점소이 작삼 [서문]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재미로 시작한 것이라서 중국의 연호를 따온다거나 중국의 역사적인 고찰을 따르는 일반적인 무협의 흐름을 따를 생각은 절대 없습니다. 무협의 배경이 중국인 이상 어쩔 수 없이 따오긴 하지만, 역사적인 측면은 아닙니다. 어차피 무협 소설 자체가 픽션입니다. 따라서 보시는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쉽게 현대적인 역사관을(?) 은유적 또는 직유적으로 삽입할지도 모릅니다. 정확히는 제가 쓰는 글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은연중에 내뱉으려는 숨은 의도도 있습니다. 추구하는 바가 코믹 추리 무협이라는 간판이므로 어느 정도 그에 맞춰서 1인칭 시점으로 쓸 생각입니다. 왜 1인칭 무협 시점을 택했느냐고 물어 보신다면 좀 더 리얼한 감정 묘사와 제한된 시각을 통한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 무협 소설의 주인공은 잘나지도 못했고, 무공도 별로 일게 뻔하고, 이렇다 할 기연도 아마 거의 만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 자신이 그런 무협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재미있게 봤지만, 하도 많은 무협들이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하지 밑바닥에서 올려다보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식상 하다는 기분이 들어 조금은 색다른 무협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점소이 작삼입니다. 그런 연고로 미리 밝혀 둡니다. 호쾌하면서 외로운 한 마리 승냥이처럼 강호를 질타해 자신의 정의를 세우고 수많은 여인들의 찬사를 받으며 당당하게 등장하는 선남선녀 무협을 원하시는 분은 지금 책을 덮고 그냥 못 본 것으로 하시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것을 일러 드리고 싶군요. 반면 뭔가 특이한 무협을 찾는다 한다면 찬찬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전 무협에서 뭔가 문학적인 부분을 강조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 또한 흡인력 있게 끌어 드리는 마력적인 재미입니다. 그러나, 뭔가 여운을 남길 수 있는 재미였으면 합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뒤돌아서면 잊혀지는 무협 소설을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잔잔한 여운이 감도는, 가슴이 따뜻해질 수 있는 그런 무협 소설이 되기를 원합니다. 부족한 필력인지는 알지만, 최선을 다해서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앞서 장상수 님의 삼우인기담을 읽고서 얻고 깨달은 것이 많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존경도 하게 되었습니다. 시점 교차라는 것을 그것에서만큼 강렬하게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라면, 이렇게 쓰겠다는 발현의 의지가 바로 이것이기도 합니다. 이번 편에서 뿐만이 아니라 한 번 정도는 더 시점 교차 무협 소설을 써 보려고 합니다. 물론 상황이 허락되면 말이지요. 산다는 게 의외로 어렵더군요. 전 지금까지 재미없는 세상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소지가 많지만, 주인공이 사는 세계만은 재미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묘한(妙翰) 올림. [1]점소이가 된 이유 지금 어느 황제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가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그래서 무슨 연호가 몇 년이니 하는 것은 옛날부터 몰랐지만, 앞으로도 관심이 없다. 나라님들이 하는 일이란 게 민초들의 등골이 휘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서로 당파싸움이나 일삼으며 자기네들 배나 불리는 일이니 서로 싸우다가 죽건 말건, 반란이 일어나 황제가 뒤바뀌건 말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벼슬을 시작할 때 가진다고 하는 겉보기 포부야 거창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민초들 위에 군림하려고만 하고, 다 똑같이 자기 욕심 채우기에 바쁘니까 말이다. 중원 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고, 문화가 발달했으며, 으리으리한 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강남, 그 중에서도 번화가 도시라는 흥강성이 내 얘기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당연하다. 이곳에서 태어나서 먹고, 자고, 싸우고, 배우면서, 자랐으니까 말이다. 모친은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에 돌아가셨고, 부친은 내 나이 열일곱이라는 이른 시점에 시름시름 앓다가 몸져누워 버리셨다. 그 이후 집의 가장은 바로 형이었다. 두 해가 더 지나 전국적으로 가뭄이 연이어져 굶어 죽는 이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흉흉하면서도 뒤숭숭한 시기, 서로 의심만 하며 넘치던 인심들마저 야박하게 변해 버린 어려운 시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 온 덕에 각 집마다 강제 징병 통지서가 날아왔다. 아무리 따져 봐도 집안에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형이었기에 밥을 축내기나 할 입도 줄일 겸 군말 없이 강제 징병에 따라 나섰다. 내가 강제 징병 당한지 두 해가 지나서 날아온 서신에는 부친이 기어이 이승을 하직하셨다는 짤막한 한 마디만이 써있었다. 그러나, 내가 군대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무덤덤한 표정으로 창칼을 휘두르며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일 뿐이었다. 전우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도 이를 악물며 버텼다. 용감하게 싸우기보다 졸렬하게 눈치를 보며 생존하는데 더 신경을 썼다. 장렬하게 전사해 봤자 근사한 묘지 터를 내주는 것도 아니었고, 그 유가족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전사 통보, 그것 하나로 끝이라는 것을 몸소 체험한 나는 엿 같은 개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겁쟁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꾹 참으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다. 드디어 두 해가 더 지나서야 전쟁이 그 막을 내리게 되어 간신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양친이 물려준 것이라고는 소작을 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지독한 가난이었으나, 내가 강제 징병을 당한 기간 동안 나름대로 이를 갈며 한 푼 두 푼 긁어모은 형은 급기야 몇 마지기의 논을 사 버렸다. 이제는 소작을 할 필요가 없이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특별히 어려움이 없는 그럭저럭 입에 풀칠은 하며 사는 중하층 정도의 생활은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가끔 불편은 있더라도 끼니 굶을 걱정은 안하고 살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나이를 먹어 가고 독립을 해야 하는 때가 도래하고 있었다는 것에 있었다. 아무리 형이라 해도 엄연히 형 스스로 자수성가한 곳에 동생인 나까지 밥벌이로 붙어 있는 것은 거슬리는 일일 테니……. 어느덧 날씨가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이 초가을 분위기다. 벼이삭은 살짝 익어서 예의 바르게 고개들을 숙이고 있었다. 외로이 논바닥 위에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의 외로움을 달래고자 어깨 죽지에 앉은 까마귀가 까옥까옥 울고 있을 무렵, 난 형의 부름을 받고 큰방으로 건너가서 일장 연설을 듣게 되었다. 내 나이 스물 일곱 살, 꿈도 많았던 나이라면 나이다. 한 때는 강남 제일의 화가(畵家)가 되는 것이 강제 징병을 당하기 전까지의 내 꿈이었다. 그래서, 징병의 굴레로부터 해방된 그 시각으로부터 지난 삼 년 간 실력이 있다고 알려진 화가 선생님들의 문하로 들어가 틈틈이 일하며 배움에 매진하게 되었다. 비록 이룬 것은 없지만, 내 생애 가장 보람차게 살았던 나날 일 것이다. 그림 한 폭 한 폭을 화선지에 담는 그 순간의 떨림…… 마지막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한 획을 긋는 순간의 짜릿함, 그 기쁨은 느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 형에게는 허송세월 하는 것으로 비쳐졌던 모양이다. 어느 날이었다. "네 나이도 이제 스물 일곱 살이구나, 언제까지나 이 형에게 붙어 살 생각은 아니겠지?" "그, 그럴 생각이야 없지만, 그, 그게……." 그의 눈썹 끝이 조금 치켜지고, 내 천자가 이마에 그어진 것을 보니 내게는 별로 변명을 여지가 없어 보였다. "남자가 모름지기 삼 년을 한 일에 매달렸으면, 이제 한 일가를 이루고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네 뒤를 봐줘야 하는 것이더냐? 나도 슬슬 혼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네가 한 집에 살면 너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한 일이다. 그러니 네가 나가 사는 게 어떠하냐?" 난 조금 당황했다. 그 간 눈치 보며 그림을 그려 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갑자기 집을 나가라고 하다니, 더구나 느닷없이 결혼이라니! 나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상재에 어두운 내가 수중에 돈도 거의 없는 이대로 나가면 그야말로 눈앞이 깜깜할 도리밖에 없었다. 돈을 조금이라도 얻어낼 요량으로 처량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울먹였다. "하, 하지만, 형님 제가 가진 게 없잖아요. 이대로 나가라고 하시면…… 전, 전 굶어 죽기 밖에 더 하겠어요? 그, 그러니까 조금만 시간을 더 주세요." 재빨리 눈물 신공, 콧물 신공을 펼치며 더더욱 불쌍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형의 냉랭함에는 변화가 없었다. "시끄럽구나. 삼 년 동안 아무 소리 안하고 잘 자리 내줘. 밥도 공짜로 줘. 그럼 뭘 더 해주랴? 그동안 내가 네 녀석한테 들인 돈이 얼만지 알기나 하더냐? 그거 다 셈해서 받아 내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 여겨야지. 빨리 짐이나 싸거라!" "흑, 흑 형님, 소제 집을 나가는 것은 상관없으나, 이대로 나가 굶어 죽으면 하늘에 먼저 가신 양친께서 가슴 아파 할 것이옵니다. 조금만 보태 주십시오. 형님…… 흑흑흑." "……." 내가 돌아가신 부모님 얘기까지 꺼낸 것이 조금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잠자코 한숨을 내쉬던 형님이 뭔가 뒤춤에서 부스럭거리며 꺼내는 게 보였다. 아이고, 좋아라! 논 두어 마지기는 내주려나 보다. 카카카카카! 라고 속으로 기뻐했던 것은 아주 잠시였다. 형이 꺼낸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변방 주루 소개장이었다. "자 여기를 보아라. 이십 세 이상 삼십 세 이하의 건장한 남자 급구. 한 달에 은자 두 냥에 잠자리랑 세 끼니까지 준 덴다. 좀 구석진 데지만, 네 한 몸 먹고사는 데는 아무 걱정 없을 거 같아 내 접수해 놨다." "제, 제 얘기는 그런 게 아니라 돈을 좀 보태 달라는……." "어허, 이 정도 해줬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는 거냐. 썩 꺼지거라!" 형의 냉엄한 목소리와 함께 방문은 닫혔다. 내 손에는 망아루(忘我樓) 라는 변방 주루의 소개장이 쥐어져 있을 뿐 가져갈 짐도 없다. 미치겠다, 눈앞이 캄캄하다. 정녕 떠나야 한단 말인가? 정녕 화가라는 풍운의 꿈을 접어야 하는 것인가? 형의 결정에 번복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나는 미련 없이 일어섰다. 나와 형은 달라도 너무나도 많은 부분이 달랐다. 내가 낙서에 심취해 남의 담벼락에 낙화를 그리고 있을 무렵, 형은 저잣거리에서 심부름을 해주면서 푼돈을 모으고 있었다. 내가 그림이라는 것에 본격적으로 빠져들어서 도관(圖觀)에 기웃거릴 무렵, 형은 한참 커 가는 장사꾼의 조수가 되어 상재(商才)에 대해 습득하고 있었다. 형은 돈 버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집에 논 한 마지기 없이 소작으로 근근히 어렵게 버텨 왔던 것을 상재에 눈을 떴던 형은 푼돈으로 시작해서 수천 냥을 거래하는 선에까지 이르러서 급기야는 논을 몇 마지기 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지금도 형의 수완은 계속 발휘되어 집안이 조금씩, 조금씩 윤택해져서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형과는 반대로 상재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무섭게 돈을 밝히는 형과 친해질 수가 없었다. 밖에서는 웃고 울다가도 형 앞에만 서면 안면이 차갑게 굳어지곤 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태연한 본능이었다. 뭐라 설명할 수가 없는……. 그러다 보니 나와 형 사이에 대화란 있을 수 없었다. 형 앞에서는 그림 그리는 일 이외에는 모든 게 하찮게 여겨졌으니, 그 어떤 말도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리라. 안 그래도 서먹한 형제 관계는 나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화가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 별 반대 없이 묵묵히 지켜봐 줬던 것에 대해서 언제나 감사하고 있었다. 추수 때나 가끔 거들라고 했을 뿐 그 이외 다른 날에는 아무 말도 없이 관여를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것도 자그마치 삼 년간이나 봐준 것이니 적은 기간도 아닌 것이다. 이제 새 생활을 하려는 마당에 나라는 존재가 거치적거림으로 남는다면 나 또한 불편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적절한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후련하다. 왠지 약간은 아쉬움이 남지만. 뭐, 아무렴 어떠하리. 내가 집 대문을 나선 순간부터 남남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을……. 마지막으로 형의 닫힌 큰방 문 앞에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를 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나의 결별 선언, 불편하기만 한 형제라면 다시 봐서 무엇하겠는가? 그저 내게도 형이 한 명 있었다는 정도만 기억해도 충분할 것이다. 혹시라도 이 다음에 인연이 닿아 한두 번 우연히 볼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뿐일 것이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모친이 주셨다는 이름, 다시는 쓰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나란 존재는 애초에 글러 먹은 존재이니 그 이름을 쓴다는 것은 형의 이름에 먹칠을 하기만 할 뿐이다. 일단 대문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하늘은 쾌청하고, 시원한 가을바람이 날 스쳐지나 갔지만, 이 공허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일순간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면 나의 착각일까? 조금 현기증이 일어났는지도 모르지만, 고개를 세차게 흔든 후 길을 나섰다. 이제부터는 먹고사는 문제만 생각하리라. 꿈이든 뭐든 다 잊어버리고, 만리타향(萬里他鄕)으로 가는 것이다. 왜 가까운 강남 쪽 이름 있는 주루들을 놔두고 하필이면 멀리 있는 서안 지방 이름도 없는 주루로 가느냐 하면, 난 이른바 연줄이란 것도 없고 배운 그림이라는 것도 실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연이은 흉작(凶作)으로 인심은 흉흉해졌고, 살림살이는 박해졌다. 더불어 일자리도 줄었다. 따라서 괜찮은 위치의 잘 나가는 주루에서 일자리 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바닷길이나 비단길이라는 먼 대륙 간의 거래선이 생기면서 심심찮게 외국인(外國人)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냄새나는 오랑캐니 색목인이니 하며 무시하거나 피했지만, 요즘에는 그들이 돈이 된다는 것을 안 발 빠른 주루들은 파국어, 서장어나 아랏사말 등을 능통하게 구사하는 점소이들을 우선적으로 배치해 손님 끌기에 노력(努力)하고 있다. 그 점소이 급료가 은자 열 냥 안팎에 이르고 외국인들 안내만 잘 해줘도 떨어지는 떡값이 쏠쏠하다는 입 소문이 있어서 거의 과거 시험을 방불케 하는 경쟁률을 자랑한다. 그런데, 실력(實力)만 우선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重要)한 것은 연줄이라는 것이다. 점소이 시험을 보러 온 사람 중에 주루 지배인의 먼 친척이라거나 같은 서생 아래에서 글을 배운 동문(同文)이라도 있으면, 거의 십중팔구 낙점이 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아닌 것이다. 결과적으로 난 이것도 저것도 아닌 한심한 한량에 불과하다. 형이 건네준 소개장이라도 들고 가서 입에 풀칠이라도 하며 살면 그조차도 감지덕지 한 일이 되는 거다. 꽤 먼 거리에 있는 서안 지방에서 여기까지 사람을 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급료는 박봉이면서, 하는 일은 매우 힘들 거라는 것을 넌지시 암시해 주지만, 내겐 별다른 선택권이 없다. 그저 내 운명이려니 하며 터덜터덜 가는 수밖에……. 갈 길이 멀다 보니 노자 돈이 적은 게 은근히 걱정되었다. 돈이 떨어져 구걸하며 가는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는 끔찍한 상상에 치가 떨리기도 했다. 그래서, 밤에는 노자 돈을 아끼기 위해 객잔에 거하기보다는 길거리 구석진 곳에 짚을 모아 덮어 온기를 유지한 채 잠드는 노숙(路宿)을 마다하지 않았고, 낮에는 밥값을 줄이려고 종종 칡뿌리나 산열매를 따먹으며 시냇물로 목을 축이곤 했다. 처음에는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짓도 반복하니 익숙해져서인지 버틸 만 해졌다. 그렇게 열흘 즈음 지나니 인적이 거의 없는 허허벌판이 드러났다. 두두두두두두……!! 햇볕이 내리쬐는 서안 길을 걷노라니 검은 갈기를 휘날리는 흑마(黑馬) 네 마리가 끄는 고급스런 사두마차가 다급히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방향을 보아하니 나와 같은 서안 방향인 듯하다. 문제는 얼마나 빨리 스쳐 갔는지 그만 자욱히 올라온 먼지를 내가 뒤집어 써 버렸다는 데 있었다. "쳇, 같은 방향이면 좀 태워 주면 덧나나. 이 허허벌판에 외로이 걸어가는 나라는 존재를 이렇게 무시하다니! 뭐 좋다고, 그럼 좀 조용히 지나가던가. 왜 먼지는 끼얹고 지랄이야. 지랄은!!"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고, 발 빠르게 굴러가는 사두마차에게 걸맞은 깔끔한 육두문자가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갑갑했던 속이 조금은 후련해졌다. 옷에 붙은 먼지들을 탈탈 털어 내고 먼지 없는 곳으로 가서 몇 번 숨을 고른 후 심호흡을 길게 내뿜었다.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가던 길을 계속……. "어이, 그 남정네 입 한번 걸출하네. 할 말이 있음 마차가 있을 때 해야지. 비겁하게 지나가고 난 후 한참 뒤에 소리를 지르나?" 깜짝 놀라서 누군가 돌아봤더니 웬 예쁘장한 홍의 경장 아가씨가 날 장난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그 옆에는 백의 청년이 하얀 섭선으로 안면을 가리고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불쾌한 시선을 던져 주고 있었다. "뭐, 뭐요? 당신들은……?" 일순간 당황하여 말끝을 흐리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우리 정체가 궁금해? 그럼 고귀한 우리 신분을 밝히지 않을 수 없지. 난 사천당문의 금지옥엽(金枝玉葉), 당가희(唐佳喜)라는 귀공녀고, 이쪽은 남궁세가의 장남 남궁현(南宮炫)공자셔. 들어봤을지 모르지만 남궁세가의 신진 후기지수로 백룡(白龍)이라는 칭호까지 가진 절세 무공의 소유자이기도 하지. 물론 그쪽 소개는 필요 없어. 보아하니 별 볼일 없이 지나가는 비렁뱅이 신세 같은데, 내 말 틀려?" 청산유수(靑山流水)처럼 쉼 없이 말하며 자신의 얼굴에 금칠하기를 서슴지 않는 여인의 입심에 질려 대답도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은 순간이었다. 거기에 보태서 사천당문(四川唐門)과 남궁세가(南宮世家)라는 거대 간판에 넋이 나갈 것 같기도 했다. '사천당문이나 남궁세가라면 하늘을 날고, 강을 가르며, 산을 날려 버리는 고수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잖아. 그런 곳의 여인네라면 역시 고수일 테고, 저 친구 또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듯싶은데 왜들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설마 내 돈을 뺐으려고……?' "아, 왜 말을 못해? 죄지은 거라도 있나 보지? 흠, 흠…… 어서 불어. 좋은 말로 할 때 불어!" 여인네의 입심은 가면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말도 못하게 몰아세우고 있으면서 무슨 죄가 있다고, 날 괴롭히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제, 젠장. 나, 날 언제 봤다고 반말 짓거리를 찍찍하는 거, 거야? ……요." 나로서는 용기를 내어 소리를 지른다고 한 것이었으나, 너무 주눅이 든 탓에 목소리가 기어 들어가 입안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더 자극했던 모양이다. "뭐라는 거야? 똑바로 말해 봐. 너 남자 아니지? 내시지? 그렇지?" 내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말도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본 홍의 경장 여인네의 눈빛이 더 표독해졌으나, 그 사태를 수습해 준 것은 다름 아닌 백의 청년이었다. "당 소저 맘은 알겠는데 이런 데서 시간 뺐지 맙시다. 저 후줄근한 놈팽이와 장난을 칠 시간이 우린 없소." "힝, 남궁 오라버니가 목석같으니까 내가 심심해서 그러는 거잖아요." 홍의 경장 여인이 삐친 듯 몸을 휙 돌리자, 백의 청년이 내게 은자 세 냥을 던져 주고는 혀를 쯧쯧쯧 찼다. "구걸을 하려거든 사람들이 많은 번화가에서 하지, 이런 인적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한단 말이냐. 썩 꺼져라. 냄새나는 촌무지렁이 같은 놈아……." 먼저 홍의 여인이 땅을 박차며 부드럽게 날아올랐고, 그 뒤를 이어 백의 청년이 먼지를 휘날리며 뜀박질하듯 날아올랐다. 거의 십 보 이상을 날아올랐다가 박차고 다시 날아오르기를 반복하여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저것이 말로만 듣던 경공(輕功)이라는 것인가 보다. 내 손에는 백의 청년이 던져 주고 간 은자 세 냥이 있다. 이거면 노자 돈으로 보태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분명 응당 기뻐하며 춤을 덩실덩실 춰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솟구쳐 오르는 씁쓸함은 무엇이란 말인가? 집을 나섰을 때보다 한 층 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은 어인 일일까? 저 선남선녀가 든든한 집안을 배경 삼아 고수가 되어 그 기상을 펴는 때에 생존하기에만 급급했던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이 그저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멍청한 존재가 돼 버렸다는 것을 문득 느꼈다. 누군가 인간은 귀천이 없이 태어났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나 두 주먹을 꽉 쥔 채로 부르르 떨며 서 있어야 했다. 귀천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가난은 가난을 낳고, 부는 부를 낳는 것이다. 저놈은 필시 강제 징병도 피해 갔을 것이다. 돈으로 가난한 자의 자식을 사서 대신 가게 했을 것이 뻔한 일이다. '쳇, 내가 아무리 못난 배경에서 자라나긴 했어도 너희들처럼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라 부모 배경 믿고 날 뛰는 년 놈들에게 밀릴까 보냐!' 외로이 서 있는 내 모습이 왠지 처량하고 구슬퍼 보였다.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라는 풍월을 들은 기억이 나지만, 이런 꼴을 당하고자 길을 나선 것은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결단코 이런 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럼 어떤 것을 바라느냐고? 일단 내가 멀리서 바라본 주루는 좀 아담하고 외지면서 정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야 한다. 그 주변에는 사시사철 아리따운 자연의 조화가 펼쳐져 있고 산새와 산짐승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같이 놀아 주길 바라며 깡충깡충 앞서거니 뒤서거니 뛰면서 따른다. 청아하고 깨끗한 산 공기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절로 키워 주는 그런 곳일 것이다. 막상 용기를 내어 들어간 주루의 주인은 착하고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서 귀여운 스무 살 남짓한 손녀딸이 있을 것이었다. 그곳에서의 하루하루는 그다지 어렵지도 않으면서 보람찬 나날이 되어야 한다. 식사 때면 할아버지와 손녀딸과 함께 둘러앉아 도란도란 정겨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부분이다. 할아버지는 어느 날 앓고 있던 지병이 발작하여 나와 손녀딸을 부른 후 손을 맞잡게 하고 나에게 그녀를 부탁하며 눈을 감는다. 그 순간은 슬프지만, 난 아리따운 그녀와 물 한잔을 떠놓고 정혼을 한 후 주루에서 초야를 치르고 곧 행복한 부부가 되어 주루를 경영하게 된다. 얼마 후 아이 둘이 연이어 태어나 주루에는 웃음이 그칠 날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인간으로서의 세수를 누리고 아내와 한 날 한시에 같이 조용히 이승을 떠나게 된다. 이 얼마나 소박하고 아름다운 바람이란 말인가!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래,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소박한 꿈인 것이다! 이튿날 아침이 되어 노란 해돋이가 뻗쳐 올 때까지 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비감 어린 기분에 주체할 수 없는 자책감이 일었지만, 내가 바라는 바를 생각하자 희망과 용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래서, 자꾸 그랬으면 좋겠다. 이랬으면 좋겠다. 생각하다가 깜빡 졸아서 기어이는 그와 같은 꿈을 꾸면서 행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꿈속에서 내가 본 결말은 호호 할아버지가 되어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덧없는 결말이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은 죽음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리라. 죽음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자 기어이는 모든 게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인 것을…….' 이,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득도의 경지? 조금만 더 그대로 있었다면 난 우화등선하여 신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날 필요로 했음인가! 그 순간을 가로막히는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이사형, 저기 너저분한 시주가 침을 흘리면서 멍청하게 웃고 있는데요." "보면 모르겠나? 좀 심하게 맛이 간 모양이다. 신경 쓰지 말고 어여들 가자고." 오랜 시간 서 있었더니 몸이 경직된 상태라 움직일 수가 없어 간신히 곁눈질하여 보니 남화건(南華巾)을 쓰고 청의 도복을 입은 세 명의 도사들이 쑥덕거리며 지나가는 중이었다. 검을 찬 모습이 아무래도 앞에 지나간 인물들과 같은 부류의 무림인인 듯했다. 그 중 한 명이 불쌍타는 듯 고개를 흔들며 쯧쯧쯧 혀를 차며, 은자 한 냥을 내 앞에 던져 주었다. 어제와 비슷한 장면이었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하룻밤 새 꿈과 명상을 통해 개안을 하듯 득도의 길에 성큼 다가섰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간이란 결국 다 뒤져 버리고 마는 것을……. 왠지 나도 모르게 부처가 큰 깨달음을 얻고 미소를 짓듯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이구, 대사형, 발작하려나 봐요. 어서 갑시다. 머뭇거리다간 곤란해지겠어요." 막내로 보이는 자가 질겁하며 경공을 펼쳐 사라지자, 다른 두 명도 겸연쩍어 하며 사라졌다. 우두둑우두둑. 굳은 관절을 풀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사방을 휘휘 돌아본 후 잽싸게 은자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모든 게 덧없고 덧없는 일이지만, 일단 할아버지와 손녀딸이 기다릴 주루로 가 보자. 할아버지의 지병이 발병할 때까지 열심히 일을 해서 반년 후 그가 죽으면 예쁜 아내를 맞이해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겠지. 카카카카카." 뭔가 삐딱서니를 탄 느낌이 언뜻 들었지만, 서쪽 언덕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등뒤로 비쳐 오는 노란 노을빛이 내 찬란한 황금빛 미래를 암시해 주는 듯싶었다. 온몸이 우두둑거리며 비명을 질렀지만, 내 걸음은 힘차게 서안을 향하고 있었다. 그 어떤 시련이 닥쳐도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굳은 다짐을 하며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우여곡절로 수중에 넣은 은자 덕택에 사나흘 남짓 남았던 서안 길이 앞에 비해 순탄할 수 있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려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망아루 소개장을 꺼내어 구석에 그려진 약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변방이랄 수 있는 서안 중에서도 외곽지역의 으슥한 산기슭에 위치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 좋아, 보아하니 손님도 별로 없을 외딴 곳이로군. 역시 나에겐 선견지명이 있는 것이야. 도착하는 그 순간 부로 불행 끝 행복 시작이다. 크크크.' 이제는 아예 외딴 주루에 대한 내 망상을 합리화시키며 서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래도 강남에 비해서는 손색이 많은 거리였지만, 활기(活氣)가 넘쳐 보였다. 너무 활기가 넘쳐서 무림인들이 일반인보다 더 많다는 착각이 들기까지 했다. 검이나 도 같은 무기를 소지한 이들이 어째 좀 많아 보였다. 묘한 분위기에 여기저기 돌아보는데, 누가 내 어깨를 쳤다. "이 보게 소협, 보아하니 개방 출신인 듯싶은데, 뭔가 새로운 소식 없나?" "……." "아, 내 소개 늦었군. 난 강북 지방에서 온 군자검 해대연 이라 하네. 자네 이름은 어떻게 되나?" "……." "……." 개방이라…… 조금 기분이 찜찜했지만, 철면피 신공을 발휘해서 무시하며 쓱 지나쳤다. "여보게 소협! 소협!" 뒤에서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며 발걸음을 빨리 더 빨리 놀려 방향을 좌측으로 휙 틀었다. 쿵! 강력한 충격과 함께 별빛이 눈앞에 반짝거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몸체가 거대한 장한이 머리를 부여잡은 채 눈을 부릅뜨고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아, 저기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다. 이놈아 개방 거지라 나 같은 은둔 고수는 무림인으로 안 보인다 이거지? 나 천하제일 무적권 왕석두 오늘 무지하게 열 받았다. 네놈을 후려 패 강호의 정의를 세우고 말리라!" "저기 전 개방 거지가 아니고요. 그냥 지나가던 과객인데요." 즉시 최대한 처량하게 보이도록 불쌍한 눈빛으로 눈을 깔며 허리를 30도로 굽히면서 손을 싹싹 비볐다. 이런 무식해 보이는 놈한테는 무조건 굽히는 게 장땡이기에……. "개방 거지건 아니건 간에 넌 오늘 죽었어! 피할 생각 말아!" 그가 주먹을 휙 몸 뒤로 뺐을 때 아까 그 군자검인지 뭔가 하는 인간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옳거니 이독제독(痢除毒)이라 이거지. "소협! 소협! 어찌 그냥 가는 게요? 뭔가 있구려. 뭔가 있어." "아 형씨구려. 난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가는 길이니 잠시 이 친구 좀 맡아 주시오. 그럼 이만." 채챙! 차차차창! 그런데, 갑자기 지나가던 무림인들이 일시에 모두 다 검과 도를 빼 들고서 내 주위로 몰려드는 것이 아닌가? 내가 무슨 못할 말을 했단 말인가? "역시 개방이군. 어디냐? 그것이 어디에 나타난 거냐?" "어서 말하게. 나한테만 말하라고 내가 금원보 열 개를 줌세. 나한테만 말해 주게." "그건 내 거야! 내 거라고 내가 찜 했어!" "아니 무슨 헛소리야!" "너나 꺼져라! 그건 우리 집 가보야!" "에잇 무인은 실력으로 얘기한다! 덤벼라!" 퍽! 휙 채챙 차차차차창! 크악! 슈슉 윽! 쿵 순식간에 사방팔방이 검광(劍光)으로 가득 차 버렸다. 온갖 욕지거리와 비명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이 인간들이 단체로 미쳤나? 왜 이렇게 지랄 발광들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미 서로를 가리는 것 같지도 않았고, 자칫 잘못하다간 나까지 칼을 맞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돼 버렸다. 순간 회피력이 매우 높은 나답게 바짝 엎드려서 사사삭 구석으로 기어 나왔다. 저들끼리 칼부림하는 것은 내 알 바 아니지만, 그로 인해 나한테 피해가 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일 테니. 그 길로 뒤도 안 돌아보고 소개장 약도대로 무작정 뛰었다. '헉헉헉, 에고, 에고 왜들 저런 다냐? 그것이 무엇이 길래? 헉헉 칼부림까지 하고 난리야. 미쳤으면 곱게 들 미칠 것이지. 헉헉 다신 내 근처에 얼씬 들 하지 말아라. 제발!' 서안(西安) 시내 관도(官道)를 벗어나 한참을 정신없이 뛰었다. 숨이 막혀 오르고 다리가 덜덜 떨릴 때까지 뛰고 나서야 안심(安心)이 되어 털썩 쓰러졌다. 아직도 무시무시한 함성 소리와 금속성 충돌 음들이 귓가에 메아리쳐 울리는 듯싶었다. 부르르 몸서리가 쳐진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 길래 저 난리들인지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들의 안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을 만큼 대단히 매력적인 물건이라는 것은 알겠다. 사람의 생명(生命)보다 귀한 것이라 왠지 좋은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뭐 어차피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깐 이 즈음에서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얼른 망아루로 가는 게 신상에 이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도의 흔적은 점점이 사라져 가고 대신 맑고 푸르기 그지없는 소장강(小長江)이 눈에 띄었다. 한숨을 내쉬며 강변에 주저앉아 세수를 하고 머리에도 물을 끼얹고는 시선을 돌려보니 좌측 하류 쪽에 좁다란 나무다리가 하나 보였다. 혹시라도 정체도 모르는 물건에 미친놈들이 쫓아올까 봐 걱정된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전력을 다해 건너가 버렸다. 강을 건너 조금 올라가자 녹음(綠陰)이 우거진 숲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방팔방이 은행나무로 뒤덮여 있는 천연의 정경이 시야를 덮고 있었다. 서안 시내에서의 난잡한 칼부림 소리 대신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가 어울려 연주를 하는 듯한, 초가을의 입지가 왕성한 숲은 그 자체로 아늑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었다. 한참을 뛰었기에 아직 마르지 않은 땀들이 시원한 산바람에 녹아 나는 듯싶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서장으로 통하고 있을 산기슭 언덕에 탁 트인 공간이 펼쳐졌다. 눈앞에 단아하면서 고풍스런 냄새가 풍기는 이층 목조 건물이 보였다. 누가 깎았는지 몰라도 강인한 서체가 느껴지는 현판에는 분명 망아루(忘我樓)라고 적혀 있었다. 주루라는 느낌보다 객잔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소박해 보이는 건물이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 귀찮은 여정이 끝났다는 것이 실감났다. 현관에 들어서자 내 무게를 지탱하는 나무 마루에서 나는 삐꺽거리는 마찰음에 잠시 멈춰 섰다. 심호흡을 두어 차례 들이키고 내쉰 후, 용기를 내어 들어섰다. 환한 곳에서 그늘진 곳으로 들어서자 잠시 시야 적응이 되지 않아 눈을 치켜떠야만 했다. 차차 어둠이 눈에 익으면서 제일 먼저 띈 것은 바깥에서 느꼈던 단아하면서 소박해 보이는 분위기의 탁자들과 의자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벽에는 이렇다 할 그림이나 서체 장식물이 하나도 없었지만, 살아서 꿈틀거릴 것 같은 나뭇결들의 조화로운 배치가 은은하게 멋을 자아내고 있었다. 기이했다. 모든 건축물이나 탁자, 의자들의 절단면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치 깨끗하게 잘라져 있었다. 더구나 나뭇결 이음매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며 이어 놨다는 것이 몸서리쳐지게 느껴졌다. 보통 노력 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이 내 말을 들으면 이상한 생각을 한다고 비웃겠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났어도 한 때 그림에 미쳐 화선지에 먹물이 마를 날 없었던 지난 삼 년간의 세월이 내 뇌리에 녹아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항시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바로 '조화로움'이다. 사군자를 그릴 때 모든 매난국죽(梅蘭菊竹)이나 사람, 새 등의 배치가 아무렇게나 나열된다면, 보는 이의 시야를 어지럽힐 뿐 그림을 보면 응당 느껴야 할 감흥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물화를 그릴 때도 이목구비를 그대로 베껴 그리기보다는 전체적인 조화를 생각하며 그리면, 훨씬 나은 그림이 된다. 그렇다고 아예 바꿔 그리면 다른 사람들이 그 인물화를 부정해 버리게 된다. 따라서 드러나지 않게 조화롭게 그린다는 것은 그 화가만의 실력이 되는 것이다. 당시 내가 종종 눈여겨봤던 것이 나뭇결이다. 나무를 어느 방향으로 잘라 내어도 나뭇결은 조화로움을 잊지 않는다. 그 어떤 명공이라 해도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함, 난 그것을 흉내라도 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뭇결을 통해 조화라는 필연의 과제를 통달하려 했었던 것이다. '훗, 이젠 그림이라는 것을 잊기로 했으면서 멋대로 떠올리다니 한심하군. 먹고 살 걱정이나 해야지. 사사롭게 지나간 세월을 되 돌이켜 본들 무엇하리.' 피식 멋 적은 조소(嘲笑)를 떠올리며, 잔념(孱念)을 떨쳐 버리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현관에서 우측 끝으로 시야를 돌리자 계산대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칠순에 거의 다다랐을 거라고 생각되는 반백에 회의 장삼을 걸친 노인이었다. 비교적 주름살이 작으면서 갸름한 얼굴 선을 지녔고 턱에 길게 난 수염 또한 반백으로 왠지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일 것 같았다. 그가 있는 계산대 역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장식 없이 주판과 주루 장부로 보이는 책자 하나만 달랑 있을 뿐이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노인장 실례 좀 하겠습니다." 그때서야 노인은 게슴츠레 눈을 뜨며 기지개를 켰다. "으아 암, 나이가 드니 잠밖에 안 오는군. 그래, 무엇을 시킬 건가? 여긴 요리가 다양하지 못하네. 소면과 만두 오리 구이 이렇게 세 가지밖에 안 돼지." 노인장이 말하는 폼이 왠지 주객전도(主客顚倒)가 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성의가 없어 보였지만, 난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니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즉시 품에서 형이 내준 소개장을 꺼내어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그는 소개장을 펼쳐 보고는 무릎을 탁 쳤다. "오호, 일자리를 구하러 온 젊은이로군. 나이와 이름은 어떻게 되는가?" "스물일곱 살로 우작삼(愚作三)이라 합니다." 노인네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히죽 웃었다. "이름 한 번 묘하구먼. 난 홍 영감이라 부르면 되네. 바로 일할 수 있겠나?" "물, 물론이지요." "그럼, 후원 창고에 물지게가 있으니 물 좀 떠오게나." "네, 그런데 홍 영감님 혹시, 혹시 말이지요. 귀여운 손녀딸 없으신가요?" "난 이래봬도 노총각이라네. 정혼을 한 적이 없으니 손녀딸이 있을 리 없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는 고개를 꾸뻑꾸뻑 거리며 다시 졸기 시작했다. 손녀딸이 없다는 순간부터 나의 소박한 바람에 금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더욱이 나란 인간은 별로 안중에 없는 듯 일을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는 식의 노인장을 보니 울컥 치미는 게 있었지만, 어찌하랴? 이미 여기까지 와 버린 것을……. 입이 쀼루퉁하게 튀어나왔지만, 봇짐을 구석에 풀어놓고서 뒷문을 빠져나와 후원으로 향했다. 팍! 떼구루루 팍! 떼구루루 창고가 어딘가 둘러보고 있는데, 때마침 뭘 부시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쑥 내밀어 보니 나보다 머리가 하나는 더 커 보이고 턱에는 까만 턱수염과 구레나룻이 지저분하게 난 거구 장한이 팔을 걷어 부치고서 자기 키 반만 한 도끼로 장작을 패고 있는 것이었다. 보기만 해도 산적에 버금가는 그 기세에 오금이 저려 살금살금 뒷걸음질을 쳤다. 갑자기 소리가 멈췄다. 도끼질하는 소리가 멈추자 일시에 정적이 찾아 들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어떤 도둑놈이 살금살금 엿보는 것이냐! 썩 나오지 않으면, 대갈통을 날려 버리겠다!" "……." 거구 장한의 호통에 온몸이 굳어 버렸다. 도망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잘못 나섰다가는 도끼가 날라 올 분위기고 진퇴양난이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새에도 시간은 가고 있었다. "어쭈 강단 있는데, 목숨이 아깝지 않다 이건가?" 명백한 협박(脅迫)이었다. 난 주저함 없이 잽싸게 튀어 나가면서 비굴하게 허리를 삼십 도로 굽히며 손을 싹싹 비볐다. "아이고, 대협 안녕하십니까?" "안녕 못하다면 어쩔 텐가? 내가 대협이 아니라면 또 어쩔 텐가?" "……." 이마에서 진땀이 쪼르르 흘러내렸다. 협박에 이은 도발이 분명하지만, 대답을 잘못했다 간 저 서슬이 시퍼런 도끼날에 내 머리통이 수박처럼 퍽 하고 터져 나가리라. "뭘 훔치러 왔기에 쥐새끼처럼 슬금슬금 기어 왔느냐? 바른 대로 불어!" "저…… 저기 물, 물지게 가지러 왔는데요." 드드드드드득.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내 눈은 도끼날만 바라봤고, 정신이 아득해졌기에 이빨이 부딪치며 소리가 나는지도 몰랐다. "뭐? 물지게는 훔쳐서 뭐 하려고?" "계, 계산대에 있는 홍, 홍 영감님이 물, 물을 퍼 오라고 해, 해서요" 거구 장한의 눈이 잠시 휘둥그레지더니 미친 듯이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자네는 오늘 부로 점소이가 된 사람이구먼, 진작 그렇게 말을 할 것이지. 괜히 피 볼 뻔했지 않은가? 바로 내 뒤편이 물지게가 있는 창고라네." "……." 난 천천히 창고를 뒤져서 물지게를 꺼내 들고는 그 거구 장한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나오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그가 내 등을 강하게 펑 치는 바람에 휙 날라 가 장작더미와 충돌하고 말았다. 원체 경황이 없었기에 아픈 것도 느낄 새가 없었다. "저런, 저런 조심하지 그랬나? 남자가 허리를 곧게 펴야지. 그렇게 구부정해서야 쓰나? 내 이름은 포연강(鮑緣强)이라 하네. 내가 좀 나이가 있어 보이니 자네는 포형이라고 불러 주게. 그래 자네 이름은 뭔가?" "끄응, 우작삼(愚作三)이라고 합니다." "흠 이름이 조금 이상하지만 나쁘지는 않구먼. 이제부터 작삼 동생이라고 부르지. 뭐 자네가 며칠을 버틸지는 모르겠지만, 있는 동안은 편하게 대해 주게. 이래 봐도 난 이곳의 주방장이라네." "……." 왠지 저 사람이 만드는 요리는 먹고 싶은 기분이 안들 것 같다. 저렇게 우악스런 손으로 면이나 제대로 뽑기나 할지, 만두피는 안 터뜨리는지, 오리는 압사시켜 부침개로 나오는 게 아닌지 의문스럽기만 하다. 그런데, 포형이 한 말 중에 정말 궁금한 한 마디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 일이 힘든가요? 저 이전에 있던 사람들은 방 그만 뒀나 봐요?" "일단 급료가 매우 적은 것도 있지만, 물 떠오는 일이 만만찮기도 하고, 또 뭐 좀 있다 보면 차차 알게 될 일이지." 난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물을 어디서 떠오는데요?" "흠, 여긴 산 위에는 냇물이 없다네. 우물이라도 파 보려고 했더니 몇 장 파내려 가니 지하가 암반이더군. 별수 있겠나? 이미 건물은 지어 버렸으니 좀 멀지만 산아래 소장강에서 직접 퍼 오는 수밖에……." "……." 기가 막혔다. 말이 쉬워 산 아래지. 그냥 걸어서 한 식경 이상 정도는 걸리는 거리였다. 그걸 물을 가득 채운 물지게까지 이고 올라온다면? 그러나, 진정한 불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저, 저기 하루에 한 번만 떠오면 되나요?" "한 번 갖고 되겠나? 적어도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해서 세 번은 떠와야……. 어이, 어이 작삼, 작삼 동생! 정신 차리게!" "……." [2]망아루에서의 하룻밤 땅이 꺼져라 한숨이 나왔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만 둘 때는 그만 두더라도 일단 며칠 해보고 가부(可不)를 결정(決定)하는 것이 나으리라. 물지게를 메고 내려가는 길은 별로 어려울 게 없었다. 길 자체도 사람들의 왕래(往來)가 적지 않은 듯 마차 한 대는 통과할 만큼 너른 편이었다. 산자락을 타고 굽이굽이 돌아 내려오니 소장강이 바로 보였다. 이 강 자체가 장강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이루는 여러 지류 중에 하나여서 원래는 소장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 사람들은 그것도 귀찮은지 그냥 장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워낙 절경에 위치하고 있어서 뭐라고 불리건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경치가 좋아서 물 나들이 나온 듯한 연인(戀人)들이 간간이 보이기도 했다. 연인들을 보아하니 이름 있는 대감댁 자제들 같다. 부럽다. 누군 물지게로 장강 물을 퍼서 산 중턱까지 올라가야 하는데, 누군 부모 잘 만나서 여인과 함께 여흥으로 장강에 놀러 온다. 시대를 초월(超越)해도 빈부(貧富)격차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아냐, 이제부터라도 돈 벌레가 되어 돈을 긁어모을 거야. 꾸준히 모으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객잔 정도는 하나 차릴 수 있을지도 몰라. 적어도 내 몸 하나는 튼튼하니까.' 스스로 자신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장강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은 너무나 초라했지만, 여기서 주저앉기에는 너무 젊었다. 이를 악물며 출렁거리는 물지게를 둘러메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일각이나 걸었을까? 다리가 떨리며 숨이차 올라 한숨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차례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올라갔다. 그렇게 반복하고 있을 무렵,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져 가고 땅거미가 서서히 덮여 오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난 밤눈이 어두운데, 후미 저게 뭐야?' 뭔가 시퍼런 안광을 빛내는 것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한참 후에야 그것이 부엉이라는 게 짐작되었다. 해가 져 가자 야행성 짐승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 휙 뒤돌아보았다. 이, 이번에도 시퍼런 안광이……! "끄악!"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것이 더 놀랬는지 껑충껑충 뛰며 멀리 사라져 버렸다. 토끼였다. 낮에 봤으면 잡으려고 쫓아갔을 게 뻔한 산토끼가 밤에 보니 완전 호랑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덜덜 떨렸다. 이미 해가 거의 져서 어둠이 숲을 점령해 버렸기에 모든 사물이 귀신으로 보였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잡귀야 썩들 물러가라. 안 물러가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 라라라……. 밤이었기에 차가워진 밤공기에 메아리쳐지는 내 목소리가 오히려 더 무서웠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젠 모든 게 무서워졌다. 어서 망아루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불빛이다. 분명 망아루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리라……. 밤길이었지만, 어느 정도 눈에 익숙해져서 길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단지 숲길 옆에서 뭔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뒤에서 뭔가 쫓아오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이 나를 더 몰아세웠다. 어서어서 조금만 더, 더, 더……. 조금만 더 가면 망아루 입구가 나올 것이었고, 그럼 무사히 들어가서 쉴 수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뭔가 새하얀 것이 내 시야 왼쪽을 스쳐지나 간 기분이 들었다. 숨이 가빠지며 모골이 송연해졌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이리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돌아 섰……. "끄아아아아악!" 새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이 바로 내 앞에서 날 째려보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뒤로 벌러덩 꼬꾸라졌다.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서 땅을 기었다.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본능이 날 지배하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이었다. 누가 내 어깨를 덥석 잡았다. 흠칫 몸서리치며 팔을 휘둘러 벗어나려 했다. 짝! "작삼! 작삼 정신 차리게! 나야 나, 포형이라고……." 포형은 내 뺨을 쳐서 정신이 들게 해주었다. "헉, 헉, 포, 포형이셨군요. 귀, 귀신은요?" "자네가 뭔가 헛것을 본 모양이군. 자네가 소리 지를 때, 내가 달려왔는데 아무것도 없었다네." "그, 그런가요?" 그제 서야 내가 둘러메고 왔던 물지게를 보았다. 양쪽에 달린 두 개의 물통 중에서 하나는 엎질러져 이미 흘러내렸고, 그나마 하나는 무사하였다. 내가 완전 땀에 절어 축축한 것을 보고 포형이 물지게를 들고 가 주었다. 포형을 따라가면서 뭔가 날 쫓아온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기운이 하나도 없어 무시했다. 설마 또 귀신은 아닐 거라고 다짐하면서……. 탁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가 올려져 있었다. 홍 노인과 포형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홍 노인은 재미있는 물건을 발견했다는 듯이 날 이리저리 훑어보며 곰방대를 연신 빨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기에 도주한 줄 알았더니 잘 찾아 왔구먼 그래. 귀신을 봤다고?" "…… 네, 네 분, 분명 하얀 소복의 귀신이었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뻔했던 그 순간의 아찔함으로 만두를 쥔 내 손은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만두를 먹고 있었지만 입으로 씹는지 코로 먹고 있는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왜 귀신이라고 단정하는가? 헛것을 본 것일 수도 있고 사람과 헷갈렸을 수도 있지 않은가?" "내 눈을 째려보던 그 안광을 허상으로 돌리기엔 너무 생생해요. 사람의 속도가 아니었어요. 나뭇잎 밟는 소리 하나 없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은 발 없는 귀신이나 가능하다 구요." 근래 무림인들이 경공 펼치는 것을 봤기에 비교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들이라 해도 그렇게 빠르게 왔다 갔다 하지는 못하리라. 가능하다면 오직 귀신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했다. 홍 노인과 포형이 뭔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겁에 질린 내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날 노려보던 그 푸르스름한 안광, 정녕 인간일 수는 없었다. 이제 이해가 되었다. 왜 이곳 점소이들이 며칠 버티지 못하는지……. 이 주루에는 처녀 귀신의 한 맺힌 저주가 심겨져 있는 게 틀림없다. 포형과 홍 영감이 자기들끼리 쑥떡 거리는 것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혹시 어쩌면 재물에 눈이 먼 저들이 부잣집 여식을 납치해서…… 납치해서…… 죽, 죽였을 수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분명 포형이라면 도끼질 한 방에 머리를 수, 수박처럼 팍! ……날렸을……날렸을……. "여보게." 포형이 날 부르며 어깨를 가볍게 툭 쳤지만, 난 흠칫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다가 의자와 함께 넘어져 버렸다. "사람하곤…… 사나이라는 녀석이 대단히 겁이 많구먼. 물 떠오느라 수고했네. 오늘은 더 할 일도 없으니 편히 쉬게. 자네가 앞으로 지낼 방으로 안내해 주지." "네, 네……." 계산대 옆 계단을 타고 이 층으로 올라가자 복도를 타고 방들이 좌우로 십여 개가 보였다. 포형이 안내해 준 내 방은 맨 끝 방구석이었다. "참 자네 방 건넛방은 내 동생이 지낸다네. 몸이 안 좋아서 거의 방안에서만 살지. 그러니까 함부로 열어 보지는 말게. 그리고, 한 가지 더 당부하자면……. 밤에는 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푹 잠들어 있는 게 좋을 걸세. 그럼 난 가보겠네." "네, 형님도 편히 주무세요." "알겠네. 하여간 내가 한 말들 잊지 말게." "……." 왠지 협박(脅迫)을 하는 듯한 어투였다. 일이 잘못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죽, 죽을지도? 크악! 위, 위험해. 여기는 그만두고 다른데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주루일 수는 없었다. 뭔가 숨겨진 비밀이 있는 곳이리라. 냄새가 났다. 너무나도 구린 냄새가!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닌 이상 원한 서린 처녀 귀신이 분명하리라! 아직도 날 째려보던 하얀 소복여인의 시퍼런 안광(眼光)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불을 잔뜩 뒤집어쓰고 침대 속에 엎어졌지만, 한겨울에 오한이 내린 듯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처녀 귀신은 한 번 점찍은 사냥감을 놓치지 않고, 공포에 질려 생기가 말라 비틀어져 이승을 하직할 때까지 놔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포형이나 홍 노인은 귀신을 한 번도 보지못 했다는 듯 생경한 표정이었다. 이젠 알아차렸다. 그 귀신은 노총각인 내가 목표였던 것이다. 어떤 원한을 품고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날 저승길 벗으로 노리는 것이 분명하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온 몸이 사시나무 떨듯 한 층 더 격하게 떨렸다. 무섭다. 정녕 무서워 죽을 노릇이다. 내가 그 귀신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긴 했다. 그것은 내가 더 이상 노총각이 아니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들만 있는 망아루에서 당장 총각딱지를 뗀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기루나 홍등가를 찾자면 산을 내려가 서안 시내로 가야하는데 지금은 오밤중이다. 이런 야심한 시각에 산을 내려가라는 것은 나보고 처녀 귀신한테 안겨 죽으라는 말과 똑같은 말인 것이다. 차라리 그냥 죽고 말지. 에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미칠 지경이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처녀 귀신을 본 공포로 까맣게 잊고 있던 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이런 젠장, 하필 지금 소피가 마려울 게 뭐냐? 왜 갑자기 신호가 오는 거냐고?' 그렇다. 꽤 오랜 시간 넋이 나가 있었기에 주기적으로 가야하는 뒷간을 안 간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처녀 귀신의 시퍼런 안광이 생각나서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이제는 아랫 물통이 빠방해 져서 밀려오는 떨림까지 섞여 침대까지 들썩들썩 거렸다. '눈 딱 감고 방안에다가 실례를 해버릴까?......끙 아무리 급해도 그럴 수야 없지. 하는 수 없군. 후딱 바깥에서볼 일을 보고 오는 수밖에......' 일단 급한 소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갈 일이 생기자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일어섰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물통이 터질 뜻한 찡함이 밀려와 허리를 45도로 구부정하게 구부린 채로 하복부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며 굼벵이처럼 가야만 했다. 복도 문까지 몇 발자국 안돼는 거리가 왜 그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촌각을 다투는 다급함이 전신에서 진동했지만, 자칫하다간 가다가 쏟아버리는 우를 범할지도 모르기에 한 걸음 한 걸음이 신중해졌다. 끼익~ 혹시나 귀신이 들을까봐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건만, 이음새 기름칠이 덜 됐는지 적막을 깨우는 괴음이 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만히 틈 사이로 머리를 디밀고 가려는데, 뭔가 머리에 물컹거리는 것이 부딪혔다. 순간 뜨끔했지만, 소피가 너무 마려서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앞을 막은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 날 내려다보고 있는 것은 바로, 바로 처녀 귀신의 시퍼런 안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방금 전에 머리를 부딪힌 곳은 바로 귀신의 가슴이었던 것이다. 너무 놀랐던 탓이었을까 혀가 꼬여버리면서 헛바람이 옆으로 새어 나왔다. "사....사사사사...알...리...리어......주.....주주..시...시시시시..오오오.." 내가 뭐라고 말을 하는지 경황이 없었지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나 보다. 기어이 한 쪽 발에 마비가 와서 꼬여 버리고 말았다. 경직된 몸은 그대로 포물선을 그리며 쓰러졌고 제일 먼저 마루와 인사를 나눈 것은 내 뒷통수였다. 쿵! 정신적 물리적 충격으로 정신을 잃기 전 하복부가 홀가분해지면서 바지자락이 축축해지는 것이 얼핏 느껴졌다. '니기미, 쌌네.' [3]이해할 수 없는 청춘 캄캄한 밤이다. 하늘에는 휘황찬란한 달도 반짝 반짝이는 별도 하나 없이 음산한 먹구름이 휘감겨 있다. 풀벌레도 밤새들도 침묵을 지키는 이 밤, 봇짐을 둘러맨 나는 망아루에서 도망쳐 나오는 중이다. 꽤 먼 거리를 뛰지만, 숨 하나 차지 않고, 땀도 나지 않는다. 지면을 날듯이 가뿐하게 달리는 중이다. 초조하다, 불안하다. 느낌으로 뭔가가 나를 쫓아오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달리는 것밖에 없다. 잡히면 죽을 거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휘젓는다. 느껴진다. 내 뒷목에 뜨거운 숨결이 와 닫는 것이……. 덥석. 뭔가가 나를 뒤에서 껴안아 더 달릴 수 없다. 등뒤에 느껴지는 물컹이는 부드러움 때문에 다리 사이에 힘이 불끈 들어간다. 반대로 두 다리에서는 힘이 빠져나간다. 돌려 세워진다. 역시 그녀다. 그 어떤 야수보다 몸서리쳐지는 차가운 안광의 소유자, 귀신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아름다운 그녀, 그녀가 웃으며 나에게 입맞춤한다. 부드러운 혀가 내 입안에 들어와 내 혀를 능숙하게 농락한다. 그녀의 손에 의해 허름한 내 마의들이 하나 둘 벗겨져 전라가 된다. 뜨거운 입김이 왜소하고 볼품없는 전신을 휘감아 돈다. 몽롱하면서도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이다. 뭔가 툭툭 끊어지는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본다. 내 배가 갈라져 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뻘건 간이 그녀의 매혹적인 입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녀는 허기졌는지 안면을 아예 내 뱃속에 넣어 버린다. 느껴진다. 나는 먹히고 있는 거다. 응당 느껴야 할 고통 대신 천상에 오른 듯한 희열에 부르르 떤다. "헉!" 눈을 번쩍 뜨면서 몸을 일으켰다. 창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 때문에 눈이 부셔서 안면을 일그러뜨려야 했지만, 곧 시야가 밝아졌다. 내가 누워 있던 곳은 다름 아닌 내 방이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을 보니 다 꿈이었구나. 악몽이 분명한데 왜 이리 찜찜할까?' 너무나도 생생한 악몽이었기에 더 찜찜한 것이었다. 고통 대신 희열이라……. 기가 차기도 하지. "이제 깼군. 작삼 동생. 그래 몸은 좀 괜찮은가?" 한 손으로 눈부신 햇살을 막고 올려다보니 짐작 한대로 포연강 형님이었다. 처음 봤을 적에는 그렇게 겁이 났던 구레나룻 거구 장한이었지만, 지금 이렇게 보니 왜 이리 반가운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더 바라보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햇살이 벌거벗은 내 피부를 따스하게 쓰다듬어 준다. 살아 있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을 이전에는 왜 몰랐을까? '어? 벌거벗어?' 화들짝 놀라 이불을 들춰보니 세상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뭐 내가 기절하기 전에 그대로 실례를 해 버린 걸 기억하니까 할 말이 없긴 하다. 보나마나 포형이 쓰러진 날 발견하고서 옷을 벗겼을 거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고마운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 아직도 껄떡거리는 가운뎃다리 주변에 끈적거리는 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흐미, 내가 미쳐. 그럼 그 꿈이…… 내가 돈다, 돌아. 사느냐 죽느냐 하는 판국에 느껴 버리다니! 혹시 말로만 듣던 맞아야 느낀다는 변태 체질 아냐? 한심한지고. 끄응.' 얼마나 흥분했는지 열이 바짝 올라 얼굴이 벌게진 모양이다. 포형이 내 이마에 손을 올려 보더니 나를 강제로 눕히고는 이불을 덮어 주었다. "열이 심하군. 자네 오늘 하루는 푹 쉬어야 해. 홍 영감한테는 내가 잘 말해 놓도록 할 테니, 염려 붙들어 매고 안정을 취하도록 하게." 문득 누운 채로 포형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보기보다 마음 씀씀이가 넓고 착한 사람인데 내가 왜 한순간 착각을 했을까? 절로 미안한 생각이 우러나왔다. "감사합니다. 포 형님, 첫날부터 말썽만 피운 저한테 이렇게 잘 해주시니 동생 감격했습니다. 이 은혜 백골난망(白骨難忘)일 따름입니다." "헤헤헷. 동생이 내 얼굴에 금칠을 하네 그려. 그런데 말이지 정말 애 쓴 사람은 따로 있다고." "네? 그게 무슨…… 설마 홍 영감님이?" 포형을 제외하면 당연 홍 노인 밖에 떠올릴 사람이 없다. 그는 포형과 달리 무심하고 쌀쌀맞아 보였는데, 이번 기회로 다시 볼지도 모르겠다. 이래저래 모두에게 폐만 끼친 내가 한심할 뿐이다. "아니야. 홍 영감은 자네 근처에도 얼씬한 적이 없네. 그는 아마 자네 숨이 붙어 있는 것만 확인되면 나 몰라라 할 사람이지. 조금이라도 수고스런 일은 극렬히 싫어하니까 말이야." "그럼, 혹시 포형의 동생이라는 분인가요?" "그렇다네. 사실 나도 좀 놀랐지. 그 애한테 그런 세심한 구석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거든. 냉랭하기로 따지자면 그만한 녀석도 없는데, 손수 나서서 자네 옷을 벗겨 주고, 아침 동이 틀 때까지 간호를 하다니 희한하구먼. 희한해." 기가 막힌 것은 나였다. 초면인 사람한테 오줌에 지린 내 옷이 벗겨졌으니 이 얼마나 창피스런 노릇인가? 게다가 날 밤새 간호까지 해줬다 하니 미안하기 짝이 없을 따름이다. 아무리 같은 남자끼리라 해도 알몸을 보여줬다는 것은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일인 거다. 다행이라 하면 내가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정도일까? "그분도 제 형님뻘 되시겠네요. 죄송해서 정말 몸둘바를 모르겠는데, 고맙다는 인사조차 못했으니 원. 언제나 오시나요?" 순간 포형의 안면이 기이하게 꿈틀거렸다. 웃을까 말까 한참 고민하는 듯한 묘한 표정이었다. "흠, 지금 계단을 올라오는 듯싶구먼. 아마 고마워할 필요는 없을 걸세." "왜, 왜요? 은혜를 입었으면 당연히……." 호랑이도 자기 말을 하면 온다고 순간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심장 박동이 멎는 듯싶었다. 피가 머리끝으로 몰리고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한기가 전신을 감쌌다. 덜덜덜 떨린다.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귀, 귀신이 대, 대낮에 나오다니…… 이, 이럴 수가……." 내가 덜덜 떨자 포형의 안면이 살짝 일그러지면서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설마 같은, 같은 귀신이었단 말인가! "미안하네, 실은 령령이가 장난이 좀 과하다네. 자네한테 미리 언질을 주는 거였는데 내가 깜빡해서 일이 이렇게까지 커져 버렸다네. 내 진심으로 사과함세. 용서해 주겠는가?" 그의 말에 어느덧 나의 떨림은 정지되고 있었다. 아직도 겁이 났지만, 포형의 동생이라는 여인을 찬찬히 볼 여유가 생겼다. 몸매의 굴곡을 뚜렷이 보여주는 새하얀 나삼의에 칠흑의 까만 비단결 같은 머릿결을 가진 여인, 피부는 빙옥처럼 희디희면서 섬섬옥수라 불릴 손을 지닌 그녀, 약간 신경질적으로 보일 만큼 눈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갔지만, 초롱초롱 빛나는 커다란 눈, 더 이상은 머리에 가려 안보였다. 좋다…… 다 좋은데, 왜 머리는 풀어헤친 채 다니면서 지랄을 떠느냐고!! 지금까지 귀신이라고 알았던 존재가 실은 옆방에 사는 여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 세상을 수 십 번 불질러 버리고도 넘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까 전까지 공포로 몸이 떨렸다면, 이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전신이 덜덜 떨렸다. "사과를 왜 포형이 하는 거요? 잘못은 저년이 하고서 왜 형님이 하는 거냔 말이요? 그 장난 때문에 난 죽다 살았는데, 아직도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는 저년은 두 눈 시퍼렇게 쳐 뜨고서 날 꼴아 보……." 퍽! 퍼퍼벅! 퍽! 퍼버버버퍽퍼벅!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광석화 같은 주먹이 내 안면을 수차례 갈기고 있었다. 발이 내 복부를 찌른 것도 같은데, 경황이 없어 어디를 얼마나 맞았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한낮이건만 별들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은하수가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기에……. 비록 경황없이 얻어터졌지만, 그 고통 때문에 정신만은 또렷했다. 그래서, 그녀가 깨끗하게 빨래를 한 듯한 내 마의를 던지면서 내뱉은 말들까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아가리 닥쳐. 내 머리를 내가 풀어헤치건 말건 니가 무슨 상관이야. 오냐, 오냐 하니까 기어오르는 거냐? 내가 년이냐? 년이야? 내 이름 석자 잘 기억하고 알아 모셔라. 주! 령! 령! 잘 기억해. 다신 내 성질 건드리지 마라. 니 아가리에 부엌칼 쑤셔 넣는 거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워. 알아서 기어라. 엉! 거시기도 작은 게 까불고 있어. 흥!" 단단히 화가 났는지 그녀는 문을 쾅 닫으면서 나갔고, 심지어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가는 소리까지도 잘 들을 수 있었다. 차라리 처녀 귀신때가 더 나았으리 만치 무서운 여인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거시기 얘기는 왜 나와? 젠장.' "잘 봤지? 그냥 조용히 넘어가려고 내가 미리 사과한 건데, 자네 오히려 일을 부풀리는데 소질이 다분하네 그려. 이것도 미리 언질을 주는 건데 깜빡했군, 또 깜빡했어." 자신의 머리를 탁 치며 아쉽다는 듯이 말하는 그를 보니 찜찜해도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욕하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이 인간이 딱 그쪽이다. 포연강이란 사람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꼭 먼저 일이 터지고 나면 웃으며 해결하려 한다. 꼭 먼저 일이 터지고 나서!!! 생각이 그에 미치자 입이 씰룩 오리 주둥이처럼 튀어나왔지만, 이젠 인내심이라는 것을 배워서 드러나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후환이, 후환이 두려웠기에! "어쩔 수 없지요. 힘도 없으면서 함부로 말을 한 제 잘못이지요. 포 형님께서는 개의치 마시고 볼일 보시지요." 포연강이 내 말속의 가시를 느꼈는지 무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계속 싱글벙글 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참사들이 재미있을 거라는 듯한…… 저, 저, 저 얼굴을 보니 가슴이, 가슴이, 이 주최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엇 조심, 조심…… 휴우 오히려 그걸 즐길 게 뻔한 부류의 인간에게 결단코 눈치 채여서는 안 되는 것이리라. 무서운 자들, 그 여동생의 그 오빠임이 너무나도 분명한 이 빌어먹을 남매 같으니라고! "자네 상태를 보아하니 앞으로 삼, 사 일은 더 쉬어야겠네. 아 걱정하지 말게. 내 홍 영감한테 잘 말해 놓을 테니 안심하고 푹, 푸욱 쉬게나. 종종 령령이가 간병을 올 테니 말 잘 듣고, 한마디라도 대꾸했다간 삼, 사 일이 아니라 평생 누워 있게 될지도 모르니. 하하하하! 재밌었네." 문을 닫고 나가는 그가 너무, 너무나도 미웠다. 처음 내가 느낀 것이 잘못된 게 아니라 오히려 모자라게 본 거라는 걸 이제 처절하게 깨달았다. 너무 화가 나고 분해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 내렸다. 베개를 움켜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것을 들고 그대로 문에다 던져…… 버렸는데, 그런데……. 끼익, 퍽. "……." 때마침 뭔가 잊고 있는 걸 되찾으러 온 듯 령령이가 다시 되돌아왔다가 내가 던진 베개에 그대로 얼굴을 맞아 버렸다. 물론 솜 베개로 아무리 아프게 맞아 봤자 하나도 아플 리가 없지만, 문제는 아마 그것이 아닐게 분명했다. "니가 드디어 실성했구나. 그래 오늘 너 죽고 나 살아보자." 퍽! 퍼버버버퍼벅! 퍽! 퍽! 퍼버벅! 삼, 사 일하고도 꼬박 일주일을 더 누워 있어야 했지만, 그 누구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홍 노인은 그림자도 못 봤지만, 보나마나 포연강이란 작자가 쪼르르 달려가서 상황 설명을 했으리라. 홍 영감도 어쩌면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침묵으로 방관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그런 부류일지도……. 차라리 날 귀곡산장으로 보내 도오! [4]탈출 대작전의 결말 다행히 배게 사건 이후로 령령(鈴鈴)은 내 방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처음 며칠 간은 초조와 불안의 연속이었으나, 시간이 지나고 안심이 되자 그녀의 존재를 어느 정도 잊을 수 있었다. 단지 식사시간이 되면 국밥을 들고 올라오는 포형의 능청스런 모습이 좀 아니꼽긴 했지만, 뭐 그럭저럭 참아 줄만 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는 거의 회복이 되어서 걷는 것은 물론 뛰어 다니는 것도 무리가 없었다. 이젠 기회만 엿보면 되는 것이다. '오래도 참았다. 이 저주받을 망아루 인간들, 내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 너희를 곱씹으며 악착같이 살아 주마. 언젠가, 그 언젠가 내 다리를 붙들고 울고 불며 애원(哀願)할 날이 올 것이다.' 불끈 움켜쥔 주먹 위로 참고 또 참았던 분루(憤淚)가 톡톡 떨어졌다. 지난 십여 일의 한 서린 과거(過去)가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눈만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빙기옥골(氷肌玉骨)의 선녀나 다를 바 없지만, 실상은 피가 마르도록 갖고 놀다가 수틀리면 폭력으로 의지를 관철하는 미친 여인, 주령령(周鈴鈴). 특위 사항,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다니면서 음산한 분위기 풍기기. 미소(美笑)속에 감춰진 암계(暗計)로 상대방을 이중 삼중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비열한 사나이, 포연강(鮑緣强). 아직 한 번도 그가 폭력을 휘두르는 것은 못 봤지만, 도끼를 드는 순간 이처럼 침대에서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지저의 차가운 관속에서 잠들게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일 것이다. 진정 겁을 내야 하는 자는 지금도 계산대에서 조는 척하고 있을 무정 무심 노인네 홍 영감, 맹세컨대 이 주루(酒樓) 안에서 그가 모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포연강 녀석이 홍 노인에게 보고하는 걸 봐서 그는 포연강보다 한 수 위거나 겁을 낼 만한 뭔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그의 지휘 아래 일어난 우발적 계획인지도 모른다. 손님도 하나 없는 쓸쓸한 산자락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선량하고 순진하기 그지없는 나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말이다! 결론(結論)을 내리자면 이 망아루 안에 나를 제외하고 정상적인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거의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 들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갑자기 처절하게 짓눌려 올 미래(未來)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생각이 그에 미치자 실천은 촌각(寸刻)이었다. 덮고 있던 이불에서 조용히 나와 천천히 마의를 걸쳤다. 건넛방에 있을지도 모르는 그녀를 자극해서 일이 틀어지는 일이 없도록 침착하게 봇짐을 풀어 보았다. 여벌로 가져온 마의 한 벌, 심심할 때 보려고 가져온 천자문과 빨간 표지의 춘화도(春畵圖), 그리고, 그림에 대한 여운이 남아 추억으로 챙겨 온 붓 몇 자루와 물감의 재료가 되는 원료 가루 상자. 그뿐이었지만, 다 가져가면 눈치 채일 것이 분명했다. '나에게 꼭 필요한…… 버릴 수 없는 물건만 챙기자. 그렇다면…….' 주저 없이 손때가 꼬질 꼬질 묻은 춘화도 책자를 콱 움켜쥐었다. '난 너 없이는 못살아. 크크크.' 빨간 표지 춘화도 책자를 풀어헤친 내 가슴팍 깊숙이 넣고 옷을 꽉 조였다. 행여나 떨어져 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여벌옷은 양 바지 자락 끝에 나눠 넣고 끝매듭을 확실하게 묶었다. 이대로 물지게를 이고 가서 물을 떠온다는 핑계를 대고 산 아래로 내려가면 만사형통인 거다. 물지게야 당연히 장강 위에 띄워서 두둥실 떠나가게 할 생각이었다. 내가 골탕 먹을 것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약 좀 오를 것이다. 크크크크. 남은 천자문과 그림 화구를 들고 조심스럽게 봇짐에 다시 쌌다. 절대로 내 수중을 떠나지 않았던 소중한 친구들, 슬프지만 작별의 시간이 온 것이다. 난 과감히 침대 밑 구석으로 쑤셔 넣어 안보이게 처리하려 했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침대보를 들춘 바닥에는 이미 다른 봇짐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어럽쇼. 이게 웬 봇짐들이지?' 궁금한 마음에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논어, 이태백의 명작, 서예 도구, 억 이 고린내는? 크으 썩은 버선이잖아. 빨지도 않고 쳐 넣으면 어떻게 해? 음 이 지린내는 어디서? 윽 이건 고쟁이…… 미쳐, 미쳐. 전에 살던 놈들은 참으로 지저분한 놈들이, 이…… 어라?' 꿀꺽. 침이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것이 느껴지면서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수북히 쌓여 있는 봇짐들을 보자 뭔가 짐작되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오한과 함께 엄습해 오는 이 불안감이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자리를 박차면서 일어났다. '이럴수록 더 굳건하게 나아가야 해. 그 어떤 장애물이 날 막는다 해도 모르는 척 시치미 떼면 되는 거야. 그러면 지들이 뭐라고 하겠어? 당당하게! 당당하게!'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눈을 옴팡지게 치켜 뜬 나는 포부도 당당한 걸음으로 살금살금 문밖으로 기어서 내려갔다. 그 어떤 포부도 령령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것을 아니까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계단을 내려가 보니 여전히 계산대(計算垈) 홍 영감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깊은 능구렁이 속 끝을 알 수 없는 간사한 영감쟁이 같으니라고! 흥이다 흥이야. 혹시나 실눈을 뜨고 곁눈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평정심을 유지하며 후원으로 빠져나왔다. 장작을 패던 포연강이 보이지 않아 수월하게 창고(倉庫)를 열었다. "깍꿍!" "후미야." 느닷없이 창고의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구레나룻 거구 장한, 포연강 이 빌어먹을 놈! 간 떨어질 뻔했잖아. 맷돌에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을 파렴치한 놈! 이젠 내가 니 속을 모를 듯싶으냐? "어이구, 포 형님 소제 간 떨어질 뻔했습니다요.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뭐하긴 그냥 어둠 속에서 명상 중이었지. 그런 자네야말로 편치 않은 몸으로 어딜 가려는 건가? 좀 더 몸조리를 해야지." 미쳤냐? 내가 계속 니들 손바닥 위에서 놀게! "아닙니다. 쉴 만큼 쉬었으니 밥값을 해야지요. 물이나 떠오겠습니다. 형님은 계속 명상을 하십시오." "아 물지게 때문에 온 것이군." "예, 물지게요." "물지게라……." "그럼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영차." "크하하하하하!" 이 인간은 왜 물지게란 말에 그리 뜸을 드리는지 모르겠다. 망측스런 웃음을 뒤로하고 나오려는데, 중얼거리는 말이 들려 왔다. "자고로 역사(歷史)란 돌고 도는 불변의 진리란 말씀이야." 역시 미친놈이다. 아까 전에는 명상 운운하더니 이젠 역사 운운이라……. 나까지 미치기 전에 여길 일 초라도 빨리 떠야만 하는 거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밤이면 밤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화염(火炎)같이, 뜨겁디뜨겁게 미친 주령령이 방에 콕 처박혀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침 날도 훤하니 밖으로 나돌아 다니진 않을 테고, 이 기회를 이용해 도망가는 일은 이미 여반장이 돼 버렸다. 혹시 내 의도(意道)가 들통날까 조바심이 났지만, 속으로 평정심 평정심을 외며 가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현관을 지나 바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의외로 막는다거나 뒤통수에 시선이 박히는 걸 느낀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렀다. 이 산에서 내려가기 전까지 안심이란 있을 수 없는 거다. 말이 헛 나와 속마음이 비쳐 버릴까 해서 입조차 여문 조개처럼 꼭 닫아걸고 내려왔다. 숲 속 어딘가에 숨어서 내 동태를 엿보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내려오는 길은 한 식경이나 걸릴 만큼 얼마 안 되는 거리였지만, 긴장할 데로 긴장한 나에겐 너무나도 멀고도 힘든 길이었다. 그래도 고생한 만큼 보람은 있었다. 산바람과 함께 거칠게 흘러가는 소장강 물줄기 소리가 지칠 대로 지쳐 버린 내 육신의 노고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렇게 짜증나던 소장강 물놀이 연인(戀人)들의 단란한 모습들도 반가울 따름이었다. 벗어난 것이다! 망아루의 공포(恐怖)로부터 영원(永遠)히 벗어난 것이었다. 날 무겁게 짓눌렀던 물지게를 벗어서 한쪽에 내려놨다. 일단 휴식(休息)을 취하고 몸이 풀리면 맞바로 소장강에 던져 넣는 쾌감(快感)을 누려야 하니까. "흐흐흐흐흐흐흐흐!! 끼야호! 좋구나. 좋아." 정말 좋았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잡념도 날 붙잡지 못했다. 자유, 자유(自由)란 게 이리 좋은 것 인줄 이전에 알았다면 행복하기 그지없었을 것을……. "시끄럽다. 아가리 닥치고 저리 가라. 햇볕 막지 말고……." 느닷없이 강가 풀숲 속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풀숲 쪽을 봤으나 인적이 없어 나한테 한 소리가 맞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멀게 잡아도 십여 장을 반경 안으로 멀거니 서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아, 그 인간 말길 더럽게 못 알아먹네. 거기서 시끄럽게 떠든 게 너밖에 더 있어?" 벌떡! 내 뒤 어딘가 했는데, 바로 옆에서 하얀 나삼의 미녀가 휙 튀어나왔다. 칠흑같이 새까만 비단결 같은 긴 머리를 뒤로 돌돌 말아 올려 은비녀로 고정한 하얀 피부의 여인, 양끝은 신경질적으로 보일 만큼 치켜져 올라갔지만, 커다란 새까만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는 두 눈은 오뚝하니 아담한 코와 아침 이슬 속에 자라난 싱그러운 앵두 같은 입술과 대조가 되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난생 처음 보는 엄청난 미모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싶었다. 더군다나 전혀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는데, 바로 곁에 있었다니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흠이라면 곱디고운 입에서 되바라진 말들이 쏟아지는 정도랄까? 뭐 내 눈이 즐거운데 무슨 상관있으랴. 후후. '단지 초롱초롱 빛나는 커다란 눈이 왠지 낯익단 말이야. 분명 처음 보는 미인인데, 어디서 봤더라?' 여인은 내 옆에 있는 물지게를 보더니 피식 코웃음치며 회상에 잠기는 듯 소장강을 돌아보았다. "한 달 전에도 너처럼 멍청한 녀석이 여기로 물지게를 메고 내려온 적이 있었는데, 오자마자 냉큼 물지게를 강물에다가 던져 버렸어. 그 인간 어떻게 되었을까? 넌 알아?" 당연히 모르는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불어 내 온 정신을 이 깜찍하고 귀여우면서 요염한 매력이 철철 넘치는 여인의 미모를 감상하는데 소비하고 있었으니 귓구멍에 소리가 들어오는지 파리가 들어오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감히 우리 집 물지게를 함부로 버리려고 하는데, 내가 가만히 놔뒀겠어? 일단 죽지 않을 만큼 가볍게 두들겨서 연하게 만들어 줬더니만, 정신이 좀 없어졌나 봐. 자기가 무슨 뼈 없는 오징어 인줄 착각했는지 흐느적흐느적 기어다니더라고. 야, 야, 내 얘기 안 끝났어. 어딜 기어가?" 우리 집 물지게란 말이 나왔을 때 어디서 그 눈을 봤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신에 두 다리에서 힘이 쭉 빠지면서 휘청 쓰러졌고, 쓰러진 와중에도 살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에 의해 슬금슬금 옆으로 기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의, 반의 반장을 가기도 전에 엄청난 악력(握力)을 지닌 령령의 손에 뒷덜미를 잡혀 버렸다. 동시에 억지로 옆에 앉아 부들부들 살 떨리게 하는 추억담을 듣는 고역을 당해야 했다. "정신을 잃게 만든 게 바로 나 아니겠어? 너무 미안하더라고, 그래서 정신 좀 차리게 해줘야겠다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불같이 일어나는 거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요리를 할까 하는 투지(鬪志)가 불같이 일어났겠지.' 자포자기를 하게 되니 속으로나마 령령의 설명에 반박을 하기 시작했다. 속으로 반박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요. 용기였던 것이다. 그 이상은 타고난 생존 본능에 저지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얘기는 가면 갈수록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다. "응급 처치 차원에서 그 바보 머리통을 꽉 잡고 강물 속에다 처넣었더니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키다가 축 늘어지는 게 아니겠어? 큰일났다 싶어 바로 끄집어내서 복부를 한 방 날렸더니 물을 토하면서 정신을 차리는 거야. 그런데, 제 정신이 든 이 녀석이 대뜸 나한테 욕을 하더라고. 너라도 화 안 나겠어? 나지? 그렇지?" 그냥 고개를 까딱까딱 해줬더니 기분이 좋았는지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여줬다. 순간 너무 아찔해져서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망각하기까지 했다. "나? 당연히 화났지. 그래도 상처를 더 만들면 안 되겠다 싶어서 이미 맞아서 상처 난 부위만 골라 집중적으로 두드려 줬더니 조용히 뻗더라고. 하도 불쌍해서 물지게는 대신 날라다 줬으니 지금도 나에 대한 고마움을 가슴 속 깊이 담아 두고 있을 거야." 듣는 내용은 구 층 지옥의 최하층을 연상케 하는데, 그녀 주변에는 은은하면서 화사한 꽃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 참 고약하다면 고약한 일일 것이다. 이젠 죽는 일만 남을 것일까? 분명 나에게 일어날 일을 알기 쉽게 오목조목 따져서 나열해 준 것이리라. 이제 날 두드려 줄 생각인지 요악스레 빛나는 커다란 눈동자를 자포자기로 인해 무덤덤하니 앉아 있는 내게로 돌렸다. "그런데, 나 궁금한 게 있어." "뭡니까?" "아까 전에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던데, 왜 그랬어?" 말을 하면서 내 옷고름을 바로 잡아 주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무심하게 앉아 있던 내 전신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 이성이 잊으려고 해도 내 몸은 그녀의 매서운 손길을 잊지 못함 일 것이다. "왜 그랬냐니까? 어쭈, 내가 두말하게 만드네. 너 목숨이 두 개냐?" 완전히 말하는 게 거리 건달 저리 가라다. 신은 어찌하여 겉은 극상의 선녀로 만들었으면서, 속은 최악의 저속하고 악독한 건달 패거리 여섯 부대를 몰아서 만들었는지 원망스럽기 그지없다. 에고 그래 칠 테면 쳐라. 난 모르겠다. "풍악산의 맑은 공기와 소장강의 깨끗한 물결을 보니 호연지기가 자연스럽게 일어나 나도 모르게 사나이의 기상을 담은 장소를 터뜨린 거요. 웃는 것조차 령령 아가씨의 허락을 받아야 하오?" "아, 그렇구나. 난 또 물지게를 강물에다 던지려는 줄 알고 화낼 뻔했잖아. 그런데 너 말투에서 투철한 개김성이 느껴진다? 맞아?" 한숨이 나왔다. 단단히 마음먹고 나왔는지 내가 하는 말마다 시비조가 다분하다. 눈앞의 절정 미녀에게 얻어터져야 하는 현실을 피하기는 불가능할 듯싶었다. "맘대로 생각하시구랴. 패든 말든 령령 아가씨 마음 아니오?" "……." 령령은 내가 강하게 나오자 오히려 당황했는지 시선을 피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난 사실 무지 긴장하고 있었다. "좋아, 물지게를 강물에 던지는 걸 본적도 없고, 네 말에도 일리가 있어 보이긴 해. 믿어 보지. 난 좀 더 있다 갈 테니 너 먼저 올라가 봐." 의외로 깔끔하게 봐주는 그녀를 보니 얼떨떨해졌지만,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는 예측 불허의 여인이니 기회가 생겼을 때 피하는 게 상책일 것이다. 주저 없이 물지게에 물을 가득 채우고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소장강까지 와서 돌아가야 하는 실망감보다 그녀를 이런 상황에서 만나고도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더 팽배해졌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란 간사한 것이다. 위기가 닥치면 그걸 피하려고 애를 쓰다가도 정작 피하고 나면 모종의 이익을 위해서 더 위험한 일도 불사하곤 한다. 나 또한 그 범주를 넘지 못한 모양이다. 령령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게 되자 또다시 탈출의 유혹에 빠져 버렸다. 망아루로 가는 길의 중간도 채 못 가서 산자락 근처에 이르게 되었다. 더 가면 굽이굽이 돌아서 가야 하는 깎아지른 외길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여기라면 완만한 산 경사를 타고 서안 시내로 빠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에 실패하면 변명의 여지가 없을게 분명하지만, 포연강도, 홍영감도, 주령령도 이곳에는 없었다. 지금 탈출을 못하면 다음이란 영원히 없을 듯한 불안감이 든다. 마치 운명의 기로에 서 있는 듯한 기묘한 떨림이 왔다. '가자, 저들과 더 있다간 사람 구실은커녕 개만도 못한 신세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난 그렇게 살수는 없다. 최소한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살 자격이 있다고!' 운명(運命)이라는 단어까지 도용해 옆길로 새는 졸렬함을 정당화(正當化)시키는 게 마땅찮기는 했지만, 적어도 망아루(忘我樓)군상(群像)들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은 일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초가을의 무성한 숲 속에 물지게를 숨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거진 숲을 헤치며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더 더욱 쉬운 일이었다. 간혹 잡초나 덤불의 가시에 긁힌 피부가 독이 올랐는지 푸르딩딩하게 부어올랐으나, 일주야를 침상에서 보내야 했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이제야말로 인간 껍데기를 뒤집어 쓴 악마(惡魔)들과 영원히 안녕이다. 다시는 내가 풍악산(風岳山)근처에라도 얼씬하나 봐라.' 대략 일 각 여의 시각이 지났을까, 난 오로지 숲의 잔가지를 걷어내며 경쾌한 속도(速度)로 내려가기에 정신(精神)이 팔려 내 앞으로 걸어 올라오는 사람이 있는 것을 미쳐 볼 수가 없었다. 쿠웅! 대퇴부를 울리는 강한 타격음에 다리는 하늘로 치솟고, 머리는 바닥에 박으면서 한 바퀴 붕 돌아 그대로 철퍼덕 엎어져 버렸다. 보지는 못했어도 누구한테 맞고서 이 꼴이 되었는가는 재고할 필요가 없었다. "어라, 이게 누구야? 망아루로 간다는 사람이 왜 여기로 내려와? 어서 이실직고(以實直告)해보시지." 령령, 이 눈의 가시 보다 더 독한 년, 얼굴이 반반하면 뭐해? 성깔이 개차반인데 누가 데려다 살지 몰라도 참 앞 날이 불쌍하다. 아직도 골이 윙 하고 울렸지만, 나무 기둥을 잡고 비틀비틀 일어서며, 생존본능이 치밀한 잔머리가 구르는 데로 불었다. "그, 그야 큰 게 마려워서요. 길가에 실례를 했다간 올라오시는 령령 아가씨께 엄청난 민폐가 될 것 같아서 이리로 깊이 들어온거지요. 헤헷." "그래? 아 난 또 도망가는 중인 줄 알았네. 그럼 거기서 볼 일 봐." 의외로 순순히 넘어가는 게 겸염쩍긴 했지만, 또 한 고비를 넘겼다는 기분에 홀가분히 바지를 까내리......려던 손을 멈췄다. 바로 옆에 그녀가 말똥말똥 거리는 눈빛으로 내 뒤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기 제가 다른 데로 가서 볼 일 볼까요?" "안 돼, 나 신경 쓰지 말고 볼 일 봐. 다른 데로 갔다간 주~욱을 줄 알어. 엉!" "......" 내가 상대를 말아야지. 그녀의 광증(狂症)을 내가 이해(理解)못하면 누가 이해하리. 남이 시키는 일은 절대로 안 하려는 저 똥고집이 어디 가랴? 참나 원 경우가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 있는 것 같아 허탈해지긴 하지만, 나의 초절정 철면피 신공은 이딴 일에 꿈쩍할 리가 없다. 한 숨을 내쉬면서 바지를 까 내렸는데, 마침 품속에 고이고이 모셔져 있던 춘화도 책자가 툭 떨어져 내렸다. 순간 간담이 서늘해져서 령령 쪽을 돌아보니 어디서 구해왔는지 내 팔뚝만한 나무를 구해와서 단도로 사각사각 깍아 내느라 미쳐 못 알아차린 듯 싶었다. '휴우, 내 보물1호를 하마트면 저 악녀에게 뺐길 뻔했네. 들켰으면 보나마나 압수당했을 게 뻔하지. 크크크크.' 다시 품속으로 슬며시 넣으려는데 귓고막에 울리는 소리는 조금도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야, 그거 뭐야?" "......이, 이거 말인가요?" "그래, 그거 표지가 빨간 책, 그게 뭐냐고?" 순간 발휘되는 나의 재치, 스쳐 지나가는 번뜩임. "볼 일 보고 나면 이걸로 닦으려구요. 이게 종이 질이 좋아서 잘 닦여요. 헤헤헤헷." "그래? 좋아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급하다며? 왜 안나와?" "......" 당연히 바로 나올 리가 없다. 물지게를 갖고 내려오기 전에 위에서 이미 볼 일을 봤으니까 말이다. 이번에는 무슨 핑계를 대야하는지 궁리하는 새 언성을 높힌 그녀의 추궁이 바야흐로 시작되었다. "빨리 싸, 안 싸? 내가 너 기다리는 거 안보여?" "저, 저기 그게......아가씨가 보고 계셔서 안나오는가 본데요." "웃기네, 니가 급한 상황에 그런 거 따질 인간이야? 좋은 말할 때 빨랑 싸라. 분명 뒤가 마려서 내려왔다고 했어. 너 앞으로 일 각 안으로 똥 안나오면 이 말뚝으로 니 똥꾸녕 콱 뚫어버릴 줄 알어!!" 그, 그럼 저 팔, 팔뚝만한 나무기둥의 용도가 바로...... 허걱! 어쩐지 순순히 넘어 가준다 했더니 아닌게 아니라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내 머리 위에서 노는 애한테 하찮은 잔머리로 넘어가려 했으니......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실제로 싸는 수밖에 없었다. 일각이라는 급박감에 쫓겨 젖 먹던 힘까지 전부 다 아랫배로 몰아넣었다. 자칫 잘못해 저 말뚝에 뒤를 뚫렸다간 큰 게 마릴 때마다 그냥 슝슝슝 떨어져 버릴게 분명하다. 이 나이 먹고 뒷구녕에 기저귀 차고 다녀야하는 꼴불견 신세로 타락해 버리는 거다. '안돼! 안돼! 그럴 수야 없지. 제발, 제발 나와다오. 뒷구녕아 제바알 나를 살려다오!' 얼굴이 시뻘게져서 숨이 막히도록 힘을 줬건만 애꿎은 방귀만 새어 나왔다. 뿡 뿌웅 뿌우우우웅~ '크으 냄새 한 번 지독하네. 질식해서 쓰러지겠다. 그런데, 저 년은 눈 한 번 꿈쩍도 안하고 자리를 지키네. 독해도 너무 독해, 내가 졌다. 깨끗이 졌어. 흐흑.' 무림에 대해 눈꼽만큼도 지식이 없는 나로써 는 주령령이 귀식대법(龜息大法)이라는 숨 안 쉬는 무공을 쓰고 있는걸 알 턱이 없었다. 일각이 다 되어 체념을 하고 어떻게 하면 덜 아프게 말뚝에 뒤를 뚫릴까 연구(硏究)같잖은 연구를 하고 있던 차, 아래로 뭔가가 툭하고 떨어져 내렸다. 바로, 바로 그것이었다. "이야호! 똥이다, 똥이 나왔다. 천지신명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크흐흐흐흐흑." 어이가 없었는지 뒤 돌아서며 코웃음치던 령령은 최후의 순간까지 잊지 않고 경고해왔다. "너 춘화도로 깨끗이 뒤를 닦아내. 한 장이라도 남기면...... 정말로 뚫어버린다." 너무 기뻐서 눈물에 콧물까지 뒤범벅이 되어있던 나는 군소리 없이 한 장 한 장 뜯어내 남김없이 뒤를 훑고 버렸다. 기쁨의 눈물 속에는 통한의 눈물도 같이 흘러 내렸다. '아이고, 아까운 것 내 너를 무려 은자 한 냥을 주고 구했건만, 이리 허무하게 헤어져야 한다니! 미안하다 미안 해. 흐흐흐흑.' 몇 차례 도주 계획(逃走 計劃)이 찬란하게 무산되자 재 시도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무엇보다 내 앞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령령의 요염한 뒷모습이 남기는 강한 유혹을 뿌리칠 수도 없었다. 적어도 광증(狂症)을 일으키지 않은 보통의 그녀는 가만히만 있어도 아찔한 매력을 요요롭게 풍기기에 그 모습을 놓치기가 너무 안타깝기만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공식적으로 그 뒤를 졸졸졸 따라다닐 수 있는 기회가 또 언제 생기겠는가! 비록 양어깨를 물지게의 인력(引力)이 짓누른다 해도 다리에 불끈 샘솟는 힘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쩝 도망이고 뭐고 다 글렀는데, 후회한들 무엇하리. 이참에 눈요기나 실컷 하지 뭐. 아이고, 저 개미허리하며, 걸을 때마다 실룩실룩 거리는 뇌쇄적인 둔부하며, 쭉쭉 시원하게 뻗은 두 다리의 각선미하며...... 카아 죽인다. 죽여.' 어쩌면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버려야 했던 춘화도에 대한 보상심리가 령령의 환상적인 뒷모습을 통한 대리만족으로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상쇄시키려 함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눈을 파는 새 망아루가 있는 언덕배기까지 찰라간에 당도해 버렸다. 날이 뉘엿뉘엿 어두워감 을 느꼈음인지 망아루 앞뜰의 외등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리저리 잔머리 굴리면서 그녀랑 숨바꼭질을 하는 새 하루의 반나절이 후딱 지나가 버린 것이다. "물지게 거기에 내려놔." "저기 조금은 더 가야 할 듯 싶은데요." "내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랬지? 벌써 잊었어? 생각나게 해줘?" "......" 더 생각하시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후다닥 물지게를 벗어서 옆에 내려놓았다. 순간 령령의 안광이 푸르스름하게 빛났다면 나의 착각일까? 앗 하는 새, 내 복부를 향해 그녀의 주먹이 통렬하게 쇄도했다. 적어도 일 장 정도는 붕 떠서 나가떨어진 기분이었다. "헉!" 맞은 부위가 허파부분이었는지 쇳소리만 짧게 나왔을 뿐, 신음조차 흘릴 수가 없었다. 단 한 방이었지만, 내부가 진탕되었다고 느낄 만큼 강한 진동이 전신에 퍼졌고, 못해도 삼사일 간 뱃속에 들어가 소화될 기미를 보였던 것들을 일시에 게워내야 했다. 이 한방에 담긴 위력으로 이전에 구타(毆打)당했다면 전신이 피 곤죽이 되어 산산이 터진 채 죽었을 것이다. '이, 이런 위력(威力)은 범인(凡人)이 낼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주령령(周鈴鈴)은 무림인(武林人)이 분명(分明)하다. 그렇다면, 포연강도 홍 영감도 평범한 사람들일 수 는 없다. 젠장 어째서 발에 채이는 놈들마다 다 무림인인 거야? 짜증나게......' 설명은 길었으나 찰라에 스쳐지나간 개인적 감상이었다고나 해야할까? 난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어 령령을 향해 항변하듯 두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았다. 맞을때 맞더라도 이유는 알고 맞아야할 것 아닌가! "야, 눈 깔어. 니가 뭘 잘했다고 째려봐 째려보긴. 너 남자 아냐? 가슴이 활활 타오르는 헌헌대장부 아니냐고! 앞으로도 비열하고 졸렬하게 말 돌려가면서 병아리 냉가슴 앓듯 살고 싶어? 왜 말못해? 엿 같고 악랄한 사람들이 사는 주루에선 일 못해먹겠다고 왜 말을 못해? 솔직히 그만두겠다고 했으면 순순히 보내줬을 거 아냐! 왜 거짓말을 하는 거냐고!" "......"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할퀴어 놓았다. 하나도 틀림이 없는 맞는 얘기였으니까. 난 비열하고 졸렬하게 위장된 거짓말로 날 보호(保護)하려고만 했지, 단 한 번이라도 당당하게 내 뜻을 주위 사람들에게 피력한 적이 없었다. 지난 삼 년 간 그림에 매진하며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그림을 좋아하는 내 취향을 부친이 먼저 알아차리고 일찌감치 길을 내줬기 때문이었다. 결국 내 의지라기보다 떠밀려져 간 것뿐이었다. 훗 웃기다. 저따위 악녀한테 내 헛점을 바로 지적 당해버리다니......적어도 이 순간 난 그녀 앞에 전라의 볼품없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것과 같았다. 낱낱이 간파 당하는 이 더러운 기분을 허탈하게 느껴야만 하는 것이었다. "꺼져, 내 눈앞에서 썩 꺼져버려! 안 잡을 테니 니 가고 싶은 대로 가버려!" 냉랭하게 퍼지는 그녀의 말은 그 어느 때보다 힘이 실려 있었다. 나에 대한 실망감? 피식 코웃음과 함께 입 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기껏해야 얻어맞은 기억밖에 없는데 유달리 신경질을 부린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 탓일까? 현관에서 안면에 능글맞은 웃음을 띄고 있는 포연강(鮑緣强)이 걸어 나왔다. 그가 나타나자 령령의 신형이 왠지 부르르 떨린 것도 같았다. "이런, 이런 작삼 동생이 정말로 내 동생을 화나게 만들었나 보군. 흠 날도 어두워지는데 내가 배웅해주지. 또 처녀 귀신을 만나는 일이 없도록." "......" 조금은 찹찹한 기분이라 평상시라면 고마워했을 그 말에 묵묵부답으로 응대해줬다. 주령령이 지적해준 말에 대해 울컥하는 반감이 치밀었기 때문이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가운데서도 포연강은 내 쪽으로 걸어왔고, 주령령과 교차하는 지점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더 이상 내게 걸어올 수 없었다. 령령의 오른팔이 그의 오른팔을 꽉 잡고 놓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그는 상당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조용히 보내주고 올께. 그것이 우리도 편하고 저 친구도 편한 길이야." "안돼. 오빠가 따라 가선 안 돼. 혼자 가게 내버려둬." "......변했구나.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넌 날 잡을 수 없어." "......" 그들 사이에서 세찬 바람이 사방팔방으로 몰아쳐 나갔다. 이것은 필시 무공을 겨루는 일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남매들끼리 겨눈단 말인가? 포연강이 날 안전하게 배웅해주는 것이 그렇게 못 마땅한 건가? 밤길에 내려가다가 맹수나 귀신을 만나서 죽기를 바라고 있단 말인가? 왠지 그녀가 무지하게 짜증나기 시작했다. "그냥 보내고 잊자구. 어차피 오빤 갈 수 없어! 내가 막을 테니까." "니 실력으로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 하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차게 퍼지던 그들 사이의 회오리바람도 잔잔해졌다. 대신 대기를 가로지르는 압력이 느껴졌다. 뭔가 겨루는 형태가 바뀐 것이리라. 령령이 하는 말에 반감이 커져만 갔다. 날 못 내서 안달난듯한 그녀의 말들이 반가워야 정상인데, 아까 들었던 칼날 같은 비수들 때문에 돌이키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난 처절하게 얻어터진 기억밖에 없었다. 오줌 지리게 만들어 놓고 다시 벗겨 버린 것도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빨래? 자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니 당연히 해줘야 하는 일이었던 거다. 새삼 좋게 봐줄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당해도 너무 심하게 당했다. 돌려줘야 한다. 자살하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로 악독하게 돌려주고 말 테다. 언제고 기회가 생기면 수면약이나 미약을 먹여서 기절시킨 뒤 홀라당 벗긴 후 처절하게 유린하고 또 유린할 테다. 나란 인간을 괴롭혔던걸 땅을 치며 후회하며 통곡하도록 만들어줄 테다. 그러자면...... 그러자면! "안 가, 난 안 갈 거야!" 통한에 치밀어 오르던 오기가 드디어 터졌다. "뭐, 뭐라고?" 내가 안 간다고 하니까 령령이 당황했는지 반문을 해왔다. 크크 효과가 있군. 자기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리라고는 짐작조차 못했을 테니까, 당연히 당황스럽겠지. "난 거짓말 한 적 없어. 사나이 한 입으로 내뱉은 말 뒤집지 않는다. 난 안 떠나. 절대로 못 떠나. 악착같이 버텨 보일 테다. 꼽냐? 꼽아?" 대기를 가로지르던 압력이 깜쪽같이 갈무리되어 사라졌다. 포연강 쪽이 오히려 시무룩해져서 안으로 들어가며 푸념을 흘렸다. "아, 간만에 재미 좀 볼려고 했더니만 다 틀려 버렸군. 참 나 이런 경우도 다 있네 그려." '재, 재미? 저 녀석 그렇게 안 봤는데 남색을 즐기는 놈이었어?.' 황당한 푸념이었지만, 어쨌거나 령령에게 멋진 일격을 날렸다는 기쁨으로 주루를 향하는 내 발걸음은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나도 개긴 다면 개기는 놈이라고. 그녀의 일그러진 안면을 감상하려고 힐끗 곁눈질을 해보았는데, 왠걸 안면에 만연해 있는 미소란 왠 말인가!! 그 미소라는 것도 잠시뿐 금새 냉막한 본래의 얼굴로 되돌아가 버렸다. 불길한 조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나한테 반말을 했었네. 이게 덜 맞았다 이거지?" '아니, 이게 아닌데. 왜 시무룩이 아니라 기운 펄펄 이냐고?' 퍽! 퍼버버버벅! 퍼벅! 퍼버버벅!...... 차가운 밤 공기가 내려선 산자락에 근 한 시진 동안 난타 당하는 낭랑한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5]구타심결(毆打心訣) 이튿날, 동이 터오며 싱그러운 햇살이 창문을 뚫고 내 안면을 달군 덕택에 늦지 않게 일어날 수 있었다. 지난 저녁에는 꽤 오랫동안 맞은 기분이 들었지만, 의외로 상처가 별로 남지 않았다. 맞는 순간에만 무지하게 고통이 따랐을 뿐. '이젠 구타(毆打)도 효율적으로 하는구나. 어이구 독한 년, 언젠가 반드시 땅을 치고 후회할 날이 올 거다. 그 날까지 악착같이 버텨 보는 거야.'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눈곱도 떼어 낸 후 기지개를 힘껏 켜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고금을 통틀어 예전부터 내려오는 아주 유명한 명언(明言)이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난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설사 도주가 성공해서 다른 지방으로 갔다고 해도 바로 일자리를 구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노자가 다 떨어졌으니 구걸을 해서라도 연명(連命)해야 했을지 모르지만, 그것만은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이었다. 차라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내 생존 본능으로 깔끔하게 적응하고 말리라! 방문을 힘차게 열고 남아의 굳건한 의지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구태여 주령령의 신경을 자극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겠어? 복도를 돌아 계단을 내려가니 역시 언제나처럼 홍 영감이 졸고 있는 게 보였다. 단연코 저 노인장은 보통 사람일 수 없다. 주령령은 포연강한테 한수 접어주는 듯싶었고 포연강은 노인장한테 수시로 보고를 하는 입장이다. 그런고로 홍 영감은 이곳의 두목인 셈이다. 항상 꾸벅꾸벅 거리며 조는 것은 신비스러움을 자아내기 위한 연출이거나, 상대를 기만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戰略)임이 분명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빨을 숨긴 가증스러운 존재라이거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가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 언제나 조는 척 할 테니 상대만 하지 않으면 나한테 직접적으로 해로운 수작을 부리진 않을 것이다. 비록 다른 두 연놈들을 암중에 조종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지만……. 뒷문으로 빠져나와서 후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포연강은 자리에 없었다. 설마 손님도 없는데 주방에서 놀고 있는 것은 아닐 테고, 그럼 또 명상이라는 미명 하에 창고 구석에 짱 박혀 자고 있는 게 아닐까? 창고 문 앞까지 발뒤꿈치를 들고 양상군자(梁上君子)처럼 은근히 다가가서 문을 확 열어 젖혔다. '어라 없네. 이 빌어먹을 인간이 이번에는 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혹시 나랑 숨바꼭질하는데 맛 들였나?' 물지게를 꺼내 오른쪽 어깨에 둘러멘 채로 다시 계산대를 지나쳐 현관으로 가는 중이었다. "어제 저녁에 여길 떠나지 않고 남은 것을 후회하진 않나?" 늘그막 하게 고막을 떠는 홍 영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른편 어깨 위에 올라간 물지게 때문에 계산대 쪽으로 고개만 돌렸다. 게슴츠레 실눈을 뜬 홍 영감이 어느새 곰방대에 불을 붙였는지 빠끔빠끔 빨고 있는 게 보였다. "이곳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챘을 텐데, 그러고도 일하고 싶은가?" '아니 이 영감이 내가 가만히 있는데, 왜 시비를 걸고 난리야?' "영감님이나 포형이나 령령 아가씨가 무림인이라는 것을 말하는 거라면 잘못 짚었어요. 무림인이 이곳에만 특별하게 있는 줄 알아요? 서안 시내 일대 발에 걸리는 잡것들이 전부 무림인인데, 이런 주루라고 다를 거란 법이 있나요? 하여간 난 안 나가요. 먹여 주고 재워 준다고 강남 흥강성에까지 소개장을 보냈으면 책임을 지라고요." "흘흘, 그런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모양이로군. 알겠네." 그는 자기 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산대 의자에 기대어 꾸뻑거렸다. 그런데, 소문이라니? 괜히 밋밋하게 서 있는 남세스런 작태를 연출하기 싫었으므로 바로 현관으로 나와서 소장강을 향해 내려갔다. 초가을의 풀숲에 걸맞게 울긋불긋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하게 솟구쳐 올라 있다. 산을 거슬러 올라오는 바람을 따라 시선을 돌리면 푸르디푸른 창공이 적갈색의 숲과 만나 화려한 대비를 이루는 장경을 볼 수가 있다. 나무 사이를 휘휘 날아가는 날다람쥐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질 듯 내려왔다가 다시 올랐다가 곡예비행을 하는 듯한 정체불명의 새들이 종종 내 시야를 스쳐 갔다. 어제는 떠오르는 데로 풍악산과 소장강을 핑계로 호연지기를 기른다고 했지만,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풍악산의 장경을 보며 내려와 햇살에 부딪혀 요란한 빛을 뿜어 대는 소장강 물줄기를 계속 보노라면 절로 숙연해짐은 대자연(大自然)의 조화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려올 때까지의 얘기다. 물지게에 물을 가득 채우고서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는 때부터 호연지기는 먼 나라 얘기였다. 과중한 무게로 발목이 접히지 않도록 힘을 꽉 주며 이를 꽉 다문 채 오로지 다음 쉴 곳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올라가야 했다. 반은 령령의 협박에 겁을 먹고 쫓기듯 오르고 나머지 반은 그녀의 황홀한 자태에 홀려 정신없이 오른 어제가 환상처럼 느껴진다. '젠장 이 짓을 하루에 세 번 해야 한다니 짜증나네. 에라, 그냥 던지고 튀어? 안 돼. 그럴 수야 없지. 령령이 이 년을 처절하게 유린할 그날까지 꿋꿋하게 버텨야 해.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기회가 올 거야.' 령령이 내게 정문일침(頂門一鍼)을 가하던 그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당시 나를 휘감았던 오기가 다시금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령령, 널 꼭 내 발아래 엎드리게 할 테니 두고 봐라! 두고 봐!' 우오오오옷! 양다리에 새로운 힘이 불끈 솟구침을 느꼈다. 힘이 떨어질 때마다 그녀 욕을 하면서 전의를 불사르면 희한하게도 회복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가운뎃다리에도 힘이 들어가는 거야? 내려갈 때는 일 각 남짓한 시간밖에 안 걸렸지만, 거꾸로 물을 채우고 올라올 때는 한 시진에서 두 시진은 걸렸다. 그야말로 전신을 땀으로 흠뻑 적셔야만 했다. '쳇, 무림인이라는 것들이 왜 자기들이 안 하고 애꿎은 날 시켜서 나르게 하는 걸까? 혹시 무림인이라는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일까? 아니야, 그럼 그 사실을 아는 나를 살려 둘 리가 없는데?' 속으로 의문을 품기는 했지만, 너무 지쳐 숨을 헐떡이다 보니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잊혀지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채로 물지게를 주방에 있는 대형 수통에 따라 붓고는 비틀비틀 계산대로 향했다. "홍 영감님, 물 퍼 왔어요. 다음엔 무슨 일을 하면 되지요?" 졸고 있던 영감에게 말을 거니 이번에는 눈뜨기도 귀찮았던 모양이다. "수고했네. 오늘은 물이 많이 필요치 않으니 오후 늦게 한 번만 더 떠오도록 하고, 다른 일은 없으니 마음대로 하게나." 입만 열었다가 다시 꾸뻑거리는 노인, 조는 척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닌데 하루 종일 저러고 있으니 대단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 뭘 하면서 쉴까? 음……. 아 내 재산 목록을 쭉 정리해 볼까?' 미련 없이 방으로 튀어 오른 나는 침대보를 확 열어 젖혔다. 미쳐 다 펼쳐 보지 못한 침대 아래 수많은 봇짐, 임자 없는 저 물건들은 이제 '나'라는 새 주인을 맞을 준비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래, 잘하면 춘화도 책자가 한 권쯤은 나올지도 몰라. 카카카카카.' 새롭게 떠오른 생각은 날 기대감 어린 희열에 잠기게 했다. 심지어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일일이 풀어헤치게 되었다. '어디 보자. 내가 놓고 갔던 그림붓과 원료 가루 상자랑 천자문이라. 결국 내 손으로 돌아오고 마는구나. 그리고, 어디 어디? 음, 논어, 맹자, 어라 이것은 새 옷이네. 음 여분으로 챙기고.' 그 이외에도 여러 자질구레한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쓸 만한 책 종류나 입을 만한 옷가지 등 요긴한 것과 필요 없는 것 버려야 할 것 등으로 분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낡아서 너덜너덜한 책자 하나가 내 손에 잡혔다. 제목도 묘한 구타심결(毆打心訣)이라는 책자였다. 혹시나 춘화도 일까 싶어 즉시 펼쳐 보았다. '이 책을 펼친 그대 혹시 무지막지한 구타와 폭력 속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손에서 책을 놓고 즉시 잊어버리게 해 놨다네. 만약 이 책의 글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면, 인연이 닿아 노부의 심득(心得)을 얻은 것이니 익히고 또 익혀서 철저히 터득하길 바라네. 노부의 구타심결을 몸에 익히게 되면 외부로부터 받은 충격을 내부로 물 스미듯 흡수해서 단전이 아닌 세맥들에 내력이 흐르도록 해준다네. 따라서 단전을 파괴당해 내공을 잃어버릴 염려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상대의 내공 수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큰 효과를 볼 수 있고,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내성이 강해져서 구타에서 오는 고통이 줄어드는 장점이 있지. 구타심결을 극성(極性)으로 익히게 되면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수도 있고, 그 어떤 공격에도 무사할 수가 있다는 얘기지. 단지 사소한 단점들이 있는데, 정말 사소한 거라네. 그래도 알고 있는 게 좋을 듯싶어 몇 자 적는 바이네. 일단 노부의 심득(心得)을 익히게 되면 다른 내공 구결들은 익힐 수가 없게 된다네. 왜냐하면, 구타심결로 얻은 내공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지. 정말, 정말 사소한 단점이 하나 더 있는데, 구타심결로 절정 고수가 되려면 적어도 백 년간 꾸준히 구타당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 절정 고수가 되려는 그대 설마 그 정도의 기간도 못 기다리진 않겠지? 이 기간을 단축하고 싶다면 천하에서 손꼽는 고수들에게 구타를 당하면 되지만, 맞는 동안 생존해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따르지. 더불어 정말, 정말 사소한, 별것 아닌 문제가 있긴 한데. 아, 겁먹지 말게. 정말 사소한 것이니까, 너무 충격을 받아서 정신을 잃거나, 일정 성취 이상을 이뤄서 별로 고통을 안 받는 경지가 되면 괜찮은데, 그 중간 형태는 맞는 동안 계속 고통을 수발한다네. 그 시간이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서면, 잠시 동안 인격이 변질하면서 역천(逆天)의 기운을 흘리게 되는 사소한 후유증(後遺症)이 있을 수 있다네. 실망했나? 연자(緣者)여? 무도의 길에 왕도란 없는 거라네. 다만 좀 더 기쁜 맘으로 구타를 당하라는 의미(意味)에서 노부가 심심풀이 삼아 만들어 본 것이니 열심히 구타를 당하길 바라네. 참고로 섭혼신공(攝魂神功)을 베풀어 안배했으므로 인연자는 다 읽을 때까지 눈을 뗄 수 없고, 읽고 난 후에는 뇌리에 각인되게 해 놨다네. 지금부터 구결을 적었으니 똑똑히 보고 뇌리에 각인시키게.' '젠, 젠장 뭐야?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문구들이 머릿속에 강제로 똬리를 틀어 오네. 그, 그만해! 그만!' '어차피 여기까지 읽었다는 것은 이미 섭혼신공의 지배하에 있다는 뜻이니 싫든 좋든 익히게 되겠지만, 무훈을 비네. 연자여. 꼭 생존하여 노부가 심심풀이로 만든 구타심결(毆打心訣)을 극성으로 터득하길 바라네.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 현현자(炫炫者)' 구타심결(毆打心訣)이라는 책을 다 읽고 나니 순식간에 두 시진의 시간이 허망하게 흘러가 버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 허무함이란, 초반을 읽고 있던 잠시 동안 이것이 말로만 듣던 기연이로구나 하며 좋아했으나, 단점이라는 부분을 읽어 내려갈 동안 그것은 철저하게 잘못된 판단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쉽게 말하면 다른 내공을 배울 수도 없을뿐더러 제대로 효과를 보려면 백 년 후에나 가능하다는 것이 아닌가? 아니 백 년 안에 안 죽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도 백 년간 꾸준히 구타를 당한다는 말도 안 되는 전제까지 붙어 있었다. 제일 짜증나는 것은 심심풀이로 만들었다는 대목이었다. 한마디로 나란 존재는 심심풀이의 희생자란 소리가 아닌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나는 책을 양손에 잡아들고 북북 찢어 흩날리며 고함을 질렀다. "현현자! 이 미친 노인네, 령령보다 백배는 더 미친 엿 같은 노인네야!" 고함을 지르고 나니 한 결 화가 가라앉기는 했는데 곧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었다. 복도 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아니나 다를까 주령령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나타났다. "현현자가 누구야?" "저, 저기 노, 노망나서 죽은 노인인데요. 그냥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일단 맞고 나서 차분히 대화를 나눠 보자고." "……." 우당탕쿵탕! 퍽! 퍼벅! 우당탕! 퍼버버버버버벅! 퍼벅……. [6]몰려드는 군웅(群雄) 망아루의 점소이가 된 지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계절은 바야흐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 붉게 물든 낙엽이 우수수수 떨어지는 가을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는데, 바람이 불어올 때면 산 전체가 불그스레한 빛깔로 출렁이는 것이 마치 피의 물결을 연상(然想)하게 만들었다. 하여간 점소이로서 내가 한 달간 한 일은 물 퍼 올리기 일일 삼회 반복이었다. 처음에는 아주 죽을 맛이었는데, 령령 덕택에 능률이 팍팍 올라서 다리에 근육도 붙었고, 꽤 오랫동안 쉬지 않고 한 시진 안에 왕복(往復)이 가능한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령령이 직접 날 도와줬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녀를 향한 나의 무한대 분노가 힘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그 누구보다 내 적응 능력에 탄복해 마지않는 이는 역시 감정 표현이 풍부한 포연강이었다. 령령은 원래 냉랭한 여인이어서, 심중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없었고, 홍 영감은 언제나 무정 무심으로 졸기만 하니 뭔가 반응해 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자네의 그 바퀴벌레를 초월(超越)하는 원초적 적응 능력에 감복할 따름일세. 처음 들어왔을 만해도 송장 치르는 것은 정해진 일이라고 여겼었는데 말이야." 말하는 꼬락서니가 은근히 얄밉기 그지없다. 이 녀석은 태어날 적부터 타고난 원초적 '말리는 시누이'임이 분명하다. 내 복수 명단에는 네 녀석이 령령 바로 다음 순위이니 각오하는 게 좋을 것이다! 쿠오오오옷! "다 포 형님의 탁월한 지도력과 안배 탓이지요. 소제가 한 일은 그저 형님이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간 것뿐이지요. 헤헤헤헷." "작삼 동생이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네 스스로 노력한 바가 지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네. 그런데 말이지." 무슨 말을 하려고 이토록 뜸을 들이는 것일까? 조금 불안스럽기까진 한 이유는? "이미 자네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홍 영감과 령령, 나를 비롯한 삼인은 황실 근위대에서 모종의 비밀 임무를 받고 파견 나와 잠복근무 중인 무림인이라네." '황실 근위대?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뚜들기는 소리래?' "물론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엄연한 사실이지. 여기 황제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황령패(皇令牌)가 그 증거일세. 자 보게나." 그가 허리춤에서 꺼낸 손바닥만 한 쇳덩이를 내 눈앞에서 잔재주 부리듯 빙빙 돌리더니 다시 쏙 넣어 버렸다. 눈알만 빙글빙글 돌았을 뿐 뭐라고 써졌는지 보지도 못했고, 사실이 어떠하든 관심이 없기도 했다. "자네로 하여금 힘들게 물을 퍼 나르게 한 것도 사실은 우리가 무림인이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지. 우리가 잡아야 하는 범인은 오래 전부터 살인(殺人)과 강간, 절도 행각을 밥먹듯이 해 왔을 뿐 아니라 십여 년간 추적자들을 역으로 도살(屠殺)하는 신출귀몰함까지 갖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자라네. 실수로 낌새를 드러냈다 간 그 날로 우리 임무는 끝장이 날뿐만 아니라 역으로 암살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나?" '뭐? 암살을 당해? 오호…… 좋은 거 알았다. 니들은 이제 죽었어.' 순간적으로 내 눈에서 간사한 빛이 반짝이는 걸 그가 알아 차렸는지 기침을 하며 뭔가를 부스럭 부스럭 꺼내 들고는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손을 펴 봤더니…… 큼지막한 금원보가 아닌가! 진짜인가 싶어 이빨로 깨물어 봤는데 틀림없는 금 덩어리였다. 이런 금원보 하나면 은자 오백 냥에 맞먹는 엄청난 액수였다.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그런 금원보로 열 개를 더 줄 수 있다네." "포 대협, 맡겨만 주십쇼. 소제 최선을 다해 여러분을 보필하겠습니다." 일단 복수는 뒷전으로 저만큼 멀어졌고, 눈앞의 금원보만이 현실이 되어 내 골을 울렸다. 금원보가 열 개정도 있으면 괜찮은 객잔 하나 차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럼 나도 당당한 상류층 대열에 합류해서 소문으로만 듣던 천하제일 기루에서의 향응을 맘껏 누리는 일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절색의 미소녀를 옆에 끼고 호탕하게……. 카카카카카카.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을 미뤄도 아깝지 않다고 했으렷다. 까짓 거 두어 달 더 미룬다 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몇 가지만 신경 써 주면 되지. 우리 정보원으로부터 이 풍악산 일대에 무림인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네. 아무래도 그들 중에 우리가 찾는 범인이 숨어 있는 듯하더군. 그래서, 범인 색출 차원에서 령령은 인피면구를 쓰고 점원 노릇을 해야 하는데, 결정적인 기회가 오지 않는 한 무공을 쓸 수 없다네." "아, 그러니까 포 대협과 주 소저가 무림인이라는 걸 비밀로 해 달라는 것이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원보 열 개가 달…… 아니, 헤헤헤헤헷 대명국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니 염려 붙들어 두시고 범인을 꼭 잡으시길 바라겠습니다." "고맙네. 내 자네만 믿고 비밀 임무에 전념하겠네. 부디 수고해 주게." 평상시 건들건들 거리는 그답지 않게 절도 있는 걸음으로 무게를 주며 사라진다. 그들이 황실 근위대 소속이라는 말이 신빙성 있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어떤 목표(目表)가 있고, 그 때문에 보통 사람처럼 행세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事實)보다 중요(重要)한 것은 떼 부자가 될지도 모르는 일생 최대의 기회가 눈앞에 놓여졌다는 것이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우히히히힛. 간밤에 꿈을 잘 꾼 모양이군.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으면 나도 주인(主人) 행세를 할 수 있게 된다. 크크크크.' 포연강이 내게 귀띔을 해주고 난 후 이틀인가 지났을까? 점심 무렵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물지게를 메고서 헉헉거리며 올라오니 못 보던 여인네가 새치름하게 계산대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올 데가 나오고 들어갈 데가 확실하게 들어간 육감적인 몸매가 백의 경장 위로 유감 없이 드러나 침이 꿀꺽 넘어가는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눈 밑에 주근깨가 드문드문 나고 별 특징이 없는 보통 미모였지만, 나름대로 귀엽다고 느껴지는 안면의 소유자였다. "저, 저기 손님 왔어요. 영감님." 그러나, 홍 영감은 오늘따라 깊게 졸고 있는지 묵묵부답이었다. 정식으로 손님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라 조금은 안절부절못하다가 포연강이 있을 후원으로 냅다 달려갔다. "포 대협, 포 대협!" "왜, 그러나?" 창고에서 흐느적흐느적 기어 나오는 그가 잠이 덜 깬 소리로 반문해 왔다. "손님이 왔어요. 손님이 왔다고요!" "그럴 리가 있나?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아하 암. 알았네 가 봄세." 마지못해 억지로 나온 듯한 그는 계산대 옆에 서 있는 백의 여인을 보고는 빙긋 웃었다 "내가 며칠 전에 말한 새로 온 점원일세. 앞으로는 손님이 좀 많을 테니 일손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지." 그렇다면, 이 주근깨 여인이 바로 주령령이 인피면구를 뒤집어 쓴 모습이란 말인가? 어쩐지 몸매가 환상적이면서도 낯익다 싶었다. 눈도 잘 보면 커다랗고, 초롱초롱한 것이 영락없는 그녀였다. "아 주 소저였군요. 말씀을 하시지. 이 우 모 최선을 다해서 포 대협과 주 소저를 보필하겠습니다. 절대 걱정 마시고 임무에 최선을 다하셔서 범인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안면에 가득 미소를 물고서 아부성 발언을 서슴지 않는 나를 본 령령의 눈매가 좀 삐딱해졌다. 어디서 빠직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지만, 각설하고…… 그녀의 시선이 포연강을 향해 휙 돌아서자, 그는 팔짱을 끼고 다른 데를 보며 휘파람을 휘휘 부는 것이었다. "쳇, 오빠한테서 들은 모양인데, 처신 똑바로 해라. 허튼 소리해서 일 틀어지면 넌 나한테 먼저 죽어." "여부가 있겠습니까? 대 명국의 백성으로서 최선, 또 최선을 다할 것이니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요." 빌어먹을 대 명국은 무슨! 나라의 중대사를 맡아 처리해야 할 황실은 작금 당파싸움에 눈이 어두워 백성들이 가뭄에 굶어 죽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주요한 안건들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헐뜯어 귀향 보내고 자신들의 자리를 공고히 할까 하는 것이다. 심한 경우 신성해야 할 황실 안에 주먹과 욕지거리가 난무하여 거리 건달패보다 더 심하게 바닥을 뒹구는 일이 있다 하니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만인의 귀감이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할 황제까지 그들과 어울려 치고받는다 하니 변방의 백성들이 외적에게 간살(奸殺)을 당하고, 노략질을 당해도 그 어찌 신경 쓸 틈이 있겠는가! 익히 들어온 바가 있어, 황실의 인간들을 금수만도 못한 존재로 같잖게 생각하긴 하지만, 돈의 마력에 빠진 나로서는 좋은 말로 아부를 떨며 꼬리를 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 지금은 니들 연놈들 말에 장단을 맞춰 주마. 돈만 수중에 들어오면, 내 방식대로 갚아 줄 테다.' 과연 포연강의 말대로 손님들이 망아루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물을 퍼 올리고 나서 현관 문턱에 기대어 앉아 쉬고 있었는데, 거대한 체구를 지닌 네 명의 장한들이 성큼성큼 올라오는 게 보였다. 덩치가 얼마나 컸는지 포연강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았고, 인상도 험악한데다가 요대에 채워진 반월도(半月刀)와 철퇴(鐵槌)로 보아 무림인인 듯싶었다. 걸친 옷까지 칙칙한 회의 장삼이어서 더욱더 음침해 보이는 이들이었다. 내심 첫 손님이 나긋나긋하고 아리따운 여인네들이 아니라 우락부락 거구 장한들인 게 불만스러웠지만, 점소이로서의 사명감은 잊지 않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자, 자 이쪽 전망 좋은 창가 쪽에 자리가 있습니다요." "흠, 별난 곳에 자리 잡은 주루가 있다니, 그래 요리되는 게 뭐가 있는가?" 냉큼 자리에 앉은 자들 중에 우두머리로 되어 보이는 이가 지저분하게 난 턱수염을 쓸며 물어 왔다. 주문을 받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니 크으 오랫동안 씻지를 않았던지 시큼한 땀 냄새와 여타 악취가 진동을 했다. 구토가 나올지도 모를 정도로 곤혹스러웠지만, 내색을 했다 간 한 주먹에 휙 날아갈게 뻔한지라 꾹 참고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요리로는 소면과 만두, 오리 구이 이렇게 세 가지만 취급하고 있고, 술로는 백건아(白乾兒)와 죽엽청(竹葉靑)이 있습니다." "역시 기대할 게 없군. 그럼 오리 구이 세 마리와 죽엽청 두 병을 빨리 갖다 주게."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허리를 굽실굽실 굽히며 잽싸게 주방으로 뛰어온 나는 단번에 숨을 내쉬었다. 그 살인적인 체취(體臭)때문에 숨을 쉴 수 없었던 것이다. "헥, 헥헥 포 대협, 주문 들어왔습니다. 오리 구이 세 마리와 죽엽청 두 병입니다." 평상시에는 일이 없다며 장작을 패거나 으슥한 곳에 짱 박혀 낮잠을 즐기기 일쑤든 포연강은 귀가 밝은지 이미 요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좋아, 내 오리 구이 준비를 하지. 자네는 저 선반에서 죽엽청을 꺼내서 갖다 주게. 그리고……." 앞치마를 두르던 포연강이 갑자기 팔을 내 목에 둘러 구석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닌가! '이, 이 사람이 무슨 짓을 하려고!' 지난번 일로 포연강에게 남색가 기질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저절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자칫하면 내 첫 순결을…… 안 돼!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대협이니 소저니 하면 절대 안 되네. 그럼 만사 끝이야. 자네의 금원보 열 개도 꿈으로 끝나네. 알겠나?" "아…… 예, 물론 여부가 있겠습니까? 헤헤헤헷." 다행스럽게도 호칭에 대해 주의를 주기 위해 끌고 간 것이었다. 화들짝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주방을 나왔으나, 상황(狀況)은 오히려 더 심각해져 있었다. 손님들이 온 것을 귀신같은 령령이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점원 행세를 하기로 한 그녀는 인피면구를 착용하고 풀어헤치기 일쑤이던 머리도 틀어 올려서 귀여운 주근깨 여인으로 변장을 하고서 일을 도와주려고 내려왔던 모양이다. 하지만, 인피면구가 미모는 가렸을망정 그 매혹적이고 육감적으로 황홀한 몸매까지 덮어 줄 리가 없었다. 더구나 인적도 없는 곳에 올라온 거구 장한 네 명이 무엇이 두렵겠는가? 휘파람을 부르며 환호성을 지르는 게 뒷골목에서 구르는 동네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내게 주문을 했던 거구가 령령에게 까딱까딱 손가락질하는 게 보였다. "어라 아가씨 몸매가 장난이 아닌걸. 어디 내 무릎 위에 앉아 봐. 어허, 뭐해? 어서 앉으라니깐." 령령도 이때만은 당혹스러웠는지 계산대에서 졸고 있는 홍 영감을 힐끗 돌아보았다. 잠자코 말도 없이 돌아본다고 해서 깰 인간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그를 돌아보는 것일까? 머뭇하던 그녀는 생각을 굳혔는지 장한들에게 몸을 내맡기는 게 보였다. "어이, 점소이 술 안 가져오고 뭐해?" "아, 예 잠, 잠시만요." 죽엽청을 가져가며 생각해 보니 내가 그녀에게 갚아 줘야 하는 것은 많지만, 대리로 분풀이를 하는 것은 영 석연치 않았다. 덮쳐도 내가 덮치고, 유린을 해도 내가 해야 하는 거다. 짜증나는 것들 어디서 굴러 와서 감히 내 밥에 손을 대! 갑자기 울컥 오기가 치밀었다. 당당하게 저들에게 꺼지라고 선언하고 말리라! "저 손님 그녀는 접대부가 아니오라 그냥 점원입니다. 그, 그러니까……." 령령을 무릎 위에 앉힌 두목은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허벅지며 가슴을 조몰락조몰락 거리며 침을 질질 흘리느라 정신이 없었나 보다. 감, 감히 나도 못 건드린 걸 초면에 오자마자 날름 먹으려 하다니 저, 저런 나쁜 놈 같으니라고! 대답은 다른 데서 왔다. 바로 내 옆에 있는 놈이 내 볼때기를 우악스럽게 잡아 비트는 것이었다. "야. 이 점소이 새끼가…… 너 약 먹었냐? 우리 형님이 노는데 어딜 껴들어? 죽으려고. 잠자코 찌그러져 있어. 이 새끼야!" "아, 저, 저기 그게 아니고요. 그, 그러니까 내 말은요." "어디서 말대꾸야? 확! 좋게 말할 때 얼른 사라져. 엉?" 그 녀석은 날 가볍게 던져 버렸고, 비틀 비틀거리던 나는 뒤 의자에 부딪혀 한바탕 요란하게 꼬꾸라져 버리고 말았다. 더 주저할 것이 없이 주방으로 뛰어든 나는 포연강을 붙들었다. "포형, 포형. 큰 일 났습니다." "아니 동생 왜 그러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는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빠짐없이 설명해 주었다. 난 믿었다. 그가 도끼를 들고 뛰어나가 냄새나는 지저분한 네 장한의 머리통들을 수박 터뜨리듯이 갈라 버릴 거라고…….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대어를 잡으려고 친 덫인데 피라미들이 안 꼬일 수는 없는 일 아니겠나? 내가 아니어도 령령이 맘만 먹는다면 저 녀석들 정도는 한순간에 이승 하직이야. 그런데도 가만히 있는 것은 이 일대에 천라지망(天羅地網)처럼 깔려 있는 무림인들의 이목 때문이지. 차라리 자네 같은 보통 사람이 나서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지만, 우리 같은 무림인들은…… 이봐 어딜 가는 거야. 어이, 이봐 동생!" 말을 듣고 있자니 불현듯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색이 같은 황실 근위대 동료라는 것이 저렇게 싹수머리가 없다니! 그래 차라리, 차라리 내가 간다. 내가 가! 원래 난 성질나면 앞뒤 안 가리고 일부터 저지르고 본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 일이 터지고 나면 엄청나게 후회하곤 했다. 지금도 분명 무지막지하게 후회할 게 뻔할 뻔 자지만, 일은 저지르고 보는 거다. 너무, 너무나도 화가 치솟아 오르기에……. 현관 앞으로 가서 심호흡을 몇 차례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가를 반복하며 곁눈질을 했다. 령령은 예의 냉랭함으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몹시 자존심이 상했을 게 확실했다. 그런 여자니까. 그들을 향해서 돌아섰다. 그리고,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썩은 내나 풀풀 풍기는 놈들아! 나와서 소장강 물에 목욕(沐浴)이나 해라. 니들이 소장강 물에 목욕을 하면 일곱 낮, 일곱 밤 동안 물에서 꼬린 내가 피어오를 거다. 특히 깡패 두목! 니가 제일 악취(惡臭)가 나. 우웩, 우웩 엊그제 먹은 것까지 다 올라온다. 카하하하하." 처음에 그들은 내가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되었는지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두목이라는 작자가 령령을 내팽개치며, 미친 고릴라처럼 발작을 하자 그때야 뒤늦게 반응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서 탁자가 뒤집힌 순간에 나는 달리고 있었다. 내가 믿을 거라고는 튼튼한 두 다리뿐이었다. 무식하게 덩치만 큰 그들보다 빨리 달리는 것만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바람이었을까? 상대가 무림인이라는 것을 잊었던 나는 너무나도 빨리 후회를 하게 되었다. 부하 세 놈은 확실히 나보다 느렸다. 그러나, 두목은 아니었다. 그는 내가기공(內家氣功)을 익힌 고수였던 것이다. 내가 열심히 달리고 있는 사이 두목이란 작자는 땅을 박차고 그 육중한 몸체를 퉁겨 올려 바람처럼 날아서는 내 앞에 쿵하니 내려섰다. 난 먼 훗날이나 되어서야 그것이 진기(眞氣)의 힘으로 신형(身形)을 날려 날아가는 신법(身法)의 입문 격인 어기비행(御氣飛行)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쾌속(快速)함에 놀란 나는 황급히 방향을 바꿔 뛰었다가 뒤따라오던 부하 세 명이 막아서는 것을 보고서는 얼이 빠져 몸이 굳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회되었다. 그냥 령령이 희롱을 당하건 말건 상관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즐겨야 했다. 그랬으면, 적어도 내가 살아서 훗날 그녀에게 쌓인 원한(怨恨)을 풀었을 것 아닌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린 나는 본능적으로 땅에 철퍼덕 엎어져서 싹싹 빌었다. "잘, 잘못했습니다. 살, 살려만 주세요. 제, 제, 제발……." 두목이 주먹을 뿌드득뿌드득 풀어 주며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늦었다. 처음부터 잘못할 짓을 벌리지 말았어야지. 하고많은 인간들 중에 살인을 밥먹듯이 하는 우리 하남사흉(河南四凶)에게 시비를 걸다니. 아니 최소한 나한테는 시비를 걸지 말았어야지. 내 부하들은 내공(內功)이 미약해서 구타(毆打)를 해 봤자 병신이 되는 게 고작인데, 내 주먹에 걸리면 순식간에 피떡이지. 너, 죽어 줘야겠다." 퍼어억! 내공이 실린 가공할 위력의 주먹이 내 안면에 작살 하면서, 몸 전체가 통째로 한 바퀴 뒤집혀 날라 갔다. 엄청난 진동이 내 골을 관통하면서 이성적 사고(理性的 思考)라는 개념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의 부하들에게 양팔을 꽉 붙들려 올려지면서 붕 하고 공간(空間)을 가르는 소리가 내 전신에 작렬했다는 것이다. 아마 살지는 못할 것이다. 저 자의 힘으로 미뤄 보아 내 전신의 뼈란 뼈는 모두 산산이 부서지고, 힘줄이란 힘줄은 다 끊어지고, 피란 피는 다 쏟아져 푸줏간 고깃덩어리가 되어야 놓아주리라. 원망스럽다. 약자로 태어난 것이……. 다시 태어난다면 결단코 약자로 살지 않을 것이다. 강자들 위에 군림하고 말 테다. 그것이 어떤 형태라 해도 군림하고 말 것이다! 의식의 끈을 놓아 버리기 전, 나의 뇌리 속으로 뭔가 웅얼웅얼 거리는 소리가 들려 온 듯싶었다. '삼라만상 모든 힘은 하나로 귀일(歸壹)하니. 이것을 만류귀종(萬流歸終)이라 한다. 만류귀종(萬流歸終)의 힘을 가진 자, 강자들 위에 군림(君臨)하리라.' 감은 눈 사이 각막으로 환한 햇살이 붉게 느껴졌다. 바람이 내 머릿결을 흩날리며 스쳐지나 가는게 느껴지는 걸 보니 살아 있는 모양이다. 몸을 움직여 보려 했으나 힘이 하나도 없는지 움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용하군.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내가무공에 대해서 모르긴 몰라도 그 인간정도의 무림인이었으면 날 한 방에 즉사시키는 여반장이었을 텐데, 그렇다면 누가 날 도운건가? 포연강? 주령령? ......아니야, 그 인간들은 아니야. 그런 와중에도 무공을 쓰려하지 않았어. 그럼 홍 영감? 이 인간은 절대 아니야. 맨 날 잠만 자는 인간인데. 그럼 누가?......' 내 생각은 거기에서 정지했다. 따뜻하면서 부드럽기 그지없는 조그만 손이 안면을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서 넘겨주더니 내 안면을 더듬는 것이었다. 그만두라고 말을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다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으니까...... 그게 누구 손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살아 남았다는 것이 중요(重要)한 것이니까. 주령령(周鈴鈴), 포연강(鮑緣强) 에 이어서 내복수 명단에 추가될 녀석들이 떠올랐다. 하남사흉(下南四凶)! ...... 무공(武功)의 필요성(必要性)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강한 무공일 필요도 없다. 칼을 잡고 빠르게 휘두를 정도만 되면 된다. 어차피 내공은 쌓을 수가 없으니 외공이라도 조금 익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새 수마(睡魔)가 나를 휘감아 깊은 수렁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삼라만상 모든 힘은 하나로 귀일(歸壹) 하니. 이것을 만류귀종(萬流貴宗)이라 한다. 만류귀종(萬流貴宗)의 힘을가진 자, 강자들 위에 군림(君臨)하리라.' "아우, 누구야? 잠자는데 시끄럽게 떠드는 게......헉." 머릿속이 울려 퍼질 정도로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깨서 몸을 일으키자, 머리맡에 기대있던 뭔가가 흠칫하며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놀라서휙 돌아보자 달빛을 받아 서슬이 시퍼런 안광을 교교하게 빛내는 여인이 침대 옆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귀, 귀신!" "......" "나, 나, 나무아미타불 관, 관세음 보오오살 귀신아 썩 물러가라." 효과가 있었는지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다음부터 함부로 내 일에 나서지 마. 방해된다." 령령의 냉막한 목소리였다. 할 말을 마친 그녀는 내 대답같은 것은 상관없다는 듯 바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그럼 지금껏 내 옆에 기대앉아있었단 말인가? 머리를 돌리니 툭 하고 뭔가가 이마에서 떨어지길래 주워보니 잘 접혀진 물수건이었다. 머리맡에 물이 담긴 대야가 있는 것으로 보아 밤늦게까지 날 간호해주다가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냉막하기만 한 여인인줄 알았더니 이런 면도 있다니! 그렇다고 내 복수자 명단에서 빼줄거라 생각하면오산이야. 복수는 복수......흠." 다시 자리에 누워 눈을 감으려다 벌떡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었다. 너무 오랫동안 잠을 잤는지 정신이 말똥말똥한 탓도 있었지만, 내 머리맡에 앉아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얼굴을 매만져 줬을 령령의 섬섬옥수를 생각하자 더 누워 있기 힘들었던 것이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쿵쾅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이르긴 하지만, 밤바람에 머리를 식힐 겸 물이나 퍼 나르자.' 후원에서 물지게를 매고 와서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몇 걸음 걷다가 바닥에 물컹거리는 것을 밟고는 화들짝 놀라 펄쩍 뛰며 물러섰다. 뭔가 하여 안력을 돋우어 살펴보니 거적 떼기에 둘둘 말린 사람이 누워 있는 게 아닌가! "히엑, 시, 시체다. 누, 누가 이런 몹쓸 짓을......!" "끄응, 누가 죽었다고 난리 에요? 아이고 허리야. 형씨한테 밟혀서 잠 다 깼잖아요. 어서 사과나 해요." 놀랍게도 거적 떼기를 걷어내며 일어선 사람은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은 소년거지였다. 키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 보였으며, 자주 씻었는지 피부도 뽀오얀 요악스런 놈이었다. "미, 미안하기는 한데, 왜 이런데서 자는 거야? 바로 눈앞이 주루인데?" "내 꼬라지 안보여요? 나 같은 거지가 무슨 돈이 있어서 저런 주루에서 잠을 자요?" "그, 그런가? 잠 깨워서 미안하게 됐다. 난 이만, 볼 일이 있거든." 소년 거지하고 계속 얘기를 해봤자 손해만 볼 것 같아서 얼른 자리를 떴다. 그러나, 이 거지는 날 놔줄 생각이 없는 듯해 보였다. 내가 앞서거니 산자락 아래로 내려가자 쫄래쫄래 따라오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이봐 거지씨, 계속 잠이나 자지. 왜 따라오냐?" "이봐요, 형씨,형씨 이름이 형씨가 아니라 우작삼(愚作三)이듯, 내 이름도 거지씨가 아니라소방(蘇芳)이라구요. 그리고, 내가 내 발로 걸어가는데 뭐가 어때서 그래요?" 단번에 내 이름을 말하는 거 보니, 이 녀석 또한 예사 거지가 아닌 듯 싶다. 역시 이 일대에 널리고 널린 무림인(武林人) 가운데 한 명이리라. 그럼? "너 개방사람이구나." "와, 대단해요. 어떻게 알았어요?" 뭐가 그리 기쁜지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꼴이 영락없는 애였다. 간만에 사람 같은 사람을 만났다 싶어 슬그머니 웃음이 지어졌다. "어려울 게 뭐 있겠나, 발에 걸리고 넘어지는 게 모두 무림인 인데, 거지꼴을 한 무림인 이라면 당연히 개방이겠지. 안 그래?" "칫, 시시해. 그런데,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았는데도 괜찮아요? 형씨를 때리던 막패(幕覇)가 그래도 하남사흉(河南四凶)중에서 두목(頭目)인 사람으로 제법 고수급(高手級)에 속하는 작자라구요." 하남사흉(河南四凶)얘기가 나오자 전신에서 분노(憤怒)로 인한 열기가 치솟았다. 이갈아 먹어도...... 아니지, 그 놈들을 갈아먹기엔 너무 맛없을 놈들이다. 갈아 먹을려면 령령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남사흉 이 개 같은...... 아니야, 아니라고! 그건 개를 욕하는 일이지. 개만도 못한 그놈들은 갈아서 시궁창 개구리 밥으로던져 줘야해. 아니야, 그것도 아니야! 그것은 개구리들에게 너무 불쌍한 일이야.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종잡기가 어려웠다. "와, 작삼 형님 얼굴 색상이 이렇게 다채롭게 변하다니 붉그락 푸르락 붉그락 푸르락 끝내 준다!" 얼씨구, 눈치 없이 잘도 떠드네. 그나저나 그것을 안다는 것은 이 녀석이 나를 구한건가? 설마? ...... 그래도 물어는 봐야겠다. "어이 거지씨." "......" "이봐 거지씨, 내 말 안 들려?" "......" "......" "......" "소방." "네에! 작삼형님~." 하여간 애가 무슨 계집애처럼 까다롭게 구는지 모르겠다. "형님이라 부르지 마라 낯간지럽다. 그냥 작삼 이라고 불러라. 나도 널 그냥 소방이라 부를 테니." "알았어. 작삼이라고 부르지. 그래 뭐가 궁금해?" "......" 말까지 놓으라고 한 적 없는데, 너무 앞서가는 듯 싶다. 뭐라고 한마디할까 하려다 어린 애상대로 언성높이는 게 우습다 싶어 관뒀다. "니가 날 구한 것은 아닐 테고, 누가 날 구해준 거냐?" "아니, 왜 내가 구했으면 안돼? 이래뵈도 무림인 이라고! 말단 백의개 라고 무시하는 거야?" 어라 강하게 나오네. 그럼 얘가 날 구했단 말인가? "그, 그럼 소방 네가 날 구해준 거였어?" "아니, 물론 내가 있었어도 손쉽게 널 구해줬겠지만, 나보다 앞서 가던 사람이 있어서 양보했지. 아 왜 인상을 써? 양보의 미덕도 몰라?" 소방(蘇芳)은 정말 말많은 녀석이었다. 솔직히 익숙한 산길이라 해도 밤길은 무섭기 마련인데, 소방이 쫄래쫄래 따라오면서 수다 떠는 것만으로도 왠만한 잡귀는 얼씬도 못 할 것 같았다. 하여간 소방의 말을 대략 요약해서 추려보자면, 나를 구 한 것은 종남파의 검귀라 불리는 곽철대협 이라고 한다. 검 에 미쳐서 일평생 결혼도 안하고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니며 비검을 청한다는 사나이, 그와 같이 다니면 재밌을 것 같아 쫄래쫄래 뒤를 따라다니는 중이었다는 소방, 최근 풍악산 일대에 고수들이 운집해 있다는 것을 안 곽철대협은 비검을 청할 상대자를 찾아 산길을 오르고 있었고, 그뒤를 소방이 따르고 있었다고 한다. 예상컨대 이녀석의 귀찮음은 반 시진을 겪은 나로써도 끔찍한데, 며칠을 따라다니게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곽 대협의 복잡한 속마음은 이루 형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망아루 산중턱에서 그들이 본 것은 막패가 철퇴를 어떤 청년에게 무자비하게 날리고 있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묘한 것은 철퇴를 날리는 막패의 안면이 창백하게 질린 것이 무언가 공포스런 것을 본 듯한 처절한 모습이었고, 반면 실신한 것이 분명한 청년, 즉 나의 안색은 엷게 열이 올라 있었다는 것이었다. 곽철이 올라오자 막패는 싸울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채 비틀비틀 물러섰고,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산 너머로 사라졌다는 얘기였다. 아마 거의 죽었으리라 여겨졌던 나는비록 옷이 너덜너덜 걸레가 되어 있었지만, 몸의 외상(外傷)도 미미했고, 내상(內傷)은 더더욱 느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이 한 일이라곤 나를 업고 와서 망아루(忘我樓)에 건네준 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내 짐작으로는 망아루 사람이 아닌 다른 무림인이 몰래 도와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 또한 정체를 숨겨야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날 도와준걸 하찮게 여기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뭐 나로써야 고마운 일이다. 덕분에 이렇게 사람 냄새가 풀풀 나는 소년을 살아서 만나게 해주었으니 말이다. 현재 곽철 대협은 망아루 이층 숙소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앞으로 몰려올 피보라 속에서 검을 수련(修練)하기 위해서라 하니 참으로 싸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듯 싶다. 만약 그와 령령이 싸우게 된다면 재미 있을지도 모른다. 한 번 자리를 만들어봐? 물지게를 두 차례 나르고 나니 아침동이 터 오고 있었다. 살아서 맞이하는 새 아침이 이렇게 상쾌하고 기분 좋은 것인 줄 미쳐 몰랐다. 알았다면 한 숨이라도 더 자려고 비비적거리다가 늦잠을 자는 일은 없었을 텐데...... 가을이 깊어져 감인지 풍악산의 단풍은 붉게, 붉게 물들어 더 이상 붉을 수도 없었다. 바람이 불 때 마다 출렁이는 피의 바다, 적어도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작삼." "왜? 소방?" "우리 친구 할래?" 이 어린 녀석이 가면 갈수록 귀엽게 군다. 거지치고 이렇게 깨끗한 놈도 처음이다. 살결이 뽀오얀 것은 둘째 쳐도 너덜너덜하게 기운 옷이 실상은 빨래가 매우 잘 되어있을 뿐 아니라, 혁낭에는 여분 옷까지 있다. 진짜 거지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왜? 봤잖아. 힘도 없는 게객기만 있어서 하남사흉에게 터지는 거. 운이 좋아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몰라도 아마 조만 간에 죽을지도 몰라. 이런 힘없고 나약하면서 무모하기만 한 점소이를 친구(親舊)로 두고 싶으냐?" "그 무모함이 맘에 들었거든." "......" "내가 거지라서 싫어? 그런 거야?" 저 초롱초롱 해맑게 빛나는 눈망울, 앙증 맞기만한 자주빛 입술, 뽀오얀 뽈따구, 아이구 귀여운 녀석, 콱 깨물어 주고 싶어 죽겠네. "점소이와 거지라 잘 어울리는 찰떡궁합이군. 좋아 소방, 넌 내 친구다. 둘도 없는 친구." "정말? 와아, 나도 드디어 친구가 생겼다! 야아, 신난다!" 무지하게 신이 났는지 나한테 앵겨 붙는다. 기분이 나쁘진 않은데...... 않은데? 허걱, 설, 설마나, 미소년 취향? 미, 미치! 포연강 개자식한테서 옮았나 보다. 하여간 그런 변태 같은 인간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빨리 금원보 열 개나 내 손에 들어와야 그 인간과 영원히 작별할 텐데. "이야, 그림 좋은데, 니 취향이 그런 것인 줄 미쳐 몰랐구나." 이, 이 목소리는...... "읔, 포, 포형 오해 말아요. 얜 그냥 친구일 뿐이라 구요." "요새는 친구끼리 애무도 하나 보지?" 애, 애무는 무슨? 히엑, 얘는 내 등에 언제 올라탔어? 내, 내 귀는 왜 핥어? 소, 소름 돋게 휙! 퍽! 난데없이 싸리비가 날라 와 내 머리에 맞았다. 싸리비가 날라 온 방향으로 두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이야아!!!......호." "힘이 남아 도나본데 앞마당 낙옆이나 쓸어." "넵, 령령 아가씨. 맡겨만 주십시오." "흥!" 평상시의 냉막함은 이해를 하겠는데, 왜 오늘 따라 저리 냉기(冷氣)를 풀풀 풍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밤까지 무리해서 간호해주는 면이 있는 것을 알고 조금은 감동했는데, 왜 반나절이 채 가기도 전에 저렇게 사람이 바뀌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이, 소방(蘇芳) 무거워. 나 일해야 하니깐좀 그만 할짝거리고 내려와라." 기이한 일이다. 하남사흉(河南四凶)에게 된통 당한 이후로 오히려 몸이 가뿐해지고 안력이 더 좋아졌다고 느껴지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야밤에 물지게를 두 번 연이어 퍼 날랐는데도 힘이 철철 넘쳤다. 지금 몸 상태로만 유지가 된다면 매일 새벽마다 물지게를 연이어서 세 번씩 날라도 무리 없을 듯싶었다. '뭐 건강(健康)하다는 것은 좋은 거야. 괜히 복잡(複雜)하게 생각해 봤자 머리만 아프지.' 콧노래를 부르며 비를 들었다. 붉디붉은 낙엽들이 바람에 흩날려 이리로 흘렀다가 저리로 흐르는 것을 보자, 대세(大勢)에 휩쓸려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흥이 깨지며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귀찮게 찰싹 붙어 있던 소방은 느닷없이 귀를 쫑긋 세우더니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며 바람처럼 사라진지 오래다. 내 귀에는 아무것도 안 들렸는데, 역시 무림인이라는 것인가? 말단 백의개인지 뭔지 하는 소방 녀석도 나보다 강해 보이는데, 하물며 그보다 고수라는 인간들에게 에워 쌓인 듯한 지금의 형국이 몹시 맘에 안 들었다. 여차하면 이 단풍잎들이 바람에 휘말려 정처 없이 흩날리듯 나 또한 그 꼴이 날 것이 아닌가! 언제나 이 한심한 현실(現實)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풍악산(風岳山)을 벗어나 서안(西安)방향으로 쭉 가서 광동(廣東)에서 배를 타고 최남단 섬인 해남도(海南島)로 건너가 버리면 무림인 녀석들을 안보고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까? "좋은 아침이군. 역시 아침 산 공기는 상쾌하기 이를 데 없지." "그렇지요. 어, 어라? 홍 영감님 웬 일로 계산대에 안 계시고 여기까지 걸어 나오셨어요?" 그가 이렇게 아침 일찍 말짱한 모습으로 주루 앞마당까지 걸어 나오다니! 언제나 계산대 위에서 꾸뻑꾸뻑 거리 기만하고 잘해야 한두 마디 내뱉고 다시 졸던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나도 가끔은 말짱할 때가 있지. 자네 비질이 서툴구먼. 그렇게 두서없이 쓸어버리면 낙엽이 모이기는커녕 산바람을 탄 먼지만 주루 안으로 흩날릴 것 아니겠나?" "그, 그런가요? 끄응." "여긴 산 중턱이라 산바람이 항시 불어오지. 이런 곳에서 비질을 제대로 하려면 산바람을 제압하면서 쓸어야 하네. 비를 이리 줘 보게. 내가 시범을 보여줌세." "네?" 산바람을 제압하면서 쓸어야 한다는 말에 어리둥절해졌지만, 시범을 보인다 하여 싸리비를 건네 드렸다. 홍 영감은 비를 들더니 작은 원을 쾌속하게 그려냈는데, 먼지와 낙엽이 원안에 갇혀서 비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원이 만들어 낸 공간으로는 산바람마저 침입하지 못하고 퉁겨 버리는 게 느껴졌다. 작은 원은 점점 커져 반경이 내 허리에 이르는 거대한 원이 되었다. 비를 따라 원안에 들어간 먼지와 낙엽들은 다신 나오지 못하고 원안의 공간에 갇혀 버리게 된 것이다. '역, 역시 이 영감도 한 수가 있었어. 대, 대단한데.' 홍 영감은 그 원을 비로 계속 유지시키다가 번쩍 들어올려 마당 끝 골짜기로 던져 버렸다. 싸리비의 엄청난 회전력으로 유지되던 원의 공간은 그 힘이 없어지자 통제력을 잃어 풍선 터지 듯 확 터졌고, 품고 있던 낙엽과 먼지들을 사방팔방으로 쏟아 내었다. "보았나?" "……." "산바람을 제압하려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야 하네. 비단 산바람만이 아니라 상대가 무엇이건 마찬가지라네. 만약 상대가 무림인이라고 치세. 그 역시도 자넬 이기기 위해서는 그만의 공간이 필요하지. 즉 자네가 그 무림인을 이기려면 상대의 공간을 무너뜨리고 자네 것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지." "……." "지금이야 좀 어려운 말로 들리겠지만, 언젠가는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거라네." "……." 이 영감이 갑자기 비를 쓰는 법을 알려준다더니 이젠 무림인 상대로 이기는 법이라는 장황한 설명으로 끝을 맺었다. 언뜻 들으면 무슨 무공 구결 같기도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기본 바탕이 무림인(武林人)들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엊그제 우리 령령이 자네 신세를 졌다고 하더군. 고맙네. 그 아이가 좀 차가워 보이긴 해도 가슴속은 따뜻하지. 알고 보면 매우 가련한 애라네." 알지. 그녀가 얼마나 뜨겁디뜨겁게 미쳤는지 내 잘 알지. 그 가련한 년한테 허구 헌 날 터지고 사는 나는 불쌍하지도 않나? 이 빌어먹을 영감쟁이야! "이만 들어가시지요. 영감님 가을 산바람이 꽤 쌀쌀하다고요." "글쎄, 설사 매서운 겨울바람이라 해도 인간의 이기심만큼 차갑진 않다네. 수고하게." "……." 오늘따라 홍 영감이 꽤 길게도 입을 열었다. 적어도 주령령이나 포연강보다 사려 깊고 보다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 같다. 골라서 하는 말마다 분위기가 잘 잡히는 것을 보니 젊었을 적에 얼마나 많은 여인들을 꼬였을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흠, 하여간 영감도 젊었던 시절에 엄청나게 밝히는 사람이었을 거야. 뻔하지 뭐.' 영감이 하던 데로 빗자루 돌리기를 반 시진 동안 매달려 본 결과, 공간(空間)을 만들기는커녕 산바람에 날린 먼지만 한가득 뒤집어쓰고 말았다. 홍 영감이 펼치던 것이 검풍(劍風)이라 하여 검으로 면을 펼치는 방식이라는 걸 무공 문외한인 내가 알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알았다고 해도 펼치지 못했을 것은 명약관화한 것이었을 거다. 반 시진의 사투(死鬪) 끝에 앞마당에 널려 있던 단풍들을 그럭저럭 정리한 후 주루 안으로 들어오다가 아침 식사를 하려는 듯 자리를 잡은 흑의 죽립인을 보게 되었다. 하마터면 주루 안에서도 제일 후미진 자리인 계단 옆 안쪽 자리를 차지한지라 어둠 속에 파묻혀 못 알아차릴 뻔하였는데, 그가 누군지 물어 보지 않아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즉시 달려가 엎드리며 큰절을 하였다. "곽철 대협, 지난번에 악적들 손에서 소인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감사였다. 그 누가 풍악산 구석에서 죽어 가는 이름 없는 점소이를 애써 구하려 들었겠는가! "신경 쓸 것 없소. 내가 한 일은 그냥 그 앞을 지나가는 일뿐이었는데 막패는 이미 막패가 아니었소. 내가 도운 일은 미미하니 인사 받은 정도로 피차간에 빚은 없는 걸로 합시다." 짙게 깔리는 목소리와 함께 꿇어 엎드려 있던 내 몸은 그에 의해 강제로 일으켜 세워졌다. 부르르르 떨렸다. 협객(俠客)! 진정한 협객이라는 것은 이런 사람임에 분명했다. 힘이 있어 약자를 돕는데 아끼지 않고, 힘으로 인해 군림하려 하지 않으며, 힘이 있음을 자랑하지 않는 자! '정말 멋있는 사람이군. 무림인이라는 자들의 반의반만 이런 사람들이어도 내 무림인들을 그렇게 싫어하진 않을 텐데.' "실상은 내가 당신에게 빚을 진 셈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날다람쥐처럼 달라붙던 아이가 당신한테로 옮겨 붙어 매우 홀가분해졌다오. 난 원래 등뒤에 인적을 허용치 않았는데, 그 녀석은 칼로 해결 보기에 어려서 난감했었거든. 그러니 내가 오히려 형장한테 고맙다고 해야 할 판이지. 출출하니 소면 한 그릇 부탁하오." "예! 대협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주방으로 달려간 나는 포연강에게 특제 소면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여, 그에게 가져다주었고, 맛있게 식사하는 그를 보며 흐뭇해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맘에 드는 협객이 검에 미쳐 사는 검귀(劍鬼)라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해가 중천을 지나 오시가 좀 지났을 무렵 재미있는 일이 생긴 것 같다며 사라졌던, 소방이 피곤한 기색으로 걸어와서 주루 난간에 턱 하니 기대어 앉았다. "작삼아, 나 배고파." "야, 너 거지 맞아? 거지면 거지답게 구걸을 해야 할 거 아냐? 순 날강도 같으니라고." 내가 투정을 부리려 하자, 초롱초롱 해맑은 눈빛으로 살인 광선을 인정사정없이 날렸다. 어린것이 여간 영악한 게 아니라며 푸념을 하면서 몰래 내 몫으로 빼놓아 손수건에 싸 놓았던 왕만두 두개를 건네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나 역시 애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었으니까. 목이 마를 것 같아서 그릇에 물까지 떠다 주었더니 허겁지겁 잘도 먹고는 꺼억 트림까지 해대는 것이었다. 하여간 세상에 무서운 게 없는 듯한 천진난만 그 자체라 하겠다. "그래, 재미있는 일이란 게 뭐 길래 날다람쥐 마냥 사라졌다가 한참 후에나 온 거야?" "응, 싸우는 소리가 풍악산 구룡봉 허리 즈음에서 들리기에 누구랑 누가 싸우나 가본 거였지. 막상 가보니 상황은 이미 끝나 버렸고, 승자(勝者)도 패자(敗者)도 볼 수가 없었어." "무슨 소리야? 좀 알기 쉽게 말해 봐." 무슨 중들이 선문답(先問答)하듯 애매모호함을 품고 말을 하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강압적으로 물어 보자 한숨을 쉬면서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승자인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떠나 찾을 수 없었고, 패자인 사람들은 전원 사망(死亡)해서 생존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어. 시신들을 보니 칼들을 뽑지도 못한 채 일 도에 즉사를 한 상태였어. 따라서 그들을 죽인 자들은 엄청난 쾌도(快刀)의 달인이 포함된 일인 이상의 무리임이 분명해." "……." 욕지기가 나올 것 같았다. 아무리 남이라도 같은 산자락 아래 시체가 누워 있고, 그들을 살해했을 흉수(凶手)가 버젓이 돌아다닌다는 것은 맘 편히 들어줄 만한 얘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소방이 선문답 같은 방식으로 돌려서 말하려고 했나 보다. 역시 무림인인가? 그런 얘기를 하면서 낯빛 하나 안 변하는 거 보면, 여기 오기 이전에 이미 수많은 시신을 봤음이리라. [7]천금대인(千金大人) "소방, 그들이 넓고 넓은 중원 대륙을 놔두고 하필이면 이 산중까지 몰려와서 싸우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너도 명색이 무림인이니 모르진 않지?" "작삼은 점소이 맞아? 그 부근 소식에는 우리 개방보다 주변 주루 점소이들이 빠삭하게 알고 있게 마련인데, 작삼은 아는 게 너무 없는 것 같아." 소방이 내 질문에는 답해 주지 않고 놀리기부터 하자, 울화통이 치밀어 가슴을 탕탕 치며 일어섰다. "야, 그건 장사가 잘 되어서 손님들 왕래(往來)가 잦은 번화가 주루나 그렇지. 여기처럼 손님이 없는 산중 주루에서는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도리가 없다니깐. 내가 여기서 한 달 남짓 일을 했지만, 첫 손님이라는 것들이 나를 패다가 도망가 버린 악취사흉(惡臭四凶)이고, 두 번째 손님이 곽철 대협이었어." 어느새 하남사흉(河南四凶)은 악취사흉(惡臭四凶)으로 명칭이 바뀌어 버렸다. 내가 지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그보다 적절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순간 소방의 눈이 흡사 싱싱한 생선을 발견한 듯한 고양이 눈처럼 매서워지면서 반짝거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 한참 사춘기일 소년이 가지기엔 날카롭기 그지없는 안광이었다. 마치 또 다른 령령의 분신을 보는 듯하다고나 할까? 내가 그를 의미심장하게 뱁새 눈깔을 하고 바라보자 정신이 들었는지 실실 웃으며 말을 돌리는 것이었다. "아, 그러니까 왜 무림인들이 풍악산 주변에 몰려드는지, 서로 칼부림을 하는지 궁금하다 이거지?" "수상한걸, 이렇게 회피를 하는 걸 보니 뭔가 찔리는 게 있는가 보지? 뭘까? 응? 뭘까?" "나같이 오갈 곳 없는 귀여운 거지가 찔릴게 뭐가 있다고 회피를 하겠어?" "평범한 거지가 아니니까 찔릴 테지. 괜히 개방이겠냐고." "……." 오호, 그냥 한 번 찔러 봤는데, 역시 뭔가 있는 게 틀림없다. 무림인이라는 족속들이 목적 없이 움직일 리가 없다. 협객이라 불릴 만한 곽철 대협도 비무라는 목적으로 망아루까지 올라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일견하기에도 영악하기 그지없는 소방이 아무런 목적 없이 따라왔을 리가 없는 것이다. "무림인들이 몰려와서 치고 받는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그야 궁금하지." "그럼, 뱁새 눈깔 치우고 알아 모셔야 할 거 아냐. 자꾸 몰아세우면 말 안 하는 수 있어." "……." 크크크 고것 앙칼지게도 나오네. 그래 봤자 내 눈에는 새끼 고양이가 뽀송뽀송한 솜털을 세우고 댕그랑 눈을 치켜뜨며 양양거리는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하여간 화내는 것도 이렇게 귀여울 줄이야. 아이고, 그래, 내가 져 준다. 져 줘. 이겨서 내가 얻을게 뭐가 있겠냐? "흠흠, 소방 알았어. 알아모실 테니까 어서 불어 봐.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궁금해 죽겠어."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앞서 긴장감을 높이려는지 헛기침을 두어 번하며 목을 가다듬은 소방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그것은 말이지……." 무슨 말이 나올까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밥 달라고 조르는 강아지처럼 집중하려는 찰라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도란도란 떠들며 오는 인기척이 들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궁금한 것을 참기는 어려웠지만, 점소이의 본분을 망각(忘刻)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앞마당을 가로지르며 오는 네 명의 청년들이 보였다. 그들 모두 다 선남선녀(仙男仙女)라는 말로는 무색할 정도로 수려한 외모를 겸비하고 있었다. 선두에 서 있는 백의 청년의 미색은 남자라고는 믿어지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웃음을 머금을 때 살포시 올라가는 살인 미소에 그 어떤 미녀라도 넘어가지 않고는 베길 수 없으리라! 한 손에 들고 부치는 하얀 선섭을 따라 휘날리는 몇 가닥의 앞 머리카락들이 그의 운치를 한 층 더해 주는 듯싶었다. 그리고, 그 곁에 조금 간격을 두고 따라오는 여인은 무림인답지 않게 치마폭과 소매가 하늘거리는 자줏빛 궁장의를 입고서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느라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녀의 시선이 망아루 현관을 향하는 순간 나와 눈을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만 화들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섰다. 외모만 따지면 고귀한 기품이 흐르는 현숙한 미녀였으나, 해맑은 두 눈동자에 담긴 깊이는 범인인 내가 봐도 가늠할 수가 없어 보였다.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망망대해에 빠져 심해로 내려앉는 기이하고도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그 덕에 같이 온 홍의 경장 여인과 남의 청년은 스치듯 잠깐 밖에 볼 수 없었다. 얼른 정신을 추슬러서 주루 창문 측의 전망 좋은 자리로 안내를 하였다. "저희 망아루에는 요리로 간단히 소면과 만두 오리 구이가 있으며 술로는 백건아(白乾兒)와 죽엽청(竹葉靑)이 있습니다. 무엇으로 주문하시겠습니까?" 귀여운 한 떨기 물망초와도 같은 홍의 경장 여인이 경박스럽게도 투덜거리며 주문을 했다. "에이, 역시 외진 곳에 자리한 주루라 먹을 게 시원찮네. 제갈 언니는 어차피 간단히 소면만 먹을 게 뻔하고 나머진 합쳐서 만두 한 접시와 오리 구이 한 마리 갖다 줘. 배고프니까 빨리 만들라고 해. 알았어? 점소이?" 손님은 왕이라는 점소이 기본 신념(信念)이 없었다면 썩 꺼지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소갈머리 없는 여인이었다. 응? 좀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식탁 사이를 지나쳐 주방으로 가다가 마침 계단으로 내려오는 령령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인피면구를 쓰고 내려왔는데, 새로 온 손님들을 보고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멈춰서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슬쩍 옆을 돌아다보았는데, 전신이 사시나무 떨리듯 바르르르 떠는 것이 아닌가! 얼굴을 올려다봤더니 부릅떠진 커다란 눈동자의 잔 떨림이 미세하게 한 방향에 고정되어 있었다. 혹시나 하고 그 시선의 끝을 봤더니 아닌 게, 아니라 역시 백의 미공자를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시 령령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니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령령의 투명한 눈망울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발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움, 안타까움, 반가움 그리고, 사랑……. 아마 그녀가 인피면구를 벗어 던지면, 백의 미공자 또한 같은 반응을 보이리라. 둘은 연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싸늘하기 그지없는 얼음장같던 여인이 한 순간에 청초한 향기를 머금은 열정적인 장미로 화해 버릴 만큼 뜨거운……. 그녀는 사정이 있는지 인피면구를 벗는 대신 발걸음을 되돌려 이층으로 콩콩콩 뛰어가 버렸다. 발걸음조차도 몹시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그제야 주문을 받았다는 것을 떠올리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포형, 손님 주문입니다. 소면 한 그릇, 만두 한 접시, 오리 구이 한 마리입니다. 배고프니까 서둘러 만들어 달라고 하는군요." "알겠네. 후딱 만들어 줌세. 내 이래봬도 장안에 있을 때…… 에잉? 자네 우나?" 포연강의 말에 재빨리 눈을 훔쳤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턱을 타고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에헤헤헤,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봐요. 갑, 갑자기 바람이 강하게 불어 와서요. 어라 손님이 또 오나 보네요. 어서 만들어 줘요. 포 형님, 주문 밀리겠어요." "……."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포연강을 뒤로 한 채 현관으로 뛰었다. 혹시나 소방이 있나 둘러봤지만, 어디에 무슨 이유로 짱 박혔는지, 또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고 좋아하며 사라졌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정확히는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내 일만으로도 벅찼기에……. '내가 왜 그렇게 그녀를 미워했는지 왜 그렇게 신경을 썼는지 이제는 알겠다. 후후후훗 이런 게 짝사랑이란 것인가? 심했어, 정말 너무 심했지. 별 볼일 없는 일개 점소이가 손에 닿기는커녕 보이지도 않는 여인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니!' 문설주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뭉게구름이 자욱하게 피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는데, 자세히 보니 주령령의 매혹적인 모습이 그 위에 겹쳐지는 것이 아닌가? 놀라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역시 허상이었다. 차라리 그녀를 짝사랑하고 있음을 몰랐던 때가 좋았다. 차라리 미워하고 증오하는 양 착각하고 있는 때가 좋았다. 적어도 그때는 가슴을 도려내듯 아프지는 않았을 테니……. 지독한 질투 때문에 눈이 멀 지경이지만, 잘 아는 사실이 하나 있다. 어느 방면으로 보나 나는 백의 미공자를 넘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그의 먼발치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위치에 멈춰 섰지만, 그의 미래는 더욱더 높은 곳에 있을 것이다. 좁혀지기는커녕 멀어지기만 할 게 자명한 일이다.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말달리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속절없는 깨달음의 덫에 걸려 스스로를 자책(自責)하던 허무에서 깨어나 소룡봉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쪽 산길을 돌아보았다. 네 마리의 잘 빠진 흑마(黑馬)가 끄는 사두마차, 먼지를 요란하게 일으키며 뭐가 바쁘다고 폭주를 하는 모습이 어디선가 본 듯했다.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서 소개장 하나 달랑 들고, 서안으로 며칠에 걸러 오던 차, 내 옆에 먼지를 끼얹으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던 그 사두마차가 망아루 앞마당으로 온 것이다. 마부 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검은 피풍의를 걸친 여인이었다. 말을 세우기 위해 채찍질을 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 신체의 일부를 다루는 듯 했다. 아무래도 채찍이 독문 절기인 무림인인 듯했다. 마차가 망아루 앞에 정확히 서자 피풍의 여인은 주저 없이 가볍게 뛰어내리더니 마차 문을 개방했고, 매우 신속하게 그 앞에 엎드리는 게 아닌가! 설마 했지만, 온몸을 비단과 진주로 호화롭게 장식한 배불뚝이 중년 남성이 그녀의 등을 밟으며 땅에 발을 딛는 것을 보고서야 그 자신의 몸을 계단 대신으로 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만이 내린 것이 아니라 마차 안에는 자그마치 네 명의 미녀들이 더 타고 있었고, 역시 중년 남성과 마찬가지로 인간 계단을 밟고 땅에 내려섰다. 다섯 명이 다 내리자마자 피풍의 여인은 기계처럼 재빨리 마부 석에 올라타서 마차를 마당 구석으로 돌려세우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돈을 가진 자의 힘인가? "험, 험!" 손가락이라는 손가락에는 전부 옥가락지를 끼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비단으로 덮었으며, 거대한 진주알을 엮어 만든 진주 목걸이를 목과 팔목에 찬 배불뚝이 중년 남성이 바로 내 앞에 와서 얼이 빠져 있는 나를 위해 인기척을 내주었다. 조금은 민망스러웠지만, 재빨리 허리를 굽실굽실 거리며 안내(安內)했다 "아, 예 어서 오십시오. 저를 따라서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요." 어차피 주루 안이 거기서 거기지만, 가장 좋은 자리라고 볼 수 있는 창 측에는 이미 먼저 온 일행이 있어 그 다음 상석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 맨 끝자리로 그들을 안내했고, 주문 가능한 요리와 술을 말해 주었다. 그는 요리 가짓수가 얼마 안 되는 것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 체념한 듯 주문을 했다. "얼큰한 연자탕이 먹고 싶었는데, 하는 수 없구먼, 그럼 소면 네 그릇, 만두 세 접시, 오리 구이 세 마리에 죽엽청 세 병을 가져다주게." "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주방으로 가서 포연강에게 배불뚝이 일행이 시킨 목록을 알려주었고, 이전에 주문되었던 요리들을 들고, 자기네들끼리 뭐가 좋은지 웃고 떠드는 백의 미공자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한참 백의 미공자의 미색에 단단히 빠진 듯한 홍의 경장 여인이 요리를 가져온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남자, 낯이 익은데 어디서 봤더라. 야, 점소이 너 나 본 적 없어?" 말하는 소갈머리 봐라, 부모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오냐오냐하며 함부로 키웠기에 나이도 얼마 안 돼 보이는 게 버르장머리 없이 함부로 혀를 굴리는 걸까? 내가 네 오빠였음 진작에 패대기쳤을 거다. "소인 같은 범인이 어떻게 소저의 존안을 뵈었겠습니까? 기억이 없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상대하기도 귀찮아서 잠자코 물러나려고 했는데, 내 다리를 우뚝 멈춰 서게 한 것은 다른 아닌 백의 미공자의 비수 같은 한마디였다. "가희야, 우리가 사천당문에서 막 떠나 이틀을 지나서 허허벌판을 통과할 때 본 비렁뱅이 기억나지 않느냐?" 그제야 홍의 경장 여인이 박장대소를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하! 생각났다. 그 멍청한 비렁뱅이 거지가 여기까지 와서 점소이가 되다니 와! 출세했네. 야, 거지 오랜만이다. 아는 척 좀 하며 살자." 나도 생각났다. 집에서 나오다가 만난 엿 같은 첫 무림인과의 대면, 그게 바로 너였구나. 그리고, 은자 세 냥을 던져 주면서 꺼지라던 백의 선섭 청년이 저 쉐리였구나. "야! 어디 점소이 새끼가 함부로 말을 씹어? 거지에서 점소이로 출세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냐? 그때 남궁 오라버니가 준 은자 세 냥으로 여기까지 기어온 모양인데 감사하는 마음도 없냐?" 백의 미공자, 단순히 서로 안면이 없는 질투의 대상 인줄 알았더니 이토록 지독한 악연으로 얽힌 녀석이었다니! 난 즉시 지난달 급료로 받은 은자 두 냥에 비상금 한 냥을 합쳐 세 냥을 미공자 앞에 탁 소리나게 내려놓으면서 눈을 부라리며 그의 안전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난 비렁뱅이가 아니오. 이제나저제나 당신들을 만날까 하고 은자 세 냥을 고이고이 모시고 있었소. 다행히 이제라도 보았으니 돌려 드리겠소." 미공자의 안면에 미세하게 파란 힘줄이 돋아난 듯했다. "거기서! 이 돈은 내가 어떤 비렁뱅이한테 준 것이다. 좋은 말로 할 때 다시 와서 가져가라."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걸 알아야 한다. 남의 자존심을 짓뭉갤 때는 언젠가 자신의 자존심 또한 짓뭉개 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싫소. 난 보관만 하고 있었을 뿐, 엄연히 당신 돈이오. 무공도 모르는 보통 사람이 당신들이 펼치는 경공을 쫓아가서 돌려줄 수 있었을 리가 없었지 않소?" "굳이 약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받으려 하다니 겁을 상실한 거냐?" "매를 잘 버는 형이라는 말 자주 듣소." 끝으로 말을 끊고 돌아섰다. 더 대화를 나눌 용의가 없다는 단호한 나의 의지였지만, 더불어 령령의 애인에 대해 동급의 위치에 서 있고 싶은 오기이기도 했다. 그녀의 마음이 백의 미공자만을 보고 있다는 것은 안다. 그렇기에 적어도 그에게만은 머리를 조아리는 짓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내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해도 말이다. 만약 그의 검 날에 목이 베인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다. 무림인들은 명예라는 걸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다고 한다. 오죽하면 위급한 상황에서도 합공하는 걸 꺼려서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말까지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니 사실 유무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내가 그의 칼에 목숨을 잃음으로써 백의 미공자에게 무공의 무(武)자도 모르는 촌무지렁이를 등뒤에서 공격해 죽였다는 불명예가 일평생 따라다닌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가 되는 것이다. 질투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하찮게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어리석은 자! 내 너의 팔 하나와 다리 하나를 잘라 내 명예를 우롱하려 한 너를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마. 한 팔과 한 다리가 없어도 구걸하며 먹고사는 데는 아무 불편이 없을 것이다. 일평생 구걸 밖에는 할 수 없게 되는 거다!" '자, 잠깐 그게 아니라 내 목을 잘라야지. 어, 어이 그게 아니라고!' 적이 당황한 나는 그게 아니었다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밀어닥친 엄청난 압박에 몸이 굳어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아직 칼을 맞지도 않았는데 전신이 칼로 도려내는 듯한 두려움에 떨리고 있는 것은? 이게 말로만 듣던 절정의 고수들이 내뿜는다는 살기(殺氣)인가보다. 백의 미공자의 무공 성취는 악취사흉(惡臭四凶)에 비할 바가 아닌 진짜였던 것이다. '젠장,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저런 것한테 덤벼들었지? 끄으응 미, 미쳐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다고! 야, 야 칼, 칼 내려 칼 내려 이 붕신아!' 일평생 구걸하는 거지로 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차라리 돈이 없어 종종 굶는 것은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서 연명(聯命)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것이다. 이마에 땀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 중 하나가 덩치가 커졌는지 콧등을 타고 활강을 해서 뺨에서 휙 회전을 하더니 급기야 급경사가 진 턱까지 가속도를 더하면서 모든 힘을 모아 톡 뛰어내렸다. 대기 중에서 회전을 수십 바퀴 멋지게 성공하고는 일직선을 그리며 바닥 위로…… 똑! 그 순간에 나를 압박하던 살기가 감쪽같이 확 걷혀 버렸고, 기력이 다한 나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이고, 살았네 그려. 생각 잘했다 이놈아, 너 같은 고수가 나 같은 촌무지렁이한테 칼질을 해봐야 다른 무림인들한테 손가락질밖에 더 받겠냐?' 그러나, 내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백의 미공자는 정말로 날 베려고 했던 것이다. 단지 중간에 다른 힘에 막혀 하려던 바를 방해받았을 뿐이었다. "귀하는 이 비렁뱅이와 무슨 연관이 있기에 방해를 하는 거요?" 백의 미공자의 목소리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무슨 소리인가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어느새 이층 숙소에서 내려온 곽철 대협이 죽립을 눌러쓰고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문득 언제 봐도 그의 분위기와 흑의 무복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떠올라 씩 웃어 버렸다. "내가 그 친구한테 빚이 좀 있소.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어 가는구려." "무슨 소리요?"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제왕검법(帝王劍法)은 그 기세가 자못 강맹하기 그지없다는 말을 종종 들었기에 몸소 견식 해보고자 했으나, 내 사문의 장문인께서 남궁세가 가주님과 연분이 있는 관계로 껄끄러운 부분이 없잖아 있어 꾹 참았다오. 그런데, 이 친구한테 빚이 좀 있어 그를 해하려 하는 당신과 싸울 명분이 충분해졌으니 기쁜 일이 아니겠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빚을 갚기는커녕 오히려 늘려 버리게 되는 것이니 공교롭다는 거요." 곽철 대협의 말은 무공을 모르는 내가 들어도 명백하게 상대를 도발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백의 미공자의 곱디곱던 안면은 이마에 진 내 천자 인상으로 인해 주름이 잡히었고, 하얀 피부 밑으로 돋아난 푸른 혈선들도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남궁세가의 제왕검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고 했소? 여기는 비무 장소로 좋지 않으니 밖으로 나가서 겨뤄 봅시다. 똑똑히 보여 드릴 테니 말이오."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 남궁세가의 제왕검법이 들리는 소문만큼 강맹한 것이기를 기대하겠소."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화감이 감돌아 불꽃 앞의 화약고와 같은 기이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백의 미공자와 다툰 것은 나인데 정작 싸우게 된 것은 곽철 대협인 것이다. 그러나, 해결사는 정작 다른 곳에서 튀어나왔다. 잠자코 침묵을 지키며 상황을 방관하던 자줏빛 궁장의 여인이 일어서며 곽철 대협에게 포권하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오랜만입니다. 곽철 대협, 종남산의 유 사부님께서는 안녕하신지요?" "흠, 제갈 소저였군요. 산에서 내려온지 두 해가 다 되어 가오. 안녕하신지는 오히려 내가 묻고 싶소만……." 곽철 대협의 대답을 듣고서야 왜 궁장의 여인이 느닷없이 인사를 청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곽철 대협에게 포권지례(捕拳之禮)를 취하면서 간접적으로 백의 미공자에게 상대방의 정체를 일러주고 있는 것이었다. 나야 곽철 대협이 종남파(終南派)의 제자로 검에 미쳐 사는 검귀(劍鬼)라는 말을 소방에게 이미 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가 중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은 듯싶었다. 끝까지 꿀 먹은 벙어리가 아닐까 의심까지 할 뻔했던 남의 청년이 바로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점창파(點蒼派)의 모용천풍 이라고 합니다. 대협의 위명은 잘 들었습니다. 언제 한 번 검을 나눠 보고 싶습니다." 주저주저하던 자칭 사천당문(四川唐門)의 금지옥엽 당가희도 인사를 해 왔다. "사천당문의 당가희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백의 미공자는 매우 당황한 듯싶었다. 조금 전까지 서로를 죽이기 위해 칼을 들려고까지 했었는데 분위기가 요상하게 틀어져 버린 탓도 있지만, 검귀(劍鬼)라는 칭호가 아무렇게나 붙은 것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해결사 제갈혜 소저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곽철 대협, 대협께서는 비무 상대가 최상의 상태일 때만 검을 드신다고 들었습니다. 맞는지요?" "그렇소. 그렇지 않으면 비무의 의미가 없으니까." "지금의 남궁현 대협은 상황의 급변으로 심적 타격을 받았으므로 그의 제왕검법은 십분 발휘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훗날 안정을 되찾았을 때 정식 비무 장소와 참관인을 정한 후 만나심이 나으리라 봅니다." "좋소. 소저 말에 따르겠소. 난 당분간 이곳에 거할 테니 서신은 알아서 보내시오." "감사합니다. 곽철 대협." 남궁현은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받았는지 인사도 없이 주루 바깥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비렁뱅이! 오늘 무사히 넘어갔다고 안심하지 마라. 언제고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속으로 뜨끔거리는 바가 없지 않아 있었으나, 옆에 곽철 대협이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에 안심(安心)이 되어 한 마디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또한 여의치 못했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이 대답(對答)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의외의 사람이……. "공자, 공자의 말은 틀렸소. 그는 비렁뱅이가 아니오." 그 난리가 났어도 잘만 졸던 홍 영감이 느닷없이 눈을 뜨며 막 나가려던 남궁현에게 제동을 거는 것이었다. 그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저 녀석이 비렁뱅이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냐!" "그는 우리 망아루의 점소이요." "하하하하핫! 비렁뱅이나 점소이나 뭐가 다르단 말이냐? 똑같이 밑바닥을 기어 다니는 하류 잡배가 아닌가! 점소이로 백년 만년을 기어 봐라. 어차피 내 발끝도 쫓아올 수 없을 테니!" "글쎄, 늦어도 십 년 안에 남궁 공자의 말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홍 영감이 속으로 뭔가 웅얼웅얼 거리며 대꾸를 한 것 같기는 한데, 너무나 미약해서 남궁현 녀석을 비롯해서 그 누구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내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영감을 돌아봤을 때는 이미 코까지 골며 졸고 있어서 말도 걸어 볼 수가 없었다. 남궁현은 곽철 대협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망설이지 않고 나가 버렸고, 그 뒤를 당가희가 바로 쫓아 나갔으나, 모용천풍은 곽철 대협을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있었는지 가볍게 인사를 남겼다. "사정이 안 좋아 헤어지게 되나, 다음에 꼭 한 수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모용 대협, 전 일이 있어 이곳에 며칠 있어야겠어요. 닷새 후에 구룡봉(九龍峰)에서 보자고 전해 주세요." 제갈 소저가 무슨 의도로 남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모용 대협은 의문을 남기지 않고 알았다며 나가 버렸다. 남궁현 녀석이 불같이 성급한 성격이라고 하면, 모용천풍은 물과 같이 침착한 성격인 듯싶다. 내 느낌이지만, 곽철 대협이 없었다면 아마 저 녀석이 남궁현 녀석을 말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대신 내 자존심을 바닥으로 추락시켜 남궁현의 명예를 살려줬을 것이다. 아마 자살(自殺)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하게 당했을지도 모른다. 이래서 무림인들이 싫다는 내 생각에 변화(變化)란 있을 수가 없는 거다. 유유상종(類類想從)이라는 말이 있듯, 나 같은 범인과 저 같은 무림인들 사이의 이질감은 결코 사그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곽철(郭鐵) 대협 또 신세를 지고 마는군요. 정말 이 은혜(恩惠)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너무나도 미안한 기분이 들어 낯빛이 붉어졌다.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니 그는 씩 웃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남자로 태어나 그 정도 오기는 당연한 거요. 그리고, 감사는 내게 할 필요 없소. 내가 종남산(終南山)에서 내려와서 이렇게 일방적인 협박을 당해 보긴 처음이라오." "네? 무슨 말씀이신 지? 감히 누가 대협을 협박한단 말입니까?" "누군 누구겠소? 소방, 그 녀석이지. 당장 내려가서 도와주지 않으면 내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거라고 으름장을 놓는 게 아니겠소? 내 어이없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내려온 것이니 하나 신경 쓰실 필요가 없다오." 소방 이 녀석 안 보인다 했더니만, 어디선가 몰래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눈에 띄지는 않았으니 벽을 통해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무공 같은 걸 사용했을 것이다. 하여간 영악한 것. 남세스럽게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해줘야 할 판이군. 끙 "소방이라면, 혹시 아까 전에 주루 앞마당에서 놀던 거지 차림의 소년을 말하는 것인가요?" 무슨 용무인지 가지 않고 남아 있던 제갈혜(諸葛慧) 소저가 소방에게 관심(觀心)을 보였다.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눈을 가진 그녀가 소방에게 악의(惡意)를 품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선악(善惡)이란 겪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함부로 소방에 대해 언급할 수 없었다. "소방은 제 친구(親舊)입니다만, 그 녀석이 손님이 말씀하시는 소년일지 아닐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내 퉁명스런 무뚝뚝함의 의도를 이해했는지 빙긋 웃으며 자리에 앉더니 곽철 대협에게 같이 식사할 것을 권하였다. 나랑 다툰 일로 요리에는 손 한 점 대지 못하고 떠났기에 자칫 잘못하다간 멀쩡한 요리들이 버려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곽철 대협은 호쾌한 장소를 터뜨리며 자리에 앉았고, 그들끼리 죽엽청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내려오지 그러니? 오리 구이 다 식겠다. 와, 이 만두 속 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게 침이 꿀꺽 넘어가는걸." 제갈혜 소저는 느닷없이 요리에 대해 극찬을 하며 연신 맛있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누굴 향해서 내려오라고 말하는 건지 처음에는 의문스러웠으나, 소방이 한숨을 쉬며 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들 사이가 초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리라. 그럼 내가 끼여들 여지는 없는 것이다. 지나가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신경 써 줘서 고맙다. 소방." "뭘 친구 사이에 고맙긴 당연한 일이지." 제갈혜는 소방이 내려오자 자리를 빼 주며 같이 식사할 것을 권했고, 소방은 식성 좋게 오리 구이를 뜯으며 제갈혜에게 연신 눈치 같은 것을 주고 있었다. 입으로 옹알거리는데, 들리지는 않는 걸로 봐서 전음인가 뭔가를 쓰고 있는 듯했다. 나 같은 범인에게 무슨 숨길 것이 있다고…….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던가? 자기가 친구 하자고 귀찮게 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거리를 두는 것은 또 뭔지……. 조금 섭섭한 마음에 걸음을 떼었다. 시선을 돌려 부자(富者) 배불뚝이와 그의 첩으로 보이는 미녀들이 앉은 탁자에는 이미 요리가 옮겨져 있었다. 아마 내가 예기치 못한 일에 휘말려 시간을 빼앗기는 동안 포연강이 직접 요리를 날랐던 모양이다. 짜악! 쿠당! 뺨에 작렬하는 매서운 손바닥 힘에 주루 바닥을 뒹굴었다. 누가 날 때렸는지 알기에 일어설 수가 없었다. 인피면구를 썼을 령령의 녹피 가죽신 위로 가느다란 발목이 보였으나, 그 뿐이었다. 곧 주루 바깥으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소방 같은 말단 하수도 벽을 통과해서 소리를 들을 정도인데, 필시 고수라 불릴 그녀가 주루 내의 소란을 못 알아차릴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하필 자신의 연인(戀人)과 관계된 일이라면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아끼는지 몸소 보여준 셈인 것이다. 너무나 느닷없이 일어나 뜻밖의 소란에 사방에 정적이 깔렸다. 식사를 하던 두 탁자 모두 무슨 일인가 연유를 궁금해하고 있으리라. "이야, 뺨을 어떻게 맞으면 공중제비를 돌면서 그렇게 꼴아 박을 수가 있냐? 도대체 왜 맞은 거야?" 소년 소방이 내민 손은 여인의 손처럼 작고 가늘었지만, 너무나도 커 보였다. 너무나도 우울한 마음에 그 손마저 잡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난 고개를 저으며 그가 내민 손을 피해 비틀비틀 일어섰다. 무슨 낯으로 그의 얼굴을 본단 말인가? 한숨을 쉬며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령령에게 얻어맞은 뺨이 얼얼하게 멍이 들었지만, 그보다 내 맘에 든 멍은 더 컸다. 말이 후원이지 잡초만 무성하게 우거진 그곳에는 반듯하게 잘려진 나무 밑동에 박힌 도끼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채 다듬어지지 않은 장작을 들었다. 나무 밑동 위에 올려놓고 힘차게 도끼를 휘둘렀다. 팍! 너무 과도하게 힘을 준 탓인지 쪼개진 장작은 양 갈래로 멀리 포물선을 그리며 날라 갔다. 나도 모르게 입 꼬리 한 쪽이 치켜 올라갔다. 자조적인 미소. 팍! 팍! 팍! 닥치는 대로 장작을 쪼개었다. 얼마나 더 멀리 날라 갈 것인지 시합을 하듯이 말이다. 얼마나 정신없이 장작을 팼을까? "어마! 장작 좀 조심해서 패요. 점소이 양반." 처음 들어보는 여인의 목소리에 누군가 돌아봤더니 배불뚝이 중년 남성과 같이 왔던 네 명의 미녀들 중 한 명으로 피같이 붉은 비단 능라의가 허리선까지 길게 갈라진 치마로 덧 되어진 야한 차림에 몸매까지 굴곡이 뚜렷하여 절로 침이 넘어가는 여인이었다. 평상시라면 음흉한 눈빛으로 침을 질질 흘렸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나는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다시 장작을 올리고 도끼로 내리쳤으나, 이번에는 여인이 있는 곳까지 튀지 않도록 힘을 좀 줄여 쳤다. 팍! "어머! 이봐요, 사람 좀 보면서 도끼질해요." 무슨 영문인가 싶어 돌아봤더니 바로 옆으로 능라의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저기 급한 볼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뒷간이 어디 있지요?" "이 후원 창고를 돌아서 맨 후미진 곳으로 가면 바로 아실 수 있습니다.' "말만 들어서는 모르겠어요. 안내 좀 해주시겠어요?" "……." 여인이 너무 가까이 다가와 아찔한 난향 냄새가 아련하게 느껴졌다. 가운뎃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져 더 있다가는 그녀 앞에서 망신살 뻗치겠다 싶어 얼른 앞장을 섰다. 창고를 끼고 우측으로 조금 돌자 인적이 뚜렷한 샛길이 나왔고, 붉은 단풍 숲이 울창한 가운데 나무로 아담하게 지은 뒷간이 금세 보였다. "저곳입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담담하게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돌아서서 가는 나를 여인이 뒤에서 와락 껴 앉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커다란 가슴을 내 등뒤에 바짝 붙여서 물컹거리는 압박감을 느끼게 하였고, 자신의 하체를 내 엉덩이에 밀어 넣어 미묘한 박자를 따라 요사스럽게 비볐다. "아까 당신 너무 멋졌어요. 일개 점소이가 남궁세가의 소가주에게 당당하게 대들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내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입김을 불어넣으며 말을 하던 그녀는 혀로 내 귓불을 핥으며 껴안았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 내 가운뎃다리를 쓰다듬어 오고 있었다. 몹시 흥분한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녀가 자극해 오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기에 이 순간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뭔가 툭 끊어진 느낌이 들면서 그녀를 덮쳐 바닥에 쓰러뜨린 후 사납게 내리눌렀다. 본능적인 야수처럼 여인의 입술을 갈망하고 내 앞에 드러난 그녀의 새하얀 속살들을 남김없이 유린해 버렸다. 그동안 쌓였던 한들을 보복하듯 그녀에게 인정사정없이 거칠게 쏟아 내 버렸다. 오히려 그 무자비함이 여인을 만족시켰던 모양이다. 격정의 순간을 따라 흩날려진 머리카락들을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한 그녀는 살포시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화사(花蛇)에요. 잊지 마세요." 마지막을 되새기려는 듯 내 입술과 격하게 앵두 같은 입술을 비비던 그녀는 슬며시 멀어져 갔다. 이것으로 나의 동정은 사라져 버렸지만, 이 순간의 아찔함은 영원히 못 잊을 것 같았다. 화사(花蛇), 꽃뱀이라 이름 한번 잘 지었다고 생각이 되었다. 그녀의 요염함과 끈적끈적함은 정말 화사(花蛇)란 이름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그녀와 나눴던 격정들의 여운을 좀 더 길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샛길 위에 그대로 팔베개를 하고서 드러누워 심호흡을 들이마셨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가을임을 알려주려는 듯 하늘의 푸름은 사계절 중 가장 극에 다다라 있었고, 간간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곧 다가올 겨울을 암시하는 듯싶기도 했다. 부스럭. 풀 밟는 소리가 들려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아 토끼가 지나가는 소리였나 하고 다시 드러누웠다. 서로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순간의 충동이 따르는 데로 잠시 안았을 뿐, 그렇다 해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령령을 향한 짝사랑과 남궁현을 통해 일으켰던 질투심이 눈 녹 듯 사라져 가는 느낌이 들어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결국 너무 덧없는 것이었다. 하룻밤의 꿈처럼 허망하고 의미 없는 것이었다. '헉, 남궁현(南宮炫)녀석은 그게 아닐 텐데, 그 녀석은 이를 갈고 있을 거 아냐? 아이고 미친다. 왜 이리 산 넘어 산이냐?' 보태면 주령령까지 벼르고 있을 거다. 앞으로 일부러 시비를 걸어서 교화를 빙자한 구타를 일삼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에이 설마…… 그래도 분별력은 있는 년이니까…… 하아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눈이 스르르 감겨 왔다. 한참을 잠들었던 것 같다. 한기(寒氣)가 밀려와서 번쩍 눈을 떠보니 하늘이 붉은 저녁노을에 뒤덮여 온통 시뻘건 세상이 되어 있었다. 대략 못해도 한 시진 이상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후미, 포연강 이 녀석이 농땡이 피웠다고 죽일 라고 하겠는데, 끙 바로 물 떠온다고 딴 청이나 부려야겠다.' 창고로 슬금슬금 다가간 나는 물지게를 꺼내려고 가만가만히 문을 열었다. "왁!" "끄아아악!" 창고 안 어둠 속에서 곰으로 보이는 야수가 시퍼런 안광을 번뜩이더니 소리를 지르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농땡이 핀 벌이다. 작삼 동생. 마침 손님이 안 와서 망정이지. 몰려오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됐겠어?" 포연강 이 개자식, 어디서 구했는지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서 놀린 것이 아닌가! "놀, 놀래서 간 떨어질 뻔했잖아요. 그런데, 포형은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요?' "아, 손님이 없기에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지." 그는 곰 가죽을 벗더니 둘둘 말아서 어깨에 척하니 걸치며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았다. "몇 달 전에 이 미친 곰탱이가 배가 고팠는지 글쎄 후원에서 도끼질하는 나를 덮치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 날은 곰 고기로 포식을 했었지. 의외로 먹을 만 하더군. 좀 질겨서 탈이지만." "곰쓸개는 어떻게 한 거예요?" "아 물론 영감님도 령령도 한사코 안 먹겠다고 하기에 내가 꿀꺽해 버렸지. 아직도 그 날이 생생하군. 불끈 솟아오르는 힘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단숨에 서안(西安) 시내로 달려가 기녀 다섯 명을 돌아가며 상대해 줬지. 어이 작삼 얘기 안 끝났어. 어딜 가나?" "물 뜨러 갑니다." "다음에 또 농땡이 피면 령령한테 일러 버린다. 음하하하하하." "……." 하여간 이 인간은 가면 갈수록 추해진다. 구태여 내 손으로 복수할 필요도 없이 어디까지 추해지나 방관하는 쪽이 오히려 더 나을 듯싶다. 언젠가는 스스로 똥밭에 구를지 또 아는가? 뭐 금원보 열 개를 받아야 할 일도 있지만 말이다. 뒷문을 통과해서 주루 안으로 들어가 보니 화사(花蛇)일행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곽철(郭鐵) 대협과 제갈혜(諸葛慧) 소저, 소방(蘇芳)은 쌓인 얘기들이 많은지 아직도 유유자적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옆에 수북히 쌓인 술병들을 보니 꽤 술들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소방이 내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가 팽 고개를 돌려버렸다. 몇 잔 들어갔는지 안면이 빨갰다. 뭐 곽철 대협이 동석(同蓆)해서 마신 거라면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뭐가 부끄럽다고 시선을 피하냐? 남아로 태어났으면 몇 잔 정도야 가볍게 마셔 주는 거지.' 계산대에서 꾸벅꾸벅 조는 홍 영감을 마지막으로 일별을 고하고는 주루 문을 나서려 했다. 두두두두두두……. 지축을 뒤흔드는 마차 소리,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할 수밖에 없는 싹수머리 없는 사두마차, 왜 다시 오는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저녁이라도 먹으러 오나 보다 했다. 손님 안내가 우선일 테니 물지게를 주루 난간 한편에 갖다 놓고 현관에 공손히 섰다. 원래 폭주마차(爆走馬車)이긴 했지만, 지금은 유난히 서두르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차가 서자마자 마부석에 있던 검은 피풍의 여인이 날렵하게 뛰어 내리며 마차 입구가 아닌 나에게 달려오는 것이었다. "어? 어, 무슨……?" 그녀의 손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빠른 속도로 내 손목을 잡고 힘을 주었다. 전신(全身)에 찌르르한 고통(苦痛)이 따르며 힘이 좍 빠졌다. 이것을 본 곽철 대협이 대노(大怒)하여 소리쳤다. "무공을 모르는 범인에게 금나수(擒拏手)를 펼쳐 완맥을 취하다니 무슨 짓이요!" 그러나 피풍의 여인은 요지부동이었고, 뒤이어 배불뚝이 중년 남성 일행이 마차에서 내려 주루로 올라왔다. 배불뚝이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화를 내었다. "그 녀석은 도둑이요, 곽철 대협이 그를 감싸주다가는 종남파(終南派)의 명성에 누가 될까 염려되오. 그러니 상관치 마시길 바라오." '이 배불뚝이가 무슨 돼지 멱따는 소리를 하는 거야!' 팔목을 타고 오는 이상스런 고통에 말문이 막힌 나는 꼼짝을 할 수 없이 그가 일방적으로 떠드는 바를 그대로 듣고 있어야만 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이쪽에는 제갈혜 소저가 있었다. "천금대인(千金大人) 하후돈(河厚豚)님이시군요. 그런데 저 점소이가 무엇을, 언제 훔쳐 갔다는 것인 지요? 차근차근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해주세요." "아, 중원제일지(中原第壹智) 제갈혜(諸葛慧) 소저시구려. 그럼 더욱 잘 되었소. 이 녀석은 아까 전에 제 첩을 뒷간에 데려다 준다고 하면서 몰래 그녀의 옥비녀를 훔쳐낸 것이 분명하오. 그 이전까지 그녀가 갖고 있던 옥비녀가 뒷간에 다녀온 후 없어진 것을 알아내고 다시 돌아온 것이오." 난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화사(花蛇)를 돌아보았는데, 내 시선을 외면하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점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천금대인 님의 말씀에는 어폐가 있군요. 대인님의 첩 네 분이 실상은 대인을 호위하는 무림 고수라는 걸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 여인에게서 어떻게 옥비녀를 빼돌릴 수 있지요?" 제갈혜 소저의 말에 난 더욱더 놀라고 말았다. 단지 요염하고 나긋나긋한 미녀이기만 한 줄 알았던 그녀가 실상은 무림인이라니! "인정하오. 그러나 아무리 무림 고수라 하더라도 일개 점소이에게는 방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직접 그의 몸을 뒤져 옥비녀가 나오지 않는다면 잘못을 시인하고 물러나겠습니다." 그의 말에 제갈혜는 내 의중을 물어야 한다며 피풍의 여인이 완맥을 놓고 물러나게 했다. "단지 그가 당신의 몸을 뒤져 옥비녀가 나오지 않으면 잘못을 시인하겠다고 하는군요. 그 말대로 하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난 결단코 옥비녀를 훔치지 않았으니까." 제갈혜 소저가 고개를 끄떡이자 피풍의 여인이 내 몸을 샅샅이 더듬으며 수색(搜索)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여인의 손이 전신을 어루만지자 조금은 흥분이 되어 그곳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곳이 까딱 까딱거리자 지켜보던 제갈혜 소저가 기침을 하며 잠시 시선을 돌렸으나, 피풍의 여인은 무감각한지 오히려 까딱이는 주변까지 일일이 손을 넣어 더듬는 것이었다. 결국 그것은 까딱이길 멈추고 꼿꼿이 하늘을 향해 서 버렸다. '아니, 이 사람이! 일부러 망신살 뻗치라고 이러는 거 아니야! 손 치워, 손!' 그 앙큼한 손은 엉덩이 구멍까지 일일이 찔러 보는 세심함을 보이며 내 둔부를 쓸어 올라갔다. 정말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너무 자극적이어서 느낌이 오려고 하기 직전이었으니까! 그러나, 뒤 춤에서 손은 멈춰 섰고, 부스럭거리더니 이내 내게서 떨어졌다. '휴우, 다행이다. 하마터면 개망신 당할 뻔했다.' 다행이라고 여겼으나, 그 반대였다. 그녀의 손에는 옥비녀가 쥐어져 있었고, 내 허리춤에서 옥비녀를 빼는 것을 모든 일행이 똑똑히 보고 말았던 것이다. 배불뚝이는 옥비녀를 받아 들며 내 눈앞에 그것을 들이밀었다. "이것이 자네 뒤 허리춤 요대에서 나오는 것을 모두가 틀림없이 보았다. 이래도 시치미 뚝 땔 건가?" 눈이 휘둥그러니 튀어나올 것 같았다. 본적도 없는 화사의 옥비녀가 왜 내 요대에 감쪽같이 꽂혀 있었을까? 그녀가 계속 내 시선을 피하는 이유를 이젠 알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저런 미녀가 뭐가 아쉽다고 나 같은 점소이를 안으려고 했겠는가! 하늘이 노랗게 보이려고 할 때 주루 문간에 낯익은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초롱초롱 빛을 머금은 두 눈을 인피면구 바깥으로 내놓은 주령령, 그럴 줄 알았다는 경멸의 눈빛으로 미루어 볼 때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게 분명하다. 가슴이 저렸다. 잊기로 한 짝사랑의 여인이 나를 저런 눈으로 본다는 것은 죽으라는 말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인 거다. 한숨이 나왔다. 그 누구보다 령령의 시선이 나를 숨막히게 했다. 곽철 대협조차 이제는 날 의심하는지 바라보는 눈빛이 더 이상 호의적(好意的)이지 않았다. 그런 것이었다. 무림인이라는 존재는 아무리 잘 봐주려고 해도 결국은 서로 간의 암중 묵계가 있어 범인을 용납하지 않는 이해타산적인 존재들인 거다. 다 똑같은 거다. 협객이고, 대인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 "작, 작삼은, 작삼은 범인이 아니에요!" 소방이었다. 안면(顔面)에 술기운이 가득해 혀가 꼬부라진 듯한 그의 낭랑한 목소리. '너만은 나를 믿어 주는구나. 고맙다.' "난, 난 봤어요. 창고 뒤에서……." 전신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소방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녀와 내가 하는 것을 몰래 훔쳐본 게 분명했다. 토끼의 부스럭거림인 줄 알았던 것이 바로 소방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믿어 줄 리가 없다. 취해서 혀가 꼬부라지는 소방의 말을 증거로 인정해 줄 리가 없을뿐더러 화사를 향하는 눈빛들이 경멸로 바뀔 수도 있는 거다. 필요 없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중인(衆人)들이 날 범인으로 단정했다는 것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난 즉시 소리를 질렀다. "그만! 그만해! 소방." 깜짝 놀란 듯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소방이 나를 보았다. "난 말이지. 모든 무림인들을 싫어하지만, 최소한 너를 만난 것에 대해서는 추호도 후회가 없어. 그러니까 괜찮아.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하지 마. 부탁이다." 소방의 귀엽던 안면이 살짝 일그러지면서 두 눈에 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혔다. 기분이 좋아졌다. 나를 위해서 울어 주기도 하는 무림인이 내 친구라는 게 기뻤다. "인정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더 숨길 것도 없군요. 그녀를 안내하는 척하면서 몰래 빼돌렸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오." 내가 순순히 훔쳤다고 시인을 하자 천금대인이 되려 놀라는 듯싶었다. 아마도 내 죄를 인정하게 하려고 여러 가지를 준비해 온 듯싶었으나, 그것을 쓸 필요가 없어지니 안심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화사는 끝끝내 나를 보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그녀와의 격정으로 인해 내 미련을 말끔히 씻어 낼 수 있었으니까, 고맙다면 고마울까 원망(怨望)이란 있을 수 없었다. 단지 령령의 경멸 어린 시선만은 참기가 힘들었다. 가슴이 아파서 저릿저릿했다. 곽철 대협도 실망했다는 듯이 몸을 돌려 이 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제갈혜 소저는 뭔가 생각을 하는 듯 자리에 남아 있었으나, 개뿔! 뭐가 중원제일지(中原第壹智)냐? 진범도 가리지 못하는 주제에…… 눈만 망망대해 같이 깊으면 뭐해? 허와 실을 가리지 못 하는 눈이라면 뭐 하러 달고 다니나? 차라리 뽑아서 개 먹이로 줘 버려라! 소방에겐 미안했지만, 화사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처분에 맡기기로 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관아에 가서 고발이라도 할 겁니까? 아님 단칼에 배기라도 할 겁니까?" 내 생명의 생사여탈권(生死餘奪權)은 이제 당연히 배불뚝이한테로 넘어갔다. 가증스러운 녀석, 뭐 때문에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쳤는지 몰라도 속이 시꺼먼 먹물로만 가득 차 있을 것이 분명하다. 상황이 되면 저 배를 갈라서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여의치 않은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자네가 스스로 인정을 했으니 나도 더 이상 추궁할 생각이 없네. 간단하다네. 내가 요즘 적혈장(赤血掌)이라는 무공을 입수해서 약간의 성취(成就)를 보았다네. 더도 덜도 말고 한 대만 맞아 주면 이 일에 대해서는 사실무근으로 잊어 주겠네. 어떤가?" "잠깐만요!" 잠자코 침묵을 지키던 제갈혜 소저가 적혈장이라는 소리에 대화를 중단시키고 끼여들었다. "대인께서 말씀하신 적혈장은 호신강기를 단번에 파괴하고 일격에 생명을 빼앗아 버리는 마공(魔功)이 아닙니까? 그런 장법을 일개 점소이를 상대로 펼치시려는 겁니까?" "제갈혜 소저, 소저는 참관인일 뿐이요. 내가 무엇을 하건 당신이 껴들 여지는 없소. 선택은 저 점소이가 하는 것입니다." "크크크, 내게 선택권이 있습니까? 없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작정하고 온 사람이 인제 와서 관대한 척 굴기엔 늦었습니다. 내 앞마당으로 내려갈 테니 적혈장인지 뭔지 날려 보시지요." 제갈혜가 일부러 너스레를 떨리는 없다. 분명 적혈장 한 방으로 한 많은 점소이 인생은 그 날로 종치겠지만, 매도 먼저 맞는 매가 낫다고 시간을 질질 끌고 싶지도 않아 바로 앞마당 위로 내려섰다. 배불뚝이도 내게 적혈장을 날리는 게 우선 목적이었는지 주저 없이 기묘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두 손은 하늘을 향해 떠받치듯이 쳐들고 두 다리는 기마보를 취한 뒤 심호흡을 한 번 들이쉬면서 왼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오른손은 뒤로 빼내었고 다리는 그 반대로 움직여 땅에 고정을 시켰다. 물 흐르듯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세! "하아아압!" 그의 오른손이 점차 시뻘겋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 속에 시뻘건 배불뚝이의 손을 보니 가일층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한동안의 정적,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적혈장이 펼쳐질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무림인인 그들이 별 볼일 없는 일개 점소이가 피를 토하며 죽어 가는 장면을 기대하고 있을지, 아니면 마공이라는 적혈장에 더 관심을 두고 있을지……. 쐐에에에엑! 가공할 압력에 몸이 넘어질 듯 비틀거렸으나, 미쳐 그럴 틈도 없었다. 배불뚝이의 오른 손이 내 가슴뼈에 부딪히면서 그 타격이 일파만파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호신강기마저 뚫고 내부를 파괴시키는 적혈장이라는 이름답게 가슴뼈가 일시에 함몰되는 느낌을 받았다. 모르긴 몰라도 갈비뼈도 몇 개 으스러졌을지도 모른다. 입에서 튄 핏방울이 배불뚝이의 안면을 적시면서 몇 장을 굴러간 나는 망아루 끝 나무 담장을 부시고 나가서야 겨우 멈춰 서게 되었다. "꺄아아아악! 작삼! 자아악삼!" 고막을 진동시키는 소방의 비명 소리, 앳된 소년이라기보다 여인의 비명 소리처럼 가늘고 날카롭게 들린 것은 나의 착각일까? 눈에서 빛이 사라지면서 의식이 멀어져 간다. 이 끝을 놓으면 나라는 존재는 저승을 거쳐 다시 환생하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꿈인지도 모른다. 호접몽(胡蝶夢). 장자가 어느 날 낮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다. 꿈속에 나비가 되어 신나게 날아다니며 자연을 만끽했는데, 잠시 쉬려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 보니 인간 장자라는 것을 알았다. 이때 장자(莊子)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도대체 본래 인간이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본래 나비가 꿈속에서 인간이 되어 이렇게 있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기에……. 나 또한 본래는 한 마리 종달새였는지도 모른다. 하늘을 날며 자유를 만끽하다 지쳐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꿈을 꾸었는데, 그게 지금의 나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되 자유롭지 못하고 억압을 받아야 하는 점소이의 꿈을 깨고 나면 난 아마 종달새가 되어 다시 자유롭게 하늘을 누빌지도 모른다. '어리석다! 인간으로 태어나 종달새가 될 것을 꿈꾸다니 나를 만난 이상 넌 백 년 안으로는 못 죽는다. 이놈아!' '귀찮게 또 골 울리게 하는구먼. 뉘시기에 가는 마당에까지 귀찮게 하는 거요?' '누구 긴 누구냐! 현현자(炫炫者)어르신이다. 이놈아 썩 못 일어날까!' '싫수, 일어나 봤자 또 얻어터지며 피 토할 일밖에 없는데, 일어나서 뭣하오?' '안 돼. 내 심결을 본 이상 넌 좋든 싫든 죽도록 맞아야 산다. 피를 토한 것은 필요 없는 폐혈이 밀려난 것이니라.' '후후, 난 가슴뼈가 박살났고, 갈비뼈도 거의 부러진 것 같소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심장까지 아작 났을 거요. 일어나 봤자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로 저승 행이 분명하오. 그냥 귀찮게 말고 고이 보내 주쇼.' '박살나긴 뭐가 박살나! 멀쩡하다 멀쩡해! 내 구타심결을 우습게 보는 거냐!' '우습소. 만날 터지는 게 일이라면 사양하겠소. 노망난 영감 차라리 당신이 내 몸에 들어와서 개지랄을 떨든 맘대로 하시오. 난 그냥 꼴까닥 하려오.' '너 무림인들을 증오하지 않나?' '증오하오. 하지만, 어쩌겠소? 힘이 없는걸. 그들을 상대하지 않으려고 해도 날 놔두지 않으니 귀찮기 그지 없구랴.' '무림인들 위에 군림해 보고 싶지 않나? 그들의 무위를 우습게 깔아뭉개고 싶지 않나?' '…….' '케케케케, 생각이 없진 않나 보군. 보장하지. 넌 그들 위에 설 수 있다. 항상 생각해라! 그 어떤 무기로도 널 해할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삼라만상의 힘은 결국 널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언젠가는 무림인들 위에 군림(君臨)할 수 있다는 것을!' '백 년 후에 말이요?' '뭐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삼처사첩을 얻어서 만날 구타(毆打)당하며 살면 오십 년정도로 줄어들지도 모르지.' '차라리 배를 째시오.' '아 시끄러워, 빨랑 일어나! 사내자식이 되게 말 많네. 가운데 다리 떼버리고 차라리 여자로 태어나지 그랬냐?' '…….' [8]막패의 최후 "작삼! 작삼! 일어나 바보야. 흐흐흑, 흐흑 이, 이런데 누워 있으면 감기 들어. 바보야!" 아 거 참 졸려 죽겠는데 좀 내버려둬라. 잠 좀 자자. "흐흐흑, 자악사아암!" 이 녀석이 왜 이렇게 흔들어 샀냐. 내 머리채로 앞마당을 쓸어버릴 생각인가. 꿈속에서 현현자 영감이랑 신나게 다퉜더니만, 머리가 윙하면서 두통이 일어났고, 졸음이 마구 쏟아져서 한숨 깊이 자고픈 본능에 흔들어도 모르는 척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가 뭔가 뜨거운 게 내 눈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뭐가 떨어지는가 해서 슬며시 실눈을 떴다 '윽, 눈물까지는 괜찮은데 콧물에 침까지 섞어서 떨어뜨리네. 야, 야야!' 커다랗게 뭉쳐진 그것이 내 눈깔 위로 낙하하는 순간 잽싸게 몸을 굴려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휴, 십년감수했네. "어, 작삼 작삼, 으헤헤헹 살아 있었구나!" 소방, 이해할 수가 없다. 사내 녀석이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울고 너무 눈물이 헤픈 것 같다. 난 그 녀석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후 등을 토닥여 줬다. "난 괜찮아. 잠깐 잤더니 개운하구먼. 웃샤." 현현자 영감쟁이 말대로 내 몸에는 이상이 없었다. 단지 기이한 열기가 몸 전체를 한 번 휘감아 돈 후 따뜻한 기운이 전신에 흘러서 차가운 산바람에도 끄떡없다는 정도일까? 역시 내가 멀쩡하게 일어나는 것을 중인들 모두가 놀라워하고 있었다. 예외가 있을 리가…… 어라 령령 저년은 왜 당연하다는 듯이 무반응이야? 뭐 원래 그런 여자라고 치자. 주령령이니까 안 놀랄 수도 있겠지 뭐.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심각하게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여 준 것은 역시 배불뚝이, 입을 뜨악 벌리고는 몸이 굳어 버린 게, 파리가 몇 마리 입안에서 윙윙거려도 모르는 듯싶었다. 적혈장이란 게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나? 이 기분이면 적혈장을 몇 대 더 맞아도 괜찮을 듯싶기도 했지만, 뭐 만사 불여튼튼 이란 말도 있으니 무사히 넘어간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겠다. 그래도 짚고 넘어갈 것은 짚어야 하니, 좀 따져 봐야겠다. 놀래서 굳어 있는 배불뚝이 뺨을 몇 대 찰싹찰싹 때리니 정신이 들었는지 풀썩 쓰러졌다. "적혈장인가 뭔가 맞아 줬으니까 이제 어떻게 된 사정인지 말씀 좀 해보시지요. 구태여 감출 필요도 없지 않아요?" "……." "아니 이 배불뚝이 아저씨가 정말! 남의 목숨을 갖고 장난을 쳤을 때는 목적했던 바가 있었을 거 아뇨? 말 좀 해보쇼. 이 꿀 먹은 벙어리 아저씨야! 자꾸 시치미 뗀다 이거요? 좋소. 좋아. 잠시만 기다리쇼. 우리 망아루 뒷간 구더기가 아주 맛이 좋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저씨가 시식 좀 하고 소문 좀 내주시구려." 난 정말로 열이 잔뜩 올라 뒷간에서 구더기 한 움큼을 퍼 오려고 했었는데, 뜻 밖에도 화사가 내 옷깃을 잡아 말리는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게요." "……." "정확히 사흘 전에 구룡봉(九龍峰) 산골짜기에 마차를 세우고 점심거리를 준비하던 차에 누군가가 기진맥진해서 비틀비틀 오는 게 보였어요. 그들은 바로 하남사흉(河南四凶)이었어요. 하후 가가는 예전에 그들과 뒷거래를 종종 했던 친분이 있어서 냉큼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요." "아니 이게 무슨 꼴인가? 어느 무림 고수에게 쫓겨왔기에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가?" 안면이 하얗게 탈색되다시피 한 막패는 화가 치미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림 고수는 무슨 얼어죽을 무림 고수, 일개 점소이 때문에 이 꼴이 났지 뭐야!" "아니 강호에 흉악한 명성을 자자하게 떨치는 막패가 일개 점소이의 무공에 밀려 도망쳐 왔단 말인가?" 천금대인이 자세한 자초 지정을 알아내려고 일부러 막패를 도발하는 말을 사용하자, 힘은 강하나 머리 굴리는 데는 약한 막패는 바로 이에 넘어가 버렸다. "무공 따위를 익힌 녀석이 아니야! 하다 못 해 철포삼(鐵布衫) 같은 호신강기를 익힌 것도 아니었단 말이야! 내공이라고는 눈곱만도 없는 보통 쥐새끼에 불과했어." "그럼, 왜 이렇게 도망쳐 온 건가?" "크으, 그놈의 점소이 녀석, 맷집이 장난 아니더라고. 내 철퇴에 인정사정없이 힘을 줬는데도 피를 토하며 죽을 둥 살 둥 하기만 하지. 정작 죽지는 않더라 이거야. 그래서, 이번에는 죽겠지 하고 때리고 있는데, 그만 곽철 검귀(劍鬼)녀석이 오는 게 보이지 않겠어? 한 시진 이상을 패느라 기력이 떨어진 나로서는 그를 피할 수밖에 없었지." 천금대인 하후돈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하남사흉(河南四凶) 자체는 별 볼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두목인 막패는 자신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는 실력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자신이 최근에 얻은 적혈장(赤血掌)이라는 마공을 얻었는데, 그것은 무림인들의 호신강기를 파괴하면서 내부를 진탕 시켜 버리는 금기 무공이었다. 상대가 막패라 해도 단박에 피떡이 될 것을 확신했다. 하물며 일개 점소이라면 맷집이 강하다 해도 죽을 도리밖에 없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천금대인은 마침 막패가 혈해진경(血海眞經)의 단서가 되는 지도의 일부를 이전에 가지고 있던 무림인을 죽이고 강탈했다는 정보를 막 얻은 뒤라 무엇으로 그것을 살까 고민하던 중에 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막패는 도박광이었다. 실상 그가 틈틈이 산적 질을 하는 이유도 도박에 미쳐 판돈을 얻기 위해 벌이는 짓이었다. 그는 자신이 적혈장을 익힌 것을 모르니 어쩌면 내기에 순순히 응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보게 자네나 나나 서로 실력이 비슷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흥! 이미 이틀 낮 이틀 밤을 꼬박 겨루고도 무승부로 끝난 일을 되 돌이켜 보자는 거냐?" "아닐세, 단지 난 도저히 자네가 일개 점소이를 죽일 수 없었다는 말을 믿기 어려워서 그러네. 아마 나라면 단 일 장에 격살시키고도 남을 테니까." "크으으으, 날 우습게 보나 본데. 절대 불가능해. 내가 못 한 일을 자네가 할 수 있을 리 없어. 내기를 걸어도 좋아!" 바로 이것이었다. 조금만 도발을 해도 툭하면 내기 운운하는 막패의 성질을 잘 아는 천금대인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좋아. 내 사흘 후에 망아루 앞을 지나게 되니 그때 그 점소이를 일장에 죽여 버리겠네. 만약 내가 이기면 자네가 갖고 있는 그 혈해진경(血海眞經) 지도 조각을 내놓게." "……!" "왜? 천하의 막패가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못하는 신의가 없는 소인배였나?" "웃기지마! 좋다. 하후돈 네가 그 녀석을 일장에 격살하면 반드시 주겠다. 단 일 장에 못 죽이면 화사(花蛇)는 내가 데려간다. 불만 없겠지?" "그, 그것은 화사 본인의 의견도 물어 보지 않고 결정할 수는 없다." 천금대인은 자신의 여인들을 끔찍이도 아낄 줄 아는 위인이었다. 특히 화사는 그가 제일 총애를 아끼지 않는 여인이었다. 듣고 있던 그녀 역시 천금대인을 사랑했기에 주저 없이 그 내기를 수락했고, 사흘 후 술시에 망아루에서 보기로 했던 것이었다. 솔직히 구룡봉(九龍峰)에서 망아루가 있는 회운봉(回雲峰)까지의 거리는 반나절이면 충분했지만, 천금대인은 사람을 은밀히 풀어 작삼의 과거를 캐 오게 할 만큼 치밀한 작자였다. 이틀만에 알아낸 작삼의 과거에는 무공을 배운 흔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동네 싸움에서조차 빌빌거렸던 촌무지렁이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막패가 작삼을 못 죽인 것은 막패 그 자신이 암중에 산공독(散功毒)같은 것에 중독되어 제 힘을 발휘 못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천금대인은 바로 망아루로 달려가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곽철 대협이 주루에 묶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점소이를 죽이는데 성공하더라도 자신이 곽철 대협에게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후 가가, 이 일을 소녀에게 맡겨 주세요. 제가 저 점소이를 꾀어내서 일을 꾸며 보도록 하겠어요.' 화사의 전음이 들려 왔고, 그녀의 혜안을 아는 그는 즉시 허락을 했다. 화사는 천금대인을 너무 사랑했기에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라도 일을 성사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안내를 핑계로 점소이와의 질펀한 정사를 하면서 그의 요대 안쪽에 감쪽같이 옥비녀를 감춰 두는 암계였고, 실행함에 있어서 바보같이 순진한 점소이가 그대로 넘어와 준 덕에 뜻대로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중인(衆人)들에게 해명을 하던 화사는 점소이와 정사를 나누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창피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천금대인에게 알려지길 꺼려한 것이기도 했다. 이점을 잘 이해한 작삼과 소방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해명을 듣고 나니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애초에 사랑 같은 게 아니란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때문에 다른 남자의 품에 자신을 안긴다는 것은 보통 여자가 생각할 만한 일이 될 수 없었다. "술시가 거의 다 되었군요. 그럼 막패가 올 때가 되었다는 소린데……." 제갈혜 소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람을 타고서 예의 그 지독한 시금털털한 악취가 풍겨 왔다. 하여간 저 작자의 악취에 대해서 훌륭한 무기라는 찬사를 안 던져 줄 수 없다. 얼마나 오랫동안 씻지 않으면 온갖 구토를 유발하고 정신을 혼미케 하는 악취를 품을 수 있단 말인가? 저 녀석들이 풍악산을 마치 자기네 안방 드나들듯이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아마 그 악취에서 나오는 강력한 위력 때문에 산짐승들이건 무림인들이건 그들을 피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후돈아, 하후돈아, 일장이면 끝낼 수 있다고 기고만장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이렇듯 한심한 꼴이라니 보기 좋구나. 하하하하하, 어쨌거나 약속(約束)은 약속이렷다." 쿵! 육중한 체구답지 않게 단풍나무 위를 훌쩍훌쩍 날아다니던 막패는 화사 옆에 땅을 진동시키며 뛰어내렸다. 배불뚝이는 혈해진경(血海眞經)의 단서를 손에 못 넣은 충격 때문인지 애지중지한다는 화사(花蛇)를 막패에게 내주게 된 충격 때문인지 정신을 차리고서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의기소침해 있었다. 아무도 막패가 화사를 겨드랑이에 끼고 되돌아가려는 것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와 배불뚝이 사이의 내기에 제 삼자가 끼여들 여지도 이유도 없는 것이기도 했지만, 함부로 남을 해하려 한 배불뚝이에 대한 불신감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내 첫 동정을 강탈해 간 여인을 저 딴 놈이 날름하도록 놔두기에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기도 했고, 제 발로 걸어온 원수를 곱게 보내 줄 생각도 없었기에……. "야, 막패 나랑 붙자!" 막 날아오르려던 막패는 기우뚱하면서 중심을 잃을 뻔했다가 간신히 안전하게 땅에 착지했다. 그는 자신의 귀를 한 번 후비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잘 못 들었다. 꼬마야, 다시 지껄여 봐라." "나랑 붙어 보자고." "크하하하하하! 너 미쳤냐? 무공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게 감히 나랑 붙겠다고? 니 맷집이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한다만, 지금은 얘기가 틀리다." 무슨 소릴까? 얘기가 틀리다?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궁금해져 말을 더 시켜 보기로 했다. "뭐가 틀린 지 좀 알기 쉽게 얘기해 보시지." "하후돈 녀석이 괜히 나랑 내기를 걸었을 것 같나? 그래도 믿는 한 수가 있으니까, 흔쾌히 내기를 제안한 것이지. 그렇다면 모르긴 몰라도 너의 오장육부는 네가 안 죽을 만치 뒤틀려 있는 게 틀림없다. 괜히 오기 부리지 말고 들어가서 몇 주는 푹 쉬어라. 꼬마야. 지금은 내가 급한 볼일이 있어 너랑 놀아 줄 시간이 없구나." "무슨 일로 그렇게 급한데?" "이 녀석이 꼬박꼬박 말대꾸하네. 그야 뻔하지 않겠냐? 화사(花蛇) 이 년의 속살이 끝내 준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얘기지. 얼른 시식을 해야 할 것 아니겠냐? 내가 얼른 시식을 해야 기다리는 내 부하들에게 덜 미안하지. 크하하하하!" 알지. 나도 잘 아는 일이지. 내 첫 경험이 그렇게 황홀할 수 있었으면서 아직도 여운이 남는다는 것은 바로 내 첫 상대가 화사(花蛇) 그녀였기 때문이지. 잠깐 부하들이 기다린다는 것은? 이런 빌어먹을 놈들! 돌아가며 윤간하겠다는 거 아냐! 화사가 무슨 동네북인 줄 알아! "와라, 니가 도망가면 천하의 막패가 일개 점소이가 무서워서 도망갔다고 소문낼 거야. 여기 제갈혜 소저를 비롯해서 증인들이 있으니 소문은 순식간에 퍼질 거다." 머리가 나쁘다고 했으니 도발에 잘 넘어간다고 했으렷다? 난 그 점을 생각해서 슬슬 자극을 해보았다. "뭐라고! 다른 데는 다 썩어 사라져도 주둥이만 살아서 나불나불 거릴 놈 같으니라고! 내 아랫도리가 급해서 봐주려고 했더니 니가 매를 버는구나. 매를 벌어." "내 주특기가 매를 버는 일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멀쩡히 살아 있으니 넌 잔말 하지 말고 덤비기나 해라. 도망가기만 해 봐 그 순간부터 하남사흉(河南四凶) 대신 악취사흉(惡臭四凶)이라는 냄새나는 악명이 강호를 진동시킬 거다. 여기 내 친구가 개방 사람이야. 강호에 소문 퍼뜨리는 게 주특기라고 하더군. 어때? 이래도 꼬리 내린 개처럼 도망갈 생각만 할거냐?" "이런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그래 오늘 끝장을 내보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몇 번 운 좋았다고 뵈는 게 없나 본데, 이번에는 너와 나 둘 중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끝을 보는 거다." "내가 바라는 바지." 막패는 화사의 혈도 몇 군데를 점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서 나무 위에 걸어 놓고는 훌쩍 뛰어내렸다.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저런 육중한 몸으로 나무 위를 가볍게 날아올랐다 뛰어내렸다 하는지 모를 일이다. 분명 난 무공을 모른다. 단지 믿을 거라고는 어떤 무기나 무공으로든 내 몸을 상하게 할 수 없다는 현현자 영감쟁이의 아리송한 말뿐이다. 솔직히 그것도 꿈속에서 환상처럼 들은 거라 확실히 믿음이 가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저 막패 녀석의 안면에 주먹 한 방이라도 날리지 못하고 고이 보내 주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더구나 화사를 저 놈 품에 안겨 주는 짓은 죽어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비록 그녀가 누구를 사랑하건 말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짝사랑이었던 여인도, 첫 경험이었던 여인도,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난 왜 그런 여인하고만 얽히는 건가? 어디 짝 잃은 외기러기 없냐? 나 좀 데려가라. 젠장. 붕! 퍽! "어디다 한눈을 파는 거냐? 정녕 나를 우습게 본단 말이냐? 넌 오늘 너무나도 잘못 걸렸어." 그의 무쇠주먹이 내 안면에 작렬하면서 사흘 전과 같은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다. 피가 튄다. 의식이 흐릿해진다. 현현자 영감 날 속였어!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그때의 경험인지 이번에 막패는 한 방 한 방을 신중하게 급소가 될 만한 부분만을 골라 날리고 있었다. 기이한 것은 사흘 전에는 즉시 정신을 잃어버려서 아픈 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쨌거나 의식이 살아 있어서 전신이 난자당하는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왜 일을 벌였을까? 어차피 날 죽이려 한 천금대인을 사랑한 여인인데 끌려가서 윤간을 당하건 말건 무슨 상관이었을까? 그깟 알량한 자존심 좀 접고 들어갔으면 지금 즘 편하게 잠을 자고 있을 텐데, 이 무슨 고통이란 말인가! 퍽! 퍽! 퍽! 이번에 막패는 막무가내가 아닌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막강한 권을 날리고 있었다. 철퇴는 위력이 강한 반면에 내력 소모가 많아 오래 유지를 못시킨다는 단점을 지난번의 구타로 깨달았는지 이번에는 좀 더 효율적인 구타를 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흐릿해진 시야에 언뜻 곽철 대협이 칼을 차고 주루 현관에서 내려오는 게 보인다. 그 순간 잠시 막패의 주먹이 주춤거렸다. 역시 곽철 대협! 협객 중에 협객! 어서 나를 구, 구, 구해 줘야 하는……데, 빌어먹을 령령. 그녀가 뭐라고 웅얼거리면서 곽철 대협 앞을 막았는데, 아마 정당한 비무니 제 삼자가 껴들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말했을 게 틀림없다. 필시 내가 이런 처참한 꼴을 당하는 것을 즐기고 있음이렷다! 소갈머리 없는 년! 내 너를 용서하려고 했는데, 니가 화를 자초하는구나. 두고 보자! 두고 봐! 끄아아아아악 아파, 아파. 얼마나 두들겨 맞았을까? 한참을 맞았더니 왠지 뭔가 둔탁해진 느낌이었다. 하룻밤을 꼬박 맞았더니 막패의 주먹이 좀 약해진 느낌이 들었다. 몇 시진에 걸쳐 때렸으니 지칠 법도 하지. 쯧쯧쯧. 좀 여유가 생겨 주변을 둘러보니 곽철 대협과 배불뚝이, 피풍의 여인을 제외하고는 다들 자러 갔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소방이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긴 했으나 꾸벅꾸벅 졸고 있는 꼴이 영락없는 홍 영감 판박이였다. "헉, 헉, 허억 이 녀석아 좀 쓰러져라, 쓰러져. 그렇게 피를 토하면서, 비명을 지르면서 헉, 헉 왜 안 쓰러지는 거냐?" 으잉? 정말이네. 한 번도 쓰러지지 않았네? 희한 하구만. 너무 아파서 죽을 지경이었는데, 왜 두 다리로 멀쩡하게 땅을 딛고 서 있는 걸까? "글쎄다. 어이, 악취사흉, 넌 왜 아직도 때리는 거냐? 지쳤으면 그냥 지난번처럼 도망이나 가지. 그랬어?" "칫, 바로 옆에 검귀가 헉, 헉 참관인으로 서 있는데, 어떻게 헉, 헉헉 도망을 간, 간단 말이냐? 이 독한 놈, 내 살다 살다 너같이 독한 놈은 헉, 헉 처음이다." 내 등뒤로 동이 터오며 빨간 햇살이 세상을 뒤덮는 것을 느꼈다. 마침 내가 태양을 등져서 무섭게 보였는지 막패가 주춤 한 발자국 물러섰다. 기회였다. 지금 그를 때리지 않으면, 또 언제 때려 본단 말인가! 크크크크 너무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무림인이라는 존재에게 내 주먹을 날려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몰랐다. 막패를 향해 걸어가는 내 전신에 살기가 이글이글 타오름을, 그 살기가 너무 지독해서 잠자고 있던 소방이 흠칫 깨고 말았음을, 내가 아는 것은 오직 하나! 막패 저 개 새리 안면에 내 주먹을 힘껏 내다 꽂아 버리는 장면을 상상하는 일뿐. 하여간 현현자 영감쟁이 말대로 내 몸은 멀쩡했다. 반대로 밤새도록 내력을 퍼부은 막패는 기운이 쭉 빠져서 헬렐레 할 것이다. 언젠가는 기운을 차리고 귀찮게 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도마 위에 생선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날 바라보던 막패의 눈동자가 확대되었다. 마치 귀신을 봤다는 듯이……. 역시 햇살을 등진 효과가 대단한 모양이다. 막패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겁에 질려서 뒤로 자빠진 그의 얼굴을 더 확실히 봐 두고 싶었기에……. 문득 막패의 확대된 동공에 무언가 묘한 게 비쳐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 궁금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귀, 귀신?' 길게 갈라진 양 눈 사이로 흐르는 푸른 안광, 세로로 길게 늘어난 야수 같은 눈동자, 시뻘건 입술 사이로 드러나 보이는 뾰족한 송곳니?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 입을 딱 벌리며 비명을 질렀다. "카아아아아아악!" 이, 이게 내 비명 소리? 귀 고막을 가르는 끔찍한 괴음성, 소리를 지르는 내가 들어도 이상한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막패의 면전에서 소리를 질렀더니 녀석이 기절을 해 버리는 게 아닌가! 무슨 사내 녀석이 거품을 물고 눈깔을 뒤집나? 그것도 자칭 천하의 막패라는 놈이……. 그래도 난 때려야겠다는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주먹을 들었다. 기절한 놈이라도 패야 직성이 풀릴 테니……. "잠깐만 기다려 보시오. 그의 상태가 이상하오." 곽철 대협의 제지하는 소리에 거의 광적으로 흐르던 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만큼……. 치켜들었던 주먹이 어색해져 어정쩡하니 있다가 뒷머리로 돌려서 긁적긁적 긁는데 사용해 버렸다. 막패를 살피던 곽철 대협이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죽었소. 아무래도 심장마비 같은데……." 난 그 말을 듣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안 돼 이럴 수는, 이럴 수는 없는 거야! "안 돼! 한 대도 못 때려 봤는데, 실컷 때리기만 하고 죽으면 어떻게 하냐고! 이 붕신아 일나란 말이야!" 은행나무 위에 점혈 당한 채 근 네 시진을 매달려 있었던 화사는 피풍의 여인이 내려서 몇 군데 찍어 주자 피가 뭉쳐 굳었던지 스르르 무너졌다. 즉시 배불뚝이의 다른 첩들이 달려들어 주물럭주물럭 거리자 혈색이 돌아오는 듯싶었다. 뭐, 나야 애초에 무슨 내기를 걸고 싸웠던 것도 아니라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게 분명한 그녀에 대한 미련이 조금 남기는 했지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었다. 그래도, 전리품 정도는 챙겨도 되겠다 싶어서 싸늘하게 식어 가는 막패의 품을 뒤적거렸다. '그냥 내버려둬. 멍청아.' 머리로 직접 울리는 듯 뎅뎅거리는 울림과 함께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인피면구를 뒤집어 쓴 령령이 현관에서 째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못들은 듯한 표정 인걸로 봐서 아마도 전음입밀(傳音入密)이라는 것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주변 인간들 때문에 무공을 사용할 수가 없다는 것을 난 잘 알기에 귀를 후비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어디서 모기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는 거지?" 난 못 들은 척 계속 그의 안주머니와 뒤 춤을 들추며 뒤적거렸다. '야! 너 간덩이가 부었니? 좋은 말로 할 때 물러서라. 엉?' "아야, 요놈 잡았다. 하하하하 하여간 새벽 모기가 무섭다니 깐." 계속 딴청을 피우며 령령의 전음 같은 것은 일축했다. 막패의 품을 뒤지면서 좋은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 범인인가 뭔가 잡힌다고 해서 포연강이 금원보 열 개를 순순히 내준다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었다. 황실 근위대란 말 자체가 안 믿어졌지만, 설사 맞다 해도 일이 해결되고 나면 십중팔구 모르는 척 시치미 때면서 뉘슈? 하고 입을 싹 씻어 버릴 가능성이 무지막지하게 농후했다. 그럼, 다른 길이 있다면 구태여 범인이 잡힐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렇다. 난 다른 길을 찾은 것이었다! "찾았다! 크크크크." 오래 되어 탈색이 된 듯 노랗게 색 바랜 종이 쪼가리, 그 혈해진경(血海眞經)의 단서라는 지도 쪼가리를 찾아내었다. 내가 그것을 꺼내자 화사를 되찾아 조금은 기운을 차린 배불뚝이의 안면이 이젠 완연히 피어났다. 그래, 그래 좋구나, 좋아. 먼저 참관인이었던 곽철 대협에게 발그레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공손하게 물어 보았다. "어쨌거나 제가 이긴 셈이니 전리품 한 가지 정도 챙기는 것은 상관없겠지요?" "흠, 흠 알아서 하시오." 좀 떨떠름하다는 식이었지만 긍정적으로 받아 들기로 했다. 이번에는 배불뚝이를 돌아보았고, 두 손을 싹싹 비비면서 혈해진경 지도 쪼가리에 대한 흥정을 시작했다. "천금대인, 제 손에는 당신이 원하던 그 혈해진경인가 뭔가 하는 지도 조각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얼마 정도에 사주실 수 있으신 지요?" "금원보 삼십 개에 사겠네! 아니 오십 개 어떤가?" 오호 오십 개라? 좋은데, 하지만 난 소탈해서 그렇게 많이는 필요 없단 말씀이야. "음, 금원보 사십 개로 하지요. 그럼 즉시 현물 교환으로 들어갑시다." "아, 알겠네. 흑랑(黑狼)! 금원보 40개를 어서 가져오도록 해라." 피풍의 여인의 이름이 흑랑인가 보다. 그녀를 대략 훑어보니 그래도 늘씬하게 빠지고 반반한 것이 배불뚝이 첩들보다는 쪼끔 떨어지지만, 미인 축에 들 만했다. 단지 안면 이마에 쭉 그어진 검상 흉터가 옥에 티랄까? 아니 뭐 내 입장에서야 더 매력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아무렴 무슨 상관인가! 금원보만 챙기고 나면 두 번 다시 볼일이 없는데, 아니지, 여기서 바로 빠져나갈 생각이니까 마차 좀 태워 달라고 할까? 크크크 그것도 괜찮지. 온갖 잡다한 망상이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흑랑이 들고 오는 금원보 상자가 점점 내 시야에 확대되어 왔다. '오옷, 이제 난 부자다! 내 고향 강남 흥강성으로 돌아가서 내 주루를 차리는 거야. 크흐흐흑, 길고 긴 어둠에서 벗어나 광명의 길을 가게 되는구나!' 세상이 휘황찬란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어디선가 낭랑한 제야의 종소리가 들려 오는 듯했다. 하늘에서는 선녀들이 축하한다고 꽃을 흩날리며 한 눈을 찡긋, 아이 좋아라!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것이야! 이 순간을 기다려 왔던 거야. 카카카카. 막 상자와 지도 쪼가리가 맞바꿔 지려는 순간! 호연지기를 일으키는 청아한 바람 한 줄기가 휘잉 불어왔다. '아, 바람마저 날 축복해 주는구나.' 망상에 사로잡혀 손을 내려다봤는데, 뭔가 허전했다. "어? 어? 어! 어! 아아아아악! 내 보물! 어디 갔어!" "호호호호호! 점소이 오라버니, 선물 고마워요. 내가 다음에 한턱 쏠게요! 호호호!" 회운봉(回雲峰)정상으로 까만 점이 되어 사라져 가는 여인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저주의 메아리가 내 전신을 후들후들 떨리게 만들었다. 상대가 놀라운 경공을 펼치건 말건 중요치 않았다. 내 손아귀에 있던 부귀영화가…… 이토록 허무하게 사라져 가다니! 배불뚝이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상자 속에서 금원보 하나를 꺼내어 내 손위에 올려 주었다. "좋은 거래가 될 수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네. 조촐하게 보일지 모르네만, 화사를 구해 준 보답이라고 생각하게." '조촐하지, 배불뚝이야! 네 개는 더 올려놔야 할 거 아냐!' 그러나, 그런 게 문제가 될 수는 없었다. 오한이 드는 게 뭔가 중요한 것을 잊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뭘까 한참 고민하고 있었는데, 소방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게 느껴져 돌아보았다. "저, 저기." "왜? 무슨 일이야?" "점원 누님이 조용히 할 얘기가 있다고 이층 누님 방으로 오라는데……." "……."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내가 잠시 돈에 눈이 어두워 개 겼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사사삭 지나갔다. 은신(隱身)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력하게 느낀 나는 빳빳하게 굳은 고개를 억지로 돌리며 말했다. "소, 소방, 부탁이 있다." "응?" "나 못, 못 봤다고 전해 줘. 이, 이 순간 부로 난 잠시 피신해 있을 테니. 뒤, 뒤를 부탁해." "흠, 작삼 그 부탁은 들어줄 수가 없어." "왜, 왜! 친구가 이렇게 애걸복걸 부탁하는데 왜 안 된다는 거야!" 턱! 누군가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려 흠칫 놀래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보, 보았……. "으힉!" "그 부탁은 당연히 들어줄 수가 없지. 뒤에 내가 있거덩." 싸늘한 얼음의 여왕, 주령령이 안 그래도 커다란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니 오금이 다 저려 왔다. 옆구리를 엄청난 악력으로 꼬집어 비틀고 있었으나, 한껏 겁을 먹어서 신음 소리조차도 안 나왔다. 일단 비굴하게 나가는 것만이 살길이다. "헤헤헤헷, 오늘따라 령령 아가씨의 미모가 한층 더 빛을 발해서 눈이 부시네요. 정말 하늘나라 선녀(仙女)들이 질투를 하다가 다 목매달아 자살(自殺)해 버릴 것 같아요." "……." 내가 처음으로 령령의 미모를 칭찬해서인가? 조금은 의외라는 듯 놀란 듯한 그녀의 안면에 잠시 동안 살짝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자, 아자자자! 저 얼음 여왕이 웃었어. 나, 난 살았어!' 그, 그러나 정말 잠시뿐이었다. 곧 냉랭하고 한기 서린 그녀 특유의 싸늘함에 장난기마저 배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어디서 모기가 앵앵거리는 거야?" "아니, 아가씨의 빙옥 같은 살결이……." "역시 새벽 모기가 너무 귀찮은 것 같아. 좀 잡아야겠어." "아, 아니, 저기 그게……." "모기를 쫓는 데는 제충국(除蟲菊) 향기가 최고지. 마침 내 방에 있으니 가지러 가볼까나?" "……." 질질질질질……. 귀 한쪽을 그녀에게 꼬집힌 나는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끌려갔고, 협객 중의 협객 곽철 대협은 자꾸 멀디 먼 산봉우리를 쳐다보며 연신 날씨가 좋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방 말로는 장장 한 시진 동안 끔찍한 비명 소리와 우당탕 집어던지는 소리, 퍽퍽 후려 패는 소리가 망아루를 뒤흔들어 식사를 하러 왔던 몇몇 무림인들의 발길을 슬그머니 되돌려 놓았다고 한다. [9]혈해진경(血海眞經)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주령령에게 터질 때면 당장은 아파도 맞고 나면 묘하게 개운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설마 그 방면으로 쾌감을 느끼는 변태성욕자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종종 엄습해 오기도 했다. 하여간 늘씬하게 터진 후 침대 위에 풀썩 쓰러진 나는 못해도 세 시진은 내리 잠을 자 버렸다.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 해는 중천을 훨씬 넘어가 버린 후였다. 물을 떠 와야 한다는 사명감에 옷매무새며 지저분한 머리며 대충 정리하고서 부랴부랴 창고로 뛰어갔다가 창고에서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곤하게 취침 중이던 포연강이랑 마주치게 되었다. "뭐? 물 뜨러 가야겠다고? 오늘은 괜찮아. 그간 자네가 착실히 잘 떠와서 조금 비축이 된 모양일세. 손님도 당분간 없을 테니 푹 쉬어도 좋네. 어이 문 똑바로 닫아. 찬바람 들어오잖아." "……." 이 인간마저 홍 영감한테서 잠 귀신이 옮겨왔는지 툭하면 창고에 처박혀 자려고만 한다. 그나마 홍 영감은 계산대에 앉아서 졸기라도 하지만, 이 녀석은 너무 기본이 안 되어 있다. 뭐 내가 기본 운운하니 우습긴 하지만……. 주루 창가 쪽 탁자에는 제갈혜(諸葛慧) 소저와 소방(蘇芳)이 조촐하게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라 차라? 이 주루에는 차가 없던데? "아, 작삼 일어났구나. 너도 이리 와서 제갈혜 소저가 가져온 용정차(龍井茶) 맛 좀 봐." 소방이 불렀으나, 난 고개를 저었다. 제갈혜가 몹시 껄끄러운 탓이었다. "어찌 일개 점소이가 중원제일지(中原第壹智)라는 제갈혜 소저와 한 식탁에 앉아 다과를 즐길 수 있겠습니까? 즐거운 시간들 되십시오." "괜찮아요. 어제 제가 미심쩍은 게 있었으면서도 도와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기도 하고, 그냥 이 얘기 저 얘기 나누고 싶기도 하니까 이리 와서 앉으세요." 어제 날 의심했던 게 미안했던지 사과 차원에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싶었으나, 맘에 안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지인 소방은 오히려 정이 갔으나, 명문 세가의 여식인 그녀한테는 본능적인 거리낌이 작용하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 잘 만나 호의호식하면서 없는 이들의 서러움 같은 것은 애초부터 모르고 앞으로도 모를 그들이 탐탁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싫습니다. 그 자리는 제게 가시 방석 같아서 서 있는 게 더 편하답니다." 이번 대답에는 칼날을 드러내 버렸다. 아차 싶었지만, 모르는 척 먼 산을 바라보았다. "후후, 이봐요. 점소이 양반." '양, 양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제갈혜 소저에게 돌려버렸다가 질겁해야 했다. 그녀의 오른손에 잡혀 있던 찻잔이 쩡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졌기 때문이다. 거의 령령에 필적할 만한 무서운 힘이었다. 어찌 훅 불면 날아가 버릴 듯한 가냘픈 여인네 손에서 이토록 가공할 위력의 악력이 솟구쳐 오른단 말인가! "점잖게 권유할 때 일루 와서 앉아요. 과거 저를 귀찮게 했던 수많은 사람의 뼈를 똑똑 부러뜨리긴 했지만, 당신은 제 친구의 친구이니 특별히 봐 드리려고 노력하는 중이랍니다. 아직도 멀거니 서 계실 건가요?" 후다다닥. 그녀의 맘이 바뀔 새라 잽싸게 의자에 착석을 했다. 하여간 여인들이란 왜 이리 겉과 속이 다른지 이해를 못 하겠다. 특히 한 인물 한다고 하는 애들이 더 무섭다니까. 제갈혜 소저는 배시시 웃으며 깨끗한 찻잔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용정차는 말이지요. 좋은 것은 그 맛이 달면서도 담백하며, 마신 후에도 한줄기 평화스러운 기운이 솟아 나와, 이와 볼 사이에 그 문미의 맛이 가득하지요. 그 맛을 용정차의 절묘함이라 이른답니다." 난 태어나서 차라는 것을 마셔 본 적이 없다. 당연하다. 끼니 때우기도 간당간당 한 때에 '차'라는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설명해 주는 바를 이해하기 어려웠기에 사실인가 하며 후루룩 마셨다가 그만 입천장과 혀를 데이고 말았다. "오호호, 차를 물 마시듯 단번에 들이키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요. 차란 음미하듯 마시는 거예요. 그 향과 맛을 천천히 느껴 보는 거지요." '제길 이 딴거 마시면서 지랄을 떠느니 편하게 냉수(冷水)나 마시는 게 낫겠다.' 내가 소태 씹은 표정으로 맛없다는 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소방이 웃으며 내 찻잔을 한 번 살짝 쓰다듬었다. 그러자 모락모락 피어나던 차가 차갑게 식어서 본연의 맑은 빛깔을 드러내었다. "원래는 뜨거울 때 음미하며 마시는 것이 좋지만, 시원하게 마시는 것도 나름대로 괜찮아. 다시 천천히 입안에 돌리면서 마셔 봐." 그의 말대로 한 모금 입안에 넣고 혀로 살살 돌리며 그 향과 은밀한 맛을 느껴 보니 썩 나쁘진 않았다. 그래도 역시 내 입맛에는 그저 시원한 냉수가 제격이었다. "평상시 차(茶)란 것을 먹어 본 적이 없어서 뭐라 말하긴 어렵지만, 은은하고 향긋한 것이 나쁘진 않네요. 그런데, 무슨 얘기들을 하고 계셨나요?" "작삼, 네가 궁금해하던 무림인들이 풍악산으로 몰려든 이유가 된 물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지." "엥? 그게 뭔데?" "혈해진경(血海眞經)." 난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럼 아침까지만 해도 내 손안에 있던 종이 쪼가리 지도가 그것을 가리키는 지도였다는 거잖아. 어쩐지 천금대인이건 막패건 눈에 불을 키고 그것을 애지중지 하더니만, 쩝 아깝긴 아깝네. 무지 비싸게 팔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데, 그게 도대체 뭔데, 그렇게 무림인들이 난리를 치면서 찾는 거야?" 혹시 고절한 방중술을 서술한 책이라던가? 환상의 춘화도(春畵圖)? 내 눈이 게슴츠레 야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을 눈치 챈 소방이 헛기침을 하며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무공 기서야. 그것도 삼 백 년 전 천하제일인(天下第壹人)이었던 현현자(炫炫者)가 말년에 얻은 심득(心得)을 네 가지로 분류(分類)해서 남겼는데, 각각 검경, 도경, 권경, 독경이라는 거지.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이 무공들이 펼쳐지면 피바다가 펼쳐진다는 광오한 뜻으로 혈해진경(血海眞經)이라는 이름을 붙였데. 그런데, 그것의 단서가 되는 지도 네 조각이 항간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공통적으로 이 풍악산을 가리키고 있다는 거야. 이제 이해 돼?" 현현자(炫炫者)라? 설마 그 노인네가? 아니겠지. 동명이인(同名異人)이겠지. "그러니까 무공에 대한 욕심으로 몰려들었다는 소리구먼. 무공이 목숨보다 더 소중해서 불나방처럼 죽으러 달려드는 건가? 그러고 보니 너랑 제갈혜 소저도 결국은 혈해진경을 찾기 위해서 온 거로구나." 내 말에 그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역시 무림인은 무림인이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뭐 사람이 욕심이 없을 수야 없지만, 그것 때문에 서로 죽이고 죽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은 별로 맘에 들지 않는 일이다. 제갈혜 소저가 용정차 한 모금을 마시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어차피 비밀로 하기에는 너무 공공연히 드러난 일이니까 말해 드리지요." "……." 말하긴 뭘 말해? 그냥 탐이 나서 왔다고 하면 돼지. "전 무림맹주님의 부탁을 받았어요. 공교롭게도 네 장으로 잘라져 흩어진 혈해진경 지도가 동시에 나타났다는 것은 처음부터 완성된 한 장을 누군가가 갖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요. 그런데, 왜 그는 그것을 나누어서 뿌렸는지 무림맹 상부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자세한 조사를 저를 비롯한 삼룡에게 부탁했어요. 일단은 사실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게 목적이지만, 그게 사실이고, 내 손안에 혈해진경이 있다면 나도 어떻게 행동할지 장담을 못한답니다." 갑자기 처음 듣는 용어들이 쏟아져 나오니 머리가 헷갈리기 시작(始作)했다. 혈해진경에 대해서는 감을 잡았는데, 무림맹(武林盟)이니 삼룡(三龍)이니 하는 것은 무엇을 가리킨단 말인가? "저, 저기 죄송한데, 무림맹이나 삼룡이란 게 무엇을 말하는 거지요?" 제갈혜 소저는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자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망망대해 같은 눈동자에 빠져 허우적거려야만 했다. 헤어 나오기 힘든 늪처럼 나를 빨아들이는 마력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 몸이 나른해지면서 그녀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하고 싶다는 기이한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일어났다. 사태를 눈치 챈 제갈혜 소저가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눈만 멀뚱멀뚱 거리면서 무슨 일이 있었나 다시 생각해 보고 있었다.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난 심안공(深眼功) 이라는 섭혼술(攝魂術)의 비전을 익혀서 정보가 필요한 순간이나, 상대방의 심기를 제압할 때 사용하곤 해요. 마음이 심약한 사람과 정면으로 마주치면 한동안 넋이 빠지게 되는 수도 있어요. 점소이 양반 당신처럼요." 겁나는 얘기였다. 즉 제갈혜 소저가 마음을 먹으면 시야가 닿는 그 누구라도 그녀의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는 소린데, 이거 엄청나게 무서운 가시가 달린 장미였군. "그, 그러면 제갈혜 소저는 남자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겠군요. 소저가 심안공인지 뭔지를 쓴다는 것을 아는 무림인들은 자파의 정보를 보호(保護)해야 하니 얼씬도 안 할 것이고, 소저를 마음에 두는 남자라 해도 언제나 시선을 피해야 하니, 어디 그게…… 아야, 왜 꼬집어? 니가 계집애냐!" 소방이 열심히 눈치를 준 이유가 있었다.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제갈혜 소저의 왼손이 탁자 한 쪽을 부여잡고 덜덜 떨고 있었다. 아담한 분위기가 연출되어야 할 이 자리에 살벌한 그녀의 살기(殺氣)가 넘쳐흘렀다. 실은 그녀의 은근히 아프던 곳을 내가 눈치 없이 제대로 찔러 버린 모양이었다. 콰직! 그녀에게 잡혀 있던 탁자 한 쪽이 산산이 가루가 되어 사방팔방으로 비산되고 말았다. 더불어 그녀의 음산한 음성의 칼자루 방향이 뜻밖에도 내가 아닌 소방에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 이게 다 개방 때문이야! 난 그저 창고 정리를 하다가 재미있는 사파 무공이다 싶어서 몰래 익힌 거였는데, 이놈의 개방이 어떻게 알았는지 중원 동네방네 시골구석에까지 소문내는 바람에 혼사 길 막혀 버린 노처녀 꼴이 됐잖아!" 침착하고 현숙하며 고귀했던 분위기는 다 날라 가고 전신에 야차현신을 한 듯한 그녀의 모습에 왠지 령령의 을씨년스런 모습과 겹쳐져 갔다. 메마른 그녀의 음성에서는 한 글자 한 글자에 죽음의 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제, 제갈혜야 좀 열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대화를 나누자고. 개방에서 소문을 내, 내준 덕, 덕분에 무림 후기지수 구룡(九龍)자리에 네 이름이 들어가게 되고 제갈세가(諸葛世家)의 위상도 많이 올라갔잖아." 소방의 목소리가 심히 떨리고 있었지만, 내 옆구리를 쥐어뜯듯 꼬집고 있는 그 녀석의 손에는 힘이 더더욱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 녀석의 힘이 령령이나 제갈혜에 비해 약해서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 그래 좋다, 좋아. 싸워라 싸워 우후훗. 싸움 구경은 언제나 즐겁기 그지없단 말이야. "그딴 거 다 필요 없어. 다 물러 줄 테니까 내 남자 친구나 삐까번쩍한 걸로 구해 놓으란 말이야! 그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오던 매파가 이젠 한 건도 안 들어와! 중매쟁이들도 나만 보면 십리 바깥으로 도망가 버려! 내 옆구리가 허전하면, 네 주변도 허전할 줄 알아! 내 심안공으로 전력을 다해서 훼방 놔주마!" 제갈혜는 그 말을 하면서 웬 일인지 나를 흘겨봤다. 후미 무서운 거, 눈빛이 장난 아니게 살벌하네. 어라? 이번에는 의외로 소방도 살기를 흘리네. 이 사람들이 미쳤나!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날 살기로 압사시킬 일 있나! "참, 룡(龍)이라니? 여자들한테는 대신에 봉(鳳)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는 거 아냐?" 내가 이 말을 하자 그녀들의 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재빠르게 내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이젠 날 질식사시키려는 것인가! 숨이, 숨이……. 슉 슉 슈슈슉!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은 복면을 한 흑의인들이 주루 주변에 연기처럼 솟아오르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좍 좍 빠진 몸매인 것으로 봐서 전원 여성으로 이뤄진 비밀 요원들 같았다. 그들 중 대장인 듯한 여인이 창가로 고개를 내밀며 제갈혜와 소방에게 질문을 던졌다. "수상한 냄새가 포착되어 파견 나왔는데, 혹시 이 근처에 불경한 언사를 던진 사람이 있지 않았습니까?" 질문을 받은 그녀들은 그냥 잠자코 고개를 좌우로 앙증맞게 도리도리 흔들었다. 복면 여인은 내가 일개 점소이인 것을 보고는 그냥 쓱 지나쳤고, 복면 비밀 요원들도 곧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들이 가고 나서야 제갈혜와 소방은 조심스럽게 막았던 내 입에서 손을 뗐다. "앞으로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소방이 주의를 주듯 내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 내가 궁금해하는 듯한 의문스런 눈빛을 흘리자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방금 그 여인들은 '여성 감찰부'라는 황제 산하 특수부대인데, 양성 평등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끌고 가서 구층 지하 감옥에 구금하는 일을 하기도 하고, 수시로 황제에게 직접 발견한 양성 불평등 사항을 법으로 고치도록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기도 해. 그들의 권력은 그야 말로 무소불위(無所不爲) 그 자체야. 알았으면 말조심하라고." 난 고개를 끄떡끄떡하면서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여성 감찰부가 있으면 남성 감찰부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거야말로 일방적으로 불평등한 것 아닌가?' 입 밖으로 말하고 싶었지만, 또 복면 비밀 부대 요원들이 나타날까 봐 입을 꼭 봉해야만 했다. 다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되돌아가서 내가 의문을 제기한 부분에 대해서 제갈혜 소저가 설명을 해주었다. 현 세계의 강호(江湖)에는 구파일방을 위시한 정파(正派) 무림과 마교, 배교, 혈교를 주축으로 한 사파(邪派) 무림으로 양분되어 있다고 한다. 같은 무림이지만, 무공의 연원이 다르고 이해타산이 엇갈려 수시로 칼부림이 일어나기에 이를 중재하기 위해 정파 무림에서는 무림맹(武林盟)이, 사파 무림에서는 마황맹(魔皇盟)이 등장했다. 사파에는 최강의 고수라 불리는 육마(六魔)가 있다면, 정파에는 이에 지지 않는 고수들인 십성(十聖)이 있고, 마황맹(魔皇盟)에는 최강의 부대라는 귀령대(鬼領隊)가 있다면, 무림맹(武林盟)에도 최강이라 불리는 정의수호대(正義守護隊)가 존재한다. 이외에도 경쟁하듯 서로 간에 일방적인 서열을 붙인 게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느 정도 정사교류(正邪交流)차원에서 정사 공통 후기지수를 뽑아 통칭했으니 이를 구룡(九龍)이라고 불렀다. 마룡(魔龍) 사마장령(司馬將靈), 마황맹의 소맹주로 사파 신진고수중 최강의 도객이라 불린다. 광룡(狂龍) 곽철(郭鐵), 종남파의 수제자로 검에 미쳐서 비무를 위해 천하를 떠도는 절정고수. 풍룡(風龍) 종리연(鐘理戀), 무영투도라는 명칭을 가진 천하에서 가장 빠르다는 도둑이다. 백룡(白龍) 남궁현(南宮炫), 남궁세가의 맏아들로 강맹한 제왕검법을 사용하는 검객이다. 화룡(火龍) 모용천풍(募容天風), 점창파의 수제자로 점창파의 최고 절기인 사일검법을 능통하게 사용. 빙룡(氷龍) 빙예운(氷銳雲), 북해빙궁의 공주로 여중 제일 고수라 불린다. 해룡(海龍) 제갈혜(諸葛慧), 제갈세가의 여식으로 무술보다는 책략이나 진법에 능하다. 흑룡(黑龍) 일수필살(壹手必殺), 살막의 살수로 이름이건 성별이건 비밀에 쌓여 있다. 잠룡(潛龍), 개방의 신진 고수로 이 또한 밝혀진 바가 없는 개방의 극비 사항이다. "그럼, 나는 그 중에서 광룡, 백룡, 해룡, 화룡 을 본 셈이네. 우와 많이도 봤네." 그러나, 제갈혜 소저가 내 말에 이의를 제기했다. "아까 전에 또 한 명 봤잖아요. 지도 조각을 채간 고수, 그녀가 바로 풍룡 종리연이예요." "끄응, 다음에 보면 기필코 금원보 사십 개를 물어내라고 해야지. 쳇." 내가 투덜거리자 그녀는 고소하다는 듯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당신은 다섯 이상의 구룡들을 본 거예요." 다섯이면 다섯이지 다섯 이상은 또 뭐람. 아무렴 무슨 상관이야. 갑자기 소방이 차를 마시다가 사레에 걸렸는지 켁켁 거렸다. 사내 녀석이 무지 섬세하게 군다고 투덜거리면서 그의 등을 톡톡 두들겨 줬다. 아무렴 무슨 상관이야. 아홉 마리의 용이건 아홉 마리의 미꾸라지 건 나랑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 난 남은 용정차를 마저 마시며 그 마지막 은은함을 만끽했다. 그러나, 한마디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니 뭐니해도 시원한 냉수 한 잔이 부담 없고 편해서 좋아." [10]점소이 무공 입문 그로부터 나흘 뒤 제갈혜 소저는 다른 일행과 만나기 위해 구룡봉(九龍峰)으로 걸음을 옮겼고, 곽철 대협은 망아루를 스쳐 갈 고수를 기다리며 이층에 계속 거하고 있다. 원체 말이 없는 사람이라 무지하게 재미가 없었지만, 다행히 소방이 밥 먹기 편하다는 이유로 남아 말벗이 된 관계로 심심하지는 않았다. 지난 며칠간은 강호 정세나 혈해진경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들으며 지냈지만, 역시 난 보통 사람이라 무림 얘기는 너무 지겨웠다. 웬 일인지 손님이 며칠 간 안보여서 포연강은 창고에 처박혀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자기 일쑤였고 홍 영감은 언제나처럼 졸면서도 계산대를 지키고 있었다. 단지 주령령은 자기 방에 있는지 어디 나갔는지 보기가 어려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무지하게 심심했다. 체력이 좋아졌는지 물지게 나르기도 아침에 일어나서 조금만 수고하면 두시진 안에 일이 끝났고, 손님이 없는 날은 그냥 남는 게 시간이었다. 그래서, 시간 때우기로 뭔가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게 되었다. "소방." "앙? 왜?" "나 무공 좀 가르쳐 주라. 이왕이면 그냥 간단하게 써먹을 수 있는 걸로……." "휴우, 간단하게 써먹을 수 있는 게 어디 있냐? 일조일석에 배부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단지 일단 간단하게 배울 수 있는 것은 있어. 뭐 성취는 네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가 관건일 뿐이야." 오호, 뭔가 괜찮은 무공인가 본데. 그럼 재미 삼아 배워 볼까나? "무공 이름이 뭔데?' 호기심에 가득 차 눈빛을 반짝이며 물어 보았다. "삼재검법(三才劍法), 배워 두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어. 내공도 필요 없고 한마디로 너한테 적절하다고 할 수 있지. 열심히 배울 생각이 있긴 한 거야?" "물론이지. 야, 야 어서 가르쳐 주라." "그러려면 네가 배우는 동안 날 사부로 모시면서 깍듯이 모셔야 해." "……." "항상 사부라고 부를 필요도 없어. 배우는 그동안만은 내 말에 꼭 따라야 해. 약속하지 않으면 가르쳐 줄 수 없어." 뭔가 좀 귀찮은 과정이 있나 보다. 왠지 거부감이 슬슬 일어나는 게, 소방 말은 저렇게 하면서 눈이 징그럽게 웃고 있는 게 어찌 껄쩍찌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찌 하리? 무공을 가르쳐 줄 인간이 이 녀석 밖에 없는 것을! "알았다. 사부, 뭐부터 시작해야 해?" "험, 험 원래는 구배지례(九拜之禮)를 해야 하지만, 그냥 간소하게 세 번만 나한테 절을 해라." "……." "나 안 해." "아이고, 사부님, 절 받으십시오." 즉시 그에게 세 번 정확히 엎드려서 절을 했다. 나보다 나이도 예닐곱 살은 어려 보이는 게 친구 하자고 할 때는 기가 차면서도 재미있어 보여서 해줬는데, 이젠 아예 내 머리 위에서 놀려고 한다. 어이구 다 배우기만 해봐라. 다신 이런 짓 안 한다. "좋아, 삼재검법의 묘리를 가르쳐 주지. 잠시만 기다려 봐." 소방은 주루 난간 틈새 사이를 뒤적뒤적하더니 자기 키보다 조금 작은 새까만 철봉을 꺼내 들었다. "지난번에 싸움 구경 갔다가 이것만 주워 왔어. 원래는 이렇게 짧은 것이 아니라 길었던 것일 텐데, 아마 쾌도의 도강에 잘려 버린 모양이야. 절단면이 매끈하거든." "잠, 잠깐 그거 죽었다는 무림인들이 쓰던 거 아냐? 그 걸 검 대신 쓰라고? 사부?" "그래, 진검을 쓰기 이전에 연습용 무기로 쓰기에 딱 좋아. 네 팔 힘을 기르기에도 딱 안성맞춤이야. 무공을 배우겠다는 녀석이 설마 그런 자질구레한 것에 신경을 쓴다면 실망이야." "끄응, 알았어, 알았다고. 사부 마음대로 해." "일단 시범부터 보여주지. 삼재검법은 총 32개의 초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하나하나는 지극히 간단하면서 단순한 동작들이지만, 이 모든 초식들을 하나로 연결해서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된다면 자기 몸 하나 지키는데 부족함이 없게 돼. 검을 펼칠 때 작삼, 우선 항상 염두에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해. 첫째는 공방일치(攻防一致)야. 공격과 수비가 끊임없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진행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 둘째는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해. 이는 파문이 없는 조용한 수면 같은 마음을 일컫는데, 솔직히 쉴 새 없이 잔머리를 굴리는 작삼 너한테는 어려운 일일지도 몰라. 그래도 잊지 마. 상념이 없는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검을 휘둘러야 제대로 된 삼재검법의 진가가 발휘될 수 있으니까. 자, 잘 봐 둬." 과연 무공이란 어떤 것인가? 난 그 첫 길목에 서 있음을 실감하며 두 눈을 똑바로 치켜떴다. "소진배검(蘇進背劍)!" 소방은 왼손으로 철봉 끝을 거꾸로 쥐고 직립부동 자세로 되어 조용하게 전방을 바라보면서 오른손은 검결지(劍訣指)로 해서 팔을 뻗어 몸의 측면에 자연스럽게 두었다. 칼을 뽑기 전 경계를 취하는 자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검결지(劍訣指)라고 하는 것은 검을 쥐지 않는 손이 항상 취하는 형태로 집게와 중지 손가락은 곧게 펴고 나머지 손가락을 구부려 모으는 것을 말한다. "선인지로(仙人指路)!" 이번에는 오른발에 체중을 걸어서 무릎을 약간 구부려서 왼발을 전방으로 내서 발끝을 가볍게 세워 오른손의 검결지를 정면 코 높이로 천천히 내밀었다. 이어서 몸을 왼쪽으로 돌리면서 왼발의 무릎을 높이 올려 검을 쥔 왼손으로 올린 무릎의 주위를 후리고 오른손은 검결지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밑에서 돌려 어깨 위로 이동시켰다. 왼발을 전방으로 내딛어 궁전식(弓箭式)으로 하고 오른손의 검결지를 앞의 코의 높이로 찔러 내었다. 한마디로 왼손이 공격을 펼치면 오른손이 역으로 회전하여 몸의 무게 중심을 잡아 주면서 혹시 있을 기습에 대비한 방어를 하는 듯했다. 공방일치가 그대로 드러난 초식이었다. 그 이후에 검이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바뀌었지만, 이어진 나머지 초식들도 간결하면서 언제나 공격과 방어가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금침암도(金針暗渡)!" 오른발에 체중을 옮겨서 패식(敗式)으로 되고 검을 쥔 왼손을 명치 앞에 수평으로 두고 검의 자루를 오른손으로 밑에서부터 잡았다. "나탁탐해(　　探海)!" 전 식에서 검을 오른손에 바꿔지고 전방 하단에 찔러 넣어 왼손을 검결지로 해서 머리 위에 쳐들었다. "회두망월(回頭望月)!" 왼발을 일보 내디뎌 왼쪽 무릎을 떨구어 뒤쪽에 돌아서며 검을 후방 비스듬히 세워서 오른손의 검결지를 왼쪽 손목의 안쪽에 대었다. "한망충소(寒芒沖宵)!" 일어서서 검을 비스듬히 찔러 내서 왼쪽 검결지를 비스듬히 아래쪽으로 찔러 냈다. "이산도해(移山倒海)!" 왼발을 앞으로 내디뎌 허리를 약간 떨구면서 검을 위에서 내리치고 오른발을 내디뎌 왼발과 나란히 하고서 좌측 검결지는 오른손의 안쪽에 대었다. "지일고승(指日高昇)!" 오른발, 왼발의 순으로 물러서서 양발을 나란히 하고 검을 비스듬히 세워서 허리에 겨누고 왼손을 머리 위에 올렸다. "청룡탐조(靑龍探爪)!" 왼쪽 무릎을 올려서 몸을 비틀고 검을 위에서 돌려 비스듬히 전방에 내었다. "발운담일(撥雲膽日)!" 왼발을 비스듬히 앞으로 내려 검을 오른쪽 비스듬히 상방으로 내었다. "우밀휘진(羽密揮塵)!" 왼발은 움직이지 않고 오른발을 뻗어서 위로 올려 검을 오른발과 평행하게 당겨, 왼손은 검결지를 그대로 오른손과 같은 동작을 했다. "백사토신(白蛇吐信)!" 오른발을 앞으로 내려서 왼쪽 무릎을 땅에 붙여 검을 전방으로 찔러내, 왼쪽 검결지를 검의 움직임에 맞추어서 찔러냈다. "고월침강(古月沈江)!" 몸을 뒤로 빼고 허리를 떨구면서 검을 뒤로 당겨서 왼손도 검의 움직임에 맞추어서 뒤로 당겼다. "회포옥병(懷抱玉屛)" 몸을 얕게 한 채로 왼발을 전방으로 내디뎌서 발을 교차시켜 팔을 가슴 앞에 당겨서 검을 옆으로 하고 왼손을 오른손목의 내측에 대었다. "진량가해(津梁架海)!" 오른발을 오른쪽으로 내디디고 일어서서 양손을 펼치듯이 뻗어서 검을 찔러 내었다. "고수반근(古樹盤根)!" 오른발을 왼쪽으로 물러서면서 검을 휘둘러 비스듬히 아래로 쳐 내리고 왼손을 왼쪽 위로 올린다. "공녀인침(功女　針)!" 오른손을 가슴 앞에 당겨 검을 올리고 왼발을 뒤에서 왼쪽으로 냈다. 우측 무릎을 올려서 왼발로만 서면서 우측 비스듬히 전방으로 몸을 돌려 양손을 헤쳐 놓듯이 휘두르며 검을 당긴다. 오른발을 전방으로 내딛으며 내려 검을 찔러 내서 왼손도 오른손의 움직임에 맞추어 검결지를 앞으로 향해서 찔러 냈다. "삼환투월(三環套月)!" 손목을 내측에서 세 번 돌려서 검 끝을 돌렸다. "맹호희산(猛虎戱山)!" 오른발을 비스듬히 뒤쪽으로 내디디면서 검도 동시에 당겨서 머리 위로 쳐들어 검 끝을 뒤로 향하게 했다. 왼손은 오른손목에 대었다. 이 자세를 유지한 채로 이 보 전진하여 다음의 풍권잔운에 들어갔다. "풍권잔운(風捲殘雲)!" 몸을 왼쪽돌기로 비틀어 허리를 떨구어서, 좌반식(坐盤式)으로 해서 검을 위쪽으로 찔러 내었다. "대붕전시(大鵬展翅)!" 오른발 하나로 일어서서 왼쪽 무릎을 높이 올려 몸을 왼쪽으로 벌리면서 검을 비스듬히 아래로 쳐 내렸다. "이어타정(　魚打挺)!" 왼발을 뒤로 내리면서 검을 약간 당겼다. "어룡번신(魚龍飜身)!" 몸을 우로 벌리면서 왼발을 오른쪽에 옮겨서 발끝을 세워 검을 돌려서 비스듬히 아래쪽으로 내렸다. "순수추주(順水推舟)!" 오른발을 앞으로 내디뎌 오른손을 전방으로 찔러 내고 수평으로 두었다. "주마관산(走馬觀山)!" 왼발을 일보 내딛고 다시 오른손을 찔러 낸다. 그대로의 자세로 우회전으로 걸어서 반원을 돌아 시작 때의 반대쪽에서 멈추었다. "엽리장신(葉裡藏身)!" 왼발에 체중을 걸어서 오른쪽에 몸을 돌려 오른발을 앞으로 내서 발끝을 세워 오른손을 젖혀서 검을 비스듬히 겨누고 왼손을 오른손목에 대었다. "독헐반미(毒歇反尾)!" 오른발의 무릎을 왼발의 뒤로 떨구어서 몸을 내리고 오른손을 밑에서 돌려 검을 밑에서 쳐 올리면서 왼손은 왼쪽 머리 위에 쳐들었다. "흑호좌동(黑虎坐洞)!" 왼발에 체중을 걸어서 몸을 일으켜 오른발을 앞으로 내고 발굽을 뜨게 해서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청룡출수(靑龍出水)!" 오른발을 내디뎌 검을 앞으로 찔러 내며 왼손을 위로 쳐들었다. "엽리장신(葉裡藏身)!" 오른발을 당겨 발굽을 띄워서 왼발에 체중을 걸고 오른손을 젖혀서 검을 비스듬히 내렸다. "독헐반미(毒歇反尾)!" 우측 무릎을 왼발의 뒤로 떨구어서, 검을 밑에서 돌려 쳐 올렸다. 이로부터 다시 흑호좌동, 청룡출수, 엽리장신을 반복하여 행하고 다시 또 독헐반미를 행하여 다음의 비홍횡강에 들어갔다. "비홍횡강(飛虹橫江)!" 소방은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키면서 검을 밑에서 돌려서 왼쪽으로 복귀시켰고, 오른발을 크게 앞으로 일보 내디뎌서 검을 위에서 돌려 쳐 내리며 삼십이 초식을 끝맺었다. 난 처음으로 제대로 된 검법을 봤으므로 조금은 기쁜 마음이 들었다. 비록 시간 때우기로 하는 거라 해도 말이다. 삼재검법(三才劍法) 삼십 이 초식을 천천히 펼쳐 보여준 소방은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마무리지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공방일치(攻防一致)와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 자세를 절대 잊지 말고, 항시 새기면서 초식들을 펼쳐야 해. 익숙해지면,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그대로 따라야 제대로 수련했다고 볼 수 있지." "히야, 소방, 개방에서 말단 백의개 라면서 너무 잘 하는데, 너 도장 하나 차려도 되겠다." 정말 세심하게 펼치는 자세 하나하나에 녹녹치 않은 힘과 기상이 느껴졌고, 소방 특유의 부드러움이 가세되어 검법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딱! "아야! 왜 때려 소방?" 그것도 무식하게 철봉으로 치다니 잘못해서 뇌진탕이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라고! "사부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어떻게 해? 말했잖아. 가르치는 동안은 사부라고 아예 말도 존대로 깍듯이 해. 명심해! 이런 절기는 아무한테나 함부로 전수하는 게 아니야. 너니까 특별히 알려주는 거지. 함부로 자파의 절기를 누설했을 때는 파문뿐만이 아니라 단전이 파괴당해. 더 심한 경우에는 팔이나 다리가 잘리기도 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게 돼." 소방이 자못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덜컥 겁이 났다. 나로 인해 소방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는데, 듣고 나니 문제가 심각했다. 무림에서 자파의 무공이 외부로 세면 강력한 책임 추궁이 뒤따른다는 말을 언뜻 들은 것도 같았다. "끙, 몰, 몰랐어……요, 사부. 그냥 안 배운 걸로 치고 없는 일로 하면 안될까……요?" 겁도 났지만, 소방이라는 귀여운 소년 친구에게 해가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없는 일로 하고 싶었다. 부담 가는 일이 생기는 것은 딱 질색이니까. "바보! 이미 난 가르쳐 버렸어. 그리고, 남자가 배우겠다고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지. 겁부터 내? 네 가운데 달랑이는 거 콱 잘라 줄까!" 아니, 아니면 됐지. 왜 내 가운뎃다리한테 시비야? 그러고 보니 화사랑 나랑 하는 거 훔쳐보고 나더니만, 눈빛이 질시 내지는 멸시하는 것 같은데? 같은 남자끼리 너무 하는 거 아닌가? 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쩨쩨하게 시리. 속으로 궁시렁거리던 나는 뭔가 번뜩이는 게 있어서 무릎을 탁 쳤다. 바로 그거였다. 자긴 아직 동정을 유지하고 있는데, 내가 먼저 총각 딱지를 떼버렸다고 그러는 것이었다. 크크크 내 그 마음 알지. 친구들이 누구누구랑 잠을 잤네, 속살이 죽여줬네 할 때 얼마나 부아가 치밀고 이가 갈리던지. 마음이 바다같이 넓고 깊은 내가 이해를 해야지. 아니지 이 참에 같이 기루나 가볼까? 천금대인한테 받은 금원보를 전당포에서 은전 오백 냥으로 바꾸고서 그 중에 한 백 냥만 써도 하루 잘 놀고 예쁘장한 기녀를 소방에게 붙여 주고 나도 나대로 따로 가서 밤새, 끄으, 좋다. 좋아. "저어, 사부님." "왜 그러느냐? 제자야?" 어쩔시구리. 내가 좀 치켜 줬다고 너무 재는데, 이거 관둬? 에라 그래도 가운뎃다리 자르느니 마느니 하는 말은 듣지 말아야지. "있다가 서안 시내에 있는 기루 한 번 가 볼까요? 아예 이참에 스승님 딱지도 뗄 겸 겸사겸사 해서 말이지요. 아, 돈은 제가 낼게요. 어때요?" 소방의 안면이 붉어지는 게 왠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듯 싶었다. 그럼, 그럼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게 이런 게 아니겠어? 나도 기루 구경 좀 해보자. 케케케케. 딱! "악! 왜 그래요? 사부? 아 막말로 사부님도 한 번 가보고 싶을 거 아니에요?" 딱! 따다다다다닥! "끄아아아악! 아 정말 솔직하게 그냥 가고 싶다고 말하지. 정말." "에라 머리에 이상한 것만 든 놈 같으니! 그런 데로 머리 굴리지 말고, 삼재검법이나 완전히 외워. 오늘 내로 다 외워야 해! 알겠느냐?" "끄응, 예 사부." 처음에는 정말 시간 때우기로 할 량이었는데, 지금은 소방이 파문 운운하면서 목숨을 걸며 가르친다고 하니 미안스럽기도 하고, 못 외우면 앞마당 포복으로 오십 바퀴라는 말에 귀찮을 것 같기도 해서 당분간 열심히 해보기로 했다. 소방이 다시 삼재검법을 두 번 더 반복해 줬고, 어설프게나마 기억한 나는 주춤주춤 따라 했다. 자칭 사부라 우기는 그가 옆에서 보고 있다가 교정을 해줬고, 종종 너무 못한다며 철봉으로 머리를 치기도 했지만, 꾹 참고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나서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저 올 때가 되서야 겨우 간신히 안보고 혼자 할 수준이 되었다. 대신 전신이 땀으로 얼룩이 져서 시큼한 땀 냄새가 배이고 말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첫날치곤 잘 했어. 작삼. 내려가서 좀 씻어 내고 와." 소방도 가르치는 게 좀 힘들었는지 땀으로 누더기 옷이 젖어 있었다. "이젠 소방이라고 불러도 돼?" "응." "휴우, 정말 독하게도 가르친다. 너도 땀투성이야. 같이 소장강에 가서 목욕이나 하면서 등이나 밀어 주자." 난 정말 선의에서 순수하게 꺼낸 말이었는데, 소방 녀석은 당혹스러웠는지 허둥지둥 볼 일이 있다며 사라져 버렸다. 하기야 개방에서 놀라고 그냥 보내 줬을 리는 없을 테니, 괜히 나한테 시간을 할애해서 바쁘게 된 것이 분명했다. 고마운 녀석, 그나저나 자파의 절기를 나한테 알려줬으니 일신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어휴. 정말 너무너무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안 한다고 했는데 부득부득 우겨서 강제로 배우게 하다니. 내 훗날 삼재검법을 통달하여 무림 고수로 이름을 날리게 되면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11]월하미인(月下美人) 목욕(沐浴)을 하기 위해 수건 하나를 목에 둘렀고 겸사겸사 빨래도 할 겸해서 갈아입을 여벌옷을 하나 더 챙겼다. 산자락을 타고 콧노래를 부르며 내려올 때 즈음해서 시뻘건 저녁노을 대신 은은하면서 교교히 빛나는 달빛이 세상을 뒤덮었고, 해가 떨어진지 얼마 안 되었기에 급격히 차가워진 산골짜기를 타고 시원한 산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 땀에 절은 내 심신을 달래 주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밤 짐승들이 하나 둘 자유를 만끽하며 활보를 하기 시작하면서 뭔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구슬픈 밤새 소리와 외로움을 달래는 듯한 늑대 울음소리에 휘이잉 몰아치는 바람소리, 바람에 흩날려 바스락 바스락 장단맞추는 낙엽 소리가 어울린 밤의 합주가 풍악산 일대를 메아리 쳤기에 그 음산함이란 이루 헤아리기 힘들었다. 머리카락 끝이 쭈삣쭈삣 섰고, 닭살이 다다다다닥 돋았으며, 수련을 하여 흘린 땀 대신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아직도 풍악산의 밤길은 내 가슴 속 한편에 무시무시한 추억을 남기고 있었기에 좀처럼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소방한테 같이 가자고 한 이면에는 밤길에 대한 두려움도 없잖아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이래서 목욕은 물 뜨러 내려가는 새벽이나 아침에 해 왔었는데, 괜히 무공 가르쳐 달라고 집적거리다가 이게 무슨 꼴이람. 앞으로도 수련 후에는 밤에 목욕하러 내려와야 할 거 아냐? 아 짜증난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두려움을 떨쳐 내기 위해 콧노래를 더 크게 불렀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백거이의 비파행(琵琶行)중 한 소절을 따와서 거리 악사가 곡을 만들어 부르는 사랑 타령 같은 것이다. 백거이란 사람이 귀양살이를 가서 어느 포구에 이르렀는데, 마음이 동하는 비파 소리가 들려 와 사람을 보내 그 기녀를 불러 같이 대작을 하면서 비파를 타게 했다고 한다. 기녀의 얘기를 들어보니 과거에는 한 인물 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어 옛날 생각이 난다는 푸념 같은 것이었다. 백거이가 문득 기녀를 보니 아직 미색이 출중해서 꼬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기녀를 달래는 시를 육백 십육 자로 지었는데, 이를 비파행(琵琶行)이라 한다. 곡 또한 비파의 애절하고 처량한 음률을 십분 살려 사랑하는 연인(戀人)들이 눈을 마주치며 부르면 주변 사람들이 급살맞기 딱 좋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외기러기 신세인 내가 이 음산한 야밤에 낙엽을 밟으며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지난번의 처녀 귀신 소동이 주령령의 엽기적인 취미의 한 일각으로 귀결되었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총각이 아니니 직접적으로 처녀 귀신의 습격을 받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진. 짜. 처. 녀. 귀. 신을 달래기 위해 좀 배워 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하지. 크크크, 이젠 적어도 처녀 귀신이 날 덮치지는 않겠지.' 흥이 나서인지 이젠 콧노래가 아닌 곡을 직접 부르면서 산비탈을 구비 구비 당당히 돌아 풀숲 지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평소에 단골로 애용을 하던 소장강 근처 물웅덩이로 가서 걸치고 있던 땀에 절은 마의를 훌훌 벗어서 빨래부터 했다. 한참을 물에 넣었다가 뺐다가 비비고 헹궈서 깨끗해지고 나서야 물가 돌무더기 위에 마의를 널어놓고, 본격적인 목욕을 위해 차가운 물웅덩이 속에 몸을 담갔다. 늦가을을 타서인지 강물이 시리기 그지없었으나,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들고 온 수건으로 온 몸에 쌓인 먼지와 땀들을 씻어 내었다. 머리도 깨끗이 감은 후 천천히 물웅덩이 가운데로 몸을 밀어 넣어 유유히 잠수를 탔다. 아침 정도만 되어도 맑은 물속이 시야에 들어왔을 텐데, 아무리 보름달이 떴어도 밤은 밤인지라 보이는 게 없었다. 다만 물속에서 올려다보는 보름달의 아름다움은 이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신선함을 안겨 주었다. 해가 떠 있을 때는 볼 수 없는 그런 숨겨진 아름다움, 어둠만이 드러내 주는 신비스런 아름다움이랄까? 물결의 출렁임을 따라 달도 같이 출렁거렸고, 내 손의 휘저음을 따라 달도 같이 휘저어 졌다. 땅위에서는 멀게만 느껴지던 달이 물속에서는 손에 잡힐 듯 말듯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물 밖으로 나와서 수건을 꽉 짜내어 몸을 대강 닦고, 갈아입으려고 여벌로 가져온 옷들을 주섬주섬 걸쳤다. 돌무더기 위에 걸친 옷들에 손을 뻗치려던 찰라 인기척이 부스럭 들려 와서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헉! ……귀, 귀신?' 그곳에는 숨을 가쁘게 내쉬는 미녀가 한 손에는 피가 진득하니 묻어 내리는 장검을 꼭 부여잡고서 반대편 무릎을 세운 채 앉아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백의 경장 곳곳이 찢겨지고 피가 흐른 듯 드문드문 붉은 색을 띄고 있었으며, 심한 낭패를 보았는지 옷섶이 풀려서 흘러내린 고름 사이로 새하얀 가슴이 멀거니 드러나 있었다.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돋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몹시도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보아 호의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귀신은 아니로군. 보나마나 무림인들끼리 혈해진경 지도 쪼가리를 놓고 싸우는 중이었을 테지. 나를 경계하는 이유는 나 또한 무림인으로 착각하고 있음일 테고……. 후훗, 보름달 아래 가슴을 드러내고 피를 흘리는 미녀라, 매우 좋은 구경 꺼리렷다.'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자 여인은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는 듯 당혹스러워 하며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한동안 나를 노려보던 그 여자는 무엇을 느꼈는지 부르르 떨다가 내가 물장구치며 놀았던 물웅덩이 속으로 소리도 없이 모습을 감췄다.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남화건(南華巾)을 눌러쓰고 남청색 도복을 입은 도사 세 명이 월광(月光)에 번뜩이는 칼을 들고서 지면을 박차며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달이 밝아 그들의 안면이 똑똑히 보였기에 나와 초면이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내가 득도의 경지에 다 달아 입신지경에 몰입하게 된 것을 보기 좋게 깨뜨리고 정신이상자 취급을 했던 무림인들이었던 것이다. 서로 감정 상할 일은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그렇게 유쾌한 추억은 아니었다. 그들 중 맏이로 보이는 중년인이 나에게 정중히 포권을 하며 질문을 던져 왔다. "공자, 말씀 좀 여쭙겠소. 혹시 백의 경장을 입고 도망가는 여인을 보지 못했소?" 역시 쫓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공자란 말을 들으니 절로 우쭐한 마음이 들어 나 또한 친절하게 응대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봤습니다. 몹시 낭패스런 몰골이더군요." "오오, 잘 되었군요. 혹시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아주 잠시 동안 갈등을 했다가 곧 손가락으로 소장강 건너편을 가리켰다. 다수가 한 명을, 그것도 여자를 뒤쫓는다는 것이 맘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감사하오. 저희는 급히 요녀(妖女)를 잡아야 하니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명의 청의 도사들은 소장강 수면을 퉁기며 건너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요녀(妖女)라니?'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서서히 올라올 무렵, 물웅덩이 속에 들어가 배를 깔고 숨어 있던 여인이 물 밖으로 솟구쳐 오르며 급한 숨을 몰아쉬었다. 몇 차례 숨을 고른 그녀는 황망히 서 있는 내 완맥을 확 낚아채더니 코웃음을 치며 내 뺨을 철썩철썩 갈기는 것이었다. "고고한 척 서 있기에 한 수가 있는 고수 인줄 알았더니 고수는커녕 무명 잡배도 못 되는 보통 사람이었구나. 왜 아무 말도 안 했지?" 역시 소갈머리가 바가지인 년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도사들에게 정확히 물웅덩이를 가르쳐 주는 거였는데,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저, 저한테 안, 안 물어 보셔서 그냥 가만히 있었는뎁쇼." 여인은 기가 막히다 는 듯 깔깔거리며 웃다가 다짜고짜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벗어." "네? 뭐, 뭐라 굽쇼?" 난 잘못 들었는가 싶어 재차 물었다가 싸대기를 또 철썩철썩 맞았다. "옷 벗으라고. 세 번 말하게 하면 니 항문에 칼침 놔 버린다." 주저 없이 옷을 훌러덩 훌러덩 남김없이 다 벗어 버렸다. 이번에도 여인은 어이가 없었는지 다 벗은 내 몸을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감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서 한다는 말이 또 가관이었다. "누가 냄새나는 고쟁이까지 벗으랬어? 생겨 먹은 것은 그냥 그저 그런데, 몸은 좀 단련한 티가 나는군. 특히 가운뎃다리 단련을 열심히 했나 보구나. 그래? 안 그래?" "……." "어쭈, 개기네. 가운데 다리 단련을 열심히 했냐고? 엉? 내가 지금 몇 번 물어 봤지?" 아이고, 이거 개차반 같은 령령이 성질하고 오십보백보네. 혹시 자매지간 아닌가? "별, 별로 신경 못썼는뎁쇼." "웃기네. 열심히 용두질 한 티가 나는구만. 안 했다고 시치미를 떼고 지랄이야! 지랄은!" 빨간 앵두 같은 입에서 시궁창보다 더러운 말이 쏟아져 나오는걸 예전에 봤으면 반미치광이가 됐을지도 모르지만, 주령령의 화끈한 입심 덕택에 단단히 단련이 되어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자 열을 받았는지 갑자기 오른손으로 내 가운뎃다리와 계란을 우악스럽게 쥐는 것이 아닌가! 그 손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나는 초죽음이 되었고, 그렇게 일각 동안이나 반복하다가 입에 거품을 물자 겨우 놔주는 것이었다. "흥, 단련이 덜되었구만." 날 비웃은 그녀는 걸치고 있던 피로 얼룩덜룩 진 백의 경장을 고의만 남기고 다 벗어버렸다! 그야말로 월하미인(月下美人)이 따로 없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 전라가 된 여인은 혁낭에서 금창약을 꺼내어 내 발치에 던져 주었다. "발라." "네? 무엇을요?" "……." 잠시 부들부들 떨던 그녀는 역시 전라인 나를 마구잡이로 패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타당하는데 웬만큼 단련이 된 나로 써는 별로 아프다는 고통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단련도 단련이려니와 여인이 심하게 지쳐 있는 관계로 제대로 구타다운 구타를 하지 못하는 이유도 있었다. 퍽! 퍼벅! 퍽! 퍼퍽! 한 식 경 동안 패더니 꽤 지쳤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데, 커다란 가슴이 숨을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 매우 매혹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엉뚱한데 힘이 불끈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내 가운데 다리를 본 그녀는 사레가 걸렸는지 쿨럭쿨럭 거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난 내 피부가 검상으로 덧나는 게 싫어. 그러니까 검상이 난 곳에다가 깔끔하게 바르란 말이야." 흘러내리는 긴 머리들을 둘둘 말아 올려 옥비녀로 고정시킨 그녀는 내게 등을 내밀었다. 새하얀 피부가 달빛에 뽀얀 빛을 뿌렸고, 시원한 바람을 따라 장미향의 아찔함이 느껴졌다. 잠시 동안 그녀의 몸매를 감상한 후 빨갛게 피가 묻어 난 자리를 찾아 금창약을 한 움큼씩 모자라지 않게 덕지덕지 발라 주었다. 팔과 어깨, 등, 개미허리같이 가는 허리, 동그랗게 솟은 둔부를 타고 내려가는 쭉 뻗은 다리를 비롯해서 대략 십 여 군데 검상이 나 있는 걸로 봐서 매우 처절하게 싸웠으리라 짐작이 되었다. 단지 치명상이라 할 만한 검상은 보이지 않았다. "다 발랐는데요." "앞은 안 발라!" 짜증이 치미는 듯한 그녀의 메마른 음성에 화들짝 겁이 나서 후다닥 앞으로 돌아서 바르기 시작했다. 때 마침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 부위에 와서 내 가운뎃다리가 지나치게 치솟아 올라 무척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여인은 그런걸 보고도 화를 내지는 않았다. 마침내 금창약을 다 바르고 나자, 내가 벗어 놓은 깨끗한 마의를 걸치면서 자기가 벗은 피묻은 백의 경장을 손에서 일으킨 불꽃으로 태워 버렸다. 옷섶을 묶고 고름을 바로 하고 혁낭과 요대를 찬 그녀는 떠나려고 하다가 가만히 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냐?" "우작삼(愚作三)입니다." "웃긴 이름이군. 너 같은 촌놈이 칼, 창이 범람하는 이 풍악산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정말 궁금하구나. 내 이름은 교옥정(喬玉淨)이다." 말을 마친 교옥정은 도사들이 사라진 방향(方向)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고, 곧 까만 점이 되어 사라졌다. 난 별다르게 입을 것이 없어 빨아서 축축하기 그지없는 마의를 추적추적 걸치며 우울한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무림 여자들 성질 정말 더럽네. 내가 동네북이냐? 동네북이야! 다시 무림 여자들하고 상대를 하나 봐라. 보면 무조건 쌩이다. 쌩!' 씩씩거리며 올라오는 밤길,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엣취∼! 더불어 감기까지 걸리고 말았다. "소진배검(蘇진背劍)! 선인지로(仙人指路)! 금침암도(金針暗渡)!……청룡출수(靑龍出水)! 엽리장신(葉裡藏身)! 독헐반미(毒歇反尾)! 비홍횡강(飛虹橫江)!" 삼재검법(三才劍法)을 소진배검으로부터 시작해서 절도 있고 박력 있는 모습으로 비홍횡강까지 단숨에 펼쳐 보이는데 대략 반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후훗 소방도 며칠만에 내가 완벽하게 삼재검법을 터득하자 놀란 듯 미소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야, 야, 너 춤 추냐? 꼬마 애도 하루면 터득할 것을 넌 며칠째 질질 끌고 있냐? 정말 무림에 발 안 담그길 잘 했다. 어설프게 배워서 강호초출(江湖初出) 즉시사망(卽時死亡) 당하느니 차라리 아예 모르는 게 낫지." 역시 놀란 이유는 다른 데 있었군. 흠, 산다는 게 그런 거지 뭐. 적어도 자꾸 헷갈리던 초식이랑 동작이 이제는 맞물려 돌아가니까 많이 발전(發全)했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목표였던 시간 때우기도 훌륭하게 달성하고 있으니 성공적(成功的)이라 봐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부(師父) 소방은 매우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리기 일쑤였다. 툭하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나머지 반쪽 철봉으로 내 머리 단련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이러다가 그 유명(有名)한 소림사의 철두공(鐵頭功)을 익히게 되는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기까지 하다. 오늘따라 짜증이 치밀어 어떻게 하면 이 훈련을 중단할까 하고 눈알을 디룩디룩 굴리는데, 죽립을 눌러쓴 구원의 신이 화사한 빛을 띠며 망아루로 올라오는 게 보였다. "어라, 손님이네. 사부님,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 오냐, 제자야. 앞으로 더욱 정진해서 완벽하게 터득하길 바란다. 이상!' 마무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하지 않으면, 정신이 해이해졌다며 다음 날 무지 귀찮게 하는 소방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깍듯이 허리를 굽혀 예를 표시했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뭔가 엄청나게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긴 하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윤곽이 잡히질 않는다. 자파절기 운운하며 자기 목숨을 걸었다는 그를 보면 미안하긴 한데, 아무리 봐도 목숨을 건 사람치고는 너무 즐기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부쩍 늘고 있는 중이었다. 죽립을 쓴 그 손님은 주루 맨 안쪽 어두운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다가 선객이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창가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선객이라 함은 며칠 전부터 주루에서 거하며 검을 맞댈 만한 고수를 기다리는 곽철 대협을 이름이다. 그는 언제나 계단 옆 구석진 자리에서 제일 싼 백건아를 홀짝홀짝 기울이곤 한다. 안주로는 가장 싼 만두나 소면을 시키곤 하지만, 가끔은 오리 구이를 시키기도 한다. 새벽에 내가 물을 뜨러 나올 때면 창고 뒤편 우거진 숲 속에서 검풍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곽철 대협이 연마를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소방에게 미리 들었듯이 자파의 무공 수련 모습이 유출되길 꺼려한다는 말에 그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엇을 드릴깝쇼? 저희 망아루에는 요리에 만두, 소면, 오리 구이가 있고, 술로는 백건아와 죽엽청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만두 하나, 소면 하나." 겉은 남자 인줄 알았더니 음성은 영락없는 여성이었다. 하기야 남장하는 여자 무림인들이 하나 둘이 아닐 테니 그런 거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게 순리였다. "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쪼르르 주방으로 가서 주문대로 포연강에게 말을 해줬고, 손님이 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미리 주방 조리 기구를 손질하며 기다리고 있던 그가 순식간에 요리를 해줬다. 만두와 소면을 소반에 잘 담아서 손님 탁자로 옮겨 주고 물러섰는데, 현관에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죽립을 쓴 여인을 살피는 소방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 소방, 만두 먹고 싶어? 갖다 줄까?"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저 손님이 입은 마의, 네 거 아니냐? 요즘 네가 다른 옷을 걸쳤다 싶었는데, 왜 네 옷을 저 사람이 입고 있어?" 난 그의 말에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서 소면을 깔짝깔짝 맛없게 먹고 있는 죽립 여인을 보았다. 설마 했는데, 내 마의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미 그 여인이 누구인지 감이 잡히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날 밤 당했던 일을 떠벌릴 정도로 철면피 신공을 익힌 게 아닌 관계로 시치미 신공을 발휘해서 잡아떼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보았다. "아니, 뭐 저런 마의야 흔한 것 아니겠어? 우연히 비슷한 옷을 걸친 사람을 볼 수도 있는 거 아냐?" 손아귀에 식은땀이 흐르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지만, 속으로 명경지수(明鏡止水)를 외치며 안색을 억지로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틀려, 네가 있던 강남 흥강성에서 나는 마(麻)랑 여기 서안에서 생산되는 마(麻)는 자세히 보면 차이가 나. 그로 보아 저 마의는 여기서 꽤나 멀리 떨어진 강남 흥강성에서 생산된 마의야. 더군다나 끝 소매 헤진 정도가 예전 네 거랑 흡사해."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정곡을 찌르는 여간 영악한 게 아닌 이 여우같은 녀석, 불여우가 너더러 선배님이라고 하겠다. 좋아, 그럼 나도 생각이 있다고. "너 저 여자한테 관심 있어서 그러지? 에이 그럼 가서 직접 작업을 걸던가." 이렇게 우회적으로 말 한 것은 평소 이 녀석의 성격으로 봐서 피할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했기에 살짝 도발을 건 것이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저 여인이 먹는 만두가 무척 맛있어 보였거든." "……." 소방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망설임 없이 죽립 여인이 앉은 탁자 빈 의자에 털썩 앉아 버렸다. 내가 조마조마 해서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술 더 떠서 죽립 여인이 아직 손도 안 댄 만두를 하나 집더니 맛있다는 듯이 호호 불며 먹는 게 아닌가! '쟤, 쟤가 사부 노릇에 맛들이더니 이제 아예 크게 벌리려고 하는구나. 후미 돌아 버린다.' 죽립 여인은 소면을 집어먹던 젓가락을 식탁 위에 집어던지듯 내려놓으며, 건조하면서 음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디서 굴러 온 개뼉다구 같은 거지인지 몰라도 그거 가지고 그만 꺼져 주시지." 소방은 협박이 분명한 말에 눈썹 하나 까딱거리지 않고 만두를 야금야금 맛있게 먹으면서 급기야 목이 마르다며 죽립 여인의 물 잔까지 가져와서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었다. "아, 맛있다. 역시 남의 만두는 맛있단 말씀이야. 당신도 맛있게 들어요, 왜 소면이 맛없어요? 그것도 내가 먹을까요?" 죽립 여인이 부들부들 떨더니 젓가락 한 짝을 소방에게 휙 날렸다. 난 화들짝 놀라서 말리고 싶었으나, 너무나도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벌어진 입조차 다물지도 못했다. 그러나, 젓가락은 어느새 소방 손에 들려 있었고, 나머지 한 짝도 마저 날리려던 죽립 여인은 그것마저 소방 손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심히 놀라워하는 듯싶었다. "오호, 젓가락을 저에게 주신 것을 보니 소면을 양보하시겠다는 거네요. 고마워요. 오늘 제가 공짜로 포식하게 생겼군요." 말을 마친 소방은 정말로 소면을 자기 앞으로 끌어다가 후루룩 후루룩 먹는 것이 아닌가! 죽립 여인은 이미 식욕을 완전 잃은 듯 망연한 표정이었다가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나왔다. "보아하니 개방의 고수이신 듯 한데, 소녀를 핍박하는 연유가 무엇인지요?"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대신 제가 요리 값으로 재미있는 얘기를 해 드리지요. 대략 두 해 전인가 안휘성(安徽省)일대가 뒤집힌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어요. 막 결혼을 앞두고 있던 안찰사(按察使) 어르신의 장남이 결혼식 전날 밤 복면 여인에게 강간을 당해 버린 거예요. 얼마나 거칠게 당했는지 정혈이 고갈된 그는 폐인이 되어 버려서 결국 결혼을 취소시켜야 했지요. 뭔가 내막이 있는 듯 이 사실을 숨기기는 했지만, 우리 개방의 눈은 속일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 얘기를 왜 하는 거지요?" "얘기 아직 안 끝났어요. 이후에도 절강성(浙江省), 복청(福淸), 운남성(雲南省) 등지에서 고관대작들의 수많은 남자들이 강간을 당해 버렸어요. 이들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소방은 마치 범인을 심문하듯 날카롭게 죽립 여인을 주시하며 말했다. "흥,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아, 그렇군요. 당연히 모를 텐데 제가 실례를 저질렀네요. 그들의 공통점은 강간을 당하고 난 뒤 심한 추위와 정혈의 고갈로 거의 반 폐인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들의 부모가 되는 고관대작들은 무림맹(武林孟)에 범인을 잡아 달라고 직접 압력을 행사했어요. 그래서, 파견 나온 이들이 바로 청성삼검(靑城三劍)이지요." 이번 그의 말에도 죽립 여인이 큰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죽립 아래 나온 빨간 입술이 부르르 떨리는 게 언뜻 느껴졌다. 내가 느낄 정도였다면 소방 또한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스스로를 범인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이것으로 만족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청성삼검(靑城三劍)은 청성파(靑城派)가 배출한 고수들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삼재진(三才陣)은 그 누구라 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빠르면서 쉴 틈 없이 이어지는 합격진법으로 유명하지요. 무엇보다 추종술(追從術)에 일가견이 있어 고관대작들의 아들들을 무자비하게 강간하고 다닌 복면여인이 월녀궁(月女宮)의 요화(妖花) 교옥정(喬玉淨)이라는 것까지 알아내었어요. 그런 그들이 이 풍악산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교옥정 또한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말이 되요." 이 말을 한 소방은 눈을 치켜 뜨며 왼손의 역풍(力風)으로 여인의 죽립을 날려 버리고서 똑바로 결정적인 선언을 날렸다. "안 그런가요? 요화(妖花) 교옥정(喬玉淨)!" "……." "이젠 발뺌하지 마세요. 요화(妖花) 교옥정(喬玉淨), 전 당신이 여타 고관대작의 아들들을 강간했건 말건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제 친구를 모욕했다면, 그것은 다르지요. 그 옷 어디서 난 것인가요?" 교옥정은 소방이 매몰차게 몰아붙이자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깨물기만 할 뿐 별다른 대응을 고려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그녀의 시선이 주루 맨 안쪽에 앉아 백건아를 기울이며 홀짝이는 곽철 대협쪽으로 돌아갔으나, 그는 소방이 교옥정 정도는 충분하게 제압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지 남의 집 불구경 하듯이 방관하고 있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게 교옥정에게 조금 위안이 된 듯 싶기도 했으나, 의외로 백의개라는 소방에게조차 쩔쩔매는 것을 보니 어정쩡한 하류 무림인인지도 몰랐다. "당장 그 마의를 벗어요. 당장!" 이 말에 교옥정은 매우 당황했는지 안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기야 나조차도 소방이 그렇게 독하게 몰아세울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평상시 그의 모습과는 매우 달라 보였다. '설, 설마 소방 저 녀석 이 기회에 교옥정의 몸매 감상을 하려는 건가? 쩝, 은근히 밝히는 녀석이었네.' "잠, 잠깐만요. 전 갈아입을 옷이 없어요. 다른 옷을 구하게 되면……." "그것은 내 알 바가 아니에요. 당신 역시 마찬가지였을 텐데, 아닌가요? 작삼한테 어떤 몹쓸 짓을 했을지 전혀 짐작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옷만 벗어 놓고 물러난다면 뒤를 쫓지는 않겠어요." 쩝, 그 정도 몹쓸 짓은 종종 당해도 괜찮은데, 더불어서 나도 좋은 구경했고 소방이 너무 흥분을 하는 것 같아 말려야 할 것 같았다. "소, 소방 말은 고마운데, 난 괜찮아. 그냥 보내 주면 안될까?" "작삼." "어?" "너, 설마 그새 정들었어? 그런 거냐고?" "……." 얘, 얘가 점점 더 왜 이럴까? 누가 나 같은 것한테 정이 들기나 하려고? "그, 그런 게 아니라 저 여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 남자를 밝히는 게 좀 과하다 해서 너무 몰아세울 것까지는……." 그 순간 주루 입구에 어떻게 알고 왔는지 청성삼검(靑城三劍)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뜻밖의 등장에 소방과 나의 시선이 그들을 향한 새 교옥정의 신형이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밖으로 도망갔나 싶어 조금 안심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천장을 타고 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눈 깜짝할 새 칼날을 내 목젖 끝에 세운 교옥정은 의외의 사태에 주춤 이는 청성삼검을 감시하면서 소방에게 소리를 질렀다. "이 개뼉다구 같은 거지 소굴 갈보 년아! 말코 도사들이랑 백건아 홀짝이는 저 놈이 나 못 쫓아오게 한 시진 동안 막아. 만약 누가 날 쫓아오면, 그 순간 부로 이놈 멱을 따 버리고 튀어 버릴 테니까! 한 시진이 지나도 날 쫓는 놈들이 없으면 이 멍청이를 놔주마." 소방을 협박하는 소리인 듯 싶기는 했는데, 내 턱밑에서 알짱거리는 칼날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귀 기울여 듣지를 못했다. 교옥정은 한 팔로 내 허리를 껴안고서 재빠르게 창을 넘어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심상치 않은 소란이 인 듯 싶었으나 뒤돌아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비록 미녀의 품에 어정쩡하게 안겨 있는 것은 맞았지만, 흉흉한 기색으로 봐서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했다. '아이고, 아이고 그때 왜 물웅덩이를 가리켜 주지 않고 다른 데로 보내 버려서 고생을 자처해 버렸는지. 에효.' 후회 같은 것을 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젠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까를 고민해야 할 차례인 것이다. 내게는 막패의 구타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구타심결이 심어져 있기는 하지만, 만약 날카로운 칼로 내 목젖을 따 버린다면? 아마 십중팔구 사망일 듯 싶다. 현현자, 그 늙은이는 너무 광오해서 자신감이 과도하게 넘쳐흘러 보였기 때문에 확실한 믿음이 가질 않는다. 결론은 교옥정을 향한 철저한 아부와 무한대 비굴함으로 처량하고 불쌍한 놈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그동안 단련해 온 것을 조금만 적용하면 별 무리 없지 않을까 싶었다. 령령이랑 비슷한 불같은 성질이 좀 걸리긴 하지만 잘 되겠지. 교옥정은 무공은 좀 떨어지는 듯 싶었지만, 신법 하나는 일절이라 불릴 만 했다. 옆구리에 나 하나를 끼우고서도 공기를 휙휙 가르며 달려가는데, 매달려 가는 내가 눈이 어지러워 아찔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청성삼검이나 곽철 대협이 뒤를 따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더 힘을 내는 지도 모르지만, 이 정도 속도면 그들이라 해도 쉽사리 따르지는 못할 것이었다. 단 주령령의 그 귀신같은 신법이나 내 손에서 지도 쪼가리를 채간 썩을 년의 신법 정도는 되어야 교옥정을 따라잡을 수 있을 듯싶었다. 하기야 두 해 동안 고관대작의 아들들을 강간하고 나서 흔적을 지우며 꽁지 빠지게 도망만 다녔을 테니, 신법이 고절할 법도 했다. 찰나 지간에 산골짜기를 가로질러 내려온 그녀는 소장강 자체를 거슬러서 신법을 발휘했다. 나를 안아서 무게가 늘어난 상태일 텐데도 물위를 달리는 것을 보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강물 위를 거슬러 와 버렸으니 추종술(追從術)이 아무리 뛰어난 청성삼검(靑城三劍)이라 해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한참을 가니 물결이 구비치는 물길 위로 유난히 드러나게 튀어나온 절벽이 보였다. 거의 지면과 직각에 가까울 정도로 급경사를 이룬 암벽이었는데, 하필이면 이곳으로 오르고 있었다. 두 발을 번갈아 절벽 틈새를 디디며 올라갔는데, 매달려 가는 나는 완전 죽을 맛이었다. 순식간에 지면과 멀어져서 경사를 타고 가는 것은 위험천만하기 그지없어 보였으나,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듯 가차없이 오르는 것이었다. 얼마를 더 올라가자 뜻밖에도 겉에서는 보이지 않던 동굴이 날카로운 암벽 사이로 나타나고 있었다. 교옥정은 동굴 안으로 신형을 날려 맨 안쪽으로 들어가서 날 내려놓았고,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내쉬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무리를 하며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둠이 눈에 서서히 적응이 되었을 때 주변을 둘러보니 차곡차곡 개어 있는 옷가지나 이불, 작은 항아리, 화섭자와 책 몇 권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한 편에 놓여 있었고, 또 동굴 벽면을 살펴보니 군데군데 인위적으로 깎아 낸 흔적이 있었다. 바로 이 동굴이 교옥정의 은신처였던 것이었다. 이런 곳에 숨어 있는 다면 몇 년이 지난다 해도 찾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아마도 그녀 역시 혈해진경(血海眞經)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혈해진경(血海眞經), 그것이 무엇이 길래 자신을 쫓는 청성삼검의 위험을 무릎 쓰면서까지 찾으려 하는 것일까? 어차피 나야 삼재검법(三才劍法)의 묘리를 터득하기도 바쁜 판국이니 그런 거창한 이름의 무공까지 필요하진 않지만 말이다. 아직도 숨을 거칠게 내쉬는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내 멱살을 움켜잡으며 나지막하면서도 약간은 쉰 듯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읊조렸다. "내가 잠시 갖다 올 동안 떠들기만 해봐. 주둥아리를 찢어 버릴 테니, 알았어?" 잔뜩 겁을 먹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시 동굴 밖으로 나가려던 그녀는 무엇이 생각났는지 걸치고 있던 마의를 훌훌 벗어 던졌다. 뿐만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그녀를 가려 주던 고의마저 둘둘 말아 내팽개치더니 망설임 없이 암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이었다! '헉, 설마 자살을? 아, 안 돼 그럼 어떻게 내려가!' 순간 반사적으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고개를 내민 나는 강물 위에서 유유히 헤엄을 치며 목욕을 하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안심을 하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교옥정이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았다. '쳇, 너무 멀어. 천안통(天眼通)인지 천리안(千里眼)인지 하는 것들을 익히지 못한 게 원통스럽구만. 흠, 소방을 다시 보게 되면 졸라서 가르쳐 달라고 해야지.'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모습이 점점 확대되어 보이고 있었다. 내 간절한 염원이 하늘에 닿아 천리안인가를 열어 준 모양이었다. '오옷, 거, 거대한 가슴이 유감없이 보이네. 그래, 이것은 춘화도를 버려야 했던 내 비극적 아픔을 하늘이 보상해 주려고 내려 준 능력이 틀림없어.' 너무 기뻐서 단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라리고 바라봤는데, 뭔가 옆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휙 지나가는 것이었다. 순간 느껴지는 바가 있어 천천히 옆을 돌아다보니 전신에 물기를 똑똑 흘리는 교옥정이 샛눈을 내리깔며 나를 바라보았다. "훔쳐보니 좋아?" "……." "훔쳐보니 좋냐고? 두 번 물어 봤다." "네, 넵! 매, 매우 환상적입니다. 헉, 그, 그게 아니라……." 얼결에 대답을 하고는 스스로 놀라 입을 막았으나, 교옥정은 별 일 없었다는 듯이 쓰윽 지나쳐 동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 낸 그녀는 동굴 한편에 잘 개어져 있는 백의 경장을 입더니 벗어 놓은 내 마의를 차곡차곡 개어 내게 건네줬다. "잘 입었다." "……." 바깥이 어둑어둑해 오는 것으로 봐서 여기에 납치를 당해 온지 한 시진하고도 세 시진은 훌쩍 넘어간 듯싶었다. 한 시진 후에는 보내 준다고 한 듯 싶었는데, 아직까지 보내 줄 의도가 없는 걸로 봐서 날 죽일까 살릴까 궁리하는 것 같기도 했다. 꼬르르륵. 이놈의 배가 주책없이 죽을 라고 내 의지를 거부한 채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움찔 놀라 배를 쓰다듬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침이나 먹고 좀 조용해져라.' 꼬르륵 꼬르르르륵. 이젠 자포자기를 하고 교옥정의 눈치를 슬그머니 봤다. 가부좌를 틀고서 끝없는 사념에 빠져 있는 듯 하던 그녀는 내 배가 자꾸 시끄럽게 굴자 두 눈을 치켜뜨더니 벌떡 일어서서 칼이 세워져 있는 구석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게 아닌가! 귀찮아서 칼로 목젖을 따 버리려나 보다 하고 잔뜩 겁을 먹고 있는데, 의외로 그 옆에 있는 작은 항아리에서 뭔가를 꺼내어 들었다. 일단 안심을 하고 고개를 무릎 사이로 파묻었는데, 내 어깨를 툭툭 치는 것이었다. 설마 하고서 심호흡을 들이마시며 머리를 들자 내 안면 앞으로 내밀어진 교옥정의 손위에 낟알 몇 개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벽곡단(僻穀丹)이라는 거야. 일단 하나씩 꼭꼭 씹어 먹어 봐. 허기는 가실 거다." "……." 대략 다섯 개 정도의 벽곡단을 넘겨준 그녀는 다시 가부좌를 틀고 명상(明想)에 들어갔다. 귀동냥으로 벽곡단(僻穀丹)이란 것 하나가 한 끼를 해결해 준다는 말을 언뜻 들은 기억이 있어서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 보았다. '젠장 더럽게 맛없네. 무슨 도사들만 먹는다고 하던데, 이 요녀(妖女)도 이런 걸로 끼니를 때우나? 지가 무슨 도를 쌓는다고, 쳇.' 하나 갖고는 기별도 안 가서 결국 다섯 개 모두를 입에 털어 넣어 버렸더니 제법 속이 든든해졌다. 배가 부르면서 긴장이 풀려 버리니 그 다음 나를 엄습한 것은 수면(睡眠)이었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모르지만, 동굴 안에 맴도는 차가운 바람에 한기(寒氣)를 느껴 잠시 깼다가 다시 졸린 눈을 감으려 했었다. "하악, 하악, 끄으응……." 미세한 신음소리가 들려와서 내 수면을 방해했으나, 난 배고픈 것은 참아도 졸린 것은 못 참는 체질이라 애써 무시하고 계속 잠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努力)했다. "흐으으응, 흐으윽, 으윽……." 신음소리가 너무 애절해서 결국 눈을 뜨고야 말았다. 비몽사몽간에 신음 소리의 발원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교옥정이 아랫입술을 피가 날만큼 깨물면서 신음을 흘리는 것이었다. 신음을 흘릴 때마다 바르르 떨며 몸을 배배 꼬아대는 것이 곧 죽을 듯한 기색이었다. '중독이라도 당한 모양이구나. 크크크 벌받은 거야. 그나저나, 저대로 죽어도 큰일인데.' 그녀가 죽으면, 난 이 암벽 동굴에 갇혀 죽을 때까지 벽곡단으로 연명해야 하는 것이다. 항아리 속에 벽곡단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한 해는 버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은 빗물을 받아다가 먹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늘이 정녕 나의 우화등선을 바라는 것인가? 도를 닦으라는 계시란 말인가?' 쿠당! 멀거니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가 느닷없이 교옥정이 날 잡아채는 바람에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돌바닥이라 각진 모서리 투성이었기에 여기저기 긁혀 상처가 났으나, 달빛에 비친 교옥정의 눈을 보니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새하얀 흰자위만 덩그러니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닌가! '귀, 귀신! 이 요, 요녀야말로 진정한 귀신이었구나!' 뒤늦게 비명이 터져 나오려고 했으나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어 버리는 바람에 비명이 입안에 갇혀 버렸고, 혀를 휘감아 돌렸기에 정신마저 혼미해졌다. 그 잠깐 동안 교옥정의 날렵한 섬섬옥수(纖纖玉手)는 내 옷들을 벗겨 버렸다. 전라가 된 나신을 그녀의 빙옥 같은 나신이 내리 눌렀으나, 교옥정의 전신에 서려 있는 한기 때문에 운우지락(雲雨之樂)은커녕 섬뜩한 공포만을 느꼈다. 마치 얼음과 함께 뒹구는 기분이랄까? 내 이성이 이것은 아니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내 가운뎃다리만은 그녀의 요사스런 자극으로 따로 놀았다. 강제적이었지만, 격정에 이르러 힘이 빠지려는 순간에도 그녀의 요사스런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별의별 자극을 가해서 힘이 불끈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녀의 눈만은 보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그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의 허리는 내 가운데 다리 위에서 흐늘거렸으나, 그녀의 두 손은 내 머리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내 안면을 뒤덮는 가공할 한기에 눈을 뜨게 되었고, 눈동자가 없는 새하얀 동공과 시선을 마주쳐야만 했다. 마치 나를 비웃는 듯한 비릿한 미소가 교옥정의 안면에 떠올랐다. 그렇게 몇 차례를 반복했을까 전신을 뒤덮는 지독한 한기와 거듭되는 의미 없는 정사로 인해 저승의 문턱에 다다르고 있었다. 두 번 정도만 더 하면 정말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힘없이 눈을 떴는데, 새하얗기만 하던 교옥정의 흰자위 표면에 회색 빛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던 한기 대신 따스한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마지막 파정의 순간, 옥정은 완연한 본래의 신색을 되찾았고 그것을 확인한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뭔가 뒤바뀐 게 분명한 정사, 여인들이 당한다는 강간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가 될 듯싶다는 묘한 상념을 떠올리며 정신을 잃어버렸다. '에요, 이번에는 확실히 얼어죽었나 보다.' '죽긴 누가 죽어? 넌 노부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먹기는 하는 거냐?' '현현자 영감이요? 알아먹기는 뭘 알아먹어요?' '삼라만상 모든 힘은 하나로 귀일하고 이것을 만류귀종(萬流歸終)이라고 한다고 니 머리에 박히게 틈틈이 일러줬는데, 그새 까먹느냐? 너 까마귀 고기 얼마나 쳐 먹었냐? 엉!' '그게 무슨 소용 있겠소? 죽으면 다 매한가진데, 음 그 소린가? 죽으면 다 똑같다. 이 말이 하고 싶은 거요?' '크으으, 노부가 정말 살아만 있다면 널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팼을 거다. 귀 파내고 잘 들어 이놈아! 무조건 구타당할 때 쏟아지는 힘이나 내력만이 구타심결(歐打心訣)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다. 네 녀석 몸뚱이에 퍼부어진 냉기도 따지고 보면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게야. 무조건 암중에 작용하는 구타심결만을 믿지 말고 네 스스로 믿음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는 이 말이다.' '그럼 말이오. 혹시 독에 중독 당해도 나의 내력으로 흡수할 수 있는 거요?' '물론이지. 뭐 그 경우에는 좀 고생할지도 모른다만, 일단 너의 것으로 흡수된 독에는 두 번 다시 고생하는 일이 없을 거다.' '고, 고생? 한 며칠은 몸져누울 거란 말이요? 영감?' '그렇다기보다 똑같은 통증에 시달리다가 니 놈이 죽기 직전에나 흡수될 거다. 바꿔 말하면 독은 되도록 이면 피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만, 강해지고 싶다면, 독을 마다해서는 안 돼지. 잊지 마라. 모든 것은 하나로 귀일 하느니라!' '싫소, 고통스러운 것은 귀찮으니 그냥 내버려두쇼.' '크크크크 니가 싫어도 세상은 널 짓이기려 할거다. 그래도 좋으냐?' '피하면 될 거 아니요? 비굴하게라도, 처절하게라도, 기어서라도 피하면 될 거 아니요?' '그래, 니 마음 이해한다. 나도 한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부가 피해 버리면, 고통스러울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되는 경우가 반드시 생기기 마련이다. 내가 피함으로 더 고통스러워 지는 때가 있느니라. 그 때문에 구타심결을 만든 것이다.' '왜 하필 나요?' '그야 너처럼 비굴하게 굴면서도 항상 구타당하며 사는 놈이 드물기 때문이지. 이런 게 다 인연인 것을 어쩌겠느냐? 아, 그리고 구타심결의 주화입마(走火入魔) 증세를 혹시 겪어 봤느냐?' '아, 아 귀찮은 영감, 나 갈 테니 혼자 떠드쇼.' '야, 이놈아 거기 못 서!' 전신을 압박하는 답답함을 못 이겨 잠을 깨 보니 내가 누워 있는 자리가 동굴 안인 것은 변함 없었지만, 따뜻한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고, 전라의 교옥정(喬玉淨)이 날 꽉 껴안은 채 내려다보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내 육신이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제 정신이 든 그녀가 응급조치를 취해 준 것이리라. "이제 정신이 들어?" "……네." "움직이지마, 그대로 있어. 너 아직 온 몸이 차가워." "……." 그녀는 더 더욱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녀의 뭉클거리는 가슴이 부담스러웠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미안해, 어떻게든 참아 보려고 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참아 와서 솟구쳐 오르는 음심을 감당 할 수가 없었다. 이 동굴도 어떻게든 음심(淫心)을 참아 보려고 만든 것이었는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제 확실히 알았어." 이런 상황에서도 진심으로 미안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살짝 내려감은 교옥정의 맑은 눈빛과 약간은 목이 멘 듯한 진솔한 그녀의 목소리에서 내가 들어온 바와는 다른 진한 뭔가가 느껴졌다. "당신은 들려오는 소문대로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군요." "후훗, 그래? 내가 강호로 나와서 나쁘지 않다고 말해 주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로구나." 교옥정은 나신으로 서로 껴안고 있으면서 조용히 있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는지 묻지도 않은 자신의 과거 에 대해서 스스럼없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부친은 본래 안휘성(安徽省)의 안찰사(按察使)였다고 한다. 그것도 청렴결백한 사람이어서 아랫사람들에게 따뜻한 온정을 베풀었으며, 민초들의 불편한 점들을 직접 알아내어 어려움이 없도록 돕기까지 했다고 한다. 단지 너무 청렴결백하여 안휘성(安徽省)에 온 감찰사를 뇌물 하나 없이 돌려보낸 것이 화근이 되어 세금을 강탈했다는 누명을 써야 했다. 그로 인해 일가족이 귀향을 떠나가야만 했는데, 그 이듬해 화병이 난 그는 몸져누웠고, 모친마저 뒤따르듯 쓰러져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슬하에 하나 있던 외동딸이 바로 교옥정 그녀였다. 당연히 복수를 생각한 그녀는 구파일방을 돌아다니며 제자로 받아 주기를 간청했으나 이미 감찰사의 측근들로부터 압력을 받은 그들은 그녀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암살을 하려고 까지 했었다. 이렇게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입장에 처한 그녀를 구해 준 은사가 바로 월녀궁(月女宮)의 궁주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월녀궁으로 들어간 교옥정은 궁주의 제자가 되어 월녀심법(月女心法)을 익혔는데, 이 월녀심법은 고강한 대신에 달의 음기를 체내로 받아들여 내공을 쌓는 극음의 구결이었다. 그래서, 월녀심법을 배우기 시작하면, 극성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하여 쌓인 음심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문제는 극성에 다다르면 다다를수록 잠자리를 같이한 남자들이 살아날 확률이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복수를 할 일념으로 열심히 수련을 한 교옥정은 어느 덧 구성까지 터득했으나, 자신과 잠자리를 여러 해 동안 해 왔던 남자 노예가 죽자 자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수련도 하면서 복수를 할 방법을 생각했는데, 바로 부친을 귀향 보내는데 일조한 고관들의 아들들 중 결혼을 안 한 이들을 상대로 음심을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그 결과 월녀심법을 십성까지 올렸을 뿐 아니라, 그들의 아들들을 거의 반 폐인 또는 폐인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무지하게 열 받은 고관대작들이 무림맹에 고수를 보내 교옥정을 잡아오도록 압력을 넣었고, 무림맹에서는 청성삼검을 파견해, 그들에게 쫓기고 쫓겨서 이곳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길고 긴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에는 저녁놀이 지고 있는 것으로 봐서 처음의 한 시진이 이틀째로 접어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소방이 얼마나 나를 찾고 있을까 생각하니 어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하루는 더 누워 있어야 한다며 놔주지 않는 교옥정의 말에 못이기는 척 그녀를 슬그머니 안았다. 사실 구타심결의 영향인지 내부의 한기는 오래 전에 가라앉아 있었지만, 교옥정의 따스한 품이 너무 좋아서 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불어 그녀가 나보다 두 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편하게 부르라고 해서 누님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교 누님, 누님도 혈해진경(血海眞經)에 관심이 있나 봐요?" "그래, 관심 있어. 나 역시 무림인이니까." 역시……. 그래도 망설임 없이 솔직하게 말해 주는 그녀를 보니 호감이 부쩍 늘어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요녀니 뭐니 하면서 속으로 엄청나게 욕을 했었는데, 하루가 지나서 누님이라고 부르며, 호감이 일어날 정도니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노릇이다. "복수 때문인가요?" "아니라고는 말 할 수가 없구나, 내 한을 풀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정도 힘은 필요해. 우리 가족을 이 꼴로 만든 감찰사 녀석이 그 일을 계기로 지위가 더 올라가서 지금은 동창 고위직에 있을 뿐 아니라 구파일방 자체를 손안에서 움직일 수 있어. 지금의 나로서는 놈이 보내는 추격자들을 상대하기에도 벅차. 힘이 필요해. 절대적인 힘이……!" 참을 수 없는 원한(怨恨)때문에 부르르 떠는 그녀가 너무 안쓰러워서 꽉 껴안았더니, 참고 있었다는 듯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 내 품속에 세상을 향해 칼을 빼 들고 외로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여인이 울고 있다고 생각하니 찹찹하기 그지없었다. 난 무림인 그 자체를 싫어했지만, 실상 그 내부에 도는 암류에 대해서는 생각한 적도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내 자신이 무림인이 아니기에……. 그러나, 막상 교 누님에게 듣고 나니 왠지 모를 분노(憤怒)가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바른 의를 숭상한다 하여 정파라 하는 줄 알았는데, 서로 관여치 않는다는 관의 압력에 한 여인을 처참하게 몰아붙이길 서슴지 않는 그들이 과연 더 이상 정파라 불릴 이유가 있는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그들과 사파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결국은 권력과 이득에 눈이 먼 위선자라는 것에는 다를 바 없지 않느냔 말이다! 그녀를 도울 힘이 없는 내 자신이 조금은 한스러워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나 백 년 후 내가 죽고 나서나, 아무리 빨라 봤자 오십 년 후 호호 할아버지가 되고 난 뒤라 하니 있어도 없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며, 다른 내공을 배울 수도 없으니, 귀찮은 혹 하나 단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단지 맷집이 무지 올라갔다는, 체력이 좋아졌다는, 밤눈이 약간 밝아졌다는 것 정도의 기묘한 효과 밖에 없었다. 외공이라는 것이야 결국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겉보기만 화려한 춤 시위에 불과하다고 소방한테 귀 아프게 들어서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소방은 '토납호흡법'이라는 내공 심결을 알려주겠다고 떼를 썼으나, 힘없이 웃으며 거절을 해야만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소방.' 소방(蘇芳), 나에 관련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 주는 유일한 무림인 친구, 못 본지 겨우 이틀 지났는데, 보고 싶다는 그리움 같은 게 느껴진다.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던가. 울다가 지쳤는지 교 누님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이불을 보니 한참 동안 울었던 모양이었다. 그럴 것이다. 그동안 숨죽이며 쫓기느라 울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나라는 동생이 편하게 말벗이라도 해주니 쌓아 놨던 울음보가 한 번에 봇물처럼 터졌으리라. 무림이라는 세계에 발 담그지 않아 다행이라는 소방의 핀잔 섞인 말이 내게 얼마나 징 하게 와 닿고 있는지 그는 모를 것이다. 후후훗. 하늘을 바라보니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은하수와 별들 사이로 간간이 유성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외로이 떨어지는 유성, 마치 교 누님 같았다. 한없는 은하수와 수많은 별들 사이에 갈 곳 몰라 방황하다 떨어진 유성 하나가 지금 내 곁에서 눈물 젖은 채 잠들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날 믿고 편히 잠이 들어 준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저 하늘을 가득 매운 은하수와 별들을 피해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가 다시 떨어져 나도 없는 천길낭떠러지 헤맨다면 얼마나 외롭고 서러울까 하고 생각하니 희비가 교차하는 묘한 만감이 날 어지럽게 했다. 이튿날 해가 중천에 떠서야 잠이 깬 그녀와 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가 벌거벗은 서로의 나신을 보고 얼굴을 붉히며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었다. '이상한 일이군. 엊그제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서 훌러덩훌러덩 벗던 사람이 왜 인제 와서 얼굴을 붉히지?'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꼬르륵 소리를 내며 거칠게 반항하는 배 덕분에 금세 잊어버리고 그녀가 건네준 벽곡단 다섯 알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뒤 떠날 채비를 했다. "작삼 동생." 어쩐지 교 누님이 날 부르는 게 낯간지럽게 느껴진다. "네, 누님 말씀하세요." "친구라는 소방한테 미안했다고 전해 줘." "물론이지요. 사정을 알면 나보다 먼저 교 누님 편에 설 녀석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녀가 날 옆구리에 끼고 내려가는 순간의 아찔함은 다시 생각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거의 직각에 가까운 암벽 사이에서 발 딛을 틈을 찾아 흔들림 없이 내려가 버리는 교 누님의 신위가 놀랍기도 했다. 소방에게 무공으로 밀린 것은 아마 월녀심법이 신법 방면으로는 대단해도 다른 무학 방면으로는 약한가 보다 하고 어물쩡 잊어버렸지만, 좀 더 자세히 캐물었다면 소방의 경지가 얼마나 높은 것이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소장강을 그대로 타고 스쳐 온 그녀는 처음 만났던 물웅덩이 근처에 나를 내려놓았다. "잘 가, 작삼. 다음에 인연이 되면 또 보자." "그럼요. 심심하면 망아루에 놀러 오세요. 소방이랑 곽철 대협한테는 제가 잘 말해 놓을 테니까요." "호호홋, 말은 고맙지만, 괜찮아. 난 구파일방에 속한 사람들이라면 솔직히 신물이 나. 네 친구도, 그 대협도, 근본은 구파일방이니 그들의 장문인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오히려 그들이 곤란한 지경에 처할지도 몰라." 그 말을 들으니 교옥정 누님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글픈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헤어지기가 너무나도 싫었던 것이다. 내 표정을 그녀가 읽었음인지 짐짓 망설이던 그녀는 목에서 뭔가를 풀어내어 내 목에 걸어 주었다. 미세한 한기가 느껴져 자세히 살펴보니 반월 모양의 자수정 목걸이였다. "내가 월녀궁 궁주님으로부터 받은 월녀궁(月女宮)신물이야. 월녀심법을 익힌 나는 네가 어디에 있든지 그 기운을 느낄 수 있어. 네가 날 기다려 준다면 언제 어디라도 널 찾아갈게." "누, 누님 이런 귀한걸 저한테 맡기셔도 괜찮겠어요?" 태어나서 그런 선물을 누구한테서 받은 적이 없기에 내 목에 걸린 자수정 목걸이를 보는 순간 울컥 목이 매여 왔다. 오로지 비웃음과 멸시와 주먹세례를 받아 왔던 것이 내 기억의 전부였던 것이다. "괜찮아. 너니까 맡길 수 있어. 나라고 생각하고 소중하게 간직 해줘." 싱긋 웃는 그녀의 미소가 그렇게 해맑고 눈부셔 보일 수 가 없었다. "네, 누님. 제 목숨처럼 간직할게요." 언제라도 교 누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자 기쁨이 내 안에 샘솟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막연한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나만의 사랑이 싹이 텄음을……. 다시는 그 누구도 좋아하는 감정을 품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것 또한 슬픈 짝사랑이 될까? 기쁜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우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또 다시 아픈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이 아닌지 겁부터 났기 때문이다. 갑자기 내 안면이 어두워진 것을 안 그녀가 의아해 하는 순간, 기약할 수 없는 이별이 다가왔음을 알게 되었다. 내 짐작은 너무나도 빨리 나를 엄습해 버린 것이다. "이 요녀! 이번에는 안 놓친다. 너 하나 때문에 무림맹(武林盟) 정의수호대(正義守護隊) 현무단까지 끌고 왔다. 이 호각 소리를 들으면 대기하고 있던 그들이 즉시 달려올 것이다!" 놀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땅 속에서 솟구쳐 오른 청성삼검(靑城三劍)의 한 청의 도사가 손에 들려진 호각을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난 본능적으로 강가의 모래를 한 움큼 움켜쥐어 그의 안면으로 던졌다. 교 누님만을 경계하고 있던 그로서는 나의 이 어이없는 기습에 속절없이 당해 눈 속에 몇 알의 모래를 집어넣고 말았다. 내 맹세코 태어나서 그렇게 전력을 다해 몸을 날린 적이 없었다. 속으로 하느님, 부처님, 용왕님, 염라대왕님을 부르짖으며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가 당황해서 눈을 비비는 그 짧은 순간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호각을 낚아채서 강물 속에 던지고는 끔찍하게도 그를 내 품속에 꽉 끌어안고는 깍지를 껴 버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누님, 뛰세요! 월녀궁으로 돌아가서 월녀심법을 극성으로 익힐 때까지 돌아오지 마세요! 제발, 제발 요! 누님!" 교옥정이 주저하는 듯 아무 반응이 없자 난 다시 외쳤다. "지하에서 교 누님의 양친이 피눈물을 흘리며 원통해 하고 있소! 그들의 원한을 안 풀어 줄 거예요? 허망하게 잡혀서 죽고 싶어요? 어서 가요! 가서 강해져서 오란 말이요!" 그제야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순식간에 멀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신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아는 나는 씩 웃을 수 있었다. 청의 도사가 미친 듯이 놓으라고 소리치며 내 복부에 주먹을 날릴 때도 내 미소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이때만큼 현현자 노인네가 고마웠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한방 한방이 내 전신에 작렬하는 순간의 고통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그것이 직접적으로 내 몸에 타격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살아 있는 동안 깍지를 낀 내 손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난 웃을 수 있었다. 다른 청성삼검이 하나가 된 우리를 찾았을 때는 한 시진은 훌쩍 지난 뒤였다고 한다. 그때까지도 청의 도사는 눈에 들어간 모래들 때문에 눈물이 줄줄 흐르는 쓰라림을 감수하며 나의 옆구리에 권과 장을 인정사정없이 날리고 있었다고 한다. 변함없이 깍지를 꽉 끼고 있었던 나는 기절한 상태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청의 도사한테 직격으로 맞은 탓인지 아니면 같은 남자를 무지막지하게 끌어안았어야 하는 충격 탓이었는지는 영원한 의문으로 남았다. [12]정의수호대(正義守護隊) 촤악! 아침의 상쾌한 햇살 대신 물세례를 받으며 깬 나는 그 자리가 아늑한 내 침대 위가 아닌 망아루 앞마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따뜻한 솜이불 대신 거친 동아줄이 내 몸을 앞마당 한 쪽 구석 단풍나무에 고정시켜 주고 있었다. "정신이 든다면 변명 좀 해 봐라." 인상이 험악한 황의 중년인이 팔짱을 끼고 날 내려 보고 있었다. 왼편 가슴에는 현무(玄武)라는 글자가 써져 있고 철장갑을 낀 그는 언뜻 느끼기에도 만만치 않은 고수 인 듯싶었다. 처음 보는 인간인데 나에게 무슨 볼 일이 있는 것일까? "뭘 변명하라는 겁니까?" "몰라서 묻는 겐가? 자네가 청명진인을 붙들고 늘어진 것에 대해 변명해 보라는 것이야." 내가 어쩔 수 없이 격하게 끌어안아야 했던 청의 도사의 이름이 청명진인인 모양이었다. 중간에 정신을 잃어 버려서 기억나는 것은 없었지만, 아마도 이들이 정의수호대(正義守護隊) 현무(玄武)단에 속하는 무사들인 듯싶었다. "그녀는 어찌 되었나요?" 퍽! 고개가 휙 틀어졌다. 입안이 시큼한 게 코피라도 흘러 들어간 듯했다. "자네는 지금 문책을 받는 중이다. 내 질문에 대답만 해라." "크크크, 몰라서 묻는 겁니까? 그가 호각을 불려고 하는 게 맘에 안 들었습니다. 시끄러운 게 딱 질색이었으니까." 빠각! 턱주가리가 휘어진 순간 시야가 하늘을 향해 있다. 놀랍도록 빠른 주먹이다. 그것도 철장갑을 끼고 치는 것이니 오질 나게 아플 도리 밖에 없다. "그녀와 자네는 무슨 관계인가?" 상당히 차갑게 음성을 까는 것이 맘에 안 드는 놈이다. "그녀? 그녀가 누구지? 아하, 서안 극락 기루의 단향이를 말하는……?" 퍼벅! 퍽퍽 빠각! 쿵! 녀석의 권과 각이 어지럽게 날리면서 내가 묶여 있던 단풍나무가 휘청휘청 거렷다. 우수수수 떨어지는 빨간 단풍으로 시야가 덮이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큭큭큭큭 혈해(血海), 그 가운데 너는 서 있구나." "뭐? 뭐라고? 지금 뭐라고 말을 한 거냐?" 오질 나게 귀가 밝은 놈이다. 단풍이 우수수 떨어지는 와중에 중얼거려 본 것뿐인데 그걸 듣다니……. 토끼 귀를 삶아 먹었나? "크크크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헛것을 들은 모양이군요." 빠각! 뻑! 빠각! 퍽퍽! 퍼퍼버버벅! 이놈은 그냥 때리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살이 얇아 뼈가 도드라진 턱주가리나 가슴뼈가 있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날리고 있었다. 어떻게 때리면 무지 아프게 먹힐까만을 연구하면서 수많은 실험을 해본 것이 분명 한 놈이다. 그간 령령의 구타에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놈에게 맞으니 배는 더 아픈 것 같다. "그만하세요. 어차피 일개 점소이에 불과하다는 것은 제가 더 잘 알아요. 화풀이는 그 정도로 됐을 테니 물러나세요." 제갈혜 소저가 아닌가? 무슨 일인가? 더구나 저 놈한테 명령조로 말을 하니 놈이 순순히 물러나 버리는 게 아닌가? "정말 당신 희한한 사람이군요. 무림인도 아니면서 무턱대고 시비를 거는 게 취미인가 봐요? 그래도 상대를 봐 가면서 시비를 걸지, 하필 무림맹의 일에 껴들다니 상황이 공교롭네요." "제갈혜 소저께서는 무림맹(武林盟) 사람이었군요. 저 사람이 소저께 굽실거리는 것을 보니 말이에요." 그녀는 부정을 안 하는지 어깨를 으쓱 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명예 단주랄까? 도깨비감투 같은 격이지요. 실제로는 아까 그 사람이 현무단의 실세랍니다." "그래도 교옥정 누님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겠지요? 말해 줄 수 있나요?" 내가 누님이라는 호칭을 쓰자 제갈혜는 매우 의외라는 듯 눈빛을 번뜩였다. 그녀의 망망대해 같은 눈동자가 내 혼을 빨아들이며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느껴졌다. 제갈혜가 심안공(心眼功)의 소유자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지만, 눈길을 피하기에는 이미 때늦은 감이 있었다. "요화 교옥정을 누님이라고 하다니……. 그녀에게 납치된 것도 의도 된 것이었나요? 그녀와 정확히 무슨 관계지요? 자 나한테 편하게 말해 봐요. 편하게…… 편하게……."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은은하게 속삭여 왔다. 두둥실 떠오르는 듯한 묘한 기분에 젖어 들면서 스스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듯했다. 말하고 싶어졌다. 내 속에 간직한 나만의 비밀들을 낱낱이, 모두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성의 한 편에서는 거칠게 반항을 하고 있었다. 속에 있는 것을 털어놓는 순간 소중한 뭔가가 끊어져 버릴 거라는 끝없는 불안감, 두 이성간의 다툼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있었다. 전신이 학질 걸린 사람 마냥 부들부들 떨렸다. 명령을 받아야 하는 신경계에 이상이 생겼음 일 것이다. 엇갈린 명령을 동시에 받고 있으니 혼선에 혼선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붕! 제갈혜가 서 있는 자리에 내력이 실린 철봉이 날아들어 나와 시선을 마주치고 있던 그녀가 어쩔 수 없이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제 서야 내 잔 떨림은 진정되어 가면서 제 정신이 들어왔다. '소방인가? 이 둔탁하고 멋없는 철봉을 던질 녀석은 그밖에 없지.' 아무리 해룡(海龍)이라는 제갈혜도 친구인 소방 앞에서는 한 수 접어주지 않을 수 없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나만의 비밀이 탄로나 만인의 웃음거리와 빈축을 사지 않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역시 친구 하나는 잘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너 정말 이럴 거야? 이것은 맹의 일이야,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제갈혜가 철봉을 던지고서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는 소방한테 항의를 하고 있었지만, 소방은 먼 하늘을 보며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했다. "아, 이런 비가 오겠는데, 제갈혜야 우산 준비해라." "야, 야, 야! 허튼 소리 그만하고, 내가 용무를 끝낼 동안 얼씬거리지 마, 다른데 가서 구걸이나 해!" "비 올 거라니깐 그러네. 그래 넌 떠들어라. 난 비나 피하면서 잠이나 자련다." 제갈혜의 불만 어린 투정을 끝끝내 무시해 버린 그는 망아루 난간 구석에 몸을 기대고 앉아 무릎을 세우고서 머리를 파묻더니 그대로 코를 골며 정말 자기 시작했다. 다시 나한테 심안공(心眼功)을 걸까 말까하며 나와 소방(蘇芳)을 번갈아 보던 제갈혜(諸葛慧)는 하늘에 먹구름이 끼며 한 방울 두 방울 툭툭 떨어져 내리는 비에 발을 동동 구르더니만, 급기야는 투덜투덜 거리며 망아루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슬그머니 망아루 내부를 살펴보니 아까 나를 때리던 황의 중년인과 같은 복장의 청년들이 주루 일층 탁자들을 점령하고 있었다. 아마 망아루가 생긴 이래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날일지도 모르겠다. 인피면구를 쓴 주령령이 나 대신 그들의 주문을 받아 요리를 나르고 있었고, 홍 영감은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도 역시 계산대에 기대어 앉아 졸고 있었다. 그러나, 청성삼검(靑城三劍)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의 뒤를 밟아 추적에 나선 듯했다. 교옥정 누님의 놀라운 신법을 못 믿는 것은 아니나 불안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문득 머릿속이 윙윙거리며 내가 가장 궁금해 하던 소식이 들려 왔다. '작삼, 고개 돌리지 말고, 그대로 듣기만 해. 교옥정의 신법이 풍룡 종리연보다 뒤쳐지기는 하지만, 나조차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알아주는 일절이야. 청성삼검이 그녀 뒤를 추적해 들어간 순간에 그녀는 이미 개방의 마지막 정보 범위를 통과했어. 지금이면 중원 바깥인 월녀궁으로 들어갔을 게 분명해. 그럼 무림맹의 힘으로써도 간섭할 수 없어. 그러니까 안심해. 너와 그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겠어, 단지 이제부터는 너 살 궁리부터 하길 바라.' 한 방울 두 방울 툭툭 떨어지던 비는 이제 장대비로 변해 버렸다. 가슴팍에 비에 젖자 미세하면서도 청아한 한기가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준 목걸이에 달린 자수정에서 흘러나오는 한기임이 분명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느님, 부처님, 용왕님, 염라대왕님, 온갖 허다한 기타 잡신님들 감사합니다. 감사…… 욱.' 한참 기쁨에 들떠 있었는데 입안에 뭔가 뭉클한 게 틀어박혔다. 언제 나타났는지 우산을 들고 만두 접시를 든 주령령이 젓가락으로 내 입에 만두를 하나하나 넣어 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현관에서 지켜보던 무림맹 보초가 그녀를 막을까 하다가 그녀의 아름다운 정성이 갸륵해서 모르는 척 먼 산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로서는 최대한 베풀 수 있는 나름대로의 인간 된 도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입장은 전혀 아니올시다 이었다.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만두 하나 겨우 들어차기도 벅찰 만큼 입이 큰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 우우우 우, 우!" 직역해 보자면 만두를 그만 쑤셔 넣으라는 나의 강력한 항의였다. 그러나, 천사 같은 미소로 화답하는 령령의 전음은 내용이 조금 살벌했다. '이게 어디서 눈을 부라려! 눈깔아! 안 깔아? 확, 젓가락으로 눈깔 찔러 버린다. 아가리 더 벌려! 더! 이 멍청아, 우리가 조용히 지내는데, 니가 일을 벌려? 아예 무림맹 애들을 한 보따리로 끌어들여? 너 이 만두 무슨 수를 써서든 다 쳐 먹어. 조금이라도 흘리기만 해봐. 지난번의 그 말뚝 기억해? 혹시나 이런 때가 있을까 하고 잘 모셔 놨어. 바닥에 만두 찌꺼기 하나라도 발견되면 새벽에 몰래 와서 니 똥꾸녕 뚫어 버린다! 알았어? 흥!' 멍청한 보초 녀석은 빈 만두 접시를 들고 유유히 주루 안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마음씨를 가졌다고, 천사가 따로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나마 눈치 빠른 소방은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략 알아차린 것 같기는 했지만, 후환이 두려웠는지 뒤척뒤척 이며 더욱 열심히 코를 골았다. 저걸 친구라고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조금 아리송하긴 했지만, 걱정이다. 입안에 틀어박힌 왕만두 다섯 개를 무슨 수로 먹어야 할지……. 저 마녀와 나를 만나게 해준 하늘이 정말로 원망스럽기만 하다. 교옥정 선녀가 기다리는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으로 뛰어간다. 그녀는 하늘나라 선녀, 나는 별 볼일 없는 못생긴 나무꾼이었으나, 전해지는 바대로 선녀의 옷을 훔쳐 온갖 공갈협박을 하여 결혼에 성공하였다. 전설대로 애도 세 명이 아니라 넉넉하게 수 백 명을 낳아서 푸른 초원 위에 유아방목을 하였다. 애들 먹여 살리느라 잠도 자지 않고 밤낮 없이 등골 휠 지경으로 일을 해서 돈을 버느라 힘들었지만, 교옥정 선녀의 미소를 보는 재미로 하루하루 가는 줄 몰랐다. 어느 날 교 선녀는 눈물을 지으며 선녀 옷을 입고 싶다고 애걸복걸하며 매달리기에 이왕 애도 수 백 명 낳았으니 하고 안심을 하며 선뜻 내주었다. 선녀 옷을 걸쳐 입은 그녀 화사하게 웃으며 하늘나라로 가 버리는 게 아닌가! 여보, 여보를 부르며 뛰어가니 그녀는 살포시 웃으며 양팔을 내밀었다.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하며 안기려고 했는데, 내민 두 손을 살짝 말아 쥐더니 가운데 손가락만 세우는 것이었다. 혀가 배배 꼬이는 알 수 없는 아랏사 말인지 파국 말인지를 외우며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린 그녀, 너무 슬퍼 울기만 하는 나, 나도 떠나련다. 하고 일어섰는데, 유아방목을 시켰던 자식들이 갑자기 나를 구타하는 게 아닌가! 낳았으면 책임지라며, 돈벌어 오라며, 결혼시켜 달라며……. 수 백 명이 달라 드는 통에 정신을……. 떵! 떵떵! 골이 울리는 강한 충격에 간신히 악몽(惡夢)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끔찍한 꿈이었다. 교 누님이 선녀로 나온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애가 수 백 명이라니! '내 만에 하나, 혹시, 혹시라도 운이 무진장 좋아서 결혼을 하게 되면 애는 절대로 안 낳을 거야. 나 먹고살기에도 바쁜 세상에 애 먹여 살릴 돈이 어디서 나오겠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말이 문득 스치고 지나갔으나, 그냥 무시하며 다시 눈을 붙이려고 했다. "자네의 수면에 대한 그 무지막지한 본능적 노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을 수가 없군." 낯익은 소리에 슬며시 눈을 떠보니 아닌 게 아니라 포연강(鮑緣强)이 물지게를 매고서 아쉽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포 형님이셨군요. 저야 뭐 백수신공이라는 가공할 신공절학을 체득하고 있어서 어느 상황이라도 수면을 취할 수 있도록 수련을 쌓고 있습지요." 머리가 좀 얼얼한 것으로 봐서 물지게로 내려 찍힌 것이 분명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보통 때는 실없이 굴어도 그 실상은 령령 못지않게 독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웬 일로 새벽부터 물지게를……?" "그야 물은 날라야 하니까, 자네가 이 꼴인데 그럼 홍 영감이 나르겠는가? 령령이 나르겠는가? 뭐 귀찮지만 내가 날라야지. 그런데, 내가 특별히 정성을 다해서 만들어 준 왕만두를 잘 먹은 모양이 구만, 혹시나 엉덩이에 나무 말뚝이 박혀 있는 진기한 구경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일찍 나왔네 만 아쉽게 되었어. 쩝쩝." 그렇군, 이 인간이 손님이 몰려서 못 쉬게 되니까 악에 받쳐서 왕만두를 만들어 보낸 것이었구나! 어쩐지 처음 보는 특대 만두다 싶었다. 그녀가 요리를 할 리가 없으니 당연히 이 인간이 만들어 보냈겠지. "에휴, 포 형님, 섭섭한 말씀 마십시오. 어제 소제가 신나게 터지는 거 못 보셨습니까? 오늘도 좋게 넘어가기는 그른 듯 싶은데…… 에휴." "흠, 그러게 말이네. 역시 자네가 맞는 걸 후원 담 너머에서 구경을 하니 십 년 묵은 변비 내려가 듯 속이 후련해지더구먼. 내가 어제 하루 종일토록 자네 덕택에 낮잠도 못 자고 요리하느라 얼마나 바빴는지 아는가! 그리운 창고의 따뜻한 곰 가죽이 나를 부르는데도 못 달려가는 그 심정 자네는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게 주방장을 맡은 요리사라는 사람이 할 말인가? 황실 근위대의 숭고한 사명 운운할 때의 근엄함은 어디다가 엿 팔아먹었냐? 하여간 염치를 알아라, 이 쓸개 빠진 곰탱아! "아무렴요, 제가 어찌 그 애타는 심정 이해 못하겠습니까? 너무 죄송하고 송구스러워서 제 가슴이 미어터질 것만 같답니다." "험, 험 자네의 고초를 생각해서 속 넓고 관대한 내가 참도록 하지. 그런데, 자네 웬 일로 그렇게 개기는 건가? 평상시 자네 같으면 때리는 시늉만 해도 눈물 콧물 다 뿌리면서 팔대 조상까지 다 팔아먹고 엄살을 부렸을 게 뻔하지 않은가?" "……." 그러게 말이다. 나도 그 이유가 못내 궁금하다. 특별히 악에 받친 것도 아닌데, 교 누님의 가슴 시린 과거를 듣고 나니 무림맹 잡것들에게 고개를 숙이기가 싫어졌다. 맞아도 맞아도 잡초처럼 일어나게 해주는 억척스런 맷집, 그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란 그저 맞고 또 맞아도 굴하지 않는 나만의 고집을 보여주는 일 뿐인 것이다. 그들에게 힘없는 자의 소리 없는 외침을! 밟히고 밟혀서 짓뭉개져도 꿈틀거릴 힘이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상념에 사로잡혀서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 다무는 것을 본 포연강은 씩 웃으며 내려가 버렸다. 내가 뒤미처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귓가로 전음입밀(傳音入密) 한 가닥이 흘러 왔다. '사람이란 누구나 알게 모르게 가슴 속 시린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 그것에 너무 짓눌리진 말게나. 자그마한 것에 치우쳐서 큰 것을 잊고 살면 안 되는 것이거든.' 좀 의외였다. 언제나 가볍게 굴기만 해서 진중함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는 인간이 저렇게 무게 있는 말을 하는 날도 있다는 것이……. 솔직히 나도 인간이긴 한지라 무림맹 찌끄래기들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불안하긴 했다. 구타 정도까지는 뭐 그럭저럭 맞아 주겠는데, 칼이라도 들면 그것에는 대책이 없는 것이다. 맷집도 맷집 나름이지, 아직까지 본 적 없기는 하지만, 소위 무림인들이 말하는 검기(劍氣)라도 일으키게 되면 어딘가 허전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뭐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꽁꽁 묶인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왜 없어. 백수신공을 부단히 수련하는 일이 급선무지. 그럼 마저 자 보실까나?' 다시 교 누님을 꿈속에서 만나길 바라며 순식간에 잠 속에 빠져들었다. 촤악! 전신이 이미 비에 젖어 있어서 별로 찜찜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날 깨우는 것이 따사로운 햇살이 아니라 차가운 물세례라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더구나 그 물세례를 뿌린 것이 무림맹 인간도 아닌 별 상관도 없는 인간이라면 더더욱 문제가 있다고 싶다. 내게 물을 뿌린 것은 다름 아닌 남궁현(南宮炫) 녀석이었다. 그 옆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붙는 소갈머리 없는 당가희(唐嘉喜)가 붙어 있었지만, 저번에 같이 보았던 점창파의 후기지수라는 모용천풍인지 모용백풍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흥, 당신도 무림맹 사람이요?" 일단 물을 뿌려서 깨워 준 보답으로 퉁명하게 질문을 던졌다. "아니, 무림맹(武林盟)이라고 하면 이를 가는 사람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지." "그럼 왜 깨운 거요?" "아, 무림맹 상대로 깽판을 부렸다며? 고맙다고 그 말이 하고 싶더군. 더불어서 황보원(皇甫元) 현무 부단주의 천왕삼권(天王三拳)에 반 작살이 났다는 자네 상판 구경도 좀 구경할 겸 왔네만, 안색이 그리 나쁘진 않군." 이 녀석은 나한테 쌓인 게 있을 텐데, 무림맹에도 쌓인 게 있는 모양이다. 하여간 두루 적을 만들고 다니는 자기 잘난 멋에 사는 무지막지하게 잘생긴 기생 오라버니 같은 놈! 문득 반드시 이놈에게 해야 할 말이 떠올랐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소." "그래? 어디 해봐.' "지금 내가 큰 거랑 작은 거 둘 다 너무 급해서 여기에 실례를 할 것 같으니 뒷간에 갈 수 있게 제갈혜 소저에게 말 좀 전해 주시오." "……." 잠시 부르르 떨던 남궁현은 당 소저를 불렀다. "당가희 소저, 부탁이 있소." "네, 남궁 오라버니, 말씀만 하세요.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어요." 당가희의 오동통하니 귀여운 양 뺨이 도화 빛으로 붉게 물들며 두 눈에 끈적끈적한 물빛이 일렁이는 것이 무언가 기대와 열망을 품은 듯한 사춘기 소녀의 초야를 연상케 했다. 하여간 나는 안중에 없다는 듯이 둘만의 세계에 빠져 버렸다. 이 나쁜 녀석, 감히 주령령이 너를 애타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새 바람을 펴? 하기야 당가희만 넘어갔을 리가 없다. 첫날 본 제갈혜도 그의 앞에서는 현숙한 여인처럼 내숭을 떨더니 소방과 오붓하게 남았을 때 오두방정을 아낌없이 펼치는 것을 내 이미 목격하지 않았는가! 에휴, 잘 들 논다. 잘 들 놀아. "앞으로 저 점소이가 먹을 밥에 설사약 좀 듬뿍 뿌려 주시오." "……." 하여간 쪼진 하기 그지없는 놈 같으니라고. 번드르르한 상판에 차갑고 냉혹해 보이면서도 자존심 강한 성격 이면에는 뭔가 삑사리를 타는 듯한 불안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래도 멋은 있어 보이더라 만,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망가지게 하는 걸까? 갑자기 매서운 늦가을 산바람이 회운봉(回雲峰)을 타고 휘몰아치더니 날 반경으로 스쳐지나 갔다. 순간 착각이었을까 이제는 낙엽들이 제법 많이 떨어져서 앙상함을 드러내기 시작한 나뭇가지들이 날 향해서 살랑살랑 거린 것처럼 보인 것은……? '어쭈? 나무 주제에 손가락질도 하네 그려. 크크크크…… 겨울이 되어 건조해지기만 해봐라. 방금 손가락질한 나무들 잘 기억했으니까 사그리 불질러 주마.' 잠깐 생각했을 뿐인데 돌개바람이고 무엇이고 간에 찰나 지간에 사라지면서 정적이 찾아왔다. 내가 장난삼아 인상을 쓰고 그 나무들을 흘겨보았더니, 부르르 떨면서 단풍들을 하나 둘 떨어뜨린 것도 같았다. '끙, 이젠 헛것이 보이는구나. 최후의 순간이 다가와서 그런가? 무림맹! 비록 내 한 몸 망가질 대로 망가져도 네 녀석들에게만은 고개 숙이지 않겠다. 적어도 힘없는 자의 의지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리라!' 현실을 잊고 실없이 나무 상대로 농을 친 내 자신이 우스워 인상을 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날 무지 아프게 갈겨 되던 철장갑 이름이 황보원이라는 것을 남궁현 녀석과의 대화로 알 수 있었다. 제갈혜야 소방이 은근슬쩍 견제를 해줄듯 싶기도 하고, 남궁현의 등장으로 내숭을 떠느라 나에게 신경을 덜 쓸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황보원이란 놈은 피의 전장을 달려온 듯한, 근본부터 싸가지 밥 말아먹은 놈이라는 게 느껴진다. 눈칫밥 스물 하고도 일곱 해의 날카로운 안력이 그를 조심하라고 경고해 주고 있었다. 단지 조심만 할 뿐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다는 게 문제이긴 했다. 남궁현 녀석이 내 앞에서는 치졸하게 굴었어도 얘기는 전달해 준 모양인지 험상궂게 생긴 황의 무사 두 명이 날 데리고 뒷간 앞까지 대동해 줬다. 제갈혜 소저가 아무리 현숙, 고귀한 모습에 해맑은 눈빛으로 고 단수 내숭을 떨고 있어도 남궁현 말 한마디면 결국 들어 먹히게 되어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제대로 들어 맞았다. 앞으로 종종 써먹을 수 있는 약점 하나를 잡은 것이다. 크크크. 그나저나 소방 앞에서 쪽팔리게 노상 방출을 안 하려고 얼마나 참고 참았던지, 아닌 게 아니라 특대 만두를 채로 하나하나 삼켜 버렸으니 뱃속 상태가 좋을 리가 없었다. 한 때는 목구멍에 척 걸려서 안 넘어가는 걸 뒤통수를 나무에 열심히 박아서 생존을 위한 발악 아닌 발악으로 간신히 질식사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일단 나무 말뚝 항문 관통을 피한 것은 좋았는데, 씹히지도 않은 왕만두가 하나도 아니고 다섯 개나 뱃속으로 들어갔으니 일이 나도 보통 일이 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남궁현 녀석을 보자마자 한 소리가 대뜸 뒷간을 가게 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쏴아아아! 뿌지직 뿌직 뿌직! 좌르르륵! 뿌지직……. 그야말로 뱃속에 뭉쳐 있던 온갖 오물들이 폭포수 떨어지듯 말 그대로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내렸다. 냄새는 또 얼마나 고약한지 나로부터 다섯 걸음 안에 있어야 한다고 명령받은 황의 무사들이 이때만큼은 스무 걸음 바깥으로 물러섰다. 하물며 당사자인 나도 얼마나 괴롭겠는가? 꼬박 하루 이상을 매달려 있었다가 속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쏟아 내었더니 다리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갈 정도로 후들후들 떨렸다. 그게 딱해 보였는지 황의 무사 한 명이 혀를 차며 말을 건넸다. "쯧쯧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네를 고문할 텐데, 이렇게 힘이 없어서야 어디 쓰겠는가? 고문하는 사람까지도 덩달아 기운이 빠지겠구먼." "……." 이 자식이 위로를 하겠다는 거야? 염장을 지르겠다는 거야? 하여간 무림맹 아해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맘에 안 든다니까. "그런데, 그거 아는가? 자네가 막패의 구타를 반나절 동안 받아 내고도 안 죽었다는 말을 제갈혜 단주님이 황보원 부단주님에게 했다네. 황보원 부단주님은 그 말을 반신반의하다가 자네를 직접 고문하기보다는 단원들 몸도 풀 겸 차륜구타(車輪毆打)를 하게 해 달라고 건의를 한 모양이야." 아주 이것들이 날 말려 죽이려고 작정을 했나? 그래 맘대로 해라, 맘대로 해. 그나마 막패가 나를 때리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말은 은근슬쩍 빼 버린 듯했다. 하기야 나도 안 믿어지는데, 황보 무식이가 그걸 믿어 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제갈혜 소저께서 그 건의를 받아들였나요?" 맞는 일이라면 지긋지긋했으므로 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물론 고문도 싫었지만, 고문은 그래도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려고 너스레를 떠는 동안 틈틈이 쉴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반면에 차륜구타(車輪毆打)는 무림맹 아해들 오십 명이 돌아가며 팬다는 소리니 쉴 틈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자기 차례가 오기 무섭게 한 대라도 더 패려고 안달할 것이 뻔하거늘. 이번에는 단풍나무에 날 묶는 짓은 하지 않고, 단지 도망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양 손목만을 동아줄에 꽁꽁 매어 그 끝을 망아루 앞마당 한 가운데 박아 넣은 말뚝에 묶는 것이었다. 안 봐도 뻔하게 차륜구타가 있을 거라는 것을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내 주변으로 황의 무사 50명이 도열한 가운데 제갈혜(諸葛慧)소저와 황보원(皇甫元)이 내 앞에 섰다. 제갈혜가 직접 왔으니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작삼, 당신이 내 친구의 친구인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번 요화 교옥정 건은 제 권한으로 넘어가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혈해진경이라는 덫으로 그녀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조호리산지계(調虎離山之計)를 위해 무림맹은 구파일방의 힘까지 빌려 와야 했어요." "후후, 우습군요.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무리를 해서 한 여인을 잡아야 한단 말이요? 그것 말고도 무림맹이 할 일은 많을 텐데……." "문제는 그녀가 건드린 사람들이 하나같이 세력 있는 고관대작들이라는데 있어요. 더구나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이 동창을 거느리는 사람이니 그 분노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당신이 아무리 멍청해도 모르지는 않을 거예요." "……." 아예 대놓고 내가 멍청하다고 욕을 해라. 욕을 해. 하여간 제갈혜의 교묘하기 그지없는 말발은 내가 만난 이들 중에 단연 으뜸이다. 령령이나 교 누님은 대놓고 죽인다, 찌른다, 뚫어 버린다는 말을 있는 그대로 솔직 담백하게 하는데 반해 이 여자는 소방이랑 독대할 때 빼고는 말을 신중하게 가려 가며 한다는 티가 난다. 그러면서도 의표를 서슴없이 잘 찔러 내며 자기가 의도한 바대로 대화를 유도해 내는데 도가 텄다. 하긴 그 정도 되니까 중원제일지(中原第壹智)라는 명성에 해룡(海龍)이라는 칭호까지 받은 것 아니겠어? "청성삼검이 그녀를 발견하면 호각 소리를 들은 현무 단원들이 즉시 달려나가 포위해서 일거에 잡는다는 제 계획이 당신 한 사람으로 인해 되 돌이킬 수 없게 돼 버렸지요. 교옥정이 도망가 숨어 버린 월녀궁은 중원 무림 세력권 바깥이에요. 마황맹과 대치한 지금 그곳에까지 힘을 뻗칠 여력이 없어요. 아시겠어요? 당신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아무리 강호와 관이 서로 관여치 않는다는 묵계(默計)가 있다고 해도 동창의 힘은 간과할 수가 없답니다. 결국 우리는 당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징계를 했다는 기록을 남겨야 하지요." 아으 어지럽게 배배 돌려서 말하는 거 봐라. 보아하니 침대 위에서 허리를 배배 돌리기도 능숙하게 잘 할 듯 싶다. 누가 이 여편네를 데려갈지 몰라도 복 터졌구먼, 비록 내숭이어도 현숙하면서 고귀한 자태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망망대해 같은 눈빛에다가 침대 위 기술까지 죽여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아니겠는가! "너무 돌려서 말을 하니 어지럽군요. 간단하게 용건만 말해 주시지요. 제갈혜 소저." "좋아요. 황보원 부단주님과 의견을 나눈 결과, 현무 단원들의 차륜구타를 오늘 하루 동안 받는 것으로 마무리짓겠어요. 만에 하나 살아남는다면 그 이후에 당신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말이에요." "후후훗,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맘대로 하시구려." 그들이 물러서자 대기하고 있던 황의 무사 한 명이 바로 정권 자세를 잡으며 씩 웃어 보였다. 아침을 먹고 이빨을 닦지 않았는지 드러난 치아 사이에 낀 김 조각이 흉측해 보였다. '호우, 죽지는 않겠지만, 쪼끔 아플 것 같은데.' 한숨을 내쉬며 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는 녀석의 상판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의외의 인물이 내 앞으로 더 빠르게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어라라, 남궁현 이 자식 왜 칼을 쳐든 채 나오고 지랄이야? 잘 하면 칼로 날 찌르겠다? 아니 야, 야, 불만 있음 대화로 풀어 가자고. 거기 서, 서라니깐!' 그러나, 남궁현 녀석은 나는 본 척도 안하고 망아루 안의 어두운 구석을 향해 외쳤다. "곽철 대협, 이전에 약속했던 비무를 지금 이곳에서 치르고자 하오. 받아 주시겠소?" "물론. 당신과 겨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소. 비무첩도 없이 바로 비무를 요청해 온 것은 뜻밖이지만, 검에 미쳤다는 내가 때와 장소를 가릴 리가 없지 않겠소?" 역시 언제나처럼 백건아를 홀짝 홀짝이던 곽철 대협이 기다렸다는 듯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칼을 빗겨 들고 내 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참관인은 당가희 소저, 제갈혜 소저, 황보원 대협 삼인이 있으니 전력을 다해 겨뤄 봅시다. 당신과 겨루기 위해 구룡봉(九龍峰)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 잡고 왔으니 모자람이 없을 것이오." 남궁현 녀석과 곽철 대협이 칼을 들고 대치하자 이빨에 김을 끼우고 미친놈처럼 히죽거리던 녀석이 그 기파에 밀려 뒤로 물러서게 되었다. 중원 후기지수라는 구룡(九龍)중 광룡(狂龍)과 백룡(白龍)의 비무이니 일개 무림맹 무사가 껴들 여지가 없는 것이긴 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내가 묶여 있는 마당에서 비무(比武)를 하려는 것인지 처음에는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방을 둘러보니 씩 웃으며 고개를 까딱여 주는 게 뭔가 눈치를 챈 듯싶었다. 쩝 차륜구타를 일단 피한 것까지는 좋은데, 칼바람 속에 노출되는 것 또한 만만치 않은 게 문제일 듯싶었다. 수상한 낌새를 알아챈 황보 무식이가 제갈혜 소저에게 비무를 중단시켜 줄 것을 요청하려 했으나, 늦어도 한 참 늦어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남궁현 녀석에게 열심히 작업 중일 제갈혜의 황홀한 시선 속에는 검귀(劍鬼)라는 곽철 대협과 칼을 마주 들고 대치한 남궁현 녀석의 늠름한 모습 밖에 안 들어올 텐데 비무를 중단시키는 삽질을 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녀 옆에는 역시 마찬가지로 넋을 잃은 듯한 사천당문의 싸가지 당가희가 서 있었다. 역시 무지막지하게 잘 생겨 먹은 기생 오라버니 남궁현이 정식으로 칼을 빼 들고 제왕검법을 펼치는 것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뿐만 아니라 창가를 통해 그를 내다보는 주령령의 아련한 시선 또한 놓칠 수 없었다. '니기미! 남자 건 여자 건간에 일단 잘 생기고 볼 일이라니깐. 그래야 가만있어도 월척이 걸려들 것 아니야. 나 같은 게 백날 작업해 봐라. 송사리 하나 걸리나? 에휴.' 두 사람의 대치 상태는 무려 두 식 경을 넘어서고 있었다. 누가 먼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서로 노려보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무공의 문외한인 내가 느끼기에도 둘의 몸에서 피어나는 무형의 기운들이 서로 치열한 탐색전을 벌이며 상대방의 빈틈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어떻게 알아챘느냐고? 둘 사이에서 밀린 기운이 나를 무지막지하게 찔러 버리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기파에 찔린 순간은 불에 지진 송곳으로 푹 찌르는 것처럼 극통이 전신으로 퍼지다가 기운이 해제되면 쑥 빠지는 듯 홀가분해지는 기분, 그게 계속 반복되니 바로 근처에 근접해 있는 나로서는 정말 짜증이 치밀면서 욕이 나오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 적극적으로 두 사람의 비무를 말리려고 했던 황보 무식이도 무인으로서 둘의 대결에 깊은 관심이 생겼는지 이제는 적극적인 참관인 자격으로 입장을 바꿨다. '아, 싸우든 말든 좋은데 난 좀 구석으로 빼 달라고, 고래도 고래 나름이지 이런 녀석들 사이서 등만 터지겠어? 혹시 일부러 차륜구타(車輪毆打) 대신에 여기에 놔둔 것 아냐? 이런 썩을!' 먼저 움직인 것은 역시 내가 보기에도 한 수 밀릴 것 같은 남궁현이었다. 그의 성명절기가 제왕검법(帝王劍法)이었나? 검법 이름만 들어보면 혈해진경(血海眞經)에 맞먹을 정도로 광오했다. 대략 듣기로는 만인 위에 군림하듯 강맹하면서 위엄 있게 펼쳐지는 실전 검법이라고 소방한테 들은 듯했다. 그 말대로 내 눈에 비쳐진 것은 햇빛에 반사된 검의 잔영이 남긴 한 줄기 곧은 선이었다. 아무 기교를 부리지 않고도 강맹함을 과시하면서 바로 찌르기로 들어갔는데, 검 자체에 미세한 진동이 가미된듯 하기도 했다. 그냥 찌르기도 힘들텐데, 저렇게 가늘게 진동까지 주려면 정말 엄청나게 빡세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야, 야 그냥 찌르지. 미세하게 진동을 주는 겉멋을 준다고 더 강하게 먹힐 것 같으냐? 아주 갖은 오두방정을 다 떨어요.' 곽철 대협은 남궁현 녀석이 바로 지척에 이를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바로 앞에 이르자 그때서야 검을 휘두르는데 순간 자욱한 구름이 그의 주변을 감돈 듯한 착각이 일었다. 햇빛에 반사되는 각도의 구름들을 보니 번쩍번쩍 거렷다. 그제야 저 자욱한 구름의 실체가 무수한 검들이 펼치는 잔영들의 집합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연 그의 성명절기라는 유운검법(流雲劍法)에 걸맞은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궁현 녀석은 미세한 진동을 줄뿐 거의 직선적인 공격인데, 곽철 대협은 무수한 잔영을 뿌려야 하는 만큼 무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팔을 무진장 떨면서 펼쳐야 하는 검법이라니! 만약 내가 잠시 동안만 펼치고 나면 팔이 너덜너덜해져서 툭 떨어지고 말 것이다. 차차차차차창차창! 단 한 번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리는 수 십 번은 부딪힌 듯이 요란하기 그지없었다. "아 시끄러워 죽갔네. 귀 좀 막게 손 좀 풀어 줘! 아니면 귀마개 좀 달라고!"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관계로 내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둘의 대결에 정신이 팔린 무리들의 시선에 나란 존재는 까마득히 잊혀져 버린 지 오래였고, 내 외침은 충돌음과 기파에 밀려 요 근처에서만 맴돌 뿐이었다. 좋건 싫건 지척에서 벌어지는 대결을 강제적으로 관전해야만 했다. 싸움 구경이 강 건너 불구경 다음으로 재밌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바짝 붙어 보는 것은 정말이지 안 보느니만 도 못하다고 하겠다. 불구경도 너무 가까이서 보면 불똥이 튀거나 매캐한 연기 때문에 괴로울 것인데, 두 고수들의 싸움판 바로 곁에 있으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제왕검법의 강맹함만으로는 유운검법의 화려함을 뚫을 수 없다고 느꼈는지 남궁현의 신형이 동시에 사방팔방에 펼쳐지더니 거의 동시에 검을 찔러 넣는 게 아닌가? 분신술을 펼치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의 가공할 신법이라는 소리인데, 역시 백룡(白龍)이란 칭호를 딱지치기로 거저 얻은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 맞대응 하는 곽철 대협의 신형까지 핑그르르 돌더니 수 십 개로 불어나 남궁현 녀석의 검에 일일이 대응하고 있었다. 순간이었다. 분신들에서 일어난 검의 구름이 모든 남궁현 녀석의 검을 동시에 감싸며 들어가는 것이었다. 빗살처럼 쏘아져 들어오는 검을 거꾸로 타고 반격하는 검의 잔영이라니! 위기를 느꼈음인가? 남궁현 녀석의 안면에 낭패스러운 기색이 완연한 게 보기에 심히 좋았다. 카카카카카카. 문득 정수리에 쏘아지는 강력한 살기가 느껴져 돌아보니 창가에서 아련한 시선을 던지던 주령령이 남궁현 녀석의 위기 순간에 내가 기뻐하는 걸 봤는지 두 눈을 살벌하게 치켜뜨고 째려보는 게 아닌가? 어쭈 지금 이 상황에 째려보면 어쩔 건데? 눈깔 찢어지겠다. 힘 좀 풀어라. 크크크크 어차피 차륜구타를 당해야 하는 이 몸, 무엇이 더 두렵겠는가? 남궁현은 위기에 몰리자 모든 신형을 거두고 검으로 자신의 앞을 종횡무진으로 그어 대며 뒤로 물러서기에 급급했다. 곽철 대협의 신형도 하나가 되면서 더욱 강하면서 현란하기 그지없는 구름 덩어리를 전면으로 내쏘았고, 또 다시 강한 마찰음이 그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게 되었다. 차차장 차차장창 차장차창……! 둘 사이에서 새하얀 불꽃이 무수하게 튀는 것만 보일 뿐 정작 검들은 그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얼마나 빠른 쾌검(快劍)들을 구사하기에 내 시야에는 잡히지 않는단 말인가? 황보원이나 소방이 보면서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떡 끄떡이는 것을 보니 역시 고수들은 다르다는…… 아니 소방 눈에도 보이는 건가? 무림맹(武林盟) 현무단(玄武團) 아해들도 놀랍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뭐가 뭔지 이해는 못한 듯 의문투성이 흐리멍덩 고등어 눈깔이건만, 개방 백의개라는 소방이 지금 펼쳐지는 비무를 알아보고 있단 말인가? 그럼 그는 최소한 무림맹 현무단 애들보다는 고수라는 소리였다. 어쩐지 약할 것 같지 않던 교옥정 누님이 소방한테 일방적으로 밀린다 싶더니만, 그런 연유가 있었군. 쩝, 그러고 보니 어쩌면 나만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역시 밀리던 남궁현이 심하게 낭패를 보았는지 그가 즐겨 입는 백의가 너덜너덜하게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곽철 대협이 조금 봐줬는지 심한 상처를 입은 기색은 없지만, 같은 구룡의 일원으로써 자존심에 입은 상처란 이루 말하기 힘들 것이다. 딱 칭호를 놓고 봐도 광룡(狂龍) 대 백룡(白龍), 광룡이 당연 더 강할 것 같지 않은가? 그래도 곽철 대협이 제왕검법 자체를 보고 싶어해서인지 일부러 봐주며 길게 끈다는 느낌이 왔다. 아마 저런 상태면 한 시진 이상은 갈지도 모른다. 이미 반 시진은 지나갔고, 둘 사이 비무에 적응이 된 나에게 슬슬 백수신공의 기세가 일기당천 솟구쳐 왔다. 처음에는 눈이 감겨져 와도 뒤에서 찌르는 시선이 있어서 흠칫흠칫 하며 깨곤 했는데, 그마저 적응이 되니 서서히 몸이 기우는 듯싶었다. 뭐 누가 나를 신경 쓰기나 하겠나? 무림인들의 생리가 그러하듯 평소에 구경하기 힘든 진기 명기한 비무가 펼쳐지는데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밤에 만두를 전력으로 삼키느라 제대로 잠을 못 잤다가 새벽이나 되서야 겨우 선잠에 빠진 순간 포연강이 지나가며 귀찮게 해서 다시 잠시 깼다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자나 싶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남궁현 녀석이 와서 물을 뿌리는 바람에 악몽에서나마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대신 잠은 별로 자지를 못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이제나저제나 눈치를 보아 왔던 수마(睡魔)가 이때다 싶어 나를 덮쳐 와 버렸다. 푸른 풀밭을 이불 삼아 드러눕자 따스한 햇살이 그 위를 살짝 덮은 덕에 천국이 따로 없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평상시에는 얌전히 잠들었던 내가 코까지 골며 골아 떨어졌겠는가! 대결이야 어떻게 끝나든 지금 중요한 것은 한낮의 단잠이었다. 이왕이면 오래오래 비무를 하길 바라며 꿈의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부드럽기 그지없는 섬섬옥수가 나를 살살 흔들어 깨웠다. 잠을 자면서도 바람결에 실려 오는 특이한 울금향을 느낄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교 누님의 나긋나긋한 손길과 은은한 냄새를 떠오르게 해줬기에……. 왠지 모를 기대감에 실눈을 억지로 뜨자 태양은 중천을 넘어 오시 방향에 위치해 있었고, 날 깨운 의문의 여인은 해를 등지고 있기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몸매가 교 누님이랑 비슷하네. 설마, 아니야 이미 월녀궁으로 피신했을 누님이 이곳에 왜?' "작삼, 야 작삼 비무 끝났어. 어서 일어나." 조그맣게 속삭여 오는 귀여우면서도 낭랑한 이 목소리, 잠시나마 교 누님을 연상했던 나는 적이 실망하면서 다시 눈을 감았다. "작삼, 작삼 사람들이 다 쳐다봐. 어서 일어나. 이 바보야." 소방이 계집애처럼 나긋나긋하게 속삭여 왔다. 그만해라 이 녀석아 닭살이 다다다다닥 돋는단 말이다. 더구나 내가 낮잠을 자는 거랑 상관없는 인간들이 쳐다보건 말건 신경 쓸 이유도 없고, 자 날 데려 가 다오. 몽마(夢魔)여, 다시 한 번 그녀와 만날 수 있도록…… 꿈의 나락으로……. 퍼억! "으아아악! 누구야!' "나다. 왜? 떫나?" 너덜너덜해진 백의를 걸치고서 반으로 뎅겅 잘려 나간 검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서 있는 남궁현의 초췌한 모습을 보자 옆구리에 작렬한 발길질 정도는 쉽사리 잊혀졌고, 대신 인생의 묘미를 통달한 자만이 떠올릴 수 있는 미소가 빙그레 떠올랐다. 나의 발그레한 미소 속에서 뭔가를 깨달았는지 그의 뻘게진 안면이 붉으락푸르락 거렷다. 열이 바짝 올랐는지 전음입밀(傳音入密) 한 가닥을 시끄럽게 내 머릿속에 박아 넣었다. '야, 이 개만도 못한 후레자식아! 무림맹 하는 꼬락서니가 아니꼬워서 질 걸 뻔히 알면서도 미친 이무기 새끼한테 비무 요청을 해서 시간을 끌어 줬더니 코까지 골면서 뒤집혀 자냐! 니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난 그가 떠드는 동안 너는 씨부려라 나는 안 듣겠다는 의지를 관철시키듯 귓밥 한 움큼을 후비적 파서 돌돌 만 후 손가락 끝에 올려놓고 훅 불며 딴청을 부렸다. 맨 마지막에 한마디 쐐기를 박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요즘 고수들 참 웃기네. 그 고생고생 생고생해서 배운 전음입밀인가 뭔가 하는 내력 소모 기술을 욕하는 데나 써먹는다니 참으로 안타까운지고. 비싼 돈 들여가며 무공을 가르치느라 등골이 휘었을 양친께서 이 사실을 알면 억울해서 땅을 치고 울고불고 할 거다. 안 그래? 소방?" "어? 엉. 뭐 좀 거시기 하겠지." "더군다나 도와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일 벌리고서 그 수고를 몰라줬다고 욕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개만도 못한 후레자식과 동급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 글쎄. 그런 경우가 없어서…… 잘, 잘 모르겠는데." 질문은 소방에게 하였으나, 그가 답해 주길 바라고 떠든 것은 아니었으므로 내 뱁새 눈깔은 당연히 남궁현의 오색찬란한 안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수라는 것들이 별거 아니란 것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결국 그들도 인간인 것을……. 크크크크. 이로써 남궁현 녀석은 나와 같은 동급인 개만도 못한 후레자식이 되었다. 뭐 잊어버린 첫 짝사랑이지만, 그래도 묘하게 경쟁 의식을 느끼는 터라 나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꼬락서니를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황보 무식이와 제갈혜가 의논을 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이제라도 차륜구타(車輪毆打)를 실행할 생각인가? 다른 황의 무사들은 내가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서 황당 내지는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후훗, 남자란 자고로 배포를 크게 가져야 하는 것이지. 카카카카. 곧 제갈혜가 얘기가 끝났는지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작삼, 우리는 혈해진경 문제로 해서 오늘 저녁에 바로 이곳을 떠야 해요. 따라서 주어진 시간이 얼마 안 남았지요. 차륜구타는 시간 관계상 취소에요. 대신 요즘 새롭게 신풍적으로 떠오른 합격진을 실험해 볼까 해요."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 의견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당신의 그 버릇없으면서 기고만장한 배짱이 언제까지 유지될지 궁금하네요." "상대가 불신과 위선에 가득 찬 무림맹과 구파일방이라면 절대로 비굴하게 굴지 않을 겁니다." "지금 한 말, 문제가 될 여지는 충분하지만, 못들은 것으로 하겠어요. 당신은 조금 맷집이 강한 일개 점소이일 뿐이에요. 아무리 듣는 사람이 없어도 입을 함부로 놀린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세상 하직할 수 있어요. 무림맹이란 게 당신처럼 하찮은 자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가벼운 게 아니란 것을 알려주고 싶군요. 전원 준비하세요." "……." 역시 말발로는 제갈혜를 감당하기 역부족이다. 세 치 혀로 사람 기분 잡치게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다니 깐. 곧이어 무림맹 아해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내 주변을 둥그렇게 에워싸는 것을 보고 의문을 떠올렸다. 설마, 에이 무림맹이라는 것들이 설마하니 일개 점소이를 상대로…… 어, 어이 잠깐만! 퍼벅! 퍼버버벅! 퍼버버버벅! 퍼버버버버벅! 퍽! 퍽……! 뜻밖에도 전원이 나 하나를 가운데 놓고 일방적으로 패기 시작했다. 사방팔방에서 날리는 권과 각의 힘이 집중된 상태라 쓰러질 수도 없었다. 기우뚱할라치면 그 방향에서 재빨리 각이 날라 왔고, 그 반대로 기우뚱할라치면 그 방향에서 권이 내 무게중심을 향해 짓쳐드는 것이었다. 한참 정신없이 터지고 있자니 아련히 제갈혜의 설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본래 한 명의 초절정 고수를 현무 단원 오십 명의 힘으로 묶어 두는 포박진(包縛陣)을 변용 시켜 한 명의 극악한 점소이를 현무 단원 오십 명의 힘으로 징계하는 태형진(笞刑陣)으로 만들어 본 거예요. 이름은 집단구타(集團毆打)라고 지었는데, 쉬지 않고 때릴 수 있도록 집중구타(集中毆打)와 연속구타(聯速毆打)를 적절하게 적용시켜 봤어요." 다분히 무림맹에 강력한 반감을 표시한 별 볼 일없는, 하찮은 나에 대한 조롱이 확실했다. 무림맹에 대한 반감을 일류 고수로 구성된 집단구타(集團毆打)를 통해 두려움으로 바꾸면서 그 위세를 세우려 함인지도 모른다. 또는 귀찮을 뿐이니 이대로 죽여도 좋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결국 자신이 무림맹 소속임을 분명히 보여준 것뿐이었다. 그녀 자신이 스스로의 책임과 의무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니 탓을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소위 명문 정파임을 자처하는 무림인들에 대한 내 반감은 이 순간에도 부쩍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나라고 하는 조그마한 부스럼이 종국에는 치유할 수 없는 암으로 돌변하게 될 것임을……. "그만! 모두 물러서라."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황보원이 나서며 무림맹 아해들을 물렸다. 무슨 생각일까? "네 맷집이 엄청나다는 제갈혜 단주님의 말을 듣고도 일개 점소이로 치부하며 믿지를 않았었다만, 반 시진 동안 현무 단원들의 집단구타에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비명 한 번 안 지른 네 녀석의 대단한 맷집과 오기에 조금은 감탄했다. 묻겠다. 무림맹에 들어와 교옥정을 잡는데 협조를 해 줄 의향이 없는가? 만약 너로 인해 그 요녀를 잡게 된다면 넌 일개 점소이에서 벗어나 일약 엄청난 거부가 될 수도 있고, 나 다음가는 무림맹의 직위를 얻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역시 그는 나를 좋은 말로 회유하려 들고 있었다. 이른바 채찍을 조금 맛보여 준 후 당근을 보여주는 뻔히 보이는 수작이리라. 미안하지만, 상대를 잘못 봤다. "그, 그녀는 요녀가 아니다! 그녀는 그녀일 뿐이다. 무림맹의 잣대로 교 누님을 깎아 내지 마라. 무림맹 맹주 자리를 준다고 해도 난 일개 점소이 자리가 더 마음에 든다!" "훗, 조금은 생각이 있는 친구인가 했더니. 하찮은 점소이 주제에 월녀궁 수제자한테 푹 빠진 게로군. 이런 생각은 안 해봤나? 교옥정이 널 유혹하면서 거짓을 진실처럼 말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수많은 남자들을 폐인으로 만들만큼 더럽고 지저분하게 몸을 굴린 갈보 년을 위해 니 한 몸 피떡이 되도 알아주는 이는 하나도 없다. 그 갈보 년도 이미 너를 잊었을 것이다." 계속 황보 무식이 말을 들어보니 왠지 그럴 듯했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말에는 모순(矛盾)이 있었다. 나를 속이고 잊었을지 모르는 교 누님에게 날 미끼로 쓰려 한다는 말은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이다. 더구나 고관대작의 아들들을 폐인으로 만드는 것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그녀가 뭐가 아쉬워서 아무런 힘도 없는 나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말인가? 문득 이런 말장난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끝이 없다? '그렇지. 이대로 넘어갈 듯 말 듯 질질 시간을 끌다가 해가 넘어가면 싹 안면을 바꿔도 되지 않을까? 크크크크.' 주판알 구르는 소리가 그에게도 들렸는지 좀 더 설득의 강도를 높여 왔다. 난 그의 말에 수긍하듯 고개를 끄떡 끄덕이다가 의문이 제기되는 부분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어 보며,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었다. 황보 무식이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대화의 저자세를 취하는 데는 교옥정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소리였다. 누굴까? 도대체 교 누님의 원수는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기에 무림맹 전체가 발 벗고 나선단 말인가? 동창의 수좌라는 것으로만 가능한 것일까? 먼발치에 있던 제갈혜는 이미 내 잔머리를 알아챈 듯 했지만, 소방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남궁현을 의식해서인지 끼여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해는 어느덧 저녁노을이 져 가고 있었다. 한참 혼자 열을 올리던 황보원이 더 이상 내 머뭇거림을 봐줄 수 없다는 듯이 결단을 요구해 왔다. 솔직히 그가 뭐라고 하는지 귀담아 들은 내용이 하나도 없고 어떻게 하면 시간을 길게 끌 질문을 던질까 를 고려하면서 대화를 나눴을 뿐이었다. 결정 같은 것은 애초에 필요 없었다. 교 누님이 설사 나를 속였다고 해도 함께 한 추억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이해를 했나? 인생 맨 바닥에 있는 자네가 진정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일세. 수많은 미녀를 노예로 거느릴 수도 있고, 인생 역전의 발판이 되는 것이기도 하지. 보아하니 수긍을 한 것 같으니 우리와 같이 가도록 하세.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으니까." 누구를 소개시켜 준다는 것인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해가 거의 다 졌다는 것이었다. 이미 처음에 그가 말을 한 시간은 이제 한 식 경 밖에 안 남은 것이다. "흥, 필요 없습니다. 교 누님에 대한 제 믿음 또한 마찬가지 듯 무림맹을 싫어하는 내 마음 또한 변함없습니다. 내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난 안 가오. 일개 점소이가 좋다오." "……." 갑자기 그의 기세가 놀랍게 변화했다. 매서운 살기가 나를 마구 찔러 대고 있었다. 몹시 당황한 나는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처음 약속이 해가 질 때까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해는 져 가니 난 자유요! 무림맹 사람이 설마 자신이 한 말을 어기진 않겠지요?" "크크크크, 내가 멋지게 속았구나. 그런데 애송아 해는 아직 완전히 안 졌다. 아직 반 식 경은 남아 있단 말이다. 그 시간이면 내 손으로 징벌을 내리기에 충분하지." 붕! 붕! 빠각! "끄아아악!" 그의 철장갑을 낀 권이 주저 없이 내 명치에 꽂히면서 정신이 아득하게 달아났다. 턱이 휘어진 듯도 싶고, 공중을 몇 바퀴 돌면서 철피화의 각에 전신이 터져 나가는듯 싶기도 했다. 전신의 급소가 일시에 그의 권과 각에 뚫리면서 가공할 고통이 나를 찾아왔다. 지극히 짧은 순간의 극쾌(極快)! 이성적 사고가 거의 마비된 나의 이지로는 뭐가 무엇인지 몽롱하기 그지없었다. 이 자는 막패 정도는 우습게 뭉개 버릴 수 있는 진짜 고수였던 것이다. 우습다. 한때나마 막패를 심장마비 지경까지 몰고 갔다고 우쭐거렸던 내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고의 하나 남기지 말고 모조리 벗겨라!" 그의 명령을 받은 현무 단원들이 즉시 걸레가 된 내 옷을 찢듯이 벗겨 내어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고, 미리 먹을 갈라고 시켰던 그는 붓을 들어 내 가슴에 뭔가 써 내려갔다. 다 쓰자 다시 뒤집어 뭐라고 써넣었다. "하하하하, 기억해라 애송아. 넌 입만 살아 있는 개새끼다. 오늘을 잊지 마라! 무림맹에 반감을 품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의 말로 들어보아 내 전신에 뭐라고 낙서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유치하게도 노는구나 싶었지만 한마디도 할 수 있는 기운이 없었다. 허공에 붕 뜬 듯 하더니 이번에는 휙 날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소방의 비명이 들린 듯싶었다. 그대로 아래로 굴러 떨어진 나는 절벽에 가까운 골짜기로 마구 구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벌거숭이인 내 몸이 산골짜기에 듬성듬성 솟아난 돌 뿌리와 나무줄기에 찍히고 긁혀 더욱 너덜너덜 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느꼈다. 역시 나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음을……. 과연 내 의지대로 무림맹에 생채기 하나라도 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내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저 무림맹과 나는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할 수 없는 적대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소방의 외침이 내 귓가에 울려 퍼지며 그의 신형이 골짜기를 한줄기 바람처럼 가로지르는 것이 보였다. 그 이외에도 몇 명 더 보인 듯도 싶었지만, 그 뿐이었다. 오늘은 정말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졸리다. 그리고, 찾아온 암흑. 간만에 느끼는 편안한 기분……. 이대로, 이대로 영원히 잠드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영원한 수면을……. 지랄! 이 노무 새끼는 꼭 밟고 만다. 앙! 니 놈 우거지상을 볼 때까지는 안 죽을 줄 알어! [13]점소이를 노리는 살수 정신을 차려 보니 창가로 새벽의 여명이 밝아져 오는 가운데 내 방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맞바로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가슴이 뻐근하여 다시 몸을 뉘여야만 했다. '젠장 오질 나게 아프네. 그 새리, 죽일 새리 다음에 보이기만 하면 실컷…… 봐주마.' 언뜻 침대 옆에 사람 그림자가 느껴져 살펴보니 의자에 앉은 소방이 팔베개를 하고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옆에 물대야와 젖은 수건이 있는 걸로 보아 내가 잠든 동안 열심히 간호를 해줬던 모양이다. '자식, 계집애처럼 세심하게도 구네. 후후' 기특해서 잠이 든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줬다가 문득 흘러내린 부드러운 머릿결 사이로 비친 잠든 얼굴이 무척 아름답다고 느껴져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어루만지고 말았다. '으윽, 왜 이렇게 뽀얀 것이 아기 피부처럼 부드러운 거야. 닭살스럽게 기생 오라버니보다 더 징그럽네. 쩝, 욕구 불만에 따른 후유증인가.' 자칫 위험한 세계에 빠지겠다 싶어 얼른 시선을 돌려 천장을 바라봤다. 잠이라도 자려고 눈을 감으니 그날의 황보 무식이가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순간에 치고 들어오는 극쾌(極快)! 내부를 뒤흔드는 듯한 극강(極强)!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이는 권풍(券風)! 권과 각이 연이어 조화롭게 치고 들어오는 연타(聯打)! 하나하나 떠올릴 때마다 내 몸에 작렬하는 그의 주먹이 느껴져 흠칫흠칫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신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온다. 이번에는 당해도 제대로 당했는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역시 진정한 고수 앞에서는 구타심결(毆打心訣)이고 나발이고 소용이 없었다. 그 끔찍한 고통이란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령령의 구타는 맞는 순간은 매서워도 다 맞고 나면 오히려 개운한 것이 아무리 무식한 나라도 뭔가 있구나 하는 느낌이 언뜻 들었지만, 이렇게 피륙이 상할 만큼 전신(全身)에 작렬한 구타(毆打)는 처음 느껴 보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황보 무식이 만큼 권과 각이 강한 녀석은 처음 만났던 것 같다. 즉 제대로 된 녀석에게 제대로 된 구타를 당한 셈이었다. 문득 내가 무공을 열심히 배운다면 황보 무식이랑 일 대 일로 뜰 수 있을까 하는 호승심이 일어났다. 당한 만큼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는다면 감히 가운데가 달랑이는 사내대장부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그에 생각이 미치자 이렇게 침대 속에 기어 들어가 있는 내 자신을 용납할 수 없어 기를 쓰고 일어섰다. 벌거벗은 내 몸을 내려보니 아견공야(我犬工也)라고 먹물로 큼지막하게 휘갈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보나마나 등에도 같은 글자가 있을 것이었다 '이 호로 개노무 자슥! 두고 봐라. 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풍악산에 기어 올라온 너희 무림맹(武林盟) 얼라들을 친히 저승 구경 시켜 주마. 저승길 안내는 반드시 니 녀석에게 맡기겠다.' 물론 딱히 어떤 식으로 보복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나, 홧김에 그냥 굳은 다짐만 하는 것이었다. 굳. 은. 다. 짐. 만. 아직 새벽이라 그런지 계산대도, 주방도 텅텅 비어 있었다. 어제까지 시끌벅적하던 일층 전체가 이렇게 한산하게 비어 있는 것을 보니 을씨년스러운 게 귀신 튀어나오기에 딱 알맞다 싶었다. 처음에는 그냥 수건만 두르고 목욕도 할 겸 먹물로 갈겨진 육두문자도 지울 겸 소장강으로 내려갈까 하다가 하나를 더 추가시켰다. 물도 떠올 겸…… 창고에서 물지게를 꺼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귀찮기 그지없던 것이 이제는 내 생활의 일부처럼 되 버려서 하루라도 물을 안 뜨면 불안하기까지 하니 참으로 묘하디 묘한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삐걱거리는 마루바닥을 밝으며 계산대를 스쳐지나 현관에 이르자 산골짜기 아래로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이 보였다. 늦가을이라 한참 쌀쌀할 때니 안개 끼는 횟수가 부쩍 늘어 버렸다. 뭐, 소장강 내려가는 길이야 안 봐도 머릿속에 훤하게 그려질 정도니까 별 상관은 없지만 말이다. "야, 거기 서." 주령령(周鈴鈴)의 목소리, 순간 머리털이 곤두섰다. 그날 남궁현의 낭패스런 모습을 보고 웃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겁이 덜컥 났다. 그냥 넘어갈 그녀가 아닐 테니까. "물지게 내려놓고 일루 신속히 튀어 와." 그녀 말대로 신속 정확하게 물지게를 내려놓은 후 소리가 난 주루 난간 앞으로 다다다다 달려갔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이리저리 피하다가 배로 터지느니 빨리 터지고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게 나았다. '어럽쇼, 새벽이라고 인피면구를 안 썼나? 간만에 본 얼굴을 보는구만.' 모두가 아직은 잠이 들어 있는 때라 안심을 했는지 바람도 쐴 겸해서 맨 얼굴로 나온 모양이었다. 잡티 없는 새하얀 얼굴에 앵두같이 오동통하면서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시뻘건 입술, 오뚝한 코, 그녀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는 양끝이 약간 올라간 초롱초롱 커다란 두 눈, 게다가 새벽이어서 그런지 푸르스름한 빛깔을 흘리는 귀안(鬼眼). 조금은 신경질적이면서 음산한 기운이 도는 게 그녀 나름대로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것이다. 간만에 봐서 그런지 감회가 새롭기까지 한 미모였다. 주령령의 손이 올라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움찔했으나, 바로 주먹을 날리는 대신 내 견정혈 부근에 양손을 용조수(龍爪手) 형태로 올려놓고서 쥐어짜는 것이었다. "소리지르면 국물도 없다. 알았어?" 극심한 통증이 짜리릿하게 퍼졌으나,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는 연이어 온갖 관절부를 쥐고 짜거나, 누르거나, 비틀기를 일삼았다. '마, 마녀. 소리가 안 나게 조용히 처리하려고 하는구나. 독, 독한 년이로세.' 대략 일 각 정도를 그렇게 허비한 주령령은 마지막으로 내 눈앞에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를 들이대었다. 그녀의 숨결이 바로 코앞에서 느껴졌고, 알싸한 울금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앞으로 조용히 지내길 바래. 이런 일이 한 번만 더 생기면 경고 없이 니 구멍이란 구멍에 모조리 말뚝 박아 넣을 테니까. 목숨은 하나 뿐이야. 조심해라." 그럼 그렇지. 언제나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하는 게 그녀의 일상이지 뭐. 문제는 이렇게 협박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데 있었다. 정말 언젠가는 내 구멍이란 구멍에 나무 말뚝이 인정사정없이 박혀 어느 인적 없는 산골짜기 버려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령령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냉정한 여인이니까. 내가 부르르 떨며 고개를 끄떡이자 언제나처럼 쓰윽 사라져 버렸다. 어쩔 때 보면 정말로 인간이 아닌 귀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갈 정도다. 그래도 한 때 반한 줄도 모르고 반한 여인 아닌가! 가까운 곳에서 느껴진 숨결을 생각하니 피식 멋 적은 미소가 흘러나왔다. 돌아서 내려오다 보니 여기저기 통증을 부르짖던 전신이 개운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라라? 왜 이렇게 몸이 가뿐해졌지? 흠, 설마 그럴 리가 없지. 그렇지, 그럴 리야 없지.' 너무 짙은 안개라 그런지 산새들까지 둥지 안에서 가끔 지저귀기만 할 뿐 나오려 들지를 않았다. 길을 훤히 아는 나조차도 신경 써서 발을 내딛어야 할 정도였다. 자칫 잘못해서 돌 뿌리에라도 걸려 넘어지면, 꽤나 귀찮아질 테니까 말이다. 얼마 즘 지나왔을까 자욱한 안개 사이로 강물 냄새가 느껴졌다.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지레짐작으로 여기 즈음일 것이다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물웅덩이가 바로 지척에 있었다. 머뭇거림 없이 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고, 멋있게 몸을 던져 넣었다. 지난번에 교 누님이 청성삼검(靑城三劍)에게 피투성이로 쫓겨왔을 때 한 마리의 인어처럼 물속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몇 차례 따라 하다 보니 이젠 나도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몸을 쭉 펴고 내 몸을 스쳐 지나가는 물결을 느끼며……. 쿠웅! "아이고! 머리야. 누구야! 웅덩이 한가운데 바위를 쳐 넣은 게!" 바로 솟구쳐 오르며 이마 한가운데 뽈록 솟은 혹을 어루만져 보니 피까지 콸콸콸 솟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투덜투덜 거리면서 이왕 온 김에 씻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수건을 집어 들고 슥슥 목욕을 시작하려는데, 내 옆에 새까만 것이 두둥실 떠오르는 것이었다. 질겁해서 바로 뛰쳐나왔는데, 그 새까만 것은 출렁이는 물결을 따라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만을 할 뿐 별다르게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것이지. 날 유인하려고 죽은 척 하는 것인지도…….' 즉시 강가에 있는 큼지막한 짱 돌 몇 개를 주워들어 새까만 놈을 표적으로 세차게 던졌다. 퍽! 퍽! 빠각! 제대로 맞았는지 새빨간 피가 퐁퐁퐁 솟구쳐 올랐다. '후후훗, 감히 나를 노리고 덤비다니……. 그나저나 정체가 무엇인고?' 이 정도 피를 흘리고도 가만있는 거 보니 죽었다 싶어서 웅덩이 가로 떠밀려 온 그 괴물을 건져내었다. 의외로 가벼워서 한 손으로도 번쩍 들어올릴 수 있었다. "후미! 이게 뭐야!" 그런데, 막상 건져 놓고 보니 괴물이 아니라 복면을 뒤집어 쓴 소년이 아닌가! 죽었나 살았나 싶어 심장 부근에 귀를 갖다 대어 보니 미약하게 쿵 쿵 거리는 게 곧 죽을 것 같았다. 인공호흡이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복면을 벗겨 보니 제법 반반한 상판의 앳된 미소년이었다. 다만 이마 한 가운데 커다란 혹이 솟아 있었는데, 내 혹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데다 가 뒤통수에서마저도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확인 사살한다고 던진 짱 돌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이거 잘못해서 죽으면 살인죄가 적용되는 거 아니야? 아니지. 뒤통수에 맞은 짱 돌만 내가 던진 것이니까 반만 적용되겠지. 흠 그래도 감옥에 끌려가서 아직 젊은 내 인생을 거기서 마감할 수야 없지. 그, 그럼 인공호흡을…….' 그러나, 아무리 애라도 같은 남자인데, 입술과 입술을 맞부딪치는 인공호흡 쪽은 사양하고 싶었다. 미소년이 아니라 미소녀였으면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 하고 아쉬움으로 입맛을 다시며 볼록 튀어나온 배로 시선을 옮겼다. '아, 뭐 물만 빼 주면 되겠지?' 난 미소년을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배를 힘껏 밟았다. 별로 반응이 없어 약했나 싶어 인정사정없이 걷어차고 짓밟아 뭉개고 날라 차고…… 하다 보니 물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단지 물만이 아니라 엊그제 먹은 듯한 음식물까지 섞여서 사그리 게워지고 있었다. 가슴에 다시 귀를 대보니 확실히 박동이 느껴졌다. 아마 좀 있으면 정신이 들어 자기 갈 길로 갈 것이었다. 사람을 살렸다는 기쁨에 연한 미소를 지어 보인 나는 마저 목욕을 마치고 옷을 주섬주섬 걸쳤다. 그때까지도 소년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잠들어 있었나 싶었는데, 때마침 지나가던 바퀴벌레가 녀석의 발가락 위를 지나가자 꼼지락 꼼지락거리면서 떨쳐 내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이미 잠은 깼지만, 뭔가 찔리는 게 있어서 안 일어나고 잠든 척하고 있는 거였다. 느껴지는 바가 있어 소년이 입은 옷을 다시 살펴보니 몸에 착 달라붙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이 입고 다닐 평복은 아닌 듯싶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야행의(夜行衣)인가? 그런 것을 왜 이런 미소년이 입고서 물속에 숨어 있었을까? 설마, 설마…….' 뭔가 중요한 것을 알아차린 나는 무릎을 탁 치며 일어섰다. 정말 용서받기 어려운 일을 눈치 챈 것이었다. "이런 나쁜 녀석, 천벌을 받아 거시기가 썩을 놈! 감히 미성년자 주제에 벌써부터 변태 짓을 즐긴단 말이냐! 야, 이 녀석아 내 중요한 것을 일러줄 테니 귀를 씻고 잘 들어 둬라!" 난 주변을 휘휘 둘러보고는 녀석의 귀에 대고 소곤소곤 거렷다. "이 물웅덩이말고 저 쪽 건너편에 보면 좀 더 큰 물웅덩이가 있단다. 거기 숨어 있어 보면 새벽에 가끔 예쁜 처자들이 훌러덩 하고……. 후후후후훗. 솔직히 네 용기에 감탄했다. 난 멀리서 훔쳐보기만 했지. 설마 숨을 참아 내면서 수중에서 관찰할 생각은 못했거든. 넌 정말 타고난 진정한 변태야. 존경스럽구나. 그럼 건투를 빈다." 내가 말하는 동안 계속 빠직빠직 거리는 괴음이 들려 온 듯싶었지만, 오랜만에 동지를 만났다는 흥겨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과연 저 녀석의 변태 행각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자못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난 점소이의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래도 마음속으로 그가 자부심을 가지고 꿋꿋하게 변태의 길을 가기를 응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물지게를 나르는 발걸음을 늦추진 않았다. 이제부터 무공 수련에 박차를 가할 것이기 때문에 물 나르기로 몸을 풀어 주려는 것이었다. 왜 갑자기 수련에 열을 올리느냐고? 그야 당연히 황보 무식이한테 보복을 하기 위해서지. 지금은 딱히 이러겠다 저러겠다 계획된 바가 없지만, 혈해진경(血海眞經)때문에 한동안 무림맹 아해들이 풍악산 일대를 뒤지고 다닐 거라는 사실을 알고만 있어도 반은 다 해결된 거다. 그렇다면, 조만 간에 반드시 내게 기회가 올 것이다. 그 날을 위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는 거다. 후후훗, 들어는 봤나? 유비무환(有備無患)! 대표적인 예로 령령이를 들 수 있다. 그녀는 예전에 정성 들여 깎아 놓은 나무 말뚝이 있기 때문에 다시 깎을 필요 없이 언제든 그것으로 협박(脅迫)을 할 수가 있는 거다. 뭐 예가 적절치 못하다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말이다. 일단 각설하고 물지게를 둘러메고 휭 하니 소장강으로 내려왔다. 예상은 했지만, 새까만 야행의 미소년이 안보였다. 퐁퐁퐁 솟구쳐서 얼룩졌던 핏자국도 하나 없이 말끔했다. 깔끔한 뒷정리를 하여 자신의 자취를 감출 줄 아는 고단수 변태 소년, 그는 이미 내가 일러준 명당 자리로 자리를 옮겼음이 분명하다. '지혈은 하고서 잠수를 해야 할 텐데, 안 그러면 퐁퐁퐁 올라오는 핏방울 때문에 처자들한테 들킬지도 모르는 일이거늘. 하여간 좋은 생각이렷다. 덕분에 생활의 활력소가 될 지혜를 하나 얻었군. 크크크크.' 물지게를 세 번째 지고 오르자 따뜻한 햇살이 내려와 산골짜기 곳곳에 잠복해 있던 안개들을 몰아내고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산 중턱을 넘어 굽이굽이 돌아가는 깎아지른 외길로 가는데, 갑자기 앞길에서 머리에 붕대를 칭칭 동여맨 야행의 미소년(夜行依 美小年)이 톡 튀어나오더니 내 옆으로 쓱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순간 뭔가 따끔하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모기가 물었나 보다 무시하고, 반가운 김에 인사부터 했다. "여어, 다시 보는구만. 그래 내가 말한 곳으로 예쁜 처자가 나왔나? 어때? 소장강물이 맑아서 잘 보였을 텐데, 소감이 어떠했는가?" 그는 내가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하고,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다가 팔을 휙 내저었다. "아야, 정말 늦가을 모기가 기승이라니까, 왜 이리 물어 대는지 귀찮구먼." "당, 당신 금강불괴요?" "금강불괴? 그게 뭔데? 먹는 거야?" 소년은 품속에 있던 비수들을 바닥에 내버리더니 씩씩거리며 산골짜기로 휙 뛰어내렸다. 소방보다는 못했지만, 쓸 만한 신법을 구사하며 점점이 사라졌다. 무슨 화가 그리 났는지 고함을 질렀는데 골짜기를 따라 메아리쳐 울리며 내 귓가에까지 들려 왔다. "뭐 이런 불량품을 주는 거야! 짜증나! 짜증……!" "불량품?" 그가 내던지고 간 비수를 주워 보니 조그맣게 설명서가 붙어 있었다. "웬만한 호신강기는 한 방에 뚫어 드립니다. 지금 바로 구매하세요? 이게 무슨 소리래?" 의문의 변태 소년이 무공을 할 줄 아는 무림인이라는 것이 좀 의외였긴 하지만, 별로 이상하지는 않았다. 이 산으로 올라온 인간 치고 무림인 아닌 자들이 없었기에……. 심지어 나조차도 삼재검법(三才劍法)을 익히는 중이니 엄연히 따지고 보면 초보 입문 과정에 있는 무림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망아루로 올라오자 잠에서 막 깬 듯한 소방(蘇芳)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작삼, 더 누워 있어. 죽지 않고 산 것만 해도 다행인데 아직 움직이는 것은 무리라고!" "아, 뭐 괜찮은데, 특별히 아픈 데는 없어." "그, 그래도……." 문득 날 이렇게 걱정해 주는 그를 보자 고마운 마음이 들어 쓸려 내려온 머리카락을 슬며시 걷어 주며 어깨를 툭 쳤다. "걱정해 줘서 고맙다. 내가 너 덕분에 오래오래 살 것 같다." "……." 얘가 왜 이리 얼굴이 도화 빛으로 물들었지? 으이그 귀여운 것, 그의 볼을 꽉 꼬집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금세 지워 버렸다. 수련을 할 때는 명색이 사부인데, 혹시라도 삐쳐서 혹독하게 굴면 매우 난감하니까 말이다. "참, 작삼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어제 제갈혜가 가면서 해준 말이 걸려." "엉? 왜?" "무림맹은 이걸로 손을 떼지만, 동창 쪽에서 네가 살아 있는 것을 알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했어." 동창이라……. 교 누님과 관련해서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둘째치고도 심히 수상쩍기 그지없는 곳이긴 하지만, 설마 나 같은 일개 점소이를 신경쓸려고. 일단은 황보 무식이한테 보복할 일만 생각해도 벅찬 관계로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흠, 설마 동창 아그들이 나 하나 잡으려고 여기까지 오겠냐? 무공이나 좀 가르쳐 주라." "가르쳐 주라?"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해도 이런 것은 안 봐준단 말이야. 어휴. 허리를 거의 직각으로 꺾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사부님, 기체후 일향만강 하시옵니까?" "음, 오냐. 그래 어떤 무공을 배우고 싶어서 이리 안달이 난 게냐?" "천안통(天眼通)인지 뭔지 멀리 있는 것을 가깝게 볼 수 있는 기술과 물속에서 오래 잠수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을 익히고 싶사옵니다." "……. 그딴 거 배워서 뭐하게?" "사부! 제자의 복수를 위해서 꼭 필요한 기술들이옵니다. 가르쳐 주시옵소서!" "……." "사부! 설마 몰라서 안 가르쳐 주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따악! 아으, 요것이 할 말이 없으니까 폭력 행사를 하네. 하여간 사부 노릇을 왜 이렇게 실감나게 하려고 하는지 원. "천안통(天眼通)은 일종의 깨달음의 한 경지야. 나조차도 완벽히 펼치지는 못해. 하물며 아둔한 너로써는 택도 없어. 단지 물속에서 오랫동안 잠수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있지. 바로 귀식대법(龜息大法)이다. 단순히 호흡만 멈추는 것이 아니고 심장의 박동까지 정지시키고 체온을 하강시킴으로써 인기척을 없애는 고도의 수법인데, 주로 적에게 동정을 들키지 않고 잠복할 때 쓰이지. 최고의 경지에 오르면 오관의 활동을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겉보기에는 시체처럼 보이더라도 시전자는 주위의 동정을 듣거나 볼 수 있다." "우와, 그거 에요. 그거 딱 좋네요." 당연히 딱 좋을 수밖에. 소방 사부의 설명대로라면 어여쁜 처자들에게 들키지 않고, 그들의 동정과 자태를 제대로 살필 수 있는 기술로 이것만큼 좋은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야말로 초절정 고수 변태가 다른 변태들을 위해 고안해 낸 기술임이 분명했다. 하루바삐 익혀 소장강 건너편 물웅덩이에서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니 짜릿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너 같은 초보가 잘못 펼쳤다가는 스스로 해제하지 못해서 진짜 시체가 될 수도 있어. 제대로 익히려면 못 해도 일 년 이상의 기간이 걸려. 그래도 배우겠어?" 킁, 그건 좀 고민되는걸. 일 년이라…….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한 번 익히면 두고두고 써먹을 수 있는 평생 보장 기술인 것이다. 두고두고 써먹을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일년 좀 고생해서 평생 변태 짓을 해도 안 걸리고 무사히 지낼 수 있다면 결코 손해는 아닐 것이다. "배우겠습니다. 사부님 가르쳐 주십시오." "좋아, 그럼 오늘부터 네 수면 시간 중 반 시진을 귀식대법 훈련 시간으로 갖도록 하겠다. 네 녀석이 실수로 깨어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곁에서 친히 봐주마. 대신 그 이외 시간에는 외공 연마에 주력하도록 한다. 어허, 노부가 말을 하는데 인상을 쓰다니 다 보인다. 이 녀석아. 일단 잘 보도록 해라." 소방은 말을 마치자마자 철봉이 아닌 맨 손으로 천(天), 지(地), 인(人) 육방을 점하며 총 삼십 이 초식에 걸쳐 수려하면서도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권과 장을 날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새로운 무공을 가르쳐 주려나 보다 하고 귀찮은 생각에 쌜쭉해 있었는데, 눈 여겨 바라보니 매우 눈에 익은 투로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지 손에 철봉 하나만 더 쥐여져 있다면 삼재검법으로 보아도 무관한 움직임이었다. 마지막에 마무리를 지으며 심호흡을 내뱉는 것까지 동일했다. 그는 마무리를 짓고 나서 날 직시하며 말문을 열었다. "알아보겠느냐?" "네, 사부님. 삼재검법을 권으로 펼쳐 보인 것이군요. 약간의 변화가 가미된 듯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틀은 삼재검법이 틀림없습니다." "잘 보았다. 본래 육합권(六合拳)이라 하여 천지와 사방, 즉 하늘과 땅, 동서남북의 여섯 방위 또는 육합이 상징하는 우주의 모든 방위를 막아낸다는 소림 외가 권법이 있었는데, 너무 보편화되고 단순해서 사람들의 소외를 받았다. 그러나, 그 단순함 때문에 오히려 완전하다고 볼 수도 있는 바 그 육합권의 진수를 삼재검법에 응용하여 만들어 본 것이니 머리 나쁜 네가 익히기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무공에 소질이 없는 나를 위해서 만든 것이라는 소린데, 쩝 그 정성이 갸륵해서 사부, 제자 놀이를 집어치울 수도 없을 것 같다. 후딱 배우고 후딱 때려치우는 게 목표였는데, 저렇게 진지하게 나오는 것을 보니 도저히 귀찮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좀 머리가 아파 왔지만, 놀아 주는 수밖에……. "검법을 권으로 펼치면 권법이 되고, 권법을 검으로 펼치면 검법이 되는 이치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내가 깍듯이 허리를 굽히자 녀석의 안면에 흐뭇해하는 귀여운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곧바로 기세를 가다듬은 소방은 지금까지 펼친 것을 다시 연거푸 세 네 번은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삼재검법의 응용이긴 했지만, 그 변화 부분이 헷갈리는 듯 하자 여러 번에 걸쳐서 눈 여겨 볼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험, 험 잠시 볼 일이 있어 다녀 올 터이니 그동안 꾀병 부리지 말고 내가 일러준 바를 잘 생각해 가며 수련(修練)에 힘쓰도록 해라." "예, 사부님." 그가 가는 방향을 보니 후원 뒤 뒷간 쪽이었다. 하여간 개방 방도인 주제에 엄청나게 깔끔하게 군다. 그냥 앞마당 안 보이는 구석 아무데서나 까 내리고 잠깐 볼 일을 봐도 되는 것을……. 그래도 명색이 사부니 제자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일 수 없다는 측면에서 저렇게 너스레를 떠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놀이에 너무 심각하게 빠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어쩌겠는가? 마음이 후덕한 내가 이해를 해야지. '그럼 어디 삼재권법(三才拳法)을 펼쳐볼까?' 막 소진배검(蘇進背劍)의 기수식을 취하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동작을 이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끼야아악!" 이 날카로우면서도 낭랑한 비명 소리를 낼 사람은 소방밖에 없었기에 주저 없이 뒷간으로 달려 나갔다. 설마 한 낮에 귀신이라도 본 것일까? 그 무엇이 천하의 소방을 두렵게 했단 말인가? 내가 후원으로 달려가 제일 먼저 본 것은 곰 가죽을 뒤집어 쓴 포연강이 창고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면서 하품을 하는 것이었다.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눈은 뜨지도 않았다. 한 시가 급했기에 그를 무시하고 창고 뒤 소로 길로 돌아 뒷간을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소방이 비명을 지를 정도로 무시무시한 고수란 말인가? 아니면 곰이나 호랑이 같은 야수? 아니면 설마 령령이 귀신으로 분장하고 나타나기라도 했나? 아니야 그 여자가 아무리 취미가 남달라도 낮에는 그런 짓 안 해. 그럼?' 막상 뒤뜰 나무 숲 사이 헛간 앞에서 본 것은 무엇을 봤는지 새하얗게 질려서 주저앉은 소방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질렸는지 바지도 제대로 못 올리고 허연 궁둥이를 드러낸 채 넋이 나가 있었다. 찰싹! 찰싹! 정신 좀 들라고 몇 대 뺨을 때리자 그제 서야 나를 돌아본 소방은 나에게 확 껴안기면서 왕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쩝 사내 녀석이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처음에는 이렇게 계집애처럼 굴 바에야 쌍방울 확 잘라 버리라고 농을 할까 했다가 너무 서럽게 우는 것에 질려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야, 이 녀석아 바지나 올리고서 짜라. 사내 녀석이 서럽게 우니까 너무 흉하다. 흉해." 그제 서야 화들짝 바지를 올려 요대를 꽉 묶은 그는 언제 울었냐는 듯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그래도 다시 나한테 자석처럼 떡 하니 붙어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뭘 그리 겁을 내고 있는지 원. 마침 포연강이 어기적어기적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를 보더니 히죽 웃으며 코를 후비적거리더니 똥그랗게 뭉쳐서 손가락으로 핑 튕겨냈다. "어이, 그림 좋구먼. 드디어 자네 금단의 영역에 들어섰군. 크하하하하!" "놀리지 마시고 화장실 안에 뭐가 있는 지나 좀 봐주세요. 애가 얼마나 놀랬으면 바지도 못 올리고 넋이 나갔겠어요?" "뭐? 설마 이 안에서 귀신이라도? 흠 아무리 령령이 귀신 놀이를 좋아해도 한 낮에 뒷간에서 일 저지를 애가 아닌데. 알았네 내 잠시, 어디 보자? 으잉?" 포연강(鮑緣强)은 뒷간 속을 들여다봤다가 조금 어벙벙한 표정을 짓더니만 나무 이음새 사이를 톡톡 쳐서 발판 두개를 떼 내었다. "들여다보지 말고 잠시 거기서 기다리게. 내 재미있는 구경을 시켜 줄 테니. 흠흠." "그, 그럴 게요. 뭐. 어차피 얘가 놔줄 것 같지도 않고."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히히덕거리면서 뛰어가다가 소로 끝 편에서 휙 돌아보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마치 맛 들였구나 하는 듯한…… 야릇한 미소, 내가 눈을 부라리며 째려보자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터뜨리며 사라졌다. 솔직히 말한다면 이 상황이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바람을 타고서 슬며시 흘러오는 울금향에 두른 팔에서 느껴지는 가녀린 그의 몸매가 내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가슴만 아니라면 여자라고 느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가슴이 어쨌냐고? 납작하면서 탄탄한 것이 기초 체력을 혹독하게 쌓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근육 덩어리였다. 어떤 여자가 이런 가슴을 가질 수 있겠는가? 무공에 능통한 그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동시에 께름칙한 면도 없잖아 있었다. 아무리 귀엽고 예쁘장해도 남자는 남자, 가운데 딸랑이끼리 서로 부딪힐 수는 없지 않겠어? ……우웩. 조금 있다가 긴 밧줄과 쇠갈고리를 가져오는 포연강의 인기척이 들리자 그제 서야 좀 진정이 된 소방은 나에게서 슬며시 떨어졌다. 아직도 놀람이 가시지 않았는지 붉게 달아오른 가녀린 볼을 꽉 꼬집어 주었다. "아, 아파." "나보다 강한 사부가 겁쟁이 울보였다니! 야 이거 사부 체면이 말이 아니겠는데. 두고두고 놀려먹어야겠다." 이제 좀 진정된 듯싶어 사부 놀이하면서 재미를 톡톡히 봤을 그를 좀 놀려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또 울먹울먹하는 게 영 심상치 않았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에 다시 일렁이는 눈물 방울을 보고는 가슴이 덜컹해서 재빨리 다시 껴안아 주며 토닥여 줬다. "미안, 미안 소방 다시는 안 그럴 테니. 울지 마라. 가운데가 달랑이는 녀석이, 나랑 키 차이도 얼마 안 나는 녀석이 자꾸 징징 짜면 어느 여자가 시집오려 하겠어?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 기억할 거 아냐?" 온갖 아부를 떨며 토닥여 주자 겨우 진정이 되어 가는 듯싶어 한참 웃샤웃샤 힘을 쓰고 있는 포연강을 돌아보았다. 밧줄을 뒷간 위의 굵은 나뭇가지에 걸친 그는 그 끝에 갈고리를 묶어 뒷간 안으로 던져 넣더니 끄응끄응 하며 뭔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힘이 좋은지 대략 아는 나는 도울 생각 하나 없이 뭐가 튀어나올까 예의주시를 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마디로 가공할 만한 크기의 똥 덩어리가 갈고리에 걸려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거대함이란 인간 몸뚱이에 필적하는 크기였다. 어라 똥 덩어리에 얼굴도 달려 있네? 포연강이 밧줄을 흔들어서 똥 덩어리가 똥통 구멍에서 휙 빠져나와 뒷간 앞에 굴러 떨어지게 만들었다. "얼굴이 달린 것 같은데요? 설마, 설마! 인류 최초로 똥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똥 인간!" "글쎄, 똥 인간인지 남의 집에 염치없이 몰래 숨어든 좀도둑인지 또는 청부를 받은 살수인지는 캐물어 보면 알겠지. 작삼 이놈 꺼내는 데는 내가 힘을 썼으니 똥 씻어 내는 데는 니가 힘을 쓰거라. 어허, 인상 쓰면 얼굴에 주름살이 생겨서 빨리 늙는다." 하여간 포연강, 정작 더러운 일은 나에게 떨궈 버리는구나. 에잇 더러운 놈! 속으로 있는 욕, 없는 욕 다하면서 물을 퍼 와서 촤아악 뿌리고 잽싸게 사사삭 뒤로 물러섰다. 세 네 번 물을 더 퍼붓자 이제 똥 덩어리가 웬만큼 떨어져 나갔지만, 내 바지에 똥이 튀어 버렸다! 화가 나서 똥 인간한테 한 차례 욕 세례를 하려고 아니꼽게 꼴아 보는 순간, 머리에 붕대를 감고 톡 튀어나온 이마 정 중앙의 혹에 소방이 순간적으로 던져 넣은 듯한 엽전이 절반은 푹 박혀 있는 잘생긴 미소년의 안면이 드러났다. "어? 어라? 이 녀석이 왜 여기에?" 내가 아는 척을 하자 소방이 눈빛을 반짝거렸다. 예의 그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지는 고양이 안광이 흘러나왔다. 하기야 이 녀석 때문에 놀라서 새가슴이 되어 질질 짰으니 정체가 궁금하기 그지없겠지. 궁금하기는 포연강도 마찬가지인 듯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진지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 녀석이 누구냐 하면……." 내가 막 입을 열려던 찰라 죽은 듯이 기절해 있는 줄 알았던 미소년이 눈을 팍 뜨며 소리 질렀다. "그만! 그만! 내가 말할 테니깐 넌 말하지마! 말하지 말라고!" 그가 소리를 지르는 찰라 반사적으로 소방의 손이 잔영을 뿌렸고, 그의 손을 떠난 엽전은 그대로 미소년의 이마에 박힌 엽전 위에 작렬해서 더 박아 넣고는 곡선을 그리며 다시 소방 손위에 톡 떨어졌다. 뭔가 더 말을 하려던 미소년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기절했는지 눈동자가 희번덕 뒤집혀져 있었다. 포연강이 탄성을 나지막하게 내뱉으며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다. "오호, 그 엽전 똥 묻었을 건데……." "끼야악!" 소방은 비명을 지르며 엽전을 떨어뜨렸고 바닥에 잽싸게 손을 문질러 똥을 닦아 내더니 쏜살같이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러더니 역시 비명을 질렀다. "끼야아아악!" 포연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저러느냐는 의문의 눈빛을 내게 던졌다. "이 녀석한테 퍼부은 물이 마지막 물이었어요." "끼야아아아아아악!" 이번에는 왜 비명을 지르는지 알 수가 없었으나, 포연간이 머리를 톡 치며 말했다. "아차, 백건아랑 죽엽청 다 떨어졌는데…… 오늘 주문할 작정이었지." "에이, 바보 같은 녀석." "왜?" "오줌을 싸면서 거기에 손을 씻어 내면 될 걸 가지고 괜히 시끄럽게 하잖아요." "오줌은 안 더럽냐?" "적어도 똥보다는 깨끗할 거 아니에요. 똥이 묻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오줌이 묻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위안이 되지 않겠어요?" "흠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구먼."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던 소방은 소장강으로 신형을 날려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포연강은 간만에 쓸 만한 장난감을 구했다는 듯한 사악한 미소를 떠올리며 날이 무딘 갈고리로 미소년이 걸치고 있는 똥 묻은 야행의 위를 몇 차례 가볍게 슥슥 그었다. 그러자 꽤 질겨 보이던 야행의가 깔끔하게 조각조각 나며 떨어졌다. 그런데도 미소년의 새하얀 피부에는 전혀 긁힌 자국이 남지 않았으니 짐작은 했어도 여간 강한 게 아니란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이어서 그의 손발에 느슨하게 매듭을 지어 놓은 밧줄을 던져서 휙휙 돌리니 손발이 앞으로 가지런히 묶이는 것이었다. '끙 이 능구렁이 실력이 대단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구룡이니 뭐니 하는 애들과 거의 동급 아닐까? 날도 없는 갈고리로 젖어 버린 질긴 천을 너무 쉽게 절단 내 버리잖아.' 그러나, 어차피 포연강의 무공이 대단한 수준일 거라고는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크게 놀랄 바는 아니었으나, 오히려 그보다 소년의 옷을 벗기고, 손발을 동여매는 동안 똥 가루 하나 튀지 않았다는 게 좀 억울한 바였다. 마치 평상시 이런 일을 자주 해 온 듯 능숙하다고 해야 할까? 노련하다고 해야 할까? 바지에 튄 똥물을 씻어 낼 겸 물도 떠올 겸 물지게를 이고 소장강으로 한 달음에 내려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소장강 유역에서 손을 빠득빠득 씻어 내면서 킁킁 냄새를 맡아 확인을 거듭하는 소방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이 소방, 내려온 지가 언젠데 아직도 씻고 있냐?" "그렇지만, 냄새가 좀처럼 안 지워지는 것 같아서 속상해." "흠, 내가 등을 빡빡 밀어 줄 테니까 아예 같이 목욕이나 하는 게 어때?" 난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걸치고 있던 마의를 훌러덩 벗고서 물웅덩이 속으로 풍덩 잠겨 들어갔다. 어차피 똥물이 튄 옷도 빨면서 목욕을 할 생각이었다. 하도 지독한 똥 덩어리여서 멀찍이 떨어져서 물을 퍼부었어도 냄새도 조금 밴 듯한 기분이 들어 찜찜했던 것이었다. "소방! 등 좀 밀어 줘. 소방! 소방?" 물속에 몸을 푹 담갔다가 솟구쳐 올랐을 때 이미 그는 그림자 코빼기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뒤였다. 보나마나 또 어디서 칼부림이 일어나는 소리라도 듣고 달려갔나 싶어 그대로 벅벅 때를 밀어 간단하게 수욕을 마치고 마의는 강가로 가져가 깨끗이 빨아 가지고 꽉 짜서 탈탈 턴 후 바로 걸쳤다. 예전 같으면 춥다고 오돌오돌 떨었겠지만, 요즘에는 적응이 되었는지 별로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옷을 통해 가슴에 직접적으로 습기가 닿자 자수정의 미세하면서 특이한 한기가 싸하게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마의 아래 자수정을 꽉 움켜쥐며 그녀를 떠 올려 버렸다. '교 누님, 잘 계시오? 언젠가 꼭 다시 봅시다. 교옥정(喬玉淨) 누님.' 물지게에 물을 한가득 퍼 담아 가볍게 올라온 나는 주방 물통에 쏟아 붓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언제나처럼 계산대에서 졸고 있는 홍 영감 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근래 들어 홍 영감이 깨어 있는 것을 거의 못 본 듯싶었다. 처음에는 깨어 있을 때가 종종 심심찮게 보였는데, 이젠 거의 졸기만 한다. '가장 높다는 어르신이 맨 날 졸기만 하고……. 이젠 말조차 거의 안 하시네.' 짐작 가는 바가 있어 뒷문을 빠져 나와 후원 창고 뒤 소로 길로 뜀박질을 했다. 역시 손발이 꽁꽁 묶여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전라의 미소년과 그 녀석 주변에 심문 중인 듯한 포연강이 눈에 보였고, 언제 올라왔는지 소방까지 옆에 팔짱을 끼고서 심각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묘한 것은 요즘 따라 주령령이 자주 부재중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포연강이나 홍 영감은 그 이유를 알고 있을 테지만, 구태여 무리를 하면서 묻고 싶지는 않기에 그냥 신경을 끄고 있는 중이다. "야, 아까는 니 입으로 다 분다 매. 그런데, 왜 인제 와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거야!" "……." 손발이 위로 동동 묶여 있어 얼굴이 거꾸로 매달려 뒤집혀진 잘생긴 미소년의 감은 눈과 다물어진 입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소방 앞에서는 무공을 쓸 수 없을게 뻔한 포연강은 그 냥 볼멘소리를 버럭버럭 질러서 으르는 중이었다. 소방은 딱히 고문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불안스러워 하는 모습이 역력히 느껴졌다. "포형님 그 녀석 정체는 제가 안다니깐요." "정말? 아 그럼 빨리 말해 보게. 내 너무 너무 궁금해서 안달이 나 죽을 지경이네." 내가 그 녀석 정체를 안다고 하니까 포연강이 반색을 하며 나를 반겼다. 반면 눈을 감고서 침묵으로 일관하던 녀석이 눈을 똥그랗게 떴지만, 이번에는 내가 한 박자 더 빨랐다. "그는 고절하기 그지없는 초절정 변태지요. 새벽에 저 소년은 목욕하러 올 처자들의 나신을 수중에서 목도하기 위해 야행의에 복면까지 쓰고 물웅덩이 속으로 잠수를 하고 있더군요. 정말 대담하면서도 수고를 아끼지 않는 그의 노력에 절로 탄성이 나올 지경이랍니다." "아니라니깐! 난 변태가 아니야! 너야말로 웃기지 마라!" 아직도 톡 튀어나온 이마 한 가운데에 엽전을 반쯤 박고 있는 미소년의 안면에 푸른 힘줄이 돋은 것이 자신이 초절정 변태라는 사실을 들켜 매우 당혹스러워 하는 듯싶었다. "쩝 이 친구 보게. 자고로 진정한 변태란 결단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네. 더구나 우리는 다 같은 남자들이 아닌가? 충분히 자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네." "젠, 젠장! 난 변태가 아니야. 난 살수야! 살막의 살수라고!" 포연강과 소방의 시선이 역시 그렇구나 하는 눈빛을 띄었지만, 난 그의 말을 한마디로 간단하게 일축했다. "너야말로 웃기지 마라. 니가 살막의 살수면 난 무림맹의 무림맹주다. 왜 이렇게 변태로서의 자긍심과 긍지를 감추려고만 들어! 지금까지 변태들은 언제나 뭇 처자들의 몰매질과 발길질에 노출되어 있어 그 존폐 여부가 몰락의 길로 들어섰지만, 자네의 그 고절하고도 대담스런 행각으로 새로운 변태의 장을 열어 갈 수 있음을 왜 외면하려 드는 거야!" 내 날카로운 지적에 미소년은 할 말을 잃었는지 부르르르 떨었고, 고개를 까딱까딱 이거나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포연강이 내게 이의(異意)를 제기해 왔다. "그럼, 왜 똥통 속에 있었는지 설명할 수 있겠나?" "어허 포형, 포형 또한 같은 영역에 있으면서 진실을 외면하려 하시는군요. 진정한 변태란 궁극의 절경을 보기 위해서 물속을 마다하지 않듯 똥통 또한 이와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즉 처자들의 비경을 흐릿한 물속이 아닌,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똥통 속에서 목도하려 한 것이지요. 단지 인기척이 들려 잔뜩 기대하던 차에 같은 딸랑이를 단 소방의 등장에 명경지수(明鏡止水)같은 마음을 잃고 흥분해 쉽사리 소방에게 들킨 것입니다. 그것이 매우 아쉬운 일일뿐입니다." 내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자신의 비밀이 하나 둘씩 벗겨지는 것에 열이 올랐는지 벌겋게 달아오르던 미소년은 급기야 폭발하고 말았다. "입 닥쳐! 내가 너 같은 변태 인줄 알아? 그 반대다 이놈아! 내가 딸랑이를 봐서 놀랬던 것이 아냐! 내가 똥통 속에서 놀라 순간적으로 인기척을 흘린 것은 바로 솔…… 컥!" "흥!" 하여간, 소방의 소심하기 그지없는 반응은 언제 봐도 묘하다. 그깟 가운데 딸랑이 한 번 같은 남정네한테 보여줬다고 용서 없이 엽전을 날리다니, 이 부분은 세심히 따지지 말아야겠다. 잘못하다가는 나한테까지 날릴지도 모르니……. 소방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고문을 할 생각인지 성큼성큼 나서서 미소년에게 질문을 던졌다. "살수라면 누구를 노리고 온 거지요? 또 누구의 청탁을 받은 건가요?" 그러니까 살수가 아니라 초절정 변태라니까, 지금까지 내 얘기 뭘로 들은 거야? "흥! 살수에게 비밀을 캐묻는 어리석은 짓을 하다니 언제나 내가 독단을 깨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딱! "……?" 포연강이 비릿하게 웃으며 손위에 새까만 고약하나를 갖고 놀고 있다가 그걸로 미소년의 콧구멍 한 쪽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럼 저것이 독단이었단 말인가? "크하하하하, 아까 보니까 실신해서 벌려진 입 사이로 보이더구먼, 뭔가 해서 살짝 빼놨지." 난 왠지 비분강개(悲憤慷慨)가 느껴졌다. 스스로 변태임을 은폐하기 위해 살수라고 헛말을 하여 다른 이들을 혼란에 빠뜨리다니! 이렇게 되면 잠시 령령의 비기(秘技)를 빌려 와서라도 솔직히 초절정 변태임을 털어놓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잽싸게 눈 여겨 놨던 나뭇가지를 주워서 잔가지를 꺾어 버린 후 주방으로 달려갔다. 다른 것은 몰라도 부엌칼 하나는 포연강이 번쩍번쩍 거리는 날이 서도록 항상 스윽스윽 가는 것을 봤으므로 그 예리함을 잘 알고 있기에 즉시 나무껍질을 순식간에 깎아 내고서 참기름을 막대 앞부분에 발랐다. 곧이어 귀밑머리가 휘날리도록 뛰어서 미소년이 있는 자리로 한 달음에 와 버렸다. 소방의 추궁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미소년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그의 엉덩이 사이를 노려 힘차게 푸욱 찔러 넣었다. "끄아악! 야! 너 뭐 하는 거야?!" "뭐 긴 뭐냐? 자꾸 스스로 변태임을 부인하는 네가 아니꼬워서 만들어 온 거다. 바른 말을 해라! 초절정 변태로서의 자긍심을 보이란 말이다!" "너 바보냐? 다른 녀석들은 내가 살수인 것을 바로 알아보는데, 넌 아까부터 자꾸 뻘짓 해서 날 귀찮게 하는 거냐? 처음에 물웅덩이에서 널 못 죽인 게 정말 한스럽다!" 뻘짓이라 고라! 갑자기 열이 팍팍 오른 나는 박아 넣은 나무 말뚝을 양 손바닥으로 잡고 원시인들이 나무 쪼가리에서 불씨를 얻는 방법으로 쓰던 강력 회전기를 시전 하였다. 우오오오오옷! "끄아아아악! 이, 이 녀석아 그만해! 야, 야 나, 너 죽이라고 동창에서 보낸 살수야. 엉? 동창에서 청부 넣었다고! 야! 야야야야!" 흐아아아아압! "그만! 그만! 아이고 으윽 윽……. 형, 형님 그, 그만 하, 하시오. 제, 제발." 끼요오오오옷! "헉, 헉, 그, 그, 그만……해……요. 나, 나 변태, 맞아요. 제, 제발…… 으헉!" 녀석이 변태임을 인정하면서 축 늘어진 순간에서야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내고서 나무 말뚝을 뽑아내었다. 찜찜한 냄새가 나는 것은 둘째치고 무슨 피가 이렇게 많이 묻었는지 원. 미소년이 변태라고 자백한 순간 삶의 환희를 느낀 나는 뿌듯한 미소를 떠올리며 그것을 산골짜기 아래로 던져 넣고 돌아섰다. 그런데, 소방이랑 포연강이 왜 저렇게 뜨악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피하는 것이지? 조금 짜증이 난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말했다. "변태 맞대잖아! 살수 아니라잖아!" [1]일수필살(壹手必殺) 나는 계속 초절정 변태라고 우겼으나, 이미 살막 살수라고 일방적 판단을 내린 포연강과 소방은 힘이 쭉 빠져 축 늘어진 미소년 살수 녀석을 계속 다그쳐 일행이 한 명 더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내 말뚝 맛을 질리도록 음미한 뒤였기에 녀석은 포연강이 팔뚝만한 나뭇가지를 다듬는 것을 보자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급기야는 물어 보지 않은 것까지도 다 술술 불어 버리는 것이었다. 대략 정리 해보면 미소년은 이름도 없는 살막의 하급 살수로서 암살 수행(暗殺 修行)을 쌓는 중이었다. 다른 일행은 그의 뒤를 암중에 따르면서 그가 제대로 살행을 펼치는지 실수는 안 했는지를 살펴 만에 하나 흔적이 남아 있으면 깨끗하게 지우면서 오는 감시자격인 상급 살수라는 것이었다. 이번 일은 동창의 측근으로 보이는 자로부터 청부를 받았는데, 내가 과거 무공을 익힌 적이 없다는 정보를 받은 살막 상층부에서는 간단한 일이려니 하고 자신의 수행을 쌓는 한 일환으로 맡겼다고 한다. "처음에는 수중 암살을 실습해 보려고 물웅덩이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이 분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불의의 기습을 하시더라고요. 도리어 제가 회복 불능의 중상을 입고 도망가야 했어요. 아악 이 분, 이 분 좀 말려 주세요. 난 변태 아니라니깐요! 형님을 암살하러 온 진짜 살수라고요. 제, 제발 좀 믿어 주세요. 헉, 헉…… 다, 다음에는 제 장기인 암기술(暗器術)을 펼쳤거든요. 제가 썼던 비수가 철호비(徹護匕)라고 해서 호신강기 전용 파괴 비수인데, 불량품이었는지 말 그대로 이 분 피부에 흠집만 조금 남기고 퉁겨 버렸어요. 결국 두 번째 암살 시도도 실패(失敗)한 저로서는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뒷간에서의 인간이라면 금강불괴(金剛不壞)라 해도 어쩔 수 없이 하루에 몇 번은 들락날락하면서 항문이라는 조문을 꺼내게 되거든요. 그래서 숨어 있다가 들어오면 제 칼로 거기를 푹 찌르려고 귀식대법(龜息大法)을 펼치면서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기, 기대하던 딸랑이가 아니라 솔, 솔…… 끄아아악!" 녀석 조심하지, 화장실 얘기에서 가운데 딸랑이를 남한테 보인 얘기가 나오자 대노(大怒)한 소방(蘇芳)이 주저 없이 엽전 세례를 퍼부어서 절반 정도 들어가 있던 엽전이 이제는 아예 푹 박혀 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머리뼈에도 손상이 갔을 듯싶다. 기절은 했지만 들을 얘기를 다 들은 우리는 이 허접 살수가 아닌 진짜 살수가 곧 오리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작삼, 너 어딜 가든지 꼭 나랑 붙어 다녀. 설사 뒷간을 가건 목욕을 가건 무조건 내 주변에 붙어 있어야 해." 당사자인 나보다 더 흥분한 소방이 내 손을 꼭 쥐고 주의에 주의를 주는 것을 보니 새삼 가슴이 훈훈해 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별 볼일 없는 일개 점소이를 암살 연습 상대로 밖에 보지 않는 삭막하면서 살벌하기 그지없는 사막 한 가운데에도 나만을 위해 외로이 솟아오르는 옹달샘이 존재했던 것이다. 문득 내가 망아루로 떠나오게 된 것이 평소에 갖던 생각대로 '신의 저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있고, 또 다른 인연이 있을 수도 있음을 알려 주려는 '신의 선물'일지도……. "괜찮아, 난 쉽게 안 죽어. 내가 가진 힘이 미약하긴 해도 악착같이 살아남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거든. 봐, 지난번의 무림맹(武林盟) 현무 부조장인가 하는 황보 무식이 손에서도 살아남았잖아. 하물며 고작 살수 따위한테 죽겠어? 안심하라고." "틀려, 그 때는 내가 있고, 곽철 대협이랑 남궁현 공자가 있어서 차마 널 죽이지는 못하고 그냥 엄살만 부렸을 뿐이야. 이번에는 달라. 너무나도 달라. 모르긴 몰라도 아마 하찮은 살수가 아닐 거야. 내가 전력을 다해서 막아 보겠지만, 보장은 할 수가 없어." 얘가 혼자서 모든 짐을 다 떠안으려 하는구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협객 중의 협객, 곽철 대협이 있다. 그 어떤 싸가지들도 그 무서운 신위 앞에 떨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후훗, 너무 걱정하지 마. 곽철 대협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어? 그냥 용도 아니고 광룡(狂龍)이라는 그가 있는 이상 어떤 무식하고 싸가지 없는 놈들이 와도 여긴 말 그대로 철옹성인걸." "그는 없어." "엉? 누가 없다고?" "곽철 대협은 그의 사문에 잠시 볼일이 생겼다면서 어제 네가 쓰러진 다음 날 떠났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소방이 만만치 않은 고수란 것은 어렴풋이 눈치를 챘다. 제갈혜 소저랑 친구인 걸로 봐서 구룡(九龍) 수준은 아니어도 그 바로 아래 수준 정도는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해봤었다. 그렇다 해도 상대는 기척을 감추고 다가오는 살수, 아마 소방과 싸우기보다는 나만을 처리하고서 유유히 사라지는 게 목적일 것이다. 그런 녀석을 상대로 자신의 몸을 지키기도 버거울 소방이 검귀(劍鬼) 곽철 대협의 도움 없이 나까지 지켜 준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혹시나 해서 포연강 쪽을 슬그머니 돌아다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곳에서 그가 가장 강하리라. 소방과 연합을 한다면 웬만한 살수 정도는 여유 있게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날 지켜 주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그는 씨익 조롱하듯 미소짓더니 자기 목 아래로 손날을 쓱 그으면서 혀를 쑥 내미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한 마디로 넌 이제 죽었다 는 뜻인 거다. "아, 난 이만 가 봐야겠구먼, 어차피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이 암살 대상자랑 같이 있다가 날벼락 맞는 억울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되걸랑. 그럼 수고들 하라고. 작삼 동생, 수고했네. 자네같이 일 잘하고 눈치 빠른 녀석을 다시 구하기는 힘들겠지만, 인간이란 헤어지기 위해 만나는 것이라 하지. 아하암, 난 낮잠이나 다시 자야겠어." 포연강은 다분히 말속에 내가 살아남기는 글렀다는 암시를 강하게 흘리고 있었다. 소방이 있는 한 그가 나서서 무공을 펼칠 리가 절대 없었고, 있다 해도 자기 일이 아니라고 모르는 척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그런 인간이었으니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냥 물속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잠시 바라 본 것 뿐 이었다. "아니에요! 작삼은 절대 죽지 않아요! 내가 지켜 줄 거예요!" 소방이 앙증맞은 눈을 부라리며 맞대응을 했다. 평상시였다면 귀엽다고 볼을 꼬집어 줬을지 모르지만, 내가 죽을 상황이 되니 아무 감흥이 일지 않았다. "글쎄, 개방에서 좀 굴러먹은 녀석이란 것은 알겠지만, 아마 어려울 거야. 나야 무공이란 것 에 대해서 잘 모르긴 하지만, 암흑 속에서 슬며시 다가오는 살수란 것이 상대하기가 얼마나 어려우면서 귀찮은 것인지는 좀 알지. 똥통에서 구르던 아이 말대로 이름 있는 살막에서 상급 살수라고 한다면, 정면으로 싸워도 힘들다고 볼 수 있지. 그런데, 살수들은 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야. 오로지 목표물을 죽이는 것만이 목적이지. 따라서 소방 자네를 상대하기보다 작삼에게 은밀히 다가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한 후 유유히 떠나가겠지. 소방,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네. 관은 내가 짤 테니 자네는 꽃 한 송이 넣어 주면 그걸로 족해. 저승 가는 저 녀석 발걸음이 무겁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창고로 걸어가던 그는 움찔 걸음을 멈췄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무슨 의미인가는 몰라도 포연강은 자기 말대로 창고로 들어 가 쾅 문을 닫았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알게 모르게 세력을 키워 가던 시커먼 먹구름들이 하나둘 뭉치더니 급기야는 거대한 비구름이 되어 한 방울 두 방울 굵직굵직한 빗방울을 떨어뜨렸다. 바람은 거칠게 휘몰아 쳤고, 바람을 따라 후두두둑 쏟아져 내리던 빗방울도 거세게 떨어져 내렸다. 그나마 흐릿하던 하늘은 이제 바야흐로 암흑 속에 잠겨 들었다. 노랗게 보이던 하늘이 새까맣게 뒤덮이며 날 촉촉하게 적셔 버리는 바람에 자수정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한기가 전신을 타고 돌아 안절부절 못 하며 방황을 하던 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줬다. "소방,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이번 일은 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일 뿐이다. 나같이 하찮은 놈팽이 하나 죽는 일 가지고 네 녀석한테 피해 가는 일은 바라지 않는다. 잠시 개방으로 돌아가 있어. 혈해진경인지 뭔 지에 더 매달리지 말고, 그것은 말 그대로 피를 부르는 물건일 뿐, 네 목숨보다는 귀할 수가 없지." 휙! 느닷없이 소방이 내 멱살을 꽉 쥐어흔들었다. 안 그래도 힘이 빠져 있던 내 몸은 그의 힘에 비틀비틀 거렷다. "함부로 죽네 사네 말하지 마라. 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자청해서 친구로 인정한 녀석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넌 죽을 수 없다. 내가 우습게 보이는지 몰라도 난 결코 광룡보다 약하지 않아!" '어, 어라 이 녀석 팔 힘이 왜 이리 강해졌지? 훅 불면 날아갈 듯이 징징 짜던 놈이 왜 이리 분위기를 잡아?' "쳇, 적어도 네 녀석 앞에서 흉한 꼴 더 이상 보이기 싫으니까 꺼지란 말이다. 부탁이다!" "……." 잠시 화가 많이 난 듯 부르르 떨던 그는 날 잡고 있던 멱살을 확 잡아 당겨 그의 안면 앞으로 바짝 붙이고는 무섭게 째려보았다. 그의 이러한 기세가 놀랍기도 했지만, 소방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본 적도 처음이어서 나의 놀람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다. 일단 소방의 눈빛이 이렇듯 서늘하면서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의 바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천연적으로 길고 가느다랗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여간 분노한 게 아닌 듯 꽉 다물어진 입술은 오동통하면서 새빨개서 피에 젖은 앵두가 연상되었으며, 안 그래도 뽀얀 피부는 빗물에 젖어 내려 창백하게 보이면서도 청초하기 이를 데 그지없었다. 오뚝한 콧날은 평상시라면 앙증맞다 하겠으나, 지금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일기당천(壹騎當千)의 기세가 느껴졌다. "내가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어!" "어, 그, 그래." 그의 매서운 기세에 내 기운은 한 풀 꺾여 버렸다. 나보다 작은 몸에서 가공할 기세가 넘치는 것을 보니 그가 하려는 일을 내 힘으로 막아서도,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날 믿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죽게 내버려두진 않는다." "에휴, 그래, 니 맘대로 해라." 멋 적은 웃음이 나와 씩 웃으니 그의 굳었던 얼굴도 풀어져 새치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미소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안타까운 일이다. 차라리 여자로 태어났으면 교옥정 누님에 못지않을 정도로 미인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 털썩 생각을 채 마무리짓기도 전에 힘이 쭉 빠져 버려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주저앉고 말았다. "작삼! 작삼! 왜 그래?'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동안에도 있는 힘을 다해 옆구리를 만져 보았다. 비수의 날은 옆구리 깊숙이 들어갔는지 손잡이만이 손에 잡혔다. 그것을 꽉 움켜쥐고서 힘껏 뽑았다. 촤악! 꾹 참고 있던 오줌보에서 오줌이 터져 나오듯 시뻘건 피가 튀면서 줄줄 흘러 내렸다. 표현이 이상하다고 생각 됐는지 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슉! 이번에는 제대로 관통되면서 내장을 건드렸는지 짜릿한 절정의 광기가 전신에 퍼지면서 허리힘이 풀려 그대로 풀썩 엎어졌다. 세 번째 비수도 정확히 날라 왔으나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린 소방의 철봉에 막혀 나가 떨어져 옆에 떼구루루 굴렀다. 처음 비수 꽂힌 것을 간신히 뽑아냈더니 하나 더 옆구리에 꽂혔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두려움과 함께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헉, 헉 현현자(炫炫者) 영감! 도검불침(刀劍不侵)이라면서 이, 이건 뭐요?" 내 중얼거림은 너무 미약해서 입 밖을 떠나지 못했다. 콰콰쾅! 하늘을 가르는 불꽃과 함께 떨어져 내리는 뇌성이 사방 천지에 작렬했다. 더불어 거칠게 떨어져 내리는 비바람은 더욱 거세지기만 했다. 시간상으로는 진시가 훌쩍 넘었기 때문에 한 낮이어야만 하지만, 비구름이 자욱한 이 순간 세상은 암흑으로 뒤덮여 있었다. 내가 아무리 무공 방면으로 무식해도 지금 상황이 날 지키려 애쓰는 소방에게 얼마나 불리한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는 날 막아선 채 싸워야 하기 때문에 상대의 위치를 모르는 이상 시종일관 일방적인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반면, 살막의 상급 살수라는 자는 어둠과 함께 쏟아지는 빗소리 때문에 자신의 몸을 숨기면서 기습하기가 매우 용이할 것이다. 비수가 날라 오는 방향이 수시로 바뀌는 것을 보니 계속 자리를 이동하면서 움직이는 듯 했다. 암흑과 폭우로 인해 시야가 가리고 빗소리에 발소리가 묻혀 소방은 매우 곤란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비수에 찔린 위치가 얼마나 절묘한지 힘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찌릿한 통증이 전신을 감돌고 있어서 정신(精神)은 말짱한 편이었다. 그렇다 보니 오감 중 거의 시각만 살아 있어서 눈에 들어오는 전세(戰勢)가 빠짐없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엎어지는 순간 소방(蘇芳)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自然)스럽게 고개가 그를 보는 방향(方向)으로 돌려졌다. 싫거나 좋거나에 관계없이 내력이 실린 듯한 비수들을 일일이 쳐내는 기이한 철봉의 변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뭔가를 효율적으로 두드려 패는 듯한 봉법 이랄까? 그것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으휴, 저 봉법을 주령령이 알았다면 얼마나 날 무시무시하게 뚜드려 팼을까?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하구만…….' 시간이 몇 각이나 흘렀을까? 매서운 내력이 실린 비수가 어느 방향에서 날아오든 척척 쳐내는 소방의 전신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누덕누덕 기운 옷이 그의 몸에 젖어 들어 착 달라붙어 버렸다. 그것이 땀으로 인해 젖은 것인지 비로 인해 젖은 것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지만 거칠게 숨을 내뱉는 그의 모습에서 꽤 지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봉을 꽉 쥔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질 줄 몰랐다. 오늘따라 가녀리기만 하던 그의 체구가 태산처럼 커 보이는 것은 우연일까? 살수 녀석은 이쪽이 지치길 기다리는지 어둠 속에서 비수만 날릴 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나자 비수가 다 떨어졌는지 마침내 낫처럼 생긴 날이 길고 예리한 도를 양손에 든 살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야 거리에 다다른 살수는 야행의(夜行衣)에 복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물에 젖어 착 달라붙은 호리호리하면서 날씬한 몸매를 보니 뜻밖에도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날카로우면서도 칙칙한 눈매가 사이하기 그지없었으며,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끈적끈적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참으로 특이한 봉법이군요. 제 생각이 맞는다면 개방 방주나 그 후계자에게만 구두로만 전해진다는 타구봉법(打狗棒法)이 아닌지요?" "……맞아요." "그렇군요. 당신이 바로 개방 방주가 너무 애지중지해서 극비 사항으로만, 존재한다는 잠룡(潛龍)이었군요. 어쩐지 철호비가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쉽게 퉁겨나가는 것을 보고 정말 불량품인줄 알았지 뭐예요." 소방이 개방의 잠룡이었단 말인가? 혹시나 했지만, 그래서 제갈혜와 친했던 것인가? "꼭 철호비(徹護匕)여서 그런 게 아니겠지요. 비수에 이렇게 강맹한 기운을 자유자재로 섞어 넣어 날 연신 수세로 몰아넣을 정도로 고강한 이들 중 당신처럼 젊은 살수는 내가 아는 한 살막의 일수필살(壹手必殺) 흑룡(黑龍)밖에 없어요." "호호호홋, 맞아요. 전 감히 그 칭호를 감당할 수가 없지만, 제 손에 죽은 인간들이 하도 고명한 이름을 가지고 있던 작자들이라서 자연스럽게 붙여 주더군요. 하지만, 그들은 이름뿐인 이들이었어요. 허명이었지요. 당신만한 사람은 아직 없었어요." 마치 이웃집 아낙네들이 떠드는 수다처럼 느껴지는 일수필살(壹手必殺)과 소방의 대화중에도 그들 사이의 살기가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서로 죽일 기회만 노리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일수필살이라는 여자만이 다가오고 있었고, 소방은 뒤에 엎어져 꼼짝도 못하는 나를 의식한 듯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수세(守勢)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자신의 공격이 빗나가면 바로 나의 죽음으로 이어지리라는 압박감 때문일 것이다. '아, 한심하군. 한심해. 이럴 줄 알았으면 칼이라도 한번 찔러 볼 수 있게 수련을 열심히 받을걸. 친구의 등만을 보며 숨는 행각을 언제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네요. 하급 살수의 살행 수업 때문에 일수필살(壹手必殺) 정도 되는 최상급 살수가 뒤를 봐준다는 게……. 왜지요? 당신이 맡은 진짜 임무가 뭘까요? 이 산중에 당신이 반드시 죽여야 하는 자가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소방이 문득 일수필살의 의중을 찔러 보면서 기회를 엿보려고 한 말은 오히려 상대방의 전투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했다. 실제로 저 여살수에게는 다른 임무가 있었던 것이다. 소방의 한 마디에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칙칙한 눈을 번뜩거리던 여살수는 소방과의 거리를 재는 듯 살피다가 느닷없이 날 향해서 비수를 연이어 날리고는 낫처럼 기이하게 휘어진 쌍도을 맹렬하게 휘두르며 신형을 날려 왔다. 챙! 챙! 나에게 날라 오던 비수 두 개를 다급히 철봉으로 쳐낸 소방이 자세를 갖추기도 전에 일수필살의 기습을 받아 연신 주춤거리며 물러서야 했다. 그녀의 기이하게 생겨 먹은 쌍도가 펼쳐 내는 속공에 속절없이 밀리고 있다는 것만을 알 정도로 대단히 빠른 쾌도(快刀)였다. 소방이 타구봉법을 제대로 익혔다면 철봉이 아닌 타구봉이나 그것과 비슷한 봉을 들고 있을 때에야 제 힘을 발휘할 텐데, 유감스럽게도 그가 든 철봉은 봉이라 하기에는 반 동강이 나서 짧기도 했고, 두꺼운 쇠로 된 것이기 때문에 무겁기도 했다. 그래서 가뜩이나 수세인 그의 행동반경이 더 짧아지면서 연신 낭패를 보았고, 상대가 양손에 쌍도를 들고 쾌속으로 휘둘러 오는 덕에 더 더욱 불리해져 갔던 것이었다. 순간 일수필살의 우도(右刀)가 소방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기에 소방은 재빠르게 철봉으로 막아내었다. 그런데, 막자마자 좌도(左刀)가 소방의 발목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순간적인 일이라 나조차도 소방이 크게 상처를 입는구나 하고 자책을 하려던 찰나였다. 뜻밖에도 우도를 막고 있던 철봉을 비스듬히 휘둘러서 철봉을 향해 그어지던 좌도를 쳐내었고, 도리어 우도에게 가슴을 무방비로 내주는 게 아닌가! 짐작대로 훼방꾼을 잃은 우도는 그대로 인정사정없이 소방의 어깨를 내리 찍어 버렸다! "소, 소방!" 나로 인해 팔 한쪽이 날아가 버릴 듯해서 당황하여 고함을 질렀으나, 역시 입안에서만 맴돌 뿐 바깥으로 퍼지지는 못하였다. 깡! 뜻밖에도 일수필살의 우도는 소방의 어깨에서 금속성을 내며 멈춰 버렸고, 이번에는 반대로 소방의 왼손에서 엽전 비표가 일수필살의 안면을 향해 날아들었다. 의외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일수필살은 침착하게 한쪽 다리로 균형을 유지하며 다른 다리를 차올리는 동시에 상체를 뒤로 숙여 엽전을 피했다. 동시에 차올린 다리로 소방의 철봉을 박차며 뒤로 훌쩍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그녀가 내린 지점에는 인사불성인 하급 살수 미소년 녀석이 묶여 있는 나무 밑동이었다. 일수필살은 내려서는 동시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를 휘둘러 미소년 살수를 동여맸던 밧줄의 매듭 부분을 깨끗하게 잘라 버렸다. 엽전 비표를 피해 뒤로 신형을 한 바퀴 돌리는 짧은 사이에 밧줄의 위치를 기억한 그녀는 내려서면서 시선은 소방을 보며 견제하는 동시에 우도로는 기억한 지점의 매듭을 절단해 버린 것이다. 그녀가 매듭을 절단해서 자유로워진 미소년 살수는 천천히 일어나서 일수필살의 뒤춤 채대에 걸려 있는 야행의를 빼내어 느긋하게 옷을 입었다. 그 순간에도 일수필살은 미소년 살수에게 등을 보이며 소방을 막아선 모습이었다. 소방의 철봉을 든 주먹이 황망하게 떨려 왔다. "그랬구나, 일수필살의 목표는 처음부터 작삼이 아니었어. 바로 하급 살수라는 소년이었지. 도대체 그의 정체가 무엇이 길래 일수필살의 보살핌을 받는 것일까? 설마? 설마……!" 미소년 살수가 야행의를 다 걸치고 일어섰으나 일수필살은 소방을 경계하는 태도를 늦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 저 연놈들 때문에 내 자존심이 짓밟혔어. 용서할 수 없다. 이 자리에서 저들의 이름을 지워 버려! 아니지, 사로잡아. 사로잡아 와서 내 앞에 대령해. 내 친히 저 놈들의 뱃속에 든 간이 얼마나 부어 있는가 확인해 보겠다!" "존명(尊命)!" 정신이 가물가물 해지는 가운데에서도 미소년 살수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일수필살이 주군이라 부를 사람은 오직 살막의 막주 아니면 그의 아들이라는 소막주뿐일 것이다. 물론 저렇게 어린것이 반로환동(反老還童)한 고수가 아닌 이상은 소막주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일수필살이 소년을 대동했던 이유도 설명이 된다. 바로 소막주의 호위를 서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막주가 일수필살을 뒤에 두고 혼자 이 산으로 온 이유는 안 봐도 뻔했다. 그는 처음에 나를 우습게보고 간단히 수중 암살을 시도했던 것이었다. 되려 나의 돌발적 잠수와 확인 사살 돌멩이 투척에 외형적인 중상 이외에도 자존심에 크나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손으로 암살을 성공시키겠다는 고집으로 급기야는 똥통에까지 몸을 숨긴 것이었을 게 뻔하다. 비록 내 예상대로 심각한 변태는 아니었지만, 잔머리가 어느 정도 돌아가는 이 녀석은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숨김으로써 일수필살이 자신을 확실히 구해 낼 수 있도록 유도를 했다. 조금만 더 일찍 저 녀석이 살막 소막주인 것을 알았다면, 오히려 그를 인질로 일수필살까지 잡을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형세는 보시다시피 매우 안 좋은 상황인 것이다. 난 비수를 맞아 비가 오는 가운데 과다 출혈로 죽어 가고 있고, 소방 또한 날 신경 쓰며 지키느라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이 매우 맘에 안 든다. 친구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 할망정, 폐는 끼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2]계륵(鷄肋) '현현자, 이 노망든 영감! 날 죽게 내버려 둘 거요?' 뭔가를 기대하고 역정을 부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내 자신의 무력감 때문에, 소방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그냥 그 화풀이 대상을 현현자라는 미지의 상대로 골랐을 뿐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통증이 완화되면서 전신에 한 줄기의 기이하면서도 청아한 기운이 가늘게나마 도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게 구타심결(歐打心訣)로 모인 힘인가?' 그런 게 중요하진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단지 내가 일어나서 몇 마디 떠벌릴 힘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과 과다출혈로 인한 현기증으로 휘청거렸지만, 미약하게나마 힘이 들어가는 양팔로 간신히 땅바닥을 집고 상반신을 일으켜 앉을 수 있었고, 왼쪽 옆구리에 박혀서 거치적거리던 비수도 마저 빼 버리고는 고개를 들어 전황을 살폈다. 소방과 일수필살은 서로 신경전을 벌이느라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이젠 일수필살의 입장도 확연히 바뀌었다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등뒤에는 호위 대상인 살막의 소막주가 서 있었으니 방금 전까지 해 왔듯이 어둠과 빗소리에 묻혀 자리를 옮겨가며 공격해 오던 기습의 묘가 사라진 것이다. 문득 저 잘 생긴 꼬맹이가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기회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수필살(壹手必殺)이 미소년 소막주 앞을 막아서고 있었지만, 그도 한 몫 낄 생각이었는지 비수를 빼어 들고, 싸움이 시작되면 바로 던질 거라는 암시를 주고 있었다. 일수필살만으로도 간당간당하는 소방으로서는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러니 그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빼돌려야 했다. "야, 초절정 변태 소년." "크윽! 야! 난 살막의 소막주야. 너 같은 어리버리 밑바닥 점소이와는 사는 세계 자체가 달라! 함부로 입 놀리지마!" 역시 바로 맞대응을 하며 씩씩거리는 모습을 보니 애는 애였다. 그럼 일은 더욱 쉽겠지. "너 누구 한 명 잊은 사람 없어?" "무슨 소리냐?" "널 벌거숭이로 만들어 거꾸로 매달고도 모자라서 고문까지 했던 텁석부리 아저씨, 벌써 잊었냐?" "그, 그러고 보니 그 자식 어디에 쳐 박혔어!" 그래, 그래 더 크게 소리쳐라. 잠자려고 애쓰고 있을 그 인간 선잠이 바로 깨도록. 어차피 소위 고수라는 인간이니까 설사 귀에 귀마개를 틀어막았다고 해도 똑똑히 다 듣고 있을 테지만. "글쎄, 어디에 있더라? 창고 안에 볼 일 있다고 들어가 버린 듯도 하고……. 그런데, 혹시 그거 아냐?" "뭘 말이냐?" "그가 너를 왜 나무 위에 벌거숭이로 만들어서 매달아 놨는지 아느냐고?" "그야…… 고문을 하려고 매달아 놓은 것 아니야?" 좋아, 좋아 내가 하는 말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구나. 어린 아이들의 특징이 뭔가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든다는 데 있다. 특이나 어려움 모르고 자란 싸가지 없는 아이라면 그 정도는 더욱 심할 터, 넌 이제 죽었다고 복창해라. 소방(蘇芳)과 일수필살(壹手必殺)을 잠시 살펴보니 빗물에 흠뻑 젖은 그들 몸 위로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고,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서로 노려보기만 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엄청나게 신경전을 벌이는 중일 꺼다. 순간 일수필살의 입이 달싹거리는 게 보였다. 직감적으로 미소년 소막주에게 이 자리를 피해 달라고 전음입밀(傳音入密)을 넣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떠나야만 일수필살, 그녀의 약점이 사라지고 비수로 뚫린 상처에서 피가 흘러 과다 출혈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나를 지키며 싸워야 하는 소방의 약점이 부각될 테니까. 제법 소년을 매우 아끼는 듯한 일수필살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외형상으로 드러난 핑계지. 실은 그 아저씨 엄청난 미소년 남색가야. 너의 수려한 외모에 빠진 그는 네 진을 빼서 축 늘어지면 덮치려고 그런 거야. 아까 전에 난 보았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널 보면서 입맛을 다시며 침을 꿀꺽 삼키는 그를, 마치 '이게 왠 떡이냐? 하늘이여 두고두고 먹을 양식을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더군. 그 전에도 내가 여기 일하는 두 달 동안 몇몇 미소년들이 벌거벗겨진 채 그에게 먹히는 걸 보아 왔지. 네가 직접 경험한 나무 말뚝 항문 관통 회전 기술도 그가 종종 써먹던 것을 내가 보고 흉내를 조금 내본 것에 불과해. 그에게 당하면 거기에 피가 조금 새는 정도가 아니라 변이 슝슝슝 빠져 버릴 만큼 너덜너덜 해져." 내가 이 말을 하자, 소막주라는 소년이 닭살이 돋았는지 부르르 떠는 게 보였다. 후후, 텁석부리 거구 장한 포연강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벌거벗은 자신 위로 덮쳐드는 상상을 하고 있겠지? 아까 전에 겁준다고 깎고 있던 팔뚝만한 나무 말뚝을 떠올리고 오줌을 지리고 있겠지? 내가 상상해 봐도 끔찍해서 눈 버릴 것 같은데, 당사자인 너는 오죽하겠냐? 후후훗 일수필살이라는 여살수 마저 닭살이 돋는지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런데, 소방한테서까지 닭살 돋치는 소리가 들리니…… 쩝. "나야 워낙 생겨 먹은 근본이 영 아니올시다인 데다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서 그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너는 꽤 오랜만에 걸린 월척이거든. 게다가 살수라는 죄목까지 붙어 있으니 공개적으로 벗겨서 매달아 놔도 그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그야말로 완벽하기 그지없는 일이었지. 장담하지, 네 호위 담당인 그녀가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넌 이미 먹혔어." 본래 여자 피부 같았던 미소년 소막주의 깨끗한 피부는 창백하게 질릴 대로 질려서 새하얗게 빛이 나고 있었다. 어린애는 이래서 갖고 놀기 좋단 말씀이야. 어른 말씀을 곧이곧대로 잘 듣거든. 더구나 장난을 좋아하는 포연강이 재미 삼아 내 흉내를 낸다고 나무 말뚝을 미는 흉내만 냈지만, 어린 마음에 그런 걸 제대로 생각할 리도 없고, 그의 연기가 너무 능청맞게 노련한 것도 한 몫을 했을 거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일수필살이 눈살을 찌푸리며 복면 위로 입을 달싹이는 게 보였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이상한 세계의 충격에 빠져든 소년은 좀처럼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참다 못한 일수필살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주군, 어서 돌아가십시오! 제가 곧 뒤를 따라갈 테니 일단 피하십시오!" 그녀의 고함에 정신이 번쩍 든 미소년 소막주는 고개를 끄떡이며 뒤로 비틀비틀 피하고 있었다. 흥! 그대로 가게 놔둘 내가 아니지. 준비해 뒀던 최후의 쐐기를 박아야 했으니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호시탐탐 널 노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도망가는 길에도 부디 몸조심해라. 도, 망, 가, 다, 가, 먹, 힐, 라. 그는 살아 있는 한 언제나 너를 노릴 거다. 적어도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함부로 나돌아 다니지 않는 게 네 신상에 이로울 거야." 미소년 소막주는 내 말에 귀신에 쫓기듯 허겁지겁 빗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한번 공황에 빠져든 인간은 헤어 나오기 힘든 법이다. 내가 포연강이 살아 있는 한 뒤를 쫓아다닐 거라고 강조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쫓기기 싫으면 죽이면 그만이니까. 과연 날 매섭게 노려보던 일수필살의 눈이 번쩍 떠지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군! 어째서!" 한참 도망을 가던 미소년 소막주는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기어이 도망가던 방향을 틀어서 포연강을 죽이기 위해 창고 쪽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아까 전에는 소방을 신경 쓰느라 무공을 쓰지 않았던 그를 보통 사람으로 착각했을 게 확실했다. 일수필살(壹手必殺)이 뜻밖의 상황에 당황해 하는 것은 분명 했으나, 지척에 소방(蘇芳)의 날카로운 기세와 대치한 상황이라 좀처럼 발을 떼지 못했다. 섣불리 물러섰다가는 그 순간의 빈틈으로 인해 크게 낭패를 볼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소막주가 창고로 들어간 지 한 식경이 흘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이 잠잠했다. 일이 잘못 되도 단단히 잘못된 것을 느낀 일수필살의 좌불안석인 모습이 참으로 볼만했지만, 이쪽이 유리할 때 그녀를 제압해야만 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충성도에 따른 것이지만, 지금까지로 보아 소막주를 향한 그녀의 충성은 거의 절대적인 듯싶었다. 그럼 한 번 운을 띄워 보기에 딱 적당한 시점이 된 것이다. "일수필살, 이상하지 않소?" '뭐가 이상하다는 것이지요? 어서 말해 보세요!" 냉정하기만 하던 아까 전과 달리 신경질적으로 변한 어투로 봐서 분명 상당히 당황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럼 이제 끝난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산중턱에 있는 자그마한 주루에 꼽사리로 사는 거지가 실은 매우 쓸 만한 고수라는 것 말입니다." "치잇, 한 가닥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잠룡(潛龍)일 줄은 몰랐어요. 광룡(狂龍) 곽철에게만 신경을 썼던 탓에 그가 떠났다는 말을 듣고서 안심하고 소막주를 보냈건만, 이렇게 꼬일 줄은 정말, 정말 미처 몰랐어요." "그럼, 이곳의 주방장도 실은 엄청난 고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지요?"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요?"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했다. 스무 해 가까이 수시로 거짓말을 해 오며 들키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를 해야 했던 과거의 필살기를 지금 극성으로 끌어올려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소막주가 포로가 되어 죽기 일보 직전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겠군요. 지금 포연강 대협으로부터 소막주를 포로로 잡고 칼을 목에 겨눴다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이 날라 왔습니다. 그가 사느냐 죽느냐는 이제 전적으로 당신 손에 달린 것이지요. 만에 하나 허튼 수작을 부리거나 도망을 가신다면 장담하겠습니다. 소막주는 죽을 것이고, 살막은 그 일차 책임자로 당신을 지목하고 징계를 해 올 것입니다. 어쨌거나 당신이 호위를 맡았으니깐 요." "……. 내가,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건가요?" "당신이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점혈을 당해 준다면 소막주의 목숨은 보장하겠습니다." 소방과 대치하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나를 노려보며 한 숨을 내쉬던 일수필살은 낫처럼 기이하게 휘어져 있는 쌍도를 발 아래로 던지고서 자세를 풀었다. 뭔가 찜찜한 것을 느끼던 소방은 그래도 신중을 기하느라 접근하지 않고 엽전 비표를 몇 개 날려 점혈을 했다. 급박했던 상황에서 극적으로 벗어나게 되자 긴장이 풀리면서 전신을 기이하게 돌던 청아한 한 가닥의 기운도 덩달아 끊겼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온통 시뻘겋게 출렁이는 피바다로 얼룩져 있었다. 막말로 비가 내렸는지 피가 내렸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소방이 점혈을 재차 확인하며 나를 돌아보려 하는 부분이 흐릿하게 비쳐졌다. 땅에 머리를 박은 것도 같은데 감각이 거의 없는 상태라 아픈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날 뒤집으면서 뭐라고 비통하게 외치는 것도 같은데, 웅성거리기만 할 뿐 시야마저도 점점 흐려져 왔다. 완전 암흑이 찾아오고 정신 한 가닥만이 미약하게 남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투정 부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구타만 당하더니만, 이제는 칼받이로 바뀐 거냐? 거 오질 나게 아프기도 하고 피도 무지하게 많이 나네. 이러다가 언젠가는 정말로 죽겠다. 백 년은커녕 올해가 가기도 전에 죽겠다. 죽겠어……죽겠…….' 매캐한 고약 냄새가 바람을 타고 슬며시 코를 간질여 왔다. 이 정도로는 수면을 향한 나의 욕구를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다시 꿈나라로 빠져들려는 찰나 찬바람이 느껴지는 옆구리 쪽에 뭔가를 덕지덕지 바르는 듯한 부드러우면서 익숙한 손길이 느껴졌다. 잠시 동안 누구일까 궁금증이 일어서 눈을 떠볼까 하다가 귀찮아서 관뒀다. 잠이 올 때는 그저 무조건 자는 게 장땡이니까. 뒤늦게 서야 옆구리 쪽으로 고약 기운이 타고 들어갔는지 찌릿찌릿한 것이 몹시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잠을 자려고 해도 은근히 따끔따끔 거리는 게 좀처럼 눈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마치 일어날래, 말래 하면서 시비를 걸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인 인상을 그리면서도 백수신공(白手神功)의 고절함을 깨닫게 해주겠다는 끈덕진 집착 하나 만으로 끝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다시 나긋나긋한 섬섬옥수가 내 옆구리를 살살 더듬는 게 느껴졌다. 이어지는 부드러운 질감이 꽈악! 컥, 따끔거리는 부분을 싸매는 강한 압박감에 찌릿찌릿 함과는 비교가 안 되는 처절한 통증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며 수백 번은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전신이 본능적으로 움찔움찔 거리면서 손바닥으로 식은땀이 배여 나오는 게 느껴졌다. 감히 이 정도로 나의 고절한 백수신공을 깨겠다는 것인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귀찮아서 봐주도록 하지. 대신 지지 않겠다는 강한 승부 근성을 가지고 이를 악물었다. 주먹을 불끈 움켜쥐고 발바닥에 힘을 팍 주며 오므렸다. 절대로…… 절대로! 눈을 뜨지 않겠다는 불꽃같은 집념의 표출! 일 각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이를 악물고 온 몸에 힘을 꽉 주며 버티자 통증이 차츰차츰 가라앉고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잠들 수 있겠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편히 꿈나라로 들어가려는 순간, 예의 나긋나긋하면서 가냘픈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내 어깨를 슬며시 타고 오르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밀려오는 향긋한 울금향이 내 코를 간질거렸다. 장난을 치는 의도가 분명한지 입 바람을 내 콧속으로 후후 불다가 내가 반응하지 않자 귓가에도 후우 부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장난 칠 게 뻔하면서 섬섬옥수라 불릴 정도로 예쁜 손을 가진 사람은 소방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나로서는 구태여 눈을 뜨면서 일일이 확인까지 하고 싶은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설사 문 밖에 저승사자가 왔다 해도 밀려오는 잠은 자야만 한다는 것이 나의 권리이자 동시에 의무였던 것이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가 귀찮게 해도 꿈나라로 향하고자 하는 나의 숭고한 의지가 흔들릴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었다. 잠자코 그가 포기하길 기다리며 끝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한참 동안 후우 불며 장난을 하던 그는 내가 반응 없이 잠을 자는듯 하자 포기를 했는지 이내 잠잠해졌다. 이제야말로 꿈나라로 편히 들어가는 중이었다. 내가 잠을 좋아하는 이유가 최근에 하나 더 늘었는데, 바로 교옥정 선녀를 만나는 기쁨이었다. 교 누님은 꿈속에서 언제나 선녀(仙女)로 나왔다. 종종 심술을 부리기도 하지만, 그녀의 미소를 볼 때면 언제나 편안(便安)하면서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비록 현실에서의 교 누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꿈속에서의 교 누님은 언제나 인자했고, 정이 많았다. 정(情). 내게 결핍된 것은 바로 정(情)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야말로 정(情)에 굶주려 있는 것이 아닐까? 침대가 가볍게 들썩이면서 가슴팍 위로 옷깃이 살랑살랑 이는 것이 그 녀석이 기어이 침대 위로 올라온 듯싶었다. 막 잠이 들려는 참이었는데, 아쉽다고 할 수밖에…….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는다. 잠은 이미 다 깨 버렸지만, 끈질긴 불굴의 집념으로 눈을 뜨기 귀찮아하는 내 뚜렷한 의지를 관철해 보이고 말 것이다. 소방의 나긋나긋하면서 부드러운 섬섬옥수가 다시금 내 양어깨를 슬며시 잡았으나, 왠지 이번에는 수전증(手顫症)걸린 사람처럼 바르르르 잔 떨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손이 내 어깨선을 쓰다듬으면서 내 목을 슬며시 움켜쥐었는데, 그 순간 잔 떨림은 더더욱 격해지면서 그의 안면이 지척에 이르렀는지 거친 숨결을 내 귓가에 내뱉고 있었다. 좀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상시의 소방은 그다지 장난을 잘 치지도 않았지만, 하더라도 경미한 수준을 넘지 않아서 또래 소년들치고는 꽤나 순수한 편이라고 느끼고 있었는데, 지금은 소방은 어딘가가 어색하면서도 왠지 그답지 않았다. "컥! 커헉!" 바르르르 떨면서 내 목을 움켜쥐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쥐어짜 버리는 통에 숨이 막힌 나는 굳건한 의지고, 백수신공이고, 나발이고 간에 할 것 없이 본능적인 생존 욕구에 따라서 신음을 흘리며, 목을 죄고 있는 그의 손을 힘껏 부여잡으면서 눈을 떴다. "주, 주령령(周鈴鈴)!?" 음산하기 그지없는 달빛 아래 언제 봐도 두렵기 그지없는 서슬 시퍼런 안광이 더욱 사이하면서도 한 층 깊게 요요히 번뜩이고 있었다. 내 목을 무서운 악력으로 죄어 오던 주령령은 내가 얼결에 그녀의 이름을 내뱉자 두 눈을 부릅뜨며 신형을 움찔거렸다. 곧이어 매섭기만 하던 푸른 안광을 약간 누그러뜨리더니 무섭게 옥죄던 손에서도 힘을 서서히 빼는 것이었다. 땅이 꺼질듯이 힘겨운 숨결을 몇 차례 내뱉던 그녀는 지쳤다는 듯이 그대로 내 배 위에 털썩……? '끄아아아아아악!' 눈알이 희번덕 뒤집혀 지면서 심연의 고통을 호소하는 비명이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꿀꺽 그것을 가까스로 삼켜 버렸다. 나도 눈치가 있지. 이 오밤중에 비명을 질렀다가 다른 인간들이 깨면 이 마녀가 두고두고 갈굴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왕 맞는 거 깔끔하게 마무리지어서 뒤끝 없이 가는 게 나음을 본연의 체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주령령은 무슨 할 말이 많은지 퍼런 안광을 깜빡이며 한참을 물끄러미 째려 봤다. 솔직히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짐작이 가긴 했다. 이런 때는 선수를 치는 게 나으리라. 나중에 가면 줘 터지느라고 어디 변명할 시간이나 있겠는가? "저, 저기요. 이, 이번에는 제가 사고치고 싶어서 친 게 아니라 정, 정말 우연이었어요. 설, 설마 날 죽이려던 살수가 살막 소막주 인줄은 몰랐다고요. 처음에는 그냥 타고난 변태인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계속 죽이려고 달려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포연강 대협한테도 그 녀석이 먼저 달려든 거예요. 제가 몇 마디 하긴 했지만……. 에…… . 아, 정신이 없는 상황이어서 뭐라고 떠들었는지도 잘 모르겠네요. 정, 정말이라고요. 믿어 주세요." 내가 횡설수설 있는 말 없는 말 지어 가며 변명을 하고 있으려니까 내 말을 듣고는 있었는지 눈을 가늘게 뜨며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래도 말뚝으로 칠공을 뚫리기는 싫은 모양이지? 하여튼 무지 아플 테니까. 그렇지?" 이 말을 하면서 가만히 내 볼을 쓰다듬는 손은 부드럽고 따스한 섬섬옥수이긴 했지만, 그 두려움이란 이루 헤아리기 어려웠다. 나의 떨림을 즐기는 듯한 마녀! 화가 났다기보다는 놀리는 듯싶었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순간을 넘기느냐 였다. 다음에 또 일 나는 거야 그 때 가서 해결할 일이었다. 내 배 위에 주저앉아 있던 그녀는 무엇을 느꼈는지 침대 위에서 일어나 창가로 내려 비치는 달빛 아래에 섰다. 그녀의 새하얗던 나삼의의 절반은 내 피로 물들어 새빨갛게 젖어 있었다. 창가를 등진 그녀는 아끼는 나삼의가 피에 젖어 버린 게 너무 화가 나는 듯 퍼런 안광을 부릅뜨며 한참을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하지. 왜 아무 말도 안 한 거지?" 갑자기 그녀의 목소리가 쉰 듯한 소리가 나면서 시퍼런 안광에서 내뿜어지는 기운이 거세져 숨이 턱 막혀 오는 것이 분노한 기색이 완연했다. 화가 나서 말뚝으로 박으려나 싶어 재빨리 바닥에 내려와 엎드려 싹싹 빌었다. 무조건 살기 위해 빌고 봐야만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칠공에 말뚝이 박히면 아픈 것은 둘째 치고라도 인간 구실조차 할 수 없을 것 아닌가! 그럼 남은 길은 오로지 구걸! 구걸 밖에 없는 것이었다. 죽어도 그것만은 싫었다. 차라리 죽고 말지. "아, 아니 제가 좀 무감각해서요. 요, 요즘 하도 맞았더니만 아픈 것을 미쳐 못 느껴서 죄송해요. 죄송해요. 다음부터 조심할게요. 좀 봐주세요. 옷은 제가 깨끗하게 빨아 드릴게요. 제발, 제발 봐주세요. 제발……." "그만, 시끄러워. 밖에 들린다." "……."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애처롭게 그녀를 바라봤다. 미약한 달빛이라 해도 창을 등지고 있는 령령의 표정을 감추기에는 완벽했다. "무림맹은 네 친구가 있어서 유야무야 넘어 갔지만, 살막은 다르다. 소막주 녀석을 죽여도 문제지만, 살려 놔도 문제다. 소막주가 여기로 온 것을 살막이 아는 관계로 일단 살려 놓긴 했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유용한 시간이 줄어들었다. 이젠 정말 문제 일으키지 말아라. 이번이 마지막이다." "예, 예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절대로 쥐 죽은 듯이 지내겠습니다요. 절대로요." 일단 살았다는 안도감에 마루바닥에 머리를 콩콩 박으며 절을 했다. 더 박으려고 했으나 그녀의 발끝이 내 어깨를 막아 세워서 그대로 멈췄고, 봐준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부르르 떨리는 것은 본능적인 거라 어쩔 수 없었다. "바보 같은 놈." 너무 작아서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나지막하게 내뱉어지는 그녀의 목소리 속에 깊은 원망이 어려 있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이유 또한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꽤 오랫동안 은밀하게 꾸며 온 그들의 계획이 나로 인해 크게 꼬여버린 것에 단단히 화가 나 있음이리라. 그녀가 몸을 돌려 휙 하니 나가고 난 뒤 정신이 몽롱해진 나는 또 털 푸덕 쓰러져야 했다. 피를 흘려도 너무 많이 흘렸던 모양이다. 또 얼마를 정신없이 누워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문득 한기가 들어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다행스럽게도 령령이 아닌 소방이 환기를 시킨다고 창문을 연 것이었다. 그 날의 잔혹한 기억이 떠올라 침대에 푹 젖어 들었거나, 바닥에 흥건하게 흘러내린 핏자국을 찾아 봤으나, 평상시와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혹시나 내가 꿈을 꾼 것이었을까? "소방, 내가 누운 지 며칠이나 지났어?" "와아, 작삼(作三) 이제 정신이 들었나 보구나? 대략 일 주일 정도 지났나봐. 어디 보자." 바람결에 흘러내린 앞머리와 귀밑머리를 살랑살랑 이며 뭐가 저리 좋은지 촐랑거리던 그는 붕대를 갈 겸 얼마나 상처가 아물었는지 확인한다며 다짜고짜 내 옆구리에 동여맨 붕대를 풀어내었다. "흠, 네 회복력은 거의 괴물 수준인 것 같아. 그렇게 구멍이 숭숭 뚫린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흔적 정도만 희미하게 남았는걸. 야 너 혹시 만년설삼(萬年雪參)이나 화룡내단(火龍內蛋) 같은 영약을 숨겨 놓고서 몰래 먹고 있는 거 아냐?" "바보냐? 그런 거 먹었으면, 내가 이런 한적한 곳에서 점소이나 하고 있을 것 같아? 유명한 표국의 우두머리 표두를 하거나, 산적 두목이라도 하고 있었겠지." "뭐? 표국? 산적두목? 차라리 구파일방의 수제자로 들어가지 왜?" 이번 그의 말에는 코웃음이 나왔다. 내가 얼마나 무림맹과 그 추종자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는지 얘가 잘 모르나 보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그동안 나를 도움에 있어서 힘을 아끼지 않았던 협객중의 협객(俠客), 곽철 대협이나, 내가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 친구로 여기는 소방도 구파일방의 한 일부였으니까. 무조건 흑과 백으로 갈라서 나쁘다, 좋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그들인 걸까? "참 소방, 혹시 말인데, 내가 누워 있는 동안 침대보가 빨갛게 물들었다던가, 바닥에 흥건하게 피가 고여 있었다던가, 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적 없었어?" 문득 령령이 다녀가고 난 이후 분명 본 사람이 있을 텐데, 조용한 것에 대해 의문이 일어났다. 내 질문에 고양이처럼 댕그란 눈을 똘망똘망 빛내며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갸웃하던 그는 입을 쌜쭉하게 내밀며 내 볼때기를 우악스럽게 꼬집어 버렸다. "……?" "흥, 날 못 믿나 본데, 네가 잠들어 있던 일주일 동안 네 방을 철통같이 지키면서 간호를 해 왔는데, 어느 누가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겠어? 너도 아무 일 없이 잠만 잘 자더라. 그러니 이상한 생각일랑 하지 마." "그래? ……. 신경 써 줘서 고맙다." "푸, 갑자기 낯간지럽게 왜 그래? 우리가 남이야? 남이냐고! 어서 일어나기나 해. 이 바보 멍청아." 역시 나의 꿈이었나? 배를 짓누르는 찌르르한 통증이나 질척질척거리던 흥건한 피바다라던가 그녀에게 울고 불며 매달리던 게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역시 주령령도 교 누님처럼 그녀를 향했던 외기러기 연정이 꿈으로 나타난 것일까? 그녀야 원래 냉랭하면서 으시시한 분위기를 잘 타고나니 그런 묘한 꿈을 꿨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긴 했다. 이제라도 확실히 잊어야겠다. 그녀 자체가 손이 안 닿는 높은 곳에 있는 꽃이기도 했지만, 남궁현을 넘어서서 확실히 강호에 이름을 남길 일도 영원히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교 누님은 잘 있을까? 내가 그녀에 대해 외기러기 짝사랑을 품었다는 것을 알기는 할까? 당연히 알 리가 없다. 설사 알았다고 해도 황보 무식이 말처럼 남자 덮치기를 우습게 아는 그녀가 날 기억하고 있으리라 보는 것은 무리였다. 어디까지나 그녀는 월녀궁의 수제자였고, 난 어느 한적한 산골짜기 작은 주루의 힘없고 볼품 없는 일개 점소이일 뿐이니까 말이다. 내가 아무리 황보 무식이 말을 흘러 들었어도 완전히 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으니까 말이다. 교 누님 또한 주령령처럼 내 마음속에만 남아 버린 그림자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젠 잊어야 할 것 같다. 더 이상은 꿈속에서만 만나는 그녀를 두고 볼 수가 없으므로……. "야, 야 정신 차려 작삼. 어디다 정신을 팔아먹었어?" 소방이 곁에서 귀찮게 흔들어 준 덕에 쓸 때 없는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 일생에서 그나마 남는 게 있다면, 내가 어느 날 덜컥 일생을 마감해도 포연강 말대로 내 관에 꽃 한 송이를 던져 줄 친구가 있다는 것이다. 소방, 그는 하늘이 내게 내려 준 작은 선물일 것이다. 후훗. "얘 봐, 얘 봐. 초점 없는 시선으로 바보같이 히죽 히죽거리기는……. 이상한 상상하고 있었구나. 하여간 그 변태 같은 기질이 어디 가겠냐? 이 색마 같으니라고." 색마라, 그래 차라리 난 색마들이 부럽다. 변태들이 부럽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채 떳떳하게 거리를 활개 치며 하고 싶은 짓들을 감추지 않는다. 아무리 이 사회가 어둠의 인간들이라고 손가락질해도 그들의 내면에는 변태들에 대한 부러움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마음껏 누리고 사는 그들이 부럽기 그지없을 것이다. "또, 또, 또 다른 생각하는 것 봐. 그들에 대해서 궁금하지도 않나 봐." "그들? 설마 소막주랑 일수필살? 어, 어떻게 됐어? 죽였어? 파묻었어? 어디다가 묻었어? 엉?" 그들에 대한 것에 생각이 미치자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당연 궁금하지. 내가 그들 때문에 침대 신세를 진 것도 억울하고 소방이 자기 목숨을 걸면서까지 날 지키게 만든 것을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데, 지난번 막패 녀석처럼 그냥 죽어 버렸다면 원통하고 방통해서 잠이 제대로 올 리가 없다. 죽여서 파묻었다고 하면 밤에 시신을 몰래 파내서 다시 이어지지 않도록 오등분에, 오등분에, 다시 오등분을 내버릴 생각이었다. 산골짜기 이곳 저곳에 흩뿌려 산짐승들과 산새들의 먹이로 만들어서 뿔뿔이 헤어져 영영 붙지 못하게 한 다음 그 영혼이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원혼이 되도록 할 작정이기 때문이었다. "작, 작삼 그렇게 눈을 허공에 대고 부릅뜨니까 이. 이상해. 귀, 귀신같아." 난 씨익 웃으면서 조금 겁을 먹은 듯도 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잠룡이라는 녀석이 어린 녀석이라 그런지 치기 어린 부분이 없잖아 보이긴 했다. 귀여운 녀석. 너한테 손찌검을 한 흑룡인가 뭔가 하는 애의 시체는 내가 톡톡히 손봐주마. "어허, 미안하군. 한참 금단의 세계에 맛 들여가는 중이었을 텐데. 있다가 올까?" 포연강 이 녀석, 하여간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어이구 풍악산 처녀 귀신들은 저거 안 잡아가고 뭐하누? 소방 너 말 잘하니까 한 방 쏘아 붙여줘라. 난 워낙 저 인간 앞에서 기는 신세라 말 같은 것을 제대로 할 수가……? 이 녀석, 뭐가 기분 좋은 일이 있다고 얼굴이 빨개지면서도 슬그머니 미소를? 설, 설마…… 허걱. 너,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끙, 하여간 포연강 저놈이 문제라니깐. "포 형님. 보아하니 할 말이 있으셔서 올라오신 것 같은데, 말을 해 주셔야지요. 시체들 묻은 장소를 옮기려고요?" 아마도 그들이 묻힌 장소가 드러나지 않도록 더 깊숙한 곳에 옮겨 묻으려나 보다. 소방은 어쨌거나 외인이라 부탁하기 애매한 판국에 마침 내가 거의 다 나아서 일어난 것을 보고는 나와서 좀 도우라고 한 소리를 하려는 것이겠지. "죽긴 누가 죽어? 아무리 살수라 해도 살막 소막주랑 흑룡이란 놈들을 함부로 죽였다가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죽이겠는가? 흐이구, 내가 그 날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어이가 없다네. 곤히 자려는데, 자네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얼마나 기가 찼는지 아는가? 자네야말로 금단의 영역에 빠져 살면서 누굴 미소년 남색가로 몰아 세워? 화딱지가 나서 칼 들고 달려온 소막주 놈의 점혈을 지그시 눌러 버린 후 발가벗겨서 창고에 매달아 놨다네. 크크크 겁을 잔뜩 먹고 질질 짜는 꼴이란……. 크으으으, 그런데, 그 녀석 몸에 배인 똥 냄새가 진동을 해서 당최 잠을 잘 수가 있어야 말이지. 하여간 끔찍했어. 끔찍했다고." "그럼 아직 살아 있어요? 흠, 좋았어요. 그들을 죽이는 것은 제가 할게요. 묻는 것은……." 따악! "아크, 왜 때려요? 어차피 언젠가는 죽일 거잖아요. 조금 앞당겨서 지금 죽여 버리자고요." "그들이 살아 있어야 살막에서 정기적으로 날아오는 전서구에 답신을 남길 것 아냐? 일단 혈해진경을 찾는 무림인들의 동향을 관찰하기 위해 남기로 했다고 쓰게 했지." 뭐야? 결과적으로 살아 있고, 죽일 수도 없다는 거잖아. 지금 누구 염장 지르러 온 거야? 쳇 기분만 조금 좋다가 말았네. "그럼, 그거 말해 주러 온 거예요?" "험, 험, 아니지. 그들의 내공은 내가 환상의 황실 타혈법을 시전해서 임시로 폐지시켜 버렸다. 점혈을 풀지 않는 한 보통 사람이나 똑같지. 또한 이 고약을 하루에 한번씩 삼키지 않으면 그나마 폐지되어 있던 내공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게 된다. 옛다, 이 고약들은 앞으로 네가 관리하도록 해라." 그는 내게 약주머니를 던져 줬는데, 내게 이것을 보관하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관리하라는 것인가요? 포 형님?" "그래, 령령은 따로 일이 있기도 하고 또 점원 일을 별로 내켜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이 참에 소막주랑 일수필살을 포로 겸 점소이로 쓰려고 한다. 네가 선배이니 만큼 알아서 잘 가르치도록 해라." 오호, 이게 웬 일이야. 다시 말하면 그들을 점소이 훈련 빌미로 해서 어떻게 굴리건 내 맘이란 소리잖아. 점소이 두 달만에 졸지에 쫄따구 두 명을 거느리게 되었네. 단지 걸리는 게 있다면 흑룡이라는 계집애 성깔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내공을 잃었어도 뭔가 한 가닥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도 이게 어디냐. 후후훗,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구먼. "험, 험, 너무 노골적으로 이를 드러내면서 미소짓지 말게. 섬뜩하구먼. 아무렴 쌓인 게 많았겠지. 내 어느 정도는 이해하지. 죽이지만 말게. 그래도 포로는 포로니까 어떻게 굴리건 자네 마음이지. 참, 령령이 그러는데, 그들이 사고치는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을 자네한테 묻겠다고 하더군." 어? 잘 나가다가 왜 주령령이 거기서 튀어나오느냐고? 더구나 왜 내 책임운운이야? "왜, 왜요?" "왜 기는 왠가? 자네 오랑캐 놈들 때문에 사 년 동안 징병 살이 했다면서? 그럼 거기서 자네가 사고를 저지르면 자네 대신에 자네 조, 조장이 장군에게 끌려가 욕을 먹지 않던가? 마찬가지야. 자네 쫄따구가 사고를 치면 당연히 자네한테 책임을 묻는 것이 상명하복(上命下復)의 철칙이지. 그럼 수고하게." "……." 이거 원, 기분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아리송하기 그지없어 한 숨만 절로 나왔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1 05:41:39 고친날 2005-09-01 22:32:02 읽은수 10700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48)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그로부터 사흘 정도 더 지나자 비수가 뚫고 들어갔던 자리는 거의 아물어서 흉터만 조금 남게 되었다. 소방(蘇芳)말대로 내 몸의 회복력은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라고나 할까? 그럴 수도 있지만, 일수필살의 비수가 워낙 예리해서 깔끔하게 뚫어 버린 덕에 붙기도 잘 붙는지 모르겠다.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침대 신세를 지면서 굳어 버렸을 몸을 간단히 풀기 위해 물지게 구보로 산자락을 굽이굽이 돌아 낭떠러지 외길을 통과해서 언덕을 넘어 단숨에 풀숲에 당도했다. '거 참 보통 사람들은 며칠 누웠다 일어나면 병든 병아리처럼 빌빌거리며 간신히 적응하기 마련인데, 난 어째 누웠다가 일어날 때마다 몸이 더 좋아지는 것 같아?' 예전 같으면 걸어서 내려오기도 적잖이 귀찮은 산길을 물지게 구보로 단숨에 내려와 버리다니! 일단 옷을 훌러덩 벗고 오랫동안 헤어져야 했던 물웅덩이에 몸을 던져 넣었다. 교 누님이 물 속으로 뛰어들 때는 그림이 되었는데, 역시 내가 하니 오히려 호수의 경관을 헤친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겠지? 후후. 간단히 목욕을 마치고서 물이 가득 찬 물지게를 이고 구보로 뛰어 보았다. 역시 물을 가득 채우고서 구보로 오르는 데는 무리가 따르긴 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뛰어 보니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내는 망아루 앞마당까지 간신히 오를 수 있었다. 왜 갑자기 뻘 짓을 하냐고? 다 이유가 있지. 크크크크크. 포연강한테 건네 받은 키를 갖고 후원 구석에 있는 지하실 문을 열었다. 막 동이 터 온 때라 뻘건 햇살이 지하실 안에서 희끄무레하게 날아다니는 먼지들을 관통하면서 어둡던 지하를 환하게 비추었다. 삐거덕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으며 내려가니 지하실 한편에서 퀴퀴한 냄새와 분비물들이 썩는 냄새가 코를 콕콕 찔러 왔다. 거의 악취사흉(惡臭四凶) 수준이었다. 뭐 급한 대로 화장실도 없는 지하실에 무공을 임시 폐지시킨 후 처박고 나서 끼니때마다 밥만 꼬박꼬박 넣어 줬다고 하니 이들의 고초가 어떠했을 지는 대충 짐작이 되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일수필살이 쓰고 있던 복면을 강제로 벗기고 나니까 사람이 변한 것처럼 고분고분하게 굴더라는 것이었다. 복면은 어쩌면 그녀의 본래 인격을 감추면서 또 다른 자아를 끌어내는 매개체 역할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것 또한 포연강에게서 건네 받았다. 왠지 언젠가 필요한 때가 있을지도 몰라서 그를 졸라 빼놓은 것이었다. 일부러 확실히 기선을 제압하면서 들어가기 위해 빨간 동이 터 오는 시점을 잡아 햇빛을 등지며 그들을 살폈다. 미소년 소막주 녀석은 기가 팍 죽었는지 일수필살의 품속에 꼭 안겨서 고개마저 파묻고 꼼짝달싹 자체를 하지 않았고, 일수필살은 갑자기 비쳐 든 햇살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가리며 실눈을 뜨면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날카롭고 칙칙하기만 하던 눈빛은 온 데 간 데 없고 그저 보통 수수한 처녀로써의 부끄러움을 띈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복면을 벗으니까 훨씬 사람 같은 걸. 뭐 특별히 예쁘다거나 끌린다거나 할 만한 처자는 아니지만, 점소이로서는 부담이 안 가면서 편안하기도 하고 수수하기도 한 면상이군.' "전원 기상! 셋 셀 동안 바깥으로 뛰어나갑니다. 늦는 사람은 얼차려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잔뜩 힘을 준 내 목소리는 지하실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하나!" 반사적으로 그들은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가 계단으로 뛰어 올랐으나, 소막주란 녀석이 다리가 저려 왔는지 그대로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러자 일수필살은 주저 없이 되돌아가서 소막주를 부축하고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었다. 복면을 벗었다 해도 소막주를 향한 충성심에는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좀 안쓰러운 기분도 들었으나, 날 죽이기 위해 비수 두 개를 내 옆구리에 인정 사정없이 박아 넣었던 것이나 소방이 죽을 둥 살 둥 하며 싸웠던 일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냈다. 내 신조는 받은 은혜는 빨리 잊어도 원한만큼은 오 부 이자로 보태서 되돌려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만큼 동정심 같은 것은 애초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둘! 셋! 이런, 이런 둘 다 늦어 버렸네요. 머리 박습니다. 실시!" 일수필살은 왠지 이런 일에 익숙한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머리를 박는데, 소막주란 놈은 감히 일개 점소이 주제에 살막 소막주나 되는 자신한테 머리를 박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투철한 개김성과 당돌함으로 뭉쳐진 기세를 뿜으며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었다. 오호, 너 딱 걸렸어. 난 그에게 두 번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한참 전에 피워 놓은 장작불 속에 박아 넣은 인두가 잘 달아올랐나 꺼내서 확인을 했다. 육안으로 멀거니 봐도 시뻘겋게 달아오른 인두에서 열기가 이글이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들고 씨익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어 보인 나는 소막주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어렴풋이 사태 파악을 한 그는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치다가 털썩 주저앉았고, 그 결에 같이 넘어진 일수필살은 인두를 들고 다가오는 나를 보고서 주저함 없이 소막주를 끌어안으며 막아서고 있었다. "일수필살, 당신의 본명은 무엇입니까?" 인두를 들고 내뱉는 내 질문에 청초한 두 눈 가득히 두려움을 담은 그녀는 그래도 망설임이 없었다. "단수연(丹粹姸), 단수연입니다." "호오, 예쁜 이름이군. 소막주 당신의 이름은?" 그는 내 질문에 대답을 하기는커녕 지릿지릿한 냄새만 풍겨 왔다. 그게 오줌 지린 냄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별로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대답은 그 녀석 대신에 일수필살이 했다. "소막주의 이름은 조진후입니다. 대, 대인 부탁입니다. 절 마음껏 지지시거나 난도질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우리 주군만은 제발 무사히 살막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대인." "……." 약은 것, 은연중에 살막이란 말을 함으로써 소막주의 뒤 배경을 조심하라는 말을 하면서 화풀이는 대신 자신에게 해도 보복하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누굴 무슨 남방 밀림 오지에 사는 식인종으로 아나? 절로 입안이 씁쓸해지면서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애초 기선 제압 목적에는 성공했다는 기분이 들었으므로 내공이 사라져서 평범한 소년과 수수한 여인네에 불과한 그들을 더 다그치기보다 하던 작업을 마저 마치기 위해 그들 뒤에 놓여진 탁자를 향해 걸어갔다. 탁자 위에는 물이 담겨진 사발과 다려지다 만 마의 윗도리, 그리고, 여기저기 뒤지다가 가까스로 찾아낸 허름한 홍두건이 놓여 있었다. 푸우우우. 입에다가 물을 가득 물었다가 뿜어낸 나는 신경 써서 인두로 상의를 조심스럽게 날이 서도록 다렸고, 등 뒤 쪽에도 세 줄을 잡아 사사사삭 다렸다. 바지는 그들 앞에서 벗었다가 입는 짓을 해봐야 조교로써의 경외심이 오히려 감소할 것 같아서 미리 다린 후 입고 있었다. 치치지지지직. 마지막으로 홍두건에도 각을 잡아 다린 후 그것들을 탁탁 털어 머리에 멋지게 묶은 나는 그 들 앞에 우뚝 섰다. "잘 들으시오. 오늘 부로 여러분은 망아루 점소이 훈련소에 입소했습니다. 본 조교 점소이는 당신들을 잘 훈련된 점소이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수고라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이 순간부터 주군이니 호위니 하는 신분은 잊고, 당수연 점소이, 조진후 점소이만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질문에 따른 복창 소리는 우렁차야 하며, 대답은 네, 알겠습니다 로 짧게 해야만 합니다. 제 말을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네, 네 알…… 알겠습니다." "복창 소리 작습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니들은 죽었다고 복창해도 좋다. 내 강제징병 이 년의 경험을 살려서 철저하게 굴려 줄 테니까 말이다. 후후.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1-01 08:25:10 고친날 2005-02-16 03:23:07 읽은수 6976 [ 0 K ] 제목 글을 보시는 연령대나 성별이 궁금하네요.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말 그대로 입니다. 실은 다른 분이 공지 써놓고 체크 하시는 거 보고 저도 문득 궁금해져서요. 댓글로 적어주시면 참고삼을지도 모릅니다. 제 짐작은 아마 고등학생분에서 대학생 남자분들이 주 연령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어떠할지? 이제 새해네요. 닭의 해라고 그랬나요? 닭의 해에는 닭집이 장사가 잘 되려나? ㅇㅅㅇ 집안이 만사형통하시길 빌며 저는 이만 물러갑니다. 그럼 수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2 06:04:59 고친날 2005-09-01 22:32:24 읽은수 10787 [ 12 K ] 제목 점소이 작삼(49)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창고 앞에는 내가 미리 빼 둔 물지게 세 개가 나란히 있었다. 이전에 간혹 무사히 도망가 버린 점소이들 덕택에 물지게 여분의 필요성을 느낀 포연강이 틈틈이 여분으로 만들어 뒀다는 물지게였다. 내가 하나를 둘러매며 그들에게도 하나씩 둘러매게 했다. "하나에 친절! 둘에 봉사! 복창 소리는 우렁차게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조진후 점소이, 복창 소리 작습니다. 지나가던 네 살 난 애를 납치해서 시켜 봐도 그보단 잘 하겠습니다. 다시 하나에 친절, 둘에 봉사 잘 할 수 있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제야 소리가 꽤 괜찮게 산골짜기를 타고 내렸다. 역시 공포 조성이란 것은 중요하기 이를 데 그지없는 것이었다. 인두를 가지고 장난친 것이 어린 녀석 마음에 잘 먹힌 모양이다. "이제부터 매일 새벽마다 간단히 물지게 구보를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서 내려오도록 합니다. 구령은 왼발에 친절, 오른발에 봉사, 조금이라도 흐트러진다거나 목소리가 작아지면 바로 얼차려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 출발하겠으니 대오에 어긋남이 없도록 합니다." 물지게를 한쪽 어깨에 올린 나는 자그맣게 친절, 봉사를 반복했고, 따라오던 그들은 내 목소리에 맞춰서 우렁차게 외쳤다. 솔직히 미소년의 설익은 미성과 젊은 여인의 농염한 미성이 어우러져 이런 때는 듣기 어색하긴 했지만, 독하게 마음먹은 이상 어설프게 지나갈 수는 없었다. 현관으로 지나가려니까 계산대에서 졸고 있는 홍 영감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이왕 시작한 거 격식을 맞춰야겠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그들을 현관 앞에 나란히 세운 후 각 오른편에 물지게를 내리게 하고서 거수경례라는 것을 가르쳤다. 혹시나 먼 훗날에 거수경례라는 것이 널리 퍼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미리 밝혀 둔다. 카카카카. "자, 잘 알겠습니까? 절대로 손등이나 손바닥이 정면에서 보이지 않도록 오른쪽 눈썹과 반듯하게 직각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 손 날과 팔뚝 또한 반듯하게 일자를 이루도록 합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홍 루주님께 경례라는 구령을 하면 우리 셋이 동시에 친절을 외치며 거수경례를 하도록 합니다. 잘 하실 수 있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전방을 향해 열주웅 쉬엇! 차려! 홍 루주님께 경례!" "친! 절!" 오호 처음 하는 것 치고 비교적 잘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호흡이 딱딱 맞아 떨어졌다. 단수연이야 이보다 더 혹독한 살수 수업을 쌓았을 테니 잘 따라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어리버리 개기던 소막주도 잘 따라 하니 제법 흐뭇한 기분이 들긴 했다. 그래도 잘 했다는 기색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 훈련의 목적이 무엇이던가? 매몰차게 굴리는 것 아니던가! "그게 아닙니다. 서로 박자가 어긋나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홍 루주님을 바라보는 두 눈에는 경외심을 가득 실어 흐트러짐이 없어야 하는데, 왜 조진후 점소이는 눈알을 대굴대굴 굴리는 것입니까? 조진후 점소이만 머리를 박습니다. 실시!" "실시!" 조진후는 행여나 내가 다른 짓을 시도할 것이 겁이 났는지 즉시 그 자리에 쿵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박았다. 맨 바닥에 바로 머리를 박은 것이 꽤 아팠는지 오만 인상을 다 쓰는 것이 즐겁기 그지없었다. 단수연의 정면을 향한 똑바른 시선 속에 순간 그녀 특유의 안타까움이 느껴졌지만, 그녀가 두둔하면 내가 더 발광할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챘는지 감싼다거나 하진 않았다. "조진후 점소이, 이번에 잘 할 수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목소리 기어들어 갑니다. 잘 할 수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기상, 다시 전체 차려! 홍 루주님께 경례!" "친! 절!"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거수경례를 한 그들을 보니 절로 야릇한 쾌감이 느껴졌다. 평상시 령령한테 맞고만 살다가 이번에 쫄따구 두 명을 굴리게 되니 그 감회야 오죽할까? "야, 작삼,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고 좀 심하게 구는 거 아니냐?" 처음부터 느끼한 시선으로 내 행각을 유치찬란하다는 듯이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던 소방이 나 혼자 굴리는 것이 좀 배가 아팠는지 간섭을 해 올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후후, 내가 누구냐? 이런 걸 예상 못했을 리가 없지! "오늘부터 점소이 제군들에게 길거리에서 흔하게 도는 일반 삼재검법과는 다른 한 차원 높은 실전형 삼재검법의 묘미를 가르쳐 주실 소 교관님이십니다. 모두 열중쉬엇! 차려! 소 교관님께 경례!" "친! 절!" 크크크, 저 소방의 얼빠진 표정 좀 봐라. 그 삼재검법이 제일 흔하게 나도는 삼류 검법이란 것은 포연강한테 들어서 예전부터 알고 있었느니라. 단지 네가 하도 진지하게 굴기에 나도 심심해서 장단 맞춰 준 것일 뿐이지. 이제 내가 좀 재미를 보려 하니 너도 장단을 맞추도록……. 카카카카카. 나라는 제자 하나를 갖고 노는 것보다 세 명을 가르치는 게 더 재미나지 않겠어? 사부라는 말보다 교관이라는 말이 더 폼도 나고. "소 교관님, 새내기 점소이들을 데리고 간단히 몸을 풀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친절!" "어, 어엉, 자알 갖다 와." 어찌 찜찜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그를 뒤로하고 소장강을 향해 구령을 붙이며 뛰기 시작했다. 내려가는 길이야 특별히 어려울 게 없긴 하지만, 발목에 힘을 꽉 주면서 내려가야만 한다. 물지게의 무게에 몸의 무게가 더해져서 발끝에 실리기 때문에 잘못하다가는 삐끗하기 십상인 거다. 실제로 난 조진후 녀석의 발목이 삐끗하기를 잔뜩 고대하면서 빠른 속도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직접 그들을 손보는 것은 안 된다는 언질을 받기는 했지만, 스스로 잘못해서 삐끗한 것은 분명 내 잘못이 아니렷다. 크크크크크. "친! 절! 봉! 사! 친! 절! 봉! 사!" 단수연이야 원래 최상급 살수라 불리는 여인이니 기본 체력만으로도 무시 못 할 지경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의외로 조진후 녀석도 잘 따라오고 있었다. 뭐 이제 시작이고 시간은 많으니까……. 소장강으로 내려 간 나는 그들에게 보통 점소이들이나 입을 법한 옷을 한 벌씩 나눠주었다. "이제 점소이로 새롭게 태어나려는 마당에 과거의 잔재인 야행의는 깨끗이 빨아서 본 조교에게 반납하도록 합니다. 참 혹시 얘기를 들었을지 모르지만, 다른 곳으로 튀었다간 여러분의 내공은 영영 되찾을 길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걸 알고 계시겠지요? 앞으로 제가 하루에 한 번 드리는 고약을 꾸준히 복용하지 않으면 임시 폐지시킨 내공이 사라지는 황실 비전 점혈법이 펼쳐졌다고 하니 이 점 주의에 주의 바라겠습니다. 그럼 목욕 실시!" 난 조진후야 미소년이래도 꼬마니까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단수연은 잘 안 보이는 으슥한 곳으로 가서 목욕할 줄 알았었다. 그런데, 평소 습관이 그러한지 단수연은 내 시선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꼬질꼬질해진 야행의를 훌러덩훌러덩 벗어서 맨 몸을 드러내더니 그대로 물 속에 잠기는 것이었다. 보태면 목욕 시중 들어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는지 조진후 등까지 밀어 주고 있었다. 조교 점소이 체면에 내가 자리를 피해 줄 수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나는 그대로 붉게 충혈된 눈을 뜨고서 그들이 다정하게 목욕하는 장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단수연은 가슴이 큰 편은 아니었으나 무림 고수인 것을 반영하듯 여성다운 근육이 적당하게 나 있었고, 꽤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단지 거칠게 살아왔다는 것을 반영하듯 조진후 소막주의 여인 같은 깔끔한 피부와 달리 군데군데 흉터 자국이 보이곤 했다. '참, 참아야 해. 내 굳은 의지와 결의를 보여줘야 진정한 경외심이 절로 솟구칠 것이 아닌가!' 난 단수연의 몸매보다 흉터를 더 집중해서 봄으로써 하체로부터 불끈불끈 솟아오르던 힘을 누그러뜨려갔다. 보복하려는 대상에 대해 약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두 눈에 힘을 주고 비수를 맞았던 그 날의 기억을 새록새록 되새기도록 애를 썼다. 그렇게 기를 쓰다 보니 어느새 목욕을 마친 그들은 평범한 점소이 복장으로 갈아입고서 소장강 유역에서 야행의를 빨고 있는 게 보였다. '히유, 위험했다. 잘못했으면 조교 점소이로서의 위용이고 뭐고 간에 쪽만 먹었을 뻔했네. 하여간 은근슬쩍 위험한 여자로구만…….' "야행의를 다 빨았으면 본 조교에게 반납하기 바라며, 물지게에는 물을 가득 채우도록 합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흐흐흐, 내공이고 나발이고 간에 없는 보통 인간인 너희들이 과연 나를 따라올 수 있을까? 못 따라오기만 해봐. 정말 가차없다. 가차없어. 카카카카카.' 받은 야행의는 그대로 내 물지게 한 쪽 물통에 넣어 버리고서 출렁이는 물지게를 매고는 앞장섰다. "친! 절! 봉! 사!…… 친!…… 허헉……." 예상 한대로 여인의 몸인 단수연이 오히려 숨도 별로 안 차는 듯 잘만 오르고 있었는데 반면, 조진후 녀석이 산 중턱에 이르기도 한참 전부터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하기야 그냥 걸어서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구보로 뛰어 가고 있었으니까. 잘 걸렸다. 후후후훗. "조진후 점소이 힘듭니까?" "아닙니다!' "절 못 따라오면 얼차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똑바로 못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잘 할 수 있습니다!' "……. 지켜보겠습니다. 경고는 한 번 뿐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말을 하면서 힐끔 단수연을 흘겨봤다. 조금이라도 조진후 녀석을 도와주려는 기색이 보이면 같이 굴려 버릴 생각이기도 했지만, 비록 단수연을 직접적으로 굴리지 못하더라도 그녀의 성격상 조진후가 구르는 것을 보면 심적으로 고통을 받으리라는 짐작이 있었기에 목표를 조진후로 잡은 것이었다. "친! 절! 봉! 사! 친! 절! 봉! ……헉 ……절, 봉……." 쿠당! 촤아악! 과연 얼마 가지도 못해서 조진후는 물지게를 쏟아 버리고서 쓰러져 숨을 헐떡거리는 것이 몹시도 지쳐 보이긴 했다. 정말 기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경고를 했으니 단수연도 심적 고통은 있을지언정 불만은 없을 것이다. 크크크크. "조진후 점소이, 망아루 점소이에게 있어 물지게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물을 쏟은 것도 모자라서 떨어뜨리기까지 하다니 도저히 간과할 수가 없군요." "헉…… 허헉…….' "팔굽혀펴기 자세 준비!' "허헉, 준비……." "하나에 물지게는, 둘에 내 생명이다! 복창하면서 이십 회 실시! 알겠습니까?" "허, 헉…… 네. 아, 알겠습니다." "목소리 작습니다. 사십 회! 몇 회?" "사십 회!" "시작!" "하나!" "물지게는!" "둘!" "내 생명이다!" "하나!" "물지게는! 컥!" 십 회를 채우기도 전에 조진후는 쓰러져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난 일부러 조금 쉴 시간을 주면서 기다렸다. 조금 체력을 회복해야 또 굴릴 것 아닌가! 속으로 흐뭇한 쾌감을 느끼며 이번에는 어떤 구실로 어떤 얼차려를 줄까 고심하고 있었는데, 단수연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단수연 점소이 무슨 일입니까?" "저, 작은 게 급해서 잠시 볼 일을 다녀올까 합니다." "내가 육십 셀 동안에 다녀오시오. 하나, 둘, 셋……." 일부러 초조한 마음이 들게끔 수를 세며 몰아세웠다. 내가 봐도 좀 비겁한 방법인 것 같기는 하지만, 내가 당한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게 힘이 없으면 지근지근 밟히듯, 상대방에 힘이 없다면 내가 인정 사정없이 짓밟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생각되었다. 단수연이 오면 바로 조진후를 굴리는 것을 보여줄 생각으로 천천히 육십까지 세고 나서도 오십을 더 세었다. 허리춤도 제대로 못 올리고 허겁지겁 달려올 단수연을 상상하며 눈을 떴다. 그러나 아직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엎어져 있는 조진후 녀석만 덩그러니 있을 뿐, 단수연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가 버렸나? 내공이 사라져 버릴 거라고 경고했는데도 도망갔단 말인가?' 그녀를 도망가게 놔뒀다가 닦달 거릴 령령의 안면이 떠오르자 난 주저 없이 단수연이 들어간 숲으로 숨 가쁘게 뛰어들었다. 아무리 구룡 중의 일인이라 해도 내공을 못 쓰는 지금 보통 사람보다 더 뛰어난 체력이 전부일 그녀를 체력 만점인 내가 따라잡는 것은 크게 어렵지는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외공이 미천한 내가 무슨 힘으로 그녀를 잡을지는 조금 막막하긴 했지만, 소막주를 핑계삼아 협박하는 것도 괜찮을 법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일단 그녀를 따라잡는……? '이, 이게 무슨?' 막 버들 나무 몇 개를 지나쳐 뛰어가려던 나는 눈앞에 펼쳐진 정경에 망연자실 넋을 잃었다. 사람 한 둘이 겨우 누워 있을 수 있을 정도인 숲 속 조그만 공터에는 단수연이 나신이 되어 내게 한 팔을 수줍게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흉터가 드문드문 보였지만 새하얀 그녀의 나신에 청초하고 가련한 여인의 이미지가 하나로 겹쳐지면서 나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을 보니 머릿속에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성난 야수처럼 그녀를 넘어뜨린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매끄러운 피부가 주는 촉감을 두 손으로 느끼듯 거칠게 애무를 하며 숨을 헐떡거린 듯도 싶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다리를 활짝 열고 진입하려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소, 소막주를 용서해 주세요." 그 한마디였다. 내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친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말 한마디로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입을 떡 벌린 나는 풀썩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으며 무엇 때문에 흑룡(黑龍) 일수필살(壹手必殺) 단수연이 일개 점소이에게 몸을 던지려 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 순간에 새벽부터 내가 벌려 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내 눈앞에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단지 보복이라는 미명 하에 나 또한 증오해 마지않는 무림인들과 똑같은 길을 가려 하고 있었다는 걸 그제 서야 떠올리게 되었다. '후후훗, 한심하군. 결국 무림인이건 보통 사람이건 힘이 있음으로 해서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눌러 버리려 하는 것은 똑같은 것을……. 나도 결국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무 힘없는 아이를, 아무 힘없는 여인을 그렇게 몰아붙였음에도 깨닫지 못한 것인가?' 문득 소막주를 지키려는 일념으로 자신의 일신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단수연을 바라보다가 내가 쓰고 있던 홍두건을 그녀 앞에 툭 던져 놓고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겠지만, 한참 조용하자 편하게 쉬고 있던 조진후는 나를 보자마자 후닥닥 엎드려서 열심히 팔굽혀펴기를 하는 흉내를 내고 있었지만, 이젠 모든 게 허무해 보였다. 이전에도 장난처럼 허무를 느낀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거야말로 허무한 짓이었지. 허무가 뭔지도 모르고 허무하다는 흉내를 내었으니……. 나 자체가 허무한 존재인 것을…….' 가슴속에 뭔가 아린 것이 싹트는 것을 느낀 나는 혼자 헐떡거리며 연신 내 눈치를 살피는 그를 내버려두고는 내 물지게를 둘러매고서 조용히 망아루로 올라갔다. 그들이 도망을 가건 말건 천천히 따라오건 말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허무한 일인 듯싶었으니까. 허무 한 번 빠져들면 정말 헤어 나오기 어렵다는 것은 아마 느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허무가 무엇인지 느낀 듯싶기도 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3 01:35:42 고친날 2005-09-01 22:32:51 읽은수 11420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50)-점소이 무공 입문(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3]점소이 무공 입문(2) 터덜터덜 올라온 나는 주방으로 힘없이 걸어가 물을 붓다가 떨어진 야행의들을 주워들어 후원 담 위에 걸어 두고는 창고로 걸어갔다. 주방에 그 인간 얼굴이 안 보였으니 보나마나 창고에 있을까 싶었는데, 덜컥 열어 보니 역시 곰 가죽을 뒤집어쓰고 낮잠을 즐기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들어서자 한 쪽 눈만 슬그머니 실눈을 뜨면서 씨익 웃는 것이 그리 밉상은 아니었다. 설마 이 인간한테 그새 정이라도 든 건가? "아하암, 일찍도 오는구먼. 그래, 작삼 조교, 새내기 점소이 훈련은 잘 되가는가?" "방금 퇴소 시켰습니다. 구태여 제가 훈련(訓練)시킬 필요성을 못 느끼겠더라고요. 소막주 녀석이 처음에는 개김성이 조금 엿보이다가 장난삼아 인두를 들고 겁먹게 해줬더니 찍 소리도 안 하고요, 일수필살(壹手必殺)은 처음부터 너무 고분고분 해서 재미가 다 떨어지더군요." "저런, 저런 자네 며칠 전만 해도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로 잘 걸렸다고 좋아하더니 두 시진만에 질렸나? 영 조교 체질이 아니구먼. 인간이란 종종 독해야만 할 때가 있는데, 자넨 독기가 부족해." "……." 항상 당하는 입장, 이른바 구타를 당하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하는 피해자 입장이었다가 잠시 동안 가해자 입장이 되어 보니 인간으로써 할 짓이 못 된다는 것을 느꼈다. 맞은 인간은 발뻗고 편히 자도, 때린 인간은 잠을 못 이룬다는 말도 있듯이 내가 딱 그쪽이었다. 아직도 귀에 선하다. '소, 소막주를 용서해 주세요.' 그 말이 내 가슴에 되 돌이킬 수 없는 차가운 비수로 느껴졌다. 너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구나, 라고 나를 매몰차게 꾸짖는 소리로 들렸다. "작삼." "네, 포 형님." 포연강이 뭔가 신중하게 생각하는 듯 가늘게 떴던 실눈마저 감고서 차분하게 나를 불렀다. 이 인간은 평상시에는 실없이 보였다 가도 가끔 진지하게 한 마디씩 툭 던지는 것이 나름대로 사상과 정의가 정립된 부류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귀를 쫑긋 세우고 시선을 그에게 집중했다. "찬바람 들어온다. 문, 닫, 아, 라." "……." 쾅! 기대할 인간한테 기대를 해야 했다. 번지수가 틀려도 단단히 틀려 버린 것을……. 앞마당으로 다시 나오자 내 인기척을 느끼고 어디에선가 촐랑촐랑 튀어 나왔는지 의문스럽기 그지없는 소방이 어디서 구해 왔는지 의문스러울 것도 없는 철봉을 네 개나 챙겨 와서 근엄한 모습으로 서 있는 게 보였다. 소방아, 왜 그렇게 무리를 했는지는 이해는 간다만, 이미 물 건너갔단다. "너 또 시체들 사이를 누비면서 반 동강난 철봉을 주워 왔지?' "응, 요즘 풍악산(風岳山) 일대에 시체들이 즐비해. 이것저것 뒤져보면 쓸 만한 게 꽤 많아. 넌 여기 가만있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툭 하면 피 튀기는 칼부림이 나고 난리야. 특히 끝이 뭉툭하고 폭이 넓은 귀두도(鬼頭刀)를 든 흑의 복면인을 포함한 삼인조 고수들이 손님으로 오면 조심해. 그들한테 죽은 무림인들이 부지기수래. 멀리서 숨어 보던 우리 개방 방도도 죽어라 뛰어서 겨우 살았다더라." 쩝, 누가 개방 소속 아니랄까 봐 시체 뒤지기라는 희한한 취미에 맛들인 모양인데, 보아하니 쟤 혼자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피보라가 휩쓸고 간 곳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떠나고 나면 개방 거지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가서 죽은 아이들 속곳까지 남김없이 탈탈탈……. 크으, 상상하기조차 끔찍하군. "그, 그래? 나, 나야 무림인이 아니라서 알 바가 아니긴 한데, 교관 놀이는 힘들 것 같고, 그냥 개방의 문, 파, 절, 기 삼재검법(三才劍法)으로 사부 제자 놀이나 하자." 개방의 문파 절기라는 말을 강조하자 그 동안 거리의 하류 잡배라도 다 아는 삼재검법을 문파 절기라고 속여 왔던 것이 미안했던지 그의 안면에 살짝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미안, 장난치려던 의도가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후후, 괜찮아. 난 삼재검법이 맘에 들어. 더군다나 니가 신경 써서 만들어 중 삼재권법은 아주 쓸 만한 것 같아." "……." 소방(蘇芳)의 눈이 물기에 젖어 그렁그렁한 게 감동을 먹었나 보다. 야, 야, 오해는 금물이야. 그동안 내가 삼재검법(三才劍法)을 배운답시고 너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알기나 하냐고? 툭 하면 철봉으로 머리를 얻어맞으며 철두공 수련까지 겸해 왔는데, 이제 와서 쓸모 없는 걸 배웠다고 인정해 버리면, 내 지난 시간들이 완전 허송세월이 되는 거잖아! 악에 받쳐서라도 꼭 삼재검법으로 대성하고 만다. 대성해서 삼재검법이 우스운 게 아니란 걸 보여주고 말 테다! 짝짝짝짝. 어라 웬 박수 소리? 의아스런 심정에 뒤를 돌아보니 언제 왔었는지 일수필살 단수연과 미소년 소막주 조진후가 물지게를 매고서 뒤에 서 있었다. 물론 조진후의 물지게는 텅 빈 것이었지만. 박수를 치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단수연이었다. "삼재검법이 마음에 든다니 제대로 눈이 박힌 사람이었군요. 솔직히 삼재검법도 좋은 검법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초식이 너무 많으니까요." "……." 고분고분하기만 하던 이 계집애가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람, 그냥 니 주군이나 잘 모시다가 조용히 때 되면 가라. 너마저 날 귀찮게 할 생각말고. "호홋, 뚱한 표정을 보니 제 참견이 좀 성급했나 보군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말 할 수 있어요." 그녀는 느닷없이 옆에 있던 연약해 보이는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서 손에 들어 나를 가리키며 도발하듯 말했다. "당신을 죽이는 데는 내공도 필요 없고, 화려한 기술도 필요 없어요. 오직 이 나뭇가지 하나로 찌르기 한 동작만 펼쳐도 충분하지요." 도발하듯이 아니라 명백한 도발이었다. 나란 존재는 발가락의 때만도 못하게 여긴다는 비웃음이 아니던가! 순간 내 속에서 울컥 치미는 그 무엇인가가 전신에 가득 차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우스운 계집애 같으니라고! 보통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 감히 툭 건드리면 부러질 나뭇가지로 나를 우롱하려 들다니! 너 같은 년은 내 철봉 맛을 봐야 해! "작, 작삼! 참아! 야! 이 바보야!" 누가 뭐라고 외치건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날 재미있다는 듯이, 우습다는 듯이 보고 있는 단수연 만이 눈에 확대되어 보였다. 분명 연약한 나뭇가지 하나로 날 상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일 수도 있다고 장담했겠다. 어디 그 실력을 보여 봐라! 약이 바짝 오른 난 무의식적으로 삼재검법(三才劍法) 중 청룡출수(靑龍出水)의 초식을 펼쳐 오른발을 강하게 내딛으면서 철봉으로 단수연을 향해 찔러 갔다. "으아아아아압!" "어라? 좋은 기세네요. 하지만……." 두근두근…… 두근! 두근……! 갑자기 단수연이 확대되어 보이면서 유령처럼 날 스쳐 간 듯 한 느낌에 심장이 몹시 급하게 뛰었다. 싸아하면서 피를 마르는 듯한 괴이한 기운이 날 덮치면서 바다 한 가운데에 떨어져 허우적거리는 공허함. 뭔가가 이마를 톡 치는 기분에 정신을 차려 보니 단수연의 나뭇가지가 송골송골 땀이 맺혀 또르르 흐르는 내 이마 위에 멈춰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 없는 미소가 소름끼치게 와 닿았다. "내 별호가 무엇인지 잊었나 보군요. 왜요? 분한 가요? 내 내력이 일시 폐지 당했다고 해서 당신보다 못할 거라 느꼈나요? 우습게 보지 마세요. 흑룡이라는 칭호는 딱지 따먹기로 거저 얻은 게 아니랍니다. 앞으로 시간은 많이 남은 것 같은데, 언제든 덤벼 보세요. 도전을 받아 줄 테니. 장담컨대 당신의 실력으로는 지금의 내 옷깃 하나, 머리카락 한 가닥도 건드릴 수 없어요. 여기 점소이 일은 나와 도련님이 맡도록 하지요. 당신은 삼재검법이나 열심히 갈고 닦아서 다시 내게 덤벼 보도록 해요." "너…… 너! 누, 누구 마음대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단수연은 싱긋 웃으면서 언제 챙겨 왔는지 내가 직접 줄을 잡아 다린 홍두건을 머리에 두르며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그야 조교 점소이로서의 고유 권한이지요. 작삼 점소이, 내 옷깃을 조금이라도 건드릴 수 있을 때까지 소 교관님의 통제 하에 수련을 쌓을 것을 명합니다." "……." 내가 뭐라고 항변할 듯하자 단수연은 아무 말 없이 홍두건을 톡톡 쳤다. 마치 자기 말에 안 따르면 내가 자기를 덮치려 했다는 것을 소방 앞에 이르겠다는 듯한 무언의 압박이 확연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입을 떡 벌리고 굳어 있는 찰나 한 숨을 내쉰 소방이 날 질질 끌면서 후원으로 향했다. 정말, 정말 어이가 없다.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뽑는다지만, 이건 경우가 달라도 너무 다른 것 아니냐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3 01:38:25 고친날 2005-09-01 22:33:18 읽은수 10490 [ 5 K ] 제목 점소이 작삼(5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내가 다시 널 덮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절대로, 절대로! 덮치고 만다. 싸가지 없는 것! 곱게 넘어가 줬더니 오히려 내 조교 자리까지 빼앗아? 어떻게 얻은 자린데, 감히, 감히……. 크으으으!' 단수연(丹粹姸)에게서 수련이나 더 쌓고 덤비라는 핀잔을 받아 열이 단단히 올랐으면서도 홍두건의 비사에 얽힌 무언의 협박(脅迫)에 옴짝달싹 못하게 된 나는 그저 허공에 그녀의 얼굴을 그리며 철봉을 힘껏 휘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우와, 상당히 굳센 투지와 기상이 느껴지는걸, 아쉬운 점이라 하면 너무 딱딱하다는 거야. 초식과 초식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시켜서 간격을 줄이는 게 중요해.' 이 녀석은 분명 내 기분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미주알고주알 잘도 떠들고 있었다. 불난 집에 기름 끼얹는다는 속담이 바로 소방 때문에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특히 소진배검(蘇진背劍)에서 선인지로(仙人指路)사이와 독헐반미(毒歇反尾)에서 비홍횡강(飛虹橫江)으로 넘어가는 초식 부분의 흐름이 딱딱 끊어지는 게 느껴져, 시작과 끝이라는 것을 너무 의식하고 있잖아. 그런 식으로 적을 상대하다간 다음에는 무엇을 펼칠지 눈치 채여서 반격 당하기 일쑤야." "……." 불행 중 다행이라면 소방이 이젠 더 이상 사부니 제자니 하며 귀찮은 격식에 얽매이는 장난을 치려 들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단지 내가 정말로 삼재검법에 빠져든 줄 알고, 그것만 열심히 가르쳐 준다는 점이 조금 짜증이 나긴 했다. 비록 그동안 멋모르고 배우면서 혼쭐났던 억하심정 때문에 마음에 들었다고 있지도 않은 말을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삼재검법만 이렇게 열중해서 가르칠 줄이야. 차마 내 입으로 다른 걸 가르쳐 달라고도 못하고…… 쩝. 부웅, 붕, 붕. 미친 듯이 무려 한 시진 동안 삼재검법만을 휘두르다 지친 나는 제풀에 지쳐 풀썩 주저앉으며, 거칠게 숨을 내몰아 쉬었다. 솔직히 너무 재미가 없었다. 다채로운 변화가 없는 따분함이란 참기 힘들었다. "후유, 그런데 소방." "음, 왜?" "아까 전에 어떻게 된 거야? 내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단수연이 어떻게 나뭇가지 하나로 날 제압한 거야? 너무 빨라서 보이지도 않았는데, 보통 체력으로 그렇게 빨리 움직인다는 게 말이 돼?" "아니. 그녀는 빨리 움직이지 않았어. 오히려 천천히 걸어 와서 네 이마를 콕 찌른 게 전부야. 적어도 겉보기로는 말이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바로 내 눈앞에 느닷없이 나타났다고! 아차 하는 순간에 바로 눈앞에 있던데, 내 눈이 삔 게 아닌 이상 잘못 봤을 리가 없어!' 아무리 다시 생각을 해도 그녀의 속도는 환상 그 자체였다. 내가 철봉을 내지른 순간 두 장정도 바깥에 있던 그녀는 이미 내 이마를 콕콕 찌르고 있었다. 전혀 잘못 봤을 리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소방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마침 후원 담장 위로 올라 와서 눈알을 떼구루루 굴리는 다람쥐를 발견하고서 턱짓으로 슬그머니 가리켰다. 그가 과연 뭘 하려나 궁금해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그저 담장까지 천천히 걸어가더니 다람쥐를 잡아서 슬며시 손위에 올리는 것이었다. 저 다람쥐가 도망도 안가고 순순히 잡히는 것이 뭘 잘못 먹고 미쳤나 생각되어 자세히 바라보니 가늘게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왁!" 소방이 소리치자 잠자코 떨기만 하던 다람쥐가 움찔거리더니 재빨리 뛰어내려 숲 속으로 폴짝폴짝 뛰면서 사라지는 게 보였다. 난 그의 행동에서 손바닥 위에서 떨던 다람쥐가 나라고 말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조적으로 천천히 걸어가 다람쥐를 손바닥 위에 척 하니 올린 소방은 단수연을 대신하는 것이리라. "봤지? 이와 똑같아. 알기 쉽게 말하면 호랑이랑 눈을 마주친 토끼가 끽 소리도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잡아먹히는 거랑 비슷한 이치지. 이빨과 발톱이 없는 호랑이라도 호랑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거야. 마찬가지로 무공의 극에 다다르면 내공을 쓰지 않고도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만 발현시켜 하수 정도는 단번에 제압하기도 하는 거야. 알겠어? 하수씨?" "젠장,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지금의 단수연을 못 이긴다는 소리야?" 지금 내게 있어서 고수니 하수니 하는 소리는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단수연(丹粹姸) 고 년이 내세운 조건대로 그녀의 옷가지라도 스쳐서 조교 점소이 자리를 다시 쟁탈(爭奪)할까 그 생각뿐이었다. 이번엔 주저 없이 매섭게 굴리고 말리라 맹세에 맹세를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흠, 글쎄 적어도 너 또한 뼈를 깎는 훈련을 쌓고 수십 차례 죽음의 전장을 드나들면서 실전을 쌓아야 되지 않겠어? 무공에 거의 문외한인 점소이가 날개가 꺾였다 해도 구룡 중의 한 사람을 쉽게 이길 수 있다면 누가 힘들게 무공 수련을 하겠어? 안 그래?" "……." "그러니까 내가 너 무공 배우겠다고 했을 때 말했잖아. 일조일석에 성취를 이룰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고. 하지만, 지금 같은 열정으로 열심히 휘두르다 보면 조만 간에 자기 몸 지킬 정도는 될 수 있을 거야. 더군다나 네 체력은 나도 부러울 정도고, 맷집은 일반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대단하잖아." "……." 뭐 소방, 네가 은근슬쩍 나를 띄워 준다고 해서 내가 이 딴 삼재검법을 열심히 할 것 같아? 그냥 심심해서 배우는 것 뿐이야. 그냥……. 그냥 좀 휘두르다가 언젠가 단수연 옷깃을 스치는 날 그만둘 테니까. 두고 보라고, 스치는 날까지 만이다. 그러니 내가 삼재검법(三才劍法)에 푹 빠졌다는 상상 따위는 절대로 하지 말기를 바란다. 후훗 좀 숨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바로 철봉을 들고 삼재검법의 초식들을 차례대로 펼쳤다. 소방이 해준 지적대로 초식과 초식 사이의 흐름이 매끄럽도록 신경을 쓰며, 또 내 철봉에 얻어맞아 피를 질퍽질퍽 흘리며 차가운 바닥 위에 몸을 눕힐 단수연을 생각하며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끼이익, 쾅! "아하암, 이제 좀 쌀쌀하구먼. 여어, 작삼, 웬일로 히죽히죽 웃으면서 철봉을 휘두르나? 드디어 무공에 재미를 붙였나? 후후, 그것에 맛들이면 그 또한 또 다른 세계를 느낄 수가 있지. 자넨 참으로 다채로운 세계에 빠져 사는구먼. 흐흐흐, 계속 수고하게. 난 손님이 온 것 같아서 이만." "……." 털썩. 땡그랑, 그랑, 그랑. 아니 저 인간은 하필 묘한 순간에 튀어나와서 모처럼 열심히 해보려고 하는 사람, 기운을 좌악 빼는 거야? 하여간 일생에 도움이 안돼요. 도움이…….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3 01:40:25 고친날 2005-09-01 22:33:41 읽은수 10372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5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삼재검법(三才劍法)에 매진한 지 어느 덧 열흘 남짓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에 소방(蘇芳)은 무공 수련에 대한 지도(指導)를 해주기보다는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기만 했다. 뭐, 삼재검법이 너무나 간단하니 그다지 따로 가르칠 게 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나마 그것마저도 시간이 흘러가자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거나, 아예 시켜 놓고 휭 하니 사라졌다가 늦은 시각에나 나타나곤 하는 것이 아마도 사부 제자 놀이를 하지 못하게 되어 점차 가르치기가 귀찮아진 듯 해 보였다. 열흘하고도 닷새가 더 추가로 흘러갔다. 같은 초식들을 반복해서 휘두르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하면서 짜증나던지……. 삼재권법(三才拳法)마저 없었으면 정말 이성적 사고를 발휘하는데, 크나 큰 지장이 초래했을 뻔했다. 비록 삼재검법과 별반 다를 게 없기는 했지만, 삼재권법에는 소방이 나름대로 심사숙고해서 육합의 이치를 섞어 넣었다는 말이 마음에 들기도 했고, 무거운 철봉을 들고 휘두르는 귀찮음보다는 훨씬 춤 시위에 가까워서 휘이이잉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을 느끼기에 좋았던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삼재검법의 따분함과 귀찮음에 지쳐 갈 때면 삼재권법으로 시름을 달래곤 했던 것이다. 삼재검법이 억지로 시간을 때우는 것이라 하면, 삼재권법은 시간을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연강이 내 삼재권법 시범 장면을 몰래 훔쳐보았던 모양이다. "어허, 닭살스럽구만. 남세스러우이. 될 수 있으면 안 보이는 곳에서 추기 바라네." 그 이후로는 포연강이 확실히 창고에 틀어박혀 있는 게 확실할 때만 종종 삼재권법을 펼쳐 보이곤 했다. 아마도 소방이 삼재권법을 만들어 줬을 때 여성적인 관록미가 느껴지는 수려함과 곡선행을 강조해서 그럴 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지겨운 시간들이 얼마나 흐른 걸까? 열흘하고도 열흘이 더 흐른 어느 날, 소방은 요즘은 아예 바쁜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보나마나 시체 뒤지기 놀이에 맛을 들인 게 분명하다. 하여간 취미 한 번 괴이하기 그지없다니까. 그렇게 귀찮고 따분하던 삼재검법이 어느 틈엔가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린 듯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경지에 이르렀다. 정확히 말하면 머리는 아무 생각도 없이 텅 비어 있는데, 몸이 그냥 혼자서 움직인다고 해야 할까? 너무나도 귀찮다는 생각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다 보니 그냥 생각하는 그 자체가 귀찮아 지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 결과 머리가 아무 생각을 안 하고 있어도 몸은 자동으로 삼재검법을 펼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삼재검법에 고무되어 대기를 가르고 또 가르기를 반복하던 차에 문득 안면 가득히 놀라움의 시선을 담고 두 눈을 댕그랗게 뜨고 있는 소방이 보였다. 오랜만이라 반갑기도 하고 그의 표정이 의외라 궁금하기도 해서 철봉을 거두고서 심호흡을 내쉬며 인사를 했다. "여어, 신수가 훤하네. 그래 시체 뒤지기로 한 밑천 잡았어?" "아, 아니야! 누가 시체를 뒤진다고 그래! 단지 개방 일로 좀 바빴을 뿐이야." "그런데, 왜 그렇게 놀란 토끼 마냥 눈은 똥그랗게 뜨고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너 때문이지 뭐긴 뭐야. 예전만 해도 삼재검법 수련을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듯한 기색이더니 지금의 기세는 너무나도 일취월장해서 놀란 거라고." 얘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래? 무슨 얼어죽을 일취월장이야? 아무 생각도 없구만. "일전에 내가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으로 공격과 수비가 끊임없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진행되는 공방일치(攻防一致)에 신경을 쓰되, 초식과 초식 사이의 간격을 없애라고 말했었잖아." "그, 그랬나? 그렇다 치자. 그런데 그게 어째서?" "……." "말을 꺼냈으면 끝까지 해야지. 왜 그렇게 삐딱한 시선을 보내는 거야? 더 할 말 없으면 난 또 철봉이나 휘두르지, 뭐." "……. 끙,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래, 단수연의 옷깃은 못 건드린 거야?" "단수연?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 단수연(丹粹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누구더라? 누구……? 잠깐!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까지 뭔 짓을 하고 있는 겨? 난 조교 점소이 아냐? 그런데, 어쩌자고 거의 스무 날 동안 철봉만 휘두르고 살았던 거야! 끄아아아아악! 어쩐지 바로 옆방에 낯익은 모녀가 와서 산다고 했더니만, 걔네들이잖아! 끄아아아악! "단수연! 야, 이 계집애야! 나! 와!" 내가 주루 안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점소이 복장에 틀어 올린 머리를 홍두건으로 감추고 남장을 하고 있던 단수연이 사이한 미소를 지으며 뒷문을 지나 후원 쪽으로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나 귀 안 먹었네요. 당신이야말로 일수필살(壹手必殺)이라 불리는 나를 계집애라고 깎아 부르다니 간덩이가 팅팅 부은 모양이군요. 이제야 도전할 마음을 생겼나요? 기다리느라고 지루해서 혼났다고요. 호호홋." 저 빌어먹을 불여시 같으니, 아무리 내가 잊고 있었기로 써니 자기까지 모르는 척 넘어가? 잠깐 그럼 고약은? 그럼 내공이? "이 봐, 불여시, 내가 그동안 고약을 준 기억이 없는데, 그럼 내공이 완전 폐지되어 영구 소실 돼 버린 거야?" "누굴 바보로 알아요? 그걸 매일 건네주기로 했던 어떤 치매 점소이가 무공에 잠시 미쳐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있는 동안 그의 방을 뒤져서 고약병을 찾아냈지요. 아직도 한 달 분은 남아 있다고요. 호호호호홋. 하여간 점소이도 꽤 재미있는 직업이란 것을 근래 처음 알게 되었어요." "이 불여시, 감히 날 속여? 니 죄를 니가 알지?!" 이 말에 옆에서 뱁새 눈깔로 날 비스듬히 깔아 보는 소방이 한숨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잊고 있던 니가 잘못한 거지. 아이궁 한심해라. 나야 개방 일로 바빠져서 거의 오지를 못해 그렇다 쳐도 그때의 넌 불꽃같은 투지를 태우더니……. 뭐, 꼭 나쁘게 볼 수만은 없지. 덕택에 네 무공 수위는 적어도 한 단계는 높아진 것 같아. 그래 봤자 거기서 거기겠지만 말이야." 얘는 뭐가 불만이라서 아까부터 자꾸 구시렁구시렁 거리는 걸까? 하여간 하는 짓거리마다 계집애 같단 말이야. 뭐 어쩌겠어? 둘도 없는 친구이고 날 진심으로 아껴 주는 녀석인걸. 가끔 신경질적으로 나와도 대범한 내가 봐줘야지. 암 그렇고 말고. "이봐요. 아저씨 나 이래봬도 바쁜 몸이에요. 혼자 히히덕거릴 거면 저기 창고 들어가서 혼자 몰래 히히덕거리고 덤빌 거면 어서 덤벼요." "아, 아저씨? 아, 아니, 이 아줌씨가 못하는 말이 없네! 좋아 준비하쇼. 아줌씨, 지난번처럼 어이없이 봐주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아 거기 서 있는 아저씨, 입으로 덤빌 거예요? 나랑 논검비무 하자는 건가요? 지금?" 난 지난번의 경험으로 그녀의 도발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고로 이번에는 그 도발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시 단수연과 싸우게 되면 어떻게 할 거라는 가상 전투를 수없이 벌려 왔으니까 말이다. 상대가 내공이 없다는 것 그것을 얕봐서는 안 되는 거였다. 대신 이용할 줄 알아야 하는 거다. 난 바로 철봉을 그녀를 향해 휙 던져 버리고는 재빨리 그녀 쪽으로 몸을 날렸다. 내공이 없는 단수연이 과연 내가 전력을 다해 던진 철봉을 막을 수 있을까? 설사 막는다 해도 그 다음에 덤벼들 날 피할 수 있을까? 이젠 지난번처럼 나랑 눈을 마주칠 시간도 주지 않을 것이었다. "흥! 애송이 아저씨 잘 봐요!" 그녀가 뭐라고 떠드는지 들리지는 않았으나, 내 철봉은 정확히 그녀의 몸통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피하든 막든 그 다음에 달려드는 나를 피할 시간은 못 벌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막 그녀에게 부딪히려고 하는 철봉의 회전 끝 축을 가볍게 두드리자마자 그것은 그녀가 아닌 나를 향해 그대로 날아들었고, 내가 달려든 힘과 충돌해 내 이마를 깨끗이 날려 주었다. "끄아아아악!" 난 예상치 못한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고, 이마가 깨져 피에 젖어 드는 동안 내부는 놀람과 고통에 젖어 들었다. 소방은 예상을 했다는 듯이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내 이마의 피를 막고는 지혈을 시켜 주었고, 침중하게 가라앉아 버렸을 내 속마음을 이해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하아 이봐, 일수필살 아가씨 이거, 이거 어떻게 한 것이지?"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이라는 거지요. 천근의 힘이라 해도 기운의 방향만 바꿔 주는 데는 넉 냥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소리예요. 결국 당신 이마를 때린 것은 당신 힘이지요. 난 철봉의 방향만 조금 바꿨을 뿐이라고요. 아마 나보다 하수인 자였다면 당신한테 졌을지도 몰라요. 조금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거예요." 그녀는 나랑 소방을 한 번 더 힐끔 흘겨보다가 정중히 사라져 버렸다. 난 또 져버리고 말았다. 정말 신경 쓴 비장의 한 수였는데, 젠장, 젠장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4 03:22:10 고친날 2005-09-01 22:34:07 읽은수 10150 [ 5 K ] 제목 점소이 작삼(5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이젠 늦가을의 말미를 알리 듯 회운봉(回雲峰)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제법 쌀쌀하기 그지없었다. 해가 떠 있는 시간도 가면 갈수록 짧아지고 있었다. 더구나 망아루(忘我樓)가 위치한 곳은 산 중턱이기 때문에 일출과 일몰간의 시간차가 더욱 짧아졌다. 오늘도 후원(後園)에 내려 쬐던 햇볕이 물러나고 새빨간 석양이 잔잔하게 낀 구름과 어울려 장관을 연출할 무렵 이마에서 석양보다 더 시뻘건 피를 철철 흘리며 소방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워야 있어야 하는 나는 한 숨을 길게 뽑고만 있었다. 머리를 철봉에 강타 당한 충격 때문에 전신에 일시 마비가 왔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은 역시 내 자랑거리라고 할 수 있는 주둥이 뿐이랄까? 일단 갖고 있던 손수건으로 흐르던 피들을 닦아 낸 소방은 내 머리 몇 군데를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콕콕 간지럽게 찔렀다. 그러자 주르륵 흘러내리던 피들이 멈추었다. 그는 바로 주머니에서 고약 같은 것을 꺼내 들고는 내 이마에 조심스럽게 발랐는데, 상처에 고약이 닿자 좀 쓰렸지만, 말을 하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젠장, 기분 더럽구만.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인가 뭔가 하는 게 있다는 거 소방 넌 알고 있었지?" 소방은 자기 때문에 내가 다친 것도 아니었지만, 못내 미안했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후우, 아니다. 무식한 게 죄지. 그런 게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으니. 그런데, 그런 식으로 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해서 싸움을 유리하게 이끄는 기이한 무공들이 그거 말고 더 있냐?" "음, 여러 가지가 있어.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은 그저 방향을 조금 틀어 주는 역할밖에 안 하지만, 그 이외에도 별의별 무공들이 알려져 있어. 어떤 것은 금기무공으로 분류(分類)되어서 사용하거나 익혔다는 게 알려지면 무림공적(武林共敵)으로 낙인 찍혀서 평생 도망자 신세가 되기도 해." 내가 제법 의외의 분투를 벌리고도 이마가 깨져 누워 있는 게 안쓰럽게 여겨진 듯, 자신이 알고 있는 되치는 무공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상세히 열거하며 자상하게 알려줬다.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 넉 냥으로 천 근의 힘을 발휘한다는 무공. 적이 천 근의 힘으로 공격해 올 때 맞받아 치기 위해서는 같은 천 근의 힘이 필요한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기운의 방향만 바꿔 주는 데는 넉 냥의 힘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었다. 되치는 무공들 중 비교적 널리 알려졌다고 할 수 있는 무공으로 말 그대로 방향만 살짝 비틀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고수들끼리의 싸움에서는 그 기세가 너무 날카로워서 잘 해봐야 그 방향을 조금 비틀어 주는 정도의 힘밖에 발휘 할 수 없고, 때로는 손해를 보기도 해야 하지만, 나는 너무 솔직한 공격을 감행했기 때문에 단수연이 철봉의 방향을 정반대로 되돌릴 수 있었다고 한다. 건곤대나이법(乾坤大那移法). 상대의 기운을 역이용하는 합기의 절정으로 사량발천근보다 한 단계 위라고 할 수 있다. 여러 명의 적과 상대할 때, 공격해 들어오는 기운의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꿔 주어 적끼리 싸우게 하는 고급 무공이라고 했다. 사량발천근과 달리 비전(秘傳)되어 전해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익혔다고 알려진 자도 없지만, 만약 익히게 된다면 다수를 상대로 싸우기에 매우 좋다는 무공이었다. 차기미기(借氣彌氣). 공격해 오는 상대의 기운을 받아들여 자신의 내공으로 만드는 상승 무공. 정종무공(正宗武功)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저 이론상으로만 존재하는 꿈의 무공이랄까? 만약 그런 무공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면 싸울 때마다 내공이 불어 강해지기만 할 것이 아닌가! 흡성대법(吸星大法). 상대의 내공을 빨아들이는 무공으로 사공(邪功)내지는 마공(魔功)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져서 정파 인물 중에서는 쓰는 자가 없다고 한다. 차기미기의 경우에는 공격한 상대가 자신이 사용한 내력만큼을 손해 보지만, 흡성대법의 희생자가 되면 원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가진 모든 내력을 빼앗겨 폐인이 되고 만다. 또한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사파 인물들도 흡성대법을 익힌 게 확실한 인물과는 거리를 두는 게 일반적 상식이라 한다. 이화접목(移花接木). 꽃을 옮겨 나무에 접붙인다. 부드러운 꽃송이로도 굵은 나무를 상대할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사량발천근과 유사하며, 이 또한 비전(秘傳)되는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고 했다. 만약 존재한다면 건곤대나이법과 함께 공방에 매우 이득을 가져올 수 있는 비기가 되는 것이었다. 과연 무공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멀게만 느껴질 정도로 복잡한 부분이 많아 보인다. 어느 세월에 다 익혀서 남에게 꿀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걸까? 어라 잠깐 그러고 보니 내가 강제로 얻은 구타심결(毆打心訣)이랑 차기미기(借氣彌氣)란 것이랑 비슷한 데가 있는 것 같은데, 에이 설마. 그런 악연(惡緣)이 또 어디 있다고. "소방, 혹시 그런 것 좀 가르쳐 줄 수 있냐?" 내 질문에 그는 씁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되치는 무공들 중 내가 아는 게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밖에 없긴 하지만, 그것도 너한테 알려주기에는 너무 일러. 섣불리 사용하려다가 낭패만 보기가 십상이거든. 넌 이제 무공의 일각 중에서도 한 부분만 겨우 맛을 본 셈이야. 한 술에 배부르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그럼 영영 단수연의 옷깃을 스치는 일은 요원한 일이란 말인가? 후유. 내가 매우 실망한 듯 침중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자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소방이 빙그레 미소를 떠올리며 내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네 검은 매우 정직해. 다음은 어디로 펼쳐질 것인가 뻔히 보이지. 그게 단점이긴 하지만, 조금만 신경 쓰면 장점이 될 수도 있겠어." "엥, 무슨 소리야? 또 중대가리들처럼 선문답하는 거야?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 "허(虛)와 실(實)에 의한 검(劍)의 운용, 허초로 상대를 유인하거나 상대의 움직임을 깨뜨리는 수법이라 할 수 있지. 그럼 이제 비밀 훈련을 해볼까? 여기서 훈련을 했다가 단수연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흠. 일어날 수 있겠어?" "으응, 이제 몸이 움직여져." "그럼 뒷산에 숨어서 조금 연습해 보자. 따라와." 뭐가 그리 기쁜지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어가는 그를 보니 방금 전까지 우울했던 내 기분은 한 순간에 잊혀져 버렸다. 아무렴, 아무렴 어떠하리? 언젠가는 그녀의 옷깃을 만질 수 있겠지. 그 때까지만 조금 더 노력해 보기로 다짐해 보는 것이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4 03:23:15 고친날 2005-09-01 22:34:28 읽은수 10167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5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어제 저녁에는 허(虛)는 무엇이며 실(實)은 무엇인지 간략한 원리만 배우고 끝내야 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더 이상 철봉을 휘두르는 것은 자신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소방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내 눈에는 꽤 밝게 느껴지기에 보름달이 떴나 하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보름달은커녕 초승달도 보이지 않고 별들과 은하수만이 반짝반짝 거리는 게 기이하기 그지없는 밤이었다. 가르쳐 주겠다는 소방이 앞서거니 가 버린 관계로 나 또한 그 뒤를 따라야만 했다. 그래서 오늘은 몸부터 풀고 빨리 허와 실에 대한 실습을 할 량으로 일찍부터 일어나 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가 창고에서 물지게를 들고 나오는 단수연과 우연히 스쳐 지나가게 되었다. '아하, 그동안 물도 단수연이 나르고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무려 근 한 달 동안 물을 나른 적이 없었네. 참 정신 없이도 살았군. 그래도 두고 보자. 이번만은 다를 것이다.' 그녀는 적개심을 가지고 뚫어져라 노려보는 내 노골적인 시선을 느꼈는지 힐끔 돌아보았다가 소방이 부산떨면서 이마에 예쁘게 둘러놓은 붕대를 보고는 상대할 가치도 못 느낀다는 듯이 피식 코웃음지으며 성큼성큼 지나가 버렸다. '아, 아니 저, 저년이……. 그래, 오늘까지 만이다. 오늘까지만 그 홍두건을 잘 보관하고 있거라. 내일이면 바로 접수 들어간다. 그 순간 부로 새내기 점소이 훈련을 부활시킬 테다. 우하하하하하'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서 히죽거리고 있을 찰라 눈앞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들어보니 포연강이 생뚱맞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보다가 혀를 쯧쯧쯧 차며 창고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니, 하필이면 이렇게 일찍 기어 나와서 초장부터 사람 기운을 뺄 것은 또 뭔가! 정말 저 인간은 전생에 나랑 어떤 악연(惡緣)으로 얽혀 있기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거야? 내가 후원에 나타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소방이 튀어나왔다. 언제나 느끼면서도 의례 아무렴 어떠하리 하고 넘어가서 의문을 품지 않기는 했지만, 도대체 어디에서 잠을 자다가 촐랑촐랑 기어 나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이 녀석의 뽀오얀 얼굴을 보나, 누덕누덕 기웠으면서도 뽀송뽀송 수시로 빤 티가 팍팍 나는 누더기를 보나 개방 제일의 청결 소년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 녀석이 바쁜 이유는 아마 개방 거지들에게 청결의 중요성을 교육(敎育)시키기 위한 강사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기 때문이리라. 이제 조금만 기다려 보라! 개방 소속의 모든 거지들이 뽀오얀 얼굴을 빛내며 뽀송뽀송한 누더기로 군중들의 불쾌감을 더는 한 편 동냥의 능률을 올리는 일대 혁신을 일으키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뭐야? 뭐야? 아침부터 기분 좋은 일 있었구나? 그렇게 사람 빤히 보면서 실없이 웃는 걸 보니 궁금하잖아. 어서 불어. 불어." 소방이 고양이 같은 눈을 똥그랗게 빛내며 앙탈을 부리는 귀여운 모습을 보니 꼭 껴안아 주고 싶다는 감정이 팍팍 솟구쳤다가 남자라는 사실을 환기하며 가까스로 제정신을 차렸다. '하여간 이래저래 여러 가지로 날 혼란스럽게 한단 말이야.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비기(秘技)를 전수 받아야지.' "소방, 가자." "으응? 어디를?" 얘가 갑자기 왜 이래? 가르쳐 줄 생각이 없어졌나? "어디 긴 어디야? 저 까마득한 뒷산 안 보이는 수풀로 들어가야지. 우리들만의 은밀한 그 짓을 피나게 익혀 그녀한테 철저하게 써먹어야 하잖아." "……." 소방이 날 뜨악한 시선으로 멀거니 바라보더니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려 하고 있었다. 지금 한 시가 급한 때에 갑자기 변덕을 부리려 들다니 쩝. 안되면 힘으로라도 끌고 가야지. 뭐. 질질질질질. 이 녀석이 갑자기 울상일세.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니깐. 말 그대로 후원에서도 잘 안 보이는 뒷산 수풀 속을 헤쳐서 가까스로 쓸 만한 공간을 찾은 우리는 서로 뒤얽혀 은밀한 그 짓을 무려 두 시진 동안이나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급기야는 발을 헛디뎌서 소방과 함께 철퍼덕 엎어지고 말았다. 너무 지친 나머지 소방 위에 엎어진 나도, 내 밑에 깔린 소방도 꼼짝달싹 못하고 그대로 숨만 몰아쉬어야 했다. 문득 전신이 진득진득하게 땀에 전 소방이 길면서 가느다란 속눈썹을 오롯이 치켜 뜨면서 앵두같이 오동통한 입술을 열었다. "하악, 하악, 이, 이 정도면 만족하겠어? 응?" "허억 허억, 그, 그래 만족해. 희, 희열이 느껴져서 전신이 부르르르 떨릴 정도야. 이, 이제 그녀한테 써먹을 일만 남았어." "하악, 하악, 네가 만족했다니 정말 기뻐." "허억, 허억, 고, 고맙다. 정말로……. 허억, 허억……." "하악, 하악……." 한참 동안 그대로 엎어져 있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킨 나는 간만에 땀을 씻어 내기 위해 소장강으로 향했다. 물론 그에게도 같이 가겠냐고 의향을 물어 보기는 했지만, 역시 예전처럼 고개를 저으면서 바쁜 일이 있다며 땀에 전 채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내 단골 물웅덩이에 몸을 담그자 늦가을을 실감케 하듯 뼛속까지 시릿한 한기가 올라왔다가 금세 사그라지는 게 이젠 미적지근한 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라고 중얼거리면서도 느낌상 그런가 보다 하고 금세 잊어버리고는 그간 몸에 묻어 있던 땀과 때를 깔끔하게 씻어 내리면서 정신(精神)을 가다듬었다. 허(虛)와 실(實)에 의한 검과 각의 운용, 소방이 일러준 작전(作戰)은 내 전의(戰意)를 날카롭게 다듬어 주었다. 고마운 녀석, 하여간 개방 일이 얼마나 바쁘기에 전신이 땀에 절어 찝찔할 상황인데도 한사코 달려가야만 했을까? 또 그 지경이 될 정도로까지 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준 녀석이 고맙기 그지없었지만, 우선은 단수연(丹粹姸) 고 년을 꺾는 일이 먼저였다. 특훈(特訓)의 성과를 유감 없이 보여주리라. 새 마의로 깔끔하게 갈아입고서 입고 왔던 땀에 절은 옷들을 흘러가는 강물에 깨끗이 빨았다. 그런데, 얼결에 손을 놓은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고의가 둥둥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힘차게 떠내려가는 고의 때문에 허겁지겁 강기슭을 따라 뛰어야 했다. 막 물살이 꺾어지려는 부분에서 간신히 고의를 건져내고서 돌아서려는 내 시야에 숨이 꿀꺽 넘어가는 정경이 들어왔다. 거센 물결이 꺾어지는 지점이어서 그런지 나무들이 빼곡하게 돋아 있어서 신경 안 썼던 그 곳에는 한 사람 들어가면 딱 알맞을 자그마한 물웅덩이가 있었다. 마침 그 곳에서 한 여인이 목욕을 하고 있던 참에 내가 뛰어든 격이 되었던 것이었다. 물에 젖어 새하얀 나신에 찰싹 달라붙은 길고 검은머리의 주인은 애처로우면서 가녀린 등과 가슴을 본능적으로 가린 듯 움츠러든 어깨선이 아름답기만 한 여인이었다. 유감이라면, 내가 오는 소리를 미리 듣고 있었는지 등을 보이며 서 있어서 그 미모는 감상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계속 침묵을 지키며 가만히 있는 통에 내가 어떤 추태를 부리고 있었는지 뒤늦게 알아차린 나는 황급히 허리를 숙이고 또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소저의 자태를 엿보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떠내려가는 고의를, 헛. 아니 옷을 잡으려다가 그만 본의 아니게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소저의 넓으신 아량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목욕을 하고 있을 여인이면 오로지 무림인일 도리 밖에 없다. 그럼 자칫 잘못해서 그녀의 맘을 상하게 했다가는 사나운 꼴을 피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은 뻔한 이치, 머뭇거림 없이 자리를 피해야 했고, 혹시나 옷을 걸치고 복수한답시고 쫓아올까 봐 뒤도 안 돌아보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 와야만 했다. '흠 그래도 간만에 좋은 장면을 봤더니만, 기운이 불끈! 불끈! 솟구치는구만. 후후훗, 이제 이 기세로 단수연 고년만 꺾어 버리면 다시 옛날의 영화를 되찾게 되리라. 크크크크크.' 점소이에게 있어 조교 점소이의 자리는 무척이나 매력 있는 자리였다. 물론 먼 훗날 생각한다면 한심한 과거(過去)로 치부할 가능성이 없잖아 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다시 새내기 점소이 훈련을 실시해서 그것들을 무자비하게! 인정 사정없이! 확실하게! 굴려 버린다는데 그 의의가 있었다. 산자락을 굽이굽이 도는 외길을 한참 지나 저 멀리 망아루 끝 지붕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뜀박질을 멈추고 숨고르기를 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숨이 좀 가라앉으면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듯 단수연에게 다시 재도전을 할 생각이었다. 내일이면 지금의 이 흥분이 가라앉아 버려서 그 의도를 십분 살리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5 01:44:37 고친날 2005-09-01 22:34:50 읽은수 10512 [ 11 K ] 제목 점소이 작삼(55)-악취삼흉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4]악취삼흉(惡臭三凶) 이 기세를 살려서 단수연(丹粹姸)에게 재도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노릇, 심호흡을 가다듬고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마음 자세를 떠올리며 심신을 올곧게 가다듬었으나, 망아루가 시야에 커져 오면 커져 올수록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는지 두근거림은 격해지기만 했다.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혀야 해. 무엇보다 표정 관리를 잘 해서 허허실실(虛虛實實)이 잘 먹혀들도록 해야 하지. 내 공격이 너무 드러나 보인다고 생각하는 네 고정관념이 오히려 네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후후후훗 기대해도 좋아. 단, 수, 연!' 두 눈에 부릅뜨고 양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망아루 앞마당으로 올라섰는데, 미소년 소막주 조진후(趙眞厚)녀석이 뒤 마려운 인간처럼 안절부절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게 보였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옆방에 갓 이사온 꼬마 도령이시구려? 모친께서는 잘 계시오?" 다분히 비꼬는 내 말을 찌푸린 인상으로 받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날 바라보는 녀석의 두 눈에 빛이 반짝거렸다. 저 빛은 소방의 전매특허나 다를 바 없는 살인 광선인데……. 저 녀석이 펼치니 징그럽기 그지없었다. '이 녀석아, 소방은 친구니까 봐줄 수 있고 못이기는 척 넘어가 줄 수 있지만, 넌 고매한 소막주 신분 운운할 때부터 내 주적 중의 하나로 등록됐으니 이제 와서 애교를 부린다고 새내기 점소이 훈련에서 빼 줄 성싶으냐? 어림 반 푼 어치 택도 없다! 조진후 점소이, 넌 죽었어. 카카카카카카카!' 쿠웅! 갑자기 조진후가 내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대로 머리를 바닥에 거칠게 내리 꽂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내 심중망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 놈이 미쳤나 하는 의문만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형님, 부탁입니다. 우리 단 호위를, 단 호위를 구해 주세요. 형님 밖에 없습니다. 형님!" 쿠웅! 다시 녀석이 일어났다가 무릎을 꿇으며 재차 머리를 바닥에 내리 꽂았다. 일단 화들짝 놀라 버린 내 가슴을 먼저 진정시킨 뒤 다시 머리를 박으려는 녀석의 어깨를 잡아서 일으켜 세우고서 그의 이마를 살펴보니 다행스럽게 깨져서 피가 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소방에게 받은 엽전 공세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깨끗한 이마였을 뿐 아니라 지금 또한 소리만 크게 울렸을 뿐 정작 이마는 조그만 혹이 뽈록 튀어나왔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소방에게 혼이 단단히 난 후 철두공(鐵頭功)을 익혀서 만반의 대비를 갖추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이런다고 해서 그를 향한 내 적개심이 크게 줄어 들은 것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번거로울 지도 모르는 일에 껴들고 싶지도 않았다. "조진후 점소이, 주소를 잘못 짚었군. 난 조교 점소이가 아니라 일개 식객일 뿐이야. 단수연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면 포연강 형님한테 이르면 알아서 해결해 줄텐데, 왜 이 난리인가? 가 보게, 주방이 아니면 창고에 쳐 박혀 있을게 뻔한 인간이니." 내 냉담한 말에 조금 실망한 듯한 그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이미 갔다 왔는데, 그는 단지 그대로 내버려두라고 했어요. 뿐만 아니라 만에 하나 수틀리면 단 호위든 나든 죽여서 묻어 버리면 그만이라고…… 웃으면서……." "……." 뭐 포연강(鮑緣强)이라면 그렇게 말하고도 남을 인간이지, 이전에 같은 황실 근위대 동료라던 주령령이 하남사흉(河南四凶)이라는 덜 떨어진 아이들한테 주물럭거림을 당할 때에도 나 몰라라 하면서 오히려 대어를 잡으려면 피라미가 꼬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던가? 하여간 그 대어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걸 낚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을 인간이 분명하긴 했다. 소방이 곤경에 처한 것이라면, 난 주저 없이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단수연은 나의 주적이 분명한 인간, 구태여 번거로움을 자초할 필요가 없는 뿐 아니라 곤경에 처해 있다면 손뼉을 치며 좋아할 일인 것이었다. 더구나 아침에 코웃음치며 지나가던 그녀를 잘 기억하기에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눈곱만치도 솟구치지 않았다. 뭐 어떤 지경에 처해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물어 봤다가 도와 달라고 조진후 녀석이 매달리면 매우 귀찮게 될 것이 분명하기에 생각이 정리되자마자 그를 무시하며 망아루 현관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짜증나는 그 녀석들을……! '젠장, 어쩐지 앞마당에서부터 예의 그 시큼한 악취가 풍긴다 했더니 이 녀석들이 또 와 있었네. 막패 가 죽은 것을 모르는 것인가? 하기야 일개 점소이를 패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떠벌려 봤자 믿을 인간이 없을 테니 소문도 안 난 것이로군. 단수연은……?!' 그제야 그녀가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벗겨진 홍두건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하며 앞섶이 풀어져 봉긋 드러난 가슴과 연신 그녀의 바지춤에 들락날락 하는 악취삼흉의 손길로 보아 어떻게 된 일인지 구태여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비록 어설프게 남장을 하고 있었어도 저 빌어먹을 악취삼흉의 날카로운 여성 편력으로부터 벗어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우스운 일이군. 자신들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희롱하고 있는 여인이 일수필살이란걸 안다면 그때도 저렇게 침을 흘릴 수 있을까? 뭐, 잘 되었군. 그렇게 희롱하다가 일수필살이 열 받아서 니네 목을 따도 좋고, 그녀가 계속 참는다면 끝까지 가서 덮쳐 버려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점소이, 여기 백건아(白乾아) 한 병 갖다 주게." 조진후는 내가 대답도 안하고 주루 안으로 급히 들어오는 것에 당황한 듯 계속 내 뒤에 서 있었다가 느닷없이 내가 손님 행세를 하며 백건아를 시키자 주저하다가 주방으로 달려가서 백건아를 내왔다. 난 악취삼흉이 앉아 있는 맨 구석 탁자로부터 한 탁자 건너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사발에 백건아를 따라 물끄러미 그것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니었다. 일전에 포연강이 분명 말하지 않았던가? 주령령이 단수연과 조진후가 일을 벌려 사고를 쳐도 그 책임을 나에게 묻는 걸로 선언했다고. 단수연이 그대로 참다가 그냥 저들의 손에 범해지고 끝났다면 나 또한 무사히 넘어가는 것이지만, 그녀가 참지 못해 저들을 죽이면, 일이 생기는 것은 나뿐인 것이었다. 아무리 포연강이 저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했다 해도 뒤 배경인 살막을 염두에서 놓고 있을 리가 없었다. 단지 경고만 했을 뿐 손을 대는 일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악취삼흉 정도야 어느 날 사라졌다고 해서 신경 쓸 무림인이 과연 풍악산에는커녕 중원 전체를 따져 봐도 있을까? 어떻게 하면 무리 없이 넘어갈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며 백건아를 홀짝홀짝 마셨다. 일생 동안 술이라곤 거의 마시지 않았던 내가 곽철 대협에게서 은연중에 풍겨졌던 풍취를 느끼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듯 쓰기만 한 것이 차마 뱉지는 못하고 그냥 꿀꺽 삼켜 버렸다. 더군다나 옆에서 꾸리꾸리하게 풍겨 오는 저 악취 때문에 생각이고 뭐고 하기가 어려웠다. 난 문득 홍 영감을 돌아봤다.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는 망아루의 주인이다. 따라서 망아루에 번잡한 일이 생기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주루의 점소이인 내가 할 일은? 난 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어라, 너는 그 때의 그 점소이 아냐?" 한참 단수연의 가슴을 만지작만지작 거리던 구레나룻 장한 녀석이 입을 열자 그 고강한 입 냄새에 절로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당신들의 두목 막패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오?" "크흐흐, 우리가 알 게 뭐냐? 그는 더 이상 우리 두목이 아니다. 우리를 버렸으니 이젠 우리가 두목인 것이지. 설사 온다고 해도 우리 셋이 힘을 합치면 그 하나 못 당해 낼까 싶으냐?" "웬만하면 그만 나가 주는 게 어…… 어억?"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단수연의 허리춤을 끌러 바지를 내리려던 다른 장한이 내 볼때기를 우악스럽게 잡고 끌어 당겨 자기 시선에 내 눈을 맞대었다가 살짝 밀어서 넘어뜨렸다. "네 맷집이 엄청난 것은 안다. 하지만, 네 녀석 자체는 싸움이라곤 쥐뿔도 할 줄 모르는 놈이 아니더냐? 우리는 네 놈을 패면서 힘 빼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조용히 구석에 가서 찌그러져 있어라." 어, 어럽쇼? 상대하지 않을 테니 찌그러져 있어라? 흠, 자존심도 없는 녀석들이었나? 살짝 멍이 든 듯한 볼을 살살 문지르면서 단수연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안면에는 아무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마치 그 날의 주령령처럼……. 왠지 이대로 물러서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대로 물러나 버리면 내 일생 짜증나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겁이 난다고 도망만 다니는 기억보다는 가끔 만용을 부리는 기억을 갖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막패의 주먹에도 쓰러지지 않은 내가 아닌가! 그런데, 그 부하들에게 물러선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악취삼흉(惡臭三凶), 후원으로 나와라." "악취삼흉(惡臭三凶)? 파하하하하!...... 뭐, 우리가 참는다. 보시다시피 바쁜 몸들이라고. 네 녀석 한 대 칠 시간에 이 계집의 야들야들한 피부나 한 번 더 쓰다듬는 게 낫다고." "그래? 그렇다면 이 순간부터 너네는 내 부하다. 나한테 겁이나 먹고 비굴하게 구는 네 놈들한테는 악취삼흉(惡臭三凶)이라는 말조차 과분하다. 악취삼서(惡臭三鼠)로 바꾸고 찍찍거리면서 쥐구멍이나 찾아라!" 이 말에는 좀 화가 났는지 그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하던 짓을 그만두고 벌떡 일어난 순간 난 후원으로 날렵하게 뛰쳐나왔다. 언제나 삼재검법을 휘두르며 연습을 하던 그 자리에 놓여 있는 철봉을 손에 들고 밖으로 나올 그들을 기다렸다. 철봉을 든 손이 덜덜덜 떨렸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그간 삼재검법에 푹 빠져서 조금은 단련되었을 내 실력이 궁금하기도 했다. 과연 이들에게 어느 정도나 통할 수 있을까? 침을 꿀꺽 삼키며 제발 한 명씩 나오기를 빌었다. 맨 처음에는 철퇴를 손에 든 구레나룻 장한이 씩씩거리면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오면서 철퇴를 휘둘렀다. 부웅. 철퇴의 거대한 소리가 대기를 가르며 내 머리를 스쳐지나 갔지만, 그의 철퇴는 너무나도 느려 보였다. 가볍게 몸을 틀어 철퇴를 피한 나는 몸이 흐르는 데로 백사토신(白蛇吐信)을 펼쳐서 오른발을 앞으로 내리고 왼쪽 무릎을 땅에 붙여 몸을 낮춘 후 철봉을 전방으로 있는 힘껏 찔러 버렸다. 푸욱! 제대로 옆구리에 격타 당한 그 녀석은 개 거품을 물고 그대로 푹 쓰러져 버렸다. '뭐, 뭐야? 이놈들 왜 이리 시시해? 하남에서 이름 좀 날렸다는 놈들이 이렇게 약해? 우이씨 짜증나네. 그럼 그동안 이 놈들이 부린 것은 완전 허세 아냐!' 반월도를 들고서 다음에 나오던 녀석은 내 기습에 놀랐는지 눈을 왕방울처럼 부라리며 신중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첫 놈이 너무 쉽게 쓰러지자 이제 오히려 놈들을 얕보게 된 나는 기세가 다시 살아나서 그 다음 녀석도 쉽게 잡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올시다 였다. 캉! 카카캉! 캉! 캉! 그 다음 장한은 제법 무거워 보이는 반월도를 갑자기 전광석화처럼 휘두르며 내 전신에 쇄도해 오는 게 아닌가! 반격은커녕 하나하나 막기에도 버거워 옴을 느끼며 뒷걸음질을 쳐야만 했다. "너 이 쪼끄만 쥐새끼 같은 녀석, 그새 한 수 배웠구나. 막내가 방심을 해서 어이없게 당했다만, 난 막패보다 조금 성취가 떨어질 뿐 그에 못지 않은 실력자라고 할 수 있지. 네 놈이 그의 주먹과 철퇴에는 살았어도 내 도에는 분명 잘리고 말 것이다. 그 때 그 녀석도 조금만 머리가 있었다면 반월도로 내 목을 쳐야만 했다. 자신의 주먹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결국 그 꼴로 이어져 버린 것이었지." 그는 반월도를 휘두르면서 말을 하는 여유까지 보이는 반면 연신 밀리기만 하는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이런 것이었는가? 하수와 고수의 차이인가? 그는 분명 고수 측에는 못 들 것이다. 잘 해봐야 중수 소리를 들을 뿐일 것이다. 그럼 그에게 밀리는 나는 결국 하수를 못 벗어난단 말인가! '아냐, 이길 수 있어. 어쩔 수 없지. 단수연 네 년한테 쓸려고 피땀 흘려 익숙하게 만든 것이지만, 일단 이 놈이 먼저니까…….' 그를 뒤로하고서 재빨리 멀리 벗어나 거리를 둔 나는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 기술에는 가속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반월도가 다시 내 머리를 사선으로 그으면서 휘둘러지는 찰라 비틀거리면서 돌 뿌리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내가 넘어지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그의 안면에 그러면 그렇지. 하는 비웃음이 떠올랐고, 그 짧은 순간 안심을 했는지 빈틈을 보이고 있었다. 난 쓰러지던 원심력으로 오른팔을 더 거세게 휘둘러 철봉으로 그의 팔을 쳐서 반월도를 놓치게 만들었다. 그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왼손을 땅에 대고 넘어지려던 몸을 받치면서 철봉을 휘두른 반발력으로 몸을 빙굴 돌렸다. 그리고 주저 없이 그의 발목을 왼발로 거세게 차 버려서 쓰러뜨려 버렸고, 잽싸게 몸을 일으켜 그의 옆구리에 냅다 철봉을 휘둘러 버렸다. "크어어어억! 살, 살려줘!" "비명을 지를 힘이 있었네. 그럼 안 돼지." 퍼억 퍽 퍽 퍽! 그도 개 거품을 문 것을 확인한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마지막 세 번째 녀석이 기어 나왔을 테니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마지막 녀석은 이미 뒷문 쪽에서 나오려다 당했는지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옆에는 옷매무새를 단정히 추스른 단수연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피가 묻은 은비녀를 닦아 내고 있는 게 보였다. 피가 깊게 묻은 것이 아닌 걸로 보아 내력이 없는 대신 은비녀로 점혈 부분에 푹 찔러 넣었던 모양이었다. 단수연은 그들을 무정한 모습으로 살피고는 마지막으로 날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허와 실이라 그것을 연습하느라 어제와 오늘 내내 안보였군요. 그런데, 이를 어쩌지요? 제가 다 봐 버렸네요." 어, 정말? 순간 황당해진 나는 입을 떡 벌리고서 무릎에 힘이 풀려 풀썩 꿇어앉았다. 오로지 단수연한테 써먹으려고 그렇게 연습한 것이었는데, 정작 엉뚱한데다가 써먹어 버린 것도 모자라서 보여서는 안 되는 그녀 앞에서 전력으로 펼쳐 보이는 어리석음을 범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5 20:49:57 고친날 2005-07-23 18:48:26 읽은수 10076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5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56] "자, 이것 돌려줄게요." 뜻밖에도 단수연(丹粹姸)은 내게 홍두건을 되돌려 주었다. 난 그것을 들고 감회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에게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겁나지도 않소? 내가 이것을 쓰는 순간부터 당신들을 새내기 점소이 훈련이라는 미명 하에 굴릴 거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닐텐데?" "내가 아는 당신이란 사람은 옹졸하고 꿍한 구석은 있어도 모질지는 못해요. 알고는 있었지만, 단지 무공을 쌓을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조금 장난을 쳐 본 거에요. 화가 나셨다면 제가 사과 드릴게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벼르고 별렀던 일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게 느껴져 한숨이 나왔고, 구태여 홍두건에 집착할 필요(必要)가 없어 보여 그것을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기념입니다. 망아루(忘我樓)에서 점소이를 했었다는 조그만 추억으로 가져가시길......일손이 좀 필요하니 힘이나 좀 써보쇼." "네? 어떤 힘을 말하는 거지요?" 난 그녀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후원 구석 중에서도 잘 안 보이는 외진 곳으로 눈을 돌렸다. 삽과 밧줄을 가지고 와서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있던 조진후에게는 악취삼흉(惡臭三凶)의 두 손을 뒷짐 지게 한 채 꽁꽁 묶으라고 일렀고, 삽 하나는 단수연에게 건내준 후 땅을 파기 시작했다. 내 행동을 꼼꼼히 살피던 그녀는 곧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사악(邪惡)한 미소를 지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 땅을 팠는데,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불렀다. 난 조금 불안해져서 미리 다짐을 받아 두기로 했다. "단수연, 절대로 이들을 죽이면 안됩니다. 식객(食客)이 늘어났다고 생각해 주시오." "어머, 누가 죽인데요? 단지 끼니는 제가 챙겨줄까 하는데, 괜찮겠지요? 네?" "마, 마음대로 하시오." 싱긋싱긋 얄밉게 웃는 그녀가 얼마나 독한 마음을 먹었을지 대략 이해가 되었다. 삼가 악취삼흉의 명복을 미리 빌어주는 수밖에......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를 뻔한 미래가 보이는 듯 싶었다. '악취삼흉, 니넨 내 밥이 아니라 일수필살(壹手必殺)의 밥이 될 듯 싶다. 쯧쯧 자네들의 더러운 손장난을 탓하게. 난 모르는 일이야. 암, 모르고 말고.' 우리가 그들을 고이고이 잘 묻는 것을 본 또 다른 인간이 있었다. 그야 물론 포연강이었다. 그는 내가 격하게 싸우는 순간에도 창고에서 잠만 자더니 악취삼흉을 고개만 내밀게 만들고서 완전히 묻어 버린 후에야 천천히 기어 나왔다. 끼이이익 쾅! 창고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포연강의 존재를 뒤늦게 눈치챈 내 등뒤로 식은땀이 줄줄줄 흘러내렸다. 저 인간이 도대체 무슨 시비 거리를 만들어서 귀찮게 하려 드는지 매우 걱정이 되었지만, 단수연과 조진후는 자신들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듯 어느새 멀찍이 서서는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당연히 악취삼흉을 심고 난 곁에는 나만 혼자 외로이 서 있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었다. 포연강이 하품을 하며 주방으로 막 들어가려다가 고개만 빼꼼 내밀더니 날 향해서 까딱까딱 손가락질을 했고, 난 주저없이 새찬 바람을 일으키며 그의 곁으로 뛰어갔다. "저기 구석에 보니까 새로운 식물을 구해서 심어놓은 듯 싶구만, 저 괴식물들 이름이 뭔가?" "네, 넵 악취삼목(惡臭三木)이라는 새로운 종입니다. 저, 저것들은 어, 얼핏 보면 사람 얼굴과 비슷하긴 하지만, 매우 큰 뿌리를 가, 가진 인, 인삼(人參)의 한 부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참, 참고로 향기 대신 악취를 뿌려서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멸종(滅種)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포연강이 주령령에게 또 무슨 사악한 말을 내뱉을까 염려가 된 나는 얼결에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내는 유치찬란한 짓을 하고야 말았다. 구석에서 딴청을 피우고 있는 단수연과 조진후의 어깨가 흔들리는 것으로 봐서 웃음을 참고 있는 듯도 싶었지만, 중요한 것은 눈앞의 포연강이었다. 포연강은 쯧쯧쯧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자네, 아무래도 유명한 명의의 진찰을 받아봐야 겠구만, 쩝 하기사 여기 점소이 일이 홧병이 나서 정신이 헷가닥할 만큼 힘들긴 하지. 뭐 저것들이 살아 있고 아혈이 짚혀서 조용히 지내는 한 인간이건 인삼이건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닌데 말이지. 자네 한 가지 고쳐야 할 것이 있네." "......" "행동 반경이 너무 크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의 효과를 끌어내는 것이 무공을 하는 이들의 공통된 과제지. 앞으로는 그것에 주의하면서 효율적으로 싸워보게. 령령에게는 내가 잘 말해서 이해를 하도록 설득해 보겠네. 이해를 못하면 그야 자네는 죽은 목숨이겠지만......그럼 수고하게." "......" 그의 언사는 너무나 교묘해서 나를 위로하는 것인지 염장을 지르는 것인지 확연히 구분 짓기에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 자신은 이번 일을 문제시 삼지 않겠다는 의지 표출 정도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령령이 문제긴 하지만......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녀가 요즘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일까나? 포연강이 가자마자 잠시 사라져 있던 단수연과 조진후는 어디서 잡아왔는지 한참 동면 준비를 하려고 했을 법한 두꺼비의 뒷다리를 장갑을 낀 손으로 잡아와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악취삼목을 향해 쪼르르르 다가서고 있었다. 이런 산중에 사는 두꺼비란 녀석들은 피부에 맹독이 있어서 뱀들도 개구리로 착각하고 먹는 일이 거의 없다. 설사 실수로 집어 삼켰다고 금새 심각한 복통이 인듯 꿈틀거리다가 다시 뱉아 버리고 만다. 물론 다시 뱉을 때의 두꺼비는 반은 녹아 내린 반죽이 되어 있겠지만...... 어떻게 잘 아느냐고? 내가 한참 어려서 사리분별이 떨어지던 시절에 길을 가다가 밭두렁을 보니 왠 개구리가 뛰지를 않고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내 딴에는 개구리를 놀래켜서 팔딱팍딱 뛰게 만드는 것이 목적(目的)이었는데, 심술 굳게도 바지를 내려서 그 놈의 등짝에 소피를 봐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놈은 그 왕방울 같은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날 노려보기만 할뿐 여전히 기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몇 분 후 그 녀석과의 승부는 나의 완패(完敗)로 결말(結末)지어지고 말았다. 그 녀석의 피부에 있던 독성분이 내 소피를 거꾸로 타고 올라와서는 내 조그맣기만 하던 가운뎃다리를 중독 시켜버린 것이었다. 너무 쓰린 나머지 울면서 간신히 어그적어그적 집으로 왔었고, 당시에 살아 계셨던 외할머니께서는 혀를 쯧쯧쯧 차며 어디선가 잘라온 머리카락을 살짝 살짝 태우시더니 거기에 뭔가를 더 뭉쳐서 고약처럼 만들어서는 내 가운데 다리에 덕지덕지 바르고서 붕대로 칭칭 감아 주셨더랬다. 과연 며칠 후에 말끔히 독기가 빠지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두꺼비 근처에는 얼씬도 안 했고,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개구리만 봐도 가슴을 쓸어 내리며 시선을 돌려버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감히 막 동면(冬眠)에 들려고 땅을 파고서 배를 깔았을 맹독성 두꺼비를 파내와서는 악취삼목(惡臭三木) 앞에 슬그머니 내려놓는 것이었다. 가관은 그 다음 부터였다. 씨익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단수연은 언제 잡았는지 바퀴벌레며 귀뚜라미며 지렁이들을 슬며시 그들의 머리 위에 올리거나 귀에 걸쳐서 장식을 해버렸다. "얘들아, 배고프지? 안 그래도 이 엄마가 걱정이 되서 개구리 반찬을 만들어 올려고 했는데, 개구리가 다 도망가버렸는지 비슷하게 생긴 이 놈 밖에 없었어. 비록 생긴 것은 맹독을 품은 두꺼비랑 비슷하지만, 아마 개구리가 변장을 한 놈인 것 같아. 그러니까 맛있게들 먹어야 해. 참 지렁이랑 귀뚜라미랑 바퀴벌레도 구해왔으니까 편식하면 안 돼. 알았지? 아이 착해라. 그래 어서 먹으렴. 내가 먹여달라고? 아이 참 쑥스럽게 자 아~, 해봐. 아~. 어, 아~를 안 하네. 엄마 말을 안 들으면 어떡하니? 엄마 화나면 은비녀로 눈깔 콱 찔러버리는 버릇이 있는 거 알잖니?......자, 아 옳지. 꼭 꼭 씹어 먹어야 해요. 그렇지. 그렇지." 보고 있으면 보고 있을 수록 점점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다. 멀거니 보고 있던 나조차도 속에 있던 게 다 넘어올 것 같았다. 녀석들의 아혈은 단수연이 비녀로 다 찔러 놨는지 소리는 지르지도 못하고 숨소리만 힘겹게 들려왔다. 두꺼비 녀석은 움직이는 지렁이랑 바퀴벌레를 보자 엉금엉금 기어서 혀를 쑥 내밀어 채 먹었는데, 그 때마다 악취삼흉의 피부가 긁혀서 독기에 부르터 푸르게 변색되는 것이 멀거니 선 내 육안에도 잘 보였다. '임자 만났군. 임자 만났어. 하여간 막패가 죽고 난 이후에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좀 씻고 살았으면, 이런 생지옥 경험은 안 할 거 아냐?' 하여간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입 속에 바퀴벌레를 쳐 넣는 단수연을 보니 아까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을지라도 실제로 그 분노(憤怒)가 어떠했는지는 미루어 짐작하기 어려운 바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마녀라고 생각했던 주령령이 훨씬 요조숙녀에 가까워 보였다. 주령령은 단지 후려 패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더구나 옆에서 그런 그녀를 목도하고 있는 살막 소막주 조진후(趙眞厚)가 과연 누구한테서 교육을 받아 저렇게 어긋나게 되었는지 이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있어 단수연이란 존재는 호위라는 개념을 넘어서서 인생의 선생님이자, 어머님이자, 누님인 것이었다. 살막의 미래는 안 봐도 뻔할 뻔 자였다. 차마 눈뜨고 보기는 힘든 엽기적인 행각에 난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여보시오. 단수연(丹粹姸) 소저!" 내 강경한 어조에 한참 유희를 즐기던 그녀가 새초롬한 눈빛으로 날 돌아보았다. "어머, 왜요? 우작삼(愚作三) 공자님?" 심호흡을 들이키며 생각했다. 남자로써 떳떳하게 할 말은 하고 짚어야 하는 것은 짚어야겠다고. "우린 바로 옆방에 사는 이웃 사촌 아니요? 앞으로는 친하게 지내도록 합시다." "그럼요. 저야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앞으로 친하게 지내봐요. 호호호호홋."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6 07:20:24 고친날 2005-07-23 18:49:07 읽은수 10073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5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57] 난 다시 본래의 점소이로 되돌아 왔다. 무려 한 달 동안이나 떠나있다시피 하다가 되돌아온 것이라 감회가 남다르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예전처럼 응당 해오던 물을 떠오기 위해 물지게를 지고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가 누가 내 등을 툭 치길래 돌아서 보니 단수연과 조진후 녀석도 물지게를 매고서는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하기사 내가 점소이 일을 아예 잊고 삼재검법(三才劍法)에 빠져 있던 날 동안 물을 날랐을 이들이니까. 난 그 날처럼 구보로 뛴다거나 하는 바보짓을 다시 반복하진 않았다. 그저 낙엽들이 하나 둘 씩 떨어져 내리는 풍악산(風岳山) 정경을 두 눈에 가득 담으려는 듯 천천히 내려왔고, 그들도 그런 내 걸음에 맞춰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약속(約束)이나 한 듯 조용히 침묵을 지키며 소장강에 낀 안개를 구경하고는 간단히 세수를 하고는 물지게에 물을 가득 담고서 천천히 망아루로 되돌아 왔다. 주방에 물을 부어놓고 현관으로 나와서 난간에 걸터앉으니 조진후 녀석도 내 옆에 슬그머니 앉았다. 처음에는 단수연과 조진후를 어떻게 하면 굴려버릴까 하는 궁리로 매달린 것이었는데, 이젠 그런 것 따위는 내 관심 사항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미소년 점소이 조진후는 되려 날 호감 어린 시선으로 봐서 무척 껄쩍지근하기 그지없었다. 저런 시선은 미소녀로부터 받아야 하는 게 정석인데, 남자 녀석한테서 받는 것은 아무리 상대가 애라 해도 찝찝한 일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그래도 개방 일이 바쁜지 소방이 잘 안 보이는 근래 말벗을 해주는 녀석이 있다는 것은 그다지 기분 나쁜 일도 아니었다. "어이, 조진후 점소이 고향이 그립지 않나?" 내 뜻밖의 물음에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처연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마치 회상을 하는 듯 먼 하늘을 향해 초점 없는 시선을 날렸다. "그립지요. 부모님이야 바쁘셔서 뵙기 힘들었지만, 항상 나랑 놀아줬던 주 총관과 호위대 애들이 보고 싶어요." 후훗 평상시 잔머리만 열심히 굴리려던 녀석 답지않게 쓸쓸하면서도 풋풋해 보이는 미소를 흘리는 것을 보니 애는 애로구나 하는 게 느껴져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미소년이라 그런지 바람이 불어 앞 머리카락 몇 가닥이 바람에 흩날리자 정말 그림이 되는 녀석 이라는 게 느껴졌다. 소방이 귀여우면서 청초하다고 한다면, 이 녀석은 단아하면서도 날카로운 기상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난 짐짓 가라앉은 분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화제를 조금 바꿔 보았다. "그래, 뭘 하면서 놀았는데? "술래잡기나, 말뚝박기, 수건돌리기 등등 정말 재미있는 놀이들이었어요." 난 피식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소방보다 조금 어려 보여도 알 것은 다 알만한 나이건만, 그런 시시한 놀이들을 재미있다고 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다 큰 녀석이 코흘리개 애들이나 하는 재미없는 놀이에 빠져 지내다니 조금 실망인걸. 더군다나 그들은 어른들이니 흥도 안 날 것 아니냐?" "아니에요. 어린애들 놀이랑은 좀 틀려요. 그래서, 노는 동안 흐르는 긴장감이나 집중도가 장난 아니라니까요." "왜? 뭐가 좀 다른데?" "술래잡기는 반 시진 동안 떨어지는 모래시계가 있거든요. 홍조(紅組)와 청조(靑組)로 나눠서 대표끼리 일단 가위, 바위, 보를 해요......" [살막식 술래잡기] 홍조와 청조 대표가 가위, 바위, 보를 해서 공격조와 수비조로 나눈다. 수비는 술래를 정예 추적요원으로 두 명 뽑고 공격은 은신술이 뛰어난 정예요원으로 30명을 뽑아서 일 각의 시간을 줘서 먼저 숨도록 해준다. 일 각이 끝나면 모래 시계를 뒤집는데, 주로 그 주최자는 주 총관이라는 사람이 도맡아서 한다고 한다. 모래가 다 떨어지기 전, 즉 반 시진 안에 술래 쪽이 은신요원들을 다 찾아내면, 수비조가 이기고, 그 반대는 공격조가 이기는데, 승부가 결정 난 순간 진 쪽은 무조건 은신하거나 도망가야 한다. 잡힌 녀석들은 이긴 쪽의 집단 구타를 일 각 동안 당해야 하기에...... [살막식 말뚝 박기] 이 때도 홍조와 청조 대표가 가위, 바위, 보로 공격조와 수비조로 나누고, 쌍방 간에 다섯 명씩 뽑아낸다고 한다. 그리고, 의례 하듯 수비 쪽은 엎드려서 말뚝 공격을 받기에 호신강기와 맷집이 뛰어난 이들로 뽑고 가위, 바위, 보를 하는 머리만은 잔머리를 잘 쓰는 녀석으로 뽑아서 대비한다. 공격 쪽은 몸무게가 많이 나가면서 높이 뛰기를 잘 하는, 즉 신법이 뛰어난 이들로 추려서 강공을 퍼붓는다. 말뚝박기 경우는 거의 몸공격을 하는 순간에 결정이 나긴 하지만, 잘 버텨서 머리들 대결로 이어져서 승부를 내면 이 때는 참여한 쌍방 열 명 사이에만 승패를 따져 구타를 일 각 동안 실시한다고 한다. [살막식 수건돌리기] 수건돌리기는 일반적인 노래를 부르며 하는 수건돌리기로는 끝이 나질 않기에 안에서는 배수 놀이를 한다고 한다. 예로 오(五)를 배수(倍數)로 정하면 숫자를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외칠 때 오의 배수에서는 손뼉을 치는 것이었다. 그 동안 바깥의 술래는 손수건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떨어뜨리는 것이다. 안과 바깥으로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안에만 신경을 쓰다가는 바깥의 손수건에 걸려 술래가 되기 쉽 상이고 바깥을 너무 신경을 쓰다보면 배수에 걸려 역시 술래가 될 수도 있다. 술래가 된 사람은 머리 위에 사과를 올리고 담장 앞에 서는데, 왠만하면 머리 보호구를 착용하고 서지만, 안 그럴 때도 있다. 말 그대로 암기 던지는 연습 상대가 되는데, 간혹 가다가 삑사리가 나서 다치거나 심한 경우 사망자도 생긴다고 한다. ... ... "그리고......" "잠, 잠깐! 거, 거기까지 그만! 대략 무슨 소리인지 충분히 이해했다. 그럼 넌 뭘 하는데?" "저야 이래봐도 소막주잖아요. 그러니까 이기던 지던 언제나 패는 쪽에 꼈어요. 저야 상관없지만, 당사자인 청조와 홍조는 언제나 치열하게 피 튀기는 접전이 펼쳐져요. 우리 살막은 놀이를 해도 무공수련을 겸해서 하기 때문에 매우 재밌다니까요." 니기미! 재미는...... 한 마디로 놀이를 빙자한 생사결이잖아! 하여간 그런 곳에서 제대로 된 인간들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두꺼비 반찬을 가지고 앙갚음을 하려드는 단수연이나 화가 난다고 똥통에 들어가길 서슴치 않는 조진후가 아니던가! 하기사 살수라는 녀석들이 정상적인 무공수련으로 목표물을 암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뭔가 창의적이면서도 비이상적인 방법을 스스럼없이 동원할 수 있도록 평상시에 실전을 방불케 하는 추적, 은신술 수련과 잔머리 굴리는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적으로 삼으면 무척이나 골치 아픈 곳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곳이 암살 대상으로 청부 받은 게 나 아닌가! 이것 참...... "그런데, 살막에서 나 잘 죽였냐고 전서구 안 날아왔냐?" "안 물어봤지만, 사체 깔끔히 처리했다고 보냈어요. 어차피 나랑 같이 있는 단 호위가 바로 살막의 비밀 병기라는 흑룡(黑龍) 일수필살(壹手必殺)이니까 신경 쓸 필요도 없었을 거에요. 솔직히 말하면 형님한테 암살을 시주한 자가 던져준 돈도 은자 열 냥 밖에 안돼요." "뭐? 그럼 살막이나 되는 곳이 고작 은자 열 냥 때문에 날 죽이러 니네들을 보낸 거야?" "아니요. 원래는 하도 기가 막혀서 그 청부를 안 받을려고 했었는데, 그 때 그 살막 분점에 제가 있었거든요. 마침 여기를 구경 차 지나갈 생각이어서 제가 받았......커, 컥 형, 형님......" 녀석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나는 취소될 뻔했던 암살 청부를 그가 받았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정신이 나가 조진후(趙眞厚)목을 조르다가 켁 켁 거리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놓아주었다. 그러나, 그를 계속 째려보는 나의 시선은 거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있는 힘껏 인상을 쓰며 이를 박박 갈아 보였다. 으드드드득 "그러니까 살막 소막주께서 심심풀이 땅콩으로 날 헤치우려 했단 이거네? 결국 너 때문에 내 고생문이 더 훤했졌다는 소리 아냐? 크아아아악!! 안 돼겠어. 조교 점소이 부활이닷!!" 한 마디로 일수필살에게 칼침 맞고 일주일간을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는 다시 한 달간 미친 듯 삼재검법에 몰아일체 상태로 빠져들 수 있도록 해 준 것이 바로 이 조진후 소막주 라는 것을 안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당당히 조교 점소이로 복직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어머머, 작삼 공자님, 남아일언중천금(男兒壹言重千金)아니었던가요? 다 부질없다며 이 홍두건을 저한테 기념으로 주신 게 바로 어제 일이에요. 안 그래요?" 저 불여시, 저걸 그냥 콱, 내공이 없는 지금 굴리지 못하면, 내공을 찾고 난 이후로는 영영 기회가 없을 게 뻔할 터,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바! 뜨거운 정열과 굳센 의지를 담은 사나이의 강건한 기세로......! "험, 험 아 물론 그렇지만, 단수연 소저께서도 생각을 해보시오.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을 이토록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면, 당사자인 내 입장에서는......" 단수연(丹粹姸)은 왼 손 집게손가락으로 내 입을 살짝 막아 버리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끄떡이며 예의 그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만약 우리 살막에서 청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 청부는 다른 데로 흘러갔을 거에요. 물론 암살청부는 우리 살막이 최고이긴 하지만, 다른 암살 청부 집단도 많이 있지요. 그렇지요?" 내 눈을 딱 바라보며 물어 보길래 난 엉겁결에 고개를 끄떡였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집게손가락은 다분히 의도된 듯 계속 내 입술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있는 청부자라면 아마 돈을 더 얹어서 청부했을 테고 어쩌면 다른 곳의 자객이 왔을 거에요. 물론 작삼 공자님의 친구 분께서 막으셨겠지만, 그 말이 동창으로 직접 들어갔다면 그 때는 동창 자체가 직접 움직였을 지도 몰라요. 그렇지요?" 끄떡끄떡 "그럼, 잠룡이 아니라 광룡까지 같이 있었다고 해도 작삼 공자님을 구하기는 힘들었을 거에요. 우리 소막주님께서 살막 전서구에 암살 가뿐히 성공했음 이라는 말을 추가하지 않았다면 일이 더 커졌겠지요. 이젠 당신께서는 그저 모두의 기억이 희미해지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거에요. 어차피 여기 청부한 자도 동창 자체라기보다는 그저 홧김에 개인적으로 청부를 한 것 같았거든요. 그 자만 조용하면 만사형통인거지요. 결과적으로 저희가 온 것이 작삼 공자님께 득이 되었으면 득이 되었지 손해가 되지는 않았을 거에요." 그, 그런건가? 그런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내가 손해를 본 것 같은데, 그저 단수연의 말장난에 놀아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에잇, 아무렴 남아일언중천금이란 말까지 나왔으니 그냥 다 잊자. 잊자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6 21:49:49 고친날 2005-07-23 18:49:33 읽은수 9890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58)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58] 악취삼목(惡臭三木)은 단수연(丹粹姸)의 뜨거운 관심 속에 무럭무럭 자알 자라나고 있었다. 매일같이 희한한 것들을 끼니때마다 거르지 않고 먹게 해서 그런지 살이 오동통 오른 듯도 싶고, 빨갛게 부어오른 듯도 싶었지만, 단수연의 관심 종자에 손을 댔다가 어떤 후환을 당하게 될까 은근히 두려워서 짐짓 모르는 척 관망만 하고 있었다. 과연 오늘도 지나치치 않고 특식을 만들어 준다며 며칠 동안 모아 놓은 음식 쓰레기통을 꺼내 들고 있었다. 원래는 후원 창고 뒷 쪽 길로 쭈욱 가면 음식 쓰레기 버리는 웅덩이가 따로 있어서 그 곳에 버리면 산짐승들이 어떻게 알고 와서 먹는지 흔적조차 남아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마침 이번에는 조진후 점소이가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깜빡 잊고 미쳐 버리지 못한 음식 쓰레기가 나무통에 고스란히 남아서 걸죽하게 숙성 되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 특유의 구릿구릿한 향내를 귀신처럼 알아차린 단수연은 뛸 듯이 기뻐하며 콧노래를 부르는데, 곁에 있던 나로써는 끔찍한 참상이 떠올라 슬그머니 그녀에게서 멀어지려 애썼다. "아이, 작삼 공자님 어디로 가세요? 연약한 아녀자를 버려 두시고 가시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는 말도 못 들어 보셨어요?" 연약한 여자? 내공도 없는 기본 체력만으로도 나와 맞먹는 여인이 연약해? "아, 아니 잠시 바람을 쐬려고 말이오. 날, 날씨가 무척 쾌청하질 않소?" "그럼 후원으로 잠시 나들이 가는 게 어때요? 공자님, 이왕이면 소녀 팔이 아파서 그러니 그것 좀 들고 와주시면 그 은혜(恩惠) 백골난망(白骨難忘) 일 것 같아요. 오호호호호홋." 소, 소녀?...... 이 아줌씨가 헷가닥했나? 왜 뻔히 보이는 나이를 속이려고 드나? "......" 일신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단수연 소저 운운하며 사이좋게 지내자고 한 것을 이 사악한 것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한 술 더 떠서 닭살스럽게 공자님 공자님 하며 나마저도 귀찮게 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한 숨을 몰래 내쉬며 음식물 쓰레기통을 들고 나서려니 조진후 녀석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히죽 거리길래 한 껏 째려 봐줬다. 그는 금새 안면몰수 하고 시선을 돌렸지만, 히히덕거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통을 악취삼흉(惡臭三木)앞에 내려놓자 주걱을 든 단수연이 사이하게 번득이는 봉목으로 눈웃음지으며 강제로 퍼먹이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독랄한지 깨달은 악취삼목은 따로 뭐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도 삼켰다. 기어이는 한 주걱도 남김없이 다 삼키게 만들어 버렸다. 이제 다 끝났나 싶어 통을 들고 되돌아서서 가려하니 그녀의 투박하면서도 가녀린 손이 내 손을 꽉 잡아 당겼다. 단수연의 손은 한 순간도 칼을 내려놓은 적이 없었는지 굳은살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여인네의 손인지라 부드럽기는 했다. "왜 그러시오? 단수연 소저?" "아직 다 안 끝났어요. 언제나 마무리는 중요한 법이예요." "......?" 뭔 소리인가 가만히 내려다보니 안 그래도 벌겋게 부어있던 악취삼목 중 한 녀석이 토악질을 우웩 했고 다른 놈도 덩달아서 우웩우웩 거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서 우웩!우웩! 바닥이 토악질로 범벅이 되어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악취가 진동을 하는 데도 그 앞에 꿇어앉은 단수연(丹粹姸)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들의 토악질이 끝나는 순간까지 독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의 토악질이 진정되자 그녀는 바닥의 토악물들을 주걱으로 퍼담더니 그들에게 다시 퍼 먹이는 것이었다! 흙이 섞이건 자갈이 섞이건 개의치 않고 강제로 먹인 그녀는 내가 토한 것까지 퍼 담아서 그들이 마저 다 삼키게 만들었다. 단수연의 그런 모습은 독한 정도를 떠나서 섬뜻 하기까지 했다. 기가 질린 나머지 통을 내버려두고 슬그머니 살금살금 뒷걸음질쳐 그 자리를 조용히 벗어났으나, 단수연은 눈치를 채고도 보내준 것인지 그들이 토하는 것을 계속 퍼 먹이느라 정신이 팔려서 그런지 다시 날 붙잡거나 하진 않았다. 조진후마저 그녀에게서 퍼져 나오는 강렬한 살기 탓인지, 토악질로 인한 지독한 악취 때문인지 뒷문쪽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는 더 다가서려 하지 않았다. 머쓱해진 나는 그 녀석의 머리를 툭 치고는 그대로 지나쳐 와버렸다. 더불어 별난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두 독종 중 누가 더 강할까 하는......두 독종이 누구인가는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독하기로 난형난제(難兄難弟)인 일수필살 단수연이 내공을 회복하고 떠나는 날 주령령과 시비가 붙어서 싸우게 되면 무척 재미있을 것 같은데......과연 누가 이길까? 후후훗' 근래 들어 손님들이 많이 줄었다. 혈해진경(血海眞經)과 관련해서 어디엔가 개미떼처럼 빠글빠글 몰려있는 게 분명했다. 내 짐작이지만, 령령의 부재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부재는 내게 있어 매우 시원섭섭한 일이었다. 그녀의 매서운 주먹을 생각하면 안 보이는 게 편한 일이지만, 짝사랑 연정을 한 때라도 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보고 싶다는 그리움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시원섭섭이라......차라리 이런 기분이 좋은 것인지도 모르지. 자주 봐서 이로울 게 없는 여인이니 그리운 감정이라도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오히려 낫다.' 달도 없는 한밤에 잠자리에 드러누워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다보니 문득 소피가 마려 오는 게 느껴졌다. 자리에 드러누운 이상 다시 일어나기가 한없이 귀찮았지만, 그래도 물을 빼주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룰 게 뻔한 관계로 투덜투덜 거리며 계단을 지나 앞마당으로 어그적어그적 기어 나왔다. "에휴, 추워라. 그래도 보름달이 떴는가보군. 이렇게 훤한 것을 보......어라?" 쪼르르르륵 볼 일을 해결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보름달은커녕 그믐달도 없었으며, 의례 반짝이던 별들이나 은하수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껴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훤하게 보인다? 묘한 기분과 함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것이 소피를 보고 나면 찾아오는 떨림인지 뭔가 알 수 없는 기묘함에서 기인한 떨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흠, 악취삼목은 밤에 과연 제대로 수면을 취하나 볼까? 안 자고 있으면 내가 조금 놀려줘도 괜찮을 듯 싶기도 하고......후후후훗.'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악취삼목들을 조롱이라도 해서 풀어보기라도 할려고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간 단수연에게 단단히 당하면서 순화 교육이 많이 된 그들은 비단 그녀의 밥일 뿐만 아니라 내 밥이기도 했던 것이다. 후원으로 가는 동안 통과해야하는 현관에서 뒷문사이의 어둠도 걷어져 훤하게 보였다. 갈수록 기이하기는 했지만,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고즈넉한 기분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텅! "아이고! 아이구! 후아, 후아 누가 여기다 이 물통을 놔둔......어랍쇼?" 내 발톱 끝에 채여서 짜릿한 통증을 유발시켜준 물통은 다름아닌 악취삼목을 위해 자기 전에 덮어주던 일종의 지붕이었다. 모두가 잠든 야간을 틈 타 쥐들이 찾아와서 그들의 안면을 갉아먹어도 곤란한 일이었고, 뱀이라도 찾아와서 물어버려도 곤란하기에 밤 동안에라도 편하게 자라고 내가 씌워준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난 다급한 마음에 그들이 묻혀 있을 후원 구석으로 단숨에 달려나가려다 진중하게 걸음을 옮겨나갔다. 가는 길에 굴러다니는 다른 두 개의 물통을 보니 내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설마 그들이 땅을 헤치고 빠져나가기라도 했단 말인가! 재빨리 후원 한켠에 놓여있는 내 반 쪽 짜리 철봉을 들었다. 만약에 뒤따를 기습에 조금이라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 동안 단수연의 뜨겁디뜨거운 불같은 보살핌으로 철저하게 화상을 입었을 악취삼흉(惡臭三凶)이 얼마나 이를 갈고 있을지는 안 봐도 자명한 일이었다. "허억, 허억, 허억......" 조심 조심 주변을 경계하며 낮은 보폭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가긴 했지만, 숨이 거칠게 세어 나오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이 묻혀 있었을 곳으로 걸음을 옮기면 옮길 수록 겁이 나면서도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나 혼자 오는 게 아니었다. 최소한 단수연이라도 깨워서 왔으면 이토록 떨리지는 않을텐데......세 명은커녕 두 명조차도 동시에 상대한 다는 것이 지금의 나로써는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기에 떨림은 격해지기만 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7 10:14:22 고친날 2005-07-23 18:50:02 읽은수 9920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59)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59] 속으로 명경지수(明鏡止水)를 외우고 또 외우면서 혼란스럽던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힌 후에 발소리를 죽여가며 그들이 묻혀있을, 또는 묻혀있던 장소로 천천히 이동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들이 응당 있어야 할 자리가 파인 자국도 없었지만, 평평하게 변해 있었다. 기이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러서 처음에는 낮에 단수연이 그들을 토악질하게 만든 냄새인가 했었다. 그러나, 땅의 색깔도 어딘가 어색했다. 황토빛이 아니라 적갈빛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이상한 마음에 흙을 조금 파내어 손으로 비벼보니 손에 뻘건 물감 같은 것이 묻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코로 가까이 갖다 냄새를 킁킁 맡아보고는 대경실색(大驚失色)을 하며 뿌리치고 말았다. '젠, 젠장 이거 피 아냐! 그, 그럼?' 평평한 곳 중에서 그들이 묻어있었겠다 싶은 부분을 파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인간의 뼈로 보이는 하얀 각질 부분과 살로 보이는 적갈빛 육질부분이 드러났다. 다른 악취삼흉이 파묻혀 있었을 부분도 파보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즉 몸은 땅 속에 박힌 채, 머리만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매우 황당하면서 당황스럽기까지 한 살인현장(殺人現場)을 일착으로 발견한 것이다. '단수연(丹粹姸), 기어코 일을 저질러 버렸구나. 어제 혼자 남겨두고 가는 것이 아니었는데, 결국 자기 성질을 참지 못해 이렇게 까지 만들어 버렸어. 너 덕택에 나만 죽은 목숨이 되었다. 아니지. 이들을 파내서 묻어버리고, 마치 알아서 도망간 것처럼 꾸미고 모르는 척 시치미 떼면 되지 않을까? 겉흙도 긁어 내버리고, 깜쪽 같이 위장을 하면 되는 거야.' 원래 쥐새끼 시체만 봐도 질겁을 하는 나였지만, 지금은 오로지 생존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 뿐이라서 무섭다는 생각도 없이 삽으로 시체 주위 흙들을 파내기 시작했다. 대략 무릎 정도까지 파낸 다음 목이 잘렸어도 죽여주는 암내를 풍기는 겨드랑이를 잡고 힘차게 끌어 당겨 하나씩 하나씩 꺼내었다. '쓰파, 하아, 하아 냄새 때문에 숨도 못 쉬겠네. 이것들은 어떻게 죽고 난 후에 냄새가 더 지독하냐? 킁킁 이, 이 냄새는......?' 왠지 익숙한 종류의 징한 냄새의 합류로 끓어오르는 두통을 느낀 나는 그 진원지가 그들의 엉덩이 부분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더 생각하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었다. 이 세상 어느 인간이 바퀴벌레에 지렁이, 귀뚜라미 반찬에 두꺼비 생회를 포함한 음식 갖지 않은 음식들에 걸죽하게 숙성된 음식찌꺼기를 먹고도 모잘라 토악질 한 것까지 다시 삼키고서 속이 멀쩡할 리가 있겠는가? 아혈을 짚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묻힌 그대로 실례를 해야 했던 이들을 생각하니 왠지 미안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났지만, 이미 죽어버린 악취삼흉(惡臭三凶)을 위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냥 잘 묻어주는 일 뿐이었다. 그것도 이왕이면 음지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거의 있을 수 없는 외진 곳이어야만 했다. 비석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미쳤다고 '여기 살인을 당해 죽은 얼라들 묻혀 있어요.' 하고 선전할 일이 있겠는가? 그렇게 따져 보니 딱 좋은 곳이 있었다. 바로 소방과 땀범벅이 된 채로 나뒹굴어야 했던 그 은밀한 곳, 생각은 길었지만, 행동은 빨랐다. 일단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현장 정리였다. 죽어서까지 더 지독한 악취를 풀풀 풍기는 그들을 창고(倉庫) 뒷편으로 질질질 끌고 가서 차곡 차곡 쌓아 놓은 다음 되돌아와서 적갈빛으로 물든 땅을 갈아 엎어 버렸다. 그냥 그들이 땅을 박차고 나왔다고 생각하게끔 이곳 저곳을 뭉게 놓고는 빗자루로 끌고 간 자국들을 사사삭 쓸어서 지워버렸다. '어랍쇼, 쓴 자국 자체가 너무 튀잖아. 끙 하는 수 없지.' 결국에는 신경도 안 쓰던 후원 전체를 쓸어 버렸다. 후원 전체에 빗자루자국이 가득하니 그저 내가 열심히 청소했으려니 생각들을 할 것이었다. 문제는 이제부터 였다. 들고온 삽을 시체들 옆에 세워 둔 후 심호흡을 몰아쉬며 덩치가 가장 커 보이는 놈의 겨드랑이를 잡고 질질질 끌기 시작했다. 뒷간 앞 정도를 통과할 때 즈음 발에 뭔가가 톡 걸려 넘어지면서 시체 밑에 깔리게 되었는데, 싸늘하게 식은 시체의 차가움이 직접 내 몸뚱아리에 닿자 내 전신이 소름이 끼치면서 닭살이 다다다다닥 돋아 버렸다. 거기까지 였으면 그럭저럭 참았을지도 모른다. 떼구르르 굴러오던 공 같은 것이 내 어깨에 툭하고 부딪혔는데, 움찔해서 돌아보니......촛점이 없어 보이는 악취삼흉의 쾡한 두 눈이 똥그랗게 날 노려다 보면서 혀를 길다랗게 쭉 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끄아아아악!......으읍."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던 나는 바로 비명이 터져 나오는 입을 두 손으로 막으면서 뒷걸음질을 쳐서 그 자리를 간신히 빠져 나왔다. 간신히 그것들이 사라졌던 악취삼흉의 머리란 것을 인지한 나는 손을 떼다가 내 손에 묻어있는 핏자국을 보고는 까무러칠 듯 놀래서 소매로 입술이 벗겨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열심히 문질러야만 했다. '단수연 네 이년! 날만 밝으면 뒷간으로 불러내서 자초지정을 샅샅히 케묻고 이실직고(以實直告)하게 만든 후에 반드시 일벌백계를 가하고 말테다!' 지금은 악에 받쳐 이렇게 맹세를 하고야 말았지만, 정작 실천 여부는 날이 밝아야 알 수 있는 일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목이 없는 몸뚱이야 무겁기만 하지 그렇게 무서울 것도 없긴 하지만, 머리는 아니었다. 영혼이 떠나기 직전까지 자신들의 목을 일일이 잘라버리는 단수연의 무정한 손속을 몸서리치게 느끼면서도 아혈이 집혀 소리도 못 지르고, 몸이 묻혀 꼼짝달싹 못하고 차례차례 죽어버렸을 악취삼흉의 안면에는 그 순간의 경악 어린 공포가 역력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부릅떠진 두 눈에는 죽음의 사신을 향한 두려움과 자신에게 닥쳐올 죽음의 공포가 서려 있었고 코와 입 주변에 진득하게 흐르는 진물을 보니 죽기 직전 콧물, 눈물에 침까지 질질 흘리며 살려달라고 진심으로 애걸복걸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게 비치는 듯 싶었다. 혀가 쭉 내밀어진 것은 목이 잘린 순간이 지극히 짧아서 소리도 안나오는 비명을 지르던 즉시 죽으면서 굳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한 순간에 짤렸다? 단수연은 지금 내공을 임시 폐지 당해서 톱질하듯 설설 베어서 자를 수밖에 없었을텐데......?' 그러나, 곧 머리를 휘휘 내저어 지레짐작하던 것들을 떨궈내 버렸다. 흑룡(黑龍) 일수필살(壹手必殺)이라는 여인이다. 내공이 없다고 해서 고수였던 경력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리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이 시체들을 잘 정리하고 나서 시치미 떼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손으로 잡기엔 오싹하기 그지없는 머리들을 발끝으로 톡톡 차서 한 쪽으로 굴려 모아 놓은 후, 목 없는 시체들을 하나 하나 질질질 다시 끌어서 은밀한 그 곳 근처에 차곡차곡 쌓아놓았고, 목 세 개는 삽으로 살살살 굴려서 시체 앞에 떼구르르 굴러가게 만들었다. 이젠 땅을 좀 깊게 파서 시체들을 굴려 넣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삽을 땅에 박은 후 오른 발로 밟으며 살짝 밀어 세웠고, 삽의 끝을 두 팔로 누르며 퍼내었다. 삽질! 강제징병을 두 해 동안 다녀온 내가 창과 칼, 방패보다 더 많이 애용해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삽이었다. 이런 작전(作戰), 저런 작전이 유난히 많이 떨어져 내렸던 변방 부대로써는 그냥 땅을 파서 호를 만든 후 거기 숨는 게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툭하면 성을 쌓아야 된다느니 나무를 심어야 한다느니 집을 수리해야 한다느니 하는 일에 무작위로 강제 동원을 당해야 했던 순간에도 삽은 필수적으로 갖고 다녀야 했다. 삽질이란 말이 흔하게 자기 무덤을 판다는 뜻으로 해석들을 해서 놀려먹을 때나 쓰는 말인줄 알고들 있지만, 강제징병들을 당해 보라! 삽질이 곧 생활임을 알게 될 것이었다. 옛날 향수에 휩싸여 삽질을 했던 관계로 원하던 깊이보다 더 깊이 파고 나서도 한 참 지나서야 어라? 하며 삽질을 멈추게 되었다. 어느 사이엔가 내 가슴 깊이까지 파 내려가 버린 것이었다. 역시 강제징병을 다녀와야 삽질의 진정의 묘용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악취삼흉(惡臭三凶), 비록 전생에는 지독한 악취로 강호를 진동시키면서 뻘 짓이나 하고 돌아다녔을지는 모르나, 후생에는 부디 향긋한 냄새를 뿌리는 아름다운 청년들이 되기를 바라겠소. 편한 잠을 잘 곳은 못되나 나로써는 최선을 다 했으니 억지로라도 잠들길 바라오. 그럼 이만." 그들을 위한 묵념도 아끼지 않고 곧 바로 차례차례 발로 밀어서 구덩이 속으로 빠뜨려 버렸다. 머리들은 발로 차기도 찜찜해서 삽으로 가볍게 톡 쳐 올려서 쏙 쏙 들어가게 만들었다. 다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꽃 대신 옆에 있는 토끼풀과 강아지풀 몇 개를 뜯어서 넣어주고는 흙들을 덮었고, 위에 올라 단단하게 밟아 땅을 굳힌 후 남은 흙들로 주변에 잘 흩어 뿌렸다. 이로써 귀찮은 건수 하나는 해결한 것이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8 09:30:45 고친날 2005-07-23 18:51:05 읽은수 10251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60)-주령령의 폭주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0]주령령의 폭주 일 벌인 인간은 따로 있는데, 정작 뒷처리나 해야 했다는 껄끄러움 때문에 찝찝함을 금하기는 힘들었으나,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자 절로 안심이 되면서 주령령(周鈴鈴)이 나한테 시비 거는 일은 없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를 했다. 잔가지로 마지막 정리를 한 후 뒤로 물러서서 완벽한 위장에 만족하며 보람찬 미소를 떠올릴 수 있었다. 삽을 어깨에 둘러매고서 강제징병 시절 종종 불렀던 전우가(戰友歌)를 흥얼거리며 귀가하려는 찰라 였다. 왠지 섬뜻하면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져 설마를 속으로 부르짖으며 천천히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령령(周鈴鈴)?!'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하얀 나삼의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을씨년스런 산바람에 휘날리며 시퍼런 안광을 교교롭게 뿜어대는 령령의 커다란 봉목이 날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처음 보는 인간들이면, 처녀귀신이라며 비명부터 지르겠지만, 그녀의 괴팍한 취미를 체득으로 잘 알고 있는 나로써는 다른 걱정부터 떠올렸다. '젠, 젠장 언, 언제부터 서 있었던 거야? 며칠 보이지도 않더니 하, 하필이면 야밤에 이런 곳에서 마주칠 것은 또 뭐냐! 어, 어쩌면 못 봤을지도 몰라. 그, 그래 한 번 떠보는 거야.' "험험, 그 간 강녕하셨습니까? 령령 아가씨? 오늘 따라 달도 밝고 시원한 바람이 나부끼는 것이 절로 호연지기가 솟구치는군요. 마침 소피도 해결할 겸 달밤에 몸 풀기가 좋다는 말이 있어서 정말 그런가 시험삼아 나와 봤지요." 그녀의 시선이 내 손에 들려진 삽을 향했다가 다시 내 눈을 향해서 깜빡이는 것을 보고는 곧 그 의중을 헤아릴 수 있었다. "아, 이 삽이요? 호신용입니다. 호신용, 혹시나 늑대라도 나타나서 달려들기라도 하면 어쩌나 해서 말이예요. 아, 추워라. 이제 겨울이 오려나 봅니다. 그럼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뛸 만큼 조마조마함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온갖 아양과, 능청과 너스레를 떨며 은근슬쩍 넘어가는데 심력을 소모하면서 느긋하게 망아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두르는 인상을 남겼다가 그녀가 의심을 품고 추궁을 함으로 해서 지금까지의 초절정 연기가 물거품 되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거기 서." 음산하면서도 나즈막하게 퍼지는 사이한 소리가 내 귓가에 또렷하게 울려왔다. 난 등으로 식은 땀을 주르르륵 흘리면서도 못들은 척 계속 걸어갔고, 다시 작게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려온 듯도 싶었다. 차갑고 고요한 밤중이기에 듣고 싶지도 않은 그녀의 소리들이 똑똑하게 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젠장 나 못들은 걸로 할테니 제발 그냥 넘어 가다오. 그 동안 그렇게 날 뚜드려 팼으면 가끔씩은 기분 좋게 인심 좀 써라.' 따악! 매우 육중한 느낌이 들면서도 딴딴한 것이 내 뒷통수에 격중 당해 눈앞에 번뜩이는 별을 보고는 잽싸게 뒤돌아 섰다. 연이어서 뭔가가 휙휙 날아 오길래 들고 있던 삽으로 멋지게 막았는데, 그 다음 날아오던 것은 삽자루에 착 걸쳐지면서 물어버리는 게 아닌가! 덕분에 날아온 게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방금 전에 내가 직접 웅덩이에 집어놓고 묻어버렸던 악취삼흉의 머리였던 것이었다. 한 쪽 눈이 터졌는지 진물을 질질 흘리던 그 머리는 남아있던 나머지 눈동자로 나를 확 째려보면서 발작하듯 자기가 물고 있는 삽 부분을 따다다다닥 거리며 씹으려 드는 게 아닌가! 순간 밀려든 오싹한 한기가 전신에 싸아하게 퍼지는 것을 느끼면서 삽을 미친 듯이 흔들어 떨궈 내고는 다른 머리들을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땅바닥을 구르고 있던 악취삼두(惡臭三頭)들도 약속(約束)이나 한 듯 일제히 이빨을 따다닥거리며 나를 향해 땅 위로 미끄러지며 달려드는 것이었다. 매우 흥분한 나는 덤벼드는 놈들을 무조건 삽으로 쳐내며 뒷걸음질에 뒷걸음질을 반복해야만 했다. "이게, 이게 무슨 조화냐! 니네 들은 죽었어! 죽었다고! 저리 가! 꺼져!......헉." 정신 없이 삽을 휘두르며 뒷걸음질치던 중 등에 물컹거리고 느껴지는 두 개의 부드러운 촉감에 놀라 잽싸게 뒤돌아 봤다가 령령의 서슬이 시퍼런 눈동자와 지척에서 바로 맞부딪혀 버렸다. 안 그래도 왕방울만하던 두 눈동자는 내 눈앞에서 더욱 커지면서 한층 더 푸른 안광을 빛내는 게 요사스럽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문득 날 물려고 따라오던 악취삼두(惡臭三頭)가 생각이 나서 휙 돌아보니 그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그 중 하나에게 아그작 아그작 씹힐 뻔 했던 삽자루룰 내려다보니 아무런 흔적도 없이 말끔한 것이었다. '휴우, 역시 헛 것을 본 거였구나.' "왜, 다시 되돌아 온 거지? 찔리는 데라도 있는 거냐?" '허억, 주령령!' "아, 아니에요. 제, 제가 요즘 삼재검법의 묘미에 빠져서요. 그냥 정신 없이 휘두르다 보니 그, 그만......하하하 여, 역시 달밤에 휘두르는 삼재검법이 제 맛이라니깐요." 그 자리에서 바로 소진배검(蘇진背劍)에서 선인지로(仙人指路)로 이어져 시작(始作)되는 삼재검법(三才劍法)을 연이어 부드럽게 삽으로 펼쳐내며 그녀와의 거리를 슬금슬금 벌려 나갔다. 짐짓 몰아일체(沒我壹體)에 빠져 정신 없이 흘러가듯 후원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이동을 해 간 것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일지라도 삼재검법의 묘미를 조금 맛 본 나는 어느새 정말로 삽으로 삼재검법을 펼쳐내는 것에 빠져들어 넋을 잃고 한 참 동안을 흘러 가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령령의 앞으로 되돌아 와서 검법을 펼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쳇, 거의 다 빠져나간 거였는데, 다시 되돌아오다니, 아니지, 이 즈음 되면 도리어 령령의 의심이 풀렸을 테니까, 다시 펼치면서 가면 빠져나갈 수 있을 지도 몰라. 좋아, 다시 시도해보자.' 이번에도 검법을 펼치면서, 정신을 잃은 것처럼 삽을 휘두르며 열심히 후원을 향해 약간씩 약간씩 이동해 갔다. 창고 옆 소로길로 시치미를 떼고 지나가려는 순간 발끝을 교묘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돌다가 결국에는 다시 비웃듯 조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의 앞으로 되돌아 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를 악 물고 몇 번을 더 시행해봐도 똑같은 것을 보고서야 령령이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결국 제 풀에 지쳐 그녀 앞까지 와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독한 년, 징한 년, 풍악산 처녀귀신 연합회 청년 회장 해 먹을 년, 결국 날 패야만 보내주겠다는 뜻이더냐? 그런 거였냐? 끄응. 배 째! 맘대로 해! 짜증나니까, 에휴.' "다른 이들이 투로만 하루 이틀 익히고 넘어가는 삼재검법을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절세 검법인양 전력을 다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펼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후훗 좋은 구경이었다." 배 째건 말건 맘대로 하라는 뜻으로 그녀 앞에 큰 대(大) 자 모양으로 드러누워 버렸더니만, 뜻밖에도 그녀가 즐거워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눈을 부릅뜨고 다시금 그녀를 보게 되었다. 분명 그녀의 두 눈에서는 푸른빛을 발광(發光)하고 있는 귀안(鬼眼)이 번뜩이고 있었다. 내 체험으로 미루어 볼 때 귀안(鬼眼)상태의 주령령은 상대를 공포와 두려움에 젖게 만드는 음산하면서 사이한 기운을 뿌릴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도 차갑기 그지없어 감정이라곤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앗싸, 잘 하면 이번에야말로 좋게좋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후후훗 좀 더 부추켜 줘야 겠다.' "이게 다 잘난 거지 친구(親舊)를 둔 덕분 아니겠습니까? 헤헤헷 하여간 소방(蘇芳)이 장난삼아 가르쳐줬던 것인데, 제 스스로가 삼재검법(三才劍法)의 참 진리를 깨닫고 열, 열심히......?" 내가 소방 얘기를 하자 지금까지 희색(喜色)이 만연해있던 령령의 안색이 갑자기 차갑게 굳는 것이 보였고, 동시에 약해져 있던 그녀의 사이하면서 음산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강해지면서 끈적끈적한 기운이 나를 칭칭 휘감으며 압박하는 것이었다. "소방, 소방이라......그렇지. 너를 유일하게 걱정해 준 착한 아이인 듯 싶었다. 너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지?" 왠지 분위기가 이상해져서 이대로는 안돼겠다 싶어 조금이라도 그녀를 웃게 만들려고 내 딴에는 농을 한다고 머리를 굴려 대답(對答)했다. "소, 소방은 저의 둘, 둘도 없는 친구지요. 헤, 헤헷, 점소이랑 거지가 만났으니 찰떡 궁합인거지요. 네, 헤헤헷." "......" 그러나, 그녀의 귀안은 왠지 차갑게 가라앉으면서 한층 음산한 청광(靑光)을 한 층 강렬하게 발산(發散)시키는 것이었다. 내 얘기가 그렇게 재미없었나? "그렇지. 점소이랑 거지라......과연 잘 어울려. 잘 어울리고 말고, 그런데, 네 녀석은 왜 웃었다가 울상이다가 그렇게 복잡하게 표정이 변하는 거냐?" 이게 누구 놀리는 거야? 젠장할 이제 갖가지로 노는구나. "그, 그야 령령 아가씨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셔서 저도 그냥 따라 하다보니......" "뭐, 뭐라구? 이 어둠 속에서 내 표정이 보여? 거짓말 하지마라. 달도 없는 밤이거늘. 감히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한단 말이냐?" 아니, 아니면 말지. 왜 화는 내고 그래? 에효 이전처럼 겁만 주는 걸로는 내가 반응하지 않으니까 이젠 다각도로 연구해서 시비를 거는구나. 무서운 년이야. 무서운 년...... "글, 글쎄요. 제 눈에는 그냥 훤하게 보이는데요. 대낮 수준은 아니지만, 보일 것은 다 보이는데요." "그, 그런가? 그렇다 치자. 내, 내게 표정이란 것이 있었단 말이냐? 웃기라도 했었단 말이냐?" 왜 당황하고 난리야? 웃었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네, 방금 분명 웃고 있었어요. 제가 소방 얘기를 하니까 다시 차가워지셨지만, 착 가라앉은 것이 왠지 서운해하는 느낌이......" "안, 안 돼! 안 돼! 그, 그만! 그만해 지금의 내가 감정따윌 느낄 리가......안 돼, 느껴선......!" 머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흔들면서 푸른 눈의 발광 정도가 수시로 변하는 것을 보니 드디어 이 년이 진정으로 미치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을 눈치채 버렸다. 역시 평소에도 미친 짓을 잘 하더니 드디어 발작을 하는구나. 그러게 약은 제 때에 먹었어야지. 마구잡이로 싸돌아 다니면서 약먹을 시기를 놓치니까 이렇게 되는 거 아니야. '오호, 지금 령령이가 발작을 일으키는 중인가 보니 살짝 피해줘도 되겠지? 후후훗 나 같은 것은 기억에도 남지 않을거다. 휘유우 살았네, 살았어. 역시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군. 자주 좀 발작해라. 난 간다. 크크크크.'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8 18:05:56 고친날 2005-07-23 18:51:40 읽은수 10012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6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1] 귀안(鬼眼)의 주령령(周鈴鈴)이 발작을 일으켜서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재빨리 사사사삭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런 좋은 기회를 마다하면서까지 곁에 남아 있다가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주령령, 정녕 알 수 없는 여인이로구나. 어째서 귀신놀이를 좋아하고 쉽사리 미치는 너에게 한 순간이라도 연정(戀情)을 품었는지가 더 알 수 없는 노릇이긴 하다만, 니가 남궁현(南宮炫)앞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알겠다. 바로 그 발작 때문이로구나. 불쌍한 것. 쯧쯧쯧.' 비록 도망을 치는 와중이었지만, 그녀를 향한 연정(戀情)이 조금 남아 있었는지 안타까움이 밀려오기도 했다. 날카로워 보이지만, 꽤 아름답다고 불려야 하는 미모를 감추고 다니는 이유가 이제는 이해가 될 듯 싶었다. 아마도 자기도 모르는 새 발작을 일으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일 것이다. 황실 근위대? 개뿔 같은 소리였다.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더욱 더 분명해졌다. 이 년 놈들이 오히려 황실 근위대한테 쫓기는 입장일 것이었다. 포연강(鮑緣强) 이 놈의 새리는 아마도 살인, 강간, 방화를 밥먹듯이 했음이 분명하다. 그의 낯짝은 아무리 잘 봐줘도 영락없는 산적 두목감이다. 홍 영감? 뭐 짐작은 안 돼지만, 글 꽤나 읽은 듯한 꼴로 보아 엄청나게 큰 사기를 치고서 한 몫 크게 챙긴 후 피해자들에게 쫓기는 중이 아닌가 싶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동창이 이를 갈고 있는 입장이잖아! 일단 급한 불은 껐다 해도......쩝. '아니지, 난 억울하게 죄인(罪人)으로 몰렸을 뿐. 적어도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거나, 사기를 치고서 도망 다니는 입장은 아니라고......' 이 외딴 산중에 망아루(忘我樓)가 세워진 이유도 이로써 간단히 풀려 버렸다. 바로 은거하기 위한 위장건물이었던 것이다! 단지 그들도 혈해진경(血海眞經)이라는 무공기서로 인해 무림인 들이 이렇게 외진 곳으로 몰리리라곤 짐작 못했을 것이다. "히익?!" 풍악산 처녀귀신 청년 회장 아니랄까봐 후원을 지나 막 뒷문으로 들어가려던 내 앞을 귀신같이 날아와 막아 선 그녀의 두 눈에서 뿜어지는 빛은 더 이상 교교하기만 하던 푸른 청광(靑光)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처절한 죽음을 암시하듯 피 같이 붉은 적광(赤光)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태까지처럼 단정하게 풀어 헤쳤던 비단결 같이 윤기가 흐르는 까만 머리도 아닌 마구잡이로 풀어헤쳐진 말 그대로 미친년을 방불케 하는 괴기스런 모습이었다. "저, 저기 주령령 아가씨 저, 저기 이, 이러시면 다, 다른 사람들도 깨요. 우, 우리 좋게 대화로 풀어 가자구요. 대화 좋잖아요. 대......" 휙 콰직! 날카로운 바람 한 줄기를 느꼈을 뿐인데, 내 유일한 방패막이였던 삽이 두부처럼 썰려 버렸다. '이런 젠장!' 양손에 들려 있던 두 동강 난 삽을 그녀의 괴기스런 안면에 힘껏 던지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철봉이 세워진 곳으로 냅다 달렸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철봉을 잡을 때까지 미친 령령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양손에 잡혀버린 두 동강난 삽을 그대로 불살라 재로 만들어버린 그녀의 안면에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사이한 미소가 떠 올랐다. 마치 좀 더 재미있게 날뛰어봐라 하는 조롱이 섞인 듯한...... '차, 차라리 처녀 귀신 때가 훨 나았어. 적어도 그 때는 제 정신이 살아 있어서 장난 정도만 치고 마는 정도였지만,......이, 이건 완전 피에 굶주린 미친 불여우잖아. 포, 포연강을 깨워야 해. 그, 그 녀석이라면 지금의 령령을 막을 수 있을 거야.' 휙 차창! "우욱!" 마치 쇠와 쇠가 부딪힐 때나 일어나는 불꽃과 함께 스쳐지나간 날카로운 바람 한 줄기, 그것은 바로 날카롭게 돋아나버린 그녀의 손톱이었다. 그 힘에 밀려 다섯 발자국은 밀려났으나 삼재검법(三才劍法)을 수련하면서 잡힌 기본기 때문인지 용케 쓰러지진 않았다. 대신 그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팔이 저릿하면서 속이 진탕된 듯한 느낌이 일어났다. '아, 아니지. 포연강은 그녀를 제압하고 나면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분명 나도 죽일 거야. 분명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거야. 결국은 한 통속이니까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지. 젠장!' 잘 생각해보니 포연강이나 홍영감을 깨우는 것은 내 명을 재촉하는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차라리 령령의 광기(狂氣)가 가라앉을 때까지 도망다니면서 정신 차리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휘익 '웃샤! 피했다. 크크크.' 막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란 것을 한 번 막아보고 안 나는 기회를 엿보다가 살짝 뒷걸음질을 쳐서 그녀가 헛손질을 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망아루 안으로 들어가서 다른 인간들을 깨울까 생각했지만, 나와 그들이 탄 배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주저 없이 뒷산으로 힘차게 뛰었다. 나무숲이 울창한 곳으로 들어가면 미친 주령령이 쫓아오기도, 움직이기도 어려울 거라고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시뻘건 안광을 활활 태우고 있는 그녀는 일부러 사냥감을 쫓는 재미를 느끼고자 함인지 한참동안을 따라오지 않았다. '역시 제 정신이 아닌 령령의 머리는 둔해지는구나. 사냥감도 사냥감 나름이지. 내가 사냥감일 때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지. 후후후훗.' 물이 꽉 찬 물지게를 매고서도 소장강에서 망아루까지 한 달음에 주파해버린 무한 체력의 소유자, 그게 바로 이 몸이시다. 따라서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철봉 하나 달랑 들고 회운봉(回雲峰)을 밤새 뛰어 다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거다. 시간을 끌다보면 령령도 제 정신을 찾겠지. 그럼 미안해서라도 몇 대만 패고 끝내는 매우 행복한 결말이 나를 기다리는 것이다. '역시 고금제일(古今第壹)의 잔머리답다. 시간을 끌면 내가 이긴다.' 숲 속으로 얼마나 정신 없이 들어간 것일까? 이미 내가 기억하던 숲 가장자리를 벗어난 지 한 식 경은 지난 것 같았다. 지금 시간은 자정을 한참 전에 넘겼으니 축시를 막 지나쳤을 것 같다. 숨이 벅차 올라서 심호흡을 하며 달아오른 열기를 식히다 보니 문득 뒷통수가 따끔따끔 거리는 게 느껴져 돌아다보았다. 역시 미친 령령이 붉은 안광을 번득이며 서 있는 게 보였다. 언어 구사력이 상당히 떨어졌는지 사이하게 웃기만 하는 것이 고작 여기까지 못 뛰어왔냐고 하는 듯도 싶었다. '젠장, 보통 인간이라면 여기의 절반이나 올 듯 싶어? 이제부터다 미친 령령.' 숨을 돌린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뒤로하고 뛰기 시작하려...... 퍼엉! "끄아아아아악!" 순간 이동이라도 하듯 내 앞에 내려선 그녀의 손이 이번에는 벌겋게 물들며 그대로 내 가슴에 장(掌)을 날렸다. 가슴뼈가 함몰되듯 우직 거린 듯도 싶었지만, 몇 바퀴 구르고 나서 고통으로 이맛살을 찌푸리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찢어진 옷 사이를 내려다보며 손으로 만져보니 고통에 비해 멀쩡했다. '설마 구타심결(毆打心訣)의 효용(效用)인가? 후훗 그런건가? 그동안 줘터진 보람이 있는 걸까?' 미친 령령은 자신의 시뻘건 장을 얻어맞고도 비틀비틀 이상 없이 일어나는 나를 보고는 조금은 의외라는 빛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더 사이하면서 기뻐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을 보니 좋은 장난감을 만났다는 듯한 의미로 해석이 되었다. '미친 상황에서도 그 독랄한 성격은 그대로구나. 으이구, 빨리 정신 좀 차려라.' 이번에는 기다려 주지도 않고 그 시뻘건 장(掌)을 연거푸 날려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을 외치며 오른발을 오른쪽 앞으로 내디디고 일어서서 양손을 펼치듯이 뻗어서 검을 찔러내는 진량가해(津梁架海)를 무의식적으로 펼쳐냈다. 최선의 방어는 최선의 공격이라는 공방일치(攻防一致)의 개념대로 몸이 따르는 것을 보니 신기하기도 했다. 한 달 전의 나였다면 이런 반사적인 움직임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뭐 망아루에서 지내는 동안 귀안(鬼眼)의 주령령(周鈴鈴)에게 적응한 바도 있어서 미친 령령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는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쩌엉! 퍽! "끄아악! 커흑!" 시뻘겋게 타오르는 장(掌)과 맞 부딪힌 철봉은 오히려 되밀려서 꽉 쥐고 있던 내 손바닥 껍질을 벗겨내고는 그대로 내 갈비뼈를 찍어 버렸다. 온갖 인상을 다 쓰면서도 갈비뼈 부분을 더듬어 보니 역시 별 이상이 없어 보였다. 단지 숨을 쉬기가 버거워서 기침을 몇 번 내뱉어야 했다. 숨을 제대로 쉬질 못해 힘겨워 하는 나를 흥미진진하게 내려다보는 그녀를 보니 절로 화가 치밀었다. 적의 방심은 곧 나의 반격 기회라는 것을 소방과의 허(虛)와 실(實)을 통한 특훈(特訓)을 통해 깨달은 나는 비틀비틀 거리며 일어섰다가 주저 않는 척 하며 무릎을 굽힌 그대로 몸을 비틀고 검을 위에서 돌려 쏜살같이 전방으로 질러 버리는 청룡탐조(靑龍探爪)를 펼쳐 그녀의 가슴뼈를 기습적으로 찔러 버렸다. 이 한 수는 방심하고 있었던 그녀로써도 전혀 예상 밖이었는지 제대로 먹혀 버리고 말았다. 쩡! "이럴 수가! 어째서?!" 주령령의 가슴뼈와 맞 부딪힌 철봉은 철과 부딪힌 듯한 소리와 함께 그 반탄력으로 회전을 하며 내 손에서 벗어나 멀찍이 떨어진 풀밭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장난 일조로 따라오며 공격을 간간히 펼쳤던 미친 령령이 이 기습적인 한 수를 얻어맞고는 화가 났는지 그 기세가 대번에 바뀌어 버렸다. 눈에서 솟구쳐 오르는 적광(赤光)이 한 층 더 강렬해지면서 끈적끈적거리는 사이한 기운이 대기를 정지 시켰고 내 주변을 옭아매 버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난 지독한 호흡곤란을 느끼면서도 못박힌 것처럼 옴짝달싹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버렸다. 뻑! 그녀의 발에 턱을 걷어차인 나는 그대로 대(大)자로 정신 없이 숲 바닥에 눕혀지고 말았다. 뿌드드득 "으아아아악! 주령령! 잘......잘못 했어요!......용, 용서 해주세요! 령, 령령!" 령령의 양 발바닥이 뻗어있는 내 양 발목을 무서운 힘으로 눌러버렸는데, 마치 바위 밑에 깔린 기분이었다. 당연히 탈골 되버렸고 양쪽이 동시에 그렇게 되자 지독한 극통이 내 머리끝을 수 천번은 관통하면서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본능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용서해달라고 외쳤으나 적어도 한 가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미친 주령령 한 명이 귀안(鬼眼)의 주령령 한 부대와 평상시의 주령령 한 부대를 합친 것보다 훨씬 무섭다는 것을...... 휙! 뻐벅! 퍼버버버버벅! 퍼버버벅! "끅, 끄아아아악! 령령! 령령!" 곧이어 그녀의 시뻘겋게 달아오른 장(掌)과 조(爪), 권(拳)이 내 전신에 유감 없이 떨어져 내렸다. 한 대, 한 대 치고 날릴 때마다 내 몸이 반응하거나 상처입는 정도를 살펴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신을 난자해 버리는 그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주령령의 이름을 부르짖었지만, 둔해빠진 미친 령령에게는 그 어떤 단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전혀 반응이 없었고, 내 의식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실 하나가 드디어 끊어지려 하는 것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실이 끊어지면 난 죽는다는 것을......그래서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으나, 미친 령령 앞에서는 지극히 무력하기만 했다. 문득 이대로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어차피 살아봤자 또 그녀의 노리개로 전락한 것은 자명한 일, 설사 그 상대가 정상의 주령령 이건 귀안의 주령령이라해도 결국은 매한가지라는 것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결국 내가 조금 강해지는 정도로는 오히려 상대방의 화만 재촉할 뿐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손에 쥐지 않는 한은...... 툭! 그리고, 실은 끊어졌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9 06:42:33 고친날 2005-07-23 18:52:05 읽은수 10424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62)-현현자의 비회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2]현현자(炫炫者)의 비회 이번에야말로 죽었구나 하는 억하심정이 들며 의식을 잃었던 기억까지는 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희미한 빛이 내 각막을 어지럽힌 탓에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젠장, 허구헌 날 죽도록 터지고 침대에 눕는 게 내 일인가? 죽지도 못하는 내 신세, 현현자 이 영감탱! 기연을 줄거면 좀 강하게 써먹을 수 있는 걸로 주지. 도대체 내 스스로에게는 무용지물이나 다를 바가 없는 걸 줘 가지고 맨날 허벌라게 터지게만 하냐고! 에잇 짜증나. 잠이나 더 자자.' 만사가 귀찮아져서 그냥 다시 누울려고 했다. 그런데, 내 몸은 전혀 내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침대에서 반쯤 일어난 내 몸은 두 눈을 번쩍 뜨고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피는 것이었다. '어라? 여기가 어디야? 이런 고급스런 방이 망아루에 있었던가?' 물론 주령령과 포연강이나 홍영감 방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구조는 거기서 거기일 게 뻔했다. 그런데, 내 눈에 비친 방은 내 방보다 적어도 네 다섯 배는 되는 듯 훨씬 넓었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침대가 엄청나게 푹신푹신한 것은 둘 째 치고도 여인의 살결처럼 부드러운 황금색 비단으로 침대보까지 맞춰져 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랍쇼? 이 침대, 요사스런 지붕까지 달려 있고 투명한 망사까지? 여기가 황실이라도 되는 것이야? 에이 그럴 리가! 쩝, 내가 꿈을 꾸는 모양이군. 어이 다시 돌아와 눕자고, 이딴 꿈 꿔봤자 다 허망한 거야. 야! 어딜 제멋대로 가려는 거야!' 어쩐지 자꾸 이질감이 드는 내 몸은 전혀 내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고, 그대로 비단 이불을 걷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으, 으헥, 미, 미녀다! 오옷! 야, 다시 되돌아가. 꿈이라도 좋으니까 한 번만 하자. 한 번만!' 걷어진 이불 속에는 꿈에서나 나올 법한 나신의 미녀가 흐트러진 머릿결을 하고서 쌔액쌔액 잠들어 있었다. 주령령이나 교옥정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정말 그녀들의 미모보다 몇 배는 더 나으리라 여겨지는, 옥으로 빚은 조각 같은 여자였다. 하기사 꿈이니까 그렇겠지. 야, 그러니까 한 번만 안아 보자니까, 자꾸 어디로 가냐? 뚜벅뚜벅 제 멋대로 걸어가던 내 몸은 제법 비싸 보일 정도로 황새 무늬가 현란하게 수놓아진 비단 청의을 걸치더니 벽에 걸린 동경(銅鏡)을 바라보며 흘러내린 머리카락를 옥으로 만든 빗으로 깔끔하게 빗어 넘...... '누, 누구냐? 저 중년 얼굴의 인간은? 설, 설마 그, 그렇게 시간이 흘러 버렸냐? 안, 안 돼. 미인이고 비단이고 다 필요 없으니 내 인생 돌려놔라!' 동경에 비친 내 얼굴은 험악하게 인생을 살아온 듯 길쭉하면서 날카롭게 각이 진 사십 대 후반 정도의 중년인으로써 드문드문 흰머리가 보이는 호랑이 눈썹의 호걸(豪傑)이었다. 꽉 다문 얇은 입술은 무척 고집스러워 보였고, 번득 번득이는 안광을 수시로 흘리는 것으로 보아 힘이 넘쳐흐르는 절정고수 인 듯 했다. '젠장할, 내가 모르는 새 절정고수 중년인이 되어 버렸다니!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이제 령령은 애도 두 엇 낳은 아줌씨가 되어 있으려나? 야, 무림맹 아그들하고 망아루 인간들 혼쭐내러 가자. 엉? 가자고! 쳇, 너 내 몸 맞냐? 왜 이렇게 내 말을 안 들어?' 머리를 빗고 있던 중년인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느닷없이 천장을 향해서 집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날카로운 바람 같은 것을 날렸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지풍(指風)? 그러자 구멍이 숭숭 뚫린 천장에서 가벼운 신음 소리들이 나며 털썩털썩 거리더니 이제는 새빨간 핏방울들이 방울 방울 구멍을 타고 뚝 뚝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거 연출 한 번 쌀벌하게도 하네. 이어서 몸을 풍차처럼 회전시키며 창을 뚫고 들어오는 흑의 복면인들의 검날이 무자비하게 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으, 으아아아악! 왜 맨날 나만 쳐!' 그러나, 나의 손이 떨어져 내리는 검 하나를 교묘한 손 동작으로 뺏어 버리고는 도리어 상대의 목을 베어버렸고, 멋모르고 뛰어든 다른 녀석들의 목까지도 연거푸 베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동작 하나 하나가 얼마나 깔끔하고 신속하며 조용한지 침대 위에서 잠든 나신의 미녀는 깨지도 않고 쌔액쌔액 거리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호오, 이게 그 유명한 금나수야? 역시 난 대단해. 제멋대로 내 몸이지만, 잘 한다. 그래 다 쓸어버려라!' 그 순간, 그렇게 잘만 싸우던 내 몸은 부들부들 떨더니 웩 하면서 검은 피를 토해 내는 게 아닌가! 문득 끼이익 거리는 소리에 현관쪽을 돌아보자 새하얀 비단옷을 걸친 잘생긴 백의 미공자가 하얀 선섭을 하늘하늘거리며 허락도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괘씸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찰라에 이번만큼은 내 몸도 반응을 해서 지풍을 날리려고 했으나 단 한번 미약하게 바람이 일고는 그것으로 아무 반응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하하하하하, 그만 두시오. 현현자(炫炫者), 당신의 내력은 당분간 쓸 수 없습니다. 금강불괴에 만독불침지체(萬毒不侵之體)인 당신이라 해도 딱 하나 신선폐와 같은 산공독(散功毒)에는 일시적으로 무력하지 않겠소? 뭐 그것도 오로지 한 방법으로 밖에 안 돼지만 이렇게 걸려들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이미 깨어 있었던 듯한 나신의 미녀가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일어나며 백의 미공자 쪽으로 물러섰고, 미안하다는 듯 나의 시선을 피하며 요염하기 그지없는 오동통한 빠알간 입술을 열었다. "미안해요. 현현 가가, 어쩔 수가 없었어요. 조부님 명이어서......정말, 정말 미안해요." '현현자? 혹시 난 그의 기억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인가? 내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인가? 어째서? 무엇 때문에......?' "으아아아아아! 네가 감히!" 내가 의문을 품고 있는 사이 무서운 고함을 지르던 현현자의 왼손이 현란하게 펼쳐져 뭔가를 날렸고, 그 뭔가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방을 가르더니 미녀의 목을 꽤뚫어 버리고는 맞은 편 벽에 깊숙히 박혀 들었다. 그의 왼손에서 발출된 것은 가느다란 비수였다. 미녀의 눈이 일순간 부릅 떠지더니 처연한 표정으로 바뀌며 슬픈 미소와 함께 스르르 무너져 버렸다. '으아아악, 야, 현현자, 한 번만 더 안아보고 죽였으면 어디 덧 나냐? 앙? 나도 좀 즐기자고!' "크크크크, 괜찮아. 미안하면 죄값을 받으면 그만이지. 이젠 애송이 너냐?" 허망함을 절로 느끼게 하는 웃음과 함께 시선을 백의 미공자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현현자, 갑자기 회복해버린 듯한 그의 놀라운 기세에 말문이 막힌 듯한 백의 미공자는 벌벌 떨면서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이까짓 신선폐따위로 감히 노부를 귀찮게 하려 들다니! 광오한 짓이었어. 어떻게 죽여줄까? 분근착골이라도 당해볼테냐? 아니면 가죽을 깔끔하게 벗겨서 소금밭 위를 뒹굴게 해줄까? 아니면 전신에 칼자국을 내서 똥물에 빠트려 줄까?" 쿠웅! 쿠웅! "......크크크, 평소에는 얼씬도 안 하던 쥐새끼들이 이 때다 하고 다 기어 나오는군. 가소로운 것들 다 덤벼라! 설사 내가 여기서 죽는다 해도 너희 모두를 저승길 동무로 삼으리라!" 백의 미공자가 서 있던 뒷벽에 쩍쩍쩍 균열이 가더니 일단의 무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창에서도 문에서도 우루루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 제일 우두머리로 보이는 황의 노인이 길게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고, 다른 무인들은 그를 보위하듯 주변으로 대열을 맞춰 섰다. "할, 할아버님. 저, 저자는 신선폐에 중독되고도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물, 물러서는 게 좋겠습니다. 할아버님." 백의 미공자가 후다다닥 황의 노인 옆에 서며 주절 거렸으나, 노인장은 바닥에 목을 뚫려 누워있는 전라의 여인을 바라보다가 한 숨을 쉬며, 그녀의 눈을 감겨 주었고, 바닥에 떨어진 비단 이불로 그녀의 나신을 슬며시 덮어 주었다. "꼭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나? 그래도 자네를 꽤 좋아하던 아이가 아니었는가? 한 번 쯤은 봐줄 수도 있는 것 아니었나?" "하하하하하! 정파 제일의 협의지객(俠義之客)이라는 무림맹주, 자네야말로 꼭 친손녀에게 이런 더러운 짓을 시켜야만 했나? 어차피 그녀는 자책감을 못 이겨 스스로 자결할 아이다. 차라리 내 손에 죽어버리는 게 매화선자로써도 마음 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현현자가 되려 큰 소리를 치자 무림맹주라는 황의 노인의 안색은 한 층 침중해졌다. "자네의 아들 며느리 부부와 손녀를 사로잡은 우리가 구태여 이런 짓을 할 이유는 없었지. 단지 편하게 협상을 하고자 하는 내 얕은 생각이었네만, 정말 얕은 생각이 되어 버렸군." "뭐, 뭐라고! 이런 더러운 것들이......!" 현현자의 분노가 솟구쳐 오르면서 저절로 내력이 끌어 올려졌으나, 검은 피가 다시 입으로 솟구쳐 올라 각혈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봐도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신선폐란 것이 완전히 효과를 보지는 못했어도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여준 듯 했다. "내 손녀딸의 목숨은 자네 아들의 한 팔로 대신하지. 내 잘못도 있고 하니 말이야.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다음에는 팔이 아닌 목을 자르게 될 걸세. 우리 일에 비협조적이어도 마찬가지겠지. 그 때는 자네 손녀를 제외한 모든 가솔들을 다 처단해 버릴 걸세." "너, 너 이러고도 무림맹주 자리에 계속 앉아 있을 생각이더냐? 소문이 무섭지도 않느냐!" "후훗, 이들은 나의 가문에서 데리고 나온 충복들로 무림맹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 여차해서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모두 나를 위해 자결도 할 수 있는 충성스런 무사들이다." "......" "자, 내놓게. 자네가 쓰러뜨린 도왕(刀王), 권왕(拳王), 독왕(毒王)의 진경(眞經)을 말이야. 뿐만 아니라 검왕(劍王) 자네의 진경(眞經)도 같이 줘야 겠어. 거부한다면 자네 가솔들은 이 세상에서 지워지겠지. 남은 자네라 해도 신선폐에서 완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내가 잘 알지. 날 상대로도 싸우기가 힘겨울 것이다. 하물며 내 부하들까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허허, 일평생 친구라고 믿었던 네가 이렇게 내 발등을 찍을 줄이야. 사람을 너무 믿어서는 안돼는 것이었어. 그 책은 내 지하석실에 나뒀다. 지하 석실로 가는 기관(機關)과 진법(陣法)은 오로지 나만 알지. 안내할테니 내 뒤를 따라오건 말건 맘대로 하게." "......뭐, 좋아. 대신 헛튼 수작은 금한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하면 뒤에 포박되어 따라올 자네 손녀와 아들 며느리는 영영 볼 수 없을 거야." "......" 황의 노인을 안광만으로 죽일 듯 무섭게 노려보던 현현자는 창을 통해 바깥으로 몸을 날렸고, 곧 황의 노인을 포함한 이 십 여 명의 고수들이 그를 중심으로 따라 오르는 일대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왠지 주변 풍경이 풍악산(風岳山) 일대와 많이 흡사해 보였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지형 자체는 바뀌기가 힘든 법이다. 현현자가 나무 끝을 밟고 올라섬으로 해서 사방팔방이 더욱 확연히 한 눈에 들어온 지세(地勢)는 아무리 봐도 풍악산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구타심결(毆打心訣)을 남겼다는 현현자가 혈해진경(血海眞經)을 남겼다는 현현자와 동일 인물이었단 말인가? 그럼 나한테는 왜 이렇게 열 받게 하는 구타심결이나 겨우 남긴 거냐고? 나도 다른 애들처럼 하늘을 향해 박차 오르고, 장풍도 쏘고, 번쩍 번쩍이는 검도 휘두를 수 있는 경천동지할 무공기서를 넘겨주지. 어찌하여 매맞기 딱 알맞은 희한한 구결이나 넘겨준 거냐고! 에잇, 열 받아. 현현자 영감탱, 점점 더 맘에 안 들어. 맘에 안 든다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09 17:38:40 고친날 2005-07-23 18:52:31 읽은수 10256 [ 15 K ] 제목 점소이 작삼(6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3] 현현자는 순신 간에 회운봉(回雲峰)을 넘어서 산골짜기 사이사이를 가로질러 날아가다시피 했는데, 발끝이 땅에 닿는 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주위 경관도 삽시간에 시야를 스치며 지나가서 눈이 매우 어지러웠을 뿐더러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맞바람의 힘이 매섭기 그지없었다. 내가 직접 날아가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라면 당사자에게 와 닿는 대기의 압력은 장난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분노(憤怒)로 부릅떠진 현현자의 눈동자는 단 한 번도 깜빡임이 없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간접적으로 그의 시야를 빌리고 있는 나의 머리가 심각한 두통에 멀미를 호소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잠을 깨지 않는 것은 참으로 용한 일이라 하겠다. 회운봉 다음 봉우리인 소룡봉(小龍峰)과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어 이름 붙혀진 구룡봉(九龍峰)마저 지나고 나니 내가 지명을 아는 봉우리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어차피 소룡봉과 구룡봉도 포연강 녀석이 사냥 얘기 속에 자신의 대활약을 침 튀기며 섞어 말하다가 강제로 알려준 탓에 그냥 어쩔 수 없이 알게 된 것이었다. 당연히 회운봉 중턱과 소장강 사이만을 와리가리했던 나로써는 풍악산의 깊숙한 지세에 낯 설 수밖에 없었다. 현현자가 막상 내려선 곳은 풍악산의 정상과는 까마득하게 떨어져 있는 그늘졌으면서도 외진 골짜기였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 투성이라 무공을 익힌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내려올 상상도 할 수 없는 험지 중의 험지였다. 문득 물 떨어지는 소리에 안력을 돋구고 바라보니 캄캄한 계곡 사이로 이 십 여 장은 되어 보이는 폭포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호수 위로 요란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곧 현현자를 숨 가쁘게 따라오던 황의 노인과 손자로 보이는 백의 미공자와 그의 수하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맨 뒤를 자세히 바라보니 귀여운 여자아이와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흑의 복면인 들에게 결박당한 채로 끌려오고 있었는데, 그 중 남자의 왼 쪽 팔목 부분이 바람 부는 대로 허전하게 펄럭이는 것으로 보아 황의 노인 말대로 팔이 잘려 버린 현현자의 아들인 듯 싶었다. 그를 향해 현현자의 시선이 돌려져 있는 동안 살을 에이는 듯한 아픔이 가슴 찡하게 와 닿고 있었다. '거 옛날 회상 같은데, 갖가지로도 노네. 현현자 영감탱, 당신의 가슴이 아프고 말고 간에 나까지 귀찮게 하지 마쇼. 쓸모도 없는 구결 하나 강제로 외우게 하고서 너무 공치사 하는거 아니요? 보여 주고 싶은 것 있으면 요약 정리해서 대충 넘어 갑시다. 귀찮아 죽겠소!' 꿈에나 나올 듯한 환상적인 미인을 안아보는 데 실패한 나는 잔뜩 심통이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고 질렀으나, 그게 과연 현현자 영감탱에게 전달되었을 지는 미지수였다. 더군다나 쓸 때 없이 자신의 아픈 감정까지 나에게 강제 전이시키다니 정말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현현자는 고개를 획 돌리며 곧 바로 폭포가 떨어지는 새까만 호수 위로 신형을 날려 물 위를 말 그대로 얼음판 위를 지나가 듯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물 위를 빠르게 스쳐 건너가는 등평도수(等平渡水)라는 신법(身法)이라 보여졌다. 물론 교옥정 누님도 등평도수를 펼쳐 보이긴 했지만, 솔직히 물이 튀겨서 바짓가랑이 일부가 젖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내 생각이지만, 설사 내가 교 누님에게 안겨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것은 별 차이가 없을 듯 했다. 그런데, 이 인간은 물 위에 물결 하나 안 남기고 스윽 지나쳐 가는데, 소름이 다 끼칠 정도로 깔끔하게 지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폭포 안으로 빠르게 들어온 현현자의 몸에는 물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호신강기가 극에 다다르면, 신경 쓰지 않아도 저절로 얇은 보호막이 생긴다더니 이 영감탱이 꼭 그 꼴이었다. 하여간 여러 가지로 사람 놀랍게 만드는 인간이었다. 곧이어 그는 다른 인간들이 뒤미쳐 따라오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져 있는 대리석들 중에서 유난히 푸른빛을 발하는 주먹만한 대리석 조각을 잡고는 왼쪽으로 두 바퀴 돌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한 바퀴를 돌리고서 다른 대리석들을 그것 위에 올려 놔 버렸다. 쿠쿠쿠쿠쿵! 스르르르릉 놀랍게도 막혀있는 줄 알았던 정면의 천연적인 돌 벽이 뭔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와는 한 박자 느리게 반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역행(逆行)의 원리로 돌 벽이 올라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기관(機關)이라고 하는 신비하면서 재미있고 아기자기한 세계(世界)가 펼쳐지는 것일까? 크크크...누구 기관에 좀 걸려서 무지막지하게 고생하는 꼴을 봤으면...... "호오, 여기가 비밀스럽게 말로만 전해지던 검왕 현현자의 비밀 석실이군. 아깝군, 아까워. 자네가 조금만 권력(權力)이라는 것에 눈을 돌려서 세력을 키웠더라면 이 곳은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암부가 될 뻔 했을텐데......" "......" 절정의 고수답게 가장 먼저 폭포로 날아온 무림맹주(武林盟主) 황의 노인의 말투는 영 마음에 안 들었다. 뒤이어 백의 미공자와 흑의 복면인 들이 떼거리로 폭포를 통과해 들어왔고, 사로잡혀있는 아들 며느리 부부와 손녀 때문인지 현현자 영감은 별 대꾸도 없이 그냥 자신이 가던 길로 계속 갔다. 지하 석실 내부도 인조적으로 만든 것인줄 알았더니 원래는 천연 동굴이었던 모양이다. 동굴 내부에 가득 차 있는 습기는 둘 째 치고도 수 백년의 세월이 걸려야 겨우 하나 만들어질까 말까하는 석주와 석순이 여기저기 돋아나 있는 것을 보니 밖에서 보던 비밀스런 운치와는 전혀 다른 신비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난 나뭇결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조화로움'을 이루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현현자의 시야를 통해 들어오는 지하석실의 내부 천연동굴의 세계가 이루는 은은한 옥빛의 석주와 석순은 가히 인간의 손으로는 조각해 낼 수 없는 자연만의 독특한 '조화로움'을 유감 없이 펼쳐 보이고 있었다. 어떤 석주는 얼핏 보기에 절색의 여인과도 같았고, 다른 석순은 성난 파도와 같았으며, 또 그 어떤 것은 구름다리처럼 공중에서 기이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단지 톡 건드리면 무너져버릴 듯한 위태로움이 자리잡고 있는 게 아쉬울 뿐......연신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천정과 벽은 마치 옥으로 빚었다가 녹아 내리는 듯한 묘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종종 석주나 석순이 자라는 대신 조그마한 물웅덩이가 형성된 곳도 있었다. 현현자는 뒤따라오는 인간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타고 계속 내려가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마 맨 뒤에 결박되어 끌려오는 친인들 때문에 극도로 불안하면서도 초조하기 그지없는 상태 같았다. 단지 평상시에 갈고 닦은 게 있어서 그런지 겉으로는 잘 티가 나지 않았을 뿐 속으로는 연신 가슴이 찡찡거려서 엄청나게 귀찮았다. 드디어 한참을 내려가자 돌계단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양옆으로 사천왕 조각상이 하나씩 서 있었는데, 째려보는 눈초리가 마치 여기 들어오면 너 죽는다 하고 경고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현현자는 뒤따라오는 일행에게 기관에 관련된 부분은 보여주기 싫었는지 등으로 가로막은 가운데, 멀리서 사천황 조각상 뒤에 있는 자그만 돌멩이를 격공섭물(隔空攝物)인지 허공섭물(虛空攝物)인지를 이용해서 지긋이 누르는 것이었다. 물론 뒤따라오던 인간들이야 그냥 문이 저절로 열리는 줄 알고 놀라는 듯 했지만, 적어도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뭐 현현자의 눈이 곧 내 눈......크으으으, 어, 어감이 마음에 안 드는걸. 영감탱 눈이 왜 내 눈이야! 지하석실은 천연동굴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지만 인공물을 부분적으로 가미함으로써 매우 완벽한 구조로 이어지고 있었다. 천정에는 그 비싸다고 하는 야명주(夜明珠)가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서 보통 사람의 시야로도 곤란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를 해 놓았고, 돌계단도 자세히 보면 울통불통 돌기가 나 있어서 습기로 인해 미끄러지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단지 벽을 지날 때면 사천왕 조각상이 반드시 놓여 있었는데, 그 때마다 현현자는 꼭 어딘가를 허공섭물로 누르곤 했다. 문제는 그것이 꼭 사천왕 조각상 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입구 주변에 일정하게 돌기가 아홉 개가 나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각 통로마다 그 아홉 개의 돌기 중 하나를 누르는데, 일정한 법칙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다. 무작위로 누르며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단지 사천왕 조각상들이 항시 다양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는 게 수상하다고 하면 수상할까? 쿠궁! 퓨퓨퓨퓨퓨!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뒤돌아 본 일행들은 맨 끝에 따라오던 현현자의 아들이 기회를 틈 타 기관을 건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서 있던 곳을 반경으로 오 장 안에 있는 공간으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려서 아내와 딸은 비명을 지르며 숨졌고, 흑의 복면인들도 발빠른 한 둘을 제외하고는 세 네 명이 같이 죽어버렸다. 그에게는 현현자에게서 받은 비전 호신강기라도 있었는지 바로 죽지도 않고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 이, 이들은 진경을 뺐자마자 우리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갇혀 있는 동안 기절한 척 하면서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로 다 들었습니다. 어, 어차피 죽을 목숨, 먼저 갑니다. 꼭, 이 놈들의, 이 놈들의 뼈를 갈아서 우리 가족의 무덤에 거름으로 써, 써 주......세......" 마침내 기력이 다 했는지 온 몸에서 피를 철철철 쏟으며 스르르르 무너져 버렸다. 사정을 안 현현자의 입에서 분노와 슬픔에 가득 찬 사자후(獅子吼)가 터져 나왔고, 방심하고 있던 몇 몇 흑의 복면인 들은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풀썩 쓰러져 버렸다. 황의 노인이 즉각 현현자를 제압하기 위해 검을 빼들고 달려들며 검기 몇 가닥을 뽑아 내었는데, 현현자는 그를 상대하지 않고 번개처럼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아들 내외 가족이 죽어버린 이상 안내를 할 이유도 진경을 내줄 이유도 사라져 버린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원한에 독이 올라 처절하게 죽일 결심을 한 듯했다. 허공섭물로 건너편에 멀찍이 있던 문을 미리 연 현현자는 바로 뛰어들면서 문을 다시 닫았으나, 문이 닫히기 전에 황의 노인만은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들어와 버렸다. "젠장, 이 놈의 신선폐에 뭘 섞어 넣었길래, 이렇게도 내 내력이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거냐!" "무형지독을 조금 섞어 넣었지. 신선폐만으로는 네 놈이 금새 회복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의 말에 가뜩이나 독이 올라있던 현현자의 분노는 한층 더 격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매화선자도 처음부터 같이 죽일 생각이었단 말이냐!" 현현자의 말에 황의 노인의 안면에는 조금도 변화가 떠오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뚝뚝하게 말대꾸까지 해왔다. "그 아이가 스스로 택한 길이다. 자네를 속인 이상 살고 싶지 않다며 자네와 같이 죽겠다면서 스스로 자청을 했다. 자네가 죽이지 않았어도 무형지독에 언젠가는 죽을 아이였던 것이지. 자네 손녀뻘이나 되는 아이가 그토록 자네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나?" 현현자의 가슴속에서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갖가지 감정들이 솟구쳐 올라와 내 마음을 직접적으로 압박해 왔다. 자신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목을 꿰뚫려 죽으면서도 슬픈 미소를 떠올리며 죽은 매화선자의 얼굴이 아른거리는가 하면, 복수를 외치며 비통하게 죽은 아들 내외와 세파에 휘말려 여리디 여린 꽃봉오리를 채 열지도 못하고 죽어 버린 불쌍한 외손녀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맨 마지막에 스쳐간 얼굴은 젊었던 시절에 의기투합하며 전장을 헤치고 나갔던 황의 노인의 믿음직한 얼굴이었다. 너무나 또렷한 그들의 영상이 내 뇌리를 어지럽히며 쉴 새 없이 격한 감정을 불러 일으켜 눈물이 또르르르 흘러 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이런 개 같은 육시랄! 난 하나도 안 슬퍼! 얼굴이 떠오르지도 않는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도! 항상 무뚝뚝했던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도! 난, 난 안 울었어! 현현자! 이 개새리! 니가 뭔데, 니 감정을 나한테 강제적으로 심어주는 거야!! 그만해! 그만하라고!' 그러나,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황의 노인의 얼굴이 울퉁불퉁하게 굴곡져 보였다. "꼭, 꼭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나? 그냥, 그냥 달라고 했으면 내가 안 줬을 것 같은가? 왜, 왜 이렇게 힘든 길로 돌아서 가야만 하는 거였나?" 황의 노인은 무뚝뚝하기만 하던 현현자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자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는지, 의기소침해졌는지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권력의 매력, 한 번 그것에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다. 내가 별 의미 없이 툭 던진 말 한 마디에 멸문지화를 당하는 문파나 세가를 보면 은근히 희열이 느껴지곤 했지. 그 권력을 유지하려면 힘이 필요한 법, 자네와 우정을 나눴던 시절의 나는 그 시점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지. 그런 거였다. 그런 것이었어. 우욱." 검기를 세우고 있던 황의 노인이 말을 마치며 피를 한 말은 쏟아 낸 듯 싶었다. 현현자가 분노에 미쳐서 사자후를 터뜨릴 때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었던 그는 이미 심각한 내상(內傷)을 입은 상태였던 것이었다. "미안한 부탁이지만, 내 목숨 대신으로 내 아들을 살려줄 수 없겠나? 비록 자기 누이의 죽음마저 도외시 할 정도로 배은망덕한 놈이지만, 우리 집안의 혈통을 이을 유일한 녀석이네." 현현자는 그의 말에 쓸쓸히 고개를 저으며 나즈막하게 입을 열었다. "틀렸어. 내 아들 녀석이 죽으면서 발동시킨 기관은 이 곳 문이 닫힌 시점에 다른 기관을 연이어 발동시켜 버렸는데, 그 지독함은 만든 나마저도 치가 떨릴 정도지. 오히려 화살에 몸이 꿰뚫려 죽은 녀석들이 행복하게 죽은 셈이야." "그, 그런가? 후훗, 내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 해도 되겠나?" "......" "이 세상을, 나를 이렇게 타락시켜버린 이 세상을 피로, 피로 적셔 주게. 크크큭." 퍼억! 자조적인 웃음을 짓던 황의 노인은 그대로 자신의 천령개를 내리쳐 뇌수가 쏟아진 채로 즉사해 버렸다. 그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현현자는 홀연히 몸을 돌려 어디론가 신형을 날리며 외쳤다. "좋네, 좋아! 내 꼭 자네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 주겠네. 우리는,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가 아니었는가! 우리를 이 꼴로 만든 세상이 당연히 핏값을 받아야 하지. 암, 암 그렇고 말고!!" 너무 빠르게 날아가서 주변 경관이고 뭐고 간에 시야에 잡히지 않았지만, 맨 마지막에 그가 멈춰선 곳의 내부가 바깥의 차가운 석조건물들과 달리 일견하기에도 비싸 보이는 자단목으로 지어져 아담하면서도 운치 있는 분위기가 풍기는 것으로 보아 그의 거처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름 있는 화가들이 그렸을 법한 수려한 사군자와 명필들이 걸려있는 거실을 지나친 그는 무수히 많은 서책들이 꽂혀 있는 맨 끝 방으로 들어가서 대리석으로 된 탁자의 네 모서리를 허공섭물로 동시에 비틀었다. 그그그긍 그러자 대리석 한 가운데가 열리며 조그만 공간이 나타났는데 그 곳에는 혈해진경(血海眞經)이라고 써진 빨간 책자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꺼내 든 현현자는 회한에 찬 한 숨을 내뱉으며 그 책을 바라보다가 자신이 앉아 있던 돌로 된 의자를 뒤집더니 그 곳에 책을 끼워넣고는 밀랍을 녹여서 그 사이를 봉인해 버렸다. 의자를 다시 뒤집고는 서고에서 아무 빨간 책자를 빼서 제목을 지워버리고는 대리석 탁자 가운데 공간에 넣고는 네 모서리를 다시 뒤틀어서 뚜껑을 닫아 버렸다. 홀로 남은 현현자는 그 누구도 대화할 상대가 없는데도 미친 인간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후우, 언젠가는 이것을 찾으러 올 놈들이 있겠지? 분명 이 대리석 탁자를 여는 순간 내가 이제부터 설치할 새로운 기관이 작동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정신이 흐려진 놈은 즉시 이것을 가지고 도주하려 들 테지. 당연히 서로 칼부림을 할 테니 더 더욱 책 내용을 살피기는 요원하겠지. 칼부림과 기관의 함정에서 살아남은 녀석은 또 다른 녀석에게 쫓겨 계속 내용이 뭔지도 확인하지도 못한 채 밖으로 나갈 것이야. 그러면 그로 인해 한 바탕 혈풍이 불 수 도 있겠지. 그런데, 만약 진짜 혈해진경(血海眞經)을 찾는 녀석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흠......흠." 현현자는 서고에서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는 빈 책자와 문방사우를 꺼내들고 먹을 갈았다. 붓에다가 먹물을 찍고는 미친 사람처럼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그래, 그래, 가져 간 진경을 걸레 조각으로 만들어 버릴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거야. 내가 평상시부터 궁리하고 있던 그것을 완성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혈해진경을 가져 가서 익힌 놈이 강호일통을 부르짖으며 세상을 피로 적셔버릴 무렵에 그것을 깰 녀석이 나타나 그 놈을 바보로 만든다면 일통된 세력들은 또 조각조각 갈라져서 서로 피 터지게 싸우겠지. 피로 얼룩진 천하가 다시 피로 얼룩지도록 만드는 거야. 으하하하! 하하하하하핫!......" 미친놈처럼 웃던 그는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일어나서 생각지 못한 난간에 부딪힌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중얼 거렸다. "그것으로 또 강호일통을 하려 들면 어떻게 하지? 흠......옳거니 섭혼대법을 걸어야겠다. 이 새로운 내공심결을 손에 넣을 녀석은 아둔하고 어리석으며 야망이 없어서 세상으로부터 도망만 치려하면서도 심심하면 얻어터지고 사는 불쌍한 녀석만이 익힐 수 있도록......설사 그 녀석이 정상에 우뚝 서는 날이 와도 그것을 먹지도 못하고 도망가 버리도록......과연 그런 놈이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는다면 천하는 혈해진경으로 인해 몇 세대 동안 피로 젖을 게야. 그것도 괜찮겠지." 현현자가 책을 서술하기 전에 앞서 맨 앞 겉 표지에 뭔가 끄적거리길래 자세히 보니 구타심결(毆打心訣)이라고 써넣고 있었다. '아둔하고......어리석으며......야망이 없어서......세상으로부터 도망만 치려 하면서도......심심하면 얻어터지고 사는......불쌍한 녀석......?!' 그게 나냐? 이 열 배는 빌어먹을, 스무 배는 우라질 현현자 영감탱이가 누굴 밥으로 아나! 이 따위 허접한 심결 필요없으니 제발 가져가라! 나도 제대로 된 다른 무공 좀 익히게 가져가라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0 06:34:04 고친날 2005-07-23 18:53:00 읽은수 10435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64)-당근과 채찍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4]주령령의 폭주(2) 전신에 걸쳐 휘감겨 있는 아릿아릿한 통증이 나를 심연의 꿈속에서 반 강제로 끌어 올렸다. 희미하게 의식을 차리면서 내가 생존해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먼저 떠올린 생각은 이번에도 죽지 않고 구차하게 살았구나 하는 비굴함과 또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구나 하는 안도감이었다. 어느 쪽에 더 무게가 실렸는지 아리송할 정도로 두 감정은 비슷한 비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숨을 희미하게나마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알싸하면서 기분 좋은 울금향이었다. 내가 알기로 내 주변에서 울금향을 쓸 사람은 단 두 사람 밖에 없었다. 개방 거지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솔선수범으로 청결을 유지해 다른 거지의 모범이 되는 소방(蘇芳), 더불어 어떤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나를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패려고만 하는 냉혈마녀(冷血魔女) 주령령(周鈴鈴)......이 두 사람 중에 한 명이라면 당연히 소방일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하기도 했다. 주령령이라면 어떤 짓을 하려 들지 알 수 없다. 이번 일을 계기로 주령령이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죽하면 거만하고 까다로운 그녀가 자기 애인을 볼 낯이 없어서 인피면구를 쓰고 다니겠는가? 앞서도 말했지만, 가까운 과거(過去)에 정신 발작을 일으켜서 수많은 무고한 민초들을 해친 것이 확실했다. 그래서, 황실 근위대의 추격을 피해 이곳에 은거(隱居)하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제, 제발 내 옆에 있는 인간이 소방이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면서 슬그머니 실눈을 떠보았다. 약간 그늘이 진 듯한 텅 빈 방 내부는 내 방과 크기나 구조가 비슷했으나, 엄연히 내 방이 아니었다. '어라? 아무도 없잖아. 그럼 이 울금향은 어디서 나는 것이지?'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쫓던 나는 그 향이 내가 덮던 이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뽀송뽀송한 고급 원단 질감의 새하얀 이불에서 특히 강하게 나는 걸로 보아 이 방의 주인이 덮던 이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울금향 냄새는 어느 정해진 특정 장소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라 방 전체에 배여 있다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이 방의 주인은 평상시에 울금향을 쓰는 사람인 것이었다. 벽에 걸린 난초 수묵화라던가 선반 위에 꽤 비싸 보이는 청록 빛 도자기라던가 탁자 위에 펼쳐진 화선지 위에 먹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글씨가 써져 있는 것으로 봐서 무척 현숙하면서도 섬세한 사람이란 것도 더불어 느낄 수 있었다. '누굴까? 주령령이야 지금 확실히 미쳐있는 데다가 원래 섬세한 구석이 없으니 예외로 하고, 남는 것은 소방인데, 소방의 은신처가 이 곳일까? 아니면 제 삼자일까? 거 참.' 문득 햇살이 느껴져 창 측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햇살이 직접적으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 미약한 반사광이었다. 해가 중천(中天)에 떠 있는데도 햇빛을 등지고 있는 위치. 북향(北向)인 곳, 내 방이 남향(南向)이니까......설마! 확실히 확인을 하기 위해 욱신거리는 몸을 달래며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서려 했다가 붕대가 칭칭 감겨 있던 양발목이 순간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호소하는 바람에 그만 마루 바닥 위에 쿵 소리를 내며 엎어져 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전신을 엄습하는 지독한 통증과 함께 그녀에게 당했던 일 들이 주마등처럼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녀 욕을 속에 있는 데로 토해 내버렸다. "젠, 젠장 할! 미친 령령! 빌어먹을 령령! 우라질 령령! 미칠려면 곱게 미치지. 왜 그렇게 지랄발광을 하도록 미쳤냐고! 짜증나는 미친 령령, 내 언젠가는 네 년을 홀라당 발가벗겨서 이 세상에서 제일 비참하게 유린해 버리겠다. 그걸로 끝낼 줄 알구! 어림없지. 전신의 살가죽을 산 채로 벗겨내어 소금밭 위에서 죽을 때까지 구르게 해주마. 네가 죽고 나면 곱게 묻어줄 것 같으냐! 어림없다. 토막토막 잘라서 소 잡는 칼로 무식하게 다듬은 후 길거리 개 먹이로 뿌려줄 거다. 푸하하하하!" 별 생각 없이 평상시 쌓인 대로 질러버린 고함이었지만, 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이 올라서 마음껏 웃을 수 있었다. 끼이이익 때 마침 문이 열리면서 방의 주인인 사람이 들어온 듯 싶었다. 그가 누구인가는 둘 째 치고도 버릇없이 고함 질러버린 것을 다 들려버렸을 게 머슥해져서 웃음을 멈추고 그를 보고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할려고 고개를 조금 틀었다가 또 전신을 자극하는 통증에 이를 악 물며 이맛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눈가에 스치듯 얼핏 보인 것은 녹피 가죽신을 신고 새하얀 나삼의를 펄럭이며 성큼 성큼 걷는 여인의 아리따운 다리였다. 왠지 매우 낯익다는 생각이 들어 기억을 되새기려 할 때 방주인은 나를 섬섬옥수로 빙글 돌리더니 안아 올렸...... '주......령......령?!' 예의 냉막한 시선으로 날 내려다보는 이는 바로 내가 방금 실컷 욕을 한바탕 퍼 부어버린 주령령(周鈴鈴)이었다. 그 순간 모든 머리카락이 쭈삣쭈삣 서면서 시체가 사후경직 되듯 온 몸이 차갑게 굳는 것을 느꼈다. 그야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냉혈마녀(冷血魔女)앞에서 마녀 욕을 했으니 그 어떤 끔찍하고 처절한, 지극히 마녀다운 보복 조치가 뒤따르리라는 것은 뻔할 뻔 자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 곳은 다름 아닌 마녀의 방안이면서 지금은 아예 마녀의 품안에 안겨 있지 않은가! 내 방과 비슷한 구조면서 북향이면서 울금향을 쓰는 사람이 주인인 사람은 남향인 내 방 건너편에 사는 주령령일 거라는 것을 빨리 생각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저 날 다시 침대 위에 올리고서는 차갑게 가라앉은 커다란 눈으로 도마 위의 생선 바라보듯이 내 전신을 쓸어 보고 있었다. 그 긴장감을 못 이겨 침이 꿀꺽 넘어갔는데, 방안이 너무 조용해서 상대적으로 크게 울렸다. 그 어떤 변명을 해야 이 위기를 슬기롭게 넘길 수 있을지 식은땀을 흘리며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 보려해도 머릿속이 새하얀 화선지처럼 깨끗하게 텅 비어버렸을 뿐 아니라 입 자체도 열리지 않았다. 더욱이 방 한 구성에 있는 의자를 령령이 들었을 때는 그걸로 후려 패려나 보다 하고 사시나무 떨 듯 떨어야 했다. 그녀는 그걸로 날 후려 패는 대신에 침대 옆에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아서 투명한 심해와 같은 커다란 눈을 내 시선 앞으로 들이밀었고, 그 바람에 그녀의 강렬한 울금향을 담은 숨결이 지척에서 느껴졌다. 잠자코 벌벌 떠는 날 보며 조롱하듯이 씨익 미소지은 그녀는 섬섬옥수로 내 발목을 안마하듯이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새빨갛게 무르익은 앵두 같은 입술을 열었다. "다른 욕은 그럭저럭 들어줄 만 했는데, 나를 발가벗겨서 이 세상에서 제일 비참하게 유린하겠다는 말은 좀 심하지 않았어?" "......" 당연히 할 말을 잃은 나로써는 그저 침묵을 지키며 호랑이 앞의 토끼처럼 벌벌 떠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우드드득 "커헉!" 그녀가 쓰다듬던 발목을 심하게 뒤틀어 버리는 바람에 짜릿한 극통이 등줄기를 타고 전신에 퍼졌다. 다른 발목마저 섬섬옥수로 부드럽게 더듬던 그녀는 그 부분도 우드득 소리가 나게 비틀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퍼부은 욕을 가슴속에 담았을 주령령의 보복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었다. "내 몸의 살가죽을 산 채로 벗겨내어 소금밭 위에서 죽을 때까지 구르게 하겠다는 말에도 책임을 질 수 있는 거야?" "......" "흥, 너 그새 간땡이가 잔뜩 부었구나. 벌써 내가 질문을 두 번이나 했는데도 침묵을 지키다니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야?" "......" 내가 변명은커녕 사시나무 떨듯 떨기만 하자 흥이 떨어졌는지 내 가슴과 배를 동동 싸맨 붕대로 섬섬옥수를 내민 그녀는 바로 화풀이하듯이 붕대를 마구 찢어 버렸다. 꽉 매여져 있던 붕대가 강제적으로 당겨지며 뜯어지자 그 때마다 그 상처부분이 심하게 압박을 당해서 발목을 비틀 때와 맞먹는 극통이 전신에 퍼졌으나, 이를 악물어 신음소리 하나 새 나가지 않게 했다. 신음이라도 흘렸다간 령령이 무슨 핑계를 대고 괴롭히려 들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가슴과 배를 냉막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가늘게 실눈을 내려 뜬 령령은 내 상처를 내려다보며 상처 위에 내려앉은 피딱지 덩이들을 인정 사정없이 뜯어 내 버렸다. 그 통증이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꽉 쥔 주먹 안에 땀방울이 송글 송글 맺혔다. "호오, 잘 하면 그 주먹으로 한 대 치겠다. 주먹에 잔뜩 힘들어 갔는데......" 짜릿한 통증을 참느라 이맛살을 찌푸리면서도 바로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나, 그녀는 용서 없이 내 상처 위에 쓰린 고약들을 덕지덕지 바름으로써 내 회피에 강공으로 회답했다. 전신이 불로 지지듯 화끈 거려서 오만 우거지상을 썼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이만 악 물었다. 알싸한 울금향 숨결이 느껴져 간신히 눈을 떠보니 눈앞으로 재밌다는 듯이 미소짓는 그녀의 얼굴이 디밀어져 있었다. "야, 야 인상만 쓰면서 참는 척 하지말고 나 한 대라도 쳐 봐. 사내라는 녀석이 주먹을 쥐었으면 휘두르기라고 해야 할 거 아냐? 그것도 못하냐? 엉?" "......" 내가 대답이 여전히 없자 코웃음치던 그녀는 그대로 잽싸게 고약을 바른 부분에 붕대를 돌려 감아버렸는데, 그 쪼임이 얼마나 눈물나게 아프던지 이루 형용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번에는 베개로 내 허리에 대고 비스듬히 세원 준 그녀는 언제 가져왔는지 탁자 위에 있던 죽 사발을 내 얼굴 옆에 들고서는 숟가락으로 가만히 떠 먹여 주는 것이었다. '이, 이 마녀가 정말로 미쳤나? 왜 이래?' "그리고, 마지막으로 뭐라고 했더라? 토막토막 잘라서 소 잡는 칼로 무식하게 다듬은 후 길거리 개 먹이로 뿌려준다고 했지? 너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어?" "......" 그녀가 매몰차게 몰아세우듯 던진 질문에 순간적으로 사레가 걸린 탓에 입 속에 들어갔던 죽이 물린 채로 기침을 해버려서 여기저기로 튀고 말았다. 특히 그 걸죽한 건더기 중 일부가 령령의 얼굴에 묻어있는 것을 봤을 때는 안 그래도 경직되다시피 해버린 전신에서 핏기가 사악 가시는 듯 싶었다. 이제야 말로 죽었구나 싶어서 체념을 하려는 찰라, 죽을 떠내던 자세 그대로 숟가락을 들고 있던 령령의 손은 한참이나 내 입 바로 앞에 서 있었던 모양이다. "나 팔 아프다. 나 힘들게 하면 이 죽을 그대로 니 상처 위에 부어 버리는 수가 생긴다. 좋은 말로 할 때 아가리 열어라. 엉?"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란 나는 주저 없이 입을 열어 그녀가 떠 먹여 주는 죽을 남김없이 넙죽넙죽 먹어야만 했다. 물수건으로 자기 얼굴과 내 턱을 타고 흘러내린 침과 죽을 닦아 낸 그녀는 다른 물수건으로 붕대를 싸매지 않은 다른 내 신체 부분를 의외로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이 여자가 왜 이렇게 갑자기 고분고분하게 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즘 그 해답이 되는 말이 그녀 입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네 회복 속도가 괴물 같아서 너무 기뻐. 후훗. 처음에는 죽은 줄 알고 조금 당황했었지. 숨은 쉬길래 내 방에 데려다 놓고 응급처치 정도만 했더니 의외로 끈질기게 살아서 회복해 나가더구나. 넌 꼭 쾌유해서 빨리 일어나야 해. 너 만큼 내 주먹빨이 잘 들어먹는 녀석은 또 없으니까." 령령이 물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는 동안 이제 고문 시간이 지났구나 하는 것을 느낀 내 몸의 잔 떨림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생각 외로 심한 고문은 없었기에 의문이 들기도 하던 찰라 그녀의 말을 들으니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용솟음 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날 간호해 준 이유가 하루라도 빨리 쾌차해서 쾌적의 구타 가능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소리 아닌가? "령령 아가씨!" "왜?" "나처럼 허약한 녀석을 패서 뭐합니까? 차라리 이 산에 몰려있는 강한 무림인 들을 패세요!" "어쭈, 반항이냐? 정말 너 그동안 많이 컸구나. 많이 컸어." 간만에 바라보는 내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인 주령령은 웃으면서 섬섬옥수로 내 뺨따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개기면 지금 후려 패는 수가 있다. 엉?" "......" "후후훗 네 말에도 일리가 있지만, 다른 녀석은 팰 수가 없어." "왜, 왜요?" "너무 쉽게 죽어버리거든."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1 06:27:58 고친날 2005-07-23 18:53:33 읽은수 10007 [ 11 K ] 제목 점소이 작삼(6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5] 적어도 하루 삼 세 끼는 주령령이 꼭 죽 사발을 챙겨와서 떠 먹여주는 통에 배가 고프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또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서 죽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고, 심지어는 죽을 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이어 소화 불량 증세를 보이곤 했었다. 그러나, 며칠 지나 익숙해지고 그녀 스스로도 별 다른 발작 증세를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공할 내 회복력(回復力)탓에 상체를 일으키는데 아무 이상이 없게되자 스스로 일어나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단지 여간 부담스러우면서 불편하기 그지없는 부분이 몇 가지 남아 걸리적거리곤 했다. "저, 저기 령령 아가씨, 별, 별거 아니지만, 부, 부탁이 있는데요." "별 거 아니면 안 들을래. 정말 별거 아니야?" "......" 언제나처럼 조그마한 상에 밥을 차려 온 그녀는 이제 스스로 상반신을 일으켜 밥을 먹을 수 있는 수준으로 상태가 호전되자, 내 입에 죽을 떠 넣는 짓은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밥을 먹는 동안에 그 커다란 왕방울 같은 눈을 반짝반짝 거리며 내 밥 먹는 꼴을 빤히 쳐다보는데,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엄청나게 불편했다. 이전에 그녀가 떠 먹여줄 때, 언제 화를 내며 발작을 일으킬까 걱정이 되어 소화불량에 걸려 있었다면, 이제는 저렇게 잠자코 노려보다가 무슨 핑계를 대면서 패려고 할지 걱정이 되어 다시 소화불량에 걸릴 지경이었다. 침대 위에 걸터앉아 밥 먹는 것을 지켜보던 그녀는 그냥 내가 잠자코 깨작깨작 거리며 먹자 냉막하면서도 조금은 인간미가 엿보이는 미소를 살짝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뭐, 네가 나한테 부탁한다는 말을 한 것 자체가 거의 기적이니까, 괜찮아 말해봐." "정, 정말이요?" "대신 듣고 나서 내 생각에 별 거 아니면 그냥 살짝 한 대만 쳐봐도 될까? 아, 정말 살살 때릴게. 어때? 괜찮지?" "......" 그 성질 남 주냐? 그냥 소화불량 걸려 줄 테니까 계속 꼴아 봐, 이 마녀야. 솔직히 미친 상태였다고 해도 령령이 아작을 내놓은 것이니 내 보행 불편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그녀가 제공해주는 조그마한 편의는 당연한 내 권리였다. 문제는 그 권리 중에 바라지 않는 것도 껴있다는 것이었다. '끄응, 허억 신, 신호가 왔다. 젠, 젠장......' 마침 령령은 내가 깨작거리며 해치운 밥그릇들을 상과 함께 들고 내려가 버렸다. 그녀가 없는 이 틈에 재빨리 그곳에 갔다 와야 했던 것이었다. 너무 처절하게 탈골된 상태에서도 한참동안을 무겁게 짓눌려져 여기저기 심각한 손상을 당한 나의 발목뼈만큼은 다른 상처보다 회복이 늦었다. 그래서, 살짝 바닥에 내려서는 이 순간에도 찡한 통증이 발바닥에서부터 신경 줄기를 타고 전신에 퍼져 찌릿찌릿 거렸지만, 그래도 버틸만했다. 아니 버텨야 했다. 어서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안 그러면 그보다 더욱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끼이이익 문을 살짝 열고서 고개를 슬그머니 내밀어 바깥의 동정을 살핀 후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복도로 걸어 나갔다. 발바닥 신경으로부터 엄청나게 찌릿찌릿 거리는 통증이 전신의 신경을 퍼져 나갔지만, 그보다 급한 것은 그곳이었다. 뿌드드득 "끄아아아악!" 쿠당탕 쿵! 아직도 덜 고정된 발목은 여지없이 어긋나 버리면서 채 몇 걸음 가기도 전에 엄청난 통증과 함께 그대로 날 쓰러뜨려 버렸다. 엎어진 상태로 이를 악물며 발목을 쥐어 잡으며 그 극통으로 인해 벌벌벌 떠는 내 시야에 새하얀 나삼의를 펄럭이며 날아드는 녹피 가죽신이 보였다. '제기랄, 꼬라지 더럽게 되 버렸군. 내려가지도 못하고 현장을 들키기까지 해 버렸으니!' 주령령(周鈴鈴)은 즉시 부러진 발목을 잡고 몇 군데를 거세게 누르며 뿌드득 소리가 들릴 정도로 돌려 버렸다. 그 짧은 순간 전신을 꿰뚫어 버리는 어마어마한 극통이 체내를 돌아다니며 인정 사정없이 유린해 버렸다. 급기야는 이 나이 먹고 양 눈에 눈물 한 방울씩이 나도 모르게 맺히면서 찔끔 흘려 버리는 볼 쌍 사나운 꼴까지 연출해야 했다. 비록 발목은 퉁퉁 부어 올라 있었지만, 통증은 순식간에 가라앉아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으나, 령령 앞에서 안심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날 가볍게 안아든 그녀는 날 거칠게 침대에 집어 던지고는 바로 내 목을 졸라왔다. 눈앞으로 디밀어진 그녀의 동공이 낮인데도 불구하고 푸르스름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매서우면서도 날카롭게 풍겨오는 울금향 숨결이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분명 말했지? 내가 다 나았다고 인정하기 전까지 절대 니 멋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커, 컥, 했, 했어요." "네 알량한 자존심 하나 때문에 회복기간이 일 주야는 더 늘었어.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네 녀석이 어서 완전히 회복해야 나도 마음놓고 편안하게 널 팰 거 아냐? 그 기다림의 기간이 일 주야가 더 늘어났어. 차라리 내가 여기서 니 자존심 세워 줄 테니 그냥 죽어!" "커, 커헉, 으으윽!" 그녀의 두 손에 들어간 힘이 아까와는 비교가 안 되도록 강해지고 있었다. 생명의 위기를 느낀 나는 강력한 생존 본능을 바탕으로 한 필살의 검결지(劍訣指)를 그녀의 가냘퍼 보이는 목에 전력으로 꽂아 넣었다. "끄아아아악!" 누구 비명 소리였냐구? 당연 내 비명 소리였지. 집게와 중지 손가락을 모아 검신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기세는 이제 겨우 삼재검법의 묘미를 조금 느끼고 나한테는 꿈같은 소리였다. 내 딴에는 목 중에서도 가장 약해 보이는 목근육과 목젖 사이를 노리고 찔러 넣은 것이었지만, 그녀의 매끄러운 살결을 느끼는 순간 되 튕기는 힘에 의해 오히려 내 손가락이 안 부러진 게 다행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랄까? 내 목을 무서운 악력으로 조르던 령령이 움찔하더니 잠시동안 무섭게 날 노려보다가 화가 난 듯 문을 쾅 닫으며 나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휴우, 정말 어서 나아야 할 텐데, 이러다가 언젠가는 정말로 비명횡사하고 말 거야.' 끼이이익 살았다는 기쁨의 한 숨도 잠시였다. 다시 들어 온 령령의 손에는 차가운 금속 빛을 내뿜는 청동 요강이 들려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날 죽이려고 날뛰더니 화를 내며 나간 새 용케도 잊지 않고 저 요강을 잘도 들고 와 버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망설임 없이 내 허릿춤 요대를 익숙하게 풀어 내리고서 바지를 훌러덩 벗긴 그녀는 고의도 안 걸쳐 바로 드러난 내 가운뎃다리의 허전함을 무시한 채 날 가볍게 안아 올렸다. 각각 내 허리와 양다리의 무릎을 안아 올려서 발목이 땅에 닿지 않게 배려한 채 청동 요강 위에 내 엉덩이와 가운데 딸랑이를 올려놓고는 말 없이 날 째려 보았다. 한 마디로 어서 볼 일 보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빌어먹을 저런 마녀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면서 잘도 변이 나오겠다. 쪼르르르륵 역시 아니나 다를까? 소피만 조금 나오고 아까 전까지 찡 하고 신호를 주던 아랫배가 조용했다. 피멍이 채 가지시도 않은 목조르기의 끔찍한 기억이 생리욕구마저 짓눌러버린 것이리라. 나도 이번만큼은 삐져서 억지로 변을 뺄 생각도 하지 않고 세월아 네월아 하며 침묵을 지킨 채 무언의 시위를 벌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쌔액쌔액 거리는 알싸한 숨결이 느껴져 시선을 돌려보니 무진장 열 받은 듯 이맛살을 찌푸린 령령이 안 그래도 커다란 눈알을 부라리며 입을 열었다. "아랫배 힘 안 줘? 내가 직접 니 똥구녕 열어서 숟가락으로 퍼 내줘? 엉? 정말 그렇게 해줄까?" 난 그 즉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사력을 다해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이 마녀가 자기 입으로 하겠다고 내뱉은 말은 정말로 골 백 번은 하고도 남을 년이니까 말이다. 뿌지지직 뿌직 뿌지직 듣기 거북한 소리와 함께 고약한 냄새가 그녀의 방안을 가득히 매워버렸다. 오랫동안 참았던 탓인지 한 식 경이나 지나서야 겨우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뒤까지 닦고 나자 어느 틈엔가 냉막한 표정으로 돌아 가버린 그녀는 날 그대로 침대에 눕힌 뒤 바지를 입혀주고는 요대마저 깔끔하게 묶어 주었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귀식대법(龜息大法)으로 참고 있었다는 소리였구나. 그러면 그렇지 네가 어떤 년인데 그 냄새를 참고 있었겠냐?' 요강을 들고 나간 여인은 금새 되돌아와서 창문을 활짝 열고 소매로 몇 번 휘저어 일으킨 바람으로 방안에 역하게 돌던 변 냄새를 바깥으로 몰아 내었다. 그러고는 의자를 끌어와서 침대 옆에 앉아서는 그대로 엎어져 곤하게 잠들어 버렸다. 야행성인 그녀는 밤에는 항상 푸르게 빛나는 을씨년스런 귀안(鬼眼)을 하고서 밖으로 싸돌아 다녔다. 밖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긴 해도 짐작 불가능 한 것은 아니었다. 보나마나 귀신 놀이를 하면서 무리로부터 외롭게 떨어진 무림인 들의 간이 떨어질 정도로 놀리는 것 일게다. 그녀의 유일한 소일거리면서 낙인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새삼 놀랄 바는 아니었다. 다음 불만 사항은 바로 해가 떠있는 동안 일이 없을 때에는 내 곁에 그녀가 잠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냉혈마녀(冷血魔女)가 내 바로 옆에 엎어져서 고즈넉하게 잠들어 있는데, 어떻게 내가 편한 마음으로 누워 있을 수 있겠느냐고? 차라리 날 내 방으로 보내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녀의 분위기로 봐서 언제든지 신경질을 부리며 팬다해도 이상할 게 없었으므로 그냥 자포자기한지 오래였다. 그래도 이 시간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왜냐구? 아무리 냉혈마녀(冷血魔女)에 종종 헷가닥하는 발작성 정신병자라 해도 조용히 잠든 순간만큼은 본래의 미모가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소방처럼 귀엽다거나 앳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잠들면 주변의 시간마저 잠드는 것 같은 묘한 적막감이 나쁘지 않았다. 새초롬한 모습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저질러온 온갖 악행을 잊은 듯한 자연미에 어우러진 백치미가 그녀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물론 매섭게 눈 끝이 조금 치켜 올라간 왕방울 같은 눈동자가 그녀의 가장 두드러진 매력이었지만, 잠든 모습의 그녀도 나쁘지 않았다. 평상시에 그녀가 내 옆에 엎드려 있는 게 느껴질 때는 불안함으로 잠을 설치곤 했지만, 오늘은 어쩐지 나도 곤하게 잘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첫사랑 연정이라는 것은 무서운 것이었다. 비록 현실이 어떠하건 말이다. ... ... 우르릉! 콰쾅! "헉!" 느닷없이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비가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한 밤 중이었다. 비스듬히 열려진 창이 거칠게 나부끼는 비바람을 따라서 열렸다 닫혔다 하며 오도방정을 떨었지만, 보시다시피 아직 걸어가서 창을 닫을 수 있을 정도로 발목 부상이 완쾌된 것은 아니었다. '에휴, 잠은 다 잤군. 뭐 어차피 낮에도 먹고 싸는 일 빼고는 잠 밖에 잘 일이 없으니까.' 비가 오는 오밤중에 잠이 한 번 깨버리자 좀처럼 다시 잠들기 힘들었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야 할 형편이었지만, 어두캄캄해야할 방이 낮처럼 훤하지는 않아도 건너편 벽에 걸린 난화의 잎과 줄기 수를 헤아릴 정도로는 보였기에 응당 느끼곤 했던 밤에 대한 두려움도 이제는 일지 않았다. 끼이이이익 '령령인가? 왠 일로 이렇게 일찍 들어오나? 새벽이나 되어야 슬그머니 들어와서 엎어져 자더니......' 예상대로 서슬 시퍼런 안광을 번득거리는 귀안의 령령이었다. 을씨년스럽고 사이한 기운이 여전히 흐르기는 했지만, 시뻘겋게 타오르는 눈빛의 미친 령령만 아니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내가 다쳐서 이 모양으로 누워있는 동안은 말이다. '뭐 보나마나 또 바로 엎어져서 잠들어 버리겠지. 어, 어라?' 지금 들어오는 령령은 평상시와 상당히 달랐다. 전신에 피 칠을 한 것이 뭔가 상당히 요란하게 법석을 떤 듯 싶었고, 시퍼렇고 사이하면서 강렬한 청광이 발산되어야할 귀안(鬼眼)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너무나도 놀랐던 탓에 평상시라면 바로 잠자고 있는 척 했을 나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계속 바라보다가 그만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다. "왠 일로 깨어있지? 다른 날처럼 잠자는 척 하기 질렸나 보지?" '귀신같은 년, 그럼 그동안 내가 잠자는 척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채고도 모르는 척 했단 말이야?' "에헤헤헷 아니 그게 항상 피곤한 모습으로 들어오시길래 귀찮게 해드리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지요. 뭐, 단지 오늘은 너무 지치신 듯 해서 조금 놀란 것뿐이에요." "그럼, 날 걱정했다는 소리야? 듣기 나쁘진 않군." 령령은 잠자코 침대 위에 걸터앉아서 날 빤히 내려다보며 내 뺨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혈향(血香)이 지나쳐서 슬그머니 곁눈으로 보니 섬섬옥수만 같던 손이 완전 피에 절어 있었다. 분명 그녀의 피가 아니리라. 그렇다면, 드디어 이 여자가 완전히 미친 거야? "니 말대로 강한 무림인 들을 패버렸지. 한 대 한 대 후려칠 때마다 나약하게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그들을 보니 너무 재미가 없었어. 단지 아직도 그 녀석을 이길 수가 없더군. 너무 강해서 한 대라도 제대로 건드리기는커녕 수세에만 몰리다가 결국 도망쳐 와야 했지. 그리고서 내가 뭘 느낀 줄 아니?" "그, 글쎄요? 저는 잘......" "널 때릴 때가 제일 기분이 좋았다는 거야. 역시 너밖에 없어. 어서 나아야 해. 널 때리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정말이야. 정말......" "......" 풀썩 '끄아아아아악!' 말을 마저 끝내지도 못한 그녀는 내 뺨을 쓰다듬던 자세 그대로 힘없이 쓰러져서 내 가슴과 배 사이 위에 철푸덕 엎어져 버렸다. 덕택에 내 통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날 때릴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아? 이 미친 년, 맞는 내 기분은 생각해 보고 그런 말을 해야할 거 아냐? 어서 낫자. 어서 나아서 도망가야겠어. 이 냉혈마녀 곁에 있다가는 언젠가는 맞아 죽을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2 07:04:46 고친날 2005-07-23 18:53:59 읽은수 9889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6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6] 나날이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지만, 주령령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뚜렷한 일념 하나로 회복하는데 심신을 기울여 전력을 다한 결과, 일 주야 만에 그녀로부터 직접 퇴실해도 되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비록 붕대를 풀어낸 가슴과 배에 보기 흉한 실선들이 낙서처럼 어지럽게 그어져 있었지만, 피부에는 탄력이 더해졌으며, 탈골되었던 발목도 오히려 더 튼튼하게 붙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묘하지만, 내 발목을 섬섬옥수로 일일이 짚어보고 붕대를 직접 풀어내고서 내 가슴과 배를 쓰다듬던 주령령의 한 송이 백합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던 미소가 잊혀지지 않았다. 더불어 그녀와 나눴던 꿈결같은 대화도 뚜렷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야아, 이제 다 나았는걸. 퇴실해도 괜찮을 것 같아." 이런 분위기에는 아부 한 마디 빼놓을 수 없었다. 비록 누가 나를 이 꼴로 만들어 놨느냐는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기억 속에서 지우고 말이다. "그, 그야 다 령령 아가씨의 따사롭고 정성어린 손 길 때문입지요. 이 은혜(恩惠) 뼛속에 새겨 잊지 않도록 하게습니다." 당연하지. 이 원한을 뼛속에 새겨 두고두고 되새김질하고 말 테다. 단 되새김질만 하겠지만 말이다. "나 역시 오로지 이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어. 하루 하루가 천 일과도 같았었지." "그, 그런가요? 하, 하, 하." 그녀의 섬섬옥수가 내 뺨따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 촉감의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 마녀가 진심으로 내 쾌유를 반가워하고 있다는 것이 절실하게 와 닿았다. 그 증거로 타고난 생존본능을 자랑하는 육감(六感)이 전력을 다해 그녀로부터 최대한 떨어지라고 경고를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저기 우리 으슥한 후원에서 오붓하게 정다운 대화를 나눠보는 게 어떨까? 바깥바람도 쐴 겸해서 어때?" 이 마녀가 뻔히 속 보이는 말을 하고 있네. 니가 나랑 대화를 나누는 게 목적이냐? 그동안 구타를 참느라 두 주먹이 근질근질 할 게 뻔하다는 것을 내가 모를까봐? 내 상처가 덧나서 회복하는 날이 늦어질까봐 안달하던 너의 속마음을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는가? "저, 저기 일단 제가 그동안 씻지를 못했더니 몸이 무척 근질근질 거리네요. 아유, 여기 때가 줄줄줄 밀리는 뎁쇼. 헤헤헤헷 겸사겸사 해서 옷도 좀 빨고 물도 좀 떠 올려구요. 갔다 와서 천천히 후원에서 뵙도록 하지요." "난 괜찮아. 니가 좀 지저분해도 우리들이 오붓한 대화를 나누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해. 안 그래?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앗차, 뒤, 뒤가 마려워 오, 오는데요. 금, 금새 다녀올 테니 조,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이대로 무사히 보내 주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듯한 그녀의 뜨거운 시선이 뒷통수에 내려꽂히는 것을 느끼며 허겁지겁 빠져나온 내가 바로 향한 곳은 정말로 뒷간이었다. 주령령에게 까 내려져서 묘한 자세로 볼 일을 봐야했던 끔찍한 과거와는 이제 안녕이었기에 대기하고 있던 변들이 이 때다 하고 일시에 풍덩 풍덩 낙하를 실시하고 있었다. 간만에 느끼는 쾌변!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순간인가! 슬그머니 품속에 숨겨온 폐지로 뒤를 닦는 감촉 또한 죽여줬다. 그 이전까지는 까칠까칠하면서도 말라비틀어진 똥덩이가 더덕더덕 붙은 새끼줄을 앞뒤로 움직여 슥슥 문지르고 일어나서 마무리가 덜 된 깔깔한 감촉을 수욕을 하는 아침나절까지 그대로 느껴야만 했었다. 그런데, 그녀의 방에 강제로 거하는 동안은 적어도 부드러운 폐지로 마무리짓는 깔끔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는 게 나름대로의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던 것이다. 다시 슬그머니 내 방으로 들어가서 갈아입을 마의를 챙긴 후 물지게를 가져가기 위해 창고 문을 열었더니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곰 가죽과의 일체화에 힘쓰고 있던 그 인간이 날 보자 놀랐는지 두 눈을 번쩍 뜨고는 연신 감탄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포 형님. 오랜만이네요." "오호, 자네로구만. 이번에 대단히 운이 좋았네 그려. 령령의 방에서 오랫동안 나오지도 않길래 기어이 이 세상 하직해 버렸구나 하고 생각했더니만 의외로 무사하구만." 이 인간이 지금 위로를 하는 거야? 염장을 지르는 거야? 선문답 좋아하는 중대가리들이랑 같이 놀면 너를 선배님이라고 부르겠다. 이 염장쟁이야. "이게 다 포 형님께서 걱정해주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망아루에는 별 일 없구요?" "뭐, 일수필살하고 소막주 녀석이 점소이 일이야 잘 하고 있어서 별 탈은 없었지만, 자네가 없으니 허전하긴 하더군." "이제 제가 돌아 왔으니 맘 편히 놓으십시오. 저는 물이나 떠오도록 하지요." "험, 물이야 넘칠 정도로 차고 넘쳐서 안 가도 되는데, 어이 어디를 급하게 가나? 어이 이보게!" 난 그의 마지막 말을 못 들은 척, 무시를 하며 후원을 번개같이 가로지르며 뒷문을 빠져 나왔다. 물이 많건 적건 중요한 것은 일단 망아루에서 벗어나는 것이 관건이었다. 천천히 생각해 볼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계산대 옆을 지나치다 보니 언제나처럼 꾸뻑꾸뻑 졸고 있는 홍 영감이 보였다. 그의 반백이던 머리는 지난 두 달 새 거의 새하얗게 변해 버리고 있었다. 이젠 검은머리 숫자를 헤아리기도 어렵지 않았고, 원래 핼쓱하던 그의 안면은 더욱 메마른 듯 싶었다. 그래도 이 망아루에서 별로 유감이 없는 유일한 인간이라 그가 보건 안 보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총총총 걸어 나오려 했다. "자네, 신수가 그리 나쁘지 않은 듯 싶으이." "오옷, 영감님 오랜만에 말씀을 하시네요." "난 언제나 깨어 있다네. 단지 말을 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졸기만 할 뿐이지." 그랬던가? 어쩐지 홍 영감이 말을 할 때는 항상 절묘한 순간이었었다. 딱 그 말이 필요한 순간에 골라서 한다는 것은 적어도 상황 파악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니까. 그럼 지금 내가 까딱거리고 소리 없이 인사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는 말인데, 그럼 소리로? 아니지 그런 게 소리로 들릴 리가 없는데, 그럼 뭘까? "솔직히 령령이 자네를 못 살게 구는 것 같아서 밉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겠지?" "자주가 아닙니다. 항상이라구요. 못 살게 구는 정도가 아니라.....말을 말아야지요. 에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나?" 어라? 이 영감도 애매한 소리를 하려드네. 어디 봅시다. 내가 여기 와서 말 빨이 얼마나 청산유수처럼 늘었는지 잘 들어 보시오. "영감님, 영감님 목에 누가 칼을 들이대고 죽이기 직전에 죽이는 데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납득하시겠어요?" "흠, 그렇지. 그렇기야 하지. 내 말은 별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네. 그저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입장으로써 의미 없이 던지는 충고라고 생각해두면 되네. 다시 자야겠네. 수고하게나." 말을 마치자마자 무섭게 잠이 드는 그를 보니 얼떨떨하기도 했다. 그래도 거의 한 달만에 영감하고 대화를 나눠 본 것이라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엄청난 고수인 것 같기는 한데 왜 이렇게 잠만 잘려고 하는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현관을 지나 앞마당으로 나오자 기마보 자세로 낑낑거리고 있는 미소년 소막주 조진후와 그의 곁에서 가부좌를 튼 채 명상에 들어가 있는 일수필살(壹手必殺) 단수연이 보였다. 그녀를 보자 눈에서 불똥이 뚝뚝 떨어질 듯한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노려보는 것만으로 살인이 가능하다면 단수연은 이미 너덜너덜한 살코기 조각이 되어 흑점에서 팔리고 있을 것이다. 문득 무엇인가를 느꼈는지 단수연이 눈을 번쩍 뜨고는 빙긋 웃으며 내 칼 같은 시선을 받아내며 입을 열었다. "살기로 상대방을 격살시키는 수련을 하고 계셨나 보네요. 작삼 공자님, 이전과는 비교하기 힘든 강렬한 살기(殺氣)속에 단호한 의지(意志)가 느껴지는 군요." 지랄하고 있네. 내가 너 때문에 죽을 둥 살 둥 했다는 걸 알기나 하는겨? "단수연 소저, 그들을 왜 죽였소? 죽이지 않는다고 분명 나와 약속(約束)하지 않았습니까?" "제가요? 제가 왜 그들을 죽였다고 생각하세요? 흔적으로는 용케 빠져나와서 도망가버린 듯하던데, 어떻게 공자님은 그들이 죽었다고 확신하시지요?" "그, 그것은......" "저야말로 분해 죽겠어요. 소피로 간을 맞춘 지렁이 생국수를 먹여보고 싶기도 했고, 구더기 생젖갈도 담가서 먹을만한지 물어보려 했었어요. 그밖에도 무수히 많은 요리들을 개발해서 시식시켜 보고 싶었다니깐요." 너무나도 분하다는 듯이 되려 화를 내는 그녀를 보니 둘 중 하나라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로 단수연이 모르는 일이거나, 또는 그녀의 연기력이 매우 출중한 것이거나...... 뭐,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구태여 끝난 일을 들춰 내봤자 바뀔 것도 하나 없는 것이 현실이긴 했다. 어쨌거나 이들은 망아루의 일개 점소이보다 귀중한 귀빈급 포로였으니까 말이다. "알, 알았으니까 그만 해요. 단수연 소저, 아무렴 어떠하겠소? 이래도 내가 죽일 놈, 저래도 내가 죽일 놈이니 과정이 무슨 상관 있단 말이요. 명상이나 계속 하시오." 이런 식으로 그녀와 말다툼 해봤자 이득 볼 게 없다고 여긴 나는 계속 개발중이라고 우기는 그녀의 요리 목록들을 듣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자리를 벗어났기에 입으로는 떠들면서 날 날카롭게 째려보는 그녀의 시선을 느낄 수가 없었다. 마침 기마보를 풀고서 한 숨을 내쉬며 몸을 풀던 조진후는 내가 물지게를 지고 내려가는 것을 보고는 입을 모아서 큰 소리로 외쳤다. "작삼형! 주방 물 통 다 채웠어요. 물 뜨러 갈 필요는 없어요!" "뭐, 뭐라고! 물이 부족하다고? 알았어 내 금새 다녀오지!" "아니, 물 다 차있다니깐요!" "아, 알았어. 금새 떠온다니깐! 그냥 기다리고 있어! 수고해!" "......" 내가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내 등으로 쏘아 보내고 있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없지. 나도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할 지경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동안은 그냥 그럭저럭 버틸만하다 싶어서 꾹 참고 살았지만, 이제 령령의 광증(狂症)을 확실히 알아챈 이상 목숨 유지 차원에서 심각하게 탈출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박한 심정, 뭔가 막막한 미래가 드리워진 것 같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 어느 곳에도 내 길은 없어 보였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2 12:59:15 고친날 2005-07-23 18:54:21 읽은수 9865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6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7] 바야흐로 초겨울의 문턱에 냉큼 들어선 것이 느껴질 만큼 풍악산 일대 단풍나무들의 앙상함은 애처로움을 절로 자아낼 지경이었다. 무일푼이라는 그들의 신세를 반영하듯 외롭게 흔들리는 단풍잎마저 매섭게 몰아치는 산바람에 휘말려 하나 둘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망아루(忘我樓)로 들어서는 낭떠러지 외길 입구에서도 유난히 두드러지게 드러난 은행나무 꼭대기 위에서 팔랑거리는 왜소한 은행잎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물지게를 메고 그 곁을 지날 때 즈음 머나 먼 산골짜기에서 불어 온 강풍(强風)에 휘말린 은행 나뭇잎은 끝끝내 아득한 낭떠러지로 하염없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문득 그 어느 곳에서도 반겨주는 이 하나 없는 은행 나뭇잎의 외로운 처지가 나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오로지 매섭게 불어닥치는 산골짜기 한풍(寒風)같은 미친 여인네 주령령(周鈴鈴)이라던가 자신에게 매달려 있던 은행 나뭇잎이 위태롭게 흔들거리다가 떨어지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 은행나무 같은 홍 영감이나 심지어는 바람에 흔들렸는지 어쨌는지 옆에서 툭툭 쳐서 귀찮게 떨어지게 하려고 애쓰는 듯한 심술쟁이 이웃 나무 줄기 같은 포연강(鮑然强)은 결국 남일 수밖에 없다. '하기사 친 혈육이라는 형한테서도 버려진 몸인데, 후후훗. 그런 놈들한테 동정 같은 걸 받으며 살기는 더 더욱 싫기는 하지.' 왜 이런 생각이 진지하게 들었느냐 하면 역시 다름 아닌 주령령의 나날이 거세지는 횡포 같지 않은 횡포 때문이었다. 이젠 아예 대놓고 팰 생각까지 하는 듯한 그녀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내 살다 살다 이렇게 기막힌 인간들과 마주 대하면서 일하게 되리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처음 희망(希望)대로 고즈넉하면서도 외로이 동떨어진 주루에 병들어 늙어 가는 할아범과 한 떨기 수선화같이 귀여운 외손녀가 있어서 오붓한 가족 분위기가 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보통 주루에 보통 인간들만 같아도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내 억척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적응능력으로 버텨 보려고도 했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광견(狂犬)처럼 달려들어 죽음이 뭔가를 수시로 깨닫게 해 줄 주령령만큼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난 인간이다. 똑같은 하늘 아래, 똑같은 생명(生命)을 부여받은 똑같은 인간이란 말이다! 니가 뭔데 감히 나의 미래(未來)와 운명(運命)마저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려 들어! 너같은 마녀(魔女)에게 한 순간이라도 마음을 뺏겼다는 것이 부끄럽다. 부끄러워. 퉤엣,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녀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원망(怨望)과 절망(絶望)만이 깊어지는 것을 새삼 느끼며 길 옆 고랑에 고민하느라 나도 모르게 고여 버린 침을 내뱉고는 조금은 주저하던 나의 발걸음에 힘을 주었다. 설사 지난번처럼 주령령이 내 앞을 가로막고 또 다시 힘으로 몰아 세우려 한다면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고 그녀에게 떳떳이 말 할 것이었다. '하늘 아래 동일하게 태어난 인간으로써의 존엄성과 자유를 힘으로 범하려 들지 마시오!' 적어도 주령령이 일전에 가고 싶으면 가고 싶다고 솔직하게 밝히라고 했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내가 대범하게 나간다면 그녀도 막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날 못 패서 안달난 냉혈마녀(冷血魔女)이긴 하지만,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는 잘 아는 그녀이니 말이다. 굳은 다짐을 하자 암울하기만 하던 내 미래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치는 듯 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의지(意志), 나의 굳은 결심(決心)인 것이었다. 지옥 같은 망아루에서 버텨온 절정의 적응 능력이라면 어디로 가도 굶어죽지 않을 자신이 있기도 했다. 왼편은 낭떠러지요, 오른편은 수직으로 깎아지른 암벽인 산 중턱 외길을 구비 구비 돌아서 한기가 몰아치는 산자락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씩 내려갔다. 평상시에는 그래도 꽤 먼 길이라고 여겨졌는데, 하산을 생각한 지금 그 거리가 왜 이렇게 짧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이윽고 건조해질 데로 건조해져서 바짝 메마른 풀숲을 지나가니 보기만 해도 몸이 얼어버릴 듯한 한기를 내뿜으며 흘러가는 드넓은 소장강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만 아래로 내려가면 상당히 낡았지만, 건너는 데는 무리 없을 목조 다리가 보일 테고, 그마저 건너가면 울퉁불퉁한 산 길이 아닌 평평한 관도가 보일 것이다.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사람들이 시끌벅적거릴 서안(西安) 시내가 펼쳐질 테고, 그 다음부터는 어디로 가건 내 맘인 것이다. 몰래 챙겨 온 혁낭에는 솔직히 은자 다섯 냥 밖에는 없었지만, 어디로 가건 부족함은 있을지라도 당분간 버티기에는 충분하다 싶었다. '그런데 말이지. 왠지 모르게 너무 허전하단 말씀이야. 이 나이 먹도록 이룬 것도 없이 쫓기 듯 집을 나선 게 석 달 전인데, 이젠 수시로 광증(狂症)을 보일 계집애 하나 때문에 또 도망치듯이 떠나야 한다는 게......에휴.' 뭔가 켕기듯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나는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입고있던 마의를 훌훌 벗어버리고, 알몸이 되어 보기에도 차가워 보이는 내 단골 물웅덩이로 머리부터 꺼꾸로 뛰어 들었다. 역시 예전처럼 들어가는 순간만 잠시 한기가 느껴지다가 곧 미적지근하게 변해버리는 물웅덩이가 기이하긴 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수욕을 간단하게 마치고서 나왔다. 새 마의를 걸치고 일어서자 뭔가 더 이상 걸리적 거릴 것이 없었지만, 여전히 발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뭐, 그래 내친 김에 빨래도 하지 뭐.' 열심히 강가에서 비비고 담갔다 빼기를 반복해서 마의와 속곳을 깔끔하게 빨고 난 후에도 뭔가 아쉬움이 남아서 물지게에 물까지 떠 버렸다. '물이 넘친다고 했지? 뭐 그래도 가져가면 버릴 물은 아니지. 잠깐 내가 왜 다시 가? 쳇.'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내 가슴속에 가장 큰 걸림돌로 남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망아루에서 일하면서 얻은 소중한 것들 바로 소방(蘇芳)과의 우정(友情), 가슴속에 시리게 품었던 짝사랑 연정(戀情), 그리고, 내 품 속에서 특이한 한기를 내뿜고 있는 자수정 목걸이연던 것이다. 짝사랑 연정이야 미친 령령을 떠올리면 머리가 절레절레 흔들어져서 떨치기가 쉬운 편이었고, 자수정 목걸이는 내가 차고만 있으면 어디서든 교 누님이 찾아 올 수 있다고 했으니 떠난다고 해서 문제(問題)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방은 어디에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안 보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의례 내가 망아루에 있을 줄 알고 돌아와서 날 찾을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그나마 내가 망아루에 와서 얻은 소중한 것 중 하나가 그와의 우정(友情)이 아니었던가! 여전히 떠날까 말까 한 숨을 내쉬며 망설이는 내 시야에 문득 발목까지나 찰 듯한 얕으막한 물웅덩이 위를 두둥실 떠다니는 부평초가 보였다. 그것을 보니 내 신세와 비슷하다는 것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한탄하듯 읊조렸다. "부평초야, 부평초야, 너도 나처럼 뿌리내릴 땅이 없어 외로이 바람 따라 밑도 끝도 없이 흘러만 다니는구나. 얼마를 더 떠돌아 다녀야 안착할 곳을 찾을 수 있을꼬? 에휴" 하염없이 초점도 없는 눈으로 멀거니 부평초를 보고 있자니 곁눈 사이로 새하얀 것이 아른거렸다. 뚱한 시선으로 별 생각 없이 고개을 돌렸다가 예의 그녀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허억, 여, 여기는 왠 일로......내, 내려 오셨어요?" 주령령은 나를 본 채 만 채 하며 부평초가 떠있는 물웅덩이 앞에 쪼그려 앉아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했다. "부평초는 흙 바로 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는 하지만, 절대로 반 치 이상 떨어지지도 않아. 흙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 어떤 식물들보다 강해서 수면이 높은 곳으로 가면 그대로 죽어버려." '뜬 금 없이 부평초 얘기는 왜 하는 거야? 니가 여기 왜 내려 왔는지나 해명(解明)해 이년아.' "바람에 따라서 이유 없이 흔들리는 것도 아냐. 뿌리를 땅에 박지 못한 부평초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수중에 떠다니는 양분을 필사적으로 섭취하려고 노력(努力)하지. 부평초가 외롭다는 것은 더 더욱 말도 안 돼. 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봐, 부평초 곁에 무엇이 있는지." '이, 이년도 선문답을 즐기는 구만. 도대체 왜 내 주변에는 이런 선문답 계열 인간들 밖에 없는 거야? 그 곰탱이 녀석도 이상한 말만하더니, 얘는 불여시답게 한 술 더 뜨네. 하여간 골고루 들 놀아요.' "그, 그게 부, 부평초 밖에 안 보이는데요." "그래, 맞아. 부평초는 같은 부평초끼리 모여서 외로움을 달래. 또 다른 부평초가 멀리 떠내려가지 않도록 붙잡아 주기도 하는 거야. 이제 알겠어?" "....." 도대체 무슨 말을 저렇게 빙빙 돌리는 것인지. 그냥 나 무식하고, 자기 유식하다는 말이잖아. 짜증나게 꼭 잘난 척을 해야 되겠냐? 운치란 게 있잖아. 하여간 맞장구 쳐주지는 못 할 망정 꼭 걸고 넘어가요. 아, 아니지, 또 저 마녀 의도대로 따라가면 안 돼. 여기서 단호하게 말을 해야 해. 단호하게! "저, 저기......" "왜? 하고싶은 말 있으면 먼저 해 봐. 나도 할 말이 있으니까." 할 말? 흠 좋아 일단 먼저 들어나 보자. "네, 먼, 먼저 하세요." "음, 그동안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너무 일방적으로 널 때리기만 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네가 실수를 저질러도 너그럽게 봐주기로 했어. 뿐만 아니라 너한테도 기회를 줄께." "네? 무슨 기회요?" "날 때릴 수 있는 기회, 아무 때나 날 공격해봐. 어떤 무기나 어떤 수단을 써도 좋아. 난 단지 피하거나 방어만 할 테니까." "정, 정말이요?" "그럼,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것 봤어? 내 말은 남아의 일언 보다 더 무겁다는 거 네가 더 잘 알잖아." 뭐, 뭣이라! 오호 이거 땡기는 걸. 그러니까, 내가 기습을 해서 그게 먹혀 들어가도 절대로 보복하지 않겠다는 뜻이렸다. 더군다나 함부로 구타(毆打)를 일삼지도 않겠다고 하는 게 분명(分明)하긴 한데, 얘가 왜 이러지? 아까 전 까지만 해도 때리고 싶어서 안달하던 애가......끌리기는 하는데, 뭔가 찜찜한 걸. 이렇게 순순히 당해줄 마녀가 아닌데 말이지. 수상하긴 한데 뭐가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구만. "그런 의심스런 눈으로 볼 것 없어. 나라고 널 편한 마음으로 때린 거 아냐.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 해줘. 또 한 가지 더 보증하지만, 그 날처럼 정신을 잃어버리는 일도 두 번 다시는 없을 거야. 정말이야,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 한 번 믿어 볼 까? 어차피 소방 때문에 떠나기도 찜찜 한데다가 저렇게 파격적인 제안까지 해오는데, 떠나버리면 또 언제 이 마녀를 때려 보겠어? 그동안 당한 게 하루 이틀이냐? 후후훗 뭐 어떤 식으로 기습을 할 것인가는 천천히 생각해 봐도 되겠지. 그 때가서 약속을 어기려 들면 그 때가서 도망가 버리면 되지. 뭐. 후훗. "그런데, 할 말이라던 게 뭐야?" "아, 아니에요. 아무 것도, 하여간 지금 한 말들 잊지 마세요. 령령 아가씨의 말이니까 믿어보기로 할게요." "당연하지. 아, 하나 또 좋은 소식이 있는데 말이지." "네? 뭔데요?" "이제부터 내가 직접 매일 반 시진씩 실전 무공 대련 상대가 되어 줄께. 넌 어떤 무기를 써서 덤벼도 좋아. 기쁘지? 나 같은 고수가 직접 실전 감각을 닦아주겠다고 하니까 가슴이 설레이지?" 이 마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실전 무공 대련? 한 마디로 무공 연습 핑계 대고 매일 반 시진씩 패겠다는 소리잖아. 미쳤어? 내가 그걸 왜 해? 안 해. 안 한다고! "아, 아니 그, 그것은.....말, 말도 안......" "봐, 봐 너무 기뻐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잖아. 좋았어 마침 저기 땅이 마른 풀밭 위가 딱 좋겠다. 전력을 다해서 덤비다 보면 날 때릴 수도 있을 거 아냐. 또 알아? 내가 실수로 미끄러지기라도 할지. 꿩 먹고 알 먹기가 따로 없네. 자, 자 오늘 하루도 열심히 수련(修練)을 쌓아야지." "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질질질질..... 퍽! 퍼벅! 퍼버버버벅! 퍽! 퍼퍽! 빌어먹을 마녀 같으니라구! 내 이럴 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어! 에구, 에구 그만 좀 때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3 07:37:30 고친날 2005-07-23 18:55:00 읽은수 9944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68)-수라삼살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8]수라삼살(修羅三殺) 반 시진에 걸쳐 수련(修練)을 빙자한 구타(毆打)를 실시한 령령의 발그레하게 혈색이 도는 얼굴이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처럼 떨어진 일방적 구타에 의해 처참하게 구겨진 내 얼굴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기회가 생겼을 때 망설이지 말고 다리를 건넜어야 했는데, 괜히 주저하다가 덜미만 잡혀 흉한 꼴만 당하고 만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니 개차반 같은 성질이 어디로 사라지겠냐? 괜히 좋아했잖아. 두고보자, 내 최소한 니가 약속(約束)한 것을 철저히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이를 부득 부득 갈며 욱신거리는 몸을 추스려 상쾌하기 이를 데 없다는 듯 날아가다시피 하는 그녀 뒤를 출렁이는 물지게를 매고서 천천히 따라 올라갔다. 전부터 느껴왔던 이상한 점이라 하면, 령령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순간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 오히려 개운해 진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충격이 가는 시간도 점점 짧아져서 지금은 아예 맞고 난 직후라 해도 바로 움직일 수 있었다. '쳇,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맞았다는 그 사실 자체가 더럽게 기분 나쁠 뿐이지.' 앞서가던 그녀가 빙글 돌아서며 갓 피어난 장미처럼 화려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왠지 투덜거리면서 인상을 쓴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봤나?" "헤헤헤헷, 설마요. 령령 아가씨께서 직접 무공 수련을 도와주셔서 기쁨에 겨워 진심으로 감읍했을 따름이지요." "글쎄, 지금이야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는 내 욕을 더럽게 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말이야. 언젠가 내게 고마워할 날이 올지도 몰라." '우라질! 그런 날이 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장을 지져!' "좋은 소식 하나 더 전해 줄께. 하루에 한 번, 반 시진동안 실전 대련을 한 날은 절대로 널 건드리지 않을 거야. 안심해도 좋아." "정, 정말이세요?" "그럼, 정말이고 말고.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아까부터 주령령(周嶺嶺)이라는 이름을 길거리 돌멩이처럼 너무나도 하찮게 생각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자기 이름으로 맹세를 한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한 입으로 두 말하는 그녀가 아닌 것은 알지만,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망아루가 보이는 언덕에 다다르자 무엇인가를 느낀 듯한 령령은 나에게 아무 말도 없이 오른편 산골짜기 아래로 신형을 날렸다. 마치 한 마리 제비처럼 사뿐히 날아오른 그녀의 모습은 곧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어라? 낮에는 보통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잠을 자더니만, 지금은 왜 엉뚱한 데로 가 버리지?' 의문 어린 시선으로 령령이 사라져버린 산골짜기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망아루로 걸음을 옮겼다. 앞마당에 들어서자 현관 난간에 낯익은 녀석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왠지 몇 년 만에 헤어졌던 사람을 다시 만난 듯한 반가움이 밀려와 속이 울렁거렸다. "쳇, 어디서 뭐하다가 기어들어 온 거야? 또 시체 뒤지기 놀이 하다가 왔냐?" 막상 튀어나온 인삿말은 못 볼 녀석을 봤다는 듯 퉁명스런 시비조였다. 파묻었던 고개를 쳐든 그의 얼굴이 파리해 보이는 게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으나, 차마 내색을 하지는 못 했다. 꼬르르르륵 대답 대신 들려 오는 생뚱 맞은 소리에 그만 씩 웃어 버렸다. "작삼, 나 배고파." "후훗 알았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봐. 이거 갖다 놓고 간단한 요기 꺼리 챙겨 올께." "으응." 물지게를 맨 채로 망아루 현관으로 들어서니 평상시라면 한가했을 주루에 손님들이 여럿 보이고 있었다. 병장기를 휴대한 것이나 입구로 들어선 나에게조차 날카로운 시선을 빛내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림인들인 것은 확실했다. 단수연과 조진후는 그들이 받고 음식들을 나르며 잔심부름을 하느라 정신들이 없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나보다 그들이 더 점소이 답다고 할 정도로 눈치있게 뛰어 다니고 있었다. "여기 죽엽청 한 병하고 오리 구이 하나 더 추가해 주시오!" "예, 그런데, 손님, 오리 구이는 밀려 있어서 시간이 좀 걸릴 거에요." "그럼 죽엽청이나 먼저 갖다 주시오." "네, 손님." 키가 유난히 커 보이면서 쌍검을 양 허릿춤에 차고 있는 회의 장한이 소리치자 홍두건을 푹 눌러 쓰고서 남장을 한 단수연이 주문을 받아서 주방을 들락날락 거렸다. 조진후도 손님들이 불러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있었으나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어머, 미소년 점소이네. 이봐 여기 좀 앉아 봐." "네? 아, 저기....." 귀여운 백의 경장 아가씨들이 득시글거리는 창측 탁자로 불려간 조진후는 그들의 뜨거운 손길에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쳇 부러운 녀석, 꽃밭에서 잘도 놀고 있네. 일도 안하고 말이야.' 내가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가려는데, 유난히 어여뻐 보이는 백의 경장 아가씨 한 명과 그녀 곁에 같이 앉아 있던 삼 십대 후반 정도의 현숙하면서 날카로움이 돋보이는 중년 여인이 홀연히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혹시 령령에게 맞은 게 피멍들어서 그런가? 특별히 안면을 맞은 기억은 없는데......' 내가 그들을 주시하자 중년 여인은 시선을 돌려 버렸지만, 예쁘장한 백의 경장 아가씨는 오히려 나를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었다. 마치 철천지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을 때나 지을 법한 매서운 눈초리와 함께 말이다. '젠장, 심하게 멍든 모양이군.' 속으로 궁시렁 궁시렁 투덜거리며 재빠르게 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아예 대놓고 궁시렁 궁시렁 거리며 투덜거리는 포연강을 볼 수 있었다. 몇 되지도 않는 손님들 때문에 궁시렁 거리는 그의 모습은 예상 밖이었다. "포 형님, 손님들도 별로 없던데, 무슨 문제 있으세요?" "흥이다! 지금이야 몇 안 되어 보이지만, 좀 있어봐라. 이전의 무림맹 애들이 몰려 왔던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인파(人派)가 몰려서 귀찮게 북적북적거릴테니......게다가......아니, 아니다. 아니니까 너도 일 거들 준비나 해라." 주령령 이것이 왜 망아루로 안 가고 옆길로 샜나 했더니 귀찮은 일이 생길 줄 미리 알아채고서 튀어 버렸던 것이다. 하여간 나날이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그녀를 보니 한 숨 부터 나온다. 하기사 그녀가 내 곁에 없는 게 날 돕는 일이긴 하지. "혹시 만두 좀 남은 거 있나요?" "잠시만 기다려 봐라." 물이 가득 차 버린 물통을 빼고서 지게 부분만 창고에 넣어 놓고 나오자 한참 만두를 솥에 넣어 찌는 중이기도 했던 그는 금새 맛있게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왕만두 서너개를 그릇에 담아 건네 주었다. 꼬르륵거리며 날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소방(蘇芳)을 위해 현관으로 되돌아가는데, 이번에는 백의 경장 아가씨들 모두가 나를 노골적으로 노려보며 자기네들끼리 소곤소곤 거려서 귀찮은 마음에 시선을 정 반대로 돌리며 바삐 걸어야 했다. 역시나 내가 나오기를 기다렸던 소방은, 역시 아니나 다를까 내 손에서 만두 그릇을 낚아채서 허겁지겁 삼키듯이 먹고 있었다. 나보다 만두 그릇이 훨씬 반갑다는 듯이 말이다. 순간 미운 마음이 들어 그릇을 뺐어 버릴까 하다가 유치해 보여서 관뒀다. "어이, 소방 저기 백의 경장 여인들은 어디서 온 애들이야?" 한참 우물우물 거리며 만두를 입 안 가득히 채우고 있었던 그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목이 매였는지 켁켁 거리기에 얼른 물 사발을 건네 줘야 했다.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왜 웃어! 친구가 지금 배도 고프지, 잠은 오지, 목도 매여서 켁켁 거리는데, 옆에서 고소하다는 듯이 웃고 있냐?" "아니, 아니야, 그냥 귀여워 보여서 후훗." "뭐, 뭐야!" 벌컥 화를 내면서 금새 신경질을 부릴 듯 하던 소방은 뒤늦게 자기 관리에 들어갔는지 다소곳해지면서 숨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들은 말이지. 바로 월녀궁(月女宮) 여인들이야." "그, 그래? 그럼 왜 날 째려들 보는 거야? 설마 교 누님한테서 내 얘기를 들었나? 그렇다해도 어떻게 단번에 알아보지?" "글쎄다. 문제는 그게 아니야. 수라삼살(修羅三殺)로 보이는 고수들이 이 쪽으로 오고 있어. 여기 모인 무림인들도 그들 때문에 이곳으로 미리 와 있는 거야." "그럼, 너도 그들 때문에 온 거구나." "말도 마. 그동안 그 인간들 몰래 쫓아다니느라고 죽는 줄 알았다니까. 워낙 신법이 뛰어난 고수들이라 쫓아다니기도 힘들었고, 들키지 않게 숨느라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 게다가 킁킁 몸에서 땀 냄새까지 끔찍하게 나는데, 씻지도 못하고 말이야. 그렇게 개 고생하면서 추격했더니 망아루를 약속장소를 잡는다고 주변인간들 다 들릴 정도로 떠들어 버리잖아. 완전 헛고생한 셈이지." 자기 몸에서 땀 냄새가 난다고 킁킁거리면서 호들갑 떨며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보니 이제는 기운이 거의 회복 된 모양이었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궁금하게 생각했던 질문을 던졌다. "여기로 왜 와?" "그들이 모은 혈해진경(血海眞經) 지도 조각은 두 개야. 원래는 강남표국(江南驃局) 선발대와 제갈세가(諸葛世家) 별동대가 갖고 있었는데, 바로 수라삼삼(修羅三殺)이 몰살시켜 버리고서 뺏은 거야. 그런데, 나머지 두 개의 조각 중 하나는 중원제일의 신법을 구사한다는 풍룡(風龍) 종리연(鐘理戀)이 가져가 버려서 추격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누구한테 있는지 알려져 있지 않아. 그래서, 여기로 모여서 지도를 맞춰보자고 고의적으로 소문을 퍼뜨린 거야. 누가 갖고 있건 결국 나머지 지도랑 맞춰 보기 위해 올 거라고 판단한 것이지." 그러니까 한 마디로 약속과는 관련 없는 피라미들이 엉겨 붙은 거라는 소리였다. 뭐 따지고 들면 소방도 그 피라미 중에 하나겠지만 말이다. 수라삼살(修羅三殺)에 대한 소문만큼은 나도 언뜻 들어 본 바가 있었지만, 자세한 설명은 소방으로부터 들어야 했다.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이 피에 굶주린 악마로써 그들이 저지른 살인, 강간, 강도 행각이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무수했고, 정파 사람이건 사파 사람이건 무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평민이건 상대를 가리지 않고 걸리는 데로 무자비한 살상을 일삼는 다는 것이었다. 첫째가 혈살(血殺)로 독에 관한한 독의 황제라는 당문(唐門)에서조차도 한 수 접어준다고 한다. 그의 손이 흩날리면 수많은 무림인 들이 칼 한 번 뽑지도 못하고 피를 흘리며 떼 몰살을 당한다고 해서 혈살(血殺)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둘째가 도살(刀殺)로 강남 표국과 제갈 세가 무인들을 주로 격살시킨 쾌도의 달인이라고 했다. 도살(刀殺)의 귀두도가 뽑히면 그 어떤 자라해도 일도(一刀)를 받아내지 못하고 일도양단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고 했다. 마지막 셋째는 권살(勸殺)이라 불리는데, 박투술에서 그를 능가하는 자는 육마(六魔)나 십성(十聖)정도는 되어야 하며 구룡(九龍)정도의 수준으로는 겨우 맞상대나 가능할 뿐이라는 자였다. 과연 이런 흉악한들이 온다면 여기 모인 무리들 중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자들은 얼마나 될 것인가? 혈해진경을 얻기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바치려 하는 무림인들이 난 더 무섭게 느껴졌다. 바보 같은 사람들 똥 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진경을 얻어도 저승에 가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그 무리들 중에서 소방까지 껴 있다는 것은 내심 불안하기까지 했다. 다른 인간들이 죽건 말건 상관없으나 소방만은 무사하길 빌고 또 빌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3 14:08:52 고친날 2005-09-25 12:49:33 읽은수 9646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69)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9] "수라삼살(修羅三殺)이라는 인간들이 언제 오기로 했는데?" "진시(辰時) 안으로 오겠다고 했으니 지금 즘이면 근처에 와 있을 거야." "그런데, 제갈세가(諸葛世家)라면 네 친구인 제갈혜 소저의 가문 아니야? 무림맹 부탁으로 혈해진경(血海眞經)을 조사하러 왔다는 그녀와 제갈세가는 서로 연관이 없는 거야?" 내 질문에 만두를 조금 씩 때 먹으며 오물오물 거리던 소방(蘇芳)은 냉소를 지으며 싸늘하게 차가워 보이는 시선을 흘렸다. 평상시 그답지 않은 생경한 모습에 놀라서 주시하자 내 따가운 시선을 느낀 그가 그제야 눈에 들어간 힘을 풀어내고서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세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어. 특히 그 사람이 제갈세가 인간이라고 한다면 그 속이 새까맣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무림맹에서는 아직 몰라. 나 혼자 수라삼살에게 몰살당한 시체들을 뒤지다가 알아낸 것이지." "어떻게 알 수 있었어? 설마 그들이 우리 제갈세가 맞소 하고 표식이라도 차고 있을 리는 없잖아." "제갈 세가의 독특한 암문(暗文)을 죽은 자들 사이에서 발견했거든. 그것이 지워지기 전에 내가 우연히 먼저 확인했어. 무슨 수로 혈해진경 지도 조각을 손에 넣었는지는 몰라도 제갈세가 독자적으로 별동대를 돌렸다가 큰 코 다친 셈이지. 무림맹의 눈 때문에 수라삼살에게는 공식적으로 화도 내지 못 할 거야." 얍삽한 제갈혜의 날카로운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자신의 집안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을 리 없다. 그런데도 강 건너 불 구경하는 일인양 무림맹 아해들과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것은 왠지 검은 흑막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혹시 그녀는 무림맹(武林盟) 아해들을 견제하는 역할로 붙어 다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친구인 제갈혜의 일인데도 별 다를 게 없다는 듯 언급하는 소방을 보니 왠지 평소의 그와는 달리 생경해 보였다. 내가 느끼고 있던 그는 언제나 따뜻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녀석이었는데, 혈해진경과 관련해서 만큼은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냉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런가? 너도 역시 무림인(武林人)이라 이거냐? 그런 것이었냐?' 오물오물 거리던 소방이 입안에 있던 것을 급히 삼키고는 오른쪽 앞마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소룡봉(小龍峰)과 구룡봉(九龍峰)으로 빗겨가는 길이면서 서장으로도 통하는 오르막 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와 나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조그마한 점으로 보이던 인물들이 점차 커지면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선두에는 갈색 피풍의를 펄럭이는 세 명의 걸출한 인물들이 눈과 콧등까지 그 윤곽을 가린 새까만 철가면(鐵假面)을 쓰고서 지면을 미끄러지듯 박차며 순식간에 다가오는 게 보였다. 현관 앞에까지 이르렀을 때에야 그들이 쓴 철가면의 이마 부분에 살(殺)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게 보였다. 매우 살벌해 보이는 무림인 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내 본분이 무엇인지까지 잊을 리는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앞 뒤 가릴 것 없이 손님이라는 생각에 인사부터 하고, 마침 비어 있는 가운데 자리로 안내했다. "오호, 정말 일형 말대로 이런 외진 산중에 조촐하게나마 주루가 세워져 있었군요." 뒤따르던 철가면 하나가 맏이로 보이는 철가면에게 웃으면서 반 존대로 말했으나, 맏이로 보이는 철가면은 그저 고개를 한 번 까딱이고는 자리에 앉자마자 나를 돌아보았다. 비록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그가 원하는 바를 이해했기에 즉각 가능한 요리 목록을 불러 주었다. "저희 망아루에서는 요리로는 만두와 소면, 오리 구이가 있으며, 술로는 죽엽청과 백건아가 있습니다. 어떻게 갖다 드릴깝쇼?" "기대는 안 했지만, 실망이로군. 죽엽청만 두 병 갖다주게." "네, 바로 갖다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대답을 하고는 주방으로 가려고 몸을 돌렸다가 주루 안에 먼저 와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날 향해있는 것에 놀라 주춤거렸다가 그 자리를 벗어나고서야 내가 아닌 철가면 삼 인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지어는 현관에 기대어 앉아 있던 소방마저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기서 끝이 난 게 아니었다. 내가 그 철가면 삼 인이 앉아 있는 탁자에 죽엽청을 갖다 주고 현관으로 되돌아가려는 순간 갑자기 들이닥친 새로운 무림인 들로 인해 주루 안은 인산인해(人山人海)를 방불케 했다. 안 그래도 넓지 않은 공간에 새롭게 들어온 무리로 인해 자리가 모자르게 되자 앞마당에까지 빽빽하게 들어선 그들을 보니 기가 다 질릴 지경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자리가 모자른 것에 그 누구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크, 이 많은 인간으로부터 주문을 받아야 한다니 오늘 하루는 매우 힘들겠군.' 걱정부터 앞서서 누구한테 먼저 주문을 받아야 할 지 몰라 현관에서 얼쩡거리며 서 있었으나, 많은 무리가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요리에 간간이 손이 가는 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시간이 멎어 버린 듯한 적막감에 짜증이 난 나는 점소이로써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무리들이 다 알아들을 정도로 외쳤다. "주문하실 분은 손을 들어 주시면 제가 재빨리 달려가겠습니다. 저희 망아루(忘我樓)에서 되는 요리는 만두와 소면 오리 구이가 있으며, 술에는 죽엽청과 백건아가 있습니다!" "......" 내가 큰 마음먹고 외쳤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이도 손을 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치며 날 한심하게 보는 시선마저 느껴졌다. 내 목소리가 작았나 싶어 다시 외치려고 하자 소방이 자기 옆으로 내 손을 끌었다. "어, 어? 왜 그래? 주문 받아야 한단 말이야." "어휴, 아무리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하지만, 넌 너무 눈치가 없어." "왜? 뭐가 잘못 된 거라도 있어?" "내가 수라삼살(修羅三殺)이 진시 안으로 오기로 했다고 말해주지 않았어? 지금이 진시 말(末)이야. 그런데, 그 때 들어온 살(殺)자가 들어간 철가면 삼 인을 보고도 눈치 없이 구는 거야? 이제 와서 놀란 표정 지어봐야 너의 무식함과 아둔함을 눈치 못 챈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그냥 여기에 나랑 같이 가만히 찌그러져 있어." "......" 그제 서야 상황 파악이 되자 후다닥 어이없어 하는 소방 뒤로 돌아가 몸을 숨기고서 수라삼살을 살펴보았다. 과연 그들 주변 탁자로는 손님들이 한 명도 없었다. 근자에 그들이 떨치는 악명(惡名)이 자자한 까닭에 겁을 먹은 듯 해 보였다. 수라삼살은 주변 무림인들의 시선 집중 따위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로지 죽엽청을 잔에 기울여 마시는데, 절대로 서로 따라주는 법이 없이 자신의 잔에 직접 자작하는 진풍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마치 서로 대놓고 남남이라고 선전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군. 수라삼살이 다른 이들에게는 흉신악살(凶神惡殺)처럼 굴어도 자기네들끼리는 매우 친하다던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해 보인단 말이야.' 특히 맏이로 보이는 철가면 녀석은 계산대에서 변함 없이 조는 홍 영감에게로 시선을 한 번 던졌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그것을 그대로 홍 영감의 머리를 향해 날리는 것이었다. 놀란 내 발걸음이 계산대로 향할 뻔했으나, 다행히 술잔은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 몇 올만을 날리고는 벽에 부딪혀 깨져 버렸다. 맏이 철가면이 일어서자 다른 철가면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일어섰고, 계산도 하지 않은 채 휭 하니 나가려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 이것들이 감히 돈을 떼어먹으려고 해?' 난 즉시 그들 앞으로 달려가 점소이의 본분대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애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자 한 냥 되겠습니다." "후훗, 재미있는 점소이로군. 용기가 가상해서 계산은 해준다. 옛다." 아까부터 가장 말이 많아 보이던 둘째 철가면은 나에게 웃으며 은자 한 냥을 가볍게 던져 줬다. 난 즉시 그 은자를 받고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다음에 또 오십시오." "네게 다음은 없다." "예?" "만용에 대한 댓가는 쓴 법이지. 잘 가라." 난 바로 그가 날 죽이려 든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쳐 그 자리를 벗어났으나, 쾌도(快刀)의 달인이라는 도살(刀殺)앞에서 피할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을 내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니기미!' 뼛속까지 배어버린 점소이 근성 때문에 오늘로 한 많은 인생에 종지부를 찍나 했었다. 챙! 그의 귀두도는 날 자기 등뒤로 밀며 튀어나온 소방(蘇芳)의 봉에 막혀 멈춰 서 있었다. 도살(刀殺)은 자신의 도를 막는 거지 소년이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하는 듯 싶었다. 당연하지! 개방의 잠룡(潛龍)이라는 위명(威名)이 감히 수라삼살(修羅三殺)정도의 악명(惡名)에 밀릴 리가 없었다. 도살의 놀란 표정은 곧 흥미롭다는 미소로 바뀌더니 도를 떼었다가 다시 도광을 번득이며 휘둘러 왔다. 제법 무거워 보이는 거대한 귀두도를 자유롭게 펼치는 그 녀석을 대하는 소방의 봉도 현란하게 늘어나며 바람을 일으켰기에 그들 곁에 있던 무림인들은 그 기세를 참을 수 없어 몇 걸음씩 물러서야 했다. 거세게 일던 그들 사이의 짤막한 일전은 시작처럼 순식간에 끝이 났다. 너무나도 빠르게 끝이 났으나, 다행히 그 누구도 손해를 봤다거나 이득을 보지 않고 끝이 나버렸다. "누군지 대략 알 것 같군. 내 도를 맞댈 수 있는 봉을 쓰는 소년이란 이 세상 위에 그리 많다고 할 수 없지. 오늘은 일이 있어서 이 정도로 해둔다만, 명심해라. 다음에는 네 목이 날아갈 것이다. 일개 점소이를 감싼 어리석음에 두고 두고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흥, 당신의 위명(威名)이 허명(虛名)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보장할 수 있어요. 내 목을 떼 가려면 당신은 최소한 한 다리와 한 팔이 잃을 각오로 덤벼야 할 거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피차 실력을 숨기고 있기는 한 듯 싶으니까......네 뒤에서 떨고 있는 못난 점소이 녀석에게 잘 일러둬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함부로 날뛰지 말라고 말이다." "그가 할 일은 그가 알아서 해요. 나라고 해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어요." 끝끝내 말로도 밀리려 들지 않는 소방을 대하는 도살의 한 쪽 입 꼬리가 치켜 올라가면서 기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화가 나서 일그러진 것인지 진심으로 웃고 있는지 당최 구분이 가지 않았다. 도를 거두고 물러서던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다른 이 살 곁으로 가다가 쉭 소리를 내며 다시 한 번 더 도광(刀光)을 번뜩거렸다. 그 기세가 나를 노린 것 같아 잔뜩 움츠러들었으나, 내 앞을 봉 하나라 당차게 막고 있는 소방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툭 툭 떼구르르 '어라? 이 무슨......?!" 땅바닥에 차례차례 떨어져 내려 구르고 있는 것은 소방과 그의 주변에서 멀찍이 구경을 하고 있던 무림인들의 목이었다. 목이 떨어진 몸들은 뒤늦게 통증을 느꼈는지 부르르르 떨다가 털썩털썩 쓰러져 버리고 있었다. 도살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내 도는 한 번 뽑히면 반드시 피를 봐야 하거든. 그 녀석들은 너와 점소이 녀석 대신으로 피를 흘린 거야. 그러니 정중하게 묻어주도록 해. 너희 때문에 죽은 이들이니까." '뭐라고! 저 싸가지가 날 또 휙 돌게 만드네. 그냥 니가 홧김에 죽인 것 가지고 엉뚱한데다가 덤태기를 씌울려고 그래! 빨리 꺼져 소금 뿌리게!' 속마음은 이러했지만 감히 본인 앞에 호통을 칠 수 없는 현실이 갑갑하기도 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4 07:23:21 고친날 2005-07-23 18:56:16 읽은수 9543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70)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0] "종리연(鐘理戀)! 온 것 알고 있다. 내려 와라!" 수라삼살(修羅三殺)중 맏이 철가면이 외치자 망아루의 지붕 꼭대기 쪽에서 대답(對答)이 들려왔다. "이봐요. 누구를 바보로 알아요? 세 분이 그렇게 몰려 있는 곳에는 내려가기 싫다 구요.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단 말이에요." "그럼, 어떻게 해주길 바라나?" "세번째 권살(券殺)이라는 분만 그 자리에 남으시고, 다른 지도 조각을 갖고 계신 분도 마저 나오면 내려가지요." "좋아, 그 조건 승낙하지." 아까부터 침묵을 계속 지키고 있던 세 번째 철가면, 권살(券殺)이 협상자로 나서면서 다른 이 살(二殺)이 물러서자 소리만 들려오던 지붕 끝 부분에 종리연이 오연히 올라앉아 모습을 드러내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얇은 흑의에 흑두건을 둘러 눈 윗 부분만 간신히 드러낸 그녀는 훅 불면 날아가 버릴 엿가락 같은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더 내려올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저 여자가 내 지도 조각을 가져간 거잖아. 저런 싸가지 없는 도둑 년이 있나?' 그녀를 보자 어이없게 지도 조각을 강탈당했던 지난날이 떠올라 금원보에 대한 욕심(欲心)을 다시금 새롭게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종리연이 내 손에 있는 동안 낚아 채 가지만 않았어도 바로 금원보 상자를 챙기고서 살기 좋은 대도시에 내 소유로 된 거대한 주루를 하나 정도 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냉혈마녀(冷血魔女)의 손아귀에 쥐여 비참한 나날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뿐 아니라 천하 제일 기루에서 천하 제일 미녀를 종종 옆에 앉혀놓고 주거니 받거니 대작하는 신선놀음이나 즐기고 있었을 텐데, 짜증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도 조각에 얽힌 열 받는 추억이 떠오르자 본능적으로 지붕의 그녀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종리연! 당장 내 지도 조각을 내 놓으시오. 그것은 엄연히 결투(結鬪)를 통해서 얻은 내 획득물이란 말이오!" "어머나, 점소이 오라버니 아직까지 살아 있었네. 진작에 죽은 줄로만 알았더니 명이 긴 편이군요. 하지만, 이걸 알아야지, 오라버니 손에 있었다면 그 때문에 오라버니 목숨은 예전에 사라졌을 거예요." "난 그 자리에서 천금 대인과 직접 현물 거래를 하는 중이었단 말입니다. 당신만 없었어도 한 몫 바로 챙겨서 자리를 떴을 게 분명한데, 이제 와서 딴 소리를 하는 것이오!" "흥, 잘 생각해 봐요. 무주공산(無主空山)인 풍악산 전체는 무림인 들로 천라지망이 깔려 있는데, 일개 점소이가 금원보 상자를 얻었다는 말이 들리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오라버니는 바로 죽었다구요. 그런데, 제가 그 위험한 물건을 옮겨줌으로 해서 점소이 오라버님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恩人)이 된 셈 아니겠어요?" "......" 그녀가 괴변을 늘어놓기만 하고 지도 조각을 돌려줄 용의가 전혀 없는 것을 보고 있으려니까 화가 나서 한바탕 욕설을 퍼부을 뻔했으나, 소방이 옆에서 내 소매를 당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하며 참으라고 말렸기에 그냥 꾹 참았다. 솔직히 부아가 치밀어서 미칠 것 같았지만, 참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군중들은 수라삼살(修羅三殺)에 이어 풍룡(風龍) 종리연까지 안중에 없다는 듯이 떠드는 나를 보고 별난 종자라고 손가락질하며 소곤소곤 비웃고 있었다. 그 중에서 특히 방금 전에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백의 경장 아가씨 무리들의 삐딱한 시선이 제일 참기 어려웠지만, 어쩌겠는가? 그냥 참는 수밖에...... 권살(券殺)이 나서며 낭낭하면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다른 지도 조각을 가지신 분께서 이 중에 있으시면 앞으로 나오시오!" 피풍의에 몸매가 가려 있어서 몰랐는데, 뜻밖에도 권살의 목소리는 여성의 것이었다. 그녀가 여성이라는 것에 안심을 했는지 무리를 해치며 한 명의 백의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 백의인은 다름 아닌 백의 경장 아가씨 무리 중에 섞여 있던 삼 십 대 중 후반의 중년 미부였던 것이다. "소방, 저 여자는 누구야?" "월녀궁(月女宮)의 부궁주 냉월화(冷月花)야. 월녀궁의 이 인자인 여인이지. 자세한 내력 수위는 강호 활동을 거의 안하고 궁에만 있던 여인이라 알 수 없지만, 꽤 고수일거야." 다시금 여인을 세세히 살폈다. 새하얀 궁장의를 걸친 여인의 오른 쪽 치마단이 쭉 갈라져 있어서 걸을 때마다 오른편 다리의 미끈한 각선미가 유감 없이 드러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얼굴에는 주름살 하나 없이 젊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돌을 깎아 만든 듯 무척이나 무뚝뚝한 기운이 흐르는 여인이었다. 새까맣게 윤기가 흐르는 머리가 허리 너머까지 흩날리는 점이 인상적이기도 했다. 보태서 특이한 점이라 하면 그 어떤 무기도 휴대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상대가 아무리 여인이라 해도 수라삼살 중 한 명이라 일컫는 사람인데도 특별히 경계하고 있다는 분위기가 잡히지도 않았다. "월녀궁(月女宮)의 냉월화(冷月花) 라고 해요. 혈해진경(血海眞經)과 관련된 사안이라 제가 직접 나왔지요." 그녀가 나오자 종리연이 지붕 위에서 사뿐히 뛰어 내려 앞마당으로 신형을 날렸다. 무려 삼 장은 되는 높이에서 훌쩍 뛰어 내렸으나, 몸 전체가 탄력 있게 휘어지며 안착이 되더니 내 옆을 스치듯이 미끄러져 갔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나자 내 혁낭이 두툼하게 무거워진 듯해서 의문을 갖고 열어보니 금원보 두 개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일단 수수료라고 알고 있으세요. 점소이 오라버니, 일만 잘 성사되면 그것의 열 배고 스무 배고 오라버니가 원하는 대로 드리도록 할게요.' 전음입밀(傳音入密)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서 종리연을 돌아보자 나를 향해서 한 쪽 눈을 찡긋 감았다가 권살을 향해 다가서는 그녀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거래를 하는 동안 입 좀 다물고 있어 달라는 일종의 뇌물이라는 찜찜한 생각을 지울 수야 없었지만, 받은 것을 도로 내뱉는 것은 내 선에서 있을 수 있는 예의가 아니기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권살과 냉월화, 종리연이 앞마당에 모이자 다른 멀찍이 떨어져 있던 맏이 철가면이 외쳤다. "자, 이제 상관없는 떨거지들은 모두 물러서라. 내가 열을 세는 동안 남아 있는 녀석들이 있다면, 우리와 싸우겠다는 의지 관철로 알겠다. 하나! 둘! 셋!......" 그가 외치는 동안 방금 전 도살의 신위에 겁먹은 피라미들은 일찌감치 자리를 떠서 슬금슬금 자취를 감추었고, 그나마 남아 있던 자들은 서로 고개를 끄떡이며 뭉치고 있었다. 단지 백의 경장 아가씨들은 주루 안에서 조용히 자신들의 부궁주를 관망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난 즉시 소방의 손을 꽉 잡고 망아루 안으로 들어 왔다. 처음에는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으려 했던 그도 내가 재차 끌어당기자 못 이기는 척 망아루 내부 탁자로 들어와 내 옆에 털썩 앉기는 했으나, 여전히 현관 부근을 날카롭게 노려보는 것은 매 한가지 였다. "......여덟! 아홉! 열!" 그가 열을 다 세고 나자 앞마당에 대략 오십 여명의 무림인들이 병장기를 꺼내들고 그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그들은 이미 수라삼살(修羅三殺)과 싸울 각오를 하고서 모여들었던 사람들인 것이다. 특히나 검을 빼어 든 회의 장한으로부터 가공할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으로 십 여인의 무리가 그의 신호를 기다리는 듯 모여든 것으로 봐서 같은 일행인 듯 싶었다. "크크크 수라삼살, 오늘 이 자리는 너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감히 우리 강남표국(江南驃局)의 선발대를 건드리다니 간이 너무 부은 것이 아닌가? 국주인 내가 직접 이 곳에 행차하게 만든 너희들의 불운을 탓해라." 그의 선언에 힘입은 다른 무인들도 그들에게 붙으며 결전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한 바탕 피보라가 이는 혈투가 망아루 앞마당에서 펼쳐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 되 버렸고, 종리연과 냉월화는 그들을 힐끔 흘겨보고는 주루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강남표국(江南驃局)의 국주라면 화산파(華山派) 속가 제자 중 단연 으뜸이라고 소문난 섬전검 최 국주겠군. 단지 자신의 실력만 믿고 이 자리에 선 것은 아닐 테지?" 맏이 철가면의 비아냥에 최 국주의 안면이 조금 일그러졌으나,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내 뒤에 서 있는 열 명의 무사들은 어렸을 때부터 화산파(華山派)에 들어가 육합검법(六合劍法)을 하사받아 매화검수라는 칭호까지 얻은 이들이다. 이를테면 우리 표국의 숨겨진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정예들이지. 이들에 나까지 나온 이상 너희들의 악행(惡行)은 오늘로 끝이 난 것이다." 최 국주가 검을 뽑아 들고 허공에 말 그대로 섬전 같이 그어대며 기수식을 취하자 그를 에워싼 열 명의 검수들도 일시에 검을 뽑아 들고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그들의 기세가 자뭇 뛰어나서 호랑이라 해도 제압할 듯 하자, 이에 힘을 얻은 주위 무리들도 각자 자신의 병장기를 꺼내들고 수라삼살을 꼴아 보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두 무리 중 한 무리는 망아루 앞마당에서 인생을 종 칠 분위기였다. 삼 대 오십, 얼핏 보기에는 수라삼살 쪽이 조금 불리해 보이기도 했으나, 워낙 그들의 악명(惡名)이 드높으니 그 또한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나야 누가 이기건 상관이 없었다. 다만 종리연이 한 약속을 잘 이행해 주길 바랄 따름이었다. 설마 또 속이려 드는 것은 아니겠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4 12:35:44 고친날 2005-07-23 18:56:58 읽은수 9479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7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1] "으아아앗! 죽여라! 무림의 정의를 세우자!" 강남표국(江南驃局) 최 국주(局主)를 필두로 한 정예 검수 열 명이 수라삼살(修羅三殺)을 향해 달려들자 다른 무인 들도 동시에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안 그래도 좁은 앞마당에 수 십 명의 무림인 들이 진형을 이루며 엉키자 삽시간에 삼 살은 인파에 밀려 삼켜져 버린 듯 했다. '쳇, 시시하군. 소방을 몰아세울 때는 엄청 강해 보이더니 고작 이 정도에 죽을......' 촤악 촥! 쿵, 쿵 떼구르르 느닷없이 수 십 여 개의 머리가 하늘을 날아올랐고, 그 중 몇 개의 머리가 망아루(忘我樓) 나무 난간에 부딪혀 바람을 넣어 만든 돼지 오줌보처럼 통통 튀어 올랐다. 심지어는 그 중 하나가 떼구르르 탁자 아래까지 굴러 와서 내 발 앞에 탁 부딪혔으나, 느낌만으로도 오싹함을 느낀 나는 머뭇거림 없이 톡 차서 바깥으로 굴려 버렸다. 그리고, 모르는 척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뒷통수를 콕콕 찌르는 느낌에 슬그머니 눈을 돌렸더니 처음부터 대놓고 철천지원수처럼 노려봤던 백의 경장 아가씨가 시선을 내 발등으로 돌려 보였다. '젠장, 그까짓 머리 좀 굴렸다고 거 대단히 귀찮게 굴려고 드네. 어? 크으으으.' 슬며시 내려다 본 발 등 위에는 초점을 잃은 회색 눈동자가 달린 하얀 눈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던 것이었다. 울렁울렁 속이 매쓱거리긴 했지만, 신속하게 발을 허공에 휙 차내어 눈알마저도 바깥으로 굴려 버리고는 여전히 아니꼽게 노려보는 그녀를 반 무시하고는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의 혈전이 멈추고 드러난 전황은 최 국주와 열 명의 검수만이 간신히 땅 위에 서 있을 뿐 다른 이들은 머리와 몸통이 깨끗하게 분리가 되어 저승으로 달려가 버린 뒤였다. 뭐가 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순식간에 일어나 버린 일이라 아리송한 일이었지만, 권살은 뒤에 팔짱을 끼고 물러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전면에 나가서 싸운 것은 혈살과 도살뿐이었던 모양이었다. 일방적으로 도륙 당해버린 상황에 의문을 가질 무렵 최 국주의 입에서 피 분수가 솟구쳐 그의 앞섶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 어째서 당문(唐門)에서 특별히 받은 피독단을 복용하고 있었는데도 이, 이렇게 쉽게 중독(中毒)당한 것이냐?" "글쎄, 당문의 피독단이 모든 독에 만능인 것은 아니지. 궁금한 것은 저승에 가서 저승사자들에게나 물어 봐라." 혈살(血殺)이 조롱하듯 대답을 하자, 피를 토하면서도 눈살을 찌푸리던 그는 갑자기 학질에 걸린 사람처럼 떨리는 손가락으로 혈살을 가리키며 몇 배는 더 창백해진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그, 그렇구나. 너, 너의 정체는 바로......커헉!" 촤아악!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도살(刀殺)이 휘두른 귀두도에 머리를 잘려야 했고, 다른 정예 검수들도 너무나도 얌전하게 머리를 내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쾌도(快刀)라는 도살 앞에서 가만히 서 있었으니 죽어도 당연한 일이라 여겨졌다. '어떤 독에 중독되었길래 피독단인지 뭔지가 소용없었을까? 또 최 국주가 내뱉으려 했던 말은 무엇일까? 뭐, 나야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이긴 하지만, 저 자리에 머리를 베이고 누워 있는 아해들이 무림맹(武林盟) 녀석들이 아니란 게 조금 아쉽기는 하군.' 사실 조금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매우 안타깝기도 했고, 도살을 비롯한 삼살이 멀쩡한 것도 마음에 안 들기는 했다. 소방도 예상(豫想) 외의 전개가 펼쳐지자 조금 당혹스러워하는 듯 싶었다. '설마 어부지리(魚父之利)를 취하는 게 목적이었나? 의외로 엉큼한 구석이 있었네.' "자, 이제 피라미들은 다 해결(解決)되었으니 혈해진경(血海眞經) 지도 조각을 맞춰 봅시다. 나와 도살은 멀찍이 물러서 있겠소이다." 혈살은 자기 말대로 도살과 함께 오르막길 끝으로 올라가 버렸다. 꽤나 멀리 가버려서 보일락 말락 한 곳에까지 물러서 있었다. 그 때까지 팔짱을 끼고 잠자코 서있던 권살이 앞으로 걸어 나왔고, 종리연과 냉월화도 경계심이 풀렸는지 앞마당으로 나섰다. 앞마당은 그야말로 여기저기에 굴러다니는 목 없는 시체들로 인해 끔찍함을 형용키 어려웠다. 비릿하게 흘러나오는 혈향(血香)은 둘째 쳐도 검푸르게 변색되어 버린 것이 중독이 된 상태임이 분명했다. 멀쩡한 시체들을 치우는 것도 귀찮은데, 중독까지 된 머리 없는 시체들을 독이 옮을까 조바심을 내면서 치워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에휴, 저 시체들을 언제 치우느냐고......? 혹, 혹시?' "소방, 혹시 다른 개방 거지들이 이 근처에 숨어 있어?" "어, 엉? 어, 어떻게 알았어?" "풋, 너 날 바보로 아는구나. 저 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는데, 시체 뒤지기 놀이의 대명사인 소방이 모르면 누가 알겠어? 야, 이왕 뒤질거면 뒷마무리도 부탁한다. 인적이 안 닿는 깊은 숲 속 응달에다가 말이야." "......" 권살(券殺)이 서있는 자리까지 온 종리연(鍾理戀)과 냉월화(冷月花)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지도 조각을 꺼내 들었다. "셋을 세면 동시에 맞추도록 하지요. 대략 일 각 정도만 보고서 조용히 물러서는 것으로 합시다." 권살의 말에 동의를 표시한 그녀들은 셋이란 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지도조각을 맞추고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일 각이라는 짧은 시간동안에 완성된 지도를 머릿속에 각인(刻印)시켜야 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녀들의 기대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부웅 채 반 각도 지나기 전에 권살의 철권이 종리연과 냉월화의 복부를 꿰뚫고 있었다. 지도는 조금의 떨림도 없이 공중에 떠있었기에 계속 잡고 있을 줄로만 착각하고서 지도를 뚫어지게 보고만 있었을 그녀들은 난데없는 기습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각각 일 권씩을 얻어맞고 볼 쌍 사납게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지도는 내가 가져가겠다." 권살이 공중에 허공섭물(虛空攝物)의 힘으로 떠 있는 지도를 회수하려 할 때 바닥을 굴렀던 냉월화의 채대가 풀리면서 누워있던 자세 그대로 권살의 배를 갈랐다. 마찬가지로 방심하고 있던 권살의 배가 갈라지면서 피를 뿜었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비명 하나 안 지르고, 지도를 마저 회수해 버렸다. "독한 년이구나! 네가 팔 다리를 잘려도 비명을 안 지르는지 두고 보마!" 구르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일어선 냉월화의 채대(彩帶)가 풀린 채로 뱀처럼 출렁이며 번득이는 것을 보니 다름 아닌 연검(軟劍)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얇은 검신 때문에 이리저리 휘어지던 연검은 보통의 검처럼 꼿꼿하게 서더니 배를 갈려서 비틀비틀 거리는 권살에게 날카롭게 쇄도해 들어 갔다. 챙! 역시 악명에 걸맞게 약속 같은 것은 처음부터 지킬 용의가 없었을 도살이 그녀의 연검을 튕겨 내고는 권살 앞을 막아섰고, 혈살이 그녀를 부축하고 피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려고 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자 망아루 안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여섯 명의 백의 경장 아가씨들이 일제히 신형을 날려 혈살과 권살을 쫓아갔으나, 그 누구도 냉월화를 도우려 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녀가 그 믿음에 어울릴 정도로 고강한 고수(高手)라는 뜻일 터였다. "이년들이 어딜 감히 지나가려고 하느냐!" 채챙! "다른 데로 눈 돌리지 마. 네 녀석 상대는 나 하나로 충분해." 도살의 쾌도가 그를 무시하고 스쳐 가는 백의 경장 여인들을 가르려고 했으나, 그 또한 연검에 막혀 그 자리에 발이 묶여 버리고 말았다. 역시 월녀궁 부궁주 자리가 뒷골목 딱지치기로 얻어낸 유명무실(有命無實)한 자리가 아님이 여실하게 증명(證明)되는 순간이었다. 도살은 미친 듯이 귀두도(鬼頭刀)를 휘두르며 냉월화의 연검(軟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으나, 한 수가 딸리는 듯 하면서도 팽팽한 기세를 잃지 않는 냉월화의 날카로운 기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있었다. 혈살은 권살을 일단 내려놓고 뒤따라서 신형을 날려오는 여섯 명의 백의 경장 여인들을 향해 가느다란 침을 쏘아내었으나, 맨 앞에 있던 한 명만이 미쳐 못 막고 어깨 부분을 맞았을 뿐 다른 여인들은 다 칼로 튕겨 내거나 막고는 계속 달려들고 있었다. 침을 맞은 여인은 즉시 침 맞은 부위의 혈도를 점하고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어 꿀꺽 삼키고서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주저앉았다. '그러니까 독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는 말이렸다. 의외인걸, 최 국주 일행은 당문에서 받은 피독단을 먹고도 쉽사리 제압당했는데, 오히려 월녀궁 애들이 더 기민하게 대처하네.' 내가 그들이 싸우는 것을 재미있게 구경하며 씨익 웃자, 소방이 의문스런 시선으로 날 돌아보며 물어왔다. "너, 저 사람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이해는 하고서 웃는 거야?" "엉? 대충은 보이는데, 침이 날라 가는 거나 검으로 튕기는 것이나, 뭐 검로 같은 것은 그냥 느낌으로만 알 뿐이지만, 이상할 것은 없잖아?" 그러나, 소방의 눈이 휘둥그래 커지며 이맛살을 찌푸리자 왜 이러는가 싶었다. "충분히 이상해. 고수들의 접전이라구. 중수 정도 되어도 머리를 긁적여야 하는데, 하수 중에서도 맨 바닥에 있을 네 눈에 보인다고 하니까 당연히 이상할 수밖에......" "쳇, 몸이 못 따라간다고 해서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말로 억지다. 뭐." "억지는 네가 부리는 거지. 어휴, 넌 정말 이상한 데가 있어. 내공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데, 내공을 가진 무림인 들보다 고강한 맷집이던가 지금처럼 고수들의 접전이 보인다고 하는 것은 누굴 붙잡고 물어봐도 이상한 거야." "그래? 아무렴 좋은 게 좋은 거지. 후후훗."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5 06:51:41 고친날 2005-07-23 18:57:43 읽은수 9545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7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2] 채채챙 차창! 냉월화(冷月花)가 도살(刀殺)을 붙잡고 있는 동안, 가부좌를 틀고서 독을 몰아내고 있는 한 명을 제외한 다섯 명의 월녀궁(月女宮) 여인들의 검진(劍陣)이 매몰차게 혈살을 몰아 붙이고 있었다. 솔직히 개개인의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혈살(血殺)에 한참 못 미쳤으나 평소에 합격진(合擊陣)을 신경 써서 수련했는지 호흡이 장난 아니게 척척 잘 들어 맞아 치고 빠지면서 압박함에 있어서 모자름이 없어 보였다. 원거리의 잇점을 잃은 혈살은 장검 하나로 간신히 막고 있을 뿐이었다. 하기사 바로 지척에 배가 갈라져 버린 권살이 피를 줄줄줄 흘리며 겨우 숨만 쉬고 있으니 독을 썼다가 그녀에게까지 피해가 생기면 난감한 일이 될 것이었다. "월녀궁 애들이 제법 한 수가 있네. 오십 여 명이 떼거지로 달려들어 떼 몰살을 당했는데, 쟤 네는 소수로도 잘 싸우잖아." 앞마당이야 개방 아그들이 정리해 줄 거라는 생각에 한 시름 놓아져서 전황을 보는 내 태도 또한 느긋해질 수 있었다. 이제야말로 진정한 강 건너 불 구경의 참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설사 수라삼살 중 도살이 헷가닥 해서 일루 온다고 해도 소방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겠는가? "수라삼살(修羅三殺)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온 거야. 냉월화 부궁주만해도 내 밑이 아니야. 여섯 명의 검진을 짠 애들도 제법이야. 월녀궁(月女宮), 만만히 볼 곳이 아니었어." 소방의 말투가 의미심장해서 돌아보니 예의 고양이 눈알 모드를 하고서 혈투중인 그들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런 것인지 궁금하지만, 이럴 때는 안 건드리는 것이 장땡이란 생각에 더 케 묻지는 않았다. 도둑 년에 생각이 미쳐서 돌아보니 신법은 빨라도 무공이 떨어졌는지 권살한테 한 방 맞은 것 같고 가부좌 상태로 운기조식(運氣調息)을 죽네 사네 하며 내상을 치유중이었다. 그러한 종리연(鍾理戀)을 보니 툭 툭 건드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어났다. 무림인이라는 애들이 내상을 입고 운기조식을 하고 있을 때 건드리면 내상이 도져서 죽을 둥 살 둥 한다는데, 어디 한 번 시험해 봐? 슬금슬금슬금, 톡 톡 톡, 빠직 빠직 '오호, 빠직 빠직 거리는 소리는 어디서 나는 거지? 이거 무진장 재미있네. 후후후훗.' 툭 툭, 빠직 빠직 "작, 작삼, 뭐하는 거얏!" 뒤늦게 서야 나한테로 시선을 돌린 소방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난 그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응답해줬다. "운기조식 중 외부 충격에 의한 대비 내상 진행 정도를 임상 실험으로 알아보는 중이야. 너도 와서 해 봐. 무지 재미있다. 빠직거리는 소리도 나." 그 짓을 계속 하려고 했으나, 뱁새 눈깔을 하고서 야리는 소방의 손에 강제적으로 질질질 이끌려 다시 망아루 내부로 되돌아 와야 했다. 난 아쉬움에 입맛을 다지면서도 뒤를 돌아다 보았는데, 운기조식 중이라 내가 보이지 않았을 종리연이 바르르르 떤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뭐, 기분이겠지. 아, 아쉽다. 저 흑두건을 한 번 벗겨보고 싶었는데......쩝.' 소방과 내가 막 망아루로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방팔방에서 가슴에 현무(玄武)를 써넣은 황의인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물론 그들 가운데에는 제갈혜(諸葛惠)와 황보원(皇甫元)이 보였으며, 무림맹 아해들과는 같이 움직이기 싫다고 하던 남궁현(南宮炫)과 그를 약방에 감초처럼 따라 다니는 당가희(唐佳喜), 그리고 침묵을 금으로 아는 모용천풍(募容天風)까지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의 등장 시점은 실로 교묘해서 먼저 와 있던 무리들이 지리멸렬하거나 흩어진 상태였고, 남은 이들도 서로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우느라 상태가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장내가 이렇게 숨가쁘게 정리가 되어 가는 시점에 나타났다는 것은 머리가 아무리 나쁜 나라해도 다분히 고의적인 냄새가 진하게 난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림맹 아해들의 등장에 혈전을 벌이던 모든 이들이 잠시 주춤하게 되었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도살은 주저 없이 냉월화로부터 벗어나서 권살을 안아 들고 신형을 길게 뽑아 내었다. 도살이 권살을 안고 자리를 벗어난 덕택에 자유로와진 혈살은 즉시 소매를 흔들어 독가루를 전면에 뿌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져 버렸다. 월녀궁 여인들은 즉시 신형을 뒤로 뽑아 내어 독가루의 범위로부터 벗어났으나, 한 여인만은 늦게 움직이는 바람에 독가루에 노출이 되자 바닥을 구르면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뒤늦게 냉월화가 소매로 바람을 일으켜 독가루를 몰아낸 후 품에서 알약을 꺼내어 다가갔을 때에는 쓰러져서 비명을 지르던 여인은 더 이상 신음소리도 흘리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손수건을 꺼내어 싸맨 손가락으로 여인의 턱 아래 맥을 짚어 본 그녀는 침통한 한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보같으니라구. 훈련받은 데로 알약을 바로 삼켰으면 목숨이라도 건졌을 텐데, 도리어 비명을 지르면서 숨을 쉬는 바람에 독가루를 치사량 이상으로 마셔 버렸어." 가뜩이나 차갑게 보이던 냉월화의 안면은 혈해진경(血海眞經) 지도 조각을 뺏긴 데다가 월녀궁 제자 한 명을 잃어 버렸다는 자책감으로 인해 그늘이 져서 더욱 암울해 보이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분위기를 따라서 다른 월녀궁 여인들도 침통해 하는 분위기였다. '침통해 할 필요까지 있나? 이 앞전에 오 십 여명이 몰살당한 것에 비하면 엄청나게 선전한 것이라구. 오히려 자축해도 좋을 텐데......' 너무 많은 죽음이 눈앞에 펼쳐져서 인지 월녀궁 여인 한 명이 비명횡사한 것은 눈에 차지도 않았다. 나와는 아무런 통성명을 한 사이도 아니니 죽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소방, 오랜만이야. 잘 있었어?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점소이 양반도 무사히 잘 계시네요?" "아, 안녕하세요. 제갈혜 소저." 은근히 말투에 살막에서 살수를 보냈을 텐데 용케도 살아있다는 비아냥이 서려 있었지만, 까짓 거 귀 한 번 후벼주고 말지. 제갈혜의 어투가 고귀함과 현숙함을 떠나 다분히 독을 뿜는 것을 보니 남궁현은 옆에......역시 없었다. 모용천풍과 당가희도 없었고, 황보원도 안 보이는 것으로 보아 도주한 수라삼살 뒤를 추격해 갔음이 분명한 듯 싶었다. "제갈혜야 올려면 빨리 오지. 왜 이렇게 느즈막하게 올라온 거야?" "그야 올 필요가 없었으니까, 뻔한 것을 왜 물어? 지하 석실로 들어가면 적이 될 사람들이잖아." "정녕 그런 거였어? 꼭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써야만 했던 거니?" "호호호, 소방, 너만큼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사람이 드물텐데, 알면서 묻고 있어? 네 손에 직접 피를 묻히느니 이런 쪽이 오히려 낫지 않아? 의외라면 수라삼살도 같이 죽거나 타격을 받았으면 했는데, 권살이나 겨우 검상을 입힌 정도라니! 정녕 아쉬운 일이지." 그녀의 말에 의외로 소방은 말대꾸를 하지 않고 아랫 입술만 질겅질겅 깨물고 있었다. 그녀와 제갈혜의 지금까지 관계로 미루어 볼 때 독대 중에는 절대로 말 한 마디도 밀리지 않으려 했던 것 치고는 왠지 어설프게 남아 언급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 '그'라는 인물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절로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가 누구일까? 달그락 달그락 탁 탁탁 접시 옮기는 소리가 나기에 돌아보니 무림인 들이 떠나고 난 뒤 음식 찌꺼기와 여기저기 널린 요리 접시들로 인해 엉망이 된 탁자 주변을 조진후와 단수연이 열심히 치우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 역시 망아루의 점소이니 만큼 같이 정리를 하려던 찰라 냉월화 를 비롯한 월녀궁 일행이 현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우리 쪽에 부상자가 있어서 모두 며칠 거하면서 회복할 방이 필요하다. 바로 안내해다오." 부상자라고 한 사람은 방금 전에 독침을 어깨에 맞고서 운기조식에 들어갔던 월려궁 여인이었다. 이제는 거동이 가능한지 양쪽의 부축을 받으며 보행 중이지만, 중독에 의한 고통이 따르는지 가늘게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난 바로 그들을 이 층으로 안내해서 원하는 대로 응달이 지는 북향측 방 세 개를 배정해 주었다. 마지막 세번째 방마저 안내한 나는 바로 나오려고 했으나, 방금 전까지 날 매섭게 째려보던 월녀궁 여인에게 덜컥 목덜미를 붙잡혀 그대로 냉월화 앞으로 질질 끌려 와야만 했다. "이, 이거 왜 이러세요?" "너한테서 들어야 하는 일이 있어서 그런다. 까불지 말고 무릎 꿇어." 침착하게 굴던 냉월화도 내게 들을 말이 있었는지 침대 위에 걸터앉아서 그녀 앞에 무릎을 꿇린 채로 기가 질려 떨구어진 내 턱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맞추다가 내 상의를 젖혀 자수정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이 목걸이 어디서 난 것이냐?" "그, 그것은 교옥정 누님이 저, 저한테 맡긴 것인데요." "옥정이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너같이 어리버리한 일개 점소이 녀석한테 목걸이를 맡기다니! 타인을 함부로 믿지도 않고 깐깐하기도 그지없는 그녀가 미치지 않은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른 데로 고하렸다. 옥정이는 지금 어디 있느냐? 어디에다가 강금시켰느냐?" "아, 거 사람 말 정말 못 믿네. 교 누님은 월녀궁으로 오래 전에 피신 했구요, 목걸이는 다시 올 때, 절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준 거라니깐요. 정 궁금하면 월녀궁에 인편을 보내건 전서군지 뭔지 보내서 알아보면 될 거 아니에요?" "변방 주루 점소이가 사람이더냐? 구룡의 일 인도 아니고, 이름 있는 오대세가 사람도 아니며, 하다 못해 내공이 느껴지는 무림인은 더더욱 아니면서, 글 좀 하는 문사도 아니질 않느냐? 더구나 우리가 월녀궁 사람이란 것은 또 어떻게 알았지?" "......" 내 멱살을 꽉 움켜쥐고서 앞뒤로 흔들면서 질풍같이 쏟아내는 질문들이 두서 없이 나열 되 버려서 답변을 하기는커녕 정신을 올바로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하여간 무린인 이라는 것들은 정파 사파 구분할 것도 없이 무림인이 아닌 사람은 일단 무시하고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은 별 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대답해! 대답하라니깐! 꿀 먹은 벙어리더냐? 입을 열어 봐서 꿀이 없으면 혀를 뽑아 동강내주마!" "......" 교옥정 누님을 처음 만났을 때 튀어나온 싸가지 없는 말버릇의 근원지가 어딘지 대략 짐작이 될 것 같았다. 부궁주란 인간의 고운 입에서 나오는 시궁창보다 못한 말을 듣고 있으려니 울컥 욕지기가 치밀었다. 아여, 짜증난다. 동강내라, 동강내! 그게 귀찮으면 내 입에 꿀 쳐 넣던가, 맘대로 해라. 마음대로!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5 22:14:16 고친날 2005-07-23 18:58:08 읽은수 9639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73)-소맹주 천운학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3]소맹주 천운학(天雲鶴) "작삼! 제갈혜 현무단주(玄武團主)님이 물어볼 말이 있대. 어서 나와봐." 이 가냘픈 미성은 역시 소방의 목소리였다. 즉각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날 불렀는지 눈치 챈 나는 바로 소리쳤다. "어, 일 다 끝났어. 나갈 거야." 일이 이렇게 되자 무림맹과는 아직 충돌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냉월화는 고민하다가 품속에서 붉은 단약을 하나 꺼내더니 강제로 내 목구멍에 던져 넣어 버렸다. "허걱, 케, 케켁." 내가 가슴을 치며 발광을 하자 날 죽일 듯 내려보던 월녀궁 여인이 등을 두들겨서 숨구멍이 막힐 뻔한 위기를 넘기게 해 주었다. 이게 뭐냐는 내 소리 없는 외침을 가득 담은 눈빛을 잠시 피하던 냉월화는 곧 빙그레 화색을 띄우며 전음입밀(傳音入密)을 내 뇌리에 박아 넣었다. '이틀 후에 발작하는 독약(毒藥)이다. 적어도 내일 밤에는 반드시 내 방으로 다시 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칠공에서 피를 쏟으며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 누구한테 입을 벙긋할 생각도 하지 마라. 해약(解藥)은 오로지 나한테만 있다. 일이 누설되면 해약을 다 없애버릴 테니까 입 조심하도록 해라.' '젠, 젠장 똥 밟았다.' 밖으로 걸어 나가다가 그들을 무섭게 흘겨본 후 나왔으나, 쓰린 가슴을 달랠 곳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남정네한테 다짜고짜 독약부터 먹이는 악녀들이 교 누님이 무공을 배운 곳의 사부나 사매가 되는 이들이라고 생각하니 기가 막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나마 교 누님이 거하는 곳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무림인 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반가운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 기분 다 취소다. 젠장.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방이 내 안면에 그늘이 드리운 것을 보고 무슨 속사정이 있구나 하는 것을 눈치 챈 듯 했지만, 세세하게 캐 물어오지는 않았다. '내일 다시 오라고 했으니 과연 어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서 수모를 겪게 하려는 것일까? 이 세상 위에는 오로지 널리고 널린 게 악녀, 마녀, 도둑년 밖에 없는 것인가? 어째서 내가 만나는 여인마다 이렇게 악랄하단 말인가! 에휴.' 아래로 내려와 보니 제갈혜가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머리 없는 시체들에게 제 임자를 찾아준 후 뒷동산에서도 한참 떨어진 벌판에 가매장을 하도록 황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게 보였다. 그 동안 핏물들이 스며들어 빨갛게 물든 앞마당을 바라보니 내가 상처 입기라도 한 듯 아릿한 마음이 들었다. 종리연도 어느새 운기조식을 마치고서 망아루 안의 창가로 들어와 앉아 있었다. 지도 조각을 빼앗겼는데도, 오히려 얻을 것은 다 얻었다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단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이를 빠득빠득 갈았는데, 얼마나 심하게 갈았는지 그녀의 주변에서 서성이던 황의인들이 슬금슬금 거리를 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흑두건이 떨어질락 말락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게 보였다. 조금만 더 이빨을 갈도록 내버려뒀으면 흑두건이 저절로 떨어져서 어떤 면상인지 공짜로 구경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점소이 오라버니,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다 죽어 가는 아녀자를 툭툭 쳐요? 하마트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려서 속이 진탕 되 버릴 뻔했잖아요!" "진탕은 무슨? 멀쩡하구만, 나머지 금원보 언제 줄 거요? 그거나 말해 보시오." "금원보가 누구네 애 이름인줄 알아요! 아까 전에 수라삼살에게 지도 조각 뺏긴 거 못 봤어요? 사람이 염치가 있으면 알아서 구석에 조용히 찌그러져 있기나 할 것이지. 왜 이렇게 줏대 없이 굴어요! 몰라요, 배 째요. 배 째!" '오호, 지도 조각이 없다고 함부로 나불나불 거리네. 좋아 그럼 나도 생각이 있다 이거야.' 독약(毒藥)을 넙죽 삼켜 버렸다는 생각에 심한 공황(恐慌)에 빠져 있던 나는 즉시 주방으로 들어가 보도처럼 번쩍번쩍 거리도록 잘 갈아진 부엌칼을 치켜들었다. 포연강은 넘치게 많은 그릇들 때문에 단수연의 보조를 받으면서도 연신 투덜투덜 거리기를 잊지 않고, 설거지를 하는 중이어서 미쳐 나한테 신경을 쓰지 못 했다. 종리연이 심호흡을 내쉬며 쉬고 있던 탁자를 향해 신형을 날린 나는 주저 없이 무의식적으로 삼재검법 중 비홍횡강(飛虹橫江)을 펼쳐 오른발에 살짝 힘을 주고 내려서면서 올려든 부엌칼을 그 반동으로 그녀의 배를 향해 거세게 휘둘러 내리쳐 버렸다. 콰직! 때마침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던 종리연이 화들짝 놀래며 옆으로 피해 버린 까닭에 애꿎은 의자 바닥만 너덜너덜하게 반 동강이 나서 흩날려져 버렸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나의 기세는 더욱 더 뜨겁게 불타오르게 되었다. "끼아아아악! 왜 이래요? 정신 차려요!" "나, 제 정신이오! 왜 피하는 거요? 당신 입으로 배 째라고 했지 않소? 돈 안 받아도 좋으니 당신 배는 째고 말 거요. 어서 배를 갖다 대란 말이오!" 콰직! 한 번 타올라 버린 나는 눈앞에 뵈는 게 없는 상태가 되어 마구잡이로 부엌칼을 휘둘렀으나, 그 때마다 삼재검법의 초식이 자연스럽게 응용되어 운기조식으로 내상을 치유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종리연을 바싹 긴장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침내 참고만 있었던 그녀가 청룡출수(靑龍出水)를 펼쳐 부엌칼을 가슴으로 내지르는 순간 비스듬히 피하더니 내 배에 인정 사정없이 힘껏 장을 내질렀고, 지난 날 주령령으로부터 처음 한 방 얻어먹은 그 날처럼 등뒤에 부딪힌 탁자 하나를 박살내면서 마루 바닥을 떼굴떼굴 굴러 버렸다. "작삼! 작삼! 무슨 짓이야!"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고 뒤에서 당황스럽게 지켜보고 있었을 소방이 날카롭게 신형을 뽑으며 종리연을 향해 매서운 공격을 퍼부었고, 연이어 황당스런 꼴을 당하게 된 종리연은 그녀대로 사활을 다 해 그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아무리 지쳤어도 풍룡(風龍)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신법 하나는 정말 기가 막혀서 소방의 날카로운 권과 각들이 아슬아슬하게 그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만! 그만해! 그 도둑년은 내 거야! 손대지 말라고!" "작, 작삼? 괜, 괜찮아?" 조각조각 가루가 된 탁자 조각을 떨쳐내 버리고서 일어난 내가 소리를 지르자 종리연을 매섭게 몰아 붙이던 소방이 깜짝 놀라면서 공격을 거두고 내 옆으로 날아 내렸다. "당연히 괜찮지. 저 도둑년은 날다람쥐처럼 도망가기만 잘 할 뿐이지. 무공은 형편없다고, 아까 전에도 권을 한 대 맞았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운기조식 하는 거 못 봤어? 이번에 잡히기만 하면 저년 배도 가르고, 다리 몽댕이도 같이 분질러 버릴 거야. 비켜봐 좀." 시체를 치우다가 주루 안에서 기이한 일이 터지자 하나 둘 모여든 황의인들의 안면에는 경악스런 표정들이 떠올라 있었다. 경악스럽기도 하겠지. 한 달 전만 해도 자기들 손에 무참하게 피 떡이 되었던 일개 점소이가 부엌칼을 들고서 지쳤다고는 하나 명색이 풍룡인 종리연을 몰아 세우다가 정통으로 공격을 받았는데도 그냥 훌훌 털고 일어나면서 기세등등하게 다시 덤벼들려 하는 꼴을 보고 어찌 질리지 않겠는가! 하지만, 니 네도 내 꼴 나봐. 인간이 미치면 무림 고수고 뭐고 간에 눈에 안 들어온 다는 것을 알아야지. "그만들 해요! 어서 시체들이나 치워요." 제갈혜가 나서서 사태 수습에 나서자 몰려 있던 황의인들은 황급히 자기네 일들을 마저 마치기 위해 몰려 나가 버렸다. "이봐요, 점소이 양반도 그만 해둬요. 종리연은 우리 무림맹의 손님이예요. 그녀를 귀찮게 하는 것은 명백히 무림맹에 대한 도전이나 마찬가지예요. 또 다시 저번과 같은 꼴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제발 좀 가만히 있어요." "......" 내가 부엌칼을 슬그머니 내려놓으면서도 씩씩거리기를 멈추지 않자 한 숨을 내쉬는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휴우,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알면 알수록 반대로 더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한 때는 소방을 비웃었던 적도 있었지만, 얽매임이 없는 자유로운 당신 같은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 그녀의 어감이 왠지 경멸조가 서렸던 예전과는 좀 다르게 들려와 왠 일인가 싶어 돌아 봤으나, 바깥이 시끌시끌 거려서 묘하게 이어지던 대치 상태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자 아까 전까지만 해도 마구잡이로 치밀어 오르던 오기가 슬그머니 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더불어 부엌칼을 들고 종리연에게 달려들었던 과거를 생각하니 오싹한 기분마저 들면서 상당히 혼란스러워 졌다. '내, 내가 미쳤지. 감, 감히 무림인에게 부엌칼을 휘두르며 덤비다니 내,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의문스럽고도 기이한 마음에 본능적으로 종리연을 돌아다보니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휙 돌렸다. 어쩐지 나를 겁내고 있다는 묘한 기분이 들자 흥분이 되면서도 불안해졌다. 분명 내가 순간적으로 그 무엇엔가 홀려 버렸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소 겁을 내던 무림인에게 부엌칼을 들고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니! 더구나 포, 포연강과 어디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주령령.....! 크악! 내, 내가 왜 그랬을까? 혹시나 해서 주방을 바라보니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단수연과 포연강이 보였다. 포연강의 손가락이 나를 향해 까딱까닥 이는 것이 보여 바깥의 동정에 신경을 쓰고 있어 나를 돌아보지 못하는 소방을 야속하게 한 번 흘겨보고는 슬금슬금 기다시피 주방으로 기어 들어갔다. 말없이 팔짱을 끼고서 한동안 나를 노려보던 포연강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 놔." "네? 무, 무엇을요?" "내 부엌칼 내놓으라고." "아, 예. 여, 여기." 즉시 그의 손위에 정중하게 부엌칼을 올려놓고는 슬그머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여차하면 날아올 부엌칼을 피하기 위해 전신의 육감을 극도로 키웠다. "잘 기억해둬라. 방금 전 네가 펼친 그 삼재검법, 군더더기 없이 아주 훌륭했다." "예? 뭐, 뭐라고 하셨는지......?" "......" "......" "하여간 진기한 놈이군. 어떻게 너 같은 기이한 물건이 여기로 흘러 들어왔는지 모르겠구나. 나가서 일이나 봐라. 소막주는 혹시나 제갈혜란 여자가 알아볼까 해서 이 층에 짱 박혀 있으라고 했으니까, 찾지 마라. 난 귀찮아서 넘어간다만, 어디서 지켜보고 있을 령령이 조용히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하진 마라." 여전히 아리송 다리송 한 말이었지만, 일단 그가 넘어가 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주령령이야 왠만한 실수는 봐준다고 했으니까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했다. 자기 이름으로 맹세까지 했는데, 설마 그걸 어기겠느냐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7 20:20:21 고친날 2005-07-28 23:34:03 읽은수 9366 [ 15 K ] 제목 점소이 작삼(7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4] 바깥이 시끌시끌한 것은 둘째 쳐도 소방이 저렇게까지 정신 없을 정도로 신경 쓰는 일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지만, 나로 인해 엉망이 된 주루 내부 정리가 우선인지라 박살난 탁자와 의자 조각들을 모아서 후원 입구에다가 던져 놓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마루 바닥에는 손상이 없어서 그나마 몰래 한 숨을 쉰 정도라고나 할까? 어느새 설거지를 마친 듯한 단수연(丹粹姸)이 나와서 도와준 덕택에 일이 한 결 수월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현관으로 인파가 몰려드는 것 같아서 얼른 손님 맞이 차원에서 현관으로 뛰어 갔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허리를 반 즘 숙인 내 옆으로 뭔가 바스락거리는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미약하게 향냄새가 나길래 여인인가 해서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비켜, 감히 어느 안전에서 어물쩡 거려!" "어, 어이쿠." 바로 그 뒤를 따라오던 청의 무복 여인의 강한 힘에 떠밀려 비틀비틀 넘어질 듯 했다가 뒤에서 어떤 인간이 받쳐준 덕에 가까스로 넘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감, 감사합니......"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고 했다가 그 손의 임자가 남궁현인 것을 확인하고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슬며시 틀었다. 다른 인간들은 몰라도 이 무지막지하게 잘 생겨먹은 기생 오라버니 미공자 남궁현에게 만은 고맙다는 소리 따위를 내뱉어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봐, 감사 인사를 할려면 끝까지 해야지. 왜 말 끝을 흐리나? 어, 어이 고개는 왜 돌려? 참 나 은자 세 냥 사건 가지고 엄청 쪼잔하게도 구는군. 누가 보면 내가 점소이인줄 알겠다. 쳇." 그의 푸념 같은 것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면서 슬그머니 곁눈질 해보니 그 뒤로 당가희와 모용천풍도 들어와서 맨 앞에 앞질러 간 인간 쪽으로 시선들을 돌리고 있었다. 묘한 것은 뭔가 위화감이 느껴질 만큼 다가서길 꺼리며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의 앞에서는 자리에 앉을 자격도 없다는 듯 멀찍이 서서 구경하고있는 것이 꽤나 기이하게 보였다. '흠 면상이 얼마나 곱상한가 구경이나 해볼까나?' 점소이라는 신분을 십분 이용해서 앞서 들어온 인간의 용모를 파악하기 위해 잽싸게 그가 앉은자리로 뛰어 가서는 허리를 굽실 하며 요리 목록을 읊었다. "저희 망아루에는 요리로 소면과 만두, 오리구이가 있으며, 술로는 백건아와 죽엽청이 있습니다. 무엇으로 갖다 드릴까요?" 말을 하면서 가만히 상대를 살펴보았다. 비록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급스러면서 은은한 향냄새를 흘렸고, 드러난 단아한 얼굴 선에 수려한 외모가 일견하기에 여자로 착각하기 쉽기는 했으나, 목에 드러난 뚜렷한 목젖으로 보아 남자임이 확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고 있는 옷은 또한 구름과 학이 어우러져 놀고 있는 문양이 들어간 상아빛 비단옷이었으며 손목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옥석이 박힌 황금색 팔찌가 채워져 있었고, 입술에는 무엇을 발랐는지 자주빛으로 윤기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다분히 그 쪽으로 끼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분명 남색가였던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를 남자가 아닌 여자로 보는 위험한 남색가! '이거 포연강이 보면 홀딱 반할 사람이로군.' "꺼져." "예, 예? 잘, 잘 못 들었는뎁쇼." "꺼지라고 했다. 지저분한 양파 냄새나 풍기는 일개 점소이 주제에 감히 나에게 말을 걸다니!" 순간 그의 오른편 손이 들리면서 집게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는 장면까지 보았으나, 그 다음에는 내 이마에 망치로 갈긴 듯한 충격을 받으며 뒤로 떼굴떼굴 나뒹굴어야만 했다. 우당탕 쿵탕! 즉시 소방이 내 곁으로 뛰어와 일으켜 세워주며 물었다. "괜, 괜찮아? 작삼?"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면서 이마를 만져 보았더니 뜨근 미지근한 핏줄기가 주르르륵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지! 열 불이 나서 따지려고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려 했으나, 다급히 소방이 내 어깨를 잡아 무겁게 눌러버리는 통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떠들지 말고 듣기만 해. 저 인간은 나조차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야. 만약 네가 그 인간에게 덤비면 너 하나 죽는 문제로 끝나지 않아. 망아루(忘我樓)에도 피해가 간다고, 그러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망아루에 피해가 간다는 그의 전음입밀(傳音入密)에 즉각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화딱지가 났다하면 힘이 솟구쳐 오르면서 상대도 보지 않고 달려들어 버리지? 예전에는 화가 나도 그러려니 하면서 속으로 잘 삭였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네. 독약을 먹은 후유증(後有症)인가? ' 내 스스로 자극을 받으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방이 이끄는 데로 순순히 옆 탁자에 앉았다. 그는 이어서 주방에서 손수건에 물을 적셔와서 피가 나는 내 머리를 자기 다리 위로 눕히고는 이마 위에 물수건을 올려 주었다. 혹시라도 내가 또 미쳐 날뛸 것이 염려되었는지 내 오른 손을 자신의 작고도 부드러운 왼 손에 깍지를 껴서 내 배 위로 가만히 올려놓았다. '사려 깊은 녀석, 도저히 너를 못 당하겠구나. 너를 봐서라도 참아 보이겠다. 스스로의 의지도 아닌 독약의 후유증 같은 것에 휘말리지 않겠다.' 그래도 모두가 겁을 내고 있는 미공자의 정체가 궁금해서 누운 채로 눈을 감고 귀를 활짝 열어서 어떤 대화가 오가는 지에 신경을 기울이기로 했다. 다른 데 신경을 기울임으로써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투명한 투기를 가라앉힐 필요성도 더불어 느꼈던 것이었다. "부조장 이하 무림맹 조원들은 모두 바깥에서 대기하도록 한다." "존명!" 미공자 대신 그의 옆에 자석처럼 붙어 있던 청의 무복 여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대답과 함께 다수의 황의인들이 우루루 몰려 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마루 바닥을 타고 의자와 소방의 무릎에 전해져 내 척수 신경까지 울릴 지경이었다. 상아색 비단옷에 향까지 뿌린 미공자가 앉은 탁자는 종리연이 앉아 있는 곳이었다. 그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일차적으로 종리연에게 볼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와 그녀 사이에 대화 소리가 조용해진 주루안에 퍼져왔다. "종리연 소저, 듣자 하니 반 각도 채 못 지난 상태에서 기습 공격을 받았다고 하던데, 어느 정도나 암기해 두었소?" "호호호호홋, 반 각보다 더 짧은 반의 반 각이라 해도 소녀가 지도를 한 번에 암기하기에는 충분한 시각이지요. 기문이 기록된 글자 하나 남김없이 세세하게 잘 기억해 두었으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천운학(天雲鶴) 공자님." "흐음, 그렇소? 역시 구룡의 일인 이면서 무영투도(無影偸盜)라는 종리연 소저와 거래를 하게 된 것이 무척 현명한 선택이었구려." "당연한 말씀이예요. 월녀궁에서 나왔다는 부궁주는 뭔가 이해가 안 되었는지 인상만 찌푸리다가 기습 공격을 받아서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분만 겨우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뿐만 아니라 다른 월녀궁 고수들까지 동원한 것으로 봐서 처음부터 외우기보다는 지도 조각 자체를 뺏을 목적이었다가 도리어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꼴이 된 것이지요." "하하하하하, 그렇구려. 일리가 있는 말씀이오. 그럼 이 종이에 그려볼 수 있겠소?" 그가 말을 마치자 마자 옆에 대기하고 있던 누군가가 바스락거리며 탁자 위에 종이와 문방사우를 꺼내어 올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림자처럼 따라 붙어 있는 청의 무복 여인인 듯 싶었다. "흥, 누구를 바보로 아시나요? 천운학(天雲鶴) 공자님, 제가 그려 드리고 나면 제 존재 이유가 사라지잖아요. 지하석실 무고(武庫)까지 같이 가시기로 했던 것 아닌가요?" "글쎄올시다. 종리연 소저가 확실히 기억을 했는지 나로써는 검증할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좋은 거래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의 착각이었나 보네요. 안녕히들 계세요." 정말로 자리에서 일어섰는지 의자가 뒤로 밀리며 긁히는 소리가 났으나, 몇 걸음 가기도 전에 제지를 당했는지 못 이기는 척 다시 털썩 자리에 앉는 듯 싶었다. "좋소, 정말 머리로는 당신을 당해낼 수 없구려. 당신의 안전(安全)을 최우선으로 해서 지하석실을 빠져 나오는 순간까지 보호(保護)해 드리리다." 그들의 대화로 헤아려 볼 때 지하석실은 단순히 지도를 알고 있다고 해서 지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무공이 고강한 이들이 여럿 있어야 통과할 수 있다는 억양이 강하게 느껴졌다. 종리연의 무공이 일천하니 어쩔 수 없이 무림맹(武林盟)을 끌어들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 여인 못지 않은 미모를 자랑하는 미공자의 정체는 무엇이길래 모두가 쩔쩔 매는 것일까? 무림맹에서 꽤나 높은 자리에 있는 놈인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말이다. "남궁현 공자, 왜 그들을 끝까지 추격(追擊)하지 않았소? 황보원 부조장, 당가희 소저와 모용천풍 공자가 옆에서 도와줬다면, 권살이 중상(重傷)을 입은 수라삼살(修羅三殺)즘이야 충분히 생포할 수 있었지 않소?" "충분히라? 혈살 하나만 상대해도 버거운 판국에 그런 것이 가능할 거라 생각하오? 강남표국의 최 국주가 복용했던 당문의 피독단은 우리가 받은 것과 같은 것이었소. 그런 그들이 중독을 당해 힘 한 번 못 써보고 죽었는데, 우리더러 똑같이 죽으란 말을 하는 거요?" "남궁 공자, 언제부터 나한테 말대꾸를 할 용기가 생겼소이까? 스스로의 입장이 어떠한지 생각해 보았소? 그런 것도 못 하면서 구룡의 자리에 있다니 어이가 없구려." "......" 의외였다. 자존심 강하고 쓴 소리를 듣고는 참지 못하는 남궁현이 찍 소리도 못 하고 여자처럼 곱상하기만 할 뿐인 녀석의 말에 반박을 하지 않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도대체 어떤 약점을 잡혔길래 저렇게 고분고분하게 기는 것일까? 그것을 안다면 앞으로 남궁현 녀석을 내 발아래 굴리는 것은 꿈이 아닐텐데 말이다. 이때 역시 남궁현의 영원한 피앙새 중 하나가 될 제갈혜가 그를 두둔하고 나섰다. "죄송합니다. 소맹주님. 남궁현 공자 일행이 수라삼살을 잡지 않고 놓아 준 것은 제가 미리 그렇게 하라고 일러 둔 것입니다." "제, 제갈혜 소저......" 남궁현 녀석이 말꼬리를 흐리는 것으로 보아 제갈혜가 단지 그를 두둔하기 위해 핑계를 대려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미래의 낭군감이 될 남자가 수치를 당하는 상황(狀況)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면 중원제일지(中原第壹智)라는 명성 다섯 글자가 울 것이다. 그동안 현숙한 척, 고귀한 척, 있는 내숭, 없는 내숭 다 동원하며 꼬리를 흔들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소방이 안다. 또한 검에 미쳐 광룡(狂龍)이라는 칭호까지 붙은 검귀(劍鬼) 곽철 대협 앞에서도 교묘하게 그의 정체를 남궁현에게 알려주면서 곽철 대협의 비무 습관까지 언급해서 남궁현의 심신이 안정된 훗날에 비무를 치룰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까지 아끼지 않은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 제갈혜가 소맹주 앞이라고해서 다르진 않을 것이었다. 남궁현 좋아할 것 없다. 저렇게 널 감싸고도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 장가갈 준비나 하고 있어라. 후후후훗. 잠깐 소맹주(小盟主)라면 설마?......무림맹주의 아들이란 말이야? 중원 무림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정파(正派)에서도 만인지상(萬人之上)일인지하(一人之下)의 자리, 즉 무림맹주(武林盟主) 바로 다음 자리에 있는 녀석이면서 맹주 사망시 그 다음 맹주에 올라갈 가장 유력한 놈이란 소리? 오옷, 복에 겨운 놈일세. 한 마디로 나 같은 게 아무리 기를 쓰고, 용을 쓰고 올라가 봤자 그의 발끝은커녕 근처에 가보기도 전에 늙어 죽을 정도로 높은 자리에 있는 놈이란 소리잖아! 아, 갑자기 짜증난다. 저런 놈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로는 들었어도 직접 보니 배가 아파 미칠 지경이다. 그런 자리에 있는 놈이 생겨먹은 것까지 온갖 미녀들이 오빠~! 하면서 철썩 철썩 달라붙게 생겼으니 부러워 죽을 지경이다. 더군다나 저 놈의 부친이란 놈이 온갖 비리를 일삼으며 비축했을 재산이 또 얼마나 어마어마하겠는가? 보나마나 중원 곳곳 거대한 전장에 차곡차곡 쌓아놨을 검은 돈만 해도 장난이 아니게 많을 것이다. 저 놈 이름으로 명의 변경되어 붙어 있을 검은 돈이 그 얼마나 엄청나겠는가! 내가 만 명으로 불어나 일평생 죽도록 점소이 짓을 해도 그 검은 돈의 십 분의 일이라도 모을 수가 있을까? 절대 불가능할 거다. 권력이면 권력, 돈이면 돈, 외모면 외모......히야 죽여주는 삼 박자다. 넌 최고다. 그럴 자격이 있어. 후후후후훗. 미인박명이라고 했으니 제발 저승사자가 저 녀석 빨리 데려갔으면 좋으련만. 널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무지막지하게 샘솟는단 말이다! 제길! "제갈혜 현무조장, 왜 그렇게 마음대로 지시를 변경했소? 난 분명히 그들을 모두 생포하거나 생포가 불가능하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아는데, 틀리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지하석실에는 수많은 기문과 진법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그들을 먼저 통과시키고서 우린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가면서 안전을 도모하는 게 나을 듯 싶었습니다. 소맹주님이 계신 이상 결정적인 찰나에 그들을 죽이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흠, 틀린 말은 아니나 그 정도 이유만으로 내 명령을 어겼다면 천하의 제갈혜가 아닐 거요. 또 다른 이유가 있소?" "네, 또 한가지는 그들 손에 지도 조각이 모두 모였다는 사실에 피라미들의 이목 또한 수라삼살에게 몰릴 것입니다. 저희 손을 더럽히지 않고 피라미들을 정리할 이독제독(痢霽)의 좋은 기회도 됩니다. 저희의 손을 더럽혔다가 그로 인해 소맹주님의 명성에만 누가 될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럼, 수라삼살에게 쥐새끼를 붙여 놓은 거요?" "그들은 추격자를 허용할 만큼 만만한 이들이 아니라서 대신 종리연의 지도 조각에 천리추종향을 미리 뿌려 놓게 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건 우리의 손바닥 안에 있는 셈이지요." "오호, 정말 일 처리 한번 똑 소리나게 잘 해놓았구려. 중원제일지(中原第壹智)라는 말이 허명(虛名)이 아닌 것을 내가 오늘 확실히 깨달았소. 좋소. 제갈혜 조장의 구구절절한 해명(解明)도 마음에 들고, 깔끔한 뒷 처리도 마음에 드는 관계로 남궁현 공자의 일은 더 이상 다그치지 않겠소." "옳으신 혜안입니다." 남궁현, 잘 기억해 둬라. 네 녀석을 위해서 소맹주 앞에서조차 당당하게 머리 굴리기를 아끼지 않는 그녀를 잊지 말란 말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소방의 친구라는 점을 빼고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내숭 덩어리지만, 널 감싸고도는 그녀를 볼 때마다 널 향한 그녀의 일편단심(一片丹心)에 부러움 가득한 나날도 많았다. 내 주변에는 그런 여인이 물론 없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날 수련이라는 미명 하에 구타를 일삼고, 무시하려는 애들만 가득하다. 누가 나같이 미래가 불투명할 뿐 더러 현재마저 휘청휘청 거리는 밑바닥 인생에게 기대를 걸어 준단 말이냐? 이렇게 옹호를 해 주겠기는 신경이나 써 주겠냐는 말이다. 넌 소맹주 보다는 못해도 나름대로 충분히 복에 겨운 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놈아. 문득 내 오른 손을 타고 흘러오는 소방(蘇芳)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렇다. 비록 날 위해 소맹주(小盟主) 앞에서 비호를 해줄 여인은 없지만, 날 위해 일수필살(壹手必殺)의 앞을 맨 몸으로 막아선 친구가 있었지. 후훗, 그래 그다지 나쁘진 않군. "그런데 말이오. 수라삼살의 뒤를 쫓다보니 재미있는 것을 하나 줍게 되었지 않겠소. 처음에는 그냥 시체려니 했는데, 이승에 미련이 남은 놈이었는지 귀식대법(龜息大法)을 펼치고서 죽은 척 하고 있는 놈이었더랬소." "......" 갑자기 찾아온 적막한 분위기가 이상해서 소방의 무릎 위에 기댄 채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상황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무척이나 당당하게 굴었던 제갈혜가 미약하게 나마 떨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마침 심심하기도 해서 그 놈의 단전을 파괴하고, 혈도를 점해서 행여나 자살을 하지 않도록 한 후 손톱 아래에 철침을 몇 개 박아 보았다오. 제법 강단이 있는 놈이었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도 끝까지 자기의 소속이 어디인지 불지 않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로와서 심심풀이 삼아 배워본 고문 기술을 하나하나 써먹어 보았다오. 인두로 지져도 보고, 분근착골도 시험해 보고, 기어이는 살갗을 내 보도로 살짝 벗겨내는 수고까지 하게 만들더군. 그랬는데도 소용이 없었소." "......" 치가 떨리는 놈, 하여간 잘 생겨먹은 데다가 떵떵거리며 사는 놈 치고, 성격이 멀쩡한 놈을 못 봤다. 인물값을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것은 둘째치고 남자인 주제에 자신의 외모에 반해서 하루 종일 거울만 바라보며 자아도취에 빠져 사는 괴이한 놈들도 종종 봤다. 소맹주라는 놈은 그런 놈들 중에서도 악질에 들어가는 놈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쾌감으로 승화시켜 진정한 기쁨을 얻는다는 지랄 같은 가학주의자 놈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주령령도 구타를 통해 삶의 환희를 느끼는 미친년이었지. 젠장, 두 년 놈이 만나면 동지라고 얼싸 안고 춤을 추겠군.' "그래서, 다른 단서라도 있을까 하고 그 일대를 다시 한 번 더 샅샅이 뒤지다가 시체 하나를 무심코 뒤집어 보았는데, 기이한 암문이 있더란 말씀이야. 제갈혜 조장, 그 암문이 어디 것인지 혹시 짐작이 가시오?" "글, 글쎄요. 제가 보, 보지를 못 했으니 알 수가 없지요." "뭐, 상관없소. 감식조에 보내서 어느 문파 것인지 소상하게 알아내라고 했으니 못해도 내일 이맘때 즘이면 회신이 올 것이오." 왠지 질문을 던지는 천운학은 대답을 바란다기보다 추궁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대답을 어설프게 하며 회피를 하는 듯한 제갈혜의 잔 떨림은 더욱 커져만 가는 것 같았다. 주변 인물들은 애초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나 긴장감 어려서인지 침 넘어가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곱상하게만 생긴 소맹주라는 놈이 그렇게나 겁이 나는 놈인 걸까? 그냥 모두 한 번에 확 달려들어서 살인멸구 해 버리고 돌아서면 될 것을 가지고 저렇게 까지나 쩔쩔 매는 걸까? 훔쳐보는 내가 정말 화딱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다 뒤집고 엎어 버리고 엿 같은 무림맹 아니꼬와서 그만 둔다고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저렇게 옹기종기 둘러앉아 벌벌 떨며 떠받들고 있을 것은 또 뭐냐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8 19:57:18 고친날 2005-07-23 18:58:52 읽은수 9042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7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5] 탁! 느닷없이 무릎을 치며 일어선 천운학(天雲學)의 돌발적인 행동에 모두 깜짝 놀란 듯 싶었다. 가만히 곁눈질하던 나마저 움찔 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아, 왜 내가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제갈혜 조장 나를 좀 도와줘야겠소 이다." "네, 하명만 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전력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렇소? 그것 참 다행이구려." 왠지 다분히 조롱끼가 어린 듯한 날카로운 미소는 천진난만한 소방의 그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어 보였다. 세속의 때라는 때는 모조리 껴안은 듯 무게감이 실려 있는 무서운 미소였다. "별로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소저의 심안공(心眼功)을 빌리고 싶소. 다행스럽게도 그의 눈알 한 쪽은 멀쩡하니 그것을 걸어 내력을 알아보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아, 알겠습니다." 제갈혜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져 보였지만, 자신의 입으로 언급했듯이 일 처리를 함에 있어서는 공과 사가 뚜렷이 해야 한다고 스스로 내뱉을 만큼 냉혹한 면이 있는 여인이니 내가 잘못 봤거나, 가벼운 감기 증상인 듯 했다. 아무래도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초겨울의 분위기가 완연하니 말이다. '아, 암문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거 보니 오늘 아침에 소방이 말해줬던 제갈세가의 별동대에 관련 된 얘긴가? 무림맹에는 알리지 않았다고 하더니 저 놈이 어찌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설마?' 혹시나 하는 기분으로 소방의 안면에 어떤 자책감이라도 서려 있을까 하고 슬쩍 올려다 보았으나, 그의 안면에는 그 어떤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돌 조각처럼 무표정하기만 한 것이 생전 처음 보는 남의 일이라는 듯 무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악조영 부조장, 그를 잘 모셔오도록 일러라." "존명!" 청의 무복 여인이 바로 현관으로 나가 다른 황의인들에게 몇 마디하고 다시 돌아온 것으로 봐서 그녀의 이름이나 직책이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라, 그럼 황보원하고 동급인건가? 어쩐지 황의인들 수가 지난 번 보다 두 배로 늘었다 했지. 그런데, 왜 쟤는 안 나가고 아까부터 천운학 옆에 자석처럼 철썩 붙어 있는 걸까? 부조장 겸 비서인 건가?' 잠시 후 전신에 검은 색 두루마기를 칭칭 감아서 내용물이 불분명한 그 무엇을 두 황의 장한이 어깨에 둘러매고 들어와서 천운학 옆 의자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는데, 그들의 움직임을 타고 살짝 일어난 바람결에 굉장히 지독한 피 내음이 섞여 있어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즉 죽었거나 살아있어도 죽어 가는 인간이란 뜻일 터였다. 천운학이 뚜벅뚜벅 일어나서 검은 두루마기를 확 걷어내자 방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득한 피 내음이 망아루 일층 실내를 가득 매워 버릴 정도로 지독하게 퍼졌다. 두루마기 속에 있던 인간은 그야말로 더 이상 인간으로 불리기에는 모잘라도 한참 모자를 정도로 멀쩡한 부위가 보이지 않았다. 목불인견(目不人見)! 손톱이란 손톱은 다 빠져서 피로 얼룩진 오른손에서는 아직도 핏방울이 뚝뚝 흘러내리는 반면, 왼손에는 손톱이 다 달려 있었지만, 그 사이사이에 날카로운 철침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어서 침 끝을 타고 역시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더구나 벌거벗겨진 전신의 살갗의 절반은 끔찍하게 난도질당해 버려서 정육점의 살코기처럼 시뻘건 근육질이 남김 없이 드러나 있었고, 곳곳에 인두질을 당한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었을 뿐 아니라 방금 전까지도 지지던 중이었는지 고기 태우는 냄새가 은근히 풍겨왔다. 상처들 중에서도 심하게 곪아서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손상 정도가 심한 것이 종종 보였다. '젠, 젠장 저 녀석 취미 생활에는 령령이도 한 수 물러줘야 겠는걸. 이, 이래서 모두가 겁을 내고 있었군. 돈이 오질나게 많으니까 이 짓 저 짓 다해보며 즐기다가 지겨워져서 인체 해부라는 새로운 취미 생활에 눈독들인 거구나.' 난 직접적으로 인체 해부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림을 가르치던 선생 중에서 유별난 인간이 한 명 있었더랬다. 그 선생이 평소 주장하는 바가 사람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서는 인체의 근육 한 가닥 한 가닥을 다 외우고 있어야 하며 그것의 수축 관계를 낱낱이 이해해서 그림에 반영해야 살아있는 그림이 나온다고 일장연설을 하곤 했었다. 그래서, 종종 야밤을 타고 자기 생각에 깊은 동조를 하는 유별난 소수 정예들을 데리고서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무덤을 파해쳐서 인근 동굴로 빼돌린 후 직접 해부를 하며 설명을 하는 엽기적 파행을 서슴치 않았던 기억이 났다. 물론, 그 유별난 소수 정예 중에 나도 포함이 되어 있었지만, 난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그림에 대한 열정 그 하나로 열심히 가르침에 성실히 따랐을 뿐이다. 결단코 언젠가 눈이 휘둥그래질 만큼 잘 빠지고 황홀한 미모를 자랑하는 미녀 시체를 해부할 날이 오겠지 하는 응큼한 생각을 품고서 뒤따라 다닌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히는 바이다. 물론 비인륜적인 엽기적 행각이었던 것은 인정하지만, 그로 인해 우리 유별난 정예들의 그림실력이 유별나게 늘어났음은 두 말 할 나위도 없었다. 시신 해부를 통해 깊은 깨달음을 얻은 우리들은 너덜너덜해진 시신을 헝겊으로 둘둘 말아서 잘 이은 후 그 다음 날 야밤에 본래 있던 무덤에 잘 안치하고는 각자 믿는 신을 부르짖으며 죽은 자의 안식을 정성껏 빌어주곤 했었다. '그 유별난 그림 선생은 지금도 그 엽기적 행각을 반복하고 있을까? 한 번 보고 싶군. 후훗.' 그런 과거가 있기에 인체 해부는 내게 있어 그리 생소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인간을 고문이라는 명분 아래 난도질 한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행위자가 공명정대 정파 우두머리의 아들이라는 것은 충분히 맹주 교체의 시비 꺼리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다들 설설 기는 것인지 사뭇 이해하기 어려웠다. 내 손에 깍지를 낀 소방의 손에서 잔 떨림이 느껴졌다. 소심하긴. 알고 보면 이 녀석도 곱상한 환경에서 곱상하게 자랐을......아닌데, 개방이란 환경이 곱상할 리가 없잖아! 쩝 뭐 시체 해부같은 진기한 경험을......했을 리야 없겠지. 아무래도 인륜이라는 것이 존재하니까, 괜찮아, 처음에는 다 그런 거야. 오히려 내가 소방의 손을 힘줘서 꽉 쥐어줬다. 날 잠깐 슬며시 내려다 본 소방의 안면에 멋 적은 미소가 떠오른 듯도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순간이었다. 소맹주 천운학 공자를 의식해서 인지 돌 조각 같은 안면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 쪽 눈은 침으로 장난을 치다가 실명되어 버렸지만, 다른 한 눈은 멀쩡하다오. 어서 제갈혜 소저의 고절한 심안공(心眼功)을 펼쳐서 이 녀석의 소속이 어디인지 좀 밝혀 주시오. 물론 내일이면 감식조에서 암문(暗文)을 분석해서 정확한 근원지를 알아내 오겠지만, 너무 궁금해서 말이오." 그의 말에 멍 하니 다른 생각에 빠져들어 있던 제갈혜가 즉각 정신을 차리고 황의인들이 데리고 와서 양옆으로 내려놓은 인물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운학이 황의인들을 향해 턱짓을 하자 그들 중 한 명이 축 늘어져서 진득한 혈향(血香)을 풍기는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웅큼 움켜쥐고 뒤로 제쳐서 제갈혜가 그의 눈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들려진 안면은 몸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한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장난으로 침을 꽂았다는 눈은 얇은 칼로 한 겹 한 겹 정교하게 벗겨낸 티가 역력했고 그러한 눈을 감지도 못하게 강철 침으로 고정시켜 고통이 극대화 되도록 해놓았을 뿐만 아니라 안면부 거죽의 절반이 벗겨지다 말아서 너덜 너덜거리는 살갗이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천상 멀쩡한 나머지 반의 모습으로나마 그의 원래 모습을 짐작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극심한 고통 때문에 힘을 잃은 눈동자에서는 그나마 총기가 가시지 않았고, 조금 돋아난 콧수염은 정성스럽게 다듬은 티가 났으며 반 즘 벌어진 얇은 입술과 각이 비스듬히 난 얼굴 선으로 볼 때 미남이란 소리보다 남자답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성싶은 사십대 중반의 중년인 정도로 보였다. "......" 순간 제갈혜의 안면이 이제는 창백함을 넘어서서 경악으로 가득 차 올라 비명을 지르려다가 억지로 삼키는 기묘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더 이상한 점은 천운학 녀석이었다. 그는 그런 제갈혜를 천연덕스러운 미소로 바라보며 마치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추억으로 남기겠다는 의지를 투영시키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이어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줄다리기는 더욱 거세게 당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놔, 놔라......내 입에서...그 어떤 사실도......알아낼 수 없을...것이다. 차, 차라리 죽여라." 반 시신이나 다를 바 없는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쉰 소리를 들은 제갈혜의 전신이 경련으로 떨리더니 번개 같이 비수를 꺼내어 상대의 이마를 향해 힘껏 날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쉭 쏜살같이 바람을 가르는 비수의 등장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바 였다. 아니 단 한 사람은 제외였다. 그 사람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8 23:50:40 고친날 2005-07-23 18:59:14 읽은수 9149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7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6] 제갈혜(諸葛惠)가 날린 비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천운학(天雲鶴) 녀석의 교묘한 금나수(擒拏手)에 말려들어 그의 손속으로 정확하게 들어가 버렸다. 그러나 그녀 또한 예상했다는 듯이 비수를 날린 직후에 검을 뽑아 들고 반 시신이나 다를 바 없는 중년인을 향해 달려들어 그의 이마를 반으로 가르려다가 이미 지시를 받고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악조영에게 가로 막혀 뒷걸음질치며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나, 주춤거린 그 순간 다시 되 치고 들어가서 악조영의 검과 마주 댄 채 옆으로 거칠게 한 바퀴 돌려서 상대의 검을 바닥에 패대기친 그녀는 당황하는 악조영의 옆구리를 타고 들어가서 기어이 중년인을 베어 내려 했다. "제갈혜, 그만 검을 내려놓으시오! 안 그러면 제갈세가에 그 책임을 묻도록 하겠소." 그 말에 중년 사내의 이마 바로 앞에까지 짓쳐 들어가던 검이 그대로 우뚝 멈춰서면서, 그의 곁에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버리는 제갈혜를 볼 수 있었다. 동시에 그녀의 눈을 타고 똑 떨어져 바닥에서 산산이 깨져 버리는 것이 다름 아닌 눈물이었음을 뒤늦게나마 알아보고는 상당히 놀라고 말았다. 냉정하게만 굴던 그녀에게서 눈물이라는 것을 이렇게 일찍 보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연극(演劇)을 하기 지쳤나 보구려. 내 솔직히 말해주리다." "......" "암문 같은 것은 보지 못했지. 단지 누가 발로 비벼서 바닥에 써진 그 무엇을 급하게 지운 흔적을 보고는 나름대로 암문이었다고 짐작해 본 것이었소." "......" "강남표국은 처음부터 무림맹과는 거리를 두고 독자 노선을 달리고 있는 곳이었기에 특별히 감시조를 붙여서 샅샅이 감시하고 있었지만, 제갈세가의 별동대가 무림맹의 시선 바깥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지. 설마 맹주께 충성(忠誠)을 맹세한 제갈세가가 혈해진경에 눈이 멀어 무림맹을 배신(背信)할 줄이야!" "그, 그럼, 어떻게 아셨지요?" 자포자기한 듯한 제갈혜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얼굴을 들지도 못 하고 물어보자 천운학은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몰랐소. 단지 저 자의 얼굴을 보니 그의 얼굴이 누군가와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떠올랐기에 지레짐작으로 그를 걸레로 만든 후 제갈혜 소저와 대질시켜 본 것이오. 대질하기도 전에 소저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소저 스스로 제갈세가가 무림맹과 반목할 의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인 셈인 것이오." "아, 아니예요! 저, 저희 제갈세가(諸葛世家)는 절대로 무림맹(武林盟)과 반목하려는 것이 아니었어요! 다만, 다만 혈해진경에 대한 독자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예요." 방금 전까지의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오 간데 없이 거의 엎드리다시피 천운학 공자 앞에서 애걸복걸 매달려 울며 변명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애절해 보였다. 지금까지의 모습들이 가식적으로 꾸며진 것에 반해 지금의 제갈혜는 진심으로 자신의 가문을 위해 울고 있는 것이 절절히 느껴진다고나 할까? 반면 그녀를 내려다보는 천운학의 안면에 떠오른 조소는 좋은 장난감을 손에 넣었다는 장난끼가 다분히 어려 있었다. "내 수고를 아끼지 않게 만든 저 중년인은 누구요?" "흐흑 저, 저의 둘도 없는 숙부님이옵니다." "그는 명백히 무림맹 입장에서 반도요, 배신자일 뿐, 죽이건 살리건 내 맘대로 인 것이지. 더구나 이번 일로 무림맹은 제갈세가를 무림맹에서 퇴출시킬 뿐만 아니라 경우가 심해지면 멸문지화(滅門之禍)까지 피해갈 수가 없을 거요. 혈해진경은 무림맹이 전력을 다해 신경 쓰는 일인 것을 알지 않소?" "흐흐흑 용서해주세요! 천운학 소맹주님, 저, 저희 제갈세가는 절대로 무림맹과 반목할 생각도 없고, 그럴 여지도 없답니다. 흐흑 제발 제발 용서를......!" 쿵 쿵 쿵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천운학을 향해 용서를 구하는 그녀를 보니 은근히 화가 났다. 제갈혜가 비록 냉정한 면이 있지만, 평상시 타고난 가증스러움이 가미된 자연스러운 내숭으로 일관해온 과거가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솔직히 남궁현에게 꼬리치며 현숙한 척, 고귀한 척 할 때도 그리 밉지는 않았다. 여인이라고 하면 누구나 드러내는 내숭이 더 강하면서 그녀 말대로 공과 사 구분 없이 혹독하게 굴긴 했지만, 특별히 개인적 감정으로 나에게 폐를 끼친 적도 없기에 조금 얄밉기만 할 뿐 별다른 감정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를 가문의 멸문지화라는 말도 안 되는 말로 무릎꿇게 만들다니! '소맹주라는 자리가 참으로 좋기는 좋구만, 과연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제갈혜가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는 날이 있기는 할까? 쩝, 소맹주 녀석이 왠지 부럽긴 하군.' "흠, 뭐 내 선에서 그냥 간단히 끝내 버릴 수 있기는 하오. 저 포로도 그냥 내줄 수 있기도 하지." "그, 그래만 주시면 소, 소녀 그 은혜 뼈에 새겨 결, 결단코 잊지 않겠습니다!" 일순간 제갈혜의 안색에 화색이 돌았다. 무사히 넘어가게 해줄 수도 있다는 어투가 소맹주 입에서 떨어졌음일 것이다. "글쎄, 좋아할 일 만은 아니지. 내가 너무나도 심심해서 그러는데, 당신이 날 즐겁게 해준다면 충분히 고려를 해 보겠소." "하, 하명만 하십시오." "아니오, 불가능 할 듯 싶소. 그냥 없는 얘기로 합시다. 혹시 아오? 제갈세가가 그동안 세워온 공적을 생각해서 아버님이 그냥 넘어가 주실 지도 모르는 것 아니오?" "하명만! 하명만 하시면 그 어떠한 일이라도 달게 하겠습니다! 천운학 공자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놈, 완전 제갈혜 간이든 심장이든 다 빼 먹을려고 작정을 했구나. 도대체 무슨 짓을 시키려고 그러는 것일까?' "좋소, 제갈혜 소저의 생각을 내가 무시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아, 보시다시피 내 가죽신발에 먼지가 많아 묻었구려. 좀 닦아주시겠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갈혜는 의자에 기대어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자신의 소매로 닦아내려 했었다. 퍽! "헉." 그런데, 이 빌어먹을 천운학 녀석은 그런 그녀의 배를 냅다 차버려서 뒤로 나동그라지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웃긴 놈 아냐! 자기 입으로 닦아 달라고 해놓고서 왜 차고 난리야? 제갈혜가 공이냐? 차라리 날 차라! 헉! 내, 내가 무슨 생각을......? "그냥 소매로 닦아 버리면 누군들 못하겠소? 중원제일지답게 창의적으로 닦아 내 보시오. 기회는 단 한 번만 줄테니 잘 해보시오. 내 마음에 안 들면 제갈세가는 축출 내지는 멸문의 길을 가야할텐데, 너무 정성이 부족하구려." 배를 끌어안으며 무릎발로 기어온 제갈혜는 한 숨을 내쉬며 천운학의 신발을 자신의 혀로 사악 사악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 그것이라는 당연스런 표정으로 제갈혜가 자신의 신발에 묻은 티끌 하나 하나까지 혀로 닦아내는 것을 경멸이 가득 찬 미소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퍽! "허억." "지저분하게 침을 흘리다니 화가 나는구려. 그러나, 나의 너그러움은 대해와도 같으니 한 번 더 봐주기로 하겠소. 마지막 기회요. 이번마저 날 실망시킨다면......알아서 생각하시길......" "아닙니다. 잘 할 수 있습니다! 말씀만, 하명만 내려주시면......!" "좋소이다. 그대로 엎드려서 이 주루 앞마당을 멍멍 소리를 내면서 도시오. 설사 내 부하들이 당신을 귀찮게 굴어도 절대로 반항하면 안되오. 그대는 앞마당을 도는 동안 그저 한 마리 개일 뿐이니까......" 천운학의 요구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제갈혜를 깔아뭉개고 있다는 것이 여실하게 보였다. 무지하게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놈이다. 나 자신도 무척 비겁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을 그를 보니 속에서 이만저만 끓어오르는 게 아니었다. '안, 안 돼! 참, 참아야 해.' 내 속에서 극렬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저 놈을 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듯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내 심장의 박동 수치가 빨라지면서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종리연을 향해 느꼈던 분노와는 비교도 안 될 그것이 참지 못하고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안 돼! 안 돼! 작삼 참아. 네가 화를 낼 상대가 아니야. 지금은 참아야 해.' 내 변화를 눈치 챈 소방이 내 손과 깍지를 낀 그대로 가슴을 강하게 억누르며 전음입밀을 날려준 통에 아득해져 가려던 정신이 다시 제대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멍청히 바깥을 바라만 보았다. "멍! 멍멍! 멍! 멍멍!......" 제갈혜는 정말로 그대로 기어서 앞마당을 돌고 있었는데, 강압적인 명령을 받은 듯한 황의인들이 자신의 상관일 그녀를 마지못해 걷어차고 있었다. 물론 그저 흉내만 내고 있는 정도 였지만, 구룡중 일인이라 불리는 그녀에게는 대단히 모욕적이며 수치스런 일이 될 것임은 자명했다. 뭔가 따가운 기운이 느껴져 슬며시 돌아보니 그녀를 바라보는 남궁현의 눈에서 불똥이 튀는 게 보였다. '후훗, 이제 서야 저 여인이 네 것으로 보이느냐? 어쩔 테냐? 소맹주라는 자에게 대들어 볼 테냐?' 그러나, 역시 재빠르게 그의 기운을 느낀 제갈혜가 황의인들에게 채이면서 멍멍 짓는 와중에도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남궁현을 바라보았기에 무슨 의미인지 그가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다. 남궁현은 그만 눈을 감아 버리고 서서히 분노를 속으로 삭히고 있었다. '하여간 너도 복이 많은 놈이다. 니 녀석 주변에 널 향한 외바라기 사랑이 최소한 세 명은 있다는 것을 알아라. 그 중에서 제일 나은 게 그나마 제갈혜니라. 령령은 아무래도 광증 고치기는 글렀으니 평생 니 앞에 다시 나타나는 일이 없을테고, 당가희는 너무 가벼워 보여. 있을 때 잘 해줘라.' 제갈혜가 그렇게 한 바퀴 돌고나자 천운학은 쾌활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종리연과 무림맹 아해들을 데리고, 망아루를 벗어나 숙소가 있을 서안(西安)으로 내려갔다. "하하하하핫, 내 오늘 제갈세가에 개망나니 여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림맹에 소문을 내면 그 어느 누구도 제갈세가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개망나니한테 물려서 광견병이 옮으면 안 될 테니까.....하하하하하......!" 그의 웃음소리는 메아리치고 메아리쳐서 회운봉을 돌고 돌아 우리들 가슴속에 깊숙이 남았다. 그리고,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천지신명이시여, 용왕이시여, 염라대왕이시여, 붓다시여, 기타 제가 모르는 세상의 모든 신들이시여 천운학과 주령령이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 서로 뽀질나게 싸우다가 양패구상 하게 해주시옵소서. 나무아미타불..... 무량수불......'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9 11:48:20 고친날 2005-06-14 11:46:50 읽은수 4558 [ 2 K ] 제목 제 필명은 묘한(妙翰)-주저리주저리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저 있는 데까지 와서 pk하실람 정파 고렙이어야 하는데, 크크..ㅇㅅㅇ;;..아직 정파 케릭을 못봤어요. 오다가 죽는다나? 저도 물론 정파 쪽으로 가본 적이 없고, 아, 이것은 구룡쟁패 얘긴데, 주천3까지 올렸더니 별로 일이 없어서 아주 가끔 접하고 있습니다. 길드 워는 종종 했는데, 유료화 되버려서 결국 본의 아니게 접게 되었구요. 요구르팅은 애들 겜이더군요. 그래도 예쁜옷 구해입히려고 열심히 몬스터를 잡기도 합니다. 이 겜의 특징이 하루 일정 시간을 주는데, 그날 소화를 못하면 손해난다는 거지요. 한 번 하면 끝장을 보고 쉬어야 해요. ***** 별 다섯 개 짜리 기대만땅인 겜이 있습니다. zera 에요. 클베 신청 넣었는데,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주 기대되는 대작, 특히 여케 몸매가 장난 아니더라구요. 물론 남케들도 꽃 미남이구요. 그래픽이 장난 아니더군요. 어떻게 새로 나오는 게임들 그래픽들이 이렇게 좋아지는지. 언젠가는 제 컴으로도 따라잡지 못하는 날이 오겠네요. 그래도 램이 1기가 인데 말이지요. cpu도 보통 이상 사양이구요. 그래픽 카드는 보통이지만, 겜 호환이 잘 되는 거라고 하더군요. 적어도 다운은 잘 안 일어나요. 그런데, 요즘 질주를 참여해서 하루라도 겜에 빠지면 질주 탈락이라고 봐야죠. 뉴스를 접했는데, 아기방치하고 pc방에서 5시간 놀았다가 아기가 사망한 부부 이야기가 있었는데, 전 아기보다는 부부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어요. 아마도 아기가 잠들었거니 하고 나왔을 테지요. 같이 그렇게 오랫동안 겜을 할 정도면 부부사이에 금슬이 좋다는 얘기도 되고, 그런데, 이런 일을 기사화 해서 두 부부를 몰아세울 정도까지 되는지 의문이 듭니다. 불의의 사고였다고 밖에 할 수 없을텐데 말이에요. 저같은 하류 인간이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모르지만, 하게되면 저도 같이 겜을 자주 할 생각...ㅡ_ㅡ;;; ..이거든요. 이왕이면 맞춰서 같이 놀 수 있는 걸로 할려구요. 만화도 좋아하고, 소설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고, 야동도 좋아하고(..ㅡ_ㅡ;;;..좀 거시기한가..ㅡ_ㅡ;;;), 음악은 문외한에 가깝지만, 좋아할 소지는 다분합니다. 특히 영화 경우는 대형 스크린이나 영사기를 설치해서 밤에 오붓하게 감상을 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답니다. 집안일도 제가 거의 할 용의가 있습니다. 뭐 이미 길들어져 있기도 하구요. 이왕이면 와이프도 자신의 보람에 맞는 일을 한다면 좋을 듯 절대로 말리지 않을 것이며, 뒤에서 응원할 생각. ㅡ_ㅡ..꿈도 야무지죠? 한 편에는 제가 쓴 책들을 빼곡히 꽂아놓은 서고도 만들구요. 일평생 독자들의 가슴속에 길이 남을 법한, 명작이라기보다, 읽고나서 훈훈하게 남는 것이 있는, 뭔가 얻어 갈 수 있는, 그런 책들로 매우고 싶어요. 역시 야무진 꿈. 그런데, 왜 이런 말들을 써놨는지 모르겠군요. ㅡ_ㅡ..어디서부터 삼천포였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9 20:26:04 고친날 2005-07-23 18:59:42 읽은수 9040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7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7] "멍! 멍멍! 멍! 멍멍멍!......" 천운학(天雲鶴) 일행이 내려간 지 반 각은 지났지만, 약간 맛이 간 듯한 제갈혜(諸葛惠)는 계속 필사적으로 짖으며 앞마당을 기어서 돌고 있었다. 몹시 분개한 듯한 남궁현(南宮炫)이 나서서 그녀를 와락 부등켜 안아 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너지며 구구절절 서럽게 우는데, 역시 그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타고난 선수기질이 발동하고 있음을 실감케 해주었다. 이로써 남궁현은 제갈혜 수중으로 떨어지게 된 것일까? 당가희가 제갈혜더러 언니라고 불러야 할 날이 조만간 다가 올 거란 예감(預感)이 들었다. '젠장, 하여간에 선남선녀라는 것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림이 되는군. 짜증나게......' 천운학이 가버리자 무겁게 가라 앉아있던 망아루 긴장 상태는 조금 해소되었으나, 여전히 피 내음은 변함 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뒤늦게 서야 한참 동안 눈물을 짜낸 제갈혜는 안면이 도화빛으로 물들며 남궁현을 부끄럽다는 듯이 밀어내고는 망아루로 달려오는데, 그 가증스러움이란! 닭살이 다다다닥 돋을 정도로 뻔히 속 보이는 짓이었다. '야, 제갈혜, 그냥 계속 안겨 있지. 왠 부끄러운 척? 니 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 상황에서조차 내숭이냐? 아예 물 한 사발 떠 줄 테니 식까지 올리지 그러냐?' 그러나, 온 몸이 먼지와 발길질로 엉망이 된 옷매무새를 제대로 고치지도 않고 실내로 달려들어 숙부라고 하는 반 시신 앞에 매달려서 동이 난 줄 알았던 눈물샘을 한없이 짜내는 그녀를 보니 비아냥거리던 속마음도 쑥 들어가 버렸다. 주위 사람은 아랑곳없이 눈물 콧물 뒤범벅으로 우는 제갈혜를 보니 왠지 나까지 슬퍼질 것만 같았다. "흑, 흐흑 숙부,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흑 흐흑 흑......" 손톱이 없어 빨갛게 물들었으면서도 근육까지 드러나 너덜너덜 해진 팔이 힘겹게 부들부들 떨리며 제갈혜의 헝클어진 머릿결을 바로 잡아 주고 있었다. 전신이 너덜너덜한 정육점 살코기나 다를 바가 없는 그를 보니 설사 화타가 시공을 초월해서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그의 가느다란 숨결을 연장시키기는 힘들 듯 싶어 보였다. "숙, 숙부." "울지 말거라, 사람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다. 아, 아쉬운 것은 천운학 그, 그 놈에게 제갈세가의 금지옥엽(錦之玉葉)이 모욕을 당하는데도 손 한 번 쓰지도 못 하고 바라 봐야만 하는 무력감이랄까? 형, 형님에게 죄, 죄송하다고......커...헉...다...다시 그 때의 영화를......" 그 말을 하려고 떠나려는 숨결을 모질게 쥐고 있었는지 말을 마치자 마자 눈을 감으며 차갑게 식어 가는 그를 보게 되었다. "숙부! 숙부! 떠나시면 안 되요! 숙부! 눈을......눈을 뜨세요! 숙부!" 제갈혜의 비통한 외침이 그 후로도 길게 망아루를 뒤흔들었으나, 그 누구도 말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얼마 후 후원에서도 좀 떨어져 있는 뒷동산 벌판에 소방과 당가희가 훌쩍거리는 제갈혜를 토닥여 주며 서 있었고, 남궁현과 모용천풍이 가매장할 자리를 골라 파낸 곳에 검은 두루마기로 싼 시신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것이 보였다. 얼마 후 제갈세가(諸葛世家) 사람들이 와서 가매장한 시신을 다시 파내어 본가 무덤에 정식으로 안장할 것이라서 깊게 파묻지는 않았다. 후원 뒷동산 벌판에는 그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가매장 봉분 들이 치솟아 있었다. 수라삼살과의 결전에서 일방적 도살을 당하다 시피한 강남표국(江南驃局) 사람들과 그들만 믿고 달려들었던 불나방 무림인들이 떼거지로 파묻힌 이 곳은 어쩐지 주루라고 불리기에는 어색함이 있는 공동 묘지같은 음산한 분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아니야, 원래 음산했어. 주령령이 있는 이상 언제나 타지역보다 백 배는 음산했었는데. 이제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귀신놀이에 탄력이 붙겠구만. 밤에는 절대로, 절대로! 후원에 안 나온다. 젠장, 그나저나 이해할 수가 없군. 이해할 수가 없어.' "저기 소방,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 "응, 운을 띄우긴, 언제라도 궁금한 게 생기면 주저하지 말고 물어 봐." "아까부터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는 구룡(九龍)중에서 세 명 이상......이나 모여 있었잖아. 나 같으면 그냥 그 소맹주랑 다른 녀석들을 모조리 다 진압해 버리고 말았을 텐데, 왜 그렇게 물러터지게 끌려 다니는 거야? 더군다나 무림맹의 근본은 구파일방(九派一房)과 오대세가(五大世家)잖아. 그런데도 오히려 너희들이 더 굽실거리며 떠받드는 것 같아." "그래? 그렇게 느껴졌니? 처음 무림맹이 만들어졌을 때라면 무림맹(武林盟)이 다른 문파들 눈치를 봤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지금의 무림맹은 이제 다른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눈치 따위 보지 않아.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무소불위(無所不爲)라 할 수 있지." "제갈세가의 영애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모욕을 줄 정도로 강하단 말이야? 자기 가문의 별동대를 자기들이 움직였다고 해서 배신(背信)이라는 말을 마구 내뱉다니 너무한 것 아냐?" "소맹주 천운학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구나. 하아, 떨떠름한 일이지만,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그에게 덤벼들었다고 해도 승산을 장담하기 힘들었을 거야. 그는 구룡(九龍)에 속하는 인간은 아니어도 십성(十聖)중의 한 명이야." "십성(十聖)? 크으으으 잘난 외모에, 돈에, 권력까지 갖고 있는 그 어린 놈이! 십성에까지 들어간단 말이야!" 지난번의 제갈혜의 설명으로 십성이 정파 중에서 최고의 고수들을 일컫는다는 것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도 더 어려 보이는 곱상한 녀석이 화려하다는 수식어란 수식어는 모조리 달고 있으면서도 무림 최고 권위와 위세를 일컫는 십성(十聖)에까지 들어간다고 하니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십성이라는 고수 칭호를 받기 위해서는 절세기재라 불리는 인간이 일평생 무도에만 정진하고도 더 나아가 깨달음까지 얻어야 가능한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놀랄 필요도 없어. 태어나자마자 소림사에서 벌모세수를 받아서 환골탈태를 한 데다가 지금 것 자라오면서 온갖 영약이란 영약은 다 먹으며 성장해온 사람이야. 거기에 오성까지 절세기재라고 불릴 정도니 구룡 정도의 칭호는 그냥 건너 뛰어 버리고 바로 십성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지. 지금의 무림맹에는 십성 중에서 오성이나 몰려 있어. 소맹주를 정파 최고의 고수로 키우는 것은 별로 힘든 일이 아닐 거야. 순수한 노력(努力)으로만 이 자리에 오른 우리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어." 순수한 노력? 너희들이 과연 노력만으로 구룡이라는 칭호를 받았을 것 같아? 웃기는 일이로세. 소방, 너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감히 상상을 못했는데......뒤집어서 내가 노력이란 것을 하면 구룡이 될 수 있을까? "하하하하하하!" "왜? 왜 웃어?" "노력으로만 이 자리에 올랐다고? 그게 말이나 돼?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그 소맹주 녀석과 똑같다고! 단지 그 놈보다 조금 못한 상황에 있었을 뿐이지. 넉넉한 환경에, 다정한 부모님에, 훌륭한 사부님에, 뛰어난 가전무공이나 문파무공을 배우고서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 아냐? 나같이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이 홀홀단신으로 너희들을 올려다 봐야 하는 밑바닥 인생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도 않았겠지. 그런 거다. 너희들이 소맹주를 두려운 시선으로 올려다 봤듯이 나 또한 너희들을 두려운 시선으로 올려다보고 지내왔어. 너희라고 소맹주와 다르다고 생각하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거야!" "......" 청산유수(靑山流水)처럼 마구 쏟아내는 내 말에 훌쩍거리며 질질 짜던 제갈혜나 그 옆에서 다독이던 당가희와 소방, 흙을 막 덮고 있던 남궁현이나 모용천풍까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날 돌아보았다. 정확히 지적하자면 제일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평상시라면 마음 속에 꾸욱 눌러 박고 있을 속내를 이렇게 여과 없이 바깥으로 토해내는 날이 감히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더구나 구룡 중에 사룡이 몰려 있는 자리가 아닌가? 젠장 맞아 죽을려고 기를 쓰는구나. 기를 써. 에휴 모르겠다. 갈 때까지 가보자!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꾹꾹 눌러놨던 울분들을 다 토해내 보는 거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19 23:54:38 고친날 2005-09-18 21:05:46 읽은수 9200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78)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8] "야! 너 미쳤냐? 그런 말을 해도 상황을 봐가면서 떠들어야 할 것 아니야? 힘없는 점소이라고 봐주는 데도 한계가 있는 거다!" 남궁현이 내 말에 참고 있던 울화통이 터졌는지 삽을 내던지며 호통을 버럭버럭 질렀다. "크크크크, 거 보시오. 만약 내가 당신과 같은 구룡 중의 한 명이었거나, 소맹주였다고 한다면 그렇게 상대방을 까 내리는 행동이나 말이 튀어나올 수 있을 것 같소? 그 자체로 당신은 소맹주와 똑같은 부류라는 것을 증명해 보인 셈이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로 보여주마. 밑바닥 인생이라는 너 따위가 구룡이라는 하늘같은 존재에게 함부로 입을 나불거린 결과가 어떤 것인지 내 똑똑히 보여주겠다." 모두가 얼떨떨한 상황이었는지 바람처럼 나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르는 남궁현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심지어 소방조차 당황스러웠는지 미쳐 막을 생각을 못하고 있던 찰나 남궁현의 주먹은 내 안면을 향해 거칠게 날아들고 있었다. 퍼억! "커헉!" 그의 철퇴 같은 주먹이 내 안면에 인정 사정없이 떨어져 내리는 순간, 뒷골이 멍하게 울리며 전신에 일순간 마비가 오는 것을 느꼈으나, 적어도 그로부터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눈에 훤하게 보이는 방향으로 휘둘러오는 그의 주먹을 맞아준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크크 잘 쳤다. 이로써 내가 널 죽여도 무방하다는 정당방위가 성립된 것이렸다! 죽인다! 죽이고 말리라!" 예전 같으면 한 대 맞고서 바로 쓰러져 죽네 사네 했겠지만, 구타심결의 효과 때문인지 금새 고통이 흩어져 버렸다. 지금의 나라면 남궁현 정도는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는 강렬한 자아(自我)가 날 지배하며 힘을 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휘청이던 몸의 균형을 억지로 잡은 후 삼재권법(三才券法)의 응용을 따라 독헐반미(毒歇反尾)를 펼쳐서 우측 무릎을 왼발의 뒤로 떨구어서 자세를 조금 낮춰 균형을 잡았다. 바로 직후 일어서며 주먹을 밑에서 돌리면서 쳐 올려 그의 턱을 날려 버렸다. 빠각! 내공이 하나도 없을 내 주먹의 위력에 밀렸다기보다 자신의 주먹에 쓰러지지 않고 바로 반격해 온 내 용의주도함에 놀랐는지 휘청이는 그의 곁을 스치듯이 지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삽을 들었다. "죽어라! 죽어!" 남궁현이 주춤이는 틈을 타서 삽으로 그의 목을 향해 청룡출수(靑龍出水)를 펼쳐 꿰뚫으려는 찰나 다른 제 삼자의 손이 삽을 쳐서 날리고는 내 발을 걸어서 그대로 바닥에 자빠뜨리고 말았다. 넘어지는 순간에 그 삼자가 소방(蘇芳)인 것을 확인하며 넘어졌는데, 그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철퍼덕 '그만해! 왜 이러는 거야? 상대를 봐 가면서 덤벼야지. 아까부터 왜 그러는 거야? 남궁현이 상대가 너라는 것을 감안해서 그나마 내공을 약하게 주입하고 쳐서 망정이지, 제대로 맘먹고 쳤으면 그렇게 바로 일어났을 수 있을 것 같니? 정신차려!' 그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이 내 뇌리를 흔들었으나, 이번만큼은 왠지 씁쓸함을 느껴졌다. "크크크 그래, 가제는 게 편이다 이거냐? 같은 구룡이라고 그를 두둔하는 것이냐? 날 먼저 친 것은 저 놈이야. 그것은 생각 안 하는 거냐! 너무 하는군, 너무해." "아, 아니야. 난, 난 다만......" 소방이 내 말에 적잖이 당황했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남궁현은 남궁현대로 일개 점소이한테 한 대 맞은 게 화가 났는지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 기세였으나,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는 소방때문에 잠시 주저하는 티가 났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여태까지 나는 혼자였다. 지금도 나는 혼자다. 죽어도 내가 죽고, 죽여도 내가 죽인다. 비켜라, 오늘 적어도 저 녀석 아니면 나 둘 중에 하나 여기에 뼈를 묻는다." "작, 작삼......"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지만, 이렇게까지 광오스럽고, 대담하다니 정말 그 쾌감에 전신이 부르르르 떨릴 정도였다. 내 과거를 통틀어 이런 말을 하는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다. "이 녀석이 점점,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로구나. 하하하하핫, 일개 점소이마저 나를 우습게 볼 정도로 오늘의 내가 한심해 보였는가? 그래, 나도 그럴 수밖에 없는 내가 한심하기 그지없구나. 방금 전까지 참느라 미치는 줄 알았다. 잘 되었다. 오늘 네게 강호의 쓴맛을 보여주마! 힘없는 약자 앞에서 함부로 칼을 빼려고는 안 했지만, 오늘만큼은 예외로 하겠다!" "야, 야, 너 입은 삐뚤어 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 이전에도 성질난다고 칼 든 적 있었잖아. 기억 안 나냐? 내가 기억나게 해주랴?" "오냐! 제발 기억나게 해봐라! 어이, 개방 거지녀석아 비켜라!" 채앵! 번득이는 칼을 빼든 남궁현과 다시 삽을 주워들고 일격필살을 노리는 나 사이에 껴버린 소방은 몹시 주저하고 있었지만 물러설 생각도 없는 듯 봉을 빼들고서 여차하면 우리 둘의 격돌을 막으려고 결심한 듯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비켜라, 소방. 오늘 저 녀석과 나 둘 중에 한 명은 죽어야......" 짜악! 어느새 다가왔는지 바람처럼 내 앞에 내려선 제갈혜의 매서운 손바람이 내 뺨에 작렬했다. 그다지 아프지는 않았지만, 얼얼한 것이 정신이 확 드는 것 같았다. '어, 엇 또 내가 무슨 짓을......?' "작삼, 꼭 오늘 이래야만 해요? 수모를 당했어도 내가 당했고, 죽임을 당했어도 내 숙부님이 죽었어요. 그런데, 당신들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꼭 내 앞에서, 그것도 내 숙부님의 무덤 앞에서 쌈박질이나 하는 거예요? 남궁현 공자님, 공자님도 마찬가지예요. 화를 낼 상대가 틀린 것 아닌가요? 막 말로 이 점소이 하는 말 틀린 것 하나 없어요. 안 그래요?" "미, 미안하오. 소저, 내, 내가 너무 성급했오. 용서하시오." 제갈혜의 퉁퉁 부어있는 눈물 젖은 눈망울을 보자 삽을 들었던 손에서 힘이 주욱 빠지면서 어깨를 움cm려야만 했다. 제대로 정신이 들자 또 겁이 슬그머니 나면서 뒷감당을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태산처럼 밀려와 남궁현을 흘끔흘끔 훔쳐봤으나, 왠지 자책감 어린 듯한 그는 날 무시하며 검을 칼집에 꽂아 넣고는 휭 하니 가버렸다. '역시 남궁현은 제갈혜 손안에서 놀기 시작했구나. 명복을 빌어주마. 남자는 모름지기 여자에게 붙잡힌 순간부터 인생 종 쳤다고 하더라. 너도 쫑이다, 쫑이야.' 속으로는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으나, 지금까지 내가 끌어온 분위기란 게 있어서 뭔가 한 마디는 해야겠다 싶어서 머리를 굴리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이 있어 입을 열었다. "제, 제갈혜 소저, 죄, 죄송해요." "휴우, 뺨은 괜찮은가요? 나도 화가 나서 그만 손이 멋대로 나갔어요." "네, 뭐 그 정도야. 그런데요, 질, 질문이 하나 있는데, 해도 괜찮을까요?" "해보세요. 제가 할 수 있는 답이라면 해 드리지요." "천운학 소맹주가 시키던 데로 심안공(心眼功)을 쓰는 척 하면서 그를 속이거나 하는 방법을 쓸 수는 없었나요?" "그런가요? 당신의 눈에는 제가 금수만도 못한 존재로 비쳐졌을지 몰라도 저도 인간이예요. 어렸을 때부터 저를 신경 써서 돌봐 준 숙부님께 함부로 심안공을 걸만큼 패륜아가 되지는 못한답니다. 더구나 오늘따라 말꼬투리를 잡으며 빈정거리는 소맹주의 어투에서 다 알고 있다는 게 느껴졌기에 차라리 숙부님을 빨리 편안하게 해드리는 게 도와드리는 거다 싶었거든요." "그, 그렇군요. 아픈 데를 건드려서 죄송합니다. 제갈혜 소저, 정말 죄송합니다." "이미 지나간 것 다 부질 없을 뿐이예요. 앞으로 더 조심해야지요. 그런데, 의외군요. 오늘 따라 종리연 소저나 남궁현 공자에게 마구 대드는 것이 범상치 않던데요. 혹시, 뭐 약 같은 거 잘못 알고 먹거나 뱀에게 물렸다거나, 어떤 고수에게 이상한 점혈을 당했다거나 한 것 없나요?" "그럼요, 제가 뭘 잘못 먹었......" 분명 잘못 알고 먹은 것은 없지. 그냥 강제로 삼킨 것이 있을 뿐, 어쩐지 과도하게 열이 나면서 힘이 솟더라니, 이 빌어먹을 월화궁 부궁주를 그냥 확!......할 수는 없어도 다른 수는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저, 저기 당가희 소저 부,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어? 나? 뭐, 뭔데?" 내가 자기한테 말을 걸자 조금 뜻밖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부탁이 무엇인지 궁금하긴 했나보다. 뭐 별거는 아니지만...... "저, 저기 좀 강력한 설사약 좀 얻을 수 없을까요?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20 23:54:16 고친날 2005-07-23 19:00:39 읽은수 9157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79)-가증환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9]가증환(加增丸) 당가희(唐佳喜)가 의아해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내주는 엄지손가락 두 개만한 환단을 딱 반쪽만 쪼개어 물 사발에 타서 꿀꺽 마신 직후부터 그 화끈한 효과를 경험할 수 있었다. 하복부로부터 뜨거운 열이 짧은 순간 전신으로 퍼지더니 금새 가라앉았으나, 그 이후부터는 엉덩이를 두드리는 강한 압박을 받으며 슬금슬금 어그적어그적 기어서 뒷간으로 향해야 했던 것이다. 뿌지직 뿌직! 풍덩 푸덩 뿌지지지직! 풍덩 풍덕...... 까 내리기가 무섭게 낙하 준비를 하고 있던 굵직한 그것들이 고공낙하를 마구잡이로 실시하기 시작했다. 처음 떨어지던 놈들은 그나마 오래 전부터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녀석들이었는지 한 덩치 하는 놈들이었으나, 그 다음으로 갈 수록 왜소한 덩치로 수그러들고 있었다. 정녕 문제는...... 쏴아아아아! 똑 똑 쏴아아아아! 똑 똑 똑...... 말 그대로 한 바탕 비가 쏟아지고 난 뒤 몰려드는 강물처럼 마구잡이 지류를 이루며 쏟아져 내리는 놈들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것들은 차 오를 데로 차 오른 강물이 홍수로 돌변해 댐을 무너뜨리며 범람하듯 거칠 것 없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일절 내 통제 따위는 완강히 거부를 하며 자신들을 무슨 홍건적(紅巾敵)으로 착각이라도 한 듯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기세로 내 엉덩이를 유린해 버리고 있었다. "홍건적(紅巾敵)? 맞는 말이지. 봐, 뻘겋......잖아. 우매! 저, 저거 완전 핏물이잖아. 야, 그, 그만 나와. 이, 이러다가 빈혈로 쓰러지겠다!" 주르륵 똑 또옥 똑 주르르르륵 똑 똑 똑...... 거의 한 시진동안이나 쭈그리고 앉아 있었더니만, 드디어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미 그 곳은 거친 마찰력으로 인해 너덜너덜하게 헐어버린 것이 확실했다. 한 숨부터 나왔지만, 어찌하겠는가? 냉월화(冷月花)의 악랄한 마수(魔手)로부터 벗어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이 정도뿐인 것을...... 물론 설사약 정도로 독 기운을 체외로 배출하겠다는 데는 작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 이미 상당량이 흡수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위안이라고 하면 냉월화가 씹지도 않은 단단한 알약 채로 내 목구멍에 던져 넣어서 덩어리 자체는 뱃속에 남아있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미쳐 뱃속에서 녹지 못한 그 덩어리는 내 그 곳을 경유해서 똥통 속에서 잠수를 하고 있을 터였다. '내일 밤에 해약(解藥)을 준다고 했으니까, 그 이전까지만 발작하지 않으면 되는 거야.' 쾅! 쾅! 쾅! 누군가가 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왠만하면 그냥 숲 안 쪽으로 들어가서 몰래 실례를 하면 될 것을 구태여 감히 날 귀찮게 하는 인간이 누군지 그 면상이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네, 나, 나갑니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쿠당탕 "어이쿠! 히익!" 미리 준비해 갔던 마른 풀을 한 웅큼 쥐고서 슥슥 뒤를 닦고는 일어나려 했다가 그만 휘청이며 한 쪽 다리를 그 곳에 빠트리고 말았다. 너무 오랜 시간동안 앉아 있었더니 그만 다리에 피가 몰려서 쥐가 나고 만 것이었다. 끙끙거리며 빠져 나오려고 했으나, 너무 진이 빠져 있어서 팔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살, 살려주세요. 빠, 빠져 죽겠어요! 밖에 계신 분 저, 저 좀 살려 주세요!" 내 애절한 목소리를 들었음인지 안으로 걸려있던 문고리가 팍 끊어지며 문이 덜컹 열렸다. 눈부신 햇살과 함께 날 어이없이 내려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월녀궁(月女宮) 여인들 중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여인이었다. 필시 내가 똥통에 빠져 죽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리라! '젠, 젠장 하필 너냐. 이 한 많은 점소이 인생이 여기서 끝이 나는구나. 크흐흐흑.' 내가 절망에 빠져서 손에서 힘이 빠지려는 순간 그 여인은 의외로 한 손으로는 자기 코를 틀어막고는 나머지 손으로 내 덜미를 잡고서 끌어내 주는 아량을 보여줬다. "헉, 허억 ,헉 감, 감사합니다. 덕,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 안 해도 되니까 나한테서 저만큼 떨어져. 아주 뒷간 냄새가 배였다. 배였어. 왠만하면 그 옷 갈아입고 수욕이나 해라. 정말 어째서 언니가 너 같은 한심한 종자를......" "네? 마, 마지막 마, 말씀을 잘 못 들었는데요." "됐어! 알 것 없네! 여기서 알짱거리지 말고 어서 꺼지기나 해." "......" 당장 화를 내건 말건 날 똥통에서 건져내 준 은인인 것은 맞으니까 그녀 말대로 비틀비틀 일어나서 후원으로 걸어갔다가 그냥 궁금해서 힐끔 뒤돌아 보니 뒷간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매우 역했는지 한참동안을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다시 뒤로 나오고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길 반복하고 있었다. 기어이는 뒷간 문을 뻥 차버리며 숲 속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흐음, 몰래 숨어서 따라가 볼까 이런 진기한 기회도 드문데......' 한참동안 뒷간 신세를 져서 진력이 빠진 상황에서도 내 변태 기질은 사그라들지 않았으나,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망아루로 기어 들어갔다. 만에 하나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숲 속이니 만큼 쥐도 새도 모르게 살인멸구를 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에...... 힘없이 뒷문으로 어기적어기적 들어가려니까 마침 주방에서 나오던 단수연(丹粹姸)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나를 무심코 바라보던 그녀는 눈을 부릅 뜨며 코를 감싸쥐고는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었다. "단수연 소저, 왜 그러시오? 무슨 일 있소?" "저, 저기 작삼 공자님, 왜, 왠만하면 옷 갈아입고, 목욕도 한 번 하시는 것이 좋겠어요." "흠, 코를 막고 말을 하니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소. 코맹맹이 소리 밖에 안 들리는 구려. 자, 자, 손을 내려놓고 말을 합시다. 상쾌한 공기를 쐬며 여유로운 대화를 나눠야 하는 것 아니겠소?" "괜, 괜찮아요! 괜찮다니깐요!" 그녀가 뭐라고 말했는지 못 들었을 리가 없긴 했지만, 심통이 잔뜩 오른 나는 그녀의 손을 나꿔채서 청아한 뒷간 냄새 향기를 만끽하게 해주려 애썼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왜냐구? 거기가 주방 아니겠어? 주방에는 누가 거주하고 있지? "어이, 작삼 동생." "헛, 예 포 형님, 오늘도 신수가 훤하신 게 좋은 일이 있으셨나 보군요." "허허, 본 지가 언제라고 왠 문안 인사? 뒷간 냄새 꾸리꾸리하게 퍼뜨리며 다니지 말고, 후딱 소장강으로 잠수했다가 복귀하게. 어딜 올라가나? 복도에 냄새 배겼다가는 자네 제삿날이 될걸세." 후다다다닥 포연강(鮑緣强)이 좋게, 좋게 말을 하고 있을 때, 신속 정확하게 움직여주는 것이 얇고 긴 생명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채 전에 바깥으로 내달렸다. 얼핏 본 것이지만, 꾸벅꾸벅 졸고 있던 홍 영감의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진 듯한 기분이 들어 현관으로 막 나서려던 발걸음을 돌려 계산대 근처에서 얼쩡거려 보았다. '어? 이상하네. 분명히 홍 영감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었는데, 지금은 평상시처럼 조시네. 어디 언제까지 버티시나 보자. 후후후후훗.' 아예 그의 앞에서 소매를 흔들어 냄새가 은근슬쩍 풍기도록 하고는 홍 영감의 인상에 변화가 있나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 지난번 홍 영감님 얘기로 미루어 보아 졸면서도 수시로 망아루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는데, 정말 그러한지 냄새로 확인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아자! 지금 눈썹이 꿈틀 거렸다. 역시 항상 깨어 계신 거였군. 어쩐지 그냥 졸기만 하는 게 아니었어. 후후후후훗.' "아, 그 녀석 냄새 징하게 진동하네. 허, 참 도대체 똥통 속에서 헤엄이라도 치고 나왔나? 주방 대청소라도 해야겠구만." 포연강의 투덜 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서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이번에 걸렸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 자명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가 없는 것이 있었다. 단수연은 그 지독한 토악물 속에서도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고 잘도 버티더만, 고작 이 정도 악취 가지고 호들갑을 떨다니 선뜻 이해가 어려운 일이었다. 이래서 여자란 여러모로 골치 아프단 말씀이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20 23:54:56 고친날 2005-07-23 19:01:21 읽은수 9944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80)-출판 삭제분 다 부활시켰네요.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0] 급하게 달려서 내려 오다보니 구비 구비 돌아야 하는 낭떠러지 외길 한 가운데 뒷짐을 진 남궁현이 땅이 꺼져라 한 숨을 쉬며 서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그의 속마음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한 시진 반 전에 그와 가볍지 않은 실랑이를 벌였던 기억이 있는 나로써는 그 길을 지나가기가 매우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젠, 젠장. 그냥 다시 올라가 버려? 아, 안 돼. 그랬다간 포연강이 날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게 뻔한데다가 주령령이라고 곱게 넘어가 줄 리도 없지. 그러고 보니 이 년은 어디 쳐 박혀있는 겨? 뭐 내 눈에 안 보이는 게 날 돕는 길이긴 하다만......" 난 조심스럽게 그의 곁을 지나가려고 했다. 그도 나의 기척을 눈치 챘을 게 분명하면서도 돌아보지 않는 것을 보니 모르는 척 넘어가려고 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와 나 사이의 거리에 변화가 보이질 않는 것이 아닌가! 내가 너무 천천히 가서인지 하는 의문이 들어 아예 대놓고 달음질 쳐서 지나가려고 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거리 차는 좁혀질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괴이한 마음에 그의 발끝을 내려다보니 아주 미세하게 발바닥을 좌우로 번갈아 움직여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바보잖아. 내 냄새 때문에 피하는 거면 한 번만 스쳐 지나가면 될 것을 가지고......너 실력으로 들어온 구룡 아니지? 뒷돈 먹였지?' 나와 싸운 기억이 시간이 지나자 조금은 후회가 되었는지 차마 속에 있는 생각을 겉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는 듯한 그를 그냥 지나가려 했으나, 무심해 보이는 얼굴에는 변화도 하나 없이 발끝으로만 사사사삭 이동하는 그를 보니 기가 찼다. '허, 허극, 그그그그극!' 느, 느낌이 왔다. 뒷간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그것이 뱃속에서 출렁거리며 발광을 하는 통에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마침 이곳은 훤하게 뚫린 낭떠러지 외길이라 까 내릴만한 곳도 못 되었고, 더불어 급하게 사용할 나뭇잎조차 없는 곳이었다. 보태면 앞에서 지랄 옆차기를 하고 있는, 뒷돈으로 구룡이 된 것이 거의 확실시 여겨지는 남궁현까지 있었기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짜, 짜증난다. 에라이 모르겠다. 내가 뛰어서 지나쳐 주마!' 난 최소한 외길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고, 바보 남궁현도 그에 질 새라 빠르게 게걸음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제 딴에는 분위기 잡은 거 깨기 싫다는 듯 발목근처까지 목석처럼 가만히 있고 발끝만으로 이동하는 게 매우 운치 있게 느껴졌나 보다. 전부터 느껴 온 것이지만, 정말 저 녀석 부모님이 무공가르친다고 나름대로 신경 썼을텐데, 기껏 배운 무공으로 욕하는 데 전음입밀을 써먹지 않나? 뛰어난 가전무공 가르쳐놨더니 뒷짐 지고 하늘을 보며 게걸음으로 이동하면서 나름대로 운치 있는 척 하지 않나? 하여간 여러 모로 구제불능이...... 쿠웅! 분명했다. 한참 게걸음으로 이동하면서 시선은 변함 없이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던 남궁현은 때마침 외길을 벗어나 숲길로 들어선 것도 모르고 있다가 바로 길옆에 우뚝 솟아있는 은행나무에 제대로 머리를 들이박고 말았다. 난 보았다. 무척 아플텐데도 부딪힌 그대로 멈춰 서서 보고 있던 각도 그대로 하늘을 주시하고 있는 남궁현의 코에서 빨간 것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그것을 감추려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코로 다시 빨아들이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 놈의 겉멋이 그리도 중요하단 말이냐? 적어도 제갈혜가 너보다 낫다. 남궁현아, 남궁현아, 제갈혜한테서 좀 배우고 깨달아라. 에휴.' 그를 내버려 둔 나는 재빨리 나무숲 속으로 들어가 다시 한 번 더 힘을 줘야만 했다. 이번에는 속에 있는 게 거의 빠져있어서 그런지 반 각 정도 밖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뭇잎을 긁어모아 뒤를 처리한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남궁현,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나 같은 인간도 있으니까......에휴, 에휴.' 마침내 소장강에 도착해서 내 단골 물웅덩이 몸을 담궜을 때 엉덩이가 아릿하게 쓰려옴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엉망진창으로 헐어버린 것이었다. 아려오는 궁뎅이를 달래며 깨끗이 수욕을 마친 후 뒷간 냄새가 밴 마의도 마저 빨았다. 별다르게 마른 옷을 가져오지 못했던 관계로 빨았던 마의를 쭉 짜서 다시 걸쳐 입으니 역시 무척이나 찝찝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더 이상 주체못할 분노(憤怒)가 치민다거나 정신(精神)을 잃는다거나 하는 증상은 보이지 않는다. 역시 당문에서 제조된 설사약이다 보니 그 효과가 확실하군. 어서 제대로 된 해약이나 받아야 할텐데, 순순히 줄지 모르겠군.' 짜서 탈탈 털었음에도 물기가 남아 축 처지는 마의를 걸치고서 축 처지는 기분으로 망아루로 올라오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서 어느 덧 신시(申時)를 넘어가고 있었다. 마침 제갈혜를 비롯한 그 일행은 저녁 식사를 막 하려던 참이었다. 소방도 그들 곁에 있었는데, 나를 돌아보고는 한 마디 하는 것이었다. "작삼, 얼굴이 핼쓱한데, 어디 아파?" "어, 어? 괜, 괜찮아. 아픈 데 없어. 저녁 맛있게 먹어." 문득 무뚝뚝한 표정으로 조용히 식사를 하는 남궁현을 보니까 웃음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킥하고 웃었더니 한참 식사를 하던 그가 사레가 걸렸는지 콜록 콜록 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흠, 제갈혜에게 내가 본 것을 떠들면 무척이나 재미있어 할텐데, 다음에 기회 봐서 말해줘야지. 후후후훗.' 내 은근한 시선을 느낀 남궁현이 계속 기침을 하며 물을 마시는 것을 보니 흥이 떨어져서 내 방으로 기어 들어가려고 했더니만, 포연강이 느닷없이 주방에서 손짓을 하며 부르기에 가봐야 했다. "작삼, 마침 잘 왔다. 단수연이 거의 다 나르기는 했지만, 아직 좀 남았구나. 이걸 위에 있는 월녀궁 부궁주라는 사람 방에 갖다 줘라." "......" 아드드드득 "어? 이빨을 가네? 너 시방 나한테 불만 있다 이거냐?" "아, 아니에요. 제가 냉수 목욕을 했더니만, 좀 감기 기운이 들었나 봐요. 헤헤헤헷." 월녀궁 부궁주, 냉월화(冷月花)얘기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얼결에 포연강 앞에서 이를 가는 실수를 범했으나 재치 있게 위기를 넘기고서 재빨리 접시를 받아서 그녀의 방 앞에 섰다. '후훗, 기회다. 소면 두 그릇에 만두 하나라......조촐하군. 크크 어디 니 네도 당해봐라. 여기에 설사약을 타면 설마 날 의심하지는 못하겠지. 음식이 상했으려니 생각할거야. 후후훗 밤새 뒷간에서 살아봐라. 둘이서 먹을 테니 냉월화는 뒷간에서 밤새도록 살 테고, 날 죽일 듯이 노려보는 그 계집은 으시시한 숲 속에서 밤새도록 까 내리고 있도록 해라. 흐흐흐흐흐.' 생각이 선 난 주저 없이 나머지 환단 반쪽을 꺼내어..... "야! 여기서 뭐해? 국수 다 식잖아." 꿀꺽.....커헉. "아, 예 막 들어갈려는 찰나였습지요." 항상 날 죽일 듯 노려보는 월녀궁 여인이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내가 하려던 일은 불발로 끝나고 아쉬운 마음으로 그냥 들여보내야 했다. "잘 왔다. 마침 널 보고 싶었어. 마침 오늘 전서구를 받았는데, 교옥정 그 녀석이 네 신분에 대해서 직접 해명하는 글을 남겼더구나. 아침에는 정말 미안했다." '교, 교 누님......' 교옥정 누님 얘기를 들으니 이들에 대해 품었던 반감이 일시에 씻겨 내려가는 듯 싶었다. 그런데, 왜 내 뒤에 있는 계집애는 오히려 더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거야? 그나마 냉월화가 반색을 하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기에 덜 떨떠름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밝은 미소로 미루어 보아 해약을 바로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품게 되었다. "그, 그럼 해약을 주시려는 겁니까?" "해약? 아, 그거 독약은 아니야. 내가 그냥 재미 삼아서 이것저것 섞어서 만들어 본 환약이지." "하, 하지만......" "뭐, 물론 먹고 나서 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지? 나도 솔직히 검증된 효과를 가진 환약이 아니라서 긴가 민가 했는데, 너한테 일어난 증세로 볼 때 매우 만족할 만했어. 간만에 하나 쓸만한 걸로 건졌어. 정말 고마워." "설마 그 증세라고 하는 게......?" "이름을 가증환(加增丸)이라고 지었는데 직접 느껴봤으니 어떤 효과를 지녔는지는 알겠지? 일정시간 동안 두려움을 없애주면서 스스로 가지고 있는 일정 잠재력을 끌어내 주는 데 효과가 있는 것 같아. 한 마디로 전쟁 직전에 병사들에게 복용시키면 거의 광전사(狂戰士)나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거지." 역시 이 빌어먹을 여편네가 덥석 던져준 알약 때문에 오늘 내가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긴 거였구나. 하필 상대가 구룡이라고 불리는 애들이었을 게 또 뭐냐고? 빌어먹을 아줌씨 같으니라구! 환약 이름도 가증스럽게도 가증환(加增丸)이라니! 딱 잘 지었구나. 젠장! "재, 재료는 무엇으로 만들었나요?" "어? 잠시만......기다려 봐. 아 여기 있다. 두꺼비 간, 모기 눈알, 지렁이 창자, 바퀴벌레 더듬이......" '우, 우웩 우웩......어떻게 저런 재료로 환약을 만들 수가 있어! 단수연이 만든 두꺼비 생회 요리랑 뭐가 틀리냐고?' "후훗, 얼굴이 사색이네. 괜찮아. 서양에서 들여온 비전을 보고서 만들어 본 거야. 쑥과 마늘을 집어넣어서 독기를 최대한 억제 시켰으니까, 후유증도 거의 없어. 효과는 보다시피 한 시진정도 가더라구." "잠, 잠깐만 요. 한 시진이라구요? 그럼, 그 이후에는?" "한 시진 후에는 그냥 소화가 되 버리지. 일종의 강장제나 정력환이라고 보면 될 거야." 그, 그럼 오늘 내가 한 짓은 뭐냐고? 뭘 위해서 설사약을 먹은 거냐고? '헉, 커허헉. 그그그그극.' "응? 왜 그래? 그녀의 물음에 간신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뚱뒤뚱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고 뒷간으로 잠자코 기어가다시피 도착을 해서는 조용히 문을 걸었다. 오늘밤은 무척이나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뿌지직 뿌지지지직 뿌지직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22 16:02:34 고친날 2005-09-04 15:54:36 읽은수 10746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81)-쫓기는 검귀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1]쫓기는 검귀(劍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비실비실 일어나 언제나 했던 것처럼 물을 떠오면서 간단히 목욕도 겸사겸사 하고서 천천히 어그적 어그적 산자락을 올라왔다. 곤혹스럽게도 연이은 방출로 인해 엉덩이가 심하게 헐었는지 바짓가랑이가 고의를 스칠 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짜르르 하게 퍼져왔다. '아, 아직도 약기운이 좀 남아 있겠지? 그, 그럼 오늘 하루는 처절하게 굶어야 하겠구나. 슬픈 일이다. 망아루에서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가 밥 먹는 시간인데, 불가피한 사정으로 건너뛰어야 한다니.....에휴.' 당연히 걸음도 늦어져서 평상시보다 반 시진은 늦게 올라와야 했다. 물을 주방 물통에 붓고서 어그적 어그적 걸어가서 물지게를 창고에 던지듯 넣고 나오려니까 귓속을 울리는 낯익은 전음입밀(傳音入密)에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뛰며 경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늦게 올라왔구나, 그대로 돌아서서 무덤들이 늘어서 있는 뒷동산 벌판 쪽으로 오도록 해.' 주령령(周領領)의 목소리에 부들부들 떨면서 못 들은 척, 지나가 버릴까 잠깐동안 심사숙고해봤지만, 같은 시도를 했다가 매만 곱절로 벌었던 지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라 코뚜레가 걸린 황소처럼 잠자코 그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 좋은 아침입니다. 령령 아가씨, 오늘 하루도 강녕하신지요?" 일단 아부 첫 마디가 한 대라도 덜 맞는 길임을 서서히 깨닫고 있던 나로서는 억지 미소를 띄우며 서슴없이 극존칭을 사용하며 설설 기었다. 뜻밖에도 남궁현이 망아루에 있음을 알면서도 인피면구를 착용하지 않은 새하얀 피부에 언제나처럼 그에 어울리는 새하얀 나삼의를 걸친 그녀가 찰랑찰랑 윤기가 흐르는 칠흑의 비단결 같은 머리를 잘 빗어 넘겨 뒤로 묶은 모습을 보니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입술에도 뭔가를 발랐는지 반짝반짝 거리는 게 새벽이슬 속에서 갓 열매를 맺은 앵두라 해도 비교되기 어렵다고 해야할까? 오늘따라 왜 이리 아름답게 치장을 한 것인지 이해가 안......되면 바보일 것이다. 다름 아닌 남궁현이 주루 안에 거하고 있는 상황이라 언제 어떻게 부딪힐지 모르니 깔끔하게 단장하고 있는 것은 그와 애인 사이일 령령으로서 당연한 배려라고 하겠다. 단지 인피면구를 쓰지 않았다는 것은 그와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인가? 뭐 날 위해서 예쁘게 꾸민 것은 아니라는 뻔한 사실에 씁쓸함을 금할 수는 없었지만, 황홀하면서도 뭉클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얼굴이 왜 그래? 중독이라도 당한 것처럼 핼쓱하잖아." 그녀가 가뜩이나 커다란 눈을 지척으로 들이대며 안면을 살피는지라 더할 수 없이 커다란 보석이 눈앞에서 반짝반짝 거리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왠지 연민 어린 그녀의 다정스런 표정에 순간적으로 혹해 버린 나는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 어쩌면 냉월화가 독약을 먹여서 이 꼴이 되었다고 하면, 오늘은 수련(修練)없이 넘어가 줄지도 모른다. 후후후훗. 그래 남궁현 덕분에 이 마녀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는 상황이니까 말이야.' "월, 월녀궁 부궁주가 독약을 먹이면서 협박하는 통에 이 꼴이 되었지 뭡니까? 지금도 눈앞에 저승사자가 아른거리는 것 같아요. 컥 곧 죽, 죽을 것만 ......" 저승사자가 아른거리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다는 것이 정확하지. 뭐 일반적으로 들어왔던 삭막하고 음산한 저승사자라면 이전까지의 령령을 떠올리기만 해도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곱게 단장을 해서인지 무척이나 아름다운 저승사자로 느껴지긴 했다. 이런 저승사자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서로 죽을려고 아우성을 지를지도 모르지. 후훗, 그래도 난 뒷간에 빠지는 일이 생긴다해도 이승이 좋단 말씀이야. 뭐 이미 빠질 뻔했지만...... "그래? 난 또 설사약 과다 복용으로 진이 빠진 줄 알고 오늘 하루는 쉴까 했었는데, 잘못 알았나보네. 하는 수 없지, 이독제독(痢除毒)이란 말 알어? 중독을 당했을 때는 그저 무자비하게 전신 을 얻어맞는 게 최고야. 치사량의 독이 아니라면 나을 수도 있어." 뭐, 뭐라고? 이 마녀가 어떻게 알았지? 분명히 자기 방에도 없었고, 내 눈에도 안 띄었었는데..... "저, 저기 잠깐만 요!" "아,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혹시 모르니까 미리 유언이라도 남겨. 만약 네가 잘못되어 죽으면 그대로 들어줄 테니까, 걱정되면 말 해봐." 작정을 했구나.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은 저 철벽 대꾸. 언제나 느끼지만 정말 무서운 년이로세. 이대로 맞고만 있을 것 같아? "이, 이왕 죽을지도 모르는 거, 마지막 수련에 이바지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으래? 그렇게 해. 나야 뭐 별로 상관없으니까." 내가 가증환(加增丸) 복용으로 깨우친 삼재권법의 정화를 보여 주도록 하마. 구룡들조차도 껄끄러워 할 만큼 무시무시한 내 장족의 청룡출수(靑龍出水)를 보아랏! 난 그녀가 자세를 잡을 기회도 주지 않고 말을 마치려고 하는 순간에 바로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다른 발로 박차서 몸을 앞으로 밀어낸 후 꽉 말아 쥔 주먹을 그녀의 연약해 보이는 새하얀 목덜미를 향해 전력을 다해 내려꽂았다. 단 한 번, 단박에 그녀를 기절시켜야 내가 사는 것이다. 혹시라도 피하거나 막는다면 그 다음 이어질 보복선 난타로 거의 사망에 이를지도 모른다. 퍽! "끄아아악, 내, 내 주먹!" 젠, 젠장 그, 그 날 저녁처럼 그녀의 몸에 내 주먹이 닿기는 했지만, 반발력이 작용하면서 되 튕겨져 버렸다. 역시 그녀에게는 아무런 충격도 없는지 아주 짧은 순간 움찔거리기만 했을 뿐 곧 성난 노도처럼 매섭게 몰아 부치려 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의 연민 어린 시선 같은 것은 말끔히 사라진 진정한 저승사자가 등장한 것처럼 사이한 살기가 퍼져왔다. "야, 야, 어금니 다물어. 니가 떠든 소리를 듣고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면 넌 독약으로 죽는 게 아니라 내 무정한 손속에 목이 비틀려서 죽을 거야." "잠, 잠깐만 요!" "어금니 다물라고 했다!" 퍽 퍼퍼퍼퍼 퍽 퍽......! 그녀는 더도 덜도 말고 정확히 반 시진 동안 탈진해서 축 늘어져있는 내 사정 따위는 무시하고, 평상시보다 더 강도 높은 구타를 실시하고는 조용히 그 흔적을 감췄다. 젠장 처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호신강기(護身鋼氣)인지 뭔지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이상 상처는커녕 조그마한 충격도 전해질 리가 없었다. 내 주먹은커녕 진검(眞劍)조차 먹히지 않을텐데 수련 운운을 하다니...... '그런데, 왜 그렇게 화를 더 내는 거야? 분명히 내가 때려도 된다고 해 놓구서......이게 어딜 봐서 수련이냐? 에휴 그냥 내가 상대를 말아야지.' 당가희한테 받은 설사약으로 진을 다 뺀 상태에서 평상시보다 더욱 야멸차게 떨어져 내린 령령의 구타에 완전 탈진해서 가매장 무덤가 봉분 근처에 널브러져 있었는데, 마침 뒷간으로 지나가던 남궁현이 걸레처럼 굴러다니는 나를 보고는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히히덕 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니기미,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이곳을 지나가는 인간이 저 인간이라니......' 백룡에 대한 평가 계속 하락 중, 인간이 자존심만 높았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멍청함이 부각되면서 좁쌀처럼 쪼잔한 유형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저러다가 백룡이 뱀장어로 평가 절하되고, 언젠가는 모두가 고개를 끄떡이는 미꾸라지가 될 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 희망사항만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 강제 징집을 당했을 리가 없는 신의 아들일지라도 삽질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 보이니 말이다. 일 각이나 지났을 때 즘에서야 겨우 비틀비틀 일어나서 령령의 매서운 권과 장에 맞고 나뒹굴면서 엉망이 된 옷매무시를 바로 잡고 먼지를 털어 내고는 궁시렁 궁시렁 령령의 욕을 내뱉으며 망아루 현관으로 걸어갔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난 망아루의 점소이니 말이다. 그래도 역시 단수연이 있으니 매우 한가해졌다. 일을 분담해서 해도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우 익숙하다는 듯 없는 일까지도 알아서 싸그리 해버리는 바람에 막상 나는 현관을 지키고 있는 따분한 일밖에 할 것이 없었다. 소방(蘇芳)은 제갈혜와 더불어 지하석실 문제로 할 얘기가 많은지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밥 먹을 때나 잠시 내려와서 아는 척 인사를 할까 몰라도 말이다. 아무래도 삐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내가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것들만 떠올려 봐도 분명 평상시의 나답지 않게 심한 말을 한 듯 싶었으니 말이다. 월녀궁 아이들도 좀처럼 바깥으로 나돌지 않았다. 그것은 걔 네들 의지라기보다는 냉월화(冷月花)의 의지 같았다.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리 교 누님과 관련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호감도가 부쩍 상승해 있어도 무림인은 역시 무림인일 수밖에 없다. 제일 궁금스런 조진후는 소막주였어도 기본적인 살수 수업은 통과를 했는지 꼼짝도 않고 잘 숨어 있었다. 뭐 밥이야 단수연이 자기 밥 들고 가는 척하면서 겸사겸사 같이 먹을테고, 씻는 것도 뭐 막말로 단수연이 물수건으로 닦아준다고 치지만, 그럼 뒷간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는 것인지 매우 궁금했다. 귀식대법(龜息大法) 생각도 나긴 했지만, 수련정도가 낮은 이가 장시간 펼칠 경우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소방한테서 들었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진후(趙眞厚)의 수련 정도가 그다지 높다고 볼 수는 없으니 계속해서 귀식대법을 펼치고 있다고 여겨지지도 않았다. '다음에 꼭 물어봐야지. 방 속에서 과연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1-22 23:55:45 고친날 2005-01-23 02:58:05 읽은수 10098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8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2] 현관 난간에 쪼그려 앉아 하염없이 지평선에 드리워진 푸른 하늘과 울긋불긋하던 나뭇잎들이 다 떨어져 내려 암 울할 정도로 앙상하게 변해버린 산 능선을 바라보았다. 바 람이 차게 느껴져 팔짱을 끼고서 더욱 몸을 둥글게 말아 온기보존에 매진하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뚜벅뚜벅 걸 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가벼운 것을 보니 아마도 단 수연이나 소방인 듯 싶었다. 소방은 어제 일로 상당히 마음 이 상해 있는 듯 밥 먹을 때만 잠시 마지못해 인사를 해올 뿐 접근도 해오지 않았기에 남은 사람은 단수연인가? 그녀는 내 뒤에 잠자코 주저앉아서 어깨 목 근육을 시원 하게 주물러 주었다. 나긋나긋하게 부드러운 손으로 주물러 주는 것이 꽤나 기분이 좋았다. '얘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잘 하긴 하지만, 갑자기 왜 이 러지? 나한테 부탁할 거라도 있나? 아니면 내가 뚜들겨 맞 는 것을 몰래 보고서 불쌍해서 그러나?' 단수연이 고분고분하게 나올 때는 꼭 뭔가 바라는 대가 가 있었다. 흑두건을 벗고 있을 때는 보통 여자 같기는 하 지만, 무척이나 치밀하게 계산을 하며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점소이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좋은 관 계를 유지해서 자신의 주군인 소막주에게 피해가 안 가게 하려고 그런 다는 것을 익히 깨닫기는 했지만, 나한테까지 부탁을 해 온 적은......일전 그 일이 있고 나서는 별 다르게 없었다. "단수연 소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시오. 나긋나긋 하게 주물러줘서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당신한테 공짜란 것은 없지 않소?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테니 귀찮게 헛고생하지말고 그냥 놔두시오." "......"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계속 주무르기만 했다. 문득 누군가 지나가며 일으키는 바람결에 사향 냄새 가 은은하게 느껴졌다. '사향? 단수연한테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데, 이 무슨......?' 내 앞을 스쳐간 그 누군가를 바라보니 다름 아닌 단수연 이었다. 그녀는 앞마당 구석에 몰려있는 나뭇잎들이 볼 쌍 사납다고 느꼈는지 비를 들고 천천히 쓸어내고 있었다. '그, 그럼 이 손의 주인은 누구야? 설마 소방? 아닌데, 소방은 울금향 냄새가 난다고......' "누, 누구세요?" "이제 눈치 챘어? 어때 내가 주물러 주니까 기분이 나긋 나긋하게 좋아?" 고개를 슬며시 돌려보았다가 날 죽일 듯 노려보기를 일 종의 습관처럼 여기는 월녀궁 여인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 다. 불안한 기분이 들어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어 나려고 했으나, 무겁게 눌러버리는 힘에 그대로 다시 주저 앉아야 했다. "왜, 왜 이러세요?" "나? 아주 간단한 부탁이 있어서 그래. 어렵지 않아. 정 말 간단한 일이야." "무, 무슨 일인데요?" 그녀의 양손 손가락이 교묘하게 내 양 견정혈 위에 놓이 며 설설 눌러오고 있었다. 거부하면 점혈(點穴)을 해서 고 통을 줄 거라고 암시를 하듯 다분히 협박 성향이 짙었다. "교옥정(喬玉淨) 언니가 맡겨놓은 자수정 목걸이 있지? 그거 언니한테 직접 돌려 줄 테니까 나한테 넘기도록 해. 물론 공짜로 달라고는 안 해. 내 전 재산인 금원보 하나랑 바꾸자. 어때?"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금원보란 말에 고민을 했다가, 금새 그 잡념을 털어 내었다. 아마 교 누님이 월녀심법(月 女心法)을 완전히 터득하고 월녀궁을 나올려면 못해도 몇 년은 걸릴 것이다. 그 때까지 그녀가 날 기억하고 있을지는 의문이긴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선뜻 선물을 받 은 것은 정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다. 그런 소중 한 것을 그까짓 금원보 하나 따위에 넘길 것 같아? 적어도 금원보 스무 개는 되어야......가 아니라......절대 넘길 수가 없는 것이다. "싫소." "후회할텐데,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그까짓 금원보 하나에 날 매도하려 하......어, 억!" 내 말이 끝나기도 채 전에 견정혈을 슬슬 문지르던 손가 락이 날카롭게 곧추 세워지며 그 곳을 강하게 찔러 왔다. 곧 극심한 통증이 신경선을 타고 전신으로 아릿하게 퍼졌 다. "어때? 이젠 후회되지? 그냥 뺏어버릴 수도 있지만, 네 스스로 꺼내 놓기를 바래. 어서 내놔." "끄으으윽, 싫......소. 당신이......뭐, 뭔데 그녀가 맡긴 것 을......뺏으려 드는 거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겨우 운을 떼며 입을 열었더니 내 오기에 화가 났는지 거친 숨결을 내 귓가에 토해내던 그녀 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벼락이 수없이 내려치는 듯한 쩌릿 함이 전신을 수없이 훑으며 충돌하는 기이한 고통 때문에 땀이 뻘뻘 흘렀으나, 꽉 다문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 지 않도록 기를 썼다. "자, 이제 내놓을 생각이 들었어? 말을 못하겠거든 고개 만 끄떡거려 그럼 풀어주마." 난 반대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가 뭔데 교 누님이 날 다시 보기 위해 직접 건네 준 이정표를 달라 말라 하며 난리를 치는 것인가! 물러설 수도 없었고, 물러서서도 안 되는 문제였다. 난 교 누님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에 게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거나 나처럼 하찮은 점소이 따위는 다시 보고 싶지 않아서 마음이 변한 것이 아닌 다 른 사람의 방해로 못 보게 된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순간, 짜릿함만 느껴지던 전신에서 청아한 기운이 한 가닥씩 한 가닥씩 일어서며 뭉쳐져 가는 기이한 기분이 들 었다. 폭우 속에서 일수필살에게 비수를 얻어맞고 비통에 잠겨 울부짖었을 때 전신을 휘감았던 청아한 실낱같은 기 운이 다시금 날 휘감고 돌았던 것이다. "너, 바보구나. 좋게 말 할 때 넘겨줬으면 좋았을 것을, 이젠 네 녀석이 기절할 때까지 힘을 빼지 않을 것이다. 스 스로의 어리석음을 탓해라." 그녀가 손에 힘을 가중시킴으로써 더욱 극렬하게 흐르던 통증은......오히려 점차 점차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 의 손가락을 타고서 흐르던 강맹한 힘들이 청아한 기운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희미하게만 느껴지 던 몸 안의 암중 기류가 이렇게 신기하게 와 닿기는 처음 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억, 얘 얼굴이 왜 이렇게 새빨개? 땀은 또 왜 이리 많 이 흘려? 눈동자도 무지 커졌네?' 내가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자, 한참 전부터 곁 에서 뚱한 시선을 보내고 있던 단수연이 입을 열었다. "저 사람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졌네요. 자기가 준 힘 을 주체 못 할 정도로 끌어 올려서 기어이는 그 한계 치를 넘겨 버린 거예요. 한 마디로 내공 조절에 미숙한 바보들이 나 걸리는 함정에 빠진 거지요." "그, 그럼, 나도 이대로 계속 있어야 하오? 단수연 소저?" "그냥 빠져 나오시면 되요. 작삼 공자님, 이젠 자기 힘을 억누르기도 힘든 상황이니깐요." 단수연 말대로 내가 그냥 슬그머니 빠져 나오자 이를 갈 며 나를 노려보면서도 부들부들 떨던 그녀는 굳어있는 자 세를 억지로 굽혀서 좌공(坐功) 자세를 취하더니 그대로 눈 을 감고는 깊은 운기조식(運氣調息)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대로 한 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거요?" "잠시동안은 꼼짝도 할 수가 없겠지요. 그, 그런데 그것 은 왜요?" "남의 물건을 강탈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실패할 경 우도 고려해서 굳은 각오를 했을 터, 그 굳은 각오를 잊게 해서는 안 될 듯 싶어서 말이오." 난 즉시 주방으로 후다다닥 달려가서 포연강한테서 간장 을 조금 얻어서는 물을 엷게 타서 빨갛게 만든 후에 운기 조식 중이라 꼼짝달싹을 못하는 월녀궁 여인네의 도톰한 입술 주변에 몇 방울 찍어서 흘러내리게 만들고는 뒤로 넘 겨진 귓머리 몇 가닥을 앞으로 빼서 꽉 다물어진 입에 살 짝 물려주었다. 뒤로 물러나서 보니 어딘가 허전해 보여서 양 눈 아래에 다가 묽은 간장을 찍어서 핏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표현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강아지풀 두 어 개를 꺾어 와서 한 쪽 귀에 예쁘장하게 꽂아 주었다. 카아, 예술이 따로 없었다. "단수연 소저, 내 작품이 어떻소?" "작품 제목이 무엇인데요?" "고뇌하는 광녀 라고 하오. 훌륭하지 않소?" "딱이긴 하지만, 지금 속으로는 작삼 공자님을 쳐죽일까 말까 하고 엄청나게 고뇌하고 있겠는데요. 저러다가 심마 (心魔)에 빠져서 주화입마가 더 도지겠어요." "뭐, 주화입마로 사망하면 묘비 정도야 내가 세워줄 수 있지요. 묘비명도 생각해 봤다오. 여기에 월녀궁 광녀 외로 이 잠들다." 아드드드득 이빨 가는 소리가 얼핏 들린 것도 같았으나, 아직까지 주 화입마에 빠져서 운기조식 하는 중에 이빨을 갈았다는 말 은 못 들어보았다. 운기조식 중에 다른 데 정신을 팔리면 그대로 골로 가기 쉽 상인데, 감히 이빨을 갈 여지가 있겠 는가? 그래도 왠지 이빨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단 말씀 이야. 제목을 잘못 지었나 보다. '이빨 가는 광녀'라고 할 것을......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1-23 20:29:43 고친날 2005-01-23 20:29:43 읽은수 9838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8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3] "저, 그런데요. 작삼 공자님." "왜 그러시오? 수연 소저?" "후환이 두렵지 않으신가 봐요? 운기조식을 마치고 일어 나면 제일 먼저 공자님께 보복을 하려고 할텐데요." "그, 그렇긴 하지만, 단독범행이 분명하니 더 이상 함부 로 날뛰지는 못 할 거요. 방금 그 일로 인해 내게는 좋은 방패가 생겼으니 말이오." "방패라니요?" 그야 뻔하지 뭐. 어제 분위기로 봐서 이 년은 계속 날 잡 아먹을 듯이 째려봤지만, 냉월화(冷月花)와는 아주 호의적 인 대화를 나눴거든. 그것은 즉 그녀는 필요할 때 아군으로 써먹을 수 있을 소지가 높다는 뜻이지. "한 번만 더 날 협박(脅迫)하려고 들면 난 주저 없이...... 냉월화(冷月花) 부궁주님께 소리를 질러서 이 여인의 부조 리한 처사에 대해서 낱낱이 고자질하고 말 거요." "지금 일은 봐주시려구요?" "그럼요. 남아대장부로 태어났으면 타인의 허물을 한 번 즘은 넓은 아량으로 너그러이 넘어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 소? 단수연은 내가 지금 월녀궁 여인을 봐주고 있는 게 맞냐 는 듯한 뚱한 시선으로 곁눈질 하다가 문득 무엇을 느꼈는 지 산비탈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역시 반사적으로 그 녀의 시선을 따라 산비탈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약속 이나 한 듯 보조를 맞추며 움직이는 새까만 점 두 개가 보 였다. 점점 커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봐서 이 쪽으로 경 공을 펼쳐서 신속하게 달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어, 어라 저 뒤를 따라오는 바퀴벌레처럼 징그럽게 떼거 지로 붙은 놈들은 뭐요?" "아무래도 마교(魔敎) 같은데요. 일전에 그 쪽 청부를 받 은 적이 있어서 안면이 익네요." "마교? 그럼 그들에게 쫓기는 저들은 누구지?" 채채챙 챙챙 챙챙 꽤 까마득하게 떨어진 곳인데도 날카로운 쇳소리가 메아 리치며 망아루가 있는 언덕에까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 었음인지 망아루 객실에 있던 구룡(九龍)들이 일제히 우루 루루 나왔을 뿐만 아니라 냉월화 부궁주를 비롯한 월녀궁 여인들도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다. "아니 사월(死月)아 너 여기서 뭐 하는 거니?" 냉월화와 월녀궁 여인들 뿐만 아니라 소방과 제갈혜 일 행도 그녀를 보고는 적잖이 놀란 듯 싶었다. 그들이 너무 놀라서 까무러치지 않게 할 의무가 있겠다 싶었던 나는 바 로 그들을 위한 부연 설명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만, 물러들 서세요. 보시다시피 그녀는 내상을 입어 운기조식(運氣調息)중이랍니다." "작삼 동생, 그게 무슨 말이지? 자초지정을 아는 것 같은 데, 자세하게 설명 좀 해주겠니?" 이제 냉월화는 아예 대놓고 동생이라 부르며 친근하게 하대를 해왔다. 마치 교 누님을 대하는 기분이 드는 게 그 리 나쁘지는 않았다. 후후훗 대세는 나에게로 기울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입 주변을 잘 보세요. 너무나도 배가 고팠던 그 녀는 만류하는 저를 뿌리치고 후원에서 양식 중인 오리 한 마리를 생으로 뜯어먹다가 체해서 결국은 주화입마(走火入 魔)에까지 빠진 것입니다." "뭐? 정, 정말이냐? 그, 그럴리가......" "정 궁금하시면 있다가 한 번 물어 보세요. 아마 너무 창 피해서 아무 말도 못 할 껄요." 내 해명에 놀란 무리들은 곧이곧대로 납득을 했는지 그 녀로부터 한 발자국 씩 떨어졌다. 단지 제갈혜 소저만이 킁 킁킁 거리더니 간장 냄새가 나는데 라고 중얼거려서 뜨끔 했지만, 월녀궁 사람 일이라 그런지 개입하려는 뜻이 전혀 없어 보여서 일단 안심을 하게 되었다. '후후후훗 처음부터 날 건들지 말았어야지.' 잠시 후 주화입마에 빠져있던 그녀가 내 해명이 억울했 는지 신형을 부들부들 떨다가 뻘건 피를 한 모금 뿌리더니 날 삿대질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너, 너! 내가 이대로 넘어갈 줄 알아! 어, 억! 죽, 죽여 버......쿨럭, 쿨럭." 사월(死月)이라 불린 여인은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하 다가 입에서 피분수를 뿜고는 그대로 혼절해 버리고 말았 다. 말 그대로 주화입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기절해버 리다니! 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 고 보니 내가 요즘 무림인들에게 많이 개기는 것 같기는 하다. 아마도 주령령에게 하도 터지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간 땡이가 부어서 대신 다른 이들에게 쌓인 울분을 이런 식으 로 표출 시키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왜 가만있는 사자 의 코털......이 아니라 점소이의 견정혈을 건드려! 냉월화는 그녀와 나 사이의 묘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한 숨을 내쉬면서 그녀의 맥을 짚어 보고는 품에서 기이한 환 약 냄새가 나는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그녀가 그 주머니를 꺼내들자 주변에 있던 월녀궁 여인들이 한 발자국 씩 뒤로 슬금슬금 멀어지는 것으로 느껴졌다면 내 착각일까? 간신히 실눈을 뜨며 정신을 차리려 애쓰던 사월은 냉월 화가 빨간 환약을 꺼내는 것을 보자 눈이 휘둥그래지며 안 면이 사색(死色)으로 변하였다. 몸이 움직일 리야 없지만, 말도 안 나오는지 대신 고개를 필사적으로 내젓는 것이었 다. 왠지 그 심정, 이해가 가기도 했다. 검증이 안 된 환약 만큼 무서운 것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사월아, 걱정할 것 없다. 왠만한 주화입마는 이 격동환 (激動丸) 한 알로 해결되니까, 그렇게 사양할 필요 없어. 너 희들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정성을 들여 만든 아까운 환단 이라고 해서 아낄 이유가 없지 않겠니? 자, 앙 벌려봐." 사월은 오히려 입을 꽉 다물었으나, 냉월화는 가차없이 그녀의 턱 뼈를 빠가각 빼서 강제로 입을 열더니 격동환이 라고 하는 것을 친절하게도 목구멍에 넣어 주고는 다시 턱 뼈를 껴 맞춰는 과격한 방법으로 먹여 주고 있었다. 그 이 후에 그녀를 앉히고는 그녀의 등뼈부분을 몇 차례 가격을 해서 약이 잘 넘어가게 유도를 해주는 것 같았다. 그 직후였다. 사월의 전신이 부들부들 파닥파닥 튀며 진동을 일으키는 데, 보고 있는 내가 다 끔찍스러울 지경이었다. 냉월화는 그런 그녀를 별거 아니라는 듯이 무시하면서 다른 월녀궁 여인에게 지시를 내렸다. "명월(明月), 춘월(春月)아 방으로 잘 데려다 놓고 한 명 은 남아서 간호를 하고 한 명은 다시 내려오도록 해라." "예, 부궁주님." 허리를 살짝 굽힌 두 여인은 즉시 격하게 떠는 사월의 양팔을 끼고는 객실로 올라가 버렸다. 이제는 주변의 있던 구룡 애들도 그녀에게서 두 발자국 이상씩 슬그머니 걸음을 떼고 있었다. 심지어는 당문의 말 괄량이라 부를 만한 당가희(唐佳喜)조차도 시선을 다른 곳 으로 돌리며 냉월화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고자 애쓰고 있었 다. 난 그런 그들과는 반대로 그녀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적 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냉월화와 친 하게 지내면, 단지 그녀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확실한 방 패막이 될 거라는 사실 말이다. 사월 그년은 이제 내 손안 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후후훗. "작삼 동생, 많이 놀랬어?" "아, 아닙니다. 냉 누님의 고매한 의술에 절로 감탄사가 나올 뿐입니다." 아부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나의 입심은 이럴 때일수록 그 빛을 발하기 마련이었다. 냉월화라고 다른 아해들이 자 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이런 때 편을 들고 아부를 해야 점수가 곱절은 붙는 것이다. "오호호호호홋, 알긴 아는구나. 앞으로 어디 아프면 나한 테 즉각 말해. 어떤 중상이라도 치료할 수 있는 환약을 여 러 개 만들어 놨거든." "하하하하핫, 제, 제가 좀 튼튼해서요. 별로 병치레가 없 답니다. 하하하핫, 말씀만으로도 힘이 부쩍 나는데요. 어엇, 저, 저기 검은 옷의 인간들이 이 쪽으로 올라오는데요." 그녀가 더 이상 환약 얘기에 몰두하지 않도록 원래의 목 적을 환기시키며 나도 산비탈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격하 게 칼부림을 하던 그들 중 두 명은 우리들을 보자 재빨리 이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점점 커지는 인영을 보고서야 그 새까만 두 인영 중 한 명이 매우 낯익은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곽철 대협이다! 소방, 제갈혜 소저, 어서 도와줘요." 이미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쫓기는 두 명중 한 명이 누군지 알아본 그들은 남궁현을 필두로 해서 제갈혜 일행 모두가 신형을 아래로 날리고 있었다. 단지 월녀궁 여인들 은 냉월화가 잠자코 지켜보기만 했기에 그녀 주변에 서서 전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뭐 구룡 아해들만 가도 저 정도 숫자야 충분히 해결할 수 있겠지. 그럼 어디 본격적으로 강 건너 불구경을 해보도 록 하실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1-23 23:50:20 고친날 2005-01-24 03:39:49 읽은수 9984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8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4] 곽철 대협은 십 여장 거리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도주를 멈추고 돌아서서 추격을 해오는 이들을 향해 검을 곧추 세 웠다. 그와 같이 달려오고 있던 흑의인은 의외로 매우 날씬 한 미녀였다. 오랫동안 쫓기며 달려왔는지 머릿결이 엉망이 었고,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지 지저분하기도 했지만, 그 티 가 오히려 그녀의 아름다움이 더욱 두드러지도록 해주었다. "곽철 대협! 다치신 데는 없으신 가요?" 남궁현에 이어 제갈혜가 그의 옆으로 사뿐히 내려서고는 여기저기 피로 얼룩진 그의 상세를 살피며 확인 차 물어보 았다. "크게 다친 데는 없소. 다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긴 말 을 못할 뿐더러 여러분의 힘을 빌리고자 하오." "사해는 동도라고 했습니다. 그런 말을 하시며 오히려 우 리가 섭섭하지요." 모용천풍(募容天風)이 침묵을 깨며 도리어 앞으로 나섰 다. 평상시에도 곽철 대협을 존경하는 티를 내더니 역시 이 런 때 빠지지 않는 녀석이었다. 당가희(唐佳喜)는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빠 르게 선공으로 나서며 실력행사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었 다. 그녀의 손이 잠깐 잔영을 일으켰다는 기분이 들었을 뿐 인데, 달려오고 있는 복면인들을 향해서 십 여 개의 비표가 날아들고 있었다. 단순한 비표 같아 보여도 당문의 특성상 독이 묻어 있을 게 뻔한 비표였기에 섣불리 접근해오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 무림인들과는 경지가 다르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직선으로 날아오는 비표들을 검으로 빠르 게 빗겨 쳐내고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구룡들을 향해 서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어딜 지나가려고 하느냐? 마음대로는 안 될 것이다!" 선두에 서 있던 남궁현(南宮炫)의 검이 매섭게 허공을 가 르며 그를 무시하며 지나가려던 복면인들의 전진을 방해하 고는 자신의 선두에서 달려오던 복면인의 목을 일순간에 베어 내었다. 순간 튀어 오른 피가 그의 백의를 빨갛게 물 들였지만, 개의치 않고 그를 향해 달려드는 복면인들을 상 대하기 시작했다. "저들이 중원에서도 구룡(九龍)이라고 불리우는 후기지수 들이다. 언젠가 우리들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이들이니 잘 봐두도록 해라." "예 부궁주님, 명심하겠습니다." 냉월화가 잘 보고 새겨두라는 듯이 언급을 하자 월녀궁 여인들은 대답을 하며 전황을 더욱 관심있게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녀들 개개인으로만 따지면 구룡에 훨씬 못 미치 긴 했지만, 그 날 펼쳤던 합격진(合擊陣)은 정말 무시무시 하기 그지없었다. "오호, 남궁세가의 백룡이로군. 제왕검법(帝王劍法)이 실 전적이면서 강맹하다고 하더니 실제로 그러하구나. 다른 여 타 검법처럼 기교를 부림도 없이 오로지 상대의 목숨만을 노리는 일격필살 검법이라 좋군." 냉월화가 나름대로 만족했다고 고개를 끄떡였으나, 나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어딜 봐서 저런 가짜 구룡 녀 석의 검법이 훌륭하단 말인가! "그의 검법은 별거 아닙니다. 구룡 중에서 진정한 실력자 는 검귀(劍鬼) 곽철 대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검법 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지요. 물론 냉 누님의 검술에 비하면 조금 모자람이 없잖아 보이긴 하지만요." 이런 상황에서도 자동적으로 아부 한 마디 잊지 않는 내 투철한 아부 정신이 씁쓸해지기까지 했지만, 냉월화의 연검 술 또한 상당히 교묘하면서 기이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호호호호홋, 작삼 동생이 오늘 따라 계속 내 얼굴에 금 칠을 해주는구나. 뭐 내가 월녀궁에서도 지위만으로 이 인 자인 것은 아니지. 궁주 언니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날 당해낼 수 없으니 말이야. 그런데, 작삼 동생이 칭찬을 하 는 것을 보니 곽철이란 자가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지?" "네, 오죽하면 광룡(狂龍)이라고 까지 불리겠어요? 그의 유운검법(流雲劍法)의 현란함은 정말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착각이 들 정도지요." "흠, 동생의 말은 틀린 것 같군. 그의 실력은 결코 내 아 래가 아닌 듯 싶은데, 한 번 비무신청을 해볼까? 내가 가증 환을 복용하고서 싸운다면 이길지도 모르지만, 대신 팔 하 나는 내줘야 할지도 몰라."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곽철 대협은 흑의 미녀를 향 해 다가오는 복면인들을 향해 검을 날렸는데, 딱 한 번 찌 르고 검을 회수한 순간 무려 세 명의 복면인의 몸이 벌집 이 되서는 피를 뿜으며 바닥에 머리를 쳐 박는 것이 보였 다. 한 번을 찌른 것처럼 보인 것은 실제로는 수 십 번을 찔렀다는 소리다. "저, 저런 기술을 쓰면 팔 뼈가 탈골되거나 하지는 않을 까요?" "뭐 작삼 동생이 저런 기술 흉내내다가는 팔 뼈 뿐만이 아니라 힘줄도 가닥가닥 끊어지고 심장마비로 죽기 딱 알 맞지. 곽철이란 사람은 아마도 저 검술과 맞물리는 내공을 익히고 있을 거야." "제가 보기에 지난번에 냉 누님이 도살을 상대로 펼치는 검법을 보니까 그의 쾌도를 잘 흘려버리시면서 날카롭게 파고드시던데요. 누님이라면 과철 대협의 쾌검 정도는 어렵 잖게 상대하실 수 있지 않나요?" "그 때 도살은 위력으로 밀어붙이는 강(剛)의 성격이 강 했지. 난 강(剛)을 제압하기에 알맞은 유(柔)가 바탕이 되는 연검(軟劍)을 쓰기 때문에 위력으로 밀어붙이는 놈들은 좋 아해도 저렇게 쾌검(快劍)을 자유롭게 쓰는 상대랑 만난다 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도망가고 말 거야." "누님은 참 특이하시네요. 보통 중원 무림인들은 도망간 다는 말은 잘 안 쓰는데, 임전무퇴로 싸움에 임해서 절대로 등을 보이지 말라고들 하던데요." "흠, 내가 특이한 게 아니야. 그게 우리 월녀궁(月女宮)의 방침이야. 대의명분보다는 생존이 최우선이야. 예전에는 명 분이란 것을 세우다가 궁이 거의 붕괴직전 까지 갔던 때도 있었어. 그 이후로 우리는 상대가 안 되면 무조건 도망가라 고 배워왔어." 그녀의 말에 난 고개를 끄떡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의명 분, 특히 정파 녀석들이 내세우길 좋아하는 대의명분이란 것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자존심인지 난 잘 알 것만 같았 다. 그런 것 하나에 초개같이 목숨을 버린다는 말도 얼핏 들은 듯도 했다. 그보다는 실리를 따진다는 냉월화 누님의 말이 매우 현실적으로 가슴에 와 닿았다. 구룡이 합세를 하자 뒤따르던 삼 십 여명의 복면인들은 한 동안 대치 상태를 이루다가 조금씩 조금씩 밀리더니 이 제는 대세가 거의 기울어져 보였다. 복면인들은 하나 둘씩 쓰러져 가는 반면, 구룡 측 아해들은 거의 멀쩡했기 때문이 었다. 남궁현이나, 곽철 대협, 모용천풍에 소방처럼 접근전 유 형의 아해들이 앞에서 복면인을 상대하고 뒤로 보내주지 않자, 뒤에서 암기나 비수로 지원을 하는 당가희와 제갈혜 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흑의미녀는 도망쳐 오느라고 지쳤는지 다른 이들이 싸우는 것을 털썩 주저앉은 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기어이는 거의 쓰러지게 되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마교 녀석이 품에서 동그랗고 길쭉한 죽통을 꺼내더니 한 손으 로 잡고는 다른 손으로 그 밑 둥을 강하게 치는 것이었다. 파앙! 그러자 죽통에서 화약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보라 색 연기를 뿜어대는 새까만 돌맹이 같은 것이 하늘로 솟구 치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달걀만하던 덩이가 연기를 뿜 으면 뿜을 수록 작아지더니 한참 올라가서는 사라져 버리 고 말았다. 뒤늦게 서야 죽통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던 모용천풍이 복면인의 가슴을 베어내며 일격에 죽이긴 했으나, 이미 피 어져 올라간 연기는 사그라들 줄 몰랐다. 그것을 본 냉월화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 다. "쯧쯧 귀찮게 되었군. 저들은 단지 선발대 일 뿐이었어. 그럼 본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소리인데, 이들만으로 상대가 될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1-24 21:38:18 고친날 2005-01-25 04:38:12 읽은수 9646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8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5] 전장은 구룡(九龍)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 났지만, 덕분 에 삼 십여 구의 검은 시신들이 가뜩이나 비좁은 산비탈을 어지럽게 매워 버렸고, 진한 피 내음이 바람을 타고 망아루 앞마당에까지 차 오르고 있었다. 엊그제의 혈전으로 혈향 (血香)이 가시지 않은 망아루(忘我樓)에는 다시금 예의 비 릿한 냄새가 판을 치게 되었다. 이런 일을 한 두 번 겪은 것이 아니었는지 누가 시키지 도 않았는데, 남궁현과 모용천풍, 소방이 나서서 시신들과 무기들을 산골짜기에 매정하게 던져 버렸고, 제갈혜와 당가 희는 핏자국이나 싸운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곽철 대협한 테 비무신청을 했다가 처참하게 깨진 전적이 있는 남궁현 이 그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운 것은 참으로 놀랍기 는 했으나, 그냥 잊기로 했다. 그에 관한한 약점으로 잡고 써먹을 만한 허물만을 기억하기로 했으니 말이다. "소방, 아까 그 녀석들 어디 애들인지 혹시 짐작이 가?" 그가 개방의 잠룡(潛龍)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제갈혜 가 단도직입적으로 소방에게 물어보는 것을 보니 개방의 정보력이란 것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 지. 허구헌날 시체 뒤지기 놀이를 주 업무로 삼고 있을 그 들이 모르면 과연 누가 알겠는가? "솔직히 직접 본 것은 아니고, 마교 진영 근처에서 놀던 애들한테 들은 건데, 아무래도 마교(魔敎) 추혼대(追魂隊)같 아. 무공실력이 그다지 높지는 않았지만, 경공실력은 곽철 대협이랑 맞먹을 정도로 빠르기도 하고 말이지." "그럼, 마교 추혼대 녀석들이 왜 곽철 대협을 쫓고 있었 을까? 더구나 그들은 미행의 고수이긴 하지만, 이렇게 드러 내놓고 덤벼드는 임무를 받는 일은 거의 없을 텐데......" "그거야 본인에게 물어보는 것이 빠르지 않겠어?" "그렇긴 하지만.......있다가 물어보는 것이 낫겠어." 제갈혜 말대로 오랫동안 쫓기면서 검을 휘둘렀을 곽철 대협은 내공이 고갈되어 있었는지 운기조식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그의 전신은 미세한 검상들로 인해 흑의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바닥에도 여러 차례 굴렀는지 흙먼지로 너저분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개방 소속인 소방(蘇芳)보다 곽철(郭鐵) 대협이 더 거지같 아 보였다. 곽철 대협이 눈을 뜨고 일어나자 약속이나 한 듯 흑의 미녀를 포함한 일행 모두가 망아루 안으로 올라왔고, 냉월 화를 비롯한 월녀궁(月女宮) 여인들도 속사정이 궁금했는지 구룡 일행이 일부러 골라 앉은 구석 탁자에서 멀지 않은 가운데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흑의 미녀만은 이런 자리가 어색했는지 아니면 쫓기느라 엉망이 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목욕할 따뜻한 물 을 올려달라고 하면서 객실에 올라가 쳐 박혔다. '젠장, 물 데우기가 쉬운 줄 알어? 더구나......에휴.' 물 데우는 일이 귀찮았다기보다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듣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섰던 것이었다. 투덜투덜 거리며 후 원 뒤 가마에 불을 붙이고 물을 올려놓은 후 물지게를 이 고 흑의 미녀가 거하는 방의 욕실로 올라갔다. 욕실 욕조에 주방에서 바로 떠온 미지근한 물들을 네 통 정도 단수연의 도움 아래 들이붓고는 다시 후원으로 내려와서 가마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 죽겠는데, 하필 이런 때 물 데우라고 시키다니! 예의가 없는 처자로군. 반반한 얼굴을 봐서 내가 참는다. 에휴.' 누가 내 속사정을 알았다면 점소이 맞느냐고 삿대질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곽철 대협의 대활극을 듣고 싶 었던 것이다. 적어도 여태까지 겪어봤던 무림인들 중 그에 대해서만큼은 받은 빚도 있고 겸사겸사 존경하는 바가 없 잖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조해하는 만큼 물도 늦게 끓어 서인지 물지게에 단수연이 물을 따라줬을 때에는 이미 얘 기가 한참 진행되어 끝나려고 하는지도 모르는 시점이었다. 여전히 투덜거리며 욕조에 뜨거운 물을 붓고는 되돌아서 나가려 할 때, 흑의 미녀가 나를 불렀다. "이봐요. 점소이, 궁금한 게 몇 가지 있는데, 여기 앉아서 대화 좀 나눠요." 뚱한 표정으로 소리나는 방향으로 돌아보자 눈에 반짝이 는 빛을 머금은 흑의 미녀가 침대 위에 다리를 걸치고서 고혹적인 자세로 앉아있는 게 보였다. 늘씬하게 드러난 새 하얀 다리를 쓰다듬으며 치마를 허벅지 위에까지 살짝 끌 어내렸는데, 그 섬뜻한 매력에 그만 나도 모르게 그녀를 덮 치고 싶다는 충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뭘 그렇게 쳐다만 봐요. 만져봐도 괜찮은 다리니까 어서 여기 앉으라니깐요." "정, 정말요?" "호호호, 속고만 사셨나 봐요. 그럼요. 얼마든지 만져도 좋아요. 만진다고 어디 닳아서 없어지는 것인가요? 어서 이 리 오세요." '만, 만져봐도 된다고? 이, 이게 왠 떡이야. 후후훗. 그럼 감사히......아, 아니지, 난생 처음 보는 일개 점소이가 뭐가 좋다고 유혹을 하겠어? 그래, 뭔가 냄새가 난다. 이번에는 절대 안 속아.' 평상시의 나였다면 미녀가 아니라 치마만 두르고 있었어 도, 당장 달려가서 헥헥헥 거리며 꼬리를 흔들었겠지만, 그 동안 미녀라는 무림인들에게 당하고 또 당하면서 나름대로 의 독보적인 학습 능력이 생겼기 때문에 즉시 경종이 울려 퍼지면서 함정이라고 강력한 경고해왔다. "죄송합니다. 손님,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내려가 봐야 겠습니다." "잠, 잠깐만 요. 잠시만 시간을 내달라니 깐요." 흑의 미녀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며 상의을 풀어 헤 쳐서 가슴 계곡선이 보이게 만들었다. 아슬아슬하게 가슴이 봉긋 봉긋 드러난 그 자태는 그야말로 황홀 그 자체였기에, 이번에는 경고고 나발이고 넋을 잃은 채 그녀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게 되었다. 왠지 여우를 연상하게 하는 미녀 의 안면에 그제 서야 그럼 그렇지 하는 듯한 조소가 떠올 랐으나,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는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 았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서자 어디선가 지독한 땀내가 코를 찔러와서 잃었던 정신을 퍼뜩 되찾고는 반사적으로 그녀로 부터 후다다닥 멀리 떨어져 버렸다. '야, 유혹을 할거면 목욕이나 하고서 하지. 이 지독한 땀 냄새 봐라. 에휴.' "아, 저, 저기 이젠 정말 안 되겠습니다. 정말 바쁜 일이 있어서요." 황당해 하고 있는 그녀를 뒤로하고 나가려는 찰나, 그녀 의 앙칼진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야, 거기 안 서?" "네, 안 설 건데요." "......" "......" "얼마면 돼?" 호오, 정말 물어볼 것이 있나보네, 그러니까 돈 아낄려고 몸으로 때우는 척하면서 알아보려고 했던 거구나. 에휴, 몸 에서 냄새만 안 났어도 넘어가 줬을 텐데, 좀 아쉽기는 하 군. 그런데, 나 같은 점소이가 뭘 안다고 그런 것일까? "은자 두 냥이면 되겠어?" "세 냥." "야! 이 날강도 같은 놈아! 은자 두 냥만 해도 무지 큰 거 아니야! 니가 뭐가 잘났다고 튕겨!" 돈에 대한 거라면 밀릴 수야 없는 일이었다. 무림인들에 게 은자 한 두 냥이 돈이겠는가? 보아하니 무척 다급한 일 인가 본데, 그럼 부르는 데로 오르기 마련인 것이다. "그렇소? 그럼 우린 아무 것도 나눌 얘기가 없는 것이지. 수고하시오." "아, 알았어. 세 냥 줄께." "네 냥." "왜 네 냥이야! 방금 세 냥이라면서 왜 네 냥으로 금새 올라가?" "그럼 다섯 냥으로 할까요?" "치이잇, 내 살다살다 너처럼 치사한 점소이는 처음 봤 다. 어떤 놈이건 다리 한 번 보여주면 바로 달려들면서 다 불었는데,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꼽지만, 은자 네 냥에 낙찰 이야. 더는 안 돼." 흑의 미녀는 화가 무지막지하게 났던지 은자 네 냥을 내 발 아래에다가 던져 버렸다. 난 이미 내가 이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여유 있게 은자들을 챙기며 입을 열었다. "후후훗, 그래 궁금한 것이 뭐지요?"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은 이 풍악산(風岳山) 일대 혈해진 경(血海眞經)에 대한 정세였다. 다른 무림인들에게 물어보 자니 의심을 살 것이 뻔하니까 무림인들 다음으로 혈해진 경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 같은 점소이인 나를 붙잡은 것 이었다. 단수연도 있었지만, 아무리 내공을 쓸 수 없다고 해도 내공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닌 이상 그녀에게서 느껴 지는 기운이 없잖아 있었을 것이고, 더불어서 그녀가 여자 라는 것을 눈치챘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결국 아무런 내공 도 느껴지지 않는 나를 유혹해서 샅샅이 케 물으려 했던 것인데, 땀내가 진동하는 상황에서 유혹하려 했으니 실패할 수밖에......만약 목욕을 하고서 단정히 차린 후 유혹했다면, 아마 난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서라도 다 불고 말았을 게 뻔한 일이었다. 그동안 망아루에서 일하면서 들어온 혈해진경(血海眞經) 에 관련된 일들을 내가 아는 한 까지 다 말해주었다. 흑의 미녀는 나름대로 만족했는지 다짜고짜 욕실로 들어가서 철 커덕 문을 잠그고는 내가 나가건 말건 바스락 바스락 옷 벗는 소리를 냈는데,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어 후 다닥 방을 나왔다. '휴우 저 여자는 불 여우같아. 위험해. 지금이야 지저분하 고 냄새가 나서 거리를 둘 수 있었지만, 조금만 다듬고 나 오면......'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1-24 23:50:40 고친날 2005-01-27 07:52:50 읽은수 10418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86)-점소이의 결단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6]점소이의 결단 나름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방을 막 나서서 내려가 려는 찰나 난 몸이고 생각이고 간에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뒷통수를 향해 내려꽂히는 낯익으면서도 따 가운 시선을 느낀 것이었다. 제발 속으로 그녀가 아니길 바 라며 천천히 뒤돌아보았으나, 역시 빼꼼히 열린 문 사이로 나를 바라보며 까딱까딱 손가락질하는 주령령(周鈴鈴), 그 녀와 시선을 마주 칠 수 있었다. '제, 젠장 또 뭘 꼬투리 잡으려고 날 부르는 거야? 더구 나 아침도 아니고, 저녁이 다 되어 가는 이 시점에.....' 우거지상으로 흑의 미녀 방에 들어갔다가 은자 네 냥을 품속에 넣고 흐뭇한 미소로 나왔지만, 이제는 울상으로 령 령의 방으로 기어 들어가게 되었다. 일단 최대한 불쌍하게 보여서 한 대라도 덜 맞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툭 치면 눈 물이 그렁그렁 쏟아질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이 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령령은 귀신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내 손 목을 붙들고 끌어가더니 날 의자 위에 강제로 앉히는 것이 었다. '흠, 그건 말이 안 돼. 어떤 귀신이 령령을 쫓아오겠어? 오히려 쫓겨서 도망갔다면 또 모를까?' 그 자리는 주령령이 낮에 가끔 깨어 있었을 때 그녀답지 않게 난초를 그리거나, 붓글씨를 쓰던 책상이었다. 마침 책 상 위에는 종이와 벼루 위에는 먹을 간 지 얼마 안 지난 듯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먹물이 보이고 있었다. '설, 설마, 문방사우로 날 고문하려는 것일까?'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긴 하지만, 령령 앞에서는 말이 안 되는 모든 것이 가능해 보였으니 정말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 내 말 잘 들어." "네, 네, 그, 그럼요. 잘 들을 테니 문방사우로 고문만 하 지 마세요. 제발요." 얼결에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어 버리고는 제풀에 화들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 "아, 아니 그게 아니 구요. 그냥 안 아프게 살살......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그만해둬. 내 이름으로 맹세했잖아. 하루 한 번 수련을 했으면, 그 날만큼은 널 귀찮게 안 하겠다고 했잖아. 내 말 못 믿겠어!" 내가 유달리 벌벌 떨자 무척 화가 난 듯한 그녀의 목소 리가 격앙어리게 들렸다. 꼭 저러다가 진짜로 팬다니깐. "아, 아니요. 물, 물론 믿지요. 그럼요. 그렇고 말구요." "관두자. 그냥 일이 있어서 부른 거니까 그만 떨고, 내가 부르는 데로 적기나 해." "네, 네. 준, 준비되었습니다요." 내 글자 쓰는 실력은 솔직히 눈 달린 사람이면 겨우 해 독이 가능할 정도였다. 내 취미는 그림이었지. 서책이나 들 여다보면서 공부를 하거나, 글씨를 쓰는 것은 결단코 아니 었으니까 말이다. "남궁현 공자 보시오. 수라삼살 뒤를 추격하는 무림맹의 후발대에 합류해서 지하석실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리석 은 짓이오. 지하석실에는 곳곳에 함정이 있으며 적어도 그 중에 하나는 절대로 피할 수가 없는 죽음의 함정이 펼쳐져 있소. 경고하오. 가면 반드시 죽게 될 거요. 무슨 일이 있더 라도 지하석실로 내려가지 마시오......다 적었어?" 그녀가 띄엄띄엄 쉬면서 천천히 불러줬기에 난 어렵지 않게 다 적을 수 있었다. 내 글씨가 엉망이라서 해독이 잘 안 된다면 그것은 그들 탓이지 더 이상 내 선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주령령은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종이를 들어서 읽어보 고는 나름대로 만족했는지 곱게 접어서 봉투에 넣고는 잘 밀봉해서 다시 나한테 건네 주었다. "이것을 남궁현 공자에게 몰래 전해 줘. 후원에서 정체 모를 복면인이 전해주라고 했다고 해." 그녀가 건네준 봉투를 받자 숨이 턱 막혀오면서 가슴이 답답하다는 것을 느꼈다. 화가 나면서 목이 매이는 묘한 기 분에 할 말을 읽고 말았다. 설마 했지만, 있을 리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질투가 불같이 맹렬하게 일어났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군요." "무엇을 말하는 것이지?"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전해주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어 려운 길을 택하는 거지요? 무슨 술래잡기를 하는 것도 아......" 짜악! 그녀에게 뺨을 얻어맞고는 어지러움과 함께 눈앞에 별이 일렁이는 것을 보며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가 옆에 있던 침 대 기둥을 붙잡고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왜 이런 오기가 치미는지 모르지만, 지금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 던 것이었다. "니가 뭔데,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말대꾸하지마. 시키면 시킨 대로 해. 의문 따위 갖지 말란 말이야. 나도, 나도 힘들어.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 밖에 할 수가 없어." "......" "그 서신, 잘 품고 있다가 일단 뒷동산 가매장 봉분 근처 한 바퀴 돌고 와서 남궁현 공자에게 전해 줘. 몰래 전해줘 도 좋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다른 이들이 있건 없건 전해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령령 아가씨 분부대로 합지요." 안 그래도 큰 눈을 부라리며 무섭게 말하는 그녀를 보자 질투와 함께 화도 났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 푸리며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주령령이 내 뒷덜미를 잡아채서는 침대 위로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그 자세 그대로 내 배 위에 올라타서는 두 손으로 내 목을 가 볍게 움켜쥐며 입을 열었다. "너 절대로, 절대로 내 얘기 입 밖에 내지 마라. 한 마디 라도 나에 대해서 지껄이면, 널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말 겠다. 알겠어?" "......" "알겠느냔 말이다!" "커, 커컥......" 내가 미쳐 대답을 하지 못하자 내 면전에 말을 내뱉은 그녀가 내 목을 옥죄어왔다. 일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그 때는 아마 도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의 목덜미에 검결지를 내려 꽂았 던 것 같았다. 이번에는 비교적 내 의식이 또렷했기 때문에 그러 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의 그렁그렁 커다란 눈을 매섭 게 노려보기만 했다.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 리고, 말했다. "바보 같군요." "......" "다시는 정신 이상 같은 것 일으키지 않겠다고 하더니, 지키지도 못할 맹세 왜 하신 거지요?" "......" 내 말이 비수가 된 듯 내 목에서 손을 뗀 그녀가 아랫 입술을 깨물며 몸을 일으키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리고는 땅이 꺼질 듯한 깊은 한 숨을 내쉬며 그만 나가라 는 듯 손을 내저었기에 주저 없이 방을 나섰다. '휘유, 그냥 한 번 무게 잡아 봤는데, 먹히는 구나. 흠 그 래도 다음에 또 써먹기는 위험해. 아주 가끔씩 잊을 법한 때나 정말 위험한 때 종종 써먹어야지." 복도를 지나서 계단을 돌아 내려온 나는 그대로 뒷문을 빠져 나와 후원을 통과해서 여전히 음산하면서 침침한 분 위기를 내뿜는 가매장 봉분 주위를 그냥 쓱 의미 없이 돌 았다. '쳇, 고집쟁이 같으니 자기 옛날 애인 만나는 게 뭐가 힘 들어서 이렇게 나까지 번거롭게 하는 거야. 더더구나 왜 내 가 니네들 연애놀음 사이에서 놀아줘야 하느냐고......!' 문득 그들 사이에 나란 존재가 정말 의미 없이 끼워져 있다는 사실에 화가 몸서리치게 나서 아무 잘못도 없는 본 분의 가장자리를 거세게 걷어차 버렸다. 그 바람에 흙덩이 가 사방으로 튀었는데, 드러난 공간 사이로 차갑게 굳어버 린 손이 쓰윽 나타나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뻔했다. 주위 를 한 번 쓱 둘러본 나는 다른 흙덩이들을 살살 차서 드러 난 공간을 메우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휘파람을 불 며 지나쳐 왔다. '손이 작고 부드러운 것으로 봐서 여인 것이었는데, 흠. 아무리 미녀래도 시체는......싫어.' 왠지 말끝을 흐리는 나, 조금 문제가 있다 싶기도 했지 만, 머리를 휘휘 내저어서 잡념을 떨쳐버리고, 망아루 내부 로 다시 돌아왔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1-25 21:28:32 고친날 2005-01-25 21:28:32 읽은수 9792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8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7] 실내로 들어가자 곽철 대협은 오래 전에 올라간 뒤였고, 제갈혜와 소방도 자기 방으로 들 들어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남궁현과 모용천풍은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죽엽청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로 날을 새울 듯한 기세였 고, 당가희야 남궁현이 이 곳에 앉아 있어서 그런지 말괄량 이 사갈 같은 기세는 온데 간데 없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 다. 그런데, 가운데 탁자에서는 냉월화가 초점없는 눈으로 천 장을 향한 채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으로 금(琴)을 타듯이 탁자를 따그닥 따그닥 두드리며 있어서 주변에 앉아있는 세 명의 월녀궁 여인들을 좌불안석(座不安蓆)상태로 몰아가 고 있었다. 월녀궁 아이들 중 사월(死月)보다 좀 어려 보이 지만, 꽤 침착해 보이는 여아가 나를 보더니 반갑다는 듯이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며 냉월화 누님을 눈짓하는 것이 도움 을 청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흠, 언제 나랑 통성명을 했다고 찡긋거리기는.....귀엽긴 하다만, 발육 상태도 미진해 보이는 게 영 안 끌리는 걸.' 처음에는 그냥 무시를 하고 스윽 지나가려 했으나, 얼떨 결에 곁눈질을 했다가 길거리에 버려진 우수 어린 강아지 처럼 불쌍한 눈빛과 마주쳐버리고는 마음이 급속도로 약해 져 버리고 말았다. 마치 소방이 밥 달라고 살인 미소를 쏘 아보낼 때의 느낌이랄까? "험, 험, 냉 누님, 저녁은 드셨는지요?" "어, 어? 작삼 동생이구나.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 그의 재미있는 입담도 듣지 않고 말이야."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가 막 꿈에서 깨어난 듯 배시시 웃음 짓는 그녀의 미소가 마치 어머니의 그것처럼 다가와서 훈훈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러나, 난 곧 바로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훗,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군. 모친의 얼굴조차 기 억 못하는 주제에......' "점소이 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요. 뭐. 윗 층에 목욕물을 나르고, 후원 정리 좀 하느라구요. 올라가 계세요. 몇 가지 안 되는 요리지만, 그래도 든든히 먹어둬야지요."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어? 쯧쯧 꼭 생각에 빠지 면 이렇다니깐, 알았어. 있다가 일 끝나면 내 방에 들러보 도록 해." "예, 누님, 꼭 들러 보도록 할께요." 빙긋 웃으며 사뿐사뿐 올라가는 그녀의 뒤로 월녀궁 여 인들이 뒤쫓으며 사라져 갔고, 침착한 눈빛을 지닌 귀여운 여아는 고맙다는 듯이 내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역시 뒤따라 올라가 버렸다. 그 애를 보니 소방 생각이 더 간절 하게 든다. 도대체 언제까지 삐져 있을 것인지 알 수가 없 는 일이었다. '일단 남궁현 쪽 일부터 해결해 놓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막상 남궁현에게 말을 걸려고 다가가자 그와 나 사이에 껄끄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불현듯 떠올라 버 렸다. 아무리 령령의 명령이라 해도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 다. 한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봤다가......허걱! 뒷문 쪽에서 검은 물결 같은 머리를 그대로 늘어뜨리고 서 얼굴의 반만 살짝 내밀고 있는 그녀가 새파란 안광을 번득이며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내가 편지를 전 해주는지 안 전해주는지 감시라도 하고 있는 듯한 그녀 모 습에 바짝 얼어버린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림 없이 남궁현에 게로 쭈삣 쭈삣 다가섰다. "저, 저기 남궁현 공자님, 저, 저기 할 말이 있는데요." "어라? 이것 봐라? 하하하하핫! 니가 왠 일로 나한테 경 어를 다 쓰면서 다가오는 거냐? 음 뭔가 찔리는 거라도 있 나보지?" 죽엽청 한 잔을 깨끗이 비운 그는 잔을 탁 소리나게 탁 자 위에 내려놓으며 역겹게 웃어 제꼈다. 당가희 골빈 사갈 년이야 그 장소에 넘어 갔는지 초롱초롱 빛나는 시선으로 그를 사랑스럽다는 듯이.....우웩!......역겨운 것들, 여기가 니 네들 안방이냐? 사랑 놀음은 좀 객실로 올라가서 들 하시 지. 안 보이는 데서야 다 벗고 애무을 하건 동침을 하건 내 알 바 아니다만, 최소한 다른 인간들이 바라보는 데서는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해다오. 보는 사람 눈 버린단 말이야!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남궁현 공자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런데, 후원으로 잠시 나오시면 안 되겠는지요?" "엉, 안 돼." "......" "하하하하하핫!" 그는 소태라도 씹은 듯 우거지상으로 일그러진 내 안면 의 변화을 안주라도 삼듯 죽엽청 한 잔을 자신의 잔에 부 으며 매우 기쁘다는 듯이 자작하고 있었다. 진정으로 이 인 간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열이 화악 오르면서 죽엽청 술병으로 그의 대가리 를 깨버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으나, 여전히 뒷통수 에 와 닿는 따가운 시선으로 인해 금새 진정할 수 있었다. '참자, 참아야 하느니! 참을 인(忍) 세 글자면 살인도 면 한다고 했다. 그런고로 남궁현, 넌 오늘 죽지 않고 산 것을 천지신명께 감사해야 한다. 이 놈아!' "급한 서신이 있습니다. 안 보시면 후회하실 지도 모릅니 다. 정말입니다." "그으래? 뭐 이렇게 징그럽게 애걸복걸하는데, 안 가줄 수야 없지. 좋다. 가보자." "감사합니다. 공자님." 기쁜 마음이 들어 속에도 없는 인사치레를 한 후, 그를 대동하고서 뒷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녁 시간인지라 석양에 물들어 빨갛게 변해버린 후원은 정말 을씨년스럽기는 했지만, 아직 빛이 남아 있기에 서신 을 읽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었다. "그래, 어디 급한 서신이라는 것을 보자. 이리 내놔." "네, 잠, 잠시만 요." 난 이제 겨우 령령의 감시로부터 해방이라고 생각을 하 며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서 서신을 꺼내려고 했다. '어, 얼라리요? 아, 아무 것도 없잖아?' 이 어이없는 황당한 상황에 당황해버린 나는 미친 듯이 내 온 몸을 뒤졌고, 그 몰골을 뜨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남궁현 역시 황당했는지 입을 반 즘 벌리고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더 뒷통수로 따가운 시 선이 느껴져서 휙 돌아보니 역시 얼굴을 반 즘 내밀고 있 는 령령이 바닥을 다시 한 번 내려다보고는 귀신처럼 스르 륵 사라져 버렸다. 뭐, 귀신보다 더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 다. '바, 바닥?' 그녀가 내려다 봤던 곳으로 눈을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내가 어디선가 떨어뜨렸을 서신이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서신을 줍기 위해 달려가고 있는데, 갑자기 차가운 산바람이 휘몰아쳐 올라 서신을 하늘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이, 이놈의 편지가 미쳤나? 자꾸 왜 이래?' 서신을 잡기 위해 마구 우거지상을 지으며 전력으로 뛰 었으나, 그만 평상시에는 보이지도 않던 돌 뿌리에 채여서 철푸덕 엎어져 버리고 말았다. '젠장, 오늘 왜 이렇게 꼬이는 일이 많아? 아차 서신!' 뒤늦게 서신의 행방이 떠올라 일어나 보니 다행스럽게도 남궁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래도 경공에 조금은 잔재 주가 있었는지 내가 넘어진 순간 휘날려가던 서신을 잽싸 게 움켜쥔 모양이었다. 서신을 펼쳐서 순식간에 죽 읽어 내 려가던 그는 의심쩍다는 눈빛으로 날 한 번 흘겨보고는 다 시 한 번 더 서신을 읽어 내리고는 그것을 곱게 접어서 자 신의 품속에 쏙 집어넣었다. "이 서신을 전해준 자의 인상착의를 혹시 아느냐?" "그, 그는 그저 복면을 쓰고 있어서 알 수 없었소. 더는 모르니 묻지 마시오." "허허, 서신을 전해줬다고 극존칭를 쓰던 놈이 이제는 평 존칭으로 어조가 바뀌었다? 협박을 받은 것이었군. 누구냐? 편지를 전해준 녀석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이냐?" 어랍쇼? 이 녀석, 왜 이렇게 날카롭게 굴지? 평상시에는 자존심만 쎈 어리버리더니만, 갑자기 머리가 좋아진 척 구 는데, 흠. 니가 아무리 케 물어봐도 난 대답해 줄 수 없다. 당가희랑 제갈혜만으로도 온갖 닭살 희극을 펼치는 놈한테, 그녀마저 합류하게 되면, 크으으으으으 내가 미쳐버리고 말 지. 더구나 내 입으로 그녀 얘기를 불었다가는 주령령이 또 날 얼마나 갈굴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로세. "후원에서 잠시 마주쳤을 뿐이오. 오늘 내로 전해주지 않 으면 내 목을 따버릴 거라는 협박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이미 전해줬으니 이젠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오." "뭐, 그렇긴 하지. 그럼 하나만 묻자. 이 서신을 전해준 사람은 남자였나? 여자였나?" 그야 간단히 그녀의 반대로 말하면 되겠지. "남자였소. 그럼 이제 볼 일 다 끝났으면 가보겠소." "잠깐." 그의 곁을 지나가려고 하던 나를 팔로 가로막은 그는 천 천히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눈을 깜 빡거렸다. "뭐요? 용무는 다 끝난 것으로 아오만." "복면을 썼다고 하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떻게 알았 지?" 그의 반문에 내 한 쪽 눈이 움찔거렸다. 미쳐 생각 못한 빈 틈이었다고나 할까? 그래도 한 번 밀어 붙이기로 했으 면, 우격다짐으로 우겨서라도 빈틈을 허용할 수는 없었다. "목소리가 남자였소." "변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더구나 여자였다면 타고난 내 변 태적 육감이 그토록 거부반응을 일으키진 않았을 거요. 그 는 틀림없는 남자였소." "휴우, 그런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만약 그를 다시 만 나면 전해주도록 하게. 난 사정이 있어서 물러설 수 없다고 말이야. 난 꼭 혈해진경(血海眞經)을 찾아야 해." "마음대로 하시오. 내 알 바 아니니 말이오." "......" 그는 무슨 깊은 회한이 있는지 한 숨을 내쉬며 그 자리 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한심스러운 일이다. 두 여자를 거머쥐고도 뭐가 부족해서 한숨이란 말인가? 보아하니 령 령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눈치 챈 것 같았다. 여자냐, 남 자냐를 특히나 따지는 것을 보니 적어도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짜증난다. 사이에 껴버린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짜증이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좋으면 좋다고 만나서 헤벌쭉 하 면 될 것 가지고 이렇게까지 공적인 점소이를 사적인 일에 남용을 하다니! 그까짓 정신질환 정도 앓고 있으면 어때? 사랑이란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 정도도 이해를 못 한다면 남궁현, 넌 여전히 쪼잔한 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1-25 23:52:59 고친날 2005-01-26 07:58:41 읽은수 9893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88)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8] 저녁 시간이 되자 약속이나 한 듯이 객실에 있던 손님들 이 거의 내려왔다. 소방을 비롯한 구룡 일행과 냉월화를 비 롯한 월녀궁 인물들도 거의 내려왔는데, 특히나 제일 시선 을 끌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흑의 미녀였다. 올려준 물로 목욕을 마치고 단장도 하고 어디서 옷도 새로 구했는지 한 결 깔끔해진 모습이었다. 역시 짐작했던 데로 그녀가 말끔 하게 단장을 하고서 요요롭게 와 닿는 섬뜻한 마력과도 같 은 미소를 짓자 뭇 남성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향냄새가 독특하네. 종류를 알 수 없지만, 기이하게도 그 녀에게 끌리는 것 같단 말씀이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하게 서신을 바라보던 남궁현도, 옆에 당가희가 있건 제갈헤가 있건 신경도 안 쓰던 모용천 풍 조차도, 더구나 여자한테는 별로 관심이 없을 것 같던 곽철 대협 조차도 그녀를 보자 눈길을 떼지 못했다. 나? 나 야 뭐, 그냥 구석에서 조용히...... "작삼 공자님 입에서 침 흘러요. 내가 물수건으로 닦아 줄까요?" 역시 초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단수연이었다. 단지 소방만은 남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흑의 미녀를 힐 끔 봤다가 눈을 떼 버렸는데, 그녀에게 정신이 팔려있는 나 와 얼결에 눈이 마주치자 흥 소리를 내며 고개를 팽 돌리 는 것이었다. '거 상당히 오랫동안 삐져 있네. 이제 왠만하면 화 좀 풀 지.' 그냥 한 숨을 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 다. 대신 바로 곁에 앉아있는 냉월화 누님에게로 시선을 돌 렸다. "냉 누님, 그냥 위에서 식사를 하시지. 다시 밑으로 내려 오셨네요." "응, 아까 전에 곽철 대협이라는 사람이 알려준 대활극 때문에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지." "네? 뭐라고 했는데요." "풍악산으로 올라오다가 복면인들에게 쫓기는 여인이 있 어서 도와준거래. 그 한 마디로 끝이야." "......" 지극히 그답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한 마디를 듣기 위해서 모였을 중인들의 허탈함은 안 봐도 뻔할 것 같았다. 그럼 다시 이렇게 모여든 것도 이해가 되었다. 곽철 대협이 모르는 속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을 사람은 다름 아닌 흑의 미녀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저녁 시간을 핑계삼아 어떻게 된 사정인지 듣기 위해 내려온 것이었다. 흑의 미녀는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린 것을 느끼 자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 도화 빛 홍조를 지으며 살포시 웃더니 허리를 짧게 숙였다가 펴며 고맙다고 감사인사를 해왔다. "위기에 처할 뻔한 소녀를 도와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 립니다. 특히 곽철 대협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과찬이오. 신경 쓰실 필요는 없소. 그런데, 소저, 우린 소저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소이다. 어떻게 된 일인 지 해명을 좀 해주실 수 있겠소?" 역시 빚을 지우기 싫어하는 곽철 대협다운 반문이었다. "물론이지요. 소녀는 마교에서 도망쳐 온 적미호(赤美狐) 라고 합니다." 피로 물든 아름다운 여우라,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 었다. 섬뜻할 정도로 유혹적인 미모를 발산하는 그녀를 보 노라면 왠지 아름다운 여우가 떠올랐다. 눈을 떼지 못할 정 도로 아름답기는 하지만, 상당히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의도한 것이건 또는 의도 를 당한 것이건 간에 말이다. "마화(魔花) 적미호?" 마화라는 말에 중인들의 술렁거림이 격해졌다. 마화라는 존재가 그렇게 비중이 큰 존재였던가? 잠자코 있던 제갈혜 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적미호에게 물어 보았다. "당신은 마교 교주의 수양딸로서 그의 오른팔 격인 부교 주에게 시집을 가게 되어 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 거지요?" "예정대로라면 오늘이 그와의 혼삿날이었을 거예요. 하지 만, 전 그 구닥다리 아저씨하고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눈꼽 만큼도 없다구요. 말이 수양딸이지 전 그저 교주의 심심풀 이 애완용으로 키워졌을 뿐이예요. 더 이상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기에 탈출했지요." "......" ... 마화(魔花)라고 불리는 것은 그녀가 마교 교주의 수양딸 로 애지중지 키워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명 실상부 사파(邪派)의 거목 중 하나인 마교(魔敎) 교주의 위 치야 마황맹(魔皇盟)의 마황맹주 다음으로 높은 자리나 다 를 바 없었다. 그런 그가 소싯적에 심심풀이로 인간 매매 시장을 구경 하다가 인형처럼 생긴 아이를 보고 바로 노예 상인에게서 사들여 키운 것이 바로 오늘의 그녀라고 한다. 그녀의 말을 빌자면 나이를 먹어서 성기능을 상실한 교주는 어렸을 때 부터 자신에게 이옷 저옷을 주며 갈아입는 것을 구경하면 서 인형처럼 대하는 변태적인 취미가 있다고 한다. 가끔 그 자신을 들러리용으로 치장을 시키고 이곳 저곳에 대동을 하곤 했는데, 그 때도 옷을 가마에 대량으로 실어 따르게 하면서 심심하면 으슥한 데로 데리고 가서 옷 갈아입는 것 을 구경하곤 했다는 것이었다. 때때로 그 자신이 그녀를 직 접 치장해보기도 했는데, 그의 쭈글쭈글한 손이 그녀의 살 결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끼쳤지만, 익숙해지니까 그럭저럭 견딜만해졌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십 여 년간 그의 변태적인 취미에 그럭저럭 길들 여져 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싫증이 났는지 부교주에게 시집을 가라며 그녀를 부교주가 사는 곳으로 보내버렸다는 것이었다. 마교 부교주라는 자는 매우 색욕이 강한 사십대 초반 중년인으로 정식 아내를 제외한 첩만도 무려 수 십 여명씩이나 거느리고 있는 변태 성욕자라는 것 이었다. 때마침 부교주가 있는 곳으로 가마를 타고 가던 도중 소 피가 마리다며 내린 그녀는 그 길로 말을 한 마리 사서 그 들로부터 벗어났다고 한다. 이에 화가 치민 부교주는 부하 들을 보내어 그녀를 잡아오게끔 시켰고 쫓고 쫓기는 추격 전 끝에 풍악산 근처까지 와서는 말이 지쳐서 버려야 했고, 미천한 경공으로 잡힐 듯 말듯 쫓기다가 곽철 대협을 보고 서 구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곽철 대협은 여인이 복면인들 에게 쫓기는 것을 보자 바로 검을 출수하여 일단의 무리들 을 처치했으나, 워낙에 그 숫자가 많아 도망치면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싸우면서 도망을 다닌 이유는 바로 다른 무림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고 하는 데, 어떻게 된 것이 망월루에 오르기 전까지 무림인들 흔적 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망아루 까지 쫓겨 와서 구룡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 무림인들이 그 사이에 안 보였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수라삼살(修羅三殺)의 협박에 겁을 먹은 무림인들은 아예 사라져 버렸거나, 더 깊숙히 숨어서 기회 를 노리고 있을 테고, 겁도 없이 덤벼든 무림인들은 죽어서 뒷동산 벌판에 가맹장 되어 버렸으며, 무림맹 아해들은 소 맹주를 따라서 싸그리 서안(西安)시내로 내려가 있으니 조 용할 도리 밖에 없는 것이었다. 제갈혜는 적미호의 대답에 그럭저럭 이해를 했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일어섰는데, 뭔가 할 말이 있는지 그녀를 향해서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런데, 적미호 소저,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요." "네? 무엇이 더 궁금하......꺄아악!" 적미호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질문이 있는 척 일어서며 교묘하게 펼쳐진 제갈혜의 금나수(擒拏手)에 완맥을 붙잡혀 무기력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무, 무슨 짓이오! 제갈혜 소저?" 남궁현이 제갈혜의 느닷없는 기습에 놀라 제지하려고 했 으나, 소방의 봉이 그의 앞을 가로막아 버려서 더 전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화가 난 그는 소방을 향해 고함을 내 질렀다. "비, 비켜 이 거지 놈아!" "남궁현 공자님, 그를 함부로 욕하지 마세요. 개방에서 애지중지 하는 잠룡(潛龍)과 싸워봤자 이로울 것이 없답니 다." "제, 제갈혜!" 여태까지 소방의 비밀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던 제갈혜가 갑자기 그의 정체를 밝히자 남궁현 뿐만이 아니라 같이 있 던 당가희와 모용천풍마저 눈이 휘둥그래지며 몰랐다는 듯 이 의아스러워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당황스러웠을 소방 은 그녀가 느닷없이 자기 정체를 밝히자 놀란 듯이 반문을 했으나, 제갈혜는 그의 반문을 한 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왜? 어차피 우린 한 배를 탔어.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지. 남궁현 공자님, 그만 자리에 앉으세요." "아, 알겠소." 너무나 이런저런 일이 겹쳐져 정신이 없었던지 그녀가 시키는 데로 순순히 주저앉아 버리는 그를 보니 한심스런 노릇이었다. 소방 일로 놀래서 자신이 왜 일어났었는지 본 래의 목적을 망각해버렸으니 말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1-26 22:04:27 고친날 2005-01-27 07:48:43 읽은수 9537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89)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9] 제갈혜와 소방의 그런 행동은 정말 실내에 있던 그 누구 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들 이 하는 일이 아마도 모두에게 해가 되는 일은 아닐 거라 는 사실이었다. "적미호 소저, 님께서 지금 뿌리고 내려오신 이 향의 의 도에 대해서 여쭙고 싶군요. 우리는 소저가 생각하는 것처 럼 앉아서 끌려갈 정도로 녹녹치는 않거든요." "그, 그것은......" 제갈혜의 날카로운 지적에 적미호는 찔리는 게 있는지 말끝을 흐리며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언급하기 싫으시다면 제가 말해보지요. 소저께서 쓰신 향은 향이라기 보다 고(蠱)에서 추출한 독의 일종으로 향수 처럼 쓰면, 바른 사람과는 다른 이성(異性)의 사람들을 강 하게 유혹하는 힘이 있지요. 틀린가요?" "그, 그게 아니라......" "처음에는 주변 사람조차 느끼지 못 할 정도로 그 정도 가 미약하지만, 그 향을 맡으면 맡을 수록 마약처럼 작용해 서 언젠가는 만성이 되어버린 이성을 노예처럼 수족으로 부릴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고독향(蠱毒香)이라는 기 묘한 이름으로 불린다지요?" "......" 그녀의 지적에 남궁현은 불현듯 놀랍고도 화가 났는지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허리에 찬 검 손잡이 에 손이 간 것이 여차하면 적미호를 베어버릴 기세였다. 반 면 적미호는 사시나무 떨 듯 바르르 떨더니 섬섬옥수로 얼 굴을 가리면서 털썩 주저앉더니 어린 아이처럼 서글프게 우는데, 좌중들 중에서 여인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고, 남자들은 왠지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껴야만 했을 것이다. 어떻게 알았느냐구? 나도 남자거든...... 제갈혜는 더 이상은 할 말이 없는지 자기 자리로 되돌아 갔고, 남궁현을 한 번 슬며시 바라보며 눈웃음짓는 것이 놀 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할 말 있으면 하라고 하는 듯도 싶었 다. 벌떡 일어나 있는 남궁현의 흥분한 안면에는 분노로 가 득 차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기어이는 울고만 있는 적 미호를 삿대질하며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이 요망한 년! 목숨을 걸고 구해줬더니 보따리까지 내놓 으라는 식이구나. 변명할 테면 제대로 변명해봐라. 만약 시 답지 않은 변명이면, 당장 네 목을 베어 이 주루 현관에 효 수를 해서 까마귀밥으로 만들고 말 것이야!" 뭐라고? 하필 효수를 해도 내가 일하고 있는 망아루에 효수를 한단 말이냐! 남의 집장사 말아먹을 일 있어? 그것 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 "남궁현 공자님, 망아루 현관에 효수를 하실려면 사용료 를 내셔야 합니다." "뭐? 좋아. 내가 내지. 얼마 내면 되겠는가?" 어쭈 세게 나오네? 돈이 그렇게 썩어 날 정도로 많은 거 냐? 좋다 이거야. "한 달에 금원보 세 개 되겠습니다. 일주일 사용료는 금 원보 하나 입니다." "뭐야? 왜 그렇게 많아!" "많긴요. 여자의 목이 효수되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들어오겠습니까? 당연히 장사가 안 되는 만큼 보상(補償)을 미리 받는 것이지요." "......" 내 말이 논리정연하게 와 닿았는지 차마 반박을 못하고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이다가 적미호를 향해 획 돌아보며 외쳤다. "왠만하면 효수만큼은 봐 줄 테니 변명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해봐라!" 끝까지 구차하게 노는구나. 그냥 돈이 없다고 하면 될 것 을 가지고, 구태여 배배 돌려서 말을 하다니......배배 돌려 말하기는 제갈혜가 으뜸이니 이 둘은 하늘이 오래 전에 맺 어준 천생배필(天生配匹)이 틀림없을 것이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던 적미호는 엉거주춤 일어 나서 좌중을 한 번 처연하게 둘러보더니 새파랗게 질린 입 술을 바르르르 떨면서 눈을 반 즘 내리며 변명을 하기 시 작했다. "내려오기 전에 생각을 해보니 제가 마교 교주의 수양딸 이라는 이유로 여러분이 적잖이 동요를 일어나거나, 심한 경우 마교와의 충돌을 우려한 끝에 저를 추격해오는 마교 도들에게 넘길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저에 대한 호감도를 높일 목적으로 약하게 뿌리고 나온 것 이랍니다. 정말 그 이상은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흐흐흐 흑." 그녀가 불쌍하게 흐느끼자 그 분위기에 압도당한 좌중들 의 흐름이 왠지 동정론 쪽으로 흐르는 듯 싶었다. 나 역시 도 적미호의 슬픔에 동화되어 울적함을 느껴야만 했다. 반 면 고독향(蠱毒香)이라는 말에 속이 거북해졌는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곽철 대협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데려온 화근이니 내가 책임지도록 하겠소. 만약 적 미호 소저로 인해 마교의 추격이 심해진다면, 여러분과 갈 라서서 다른 길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감, 감사합니다. 대협.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적미호 소저는 곽철 대협의 발치에 엎드려서 이마를 바 닥 가까이 굽히고 또 굽히면서 진정으로 감사하는 듯 했다. 이에 겸연쩍어진 곽철 대협이 손을 휘저으니 그 반발력에 소저의 엎드려졌던 몸은 바르게 세워졌다. 그렁그렁한 눈 사이로 기쁨의 빛이 흐르자 그 처연한 아름다움은 거의 뇌 살적으로 극에 다다르게 되었다. 단지 그 상대가 곽철 대협이라는 것이 안 좋았다. 한 번 흐트러졌던 마음을 바로 잡은 듯한 곽철 대협의 부동심(不 動心)은 오히려 그런 그녀를 은근히 경계하듯 말했다. "좋아할 것 없소. 만약 당신이 우리 일행이나 나에게 다 른 마음을 품고 해를 끼치려 한다는 것을 나중에라도 알게 된다면 소저의 목은 내 손으로 배게 될 것이요." "......" 그의 말에 조금 놀라 입이 바짝 마른 듯한 적미호는 침 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습니다. 제 목숨 대협의 손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곽철 대협은 그렇게 다짐하는 적미호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한 순간이라도 속임수에 넘어가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에 적잖이 화가 난 듯 싶었지만, 그럼에도 잘 참고 있는 편이었다. 마음이 좁쌀처럼 편협하기 그지없는 누구와는 달리 말이다. "야, 너 왜 자꾸 기분 나쁘게 내 면상을 뚫어지게 쳐다 봐. 그만 봐. 닳는다." "남궁현 공자를 본 것이 아니오. 소방을 보고 있었으니 오해하지 마시오." "......" 크크크크 소방(蘇芳)이 잠룡(潛龍)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함부로 대들지도 못하겠지. 친구 잘 사귀고 누님 잘 두니 세상이 이렇게 편해질 수가 있나? 후후훗 소방이 자기를 언급하자 잠시 날 돌아보긴 했지만, 역시 나와 눈이 마주치자 팽 소리가 들릴 정도로 빠르게 시선을 피해버렸다. 내가 적미호 소저를 보면서 침 좀 흘렸다고 저 렇게 화가 난 것일까? 곽철 대협처럼 평정심을 잃지 않는 사람도 순간적으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는데, 하물며 나 처럼 치마 두른 사람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인간이 어떻게 고독향을 뿌렸다고 하는 적미호를 외면할 수 있겠냐? 더군 다나 같은 남자끼리 두루 두루 이해하면서 살면 어디 덧나 기라도 하냐? 내가 한 숨을 푹 내쉬자 이유는 모르지만 힘내라는 듯 내 어깨를 톡톡 쳐주며 일어선 냉월화 누님이 막 저녁 먹 을 준비를 하고 있는 구룡 일행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구룡과 그 일행 여러분, 본의 아니게 새벽에 길을 떠나 실 거라는 얘기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습니다. 그 길에 저희 도 동참시켜 주실 수는 없는지요? 저희 실력이 부족하고, 제가 기억하는 것도 미약하지만, 아마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림맹과의 관계 때문에 구룡 일행의 실질적인 주도자가 되어 버린 제갈혜가 월녀궁과의 동행은 민감한 사안인지라 섣불리 대답을 못하고 잠시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대답을 했다. "무림맹(武林盟)과 월녀궁(月女宮)이 적대적인 관계라는 것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예요. 저희들이 무림맹 소속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무림맹에 협조 를 하는 처지라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가 없는 일이군요. 소맹주에게 연락을 보내어 긍정적인 회신이 온다면, 그 때 는 같이 가셔도 됩니다." "좋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많으니까 언제든지 기다리도록 하지요. 적어도 떠나기 반 시진 전에 연락을 주세요. 만약 같이 가게 될 거라면 우리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마치 같이 가게 될 것이 뻔하다는 투로 말을 내뱉은 냉 월화는 월녀궁 여인들을 데리고 윗 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냉월화 누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월 녀궁의 부궁주라는 간판에 걸맞은 지혜를 지니고 있는 것 은 맞는 듯 하다. 제갈혜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두뇌 회전과 손익 계산이 빠른 듯 해 보였으니 말이다. 분위기가 바야흐로 진정 저녁을 먹는 분위기로 바뀌어 가자 아까부터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곽철 대협이 휭 하 니 몸을 일으켜 윗 층으로 올라가려는 찰나, 제갈혜가 그에 게 말했다. "곽철 대협, 저희랑 함께 가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같이 가신다면 저희에게 큰 힘이 되실 수 있을 듯 합니다." "나에게는 저 마교 여자가 혹으로 붙어 있을 것이오. 그 래도 좋소?" "저희 쪽에는 무림맹이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마교도라 해도 함부로 섣부른 짓을 해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디 부 탁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도록 하지요. 그럼 있다 가 뵙도록 하겠소." 말을 짧게 마친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성큼성큼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신이 데려온 거나 다를 바 없는 적미호로 인해 좌중의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그에 대해서 단단히 화가 난 듯해 보였다. 그가 떠나고 나자 좌불안석이 된 적미호도 그를 따라 슬금슬금 올라가면서 나에게 조그 맣게 속삭였다. "나 배고프니까 방으로 저녁 좀 올려 줘. 곽철이란 사람 방에도 요기 꺼리를 갖다주고 말이야. 그럼 수고해." 언제 울었느냐는 듯 한 쪽 눈을 찡긋거리고 올라가는 그 녀를 보니 어안이 벙벙하긴 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1-26 23:54:01 고친날 2005-01-27 21:04:41 읽은수 9675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90)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0] 일단 곽철 대협과 적미호가 떠난 자리를 정리하고 가려 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있어서 짧은 비를 들고 와 서 먼지가 안 나게 살살 쓴다고 쓸었는데, 코에 뭔가 들어 가면서 그만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에이취! 에취 에취!" "저런 감기 걸렸나 보군요. 조심하지 그랬어요. 여기 소 면 네 그릇하고, 만두 두 접시에 오리 구이 한 마리 갖다 주세요." 소방이 새치름하게 앉아있자 의외지만, 제갈혜가 대신 걱 정을 해주면서 겸사겸사 요리 주문도 해왔다. 묘한 일이라 면 일전에는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투가 없잖아 있었는데, 어제와 오늘 말투에서는 그런 것을 느끼기 힘들었다는 것 이다. 소방의 기분이 저조한 상태라서 알아서 기는 것인지 는 모르겠다. "네, 저기 술은 안 하세요?" "새벽에 길을 떠나야 해서 술은 안 되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방에 요리 목록을 전해준 후, 뒷일은 단수연에게 맡기 고 주방에서 막 나온 따끈따끈한 소면 두 그릇과 만두 한 접시를 가지고, 일단 곽철 대협의 방으로 올라가 소면 한 그릇을 탁자에 놔두었다. 의기소침해 있는 그를 보니 먹을 지 안 먹을지는 미지수였지만, 점소이로써의 의무는 이행한 셈이니 허리를 꾸뻑 숙여 보이고 나와서는 적미호의 방으 로 들어갔다. "저녁 식사요. 소면 한 그릇에 만두 한 접시면 되겠습니 까?" "물론 되지. 그런데, 곽철 이란 사람한테는 저녁 줬어?" "드리긴 했는데, 드실 의향은 별로 없는 듯 싶군요." "그래, 하는 수 없지. 거기 놓고 가봐. 왜? 무슨 일인데, 손을 내밀어?" 난 잠자코 한 쪽 손을 내민 채 시치미 떼고 있는 중이었 다. 바꿔 말하면 돈을 달라고 그녀를 협박하고 있는 중이었 다. 날 의미심장하게 째려보던 적미호의 한 쪽 눈썹이 바르 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은자 네 냥 줬으면 됐잖아? 뒤끝이 없어야 하는 거 아 니야!" "쉿, 목소리가 크오. 그 일은 물론 깨끗하게 끝난 일이지 요. 단지 말이오. 방금 전에 바닥을 쓸면서 재미있는 사실 을 알게 되었지 뭡니까?" "뭔데, 그게 손 내밀 일이야?" "바닥에 후추 가루가 떨어져 있었는데 그 자리에 서 있 던 사람은 바로 적미호 소저였지요. 그 가루를 가지고 제갈 혜 소저에게 보여주면서 당신이 울 때 손에 쥐고 있던 것 이라는 것을 살짝 일러준다면, 장담컨대 당신은 곽철 대협 한테서 버려지거나, 심한 경우 목을 뎅겅 잘릴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적미호가 흐느끼려 했을 때 손으 로 얼굴을 가리는 것은 봤어도 그녀의 손가락 끝에 후추 가루가 묻어있었는지 어쨌는지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다 만 이 여자의 표정이 너무 변화무쌍하게 금새 돌변하는 것 이 수상해서 나름대로 건너짚어 본 것이었다. "끄으응, 야, 너 협박하면서 돈 걷는 수금원으로 일 해 볼 생각 없어? 아주 자알 하겠다. 자알 하겠어."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요." "휴우, 얼마면 돼?" "싸게 해드리지요. 은자 두 냥으로 입을 닫아 주도록 하 겠소. 걱정 마시오, 뒤끝은 없으니까." 땅이 꺼질 듯이 한 숨을 쉬면서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막 은자를 꺼내려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머리가 어질어질 해지 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제 서야 적미호 곁에 너무 가깝 게 붙어서 대화를 나눴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독향(蠱毒香) 에 너무 오랫동안 노출되어 버린 것이었다. 내게 은자를 건네려던 적미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을 때는 이미 이성을 반 즘 상실해버린 내가 그녀의 어깨를 거머쥐고서 침대 위에 쓰러뜨려 버린 후였다. 고함을 지를 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그녀의 입술을 사납게 내리 눌러서 거칠게 입맞춤을 했고 손으로는 치마를 걷어 올려서 부드 러운 허벅지의 감촉을 만끽했다. 내 두 손은 그대로 더 올 라가서 적미호의 엉덩이를 마구잡이로 주무르다가 고의를 거칠게 풀어 내리려 했는데, 그 순간 따끔거리는 그 무엇에 찔리면서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의 고의에 비밀스럽게 꽂혀있던 것은 다름 아닌 자 그마한 비수들이었던 것이다. 스스로에게 너무나 놀라버린 나는 적미호에게 미안하다 는 말 한 마디도 없이 그대로 뛰쳐나와 계단을 내려와서는 뒷동산 벌판으로 정신 없이 내달리고 말았다. 머릿속이 말 그대로 텅 비어 버려서 하필이면 오싹하면 서도 냉랭한 분위기가 풍기는 가매장 봉분이 있는 곳으로 뛰쳐나온 연유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데로 마구 달려버린 것이었다. 흐트러져 있던 정신이 바짝 조여진 것은 난데없이 흐느 끼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흐흐흐흑 흐흐흐흑 흑 흐흑......" '허억, 여, 여기가 어디지?' 가매장 봉분 끝자락 부근에서 애처롭게 흐느끼는 여인의 목소리에 그만 몸이 바짝 얼어버려서 그대로 멈춰 섰지만, 어떤 처녀 귀신인지 보고싶은 궁금증이 일어나서 슬그머니 다가서기 시작했다. 하도 주령령의 귀신 놀음을 자주 봐 와 서인지 처녀 귀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던 나로서는 귀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가 더 궁금했던 것이었다. '울고 있는 것으로 봐서 냉혈마녀(冷血魔女) 주령령(周鈴 鈴)은 아니군. 내 여태까지 그 년이 우는 것은 한 번도 못 봤다. 그럼 누굴까?' 뭐가 그리 슬픈지 봉분을 껴안다시피 하고서 흐느끼던 여인이 새하얀 소복 같은 것을 입은 것까지는 보였다. 좀 더 자세히 확인하고픈 마음에 조용히 다가서자 그녀의 목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흐흐흐흑, 가, 가면 죽는단 말이야. 바보야, 가면 죽는다 고....흐흐흐흑..왜,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흐흐흐흐흑 흐 흑......" 목소리가 꽤나 낯이 익게 들렸다. 설마 하는 마음에 누구 인가 확인하려고 엎드려 있는 옆얼굴을 확인하려고 봉분을 살짝 도는 순간...... 탁! 그만 발을 잘못 내딛어서 나뭇가지를 밟고는 그것이 부 러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동시에 애절하게 흐느껴 울던 소리도 멈춰버리고 말았다. '이런 젠장할! 튀자. 령령만 아니면 설마 쫓아오지는 못 할 거다.' 정말 령령만 아니면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고 냅다 망아 루를 향해 달려갔는데, 순식간에 등뒤로 싸늘한 한기가 일 더니 내 목덜미를 확 잡아서 뒤로 당겨버리는 바람에 그대 로 꽈당 소리를 내며 제대로 바닥에 내려꽂히고 말았다. 뒤통수는 뒤통수대로 바닥에 제대로 떨어져 내려 뇌가 뒤흔들리는 충격 때문에 정신이 없어질 지경이었고, 동시에 바닥에 꽂혀진 엉덩이 꼬리뼈를 타고 흐르는 통증도 장난 아닌 것이 왠지 전에도 한 번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기분 이 들었다. 바닥에 대(大)자로 쭉 뻗어서 충격으로 바르르르 떠는 내 몸 위에 야수 같은 것이 무섭게 확 내려앉았으나, 금새 그 정체가 주령령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하도 그녀한테 이리 저리 부대끼며 살다보니 스치는 잔영이라 해도 이 년 또 귀신놀음 하네 하고 척 하니 알아볼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새파란 안광을 요요롭게 빛내며 달빛에 반사되어 그 윤기 가 한층 은은하게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나부 끼는 령령을 보니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했다. 진짜 처녀 귀신이었으면 잡아먹으려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령 령이라면 그냥 실컷 패고 말 테니 말이다. 그녀도 엿보던 상대가 나인 것을 알자 경계하고 있던 상 태에서 맥이 풀렸는지 한껏 무섭게 부라리던 커다란 눈에 서 힘을 빼고는 찌푸렸던 이맛살도 바로 폈다. 이제부터 패 려나 보다 하고 눈을 질끈 감았었는데, 주먹대신 뜨끈한 것 이 내 안면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눈물? 이 마녀에게서는 절대로 볼 수 없을 거라고 여겼 던 눈물이 하나 둘 씩 떨어져 내리잖아? 그런가? 남궁현과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따뜻한 인간이라 이건가?' 눈물샘이 풀렸는지 아까보다 더 애처롭게 눈물을 내 안 면 위로 툭 툭 떨어뜨리는데, 차갑게만 느껴졌던 귀안(鬼 眼)의 령령에게서 이렇게 뜨거운 눈물도 흐른다는 것이 몹 시 당황스럽기만 했다. 급기야는 내 가슴에 그대로 무너져 내려서 서럽게 흐느끼는 그녀가 너무나도 생경하게 느껴졌 다. 령령은 적어도 반 시진 동안은 내 품속에서 울다가 지 쳤는지 벌떡 일어나서 비틀비틀 어둠의 숲 속으로 그 자취 를 감추며 멀어져가고 있었다. 내 가슴팍 일부는 그녀가 흘린 눈물로 젖어들어 있었지 만, 내 마음은 그녀가 처음으로 보여준 슬픔에 흠뻑 젖어들 고 말았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1-28 14:45:17 고친날 2005-01-29 06:44:23 읽은수 9699 [ 15 K ] 제목 점소이 작삼(9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1] 가슴팍이 축축하게 젖어있었지만, 차갑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주령령이 시퍼런 눈을 빛내며 을씨년스럽게 흘러내 린 긴 머리를 바람에 나부끼면서 사냥감을 찾는 듯한 모습 일 때는 도망 다니기에도 바쁘지만, 오늘의 그녀는 뭔가 특 별했다. 종종 정신병을 이기지 못해 발광을 하기까지 하는 그녀가, 항상 날 힘들게만 만드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남 몰래 흐느껴 우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진 다면, 내가 잘못된 것일까? 아프다. 내 신체가 멍들고 베여서 손상을 당해 아픈 것이 아니라 내 가슴속 깊은 그곳이 징 하게 저려와서 아프게 와 닿는다. 이대로 오늘 하루를 넘긴다면 가슴을 짓눌러오 는 무게를 감당 못하고 무너져버릴 것만 같다. 이 답답함을 원천적으로 시원하게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무리 잔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아 도 결론은 하나로 귀일 되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남궁현 그 녀석이 무사히 살아서 돌아 오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그 녀석의 무사생환(無事生還)을 위해서 하수중의 하수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은 거의 미미하다고 볼 수 있었 지만,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는 말도 있듯이 아무리 하찮 은 나라해도 뭔가 쓸모가 생길지도 모른다. '주령령이 사랑하는 남궁현이 살아서 돌아올 수만 있다 면, 나 같은 것 즘이야......아무렴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텐데, 뭐......후후후훗......' 생각해보니 내가 이 세상에 미련 가질 것이 하나도 없었 다. 물려받거나 벌어놓은 재산이 있기라도 하나? 내가 죽으 면 울어줄 여인이 있기라도 하나? 비록 삐쳐있다 해도 친 구가 하나 있지만, 그 역시도 지하석실로 들어가려 하고 있 다. 그렇다면, 더 더욱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좋아, 나도 지하석실(地下石室)로 내려 가봐야겠다. 그러 자면 내가 매달릴 곳은 오로지 한 군데 밖에 없어.' 결단이 서자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그녀의 방을 향해서 쏜살같이 달려갔다. 한 시진은 훌쩍 넘어가 버렸기에 떠나 기 전에 앞서 일찌감치 수면에 들어간 듯 대부분 방의 불 이 꺼져있는 것이 한 눈에 들어왔지만, 마침 그녀의 방에는 아직 불이 밝혀져 있었다.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한 달음에 내달려서 복도에까지 오른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호흡 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그녀의 방문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 다. "저, 냉월화 누님, 시간 있으신 지요? 실례되지 않는다면 잠시 들어 가봐도 될까요?" "어, 들어와도 돼." 끼이이익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환약 냄새가 확 퍼져 나오면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등잔 불을 따라 냉월화 누님의 안면 그림자가 요란하게 춤을 추 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문득 이 야심한 시각에조차 환단제 조(還丹製造)에 힘쓰는 그녀가 무섭게 느껴져 그냥 되돌아 갈까 망설이는 찰나, 재촉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도 된다니까 거기서 뭐 해? 안 잡아먹을 테니까 어서 들어와. 사월이도 아직까지 저 꼴이고 해서 무척이나 심심했어." "아, 그러셨군요." 문을 닫고 들어오면서 맞은 편 침대를 힐끔 바라보니 눈 을 내려감은 와중에도 환약 냄새가 괴로운 듯 이맛살을 드 러나지 않게 살짝 찌푸린 채 드러누워 있는 사월이를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안색이 한 결 나아진 것이 주화입마(走 火入魔)로부터 회복된 기색이 여실했다. "저 냉월화 누님, 확실히 구룡(九龍) 일행과 같이 가게 될 듯 한가요?" "아마도 그럴 거야. 종리연이 정확히 지도를 암기했는지 미덥지 않기도 할 테고, 혹시나 그녀가 지나친 부분을 내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소맹주란 놈이 무척 간사 해 보였거든, 그만큼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소리니까 기꺼 이 환영해줄 테지." "저, 저기 누님, 누님 일행에 저도 껴 주시면 안 될까요?" "뭐라구!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내 말에 무척이나 놀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냉월화 는 내 눈을 무섭게 노려보다가 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한 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앉았다. "우리는 놀러 가려는 게 아니야. 필시 수많은 목숨들이 지하석실에서 사라져버릴 게다. 나를 비롯해서 이 자리까지 온 우리도 본궁에 유서(遺書)를 남기고 올 정도로 죽을 각 오로 온 거야." "괜찮습니다. 전 지하석실에서 죽지도 않을 테고, 죽을 생각도 없으니 유서를 쓸 이유도 없지요." "호호홋, 이 욕심 많은 사람을 봤나? 지하석실에는 반드 시 가겠지만, 죽을 생각도 없다니 그게 말처럼 쉽게 될 듯 싶어? 혹시라도 잘못되는 날에는 옥정이를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는데, 그래도 좋아?" "......" 교옥정 누님 얘기가 나오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동안 모은 재산도, 특별히 만들어 놓은 애인은커녕 여자 친구도 없다는 생각에 미련 없이 따라갈 생각을 하고 있었 다 그런데, 언제 월녀궁에서 나올지 기약할 수 없기는 하지 만, 언젠가는 그녀가 월녀심법(月女心法)을 대성하고 나왔 을 때 만약 내가 이 세상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어지러운 찰나에 주마등이 스쳐 가듯 내 가슴팍 위에 엎드려 구슬프게 흐느끼던 령령이 눈 앞에 떠오르자 막막하던 안개가 일시에 거치는 기분이 들 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주먹을 꽉 쥐고 그녀를 향해 자신 있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저한테는 꼭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냉월화 누님, 저도 꼭 데려 가 주십시오!" 즉시 그녀의 발치 앞에 엎드려 머리를 바닥에 바짝 붙인 채 그녀의 가부 결정을 기다렸다. 만약 그녀가 거부하면 몰 래 라도 그들의 뒤를 쫓아갈 생각이었다. "휴우, 고집이 센 사람이군. 참, 내 정신 좀 봐. 가증환(加 增丸)을 어서 더 만들어야 하지. 험, 험, 그럼 작삼 동생은 간단히 여벌의 옷과 마른 음식이 있으면 좀 챙기도록 수면 을 취하도록 하게. 떠나기 전에 자네를 부르도록 할 테니 일단은 자두는 게 좋을 거야."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냉월화 누님." 허락이 떨어지자 벌떡 일어선 나는 그녀에게 한 번 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내 방으로 와서 필요한 것들을 싸기 시작했다. 주방으로 바로 내려가 저장고 문을 열어 보 니 만두나 소면을 만들 때 조금씩 넣던 마른 육포(肉脯)가 한 보따리 분량으로 쌓여 있는 게 보였다. '포연강, 내 조금만 빌려 가마. 살아만 나오면 이자까지 쳐서 돌려줄 테니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말아라.' 준비해갔던 봇짐 가득히 육포를 채우고서 살금살금 올라 와서는 망아루에 오기 전에 챙기고 다녔던 물통에도 물을 채워서 봇짐에 잘 묶었다. 여벌의 마의도 잘 우겨 넣어서 터지려고 하는 봇짐을 억지로 눌러 묶어 버리고는 마지막 으로 내 호신용(護身用) 무기로 챙긴 반 쪽 짜리 철봉(鐵 棒)도 주먹에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어 침대를 창문 바로 밑으로 끌어 와서는 창문을 열고서 그 옆에 기댄 채로 두 눈을 번쩍 뜨 고 바깥을 살폈다. 그러나, 피곤했었는지 반각이 채 지나가 기도 전에 허무하게도 꿈나라로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소스라치 게 놀라 퍼뜩 눈을 떠보니 아직 별이 지지 않은 야심한 시 간에 구룡 일행들과 월녀궁 일행이 망아루를 벗어나 소룡 봉(小龍峰)쪽 오르막길로 이동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 다. '쳇, 역시 냉월화 누님이 나더러 눈 좀 붙이라고 한 데는 이유가 있었군. 날 떼어놓고 몰래 가려고 하다니, 그런다고 내가 못 쫓아갈 거라고 생각하면 단단히 착각한 거라구.' 가소롭다는 듯 피식 코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고 나가려 고 했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 그대로 머리만 콰당 들이 박 고 말았다. 무슨 수를 써서 문을 막아버렸는지 몰라도 조용 히 문을 통해서 나가기는 글러버린 것 같았다. '치이, 치밀하게도 막아놨네. 쳇, 그렇다고 내가 못 따라 갈 거라 생각하면 큰 착각이지. 통로가 한 군데 남아 있거 덩.' 즉시 창문으로 몸을 디밀어서 창문 난간 밑으로 대롱대 롱 매달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일 장 남짓 될 만큼 만만 치 않은 높이였다. 운이 나쁜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 진다고 잘못 떨어졌다가는 다리 병신이 될 수도 있는 높이 이기도 했다. 어차피 출발 전부터 죽음을 각오했던 바 심호 흡을 가다듬던 그대로 훌쩍 뛰어 내렸는데, 착지하는 순간 중심을 잃어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어 버리고는 눈물이 찔 끔 나올 뻔 하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야만 했다. 겨우 몸을 일으켜 허리를 좌우로 꺾어보니 다행스럽게도 허리는 멀쩡 했다. "자, 이제 따라가 볼까?" "정녕 가야만 하겠는가?" "에구머니나! 홍 영감님!" 내가 내려선 지붕 아래 창가 탁자에는 언제부터 앉아 있 었는지 짐작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교묘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홍 영감이 연기도 오르지 않는 곰방대를 뻐끔뻐끔 빨 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여긴 왠 일이세요?" "불나방처럼 죽음을 향해서 뛰어들려고 하는 젊은이들의 오기가 안타까워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들의 뒷모습 을 내 뇌리 속에 새겨 넣어 준 것이지. 그러는 자네야말로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것을 보니 자살이라도 할 속셈이었는 가?" "아, 아니 저는......" "되었네. 보아하니 자네도 떠나려 하는 듯 싶구만. 무슨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보 같은 짓이라네. 지금이 라도 그만 포기할 생각은 없는가?" 홍 영감도 내가 떠나는 것에 대해 마땅치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가 진정 숨은 고수라는 것을 잘 아는 나로서 는 여차하면 그를 피해 한 달음에 뜀박질하려고 그와의 거 리를 눈대중으로 재고 있었다. 그런 나의 속마음을 읽었는 지 홍 영감은 한 쪽 입술만 교묘하게 틀려 올라간 요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떠날 생각이라면 말리지는 않겠네 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마당에 몇 가지만은 일러두고 싶어서 자네 앞에 날 드러낸 걸세." "......" 내 딴에는 조심한다고 했는데, 단박에 내 의중을 들켜버 린 게 어색해서 가만히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 보기로 했다. "연강이와 령령이를 너무 미워하지 말게. 그들이 어울리 지도 않는 주루를 경영하며 근근히 버텨온 것은 다 나 때 문이니까." "영감님 때문이라니요?" "그래, 내 몸에는 심각한 독마(毒魔)가 또아리를 틀고 서 서히 잠식해 오고 있다네. 그래서, 항상 단잠을 잔 적이 없 었지. 그것을 회복하자면, 오로지 가능성이 있는 것은 혈해 진경(血海眞經)의 독경(毒經)중 해독(解毒)편 뿐이지." "......" 그의 얘기를 빌자면 결국 망아루 인간들도 혈해진경에 얽매여 웅크린 채 발톱을 갈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황실 근위대는 아니어도 그것에 쫓겨서 숨어사는 인간들 정도 되는 줄 알았더니 실상은 더 만만치 않았던 것이었다. "그것을 왜 저한테 말씀해 주시는 거지요?" "글쎄, 그간 자네한테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던 탓이라 고 해두지. 아마 연강이나 령령이도 그럴 거야. 다시 말하 지만, 지하석실로 가면 살아서 나오기가 무척 힘들다네." "원 영감님도......누가 죽으러 가는 줄 알아요? 그냥 가볍 게 여흥 삼아 다녀오는 거니까, 염려 붙들어 매십쇼. 제가 죽으면 포형이 육포 값이 아까워서 배를 잡고 뒹굴걸요." "그런가? 그럼 몸 성히 잘 다녀오게." 마지막 인사말까지 꼭 '죽지 않고 살아도 중요한 데가 부러지거나 박살나서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로 올 게 뻔하네' 라고 말하는 것 같아 무척 찝찝했지만, 다른 일행 을 놓칠 새라 부지런히 뛰어가야 했다. 이미 시야에서 사라 진 지는 오래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새벽이라 해가 뜨지 않아서 그런지 멀리 가지는 못했던 모양이었다. 재빨리 한참을 앞서 가버린 월녀궁(月女宮) 일행 맨 뒤로 달려가서 멀뚱멀뚱 쳐다보는 그녀들의 부담스런 시선을 사 사삭 흘릴 겸 숨도 고를 겸 곧게 정면을 바라보며 보조를 맞춰 걸어갔다.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냉월화 누님도 나를 발견(發見)하고는 경악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굳게 약 속(約束)을 했던 과거가 있는지라 벙어리 냉가슴 앓듯 그냥 꼭 입을 다물고 한동안 불안한 듯 흘겨만 보았다. 급기야는 그녀도 지쳤는지 그저 나라는 존재를 잊은 듯 무시하며 구 룡 일행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래도 월녀궁 일행 중에서 사월(死月)의 눈흘김이 장난 아니었다. 뭐라고 나불나불 거리는 지 빈 입을 달싹이며 무 지막지하게 되새김질하며 곱씹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 차피 내 손바닥 안에 있는 그녀이려니 하며 너그럽게 넘어 가주기로 했다. 얼마를 걸었을까? 소룡봉(小龍峰)도 지나고 구룡봉(九龍 峰)마저도 지나고 나자 따사로운 먼동과 함께 아침 햇살이 터오며 구석구석 숨어든 암흑을 걷어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산골짜기로 진입하기 전 인원 점검 차원이었 는지 전원이 멈춰 섰고, 선두로 걸어가던 제갈혜가 돌아서 며 말을 하려고 무리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나와 눈을 마주 치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굳어 버리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아이, 굳을 것까지는 없잖아? 그냥 유연하게 넘어가면 될 것을 가지고......귀찮아지게스리. 쩝'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녀의 시선을 따라서 구룡 일행의 시선이 나에게 꽂혀 버렸고, 그들도 유행처럼 제갈혜를 흉 내내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후훗 쑥스럽게 좀 그만 쳐다들 보시지. 월녀궁 일행은 남의 일이라는 듯 다들 내가 서있는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며 주변 경치를 유심히 구경하면서 고개를 끄떡거리고들 있었다. 뭐 냉월화 누님하 고 잠자는 척 하느라 무진장 애를 쓰는 듯했던 사월이를 제외하고는 월녀궁 애들 또한 나의 존재에 대해서 전혀 예 상을 못하긴 마찬가지였을 테지만, 냉월화 누님의 침묵으로 미루어 뭔가 암묵적인 게 있다는 것을 눈치 깐 듯 해 보였 다. "작삼 점소이, 이 곳에 낄 이유가 없다고 보는데요. 왜 따라 온 것이지요?" 무리의 의문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제갈혜의 질문에 모두 의 시선이 내 입으로 몰렸다. "전, 월녀궁의 짐꾼으로 낀 것이니 하등 신경 쓰실 것 없 습니다. 절대로 여러분의 행보에 거치적거리지 않을 테니 안심들 하시기 바랍니다." "뭐, 뭐라구요? 냉월화 부궁주님 그의 말이 사실인가요?" 내 대답에 눈이 휘둥그래진 제갈혜가 화두를 냉월화 누 님에게 던지자 곤혹스러운 상황을 잠시 잊고자 했는지 먼 동과 함께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연신 좋구나 를 읊 조리던 그녀가 움찔하며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호호호홋, 우, 우리 애들이 워낙 연약해서 말이예요. 툭 하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기 일쑤고, 산 속에서 채식 만 하고 자랐더니만 뼈들이 약해요. 결국 힘을 쓸 짐꾼이 필요하겠더라구요. 그래서, 그를 임시 고용했답니다. 호호호 호홋." 진땀을 뻘뻘 흘리며 능청을 떠는 그녀를 어이없게 바라 보던 제갈혜가 포기를 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 아서자 모두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납득하려고 애쓰는 분 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단 한 명을 빼고...... "돌아가!" 나를 똑바로 직시하며 몹시 분개한 듯 쌍심지를 돋운 소 방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르게 보였다. 고양이처럼 양양거리는 그가 겁이 날리는 없지만, 처음으로 대하는 그의 색다른 이면이 신기하면서 놀랍기까지 했다. "다시 말하겠어. 돌아가! 지하석실이란 곳이 개나 소나 다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너처럼 훅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나약한 녀석이 심심풀이 삼아 따라올 만한 데가 아니란 말이야!!" 그의 목소리는 가면 갈수록 높아져서 기어이는 산골짜기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질 정도가 되었고, 그 미세한 진동 으로 피부가 떨려왔고, 그의 의지가 내 마음 속에 직접 와 닿았다. 저것이 그가 무공에 관해 얘기할 때 한 갑자 이상 의 정순한 내공이 있어야 펼칠 수 있다고 사자후(獅子吼)란 말인가? "안 돼. 난 꼭 가야해." 내가 간단히 딱 잘라 말하자 소방의 눈이 번득이면서 오 장이나 되는 거리를 가로지르며 바로 앞으로 바짝 다가섰 다. 숨 쉴 사이도 없이 그의 주먹이 내 안면에 몰아치면서 일 장 이상은 땅바닥을 뒹굴며 날라 가야만 했고, 머리에 직접 가해진 충격 때문에 비틀비틀 일어났다가 다시 쓰러 져야 했다. "제갈혜, 출발해." "어, 엉 그래." 그가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내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해 버리자 일행들은 의외라고 여기면서도 만족한 듯, 길을 재 촉하고 있었다. 냉월화와 남궁현이 정신을 못 차리는 나를 한 두 번 돌아본 것도 같지만, 거기까지였다. 무지막지하게 전신을 뒤흔드는 통증에 심각한 현기증이 겹쳐져 계속 넘어졌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소방이 나 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뼛속이 통 채로 울리며 아릴 정도로 똑똑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그래도 난 가야만 한다.' 내 뚜렷한 의지가 하나로 일어서자 서서히 몸 속에서 일 어난 청아하면서 맑은 기운 한 가닥이 내 뇌리를 관통하며 흔들리던 시야가 하나로 뭉치게 만들어 주었다. 여전히 아 픈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그들의 뒤를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하게 뒤따를 수 있었다. 나의 기척을 느낀 소방이 다시 돌아서며 한 대 더 후려 칠 듯한 기세를 보였으나, 냉월화의 신형에 가로막혀 한 걸 음 물러서야만 했다. "그가 당신의 친구(親舊)인 것을 알았기에 한 대는 양보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행이니 만큼 더 이상은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로군요. 작삼 동생의 진정한 친구라면 그의 의지(意志)도 존중(尊重)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오동통한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바르르 떨던 소방은 마침 내 포기했는지 팽 돌아서며 허공에 외쳤다. "맘대로 하라지! 어떤 바보가 죽게 되도 난 절대로 모르 는 척 할 테니 알아서 하라지. 흥이다! 흥이야!" "미안하다. 그래도 날 생각해주는 것은 너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 내 중얼거림이 과연 그의 귀에까지 들렸을지 의문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와 내가 친구라는 사실 은 변하지 않을 것이기에...... "작삼 동생." "네, 우아하시고 현명하신 냉월화 누님 말씀하세요." 냉월화가 나긋나긋하게 웃으며 나지막하게 부르는 것이 어째 조금 불안했지만, 내가 그녀에게 빌붙어버린 이상 확 실하게 강도 높은 아부를 할 필요가 있었다. "호호호홋, 작삼 동생은 날 너무 잘 알아. 그런데 말이야. 명분이 임시 짐꾼인데, 맨 손으로 가기 뭐하지 않겠어? 더 구나 우리 애들 약해 터졌다고 말까지 해 버렸는데, 이대로 가기는 허전하지?" "아, 아니요. 전혀 허전하지 않은데요. 정, 정말이에요." "에이 사양할 것 없어. 이왕 도와주기로 한 거 확실히 도 와줄게. 얘들아, 짐 가진 거 작삼 동생한테 몰아주렴." "예, 부궁주님." 월녀궁 애들은 명령이 거둬지기라도 할 새라 재빠른 몸 놀림으로 혁낭을 풀어서 내 어깨와 목에 둘러주었다. 개개 인의 혁낙은 별로 무겁지 않았지만, 다섯 명분의 혁낭이 모 이자 허리가 제법 휘청거릴 정도로 무거웠다. 불행중 다행 이라면 망아루에서 일하면서 체력이 많이 올라가 있다는 것 정도일까? 입이 삐죽 세 치는 튀어나온 듯 했지만, 어찌 하랴? 내 입으로 내 뱉은 말이 분명하거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1-29 21:09:50 고친날 2005-01-30 07:44:23 읽은수 9655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92)-지하석실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2]지하석실(地下石室) 지금까지는 확연히 인적이 느껴지는 길들이었다면, 산골 짜기로 내려가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 길이 없었거나, 처음 가는 길이 분명했다. 눈에 보이는 것 은 그저 나뭇잎이 다 떨어져 내려서 앙상한 가지를 힘없이 축 늘어뜨렸으면서 껍질마저 메말라 좍좍 갈라진 단풍나무 들뿐이었다. 거기에다가 길은 가면 갈수록 가파르게 되어가 서 험준하기 그지없었다. 그나마 선두에 앞서가던 제갈혜와 남궁현, 모용천풍이 잔가지들을 잘라내며 뒷사람이 따라올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게 나름대로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젠, 젠장 미, 미치겠네. 이, 이거 언제 즘 도착하는 거 야?' 그냥 걸어가도 쉽게 따라갈 수 있을 만한 길이 아닌데, 월녀궁 여인들의 짐까지 둘러매고 가니 그 노고가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나 사월이 년이 가끔 돌아보며 혓바닥을 메 롱하며 내미는데, 우씨 저걸 콱 산골짜기 밑으로 밀어버려? 어휴, 인내심 많고 너그러운 내가 참아야지. 해가 머리 위로 오른 것을 보니 진시(辰時)나 되었을까? 그렇게 가파르던 산골짜기 가운데에서도 제법 넓은 공터가 드러나 보였다. 단지 불안한 것은 그 이후의 길이 안 보였 다는 것이었다. '뭐 제갈혜가 알아서 어련히 길을 찾아내겠지. 뭐.' "여기서 간단히 중식을 먹고 휴식을 취한 후 밑으로 내 려갈 예정이니 잠시 여정을 풀도록 하세요." 제갈혜의 낭랑한 목소리가 골짜기 곳곳을 누비며 메아리 쳐 되돌아왔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소방을 힐끔 돌아보니 망아루에 있을 때보다도 곱절로 더 삐쳐 버렸는 지 아예 내 근처에는 눈길도 두지 않았다. '사내 녀석이 소심하긴......그저 훌훌 털고 잊어버리면 될 것을 가지고......' "작삼 동생, 짐을 여기에 내려놓도록 해. 이제부터는 각 자 들고 가야하니까, 이 쪽으로 와 봐. 우리 애들 소개도 시켜줄게." "우와! 정말이요? 제가 끝까지 매고 갈려고 했었는데, 아 쉽게 되었네요. 헤헤헤헷." 그야말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리였지만, 너무 기뻐하는 속내를 드러내기보다 은근슬쩍 여운을 남길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냉 누님한테는 가벼운 인간으로 비치기 싫었던 것 이다. "그럼, 끝까지......" "앗! 그러고 보니 냉월화 누님이야 워낙 군계일학(群鷄壹 鶴)같이 뛰어나신 분이어서 존함이 바로 머리에 박혔는데, 다른 월녀궁 분들 이름은 제가 미쳐 모르고 있었군요. 이런 실례가 있나?" 재빠르게 냉월화 누님에 대한 아부로 너스레를 떨며 메 고 온 혁낭들을 살짝 벗어 놓았다. 그녀에 대한 아부로 먼 저 말을 시작하자 냉월화 누님은 기뻤는지 자신이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거나 얼버무려준 모양이었다. 휴우 하마트면 개 고생 할 뻔했다. 사월(死月)로 부터 시작해서 다른 네 명이 주르륵 냉월화 누님 옆으로 섰다. 모두 평균 이상의 미모를 지니고 있어서 말 그대로 꽃밭이었다. 단 냉 누님 앞에서는 너무나 경직들 이 되어 있어서 말로만 들어온 생강시를 보는 기분이 들었 다. "맨 왼쪽부터 사월(死月)이라 하고 옥정이 바로 다음으로 들어온 애지. 그 다음부터 순서대로 명월(明月), 은월(銀月), 적월(赤月), 춘월(春月)이라 해. 막내도 있었지만, 그 날 그 만 안타깝게 죽고 말았어." 그녀가 막내에 대해 말을 하자 월녀궁 여인들 사이에 침 울한 분위기가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경직들은 되어 있어도 서로간에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 양이었다. 짝 짝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는 것을 알아차린 냉 누님이 손뼉 을 가볍게 쳐서 환기를 시켜 주었다. "자, 그만. 이 쪽 작삼 동생과는 우리와 같은 일행이 될 사람이니 터놓고 지내도록 해. 작삼 동생도 편하게들 대 해." 사월은 그녀의 말에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째려 봤지 만, 은월이는 친근하게 살며시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냉월화 누님이 깊은 생각에 빠져 꼼짝도 안 하느라 발목이 잡혀버렸을 때 몰래 구원 요청을 했던 애였 다. 나도 그냥 아는 척 해주느라 고개를 끄떡여 주었다. 간단한 통성명이 끝난 후에 각자 준비해왔던 육포를 조 금 꺼내 먹는 것으로 식사를 마치고는 금새 떠날 차비를 차렸다. '이젠 올라가려나? 내려가는 길도 없는데,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이지?' 전원 출발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한 제갈혜는 무리를 한 번 둘러보고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벼랑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아닌가! 더 놀라운 것은 그런 그녀를 구룡들도 아무 말없이 따라서 뛰어 내렸다는 것이었다. '설, 설마 동반자살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더욱 더 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냉월화 누님마저 나를 자 기 옆구리에 강제로 끼우고서 벼랑으로 훌쩍 뛰어 내린 순 간이었다. "끄아아아악!" 거의 절벽이나 다를 바 없는 그 곳으로 몸을 날린 그녀 가 쭈욱 떨어지다가 절벽 모서리에서 발끝으로 살짝 딛었 다가 속도를 떨어뜨렸다가 다시 하강하기를 반복했는데, 시 야가 아찔해서 떨어질 때마다 심장이 철렁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실수로 냉월화 누님이 발을 헛 딛거나, 나 를 놓치면 그 순간으로 이승하직이니 단 한 순간도 마음이 놓일 리가 없었다. 마침내 바닥에 발을 딛었을 때 실제 시간은 반각 정도 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내게는 무한대의 아득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더불어 하의 일부가 촉촉한 것이 아무래도 그것 이 틀림없었다. '끄으응 좀 지렸네. 에라 한 시진만 시치미 떼자. 그럼 마 르겠지.' 쏴아아 심호흡을 하며 아직도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안정을 취하자 희미하게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 리가 들려오는 방향에는 황의인들이 미리 정열을 하고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들 쪽은 수라삼살(修羅三 殺) 뒤를 쫓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틀림없었다. "조금 늦었구려. 제갈혜 소저." 무림맹 아해들 사이를 헤치며 천운학(天雲鶴)소맹주가 속 을 헤아리기 어려운 준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종리연(鐘 理戀)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오자 제갈혜 입장으로 서는 그 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는지 껄끄러워 하는 듯도 했으나, 내숭의 천재답게 속으로 잘 갈무리한 그녀는 바로 포권을 지어 보이며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조금 말썽이 있어 지체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소?" 그녀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월녀궁 일행을 둘러보던 그는 스치듯이 나를 봤으나, 문제삼지는 않았다. 냉월화 부 궁주와 시선을 맞 교환한 그는 의례상의 포권을 하면서 가 볍게 인사를 해왔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 시에 협조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 에 여기까지 모셨으니 잘 부탁드리겠소." "저희야말로 감사한 일이지요.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도록 하겠습니다." "수라삼살(修羅三殺)문제로 골치가 좀 아팠는데, 여러분 을 보니 든든하기 그지없군요." "과찬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저희가 신세질 일이 더 많을 지도 모르지요." "하하하하하." "호호호호홋." 시작은 가벼웠으나, 어쩐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늑대와 여우의 날카로운 대치를 보는 것 같은 설전이 오고 갔다는 것을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냉월화 부궁주와 천운 학 소맹주 사이에는 어둠의 기류가 흐르는 것 같아 깨으름 칙 하기까지 했다. 뭐 애초에 이해득실(利害得失) 관계로 일시 협력을 하기로 한 것이었지만, 왠지 불길해 보였다. "그럼 우리 먼저 출발하도록 할 테니 제갈혜 소저 일행 과 천천히 뒤따라오시기 바랍니다." "네 살펴 가십시오." 천운학 소맹주는 종리연의 안내에 따라서 눈앞의 펼쳐진 물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한 냇가 위로 등평도수(登萍渡水)를 펼쳐서 지나갔는데, 그 뒤로 그의 그림자 격인 양조영과 황 보원이 뒤를 따랐고, 무림맹 아해들 오십 여명이 그 뒤를 이어서 같은 등평도수(登萍渡水)를 펼치기는 했지만, 역시 발끝이 거의 물 표면에 스치기만 하는 천운학에 비하면 첨 벙첨벙 거리며 지나가는 것이 같은 경공기술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나? 나야 뭐 원래부터 꼽싸리 아니였겠어? 후 후훗. 그런데, 소맹주가 한참이나 등평도수를 펼쳐 폭포 밑으로 쏙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그 곳이 고만고만하 작은 냇가 가 아니라 거대한 호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뿐만 아니 라 멀리서 보았을 때는 자그마한 폭포인 줄 알았던 그것도 실제로는 이십 여장에 이르는 거대한 폭포라는 것을 뒤늦 게 서야 눈치챌 수 있었다. 절벽에서 떨어지다시피 내려온 아찔함에 질려 미쳐 주변경관을 확인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주변 전체가 절벽산이었구나. 이런 외진 골짜기에 거대 한 폭포와 어우러진 드넓은 호수가 있다니 절경이 따로 없 기는 하구나. 그런데,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 낯이 익은 정 경인데 말이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1-29 23:58:06 고친날 2005-01-30 07:44:54 읽은수 9230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9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3] 오십 여명의 무림맹 황의인들은 건너가지 않고 호수 주 변에 진을 치듯 대기했다. 우리가 들어가고 난 후 뒤따를지 도 모르는 다른 무림인들을 경계하기 위해서 인 것 같았다. 제갈혜를 선두로 구룡 일행 모두가 등평도수(登萍渡水)를 펼치며 시커먼 호수 위를 내달려서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 속으로 쏙쏙 들어가 버렸다. 역시 이번 에도 냉월화 누님의 옆구리에 끼워진 나는 그녀의 따스한 품을 만끽하며 여태까지와는 달리 비교적 편하게 호수를 건널 수...... 쏴아아아아 "......" 폭포수를 통과한 냉월화 누님과 나는 말 그대로 물벼락 을 맞고는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나고 말았다. 몸이 물에 완 전 젖어버리자 찝찝하기 그지없었으나, 물에 흠뻑 젖어 옷 이 몸에 찰싹 달라붙자 요염함 몸매가 그대로 드러난 그녀 를 보자 물벼락 맞은 보람이 느껴져 흐뭇해졌다. 뿐만 아니 라 다른 여인들도 사정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우히히히힛, 따라오길 잘 했지. 덕분에 눈이 호강하는구 나. 그나저나, 이 안의 공간에 세워져 있는 석문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요란한 폭음과 함께 떨어지는 폭포수를 통과하는 동안 난 이 절경들을 어디에서 보았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바로 현현자(炫炫者)의 회상이라고 여겨졌던 내 꿈속에서 봤던 절경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 문 여는 방법도 똑같은 것일까? 마침 미리 와있던 구룡 일행은 가로막혀 버린 석문 앞에 서 망연자실해 있었다. 천운학 공자는 따라오라고 하고서, 시험이라도 해보는 듯 문을 안에서 닫아버리고 가 버린 것 이었다. 그 쪽이야 종리연이 있으니 문을 어떻게 여는지 잘 알고 있겠지만, 이 쪽은 지도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불분명 한 냉월화 누님 밖에 없었다. 누님을 따라서 월녀궁 여인들 도 폭포수 안으로 들어서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물론 나 야 그 침묵의 시간을 이용해서 들어온 월녀궁 여인들의 몸 매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모두가 문 여는데 정신이 팔려서 내 눈알 돌아가는 소리 같은 것에는 신경을 안 쓰 고 있는 것 같아 더욱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문득 냉월화 누님도 지도를 본 삼 인 중 한 명이 라는데, 생각이 미쳤는지 약속이나 한 듯 말없이 그녀를 돌 아보았다. 냉월화 누님은 뾰롱퉁한 시선으로 석문을 바라보 며 자신에게 몰린 무리들의 시선을 매몰찬 한 마디로 물리 쳐 버렸다. "미안하지만, 문 난 여는 방법 몰라요. 다른 데 신경이 팔려서 그런 세세한 것에는 신경 쓰지 못했다구요. 그러니 까 눈길 좀 돌려주겠어요? 니네들도 눈깔 돌려 가장 늦게 돌리는 애한테는 내 특별히 제조한 정체불명의 환단을 몸 소 먹여줄 테니까." 사사사사삭 내 태어나서 머리 돌아가는 소리가 이렇게 일사불랄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월녀궁 사람들, 어 쩌면 생각보다 유쾌한 삶을 즐기고 있는 유쾌한 인간들인 지도 모르겠다. 제갈혜가 한숨을 쉬며 문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기관(機 關)과 진법(陣法)에 해박한 지식이 있다고 하니 잠자코 지 켜보기로 했다. 무엇을? 후후후훗 물론 물에 흠뻑 젖어 유 감 없이 드러난 제갈혜의 몸매지. 시간이 좀 걸리는 것에 지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석 문의 왼쪽 아래를 살펴보니 여러 대리석 조각이 보였고, 그 속에서도 푸른빛이 돌고 있는 대리석을 발견했을 때는 묘 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직접 돌리기에는 꺼림칙한 구석이 느껴져서 한참 뭔가를 계산하고 있느라 바쁜 제갈혜를 불렀다. "제갈혜 소저, 저, 저기 말이에요." "무슨 일이지요? 전 지금 이 문을 여는 방법 생각하는데 도 바빠요. 빨리 말해요." 괜히 나한테 신경질이야. 콱 그냥 넘어갈까 보다. "소저의 발치에 있는 대리석 무더기가 매우 수상해 보이 는데요." "......" 내 말에 자신의 발 주변을 무의식적으로 바라보던 제갈 혜는 눈을 번쩍 뜨고는 미친 듯이 대리석들을 하나 둘 씩 치우다가 마침내 고정이 되어 빠지지 않는 푸른 대리석 조 각을 찾아내고는 시험삼아 슬쩍 돌려보는 것이었다. 확신을 얻은 제갈혜는 주저 없이 대리석 조각을 왼쪽으로 두 번 돌렸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한 번 돌렸다. 쿠쿠쿠쿠쿵! 스르르르릉 정면의 천연적인 돌 벽 건너편에서 뭔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와는 한 박자 느리게 정면의 석문이 반 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꿈 속에서 느꼈던 역행(逆行)의 원 리 그대로 돌 벽이 올라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갈혜는 의아한 눈초리를 나를 돌아봤으나, 난 다시 다 른 여인의 몸매를 감상하는 척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 이 너무 부담스럽기도 했고, 아직 나 스스로도 확신을 하지 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연이려니 하며 시선을 지하석실 내부로 돌린 제갈혜는 주저 없이 신형을 동굴 안으로 날렸다. 동굴 내부 천장에는 어둠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야명주가 규칙적으로 박혀 있 어서 시야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없었다. 내부는 역시나 인 조적으로 놓인 것이 분명한 돌계단을 제외하고는 거의 천 연동굴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때 느꼈던 수 백 수천 년의 신비가 다시금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꿈속에서 본 현현자의 회상에서 본 광경과 한 치도 어긋 남 없이 일치하는 동굴내부 절경을 보며, 신기한 생각이 들 어 입이 근질근질 해졌지만, 잠자코 있기로 했다. 내가 현 현자가 되어 지하석실 내부를 누비는 장면을 꿈속에서 봤 다고 한들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다. 지하석실의 내부 천연동굴의 세계가 이루는 은은한 옥빛 의 석주와 석순을 다시금 보게 되니 그 감회가 남달랐다. 절색의 여인과도 같았던, 성난 파도와 같았던, 하늘로 승천 하는 용과도 같았던 석주와 석순을 차례 차례대로 보니 그 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구름다리처럼 공중에서 기 이하게 이어지고 있는 석주도 변함 없이 그 위용을 과시하 고 있었다. 꿈속에서 본 장면들이기는 하지만 다시금 봐도 그 감동은 줄어들지 않았다. 단지 이미 한 번 봤던 것이라 그런지 좀 처음 꿈속에서 느꼈던 그 강렬한 감동까지 느껴 지지는 않았다. 되새겨 본다는 즐거움이라고 해야할까?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정신이 팔려있던 나는 어느새 무리의 맨 후미로 떨어져 버렸으나 은월이 내 팔을 툭 치 며 말을 걸어온 통에 가까스로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되었 다. "지난번에는 고마웠어요. 시비꺼리가 생기면 환단 임상실 험자로 찍어버리는 냉월화 부궁주님 버릇 때문에 조심스럽 게 행동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어서 고맙다는 말씀도 못 드렸어요." "괜찮소. 난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일이고, 폐가 될 일 도 아니었으니 속에 담아둘 것도 없소." 솔직히 은월이란 여자애와 개인적으로 말을 나눠본 적도 없고 눈웃음만 한 두번 받아본 게 전부인데다가 흠뻑 젖었 어도 설익어 보이는 가냘픈 몸매가 그닥 끌리지 않는 나는 침묵을 지켰으나, 조금은 뾰롱통해 보이는 이 아이는 어떻 게든 말을 시켜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혹시 사월 언니가 왜 그렇게 작삼 공자님한테 화를 내 는지 아세요?" 공자? 부, 부담스럽게.....단수연 이후로 처음 듣는 말이지 만, 기분 나쁘지는 않군. "글쎄올시다. 전혀 감이 안 잡히는데, 내가 혹시 그대들 모르게 실수한 거라도 있소?" "아니요. 실은 말이에요." "......" "은월아!" "네 사월언니, 가, 가요." 그녀는 내게 그 이유를 말해주지도 못하고 의구심만 부 풀려 놓은 채 사월이 부르는 곳으로 달려갔다. 가면서 말을 못한 게 못내 아쉽다는 듯이 뒤를 연이어 돌아보았다. 도대 체 무슨 일이길래? 지하석실은 천연동굴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지만 인공 물을 부분적으로 가미함으로써 매우 완벽한 구조로 이어지 고 있었다. 천정에는 그 비싸다고 하는 야명주(夜明珠)가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어서 시야에 곤란을 느끼지 않도 록 배려해 놓았고, 돌계단도 자세히 보면 울통불통 돌기가 나 있어서 습기로 인해 미끄러지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한 참을 내려 가다보니 역시 돌계단이 끝나고 벽을 통과하는 지점에는 그 문을 지키고 있는 듯 조각되어 있는 사천왕상 이 양옆으로 서있었다. 그 앞에 선 제갈혜는 그 석문이 함정 기관으로 되어있음 을 단박에 알아보고는 일행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아마도 문 주변에 나열되어 있는 아홉 개의 돌기도 확인한 듯 싶 었다. 회상해보면 벽을 지날 때마다 사천왕 조각상이 반드 시 놓여 있어서, 그 때마다 현현자는 꼭 어딘가를 허공섭물 로 누르곤 했던 기억이 들었다. 지금 처음 사천왕상이라 제 갈혜는 나름대로의 법칙을 적용시키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 나, 그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모든 문을 통과해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법칙으로도 적용이 될 수 없 을 듯 무작위로 누르는 기분이 드는 아홉 개의 돌기들...... 내가 수상하게 여겼던 것은 양옆에 서있는 사천왕상이 매 석문마다 조금씩 그 모양이 달랐다는 것이었다. 비록 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문만 가졌을 뿐 끝 끝내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제갈혜라면 별로 어렵 지 않게 알아낼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녀에게 그 것을 슬며시 흘려주는 것이리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30 21:25:03 고친날 2005-07-25 18:10:26 읽은수 9068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9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4] "모두 아홉 개의 돌기가 나와 있는 것으로 봐서 구궁(九 宮)의 방위를 쓰고 있는 것 같군요. 어떤 원리를 썼는지 궁 금하기는 하지만, 갈 길이 급하니 편법을 써보기로 하겠어 요." 편법이라?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제갈혜는 혁낭속에서 병 하나를 꺼내더니 마개를 열고 솜뭉치 위에 노란 가루를 뿌리고는 물을 묻혀 질척거리게 만든 후 노랗게 물든 솜뭉 치로 아홉 개의 돌기 위를 가볍게 톡톡 두들겼다. 그러자 잠시 후 아홉 개 중 석문 오른 편에 있는 돌기 하나의 가 운데에 지장(指章)정도 크기의 동그라미가 빨간색으로 선명 하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 숨을 내쉰 그녀가 그 돌기를 누르려고 손을 갖다 대 려는 순간 현현자가 맨 첫 통로의 석문만큼은 좌측 사천왕 뒤에 있는 돌기를 허공섭물(虛空攝物)로 지긋이 눌렀던 게 떠올라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그만! 누르지 말아요!" 고함 소리는 동굴 벽면에 반사되며 한 동안 쩌렁쩌렁 울 려 퍼졌다. 제갈혜는 의외로 그 돌기를 누르지 않고 천천히 나를 돌아보았다. 누르기 직전 그녀 스스로도 상당히 긴장 했는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게 왠지 안쓰 럽기도 했다. "왜지요? 왜 누르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 그것은......" 내가 대답을 주저하자 마찬가지로 애가 바짝 바짝 타오 르고 있었을 남궁현이 내 멱살을 쥐며 흔들었다. "니가 뭘 안다고 아까부터 마음대로 껴들고 지랄이냐!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남궁 공자님 가만 두세요. 그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듣고 싶 어요." 제갈혜가 제지를 하고 나서자 남궁현은 마지못해서 손을 떼면서도 날카롭게 노려보는 시선만은 감추지 않았다. "작삼 점소이, 혹시 짐작 가는 것이나 아는 것이 있다면 그대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내 대답에서 뭔가 명쾌한 해답을 구하는 듯 반짝 반짝이 며 빨려 들어가 잠겨버릴 것 같은 심해보다 깊디깊은 눈망 울을 내미는 그녀 앞에서 그만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닌게 아니라 내 행동이 미심쩍었던 제갈혜는 모두가 지켜보는 앞인데도 불고하고 심안공(心眼功) 펼치기를 주저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미 한 번 당할 뻔한 경험이 있었던 나는 다급 히 눈을 감고서 심호흡을 한 후에야 다른 곳으로 눈을 돌 리며 입을 열 수 있었다. "아마, 그 돌기는 아닐 것입니다. 천운학 공자님이라면 꼭 손으로 누르지 않아도 멀찍이 서서 내공으로 눌러버릴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저기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사 천왕 조각이 아무 이유 없이 서있는 것이 아닐 거라고 봅 니다. 제갈혜 소저라면 반드시 뭔가 알 수 있을 겁니다." "사천왕 조각상?" 내가 던져준 한 마디를 곱씹으며 문에서 떨어져서 양옆 의 조각상을 살피던 제갈혜는 한참동안 심사숙고를 하더니 뭔가 알아낸 듯 바르르르 떨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했으나, 그녀를 안쓰럽게 지켜보고 있던 남궁현이 재빠르 게 뒤에서 그녀를 부축해 주었기에 간신히 서 있을 수 있 었다. "괜찮겠소? 제갈혜 소저?" "아......네, 고마워요. 남궁현 공자님." 그러나, 대답을 한 제갈혜는 남궁현에게서 바로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기댄 채 상당히 오랫동안 뜸을 들이면서 숨을 가다듬었다. 아직 채 경련이 가시지 않은 그녀의 손은 자신 을 부축한 남궁현의 손에 깍지까지 끼고는 그의 온기를 좀 더 음미하겠다는 듯 가만히 있었다. '크으으으 닭살이야. 이, 이것들이.....이젠 기어이 때와 장 소를 가리지 않고 지랄들을 하는구나. 누가 쟤네 좀 말려 라. 좀.' 이에 보다 못한 소방이 헛기침을 하며 혼잣말로 중얼중 얼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대로 있다가는 날 저물겠군. 여기서 야행을 해야 하나? 보아하니 습기가 가득 차 있어서 잠자기도 마땅치 않네. 아, 그냥 다시 올라가서 자고 내려오면 되겠구나." 그 말이 자신들을 간접적으로 탓하는 것임을 알아챈 제 갈혜는 남궁현에게서 떨어지기는 했지만, 실눈으로 소방을 한껏 째려보기를 잊지는 않았다. 소방도 이에 질 새라 그녀 를 마주 째려보았고, 한동안 이어질 듯 하던 신경전은 제갈 혜가 순순히 한 발 물러섬으로써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녀는 석문을 향해서 자신 있게 걸어가더니 좌측 사천 왕 조각상 뒤편에 위치한 돌기 앞에 섰고, 누르기 직전 나 를 돌아보고는 내가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않자 그것을 지긋이 눌렀다. 그그그그긍 쿠쿵! 가로막혀 있던 석문은 요란한 굉음을 내며 열렸고, 초조 와 긴장 속에서 애를 태우고 있던 무리들의 안면에 안도의 빛들이 비쳐졌다. 그 중에서도 남궁현이 제일 기뻤는지 그 대로 뛰어 내려가서 제갈혜를 꽉 껴안는데, 오옷 닭살이..... 다다다다닥.....돋는 소리가 역력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그를 가만히 제지하며 입 을 열었다. "작삼 점소이가 지적해주지 않았다면, 온기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손자국을 이용한 저희 가문의 비전 가루를 사용 해서 그대로 눌러버렸을 거에요. 그럼 전 고슴도치 신세가 되었겠군요. 이 문 주위를 잘 둘러보면 아는 게 없는 불청 객이 겁도 없이 아무거나 눌렀을 경우 비침이 날아오도록 장치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당신의 말대로 이 조각상을 잘 눈여겨보니 이들의 동작은 바로 그 누구나 알기에 쉽게 지 나쳐 버리고 마는 삼재검법의 모습을 취하고 있더군요. 여 기 좌측의 사천왕상은 삼재검법(三才劍法)중 스물 네 번째 초식에 해당하는 순수추주(順水推舟)의 자세를 시전하고 있 으며, 우측의 사천왕상은 네 번 째 초식의 풍권잔운(風捲殘 雲)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지요. 그 차는 왼편의 사(四)! 일 백, 이흑, 삼벽, 사록, 오황, 육백, 칠적, 팔백, 구자의 구성 (九星) 구궁(九宮)의 방위를 따라 왼편에서 사록의 위치로 돌리면 사천왕상 뒤편 돌기가 나오지요." 나는 그녀가 하는 말에 따라서 눈을 깜빡 깜빡 거리며 고개를 끄떡였지만, 이해를 해서 끄떡거린 게 아니라 너무 길고 어려워서 그만 나도 모르게 꾸벅거리며 존 것이었다. 그냥 넘어가도 되는 것을 왜 이렇게 어려운 말까지 해가며 설명을 하려 드는 것인지 좀처럼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작삼 점소이, 응당 고맙다는 말을 우선 해야하는 것이 순서인 것은 알지만, 그보다 먼저 이 원리를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군요. 대답해 줄 수 있겠어요?" 꾸벅 꾸벅 졸다가 나를 부르는 그녀의 소리에 시선을 맞 췄다가 그만 내 정신이 밑도 끝도 없는 아득한 낭떠러지로 빨려드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제갈혜 이 년이 제대로 심안공(心眼功)을 펼쳐왔는데, 나는 졸면서 그 녀의 눈을 바라봤으니 제대로 걸려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다. 그러나, 단지 그 이유 뿐만은 아닐 것이었다. 주변의 모 두가 나를 의심스럽게 보고서 제지를 해주지 않은 까닭에 바로 걸려들기도 했을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소방조차 나 를 의심하고 있다는 말도 되었다. 심안공에 걸려든 순간에 도 그 생각이 아련히 떠오르자 씁쓸하면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묻겠어요. 작삼 점소이, 이 석문을 여는 방법을 어떻게 알았지요?" "저, 저는 그, 그 석문을 여는 방, 방법 같은 것은 몰랐어 요. 다, 다만 여는 순간을 꿈속에서 보면서 느꼈던 적이 있 어요. 사, 사천왕상이 뭔가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말이에 요." "다시 묻겠어요. 꿈속에서 본 것이 확실히 지하석실의 이 문이었나요?" "네." "......" 제갈혜가 눈을 감으면서 시선을 돌리자 아득한 심해 깊 숙한 곳에 잠겨들었던 정신이 간신히 되돌아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랄까? 마치 내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서 바 다 속을 한 바탕 휘젓는 기이한 기분이랄까? 그다지 나쁘 진 않았다. 앞으로도 종종 제갈혜한테 심안공을 펼쳐 달라 고 해볼까? 뭐 그 의도가 기분 나쁘긴 했지만 어쩔 수 없 었다. 그냥 잊어버려야 하는 일일 뿐. 그녀는 여전히 나에 대한 궁금증을 털어 버리지 못했는 지 의문이 가득 찬 모습이었지만, 꿈속에서 보았다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말에 그냥 우연히 상황이 맞아 떨어졌나 보 다 하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당신을 의심해서 죄송해요. 고맙군요, 덕분에 위험한 순 간을 넘겼어요." 제갈혜는 사과와 함께 나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가 펴며 남궁현과 함께 문을 지나갔다. 조금 의외이긴 했다. 도도한 자존심과 높은 콧대를 지녔 을 제갈세가(諸葛世家)의 영애면서 중원제일지(中原第壹智) 에 해룡(海龍)이라는 말까지 듣고 있는 제갈혜가 일개 점소 이에 불과한 나에게 정중히 허리를 굽혀 왔다는 것은 나름 대로 파격적인 처우로 보였다. 구룡들이 내 곁을 지나갔으나, 그녀의 파격적인 처우에 놀라 굳어있는 내 등을 냉월화 누님이 살짝 두드려주며 지 나가서 간신히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1-30 23:55:26 고친날 2005-01-31 04:20:33 읽은수 9310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95)-마교 난입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5]마교 난입 첫 관문을 통과한 이후부터는 일사천리로 하나 하나 열 어나갈 수 있었다. 앞서 나간 천운학 소맹주 일행과 멀어졌 을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 서둘렀기에 주변 경관 을 감상할 시간도 없이 뛰어서 내려가야만 했다. 그러나, 다섯 번째 관문을 통과하려는 찰나 그 누구도 예 상치 못한 의외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예 견되었던 일일지도 모른다. 단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뿐 일 것이다. 우리 일행이 지나가고 난 이후로 자동으로 닫혔을 석문 이 스르릉 열리면서 일단의 흑의인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어림 잡아도 근 오십 여 명에 이르는 수의 인원이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선두에서 뒷짐을 지 고 내려오는 중년인의 기세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곽철 대협이 검을 뽑아들고 무리의 앞에 서자 적미호가 바로 그의 뒤에 몸을 숨기는 것이 보였다. 석문을 통과하려 고 돌기를 막 누르려던 제갈혜는 이마를 지긋이 짚으며 한 숨을 쉬고는 선두에 앞서 오는 중년인에게 말문을 열었다. "저는 제갈세가(諸葛世家)의 장녀이자 무림맹(武林盟) 현 무조(玄武組) 조장을 맡고 있는 제갈혜라고 합니다. 어디서 오신 누구 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제는 유명무실(有名無實)해진 게 뻔한 무림맹 명예 조 장 직책을 구태여 언급한 것은 아마도 우리의 뒷 배경이 무림맹이라는 것을 은근히 상대방에게 압력을 넣기 위한 그녀 특유의 말 빨로 비쳐졌다. 그러나, 상대는 무림맹이라는 말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 고 성큼성큼 내려왔기에 제갈혜를 매우 당황스럽게 만들었 다. 오 장거리까지 내려온 중년인은 콧수염을 매우 멋지게 길러 다듬었고 머리에도 기름을 잔뜩 발랐는지 야명주의 은은한 빛에조차 반사가 되어 반들 반들거렸다. 생김새도 미남이란 말까지는 못 들어도 남자답게 생겼다고 할 만치 올곧아 보이면서 날카로운 한 자루의 칼 같다는 느낌이 들 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나 말인가? 흠, 해룡(海龍)이라고 불리는 제갈혜 소저가 직접 자기 소개를 해왔으니 내 소개를 하지 않을 수 없군. 난 마교(魔敎) 부교주를 맡고있는 원호영(原豪永)이라하네." "그, 그러시군요. 그런데, 무슨 일이시지요?"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테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적미호 소저를 순순히 보내주길 바라네." 그의 말에 제갈혜는 좀 고심을 하는 것 같았다. 그냥 보 내주자니 곽철 대협이 가만 안 있을 것이고, 그렇다고 데리 고 있자니 필연적으로 저들과 싸워야만 할 것이었다. 그녀 의 고충을 바로 헤아린 곽철 대협이 즉시 앞으로 나서며 원호영 부교주에게 말했다. "적미호 소저의 일은 이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소. 따라서 나와 해결을 보면 되는 거요." "오호, 제법 잘 가다듬어진 하나의 검과 같은 사나이로 군. 나도 검으로 한 일가를 이루었다고 자부를 하지만, 자 네 또한 나에 비해 그다지 부족하지 않은 듯 싶군." "칭찬은 고맙지만, 장소가 좋지 못하군요. 올라가서 계속 말을 하도록 합시다." "그거 좋지." 원호영은 순순히 곽철 대협 말대로 왔던 길로 되돌아 올 라가고 있었다. 곽철 대협 역시 그런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뒤따르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제갈혜의 신형이 돌계단 옆을 스치며 날아오르더니 곽철 대협의 앞을 가로막아 버리는 것이었다. "곽철 대협은 잠시 기다리세요. 원호영 부교주님 한 가지 여쭙지 않을 수 없는 게 생각났습니다." "무엇인가?" "바깥에 무림맹 현무조원 오십 여 명이 입구를 막고 있 었을 텐데, 어떻게 들어오셨나요?" "하하하하하!" "......" "왜 그들의 생사에 대해서 묻지 않는지 의아스러웠지. 간 단하다. 거치적거리면서 귀찮게 붙어와서 모조리 내 손으로 잠재워 버렸지. 부하들 손을 빌릴 것도 없을 정도로 허약하 더군." "......" 챙 제갈혜의 손에서 검이 뽑혀지자, 이대로 갈라설 듯 했던 분위기가 판이하게 바뀌어 버렸다. 즉시 남궁현과 모용천풍 이 그녀 곁에 내려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제갈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이것은 명백히 무림맹의 영역에 대한 고의적 침입입니 요! 이 일은 곽철 대협의 개인적 용무를 떠나 무림맹 전체 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군요!" "바라던 바다. 한 산에 두 마리 호랑이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이었지. 내 신부도 돌려 받을 겸 잠들어 있는 불 씨도 일깨울 겸 한바탕 피의 춤을 추는 것도 좋겠군." 원호영의 태도는 명백히 도발적이었으며, 어투 속에서도 계획적으로 시기를 봐서 저질렀다는 암시가 들어 있었다. 하기사 망아루 앞에서 추혼대인지 뭔지 하는 애들이 쓸려 버리고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즉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노림수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바로 무림맹 아해 들과 다시 만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충돌꺼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정파 애들이랑 사파 애들이랑 다구리 붙는 거야? 이거 재미있겠는걸.' 나야 어느 쪽도 아니니 이들이 서로 박 터지게 싸우건 말건 내 알 바가 아니긴 했다. 단지 곽철 대협과 소방이 그 가운데 껴져 있는 게 조금 걱정되었고, 남궁현의 목숨이 붙 어 있느냐 마느냐 도 관건이기는 했다. 뭐 그의 팔 다리 하 나 정도 절단되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목숨만 붙어서 나가 면 그만이니 말이다. 원호영을 비롯한 흑의인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들며 구룡 일행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커지자 뒤서거니 있던 소방과 당가희도 뛰어들어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월녀궁 일행은 지난번처럼 구경만 하고 있 을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그들마저도 검을 뽑아들고 나서 는 것이었다. 냉월화 누님이 요대처럼 차고 있던 연검을 뽑 아들며 날아오르자 사월을 비롯한 월녀궁 여인들도 그녀 뒤를 따라서 동굴벽면을 박차며 일제히 신형을 날리고 있 었다. 채챙 챙챙 채채챙 원호영이라는 자에게는 남궁현과 제갈혜뿐만 아니라 모 용천풍까지 붙어 합격 검진을 만들어 검을 휘날렸으나, 한 점도 우위를 차지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수가 많 은 제갈혜 일행이 밀리는 듯한 분위기까지 보였다. 원호영 부교주의 기세는 구룡중 세 명이 합쳤는데도 좀처럼 당해 내질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그는 사파에서도 높 은 고수반열에 드는 사람이란 뜻일 것이었다. 반면에 소방이나, 곽철 대협, 냉월화 누님 쪽은 압도적이 었다. 상대방 쪽에는 원호영 부교주 다음 선에서는 단독으 로 구룡을 당해낼 만한 사람이 없었는지 세 네 명이 한 조 를 이루며 우리 쪽 다른 고수들을 간신히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월녀궁 여인들은 냉월화 누님 주변에서 틈새를 노 리고 들어오려는 다른 흑의인들의 공세를 막아내며 기묘하 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쌍방 간 피가 튀 는 접전도 아니었고, 소리만 요란할 뿐 형세만 그렇게 보였 다는 것이었다. 채챙 챙챙 차차차창! 챙챙! '야, 누구 피 좀 뿜으면서 좀 쓰러져라. 왜 이렇게 재미없 게들 싸우는 거야?' 그냥 보기만 하려니 허전했던 관계로 뒤춤에서 육포를 두 어 개 꺼내서 하나를 질겅질겅 씹으며 관전에 몰입하려 는 찰나 옆에서 내 육포 하나를 뺏더니 그대로 털썩 앉아 서 전황을 살피는 그녀의 모습도 보였다. "저기 여보시오. 좀 찔리지 않수? 당신 때문에 저렇게들 싸우는 거 아니요?" 내 지적에 무슨 자다가 봉창 뚜드리느냐 는 식으로 새치 름하게 눈을 반짝이던 적미호가 육포를 입에 문 채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왔다. "나 무공 못 해. 맨날 몸매랑 피부 가꾸느라 무공 같은 것은 그저 간단한 호신술 몇 가지랑 간단한 경공만 조금 익혔을 뿐이야. 내가 저기 꼈다가는 큰 일 나." "무슨 큰 일 말이오?" "실전으로 검 들고 싸웠다가는 손에 물집 잡히면서 굳은 살 박힌단 말이야. 한 번 박힌 굳은 살 빼려면 장난이 아니 야. 그런데, 넌 왜 육포까지 물고서 구경하는데?" "그걸 몰라서 묻는단 말이오?" "엉, 몰라." "임시 짐꾼으로 고용된 처지 아니오? 내가 죽으면 짐은 누가 든단 말이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1-31 23:54:10 고친날 2005-08-03 23:10:32 읽은수 9316 [ 14 K ] 제목 점소이 작삼(9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6] 내가 적미호와 나란히 느긋하게 육포나 뜯으면서 전황 관람을 할 수 있는 이면에는 우리 쪽 일행의 우위에 대한 확신과도 같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연찮게도 구룡 (九龍) 중에서 제갈혜와 남궁현, 모용천풍 그리고, 검귀(劍 鬼)라고까지 불리는 곽철 대협까지 네 명이 한 자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거의 같은 급이거나 그 이상이라고 보이는 냉 월화 부궁주까지 껴져 있으니 구룡이 다섯 명은 몰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월녀궁 여인들이 펼치는 합격 검진(合擊劍陳)도 만만찮은 기세를 보여주고 있었으며, 일 견하기에 뒤에서 당가희가 거치적 거리 듯 비표를 날리고 있었어도 그녀가 날린 비표를 막느라 상대 검수(劍手)들은 압도적으로 많은 머릿수를 살리지 못한 채 선기를 계속 놓 치며 밀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돌계단을 합치고라도 협소하기 그지없는 동굴 공 간은 인원이 많다는 상대방의 이점을 최소한도로 억제해 주고 있었다. 다만 바닥이 미끄럽기 때문에 발을 잘못 딛으 면 그대로 엎어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것은 비단 아군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닐 것이기에 그냥 덮 어두었다.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이라면, 원호영(原豪永) 부교주라는 작자가 세 명의 아군 고수를 묶어놓고 있으면서도 안면에 여유가 가득하다는 사실이었다. 이렇게 팽팽한 가운데에서는 한 쪽이 조금 우위에 놓이 기 시작하면 강둑에 구멍이 나서 차츰차츰 무너져 가듯 상 대방을 압도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가능성의 변수가 될 인간이 원호영이었던 것이다. 챙! 아니나 다를까? 내 딴에는 그저 걱정이 조금 된다는 정 도였는데, 그 인간은 육포를 입에 물고 즐겁게 관전중인 나 를 보며 불안하게 코웃음을 치더니만,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어느 새 놀고 있던 왼손에 또 하나의 검을 꺼내 들었 다. 검 하나 만으로도 백룡, 해룡, 적룡 세 명을 묶어버리는 그가 하나의 검을 더 꺼내들고 제갈혜를 향해 휘둘렀는데, 무식하게도 검날로 베는 게 아니라 검신으로 제갈혜의 옆 구리를 후려쳐서 날려버리는 게 아닌가! 뻐억! "꺄아악!" "제갈혜 소저!" "우아악!" 제갈혜가 중심을 잃고 나를 향해 튕겨 오는 것을 보고는 얼른 피하려고 했지만, 몸을 일으키고서 발을 채 떼지도 못 한 굽힌 상태 그대로 같이 나뒹굴어 지고 말았다. 물론 그 녀가 돌 바닥에 굴러서 받았을 충격을 내가 고스란히 받고 도 모자라 여기저기 동굴 모서리에 정통으로 찍혔기에 그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당, 당연하지. 이, 이 상황에 말, 말이 나, 나오면, 그게 인간이야?' "어이, 임시 짐꾼 점소이, 괜찮아? 갈비뼈 박살난 데 어 디 없어?" '니, 니가 보기엔 괜, 괜찮아 보이냐? 나 대신 니가 받아 봐라.'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조용히 즐기고 있는 내가 아니 꼬왔는지 제갈혜를 무슨 갖고 노는 공처럼 날려버린 원호 영 그 놈의 고의적 의지 덕택에 본의 아니게도 내 배때기 위에는 검신으로 맞는 순간 기절해버린 듯한 그녀가 엎어 져 있었다. 평상시라면 이 압박감을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 일 지도 모르지만, 팔십 근은 너끈히 나갈 그녀와 오 장의 거리에서 제대로 충돌하고서 등뒤로 돌 바닥을 받아버린 내 심신에 가해진 충격은 이만 저만 큰 것이 아니었기에 어서 그녀를 내려줬으면 하는 바램으로 적미호를 애처롭게 쳐다보며 애걸복걸 입을 열었다. "좀, 좀 내, 내려......주, 주세요." 숨쉬기도 힘든 상황에서 간신히 말을 뱉아 냈더니 적미 호 이 년이 나한테 쌓인 게 많았는지 다르게 해석을 하고 있었다. "뭐? 기분이 째진다고? 나도 올라타라고? 그럼, 누구의 부탁인데, 감히 내가 거절하겠어?" "아, 아니......" 적미호까지 기절해버린 제갈혜 위에 그대로 엎어지더니 고통으로 일그러진 내 안면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희희덕 거리는 게 보였다. '니기미......'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며 전장으로 눈을 돌리자 제갈혜의 빈자리에는 어느 새 곽철 대협이 뛰어 들어 검을 날리고 있었다. 제갈혜에서 곽철 대협으로 바뀌었을 뿐 삼재진(三 才陳)의 형태는 그대로였지만, 기세가 판이하게 달라져서 쌍 검을 휘두르는 원호영에게 전혀 밀릴 기색이 보이지 않 았다. 말 그대로 이게 검귀(劍鬼)라는 명성의 무게였던 것 이다. 그 네 명이 어우러진 곳의 기세가 제일 엄중하고 날 카로와서 정확한 검의 움직임들은 상세하게 잡히지 않았다. 그저 두 명이 치면 한 명이 막고, 매서운 공격이 들어오 면 두 명이 막는 새 다른 한 명이 기습적인 반격을 가하고 있다는 정도만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전에 같이 연습 해 본 적이 없을 텐데,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보기라도 한 듯 척척 죽이 잘 맞아 떨어졌다. 아마 저 곳은 안심을 해 도......아뿔싸! 대신에 곽철 대협이 막고있던 자리가 뻥 뚫려서 무주공 산(無主空山)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 옆에는 소방의 봉이 흑의인들의 접근을 허용치 않고 있었지만, 곽 철 대협이 맡고 있던 공간이 워낙 넓었기에 그 공백을 단 번에 메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한 흑의 검수가 빈틈 을 헤집으며 남궁현을 향해 신형을 날리는 모습이 보고 말 았다. '아, 안 돼!' "비, 비켜요!" "싫어. 여기서 우거지상인 자칭 임시 짐꾼 아무개 점소이 얼굴을 내려다보는 게 훨씬 재미있어." '그래, 퍽도 재미있겠다. 구룡 일행이 다치건 마교도들이 다치건 아무 상관이 없다는 니 태도가 충분히 납득은 가는 데, 날 귀찮게는 하지는 말아야 할 거 아니야!' 내가 바둥바둥 거리는 사이 우리측의 후방에서 비표를 날리며 지원을 하던 당가희가 재빨리 튀어나오는 흑의인에 게 비표를 연이어 날려 주었기에 그것을 튕겨낸 상대방은 잠시 주춤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사전 상황에 따른 묵계가 있었는지 뒤로 한 걸음 더 물러서며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흑의인의 뒤에서 다른 흑의인 두명이 당가희를 노리고 비 수를 날려왔다. 암기를 주로 사용하는 당가희가 비수를 피하는 일은 어 렵지 않았으나, 그녀가 피하느라 공세를 멈춘 사이 주저앉 아있던 흑의인이 신형을 일으켜서 다시 남궁현에게 달려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후춧 가루!" "어맛!" 그녀의 약점을 외치자 적미호 자신도 모르게 당황했는지 그만 무의식중에 물러섰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절한 제 갈혜를 밀쳐낸 나는 그 흑의인을 향해 발운담일(撥雲膽日) 을 펼쳐서 몸을 앞으로 디밀며 그의 옆구리를 향해 철봉을 날렸다. 퍽! "커헉!" 남궁현만을 노리고 달려들던 그로서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은 짐꾼이 철봉으로 자신의 옆구리를 질러 버리자 미쳐 신형을 틀지 못하고 어이없게 한 방 먹어버린 것이었다. 단 지 그 녀석은 내 철봉을 맞고도 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지 쓰러진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일어나서 검을 무자비하게 찔러왔는데, 검이 어디서 찔러오는지 뻔히 보이면서도 몸이 따르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이란......! '몸아 제발 말 좀 들어!' 슉! 처음 한 번은 억지로 몸을 틀어서 옆구리 사이로 검봉을 흘려버릴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 연환되어 찔러오는 공 세들이었다. 한 번 움직인 몸이 중심을 채 잡기도 전에 다 시 찔러오는 검봉을 바라보니 아찔한 노릇이었다. 당연하다 일개 점소이가 마교도 고수를 상대하겠다고 뛰어든 것 자 체부터가 상당히 잘못된 일이었던 거다. 처음 공격이 우연 히 먹힌 것은 상대방 흑의 검수가 적수가 없다고 마음을 놓고 들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기랄! 여기까지인가? 뭐 그래도 최선을 다 했다. 이후 에 남궁현이 뒤지건 말건 알 바 아니지. 후훗.' 피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좌절하려는 그 짧은 찰나 흑 의 검수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버리는 바람에 주인을 잃 은 몸뚱아리는 뒤로 나뒹굴며 부르르 떨다가 영원히 침묵 에 빠져 들었다. "작삼, 정신 차려! 단 한순간이라도 검에서 눈을 떼지 마 라!" "으, 으응." 흑의 검수 머리를 날려버린 것은 역시나 소방의 봉(棒)이 었다. 내가 위기에 처하자 잠시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 상 대방 머리를 날려버리고서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것 이었다. 사방팔방에 피가 튀고 있는데도 그가 곁에 있다는 것을 떠올리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살포시 지어졌다. "작삼 점소이, 어서 뒤로 빠져!" 당가희의 고함 소리에 즉시 뒤로 빠지면서 날아올 암기 의 섬뜻함을 생각하며 한 쪽 다리를 굽혀 몸을 낮추자 마 자 귓가를 가로지르는 비표들이 그 자리를 매웠으나, 결단 코 눈을 떼지는 않았다. 방금 같이 기습적인 묵계로 들어온 다면 나 역시도 방금 같이 막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처럼 별 충격도 주지 못하는 내 공격이 먹혀 들리는 없지만, 옆에서 봉을 자유자재로 신체의 일부처럼 휘두르며 찔러대는 소방이 있는 한 안심하고 공격할 수가 있을 거라 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되자 전황은 어느 쪽의 우세라고 보기 어려울 정 도로 다시 팽팽해져 버렸다. 돌계단의 우측 날개는 타구봉 법(打狗棒法)으로 틈새를 좀처럼 주지 않는 소방과 그와 중 앙의 벌어진 간격을 쉴새없이 비표를 날림으로써 매워주고 있는 당가희, 그리고, 그냥 들러리이긴 하지만, 간간이 등장 해서 그 존재만으로도 상대 검수들을 혼란에 빠트리는데 앞장서고 있는 이 몸이 그럭저럭 막아내고 있었고, 좌측 날 개에는 냉월화 부궁주를 주축으로 한 월녀궁(月女宮) 여인 들의 화려한 합격검진(合擊劍陳)이 우세적이어서 조금씩 밀 어붙이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중앙은 쾌(快)와 강(剛)이 적절하게 섞여 그 위력이 변화무쌍하면서 매섭기로 뒤지지 않을 요상한 쌍검을 휘두 르는 원호영 부교주가 곽철 대협을 중심으로 남궁현, 모용 천풍이 뭉친 삼재진(三才陳)을 조금씩 조금씩 거세게 압박 해 오는 것이 느껴졌다. 세 명의 구룡을 상대로 하는데도 우위에 있다는 것은 설마......? 관건은 좌측 날개를 맡은 월녀궁 여인들이 상대방 흑의 검수들을 쓸어버리고 중앙으로 쇄도하느냐? 아니면 중앙의 원호영 부교주가 삼재진을 무너뜨리고 좌우를 무너뜨리느 냐?......였다. 내 눈에 보일 정도라면 이미 모두들 인식을 하고 있을 터, 전장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긴장감이 더해져 더욱 날카로와져 가기만 했다. 그그그그긍 쿠구궁! 뒤에서 석문이 올라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보다 앞서 서 들어간 인간들이라면 천운학 소맹주 일행이거나, 수라삼 살(修羅三殺)일 터였다. 다른 사람들은 앞의 마교도 흑의 검수들과 조금이라도 방심해서는 안 되는 원호영 부교주와 날카롭게 대치하느라 미쳐 돌아볼 수 없었지만, 여유가 넘 쳐흘렀던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같이 가도 되는 것을 싸가지 없게 먼저 들어가 버린 천 운학(天雲鶴) 소맹주와 종리연을 비롯한 무림맹 아해들이었 다. "요란한 소리가 들려서 되돌아와 보니 상호간에 쓸 때 없는 피를 흘리고 있었구려. 이제 그만 무기들을 거두고 한 발자국 씩 물러섬이 어떠할까요?" 천운학의 갸름하면서 소름 돋는 미성을 들은 무리들은 이미 충분히 지쳐있었으므로 그의 말대로 조금씩 물러섰다. 긴장이 풀려서 한숨을 내쉬며 우리측 일행의 피해 상황을 보니 기절해서 차가운 동굴 바닥에 누워 있는 제갈혜를 제 외하고는 특별한 사상자가 없었다. 그러나, 압도적인 우위를 펼친 냉월화 부궁주와 소방, 그 리고, 뒤에서 비표를 날리느라 직접적인 타격을 안 받은 당 가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약간씩 검상을 입었는지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백의 경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월녀 궁 여인들은 붉은 얼룩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있어 안타 까움이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물론 사월이 년은 빼고...... 반면 상대방은 바닥에 누워서 신음하는 자만을 빼고도 누워서 굳어있는 녀석들만 해서 십 여 명은 되어 보였다. 피해 상황만 따져 본다면 이 쪽의 승리였지만, 중앙을 맡고 있던 곽철 대협과 남궁현을 보니 상처가 가볍지 않아 보였 다. 남궁현도 백의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붉게 물든 부분이 많았지만, 뭐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되니까 불쌍하다거나 안 타깝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들지 않았다. 모용천풍이 별 상처가 없는 것이 의외이긴 했지만, 아마도 시간을 더 끌었 으면, 상호간에 피해가 얼마나 속출했을 지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세 명의 구룡을 동시에 상대하고도 우세를 유지하는 쌍 검수는 흔하지 않지요. 육마(六魔)중에서도 신분이 은밀하 다는 쌍검광마(雙劍狂魔)선배 아니시오?" "하하하하! 나를 단번에 알아보다니 놀랍군. 그대의 기세 야말로 이 중에서 으뜸이면서도 한 단계는 우위에 있으니 십성(十聖)중 한 명이라는 무림맹(武林盟) 소맹주 천운학 공자가 아닌가?" 천운학과 원호영의 호기로운 대화로 인해 원호영이 육마 (六魔)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쌍검광마(雙劍 狂魔)라......광룡(狂龍) 곽철 대협에 이어서 미칠 광(狂)자가 들어가는 인간이 또 있었다니! "그런데, 쌍검광마(雙劍狂魔)선배님께서는 어인 일로 이 곳에 어려운 행차를 하셨는지요?" "교주님께서 내려주신 내 신부를 찾으러 왔지. 돌려줄 수 있겠나?" "흑의를 걸치고 새치름하게 앉아있는 미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네. 그녀만 돌려주면 조용히 돌아가도록 하지." 천운학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적미호를 내려다보자 그 녀는 몸서리를 치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 리건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는 분위기를 느꼈음이리라. 더 불어 곽철 대협의 이맛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해석을 내려야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의 자존심 상, 한 번 지켜주기로 한 여자를 타인의 의지로 뺏긴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제가 보기에는 저 정도 미녀는 마교에 널리고 널렸을 것 같군요. 다른 목적이 있으시다면, 그 말씀대로 따르지요. 정녕 저 여인 자체가 목적이십니까?" 천운학 소맹주의 반문에 원호영 부교주가 코웃음치면서 도 눈은 오히려 날카롭게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아픈 데를 찔렸다는 듯이 말이다. "물론 아니긴 하지. 적미호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다면 그녀에 대한 것은 여기서 다 잊어버릴 수도 있지. 거부한다 면,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마교도들까지 다 불러 들여서라 도 생사결을 할 수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결정은 그녀 스스로 내리게 하도록 하지요. 정 안 되면 부교주님께 강제로 인계해드리는 수밖에 없긴 하군요. 지금 상황이 우리 쪽도 그렇게 여유부릴 때가 아니 라서 말이지요." 강제로라도 인계할 수도 있다는 천진학의 말이 결정타가 되었는지 축 늘어져있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풍만한 가 슴을 가린 앞섶을 아슬아슬한 선까지 풀어내며 꺼낸 것은 용이 새겨진 동그란 금패였다. 소중하다는 듯이 두 손에 금 패를 꼭 쥐고 있던 그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곽 철 대협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건네 주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고서는 적미호에게 고개를 끄떡여 보이고는 원호영 부교주에게로 다가가 정중하게 건넸다. "우하하하하!!" 금패를 받아든 쌍검광마(雙劍狂魔), 원호영 부교주는 호 쾌하게 장소를 터뜨렸는데, 그로부터 십 여장 거리에 있던 내 귀가 다 멍멍할 지경이었다. 천운학이 원호영을 향해 포권을 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경하 드립니다. 드디어 마교 교주가 되셨군요." "하하하하! 어린것이 눈치가 빠르구나. 그렇다. 본좌는 이 제부터 정식 마교 교주가 되었다. 항상 조용한 것을 좋아하 던 전대 교주로 인해 다른 사파 녀석들까지 덩달아 침묵을 지키는 바람에 중원은 너무나 긴 평화를 유지해 왔다. 이제 는 피 바람을 불러일으킬 때가 도래한 것이지." 방금 전까지 자칭 마교 부교주라던 녀석이 금패 하나를 받았다고 해서 교주라고 불리게 되다니 이게 무슨 소린지 어안이 다 벙벙할 지경이었지만, 나를 제외하고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이해를 한 듯 싶었다. "그 생각에는 저도 동감합니다만, 교주께서는 전대 교주 로부터 정식 인계를 통해서 이어진 것이 아닌 만큼 교내의 반발세력들부터 진압을 하셔야할 겁니다. 못 해도 한 해 동 안은 마교 내 세력들을 통합하는데 힘을 기울이셔야 할 테 니까 준비가 되시면 언제라도 선전포고를 하시지요." "흠,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구나. 그래도 맘에 드는구나. 하하하하! 그런데 말이지 혹시 아느냐? 조만 간에 또 보게 될지. 사람의 앞일이란 함부로 추측하기에는 너무 오묘하단 말씀이야. 일단은 수고들 해라." 말을 마친 자칭 마교 교주, 원호영은 뒷수습을 한 흑의 검수들을 이끌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사라 지자 천운학은 가소롭다는 듯이 눈웃음지으며 바닥에 기절 해 있는 제갈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이런 여인의 몸으로 차가운 바닥 위에서 잠드는 것은 건강을 해치는 일이지." 퍽! "꺄아아악!" 천운학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기절한 제갈혜의 다친 옆구리를 다시 걷어차 올려서 깨우는 거친 방법을 사용 한 것에 대해서 놀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그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 파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궁현이 이를 악물고 달려나가 비명을 지르며 날아오른 제갈혜를 받아든 것을 빼고는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 이거 냉월화 부궁주님께 안 좋은 모습을 보여드렸군 요. 그렇지만, 원래 말을 안 듣고 기어오르려했던 부하에게 는 매가 약이라는 것을 잘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 "모용천풍 공자와 소방 공자는 일이 좀 생겼으니 날 좀 도와주도록 하시오. 다른 분들은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그는 모용천풍과 소방을 데리고서 들어왔던 석문으로 다 시 나가 버렸다. 물론 그를 따르고 있던 무림맹 아해들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제갈혜의 신음이 가라앉을 때 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가기로 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2-03 10:42:55 고친날 2005-02-03 10:42:55 읽은수 9463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9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7] 자칭 마교 교주라고 선언한 원호영의 검신에 휘갈겨지고, 간사함이 넘쳐흐르는 소맹주에게 다시 한번 거칠게 걷어차 인 제갈혜(諸葛慧)의 옆구리는 부었던 상처가 심하게 터졌 는지 새빨간 피가 한 방울씩 뚝뚝 떨어져 내렸다. 질겁을 한 남궁현(南宮炫)이 혁낭에서 붕대와 금창약을 꺼내들자 일편단심 민들레 당가희(唐佳喜)가 발 빠르게 나서서 제갈 혜의 옆구리를 소독하고 금창약(金瘡藥)을 바른 뒤 붕대 매 는 일을 도왔다. 지나치게 호들갑을 떠는 그를 보니 눈깔이 썩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쳇, 야, 야, 니네 눈깔에는 다른 인간들이 피로 절은 것 은 안보이냐? 너무 티내는 거 아냐?' 남궁현이 훔쳐보면 죽는다는 의지를 내포한 눈빛을 휘날 리는 여자의 속살구경보다 원호영 부교주가 손에 쥐면서 자신이 교주라고 장소를 터뜨리게 만든 금패에 더 관심이 쏠렸던 나는 넋 나간 사람처럼 한 숨만 푹푹 내쉬는 적미 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적미호 소저, 그 금패가 그렇게 중요한 물건인가요?" 내 질문에 힘없이 고개를 돌린 적미호는 말할 기운도 잃 었는지 그저 보일 듯 말 듯하게 까딱거리기만 하고는 더 이상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금패를 갖고 있으면 마교 교주로 인정받는 것인가 요? 왜 적미호 소저가 갖고 있을 때는 아무런 효력이 없었 나요?" 내게 있어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지만, 착 가라앉아 버린 분위기가 짜증나서 그녀가 아무 말도 안 해줄 거라는 기분 이 들면서도 그저 생각나는 데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아마도 마교 교주의 신물일 거야. 오로지 교주에 게서 다음 대 교주로만 전해진다고 들었는데, 그 신물이 수 양딸의 손에 들려졌고, 그것을 부교주가 뺏으러 왔다는 것 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야." 잠자코 월녀궁 여인들의 부상 정도가 미미한 것을 확인 한 냉월화(冷月花) 누님도 이런 분위기가 맘에 안 들었는지 반갑게도 말참견을 하며 껴들어 왔다. "뭔 데요? 누님?" "이전 마교 교주의 사망, 자세한 속사정이야 동생 옆에 있는 여우 아가씨가 잘 알겠지." 냉월화 누님이 장난치듯 여우 아가씨라고 했으나, 내 질 문 따위에는 묵묵부답이던 적미호는 비수를 심장에라도 맞 은 듯 부르르 떨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만! 날 여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교주 할배 밖에 없어. 할배 이외에는 그 누구도 날 여우라고 불러서는 안 돼!" '교주 할배? 어제는 변태 교주라고 하더니......' 그녀의 날카로운 반응에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곽철 대협이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구석에 앉아 있는 적미 호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모두가 모여있는 동굴 바닥 가 운데로 사납게 내동댕이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의 숨소 리가 거칠게 흔들리는 것으로 봐서 평소의 그답지 않게 상 당히 분개한 것이 분명했다. "내가 당신을 내치지 않고 데려오는 실수를 범하는 바람 에 일행이 크나 큰 피해를 입었소. 무리를 해서 피를 흘린 일행에게 최소한 고맙다는 말 한마디는 못할 망정 화를 내 서야 되겠소!" "흐흐흐흑, 으아아앙......!" 가볍게 흐느끼던 그녀는 기어이 어린애처럼 주저앉아 목 을 놓아 울었으나, 마음이 그녀로부터 멀리 떠나버린 듯 곽 철 대협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매섭기만 했다. "어차피 내놓았을 금패, 처음부터 꺼냈으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것 아니요!" "흐흐흑 마화패(魔火牌)는 교주 할배가 죽기 전에 맡긴 유품(遺品)이란 말이에요. 흑흑 그,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순순히 내줄 수 있겠어요?" 그 말은 교주 할배가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패를 자 신에게 맡길 정도로 친했다는 말인데, 그럼 어디까지가 거 짓말이고, 어디부터가 진짜야? 아니지.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부터가 거짓말이야? 아이고 헷갈려라. "거짓말쟁이에 만사가 자기 중심적인 당신과는 더 이상 같이 다닐 수 없소. 이제 되돌아 올라가서 당신 길을 가도 록 하시오." 맺고 끊는 게 분명한 그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 수록 열만 더 오르게 되자 기어이는 적미호에게 등을 보인 채 결별 선언을 내뱉고는 그대로 석문을 지나가 버리려 했 다. 그러나, 그의 걸음은 그녀의 울음 섞인 변명에 길게 이 어질 수가 없었다. "눈, 눈앞에서 교주 할배가 살해당하는 것을 봤는데, 누, 누굴 믿을 수 있다고 제가 말을 하겠어요? 부교주의 손이 안 닫는 곳이 있는 줄 알아요? 분명 당신들 중에도 그의 끄나풀이 섞여 있을지도 몰라요. 그런 마당에 내가 어떻게 진실을 말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럴지도 모르오. 그러니까 당신이 진실을 말 할 수 있 는 곳으로 가시오. 난 이들에게 빚이 생겼으니 그것을 갚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갈 것이오." 곽철 대협의 가시 돋친 말에 변명으로 일관하던 적미호 의 신형이 비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내가, 내가 진실을 말 할 수 있는 곳? 없, 없어요. 이 세 상 그 어느 곳에도 그런 곳은 없어. 아니 밖으로 나가는 순 간 기다리던 살수한테 죽겠지. 그래요, 이 세상 그 어느 곳 에도 기댈 곳이 없는 나 같은 거 그냥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 그들 사이에 감도는 이상한 말다툼 때문에 나를 포함한 다른 무리들조차 경직되어 버렸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성 질 오른 곽철 대협은 적미호더러 꺼지라는 말을 우회적으 로 내뱉았는데, 그녀는 그녀대로 갈 곳이 없다고 역시 우회 를 해서 맞 받아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말싸움은 끝 도 없이 돌고 도는 악순환과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때는 한 쪽이 져주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자면 누군가가 중계 자가 되어 그런 계기를 마련해 주는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하면 내가 월하노인(月下老人)이 되어 주겠다는 말이지. 후후훗.' "곽철 대협,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소인이 한 말씀 아뢰 어도 될까요?" "말해 보시오." "적미호 소저를 구해 왔으면서, 책임지겠다고 한 이도 곽 철 대협이니 이제 와서 그녀를 내치는 것은 사나이 된 도 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비록 그녀가 문제가 많은 여인임은 분명하나 대협의 넓으신 아량으로 봐주시는 게 좋을 듯 합 니다." "......" "그리고, 적미호 소저." "......" "믿을 사람이 없다면 이제라도 만드시는 게 어떨까요? 곽철 대협이 비록 검을 너무 좋아해서 검귀(劍鬼)라고 까지 불리기는 하지만, 그의 사람됨됨이나 책임감만 따져봐도 제 가 보아왔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능히 군계일학(群鷄 壹鶴)감이지요. 이미 그에게 은혜를 입으셨으니 훗날에라도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면 일단 곽철 대협을 믿고 따르시는 게 옳은 순서지요." "......" 내가 이렇게 운을 띄워주자 그들 사이에 격해져 있던 기 류가 한 결 차분해진 듯 했다. 그들을 애써 못 본 척 무시 하며, 걸음을 옮기는 무리 사이로 곽철 대협이 적미호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이 눈에 얼핏 보였다. 그 다음이야 안 봐 도 뻔한 순서였지만, 배가 조금 아파 오는 것은 나만의 생 각일까? 내가 다리는 놓아주기는 했지만, 외기러기 신세인 내 입 장에서는 눈꼴 시린 부분이 없잖아 있는 관계로 앞장서 걷 다가 철봉을 놓고 온 게 생각나 다시 되돌아와야만 해, 해 했...... "에이취! 에취! 에취!" 이게 무슨 냄새야? 후, 후춧가루? 내가 콧물까지 흘리며 멀거니 앞서간 적미호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눈물 범벅이 된 그녀가 내 꼴을 보고 배시시 웃는 꼬락서니가 눈에 들 어왔다. '제, 젠장. 아, 아무래도 유품이 아니라 그냥 죽은 할배 품을 뒤져서 훔쳐온 것 아니야? 실제로는 자기가 교주 자 리에 오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옷도 자기가 사달라고 졸라서 산 게 분명해. 교내 문제로 머리 아플 영감탱이 그 런 사소한데 신경 쓸 리가 없잖아. 아그, 복잡해! 불여우가 너더러 선배님하고 절을 하겠다. 절을 하겠어!'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2-04 14:50:54 고친날 2005-02-04 17:53:56 읽은수 9573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98)-절망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8]절망(絶望) 남궁현에게 안겨 가던 제갈혜가 부끄러웠는지 만류하는 그를 뿌리치며 석문을 통과하기도 전에 일어서며 외쳤다. "모두 멈춰요!" "왜 그러시오? 제갈혜 소저? 어디 아픈 데라도......?"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에 걱정 말라는 듯 살짝 미소 를 보였다가 곧바로 한숨을 지으며 굳은 안면을 보이는 복 잡미묘한 그녀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소방과 모용천풍 공자를 천운학 소맹주가 데려갔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안 좋은 일일 수도 있어요.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깝기는 하지만, 되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설, 설마 소방과 모용천풍 공자를 데려간 것은 바로 소맹 주의 남색가 기질 때문? 그럼 우리가 큰 일 난 것이 아니 라 소방이 큰 일 난 거잖아! 이를 어째? 그런데, 그들을 놓 고 되돌아가자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 그게 무슨 소리요?" "지금 이 자리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기에는 복잡한 사정 이 있어요. 다음에 얘기하지요. 냉월화 부궁주님, 이대로 가 셔야만 하겠어요?" 남궁현의 반문을 한 마디로 일축해버린 제갈혜는 더 갈 것인지 말 것인지 가부를 놓고 냉월화 누님의 의중을 떠보 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냉월화 누님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다해도 갈 겁니다. 일이 있어서 되 돌아가신다면 여기서 갈라서게 되어도 어쩔 수가 없는 일 이지요." "그런가요? 다른 분 의중은 어떠세요?" 제갈혜가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일까? 언제 다른 사람 의중을 따지면서 가부를 결정한 적이 있기는 한가? "나, 난 반드시 가야만 하오. 내게는 선택의 길이 없소. 미안하오." 남궁현 녀석이 어눌하게 나마 쐐기를 박아 버리자 제갈 혜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다른 사람 의중은 더 물어보지도 않았다. 뭐 당가희야 남궁현이 가면 끝까지 따라갈 애니 제 외하고, 곽철 대협도 일행이 가면 간다고 했으니 그렇다고 치자 왜 내 의중은 안 물어 봐? 어, 어이 나, 나도 좀 물어 봐 줘! "그렇다면 뒤 따라 가도록 하지요. 대신 이제부터 검이든 도든 언제나 뽑을 수 있게 해 두세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을 거예요." 그그그긍 쿠쿵! 그 다음으로 들어간 통로는 지금까지 지나온 통로와는 확실히 다른 게 몇 가지 있었다. 일단 너비나 폭이 무지막 지하게 넓었다. 만약 이 곳에서 흑의인들과 싸우면서 포위 를 당했다면 우리 쪽 사상자도 만만치 않게 나왔을 것이다. 천정을 올려다보니 완전히 밀폐된 공간이 아니라 양 옆 끝 부분에 토끼 정도면 어렵지 않게 뛰쳐나올 법한 구멍들이 보였다.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까지는 분명치 않았던 공기 바람의 흐름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발 아래를 내려다 봤더니 또 무슨 쥐구멍이 그렇게 많은지 의문이 갈 정도였다. 대놓고 나 공기구멍이요 라고 하기에는 너무 지나치게 많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킁킁거리던 제갈혜가 뭘 알았는지 신형 을 미미하게 떨었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겠어요. 모두 앞으로들 뛰어요!"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무리들도 불길한 기운을 느꼈는지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제히 경공을 펼치며 다음 통로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당연히 경공이고 나발이고를 알 리가 없는 내가 맨 뒤로 처지자 앞서가던 냉월화 누님 이 다시 되돌아와서 날 안아들고는 날렵하게 신형을 펼쳤 는데, 연유야 어찌되었건 코를 간질간질 자극하는 장미향을 느끼며 그녀의 풍만한 가슴에 파묻히게 되자 기분이 나쁘 지는 않았다. 아니 옆구리에 끼워져서 가는 것보다 백 배는 낫구만......크크크. '알고 보면 냉월화 누님도 중년 여자 치고 꽤 미인이지? 몸매도 장난이 아니고 말이야. 그 지랄 맞은 정체불명 환약 들에 대한 집착만 아니면 꽤 괜찮은 여자라는 소리를 들을 텐데......'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위기를 느끼는 이 상황에 무슨 생 뚱 맞은 소리 하냐고 욕하겠지만, 이런 미녀의 포근한 품에 안겨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실례 아니겠어? 쉬쉬쉭 귓가를 스치고 가는 바람결을 느끼며 맨 끝에 다다랐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암담할 정도로 깎아질러 올라간 암 벽이었다. 십 여 장은 되어 보이는 꼭대기 끝 부분이 앞으 로 비스듬하게 튀어 나와 있어서 전체적으로 기우뚱하게 기울어져 있는 기이한 암벽이었다. 이 암벽은 내 기억 속에 없는 부분이었다. 아마도 현현자 영감탱이 그 이후에 새롭 게 가미한 인공적인 지형인 것이 분명했다. 벽면을 바라봐 도 발을 딛거나 손을 올려놓을 틈이 거의 없을 정도로 촘 촘하게 잘 깎여 있는 것이 그 어떤 암벽 타기의 고수라해 도 얼마 못 가서 미끄러져 내려버릴 것 같았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어떻게 위로 올라갔는지는 몰라도 매 우 질겨 보이는 노끈이 위에서부터 기다랗게 드리워져 있 었다. 그 끝에는 천운학 소맹주와 그와 함께 먼저 앞서 나 갔던 모용천풍과 소방이 나란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서있는 것이 보였다. '휘유, 소방이 먼저 가 있었지. 그런 이상 안심이야. 후후 훗.' 그런데, 그들과 우리 일행 사이에 이해하기 어려운 기이 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모든 사람이 노끈을 봤는데도 잡고 올라갈 생각을 안 할 뿐만 아니라 육포라도 입안에 넣고 씹고있는지 입을 딱 다물고 있어서 숨막혀 질 식해버릴 것 같은 적막감이 고즈넉하게 깔려 버리는 것이 었다. 지켜보고 있는 내가 너무 답답해서 무리를 둘러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도 안 올라갈 거면, 나 먼저 올라갑니다. 네? 반대 없지요? 왜 다들 말이 없는 겁니까?" "그럼 니가 먼저 올라가 봐. 어떻게 되나 보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후춧가루를 가지고 방성대곡(放聲大 哭)을 하며 사기 연극을 펼치던 적미호가 뻔뻔하게도 나에 게 턱짓을 하며 올라가라고 하고 있었다. 더 심각한 것은 여전히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제갈 혜 말을 듣지 않고 따라온 것을 매우 후회들 하는 것 같은 표정들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는 것이 괜스레 나까지 불안 해지는 것이었다. '에잇, 짜증나. 다들 왜 이러는 거야? 모용천풍은 몰라도 끝에 서있는 사람 중에 하나가 소방이잖아. 그런데도 뭐가 그렇게 미덥지 않아서 서로 눈치만 보면서 미루고들 있는 거야? 꼭 이 몸이 시범을 보여 줘야겠어?' 짜증이 치밀대로 치민 나는 직접 노끈을 잡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물론 만류하는 사람도 없이 정적이 흐르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 끝에 소방이 있다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난 주저 없이 올라갈 수 있었다. 노끈은 한 자 단위로 매듭을 묶어서 흘러내리지 않게 되어 있었고, 강제 징병 시절 노끈 타고 암벽 오르는 법을 익힌 습관대로 밧줄 끝 가닥을 오 른발등 위에 올리고 왼발을 그 바로 옆에 올려서 고정을 시키고 손에 힘을 쥐고 잡아 오른 후에 발 부분을 풀어서 흘려 다시 처음처럼 엇갈려 밟아서 고정을 시켰다. 그 것을 반복해서 지렁이가 땅위에서 꿈지럭 꿈지럭 거리며 기어가 듯 꿈틀거리며 올라섰고, 어느새 중간에 이르게 되었다. "헉, 헉 이거 더럽게 높네. 힘들어라. 후훗 소방 조금만 기다려 좀 쉬고 올라갈 테니까." 그러나, 그의 안면에는 어쩐지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도 같았다. 그런 그와 나 사이를 흥미 있다는 듯 소맹주가 흘 겨보고 있었던 반면, 모용천풍은 관심 없다는 듯이 무심하 게 서 있었다. 챙 익숙하게 들어온 발검 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사람도 아닌 소방의 손에 야명주의 푸르스럼한 빛을 받아 은은하게 번들거리는 검이 들려 있는 게 보였다. 꿀꺽 너무나 조용한 나머지 목구멍을 타고 침 넘어가는 소리 까지 똑똑히 들려왔고, 동시에 목이 매여오는 아릿한 기분 도 들었다. 매우 당황은 했지만, 꼭 검을 뽑아든 이유가 밧 줄을 끊기 위해서 그런 것만은 아닐 거라고 굳게 믿었기에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조금씩 조금씩 올라갔다. "거기에 서. 내려가. 내려가란 말이야!" 소방의 날카로운 쇳소리가 내 귀를 어지럽혔다. 아니다, 저것은 내가 잘못 든 환청인 것이 분명했다. 눈을 감고서 심호흡을 가다듬은 후 다시 눈을 뜨고서 그를 올려다보았 다. "저, 저기 소방, 잘 못 들었어. 다, 다시 얘기해줄래?" "......" "내, 내가 잘못 들은 거지? 그렇지?" "아니, 제대로 들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지. 그래서, 그래서! 난 네가 오지 않기를 바랬던 거야. 내가 널 막아섰을 때 평상시와 다르다는 것을 왜 알아차리지 못했 니? 그냥 조용히 쓰러져 있다가 되돌아 갔으면 이렇게 서 로 얼굴 붉히는 일 따위 없었잖아!" 그의 말을 듣는 내 가슴속에는 비수가 하나씩 하나씩 박 혀드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소방은 내가 알았던 모습과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마치 소라고 동을 귀에 대면 우웅 거리는 소리가 한없이 들려오는 것처 럼 들려오는 말들이 희미하게 퍼져가며 멍멍하게 들려만 왔다. 의식이 흐려져 가는 것 같았지만, 최후의 힘을 모아 쥐어짜듯 물음을 던졌다. "저, 저기 저 아래에는 네 친구인 제, 제갈혜도 있고, 의, 의협 중의 의협, 곽철 대협도 있고, 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월녀궁 사람들도 있는데, 어, 어째서......?" "제갈혜가 죽건, 남궁현이 죽건, 월녀궁 여인들이 모조리 죽건 말건 무슨 상관이지? 너와 난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었어. 그런데, 왜 따라 온 거야? 왜? 왜!" "......" 그제 서야 애초에 이 장소로 저들을 유인해서 죽일 계획 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래 남아있는 이 들은 모두가 소맹주와 대립적이거나 사이가 안 좋은 세력 들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쳐졌다. 그렇다면, 소방은 처음부터 소맹주의 끄나풀이었단 말인 가? 아니다. 믿을 수 없다. 어째서 소방 같이 착하디 착하 고 순하디 순한 녀석이 간사한 냄새가 풀풀 나는 소맹주의 끄나풀일 수가 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믿기 지가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꿈 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해서 소방의 눈을 뚫어지게 올려다 보았다. 그의 눈이 점점 커져 왔다. 툭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와는 점점 멀어지다가 급기야 새끼손가락 만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내 손에는 밧줄을 꼭 쥐여 있었으므로 내가 떨어지 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럼 그가 알 수 없는 주술에라도 걸 려 몸이 개미만큼 작아지고 있다는 뜻일까? 내 머리카락을 쓸며 날 스쳐 올라가는 바람결이 느껴졌다. 그의 모습이 작아지는 게 안타까웠던 나는 그를 잡기라 도 하려는 듯 더욱 더 작아지기만 하는 그를 향해 손을 허 우적거리며 외쳤다. "소방! 소방!" 나의 목소리는 덧없이 메아리쳐 울려 퍼졌고, 더 더욱 깊 은 그림자를 드리우고서 날 내려다보던 그는 더 이상은 못 보겠다는 듯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 때서야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내가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흘 러버릴 듯한 분위기 탓에 그 누구도 올라가려 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난 너무 어리석었다. 이 세상 모두가 날 버려도 그만큼은 날 향해 손을 벌려줄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아 버 렸다. 처음부터 내가 혼자였듯 앞으로도 그 사실만큼은 불 변의 진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는, 이제는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일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2-05 18:29:10 고친날 2005-02-05 22:02:01 읽은수 9455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99)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9] 우연인지 눈길이 소방이 서있던 곳을 떠나지 않았기에 내 몸이 떨어지는 중이라는 기분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대 로 떨어지면, 머리뼈는 수박처럼 터질 것이고, 등뼈도 산산 조각 나 버릴 게 자명했지만, 머리 속이 백짓장처럼 새하얗 게 비어버린 바람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퍼엉! 우드득 "쿨럭." 떨어지는 내 등에 작렬해버린 차가운 풍압의 여파로 다 시 한 순간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을 느꼈으나, 그 충격 이 내장에도 충격을 줬는지 붉은 피가 울컥 하고 치밀어 올라 목구멍을 타고서 입으로 뿜어졌다. 공중에 떠 있는 그 짧은 순간 내 몸을 와락 껴안는 익숙한 포근함에 그녀가 냉월화 누님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지만, 살아있는 그 자체로 시체와 다름없는 나였기에 고맙다고 생색을 내 진 않았다. 그녀도 별 기대를 안 했는지 그대로 가뿐하게 착지하고서 날 앉히고서는 등을 쓰다듬어 주며 가볍게 힘 을 줘서 뱃속에 고여있던 피들을 마저 토해내게 만들었다. 비록 냉월화 누님의 노력으로 죽지 않고 무사히 바닥으 로 내려앉게 되었지만, 지금의 나에게 삶과 죽음이 의미를 부여해 주지는 못했다. 생과 사가 갈라지는 그 순간에조차 도 마치 꿈속을 헤매듯 소방과의 따스한 순간들이 주마등 (走馬燈)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하찮은 삼재검법(三才劍法)조차 열심히 가르쳐서 나름대 로 간신히 내 한 몸 지킬 수 있게 수련을 쌓게 해줬던 나 날들, 일수필살(壹手必殺)의 암수로부터 봉만을 든 맨몸으 로 막아줬던 순간, 단수연을 쓰러뜨리고자 뒷산 외진 곳에 서 특훈을 수련했던 나날......그 이외에도 여러 일들이 눈앞 에 아른거려왔다. '그 모든 것들이 다 하찮은 것으로 사라져 버렸단 말이 냐? 너도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날 그저 일개 점소이로 밖 에 보지 않은 것이었단 말이냐? 그럼, 어째서? 어째서 하필 이면 나였다는 말이냐?' "안타깝군. 원래는 제갈혜, 네 년이 먼저 올라오기를 바 랬거든. 그럼 이 밧줄이 끊어지는 순간 네 년의 얼굴 면상 이 어떻게 변하나 하는 게 정말 궁금한 일이었었는데......"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텅 비어있을 나의 내부에서 그를 향한 맹렬한 증오(憎惡)가 용 솟음 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녀석만, 녀석만 존재하지 않 았더라면 소방, 나의 소방이 이렇게 나를 떠나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 그 개만도 못한 자식 때문에 일이 이 지 경으로까지 번진 것이 확실하니까! "소맹주, 밧줄을 끊었다고 해서 우리가 당장 주눅들 거라 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 길로만 가지 못할 뿐이지, 되돌 아나가는 길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군 요." 그러나, 제갈혜가 이를 악문 채 그를 올려다보며 하는 말 에서는 왠지 설득력이 떨어져 보였다고 하면 나만의 착각 이었을까? 도마 위에 막 올려져 펄펄 끓는 가마솥에 들어 갈 준비를 하고 있기에 산송장이나 다를 바 없는 보신탕용 개만도 못한 바로 그 녀석! 천운학의 비아냥거림 속에서 다 분히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섞여서 들려왔다. "쯧쯧쯧, 이거, 이거 왜 이러시나? 중원제일지(中原第壹 智)의 뇌(腦)가 썩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 는 척 하는 최후의 발악인가? 저 수많은 통풍구에서 새어 나오는 비릿한 내음들이 뭘 의미하고 있는지는 제갈혜! 네 년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 는 편이 오히려 살 확률이 높은 편이지. 괜히 가다가 중간 에 그것들과 마주친다면......하하하하하!" 재수 없는 녀석, 생겨먹은 것은 영락없는 미소녀 그 자체 인데, 웃는 소리하며 말하는 어투하며 정말 밥맛 중의 밥맛 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눈앞에 놈이 있다면 목구멍을 확 따버려서 다시는 저 소름끼치는 미성이 울려 퍼지지 않도 록 할텐데...... 그런데, 그것들이란 도대체 무엇이지? 설마 저 쥐구멍에 서 무수한 식인쥐들이 쏟아져 나오기라도 한단 말인가? 크 크크 그거 재미있겠군. 이 쪽에는 여자들이 압도적으로 많 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비명을 지르며 피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고, 남궁현과 곽철 대협은 그런 그들을 대신해 쥐들 을 떨궈내 주느라 정신이 없어지겠군. "아, 행여나 당가희 골빈 년의 독가루에 의존해서 벗어나 겠다는 알량한 생각 같은 것은 하지 말라구. 어떤 종류의 독을 뿌리건 바로 바람을 따라서 밑으로 빠지게 되어 있거 든. 오히려 뿌린 사람이 있는 일행에게도 그 독가루가 날려 올 거다. 정말 오묘한 함정이지 않나?" 당가희의 골이 비어있다는 데는 나도 공감하지. 나처럼 만만해 보이는 이들에게는 온갖 횡포를 서슴지 않으면서 남궁현에게만은 눈이 멀어 그가 원하는 눈치만 흘려줘도 간이든 심장이든 다 빼줄 년 아닌가? 설사 심장을 내주고 죽어가는 상황이라해도 기뻐하며 미소를 지은 채 죽어갈 년이 바로 당가희일 것이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지금 물어보도록 해. 허튼 수작을 부리면 바로 기관(機關)을 작동시켜버릴 테니 주의하고 말 이야." "나와 남궁현 공자까지는 이해하겠어요. 그러나, 지도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냉월화 부궁주나 아무 상관도 없는 곽철 대협, 당가희 소저는 왜 여기에 남긴 것 이지요?" 그녀의 의문은 동시에 내가 가려운 부분까지 잘 지적하 기는 했다. 그런데, 왜 나는 빼먹은 거야? 차라리 이해를 한다고 해준 것도 아니고, 들먹여주지도 않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야? 노끈을 먼저 타고 오르다가 죽을 뻔했던 것도 나고, 친구에게 뜻하지 않은 배신을 당해 가장 크게 절망한 것도 나이거늘 아예 입에 오르내릴 가치도 없다는 것인가! 에휴, 참자. 제갈혜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아, 좋은 질문이다. 냉월화 부궁주가 아는 것은 아마 종 리연 소저도 알고 있을 게 뻔하다는 것을 여기까지 오면서 알게 되었지. 구태여 월녀궁(月女宮) 세력을 끌어들여서 번 거로움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곽철 저 녀석은 너 무 고지식해. 은근히 그의 사부를 통해서 압력을 넣었는데 도 그는 좀처럼 내 말을 따르지 않더군. 사부 말이라고 하 면 죽는시늉까지 마다하지 않는 소방과는 비교가 될 수 없 더군. 내 장기 말로써 소용가치가 없는 것은 폐기 처분밖에 방법이 없는 것이야. 당가희? 얘는 덤이야. 남궁현을 죽일 거라면 이 년도 같이 죽여줘야 미래 지아비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나?" "당신 정말 근본부터 철저하게 썩어버렸군요." "남 말할 처지가 아니야. 제갈세가(諸葛世家)야말로 권력 의 중심부로 다가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더러운 짓들을 해 왔는지 모른다고 할 참인가?" "......부인하지는 않겠어요. 그, 그럼, 우리 세가를 건드리 지 않겠다는 약속은 유효한가요?" "그것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아무리 썩었어도 약속한 바 는 반드시 지킨다. 단지 넌 너무 위험해. 불안한 싹수가 보 이는 것들은 미리미리 가지를 쳐줘야 하지. 그러니 안심하 고 죽어라." "흥, 믿어보지요. 만에 하나라도 우리 집안에 조금이라도 해코지를 했다간 귀신이 되어서라도 당신을 저주하겠어요." "하하하하하!" 그의 비웃음 가득한 장소가 통로 가득히 퍼졌다. 곧 죽을 것 상황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제갈혜에 대한 애도의 표시일까? 저 개만도 못한 놈의 낯짝을 봐서라도 여기서 저들과 같이 죽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꼭 살아 나 가서 받은 것의 세 배, 네 배는 돌려줘야 분이 풀릴 것 같 은데, 이 억하심정을 어디에다가 하소연해야하는 것일까? "내 얘기 아직 안 끝났다. 마교 녀석들이 우리 뒤를 바짝 추격해 오고 있는 것을 알고도 왜 바깥 애들이 떼 몰살을 당하도록 세워놓고 들어온 줄 알기는 해? 더구나 부교주 일행과 부딪혔을 때 양패구상(兩敗俱傷)을 막아준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개만도 못한 천운학 녀석은 계속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 것에 대해서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궁금하게 여기도록 유도 를 하고 있었지만, 곧 죽을 마당에 그런 것을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아, 정말 생각해 보니까 가지가지로 열 오르게 만드는 놈이네. 울컥 치미는 것이 있어서 한 마디 하지 않 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안 궁금해! 이 뒷간에 빠져서 익사해버린 똥개만도 못한 놈아! 그냥 꺼져! 꺼지라구!" "흠, 밑바닥 점소이에 불과하면서 소방의 친구라는 호사 를 누려온 작자로군. 어쩐지 소방 녀석이 그 주루에 대한 보고를 소홀히 하더라니......복에 겨운 놈이로군. 이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봐 와서 내가 좀 아는데......" "그만! 더 듣고 싶지 않아. 니가 뭐라고 해도 아무 말도 듣지 않을 거야. 정 말하고 싶으면 이리 내려와 봐! 나랑 한 판 붙자!" "소방, 입이 아주 거친 친구를 뒀구나. 감히 무림맹 소맹 주인 이 몸에게 개보다 못하다는 욕을 퍼붓는 배포를 가진 놈이 있을 줄이야. 그래서 더 맘에 드는군." "......" "그래도, 해줄 말은 해줘야지. 바깥에 세워놨던 놈들은 이틀 전에 제갈혜가 개가 되어 앞마당을 엎드려 돌며 짖을 때 분명 내가 인정 사정없이 밟으라고 명령했는데도 불구 하고, 슬그머니 내 눈치 봐가며 툭툭 차는 흉내만 내던 놈 들이지. 내 기억력이 아주 비상하거든. 소리만 들어도 어느 위치의 어느 놈이 어느 세기로 찼는지 쉽게 알 수 있을 정 도니 말이야. 그러고 보니 제갈혜가 명예 조장이었을 때 직 속 부하였던 애들이 대부분이더구만, 하하하핫! 꼴들에 존 경이라도 하고 있었나 보지?" "......" 제갈혜는 그가 그 때의 치욕스러웠던 얘기를 언급하며 기억을 새롭게 되새기자 아무렇지 않은 척 내숭 떨기에도 지쳤는지 눈을 부라리며 가쁜 호흡을 내뿜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그럴 줄이야! 하는 듯한 분노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이런 아직 그 정도로 열을 내면 안 되지. 자신들의 처지 를 잘 살펴 봐. 죽은 녀석은 하나도 없지만, 대부분이 몸에 상처를 입고 있지? 그렇게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린 이유는 여기 본래 주인들에게 물어보면 잘 알 수 있지. 그들이 친 절하게 행동으로 보여줄 테니까 말이야. 이상! 내가 할 말 은 끝났다. 너희들을 위해서 수라삼살(修羅三殺)하고 한 번 붙어줬으니 나한테 감사하도록......가동되려고 하는 기관을 일시 정지시키느라 애 많이 먹었지. 하하하하핫!" "......"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본래 주인이라니? 듣는 사람들 성 질 더럽게 만드는 말만 던져놓고서 뭐가 그렇게 기대되는 지 키득키득 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그가 아래에서 간신히 그 끝만 보이는 석문 통로를 지나가 버리자 새하얀 돌가루 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차양막이 스르르 내려와서 뚫려있는 부분을 완전히 덮어 버렸다. 새하얀 돌가루는 둘째치고, 차 약막은 왜 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정체에 대해 서 궁금하기는 했지만,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보다 하나뿐이었던 친구를 잃어버려 다시 혼자가 되어 버렸다는 게 더 슬펐던 나머지 입을 열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 곳에 있는 인간들은 결국 다 남이었으니 말이다. 글 쎄? 곽철 대협이나, 냉월화 누님이야 좀 틀리지만, 그들이 내 친구가 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당연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조금 친한 것일 뿐이었다. 천금대인의 음모로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겉으로 드러 난 사실만을 가지고서 내게 실망했다는 시선을 던졌던 곽 철 대협의 이중적인 모습을 결단코 잊지 않았던 것이다. 냉월화 누님도 지금까지는 내가 교옥정 누님과 안면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내 처지를 조금 이해해 주는 것 같기 도 하지만, 필요에 따라 언젠가는 돌아설지도 모르는 사람 이란 생각을 항상 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그 녀는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곁에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와 함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든든한 마음이 들었던 소방, 이제 그는 더 이상 없다. 되 돌이켜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잠룡이라고 불리는 그가 나를 친구로 둘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그는 단지 나를 불쌍하다고 동정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친구 라는 가면을 쓰고서 연극을 했던 것이 아닐까? '후후훗 무슨 상관이야. 이제 다 끝난 얘기, 다 지난 얘긴 걸. 딱 하나만 빼고 다 잊을 테다. 천운학, 너 내 이름 석자 를 잘 새겨두는 게 좋을 거다. 일개 점소이가 한을 품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잘 지켜보아라.' 아드드득 그에 대한 분노를 새롭게 다지게 되자 나도 모르게 이빨 을 갈아 버렸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2-08 11:45:56 고친날 2005-02-08 14:28:26 읽은수 9410 [ 12 K ] 제목 점소이 작삼(100)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0] 그그그긍 쿠쿵! 쿵! 쿠쿵! 쿠쿠쿠쿵! 천운학이 말하던 기관(機關)이란 것을 작동시켰는지 그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돌이 떨어지며 충돌하 는 소리들이 요란하게 들렸다. 마치 군대 사열식 때 휘황찬 란하게 광을 낸 창들을 파도타기 식 조 단위로 돌아가며 내려놓을 때 규칙적으로 퍼져 나가는 소리들처럼 돌들이 일정한 박자로 떨어져 내렸는데, 그 소리들이 들려오는 진 원지는 바로 통풍구로 알았던 위아래 구멍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제갈혜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그들 사이에 어정쩡하게 앉아있던 나를 뒤 벽으로 밀어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작삼 점소이, 미안해요." 이 여자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걸까? 아하, 설마 소 맹주에게 내 얘기를 거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 렸나 보지. 뭐, 짐작은 가기는 하지만, 일단은 들어나 보자 구.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요? 소저가 언제 나를 신경 쓰기 라도 했단 말이요?" "그럼요. 단순히 신경 쓴 정도가 아니라 소방이 우리의 뒤통수를 칠 경우를 대비해서 데려온 일종의 볼모였어요. 무뚝뚝하고 차갑기만 하던 그가 다른 누구를 위해서 그렇 게 공을 들이는 것을 처음 봤거든요. 따라서, 당신을 우리 곁에 두고 무언의 협박을 하면 소방이 다른 생각을 품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당신이 뒤따를 수 있도록 못 이 기는 척 배려를 한 거예요." 그녀가 하는 얘기가 무엇이란 말인가?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내게 아낌없는 우정을 보여준 소방이 무뚝뚝하고 차 가워? 더구나 뒤통수를 칠 거라고 예상할 정도로 신의가 없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 어! "다만 그에게는 사부의 명령이 무엇에든 최우선 시 된다 는 것을 너무 쉽게 잊고 있었어요. 공연히 애꿎은 당신만 끌어들이고 안 좋은 꼴만 보였군요. 미안해요. 너무 제 욕 심만 차린 덕에 부끄러운 꼴만 보여드렸군요. 용서해주실 수 있겠어요?" 얘기를 들으면 들을 수록 안 그래도 복잡하던 심사가 뒤 틀려 일그러지는 것 같아 인상을 찡그리며 시선을 돌렸더 니 전방을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주시하며 연검을 뽑아든 냉월화 부궁주와 언제나처럼 무심한 모습으로 검을 들고서 흔들리지 않는 대나무처럼 꼿꼿하게 서있는 곽철 대협을 제외하고는 다들 제갈혜와 나의 대화에 관심이 갔는지 은 근슬쩍들 곁눈질을 하고 있었다. 뒷돈으로 백룡이라는 이름 을 산 게 확실시 될 정도로 한심한 모습으로 일관해 스스 로의 명성을 연이어 떨어뜨리고 있는 남궁현은 아예 대놓 고 나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것들이 그렇게나 나와 소방 사이의 우정이 우습게 보 였다 이거지?' "하하하하하! 하하하! 우습구려, 우스워!" "......" 너무 기가 차서 웃음을 터뜨려 버린 나는 의아해하는 제 갈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 마디 쏘아 붙였다. "이제 와서 다 끝난 일 가지고 선심 쓰듯 생색 부리지 마시지요. 남궁현 공자나 어디서 잃어버리지 않도록 잘 챙 기시구려." "......" "뭐라구! 이 놈이......점점 눈에 뵈는 게 없는......!" 내 말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하며 역성을 내려던 남궁현은 더 이상 내게 신경 쓰지 못하고 전방을 주시한 채 입을 다 물지 못했다. 쉬쉬쉬쉭 쉬쉬쉬쉭 쉬쉭 쉬쉬쉭 정작 통로 구석 아래에 나있던 무수한 쥐구멍으로부터 튀어나온 것들은 쥐가 아니라 징그럽기 그지없는 뱀 떼였 다. 몸 색이 푸르게 빛이 나는 것이 영락없는 맹독(猛毒)을 품고 있는 독사(毒蛇)가 분명했다. 수 십 마리에 불과하던 독사들은 순식간에 수 백 마리로 늘었다가 다시 수 천 마 리 정도로 급격하게 수가 늘고 있었는데, 한 두 마리도 아 니고 떼로 몰리니 그 비릿한 내음의 역겨움에 머리가 다 어질어질해질 정도였다. 오죽하면 월녀궁 여인들 중 춘월이 가 이런 곤란한 상황에 냉월화 누님이 옆에 있는데도 불구 하고 허리를 구부리며 우웩우웩 구토를 하겠는가? 거 좀 그만하지. 바라보는 나까지 토할 것 같잖아. 묘한 것은 말 이지. 일행이 서 있는 주변으로만 계속 몰려오고 있다는 것 이었다. 설마 그것 때문일까? 곽철 대협은 특유의 쾌검으로 다가오는 독사들의 몸통을 잘라 내었고, 남궁현도 이에 질 새라 허둥지둥 검을 휘둘러 뱀들을 몰아내었지만, 아무래도 곽철 대협에 비해 손색이 많아 보였다. 당연하지 네까짓 게 해봐야 얼마나 하겠냐? 어련하시겠어? 제갈혜야 머리가 뛰어난 애니까 무공이 좀 딸려도 이해를 해. 그런데, 넌 뭐냐? 얼굴이 잘나서 백룡이 라고? 그래, 너 잘났다. 제갈혜가 겨우 자기 앞을 아슬아슬하게 막고 있는 반면, 냉월화 누님의 연검은 일전과 달리 뻣뻣해지더니 곽철 대 협에 뒤지지 않는 쾌검을 구사해 꽤 많은 공간을 막아서고 있었다. 월녀궁 애들이야 합격검진(合擊劍陳)을 짜서 잘 막 아내고 있었지만, 어쩐지 위태위태해 보였다. 품속을 뒤지던 당가희는 주머니 하나를 꺼내서 재빠를 손놀림으로 하얀 돌가루를 바닥에 뿌렸다. 그러자 신기하게 도 그 부분으로는 뱀들이 잘 지나오지 않았다. 단지 다른 뱀들에 떠밀려 온 놈들이나 선을 건드렸다가 하얀 돌가루 가 표피에 닿자 한 바탕 엎치락뒤치락 발광을 떨다가 허둥 지둥 다시 되돌아가곤 하는 것이었다. '미물이라는 뱀들도 사람 웃길 줄 아는구나. 꼭 어디에나 덜 떨어진 놈들이 존재한다니까.' 그 생각을 하며 지긋이 남궁현을 바라보았으나, 자기 앞 을 막기에도 허름한 실력인 그가 다른 데 돌릴 신경 따위 는 없었다. 그나마 당가희가 티 나게 그의 주변에 하얀 돌 가루를 많이 뿌려놔서인지 뱀들의 접근이 경미한 편이었다. 부스럭 털썩 인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어느새 내 육포를 빼갔는지 입 에 물고 질겅질겅 씹으며 편하게 앉아 있는 적미호의 밉살 스러우면서도 당당한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야 아니꼽고 시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거칠고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독보적인 처세술을 터득한 똑 소리나는 여인이었다. 그녀 또한 갈 곳 없는...... 은 아니지. 아무데서나 미끈하고 새하얀 다리를 척 하니 올 려놓고 슬그머니 치마를 걷어올리면 오라고 손짓할 곳이 어디 한 두 군데겠는가? 무공이야 별 볼일 없지만, 반반한 미모에 매끈한 몸매가 있으니 자기 한 몸 건사하는데는 아 무런 지장이 없으리라. '그러니까, 일단 외모가 선천적으로 잘나게 타고나야 한 다니까, 후천적으로라도 뜯어고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화 타를 만나지 않는 한 그게 어디 가능한 일이겠어?' "일났군. 이제 살아서 해를 보기는 그른 것 같아." 육포를 질겅질겅 씹다가 뜬금없이 내뱉어진 그녀의 말에 그만 그녀가 쳐다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야명주 가 박혀있는 천장에 새까만 놈들이 하나 둘 씩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게 뭔데 그러는 거요?" "혈편복(血편복), 쉽게 말하자면 피를 빨아먹는 박쥐라 이거지. 독사는 당문 애가 눈치 있게 백반(白礬)을 뿌려놔 서 그럭저럭 막고는 있지만, 저것은 어림도 없어." 적미호(赤美狐)에 대해서 정정을 더 해야겠다. 아름다운 미모와 매끈한 몸매에 독보적인 처세술만이 아니라 먹물까 지 꽤나 많이 먹은 듯 아는 것도 적지 않아 보이는 그녀는 어디에 내놔도 충분히 살아 남아서 어떤 길로 통해서든 무 난히 성공할 거라는 부러움이 든다. "어찌 그리 잘 아시오?" "아, 마교도 중에 별난 동물을 키우는 게 취미인 영감이 있는데, 내가 그의 수염을 가지고 조금 놀려줬더니만, 쫀쫀 하게 그 일 가지고 앙심을 품었는지 곤히 잠 든 한밤중에 내 독방에다가 혈편복을 두 마리나 밀어 넣은 것 있지? 한 참 자다가 가려워서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이고 보니까 세 상에 혈편복 두 마리가 내 허벅지 안쪽에 딱 붙어서는 이 빨을 박고서 피를 쭉쭉 빨고 있잖아!" "그래서 어떻게 했소?" "어, 엉. 호호호홋 좀 부끄러운 얘기지만, 혈편복한테 피 를 빨릴 때는 통증보다 묘한 자극이 와. 마치 누군가 나를 부드럽게 애무해주는 듯한 쾌감이 짜르르르 하게 일더라구. 결국 반 시진 후에 그것들이 배가 불러서 스스로 떨어질 때까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배가 불러서 날지도 못하 는 그것들은 잡아서 새장 속에 넣고 내 애완용으로 삼았었 지. 물론 그 이후로도 가끔 애용을 했어. 호호호호홋." "......" "안 믿어지나 보지? 정말이라니까, 이제 곧 쟤네들이 떼 로 너를 덮치면 네 가운뎃다리가 발딱 서 버릴걸. 피를 쭉 쭉 빨려 죽어 가면서도 황홀한 쾌감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어. 그것이 혈편복의 무서운 점이야. 여기 모두가 그 렇게 죽게 될 거야. 호호호호호홋!" "......" 그녀에 대한 정정, 어쩌면 이 여자는 누군가에게 학대받 는 것을 쾌감으로 여기는 부류인지도 모른다. 박쥐가 자기 허벅지 안 쪽까지 파고들어서 피를 쭉쭉 빨고 있었는데, 흥 분을 했다고 하는 것이 말이......되겠는가? 될까? 흠, 나도 한 번 피를 좀 빨려볼까? 어차피 곧 혈편복인지 뭔지 한테 우리 모두가 몰살을 당할 테니 결과야 그 때 가서...... '안 돼. 여기서 죽을 수 없어. 누구 좋으라고? 천운학! 이 녀석이 좋아하는 꼴만은 절대로 두고 볼 수 없어. 나의 소 방을 빼앗아 가 버린 개만도 못한 놈! 젠장, 젠장할!' 그에 대한 생각을 하자 지금까지 복잡하게 뒤엉켜서 뒤 죽박죽이 되어 있던 심신이 그를 향한 분노의 일념 하나로 집결되기 시작했다. 이를 빠득빠득 갈던 나는 그만 그 분노 를 삭히지 못 하고 벌떡 일어나 버렸다. 푸드드득 푸드드득 푸득 푸드득 혈편복들이 모이자 수 천, 수 만 마리는 넘어섰는지는 그 숫자로 인해 야명주가 가려져서 그 밝던 통로 전체가 어두 컴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번에도 그것들은 독사를 막느 라 정신이 없는 일행 주변에 잔뜩 몰려들고 있었다. '일행들이 피를 흘리게만 하고 만 것에는 이유가 있었구 나. 피 냄새로 저들의 후각을 자극해서 혹시라도 귀식대법 (鬼息大法)을 펼치고 잠복할 여지가 없도록 한 것이었구나. 악랄하게 똑똑한 놈! 여기서 살아만 난다면 너의 악랄한 머 리를 그대로 본받아서 되돌려주고 만다!' 제갈혜를 비롯한 무리들도 그 심각성을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특히 그 정체가 무엇인지 잘 아는 듯한 제갈혜의 침중한 안색은 너무나도 처절해 보였다. "곽철 공자님, 남궁현 공자님, 제 자리도 맡아 주세요. 저 랑 당가희 소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혈편복들을 막아 볼게 요." "휴우, 알겠소. 독사들은 염려하지 말고, 최선을......" 말없이 자신의 자리를 넓히는 곽철 대협과는 달리 남궁 현은 목이 매인 듯 말을 끝내지 못했다. 뭔가 더 말을 하려 던 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는 독사들을 베어 내기에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마치 마지막으로 검을 신 명나게 흔들어 보겠다는 듯이 말이다. 쐐액! 혈편복은 자신의 상대라고 이미 생각하고 있었는지 비표 를 주머니에서 꺼내들고 준비하고 있던 당가희의 손에서 동시에 수십 여 개의 비표가 대기를 갈라 버렸고, 중과부적 (衆寡不敵)이기는 하지만, 그 때마다 수 십 마리의 혈편복 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머리가 비어있는 년이라고 수없 이 욕을 했던 그녀지만, 되려 이런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처 를 하는 그녀를 보니 새삼 내가 사람을 너무 쉽게 판단 해 왔다는 자조감이 들기도 했다. 제갈혜도 암기술에 조금은 일가견이 있었는지 당가희보다는 못하지만, 한 번에 네 다 섯 개를 날리며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나를 사로잡은 것은 천운학을 향한 분노 (憤怒) 그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있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퍼져왔던 박쥐 날개 소리와 뱀들이 혀를 뽑으며 쉬쉭 거리는 소리, 비표가 대기를 가르는 소 리, 검이 뱀들의 육편을 잘라내는 소리들이 서로 어우러져 산만하기 그지없어 아비규환(阿鼻叫喚)같던 아우성들이 가 라앉으며 정적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가끔 느끼곤 했던 청아한 기운과는 다른 것이 내 전신을 휘감아 오고 있었던 것이다. 낯 선 것은 아니었다. 상쾌하 다는 점은 같지만, 말로 형용하기에는 어려운 이질적인 쾌 감, 분명 이전에도 한 번 느꼈었던 이 기이한 기운, 뭘까? '아무렴 어때? 키득키득 천운학, 기다려라. 기다려......지금 내가 가마. 크크크크......어라? 저 바닥에서 꼼지락거리는 놈 들을 보니 무척이나 간사해 보이는 게 천운학이랑 똑같네? 그러고 보니 하늘에서 펄럭거리는 놈들 악랄하게 떼로 달 려들었다가 도망갔다가 하는 것을 보니 천운학의 사주를 받은 게로구나!' 아직까지는 제갈혜와 당가희의 견제를 받고 있던 혈편복 들은 섣불리 다가오지를 않았다. 아주 영악하게 구는 것이 어쩌면 저렇게 천운학이랑 똑같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 였다. 용서치 않을 것이다. 천운학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말살할 것이다. 키득키득. 방어진(防禦陳)이 무너지기 시작한 최초 분기점은 바로 월녀궁 여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누군지 는 다른 여인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뱀들의 비릿한 내음을 참다참 다 못한 한 여인이 심하게 구토를 하면서 검진으로부터 그 만 이탈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찰나였다. 빈틈을 보인 여인을 향해 일시에 혈편복들 이 달려든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이에 놀란 사 월(死月)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검으로 혈편복들을 걷어내 며 그녀를 끌어당기려는 순간 그 손을 다른 혈편복이 물려 버렸는데, 묘하게도 사월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기어이는 그녀마저도 혈편복에 묻혀 버리게 되었다. 무리들 모두가 그녀들이 그렇게 된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테지만, 방어진이 더 이상 무너져서 몰살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혈편복에 피를 빨리며 죽어 가는 그녀들을 꺼내올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꺼내러 간 자까지 묻혀버리면, 그 자리가 비어버리므로 방어진이 무너지는 속도만 가일층 더 할 뿐이니 안타깝더라도 매정하게 굴 수밖에 없을 것이었 다. 이해는 한다. 더구나 나라는 녀석은 그들이 만든 방어 진 안에 안전하게 서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래도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천운학 이 녀석의 분신들이 감히 교 누님의 동생들을 괴롭혀? 오냐! 니네들이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 해보자 고!' "천!운!학! 용서 못해! 카아아아악!" 나도 모르게 질러버린 소리에 묘하게도 이상한 소리가 섞여 들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시간 따위 없었다. 철봉 을 든 손에 힘을 가득 넣은 나는 그녀들이 묻혀버린 혈편 복 무리들을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무도 그녀들을 돕기 위해 손을 뻗치지 못했듯이 아무도 나를 제지하기 위 해 막는 사람이 없었다. 어차피 바라는 바였긴 하지만, 조 금은 씁쓸해졌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2-09 09:21:42 고친날 2005-02-09 15:19:44 읽은수 10029 [ 16 K ] 제목 점소이 작삼(10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1] 한 걸음씩 걸어갈 때마다 그에 대한 분노(憤怒)의 의지 (意志)를 불태워 나갔다. 그가 나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던 소방을 뺐어갔듯이 나는 그의 전부일 야망(野望)을 하나하 나 부수고 말 테다. 내 일평생이 걸려도 봐주지 않을 것이 다. 나에게 천운학(天雲鶴)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각인(刻 印)되었듯이 그에게는 우작삼(愚作三)이라는 세 글자를 똑 똑하게 심어 주리라! "카아아아아아앗!" 목이 쉬었는지 귀가 찢어질 듯한 쇳소리가 퍼져 나왔지 만, 그들을 향한 나의 분노 서린 의지가 충분히 담겨 있었 는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나가면 독사들도 혈편복도 두렵다는 듯이 노려보다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면서 멀어 지려고 애를 썼다. 간혹 보면 영문을 알 수 없게 얼어붙은 놈도 있었다. 콰직! "키득키득 그런 놈은 내 철봉 맛을 보고 싶다는 거겠지. 카아아아앗!" 문득 녀석들을 죽이겠다는 나의 의지가 살기(殺氣)로 발 현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수연을 상대로 했을 때 아둥바둥하며 잡으려 했던 그것이 이제 와서 저절로 풀 려 나오다니! 더욱이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그 살기의 영 역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게 의외이긴 하지만, 나 로서는 매우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어느 한 쪽이 완전히 지리멸렬(支離滅裂)할 때까지 나의 살기는 멈추지 않을 테 니까 말이다. 사월과 같이 이름 모를 한 월녀궁(月女宮) 여인을 집어 삼켜버린 혈편복(血　　)들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무슨 이 유인지 녀석들은 날아가지도 않고 슬금슬금 기어가며 나로 부터 조금씩 멀어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아예 몇 놈은 이빨을 박은 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런 놈들을 잡아서 내 손위에 올려놓으니 그와의 옛일이 떠올랐다. 소방의 손 안에 올려졌어도 움직이지 않던 다람쥐, 그가 말했었지. 의 지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다고...... 옛 일을 떠올리자 다시금 나의 분노는 커져만 갔고, 천운 학, 그를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 또한 더불어서 커져가고 있 었다. 내 손에 올려진 혈편복에게도 그 의지가 전해졌는지 바르르르 떨며 발광을 하던 그것은 그대로 까뒤집어지며 차가워져 버렸다. 시시했다. 죽어버린 놈들 따위 철봉 맛을 알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월녀궁 여인들에게 시선을 돌려 그들에게 몇 붙어있지도 않은 혈편복들을 떼 내어 내 발치에 모았다. "감히, 감히 교 누님의 동생들에게 이빨을 들이대다니 간 덩이들이 부었구나. 키득키득 솔직히 나도 저 미녀들을 껴 안고 뒹굴면서 깨물고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떠올리 곤 했단다. 이해할게. 다만 니 놈들 하는 작태가 천운학이 랑 똑같다는 게 조금 마음에 안 들어. 너희들도 이해하지? 카아아아아앗!" 콰직! 콰직! 나의 철봉으로 절구를 찧듯 놈들을 힘차게 내려 찧으며 피와 육즙이 사방팔방으로 비산(飛散)되는 꼴을 내려다보았 다. 비록 미물이라 해도 내 손으로 생명을 하나 둘 씩 이승 의 명부에서 지워나가는 쾌감으로 서서히 전율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시시해. 피를 보려면 사람으로 하는 것이 낫겠 지? 키득키득 이왕이면 순백처럼 아리따운 여인들의 피라 면 더더욱 좋겠지. 옳거니 여기 좋은 것들이......' 혈편복들이 다 떨어져 나간 월녀궁 여인들을 내려다보니 사월(死月)과 다른 한 여인은 적월(赤月)이라는 여자였다. 역시 월녀궁 여인답게 아름답기는 했지만, 사월이나 은월처 럼 자기 개성을 드러내면서 적의감이나 호의를 보인다던가 하던 애가 아니라 너무나도 조용히 있었기에 그 존재감조 차 미미했던 여인이다. '홍조를 떠올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다? 적미호 말대로 혈편복들에게 물리면 흥분을 한다는 말이 사실인가? 그래 서, 반항할 생각도 떠올리지 못하고 그대로 절정으로 치달 으며 죽어간다 이거지? 어차피 죽을 거였다면, 키득키득 이 몸의 쾌감을 더 부풀려 주렴.' 피에 대한 쾌감(快感)에 젖어버린 나는 하마터면 내 손에 들려있던 철봉을 그대로 그들의 안면에 휘둘러 버릴 뻔했 다가 내려치기 직전에 스스로의 마성(魔性)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방향을 틀었다. 쩡! 마지막 순간에 나를 일깨워 준 것은 자수정으로부터 흘 러나온 미세한 한기였다. 그 한기가 일순간이나마 쾌감으로 미쳐 가는 내 가슴에 작은 파동을 던져 줬던 것이었다. '내, 내가 왜 이러지? 나, 난 그들을 구하려고 온 것이 아 니었나? 젠, 젠장!' 스스로의 손으로 그들을 죽일 뻔했던 나의 어리석은 본 능을 탓하며 아직도 흥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발 그레 도화빛 홍조를 일으키며 몸을 비비꼬는 그들의 팔을 잡고 적미호의 옆으로 끌고 갔다. "놀고 있는 당신, 그들이나 잘 보살펴 주시오." "......" "왜 대답이 없소? 일개 점소이 따위에게는 대답할 가치 가 없다 이거요?" "......" 내 스스로가 말을 내뱉고도 흠칫 놀랐다. 아무리 적미호 가 만만해 보인다 하더라도 무림인은 무림인, 약점을 잡고 서 돈을 뜯어내려 했을 때도 비굴하게 굴었던 내가 아니던 가? 적미호는 내 눈을 바라보며 뭐가 무서운지 바르르르 떨었다. 문득 그런 그녀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의 안면을 핏기가 가셔서 새하얗게 질렸기에 더욱 뽀얗기만 한 그녀 의 얼굴로 들이밀다가 적미호의 눈동자에 비친 낯설지 않 은 안면과 마주치게 되었다. '길게 갈라진 양 눈 사이로 흐르는 푸른 안광, 세로로 길게 늘어난 야수 같은 눈동자, 시뻘건 입술 사이로 드러 나 보이는 뾰족한 송곳니? 분명 언젠가 본 적이 있는데......' 입에 거품을 물고 털썩 쓰러져 버리는 그녀를 뒤로 한 채 다시 독사무리들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 오르지 않았다. 이 때는 왜 그 귀신같은 안면이 바로 나 자 신이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까? 마성에 젖어들면 사고가 단순해 져버리는 것이었을까? 내 본래 목적을 상기시킨 나는 그대로 독사무리들을 향 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카아아아아앗!" 내 괴음에 화답하듯 안 그래도 조금씩 물러서는 중이었 던 독사들이 일제히 도망치듯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우스 웠다. 수 만 마리나 되는 놈들이 일시에 꿈틀거리며 도망가 려고 하니 그게 지들 맘대로 되겠어? "넌 뭐야!" 내 어깨를 제치며 자신의 영역에 침범했다고 화를 내는 듯한 남궁현의 잘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역시 내 안면과 마주치더니 그만 털썩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실없 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어준 나는 곧바로 뱀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퍼 덕이며 천장을 날아다니던 혈편복들을 향해 분노의 일갈을 퍼부었다. "카아아아아아앗!" 재미있었다. 내 울음소리에 동조하며 마치 겨울이 눈이 떨어지듯 후두두두둑 떨어져 내리는 혈편복들을 보니 너무 나도 재미있어 보여서 그만 웃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키득키득키득 큭큭." '이게 내 웃음인가? 아무렴 어때? 어차피 뒤틀려 있는 세상, 나도 같이 뒤틀려 보는 거다. 키득키득.' 철봉을 꺼내들 나는 내 앞에서 아직 어물어물거리는 독 사와 혈편복들을 향해 인정 사정없이 철봉을 휘둘렀다. 사 월과 적월을 향해 휘두르려다가 잠시 억눌렀던 분노의 쾌 감을 남김없이 쏟아내며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한 생명 한 생명을 사그라지게 하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내가 미처 몰랐다니! 다음에는 꼭 사람을 상대로 시험 해 봐야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철봉을 쥔 손에 더욱 힘 을 줬다. '너무 많군. 언제 이것들을 다 패 죽이지? 키득키득 구태 여 힘을 쓸 필요는 없겠지.' 난 내 뒤편에 주저앉은 남궁현과 그를 진정시키려는 듯 다독이는 제갈혜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부싯돌과 화섭자(火攝子)를 갖고 있으면 내놓으시오." "무, 무엇에 쓰려고 하는 거지요?" 제갈혜는 의외로 기절하거나 주저앉는 다른 녀석들과 달 리 비교적 양호하게 내 시선을 마주 봐 주었다. 비록 가늘 게 잔떨림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그 또한 나쁘지는 않은 일 이다. 키득키득. "내가 긴히 쓸데가 있으니 달란 말이오. 어서!" "......" 그녀는 한숨을 쉬며 부싯돌과 화섭자를 내놓았고, 그것을 받아든 나는 바로 부싯돌을 서로 부딪혀서 화섭자에 불을 붙이고는 독사보다는 잔털이 많아 쉽게 타오를 것 같은 혈 편복 무리를 향해 화섭자를 냅다 던져 버렸다. 화르르르륵 역시나 불이 순식간에 퍼져 혈편복들을 삼켰고, 같이 엉 킨 독사들에게도 옮겨 붙기 시작했다. 불이 붙어 고통에 찬 혓소리를 내며 타 들어가는 독사들을 보니 주체할 수 없는 혈기(血氣)가 다시 머리끝으로 치솟는 게 느껴졌다. "카아아아아아아앗!!" 콰직! 콰직 콰직! 다시 철봉을 들었다. 불을 피해서 겁없이 내 주변에서 알 짱거리는 놈들을 짓이기고 또 짓이겼다. 피가 튀고 육즙이 튀어 올랐다. 그런데, 나에게 튀어 오른 것은 그것만이 아 니었다. 한참 철봉을 정신 없이 휘두르다보니 몸이 뻣뻣하 게 굳어 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신도 어질어질한 것이 꼭 몸에 맞지도 않는 술을 마시고서 뻗어버리는 사람 처럼 다리가 꼬이는 것이 느껴졌다. "웃기네! 일어나야 해! 아직 죽일 놈들이 이렇게나 많아! 다, 다 죽일 때까지 난 쓰러지지 않아! 카아아아아아앗!" 날 쾌감으로 이끌던 이질적인 기운이 내 분노 어린 절규 에 화답하듯 내 온 몸을 관통하며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전신에 활력을 불어넣어 줬다. 다시금 정신을 곧추 세운 나는 연기가 매캐하게 퍼지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철봉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혈편 복이건 독사건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인정 사정없 이 후려쳤고, 다시 후려쳤다. 아무래도 나는 철봉을 휘두르 는 것이 맘에 들었다. 무공을 몰라도 아무나 휘두를 수 있 다는 보편성! 내려쳤을 때 느껴지는 이 육중한 타격감! 상 대의 뼈가 바스러져 으깨어지는 쾌감과 전율! 이 모든 것이 나와 딱 맞게 떨어져 내렸다. 화르르르르륵 불길이 내 눈앞까지 번져왔다. 너무 깊숙이 들어가 버린 나로서는 그제 서야 제갈혜가 불피우는 것을 주저한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도망갈 길이 없었다. 내가 아 무리 살의(殺意)를 일으켜도 불에게만큼은 먹혀들 리가 없 었다. '허억, 허억 내가 무슨 짓을? 왜 여기에 서있는 것이지?' 내 분노의 대상이 되어야할 독사들과 혈편복들이 불에 타서 재가 되어갔기에 그 목표를 잃어버린 내 살의도 덩달 아서 수그러들면서 제 정신이 돌아왔다. 단편적으로 떠오르 는 지난 순간들이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황당해지기까지 했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면 자욱하게 피어오른 연기 가 바람을 따라 아래 환풍구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내 뒤에 있는 일행에게까지 번지지는 않는 다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분노가 가라앉으면서 내게 활력을 불어 넣어주던 기운도 더불어 사그라지면서 극심한 통증이 찾아들고 있었다. '독이다. 근거리에서 겁도 없이 독사들을 철봉으로 내리 쳤으니 긁힌 상처에 튄 독으로 인해 중독(重毒)된 거다. 어 쩐지 몸에서 힘이 빠지더라니......크크크크......사방팔방이 불 인데, 도망갈 기운은커녕 움직일 수도 없다니......' 이왕 죽을 거면 불에 타서 끔찍한 고통 속에서 절규하며 죽어 가는 것보다 혈편복한테 피를 빨리며 은근한 쾌감 속 에서 죽는 게 백 배는 나았을 것이다. '몇 마리 살려둘 걸 그랬나? 젠장.' 털썩 지독한 통증과 함께 기운이 빠진 나로서는 더 이상 서있 을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전력으로 다리를 뒤로 밀며 불로 부터 멀어지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내가 발버둥치는 속도 보다 불이 따라오는 속도가 배는 더 빨랐다. 화마(火魔)는 내가 정신 없이 박살내버린 독사들과 혈편복들의 육편 덩 어리를 집어삼키며 빠른 속도로 내 다리를 잡아 채오고 있 었다. 휘익 불길이 막 내 다리를 집어삼키려던 찰나 누군가의 손에 목덜미를 잡힌 나는 붕 떠오른 채로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사 장 정도 되는 거리를 가볍게 날아오르고서 날 내려놓는 인물을 올려다보니 바로 곽철 대협이었다. 독으로 인해 지독한 통증이 전신을 후벼팠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 야했다. "고, 고맙습니다. 곽, 곽철 대협." "그 말은 내가 할 말이오. 내가 한 일은 그저 당신의 목 덜미를 들고서 몇 발자국 뛴 것 밖에 없소. 당신이 한 일에 비하면 정말 작은 일이니 또 빚을 지고 말았구려." "헉, 허억......내, 내가 한 일?" 중독으로 인한 통증으로 떠는 와중에도 희미하게 떠오른 단편적인 조각들이 하나 둘씩 연결되면서 하나의 기억으로 떠올랐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게 무슨 힘이 있어 서 독사들과 혈편복들을 내몰았을까? "물러서시오. 곽철 대협. 마성(魔性)에 빠져 마인(魔人)의 길에 들어선 자는 절대로 살려둬서는 안 되오. 한 번 마인 이 되었던 자는 언젠가 다시 마인이 될 수 있단 말이오!" 검을 뽑아들고 날 죽일 듯이 노려보는 남궁현의 눈길에 서 강렬한 수치심이 동반된 비분강개(悲憤慷慨)가 느껴졌 다. 잠시동안이었지만, 내 살기에 짓눌렸는지 귀신에 홀렸 는지 그만 주저앉아 버렸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자 신의 자존심에 먹칠을 당했기에 더 열을 올리는 것일 거다. 뻔한 인간, 그것밖에 안 되는 네 녀석을 구한답시고 따라온 내가 다 부끄러워진다. "검을 내리세요. 남궁현 공자님. 그가 잠시 빠져있던 마 성(魔性)은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지나올 수 있는 길이에요. 설사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해도 그처럼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요. 오히려 그로 인해 우리가 그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우리도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겠지요." 역시 제갈혜가 막고 나서니 남궁현은 불만이 잔뜩 서린 얼굴이었지만, 마지못해 검을 검집에 꽂아 넣고서 뒤로 물 러나 버렸다. 그러나, 역시 그녀답게 쐐기를 박고 빠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작삼 점소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방금 일에 대해 입을 다무는 것이에요. 만약 그 일이 무림맹 귀 에 들어가면 당신은 마인이라는 미명 하에 무림공적(武林 共敵)으로 낙인 찍혀서 평생을 쫓겨다닐 테니까요. 그러니 항상 마(魔)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제가 지금까지 당신을 주욱 지켜봐 온 바로 당신은 마(魔)에 너무나 쉽게 빠져드는 경향이 있어요. 그 정도가 크건 작든지 간에 위험 한 일입니다." 젠장, 왜 내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대활약을 한 것을 가 지고 마인이니 어쩌니 하면서 그 격을 떨어뜨려 버리는 걸 까? 그녀가 하는 말이 틀린 바는 없는 듯 하면서도 은근히 거슬리는 게 직설적으로 말해오는 남궁현의 말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쳇, 그, 그럼 묻겠소. 정(正)이라는 명분으로 살인을 하 는 것, 것은 옳은 것이고, 같, 같은 부류의 살인이라 해도 마(魔)로 몰리면 왜 나쁜 일이 되는 거요?" "어려운 질문을 하는군요. 솔직히 말하면 이 세상을 정 (正), 사(邪), 마(魔)와 같은 것으로 구분 짓는 자체가 다분 히 정략적인 냄새가 강하지요. 모든 정의(正義)는 권력을 가진 자, 힘을 가진 자의 것이니까요. 제가 염려하는 것은 작삼 점소이가 그런 정략적인 정의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 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에요. 저도 조금은 알 것 같아요." "허, 허억......무, 무엇을 말입니까?......헉, 헉." "소방의 마음이요. 그는 당신의 무식한 순수함에 끌렸는 지도 몰라요. 아, 미안해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이게 은근슬쩍 사람 가슴이 애린 곳을 푹푹 잘도 찔러 놓고 미안하다면 다야? 순수라? 뭔가 잘못 알고 있군. 난 애초에 순수하다느니 뭐하다느니 하고는 인연이 없어. 단지 권력에 빌붙어 살 기회가 없는 밑바닥에서 살았으니 그런 것을 몰랐을 뿐이다. 알았다면 어떻게 해서든 달라붙어서 내 지위를 상승시키고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는데, 전력을 다 했을 거다. 바로 너희들처럼 말이다! "컥! 헉 끄아아아악!" 내가 흥분을 하며 노기를 일으키자 잊고 있었던 독기운 이 삽시간에 전신에 퍼져 극심한 고통을 수반해 왔다. 당가 희가 뭔가를 꺼내어 내게 먹이려고 하는 것이 보였으나, 그 녀는 냉월화 누님에게 가로막혀 엉거주춤한 입장이 되어 버렸다. 오,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부탁이에요! 누님! "당문의 해독약보다 내가 개발한 이 환약 효과가 더 좋 을 거야. 효과는......검증할 수 있어. 독사에 물려 죽어 가는 황소한테 임상실험을 이미 해봤지. 안심해. 작삼 동생." '도저히 안심이 안, 안......커 헉.' 손으로 환약을 가루로 만들어서 내 목구멍으로 넘긴 냉 월화 누님은 물을 조금 부어 주고는 내 상반신을 일으켜 세워서 등줄기에 강한 힘을 주며 두드려서 잘 넘어가도록 만들고는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니 왠지 오한이 드는 것이 너무나도 불안했다. "사월과 적월에게는 내 특효 회복단을 먹여놨으니까 곧 깨어날 테고, 은월이를 같이 남겨 놓을 테니까 회복들 되면 천천히 따라오도록 해. 작삼, 우리 애들 구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정(正)이니 마(魔)니 하는 얘기 따위 신경 쓸 것 없 어. 우리도 사(邪)로 몰려서 무림맹과 맨날 툭탁거리지만,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아. 결국은 누가 강하느냐에 따라 결 정되는 일일 뿐이야." '그, 그런 것보다 당문 해독약을 먹게 해줘요. 누님 커, 커헉.' 난 진심으로 불안해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당가희를 가리키려고 했으나, 그 손은 채 뻗치기도 전에 냉월화 누님 이 두 손에 꽉 움켜 쥐여졌다. "걱정하지마. 우리는 그 놈들한테 절대로 지지 않을 거 야. 안심해. 소맹주 일행은 분명 수라삼살과 싸워서 엉망진 창이 되어 있을 테니......아, 소방? 그는 절대로 건드리지 않 으마. 약속하지. 그럼 어서 낫고 천천히 따라오렴." 중독이 된 나와 혈편복에 당해서 아직도 흥분 상태에 빠 져 있는 사월과 적월, 그리고 간호를 위해 남겨진 은월을 제외한 모두가 암벽 앞에 섰다. 신법이 이 중에서 가장 월 등한 냉월화 누님이 가볍게 뛰어 오르자 곽철 대협이 밑에 서 절묘한 위치로 계속 돌을 던져 올려서 그것을 발판 삼 아 위로 오르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미쳐 생각 못한 일이었 지만, 위태위태하게 올라가던 그녀는 기어이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곧 그녀가 풀어준 밧줄을 타고 일행 모두가 올 라가 버렸다. '허, 허윽 모, 모두가 꿈같은 일이군. 제기랄 이 통증만 아니라면......' 냉월화 누님을 비롯한 일행들이 모두 올라가서 사라져 버린 것을 본 은월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 었다. "저기 작삼 오라버니가 먹은 환약 이름이 뭔지 알아요?" 가뜩이나 중독의 통증으로 통증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차라 고개만 절레절레 저어줬다. '내가 그런 것 따위 알 리가 없지. 그런데, 그것은 왜 물 어?' "그거 이름이 극통환(極痛丸)이예요. 물론 부궁주님이 만 든 대부분의 회복계열 환약들이 통증이 수반되지만요. 작삼 오라버니가 먹은 것은 그 중에서도 최강이래요. 부궁주님 말씀대로 일전에 중독되었던 소에게 극통환을 먹였더니 분 명 독은 깨끗하게 해소되었거든요. 대신에 치료과정에서 발 생한 통증으로 소가 미쳐서 날뛰는 바람에 그냥 도살해야 만 했었데요." 빨리도 얘기한다. 그런 것은 먹이기 전에......하기사 냉월 화 누님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바라보는 데서 감히 입을 열 수가 없었겠지. 뭐 어쩌겠어? 하늘이 오늘 내게 내려준 두번째 시련이라고 생각을 하......커커커컥. "끄아아악!" "꺄아아아악!" "끼야아아아아악!" 내가 고함을 지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사월과 적월의 비 명소리가 들려왔다. 중독으로 인한 통증은 문제도 아니었 다. 이게 사람을 살리려고 만든 해독단인지 죽이려고 만든 해독단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과격한 통증이 몸 안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 같았다.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냉 월화 누님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은 분명 훌륭한 방패막 속 에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행일 수도 있다는 사실 을...... '그, 그녀는 양날의 검이야. 커커컥.' "끄아아아아아악!"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2-11 15:27:10 고친날 2005-02-12 11:00:38 읽은수 10299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102)-현현자의 서고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2]현현자의 서고 외부에서 가해져 오는 충격에는 점점 익숙해져서 왠만큼 참아주겠지만, 내장을 뒤흔들며 할퀴는 듯한 극통환(極痛 丸)의 위력(威力)앞에서는 너무나도 무력한 나 자신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반각이 지났을까? 일 각이 지났을까? 사월과 적월의 비명 소리가 안 들리는 것으로 봐서 아마 기절해버 렸나 보다. 도대체 냉월화 누님은 왜 이런 무시무시한 환단 을 만들어서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끄아아아악! 끄아악! 크으 크으으으......" 한참 고함을 질렀더니 목이 맛이 갔는지 더 이상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더불어 의식까지 멀어지려 하고 있었다. 마 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은월(銀月)이 동감한다는 듯이 내 손을 꼭 쥐고서 다독거려 주는 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 녀가 손을 잡아줬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힘겹게 놓치지 않 고 있던 의식의 끈을 그만 놓아버리면서 아득한 꿈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 '어떠하냐? 몸은 괜찮으냐?' '어라? 현현자 영감이요? 오랜만이시구랴. 왠 일로 이제 야 나타났소?' '왠 일은? 네 녀석에게 과거의 잔재를 느끼게 해주느라 고 사념체가 지닌 한계 영역까지 힘을 써버려서 한 동안 쉬고 있었더랬지.' '옳거니! 잊고 넘어갈 뻔했는데, 왜 줘도 이런 거지 같은 구타심결(毆打心結)이나 넘겨준 거요? 혈해진경(血海眞經) 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지금이라도 다른 무공이나 알려주 슈. 과거의 회상까지 보여줄 정도면 무공기서 한 둘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 거 아니요?' '내가 거기 안 써놨냐? 한 번 구타심결(毆打心結)을 익히 게 되면 다른 내공구결은 익히지 못한다는 것 말이다. 혈해 진경만 해도 각 무공에 걸맞는 내공구결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에 네가 익힐 수가 없는 쓰레기일 뿐이다.' '봤소. 젠장 이왕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가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영감탱이 다시 걷어 가 시오. 없었던 걸로 하잔 말이오.' '바보 같은 녀석, 그것을 대성하기만 하면 혈해진경 정도 는 우습게 내려볼 수 있는데도 마다하려 들다니! 내가 거둬 가고 싶어도 난 현현자 본인이 아닌 사념체(思念體)일 뿐이 라서 그럴 힘도 없거니와 넌 이미 구타심결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니 다른 군말할 처지도 아니지.' '무슨 소리요? 내가 구타심결 덕을 보다니?' '이런 머리 나쁜 놈을 봤나! 내가 일전에 분명 말해줬지? 구타심결의 후유증 중에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면, 역천(逆天)의 기운을 흘리면서 인격이 변질된다고 하지 않 았더냐? 비 이상적인 살기의 비산(飛散)은 바로 역천의 힘 이다.' '모르오. 꿈속에서 들은 것을 세세하게 기억한다면 그게 어디 인간이오? 난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것 따위 기억 못 하오!' '그럼, 지금이라도 똑똑히 기억해둬라. 구타심결을 익힌 네가 연이어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져 마인(魔人)이 되었 다가는 이 세상은 그야말로 피바다를 이룰 것이다. 그러니 항시 스스로를 다스리면서 구타를 당하도록 해라. 알겠느 냐?' '싫소.' '왜! 왜? 싫다는 거야! 또 뭐가 불만이야?' '내가 왜 구타 따위를 당하며 살아야 하오. 싫소. 다 싫으 니까 물러주시오.' '구타심결의 진정한 묘용은 끝없는 인내(忍耐)를 통한 자 아완성(自我完成)과 득도(得道)에 있다. 억눌리고 억눌린 자 아가 그 힘을 풀어 의지(意志)와 합일(合壹)시키면 그 누구 도 네 앞을 가로막지 못한다. 네가 그렇게 원망하고 또 원 망하는 천운학도 마찬가지지. 이래도 싫으냐?' '그러니까 백 년 후에 말이오?' '흠, 그 기간은 어쩌면 상당히 단축될 지도 모른다. 네가 만난 인연의 별이 너무나 강대하기 때문이다.' '인연의 별? 그게 뭐요? 삶아 먹을 수 있는 거요? 다 필 요 없으니 구타심결 따위 제발 걷어 가버리고, 다른 좋은 걸로 좀 바꿔 주시오. 외로운 한 마리의 늑대처럼 호쾌하게 강호를 질타하며 포효할 수 있는 강력한 무공으로 바꿔달 란 말이오.' '끌끌끌, 한심한 친구로군. 뭐 그러니까 구타심결의 주인 이 된 것이겠지만, 정말로 한심한 노릇이로고. 아이고, 사념 체인 내 머리가 다 아프네. 몰라! 배 째!' '아니! 누가 할 대사를 영감이 왜 하는 거요! 그것은 내 대사요. 내 대사란 말이오!' '꿈이나 깨라! 일어나서 혈해진경을 챙기는 거다. 그것을 네가 가장 미워하면서 두려워하는 자의 손에 넘겨라. 두고 보아라. 네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혈해진경과 싸워야만 한 다. 때가 되면 네 힘의 진정한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 "후아, 후아 아이고, 머리야!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 거 야!" 깊숙이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쉬며 나도 모르게 눈을 번 쩍 뜨며 외쳤다. 순간적으로 현기증과 함께 머릿속을 징하 게 울리는 두통 때문에 인상을 찡그려야만 했다. 분명히 꿈속에서 현현자(炫炫者) 영감과 재회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맨 마지막에 뭐라고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도통 나 질 않았다. 머릿속을 뒤흔들면서 거부할 수 없는 강한 의지 (意志)가 뇌리 속에 박혀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면 서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찜찜함 때문에 찌푸려진 이맛살이 쉬 풀리지 않았다. "끼야악! 작, 작삼 오라버니, 깨어났네. 오, 오라버니 이, 이게 몇 개로 보여요?" 은월이 일견하기에도 멀리 떨어져서는 오른손 집게와 중 지 손가락을 펴 보이며 질문을 던져오고 있었다. 쟤가 왜 저러나 싶기도 하면서 깊게 생각하기에는 완전히 가시지 않은 두통 때문에 머리를 어루만지며 대답해줬다. "두 개." "그럼 이것은 요?" "네 개." "그, 그럼 이것은 요? "여덟 개, 나 안 미쳤으니까 그만 좀 하시오." "우와, 정말 멀쩡하네요. 대단해요. 극통환(極痛丸)을 복 용했던 다른 월녀궁 사람들은 의식이 차리고서도 적어도 사 나흘 동안은 헛소리를 하면서 실실 웃어서 따로 정신 치료를 받았어야 했는데, 오라버니는 바로 제 정신을 차렸 네요." 아니 그럼 내가 미쳐서 실성이라도 하길 바랬다는 소리 야? 이 애는 그래도 나한테 호감을 보이는 몇 안 되는 애 라고 생각했는데, 은근히 짜증이 나는 구석도 없잖아 있 어 보인다. 안 그래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기 때문에 옆에서 뭐가 그리 흥이 났는지 나불나불 입을 닫을 줄 모 르는 그녀를 그냥 무시하며 다시 드러누우려고 했었다. 그런데, 바로 내 옆에 바짝 붙어 무릎을 꿇고 앉아 부복 해 있는 여인이 보여 그만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버렸다. 일단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찬찬히 보니 사월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미녀였던 적월(赤月)이었다. 내가 일어나 는 것을 본 그녀는 바로 두 손을 땅에 대고 이마를 바닥에 지긋이 붙이며 절을 한 채로 무척 부담이 되는 말들을 쉴 새 없이 내 쏟았다. "은공, 자세한 얘기는 은월이로부터 들었습니다. 제가 비 록 월녀궁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지만, 은공이 아니었으 면 이승과 하직했을 목숨, 저희를 목숨걸고 구해주신 은공 의 하해(河海)와 같은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역시 교옥정(喬玉淨) 언니의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니었군요." "잠깐, 교옥정 누님의 선택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느닷없이 교 누님 얘기가 튀어 나와서 무슨 말인가 귀를 바짝 기울이며 그녀 입을 쳐다보았는데, 구석에 뻣뻣하게 서있던 사월이 소리를 지르며 막는 통에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만! 그런 얘기는 하는 것이 아니야! 아직은 모른다고! 교 언니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 때는 정신이 없어서 그랬을 거라구. 그러니까 거기서 그만해." "너, 은공 앞에서 뻣뻣하게 서 있기나 하고 왜 그리 예의 가 없니? 동기라고 봐줄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그렇게 나 오면 내 검이 널 용서치 않을 거야!" 적월은 말과 동시에 일어서면서 발검 자세를 취한 채 사 월을 째려보았다. 이맛살을 찌푸리던 사월은 흥 하고 아니 꼽다는 듯 코웃음 소리를 내며 역시 검병에 손을 올려놓으 며 대치를 하는 것이었다. "용서치 않으면 어쩔 건데? 네가 날 이길 수 있기나 해?" "피차 일반이지. 이 기회에 제멋대로인 네 성격을 모조리 뜯어 고쳐 주겠어!" 오옷, 적월이란 여인, 가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의외로 화통하네. 이대로 둘이 싸워도 좋기는 한데, 그 소식이 교 옥정 누님 귀에 들어가는 것은 둘 째 치고 냉월화 누님 귀 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나에 대한 호감도가 조금은 깎이겠 지. 사월이야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내 손바닥 안일 테니 봐 주도록 하마. "그만 들 하시지요. 같은 사문 사람들끼리 칼부림하는 것 을 냉월화 누님이 보면 퍽도 좋아하시겠구려." "......" 냉월화 누님 얘기를 꺼내자 마자 부궁주를 몹시도 두려 워하는 듯했던 그녀들의 평소 습관대로 흠칫하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대치 상태를 거두며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도 대체 그녀가 월녀궁에서 어떤 존재로 군림(君臨)해왔기에 제자라는 아이들이 이렇게 겁을 내는지. 원. "흥, 점소이 너, 나한테 공치사할 생각하지마. 저번 일로 한 번은 널 혼내주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이번 일로 상쇄시 켜 주마. 오히려 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끝까지 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구나!" 사월의 싸가지 없는 말에 내 속에 있는 대로 알아서 척 척 말대꾸해주는 적월을 보니 속이 후련해지면서 구해준 보람을 충분히 느끼고도 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사월은 괜히 꺼내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적월을 봐 서 잊기로 했다. 후후후훗. 대신 그동안 궁금하긴 했지만, 차마 꺼내지 못했던 질문이나 해볼까? "그런데 말입니다. 월녀궁 소저들이면 모두 월녀심법(月 女心法)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랬다면 남자문제는 어떻 게 처리해왔는지 궁금하군요. 말해 줄 수 있나요?" "그것은 말이지요." "시끄러! 궁내의 일을 외인에게 떠벌리지 마!" 둘의 다툼 때문에 멀거니 서있던 은월이 말할 기회가 생 겼다는 듯이 잽싸게 나섰으나, 사월이 눈을 부라리며 다그 치자 막내 된 입장에서 겁을 먹었는지 슬그머니 말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그녀를 대신해서 역시 적월이 입을 열었다. "그는 이미 외인이 아니야. 알 권리가 있어." "너, 정말......" 외인이 아니라? 내가 주화입마(走火入魔)인지 뭔지에 빠 져 얼결에 그들을 구해준 것이 그렇게 큰 것이었나? "저희는 월녀심법(月女心法) 육 성까지 밖에 못 익혔어 요. 그 단계까지는 남자를 몰라도 무리 없이 익힐 수 있답 니다. 지금 우리 일행 중에서 월녀심법을 대성한 사람은 냉 월화 부궁주님 뿐이예요. 은공께서는 아마 교옥정 언니가 수제자로 인정받아서 혹독한 과정을 거치며 월녀심법을 익 히고 있는 것도 아실 거예요. 저희가 이 곳에 온 것도 그것 때문이지요. 월녀심법과 맞물리는 일양심법(日陽心法)의 진 본(眞本)을 찾아서 온 것입니다. 그것만 얻으면, 남성과의 교합이 없어도 월녀심법을 대성할 수 있어요. 따라서 이번 저희가 나선 배경에는 월녀궁의 사활이 걸린 거나 다를 바 없어요. 더 이상 무림맹에게 사파(邪派)로 매도당하는 꼬투 리를 잡히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 뜻 밖에도 그녀들의 목적이 혈해진경(血海眞經)이 아닌 처음 듣는 일양심법(日陽心法)이라는 것에 놀라기는 했지 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적어도 혈해진경을 놓고 다 른 구룡애들과 싸울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2-12 20:52:41 고친날 2005-02-12 20:52:41 읽은수 9403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10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3]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머릿속에서 공명(共鳴)하듯 울리던 두통이 차츰 차츰 가라앉아 갔고, 몸을 움직이기도 한 결 편해졌다.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어 은월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은월 소저, 다른 일행이 출발한지 얼마나 되었지요?" "음, 반 시진은 된 것 같아요." "이런, 여기서 우물쭈물할 때가 아니군요. 어서들 갑시 다." 혹시라도 소맹주 일행과 부딪혔을 지도 모르는 일행들이 걱정이 된 나로서는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물론 내 자신은 크게 도움이 될 리가 없었지만, 나와 함께 뒤에 남 아있던 월녀궁 제자 세 명의 힘이 그들에게 적은 것이 아 닐 것이다. 혹시 아는가? 또 구타심결(毆打心結)의 덕을 또 볼 수 있을지? 사월(死月)은 내 말이 떨어지기도 채 전에 이미 밧줄을 타고 깃털처럼 가볍게 올라가고 있었다. 하여간 언젠가는 저 버르장머리를 내 손으로 꼭 뜯어고치고 말 테니 두고 보라지. 반면 내가 먼저 올라가기를 기다리는 듯 내 뒤에 공손히 기립해있는 적월(赤月)과 은월(銀月)이 왜 이렇게 귀여워들 보이는지. 특히 파릇파릇하게 산 채로 생회를 쳐 서 날름 삼켜버려도 군소리조차 안 할 것 같은 적월의 존 재는 너무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든든하기도 했다. 피식 실없는 사람처럼 헛바람을 내쉰 나는 시답지 않은 잔념을 떨쳐내며 몸에 익은 데로 밧줄을 오른 발에 올리고 왼발을 엇갈려 올린 뒤에 조였다 놓았다 하면서 힘겹게 올 라갔다. 그 놈의 극통환(極痛丸)때문인지 아니면 구타심결 (毆打心結)의 후유증 때문인지 기력이 많이 손실되어서 올 라가는 순간 조금 버겁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기어이 끝까지 올라가고야 말았다. 미리 올라와 서 기다리던 사월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흥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제치며 혼자 앞서거니 신형을 날려 사라져 가고 있 었다. 왠지 그녀를 마주 대하면 두통이 재발하는 것 같아 머리 를 움켜쥐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가 앞선 일행들이 걷어버 린 차양막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제야 차양막에 붙어있는 새하얀 돌조각들이 당가희가 바닥에 뿌리던 백반 가루와 같은 종류임을 알 수 있었다. 혈편복과 독사들의 신경이 우 리에게 쏠리게 만들어 놓고 이 차양막으로 입구를 막아서 자신들 뒤를 쫓아오지 않도록 만든 것이었다. 결국 일행을 이 위치에서 생매장 시켜버리려 했던 소맹주의 치밀한 계 획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무서운 놈, 소방이나 남궁현한테 손가락 하나 까딱거리 기만 해 봐. 네 놈의 다리 몽댕이를 다 부러뜨려 버릴 테 다. 특히 가운뎃다리도 똑 분질러버려서 평생 내시로 살게 만들어 주마.' 내가 올라선 순간에 적월과 은월이 신속하게 정상으로 올라왔다. 빨리 올라올 수 있음에도 천천히 나를 기다린 그 녀들이 싸가지 없는 사월보다 백 배는 더 아름답고 우아 하며 세련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더구나 적월이 나를 대하 는 태도는 과할 정도로 공손했다. "은공, 많이 피로해 보이십니다. 저희들이 은공을 모실 테니 조금 어지럽더라도 참아주실 수 있겠는지요?" "네? 아, 마, 마음대로 하세요. 빨리 갈 수 있다면 저야 좋지요." "은월아, 그 쪽을 부탁해." "네, 언니 맡겨 두세요." 내가 아직 회복이 덜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듯 둘이서 내 양옆에 서서 각각 맞은 편 팔과 팔짱을 끼고는 보조를 맞추며 사월의 뒤를 따라서 경공을 발휘해 사뿐히 날아 올 랐다. 솔직히 몸이 부웅 떠올랐다가 내려앉으며 지면을 스 쳐나갈 때는 아찔한 마음에 떨리기도 하면서, 두 월녀궁 미 녀가 양옆에 붙어서 뿌려주는 사향 냄새에 가슴 설레는 복 잡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버렸다. '킁킁, 무, 무슨 향을 이렇게 진하게 뿌려놨어? 봉, 봉긋 한 가슴이 흔들 흔들거려서 눈, 눈도 옆으로 못 돌리잖아. 다른 때 같았으면 유감 없이 감상했을 텐데, 날더러 은공이 니 뭐니 하는 애 앞에서 채신머리없이 굴 수도 없고......끙.'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내려보자 이 번에는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 나뒹구는 무림맹(武林盟) 황의 무사들의 시신들 서너 구가 눈에 들어왔다. 내장을 쏟 아낸 것도 모자라 진득한 피내음을 풍기고 있는 섬뜩함에 그만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아마도 앞서 간 제갈혜와 냉월 화 누님 일행이 휩쓸고 지나가 버린 자리인 듯 했다. '아이고, 이래저래 눈 돌릴 곳도 없구나. 어지러워도 그냥 정면이나 바라보자.' 얼마 가지 않아서 저만치 앞서가는 사월의 신형이 눈에 띄었다. 적월과 은월에게 팔짱이 끼워진 채 따라오는 나를 보고 또 흥 소리를 내는 것을 실눈을 뜨고서 새치름하게 바라보았다. 도대체 나의 어디가 그렇게도 불만스러운지 이 해가 어려운 여인이었다. 되 돌이켜 생각해보면 교옥정 누 님과 관련해서 역성을 내는 적이 많았던 기분이 든다. 그냥 기우일지도 모르겠지만, 차라리 눈에 안 보이는 계집애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 나으리라. 계속 내려가야만 하는 지하 통로의 석문들은 모두가 개 방된 채로 정지되어 있었다. 원래는 일행이 갇혀 버린 곳에 있던 혈편복들이 통로를 따라 날아오르며 피의 잔치를 벌 리도록 설계되어 있었겠지만, 어이없게도 백반 차양막 하나 로 막아버린 것을 현현자가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후후훗 다음에 꿈속에서 현현자 영감탱을 보면 꼭 물어 보면서 얼굴 표정이 어떻게 바뀌나 살펴봐야지.' 채챙 채채챙 채챙...... 끝도 없이 이어져 있을 것 같은 동굴 통로를 타고 은은 하면서도 나지막하게 메아리치며 들려오는 금속성은 분명 검과 도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였다. "이, 이 소리는......적월, 은월 그 인간은 걸어서 내려오라 고 하고 니네는 어서 따라와!" 성질 급한 사월이 그 말만 남긴 채 순식간에 몸을 날려 사라져 버렸고, 날 양옆에 끼고 신형을 날리던 그녀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서 잠시 망설이는 빛이 역력했다. 사 월이 밉살스럽게 내뱉은 말이기는 하지만, 내 스스로가 그 녀들에게 거치적거릴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팔짱이 껴진 팔들을 풀어 버렸다. "어서 가보시지요. 저 때문에 소저들의 발걸음이 늦어서 일행들이 위험에 처해지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귀찮......아니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먼저들 가 보세요." 적월이 한숨을 내쉬며 송구스럽다는 듯이 허리를 깊게 숙이고서 자리를 떴으며, 은월도 손을 흔들면서 낭랑하게 한 마디 남겼다. "작삼 오라버니 있다가 봐요."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땅이 꺼져라 한숨 을 내쉬며 돌계단 위에 털썩 앉아 버렸다. 사월의 한 마디 로 인해 내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인간인가 다시 한 번 깨우쳤기 때문이다. 어쩌면 괜히 따라온 것인지도 모르 겠다. 처음에는 주령령의 눈물에 그만 나도 모르게 울컥해 서 남궁현을 구해내겠다는 말도 되지 않는 일념 하나로 뒤 쫓아오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둘도 없었던 친구를 잃었을 따름이다. 정작 당사자인 남궁현 녀석은 고마워하는 기색을 눈꼽만치라도 보여주기는커녕 나에 대한 악의(惡意)만 드높 인 듯 했다. 내 딴에는 죽을 둥 살 둥하며 건져낸 그들에게 서 돌아오는 말들은 고작 마인(魔人)이니 하는 개소리 밖에 돌아오지 않았고, 사월은 여전히 날 아니꼽게 여기고 있다. 오로지 적월만은 나를 은공이니 뭐니 하면서 지나치게 떠 받들어 줬기에 조금 부담이 되었어도 그나마 유일한 위안 거리라고나 할까? '결국은 내가 힘이 없기 때문인가? 그래서, 그토록 노력 을 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렇다 면......내가 강해진다면 저 녀석들도 나를 우러러 볼까? 좋 아, 혈해진경(血海眞經), 내가 먹어주지. 그것을 손에만 넣 는다면 구타심결(毆打心結)따위야 제거할 방도가 생길 거 다. 너희들에게는 유감이겠지만, 그 장소를 아는 자는 오로 지 나뿐일 것이다.' "후후후후훗, 하하하하하하핫......!!" 통로를 끝없이 울려 퍼지는 이 웃음의 의미를 아는 것은 나뿐이리라. 두고 보자. 최후에 웃는 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될 테니......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2-13 21:13:03 고친날 2005-02-13 21:13:03 읽은수 9522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10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4] 혈해진경(血海眞經)이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지금처럼 수동적으로 따라만 다니며 눈치를 보기만 했던, 과거가 모조리 부질없어 보였 다. 혈해진경을 남 몰래 챙겨서 천하무적(天下武敵)에 무소 불위(無所不爲)인 무공을 터득한다면 이 세상 모든 세력들 을 일거에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몰아붙여 나만의 세계를 세우는 것도 불가능은 아닐 것이다. 상상해 보라! 아무리 나보다 잘 생기고 돈 많은 상류층 인간들이라 해도 절대강자(絶對强者)로 군림(君臨)한 내 앞 에서는 비굴하게 허리를 조아릴 것이며, 밤이면 밤마다 수 많은 미녀들의 나긋나긋한 알몸 봉사를 받으면서 꼭두새벽 까지 질펀하게 놀 것이며, 내가 거하는 집은 한 나라의 황 제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으리으리하면서 휘황찬란한 대궐 이 될 것이며, 창고에는 언제나 곡식과 금은보화가 그득하 게 쌓여 있어 그 누구도 부럽지 않게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 것이다. '크흐흐흐흐, 지금까지 날 능욕하며 무시한 인간들은 무 공을 폐하고 내 전속 노예로 전락시켜서 내 발을 씻게 하 고 뒷간에서 내 뒤나 닦는 비천한 처지로 타락시켜 주겠다. 받은 게 있다면 열 배 스무 배로 갚아주리라!' 더불어 지금까지 함께 왔던 일행들이 지켜줘야 할 대상 에서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자연스레 바뀌어 졌다. 그들을 최대한 이용해서 현현자의 서고까지만 간다면, 혈해진경은 저절로 내 손안으로 굴러 들어오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흐 릿하던 목표가 우뚝 솟아오른 첨탑처럼 그 끝이 뚜렷하게 보이자 피곤에 절어 무겁기만 하던 발걸음에 힘줄기가 돋 아났다. 돌계단을 따라서 내려가자 검과 도가 부딪히는 소리는 한 층 격해졌고, 가끔 욕설 섞인 고함도 약하게 들려왔다. 통로 양옆으로는 거적 대기처럼 마구잡이로 내팽개쳐진 무 림맹 황의 무사들의 처참한 시신들이 종종 보였지만, 일개 점소이 치고는 너무나 많은 시신들을 접해왔고, 그 이전부 터 그림을 핑계삼아 무덤을 파헤치며 시신해부에 동참했던 화려한 경력들이 있었기에 욕지기가 일어난다 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시신들의 주머니를 뒤져 은전과 동전 을 챙기는 대범함까지 잊지 않았다. '몰래 숨어서 혈해진경을 익히는 동안 밥은 먹고살아야 할 거 아냐? 어차피 저승으로 간 놈들의 금전을 가난에 찌 든 내가 사용해줌으로써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갈 그들의 덕행을 대신 쌓게 해준 셈이니 결과적으로 상부상조 아니 겠냐고?'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을 나처럼 유용하게 써먹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석문을 한 군데 더 통과해서 내려가자 도검이 휘날려지 며 맞부딪히는 소리가 한 층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싸우는 상대가 누구인지, 전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증이 앞섰 기에 한 달음에 뛰어 내려갔다. 수라삼살(修羅三殺) 아니면, 무림맹(武林盟)아해들일 것은 뻔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구 체적으로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나름대로의 호기였다. 그러나,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쏟아져 내리는 강렬한 빛줄 기 때문에 잠시동안은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눈이 적응하 기를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천천히 손을 떼어내며 빛줄기 의 근원인 천장을 올려 보았다. 놀랍게도 천장에는 통로에 드문드문 박혀있던 야명주와 는 비교도 어려울 만큼 큼지막하면서도 수많은 야명주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그 빛들이 교차되고 교차되니 거의 대 낮을 무색하게 만드는 강렬한 빛줄기들이 형성된 것이었다. '이 곳이 어떤 곳이기에 이렇게까지 훤하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질문에 대한 답은 그의 회상을 더듬어 본 결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 곳은 바로 현현자의 거처였으면서 서고가 위치하는 거실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 광장이었 던 것이었다. 따라서 책을 읽고 쓰며 생활하는데, 가장 편 한 광원으로 조절을 해놓았던 듯 했다. 모르긴 몰라도 현현 자만이 아니라 무공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는 그의 다른 가솔들도 이 곳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 서, 천연에 가까운 조명을 설치한 듯 싶었다. 천하제일인 답게 취향 또한 고상하다 싶었지만, 장관은 장관이었다. 채챙! 채채챙! 채채챙! 챙 챙 챙...... '아차 내가 무슨 잡념을 이리 떠올리고 있었을까? 어디 어떻게 된 것이지?' 지름이 십 여장은 되어 보이는 드넓은 광장 안에서는 예 상대로 무림맹 사람들과 우리측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대 규모로 칼부림을 벌리고 있었다. 곽철 대협과 검을 마주대 하고 서있는 녀석은 뜻밖에도 평상시 그를 존경한다고 입 버릇처럼 말을 했던 모용천풍으로 그 또한 구룡 중에서 발 군의 실력을 갖고 있었는지 검귀(劍鬼)라는 곽철 대협한테 우세하지는 못해도 밀리는 기색 없이 잘 싸우고 있었다. 무 공이 조금 떨어지는 황보원과 악조영은 합공으로 남궁현을 몰아세우고 있었는데, 마치 외나무다리에서 철천지원수라도 만났다는 듯한 날카로운 기세가 넘쳐흘러 자못 구룡급에 밀리지 않아 보였기에 남궁현의 강맹한 제왕검법(帝王劍法) 이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제갈 혜와 당가희, 그리고, 적미호는 월녀궁 여인들의 합격검진 (合擊劍陳)에 힘을 합쳐서 무림맹 무사들을 막아내고 있었 다. 실력은 이 쪽이 조금 앞서는데 반해 워낙에 숫자가 딸 리고 장소도 넓은 탓에 좀처럼 우세를 보이기는 힘들어 보 이는 전황이 마치 누가 일부러 양쪽의 힘을 균형 맞춰 대 련 시켜놓은 듯 아슬아슬한 것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내 손에 저절로 식은땀이 다 날 정도였다. '천운학 소맹주가 보이지 않네. 수라삼살을 뒤쫓아 간 것 인가?' 마지막으로, 맨 구석에서 냉월화 누님의 연검에 맞서서 봉을 휘두르고 있는 자는 바로...... '소, 소방!' 막상 그를 보니 시야가 흐려지면서 무언가 뜨끈 미적지 근한 것이 볼을 타고 톡 하니 떨어져 버렸다. 아무 상처 없 이 무사한 그와 다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워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버린 것이었다. 냉월화 누님은 정말 나와의 약속대로 그에게 상처 하나 입힐 생각이 없었는지 연검으로 봉의 진로를 튕겨내며 잡 아 두고만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정도로 소극적으로 싸 우고 있었다. 소방 또한 기운이 빠졌는지 전력을 다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눈앞에 연검이 있으니 봉을 내지른다는 비무초친과도 같은 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 다. 무엇 때문에 기운이 빠진 것일까? 그가 무사한 것 같아 기쁘기도 하면서 힘이 빠진 모습에 걱정이 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바라보고 말았다. "작, 작삼 살, 살아 있었......?" 내 인기척을 뒤늦게 알아차린 소방이 나의 무사생환(無 事生還)을 알아보고는 무심코 기쁜 듯이 외쳤으나, 사나이 로 태어났으면서도 눈물을 흘려버린 사나운 꼴 따위를 보 여주기는 싫었으므로 얼른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나의 외 면을 목도한 그가 그만 위화감을 느꼈는지 끝말을 흐리며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외면은 했지 만, 위로 한 마디는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무릎을 탁 치며 입을 열었다. "댁은......? 아아, 저랑 닮았으면서 소방의 친구였던 점소 이 우작삼을 찾으시나 보군요. 안타깝게도 그는 둘도 없던 친구의 배신에 치를 떨면서 혈편복에게 피를 빨리고 독사 에게 물려 죽었다오. 난 단지 우연히 그를 닮은 사람이니 착각하시지 말길 바라오." '어, 어라 이, 이게 아닌데......' 막상 내뱉고 나니 이게 아니다 싶어 당황했지만, 한 번 쏟아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그를 향해 반갑다 고 껴안으며 등을 톡톡 두드려 주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내뱉었다는 말이 이렇게 까지나 가시 박힌 비수가 되어버릴 줄은 나 자신도 몰랐다. 탁 탁 탁 탁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에 놀라 외면하고 있던 고개를 돌려보니 소방이 대치하고 있던 냉월화 누님을 내팽개쳐 버리고는 맞은편 통로로 뛰어가 버리는 뒷모습만을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균형을 유지해오던 저울추에서 큼지막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그가 빠져버리고 나니 남아있던 무림맹 사람들만 된서리를 맞게 되었다. 엉뚱하게도 상대적으로 이득을 본 냉월화 누님이 연검을 파르르 떨치며 근접한 거리에 있던 무림맹 무사들의 목을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휙 휘리릭 휘릭 "우왁! 크아아악! 큭!" 소방의 부재로 손이 비어버린 냉월화 누님이 팽팽하던 저울추를 급격하게 무너뜨려 버리자 상황판단이 빨라 보이 는 여시같은 여인, 악조영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모두 물러서! 여기를 포기한다. 모용천풍 공자님도 어서 떨어지세요. 다른 무림맹 사람들과 합류해야만 합니다!" "쳇, 곽철 대협 오늘 우모 정식으로 대협과 검을 나눌 수 있어서 기뻤소. 다음에 또 붙어 봅시다." 그런 것이었나? 저 모용천풍인가 뭔가 하는 놈은 곽철 대협하고 정식으로 목숨을 건 진검대결을 하고 싶어서 무 림맹에 붙은 것이었단 말인가? 우루루루루루 자기 목숨 아까운 줄 잘 아는 듯 무림맹 아해들은 정말 여우에게 꽁지 뜯긴 닭처럼 반대편 통로로 전력을 다해 도 주해 버렸다. 통로를 타고 들어온 바람이 휭 하니 나부낀 을씨년스런 광장에는 비릿한 피내음과 함께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무림맹 황의 무사 시신 몇 구만이 덩그라니 남겨져 방금 전까지의 혈전을 실감하게 만들고 있었다. 톡 톡 누가 내 어깨를 치기에 돌아보니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 힌 제갈혜가 그녀답지 않게 씽긋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 고 있었다. "당신 정말 여러 용도로 이득이 되는군요. 무려 반 시진 동안 소맹주가 나타나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하며 대치하 고 있었는데,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당신으로 인해 우리가 득을 보았군요. 내 예상이 빗나가지 않아서 다행이예요." 언제나 그러하듯 제갈혜의 말은 꼼꼼히 되새김질해 보아 도 칭찬을 하는 것인지 비아냥거리는 것인지 당최 구분이 애매 모호하기 그지없었다. 원래부터 말버릇이 저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의 말을 기분 좋게 흘리기는 어려웠다. '젠장,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제갈혜를 한 번 흘겨보고는 무림맹 무사의 옷깃을 뜯어 내어 연검을 정성스럽게 닦고 있는 냉월화 누님에게 정중 히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냉월화 누님. 소방을 무사히 보내주셔서 정 말, 정말 감사 드립니다. 누님." "글쎄, 저렇게 힘 맥아리 하나 없는 아이를 어떻게 내가 죽일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와 싸우는 도중에 몇 차례나 치명적인 틈을 내주며 찔러버리라고 유혹을 해와서 참느라 고 혼이 났다네. 자네를 봤을 때는 아예 봉을 놓아버리더 군. 다음에 다시 보게 되면 그를 놓치지 말고 꽉 잡아주게. 위태로운 것이 훅 불면 쓰러져 버릴 아이야." "휴우, 그게 막상 제 마음대로 되지를 않더군요. 뭐 괜찮 을 겁니다. 저 같은 일개 점소이 따위 잊어버리는 게 오히 려 그의 일신상에 좋을지도 모르지요." 순간 냉월화 누님이 내 볼따구를 잡고 꼬집어 버리는 바 람에 안 그래도 그렁그렁 맺혀있던 눈물 방울이 찔끔 떨어 져 내려 버렸다. "자넨 바보로구먼. 내가 일개 점소이 따위에게 동생이라 고 말을 높여주겠는가? 공식적이지는 않지만, 자네의 신분 은 이미......흠, 그래 아직은 이르지. 일러." 알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며 현현자의 거처를 향해 걸음 을 사뿐사뿐 내딛는 그녀를 보니 마음 속이 조금은 싱숭생 숭해졌다. 도대체 나의 신분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일까? 월 녀궁 여인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상당히 친밀감 있 게 다가오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다. 성질 더러운 냉월화 누 님이 다짜고짜 나를 동생이라고 불러온 것도 이상한 일이 기는 했다......에휴, 머리 아프게 깊게 생각하지 말자. 그냥 간단 간단하게 살자구. 칼부림으로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현현자의 거 처로 걸어 들어가는 그들의 뒤를 나도 따라 들어갔다. 물론 혈해진경(血海眞經)을 손에 넣기 위해서 말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2-15 01:20:38 고친날 2005-02-16 21:42:38 읽은수 9535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10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5] 외부 광장이 돌로 지어져 조금은 삭막한 분위기가 도는 반면, 정작 그 내부는 입구에서부터 비싸다고 알려진 자단 목으로 지어져 있어 일견하기에도 매우 견고해 보이면서도 아담하며 운치 있는 꿈 속 분위기 그대로 였다. 내가 별 생 각 없이 쳐다보는 자단목을 쓰다듬으며 톡톡 두들겨본 제 갈혜가 감탄을 터뜨렸다. "대단하군요. 이 자단목(紫檀木)들은 매향(埋香)된 침향목 (沈向木)중에서도 꽤나 상품에 속하는 것들 이예요. 못해도 천 년 이상은 갯벌에 묻혀있었던 것들이네요." "그럼, 이 자단목들이 그렇게 비싸단 말인가요?" "그럼요. 이 나무 조각 하나가 아무리 못해도 은전으로 스무 냥은 넘을 거예요. 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끼이익 끼익 끼익 은전으로 스무 냥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철봉을 모가 난 공간에 끼워 넣고 비틀기 시작했다. 자단목을 뜯어내기 위해 애쓰는 나를 내려다보며 어이없는 시선으로 반문하는 그녀에게 돈에 환장한 사람으로 비치지 않도록 적당히 얼 버무려주었다. "제가 무단으로 육포를 좀 빌려 왔거든요. 아무래도 그것 을 갚을 돈이 좀 필요해서요. 헤헤헤헤헷." "작삼 점소이." "네?" "나라면 거의 돌이나 다름없는 강도를 자랑하는 자단목 에 매달리는 헛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벽에 걸려있는 명필 이나 사군자를 몇 점 집어갈 거예요. 저기 걸려있는 달마도 만 해도 금원보 세 네 개는 줘야......" 후다다다닥 그녀의 입에서 금원보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벽에 걸 려있던 달마도 뿐만이 아니라 사군자 등이 걸린 벽으로 달 려가서 진본임을 증명하는 인장을 확인하고는 맞바로 눈에 보이는 모든 족자들을 빼내어 챙겼다. 한때 삼 년 간이나 그림에 미쳐있었던 경력 때문에 수시로 진본과 탁본을 곁 에서 살펴왔던 나로서는 진품과 가짜를 구분해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솔직히 일전에 붓을 쥐었을 때는 그림을 그린다는 그 자 체에 목적을 뒀었지, 이처럼 그 가치를 돈으로 바꿔서 생각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림은 보면서 느낄 수 있다는 그 자체 만으로도 행복한 것이거늘 언제부터 이렇게 타락해버린 것 일까? '젠장! 내 비록 배가 고프고, 눈치가 보이는 한이 있어도 물감을 찍어 화폭에 붓을 내리그었던 순간의 황홀함만은 영원히 잊지 않을 줄 알았는데......빌어먹을! 나, 나는 왜 이 렇게 변해버린 걸까?!' 마지막으로 국화가 그려진 족자를 채 접지 못하고 자책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나를 아마 타고난 돈벌레 정도 로 생각했는지 비웃듯 코웃음친 제갈혜는 거실 가운데에 놓여져 있는 거대한 자단목 탁자를 바라보며 여기저기 만 져보다가 종이 냄새가 진동하는 서재로 성큼성큼 걸어 들 어가 버렸다. 그제야 나도 아뿔싸 하며 그녀 뒤를 따라들어 갔는데, 그 곳에는 이미 당가희와 냉월화 누님이 서고에 있는 책들을 하나씩 빼보며 확인하는 중이었다. 적미호도 뭔가 흥미롭다 는 듯이 여기저기 흐트러진 책들을 펼쳐 보며 내용을 확인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져버린 책들하며, 여기저기 뒤진 흔적들이 채 정리되지도 않은 것을 보니 이미 소맹주 일행이나 수라삼살이 한참 전에 뒤지면서 난장판을 만든 티가 역력했다. 아마도 수라삼살(修羅三殺)이 한참 뒤지고 있을 때 천운학(天雲鶴) 소맹주 일행이 거실로 뛰어 들어왔 는지 길게 뒤지진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들은 아마 자 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도주중일 것이다. 서재 중앙에 있는 대리석 탁자의 네 모서리가 비틀려 있 었고, 그 중앙 부분이 확실히 열린 채로 비어 있었던 것이 었다. 아마 책 내용도 확인해 보지도 못한 채로 꽁지 빠지 게 도주중일 것이다. 소맹주는 소맹주대로 그들이 얻은 것 이 혈해진경(血海眞經)임을 확신하고서 추격중일 것이리라. 그런데, 천운학 혼자서 그 세 명을 추격중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떠오른 의문을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말 았다. "소맹주 혼자서 수라삼살 세 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꼭 혼자일 거라고만 볼 수는 없지요." 제갈혜가 자기 멋대로 껴들었지만, 내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려는 듯 한 의도가 가상해서 계속 들어주기로 했다. "그렇지만, 아까 전에 우리 일행이랑 싸우던 무림맹 애들 을 빼면 종리연 소저만이 남잖아요. 그녀의 경공 실력이 아 무리 빼어나도 무공은 뒤떨어져 보이던데요." "아마도 황의 무사들 속에 무림맹에 일신을 안주하고 있 는 오성(五聖) 중의 한 명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 분들 중에서 변장을 취미로 하는 분이 있거든요. 그렇다 고 한다면 그 두 명만으로도 수라삼살 정도는 가볍게 제압 하고도 남지요." '흐흐흐흐 그래? 그러니까 가짜를 가지고서 자기네들끼 리 신명나게 싸울 거라 이거지? 그럼 슬슬 진짜 혈해진경 을 접수해 보실까?' 혈해진경을 빼 가버린 줄 알고 실망한 빛이 역력한 그들 사이로 슬그머니 껴든 나는 꿈의 회상 속에서 현현자가 혈 해진경을 넣고 밀랍으로 봉해버린 돌의자 위에 살짝 앉고 는 무척 힘들었다는 듯이 다리를 주물럭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아이고, 다리야. 왜 이렇게 힘이 들지? 아이고." 쾅! "에, 에구머니나! 왜, 왜 그렇게 화를 내슈?" 남궁현이 부들부들 떨면서 돌탁자 위에 두 주먹을 그대 로 내려쳐 버려서 근접 거리에 있던 나로서는 그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범행을 저지르기 전이 라 행여나 눈치채는 다른 인간들이 있을까 은근히 긴장이 되어 있는 참이기도 했다. "크으으으, 혈해진경을 내 손으로 얻어서 소맹주에게 넘 겼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꼬인 것이더냐! 그, 그 녀석의 행 방을 아는 놈은 천운학 그 자식 밖에 없는데......젠장!" 쾅! 쾅! 쾅! '오호라 남궁현, 이 놈은 의외로 혈해진경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칭 '그 녀석'이라는 자의 행방을 알아내는데 있었 구나.' "그, 그 녀석이 누구요?" 내 반문에 분노가 가득 서린 눈을 나에게로 돌린 그에게 서 위압적인 기세가 거세게 쏟아져 나왔다. 그 기세에 눌려 내가 어깨를 움츠러뜨리자 그제야 자신의 흉한 몰골을 알 아차렸는지 분기를 누그러뜨리며 퉁명스럽게 답을 해왔다. "알 것 없다. 설사 니가 안다해도 점소이라는 하찮은 신 분으로는 그 녀석의 발치 근처에도 얼씬거릴 수 없어! 아니 지. 나를 제외하고서는 그 누구도, 그 누구도 그 녀석을 건 드릴 수 없어. 그런데, 그런데......" '웃기네. 야, 나랑 치고 박으면서 나가떨어진 경력이 있는 주제에 니가 그런 말 할 입장이야?' "남궁현 공자님, 엉뚱한 사람한테 역정을 내면 안 되요. 혹시 모르니 우리같이 책장이라도 뒤져봐요." "틀렸소.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지나갔던 천운학이 요. 이 곳에는 이미 그가 원하는 것이 없을 것이요. 차라리 수라삼살의 손에 혈해진경이 넘어갔다면 좋으련만......" 제갈혜가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얼싸안으며 징징거리는 아이를 보채듯 다독거려줬다. 그 순간 닭살이 다다다닥 돋 아 오르면서 오한이 드는 것이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더구 나 그들로부터 근접하기 어려운 휘황찬란하면서 눈부신 빛 이 뿜어져 나와 서재를 뒤덮어 버리는 기분까지 드는 것이 었다. '이, 이 년놈들아, 내, 내 눈이 썩는다. 썩어. 여기서 지랄 하지 말고 제발 밖으로 나가서 너희들만의 세계에 빠지든 말든가 해다오.' 닭살 돋게 껴안고는 위안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그 들을 제외하고서는 곽철 대협만이 서재를 한 번 휘 둘러보 고는 일 없다는 듯 거실로 나가 버렸을 뿐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 모두가 책장에 매달려 있었다. 특히 월녀궁 여인 들은 모두가 넓게 퍼져서 서책 하나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 내들며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는데, 아마도 일양심법(日陽心 法)인가를 찾고 있는 듯 했다. 적미호와 당가희는 특별히 찾는 것도 없어 보였는데, 뭐가 그리 신기한지 막연히 이것 저것 뒤져보고 있는 것 같았다. '후후후훗 수라삼살에 소맹주를 포함해서 니네들까지 모 두 헛물 켜버린 것을 알기는 아냐? 진짜는 바로 내 궁댕이 아래 있단 말씀이시다. 카카카카.' "꺄아아아악! 찾았어요! 찾았다구요! 부궁주님! 부궁주 님!" '아이구, 귀청 떨어지겠다!' 혈해진경이 내 궁댕이 바로 밑에 있다는 생각으로 심장 이 쿵쾅거리며 뛸 정도로 바짝 긴장해 있는데, 느닷없이 은 월이 비명과 함께 누렇게 낡은 서책 하나를 들고 어린애처 럼 깡총깡총 날뛰는 통에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라고 말았 다. '어휴, 놀래라. 이 인간들이 짜고서 날 놀리기로 한 것인 가? 잠, 잠깐, 그, 그렇다면......?' 냉월화 누님은 은월이 들고 온 서책을 받아서 찬찬히 넘 겨보더니 고개를 끄떡이며 그것을 앞섶 속에 소중히 넣었 다. 월녀궁 여인들 전체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들뜬 분위 기로 봐서 그들이 원하던 일양심법(日陽心法)이 맞는 모양 이었다. '다행이다. 그럼 교옥정 누님이 월녀심법(月女心法)을 대 성하기도 한 결 쉬워지겠구나. 후후훗. 그럼 슬슬 행동 개 시를 해볼까나?' "아이고, 아이고, 배야." 온갖 우거지상을 한 채 배를 끌어안으며 털썩 주저앉았 더니만, 무안하게도 무리들의 시선이 일거에 내게 집중이 되어 버렸다. "육, 육포가 상했나 봐요. 이. 이거 아무래도 설사같 은......" "윽, 이 더러운 놈, 아무리 급해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할 거 아냐? 우리가 나갈 테니 여기서 실례를 보던가 말던 가 해라. 옛다! 이걸로 뒤나 닦아라." 안 그래도 분기가 가시지 않았던 그의 성질을 돋궈주자 화를 풀풀 내뿜던 남궁현은 자기 앞을 굴러다니던 서책 하 나를 나한테 휙 집어던지며 성큼성큼 나가버렸고, 그런 그 의 뒤를 제갈혜와 당가희가 뒤질 새라 급하게 따라나갔다. 냉월화 누님을 비롯한 월녀궁 사람들도 일양심법(日陽心法) 을 찾았기에 더 볼 일이 없었는지 약속이나 한 듯 우루루 루 나가 버렸다. 단지 적미호만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날 의미심장하게 바라봤기 때문에 정말로 대놓고 뒤를 까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가 보는 앞에서 버젓이 뒤를 까 내리자 당황한 그녀 또한 총총걸음으로 바깥으로 나가버리고 말았다. '휘유, 그럼 어디......' 모두가 나가버린 것을 확인한 나는 조심스럽게 옆의 돌 의자를 뒤집어 보았다. 역시 꿈속에서 보았던 데로 의자 아 래에 밀랍으로 봉해진 부분이 보였기에 서슴없이 뜯어내고 는, 그 속에 들어있는 빨간 책자를 꺼내들었다. '크크크크 혈해진경(血海眞經)이 맞구나. 잠깐, 홍 영감한 테 필요한 부분이 해독(解毒)편이라고 했겠다? 뭐 좋아, 선 심 쓴다. 나야 원래 독에는 관심이 없는데다가 포연강한테 서 받아 내야할 금원보들도 있단 말씀이야. 이걸 담보로 잡 으면, 설마 안 주겠어?' 혈해진경 맨 뒷장의 독경(毒經) 부분이 용독(用毒)과 해 독(解毒)편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해독편 부분만 을 부욱 뜯어내서는 반으로 접어서 봇짐 속에다가 쏙 넣어 버렸다. '후후후훗 폼 나는 검경(劍經), 도경(刀經), 권경(拳經) 부 분은 내가 습득해서 익히고, 별로 멋없을 것 같아 보이는 독경 (毒經)부분은 팔아서 돈을 번다라, 카아! 내가 생각해 도 정말 똑똑한 처사가 아닐 수 없군.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壹石二鳥)요, 꿩 먹고 알 먹기지. 참 뒷마무리도 깔끔히 해 야지.' 혹시라도 다시 들어올지도 모를 인간들을 위해서 아랫배 에 힘을 꽈악 주었다. 기름진 음식을 배불리 먹은 게 아니 라 다 말라비틀어진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서 채운 배라 쉽 사리 변이 나오지 않았지만, 한참 동안 힘을 주자 엉덩이가 묵직해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뿌지지직 뿌직 뿌직 뿌지지직 '어흐, 시원하다. 이제 슬슬 닦고 일어나 보실까나?' 상쾌한 기분에 홀가분한 만족감을 느꼈던 나는 아무렇게 나 손에 잡힌 책의 뒷부분 몇 장을 그대로 부욱 뜯어서 뒤 를 닦는데 사용해 버렸다. 종이질 자체가 원래 좋았지만, 오래 되기도 해서 눅눅해진 탓에 부드러워진 촉감이 아주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까 내린 바지를 주섬주섬 걸치고는 마지막으로 요대를 채우고서 가려다가 뭔가 허전한 기분에 뒤돌아보게 되었다. '아차 혈해진경을 놓고 가버릴 뻔했잖아. 이 바보 같으 니......어, 어라?' 혈해진경을 손에 들자 불안한 기분이 엄습해 왔기에 변 을 덮고 있는 뒤 닦고 버린 종이들을 가슴 떨리는 시선으 로 눈여겨보았다. 다시 혈해진경을 찬찬히 살펴보니 맨 뒷 장 용독(用毒)편 몇 장이 뜯겨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잠시동안이지만, 뒤 묻은 종이들을 다른 책에 끼워서 라도 가져갈까 말까 하는 망설임을 가져 보기도 했다. '에라, 아무렴 어떠냐? 팔고 나면 내 손을 떠날 물건 아 니냐? 값 좀 나가는 족자를 몇 개 챙기기도 했으니까, 좀 싸게 팔아주지. 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2-16 11:25:13 고친날 2005-09-10 23:57:00 읽은수 9590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106)-토사구팽(兎死狗烹)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토사구팽(兎死狗烹) 어쩔 수 없이 용독편(用毒篇)의 끝자락 일부를 내팽개치며 발걸음을 떼야 했다. 진한 아쉬움이 뒤따랐지만, 혈해진경(血海眞經) 대부분을 무사히 품속에 갈무리했다는 기쁨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흡족했기에 뒤 묻은 몇 장 정도는 쉽게 잊을 수 있었다. 혈해진경을 갖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상을 내 발아래 둔 기분이 들어 날아오를 듯 흥분되었던 것이다. '후후후훗 두고 보라지. 날 무시했던 놈들은 이제라도 긴장을 하는 것이 좋을……?' 서재를 나와서 거실을 지나 입구로 발을 내딛은 순간, 광장 전체를 쥐 죽은 듯 묘한 적막감이 휘감아 도는 게 느껴졌다. 적막감을 끌어내 주고 있는 위화감의 정체가 궁금해져 자세히 살펴보니 모든 일행이 그 무엇인가를 에워싼 채로 목석처럼 굳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인간들 꼬락서니가 마치 호랑이 앞에서 눈을 마주치고 굳어 버린 토끼들 꼴일세. 그럼 호랑이가 있다는 소리?' 호랑이의 정체가 궁금해진 나는 조용히 뒤 발꿈치를 들고 슬금슬금 다가갔다. 월녀궁(月女宮) 여인들 어깨 사이로 고개를 슬며시 디밀었다. 과연 광장 중앙에 떡 하니 자리를 잡고 뒷짐을 진 노인이 보였다. 일행을 향해 위압적인 시선을 던지고 있는 작달 만한 금포 노인이었다. 그의 뒤로는 방금 전에 도주를 했던 무림맹 일행과 새로 합류한 종리연이 옴팡지게 서 있었다. 노인장의 험상궂게 찡그린 주름 투성이 안면에 날카로운 눈매가 퀭하니 드러나 있었다. 꼭 며칠 굶주린 독수리가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서 어느 놈을 먼저 잡아먹을까 하고 고민하는 눈빛 같았다. 시선을 움직일 때마다 그 번쩍임이 한층 더해지는 황금색 비단 금포는 노인장의 압도적인 기세를 강조해 주고 있었다. 단지 옥의 티라고 해야 할까? '저, 저 노인장 대머리에서 반사되는 빛이 장난 아닌데? 아, 아이고 눈부셔.' 너무나도 찬란하게 빛나는 반사광에 눈이 부셔서 손으로 가려야만 했다. 그러나, 다시금 노인의 그 번쩍 번쩍거리는 대머리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실소를 흐렸다. 기어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데굴데굴 구르면서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터뜨리고 말았다. "킥 킥 키득 키득…… 으하하하하핫!" "……." "으하하하하하! 아이고, 아이고 배야." "아가야, 뭐가 그리 웃겨서 어른 앞에서 함부로 웃음을 헤프게 흘리는 것이더냐?" "으하하하하! 노, 노인장의 대, 대머리가 너, 너무 으하하하하! 눈, 눈이 부셔서요." "갈!…… 이 놈! 이 놈이 감히 어른을 놀려!!" 나의 박장대소(拍掌大笑)에 대노(大怒)한 노인이 함성을 질렀다. 그러자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일행들이 급한 숨을 다급히 내몰아 쉬면서 풀썩 풀썩 쓰러져 내렸다. 다만 곽철 대협과 냉월화 누님만이 기다렸다는 듯이 검과 연검을 풀어내며 노인장과 대치했을 따름이었다. 남궁현 녀석은 한 쪽 무릎을 굽혔어도 검집을 지팡이 삼아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곧 심호흡을 내쉬며 노인장을 분하다는 듯이 노려보다가 내상이라도 입었는지 가부좌를 틀며 운기조식(運氣調息)에 몰입해 들어갔다. "허허허, 극한의 살기(殺氣)를 베풀어서 단숨에 고통들 없이 목줄들을 따주려고 했건만, 어디서 튀어나온 미꾸라지 한 마리가 일을 그르쳐 버렸구나. 쯧쯧쯧, 아까운지고, 아까운지고." 그가 나를 가리켜 미꾸라지라고 하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나로서는 너무나도 화가 나 삿대질과 함께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맞대응 했다. "누구더러 미꾸라지라고 하는 거요! 영감의 그 흉기나 다를 바 없는 민 대머리 간수를 잘 했으면 내가 웃을 일도 없었잖소! 최소한 두건 정도는 쓰고 다녀야 할 거 아니요? 소림사 땡중 머리도 그렇게까지 눈부시게 빛나지는 않을 거요!" "허허 아가야, 그런 심한 말을 할 때는 여자 뒤에 쪼그려 앉은 채 벌벌 떨며 내뱉으면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겠느냐?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나서서 떠들려무나." "싫소! 앞으로 나가면 한 대 패려고 하는 노인장의 얄팍한 속을 내가 모르리라고 보는 거요?" 난 노인장의 협박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연검을 파르라니 펼치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냉월화 누님 뒤에 숨어서 열심히 소리를 질렀다. "갈! 내가 한 대만 패겠냐? 아주 죽사발을 만들어 놓지! 감히 나 유성창(流星槍) 진두한(鎭頭韓) 앞에서 얄팍하게 구는 너야말로 정체가 뭐냐?" '흥, 내 정체를 밝히면 망아루(忘我樓)로 몰래 자객(刺客)이라도 보낼려구? 어림 반푼 어치 택도 없는 소리!' "나, 나의 정체는…… 수, 수라…… 수라사살(修羅四殺) 아무개(我無槪)요!" 뭐라고 대답할까 떠듬거리며 고민을 하다가 그냥 생각나는 데로 수라사살이라고 내뱉어 버렸다. 이렇게 말하면 수라삼살 뒤나 쫓아다니겠지? "수라사살? 수라삼살까지는 들었어도 수라사살은…… 하여튼 그 정도나 되니 나의 살기(殺氣) 속에서도 그렇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 뭐 상관없다. 어차피 여기가 너희들 무덤 자리가 되리라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을 테니까." '살기(殺氣) 속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그 정도 위화감 같은걸 가지고 살기라고 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 적어도 주령령한테 백 년은 배워야 할 거다. 그 년이 내뿜는 기운이 너보다 백 배는 더 살벌하다 이 영감탱이야!' 주령령(周鈴鈴)이 눈에 푸른 불을 키고 밤에 돌아다닐 때 내뿜는 묘한 기운이 주는 압박감은 언제나 그랬다시피 장난이 아니었다. 허구헌날 그녀가 내뿜는 사이한 기운 속에서 이리저리 부대끼며 살다시피 한 나에게 방금과 같은 위화감은 어린애들 장난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주령령이 눈을 빨갛게 빛내며 발광할 때 내뿜었던 끈적끈적한 기운은 정말 두 번 다시 경험하기 싫은 끔찍한 악몽(惡夢)이리라! "흥이요! 흥! 영감이 뭔데, 마음대로 남의 묘 자리를 정하고 난리요? 영감이나 집에 돌아가서 손자 손녀 재롱이나 보다가 곱게 이 세상 하직하시구려!" "허허 이것 참 큰 일이로세. 요즘 젊은것들 경로 사상을 아주 헛으로 배운 모양이구나. 이리 오너라. 꼬마야, 내 제대로 예절이 무엇인지 손수 꿇어 앉혀놓고 가르쳐 주마!" 한참 동안을 주저앉은 채 운기조식(運氣調息)에 매진하고 있던 제갈혜가 뒤늦게 서야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일어났다. 대머리 영감탱이와 평소 안면이 트였던 관계인지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오랜만입니다. 괴성(怪聖) 진두한(鎭頭韓) 선배님, 풍악산 정상에서 기다리시는 줄 알았는데, 여기는 어인 일로 납셨는지요?" '괴성(怪聖)? 얼마나 괴이한 짓들을 마구잡이로 벌렸으면 그래 하필 붙어서 괴(怪)자가 붙었냐? 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지. 잠깐 성(聖)자가 꼬리로 붙은 칭호라면……?' 그제야 제갈혜가 영감탱이한테 인사하는 척하면서 그가 정파(正派) 최고수라고 불리는 십성(十聖)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무리들에게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일 다경 전에 정상 봉우리가 폭발하면서 드러난 구멍으로 수라삼살과 소맹주가 튀어나오더구나. 그나저나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군. 나만 보면 인사는커녕 도망가기만 바쁜 무림맹 아해들 중에서 그나마 예절이 뭔지 잘 아는 참한 여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네까지 죽이라는 부탁 아닌 부탁을 받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노릇이지." "그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요. 무림맹(武林盟)의 역사 자체가 자고이래(自古以來)로 피로 얼룩져 세워진 것,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나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단지 쉽게 사그라질 생각만큼은 없사옵니다." "그러냐? 그래도 소용없을 것이다. 설사 내가 아니더라도 혈성(血聖) 녀석까지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야. 지금이야 소맹주랑 수라삼살(修羅三殺) 녀석들을 뒤쫓고 있지만, 곧 처리하고 나서 여기로 달려올 테지. 그럼 그 때까지 자네들이 운 좋게 시간을 끌었다 해도 전원 지독한 참살을 면키는 어려울 거야. 차라리 내 손에 순순히 죽어 주는 것이 고통도 없고 좋았을 것을……." 챙! "개소리요! 우리들을 향해서 무림맹이 칼을 겨눴다는 것을 다른 구파일방(九派壹幇)과 오대세가(五大世家)가 알면 가만있을 것 같소!" 분기탱천해 있던 남궁현이 운기조식(運氣調息)을 이제야 다 끝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검을 뽑으며 영감탱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기본적으로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내가 할 말을 알아서 해주는 기특한 데도 없잖아 있는 것 같다. "크크크 그렇지. 그러니까 모르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 "……." 협상의 여지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인멸구(殺人滅口)의 의지가 명백히 느껴지는 한 마디였다. 혈편복과 독사로 에워싸인 함정에 빠졌을 때부터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지하석실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살아서 나가기란 요원한 일이었던 것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2-17 16:17:08 고친날 2005-09-11 10:24:50 읽은수 9310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10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진두한 노인장이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풀어내자 오른 손에 들려 있는 세 척 짜리 황금 단창에 시선이 머물러졌다. 끝은 삼지창 형태면서도 가운데는 뾰족하게 치솟아 있고 양날이 초승달처럼 바깥으로 휘어져 있는 것이 스치기라도 할라치면 목이라도 뎅겅 잘라 낼 듯 위압적이었다. 두 척의 짧은 창대가 무척이나 애매하면서도 거슬렸다. "선수를 양보해 주지. 노려만 보고 있을 텐가?" 그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우리측 그 누구 하나도 움직이지 못했다. 살기는 많이 누그러들었지만, 그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에 밀리기도 했고, 좀처럼 공격할 틈도 보이지 않았기에 주의에 주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구먼. 선배 체면에 몇 초 정도는 봐주려고 했거늘. 기어이 내 스스로 선수를 날리도록 해주는군." 진두한의 황금창이 냉월화 누님을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무척 무거워 보이기는 했으나, 짧은 단창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두고 볼 일이었다. 냉 누님이 연검을 파르락 떨쳐 내고는 채찍처럼 그대로 황금창의 끝 부분을 치자 창의 괘도가 조금 뒤틀려 나를 노리는 꼴이 되었다. 단지 너무 짧아서 채 닫지 못할 것이기에 안심하고 느긋하게 참고 있었던 기지개를 쭈욱……. 카캉! "허걱!" 길이가 짧다는 점 하나로 날 노리는 방향이었음에도 안심한 참이었다. 하품까지 하며 기지개를 펴느라 몸을 조금 비틀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창날이 그 거리를 비집고 들어오며 바닥을 찍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창날은 날듯이 늘어난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줄어들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슈르르륵 쩡. "호오, 대단한 반사신경을 지녔군. 감히 노부 앞에서 허락도 없이 앉아 있는 자네의 그 괘씸한 엉덩이 살을 베어 내어 간단히 훈계코자 했거늘. 용케도 피했구먼. 아쉽네 아쉬워." 너무나도 놀라서 내 입이 다물어지지도 않는 사이, 곽철 대협과 남궁현이 거의 동시에 노인에게 반격을 가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쉬이익! 차창! 노인이 날 공격하느라 생긴 빈틈을 노렸는지 곽철 대협의 검이 번득이는 검광과 함께 곧게 일직선을 그리며 들어갔다. 그러나, 노인의 짧아진 황금창에 너무나도 쉽게 막혔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돌려진 창날에 검봉을 잡혀 측면에서 달려드는 남궁현쪽으로 확 밀어붙여졌다. 검귀답게 끝까지 검에서 손을 떼지 않던 곽철 대협의 신형과 남궁현의 신형이 부딪혀 한 데 엉켜 버리고 말았다. 쿠다다당 쿠당! 한 바퀴 가볍게 창날을 돌린 진두한이 기합을 넣자 창이 또 길어지며 곽철 대협의 다리를 향해 치달았다. 냉월화 누님의 연검이 재빠르게 창날 끝을 감고 당겨 버린 까닭에 둘은 줄다리기라도 하듯 팽팽한 대치 상태로 접어들어 버렸다. "지금이에요. 어서 쳐요!" 냉월화 누님의 외침에 곽철 대협과 남궁현은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줄어드는 황금창날에 휙 끌려갔다가 복부를 걷어 채여서 연검과 함께 공중으로 붕 날아오른 그녀를 망연자실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둘은 전음입밀(傳音入密)로 약속이라도 주고받은 듯 했다. 곽철 대협은 필사의 절초인 유운검법(流雲劍法)을 펼쳐 자욱한 구름의 검영을 날리며 전두한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뒤로 신형을 날린 남궁현은 떨어져 내리는 냉월화 누님의 신형을 가볍게 받아들었다. "냉월화 부궁주 괜찮소?" "그, 그래요. 난 괜찮으니 어서 곽 대협을 도와주세요. 혼자서는 역부족일 거예요. 물론……." 상황으로 봐서 무슨 말을 하려다 말을 흐렸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사 남궁현이 합세를 한다고 해도 전세가 뒤바뀌질 않으리라는 소리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에 대한 모욕이 될 테니 목구멍으로 넘어오던 말을 삼켜 버린 것 같았다. "잠시 쉬고 계시오." 그녀는 남궁현이 가자마자 고통스러웠는지 그대로 복부를 움켜잡으며 검붉은 피를 울컥 토해 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품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환단 하나를 꺼내어 꿀꺽 삼키고는 가부좌를 틀며 운기조식(運氣調息)에 들어갔다. 곽철 대협의 전력이 스며든 구름 물결 검영의 유운검법(流雲劍法)과 양패구상(兩敗求喪)을 각오한 듯 오로지 공격 일도로만 제왕검법(帝王劍法)을 펼치는 남궁현의 공세가 바야흐로 하나가 되어 펼쳐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두한은 그 속에서 일곱 치로 늘어난 황금창을 자유자재로 놀리고 있었다. 그들의 공격들을 물결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흘러 내며 아슬아슬하게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멈칫멈칫 하며 여유를 부리는 것을 보니 유희(遊戱)로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종리연과 황보원은 현무단 열 댓 명과 함께 내 우측으로, 모용천풍과 악조영은 다른 현무단 아해들을 데리고 내 좌측으로 에워싸고 들어가서 저들을 처단해라. 난 이 애들과 더 놀도록 할 테니……." 명백히 상대에 대한 무시였다. 곽철 대협은 언제나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담담하게 오로지 검을 휘두르는 데만 전력을 다하고 있었으나, 남궁현은 돈으로 백룡이란 칭호를 산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금새 평상심(平常心)이 흐트러져 안면을 무섭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마 진두한의 흥미가 떨어지는 순간까지는 생존해 있을 듯 싶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내 쪽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현현자의 서재로 들어가는 입구만이 뚫려 있을 뿐 내가 내려왔던 통로는 이미 막혀 버려 도망갈 곳도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긴장한 모습으로 검을 고쳐 잡는 월녀궁(月女宮) 여인들을 보니, 좌우에서 에워싸고 천천히 다가서는 무림맹 아해들에게 기선을 완전히 제압 당해 버린 것도 알 수 있었다. 이 쪽에 손이 남는 고수라고 내세울 만한 사람은 제갈혜나 당가희 밖에 없었는데, 걔네들은 황보원이나 악조영같은 어중간한 애들하고나 겨우 상대할까 모용천풍이랑 붙는다고 하면 백이면 백 다 깨질 것이 거의 자명하다. 더구나, 최고의 신법을 자랑한다는 종리연의 가세로…… 어, 어라? 진두한의 명령에 석연찮다는 태도로 검을 뽑아 들고 다가오던 종리연은 갑자기 안색이 파리해졌다. 환상처럼 복부를 뚫고 나온 황금창날 끝을 바라보며 앞으로 스르륵 엎어져 버리고 말았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무림맹 아해들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지경이었다. "뭘 그리 놀래? 소맹주의 지시를 따른 것이니 너희는 너희 일에나 충실히 매달리도록 하려무나." 늘였던 창대를 회수해서 황금창날을 뽑아 낸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곽철 대협과 남궁현을 압박해 나갔다. 그러나, 얼어붙어 버린 무림맹 아해들은 누구 하나 선뜻 나서려는 이들이 없이 바닥에 엎어져서 피를 쏟아 내는 종리연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뭣들 하는 거냐! 너희들도 눕고 싶은 것이더냐? 내가 너희들까지 정리해 주랴?" 그제야 허겁지겁 포위망을 좁혀 오는 그들을 보니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바닥에 엎어져서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뜬 채 피를 쏟아 내는 종리연이 측은해지기도 했다. 천운학 소맹주, 결국 처음부터 실컷 이용만 해먹고 혈해진경을 독차지한 후에 그녀를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었다. 한심한 일이다. 막상 수라삼살들을 잡아 책을 빼앗아서 펼쳐 보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참으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반에는 머뭇거리던 제갈혜가 이런 상황으로까지 밀리게 되자 진두한을 향해 암기라도 던지려고 했으나, 다른 무림맹 아해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돌린 듯 했다. 일행 중 가장 고수에 속할 그들이 진두한 하나에게 매달려도 밀리는 판국이긴 했지만, 문제는 다른 무림맹 아해들을 막을 고수들이 절대 부족하다는데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선 월녀궁 여인들이 바로 합격검진(合擊劍陳)을 펼쳤다. 당가희가 왼손에는 검을, 오른손에는 암기를 드는 모습들이 매우 필사적이었다. 그렇다해도 이미 수적, 질적 승부 둘 다에서 급락 곡선을 타고 있음을 부인치는 못할 터였다. "에잇 빌어먹을, 벌써부터 손바닥에 물집 잡히려고 하네. 계속 이렇게 검을 들다가는 조만 간에 굳은살까지 박혀 버리겠네. 그렇다고 가만히 목을 늘어놓을 수도 없고…… 아유, 짜증나." 투덜투덜 궁시렁궁시렁 거리던 적미호는 검을 뽑아 날을 세웠다. 아직도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지 못해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하는 나에게 무작정 시비를 걸어왔다. "야, 야, 한 떨기 백합과도 같은 고귀한 이 몸이 검을 잡고 나서는데, 넌 어디가 나보다 잘난 데가 있다고 구석에 쳐 박혀 쉬고 있어? 얼른 못 일어나?" "한 떨기 백합이 아니라 꼬리에 불이 붙어서 사방팔방으로 날뛰는 여우 같소만." "뭐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니 그녀의 불같은 성정이 잘 드러나 보였다. 적미호야 내숭 수준이 아니라 아예 타고난 미모에 눈물어린 애달픈 호소를 흘려 완벽한 연기로 승화시킬 정도로 똑똑하긴 했다. 다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는 그 지혜도 빛을 잃는 듯 했다. 그럼 조금 부추겨 볼까나? "아름답고 고매한 적미호 소저께서는 검을 드는 것보다 미인계(美人計)를 쓰시는 것이 백 배는 낫지요. 그럼 상대편들이 대 혼란 속에서 스스로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져 지리멸렬(支離滅裂)해 버릴 것 아닙니까?" "흠, 정말?" "내가 언제 실없는 소리하는 것 봤나요?" 물론 내가 실없는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지. 다만 다른 사람들의 귀에 실없이 들릴 뿐이지. 그래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측 남자라고 해 봤자, 진두한이랑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곽철 대협과 남궁현이랑 별로 전력에 보탬이 안 되니 신경 쓸 필요 자체가 없는 나만 있지만, 상대편은 쓰러져 버린 종리연과 악조영을 빼고는 대부분이 남자들이다. 뭐 간혹 황의 무사들 중에서도 여자들이 드문드문 뜨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됐네. 니가 말하려고 하는 게 뭔지는 잘 알겠는데, 나 고독향(蠱毒香) 갖다 버렸어. 설사 있다 쳐도 우리편이 먼저 날 죽이려 들 것 아니야? 관둘래. 차라리 굳은 살 박히는 쪽이 나아." '역시 불여우답구만, 웬만큼 해서는 안 넘어오네. 난 그저 우리편이고 무림맹이고 간에 갈팡질팡하는 재미있는 꼬락서니 좀 보려 했더니.' "아니에요. 적미호 소저, 좋은 생각이에요. 이번에 한해서만 허락할 테니 고독향(蠱毒香)을 써 보도록 해요." 뜻밖에도 고독향을 쓰자는 동의해 온 사람은 제갈혜였다. 내가 재미로 생각한 것이 그녀한테는 일종의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저, 저기 고독향(蠱毒香) 그 날로 갖다 버렸어요. 정, 정말이에요." "고독향은 구하기도 어렵지만, 부르는 게 값인 만큼 아마 잘 간수하고 계실 거라고 믿어요. 그 뿐만이 아니지요. 고독향은 그 자체로도 비싸지만, 그와 함께 비전되는 나녀무(裸女舞)가 있다는 것도 잘 알아요." "……." "이것은 허락이 아니에요. 적미호 소저, 부탁드려요. 잘못하면 소저뿐만이 아니라 곽철 대협까지 죽게 되요." "휴우, 알겠어요. 대신 그 이한테는 제갈혜 소저가 잘 말해 줘야만 해요." 어라, 그, 그이라니? 이 여자 그새 곽철 대협한테 호감을 품어 버렸나? 전혀 내색을 안하고 따라오기에 혈해진경만이 목적 인줄 알았는데, 그럼 곽철 대협한테 빠져 버려서 따라 온 것이기도 했어? 뭐, 항상 두 눈에 우수가 살짝 어려 있고, 과묵하면서도 올곧은 것이 매력이라면 매력이긴 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여자가 따르기 어려운 사람이라 생각될 지경이었다. 그런데, 많고 많은 여인들 중에서 하필이면 불여우 같은 적미호가, 하고많은 남자들 중에서도 하필이면 공명정대한 곽철 대협한테 반했다고 하니 정말 이 세상 요지경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요. 뿐만 아니라 일행을 위해서 소저가 희생했다는 것을 알면 오히려 적미호 소저에 대한 그의 호감도가 부쩍 올라갈 거예요." 그럼, 제갈혜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는 말인가? 정말 여자들의 직감이란 무섭기 그지없군. "알았어요. 해볼게요." 이어서 그녀는 제갈혜한테 입술을 달싹거려 보였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것으로 봐서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뭔가 중요한 사항을 전달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나녀무(裸女舞)라? 한 마디로 벌거벗고 춤춘다 이거지? 입맛 당기는걸.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2-19 14:11:46 고친날 2005-09-11 14:48:01 읽은수 9290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108)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흐흐흐흐 나녀무(裸女舞)라 정말 볼만하겠는걸, 어디 느긋하게 뒤에서 감상을 해보실까나?' 기대에 찬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적미호(赤美狐)가 옷을 훌러덩 훌러덩 벗어버리고 덩실덩실 나체 춤을 추기만을 고대하고 있던 찰나였다. 갑자기 제갈혜가 손수건을 꺼내서는 갈래갈래 찢고 나서 물통 물을 흘려 적셨다. 그것을 말아서 새끼손가락 크기로 만드는 것을 멀뚱멀뚱 바라만 보고 있었다가 그만 불의의 기습을 받고 말았다. "뭐, 뭐 하는…… 읍, 읍?" 내 콧구멍에 젖은 손수건 조각 뭉치를 강제로 쑤셔 넣은 그녀는 재빨리 내 입을 막고는 조용히 하라는 듯 집게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워 보였다. 이어서 머릿속이 댕댕 울리는 전음입밀(戰音入密)을 보내 왔다. '고독향(蠱毒香)을 맡고서 나녀무(裸女舞)를 보게 되면 정심하지 못한 남자들 대부분은 이성을 잃고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되요. 작삼 점소이, 절대로 나녀무를 봐서는 안 되요. 알았지요?'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적미호의 쭉 빠진 알몸을 구경할 수 있는 천재일우(千載壹遇)의 기회를 차 버리라고? 당연히 그럴 수야 없는 일 아니겠어? 난 그녀의 전음입밀에 반항이라도 하듯 말없이 시큰둥하게 시선을 돌리려…… 했으나, 느닷없이 내 코를 우악스럽게 거머쥐며 자기 얼굴 앞으로 획 돌린 제갈혜(諸葛惠)와 눈을 마주쳐야만 했다. 더불어 주먹을 들어올려서는 뿌드득거리는 뼈마디 마찰음을 들려주며 최후통첩을 날려 오는 통에 그저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작삼 점소이, 정녕 뼈 한 두 군데는 부러져야 말을 들을 거예요? 아예 고개 돌릴 생각도 못하게 목뼈를 부러뜨려 줄까요?' 절레절레. '잘 알아들었으면 절대로 적미호 소저를 훔쳐볼 생각 따위는 하지 말아요. 만에 하나, 당신으로 인해서 일이 뒤틀려서 목숨을 잃게 되면 그 이전에 내가 먼저 당신 목뼈를 뒤틀어 놓을 테니까! 알아서 잘 처신해 주길 바래요.' 끄떡 끄떡. 그래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샛눈으로 나를 흘겨보던 그녀는 진두한(鎭頭韓)에게 휘둘려 계속 밀리기만 하는 그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듯 싶었다. 그러더니만 무슨 객기가 솟았는지 겁도 없이 그에게 달려들려고 까지 했다. "멈춰요." 그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 제지한 것은 다름 아닌 냉월화(冷月花) 누님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운기조식에서 깨어나서 달려들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까지 다 듣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랑 작삼 동생이 잠시 시간을 벌어 볼 테니 저들에게 교대로 사정을 전달하고 대비를 하라고 해요." 뭐, 냉월화 누님 실력이라면 잠시동안 시간을 버는 정도야 아무것도……. "어? 아, 아니 누, 누님 거, 거기에 저는 왜 껴 넣으……." 내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제갈혜가 냉월화 누님의 두 손을 꼭 마주잡으며 감사 인사를 미리 전했다. "고마워요. 냉월화 부교주님, 여기서 무사히 빠져만 나간다면, 저라도 월녀궁이 중원으로 진출하는데 힘이 되어 드리겠어요." "당신들이 사는 일이 곧 우리도 사는 일이니까 생색 부릴 필요는 없어요. 대신 아주 잠깐동안이에요." "아, 아니 그, 그러니까 나, 나는 왜……?" "작삼 동생, 가자구. 네가 날 잘만 도와 주면 조금은 시간을 끌 수 있어. 걱정하지마. 죽어도 같이 죽을 테니까." "……." '아, 아니 같이 안 죽어도 되는데…… 죽, 죽을 거면 누님 혼자 죽어도 되는데…….' 그녀가 내 손목을 꽉 붙들고 가는 통에 코뚜레에 코가 꿰인 소처럼 어쩔 수 없이 질질 끌려가야만 했다. 입이 세 치는 쀼루퉁하게 튀어 나왔지만, 냉월화 누님의 요지부동(搖之不動) 악력에 자포자기하고 있을 무렵 그녀로부터 다급한 전음입밀이 귓가에 떨려 왔다. '잘 들어. 솔직히 우리 세 명이 다 달려들어도 진두한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야. 고작 해봐야 치고 빠지기나 약간 통할까 모르겠다만, 넌 우리 뒤에 멀거니 서 있다가 노인장한테 욕이든 뭐든 퍼부어 줘. 최대한 그의 신경을 건드려야 해.' "네, 네……." 일단은 내가 직접 저 괴물 같은 늙으신네와 맞닥뜨리는 게 아니란 데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렇다 해도 거리 개념이 없이 쭉쭉 뻗는 창날 앞에 언제 사망 선고를 받을지 알 수 없기에 불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부탁해." "……." 내 손목을 풀어 주고는 연검을 스르륵 끌러 내며 달려가는 그녀가 남긴 힘없는 한 마디가 왠지 임종(臨終) 직전 내뱉는 소리 없는 단말마(斷末魔)처럼 느껴져 마음속이 심란해졌다. '뭐야, 곧 죽을 사람처럼 이상한 말만 던져 놓고…… 쳇, 한다. 제대로 하면 될 거 아니야.' 그들 사이에 냉월화 누님이 가세하자 곽철(郭鐵) 대협과 남궁현(南宮炫)이 조금은 한숨을 돌리게 된 듯 싶었으나, 그것도 잠시 남궁현이 제갈혜로부터 무슨 전음입밀을 들었는지 머뭇거리며 뒤로 빠지자 또 영락없이 밀리게 되었다. 휘잉 휘잉 차창 차차창! 진두한의 황금창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친 파죽지세(破竹之勢)앞에 냉월화 누님의 가녀린 몸매가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그 명줄이 끊어져 버릴 듯한 위태로움에 빠져드는 것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닫혀 있던 입이 저절로 열렸다. "아우, 눈부셔! 어이, 빛나리 영감! 아무리 깜깜한 한 밤중이라 해도 대낮같이 밝겠네! 정말 부럽소!" 기우뚱. 연검을 날린 직후라 미쳐 신형을 가다듬지 못한 누님을 향해 쾌속으로 늘어나던 창날 끝이 조금 흔들렸다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은 듯 종전의 기세로 날아왔다. 그러나, 고수들끼리의 대결에서 한 순간의 틈이 결단코 작지 않다는 것을 간만의 차이로 몸을 빼내는 그녀를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 몇 가닥이 창날에 흩날렸으나, 그 정도면 일단 안심이었다. '어라, 저거 순수한 황금이 아니었네. 도금한 거잖아. 걸렸다. 크크크크.' "와! 황금창날에서 황금이 벗겨졌네. 그거 가짜 황금창 아니오?" "……." "가짜 황금창이라니! 무림맹 오성이란 사람이 이토록 찢어지게 가난할 줄이야! 요즘 무림맹의 재정이 악화된 모양이로군." 처음에는 눈앞의 냉월화 누님과 곽철 대협만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내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하려던, 노인장은 내가 더 더욱 소리를 바락 바락 질러 정신이 산만해지자 그 자신도 모르게 버럭 화를 내며 말대꾸를 해 왔다. "떽! 가짜는 무슨 얼어죽을! 황금만으로 창을 만들면 강도가 떨어져서 그냥 휘어져 버린다. 따라서……." "에이, 핑계는? 그 비단 금포도 가짜지요? 그냥 누런 천 위에다가 광기름 바른 거 아니냔 말이요?"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요?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했소. 강하게 부정하는 것을 보니 맞는가 보구려." "너 이놈! 내가 얼마나 부자인줄 알기나 해? 얼라리요? 아예 황금창날을 거둬 버리고 뒤로 물러서서 뒷짐까지 지고 나와의 말장난에 더 열을 올리네? 이것을 보니 노친네 머리가 무지하게 안 돌아간 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했기로서니 선후 구분을 무시하고 창날을 거두는 걸 보니 아무래도 치매에 노망끼까지 들어 보였다. "부자는 무슨 부자요? 가짜 비단 금포에 가짜 황금창 들고 다니는 것 보니 십성(十聖)에 드는 사람 치고 참으로 불쌍한 축에 드는 노인장이라는 걸 알겠구먼." "크아아아악, 내 너를 산 채로 잡아다가 팔, 다리 몽땅 잘라 내고, 입을 꼬매 버린 후 내 처소 비밀 지하 창고에 던져다 주마. 네 놈한테만은 특별히 사과 상자가 수 백 개가 쌓여 있는 장관을 보여주지!" "사과 상자가 수 백 개? 그걸 창고에 처박아 두면 썩기 밖에 더 하겠오?" "클클클 듣고 놀라지나 말거라. 상자에는 사과 대신 금원보로 한가득 채워져 있다. 내 후손 삼 대까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정도지. 쿠헬헬 입을 다물지 못하는군. 턱으로 흘러내린 침이나 닦거라. 아가야. 어떠냐? 이만하면 남부러울 일 없지?" "……." '오옷, 이거 구미가 당기는데, 삼대라고 했으니 저 영감의 삼대째안에 연관만 되면…….' "저기 노인장 혹시 말인데, 혹시나 참한 손녀딸 없소?" "참한 정도가 아니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엽고 예쁜 손녀가 있지. 좀 성질이 더러…… 험,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냐!" "내가 성실하고 예절바른 점소이 청년을 하나 아는데, 데릴사위로 들일 생각 없소?" "허허허, 이보게, 최소한 아랏사나 파국 물을 사 오 년 이상은 먹고 왔으며 구파일방(九派壹幇)이나 오대세가(五大世家)에 맞먹는 뒤 배경을 가진 녀석이 아니면 아예 얘기를 꺼내지 말게. 뭐 판관 출신 녀석이라면 좀 고려해 볼만하지. 그 정도만 되어 준다면, 외모가 딸려도 봐줄 수 있지. 남자는 자고로 능력이 되어야 해. 자네처럼 한량 티가 팍팍 풍기는 녀석은 절대로 안 돼." '쳇, 콧대 한 번 더럽게 높네.' "저기 그럼요. 비밀 지하 창고지기는 안 구하세요? 제가 정말 잘 할 자신이 있거든요. 밥만 주시면 월급 없이 잘 할 수 있어요. 정말이라니깐요. 한 번 믿어 보세요." "…… 얌마, 내가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지키라고 하겠다." '치잇 정말 치사하고 더럽고 아니꼽네. 지하 창고에 숨겨야 하는 거 보니 어차피 부정축재(不正蓄財)로 모은 모양인데, 나 같은 불우 이웃하고 나눠 쓰면 어디 덧 나냐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2-20 16:11:33 고친날 2005-09-12 12:14:26 읽은수 9384 [ 12 K ] 제목 점소이 작삼(109)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유난히도 자신이 부유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대머리 노인장을 보니 배알이 심히 뒤틀렸다. 안하무인(眼下無人)격 노인의 고자세를 보니 참한 손녀라고 하는 여아 또한 상상이 갔다. 얼마나 괴팍하면서 고귀한 척 오두방정 내숭에 공주병을 떠는 애일지는 안 봐도 척하니 삼천리였다. 휘이이이익! 영감과 내가 삼천포로 빠져든 사이 손수건 조각 뭉치로 코를 막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곽철 대협으로부터 중단되었던 공격이 바야흐로 재개되었다. 휘파람 소리와 함께 파라라락 돌기 시작한 검의 반경에 자욱한 구름무더기가 형성되면서 그대로 진두한을 향해 내리쳐 버렸다. 채채채채채챙! 차차차차차차창! 나와의 대화에 빠져 방심하고 있던 진두한은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벌름벌름 거렸다. 그러다가 소나기처럼 빠르면서도 강맹하게 떨어져 내리는 곽철 대협의 변화무쌍한 쾌검에 뒤늦게 맞대응을 해왔다. 이어지는 냉월화 누님의 날카롭게 세워진 연검의 기세와 남궁현의 숨막히는 합공에 그만 한 발자국씩 밀려나고 있었다. '작삼 동생, 시간을 끌기 위해 있는 말, 없는 말까지 지어 내느라 정말 수고했어. 이제 여기는 우리에게 맡겨.' 이어지는 냉월화 누님의 전음입밀에 한 동안 무슨 소리인가 어안이 벙벙했다. 잠시 내가 돈에 홀려 너무나도 본능에 충실했음을 깨닫고는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나 또한 그와 똑같이 물질 만능 주의에 푹 절어 있다는 사실에 자책감마저 드는 것이었다. '작삼아, 작삼아, 그것밖에 안 되는 개종자더냐? 너를 낳고 미역국을 드셨을 부모님들이 불쌍타. 이놈아.' 부우우우웅 채채챙! 채채챙! "갈! 감히 어르신이 말씀하시는데, 날파리같은 것들이 훼방을 놓다니……! 너희들은 아비 어미도 모르는 부랑자들이기라도 하냐?" 잠시동안이었을지라도 자신의 기준에서 하수에 속하는 후기지수들의 연수합격에 밀렸다는 사실에 무지하게 열을 받은 듯 했다. 궁지에 몰린 그가 귀가 멍멍할 정도의 팽창음과 함께 황금창을 풍차처럼 머리 위에서 돌리며 기력을 뿜어냈다. 그 반탄력에 세 명 모두가 튕겨 나오고 말았다. "어르신도 어르신 나름이겠지. 당신처럼 괴이한 노인장이 노망이 들어보쇼. 진씨 세가 담벼락이든 집 벽이든 모조리 따끈따끈한 변으로 도배가 될 것 아니요? 그러기 전에 정신이 조금이라도 멀쩡할 때 일찌감치 자결하시오!" 즉시 내 본연의 임무로 되돌아온 나는 그의 심중에 상처가 될 정문일침(頂門一鍼)을 인정 사정없이 박아 버렸는데도 그는 이전처럼 발작하듯 대꾸함 없이 나지막하게 몇 마디 읊조렸을 뿐이다. "창고지기 자리가 비었는데, 이를 어이할꼬?" "윽, 이 영감탱이가……." "사과 상자 수백 개를 제대로 관리를 해줄 인재가 정녕 없단 말인가?" "……." "대가로 상자 하나쯤은 줄 수 있었는데, 아쉽구먼, 아쉬워." "노인장!" "왜 그러나?" 짧은 순간 망설였지만, 상자 하나 정도는 줄 수 있다는 그의 말에 그만 내가 하겠다고 나설 뻔했다. 그러나, 그 찰나 진두한 노인장의 시선이 몽롱해지더니 내 좌측 뒤편으로 지대한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닌가! 그의 눈길을 따라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획 돌렸다가…… 헉! '이, 이 여편네가 아예 나를 집중적으로 막아서고 있었네.' 그 자리에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제갈혜가 새치름히 날 바라보며 내 시야가 그 뒤로 흐르는 것을 막아서고 있었다. 제갈혜가 아무리 남의 여자라 해도 미녀는 미녀였다. 지척에서 안면을 마주 대하는 상황이 몹시도 난감해서 다시 고개를 되돌리려고 했다. 그 때였다. 그만 그녀의 어깨 너머에서 하늘하늘 부드럽게 펼쳐지는 적미호의 새하얀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눈에 보여 나도 모르게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우뚱하게 구부렸다. 즉시 내 귀를 잡아당기는 무시무시한 악력에 제자리걸음을 해야만 했다. "방금 전에 내가 한 말을 잊어버렸나 보네요. 그렇지요?" "아, 아니에요. 그, 그것이 아니고……." 그녀의 무시무시한 압박에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순간, 다시 적미호의 새하얗게 벗은 허벅지가 들어 올려진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흥분한 나머지 숨을 가쁘게 내쉬고 말았다. "헉!" 그 덕에 코를 막고 있던 이물질이 숨과 함께 빠져나가 버렸다. 습관적으로 재차 숨을 들이쉰 그 시각으로부터 새롭게 변화된 세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전신을 부르르르 엄습해 오는 거부할 수 없는 마력적인 흥분과 더불어 머리 속이 텅 비어 버리는 것을 어렴풋이 느껴졌다. 처음 느끼는, 너무나도 신선한 충격에 몸부림치면서도 본능적으로 제갈혜를 제치면서 적미호의 나신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었다. "……!!" 아주 잠시동안이었지만, 눈부시게 빛이 나면서 마음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요염한 자태를 봤던 것 같다. 아쉬운 점이라고 하면 뇌리 속에 각인시키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와락. 잠시 주춤거렸던 제갈혜가 내 머리를 자신의 가슴팍에 묻어 버리는 바람에 환상속의 그녀가 보여주는 눈부신 자태를 더 이상은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너무나도 화가 나고 다급했던 나는 뭐라고 고래고래 고함를 지른 것 같았다. "비켜! 비켜! 이거 놔! 이 년아, 니가 뭔데, 날 막고 지랄이야! 그녀를, 그녀를 볼 수 있게 해줘!" "정신차려요. 숨을 쉬어선 안 되요. 내가 혹시라도 이럴까 봐 보지 말라고 한 것인데,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군요." 그녀가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머리 속을 맴돈 것 같기는 하지만, 거의 의식불명 상태로 본능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오로지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를 한 순간이라도 더 보고 싶다는 욕망만이 자리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비켜! 이거 놔! 난 가야 해. 나, 난 그녀 곁으로 가야 한다고!" "조금만 참아요. 이제 곧 끝나요. 아니 이 사람이……." 내 뒤통수를 강하게 짓누르는 완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면 양옆에 솟아 있는 동그랗고 물컹거리는 것을 두 손으로 우악스럽게 움켜쥐고는 전력으로 밀어내었다. 날 가로막던 여인은 잠시동안 내가 벗어나려고 하는 처절한 본능적 행위를 멍하니 방치했다. 기어이는 부르르르 떨며 내 뇌리 속에다가 뭐라고 속삭여 온 것 같았다. '남궁현 공자조차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 내 가슴을 마음껏 주물럭거렸으니 이제 여한이 없겠지요? 그냥 죽이자니 좀 미안해서 내버려 둔 거예요. 저승길은 한 순간에 가급적 빨리 보내드리도록 할게요.' "아니 이 여편네가 뭐라고 웅얼거리는 거야! 비켜, 못생긴 면상 제발 저리로 치워." 빠직 빠직. 퍼퍼퍼퍽 퍼퍼퍼퍽 퍽 퍽 퍼퍼퍼퍽 퍽퍽! 둔탁한 그 무엇이 전신을 마구 내리쳐 버려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머리와 부딪힌 바닥의 돌가루가 깨지면서 사방으로 튀어 오른 듯도 싶었다. 처음에는 무지막지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환상 속의 그녀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기어가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화아아아악!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비몽사몽 중에 강한 충격을 받자 영문을 알 수 없는 청아한 기운들이 전신에서부터 가닥가닥 모여들어 하나로 이어짐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무척이나 시원하면서 청명한 기운이 전신을 물결치듯 감돌기 시작하자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차츰차츰 맑게 개여 왔다. 파파파팍 퍽 퍽 퍽 퍽! "헉, 헉, 헉, 이, 이런 제길! 뭐 이런 질긴 놈이 다 있어?" 퍽 퍼퍼퍽 퍽 퍽 퍽 퍽! 누가 누워 있는 내 몸에 이토록 시원하게 전신 안마를 해주나 하고 게슴츠레 눈을 떠보니 다름 아닌 제갈혜였다. 뭐라고 중얼거리는지는 워낙 희미해서 잘 들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정성스레 전력으로 안마를 해주는 모습이 무척이나 앙증맞고 귀엽게 느껴졌다. 한 편으로는 불안한 마음까지 들 정도였다. '얘가 왜 이러지? 느닷없이 안마를 다 해주고, 고맙긴 한데, 치사하게 시키지도 않은 안마 값 달라고 생떼를 부리는 거 아니야? 에라 모르겠다. 일단은 기분이 좋으니 내버려두자.' 동굴 최하층이라 그런지 한 낮의 봄처럼 따뜻했다. 제갈혜의 나른하면서도 개운한 안마가 부드럽게 더해지자 저절로 눈이 스르르륵 감겨 왔다. 귓가에 시끄럽게 울려 퍼지던 고함소리들도 잦아들어 자장가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젠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수마(垂魔)의 강림과 함께 심연의 깊은 늪 속으로 잠겨 들게 되었다. 흐흑흑흑 흐흐흐흐흑 흐흑흑. 처절하게 절망하며 오열하는 여인의 울음소리가 암흑의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눈처럼 새하얀 소복을 걸치고서 머리마저 풀어 해치고는 애달프게 울고 또 우는 그녀의 뒷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다가간다. 한 사람이 더 누워 있다. 그녀가 꿇어앉은 발치에 누워 있는 남자의 차디차게 식어 버린 모습…… 바로 내가 지켜 주겠다고, 내 목숨과도 맞바꿔서 살려내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그가 묘비처럼 반듯하게 꽂혀 버린 검과 일체가 되어 누워 있는 것을 침울하게 내려다본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이 날 원망한다. 내가 산산이 부셔지고, 재가 되는 한이 있었더라고 그만은 살려서 데려와야 했노라고 원망한다. 눈물이 흐른다. 그녀를 울게 만든 나 자신이 한심스러워 덩달아 울고 만다. 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 소름끼치도록 아름다운 미성의 웃음소리가 암흑의 공간 먼 저편에서부터 메아리쳐 온다. 보인다. 내가 원망하고 원망하던 남자가 세운 단두대 앞에 목을 드리운 그리운 그의 얼굴이 보인다. 날 향해 고개를 돌린 그의 눈동자가 흔들거리며 말해 온다. 미안하다고,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고, 다음 생에는 부디 좋은 친구로 만나자고……. 그 남자의 손이 단두대의 맨 꼭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칼날을 고정시켜 놓은 밧줄을 풀어내려 하고 있다. 이를 악물며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다급히 뛰어가려 했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호흡마저 가빠 온다. 이상해서 내려다보니 내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가 뻥 뚫려 있는 게 보인다. 고소하다고 웃는 그녀의 손에는 내 심장이 부르르르 떨고 있다. 그녀의 새빨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다홍빛 혀가 덜덜 떨고 있는 내 심장을 할짝할짝 핥는다. 쿠우우우웅! 떨어져내린 칼날과 동시에 잘려 버린 그리운 그의 목이 땅바닥을 구른다. 눈물이 하염없이 떼구루루 떨어져 내린다. 호호호호호홋! 그녀의 비웃음 가득한 웃음소리가 고소하다는 듯 원망하고 또 원망한다는 듯 울려 퍼지고 또 울려 퍼진다. '헉!' 너무나 끔찍한 악몽 때문에 곤하게 빠져 있던 꿈의 나락으로부터 벗어나고 말았다. 몸을 세워 일으키자 눈 끝자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눈물 방울이 톡하고 손등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라? 진, 진짜로 울었나? 쩝 별나군. 아무리 악몽이어도 그렇지. 그렇다고 현실에서까지 울긴 왜 울어? 바보같이…….' "허억 허억 허억, 괴, 괴물…… 헉, 허억……."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힘없이 주저앉아 있는 제갈혜의 퀭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진두한 노인장과 꽤나 격하게 싸웠던 모양이다. 그런 괴물하고 싸운다면 똑똑하기는 할까 몰라도 무공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그녀가 녹초가 되어 나가떨어지는 것은 새삼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차, 적미호!' 뒤늦게 나마 적미호의 잘 빠진 나신을 구경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나녀무가 완전히 펼쳐지고 마무리지어진 후였다. 어느새 흑의를 걸치고서 옷매무시를 바르게 고쳐 잡고 있는 적미호를 바라보니 약간은 서글퍼졌다. '젠장 내가 너무 오래 잠들어 있었나?' 광장 안을 둘러보니 묘하게도 진한 피 내음을 풍기며 널브러져 있는 황의 무사가 스무 명 정도 늘어나 있었다. 살아 있는 무림맹 녀석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진두한 노인장을 포함한 모용천풍이나 악조영같은 중심부 인물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진두한 노인장과 생사결을 펼쳤을 곽철 대협과 냉월화 누님, 그리고 남궁현은 제갈혜 못지 않게 땀과 피에 절어버렸다. 광장 구석에 흩어져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상 치유 및 내력 보충에 힘쓰고 있었다. 당가희와 사월은 운기조식에 빠져 있는 이들을 호위하듯 그들 사이에 서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월녀궁 사람은 월녀궁대로, 구룡애들은 구룡애들대로 서로를 믿지 못해서 혹시라도 뒤통수를 칠까봐 경계하는 듯 했다. 나머지 월녀궁 여인들은 시체들을 질질 끌고 가서 거실 속에다가 쳐 박아 넣고 있었다. '크으으, 변 냄새가 진동 할건데……. 내 욕을 하면서 쌓고 있겠구먼, 쩝.' "잘 잤어?" "뭐, 그럭저럭 잔 것 같네요. 한참 꾸던 꿈이 뒤숭숭해서 길게는 못 잤지만 요." "너 참 별종이다. 다른 사람들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듯 한데, 어째서 그 상황에 잠이 오니?" "그러게 말이오. 나도 내가 왜 잠들었는지 당최 이해가 안 가오? 혹시 그 이유를 아시오?" "알 리가 없지. 나녀무(裸女舞)를 한 번 추기 시작하면 완전히 몰입해야 그 효과를 배로 늘릴 수 있단 말이야.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춤을 추면 그것은 구경거리용 나체 춤 밖에 되지 않아." '쩝 안타깝군. 구경 좀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것일까?' 제갈혜를 돌아보니 퀭하니 땀에 절어서 가쁘게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꼬락서니를 보니 대화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때 마침 적당한 상대가 보여 얼른 그녀를 불렀다. "어이, 은월 소저!" "어머, 언제 일어났어요?" "방금 전에 일어났소. 이거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된 거요?" "우리가 한 일은 거의 없어요. 그냥 불안하게 대치만 하고 있었는데, 적미호 소저께서 고독향을 잔뜩 뿌리고 우리 뒤편에서 나녀무를 전개했거든요. 그러자 무림맹 무사들이 순식간에 눈들이 시뻘개져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가왔어요. 자기네들이 방해가 되니까 자기네들끼리 싸웠어요. 우리가 있는 곳까지 무사히 다가온 무사들은 자기 본신 실력의 반의반도 채 못 펼치고 흐리멍덩하게 덤벼 오다가 당가희 소저의 암기에 죽거나 우리의 검날에 풀썩풀썩 쓰러진 거구요. 무림맹 고위 간부들하고 여자 무사들만 여기서 무사히 도망가 버렸을 뿐, 남자 무사들은 거의 죽었을 걸요." "그래도 조금은 부럽구만. 적미호 소저의 나녀무를 볼 수 있는 기막힌 기회를 놓쳐 버리다니…… 아얏! 왜 꼬집어요?" 적미호 소저는 내가 그녀의 나녀무를 못 봐 안타깝다고 얘기를 하자 조금은 무안했는지 다른 데를 보며 내 옆구리를 살짝 비틀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은월이 나를 말리면서 오히려 자기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아서요. 저도 중간에 하도 궁금해서 힐끔 곁눈질로 봤는데요. 여자인 제가 봤는데도 심장이 덜커덩 내려앉으면서 다리가 후들후들 거릴 정도로 흥분이 되더라니깐요. 얼마나 놀랬는지 바로 고개를 돌려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저도 그 무사들 꼴 났을지도 몰라요." '고독향에 영향을 안 받는다고 하는 여자들이 그 정도로 느끼는 정도라면, 웬만한 남자들은 거의 다 미친다는 소리구만. 그래서, 혹시 제갈혜가 일부러 나를 재운 것이 아닐까?' 정녕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자초지종이야 제갈혜 본인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단지 저렇게 맛이 가 있으니 당장 물어 보기도 애매한 문제이긴 했다. 뭐, 아무렴 어떠하겠는가? 내 일신 편히 한 숨 잘 잤을 따름이니 나름대로 좋은 일 아니겠어?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2-21 23:22:14 고친날 2005-09-12 12:31:28 읽은수 9280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110)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진두한에게 복부를 관통 당했던 종리연은 정말 운이 좋게도 내장을 다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바닥이 흥건하도록 피를 콸콸콸 쏟아 내긴 했지만, 아직도 죽지 않고 용하게 숨결이 붙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일행을 생매장시키려 했던 괘씸하기 그지없는 소맹주에게 박쥐처럼 찰싹 달라붙어 버렸던 그녀를 그대로 거실에 쳐 박아서 다른 시체들과 같이 썩어 들게 만들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누군가가 이미 지혈을 해주고 붕대까지 감아 버린 후였다. '이 녀석, 죽을지 살지 모르는 판국이니 이 참에 풍룡(風龍)의 면상 구경이나 해볼까 나?' 장난 끼가 발동한 나는 그녀의 복면을 슬그머니 벗겨 내었다. '어라, 꽤나 귀여운 면상인걸?' 나이는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의외로 소방을 연상케 만드는 깔끔한 외모의 귀여운 면상을 하고 있었다. 소방, 그를 생각하니 종리연에 대해 고깝게 생각했던 지난 순간들이 많이 누그러들고 말았다. '뭐 금원보 아홉 개 받을 일이 있기도 하니 일단은 봐주지. 그러나, 그냥 봐줄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일걸.' 한 식경 정도 지나자 약속이나 한 듯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냉월화 누님과 곽철 대협이 자리를 탈탈 털면서 일어섰다. 남궁현은 역시 뒤떨어지는 실력만큼이나 운기조식도 늦어지는지 아직도 가부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냉월화 누님 앞으로 쪼르르르 달려가서 어찌된 경황인지 물어 보았다. "이제 운기조식을 끝내셨네요. 진두한은 어떻게 되었나요? 누님?" "휴우, 역시 십성(十聖)이라는 이름답게 고독향(蠱毒香)을 맡고, 나녀무(裸女舞)에 노출 당했는데도, 우리를 잘도 감당해 내더군. 더구나 본신의 실력을 삼 할은 감추고 있었던 것이었어." 그와의 혈전이 치가 떨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그녀의 찌푸린 눈살을 보니 정말 진두한 노인장이 강하긴 강한 모양이었다. 만약 한 명의 십성이 더 있었더라면, 설사 고독향에 나녀무가 펼쳐졌다 하더라도 거실에 차가운 몸을 눕힌 것은 우리 쪽이었으리라. "저기 냉월화 누님, 급한 환자들이 있는데 좀 봐주시겠어요?" "환자?" "네, 급한 중환자예요. 얼른 좀 봐주세요." "호호호호홋, 환자가 있다고 하는데, 내가 여기서 어물쩡거릴 데가 아니지. 어여 가자구." 풀이 죽어 있던 그녀가 중환자라는 한 마디를 입에 물자마자 따뜻한 봄날에 꽃봉오리들이 일시에 터지듯 화사한 미소를 터뜨렸다. 단박에 종리연이 누워 있는 광장 중앙으로 날듯이 달려왔다. 종리연의 맥을 짚어 보고 눈꺼풀을 뒤집어 본 누님은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품속에서 문제의 환단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주춤 주춤. 환단 냄새가 광장에 퍼지는 순간, 월녀궁 여인들과 구룡 일행은 이때만큼은 약속이나 한 듯 일치단결해서 한 발자국, 두 발자국씩 슬금슬금 멀어져 갔다. 심지어 자기 성질대로 격하게 싸웠는지 검상을 유난히 심하게 입은 사월은 내가 실례를 해 놔서 구릿한 냄새가 피어오르고 있을 서재로 서슴지 않고 피신하는 과감성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냄새가 지독할 텐데…….' 뻔히 보이는 수작들이었지만, 누님의 화사한 미소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부동의 환자가 두 명이나 있는 관계로 다른 사람들에게 집적거릴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환단을 손가락으로 와삭 으깨어 가루로 만든 그녀는 의식이 없는 종리연의 입을 벌려 물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가게 했다. 잘 넘어간 것을 확인한 냉 누님은 나에게 종리연의 상반신을 붙잡게 했다. 곧 등뒤 척추 부분을 주무르듯 가격해서 환단 가루가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가도록 인도했다. "무, 무슨 효능이 있는 환단인가요? 이, 이름은 있는 건가요?" "이름? 이름은 아직 안 지었지만, 기운이 바닥났을 때 복용하면 좋은가 봐. 늙어서 빌빌거리던 개한테 임상 실험을 해봤더니 펄쩍 펄쩍 뛰어오르면서 월녀궁 주변을 엄청난 속도로 뛰어다니던걸." "오오, 정말 좋은 효능을 지녔네요." "글쎄, 문제는 반시진 후에 늙은 개가 기력이 다 했는지 조용히 거품을 뿜으면서 혀를 내밀고는 배를 뒤집어 버리더라고. 죽을 때가 되어 죽은 것인지 약효가 과다해서 죽은 것인지 항상 궁금했었는데, 드디어 오늘에서야 그 궁금증이 풀리게 되었군." "……." "에이, 그런 눈으로 보지마. 어차피 우리를 배신한 애야. 스스로도 복부를 뚫리고 버려진 바 되었는데, 살고 싶겠어? 살면 약효가 입증되는 거구. 죽으면 그냥 운명이려니 하는 거지. 자, 다음은?" '쯧쯧 삶에 대한 의욕만큼은 누구한테도 밀리지 않을 애 같은데, 에휴, 그러게 왜 누님한테 밉보일 짓을 했냐고?' 아직도 초점이 흐릿한 제갈혜에게 냉월화 누님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다가섰다. 그녀가 왜 이렇게 무서워 보이던지……. 정녕 누님 곁에 있는 것이 안전한 일이 될 수 있을까 의문스럽기까지 했다. 제갈혜를 진단한 누님은 이번에는 약간 주저하면서 환단을 꺼내어 들었다. 그 형태나 모양으로 봐서 내가 일전에 먹고서 죽느냐 사느냐의 고비를 넘겨야 했던 극통환과 비슷해 보였다. 그 끔찍했던 악몽의 순간이 떠올라서 오한과 함께 침이 꿀꺽 넘어갔다. 일단 확인을 해볼 필요는 있었다. "저, 저기 그, 그거 극통환(極痛丸)아닌가요?" "어? 어떻게 알았어?" "……." 냉월화 누님이 오늘 환자 치료를 핑계로 적도 아닌 우리측 사람들을 떼 몰살시키려고 작정을 하고 온 것인지 정말 진정으로 의심스러워졌다. "그, 그냥 이, 일전에 어, 어깨 너머로 스치듯이 들었어요. 제갈혜 소저의 증상이 어떤 것이기에 그것을 꺼내셨어요?" "흠, 그녀는 모종의 이유로 화가 머리끝까지 북받쳐 오른 것 같아. 그 화기로 인해 잠시 뇌손상이 된 것이지만, 뭐 심하지는 않고 며칠 요양하면 회복되는 정도? 걱정마. 이렇게 조금만 떼어 내서 먹이면 잠시동안만 심신이 뒤흔들리는 충격을 받고는 금새 제 정신으로 돌아올 거야." 냉월화 누님은 정말 별거 아니라는 투로 극통환을 조금만 떼어 내서 제갈혜의 입에다가 쏙 집어넣어 버리고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돌아섰다. 나도 그냥 그런 가보다 하고 같이 되돌아섰는데, 살짝 굳어 버린 그녀가 보였다. "왜, 왜 그러세요?" "역시 인명은 재천인 것이로군." "……?" 환단 주머니를 열고 작은 조각을 떼어 낸 극통환을 넣으려고 했던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자그마한 조각이 떨어져 나간 극통환이 아니었다. 극통환으로부터 떼어 낸 조그마한 조각이 대신 들려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극통환 자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설마 하는 조바심과 함께 그녀와 나의 시선이 동시에 제갈혜에게로 쏠렸다. 힘없이 벽에 기대고 앉아서 퀭한 눈을 내리깔고 있던 그녀는 처음에는 조용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곧 제갈혜의 눈이 부릅떠지면서 배를 움켜쥐더니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면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악! 사, 사람 살려! 꺄아아아악……!" "……." "……." 냉월화 누님은 한숨을 쉬며 제갈혜의 궁장의 치마 끝자락을 부우욱 길게 찢어 내었다. 그것으로 제갈혜의 입술을 벌려서 칭칭 동여매어 버렸다. 나를 돌아다본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던지는 말 또한 일품이었다. "여긴 지하라서 시끄럽잖아." 그 시점에 종리연은 눈깔을 흰자위가 보일 지경으로 까뒤집더니 전신을 부르르르 떨었고, 입에서는 흰 거품을 뽀글뽀글 내뿜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적어도 그녀는 귀청이 찢어지도록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는 정도일까? 주변에 멀찍이 서있던 인간들은 역시나 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눈빛을 종리연과 제갈혜에게 보내며 광장 벽 끝으로 바짝 붙어 버렸다. 냉 누님은 그런 그들을 이해한다는 듯 탓하지는 않았다. "원래 사람을 살리는 환약사의 길은 멀고도 험한 것이지." '누님, 문제는 그 환약사가 누님이라는데 있는 게 아닐까요?' 목구멍까지 치켜 넘어 오려던 말을 다시 꿀꺽 삼켜야만 했다. 말 한 마디 잘못해서 임상 실험 대상자로 낙인찍히는 위험을 감수 할 수는 없었으므로…….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2-23 07:19:50 고친날 2005-09-12 15:57:38 읽은수 11408 [ 13 K ] 제목 점소이 작삼(111)-혈해진경의 귀결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혈해진경의 귀결 제갈혜가 이 꼴이고 보니 일행을 주도하게 된 인물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냉월화 누님이 되고 말았다. 정확히는 그녀가 이러는 게 어떨까 하고 생각을 타진하기만 해도 월녀궁 애들이야 원래 그녀에게 설설 기었다. 다른 일행도 깊이 생각하는 데는 별 취미가 없는 곽철 대협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극본을 보고 짜 맞추기라도 한 듯이 동의를 해 왔다. 애초부터 의논이고 자시고 간에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한테는 더 머뭇거릴 시간이 없어요. 지하 밀실 자체가 기관으로 이뤄진 곳이니 언제 무슨 기관이 작동될 지 알 수 없기도 하고, 소맹주가 언제 반격해 올지 모르는 이상 우리가 먼저 움직이는 게 나을 거예요. 다른 생각 있어요?" "……."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나설 기미가 안보이자 자연히 그녀의 의견대로 일이 흘러가게 되었다. "그럼 반대편 출구로 올라가도록 하겠어요. 무리의 후미는 월녀궁이 맡기로 하고, 저와 곽철 대협, 남궁현 공자는 선두에 자리잡기로 하겠어요. 당가희 소저는 선두 바로 뒤를 따르면서 혹시 있을 지 모르는 기습에 암기로 견제를 맡아 주세요. 나머지 다른 분들과 환자들은 중앙에서 안전하게 따라오도록 하구요." 뭐 냉월화 누님의 혜안(慧眼)도 남 못지 않기는 하다. 여태까지는 중원제일지(中原第壹智)라는 제갈혜에게 가려져 있기도 했고, 환약으로 너무 드러나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서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해 왔던 덕에 그녀의 의중이 드러날 기회가 없었을 뿐인 것이다. "종리연 소저는 현재 모종의 사유로 거동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니, 적미호 소저께서 업고 올라오세요." "네? 저, 저요?" 적미호는 냉월화 누님의 대답에 몹시 당황한 듯 싶어 도움을 청하듯 내게 시선을 돌렸으나, 재빨리 누님 옆에 서며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호가호위(狐假虎威)라는 말이 있듯이 냉 누님의 등뒤에 서서 당당하게 구는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적미호의 아니꼽고 더럽다는 시선 따위는 깔끔하게 무시해 주었다. '쯧쯧 그러게 줄을 잘 서야지.' "작삼 동생." "예 냉월화 누님, 뭐든지 맡겨만 주세요. 최선을 다해 이 한 목숨 다할 때까지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누님." "호호호홋, 역시 작삼 동생은 솔선수범 해서 다른 이들에게 모범에 되는구먼. 마음 같아서는 내 자수정 목걸이를 상으로 주고 싶지만, 이미 걸려 있으니 넘어가도록 하지. 동생은 제갈혜 소저를 안고 올라오도록 해." "네? 아, 아니 저기 전……." "작삼 동생 맨 처음에 여기 짐꾼으로 왔는데, 변변히 아무 일도 맡겨 주지 못해서 미안하게 생각이 되더라구. 이제부터라도 제갈혜 소저를 짐이라고 생각하고 천천히 따라와." "아, 아니 괜찮……." "냉월화 부궁주, 그녀는 제가 업고 가겠습니다." 역시 남궁현이 날 매섭게 흘겨보며 이 때만은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래, 남궁현, 더 강하게 밀어 붙여! "안 됩니다. 남궁현 공자는 선두에서 일행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임무가 있지 않습니까? 사소한 개인적 감정으로 일행을 위험에 빠트리지 마세요." "……." '안, 안 돼. 이 녀석아, 그렇게 수긍하는 빛을 보이면서 날 째려보면 어쩔 건데, 니 여편네 아니야! 니가 업고 가야지.' 날 못 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나 또한 눈알을 부라리며 맞대응을 해줬다.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고, 한 번 더 강경하게 냉월화 누님에게 니 의지를 보여주라고! 그러나, 한 동안 주저하던 녀석은 그녀의 진정한 무서움을 되새겼는지 느닷없이 몸서리를 부르르 치고는 포기한 듯 내 눈빛을 피해 그냥 성큼성큼 올라가 버렸다. 결국 냉월화 누님의 의지대로 편성이 되어 지상을 향한 이동이 시작되었다. 올라가는 돌계단은 내려왔던 쪽의 돌계단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구태여 왜 이 쪽으로 올라가느냐는 내 질문에 대한 그녀의 이유는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이 쪽 동굴은 구경을 못했잖아." "……." 옆에서 종리연을 업고 올라가는 적미호가 고소하다는 눈빛으로 혀를 날름거려 보였다. 아무래도 그녀가 업고 가는 종리연이 제갈혜보다는 훨씬 가벼워 보였다. 비록 제갈혜가 고통에 못 이겨 혼절해 버려서 조용했던 관계로 안고 가기는 쉬웠지만, 풍룡이라고 불릴 만큼 중원 제일의 신법을 자랑하는 종리연이 훨씬 가벼울 거라는 것은 밋밋하게 마른 몸매만 봐도 충분히 상상이 가는 일이었다. 옥의 티라고 하면 입에서 뽀글뽀글 뿜어 대는 하얀 거품으로 업고 가는 사람의 등이 젖어 버린다는 정도? 그래도 힘이 드는 것보다는 좀 지저분한 쪽이 낫다고 생각되었다. "저기 적미호 소저, 우리 서로 바꿔 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싫어, 니가 뭔 생각으로 그러는지 내가 모를 줄 알어? 이 여자 하나도 안 무겁네. 뼈하고 가죽만 있나 봐. 호호호홋." "그, 그래도 입에서 뿜어지는 거품으로 적미호 소저의 등이 젖잖아요." "니 땀이나 닦으면서 말해라. 땀으로 젖는 것보다는 침으로 젖는 게 나아. 적어도 힘들지는 않다는 소리잖아." "……." 한 시진은 흘렀을까? 갈수록 좁아지기만 하는 돌계단 통로는 좀처럼 그 끝을 보여주지 않았다. 내려올 때 형성되어 있던 천연 동굴의 고색창연한 아름다움도 없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진 티가 역력했다. 그 흔하디 흔하던 사천왕 석문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뭐 뻔하지. 입구에서 밀실까지 떼돈을 부어 가며 짓고 나니까 돈이 떨어져서 막판에는 눈대중 날림으로 공사를 했겠지. 이거야말로 부실 공사 현장이 아니고 뭐겠어?' 갑자기 선두에 앞서가던 냉월화 누님이 손을 들어서 일행 전부를 정지시키고는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큰일났다! 모두 전력으로 위로 올라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대경실색(大驚失色)한 그녀가 신법을 발휘해 위로 신형을 날리자 다른 이들도 저마다의 신법으로 신형을 날렸다. 당황은 되었지만, 남궁현이 나에게로 다가와서 제갈혜를 빼앗아 갔을 때는 너무나 흐뭇해서 적미호를 돌아보며 놀려 주려 했었다. 그러나, 풍룡을 안아 든 그녀는 의외로 매우 빠르게 신법을 발휘해 선두진을 따라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오히려 뒤떨어지고 있는 것은 바로 나였다. '쳇, 빚쟁이한테라도 쫓기나? 뭘 저렇게 서둘러?' 내가 맨 뒤로 쳐지자 은월과 적월이 고맙게도 알아서 내 어깨를 양옆에서 낚아채서는 물찬 족제비처럼 날렵하게 계단 위로 신형을 날렸다. 우르르 떼구르르르 쿠쿵 쿵! 귀 고막이 멍멍해질 정도로 들려 오는 굉음에 고개를 살짝 틀어 보니 시야의 후미에서부터 계단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시커먼 괴물이 우리를 잡아먹기 위해 뒤쫓아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니미럴! 부실 공사로 위장된 함정 기관이었구나. 잘못하면 먹히겠는데…….' 은월과 적월이 나를 내버려두고 자기들만 갔다고 한다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속도였지만, 나라는 짐으로 인해 그 속도가 현저히 떨어져 버렸기에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나로 인해 그녀들까지 암혹의 무저갱 속으로 빠지게 되면 무진장 미안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이 팔을 풀어 버리고 저 속으로 뛰어들어 버리면 은월과 적월은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 갔다. '그래, 이 팔을 풀어 버릴까? 내 팔만 풀어 버리면 적어도 이들은 산다. 하지만…… 나, 나도 죽기는 싫은데. 젠장.' 삶에 대한 의욕이 그 누구보다 강했던 나는 끝끝내 그들에게 잡힌 팔을 풀 수가 없었다. 설사 그들과 같이 죽게 되더라도 살고 싶다는 욕구를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기 싫었던 모양이다. '젠장, 현현자 영감탱, 당신은 틀렸소. 백 년은커녕 일 년도 넘기지 못하는구려. 크크크, 이로써 구타심결이고 혈해진경이고 나발이고 간에 그 모든 것들이 어둠 속에 잠기게 되는구려.' 적월과 은월은 지척에까지 다가온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포기를 하지 않고 이를 악물며 신형을 날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난 알 수 있었다. 내가 진작에 팔을 풀어 줬더라면 적어도 그들은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로 인해 애꿎게도 두 여인들까지 저승길 동무로 동반하게 된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보 같은 녀석! 구타심결을 써먹을 줄 모르는 녀석! 몸뚱아리도 없는 사념체를 울화통 터지게 만드는 놈은 아마 니가 이 세상에서 처음일 거다.' 머릿속을 강하게 울려오는 이 소리는 분명 꿈속에서 마다 대화를 나눴던 현현자 영감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아닌 느낌만으로도 그의 의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뇌리 속에서 기생해서 산다는…… 찜찜한 사념체. '얼라리요? 이젠 멀쩡히 깨어 있을 때도 나타나는 거요? 크크크 아무렴 어떻지요? 죽음이라는 걸 당신 마음대로 막아 볼 수 있나요?' '이렇게까지 하긴 싫었다만, 노력을 게을리한 네 탓이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것들을 보고, 느낌으로써 체득하도록 해라. 네 몸의 명령권을 내가 잠시 갖도록 하겠다.' '후훗 마음대로 해보시오. 이젠 다 끝입니다. 그냥 편하게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단지 이 철없는 아가씨들을 저승길 동무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이 놈! 누구 맘대로 죽는다고 난리냐? 네 녀석이 구타심결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니 마음대로 죽을 수 있을 듯 싶더냐? 백년뿐이 아니라 이 백년도 너끈히 살지도 모르는 놈이…… 감히 나를 능멸하려 들다니!' 두둥 두둥 두둥! 일순간 시야가 뒤로 밀려 버리는 느낌을 받으면서 약간의 현기증을 느껴야만 했다. 그 시각으로부터 내 몸은 나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제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적월과 은월이 바로 뒤까지 무너져 내린 계단을 느끼고 아연실색해서 안면이 창백해졌을 때 나의 팔들은 미꾸라지처럼 교묘한 금나수(擒拏手)를 펼쳐 그녀들의 팔짱으로부터 벗어남과 동시에 반대로 엄청난 완력으로 그녀들의 팔뚝을 낚아채 버렸다. '날아오르는 그 기세가 봉황과 같다 해서 봉조신법(鳳鳥身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알아두면 쓸 만하나, 신법이라고 하는 것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니 크게 유념할 필요는 없다.' 내 발끝으로 청아한 기운들이 자기들 멋대로 일어나며 충만하게 퍼지는 순간, 무너지는 돌계단을 박차고 날아올랐는데, 마치 스스로가 독수리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통로를 휘몰아치며 날아올랐다. '네가 느끼던 이 청아한 기운은 바로 구타심결(毆打心結)의 효용인 내력이다. 다른 내력과 똑같다고 생각하지 마라. 니 놈이 죽을 둥 살 둥 피똥을 싸며 얻어터지는 동안 그 일부만이 걸러져 모인 순수한 너만의 것이다! 이용하기에 따라서 네 놈의 부족한 완력을 키워 주기도 하고, 몸을 이처럼 가볍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현현자 사념체의 말대로 내 몸 전체에서 일어난 내력의 흐름은 날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어 줬다. 나에게 팔뚝을 낚아채진 적월과 은월의 무게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느닷없이 변해 버린 나의 기세에 뭔가 말을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통로를 타고 올라가는 강한 역풍에 눈조차 뜰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를 향해 몰려오던 역풍 속의 돌 조각과 먼지들은 내 몸을 건드리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는데, 얇은 막이라도 형성된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력이 극에 다르면 지금처럼 몸을 보호해 주는 호신강기(護身鋼氣)역할도 해준다. 뿐만 아니라 네 손에서 펼쳐지는 평범한 삼재검법이 내력과 하나가 되면 네 의지로 생사의 종지부가 결정날 수도 있는 게야.' '쳇, 어디 그러한지 시범을 보여주시지요. 령령 하나로도 버거워서 항상 깨지는 나한테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녀야말로 네가 넘어서야 하는 가장 강대한 벽이 될 것이다. 한 가지는 잊지 말거라. 네가 있기에 그녀가 있고 그녀가 있기에 네가 있는 것이다.' '내 존재가 령령에게는 삶의 활력소라는 것을 잘 아니 그런 말 할 것도 없소. 그러나, 그녀가 있어서 내가 있다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할 것 없소. 내 소원이 뭔지 아시오? 그녀의 무시무시한 주먹이 내게 있어 솜방망이처럼 느껴져 아무리 맞아도 안 아프게 되는 그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오. 아니지, 제일 원하는 바는 하루라도 빨리 그녀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활개치며 사는 거요.' '꿈도 야무진 놈, 그 날이 오면 넌 명실상부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말일 것이다. 지금의 널 보면 그냥 한숨만 나오니까 입다물고 두 번 다시없을 나의 가르침들을 몸에 새겨 두기나 해라. 이 놈아.' 돌계단을 타고 오른 지 얼마 안지나 뒤따르던 암흑의 괴물을 떨쳐 냈을 뿐만 아니라 눈앞으로부터 눈부신 빛살이 스며 나오는 종점이 보였다. 저 곳이 아마도 풍악산의 정상인 듯 했다. 나와 내 손에 팔뚝을 잡힌 적월과 은월을 제외하고는 다들 올라섰는지 내 앞에 서 있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다. 냉월화 누님이 뒤늦게나마 나와 적월, 은월의 부재에 대해서 알아챘는지 출구로 다급히 신형을 날리며 내려오는 것이 보였지만, 내가 무섭게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구로부터 피신하듯 날렵하게 물러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부우우우웅. 마지막으로 입구를 벗어나는 순간 내가 몰고 온 역풍과 맞 부딪힌 지상의 대기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났는지 기이한 소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어떻게 들으면 거대한 방귀 소리 같기도 했다. 거의 실신하듯 매달려 있는 적월과 은월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론 내 의지가 아닌 자칭 현현자의 사념체라 불리는 기생령의 의지이긴 했지만……. "작, 작삼 동생,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무공이라고는 모르는 줄 알았는데?" 냉월화 누님이 놀라면서도 궁금했는지 한 발자국 나서며 질문을 던져 왔으나, 내가 지긋이 바라보자 내 눈동자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입을 닫아 버리면서 주춤주춤 물러서 버렸다. "야, 너, 너 이게 어떻게 된 거냐!" 역시 이런 일에 빠질 남궁현이 아니지. 대경실색은 한 듯 하면서도 자기보다 한참 하수일 내가 기이한 신법으로 적월과 은월까지 잡아채고서 올라온 것에 강한 의문을 표시해 왔지만, 현현자 사념체는 그마저 귀찮았는지 중지 손가락을 엄지에 끼우며 그의 이마를 향해 내력을 모으더니 가볍게 튕겨냈다. 그 순간 중지 손가락 끝을 통해 얄팍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핑! 퍽! "아이고! 이, 이게 뭐야!" 놀랍게도 이 장은 떨어져 있던 남궁현의 이마에 빨갛게 혹이 튀어나왔고, 이에 놀랐는지 이마를 감싸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이렇게 통쾌하면서도 흐뭇하게 느껴진 적이 또 있을까? '후후후훗 으하하하하핫! 지금 그 한 방은 매우 쓸 만하구려. 무슨 기술이요?' '흔히들 탄지신통(彈指神通)이라고 하지. 이처럼 지금의 네 내력으로는 큰 위력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잘 기억해 뒀다가 훗날 유용하게 쓸 수 있도록 해라.' '내가 어떻게 기억을 하겠소?' '넌 기억 못해도 네 몸이 기억할 것이다. 뭐 구태여 기억하려 들 필요도 없긴 하지. 무공이란 결국 하나로 통하는 것, 네가 모으는 힘들이 결국 하나로 귀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야.' 바깥으로 나왔다는 것이 실감되듯 살을 에이는 듯한 차가운 한풍이 몰아치는 풍악산 산 정상은 암석들 투성이로 나무하나 안 보이는 민둥산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마치 일행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수많은 무림인들의 모습이 거침없이 드러나 있었지만, 그들이 에워싼 형세를 보아하니 우리 일행을 노리는 게 아닌 듯 했다. 그들의 중앙에는 수라삼살(修羅三殺)이 오랫동안 치열하게 싸웠는지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쓰러질 듯 말 듯 간신히 서 있었다. 그들을 일차적으로 에워싸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천운학 소맹주 일행이었다. 진두한과 모용천풍을 비롯해 우리와 대치하고 있던 무림맹 아해들 중 악조영의 모습만이 보일 뿐 다른 애들은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일반 무사들의 수만도 수백 명은 되는 듯 싶었다. 남아 있던 현무단 전원이 여기에 투입된 모양이었다. 특이한 인물이 하나 보였는데, 네모나게 각이 져 있는 얼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기세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십성(十聖)중 한 명인 듯 싶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3-02 00:14:07 고친날 2005-09-12 19:27:10 읽은수 9286 [ 13 K ] 제목 점소이 작삼(11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현현자의 오감을 통해 주변을 둘러보니 드러난 무리들 이외에도 수많은 무림인들이 암중에서 수라삼살(修羅三殺)과 무림맹(武林盟)의 행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못 먹는 감 찔러 나 본다고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혼란한 와중에 뒤통수라도 쳐서 이득을 보려는 작자들 같았다. 그렇기에 불씨만 붙여 주면 재도 남기지 않고 활활 타 버릴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전장에 흐르고 있었다. '포위 당한 놈들을 보아하니 아직까지도 혈해진경(血海眞經)이 자기들 손안에 있는 줄로만 알고 있는가 보군. 하긴 확인할 새도 없이 기관이 작동했을 것이고, 쉴 틈도 없이 다른 무리들에게 쫓겼을 테니 자기네들 수중에 있는 것이 진본인 줄로만 알고 있겠지.' '크크크, 거 꼴 좋군요. 잘난 척 굴던 수라삼살(修羅三殺)이 완전히 삼중 사중의 천라지망(天羅地網)속에 갇혀 버렸네요. 마침 강 건너 불 구경하기에도 딱 좋은데요.' '혹시나 말인데, 네가 가장 증오해 마지않는 소맹주가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렸다는 소문이나, 짜증나게 굴던 무림맹 아해들이 거의 몰살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 '오오! 듣기에 매우 솔깃한 말이구려. 영감, 무슨 좋은 수라도 있는 거요?' '있다마다. 넌 그저 이제부터 내가 하려는 일에 훼방만 놓지 말고 가만히 구경만 하면 되느니라.' '카아, 그야 여부가 있겠소? 당연히 나야 대찬성이지요. 크크크, 어서 일이나 벌려 보시오. 난 오로지 소맹주가 나한테 크게 한 방 얻어먹었다는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할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 일거요.' '좋네. 이제부터 자네의 마지막 의지마저 인계 받아 잠시동안이지만, 자네 몸은 내 완벽한 통제 아래 놓이게 되네. 동의하나?' '동의하오.' 두둥 두둥 두둥……. 내 의지를 따라 동의한다고 허락하자마자 그나마 손에 잡힐 듯 느껴지던 나의 몸이 아득히 멀어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생각을 떠올려 봐도 현현자 영감과 더 이상의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 나라는 존재가 내 몸으로부터 완전 이탈되어 버린 듯한 묘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라 현현자 그 자체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수라삼살(修羅三殺) 바보 삼 남매는 듣거라! 너희들이 들고 있는 것이 과연 혈해진경 진본이 맞는지 확인해 봤느냐?" 수라삼살과 치열한 교전을 펼치고 난 직후 에워싼 그대로 잠시 소강 상태로 대치하고 있던 무림맹 아해들 주변으로 메아리치듯 현현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방팔방에서 목소리가 들려 와서 나조차도 그 방향을 가늠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말로만 듣던 육합전성(六合傳聲)이라는 전음술이 내 몸에서 터져 나오는 날이 있을 줄이야! 현현자의 육합전성(六合傳聲)이 울려 퍼지자 소맹주와 네모난 대두 영감을 비롯한 무림맹 아해들이 우왕좌왕하며 육합전성의 소재를 찾고자 사방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고, 무엇보다 수라삼살의 안색이 변한 것을 보니 진경에 대한 의구심을 뒤늦게 떠올린 모양이었다. 더불어 주변 이곳 저곳에 몸을 사린 채 숨어 있는 수많은 무림인들의 동요로 인한 공기 흐름의 뒤틀림까지 다 느껴질 정도였다. 냉월화 누님을 비롯한 월녀궁 여인들과 구룡 아해들이 놀라는 광경도 내 눈으로 목도하고 싶었지만, 현현자의 신경이 봉우리 정상아래 집결된 무리들에게만 향해 있어서 직접 확인할 길은 없었다. 이리저리 신중하게 고개를 돌리던 천운학 소맹주가 마지막으로 산 정상 봉우리를 향해서 시선을 돌렸다. 내 몸을 점령하고 있는 현현자에게서 묘한 기운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랫입술을 질겅거리며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듯 했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야, 거기 점소이! 물론 그럴 리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한가지 물어 보마. 지금의 육합전성(六合傳聲), 혹시 네 입으로부터 나온 것이더냐?" "……." "크크크, 건방진 놈, 감히 내 말을 씹는 것이냐?" 현현자는 말없이 조금 약이 오른 듯한 그를 내려다보며 비웃기라도 하듯 씨익 한 쪽 입술로만 웃어 보였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내 몸, 현현자의 반응에 발끈한 네모나게 각진 대두(大頭)의 노인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쌍 놈의 종자가!" "하하하하하! 내가 쌍 놈의 종자라면, 그보다 못한 네 놈의 종자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골을 뒤흔드는 육합전성이 아까보다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진동에 지면 위에 먼지들이 들썩거리며 일어났고, 산바람에 나부낀 덕에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에 놀라 뒤로 주춤하던 대두 노인장이 옆의 황의 무사로부터 검을 빼앗아서 날 향해 고함을 지르며 검을 날려 왔다. "죽어 버려랏!" 휭 휘휭 휘휘휭 휘잉 휘이이이이잉! '현현자 영감! 물러나요! 영감! 지금 나한테는 저걸 막을 힘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고! 내 팔뚝이 날아가게라도 하려는 거요? 어서 물러나라니까!' 약간 휘어지면서 대기를 가르던 검은 점점 속도를 더해 가더니 내 지척에 다다랐을 때는 거의 보이지도 않게 되어 버렸다. 너무 놀란 나는 소리를 버럭 질러서 현현자 영감한테 경고를 했으나, 나의 의지에 발현한 그 어떤 전달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제야 내 마지막 의지를 인계 받아 내 몸을 자신의 완벽한 통제 하에 둔다는 그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은 오로지 현현자 영감의 오감을 통해 보고 느끼는 빌어먹을 일 뿐이었던 것이다. 톡. 고개도 돌리지 않은 내 몸, 즉 현현자는 날아든 검에 대해서 왼손의 집게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퉁겨 내기만 했을 뿐인데, 날아오던 검이 감쪽같이 그 자취를 감춰 버리는 것이 아닌가! 검이 어디로 사라졌나 하고 의문을 느낄 무렵 귀 고막을 울리는 굉음이 아래에서 들려 왔다. 쩌어어어엉! 놀랍게도 내 지척에서 자취를 감춰 버린 검은 다급히 들어올려진 대두 영감의 금도(金刀)를 한 치는 파고 들어가 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기세의 반발력으로 오 장정도 뒤로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대두 영감은 벌겋게 달아올라서 콧김을 벌렁벌렁 내뿜었지만, 별다른 상처는 없어 보였다. 다만 그가 밀릴 때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서 있던 애꿎은 황의 무사들만 매섭게 퉁겨 나가 땅바닥을 뒹굴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 말도 안 돼! 나의 내력을 담아 낸 십 성의 회선비검(回旋飛劍)을 사량발천근 따위로 막아내다니! 너, 넌 누구냐?!"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 넉 냥의 힘으로 천 근에 해당하는 힘의 방향을 바꿔 준다는 그것? 문득 단수연에게 겁도 없이 달려들었다가 이마가 깨져 버렸던 예전의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을 이 몸으로 펼치게 되다니…… 비록 내가 직접 벌리는 일은 아니어도 내 몸이 벌린 일이라 생각하니 야릇하게 흥분이 되었다. "남의 정체를 물을 때는 자신의 신분부터 밝혀야 하는 법, 그러는 너의 정체는 무엇이더냐?" "나, 난…… 무림맹(武林盟)의 오대 장로 중 한 명인 하태우(河太愚)님이시다! 이제 네 정체를 밝혀라!" "끌끌끌, 한 마디로 남의 집 종노릇하는 똥개라는 소리구나. 내 정체는 알 것 없다. 그저 너 같은 하류의 입 위에 오르락내리락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만 알아두기 바란다. 그만 꺼져라. 집 주인에게 볼 일이 있는 것이지. 집 지키는 똥개에게는 볼 일이 없느니라." "뭐, 뭐라고! 네, 네 놈의 사지를 내가 당장……!" 현현자 영감은 하태우(河太愚)라는 노인장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몇 마디 말로 똥개로 전락시켜 버렸다. 그 때문인지 등뒤에서 핏기들이 싹 가시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갑자기 변해 버린 나 때문에 아무 말 못하고 사태를 관망해 오던 일행들에 있어서 수 백 명이 떼거지로 몰려 있는 무림맹 아해들은 그야말로 죽음의 사신처럼 느껴지고 있을 터였다. 당장 눈앞에 있는 천운학과 하태우만 하더라고 부상자 투성인 일행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거기에 악조영을 비롯한 무림맹 아해들 숫자만도 근 이 삼백 명은 넘으니 천운학의 한 마디만 떨어지면, 일행은 여기에 뼈를 묻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야! 너, 입 좀 닥치고 가만히 있지 못해! 방금 전에는 내가 좀 정신이 없어서 어이없게 돌멩이 따위에 얻어맞은 모양이다 만, 이제는 용서 없다. 그 입, 내가 닫아 주마!" 역시 눈치코치 없는 남궁현이 고함과 함께 칼을 뽑아 들고 뒤에서 덮쳐 왔다. 뭐, 그 다음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현현자 영감은 천운학을 직시한 자세 그대로 오른 손을 어깨 너머 등뒤로 돌렸다. 이어서 방금 전보다 더 강하게 가운데 중지 손가락을 퉁겼다. 퍽! 쿠당! "아아악! 이, 이거 피 아냐! 너, 너!" 사박사박 질질질질. 등뒤의 일이라 보이지는 않았지만, 발자국 소리로 미루어 보아 아무래도 눈치가 좀 있는 냉월화 누님에게 뒷덜미를 잡혀서 끌려간 확신이 들었다. 뭐 평상시의 그였다면 사파니 어쩌느니 하면서 대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나한테 연이어 이마빼기가 깨져서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리 현현자가 내 몸을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엄연히 껍데기는 나였으니 말이다. 도도하기 그지없는 남궁현조차 바보가 되어 버리는 꼬락서니를 똑똑히 바라본 천운학 소맹주는 아직도 울화통을 터뜨리고 있는 하태우를 가만히 제지하고서 그 곱상한 안면을 가깝게 디밀어 왔다. "왠지 내가 알던 그 점소이가 아닌 듯 싶군. 그래, 하고 싶은 얘기란 게 뭐냐?" "이제라도 내 말을 알아들어서 다행일세. 일단 이것부터 받아 보도록. 그 다음부터 천천히 대화를 나눠 보도록 하지." 현현자 영감은 내 가슴속에 품고 있던 책자를 꺼내 앞 부분을 북 뜯어서 그대로 천운학을 향해서 휙 날려보냈다. 천운학은 신중한 빛으로 책자를 받아 들었으나, 정확히 다섯 발자국을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크크크 고거 쌤통이다. 오늘 남궁현에 이어서 천운학마저도 모욕을 당하는구나. 그런데, 뭘 던진…… 끄아아아악! 현현자 영감! 혈해진경을 던져 주면 어떻게 해!' 이 영감이 미쳤나 보다. 내가 어떤 쪽팔림을 감당하면서 숨겨 온 혈해진경(血海眞經)인데, 그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철천지원수, 천운학 녀석한테 던져 줘 버린단 말인가! 열이 바짝 오른 나는 거의 인사불성이 될 지경으로 현현자 영감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해 버렸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뭐라고 퍼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괘씸하기 그지없는 영감탱에게는 내 말이 단 한마디도 전달이 안 된 것은 확실했다. 책자를 받아 든 천운학은 책자의 앞면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휘리리릭 책장을 넘기고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혈해진경(血海眞經) 중에서 검경(劍經)부분이구려. 혹시 나머지도 다 갖고 있소?" 손안에 든 진경의 무게 탓인지 하대로 일관하던 소맹주의 어투가 어느새 반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더불어서 사방팔방에 퍼져 있던 무림인들의 신경이 바로 나와 소맹주에게로 쏠리는 강렬한 기세가 느껴졌다. 수라삼살의 존재는 이미 그들의 뇌리 속에서 지워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들이 갖고 있는 진경이 가짜라는 것을 이제는 모두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다 갖고 있지. 뿐만 아니라 나머지도 무림맹에 맡길 의사가 있다." '이 미친 영감탱! 정, 정말 다 주려는 거요? 권, 권경(券經)이나 도, 도경(刀經)만이라도 남겨 주시오. 제발!' 그에게 내 의지가 하나도 들리지 않으리란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소리를 질렀으나, 역시 현현자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것을 두고 죽 쒀서 개 줬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젠장! "조, 조건을 말해 보시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다 들어 주겠소." "좋아. 몇 가지 간단한 조건들이 있기야 하지. 일단 저기 널브러져 있는 남궁현 녀석이 원하는 정보를 전음으로 전해 주도록 해라. 아무리 싸가지가 없는 녀석이라 해도 일행은 일행이니 말이다." "알, 알겠소." 힘없이 대답을 한 소맹주는 입을 달싹달싹 거렸으나, 남궁현에게만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말을 전달하고 있는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어서 기가 질렸는지 바닥에 퍼 질러져 있던 남궁현이 느닷없이 벌떡 일어서더니 잠시 후에는 털썩 주저앉으며 '다행이야.' 라고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아마도 그가 원하던 답을 얻었던 모양이었다. "그 다음 조건은 무엇이오?" "월녀궁 여인들을 비롯한 우리 일행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그런다고 약속 따위를 제대로 이행할 무림맹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만, 아시다시피 구파일방(九派一幇), 오대세가(五大世家) 놈들이 사그리 숨어 있다는 것은 너도 잘 알 것이다. 수많은 낮 쥐들이 우리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셈이지. 이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약속하겠느냐?" "어려운 부탁이긴 하지만, 약속하오. 그들에게 손 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소. 그리고, 또 조건이 있소?" "이제는 없다. 이거나 가져가도록 해라. 어디 보자, 이것은 도경이군." 또 아까운 혈해진경을 북 뜯어낸 현현자(炫炫者) 영감은 그것을 하태우(河太愚) 영감에게 날렸다. 하태우는 험상궂은 안면과는 달리 몹시 당황하며 받아 내었으나, 역시 네 발자국은 뒤로 쭈욱 미끄러졌다. 이어서 이것은 권경(券經)이로군 하면서 북 뜯어서 날렸는데, 의도를 했는지 안 했는지 악조영(惡趙影)의 품속으로 정확히 날아들었다. 그녀는 엉거주춤 그것을 받으려고 했다가 끌어안은 그대로 비명을 지르며 멀찍이 나가떨어졌다. 그러더니 축 늘어져 버린 것이 기절해 버린 게 분명했다. 다시 이번에는 마지막 독경이로군 하고 책자를 날렸는데, 그것은 미쳐 피하지 못한 이름도 없는 황의 무사 품으로 날아 들어가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끔찍한 단말마와 함께 쭉 미끄러진 그는 그대로 피를 토하며 굳어 버리는 것이 즉사해 버린 듯 싶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무사가 미끄러져 멈춘 곳이 교묘하게도 수라삼살의 발치였던 것이었다. 잠자코 대치하고만 있던 수라삼살(修羅三殺) 중 혈살(血殺)이라는 작자가 뻗은 무사의 품에서 독경(毒經)을 강탈해 버리더니 자기 일행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쳐버리는 게 아닌가! 그를 가로막던 무림맹 아해들은 그가 기습적으로 뿌린 독침에 당해서 힘없이 풀썩 풀썩 쓰러져 버렸다. 그 틈을 타고 나머지 도살(刀殺)과 권살(券殺)도 제각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생각할 수록 그들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수년간 호흡을 맞춰 왔다는 놈들이 너무나도 제 멋대로들 행동하는 것이었다. 혈살이 우두머리 인줄 알았더니 왠지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알쏭달쏭한 구석이 너무나도 많은 놈들이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장중에 있던 그 누구도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천운학과 하태우는 자신들의 품에 있는 혈해진경에 넋들이 빠져서 미쳐 그들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주저하다가 결국 그들을 놓쳐 버리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정신을 차려야 할 악조영은 기절해서 널브러져 있는 상황이었으니 수라삼살을 우왕좌왕하고 있는 황의 무사들로만 잡아 둔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긴 했다. 혈살(血殺)이 지나간 방향에서 고함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려 오는 것으로 봐서 독경(毒經)에 욕심을 품은 무림인들이 겁도 없이 불나방처럼 그에게 달려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검경(劍經), 도경(刀經), 권경(券經)을 꿀꺽 삼킨 꼴이 된 무림맹 아해들은 무사히 무림맹에까지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일까? 정신을 차린 천운학(天雲鶴)은 악조영의 품에서 권경을 꺼내 품속에 갈무리하고는 아쉬움으로 입맛을 다시는 하태우에게서도 도경을 빼앗아 갔다. 무림맹으로 귀화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듯이 무림맹 아해들의 호위를 받으며 급히 내려가는 꼴이 볼썽 사납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쪽에는 신경을 아예 꺼 버리고서 쏜살같이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현현자가 잠자코 내려다보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그의 시야를 따라 갔는데, 무림맹이 내려간 뒤로 수많은 무림인들이 줄을 이어 그 뒤를 따랐다. 막무가내로 모습을 드러낸 채 뒤따르는 것을 보니 이미 우리 일행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푸드드드덕. 그 뿐만이 아니었다. 숲 속 곳곳에서 전서구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날아 오르는 게 아닌가! 상황이 웃음으로 넘어가기에는 아주 기가 막히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새하얀 전서구들이 날아 오르는 꼴이 아주 장관이었다. 아무래도 당분간 천운학을 비롯한 무림맹 아해들은 찐하게 고생 좀 할 듯 싶다. '젠장, 정말 정성껏 죽을 쒀서 개들에게 준 꼴이 되었구나. 에휴. 어쩔 수 없지. 나와는 인연이 없나 보지. 이 빌어먹을 영감탱 내가 구타심결(毆打心結)을 연마하게 만들려고 이런 사기 극을 조작한 모양인데, 내가 어디 그 엿 같은 무공을 연마하나 봐라!' 속으로는 당당하게 외치고는 있었지만, 어쩐지 불안한 오한이 감도는 것은 단지 기분탓 만일 것인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3-05 10:21:01 고친날 2005-09-13 08:46:11 읽은수 9195 [ 12 K ] 제목 점소이 작삼(113)-수라사살(修羅四殺)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수라사살(修羅四殺) 아슬아슬 줄타기 같던 소맹주와의 설전이 허망하게 끝이 났다. 그가 진경 대부분을 움켜쥐고 떠나가자 정체 불명의 온갖 무리들도 그 뒤에 자석처럼 철커덕 붙어 사라졌다. 화약고 같던 긴장감이 일시에 해소되고 정적만이 남자 진이 빠진 무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자리에 털썩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혈해진경(血海鎭經)이라는 무게 때문이었을까? 풍악산(風岳山) 정상에 우두커니 남아 버린 일행들 중 나의 무위가 갑자기 올라간 것에 의문을 던진다거나 놀라워하는 사람이 없었다. 머리 회전이 비상하다고 해야 할 제갈혜(諸喝慧)와 종리연(鐘理戀)은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어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눈치가 밥풀 때기만큼도 없는 남궁현(南宮炫)이 따지듯이 건방지게 굴다가 이마빼기에 한 대 먹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소맹주한테서 들은 의문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을 되새기듯 멍청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그가 행방을 궁금해하는 인간 낯짝을 한 번 보고 싶다는 기분도 들었지만, 관뒀다. 그의 싸가지 없는 성격으로 볼 때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듯이, 그가 애타게 찾으려는 인간 또한 피차일반 개차반일 테니 말이다. 그래도 예외는 존재했다. 사람잡는 환약사로 자리 매김을 한 냉월화(冷月花) 누님이 의연하게도 나를 향해 포권과 동시에 허리를 깊숙이 조아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왔던 것이었다. 뭐, 정확히는 내가 아닌 나의 몸을 점령해 버린 현현자에게 한 것일 테지만, 그래도 기분이 뿌듯한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어르신, 감히 소녀가 어르신의 존안을 뵈옵니다." "허허, 그래도 네가 이 중에서 보는 눈이 가장 좋구나. 나의 정체를 알고서 말하는 것이더냐?" "아니옵니다. 한갓 보잘 것 없는 소녀이오나, 어르신의 안력(眼力)에서 범람할 수 없는 깊이를 언뜻 보았사옵니다. 제가 알기로 그런 형형한 눈빛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전대 선배님은 되어야 가능한 것으로 아옵니다." "그럼, 내가 반로환동(反老還童)의 고수가 되기라도 한다는 말이더냐?" "그, 그것은……오직 어르신만이 아실 일이라 미력한 소녀의 얄팍한 안목으로는 알 수가 없사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두 사람 사이에 자그마한 말장난 같은 논쟁이 붙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놈의 영감쟁이가 간만에 나 이외에 살아 있는 인간과 대화를 나누는 일에 재미 들려 버린 모양이었다. "허허허허, 걱정할 것 없다. 난 잠시 이 놈의 몸을 빌렸을 뿐이니까. 모자란 내공도 일시 격발시켜 사용한 터라 내가 물러서고 나면 필시 작삼 이 놈은 며칠 정도 몸져누울 거다. 그러니 보살필 인원을 남기고 회궁하도록 하거라." "명심하겠사옵니다." 보살펴 주라는 현현자의 말에 그녀의 눈빛에 생기가 어리는 것을 보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이 놈의 미친 영감이 사람을 봐 가면서 말을 가려야지. 생사람 잡을 일이 있나! 더구나 내가 몸져누울 것을 알면서도 자기 맘대로 격발인지 뭔가를 시켜 가며 무리를 한 거란 말이야? 후미 열 받는 거! "남궁현 아해는 듣거라." 그 때까지 넋을 잃은 듯 하늘만 우두커니 바라보던 그는 현현자의 부름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시선을 돌려 왔다. "하, 할 말이 있, 있으면 해……가 아니고, 하, 하시오." 말까지 떠듬거리는 게 영락없는 낙방 서생 꼬락서니였다. 좌우간 갈수록 어설퍼 보이는 게 미덥잖아 보인다. "지금은 소맹주란 놈이 혈해진경을 지키느라 너희들한테서 일시적으로 손을 뗐지만, 맹으로 무사 복귀한다면 너희 가문이 온전하기 힘들 거다. 후대를 보전하고 싶다면 일시적으로 모든 가솔들을 은신시키는 것만이 사는 길일 거다. 제갈혜란 아이의 가문은 아마도 오래 전에 피신했을 게야. 저 아이 가문은 옛날부터 눈치 하나 보는 데는 너무나도 탁월한 구석이 있었거든." "도대체 노인장 나이를 얼마나 먹은 귀신이기에 그렇게 잘 아는 것이오?" "너보단 많이 먹었다." "……." "어허, 나한테 은혜를 입은 녀석 눈깔이 시답잖은 지고. 생색낼 필요는 없지만 고마운 티 정도 내면 덧나랴? 이거야 원, 요즘 아해들 경로 사상이 너무 형편없군. 시대를 잘못 타고 나 버렸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변명은 됐느니라. 은혜 갚을 생각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면 이 아이에게 갚도록. 어허, 이보게. 노골적으로 아니꼬워하면 엉덩이에 뿔나느니라. 옛날부터 남궁세가 애들은 하여튼 막되먹었다니깐. 나 간다." 두둥 두둥! 뒤로 물러서 있던 내가 앞으로 쭉 당겨지면서 다시 내 몸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을 맛보게 되었다. 동시에 그 존재감이 희미해져 가는 현현자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 왔다. '사념체 주제에 너무 무리를 해 버렸다. 다 니 놈이 게으른 탓이다. 한 이삼 년 동안은 푹 쉬며 잠을 자야 할 판이니 내가 몸소 체득시켜 준 그 느낌을 잊지 말아라. 그럼 수고하도록.' '어이, 어이 영감! 혈해진경을 그 따위로 뿌려 놓고 어디로 튀는 거요? 냉큼 못 나와요! 어이 영감!……젠장.' 현현자(炫炫者) 영감은 자기 멋대로 내 의식을 비집고 들어오더니 갈 때 또한 자기 멋대로 사라져 버렸다. 다음에 나타날 때도 자기 멋대로 나타날 것이다. 거추장스런 기생충 같은 암적인 존재! 무당을 불러 한 바탕 굿을 하면 떨어져 나갈까? 돈 꽤나 들텐데 말이지. 쳇, 내 돈이 아까워서 굿판을 벌리지 않는 게 아니다. 귀찮아서 안 하는 거지. 휘청 휘청 털썩 쿵! 시야가 깜깜해져 오면서 온 몸에 현기증이 일어났다. 뺨이 화끈거리는 것으로 미뤄 보아 넘어지면서 볼따구로 땅을 들이받은 모양이다. 묘하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이, 의식이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전신에 힘이 쭉 빠져 있었다. '이 빌어먹을 영감, 갈 땐 가더라도 내 몸은 제대로 돌려놓고 갔어야 할 것 아니야?' 탁 탁 탁 탁. 누군가가 다급히 달려오더니 날 돌려세워서 내 안면 볼따구 긁힌 곳에 고약을 발라 주었다. 은은한 사향 냄새에 거침없는 행동을 보아하니 다름 아닌 적월(赤月)같아 보였다. "호호호호홋! 환자는 나에게 맡겨. 그거 내 전문인 것 잘 알잖아." '헉, 냉월화 누님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 온다. 안, 안 돼.' "부궁주님, 작삼 공자의 상세를 보아하니 그저 며칠 객잔에서 푹 쉬면 나을 듯 싶습니다. 구태여 부궁주님의 손까지 빌어서 치료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공자가 거동할 수 있을 때까지 소녀가 돌보도록 해주십시오." '오옷 적월 그래, 잘 한다.' "아니야. 작삼 동생이 행여나 어디가 잘못되었으면 큰 일 아니겠어? 당연히 내가 직접 손을 봐야지. 저리 비켜." "부궁주님. 제발 소녀가 공자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쿵 쿵 쿵 쿵 쿵! '어라 이게 무슨 소리야? 왜 지면이 울려?' "그만해! 이마의 피나 닦아. 흥, 네가 감히 내 말에 정면으로 반박해 오다니 용기가 가상하구나. 그 용기가 가상해서 이번 한 번만 봐주마. 대신 귀궁하면 지하 독방에서 십일동안 면벽수련할 각오를 하는 게 좋아." '누님, 그, 그건 좀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겨우 그 정도로 십일이나 독방 행이라니!' 그녀가 간호를 포기한 것에 대해서 안도의 한 숨을 쉬었지만, 반대급부로 적월이 벌을 받게 되다니! 울컥하는 마음에 한 마디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입안에서만 맴돌 뿐 그 말을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그 말을 했다가 되려 누님의 화를 북돋울까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부궁주님." "됐어. 일어나. 사월(死月), 너도 잠시 남아서 적월을 도와 작삼 동생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도록 해라. 나와 나머지 월녀궁도들은 사안이 급한 관계로 먼저 환궁한다." "예, 예? 저, 저까지요? 부궁주님, 저 대신에 은월(銀月)을 남기면 안될까요? 은월이야말로 남고 싶어하는 눈치가 역력한데, 어째서……?" '야, 나도 너 꼴 보기 싫어. 웬만하면 월녀궁으로 가서 영영 오지 말아라.' "이것이! 사월! 넌 구명지은(救命之恩)도 모른단 말이냐! 너보다 적월이 백 배는 낫구나. 사월, 넌 환궁하면 백일 지하 독방 면벽수련을 하도록 해라. 알겠느냐?" "……예, 알, 알겠습니다. 부궁주님." 힘없이 대답하는 사월의 목소리를 들으니 힘이 불끈 솟아올랐다. 역시 냉월화 누님은 내 편이라니까. "남궁현 공자, 제갈혜 소저가 일어나면 소저가 궁을 도와주겠다고 한 말을 궁주님께 그대로 전하겠다고 알려주세요. 여기서 그만 헤어져야 할 듯 싶네요. 작삼 동생." "네, 누님." "아쉽지만, 나 먼저 가도록 할게. 대신 적월과 사월이 남아서 네가 일어나기 전까지 간호를 해줄 거야. 다음에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고." "그럼요. 교옥정 누님한테도 안부 좀 전해 주세요." "물론이지. 여부가 있겠어? 어서 완쾌하라고. 잘 있어. 동생." "네, 누님도 만수무강하시고 옥체 보존하세요." "호호호호! 옥체까지야 뭐 내가 한 몸매 하긴 하지. 역시 작삼 동생 보는 눈이 있단 말이야. 꼭 머잖아 다시 보게 될 거야. 얘들아 가자." 휘리리릭 펄럭 펄럭.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와 월녀궁도들이 신법을 발휘해서 달려가는 옷깃 소리가 들려 왔다. 다른 사람의 발자국 소리도 들렸는데, 아마 곽철 대협과 남궁현 녀석 같았다. "작삼 점소이, 나도 가보겠소. 이 일을 먼저 유 사부님께 전해 드려야 할 듯 싶소이다. 그럼 이만." "네, 안녕히 가세요 곽철 대협." 그의 발자국 소리에 사박거리며 뒤를 따르는 소리도 들려 왔다. 동시에 머리를 울리는 그녀의 전음입밀(傳音入密)? '몸조심해. 다음에 볼 때는 꼭 곽철 대협의 안부인이라고 불러 줘. 알았지?' 마화(魔花) 적미호(赤美狐)다운 소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한 가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다. 곽철 대협이 속한 종남파(終南派)가 얼마나 정사 대립에 대해서 민감하게 구는 문파인지 아직 잘 모르는 듯 싶었다. 언제나 공명정대하면서 정파의 선봉에서 검광을 날린다고 하는 종남파가 과연 마화(魔花)라고까지 불리는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지 조금은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아마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 만난 무림인들 중에서 가장 나와 유사점이 돋보이는 재미있는 아가씨였는데 말이다. 조금 야시시한 기억도 떠오르고, 후후후. 아무렴 꼬리가 아홉 개인 영악한 구미호니까 어련히 알아서 잘 할 것이었다. "야, 감히 혈해진경을 꿀꺽하고 넘어가려고 들다니! 정녕 뻔뻔스럽기 그지없구나! 너한테 빙의되어 있던 그 귀신 영감이 너한테 은혜를 입었느니 하는 말만 안 했다면 니 팔 하나는 잘랐을 거다. 그냥 조용히 넘어가 주는 걸로 너와의 은원관계를 청산하도록 하겠다. 다음에 볼 때는 좀 고분고분하게 굴어. 알았어?" '어쭈, 이게 사람들 다 갔다고 시비 거네.' "싫다면? 싫다면 어쩔 거요?" "……." "왜 대답이 없소?" "휴우, 일어날 힘도 없는 녀석을 상대로 검을 뽑는 것은 소인배의 일이지. 난 일취월장(日就月將) 남궁세가(南宮世家)의 소가주다. 너 따위 일개 점소이 따위는 애초부터 거들떠볼 이유가……." 챙! "남궁현 공자, 거기서 한 마디만 더 입을 열면 가만 안 있겠어요!" "후후, 소저 실력으로 감히 나와 상대가 되겠소?" "야! 남궁세가(南宮世家)면 월녀궁(月女宮)은 눈에 안차냐? 정말 이젠 별것들이 다 기어오르네. 야, 한 판 붙자." 의외로 지하독방 면벽수련 백일 처분에 기죽어 있을 줄 알았던 사월이 독기가 쌓였는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월녀궁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무슨 추태를 부렸는지 실감한 듯한 남궁현이 잠시 침묵을 했다. "쳇, 사파(邪派)따위 두렵지 않소. 그러나, 여기까지 해 둡시다. 잘들 계시오." 월녀궁의 무게 때문인지 제갈혜를 안은 무게 때문인지 그의 발걸음이 조금 무겁게 들렸다. 그는 곧 신법을 발휘해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어쨌든 끝까지 맘에 안 드는 놈이다. 웬만하면 두 번 다시 안 봤으면 싶은 인간이다. 수많은 무림인들이 혈해진경(血海眞經)을 놓고 치열하게 혈투(血鬪)와 암수(暗數)를 날렸던 풍악산(風岳山)은 이제 적막에 빠져들었다. 어떠한 경치일지는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귓가에 쟁쟁하던 창검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이 자리에는 나와 적월, 그리고 사월만이…… 어라? 그러고 보니 종리연(鐘理戀)이 남아 있잖아! 이런 빌어먹을 인간들, 자기들만 챙기고 남이사 기절해 있건 말건 신경도 안 쓴다 이거야? 아으, 짜증나. 그럼, 눈도 안 보이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내가 챙기리?! "사월 소저, 거기 혹시 종리연 소저 있나요?" "그래, 있다. 있어. 잘 되었다. 저거 저대로 놔두고 가면 늑대나 다른 산짐승 밥이 되기 딱 좋겠네. 그런데, 그건 왜?" 이걸 얘기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말해 봤자 욕만 먹을 게 자명한데……. "저기 그녀는 소저께서 업고 오시면 안 될까요?" "어, 안 돼. 난 분명 부궁주님께 네 간호에 대한 명만 받았지. 저 년에 대한 것은 전혀 들은 바 없거든. 너도 그냥 잊어. 보아하니 사이도 별로 안 좋아 보이던데, 잘 되었잖아. 이 참에 니 정적 하나가 사라지게 되는 거 아니야?" 그렇기야 하지. 그래도 배를 뚫리던 그 장면이 자꾸 생각이 나서, 불쌍해서 그런다. 잠깐, 크크크크 옳거니 그런 수가 있었군. "그럼, 적월 소저께서 저 분을 업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공자님의 말씀이라면 당연히 따라야지요." 역시 적월, 맘에 든다. "그리고, 사월 소저가 저를 업어 주시면……." "시꾸랏! 내가 저년 업을 테니 더는 말하지 마. 앙!" 역시 나를 업는 것보다는 종리연 쪽을 택하는군. 그럼 그렇지. 이젠 이대로 망아루(忘我樓)로 복귀할 일만 남았다. 종리연은 며칠 쉬게 해줬다가 깨어나면 혈해진경 지도 조각 값에 치료비까지 두둑하게 쳐서 받아 내고 말 테다. 이제 무사 귀환인 것인가? 이 하루 동안 지하 석실에서의 경험은 망아루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곳이었는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아무리 냉혈마녀 같은 주령령(周領領)에 말리는 시누이 같은 염장질쟁이 포연강이 있는 곳이지만, 나름대로 정이 들어 버린 모양이다. 홍 영감 이랑은 대화를 나눈 적도 거의 없지만, 마지막 헤어질 때 나눈 짤막한 대화로 인해 호감도가 부쩍 올라가 있었다. 일수필살 단수연과 살막 소막주 조진후는 잘 있을까? 망아루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정말 기뻤다. 이런 지긋지긋한 피 냄새가 진동하는 곳보다는…… 그 곳이 훨 나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소방(蘇芳),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일로 인해 난 하나뿐인 친구를 잃어 버렸다. 그것은 내게는 너무나 큰 상실감을 가져다 준다. 왠지 가슴 아린 한숨이 나온다. 그는 잘 있는 걸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3-09 09:26:52 고친날 2005-09-13 16:28:36 읽은수 9076 [ 11 K ] 제목 점소이 작삼(11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적월 소저의 등에 업혀 한참을 내려갔다. 보통 걸음으로 내려가도 풍악산(風岳山) 정상에서 구룡봉(九龍峰)까지 한 시진 정도면 갈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구룡봉에서 망아루까지는 두 시진이나 걸리려나? 그럼 무림인의 경공으로는 풍악산(風岳山)정상에서 망아루(忘我樓)까지 대략 한 시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날 업고 가는 적월이 워낙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기에 뒤따르는 사월마저도 고만고만한 속도를 유지하며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 몸이 정상이 아니란 것을 고려해도 그녀의 발걸음은 너무나도 조심스러워서 내가 다 무안할 지경이었다. "적, 적월 소저, 미안해요. 너무 민폐를 끼치고 마네요." "아니에요. 작삼 공자님,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공자님이 한 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지요. 이대로 월녀궁으로 환궁했다면 언제 다시 오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라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아 드리고 싶었어요." "……." 다소곳이 응대해 주는 그녀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까지 편안해졌다. 자의든 타의든 적월 소저를 구해 낸 것은 백 번 만 번 고쳐 생각해도 잘 한 일 같다. 사월? 그냥 덤으로 구했다고 생각하자. 아니 차라리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으리라.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뒷골 땡기는 인간이니 말이다. 냉월화(冷月花) 누님이 있을 때는 몰라도 그녀가 없는 지금 내게는 그녀를 통제할 구체적인 수단이 없었던 것이었다. 지금도 나랑 적월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자 뒤에서 뭐가 그리 불만인지 궁시렁궁시렁 거리는 소리를 흘려 왔다. '냉월화 누님도 참 생각하는 게 고리타분하다니까. 날 간호해 줄 양이면, 나랑 친한 은월 소저를 남겨야지. 나한테 독을 뿜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 저년을 남겨? 그냥 끌고 가서 백일 지하 독방 면벽수련만 시켜 줘도 충분히 좋을 뻔했는데…….' 적월 소저의 따뜻한 등에 편안하게 업혀서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 덧 스르르륵 깊은 수면에 빠져들고 말았다. "야, 바보야 일어나! 어서 눈 떠!" "쉿, 사월, 좀 조용히 해. 좀 더 주무시게 놔둬." "이런 곳에서 잠을 자게 내버려 둬? 너랑 나도 여기서 밤을 지새게 되는데, 좋아? 좋냐고!" "그, 그게 아니라…… 어, 작삼 공자님, 깨, 깨 버리셨군요. 죄송해요." 사월이 시끄럽게 떠드는 통에 슬며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적월이 그녀의 모포를 꺼내서 날 덮어 주었는지 여인의 향내가 은은하게 나는 따뜻한 모포 속에서 한참 잠을 자고 있었던 찰나였다. '이제 눈이 보이네. 휴우, 다행이다. 안 보이면 어쩌나 했는데, 어, 어라?" 잠결에 눈을 감았던 나는 뭔가 심각한 위화감을 느끼고서 다시 눈을 떠 버렸다. 분명 낯익은 정경이긴 했는데, 뭔가가 매우 어색했다. 이유가 뭔지 몰라서 한참을 갸웃 갸웃거리다가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적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적월 소저, 한 가지 물어 봐도 되겠어요?" "네, 네 공자님, 그야 당연하지요. 뭐, 뭐가 궁금하세요?"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곳이 낯이 익기는 한데, 생각이 안 나서 그러오. 혹시 소저가 아는 곳이오?" "……." 그녀는 웬일인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이유를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다 성질 급한 사월 덕택이었다. "너 바보냐? 여기가 어디긴 어디야? 니가 점소이로 있던 망아루지. 현실을 직시해. 외면하려 들지마!" "사, 사월." "너도 저 바보를 업고 왔다가 바보 병이 옮기라도 했니? 왜 말을 못하는데?" "……." 망아루(忘我樓)! 나는 그녀의 말에 반사적으로 모포를 제치며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분명 망아루가 서 있었을 자리에는 새하얀 잿가루만이 산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인적이 없는 것은 둘째치고 주루 자체가 불에 타 버린 흔적만 남았을 뿐 기둥뿌리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뒷동산의 봉분들까지 훤하게 보이는 이상한 정경을 보고 잠시 착란을 일으켰던 모양이다. '그, 그렇다면, 홍, 홍 영감님이…….' 뇌리를 스쳐 가는 충격과 함께 두통을 동반한 현기증이 일시에 몰려 간신히 보이던 시야가 다시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다. 무게 중심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것을 누군가가 덥석 안아 와서 그대로 버틸 수 있었다. 물론 날 안아 준 가냘픈 몸매의 주인은 적월(赤月)이었다. 그녀의 봉긋한 가슴이 내 안면을 덮어 줬으나,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가슴팍이 젖어 버릴 정도로 한참 동안을 소리 없이 울어야 했다. "사내 녀석이 이까짓 일로 흉하게 질질 짜기는! 눈으로 확인된 것이 아니면 맘대로 단정짓는 것 아니야." "하, 하지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중요한 사정이 있을지 모르는 거잖아. 일단 서안(西安) 시내로 내려가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게 중요해. 여기 계속 있어 봤자 산바람에 떨기 밖에 더해? 가자고! 적월, 그만 업고 가자구." "……." 적월은 내 슬픔이 자기 슬픔 인양 말없이 내 등을 토닥여 주다가 슬며시 등을 돌려서 날 업었다. 날씨가 차다는 것을 그녀 또한 통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 건강이 걱정되어 사월(死月)의 모멸 찬 말에 고분고분 따르고 있는 것이리라. 적월의 따뜻한 등에 업혀 있는데도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숨이 막혀 왔다. 어제 새벽까지만 해도 날 전송해 주던 홍 영감이 죽었다는 것은 날 보내던 그 순간이 마지막 회광반조(回光返照)의 순간이었다는 말이 된다. 어쩐지 평소에는 그렇게 병색이 완연하던 영감쟁이가 멀쩡한 모습으로 한 마디 해주더니 결국 내가 떠난 순간 부로 이승과 하직을 한 모양이었다. 그의 병세 때문에 남아 있었다고 하는 주령령(周鈴鈴)과 포연강(砲緣强)으로서는 더 이상 그 주루에 남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아, 거 참 그만 좀 훌쩍거려라. 니가 무슨 생각으로 질질 짜는지 다 보인다. 다 보여. 이 말은 안 해주려고 했는데, 새로 생긴 봉분이 있었어? 망아루 사람들이 다른 무림인들에게 살해당했다면, 그들은 아마 망아루 인간들을 봉분 곁에 그대로 묻어서 사건을 무마시켜 버렸을 거야. 봉분이 있는 곳에 봉분을 더 세워 본들 누가 눈치 채기나 하겠어? 내가 기억력이 좀 좋아서 하는 말인데, 새로 생긴 봉분은 보이지 않았어. 그 말은 그들의 일신 자체는 무사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만 좀 조용히 해." 그러고 보니 홍 영감이 묻혀 있을지도 모를 새 봉분이 없었다는 말도 된다. 사월이 망아루 인간들의 무위(武威)를 몰라서 하는 소리 기는 하지만, 일리는 있었다. 현재로써 확실히 아는 사실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었다. '좋아, 일단은 산아래 마을 객잔이나 주루에서 뭔가 들리는 소문이 있는가 알아봐야 해. 사월도 괜찮은 말을 할 때가 다 있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왜 날 미워하는지 이유를 아직도 모르네. 정말 나도 궁금, 궁금하…….' 이런저런 생각을 연이어 떠올리며 조금 안심한 나는 또 그대로 적월의 등에 기댄 채로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녀의 등에 업혀 있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마치 소방과 같이 있을 때처럼 말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잠이 들었을까?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나를 깨운 것은 역시 다름 아닌 사월이었다. 단지 이번에는 적월도 한 몫 거들었고,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종리연이었다. 그들의 합작품 때문에 아마 객잔에 투숙하고 있던 인간들이 다 깼을 거다. "끄아아악! 중원 계집애들은 왜 이리 싸가지가 없어!" "사, 사월, 좀 조용히 해." "지금 조용히 할 때야! 이 싸가지 없는 년! 감히 나를 우롱했어. 잡히기만 해봐! 아주 진을 흠뻑 빼 버릴 테다!" "그러니까, 조용히 하라니깐. 공자님 잠 깨잖아. 차라리 나가서 떠들어." "아니, 어쩜 너는 화도 안나? 산짐승한테 먹혀 버릴 위기에 있는 걸 내가 몸소 업어다가 산아래 객실에까지 고이 모셔다 놨더니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없이 튀어? 이게 어디 인간이 할 짓이냐!" "나라고 화가 안 나겠어! 단지 여기는 우리 은공이 잠들어 있는 객실이잖아. 화 낼 거면 나가서 내라니깐!" 역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사월이었지만, 조용조용 맞받아 치던 적월도 기어이는 억장이 터졌는지 같이 화를 내었다. 덕분에 나는 오래 전에 잠을 깰 수 있었다. 그냥 눈뜨는 게 귀찮아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을 따름이었다. 다른 말들은 다 이해하겠는데, 종리연을 잡으면 진을 흠뻑 빼 준다는 소리는 또 뭔지 아리송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월녀궁(月女宮) 반경 오십 여장 안에 거주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아마도 귀마개를 필수품으로 애용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둘만 있어도 이렇게 시끄러운데, 수백 명의 월녀궁 여인들이 몰려 있는 월녀궁은 얼마나 소란스럽겠는가? 누가 한 마디 빌미 거리를 제공하기만 하면, 여기 저기서 우뢰와 같은 수다가 터져 나올 거다. 모르긴 몰라도 냉월화 누님도 한 몫 거들며 떠들어 되면 그 소음이 장난이 아닐 것 같다. 만약 월녀궁이 중원 안에 비밀 분타를 세우기라도 할라치면 더 이상 비밀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을 거다. 저렇게 은연중에 떠들어대면서 자기들 내부 사정을 스스로 바깥에 다 까발려 버릴 테니 말이다. 교옥정 누님을 보게 되면 건의 좀 해야겠다. 비밀 분타를 세울 때는 이중 삼중으로 방음 설계를 엄중히 한 건물을 짓고 나서 옮기라고 말이다. 슬그머니 샛눈을 떠보니 덧대어진 창호지문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아침 햇살 때문에 눈이 부셔왔다. 시력이 회복된 것이었다. 이불 속에 있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까딱거려 보니 평상시처럼 잘 움직였다. 거의 회복이 된 모양이었다. 방안을 둘러보니 망아루의 내 방보다 더 큰 방 안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사인용 객실로 잡았던 모양이다. 이층 짜리 침대가 방 끝 모서리에 하나씩 세워져 있었고, 방 중앙 탁자를 두고서 적월과 사월이 설전을 벌리고 있었다. 적월, 조용한 여인 인줄 알았더니 불만 붙여주면 활활 타오를 소지가 다분해 보인다. 꼬르르르륵 꼬르륵 "헛, 공자님, 깨셨어요?" 하여간 이 놈의 배가 주책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좀 참을 줄 알아야지. "적월 소저, 제가 누운 지 얼마나 지났나요?" "거의 나흘 간을 내리 주무셨어요. 아, 앉아 계세요. 제가 아침 소반을 가져올게요." '나흘? 무척 오래도 잠들어 있었군. 그러니까 배고파서 환장할 법도 하지.' "괜, 괜찮아요. 다 회복됐어요. 정 식사 할거라면 같이 내려가서 먹지요. 그런데, 종리연 소저는 말도 없이 사라졌나 봐요?" "그래! 그 싸가지 없는 년, 고맙다는 말 한 마다하지 않고 야반 도주를 해 버렸어! 잡히기만 해봐. 그럼 내가 확!" "확? 어쩔 건데요?" "흥, 알 것 없어." 팔짱을 낀 채 도리질을 하는 사월의 모습을 보니 순간적으로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그만 머쓱해져서 시선을 내 봇짐으로 돌렸는데, 여기저기 삐죽 튀어나온 그림 서예 족자들에 고정이 되었다. 순간 덜컥 하는 게 있어서 숫자를 세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어! 족, 족자가 세, 세 개나 모자라잖아! 종, 종리연! 이 빌어먹을 계집애 같으니! 잡, 잡히기만 해봐라! 그냥 확!" "확? 어쩌려고?" "쳇, 그런 게 있소. 젠장 안 그래도 금원보 받아 낼 게 있는데, 감히 내 액자를 세 개씩이나 빼 들고 나르다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빌어먹을 좀도둑 같으니!" "그러게 말이야. 내가 그 계집애 밤새도록 업고 풍악산 정상에서부터 내려온 걸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도망갈 때 가더라도 고마웠다는 서신 하나 남기기라도 했으면, 좀 좋아? 하여간 중원 애들 버르장머리가 너무 없어!" 꼬르르르륵 꼬르르르륵. 눈치 없이 배고프다고 시위를 벌이는 밥통 덕에 우리들의 한 바탕 소란은 거기서 매듭지어졌다. 뭐 액자 세 개가 아깝기는 하지만, 십여 개 중에서 달랑 세 개만 가져간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나름대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긴 했나 보다. '그래도 빚은 빚이다. 다음에 꼭 악착같이 받아 내고 말 테다.' "작삼 공자님, 그럼 우리 식사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요. 적월도 그만하고 내려가자." 더 눈치볼 것도 없이 이불을 걷어 내며 두 발로 일어선 나는 그들과 함께 일 층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통 손님이 많지 않은 한산할 아침치고는 식당 창가에는 대략 십 여명 안팎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복장도 가지각색인 것이 어중이떠중이들이 잠시 얘기 거리가 있어 두런두런 둘러앉은 것 같았다. 우리는 그들 반대편 쪽인 식당 안쪽 그늘 진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의심이 많은 월녀궁 여인들 특성상 중원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는 게 당연하기도 했다. 우리가 자리를 잡자 식당 창가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점소이가 알아보고 귀찮다는 듯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공자님, 뭘로 드시겠어요? 여기는 예전 망아루와는 달리 요리 가짓수가 꽤 많네요." "흠, 소저가 먹는 것과 같은 걸로 시켜 주시오." "그럼, 여기 소면 세 그릇 갖다 주세요." "무슨 소리! 이틀 동안 공복이었잖아. 아무거나 먹다간 배탈나. 여기 봐요. 점소이, 쟤는 희멀건 죽으로 갖다 줘요."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왠지 적월이 다정하게 구니까 사월이 역성을 부리는 것도 같았지만, 뭐 내가 다 회복한 이상 곧 헤어질 사람들이었다. 별로 정을 붙일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그냥 아침 한 끼 먹고 헤어지면 그만일 듯 싶은 그런 관계일 뿐일 것이라는 생각에 별 대꾸도 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점소이의 반응이었다. 날렵하게 주방으로 가서 주문을 하고는 다시 식당 창가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분명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고 있던 모양이었다. 혹시나 망아루(忘我樓)얘기가 나올까 싶어 귀를 쫑긋 세웠는데, 식당 안 모두가 입을 꽉 다물고 얘기에 집중해 준 턱에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까지 소리가 낭랑하게 잘 들려 왔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3-12 15:17:50 고친날 2005-09-13 18:45:24 읽은수 9091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11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창가 탁자 가운데 상석에는 웬 텁석부리 청의 무사가 거드름을 피우며 뜸을 드리고 있었다. 안달이 난 주변 사람들이 그를 재촉하고 있는 이상한 형국이었다. "거 이 사람 보게 말문을 열었으면 그 다음 얘기를 해줘야 할 것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내 속이 다 타 버리기 전에 말 좀 해보게." "그래, 그래 어서 말 좀 해보시오." "어허, 이 급보를 전하기 위해 새벽에 눈을 비비며 무림맹 서안 분타에서 한 달음에 뛰쳐나온 몸이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또 뭐 있더라?" 그가 말을 질질 끌기 무섭게 주변에 둘러 있던 어중이떠중이들은 즉시 점소이에게 죽엽청에 연자탕, 오리구이, 마파두부 등 온갖 산해 진미 요리를 주문하기에 바빴다. 어이없게도 그들이 주문한 요리들 때문에 내가 앉아 있는 쪽 아침 식사는 완전 뒷전이 되어 버렸다. 점소이는 아예 깜빡했는지 사과 한 마디 없었으나, 나로서는 오히려 더 반가운 일이었다. 요리가 아직 안 나왔다는 핑계로 식당에 앉아 있을 명분이 충분해졌으니 말이다. 어중이떠중이 중에 섞여 있던 예쁘장한 여인이 자청해서 술까지 따라 주자 흥이 오른 청의 무사는 죽엽청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켜 버렸다. 더불어 안주로 이것저것 집어서 쓸어 넣고 있는 중이었다. 수많은 눈짓들이 여인에게 쏟아져 내렸다. 한쪽 눈을 찡긋거려 간단하게 대답을 한 그녀는 가증스럽게 청의 무사 품속으로 풀썩 안기며 아양을 떨었다. "후후, 역시 서안 분타에서 한 달음에 예까지 달려온 보람이 있구려." "아잉, 궁금해요. 어떻게 된 일인지 속 시원하게 말해 보세요. 멋있는 무림맹 아저씨." '무림맹?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왜 다 끝난 일을 가지고, 뒷북을 치려는 거야?' "흠, 어여쁜 소저께서 이리 안달하시니 말을 안 하고 더 버틸 이유가 없구려. 이제부터 세이경청(洗耳敬聽)해서 내 말을 잘 들어 보시오. 닷새 전에 무림맹 소맹주의 위신에 질린 악적이 스스로 혈해진경을 바친 일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오. 그 당시만 해도 그 악적이 무림맹의 위신에 겁을 먹고 알아서 기어 버린 줄 알았다오." "그럼, 그게 아니었단 말이에요?" "물론이오. 사흘 간에 걸쳐 일어난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지요. 하태후등의 절정급 고수들이 합류된 현무조 이백 여명 무사들과 무림맹이 있는 안휘성으로 다급히 신형을 날리던 소맹주 일행은 첫 날밤이 가기도 전에 정체불명의 무리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오." "에이, 정파 십성(正派 十聖) 중에서 두 명이나 있었는데, 쉽게 당했을려구요. 보나마나 습격한 자객들이 다 죽었겠지요." "그게 그렇지 않다오. 아무데서나 나타난 자객들이 아니었소. 그들은 구파일방(九派一幇)과 오대세가(五大世家)가 총 망라된 정예들이었다오. 심지어는 그들 중에 십성급 인물까지 섞여 있었다면 말 다한 것 아니겠소? 어떻게 되었겠소?" "설, 설마?" "설마가 아니오. 결과적으로 현무조는 거의 괴멸 당해 무림맹에서 그 이름이 사라져 버렸지요. 십성(十聖) 중 하나인 하태후가 한 팔이 잘려 외팔이 되어 버렸을 지경이니 실력이 떨어지는 다른 이들이야 오죽했겠소? 사흘째 되던 날 지칠 대로 지친 소맹주가 그나마 갖고 있던 혈해진경 중 도경과 권경을 성난 무리들 앞에 던져 버리고 자기네들끼리 진경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틈을 타서야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오. 잠도 자지 못하고 경공을 발휘한 끝에 나흘째 저녁 무렵에야 살아서 무림맹에 도착했소. 도착한 인원이 열 명도 채 넘지 않는다는 사실에 노발대발한 무림맹주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향해 대대적인 선전포고를 할 생각까지 했다고 하더이다." "그, 그렇게 되면 정파는 내부 분열로 완전 붕괴되겠군요. 사파와 세외 무림인들이 좋아할 일이겠네요." "마침 소맹주가 맹주를 말리면서 대신 다른 부탁을 했다고 하더이다. 뭐 그 때문에 중원 전체에 전서구(傳書鳩)가 날아가게 되었고, 특별히 일이 발생한 서안 분타 쪽에는 비둘기 대신 전서응(傳書凝)을 날려서 여기까지 하루만에 날아오게 한 것이오." "무슨 일인데요?" "이미 구파일방, 오대세가와 무림맹 사이간에 깊게 파여버린 골은 되돌이킬 수가 없게 되어 버렸으나, 정파의 근간이 유지되어야 하는 관계로 무림맹주께서는 그 일에 대해서 함구하기로 하셨소. 단지 이번 일에 원흉이 된 수라사살에 대해서 현상금 금원보 한 상자를 내거셨다오." "오오! 그, 그렇게 까지나!" "금원보 한 상자!" "오오, 악적 한 명에 붙은 것이 금원보 한 상자라니! 누구든 잡으면 팔자 고치는 것은 여반장이로군!" 여기저기서 유례 없는 현상금의 무게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그래 봤자 나보다 더 놀랬겠는가? 왠지 얘기 초반에 나온 악적이 현현자 영감을 지칭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은근히 떨려 왔다. 설마, 설마 내 얘기는 아니겠지 하고 가슴 졸일 무렵이었다. "왜, 왜 그런 것이지요?" 옆에서 술시중을 자처한 여인이 팔짱을 껴 오며 질문을 던지자 텁석부리 청의 무사는 뭐가 그리 좋은지 해벌레 웃으며 대답이 막힘 없이 술술술 나왔다. 어이, 보는 사람들 시선을 생각해서 웬만하면 침은 흘리지 말라고. "지난 일들을 잘 되짚어 보면 수라사살(修羅四殺)의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로 일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소. 그는 혈해진경(血解眞經)으로 풍악산에 몰린 무림인들의 시선이 무림맹에 쏠리게 만들었소. 그로 인해 수라삼살이 무사히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진경 중에서 가장 위험도가 높을 독경(毒經)을 혈살(血殺)에게 넌지시 넘겨줬단 말이오. 반대로 혈해진경 대부분을 움켜 쥔 무림맹은 오히려 먹이 감이 되어 난자 당해 버린 것이오. 결국 혈해진경이라는 미끼로 정파 내부를 불신으로 가득 차게끔 만들어 버렸소. 뿐만 아니라 각 파의 다음 대를 이끌어 갈 정예 후기지수들이 이번 사건으로 해서 상당수 희생되었다고 하더이다. 수년간 수라삼살(修羅三殺)이 일으켰던 참살 인원에 비교도 안될 뿐만 아니라 희생당한 이들이 지녔을 비중 또한 비교가 어려울 지경이오. 이 모든 참사가 새롭게 수라사살(修羅四殺)이 된 차도살(借刀殺), 이 빌어먹을 악적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겠소?" 허걱, 그의 말을 들어보니 그 수라사살이 누군지 분명하게 느껴졌다. 다름이 아니라 내 몸뚱이를 잠시 강탈해서 혈해진경을 뿌린 현현자 영감탱을 이르는 소리인 것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다른 인간들은 현현자 영감의 사념체에 대해서 알 리가 없으니 당연히 나를 일컫는 말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말은 똑바로 해야만 할 것이다. 현현자 영감탱이 잔머리를 굴린 것은 알겠는데, 서로 칼부림한 게 어디 내 탓이냐고? 엄연히 자기네들끼리 칼부림하고 자기네들끼리 피 뿌린 것이었다. 그런데, 왜 화살을 나에게 돌리는가? 오히려 난 피눈물을 삼키며 혈해진경을 넘겨줘 버려서 배가 아플 지경인데, 적반하장(賊反賀掌)도 유분수지. 고맙다고 감지덕지는 못할 망정 감히 내 핑계를 대고 내게 현상금을 걸어? 그 현상금의 절반만 나한테 넘겨도 내 발로 무림맹을 찾아가겠다. 어휴. 더군다나 멋있고 멋있는 수많은 호칭 중에 하필이면 차도살(借刀殺)이라는 어정쩡한 호칭을 붙여! "그런 나쁜 놈이 있나? 그나저나 상금이 엄청나네요. 현상금이 붙었으니 그의 인상착의 정도는 알 수 있겠지요?" "그의 인상착의는 여기 방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오. 잠시만 기다리시오." 청의 무사가 등에 짊어진 봇짐을 뒤지며 현상금 수배서를 꺼내들고 있었다. 잔뜩 겁을 먹은 나는 어깨를 움츠러뜨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가만히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사월이 눈치 없게 날 콕 찌르며 자기 딴에는 조용 조용히 입을 연다고 했던 모양이었다. "야 너더러 차도살(借刀殺)이란다. 어떠냐? 수라사살(修羅四殺)로 출세한 기분이?" 그 순간이었다. 챙 챙 챙 차창 챙 챙! 식당 안에 있던 어중이떠중이 무림인들이 일시에 병장기를 뽑아들며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얘기를 듣는다고 모두 침묵하고 있었던 데다가 내가기공을 키운 무림인들이었기에 사월의 말을 모조리 다 똑똑히 들어 버린 것이었다. '젠장, 너 날 간호하러 온 거 아니지? 나 암살하러 온 거지!' "이 악적! 네가 수라사살, 차도살이더냐? 내 칼을 받아라!" "으헤헤헤! 잘 걸렸다. 차도살!" "비켜, 비켜 저건 내 꺼야! 내가 찍었다고!" "호호호호! 웃기지 마. 먼저 목을 베는 사람이 현상금을 먹는 거야. 왜 이러셔!" 식당 안은 순식간에 시장 바닥이 따로 없을 지경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날 치러 오는 놈들은 다른 녀석들의 견제를 받아 서로 치고 박고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황당해진 듯 무안스러워 하는 사월(死月)을 째려본 적월(赤月)은 검을 뽑아 들고 내 앞을 호위하듯 막아섰다. 어이가 없었다. 사월과 적월의 실력이 중수 이상인 것은 알겠는데, 어중이떠중이 무림인이라 해도 십여 명 안팎에 이르는 저들을 상대로 얼마나 버텨 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자, 잠시만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지금부터 수라사살의 인상착의를 불러들이겠소." 청의 무사가 현상금 수배서를 들고 외치려 하자 일단 소란은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병장기를 든 손과 금원보 한 상자라는 말에 독이 오른 시선들은 여차하면 객잔을 뒤엎을 기세로 대치한 상태였다. "수라사살(修羅四殺) 차도살(借刀殺), 칠 척 장신에 구레나룻을 기른 험상궂은 안면임. 두 눈에서는 사기와 음기가 가득 차 넘치며 입을 열 때마다 사악한 음모로 가득찬 말을 내뱉으니 귀를 막고 싸울 것. 그에게 간살당한 여인이 수십 명을 헤아릴 정도로 악랄한 색마이니 여인들은 특히 주의를 요망함. 엄청난 내공과 무공을 소유하고 있으니 필히 무리를 지어서 공격하기 바람. 무림맹 소맹주." 그의 입에서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어질 때마다 나의 모습과 머릿속으로 비교를 하고 있을 법하던 무림인들의 손과 눈에서는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흉흉하기만 하던 살기도 어느 덧 걷혀 버린 상태였다. "뭐? 칠, 칠척 장신?" "구레나룻을 기른 험상궂은 안면?" "엄청난 내공과 무공?" "에이, 이런 데 그 놈이 아직도 쳐 박혀 있을 리가 없지. 내뺐어도 옛날에 내 뺐지. 에구구 헛물 켰구먼." 하나 둘씩 약속이라도 한 듯이 병장기를 갈무리하며 자기들 자리에 털썩 털썩 주저앉았다. 어떤 놈이 김이 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런 비렁뱅이 녀석이 차도살이면 난 무림맹 맹주겠다." "누가 아니래? 차라리 내가 마황맹 맹주라고 하는 편이 더 신빙성이 있겠다." "호호호, 당신이 마황맹 맹주면 난 월녀궁 궁주겠네요." 월녀궁 궁주가 화자에 오르자 발끈하며 일어서려 했던 사월을 적월이 날렵하게 제지했다. 한참동안 씩씩거린 그녀는 잠자코 점소이가 가져온 소면에 머리를 박고 음식에 화풀이를 하듯 쩝쩝 짭짭거리는 소리를 내며 완연하게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적월은 적월대로 가져온 소면에는 시선도 두지 않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월이 불안했는지 감시하듯 그녀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가슴을 쓰러 내린 나는 죽을 퍼먹기는 했으나, 입으로 떠먹는지 코로 들이키는지 구분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사월, 저거 저 성질 안 죽이면 언젠가 한 번 크게 낭패를 볼 거다. 여기가 니네 월녀궁 안마당이냐? 적월 반만 정신 차리고 살아 봐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3-18 13:21:51 고친날 2005-09-14 10:42:24 읽은수 9001 [ 13 K ] 제목 점소이 작삼(11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우리 쪽이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급하게 일어난 무림인들은 수배서 대로의 수라사살(修羅四殺)을 찾아서 길을 나섰다. 무공이 강하다는 부분이 걸렸는지 눈이 맞은 상대들과 둘 셋 옹기종기 모여서 나가 버렸다. 내 인상 착의를 소맹주가 그렇게 써 놓은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번 사태 전가를 위해 차도살(借刀殺)이라는 이상한 호칭까지 붙여 줬다는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하필이면 나냐고? "중원 애들이랑 부대끼며 사니까 미칠 것 같아. 역시 월녀궁 사람은 월녀궁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야 해." 화풀이라도 하듯 소면 국물을 후루룩 들이키며 대놓고 투덜거리는 사월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는 잘 알 것 같았다. 어차피 이 애들을 구해 낸 기억이란 희미하게 떠오를 꿈일 뿐이다. 별로 미련조차 남지도 않는다. 사월이란 존재가 귀찮은 것은 물론이려니와 나를 은공, 은공이라며 떠받들어 모시는 적월 또한 부담스럽기만 하다. 난 내가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나 그릇이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몸에 이젠 아무런 이상도 없는 듯 하니 이 곳에 더 머무를 이유들이 없는 것 잘 압니다. 이제 서로 갈 길을 가야겠군요. 사월, 그게 좋겠지요?" "물, 물론이지! 난 하루바삐 환궁해야 해. 이 따위 중원의 썩은 공기 속에서 숨쉬고 살려니까 미칠 것 같아. 그럼 가도 되는 거야?" 중원의 썩은 공기? 그럼 나를 포함한 중원 사람들은 다 썩었다 이거야? 정말 사상이 불순하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구만, 같은 공기를 나눠 마신다는 것 자체도 짜증이 나려고 한다. "누가 언제 잡기라도 했나? 오해는 마쇼. 피차 여기서 찢어지는 게 마음 편하다는 것 잘 알고 있다오. 난 아직 다 못 먹었으니 어여들 가 보시오." "좋아. 니 지저분한 상판 안 보게 될 것을 생각하니 벌써 속이 다 후련하다. 적월 어서 가자." 그녀는 끝까지 아니꼽게도 인사 한 번 남기지 않고 휭 하니 나가 버렸다. 우물쭈물 남아 버린 적월만 어색하게 되었다. "은공,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제 기침하신 지 한 시진도 되지 않았는데, 이대로 헤어져도 아무 일 없으시겠어요?" "……." 솔직히 적월(赤月)은 내게 있어 독과도 같은 존재다. 인생 맨 밑바닥에서 발버둥치는 나를 은공, 은공하며 높여 주는 것이 얼마나 부담 가는 일인지 그녀는 모를 거다. 진심으로 걱정스럽다는 듯 침중한 눈빛을 말똥말똥 흘리는 적월을 보니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소방의 귀여운 안면이 떠올라 버렸다. 그래서인가? 나도 모르게 피식 자조 어린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입술 한 쪽 끝이 기이하게 말려 오르는 어색한 미소를 그만 그녀에게 보이고 말았다. "은, 은공?"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든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제대로 웃어 보였다. "아, 다른 일을 좀 떠올리느라고요. 죄송해요. 그 동안 감사했어요. 이젠 서로 갈 길을 가야지요." "저기…… 정말 제가 이대로 떠나가기를 바라세요?" "후훗, 이 더러운 중원 공기 속에서 살고 싶다는 거요? 사월은 솔직히 근본이 더러워서 상관없지만, 당신같이 깨끗한 사람은 월녀궁의 때묻지 않은 공기 속에서 살아야 해요. 이곳은 온통 탐욕과 배신, 슬픔과 고통만이 남아 있는 곳이니까요. 그런 꼴 당하지 않으려면 이 곳을 떠나는 게 상책이지요. 끙, 내가 무슨 헛소리를 이렇게 하는 거지? 크크크 그럼 저는 위로 올라가 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 탁탁탁탁. 그녀가 가건 말건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객실로 올라와 버렸다. 왠지 적월의 마지막 뒷모습을 머릿속에 남기기는 싫었다. 그녀가 제 이의 소방으로 기억되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소방, 그의 배신이 더욱 아프게 와 닿는 것은 그만큼 나 자신도 모르게 그를 믿고 의지했기 때문이리라. 다시는, 다시는 그런 인연 따위 만들지 않을 거다.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며,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을 거다. 결국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혼자로서의 나일 테니 말이다. 왠지 싱숭생숭한 기분에 세수라도 하려고 욕실 문을 덜컥 열어보니 욕조에는 아직 채 온기가 가시지 않은 물이 한가득 차 있었다. 적월의 따뜻하고 사려 깊은 배려에 가슴이 조금 울렁거려 왔다. 목욕을 마치고 새 마의로 옷을 갈아입은 후 밖으로 나서니 눈부신 햇살이 내 시야를 어지럽혔다. 어느 덧 해가 중천에 떠버린 것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목욕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아마도 따뜻한 온정을 느낄 마지막 순간이라고 여겼기 때문일까? 한참 동안 사그라져 가는 마지막 온기까지 음미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망아루(忘我樓)에서 나오면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앞마당과 아득한 산골짜기만을 봐 왔던 나에게 사람들이 북적북적 거리는 서안(西案) 시내 저자 거리는 왠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겨우 반 년 정도의 시간이었는데, 그 새 망아루에 적응되어 버린 모양이다. 쓴웃음이 나온다. 어디로 발걸음을 옮길까 한참 고민하며 두리번거리던 찰나였다. 느닷없이 내 손을 잡아끄는 부드러운 손이 있어 얼결에 엉거주춤 으슥한 골목 안까지 따라가고 말았다. "누, 누구요?" "쉿, 조용해요." 웬 여인네가? 라는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입술을 뺏기고 말았다. 부드러운 혀 놀림이 내 혀를 휘감아 돌았고, 뭉클거리는 가슴은 날 벽에다 몰아붙인 채 숨도 못 쉴 정도로 압박해 왔다. 더구나 요사스럽기까지 한 그녀의 손은 내 하체를 쓸어 내리고 있었다. 알싸한 사향 냄새는 더욱 나를 흥분 시켰다. 뭐 이유는 모르지만, 나야 넝쿨이 호박 째 굴러 온 꼴이라 날름 양손으로 그녀의 둔부를 꽉 움켜잡고는 은근슬쩍 끌어당기며 주물럭거렸다. 찰싹! 눈앞에 불똥이 번쩍 튈 만큼 날카로운 손놀림에 아픔보다는 갑자기 변해 버리는 그녀의 태도에 더 놀라고 말았다. '어, 어럽쇼? 자기가 먼저 달려들고서 왜 때리는 거야?' "아, 미, 미안해요. 저기 생각해 보니까요. 제가 깜빡 놓고 온 물건이 있어서 그런데, 이왕이면 인적이 없는 곳에서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자구요. 그렇지. 여기서 저 쪽 골목을 타고 죽 가면 한산한 소장강 강변 벌판이 나와요. 거기서 못 다한 부분을 마저 하기로 해요. 그럼 한 식경 후에 봐요." 빚쟁이한테 쫓기기라도 하듯 날렵하게 사라지는 여인의 모습을 곰곰이 되새겨 보니 아까 전에 주루 안에서 본 기억이 났다. 바로 무림맹 청의 무사 옆에서 갖은 오두방정 아양을 떨던 예쁘장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나한테 추근덕 거리는 것인지, 당최 속사정을 알 수가 없다. 뭐 아무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에 더는 깊게 고려지 않기로 했다. 물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내 발걸음은 잠시도 쉬지 않고, 그녀가 가리킨 소장강 강변을 향해 걷고 있었다. 못 다한 부분을 마저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발딱 서 버린 가운데 다리를 책임져 줘야지. 후후후훗. 부스럭 부스럭. 과연 그녀가 언급한 소장강 강변에는 바짝 마른 갈대들이 사람 키만큼이나 높다랗게 솟아 있어 바깥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었고, 바닥에는 부드러운 모래가 깔려 있어서 운우지락을 나누기에는 딱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이거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네. 아무래도 직업 여성인가 보다. 여성 감찰부에서 발의한 그 무슨 특별법인가 하는 것 때문에 이런 장소로 골랐나 보지? 하여간 여자의 적은 여자라니까. 뭐, 상판도 반반하고, 몸매도 끝내주더만. 뭘 마다하리? 후후훗, 어서 오기나 해라.' 휘파람을 불며 모래 바닥 위에 두루마기를 깔고 자리를 점검하는 순간이었다. 왠지 따가운 시선들이 무수히 느껴져 그대로 멈칫한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말 그대로 바람처럼 등장한 십여 명 조금 남짓한 여인들과 한 노인이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나와 안면이 있는 인간들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잠이라도 자려는 겐가? 거 취미 한 번 별나구먼." "남이야 여기서 잠을 자건 말건 무슨 상관이요? 낮잠 좀 자게 그 번쩍이는 대머리 좀 치워 주시오. 그런데, 그러는 노인장은 여기서 뭘 하려고 그렇게 몰려 있는 거요?" "클클클, 그거야 뻔할 뻔자 아니겠느냐? 자칭 수라사살(修羅四殺) 니 놈이 오기만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었지. 차도살(借刀殺)이라며? 소맹주 작명 실력이 썩 나쁘진 않군. 나도 지하석실에서 그 점을 잘 느꼈느니라." "젠장, 이보시오. 노인장, 수배서 읽어보셨소이까? 분명 나와는 다른 인물 아니오? 더군다나 노인장이 화를 내야 하는 인물들은 벌써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을 거란 말이요. 왜 애꿎은 나한테 화풀이를 하려는 게요?" "아냐. 네가 수라사살 맞아. 그때 웬 잔챙이의 사악한 혀놀림과 마교 요녀의 요사스런 나녀무(裸女舞)에 그만 정신이 홀려 버리는 바람에 감히! 이 내가! 꼴사납게도 도망을 쳐야만 했었다. 그게 얼마나 화가 나던지 복수를 해주려고 서안분타 무림맹에서 잠시 쉬고 있었지. 그랬더니 소맹주는 소맹주대로 휭 하니 가버렸더란 말이야. 나야 뭐 잘 된 일이었지. 하태우 바보 녀석처럼 팔이 잘리는 일도 없이 이 애들 속에서 질펀하게 잘 지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 동안 그 잔챙이와 마교 요녀의 종적은 계속 파악해 놓고 있었다. 다만 워낙 많은 무림인들이 몰려 있었던 상황이라 두문불출하고 기다렸을 뿐이니라. 그런데, 과연 나흘 후에 전서응(傳書鷹)이 수라사살에 대한 수배서를 달고왔더란 말이야. 놀랍게도 내가 찾는 잔챙이와 생김새가 똑같은 초상화가 첨부되어 있더군. 당연히 복수도 할 겸 금원보 상자도 하나 늘림 겸해서 내가 조금 수정을 가해서 뿌린 것이지. 이제 앞 뒤 사정을 알겠느냐? 잔챙이?" "그, 그러니까 노인장이 찾는 그 사악한 혀놀림의 잔챙이가 바로 나란 말이요?" "그래, 이제 이해가 되었느냐?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떻게 해야 널 처참하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천천히 저승으로 보낼지 연구중이란다. 아가야, 어디로 내빼려고 하느냐? 옳아, 첫 상대로 그를 지목한 것이냐?" 당연하지. 그 말을 듣고도 내가 가만히 기다려 줄 성싶으냐……? '빌어먹을! 황보원 이 녀석이 안 보인다 했더니 내 등뒤를 가로막아 버렸구나. 그나저나 아깝구만. 진두한하고 황보원만 없었어도 꽃밭에 둘러싸인 격이 되었을 텐데, 아쉽다. 아쉬워.'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꼴에 빠져 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넓죽 엎드려 살려 달라고 빌었을 테지만,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나름대로의 오기와 배짱을 키워 버렸다. 더더군다나 현현자 영감에게 몇 수 배운 게 있어서 느긋하게 꽃밭 운운할 여유까지 생겨 버린 것이었다. 뭐 실제로 지분 냄새와 사향 냄새가 넘실넘실 풍겨 와서 과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또 언제나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보겠는가? 되려 지그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나를 불안하게 노려보는 황보원의 이마를 살펴보았다. 가운데 손가락을 가볍게 엄지손가락에 맞물린 후 힘껏 퉁겨 버렸다. 크크크 이제 넌 내 탄지신통에 이마를 얻어맞고 곧 바로 떼구루루……. "……." 꿀꺽. "야, 너 지금 뭐 한 거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이마를 스쳐지나 간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그게 뭐냐고?" 철장갑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좌우로 뿌드드득 흔드는 그를 보니 문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 몸이 기억하고 있을 거라더니! 고작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날리자고 폼 잡은 것은 아니란 말이다! 현현자, 이 거짓말쟁이! 내가 다시 이 사기꾼 영감탱 말에 귀를 기울이면 인간이 아니다! "역겹게도 너와 입맞춤을 하고서 토악질을 실컷 했을 려희가 오면 수고한 대가로 첫 번째 칼질을 양보해 주려고 했으나, 이 애가 토악질을 하다가 기절이라도 했는지 변장을 고치느라 시간이 걸리는지 안 오고 있구나. 그래서, 일단 내가 먼저 손을 봐주도록 하겠다." '쳇, 그럼 그렇지. 아무 이유 없이 나한테 다가올 여자가 어디 있겠냐? 빌어먹을 려희인지 뭔지 오다가 미끄러져서 뒤통수나 깨져 버려라.' 부우웅 쐐에엑! 황보원의 철주먹이 시야를 좁히며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들었다. 질겁을 한 상황이었지만, 이전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대기를 가로지르는 요란스런 소리는 그대로인데도 철주먹의 괘도가 어렴풋이 나마 보인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말 그대로 전광석화 같아서 그저 정신 없이 맞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묘한 흥분이 감돌았다. 몸에 익은 대로 반사적으로 삼재검법(三才劍法) 중 금침암도(金針暗渡)를 가볍게 응용했다. 오른발에 체중을 옮겨서 상체를 옆으로 슬그머니 뺀 후 철봉을 두 손으로 말아 올려 쥐었다. 내가 서 있던 자리로 아슬아슬하게 철주먹을 가로지르는 황보원의 황당해 하는 모습을 힐끔 바라보았다. 주저 없이 백사토신(白蛇吐信)을 펼쳐 공격으로 인해 비어 버린 가슴뼈에 반격을 가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상체를 비스듬히 앞으로 밀면서 왼쪽 무릎을 땅에 붙였다. 그 반동에 내 힘을 실어서 철봉을 전방으로 힘껏 찔러 내 버린 것이었다. 퍽! 가슴을 부여잡고 네 다섯 걸음 정도는 뒤로 물러선 그의 안색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버렸다. 별로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지만, 나 같은 하수에게 한 방 먹는 꼬락서니를 현무 단원, 특히 대다수가 여자인 그들 앞에서 자존심이 상해 버린 것이었다. "흥, 이제부터 무진장 쥐어 터질 네 놈을 위해 한 방 맞아 준 것이다. 좋아할 것 없다." "이봐, 나 아무 말도 안 했다. 왜 먼저 너스레를 떨어? 찔리는 데라도 있으신가?" "크으으, 이 녀석이 벌거벗고 전신에 욕으로 먹물칠 당했던 일을 잊었느냐! 이번에는 그보다 더 심한 꼴을 당하게 해주마!" "그래, 분명 그런 일이 있었지. 그런 일이 있었어. 어서 덤벼라." 그의 도발에는 분명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러나, 철봉을 잡고 무릎을 구부정하니 구부리고, 검을 비스듬히 세우는 흑호좌동(黑虎坐洞)에 자세에 임하자 다른 철봉으로 내 머리를 때리던 소방(蘇芳)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 왔다. '그렇게 다른 데 눈 돌리지마! 그렇게 잔념이 많아서야 적이 도발해 오기도 전에 무너지겠다. 평상심(平常心)과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자세를 잊지마. 삼재검법(三才劍法)의 진정한 묘용은 흐트러지지 않는 정신 속에서 나오는 거야!' 나도 모르게 미소가 흘러 나왔다. 그렇다. 비록 그가 나를 떠났지만, 소방의 가르침은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울려 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 녀석, 드디어 실성해 버렸구나. 그렇게 빈틈을 보이면서 웃으면 이렇게……!" 쐐에엑 쐐엑! 황보원의 두 주먹이 시차를 두고 내 얼굴을 향해 직격해 왔다. 그의 공격이 매섭기는 하지만, 너무 일직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상대의 빈틈이 보이면 망설이지 말고 최대한 빠르게 치고 들어가. 그것만이 네가 강호초출(江湖初出) 즉시사망(卽時死亡) 당하지 않는 방법이야.' "살아 남을 거야! 살아 남아서 언젠가 다시 너를 만나고 말겠어!" 고수반근(古樹盤根)과 공녀인침(功女引針)을 연환해서 몸을 빙그르르 돌려서 그의 공격권으로부터 벗어났다. 동시에 나를 스쳐 간 그의 뒤통수를 향해 철봉을 휘둘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낌새를 알아차린 그는 주먹을 뻗은 상태에서 그대로 허리를 숙이더니 왼발을 축으로 오른발을 들어올려 냅다 나를 걷어차 버리고 말았다. 퍼억! "크윽!" "꺄아아악!" 강한 힘에 실려 붕 날아오른 나는 그대로 뒤편에서 경계를 펼치고 있던 웬 여인과 부딪혀 엉켜 한데 구르고 말았다. 덕분에 내게 떨어진 황보원의 발길질에 의한 충격은 거의 완화되어 버렸다. 대신에…… 본의 아니게 직격으로 받아 버린 여인은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버렸다. 적이지만 머쓱하게도 좀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다가 한 눈을 파느냐! 죽어라! 죽어!" 부우우우웅! 내가 방심한 사이 황보원의 주먹이 이번에는 내 전면 시야를 가리면서 날아오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피할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있다고 한다면 오로지…….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철봉을 바닥에 내리꽂으며 세우고는 뒷다리로 힘차게 차 올라 몸을 거꾸로 세웠다. 몸이 일직선으로 선 순간 팔 힘으로 철봉을 힘껏 밀어 잠시동안 공중에 떠 있었고, 그 사이에 그의 폭풍 같은 주먹이 바로 아래를 쓸어 버렸다. 물론 인사불성이 되어 있던 애는 거의 걸레짝이 되어 저 쪽 구석에 쳐 박혀 버렸다. 어이가 없게도 그 여인은 내가 받을 주먹 세례를 고스란히 받아 버린 것이었다. 숨이나 제대로 붙어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야, 너 앞으로 현무단 여인들한테 인기 뚝 떨어지겠다. 같은 편을 그렇게 박살내버리면 어떻게 하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3-24 14:19:58 고친날 2005-09-14 20:45:22 읽은수 8859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11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고양이처럼 가볍게 한 바퀴 빙글 돌아서 착지하고 나니 그는 나를 지나쳐서 삼 장은 지나가 버린 뒤였다. 기이하다고 해야 할까? 그 누구한테도 배운 기억이 없는 제자리 공중 제비를 자연스럽게 펼치다니 참으로 대견스럽기도 했다. 적들한테 둘러싸여 떠올린다는 생각 또한 참으로 나답다고나 해야 할까? '이 참에 망아루도 없어졌는데, 곡예단이라도 들어가서 일해 볼까?' "이 미꾸라지 같은 놈이 감히 우리 조원을 방패로 쓰다니!" 자기 멋대로 현무 단원 여인 한 명을 날려 버리고서 나한테 화풀이를 하네? 너같이 억지 부리는 놈들 때문에 내가 어이없게 차도살(借刀殺)이라는 허명으로 불려지게 된 것 아닌가! "아니야, 그 녀석은 원래 한 수가 있던 놈이었느니라. 지하 석실 광장에서 내 살기를 가뿐하게 받아 낼 때부터 알아 봤었지. 가볍게 간과할 놈은 아니야. 내가 손수 아작 내주랴?" "아닙니다. 어르신, 이 놈은 제 선에서 완전 끝장을 내버리겠습니다. 어르신의 손까지 빌릴 가치가 없는 놈입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 하네. 꼴에 자존심은 드세 가지고. 그래, 함 해보자. 해보자고.' 내 딴에도 오기가 치밀었으나, 목구멍으로 꿀꺽 삼켜 버렸다. 성질대로 내뱉은 말 한 마디에 진두한 노인장이 발끈해서 껴들기라도 하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노리는 바는 오직 하나였다. 황보원의 급소를 한 방 먹이고서 재빠르게 내달리는 것이었다. 그 급소가 어딘지는 두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조금만 뛰어가면 사람들이 북적북적 거리는 저자 거리가 지척이다. 그 속에 파묻히기만 하면 진두한 영감쟁인들 날 찾아내기 요원할 것이었다. '허허실실(虛虛實實)을 이용해 봐야겠군.' 허와 실에 생각이 미치자 단수연에게 써먹으려고 소방과 죽자 사자 연습하며 땀으로 뒤범벅되어 나뒹굴었던 과거가 아련히 떠올랐다. 그리웠다. 당시에는 초라한 복수심에 눈이 멀어 알지 못했다.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녀석이 또 한 눈을 파는구나! 내가 호구로 보이느냐!" 쐐애엑! 변함 없는 일직선으로 치달아 오는 그의 공격을 슬그머니 흘리면서 철봉이 떨어진 곳으로 몸을 굴렸다. "어림없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을 거다!" 이번에는 내 의중을 꿰뚫고 있었는지 곧바로 선회해서 내 등뒤로 바짝 붙어 주었다. 그는 알까? 그것이야말로 내가 의도하는 바였다는 걸……. 황보원이 선회해서 주먹을 날리려는 자세를 취하려는 찰나 빙그르르 몸을 돌려 드러누웠다. 그리고, 훤히 드러난 그의 낭심을 노리고 오른발로 힘껏 걷어 차 버렸다. 퍽! 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발바닥 끝으로 쌍 계란 터지는 촉감과 함께 그의 대가 끊어지는 곡소리가 애달프게 울려 퍼지리라고…….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달랐다. 오히려 내 발끝이 돌덩이에라도 부딪힌 듯 얼얼한 충격으로 굳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이고! 아이고! 이, 이게 뭐야?" 유감스럽게도 곡소리를 내뱉은 인간은 그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크하하하! 애송이답게 제대로 걸려들었구나. 강철 보호대를 솜방망이 같은 네 발이 이겨낼 듯 싶더냐? 이젠 도망 못 간다." 황보원은 왼 손으로 내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아 일으키고는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이 호쾌하게 웃어 젖혔다. 곧 이어 그의 오른손 철장갑 주먹이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된 내 전신에 작렬해 버렸다. 퍼버버벅! 퍼벅 퍼버버버벅! 눈앞에 별들이 은하수가 되어 드리워질 지경으로 번쩍 번쩍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렸다. "이 마지막 절초 한 방으로 네 놈은 끝장난다. 저승 가기 전에 잘 기억해 둬라. 황보세가에서도 일인에게만 비밀스럽게 구전되는 최강의 벽력신권(霹靂神拳)이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몸이 위로 붕 떠올려졌다. 벽력(霹靂)이라는 말처럼 천둥소리가 울려 퍼진 듯 했다. 우르르룽! 우르릉! 쐐에에액! 맞바로 내 갈비뼈를 관통해서 박살내 버리는 매서운 충격과 함께 바닥으로 내리 꽂혀져 버렸다. 퍽! 콰직! 쿵! 땅바닥과 부딪힌 반탄력으로 높게 치솟아 올랐다가 다시 처박혀 버렸다. "헉 헉 헉, 지독한 녀석, 감히 벽력신권(霹靂神拳)까지 쓰게 만들다니! 아직 미완이라 내력소모가 너무 크고, 후유증까지 뒤따르는데…… 제길! 이승 하직하는 마당에까지 귀찮게 하는군. 헉 헉 헉." 바닥에 죽은 듯이 축 늘어진 나의 전신으로 청아한 기운들이 여느 때처럼 휘감아 돌기 시작했다. 그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다. 미친 주령령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그녀가 미친 순간에도 난 살아 남았다는 것을……. 그런데, 겨우 이 정도에 내가 무릎 꿇을 성싶으냐! 모든 게 끝났다는 듯이 뒤돌아 서서 힘겹게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왜 이리 우스워 보이던지!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 천천히 돌아선 황보원의 경악에 가득 찬 모습이란! 과히 나쁘지 않았다. "너, 너, 괴, 괴물이냐? 그 누구도 우리 가문의 비전인 벽력신권(霹靂神拳)앞에서는 무사할 수 없다!" "크크크, 그래? 그럼 난 뭐냐? 말해 봐라. 난 무슨 부류에 속하는지 말해 보란 말이다!" "그 휘청거리는 다리로 뭘 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치고 난리냐? 정말로 이번에 완전히 끝장을 내주마!" "너야말로 상대방을 주둥이로만 끝내려고? 나라면 그동안에 세 네 번은 더 휘둘렀겠다." "갈! 애송이, 일개 점소이 주제에 못하는 말이 없구나!" 우르르릉! 우르릉! 뒤로 빼든 그의 오른손 끝으로 전신의 기운이 극한으로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 기이한 천둥소리는 비이상적으로 기운을 끌어 모으는 소리였던 것이다. 저 팔, 저 팔을 잘라 낼 검만 내 손에 있었다면! 젠장! 촤아악! "끄아아악! 누, 누구!" 일순간 시간이 멎어 버린 듯했다. 날 향하고 있던 황보원의 시선이 자신의 팔을 자른 인영에게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 찰나였다. 상대방은 그 순간마저 허용치 않고, 그의 목마저 간단하게 날려 버렸다. 휙 날아오르는 그의 머리를 따라 붉은 선혈이 낭자하게 흩뿌려졌다. 진두한 노인장을 비롯해서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현무조원 여인들까지 놀랐는지 살짝 굳어져 버렸다 휘둥그래 치켜 떠진 눈을 감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등장은 전혀 예상되지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주, 주령령 아가씨?" 짜악! 그녀의 전광석화 같은 손짓에 머리가 반대편으로 휙 틀어져 버렸다. 뺨따구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아니 왜 이 상황에 내 뺨을 때리는 것인지 이해가 어려웠다. 어차피 그녀의 느닷없는 등장 자체도 이해가 어렵기는 했지만……. "너 바보니? 누가 너더러 그를 지켜 달랬어! 누가 너 따위에게 기대 같은 거 할 줄 알았어? 가만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사서 매를 버는구나." "아, 아니 저, 저기……." 짜악! "시끄럿! 있다가 끝나고 보자. 흥!" 이젠 두 뺨 모두가 얼얼해졌다. 역시 그 어느 상황이라 해도 그녀와 상식 선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아마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하여튼 그녀의 등장으로 사태는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잠깐 그녀가 왔다는 것은…… ? 퍼억! "허억!" 떼구루루루. 거대한 손바닥이 내 등짝을 무서운 힘으로 쳐버린 까닭에 모래 바닥을 서너 바퀴는 굴러 버렸다. 물론 그 손바닥의 임자가 누군지 는 안 봐도 훤했다. 입 속에 들어간 모래를 퉤퉤 뱉어내며 비틀비틀 일어서려니 눈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포, 포연강 형님 이셨군요.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여, 여긴 어떻게 아시고 오셨는지?" "크하하하! 내가 모르는 일이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은가? 자네 근래에 재미있는 칭호까지 하나 달았더구먼. 수라사살(修羅四殺) 차도살(借刀殺)이라며? 흐음,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멋들어지게 잘 지었던걸. 껄껄껄." "끙, 그, 그것은 소맹주라는 버릇없는 개망나니 놈이 자기 멋대로 지은 거라고요. 하필이면 차도살이라니? 수라사살도 어불성설이에요. 자기네들끼리 칼질하고서 나한테 다 뒤집어씌우다니 그게 말이나 됩니까?" "뭐, 무림비사(武林秘事)란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나? 그나저나 홍 영감님이 자네를 한 번 보고 싶으시다 하네." "그, 그럼 영감님은 무사하세요?" "뭐, 아직까지는…… 그것도 오늘내일 하신 다네. 휴우, 아쉬운 일이었지. 우연히 자네 덕에 만들어진 기회를 우리가 살리지 못했으니…… 당세옥, 그 놈의 잔머리에 넘어간 우리가 바보였지." "당세옥? 그게 누군 데요?" "자칭 혈살 흉내를 낸 당문 녀석이야. 자세한 얘기는 여기부터 정리하고 나서 하자고." 그러고 보니 다른 현무단 계집애들이 전부 다 조용하더라니? 자기네들 부단주가 당했으면 하다 못 해 비명이라도 질러야 정상이었거늘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령령의 등장에 모두가 놀란 사이 그림자처럼 나타난 포연강한테 모두 점혈이라도 당한 모양이었다. 입이 떡 벌어져서 눈이 휘둥그래진 모습 그대로들 굳어 버린 상태였다. 물론 진두한 영감쟁이만은 제외였다. 십성이란 이름이 있는데, 아무리 포연강이라도 단번에 제압될 리가 있었겠는가? 지금 그는 지독한 살기를 드리운 주령령과 대치한 상태였다. 묘하게도 서로 안면이 있는 듯 했다. 그 대치 상태를 묘한 박자로 깨뜨린 것은 바로 포연강이었다. "크크크, 이것 오랜만이시군요. 그 동안 어디 뼈마디가 노골 노골 해진 곳은 없는 게요? 손녀 재롱이나 보셔야 할 나이에 여기까지 몸소 나오시다니 무림맹에서 찬밥 신세라도 된 것이요?" "천만에! 난 아직 한창때라네. 무림맹에서 공밥을 먹고 있기가 심심해서 유람차 나온 것이지. 그렇게 싫어하던 덥수룩한 텁석부리에 구레나룻으로 위장하고 있었구먼. 그 따위 조잡한 변장으로 용케도 소맹주의 시선을 피했군, 그래." "변장이 아니오. 실제로 기른 것이라오.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누가 속아넘어가기나 하겠소?" "허허, 겉멋을 유난히 부리던 자네가 그런 험상궂은 모습으로 나돌아다닌다니 대단한 결심을 한 모양이군. 그럼 그들은 누구인 건가?" "아, 그 가짜들 말이요? 한 명은 짐작이 가지만, 다른 두 명은 나도 모르오. 당신이 모르는 것을 보니, 무림맹 사람은 아닌가 보군요." 의외로 포연강조차도 진두한 노인장을 잘 안다는 듯이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언중유골(言中有骨)같은 말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어서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또한 그 가짜들이란 누구를 이르는 말인 걸까? '그나저나 황보원의 그 벽력 머시기인가 하는 권법은 일인구전(一人口傳)이랬지. 놈이 죽었으니 그 겉멋만 잔뜩 든 권법도 덩달아 단맥된 걸까? 그러게 죽을 짓을 왜 하냐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4-02 20:18:06 고친날 2005-09-14 23:40:23 읽은수 8556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118)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햇볕이 쏟아지는 아침 강바람을 타고 펄럭이는 주령령의 나삼의가 새삼 새하얗고 청순하게 느껴졌다. 마치 하늘에서 막 강림한 선녀를 연상하게끔 만든다고나 할까? 밤에 보면 교교히 을씨년스러운 게 딱 풍악산 처녀 귀신 청년 회장 감인데, 간만에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서 보니 새로운 기분이 들었다. 사박사박. 툭, 떼구루루.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에 이끌려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가 뭔가를 걷어차고 말았다. 섬뜩한 느낌에 돌아보니 양 눈의 흰자위가 희번덕 돌아가 있는 황 무식이의 머리통이었다. 그것과 보고 령령을 번갈아 보고는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역시 그녀와는 거리를 두는 편이 일신의 안전 도모 차원에서 나으리라. "흘흘흘 의외로군. 전 중원을 두 해 동안 뒤져도 자취조차 찾을 수 없던 자네들이 이런 구석 산중에 숨어 있었을 줄이야! 그래, 무슨 생각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인가?" 진두한 영감의 어투 속에는 분명 서로 일면식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몰라서 묻는 거요? 저 녀석이 수라사살(修羅四殺)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네 나버렸는데, 우리가 모르는 척 외면할 거라고 보시오? 그것만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케케묵은 은원도 청산해야 할 거 아니겠소?" 잠, 잠깐 내가 수라사살(修羅四殺)인 것하고, 자기네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설마 자신들이 수라삼살(修羅四殺)이라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에이, 설마! 시름시름 앓기나 하는 홍 영감이 혈살(血殺)일리가 없는 것 아니겠어? 뭐 포연강이 도살(刀殺)이라고 한다면야 그것은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럼 주령령이 권살(拳殺)이 되나?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그들의 실력이나 성격상 수라삼살이라 해도 틀릴 것은 없었다. 주령령은 아예 흉신악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이렇게 생각을 하니깐 왠, 왠지 무지막지하게 불안해 지기 시작했다. "오호, 그런 것인가? 저 녀석 분위기가 건방질 정도로 넉살좋은 게 딱 자네를 떠올리게 하더니 역시 그런 것이었구먼. 그래도 내 앞에 나타난 일은 너무 경솔한 일이야. 자네와 내가 같은 십성(十聖)이라 불려도 엄청난 격차가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뭐, 내가 어르신한테 한 수 뒤진다는 것은 인정하오. 그런데 말이요, 지금 어르신과 대치한 녀석이 내가 아니란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오?" "설마, 이 아이를 말하는 것이더냐? 하하하하하! 가소롭구나! 가소로워! 소맹주의 말단 하수인들에게서조차 간신히 도주했다는 걸 내가 모르리라고 보느냐? 숨어 있는 두 해 동안 기연을 만나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거듭 했다고 치자. 이 아인 선천적으로 무골과 인연이 없다. 설사 나를 따라잡고자 일평생을 바치며 환생을 거듭해도 어림없는 일이니라." "그거야 직접 싸워 보면 알 거 아니요?" "오냐 오냐 해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가 보구나. 잘 눈여겨봐 두거라. 그 때는 그 녀석들이 엉뚱한 데 정신을 팔고 있어서 빈틈을 내준 것이지만, 나에게는 어림도 없느니라." "그만! 옛날 얘기 따위 그 더러운 입으로 지껄이지 마라! 그러는 너 또한 소맹주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는 거잖아!" 그들의 대화를 막으며 먼저 달려든 것은 주령령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펄럭이는 그녀의 양 소매 끝에서 안쪽으로 약간 구부러진 뾰족한 갈고리들이 챙 소리와 함께 튀어 나왔다. 마치 성난 곰의 앞 발바닥처럼 무자비하게 난자해 버릴 듯한 희한한 무기였다. 어떻게 보면 장갑처럼도 보이고, 또 어떻게 보면 창날처럼 생긴 기이한 무구라고 해야 할까? "허허, 그 녀석이 감히 나를 부려먹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건방진 입부터 뭉개 주도록 하지.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지만, 해도 해도 너무 하는구나."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이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 온 나다. 호락호락 하리라 보면 오산이야! 영감!" 그녀의 새하얀 나삼의와 노인장의 황금색 비단 금포는 아침 햇살에 반사되며 서로 묘한 이질감을 교환하고 있었다.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황금 창날과 은빛으로 빛나는 뾰족한 갈고리들이 어지럽게 교차되며 두 인영이 한데 뒤엉켰다. 매서운 돌개 바람이 강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차차차창! 채챙! 끼이잉! 채챙! 촤악! 촤아악!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했던가? 어이없게도 그들 주변에 굳어 버린 채 서 있던 현무조 여인들의 몸체가 핏물과 함께 산산이 박살나며 사방팔방으로 튀어 버렸다. 살아 생전에는 미모로써 뭇 사내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을 그녀들이 한낱 고기 조각이 되어 나뒹구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왜 그렇게 아깝다는 눈으로 바라보나? 쟤네들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잘난 데 하나 없고 미래 설계가 눈곱만치도 안 되어 있는 자네한테 눈길 한 번 줬을 것 같은가?" 포연강, 이 녀석의 눈치란 정말 귀신이 곡을 할 정도다. 그래도 아까운 것은 아까운 거다. 밟아 뭉개져 속 내용물이 꾸물꾸물 쏟아진 눈앞의 떡보다 화려한 그림의 떡이 더 보기 좋은 것 아니겠냐고? "아니, 사람의 목숨을 어찌 그리 하찮게 말씀하십니까? 저도 뜨거운 피가 흐르는 같은 인간입니다. 그들의 인생이 이런 식으로 마감되었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눈길을 몰라보시는 겁니까?" 그는 한동안 내 눈을 지긋이 고깝게 내려다보더니 조용히 한 마디 했다. "그럼, 좀 더 가까이 와서 그런 말을 해보게. 멀찍이 떨어져 넓죽 엎드린 자네의 고등어 눈깔로는 도무지 설득력이 생기지 않는다네." "……." 하여튼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그럼 나도 저 여인들처럼 퍽퍽 터져 나가기라도 하라는 소리야? 측인지심이고 나발이고, 일단 내가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나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진두한과 주령령의 신형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윽고는 그저 노란 바람과 새하얀 바람이 뒤엉켜 대기를 가로지르는 듯한 묘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물론 더 이상 그들 주변에 서 있는 현무조 여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포연강 뒤로만 한 세네 명 서 있는 게 고작? 그리고, 나와 부딪힌 충격으로 실신한 채 그대로인 불쌍한 여인네 한 명이 있을 따름이었다. 쩡! 귓고막을 울리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온 두 사람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진두한 노인장의 차림새나 외양이 멀쩡한 반면 너덜너덜해진 주령령의 나삼의는 여기저기 붉은 빛깔을 띄우고 있었다. 역시 십성(十聖)의 하나인 진두한을 상대로는 풍악산 처녀 귀신 청년 회장도 몇 수 밀릴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노인장의 안면에 득의양양 올라 있던 조롱기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있었다. 당혹스러워 하는 그의 안면이 기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놀랍구나. 어느 누가 무학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던 이 아이를 이런 괴물로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기 그지없구나. 혈살(血殺), 그 놈이더냐?" "웃기지 마라. 수라삼살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너희가 멋대로 지어낸 거잖아. 나를 권살(拳殺)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관없다. 그러나, 영감님을 네 멋대로 부르지 마!" 령령이 핏대가 올라 귀가 따가울 지경으로 고함을 질렀다. 따져 보면 그녀야 권살이라 불려도 당연하지. 아니 모자라지. 흉신악살(凶神惡殺)이 더 어울…… . 뭐? 뭐라고? 너희가 수라삼살(修羅三殺)이라고?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얘기에 눈이 부릅떠져서 반사적으로 포연강을 돌아보았더니 그가 씩 웃으며 날 내려다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알겠느냐? 우리가 바로 원조 수라삼살(修羅三殺)이라는 걸? 자네가 수라사살이 되었으니 우리도 덩달아 수라사살(修羅四殺)이라고 불리겠군. 기쁘지 않은가? 이젠 자네도 당당히 무림비사(武林秘事)의 한 줄을 장식하는 유명인사가 되어 버린 거야. 크하하하하하!" '제, 젠장 완전 똥 밟았잖아. 그럼 그 동안 수라삼살 곁에서 일하고 있었던 거야? 후미!' 정체를 알 수 없는 오한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4-09 16:15:06 고친날 2005-09-15 09:54:47 읽은수 8247 [ 11 K ] 제목 점소이 작삼(119)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그 뒤로도 몇 차례에 걸쳐 그녀와 노인장의 쫓고 쫓기는 듯 숨막히는 결전이 이어졌다. 잠시 신형이 멈칫거릴 때마다 령령의 상처가 하나 둘 늘어난 게 보였지만, 적어도 치명적인 결정타는 입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다시 뒤엉키면 여전히 내 시야에는 흐릿한 바람의 흐름만 보였다. 따라서 그들의 대결 양상을 짐작만 해 볼 뿐 구체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는가? 자네의 흐리멍덩한 고등어 눈깔로 저들의 대결을 관전한다는 것은 백 년이 지나도 무리야." 역시 포연강이다. 비꼬는 데 있어서 그 누가 이 놈을 당해 내랴?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적어도 포 형님 정도의 고수는 되어야 알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무리네. 나조차도 겨우 느끼기만, 할 뿐이지." '어럽쇼, 이 인간이 갑자기 겸손한 척 발뺌을 하네. 뭘 잘못 먹었나?' "네? 그럴리가요. 제가 좀 눈치가 늦긴 해도 포 형님이 령령 아가씨보다 강하시다는 것은 안 봐도 척 하니……." "강하기로만 따지면 아직은 내가 그녀보다 더 우위에 있을지 모르네. 하지만, 지금 저들은 오로지 빠르기에만 모든 것을 걸고 있지. 아무리 강한 자라도 결국 빠른 자 앞에서는 무력한 법이거든. 기실 우리 셋 중에서 주령령의 경공 속도와 보법의 현란함을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이 없긴 하지." "……." 그, 그럼 주령령(周鈴鈴)이 수라삼살(修羅三殺)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말인가? 이제 뭘 좀 알 것 같다. 요컨대 세기는 지가 가장 센데, 노인장과 형님이 연장자라 꾹 참고 지내야 했을 거다. 폭발하는 화산 분화구처럼 신경질적인 그녀가 참고 지낸다는 것은 어불성설, 즉 그 화풀이를 대신 힘없고 연약한 나한테 다 퍼부어 왔던 것이다. 어쩌면 손님도 없었던 망아루 점소이의 진실한 역할은 화풀이 해소용 걸레짝이 아닐까? "아, 내가 말을 잘못했군." "네?" "우리 넷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해야 하겠지. 껄껄껄." "……." '웃기지 마라. 홍 영감님만 만나 뵙고서 그대로 떠날 거다. 설마 다 죽어가는 영감님 앞에서 정식으로 작별을 고하고 떠난다고 한다면, 저 원수 덩어리들이라 해도 날 어쩌진 못하겠지?' 쩡! "에구머니나!" 귓고막 뿐만이 아니라 대기까지 진동시키는 마찰음이 터져 나오면서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내 좌측으로 튕겨 날아오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그것이 주령령의 신형임을 알고 오른편으로 슬며시 발걸음을 옮겨서 자리를 피해 주려고 했었다. 툭! "아, 미안하네. 손이 그만 미끄러져 버렸군." '어, 어어어, 포, 포연강 저 개놈!' 퍼어어억! "끄아아아아악!" 떼구루루루. 튕겨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그녀 대신 받아 버린 나는 적어도 십 여장은 넘게 강변 풀숲을 떼굴떼굴 나뒹굴어야만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한다면 귀안의 령령일때면 항시 내뿜던 호신강기(護身剛氣)인지 뭔지가 해체된 상태로 부딪혔다는 것이다. 만약 호신강기가 멀쩡한 상태에서 이 속도로 부딪혔다면 나야 뭐 피곤죽이 되었을 게 자명한 일이었다. 비틀비틀 일어선 나는 발끈한 마음에 반사적으로 두 년 놈들에게 한 마디 퍼부으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는 날 버팀목 삼아 비교적 충격을 덜 받고 안착해 있긴 했었다. 하지만, 노인장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었는지 시뻘건 선혈 한 줄기를 입으로부터 주르륵 흘러 내리고 있었다. 새하얗던 나삼의는 군데군데 새빨갛게 물든 채 창날에 베여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그녀의 손등을 감싸고 있던 갈퀴 모양의 갈고리들도 날이 상해서 부러지거나 휘어져 있기까지 했다. 엉망이 된 그녀를 보니 튀어나오려던 불만들이 저절로 쑥 들어가 버렸다. 이번에도 영감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조금 숨을 헐떡거린다는 게 전부일까? 그래도 여기저기 잔 상처로 뒤덮인 그녀를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고소하다는 기쁨에 호쾌한 웃음이 금새라도 터져 나올 것 같으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동시에 드는 것이었다. 한 사람을 통해 상반된 기분을 동시에 떠올린 다는 것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그새 괴물 한 마리를 키워 놨구나. 뭐냐? 이 으스스하면서 괴이한 기운은? 내가 알기로 이 기운을 기반으로 하는 무공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감히 무림맹과 마황맹의 공인 아래 금기된 무공을 익히다니……. 무엄하구나!" 진두한 영감쟁이가 단단히 열 올랐다는 듯이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금기된 무공이라? 그럼 령령은 무림공적? 오호? 뭐,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지. 수라삼살(修羅三殺) 중 권살(拳殺)이라고까지 불린다고 하는데, 무림공적 따위야 이미 먹고 들어가는 거잖아. '잠, 잠깐! 나는 수라사살(修羅四殺)로 강호 전역에 공식 선언된 거잖아. 그, 그렇다는 것은 나, 나도 무림공적(武林共敵)? 허걱!' 이미 외적 충격을 받아 문어처럼 흐느적거리던 나는 그 사실 하나로 상당한 내적 충격을 받고 그만 모래성처럼 흐물흐물 무너지고 말았다. 이젠 난 어디로 가도 두 발 뻗고 자기는 그른 것이었다. "우린 이미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몸 아니겠소? 거기에 죽을 이유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겠오? 뭐 새삼스럽게 흥분을 하는 거요?" 내 정신 세계가 크나 큰 공황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에도 포연강 개노무 자슥의 능글맞은 말대답은 한 층 더 그 빛을 발했다. 저승 맨 아래층에 갖다 버려도 능글맞게 밉살스런 말이나 툭툭 내뱉을 인간 같으니라고. "뭐, 그렇기야 하지. 음……, 좋다. 오랜만에 만난 것도 인연이고 하니, 오늘은 그냥 못 본 것으로 하마. 이대로 갈라서자꾸나." "하하하하, 그 동안 많이 너그러워지셨군요. 역시 사람은 나이를 먹어야 부드러워지는가 봅니다. 좋습니다. 우리 이대로 못 본 척 합시다. 그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소? 그렇지? 령령?" "령령? 그게 누구냐? 호오, 그 동안 다른 이름을…… ." "이 악적! 어디를 가려느냐! 오라버님이 허락해도 난 허락 못한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살기 등등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흐지부지 넘어가나 싶어 어리둥절하던 찰나였다. 서로 이러쿵저러쿵 잡담을 이어가나 싶더니 그 흐름을 령령이 깨며 다시 달려들어 버렸다. 그 바람에 진두한 영감쟁이가 뭘 말하려고 했는지는 의문으로만 남았다. 어차피 말 그대로 강바람이 심해서 내 귀에 똑똑히 들려 오지도 않았다. "아이쿠, 얘가 왜 이래? 저 영감을 우리가 당해 낼 수 있을 듯 싶으냐? 그냥 곱게 보내 줄 때 가자구." 포연강이 묘하게도 꼬리를 감아 내리고는 그녀를 살짝 말리는 듯 싶었으나, 령령의 신형은 가볍게 그를 흘러 비껴서 노인장에게로 날아들고 있었다. "끌끌끌, 니가 아무리 기고 날아 봤자 아직 나한테는 한참 멀었……." 쉬익! 촤아악.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영감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비스듬히 갈라진 자신의 배를 내려보았다. 입에서 시뻘건 피를 벌컥 내뿜으면서도 포연강을 가리키며 삿대질을 하려는 듯했다.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노발대발 고함까지 지를 것 같은 어정쩡한 자세였다. 퍼어억! 그러나, 그의 항변은 령령의 새하얀 손바닥에 머리가 날아가는 통에 들어줄 수가 없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어렴풋이 나마 느낄 수 있었다. 주령령이 그를 지나쳐 가면서 영감의 시야를 막는 순간 포연강이 교묘하게 그녀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한 발 더 빠르게 진두한 영감을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멈춰선 그의 팔뚝 끝에 피를 머금은 작은 부엌칼이 쥐어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맨 몸이더니 아마도 소매 끝에다가 숨겨 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하필 멋없게 부엌칼이 뭐냐? 누가 봐도 완전 날강도 그 자체잖아.' 훅, 숨을 몰아쉰 그는 머리가 없어진 진두한 영감의 시신을 톡톡 걷어차면서 입을 열었다. "가긴 어딜 가? 당신 잔머리가 얼마나 고단수인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아는데, 아량을 베푸는 척 시치미 떼기는! 나조차도 령령의 장력을 정면으로 맞았다가 심신이 분리되는 줄 알았다구. 그런데, 나이를 먹을 데로 먹어서 뼈가 노골 노골 해진 영감쟁이가 아무 탈 없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이런 걸 두고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다고 하는 거야." '어이구, 잘났다. 잘났어. 비겁하고 야비하기가 하늘을 찌르고도 넘쳐서 은하수를 가로지르는구만.' 혼잣말로 온갖 잘난 척을 하던 그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보며 씩 웃어 보였다. 겁나게 섬뜩한 미소였다. "뭘 그리 꺼벙하게 쳐다보나? 비겁하게 느껴지나? 졸렬하게 느껴지나? 이 세상은 비겁해야만 살아남는 거다. 정직과 성실만으로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너무나 추악해." 그의 미소가 이 순간처럼 무섭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비겁한 수단을 동원했다 하더라도 십성 중 하나인 진두한 영감이 그의 손아래 저승 마차를 타 버렸다는 사실도 한 몫 했다. 난 재빠르게 상황 파악을 하고는 힘차게 손뼉을 쳤다. 물론 억지 미소와 함께 말이다. 짝짝짝짝. "훌륭하십니다. 형님. 이 아우, 포 형님께서 내려 주신 가르침 가슴속에 새겨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우리 막둥이가 정말 배움에 목말라 있었구나. 걱정 말아라. 앞으로 내 훌륭한 가르침들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겠노라. 나만 믿어라. 하하하하하!" '이런, 빌어먹을 미련 무식 곰탱이 같으니! 넌 그야말로 내가 만난 온갖 군상들의 단점들만 쳐 발라 만들어진 것 같다. 조물주의 대 실수로 탄생한 대 실패작이란 말이다!' 부르르르르. 주령령이 갑자기 발작하듯 떠는 게 느껴졌다. 분명 발작이 오기 직전의 끈적끈적함이 동시에 발산되고 있었다. 위기 의식을 느낀 나는 날렵하게 그녀로부터 사사삭 거리를 두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눈에서 파란 기운을 뚝뚝 떨어뜨리던 그녀는 미친 듯이 장승처럼 굳어 있는 현무단 여인들에게 신형을 날렸다. 퍽! 퍼퍽! 퍼어억! 순식간에 네 명의 여인들의 배에 장력을 힘껏 날려 북을 찢듯 터뜨려 날려 버린 그녀는 아직도 모자라다 는 듯 거친 숨결을 내뱉고 있었다. '설, 설마 나, 나를?' 지레 겁부터 먹은 나는 나도 모르게 포연강 몸 뒤로 살짝 숨으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바로 황 무식이의 철권에 얻어맞고 튕겨나간 내 몸에 부딪혀 실신해 버렸던 여인에게로 말이다. 기절만 했다 뿐이지, 아직 살아서 숨은 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숨결을 령령이 놓칠 리가 없었다. 곧이어 그녀의 피에 절은 손바닥이 여인의 머리를 치기 위해 번쩍 들어 올려진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날려 그녀를 밀쳐 버리고 말았다. 뜻밖에도 령령은 힘없이 밀쳐져 모래 바닥 위에 철푸덕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헉, 내, 내가 무슨 짓을?' 역시 희미하게나마 새파란 안광을 흘리던 그녀의 분노가 나로 돌려져 버렸다. 이번에야말로 죽었구나 라고 잔뜩 겁을 집어먹고 한 발 한 발 물러서고 있었다. "거기 서!" "네, 네." "나를 밀친 이유를 설명해 봐.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아니라면 오늘 아주 날을 제대로 잡았다고 생각해라." 잔뜩 겁을 먹은 나는 포연강에게 도움을 구하는 시선을 수없이 보냈다. 그러나, 그는 남의 일이니 자기 알 바가 아니라는 듯 예의 멋없는 부엌칼을 시신들의 옷으로 닦아 내는데 온 정신을 다 쏟고 있었다. 하여튼 더럽게 비겁하고 매정한 놈이다. 저런 놈에게서 내가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빨리 대답 못해!" "에, 에구머니나! 네, 그, 그것이 저, 저 여인은 아, 아까 전에 저, 저 대신에 황 아무개가 날린 철권의 위력을 고, 고스란히 받았거든요. 두 번이나 저 때문에 저승 문턱까지 간 여인입니다. 그, 그러니 아, 아량을 베푸셔서 그, 그냥 살, 살려주시면 안, 안될까요?" "안 돼." "……." "그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 있어? 날 쓰러뜨린 무엄한 행동은 일단 넘어가 주겠어. 그러니까 얼른 비켜." "……." 그녀 고집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아는 나는 그래도 살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러서려고 했다. 그런데, 이 놈의 다리에 꼼짝달싹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무 긴장을 해 버린 탓에 그만 쥐가 나 버린 모양이었다. "어쭈, 이제 아주 반항을 하는구나. 그렇게 간덩이가 부어 버렸어? 내가 몸소 터뜨려 줄까?" "아, 아니 그, 그게 아니고……." "……." "그, 그러니깐요. 그게 몸, 몸이……." 하도 그녀의 시선이 날카로워서 찔끔찔끔 눈을 피하는 통에 말 한마디, 한마디 잇기조차 숨가쁠 지경이었다. 한동안 거친 숨을 내몰아 쉬던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내쉬었다. 살짝 치켜 올라간 왕방울 같은 두 눈을 슬며시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에는 희미하게나마 서려 있던 푸른 기운이 많이 가신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눈을 부릅 치켜 뜬 그녀는 날 흘겨보며 아니꼽다는 듯, 마지못해 봐준다는 듯 입을 열었다. "흥! 좋아. 봐주도록 하지. 자의든 타의든 튕겨 나오던 나를 받아 낸 성의를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 주겠어." '어, 어라?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자기 고집을 꺾을 때도 다 있네, 신기한 일이로세.' "뭘 멀뚱멀뚱 쳐다봐. 어서 가자. 여기서 지체할 시간 없어. 홍 영감님께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마지막으로 널 보고 싶어하시니까 서둘러." "네, 네." 포연강이 어디서 삽을 구해 왔는지 나와 령령에게 하나씩 건네주었기에 우리는 날렵하게 응달진 강변 모래 바닥을 순식간에 파내고서 시신들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피에 젖은 모래들은 퍼내서 강물에 버려 버리고, 새 모래들로 그 자리를 채워 넣었다. 그들이 하는 짓들이 왠지 매우 능숙해 보였다. 물론 그냥 느낌만 그랬을 뿐이다. 뒷정리가 다 끝나자 코뚜레 뚫린 소가 질질 끌려가듯 말 그대로 그녀에게 팔목을 잡힌 채 바닥을 박차고 신형을 날리게 되었다. 포연강은 이미 저 멀리 아득히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육중한 그가 몸을 날리는 모습이 참으로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갑자기 노릇한 지린내가 풍긴 듯 하단 말이야. 바람결에 실려 온 느낌이 뜨끈뜨끈했는데…….'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4-13 16:16:45 고친날 2005-09-15 17:40:57 읽은수 8937 [ 14 K ] 제목 점소이 작삼(120)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한참을 바람처럼 달려가는 그녀에게 정신없이 끌려갔다. 덕분에 서안 시내는 훨씬 예전에 벗어나 버렸다. 나삼의가 너덜너덜해질 지경으로 싸운 뒤인데도 물찬 제비처럼 기운이 넘쳐흘러 보인다. 내가 본 여인들 중에 아마도 제일 강한 여인이 아닌가 싶다. 더불어 제일 악랄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한 식경을 채 넘기기도 전에 지면에 살포시 안착한 령령은 내 손을 놓고는 산허리를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오라버니랑 천천히 올라가. 난 곧 뒤따라 갈 테니까 있다가 보자구."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어 휭 하니 몸을 돌려 나가는 그녀 뒤에 말꼬리를 붙였다. "어, 어디로 가시는데요?" "쳇, 소피보러 간다. 왜? 따라오고 싶어? 구경하고 싶어?" "아, 아니요. 잘 다녀오세요." 더 성질부리기 전에 허리를 굽실굽실 숙이며 배웅까지 해줬다. 앵두 같은 입술이 쌜쭉하니 튀어나온 게 왠지 삐쳐 보이기도 했다. 하여튼 하루에도 수십 번 희로애락 상태가 변화무쌍하게 오르락내리락 거려서 어디에 장단맞춰야할지 난감하기 일쑤다. 오로지 알아서 기는 것만이 무사태평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이다. '소피보러 간다면서 오질 나게 멀리도 날아가네. 그렇게 수줍음 타는 성격은 아닐텐데…….' 펑! 등짝에 포연강 개놈의 거대한 손바닥이 떨어져 내렸다. 이 놈 맛들였나? 왜 심심하면 내 등짝을 때리고 난리야? "아구구! 왜, 왜 그러세요?" "어디다가 한눈을 파는가? 어서 가 보세나. 홍 영감님 마지막 임종 정도는 지켜 드려야 예의가 아니겠나? 영감님이 왜 자네를 보고 싶어하는지는 모르겠네만, 그래도 불러오라고 했으니까 말이네." "예, 예, 어, 어서 가보지요." 더 귀찮게 토달면서 등짝을 치려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재빨리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갔다. 포연강은 그저 가볍게 날아오르고 있었지만, 그 뒤를 숨가쁘게 기어서 올라가야 하는 나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일각 여를 따라 올라가다 보니 이젠 숫제 절벽 수준의 경사가 진 언덕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어떻게 올라갈 바를 몰라서 망설이려고 있다가 그만 포연강에게 느닷없이 멱살을 잡히고 말았다. "커, 커커컥." 내 멱살을 우악스럽게 거머쥔 그는 손쉽게 절벽을 휙휙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정상에 다다랐을 때까지 내 숨이 붙어 있기는 했다. 원망 어린 눈초리로 그를 매섭게 째려보았으나, 그도 마주 째려보았기에 얼른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정말 정신 상태가 제대로 박힌 인간들이 그리워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자네 허리라도 다정하게 안아주고 오르기를 바랬나? 내 장담컨대 내 힘을 못 이겨서 그 허리가 뚝 하고 부러졌을 거네. 그럼 완전 허리 병신이 되는 거지. 남자 구실도 못하고, 일평생 구걸만 하면서 사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걸세. 그 쪽이 더 좋나?" '젠장, 말이라도 좀 곱게 하지. 어떻게 하나부터 열까지 미운 짓만 골라서 하냐?' "아, 아닙니다요. 제가 언제 형님에 대해서 불평을 한 적이 있나요? 저야 언제나 감지덕지 할 뿐이지요." "하하핫, 그래? 빈 말이라도 듣기 나쁘진 않군. 어서 영감님을 뵈러 가세." 홍 영감님의 임종 직전이라 그런지 그의 웃음소리에 응당 실려있던 당당한 기세가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그도 슬픔이라는 것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인 것일까? "네? 네, 그, 그래야 지요." 낭떠러지 위로 막상 올라와 보니 드넓은 초야가 펼쳐져 있었다. 막 쌀쌀한 한파가 불어닥치기 시작한 시점인데도 푸릇푸릇한 풀들이 쌩쌩하게 돋아나 있었다. 특이나 소나무 같은 사철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서 겨울이 온다해도 그 푸르름은 여전할 기세였다. 뒤집어 말하면 사시사철 은신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말도 될 것이었다. 포연강이 비집고 들어가는 나무들 사이로 한참을 따라 들어가니 볼록 솟아 나온 흙무더기 언덕이 보였다. 조그마한 샛길로 돌아서 우회하기에 그대로 가보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흙무더기 그 자체가 은신처의 일부였다. 정확히는 지붕과 뒷담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마도 나무로 형태를 다진 후에 흙을 쌓아 올린 듯 싶었다. 드문드문 나무도 심겨있고 잡초와 풀들이 무성하게 나 있어서 그 누가 봐도 감쪽같을 것이었다. '흠, 그래도 좀 실망인걸. 무슨 진법이라던가, 함정이라도 숨겨있을 줄 알았는데, 그저 눈속임일 뿐이잖아.' "쿨럭 쿨럭! 허허 왔는가?" "영, 영감님!" 흙무더기와 절벽에 가로막혀 햇살 한 줄기도 안 들어오는 마당 위에 홍 영감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기침을 심하게 하면서 숨을 가쁘게 내쉬는 것을 보니 죽을 순간이 성큼 다가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솔직히 그와는 그다지 친분도 없었다. 나눈 대화도 몇 달을 통 털어 몇 마디 되지 않았다. 다만 망아루에서 호감이 가는 두 번째 인물이었는데, 이렇게 떠나 보내게 되다니 조금은 숙연해졌다. 령령은 언제 나타났는지 나보다 한 발 앞서서 도착해 있었다. 온지 얼마 안 되었는지 넝마 조각이 된 나삼의를 아직도 그대로 걸치고 있었다. 군데군데 새빨갛게 물이 들고 너덜너덜해진 나삼의가 조금은 선정적인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 더러운 성질만 아니람 얼마나 좋을까? "저 그, 그런데,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는 게……?" "쿨럭 쿨럭, 다, 다름이 아니라네. 특별히 자네한테 하고 싶은 말도 없었네." "그, 그럼 왜?" "그저 자네가 무사한 것을 보고 싶었다네. 구태여 핑계를 대라고 한다면 한 때는 자네도 망아루(忘我樓)의 식구가 아니었는가? 그래서, 내 임종을 지켜주는 녀석들 중 하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없잖아 있다네." "당, 당연하지요. 삼일장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겠습니다. 영감님." "틀렸네." "예?" "이 아이들이 삼년장을 치러 주기로 했다네. 그럼 자네도 삼 년 간 지켜주겠다는 뜻이로군. 고마우이." "……." 당황한 내가 엉거주춤 울거지상을 지으며 난색을 표명하자 병색이 완연한 가운데에도 미소를 떠올린 영감이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쿨럭 쿨럭, 헉 헉, 내 마지막 가는 길에 실없는 농담 한 번 해봤다네. 재미있었나?" "네? 아…… 하하하, 그, 그럼요. 재, 재미있었습니다. 영감님, 하하하하." '끄응, 죽을 때가 되니까 노망기라도 치밀었수? 왜 그러슈?' "붉으락푸르락 하는 자네 안면 변화가 무척 다채롭군. 나도 건강하던 시절에는 웃음이 많았던 인간이라네. 그 놈의 무형지독(無形之毒)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재미있는 여생을 보냈을 텐데……. 쿨럭 쿨럭 쿨럭! 카아악! 커컥!" 갑자기 홍 영감의 기침이 심해지면서 심한 각혈을 하였다. 더불어 심한 경련과 함께 기우뚱 넘어지려고 했다. 다급해진 내가 급히 그를 부축하려하자 옆에 서있던 주령령이 나를 강하게 밀쳐 내었다. "물러서! 각혈 속에 독이 들어있단 말이야!" 휙, 쿵! 그 바람에 미쳐 대비하지 못했던 나는 봇짐을 채 벗지도 못하고 벌러덩 넘어져 버렸다. 덕분에 봇짐이 풀어헤쳐지면서 온갖 내용물들이 땅바닥에 쏟아지고 말았다. 주령령과 포연강이 홍 영감의 병세에 신경을 기울이는 동안 난 내 물건들을 주섬주섬 정리해 넣었다. 그러면서 보고 말았다. 잊고 있었던 그 물건을! 떨리는 목소리로 홍 영감님에게 질문을 던졌다. "영, 영감님, 저, 저기 혹시 말인데요. 혹시나 지, 지금이라도 영감님의 손에 혈, 혈해진경(血海眞經) 해독편(解毒編)이 쥐어져 있으면 나으실 수 있나요?" "쿨럭 쿨럭, 허허, 하나도 안 웃기네. 그려. 그게 땅에서 솟아오르겠나?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하겠나?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게." '이, 이 영감쟁이가! 내가 당신들처럼 비정상적인 부류인줄 알아? 아무렴 내가 농담과 진담을 구분 못할까?' 발끈한 나는 주워들었던 독경 해독편 부분을 홍 영감님의 눈앞으로 냉큼 내밀고는 흔들어 보였다. "자, 보세요! 보시라고요! 제가 누구들처럼 실없는 소리나 하는 사람으로 보셨음 오산……." 휙, 쿵! 날 밀쳐내며 내 손에서 독경을 낚아 챈 령령은 휘둥그래진 눈으로 책자를 훑어보다가 바로 영감님에게 건네 드렸다. 투덜투덜 거리며 먼지를 톡톡 털면서 일어섰을 때에는 홍 영감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독경을 한 장 한 장 넘겨보고 있는 중이었다. 포연강의 눈도 휘둥그래져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더니 홍 영감의 입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마 그것이 진본인지 가짜인지 확신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었다. 책자를 빠르게 훑어보던 영감은 관심 가는 대목이 있었는지 한동안 정독을 하였다. 그러더니만 바로 눈을 감아버리고서 말 한마디 없이 운기조식에 빠져 버리는 것이었다. 잠시 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뜬 홍 영감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후우, 후우, 그, 그렇군. 계속 고민하고 있는 문제였는데, 이렇게나 간단한 이치였다니. 정말, 정말 일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인연으로 성사되는군. 하늘이 아직 날 필요로 하지는 않는 모양일세. 일단 급한 불은 껐네. 그런데, 설마 자네 나 때문에 이것을 빼낸 것인가?" '이제야 나의 진가(眞價)를 알아주려는가 보군. 헤헤헷.' 당당히 가슴을 펴고 어깨를 으쓱거려 보인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떡거렸다. "아무렴요. 당연히 영감님을 생각해서 몰래 빼놨지요. 제가 누굽니까? 한다면 하는 망아루의 일등 조교 점소이 아니겠습니까?" "껄껄껄, 정말 일이 공교롭게 흘러가는군. 소맹주 꼬맹이가 귀찮은 일은 다 떠 안고 무림맹 아이들이 대신 피를 흘려준 덕택에 우린 목적한 바를 은밀하게 이룬 셈이군. 우리조차 속아넘어간 셈이니 다른 인간들이야 오죽할까? 정말 고맙네. 고마워. 자넨 진정으로 일등 조교 점소이가 분명하이. 껄껄껄." 이때다 싶은 나는 잽싸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두 토해내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잘 풀려 가는 거 내 밥그릇을 마저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저, 저기 그래서 말인데요. 드리고 싶은 말씀이 몇 가지 있는데요." "엉? 그래, 해보게나." "첫째, 아시다시피 전 망아루(忘我樓)의 일등 조교 점소이 이긴 했어도 수라사살(修羅四殺)이라고 불릴 이유는 없거든요. 전 그저 무림과는 무관하게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대로 절 보내주셨으면 하는데요." 잠시 침묵을 지키며 먼 산을 바라보던 영감은 슬그머니 곁눈질을 하더니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떡여 주었다. 뭐, 찜찜하긴 했지만, 좋게 해석해서 허락으로 보았다. "둘째, 일이 성사되면 금원보 삼십 개를 준다고 포 형님이 약속을 하셨더랬지요. 이제 일이 성사된 셈이니 금원보를 주세요. 형님."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포연강 녀석에게로 모였다. 주령령은 나 몰라라 하는 식으로 입을 닫아버린 지 오래였고, 홍 영감도 애매 모호한 표정으로 달관하고 있었다. 당사자인 포연강은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그답지 않게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쿨럭쿨럭 거렸다. "아, 그게 말이지. 최근 망아루 경제 사정이 형편없었거든. 뭐, 애초에 장사를 목적으로 연 게 아니라서 적자 행진이었다구. 자네한테 준 금원보 하나가 마지막이었다네. 아, 그렇게 노골적으로 째려보지 말게나. 당시로는 자네라는 존재가 너무 불안스러워서 그냥 입막음용으로 준 거였다네.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한 동안 부들부들 떨던 나는 사군자 달마도 액자와 차근차근 모아놓은 게 적지 않다는 데 위안을 삼기로 했다. 그 간 간간이 금원보를 만져볼 수 있었던 것도 알고 보면 혈해진경(血海眞經)덕을 알게 모르게 본 셈이었다. 이대로 떠나도 작은 주루나 객잔 하나를 차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아니꼽기는 했지만, 아쉬울 것도 없었다. "에휴, 포 형님이 저를 그렇게 밖에 보지 않았다니 정말 실망, 실망이네요." "아니, 그게 나는 말이지……." 크크크, 금원보는 못 챙겼지만, 모두의 앞, 특히 홍 영감님 면전이라 평상시처럼 주먹으로 밀어붙이지도 못하고 허둥대는 꼴이라니, 이런 것을 호가호위(狐假虎威) 해야 하나? "좋습니다. 좋다구요. 전 이제 가렵니다. 모든 게 좋게 끝난 셈이니 더 있을 이유가 없군요. 영감님 부디 옥체 보존하세요." "흠, 알겠네. 난 좀 더 진경을 읽어보고 내독(內毒)을 다스려야 하니 며칠은 꼼짝달싹 못할 것이네. 부디 잘 가게. 혹시라도 다시 보게 된다 해도 문전 박대하지 않을 테니 마음 푹 놓도록 하게나." '아니, 다시 보긴 왜 봐? 절대로 내 발로 기어서 들어오면 내가 내 성을 간다.'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을 갈아도 상관이 없었다. 이미 한 번 성과 이름을 갈지 않았던가? 내 본명이 뭐냐구? 미안하지만, 오래 전에 잊기로 작정한 것이라 나 자신도 잊어버린 지 오래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름 때문에 곤욕을 치른 쓰린 기억까지도 더불어 잊은 지 오래였던 것이다. 홍 영감님한테만 가볍게 절을 한 나는 휭 하니 걸음을 옮겼다. 정식으로 허락도 받은 셈이니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하여튼 기분이 홀가분한 것이 날아갈 듯 싶었다. 바로 이런 게 자유인가 싶었다. 비록 올라올 때는 경사가 급해서 포연강의 같잖은 협조 아래 겨우 올라왔지만, 내려갈 때라면 얘기가 다르다. 경사가 조금만 완만한 데라면 대롱대롱 매달려서라도 내려가면 그만인 것이다. 바깥으로 나와서 한참을 뒤진 끝에 그런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막상 떠날 순간이 오니 감회가 새로와 졌다. 그 간 집을 홀홀 단신으로 나와서 많은 일이 있었다. 심심하면 두들겨 맞기 일쑤였고, 내 일생을 통 털어 잊지 못할 인연들도 있었다. 그리고, 절망과 좌절의 순간도 있었지만, 난 이렇게 다시 일어섰다. 이제 괴롭고 힘들었던 나날들은 안녕이다. 뭐 수배 전단지 때문에 껄끄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막말로 잡아떼면 그만이다. 나처럼 평범하게 생겨먹은 인간이 어디 하나 둘이겠냐고? '크흐흐흐, 이제야말로 불행 끝 행복 시작이다. 당당하게 내 주루를 하나 차려서 떵떵거리며 알콩달콩 살아보는 거야. 이제는 그 누구도 날 막을 수 없지. 암, 그렇고말고!' 한참 들떠서 막 경사진 곳으로 내려가려 할 무렵 내 뒷덜미를 낚아채는 무서운 악력이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동안 세상이 빙빙 도는 묘한 정경을 접해야 했다. 덥썩, 부웅. "허어어억, 이, 이게 뭐야!" 철푸덕! 말 그대로 찰떡처럼 언덕배기 위에 내팽개쳐진 나의 울분은 그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감히 누가 나를 이 꼴로 패대기를 쳤단 말인가! 설사 포연강 녀석이라고 해도 당당히 따지고 들 작정으로 두 눈에 힘을 주고 이맛살을 한껏 찌푸려 보였다. 그러나, 상대를 확인한 순간 그 의도는 황망히 물거품이 되었다. "헤헤헤헤, 령령 아가씨군요. 무, 무슨 일이신데, 제 발을 붙잡으시는 것인지?" "일이야 뻔하지. 좋은 말 할 때 되돌아가라. 앙?" "무슨 소리세요? 홍 영감님이 분명 저 가도 된다고 하는 거 옆에서 듣고 계셨잖아요." "홍 영감님은 홍 영감님이고, 난 나야. 내가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그동안 나한테 그렇게 터졌으면서 아직도 수라삼살(修羅三殺)의 실세가 누구인지 눈치 못 챘어?" '정말 이 년이 가지가지로 하네. 더러워서 정말.' "어허, 이게 어디서 눈을 부릅뜨고 난리야? 눈깔 안 깔어? 고개 안 숙여? 주먹 쥐면 어쩔 건데? 한 대 칠 거냐? 엉? 많이 컸다. 그래 한 대 쳐 봐. 어서." "아, 아니에요. 령령 아가씨, 제발 갈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허락해 주실 거지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비굴하게 그녀를 올려다보며 손을 싹싹 비볐다. 이 년이 뭔가 자존심이 상해서 편하게 보내줄 생각이 없는가 본데, 그래도 자기가 어쩔 거야? 영감님이 허락한걸 번복시킬 수 있겠냐고? "안 돼." "헉, 왜, 왜요!" "이미 넌 우리의 존재를 알고 있잖아. 순순히 내보냈다가 무림맹(武林盟)의 개들이 냄새를 맡으면 오히려 우리가 곤란해져. 게다가 말이지. 바깥의 인간들은 우리를 더 이상 수라삼살로 안 봐. 수라사살(修羅四殺)로 본다구. 그런 상황에 막둥이인 네가 맘대로 탈퇴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겠어? 안 그래?" '아니, 우길 걸 우겨라. 그런 억지 주장이 어디 있어?' "……."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보내 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망연자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녀를 노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찔리는 게 있을 그녀로서는 나의 무덤덤한 시선을 감히 받아넘기지 못할 것이다. "어쭈, 이게 눈을 마구 부라리네. 많이 컸다. 정말. 좋게 말로만 넘어가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좋아. 셋 중에 하나를 택해. 첫째! 반 시진 동안만 실전수련을 쌓고서 조용히 기분 좋게 따라간다. 둘째! 오늘 해가 떠 있는 동안 종일토록 맞고 질질 끌려간다. 셋째! 그냥 여기서 몇 날 며칠이 걸려도 죽을 때까지 맞는다. 자 어느 것으로 할래?" "……." 정말 어이가 없어서,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어째서 저렇게 인간이 치밀하게 꼬일 수가 있지? 독경 해독편까지 구해 줬으면 감지덕지해도 모자를 판에 이게 뭐냐고? 도대체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냐? "셋 셀 동안 결정해라. 셋! …… 둘! …… 하……." "잠, 잠깐만요. 첫, 첫 번째로 할게요." "그래? 그냥 좋게 말로 할 때 따라오면 될걸 가지구.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니? 좋아, 따라와." 빙긋빙긋 미소짓는 그녀의 미모가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더욱 악랄하면서 요사스럽게 빛이 났다. 난 그저 질질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참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도 하지. 터지기에는 딱 좋은 날……. 퍽! 퍼퍽! 퍼퍼퍼퍼퍽! 퍽! 퍽!……. '에구구, 그래도 좀 살살 때려. 어떻게 예전보다 더 세진 것 같잖아!' 1부 완결, 2부에 계속됩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4-22 08:21:03 고친날 2005-05-02 15:14:35 읽은수 9337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1)-호접몽-2부의 시작.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호접몽 실내는 으리으리한 하얀 대리석으로 그 위용을 빛내고 있다. 죽 늘어서 있는 기둥들을 감아 돌며 똬리를 틀고 있는 용 조각만 해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나의 좌우로는 꽃보다 더 꽃다운 미녀들이 하늘하늘 꽃부채를 흔들어 주고 있었다. 싱그러운 울금향이 내 주변을 맴돌았다. 최고 상석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내 머릿결이 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또한 그녀들 좌우로 수많은 병사들이 인형처럼 꼿꼿하게 시립해 있었다. 처음에는 꿈인지 생시인지 의아한 마음에 눈을 비벼 보았다. 그러나, 몇 번을 비벼 보아도 눈앞의 정경은 변하지 않았다. 기분이 무지막지하게 흐뭇해졌다. 더군다나 나의 의자는 나무로 만든 것도 아니요, 돌로 만든 것도 아니요, 쇠로 만든 것도 아니었다. 내 엉덩이를 받쳐 주고 있는 의자는 살아서 숨쉬는 생명체였다. 정확히는 구레나룻이 더부룩하게 났으면서 거대한 덩치를 지닌 남자였다. 힐끔 안면을 흘겨보니 한 때 나를 무섭게 핍박해 왔던 포연강(鮑緣强)이라는 인간이었다. 그의 안면의 정체를 알아 챈 나는 속에서 울컥 치미는 게 있어서 그대로 등짝을 타고 올라 발을 동동 굴러 버렸다. 그러나, 녀석은 신음 소리 하나 흘리지 않고 꾹 참는 것이 아닌가? 누가 이기나 끝까지 해보려 했던 나는 결국 제풀에 지쳐 그만 두고 말았다. 유치찬란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식어 버린 흥미를 돋구는 데는 술과 미녀가 최고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그런데, 내가 술을 좋아했던가? '아무렴 어때?' 그저 별 생각 없이 손바닥을 두 번 쳤다. 그러자 은은한 풍악 소리와 함께 선녀에 비견될 만한 여섯 명의 미녀들이 새하얀 날개옷을 휘날리며 주안상을 들고 와서는 다소곳이 내 앞에 내려놓는 것이었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진기명기 요리들이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흘러 넘쳤다. 내 손이 막 요리로 옮겨지려는 찰나였다. 웬 늙은이가 내 앞을 슬며시 막아서며 은 막대기로 요리들을 하나하나 찔러 보는 것이었다. "드셔도 좋습니다. 아무 이상이 없사옵니다." '어라, 목소리가 낯익은데.' 구석에 가서 찌그러지듯 허리를 숙이고 있는 노인네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다가 무릎을 탁 쳤다. 그는 바로 홍 영감이었던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한 마디 할까 하다가 관두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별 유감이 없었으므로 그냥 좋게 넘어가기로 했다. 눈앞의 빈 술잔을 들었더니 역시 아니나 다를까 내 옆에 부복해 있던 미녀가 재빨리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정신이 없었는지 그만 술을 넘치게 따라서 내 황금 비단 옷을 술에 흠뻑 적셔 버리고 말았다. 화가 난 나는 술잔을 상위에 꽝 내려놓았다. 다른 미녀들이 뛰쳐나와 술을 닦아 내었지만, 젖어 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는 법이었다. 술을 흘린 미녀는 멀찍이 사사삭 물러나서는 바닥에 철푸덕 엎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폐하! 자비를 베푸시옵소서!" '쟤는 무슨 헛소리를? 내가 니 목이라도 베겠냐? 잠깐 어디서 봤더라?' "고개를 들라." 잠시 움찔한 여인은 엎드린 그대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양끝이 살짝 치솟아 있는 왕방울 같은 두 눈망울, 오뚝한 코와 앵두같이 도톰한 빨간 입술, 백옥같은 살결, 갸름한 얼굴선을 보니 틀림없는 그녀였다. 밤낮없이 야차처럼 날 괴롭혀 왔던 냉혈마녀(冷血魔女) 주령령(周鈴鈴)! 행복에 차 올랐던 내 단꿈을 산산이 깨트려 버린 원수 덩어리! 나도 모르게 치솟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용서할 수 없다! 당장 치도곤(治盜棍)을 대령하라!" "폐하! 제발 은혜를!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꺄아아악 ……!" 좌우에 시립해 있던 병사들이 즉시 령령을 버드나무로 만든 길고 넓적한 치도곤에 손발을 묶고는 인정사정없이 치마를 벗겨 내렸다. 그녀의 새하얗고 탐스런 엉덩이가 유감없이 드러나 버렸다. "폐하! 폐하! 제발, 제발! 자비를……!" 령령의 비명 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지자 잠시 굼떠 있던 나의 분노에 불이 당겨지고 말았다. 왠지 모르게 짜증이 치밀어 올라 버렸다. "재갈을 물리고 매우 쳐라! 내가 그만 할 때까지 매우 쳐라!" "예!" 곧 양 소매를 걷어 부친 두 장정이 그녀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는 치도곤에 묶인 그녀의 좌우에 서더니 맞바로 곤장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철썩! 철썩!……! "으읍! 으으읍! 흐윽!" 재갈 때문에 비명을 못 지르고 목울림만 지르던 그녀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내렸고, 기어이는 삼십 대를 칠 때쯤 실신을 해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내려치려던 그들에게 손을 들어 일단 제지시켰다. 령령을 내려치게 하면 할 수록 내 가슴속에 한이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실타래가 복잡하게 뒤엉키듯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일단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들 물러가라." "예! 폐하." 곤장을 내려치던 병사들은 물렸으나, 령령을 풀어 주지는 않았다. 내 속에 쌓인 한들이 풀리려면 뭔가 다른 방향으로 복수를 해야만 했다. 그것에 대해서 골똘히 심사숙고(深思熟考)하고 있을 때였다. 다른 이들과 달리 당당히 허리를 편 채 내가 앉은 자리까지 올라오는 자가 있었다. 언뜻 보면 백면 서생과도 같은 차림이었던 그는 무척이나 말쑥하고 아담하면서도 귀여운 소년이었다. 그리고, 무척 그리운 존재이기도 했다. 소방(蘇芳), 니가 와 주다니! "형님, 무슨 일로 그렇게 고민을 하십니까? 안색이 어두우시군요." '형님? 흠, 그런가? 너와 나의 관계가…….' "어서 오너라. 안 그래도 좀 상의해 볼 일이 있었느니라." "하하하하, 하찮은 저에게 상의를요? 무슨 일이시기에……?" 난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나면서까지 그를 맞아 드리려 했다. 그를 더 가까운 곳에서 보고 싶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예의 울금향이 알싸하게 퍼져 왔다. 여전히 그는 울금향을 자주 쓰는……. 왼쪽 허리가 갑자기 뜨끔하면서 축축해져 왔다. 전신에 경련이 부르르르 일었지만, 꾹 참고 고개를 숙여 보았다. 단도였다. 어느새 뽑았는지 소방의 오른손에 쥐여져 있던 단도가 내 허리를 관통하고 있었다. "어, 어째서?" "크크크, 그것을 몰라서 물으십니까? 형님? 너무 오랫동안 왕좌에 앉아 계셨지 않습니까? 슬슬 물러나실 때가 되셨으니 제가 영원히 잠재워드리지요."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그의 안면은 여전히 해맑아 보였다. 그 미소와는 달리 단도를 쥔 그의 오른 손은 내 허리를 찌른 것도 모자라 비틀어 버리고 있었다. 이제 막말로 대라신선이 와도, 화타가 와도 날 살리기는 글러 버린 셈이었다. 그런데도 그다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이것도 운명이려니 하며 그를 끌어안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그의 품안에서 죽고 싶었던 것이었다. 내 옆구리를 비틀어 대던 단도의 움직임이 멈췄다. 울금향의 냄새가 내 콧잔등을 어지럽힌다. 이대로, 이대로 잠드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그와 함께 한 마지막을 영원히 기억할 테니……. 분명 피가 질척거릴 정도로 찔렸는데, 바로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 들지는 않았다. 난 더더욱 힘을 주어 그를 안았다. 다시는 그와 헤어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런데, 그의 가슴이 뭉클거리면서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내가 숨쉬기가 힘이 들 정도로 압박해 오는 것이었다. 궁금한 마음에 끌어안았던 손을 풀고 그의 가슴을 움켜쥐어 보았다. 그의 동그란 가슴은 내 손바닥으로 꽉 쥐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걱정이 되어 그에게 되묻고 말았다. "소방, 너 가슴에 혹이 났구나. 병이라도 걸린 게냐?" 퍽! 쿵! 붕 떠오르는 느낌과 함께 뒤통수에 가해진 타격 때문에 눈을 번쩍 떠버렸다. 순간 나의 눈앞으로 녹피 가죽신에 새하얀 버선발을 신은 늘씬한 다리가 보였다. 예전 처녀 귀신놀이에 빠져있을 때처럼 새하얀 나삼의를 걸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다리 옆선이 갈라진 치파오(旗袍)는 가뜩이나 다리가 긴 그녀의 각선미를 유감없이 드러내 주었다. 몸에 착 달라붙어 안 그래도 굴곡이 뚜렷한 그녀의 몸매를 관능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약간 홍조를 띤 주령령이 갸름한 새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왕방울 만한 그녀가 새눈으로 내려다보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젠장, 꿈이었군. 어쩐지 기둥에 박혀 있는 용조각이 정말로 꿈틀거린다 싶긴 했지. 그 때는 그러려니 했는데, 역시 꿈이었군. 그래도 너무나 생생했는걸.' "어서 일어나.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상쾌한 아침이야. 실전 대련은 이런 때 하는 것이 가장 좋아. 바로 지하로 내려와." "네, 네, 저, 저기 세수는 하고……." "바로 내려와. 좋은 말로 할 때!" "네, 넵!" 드르륵, 쾅! '쳇, 괜히 짜증을 부리는구만. 도대체 왜 저러는 것인지 이유나 좀 알자.' 잠을 자면서 한 바탕 난동을 부렸는지 솜이불은 침대에서 떨어져 마루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솜이불을 탈탈 털어서 올린 후 내가 즐겨 입는 마의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지하로 억지걸음을 옮겼다. "어이구! 허리야." 나도 모르게 눈길이 허리로 옮겨졌다. 상의를 젖히고 배꼽 옆 허리 부분을 바라보니 시퍼렇게 멍이 든 것이 보였다. 누군가의 엄청난 악력으로 꼬집힌 듯 했다. 그 누군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간인지는 내 입으로 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침대 맡에는 여전히 그녀가 애용하고 있는 울금향이 강렬하게 배여 있었다. '어쩐지 꿈속에서 울금향이 알싸하게 흐른다 했다. 허리가 관통 당하는 고통까지 현실감 있게 느껴지더니 아주 절묘한 순간에 꼬집히고 있었구만.' 삐꺽삐꺽. 규모가 망아루(忘我樓)보다 두 배는 커진 듯한 무환루(無患樓)의 기나 긴 복도를 가로지르며 맨 아래층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쿵. 창고문을 열고 들어서자 코끝을 간질이는 주향(酒香)이 머리를 어지럽게 흔들었다. 아무래도 난 체질상 술과는 상성이 맞지 않는 모양이다. 이 지독한 술 냄새를 맡은 지도 어언 한 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적응이 쉬 되지를 않는다. 수십 개의 수많은 술통들 중에서 맨 끝의 술통만은 제대로 된 술통이 아니었다. 물론 술통 뚜껑을 열면 새까만 흑주(黑酒)가 고개를 내밀고 있지만, 실제로 흑주인 까닭은 그 아래 막힌 바닥을 감추기 위한 하나의 눈가림일 뿐이다. 통의 밑동을 힘껏 움켜잡고 돌렸다. 간신히 내 몸 하나 넣을 만한 공간이 드러났다. 재빨리 몸을 집어넣어야만 했다.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지 시간을 끌면 저절로 스르륵 닫혀 버려서 중간에 허리가 껴버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때마다 틈새에 몸을 끼운 채로 다른 이들의 도움을 기다려야만 했다. 어쨌거나 비밀 통로였으므로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까? 새로이 무환루(無患樓)라고 홍 영감님이 이름 붙인 지 벌써 한 달이 지나간다. 되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들이 너무나 은밀하면서도 신속하게 이뤄졌다. 나를 제외한 수라삼살(修羅三殺)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뜻밖의 조력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4-24 18:19:14 고친날 2005-05-02 15:15:22 읽은수 8370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2] 수라사살(修羅四殺)이라는 멍에를 벗어 던지고, 세상 밖으로 나서려던 바로 그 날, 환희에 가득 찼던 환상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그 날, 난 나의 주적이자 명목상 직속 선배 격인 주령령(周鈴鈴)에게 질질질 끌려가 실전수련이라는 미명 하에 처참하게 뚜들겨 맞아야만 했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비틀비틀 되돌아 온 나에게 왜 왔냐고 되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올 줄 알았다는 듯한 그들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난 그저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만 했다. 포연강(鮑然强)은 원래 그런 인간이라고 치자. 철썩 같이 믿었던 홍 영감까지 안면에 철판 깔고 모르는 척 운기조식(運氣調息)에 열중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던 바였다. 그 날은 내가 정식으로 수라사살의 일원이 된 날이었다. 물론 무공이 되는 것도 아니요, 머리가 받쳐주는 것도 아니요, 하다 못해 인물도 그저 그런 내가 내세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날 강제로 수라사살(修羅四殺) 속에 끼워 넣은 이유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밤마다 귀신처럼 싸돌아 다니는 귀안(鬼眼)의 령령, 그녀의 장난감으로 날 떠밀어 넣은 것이리라. 뿐만 아니라 종종 정신병 발작을 일으키면 대신 칼받이가 되라고 날 끼워 넣은 것이리라. '이 악독한 놈들! 언젠가, 그 언젠가는 반드시 니 놈들을 처절하게 독살한 후 맷돌에 득득 갈아서는…….' 끼이이익. "막내야, 이 으슥한 한밤중에 청승맞게 마루 끝에 쭈그리고 앉아서 뭘 그렇게 씨부렁거리고 있는 게냐? 내 귀가 간질간질하구나." "아, 포, 포 형님? 청, 청승맞다니요? 한, 한참 달 밝은 밤 아래 세상에 가득 찬 원기를 들이키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우는 중이었는데요." 호연지기는 개뿔, 간만에 제대로 터져서인지 전신이 욱신욱신 거려서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결국 방밖으로 기어 나와서 수라삼살을 씹고 있었던 거지. 뭐. "호연지기(浩然之氣)? 하긴 사물에서 해방되어 자유스럽고, 유쾌한 마음을 가지라는 세 번째 어구가 자네한테 딱이긴 하군. 불가에서는 그것을 일컬어 금강불괴(金剛不壞)라고 한다지 아마? 많이 키우게. 혹시 아는가? 진짜 금강불괴(金剛不壞)가 되어 이 험난한 세상 여파 속에서 살아 남는데 도움을 줄지……?" "……." 호연지기에 대해서 그가 떠드는 것을 보니 제법 한 유식해 보였다. 나야 한량들이 툭하면 내뱉는 말을 귀동냥으로 듣다보니 어쩌다가 알았을 뿐이었다. 호연지기를 키우면 금강불괴(金剛不壞)가 된다고? 험난한 세상까지 갈 필요도 없다. 그 이전에 미친 령령한테 죽사발이 되도록 맞고 뒤질 테니 말이다. "허허, 부담스러우이. 그만 째려보게. 자네 불만이 뭔지 모르는 바는 아니네 만, 불가항력이라네. 그저 그러려니 순응하면서 살다보면 언젠가는 적응이 될 걸세." '어이구, 아주 빨리 맞아 죽으라고 굿을 해라. 굿을!' "난 갈 길이 급해서 가보려네. 저기 구석 모퉁이가 부엌인데, 내가 없는 동안 밥은 자네가 하게나. 령령한테 부엌을 맡겼다가는 자네와 홍 영감이 소화불량으로 이 세상을 하직할까 염려된다네." "어, 어디로 가시는데요?" "우리가 다음에 살 곳을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럼 나 없는 동안 수고하게나." "잘 다녀오십시오. 형님." 그는 바람처럼 신형을 날려 사라지고 있었다. 저 거대한 체구가 휙휙 날아다니는 것은 아무리 봐도 적응하기 어려워 보였다. 처음에 그가 소화불량 운운했을 때는 농담인줄 알았다. 정확히는 그냥 흘려 들어서 뭐라고 떠들었는지 잘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내가 늦잠을 자버린 어느 날, 뭐가 타들어 가는 냄새를 맡고는 화재가 난 줄 알고 맨발로 후다닥 뛰쳐나가고 말았었다. 그 진원지는 다름아니라 부엌이었다. 이 년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침 일찍 부엌에 들어가서 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밥이라는 존재를 식탁에서 접하고 난 이후로 두 번 다시 늦잠을 자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게 되었다. 홍 영감이야 두통 때문에 밥을 못 먹겠다고 슬그머니 자리를 떠도 누구 하나 붙잡을 사람이 없지만, 난 누렇게 떠서 탄내가 밴 밥을 억지로 으적으적 삼켜야만 했다. 면전에 령령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막내 주제에 감히 어디로 내뺀단 말인가? 결국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나는 뜻밖에도 환하게 웃는 그녀의 아찔한 미소를 접할 수 있었다. 평상시 날 후려칠 때의 령령은 야차현신이라도 한 듯 매서웠지만, 그 때만큼은 천상의 선녀가 내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 밥은 먹을 가치가 있군. 항상 냉혈마녀(冷血魔女)같던 령령의 안면에 선녀(仙女)가 강림할 때도 있고 말이야. 종종 먹어줄까?' 그 생각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일 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밥을 먹었으니 실전수련을 하자는 그녀를 순순히 따라 나선 순간 절묘하게도 뱃속에서 요동을 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말 그대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이었다. 다른 때라면 적어도 그녀의 주먹을 피해서 뜀박질이라도 했을 테지만, 그 순간은 뛰기는커녕 서있기도 힘들었다. 령령이 한 번 주먹을 펼치면 그 자신도 자제를 못하는지 적어도 반 시진동안은 놓아주지를 않는다. 밖으로는 령령이 두들기고 있고, 안으로는 뱃속에서 난리법석을 떨어되니 고통도 그런 고통이 없었다. 뒷문 괄약근에 힘이라도 빠지면 어떻게 될지 과히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기에 필사적으로 다리를 꼬운 채 령령의 구타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제일 위험했던 순간은 복부를 걷어 채였을 때다. 그 땐 색다른 의미로 내압과 외압의 상충으로 떼굴떼굴 굴러야만 했다. 결국 무사히 뒷간으로 기어가기는 했다. 그 때의 끔찍함과 처절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르르르 치가 떨린다. 그 이후로 그녀의 부엌 출입을 막기 위한 나의 피눈물나는 사투가 이어졌다. 새벽이 채 오기도 전에 눈이 떠지는 것은 기본이요, 심지어 부엌 아궁이 앞에 이부자리를 깔아놓고 잠을 자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구관이 명관이란 말이 있듯 포연강이 그리워지기까지 했다. 웃지 못할 처절한 사투가 한 달여간 지속될 무렵, 홍 영감님은 내독(內毒)을 말끔히 중화시켜 버렸다고 했다. 대신 내공의 절반을 잃었다나 어쨌다나? 그는 앓던 이 빠지고 난 시원함을 과시라도 하듯 무섭게 해독편을 탐독하는 한 편, 매일 아침마다 차가운 한파에도 불구하고 아침 산보를 즐겼다. "난 말이지. 이번 겨울눈은 보지 못할 줄 알았다네. 원래 겨울이 싫었지만, 올해부터는 좋아질 듯 싶으이." 겨울에 대한 그의 감상편이었다. 혈해진경(血海眞經) 해독편(解毒編)에 대한 뜨거운 독서열도 뜨거웠다. 가끔 조식도 거르기 일쑤였다. 특히 부엌에서 조금이라도 탄내가 나면 방문까지 걸어 잠그고 탐독에 빠져들었다. 설사 내가 실수로 밥을 태웠다고 해도 말이다. 령령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어디론가 사라지기 일쑤였다. 어쩔 때는 밤새도록 안 들어올 때도 있었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절대로 부엌 아궁이 자리만은 사수하고 말리라 마음먹으며 보낸 나날이었다. 그렇게 두 달여 정도 지나가니 바람과 함께 사라졌던 포연강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가 오자 모두들 솜옷을 걸쳐 입고 행낭을 챙겨 들었다. 떠나려한다는 것을 직감한 나도 마의 위에 솜옷을 걸쳐 입고, 침대아래 잘 숨겨놓은 나의 봇짐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봇짐에 꽂혀있어야 할 나의 고가 액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헐레벌떡 뛰쳐나와 사방팔방 날뛰는 나를 붙잡아 세운 포연강은 자초지종을 듣고는 구레나룻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런, 몰랐나? 새로 옮겨갈 주루를 맨 손으로 강탈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자네 액자를 팔아서 좀 융통했지. 아슬아슬하게 돈이 되더군. 어이, 흥분하지 말게. 우리 수라사살(修羅四殺)은 니 것, 내 것을 가리지 않는 훌륭한 전통이 있다네. 막내인 자네가 감히 그 전통을 깨겠다는 것은 아닐 테지? 자자, 인상 풀고 그만 가자구. 갈 길이 멀다네. 먼저 갈 테니 잘 따라오게나." "내, 내 돈,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서 씩씩거리는 새 주령령에게 손목을 덜컥 붙잡힌 나는 그대로 언덕을 날아가야만 했다. 새찬 겨울 바람을 맞았지만, 묘하게도 추위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너무나도 빠르게 날아가는 통에 현기증마저 느낀 나는 결국 화를 삭히지 않을 수 없었다. 매달려 가는 그 자체로도 정신이 없었으니 말이다. 낮에는 일반 행인들 속에 섞여들어 천천히 걸어 다녔다. 잠도 낮 시간동안에 허름한 객잔방을 두 개씩 빌려 각각 나눠서 잠들었다. 령령과 내가 한 방을 썼는데, 물론 난 찬 마루 바닥 위에서 새우잠을 자야만 했다. 그것도 지극히 짧은 시간동안 뿐이었다. 보태면 이마저도 내 몇 없는 금원보 강탈로 해결되고 있었다. 이제는 망아루 시절 급료로 받은 은자 몇 개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예 자포자기 상태로 접어든지 오래였다. 한 겨울인지라 밤 시간이 상대적으로 훨씬 길었다. 밤에는 인적이 드문 숲길을 골라 경공을 펼치며 야산을 넘곤 했다. 물론 이때도 령령에게 대롱대롱 매달려서 끌려가다시피 했다.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지면을 스칠 때마다 천천히 가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저 마음뿐이었다. 밤 시간이 되면 저절로 두 눈에서 시퍼런 불꽃을 내뿜는 령령이다. 이때는 성질까지 한 층 더 날카롭고 차갑게 변한다는 것을 누적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삼척 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냥 잠자코 끌려가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구타없이 넘어가는 일도 없었다. 해가 뜨고 동이 터 오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실전수련 시간이 돌아왔다. 단지 반 시진이 아니라 반 식경 동안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이뤄졌다. 그렇다고 특별히 편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평상시보다 두 세 배는 더 강하게 후려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폭풍과도 같은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온 몸이 너덜너덜 멍투성이로 변해버리곤 했다. 하여튼 별 의미 없는 것까지 일일이 챙겨 들어서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니까. 그런 우여곡절 끝에 장장 이 주가 지나서야 절강성(浙江省)의 성도(省都)이자 최종 목적지인 항주(杭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처음 주루에 들어섰을 때에는 손질도 덜 되었고, 현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 청소를 계속 해왔는지 제법 말끔했다. 그 곳에 맨 처음 발을 들여놓은 홍 영감님이 한 마디 던졌다. "이 곳이 우리가 앞으로 지낼 새 집이다. 이 곳에 발을 들이면 근심을 잊는다는 뜻에서 무환루(無患樓)라고 부르자." 그래서, 주루의 이름은 무환루(無患樓)가 되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4-26 14:11:16 고친날 2005-05-02 15:16:22 읽은수 8205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3] 끼이이익. "에, 에구머니나!" 야심한 시각이었던 관계로 주루 현관문이 저절로 열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짤막한 신음과 함께 서너 발자국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그러나,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아니 되려 홍 영감은 감개가 무량한 듯 아련한 시선으로 현관을 주시하고 있었다. 사박사박. 주루 현관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여인이었다. 안면에 새겨진 잔주름 덕에 나이는 좀 들어 보였지만, 왠지 모를 현숙함과 지성미가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더구나 전신을 수풀처럼 푸른 녹의로 감싸고 안면에는 푸른 풀처럼 생기 어린 미소를 화사하게 떠올린 중년 여인이었다. 가느다란 허리에는 지금까지 걸치고 있었던 듯한 녹포가 둘러져 있었다. 틀어 올린 머리에 꽂혀있는 두 개의 옥비녀까지 푸른빛을 띄우고 있었다. '지독히도 녹색을 좋아하는 아줌씨로군. 온 몸으로 '난 녹색에 환장했어요.' 하고 노래를 부르는구만." "오셨군요. 연락을 받고는 바로 달려와서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늦으셨어요. 홍 오라버니." '홍, 홍 오라버니?' "허허허, 미안하게 됐다. 녹매, 정말 오랜만이구나." '녹, 녹매? 이, 이 사람들이…… 시아버지와 며느리 뻘 되는 인간들이…… 이, 이거야 원. ' 그녀의 뒤로는 키가 멀대같이 큰 흑의 남자가 그림자처럼 뒤따르고 있었다. 특히 안면이 길쭉한 그는 왼쪽 눈과 왼 볼을 가르는 검상 덕에 애꾸눈을 하고 있었다. 그 냉랭한 분위기가 앞의 화사한 중년 여인과 사뭇 대조적으로 비쳐졌다. 물론 령령의 냉막함과 비교하기에는 현저히 떨어졌지만 말이다. 한참동안 녹매라 부른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홍 영감은 천천히 걸어가 중년 여인의 앙상한 손모가지를 어루만져 주었다. 중년 여인은 말없이 미소를 띄웠지만, 그렁그렁 빛을 머금은 두 눈에서는 금새라도 눈물이 똑똑 떨어져 내릴 듯 했다. 이루 헤아리기 힘든 비애와 반가움, 그리움이 한 번에 터져 나오는 듯 했다. 전에도 비슷한 장면을 본 기억이 있었다. 남궁현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주령령의 모습이 그러했었던 것이다. '젠장,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는데…….' 문득 여인의 뒤로 시선을 던진 노인장의 안면에 기이한 이채가 떠올랐다. 그의 하얀 수염이 부르르 떨린 듯도 했다. "변고가 있었군. 그들이 왔었던가?" "휴우, 그들이 직접 왔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들과 연계한 내부 동조자 덕에 안마당을 내주게 되었지요. 북천위(北川衛)의 눈은 그 때 절 지켜주다가 다친 거예요." "이, 이 천벌을 받을 놈들, 아무 연관도 없는 너를 건드리다니! 내 반드시 열 배, 백 배로 돌려주고 말겠어!" 홍 영감이 그렇게 분노에 사로잡혀 살기를 내뿜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거의 언제나 졸기만 했으나, 깨어 있을 때도 시종일관 침착함을 잃지 않던 노인이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녹의 여인이 홍 영감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래도 나이 차가 너무 큰 거 아니야? 흠, 할아버지 손녀 뻘이 아닌 것이 다행인지도 모르지. 좋게 생각해주자.' 녹의 여인은 전신을 부르르 떠는 홍 영감의 옷깃을 말없이 바로 잡아 주고는 그의 안면을 슬그머니 쓰다듬었다. 그녀의 청초한 미소에 홍 영감의 노기가 서서히 녹아버리는 게 보였다. "진정하세요. 오라버니, 알맹이는 아직 제 손에 있어요. 지금은 심해 깊숙이 가라앉혀 놓았지만, 오라버니가 오신 이상 언제든지 떠오르게 할 수 있어요. 일단은 먼 길들을 오셨으니 안으로 들어와서 쉬시는 게 먼저예요. 제가 간만에 오라버니가 좋아하시는 동파육(東坡肉)을 만들어 드릴게요. 어서 들어오세요." "알았다. 이 년이나 고통 속에서 죽지도 못하고 모질게 살아온 나다. 복수를 위해서 조금 쉬는 것도 괜찮겠지. 더구나 동파육이라면 충분히 먹을 가치가 있지. 들어들 가자." 홍 영감은 앞장서서 뚜벅뚜벅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이어 포연강과 주령령도 따라 들어갔다. "하하하하, 녹 아주머니, 못 본지 이 주가 지났을 뿐인데, 그새 더 젊어지셨군요. 역시 영감님 쾌차 소식에 나이를 거꾸로 드시는군요. 이거 정말 옆구리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못 살겠습니다. 그려." "예끼, 이 사람, 실없는 소리말고 어서 들어오기나 하게." 포연강답게 너스레를 떨며 야단이다. 옆구리가 시리다라? 그런 것 따위 난 예전에 포기한 몸이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도 있고 말이다. 그 방면으로는 꼬인 기억 밖에 없다. 그냥 생각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다. 녹의 여인은 난감했는지 그의 거대한 등짝을 짝 쳐버렸다. "어이쿠, 녹 아주머니가 사람잡네. 농담 한 마디 더 하다간 내 목뼈가 날라가겠수." "정말, 자네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네." "하하하핫, 칭찬으로 듣지요. 어서 동파육 맛이나 봅시다. 뱃가죽이 등에 착 달라붙을 지경입니다." "알았네. 어서 들어가게나."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포연강이 들어가자 자연스럽게 그 뒤를 주령령이 이었다. 그녀는 녹의 여인에게 다소곳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 간 강녕하셨는지요? 오랜만입니다. 녹녹님." 녹의 여인은 그녀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주령령의 안면을 뚫어지게 살펴보고 있었다. 안면에 철판을 깔고 다니는 령령이 무안할 정도로 말이다. "왜, 왜 그러시지요?" "변했구나.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어. 그때는 산송장 같더니 이제는 살기(殺氣)로 가득 차 있구나. 다만 한 가닥 활기(活氣)가 엿보여서 다행이로구나." "……." 주령령은 그녀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아무 말 없이 들어가 버렸다. 결국 나 혼자 썰렁하게 남아 버렸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찰나 녹의 여인이 면전으로 성큼 다가오며 내 손을 꽉 잡는 게 아닌가? 당황해서 목석처럼 굳은지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의 입이 열렸다. "얘기는 많이 들었단다. 네가 바로 홍 오라버니가 그렇게 애타게 찾던 혈해진경(血海眞經) 해독편(解毒編)을 구해온 은자(恩者)라면서? 고맙다. 네 덕에 오늘 내가 십 년은 젊어진 것 같구나." '오호, 아주 우호적인데. 그러고 보니 홍 영감은 원래 높은 양반이라 그렇다 쳐도 다른 두 년 놈은 이 아줌씨한테 설설 기었었지? 좋아, 딱 걸렸어.' "별 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녹.누.님." "녹, 녹 누님? 호호호호홋. 좋아, 이제부터 날 누나라고 불러주렴. 당장 내 처지가 어려워서 이렇다할 보답은 어렵지만, 일단 그 정도가 내가 해줄 수 있는 정도로구나." "문, 문주님!" 북천위인지 뭔지 하는 인간이 그녀의 말을 듣고, 질겁을 해서 한 쪽 밖에 없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녹 누님이 잠자코 노려보자 입을 다물며 조용히 물러서는 것이었다. 그 순간, 녹 누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위엄은 홍 영감의 그것에 뒤지지 않아 보였다. 어쩐지 비슷한 인간끼리 좋아하는 셈이었군.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해야할까? 그런데, 녹의 여인을 녹 아주머니가 아닌 녹 누님으로 불러주는 게 그렇게도 못 마땅한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아부인데, 왜 저 인간이 갑자기 껴드는 거야? 샘나면 자기도 녹 누님이라고 아부 떨면 될 것을 가지고. "아, 참 내 정신 좀 봐. 작삼 동생, 먼 길 오느라 고생했지? 어서 들어와. 내가 맛있는 요리를 해줄 테니까. 차라도 마시면서 몸부터 녹여." 주루 내부를 둘러보니 망아루 시절보다 두 배는 넓어 보였다. 밖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부수적으로 딸린 건물이 꽤 보였었다. 위치도 낮이 되면 시끌벅적할 듯한 항주 중심거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괜찮은 목이라고 해야 하나? 그녀는 직접 내 팔을 끌고서 식탁 의자까지 대동해 주고는 동파육이라는 요리를 만든다고 주방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북천위라는 놈도 그녀를 따라서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마도 주방 보조를 하려나 보다. 식탁에 앉아있던 포연강의 눈이 휘둥그래져 있다. 뭔가 엉뚱해 보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무덤덤하게 앉아 있는데, 혼자 난리였다. "이야, 너 말 한 마디 잘 해서 단박에 출세해 버리는구나!" "네? 출세요? 그럼 제가 무환루 지배인이라도 되는 건가요?" 잘 생각해보면 이 주루를 사는데 내 고가액자들이 한 몫 한 셈이니 틀린 말도 아닐 거다. "……."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세요?" "하여튼 걸출한 물건이로고. 처음에는 그저 재수 더럽게 없는 어중이떠중이 녀석이려니 했는데, 보면 볼수록 수라사살(修羅四殺) 차도살(借刀殺)답다고 느껴진단 말이야. 하하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것은 좋은데, 왜 웃는지 이유라도 좀 알자. 같은 말이라도 저 녀석 입으로 나오면 반감이 울컥 치밀어 오른단 말씀이야. 아니 막말로 내가 수라사살 하고 싶어서 하고 있는 것인가? 자기네들이 못 가게 협박하고 을러서 붙잡아 놓은 것은 기억나지 않는단 말인가? 정작 그 협박의 당사장인 주령령은 그저 조용히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홀짝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엉, 차?' 이전에 제갈혜와 소봉과 같이 용정차를 마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주전자로 손이 저절로 옮겨졌다. 쪼르르륵. 그 때처럼 단박에 마셔서 혀를 데이는 짓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먼저 그 향을 음미해 보았다. "어, 차에서 꽃향기가 나네." "그래, 그 말처럼 이 차를 화차(花茶)라고 부르지. 잘 맡아보면 향기도 찻잎 향기와 꽃향기 두 종류로 나는 것을 알 수 있어. 우리가 마시는 이 차는 말리화차(茉莉花茶)라고 불러. 지금처럼 찻잎보다 꽃향기가 짙게 나는 것은 상품에 속해. 너처럼 차에 대해서 일자무식인 애들이 마시기에도 좋지. 향기와 차맛을 고루 갖추고 있거든." 싸늘한 분위기로 침묵을 지키며 앉아있던 주령령이 느닷없이 껴들어서 상세히 설명을 해줬다. 마치 화차를 평소 물 마시듯 즐기는 사람처럼 말이다. "아, 그렇군요." 후루루룩. '쳇, 그래 나 일자무식이다. 그래도 야심한 밤이라 성정이 차가워져 있을 텐데, 친절하게도 설명해 주네? 또 발작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곧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동파육이 나왔다. 기름에 튀기고 간장에 졸이는 시간만 해도 반 시진은 걸리는 요리인데, 의외로 빠르게 나온 것이었다. 준비를 다 마쳐놓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홍 영감 곁에 바싹 붙어 앉아서 젓가락으로 직접 후후 불며 먹여주는 녹 누님의 닭살스런 자세가 식탁의 압권이었다. 옆에서 포연강이 헛기침을 꾸준히 해댔으나, 녹 누님은 그마저도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그 이후 주방은 녹 누님 차지가 되었다. 잘해봐야 오리구이, 소면, 만두가 전부였던 망아루 시절과 달리 온갖 산해진미 요리가 가능해졌다. 갖가지 화차도 제공되었다. 보태면 우악스럽게 험상궂은 포연강이 만드는 요리보다 나긋하게 상냥해 보이는 녹 누님이 만드는 요리가 백 배는 맛있어 보였다. 실제로 맛도 그러했다. 이왕이면 주방 보조로 귀여운 아가씨를 대동했으면 더 좋을 뻔했다. 포연강에 뒤지지 않는 무식함을 자랑할 듯한 북천위의 앞치마 두른 꼴은 미관만 해쳤으니 말이다. 우리가 도착한 후 한 달 동안은 무환루(無患樓)의 대대적인 내부 공사가 이뤄졌다. 특히 목재가 낡은 곳을 새 곳으로 갈아낼 때 가장 수고를 한 인간이 포연강이었는데, 그의 도가 지나가고 난 목재의 나뭇결은 살아 숨쉬는 듯했다. 그제야 망아루의 나뭇결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그것들 또한 포연강의 도로 손질을 당했었던 모양이다. 나뭇결 이음새를 맞추는 솜씨도 제법이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과거 경력에 목수라도 했었던 모양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4-28 12:15:46 고친날 2005-05-02 15:16:53 읽은수 8209 [ 11 K ] 제목 점소이 작삼(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4] 술통 속 빈 공간에 몸을 디밀어 넣고 일어서자 마자 아슬아슬하게 술통 입구가 스르르륵 닫혔다. 겨우 몸 하나 지나갈 법한 통로는 나무기둥과 벽돌로 촘촘히 구성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보수한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포연강 녀석의 솜씨인 듯했다. 그래서, 지난 두 달여 동안 이 곳을 보수하느라 연락마저 두절하고 지냈다가 뒤늦게 나타난 모양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지하 통로 보수가 뭐 그리 급하다고 땅 위 건물은 내팽개쳐두고 이곳에 우선적으로 공을 들였느냐 하는 것이었다. 발소리도 거의 나지 않는 돌계단을 타고 내려갈 때 쳐다보는 곳은 바닥이 아니라 머리 위였다. 벽과 바닥은 별 걱정이 없어 보였지만, 나무판자를 연이어서 막아놓은 천장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까딱 잘못했다가 무너져 압사라도 당할까 겁이 날 지경이었다. 급기야는 포연강에게 내 불안한 마음을 토로한 적이 있었더랬다. "흐헤헤헤, 사내자식이 간이 콩알만 하기는. 걱정 마라! 내가 누구냐? 수라사살(修羅四殺) 중에서도 듬직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둘째 도살(刀殺)이 아니더냐? 내 손으로 직접 장인의 혼을 불어넣었으니 안심하도록!" 펑! 떼구루루루, 철퍼덕. '아구구구, 빌어먹을, 내 등짝이 동네북이냐? 왜 심심하면 펑 펑 쳐되냐고! 그리고, 소문은 무슨 얼어죽을, 그냥 니 혼자 생각이잖아.' 주령령이 나의 주적이라면, 포연강은 암적인 적대 세력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그 이후로 통로 안전 문제는 입에 담지 않았다. 돌아올 대답이 어떠하리라는 것쯤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빨리 안 내려와!" "네, 네 지금 내려 갑니다요." 오늘따라 주령령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 진득한 살기가 느껴진다. 열이 잔뜩 오른 연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녀의 오락가락하는 분위기에 장단 맞춰주기 포기한지 오래이긴 하나,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선 열심히 뛰어 가는 수밖에 없다. '에휴, 정말 한심한 신세로고.' 탁탁탁탁탁. 무공으로써는 내 앞길을 암울하게 만들어버린 구타심결(毆打心訣)이기는 하나 부가적으로 따라오는 효용들만큼은 쓸 만했다. 그 중에 하나가 암흑 속에서도 사물을 구분하는데 별 불편함이 없다는 것이었다. 포연강 자식이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하 통로에는 처음부터 횃불은커녕 흔한 촛불조차 달지 않았다. 연공장 대신으로 사용하는 지하 동굴에 달랑 하나 놓여 있는 조그마한 촛불 하나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홍 영감님 말을 빌자면 앞으로 청부를 받으려면 암흑 속에서도 물체를 식별할 능력을 키워야 한데나? '그런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구? 청부야 잘난 포연강이나 주령령이 알아서 하면 되지. 난 그저 근면성실 일등 조교 점소일 뿐이라고. 어차피 그런 일과는 하등 상관이 없단 말씀이야.' 바닥에 내려서자 탁 트인 지하 공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원래는 천연 동굴이었던 모양이지만,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확장과 보수를 반복한 티가 팍팍 나는 곳이었다. 이런 곳을 찾아내 비밀 공간으로 보수한 인간들에 대해서 약간은 궁금증이 일기도 한다. '아마 녹 누님과 무관하지 않은 듯 싶단 말이야. 북천위란 인간도 그렇고, 주령령도 녹 누님을 녹 문주님이라고 불렀었지. 녹 누님은 혹시 구파일방과 관계가 있는 사람일까? 그래도 무림맹(武林盟)에게 쫓겨다니는 신세인 것으로 봐서 그것은 왠지 좀…….' 휙, 쿵! 섬뜩한 살기가 등허리를 훑고 지나오기에 반사적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주령령의 손바닥이 내가 방금 전까지 서있던 자리에 내려 꽂혀져 있었다. 바닥이 움푹 패일 정도로 그녀의 괴력은 정말로 엄청나다. 더욱 더 큰 문제는 그 위력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비약적으로 강해져 가는 게 어렴풋이 느껴진다는 거다. 더구나 지금의 령령은 알 수 없는 모종의 연유로 잔뜩 독이 올라 있지 않은가! "흥! 감히 내 손바닥을 피해? 많이 늘었구나. 가만히 앉아서 터지기는 싫다 이 말이렷다?" "잠, 잠깐만요. 오, 오늘은 심,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신 것 같은데요. 좀 쉬면서 수련에 임하시는 게 어때요?" "시끄러! 이젠 아예 대놓고 말대꾸까지 꼬박꼬박 해?. 아예 그 겁없는 주둥이를 짓뭉개 주고 말겠어." 쉬이이익! 퍽! "허어억!" 털썩. 한 줄기의 바람이 내 복부를 휩쓸고 지나갔다. 몸이 앞으로 수그러들면서 힘이 빠져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헉, 헉, 이, 이상해. 평상시의 그녀가 아니야. 나, 나에게 원독을 토해내고 있어. 설마, 또 발작인 건가? 빌, 빌어먹을 이런 폐쇄적인 공간에서 발작하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또 다시 치달아오는 그녀의 살기에 움찔하면서도 날렵하게 몸을 옆으로 굴렸다.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서는 그녀의 움직임을 최대한 빨리 느껴야만 했다. 눈으로 보고 도망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포연강이 수라삼살(修羅三殺) 중에서 주령령의 경공과 보법이 으뜸이라고 말했듯이 그녀의 몸놀림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치 한 마리의 굶주린 야수와 같다고 해야할까? 그동안 그나마 버틸 만 했던 것은 순전히 주령령이 봐주면서 두들겼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삼재권법을 동원해서 반격은 꿈도 못 꿀지라도 종종 막기는 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무식하게 덤벼들 때는 오로지 도망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어설프게 막거나 대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부우웅! 몸을 떼구루루 굴리면서 재빠르게 곁눈질을 했다. 그 순간 보았다. 녹피 가죽신도, 버선도 벗어 던져 맨발바닥을 유감없이 드러낸 주령령의 늘씬한 다리가 세차게 허공을 휘몰아치는 것을! 짧은 치파오 덕에 속곳이 드러난 것도 못 알아차릴 정도로 아름다운 곡선이었다. '쳇, 그래도 저 다리에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못해도 한 달은 침대 신세 져야할 거다.' "나한테 반년간 맞더니 몸놀림이 눈에 띄게 좋아졌구나. 흥! 좋다. 이제부터 제대로 해보자꾸나." "잠, 잠깐만요!" "입 닫아! 혀 잘린다!" 휙, 빠각. 턱뼈가 쌔끈하게 저려왔다. 그녀의 늘씬한 다리가 내 턱을 날려 버린 거다. 눈물이 퀭하고 나올 지경이었으나,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현란한 보법인지 뭔지가 펼쳐져서 그녀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 어느 방향에 있는지 조차 종잡기 어려워졌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녀는 단조로운 움직임으로만 공격하면서 방어해왔다. 이렇게까지 현란하면서도 압도적인 무력으로 날 제압하려 든 적이 없었다.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퍽! 퍼퍽! 쿵! 기어코 그녀의 연이은 공격에 바닥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한동안 그렇게 일방적으로 맞고 구르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더럽게 아팠지만, 치명적인 공격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지금 날 갖고 노는 것이었다. "바보! 멍청이! 똘추같은 놈! 그동안 좋게 대해줬더니 버르장머리가 바닥을 기는구나. 오냐, 이대로 계속 바닥을 기게 만들어주마. 일개 점소이에 불과한 네 신세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깨닫게 해주마!" '뭐? 일개 점소이?' 일개 점소이 운운한 그녀의 말속에는 더 이상 나를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어조가 묻어 나왔다. 나의 존재가 그녀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드러내놓고 깔보며 무시한 적은 처음이었다. '주령령, 이 빌어먹을 냉혈 계집애! 내가 니 년한테 맞고 살아온 것만 반년이다. 이젠 더는 못 참아!' 계속 맞는 것은 참아 줄만 했지만, 내 신세를 깨닫게 해주겠다는 그녀의 말에 그만 뜨거운 분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 동안 압도적인 무력에 억눌려있던 억하심정이 그녀의 무시와 천대로 인해 자극을 받아 봇물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뒷일이야 어찌 되건 눈앞의 령령에게 제대로 된 일격을 먹이고 말겠다는 위험천만한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전신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나의 오른 주먹 끝에 끌어 모았다. 누군가에게 배워서 하는 게 아니었다. 한 대 치고 말겠다는 나의 의지를 따라 그 기운이 흘러간 것이었다. 멈칫. 대놓고 무시하듯 현란한 보법으로 일관하던 그녀가 무엇을 느꼈는지 잠시 주춤 거렸다. 좋은 기회였다. 바로 달려 들어서 그녀를 와락 껴안으면서 넘어졌다. 그대로 령령의 배 위에 올라타면서 두 무릎으로 령령의 두 팔을 재빨리 봉했고, 왼손으로는 령령의 가냘픈 목을 움켜잡았다. 령령의 커다란 눈동자가 더욱 동그랗게 커졌다. 여태까지 수동적으로 도망을 다니거나 막기에만 급급했던 나였기에 의외의 반격에 무척이나 당황한 듯 싶었다. 나의 분노가 담긴 주먹을 령령의 안면에 힘껏 내려꽂았다. 퍽! 콰드득. 이번만큼은 휙 틀어진 주령령의 안면 동공까지 커진 것을 보니 충격이 아주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콰드득 거리는 소리는 뭐였냐구? 그거야 내 오른손 팔목이…… 허걱. 탈골 됐잖아! 그녀의 호신강기인지 뭔지에 반탄력을 받아서 이 꼴이 되 버린 거였다. 펑! 쿵! "아이고! 내 머리!" 내 무릎에서 가볍게 팔을 빼낸 령령은 두 손바닥으로 내 가슴을 쳐서 허공에 붕 뜨게 만들었다. 가슴에 가해진 장력으로 일시 호흡 중단을 경험했던 나는 직후 벽에 뒤통수를 들이받고 일시 뇌진탕을 경험해야만 했다. 머리가 헤롱헤롱 돈다. 정신이 없다. 뇌가 받은 충격이 치명적이었는지 시야까지 흔들린다. 정말 무슨 계집애 손 힘이 저렇게 강한지 원. "너어! 감히!" 퍽! 퍼퍼퍼퍽! 퍽! 퍽퍽! 그 이후야 완전 생지옥이었다. 뇌가 받은 타격으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데다가 분기 탱천한 령령의 소나기 같은 발길질이 내 몸 위에 작렬했다. 한 가지 웃긴 것은 시야가 회복되면서 다시금 본 그녀의 늘씬한 다리가 무척 아름답다는 것을 재차 느꼈다는 거다. 그 어떤 여인의 다리도 령령의 길고 늘씬한 다리처럼 부드러우면서도 화려하게 대기를 가르지는 못하리라. 내가 생각해도 나란 인간은 묘한 놈이다. 이렇데 줘 터지는 상황에서 엉뚱한 감상이나 떠올리다니!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이대로 당할쏘냐.' 전신에 작렬하는 그녀의 매서운 발길질에 죽을 맛이었으나, 내 눈만큼은 쉴 새 없이 굴러갔다. 솔직히 령령의 주먹은 시야로 쫓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지만, 상대적으로 반경이 긴 그녀의 다리는 날 차기 위해 뒤로 빼는 순간 멈칫 멈칫 멈추는 순간이 보였다. '지금이다!' 날 걷어차고서 다시금 뒤로 다리를 빼는 순간 몸을 앞으로 박차고 나가서 그녀의 허벅지를 간신히 움켜잡을 수 있었다. 팔이 빠지지 않도록 왼손으로 덜렁이는 오른 팔 팔목을 꽉 움켜잡았다. 당연히 그녀의 발차기는 내 이 한 수로 봉쇄되었다. 내 오른팔이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에 낀 것은 좀 찜찜했지만, 놓는 순간 사망선고가 떨어질 게 뻔하기에 더욱 옥죄었다. "이, 이 놈이 그 더러운 손놓지 못해!" 퍽! 퍽퍽! 퍽! 그녀의 매서운 주먹이 내 등짝에 떨어져 내렸다. 미치도록 아팠다. 령령에게 붙은 것은 좋은데 나 또한 봉쇄당한 꼴이었다. 이대로 맞고 있다가는 등뼈와 척추가 박살나 병신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녀의 악력이 얼마나 강한지 나만큼 잘 아는 인간이 드문 만큼 평생 앉아있지도 못하고 자리 깔고 누워있는 어떤 비렁뱅이의 처참한 모습을 상상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젠장! 넌 그래도 다른 무림인들과 조금은 다른 줄 알았었는데, 결국은 한 통속이야! 일개 점소이라고 무시하는 게 뭐가 다르단 말이냐! 이왕 죽을 거 네 몸에서 피가 나는 것을 꼭 보고 말 테다!" 악이 바짝 오른 나는 그대로 이빨을 주령령의 허벅지에 박아 넣고는 전력으로 물어 버렸다. 오로지 그것에만 신경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녀의 주먹질이 멈춘 것도 못 알아차렸다. 한참동안 정적이 흘렀다. 일 각이 넘게 령령의 허벅지를 물고 있다보니 너무나 조용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이, 이 년이 죽었나? 설마? 그, 그럴 리가?' 겁이 덜컥 난 까닭에 물었던 이빨을 빼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면서 위로 눈을 돌렸다. 그녀는 죽었다거나 한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퍼런 청광(靑光)을 내뿜던 령령의 커다란 눈은 어느새 차분한 일상의 눈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가 물고 있었던 그녀의 오른쪽 허벅지로 눈을 돌렸다. '세상에! 피, 피가 저렇게나 많이? 왜, 왜 령령이 가만히 서 있었지? 설, 설마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린 거야?'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녀의 성격으로 분명 봐주며 넘어갈 리가 없다. 아마도 이전에 령령의 손에 머리가 터져 나간 진두한이나 현무조 여인들처럼 똑같은 길을 걷게 될 거라는 직감에 몸서리 쳐졌다. 뒤늦게 제 정신이 든 나는 덜덜 떨면서 말을 듣지 않는 발과 팔을 끌면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히익! 살, 살려 주세요!" 그녀의 치맛자락이 펄럭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한참동안 시간이 흘렀어도 령령의 공격은 없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하 연공장 그 어디에도 령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방금 전까지 그녀가 서 있었던 자리에 흥건한 핏자국만이 령령의 존재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해도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노기가 솟아서 령령한테 다짜고짜 덤벼든 나도 그렇지만, 그런 나를 내버려두고 조용히 사라진 령령도 이상한 일이다. '이거 꿈이야? 생시야? 꿈이면 차라리 다행인데, 만약에, 만약에 생시면 어떻게 하지? 에휴, 꿈일지도 모르지. 이렇게 졸려오는 거 보면 꿈, 꿈이 아니고…… 뭐, 뭐겠…….' 잔뜩 지쳐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그대로 깊은 꿈나라로 접어들고 말았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4-30 13:12:13 고친날 2005-05-02 15:17:47 읽은수 8263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5)-첫 번째 청부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5]첫 번째 청부 끼이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무진장 귀에 거슬려서 그만 눈을 떠 버렸다. 몇 시진이나 누워있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차가운 지하 연공장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익숙한 정경, 익숙한 촉감, 바로 내 방이었던 것이었다. 이불을 걷어내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허리가 조금 움찔거렸지만, 전체적으로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어머, 작삼 동생, 마침 잘 깼구나. 자, 이거 들도록 해. 전복죽인데, 몸보신으로는 아주 그만이야." "녹 누님이셨군요." 언제나처럼 전신을 녹색으로 치장하고 있는 녹 누님이 녹색 앞치마를 두른 채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소반을 돌고 있었다. 아마 방금 문이 열리는 소리는 그녀가 들어올 때 난 소리였던 모양이다.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어와 앉은 그녀는 왼손에 죽그릇을 들고는 숟가락으로 퍼서는 후후 불었다. 마치 홍 영감 옆에 찰싹 붙어서 동포육을 먹일 때처럼 말이다. 그녀가 옆으로 바싹 붙어 오자 은은한 난향이 바람결에 실려왔다. 뿌리는 향수마저 녹색을 연상케 해주는 독특한 누님이다. "자, 아 해봐. 어서." "저, 저 괜, 괜찮아요. 혼자서도 먹을 수 있어요." "괜찮기는, 전신이 피떡이 되도록 맞았는데, 괜찮을 리가 있겠어? 자, 아 해봐." 결국 그녀가 내미는 데로 전복죽을 꿀꺼덕 삼켰다. 입안에서는 달짝지근하더니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에는 청아한 느낌이 드는 죽이었다. 역시 녹 누님의 요리 솜씨는 언제 맛을 봐도 일품이었다. 주령령 그 계집애가 녹 누님 요리 솜씨의 반의, 반만 따라가도 먹어 줄텐데. "참, 령, 령령 아, 아가씨는요?" "걱정할 것 없다. 한 바탕 호통을 쳐줬단다. 앞으로 또 그런 일이 있을 시에는 내가 가만있지 않겠다고 했지. 너를 업신여기는 것은 곧 하오문(下汚門)을 깔보는 것과 마찬가지니 말이다." '오호, 그거 고소하다. 역시 녹 누님한테 아부를 떨어서 점수를 딴 보람이 있군. 그런데, 하오문? 들어본 듯도 하고, 처음 듣는 듯도 하고…… 에라 모르는 게 약이지. 아무렴.' 그로부터 사흘 간은 녹 누님의 강력한 만류로 내리 쉬기만 했다. 뭐, 그녀로서는 내 괴물같은 회복력에 대해 모르긴 할거다. 몸이 편하니 납득시킬 이유도 없었지만, 나흘 째 누워있으려니 너무나도 답답하고 좀이 쑤셔와서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정확히 언급하자면 그 나흘 간 단 한 시도 마음 편한 때가 없었다. 선잠을 자다가도 창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깜짝 깜짝 놀라 깨기 일쑤였다. 언제 미친 령령이 들이 닥쳐서 자기 허벅지에 난 내 이빨 자국에 대한 보복을 하려들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되 돌이켜 생각해봐도 내가 제 정신이 아니었다. 바닥에 그녀의 피가 흥건하게 고여들 정도로 이빨을 박아 넣은 나도 문제지만, 그런 나를 내버려두고 조용히 사라진 주령령 또한 걱정이다. '당연하지. 그 미친 마녀의 꿍꿍이속을 모르니까 환장하는 거 아니겠어? 분명 이대로 넘어갈 애가 아닌데 말이지. 혹시 내가 홍 영감님의 은인이라고 봐주고 있는 걸까? 아니, 절대 그럴 리가 없어. 나를 은인이라고 생각하는 년이 이렇듯 가혹하게 군단 말이야? 일개 점소이 운운하면서 무시할 때 내 알아봤다.' 확실히 포연강이 날 대하는 태도는 이전보다 한 결 너그러워지긴 했다. 홍 영감님은 원래부터 대화가 좀 통하는 인간이었기에 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러나, 주령령 이 냉혈 마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언제나 분위기가 들쭉날쭉 자기 마음 대로다. 결정적으로 이번에는 대놓고 날 면전에서 깔아뭉개 버렸다. 도저히 묵과할 수도 없고 묵과해서도 안 되는 일인 것이다. '다만 내가 참아주기로 했다. 파격적으로다가! 내가 먼저 가서 고개까지 숙여주마. 결단코 네 주먹이나 발길질이 무서워서 이러는 거 아니니까 행여 착각은 하지 마라. 쳇.' 무환루(無患樓)는 삼 층 짜리 대형 주루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하면서도 품위가 있다. 무환루라는 현판이 달린 대문을 통과하면, 길 양옆으로 펼쳐진 앙상한 나무들과 시들어빠진 잡초들을 볼 수 있다. 봄이 찾아들면 온갖 향기가 넘쳐나는 수려한 화원(花園)이 된다고 하니 기대를 걸어볼 만 하다. 스무 걸음 정도 걸어 들어가면 일 층 현관에 다다른다. 일 층은 주방과 창고를 제외한 전체가 식당으로 꾸며져 있다. 문제의 창고는 주방 옆에 붙어 있으나, 입구의 위치가 교묘하게 틀어져 있어서, 식당 쪽에서는 주방을 거치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아마 지하 연공장에 대한 일종의 연막인 듯 싶다. 주방을 따라서 후원으로 갈 수 있는데, 여기서는 손님 목욕물을 데우거나, 고기를 굽는 가마와 더불어 아담한 팔각 정자가 지어져 있다. 아마도 특별한 손님들을 위해서 마련된 곳인 듯 했다. 일층 양옆으로는 이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이 층은 크게 두 칸으로 나누어진다. 정면에서 좌측은 객실이고, 우측은 객실 칸 반대편 세 방향의 벽이 시원하게 뚫려있는 식당 칸이다. 운치와 술을 좋아하는 인간이라면 일 층보다는 이 층을 선호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마지막 삼 층은 수라사살을 포함한 무환루 식구들만을 위해 배려된 공간이다. 아직은 빈방들이 넘쳐난다. 내가 왜 이렇게 복잡한 무환루 구조를 일일이 늘어놓았느냐구? 중요한 점은 그 삼층 맨 끝 남향에 위치한 방이 내 방이라는 것이다. 더 더욱 중요한 점은 내 방 바로 맞은 편 북향에 위치한 방이 주령령의 거처라는 것이다.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맨 끝 방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가 좌우를 헷갈려 덜커덕 열고 들어간 방에 가득했던 울금향을! 마침 명상에 빠져있던 령령의 눈이 천천히 떠지면서 차갑게 노려보는 것이었다. 당황한 내 눈이 휘둥그래지자 아예 싸늘한 한기를 풀풀 풍기며 날카롭게 째려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었다. "할 말 있어?" "아, 아니요. 그, 그만 방을 헷갈려서요." "할 말 없으면 문닫고 꺼져." "네, 넵! 안, 안녕히 계세요." 후다다닥, 쿵. 그런데, 이제는 그녀의 방 앞에서 심호흡을 내쉬며 서있게 되었다. 그녀가 있으리라는 전제 하에 들어가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만 것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먼저 용서를 빌고 터지는 게 더 나을 듯 싶었다. 그래야 다음 수련 시간들이 덜 고달플 것 아니겠는가? 똑똑똑똑. "저 작삼인데요. 저, 저기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 데요. 시간 되시면 잠, 잠시 들어가서 문, 문안 인사를 여쭤도 될까요?" "……." 안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응답이 없다면, 령령이 안에 없거나, 대답하기조차 귀찮다는 뜻일 거다. 어느 쪽으로 갈피를 잡아야 할지 난감한 일이다. '어차피 부딪혀야 하는 일이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 아니겠어?'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가겠습니다." 끼이이익. 두근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들어가 봤다. 강렬한 울금향이 확 퍼져 나왔다. 이 정도로 울금향이 강하게 난다는 것은 곳곳에 향낭을 배치해 놨다는 뜻인데, 낸 눈깔에는 향낭 하나 보이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는지 아리송한 일이다. 다행이라 해야할지 귀찮게 되었다고 해야할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내부가 잘 정돈되었을 뿐만 아니라 덧문까지 걸어 놓은 것을 보니 한동안 방을 비웠던 모양이다. '에라, 령령이 나타나면 그 때 생각하자. 지금은 몸에 낀 떼부터 벗겨내고 볼 일이지.' 처음에는 가까운 곳에 있는 전당강(錢塘江)에 갈까 했지만, 시간이 한 낮이라 유람 나온 인간 군상들의 손가락질 세례를 받을 게 뻔했으므로 그냥 후원에 있는 우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갈아입을 속곳과 마의, 마두건을 챙겼다. 이 마두건은 녹 누님이 내가 즐겨 입는 마의에 맞춰서 내 전용으로 만들어 준 점소이용 두건이었다. 각까지 잡혀 있는 게 내 맘에 쏙 들었다. 계단을 따라 쭉 내려가니 이 층에는 대낮부터 술판을 벌리고 있는 손님들이 몇몇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누워있는 동안 누가 점소이 일을 보았을까? 그 궁금증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어서 오십시오! 자, 자 이 쪽으로…… 어, 어디로 가, 가시……? 에이, 왜 이렇게 손님들이 나만 보면 꼬리를 내빼누!" 저 우렁찬 목소리, 보통 사람보다 목 하나는 더 큰 덩치로 손님을 맞아들인다는 것은 분명 무리였다. 아니면 그 산적 두목 같은 구레나룻과 턱수염이라도 깔끔하게 밀던가. "포 형님, 오랜만입니다. 그간 안녕하셨어요?" "오오, 일어났군. 난 녹 아주머님이 호들갑 난리를 피우시기에 다리 하나는 떨어져 나간 줄 알았지." "그런데, 지금 뭘 하고 계신 거예요?" "보면 모르겠나? 주방장이 주방에서 쫓겨났으니 할 일이 없더군. 그래서, 자네가 몸져 누워있는 동안 대신 내가 빈자리를 메웠지. 여기 신입이 한 명 더 있다네. 인사하게." 포연강의 거대한 덩치에 가려 안 보였던 왜소한 백의 인영이 그의 말을 따라서 쓰윽 자태를 드러냈다. 비록 백두건을 머리에 둘러 긴 머리카락을 가렸지만, 한 눈에 남장 여인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예쁘장한 점소이였다. 먼저 허리를 숙이기에 나도 따라서 엉거주춤 인사를 했다. "작삼 도련님이시군요. 문주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동이라고 불러주세요. 동천위(東川衛)라는 이름이 있지만, 사방팔방에 깔린 게 무림맹의 눈인지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북천위(北川衛)라는 인간과 동문지간인가? 이름이 비슷하네. 그런데, 왜 하늘 천(天)자가 아닌, 내 천(川)자를 쓰는 것일까?' "네, 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말씀 놓으셔도 됩니다. 녹 문주님의 동생 분이시면 저희에게는 작은 문주님이 되시니까요." '작, 작은 문주?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군.' "꼭 말을 놓아야 합니까?"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그럼 나 좋을 대로 하렵니다. 내가 훗날 수석 점소이라도 되면 그 때나 말을 높여주시오. 지금은 똑같은 점소이 아니겠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02 15:11:50 고친날 2005-05-02 15:20:10 읽은수 8098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 동천위라는 여인과 간단하게 통성명을 나누다가 계산대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 자리는 변함없이 홍 영감님이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으나, 꾸벅 꾸벅 조는 모습 또한 여전했다. 아마도 생존하기 위해 익힌 가수면법(假睡眠法)이 습관으로 굳어버린 듯 했다. '홍 영감님은 밤에 주무시기 글렀군. 이래서, 녹 누님까지 덩달아 잠을 안 자는 거 아냐.' 그들이 같은 방을 쓴다는 것은 무환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오밤중에 소피나 뒤가 마려워 뒷간으로 가다가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들의 방 앞을 스쳐지나 갈 때면 희미하지만, 녹 누님의 신음 소리가 종종 새어 나오곤 했던 것이다. 하여튼 영감님이 아직 정정하시다는 것 하나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우물이 있는 후원으로 가려니 어쩔 수 없이 주방을 지나쳐야만 했다. 마침 춘권(春卷)을 요리 중이던 녹 누님과의 가벼운 실랑이가 있었으나, 예전에 아물어버린 내 등판을 보여주고 나서야 겨우 지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대로 지나칠 녹 누님이 아니긴 했다. "작삼 동생, 잠시만 기다려 봐. 지금 목욕물 데우는 중이었거든. 그걸로 목욕하도록 해. 아직 겨울 한파가 남아있어. 함부로 냉수마찰 하다간 몸 버려." "괜, 괜찮은데, 아직까지 냉수마찰로 감기 든 적은 없, 없었어요." "휴우, 괜한 고집은, 누나가 후원 욕조에 물 퍼다 놓을 테니 잠자코 여기서 기다리렴." "……." 결국 팔을 걷어붙이는 그녀의 말대로 따르게 되었다. 북천위의 눈이 휘둥그래지며 대신 나르겠다고 그녀를 만류했으나, 녹 누님은 끝끝내 손수 물을 퍼 날랐다.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던 북천위가 애꾸눈으로 날 째려보기에 나도 마주 째려 봐줬다. 하여튼 그 인간은 나한테 상당한 유감을 갖고 있는 듯 했다. 후원에는 우물터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바깥에 드러난 생활 용수 전용 우물터이고, 하나는 칸막이 욕조로 된 건물 중앙에 파여져 있는 목욕물 전용 우물터였다. 욕조가 있는 건물의 바깥 덧문은 이음새가 아래로 이어져 있고, 짧은 끈으로 묶어놔서 위에서 아래로 반의 반까지만 열렸다. 이 기이한 방식 덕택에 햇빛은 들어와도 바깥에서 안을 엿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건물 근처에는 물을 데울 수 있는 아궁이가 있어 필요하면 뜨거운 물을 퍼 날라 줄 수도 있었다. 물론 실내 욕조가 있기는 하지만, 아주 비싸게 구는 손님이 아니면 거의 야외 욕조를 이용하게끔 하고 있었다. 점소이 입장에서 보면 그 쪽이 백 배는 편해 보였다. 그저 뜨거운 물이 필요할 때만 좀 데워다가 퍼주는 수고를 하면 끝이었던 것이다. 슥삭슥삭. 저절로 나오는 콧노래에 맞춰서 떼를 밀었다. 간만에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니 좋긴 좋은데, 한 쪽 눈으로 째려보던 북천위의 껄끄러운 시선이 자꾸 떠올랐다. 이상한 놈이다. 불만 있으면 말로 할 일이지, 그렇게 꼭 눈으로 압박을 해와야만 하는 걸까? 끼이익. "아, 녹 누님이세요? 뜨거운 물은 더 필요 없……." "……." 욕실 문을 열고 들어온 여인은 녹 누님이 아니었다. 찾을 때는 어디에 쳐 박혀있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던 그녀였다. '하, 하필 내가 무방비 상태인 때에 들이닥치다니! 벌거벗은 채로 도망갈 수도 없지만, 그 문마저 막고 있으니 도망 자체가 불가능하잖아. 노, 노리고 있었던 거냐. 제, 제길!' 어디서 지랄발광을 했었는지 전신에 새빨간 피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주령령(周鈴鈴)은 한참동안 내 벌거벗은 나신을 훑어보았다. 어디를 어떻게 찢어야 속이 풀릴지 고민하는 듯 했다. 그녀의 싸늘한 시선이 피부에 와 닿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는 덜덜 떨어야만 했다.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잔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끼이익, 쾅. 뜻밖에도 그녀는 욕실 문을 닫고는 조용히 물러나 버렸다. 그렇다고 아주 물러난 것도 아니었다. 끼익 끼익, 쏴아아. 첨벙! 끼익 끼익, 쏴아아. 첨벙!……! 두레박 돌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우물물을 퍼다가 욕조에 붓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 날 익사시키려는 것인가? 잠, 잠깐 그, 그럴 량이면 이 물에 익사를 시켜도 되는 거잖아.' 부스럭 부스럭. '이, 이 소리가 또 뭐지?' 곧 찰랑찰랑 거리는 물소리가 나더니만, 다시 우물물을 퍼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옷을 비벼 빠는 듯한 소리까지 더불어 들려왔다. 몇 차례 반복하던 주령령은 볼 일을 다 마쳤다는 듯 그대로 나가 버렸다. 다시금 그녀가 들이닥칠까봐 한동안 전전긍긍하던 나는 욕실문을 꽉 붙들고 꼼짝을 하지 못했다. '아, 걸쇠가 있었지. 내 정신 좀 봐.' 욕실문을 걸고 나서 욕조에 몸을 넣으니 물이 차갑게 식어버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조마조마 쪼그라든 간덩이 덕에 목욕도 제대로 못 하고 야외 욕실을 빠져 나와야만 했다. 아무래도 령령의 진의는 내 피를 말려 죽이겠다는데 있는 듯 싶다. 참으로 독한 년이다.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토록 살벌하게 구는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마의와 마두건을 걸치고서 현관으로 들어가니 날 흘겨본 포연강이 씩 웃더니만, 위 층이 아닌 후원으로 나가 버렸다. 안 봐도 뻔할 뻔 자였다. 풍악산에서 얻은 곰가죽을 잊지도 않고 용케 잘 챙겨 온 것을 보니 이번에도 역시 후원 창고에 쳐 박혀 곰가죽과의 일체화를 시도하려는 것이리라. 동천위라는 점소이 여인은 이 층에 요리를 나르고 있었는지 일 층에서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잘 오셨습니다. 자, 자 많이 추우셨을 테니 이 쪽 뜨끈한 난로 옆으로들 오세요." 역시 포연강의 험상궂은 안면이 사라지자 짐을 짊어진 장사치 몇 명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령령의 일을 잠시동안이라도 털어 버리려는 마음에 더욱 열심히 손님들을 대했다. 적어도 이렇게 많은 눈들이 몰려 있는 곳에서 보복하려 들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휴우, 겨우 항주에 도착했군. 얼어죽는 줄 알았네. 그려. 이 봐 점소이, 여기 얼큰한 용봉탕(龍鳳湯) 네 그릇 부탁하네." "검남춘(劍南春) 한 동이도 추가함세." "어허, 그것은 좀 과하지 않은가? 우리 같은 발품 상인 주머니 사정에 비싸디 비싼 검남춘(劍南春)이라니?" "걱정 말게. 이 참에 내가 한 턱 쏘도록 하지. 오늘처럼 경사가 겹친 날에는 술맛이 맑고 상쾌한 검남춘(劍南春)이야말로 제격이지 않겠는가!" "하긴 그것도 그렇군. 좋네. 나도 가만 있을 수 없지. 난 죽엽청(竹葉靑) 한 동이로 하지. 오늘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보세." "그것 좋지. 하하하하." 장사치들은 뭐가 좋은지 킬킬거리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들이 겹경사 운운하자 옆자리에 있던 다른 손님들도 궁금해졌던 모양이다. 궁금한 것은 못 참고 알아내야만 하는 군중심리가 작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어코 호기심 많은 한 여인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무슨 경사이기에 그렇게 좋아들 하시는지 저희도 좀 알 수 없을까요?" "흠, 이것은 우리들만 아는 비밀이지만, 내 특별히 아가씨한테만 알려드리리다. 그러니까 말이오." '얼씨구 잘 논다. 비밀이라면서 그렇게 대놓고 떠드나? 한 마디로 제 발 저릴 정도로 입이 간질간질했었구만.' "이 곳 항주 북서쪽에 있는 천목산(天目山) 산적들이 얼마나 얍삽하고 지독한 놈들인가는 잘 알고 계시겠지요?" "알다마다요. 그 놈들한테 당한 사람들이 어디 하나 둘이겠어요? 반항하는 사람은 즉시 사지와 목을 자르고, 조금이라도 반반한 아녀자들은 돌아가며 윤간을 해서 폐인을 만들어 버리는 더러운 놈들이잖아요. 더구나 무림인처럼 강한 이들이나 관아에서 포졸들을 파견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자취를 감춰버려서 번번이 허탕만 칠 뿐이니. 그 놈들 때문에 호위 무사를 고용할 능력이 없는 우리같은 사람들은 하나뿐인 목숨이 아까워서 산세가 수려하다는 천목산 근처에조차 얼씬 못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가? 수라삼살(修羅三殺)한테 끌려 올 때 그 쪽 산맥을 타고 온 듯 한데, 산적은커녕 토끼 한 마리도 못 봤는데.' 어느새 그들의 얘기에 푹 빠져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나만이 아니라 주루 일 층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귀가 쫑긋해져서 그 쪽에 관심들을 보이고 있었다. 그만큼 천목산(天目山) 산적들이 악질이었던 모양이다. "바로 그거요. 천목산 근처에 사는 한 사냥꾼이 길을 잘못 들어 그만 산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까지 들어갔었나 보오. 뒤늦게 알아챈 그는 부랴부랴 내빼려 했으나, 늑대 세 마리가 몰려서 뭔가 뜯어먹는 것을 보고 말았소. 본능적으로 욕심이 동해 화살을 당겨 한 마리를 잡았다고 하더군요. 다른 놈들이 도망간 새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늑대들이 뜯고 있었던 것은 산산이 박살이 난 인간의 시체였다는 거요. 몸체는 터져서 오장육부가 흩어져 있었지만, 비교적 양호한 머리통이나 사지를 보니 산적이 틀림없었다고 하오. 흥분한 그는 더 깊숙이 들어가서 박살난 산적들을 하나 하나 쫓다가 나중에는 숨겨져 있던 산적 본거지까지 찾아내 버렸다고 하오. 물론 살아있는 자들은 하나도 없었오. 기이한 점은 산적들에게 붙들려온 듯한 처자들도 몇 있었는가 본데, 같은 꼴로 죽어있었다는 것이지요." "저런, 죽은 처자들은 아깝게 되었지만, 경사로군요. 이제는 천목산에 안심하고 올라갈 수 있겠네요. 호호호호." "그럼요. 그들의 죽음이 두려워서라도 천목산에서 산적질을 할 놈들도 없을 겁니다." "그런 좋은 소식을 전해주셨으니 소녀가 감사드리는 의미에서 한 잔씩 올리도록 하겠어요. 부디 받아주세요." "우, 우리야 반가운 얘기지요. 하하하하." '소, 소녀? 이보세요. 아줌마,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삼십은 옛적에 넘긴 듯한 사람이 소녀라니! 그나저나 산산이 터져서 뒤졌단 말이지? 참으로 지저분하게도 죽였네. 산적들은 원래 죽일 놈들이라 치자. 누군지 몰라도 어여쁜 처자들까지 터뜨려 죽였다는 것은 더 악질이라는 소리 아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04 09:11:54 고친날 2005-05-04 09:11:54 읽은수 8188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 해시(亥時) 초쯤 되니 떠들썩하던 무환루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일부는 잠을 청하기 위해 객실로 올라가기도 하고, 늦은 시각이기에 헐레벌떡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서호(西湖) 주변에 즐비한 주루로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무환루(無患樓)는 서민들을 주 대상으로 하기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접대를 한다는 게 장점이지만, 해시가 되면 어김없이 문을 닫는다는 단점이 존재하기도 했다. 물론 홍 영감님이 세운 철칙이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긴 긴 밤을 술로 달래야만 하는 한량들의 발걸음은 자연히 더럽게 비싸지만, 밤새도록 불을 밝혀주는 서호(西湖) 주변 주루들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항주를 일컬어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항주(杭州)가 있다.' 라고 한다. 소동파라는 유명한 시인이 '물빛 반짝이는 청명한 날도 좋고 비 오는 날의 안개 낀 산 빛도 좋은 천하명승'이라고 칭송한 말까지 전해 내려온다. 그만큼 항주가 천예 절경으로 그득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서호(西湖)를 칭송하는 말은 이러한 항주를 아주 우습게 깔아뭉갠다. '서호 없는 항주는 갈 필요가 없다!', 심지어 양귀비와 함께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는 서시(西施)가 항주 출신 미인이라는 근거 아래 서호를 서시에 비유해 서자호(西子湖)라고 부른 시인도 있었다. 한 마디로 서호는 항주의 으뜸 절경이라는 소리인 것이다. 결국 서호 주변 주루는 전국에서 몰려온 유람객으로 발 딛을 틈이 없을 정도이리만큼 더럽게 비싼 자릿세를 지불해야만 했다. 보태면 서호 주변에 즐비하게 널려있는 정자와 누각, 사원과 탑 등이 주위의 자연과 어우러진 경치는 훌륭한 작업 환경이 된다는 제비와 꽃뱀들의 증언도 한 몫을 했다. 특히 낮에는 미쳐 발견할 수 없었던 서호 야경(西湖 夜景)의 환상적인 분위기에 압도당한 수많은 남과 여가 인연 맺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솔깃하기까지 했다. '무환루 문닫는 시간에 맞춰서 동천위(東川衛)라도 서호 주변으로 데려가서 한 번 꼬셔 볼까나?' "작삼 소문주님." "에구머니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느닷없는 그녀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버렸다. 빙그르르 미소짓던 동천위의 입이 열렸다. "홍 대인님께서 소문주님을 대인님 방으로 모셔오라는 분부가 있으셨습니다." "여, 여보세요. 자꾸 소문주, 소문주 하는데, 그냥 작삼 점소이라고 불러주시오." "그럴 수는 없답니다. 그것은 곧 녹 문주님을 격하시키는 일이 됩니다. 녹 문주님께서 취하하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보쇼. 그럼 북천위인가 하는 인간은 왜 날 볼 때마다 쌩 아님 째릿 째릿 이냐구?' 그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으나, 마침 주방에서부터 녹 누님 뒤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오는 북천위 녀석과 눈이 마주 치고는 꿀꺽 삼켜 버렸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놈이 애꾸라는 것이었다. 한 눈으로 째려봐 주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거슬릴 판인데, 두 눈으로 째려보면 얼마나 심기가 불편할지 짐작이 안가는 일이었다. 녹 누님이 나오자 동천위가 그녀를 의식했는지 가볍게 허리를 숙이면서 옆으로 물러났다. 가느다란 허리에 꽉 쥔 주먹을 직각으로 걷어붙이고 뚜벅뚜벅 다가오는 녹 누님의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간 게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녀가 저렇게 달아오른 듯한 모습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작삼 동생, 난 피붙이 하나 없이 홀홀 단신으로 이 자리까지 자수성가를 통해 올라온 독한 사람일세. 그런 나와 거리를 두며 두려워할 망정 누나라 부르며 친근하게 다가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더욱이 무림맹의 동조 세력에 날개가 꺾여버리자 다 떠나가 버리고, 지금 내 주위에 남아준 이들이라고는 삼천위와 홍 오라버니, 그리고, 자네들뿐이지. 지금의 나는 가진 것 없이 초라하게 쫓기는 중년 여인일 뿐인 게야. 그 때문에 내 동생 자리가 부담스러운 거라면, 기꺼이 없던 일로 하려네. 정녕 그 때문인가?" '무슨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하누? 난 그저 녹 누님이 일자무식 포연강과 냉혈마녀 주령령에 대한 방패막이가 되어주길 바라는 거지. 더도 덜도 없다고. 거창하게 말해봤자 무슨 말인지도 모른단 말이야. 에휴. 그래, 소문주 해준다. 해줘.' "그런 게 아닙니다. 누님, 제가 워낙 밑바닥을 기어다닌 하류 인생이라, 고매하고 지성미 넘치는 누님께 민폐를 끼칠까봐 소문주 호칭을 사절한 겁니다. 녹 누님에 대해서야 홍 영감님에 대한 하해와 같은 존경심에 비해서도 한치 모자람 없을 정도지요. 제가 어찌 감히 그런 불경한 마음을 먹겠습니까?" "이보게. 자넨 이미 무림공적으로 몰릴 만큼 무림맹조차 두려워하는 존재라네. 세상 그 어떤 무림인들도 자네를 무시 못 할 게야. 스스로를 너무 낮추지 말게. 차도살(借刀殺)이 가지는 위명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다네. 그럼 소문주 호칭을 허락한 것으로 알겠네. 호호호, 작삼 동생, 어서 가세나." 녹 누님은 남세스럽게도 내게 팔짱을 끼고는 살포시 보조개 미소를 떠올렸다. 연상의 녹 누님에게서 퍼져 나오는 은은한 난향 덕에 살짝 현기증이 일 정도였다. 그녀를 따라 홍 영감님 방으로 올라가면서 내내 생각한 것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지금 녹 누님이 나에 대해서 엄청나게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림맹이 날 얼마나 하찮게 생각하는지 그녀는 정녕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면 공갈 사기를 죄로 물어 내 목을 치려들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 할 만 했다. '이 와중에서도 째려보냐? 뒤통수 근질거린다. 너 자꾸 거치적거리면 남은 눈 하나마저 뽑히는 수 있다. 물론 내가 아니라 령령한테 뽑힐 거라 이 말이다. 하여튼 조심해라.'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북천위의 외눈 째려보기는 그 열기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저 습관 안 버리면 언젠가 두고두고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삼 층으로 올라가자 우측 끝 방으로 녹 누님의 발걸음이 옮겨졌다. 물론 그녀에게 팔짱을 끼인 나의 발걸음 또한 그대로 이어졌다. 내 방이 좌측 끝 방에 있는 것이니 삼 층에서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셈이었다. 자연히 홍 영감님 방은 먼발치에서라도 들여다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한밤중에 뒤가 마려 후원 뒷간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다가 복도를 타고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는 녹 누님의 신음 소리를 들은 게 전부였을 따름이다. 방 앞에 이르자 뒤를 힐끔 돌아본 녹 누님이 동천위와 북천위를 물렸다. 아무래도 주변 경계를 시키는 듯 했다. 홍 영감님이 우리를 부른 게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끼이이익. '이, 이게 뭐야?' 방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은 찰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내 방의 두 배 면적에 이른다는 것은 겉 출입구 위치로 어렴풋이 알아차렸었지만, 내부가 이토록 천양지차로 으리으리할 줄은 몰랐다. 바닥에 깔려서 위용을 자랑하는 호피에서부터 타닥타닥 조용히 타오르는 아늑한 분위기의 벽난로, 그 좌우로 길게 펼쳐진 한 폭의 사군자 등에 이르기까지 그 격이 낮은 게 없었다. 이런 곳에 꽃과 같이 청초한 녹 누님과 어울려 한밤을 지새니 나라님 부러울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중앙에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황새 문양의 대리석 원탁이 놓여 있었는데, 다른 나라 장인의 손길을 거친 티가 역력했다. 원탁의 중앙에는 홍 영감님이 앉아 있었고, 그 우측에는 먼저 온 포연강이 심드렁하니 앉아있었다. 방에 들어선 녹 누님은 내 팔짱을 바로 풀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홍 영감님의 좌측에 찰싹 붙어 앉아서 보란 듯 팔짱을 꼈다. 아무리 살을 마주 비빈 사이라지만, 너무 드러낸다 싶었다. 뭐 내가 단 한 치라도 관여할 바가 아니지만 속이 은근히 쓰린 것은 당연할 것이다. 적어도 난 외기러기 신세이니 말이다. "왔군. 거기 앉도록 하게." "……." "참으로 오랜만에 얼굴들을 마주 보게 되는군. 연강이야 짐작하고 있겠지만, 작삼은 어찌 된 영문인지 의아하겠지?" '거 뜸들이는 거 봐라. 우리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놀자구요.' "그, 그렇지요. 한 달간 별다른 일 없이 주루 일에만 매달려 왔으니깐요." "앞으로 우리는 무림맹과 한 바탕 푸닥거리를 해야 할 판이지. 우선적으로 자금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네. 이 정도 규모의 주루 운영으로는 우리 입에 풀칠하는 게 고작이라고 해야겠지. 그래서, 처음 생각대로 주루 운영과 청부 접수를 겸하기로 했네. 이 정도까지는 자네도 짐작하고 있었으리라고 보네." '그거야 영감님이 맨날 청부를 위한 수련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를 했으니까 아는 것 아니오?' "저기요. 홍 영감님 질문 있는데요." "흠, 그래, 있으면 해보게. 내, 할 수 있는 데까지 상세히 대답해줌세." "청부 얘기는 저랑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거든요. 저는 이만 들어가 봐도 될까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청부를 아무나 거저 수행할 리가 없잖겠는가? 뛰어난 무공이 뒷받침되지 않는 내가 가봤자 일회용 칼받이 소모품으로 전락할 뿐이다. 설사 살아 남아도 칼바람이 쓩쓩 뚫린 몸으로 점소이 일을 제대로 할 수나 있겠는가? 그냥 길가에 버려지지나 않으면 다행일까? 나는 그저 여기서 조용히 점소이 일에나 파묻혀 살길 바랄 뿐이다. 평화로운 일상을 바랄 뿐이다. 운 좋으면, 동천위를 꼬셔다가 서호 야경 유람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할 따름인 것이다. "아니, 작삼 동생, 자네가 이번 청부의 핵심 역할을 맡아줘야만 하네." 바깥으로 나가려는 내 발을 멈춰 세운 것은 심드렁하니 코를 후비고 있던 포연강이었다. '윽, 더러운 놈, 감히 홍 영감님 앞에서 코를 파냐? 경로 사상은 도대체 어디다가 팔아먹었어?' "포 형님, 생각해 보세요. 제가 경공이 빠르길 합니까? 쾌검이나 쾌도를 제대로 쓰기라도 합니까? 그렇다고 지풍을 자유자재로 날리기라도 합니까? 제가 있어봤자 거치적거리기만 할거라구요." "흠, 나도 자네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네. 다만 별다른 적임자가 없는 데다가 자네를 강력하게 추천하는 사람이 있어서 심사숙고 끝에 내려진 결정이니 막내 수라사살(修羅四殺)답게 성심 성의껏 임무에 전념하길 바라네." 그 말에 내 머리로 열이 발끈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무환루의 일등 점소이로써 자리 매김을 하며 성실히 살고 있는 나를 그런 사지(死地)로 보내려드는 썩을 인간이 있었다니 도저히 용서가 안 되었던 것이다. "어느 빌어먹을 인간이 저를 추천했답니까? 내 당장 달려가서 요절을 내고 말겠습니다!" "참는 게 좋을 텐데?" "참을 게 따로 있지요. 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추천이나 남발하는 그런 놈을 봐준단 말입니까? 그 빌어먹을 놈을 꼭 제 손으로 후회하게 만들 겁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드높이고 말았다. 그 새 등뒤 문이 슬그머니 열렸었던 모양인데, 너무 흥분한 까닭에 미쳐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차가운 한기가 등뒤로 몰려나오는 게 느껴졌다. 더불어 퍼져오는 가벼운 발자국 소리까지 어렴풋이 듣고 말았다. 사박 사박 사박. 차갑고도 익숙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 차 있던 은은한 난향을 살짝 밀어내며 알싸하게 퍼져왔다. 왠지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 왔다. 그제야 이 자리에 있어야 할 한 인간의 자리가 비어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 내렸다. 그녀는 내 뒤에 서더니 자신의 양팔로 내 어깨와 목을 천천히 감아왔다. 울금향 어린 입김이 오른 귓불에 느껴졌다. "빌어먹을 놈이 아니고, 빌어먹을 년이야. 널 추천한 게 바로 나거덩. 연강 오라버니랑 내가 청부 때문에 발벗고 나서려는 참인데, 감히 막내 주제에 뒷짐 지고 발을 빼시겠다?" 도리도리. 강력한 생존 의식이 발동되어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좌우로 세차게 흔들어졌다. 이번마저 그녀에게 밉보이면 당연지사 비명횡사 당하리라. 그것을 잘 아는 나는 무조건 동의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 옆자리로 슬며시 돌아앉는 그녀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새까만 야행의로 갈아입고 있었다. 어쩐지 등에 느껴지던 압박감이 푹신하더라니……. '쳇, 아무리 뛰어난 미모와 몸매를 가졌으면 뭐하냐? 숨겨놓은 애인 따로 있지, 성질 개차반이지, 툭 하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제발 부탁이다. 날 좀 가만히 내버려 다오. 휴우.' 자조 섞인 한숨을 몰래 내쉬었는데, 그만 그녀에게 포착 돼버린 모양이었다. 옆구리를 비트는 무지막지한 힘에 그만 눈깔이 휙 뒤집혀지면서 전신에 잔 경련이 일었다. 옆으로 바싹 붙어 앉은 령령이 내 옆구리를 왼손으로 몰래 쥐어뜯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익, 또 뭐가 불만이야! 간다고! 간다고 했잖아!'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06 20:11:25 고친날 2005-05-06 23:34:57 읽은수 8015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8)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 그 날밤 회의랄 것도 없는 일방적인 통보 아래, 난생 처음 야행의(夜行衣)란 것을 입어보게 되었다. 전신에 착 달라붙는 그녀의 야행의와는 달리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흑의 경장이었다. 반면, 포연강이 걸친 옷은 보기만 해도 건들건들 거리는 뒷골목 낭인 무복이었다. 이를테면 '나 시비 걸러 왔으니 다 덤벼라.' 하고 티를 내는 듯 했다. 일단 똑같은 야행의를 입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령령이 입고 있는 형태의 야행의를 포연강이나 내가 걸치게 된다면 당장 눈부터 멀어버릴 테니 말이다. "저, 저기 제, 제가 할 일은 뭔가요?" 일방 통보로 청부 참여를 강제적으로 떠 안은 것은 어쩔 수 없는 대세라지만, 내가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당연히 물어야 할 말을 묻자 포연강은 자기 알 바 아니라는 듯, 밤하늘에 반짝반짝 이는 별들에 지대한 학구열을 불태워 보였다. 대신 일부러 거리를 두면서 시선을 피했던 령령이 생글생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바짝 다가왔다. 물론 내가 바라는 답변과는 거리가 먼 반응을 보여줬다. "궁금해? 정말로 궁금한 거야?" 질문을 던지는 인간은 나였는데, 오히려 그녀가 반문해 온다. 그러면서 내 뺨따구는 왜 살살 어루만져 오는지…… . 입 닥치고 가만있으라는 무언의 압박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아, 아니요. 전, 전혀 궁, 궁금하지 않아요." "떨기는, 걱정할 것 없어. 모르고 싶어도 때 되면 다 알게 되어 있어. 원래 첫 경험이란 것은 떨리기 마련이지. 이거나 뒤집어 써." 그녀가 내게 건네준 안면 두건은 눈, 코, 입 부분만 어색하게 뚫려있는 괴이한 헝겊 쪼가리였다. 아무리 턱끈을 잘 조여 매고 거울을 바라보면서 조정을 해도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이른 바 급조한 티가 팍팍 났다. 반대로 포연강 것은 꽤나 근사한 안면 두건이었다. 그의 지저분한 구레나룻과 턱수염을 가려주는 대신에 부리부리한 두 눈만 정확하게 보여줬으니 말이다. 거기에 주령령은 한 술 더 떴다. 콧등위로 살짝 가려지는 흑두건이었는데, 눈구멍이 있어야 할 위치에 까만 유리가 장착되어 있는 게 특이했다. 아마도 밤 시간이니 시퍼렇게 빛을 뿜어댈 그녀의 귀안(鬼眼)을 가리려는 것이리라. 산적들이나 휘두를 거대한 대도(大刀)를 허리에 찬 포영강이 몸을 훌쩍 날리자, 내 팔뚝을 꽉 움켜잡은 령령도 몸을 날렸다. 한 밤 이내에 일을 처리하고 오갈 수 있는 거리라 하니 아마도 우리가 사는 항주 근처에 청부 위치가 자리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휘리리릭 휘리릭. '야, 조, 조심해 부, 부딪힌다! 후미!' 목조건물들의 지붕을 사뿐히 딛고서 날아다니는 령령의 경공에 절로 감탄이 나오긴 했으나, 정작 나 자신은 여기저기 부딪히기 일쑤였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그녀가 야속하기만 하다. 어쩌면 자신의 백옥 같은 허벅지를 물어 뜯어버린 것에 대한 일종의 보복 조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말이지. 령령은 남궁현처럼 쪼잔하지는 않잖아. 열나는 일 있음 그 때, 그 때 화끈하게 풀고 말걸. 어쩌면 남궁현이랑 대판 싸우고 잠시 갈라선 것인지도 모르겠군. 그 놈이야 좁쌀 같이 편협한 놈이니 꿍한 채 안 풀고 있는 것 아냐?' 한참을 가다보니 웬 대궐 같은 건물이 나타났다. 우리 무환루 정도의 건물이 십여 채는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곳곳에 풍류와 운치가 넘쳐 보이는 멋들어진 정자도 여러 채 세워져 있었다. 으리으리한 건물 구조와 규모를 볼 때 서민을 상대로 운영하는 주루가 아닌 듯 했다. 못해도 최소한 한 지역 경제를 좌지우지할 인간들이나 놀러올까? 서호(西湖) 주변에 있는 고급 주루들 중에서도 최고급에 들어갈 만한 곳이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이곳, 저곳에 늘씬하고 아리따운 최고급 기녀들이 무더기로 대기중이다. 이거지? 어디 어디 좀 보실…….' 철푸덕. "아이고! 갑자기 던지다니 이…… 읍." 땅바닥에 날 던지다시피 내려놓은 령령은 내가 얼떨결에 소리를 내자 자신도 당황했는지 날렵하게 내 입을 막았다. '너, 미쳤니? 목표했던 위치니까 내려놨지. 괜히 내려 놨겠어? 엉뚱한 데 정신 팔려 있으니 그 꼴이잖아. 사람 구실 좀 해라. 언제까지 나한테 욕먹고 살래?' 그녀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이 머릿속에서 대성방곡을 하듯 요동을 쳤기 때문에 당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젠장,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라. 니가 날 이 꼴로 만들어 가고 있는 거잖아. 궁금하다고 물어봤을 때 말해줬으면 되는 것 아니야? 아니 그 문제 이전에 내가 맘먹고 떠나려고 했을 때, 보내줬으면 니도 편하고 나도 편하고 좀 좋아?' 주령령과 포연강의 경공실력이 좋은 것은 알겠는데, 그래도 무환루(無患樓)에서 한 식경 밖에 안 걸리는 거리에 있다는 것은 좀 심하다 싶었다. 한참은 더 날아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 예상이나 했겠는가? 상상 범위 바깥이라 해야할 것이다. 어쩌면 청부 수락 우선 순위를 거리로 잡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듯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 첫 청부 장소라니……. '이제부터라도 인간 대접받고 싶으면, 이번 일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해라. 너 하나로 해서 우리 발목 잡히게 하지 마. 알겠어?' 끄떡 끄떡. 비록 령령의 눈이 흑두건에 가려 안보이긴 했지만, 어떤 눈빛을 짓고 있을지 뻔했으므로 신속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정작 내가 해야할 일이 뭔지도 몰랐으면서 말이다. 그녀는 날 내버려둔 채 담장을 타고 지나갔다. 마치 고양이가 담장을 타고 소리없이 지나가듯 감쪽같았다. 건물 맨 구석을 돌기 전 령령은 내 존재가 불안스러웠는지 잠시 돌아보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자네가 할 일은 내가 설명해주지. 우리가 할 일에 비하면 아주 간단하니까 미리 겁먹을 필요 없네. 그저 안 잡히게 도망만 다니면 된다네. 알겠나?' 포연강은 내게 전음입밀을 날리며 생긋 웃어 보였다. 역시 멋진 흑두건을 썼어도 그의 미소에는 적응하기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왜 웃어? 그저 도망만 다니는 것이라면, 뭐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긴 한데, 왜 이리 불안한 거지? "도둑이다! 도둑 들어왔다! 여기요! 여기!" '이, 이 인간이…… !' 포연강이 소리를 지르고 령령이 간 곳을 따라 자취를 감추자마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여기 저기서 백의 무사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아무리 고급 주루의 호위 무사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신속한 대처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도둑이 들어오길 기대하며 잠복하고 있었던 듯 했다. 어디서 긁어모은 어중이떠중이 집단이 아니라 칼을 잡고 신형을 날려오는 게 마치 무림맹의 현무조 애들을 연상케 할 만치 기본이 잘 잡혀 있었던 것이다. 포연강의 느닷없는 함성에 얼이 빠져서 다리가 얼어붙어 버렸다. 마침 어떻게 알았는지 령령의 전음입밀이 시기적절하게 귓고막을 울려왔다. '야, 이 멍청아! 가만히 있다가 칼 맞고 싶어? 그대로 잡히고 싶으면 가만히 서있어. 내가 일 마치고 나가면 널 붙잡은 녀석들부터 모조리 쓸어버릴 테지만, 대신 너도 같이 아작 내고 말 거야. 내 허벅지 건까지 합쳐서 곱절로 쳐 줄 테니 알아서 해!' 그녀의 전음입밀을 듣는 순간 넋이 나가있던 정신이 바짝 들었다. 여기저기서 신형을 날려오는 백의 무사들을 다 합친 것보다 백 배는 더 무서운 인간이 누구인지 똑똑히 떠올린 것이었다. 특히 허벅지 건까지 언급을 해와서인지 힘이 부쩍 솟아났다. 백의 무사들의 칼을 맞는 것보다 령령의 살인적 구타를 피하는 게 제일 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신형을 날려오는 백의 무사들은 그 흔한 경고 한 마디없이 검과 도를 뽑고 죽일 듯한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라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철봉을 챙겨왔다는 것이었다. 이를 악 물고는 맨 처음에 몸을 날려오는 녀석의 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검이 내 몸에 닿으려는 찰나, 회두망월(回頭望月) 수법으로 몸을 빙그르르 돌려 비켜서 흘렸다. 직후에 몸을 좌악 피며 청룡출수(靑龍出水)를 펼쳐 상대의 하복부에 철봉을 힘껏 찔렀다. "크헉." 정말 어이없었다. 겉보기로 흉흉한 기세를 흘리며 덤벼들던 놈이 이처럼 가벼운 한 수에 싱겁게 당해 기절까지 할 줄이야! 그의 뒤를 바짝 쫓아오던 놈은 그 앞의 놈이 가벼운 신음과 함께 쓰러져 기절해 버리자 잠시 멈칫하며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령령의 압박에 떠밀려 다급해진 나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맞바로 청룡출수(靑龍出水)를 찔러 넣었다. 상대는 그래도 시기적절하게 내 철봉을 쳐내며 반격해오려 했다. 철봉이 검에 맞아 튕기는 순간 독헐반미(毒歇反尾)로 돌려서 힘껏 쳐 올려 버렸다. 채앵! 휘이잉. 상대의 손에 있던 검은 내 철봉에 휘둘려 공중으로 저만치 날아가 버렸다. 물론 검을 주우려고 달려가는 그의 뒤통수에 철봉을 전력으로 날려 버렸다. 퍼억! '아차, 설,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제, 제길 어, 어디?' 뒤통수에서 시뻘건 피를 철철 흘리며 엎어져 있는 상대의 턱 아래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휴우, 숨은 붙어있네. 알아서들 데려다가 치료하겠지. 난 이만…….' 몸을 돌려세운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어느새 내가 서있던 뜰은 새하얀 백의 인영들로 빼곡하게 에워싸여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처절한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08 11:58:50 고친날 2005-05-27 10:18:29 읽은수 8168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9)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 포연강 녀석이 도둑이야! 하고 외쳤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내 야행의에 대한 진의를 알게 되었다. 앞에 뻗어있는 두 놈은 날 보고는 대뜸 어디서 엉뚱하게 굴러든 얼뜨기 초보 도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놓고 방심한 채 덤벼들었다가 내 볼품 없는 삼재검법(三才劍法)에 어이없게 당한 것일 거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런 것조차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내 주변을 에워싼 백의 무사들은 엎어져 있는 두 무사들을 본보기로 내가 생각보다 녹녹치 않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심의 묘미 같은 것은 예전에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밤눈이 밝다는 쓸만한 장점조차 그들이 들고 있는 수많은 횃불로 인해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휘이잉 휘잉! 물샐틈없이 포위 당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순간, 느닷없이 기이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바람은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횃불을 하나 하나 꺼트려 버리는 게 아닌가! 마치 자로 잰 것처럼 횃불을 들고 있는 자들 주변으로 거센 소용돌이가 들이닥쳤다. 바람이 얼마나 거셌는지 횃불을 들고있던 어떤 놈은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미친 듯이 부여잡고는 바닥을 굴러 버렸다. 바람에 섞인 흙먼지가 무척이나 따가웠던 모양이다. '역시 하늘은 아직 날 버리지 않았군. 별난 바람을 보내주기도 하고…….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사방팔방이 어둠과 함께 혼돈에 잠겨든 틈을 타 날렵하게 사사삭 바닥을 기었다. 눈치 있게 튀는 것은 내 전매 특허이니 만큼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까짓 횃불들이 꺼졌다고 난리를 치는 그들이 참 기이하기도 했다. '어,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하늘에 달이 없는 날이었네. 어쩐지 별이 무진장 밟더라. 뭐, 달이 없으면 칠흑같이 어둠이 깔리는 날이긴 하지. 어쩐지 놈들이 허둥지둥 거리는 이유가 있었군.' 백의 무사들이 다시 횃불을 밝히고, 눈을 부라렸을 때는 난 이미 완벽하게 숨어버린 후였다. 그들이 길길이 날뛰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순간에도 그들의 바로 뒤편 대청 마루 밑은 뒤질 생각들을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지. 자신들의 대장인 듯한 놈이 밟고 서있는 대청 마루 아래를 어느 간 큰놈이 뒤지려 하겠는가? 이를 두고 등하불명(燈下不明), 즉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 것이지. "샅샅이 뒤져라! 고휘천(高諱泉) 공자님이 이로 인해 깨어 나시면 안 된다. 다들 조용히 수색하도록 해라!" "존명(尊命)!" "시끄럽다. 조용히 하라고 했잖느냐! 어서들 흩어져라!" "……." '하여튼 윗대가리 라는 놈 꼬락서니하고는 조용히 하라면서 자기가 더 떠들어요. 고휘천이라는 놈 귀가 먹통이 아닌 이상 니 소리 듣고 잠 깨겠다. 이러고서 일 생기면 분명 부하들한테 책임을 전가시킬 놈 같으니라구.' 백의 무사들은 모였을 때처럼 흩어질 때 또한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눈여겨보기로 눈 앞 뜰에 남은 백의 무사는 하나도 없었다. 단지 내 머리 위 대청 마루에서 알짱 알짱거리는 우두머리 녀석을 빼고 말이다. 그런데, 이 놈은 또 고휘천(高諱泉)이라는 놈에게 굽실굽실 거리는 처지였던 것이다. 마치 천운학(天雲鶴)과 황보원, 그리고, 현무단의 관계가 연상되었다. 물론 황보원은 죽었고, 현무단도 거의 몰살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말이다. '이 놈들은 새하얀 무복이니까 백호단(白虎團) 정도 되려나? 내 위에서 알짱거리는 놈은 백호단 부단주고? 헤헷, 망상은 자유지. 무림맹이 할 일없다고 주루나 꽤 차고 있겠냐?' 드르르륵. 성큼 성큼 성큼. "휘, 휘천 공자님, 깨, 깨어 나셨군요." "깨긴 깼지요. 한참 즐기던 차에 우렁찬 부단주 목소리 덕택에 흥이 깨졌단 말이오. 목숨이 아홉이라는 하오문의 살쾡이라 그런지 안는 맛이 각별했는데, 마무리를 짓지 못해 조금 아쉽구려. 뭐, 오늘만 날은 아닐 테지만 말이오. 어차피 그녀는 내 손위에서 노는 처지니 아무렴 어떻겠소?" "……." "거기 숨어 있는 양상군자(梁上君子) 친구, 이제 나와 보는 게 어떻소? 그런 곳에 숨어 있자니 답답하지 않소?" '으잉? 들, 들켰나? 젠장, 우째 저 놈 천운학의 재수 없는 어투를 그대로 쏙 빼닮은 것 같은데.' 나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 천장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가볍게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네요. 안면만 번지르르한 풍류 공자라더니만, 그에 못지 않은 무공 실력을 숨기고 계셨군요. 어떻게 제가 있는 곳을 알았는지 여쭤봐도 되겠어요?" '어, 어라 이, 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인데…….' "이런, 이런, 하하하하핫! 쥐새끼 한 마리를 잡으려고 했을 뿐인데, 덩달아 토끼까지 잡은 격이 되어 버렸구려. 난 소저가 천장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소. 단지 마루 아래에서 숨소리를 제대로 고르지도 못하는 얼뜨기 도둑을 불러냈을 뿐이오." "뭐라구요? 쳇, 오늘은 왜 이리 되는 일이 없는지 모르겠네. 야, 아래 숨어있는 놈, 들켰다잖아. 후딱 기어 나와!" 쿵쿵쿵! 정확히 내가 숨어든 마루 위에서 발을 구르는 걸 보니 이번에는 날 지적하는 게 확실했기에 엉거주춤 바깥으로 기어 나가야만 했다. 대청 마루 위에는 백의 무사 단주인가 뭔가 하는 녀석말고도, 전신에 착 달라붙는 새까만 야행의를 걸친 복면 여인과 풍류 공자로 소문났다는 고휘천이 어정쩡하게 대치를 이루며 서 있었다. 아주 묘하다면 묘한 대치 상황이었다. "야, 너, 한 집을 두 도둑이 동시에 털면 안 된다는 양상군자 연합회 규칙도 모르냐? 내가 먼저 점찍어 놓은 곳을 너처럼 어설픈 놈이 들어와서 망쳐 놔? 너 뭐야? 소속이 어디냐고?" 양상군자 연합회? 아무리 모이는 게 힘이 된다지만, 민초들에게 해나 끼치고, 관한테는 쫓겨 도망이나 다니는 주제에 별난 걸 만들어서 이권 다툼이나 하려들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목소리, 가슴도 밋밋한 가느다란 몸매가 꽤나 눈에 익은데, 야행의 입은 자세도 낯설지 않…….'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가는 게 있어서 무릎을 탁 치며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그녀가 누군지 이제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기쁨과 동시에 날 엄습해 온 것은 은혜도 모르고 남의 액자를 세 개씩이나 스리슬쩍 해간 그녀의 몹쓸 손버릇에 대한 분노였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고. 이 계집애가 완전 적반하장(敵反荷杖)으로 삽질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내 말 안 들려? 너 어디 소속이냐고? 내가 가서 따지고 들면 넌 그 날로 모가지야!" 난 그녀의 호통에 대답은커녕 실쭉 웃어주었다. 기뻐서 웃었다기보다 어이가 없어서 비웃었던 것이다. 부처님 손바닥 위의 원숭이가 부처한테 대드는 꼴 아닌가? "아이고, 이게 누구세요? 아주 오랜만이네요. 내 족자 세 개를 날름 집어삼키고 시치미 뚝 떼려고 하셨어요? 왜 더 떠들어 보시지요? 왜 말이 없으세요?" "설, 설마…… 점, 점소이 오라버니?" 흑두건으로 얼굴 전체를 뒤덮은 그녀였지만, 안색이 대번에 변했을 거라는 것은 안 봐도 뻔할 뻔 자였다. 이제 도마 위의 생선을 요리할 일만 남은 것이었다. "오호, 이제 알아 보셨소? 그럼 우리 사이에 응당 계산되어야 할 것이 많다는 것도 알겠구려? 종…… 읍! 읍! 읍!" 얼결에 그녀의 이름을 누설할 뻔했으나, 신법이 번개같은 풍룡 종리연답게 단박에 내 옆으로 날아들어서는 입을 막아 버렸다. 경공 하나는 기차도 그녀의 힘이나 무공이 얼마나 빈약한지 잘 아는 나는 그대로 내 입을 틀어막은 손모가지를 잡고 비틀어 버렸다. 감히 어디서 대들어? 대들기는! "아, 아아악! 잘, 잘못했어요. 점, 점소이 오라버니 이, 이것 좀 놔주세요." "놓으면 그대로 도망가시게요? 어디 도망가 보시오. 난 남아서 그대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을 다 불어 버릴 테니. 내가 아는 것은 소저의 이름만이 아니란 거 모르시오? 나만큼 그대의 얼굴을 세세히 아는 이도 드물 거요. 내 나름대로 그림에도 한 가닥 조예가 있다오. 딱 하나만 그려서 관에 넘기면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시오?"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입에서 나올 때마다 정곡을 찔린 듯 부르르르 떠는 종리연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의 처지를 알았을 테니 놔줘도 상관없겠다 싶어서 잡았던 속모가지를 놔주었다. "너 실수 한 거야!" 푸욱. 찰나 옆구리에 찌르르한 고통이 찾아들어 그대로 철푸덕 엎어지고 말았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더럽게 아팠던 것이다. "웬만해서는 살인 따위는 하지 않아. 예외가 있다면 너처럼 나에 대해서 잘 아는 놈들뿐이지. 찜찜했는데, 오히려 잘 걸렸다. 저승에서 날 원망하지나 말거라. 호호호홋! 오늘의 청부는 망쳤지만, 오늘만 날인 것은 아니지. 게다가 항주 제일의 풍류 공자라는 고휘천 오라버니의 아름다운 안면도 잘 감상했으니 완전 공쳤다고 볼 수도 없지." 남의 옆구리를 찌르고는 혼잣말로 재빠르게 중얼거린 그녀는 맞바로 자리를 떠 버렸다. 그녀의 엄청난 경공 실력을 아는지 고천휘와 백의 무사 부단주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잠자코 한숨을 내쉰 고천휘는 발걸음을 다시 자신의 묵고있던 방으로 되돌렸다. "이거야 원, 희한한 날이군요. 공교롭게 두 도둑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찾아들어 서로 싸우다가 한 년이 한 놈을 대신 처치해주고 떠났다라? 되돌아가서 마무리나 지어야겠군요. 간지호 부단주, 애들더러 시체나 내다버리라고 지시를…… 어라? 시, 시체가 숨을 쉬어?" 고휘천이란 놈이 내가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것을 알아 챈 순간, 바로 몸을 일으켜 혼신의 힘을 다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달리면서 옆구리를 더듬어 박혀있는 비수를 뽑아보니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큼 박혀 있었다. 겨우 그것만큼 박히고 엄살을 떤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래도 찌르르했던 그 순간에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종리연, 내 이년을 두 번 다시 놔주나 봐라. 이번에 잡히면 정말 가만 안 놔둘 거야!' "잡아라! 꼭 저 놈을 산 채로 잡아 와라!" 간지호 단주라는 놈이 외치자 어디서 헤매고 있었는지 안 보이던 백의 무사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경공은 몰라도 무한 체력을 자랑하는 내 달음박질을 따르기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설사 지옥에 떨어졌을 악취사흉의 우두머리 막패가 살아나서 경공을 펼친다 해도 날 잡기는 쉽지 않을…… . '이, 이 놈들 더럽게 빠르잖아! 도대체 이 녀석들 정체가 뭐냐!' 이리 저리 헤매며 대문으로 내달았을 때에는 내 뒤에 붙은 백의 무사들의 숫자가 눈덩이만큼 불어나 있었다. 대문을 벗어났으나, 얼마 가지 못해 에워싸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더구나 대문 쪽에서 죽립을 쓴 채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흑의 사나이가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내가 무림인들처럼 상대의 내공을 낌새만으로 알아차린다던가 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흑의 사나이가 내뿜는 기세가 속으로 갈무리되어 있는 것이 잘 갈아진 하나의 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마치……. 죽립을 쓴 그의 뒤로 모습을 드러낸 한 여인이 무척이나 낯익었다. 난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을 향해 전력으로 뛰어갔다. 오늘은 참으로 이상한 날이다. 한 번에 두 마리의 용(龍)이나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여우는 덤이라고 해야하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10 14:11:53 고친날 2005-05-12 01:02:55 읽은수 8120 [ 13 K ] 제목 점소이 작삼(10)-뜻밖의 동료와 쫄따구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뜻밖의 동료와 쫄따구 죽립을 쓰고있는 흑의 사나이가 다름 아닌 곽철(郭鐵) 대협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뒤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미녀가 적미호(赤美狐)임을 바로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상대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데 있었다. 당연하다. 머리에 새까만 복면을 뒤집어쓰고 달려오는 얼뜨기 도둑에서 나라는 존재를 유추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닐 테니……. 곽철 대협은 코웃음치며 검집 채로 내 머리를 향해 내리그으려 했다. 다급해진 나는 재빨리 손을 앞으로 휘저으며 외쳤다. "곽, 곽철 대협, 저, 접니다. 풍, 풍악산 점소……!" 퍼억! "끄아아악!" 철푸덕. '내, 내가 미, 미쳤나봐. 복, 복면을 쓴 것도 잊고 검, 검귀 앞으로 달려들다니!.' 정수리를 내려 찍히는 고통과 함께 엎어져서는 불룩 튀어나온 혹의 촉감과 함께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쪼르르르 다가온 적미호가 내 복면을 벗겨내고는 까르르르 상쾌하게 웃어 버렸다. 이 계집애가 정말! 그만 좀 닥쳐! "이 바보야, 혀 꼬이는 발음으로 못 알아들을 소리를 하느니 먼저 복면부터 벗어 보이지 그랬어? 우린 어떤 좀도둑이 돈 내놔! 하고 외치는 줄 알았단 말이야." "당, 당신같이 눈치 빠르고, 귀밝은 사람이 그것도 못 알아들었단 말이오? 젠장, 혹 떼러 왔다가 혹 하나 더 붙인 격이구려." "혹이라니?" "아차, 이, 이럴 경황이 아니오. 이크 복면!" 재빨리 정신을 차린 나는 적미호의 손에서 복면을 빼앗아 들고 다시 뒤집어썼다. 죽립 아래로 내 정체를 확인한 곽철 대협은 미안하면서도 황당했는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다만 떨떠름한 표정으로 짙은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엄연히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거니까 치료비니 뭐니 하면서 손 내밀기 없기다. 어차피 우린 돈도 바닥났어. 줄 돈도 없어." '끙, 이 여편네가 내가 항상 돈만 뜯어 가는 수전노로 보이나? 그때야 니 하는 작태가 어이없어서 놀려 주느라 그런 거다. 그런데, 희한하군. 적미호가 자꾸 우리, 우리를 반복하는데도 곽철 대협이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거지? 그럼 긍정인가?' "쳇, 괜찮소. 괜찮으니까 뒤나 부탁드리겠소." "뭐, 뭐?" 후다다다닥. 우루루루루. 곽철 대협 뒤에 무성하게 우거져있는 측백 나무숲 속에 몸을 숨기기가 무섭게 백의 무사 무리들이 헐레벌떡 쫓아 나왔다. 아마도 내가 측백 나무숲 속에 몸을 숨기는 것을 대부분의 백의 무사들이 봤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내 앞을 막아서고 있는 인간이 누구인가? 검귀(劍鬼)라는 날카로운 별명과 함께 광룡(狂龍)이라는 무시무시한 명성에 어울리는 실력을 지닌 이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정수리 한 대 맞은 것 따위는 하나도 아깝지 않은 일이었다. 한 대 때린 게 미안해서라도 추격자들을 막아줄 테니 말이다. '뭐 이제부터는 검귀가 호위 무사들을 정리하는 것만 구경하면 그만이지.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지만…….' 백의 무사들이 바로 눈앞에까지 몰려들었으나, 더 이상 발걸음을 떼지는 못했다. 그들 앞에 서 있는 검귀 곽철 대협의 전신에서 쏟아져 나오는 검기의 기세를 느꼈음이리라. 그의 뒤에 숨어있는 나조차 그 기세로 인해 긴장이 되는데, 하물며 그의 검기를 직접 받아내고 있는 백의 무사들이야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었다. "겁낼 것 없다. 우리가 누구냐! 일거에 토막내 버려라! 가라!"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 말 한 마디가 백의 무사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 모양이었다. 일제히 검을 뽑아내며 곽철 대협에게 달려들어 왔다. 곽철 대협은 덤덤하게 검이 꽂혀있는 칼집 채로 무사들의 공세에 대응했다. 무수하게 펼쳐진 검영 속으로 신형을 날리는 그가 무사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부스럭 부스럭. 순간 철봉에 손이 갈 뻔했으나, 쑥 내밀어지는 안면의 낯익음에 한숨을 놓았다. "야, 허전하지? 이거나 씹어." 용케 내가 숨어있는 곳으로 기어 들어온 적미호는 혁낭 속에서 건포를 꺼내 건네주더니만, 그녀도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아 건포를 입에 물었다. 나도 건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전황을 살폈다. '역시 검귀 곽철 대협답군. 크크크, 그래 그거다! 그거!' 그는 하나의 신들린 검처럼 백의 무사들 속을 누비며 하나씩 하나씩 검집으로 후려쳐 눕히고 있었다. 물 흐르듯 매끄럽게 백의 무사들을 기절시켜 버리는 그의 신위에 한시름 놓였다. 날카롭게 펼쳐진 검영 속에 내가 서 있었더라면 당연히 토막토막 걸레 신세가 되어 저승 입소식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적미호 소저,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만." "응, 뭔데?" "우, 우리라고 하는 것은, 드디어 작업에 성공했다는 말이오?" "호호호호홋, 눈치챘구나! 내가 괜히 마화(魔花)라고 불리는 줄 알아? 무려 한 달간 공을 들였는데, 아무리 목석이라고 해도 안 넘어오고 베길 것 같아? 오래 전에 혼인식까지 치렀지. 물론 나도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 했어. 그가 어디로 가건 방해하지 않고 따라다닌다는 조건이 붙었거든. 뭐, 어차피 난 부평초 같은 인생이야. 저 남자의 듬직한 등판을 보며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풍악산에서 헤어졌을 때, 곽철 대협 뒤를 따르는 그녀의 장난스런 미소를 보고는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나 빠르게 진척되었을 줄은 몰랐다. 요사스런 적미호이긴 하나, 곽철 대협에게 빠져들면서 나름대로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좋아 보였다. "하하하하, 이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 쌍의 원앙 부부가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휴우, 그러면 얼마나 좋겠니? 요즘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아. 삐쳐도 단단히 삐쳤어." "네? 무슨 일인데요?" "나 때문에 그이의 사문인 종남파(終南派)에서 파문(破門) 당했거든. 유 사부라는 분이 자신의 수제자라는 그이가 느닷없이 마교 출신인 나와 결혼한 것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야. 나와 그이를 보자마자 대뜸 파문을 선언하고는 문 밖으로 쫓아 내버리더라고. 그 이후 그이는 날 돌아보지 않아. 오로지, 오로지 검을 겨룰 상대만을 찾아서 미친 듯이 떠돌 뿐이야. 벌써 한 달째 무시당하고 있어. 그때처럼 날 다정하게 돌아 봐주지 않아. 나, 난 그저 그의 등뒤에 달린 혹일 뿐이야. 힘, 힘들어. 너무 힘들다고. 으히힝, 으아아아앙……." 입에 문 건포를 떨어뜨리고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를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곽철 대협과 적미호라면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원앙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리 복잡한 사정이 있을 줄이야! 어떻게 보면 월하노인(月下老人)이라 볼 수 있는 내 입장이 난처해지기도 했다. '어, 엉? 그런데, 파문을 당하면 단전을 파괴당한다고 하던데? 보아하니 그의 신위는 이전보다 날카로워졌으면 날카로워졌지, 떨어진 부분도 없어 보인단 말이야. 어쩌면, 어쩌면 해법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크크크크.' "적미호 소저, 그만 우세요. 어쩌면 제가 두 분 사이를 조금은 풀어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엉? 정, 정말?" "흠, 장담은 못하겠는데요. 곽철 대협은 고지식한 양반이라 내 말을 헤아려 들어줄지……. 원래 꿍한 면이 없잖아 있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할 줄 아는 분이오. 조그마한 불꽃만 피워주면 아마 일사천리일 거요. 그 이후는 알아서 소저가 알아서 작업하시면 되요. 작업은 소저의 전문 분야 잖아요." "고, 고마워!" 그녀는 정말로 기뻤는지 날 와락 껴안았다. 난감하게도 그녀의 뭉클한 가슴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간만에 느끼는 여인의 촉감이었기에 나도 그만 그녀를 안을 뻔했다. 그러나, 이미 남의 여편네가 된 여인 아닌가? 입맛을 다시며 그녀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곽철 대협도 참으로 물건 중에 물건이다. 어떻게 이런 초 뇌살 미녀를 옆에 두고도 무시해 버릴 수가 있는 거야! 에휴.'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가 뒤늦게 전황을 살펴보니 이미 다 끝이 나버린 뒤였다. 백의 무사들 모두가 신음 소리를 흘리며 바닥에 엎어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가운데 곽철 대협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과연 구룡 중에서도 군계일학(群鷄壹鶴)이라 할 만한 사나이였다. 최저라 느껴지는 남궁현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그의 기세에 왠지 흐뭇한 미소가 배어 나왔다. "감사합니다. 곽철 대협, 제가 또 은혜를 입고 마는군요." "감사할 것 없소. 이들이 내 앞길을 막았으니 이들 잘못이오. 그대의 머리를 후려친 것도 있으니 서로 비긴 걸로 합시다." '역시 맘에 드는 대협 중의 대협이야. 가식 없는 대협을 위해서라면 조금 잔머리를 굴리는 것도 괜찮겠지.' "그런데, 대협, 적미호 소저와의 일로 사문에서 파문 당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한 말씀 올릴까 하는데, 들어주시겠는지요?" "흥! 일 없소. 난 파문을 당해 정처 없이 떠도는 낭인일 뿐이오. 사문이라니 당치않소!" '이거, 이거 단단히 삐쳤군. 그래도 물러설 수 없지.' "아닙니다. 대협은 낭인일 수가 없습니다. 대협의 파문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무, 무슨 말이오?" '옳거니 역시 넘어오는군. 겉으로 티는 안 내고 있었어도 얼마나 답답했을까? 나도 집에서 쫓겨나는 일 따위로 하늘이 노랗게 보이긴 했으나, 자신의 뿌리가 끊어졌다는 충격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제가 알기로 대협의 사부님께서 진심으로 화가 나셨다면, 대협의 단전을 파괴하고 다시는 사문의 검을 들지 못하도록 검을 쓰는 팔을 잘라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제가 된 적미호 소저는 목을 베어 효수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대협과 소저를 보자마자 대뜸 파문 선언만 하고 바로 내쫓았다는 것은 사부님의 의도를 잘 보여주는군요." "……." 어느새 그는 내 얘기에 푹 빠져들고 있었다. 이로 보아 그가 종남파를 무척 사랑하고 아끼는 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유 사부에 대한 존경심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그의 달아오른 눈시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고지식하고 목석 같은 양반이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검에 미쳐 중원을 떠돌고 있었어도 마음 속은 항상 사문에 있었으리라. 이런 사람을 키워낸 종남파란 어떤 곳일까? 잠시라도 종남파(終南派)의 제자가 되어 그들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나같이 하찮은 존재라도 받아준다면 말이다. "종남파는 정파의 거대한 기둥 중에 하나입니다. 따라서 대외적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사문의 수제자가 마교 여인과 혼인했다는 것은 지탄을 받아 마땅한 일일 테지요. 그렇게 된다면 제일 불편한 사람은 바로 대협일 것입니다. 사문을 사랑하는 대협이 받을 압박감을 종남파 사부께서는 미리 계산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대협과 소저를 보자마자 대뜸 대외적으로 파문하면서도 종남파 무공을 쓸 수 있도록 멀쩡하게 내보낸 것은 대협이 종남파 무공을 더욱 갈고 닦아주기를 바랐음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적미호 소저도 남 몰래 눈여겨보셨을 것입니다. 그녀를 무사히 내보낸 것은 대협의 여자로서 인정했다는 뜻일 겁니다. 이제 대협은 사문에 누를 끼치지 않아도 되고, 그녀와의 혼인에도 아무런 하자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언젠가 대협과 소저에 대한 정파 수뇌부의 질타가 수그러들면 유 사부님께서는 대협을 조용히 종남파로 불러들일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대협은 사부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셔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유 사부님께서 인정한 적미호 소저를 소중하게 아끼고 사랑해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종남파의 검을 더욱 갈고 닦는 일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 언젠가를 위해서 말이지요." "……." 잠시간 짧고도 긴 침묵이 흘렀다. 목이 매인 듯한 곽철 대협의 입이 기어코 열렸다. "하아, 그, 그렇게 된 사정이었던 것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 누구라도 알 일을…… 난 참으로 한심한 인간이오. 작삼, 그대야말로 내 은인이요. 내 편협한 시야을 밝게 비춰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오. 난 또 당신에게 빚을 지고 말았구려." "아, 아니 전, 그저……." '끙, 이, 이런 너무 쉽게 넘어 오잖아. 꿈보다 해몽이라고, 난 그저 좋게 둘러 말한 것뿐인데. 하여튼 나중에 내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 얼마나 실망할지 모르겠군. 그래도 일단 곽철 대협이 순진해서 다행이다. 크크크.' 곽철 대협은 나한테 감사하다고 허리를 숙이더니 이번에는 적미호 소저를 돌아보며 넓죽 엎드리는 게 아닌가! "미안하오. 내가 어리석었소. 날 용서해 주시겠소?" 적미호는 그런 그를 보자 또 우왕 울음을 터뜨리며 엎드린 그를 껴안았다. 그간 정말 무지막지하게 힘겨웠던 모양이다. 부럽고도, 부럽고도, 또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로 위안을 줄 옆구리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부러운 일일 줄이야! 내 주변에는 오로지 날 못 잡아먹어 안달 난 냉혈 마녀나 상하를 따지며 딱딱하게 구는 인간들 밖에 없다. 하나 있던 친구마저 배신을 때리고 잠적 중이다. 아, 한심하고, 한심한 일이다. 나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젠장, 그래도 살고 만다. 악착같이 살아서 꼭 내 주루를 거머쥐고 말 거야. 내 존재를 강제로라도 인정하게 만들 거야. 옆구리 없으면 어때? 돈으로라도 여자를 사면 될 거 아니야?' "험, 험, 저기 좋은 분위기를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남의 집 안마당에 와서 뻔뻔스럽게 행패를 부린 데 대한 해명을 들어야 겠소만." 서로를 부축하고 간신히 일어나고 있는 백의 무사들 사이로 항주 제일의 풍류 공자라는 고휘천 공자가 걸어 들어왔다. 아까 전에는 괘씸한 종리연 덕에 제대로 살피지 못했지만, 반듯하게 하얀 선섭을 부치며 하늘하늘 펄럭이는 백의를 걸치고 나타난 그의 모습에서 글 꽤나 읽은 듯한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더구나 그의 안면은 타고난 신의 조각품이라 불려도 될 정도로 아름답다고나 해야할까? 그의 말투도 그러했지만, 외면에서까지도 천운학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주루 주인 된 입장이면 엄청난 금력을 쥐고 있다는 뜻 아닌가? '제길, 또 배아프게 만드는 인간의 등장이군.' 아직도 훌쩍이는 적미호 소저를 달래며 일어선 곽철 대협은 사뭇 달라진 기세로 점잖게 포권을 취했다. "죄송하오. 그들이 제 앞을 막기에 그만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소. 당신이 고휘천 공자이시오?" "그렇소. 그럼 이제 그 좀도둑을 내주실 수 있겠소?" "그 이전에 나와의 결전을 치러야 할거요. 나와 검을 겨루고 싶다고 초대한 것은 당신이니 피하진 않겠지요?" 곽철 대협의 말에 고휘천 녀석의 우아한 안면이 살짝 일그러졌다. "난 당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초대한 적도 없소. 그 초대장이나 줘보시겠소?" 곽철 대협은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품안에 잘 갈무리하고 있던 서신을 건네었다. 그 서신을 받아든 고휘천 녀석의 안면이 순간 창백해졌다. 서신을 꾸깃꾸깃 움켜쥔 고휘천 녀석의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속았다! 모두 돌아가! 양 총관과 유 문주가 무사한지 어서 확인해! 젠장 어쩐지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들이 한꺼번에 난리를 피운다고 했다. 저 좀도둑놈도 연막에 불과해. 아는 게 없을 거다! 어서들 돌아가!" 문사풍으로 선섭을 흔들던 고휘천 녀석은 놀랍게도 쾌속한 경공과 함께 장내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의 경공 속도로 미뤄볼 때 구룡에 버금가는 고수인 듯했다. 과연 강호는 넓고도 넓은 곳이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고수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 고수가 이런 곳에 은닉하고 있을 줄이야! 비틀 비틀 일어선 백의 무사들도 그의 뒤를 따라 신형을 날렸다. 단숨에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 꼴이 된 곽철 대협과 적미호 소저, 그리고 나만 남은 장내로 스산한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럼 우리 청부도 그저 연막이란 말이야? 제 삼의 인물이 존재한다는 소린가? 도대체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모르겠군. 아구구, 머리 어지러워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12 12:10:36 고친날 2005-05-12 12:10:36 읽은수 7915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1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1] "저, 저기 곽철 대협,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한동안의 적막감을 이기지 못한 내가 먼저 우두커니 석상처럼 굳어있는 곽철 대협에게 말 문을 열었다. 나름대로 고휘천 공자에 대한 소문만을 들었던 중에 대전을 요청하는 서신을 받고는 기대감에 벅차 한달음에 달려왔을 그의 실망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대략 짐작이 되었다. 검귀(劒鬼)라고도 불리면서 광룡(狂龍)이라는 명성에서 잘 알 수 있듯이 검에 미쳐있는 그가 헛걸음을 했다는 것은 엄청나게 열 받는 일일 것이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한다지 않는가? 더군다나 칼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양반이 된서리 맞은 꼴이니 그 분노를 어디에 풀겠어?' "휴우, 내가 잠시 미쳤었나 보오. 당시에는 파문을 당했다는 충격 때문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소. 그저 전율이 일 만큼 무서운 자와 대결해봄으로써 파문의 시름을 달래려 했나 보오. 뒤늦게 나마 유 사부님의 뜻을 안 내가 그저 한탄스럽기는 하나, 막막하기는 마찬가지구려. 이 허전함을 무엇으로 달랠지 걱정이라오." "곽철 대협……." 뭐라고 위로할 말이 없었다. 파문을 당한 현실에는 변화가 없었으니 말이다. 눈치 빠른 적미호가 가만히 곽철 대협의 허리에 손을 두르며 널찍한 그의 등판에 머리를 기대었다. 쓴웃음을 떠올린 곽철 대협은 자신의 허리에 깍지를 낀 그녀의 손을 살포시 움켜쥐었다. 서로 위안을 주느라 붙어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문제였다. '제, 제길, 그래도 닭살이 다다닥 돋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단 말이야. 눈깔 시려 죽겠구만. 그렇게 염장 지를 거면 찢어집시다, 찢어지자구요!' 내 마음 속 심금을 울리는 절규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의 포옹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안 보였다. 그들과 같이 있기에 심히 거북함을 느끼던 나로서는 그저 한숨만을 푹 내쉬며 시선이라도 틀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사사사사삭 휘리리릭. '응?' 때 마침 담장을 타고 가볍게 신형을 날려오는 두 명의 검은 인영이 보였다. 거대한 체구의 헐렁이는 낭인 무복 복면인과 요염한 몸매를 과시하듯 착 달라붙은 야행의의 복면 여인이 누구인가는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바짝 다가온 그들의 몸에서 기이하게도 진한 혈향(血香)이 흘러 나왔다. '뭐, 뭐야? 암살 청부라도 맡은 거야? 이 정도 피냄새면 옷에 잔뜩 그게 튀었다는 뜻인데, 도대체…….' 피내음을 잔뜩 풍기는 주령령(周鈴鈴)과 포연강(鮑緣强)이 다가오자 풀이 잔뜩 죽어있던 곽철 대협의 두 눈에 빛이 반짝 들어갔다. 그의 몸은 자연스럽게 발검(發劍) 자세로 흘렀고, 덩달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적미호도 날렵하게 뒤편으로 신형을 날렸다. 분위기로 보아 검날을 세운 곽철 대협의 신위를 뒤에서 관전하려는 듯 했다. '아, 아차, 곽철 대협은 이들을 모르지. 뭐, 뭐라고 설명해야하지? 에라, 일단은 막고 보자.' 난 재빠르게 그들 사이로 몸을 끼워 가로막고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대결이 벌어지지 않도록 만류를 했다. "잠, 잠깐만요. 곽철 대협, 고, 고정하세요. 이들은 제 일행이거든요. 그냥 못 본 척 해주시면 이대로 물러갈게요. 다, 다음에 뵙도록 해요." "……." 그러나, 묘하게도 잔뜩 긴장해있는 곽철 대협의 귀에 내 말 따위는 안 들리는 듯 했다. 심지어 그의 시선은 나를 건너뛰어 내 뒤편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일이 생각보다 심각해지려 하는 게 아닌가! 매우 당황한 나는 적미호 소저에게 필사적으로 도움의 눈빛을 날렸다. 눈치 빠른 그녀는 상황을 재빠르게 이해하고는 곽철 대협을 말리려 했다. "당신, 그만 칼을 거두고 물러나는 게 어때요? 보아하니 저들은 작삼 점소이와 같은 일행 같은데, 싸울 필요는 없잖아요?" "물러서시오. 나에게 살기를 날린 것은 저 자요. 이미 그와 나는 부딪혀야만 하는 운명인 게요." 그의 단호한 모습에 나를 슬며시 돌아본 적미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게 느껴진다. 적미호가 만류해도 안들을 정도로 일이 치닫고 있다는 것은 불길한 일이었다. 난 그 누구도 다치길 원치 않았다. 그라고 이르는 것을 보니 곽철 대협이 경계하고 있는 대상은 포연강이리라. 그 인간이야 십성(十聖) 중 하나라 불릴 정도의 고수지만, 곽철 대협도 구룡(九龍) 중 단연 군계일학(群鷄壹鶴)이라 할 만큼 그에 못잖은 고수일 것이다. 둘이 전력으로 맞붙는다면,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직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곽철 대협은 원래 호전적인 인물이라 쳐도 더럽게 능글맞은 포연강 녀석까지 왜 이러는 거야? 다들 미쳤나? 흐이구, 내가 더 미칠 지경이다.' "곽, 곽철 대협, 제발 진정하세요. 곽철 대협과는 아무런 은원이 없는 이들이에요. 제발, 제발 이대로 보내 주세요. 네?" "내 말 못 알아들었소이까? 적의로 가득 찬 살기를 날리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요, 바로 그대 뒤에 있는 거구의 남자요. 필시 우리 종남파와 적대적인 관계를 맺고있는 자일 거요. 비록 파문을 당한 몸이나, 유 사부님의 기대가 날 떠나지 않은 이상, 종남파의 적은 곧 나의 적이요. 비켜서시오. 작삼 그대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만큼 그대를 베고 싶지는 않소." "그, 그러나……." 덥썩 질질질질. 갑자기 목덜미를 잡힌 나는 속절없이 한 쪽 구석으로 끌려가야만 했다. 물론 내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간 악력의 주인공은 두 말할 나위 없이 냉혈마녀 주령령이었다. 당황해서 한마디하려는 나를 지긋이 내려다본 주령령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검은 유리조각으로 눈을 가리고 있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최 알 길이 없었다. 그녀에게서 무언의 압박을 강력하게 받은 나는 그만 입을 다물어야 했으나, 곽철 대협이 너무나도 걱정이 되었다. 물론 포연강도 걱정은 되었지만, 솔직히 곽철 대협에 비해서는 별반 아니었다. '청부 때문에 왔으면, 청부만 해결하면 될 일이지. 곽철 대협은 왜 죽이려 드는 거야? 그럼 적미호까지 죽이려는 생각인 것인가? 혹, 혹시 내가 그들에게 정체를 내보인 것 때문에?' 그 생각을 떠올리자 말 할 수 없는 자책감이 들었다. 결국에는 내 실수였던 것이다.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말았어야 했던 거다. 조금 더 힘들었다해도 정체를 숨긴 채 계속 내달려야만 했던 것이다. 툭. "귀하는 우리 종남파와 무슨 은원(恩怨)이 있기에 나에게 살기를 내뿜는 것이요?" 먼저 침묵을 깨트린 것은 곽철 대협이었다. 죽립까지 벗어 던진 것을 보니 포연강이 만만치 않은 고수라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지. 십성의 말단 고수 대 구룡의 상위 고수간 대결이라…… 정말 희한한 대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포연강이 조금 더 우세하지 않을까?' "종남파 운운하는 것을 보니 네가 바로 종남파에서 파문 당했다는 미친 뱀새끼로구나. 종남파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은원이 없을 뿐더러 종남파 근처에도 간 적이 없다. 그저 호승심이 일어났을 뿐, 구룡의 실력을 한 번 가늠해보고자 한다." "좋소. 마침 허깨비에게 속아 헛걸음을 하는 듯 했으나, 형장 같은 고수를 만나 기쁘기 그지없소이다. 과연 구룡을 깔 볼 만한 실력이 되는지 내가 헤아려 드리리다." '에휴, 칼로 싸우기도 전에 혓바닥으로 난도질부터 하는구나. 포연강도 곽철 대협처럼 칼부림에 미친 것이었나? 곰가죽과의 일체화나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 초무식 곰탱인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안 걸까?' 결전의 순간이 임박해왔음을 느낀 순간 난 두 눈을 질끈 감고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포연강의 무식한 대도에 치명상이나 결정타를 얻어맞고 쓰러질 곽철 대협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는 안 봐도 뻔하리라.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곽철 대협의 목이 뎅겅 잘려 하늘에 솟구쳐 오르리라!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을 적미호는 주령령의 손에 가느다란 모가지를 잡혀 뿌드득 꺾여 버리리라! 언제나 그러했듯 그들의 시체는 경공을 펼쳐 산 하나는 넘어간 후에야 은밀하고 음지 바른 곳에 묻혀 강호에 그 생사조차 불분명해지리라! 쩡! 털썩. '역시 곽철 대협이 피를 토하며 쓰러져 버렸구나. 이제는 그의 목이 날아가고, 적미호가 살해당할 일만 남았구나. 안타깝군. 그들이 막 화해를 하고 백년해로를 다짐하는 차에 그 끝을 보게 될 줄이야! 그러게 왜 내 앞에서 닭살신공을 펼쳐서 이 꼴을 당하느냐고. 쯧쯧쯧.' 짧은 적막감을 참지 못한 나는 슬그머니 눈을 뜨고 말았다. 의외로 곽철 대협과 적미호의 목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저 바닥에 한 차례 내팽개쳐졌는지 흙으로 범벅이 된 흑의의 주인인 곽철 대협이 그의 생명과도 같은 검을 놓치고는 망연자실 초점을 잃은 채 주저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그의 턱 끝에는 대도의 무딘 날이 겨눠져 있었으나, 생사와는 관련이 없어 보였다. 단지 그의 입으로부터 한 마디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듯 했다. "졌소, 그, 그것도 완벽하게 패하고 말았소." 그의 입으로부터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포연강은 씨익 겁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대도를 허리에 다시 묶었다. 한 차례의 가벼운 격돌만으로 심각한 내상을 입은 듯한 곽철 대협에게로 안면이 새하얗게 창백해진 적미호가 뛰어들어가 상세를 살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니 별다른 중상은 입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문보다는 겸손한 놈이군. 수고하게나." "잠, 잠깐, 당신의 존함을 알고 싶소. 그래야 훗날 찾아가 보기라도 할 것 아니오?" "당연히 비밀이지. 이 잘난 복면은 멋으로 쓰고있는 게 아니라네. 그럼 이만." 포연강은 승자의 여유를 발휘하며 유유히 사라지려 했다. 그러나, 곽철 대협은 이를 악물고 악다구니로 일어서서 그의 앞을 막았다. 내상을 천천히 가라앉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무리를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안면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나 입가로 가늘게 흘러내리는 시뻘건 핏줄기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못 가오. 존함을 알려주지 않으면 갈 수 없소." "허허, 이 놈 고집 보게. 눈에 독이 오른 것이 아주 보기 딱 좋아. 자넨 타고난 승부사로군. 때리는 시늉만 해도 꼬리를 말고 배를 뒤집는 누구와는 아주 잘 대조가 되네 그려. 다시 말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는 알려줄 수 없다네." '이, 이봐. 누구라고 말하지 말고, 나라고 딱 찍어서 말하시지. 난 그저 생존 본능에 충실할 뿐이라고. 겉멋 부리다가 저승행 마차를 타는 불운을 겪는 바보가 되기는 싫단 말이야.' "그, 그렇다면, 차라리 날 죽이고 가시오." "귀찮군. 그렇게 죽고 싶다면 왜 스스로 목을 자르지 못하는가?" "……." "이것 참, 고집 센 친구로군. 내 정체를 직접 알려주지는 못하겠지만, 부득부득 따라오는 놈을 막을 생각은 없네.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보게." 그 말에 절망에 가득 차 있던, 곽철 대협의 두 눈가에 생기가 감돌았다. 뿐만 아니라 실쭉 웃는 것처럼 보였다면 내 착각일까? "감, 감사하오." 철퍼덕. 그 말을 간신히 내뱉은 곽철 대협은 내상이 크게 도져버렸는지 그대로 고꾸라져 버렸다. 짤막한 비명을 내뱉은 적미호의 뒤로 백의 무사들의 잔영이 보였다. 너무나 길게 시간을 끈 것이었다. "이런, 나 원 참, 난 같은 게 달랑거리는 남정네는 업고 싶지 않단 말이다. 에휴." 투덜투덜 거리며 곽철 대협을 업고 신형을 날리는 포연강의 잔영 사이로 살포시 웃음짓는 주령령의 화사한 미소를 잠깐 본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찰나지간에 나타난 그녀의 미소는 나타난 순간보다 더 빠르게 지워져 있었다. 여기에 왔던 때처럼 우악스럽게 그녀에게 팔뚝을 잡혀 날아오르게 되었다. 적미호도 다급히 신형을 날려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주령령의 신형이 포연강과 나란히 가게 되자 날 힐끔 돌아본 포연강이 눈을 부라리며 입을 열었다. "얌마!" "네, 네?" "너 빨리 쓸만한 경공 아무거나 좀 익혀 봐. 새까만 막둥이를 놔두고, 꼭 까마득한 선배인 내가 이런 짓을 해야겠냐? 앙? 안 그렇냐?"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14 15:11:03 고친날 2005-05-15 09:14:24 읽은수 7797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1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2] 거리가 가까웠던 관계로 새벽녘이 채 이르기도 전에 전원 별 탈 없이 무환루(無患樓)로 돌아오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덤으로 기절한 곽철 대협과 그의 안사람이 된 적미호 소저까지 데려오고 말았다. 아니 이제는 적 부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순순히 그들을 데려온 포연강의 드넓어진 아량에 의문이 생긴다. 주령령이 별다르게 반대를 하지 않은 것도 뜻밖이었다. 심지어는 마중 나온 홍 영감이나 녹 누님까지도 가타부타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마치 사전에 데려 오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은 거기까지였다. 철푸덕. "헉, 살살 좀 내려줘요." "흥, 엄살은, 아니꼬우면 포 오라버니 말대로 아무 경공이라도 익혀 보던가." 주령령이 날 내려놓는 순간 관통 당했던 찌르르한 고통이 재차 엄습해와서 나도 모르게 옆구리를 감싸안으며 주저앉고 말았다. 이번에도 내가 다른 생각을 하다가 엎어졌으려니 지레짐작하며 무심코 지나쳤을 령령은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몇 걸음 채 가기도 않고 다시 되돌아 왔다. 갑자기 옆구리를 감싸고 있던 내 손바닥을 번쩍 들어 보였다. '어, 어라 이거 웬 피가 이렇게나 많이? 아하, 종리연 싸가지한테 찔린 상처로구나.' 지혈도 하지 않고, 맞바로 대롱대롱 매달려 왔으니 벌려진 상처에서 새어나온 피로 범벅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쩐지 매달려 오는 내내 옆구리가 따끔따끔 하드라니.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 령령은 그대로 내 손을 붙잡아 끌다시피 데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윗도리 벗어." "……." 내가 잠자코 상의를 벗어주자 물수건으로 상처 주변을 닦아낸 후 고약인지 금창약인지를 처덕처덕 발라 주었다. 더구나 붕대까지 세심하게 싸매 주는 것이 아닌가? '이 년이 또 왜 이래? 또 발작하려는 거 아니야?'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공연히 내가 다 불안할 지경이었다. 평상시의 쌀쌀맞은 그녀답지 않다고 해야할까? 바야흐로 붕대 매듭까지 꼼꼼하게 처리하고 나자 아니나 다를까 본격적인 추궁이 시작되었다. "야, 이 멍청아, 옆구리 뚫렸으면, 미리 말해야 하는 거 아니야? 대충 지혈이라도 했으면 이렇게 바짓가랑이까지 흠뻑 다 젖을 정도로 피를 흘리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 "누구야?" "네?" "누구한테 찔렸냐구?" "……." 결국 청부로 갔던 주루 뜰 안에서 벌어졌던 지난 순간을 다 토해놔야 했다.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서 뚝뚝 흘러나오는 차가운 냉기를 접하게 되니 감추고 말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 술술술 다 흘러 나왔다. 얼마나 그녀에게 쫄았는지 종리연 싸가지에게 왜 찔렸는지 세세하게 상황 설명은 물론이거니와 별 상관도 없는 고휘천 공자를 보고 느낀 감상까지 다 내뱉고 말았다. 그래도 좀 어이가 없기는 했다. 중원 전체를 제 방 드나들 듯 싸돌아 다니는 풍룡(風龍) 종리연(鐘理戀)이 아닌가? 자기가 그 년에 대해서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다고 세세하게 캐묻고 난리인지? 나 원 참. "오늘 하루는 꼼짝 말고 누워 있어." "네, 그, 그럼, 이만." "어딜 가?" "네?" "니 방에 있으면 니가 잘도 누워있겠다. 이 침대에 누워서 쥐죽은듯이 꼼짝하지도 마. 수시로 확인할 거니까 일절 나돌아다닐 생각일랑 하지마. 알았어? 몰랐어?" "알, 알았어요." 결국 오늘 하루는 불가항력으로 그녀의 침대에 강시처럼 꼼짝도 못하고 드러누워 있어야만 했다. 울금향(鬱金香)이 진하게 배어 나오는 령령의 방 구경은 항주(抗州)로 거주지를 옮겨온 후 처음이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그녀의 모난 성격 덕택이라고나 해야할까? 령령이 방문을 닫고 나간 것을 확인한 나는 여전히 그녀가 존재하는 것처럼 진한 울금향이 흘러나오는 방안을 훑어보았다. 방 크기가 조금 커졌을 뿐 망아루 시절과 거의 비슷한 형태의 방이었다. 창문도 북쪽으로 나있어서 바로 햇빛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이전 때처럼 반사된 빛만 들어올 뿐이었다. 언제 챙겨왔는지 벽에 걸린 난초 수묵화도 그대로 있었고, 조금은 값이 나갈 듯한 청록빛 도자기도 그 위치 그대로 놓여져 있었다. 마치 망아루에서 령령의 방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약간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별난 성격일세. 하기사 그녀가 남이랑 좀 다르냐? 원래 기똥차게 희한한 구석이 많잖아. 그러려니 해야지.' 밤새도록 쫓겨다닌 데다가 피까지 대량으로 흘려서인지 눈이 스르르륵 감겨져 왔다. 강렬하게 흘러나오는 울금향과 포근하게 감싸주는 이불의 온기에 취해 그만 꿈의 나락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었다. 어두컴컴한 밤중이다. 밑도 끝도 없이 뒤덮인 암흑 속이다. 난 그저 정처없이 헤맬 뿐이다. 어디로 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지 의문이 일 정도였다. '여기가 어디일까? 밤눈이 무지하게 밝은 내 시야로도 새까맣게 보일 정도면, 안개라도 깔린 것일까? 그, 그럼 제길, 꿈 속이로구만.' 한 가지 희한한 점은 예전에 꿈을 꿀 때는 그저 그러려니 했는데, 요즘에 꾸는 꿈일 수록 내 의식이 비교적 뚜렷하다는 점이었다. 즉 꿈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꾸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더 보태면 나의 꿈은 거의 대부분 암흑 속에만 갇혀있는 듯 했다. 꿈속에서 밝은 태양을 못 본지 오래전인 것이다. 언제부터였는지, 왜 그러한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찌하랴? 그저 꿈일 뿐인 것을……. 꿈속에서 궁시렁궁시렁 거리며 걷다보니 문득 발끝에 채이는 것이 있었다.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까닭에 허리를 굽혀 자세히 확인을 했다. '헉! 포, 포연강!' 그랬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포연강의 머리가 굴러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그 거대한 몸통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너무나도 놀란 나는 그대로 도망치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아무리 뛰고 뛰어도 좀처럼 멀어지지 않았다. 기어이는 돌무더기에 걸려서 엎어지고 말았다. 다시 일어나서 뛰어 가려던 나의 몸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돌무더기는 말 그대로 거대한 머리통 무더기였다. 가장 정상에는 홍 영감님의 머리가 생전 그대로처럼 세워져 있었고, 그 주변으로 녹 누님과 죽어서도 호위하듯 굴러다니는 삼천위의 머리통까지 보였다.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온 몸의 모공에서 소름이 바짝 돋아났다. '침착해. 침착하라고. 이것은 다 꿈이야. 꿈일 뿐이야.' "꺄아아아악!"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 난 주저주저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뛰어가야만 했다. 꿈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음에도 내 몸은 내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미끈 휘청 철퍼덕. 평평한 돌 바닥에 쏟아진 그 어떤 것에 미끄러져서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어 버렸다. 평상시 같으면 투덜투덜 거렸을 것이나, 바닥에 흘러내린 것의 정체를 알고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사방팔방이 전신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시뻘건 핏물 천지였다. 그 피의 진원지는 두 시신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생전에 연인이었는지 죽는 순간까지 서로 껴안고 있는 두 남녀, 바로 곽철 대협과 적미호 부인이었다. 비록 그들이 껴안을 팔까지는 있었어도 허리 아래 하반신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제, 제길 무환루 인간들이군. 나올 사람들은 다 나왔네. 딱 한 사람만 빼고 설마…….' "꺽 꺼억." 간신히 신음 소리만을 흘리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지자 두 명의 여인이 서로 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령령에게 먹히고 있는 종리연의 모습이었다. 옷이 찢겨졌는지 나신이 된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종리연의 복부를 갈라내고 간을 끄집어내고 있는 손의 주인은 당연히 주령령이었다. 커다란 두 눈탱이가 새빨갛게 빛이 나는 것을 보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상태인 모양이다. '그럼, 그렇지. 이런 짓을 할 애는 너 밖에 없지. 그런데, 종리연은 무환루 근처에도 얼씬거린 적이 없는데, 왜 나오는 거야? 참, 이, 이럴 때가 아니라 나도 도망을 가야하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몸이 내 뜻을 따라줘서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칠 수 있었다. 기어이는 반대로 몸을 돌려서 뛰어가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 실패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앞에 긴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령령이 그 새하얀 나삼의를 펄럭이며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끄러지듯 내 앞으로 날아와 내 어깨를 밀치며 쓰러뜨리고는 그 위에 올라 타 버렸다. 바로 눈앞에서 새빨간 혀로 입맛을 다시는 그녀가 너무나도 소름이 끼쳐 그만…….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전신이 땀으로 목욕한 듯 젖어 있었다. 밤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방안의 정경이 훤하게 들어왔다. 내가 누워있는 곳도 령령의 침대 위가 맞았다. 단지……. '이 년이 왜 새하얀 나삼의를 꺼내 입고 엎어져 있는 거야? 설마 또 밤이라고 귀신 놀음하는 것은 아닐 테지? 아니야, 최근에는 새까만 야행의로 취미를 바꾼 것 같던데. 잠잘 때만 새하얀 나삼의를 입고 자는 모양이지?' 그녀는 내가 누워있는 침대 바로 옆에 의자를 갖다 놓고는 망아루 때처럼 침대 맡에 머리를 올려놓고 잠들어 있었다. 문득 잠이 들어있는 그녀의 기다란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었다. 잠잠했다. 령령이 잠든 것이 확실해지자 대담해져서는 그녀의 새하얀 얼굴선까지 어루만지고 말았다. '어디서 싸돌아 다니다가 들어왔나? 왜 이렇게 온통 땀범벅이야?.' 흠칫. 그녀의 백옥 같은 살결에서 잔 경련을 느낀 나는 재빨리 손을 떼고는 잠자는 척 했다. 그러다가 슬며시 실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휴, 제대로 잠들어 있군. 귀신같은 계집애가 사람 간 떨어지게 하네 정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16 12:11:33 고친날 2005-05-16 12:37:18 읽은수 7787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1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3] 이튿날 아침 옆구리 붕대를 풀어내고 고약 찌꺼기를 걷어낸 령령은 고개를 끄떡거렸다. "좋아. 예상대로 거의 다 나았어. 워낙 깔끔하게 찔린 탓도 있지만, 비이상적인 회복력도 한몫 단단히 하는군." "헤헤헷, 감사합니다. 령령 아가씨, 다 아가씨 덕택 아니겠습니까?" 속에도 없는 입바른 말이라도 일단 아부는 안 하는 것보다는 해두는 게 나으리라. "고마워할 것 없어. 내일 아침부터 실전 수련을 재개하자면 몸이 멀쩡해야 할 것 아니겠어? 이틀을 건너뛰었더니 몸이 근질근질 거리지? 오늘까지는 무리하면 안 되니까 봐준다." "……." '안다. 이 년아, 니가 꼼꼼하게 치료해주는 거야 다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겠냐? 하루라도 날 구타하지 않으면 니 주먹이 더 근질근질 하다는 거 무환루(無患樓)에서 모를 인간이 어디 있어?' "넌 워낙 반사 신경이 별나니까, 일단 보법은 건너뛰어도 당장은 별 무리가 없어. 그러나, 경공을 못하면 비단 너뿐만이 아니라 우리 수라사살(修羅四殺) 얼굴 전체에 먹칠하는 꼴이 되. 앞으로 청부를 받을 때마다 걸리적 거리는 일도 하나 둘이 아닐 거야. 언제까지나 나한테 대롱대롱 매달려서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지. 더욱이 때에 따라서 개별 행동을 해야할 때도 있을 테니까 말이야. 홍 영감님이 쓸만한 것으로 하나 가르쳐 주신다니까 제발 열심히 배워라. 배워서 남 주는 거 아니다. 알겠어?" "네." 그거라면 오히려 내가 더 바라는 바다. 여자인 령령에게 남자인 내가 매들려 다닌다는 자체가 볼썽 사나운 데다가 여기저기 부딪히고 긁히기 일쑤니 속이 탔어도 내가 백 배는 더 탔다. "아침 먹고 나면 홍 영감님 방으로 가 봐." "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시선을 돌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허리를 푹 숙여 공손히 인사를 한 후 가만히 문을 닫고는 후원 욕실로 후다다닥 달려갔다. 몸에서 땀내가 끈적끈적하게 진동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달려가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제까지만 해도 허벅지 건을 품고 있었는지 쌀쌀맞기 그지없던 령령의 어투가 하루 밤새 많이 부드러워 졌다는 게 느껴졌다. 묘한 기분에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려봐도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다. '뭐, 유별난 년 아니냐? 그녀를 이해한다는 것은 백 년, 천 년, 만 년이 걸려도 불가능할 거다. 관두자. 관 둬.' "빨리도 일어났구나. 이제 옆구리는 괜찮은 거야?" "헤헤헤헷, 그럼요. 녹 누님이 걱정해주신 덕에 예전에 다 나았지요." "호호호, 작삼 동생 아부떨기는. 그래도 듣기 나쁘진 않구나. 어서 씻고 오렴. 아침은 별미로 만들어 줄 테니까." "네, 누님. 그럼." 새벽부터 일어나 앞치마를 둘렀을 녹 누님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무환루에서 그나마 편하게 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아닌가? 다만 그녀 뒤에 목석처럼 서 있는 애꾸 녀석의 날카로운 눈빛이 여전히 꺼림칙하게 느껴진다.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놈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녀석이랑 동천위(東泉衛) 말고도 서천위(西泉衛)라는 놈이 한 명 더 존재한다고 한다. 은신술이 뛰어나 항상 숨어서 암중에 녹 누님을 호위한다는데, 아직까지 내 눈에 뜨인 적이 없을 정도였다. '밥은 먹고사는 걸까? 뒷간은 언제 갈까? 잠은 자기나 하나?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는 걸까?' 여러 의문이 떠오르지만, 별로 알고 싶지도 않기도 하다. 내 한 몸 챙기기에도 빠듯한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놈에 대해서 생각해봤자 떡이 나오겠는가? 밥이 나오겠는가? 목욕 이후 상쾌한 기분으로 누님이 차려준 오향장육을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우고는 맞바로 홍 영감님 방으로 올라갔다. 끼이익 쾅. 여전히 초호화판 영감님 방에서 흘러나오는 난향은 여기가 노인네 방인지 여인네 방인지 아리송하게 만들어 준다. 하여튼 복터진 영감쟁이라니깐. "왔느냐? 그래, 옆구리 자상(刺傷)은 많이 아물었는고?" "그럼요. 제가 누굽니까? 일등 조교 점소이 아니겠습니까? 이까짓 모기한테 물린 정도로 앓아 누울 제가 아니지요." "홀홀, 듣는 모기가 웃겠구먼. 하긴 령령이 이를 갈고 있는 듯 하니 모기보다 비참한 신세가 될지도 모르겠군." "네?" "아, 아닐세. 그나저나 경공을 가르쳐 주라고 연강이나 령령 모두가 이구동성(二口同聲)으로 외쳐되니 가만있을 수가 없더구나. 어차피 피보라가 몰아치는 강호 속에서 조금이라도 생존율을 높이려면 빠른 발은 필수라 할 수 있지." 그러니까, 요컨대 내가 강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재빠르게 도망치는 길뿐이다. 이 소리잖아? 이거, 이거 사람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능력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나 아닌가! 그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내가 아직까지 버젓이 살아서 걸어다닌다는 사실 아니겠어? "다행스럽게도 자넨 기초 체력이 매우 튼실하네. 따라서 자네 몸 안에 도는 미미한 내공을 자네 의지대로 돌리는 요령만 익히면 되지. 그게 어려운 문제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했다. 이걸 발목에다가 차 보거라." 쿵! "……." 홍 영감이 발목 보조대를 가볍게 내려놨을 뿐인데, 바닥이 요란하게 울렸다. 꽤 두꺼워 보이는 보조대 내용물이 아무래도 쇳덩이가 분명해 보였다. 속으로는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차긴 했는데, 역시나 걷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앞으로 항시 이걸 차고 다니게. 청부가 있는 순간에만 떼 놨다가 일 끝나면 다시 차고 다니는 게야. 이 정도의 무게는 힘으로만 해결하기에는 근육에 무리가 가기 마련이지. 일신의 내공으로 밀어내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야만 거의 무게를 느끼지 않게 된다네." "저, 저기 영감님, 저한테 내공이라는 게 존재를 하기는 하나요?" "흠, 아마 눈곱만치는 있을걸. 그거면 경공 쓰는데는 무리 없네. 켈켈켈. 그럼 가보게." "……." 끼이익. 쾅! 난 또 세간에 불리는 대단한 요결이라도 알려줄까 싶었는데, 지지리 궁상맞게 혹 하나 더 단 격이 되어 버렸다. 그 순간으로부터 녹 누님까지 무슨 작정을 했는지 바깥에 심부름 나갈 일만 있으면 날 시켰다. 생선 가게에 가서 요리에 쓸 상어 지느러미를 사오라고 하지를 않나? 야채 가게에서 싱싱한 양파와 배추를 사오라고 하질 않나? 심지어 요리와는 일절 상관없는 포목점에서 옷감을 사오라고 하질 않나? 밖으로 나갈 일만 생기면 무조건 나를 시키는 것이었다. 게다가 포연강은 물론이요, 작은 문주님이라고 떠받들어주기 까지 하던 동천위까지 쭈뼛쭈뼛 나에게 일을 맡겨 왔다. 주루 손님들 심부름이라도 생길라치면 그 또한 내 차지가 되었다. 묵직한 쇳덩이 발목 보조대를 차고 있으려니 서 있기도 짜증나는 판국에 여기저기 진땀나게 뛰어 다니려니 더욱 장난이 아니었다. '제길, 체력 하나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는데, 쇳덩이 두개 찼다고 이렇게까지 힘들다니. 어서 하루라도 빨리 경공인지 나발인지를 터득해야지 원.' 덕분에 활기가 넘치는 항주 저자 거리 구경은 거의 다 해 버렸다. 워낙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몰려오는 유람객들이 많은 항주다 보니 저자거리 또한 없는 게 없었다. "무환루 점소이 총각 또 왔구만. 그래, 이번에는 뭘 구하러 왔는가?" 벌써 단골이 된 정육점 손씨 아저씨는 내가 헐떡이며 나타나자마자 생긋 웃으며 뭉툭하면서도 잘 갈아진 칼을 치켜들었다. "싱싱한 소고기 갈비로 네 근 주세요." "잠시만 기다리게. 내 저장고에서 금새 꺼내다 줌세. 그나저나 여태까지 우리가 직접 납품을 해왔는데, 몸소 가지러 오라고 자네를 보내는 이유를 모르겠군." "글, 글쎄요. 아마 마땅한 저장고가 주루 안에 없어서 싱싱한 재료를 그 때 그 때 쓰려고 그러는가 보지요." "그런가? 자네만 개고생이군." '쳇, 모르긴 왜 몰라. 홍 영감의 입김이 작용했겠지. 뻔한 것 아니겠어? 그냥 령령한테 매달려 다니겠다고 물러 버릴까? 그럼, 령령한테 뒤지도록 터지겠지? 에휴, 더러운 내 팔자야.' "그래도 덕분에 항주 시내 구경은 다 하는데요. 제가 살던 강남 흥강성(興剛城)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번화한 거리인걸요. 이런 곳은 난생 처음이에요." "흠, 그럼 자네, 항주 삼대 유명인은 알고 있나?" "네? 명물도 아니고, 유명인이라구요?" "크흐흐흐, 모르는가 보군. 주루에 가서 물어보게. 자네 빼고는 다 알고 있을 테니 말일세. 항주 삼대 유명인을 보지 못하고서야 항주를 구경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일이지. 자, 여기 도축한지 얼마 되지도 않고, 갓 숙성된 소고기 갈비 네 근이네. 아직 피가 떨어지니까 옷에 묻지 않도록 조…… 조심하라고 할랬더니. 이미 늦었군. 주루에 도착하면 옷부터 갈아입게. 그럼 잘 가시게나." "……." '항주 삼대 유명인…… 잊지 않겠다. 내 소중한 마의에 소피를 튀게 만든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라구!' 항주 삼대 유명인이라는 말에 그만 부주의하게 소갈비를 받아든 탓에 바짓가랑이를 또 피로 적시고 말았다. 비록 내 피가 아닌 소피일지언정 용서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반드시 이 놈들의 면상을 봐주고 말 것이다. 얼마나 괴상망측하게 생겨먹은 놈들인지 꼭 봐주고 말 것이다. 항주 삼대 유명인을 머릿속에 되뇌이며 무환루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발목에 쇳덩이를 차고 있건 말건, 아직도 피가 뚝뚝 흐르는 소갈비에서 핏물이 튀건 말건 알 바 아니었다. 이미 버린 바지, 어차피 열나게 빨아야 함은 변함 않는 진실 아니겠는가? "녹 누님! 여기 소갈비요!" "귀청 떨어지겠네. 천천히 오지 않구서. 바지에 피가 묻어나 버렸구나." "누님, 항주 삼대 유명인이 누군지 어디에 사는지 누님은 잘 아시지요? 좀 알려주세요. 심부름 갈 일 있으면 겸사겸사 구경하고 오게요." "흠, 기어이 듣고 말았구나. 한 명은 이미 봤지 않니?" "누, 누구요?" "항주 제일의 풍류공자 고휘천 말이다. 다른 한 명은 종종 요 앞 항주 사거리를 지나쳐가니 안 보려해도 안 볼 수 없을 것이다. 워낙 거드름을 피우는 여인이라 먼발치에서 간신히 보는 게 고작일 테지만 말이야. 나머지 한 여인은 내가 직접 소개시켜 주마. 놀래긴…… 이래봬도 이 누님은 항주에서 발이 넓은 편이란 걸 잊었니?" 꿀꺽. '여, 여인이야? 얼, 얼마나 예쁘기에……?' "참, 삼층 오른쪽 첫 번째 방 곽철 공자한테 이 죽 좀 올려주렴. 지금쯤 운기조식을 마치고 한 숨 돌렸을 테니 말이야. 소면은 같이 있을 아가씨 것이고." "아, 곽철 대협. 알았어요. 대협 일이라면 당연히 제가 해야지요." "그를 존경하나 보구나?" "그럼요. 제가 지금까지 만나 본 무림인들 중에서 그처럼 강직하고 순수한 무림인은 본 적이 없었어요. 전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고, 걸핏하면 남을 깔보기 일쑤고……." 갑자기 흥분해서는 침까지 튀며 성토하는 내 말에 반짝이는 눈을 휘둥그러니 뜬 녹 누님은 얄팍하게 실눈을 뜨며 배시시 웃다가 되물었다. "그럼, 나는? 나와 다른 무림인들을 비교해보면 어떻게 보이니?" "에이, 어떻게 누님을 무림인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누님은 그저 누님일 따름이지요." "그래? 그렇지만, 나도 엄연히 강호밥을 먹고사는 무림인이야. 그것도 네가 말한 종류의 무림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그 말을 하는 녹 누님의 눈가에는 왠지 슬픈 우수가 어려 보였다. 과거를 회상하는 듯 초점이 없는 그런 눈이었다. 더 이상은 뭐라 할 말을 잃은 나는 한 마디만 내뱉고 올라와 버렸다. "적어도 제가 본 누님은 그런 사람일 리가 없어요. 절대로……." 다다다다다.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17 15:12:01 고친날 2005-05-18 03:21:12 읽은수 7699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1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4] 종남파(終南派)의 현묘하다는 내공심법으로 내기를 다스린 듯한 곽철 대협의 안면은 조금 핼쑥해져 있었다. 내상이 얼마나 심했기에 꼬박 하루 반 동안이나 운기조식(運氣調息)에 매달려야만 했을까? 십성(十聖)의 말단이라 하더라도 구룡(九龍)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뜻으로 해석해야하는 것일까? 그래도 곽철 대협 정도면 포연강하고 겨뤄볼만 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싱겁게 일방적으로 결판이 나 버렸다. 대협 때문에 두 눈가가 퀭하니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안달이 난 적미호 부인에게 소반을 넘긴 나는 그저 조용히 물러나 주는 게 상책이었다. 어쨌거나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여보게. 오늘은 투숙객을 받지 말게. 부득이한 사정이 있으니 다른 주루나 객잔의 객실을 이용하라고 귀뜸을 해주게나." 계산대에서 꾸벅꾸벅 졸던 홍 영감이 느닷없이 실눈을 떠 보이며 뚱딴지같은 말문을 열었다. "네? 오늘밤에 주루 내부 공사라도 벌어지나요?" "아닐세, 약간 시끄러운 손님이 한 분 올 거라네. 그 때문에 다른 손님들에게까지 민폐를 끼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나?" "네, 알겠습니다." 자기 할 말을 마친 홍 영감은 또 바로 골아 떨어져서 꾸벅꾸벅 졸았다. 무려 두 해 동안에 걸쳐 체득한 생존성 습관이다 보니 쉽게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영감 스스로는 계산대에만 앉았다 하면 무섭게 졸 뿐, 고치려는 노력을 일절 하지 않으니 맨날 저 꼴인 것이다. 반은 자면서도 반은 깨어있다는 사실이 무지하게 맘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주변 인기척은 귀신같이 척척 알아본단 말씀이야. 보지도 않고 계산까지 정확하게 하는 것 보면 진짜 귀신이래도 혀를 내두를 일이지. 저대로 누구한테 암습을 받아도 암습한 놈만 손해를 볼 테지.' 해시 초가 되어 깜깜한 어둠이 밀려오자 서너 명 남짓 남아 술잔을 기울이던 손님들도 비틀비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동천위와 함께 주루 뒷정리에 나섰으나, 워낙 주루가 크다보니 솔직히 우리 둘 정도로는 일손이 빠듯했다. 그렇다고, 령령이 방에서 기어 나오기를 하나? 포연강이 팔뚝 걷어붙이기를 하나? 머리가 새하얗게 서리 내린 듯한 홍 영감님한테 맡길 수 있기를 하나? 주루 일에 관해서는 손들 빼고는 뒷전인 인간들이었다. 그나마 주방 쪽은 녹 누님과 부조화적이지만, 북천위 놈이 나서서 도맡아 했기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포연강은 그냥 쉬는 게 주루를 돕는 것이지만, 령령이 수련 때처럼 치파오를 입고 섭선만 가볍게 흔들어 줘도 손님이 두 배는 늘어날텐데, 정녕 아쉬운 일이다. 흠.' 일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끌고 올라가서 침대 위에 풀썩 쓰러졌다. 낮 동안 내내 쇳덩이 발목 보조대를 차고 다녔더니 피곤이 한번에 몰아쳐 밀려와 꿈을 꿀 새도 없었다. 한 시진이나 되었을까? "어서 나와! 나오라고! 안 나오면 내가 뒤진다!" "나와! 다 알고 왔어. 이 따위 말도 안 되는 내기 청부 내건 년 나오란 말이야!" 갑자기 카랑카랑한 계집애 목소리가 주루 내부를 뒤흔드는 바람에 그만 깊이 빠져있던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목소리로 들어봐서 육시랄 계집년이긴 한데, 예의도 없이 주루 안까지 난입해서는 생 난리법석을 떠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홍 영감님이 말한 손님이라고 하는 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뒷골목 깡패 건달을 십 년은 너끈히 해 먹은 칠공주파보다 눈곱만치도 나을 게 없어 보이는 새파란 계집애였던 것이었다. '면상이 얼마나 구린지 구경이나 해볼까? 예쁘기라도 하면 봐준다.' 날렵하게 마의를 걸치고 조용히 문을 열고는 사사사삭 슬금슬금 기어갔다. 난 그저 계단 난간으로 살짝 고개만 내밀어서 얼굴만 구경하고는 다시 되돌아올 생각이었다. 쿵! "아이쿠, 어떤 빌어먹을…… 이 아니오라…… 헤헤헤헷, 령령 아가씨도 깨셨군요." "구경할 거면 바닥을 기지말고 당당히 걸어서 내려와. 넌 엄연히 무환루의 일부야. 비굴하게 스스로를 깎아 내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 커다란 두 눈에서 파아란 불꽃을 미약하게 내뿜기 시작한 귀안(鬼眼)의 그녀가 새까만 야행의를 걸치고는 먼저 나와 있었다. 뺨을 타고 식은땀이 주르르륵 흐른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핑계 거리를 찾았다. "그, 그럼요. 그, 그냥 제, 제가 아, 아까 전에 여기서 은자 한 냥을 잃어버렸거든요. 그걸 찾느라고……." 뗑그르르르르. 피식 비웃음 가득한 코웃음을 친 령령은 은자 한 냥을 내 발치에 던져주고는 그냥 내려가 버렸다. 찜찜하긴 했지만, 일단 공짜로 생긴 은자를 거부할 나는 아니었다. 은자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조심스럽게 이 층 계단 난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 난간에는 이미 녹 누님과 그녀의 등뒤에 항시 껄끄럽게 서있는 띠꺼운 북천위 녀석이 나와 있었다. 거기에 동천위까지 동반해서 나와 있었다. 다만 먼저 내려간 령령은 어디로 샜는지 보이지 않았다. "흥! 이제야 기어 나오시는군. 어떻게 내 비밀 연락망을 아는가 했더니 다름 아닌 옛날 하오문 문주로구나." "더러운 입 닥쳐라. 엄연히 일 문의 문주시다." 입심이 더러워 보이는 복면 계집애가 함부로 나불거리자, 북천위 녀석이 발끈했는지 맞대응을 하며 고함을 쳤다. 녹 누님은 가만히 서있을 따름인데 혼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흥, 지금은 아니잖아. 호호호호, 잘 걸렸다. 지금의 하오문 문주인 유 문주한테 살짝 여기 위치를 흘리면 다른 사람 손으로 코푸는 격이 되는데. 아아, 인상 쓸 것 없어. 난 정상적인 청부를 건 손님의 정체에 대해서는 분명히 함구를 하는 원칙이 있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비정상적인 청부에 대해서는 나 또한 원칙대로 할 생각이 없거든.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 유 문주 방에 걸려 있지도 않은 월하미인도(月下美人圖)를 내기 대상으로 삼은 심산이 뭐야?" '저 가냘프고 호리호리한 몸매의 여인은? 설, 설마! 이, 이런 주둥이만 썩어 비틀어질 년! 종리연 이 싸가지!' "틀렸어요. 월하미인도(月下美人圖)는 분명 그녀의 방에 걸려 있었지요. 그녀가 아끼는 그림들 중 하나였으니깐요. 다만 지금은 제 손에 있을 뿐이지만요." 녹 누님은 정나미가 다 떨어질 정도로 차갑게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으며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 액자를 주르르륵 펼쳐 보였다. 내 쪽에서는 그림이 보이지 않았으나, 종리연 쪽에서는 똑똑히 보였는지 잔 경련까지 일으키는 게 보였다. 도대체 무슨 내기를 걸었기에 이렇게 자기네 안방처럼 생색을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건 사기야! 자기 손안에 있는 뻔한 그림으로 내기를 걸다니! 사기가 분명하다고!" "사기가 아닙니다. 이 그림은 당신이 유 문주 방을 뒤지기 전에 우리 일행이 걷어 온 것입니다. 내가 제시한 시간까지 이 그림은 분명 유 문주 방에 걸려 있었지요. 무영투도(無影偸盜)라는 당신이 제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뒤늦게 뒤쳐진 까닭에 못 찾은 것이지요. 내기는 엄중하게 치러졌습니다." "말도 안 돼. 무림에서 제일 중요한 무력으로는 최하위 밑바닥을 기는 너희들의 같잖은 실력 따위로 이중 삼중으로 펼쳐진 무림맹과 정식 하오문의 합동 경계를 뚫고 그림을 빼왔다는 게 말이 될 것 같아! 날 속인 거야! 억지 그만 부리고 약속한 은자 오만 냥이나 내놔. 이래도 끝까지 발뺌을 하겠다면 내가 친히 이 곳을 쓸어버릴 테다!" "종리연, 내가 하오문의 문주로 있을 때는 설설 기더니 내가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너무 오만 방자하게 구는 것 아닌가요? 이제라도 마음 고쳐먹고 고개를 숙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싸늘하게 한 마디 한 마디를 툭툭 내뱉는 녹 누님을 보니 전혀 딴 사람 같았다. 모진 풍파를 수 차례 거쳐온 위엄이 느껴졌다. 평상시에는 항상 생글생글 웃기에 마음씨 좋은 누님으로만 봤는데, 이런 면도 있다니 의외였다. "흥! 찔리는 게 있는가 보군. 그런 식으로 계속 발뺌해봐. 널 산채로 잡아서 문둥이 소굴에 처넣어 주겠어. 문둥이들에게 냄새나는 가랑이를 벌리고 뒤늦게 애원해봤자 늦을 거다. 정녕 하나 남은 그 몸뚱이마저 썩어 문드러지게 하고 싶은 게냐? 설사 니가 죽어도 네 목만 있으면 유 문주에게서 은자 오만냥 정도 받아내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지.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어. 나 너무 열 받았거든." '이, 이 무슨……! 종리연! 이전에 봤을 때도 싸가지가 없긴 했지만, 이토록 안하무인격인 년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데 단지 자기보다 약해 보인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너 썩어도 단단히 썩었구나.' "지랄! 입 닥쳐!" 무환루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 다정하게 다가온 녹 누님이 종리연 따위에게 계속 모욕 어린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귀가 썩어드는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조용히 구경만 하다가 빠질 작정이었지만, 이젠 얘기가 달라졌다. 저 빌어먹을 년을 기어코 내 손으로 쥐어짜고 말 것이다. 설사 내가 경공이나 보법에 문외한이라 한 수 뒤진다고 해도 도저히 간과할 수가 없는 일이었던 것이었다. "너, 넌! 그렇게 찔리고도 살, 살아 있었어?" "니 년을 잡아가려고, 저승에서 되살아왔다? 왜? 떫으냐? 이번에도 내 옆구리 찔러 보시지?" "호호호호, 너 정말 귀엽게 구는구나. 잘 되었다. 녹녹 저 년과 너, 그리고 뒤에 엉거주춤 서있는 연놈들까지 같이 묶어서 문둥이 소굴에 처넣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군. 점소이, 넌 이번에도 실수했어. 망아루에서야 니 놈 옆에 붙어있던 개방의 잠룡(潛龍) 녀석 때문에 더러워도 꾹 참았고, 서안시내로 내려왔을 때는 월녀궁(月女宮) 계집애들이 걸려서 넘어갔다만, 지금은 얘기가 틀려. 서천위란 놈을 믿는 거라면 한 마디 해주지. 그 정도 은신술로는 백 년이 걸려도 날 따라올 수는 없다. 은신술하면 바로 나 아니겠어? 그 놈은 꼼짝 못하게 혈을 짚어놓고 들어왔지. 자, 그럼 여기서 문제, 이 안에서 나보다 경공과 보법이 뛰어난 사람이 있을까? 진정한 무공이란 말이지, 남보다 두어 수는 빨라야 이기는 법이거든. 그런데, 이걸 어쩌나? 적어도 내가 열 수는 앞지를 것 같은데? 버러지 같은 년 놈들 네 명이 뭉쳐봤자, 버러지는 버러지일 뿐이지. 너희 모두의 혈을 짚어주는데, 반 각도 걸리지 않아. 자 시작해 볼까?" 안에 있는 모두를 정말 죽이기로 작정했는지 흑두건까지 벗어 던진 풍룡(風龍) 종리연이 쌜쭉 웃으며 이 층 난간으로 걸어 올라왔다. 면상은 소방을 연상시킬 정도로 귀엽고 앙증맞은 주제에 행동하는 꼬락서니는 소맹주 개 잡종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녀를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무공 그 자체는 빈약한 년이란 것을 알기에 주저함 없이 그녀를 향해 몸을 던졌다. 뒷일이야 어찌되건 일단 종리연이 못 움직이게 잡는 게 우선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뜨끔. 종리연 녀석의 바로 지척에 신형이 다다랐을 때 순간 뒷목이 따끔거렸다. 그 찰나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느끼지도 못했는데, 언제?' 실눈을 얄팍하게 떠 보이며 밉살맞게 웃는 그녀를 지나친 나는 그대로 계단 난간을 구르며 바닥에 떨어졌다. "작, 작삼 동생!" 녹 누님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시선은 이 층 계단 난간에 고정됐으나, 몸이 도통 움직여지질 않았다. 난 괜찮다고 외쳐주려고 했으나, 입까지 굳었는지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이, 이 년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녹 누님의 앞을 막아선 북천위였으나, 종리연과 몇 수 채 교환하기도 전에 꼿꼿이 굳어 버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뒤를 따르던 동천위도 마찬가지였다. 기어이는 녹 누님마저 단도를 꺼내들려는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종리연은 배시시 미소지으며 녹 누님의 얼굴선을 쓰다듬었다. 더 나아가서는 장난이라도 치듯 녹 누님의 귓볼을 깨물며 그녀의 가느다란 목 주변을 할짝할짝 핥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어머머, 녹녹 너 마흔이 넘었다고 들었는데, 거의 삼십대 수준의 피부를 유지하고 있구나. 다행이다. 이 정도 미모와 살결은 되어야 널 덮치는 문둥이들이 더욱 환장할 것 아니겠어? 호호호호, 꼴 좋다. 그러게 진작 은자 오만냥을 내놨으면 이런 험한 꼴 안 당하고 좋잖아. 지금은 마구 후회되지? 문둥이들이 떼거지로 덮쳐올 생각을 하니까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지? 호호호호호호!" 미친년처럼 허리까지 젖히며 마구 웃어대던 그녀는 웃음을 뚝 그치며 녹 누님의 눈앞으로 자신의 눈을 디밀며 말했다. "늦었어. 너무 늦었어. 일단 날 기억하면 안 되니까 차례차례 백치로 만들어 줄께. 고맙게 여겨. 문둥이들한테 가랑이를 벌리고 희열에 부들부들 떨어도 넌 아무 수치심도 느끼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18 11:14:02 고친날 2005-05-18 11:14:02 읽은수 7690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1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5] 퍼억! "꺄아아악! 뭐야!" 갑자기 천장에서 떨어져 내린 령령의 주먹에 안면을 얻어맞은 종리연은 난간에서 떨어지는 와중에도 멋있게 공중제비를 돌며 바닥에 무사히 안착했다. 아무래도 령령이 주먹 힘을 많이 빼고서 후려친 모양이었다. 제대로 맞았다면 그대로 기절하거나, 한 방에 머리통이 날아갔을 게 뻔할 뻔 자인 것을……. "넌, 넌 누구냐? 아까 전 까지만 해도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나? 삼천위가 나왔으면 뻔한 것 아니겠어? 바로 사천위 중에 하나 남은 남천위지." 눈가리개뿐만이 아니라 두건까지 둘러서 안면을 가린 령령의 차가운 미소가 느껴졌다. 무슨 꿍꿍이속으로 농담 따먹기를 하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령령은 종리연 따위에게 절대로 밀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십성(十聖) 진두한을 상대로 해서도 오랫동안 팽팽한 전세를 유지했던 그녀 아니던가? "남천위는 녹녹 곁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다 개수작이었구나. 더구나 감히 내 얼굴에!" 휙 슈욱. "흡!" '저, 저런 령령 저 년이 정말로 미쳤나? 저런 허접한 비수 따위에 어깨를 내 줘? 평상시의 호신강기면 그냥 튕겨낼텐데' "흥! 별것도 아닌 것이 까불고 있어. 네 년은 여기서 목줄을 따주마. 감히 내 소중한 얼굴에 멍이 들게 만들다니!" "잠깐, 여긴 우리에게 너무 좁은 공간이다. 우리의 대결로 인해 녹 문주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다치기를 원치 않아. 어차피 점혈을 당해 움직이지 못하는 이들이다. 밖으로 나가서 대결하자." "흥, 누가 니 년 말을 따를…… 야! 거기 서! 감히 어디로 도망을 가는 거야! 제길, 저 년 내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텐데…… 흥, 좋다 이거야. 감히 내 경공으로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도망칠 수 있는지 보겠어." 혼자 제멋대로 떠들어 댄 종리연의 신형이 일순간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움직여 보려고 해도 온 몸의 피가 굳은 듯 꼼짝할 수도 없었다. 처음 당해보는 점혈이었지만, 이토록 무서운 것인 줄 미쳐 몰랐다. 어떻게 목소리마저도 나오지 않은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끼이이익. "휴우, 정말 사갈 같은 여인이군요. 풍악산에서는 박쥐처럼 소맹주한테 붙다가 버려진 것을 구해줬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같은 구룡(九龍)이라는 게 다 부끄러운 따름입니다." "그러게요. 겉보기로는 그저 귀여운 여인인데, 실제로 속에는 흉악한 독사를 품고 있었네요." '야, 야 적미호, 너 남 말할 입장 아니다. 곽철 대협만 옆에 없어 봐라. 옛날 본성 그대로 드러낼 거잖아.' "자, 자자, 우린 뒷정리나 해야지. 점혈 당한 사람들부터 풀어주고, 그나저나 서천위라는 놈은 어떻게 찾아서 점혈을 풀어주나?" 이층 난간에 굳어있는 녹 누님부터 시작해서 하나 하나 점혈을 풀어주는 포연강이 보였다. 그의 옆으로는 곰방대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는 홍 영감까지 서 있었다. 평상시에는 있으나 마나 별 신경을 안 썼던 포연강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걱정 말게. 령령이 돌아오면 알아서 찾아낼 거야. 머잖아 돌아올 테니 신경 끊어도 좋을 것이야." 종리연이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들이 방에서 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기운을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저기 말이에요. 어떻게 종리연으로부터 기척을 감추고들 계셨어요?" "그거야 간단하지. 귀식대법(龜息大法)으로 숨까지 거의 멈추고 있었는걸. 나야 아직 미숙해서 귀식대법을 한 번 펼치면 스스로 빠져 나오지는 못하지만, 우리 그이가 먼저 깨어나서 내 귀식대법을 풀어줬지. 호호호호." "왜 이렇게 복잡한 연극을 한 것이에요? 솔직히 영감님이나 연강 형님 정도만 나서도 한 방에 끝낼 수 있는 일을……." 내 의문에 대해서 모두들 함구무언(緘口無言)이었다. 분명 사정을 알고 있을 녹 누님은 아직 완전히 해혈이 되지 않았는지 입을 열지 못했고, 포연강은 그냥 말하는 것 자체가 귀찮은지 손을 휘휘 저으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곽철 대협은 원래 과묵하다고 쳐도 입이 참새처럼 가벼울 적미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난 결국 이 일의 주모자가 되었을 게 뻔한 홍 영감님을 무안할 정도로 게슴츠레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곰방대를 빨던 홍 영감이 사레가 걸린 듯 기침을 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다. "종리연의 그릇을 시험해 본 것이다.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여인인지 말이다." "그, 그 년의 그릇을 재봐서 뭐하게요?" "앞으로 우리가 무림맹과 어깨를 겨루기 위해서는 무공이 딸려도 그녀처럼 남다른 데가 있는 인재도 필요한 법이니라. 이로써 그녀의 가치가 드러나 버렸구나. 강압적인 수단은 되도록 안 쓰려고 했지만, 그녀는 놔두면 화근이 될 소지가 다분한 여인이지. 종리연의 목숨은 전적으로 령령의 판단에 맡기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당연히 그 싸가지야 다리 몽댕이를 부러뜨려서 자기가 그토록 좋아하는 문둥이 소굴에 던져 줘야지. 정말 그렇게 더러운 인간은 천운학 소맹주 이후로 처음이야.' "곽철 공자, 다시 묻겠네. 우리가 갈 길은 아주 위험하다네. 그래도 따라올 건가?" "이미 누차 말씀드렸듯이 사문에 누가 되지만 않는다면, 당분간 당신들과 같이 있고 싶소. 무엇보다 내겐 포 대협과 다시 일전을 겨루는 게 중요하니 말이오." "헐헐헐, 좋을 대로 하시게. 그럼 난 들어가 보려네. 다들 들어가서 잠들 주무시게." 홍 영감님은 녹 누님을 다독거리며 자기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다른 이들도 각자 자기 방으로들 들어갔다. 이 인간들은 령령이 종리연을 살려둘지 죽일지 궁금하지도 않은가? 그냥 군말 없이 들어가 버리게? '하, 하기야 나도 좀 졸리긴 하군. 그, 그래도 기다려 본다.'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눕지도 않고 의자를 끌어와서는 령령이 그랬듯이 침대 맡에 머리를 기대고 엎어졌다. 령령이 올 때까지 잠들 생각이 없었다. 사갈같은 그년, 종리연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듣기 전에는 말이다. 아무리 다시금 생각해봐도 괘씸하기 그지없는 년이었다. 진두한의 황금창으로 배때기에 구멍 난 것을 내 의지야 어찌 되었건 간에 살려 주었다. 게다가 들짐승들의 밥이 되지 않도록 버려진 그녀를 서안 시내까지 데려와서 병간호를 받게 해줬는데도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사라짐은 물론이요, 내 물건에까지 손을 댄 그녀가 너무 얄미웠었다. 그러나, 오늘의 그녀를 보자 그녀는 살려둘 가치 자체가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나도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것은 매한가지이긴 하나, 그 정도로까지 타락하지는 않…… 않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결국 엎어진 채로 선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꽈르르르릉! 꽈르르르릉! 쏴아아아아. "허억! 천, 천둥이었구나. 비가 오고 있네. 에휴, 다, 다시 잠을……." 끼이이익. 고막을 긁는 듯한 문 열리는 소리에 그만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밖에서는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리는데, 문이 슬그머니 열린다는 것은 귀, 귀신이…… . '어, 령령이잖아. 무슨 일로 내 방에?' 쿵! 철퍼덕. 전신이 비에 젖어 안 그래도 찰싹 붙는 야행의가 살결에 밀착되어 육감적인 몸매를 유감없이 드러낸 령령이 내 앞에 집어던진 물건은 다름 아닌 종리연이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질질 짠 듯한 그녀의 눈자위가 퉁퉁 불어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짐작하기조차 어려웠다. 령령에게 직접 맞았다기 보다 여러 차례 땅바닥을 굴렀는지 여기저기 멍들고 긁힌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걸치고 있는 것의 본래 정체가 야행의였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너덜너덜해져 버려서 저자거리에서 동냥질하기에도 딱 알맞은 형태였다.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면 점혈을 당한 것도 아닌데, 왜 도망을 가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 의문은 금새 지워졌다. 이제 보니 종리연의 양 팔꿈치와 양 무릎 부분이 탈골되어 뒤틀려있는 게 아닌가! 당연히 신법이 장기인 그녀가 도망도 못 가고 이 꼴이 된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왜 안 죽이고, 여기까지 산 채로 데려온 거지?' 휙, 팍! '허억, 왜 멀쩡한 바닥에 비수를 꽂고 난리야? 원하는 게 뭐냐? 말로 해. 말로.' "너한테 선택권을 주겠다. 아마 우리 무환루에서 너만큼 이 년한테 원한을 품은 사람도 없을 거다. 결정해. 죽일 량이면 그 비수로 여기 목을 깊숙이 찔러. 그럼 대라신선이 와도 다시 살아나지 못할 테니까." '그, 그 뜻이었는가? 그야 당연히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지. 은혜도 모르는 골빈 년을 살려놔서 뭐해?' "점, 점소이 오라버니, 살, 살려 주세요. 흑, 흐흐흑. 제, 제발. 앞, 앞으로 말 잘…… 들을게요. 제, 제발요. 흐흐흐흑……." '끙, 처참하게 당했구나. 그 심정 내가 잘 안다. 인간 하나 걸레짝으로 만드는 것은 령령에게 아무 일도 아니지. 더군다나 너처럼 철면피를 뒤집어 쓴 짐승같은 존재람 두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나 너한테 유감 많았거든. 이제 편히 지옥으로 보내줄게.' 쌓인 게 많았던 나는 바닥에 박힌 비수를 뽑아들고, 녀석의 목에 들이댔다. 피 한 줄기 또르르르 흘러 내렸다. 이대로 조금만 힘을 주면 녀석은 이 세상과 하직인 것이다. 지은 죄가 많으니 아마도 구 층 지옥 맨 아래로 떨어질 게 분명했다. "점, 점소이 오, 오라버니, 제, 제발요. 제, 제발!" '웃기네. 내가 너한테 또 속을 줄 알구. 너한테서 금원보 따위 안 받아도 되니까. 시원하게 목줄기나 따주지.' 내 완강한 표정을 읽었는지 체념한 듯한 종리연이 고개를 떨구었다. 속에서 화악 북받치는 게 많았던 나는 그대로 힘을 주었다. 흠칫, 뗑그르르. 그만 비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주 순간적이었지만, 거지처럼 너덜너덜해진 종리연의 자태가 그만 소방의 모습과 겹쳐지고 말았던 것이다. 너무나 놀래버린 나는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을 쓸어내야만 했다. 왜 이런 결정적인 찰나에 그 녀석이 떠오르는 것인지 내 스스로에게 의문이 다 일 정도였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종리연, 소방한테 감사해라. 너랑 비스무리한 구석이 있어서 살려준다. 너란 존재도 따지고 보면 그저 오욕칠정(五欲七情)에 충실하게 발버둥치는 존재일 뿐. 나라고 해도 내 앞길에 분명히 걸리적 거릴 존재라면 아마 살의(殺意)를 일으키겠지. 화딱지 더럽게 나지만, 이해는 할 수 있다. 어쩌면 너란 년이야말로 나랑 가장 많이 닮은꼴인 듯도 싶으니 말이다.' "휴우." 깊게 내뱉은 심호흡과 함께 살심을 내던진 나는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묵묵히 바라보는 령령에게 입을 열었다. "그냥 이번 한 번만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 이 정도로 굴려졌으면 하늘이 얼마나 높은 것인지 자신도 알아차렸을 거에요." 일부러 령령을 하늘이라 지칭함으로써 약간의 아부성 부탁을 곁들였다. "흥! 니 맘대로 하라고 했잖아. 그렇지만, 다음에 누구를 죽여야 하는 일이 생기면 절대로 망설이지 마. 잠깐의 망설임으로 니 목이 대신 나가떨어지는 수도 있으니까." 여전히 차가운 시선으로 종리연을 바라보던 령령은 종리연의 팔꿈치와 무릎 뼈를 맞춰 뿌드득 돌려 넣었다. "꺄아아아악!" "종리연, 앞으로 넌 이 놈의 부하다. 작삼이 죽으라면 죽고, 짖으라면 짖어. 앞으로 허튼 수작 부릴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을 거야. 너 따위는 굳이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언제나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 "감, 감사합니다. 충, 충심껏 모, 모시겠습니다." "흥!" 끼이이익. 쿵! 어쩐지 문을 거칠게 닫고 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화가 난 듯 해 보이기도 했다. 그럴 것이다. 성질 같아서는 종리연을 터뜨려 죽이고 싶었을 텐데, 참고 데려오느라 오죽 열 올랐을까? '잠, 잠깐 그, 그럼 나, 나는? 끄아아아, 내일 아침 죽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19 11:11:10 고친날 2005-05-19 11:11:10 읽은수 7670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16)-쫄따구 길들이기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6]쫄따구 길들이기 전신이 만신창이 된 채로 신음을 흘리는 종리연을 내려다보니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구룡(九龍)중 한 명이라는 년이 상대를 못 알아보고 깝죽거리다가 된 통 당한 것 아닌가? 내 쫄따구가 된 이상 그녀를 보살펴 주는 것 또한 내 일이라는 것을 떠올렸기에 먼저 종리연이 걸치고 있던 누더기 야행의부터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옷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걸레 쪼가리에 더 가까웠지만 말이다. '뭐, 뭐냐! 속에는 아무것도 안 걸치고 있었잖아? 끙, 하기사 이 정도로 노력을 하니까 중원 최고의 경신법을 지녔다는 말을 듣는 걸 테지. 그런데도 령령한테 붙들려 개작살났다는 것은? 령령이 이 년보다 더 빠르다는 소리겠지? 정말로 경계해야 할 년은 주령령(周領領), 그 계집애지. 암, 그렇고말고.' 물수건으로 피멍이 든 종리연의 나신을 조심 조심 닦아내었다. 워낙에 잔 상처가 많이 나 있기도 했지만, 령령이 두어 차례 비틀었을 팔꿈치 무릎 관절 또한 눈에 띄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눈을 딱 감고,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바르르 떠는 그녀를 보니 한 번에 밀려오고 있을 통증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 자신의 볼품 없는 나약한 나신을 내 앞에 드러냈다는 수치심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는 종잡기 힘들었다. '흥, 수치심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냐? 걱정 마라. 천길 낭떠러지 절벽 뼈 가죽한테 관심 가질 정도로 굶주리지는 않았단다.' 침대 위에 그녀를 안아 올리고서는 상처가 난 곳에 빠짐없이 금창약을 덕지덕지 발라줬다. 얼마나 상처가 많았던지 처음 쓰는 새 금창약 마개를 개봉하고는 한 번에 다 써버려야 할 정도였다. 붕대도 싸줄까 하고 꺼내들었지만, 전신이 난자 당한 꼴이라 어림 반푼 어치 택도 없겠다 싶어 그냥 그대로 이불을 덮어 버렸다. '절대로 귀찮아서 붕대를 안 감는 게 아니다. 붕대가 모자라 보여서 그냥 넘어가는 것뿐이다. 아함, 졸, 졸리구만.' 비록 내 침대를 뺏기기는 했지만, 쫄따구가 생겼다는 흐뭇함 때문인지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앞으로 종리연을 어떻게 부려먹어야 잘 부려먹었다는 말을 들을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채 침대 맡에 머리를 기대자 눈꺼풀이 스르르륵 내려앉았다. '머잖아 수석 점소이라 불릴 날이 오겠군. 크크크.' 따끔 따끔. 뒤통수에 내려꽂히는 살기를 느낀 나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상대를 향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생존 본능에 가속도가 붙어서인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신경이 민감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 "앗, 령령 아가씨, 웬, 웬 일이세요?" "잘 하면 한 대 치겠다?" 그제야 치켜든 주먹을 재빠르게 치웠다. 새벽에 문을 쾅 닫고 나갈 때부터 그녀의 심기가 예사롭지 않다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빈정거리는 어투를 날리는 것을 보니 뭔가 거슬리는 일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도대체, 왜 걸핏하면 짜증을 부리는지 영문을 모르겠단 말씀이야.' "오늘부터 다시 실전 수련 재개인 거 알지? 어서 내려와. 지금 뭐 해?" "발, 발목 보조대를 깜빡 차고 졸아서요. 떼 놓고 갈려구요." "떼긴 왜 떼? 청부 없는 때는 항시 차고 다니라는 홍 영감님 말씀이 있었을 텐데? 안 그래? 경공이란 게 하루아침에 쉽사리 터득되는 것인 줄 알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고는 그 무엇도 이룰 수 없어. 어젯밤에 똑똑히 느꼈을 거야. 조금이라도 분한 마음이 있다면 설렁설렁 넘어가지 말고, 제대로 노력해." "……." 결국 쇳덩이 발목 보조대를 찬 그대로 령령의 구타를 고스란히 받아내야만 했다. 가뜩이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령령의 귀신같은 몸놀림이 버거워 죽을 지경이었는데, 두 발목에 혹까지 달고 있으니 피해낼 재간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령령, 이 년이 단단히 독이 오른 듯 했다. 퍽 퍼퍽 퍼퍼퍼퍽 퍼퍽……! 평상시보다 곱절은 늘씬하게 터진 관계로 그녀가 사라지고서도 한 식경 정도가 흐를 동안 꼼짝도 못하고 바닥에 늘어져 있어야 했다. 꼬르르르륵. '배가 고프긴 하군. 그러고 보니 그 녀석 당분간은 못 움직이잖아. 쳇, 하는 수 없군. 내 쫄따구이니 만큼 내가 챙겨 줘야지.' 비틀 비틀 일어선 나는 언제나 그러하듯 먼저 목욕을 하고서 주방으로 들어섰다. 어젯밤의 일은 잊어버린 듯 아침 준비로 부산한 녹 누님이 화창한 미소로 맞이해 줬다. 다만 언제나 그녀 곁에 서있는 북천위 녀석이 대놓고 살기 등등하게 날 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이유야 듣지 않아도 뻔하기는 했다. 그저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내 잘못이 무엇인지 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동생, 웬 한숨이니?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기 만두 이 인분 좀 주실 수 있어요?" "그럼, 잠시만 기다리렴. 마침 방금 쪄 놓은 게 있거든." "……." "자, 여기,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만두 그릇을 담은 소반 위에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덤으로 올려 주었다. 틈새로 흘러나오는 냄새만으로도 고약의 일종임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피부가 심하게 부어 올랐을 때, 사용하면 잘 듣는 고약이야. 두껍게 붙여 주고서 붕대로 꽉 매주면 꽤 효과를 볼 수 있어." 그렇게 심한 모욕을 당하고도 고운 마음 씀씀이를 잊지 않는 그녀를 대하니 약간은 목이 매여왔다. 내가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고맙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무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관계로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다급히 주방을 빠져 나오고 말았다. 탁탁탁탁. 삼 층 내 방으로 단번에 뛰어든 나는 소반을 내려놓고서 잠시 숨을 골랐다. 놀란 토끼 마냥 눈을 똥그랗게 떴던 종리연은 내 눈빛이 거북스러웠는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크크크, 벌써부터 알아서 기는 법을 터득했구나. 기특한 것.' 고약부터 붙여줘야겠다는 생각에 그녀의 나신을 덮고있던 이불을 잠시 걷어 내었다. 갑자기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바르르르 떨어대는 통에 고약을 붙일 수가 없었다. 살짝 열이 오른 나는 그녀의 이마에 꿀밤을 먹이며 일갈했다. "야, 야야, 고만 떨어. 아까운 고약 떨어진다." 꿀밤을 먹인 효과 탓인지 좀 진정이 되었다. 안 본 새에 무릎팍이 두툼하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녹 누님이 알려준 대로 고약을 바르고는 붕대로 꽉 졸라맸다. 거기에 미리 준비해둔 부목을 덧댄 후 끈으로 칭칭 감았다. 나머지 무릎과 팔꿈치에도 똑같이 고약을 바르고 부목을 덧대었다. "고약은 녹 누님이 주신 거다. 다음에 누님 보면 꼭 감사하다고 한 마디 하는 거 잊지 마라." "……." "어허, 대답이 늦다. 알겠냐? 모르겠냐?" "왜 절 살려준 거지요?" '어라, 이것 보게. 감히 하늘같은 상관의 질문에 동문서답(東問西答)이라니! 눈까지 똥그랗게 뜨고 정면으로 노려보면 어쩔 거야? 이거 이거 처음부터 삐딱서니 타는 거 보니까 기회 되면 명령불복종에 하극상을 일으킬 녀석일세.' 한 번 더 꿀밤을 먹이려고 주먹을 치켜들자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리는 녀석의 모습에 다시 소방의 모습이 겹쳐지고 말았다. 그만 마음이 약해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내렸다. 비록 스스로의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인해 당한 꼬락서니였을지라도 엄연히 환자는 환자였다. 종리연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서 가뿐하게 허리를 일으켜 세우고는 등 뒤쪽에는 불편하지 않게 베개로 받쳐주었다. 녀석이 자꾸 안면을 붉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하체가 드러나서 그러는갑다 느껴져서 다시 이불을 허리께 까지 덮어주었다. 그녀의 입에 만두 하나를 넣어 주고는 나도 하나 털어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역시 녹 누님이 만든 만두라 그런지 망아루 시절 포연강의 손에서 탄생한 투박한 만두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만두 주제에 입안에서 살살 녹아나면서 향긋한 냄새가 고루 퍼지기까지 했다. 이토록 고급스러운 기품이 절로 흘러나오는 만두는 녹 누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아직 제 질문에 답을 안 해주셨어요. 왜지요?" '쩝, 니가 내 흥을 깨는구나. 질긴 구석까지 있고 말이야. 나로 하여금 갈등 때리게 만드는구나. 순순히 소방 얘기를 해주면 만만히 보고는 다음에도 기어오르려 들 테고, 길들인답시고 마구 패버리기에도 조금 거시기한 구석이 있단 말씀이야.' "험험, 그걸 니가 모르면 안되지. 납작한 가슴에 손을 얹고 잘 생각해봐. 내가 반 년 전에 생고생, 개고생을 해서 혈해진경(血海眞經) 쪼가리 하나를 얻었었지. 그 쪼가리를 천금대인이라는 부자 녀석이 금원보 오십 개에 사려던 참이었거든. 그 때 그 쪼가리 갖고 튄 게 너야? 아니야?" "저…… 저 맞아요." "게다가 그 이후 다시 봤을 때, 넌 금원보 열 개 주기로 약속하고서 딸랑 하나만 줬지. 그래? 안 그래?" "그, 그렇기야 하지요." "그 후에는 내가 뼈빠지게 고생해서 들고 온 그림 액자 세 개를 슬쩍했어? 안 했어?" "슬, 슬쩍했어요." "거봐라. 다 계산해보면 금원보 100개는 되지? 거기에다가 이자까지 합쳐서 계산하면 적어도 금원보 130개는 된다 이거야. 만약 내가 널 죽였다고 치자. 너를 죽여서 얻은 고기 조각을 흑점에 가져다가 팔았다고 가정해도 잘 쳐봤자 은자 50냥 정도라 이 말씀이다. 자 금원보 130개면 은자로 따져봤을 때 자그마치 65000냥이나 되지. 자 여기서 문제, 은자 65000냥이 많아? 은자 50냥이 많아?" "은, 은자 65000냥이요." "내 놔." "네?" "은자 65000냥 내 놓으라고." "흥! 없어요. 내 옷 다 벗겨내고 내 알몸 다 뒤적거려 봤으면서도 모르겠어요? 동전 한 푼이라도 나왔던가요?" "그럴 줄 알고 널 살려준 거다. 어떻게든 은자 65000냥을 받아내야 할 것 아니야? 무턱대고 죽여버리면 나만 바보 되는 것 아니겠어?" 종리연의 안면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화를 낼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 왠지 앙증맞아 보이기도 했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녀의 입에서 기어이 고함이 터져 나왔다. "흥! 차라리 내 단전을 파괴해요! 도망 못 가게 발목 인대도 끊어버려요! 그리고서 사창가에 넘기면 흑점에 넘기는 것보다는 훨씬 많이 줄 거예요." 딱! "아야!" 따다다다다닥! "아야야! 그, 그만! 왜 때리는 거예요?" "너 몇 살이야?" "열, 열 일곱이요." "야, 황실조차 능멸하려 드는 여성 감찰부에서 성매매 특별 방지법이라는 것을 만든 거 몰라? 거기에 미성년자가 끼면 곱절로 가중처벌 당한단 말이야. 누구 쇠고랑 차고 꽁보리 콩밥 먹일 일 있어! 흠, 뭐 꽁보리 콩밥이 보통 밥보다 비싸기야 하지만, 희멀건 죽을 먹어도 자유롭게 활개치며 사는 게 좋은 것 아니겠어?" "……." "넉넉잡아서 한 달에 은자 넉 냥으로 쳐줄게. 여기 항주는 워낙 유람객들이 많이 와서 주루 장사가 잘 되더라구. 그럼 어디 보자. 너 앞으로 내 밑에서 1000년하고도 145년 동안 쫄따구 노릇해라. 크크크, 니 생전에 쫄따구 신세 면하기는 글렀구나. 어디 그 뿐이냐? 죽어서도 내가 지옥으로 가건 천국으로 가건 쫓아와서 남은 기간 다 채워. 알겠어? 모르겠어?"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21 19:12:20 고친날 2005-05-21 19:12:20 읽은수 7415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1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7] 그로부터 열흘 정도 지나자 종리연의 상세가 상당히 호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목을 풀어내고 고약 찌꺼기도 떼어내고 나니 언제 부었었냐고 항변이라도 하듯 미끈한 팔 다리가 그 자태를 드러내 주었다. 누구보다 나만큼 종리연이 하루 속히 쾌유하기를 빌었던 인간도 없을 것이다. 지난 열흘 간을 되 돌이켜 보면 누가 누구 쫄따구인지조차 애매 모호할 정도였다. 손을 쓰지 못한다고 매 끼니때마다 식사를 챙겨와서 일일이 젓가락질을 해줌은 물론이려니와 악취가 동반되는 대소변까지 일일이 받아내 줘야만 했다. 더군다나 나 쓰기에도 모자란 귀한 폐지로 그녀의 뒤를 닦아줘야 했을 때는 속이 다 쓰라릴 지경이었다. 더 가관인 점은 그녀의 태도 변화였다. 령령한테 죽도록 굴려지고 내 앞으로 끌려왔을 때, 살려달라며 울고 불며 애걸복걸 통사정을 했던 때가 엊그제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대놓고 배고프니 밥 가져오라고 난리요, 응가가 마리니 요강 들고 올라오라고 난리요, 심지어 얼굴이 가렵다느니 등이 가렵다느니 하며 별 희한한 일에까지 내 손을 동원시키려 하는 것이 아닌가! 요망한 것이 심심하면 전음입밀(傳音入密)로 외쳐되는 통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려올 지경이었다. '점소이 오라버니! 등이 가려워 죽겠어요! 와서 좀 긁어줘요! 점소이 오라버니!…….' '점소이 오라버니! 오줌통 터져 죽겠어요! 빨리 요강 들고 튀어와요! 빨리요, 빨리 안 오면 오라버니 침대에다가 쉬해 버릴지도 몰라요!' '아그, 배고파 죽겠어요. 지난번에 먹었던 오향장육이 좋겠어요. 그걸로 부탁해요.' 그녀의 전음입밀은 내공이 비교적 약해서인지 크게 울리지는 않았으나, 내 머릿속을 날카롭게 헤집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거슬렸다. 귀찮은 전음입밀이 더 들려오지 않도록 후다다닥 튀어 올라가서 그녀가 요구하는 바를 들어줘야만 했다. 남이 보면 누가 상관인지 헷갈려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점소이 오라버니,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계세요?" "쳇, 감개가 무량해서 그런다. 일어나서 걸어보기나 해." 이불을 젖히고 일어난 종리연은 몇 발자국 걷다가 한 발을 세우고는 핑그르르 몸을 돌리며 잔재주까지 피워 보였다. 이젠 바야흐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는 생각에 눈망울이 일렁거려 왔다. "이제 다 나은 거지? 그렇지?" "아얏, 아, 아직도 통증이……." "시꺼! 내 앞에서 엄살 따위 피울 생각하지마! 전음입밀 좀 할 줄 안다고, 그 따위로 날 부려먹는 거 아니다. 이 참에 누가 주인이고 누가 쫄따구인지 확실히 각인시켜 줄 테니 좋은 말로 할 때 옆방으로 꺼져." "알았다구요. 가면 되잖아요." 시큰둥하게 걸음을 내딛던 그녀는 짤막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전신을 바르르르 떠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기에 재빨리 안아 일으켜서 다시 침대 위에 눕히고는 한동안 주물럭 주물럭 무릎안마를 실시했다. 그제야 좀 진정을 하는 것 같아 손을 떼고는 긴 한숨과 함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쳇, 닷새다. 앞으로 닷새만 더 누워 있어라. 그 이후에는 가차없다. 알겠냐?" 끄떡 끄떡. 내 말에 군대답 없이 고개를 끄떡이다가 히죽 미소짓는 녀석의 장난기 가득한 면상이 언뜻 보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 눈을 휘둥그러니 뜨고 다시 봤을 때는 아직도 무릎 관절이 아프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린 얼굴로 변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요즘 신경과민이라 헛것이 보이는 걸까?' 영 기분이 찜찜한 것이 그녀에게 속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뇌리를 스치고 가기도 했다. 그러나, 상관 주제에 한번 말 밖으로 내뱉은 말을 번복하는 것은 위엄이 서지 않는 일이기에 속으로 꾹꾹 눌러 담는 수밖에 없었다. '얍실한 것, 다 낫기만 해봐. 그동안 고생한 것 곱절 이자까지 계산해서 다 받아내고 말 테다.' 그로부터 닷새, 그러니까, 무려 보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종리연 수발을 들어준 셈이 되었다. 딱 보름하고도 하루가 더 되는 날 아침, 령령과의 수련을 마친 후, 한 마디 하려고 단단히 벼른 상태로 내 방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그러나, 내 방 어디에도 그녀의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침대도 잘 정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간 그녀 뒤치다꺼리로 인해 어질러져 있던 내 방 자체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 이 년이 또 튄 거 아니야? 안, 안 되는데!' "종리연 나와!" 너무나도 다급한 마음에 그녀 이름을 부르며 창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신법이 뛰어난 그녀라면 다리가 낫자마자 창문으로 날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간 내가 너무 안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령령에게 한 바탕 욕을 얻어먹을 생각뿐만 아니라 하나 뿐인 쫄따구를 잃었다는 생각에 그만 천길 낭떠러지로 내 자신이 떨어지는 절망감을……. "작삼 오라버니, 무슨 일이에요?" "……." 미쳐 닫지 못한 방문 쪽에서 쌜쭉 하니 머리통을 디밀고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종리연이 틀림없었다. 동천위가 여벌로 갖고 있던 점소이 옷을 두 벌 얻어다가 옆방에 미리 놔뒀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 옷을 걸치고 나타난 것이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그만 그녀를 와락 껴안고 말았다. "다, 다행이다. 정말, 난 또 튄 줄 알고 놀랬잖아." "사람이 속고만 살았어요? 나도 신의란 게 있는 사람이에요. 더군다나 령령 언니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내가 어디로 도망가겠어요." 빠직 빠직. "너한테 계속 속고 살았잖아! 너한테 신의란 게 있냐? 있어? 납작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엉? 너 령령만 없으면 바로 튈 거지?" "쳇, 계속 납작한 가슴, 납작한 가슴하고 떠벌릴 것 없어요. 내 가슴 납작한 거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아니깐요. 숨, 숨막혀요. 그만 놔요. 일 가야 한다구요. 점소이 오라버니의 쫄따구인 제가 할 일이라곤 점소이 밖에 없잖아요. 어서 가자구요. 앞으로 같이 일할 사람들 통성명은 하고 지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어엉, 그렇지. 가, 가자구." 내 앞으로 가볍게 사뿐사뿐 걸어나가는 그녀를 보니 어쩐지 내가 계속 끌려 다닌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그녀 뒤를 내가 따라가고 있기도 했지만 말이다. 다 낫기만 하면 뭔가 잔뜩 부려먹으려고 단단히 벼르긴 했는데, 막상 때가 닥치고 나니 시킬 일이라곤 점소이 일 밖에 없기는 했다. 실제로 무환루 점소이 일자리가 부족하기도 했지만, 무환루 특성상 아무나 덜컥 채용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동천위랑 둘이서 끙끙거리며 일을 해온 것이었다. 끼이이익. "야, 거, 거긴……." "안녕하세요. 역시 종남파의 검귀 곽철 대협이셨네요. 그리고, 이쪽은 적미호 부인되시려나? 궁합이 너무 좋으셔서 제가 밤잠을 많이 설쳤더랬어요. 앞으로 무환루에서 일하게 된 점소이 종리연이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그럼 수고들 하세요." "……." 쿵! 후다다다닥. 예고 없는 그녀의 등장에 얼이 빠져 굳어있는 곽철 대협과 적미호 부인한테 다른 말도 못하고, 그저 죄송한 마음에 허리를 꾸뻑 꾸뻑 숙여 보이고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 내가 뒷수습에 난감해 하는 새에도 종리연의 걸음은 쉬지 않고 사뿐사뿐 내려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왜 이리 빠른 건지 내 걸음으로는 따라잡을 수가 없어서 후다다닥 뛰어야만 했다. "동이 언니,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새로 일하게 된 점소이 종리연이라고 해요. 언니의 냄새가 이 옷에서 배어 나오는 것 보니 이 점소이 옷, 원래 언니 것이지요? 잘 입을게요.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려요." "네, 네, 저, 저도 잘 부탁 드려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등장한 그녀의 인사를 마지못해 받고 있는 동천위의 곱상한 안면은 웃을까 울까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계산대로 계속 걸어간 종리연은 그 앞에 서서는 잠시 멈칫했다. 여전히 졸고 앉아 있는 홍 영감님의 안면에서 뭔가를 찾으려는 듯 열심히 탐색을 벌이는 게 아닌가? 너무나도 진지해 보여서 그만 말리지도 못했다. "제가 누군지는 아실 거예요. 앞으로 잘 부탁 드려요. 아, 참 주신 약은 잘 챙겨 먹었어요." 왠지 그의 앞에서만큼은 웃지 않는 것이 단단히 토라진 듯도 했다. '그나저나 무슨 약을 먹었다는 것이야? 있다가 물어봐야지. 쫄따구 주제에 숨기기만 해봐. 몸에 좋은 약이면 나도 좀 달라고 해야겠다.' 그녀의 당돌한 행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어이 주방으로까지 걸음을 옮기고야 마는 것이었다. 가장 껄끄러울 두 명이 있는 주방으로 말이다. 처음에는 말릴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어차피 앞으로 같이 일할 사람들, 한 번은 부딪혀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후다다닥 따라나섰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22 20:16:07 고친날 2005-05-23 08:52:23 읽은수 7554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18)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다시 생글생글 해맑은 미소로 안면을 바꾼 종리연이 그녀의 인기척에 요리에서 잠시 손을 뗀 녹 누님과 마주서게 되었다. 그러나, 종리연의 등장과 동시에 그 앞을 북천위가 막아서 버렸다. 그로부터 살기가 뭉실뭉실 솟아 나와 종리연의 전면에 쏟아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으나, 종리연은 말없이 웃으며 그 살기를 전부 받아내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거 환영인사치고는 너무 거창하네요. 지금의 제 신분은 작삼 오라버니의 쫄따구일 뿐이에요. 그것도 자그마치 천년은 너끈하게 해먹어야 하는 거니까 적어도 천년 동안은 안심하셔도 되요." '이게 내가 농담 삼아 한 말 가지고 앙심을 품었나? 왜 이리 비꼬는 거야?' "더구나 손님들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마당에 살기를 내뿜다니요? 따가워 죽겠으니 좀 걷어주시겠어요?" 손님이라는 말을 듣고도 북천위의 살기는 걷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어디서 꺼냈는지 검집에서 검까지 뽑아들 기세였다. 여차하면 종리연의 목을 날려버릴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그만, 물러나." 녹 누님의 짤막한 그 말 한 마디에 북천위는 살기를 걷어내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날카롭게 번득이는 시선은 여전히 종리연의 가냘픈 몸매를 뚫어버리듯 빛나고 있었다. "보내주신 고약은 잘 받았어요. 효과가 좋더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어요. 녹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안 돼." 실실 웃으며 말을 건넨 종리연의 호의는 녹 누님의 일언지하에 거절되고 말았다. 나한테는 아무렇지 않은 척 화창한 햇살처럼 웃었던 누님이었지만, 역시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두 여인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호호, 그럼 녹 문주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드나드는 손님들 중에 귀가 밝은 분들이 있으면 유 문주님한테로 새어나갈텐데요." "닥쳐, 내 앞에서 배신자의 이름 따위 입에 담지 마라. 더구나 문주라니! 언젠가는 그 년을 발가벗겨서 모든 하오문도들이 보는 앞에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윤간을 당하게 한 후 오체분시(五體分屍)시켜 버리고 말 작정이다. 니 년도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거든 뚫린 입이라 해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 "넌 작삼 동생의 부하일 뿐이야. 내게 하고픈 말이 있으면 작삼 동생한테 말을 전하면 그만인 것이야. 작삼 동생을 봐서 이번 일은 넘어가 주겠다. 적어도 북천위나 서천위가 너한테 밀릴 거라 생각하지 마라. 니 년의 그릇을 보려는 홍 오라버님의 지시 때문에 한 수 물려줬을 뿐이다. 서천위도 일부러 스스로를 노출시켜준 것이다. 조심해라. 수라사살(修羅四殺)이 없다해도 니 년 목을 뜯어내는 일은 손바닥 뒤집기 보다 쉬운 일이다." "흠,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어차피 저도 작삼 오라버니의 쫄따구일 뿐이라서 딱히 녹 문주님께 따로 드릴 말도 없을 거예요. 제 충심은 오로지 작삼 오라버니 한 사람만의 것이니까요." "충심(忠心)이라? 호호호호호!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나. 구룡(九龍) 중에서 풍룡(風龍)이 가장 약한 주제에 얍삽하기만 하고, 신의가 없으며, 남의 물건이나 훔치는 저속한 일을 생업으로 삼는다는 것을 이 중원에서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더냐? 하긴 한 명 있긴 하군. 그 덕에 질긴 목숨 부지했던 것이 아니냐?" "그래요. 제가 구룡 속에 낀 게 저로서도 항시 의문이었어요. 그래도, 여태까지 하오문(下汚門)보다는 덜 더럽다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왔거든요?" "흥, 니가 정녕 매를 버는구나. 죽고 싶은 것이냐? 여긴 호굴이다. 니 안방이 아니란 말이다. 북천위가 검을 치웠을 때는 서천위의 보이지 않는 검날이 널 향했다는 뜻이다. 택해라. 죽을 테냐? 기어서 살 테냐?" "……." 그녀들의 무시무시한 설전(舌戰)이 일어나는 순간, 주루안에 손님이 없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정확히는 이런 상황이 될 거라고 동천위가 지레짐작을 했는지 대문을 닫아걸어 버린 것이었다. 살모사의 맹독(猛毒)보다 더 지독한 독기(毒氣)가 두 여인 사이에서 흘러나왔기에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야만 했다. 어차피 북천위의 관심 대상도 종리연이었지, 내가 아니었기에 내가 발을 빼는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종국에 녹 누님 입에서 생사로 직결되는 말까지 나왔을 때는 더 놔둘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잘못하면 자그마한 불씨가 숲조차 꿀꺽 삼킬 거대한 화재로 번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헤헤헤, 누님, 어차피 한 번 죽은 녀석입니다. 좀 봐주세요. 야, 쫄따구, 어서 눈깔 깔어. 감히 어디서 하늘같이 지엄하신 녹 누님을 뻔뻔스럽게 쳐다보고 있어. 어허, 어서 눈깔 깔아라." 종리연이 내 말에 못 이겨서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을 감아 버리자, 녹 누님도 아차 싶었는지, 두 눈가에서 독기를 거둬들였다. 녹 누님한테 이런 날카로운 면이 존재하기도 한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던 것이다. "휴우, 나도 모르게 그만 흥분해 버렸구나. 작삼 동생 앞에서 험한 꼴을 보이다니……." "아닙니다. 이 자식하고 같이 있으면 누구나 성질 더러워지게 돼있습니다. 누구보다 제가 잘 알지요. 헤헤헤, 누님의 심기를 어지럽혀 드려서 죄송할 따름이네요. 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포 형님한테도 들러봐야 하거든요." "그러렴. 나도 어서 손님맞이 준비를 마쳐야 하지. 참, 아침은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동파육으로 준비해 줄게." "네, 그럼 좀 있다가 뵐 게요." 억지로 살짝 굳어있는 종리연을 끌어안다시피 해서는 후원으로 빠져나갔다. 아직 쌀쌀한 겨울 한파가 남아 있음에도 포연강은 여전히 후원 창고에 처박혀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몇 걸음이나 갔을까? 억지로 내게 질질 끌려오던 종리연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심하게 각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상태에서도 할 말은 다하는 끈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쿨럭, 쿨럭, 오늘부터 무환루에서 일하게 된 점소이 종리연이라고 합니다. 작삼 오라버니의 똘마니이기도 하구요. 보아하니 연공에 매진하고 계시네요.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뵙겠……." 철푸덕.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 화들짝 놀란 나는 솜털처럼 가벼운 그녀를 안아들고서 단번에 삼 층 종리연의 방으로 뛰어 올라들었다. 침대에 내려놓고서 머리에 손을 올려보니 열이 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따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제정신 차리는 것을 기다리는 일밖에 없었기에 가느다란 팔 다리를 열심히 주물러 주었다. 그래서인지 얼마 후에 실눈을 뜨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야, 야, 괜찮아?" "예, 괜찮아요." "괜찮은 녀석이 이 꼴이냐? 이번에는 또 뭐냐? 어?" "북천위 그 자식의 살기를 맨 몸으로 받아서 그래요. 다른 때처럼 호신강기(護身綱氣)를 두르고 받아쳤으면, 이 꼴은 안 났을 텐데. 그냥 객기를 부려서 그래요." "북천위가 그렇게 고수냐?" "아뇨, 제가 그만큼 하수인 거지요. 경신법을 빼고 순수 무공으로만 겨룬다면 무환루 안에서 제가 가장 바닥일 거예요. 어차피 한 번은 당해줘야 같이 지내기 수월하지요. 통과의례랄까?" "그래서, 일부러 도발했냐? 킁, 꼭 이런 식으로 해야 되는 거냐?" "……." 말하기가 힘들었는지 잠시 눈을 감은 그녀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어떻게 보면 뭔가 다른 세계 속에 빠져들어 심사숙고하는 듯도 했다. 열 닷새 전에 잔뜩 독이 올라서 펄쩍 펄쩍 날뛸 때와는 또 다른 차분함이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미성년자라 해도 여자라 이건가? 요물은 요물이군. 물론 령령에 비하면 새발의 피지만 말이야.' 가만히 눈을 뜬 종리연은 무슨 일인지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사람 무안하게 말이다. "왜, 왜 그래?" "작삼 오라버니가 혹시 수라사살(修羅四殺)의 막내라는 차도살(借刀殺) 아니에요?" "흠, 뭐 바깥의 인간들은 그렇게들 말하긴 해. 뭐, 내가 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고. 다들 그렇게 몰아 세우는걸." "그럼, 차례대로 혈살(血殺), 도살(刀殺), 권살(拳殺)이 되네요. 바로 수라사살(修羅四殺)! 어쩐지 기반을 송두리째 뺏긴 녹 문주가 무엇을 믿고 항주로 돌아왔는가 했더니, 다 믿는 바가 있었네요. 거기에 광룡(狂龍)에 마화(魔花)까지……. 후훗, 반 쪽짜리 하오문 정도는 뒤집을 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작금의 하오문 뒤에는 무림맹이 있어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하오문이란 데가 그렇게 지저분해? 개방보다 더 지저분하냐? 게다가 녹 누님이 하오문 문주야?" "작삼 오라버니는 참 신기한 사람이에요." "뭐가?" "무림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무림에 대해 전연 아는 바가 없으면서도, 누구보다 무림에 깊게 관여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갑자기 얘가 뭘 잘못 먹었는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고 있다. 내가 무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기는 하지. 고작 해봐야 이전에 소방과 제갈혜한테서 들은 게 전부랄까? 그런데, 내가 무림에 깊게 관여되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가 안 되었다. "녹 문주 말대로 난 믿음이 안가는 무림인 일 순위라 할 수 있어요. 든든한 배경도 없이 경신법 하나만으로 살아 남으려니 남들을 속이며 비겁하게 살수밖에 없었어요. 더구나 신의에 목을 매다가 죽는 사람들도 많이 봤거든요. 그래도, 그래두요. 전 단 한 사람만 제가 신의가 있는 무림인이다라고 믿어준다면 이 세상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한 사람이 오라버니였으면 좋겠어요." "그래? 좋아. 그럼 지금 당장 65000냥 갚아. 그럼 믿어줄게."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5-24 13:19:35 고친날 2005-07-25 18:11:56 읽은수 7749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19)-항주 삼대 유명인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9]항주 삼대 유명인 종리연 점소이가 무환루에 정식 취직한지 며칠이 흘러갔다. 워낙에 약삭빠르고 남 다른 눈치를 지닌 덕에 난생 처음 한다는 점소이 일에 너무나도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점소이 자질로만 따지자면 두 달 정도 선배 격이라 할 수 있는 동천위(東泉衛)보다 월등해 보일 지경이었다. 동천위는 내성적인 여인이라 그런지 낯가림이 심해서 손님 접대가 아직도 서툰 편이었다. 선천적으로 싹싹하게 태어났을 종리연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론 한참 선배 격인 나와 비교하기에는 택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내 전속 쫄따구이기도 하지. 크크크. 그 녀석이 일을 하면서부터 손님들이 조금 더 늘어난 것 같단 말씀이야. 다만 눈빛들이 게슴츠레 해 보이는 아저씨들이라서 좀 찜찜하지만 말이야.' 주방에도 일손이 하나 늘어났다. 녹 누님이 괜찮다고 만류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팔을 걷어붙인 적미호(赤美狐) 부인이 기어이 주방 보조로 나서고 말았다. 그녀의 속셈이야 안 봐도 뻔할 뻔 자였다. 전 마교 교주의 후광 아래 귀하게 자랐을 몸, 당연히 요리와는 담을 쌓은 그녀이기에 지난 두 주 간, 곽철 대협의 밥상 마련은 언제나 녹 누님 차지가 되어 왔다. 곽철 대협이라면 그런 일에 신경 쓸 양반은 아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적미호 부인 입장에서는 자기 손으로 차린 밥상을 그에게 올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요리 솜씨가 뛰어난 녹 누님에게서 한 수 배우겠다는 뜻인 것이리라. '그럼, 그 이전까지는 뭘 먹고들 지낸 거야? 설, 설마 건포가 주식이었나? 그 때 곽철 대협이 적미호 부인에게 삐진 이유 중에 하나가 어쩌면……?' 뭐, 머릿속 상상이야 자유 아니겠는가? 아직 무환루(無患樓) 일손이 부족한 것은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해 훨씬 여유가 생겼다. 한 두 명 정도만 더 있으면 훨씬 편할 거라는 생각을 할 때쯤이었다. 갑자기 주루 바깥이 술렁술렁 거리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다.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사람들이 우르르르 몰려가는 것이 뭔가 재미난 일이라도 일어난 듯 했다. "어디 잘 사는 대감 집에 불이라도 났나? 아님 유명한 싸움꾼들의 박투(搏鬪)라도 벌어졌나?" 나도 모르게 의문이 들어 중얼중얼 거렸더니만, 물끄러미 거리로 눈길을 돌리고 있던 창가 손님들 중 한 분이 그걸 들었는지 웃어젖히는 것이었다. "껄껄껄! 자네 외지에서 온 사람이군. 항주에서 두 달만 살았어도 그녀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거늘." "네? 뭐, 제가 여기에서 일한 지 두 달 조금 안되긴 했지요. 그런데, 그녀라뇨?" "어허, 정말로 못 들어 본 게로군. 항주(抗州) 삼대 유명인 중 한 명인 그녀를 모른다니! 한 달에 한 번 이맘때가 되면 꼭 이 항주 사거리를 지나쳐가곤 하는 그녀를! 아 참, 내 정신 좀 봐. 여기 다 해서 닷 냥이라 했지? 우리도 간만에 구경하러 가봐야겠네. 그럼 수고하게." "예 살펴들 가십시오. 손님." 허리를 넓죽 숙여 공손히 손님 일행을 보낸 직후 약속이라도 한 듯 다른 손님들까지 덩달아 자리 정리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허겁지겁 서두르며 우르르르 홍 영감님이 졸고 있는 계산대로 몰려드는 그들을 보니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 손님들은 자기네들 요리를 다 처리하고서 일어난 것이었지만, 뒤따르는 그들은 막 조리되어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요리를 눈앞에 두고도 그냥 일어서곤 하는 것이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홍 영감님은 언제나처럼 귀신같이 알아서 척 하니 손님들 계산을 해 버렸다. 어느 틈엔가 남녀노소를 무론하고 손님들이 다 나가버려 텅텅 비어버린 주루 내부에는 문틈으로 들어온 스산한 바람 한 줄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저 영감님, 언제 봐도 대단하네요. 조는 듯 하면서도 들을 것 다 듣고, 볼 것 다 보니 말이에요." 예전에는 확연하게 홍 영감의 존재에 대해 불만이 많아 보였던 종리연이 그를 별종 정도로 가볍게 언급하는 걸 보니. 불만 사항 같은 것은 거의 다 잊은 듯 했다. 적응력만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사내도 아닌 여자애 주제에 털털하니 뒤끝이 없는 게 꽤나 맘에 들었다. "넌 혹시 본 적 있냐? 지금 바깥에 있다는 항주 삼대 유명인 중에서 한 사람 말이야." "물론 봤지요. 아주 엄청난 미인이던걸요. 거기에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어마어마하다고 하던 걸요. 뭐, 부정 축재했다는 쪽에 무게가 실려있기는 하지만요. 두어 달 전에 실종된 그녀의 조부가 십성의 한 명이면서 무림맹의 일원이었을 때의 위세란 장난이 아니었어요. 지금에서야 부랴부랴 진씨 세가 전체가 발벗고 나서서 그의 행방을 쫓고 있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더군요." "……." "왜, 왜 그러세요? 작삼 오라버니?" 종리연의 말을 듣는 순간, 진두한 영감쟁이가 나한테 자랑삼아 늘어놓던 손녀가 있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비록 성격에 문제가 있음을 진두한 스스로 성토하긴 했지만, 그가 손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그녀가 조부의 죽음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비통해할까 하는 생각에 조금은 침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연아, 그 미인의 이름이 뭐냐?" "호호호홋, 하여튼 남자들이란 그저 돈 많은 미녀라고 하면 사족을……. 아, 알았어요. 농담이라구요. 그만 좀 째려보세요." "……." "진미희(鎭美姬) 소저예요. 손님도 없는데, 우리도 구경 가보지 않을래요? 비단 주루 손님들이 그녀의 미모에 혹해서 몰려나간 것만은 아닐 거예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앙증맞으면서 밉살스런 보조개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돌리는 것을 보니 뭔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내 궁금증을 부채질 해주면 내가 질질 끌려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내가 쫄따구의 말에 현혹되어 끌려 다닐 정도로 만만해 보였단 말인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끌려 다니는 게 아니라 내가 주도적으로 앞질러 가면 되는 거 아니겠어?' "동이 점소이." "네, 작삼 점소이님." "뒤를 부탁하오." "……." 그녀의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눈썹 끝이 휘날리게 무환루를 튀어 나왔다. 대문을 나오면서 힐끗 돌아보니 찬 기운이 쌩쌩 감도는 일 층 주루 한 복판에 목석처럼 살짝 굳어버린 동천위가 보였다. 내가 무환루 현관을 박차고 내달린 순간 종리연도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고 있었다. "히야, 작삼 오라비니 순수 체력만으로 달음박질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척 빠르시네요. 매일 아침 령령 언니에게 받는 비밀 특훈의 성과인가 봐요?" 그래도 하나 있는 쫄따구라고 차마 매일 아침 령령에게 구타당하고 있다는 말은 못하고, 그저 비밀 특훈이라는 말로 얼버무려놓았었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날 보는 시선이 좀 남다르긴 하다. '뭐, 조금은 효과가 있을 거다. 너마저 잡아낼 정도로 빠르게 날아다니는 령령의 매서운 손바닥과 주먹을 피해서 굴러다니다 보면 인간의 극한이란 게 어렴풋이 보이지. 그러고 보니 나 지금 발목 보조대를 차고 뛰는 거잖아?' 보조대를 차고도 이 정도의 속도가 나오는 것을 보면, 떼고 뛰면 어느 정도일까 하는 기대감이 솟아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옆에서 심호흡 한 번 거르지 않고, 편안한 기색으로 나란히 보조를 맞추고 있는 종리연을 보니 기운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저기, 저기 있어요." 과연 드넓은 항주 사거리 주변으로 쌀쌀한 한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인파가 우글우글 왁자지껄하게 몰려들고 있었다. 그 사거리 한 복판을 일단의 기이한 무리들이 지나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네 명의 듬직한 장정이 둘러맨 꽃가마를 선두로 해서 그 후미를 수십 명의 개성적인 무사들이 호위하듯 무질서하게 따르고 있었다. 호위 무사라고 하기보다는 낭인 무사에 더 가까워 보이는 이들이었다. 무엇보다 무리의 맨 앞을 인도하듯 외로이 앞장서 걷고 있는 무사가 내뿜는 흉흉한 기운이 장난 아니었다. 여름도 아닌 한 겨울에 팔뚝이 통째로 드러난 새빨간 혈의무복이라니! 더불어 새빨간 영웅건을 이마에 두른 그는 드러난 피부마저 흉흉했을 그의 과거를 말해주는 듯 끔찍한 흉터로 뒤덮여져 있었다. 그의 허리에 채워져 있는 쌍검은 그가 쌍검술의 달인임을 느끼게 해줬다. "오옷,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기백이 느껴지는 인간일세." "그럼요. 저 사람이 벌써 열 달 동안 진미희 소저의 호위수장(護衛首將)을 맡고 있는 걸요. 앞으로 두 달만 더 채우게 되면 그는 명실공히……." 종리연의 부연 설명은 모여든 군중이 지르는 함성에 파묻혀 끝까지 들을 수가 없었다. 사거리 한복판에 꽃가마가 바닥에 내려지면서 차양막이 걷혀졌던 것이다. 가마 속에서 한 명의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앞을 가로막은 수많은 군중들 때문에 먼발치에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며 봐야 했지만, 스치듯 보이는 미모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여인이었다. 세요설부(細腰雪膚), 주순호치(朱脣皓齒), 명모유반(明眸流盼)의 기준 따위는 가뿐하게 넘어서서 위에서 내려다보는 경국지색(傾國之色)형 미인이라고 해야할까? 그 어떤 말을 곁들여도 그녀를 표현하기에 모자람이 있었다. 솔직히 이전까지만 해도 적미호가 내가 본 미인들 중에서도 으뜸인줄 알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곽철 대협의 안부인이 되면서 뇌살적으로 흐르던 향기가 급속도로 감퇴되어 버렸다. 그저 남의 부인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반해 꽃가마에서 내려서서 오롯이 몸을 일으킨 여인은 비단 뇌살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범람하기 어려운 우아함까지 지니고 있었다. 제일 중요한 점은 임자가 없다는 점이랄까? 아무리 남의 떡이 커 보일지라도 임자 있는 떡에는 눈이 덜 가기 마련인 것이다. 진미희는 선두의 무사처럼 장미문양이 수놓아진 새빨간 궁장의를 걸치고 있었다. 갸름하니 모난 데 하나 없는 얼굴선이며 쭉 빠진 다리와 팔, 그리고, 개미허리처럼 가느다란 허리를 보니 몸매 또한 예술이었다. "와아아아아아! 미희 소저다! 미희 소저가 나왔다.!" "오오, 정말 듣던 바대로 아름다우면서도 고고한 한 떨기 장미같은 여인이다!" "최고다! 최고! 항주 뿐만 아니라 절강성최고의 미녀다!" "제발, 여기로 눈길 한 번만 주시오! 진미희 소저! 제발!" 군중들의 기운 넘치는 환호 소리는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물론 그 환호의 주인공들은 거의 남자들이었다. 간혹 그 속에는 음담패설 성향이 짙은 환호도 종종 껴져 있었지만, 그런 소리를 내뱉은 인간은 주위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으슥한 골목으로 사라지곤 했다. 얼마나 그녀가 열혈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그에 화답하듯 살포시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진미희의 미모를 대하게 되자 내 혼백조차 아득히 떠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꾹 꾹. "아, 왜 남의 옆구리는 찌르고 난리야? 왜? 무슨 일인데?" "여기 손수건이요. 작삼 오라버니 입가에 흐르는 침 좀 닦으면서 보시라구요."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26 11:15:57 고친날 2005-05-26 16:40:03 읽은수 7663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20)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20] 꽃가마에서 내린 진미희가 의도적으로 군중들을 한 차례 둘러보자, 수정처럼 반짝반짝 거리는 그녀의 시선에 압도당한 군중들이 이내 잠잠해졌다. 진미희의 눈동자는 해맑다 못해 그윽하기까지 해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 그 자체를 한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아니지. 눈매 하나는 냉혈마녀(冷血魔女) 주령령(周鈴鈴)이 최고 아니겠어? 그 커다란 눈동자에서 발산되는 음울하면서 차가운 기운이 가히 천하일품(天下一品)이지. 그녀가 저 자리에 선다면 압도적인 냉기에 좌중 모두의 피가 얼어붙어서 동사(冬死)들 해 버리고 말걸.' 군중들이 잠잠해지며 그녀에게로 시선이 모여지자 진미희의 장미처럼 붉디붉은 입술이 보일 듯 말듯 야릇한 미소와 함께 살짝 그 끝이 말아 올려졌다. 한차례 심호흡을 들이킨 그녀는 두 눈을 갸름하게 빛내며 방울이 굴러가듯 낭랑한 목소리로 마침내 말문을 열어 보였다. "여러 영웅분들께서 이 미천한 소녀를 보기 위해 아직 가시지 않은 한파에도 불구하고 불원천리 왕림해주신 것 매우 감사 드립니다. 저의 낭군이 되실 분을 구하고자 매달 스물 하고도 나흘째 되는 날 영웅 대회전을 열어왔다는 것 모두가 잘 아실 겁니다. 한 해 동안 호위수장의 자리를 지키신 분께 저의 일신을 맡기겠다는 공약 또한 모두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벌써 열 달 동안 무적쌍검(舞敵雙劍) 팽무진(彭舞進) 대협께서 연전 연승을 거두시며 호위수장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셨답니다. 저번 달은 저의 조부님의 소식이 묘연하여 서안(西安)을 다녀오느라 부득이하게도 영웅 대회전을 열지 못했지만, 뒤늦게나마 저의 약속을 지키고자 서둘러 항주에 당도하였습니다. 지금이 진시(辰時) 말이니 사시(巳時) 초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인 신시(申時) 말까지 영웅 대회전을 열기로 하겠습니다. 방식은 예전처럼 우승자이신 팽무진 대협에게 도전을 해서 이기시는 분이 새로운 우승자가 되시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매 결전마다 반 식 경의 휴식 시간을 둔다는 점 또한 잊지 마시길 바라겠습니다. 장소는 여기서 한 식 경 거리인 매향루(梅香樓) 안마당으로 잡겠습니다. 그 시간동안 제가 매향루를 통째로 빌리기로 했으니 거리낌없이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있다가 뵙도록 하고 소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마치 준비된 서찰을 한 번에 내려 읽기라도 하듯 막힘 없이 영웅 대회전에 대한 설명을 마친 진미희 소저는 군중을 향해 다시 아찔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우아하게 사방으로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꽃가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것이 신호인 듯 기이한 무리는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들의 이동 방향은 진미희 소저가 언급했듯이 매향루로 향하고 있었다. 매향루는 무환루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규모와 시설 면에서만 비교해봐도 우리 주루와는 그 격을 달리할 정도였다. "작삼 오라버니, 우리도 가요. 공짜래잖아요. 이참에 매향루 구경도 해보고, 팽무진이란 사람의 무위도 구경할 겸 가보자구요." 종리연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귓가에 울려왔다. 곤란한 일이었다. 애당초 그저 진미희 소저가 소문과 비교해서 손색없는 미녀인지만 확인하고서 돌아설 작정이었다. 그런데, 내가 소속된 주루 일을 내팽개치고, 남의 주루에까지 원정을 가서 논다는 것은 나름대로 점소이 일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진 나로서는 부담이 가는 일이었다. 더욱이 포연강과 홍 영감이야 제쳐놓아도 냉혈 마녀 주령령이 가만있을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주방에서 고생하고 계실 녹 누님께도 민폐를 끼치는 꼴이 되는지라 절로 미안한 마음도 들 것이었다. "오라버니, 무슨 고민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이런 날에는 주루에 손님이 있을 턱이 없어요. 있어봤자 동이 점소이 혼자서 일 처리하기에 무리도 없을 거라구요. 어엿한 수라사살(修羅四殺)이잖아요. 눈치 따위 보며 살던 때는 옛적에 끝났다구요." 악마의 밑도 끝도 없는 유혹이 시작되었다. 특히 그녀가 수라사살 이야기를 꺼낸 배경에는 내 자존심을 자극하는 한 수가 보이긴 했으나, 어떻게 들어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내가 수라사살을 하고 싶어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온갖 협박과 구슬림을 배겨내지 못하고, 반강제로 끌려오다시피 따라온 것이 아니던가? '손님도 없을 텐데. 뭐, 자기네들도 일하지 않는 주제에 설마 나한테까지 닦달하지는 않겠지.' "좋아, 다른 주루 경영 기법에 대해서 답사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가보자." "호호호호, 역시 오라버니는 화통하기도 하셔. 어서 가자구요. 우물쭈물하다가는 명당자리 뺏길지도 몰라요." 결국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뒷일이야 어찌되건 진미희 소저의 백옥같은 미모를 한 번 더 보고 싶기도 했다. 보면 볼 수록 더 보고 싶어지는 미녀란 흔치 않은 법이다. 비록 내 손안의 떡이 될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그 끝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항주 사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봇짐과 혁낭을 둘러매고 여벌의 신을 꽁무니에 달고있는 꼴들을 보아하니 적잖은 인간들이 진미희 소저를 보기 위해서 먼 지방에서 내달려온 티가 났다. 하기사 그녀가 항주 삼대 유명인으로 불릴 정도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돈과 명예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있는 여인이 아닌가? 그녀의 남편이 된다는 것은 진두한 영감이 자랑한 데로 일평생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먹고사는 데 지장이 전혀 없음도 의미하지만, 곧 무림맹과 직접 연줄이 생긴다는 말도 되는 것이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는 속담도 있지만, 호박도 이런 호박이 없을 것이다. 그녀만 붙잡으면 모든 것을 영유하게 된다는 말이니 어찌 아니 모른 척 하겠는가? 못 먹는 감이라 해도 찔러나 본다는 심정으로 영웅대회전에 도전할 불나방 녀석들이 어디 하나 둘이겠는가? '나도 찔러 봐? 못 먹는 감이라 해도 찌르는 것은 내 자유 아니겠어? 혹시 알어? 우연에 우연이 겹쳐져서 내가 연전연승할지?' 몰려드는 인파 사이를 가로지르며 한동안 달려가자 거대한 매향루가 멀찍이 시야에 들어왔다. 입구에 점소이가 한 명 서 있기는 했지만,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인파를 막지는 않았다. 그저 사전 예약하고 오는 고귀하신 인간들을 안내하기 위해 배치된 녀석인 듯 했다. "우리 이 층으로 올라가요. 대회전 관람은 그쯤이 적당하다구요." "너 자주 왔었냐? 왠지 잘 아는 것 같은데." "팽무진이란 사람의 박력이 끝내 주거든요. 흉터로 뒤덮인 것을 보면 은근히 멋진 매력이 흘러나오기도 하구요. 그 사람 여인들한테 제법 인기가 있는 사람이에요. 아마 대전에서 탈락이라도 하면 다른 여인들이 그에게 작업을 걸려들지도 몰라요. 구경하다보면 가끔 멋있고 잘생긴 남자들이 나오기도 하구요. 그 맛에 종종 구경하러 오곤 했어요." "오호, 그 남자한테 관심 있는가 보구나? 내가 다리 놔줄까? 나 월하노인 경력이 좀 있거덩." "흥! 됐어요. 천년동안 작삼 오라버니 쫄따구 노릇해야 할 판인데,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있겠어요?" "……." '그렇게 떫으면 오늘이라도 후딱 갚으면 될 거 아니야?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그렇게 빚더미를 부풀려 놓으래? 그래도 명색이 잘 나가는 도둑이면 한 밑천 두둑이 모아놨을 법도 한데, 먹고 짼다 이거지? 두고 보자. 그딴 식으로 나오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내일 모레 오락가락 하는 날이 와도 내 쫄따구로 거느리고 말 테니.' "뭘 그렇게 궁시렁궁시렁 거려요? 자리 뺐긴다구요. 서둘러야 해요." "……." 그녀의 손에 이끌려 이 층으로 들어서자 바깥에서 보던 매향루와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매향루는 건물이 구(口)자 형태로 세워져 마당이 교묘하게 가려져 있다. 예전에 그 앞을 지나치곤 할 때는 아마도 아내와 남편을 피해 바람을 피우는 족속들을 가려주기 위해 그렇게 지었으려니 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마당에는 돌로 된 넒직한 연무장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닌가? 4층 높이로 세워진 매향루 전체가 바깥벽은 막혀 있어도 안마당을 향해서는 뻥 뚫려 있었다. 어쩐지 가끔 칼부림 소리가 들려온다 싶기도 했다. 이곳은 한 마디로 연무장에서 목숨걸고 싸우는 인간들의 칼부림을 안주 삼아 여흥을 즐기는 곳이리라. "멋진 곳이지요? 절강성에서 정식 결투 관람이 허락된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예요. 자자, 여기 자리가 나 있네요. 오라버니 일루 오세요. 어머, 진미희란 여인 엄청난 부자인가 봐요. 안주는 둘째 치더라도 한 탁자에 죽엽청 한 동이씩이나 돌려놓다니 말이에요." '당연하지. 걔네 집 지하 창고 어딘가에 금원보로 채워진 사과상자 수백 개가 쌓여 있다는데, 이 정도가 대수겠냐? 내 생각이 맞다면 이 매향루도 아마 진씨 세가에서 미리 사들인 사업체 중 하나일거다. 우습다. 난 일평생 일해서 모은 돈으로 망아루처럼 작은 주루라도 하나 갖는 게 소원인데, 진미희란 여인은 집안을 잘 골라 태어난 덕에 이미 없는 게 없다. 게다가 얼굴 예뻐, 몸매 끝내 줘, 배경 튼튼해, 이제 남자만 자기 입맛에 맞는 녀석으로 고르면 그만이네. 그러고 보니 왜 구태여 이런 영웅 대회전을 여는 거야? 무슨 꿍꿍이야?' "자, 작삼 오라버니 무슨 일로 심기가 불편하신지 모르지만, 인상 그만 구기시구요. 소녀가 한 잔 따라 올릴게요. 자요." "어, 어 그래." 쪼르르르륵. "꿀꺽, 카아. 속이 화끈거리는데. 너도 한 잔 받아라." "어머, 저도 주시는 거예요? 호호호홋, 그럼 거절할 수 없지요." 종리연과 주거니 받거니 대작을 하다보니 어느 새 주변이 인파로 꽉 찬 것을 알 수 있었다. 눈빛을 늑대처럼 번득이며 진미희 소저의 모습을 찾고 있는 남자들이 많기는 했지만, 뭔가 기대와 열망에 가득 찬 여우같은 눈빛으로 연무장을 향하고 있는 여인들도 적지 않았다. "어머머, 작삼 오라버니 드디어 대회전이 시작되려나 봐요." "그, 그러게." 약간 취기가 오른 나는 혀가 꼬이면서 시야까지 흔들리는 것을 느꼈으나, 잠자코 연무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 곳에는 아까 전 기이한 무리들의 선두를 이끌던 혈의무복 무사가 매서운 기세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 사람 사문은 어디야?" "없어요." "없다니?" "낭인 무사예요. 어떤 문파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라 직접 다른 무인들과 겨루면서 실전 검법을 체득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더 멋진 남자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내공심법이 딸린다거나 하진 않을까? 이름난 문파의 비전을 익힌 인간들을 상대하기는 어려울 텐데."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아직까지 팽무진 대협이 못 이기는 사람은 못 봤어요. 무수한 정파 무인들도 그에게 나가 떨어졌는걸요." '대협이라, 이거 이거 순 사기꾼 아니야?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인간을 보기 위해서 날 부추겨 온 셈이군.' 종리연이 팽무진에게 이끌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장기인 경신법의 어원은 모르지만, 사문이 없다고 하니 어디서 쓸만한 무공기서 하나 훔쳐서 익힌 것인지도 몰랐다. 즉 알고 보면 그녀도 낭인 무사의 한 부류인 셈인 것이다. '그럼, 나는? 나는 뭘까? 낭인 무사들조차도 삼재검법은 익히지 않는다는데. 삼재검법을 장기로 익힌 난 뭐라고 불려야 하는 거냐?' "팽무진 대협 승! 팽무진 대협이 경기 진행을 계속 하겠다고 하시니 다음 분 나와주시기 바랍니다." 연무장 가운데 청기와 적기를 양손에 든 심판관의 우렁찬 소리가 매향루 안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어, 어라? 방금 무슨 일 있었어?" "휴우, 어떤 바보 같은 낭인 하나가 팽무진 대협한테 달려들었다가 일 초에 나가 떨어졌어요." "……." 그로부터 내리 반시진 동안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조무래기 무인들이 팽무진의 쌍검에 싱겁게 나가떨어지거나 몇 초 지나지 않아 피를 뿌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너무 큰 격차라고 해야하나? 결국 심판관이 휴식을 선언했을 때에야 오합지졸들의 도전이 그 막을 내렸다. "이거 왜 이렇게 대전 수준이 떨어지냐? 저런 조무래기는 사전 심사를 거쳐 걷어내야 할 것 아니야?" "그게 진미희 소저의 무서운 점이에요. 삼류 무인이라도 도전할 수 있도록 제한을 두지 않았어요. 그녀에게 흠뻑 빠져든 사람들 모두가 공연한 허상을 품을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래서, 그녀의 인기가 이렇게 드높은 것인지 몰라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팽무진 대협을 지치게 만들려고 고용된 용병도 있어요.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강한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낼 거예요. 그들은 팽무진 대협이 철저하게 지치길 기다리는 거지요. 비겁한 소인배들이라구요." '남 말할 처지가 아닐텐데…….'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27 11:15:29 고친날 2005-05-28 11:42:18 읽은수 7719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2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21] 종리연이 입에 거품을 물고 팽무진을 두둔하는 것을 보고는 녀석에게 단단히 빠져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그녀의 말에 신빙성이 더해져 갔다. 초반에는 약한 녀석들이 올라오더니 한 시진 정도 지나가자 앞전보다 강해 보이는 놈들이 고개를 디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상한 점은 전력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겠다는 투기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놈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곧 저들의 목표가 이기는 것이 아니란 것에 일맥상통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점에서부터 팽무진도 지쳤는지 한 번 대결이 끝나고 나면 반 식 경씩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잘못된 경기 방식이었다. 결국, 돌려가며 공격해오는 차륜전이랑 다를 바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달이나 우승을 거며 줬다는 것은 팽무진이란 작자가 그만큼 강하다는 말인가? 구룡에도 끼지 못하는 주제에?' "다음 도전자는 화산파(華山派) 속가 제자 왕천후 공자 이십니다. 양 대전자는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심판관은 청기, 적기 두 깃발을 번쩍 치켜들어 대결 시작을 알렸다. 적기는 전 결투의 승자인 팽무진 대협을 의미하며, 청기는 도전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마지막 순간 승자를 알리는 순간에는 적기가 올라갔었다. 도전자들도 별 볼 일없는 떠돌이 낭인 수준의 하수들이었다. 팽무진이란 놈이 전력으로 상대해줄 가치도 안 보였었다. 그런데, 이제는 제대로 배운 오대세가 구대문파 인간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 자는 속가 제자이면서 매화 검수로 불리는 고수인데! 오래 전에 팽무진 대협에게 아깝게 진 사람이기도 하구요. 반년간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검을 다시 날카롭게 세웠을 거예요. 저번에도 간신히 우승 턱을 넘겼는데, 이번에는 더욱 험하게 생겼네요." 안절부절 걱정 반, 취기 반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종리연이 근심 어린 말들을 쏟아 내었다. 계속 듣고 있다보면 별 상관도 없는 나마저 녀석의 분위기에 동화되어버릴 것 같았다. "매화 검수인지 뭔지 하는 녀석을 팽무진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이긴 거야? 제대로 사문을 두고 배운 검법도 아니라면서?" "제대로 사문을 두고 배운 것은 아니지만, 주로 구파일방 고수들과 싸우면서 그들에게서 간접적으로 검술을 배운 거예요. 팽 대협은 오래 전부터 명문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기 일쑤였어요. 그 때는 주변에서 미쳤다고 삿대질을 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나름대로의 검을 만드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예요. 중상을 입으면서 실전감각을 키운 진정한 의미의 낭인 무사라구요. 아!" 차차차차창! 차차창! 초반부터 둘 사이에서 불꽃이 튀어 나와 심판관마저 멀찍이 숨어야만 했다. 험상궂은 인상으로 반을 먹고 들어갔던 팽무진의 안면에도 처음으로 긴장하는 티가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화산파라고 하는 곳은 매화를 기본 모태로 한 검법을 쓴다고 들었는데, 내 눈이 해태 눈깔인지 매화의 흔적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하기사 목숨을 내걸고 하는 싸움판에 매화를 그리고 앉아있는 바보가 있을까? 그런 형식에 얽매이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상대방 목줄을 빨리 끊을까 하는 데나 신경을 기울이겠다. 어라?' 제법 곱게 자란 티가 나는 왕천후 녀석의 검 끝에서 정말로 매화가 그려지고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그 오의를 터득하고 있는 놈이었는지 비스무리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검 끝이 미미하게 매화 모양으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위, 위험해요. 저 화산파 녀석의 검법이 한 단계 더 올라가 버렸네요. 가뜩이나 지쳐있는 팽무진 대협인데……." "야, 야 그렇게 걱정되면 니가 뛰어내려가서 한 판 거들어 봐라." "흥! 그래도 된다면 예전에 그렇게 했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이렇게 먼발치에서 남 몰래 응원하는 일밖에 없단 말이에요." "너뿐만이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여인들도 거의 팽무진 이라는 녀석을 응원하는 것 같은데?" "흥! 흥! 흥! 그들의 응원과 제 응원은 격이 다르단 말이에요. 어디서 근원도 알지 못하는 계집애들을 꺼내세요!" '끙, 얘, 얘가 좀 취했나? 근원을 알 수 없기로는 니가 한 수 위잖아?" "그래도 이 대회를 주최하고 있는 진미희 그년보다는 나은 애들이에요. 그 계집애는 애초부터 공약에는 관심이 없는 괘씸한 년이라구요." "뭐? 그럼 이 영웅 대회전은 왜 치르는데?" "보고도 못 느끼시겠어요? 다른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과 이목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즐기고 있는 거예요. 그 자신을 상품으로 내걸어서 즐기고 있는 거라구요. 자기 잘난 맛에, 자아도취에 빠져사는 밥맛…… 읍! 읍!" 난 재빨리 녀석의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주변에서 날려오는 음흉한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취기가 약간 올랐다고 해도 철없이 진미희의 광적인 추종자들 앞에서 그런 말을 내뱉다니! 도대체 그녀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기에 이토록 흥분을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눈에 콩깍지라도 쓰인 게로군.' "팽무진 대협 승!" 팽무진 녀석을 의미하는 적기를 들어올린 심판관의 선언이 들려왔다. 종리연의 입에서 손을 뗀 나는 재빠르게 연무장으로 눈길을 돌렸으나, 종리연보다는 한 발이 늦고 있었다. 내 앞 시야가 어느 새 녀석의 뒤통수에 꽂히고 있었던 것이었다. '경신법과 은신술을 배운 이유가 혹시 이런 데 써먹으려고 그런 거냐? 너 그렇게 제멋대로 날뛰다가 언젠가 황소처럼 코에 코뚜레가 뚫려서 비참하게 끌려 다닐 날 있을 거다. 쯧쯧.' "이, 이러면 안 되는데……." "뭐가 안 되는데?"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옮긴 나는 이맛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팽무진 녀석, 승리에 급급해서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매화 검수인지 뭔지 하는 놈에게 왼쪽 어깨를 살짝 내준 것도 모자라서 왼손으로 검날을 움켜쥔 것이었다. 검의 움직임을 봉하고는 오른손에 들린 검을 녀석의 목덜미에 들이밀어서 심판관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결국 승리를 따내긴 했지만, 그 대가로 그가 내놓은 것은 작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연적을 맞아드려야 하는 상황에 중한 타격을 입은 것이었다. 자신의 추종자 무리로 보이는 낭인 무사에게 호위를 받으면서 일 층 특석에 자리를 잡고 있던 진미희가 연무장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로 쏠렸다. "여러분, 팽무진 대협이 대전 속행에 무리가 갈 정도로 중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오늘 대전은 여기서 취소를 하고, 다음 달로 미룰까 합니다. 중환자로 하여금 칼을 들게 하는 것은 사람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이런 차륜전 경기 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다해도 진미희 소저의 배려도 나쁘지 않군. 예쁜 것은 둘째 쳐도 마음씨 또한 비단결처럼 곱구만. 종리연 녀석이 저러는 것은 혹시 괜한 질투 아닐까?' "와아! 찬성이오! 과연 절강성 제일의 미녀답게 마음 씀씀이도 최고요!" "나도 찬성이오! 한 달 정도 다시 미뤄도 아무 상관이 없소!" "진미희 소저 만세! 만세! 만세!" 여기저기서 진미희 소저에 대한 환호가 그치질 않았다. 피로 얼룩진 연무장 가운데 서있는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좌중들에게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사방팔방에서 메아리쳐 울리는 뜨거운 환호가 그녀를 흡족하게 달궈주는 것 같았다. "괜찮소! 난 공약대로 반 식 경만 쉬면 되오. 상처는 치료하면 그만이오. 대전을 이대로 속행해 주시오." "……." 뜨겁게 흔들리던 매향루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일시에 조용해졌다. 진미희 소저의 배려가 팽무진 녀석의 일언지하에 거절되어 버린 것이었다. 과연 그녀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 두고 볼 일이었다. 몹시 분노한 듯, 어깨를 부르르르 떨던 진미희는 맘대로 하라는 듯 휙 몸을 돌려 연무장에서 내려와 버렸다. 대전은 그의 의지대로 다시 재개되었다. 휴식 시간도 그대로 반 식 경으로 지켜졌다. '괜한 고집을 피우는군. 그까짓 자존심, 잠시 접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혈을 하고, 금창약을 바르고 붕대를 싸매고서 기어이 걸어나온 그의 모습이 당당해 보이기는 했으나, 보는 이를 압도하게 만들던 기백은 온데간데 없었다. 왼손에도 부상을 입었기에 쌍검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상황에 고집을 피우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를 두고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해야할까?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해도 호랑이는 호랑이야.' 문득 사부 노릇하던 소방의 가르침 한 마디가 뇌리를 스쳐갔다. '그 녀석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소맹주를 내팽개치고 가버려서 필시 쓴 소리 한 마디 들었을 텐데, 아무 일 없는 걸까?' 그를 둘러싼 여러 의문들이 순차적으로 지나갔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연무장으로부터 눈을 떼지는 않았다. 중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별 무리 없이 잘 버텨내고 있는 팽무진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쌍검의 노련미가 도전자로 하여금 꼬리를 감추고 스스로 패배 선언을 자인하게도 만들었다. 무엇보다 화산파 매화검수라는 왕천후보다 강한 도전자가 좀처럼 안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다음은 무림맹(武林盟) 백호단(白虎團) 부단주를 맡고 있는 간지호 대협이십니다." 심판관에 이 말에 장내가 금새 술렁술렁 떠들썩해져 버렸다. 진미희 소저의 조부인 진두한이 실종 처리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그녀의 배경이 무림맹이라는 것은 일순간에 바뀔 리가 없었다. 그런 차에 무림맹 요직에 있는 녀석 하나가 등장한 것이었다. '간지호?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에서 들어봤더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28 22:12:48 고친날 2005-05-29 23:32:22 읽은수 7867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2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22] 간지호(干志豪)라는 놈은 말 그대로 간지게 멋이 나는 놈이긴 했다. 남자답게 각이 잘 잡힌 얼굴인데다가 턱 밑에 수염 한 가닥을 곱게 길렀는데, 유난히 그 턱수염 한 가닥이 눈에 아른거렸다. 몸매는 탄력 있는 것이 적당히 보기 좋게 근육이 붙어있는 놈이었다. 좀 간사한 면이 엿보이는게 흠이라면 흠이랄까? "낯이 익은 인간인데, 무환루 단골 손님이라도 되려나?" "작삼 오라버니 건망증 하나는 알아줘야겠네요. 하오문(下汚門) 본지부 화화루(花花樓)에서 우릴 귀찮게 굴었던 부단주잖아요." "화, 화화루? 끙, 우리 무환루 근처에 있는 경쟁 주루냐? 우리 주루 장사를 훼방이라도 놨던 거야? 이런 썩을! 우리도 가서 똑같이 훼방 놓자!" "아, 아니 그게 아니라구요. 이런 말은 하기 싫었는데……." "뭐? 괜찮으니까 말해." "휴우, 제가 작삼 오라버니한테 앙심을 품고, 옆구리를 푸욱 찔렀던…… 케, 켁, 이, 이거 놔, 놔주세요. 오, 오라버니." 녀석이 날 찔렀던 지난 추억을 들춘 순간, 무의식적으로 바짝 열이 올라버린 나는 그만 반사적으로 종리연의 목을 조르고 말았다. 그녀가 애걸복걸 쉰 소리를 흘릴 때에서야 간신히 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떼었으나, 이미 주변에서 쏟아져 내리는 이상한 시선을 피할 길이 없었다. 몇 번 기침을 한 종리연은 삐쳤는지 눈을 쌜쭉하게 내리 깔며 입을 열었다. "쿨럭, 쿨럭, 별 것 아니니까 신경들 쓰지 마세요. 그저 우리 오라버니는 가끔 발작을 일으키는 죄밖에 없어요. 증세가 심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목을 조르곤 하거든요. 아직까지 그로 인해 죽은 사람은 없으니까 절대로 안심들 하셔도 되요." 사사사사사삭. 종리연 이 녀석이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내뱉은 말 한 마디에 주변에 붙어 있던 인간들이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어떤 인간은 그것도 불안했는지 아예 봇짐 채로 꾸려서 다른 자리로 뜨기도 했다. 덕분에 우리가 앉은 주변이 한산할 정도로 자리가 넓어져서 좋기는 좋은데, 한 편으로는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찜찜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전에도 이 녀석 목을 조른 적이 있었지. 왤까? 왜, 이 녀석이 내 신경을 돋구면 나도 모르게 이 녀석 목을 조르게 되는 거지? 거 참, 기이한 일일세. 뭐, 이 녀석 목이 갸름하고 예쁘장한데가다 감촉도 좋아서 아주 조금 자극적이기는 하지만서도. 쩝. 이것 참.' 단단히 토라졌는지 아예 난간에 바짝 붙어서 연무장에서 눈을 떼지 않는 녀석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 나도 연무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약간은 눈살이 찌푸려졌다. 우리가 이 층에서 조그마한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사이 팽무진의 혈의무복은 너덜너덜하게 변해 있었다. 그것도 시종일관 수세에 몰렸는지 우리가 연무장으로 눈을 돌렸을 때 그는 연무장 끝자락에서 아슬아슬하게 간지호의 검을 막아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저 무림맹 녀석보다는 팽무진이라는 놈이 맘에 들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그러게 왜 무리수를 둬서 이 꼴이 난 거야? 게다가 진미희 소저가 인심 팍팍 쓰고 있을 때, 조용히 있었으면, 다음 달에 회복하고서 다시 대전을 치렀을 텐데, 도대체 뭐가 불만이냐? 다 자업자득(自業自得), 스스로 삽질을 한 결과지, 뭐.' 수많은 여인들이 팽무진의 열세에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하는 게 보였다. 물론 그들 중에서 내 앞에 있는 인간이 가장 극성이었다. 진미희 소저가 앉아있는 곳을 내려다보니 무표정한 게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였다. 어떻게 보면 화가 난 듯도 하고 어떻게 보면 걱정을 하는 것도 같고 도무지 종잡기가 어려운 모습이었다. "꺄아아악!" '아이고, 깜짝이야? 이제 드디어 죽었나?" 그러나, 팽무진 녀석은 아직 멀쩡했다. 잠시 위기에 몰렸던 모양인데, 재치있게 몸을 굴려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겨우 그 정도 갖고 풍룡 무영투도(風龍 無影偸盜)라는 외호답지 않게 비명은? 팽가 놈 밀리는 꼬락서니를 보니 조금만 더 있음 종리연 녀석 아예 기절하겠구만. 아니지, 오빠, 오빠하고 응원하고 있는 수많은 여인들까지 단체로 기절하겠는데. 이거 아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겠군. 흐흐흐, 이왕지사 지는 거 팔 한 쪽 정도 팍 잘려 버려라.' "하하하하! 이제 밑천이 다 떨어졌나 보지? 뇌려타곤(懶驢陀坤)까지 시전하는 꼴을 보니 병든 당나귀가 따로 없구나. 강호밥을 먹고사는 무림인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쓰지 않는다는 뇌려타곤을 스스럼없이 쓰는 것을 보니 무인이기를 포기한 게로구나." 간지호 녀석이 팽무진 녀석을 비웃으며 간드러지게 웃어 젖혔다. 간지호 녀석, 갑자기 간질나게 밥맛 없는 놈이란 게 느껴졌다. 뇌려타곤(懶驢陀坤)! 하면 바로 내가 가장 애용하는 신법 중 하나 아닌가! 령령의 귀신같은 몸놀림을 조금이라도 피하려고 하면 발놀림만으로는 어림없었다. 몸으로 느껴지면 서슴없이 굴러야 하는 것이었다. '저 빌어먹을 쌍놈의 자식! 뇌려타곤이 얼마나 훌륭한 신법인지 알고는 하는 소리야!' "팽무진. 집어쳐라! 그냥 자결해라! 무림인이 된 주제에 웬 뇌려타곤이냐! 부끄럽다! 부끄러워!" "우우! 때려치워라! 때려치워!" 간지호 녀석은 팽무진을 갖고 놀듯 서서히 몰아세웠다. 연무장에 끝에 몰아 세우더라도 몸을 굴리면 피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었다. 그럼으로써 뇌려타곤을 아낌없이 펼칠 수 있게끔 만들어 주고 있었다. 나의 시각으로 볼 때, 뇌려타곤을 펼치는 것은 매우 현명하며 타당한 선택이었지만, 내 주변에 있는 녀석들은 전혀 다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가 무서운 기백으로 상대를 제압할 때는 꿀먹은 벙어리 마냥 가만있던 놈들이 그가 상처 입은 몸으로 힘이 딸리기에 조금 몰려 뇌려타곤을 펼치는 것 가지고 마구잡이 야유를 퍼부으며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개잡종들, 니들이 팽가 놈 대신 팔병신 된 채로 싸워봐. 얼마나 잘 구르는지 내 봐줄 테니.' 물론, 울컥 목구멍까지 넘어온 한 마디는 그대로 삭혀져야만 했다. 한 마디 잘 못했다가는 성난 군중에 의해 이 층에서 바닥으로 밀려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이래서 군중심리란 무서운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촤아악! 내 생각이 씨가 되었음인가? 멀쩡한 한 팔로 간신히 공격을 막으며 피해 다니던 팽무진이 기어이 피를 뿌리고 말았다. 그것도 멀쩡하던 팔 한 쪽이 통째로 날아가고 말았던 것이었다. 장내에는 아주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간지호 대협 승!" "우와아아! 간지호 대협 만세! 만세!" "간지호 대협 최고요! 당대 제일의 검객이요!"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남자들의 우렁찬 함성 때문에 몇몇 여인들의 비명과 흐느낌 따위는 묻혀져 들리지도 않았다. 단 종리연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들부들 떠는 게 심상치 않았다. '아뿔싸, 이대로 놔두면 저 놈한테 덤비기라도 하겠는데! 말려야 해. 저 년이 말썽이라도 부리면, 령령이 아주 작정하고 날 죽이려 들게 뻔하다고!'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난간위로 한 발을 올리며 연무장으로 신형을 던지려는 게 아닌가! 다급해진 나는 녀석의 허리를 부둥켜안으며 낚아채야만 했다. "이거 놔요! 놓으라구요! 저 빌어먹을 녀석의 가운데 다리를 내 손으로 박살내고 말 거니까 놔두라구요!" "참, 참아. 참…… 어, 어?" "오, 오라버니!" 거칠게 몸부림치던 그녀가 실랑이를 벌이던 내 품속을 미꾸라지처럼 가볍게 빠져나오더니 나를 힘껏 제치며 멀어지려 했다. 그런데, 문제는 날 밀친 장소가 무지막지하게 안 좋았다. 난간에 허리를 된 상태에서 어깨를 힘껏 밀린 나는 그대로 몸의 중심을 잃으며 휘청 한 바퀴 돌게 되었다. 워낙 규모가 큰 주루라 못 해도 사 장은 되는 높이였으니 그대로 떨어지면, 몸 성할 리가 없는 것이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대위기에 봉착한 순간 한 바퀴 돌던 내 발끝이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난간을 힘차게 차 버렸다. 그대로 몸을 말아서 공중제비를 몇 바퀴 돈 나는 신형을 펼치며 바닥에 가볍게 안착하는데 성공하고 말았다. '헉헉헉, 이게 꿈이냐? 생시냐? 나 산 거 맞지?' 일단 무사히 내려앉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자 어떻게 무공에 일자무식이나 다를 바 없는 내가 가뿐하게 안착했는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이 빌어먹을 쫄따구 녀석의 싸대기를 바짝 쳐 올려서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교육시켜야겠다는 일념에 불타 올랐을 뿐이었다. 살짝 열이 올라 이 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종리연에게 쌍 욕을 퍼부을 생각으로 시선을 돌렸다. "야! 이 빌어먹을 개…… 어, 어라? 왜? 왜들?……." 종리연의 휘둥그래진 두 눈가에 불신의 빛이 떠오른 것은 둘째치고 라도 그 주변 인간들까지 매우 놀란 듯 침묵을 지키며 두 눈이 휘둥그래진 것은 매우 의외였다. "저, 저기 도전자 분의 소, 소속 문파와 존대성명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쭈뼛쭈뼛 다가온 심판관이 날 보고 조심스럽게 꺼낸 한 마디였다. "지금 나 보고하는 말이오?" "그, 그럼요. 지금 연무장으로 몸을 날려 내려오신 대협 말이지요." "연, 연무장?"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난 정확하게 연무장 모서리 한 쪽에 안착해 있었던 것이었다. 정녕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 층에서 뛰어 올라도 먼 거리인 연무장을 이 층에서 몸을 날려 안착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종리연 녀석이 꽤나 먼 곳에 떨어져 있었네. 이거 혹시 저 녀석이 날 이곳으로 날려버린 것 아니야? 아닌데, 저 녀석 내공이 무지하게 딸리는 데다가 힘도 비리비리한 년이잖아. 쳇, 일단 자리는 모면하고 보자. 내가 미쳤다고 저 놈하고 싸워? 황보 무식이 녀석만 해도 무서운 놈이었는데, 그 놈과 동급인 저 놈이라고 다르겠어?' "아하하하, 이거 제가 뒷간으로 가다가 길을 잘못 들었나 봅니다. 수고들 하세요." "……." 내 대답에 황당해하는 심판관을 뒤로 한 채 살짝 연무장을 벗어나려 했었다. 그런데, 내 건너편에 멀뚱멀뚱 서 있었던 간지호 녀석이 기가 막혔는지 고함을 질렀다. "어디에서 오신 고수이신지는 모르나, 여기까지 나왔을 때는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었을 터, 순순히 무기를 들고 덤비시오!" "저기, 저 고수 아닌데요. 그냥 지나가던 점소이거든요. 헤헤헤헷, 대협도 수고하세요. 팽무진 대협이 다 만들어 놓은 밥이니 대협이 마무리지으면 되겠네요. 헤헤헤헷, 경하드립니다. 그럼 이만." "뭐, 뭐라구? 점, 점소이?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요? 게, 게다가 팽무진 대협이 다 만들어 놓은 밥? 나, 나를 모욕해도 유분수지. 어서 나오시오!" "싫은데요. 저 급하거든요. 정말 이만 가봐야 해요." "이, 이 빌어먹을 후레자식아! 이리 썩 튀어나오란 말이다!" 노발대발한 간지호 녀석이 기어이 폭발했는지 점잖은 자세를 버리고, 고함을 질러왔다. '빌, 빌어먹을 후레자식? 끙, 참자. 참은 인(忍) 세 번이면 사람 목숨도 건진다고 했다.' "헤헤헤헷, 그, 그렇소. 난 후레자식이요. 그럼 가봐도 되지요? 그럼 정말 이만 가오." 난 정말 가려고 했다. 웬만한 말은 다 참을 수 있었다. 어차피 내 인생 자체가 비굴하게 얼룩져있지 않은가? 이 순간만 넘기면, 난 그저 무환루(無患樓) 점소이로써 내 역할을 다 하면 그만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너무 비굴하게 보였는지 기가 잔뜩 들어간 간지호 녀석은 기어이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하하하하하! 우습구나! 우스워! 그 부모의 그 자식이라고 했다. 네 놈을 낳고 미역국을 먹었을 어미 또한 어떠한 자인지 안 봐도 훤하구나. 평생 남에게 굽실거리며 비굴하게 살아온 비천한 천민일터, 자식 또한 당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30 13:21:14 고친날 2005-05-30 13:52:54 읽은수 7804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2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23] 간만이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텅 비어버림과 동시에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내부를 가득하게 채워주는 이 느낌! 발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지경으로 용솟음치는 이 기운! 무엇을 더 망설인단 말인가?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나의 본능이 이끄는 데로 몸을 빙그르르 돌려서 간지호 녀석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몸에 익은 듯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신법의 정체가 다름 아닌 봉조신법(鳳鳥身法)임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기생충 같은 현현자 영감쟁이 말대로 나 자신은 무지하지만, 내 몸은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퍼억! "으아악! 이, 이 놈이!" 느닷없이 돌변한 내 돌격 태세에 당황했는지, 황당했는지는 몰라도 살짝 굳어있던 간지호 녀석은 그대로 내 머리통과 정면 충돌 당하는 불운을 겪고 말았다. 내 머리통도 어지럽기는 했지만, 견딜만했기에 바닥에 떨궈져 있던 검집을 잽싸게 주워 들었다. 경악 어린 고함과 함께 바닥을 뒹군 그는 열이 바짝 올랐는지 간지게 멋이 나는 안면을 험악하게 구기며 번득이는 검을 치켜올렸다. 아주 잠시 동안이었지만, 검 끝이 미미하게 흔들리며 찔러 오는 게 보였다. 단순한 찌르기처럼 보인다고 섣불리 맞받아 쳤다가는 내 손에 들린 검집 따위는 우습게 가루로 만들어버릴 기운이 어려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 잘난 척 굴었다 이거지? 난 그런 놈이 제일 싫어.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여야 하는 법이거던. 내가 니 고개 숙이도록 도와줄게.' "흐압!' 휘청. 간지호의 검을 고수반근(古樹盤根)에서 공녀인침(功女인針)으로 이어지는 보법을 이용해 살짝 흘린 후 금침암도(金針暗渡)와 독헐반미(毒歇反尾)를 단번에 이어서 펼쳤다. 즉 몸을 슬그머니 낮춰 뒤로 뺏다가 벼락같은 기세로 디밀며 검집을 밑에서 돌려 쳐 올린 것이었다. 내 검집 끝이 노린 부분은 그의 갈비뼈 부분이었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올 삼재검법 초식들이 하나로 이어지며 응용, 연환 되자 그 위력은 자못 무시할 수 없었다. 빠각! "커헉! 허헉!" 충격과 함께 호흡곤란을 느꼈을 놈이 검을 떨어뜨린 이후부터는 더 조심할 이유가 없었다. 소리와 느낌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의 갈비뼈가 서너 개 부러진 듯 했다. '크크, 고소한 일이군. 자기 무덤 자기가 판 격이니 내 탓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놈 스스로가 경멸한다고 선언한 뇌려타곤을 펼치며 좌우로 구르는 것을 목전에서 느끼는 쾌감 속에서 손이 가는 데로 발이 가는 데로 치고 또 쳤다. 검집을 버리고, 맨 손과 맨 주먹으로 쳤지만, 나도 모르게 소방이 가르쳐 준 삼재권법(三才拳法)의 흐름대로 손발을 놀리고 있었다. 퍽! 퍼퍽! 퍼퍼퍼퍽! "나조차 모르는 우리 어머니를 넌 안다 이거지? 그럼 넌 내 이복형제냐? 말해 이 개놈아!" 퍽! 퍽퍽! "크, 크아아악! 아, 아니다! 난 모른다. 몰라!" "웃기지마. 넌 분명 안다 했다. 필시 넌 내 이복형제인게 분명하다. 당연 내가 니 놈의 형이 되는 것일 테지? 맞냐? 그르냐?" 퍽! 퍼퍼퍽! 퍽! 퍽! "으악! 아, 아니야. 내가 잘못했다. 내가 말을 잘못했단 말이다!" "아니, 동생이 형한테 반말 짓거리를 하고 있다니! 그게 어느 빌어먹을 왜국 새끼들의 법도냐? 너도 국적 바꿨냐? 너도 강제징집이 싫어서 국적 엿 바꿔 먹었냐! 말해! 이 개놈아!" 퍽! 퍼퍼퍼퍼퍽! 퍽! 퍽! "으악! 아, 아니오. 난, 난 국적 바꾸지 않았소! 끄아아악! 믿어 주시오! 정말이오!" "어라? 아직도 날 형이라고 안 부르네. 똑바로 형이라고 부르지 못해!" 퍽! 퍼퍼퍽! 퍽퍽! "으아악! 어,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난, 난 대협과 오늘 처음…… 으아악!" "얌마!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 부른 애도 있어. 그런데, 난 너한테 형이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준다잖냐? 이 얼마나 좋은 기회냐? 좋게 말로 할 때 싸게 싸게 불러봐라. 잉?" 퍽! 퍼퍼퍼퍽! 퍽! 퍼퍽! "형, 형님! 끄아악! 이, 이제 그, 그만 용서해 주시오! 형님!" 퍼어억! 내 주먹에 간드러지게 멋이 났던 안면을 정통으로 맞은 그는 대(大)자 모양으로 쭉 뻗어 버리고 말았다. 발악할 기운도 다 되었는지 그저 입에 거품을 물고는 간드르르 떨고 있었다. 홧김에 그의 정강이를 한 번 더 세게 걷어차며 한 마디 내뱉었다. "나, 내가 후레자식인거 인정하거덩. 그런데, 너도 내 동생인 거 인정했으니까 후레자식의 동생인 거 맞지? 이구, 후레자식보다 못난 놈 같으니라구. 게다가 뇌려타곤을 우습게 봐? 그런 놈이 그렇게 뇌려타곤을 남발해? 뭐, 그래도 괜찮아. 난 다 이해할 수 있어. 원래 무림맹 개새들은 절대로 언행일치(言行一治)가 안 된다는 거 세상에 모르는 인간이 없거덩. 남들 다 아는 거 재확인한 일밖에 안 되지." 한숨 돌리며 고개를 돌렸다가 멀거니 서서 떨떠름하니 보고 있는 심판관의 안면을 보게 되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흠칫 한 번 떨고는 청기를 번쩍 들어 올렸다. "대, 대협의 승리요. 대협의 승리요!" '으응? 나 도전한 적이 없…… 응? 응? 응? 끄으응. 또 일 저질렀구나. 이를 어째? 령령이 알면 이, 이번에야말로 죽이려 들텐데.' 얼결에 주먹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흠칫 떨었다. 얼마나 피가 튀었는지 팔목에까지 핏방울이 맺혀 있을 정도였다. 물론 내 마의야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젠장, 또 뒤지게 빨아야겠군. 그나저나 내가 승자면 도전자를 받아야 하나? 아냐, 그럴 시간도 없고, 괜스레 미친 짓 할 이유도 없지. 진미희 소저가 아리따운 처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림의 떡 아니냐? 먼발치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넘치지.' 그녀를 향해서 힐끗 시선을 돌려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하긴 했으나, 조금 의외라는 듯, 관심이 간다는 듯, 눈빛에 생기가 어려 보였다. 순간 가슴이 덜컥하고 내려앉는 불안감이 들었다. 위험한 시선이었다. 저 상태에서 한 번만 미소를 던져주면 그녀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겠노라고 공언하며 진미희의 발등에 입을 맞추려 들 것만 같았다. 두근두근 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몸을 돌려 세웠다. 일단 자리를 모면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저, 저기 여러분, 제, 제가 진짜 바쁜 일이 있는 점소이거든요. 그러니까, 기, 기권을 하겠습니다." 그러자 심판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여, 여태까지 승자가 기권을 한 일은 없었소. 그럼 누구를 다음 대전자로 잡아야 한단 말이오?" "그야 간단한 일이지요. 누구든 먼저 연무장에 올라오는 사람이 부전승하면 되는 일이지요. 어차피 대전시간도 끝나가니 부전승으로 올라온 사람이 우승자가 될 확률이 크겠네요. 그, 그럼 수, 수…… 으잉?" 우루루루루. "내가 부전승자다! 나야, 나라고!" "아냐, 나야 내가 먼저 올라왔어." "웃기지마, 진미희 소저는 내 차지다! 내 차지란 말야!" '니들이야말로 웃기지 마라. 떡 줄 사람은 아무 생각도 없을 텐데, 자기네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구나.' 누가 먼저 올라온 것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수십 명의 인파가 간발의 차로 뛰어 올라왔다. 언뜻 보면 무림인이 아닌 영감까지도 올라와서 생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이젠 연무장이 아니라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설사 누가 부전승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인정받기는 그른 상황이리라. '대전이 멋지게 망가져 버렸네. 이크, 어서 자리를 떠야지.' 휘이이익.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던 나의 등뒤로 매서운 살기 하나가 날아드는 게 느껴졌다. 평상시부터 령령의 살기를 느끼며 뇌려타곤(懶驢打棍)으로 구르는 게 일상 생활이 된 나는 망설일 것 없이 옆으로 몸을 뒤틀었다. 파악! '허억! 어, 어깨가……. 제길, 그래도 다행이다. 조금만 늦었으면 뒷덜미가 뚫렸…….' 휘이이익. 조금 더 강해진 살기 한 가닥이 날아오고 있었다. 이미 한 대 얻어맞고 잔뜩 긴장해버린 나는 날렵하게 몸을 옆으로 굴리고는 일어서자마자 인파에 몸을 묻었다. 보이지도 않는 상대에게 겁을 집어먹었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모르긴 몰라도 간간이 신법도 곁들여져 내달린 것 같았다. 순식간에 사거리로 돌아온 것을 보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기도 했다. "오, 오라버니 같이 가요. 같이 가자구요!" "……." 헐떡거리며 신법을 펼쳐 날아온 그녀, 종리연의 등짝에는 팔 한 쪽이 떨어져 나가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팽무진 녀석이 보였다. 급하게 지혈을 하고 붕대로 묶어 놓기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등은 새빨갛게 젖어 버리고 말았다. "아, 팽무진 녀석이구나. 아, 아니지. 왜? 왜? 왜! 데리고 왔어!" "참, 그걸 오라버니가 모르면 안 되지요. 작삼 오라버니 덕에 대전이 개판, 떡판이 되었잖아요. 안 그래도 싸가지 없는 진미희 계집애가 무지하게 열이 올랐을텐데, 누구한테 화풀이하겠어요? 당연히 팽무진 오라버니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잘렸을 거라구요. 작삼 오라버니 때문에 팽무진 오라버니가 죽기라도 했으면, 그 원혼이 오라버니한테 달라붙을 거 아니에요? 이제 제가 얼마나 오라버니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겠지요?" "야, 그냥 팽무진 녀석한테 푹 빠졌다고 말해. 간단한 걸 가지고 그렇게 돌려 말하는 거야? 너답지 않게. 니가 제갈혜 년 동생이냐? 다른 것은 몰라도 돌려 말하는 것은 본받을 필요 없어. 사람은 그저 솔직하고 직설적인 게 좋아. 다 이해하니까 어여 돌아가자. 그 놈이 쫓아올라." "누, 누구요?" "누군, 누구야? 내 어깨에다가 이 비수 박아 넣은 놈 말이야. 년인지 놈인지 모습을 확인은 못했지만, 나한테 단단히 독이 오른 것 같아. 얼른 피하지 않으면 곧 뒤따라올 거라고. 뛰어." 다시 한 번 뒤를 휘휘 둘러본 나는 무환루를 향해 무작정 신형을 날렸다. 한 덩치 하는 듯한 팽무진 놈을 업었지만, 종리연의 신법은 여전히 그 위력이 감소되지 않았다. 너무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간 덕에 이 층에서 내가 떨어진 이유가 어쩌면 그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미쳐 떠올리지 못했다. 종리연 싸가지라고 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년인 것을…….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5-31 22:10:50 고친날 2005-05-31 23:39:07 읽은수 7647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2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24] 팽무진의 핏물로 흠뻑 젖어버린 종리연이나, 비수를 어깨에 박은 채 꽁지 빠지게 도망쳐 온 나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도망쳐온 와중에도 행여나 미행자가 있을까 조바심이 나서 무환루(無患樓)로 바로 들어오지도 못했다. 주루 주변을 한 바퀴 뱅뱅 돌면서 경계를 하다가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몇 집 건너 떨어져 있는 다른 건물로 월담하기에 이르렀다. '어, 어라? 봉조신법(鳳鳥身法)인가 뭔가 어떻게 펼쳤더라? 분명히 다리에 힘을 바짝 몰아넣고는 박차 올라서…….' "어이쿠! 머리야." "오, 오라버니 진미희 계집애 일로 스스로를 학대하시는 거예요? 그렇다고 돌담에다가 머리를 들이받으시다니……." "끄으응, 그러게 말이다. 지금 내가 뭐 하는 짓인지 나도 모르겠다. 가르쳐 줄 거면 머릿속에 똑똑히 기억시켜 놓던가 하지. 내 몸에 각인 시켜놓으면 뭐하냐고? 아무 때나 발작하듯 자기 멋대로 튀어나오는 걸 어디에다가 써먹어? 으이구, 그럼 그렇지. 그 영감탱이 하는 일 치고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니깐." "……." "에휴, 그냥 그런 일이 있으니까 신경 끄고 얼른 들어가기나 해라. 잘못하다가 생사람 잡을라. 그 친구 후딱 치료하고 침대에 눕혀야 할 것 아냐?" "아차, 내 정신 좀 봐. 저 먼저 가 있을 테니 오라버니는 천천히 오도록 하세요." 종리연이야 그 근본이 장물을 등에 지고서 훌쩍훌쩍 담 넘어 날아다니던 양상군자 출신이라 그런지 팽무진을 업고도 도약 한 번 없이 담벼락을 가볍게 넘어 버렸다. 신출귀몰하게도 발자국 소리조차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무영투도(無影偸盜)란 외호가 왜 붙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여튼 별 일이라니까, 짚신도 짝이 있다더니 양상군자 출신 쫄따구한테도 절호의 작업 기회가 오는구나. 에휴, 그런데, 왜 난 짝도 없고 기회도 없는 거야?' 그녀의 뒤를 따라 월담을 할 양으로, 걸어 쥔 두 손바닥에 꽉 힘을 주며 담벼락을 향해 발돋움을 했다. 그러나, 곧 찡한 통증과 함께 그대로 떨어져 주저앉으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쿠웅! "어이쿠, 내 궁뎅이!" '비수를 꽂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하다니! 젠장 눈물나게 아프네. 하는 수 없지. 그냥 현관으로 들어가지. 뭐, 어차피 영웅 대전 때문에 손님은커녕 파리만 날리고 있을 텐데, 아무렴 무슨 상관이겠어?' 이 궁리, 저 궁리 해보다가 결국에는 그냥 무환루 현관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나, 웬걸? 조용할 줄만 알았던 무환루는 시끌벅적 요란한 것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지나가던 상인 일행으로 보이는 손님들이 주루 일 층 한 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미안하게도 동천위는 그들 시중 때문에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를 정도로 이리저리 숨가쁘게 뛰어 다니고 있었다. 주방에서도 갑자기 밀려든 손님 때문에 주문이 잔뜩 밀려있는 듯 했다. 홍 영감만이 계산대에서 변함없이 졸고 있을 뿐이었다. '킁, 이거 눈치 보이네. 살짝 올라가서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와야겠다. 설마 령령한테 걸리진 않겠지?' 손님들에게 비수가 꽂힌 등판을 보이지 않기 위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서 계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뒤편에 예상 못한 인물이 서 있었다. 팔뚝에 물컹거리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고는 화들짝 놀라 몸을 떼며 시선을 돌렸다. "아, 죄, 죄송합니다. 고,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 내 팔뚝에 풍만한 가슴을 부딪힌 주근깨 여인은 응당 다른 여인들처럼 안면이 벌게진다거나, 버럭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아무런 대꾸도 없이 내 등을 바라보고만 서 있었다. 찔끔한 나는 머뭇거림 없이 단숨에 내 방으로 뛰어올라와 버렸다. 평범한 여인이긴 한데, 어딘가 범상치 않은 인간이었다. 어쩐지 낯설지 않기도 했다. '어디서 봤더라? 기억이 날듯 말듯 한데. 참, 우선 종리연한테 비수나 좀 뽑아 달랠까?' 끼이이익, 쿵. "어? 손, 손님? 객실을 잘못 찾아오셨군요. 바로 이 아래층이 객실이거든요. 그러니까 아래층으로 가시면……." 나와 부딪혔던 주근깨 여인은 무슨 연유인지 내 뒤를 따라서 올라왔던 모양이었다. '후미, 설, 설마 성추행 했다고 협박하려는 거 아니야? 나 같은 알거지한테서 뜯어낼 게 뭐가 있다고……?' 그런데, 그녀의 손이 자신의 얼굴 가를 더듬더니 그 끝머리를 잡고서 부욱 뜯어내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무슨 귀신인줄 알고 소름이 전신에 좌악 돋았으나, 상대가 누구인가를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그 낯익은 안면이 바로 령령의 인피면구(人皮面俱)란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잘 하는 짓이다. 자신의 일을 내팽개치고 나가서 한다는 일이 고작 등판에 비수나 달고 오는 일이냐?" "……." "머저리 같은 무환루 점소이 둘이 단체 이탈해준 덕분에 간만에 인피면구 쓰고 주루 일 좀 도왔다. 돌아 서 봐." 령령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빨리 돌아섰다. 그녀의 심기가 불편해 보일 때는 평상시보다 배는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줘야 두 대 맞을 거 한 대만 맞고 말지 않겠는가? 비수를 세심하게 관찰하던 그녀는 느닷없이 비수 끝을 집게 손가락으로 서너 번 퉁겨 내었다. "으윽!" "참아. 그냥 빼내면 살점까지 뜯길 거란 말이야. 됐어. 뽑는다." 슈욱. "커헉!" "흥, 사내 녀석이 엄살은……." 상처 부분을 꼼꼼하게 살피던 령령은 기이한 냄새가 나는 고약을 조금 바르고는 그 위에 금창약을 덧발랐다. 언제 준비해 왔는지 붕대로 칭칭 싸매고는 깔끔하게 매듭을 지어줬다. 그 다음 순서야 안 봐도 뻔할 뻔 자이리라. 본격적인 추궁과 문초가 뒤따를 것 아니겠는가? "다음부터 이런 거 박히면 웬만함 바로 뽑아. 잘못하면 독기가 옮아서 곪다가 썩어든다. 심하면 살을 도려내는 일까지 생길 수 있단 말이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캐묻지는 않겠다. 대신 앞으로 좀 더 주의해. 설사 일이 생기더라도 나 이외의 인간에게 터지고 다니지도 말고. 알겠어? 모르겠어?" '엥? 얘가 웬 일로 순순히 물러나는 거지?' "네, 각, 각골난망(刻骨難忘)! 명, 명심하겠습니다." "몰골이 엉망이야. 흔적이 안 남게 잘 씻고 내려오도록 해." 다시 주근깨 인피면구를 뒤집어 쓴 령령은 그대로 나가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운이 좋은 날이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버럭 화를 내면서 꼬치꼬치 캐묻는 게 수순이리라. 그런데, 오늘은 그저 짤막하니 잔소리를 내뱉고 조용히 나가준 것이다. 도리어 기분이 찜찜할 지경이다.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인가 생각해봐도 그녀가 남기고 간 울금향이 너무나도 진하게 코끝에 감돌고 있었다. '크응,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었나 보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순순히 덮어줄 리가 없지. 에라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 크크크.' 잠시 후 말끔한 본연의 점소이로 복귀한 내가 일 층으로 내려오자 그녀는 말도 없이 쓰윽 올라가 버렸다. 나로서는 그녀와 한 마디라도 덜 나누는 쪽이 편했다. 꼬투리라도 잡혔다하면 그 불똥이 어디까지 튈지 종잡을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종리연 이 녀석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네. 짜증 더럽게 나는구만. 아무리 팽무진 녀석한테 푹 빠져있다 해도 그렇지. 상관이 나와서 일을 하는데, 쫄따구가 감히 콕 처박혀 있어?' 동천위는 나를 보자 반가웠는지 살짝 보조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순진한 여인이다. 누구, 누구처럼 버럭 신경질을 내는 일도 없고, 잔머리를 굴리지도 않는다. 진심으로 날 작은 문주라고 뼈 속 깊이 각인시켜 놨는지 내 머리 위에 올라서는 일도 없이 무안할 정도로 저자세 일관이다. 항시 날 개무시하는 북천위와는 천지 차이라고 할 것이었다. '령령이 동천위처럼 고분고분 순진한 여인이면 얼마나 좋을까? 성질이 개차반 같으니까 꿈속에서까지 악역으로만 나오는 거 아냐. 하여튼 인물값을 해도 너무 지나치단 말씀이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6-02 01:19:53 고친날 2005-06-02 01:19:53 읽은수 8044 [ 11 K ] 제목 점소이 작삼(2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25] 그 날밤, 술시(戌時) 초가 채 지나기도 전에 주루 안이 텅텅 비고 말았다. 원래 영웅 대전 때문에 손님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그나마 그 사이 들어온 상인 일행들도 피곤하다며 이 층 객실로 모두 올라가 버리는 통에 일찍 문을 닫게 되었다. 동천위와 함께 막판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기이한 손님 하나가 주루 막장 시간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턱대고 들어와 버렸다. 자그마한 죽립을 눌러쓴 것도 모자라서 새하얀 면사를 걸치고 있는 손님이었다. 거기에 검정 가죽 피풍의로 전신을 에워싸고 있어서 갑갑하면서도 음산해 보였다. 여름이었으면, 숨이 막혀 보였을 테지만, 아직 쌀쌀한 찬바람이 부는 늦겨울이기에 충분히 납득이 가는 차림이긴 했다. "손님, 죄송하게도 저희 주루가 지금 문 닫을 때가 되었거든요. 바로 주무실 거라면 객실로 안내는 해드릴 수 있으나, 식사나 술을 원하시는 거라면, 다른 주루를 찾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난 객실도 식사도 필요 없어요. 이 곳에 만날 사람이 있어서 온 것이니 점소이 양반을 귀찮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는 내 허락도 없이 성큼성큼 주루 안으로 발걸음을 옮겨 버리고 말았다. 서둘러 불청객을 만류하려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는 애매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음식물로 어질러져 있는 탁자를 행주로 닦아내던 동천위 앞까지 걸어간 그는 그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랜만이군. 동천위, 문주님께 내가 왔다고 전해 드릴래?" "너, 넌!"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기겁을 한 동천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며 주방으로 달려갔다. 곧 녹 누님이 푸른 앞치마를 풀어놓으며 걸어 나왔다. 누님 뒤를 따르는 북천위의 살벌함이 평상시보다 곱절은 더 해 보였다. "작삼 동생, 대문과 현관을 닫아 주겠어?" "네, 누님." 중요한 얘기가 있다는 것을 요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로 감지했기에 망설임없이 대문과 현관을 닫아걸었다. 기이한 손님은 죽립과 면사를 벗어서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주루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기어이는 꽤 두꺼워 보이는 검정가죽 피풍의마저도 천천히 벗어 버렸다. 뜻밖에도 속에는 허벅지에서 허리 옆선까지 길게 갈라져있는 다홍색 비단 치파오를 입고 있어서 긴 다리속살이 아슬아슬한 지경에까지 드러나 있었다. 가냘픈 어깨와 풍만한 가슴선 마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다 드러나 있어서 거의 반라나 다름없는 복장이었다. 가느다란 목과 팔목에는 같은 질감의 다홍색 비단띠가 둘러져 있어서 한층 더 야하게 비쳐졌다. '오옷, 무지막지하게 늘씬한 여자잖아. 어쩐지 지분 냄새를 넌더리나게 풀풀 풍긴다 싶더라니! 게다가 요염한 색기가 철철 넘치는 초절정 미녀 아닌가! 아무래도 꽤 이름 있는 유명 기녀 같은데. 예전의 색기발랄했던 적미호를 보는 기분이군.'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뻔뻔스럽게 고개를 디미는 것이냐?" "언성 낮추시는 게 좋을 걸요. 항주가 무림맹의 보호 구역인걸 잘 아시잖아요. 손님으로 위장하고 돌아다니는 간세들도 있다는 것 모르시는 바가 아닐텐데 왜 이러실까?" "그래, 무림맹의 비호 아래 숨을 쉬니까 좋더냐?" "오해는 마세요. 하오문을 버리고 도주를 택하신 녹 문주님 곁을 떠나긴 했지만, 하오문의 정보망을 집어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무림맹 편은 더 더욱 아니에요. 선대 남천위 때부터 기밀 유지 차원에서 독자적으로 존립해 왔다는 사실을 모르시지는 않을 테지요? 문주님이 피신하시는 동안, 전 정보망의 기밀을 지키기 위해서 크건 작건 정체가 유출된 아이들 모두 제 손으로 도륙해야만 했어요. 작금에 와서 정보망 접선 방법을 알고 있는 인간은 오로지 저뿐이지요. 당연히 허울과 껍데기뿐인 문주님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귀한 몸 아니겠어요?" 그녀의 말은 아무리 잘 들어봐야 녹 누님에 대한 가시 돋친 원망과 비난 일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북천위 녀석이 더 참지 못하고, 검을 뽑아 들고 남천위라는 미녀의 목을 단숨에 베어낼 기세였으나, 묵묵히 듣고만 있던 녹 누님이 그를 제지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든 녹 누님이 잠시 후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미안하다. 너무 내 생각만 했구나. 그래, 바라는 게 뭐냐? 내 목이라도 잘라서 무림맹에 던져 넣어야 속이 풀리겠느냐?" "문주님이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으신다 해도 죽은 아이들은 생환하지 못해요.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외세(外勢)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하오문(下汚門)을 생전에 보는 거예요. 그런 때가 온다면 기꺼이 제 스스로 문주님께 백배 사죄하겠어요. 정보망도 살려서 후인에게 인계 후 거리낌이 없어졌을 때, 문주님이 원하시면 하오 문도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결할 각오도 서있어요. 물론 거의 불가능한 일일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흥, 함부로 호언장담(豪言壯談)하는 게 아니다. 미래가 어떻게 돌변할지는 점쟁이라 해도 모르는 법이야." "호호호호, 아무렴 문주님 같이 치밀한 분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범의 아가리 속으로 돌아오셨겠어요? 얼마든지 지켜봐드릴 작정이에요. 최후에 웃는 자가 누구인지 말이에요."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들어왔지? 설마 무림맹 잡견들이 냄새라도 맡은 것은……?" 남천위의 느닷없는 등장에 불안해진 듯한 녹 누님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매우 궁금해졌다. 누님 생각대로 무림맹에서 이곳을 알아낸 것이라면 조만 간에 떼거지로 들이닥칠 것은 뻔한 이치였다. 상상만으로도 소름 돋을 만치 귀찮은 일이었다. "무림맹에서 냄새를 맡았다면 저보다 먼저 그들의 방문을 받았겠지요. 날파리처럼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세도가들이 짜증나서 영웅대전이 열리는 매화루(梅花樓)로 잠시 바람쐬러 갔었거든요. 그런데,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지 뭐예요. 아니꼬운 그 치의 수하를 후련하게 걸레짝으로 만들어준 데다가 진미희가 자기 과시용으로 여는 영웅 대전을 개판으로 뒤엎어 버린 멋있는 양반을 보고 만 거예요." 길디긴 말을 진심으로 흐뭇하다는 듯 단숨에 내뱉은 남천위는 잠시 숨을 들리더니 날 노골적으로 곁눈질하며 한 쪽 눈을 요염하게 찡긋거려 주었다. 그녀의 곁눈질을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들까지 날 향했기에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떨떠름해졌다. 특히 북천위의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결국 그녀의 말은 내 뒤를 따라왔다는…… 허걱! "그를 꼭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뒤를 몰래 추격했지요. 그런 눈으로 보실 것 없어요. 저말고 다른 추격자는 없었으니깐요. 그런데, 그는 이미 문주님의 사람이었더군요. 적잖이 실망되긴 했지만, 이런 우연도 없다 싶어 막장 시간까지 건너편 주루에서 쉬다가 왔어요. 그 사람도 볼 겸, 문주님도 볼 겸해서 말이지요." 그녀가 말을 마치자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들 모두가 입에 꿀이라도 잔뜩 문 듯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은 내가 초조, 불안, 좌불안석(坐不安席)의 극치로 내달릴 지경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밖에서 사고 치고 반갑지 않은 꼬리까지 달고 온 격이니 녹 누님의 동생 관계만 아니라면, 오래 전에 호되게 경이라도 쳤을 분위기였다. 때 마침 동천위가 눈치없이 용정차를 끓여와서 찻잔을 돌렸기에 차를 식히며 후루룩 마시는 소리만이 여기저기에서 나지막하게 울리고 있었다. 물론 그 누구보다 차를 열심히 식히며 마신 사람은 나였다. 몇 모금 차를 들이킨 남천위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 찻잔을 내려놓으며 경직된 말문을 먼저 열었다. "녹 문주님, 제가 유용한 제안을 하나 드리고 싶군요." "흠, 말해봐." "항주 지부 무림맹 동향을 샅샅이 알려 드리겠어요." "응?…… 정말 끌리는 제안이로군. 조건은?" "저 점소이 양반을 저한테 주세요. 그를 연락책으로 쓰겠어요." "…… ." 쿵! 갑자기 그들의 식탁 한 가운데로 비수가 섬뜩하게 날아들어 박혀 버렸다. 바로 내 등판에 박혀 들었던 그 비수였다. 비수가 날아온 이 층 난간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옮겨졌다. 아니나 다를까? 새하얀 나삼의를 걸친 주령령(周鈴鈴)이 커다란 두 눈에서 푸른빛을 은은하게 내뿜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안 돼. 그는 녹 아주머니 사람이 아니라 우리 일원이다." "당, 당신은?" "여기 네가 온 것을 아는 사람이 혹시 있어?" "없어요. 제가 온 이유가 점소이 양반 때문이니 당연히……." 휘리리릭. 그녀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형을 날린 령령이 남천위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움켜잡고 말았다. 그녀의 아리따운 새하얀 안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니 아마도 령령이 무서운 악력으로 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너만 죽이면 끝나는 문제로구나." "……." 그녀의 압도적인 위압 때문에 장내에 있던 모두가 입을 딱 다물고 말았다. 더군다나 령령이 한 말이 틀린 소리도 아니기에 그렇게 해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눈을 얄팍하게 내려감은 남천위는 살려달라는 말 한 마디는커녕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마치 령령의 손에 죽을 사람이 자신이 아닌 양 달관한 듯한 모습이 찡하게 다가왔다. 남천위를 끌어들인 게 나이긴 했지만, 은연중에 그녀에게 끌리는 바가 있었기에 령령을 말려야겠다는 생각까지 들던 찰나였다. "죽음만이 능사인 것은 아니지." 아직도 계산대에서 졸고 있던 홍 영감이 한 쪽 눈만 떠올리며 짤막한 화두와 함께 자그마한 환약 하나를 령령에게 날렸다. 그것을 노는 손으로 받아든 그녀는 잠시 갈등하는 듯 싶더니, 곧 남천위의 입을 강제로 벌려서 환약을 삼키게 만들고는 목을 조르던 손을 내려놓았다. "적어도 보름에 한 번은 홍 영감님이 제조한 해독제를 먹어야만 하는 독약이다. 보름을 넘기게 되면 꽤나 비참한 최후를 맞게될 거다. 보름에 한 번 이 곳에 들려서 해독제를 받아가라. 대가는 무림맹의 현황이다." "쿨럭, 쿨럭, 축객령(蹴客令) 한번 근사하게 하네요. 여러 모로 절 기쁘게 해줘서 고마워요. 잠시동안이었지만, 아랫도리가 후끈 달아오르더군요, 권살(拳殺) 나으리. 아니지, 차라리 귀살(鬼殺) 나으리라고 불러드리는 게 더 어울리겠군요. 호호호호, 꺼져드릴 테니까 그만 노려보세요." "……." "가기 전에 약값은 해드려야겠군요. 일전에 제갈세가(諸葛世家)와 함께 혈해진경(血海眞經) 지도 조각을 숨기고 서안(西安) 풍악산(風岳山) 일대를 수색했다가 주력을 상실 당한 전력이 있는 강남표국(江南票國)의 근황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군요. 최근 표국 청부가 정체불명의 무리들에게 훼방을 당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오죽하면 표사는 커녕 쟁자수마저 구하기 어려울 지경이라던가? 지금은 많이 기울었지만, 한 때는 웬만한 문파 하나와 맞먹는 전력을 보유했던 곳이에요. 정체불명의 무리들은 아마도 동창일지도 몰라요. 물론 그 배후는 무림맹일지도 모르구요. 참고로 이 비수, 동창의 것이에요. 무림맹 사람 일부가 동창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모르셨을 거예요." "……." 당돌한 그녀의 입심에 선뜻 말대꾸하는 이들이 없었다. 령령조차도 이맛살을 조금 찌푸렸을 뿐이었다. "아, 참. 그냥 가기 섭하긴 하군요." '또 뭔데 그러…… 웁.' 갑자기 날 끌어안으며 진한 입맞춤을 남긴 그녀는 내 귓가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자그맣게 읊조렸다. 다만 그녀의 눈초리가 매섭게 령령을 향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령령이 들어주기를 바라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서호 주변에 환락루라는 큰 기루가 있어요. 아무 때나 오셔서 매염경(梅炎璟)을 불러달라 이르시면 만사 제쳐놓고, 아주 잘 모셔 드릴게요. 돈도 일절 받지 않을 테니 맨 몸으로 부담없이 오세요." "아, 저, 저기, 그, 그게 그러니까……." "기다릴게요." 마지막까지 령령을 노골적으로 노려보며 입을 뗀 그녀는 왔던 복장 그대로 죽립에 면사, 피풍의를 두르고서 나가 버렸다. '그녀 이름이 매염경(梅炎璟)인가? 예쁜 이름인데. 적어도 남천위라 불리는 것보다 백 배는 낫다.' 쿵! "에구머니나!" 남천위의 노골적인 도발에 단단히 열이 올랐는지 그녀가 앉아있던 의자를 맨 주먹으로 박살내버린 령령은 신형을 돌려 계단을 밟았다. 한참 올라가던 그녀는 갑자기 휙 고개를 돌려서 날 한 차례 째려보았다. 그 눈매가 얼마나 날카롭던지 하마터면 심장마비를 일으킬 뻔했다. 다시 고개를 돌린 그녀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냉각된 기류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한숨을 쉬며 덩달아 사라질 때, 동천위만은 할 말이 있는지 쭈뼛쭈뼛 거리며 남아 있었다. "작은 문주님, 남천위가 어떤 애인지 아시겠어요?" 손님이 없을 때는 날 작은 문주라고 부르는 그녀였다. "아주 예쁜 초절정 미인 기녀 아니오?" "……." "……." "틀린 말은 아니지만, 흔히들 유화(柳花) 매염경을 항주 삼대 유명인이라고도 해요. 이 근방에서 제일 잘 나가는 기녀인 셈이에요. 수많은 매파가 들어왔지만, 지금까지 모조리 거절한 애였어요. 시(詩), 서(書), 화(畵), 금(琴) 중 한 가지 이상을 이용해서 자신을 격동시키는 인물의 시중만을 들어주겠다고 공언한 녀석이에요. 남자한테는 아예 관심이 없는 애인줄 알았는데, 먼저 꼬리를 흔든 경우는 아마 작은 문주님이 처음일 거예요." '그, 그런가? 몰랐네. 쳇, 솔직히 령령이 막지만 않았어도 따라갔을 지도 모르는데. 미모로만 보면 령령보다 조금 더 우위에 있지. 몸매는 비슷한가? 가장 중요한 성격이 아주 화통하고, 싹싹해 보였단 말씀이야. 누구와는 아주 다르게 말이지. 다음에 꼭 한 번 놀러가 봐야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6-04 15:11:23 고친날 2005-06-04 15:11:23 읽은수 7804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26)-낭인 무사의 사랑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26]낭인 무사의 사랑 최근 들어 나의 생존 본능을 따라잡기 시작한 적응 능력 덕분에 그럭저럭 버틸만 해졌다고 흐뭇한 성취감을 만끽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유화(柳花) 매염경(梅炎璟)이 떠나고 난 다음날 새벽, 여느 때처럼 비밀 지하 연무장에서 령령과의 오붓한 실전 수련 시간을 가지면서 뼈저리게 실감한 바가 있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그녀의 전신 구타 세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통한 어린 비애를 맛보고 말았던 것이다. 평상시보다 곱절 강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일단 젖혀놓기로 하겠다. 문제는 포연강조차 수라사살(修羅四殺) 중 가장 현란하면서 독보적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은 령령의 발놀림 빠르기가 환상적으로 상승했다는 점이었다. 결국 아무리 천하제일 신법 뇌려타곤(懶驢陀坤)을 연이어 시전해 보여도 고스란히 두들겨 맞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반시진 동안 진정한 의미의 걸레짝으로 화해서 지하 연무장 바닥을 깔끔히 닦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애초부터 연무장을 닦는 게 목표였는지 한 바퀴 굴리고 나자 령령은 주먹을 거둬들였다. 반은 넋이 나가 널브러진 날 내버려둔 채 흥! 하고 코웃음 소리를 내며 올라가 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이 왜 그리 매정해 보이던지……. 여태까지 그저 수련을 핑계삼은 심심풀이 여흥이었다면, 오늘 아침에 떨어진 불벼락은 다분히 의도된 그녀의 분풀이였던 것이다. '쳇, 처음에는 봐줄 듯 넘어가더니 꼬리가 밟혔다는 사실이 드러나니까 가차없구나. 이해심 깊고, 아량 넓은 내가 이해 해주지. 그래도 하얀 치파오를 입은 령령의 각선미 또한 매염경과 비교해서 난자난매(難姉難妹)란 말씀이야. 사나운 눈초리와 살기만 거둔다면 미모로도 밀리지 앉을텐데. 지랄같은 성격도 좀 고치고 말이야. 언젠가 재회할 남궁현(南宮炫) 녀석을 고려해서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굴면 어디 덧나냐? 덧나!' 비틀비틀. 어그적어그적. "작, 작삼 동생, 괜, 괜찮은 거야?" "그, 그럼요. 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예전에 비하면 약과에요." 언제나처럼 땀으로 찌든 몸을 씻어내기 위해 후원 욕실 건물로 향하다보니 자연스레 주방을 지나게 되었다. 새벽 수련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던 누님이 저 정도로 놀라는 것을 보니 심하게 터진 듯 싶긴 했다. '어, 어라? 북천위 녀석 눈깔이 무슨 불쌍한 거지 쳐다보듯 가련하게 흘겨보는 거야? 다른 때는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쳇, 일 없다. 일 없어.' "작삼 동생, 정, 정말 괜찮아? 안색이 벌겋게 달아올라 보이는데?" "네, 괜찮아요." 불안하게 바라보는 녹 누님 시선을 피해서 욕실에 들어섰다. 걸치고 있던 옷들을 벗으려고 하는 순간 그나마 매달려 있던 천 쪼가리들이 툭툭툭 떨어져 내렸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고의를 비롯해서 바짓가랑이는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정도일까? '령령, 이 빌어먹을 계집애같으니. 내가 이 마의를 얼마나 아끼는 줄 알고 있을텐데. 감히, 감히! 쳇.' 육체적 타격에, 정신적 타격을 받은 데다가, 분기까지 더해져 부르르르 복합적으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목욕을 마쳤다. 덜렁거리는 바짓가랑이 하나 걸치고, 내 방으로 후다닥 뛰어 올랐다. 이 꼴사나운 모습으로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방문을 벌컥 열었을 때, 내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부복해 있는 종리연 쫄따구의 모습이 들어왔다. 피골이 조금 상접해 보였다. 보나마나 그 녀석 간호한답시고 마음 고생이라도 했나보다. 썩을 것, 상관이 열심히 일할 때, 콕 처박혀 그림자도 비치지 않은 빌어먹을 쫄따구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너 실수했어. 사적인 일은 공적인 일을 처리하면서 틈틈이 하는 것이야. 그런데, 공적인 일을 내팽개치고, 사적인 일에만 매달렸으니 당연 일벌백계(一罰百戒)감이지. 내가 봐줄 것 같아?' "얌마! 너 뭐야? 꺼져. 나 지금 기분 무지하게 나쁘거든. 좋게 말할 때 꺼져." "작삼 오라버니, 저, 저기 부탁이 하나 있어요." "싫어, 안 들어줄 거야. 그러니까 그냥 나가!" "안 돼요! 오라버니만이 가능한 일이란 말이에요! 제, 제발요!" 그렇다기보다 이 무환루 안에서 그녀의 말을 들어줄 인간이 없어서 그런 것일 게다. 녹 누님은 아직도 이를 갈고 있을 테고, 홍 영감님은 그녀에게 먹인 독의 임자고, 포연강이야 원래 만사 귀찮아하는 인간이고, 주령령이야 종리연이 가장 무서워하는 인간이니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것은 나뿐이라는 것을 그녀도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쫄따구의 일은 곧 내 일이기도 하지. 한 번 듣기만 해볼까?" "어, 어럽쇼. 야, 야! 놓고 얘기해. 이거 놔." "싫, 싫어요. 오라버니가 제 부탁 들어준다고 할 때까지 안 놓을 거예요." "노, 놓으라니까!" 부우우욱. 찌이이익. "어, 어마나, 죄, 죄송해요. 호호호호홋, 보, 보기보다 우람하시네요." "……." "그래도, 다행이에요. 붙잡고 통사정하기에 딱 알맞은 크기네요. 몸에 붙어있으니 잘 떨어지지도 않을테구요." "……." 그녀의 부탁이라는 것을 일단 수용하기로 한 나는 맞바로 거대한 빙산(氷山)에 부딪힌 꼴이 되었다. 절벽은 부딪히면 돌아서서라도 가면 되지만, 빙산에 부딪히면 침몰뿐인 것이다. 하필이면 그 부탁의 정점에 서 있는 인간이 냉혈마녀(冷血魔女) 주령령이었다. 안 그래도 내가 꼬리를 달고 들어온 것에 단단히 독이 오른 그녀는 팽무진(彭無盡)의 존재마저 인정할 수 없다고 딱 잘라 선언했던 모양이다. 즉 팽무진이 깨어나기만 하면 따라온 목적을 캐물은 후 죽여서 입막음하겠다고 종리연을 윽박질러 버린 듯 했다. 종리연이야 그 녀석을 좋아하는 마음에 출혈로 기절한 놈 앞뒤 안 가리고 덜컥 데려온 상황이었다. 따라온 목적을 캐묻기 위해 깨어날 때까지 살려둔다고 하자 자기 멋대로 데려왔다는 말을 끝끝내 내뱉지 못한 모양이었다.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란 것을 깨달은 그녀의 선택은 결국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꼴에 써먹을 만한 상전처럼 보이긴 했나 보다. '주령령,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마녀 같으니. 무조건 죽이고 보자 이거냐? 언젠가, 이런 식이면 언젠가 나도 그녀 손에 죽고 말 거야. 제기랄. 일단 팽무진, 그 놈부터 만나봐야 겠군. 내가 살리기 위해 발품 팔 가치가 있는 인간인지 아닌지 직접 알아봐야겠다.' 종리연한테는 일단 점소이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라고 점잖게 타일러서 내려보냈다. 팽무진의 곁을 떠날 수 없다고 하는 녀석이 고까워져서 한 마디 내뱉었더니 잘도 움직였다. "그럼 니가 령령한테 통사정 해봐. 아니면 녹 누님한테 얘기해보는 것도 괜찮겠군." "호호호호홋, 아, 아니예요. 저야 점소이 일이 천직인걸요. 얼른 손님 맞으러 내려 가봐야지요. 잘 부탁 드려요. 오라버니." '에휴, 쫄따구가 아니라 웬수다 웬수, 부탁은 개뿔, 지금 내 코가 석 자다. 이 녀석아.' 끼이이익. 종리연 방 사이로 빼꼼 고개를 디밀어서 침대 위에 누워있는 인간을 눈여겨보았다. 일전에 항주 사거리에서 보여줬던 일당 백의 무시무시한 기세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게된 초라한 남자일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오른쪽 팔을 보니 지혈이 깔끔하게 잘 되었는지 더 악화된 기세는 안 보였다. 옆에 의자를 끌어와서 걸터앉은 나는 창가 위에 발끝을 올렸다. "이보시오. 이제 눈 뜰 때도 되지 않았소? 그래도 명색이 여인의 방인데, 더 누워있기 난감하지 않소?" "……." "이 방 주인 이름이 종리연이라고 내 쫄따구 신세인 녀석이요. 좀 어려 보여도 하는 짓이 영악한다데가 앙증맞은 구석이 있다오. 문제는 그 놈이 형장한테 푹 빠진 모양인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니미럴. 기절한 놈 업고 와서 죽인다 살린다 하는 것은 엄연한 납치, 공갈, 협박 아니야? 그따위 문제는 부차적인 것 아니냐고?" "으헤헤헤, 역시 깨어 있었구려. 왜, 더 잠들어 있는 척 하시지요?" 한숨을 내쉰 팽무진 녀석은 끙차 하는 쇳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벽에 기대어 앉았다. 움직일 때마다 오른팔 절단 부위에서 격한 통증을 느꼈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서운 여인이었어. 생긴 것은 꽤나 미인 소리를 들었을 법한 소저인데, 나지막하게 내뱉는 가닥 한 마디 한 마디에 죽음의 냄새가 흘러 나왔어. 슬그머니 잠든 척 하고 있던 내가 그렇게 느꼈을 정도인데, 직접 그녀를 목전에 두고 주저앉아 있던 종리연이란 소저가 오줌을 지린 것은 당연한 일일테지." "우헤헤헤헷, 오, 오줌을 지려? 고거 고소한 일이군. 더럽게 내 말 안 들어 처먹고 자기 멋대로 날 뛰더니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할 만하군. 그래,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소?" "몰라. 종리연 소저의 목덜미를 쥔 무서운 소저는 날 한 번 흘겨보고는 방을 나가버렸어. 아무래도 내가 깬 것을 눈치챈 듯 했지. 그 때를 생각하면 오금이 다 저려. 누구냐? 그 여인은?" '그런데, 이 녀석 처음 보는 나한테 계속 하대야. 은근히 기분 나쁘네. 콱 내가 찔러버릴까 보다.' "흐흐흐, 지금은 알 필요 없소. 무사히 이 위기를 넘겨 생존한다면 무환루(無患樓) 사람이 되었을 테니 자연히 알게 될 것이고, 운 나쁘면 아무도 모르게 죽을 테니 그 또한 의미 없을 거요. 당면한 문제는 당신이 사느냐, 죽느냐요." 생사 문제가 거론되자 잠시 흠칫 떤 팽무진은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며 시선을 들어 보였다. "난 낭인이긴 하지만, 엄연히 무림인이다. 그런데, 칼을 들던 오른팔이 이 꼴이 되었다. 게다가 진미희 소저를 항시 대동하고 거리를 누볐던 기쁨도 이제는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살아서 무엇 한단 말인가. 그냥 그대가 날 죽여줬으면 좋겠다." '이 자식이! 널 살리려고 고군분투(孤軍奮鬪)로 동분서주(東奮西走)하는 종리연은 안중에도 없다 이거냐?' "젠장, 그럼 그냥 그대로 쳐 박혀 있으시오. 야차같은 여인이 당신을 음지로 끌고 가서 강시로도 부활 못하도록 산산조각 내줄 테니 말이오. 그녀의 손속은 항주 제일, 아니 절강성 제일일 테니 아랫도리가 벌떡 일어설 정도로 아주 짜릿할 거요."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핀잔 어린 말을 마구 쏟아 내었다. 그런데, 의외로 팽무진 이 놈은 그 정도 도발이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담담하게 나왔다. "안다. 그녀가 대단한 명문 고수라는 걸. 그래서, 맘에 안 든다. 그 날 네 녀석이 펼친 필살검 속에는 생사의 늪을 헤쳐 다니며 체득한 낭인의 숨결이 느껴졌다. 나 또한 낭인, 이왕이면 같은 길을 걸어온 낭인의 손에 죽고 싶다. 더구나 위아래 입이 두 개인 야차 여인의 손에 죽느니 같은 게 달랑거리는 니 놈의 검에 죽는 게 이래저래 나을 듯 싶으니 말이다." '이, 이 놈, 입심이 더럽네. 진미희 소저 곁에 있으면서 교화되지도 못했나? 역시 근본이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밑바닥 낭인이로군. 필살검? 크크크, 듣기 나쁘진 않은데.' "틀렸소. 필살검(必殺劍)이 아니라오. 그저 흔하디 흔한 삼재검법(三才劍法)일 뿐이라오. 뭐 생사의 늪을 헤쳐 다녔다는 것은 맞을 거요. 맨 날 새벽마다 그 야차같은 여인과 한 바탕 드잡이 질을 하며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 아등바등 펼치니 형도 식도 사라진 채 펼쳐져서 그냥 그렇게 보일 뿐일지도 모르지요." 내가 삼재검법일 뿐이라고 하자 팽무진의 두 눈을 부릅뜨며 격동 어린 듯 부들부들 떨었다. 녀석이 갑자기 발작이라도 하는 가 싶어 잠시동안 적 부인이라도 불러올까 갈등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보니 그런 것과는 다른 비분강개(悲憤慷慨)에 빠져서 그런 듯 했다. 뭐 간만에 내려쬐는 따사로운 햇살 때문에 일어서기 귀찮은 점도 없잖아 있기도 했다. "삼, 삼재검법이라고? 그, 그것이? 크크크, 형과 식이 사라진다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다니! 너 내 생각보다 더 고수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내 수준에 근접한 낭인인줄 알았는데……. 난 구대문파, 오대세가 녀석들처럼 타고난 배경이 없었다. 고아로 태어나 그저 뒷골목 깡패들 속에서 살아 남자니 무공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놈들은 내가 돈도 없고, 배경도 없다는 이유로 날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구대문파, 오대세가 놈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말이다. 상대의 오의를 터득하지는 못해도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도 한 손이 아닌 두 손이 더 효과적이기에 쌍검술을 택했던 거다. 생사의 기로를 걸으며 겨우 터득해낸 나의 격호검법(擊虎劍法)이다. 그런데, 삼재검법 따위로 그런 무시무시한 검술을 보이다니! 헛살았군. 헛살았어." "당신 매우 웃긴 인간이오." "뭐? 무슨 말이냐?" "지금까지 헛살았다 싶으면 앞으로 잘 살면 될 거 아니요. 나이도 나랑 비슷해 보이는구먼. 인생 다 산 것처럼 떠벌리다니! 예순도 더 넘은 홍 영감님도 잘 해봐야 십 년 더 살 거 아등바등 이년을 날려 기어이 삶을 쟁취한 양반이라오." "……." "참, 그러고 보니 왜 아까부터 자꾸 반말 까는 게요?" "……. 제길 꼬우면 너도 반말해. 이 자식아."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다. 이 놈아. 네가 언제 나를 낳았다고, 자식은 자식이야. 이 빌어먹을 후레 거시기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사악대마왕 글쓴날 2005-06-06 09:16:53 고친날 2005-06-06 09:39:11 읽은수 7985 [ 15 K ] 제목 점소이 작삼(2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27] "크하하하하! 새벽에 늘씬하게 터지는 비명 소리가 주루를 뒤흔들기에 선머슴 계집애인줄 알았더니 남자가 맞긴 맞나 보구나." 팽무진 녀석이 내가 비명 지르는 소리를 들었다는 말에 흠칫 소름이 좌악 돋아 오르면서 머리카락까지 바짝 서는 기분이었다. 지하 연무장은 철저하게 방음 처리가 되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어떻게 이 놈이 아는 것일까? "똑, 똑똑하게 들렸냐?" "그렇다기보다 내공을 조금이라도 가진 인간이고, 소리를 약간이라도 확대해서 듣는 법을 아는 무림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들릴걸? 보통 사람이라면 알 수도 없을 테고, 오감이 날카로운 인간이 들으면 쥐가 찍찍거리는 정도로 느낄 테지." '그, 그럼 여태까지 주루 인간들은 다 알고 있었다는 얘기잖아. 쩝 내가 환장한다. 환장해. 그러니까 종리연 그 년이 자꾸 내 머리 위로 올라오려고 기를 쓰는 거였구나. 제기랄.' "그 얘기는 그만. 지금은 니 놈을 살리기 위해 이 몸이 발품을 팔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야, 너 그냥 내 쫄따구나 해라. 쫄따구 한 명 더 키운다고 애걸복걸하면 살려줄지도 몰라." "싫다. 그냥 죽여라. 긴 말 필요 없이 이 자리에서 내 목을 그어줬으면 좋겠다. 낭인은 생사를 걸고 싸우는 와중에 같은 낭인의 검에 죽는 것이 제일 행복한 법이다. 꿩 대신 닭이라고, 니 놈 검도 꽤 쓸만하더구나." "귀찮아. 내가 왜 네 놈 목을 베는 수고를 해야하지? 조금만 고개를 돌려봐. 널 살리려고 종리연 녀석이 백방으로 고생하는 거 알아? 몰라? 그 녀석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이러면 안 돼지." "크크크, 이봐. 난 그녀에 대해 원래부터 몰랐어. 내 사랑이 될 조건을 갖춘 여자는 오로지 진미희 소저 하나 뿐이야. 나 같은 낭인이 돈, 명예, 미녀 모두를 얻기가 쉬운 줄 아는가? 그래서, 무려 열 달이라는 긴 기간동안 목숨을 내걸고 버틴 거다. 꿈을 못 이뤄도 좋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그 순간이 진정 행복하다고 할 수 있지." "뭐? 돈? 명예? 미녀? 킁. 뭐, 상대가 진미희 소저라면 이해할 수 있다고 치마. 그래도 좀 아쉽겠군. 두 달만 더 버텼으면 그녀와……." "크하하하하! 쿨럭, 쿨럭. 아이고, 여기 바보 애송이가 한 놈 더 있었구나.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지. 열 달 동안 그녀 곁에서 지켜본 결과, 누굴 사랑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하지.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나 같은 종자가 일 년을 채우도록 놔둘 리가 없다는 거다. 내 팔을 날려버린 놈만 해도 진미희 소저와 잠자리를 나누는 애인들 중 한 놈의 부하 녀석일 뿐이다. 내 언젠가는 이런 날 올 줄 알았지. 크크크." "진, 진미희 소저와 잠자리를 나누는 애인들? 무, 무슨 소리야? 그녀처럼 우아하고, 순백으로 빛나는 여인이 어, 어째서?" "됐다. 그것까지 니 놈이 알 필요 없다. 긴 말 필요 없고, 내 목이나 잘라. 그것도 귀찮으면 꺼져. 야차 여인한테 죽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으니 말이야. 꼭 두고 보겠다. 그년한테 죽는 순간 내 아랫도리가 바짝 일어서는지 말이다." "젠장, 난 이제 손 뗄 테니 가만히 누워서 그녀한테 배때기 뚫릴 순간이나 기다려라. 이 빌어먹을 종자야!" "틀렸어. 난 거지 놈들처럼 빌어먹은 적 없다. 오로지 등쳐먹고 살았지. 한 놈이라도 밟고 뭉개서 이 자리까지 온 거다. 남의 발바닥 아래에서 빌어먹는 놈 따위에게는 꿈조차 존재할 수 없는 거다! 알겠냐! 애송아!" "잘났다. 잘났어!" 끼익. 쿠우웅! 팽무진 녀석의 심사가 뒤틀려도 장난 아니게 뒤틀려 있음을 알고, 그냥 방을 나왔다. 그 녀석에 대한 내 판단은 오직 하나였다. 구태여 내가 살리기 위해서 애쓸 가치가 눈곱만치도 없는 놈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밑바닥 세계의 낭인(狼人)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으면서도 진미희(鎭美熙) 소저처럼 빛이 나는 여신에게 돈과 명예를 전제로 한 삐뚤어진 사랑을 퍼붓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히 그녀를 창녀처럼 비하한 것도 맘에 안 들었다. 공감 가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같잖은 놈인 것이었다. 뚜벅뚜벅뚜벅. 내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눈을 반짝 빛내는 종리연(鐘理戀) 녀석 따위는 일단 무시해 버렸다. 좋아해도 하필 저런 말종놈을 좋아하게 된 쫄따구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끼리끼리 논다고, 말종끼리 잘들 놀아보라지. 단지 가슴이 울렁거리고, 답답할 뿐이었다. 어쩌면 심사가 뒤틀린 것은 나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팽무진 개 놈의 자식 말 중에 하나라도 틀린 게 없다는 것을……. '진미희 소저에 대한 내 환상도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지.죽음을 앞둔 놈이 경쟁자도 아닌 내 앞에서 일부러 그녀를 비하할 이유가 없고 말이야. 어차피 그녀가 천상의 여신이건, 문어 다리 바람녀건 나와는 아무 상관없기도 하지. 그래도 그 놈 맘에 안 들어.' 일단 가장 친밀감이 드는 녹 누님이 있는 주방으로 쭈뼛쭈뼛 기어들어 갔다. 아무래도 부탁을 하려고 하니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발목에 차고 있는 철환의 무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기 녹 누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잠깐만, 이것만 찌면 끝나거든 잠시만 기다려 봐." "……." 요리에 전념을 하던 누님은 긴 한숨을 내쉬며 소반에 담아 대기하고 있던 동천위에게로 건네 주었다. 잠시 여유가 생겼는지 날 돌아보며 생글생글 미소짓는 그녀가 오늘 따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중년 나이치고 누님처럼 잔주름이 적은 여자는 별로 보지를 못했다. "그래, 할 말이 뭐지?" "저기요. 그러니까……." 난 곧 팽무진에 얽힌 자초지종을 간단하게 전달해줬다. 종리연이 그를 좋아한다는 얘기는 빼고 말이다. 오히려 누님의 화만 돋구는 일이 되리라는 게 뻔히 보였기에 그보다는 우리 주루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이니까 곱게 보내주거나, 정 어려우면 주루 일꾼으로 쓰는 게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떠보았다. "요컨대, 령령이한테 한 마디 압력을 넣어달라는 것이구나?" "그, 그렇게 되나요? 뭐,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바로 그거예요. 누님, 부탁드려요. 어제 제가 꼬리를 밟힌 이후로 무지 찍혀서요. 제 입으로 말을 건네기가 너무 어려운 상황이거든요." "휴우, 미안하다만, 그 애는 내 손 밖에 있는 아이라서, 예전에는 나보다도 무공 성취가 낮은 때가 있었는데, 그 때도 내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단다. 고집이 센 아이지. 하물며 지금에 와서는 내게 눈인사만 해줘도 감지덕지 랄까? 정말 미안하구나. 필요할 때, 힘이 되주질 못해서." "아, 아니에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누님, 그럼." 주방을 나서려는 내 귓가에 느닷없이 누님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이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누님도 무림인이었던 모양이었다. 전혀 티가 안 나기에 보통 사람인줄 알았는데, 전음입밀을 할 줄 아는 정도라면, 보통이상은 된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나보다는 홍 오라버님이 한 마디 해주신다면 통할지도 모르겠구나. 그 이에게는 령령도 나름대로 빚이 있으니 아주 거절하지는 못할 게야. 그 이는 반대로 동생한테 빚이 있으니 어쩌면 제대로 말을 해줄지도 모르겠구나.' 녹 누님이 직접 말로 얘기하지 못 하고, 전음입밀 같은 수단을 쓰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끝까지 배려를 아끼지 않는 그녀의 마음씀씀이가 너무 고마워서 가슴이 찡하게 울려왔다. 나도 말을 하지 않고, 허리를 푹 숙여 인사로 답례를 했다. 누님은 빙긋 웃으며 계산대에서 졸고 있는 홍 영감님 쪽으로 손을 저어 보였다. 즉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홍 영감님 앞으로 쪼르르르 달려가 말문을 열었다. "홍 영감님, 홍 영감님, 부탁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 "어차피 제 말 다 듣고 계신 거 아니까 그냥 말씀드릴게요. 사정이 어떻게 된거냐면요. 그러니까……." "……." 조리있게 꺼낸 내 말이 다 끝났는데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고, 계속 조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속으로 정리를 하고 있나 보다 하고, 근처 식탁 의자에 앉아서 말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 보았다. 시간은 발 없는 말처럼 잘도 흘러갔다. 잠깐 기다린다는 것이 그만 일 각은 넘게 지나가 버린 듯 했다. 나도 모르게 홍 영감님 입만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짜증이 치밀어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쳇, 홍 영감님, 뭔가 켕기시는 게 있는가 보군요. 알았다구요. 갑니다. 가요. 차라리 포연강 형한테 부탁하고 말겠습니다." 지나가다가 잠시 흘겨보니 영감님의 새하얀 눈썹 끝이 아주 잠시 찔끔 움직였다. 확실히 찔리는 부분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입을 다물고 조는 척 하는 이유는 무엇인걸까? 짜증이 치미는 속내를 끌어안고 후원으로 내달렸다. 포연강 이 인간이 곰가죽을 뒤집어쓰고 쳐 박혀 있는 것을 좋아하기에 낮잠을 자고 있는 줄 알았었다. 그런데, 종리연은 거침없이 연공을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말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관심이 안 가는 것은 매한가지, 단지 중요한 것은 내 부탁을 들어주느냐 마느냐 였다. 설마 이 인간도 다른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닐까? 것보다 귀찮다고 한 마디로 코방귀를 낄 가능성이 십중팔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한 마디 해볼 작정이었다. "포 형님 안에 계십니까?" "오냐, 잘 있지. 그래, 무슨 일이냐? 니가 날 다 찾아오고?" "저기 다름이 아니오라……." 날씨가 쌀쌀하긴 했지만, 꾸욱 참으면서, 녹 누님한테 했던 얘기, 홍 영감님한테 했던 얘기 씨알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조리있게 늘어놓아 보였다. 그래도 불안해서 기어이 한 마디 보탰다. "아무래도 종리연 이 녀석이 그 놈한테 맘이 없잖아 있는 것 같기도 하거든요. 어떻게 안 될까요? 형님?" "아함, 너 말이다. 결자해지(結者解志)라는 말은 아느냐?" "네, 알지요." "잘 따져보면 니가 줏대없이 쫄따구 말을 따라간 데서부터 일이 커진 것 아니더냐? 일의 원인은 결국 너한테 있단 말이다. 오늘 아침에 니가 인정사정없이 터져서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는 것 잘 이해한다. 하지만, 이미 너한테 화풀이를 했다는 말도 된다. 령령, 그 녀석은 한 번 터뜨리고 나면 뒤끝이 없다는 걸 너도 모르지는 않을 거다. 직접 대화로 풀어보는 게 어떠하냐?" '쳇, 결국 개나 소나 지하 연무장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 웬만큼 파악하고 있다는 소리로군. 그래도 령령, 그년 너무 무섭단 말이야.' "휴우, 형님 말씀 잘 알아들었습니다. 소제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래, 긴장 풀고 한 번 가보는 거다. 까짓 거 말이 안 통해봤자 죽도록 맞기 밖에 더 하겠냐? 어차피 너한테는 령령한테 터지는 게 일생다반사일 뿐이지 않느냐? 그럼 수고." '이 인간이 말이라도 곱게 하면 밉지라도 않지. 그러니까 한 마디로 자기 일 아니니까 내가 어떻게 되건 말건 알 바 아니라는 말이잖아. 에휴, 내가 상대를 말아야지. 상대를!' 결국, 령령에게 직접 머리를 조아려야 한다는 결론으로 끝이 난 참담함을 끌어안고 원점으로 되돌아 왔다. 무의식중에 계단을 타고 올라가다가 눈을 마주친 종리연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쫑알거렸다. "작삼 오라버니, 어떻게 됐어요? 잘 된 거예요?" '잘 되긴 개뿔, 다 약속이나 한 듯 내 몰라라 하는 걸. 나더러 직접 부탁을 해보라는 결론으로 나왔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 평상시 령령 기분이 좋은 상황에서도 말을 제대로 할까 말까인데, 이 경우는 내 무덤 파는 격이란 말이야.' 한숨을 푹 내쉰 나는 그녀를 무시하며, 그냥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그대로 삼 층까지 올라갔다가 왼편 맨 끝에 있는 주령령의 방문을 한 번 찔끔 바라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다시 내려와 반대편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가 일 층을 가로질러 처음 그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그렇게 한 동안 빼뱅이를 돌아야만 했다. 말은 해야겠는데, 주령령 방문만 쳐다봐도 한숨이 나오고, 말을 말자니 종리연의 반짝반짝 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니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종리연이 아니더라도 팽무진 녀석은 죽게 내버려두기가 안타까운 놈이었다. 나름대로 자기 철학이 굳은 놈이었다. 나와 같이 밑바닥에서 올라서기 위해 발버둥치는 놈이기도 했다. '젠장,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죽을 만치 패기만 하겠지.' 똑똑똑. "저, 저기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 들어가 봐도 될까요?" 결국 그녀의 방문 앞에 선 나는 문을 두드리고 말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기에 마침 없나보다 하고 발길을 돌려 다시 내려가려는 찰나였다. "들어와." '허걱, 있, 있었나?' 꿀꺽. 끼이이익. 마른침을 삼킨 나는 두근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간신히 그녀의 방안으로 들어섰다. 강렬한 울금향이 전신을 자극해 왔다. 조심스럽게 시야를 돌린 나는 아직도 하얀 치파오를 입은 령령이 다리를 꼰 채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뽀오얀 허벅지 살결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게다가 상체를 살짝 숙이고 있었는데, 가슴 계곡선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는 게 아닌가! '이, 이 여자가 누굴 심장마비로 죽이기로 작정했나? 왜 이렇게 요염한 자세로 앉아 있는 거야?' "무슨 얘긴데? 또 꼬리 달고 왔어? 이번에는 어느 기루 계집애를 달고 왔어?" 순간적으로 짜증이 울컥 치밀어서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여태까지 시퍼렇게 빛이 나거나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만을 접해왔었던 나로서는 촉촉하게 일렁이는 눈빛을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안면이 평상시보다 뽀오얀 데다가 입술까지 새빨갛게 빛이 반들반들 나는 것으로 봐서 그녀답지 않게 단장을 한 듯했다. 새까만 머리도 빗어 넘긴지 얼마 안 되었는지 윤기가 자르르르 흐르고 있었다. 결국 난 내가 할 말을 잃고 정신없이 그녀의 눈빛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왜 왔냐니까?" "네? 아, 저, 저기 팽무진 녀석 말인데요. 살, 살려주시면 안 될까 해서요." 정신이 없던 나는 대답마저 엉겁결에 해버리고 말았다. "그 놈의 너와 어떤 관계인데 살려주겠다는 거야?" "부, 부하……가 아니고, 친, 친구, 친구가 될 놈……." "흥, 똑바로 얘기해. 하나도 안 들린다." "그, 그놈은 제 친구입니다. 앞으로 생사고락을 같이 할 놈입니다. 이런데서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고작 네 놈의 친구밖에 안 되는 놈을 살리겠다는 거냐? 그보다는 무환루의 안위가 더 중요하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대답에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내 존재를 깔아뭉개는 그녀의 말에 울컥 분노가 솟구쳐 올라 그만 주루가 떠나갈 정도로 대들고 말았다. "젠장, 그럼 죽이시오! 고작 그거 밖에 안 되는 나부터 먼저 죽이고 가시오! 당신이 원하는 데로 다 죽이란 말이오!" "오냐! 너부터! 너부터 죽여주마!" 그녀도 화가 버럭 났는지 그대로 날 쓰러뜨리며 배 위에 올라앉아서는 내 목을 무지막지한 악력으로 졸라 왔다. 몇 차례 허우적거린 듯도 싶었지만, 그녀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시야가 몽롱하게 흐려진 듯 싶었다. 머릿속까지 몽롱하게 흐려지고 만 것이었다. 그대로 기나긴 암흑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밑도 끝도 없이 빠져드는 깊은 수렁 속으로 빨려들 듯 몰입해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의식이 끊어지기 전 이런 게 죽음인가 하고 읊조린 것도 같았다. 그렇게 의식이 사라졌다. "헉!" 얼마나 시간이 길게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깨으름칙한 악몽을 꾸던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그제야 내가 내 방에 누워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전신이 비라도 맞은 듯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아도 악몽의 정체는 령령이었던 것 같다. 그녀를 만나고 나서부터 악몽의 주체는 거의 그녀였다. 내가 얼마나 주령령을 두려워하는지 잘 드러난 반증의 일부분이긴 했다. 주변이 어둠침침한 것으로 봐서 한밤중인 듯 했다. '이 녀석, 결국 죽었나? 나도 죽인다더니 용케 살려놨구나. 에휴. 미안하다. 미안해.' 한참 잠들어 있어서 인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던 나는 달구경이라도 할까 하고 밑으로 터벅터벅 내려갔다. 한참 전에 정리가 끝나서 한산한 일층을 지나 후원으로 나섰다. 역시 밤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주변을 식별하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부웅 붕 부웅 부우웅. '누구야? 달밤에 체조하는 미친놈이…… 검에 미친 곽철 대협인가?' 무환루 후원이라는 생각에 별 경계없이 소리가 나는 정자 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어딘가 낯익은 인간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특히나 한 쪽 팔이 가볍게 덜렁덜렁이는 것이 신경 쓰였다. 그 녀석 옆에는 뭐가 그리 좋은지 쪼그리고 앉아서 달구경을 겸하는 여인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낯익은 녀석이었다. 부스럭부스럭. 그만 바닥에 널려있던 나뭇가지를 잘못 밟았는지 인기척을 내고 말았다. "이야아, 자네도 달구경 나왔나? 몸을 푸는 데는 달밤 아래가 제일이지." "용케도 살아 있었군. 죽은 줄 알았는데." "낮에 그녀가 와서 그러더군. 자네가 날 친구로 인정했기에 살려둔다고. 그 말만 던져놓고 나가버렸네. 친구라. 낭인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는 놈은 낭인 밖에 없지.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 앞으로 잘 해 보세나. 조만 간에 일이 있다고 하니까 그 때를 대비해서 몸을 풀어두는 것도 괜찮겠지. 난 쌍검술의 달인이었으니까 팔이 하나라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거야. 요컨대 팔 두 개인 놈들보다 빠르면 그만이지." "그런가? 그럼, 계속 수고해. 갑자기 잠이 밀려와서 자러 가야겠어." "난 무척 감동했네." "뭘?" "자네가 그녀를 설득하는 방법 말일세. 아주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지. 삶의 의욕이 마구 마구 샘솟더군. 고맙네." "쳇,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하는군. 계속 달밤에 체조나 하라지." 그들을 내버려두고서 다시 내 방으로 올라왔다. 정말로 잠이 무진장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한 편으로는 그가 무사히 살아있다는 것에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내가 령령을 설득하는 방법? 그게 뭔데, 그렇게 삶의 의욕이 솟아? 내가 더 궁, 궁금…….' 날 강하게 끌어당기는 수마 덕에 다시 꿈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6-08 19:18:10 고친날 2005-06-09 05:20:17 읽은수 7731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28)-두번째 청부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28] 두번째 청부 "유, 유서요? 아, 아니 내가 유서를 왜 씁니까? 난 그저 짐만 나르는 쟁자수라구요. 그런 불길한 종이 쪼가리는 목숨 걸고 칼질하는 표사 나으리들이나 쓰라고 하세요." "어허, 난들 이러고 싶어서 쓰라고 하는 줄 아는가? 다 국주님의 지시라네. 이번 표행에 참가하는 전원이 쓰도록 되어 있단 말일세. 자네라고 예외일 리가 있겠는가?" "그냥 눈 딱 감고 모르는 척 넘어가 주세요. 영감님. 전 유서를 쓰기에는 남은 날이 너무 창창하단 말이에요." "어허, 이것 참." 나와 아옹다옹 실랑이를 벌리고 있는 이 회의 영감은 다름 아닌 강남표국(江南驃局)의 안살림을 도맡아 총괄한다는 박 집사였다. 지원서를 넣고, 하루간 표국 별채에서 편히 쉬고 있는 것까지는 좋았다. 비록 내가 바라는 표사 쪽 지원은 무환루 출발 당시 령령의 거절 한 마디로 무산되었지만, 여기 쟁자수라고 불리는 일도 이동시에는 마차를 타고 움직인다고 들었기에 비교적 흐뭇한 기분으로 낮잠을 즐기고 있는 찰나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불길하기 그지없게도 유서를 쓰라고 하지 않는가? "난 일 생기면 제일 먼저 도망갈 거라구요. 절대로 죽지 않을 거란 말이요. 기분 찜찜하게 이러지 맙시다." "허, 참 고집이 센 친구로군. 표사도 아닌 쟁자수면서 성질머리 하나는 표두급일세." 드르르륵. 내가 유서를 안 쓰려고 버티고 있는 찰나였다. 밖에서 실랑이 벌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별채 문을 열고 낯선 인간 한 명이 들어왔다. 머리에는 굳센 의지를 상징하듯 새빨간 영웅건을 두르고, 왼쪽 가슴에는 강남표국(江南驃局)이라고 까만 글씨가 새겨진 섬뜩한 혈의경장을 걸쳤으며, 허리에는 언뜻 보기에도 값이 꽤 나갈 듯한 보검을 찬 무인이었다. 중년 여인이라는 게 특이하긴 하나, 기세로만 따지면 어느 남정네 못지 않아 보였다. "박 집사, 무슨 문제가 있는 가요?" "유, 유 국주님, 여, 여기까지 어, 어인 일로……?" '국주? 이 여자가 바로 감남표국의 여장부 철혈국주(鐵血局主)라는 인간이었어? 어쩐지 빨간 옷 입고 설치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 여인이라 싶기는 했다.' "내일은 우리의 마지막 표행이 될지도 모르는 날 아닙니까? 표국을 책임지고 있는 국주로써 마지막 점검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보아하니 쟁자수 총각이 생떼를 쓰고 있군요. 제가 유서를 받아 낼 테니 집사님께는 표국의 마지막 정리를 부탁드립니다." "크흑, 국, 국주님, 표국을 정리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보시는 것이……." "압니다. 집사님이 우리 표국에 어떤 애정을 갖고 계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마저 죽고 나면 죽은 이들에 대한 보상은 누가 한단 말입니까? 지금 우리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어둠의 손길은 계속 우리의 피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앞선 두 표행 성공은 했으나, 귀환 도중 참가 인원 모두가 전멸을 당하는 비운을 겪고 말았습니다. 이는 명백한 경고입니다. 표국을 닫으라는 경고지요. 전 표국과 마지막을 같이 할 것입니다. 일단 표국 세간을 다 정리하세요. 표국 자체만을 남겨뒀다가 우리의 전멸 소식이 들리면 그 때 팔아서 보상은 물론 이 유언들에 합당하게 치러주도록 하세요.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 늙은 놈은 마지막까지 국주님의 무사 귀환을 기다릴 것입니다. 부디 옥체 보존하십시오." 비통에 잠긴 박 집사란 노인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시름에 잠겨 방을 나갔다. 물론 유서 뭉치는 철혈국주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도 표국이 처한 현실에 대해 침울한 기분이 들었는지 잠시 한 눈을 팔면서 유서 뭉치를 내려놓다가 그만 방바닥에 흩날리고 말았다. 일단 아랫사람으로 고용된 위치인 만큼 재빠르게 유서 뭉치를 모아 들였다. '응? 낭인제일검(狼人第一劍) 팽무진(彭無盡) 자기 사망시, 묘비명을 꼭 '고금최강(古今最强) 낭인제일검(狼人第一劍) 팽무진(彭無盡) 여기 잠들다.' 라고 새겨줄 것? 비고, 절대로 강남표국 이름으로 새기지 말것. 끄응, 그 놈 답다. 또 어디 보자. 마화(魔花) 적미호(赤美狐) 내가 죽으면 꽃미남 천 명을 구해서 천 일 동안 '미인박명(美人薄命)이로다. 마교의 꽃이 여기 잠들다니 천하가 썩었구나.'하고, 방성대곡하게 할 것. 비고, 스스로를 마화라 칭한 것으로 보아 마화를 너무 흠모해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청년인듯, 사망시 조용히 묻어 묘비에 '마화를 흠모하는 청년 여기 잠들다.' 라고만 추가할 것. 흠, 지금 남장을 하고 표사 무리에 섞여 있지? 또, 어디 보자.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 포연강(鮑緣强) 내가 죽으면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와 천하제이미(天下第二美)를 양옆에 같이 묻어줄 것. 비고, 춘화도 몇 권 구해서 던져줘라. 에휴, 다들 유언을 장난처럼 써놨잖아. 종남파문객(終南破門客) 곽철(郭鐵) 사망시, 시체를 태우고 그 뼛가루를 종남산에 뿌려줄 것. 비고, 그대로 해줄 것. 그나마 곽철 대협이 가장 정상적이네.' 부스럭부스럭 유서뭉치를 모으는 척 하면서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푹 빠져들고 말았다. 그래서 철혈국주가 그런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미쳐 알아채지 못했다. "어떤가? 다른 이들의 유서 속에서 그들의 장렬한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가?" 화다다닥. "아, 예? 에헤헤헤헷, 그, 그렇네요. 자, 여기 있습니다." "아직도 유서를 쓸 생각이 없는가?" "그럼요. 전 절대로 안 죽어요. 아니 못 죽습니다. 결혼은커녕 여자 친구도 없는데,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다구요. 그 어떤 상황이라 해도 유유히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서는 쓸 필요가 없지요." 고개를 끄떡이며 유서뭉치를 잘 정리해 한 쪽에 놔둔 철혈국주는 팔짱을 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세를 보아하니 날 반드시 설득해 보이고 말겠다는 철혈의 의지가 느껴졌다. "자네를 보니 생전에 불안하다고 누차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표국의 비밀 정예들과 길을 떠난 바깥양반이 생각나는군. 중원 최고의 표국을 세우기 위해서는 절대 무력이 필요하다면서 말이야. 결국 얼마 후에는 그 양반과 정예들의 차가운 시신을 접하게 되었지. 안타깝게도 그들은 유서 한 장 남기고 가지 않았기에 내 임의적으로 뒤처리를 해야만 했었지." 말을 짤막하게 마치며 회한에 잠긴 듯 방바닥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쉰 철혈국주는 눈을 반짝이며 내 전신을 훑어보았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빙긋 웃어 보이는 그녀가 조금 불안하게 느껴졌다. "자네 혹시 쓸만한 신법이라도 익혔는가?" "아니요." "그럼, 절대 들키지 않을 은신술이라도 아는 겐가?" "아니요." "그럼, 무엇을 믿고 까부는 겐가?" "……." "만에 하나지만 말일세. 난 우리 쟁자수 일행 중에 적의 간세가 섞여 있을 거라는 예상도 하고 있다네. 그들은 아마 두 가지 중 하나일거야. 일부러 내공을 익히지 않은 암살자들이거나, 반박귀진(返朴歸眞)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를 넘어서서 내공이 안으로 갈무리되었다고 하는 절정 고수일 것이야. 자네도 내공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군. 그런데도 유서를 쓰지 않는 것을 보니 절대로 죽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서 있다는 말이 되지." 철혈국주의 전신에서 느닷없이 강렬한 살기가 뭉실뭉실 새어 나왔다. 인자하게만 느껴졌던 그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날 후벼 파내듯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벌떡 일어나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기에 본능적으로 겁을 집어먹은 나는 앉은 그대로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선 철혈국주는 내 어깨 양 견정혈을 움켜잡았는데, 그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어짐을 알 수 있었다. '이, 이 여편네가 왜 이러는 거야?' 그녀는 내 안면 앞으로 얼굴을 바짝 댕기며 두 눈을 부라려 보였다. 원래부터 삭막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녀가 안면을 앞으로 디밀면서 이맛살을 찌푸리니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전신에서 새어나오는 살기가 한 층 그 기세를 더하고 있었다. 솔직히 그녀의 살기 정도는 령령의 그것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긴 했으나, 눈앞에 시퍼렇게 번들거리는 검을 빼들고 내 턱을 톡톡 치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난 화산파 속가제자로써 검을 갈고 닦았지. 검의 냄새가 좋았기에 일평생 검에 파묻혀 살 생각도 있었어. 그 이가 청혼만 해오지 않았어도 절세여협으로 이름을 드날렸을 게야. 지금도 난 검이 좋아. 내부 배신자처럼 더러운 놈들의 목 정도는 한 점 망설임없이 이 검으로 베어낼 각오가 서있을 정도지." 내 얼굴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또르르르 흘러 내렸다. 몸이 굳어 말을 듣지 않는데도 그녀가 눈앞에서 휘둘러대는 검광덕에 덜덜 떨려왔다. 그런 나를 지켜본 그녀는 '잘못 짚었나.' 라고 중얼거리면서 내 견정혈을 가볍게 두드려 풀어줬다. 칼집에 검을 꽂아 넣고는 날 귀찮게 압박하던 살기도 일시에 싹 거둬들였다. "미안하군. 시국이 시국인지라 잠시 자네를 시험해 봤네. 자네는 배신자가 될 만큼 배포가 큰 인물은 아닌 것 같군. 그래도 난 한 번 의심이 가면 끝까지 눈여겨보는 습관이 있지. 섣부른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마지막까지 철혈국주라는 외호답게 섬뜩한 눈빛을 반짝여 보인 그녀는 잠자코 유서뭉치를 안아들고 방밖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저, 저기요." "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가?" "네, 저기, 저도 유서를 쓰고 싶어서요." "호호호호홋, 진작에 썼으면 좋았잖아. 자, 어서 써. 기다려줄 테니까." 한 건했다는 듯이 웃어젖히는 그녀를 보자 왠지 유서를 쓰지 않으려고 버틴 다른 인간들도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사하고 아니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철혈국주라는 외호보다 공갈협박 국주라고 불리는 게 더 나을 성 싶었다. 지필묵을 꺼내든 나는 기어이 유서를 쓰고 말았다. 먹물이 마르자마자 그녀에게 내밀어 보였다. 철혈국주는 내 유서를 보며 고개를 끄떡이고는 승리의 미소와 함께 방을 나가 버렸다. 잔뜩 긴장한 나는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리 돌려 생각해도 맘에 들지 않는 여인이다. 향기가 없다는 것은 여인으로써의 치장을 포기했다는 뜻일 거다. 처음에는 강남표국 전대 국주의 미망인이라고 하기에 어떤 색깔을 지닌 여인일까 하고 기대하는 바도 없잖아 있었는데, 이렇게 숨통 막히게 하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열댓살 먹은 아들도 있다는데, 저런 괴팍한 여인 아래에서 어떤 성장을 해왔을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강남표국의 전대 국주가 어떤 식으로 죽었는지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르기에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있었는데, 철혈국주를 보자 그런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그저 이번 청부가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램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하여튼 청부라고 받는 게 다 이상한 것 뿐이야. 이번 청부도 매염경 소저가 한 마디 하고 얼마 안 있어 받은 거잖아? 청부를 누가 한 거야? 보아하니 저 아줌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6-10 08:11:09 고친날 2005-06-10 21:55:23 읽은수 7768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29)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29] 다음 날 아침, 간만에 상쾌한 아침을 느끼며 잠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별채 한 방을 쓰는 다른 쟁자수의 꾸릿꾸릿한 발바닥 꼬락내 때문에 조금 찜찜하긴 했으나, 령령과의 실전 수련으로부터 정식으로 떳떳하게 벗어났다는 흐뭇함을 만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크크크, 너무 좋다. 이런 청부 좀 많이 좀 받아라. 그 놈의 개뼉다구 같은 수련으로부터 자주 좀 해방되게. 그나저나 주령령하고, 종리연은 근처 여관에서 한 방을 쓰고 있겠지. 종리연 살 좀 떨리겠다. 하필이면 령령이랑 같이 움직여야 하니. 어쩌겠냐? 그게 니 팔자소관인 것을.' 이번 두번째 청부는 이전 청부와 비교해서 시일과 인원에서 그 맥을 달리했다. 예상 날짜만 해도 자그마치 열 닷새나 책정되었고, 아울러 무환루(無患樓) 인원이 거의 대부분 투입되었다. 연로하신 홍 영감님과 주루 경영을 책임져야 하는 녹 누님, 그리고 그 호위 삼천위만 달랑 남고, 그 이외 인원은 전부 다 참가를 한 것이었다. 곽철 대협과 적미호 부인이 청부에 참가를 한 것은 의외였다. 포연강 녀석과 일종의 밀약(密約)이 오간 것 같기는 한데,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어떤 내용인가는 짐작이 갔으니 말이다. 아마 포연강 녀석이 가끔 대련을 해주는 대신에 곽철 대협은 청부를 종종 해주기로 했을 것이다. 적미호 부인이야 바늘 가는데, 실 따라간다고 곽철 대협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따라나설 여인이니 별로 생각하고 말고도 없다. 팽무진(彭無盡) 녀석도 절단 부위 통증이 남아있는 게 분명한데도 기를 바락바락 쓰며 따라 나섰다. 반대를 하는 인간이 없는 것을 보니 은근히 반기는 것도 같았다. 참으로 웃긴 일이다. 팽무진 놈을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내부적으로 끙끙거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아무도 군소리를 하지 않는다. 하기사 애초에 그를 살인멸구(殺人滅口)시키겠다고 공언했던 령령이 별 말을 안 하니까 다른 이들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듯 했다. '주령령 그 냉혈마녀 발언권이 점점 강해지는 것 같단 말씀이야. 포연강이야 본래 머리 쓰는 일에 관심이 없다고 치자. 홍 영감님이 맨날 졸기만 하니까 거의 잠을 안 자는 주령령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 아니야.' 강남표국(江南驃局)은 무환루가 있는 항주(抗州)에서 말을 타고도 나흘은 쉬지 않고 가야하는 남서쪽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에 자리잡고 있었다. 표국과 인접한 곳에는 포양호(我陽湖)라는 호수가 있고, 호수가 있으면 의례 따라다니는 주루도 세워져 있었다. 강남의 삼대 명루(名樓)중 하나라는 등왕각(騰王閣)이 근처에 있었다. 그러나, 청부 날짜에 쫓기는 나로서는 유람같은 것은 일체 포기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생전 처음 타보는 말등에 올라타서 쉼없이 내달려야만 했다. 나와 같이 동행했던 팽무진 녀석은 팔 하나만으로도 운치있게 잘 몰았지만, 두 팔을 가진 나는 언제 떨어질까 몰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말고삐만을 꽉 쥐어야만 했다. 우리가 무환루에서 제일 먼저 출발했고, 그 다음 날 포연강이 홀로 출발했을 것이고, 이어서 곽철 대협과 적미호 부인이 신법으로 뒤를 이었을 것이다. 맨 마지막 날, 아마 신법이 중원에서도 최상급일 령령과 종리연이 그 뒤를 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제각각 따로 출발한 이면에는 강남표국을 살인멸구로 압박하고 있는 배후 세력에 대한 암묵적 경계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특히 주령령과 종리연은 표행 일행 뒤를 은신한 채 따르면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암살자들을 정리하면서 배후를 캐내기로 했다. '어떤 가소로운 년 놈들이 령령한테 걸려들지는 모르겠지만, 심심한 조의부터 표해야겠군. 불쌍한 것들. 쯧쯧쯧.' 궁극적으로 무환루가 맡은 이번 청부는 강남표국(江南驃局) 사람들에 대한 호위에 있었다. 강남표국이 놓인 상황으로 따지자면 사면초가(四面楚歌) 그 자체였다. 원래 강남표국은 화산파(華山派)를 등에 업은 화산파 속가 제자 섬전검(閃電劍) 최 국주의 맹진과 더불어 일취월장(日就月將)의 기세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혈해진경(血海眞經) 사건으로 말미암아 최 국주와 주력을 상실 당하는 비운을 맛보고 말았다. 더욱이 그 일 이후로 화산파마저 등을 돌려버렸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보나마나 무림맹의 입김이 작용했으리라.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남창에는 무림맹을 등에 업은 표국이 최근에 들어섰다고 하니 그 심각성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철혈국주라는 아줌씨가 아예 죽을 작정을 하고 있는 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 혹시 그 아줌씨, 남편의 뒤를 이어서 죽을 자리를 찾고 있는 것 아닐까?' 드르르륵. "이만 일어들 나게나! 허험, 자네는 벌써 표행 준비를 마쳤군. 신입 치고 오히려 더 빠릿빠릿하걸. 대단하이. 출출할 테니 식당으로 가서 아침 먼저 들게." "영감님이야말로 대단하시우. 눈이 새빨간 것을 보니 밤새 한 잠도 안 주무셨구랴." "휴우, 우리 마님과 도련님이 걱정이 되어서 당최 잠이 오질 않더군. 이런 때 어르신의 부재가 너무 크게 와 닿는구먼. 하늘은 무심도 하시지. 실낱같은 불꽃마저 거두려 하시다니!" "……." 아침부터 안면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푹 내쉬는 박 집사 영감 때문에 찜찜함을 금할 수 없었다. 꼬르르르륵. '그래도 아침은 먹어야겠군.' 식당은 표국 맨 뒤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백 여 명정도의 인원이 동시에 식사가 가능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아마 이전에는 표국 인원이 어림잡아 이백에서 삼백 여 명에 달했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은 여태까지 지원한 인원까지 합쳐서 오십 남짓할까? 빈자리로 인해 식당 안이 드넓어 보이는 것은 좋지만, 초라하게 변해버린 표국의 현주소 같아 조금은 안타까웠다. 마침 식사하러 온 곽철 대협과 적미호 부인과 마주쳤다. 여기에서는 서로 모르는 것으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기에 살짝 보일 듯 말듯 눈인사만 주고받고는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여길세. 어서 오게나. 내 자네가 올 줄 알고 미리 아침을 받아놨지." 손을 흔들어 나를 부르는 외팔이 낭인 팽무진, 그의 쾌활한 모습에 나까지 미소가 슬며시 배어 나왔다. "나보다 일찍 나와서 밥상까지 받아놓다니 대단하군." "일찍 일어나는 개가 뜨거운 똥 먹는다고, 이왕이면 빨리 나와야 제대로 된 아침을 먹을 게 아닌가? 자 어서 들게." "……." "끙, 얌마, 밥상 받아놓고 개똥 얘기는 왜 꺼내. 시장하던 것도 쑥 가라앉겠다." "먹기 싫어? 그럼 내가 다 먹도록 하지. 난 배가 고파 미칠 지경이라구." "……." 꼬르르르륵. 표국 사람들은 제대로 먹는 마지막 식사라고 생각했는지 제법 으리으리하게 차려 놓았다. 아직 일도 시작 안 했는데, 동파육이 아침으로 나와있다면 말 다한 게 아닐까? 무환루에 있을 때야 녹 누님이 내가 좋아하는 데로 만들어 주니까 아침에 동파육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지만, 외지에서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동파육이 나온 것은 의외라 하겠다. 동파육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루 신나게 일했으니 수고했다는 의미로 푸짐하게 먹으라고 내놓는 별미가 아니겠는가? 마치 최후의 만찬을 즐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후루루룩, 짭짭, 우걱우걱. "자네 쪽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표사들이 머무르는 두 번째 별채 인간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이번에 목숨을 내놓겠다는 결사의 의지가 활활 타오르더군. 마치 원수를 눈앞에 둔 낭인의 그것과 비슷하단 말씀이야. 그래서, 아주 맘에 들었지. 카하하하!" 짭짭, 후루룩, 후루룩. "난 쟁자수 아니냐? 다른 표국에 비해 세 배나 높은 임금을 책정되었으니 돈이 궁해서 물불 안 가리고 지원한 인간들이야. 더구나 사망시 보상금 또한 꽤나 많은 편이니까, 그걸 믿고 달려든 인지도 모르지. 힘을 제대로 쓸지 의심스러운 영감도 두엇 있는데, 그냥 넘어가더군. 그래서인지 다들 눈빛이 고등어 눈깔이야." 우걱우걱. "저런, 그런 곳에 있으면 기운만 빠지겠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표사 쪽으로 지원하지 그래?" 후루루루룩. 짭짭. "쳇, 나라고 쟁자수가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아, 글쎄 그녀가 전부 표사로만 하면 균형이 안 맞다면서 난 쟁자수 하래잖아. 분명 표행 뒤를 따를텐데, 내가 표사옷을 걸치고 있어봐. 오밤중에 몰래 끌고 나가서 보복 구타를 할 게 뻔해." 우걱우걱. "불쌍한 친구. 매일 아침마다 계집애처럼 비명을 지르면서 잘도 뚜드려 맞고 사는 가여운 녀석! 나라면 그 육시랄 년 목을 콱 따고 싶은 생각이……읍, 읍." 난 그의 입을 막고서 잽싸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령령이 숨어있을 법한 곳이 있는지 세심하게 살폈다. 가만히 그의 입에서 손을 떼었다. 밥풀에 고기 기름이 짓눌려져서 손이 엉망이 되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말조심하게. 령령이 은신술의 대가인거 모르는가? 만에 하나 그녀가 듣기라도 했다면 자넨 이번에야말로 살인멸구 당할 거야. 쥐도 새도 모르게 목이 뎅겅 날아간다고. 편히 죽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밤새도록 수십 수백 가지 끔찍한 고문으로 서서히 숨통을 조여오는 게 그녀의 주특기지. 못 믿겠다고? 정 궁금하면 이번 표행 끝나고 나서 종리연한테 물어봐. 종리연이야말로 산 증인이야. 정말 걔가 죽지 않고 산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 "……." 일부러 잔뜩 엄살을 피우면서 과장시킨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팽무진은 나지막하게 젠장 한 마디만 내뱉고는 비위이 상했는지 그대로 나가 버렸다. 아무리 처녀 귀신보다 더 귀신같은 령령이지만, 해가 떠있는 데도 불구하고 식당으로 버젓이 고개를 내밀고 다닐 리 만무했다. 단지 내 평상시의 고통을 팽무진 녀석에게 조금이라도 나눠주고 싶었다. 그래야 비아냥거리는 듯한 저 주둥이가 닫혀 있을 것 아닌가? 오랜만에 느끼는 이 청아하면서 쾌적한 기분을 저 무식한 놈의 언변 따위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앞으로 저 놈은 항시 령령의 그림자를 느낄 테니 여문 조개처럼 꽉 입을 닫고 살 것이다. '쳇, 제발 입단속 좀 해라. 나라고 맞고 싶어서 맞았겠냐? 나라고 령령 그 년 목을 따고 싶은 생각이 없겠냐? 그냥 수준 차이라는 것을 아니까 조용히 죽어지내는 거지. 니가 남긴 동파육은 내가 다 먹어주마. 실컷 고민이나 하고 있어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6-13 17:16:46 고친날 2005-06-13 17:16:46 읽은수 7569 [ 11 K ] 제목 점소이 작삼(30)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30] 콰직. 나뭇가지가 박살나는 소리가 천장 쪽에서 제법 크게 들려왔다. 쥐가 이빨 갈다가 구멍이 뚫리는 소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응? 천장에 표범이라도 한 마리 살고 있나? 후훗, 그럴 리가 없지. 겉은 멀쩡해 보여도 천장 쪽이 알게 모르게 좀 부식되었나 보군.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부실 공사가 문제란 말씀이야. 그까짓 돈 조금 아끼려다가 수리비만 더 날리는 꼴 아니야." 귀를 쫑긋 세우고, 다른 소리가 더 들리지 않는가 집중해봤으나, 거짓말처럼 잠잠했다. 신경과민인 듯한 기분이 들어 훌훌 털어 버리고 먹는 것에 열중했다.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나서야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를 톡톡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곧 앞마당에 모여 표행 출발 최종 점검에 들어갈 것이다. 아마도 괴팍한 미망인 유호정 철혈국주의 아들 녀석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었다. 고인이 된 최 국주와 미망인이 된 유 국주 둘 다 화산파 속가제자 출신인 만큼 그 아들내미 역시 준 화산파 제자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정작 화산파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다. '어라, 이 인간들 왜 이렇게 동파육을 맛없게들 쑤셔 넣고 있어?' 이번 표행에 드리워진 암운이 생각보다 진하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끼고 있는지 모락모락 푸짐하게 나온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깔짝거리는 인간들이 보였다.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 그런 그들을 본 다른 이들마저 덩달아 식욕이 사라졌는지 숟가락을 들기가 무섭게 내려놓고 자리를 떠버렸다. 은연중에 음울한 그림자가 곳곳에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흠, 바보들 같군. 제대로 싸울 생각이면 든든하게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이 놈들을 보니까 청부라 해도, 호위를 하러 온 나까지 힘이 떨어지는구만.' 덕분에 출발 준비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강남표국 소속임을 의미하는 쟁자수 옷을 지급 받아 갈아입고는 내 자리로 배정된 세 번째 마차에 올라탔다. 세 대로 나누어진 짐마차 속에는 이번 표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체불명의 표물 이십여개의 철궤짝과 표행 중 필요한 물자가 실려 있었다. 표국 내에 들리는 얘기로는 무게로 보아 금괴나 은괴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런 짐작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애초에 표물을 넘겨받을 때부터 불문율이 붙어져 있었다고 한다. 표국이 제일 중시하는 게 바로 신용(信用)인만큼 표국 내에서는 그 내용물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국주조차 모르는 내용물을 누가 알겠는가? '안다면 아마 내부 첩자겠지.' "모두 정렬! 국주님이 나오신다!" 이제는 강남표국에서 유일하게 혼자 생존한 제 사표두 녀석의 우렁찬 일갈과 함께 혈의경장의 철혈국주가 몸을 드러내었다. 누가 철혈국주(鐵血局主)라는 외호를 붙여줬는지 몰라도 그녀에게 정말 잘 어울렸다.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은 둘째 쳐도 날렵한 몸놀림하며, 흘리는 기세 자체가 거의 구룡급에 근접한 아줌씨였다. 그녀 말대로 혼인을 해서 표국에 묻히지만 않았어도 절세여협으로 화산파의 이름을 드높였을지도 모른다. '응? 아들내미 녀석이 뒤를 따를 줄 알았는데, 혼자 나오잖아.' 연무장에 두 줄로 좌악 정렬해 있는 표사들 무리 속으로 지나쳐오며 그들을 세심하게 살피던 유호정(猶豪訂) 철혈국주(鐵血局主)는 코를 개처럼 킁킁거리며, 적미호(赤美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마도 남장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몸에서 난향 냄새가 강렬하게 진동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철혈국주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떡이며 그냥 지나쳐 버렸다. 적미호의 유서 내용을 알기에 철혈국주가 고개를 끄떡인 이유가 금새 이해가 되었다. '에휴, 적미호, 그냥 본래대로 여장하고 다른 이름을 쓰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어렵게 가냐? 요즘은 실력만 있으면 여자라 해도 쉽게 표사가 될 수 있잖아. 당장 저 앞에만 해도 너댓명은 여자 표사 아니야? 꼭 그렇게 티를 내야겠냐?' 맨 끝에 엉거주춤 서있는 소년 표사도 만만찮게 눈에 띄었으나, 철혈국주는 그를 아예 무시하고 지나쳐 버렸다. '엉, 그런데, 쟤 미성년자 아니야? 소방 녀석보다 더 어려 보이는데 표사에 합격했어? 끄응.' 나를 포함한 이십 여 명의 쟁자수들은 미리 세 대의 마차에 나눠타고 있었다. 앞의 두 대의 짐마차에는 이번 표행의 핵심인 표물이 차곡차곡 실려서 쇠사슬로 꽁꽁 묶여있었고, 자물쇠마저 삼중 사중으로 채워져 있었다. 내가 타고 있던 세번째 짐마차에는 앞으로 닷새간 표행에 필요한 물자들이 빼곡이 실려 있었다. 표행 도중 객잔에 들러서 의식주를 해결하려다가는 적의 함정에 걸려들 수도 있다는 국주의 독단적 방침으로 결정된 사항이었다. '도대체 이 영감들을 쟁자수로 내몬 자식새끼들 면상 한 번 보고 싶군. 한참 손자 손녀 재롱에 세월 가는 줄 모르다가 이승을 하직해야할 영감들을 죽음의 표행길로 내몰다니!' 내가 탄 세 번째 짐마차에는 마부를 제외한 두 명의 영감이 더 타고 있었다. 표행이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는 꼴이 마땅찮기도 했지만, 그들을 흘겨본 철혈국주는 왠 일인지 고개를 까딱여 보이고는 그냥 지나쳐 버리는 여유를 보여줬다. 아무래도 이번 표행길은 뭔가 꾸릿꾸릿 석연찮은 부분들이 보였다. "험험, 좋다. 눈빛들이 살아 있어서 아주 좋다! 모두 알다시피 이번 표행은 아주 위험하다. 흉수의 정체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저들은 우리를 안다. 비록 사정이 그러해도 우리는 물러서지 않는다. 부러질지언정 휘어질 수는 없는 것이 우리 강남표국이기 때문이다! 내게 목숨을 맡겨라.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 날은 같다. 최후의 하나까지 비수가 되어 적의 심장에 박아 넣자. 흉수들에게 우리 표국의 굳센 의지를 보여 주는 거다!" "우와아! 강남표국 만세! 만세!" "철혈국주님 만세! 강남표국 만세!" '이거, 이거 꼭 동네 뒷골목 깡패들 패싸움 선동하는 듯한 어투로군. 최 국주라는 사람, 저 아줌씨의 어디가 맘에 들어서 청혼을 했을까?' 아침에는 음울한 기운에 젖어있던 표사들이 그녀의 몇 마디 말에 힘을 얻었는지 용기백배해서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다만 맨 구석에 엉거주춤 소년 무사만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말없이 손을 흔들면서 미소로 화답한 철혈국주는 바로 박 집사의 손에 붙들려 있던 말고삐를 낚아채서 날렵하게 올라탔다. 마치 오래 전부터 이 순간만을 위해 연습해온 사람처럼 한 점 망설임도, 조금의 어색함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표사들도 일사불란하게, 날렵하게 신형을 날려 자신에게 배정된 말에 일제히 올라앉았다. 간혹 말과 상성이 맞지 않아서 꼴사나운 장면을 연출하는 놈도 있었으나, 우리 쟁자수들은 일찌감치 세 대의 마차에 올라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쪽팔림을 감당할 이유가 없었다. 활짝 열려진 대문으로 철혈국주가 탄 말이 통과하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반대편에서 튀어나온 노인장과 소녀가 대문을 막아서는 바람에 표행 무리 전체가 선두에 밀려 잠시 주춤거려야 했다. "아니 어느 썩을 놈이 감히…… 엇, 사, 사부님!" 필시 쌍욕을 퍼부으려고 눈을 부릅떴을 철혈국주는 재빨리 말에서 신형을 날려 내려섰다. 그리고, 그녀답지 않게,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노인 앞으로 달려나가 오체투지(五體投地)하는 것이 아닌가! 유호정 철혈국주의 사부님이라면, 화산파(華山派) 사람일 것이었다. 화산파는 분명 무림맹의 압력으로 강남표국의 일에서 손을 뗀 것으로 아는데, 화산파 노사부의 등장이라니! "어허, 일어서게. 난 자네의 사부 신분이 아니라네. 내 스스로 파문을 자처하고 사문을 뛰쳐나왔으니 그저 한 사람의 낭인 일 뿐이지. 낭인 초일후(草佚後)라고 불러주게. 흠, 표사 초일후도 괜찮겠군. 국주, 날 표사로 받아주겠는가?" "어, 어찌, 제가 사부님을 제 아랫사람으로 둔단 말입니까?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그 말씀 거두어 주십시오." "어허, 이것 참 난감하구먼. 그럼, 이번 표행길에 우연히 만난 식객 정도로 하는 것은 어떻겠나? 그 정도는 괜찮겠지?" "사, 사부님." "어허 어허, 사부 아니래도. 국주, 여기서 날 어떻게 부를지 결정하고 가게. 그 이전에는 한 발자국도 안 움직일 것이야." 청회색 도포자락을 휘날리면서 반백의 기다란 턱수염을 기른 초일후 노인은 도도하게 대문을 막고 서 있었다. 철혈국주의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철혈국주는 목이 매였는지 말을 잇지 못하다가 마침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거렸다. '괴팍한 영감이로군. 하기사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철혈국주가 괴팍한 여인이 된 이면에는 필시 저 영감탱이 한 몫 단단히 했겠지. 이번 표행길 조금은 재미있겠는걸.' "정히 동행하시겠다면, 표국의 태상 호법이 되어 주십시오." "헬헬헬, 좋다. 단 이번 표행에서만이다. 다음 표행때는 표사나 식객의 신분으로 따르도록 하지. 참, 이 아이는 내 손녀딸이야." "초초(草草)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노인이 그녀를 언급하자마자 이때다 싶었는지 소녀는 냉큼 한 발짝 걸어나와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를 해왔다. "다른 손주들은 이미 화산파에 입적해버렸지만, 이 아이는 자신의 문파는 자신의 손으로 고르겠다면서 억척스럽게 고집을 피우는 통에 그저 간단한 가전무공만 익혔을 뿐이지. 강호 경험을 하고싶다고 스스로 따라나섰으니 표사 조수라도 시켜주게." 오체투지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선 철혈국주는 노인과 같이 온 소녀를 찬찬히 뜯어보고는 잠자코 한숨을 내쉬었다. 필시 사부라는 영감은 제자라는 그녀를 돕기 위해 낭인신분을 자처하며 화산파를 뛰쳐나왔을 것이다. 손녀라는 아이도 달콤한 말로 꼬드겨서 데려왔을 것이었다. 소녀는 아직 쌀쌀한 한파가 부는 초봄인데도 불구하고 백의경장만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풋사과 같은 가냘픈 몸매를 지녔지만, 눈빛만은 초롱초롱 빛이 났고 예쁘장한 구석도 엿보였다. 아마 장성하면 미녀란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긴 했다. 그러나, 노인과 달리 아직도 입에서 젖내가 날 꼬맹이가 표행에 도움이 되기는 할지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특히나 이번 표행은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 전멸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기에도 가냘파 보이는 소녀의 표행 동참은 철혈국주로써는 상당한 부담요인이자 무리수일 것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휘익. 챙. 자신을 곤란하게 바라보는 철혈국주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소리도 없이 검을 뽑아든 소녀는 자기 옆에 드리워져 있는 소나무의 잔가지 끝을 날렵하게 베어내고는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칼집에 검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실력이 어떻느냐는 듯이 당돌하게 철혈국주의 눈을 직시해오는 것이었다. 철혈국주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가 살포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미안하구나. 사부님의 손녀라면 아무래도 만만찮은 실력을 지녔을텐데, 내가 너무 경시했구나. 그러나, 이번 표행은 너무 위험하다. 우리 강남표국의 마지막 표행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따라오겠느냐?" "흥,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랑 제가 동행하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염려 꼭 붙들어 매시라고요." 절벽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을 하는 그녀의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당돌 그 자체였으나, 철혈국주는 나무라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런 그녀를 보자 영감도 한 마디 거들었다. "크하하하, 이 녀석 하는 꼬락서니가 꼭 너 어렸을 때랑 똑같다니깐. 검에 대한 깨달음도 너 못지 않지. 난 오래 전에 일선에서 물러섰지만, 이 아이를 보면 문득 문득 네가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 더 더욱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휴우, 사부님 고집을 누가 꺾겠어요? 나중에 후회나 마시라구요." "자꾸 사부, 사부 하지 마라. 난 이제 화산파 사람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나저나 우리 량이는 어디 있는 게냐?" "휴우, 그 녀석 말도 마세요. 표행에 따라오고 싶지 않다는 것을 밤새도록 두들겨…… 아니 설득해서 간신히 표사 무리 속에 집어넣느라고 제 속이 다 상했어요. 정말 초초랑은 하늘과 땅 차이에요. 사내 녀석이 되어 같고 검들기를 그토록 무서워하다니 창피한 일이지요." "쯧쯧, 피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본능이지. 억지로 검을 쥐여준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지 않느냐. 이런, 이런 너무 시간을 지체했구나. 우린 저 마차에 올라타서 가마. 길을 서둘러야 하지 않겠느냐?" 결국, 두 노소가 표행에 따라나서게 되었다. 마침 두번째 짐마차에 빈자리가 남았기에 그곳에 올라탄 영감은 표사들의 맨 뒤 꽁무니 쪽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을 타고 있는 소년을 잠시 주시했다. 아마도 그 소년이 최량(崔良)이라는 철혈국주의 아들인 모양이었다. 초일후 노인장의 중얼거림이 언뜻 들려왔다. "송곳이란 언젠가 주머니를 뚫고 나오기 마련이지. 그나저나……." "뗏끼!" "에구머니나! 왜, 왜 그러는 게요? 영감?" "너 아까부터 계속 날 뚫어져라 봤지?" "참 나 원, 보긴 봤는데요. 저 말고 다른 쟁자수, 표사 나으리들도 보고 있었는뎁쇼." "아니야. 아니야. 어디선가 계속 내 뒷덜미를 긁는 눈초리가 있었단 말이야. 좀 특별한 시선이었지. 뭐랄까? 배신자? 은둔자? 그런 기분이었어. 자, 말해봐. 너 배신자지? 언제 내부반란을 일으킬까 고민 중이었지?"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6-15 09:15:57 고친날 2005-06-15 19:58:59 읽은수 7590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3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31] 표물 도착 예정지는 북쪽으로 닷새거리인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이었다. 원래 보통 말 속도로 따져서 사흘이면 족히 갈 거리였으나, 짐마차가 대동되어 있는 관계로 닷새로 늘려 잡은 것이었다. 첫날은 그럭저럭 별 이상없이 지나갔다. 바로 앞 마차에 타고 있는 초일후 영감이 자꾸 날더러 배신자 냄새가 난다고 귀찮게 굴어서 눈살이 찌푸려진 일이 다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옆자리도 영감탱, 앞 자리도 영감탱이 앉아있는 거야? 왜 많고 많은 자리를 내버려두고 내 주변으로 포진해 있는 거냐고?' 하도 심심해서 영감들을 조금 눈여겨 보았는데, 초일후 영감이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영감들에게 넌지시 눈짓을 던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앞 마차에 탄 초일후 영감이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도 왠지 내 옆자리에 있는 영감들에게 시비 걸 것을 간접적으로 대신하고 있다는 낌새가 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날이 저물 때 즘에는 초일후 영감의 갈굼 따위는 거의 개무시할 정도로 무감각해질 수 있었다. "자, 모두 이 곳에서 야영할 준비를 하도록 한다! 사표두!" "예, 국주님." "난 잠시 개인적인 용무로 자리를 비우고 올 터이니 경계를 세우고, 잠자리를 준비하도록 해. 혹시 내가 없는 새 무슨 일이 생기면, 태상 호법님 말씀을 따르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철혈국주는 맞바로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표사들은 경계를 서는 몇 명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천막을 세우는데 투입되었다. 초봄 야산에서의 한밤은 한겨울이나 다를 바가 없기에 한파를 막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할 것이었다. 표국 사람들은 그 점을 잘 아는지 조금 번거롭긴 하지만, 몽골 유목 민족들이 애용하는 파오(包)를 세우기 시작했다. 중앙에는 화덕이 들어갈 수 있도록 땅을 팠고, 그 주변으로 둥굴게 땅을 다시 파내었다. 그 자리에 벽과 지붕이 될 골조를 심는 것이었다. 골조는 버들가지를 비스듬히 격자로 짠 것으로 의외로 매우 튼튼해 보였다. 골조의 간격으로 볼 때 한 파오 당 열 명 정도 들어가 수면을 취하는 데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자네 쟁자수 치고 삽질이 매우 익숙하군. 초봄이라 해도 겨울 기운이 남아있어서 땅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데도 잘 파낸단 말이지. 내가 알기로 암살자 녀석들이 겨울에도 땅속에 숨을 수 있도록 그런 특수 훈련을 받는다는데. 아, 그냥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이니 왜곡해서 듣지 말게나. 험험, 그래, 비결이 뭔지 귀띔해 줄 수 없겠는가?" 빈둥빈둥 놀고 있던 초일후(草溢後) 영감이 빈정거리듯 질문을 던져왔다. 하여튼 출발 때부터 뭔가 시빗거리를 계속 찾는 데,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옆의 영감들을 은근히 떠보고 있나보다 하고 지레짐작했었다. 그래서, 참고 또 참아줬는데, 하루종일 쌓이고 쌓이다 보니 기어코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쳇, 이 정도 삽질은 아무것도 아니요. 강제징집 이년만 다녀온다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할 수 있소. 그러나, 우리나라는 오로지 배경없는 소시민 남자들만이 칼같이 징집 당하는 게 현실이라오. 영감은 보아하니 명문 화산파(華山派)를 배경으로 징집을 깔끔히 무시해버린 모양이구랴. 말해보시오. 영감, 우리가 지난 이년간 청춘을 바쳐가며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면서 얻은 게 무엇이오? 일부 몰지각한 개잡종 계집년들은 추하다고 손가락질하기 일쑤요. 여성 감찰부라는 개떡같은 곳에서는 우리를 개취급 하는 것도 모자라 나라에서 눈곱만치 보상해 주기 위해 만든 보상목록마저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삭초제근(削草除根) 해버리기까지 했소. 심지어 돈 있고 배경 있는 놈들은 유학을 핑계로 징집을 피하기 위해 나라까지 버리더이다. 우리가 정녕 이런 개같은 연놈들을 위해 목숨 바쳐가며 징집 당해야만 했던 거요? 아, 미안하오. 영감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니 왜곡해 듣지는 마시오. 험험, 그래 대답이 되었소?" "암, 대답이 되었고 말고, 내 잠시, 아주 잠시 볼 일 좀 보고 옴세." 내 대답 같지 않은 대답을 잠자코 듣고 있던 영감은 안면이 울그락 푸르락해지더니 신형을 날려 바람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휘리리리릭. 잠시 후였다. 난데없이 멀쩡하던 야산의 나무들이 하나 둘 씩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퍽, 쿵, 퍼퍼퍼퍼퍽, 쿵. 퍼퍼퍽, 쿵……. 사표두는 즉시 정찰조를 편성해 다녀오도록 했는데, 그들의 보고를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 더 이상 당황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보나마나 사표두가 손댈 수 없는 어떤 좁쌀 영감쟁이가 일을 벌리고 있는 것이리라. '이 영감탱, 왜곡해 듣지 않고 자기 욕하는 줄 잘도 알아들었군. 찔리는 게 있을 테지. 문파 핑계되고 징집을 면했을 테니 안 찔리고 배기겠어? 딱 보면 징집시절 익힌 삽질 자세 몰라볼 때부터 내 알아봤다.' 한파는 막아줌은 물론이요, 보기만 해도 따뜻해지는 양가죽 파오가 십 여 채 가량 세워졌고, 파오 중앙에는 보기만 해도 훈훈해질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화덕이 들어섰다. 장작으로는 새까만 숯을 사용했기에 눈이 매운 일도 없었다. 게다가 땔감 걱정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으랏샤!" 콰지직, 콰직 콰직. "우오오! 대단하십니다. 과연 철혈국주의 사부님 다우십니다. 소신들 감탄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허험, 뭘 이 정도 가지고." 초일후 영감탱이 큼지막한 생나무통을 채로 끌고 와서 맨주먹으로 산산히 박살을 내준 덕택에 땔감 걱정도 없게 되었다. 마침 땔감을 구하러 가려던 표사들과 쟁자수들은 그의 무위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영감의 콧대는 높아만 갔다. 왜 이 갈굼쟁이 영감이 진땀을 뻘뻘 흘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내 눈앞에까지 무거워 보이는 나무통들을 질질 끌고 와서 맨손으로 박살내는 시범을 보였는지는 잘 알만 했다. 그러나, 내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절정 고수들이라는 것을 이 영감탱이가 알기는 할까? 기가 찬 나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이만하면 자신의 위력을 알겠냐는 듯 뒷짐을 지고 서있는 영감한테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이거 땔감을 핑계로 한 무단벌목은 나라에서 금지하지 않았소? 아마 최저 일평생 옥살이 내지는 최고 능지처참형 아니던가요?" "어? 어어? 허허허허, 끔찍한 소리 말게나. 그, 그냥 벌금 조금 내면 그만이겠지. 더군다나 나 혼자 좋자고, 끌고 온 게 아니지 않은가? 다 표국 사람들의 따뜻한 수면을 위한 노파심에서 나온 배려 아니겠는가? 태, 태상 호법이라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놀고 있을 수는 없잖겠는가? 겨우 이 정도 일 가지고 치사하고 아니꼽게 고발이나 일삼을 소인배가 우리 중에 있겠는가?" '어쩔시구리, 그러니까, 고발하면 소인배 자식이다 이거지? 넉살 맞은 너구리 영감이로고.' "뭐, 그렇다고 해 두지요. 설마 누가 고발이야 하겠습니까? 마는! 혹 모르지요. 우리 중에 첩자나 배신자가 있어서 덤으로 관에 고발을 할지 말입니다요." "……." 제법 뜨끈한 국밥으로 저녁 식사를 마친 나는 곧장 침낭 속으로 파고들었다. 기이하다고 해야할까? 신기하다고 해야할까? 올 겨울은 별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푹신푹신 포근한 침낭 속이 맘에 쏙 들고 말았다. 아무래도 징집 시절 훈련 이동시마다 챙기고 다녔던 침낭과 흡사한 기분이 나서 그럴지도 모른다. 낮 동안 마차진동으로 인한 멀미와 더불어 철혈국주 사부라는 영감탱이의 줏대없는 갈굼으로 피곤이 극에 다다라 있었기에 그대로 골아 떨어지고 말았다. "어이, 이봐. 이보라구. 일어나."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 날 막 흔들어 깨웠기 때문에 잠결에 슬며시 실눈을 떠보았다. 밤눈이 밝은 관계로 사물 식별에는 하등 무리가 없었으나, 분명한 한밤중이었다. 날 흔들어 깨운 인간은 같은 파오 사람도 아닌 표사 나으리였다. 몸 전체에 습기가 묻어난 것으로 보아 꽤 오랫동안 밖에서 경계를 서다가 들어온 것 같았다. "아,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는데, 왜 깨우는 거요?" "자네 불침번이라서 그러네. 어서 교대해주게. 피곤해 죽겠네." '불침번? 불침번! 무슨 소리야?' "잠, 잠깐 표사 나으리, 제, 제가 왜 불침번을 서지요? 불침번은 제가 알기로 무공이 뛰어나신 표사 어르신들만 서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요?" "흠, 그게 파오 별로 인원을 맞춰보니까 한 명이 비더라고. 마침 국주님이 자리에 없으셔서 태상 호법님께 말씀드렸더니 주저없이 자네를 추천하더군. 뭐 윗분이 시키는데, 우리같은 아랫것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나? 어서 나오게."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끝까지 해보자 이거지? 감히 수석 조교 점소이를 지낸 바 있는 나를 우롱하려 들어? 두고 보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6-17 09:13:43 고친날 2005-06-17 09:13:43 읽은수 7541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3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32] 초일후 영감에 대해 속으로 궁시렁궁시렁 하면서도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기어 나와야만 했다. 다음 근무자 표사가 잠들어 있는 파오 위치와 생김새 이름을 일러주고는 자리를 뜨려는 전 불침번 근무자 표사의 허리춤을 보는 순간 퍼뜩 떠오르는 게 있어서 다급히 붙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저기 잠시만요." "왜 그러는가?" "불침번 근무를 서려면 저도 나으리가 차고 있는 검이나 도같은 무기가 있어야할 것 아닙니까? 보시다시피 전 빈 손인 데다가 무공도 못 하는데 어떻게 근무를 설 수 있겠습니까?" "무기? 흐음, 옳거니! 이것을 쓰도록 하게. 아주 딱이군. 자네가 무공을 써야할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마음 푹 놓고 철통 경계에 임해주게. 그럼 수고하게나." 내 손에 삽 한 자루를 쥐어준 표사는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한동안 얼어붙듯 자리에 서있던 나는 꼼짝없이 날벼락 불침번 근무를 서야한다는 사실을 통감할 수 있었다. 차라리 표사로써 불침번 근무를 서면 멋이라도 나지, 쟁자수 복장에 삽 한 자루 손에 쥐고 근무를 서는 일은 아마 표국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일 것이다. 주변에서 교대 나온 표사들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기에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거 아주 보기 좋구만. 아무리 봐도 자네는 삽을 들고 서있는 게 딱 자세야. 아주 멋들어진다네. 카하하하하!" "그만 웃게. 난 정말 우울해.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땅에서 솟구쳤는지 난데없이 튀어나온 영감 때문에 아주 환장할 지경이야." 우연히도 불침번 근무가 동 시간대에 걸렸는지, 근무자 일정표를 보고 미리 근무자 변경을 했는지 팽무진 녀석이 농지거리를 떨며 다가왔다. 반갑기도 했지만, 그 반대이기도 했다. "미안, 미안 그래도 이 암울하면서 무료한 표행 길이 웬 쟁자수와 웬 태상 영감이 티격태격 거리는 통에 아주 재미있어졌다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누가 최종적으로 이길지 표사들 사이에 내기가 걸렸지. 어느 쪽으로 판돈이 몰렸을 것 같나?" "그야 뻔하지. 위치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나보다 훨씬 우위에 있을 초일후 영감탱이겠지." "잘 아는군. 그래도 말일세. 나와 적미호 표사만큼은 자네한테 걸었다네. 별로 기대는 안 하지만, 자그마치 20대 1의 배율이 적용된다네. 표행이 끝나고 무사히 복귀하는 그 날, 자네의 우세가 확정되기만 하면, 우린 떼부자가 되는 거지. 이번 표행 급료의 절반을 판돈으로들 걸었으니 말일세. 물론 자네한테도 한 몫 떼 주기로 적미호 표사와 얘기가 되었으니 분발해주게." "……." 삽자루를 들고 있던 손이 부르르르 떨렸다. 이 놈의 수박통을 터뜨려줄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가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지 모를 주령령을 의식해서 그만 두었다. 청부를 훼방놨다고 보복 구타를 당하긴 싫었으니 말이다. "한심들 하군요." 이번에는 또 어떤 염장쟁이가 등장했는가 돌아보니 바로 초초(草草)라는 태상 영감의 손녀딸내미였다. 비록 깜찍하게 생겨먹은 귀여운 소녀였으나, 그 영감의 그 손녀딸인 만큼 그리 좋은 감정으로 대하기는 어려운 바였다. "이봐요, 쟁자수 아저씨, 국주님께서 오체투지로 예의를 갖출 정도면 엄연히 우리 할아버님이 표국 최고 위치라고 할 수 있어요. 주제와 분수를 알면 할아버님께 꼬박꼬박 말대꾸하지 말고 존장으로써의 예우를 다하기 바래요. 더구나 오늘 내일 죽을 날만을 기다리시는 할아버님을 이겨서 뭐 하겠다는 거에요?" 슈우욱. 철컥. 찰나지간 번득인 검광이 사라지자마자 그녀의 옆에 서있던 소나무가 비스듬히 반듯하게 균열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쓰러지는 게 아닌가! 죽은 듯 조용하기만 하던 숲 속에서 중후한 진동이 나지막하게 퍼져 나갔다. 쿠웅! "잘 봤지요? 쟁자수 아저씨? 나중에 가서 제 손속이 무정하다고 말하기 없기예요." "잘 봤나? 참고로 알아두게. 저 꼬마 아가씨, 자기 할아버지 쪽에 거는 걸 내 똑똑히 봤다네." 팽무진 녀석이 은근히 내가 겁먹고 물러서 버릴까봐 한 마디로 부추기는 듯 했지만, 애초부터 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내 머리 위에서 노는 존재로는 홍 영감, 포연강, 그리고 최고로 악랄하고 무자비한 주령령을 포함한 수라삼살(修羅三殺)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 이외의 존재에게 굴복하고 물러선다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용치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암, 잘 봤지. 할아버지에 이어 그 손녀까지 무단 벌목을 했으니 이것은 엄연히 고의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 그 경우 두 배, 세 배는 무겁게 가중 처벌을 받지, 아마? 부디 우리측에 첩자나 배신자가 없어야 할텐데. 안 그럼 두 노소가 오붓하게 관에 끌려가 철창 신세 지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잖겟는가?" "오오, 그렇군. 아, 그러고 보니 무단 벌목한 자를 관에 신고했을 때 받는 보상금이 짭짤하다는 말이 있던데. 누군지 몰라도 떼돈 벌겠군." "아니, 이 아저씨들이! 아저씨들, 일단 저 녀석한테 볼 일이 있으니까 있다가 한 수 가르쳐 드릴게요." 버럭 성질을 내려던 안하무인(眼下無人) 꼬마 소저 초초는 무엇을 봤는지 눈알을 번득이며 신형을 날렸다. 그녀가 내려선 곳에는 다름 아닌 철혈국주의 아들, 최량(崔良)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경계에 임하고 있었다. 눈빛이 고등어 눈깔인 것이 차라리 쟁자수인 내가 더 표사답게 보일 지경이었다. '보나마나 그 영감에 그 손녀답게 시비를 걸겠지. 무슨 시비일지 궁금하긴 하군.' "최량 표사, 반가워요. 당신에 대한 얘기는 할아버지께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어요." "……." "당신이야말로 화산파(華山派) 제일 기재가 될 소질을 타고났다고 하더군요. 난 수재이고, 그대는 천재라고 하더군요. 수재는 노력해서 빛을 볼지언정 천재를 넘을 수는 없다고 하셨지요. 전 제 눈으로 당신의 실력을 가늠해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 피할 생각말고 검을 뽑으시기 바래요." "일 없소. 뽑으면 꼭 피를 봐야하는 검일랑 당신이나 휘두르시오." "흥! 겁쟁이군요." "맘대로 생각하시오. 용건이 끝났으면 날 그만 내버려두시오." 슈우욱. 그녀를 무시하며 눈을 내려 감으려는 최량의 안면을 향해 초초의 검이 환영처럼 날아들었다. 검은 정확히 최량의 미간 한 치 앞에서 멈춰 섰다. 끝이 스스로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아서 미력하게나마 진기를 주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초초라는 꼬마 계집, 보면 볼수록 여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에도 전혀 미동하지 않는 최량 녀석도 만만치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퍼억! 끝내 분기를 참지못한 초초는 최량의 가슴팍을 사납게 걷어차 버리고 말았다. 입에서 핏줄기를 토하며 몇 바퀴 구른 최량은 소매로 입가로 흐른 피를 닦아내더니 다시 자기 자리로 와서 엉거주춤 근무에 임하는 것이었다. 잔뜩 열을 받은 초초는 다시 그를 걷어차려다가 맥이 빠졌는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 시선 끝자락에 놓여 있는 인간은 나와 팽무진이었다. "쟁자수 아저씨는 스스로 아는 무공이 없다고 했으니 봐드리지요. 그러나, 표사 아저씨는 저랑 좀 놀아주셔야 겠어요. 제 기분이 무척 꿀꿀하거든요. 아저씨의 검에 제 목이 날아가도 아무런 탓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아저씨도 제 검에 목이 날아가도 탓하기 없기예요. 아셨지요?" "잠, 잠깐 난 싸우고 싶지……." "문답무용(問答無用)!" 휘리리리릭. 채채채챙, 차창. 선기를 잡고 검을 휘둘러오는 초초를 맞이해 외팔로 검을 뽑아든 팽무진은 의외로 밀리지 않고, 잘 막아내고 있었다. 무환루에서 틈이 날 때마다 검을 휘둘러 적응 수련을 꾸준히 해온 덕분에 이제는 한 팔로도 예전에 근접한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채채챙. "오호, 일개 표사치고는 쓸만한 데요. 어떤 검법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쓸만한데요." 차창, "쳇, 가전검법이라더니 완전히 화산파 매화 검법을 거의 그대로 따온 거잖아. 뭐, 오히려 잘 되었군." 끼이이잉. 채앵. "미안하군요. 가전검법을 만든 분이 할아버지라서 아무래도 매화 검법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요. 그런데, 매화 검법을 잘 아시나 봐요?" 차차차창. 챙. "어이쿠, 조, 조금 알지. 꼬마 아가씨 이제 우리 그만 하자. 한 팔로 두 팔을 감당하기에는 무리라구." "걱정하실 거 없어요. 저도 한 팔만 사용할 테니깐요. 보시면 모르겠어요? 저도 아저씨처럼 왼팔만 쓰고 있잖아요. 제가 오른팔을 쓰면 바로 진 것으로 인정하겠어요. 어때요? 할 만 하지요?" "……." 어쨌거나 연장자인 입장이라 체면이 있어 빼도 박도 못하게 된 팽무진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또르르륵 흘러 내렸다. 초초라는 아이도 땀에 절어 표사 옷이 가냘픈 몸매에 착 달라붙었으나, 풋사과 몸매라 보잘것없는 것이 조금 애석하긴 했다. 차차차창. 채채챙. 몸으로 체득한 시기적절, 노련미 넘치는 낭인 특유의 투검(鬪劍)과 검의 감각을 타고난 수재 소녀의 사뿐사뿐 나비 같은 쾌검(快劍)간의 대결이라고 해야할까? 팽무진이 힘들다고 투덜대고 있지만, 그의 안면에는 이미 즐거워 참을 수 없다는 낭인무사의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또한 그의 깡따구 어린 체력이 얼마나 끈질긴가 잘 아는 나로서는 이 승부의 가부를 점치기 어려웠다. 무료하게 불침번 근무에 임하고 있던 표사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그들의 대결을 관심 깊게 구경하게 되었다. 물론 나 또한 그들의 대결을 매우 재미있게 그리고, 고소한 기분으로 보고 있었다. 정확히 누가 이기고 누가 지건 나에겐 하등 상관이 없을 뿐더러 이독제독(痢霽)의 이점만이 있을 뿐이니 말이다. '그래도 지 잘난 척 버릇없이 구는 꼬마 계집애보다는 싸가지가 조금 있는 팽무진이 이기는 쪽이 좋겠지. 은신하고 있을 종리연 속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고 있겠군. 후훗, 나야 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이지. 어라?' 때 마침 매 근무 교대시간을 알려주는 모래시계 안의 모래가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 모래시계는 표국이 한참 잘 나갈 때, 서역 상인들을 도와주고서 선물로 받은 것이라고 한다. 시간 엄수는 표국 사람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아주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즉시 다음 교대 근무 표사를 깨운 나는 맞바로 내 파오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교대 시간을 눈치챈 다른 표사들도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일 아침이면 누가 이겼는지 알 수 있겠지. 뭐 둘 다 비겨도 괜찮겠군. 흐흐, 잠 못 자고 날밤이나 까라지. 아침이 되면 둘 다 녹초가 돼서 축 늘어져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 몸은 따뜻한 침낭 속에서 대신 푸욱 잠들어 주마.'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6-19 13:25:19 고친날 2005-10-11 09:14:28 읽은수 7540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3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33] 땡땡땡땡땡! "아하아암, 아침이로구만. 간만에 듣는 기상 종소릴세." 기지개를 좌악 펴며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기상 종소리를 반가운 심정으로 음미했다. 다른 날보다 더욱 기대에 가득 찬 상쾌한 아침이 반가운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이리라. 주령령(周領領)의 지옥 같은 수련을 가뿐하게 넘긴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밤새도록 칼부림에 광분했을 두 웬수의 최종 승패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파오 바깥으로 걸음을 옮긴 직후 전체적인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게 피부로 와 닿았다. 둥그렇게 에워싼 파오들 중심 쪽에 일부러 호위 차원에서 배치해 놓은 마차 주변으로 대다수의 표국 사람들이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몰려있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호기심에 가득 찬 나는 즉시 다른 표사들 어깨 너머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며 상황을 살펴보았다. '어라? 팽무진 녀석하고 초초 꼬마 계집애가 사이좋게 기마보로 서있잖아? 별난 방식으로 대결을 바꿨네.' 두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린 후 무릎을 살짝 구부린 다음 양팔을 죽 내민 채 버티는 기마보(騎馬步) 자세, 흔히 무공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체력 단련 수단이라고들 하지만, 징집 시절 안 좋은 일만 터졌다 하면 기마보로 기합을 받았던 끔직한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닌 게 아니라 두 연놈이 흘리고 있는 땀방울이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며 대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해(大海) 맞지. 바다가 좀 짭짤해? 쟤네들이 흘리는 땀방울도 무지하게 짭짤할 거 아냐? 조금 아깝군. 대야로 잘 받쳐 놓고 그 위에서 기마보로 흘린 땀방울을 받았으면 잘 말려서 소금가루로 추린 후 팔아먹어도 짭짤할텐데. 크크크.' 별난 망상으로 혼자 히죽히죽 웃던 나는 그만 경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사들 사이로 스윽 나타난 유호정(柳豪訂) 철혈국주(鐵血局主)의 서슬 시퍼런 안광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 싸늘한 안광이 나를 향한 것은 아닐지라도 조용히 숨을 죽일 필요는 있었다. 모여든 표사들과 쟁자수들을 앞에 두고 서늘한 눈빛으로 침묵을 지키던 철혈국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전 이번 표행 작전의 완전한 성공을 위해 어젯밤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었습니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도 못하고 뜬눈으로 날밤을 세우다가 오늘 새벽에야 파오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가관이더군요!" 부르르르 떨던 그녀가 그 말을 마치고는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환기를 시키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있던 표국 사람들 모두가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슬며시 고개 돌리는 것을 재미있게 보다가 그만 철혈국주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당황한 나는 한동안 그녀의 독기 어린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의외라는 눈빛으로 째려보던 철혈국주는 빙긋 웃더니 시선을 돌려주었다. '휴우, 십년은 감수한 것 같다. 역시 괴팍한 아줌씨야.' "조용히 철통 경계에 임해도 모자란 판국에 개인의 사소한 시비로 칼부림에 빠져들어 기강을 흐트러뜨리는 두 표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실망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주변에 몰려들어 박수를 치며 구경을 하던 표사들까지 같이 기마보로 정신 단련에 동참시키고 싶었지만, 참았습니다. 대결을 벌이는 두 사람의 실력이 그들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문득 제 앞으로 놓여진 불침번 근무자 일정표를 훑어보다가, 아주 재미있는 부분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관련해서 초일후 태상 호법님께 한 말씀 여쭙지 않을 수 없군요." "험험, 나, 나 말인가?" 찔리는 구석이 없잖아 있던 그는 헛기침을 하며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국주 사부까지 했다는 사람조차도 국주한테 쩔쩔 매는 것을 보면, 철혈국주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가 알 것 같기도 했다. "일정표 중간에 무공 문외한인 쟁자수 한 명을 대신 근무자로 집어넣으셨던데,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지시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 그거야. 내, 내가 보기에 그 녀석이 아주 수상했거든. 왠지 눈빛에 한 가득 기운이 실린 것이 필시 내부 첩자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그를 몰래 감시도 할 겸 시범 삼아 근무자로 넣은 것이네." 대답을 하는 영감탱이의 목소리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갔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국주가 내뿜는 한기가 장난 아니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내부 첩자라는 확실한 증거물이라도 발견 하셨나요?" "아, 아니, 하지만, 내 일평생을 통해 얻은 감이라는 게 있거든." "간단히 말해서 지레짐작만으로 의심을 하셨다는 거군요. 만약 그가 불침번 근무를 서고 있을 때 적이 침입했다면, 그 뿐만이 아니라 근처 파오에서 잠자던 표사들까지 반항 한 번 못해보고 죽었겠군요. 그때 가서도 확증 운운하실 건가요?" "아, 아니 내 의도는 그게 아니라……." "휴우, 연장자면, 연장자답게 제발 체통 좀 지키세요. 이제 철 좀 드실 때도 되셨잖아요. 우리 표국은 지금 기사회생(起死回生) 하느냐, 전멸(全滅) 하느냐의 암운(暗雲)에 직면해 있어요. 사소한 일로 제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셨으면 해요." "……." "기마보(騎馬步) 그만 풀어." 기마보 자세를 취하면서 땀으로 목욕을 하다시피한 팽무진은 곧 바르게 자세를 잡았다. 반면 바르르르 떨면서도 그 때까지 용케 기마보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던 초초는 비틀비틀 거리더니 그대로 철푸덕 주저앉고 말았다. 기를 썼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일어서지를 못했다.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뒷짐까지 진 채 자신의 파오로 들어가려던 철혈국주는 마지막으로 할 말이 남았는지 우뚝 멈춰 섰다. "한 시진 후까지 모두 아침 식사를 비롯한 출발 정비를 마치도록 한다. 초초 표사와 팽무진 표사는 불쾌한 땀냄새로 표행 일원들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도록 산자락 아래 시내로 가서 깨끗이 목욕을 실시하고, 옷도 깔끔하게 갈아입고 오도록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후 기강을 흐리는 이들은 내 반드시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해산!" '오호, 정말 철혈국주(鐵血局主)라 불릴 만 하군. 아들까지 둔 아줌씨답지 않게 맺고 끊는 게 아주 칼 같을 뿐만 아니라 사부라는 사람까지 바보로 만들만치 매서운 구석도 보이네. 후후후, 아주 가끔은 쓸만할 여인이로세.' 내 속에 찜찜하게 쌓여있던 것을 일거에 확 해결해줘서 기쁘기 그지없었지만, 그녀의 일갈로 싸늘하던 아침이 더욱 차갑게 경직된 분위기였기에 별 내색을 하지 않고 꾸욱 참았다. 그래도 키득키득 나지막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잔뜩 기합이 들어간 표국 사람들은 허겁지겁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할 일이야 파오 해체를 돕고 정리해서 마차에 싣는 일이었다. 철혈국주는 아침도 마다하고 밤새 못 이룬 수면을 해결하려는지 자신의 파오로 기어 들어가서 나올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 파오 하나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파오들을 다 해체 분리해서 세 번째 마차에 차곡차곡 실었다. "아침들 드슈. 따끈따끈한 아침 국거리 나왔으니까 먹고 일들 하슈."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라 후다다닥 달려가서 배급 쟁자수가 떠주는 대접을 받은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엥? 아침이 이게 뭐야? 그냥 건포에 물 붓고 끓인 거잖아. 에휴, 녹 누님이 손수 만들어준 요리들이 그립다, 그리워. 그냥 배 채우기 위해서 먹어준다.' 후루루루룩, 짭짭. 후루루루룩, 짭짭. 마지못해 건포국물을 들이키면서 곽철 대협을 흘깃 보니 묵묵히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같은 청부 일행임을 은연중에 인식하고 있을 나조차도 거의 그 존재를 못 느낄 정도로 고요했다. 하물며 다른 표사들임에야……! 그의 곁에는 언제나 약방의 감초처럼 적미호 부인이 찰싹 붙어 있었다. 자신들을 흘겨보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살짝 한 쪽 눈을 깜짝이며 보일 듯 말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떨떠름했다. '그야 당연하지. 남편을 바로 옆에 앉혀놓은 유부녀의 미소따위 하나도 매력적이지 않다구. 젠장, 그래도 가슴이 설레긴 하는군. 빌어먹을! 옆구리!'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6-22 16:12:04 고친날 2005-06-22 16:18:52 읽은수 7483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3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34] 셋째 날 여느 때처럼 파오를 정리하고 간단히 요기를 한 후 표행길에 올랐다. 간간이 잊을만하면 들려오는 초일후 영감의 전음입밀(傳音入密) 갈굼도 뉘 집의 개가 짖냐는 듯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흘려듣는 궁극의 해탈(解脫)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무리 패자가 꿍시렁거려도 승자의 여유를 방해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묘한 것은 끝까지 포기할 줄 모르는 초일후 영감의 잡초같은 집념이었다. '저 인간이 징집되지 않은 것은 수많은 인명을 살리고자 한 하늘의 안배라고 밖에 생각 안 되는군. 조금만 짬밥먹고 꺾였어봐, 사방팔방에 고춧가루를 뿌려서 부대 애들 다 버려놨을 거다. 아주 말년한테까지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달려들었을 인간이지. 암 그렇고말고.' 이리 삐꺽 저리 삐꺽거리는 마차 위에 멍하니 앉아있다보니 문득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표행 첫날부터 중요한 그 뭔가를 빼먹고 있었던 듯한 기이한 상념에 사로잡혔다. 물경 한 시진동안이나 뿌연 안개 속을 헤매듯 오리무중(五里霧中)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가 우연찮게 시선을 등판이 널찍하면서 덩치에 걸맞게 거대한 도를 찬 표사에게로 돌리게 되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앗차, 포연강(鮑緣强)! 어쩐지 허전하더라니! 이 인간이 안 보였었네. 표행에 합류하긴 한 거야? 그렇다면 혹, 혹시? 인피면구……?' 주령령(周鈴鈴)도 갖고 있는 인피면구(人皮面具), 포연강이라고 갖고있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얼굴이 다르더라도 덩치가 비슷한 표사를 찾으면 되는 일이리라. '혹시나 얼굴을 아는 무림맹 애들을 만나게 될까봐 인피면구를 쓴 것일까?' "선두 정지!" 표행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던 유호정 철혈국주가 손을 번쩍 쳐들어 보이며 정지를 시키는 바람에 그에 대한 생각을 더 이을 수 없었다. 국주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말 등에서 내려 주변을 천천히 훑어보는 것이었다. "희한한 곳이로군. 산새 지저귐은커녕 풀벌레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야산이라? 사천당문이 예까지 와서 산 전체에 독이라도 뿌린 것일까?" '그, 그러고 보니 너무 조용하다.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기 전의 고요같은 느낌이네.' 느닷없이 달걀 만한 돌멩이 하나를 집어든 국주는 눈여겨봐둔 곳으로 힘껏 던져 넣었다. 처음에는 국주 아줌씨가 야산의 초봄 풍경에 향수가 달아올라 동심(童心)으로 돌아갔나 여겼다. "어이쿠!" 철푸덕. 잠시간 두런두런 쑥덕쑥덕 거리던 표국 사람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돌멩이가 떨어진 지점에서 분명히 사람 비명 소리가 들렸던 것이었다. 그것도 이런 인적이 드문 깊은 산중에서 말이다. 철혈국주는 별반 놀랄 일 아니라는 듯 빈정거리듯 공중에 외쳤다. "이제 그만 나오는 게 낫지 않겠소? 들킨 거 뻔히 알면서 못 본 척 시치미 떼고 숨어있는 산고양이 양반들 참으로 우습구려." 부시럭 부시럭 벌떡. "뭐, 뭐라고! 누가 산고양이라는 거야? 우습다고! 이런 육시랄 년! 아까 소리지른 놈은 우리 대왕채 소속이 아니란 말이야. 인골채 이 바보같은 놈들하고 똑같이 취급하지 말란 말이야!" 웬 턱수염이 더부룩한 거구 장한이 나뭇잎을 뒤집어 쓴 채 벌떡 일어나 소리지르는 것을 시발점으로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푸념이 나왔다. "거 일 같이 못해 먹겠구만. 우리 인골채 아해가 실수를 좀 했기로서니 그걸 좀 못 참아? 그냥 몇 놈만 내려보내고 나서 쟤네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일시에 쳐도 좋았잖아." 이번에는 키만 멀대같이 길고 비쩍 마른 해골바가지 같은 놈이 숲 사이에서 일어나며 맞대응을 하는 것이었다. "에이 씨, 우리가 언제 기습같은 것을 하고 살았냐? 다 때려치워! 우리 막가채는 그냥 덮치겠다. 니 놈들은 알아서 해라. 얘들아, 모두 연장 들어라! 쳐라!" 정말 막가게 생겨먹은 인상 험악한 놈까지 일어서서는 대도를 쳐들고 뛰쳐나왔다. "얘들아, 모두 연장들고 형님 뒤를 따라라!" "우오오오! 막가채 만세!" "제길, 막가채 놈들 정말 막가는군. 다음부터는 우리 단독으로 움직이고 말 테다. 대왕채! 막가채 놈들에게 지지 마라! 먼저 마차를 빼앗는 거다!" 그게 시발점이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산자락이 여기저기서 몸을 솟구쳐 튀어나오면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는 산적들 덕택에 항주 사거리 시장 바닥에 맞먹을 정도로 시끌벅적해지고 말았다. 못해도 수백 명은 족히 넘을 어마어마한 산적들 숫자에 질린 표국 사람들은 그저 침만 꼴깍 넘기며 철혈국주의 지시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스르르르릉. 조용히 검을 빼든 국주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지시를 내렸다. "쟁자수들은 말고삐를 잘 묶어서 말이 날뛰지 않게 주의를 기울인 후, 마차 바닥으로 몸을 숨기도록. 표사들은 모두 검을 빼들고 준비해라. 겁먹을 것 없다. 우린 지지 않는다." '쳇, 그렇게 말해도 쪽수가 너무 밀리는 걸. 그럼, 이제 내가 대활약을 보여줄 시기가 온 것이군. 크크, 산적들 정도야. 한 철봉이지. 어? 어? 철, 철봉이 없다.' 반사적으로 철봉을 찾았던 나는 그제야 출발 때부터 철봉없이 길을 나섰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표사도 아닌 쟁자수 지원을 염두에 두고 출발했으니 철봉을 챙겼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철봉에 대한 미련은 아주 간단하게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녀의 전음입밀이 귓가에 울려 퍼져왔던 것이었다. '가만있어. 아직은 때가 아니야. 네가 싸워야 할 때가 오면 내 따로 일러줄 테니 지금은 그대로 숨기나 해. 피래미 상대로 힘 뺄 필요는 없잖아.' 간만에 주령령의 차가운 목소리를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들으니 나도 모르게 전신에 싸늘한 오한이 들어 부르르르 떨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 말대로 마차 바닥에 숨지도 못했다. 칼부림을 벌이기 시작한 표사들과 산적들 사이의 묘한 혈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채채채채챙, 차차차창, 채챙, 차창. "너 죽고 나 살자! 우리도 금괴 좀 만져보자!" "웃기지 마라! 마차는 우리 인골채 거다!" 서로 마차를 자기 거라고 우기며 달려드는 산적들의 동태에 어이가 없었는지 초일후 영감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마차로부터 신형을 날려 산적들 앞에 내려섰다. 그 뒤를 안하무인 손녀딸 초초가 질 새라 날렵하게 뒤따랐다. "허허허, 마침 심심하던 차에 잘 걸렸구나. 초초야, 네 수행 상대로는 부족하지만, 잠시 놀아주는 게 좋겠구나." "네 할아버님, 저도 그간 근질근질해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참고 지내느라 혼났다구요." 차차차창. 채챙. "끄아아아악!" 초초란 계집애의 손끝에서 뽑혀진 쾌검은 산적들의 목숨을 빼앗는데, 일말의 망설임이 안 보였다. 철혈국주나 팽무진 녀석이라던가, 초일후 영감 같은 인간들은 오랫동안 산전수전 다 겪었을 테니 사람 목숨 빼앗는 것이야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제 열댓 살이나 됐을 법한 그녀가 핏물이 옷에 튀어 붉게 물드는데도 그 나이 또래 여아들과는 전혀 딴 판으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저 영감탱이 초초란 애를 버려놨군. 어렸을 때부터 사람 죽이는 일에 무감각해지도록 키워 놓은 게 분명하군. 최량이란 놈하고, 저 년을 잘 섞어놓으면 딱 적당할 텐데... .' 우웩우웩. 바로 근처에 엉거주춤 서있던 최량 표사는 검을 뽑지도 못하고, 사방팔방에서 피어오르는 혈향에 노란 위액을 게워내며 구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지켜보고 있자니 나까지 덩달아 구토가 일어날 것 같은 기분에 재빨리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산적들의 등장에 기가 활짝 살아난 초일후 영감과 초초 꼬마 계집애의 검무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것은 젖혀두더라도 산적들의 실력 자체가 너무 형편없었다. 덤벼드는 자세도 어정쩡한 것이 머릿수만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달려들자마자 픽픽 나가떨어지는 꼬락서니가 영락없이 등불도 아닌 모닥불을 향해 우루루루 달려드는 불나방 꼴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산적들에게 밀리는 표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쳇, 한 순간 긴장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한숨이 나올 정도군.' 필시 철혈 국주를 비롯한 표국 사람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하나둘씩 처치하고 있을 터였다. 이변은 그 시점에서부터 일어났다. "으아아아악!" 잘 싸우고 있던 표사 하나가 비명과 함께 목젖 부분을 움켜잡으며 털썩 주저앉는 게 아닌가! 우연찮게 근접한 곳에 있던 적미호 표사가 죽음을 맞이한 표사에게 슬그머니 다가섰다. 그의 목에 박혀있는 비수를 뽑아내더니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살, 살막 놈들이야. 산적들 속에 살막 살수들이 섞여 있어요!" 그녀의 외침에 자신에게 달려들던 산적 둘을 간단히 처리한 철혈국주가 신형을 날려 적미호의 옆으로 내려서더니 비수를 빼앗듯이 확인해보고는 나지막하게 탄성을 터뜨렸다. "살, 살막! 살막이 어째서?" '살막(殺幕)? 그럼 설마 이중에 그들이 섞여있는 거야? 이것 참.' 살막(殺幕)이란 소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들에 대한 걱정보다, 일수필살(壹手必殺) 단수연(丹粹姸)과 살막 미소년 소막주 조진후(趙眞厚)가 떠오른 것이었다. 그들이 이중에 있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게 솔직한 내 감정이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6-26 11:11:56 고친날 2005-06-26 11:11:56 읽은수 7442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3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35] 이곳저곳에서 소리 없는 비명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머릿수만 믿고 덤벼드는 무식한 산적들을 상대로 여유 있게 잘 버티던 표사들 사이에 어둠의 그림자가 깔리고 있었다. 설마 산적들 속에 그들로 변장한 살수들이 숨어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주령령, 어, 어째서 이럴 때 두 손놓고 가만있는 거야? 이러다가 다 죽겠다. 우리 청부받고 온 거 맞아? 포연강 이 새리는 눈 씻고 찾아봐도 어디에 쳐 박혔는지 도무지 알 수도 없고 말이야.' 팽무진 녀석도 꽤나 긴장한 모습이었다. 일 대 일로 싸우는 것은 몰라도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 수 없는 살수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은 이제 막 외팔에 적응해 가고 있는 그로써는 버거운 일이 될 것이었다. 희한한 점은 곽철 대협이었다. 한 점의 동요도 없이 시종일관 묵묵히 한 놈, 한 놈씩 적당히 상대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무료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 때였다. 산적들 사이에서 곽철 대협을 향해 비수가 쏘아졌다. "위, 위험……!" 거리가 너무 멀기도 했지만, 상황이 너무 다급해서 제대로 경고해줄 수도 없었다. 그저 발만 동동 구를 따름이었다. 쉬이이익, 팅. 곽철 대협은 비수에게 눈짓조차 주지 않고, 그저 가볍게 검을 돌려 쳐내었다. 검 자체가 워낙 느릿느릿 돌아서 무슨 의도가 담겨졌는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 할 정도였다. 되튕겨진 비수는 산적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누군가의 입에서 짤막한 비명이 튀어나오게 만들었지만, 곧 우루루 밀려든 산적들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곽철 대협은 산적들 속에 숨어든 살수의 위치를 처음부터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역시 검귀라 이건가? 옆에 붙어있는 적미호 부인까지 놀러온 듯한 기분이 드는구만. 하기사 계속 그의 곁에 붙어 다녔으면, 누구보다 그를 잘 알고 있을 테니 여유가 넘치는 것은 당연하겠지.' 표국 일행의 선두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서있던 철혈 국주의 안면에 핏줄이 다다닥 돋아났다. 사방팔방에서 표사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가고 있는 소리가 귓전에 맴돌 테니 열이 오르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그녀는 검을 바닥에 꽂아 세우고는 허리춤에 채워져 있던 작달막한 막대를 꺼내더니 한 손으로 막대를 움켜쥐고, 자유로운 팔의 손바닥으로 그 밑동을 강하게 쳐버렸다. 퍼어엉! 슈우우우욱. 폭음 소리와 함께 주황색 연기를 뿜으며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른 막대는 공중에서 다시 한 번 더 터졌다. 마치 폭죽놀이라도 하듯 주황색 연기가 불가사리 모양으로 예쁘장하게 퍼져나갔다. '아, 마교도 녀석이 다른 마교 놈들에게 신호용으로 쓰던 거랑 비슷한 거네.'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산적들을 하나 베어버린 국주의 입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장로님들! 부탁드립니다!" '장로? 누구? 설마?" 혹시나 해서 슬그머니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절박하게 돌아가는 표국 상황을 소풍 나온 애들마냥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영감 두 명이 허리를 툭툭 치며 일어서는 게 보였다. "에구구, 허리야. 바깥바람 쐬게 해줄 테니 놀러가자고 떼쓰며 꼬실 때 내 알아봤다. 감히 오늘내일 하는 우리들을 부려먹으려 들어? 괘씸한 아해 같으니! 내 다음에 막내 녀석한테 다 일러버릴 테다." "사형, 이르긴 뭘 일러요? 우리도 무단으로 하산한 거 잖수? 이런 순간을 기대하고 따라온 거 뻔히 아는데, 핑계 한 번 좋구랴. 파리 속에 꼬여든 말벌이나 몰아냅시다. 고군분투하는 우리 아해 불쌍하지도 않아요?" "으헤헤헤, 넌 말벌이나 잡아라. 난 파리까지 싹 쓸어버릴 테다." "맘대로 하시구랴. 그러나, 알아두슈. 그네들은 굶주리고 헐벗은 평범한 서민들일 뿐이라오." "그렇게 생각된다면, 넌 니 방식대로 해라. 난 내 방식대로 하겠다. 칼을 들 순간부터 그놈들은 이미 글러버린 게야. 나 먼저 가마." 사형이라 불린 깡마른 체격의 고집불통 노인은 날 힐끔 흘겨보고는 그대로 마차 왼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몰라 떨떠름한 시선으로 노인이 산적들을 하나 둘씩 꺾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노인은 말 그대로 그들의 목을 정반대 방향으로 우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비틀어 버리거나 집게손가락 끝으로 환영처럼 잔영만을 남기며 점혈해 버렸다. 점혈 당한 녀석은 그대로 부르르 떨다가 눈을 감지도 못하고 축 늘어져 버렸다. 한 수에 한 놈씩 죽이면서 지나가는 것이 일방적 학살을 연상시켰다. '저, 저 노인, 무, 무섭네. 그냥 사혈(死血)을 찍어 버리면서 가는 거잖아!' 혈도에 대한 내 지식은 정말 기본 밖에 없어서 정확히 어디를 무슨 수법으로 찍었다는 것은 모르겠지만, 가공할 수법인 것만은 확실했다. "칠십육로무형지(七十六路無形指)라는 지법이라네. 말 그대로 전 방위 어디에서든 형태에 구애받음 없이 일격필살(一擊必殺)로 적을 쓰러뜨릴 수 있는 무서운 기술이지. 사문 수제자 자격인 매화검수(梅花劍手) 칭호를 얻어도 전수를 꺼리는 살인무공이라네." '어, 얼라리? 이 영감,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왜 자기 멋대로 알아서 설명을 해? 설, 설마 살인멸구(殺人滅口)라도 하려는 겐가? 잠, 잠깐 날 죽인다고? 후미.' 경계하는 눈빛으로 한 걸음 물러서다가 마차 위라 그대로 멈추게 되었다. 싸울 것인가, 도망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이 노인은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이런, 이런, 오해는 말게. 난 그저 자네가 궁금해하는 것 같아 말해준 것뿐이라네. 송천(松泉) 사형과 나 송진(松眞)은 화산파 12대 제자로 초일후 녀석은 우리 사질 뻘 되는 아해지. 건망증 하나는 화산파 일절이라 부를만한 놈이라네. 게다가 우리들이 워낙 오래 전에 은거해버려서 기억날 듯 말듯 하니까 그 중간에 자리잡은 애매한 자네에게 일부러 시비를 건 것일 테지. 우리 정체를 감춘 점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네. 내 대신 사과할 테니 젊은이가 우리 아해의 모자람을 이해해주길 바라네." 말을 마치고는 뒷짐을 진 채 마차의 우측으로 폴짝 뛰어내린 그는 산적들의 공격을 미꾸라지가 손위에서 미끄러지듯 흘려 버렸다. 그의 손에서도 칠십육로무형지(七十六路無形指)라는 말하기에도 숨이 찰 정도로 긴 지법이 펼쳐졌다. 다만 그의 사형이라는 작자와는 달리 그 위력이 현저하게 약했고, 산적들도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굳는 것이었다. '이 영감은 살생을 피하고 있구나. 두 사형제가 극단적으로 노는군. 뭐, 나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어? 어어?' 두 쟁자수 영감이 화산파 장로로 둔갑한 지 반 각도 채 지나지 않아 등 뒤쪽에서 떼로 달음박질 해오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이번에는 또 뭔가 하며 슬며시 돌아봤더니 웬걸? 멀찍이 후미에서 검은 무복을 걸친 수십 명의 복면인들이 지면을 박차며 경신술로 달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엎친 데 덮친 격?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압사 당하는 거야? 이런 젠장!' 자포자기로 마차에 실려 있던 대나무 막대기 하나를 다급히 집어 들었다. 소진배검(蘇진背劍)에 기마보를 잡고 오른손으로 검결지를 맺고는 정면으로 뛰어오를 놈을 하나라도 때려잡아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했다.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다. '이십 보, 십오 보, 십 보, 오 보 지금이다!' 휘이잉. '엥?' 잔뜩 자세를 잡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나를 썰렁하게 무시하며 지나친 그들은 마차의 양 방향으로 갈라졌다. 마치 얕은 강물 바닥 위를 범람하며 일거에 쓸어버리는 성난 홍수처럼 말 그대로 산적들을 쓸어버리며 지나가 버렸다. 간혹 살수로 짐작되는 자들이 산적들 속에서 튀어 오르며 피신하려 했으나, 바로 고슴도치 꼴로 전신에 비표를 받아내고는 그대로 떨궈지고 마는 것이었다. 장로라는 작자 둘과 흑의 복면인들의 의외의 합류로 숫자놀음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숨어서 암약하던 살수들까지 일거에 해결해 버리는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산자락 위에서 이를 목도한 대왕채 두목인가 하는 장한 거구 녀석 눈이 더할 수 없을 만큼 댕그랗게 커졌다. "제, 제길, 저 놈들 얘기는 없었잖아. 하는 수 없다. 모두 철수……." 서걱. 그는 말매듭을 짓지 못하고 목에서 핏줄기를 뿜어내었다. 이어서 목과 몸이 스르르륵 분리되더니 그대로 앞으로 굴러 떨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가 서있던 자리에는 날씬한 몸매의 복면 여인이 낫 형태로 휘어져 있는 곡도를 양손에 쥐고 대신 서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곡도에서 시뻘건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철수란 없다. 살고 싶은 자는 싸워라. 인골채, 막가채 두목도 최선을 다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야. 평생 살막의 추격을 받고 싶다면 맘대로 해도 좋다." 사막의 모래바닥보다 더 메마른 듯한 그녀의 목소리를 거절하는 산적은 아무도 없었다. 날카로우면서도 칙칙한 눈매가 사이하게 타오르는 여인, 난 그녀를 보고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전율적인 떨림을 느껴야 했다. 반사적으로 날렵하게 마차바닥에 몸을 깔고는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도록 애를 쓰고 말았다. '변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어두워졌다. 흑룡(黑龍) 일수필살(壹手必殺) 단수연(丹粹姸)!' 철혈국주(鐵血局主)를 바라보는 단수연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필살의 의지가 담긴 그녀의 살기를 받은 국주의 신형이 갑자기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마치 소방의 손바닥 위에 굳어버린 채 가만있던 다람쥐처럼 말이다. 단수연의 손을 떠난 비수가 무엇인지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간다는 살막의 비수, 철호비(徹護匕)잖아!' 철호비가 옴짝달싹 못 하고 굳어있는 국주의 심장을 직격하려는 찰나, 옆의 숲에서 날아든 조약돌과 맞부딪치고 말았다. 물론 철호비는 조약돌을 두 동강 내버리고 그대로 직진했으나, 위력이 크게 감소되면서 방향이 조금 뒤틀렸는지 국주의 심장 대신 젖가슴에 박혀들고 말았다. 철호비도 반쯤 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의 단수연이 날린 철호비가 제대로 들어갔다면 국주의 가슴을 관통하면서 즉사시켰을 게 뻔했다. 움찔거리며 두 눈을 부릅뜬 단수연은 조약돌이 날아온 방향으로 철호비 세 개를 연거푸 날리더니 그대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후미에서 밀려드는 아군은 둘째 치더라도 숨어있는 주령령의 존재가 무척이나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흠, 지금의 단수연이라면 주령령하고 붙어도 크게 손해는 안 볼텐데, 그녀답지 않게 꼬리를 말고 튀네? 하기사 정체불명의 아군이 합류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6-29 08:18:28 고친날 2005-07-14 15:17:49 읽은수 7643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36)-여기까지가 4권 분량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36] 흑의 복면인과 두 장로의 합류로 힘을 얻은 표국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산적 무리들을 제압하고, 숨어 있던 살수들마저도 격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몇 살수들이 소란을 틈타 재빠르게 도주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흑의 복면인 중에서 대장인 듯 한 녀석 하나만이 철호비(鐵護匕)에 찔려 거동이 불편한 철혈국주 옆을 호위하듯 우뚝 섰을 뿐, 다른 복면인들은 표사들을 도와 뒷수습에 나섰다. 복면인들은 경상자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멀쩡했지만, 이번 사태로 마흔 명에 달하던 표사들의 숫자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버렸다. 흑의 복면인은 국주 옆으로 다가서다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가슴 옷자락 끝으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지만, 철호비(鐵護匕)가 박혀있는 부분이 자못 손대기 곤란한 부분이었던 까닭이리라. "들것을 가져와라. 숲 속으로 모셔가서 치료해드리도록 한다." "그만둬. 고작 이 따위 상처로 시간 낭비할 수 없다. 내 상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속히 표국 사상자 파악과 환자 치료, 주변 정리를 부탁한다." "존명!" 철혈국주의 명령에 흑의 복면인은 평소의 그녀를 잘 아는 듯 한 점 망설임없이 물러서 버렸다. 아직은 흑의인들의 정체에 대해서 오리무중(五里霧中)일 따름이었으나, 국주의 수하 신분이라는 정도까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철혈국주는 최량 표사 쪽으로 눈을 돌렸다가 아직도 구토를 하고 있는 그를 보고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두 장로와 그들 앞에서 쩔쩔 매고 있는 초일후 영감, 그 손녀딸마저도 지나쳐 시선을 돌리던 그녀는 이 사태를 강 건너 불구경 나온 사람처럼 느긋하게 관망하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일순간 눈꺼풀을 가느다랗게 내리면서 노려보는 그 시선이 하도 날카로워서 속으로 뜨끔거릴 정도였다. "자네, 이리 와서 나 좀 도와주겠나?" '윽, 나? 나한테 한 소린가? 설, 설마? 깔리고 깔린 다른 표사, 쟁자수들을 놔두고 제일 멀거니 떨어져 있는 나를 불렀을 리가 없지. 그럼, 그렇고말고. 그러니까 일단 무시하자고.' 철혈국주가 왠지 나를 부른 듯한 육감이 강력하게 들었지만,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제발 다른 인간을 대신 부르길 바라면서 말이다. "우작삼(愚作三) 쟁자수! 도와주기 싫은가 보지? 왜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는 것인가? 정녕 비수를 꽂은 내가 거기까지 피를 철철 흘리며 기어가야만 도와주려는가?" 철혈국주라는 외호답지 않게 나긋나긋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힘이 실려있었다. 사태 현장에 있던 인간들 모두가 그녀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으므로 자연히 시선들을 내게로 돌리고 말았다. '니, 니미럴, 거 끈질긴 인간이네. 알았어, 알았다고.' "아, 저, 저 말입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헤헤헷." 부리나케 그녀 앞으로 달려간 나는 잠자코 다음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웬걸? 자기 상처는 아랑곳없이 신기하다는 듯 내 전신 구석구석을 뜯어보는 국주의 호기심 어린 시선 때문에 가시방석에 앉은 듯 좌불안석(坐不安席) 꼴이 되고 말았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녀의 입이 열렸다. "비수 끝에 마비독이 묻어있는 모양이야.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군. 부득이하게도 자네 손을 빌려야하겠으니 잘 부탁하네." "하, 하명만 하십시오. 국주님." "일단 비수를 아주 천천히 뽑아내게." "네, 넵." 국주의 명대로 철호비를 느릿느릿 뽑아내었다. "흐흑." 순간 그녀의 나지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시뻘건 피가 자그마한 분수처럼 찔꺽찔꺽 뿜어져 나와 내 안면을 적시고 말았다. 약간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으나, 잠시 일그러졌던 국주의 표정이 금새 호기심 가득 찬 어린 아이의 그것처럼 변하는 게 더 마음에 걸렸다. "지혈을 해야하겠군. 신봉혈(信封穴)과 천지혈(天地穴)을 번갈아서 집게손가락 끝으로 힘을 줘서 꼭꼭 누르게." "……." "왜 머뭇거리는가? 걱정 말게. 치료를 하다보면 이런 상황은 아주 흔하디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라는 거 잘 알 걸세. 하등 신경 쓸 필요 없네." "저, 저기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일개 쟁자수 아니겠습니까? 견정혈(肩井穴)까지는 알겠는데, 신봉혈(信封穴)과 천지혈(天地穴)의 위치가 어디인가는 도통 모르겠거든요." 내 대답에 국주는 안면 가득히 기이한 미소를 띄우며 얼굴을 내 안면으로 슬그머니 들이밀었다. "정말 모르겠는가? 자네 정도면 좀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주변 표사들이 떼로 죽어 나자빠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정도의 배짱이라면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것, 설마 간단한 혈도 위치조차 모른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 그거야 정, 정신이 없어서요. 눈 깜빡일 여유조차 없었거든요." "호호호호, 좋아. 믿어주지. 내 몸소 친절히 설명해 줄 테니 일단 웃옷을 완전히 벗기게나." "……." "다른 사람 눈은 신경쓸 것 없네. 내가 괜히 철혈국주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지. 날 여자로 보는 골빈 인간은 표국 안에 아무도 없으니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주게." 철혈국주가 무슨 생각으로 내게 이런 일을 맡기는 지는 모르겠지만, 아랫사람인 내가 그녀의 말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철혈국주라 불릴 정도로 표국 일에 대해서만큼은 냉정하다는 유호정 미망인의 반라를 공식적으로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스르륵, 스르르륵. 두근두근, 꿀꺽. 아이를 낳은 중년여인이라 보기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풍만한 가슴과 가느다란 허리가 모습을 드러났을 때,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새빨간 피로 얼룩진 왼쪽 가슴와 새하얀 오른쪽 가슴이 대비가 되어 선정적으로 극렬하게 비쳐졌다. "천지혈(天地穴)은 왼쪽 유두 손가락 마디 하나 바깥 젖가슴 부분을 가리키며, 신봉혈(信封穴)은 유두 안쪽 마디 하나 젖가슴 부분을 일컬음이니 손가락 끝으로 번갈아 꾹꾹 눌러야 하네." "……." 보는 것도 모자라 손가락 끝으로 국주의 젖가슴을 주물럭거리는 입장이 되자 서서히 하복부에 기운이 쏠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참으려해도 불끈불끈 치솟아 오르는 것은 남아로써 어쩔 수 없는 반응이리라. 분명 불룩하게 치솟아 오른 가운데 다리를 눈여겨봤을 그녀였지만, 그에 대해 가타부타 한 마디도 열지 않았다. 오히려 놀려먹는 것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 미소까지 지어 보이는 게 아닌가! "잘 했어. 손가락 힘이 아주 대단한걸. 일개 쟁자수치고 아주 능숙능란하군. 이제 피가 멎었으니 금창약을 바르고 붕대로 꽉 매도록 하게." 상처가 얕지 않았으므로, 금창약을 바를 때마다 가볍게 신음을 흘리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붕대를 꽉 동여맬 때는 통증이 극렬했는지 질끈 깨문 아랫입술에서 핏줄기가 새어나오기까지 했다. 새 혈의경장 윗도리로 갈아입은 그녀는 자신의 피가 잔뜩 묻어난 철호비를 집어들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이 굳었다면서 잘만 움직이네.' "표행 출발 전에 유난히 유서를 쓰기 싫어하는 쟁자수가 한 명 있었지. 난 그가 유서를 쓰게 만들려고 농담 삼아 첩자가 아니냐고 몰아세웠었지." '그거 내 얘기잖아? 그래서 뭘 어쩌자고?'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는 너무나도 의심쩍은 부분이 많아. 자신이 죽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서있는 것도 그렇고, 사람이라면 의례 두려워해야 할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무감각하며, 자신의 안면에 피가 튀는데도 당황하지 않았어. 손가락 힘이 보통 사람에 비해 월등히 강하다는 것도 충분히 의심해 볼만한 부분이지. 작삼 쟁자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 그거야 국, 국주님이 원래 의심이 많으셔서 그렇게 느끼시는 게 아닐까요?" "호호호호, 하나 더 추가야." 내 안면을 두 손으로 덥석 잡은 그녀는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대더니만, 나지막하게 쉰 목소리를 내었다.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살기를 받아내면서 한 점 물러섬없이 당당하게 말대꾸할 수 있는 쟁자수란 존재할 수가 없지. 넌 누구냐?" "무, 무슨 말씀을……?" "클클클, 그렇게 나온다고 해도 다 알아보는 수가 있지." "……." 느닷없이 옴짝달싹 못하게 왼팔로 내 목을 휘감은 국주는 오른손에 들려있는 철호비를 내 턱밑에 갖다 대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철호비의 금속질감이 그 무엇보다도 싸늘하게 느껴졌다. 국주는 이제는 내가 아니라 숲 속을 주시하며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이 곳에 고인이 한 분 숨어 계시다는 것 잘 압니다! 방금 전 날 도와준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자가 당신의 부하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부득이하게 고인을 뵙고자 치졸한 수를 쓰는 것이니 그만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녀의 우렁찬 고함 소리는 산자락 곳곳에 메아리치며 울려 퍼졌다. 그러나, 한동안을 기다려도 철혈국주가 목적으로 삼고있을 주령령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신, 날 잡고 위협해봤자 소용없어. 나 하나 죽는 것쯤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냉혈마녀(冷血魔女)라고. 당신이 아무리 철혈국주(鐵血局主)라고 불려도 그녀와는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아.' 속마음은 그러했지만, 내뱉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주령령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내뱉었다간 그녀가 먼저 내 목숨을 앗아가리라는 것을 불을 보듯 뻔하게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날 부를 때부터 국주의 눈초리가 의미심장해 보인다 싶었다. 혈도 위치를 알려준 것은 내가 소위 잘 나가는 무림인이 아닐까 하고 떠본 것이리라. '그것도 틀렸어. 난 잘 나가는 무림인이 아니라 바닥을 기어다니는 반쪽짜리 무림인이라구. 것도 냉혈마녀의 심심풀이 구타대용으로 존재하는 하루살이 인생이라고.' 턱밑에 갖다대어진 철호비의 싸늘함과 더불어 등짝을 짓눌러오는 국주의 봉긋한 가슴 때문에 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나쁘다면 나쁘고, 좋다면 좋다고 할 묘한 심정이었다. 한동안 정적이 숲 속에 흘렀다. 사태를 짐작한 표국사람들은 쥐죽은듯이 주령령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휴우, 내 착각이었나? 미안하네. 지레짐작이었어도 거의 확신했었는데, 아무래도 아닌가 보이. 그만 가보게." 내 목에서 철호비를 걷어치운 국주는 나와 같은 편이라 짐작했던 주령령이 끝까지 나타나지 않자 상심한 듯, 다른 환자들의 상세와 표국 상황 파악을 핑계로 어물쩡 자리를 떠버렸다. 아마도 나에 대한 의문은 끝까지 버리지 않은 채 유보시켜 둔 것이리라. '그래도 손해본 것은 없군. 어느 누가 감히 철혈국주의 가슴을 이렇게 마음대로 감상하고 어루만져봤겠어? 아줌씨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꽤 괜찮은 몸매를 지니고 있었잖아.'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7-03 17:25:34 고친날 2005-07-24 17:45:34 읽은수 7583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37)-두번째 청부(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37] 철혈국주의 늘씬한 반라를 떳떳하게 구경한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뒤이은 후폭풍이었다. 드러난 확증이 없는 관계로 직접 귀찮게 굴지는 않았지만, 심심찮게 샛눈으로 흘겨보는 뜨끔한 국주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날 보는 다른 이들의 시선도 영 곱지않게 변해 버렸다. 그녀의 심증이라는 것이 표국 내에서 어떤 영향을 발휘하는지 살갑게 아주 잘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초일후 영감은 아예 세 번째 마차 위로 자리를 옮겨왔다. 여전히 두 노장로 앞에서 절절 매는 기색을 보였으나, 내가 의심을 받는 지경에 이르자 기가 확 살아서는 온갖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거 보십시오. 이 놈이 첩자라는 걸 명석한 제 두뇌로 단박에 알아챘다니깐요. 그 스승의 그 제자라고 우리 호정이도 기어코 알아보잖아요." '참 나 원, 스스로 파문서 던져놓고 나왔다면서? 국주 앞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연으로 부르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면서 이제 와서는 장로들 앞이라고 살랑 살랑 꼬리 흔들면서 제자 운운하는 거야?' "갈! 시끄럽다. 그 놈의 입 좀 다물어라. 침 튄다." 깡마른 외모답게 성질 급한 송천(松泉) 장로가 역성을 토해내자 그제야 찔끔해서는 자라목처럼 오그라드는 초일후 영감이었다. 겉보기로는 비슷한 노인네들인데도 눈살 찌푸리며 혀를 차는 영감이나, 그 앞에서 절절매는 영감이 존재한다는 게 조금 우습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호정이의 심증일 뿐이지 않느냐? 내가 보기엔 첩자 노릇을 할 정도로 내공이나 무공실력을 갖춘 젊은이도 아닌 듯 싶구나. 매사 심증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막내 녀석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하기사 제 버릇 남 줄 수는 없는 일이겠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송진(松眞) 장로가 날 두둔해줬다는 것이었다. "하, 하지만, 이, 이번만은 제 육감이 확실하게 ……." "그렇게 똑똑한 놈이 하늘같은 사숙들도 못 알아봐? 안면은 익은데, 생각이 안 나니까 대신 저 머저리 녀석을 갈군 걸 내 모를성 싶더냐? 얼마나 두뇌가 잘났는지 내가 몸소 개봉해주랴?" '머, 머저리? 쳇, 이 빌어먹을 영감이 날 얼마나 안다고 제멋대로 머저리라고 하는 거야?' "……." 결국 두 장로의 반박 같지않은 반박에 백기를 든 초일후 영감의 입방아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다만 그 제자의 그 스승답게 내 뒤통수가 근질근질 가려울 정도로 노려보곤 했다. 사제간이 아니랄까봐 번갈아가며 흘겨봐준 관계로 그렇게 식성 좋던 나는 다섯 째날 아침 기어이 소화불량에 걸리고 말았다. '니미럴, 밥 좀 먹자. 개도 밥 먹을 때는 안 건드린덴다. 끼니때조차 뒤통수가 근질근질하니 숟가락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다. 이 잡종들아!' 사망한 표사들을 대신해 흑의인들 일부가 복면을 벗고 빈 말에 올라탄 채 표행 호위를 겸했다. 다른 흑의 복면인들은 표국 일행 꽁무니 쪽에 슬그머니 붙어서 꽁지 빠지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고인이 된 최 국주가 비밀리에 키우던 표국 정예라고 했다. 즉 혈해진경(血海眞經) 때문에 풍악산(風岳山)에 올라온 애들보다 실력이 뒤쳐진 덕에 살아남은 떨거지라는 소리였다. '그래도 그럭저럭 쓸만하던데, 뜀박질도 잘 하고 말이야.' 드디어 마지막 표물 도착 예정지인 호북성(湖北省)의 무한(武漢)에 다다르게 되었다. 두 길로 갈라선 갈래길이긴 해도 무한이 뻔히 보일 정도로 가까운 길이었다. 망설일 필요도 없이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되는 것이었다. 표물 인수인계가 무사히 끝나게 되어 다행이긴 하지만, 이 지긋지긋한 인간들과의 인연은 앞으로 사흘이나 더 남아 있었다. 표국으로 복귀하는 그 날까지 함께 해야만 하는 것이다. "선두 정지!" 막판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표국 일행을 정지시킨 국주는 품속에 손을 집어넣고 부시럭부시럭 거리다가 조그마한 종이 쪼가리를 꺼내 들었다. 까만 먹선이 꼬불꼬불 그려진 게 언뜻 보였다. 최종 목적지를 나타낸 지도인 듯 싶었다. "뭘 그렇게 훔쳐보나? 첩자 젊은이? 이번에는 또 무슨 흉계를 꾸미려는 게냐?" "……." '내가 상종을 말자. 이 놈의 영감탱이, 더도 덜도 말고 딱 사흘이다. 사흘만 더 참으면 영원히 작별이다. 작별!' 다시 종이를 접어 품속에 집어넣은 철혈국주는 표행의 방향을 약간 틀었다. 무한이 뻔히 보이는 오른쪽 길이 아닌 왼쪽 길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한으로 들어가는 다른 길인가 생각했었다. 그러나, 점점 무한과는 거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 시진은 더 이동했을까? 종국에 도착한 지점은 곳곳이 허물어져 다 쓰러져 가는 토성(土城) 안이었다. 토성 내부에는 건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가늠케 해주는 주춧돌 터만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어 오래 전에 버려진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을 지도 모르는 장소이리라. 짝짝짝짝짝. 느닷없이 울창한 소나무 가지에 가려져 그늘이 드리워져 있던 토성 맨 구석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강남표국이군. 이빨과 발톱이 빠졌다해도 호랑이는 호랑이라 이건가? 표행 완수 축하해." '어라? 꽤나 심금을 울리는 미성이잖아. 혹, 혹시 진미희(鎭美熙)소저나 매염경(梅炎璟)소저에 준하는 미녀가 아닐까?' 두근두근.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그늘에서 천천히 자태를 드러내며 걸어나오는 여인의 미모에 신경을 기울였다. '오옷, 역시 뛰어난 미모를 지닌 여인인걸!' 먼 거리였으나, 상당한 수준의 미인이라는 정도는 한눈에 들어와 보였다. 선녀의 날개옷이라도 되는 양 하늘거리는 자색 궁장의에 검을 찬 모습은 묘한 신비감마저 불러일으켰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양갈래로 쭉 찢어진 눈매가 몹시 신경질적으로 보였다는 것이었다. "아니, 저 녀석은 목화란(木花蘭)이잖아!" "사, 사매! 네, 네가 어째서?" 초일후 영감과 철혈국주가 약속이라도 한 듯 의문의 여인을 알아보았다. '화란? 초일후 영감과 철혈국주 둘 다에게 안면이 있는 여인? 끙, 영감의 제자인가 보군. 에휴, 보나마나 뭔가 비정상적인 정신 체계를 갖추고 있겠구만.' "입닥쳐! 난 더 이상 화산파 사람이 아니야. 유호정! 너한테 진 빚을 갚으러 온 채무자일뿐이다." '짐작대로구만. 하여튼 국주랑 관련된 인간치고 정상인이 없다니까. 그녀가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을 화산파의 미래도 암담하다. 암담해.'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직접 눈으로 보는 게 좋을 거야." 짝짝. 국주의 반문에 코방귀뀌듯 그녀가 박수를 치자 사방팔방 토성 너머에서 수많은 청의인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떨어져 내렸다. 그들의 손에는 란화표국(蘭花驃局)이라고 적힌 큼지막한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란화표국(蘭花驃局)? 무림맹을 등에 업고 최근에 우리 표국의 위세를 뛰어넘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란화표국의 국주가 사매였어?" 쩔렁. 목화란은 대답 대신 제법 묵직해 보이는 열쇠 꾸러미를 바닥에 던졌다. "표물들이나 열어 보시지. 뭘 싣고 왔는지 똑똑히 확인해 보라고." "우리가 뭘 싣고 왔는지는 중요치 않아. 단지 표국 신용에 따라 내용 미상의 표물을 운반할 뿐이다. 여기가 표행의 최종 목적지야. 표물 때문에 왔다면 가져가." "호호호호, 역시 철혈국주라 이거야? 그럼 말을 바꿀게. 표물의 주인으로써 인수인계 방법을 바꾸겠어. 강남표국의 국주가 먼저 표물 내용을 확인해 줬으면 좋겠군." "……." 그제야 마지못해 말에서 내려온 철혈국주는 바닥에 떨어진 열쇠 꾸러미를 주워들었다. 품에서 꺼낸 다른 열쇠로 마차 표물들을 속박하고 있던 쇠사슬들을 하나하나 풀어내었다. 쇠상자와 꾸러미 열쇠의 번호를 맞춰본 그녀는 마침내 첫 쇠상자를 개봉하게 되었다. 끼리리릭, 철컥. 내용물을 확인한 국주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게 표행의 맨 후미에 위치한 나에게도 똑똑히 보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다른 쇠상자들도 연이어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다가 더 못 참겠다는 듯 신형을 목화란에게 휙 돌렸다. 그 바람에 쇠상자 몇 개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내용물을 흩뿌리고 말았다. "꺄아아악!" 비위가 약한 몇몇 여자 표사들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닥에는 말 그대로 토막 난 사체가 들어있었던 것이었다. 썩은 내가 퍼지지 않는 것을 보니 소금에 잘 절여서 넣었던 모양이었다. '젠장, 죽이려면 좀 곱상하게 죽이지. 꼭 토막을 내야겠어? 요즘은 개나 소나 토막살인 하고서 정당방위 어쩌고저쩌고 하던데, 유행이라도 되는 거냐?' 챙! 소금에 절여져서 피부가 쭈글쭈글해진 사체를 확인한 사표두가 분통을 터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이, 이표두! 바로 네놈들이 원흉이었구나! 내 용서치 않으리라!" 분기를 참지 못한 사표두는 검을 뽑아들고는 목화란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그의 반응을 대하는 목화란은 팔짱을 낀 채 지긋이 바라볼 뿐이었다. "멈춰, 사표두! 함정이야!" 철혈국주가 만류했을 때, 사표두는 목화란의 지척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변고인가? 목화란의 앞까지 달려든 사표두는 얌전히 검을 검집에 꼽아 넣고는 그녀의 옆에 가볍게 내려서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듯 란화표국의 그 누구도 가타부타 입조차 벙긋하지 않았다. 그제야 상황을 납득한 철혈국주의 신형이 바르르르 떨렸다. 아무리 철혈국주라 하더라도 사람인지라 연이어 이어지는 충격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네, 네가 어, 어째서?" "호호호호호! 꼴 좋구나. 꼴 좋아."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기분좋게 쾌소를 터뜨린 목화란은 급기야 눈물까지 흘리고 말았다.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내고는 말을 이었다. "유호정, 놀랄 것 없어. 이 사람은 처음부터 란화표국 사람이었으니까. 강남표국의 내부사정 좀 알아보려고 들여보낸 내 사람이었지. 덕분에 강남표국의 내부사정은 손바닥 보듯 훤히 알 수 있었어. 말할 것도 없이 비밀 정예 녀석들의 존재도 알고 있었단 말이다." 네 옆에서 이빨을 빠득빠득 갈던 초일후 영감이 신형을 날려서 비틀비틀 거리는 철혈국주를 바로 잡아 주었다. "네 이년!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냐! 이 따위 인면수심(人面獸心) 같은 짓을 벌리고도 무사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겠지!" "호호호호호, 여전히 착각은 자유시네요. 오늘 이 자리가 누구의 무덤이 될지는 두고볼 일이지요. 나의 일평 오라버니를 채 간 여시같은 년을 필두로 해서 강남표국에 적을 둔 모든 인간들을 여기서 쓸어버리겠습니다." "널 에워싸고 있는 새파란 피라미들을 믿고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 목화란은 자신의 사부인 초일후 영감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빙긋 미소짓기만 했다. 미녀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조차도 그녀의 미소는 왠지 꺼림칙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남은 사흘동안 나더러 첩자니 배신자니 하는 말은 안하겠구만. 내 입장에서는 다행이긴 한데, 국주 입장에서는 불행이라고 해야겠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7-06 13:12:36 고친날 2005-07-06 13:12:36 읽은수 7490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38)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38] "목화란(木) 국주가 믿는 구석이야 바로 우리들이겠지." 저벅 저벅 저벅. 목화란이 나타났던 그늘에서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나온 인간은 커다랗게 각진 머리가 도드라지게 눈에 띄는 대두 영감이었다. 콧수염이나 턱수염 하나 없이 목살이 두 겹, 세 겹으로 접혀있어 더욱 네모나게 보이는 독특한 외모의 영감이었다. '음? 꽤나 안면이 익은 노인장인데. 누구더라?' 그가 나오자 소나무 둥치에서 세 명의 인간이 추가로 떨어져 내렸다. 여인 한 명에 남자 두 명, 그들 중 남자 두 명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백호단 부단주 간지호(干志豪) 녀석과 점창파의 화룡(火龍) 모용천풍(募容天風)이 아니던가! '모, 모용천풍? 이 싸가지없는 배신자 녀석! 혹, 혹시 소방도 근처에 있으려나?' 예전처럼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모용천풍을 보니 배신의 대한 분노와 어쩌면 소방(蘇芳)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어우러져 종잡기 어려운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 선 미녀는 인형과 혼동될 정도로 섬뜩한 미모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특이하게도 반짝반짝 이는 은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동자 또한 진보랏빛을 띄고 있어서 이국적인 미모가 절로 풍겨 나왔다. 입고있는 옷마저 그녀의 머릿결과 같은 은백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무복이었다. '말, 말로만 듣던 색목인에 은발이란 말이야? 히야, 대, 대단히 매력적이다!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완벽해.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고생한 보람이 있군.' 느닷없이 초일후 영감이 무엇엔가 질겁했는지 부르르르 떠는 게 보였다. 옆에 앉아있던 두 노장로도 대경실색(大驚失色)해서는 날렵하게 마차를 박차고 날아올라 선두에 신형을 내렸다. 송천(松泉) 장로가 먼저 말문을 열어 보였다. "놀랍군, 놀라워. 일개 표국을 상대로 빙룡(氷龍)과 화룡(火龍)만으로도 부족해서 십성(十聖) 중 한 명이라는 혈성(血聖)까지 보내올 줄이야! 무림맹이 그렇게나 강남표국을 두려워한단 말인가?" "우하하하하하!" 위이이이잉! 대두 영감이 기분이 째진다는 듯 호쾌하게 웃어젖혔다. 문제는 웃음소리에 강력한 내력이 실려있어 듣는 이들의 내장이 울렁거리게 만들었다는데 있었다. 안 그래도 소화불량으로 은근히 속이 안 좋았던 나는 뱃속에 있던 것을 사그리 게워내고 말았다. 우웩, 우웩, 우웩. '어휴, 사자후잖아. 이런 썩을 영감! 예고도 없이……. 그래도 한바탕 토하고 나니까 오히려 살 것 같다.' 개운하게 속을 비우고 상쾌하게 일어섰다가 표국 일행 이곳저곳에서 신음소리가 진동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표사들이나 흑의 복면인들은 그나마 내공을 급하게 운기해서 대두 영감의 웃음소리에 저항했던 모양이지만, 애꿎은 쟁자수들은 그 한 번의 웃음소리로 칠공에서 피를 쏟고는 영원한 수면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뭐, 뭐야? 쟁, 쟁자수는 나, 나만 남은 거야? 아, 참! 두 노장로도 쟁자수였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군.' "나 혈성(血聖) 하태우(河太愚)를 바로 알아보는 자가 있다니 재밌군. 오해는 말아라. 난 그저 심심풀이로 따라온 것 뿐이다. 북해 빙궁의 빙룡(氷龍) 빙예운(氷銳雲) 공주도 장차 천운학(天雲鶴) 소맹주님의 평생 반려자가 될 고귀한 금지옥엽(錦枝玉葉), 맹 내가 갑갑하다고 떼를 쓰시기에 동행한 것이다. 일개표국을 상대로 모용천풍(募容天風)과 고휘천(高諱泉)이 나선 것만으로도 과분할 지경이지." '하, 하태우?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그 인간이었군. 은발 미녀가 빙룡(氷龍) 빙예운(氷銳雲)? 쩝, 아까운 노릇이다. 하필이면 천운학 개놈의 배필이라니!' "저, 저기 고휘천(高諱泉) 단주님은 급한 볼일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간지호 녀석이 송구스럽다는 듯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운을 떼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그 녀석 감히 제 멋대로 자리를 이탈을 해! 아무리 동창에 적을 두고 있고, 소맹주님이 감싸고돈다 하지만, 너무 제멋대로인 거 아냐!"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간지호가 안면이 벌게질 정도로 허리를 연거푸 숙였으나, 격분한 하태우 영감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덕분에 가까이 서있던 란화표국 표사들 일부가 구토를 하며 쓰러지기도 했다. "아이, 참으세요. 어르신, 우리 란화표국(蘭花驃局) 애들까지 다치잖아요. 고휘천 공자가 작업중인 여인이 환락루에 있다던가? 그러다 보니 간혹 자리를 비우더라구요. 대신 오늘밤은 제가 어르신을 모실게요." "아, 그, 그래? 흠, 흠, 그럼 간만에 몸 좀 풀어 볼까?" 목화란이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하태우를 뒤에서 가볍게 끌어안았다. 입김과 함께 불어넣은 속삭임 덕에 그의 분기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지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곁에 엉거주춤 서있던 빙예운의 볼이 발개지는 것으로 짐작해볼 따름이었다. 차차창! 챙챙! 채채챙! "국주님! 적들의 기습입니다! 국주님!" 표행 후미에서 새하얀 백의무복을 입은 녀석들이 쏟아져 나오며 선제 공격을 해왔다. 얼마 전 화화루(花花樓)에서 일전을 치른 전적이 있었기에 대뜸 그들이 백호단(白虎團)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구태여 그들의 정체를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건 간에 적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테니 말이다. "막아라! 침착하게 대열을 유지하며 대응해라! 흑표두, 후미를 부탁한다!" "존명(尊命)!" 넋을 잃고 있던 철혈국주는 기습을 당했다는 소리에 정신을 바로 차리고는 흑표두라는 작자에게 백호단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흑표두가 바로 흑의 복면인 대장이라는 것을 이 때 알 수 있었다. 선두라고 해서 유리할 것도 하나 없었다. 오히려 후미보다 불리했다. 수적 열세는 젖혀놓더라도 고수들의 실력차도 엄연히 커 보였다. 일단 상대 쪽에는 용 두 마리를 제외하더라도 혈성 녀석이 껴 있으니 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이제 주령령이 모습을 드러내려나? 설마 강남표국이 너덜너덜 전멸할 때까지 기다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움직이지 않으니 당연히 포연강도 나타나지 않았고, 곽철 대협도 그저 눈앞으로 달려드는 백호단 녀석들이나 란화표국 표사들을 갖고 놀듯 상대할 뿐이었다. 팽무진 녀석도 예외가 될 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간지호 이 놈! 잘 만났다!" "너는 팽무진! 크하하하! 어리석은 놈, 조용히 잠적해 있었으면 너 따위는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텐데,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그 목숨, 이번에야말로 끊어주마!"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지. 니 놈은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지독한 죽음의 사선조차 넘어버린 나다. 그에 비하면 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다." '주령령을 말하는가 보군. 뻥을 쳐도 유분수지. 니가 언제 죽음의 사선을 넘었다고 그래? 오히려 죽음의 사선이 니가 불쌍해 보이니까 못 본 척 지나쳐준 거 잖아.' 뭐, 어디에나 예외는 존재하는 법, 특이나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놈이기도 하니 당연한 노릇일 것이다. 간지호 놈 말 그대로 그냥 가만히 처박혀 있을 일이지, 그깟 자존심 하나 못 이겨서 명을 재촉하려 들다니 한심한 일이었다. 조금은 걱정까지 될 지경이었다. '쳇, 중상을 입었다고 해도 두 팔 멀쩡할 때마저 밀리던 녀석이 한 팔로 어떻게 상대하겠다는 거야?' 하태우를 상대로 해서는 초일후 영감과 송천, 송진 장로가 삼재진(三才陣)으로 맞섰으나, 내가 보기엔 풍전등화(風前燈火),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하태우가 전황이 압도적으로 유리하자 그냥 놀아준다는 듯이 상대하고 있었기에 그나마 겨우 버티는 듯 했다. 그가 가볍게 내리긋는 도력(刀力) 앞에 무기력하게도 튕겨나가길 반복할 따름이었다. '쯧쯧, 말만 삼재진(三才陣)이지, 떨어져 나갔다, 붙었다 하는 자철진(磁鐵陣)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겠군.' 모용천풍은 자신의 상대자를 찾다가 철혈국주와 눈을 마주치고는 빙긋 눈웃음지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상대의 기선에 제압된 국주였지만, 그래도 이를 악 물며 그와 검을 맞대기 시작했다. 초초 녀석도 선두로 가고 싶어 안달이 난 듯 했지만, 적의 숫자에 발이 묶여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정작 일의 주모자인 목화란 국주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철혈국주의 몸에 혈선이 하나 둘씩 그어지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빙예운도 다행히 구경하는 입장이었으나, 그녀가 개입하게 되면 왠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두려운 기도가 은연중에 느껴지는 여인이었다. '어쩌면 주령령(周鈴鈴)을 상대로 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7-11 00:14:26 고친날 2005-07-28 10:37:44 읽은수 7412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39)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39] "끄아아악!" "송진 사제!" 하태우 영감을 상대로 삼재진을 펼쳐 간신히 저울추를 맞추고 있던 송진 장로 쪽이 기어이 무너져 내렸다. 단말마와도 같은 비명과 함께 송진 장로가 나가떨어지자 송천 장로가 잽싸게 뒤로 물러나 그의 상세를 살폈다. "저, 저는 걱정말고 그, 그를 막아요. 쿨럭, 쿨럭, 그, 그의 도가 다, 다른 곳을 향하면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막, 막아야 합니다. 쿨럭, 쿨럭." "알았어. 사제, 더 말하지 말고, 잠시 쉬어." "어서... 쿨럭, 쿨럭." "알았다니까! 걱정하지말고 쉬어, 이 바보 녀석아!" "사, 사형." 옆구리가 새빨갛게 물든 송진 장로 입에서 각혈이 이어졌다. 문제는 그 각혈 속에 내장으로 짐작되는 살조각이 묻어 나왔다는 것이었다. '저 영감, 내장이 완전히 박살났다. 대라신선이 와도 살아나긴 글러 버렸군. 그나마 정신 상태가 온전히 박힌 괜찮은 영감이었는데. 아쉽게 되었네. 목화란 궁주는 젖혀두고, 빙룡 빙예운이 껴들지 않았음에도 이 지경이면 표국 괴멸은 시간 문제로구만. 쯧쯧, 도대체 주령령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자신의 사제가 헤어나올 수 없는 중태에 빠진 것을 짐작한 송천 장로는 비분강개(悲憤慷慨)에 빠졌는지 눈물 한 방울을 또르륵 흘리더니 고함을 질렀다. 그의 검에 퍼르스름한 빛이 강렬하게 배여 나오며 현묘한 기운이 응집되는 것을 보니 숨겨진 절초라도 펼쳐내려는 듯 했다. "네 이놈! 용서치 않으리라!" "오호, 극한의 태청강기가 응집된 매화검법(梅花劍法) 발검세로군. 분명 화산파 노물들이로구나. 화산파는 강남표국 일에서 손을 뗀 것으로 아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우리 행보와 화산파(華山派)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우리들 멋대로 하산한 것이다! 널 넘을 수 없음은 잘 안다. 그러나, 최소한 팔 한 쪽은 떼어놓고 말리라! 각오해라!" "재미있군. 오너라!" 차차차창! 차차차차차창! 채챙! 순식간에 펼쳐져 검기와 도기의 충돌이 몇 합에 이르렀는지 어림짐작으로도 파악이 곤란했다. 필시 송천 장로는 이 한 수에 모든 것을 걸고 전력을 다하는 것이리라. 하태우 영감의 안면에 자못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긴장한 표정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어디까지나 잠시였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크크, 여기까지냐? 이 몸이 바빠서 더 놀아줄 수가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군. 그만 푹 쉬어라." 쉬이익. 수세로 멈칫하던 하태우 영감이 공세로 전환한 찰나 눈부신 빛줄기가 송천 장로를 휘어 감았다. 그로 인해 선두에서 겨루던 인물들이 신형을 뒤로 떼어내며 잠시동안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송천 사숙님? 사숙님?" 눈을 부릅뜨고 정지해버린 그를 초일후 영감이 조심스럽게 손을 댔다. 촤아악! 송천 장로의 정수리 끝에서부터 아랫도리 회음부를 정확히 반으로 가르는 핏줄기가 뿜어져 나오며 세로로 비스듬히 이등분되어 버렸다. 그를 잘라버린 하태우 영감의 신형은 피가 흩뿌려질 것을 미리 예감했는지 날렵하게 뒤로 물러나 버려서 한 방울의 피도 묻어나지 않았지만, 송천 장로를 건드려버린 초일후 영감은 고스란히 피분수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후미, 정확하게 절반으로 인체 절단 해부를 해버렸네. 시뻘건 내장이 주르르륵, 지렁이 떼처럼 스멀스멀 끔찍하게 흘러나오잖아!' 다른 강남표국(江南驃局) 표사들이나 흑의 복면인들은 쉴 새 없이 밀려드는 백호단(白護團)과 란화표국(蘭花驃局) 표사들을 상대하느라 선두에 눈을 돌리지 못했다. 당연히 선두 인간들과 할 일이 없어 마차 위에서 빈둥빈둥 노는 내 시야에만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로군. 두 장로가 저 꼴 난 것을 다른 애들이 알았으면, 안 그래도 떨어진 사기가 급감했을 것 아냐? 그나저나 이젠 정말 끝이로군. 휴우, 도대체 나는 왜 따라온 거야?' 철혈국주 유호정은 여인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비명 한 번 터뜨리지 않았다. 다만 인사불성이 된 송진 장로와 고인이 되어버린 송철 장로를 내려다보며 혼자 중얼중얼 거릴 뿐이었다. 아마도 사지에 끌어드려서 죄송하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피를 잔뜩 뒤집어써버려서 혈인이 된 초일후 영감은 목석처럼 굳어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하태우 영감의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검을 쥔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 보였다. "내 손에 더 피를 묻히기 귀찮거든. 기회를 줄 테니 그만 알아서 자결들 하게나. 저 노친네처럼 생고집 피우다가 시신도 제대로 보존 못하는 사태를……?" 하태우 영감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등분이 나버린 고인을 손가락질하려고 오른팔을 들어 보이자 팔목에서부터 팔꿈치까지 소매가 갈라지며 피가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송천 장로는 자신의 장담대로 그의 팔에 결정적인 타격을 남기고 죽은 것이었다. 여유 만만하게 선두 일행을 우롱하듯이 협박하던 하태우 영감의 안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이런 썩을 놈들! 감히 백옥같은 살결에 상처를 남겨! 내 몸소 다 죽여주마! 시신을 염할 수도 없을 만치 난도질 내주겠다!" '백옥 같은 살결? 듣는 백옥이 모욕한다고 자결하겠다.' 분기등등(憤氣騰騰)해진 그는 잔뜩 흥분해서는 버럭버럭 고함을 질렀다. 살기 어린 압도적 기세에 제압 당해버린 철혈국주와 초일후 영감, 그리고, 팽무진 녀석은 자신도 모르게 옴츠려 들어서 오들오들 떨고만 있는 것이 아닌가! '흐유, 이대로 있다가는 다 죽겠군. 이래서야 닷새 간 속병 앓아오며 잠자코 따라온 의미가 없어지잖아. 주령령 이 년의 꿍꿍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더 지켜볼 수만은 없다.' "어이! 대두 영감!" "누, 누구냐! 어느 빌어먹을 상놈의 개자식이 감히! 감히! 어, 어어? 어어어? 너, 넌 ……?" 이번에도 하태우 영감은 말 매듭을 짓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떠억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하고 있었다. "오오, 용케 알아보는군.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 "손자, 손녀 재롱이나 볼 일이지. 왜 기어 나와서 난리야? 지금이라도 그만 들어가 보는 게 어때?" "……." 하태우 영감은 생각하기도 싫은 괴로운 과거가 떠올랐는지 부르르르 떨었다. 안 그래도 작다란 눈을 얇게 내려 뜨며 좌우로 디룩디룩 굴리는 것을 보니 속으로 꽤나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알까? 그가 고민하고 있는 것보다 백 배는 더 갈등하며 떨고있는 내 속을……. 당시 현현자 영감탱이 날 밀어내고 내 몸을 꿰차고 앉았던 덕분에 십성(十聖)이라 불리는 하태우(河太愚) 영감을 갖고 놀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다른 상황인 것이다. '젠장 그만 고민하고 제발 꽁무니 빠지게 사라져다오. 제발, 제…… 헉!' 마침내 결심을 한 듯 주춤주춤 물러서던 그는 느닷없이 몸을 돌리며 내가 자리잡은 세 번째 마차를 향해 쾌속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내가 경악할 새도 없이 다시 되튕기며 본래 서있던 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뭐, 뭐냐? 도대체 뭐냐구! 어? 이, 이 기운은? 설마…….' 익숙하게 와 닿는 느낌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나를 어이없다는 듯 노려보며 서있는 주령령이 보였다.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에 전신에 찰싹 달라붙는 새까만 야행의를 입고있는 그녀가 참으로 기이하기도 했지만, 눈 부분을 살짝 가린 검은 색경이 더 기이해 보였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아, 아니 저 그게……." "됐어. 변명같은 거 하지마. 남자는 모름지기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서 떳떳이 책임질 줄 알아야 해. 자신이 옳다고 믿은 신념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란 말이야." "……." "나쁘지 않으니까." 마지막에 그녀가 한 말은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하게 혼잣말로 중얼거려서 확실치 않았다. 나한테 한 소리인지 스스로에게 한 소리인지도 애매한 말이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뒤이어서 거대한 체구의 흑의 복면인 하나가 후미에서 선두로 날아올랐다. 거대한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날아오르는 그를 보니 누구인지 의문을 가질 것도 없었다. '크윽, 흑의 복면인들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거야? 표사들만 뚫어져라 뒤지고 있던 내가 바보였지. 에휴.' "끄아아악!" 놀듯이 란화표국 표사들을 가볍게 상대하고 있던 곽철 대협도 주변에 있던 적들을 일 검에 쓸어버리고는 선두로 신형을 날렸다. 그의 빈자리는 적미호 부인이 대신 막아섰다. '그렇다면 종리연은? 어디 보자. 역시 거기로 붙었군.' 주령령(周鈴鈴)이 신형을 드러내자마자 그 누구보다 먼저 뒤따랐을 종리연(鐘理戀)은 팽무진(彭無盡) 옆에 바짝 붙어 서서는 달려드는 잔챙이들을 가볍게 처리하고 있었다. 마치 팽무진의 배후를 안전하게 지켜주려는 듯 말이다. "보아하니 빙룡이 움직일 것 같군. 그녀 또한 변수라면 변수, 내 상대로 부족함이 없어 보여. 우리 전부가 선두에 붙었으니 당연히 후미랑 측면이 빈다. 측면 란화표국 표사들은 무시해도 될 정도로 급조된 나부랭이 집단, 문제는 후미지. 후미는 니가 맡아." "네? 저, 저요? 헤헤헤헷, 제가 감히 어떻게……." "평상시 아침 수련 때 하던 만큼만 해. 그럼 돼." "아, 아니 그, 그것은 말 그대로 수련이고, 이것은……."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만 내뱉은 그녀는 언제 챙겨왔었는지 내 면전으로 철봉을 디밀었다. 얼떨결에 엉거주춤 철봉을 받아들자 느닷없이 내 뒷덜미를 우악스럽게 쥐어잡은 령령은 날 그대로 후미로 날려 버렸다. 정확히는 백여 명의 백호단 아그들이 바퀴벌레처럼 드글드글 몰려있는 한 가운데로 날 던져 버린 것이었다. "으아아악! 사람 살려!" 그로부터 한 식경동안 끔찍한 악몽이 시작되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7-14 15:17:03 고친날 2005-07-14 19:22:25 읽은수 7441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40)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40] 쿠웅! "아이쿠야!" "……." 그녀의 무시무시한 악력에 휘둘려 손발을 허우적거리다가 떨어져 내린 지점은 다행스럽게도 푹신푹신한 곳이었다. 엉덩이가 조금 욱신거렸지만, 참아줄만 했다. 적어도 어느 불행한 인간처럼 개거품 물고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일은 건너뛰었지 않은가! '무지막지하게 몰상식한 년, 아무리 밑바닥 막둥이 신세라 해도 어엿한 인간이거늘, 그냥 낚아채서 집어던져? 내가 만만하게 보이는 모양인데, 너 그러다가 언젠가 큰 코 다칠 날 있을 거다. 내 기필코, 기필코! 이대로는 안 넘어간다. 어떤 식으로든 복수를 하고 말 것이야!' "……." 막 흑검대 녀석들을 치려고 준비중이던 백호단 아해들이 잠시 얼어붙었다.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쟁자수 하나가 뜻하지 않게 자기네 동료 하나를 중태로 밀어 넣기는 했는데, 죽여야 하나 살려야 하나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기사 무림맹 백호단 체면에 일개 표국 쟁자수를 찌르자니 자존심이 상하겠지. 그럼 난 이 틈에 실례.' 서로 찌를까 말까 눈치를 보는 새 슬며시 빠져나가려는 찰나, 누군가의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 나왔다. "살인멸구(殺人滅口)!" '이런 썩을, 어느 미친놈이 다 된밥에 재를 뿌려!' 채채채채챙! 퍼억. "끄아아악!"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백호단 아해들의 검이 일시에 떨어져 내렸다. 본능적으로 제일 가까운 곳에서 검을 뽑아들던 녀석의 가슴팍에 철봉을 찔러 힘껏 밀어 버리면서 그 자리로 몸을 내뺐다. 초식명이고, 뭐고간에 떠올릴 틈도 없이 원초적 본능이 이르는 대로, 자연의 섭리대로 물 흐르듯 신형을 이끌었다. 휘이익, 차창. "어디다가 칼질이야. 조심해!" "앗, 미, 미안." "제기랄! 저 놈 잡아! 먼저 잡고 나서 죽여!" 주령령에게 얻어맞는 때도 그러했듯이 그들의 가랑이 사이로 몸을 던져 넣기도 하고 떼구루루 구르기도 하면서 요리조리 약삭빠르게 도망 다녔다. 칼을 휘두르는 게 한 박자 늦은 그네들은 기어이 서로 칼부림하는 재미있는 작태까지 보여주었다. '나 만큼이나 정신들이 없나보군. 내 원망말고 날 여기에다 던져 넣은 미친 령령이나 욕해라.' 숨가쁘게 그네들 사이를 뛰어 다니면서 막히면 아무나 인정사정없이 후려쳐서 빈틈을 만들었다. 조금이라도 빈 공간이 있으면 몸을 날려 그네들의 손아귀를 피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흑의 복면인들과 대치했기에 정신없이 병장기를 휘두르는 백호단 아해들의 등짝까지 보게 되었다. '오옷, 이거 거저먹기잖아. 내가 좀 편해지자면 흑검대 숨통을 터 줘야겠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백호단 아해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쳤다. "끄아아악!" 그런 식으로 추격을 피하면서 인접해있는 백호단 아해들의 뒤통수를 날렸다. 그 덕택에 운신이 자유로워진 흑검대 녀석들은 내 뒤에서 헐레벌떡 쫓아오는 백호단 녀석들의 발을 붙잡아 주었다. 그들이 갈팡질팡 하면 잽싸게 신형을 돌려 그들에게도 똑같이 뒤통수를 날려 버렸다. 퍼어억. 퍽. "끄아악! 끄악!" "흑검대보다 저 놈을 먼저 잡아! 어서!" '이야아. 이거 한 방이네. 이 재미 때문에 눈 가리고 수박 깨는 놀이가 유행하는 것이군.' 요령이 생기자 생각없이 백호단 속을 휘젓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흑검대와 대치한 녀석들의 머리통을 날려 그네들의 진형을 흩뜨렸다. 뒤따르는 놈들의 허점이 차츰차츰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도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주령령에 비하면 백 배는 쉬운 일이었다. 퍽, 퍽, 퍽.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백호단 아해들의 뒤통수를 신나게 날렸다. 한 번 흐름을 타기 시작하자 답답하게 몰려있던 힘이 강둑이 터지듯 쏟아져 나와 내 스스로가 주체할 수 없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 했다. 몸을 스쳐가는 바람의 거친 부드러움을 느끼며 정신없이 철봉을 휘둘렀다. 마치 무당이 신내림을 받아 신명나게 춤을 추는 기분이었다. 백호단 아해들이 철봉에 머리통을 맞고 비명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질 때마다 짜르르한 전율이 전신을 휘어 감았다. '이것인가? 이 기분 때문에 많은 무림인들이 무공에 목숨을 거는 것인가?' 한 식경정도 정신없이 철봉을 휘두르다보니 어느 새 몸 성히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백호단 녀석들이 안 보였다. 대신 등뒤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날렵하게 신형을 돌려 철봉을 날렸……. 퍼억. '허억, 흑, 흑의 복면? 흑검대 녀석이잖아.' 녀석은 왜 자신을 쳤냐는 듯 날 향해 부들부들 손가락질을 하다가 축 늘어져 버렸다.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맥을 짚어보니 다행스럽게도 숨은 제대로 붙어 있었다. 마지막 순간, 늦지 않게 힘을 뺏기에 목숨에 지장이 없는 것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일어서 보니 주변에 서있는 이들은 서른 채 안되게 남은 흑검대 녀석들밖에 없었다. 특히 흑표두 녀석이 바짝 다가왔을 때에는 속이 살금살금 탈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꿀꺽. "하핫, 저, 저기요. 그, 그게 실, 실수걸랑요." "아오. 조심성 없이 대협의 뒤로 다가선 우리 대원의 실수요. 녀석이 죽었다고 해서 대협은 하등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협이라……. 듣기 나쁘지는 않…….' "아, 아니, 아직 죽지는……." "어차피 귀공의 도움이 없었으면 모두 검하고혼(劍下孤魂)이 되었을 몸들입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소. 훗날 기회가 되면 갚도록 하겠소." "그러니까, 아직, 안 죽었……." "표국 내 여표사들한테 추근덕 거리거나, 놀음으로 다른 표사들 월급까지 싹 쓸어가곤 해서 내 속은 물론 국주님 속까지 많이 썩였지만, 그래도 근본은 착한 녀석이었소. 고향에 안부라도 잘 전해줘야……." "아직 안 죽었다니깐요! 뭐해요? 치료 안 하고! 이대로 있다가 정말 사람 하나 죽이겠어요!" "……." 그제야 녀석의 맥을 짚어 본 흑표두 녀석은 왜 말끔하게 죽지 않고 귀찮게 살았냐는 듯 눈살을 찌푸려 보였다. 얼마나 미운 살이 박혔으면, 다른 흑검대 녀석들까지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험험, 일단 표국 표사들부터 도울 일이지요. 그들은 엄연히 우리 표국의 근간입니다. 저희들은 그저 어둠 속에서 거들기만 하는 존재지요. 대협께는 국주를 부탁드립니다. 그럼." 겸염쩍다는 듯이 머리에 커다란 혹이 튀어나온 녀석을 내버려둔 흑검대 대원들은 쏜살같이 다른 표사들을 돕기 위해 신형을 날렸다. '쩝, 미운 오리 새끼로군. 알만하다. 알만해. 살면 니 운이다. 죽어도 내 탓하기 없기다.' 시선을 돌려 표국 선두를 바라보니 전세가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적의 가장 핵심 고수인 하태우(河太愚)는 거대한 체구의 흑의 복면인을 상대로 해서 밀리지는 않았으나, 우세하지도 못한 팽팽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자신을 상대로 대적하고있는 인간이 흑검대 중에 존재한다는 것에 적잖이 당황한 듯 싶었다. 그 흑검대 사나이가 포연강(鮑緣强)이라는 것은 눈 가리고 아옹해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하태우 영감은 아직 눈치 못 챈 듯 싶었다. 화룡(火龍) 모용천풍(募容天風)을 상대로 해서는 당연히 광룡(狂龍) 곽철(郭鐵) 대협이 실력을 보이고 있었다. 왠지 모용천풍의 안색이 살짝 달아오른 것이 무척 기뻐하는 티가 역력했다. '혹시 저 놈, 남색을 좋아하는 변태였던가? 그래도 곽철 대협은 남색가들이 좋아할 만한 인물이 전혀 못 되는데…….' 간지호 녀석한테는 팽무진이 붙어 있었으나, 밀리는 티가 역력했다. 그럼에도 팽팽한 전세를 유지하고 있는 데에는 물어볼 것도 없이 종리연의 간섭이 크게 작용했다. 녀석은 주변 정리를 하면서 간지호의 공격흐름을 암기 등으로 적절히 끊어주고 있었다. 그로서는 팽무진보다는 오히려 종리연의 기습이 신경 쓰이고 있을 것이었다. 유호정 철혈국주는 국주답게 란화표국 목화란(木花蘭) 국주와 맞붙고 있었다. 순수 실력만 따지면 철혈국주가 밀릴 이유가 없었지만, 악이 바짝 오른 목화란 국주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초일후 영감은 배신자 사표두를 비롯한 란화표국의 표두를 상대로 잘 싸우고 있었다. 어쩔 때는 손의 병장기가 아닌, 입으로 싸우는 느낌이 들 정도로 꺼림칙한 욕설과 상호비방을 일삼고 있었다. 무엇보다 선두 우두머리급 대결의 백미는 바로 수라삼살(修羅三殺) 주령령(周鈴鈴)과 빙룡(氷龍) 빙예운(氷銳雲)의 접전이었다. 북해빙궁 공주라는 그녀답게 빙공 위주의 공격을 퍼부었는지 수많은 얼음 파편들이 천지에 뒹굴고 있었다. '빙예운, 대단한데, 감히 주령령을 상대로 대등한 접전을 펼치고 있네? 주령령이 누구냐? 진두한조차 잡은 전적이 있는 초절정 고수잖아.'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7-18 11:13:40 고친날 2005-07-18 18:35:09 읽은수 7429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4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41] 까놓고 말해서 주령령과 빙예운 소저의 대결 쪽에 지대한 관심과 함께 눈길이 갔다. 같은 떡이라 해도 보기 좋고, 맛깔 있어 보이는 쪽에 손이 먼저 가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대부분 고수들 대결에서 미관상 강렬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대두 영감 하태우와 거대한 덩치의 흑의 복면인 포연강의 대결이 가장 눈살 찌푸려졌다. 그나마 나아 보이는 유호정 국주와 목화란 국주의 대결도 두 여인이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라도 만난 듯 핏대를 올리고 싸우는 덕에 퍼져 나오는 살기가 너무 강했다. 당연히 고개가 저절로 틀어졌다. 주령령(周鈴鈴)의 본 바탕이야 심심하면 꿈속에서 볼 정도로 잘 알고 있으니 검은 색안경 띠를 쓰고 있어도 그녀의 미모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찰싹 달라붙은 야행의의 얇은 질감 덕에 령령의 몸매가 유감없이 드러나기도 했다. 맨 살결이 아닌 것이 좀 아쉬운 일이기는 했지만, 돌려 생각하면 나쁘지도 않았다. 평상시 수련 핑계로 얻어터질 때야 도망 다니느라 육감적인 치파오를 입은 그녀일 망정 제대로 감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저 한 시진이 지나 쭉 뻗었을 때 몸을 돌려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닥에서 뒹구는 채로 올려다보는 게 전부일 따름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마차 마부석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감상하는 여유란 좀처럼 오지 않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령령의 잘록한 허리나 볼록 솟아 나온 둔부의 탄력이 장난이 아니군. 가슴 크기도 한 손에 넉넉히 쥐어지고도 남을 만큼 큰데다가 탄력 또한 여간내기가 아니란 말씀이야. 좋아, 좋아. 쩝, 육포 여분이라도 있으면 좀 뜯으면서 구경할텐데.' 그녀와 막상막하로 빙검의 위력을 펼쳐 보이고 있는 빙예운 소저의 이국적 미모도 한 몫 했다. 몸매만 따지면 령령에 비해 한 수 아래였으나, 푸른 빛깔이 감도는 눈망울이라던가 비단보다 더 반짝이는 은백색 머릿결, 상아보다 더 새하얀 살결이란 강호 어디에서도 쉽사리 구경할 수 없는 진기명기 미녀 아니겠는가! 보검으로 보이는 그녀의 검에서 얼얼한 냉기가 솟구쳐 나와 주령령의 검에 부딪힐 때마다 얼음 결정이 튀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비록 무서운 냉기이긴 했지만, 주령령의 기운을 범접하기에는 조금 모자람이 있었는지 령령에게 제대로 된 결정타가 와 닿지는 않았다. '오히려 빙예운 소저 쪽이 좀 아슬아슬한걸. 비슷한 위력이라면 신법이라던가 임기응변이 더욱 능숙능란한 주령령 쪽이 아무래도 더 유리할 테지. 시간을 끌면 빙예운 소저는 십중팔구 궁지에 몰릴 거다. 정녕코 아쉬운 일이지. 령령이 잘 설득해서 내 부하로 줘도 좋을텐데, 무리일까? 크크크, 역시 나도 남자인 게로군.' "야! 너 뭐해. 그렇게 빈둥빈둥 놀지만 말고 좀 도와!"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마화(魔花) 적미호(赤美狐) 부인이 진땀을 뻘뻘 흘리며 란화표국 표사들을 쓰러뜨리고 있는 게 보였다. 묶어 올려 감추었던 머릿결이 풀려서 그녀의 신형을 따라 치렁치렁하게 흔들렸다. 꽉 매어서 가슴을 가렸던 가슴붕대가 풀렸는지 싸우다가 숨쉬기 힘들어서 스스로 끊었는지 몰라도 풍만한 가슴마저도 덩달아 출렁거렸다. '아무리 남의 부인이 되었어도 뇌살적 미모나 몸매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군. 으휴, 곽철 대협이 부럽다. 부러워.' 채채챙, 슈욱, 서걱. "허허헉, 뭐 하냐? 빨리 좀 거들어." 빠직 빠직. "얼마나 주실 건데요?" "뭐, 뭐야?" "에이, 잘 아시면서,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어요? 저한테 할당된 백호단 아그들은 잘 정리되었거든요. 그러니까, 엄연히 제 할 일은 다 한 셈이잖아요. 그럼, 그 밖의 일은 시간 외 할당이거든요." "씨이, 됐어. 거들지 마. 힘들어 죽겠으니까 저리로 좀 꺼져." "아, 혹시 육포 좀 남는 것 없어요?" "……." 그 말에 확 토라졌는지 적 부인은 입을 다물고는 대신 란화표국 애들에게 한 층 매섭게 칼질을 퍼붓고 있었다. 아마도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녀석들의 상판을 내 얼굴로 겹쳐보는 듯 싶었다.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적 부인이 칼질하는 자태가 꽤나 요염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부담없는 성격 또한 맘에 들었다. 인물값 한다고 외모가 잘난 인간들 치고 남자건 여자건 까다롭지 않은 녀석이 없다. 적어도 적미호 부인은 그 범주 바깥에 있다해도 될 것이다. '노는 것도 좀 쑤시는 일이구만. 심심한데 또 누구를 놀려 먹을까나?' 두 번째 마차 지붕 위에서 떼굴떼굴 구르다가 등을 벅벅 긁었다. 따스한 한낮 햇살에 나른해지면서 스르륵 잠이 오려고 했다.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창칼 소리, 비명 소리를 음미하며 하품과 함께 기지개를 한껏 펴다보니 문득 날 공격하려 들었던 괘씸한 대두 영감의 안면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하태우 영감이 있었네. 이래봬도 내가 빚지고는 못 살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으렷다.' 싸움의 박력으로는 최고라 할 만한 대두 영감과 거구 복면 포연강이 대결을 벌리고 있는 자리까지의 거리는 일곱 장이 조금 넘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지만, 먼 거리도 아닌 어정쩡한 거리였다. 물론 보기만 해도 흉흉한 기색이 넘치는 그들 사이로 뛰어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단지 하태우 대두 영감을 아주 약간 놀려주는 일만큼은 지금이 아니면 못 할 일이었다. '포연강한테 손발이 묶이고, 정신까지 팔렸을 때 써먹어야 하지 않겠어?' 철봉을 꼭 쥐고 일어섰다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살아남은 흑검대 녀석들이 합류해 들어오자 란화표국 녀석들은 모래사장 위에 세운 지푸라기 집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다만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했다. 그대로 시선을 돌려 대두 영감을 노려보면서 젖 먹던 힘까지 전력을 다해 신형을 날렸다. 철환을 떼어놓고 왔기에 얼마나 몸이 가벼워졌는지 시험해볼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귀밑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결이 점점 거세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여기서 첫번째 마차를 박차고 다시 돌아서…….' 슈우우우욱. "어어어어, 으악!" 마지막 한 걸음을 남겨두고 되튕기려는 찰나, 발 밑이 허전한 것을 느껴야만 했다. 네 번째 도약 때 과도하게 힘이 실려 붕 떠버린 것이었다. 아마도 얼결에 붕조신법이 발휘된 모양이었다. 하여튼 현현자 영감이 안배해놨다는 일 치고 도움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어이없게도 그냥 놀려주기만 하려던 내 의도와 상관없이 그대로 대두 영감의 안면을 향해 날아가게 되었다. 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정신없이 청룡출수(靑龍出水)를 그의 안면으로 연이어 날리는 것뿐이었다. "흥, 가소롭구나! 그 따위 뻔히 보이는 삼재검법으로 날 우롱하려 들다니 용서할 수 없다!" 탱! 탱! 탱! 탱! 청룡출수(靑龍出水)로 펼쳐진 철봉 찌르기가 그의 도에 막힐 때마다 반탄력이 느껴져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 한 착각이 들 정도로 저릿저릿했다.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간 그의 도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눈부신 햇살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린 사이 도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온 듯 싶었다. '이런 젠장. 막, 막아야…….'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상태 그대로 두 손으로 철봉을 들어올렸다. 이제 죽고 살기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체념이 들었다. 슈우욱. 촤아아악! '으윽, 내 목이 잘리는 소리인가? 한 많은 점소이 인생이 이렇듯 어이없게 작살나는구나.'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목이 잘려나가는 통증 대신 뒷목이 잠시 뻐근해옴을 느꼈다. "눈 떠. 언제까지 안겨있을 셈이야?" '엉? 주령령의 목소리?'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눈을 떠보니 태어난지 얼마 안 지난 갓난아기처럼 어색하게 그녀 품에 안겨있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기이한 상황에 잠시동안 멀뚱멀뚱 주령령의 안면을 쳐다보다가 어떻게 된 일인가 정리를 하려는 찰나였다. 쿠웅. "아이쿠야!" "눈을 떴으면 내려서야지. 뭘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야?" '오옷, 죽지 않고 살았구나. 그럼, 목이 잘려나간 소리는?' 재빠르게 주변을 돌아다보니 거친 숨을 몰아 내쉬고 있는 거대한 체구의 흑의 복면인, 즉 포연강의 발치 아래 떼구루루 굴러다니는 거대한 머리통이 보였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하태우 대두 영감의 머리통이었다. 내 곁으로 성큼 성큼 다가선 포연강이 느닷없이 호쾌한 장소를 터뜨리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하하하하하! 잘 했네. 잘 했어. 덕분에 하태우 녀석의 빈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우리 막내답다." "예? 제, 제가 한 일이 있나요?" "모르긴 몰라도 너한테 꽤나 겁먹었던지 순간적으로 날 잊고 너한테만 신경을 쓰는 거 아니겠냐? 당연히 나의 날랜 도로 깨끗이 처리해줬지." "에헤헤헷, 경하드립니다. 이제 형님의 명성이 강호천지에 자자하게 울려퍼지겠군요." "암, 그렇겠지. 자네 명성도 아주 쪼끔은 강호에 퍼질 게야. 하하하하핫." 포연강과 내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자축하고 있는 상황에 사박사박 다가온 주령령은 한심하다는 듯이 손사래와 함께 코웃음을 쳤다. "오라버니, 그만 하세요. 정체를 감추려고 복면까지 뒤집어 쓴 거잖아요. 괜스럽게 명성 운운할 때가 아니라구요." "응? 아, 그렇지. 하하하하! 내 정신 좀 봐. 표국 놈들이 남았잖아. 좀 도와주고 올게." 난감하다는 듯 멋쩍게 뒷머리를 긁던 그는 그대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화룡(火龍) 모용천풍(募容天風)과 빙룡(氷龍) 빙예운(氷銳雲)은 옛적에 자취를 감춰 사라져 버렸고, 간지호 녀석과 목란화 국주는 발을 빼지 못했는지 사로잡혀 있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된 돌아간 거야?' "다른 데 볼 것 없어. 방금은 운이 좋아서 목숨을 건졌지만, 다음에는 절대로 그런 요행을 바라지마." 무엇 때문인지 살짝 열이 오른 듯한 주령령이 팔짱까지 끼고서 날 째려보고 있었다. '또 뭐가 불만인데? 못 해도 난리고, 잘 해도 난리법석이야.' "구룡(九龍)도 감당 못할 니 실력으로 감히 십성(十聖)한테 덤벼? 오라버니가 아니었으면 넌 벌써 이 세상 하직했어. 그 뿐만이 아니야. 이 수두룩한 상처들을 봐. 백호단 녀석들이 널 만만하게 봐서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알도록 해." 그녀 말대로 내 몸을 내려다보니 못해도 네 다섯 군데 정도 칼질 당한 흔적이 있었다. 실선처럼 가늘게 칼자국들이 나있었던 것이다. 아마 현현자 영감이 말한 구타심결(毆打心訣)의 도검불침(刀劍不侵) 능력 때문인 듯 했다. 별 효능이 없다고 여겼는데, 아주 약간은 쓸모가 있다고 해야할까? '쳇, 그래도 이 정도 상처만 입고 백호단 녀석들 뒤통수를 날릴 정도면 잘 한 것 아니야? 나 같은 보통 점소이한테 도대체 뭘 바라는 거냐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7-22 17:23:44 고친날 2005-07-22 17:23:44 읽은수 7379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4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42] 백호단은 어떤 미꾸라지 한 마리 덕에 흑검대에게 어이없게 지리멸렬 당해 버렸다. 철썩 같이 믿었을 십성 하태우가 죽고 화룡과 빙룡이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란화표국(蘭花驃局)은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거듭난 강남표국(江南驃局)의 힘에 일방적으로 박살나게 되었다. '후후훗, 그 어떤 미꾸라지가 바로 나란 말씀이야. 흠, 그러고 보면 나도 실력이 약간은 늘어난 것일까?' 애초에 란화표국 표사들은 머릿수나 채우기 위해 아무렇게나 긁어모은 어중이떠중이 낭인 집단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그들이 정예 무사나 다를 바 없는 흑검대(黑劍隊) 녀석들을 당해낼 리가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여력이 남아돌게 된 포연강이나, 곽철 대협, 초일후 영감이 가세를 하니 일방적 도륙이 될 수밖에 없었다. "팽무진 오라버니, 조금만 참으세요. 조금만요." "나 괜찮다니까. 사람 무안하게 여기서 이러지 마." "괜찮긴요. 상처가 꽤나 깊어요. 검상은 그때, 그때 바로 바로 치료를 해줘야 흉터로 안 번진다구요." "……." '언제나 예외는 존재하지. 언제나…….' 한 팔로 백호단 부단주 간지호를 상대하기에는 아직 무리였는지 여기저기 얕은 검상을 입은 팽무진(彭無盡)의 모습에 아연실색 넋이 나간 종리연(鐘理戀)이 호들갑 떠는 장면은 단지 눈꼴 시림에 다름 아니었다. '젠장, 한 쌍의 바퀴벌레 같으니…… 염장 좀 적당히 질러. 이 화상들아!' 상황이 좋은 쪽으로 급진전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혈의경장 철혈국주의 시뻘겋게 달아오른 안면은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포박되어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서는 분하다는 듯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목화란 국주를 지긋이 날카롭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에이, 참 나 원, 한 쪽에서는 호들갑 난리법석이지, 그 바로 옆에서는 삭막한 분위기 발산 중이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좀 피해주자.' 살금살금. 덥썩, 질질질질. 슬그머니 내빼려던 찰나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령령의 가냘픈 손아귀에 우직하게 뒷덜미를 잡힌 나는 그대로 그녀 뒤에 서야만 했다. '한 명 정도는 내 뒤에 호신위처럼 서있어 줘야 내가 국주와 말하기 편해. 오라버니나 곽철 대협이 서있으면 좋겠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시간 많이 남아도는 너라도 서있어야 할 것 아니야!' '쳇, 괜시리 난리야.' 거침없이 나무라는 주령령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이 머릿속을 헤집어 놔 버렸다. 별 수 있겠는가? 힘없는 내가 그대로 따라 가줘야지. 두 국주간에 교차되는 묘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다른 곳에서 울려 퍼지던 시끄러운 창칼 소리, 고함 소리가 점차 수그러드는 것 같았다.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둘 사이의 고요하면서 살벌한 침묵은 유호정 국주의 나지막한 한 마디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남길 말 있어?" "호호호호, 패자가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 절치부심(切齒腐心), 늙은 색마 녀석들에게 몸까지 바쳐가며 이 날을 기다려 왔었다. 결말이 어떻게 나건 니 년이 죽어나가는 꼴만 목도할 수 있었어도 이렇게 하늘이 원망스럽지는 않았을 거다." "나도 알아. 잠시동안이었지만, 하늘이 노랗게 보이더군. 오라버니를 잃은 후 태어나서 두 번째로 보는 노란 하늘이었지." "……." "그런데, 왜 그렇게 날 미워하는 거야?" "흥,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겠지? 우린 처음부터 오라버니를 사이에 둔 연적이었어. 네가 사이에서 훼방만 놓지 않았더라도 오라버니는 내 차지였을 거라구. 오래 전부터 무림맹에 적을 둔 내가 그와 이어졌다면 그렇게 비참하게 세상을 뜨는 일도 없었을 거야. 다 너 때문이야. 결국 오라버니가 죽게 된 것은 바로 너 때문이라구!"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도 잊지마. 날 먼저 유혹한 것은 그였어. 내가 아니였다." "……." "할 말은 그것으로 끝이야?" "아니, 아직 하나 더 남았다. 오라버니의 아들을 보고 싶다." "나의 아들이기도 해. …… 그래도 불러주겠어." 눈을 감았다가 심호흡을 들이킨 유호정 철혈국주는 뒤를 돌아다보며 소리쳤다. "량! 량아! 이쪽으로 오너라!" "……." 잠시 후에 최량이 표사들 사이로 비실비실 쭈뼛쭈뼛 나타났다. 얼마나 욕지기를 했는지 얼굴이 노랗게 떠버린 데다가 더욱 노란 위액이 입주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와 동문수학한 사매다. 잘 기억해둬라." 비실비실거리던 최량(崔良)의 눈빛이 잠시 번뜩였다면 내 착각일까? 반짝임은 섬광처럼 나타났다가 그보다 더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오, 오라버니……." 최량의 얼굴에서 고인이 되어버린 최 국주의 향취를 느꼈는지 목화란 국주의 두 눈가에 눈물이 고여 들었다.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또르륵 흘러내리는 순간, 한 줄기 빛살이 눈앞을 갈라버렸다. 촤아아악! 단칼에 베어진 목화란 국주의 머리는 그대로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분수처럼 비산하는 새빨간 핏줄기가 후두두둑 떨어져 내렸다. 마치 피비가 쏟아지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우웨에엑! 우웩! 우웩!" 지척에서 그녀의 최후를 맞이한 최량은 피비를 맞으며 욕지기를 토해내었다. 더 게워낼 것도 없는지 위액만 뱉아낼 뿐이었다. 유호정 국주의 안면은 질척하게 뿜어져 나오는 피비로 시뻘겋게 물들고 있었지만,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목석같이 굳어있는 자태라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당최 알아챌 수 없는 아줌씨였다. 피비린내 속에 노릇한 냄새가 섞여 나왔다. 그 발원지는 바로 간지호 녀석의 바지춤으로부터 퍼져 나오고 있었다. 녀석은 피비가 쉼없이 뿜어져 나오는 목화란 국주의 목 절단면을 떡 벌어진 입과 함께 동그랗게 부릅떠진 눈으로 목도하면서 덜덜 떨고 있었다. 노릇한 지린내를 맡은 철혈국주의 무표정한 눈동자가 간지호 녀석에게로 굴러갔다. 푸욱. 그녀의 검이 주저없이 간지호 녀석의 입 속에 꽂히고 말았다. 단박에 고통없이 최후를 맞이한 목화란 국주와는 달리 놈은 한동안 발광을 해야만 했다. 국주는 아주 천천히 검을 꽂아 넣었다. 마치 그의 마지막 발광을 즐기는 듯 유려한 자태로 말이다. 검 끝이 간지호의 항문을 뚫고 나와서야 생을 향한 그의 마지막 발광이 끝을 보였다. 칼자루까지 쑤셔 박아버린 철혈국주(鐵血局主)는 그의 최후를 음미하듯 지켜보다가 검을 다시 뽑으려 했으나, 그녀의 무지막지한 악력으로도 검은 뽑히지 않았다. "젠장! 썩을 놈!" 검을 포기했는지 간지호의 턱에 발길질을 해버린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혈인이었다. 안 그래도 혈의 경장을 입고 있었던 그녀의 전신이 혈인 그 자체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사매를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것에 대해서 자책감이 든 것인지 자신 때문에 표국 사람들이 희생당한 것에 대한 울분이 북받쳐 왔는지 철혈국주는 한동안 미동도 안하고 그대로 서있기만 했다. 나머지 애들 정리가 끝났는지 국주와 마찬가지로 강한 피비린내를 풍기는 흑표두가 눈치없이 다가왔다. "국주님, 란화표국 포로들 처리를 어떻게 할까요?" "……." 그의 말에 제 정신으로 돌아온 철혈국주는 신형을 빙글 돌려 두 손을 등뒤로 포박되어 끌려온 포로들을 하나 둘 눈여겨보았다. 원망서린 듯도 하고,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는 듯도 했다. "그들의 처리는 저에게 맡겨 주시면 안될까요?" 주령령이 나서자 두 눈을 반짝거리며 의외란 뜻을 보인 국주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은인의 뜻대로 하시지요." "감사합니다." 주령령(周鈴鈴)은 장갑을 벗고는 맨손으로 그들 앞으로 나섰다. '뭘 하려는 거야? 고문이라도 하려나?' "살, 살려주시오! 우린 그저 고용된 용병들일 뿐이요!" "살려주시면 천명을 받쳐 받들겠소! 살려주시오! 제발!"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삶을 향한 이십여 명의 목소리가 하나되어 천지에 울려 퍼졌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령령의 입꼬리 한 쪽 끝이 살짝 올라갔다. 싸늘한 미소였다. 그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펄럭이며 흔들렸다. 퍼엉! "끄아아악!" 촤아아아악! '후미! 깜짝이야!" 령령의 장을 맞은 최초의 한 녀석 입에서 비명이 질러졌다. 동시에 그의 몸통이 화포라도 맞은 듯 터져 나갔다. 순식간에 여러 명이 그렇게 죽어나가자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몇 몇 포로들이 도주했지만, 누구 하나 채 몇 걸음 벗어나지 못하고 똑같은 꼴을 맞이하고 말았다. 모두를 처리하고 돌아선 그녀의 전신에서 핏물이 뚝뚝 흘러 내렸다. 철혈국주 못지 않게 섬뜩한 모습이었다. '아냐, 아냐, 령령 쪽이 한 수 위지. 적어도 철혈국주는 내장 쪼가리는 걸치지 않았단 말이야. 무서운 년. 그동안 성질 죽이며 숨어 지내느라 많이도 쌓였었구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7-22 21:39:43 고친날 2005-07-22 21:39:43 읽은수 4246 [ 3 K ] 제목 새 연재, 현령이야기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원래는 무협소설 바탕에 우리나라 역사를 그리는 것으로 하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특히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무척 재미있게 느껴져서 그 사람 주변 인물로 해서 무협소설을 하나 써보려고 했지요. 비운의 인물이라고 해야할까? 당시에 사병이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스펙타클한 전개도 가능하구요. 막 왕권 교체한다고, 왕 씨 성을 가진 이를 몰살시키는 야사에서 재미있는 얘기도 끌어올 생각이었습니다. 특히 여인 관계도 복잡하게 그려서, 원수의 딸과 중국에서 도망온 무림맹 소속 여아도 그릴 작정이었지요. 중국 문파도 하나 둘 정도 딸려 들어오고, 내부에 거지 집단까지 정보집단으로 기타 용병 부대까지 해서.... 치밀한 심리전으로 그리려고 했어요. ㅇㅅㅇ..일단 이것은 점소이 작삼이 완전히 끝나는 시점에나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제목도 망종기 라고 지어놨었는데, 아쉬울 따름이네요. 의뢰가 들어와서리. 대신 야사와 설화 쪽으로 건의를 했어요. 그게 받아들여져서 지금의 시놉을 작성했는데, 일단의 가제는 현령이야기 인데, 좀 약해보여요. 다른 생각 중인 부제로 영혼의 기억(아는 여아 겜 아이디에요. 이거 채택하게 되면 뇌물 먹여야 해요. 크크.), 영혹의 각인, 백룡의 꿈, 꿈의 각인....정도 생각중이지만, 좀 안맞는 것도 같구요. 주인공 이름이 선우가람인데요. 다분히 작삼과 비슷한 인격을 지닌 아이에요. 나이도 비슷..ㅇㅅㅇ;;..생김새도 비슷..ㅇㅅㅇ;;..일단 이것 자체가 타켓이 대중성이지만, 다분히 점소이 작삼이 바탕된 부분이 많기에 점소이 작삼을 재미있게 보고 계신분이라면 아마 깔끔하게 보실 수 있을걸요..ㅇㅅㅇ;; 표지는 역사소설 카테고리로 갈거구요. 책으로 만약 나온다면....뭐라 할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장편소설 같은 식으로 나오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조금 야할 수도 있답니다. 적어도 점소이 작삼 보다 야한 부분이 더 강조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관계해서 고정출연하는 여자들이 좀 있습니다. 초고리, 미실, 아리솔...소녀로 벽재연과 하늬(난파되서 떠내려온 금발에 푸른눈 미소녀. 크크)가 대기중입니다. 이 중에서 령령의 인격체도 존재한답니다. 적미호에 종리연 섞어넣은 애도 있어요. 적월의 인격체도 존재한답니다. 소년도 있긴 해요..ㅇㅅㅇ.. 설화를 바탕으로 한 사건을 많이 다룰 작정입니다. 강간, 방화 사건은 기본 옵션이에요. ㅇㅅㅇ..신주무원록을 조금 사용해보려고 합니다. 검시에 사용하는 책입니다. 전체적으로 몽환적인 분위기, 수수께끼같은 인간들을 추가할 거랍니다. 우리나라 야사에 재미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느끼게 해드릴 작정입니다. 가람의 시선에서 조선 중기를 바라본 서술도 아기자기 하게 써드릴게요. 주타켓은 아마 무협팬 분들은 아닐테지만, 적어도 점소이 작삼과같은 흐름을 좋아하시는 분이람 무리없이 보실 수 있을 거에요. 점소이 작삼에서 복장이 우리나라 옷으로 바뀌었다고 보시면 무리가 없어요. 단지 문파는 아무래도 상당히 적을 거에요. 권수도 짧을 예정이에요. 한 세 권 정도. 만약 계약이 되면 한 번에 완결까지 내버리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달겁니다. 다음 주 중으로 카테고리 열테니까 ㅇㅅㅇ / 놀러오세용. 이것 때문에 정말 역사공부 파고 들었답니다. 정사가 아니라 야사 쪽으로요. 흐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7-24 12:13:50 고친날 2005-07-24 12:24:51 읽은수 7827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43)-섬뜩한 그녀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43] 섬뜩한 그녀 사뿐사뿐 소리없이 걸어오는 주령령의 새초롬한 입술가에 섬뜩하리 만치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마저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부르르 떨던 흑표두가 본능적으로 철혈국주 앞을 몸으로 막아섰다. 그런 그의 어깨 위에 피로 물든 손을 살포시 걸친 철혈국주는 그를 밀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설사 그녀가 내 목을 원한다해도 서슴없이 내줄 작정이니 그만 물러서라." 흑표두는 유호정 국주의 만류에 마지못해 비켜섰지만, 여차하면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는 거리에 머물러 섰다. 한 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상황이 반전되어 거꾸로 사매의 목을 베어내고 난 직후다. 그 때문인지 차분해 보이기까지 하는 철혈국주였다. '똑같이 피를 뒤집어썼다고 동질감이라도 느끼나 보지? 이 아줌씨야 잘 보라고, 령령의 야행의를 타고 흐르는 내장 쪼가리가 안 보여? 아줌씨하고는 격이 틀리다고.' "어차피 그대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목이 베여 땅바닥을 굴렀을 몸, 원하시는 게 있다면 지옥불 속이라 해도 마다하지 않고 다녀올 것이오." 철혈국주가 제법 뜸 한 번 들이지 않고, 시원스럽게 말을 내뱉자 령령의 신형이 우뚝 멈춰 섰다. "이미 지옥불 위에 서 계신 듯 합니다만?" "그, 그것은 ……?" "우리도 똑같이 지옥불 위에 서있는 사람들이지요.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자의적으로 도와드린 것이니 조금도 불편해하실 필요가 없답니다." "그렇다면 그대들도 무림맹과 반목하고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다른 중소문파들을 규합 중에 있습니다." '응? 그, 그런 거였냐? 그런데, 왜 난 들은 바가 없지?' "호호호호호! 그것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요. 혹시 우리 자리도 있는 가요?" "물론이지요. 빈자리가 너무 많아 걱정이랍니다. 강남표국의 국주님께서 한 자리를 차지해주신다면 아주 든든할 겁니다." 털썩. 느닷없이 꼿꼿하기 그지없으면서, 누구 앞에서도 의지가 꺾일 것 같지 않던 철혈국주가 주령령 앞에 오체투지(五體投地)해 보였다. "이미 무림맹과는 한 하늘을 등지고 살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군요. 부디 우리 강남표국도 힘을 보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오!" 국주가 오체투지로 나오자 살아남은 표국 아해들까지 덩달아서 령령에게 오체투지로 몸을 굽혔다. 떨떠름한 일이었다. 주령령 손에 붙들려 그녀 뒤에 엉거주춤 서게된 나마저도 강남표국 전원의 오체투지를 받는 꼴이 아닌가? '이런 걸 호가호위(狐假虎威)라고 하는 것이구만. 기분은 나쁘지 않지만, 찜찜하기는 매한가지란 말씀이야.' 령령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천천히 철혈국주를 일으켜 세웠다. 잠시동안 그윽하게 눈빛을 마주친 그들은 서로의 양손을 꼬옥 쥐었다. 령령의 말문이 열렸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한 배를 탄 동지입니다. 일단은 잠시 숨어 계세요. 곽철 대협께서 그 동안 임시 호법이 되어주실 겁니다. 이 일이 잠잠해지면 그 때 우리 쪽에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없이 그녀의 다짐에 고개만 끄떡이던 철혈국주가 품속에서 동패 하나를 꺼내더니 령령에게 건네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전음입밀(傳音入密)이 분명했다. 또 나를 흘겨보며 두어 마디 달싹거려 보였는데, 마찬가지로 령령마저 날 흘겨보는 것이었다. 그녀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철혈국주의 두 눈이 휘둥그래지며 가볍게 숨을 들이키는 게 보였다. '뭐, 뭐냐? 왜 날 두고 쑥덕쑥덕 뒷담을 까는 거야? 무슨 내용을 놓고 쑥덕공론을 벌인 거야? 으아아! 궁금해 미치겠네.' 맞바로 강남표국 사람들은 표물로 운반되어진 시신들을 꺼내어 간단히 추슬렀다. 그 중에는 목화란 국주의 시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이외 란화표국과 무림맹 소속 무사의 시신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는 불을 질러 버렸다. 솔직히 응달진 숲 속 안 보이는 곳에 잘 묻어 위장하는 것 마땅했지만, 어마어마한 시신들의 숫자를 보니 그럴 엄두조차 안 났다. 추격자들을 염려한 강남표국 사람들이 먼저 길을 떠났다. 혹시라도 뒤따를 추격조들을 뿌리치기 위해 우리는 세 패로 갈라졌다. 물론 곽철 대협과 적미호는 강남표국에 섞여 사라져 버렸다. 평상시 무뚝뚝하니 말이 없던 곽철 대협이 이 때만은 마땅찮은 눈치를 보였다. 포연강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며 조만간에 직접 찾아가 한 판 겨뤄주겠노라고 어르고 달래서야 겨우 발을 떼는 것이었다. '쩝, 곽철 대협, 어린애도 아니고, 고집은 ……. 뜻밖의 면모도 있었군.' 정작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다 좋다. 다 좋은데, 왜 나랑 주령령이 한 조냐구!' 그랬다. 당면한 문제는 인간들을 떼로 처치하고 난 뒤라 한참 신경이 날카로울 주령령과 단 둘이 동행해야 한다는데 있었다. 팽무진이 몇 군데 살짝 베인 거 갖고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종리연이 고집을 피우자 포연강이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녀석들을 호위해줘야겠다며 먼저 유유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야, 야속한 연놈들! 이 산 중에 얘랑 나랑 단 둘이 떨궈놓고 가면 나더러 쥐도 새도 모르게 맞아 죽으라는 소리랑 다를 게 뭐가 있냐!' "뭐해? 넋 놓고 하늘을 쳐다보면 밥이 나와? 떡이 나와? 이 꼬락서니로 말을 탈수는 없으니까, 니가 끌고 따라와." "아, 아니 목운동 좀 하느라구요. 웃차웃차, 간만에 여기저기 굴러다녔더니 몸이 뻐근하네요. 헤헤헤헷." "그러게, 아침 수련은 매일 빠짐없이 했어야지. 걱정마, 이제부터라도 내가 꼭 꼭 챙겨줄 테니까." "……." 허둥지둥 비바람에 반쯤 으스러져 가는 토성을 빠져나왔다. 처음의 갈림길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혹시나 무한(武漢)으로 방향을 틀어 유람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아주 잠깐 갖기는 했지만, 역시나 그녀는 무한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내려오던 길을 그대로 가로질러서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 이년이 미쳤나? 길도 없는데, 막 헤집고 들어가네. 저런 데를 말이 어떻게 들어가냐!' "얼른 안 따라와?" "네? 네, 가, 갑니다." 히히힝, 히히힝, 푸르륵, 푸륵푸륵. 앙상한 나뭇가지에 마구잡이로 몸을 긁힌 말들이 투정을 부렸다. 감히 미물인 주제에 만물의 영장인 날 째려보며 콧김을 뿜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기분이 더러워진 나는 멀거니 앞서간 주령령의 뒷모습을 흘깃 흘겨보며 말들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속삭여 주었다. "어쭈구리, 째려보면 어쩔 거야? 난 지극히 정상적 사고를 가진 지성인이야. 얌마들아, 네 놈들을 이 길로 내몰고 있는 것은 비이상적 사고를 지닌 저 년이야. 저 년! 이해하겠어?" 히히힝, 푸륵푸륵. "이해 못했군. 그럼, 다시 세세하게! 아주 친절하게 요약 정리해서 얘기해주마." 휘이잉. "에구구, 웬 모래 바람이야!" "뭐해?" "후미!" 어느 틈에 색경을 벗어 던졌는지 커다란 왕방울 눈을 반짝반짝 드러낸 주령령이 말들 사이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전신을 핏물에 담갔다 꺼낸 사람처럼 지척에서 진득한 피내음을 풍기는 그녀가 오싹하게 느껴졌다. 붉은 피가 주르르륵 흘러내리는 안면에 장난스런 미소가 만연해있다면 얼마나 섬뜩하겠는가? 두근두근. "아, 아니 언제 올라 오셨어요?" "니가 안 내려오니까 내가 온 거잖아. 말들은 여기에 묶어놓고 내 말 등위에 있는 짐보따리나 챙겨." "……." 그녀는 소풍이라도 나온 소녀처럼 숲길을 천천히 음미하며 내려갔다. 그녀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야행의에 핏물과 함께 붙어있던 내장 쪼가리가 주르르륵 흘러내렸다. '설, 설마 내가 말들에게 속삭인 귓말을 엿듣고는 앙심을 품은 게 아닐까? 날 묻어버리려고 내려가고 있는 거 아니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호흡이 가빠졌다. 능히 그러고도 남을 년이란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한 번 그런 가능성에 생각이 미치자 두려움이 언덕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허억……." 눈덩이가 커지고 커져 산사태로 번지려는 찰나, 그녀는 우뚝 멈춰섰다. 시원한 강바람이 그녀의 시뻘건 머릿결과 함께 벌판을 휘어 감았다. "엥, 강?" 드넓게 펼쳐진 새파란 물가에 시선이 다다르자 두려움은 물거품처럼 잊혀져 버렸다. 한적하면서도 물 속이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내비치는 진풍경이었다. "아니, 동호(東湖)라는 호수의 일부야. 서호(西湖)나 포양호에 비하면 볼품 없지만, 꽤 수려한 장관을 간직하고 있지. 무엇보다 좋은 점은 인적이 드물다는 거야." 찌이익, 찌익, 파사삭. 령령은 느닷없이 그녀를 감싸고 있던 야행의를 찢어버렸다. 탄력있게 늘어나기만 할 것 같았던 야행의가 파삭 파삭 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셔져 내리는 게 참으로 기이했다. 새까만 조각으로 흩날리며 떨어지는 야행의 조각을 내려다본 주령령이 아깝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휘유, 정말 아끼는 옷이었는데, 빙룡이라는 아이의 빙공 덕분에 못쓰게 돼버렸어. 쉬엄쉬엄 봐주면서 대접해줬더니 이 꼴이지." 찌이익, 파삭파삭, 찌익, 찌익, 파사삭. '얘,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뭐 잘못 먹었냐?' 꿀꺽, 두근두근. 그녀는 내 존재를 깜빡 잊었는지 면전에서 야행의를 다 벗어 던졌다. 새하얗게 드러난 늘씬한 나신을 한 번 쓰다듬어 보며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까지 하고는 그대로 호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첨벙! '쩝, 아쉽군. 뛰어들기 전에 내 쪽을 한 번 돌아보고 뛰어들지.' 몇 차례 자맥질을 하다가 고개를 불쑥 내밀어 보인 그녀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날 보더니 미친년처럼 깔깔깔 웃었다. 그러다가 정색을 하며 새눈으로 지긋이 노려보는 것이었다. "야, 너 내가 피범벅이라고 속으로 욕했지?" "아, 아니에요. 그, 그럴리가요." "정말?" "그, 그럼요." "그럼, 너는 왜 목욕 안 해? 남의 눈의 티는 보아도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본다는 말이 있지. 너라고 피범벅이 아닌 줄 아니? 너라고 내장 조각이 안 붙어있는 줄 아니?" "……." "고상한 척 굴지말고, 좋은 말로 할 때 기어 들어와. 설마 그 몰골하고 나돌아다닐 생각은 아니겠지? 강남표국 쟁자수 옷도 버려야 하니까 미련 가지지마." "저, 저기 쟁자수 옷 말고는 여, 여벌이 없는데요." "내 보따리에 남자옷 여벌 있어. 그러니까, 잔말말고 어서 목욕이나 하시지." "……." 주섬주섬 쟁자수 옷을 벗고는 고의 차림으로 동호(東湖)에 몸을 담갔다. 잠시 한기가 스며들었으나 금새 적응이 되었다. 처음에는 왜 이런가 의문도 들었지만,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다. 인적이 하나도 없어서인지 그녀가 첨벙거리며 자맥질하는 물소리만이 시원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발바닥에 밟히는 진흙의 부드러운 감촉이 여인의 속살처럼 느껴져 흐뭇하기도 했다. 곧 발을 떼고는 출렁이는 물결에 몸을 내맡겼다. 피곤이 밀려서인지 스르륵 눈꺼풀이 내려왔다. '출렁이는 소리 하나없이 조용하군. 이대로 한숨 푹 자면 원이 없겠다.' 풍덩, 꼬르르륵. "으악! 어푸, 어푸." 갑자기 물 속에서 정체불명의 무엇인가가 발목을 잡고는 끌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라 재빨리 발을 빼며 힘껏 걷어 차버렸다. 정신없이 마구잡이로 물장구를 쳐서 간신히 떠올랐지만, 잠시였다. 이번에는 아예 뒤에서 어깨를 잡아 눌러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물 속에 잠겨 허우적거려야만 했다. "물, 물귀신이다! 사, 사람 살려!" 꼬르르르륵. 물 속에서 정신없이 외쳐봤지만, 물거품만 뽀그르르 올라갈 뿐이었다. 기어이는 숨이 막히면서 익사 직전으로 몰리고 말았다. 정신이 희미해지려는 찰나 뭍으로 끌어올려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환상처럼 령령의 커다란 눈망울을 본 것도 같았으나, 그뿐이었다. 곧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들고 말았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7-26 17:19:54 고친날 2005-07-26 19:46:02 읽은수 7405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4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44] 피보다 조금 연하게 타오르는 하늘! 피처럼 새빨간 대지! 피보다 더 진한 바다! 온 세상 천지가 핏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묘한 곳에 나 홀로 서 있다. 아니, 또 다른 존재가 느껴진다. 천적보다 더 위험한 육식동물의 울부짖음이 몸서리치게 메아리친다. '아, 또 꿈속인가. 그럼 보나마나겠네.' 그르르르릉. 나지막한 야수의 목울림을 듣고는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혹시나 했지만, 언제나처럼 두 눈에 이글이글 붉은 빛을 머금은 주령령이 보인다. 특이하다면 두 팔과 두 다리를 짐승의 네 발처럼 사용하며 기어다닌다는 점일까? 마치 병약한 노루 새끼를 가운데 놓고 협박하는 야수처럼 내 주변을 빙빙 돌고 있다. 어깨뼈가 등 사이로 물결처럼 유연하게 오르락내리락 파도친다. 날씬하게 휘어진 허리가 며칠 굶은 늑대의 그것처럼 느껴진다. 아쉬운 점이라 하면 꼬리는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야, 야, 시간 끌지 말고 후딱 끝내. 힘들게 도망가봤자 뻔히 잡힐 거 다 아니까 삶아먹든 구워먹든 맘대로 해. 아, 미안, 날로 뜯어먹는 걸 좋아하지?" 은근히 겁이 났지만, 일찌감치 자포자기해 버렸다. 그녀가 나온 꿈에서 내가 제대로 도망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그녀는 한참동안을 돌고만 있다. '응? 오늘은 안 건드리려나? 그럼 이 몸이 피해주지. 야수라면 물 속까지는 못 따라 오겠지?' 기다리다 지친 끝에 냅다 피바다를 향해 내달린다. 얼마 가지도 못해 퍽 하는 느낌과 함께 해변가에 고꾸라진다. 거친 숨결과 함께 오르락내리락 요동치는 가슴 위를 짐승의 앞발과도 같은 그녀의 두 팔이 지긋이 내리누른다. 오뚝한 코로 먹이를 음미하듯 킁킁거린다. 앵두처럼 반들거리는 입술 사이로 날카롭게 돋아난 하얀 송곳니가 보인다. '아무래도 내가 도망을 가야만 반응하는 걸까? 형태는 조금씩 달라도 행동양식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군.' 내 목줄을 몇 차례 할짝이던 그녀는 섬광처럼 예고없이 물어뜯어 버린다. 별 고통은 없다. 단지 더 이상 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목줄을 뜯겼으니 의식이 끊어지는 게 정해진 순리이겠으나, 도리어 더욱 또렷해지기만 한다. 투두둑. 내 일부가 뜯겨져 나가는 게 어렴풋이 느껴진다. 아무리 고통이 뒤따르지 않는 꿈속이라 해도 기분이 엿같은 것만은 어쩔 도리가 없다. '쳇, 그럼 먹히면서도 발딱 서버리거나, 희열을 느끼는 얼뜨기 같은 연놈들도 있다더냐?' 돈다. 붉은 하늘 중앙에 떠있는 시뻘건 태양이 뱅글뱅글 돌고 있다. 더욱 더 빠르게, 빠르게 돈다. 눈앞이 희미해진다. 사각, 사각. 기이한 엇박자로 귓가를 어지럽히는 소리가 고막을 울려왔다. 눈꺼풀 끝이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듯 무거워 들려지지 않았다. 온 몸이 나른하면서도 뻐근한 것이 손가락 하나 까딱이기도 귀찮을 지경이었다. 사각, 사각, 사각. 누가 이기는지 두고보자는 듯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젠장 내가 졌다. 졌어.' 기어코 실눈을 뜨고야 말았다. 시뻘건 햇살이 눈가에 스며들었다. '허걱, 설, 설마, 아직도 꿈속이란 말인가!'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호숫가 너머로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온 세상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각, 사각, 사각. "이제 일어났어? 무슨 가운데 다리가 달랑이는 녀석이 그리 겁이 많아? 비명횡사(非命橫死)할까봐 다시는 물장난도 못 치겠다." '끙, 역시 령령이었군. 익사 직전까지 가는 게 어디 보통 물장난이냐?' 시원 상큼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에구머니나!" 지척에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것들은 다름 아닌 인간의 목이었다.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양 눈을 부릅뜨고 있었는데, 남자 셋에 여자 하나였다. "시신이 타는 연기를 보고는 금새 은신해서 접근해 오더라구. 아마 무림맹 정찰조일걸. 쪼끔 손을 봐줬지." '쪼, 쪼끔 손을 봐준 게 목을 절단한 거야? 그럼 제대로 손을 봐줄라치면 치 단위로 절단하고 소금뿌리면서 구워먹기라도 할거냐? 무식한 년!' 사각, 사각, 사각. 내 수면을 방해한 소리의 정체는 나무밑동 아래에 구덩이가 파여지는 소리였다. 구덩이 바로 옆에는 목 없는 시신 네 구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어? 어라?' 항시 범상치 않은 옷들을 걸치거나, 평복을 입어도 습관처럼 인피면구만큼은 꼭 착용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의 령령은 여느 여염집 처녀랑 다를 바 없는 분홍색 윗도리에 다홍색 치마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맨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닌가? 묶어 올린 머릿결에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으로 보아 어느새 머리 손질까지 한 듯 했다. '엽기행각만 일삼는 년인 줄 알았는데, 가끔은 보통 여인처럼 꾸미기도 하는구나. 우아하면서도 단아한 미모라? 쩝, 여자들은 왜 이렇게 변신을 잘 하는 거야?' "무, 무림맹 소속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각, 사각, 사각. "이 근방은 무당파(武當派)가 장악하고 있어. 자존심이 매우 강하면서 도도한 인간들이지. 자기네들 구역에서 복면 쓰고 숨어다닐만큼 졸렬한 인간들은 아니란 소리야. 남는 것은 찔리는 구석이 많은 무림맹 놈들뿐이지." 과연 머리들 곁에는 새까만 복면들이 하나씩 뒹굴고 있었다. 혹시나 안면 있는 인간이 있는지 그녀가 일일이 벗겨봤던 모양이다. 그러나, 복면에 피가 진득하니 묻어있는 것으로 봐서 선 절단 후 확인(先 切斷 後 確認)절차를 거친 모양인데,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무식도 정도 나름이지 이것은 숫제 엽기적인 취미라고 밖에 할 말이 없지 않은가! "일광욕 끝났으면 슬슬 옷이라도 걸치는 게 어때?" "……!" 그제야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가운데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닌게 아니라 꽤 오랫동안 알몸으로 누워있었던 듯 했다. 고의는 령령의 장난에 물귀신이 나타났다고 난리법석을 피우다가 호수 속에 떨군 모양이었다. '흠, 살짝 맛이 간 년이라 해도 내 알몸 구경은 사절할 거다. 적어도 천운학 녀석 정도는 되어야 …….' 녀석에게 생각이 미치자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놈이 더럽게 잘난 것은 알지만, 무지막지하게 맘에 안 들기는 이전과 매한가지였다. 놈 때문에 내 생애를 통틀어 하나뿐이었던 친구 소방을 잃은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갈 일이다. "자신의 거시기를 보면서 인상쓰는 놈은 너밖에 없을 거다. 미적거리지 말고 어서 서둘러. 어두워지기 전에 이 곳을 벗어나야 해. 무당파 녀석들이랑 마주쳐봤자 좋을 거 하나 없어. 그들도 엄연히 무림맹의 일부이니 말이야." "……." 보따리 속에는 뜻밖에도 내가 평소 즐겨 입던 것과 비슷한 마의가 두 벌 들어있었다. 물론 내 고향 흥강성과 똑같은 종류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 맘에 든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쳇, 그렇다고 그 동안 구타해왔던 과거를 이 따위 것으로 덮을 생각은 마라. 일단은 잘 입어주겠다만 …….' 감쪽같이 뒷정리를 하고는 매어놨던 말에 올라타 무환루 귀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올 때처럼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었고, 공연히 어딘가에 숨어있을지도 모를 무림맹 정찰조들에게 '우리 수상한 인간들이오.' 하고 선전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가급적 천천히 이동했다. 아무래도 말 타는데, 미숙한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기도 했다. 령령은 오래 전에 말을 타봤는지 꽤나 능숙하게 몰았다. 어눌하게 어깨를 움츠리고 매달려 가다시피 하는 나와는 달리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는 자연스럽게 말고삐를 쥐고서 앞서거니 달려갔다. 맞바람에 펄럭이는 치마 주름과 하늘하늘 흩날리는 머릿결을 뒤편에서 보노라면 내가 알던 본연의 그녀와는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해시가 조금 넘었을까? 자정이 가까워서인지 보랏빛 밤하늘 위로 달무리가 진 둥근 달이 걸렸다. 달빛이 워낙 밝았기 때문에 별구경 하기는 글렀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우엥? 잠, 잠깐 지금 분명 밤인데도 령령 눈에서 빛이 안 나오잖아. 그런 적이 없었…….'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 뒤편에서 다급히 쫓아오는 말발굽 소리가 여럿 들려왔기에 그녀에 대한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힐끔 뒤돌아보니 도깨비불 서너 개가 우리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 황색 남화건(南華巾)에 도복을 입은 도인들이 한 손에 횃불을 들고, 다른 손에는 말고삐를 쥐고는 달려오는 중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럼 무당파 도인일 가능성이 십중팔구일 터였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그냥 아무 말 말고 가만히만 있어.' 령령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이 뇌리에 울려 퍼져 왔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7-28 11:17:57 고친날 2005-07-28 11:17:57 읽은수 7560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4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45]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멈추시오! 잠시 멈추시오!" 뒤편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여덟 명의 도인들이 말을 타고 달려온 것이었다. 령령은 가만히 말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나 또한 그녀 곁에 말을 세우고는 무당파 도인들이 당도하기를 기다렸다. 히히히힝, 푸륵푸륵푸륵. 꽤 거칠게 몰았는지 멈춰 세우자마자 지친 말들의 입에서 새하얀 입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그들 중에서 가장 연륜이 있어 보이는 중년 도인이 말에서 날렵하게 내리더니 령령과 나를 향해 번갈아 포권지례를 취해 보였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하오. 난 무당파 이대 제자 현허(玄虛)라고 합니다." 내가 비록 강호정세에 어둡기는 하지만, 소림과 무당이 정파의 양대 산맥이라 불린다는 점만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만큼 명망 있고, 세력 있는 무당파 인간치고는 제법 예의 바른 축에 들어간다고 느껴졌다. 현허는 잠시동안 령령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치켜 떴다. "오오, 미, 미인이시군요." "과찬이십니다." 다소곳이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그녀를 보니 조금은 어안이 벙벙했다. 녹 누님에게조차 쌀쌀맞게 말을 내뱉는 제멋대로 성격의 소유자답지 않게 겸양 어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험험, 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 소저와 공자의 존, 존대성명과 행선지를 여쭤봐도 되겠소?" '자식, 공자라고 말하면서 내 쪽은 돌아보지도 않냐?' 홍안(紅顔)이 된 현허라는 도인은 말까지 더듬거렸다. 뭐, 주령령(周鈴鈴)이 뛰어난 미모에 잘 빠진 몸매를 지닌 것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한 때는 그녀를 짝사랑한 경력까지 있으니 그 심정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개차반 성격에 말보다 주먹 쓰기를 더 좋아하고,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수준으로 여기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주령령이라 합니다. 이 녀석은 제 종복이옵고, 호북성(湖北省) 일대를 유람 중에 있습니다." '종, 종복? 끄응, 뭐 막내나 종복이나 바닥 때기인 것은 매한가지 일테지.' "어디서 오는 길이었소?" 주령령의 안면을 뚫어지게 감상하고 있던 젊은 무당 도인들 중에서 한 명이 불쑥 튀어나왔다. 장신이면서도 마른 축에 들어가는 인물이었다. 외모로 따지자면 노루가 연상된다고나 할까? 얼굴마저 길쭉하니 꽤나 인상깊게 보이는 그는 곧이어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뻣뻣한 질문을 던져왔다. "옥양(玉陽)아!" 현허가 눈을 부라리며 어디서 마음대로 나서냐는 듯 주의를 주는 티가 역력했으나, 옥양이란 놈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령령 또한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없이 대답했다. "무한(武漢) 유람을 마치고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아주 잠시 스치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옥양의 두 눈이 번쩍거리면서 입가에 실룩이는 미소가 지어졌다. 마치 잘 걸렸다 하고 비웃는 듯한 기분 나쁜 모습이었다. "그럼, 무한에서 유명한 황학루(黃鶴樓)에도 가보셨겠군요. 황학루는 만한전석(滿漢全席)으로 유명한데, 특히 곰의 뒷발바닥 요리는 달면서도 입안에서 사르르 녹기에 황학루 최고의 요리로 손꼽힙니다. 먹어보았소?" 그의 질문에 속이 덜컥 내려않는 기분이었다. 뭔가 유도심문을 꾀하는 흐름이 느껴지는데, 그게 무엇인지 당최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내 속과는 달리 이번에도 령령은 단호히 대답했다. "아니요. 황학루는 저희 같은 유람객이 들르기엔 너무 비싼 곳이더군요. 더구나 제가 듣기로는 비룡탕이 황학루의 자랑이라던데요? 곰발바닥 요리 재료로 뒷발바닥을 쓴다는 말도 금시초문이군요. 뒷발바닥은 질겨서 중품(中品)은 될지언정 상품(上品)은 못되는 것으로 압니다만?" "아, 이런, 제가 잘못 알았나보군요. 실례했소이다." 옥양이라는 놈은 깜빡 실수를 했다는 듯 호들갑을 떨며 물러섰다.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현허가 나서서 수습에 들어갔다. "이거 민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근방에 불민(不敏)한 일이 있어서 말이지요. 살펴 가시……." 부스럭. "누구냐!" 현허 도인은 소리를 버럭 지름과 동시에 소리가 난 숲 속으로 비수를 날렸다. 조금은 의외였다. 그저 흐리멍덩한 중년 아저씨인줄로만 알았더니 뜻밖의 기민한 구석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채앵. 허리에 꼽혀있던 검을 빼들고 숲 속을 주시하던 그는 잠시 후 한숨을 내뱉으며 자세를 풀었다. "분명 누군가 내 비수에 격중되었다. 그럼에도 신음 한 번 흘리지 않고 내빼는 것을 보니 보통 상대가 아니다. 뒤를 추격해야겠구나." 근처를 맴돌고 있던 무림맹 정찰조였을 것이다. 나 같으면 정체를 드러내고 무당파에 협조를 요청했을 텐데, 아무래도 뒤가 켕기는 일이다 보니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문득 주령령을 돌아본 그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뻐끔거리다 말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것일까? "사숙, 제가 이분들을 밤 동안 안전한 지역에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옥양(玉陽)이 또 제멋대로 나선다.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현허 도인은 재차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더 주저할 수 없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좋다. 옥청(玉淸), 너도 옥양과 함께 이 분들을 호위해 드려라. 우리는 그 녀석 뒤를 추격하겠다. 멀리는 못 갔을 것이다. 소저, 인연이 있다면 다음에 또 보도록 합시다." '인, 인연이 있으면 다음에 또 봐? 아주 대놓고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군.' 옥양과 옥청을 제외한 무당 도인들은 말을 그 자리에 묶어 놓고, 횃불도 놔두고는 숲 속으로 신형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밤길이 어두운데, 횃불없이 괜찮을까요?" 주령령이 자못 걱정된다는 듯이 말하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듯한 옥청이라는 놈이 씩 웃으며 쾌활하게 말을 받았다. "걱정 마세요. 저를 빼고는 다들 야행술공(夜行術功)에 능숙해서 횃불 없이도 이 정도 밤길은 훤하게 볼 수 있어요." '미녀 앞에 애 어른이 없군.' "어허, 옥청아, 외인들에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우린 우리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하지 않겠니? 어서 가자꾸나." "예, 사형." 옥양이란 놈이 뒤도 안 돌아보고 앞장섰다. 그 뒤를 령령과 내가 뒤따랐고, 옥청이란 소년은 맨 뒤에 붙어서 후미를 경계해주었다. '옥양, 아까부터 대뜸 시비조였다. 불안한 놈인데…….' 그가 묵묵히 말을 몰아가니 꽤 시끄러울 소지가 다분한 옥청도 입을 다물었다. 물론 우리도 더불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일 각이나 갔을까? 옥청이란 아이가 갑자기 부스럭거리며 품속을 요란하게 뒤지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듯도 싶었고, 다급한 듯도 싶었다. 내가 느낄 정도면 옥양도 모를 리가 없었다. "왜 그러느냐?" "저, 저기 사형, 혹, 혹시 제 당, 당패(當牌)를 못 보셨나요?" "이런, 당패를 떨어뜨린 게로구나. 아차, 그러고 보니 아까 현허 사숙과 헤어질 때 쇠붙이 떨어지는 소리를 언뜻 들은 기억이 있구나. 천천히 갈 터이니 어서 갖다오도록 해라." 그의 말에 안면이 어두워졌던 옥청의 안면이 환해지더니 급히 말머리를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 달려갔다. 그가 떠나고 나자 안 그래도 조용하던 밤길이 더 적막해진 듯 싶었다. 다시 일 각이 더 지나자 옥양이 말을 멈춰 세웠다. "소피가 급해서 잠시 볼 일 좀 보겠소. 양해를 부탁드리오." "그러시지요." 처음 봤을 때는 무척 싸가지가 없어 보였는데, 웬 일로 얌전하게 나오는지 알 수 없는 놈이었다. 그가 소피가 마르다는 말을 하니 나까지도 소피가 마른 듯한 느낌이 들어 말등에서 내려섰다. 쪼르르륵. "아이구, 시원하다." 물을 비우고 나니 의례 뒤따르는 한기에 부르르 떨고는 바지춤을 추슬렀다. "어이쿠." 먼저 볼 일을 보고는 내 곁을 스쳐지나가던 옥양이 뭔가에 발끝이 걸렸는지 기우뚱하기에 그를 붙잡아줄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당연하지. 곱상한 여자라면 모를까, 아까부터 밥맛처럼 구는 저 놈을 내가 미쳤다고 잡아 줘?" 그러나, 그는 넘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내 몸 한 구석이 따끔거리더니 곧이어 굳어버리는 게 아닌가! '이, 이 자식!' "아, 너무 노려보지 말구려. 그대 주인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오. 의심이 풀리면 그때 풀어드리리다." 상황을 알아차린 주령령은 말에서 내려서며 옥양을 향해 나지막하게 꾸짖어 보였다. "이 무슨 무례한 망발입니까? 당신은 정녕 우리를 호위할 생각이 있는 것입니까?" "보고도 모르겠나? 물론 없지. 그저 그대에게 지대한 관심이 생겨서 따라나선 것 뿐이야." "……." "난 무한 쪽에서 말을 타고 나왔지. 그런데, 무한 방면으로 들어온 말발굽 자국은 있어도 나온 자국은 없더란 말씀이야. 그래서, 방금 전 은근슬쩍 떠보았더니 무한 내부 사정에는 밝더군.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라도 자리를 마련해본 것이지." "옥청이라는 소년의 당패는 당신 품속에 있지요?" "오오, 눈썰미도 꽤 좋은 편이군. 맞아, 그 녀석은 좀 순수한 구석이 있어서 이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거든." 챙. 옥양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렵하게 검을 뽑아 령령의 턱 끝에 들이대었다. 의기양양해진 그는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령령의 치마를 걷어내고는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를 거침없이 더듬거렸다. "솔직히 말해서 이 일의 배후에는 관심 없다. 단지 네 년의 몸뚱이가 탐이 날 뿐이지. 많은 여인을 섭렵해 왔지만, 꾸미지 않고도 이 정도로 빛나는 여인은 네가 처음이다." '끌끌, 무덤을 파는구나. 무덤을 파.' 오래 전 망아루 시절, 악취사흉(惡臭四凶) 중 막패가 그녀를 주물럭거렸을 때가 떠올랐다. 달음박질 빠른 것만 믿고, 악취사흉, 특히 우두머리 막패를 욕했다가 얼마나 욕을 봤던가?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게 령령의 외모에 빠져서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 이후 령령에게 당해온 처절한 과거를 떠올려보면 얼마나 내가 어리석은 인간이었는지 잘 알 수 있다. 스물 여덟이라는 나이를 후문으로 먹었던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콩깍지가 씌운다는 것은 정신 연령이 뒤로 후퇴한다는 말과 일맥 상통하는 듯 하다. '한심한 일이었지. 쓸데없는 만용이었다. 주령령이 옆구리있는 냉혈마녀 인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아차렸어도 절대로 그딴 짓은 안 했다. 오히려 악취사흉을 응원했을 텐데…….' "허어억!" 옥양의 비명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의 손이 령령의 풍만한 가슴을 우악스럽게 움켜쥔 채 부르르 떠는 게 보였다. 대신 그의 뱃속에는 령령의 손이 꽂혀 있었다. 바닥으로 시뻘건 핏물이 후두두둑 떨어져 내렸다. "내 애무 어때? 괜찮아? 쓸만해? 내 주특기가 내장 애무해주기거든. 어머, 창자를 주물러 주니까 아주 흥분되는 모양이구나. 아무리 흥분돼도 떨지는 말라구. 핏물이 튀면 옷이 더럽혀 지거든." '내 결국 이럴 줄 알았다. 령령 성질 건드리고서 무사한 놈 아직 한 녀석도 못 봤다.' "악, 악녀……." 철푸덕. 간신히 그 말을 내뱉은 옥양은 한 차례 격렬하게 떨다가 조용히 고개를 떨어뜨리며 엎어지고 말았다. 령령의 손에는 아주 잡고 뜯었는지 한 웅큼의 내장 덩어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라? 지금 령령의 눈에서 푸른빛이 번득이네. 그러니까 이제는 밤이라 해도 무공을 써야 빛이 난다 이거지?' 그의 도복에 쓱쓱 손을 문질러 피를 닦아낸 령령은 그의 시신을 툭 걷어 차버렸다. 옥양의 시체는 숲 속으로 날아가 쿡 처박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날이 밝으면 필시 현허 도인이라는 놈이 그의 시체를 찾아내고 말 것이었다. "가자." 짤막하게 그 말만 내뱉은 령령은 뒤도 안 돌아보고 말에 올라타 가던 길을 계속 재촉했다. '야, 갈 때 가더라도 혈도는 풀어줘야 할 거 …….' "어라?" 나도 모르게 그녀 뒤를 따르려다보니 굳어있던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쳇, 언제 푼 거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7-31 14:15:54 고친날 2005-07-31 19:25:29 읽은수 7380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4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46] 옥양(玉陽)의 내장을 한껏 애무해 준 덕분에 무당 도인들의 추격이 이어질 게 뻔한데도 당사자인 주령령(周鈴鈴)은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되려 이 상황을 즐기는 듯한 그녀의 여유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 정말 궁금했다.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밤공기를 가르며 퍼져오는 말발굽 소리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허겁지겁 말에 매달려오고 있는 인물이 옥청(玉淸) 녀석인 것을 알아보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되었지만, 불안하긴 오십보 백보였다. '도대체 니 년 꿍꿍이가 뭐냐? 누이 좋고 매부 좋다고, 나도 좀 알자. 설마 저 놈 창자까지도 애무해주려는 거야?' "헉, 헉, 헉. 여기들 계셨군요. 한참 찾아 헤맸지 뭡니까?" '이 놈 보게. 왜 헉헉거려? 말이 널 업고 달려왔지, 네가 말을 업고 달려왔냐?' "아, 옥청 도인님이시군요. 혹시 옥양 도인님을 찾고 계신가요?" "네? 네에, 그, 그렇지요. 같, 같이 계신 줄 알고 달려왔었는데……." 겸양의 미소를 한껏 띄운 령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옥청은 그 미소에 정신이 아득해졌는지 말을 더듬거렸다. 그녀의 내면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는 나조차도 가슴이 설렐 지경이니 초면인 소년이야 오죽하겠는가? "옥양 도인님은 일 각 전쯤에 현허 도인님이 위험하다며 숲 속으로 몸을 날리셨답니다. 그 뒤는 저희도 잘 모르겠군요." "사, 사숙님이 위험하다구요! 이런!" 새파랗게 질린 옥청 녀석은 잠시 주저하더니 작별 인사도 잊고는 또 말머리를 돌려 왔던 곳으로 다급히 내달렸다. 주인 잘못 만난 죄로 계속 헛수고만 하는 그의 말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옥양의 시체 속에서 옥청의 당패(當牌)가 발견되면, 누굴 추궁해야할지 오리무중(五里霧中)일걸. 말코 도사들끼리 고민하는 꼴을 못 보는 게 아쉽군." "……." 나 들으라고 내뱉은 말인지, 혼잣말인지 구분이 모호했지만, 적어도 그녀가 의도한 바는 대충 짐작해볼 수 있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여전히 유유자적 말을 몰아 간 령령은 표행길과는 반대편인 오른쪽 길로 말머리를 틀었다. 기어이는 물결이 거센 양자강 유역에까지 당도하고 말았다. 말을 타고 강변으로까지 옮겨간 그녀는 자기 말과 내 말에서 혁낭과 짐보따리를 풀어서 내 손에 들려주었다. '왜? 어째서?' 찰싹 찰싹. 이히히히힝. 깜짝 놀란 말들은 그대로 물 속으로 풍덩풍덩 뛰어들더니만 그 깊은 강을 머뭇거림없이 헤엄쳐 건너고 말았다. 맞은 엉덩이가 꽤나 아팠는지 뒤도 안 돌아보고 내달려 버렸다. 주령령은 강물에 푹 젖어버린 치마를 골반 높이까지 말아 올려서는 꽉 매듭지었다. 덕분에 미끈한 다리 각선미와 은밀한 속곳까지 유감없이 드러나 버렸다. 이미 그녀의 알몸을 봐버려서인지 속곳 정도는 신경 쓰이지 않……. '을 리가 없지. 눈이 호강하는 것은 좋다만, 왠지 불안한 걸.' "짐 흘리지 않도록 꽉 잡아." "……." 다짜고짜 날 옆구리에 낀 주령령은 그대로 박차고 올라 신형을 날렸다. 느닷없이 붕 떠올라 조금 아찔하기는 했지만, 이미 수 차례 령령에게 매달려 다닌 경력이 있기 때문에 별 무리는 없었다. 휘이이잉. 싸늘한 밤바람이 시원하게 귀밑을 스쳐 지나갔다. 몇 시진이나 매달려 갔을까? 동쪽 하늘을 가로지르는 아침 동이 떠오르면서 하늘 위의 구름들을 시뻘겋게 물들여갔다. 발치 아래로는 커다란 호수 하나가 그 자태를 드러냈다. 하늘이 그대로 반사되어 비치는 모습을 보니 거대한 거울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이 곳에서 쉰다. 간단하게 요기도 해야하고. 내 혁낭 속에 건포랑 자그마한 냄비가 있어. 내가 간만에 요리솜씨나 발휘를……." "건, 건포가 어디 있다구요? 참, 령령 아가씨의 혁낭 속에 있다고 했지. 지금까지 무리를 하셨는데, 푹 쉬셔야지요. 헤헤헷, 요리는 저한테 맡겨 주세요." '미쳤냐? 너한테 요리를 맡기게. 아직 살아갈 여생이 많이 남았단 말이다. 그런 끔찍한 소릴랑 입도 뻥긋하지 마라.' 건포 자체에 양념이 되어 있으니 국물이 적절하게 우러나올 정도로 끓이면 그만인 일이다. 단지 그녀의 손에 맡겨놨다가는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지 알 수 없다. 더 무서운 점은 한 번 그녀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좋으나 싫으나 내 입 속에 처넣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부글부글. "자, 다 되었습니다. 령령 아가씨, 아침 드세요." "……." 요리를 못해서인지 살짝 불만 어린 듯한 그녀였지만, 별 탈 없이 아침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이 호수 이름이 뭔지 알아?" "글, 글쎄요. 처음 보는 호수라서……." "태호(太湖)다. 작지만, 그럭저럭 낭만적인 곳이지. 특히 지금처럼 아침 동이 떠오는 날에는 네가 좋아하는 호연지기를 기르기에도 딱 좋은 곳이야." '참 나 원, 누가 호연지기를 좋아한다는 거야? 그냥 핑계삼아 한 말인데, 잊지 않고 용케도 기억하고 있네.' "어때? 간만에 단 둘이 맞이하는 호숫가 아침인 만큼 그 생각이 간절하지?" "그, 그 생각? 전 잘, 잘 모르겠…….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무당파 애들이 언제 뒤쫓아올지도 모르는데, 이런 곳에서 미적거릴 시간 없잖……." 질질질질질. 퍽퍼퍽 퍼퍼퍼퍽 퍽 퍼퍽……. 아침 공기가 꽤 쌀쌀한 탓에 구타 소리가 드넓은 벌판에 나지막하니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수련 시간만큼은 절대로 잊지 않는 그녀가 참으로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시진에 걸쳐 이리저리 구르며, 열심히 맞다보니 기운이 빠져 축 늘어졌다. 그런 나를 자신의 어깨에 걸친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그대로 태호에 던져 넣는 게 아닌가! 어쩔 수 없이 몇 모금의 물을 삼킨 나는 살짝 열이 올라 버렸다. 당장에 수련을 빙자한 가혹 행위를 중단하라고 성토하려다가 그대로 굳었다. 바스락 바스락. 그녀는 어느새 수련으로 먼지투성이가 된 치마와 윗도리는 물론이요, 속곳까지 벗어버리고 있었다. 나신이 된 그대로 물 속에 몸을 담가 버리는 것이었다. 찰랑 찰랑. 물소리가 파동을 타고 내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불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나, 나 또한 그저 아침 호수 속에서 묵묵히 목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간단하게 출발 준비를 마치고 난 이후에도 곤욕이 이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령령은 천천히 신법을 발휘해 달려갔다. 내 유일무이한 경신법, 붕조신법은 아무 때나 발현되는 게 아니었기에 당연히 그냥 열심히 달음박질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내 체력이 쓸만하다 해도 그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석태(石台)라는 작은 도시에 저녁 무렵쯤에나 당도했다. 그제야 내가 밟고 있는 땅이 남쪽 강서성(江西省)이 아닌 북쪽 안휘성(安徽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마저 아리송할 지경이니 정파 양대 기둥 중 하나가 얼마나 헛물켜고 다닐지 상상이 안 가는군.' 간만에 객잔 객실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객실 바닥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처음에는 방 두 개에 나눠 들어갈 양이었으나, 주령령의 제지에 의해 한 방으로 바뀌어 버렸다. 하나뿐인 침대 또한 그녀 차지가 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었다. "애처럼 뚱한 표정으로 불만 드러내도 어쩔 수 없어. 언제 말코 도사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단 말이야. 대신 이불은 넉넉하니까 이거나 깔고 자." "……." 내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그저 그녀가 던져 준 이불에 몸을 묻는 수밖에……. 꿈 꿀 여력도 없을 정도로 깊이 잠들어 버렸다. 그녀의 보조에 발을 맞추다 보니 체력 소모가 장난 아니었던 것이다. 동도 트지 않은 이튿날 새벽, 령령이 흔들어준 덕분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석태를 벗어나 인적이 없는 곳에 다다르자 폭풍같은 수련 시간이 숨가쁘게 지나갔다. '아구구, 삭신이야. 하루라도 좀 거르고 지나가면 어디 덧나냐? 귀신은 저거 안 잡아가고 뭐 하누? 하기사 전 풍악산 처녀귀신 청년 회장한테 어느 미친 귀신이 덤비겠어?' 꼬박 하루를 더 달렸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아름답기로 최고의 절경을 자랑한다는 황산(黃山)이었다. 황산은 '사절(四節)'이라 하여 네 가지 유명한 것이 있는데 바로 바위, 소나무, 온천,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뭐더라? 령령한테 물어볼까? 에잇, 귀찮아. 하나 정도 모르면 어때?' 이 곳에 당도하자 여태까지 맨 얼굴로 다니던 령령이 인피면구를 쓰는 게 보였다. '무림맹 본거지 합비(合肥)가 여기서 가깝기는 하지. 황산 절경이 유명하다 보니 무림맹 아해들도 꽤 유람왔을 테고 말이야.' "여기서 잠시 기다려." 황산 입구에 자리를 잡게 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리는 그녀였다. 령령이 무슨 일로 자리를 비웠는지는 모르지만, 잡은 자리가 꽤 괜찮은 명당이었기 때문에 별 불평은 하지 않았다. '명당이지. 수많은 미녀들이 줄을 잇고 있으니 이 곳이 명당이 아니고, 또 어디가 명당이란 말이야?' 그녀가 다시 나타났을 때는 저녁 노을이 저가는 저녁 무렵이었다. 안 그래도 별 말이 없는 그녀였지만, 숫제 입을 다물어 버리기까지 했다. 안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 음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풍악산보다 황산이 맘에 들었나 보지? 황산 처녀 귀신들 긴장해야겠구만, 령령이 청년 회장 자리를 놓고 아귀다툼을 벌이려 들 테니.' "작삼, 황산 꼭대기에 올라가 본 적 있어?" 왠지 질문을 던져오는 그녀의 표정이 처량해 보였다. "아뇨. 황산 자체에 처음 와봤는데요." "그럼, 한 번 올라가 볼까? 싫으면 말고." 평상시 주령령답지 않게 부드러운 권유적 어투로 질문을 던져왔다. 그러나, 그녀의 발아래 일년동안 나동그라지면서 산전수전 체득한 경험이 있기에 그것이 함정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요. 당연히 가봐야지요. 최고의 절경을 자랑한다는 황산에 왔는데, 그까짓 꼭대기 한 번 못 가봐서야 되겠습니까? 가야지요. 헤헤헤헷." '쳇, 니 얼굴에 안 따라오면 죽어. 하고 써있구만. 그런 게 어디 권유냐? 우회적 강압이지.' 아니나 다를까 내가 긍정적인 답변을 하자 안면에 잔뜩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령령의 표정에 한줄기 미소가 감도는 게 느껴졌다. 거절이라도 했었다간 어떤 보복 조치가 뒤따랐을까? 생각만 해도 머리가 절레절레 흔들어지는 일이다. 밤길이어서 그런지 그녀는 다시 인피면구를 벗었다. 이곳저곳 으슥한 곳에 둥지를 틀고 암약하고 있는 연인들 때문에 우리는 그냥 보통 걸음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할 만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매끄럽게 잘 닦여져 있다는 점이었다. 휘이이이잉. 두 시진을 걸었을까? 세 시진을 걸었을까? 뜻밖에도 황산 정상은 금세 그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높지 않았던 것이다. 령령은 정상에서 밑을 내려다보며 꼼짝도 안 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가 내려가자는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옆 소나무에 기대어 앉았던 나는 그만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눈가로 스며드는 새빨간 햇살 때문에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는 산바람에 머릿결을 휘날리는 령령이 서 있었다. 밤새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 곁에 서서 전방을 내려다보니 새빨간 일출이 막 떠오르고 있었다. 밤에는 느낄 수 없었던 안휘성 남부를 수백 리로 잇는 거대한 산악이 눈에 들어왔다. 그 끝자락을 있는 산꼭대기에 나와 령령이 서있는 것이었다. "여기 이름 알아?" "글, 글쎄요. 황산 꼭대기라는 것 밖에……." "연화봉(蓮花峰), 저 아래 문수원에서 보면 연꽃 같이 보인다고 해서 연화봉이라 불렀다고 하지. 일출이나 일몰을 보려면 청량대(淸凉臺)나 사자봉(獅子峰)으로 가는 게 나으니까 이 쪽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래도 내게는 의미가 있는 곳이야." "……." 일출이 완전히 사그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던 령령은 비로소 걸음을 떼고 내려갔다. 뭘 골똘히 생각하는지 절대로 빼먹지 않던 새벽 수련조차 잊고 넘어가는 그녀였다. '절경에 취해 건망증이 유도되는 황산이라……. 과연 명산이로고!' "빨리 안 내려오고 뭐해? 시간도 없으니까 짧고 굵직하게 하자구." '명산은 개뿔.' 퍼퍼퍽 퍼퍽 퍼퍽 퍼퍼퍼퍼퍽 퍽 퍼퍽 퍼퍼퍽…….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8-03 16:13:48 고친날 2005-08-04 00:33:03 읽은수 7319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47)-조우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47] 조우 황산에서 하루를 더 가자 절강성(浙江省) 경계를 넘을 수 있었고, 이틀째가 되자 서호(西湖)에 이르게 되었다. 무환루(無患樓)가 있는 항주(杭州)가 두 시진도 채 안 되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나, 령령은 서두르지 않았다. 저녁 노을이 질 때까지 서호(西湖) 주변을 맴돌며 유유자적 시간을 때웠다. 서호가 아무리 넓다 하지만, 북적북적 붐벼대는 유람객들 때문에 발 딛을 자리조차 없었다. 특히 독수공방(獨守空房) 노총각 염장을 갈아 엎어주는 연인들이 바퀴벌레처럼 바글바글 거려서 짜증이 배로 치밀었다. 급기야 그녀에게 조기 복귀를 은근히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저, 저기 무환루로 빨리 복귀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서호야 평상시에도 자주 보잖아요." "들를 곳이 있어서. 너도 반가워할 사람인데, 왜? 보기 싫어?" '누굴 말하는 거지?' "아, 아니요. 그냥 좀 무료해서요." "그럼, 걸어다니기도 지겨운데, 뱃놀이라도 좀 즐겨볼까?" "……." 그녀는 정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호 주변을 떠다니는 조각배에 몸을 싣고 말았다. 작은 조각배였지만,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뿐하게 탈 수 있는 배였다. 배라고는 생후 처음 타보는 것이라 둥실둥실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떠오르며 출렁거리는 게 꽤나 흥미로웠다. 다만, 어디에나 물을 흐리는 놈들이 꼭 있기 마련이다. 아마도 눈여겨봤던 아낙네들을 따라서 배에 탔는지 아까 전부터 거슬렸던 두 낭인 녀석들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었다. "여어, 아가씨 혼자 온 모양인데, 심심하지 않아?" "저, 저희 주인 아가씨는 혼, 혼자 오지 않았어요. 저, 저랑 같이 왔다구요." "오오, 그럼 더 잘 됐네. 마침 나도 내 동생이랑 같이 둘이 왔거든. 그 쪽도 둘, 우리도 둘, 이것 하늘이 맺어준 천생연분이 아닌가! 오늘 밤 질펀하게 놀아보자구. 어때?" 얼굴 전체에 칼자국 흉터가 가득하면서 옆구리에는 위협적으로 보일 만큼 큰 대도를 찬 낭인이 꽤나 반반한 미색을 지닌 홍의 여인에게 농을 떨었다.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며 입을 다물어 버린 홍의 여인 대신에 몸종으로 보이는 백의 여인이 대뜸 대답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백의 여인은 주인이라는 홍의 여인보다 미색은 떨어졌으나, 나름대로 귀여운 면모를 지닌 주근깨 여인이었다. "죄, 죄송하지만, 오늘 저녁에 저희 아가씨는 선약이 있어서 안 되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하하하하! 안 되긴 뭐가 안 돼? 하면 다 돼는 거지" 기고만장하게 웃음을 터뜨리던 칼자국 낭인은 눈을 부릅뜨고는 백의 여인 앞으로 쓱 다가섰다. 흠칫한 백의 여인이 한 걸음 물러서며 넘어질 듯 하자 거구 낭인이 잽싸게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낚아챘다. "아주 허리가 가늘군. 한 팔에만 힘을 줘도 그냥 으스러지겠는걸." 아무리 잘 들어도 협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백의 여인이 칼자국 낭인에게 협박당하는 게 역력하자 눈물이 글썽글썽 거리는 홍의 여인이 배 안을 두리번거렸다. 눈물에 반짝이는 눈망울에서 도움을 갈구하는 빛이 엿보였다. '가만있어. 공연히 쓸데없이 나설 생각하지마.' 주령령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이 일어설까 말까 망설이는 내 귓가에 울려왔다. 하는 수 없이 단념하며 고개를 틀었다. '쳇, 아깝네. 누구든 먼저 나서는 녀석이 홍의 여인을 차지하겠군. 좋겠다.' 과연 바로 앞에 앉아있던 백의 청년 한 명이 쭈뼛쭈뼛 나서며 칼을 뽑아 들었다. "네, 이 놈들 정녕코 하늘이 무섭지……." 퍼억, 첨벙. 칼자국 낭인 뒤에 우두커니 서있던 거구 낭인이 전광석화처럼 신형을 날리며 주먹을 휘둘러 버렸다. 백의 청년은 호수 속에 처박혀서는 허우적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어라? 제법 하잖아.' "저 꼴 나고 싶은 놈은 누구든 망설이지 말고 나서라. 이번에는 아가리를 찢어 줄 테다." 휘이이잉. 그 한 번의 신위로 배 안은 조용히 평정되어 버렸다. 순간 되돌아서는 그의 시선과 령령의 시선이 우연히 교차되고 말았다. "아니, 이 년이 눈깔 안 깔아!" 령령이 예의 주근깨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낭인들 눈에 차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령령은 아니꼽다는 듯 코웃음치며 눈을 돌렸다. "코, 코웃음을 쳐? 오냐, 호박보다 더 추한 얼굴을 아예 메주 덩어리로 만들어주마." 부웅, 첨벙. "어푸, 어푸, 사, 사람 살려! 난 헤엄 못 쳐. 못 친다구." "병신 육갑하네." 거구의 비명을 령령답게 아주 간단히 비웃어 버렸다. '끄응, 나더러 가만 있으라더니 자기는 한 술 더 뜨네.' 거구 낭인 녀석은 주먹 끝을 령령에게 가볍게 붙잡혔다. 그녀의 악력에 의해 눈 깜짝할 새 호수 속으로 던져지고 말았다. 대단한 쾌속이었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거구 낭인 녀석이 스스로 주먹을 잘못 휘둘러 몸의 중심을 기우뚱 잃어버리고 빠진 것으로 보일 터였다. "둘, 둘째야! 이 빌어먹을 것들. 누구냐!" 칼자국 낭인이 대도를 뽑아들고 외치자 겁을 먹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령령에게로 향했다. 거구 낭인 녀석이 실수를 했건 어찌되었건 간에 근본 원인은 령령에게 있다 이 뜻일 것이다. "호박! 니 년이냐! 니 년이 감히 우리 둘 째를 밀어서 빠뜨렸냐!" "아니요. 얘가 밀었어요." 그녀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바로 슬그머니 나를 떠밀었다. 전음입밀 또한 가관이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쓸 수는 없잖아. 철봉 꺼내지 말고, 내가 한 것처럼 저 놈도 슬쩍 빠트려버려.' "오냐, 둘이 작당을 했다 이거지. 저 놈 목을 날리고 나서 바로 니 년 목도 날려주마!" "전, 모, 모르는 일이에요. 정말이에요. 살려주세요. 살려 주세요. 나으리. 제발요." "……." '아, 아주 맛들였구나. 나보다 니가 더 무료했던 거 아니야?'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내 등뒤로 몸을 숨는 척 했다. 그녀의 턱이 어깨 부분에 살짝 닿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내 어깨 너머로 칼자국 낭인을 눈여겨보고 있는 듯 했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우리 조직을 건드린 것을 뼈아프게 느끼도록 해주겠다. 흐아압!" 칼자국 낭인이 신형이 갑자기 커졌다. 신형을 날려서 내 앞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쓸만 하긴 했으나, 백호단 아해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삼재권법을 써먹을 필요도 없었다. 무섭게 떨어지는 놈의 팔뚝 끝을 가볍게 잡아서 몸을 빙글 뒤집으며 허리를 숙였다. "으아아악!" 첨벙! "젠, 젠자앙! 뱃사공! 뱃사공! 배를 멈춰! 멈추라고!" 뱃사공 노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대도를 든 령령은 뱃사공 노인의 턱아래 그것을 들이밀었다. "그냥 이대로 가." "아, 알겠소." 령령이 사공 노인을 대도로 협박하는 것을 본 칼자국 낭인은 배에 다시 오르는 것을 포기했는지 고함만 고래고래 질렀다. "어푸, 어푸, 이 재수 더럽게 없는 연놈들! 우리 조직을 건드린 걸 후회하게 될 거다! 잊지 마라! 절대로 잊지……." 휘익. 퍽. 그가 시끄럽게 욕을 하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령령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목침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던져 버렸다. 명중된 칼자국 낭인은 끽소리도 못하고 꼬르륵 물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지? 하늘이 널 살리나, 죽이나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그들이 물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 하자 사람들은 뭐가 두려운지 우리로부터 시선을 돌려버렸다. 고맙다는 말 한 마디는커녕 외면을 해버리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두렵기에……? 홍의 여인과 백의 여인만이 조심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와서 살짝 허리를 굽혀 보였다. "뭐,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이 은혜 정말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낯짝 치워. 저리 꺼지라고." 비위가 몹시 상한 듯한 령령이 차갑게 응대하자 홍의 여인은 흠칫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어 보인 그녀는 그대로 말문을 이었다. "저들은 하오문(下午門) 사람입니다. 비록 무림맹이 하오문을 붕괴시켰다고는 하지만, 암약하는 자들이 워낙 많은 곳이 하오문입니다. 필시 다른 패거리들을 데리고 올 것입니다. 속히 서호를 벗어나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한다. 널 도와준 게 아니니까 일절 고마워할 필요도 없다. 낯짝 치우지 않으면 대신 니 년 목을 베어버리겠다." 령령의 으름장에 홍의 여인 얼굴이 새하얗게 창백해지며 비틀거렸다. 백의 여인이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며 본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주령령은 코웃음치며 고개를 돌렸다. 자리에 앉은 백의 여인과 언뜻 눈을 마주쳤는데, 살짝 고개를 숙여왔다. 나도 씨익 웃으며 령령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살짝 고개를 까딱여 주었다. 잠시 후 배에서 내린 령령은 한참을 걸어가더니 느닷없이 교소(巧笑)를 터뜨렸다. "깔깔깔깔깔! 아이고, 배야!" 혼자서 미친 듯이 웃던 그녀는 정색을 하며 날 돌아봤다. "재밌었지? 이제 무료하지 않지?" "혹시 일부러 배를 타신 건가요?" "응, 이제 둔탱이답지않게 눈치가 좀 빨라지는구나. 어쩐지 그 두 놈 꼬락서니를 보니까 일 낼 것 같더라. 그래서, 그 놈들 따라서 오늘 서호 주변을 빙빙 돌았지. 그럼, 내가 왜 뱃사공 노인한테 대도를 들이밀고, 계집애한테 욕을 했는지도 알겠지?" "그, 그거야 령령 아가씨의 평소 성격이……." 따악. "아이쿠야." "그것밖에 안 떠올라?" "혹, 혹시 하오문(下午門)의 후환이 없도록 배려하신 건가요?" "아마 하오문 자체는 상관없겠지. 무림맹의 감시 아래 있는 녀석들이 그런 짓을 할 리 없어. 그래도 몇몇 패거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녀석들 보는 앞에서 액막이 해준 거야. 자, 슬슬 약속 장소로 가볼까나?" '흠, 냉혈마녀(冷血魔女)치고는 괜찮은 면모도 있군. 그래도 종잡을 수가 있어야지. 어떤 날은 인정사정없이 차가워졌다가 어떤 날은……. 에휴, 내가 생각을 말자. 생각을 말아.'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8-05 21:16:23 고친날 2005-08-06 15:41:29 읽은수 7100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48)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48] 저녁 노을이 내려오자 수많은 연등이 하나 둘 씩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차츰차츰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면서 서호(西湖)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주루와 기루, 사찰이 일제히 불을 밝힌 것이었다. 호수 표면에 빛줄기가 반짝반짝 반사되어 그 화려함이란 이루 형용하기 어려웠다. "서호(西湖)에 와서 야경(夜景)을 즐기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도 없지. 겸사겸사 슬슬 가보자구." "어, 어디로 가시려구요?" "말했잖아. 네가 보면 반가워할 사람이라고." '내가 반가워할 사람? 설마……?' 령령의 퉁명한 어조에서 일말의 기대감을 품은 나는 주저없이 그녀 뒤를 졸졸졸 따라갔다. 령령은 으슥한 뒷골목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품속에서 검은 색경을 꺼내 눈을 가렸다. 곧이어 언질도 없이 내 옆구리를 잡아채더니 한줄기 바람처럼 담장을 타고 넘었다. 몇 차례 건물 지붕을 박차며 신형을 날린 령령은 무엇을 찾고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내로 태어난 주제에 령령에게 대롱대롱 매달려서 참 잘 하는 짓이다. 서러워서라도 경신법을 어서 익혀야 겠는데, 그 놈의 붕조신법은 더럽게 안 익혀……. 쳇, 머리 속에 담겨 있어야 익히던 말던 할 거 아냐!' 마침내 그녀가 목표했던 것을 찾았는지 서슴없이 신형을 날렸다. 오 층 누각 꼭대기 창문이 열린 곳으로 몸을 날린 것이었다. 불을 키지 않아 어두컴컴한 공간이었지만, 널따란 방안을 식별하는 데에는 별 무리는 없었다. 여인의 방이었는지 은은한 난향 냄새가 짙게 깔려 있었다. 방 가운데로는 사람 네 다섯은 앉을 수 있는 식탁이 마련되어 있었고, 구석 한 편에는 차양이 살짝 드리워진 침대도 눈에 띄었다. 항시 정리정돈을 했는지 너저분한 내 방과 달리 깔끔한 곳이기도 했다. "그만 둘러보고 여기 좀 앉아. 이 방 주인이 올라오고 있단 말이야." 어투에서 왠지 냉랭한 기운이 느껴졌기에 그녀가 내준 의자에 슬그머니 앉았다. 령령의 바로 옆자리면서 방문을 바라보는 위치였다. 사박 사박 사박. 끼이이익. 어둡기만 했던 방안으로 초롱불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잠시 실눈을 떠야만 했다. 검은 색경을 끼고 있던 령령은 방안에 들어온 인물을 확인하고는 색경을 벗어 버렸다. 나 또한 방안으로 홀로 들어선 사람이 누구인지 뒤늦게나마 알아볼 수 있었다. '유화(柳花) 매염경(梅炎璟)? 그럼, 이, 이곳은 환락루(歡樂樓)란 말인가?' 전과 다름없이 반라에 가까운 다홍색 비단 치파오로 단장한 매염경이 초롱불을 들고 방안으로 사뿐히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목과 팔목에 둘러져 있는 비단띠도 여전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타고난 듯한 요염한 색기 또한 이전보다 더 강렬하게 발산되고 있었다. 한 미모 하는 주령령조차도 항주 삼대 유명인이라고 까지 불려지는 매염경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어 보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그녀는 초롱불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의자를 끌어와 살며시 앉았다. 주령령을 봤을 때는 의례 올 줄 알았다는 듯 별 반응이 없었으나, 날 보고는 눈빛을 반짝거렸다. "어머, 귀살(鬼殺) 나으리 작삼 점소이까지 데리고 오셨군요. 이제야 저한테 넘겨주시기로 작정하신 건가요?" "허튼 수작 부리지마. 그때도 말했지만, 우리 일원이다. 너와 나 사이의 거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호호호, 그래요? 뭐,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요. 언젠가는 그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어요?" "흥, 글쎄?" 령령은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을 달싹거려 보였다. 전음입밀(傳音入密)로 소리를 전달한 것이 분명했다. 그럼, 매염경도 입술을 달싹거릴까? "호호호, 이거 죄송하네요. 전 남천위지만, 무공실력은 형편없답니다. 전음 같은 고위 무공은커녕 경신법도 구사하지 못해요. 대신 글로 옮겨왔으니 읽어보도록 하세요." 자신의 풍만한 양 가슴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은 그녀는 자그마한 종이 쪼가리를 꺼내들었다. 그것을 빼앗듯이 받아낸 주령령은 나로부터 등을 돌린 채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런 령령을 향해 비웃듯 코웃음친 매염경은 날 훑어보며 한 쪽 눈을 찡긋거려 보였다. 그녀의 눈웃음을 받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그녀로부터 발산되는 농밀한 색기 때문에 숨막혀 질식할 것 같았다. '주, 주령령만 없었어도…… 어떻게 해보는 건데, 쩝, 아깝다. 에휴.' 한동안 방안에 정적이 맴돌았다. 주령령은 주령령대로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종이 쪼가리에 정신이 팔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고, 난 나대로 매염경의 색기에 밀려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있는 때였다. "이 놈! 천운학! 개만도 못한 놈! 날 속인 거야! 속인 거라구!" '어라? 천운학? 내가 아는 천운학과 같은 천운학인가?' "공자, 너무 취했어요. 이제 그만 마셔요." "나 안 취했소. 안 취했단 말이오!" "공자……."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사나이의 목소리가 환락루의 야경을 쩌렁쩌렁 시끄럽게 어지럽혔다. 간간이 들려오는 여인들의 간드러진 목소리도 왠지 귀에 익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주령령의 어깨가 아주 잠시동안 흠칫 떨린 듯 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종이 쪼가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령령은 그것을 그대로 손바닥 위에서 태워 버렸다. '삼매진화(三昧眞火)인가? 쪽지의 내용이 도대체 뭘까나? 궁금해 죽겠네.' "지필묵과 종이 좀 쓰겠다." "어머, 그럼 쓰지 못하게 하면 안 쓰신다는 뜻인가요?" "아니, 그 땐 널 반 죽여놓고 쓸 거다." "호호호, 농담 한 번만 더 했다간 이번에야말로 목이 날아가겠군요. 널린 게 종이니까 마음대로 쓰세요." "……." 조금은 마음 씀씀이가 상냥해진 듯 했던 령령은 역시나 얼마 가지 못해 본연의 이빨을 드러내 버렸다. 종잡을 수 없다, 종잡을 수 없다 하지만, 령령만큼이나 감정이 극도로 오락가락하는 사람도 있을까? 그런 그녀에게 한 수 물리는 듯 하면서도 한 수 앞서는 말을 줄기차게 내뱉는 매염경도 특이해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고 보면 처음 주령령과 매염경이 무환루에서 마주쳤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목이 졸리는 상황에서도, 중독을 당한 상황에서도 매염경은 그녀에게 눈곱만치도 비굴한 구석을 내비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당당함이야말로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일지 모른다. '글쎄? 무모한 걸까? 당당한 걸까? 하오문이 가진 정보력의 위력을 믿는 것일까? 아니면 전부 다일까?' 휘이이잉. 느닷없이 한 줄기 바람이 식탁을 가로질렀다. 바람은 초롱불의 창호지를 꿰뚫고 지나가면서 정확히 불꽃만 꺼트렸다. 순식간에 방안에는 암흑이 찾아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와 령령은 어둠 속에서도 어느 정도 정도 식별이 가능하니까 매염경의 눈만 가려진 것이었다. 매염경은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기다리기 무료했는지 턱을 괴고 앉아 기다릴 뿐이었다. '응? 매염경이 지금 나를 돌아본 것 같은데? 설마, 무공도 없는 사람이…….' 과연 어둠 속에서도 령령은 능숙하게 붓을 놀렸다. '한시잖아! 서호(西湖)에 오니까 갑자기 흥취라도 돋았나?' 蘭陵美酒鬱金香 玉碗盛來琥珀光 但使主人能醉客 不知何處是他鄕 난릉의 귀한 명주 울금향이 은은코나 옥잔에 부어보니 그 빛깔이 호박광채일세. 여보시오 주인장, 이 나그네 취하게만 해준다면, 세상천지 어디간들 다 내 고향이 아니겠소? 한시를 다 써 내려간 령령은 먹물이 마르자마자 접어서 한 쪽 구석에 내려놓았다. 곧이어 자리를 박차고 나와 내 등뒤로 가더니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설마 하며 슬며시 눈을 옆으로 흘겨보니 그녀의 치마와 저고리가 바닥에 흘려져 있었다. '한, 한 번 슬쩍 돌아볼까? 관, 관두자. 보아하니 지금 딱 저기압이란 말씀이야. 이런 때 잘못 걸리면 사망이지.' 이번엔 바스락거리는 소리보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야행의 여벌이 있었군.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화르르륵. 치마와 저고리마저 삼매진화로 태워버린 령령은 다시 날 옆구리에 끼웠다. 창을 넘기 전 잠시 주저한 것으로 보아 매염경에게 전음입밀 한 두 마디정도는 남긴 듯 했다. '에휴, 만나자마자 작별이라 좀 아쉬운걸.' 가볍게 오 층 누각에서 아래층 지붕으로 연이어 뛰어내린 그녀는 곧장 담을 넘을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환락루 안 쪽으로 몸을 숨겼다. 자신의 혁낭 속에서 콧수염, 턱수염, 구레나룻이 주르륵 달린 가짜 수염을 꺼내 바로 내 얼굴에 철썩 붙여 주었다. '혁낭 한 번 희한해. 조그마한 주제에 별의 별게 다 들어가 있단 말씀이야. 이제부터 개별 행동인가 보군.' 수염을 재차 꼼꼼하게 확인한 령령은 잘 접어서 품속에 갈무리했던 종이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종이를 쥔 내 손바닥을 꽉 쥐고 좀처럼 놓지 않는 걸로 볼 때, 꽤나 중요도가 높은 물건인 듯 싶었다. "내 말 잘 들어. 지금 환락루 안뜰 팔각정자에서 술주정 중인 공자는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그 사람한테 다른 손님의 심부름이라면서 전해주고 그가 종이를 펼쳐들기 전에 즉각 빠져나와서 무환루로 돌아가. 잘 할 수 있겠어?" "헤헤헷,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요." "휴우, 솔직히 불안하다만, 이 근방은 하오문 아니면, 무림맹 간자들 뿐이라 일을 시킬 사람이 너밖에 없구나." 불안하다는 말과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니 울컥 치미는 게 있어서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항변했다. "맡겨만 주세요. 일등 조교 점소이 아닙니까? 그 정도쯤이야. 땅 집고 헤엄치기라니깐요." 검은 색경 너머로 날 묵묵히 바라보던 령령은 넌더리라도 나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구나. 부탁한다." 그녀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서서히 파묻혀 갔다. '쳇, 그렇게 걱정되면 직접 나서시지. 왜 투정만 부리다 가는 거야? 그건 그렇고, 나도 아는 사람이라? 누구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8-08 13:26:50 고친날 2005-08-08 13:26:50 읽은수 7274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49)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49] 슬그머니 건물을 타고 돌아보니 서호(西湖)를 바라보며 품(品)자 형태를 이루고 있는 구조였다. 서호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제일 높은 건물이 매염경을 만났던 오층 누각이고, 그 좌우로는 직각으로 연결된 삼층 높이의 누각이 들어서 있었다. '흠, 마치 서호를 보며 팔걸이 의자에 앉아있는 인간 형태와 흡사하단 말씀이야.' 환락루 일층의 모습은 점소이가 대기하고 있는 보통 주루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차이점이라고 하면 앞뜰 아무 곳에나 앉아 서호의 야경을 바라보며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정도일까? 홀로 자작하는 인간도 흔치않게 보였다. '손님이 원하지 않는 한 기녀가 붙지 않는구나. 기루면서도 주루의 장점을 따왔다? 역시 항주 삼대 유명인 매염경이 경영하는 곳이라 그런지 뭔가 좀 특별한데.' 덕분에 별다른 제지없이 연못 가운데 세워져있는 팔각정자로 다가갈 수 있었다. 방금 전보다는 원성이 좀 잦아들었지만,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그들이 뭘 얘기하는지 똑똑히 잘 들을 수 있었다. "남궁 공자님, 여기서 이러신다고 해결될 일은 없어요. 차라리 다시 그녀를 찾아보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소용없소. 다 소용없는 일이오. 세가 사람들도 동원했고, 하오문(下午門)에 거액을 부어넣어 찾기도 했소. 다 부질없는 일이었소. 역시 그에게 속은 게 분명하오." "남궁 공자님의 비분강개(悲憤慷慨)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도 일단 항주를 벗어나는 게 좋겠어요. 무림맹(武林盟) 간자들의 눈이 띄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요." "틀렸소. 우린 이미 오래 전에 눈에 띄었소. 그럼에도 천운학은 꿈쩍도 않소. 이게 뭘 의미하는지 제갈 소저도 모르지 않을 거요." "휴우, 네, 아마도 혈해진경(血海盡經) 중 하나 이상을 획득했다는 뜻이겠지요. 진경 무공을 익히느라 패관수련 중일 거예요." "어머, 제갈 언니, 정말이에요? 그럼, 큰 일이잖아요. 우리 어서 피해요." 비록 정자 기둥에 가려 그들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화의 단편만 듣고도 그네들의 정체를 떠올리는데, 별 어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어라? 익숙한 목소리다 했더니 남궁현과 제갈혜, 당가희잖아. 쳇, 전혀 반갑지 않은 인간들이로구만.' 체념 어린 한숨과 함께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특별한 사정 때문에 만날 수는 없지만,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하는 게 분명한 두 연인, 그 사이에서 전령 노릇이나 해야하는 나! 불행 중 다행이라 하면 주령령(周鈴鈴)에 대한 내 개인적 감정은 새벽 수련이라는 미명 하에 구타를 당하게 된 시점에서부터 사그라졌다는 것이다. 야차 수준으로 무섭게 몰아붙이는 그녀에게 정나미가 떨어지지 않는다면 원초적 바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제 와서 질투 따위야 일어날리 없지만, 은근히 짜증이 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내가 왜 둘 사이에서 놀아나야 하느냐고! 에휴, 후딱 해치우고 사라지는 게 상책이다.' 갈무리했던 서신을 꺼내어 정자로 다가섰다. 곤드레만드레 취해있는 남궁현(南宮炫)은 제 몸 하나 가누기에도 버거워 보였다. 양옆으로 자주빛 궁장의 제갈혜(諸葛慧)와 홍의경장 당가희(唐佳喜)를 앉혀놓고 꽃밭에서 주정부리는 그를 보니 콱 밟아버리고 싶은 울화가 치밀었다. '참아야 하느니라. 참아야 하느니라! 참을 인(忍)! 인(忍)! 인(忍)! 휴우, 이제 좀 낫군. 서신은 전해야지.' 서신을 들고 경계를 받지 않도록 천천히 그네들에게 다가갔다. 제갈혜가 무슨 일이냐는 듯 눈동자만 살짝 돌렸다. '이크, 그녀의 심안공(深眼功)을 조심해야지.' 최대한 예의를 갖춘 점소이처럼 가장한 나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며 들어갔다. 자연히 눈은 그들의 발치로 향했다. "심부름 왔습니다. 어떤 손님이 자리를 뜨시면서 공자님께 전해드리라고 남긴 서신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빈 죽엽청 병이 잔득 쌓여있는 식탁 언저리에 서신만 슬그머니 올려놓고는 몇 발자국 뒷걸음친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너무 서두르는 티를 내면 약삭빠른 제갈혜에게 금세 눈치 채일게 뻔한 노릇이니 말이다. "잠시만요. 점소이 양반, 왠지 뒷모습이 초면이 아니군요. 목소리도 들어본 기억이 있네요. 한 번 뒤돌아보시겠어요?" '젠장, 제갈혜, 언제나 산통 깨트리는데 뭔가 있는 년!' 몸을 돌린 나는 최대한 아부를 떨어주었다. 여인에게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것만큼 극진한 아부가 또 어디 있겠는가? "네? 그, 그럴리가요. 헤헤헷, 손님 중에서 소저처럼 아리따운 분은 처음 뵀는걸요." "손님 중? 그럼 손님이 아닌 여인 중이라면 저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요?" '킁, 제갈혜 아니랄까봐 별 걸 다 걸고 넘어가네.' "그야 이 환락루의 주인이신 매염경 마님이시지요." 원래는 세 번째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주령령의 존재는 비밀로 해야하는 것 아니겠는가? 부스럭 부스럭. 눈치 없고, 체신 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도 없는 당가희가 서신을 대신 뜯어보고 있었다. 제갈혜가 만류할 사이도 없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잠, 잠깐만요." "제갈 언니, 웬 시 한 수가 적혀져 있어요." "시? 어디 보자. 이것은 이백 '방랑자의 도취' 잖아." '잘했다. 당가희, 너한테 도움 받는 날도 있다니 참으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제갈혜가 시가 적힌 서신에 정신이 팔렸을 때 잽싸게 빠져나오려 했다. 그런데, 뜻밖의 인간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하필 그들이라니 ……!! "이 봐. 넌 누구냐? 신참 점소이냐? 그럼, 알아서 즉각, 즉각 신고해야할 것 아냐! 어? 이 놈, 수염이 달랑거린다!" "……." 서호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안 되었는지 흠뻑 젖어 생쥐 몰골을 한 칼자국 낭인 놈과 거구 낭인 녀석 둘이 내 앞에 떡 나타나 버렸다. 그것도 하필이면 내가 빠져나가야 하는 통로 쪽에서 마주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빌어먹을! 뒤에는 제갈혜, 앞에는 재수 때기 낭인 둘! 정녕 사면초가(四面楚歌)로세! 사면초가야.' 부욱. "아이쿠!"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이는 새 칼자국 낭인의 재빠른 손놀림에 그만 수염을 통 채로 뜯기고 말았다. "그 얼굴, 너, 너! 서호 위에서 우리를 밀어 빠뜨린 그년과 한 패인 놈이잖아!" 뿌드드득. "잘 걸렸다. 형님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오냐, 저 놈은 니 녀석 차지다. 대신 저 놈을 족쳐서 계집애 행방을 알아내면 그 년은 내 차지다." "여부가 있겠소. 크하하하! 어떻게 여기 점소이가 됬는지는 모르겠다만, 오늘이 니 놈 제삿날이다." 거구가 통로를 가로막고 다가오자 도저히 빠져나갈 구석이 안 보였다. 철봉은 령령이 챙겨 가버렸기 때문에 완전 빈손이었다. 설사 철봉이 있다고 해도 쓸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내 실수로 해서 무환루가 무림맹이나 하오문 놈들에게 노출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뿌드드득. 뿌득. 뿌득. '그냥 맞아줄까? 저 딴 놈한테 아무리 맞아봤자 령령에 비하면 새발의 피일테니, 좋다. 그냥 맞고 까무러치는 척 하자.' 그러나, 그마저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휙, 퍽. "허억!" 쿠웅. 내 등뒤에서 날아든 돌멩이에 이마를 정통으로 맞은 거구 낭인은 그대로 피를 뿌리며 뒤로 기우뚱 쓰러지고 말았다. "너 이 녀석!" 휙, 퍽. 철푸덕. 내 뒤편을 바라보며 분노를 터뜨리려던 칼자국 낭인도 마찬가지로 돌멩이를 맞더니 유혈 낭자하게 피를 뽀글뽀글 뿜으며 쓰러져 버렸다. 피가 뿜어져 나오는 정도로 볼 때, 아무래도 두개골에 금이라도 간 듯 했다. '쳇, 자업자득(自業自得)이지. 제갈혜인가? 위험한데, 얼굴을 보여서는 안 돼.' 허리를 숙인 채 슬그머니 돌아서서 꾸벅 목례를 해 보였다. "헤헤헷, 감사합니다. 이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이만." 빙글 몸을 돌려 빠져나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출구 쪽에는 언제 신형을 날려 막았는지 제갈혜와 당가희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왠지 순순히 보내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당가희는 한술 더 떠 손뼉을 치며 폴짝 뛰어 보였다. "어머, 망아루 점소이 녀석이네. 정말 오랜만이다. 얘, 이런 데서 보다니 뜻밖인걸." 제갈혜는 어이가 없었는지 그냥 샛눈으로 노려볼 뿐이었다. '에휴, 결국 들켰네. 그럼, 내 뒤에 서있는 인간은?' 꿀꺽. "이 녀석!" 남궁현 녀석이 고함을 지르며 내 어깨를 낚아채려 했으나, 의외로 쉽사리 피할 수 있었다. 만취한 상태라 스스로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서신, 누가 준 것이냐! 지난번처럼 생판 모르는 복면인이 줬다고 오리발 내밀 생각은 버려라! 네 배후에 있는 놈은 누구냐! 천운학이냐? 아니면 ……." '중앙 누각 현관으로 뛰어올라와요.' '전음입밀?' 전음을 보낸 게 누구인지 길게 생각하시고 말 것도 없었다. 날렵하게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달렸다. 바람이 귓가를 스쳐왔다. 본능적으로 신형을 앞으로 굴려 피하면서 중앙 누각으로 몸을 던져 넣었다. "거기 서!" 그들이 쫓아오기 시작했다. '맨 위 오층 누각으로 달려와요. 남궁현 공자가 취기가 있어서 쉽사리 잡지는 못할 거예요. 다른 여인들도 쉽사리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으니 어서 뛰어요.' 계속 연이어 울려 퍼지는 전음입밀 속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뒤편에서 작은 동요가 이는 게 느껴졌다. 무슨 동요 거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에게는 기회였다. 헐레벌떡 삼층인가 오를 때쯤에야 뒤에서 추격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 달음박질 속도로 그들에게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이리라. 더구나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결과적으로 탈출구없이 궁지에 몰리는 꼴이 될 터였다. 은근히 걱정이 앞섰지만, 말 그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서 조금만 더, 문이 열린 방으로 뛰어와요.' 오층에 이르자 사층까지는 환했던 바와 달리 횃불 하나 없는 암흑지경에 다다르게 되었다. 물론 내 눈의 특성상 아무 불편없이 문이 열린 방을 찾을 수 있었다. 추격해오는 발자국 소리로 미뤄보아 오층 계단 바로 밑에까지 이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저없이 방안으로 몸을 날렸다. '이 방은……? 매염경?' '어서 이 곳으로 들어가요. 웬만한 고수라 해도 이 안 소리는 들을 수가 없어요. 안에서는 밖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지만요.' 아래쪽에 하나, 위쪽에 하나씩 움직이는 이중 판자 침대였다. 그녀가 이르는 데로 침대 아래 나무 판자가 열린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먼저 아래쪽 판자가 닫히면서 뭔가 철커덕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다음에 위쪽 판자가 내려오면서 다시 철커덕 소리를 냈다. 숨이 가라앉고 진정이 되자 그제야 또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무공 실력이 부족해서 전음입밀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다더니! 나보다 잘 하잖아. 뭐, 나야 아주 못하지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8-11 23:13:38 고친날 2005-08-12 12:20:21 읽은수 7113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50)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50] 쿵! 쿵! 쿵! 쿵!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들일 테지만, ……. "어서 문을 여시오! 강제적으로 문을 부시고 들어가고 싶지는 않소." 역시 남궁현의 목소리였다. "용건도 밝히지 않고 문부터 열라고 하다니, 성미가 급한 분이군요. 좋아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철커덕, 끼이이익. 우루루루루. 매염경(梅炎璟)의 말대로 침대 아래 빈 공간에서 바깥의 소리들이 똑똑하게 잘 들렸다. 그러나, 안의 소리가 바깥에 거의 안 들릴 거라는 말은 아직 확실할 수 없었다. 단지 그러길 바랄 뿐이었다. 갑자기 기이한 적막감이 흘렀다. '어라, 왜 이렇게 조용하지?' "마구잡이로 들어와서 빤히 쳐다보는 짓은 실례 아닌가요?" "미, 미안하오. 소저의 옥용에 그만, 눈이 멀어서,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남궁현이 왜 저리 말을 더듬거리는지는 안 봐도 알만한 일이었다. 항주 제일 기녀라 할 수 있는 매염경의 눈앞이지 않은가? "죄송해요. 소저, 혹시 환락루의 주인이신 매염경 소저신가요?" "맞아요. 어떻게 아셨지요?" "작삼 점소이가 그러더군요. 저보다 더 아리따운 여인을 한 명 봤는데, 바로 이곳의 루주라고 하더군요. 그로 미뤄보아 매염경 루주께서는 작삼 점소이와 이미 안면이 있다고 보여지는데, 아닌가요?" '제갈혜, 남궁현 앞이라고 더럽게 자존심 내세우는구나. 그러니까 매염경 다음으로 자기가 이쁘다고 금칠하는 거잖아.' "어머나, 저한테 그런 칭찬을 해준 점소이가 있단 말이에요? 루주인 제가 점소이 하나 하나와 안면이 있을 리가 없지요. 그래도 찾게 되면 저한테도 소개 부탁드려요. 저녁이라도 한끼 대접하는 게 예의 아니겠어요?" "……. 가희야, 방안에는 없니?" "네, 제갈 언니, 이 방 곳곳을 찾아봤는데, 깔끔해요. 다른 길이라고는 창문 바깥뿐이 없을 것 같아요." "……." '킁, 오층 누각 창문에서 뛰어내려? 나보고 투신자살이라도 하라는 말이냐?' "이제 소개 정도는 해주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다짜고짜 남의 방에 쳐들어온 분들 치고 예의가 없으시군요." '매염경, 잘한다!' "미안하게 되었소. 매염경 루주님, 전 남궁현이라 합니다. 이 쪽은 제갈혜 소저, 이 쪽은 당가희 동생입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시오." "아아, 백룡(白龍)과 해룡(海龍)이시군요. 구룡(九龍) 중 두 분이나 뵙다니 오히려 제가 영광이지요. 시간이 되시면 간단한 다과라도 대접해드릴까 하는데 괜찮으신지요?" "휴우, 다음에 초대해주시면 감사히 받아들이겠소. 지금은 쥐새끼 한 마리를 잡아들이는 게 더 시급한지라." "그래요? 아쉽군요.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안녕히들 가세요." 끼이이익. "잠시만요." 제갈혜 목소리였다. 무슨 볼 일이 남았는지 되돌아온 모양이었다. "누각 입구에서 발견한 비녀예요. 남궁현 공자의 발치로 날아든 것이지요. 혹시 모르시겠어요?" "어머, 오래 전에 잊어버린 제 은비녀군요.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이 은혜 잊지 않도록 할게요." "끝까지 시치미 떼실 작정인가요?" "호호호, 제가 뭐가 아쉬워서 시치미를 떼지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작삼이란 점소이한테 더욱 흥미가 가는군요. 꼭 한 번 만나봐야겠어요." 안에 갇힌 처지라 바깥 상황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제갈혜와 매염경 둘 사이간에 엄청난 눈싸움이 벌어졌을 것이다. 맞수만이 맞수를 알아본다고 하지 않던가? '아직 움직이지 마세요. 올 사람이 한 명 더 남았어요. 남궁현 공자 일행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에요.' 명백한 전음입밀(傳音入密)이다. 이 곳에서 나가면 필히 무공의 연원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궁현 녀석보다 제갈혜가 백 배는 더 골치 아프지. 그런 제갈혜보다 더 골치 아픈 놈이란 뜻? 누구지?' 휘리리릭. 탁. 방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창문 쪽으로 바로 신형을 날려온 듯 했다. "오셨군요." "그래, 왔지. 얼음보다 더 차가운 그대 얼굴을 보러왔더니 뜻밖의 손님이 있더군. 그리 반가운 놈이 아니라서 밖에서 좀 기다렸지." "……." 부스럭, 부스럭. "그만! 오늘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요." "왜?" "달, 달거리 하는 날이에요." "하하하하, 천하의 매염경 루주도 달거리를 한다 이건가? 좋아, 처음 있는 일이니 봐주겠어. 어차피 진미희와도 약속이 잡혀 있으니 충분히 봐줄 수 있지." 촤르르륵, 탁. '누, 누구야? 주령령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매염경을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는 놈이!' "한가지만 일러주지. 빠르면 두 달, 늦어도 석 달 안에 천운학(天雲鶴)이 폐관을 깨고 나온다. 나야 하오문 알맹이보다 그대의 알맹이를 더 좋아하지만, 천운학은 회색을 용서치 않는다. 폐관을 깨는 시점으로부터 대대적인 제초작업에 들어갈 거다. 그 이전까지 확실히 태도를 정하길 바래." "……." "일주야 후에 들르마." 휘리리릭. 그가 나가고 나자 매염경이 창문과 덧문을 닫아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도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쨍그랑! '후미!' 귓구멍이 멍멍해질 정도로 울리는 굉음 때문에 바로 귀를 싸안았다. 그러고보니 바깥에 있을 때보다 소리가 더 확대되어 들리는 듯 했다. 철커덕, 끼이익, 철커덕, 끼이익. 잠겨졌던 침대 판자가 열리면서 희미한 등잔불이 쏟아져 들어왔다.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바닥에는 깨진 도자기 조각이 어지럽게 비산되어 있었다. "휴우, 안에 작삼 점소이가 있다는 걸 깜빡했어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저야 숨겨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폐만 끼친 것은 저인걸요." 처연히 미소짓는 매염경의 안면이 왠지 서글퍼 보였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밖으로 나오면 꼭 물어봐야지 하던 의문을 품었던 생각들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제갈혜 소저는 당신이 방안에 숨었다고 단정지었으면서도 순순히 나갔어요. 아마 어디선가 은신한 채 기다릴 거예요. 새벽까지는 이곳에서 움직이지 않는 게 좋겠어요." "……." "멀대 같이 서있지 말고, 여기 앉아요." 그녀의 억양은 거칠지도, 날카롭지도 않을뿐더러 부드럽기만 했으나, 항거할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결국에는 그녀가 이르는 대로 주춤주춤 침대를 등지고 그녀 옆에 쭈그려 앉고 말았다. 한쪽 어깨가 약간 무거워졌다. 그녀의 독특한 향기가 느껴졌다. "잠시 기대고 있을 게요. 괜찮지요?" "그, 그럼요." "아마 속으로 궁금한 게 무척 많을 거예요." '족집게네.' "다 말해줄 수는 없지만, 몇 가지만 일러드릴게요. 그 이외에는 묻지 말아주세요." "말씀 안 하셔도 되요. 뭐, 궁금하면 궁금한 대로 살면 되지요. 헤헤헷." "아니요. 제 어깨가 너무 무거워서 그래요. 비밀이 많으면 많을수록 어깨가 무거워져요. 언젠가는 그 무게에 짓눌려 질식사하고 말 거라구요. 그 전에 짐을 조금 덜어놓으려는 거니까 조금도 부담스러워 하실 것 없어요." "……." "아마 제일 궁금한 게 어떻게 제가 무공을 쓸 수 있느냐겠지요. 맞아요. 아주 약간은 무공을 쓸 수 있어요. 그렇지만, 보통사람보다도 무공에 빛을 볼 수 없는 체질이에요. 단전이 너무 허약해서 내공을 쌓을 수가 없거든요. 어떤 무공을 쓰건 지극히 단시간 동안밖에 못 써요. 녹 문주님도 제가 무공을 못하는 걸로 알아요. 비밀로 해주실 거지요?" "그럼요." "호호, 좋아요. 아, 잠깐만요. 약 좀 먹구요." 그녀는 품속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더니 약과라도 먹듯 오물오물 꼭꼭 씹어 먹었다. 왠지 낯이 익은 단약이었다. "그것은 바로……?" "아까 전에 주령령이 주고 간 단약이에요. 씹어먹는 쪽이 훨씬 맛이 좋더라구요. 왜요? 이상해요?" "이상하다기보다 어디까지나 독약은 독약일텐데……." "호호호호,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영약이라고 생각하고 먹으면, 그게 영약인 것이고, 독약이라고 생각하고 먹으면, 그게 독약인 거라구요." "……." 매염경은 꽤나 오랫동안 이 얘기, 저 얘기를 늘어놓았다. 듣고 나면 특별히 비밀일 것도 없었다. 정작 내가 궁금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한 해답은 거의 얻지 못했지만, 이젠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댄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그녀는 단지 말상대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나처럼 하찮은 점소이를 말상대로 삼아야 할 만큼 주변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교 누님처럼 무거운 짐을 둘러매고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여인이로군. 언젠가 그녀의 짐을 나눠 짊어질 녀석이 나타나겠지.' 매염경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안아들어 침대 위에 눕혔다. 이불을 덮어 주다보니 가죽신과 버선이 눈에 들어와 가만가만 벗겨서 한 쪽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버석버석. '응? 도자기 조각들이잖아. 하는 수 없지.' 점소이 버릇 개 주랴? 어질러진 방을 내려다보니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큰 조각들은 주워 담고, 작은 조각들은 먼지가 안 나도록 조심스럽게 쓸어 담아 깨끗이 정리했다. '이제 보기 좋군. 슬슬 나가볼까?' 그냥 나가려다 그녀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니 조금 아쉬운 감이 들었다. 깊이 잠들었는지 숨소리가 쌔근쌔근 규칙적으로 들렸다. 기회다 싶어 그녀의 얼굴을 슬며시 어루만져 보았다. 매끄러운 감촉에 나도 모르게 얼굴선을 따라 손을 내리다가 그녀의 봉긋한 가슴에 닿고서야 깜짝 놀라 물러섰다. 그녀의 숨소리는 변함 없이 쌔근쌔근 들려왔다. "쩝, 내가 주책이지. 다음에 봐요. 매염경 소저. 크크, 잠든 사람한테 작별 인사라니……." 막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였다. 가벼운 탄식 같은 게 들려온 듯 했다. 화들짝 놀라 잽싸게 몸을 돌렸다. 여전히 그녀는 쌔근쌔근 이었다. '신경과민인가? 하여튼.' 그 길로 방문을 열고 나섰다. 정신 없이 도망쳐 올라왔을 때는 사 층에 불이 꺼져 있다는 것에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나중에 매염경 소저가 흘린 말 중에 환락루 사 층에 대한 말도 있었다. 사 층 전체가 기관매복으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복도뿐만이 아니라 사 층 외곽 지붕과 벽들도 모두 기관매복의 일부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원할 때 발동된다고 했으나, 지나가기에 겁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휴우, 십년 감수했네. 자주 놀러올 만한 곳은 못 되는군.'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8-15 18:12:55 고친날 2005-08-15 18:29:30 읽은수 7102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51)-월녀궁 비밀 분타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새벽이 도래하기 전이라 그런지 한 밤을 찬연하게 밝혔던 수많은 등불들이 하나 둘 꺼져 가고 있었다. 이제는 말 그대로 기루든 주루든 슬슬 마무리지을 시간인 것이다. 어두움 밤거리에 간혹 켜져 있는 외등이 음산한 분위기를 부추겼다. 서호(西湖)를 타고 올라온 밤안개도 심상치 않았다. '이거 주령령이 보면 좋아서 환장할 분위기구만. 무환루가 항주 한 가운데 떡 버티고있으니 귀신놀이도 맘대로 못하고 쌓인 게 오죽이나 많겠어?' 음산한 분위기를 달래고자 속으로 궁시렁궁시렁 거리며 항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흐흐흐,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처음에는 미친 사람처럼 실실거리던 웃음소리는 급기야 밤거리가 울릴 정도로 크게 울리고 말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기왓장이 떨어져 내리며 땅이 흔들릴 정도로……? '설마 사자후?' "잘 만났다. 애송이, 제갈혜 말대로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이제 어디로 도망갈 것이냐?" "남궁현!" "흐흐, 감출 것도 없다 이건가? 아는 척 해주니 더욱 고맙군. 그 날의 치욕, 잊지 않았다. 아직도 내 이마 한 가운데가 종종 저려오곤 하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만 아니면 예전에 니 녀석 머리통을 날려버렸을 거다." '곤란한데. 다시 매염경 방으로 숨어들까?' 펄럭. 그가 펼쳐든 것은 바로 주령령이 시를 한 수 적어놓은 서신이었다. 시 속에 중요한 의미라도 내포되어 있는 것일까? "너와 그녀 사이에는 분명 어떤 식으로든 연결고리가 있다. 중간에 냄새나는 징검다리 몇 개가 섞였을 테지만." '연결고리가 아니라 맨날 그녀한테 터지며 산다. 이 놈아. 제발 니가 데리고 가서 대신 맞아다오. 두 다리 쭉 뻗고 잠 좀 자게.' "불어라." 채앵! "적수공권(赤手空拳)이라 해서 봐줄 생각은 절대 없다. 대답을 주저할 때마다 몸의 일부가 허전해 질 것이다." "잠깐 우리 대화로 곱게 풀어가자고. 칼은 좀 내려놓는 게 어때?" "단호히 거절한다. 네 녀석에게 어떤 꿍꿍이 암수(暗數)가 있을지 알 수 없거든. 일단 잘라내고 시작……야, 기다려!" 내가 미치지 않은 이상 놈과의 정면 승부에 시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길게 사설을 늘어놓는 사이 몸을 돌려 후다닥 내달렸다. "니가 신법으로 날 당해낼 성 있을 거라고 보느냐!" 과연 그의 신형이 쭉 늘어나 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안의 검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내 오른팔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드는 것도 느껴졌다. '미안하지만, 난 이미 반년 전의 내가 아니거든. 멋으로 맞고 산 게 아니란다!' 최대한 몸을 비스듬히 틀어 남궁현의 일검을 피하면서 그의 안면으로 왼쪽 주먹을 쭉 뻗었다. 펑! "우욱!" 주먹이 그의 안면에 맞기 직전 등쪽에 거대한 타격을 받고는 그대로 떼구루루 굴렀다. 더럽게 아팠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잽싸게 일어섰다. 첫 일격이 실패하자 다급한 김에 검로를 비틀어 검신으로 내 등을 후려친 듯했다. "등뼈가 박살나라고 전력으로 후려쳤는데, 쉽사리 일어나다니 의외구나. 역시 접근해왔던 처음부터 무공을 숨기고 있었구나. 네 목적이 날 감시하는 거냐?" "내가 미쳤냐? 남자한테 왜 접근해? 미녀면 몰라도 남자를 왜 감시 하냐고?" "뭐, 아무래도 좋다. 니 놈을 경시한 점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번에는 몸 성히 못 갈 것이다." "잠, 잠깐 경시해줘도 좋으니까 그냥 보내주면 안될까?" "무인이라면 무인답게 목숨을 걸어라!" 지금까지는 다르게 남궁현의 전신에 기력이 몰려드는 게 보였다. 정말 제대로 마음을 먹었는지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면치 못할 가공할 기세가 느껴졌다. 단순히 한 발을 내딛으며 검을 쥐어잡는 기수식에서 절도와 기백이 넘쳐흘렀다. '자식, 정말 겉멋 하나는 잘 들었단 말이야. 혹시 여자들 꼬시려고 피땀 흘려가며 자세만 잡은 게 아닐까?'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나는 뒷걸음으로 한 발씩 한 발씩 거리를 벌렸으나, 그 역시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기에 좀처럼 간격이 늘어나지 않았다. 허술한 내 방비에 힘을 얻었는지 기어이는 남궁현이 고함을 지르며 신형을 날려왔다. "흐아아압!" 그의 움직임이 뻔히 보이면서도 강맹한 기백에 압도되었는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피할 틈도 허용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었다. 그 때였다. 나와 그 사이에 껴든 검은 그림자가 남궁현의 검신을 손바닥으로 쳐서 부러뜨려버렸다. 익숙한 울금향이 퍼져 나왔다. '주령령!' 콰앙! 검에 맺혀있었을 기세가 산산이 흩어지면서 흡사 화탄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 기세를 정면으로 받은 남궁현이 울컥 붉은 피를 토하며 한 발 물러섰다. 주령령은 바로 내 옆구리를 껴안으며 신형을 날렸다. 조금 안도한 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남궁현…….' 입 새로 흘러내리는 피도 닦지 않은 남궁현이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우두커니 서있는 게 보였다. 그의 시선 끝자락에는 주령령의 뒷모습이 머무르고 있었다. [51] 월녀궁 비밀 분타 철혈국주를 따라간 곽철(郭鐵) 대협과 적미호(赤美狐)를 제외한 모두가 무환루(無患樓)로 무사 복귀해 있었다. 수고했다는 녹 누님의 미소 어린 한 마디에 그간 고생이 다 씻겨 내려가는 듯 했다. 팽무진(彭無盡) 녀석이 입에서 거품을 뿜으며 자신의 맹활약을 성토해 보였다. 동천위(東泉衛) 말로는 우리가 도착하기 전부터 같은 얘기의 무한반복이라 한다. 오로지 종리연(鐘理戀)만이 시종일관 호들갑 떨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세이경청(洗耳敬聽)에 시간 가는지도 모르는 듯 했다. 눈에 콩깍지가 쓰인 것은 별 상관이 없다. '젠장, 내 눈꼴이 시리게 하지는 말아야 하잖아!' 하태우(河太愚)라는 거목을 베어버린 포연강(鮑然强)은 그냥 피식 웃을 뿐 오히려 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야, 팽무진, 입에 침 좀 바르면서 떠들지. 종리연의 보호 아래 싸운 거잖아. 그게 어디 남자답게 당당히 싸운 거라 할 수 있어?' 그래도 그의 기쁨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녀석의 한 쪽 팔을 잘라낸 간지호에게 복수한 것 아닌가? 안타까운 점은 그의 목숨을 뺏은 게 자신이 아닌 철혈국주라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철혈국주(鐵血局主), 끔찍한 아줌씨였지. 그런데 말이지. 그 때 주령령(周鈴鈴)이랑 무슨 얘기를 나눴기에 그렇게 놀라는 눈치를 보였을까?' 꽤 오랫동안의 청부기간을 거쳐서인지 무환루 점소이로써의 일상생활이 낯설게 와 닿았다. 언제나 몸소 끼니를 챙겨주며 따뜻함을 잃지 않는 녹 누님, 편안한 미소로 일관하며 작은 문주라 불러주는 동천위, 털털하면서도 정감이 가는 팽무진 녀석, 부하면서 부하같지 않은 종리연 녀석, 수고했다 한마디 내뱉고는 다시 꾸벅꾸벅 거리는 홍 영감님, 여전히 곰가죽과의 일체화를 꾀하는지 좀처럼 보이지 않는 포연강, 녹 누님 뒤에 서서 아니꼽게 노려보기가 주특기인 북천위, 이 자리에는 없지만, 이제는 무환루 사람처럼 보이는 곽철 대협과 적미호,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의미심장한 서천위, 이 모든 무환루 구성원들이 이제는 친근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북천위까지도 녹 누님이 걱정되니 저러려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단 한 명만 빼고 말이다. "느려, 그렇게 느려서 남궁현의 손속을 피할 수 있겠어! 더 빨리, 더 빨리!" 쿵, 쿠쿵! '젠장, 이 마녀만 아니면 내 세상살이에 걸림돌은 없는 거나 다를 바 없는…….' 퍼퍽. "우와악!" "어디다 한 눈 팔아! 넌 반시진동안 남궁현한테 삼백 번은 찔렸어. 맨손으로 다시 만나면 도망이라도 제대로 가야할 것 아냐!" 철환을 발에 차고서 제대로 도망 다닐 리 만무했다. 상대는 남궁현도 아니고, 종리연에 맞먹는 신법의 소유자, 주령령 아니던가! 그녀가 이토록 매몰차게 수련을 강조하는 것은 아마 다른 이유일 듯 싶었다. '나 때문에 남궁현한테 들킨 셈이니 조급해지기도 하겠지. 차라리 잘 된 것이 아닐까?' 당시 주령령은 검은 색경을 쓰고 야행의를 입은 상태이긴 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남궁현의 행동에서 뭔가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령령이 뒤를 돌아보지는 못했어도 들켰다는 걸 알고는 있을 터였다. 아마도 그 탓을 내게 돌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만나면 될 것 아니야. 왜 이렇게 주변 사람 피곤하게 만들어. 이유가 뭐냐? 이유가?' "뭘 그렇게 째려봐? 할 말이라도 있어?" "헤헤헤헷, 아뇨. 오늘따라 령령 아가씨의 자태가 더욱 아름다우신 것 같아서요." "……." 일단 조금이라도 그녀의 분노를 잠재우고자 한 마디 슬쩍 던져 보았다. 오래 전 급한 김에 한 번 써먹은 기억이 있지만, 말 그대로 오래 전이었다. 역시 효과가 있었는지 약간은 누그러지는 듯도 했다. '세 대 맞을 거 두 대로 줄어들겠다. 그럼 성공한 거야. 흐흐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8-17 08:20:47 고친날 2005-08-17 20:11:30 읽은수 7028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5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52] 눈매가 가늘어진 주령령이 코웃음을 흘리며 팔짱을 낀 채 내려보았다. 하얀 치파오 사이로 쭉 뻗은 다리가 더욱 길어 보였다. "후훗,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마시지. 뻔한 수작에 넘어가 주기에는 널 너무 잘 알아." "저기, 정말인데,……." "그런 잔머리 굴릴 시간이 있으면, 남궁현의 추격을 효과적으로 뿌리칠 방도나 생각해봐."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요. 무늬만 백룡(白龍)이긴 해도 구룡(九龍)에 들어가는 녀석이잖……." 퍼퍽, 퍽. "으아악!" 느닷없이 주령령의 발길질이 내 복부에 작렬했다. 부드럽게 흘러가던 분위기라 미처 방비할 틈이 없었다. "무늬만 백룡이 아니야! 그는 정말로, 정말로 노력해서 인정받은 거야! 너처럼 도망만 다니는 비겁자가 아니란 말이야!" 쿵, 콰직. 도리어 내 말에 자극을 받고 말았는지 령령의 눈가에서 푸른빛이 줄기차게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주먹이 바닥에 움푹 움푹 꽂혀 들어갔다. 필사적으로 뇌려타곤(懶驢陀坤)을 연이어 펼치며 잔머리를 굴려보았다. '남궁현과 주령령의 문제로 이 몸이 고달플 이유가 없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겉돌아서는 안 돼지. 그녀의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한이 있어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말할 기회를 잡기 위해 부득이하게 모험을 해야했다. 퍽! '커헉, 지금이다!' 그녀의 주먹을 피하지 않고 일어나 정면으로 받아버렸다. 뜻밖의 반응에 령령이 멈춰선 틈에 그녀의 팔뚝에 전력으로 달라붙었다. "비겁자는……." 맞은 데가 저리면서 숨이 턱 막혔다. "비겁자는 내가 아니라 아가씨예요!" "……." "언제까지 남궁현으로부터 도망만 다닐 겁니까? 나 여기 있노라고 떳떳이 밝히면 되잖아요. 아가씨 발작 좀 일으키는 것 가지고 흠잡을 남궁현이 아니잖아요." "……."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령령이 우뚝 멈춰 섰다. 가만히 한숨을 내쉰 그녀는 속이 상한 듯 날 거칠게 내쳐버렸다. 그래도 더 이상 주먹다짐을 일삼지는 않았다. "니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오늘은 봐주지. 다음 번에 한번만 더 떠벌리면……." 안 그래도 커다란 령령의 귀안(鬼眼)이 내 눈 한 가득히 들어왔다. 질식하겠다 싶을 정도로 진한 울금향이 전신을 내리눌러왔다. 허리를 숙인 령령이 엉거주춤 주저앉아 있는 내 안면으로 자신의 얼굴을 불쑥 들이민 탓이다. "네 아가리를 찢어 버리겠다." 순간 전신에 오한이 느껴졌다. 그녀의 말속에는 정말로 그러고도 남을 의지가 들어있었다. 오싹한 한 마디를 내던진 령령은 그대로 몸을 휙 돌렸다. 사느냐 맞아죽느냐를 내건 한 판 도박이었다. '휴우, 그래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당분간 남궁현 문제로 날 못살게 굴지는 않겠? 어? 어어?' 갑자기 가슴에서부터 시리도록 차가운 한기가 퍼져 나왔다. 그 날로부터 한시도 떼 놓은 적이 없는 자수정 목걸이로부터 퍼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에 반응하듯 심장 박동처럼 한기를 뿜었다 사그라지기를 반복했다. 막 지하수련장을 나가려던 령령의 발걸음도 거짓말처럼 멈춰버렸다. 너무 희미해서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주방 쪽에서 요동이 느껴진 듯 했다. 스륵, 스르륵, 철컥. 비밀 통로가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묘한 일이었다. 여태까지 주령령과 내가 지하연무장에 있는 동안 무환루 사람이 내려왔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강렬한 기운이다. 왠지 낯익으면서도 낯설어. 누구지?' 마침내 발소리도 없이 조용히 내려온 인영은 그 자태를 드러냈다. 흑의경장을 두른 날씬한 몸매에 흑두건으로 눈매만 드러낸 여인이었다. 허리까지 늘어진 긴 머릿결은 가죽끈에 질끈 묶여있었지만, 그녀의 걸음과 함께 좌우로 생동감 있게 흔들렸다. 허리에는 칼집에서부터 손잡이까지 새까만 칼 한 자루가 채워져 있었다. 여인은 어둠 속을 아주 익숙하게 둘러보았다. 눈앞에 서있는 령령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나를 본 여인은 눈매를 반짝거리더니 쓰고있던 흑두건을 내렸다. 슬며시 미소지어 보이는 그녀가 누군지 그제야 알아볼 수 있었다. "작삼 동생, 여기 있었구나." "교옥정 누님?" 쿵쾅 쿵쾅 쿵쾅……. 태연자약하게 미소짓는 그녀와 달리 내 심장은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이렇게나 빨리 만나보게 될 줄은 미쳐 상상도 못했던 바였다. 자수정 목걸이를 차고 있으면 어디에 있건 찾아올 수 있다는 그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눈앞에 나타난 그녀를 보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나도 그리움과 반가움에 사무친 누님이라 어떻게 말을 이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 나야. 그동안 고생 많았지? 이 지옥같은 곳에서 꺼내줄게. 일단 널 괴롭힌 눈앞의 적부터 손 좀 봐주고." 그녀의 어투에서 주령령과 손속을 나누려는 의지가 발산되었다. 그러나, 주령령이 누구인가? 십성 중 하나인 진두한 영감과도 겨룬 전적이 있는 절정 고수가 아니던가! "교 누님, 그만 두세요! 그, 그녀는 강해요." "걱정마, 나도 강해. 월녀심법(月女心法)을 극성으로 깨우쳤으니까, 설사 상대가 구룡이라 해도 밀리지 않아." 교 누님과 나 사이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령령이 코웃음을 쳤다. 어이가 없다는 투였다.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한 것도 모자라서 우리 막내를 마음대로 데려가겠다? 그게 어느 나라 법도지?" "수라삼살(修羅三殺), 그 중에서도 귀살(鬼殺)일 테지? 너희 악명은 잘 들었다. 궁주님은 너희와 힘을 합치라는 밀령을 내렸지만, 난 찬성할 수 없다. 우리 힘만으로도 충분해." "깔깔깔깔." 배를 잡고 기똥차다는 듯 웃어젖히던 령령이 문득 정색을 하면서 고개를 약간 비틀어 보였다. 심사가 틀어져도 여간 틀어진 게 아니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너희들 멋대로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하는 것이야? 도대체 뭘 믿고 제멋대로 구는지 정녕 의문스럽구나." "그 말, 곧 후회하게 될 거다! 조금만 손봐주고 조용히 나가려 했었지만, 지금 생각을 바꿨다. 니 년만큼은 사지를 갈가리 찢어서 얼려주마." "재밌겠군. 누구 사지가 찢겨질지 내기할까? 응?" '후미, 이거 난감한 일인데, 교 누님이 령령을 상대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퍼펑! 그 말에 발끈한 교옥정 누님의 양 손바닥에 한기가 맺혔다. 순간적으로 령령의 어깨가 교 누님에게 격중당해 버렸다.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은 선제 공격에 안하무인(眼下無人) 오만불손(傲慢不遜) 주령령이 일장을 허용해 버린 것이었다. 뒤늦게 독이 오른 령령과 교 누님의 주먹과 손바닥이 누차에 걸쳐 교차되었다. 그때마다 폭약 터지는 소리가 작렬했다. 그 기파에 지하연무장 자갈돌들이 먼지처럼 굴러다닐 정도였다. '령령이 약간씩 밀리고 있다? 정말로 교 누님의 실력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한 것인가?' 격식과 예의라곤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 박투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둘 다 호신강기(護身剛氣)를 펼쳐내며 상대방의 호신강기를 깨는데 주력하는 것이 보였다. 호신강기를 펼쳐내는 것도 모르는 나로서는 그것을 깬다는 개념 자체가 애매 모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교옥정 누님이 무리하고 있는 게 아닐까? 괜한 고집 피우지 말고 칼을 뽑아서…….'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분명 주령령을 미워하긴 하나, 그렇다고 교 누님에게 밀리는 꼬락서니가 흐뭇하게 느껴지는 바도 아니었다. '교옥정 누님이 약간 오해한 것도 있……, 아니지, 틀린 말은 아니잖아. 매일 아침마다 학대받으며 터지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펑, 퍼퍼퍽! 두 사람 사이의 박투는 점점 그 정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기이한 점이라 하면, 비상 사태인데도 불구하고, 홍 영감님이나, 포연강 녀석이 고개 한 번 내밀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누가 이기나 예의 주시라도 하고 있는 것인가? 저러다가 령령이 발광이라도 하면…….'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8-20 06:13:38 고친날 2005-08-20 10:58:09 읽은수 7118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5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53] 퍼퍼펑! 퍼펑! 펑! 몇 차례 손해를 본 주령령(周鈴鈴)이 독기가 오르자 교옥정(喬玉淨) 누님에게 살벌하면서도 강렬한 권, 장, 각을 연이어 퍼부었다. 교 누님도 이에 질 새라 적당히 맞대응하면서 현란한 맹공을 퍼부었다. 막상막하(莫上莫下)! 난자난매(難姉難妹)! 둘의 실력이 거의 평행선을 이루고 있었다. 상반된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떠올랐다. 교옥정 누님의 현재 실력으로 주령령을 한 순간이나마 몰아세울 정도라는 것은 구룡에 필적한다는 뜻, 응당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 만만치 않게 두려운 생각도 떠올랐다. 령령이 저렇게나 열을 올리며 흥분했던 때가 결단코 흔치 않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바람직한 일이 될 수 없다는 직감에 몸서리쳐졌다. "교 누님, 그만하고 일단 벗어나세요. 더 이상 그녀를 자극해서는 안 돼요!" "호호호, 걱정해주는 거니? 괜찮아. 이길 수 있어. 내가 본실력을 드러내면 귀살(鬼殺) 정도는 ……." 근심 어린 내 말에 도리어 힘을 얻은 듯한 교 누님은 한 층 더 격렬하게 령령을 몰아붙였다. 퍼펑! "흐으윽." 분발한 교 누님에게 재차 격중 당해 주르륵 물러선 주령령의 상태가 이상해지고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빛을 내뿜던 안광(眼光)이 점점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위이이잉. 온 몸을 휘어감는 강렬한 기파가 령령의 전신에서 발산되었다. 그 반발력으로 교 누님과 난 지하연무장 벽 쪽으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아아악! 헉, 헉, 작, 작삼 동생 이게 뭐야?" "커헉, 설, 설마 했는데, 기어이 변했어요! 피해야 해요. 누님, 어서요!" "안 돼, 나 혼자는 못 가! 두 번 다시 그때처럼 널 내버려두고 떠나지 않겠어! 간다해도 같이 가야해!" "……." 그녀의 그 한 마디로 뇌리가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뻐서 목이 매여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기쁨의 시간은 오래 갈 수 없었다. 척하니 감겨오는 끈끈한 사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압박감이 령령으로부터 끊임없이 분출되고 있었다. '그때와 같아. 최근에 발작한 일이 없었기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또 이런 일이…….' 커다란 두 눈에서 적광(赤光)을 뿜어내는 주령령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보였다. 그녀가 발작했을 때 좋은 점은 오로지 지각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더 나쁜 점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교 누님, 듣고 계세요?" "헉, 허억, 으, 으응 듣고 있어." "지금의 귀살은 방금 전의 귀살과는 차원이 달라요. 정면승부는 잠시 접고 피해야 해요." "……." "안 믿어져도 제 말대로 해요. 제발요. 누님." "네가 간다면 나도 뒤따르겠어." "그럼요. 제가 셋을 세면 왔던 입구로 바로 뛰세요. 저도 뛸 테니까, 돌아보지 말고 가야해요. 현재 귀살은 혼란상태라서 바로 쫓아오지는 않을 거예요." "알았어." "하나, 둘, 셋! 지금이에요!" 휘리리릭. 내 말대로 교옥정 누님은 들어왔던 입구로 신형을 날렸다. 난 그녀 뒤를 따르지 않았다. 광증(狂症)에 빠진 주령령을 향해 달려갔다. 교 누님과 지금의 령령이 충돌하면 백이면 백, 교 누님의 패배가 확연한 일이다. 아마 십중팔구는 사지를 잘리거나,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어렵게 재회한 그녀다. 보자마자 잃게 되는 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적안(赤眼)의 주령령은 두 패로 갈라진 우리들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내가 자신에게 달려들자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설마……!' 그녀를 움켜잡으려는 찰나, 주령령의 신형은 땅으로 푹 꺼지듯 사라졌다. 령령의 신형이 나타난 곳은 교 누님의 바로 등뒤였다. 주령령의 유령 같은 손그림자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교 누님의 새하얀 목덜미를 찍으려는 순간이었다. "안 돼, 안 된단 말이야!" 어디서 그런 힘이 돋아났을까? 청아한 기운 한 가닥이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관통해버릴 듯 솟구쳤다. 붕조신법인지 뭔지가 발현된 것도 내 관심 밖이었다. 내 초점은 오로지 교 누님의 안위였다. 슈우욱, 덥석. 아슬아슬하게 간발의 차로 주령령의 허리를 낚아챌 수 있었다. 그녀의 손그림자가 교 누님의 목덜미 대신 내 옆구리로 떨어졌다. 가냘픈 손가락 끝이 뱃가죽을 뚫고 들어와 내장 끝을 톡톡 찌르는 게 느껴졌다. "크흑, 절대로, 절대로 안 놓을 거야." 떼구루루 구르면서 주령령이 일어서지 못하도록 그대로 팔짱을 껴버렸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내 다리를 엮어서 날뛰지 못하게 속박했다. 나와 령령이 엎치락뒤치락 바닥을 구르는 소리에 교 누님이 멈춰 섰다. 호기심을 참지 못했는지 기어이 돌아보고 말았던 것이다. "작삼! 작삼! 도, 도대체 이 년은 뭐야?" 그녀가 다시 되돌아오고 있었다. 미친 듯 날뛰던 주령령의 팔이 교 누님을 향해 휘저어졌다. 강렬한 바람 한 줄기가 대기를 가르며 쏘아졌다. 휘이익, 퍼엉! "끼아아악!" 호신강기를 일으켜 방비했음에도 그녀의 신형은 나뭇잎처럼 가볍게 날아가 연무장 벽에 부딪혔다. "누님! 누님! 괜찮으세요?" "……." 기절했는지 되돌아오는 숨소리조차 없었다. 령령이 몸부림치면서 풀어헤쳐진 긴 머릿결에 시야가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불분명한 교 누님의 생사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스르륵, 스륵, 철컥. 또 다른 누군가가 다급히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흑월 언니! 흑월 언니! 정신 차려요." 뒤이어지는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 것이었다. '흑월(黑月)? 교 누님의 새 이름인가?' "거기 누구요?" "흥, 너였구나. 질긴 놈, 아직도 살아있었다니! 그 년이냐? 그 미친년이 흑월 언니를 이 꼴로 만든 것이냐?" "누님은 살아 있소?" "그래, 내상을 가볍게 입었지만, 다행히 큰 상처는 없다. 가벼운 뇌진탕 ……. 흥! 내가 왜 대답해줘야 하지?" 월녀궁(月女宮) 여인들 중 나와 안면이 있으면서 과도하게 미워하는 여인, 교옥정 누님에 대한 존경이 극에 다다라 있는 여인,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지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당신이 누군지 이제 알겠군. 사월 아니오?" "크크, 그래, 이제 알았냐?" 채앵! "뭘 하려는 거요?" "그 년의 목줄기를 따려는 거다. 잘 잡고 있어. 잘못하면 니 놈까지 같이……. 아니지, 호호호호, 오히려 잘 되었다. 잘 되었어. 이 기회에 니 놈도 같이 베어버리겠다." '제길 주령령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 죽겠구만, 별의 별 희한한 게 날뛰고 난리야!' 위이이잉! 휘이익, 퍽. "끼아악!" "크아악!" 주령령의 전신에서 쩌릿한 파동이 퍼져 나왔다. 온 몸을 격하게 뒤흔드는 고통이 수반되었다. 엄청난 통증에 느슨하게 풀릴 뻔한 팔과 다리에 힘을 더욱 주었다. 자유로운 그녀의 팔꿈치가 내 옆구리를 파고 들어왔다. 우지지직. 갈비뼈 한두 개는 나가버린 듯 했다. 령령의 손가락이 내장을 쿡쿡 찌르는 느낌 이상으로 부러진 갈비뼈의 압박이 크게 느껴졌다. "으윽, 사, 사월(死月), 교 누님의 힘으로도 어쩌지 못한 그녀요. 당, 당신 따위는 다가올 수도 없소. 교 누님이나 어서 데리고 나가시오. 피신하란 말이오! 교 누님의 안위가 걱정되지도 않소!" "쳇, 흑월 언니만 아니었으면 너희 둘 다 죽은 목숨이었어." 사월이 교옥정 누님을 업고 가면서 몇 마디 더 궁시렁 거리긴 했으나,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덕에 자세히 들을 수가 없었다. 끝까지 령령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자 그녀의 전신에서 연이어 파동이 터져 나왔다. 내 온 몸을 벼락이 할퀴고 지나가는 듯한 극통이 뒤따랐다. 전신이 부르르르 떨렸다. '안 돼지. 내가 이 년으로부터 떨어지면 그 다음 목표는 필시 교 누님이다. 니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다.' 주령령이 몸부림칠 때마다 뼈마디가 하나씩 어긋나고 살점이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이 갑자기 뿌옇게 흐려지면서 몽롱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피를 꽤나 흘린 듯 했다. 전신을 아우르는 청아한 기운도 령령 앞에서만큼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크크, 그래도 이 정도까지 버틴 게 어디야? 조금만 더 버티면 이 년도 정신 차리겠지. 조금만 더…….' 위이이이잉. 이번에는 좀 더 강렬하게 기파가 흘러나왔다. 힘이 많이 빠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팔과 다리가 느슨해지고 말았다. 내가 꽤 지친 것을 알아챈 령령이 강한 악력으로 팔을 밀쳐내며 신형을 일으켰다. 팽팽하던 전세가 완연히 역전되었다. '후우, 후우, 쳇, 맘대로 해라.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도 없다.' 그녀는 다른 기운들을 느꼈는지 천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냥감을 놓친 것에 화가 났는지 도마 위의 생선처럼 무력하게 퍼져있는 날 내려다보며 들짐승처럼 그르릉거렸다. 그녀의 녹피 가죽신이 내 목줄기 위를 지긋이 눌러왔다. 단번에 죽이기도 아깝다는 듯 천천히 힘을 주고 있었다. 출혈에 의한 실신이 먼저일까? 질식에 의한 죽음이 먼저일까? 하는 기이한 생각이 떠올랐다. 의식이 실낱같이 희미해지려는 찰나, 령령의 발에서 단번에 힘이 빠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유에 의문을 가질 시간조차 없었다.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떠올릴 수 있었다. '출혈 쪽이 먼저구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8-23 14:19:07 고친날 2005-08-23 20:24:23 읽은수 7121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5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54] 향긋한 난향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부드러운 손길이 내 옆구리를 간질간질 더듬으며 뭔가를 바르는 중이었다. 한약 냄새를 풍기며 은근히 쓰린 걸로 보아 고약인 게 분명했다. 다른 뼈마디들이 욱신거렸으나,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눈을 뜰까 말까 한동안 망설이다가 오른쪽 눈으로만 슬그머니 실눈을 떠보았다. '휴우, 녹 누님이었구나. 역시 무환루에서 내 편은 녹 누님 밖에 없어.' 옆에서 다른 인기척이 들려왔기에 재빨리 눈을 감았다. "무진 오라버니, 무진 오라버니 방금 봤어요?" 종달새처럼 나불나불 신나게 떠들어대는 기색이 영락없는 종리연이었다. 난향 냄새 속에 사향 냄새도 섞여 있다 싶더니만, 무향(無香)을 고집하던 종리연이 드디어 향낭을 찬 모양이었다. 무영투도(無影偸盜) 풍룡(風龍)이라는 호칭보다 팽무진 쪽을 택하기로 작심한 듯 했다. "응? 뭘 말하는 건데?" 이 놈은 두말할 것도 없이 팽무진 녀석이었다. "작삼 오라버니가 방금 한쪽 눈을 떴다가 감는 걸 봤어요. 제 정신이 든 것 같아요." "글쎄다. 정신 든 놈이 안 일어날 리 없지. 잘못 봤겠지." "아니에요.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깐요." '이것들이 남의 방에서 미주알 고주알 떠들고 앉았네. 제발 다른 데 가서 니들끼리 오붓하게 떠들어다오.' "종 누이, 그만. 환자 앞이다. 너도 잘 알다시피 주령령은 피도 눈물도 없다. 인정사정 봐주지도 않는다. 그런 그녀의 손에 반 작살이 난 녀석이 온전할 리 없지. 잠시 경련을 일으키다가 실눈을 뜬 것일 게다." "아닌데……." 요즘 들어 팽무진을 향한 종리연 녀석의 애정공세가 눈에 띌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특히 그들 둘 모두의 방이 내 방 근처라서 괴롭게 느껴지는 중이었다. '종리연 녀석, 아직 미성년자면서 어른이 하는 짓은 다 하려 든단 말씀이야. 다 좋다고, 다 좋은데, 외기러기 독남(獨男)의 한밤을 귀찮게 하질 말란 말이다! 이 잡것들아!' "어허, 거 참. 우리 때문에 환자의 안정에 폐만 되겠구나. 녀석이 쾌차한 것을 확인했으니 우린 이만 나가자." "……." '어라? 팽무진 녀석, 거 더럽게 점잔 떠네. 뭘 잘못 먹었나?' 뚜벅뚜벅. "녹 아주머님, 저흰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작삼 저 녀석은 둘도 없는, 하나뿐인 제 친구 놈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끼이익 사박사박. 자신과 사이가 안 좋은 녹녹 누님한테 팽무진이 공대하는 것에 자존심 상했는지 종리연 녀석은 그대로 먼저 나가 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걱정 말아요. 작삼 동생은 저한테도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동생이니까요." 녹 누님이야 원래 나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단지 팽무진이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줄은 몰랐다. 그 날 이후로 친구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기에 그저 빈말인줄 알았었다. 실제로 나 자신도 주령령에게 할 말이 없어서 친구라는 단어로 핑계삼았던 것이다. '쩝, 자존심만 더럽게 내세우는 놈이 아니었군. 후후, 걱정 마라. 나도 네 놈을 친구로써 진지하게 고려해보마. 친구라……, 소방 이 녀석은 잘 지내고 있을까?' 뼈마디들 쪽에 다시 고약을 바르고 붕대를 교체하는 게 느껴졌다. 붕대로 꽉 조일 때 조금 아려왔다. 무엇보다 옆구리 갈비뼈와 아래 무릎뼈가 제일 아렸다. 마침내 치료를 마치고 이불을 덮어준 녹 누님의 속삭임이 귓가에 나지막하니 들려왔다. "빨리 완쾌해. 동생. 기다리는 아가씨, 속병 들라." '기다리는 아가씨? 쳇, 녹 누님도 이제 별의 별 농담을 다 하시네. 독신은 서러워서 못살겠구만.' 끼이익 쿵. 녹 누님마저 나가버리자 방안에는 기이한 정적만이 흘렀다. 깨어 있어봤자 거동이 불편한 관계로 할 일도 없었다. 억지로 잠을 청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그마저도 무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유난히 후각 신경을 예민하게 거스르는 게 있었던 것이다. 짜증이 난 나머지 그에 대해 한마디 일침을 놓지 않을 수 없었다. "종리연 녀석, 사향을 너무 강하게 쓴 모양이군. 여인의 향기란 모름지기 강렬한 것보다 은은한 게 좋단 말씀이야. 녹 누님의 난향처럼 말이야." 벌떡. "은공, 괜찮으신 거예요?" 익숙한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창 측으로 돌렸다.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눈부셔서 실눈을 떠야만 했다. "이런, 죄송해요."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즉시 덧문을 닫아 버렸다. 쭉 뻗은 몸매에 적의경장을 걸친 그녀는 다름 아닌 적월(赤月) 소저였다. 사향 냄새도 알고 보니 그녀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척에서 사향이 자극해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녀의 기척 자체가 거의 은신 수준이었기에 몰라봤던 것이다. 왠지 모르게 헤어질 때보다 약간 더 수척해진 것 같았다. "적월 소저시군요." "예, 은공, 그간 별래무양(別來無恙)하셨는지요?" '쩝, 이게 별래무양? 뭐, 무사히 살아있으니 된 건가?' "그럼요. 소저야말로 별일 없으셨습니까?" 내 반문에 그녀는 그저 말없이 빙긋 미소지어 보였다. 덧문을 닫아버려서 그런지 안면에 약간 그늘이 져 보였다. 겸염쩍어진 나는 말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틀었다. "참, 교옥정 누님은 아무 이상 없나요?" "예, 은공께서 귀살을 막아주신 덕택에 경상 정도에서 그쳤어요. 가볍게 내상을 입긴 했지만, 어젯밤에 완치되었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흑월 언니가 이곳에 있었는걸요. 다른 일이 생겼다고 절 남겨두고 나갔지만 요." 누님이 무사하다는 말에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다는 말에는 아쉬움마저 떠올랐다. 거의 반년만에 재회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령령과 그녀가 붙어 버리는 바람에……. "휴우, 주령령이 발작한 것 치고 이 정도에서 끝난 것이면 정말 다행이네요. 예전에는 정말 끔찍 그 자체였는데……." "……." "그런데, 흑월이란 교 누님의 또 다른 이름이오?" "원래 월녀궁(月女宮) 여인들은 정식 제자로 인정받으면 본명을 버리고 월(月)자 돌림 이름만 사용해요. 그런데, 흑월 언니는 가문에 대한 복수 때문인지 오래 전에 궁주님께 간청을 올렸지요. 본명도 같이 쓸 수 있게 해달라구요. 그녀를 너무 아끼는 궁주님은 특별히 예외를 인정했어요. 그래서, 밖에서는 교옥정이라는 본명을 쓰고 있는 거예요." 원한! 교옥정 누님의 원한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는지는 제대로 알 길이 없다. 단지 그녀와 이틀 밤을 겪으며 가슴 시리게 느낀 것이 전부였다. 월녀심법을 극성으로 익힌 지금, 필시 복수의 칼날을 들이밀 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이곳 무환루(無還樓) 위치는 어떻게 알았어요? 설마 자수정의 기운을 따라서 온 것인 가요?" 적월 소저는 호들갑을 떠는 내 말에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월녀궁에서 항주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먼데요. 자수정의 기운은 반경 오 리 안에는 있어야 찾을 수 있어요. 일단은 강호 전체를 뒤져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서 사실상 불가능해요. 접선자가 없었다면 아직도 헤매고 있었을 거예요." "접선자? 무슨 말이지요?" "우리 월녀궁이 숙원으로 삼던 일양심법(日陽心法)을 얻은 이상 중원에 진출할 교두보를 마련하는 게 다음 순서였지요. 정파 녀석들은 아직 우리를 사파로 몰아세우며 공적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고, 사파에 끼자니 스스로를 사파로 인정하는 꼴이라 그 또한 마땅치 않던 차였어요. 그러니까, 정파에도 사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연대가 가능한 중립 세력을 찾게 된 거지요. 그러던 차에 수라사살(修羅四殺)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어요." "수라사살에 대한 정보?" "예, 항주에 은신해 있는 수라사살이 하오문과 여타 중립 세력을 끌어들여 반 무림맹 전선을 구축하려 든다는 정보였어요. 특히 월녀궁 쪽에서는 중원에 대한 정보세력이 전무한 상황이라 하오문의 비중이 커 보였을 거예요. 월녀궁 궁주님은 즉시 항주 근처로 비밀 분타 설립을 추진했지요. 분타주는 은공께서도 잘 아시는 냉월화 부궁주님께서 겸임하기로 하셨어요. 그런 와중에 수라사살이 강남표국을 도와 무림맹과 일전을 벌였다는 정보가 연이어 들어왔어요. 자체적으로 확인해본 결과 사실로 입증이 됐구요. 어느 정도의 무력과 정보력을 갖춘 세력이라면 대세를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결론에 이른 거예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누군가가 정보를 고의적으로 우리측에만 흘린 것 같아요. 화산파를 제외한 다른 문파들은 감감무소식이었거든요." 적월 소저의 얘기를 계속 듣는 순간, 정보를 흘린 이가 누군지 짐작이 되었다. 하오문과 무환루의 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시기 적절하게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유화 매염경 소저밖에 없는 것이다. '주령령이 이 사실을 알면 매염경 소저를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을 거다. 휘유, 정말 산 넘어 산이다. 아무 일 없어야 할텐데…….' "결국 비밀 분타 설립을 위해 임시 방편으로 쓸 건물도 사들였어요. 엊그제, 흑월 언니가 귀살이라는 여인과 대결을 벌인 그 때가 건물 정리를 하던 와중이었어요." "네? 비밀 분타가 어디 있는데요?" "무환루 바로 뒤편 건물이에요." "……." "냉월화 부궁주님께서 직접 위치선정을 하신 거라 저희는 그냥 따를 수밖에 없어요." 알만 했다. 궁주는 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그녀를 제외한 월녀궁 여인들이 제일 무서워할 사람은 아마도 냉월화 누님일 것이다. 스스로는 인명을 살리는 환약사라고 자칭하겠지만, 다른 이들의 시선에는 그 반대로 보이지 않겠는가? 녹 누님이 아니었으면, 필시 그녀가 날 치료하려 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바로 뒤편에 위치선정을 한 이유가 있겠지. 냉월화 누님이 벌이는 일 중 계산에 없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한참 옛 추억에 빠져있을 때 아래층에서 가볍지 않은 호통 소리가 들렸다. 호통 소리의 임자가 누구인지도 알 것 같았다. "응? 이 소리는 교 누님 목소리 아닌가요?" "맞아요. 아무래도 흑월 언니 같아요." "그럼, 이 아래층에는……." "오늘은 무환루가 폐점 중이에요. 냉월화 부궁주님을 위시한 월녀궁 무인들이 담판을 짓기 위해 대거 몰려왔거든요. 흑월(黑月) 언니만이 아니라 사월(死月)에 은월(銀月)도 있어요. 춘월(春月)과 명월(明月)은 비밀 분타를 지키려고 남았지만요." "그럼, 이럴 때가 아니군요. 적월 소저 부축 좀 해주시면 안되겠소?" "하지만, 은공, 아직은……." 난 그녀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교옥정 누님이 지척에 있는데, 여기서 그녀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내 몸은 내가 잘 압니다. 거동은 불편해도 거의 나았습니다. 더욱이 소저가 도와주면 쉽사리 갈 수 있을 겁니다. 거절한다면 혼자라도 가겠소." "휴, 알겠습니다. 은공. 그래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내가 고집을 피우자 적월 소저는 마지못해 어깨를 빌려주었다. 처음 봤을 때는 너무나도 무뚝뚝하니 앉아있기에 여장남자가 아닌가도 의심했었다. 그러나, 가녀리면서도 부드럽게 와 닿는 그녀의 어깨에서 여인의 성숙함이 느껴졌다. '종리연이 아무리 어른 흉내를 내도 적월 소저의 발끝에도 못 미치겠군.' 팔꿈치를 비롯한 상체 뼈마디는 갈비뼈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거의 이상이 없었다. 문제는 무릎뼈가 아직도 흔들거렸다. 맛이 간 주령령의 엄청난 힘에 직접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쳇, 무지하게 아프네. 그냥 업어 달랠까? 에휴, 남자 체면이 있지. 조심 또 조심해야겠군.'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8-27 11:18:33 고친날 2005-08-27 11:30:27 읽은수 7307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5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55] 적월 소저의 부축을 받아가며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복도를 지나 계단으로 내려갔다.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층 식탁들마저도 한산하게 텅텅 비어 있었다. '아그그, 거 더럽게 아프네. 뼈마디들끼리 서로 뿌드득 뿌드득 격렬하게 애무해 주는구만.' "은공, 정말 괜찮으세요? 안색이 창백하신 게……." "헤헤헷, 햇살이 반사돼 보여서 그래요." 마침내 일층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난간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아래가 무환루 본층인 것이다. 아래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가 의외의 인원에 놀라고 말았다. 고작 해봐야 냉월화 누님, 교옥정 누님, 사월, 은월까지 다섯 명 안팎의 인원이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월녀궁 인원만 따져서 못해도 서른 명은 되는 듯 했다. 의문스런 표정으로 적월 소저를 돌아보자 그녀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 죄송해요. 미처 말씀 못 드렸네요. 일양심법을 무사히 회수한 공으로 복귀한 인원 모두가 조장으로 승급했어요. 한 조에 열 명씩 월녀궁 제자들을 수하로 거둔 거예요. 저도 열 명의 수하가 생겼어요." "아하, 그렇군요. 축하드립니다." '에휴, 난 한 명 있는 쫄따구조차 제대로 건사 못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열 명이나! 쩝, 좋겠다.' "조 이름은 뭔가요?" "각자의 이름 앞 글자를 땄어요. 즉 저는 적조(赤組) 조장인 셈이에요." "헤헤헷, 적조 조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스스로 남세스러웠는지 적월의 안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오히려 내가 더 남세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의 대한 부러움을 뒤로하며 내려가려다가 가슴이 덜컥 내려않는 고함을 듣게 되었다. "뭘 잘 했다고 뻔뻔스럽게 얼굴을 디미는 거야! 당신같이 피아를 구분 못하는 인간은 이 자리에 발을 내밀 자격이 없어!" 교옥정 누님의 고함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무환루를 메우고 있었다. 날 향한 말은 아니었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에 날카로운 비수가 삐죽삐죽 박혀있는 게 느껴졌다. 본 층으로 내려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대로 계단 난간에 걸터앉아 버렸다. 왠지 모를 위화감에 내려가기가 꺼려졌던 것이다. 협상을 위한 자리임을 인식시켜 주려는 듯 주변 식탁을 물리고 한 식탁만이 본 층 가운데 자리잡혀 있었다. 오른쪽 자리에는 냉월화 누님과 교 누님이 월녀궁 대표로 앉아있었고, 그녀들 사이 뒤편에 사월이 호위를 하듯 서있는 게 보였다. 왼쪽 맞은 편에는 뜻밖에도 홍 영감님이 두 눈을 제대로 뜬 채 앉아있었고, 녹 누님과 북천위가 호위하듯 바짝 붙어 있었다. 포연강은 말다툼 자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는지 팔짱을 끼고 멀거니 서있었다. 팽무진과 종리연은 남의 일이라는 듯 멀찍이 떨어진 탁자에 앉아 둘의 세계에만 빠져 있었다. '팽무진 녀석도 참 줏대가 없군. 일편단심 진미희 소저뿐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월녀궁과 대치한 나머지 빈자리 하나에 주령령이 막 앉으려던 찰나였다. "언제 어떤 식으로 날뛸지 모르는 인간을 이 자리에 앉히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교옥정 누님의 비방 어린 일침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잘잘못을 따지자는 자리인가? 니들이 부르는 귀살(鬼殺)의 입장으로 막내를 수련시키는 것은 내 권리이자 책임이다. 사사로이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한 것은 누구지?" '역시 주령령, 말 잘하는군. 하여간 무서운 여편네야.' 쾅! 분기(憤氣)를 못 참았는지 식탁을 주먹으로 내려친 교 누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막내라고? 강제로 납치하고 억류 중이라는 것을 누가 모를 줄 알고!" '옳지. 바로 그거다. 그거! 그게 내가 하고 싶던 말이라니깐. 크크, 주령령, 뭐라고 반박할거냐?' "흥,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군. 난 단지 부드럽게 권유했을 뿐이다. 그가 한사코 거절했다면 붙잡지 않았을 것이다." 령령의 답변에 내 입이 떡 벌어졌다. 턱뼈가 툭 빠지는 기분이었다. '부, 부드럽게 권유? 야, 이 마녀야! 몇 년, 몇 월, 며칠에 부드럽게 권유를 했는지 당장 털어놔 봐!' 바로 교 누님이 반박을 하려는 순간, 냉월화(冷月花) 누님이 손을 들어 보이며 그녀를 제지했다. "흑월, 그만 자리에 앉거라. 우리는 지금 공적인 대화를 나누려고 온 것이다. 네 사적인 얘기로 어지럽힐 자리가 아니다." "……." 교 누님이 마지못해 털썩 자리에 앉자, 주령령도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눈싸움은 한동안 치열하게 그칠 줄 몰랐다. '주령령 눈이 왕방울이라 교 누님 쪽이 좀 불리하지 않을까? 힘내세요! 교 누님!' "저희가 왜 왔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계시리라 봅니다. 선배님 일행이 수라사살인 것을 훨씬 이전에 알았어야 하는데, 좀 아쉽군요." 홍 영감님을 향해 먼저 말을 건넨 것은 냉월화 누님 쪽이었다. 영감님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좀 갸웃거리며 반문했다. "우리가 수라사살로 불려진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네. 허나, 왜 왔는지는 전혀 모르겠군. 감이 잘 잡히도록 부연 설명을 해주지 않겠나?" '오옷, 이제 본격적인 설전의 시작이네.' "호호호, 독마(毒魔) 선배님께서 얼마나 총명하신 분인가는 궁주님으로부터 귀가 따갑게 들었답니다. 오래 전에 우리 월녀궁에 홀홀 단신으로 놀러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독마? 설마 홍 영감님이 사파 제일고수라는 육마(六魔) 중에 한 명이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흠, 많이도 알고 있군. 젊은 시절의 객기로 월녀궁 구경을 해보겠다고 쳐들어간 적이 있었지. 그때 일곱 명의 할망구와 한 명의 소녀가 날 막겠다고 길길이 날뛰기에 며칠 좀 놀아주다가 나왔었더랬지. 그렇다면……?" "예, 그때의 소녀가 바로 지금의 월녀궁 궁주십니다. 지금은 칠장로였던 노사분들 중에서도 오직 한 분만이 생존해 계실 뿐, 다른 분들은 예전에 돌아가셨지요." "그런가? 훗, 좋은 시절의 추억이었지." '정말 별난 데가 많았던 영감이군. 남의 영역을 구경하겠다고 뚫고 들어가서 장난을 치다 와?' "그런데, 우리 궁주님의 기억력도 아주 비상하시답니다. 그때 독마 선배님이 사라지시면서 남기셨던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신답니다." "……."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한 번 정도는 도와주겠다고 하셨다더군요. 총명하신 독마 선배님께서 설마 그 일을 모르겠다고 시치미 떼시지는 않으리라 봅니다만?" "그랬던가? 하하하하." 그녀의 일침에 무환루 측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입심이 걸출한 포연강도 어이가 없었는지 천장만을 바라봤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듯한 녹 누님이 한 마디 할 듯 나서려다가 마는 것도 보였다. '젊은 시절, 월녀궁에 놀러갔다라? 호기심과 혈기로 가득 찬 두 남녀 청춘끼리 만났는데, 며칠동안 아무 일도 없었겠냐? 월녀궁을 다 태워버릴 법한 불장난을 쳤으니까 쫓겨났을 테지.' "좋네. 일단 얘기부터 들어보고 합당하다 싶으면 긍정적으로 생각함세. 나름대로 식솔이 있는 몸이라 젊은 날의 혈기로 무턱대고 움직일 수 없음을 미안하게 생각하네." '반 허락, 반 거절? 영감님다운 애매한 대답이로군.' "옳으신 혜안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서 반 무림맹 세력을 구축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저희도 중원에 진출할 교두보가 필요한지라 협조 세력을 물색 중이었습니다. 지금의 수라사살 세력이라면 저희와 연합을 하시는 게 낫다고 봅니다. 무력의 공백을 월녀궁의 힘으로 어느 정도 메워드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득이 되었으면, 득이 되었지, 손해는 없으리라 봅니다." "아니네. 우리와 자네 쪽은 엄연히 차이가 있지." "네?" "우린 무림맹에 노출되지 않는다는 전제로 세력을 모으고 있지만, 월녀궁은 너무나도 오랜 세월 드러나 있었네. 월녀궁 비밀 분타도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오 할은 넘을 걸세." "확실히 월녀궁 자체는 감시당하고 있겠지요. 그러나, 비밀 분타 세력은 드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선대로부터 내려온 비밀 통로로 나왔을 뿐 아니라 철저히 밤에만 은신해서 이동해왔거든요." "과연 아무 문제가 없을까? 월녀궁은 규모가 큰 곳이다. 오랜 세월 동안 무림맹 간자가 스며들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지. 그렇다면, 이번 분타 세력에도 간자가 없으란 법이 없지." "절대로 없습니다. 제 목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고르고 또 골라서 엄선된 녀석들로만 선발해 왔으니까요." 잠시동안 대화가 끊어졌다. 홍 영감님과 냉 누님 사이에도 눈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치 상대방 눈을 통해 그 속내를 꿰뚫어 보려고 시도하는 듯 했다. "그럼, 무환루 뒤편에 분타 건물을 들인 것은 어떻게 해명하실 건가요?" 주령령이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둘 사이의 침묵을 깨고 들어갔다. "여차하면 우리의 힘을 신속하게 보태기 위해서다. 담 하나 거리니까 왕래도 아주 편해질 듯 싶은데?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끼리 한 팔 거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꼬리라도 밟히면 같이 들통나겠다는 협박도 되겠군요." "그렇게 보여? 호호호, 그것은 미쳐 생각 못했는데, 이제부터라도 고려해봐야겠군." 냉월화 누님은 령령의 지적에 시인을 하면서 슬쩍 홍 영감님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한 마디로 이미 한 배를 탔으니 다른 선택은 없다는 암묵적 시위 같았다. "허허, 참, 이거 일방적 통보로구만. 좋네, 과거의 인연도 있으니 앞으로 잘 부탁하겠네." '과거의 인연? 역시 불장난치고서 내뺀 게 분명해.' "저희도 잘 부탁드립니다. 궁주님께 좋은 소식을 보내드릴 수 있겠군요. 이만 다시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월녀궁 사람들은 그대로 몸을 돌려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로 담을 넘어 지나갈 생각인 듯 했다. 마침 고개를 돌린 교옥정 누님과 시선을 마주쳤다. 잠시동안 그녀의 안면에 반가운 미소가 떠올랐으나, 주령령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곧 차갑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녀를 보며 가볍게 코웃음을 친 누님은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주령령은 그들이 사라졌음에도 발을 떼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여인이었다. 적월 소저의 부축을 받아 내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은공, 다음에 또 봐요. 일단은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쾌차하세요." "잘 가세요. 적월 소저." "……." 뭔가 할 말이 있었는지 입을 뻐끔거리려던 적월 소저는 그대로 침을 꿀꺽 삼키며 나가 버렸다. '시답잖기는, 사람 궁금하게만 만들고 가버렸잖아.' 당분간 월녀궁 비밀 분타와의 기이한 동거가 시작될 거라고 생각하니 은근슬쩍 기대가 됐지만, 동시에 걱정도 되었다. 교옥정 누님과 주령령 사이가 호전될 기미가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안하무인 주령령이 사람 사귀는 걸 제대로 할 리 없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8-31 18:14:28 고친날 2005-09-13 11:12:07 읽은수 7015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56)-불청객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56] 불청객 그로부터 사흘이 더 지나자 거동하는데 무리가 없게 되었다. 마침 녹 누님이 고약을 새로 붙이려 왔다가 내가 침상에서 일어나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는 야단법석을 떨었다. "동생! 어서 다시 누워. 다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를 하면 나을 것도 다시 악화돼버리잖아." 조금 난처해진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변명했다. "그게 다 나은 것 같은데요." "뭐라고? 설마!" 억지로 나를 침상에 눕힌 그녀는 일단 붕대들을 풀어내고 말라비틀어져 약효가 다 된 고약들도 뜯어내었다. 그리고서 갈비뼈를 비롯해 뼈마디를 세세하게 만져본 녹 누님은 대경실색(大驚失色)하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대단해. 다른 데도 아닌 뼈마디를 다친 거라 못해도 이 주야는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작삼 동생은 너무 수월하게 회복해 버렸어. 이전 때도 회복이 비이상적으로 빠르다 싶었는데……." "헤헤헷, 건강한 것은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누님." "흠, 건강한 것과는 차원이 달라. 혹시 이전에 만년왕삼이라던가 천년하수오 같은 명약을 먹은 기억 없어?" "그런 것 본 적도 없는데요." 본 일은 없어도 들어본 적은 있었다. 반년 전에 소방이 귀엽게 앙앙거리며 따지지 않았던가! 그때 난생 처음으로 들었었다. '정말 이 녀석은 어떻게 된 거야? 혹시 개방도로 보이는 거지들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뭐, 빨리 완쾌되었으니 다행이긴 하지. 아마 이 소식을 들으면 누구보다 팽무진과 적월이란 아이가 가장 기뻐하겠구나." "네? 팽무진은 이해하겠는데, 적월 소저라니요?" "월녀궁 여인들 중에서 그녀가 문병을 가장 열심히 왔단다. 아, 그렇구나. 호호호호!" "……." 느닷없이 녹 누님이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작삼 동생은 잘 모를 테지만, 적월이 문 앞까지 와서 서성이다 그냥 갔던 게 세 번인가, 네 번인가, 그럴 거야. 아무래도 낯을 좀 가리는 아이 같더구나. 내가 아무리 주방에 붙어있어도 무환루 내부 일만큼은 꿰고 있단다." "……." 적월 소저가 그간 두 번 정도 문병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것도 교옥정 누님을 따라서 왔던 것이었다. 조금 희한하다 싶었다. 무뚝뚝한 여인이기는 하지만, 낯을 가린다고 생각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럼, 더 이상 치료 차 들를 필요는 없겠구나. 점소이 일은 동천위와 버.릇.없.는 종리연이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 천천히 쉬다가 복귀하렴." 역시 종리연, 녹 누님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도 박혀 있었다. "네, 누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감사했어요." "호호호, 당연한 일이야. 동생 건강을 이 누나가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신경 쓰겠어?" 끼이이익, 철컥. 몇 번을 생각해도 녹 누님의 호의는 정말 과분할 정도였다. 어쩔 때는 나란 존재가 수라삼살과 그녀 사이에서 묘한 역학적 관계를 누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괜한 생각! 에구. 붕대도 풀었으니 바로 목욕이나 하자. 가려워 죽겠다.' 갈아입을 새 옷과 수건을 목에 두르고 문밖으로 걸음을 떼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찰나였다. 끼이이익. 좀처럼 투숙 손님이 없는 이 층 객실문이 열려 나도 모르게 힐끔 고개를 돌렸다. '어라? 주령령이 저기서 왜 나와? 게다가 인피면구도 안 쓴 채잖아. 일손도 부족하지 않을텐데, 참 별일일세.' 진짜 별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주령령 뒤로 일남이녀가 뒤따랐는데, 낯선 얼굴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궁현!?' 더욱이 가관은 주령령이었다. 평상시 그녀답지 않게 발그레하니 달아올랐을 뿐만 아니라 눈가에 이슬까지 맺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당황했는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나쳐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을 뿐이었다. 그녀를 뒤따르던 일남이녀는 주령령과는 다르게 이층 식당 자리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주령령에게서 어떤 주의라도 들었는지 날 보고도 바로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날 스쳐 지나가는 그 녀석의 안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무척이나 흥분하고 있는 상태 같았다. 내 의아한 시선을 느꼈는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그대로 지나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또한 착각이었다. 탁탁탁탁. 금새 방향을 틀고 올라온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 귀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너 함부로 주령령에게 다가서지 말아라. 한 지붕에 산다고 만만하게 보지 말란 말이다. 엄연히 너와는 격이 다른 고귀한 여인이다. 혹시 속으로 환상을 품고있다면 일찌감치 떨쳐내고, 홍등가나 기웃거려 보거라. 거기에는 네 분에도 넘칠 여인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 가뜩이나 얼이 빠져있던 나로서는 녀석의 공갈 어린 협박에 미처 응대를 하지 못했다.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실웃음을 흘린 녀석은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유유히 내려가 버렸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채 정리가 안된 나는 곧장 뒷마당으로 내려갔다. 주방에서 내 인기척을 알아본 녹 누님이 웃으며 뭐라고 말한 듯 한데, 들리지 않았다. 그 뒤로 북천위가 뭐라고 욕을 한 듯한데, 그 또한 들리지 않았다. 욕조 건물에 들어가 우물에서 물을 끌어올려 빈 나무욕조 하나를 가득히 채웠다. 끝까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는지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욕조 속에 들어앉고 말았다. 첨벙. 상체가 기우뚱 기울어지면서 자수정 목걸이에 욕조물이 닿자 청아하면서 찬 기운이 흘러나와 흩어진 내 정신을 일깨워줬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어떻게? 어떻게! 남궁현 녀석이 이곳을 알아차린 것일까? 게다가 주령령과 같은 방에서 나왔다는 것은……?' 남궁현과 제갈혜 등을 이곳으로 불러들였을 사람은 무환루에서 오로지 주령령 밖에 없었다. 발작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 계속 낯을 피해왔던 그녀가 발작한 지 엿새가 채 지나기도 전에 녀석을 불러들였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일종의 충격이었다. 이전까지 경과야 어찌되었건 간에 일을 저지르고 나면 양심에 걸리는지 약하게나마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여왔던 그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병은 고사하고 내가 완전 회복되기도 전에 남궁현 일행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그간 남궁현 때문에 주령령이 꽤나 귀찮게 굴었던 과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쳐 갔다. 결국 나에 대한 무시에 다름없는 게 아니겠는가! '쳇, 그렇게 된 것이로군. 자신이 벌린 일에 대해서 조금도, 눈곱만치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단 말이지? 뻔뻔한 년! 역시 남궁현의 옆구리답다. 어디 잘 먹고 잘 살아보라지!' 괜스레 투정이 일었다. 목욕을 마치고, 신경질적으로 빨래를 해서 널어두고는 바로 새 마의로 갈아입었다. 내 전용 마의 두건을 머리에 질끈 묶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짜증이 치밀어 오를 때는 그저 미친 듯이 일을 하는 게 최고였다. "시키실 일 있으면 맡겨 주세요. 누님." "어머, 더 쉬지, 벌써부터 일하려고?" "가만 있자니 몸이 근질거려서요." "저런, 심심해서 좀이 쑤신 모양이구나. 그럼 부탁 좀 할게. 저 요리들 이 층 아홉 번째 자리로 날라주겠니?" "그럼요."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북천위의 살벌한 눈길을 유연하게 받아넘기면서 주방 선반에 있던 소면 세 그릇과 만두, 죽엽청을 소반에 정리해 담았다. 이 층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에 잠시 멈춰 섰다. 손님이 나간 식탁을 정리하던 동천위가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까딱여 왔다. 마주 다가오던 종리연은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시끄럽게 탄성을 터뜨렸다. "역시 작삼 오라버니의 회복력은 괴물급이에요. 삼재검법을 익히면서 매 아침마다 열심히 터지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되나요?" 당황한 나는 주변 손님들이 의식되어 재빨리 둘러봤다. 다행히 다들 자기들 화제에 빠져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그녀와 이마를 맞대고는 나지막하게 응수해줬다. "농담하냐? 너 같으면, 회복력 운운하기도 전에 맞아 죽을 거다." "그럼요? 혹시 신비한 무공기서라도 입수한 거예요?" "신비한 무공기서? 젠장, 이 세상 무공입문서들까지 다 소각되면 그렇게 불릴 수도 있겠지." 순간 종리연의 두 눈이 호기심에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면서 걸음을 틀었다. 전망이 확 트인 이층 식당에 이르자 손님들이 앉아있는 식탁은 단 두 곳밖에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남궁현 일행이 차지했음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지만, 나머지 한 자리를 차지한 일행도 낯선 이들이 아니었다. 바로 적월과 은월을 비롯한 월녀궁 여인들이었던 것이다. 적월은 날 봤는지 못 봤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식사에 열중하고 있었다. 은월은 날 단번에 알아보고는 한 쪽 눈을 찡긋거렸다. 나도 빙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떡여 주었다. 반가운 마음이 절로 일었다. '은월, 하나도 안 변했군. 그대로네. 귀여운 녀석이야. 저 녀석 조원들은 좀 찹찹하겠군. 자신들보다 어려 보이는 은월을 조장으로 삼아야하니…….' "점소이! 빨리 요리 가져와. 그렇게 느려 터져서 밥 한끼나 벌어먹고 살 수 있겠어?" 남궁현이었다. 속에서 울컥했지만, 은월에게 잠시 한눈을 팔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므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식탁에 다다랐을 때 남궁현의 발치 끝이 스르륵 미끄러지며 내 발치 끝에 이르렀다. '쳇, 발이나 걸어 넘어뜨려 보겠다는 거냐? 나이 뒷구멍으로 쳐 먹었구나. 미안하지만, 예전의 내가 아니다. 이 놈아!' 안 그래도 주령령과 녀석에 대한 불만이 극도로 치달아 있던 중이었다. 속으로 잘 걸렸다 쾌재를 부르며 막 바닥에 닿으려던 앞발을 잠시 허공에 머물러 두고는 걸어가는 척 위장해 보였다. 예상대로 남궁 녀석의 발끝이 멈춘 위로 앞발을 힘껏 내려찍어 버렸다. 쿵! 콰직. "웁." '좀 아플 거다. 철환의 무게까지 더해졌을 테니까.' 녀석의 안면이 벌겋게 달아올라 버렸다. 방금 전과 비슷한 홍조였지만, 속내용은 전혀 다른 홍조인 것이다. 당가희야 둔한 구석이 있어서 계속 모르는 척 일관 중이었지만, 눈치 빠른 제갈혜는 적잖이 당황했다. '크크, 당황이라?' 남궁현의 체면이 걸린 문제라 자신이 나설 수도 없을 것이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남궁현과 주저하는 그녀를 보며 한 가닥 희열을 느꼈다. 속에서 치미는 고소한 쾌재를 억누르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맛있게 드십시오. 그럼 이만." 네 발자국이나 걸어갔을까? "점소이 거기 서." 역시 녀석이 날 불러 세웠다. "네, 저 말입니까?" "그래, 그래! 이 빌어먹을! 개자식 너 말이야!" '오호, 그래 가만있으면 남궁현이 아니지. 어쩔 테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02 14:16:39 고친날 2005-09-02 18:30:24 읽은수 7056 [ 12 K ] 제목 점소이 작삼(5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57] "그동안 사방팔방에서 오냐오냐 해준다고 배짱만 키운 모양이구나.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채앵. 남궁현 녀석이 단호히 선언하면서 검을 뽑아들자 제갈혜가 다급히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남궁 공자님, 그녀한테 주의 받은 게 방금 전이에요." "당장 저 녀석 버릇을 잡지 못하면 날 우습게 보고 또 도발해올 거요. 자신의 처지를 통감할 수 있도록 가르쳐놓지 않으면 또 덤벼들 거란 말이오." 녀석의 말에 한마디 토를 달지 않을 수 없었다. 원인제공자는 분명 내가 아니니 말이다. "어이,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자. 도발을 한 것은 내가 아니거덩. 난 그냥 조숙하게 걸어갔을 뿐이거덩." 전신을 부르르 떨던 그가 날 삿대질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저 보시오! 제갈 소저는 당신의 낭군이 일개 점소이에게 이런 대접을 받고도 참길 바라는 거요?" '당신의 낭군? 호오, 제갈혜, 역시 고단수야. 길 한 번 잘 들였구나.' 한숨을 푹 내쉰 제갈혜는 날 원망스럽게 돌아보았다. "작삼 점소이, 예나 지금이나 쓸데없이 고집 피우는 것은 하나도 안 변했군요. 언젠가 한 번 그 성격 때문에 크게 경을 치를 거예요." "……." 나도 인정하는 바였다. 성격이 두루뭉실 유연하지 못해 말 한 마디로 넘어갈 것 주먹으로 끝낸 적도 많았다. 한때 고치려고 마음먹기도 했었지만, 말 그대로 작심삼일(作心三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고집을 피우는 게 아니었다.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내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특히 남궁현한테만은 굽실거리지 않을 것이다. 주령령이 굽실거리라고 아무리 협박해도 굴하지 않…….' 주령령을 떠올리자 굳은 결의를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주먹세례라면 굴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절실하게 와 닿으니 말이다. "마지막 경고다. 비굴하게 빌면 한 번은 봐줄 수 있다. 꿇어라!" 전신을 옭아매는 살기가 남궁현으로부터 솟구쳐 나왔다. 예전 같으면 살기만으로도 겁을 먹고 굳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다. 내 자존심 하나는 지킬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키웠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반년동안 아무 성장 없이 구른 게 아니니 말이다. 좋으나 싫으나 나도 엄연히 무림인이 된 것이었다. "싫다. 니 녀석더러 나한테 꿇으라고 하면 꿇겠느냐? 피차일반이다." "크크크, 좋은 선택이다.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너와 난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신형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의 검봉이 반원의 궤적을 그리며 날아왔다. 주저할 것 없이 소반을 그의 면상에 던져 넣으며 옆으로 굴렀다. 쾅. 소반이 박살나면서 그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내가 서있던 마루 바닥에 그의 검봉이 깊숙이 박혀들었다. 기회다 싶어 식탁 의자 하나를 그에게 던져 버렸다. 콰자작. 녀석이 신형을 돌리며 내려찍은 각에 의해 의자가 산산이 부셔지고 말았다. 날 지긋이 노려보며 검을 뽑아든 그는 코웃음과 함께 냉소를 지어 보였다. "뛰어난 임기응변이다. 무림인이라면 아무리 급해도 쓰기 주저하는 뇌려타곤(懶驢陀坤)도 서슴없이 펼칠 만큼 낯짝도 두껍고 말이다. 뒷골목 깡패 두목은 할만하구나. 그러나!" 휘휘휭 휘휭. 제왕검법으로 보이는 기수식을 몇 차례 허공에 그려 보인 그는 검 끝을 내게로 돌렸다. "그 뿐이다!" 제왕의 기세처럼 날카롭게 날아드는 그의 신형을 보니 도망칠 길이 막막해 보였다. 전방이 검영에 가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형으로부터 벗어나기 무리일 듯 했다. 설사 뇌려타곤을 펼친다 해도 중상을 면키 어려울 것이었다. 일단 급한 데로 손에 닿은 식탁 의자 등받이를 슬그머니 쥐었다. 손에 철봉이 없는 것이 아쉽다면, 아쉬운 사항이었다. '쳇, 뒤뜰로 내려 뛰어서라도 철봉을 집어들까?' 탁. 휘리리릭. 채채채채챙! 숨가쁘게 흐르던 장내의 분위기가 그 울림 하나로 양상이 바뀌었다. 젓가락을 내팽개친 대신 검을 뽑아든 적월이 그의 검영을 가로막으며 나선 것이었다. 일순간 남궁 녀석이 펼쳐든 여러 검영에 대응해 적월이 검이 허공에 그려졌다. 몇 발자국 주르륵 밀려나는 것을 보니 약간의 낭패를 당한 듯 했다. 다행히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만 하시지. 남궁 공자.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간만에 외식을 하는 우리가 안 보이나 보군. 그럼, 우리를 개로 본다고 생각해도 되겠는가?" "월녀궁이라, 사파 주제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을 생각이냐? 요기나 잘 하고 사라지면 그만! 무덤을 파지 마라. 저번처럼 넘어가 줄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는 우리 월녀궁과 협력 관계인 사람, 아군의 위험을 좌시할 수야 없지. 누가 누구를 봐주게 될지는 대봐야 알 것이다." "건방지기는!" 채채채채챙 채챙 챙챙. 순식간에 수 합이 지나갔다. 일단 한숨 돌리기는 했지만, 적월 소저가 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던 은월이 개입할 의지를 보이자 당가희 또한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날렵하게도 무수한 암기침들을 양손 손가락에 껴들고 있었다. 선수를 친 것이다. "월녀궁은 더 이상 개입하지 마라. 너희와 나 사이의 거리는 지척이다. 당문의 최고 절기, 만천화우(滿天花雨)를 펼치기에 딱 좋은 거리라 볼 수 있지.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내기해볼까?" 그 말에 은월이 주춤거렸다. 만일 당가희의 손에서 만천화우가 펼쳐진다면 자리에 앉아있는 월녀궁 여인들 대부분이 참살을 면치 못할 터였다. "가희야, 일 키우지 말고 그만 앉아." 아까부터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던 제갈혜가 당가희를 점잖게 타일렀다. "안돼요. 언니, 남궁 오라버니의 적은 바로 나의 적이에요. 적의 범주에 신이나 악마가 포함되어 있다해도 제 결심은 흔들리지 않아요." 그녀의 말에 제갈혜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었다. 아예 포기했는지 두 눈마저 살포시 감아 버렸다. 당가희와 은월이 대치한 채 꼼짝하지 않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쩝, 이거 미안한걸. 나 때문에 애매한 월녀궁 여인들이 피해를 볼 상황이네. 당가희 저거 우돌적인 면이 있어서 만천화우인지 뭔지 정말 펼칠지도 모르는데.' "그만!" 내가 소리치며 두 사람 사이에 껴들자 적월 소저는 당황하면서도 당장에 검을 회수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남궁현도 일단 검을 접어 넣었다. 물론 서로를 경계하는 눈초리만은 거둘 수가 없었다. '휴, 남궁현이 그대로 찔러 버릴까봐 조마조마했네.' "적월 소저, 그만 물러서세요. 저와 녀석의 일입니다. 더 이상의 개입은 저 입장만 곤란하게 만들 뿐입니다. 당가희 소저도 월녀궁을 적으로 돌릴 생각이 아니라면 그 암기를 거두세요." "흥, 글쎄, 그것은 저년들 하는 꼬락서니를 봐서 결정할 일이지." "저년들? 너 정말 오늘 네 제삿날로 만들고 싶어!" 은월이 당가희 골빈 년의 말에 발끈해 한 마디 질렀다. "흥, 말은 바르게 해라. 내 제삿날이 아니고, 니 년들 제삿날이 될 거라 이거야." '은월, 웬만하면 그만두지. 골빈 애 너무 적극적으로 상대하다 니 골까지 빌까 걱정된다.' 당가희를 자극할까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그냥 입안에서만 맴도는 속생각일 뿐이었다. "적월 소저,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네, 은공, 말씀만 하세요." "저기, 그 검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적월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자신의 검을 검집채 풀어서 두 손으로 공손히 내밀어 주었다. 무릇 무림인의 병장기란 무인의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아무리 친구 사이일지라도 개인의 병장기를 함부로 빌려주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선뜻 바로 빌려준다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적월을 구하기 잘 했다. 적월 한 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사월 열 명에 남궁현 백 명을 구하는 험난하면서 구차한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넘겨받은 적월의 검을 뽑았다. 스르릉. 약간은 떨렸다. 상대도 상대지만, 내 생애 두 번째로 쥐는 검이었다. 매화루에서 쥐었던 검은 홧김에 휘두른 것이라 검을 들었다는 자각이 없었다. 징병시절 전장에서도 보통 병사가 검을 쓸 일이 없었다. 검은 제대로 훈련받은 검수들이나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나 같은 보통 병사는 멀찍이 서 있다가 창으로 쿡쿡 찌르고 냅다 도망치는 게 일이었다. 허리에 차고 있던 것은 고작 해봐야 단검이었다. 신속하게 전장을 누벼야 하는 상황에 검을 차고 뛰기에는 무거웠던 것이다. '그동안 철봉을 검처럼 사용했더니 검이 무척 가볍게 느껴진단 말씀이야. 혹시 소방 녀석, 그걸 예상하고 철봉을 쥐게 했던 걸까?' "어디다가 한 눈을 파는 거냐!" 녀석의 일갈과 함께 검이 일직선으로 날아들었다. 한 점의 기교도, 변화도 없이 찌르기에만 집중한 선제 공격이었다. 급하게 몸을 틀어 흘리며 비스듬히 쳐내었다. 챙. 상대의 힘에 밀려 두 발 물러섰다. 손끝이 저려왔다. 챙 채챙 챙. 연이은 남궁현 녀석의 공세를 막아서기도 급급했다. 남궁현의 눈에 실망했다는 조소가 떠올랐다. "겨우 이거였냐? 일그러진 안면 꼬락서니가 참 보기 좋구나. 호기는 아무 때나 부리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객기일 뿐이었던 것이지." '쳇, 식탁들 때문에 움직임이 제한된다. 질질 끌면 나한테 불리하다. 기회를 봐서 일격에 모든 것을 건다.' 내가 방어로 일관하자 남궁현의 현란하던 검세가 점점 단순화되어갔다. 날 철저하게 얕보기 시작한 것이다. 한 마디로 천천히 요리해주겠다는 심보였던 것이다. 그의 검이 장난스레 공중에서 반원을 그리며 무겁게 떨어졌다. '지금이다!' 재빨리 엽리장신(葉裡藏身)을 펼쳐 남궁현의 검을 받았다. 지금까지처럼 맞받아치지 않고, 끌어내리면서 검에 실린 힘을 전신에 흩뿌렸다. 온 몸이 저릿해왔으나, 두 손으로 검병을 힘껏 쥐고 냅다 한 바퀴 돌려 버렸다. 치이이잉. 휙. 방어로 일관하는 사이, 청아한 기운 한 가닥이 전신을 맴돌며 일어났다. 그의 검력이 내 몸에 스미듯 빨려 들어와 퍼지는 게 느껴졌다. 자신을 얻은 나는 거꾸로 자만에 빠진 남궁현의 빈틈을 타 그의 검을 날려버렸다. 소방에게 배웠던 한 수를 그대로 써먹은 것이기도 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당했던 한 수였으니 말이다. 단지 시기 적절하게 끌어와서 써먹은 것이었다. 당황한 남궁현을 향해 힘껏 청룡출수(靑龍出水)를 날렸다. 곧 가볍게 냉소를 흘린 남궁현은 검을 줍는 대신 두 손바닥을 마주 들어 보이며 내 검만을 노려보았다. '아하, 그래, 한 번 잡아보시겠다. 이거지? 네 방심이 널 죽음으로 이끌 것이다! 죽어라 남궁현!' 전신을 관통하는 청아한 기운에 나의 전력을 보태었다. 손끝에 들어간 기세는 과거 그 어느 때와 비교할 수가 없었다. 예전처럼 엉거주춤 기운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그것을 끌어왔기 때문이었다. 주변의 시야가 흐릿해지며 좁다란 한 점만이 확대되어 보였다. 바로 남궁현의 목줄기 부분이었다. 쉬이익, 쾅! "아아악!" 남궁현과 충돌할 시점 바로 직전에 매서운 바람 한 줄기가 덮쳐들었다. 오직 한 점만을 향해 전력으로 몸을 날린 터라 방향을 틀거나 방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전신에 철봉이 작렬하는 듯한 통증과 함께 반대쪽으로 떼구르르 나가떨어졌다. "허억 허억, 쿨럭, 쿨럭." 기침 속에 피가 섞여 튀었다. 속이 진탕 되 버렸다. '더, 더럽게 아프다. 젠장.' 바닥에 누운 채 억지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녀였다. 서릿발 가득한 노기를 머금은 주령령이 왕방울 같은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나름대로 단장하고 새하얀 궁장의를 걸치고 내려왔으나, 시기가 부적절해 보였다. "남궁 공자님, 너무 하십니다. 저와 한 약속을 하루는커녕 반시진만에 깨실 줄은 정녕 몰랐습니다." "미, 미안하오. 소저." "어쩔 수 없지요. 다음부터라도 주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참고 또 참겠소. 맹세하겠소." 남궁현의 확답을 얻은 주령령은 당가희 앞으로 걸어갔다. "언뜻 듣기로 만천화우를 펼치겠다던데 지금이라도 펼치실 건가요?" "아, 저, 저기 그게 당문의 절기라 전 아직 전수 받지 못했어요. 그냥 반 농담으로 해본 소리였어요."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 마세요. 우리끼리 분란 일으킬 때가 아니에요." "죄송해요. 주령령 소저, 앞으로 주의하겠어요." "그러길 바라겠어요." 주령령은 제갈혜 앞을 그대로 지나쳐 바닥을 굴러다니는 적월의 검을 검집과 함께 수습했다. 그것을 들고 적월에게 다가간 주령령은 놀랍도록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며 검을 건네었다. "월녀궁 여러분께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잊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 떨떠름해진 적월은 아무런 응대도 못 하고 검을 받아 들었다. 다시 제갈혜 앞을 지나치던 그녀는 슬쩍 한 마디를 흘렸다. "제갈혜 소저처럼 현명한 여인이라면 남궁 공자님과 작삼의 충돌을 슬기롭게 제지해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오늘 그 믿음이 깨졌으니 이후로 제갈혜 소저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 제갈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녀의 등장으로 좌중이 이렇듯 압도당하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남궁현을 만나던 시절부터 분위기 조율을 해왔나 보군.' 숨쉬기도 곤란할 정도로 전신이 저릿저릿, 욱신욱신 거려왔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주령령은 이리저리 한마디씩 툭툭 던지면서도 시종일관 시선을 내게 두고 있었다. 서릿발 가득한 노기를 머금은 채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끼를 궁지로 몰아가며 다가오는 호랑이처럼……. 마침내 내가 흐느적 퍼져있는 구석 바닥으로 그녀가 다가왔다. 뭔가 한 마디를 할까 말까 두근두근 기다리는 공백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그대로 날 안아들고는 이 층으로 걸음을 떼었다. "손님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윗분들끼리 가벼운 다툼이 있었어요. 정리 중이니까 그만 물러가 주세요." "손님, 올라가시면 안돼요. 아래층에 소리가 적잖이 크게 울렸을 것이다. 호기심 어린 손님들이 떼로 몰려드는 모양이었다. 종리연과 동천위가 가까스로 막아서며 쩔쩔매는 게 보였다. 삼 층으로 올라선 순간 팽무진의 방문이 철커덩 닫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몰래 엿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침내 내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침상에 날 내팽개치듯 내려놓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잠시 멈칫했다. '야, 야, 그냥 가라. 제발, 만신이 쑤시니까 잔소리 할 생각말고 그냥 사라져 줘라. 좀.' 그러나, 내 기원을 무시한 그녀는 기어코 몸을 되돌려 왔다. 손을 올리기에 한 대 치려나 해서 찔끔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나, 령령은 손수건으로 내 입가 핏줄기를 닦아내고 있었다. 신도 벗겨서 가지런히 내려놓고, 내 옷매무시를 가다듬어준 후 조용히 나가 버렸다. 문 닫히는 소리로 미뤄보아 자기 방에 그대로 틀어박힌 모양이었다. '쩝, 내가 좀 너무했나? 그래도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리고 기다렸을 남궁현과의 재회였을 텐데…….'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06 19:13:27 고친날 2005-09-06 21:34:29 읽은수 7104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58)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58] 그 날 밤 남궁현이 주령령에게 따로 불려가 단단히 주의라도 받은 모양이었다. 나와 스치기만 해도 으르렁거리던 그가 그 일 이후 태연하게, 내지는 태연을 가장해 외면하는 모습은 이례적이라 할 만 했다. 뿐만 아니라 홍 영감님이나 녹 누님한테 예의를 차리는 꼴도 심상치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제외한 무환루(無患樓) 사람 모두에게 인사치레를 해오는 것이었다. '이 자식, 속 꿍꿍이가 뭐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무환루가 문을 닫은 틈을 타 숙박 장부를 뒤적거렸다. 예상했던 바와 달리 그 어디에도 남궁현 일행에 대한 계산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무환루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설마, 무환루 사람이 되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인가? 정파 운운하며 콧대 세우기 급급한 남궁현 녀석이 사파 일색이라 할 수 있는 무환루에 합류하겠다고! 말도 안 돼!' 제갈혜와 당가희가 그와 계속 동행중이라는 것도 기이하다면 기이한 일이었다. 주령령이 그들에게 달가운 존재일리 없었다. 엄연히 연적이지 않겠는가? '뭐, 처음부터 녀석의 목적은 주령령을 찾는 것이었을 테니까. 제갈혜나 당가희 모두 주령령의 존재를 인정하고서 접근해왔다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 쳇, 양다리도 모자라 세다리냐? 아냐 더 뒤져보면 여기저기 숨겨놓은 애인이 다수 존재할 거야. 썩을 놈의 문어발 같으니라고!'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자정, 간만에 무환루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를 얻었다. 외부 숙박객들은 저녁 식사에 수면제를 타 넣어 밤 시간 내내 깨어나지 못하도록 손을 썼다. 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덧문 이음새 사이사이를 일일이 점검해야만 했다. 식탁마다 약과가 담긴 그릇과 화차 냄새가 뭉클하게 피어오르는 차주전자가 올라갔다. 녹 누님에게 듣기로는 간단히 무환루 내부 결속을 다지는 다과회 자리라고 들었으나, 실제 모임 성격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얼굴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잘 지냈어? 작삼 동생." "냉월화 누님!" 헤어지던 모습 그대로 새하얀 궁장의 차림으로 나타난 냉월화 누님은 털털하게 미소지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춘월, 명월 두 명의 월녀궁 여인만을 대동하고 한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아아, 미안, 이제야 보게 되는구나. 그동안 비밀분타 일로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 흑월도 요즘 다른 일로 좀 바빠." 그러고 보니 요즘따라 흑월 누님 보기도 쉽지 않았다. 오히려 적월과 은월을 더 자주 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음에 볼 기회가 있겠지요." "호호호호, 보기만 하겠어? 아주 붙어살텐데……." "네?" "흠, 아직도 얘기 못 들었나 보구나. 다음에 적월이나 사월한테 물어보렴. 난 좀 볼 일이 있어서 말이야." "……." 그녀는 춘월과 명월을 남겨둔 채 그림자가 진 구석으로 유연하게 걸어갔다. 포연강이 혼자 죽엽청 향을 풀풀 풍기며 자작하고 있는 자리였다. 간단히 인사말이 오가는 것 같더니 곧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작을 하는 게 보였다. '망아루에 왔을 때는 포연강한테 눈길도 안 주더니 웬 일로 살갑게 구는 걸까?' 나도 그 곳을 벗어나 어정쩡하니 구석진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화차를 홀짝이며 둘러보니 동천위와 북천위가 보이지 않았다. 예전처럼 망을 보러 간 듯 했다. 팽무진과 종리연은 어느 때처럼 찰싹 붙어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홍 영감님은 두말할 것도 없이 녹 누님과 같이 가장 상석에 앉아 있었다. 자리 배치를 보면 전체적으로 둥그렇게 앉아서 서로를 마주보는 형태였다. 아마도 홍 영감님이 모두에게 전할 말이 있는 듯해 보였다. '쳇, 남궁현 녀석, 완전 꽃밭 중에 꽃밭이로군.' 그의 오른쪽에 제갈혜와 당가희가 연이어 앉아 있었다. 물론 왼쪽에는 주령령이 살짝 미소지은 채 앉아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화사하면서 생기 넘치는 장밋빛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둘 사이에 어떤 얘기가 두런두런 오가는지 알 수도 없었다. 눈꼴이 시려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앉았으니 말이다. "주령령 소저와 남궁현 공자라…… 결국 만날 사람은 만나고 마는군요." 은은한 난향의 물결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놀랍게도 매염경 소저가 앉아있었다. 여전히 농염한 색기와 매혹적인 미모를 아낌없이 발산시키는 그녀였다.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어리둥절해졌어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 어떻게?" "호호호, 놀라시기는, 당연히 초대를 받았으니까 왔지요. 이 자리에 불청객은 아무도 없답니다." '없긴 왜 없어. 남궁현 녀석이 저렇게 버젓이 앉아 있는데.' "어머, 얼굴에 이렇게 써 있어요. '그럼, 남궁현 녀석은 여기 왜 있는 거야?' 하구요." '쳇, 여전히 족집게로군.' "남궁현 공자는 보기보다 상당히 헌신적인 사람이에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삼 년 동안 그녀를 찾기 위해 치른 희생은 차라리 눈물겨울 지경이지요. 아마 제갈혜와 당가희도 그 사실에 푹 빠져 있는 게 아닐까요?" "크크, 남 보기에는 어쩔지 몰라도 저한테는 원수일 뿐이지요.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입니다. 남궁현에 대해 잘 알고 있군요. 소저도 남궁 공자한테 관심 있나요?" 쪼르르륵. 그녀는 슬쩍 대답을 회피하며 빈 찻잔에 화차 주전자를 기울였다. 꽃향기와 차향이 어우러진 그윽한 향이 물씬 풍겨왔다. 찻잔을 다소곳이 들어올려 입바람으로 식히던 매염경 소저의 시선 끝이 남궁현 일행 쪽을 향하고 있었다. 후루루룩. 묘하게 뜸들이듯 화차만 홀짝이는 그녀였다. 마침내 결심이 섰는지 찻잔을 올린 그대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전음입밀(傳音入密)을 흘리는 것이었다. '민감한 사안이니까 그냥 듣기만 해요. 한때 우리 하오문에서는 남궁 공자가 주령령 소저를 찾으려고 혈안이 된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어요. 그를 이용해서 소맹주와의 관계를 조율하려고 했던 거지요. 녹녹 문주님을 밀어낸 내부 반란만 없었다면, 남궁현 공자는 지금쯤 제 손위에서 놀아났을지도 몰라요.' "……." 후루루룩. 막상 그녀의 전음을 듣고 보니 찜찜한 바가 없잖아 있어 천천히 화차를 들이켰다. 입안에서 살살 퍼져야할 화차의 독특한 맛과 향이 씁쓸하게만 와 닿았다.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해도 괜찮은가요?" '상관없어요. 작삼 점소이라면 말이에요.' "……." 꿀꺽꿀꺽. "앗, 뜨것!" "호호호, 저런, 조심하지 그랬어요?" 매염경 소저의 전음에 당황이 되어 화차를 그냥 들이켜버렸다. 입안이 화끈거렸지만, 금새 가라앉고 있었다. 그보다는 다시금 그녀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전부터 느끼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항주 삼대 유명인, 더 나아가 절강성(浙江省) 최고의 기녀라 불리는 그녀가 나에게 눈독을 들이는 이유가 뭘까? 그녀에게서 화사(花蛇)의 향기가 느껴졌다면 나만의 착각일까? '뭐, 아무렴 어때? 이런 미녀라면 실컷 이용당해주지. 적어도 심심풀이 해소용으로 아침마다 굴리는 냉혈마녀보다 천 배는 낫잖아.' "어머, 이 약과 맛있네요. 음음, 녹 문주님 솜씨지요?" "어라, 잘 아시네요." "그럼요. 오래 전이긴 하지만, 가끔 먹을 기회가 있었거든요. 문주님 취미 중 하나가 요리였어요." "아하, 그래서, 녹 누님 요리 솜씨가 그렇게 좋은 거군요. 매 소저는 요리를 잘 하세요?" "호호호호, 궁금하신가 보네요. 요리에 있어서는 제가 문주님 수제자라 할 수 있어요. 기회가 되면 한 번 솜씨를 발휘해볼게요." "오오, 그래요? 흠, 그거 정말 기대되는……." 찌릿찌릿. 갑자기 뒤통수로 내리꽂히는 섬뜩한 살기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무시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낯익은 기운이었기에 슬며시 고개를 돌려 발원지를 확인했다. "……." 남궁현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어있던 주령령이 이 쪽으로 삐딱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부릅뜬 눈매가 매섭기 그지없었다. "주령령 소저로군요." 내 불편한 거동에 눈을 돌린 매 소저가 단번에 원인을 알아냈다. "설마 매 소저의 전음입밀을 들은 걸까요?" "호호호, 걱정 마세요. 남의 전음을 가로채 듣는 경지를 이룬 이는 현 시대에는 없어요. 과거에 있었다면 현현자 정도나 가능했을까?" "그럼, 뭣 때문에……." 매염경 소저는 대답 대신 팔을 내 허리에 스르륵 감아왔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내 등판에 찰싹 붙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뜨거운 입김이 귓가에 와 닿았다. 막무가내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라 대처할 길도 없었다. "후후, 왜 그럴까요?" 쿵쾅쿵쾅. 안면이 벌게지고, 가슴이 제 멋대로 날뛰었다. 몸의 혈기가 한 가운데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저, 저기." 이.곳.에.서.는 곤란하다는 말을 하려고 고개를 돌린 찰나였다. 그제야 매 소저의 시선이 날 향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끝나는 지점에 주령령의 시선이 머무르고 있었다. 령령의 시선도 날 향한 것이 아니라 매 소저를 향한 듯 했다. 둘 사이에서 격렬한 눈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쩝,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09 12:17:53 고친날 2005-09-09 12:38:02 읽은수 6907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59)-탁상회합(卓上會合)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59]탁상회합(卓上會合) "험험, 자, 자, 이제 슬슬 본론에 들어가자구." 무환루 본 층에 자리잡은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홍 영감님에게로 돌려졌다. 동그랗게 모여 앉은 자리였기 때문에 한 눈에 모두가 식별되었다. "보시다시피 연령이나 배분으로 따져도 나 이상은 없는 것 같군. 내가 임시 회장을 맡기로 하겠네. 이의가 있는 이는 지금 말하게." 조금은 두런거리던 장내가 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잠시동안 정적이 흘렀다. "좋아. 이대로 진행하겠네. 이번 회합이 지닌 의미가 얼마나 중대한가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있다면 오로지 …… 첩자뿐이지." 홍 영감님은 잠시 말을 쉬었다. 한참 뜸을 들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날 흘겨봤을 때는 뜨끔해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뭔가 알아챘는지 두 눈가에 히죽이는 웃음을 떠올린 영감님이 보였다. '쳇, 나보고 첩자라니! 나한테는 아무런 말도 전해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겠어요!' "험험,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서 부연 설명을 해줄 테니 잘 듣고 주지들 바라네. 오랫동안 전 강호는 사파와 정파라는 이름으로 무림맹(武林盟)과 마황맹(魔皇盟)의 일방적 위세에 짓밟혀 왔다.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었지. 그들에게 굴종하거나 섣불리 대립하다가 멸망의 길을 가는 것, 정사를 무론하고 수많은 세력들이 그들 사이에서 직접, 간접적 타격을 받고 사라져갔지.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들이 넘보지 못할 중립세력을 구축하는 것이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면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연합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자리는 그것을 위한 첫 시발점이 되는 모임인 것이지. 하지만,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은 너무나 험하고 많다.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부결속과 기밀유지다. 어느 한 쪽이 우리와 싸우려 들 때는 적어도 심각한 타격을 고려해야만 할 정도의 힘을 가질 때까지 내부 기밀이 유지되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자리에 초대된 모두는 엄정하게 고려해서 엄선되었다. 물론 사정상 이 자리에 참석 못한 이들도 있고, 새로 합류를 고려하는 이들도 있다. 차후 정식으로 반무림맹 연합을 발족하게 되면 볼 날이 있겠지. 일단 이 자리는 서로 간의 안면을 익히는 자리로 삼으려 한다. 당사자가 자기 소개를 할 때, 간단한 질문도 허용하도록 한다. 본인부터 시작하지." 길게 일장연설을 한 홍 영감님은 녹 누님이 건네준 냉수 한 잔으로 잠시 목을 축였다. '반무림맹 연합이라? 흠, 그동안 무환루 청부에 관계된 일들을 되짚어보면, 결국 하오문과 강남표국이 연관되어 있었지. 그러니까 아군으로 끌어들였거나, 끌어들일 애들을 도운 것인가? 쩝, 내가 모르는 게 너무나 많았군.' 주령령과 눈싸움을 벌이던 매염경 소저는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자 다소곳해졌다. 허리에 둘렀던 팔도 풀어 왼손만 기대듯 내 다리 위에 슬며시 올려놓은 상태였다. 강아지 쓰다듬듯 허벅지를 쓸어 내리는 게 조금 신경 쓰이기는 했다. 주령령도 더 이상 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단지 남궁현 곁에 자석처럼 철썩 붙어 있었다. 밉살스럽기 그지없을 정도로 닭살이 올랐다. 묘한 점은 그들 곁에 앉아있는 제갈혜와 당가희가 조금의 투기도 피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이라고 봐주는 모양인가 보군. 제갈혜야 생각이 깊은 여자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당가희도 남궁현이 팥을 콩이라 해도 그대로 들을 애니 잠자코 있는 것이겠지. 남궁현, 조금만 더 지켜보마. 여난(女亂)으로 네 녀석 다리가 갈기갈기 찢어질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주마.' 홍 영감님이 몇 차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인은 무환루의 임시 주인이자 수라사살(修羅四殺)의 첫째인 혈살(血殺)이라 하네. 홍 루주라고 불러도 되지. 이상일세." "질문 있어요." 매염경 소저가 손을 들어 보이며 말문을 열었다. "뭔가?" "짐작은 하지만, 홍 루주님께 직접 확인 받고 싶은 게 있어요. 홍 루주님이 혈살이라 불린 데는 엄청난 살상력에 있다고 들었어요. 손을 한 번 흔들 때마다 십여 명이 한꺼번에 비명을 지르며 죽었다고 하지요. 제가 알기로 오래 전에도 그런 분이 한 분 있었어요. 혹시 홍 루주님께서는 사파 제일 고수라는 육마(六魔) 중에서 독마(毒魔) 선배님 아니신지요?" "맞네." 홍 영감님은 고개를 끄떡이며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언뜻 영감님이 독마니 어쩌니 하는 말을 들은 듯도 했다. "오오!" "이럴 수가!" '육마 중 한 명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것인가? 마교 부교주라는 놈도 육마 중 한 명이었었지? 십성이라는 애들도 심심하면 발에 채일 정도잖아. 포연강 녀석만 해도…….'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왔다. 특히 누구보다 당가희가 제일 놀랐는지 반쯤 일어나려다가 다시 주저앉는 게 보였다. 사천 당문이 독과 암기로 일어선 집안이니 아무래도 독마라는 말에 가장 큰 자극을 받은 듯 했다. 팽무진의 떡 하니 벌어진 입도 닫힐 줄 몰랐다. 종리연도 놀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팽가 녀석에게 찰싹 붙어버렸다. '이 봐, 이 봐, 아양도 정도 것 떨어.' 매염경 소저는 별 반응이 없었다. 하오문의 정보통을 손에 쥔 그녀이니 모르면 이상한 일일 터이긴 했다. 제갈혜의 안면은 약간 심각해졌다. 필시 암중에 계산하던 것에 오차가 생긴 모양이었다. 남궁현은 주령령에게서 미리 귀뜸을 받았는지 의외로 무덤덤했다. 약간 소란이 가라앉자 주령령이 일어섰다. "수라사살 중 셋째인 권살(拳殺) 주령령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항간에 귀살(鬼殺)이라는 말도 돌더군요." 홍 영감님의 비중이 워낙 컸는지 잠잠했다. 그녀가 앉고나자 연이어 남궁현이 일어서며 사방에 포권을 해 보였다. "남궁세가(南宮世家) 장남 남궁현이라 합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백룡(白龍)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스스로를 잘 아니 다행이군.' "남궁현 공자님 질문 있습니다." 매염경 소저가 손을 들며 질문을 요청했다. "아, 매, 매염경 소저시구려. 말해보시오." 그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매 소저마저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주령령이 옆에 있음에도 녀석의 바람기가 수그러들지 않는 듯 했다. '너 그러다가 주령령에게 뒤지게 맞을 거다. 지금이야 희희낙락(喜喜樂樂)이지? 얼마나 가나 두고보자구.' "남궁현 공자님의 의지가 남궁세가의 입장 표명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현재 우리 남궁세가는 천운학 소맹주와 여러 가지 일로 반목된 상황입니다. 그가 죽건 세가가 멸망하건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 행보 자체도 제 일방적인 의사라기보다 세가의 가주이신 아버님의 의지라고 보는 게 옳습니다. 더 궁금하신 거라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제갈세가와 사천당문도 마찬가지 입장인가요?" 매 소저는 상큼하게 웃으며 화살 방향을 돌렸다. 남궁현이 엉거주춤 앉자 제갈혜가 발딱 일어섰다. 질문에 바로 대답하려는지 포권마저 무시해버렸다. "미력하지만, 해룡(海龍)이라는 호칭을 받은 제갈혜라 합니다. 우리 제갈세가(諸葛世家)는 남궁세가 분들과 같은 곳에 은신한 상태입니다. 남궁 공자님과 제가 미래를 약속했듯, 두 집안 또한 힘을 합치기로 했으니까요. 남궁세가와 사활을 같이 할 것입니다. 답이 되었습니까?" '윽, 우째 제갈혜가 좀 신경질적으로 나오는 것 같은데.' "네, 잘 알아들었습니다. 두 분의 약혼 축하드립니다. 곧 경사스런 소식이 있겠군요." "요즘 따라 요사스런 불여우가 남궁 공자님의 시야를 흐리는 것 같아서요. 주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 불여우가 눈독들이는 먹이는 따로 있답니다. 댁은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간단한 설전이 오고간 후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제갈혜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주먹을 부르르 떠는 게 보였다. '매염경 소저 대단하군. 주령령하고 눈싸움 벌인 것도 모자라서 제갈혜하고도 눈싸움이네. 주령령은 모르겠지만, 제갈혜한테는 이긴 것 같다. 정말 대단한걸, 천하의 말재주꾼 제갈혜와 말싸움을 벌여 이기다니!' 제 분을 못 이긴 제갈혜가 털썩 자리에 앉자 우물쭈물 당가희가 일어섰다. 평상시의 그녀답지 않게 힘이 쭉 빠져 보였다. "저, 저와 당문은 아무런 관련도 없어요. 제 멋대로 가출을 한 것이라서…….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당문은 아마 무림맹 쪽에 가세해 있을 거예요.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중립을 지켜왔었지만, 현재는 부문주인 삼촌이 무림맹에 요직을 맡고 있어요. 아무래도 무림맹 입김이 강할 거예요. 죄송합니다." 마치 자기 잘못이라는양 좌중을 향해 허리를 숙이는 그녀를 보니 조금은 측은해 보였다. '솔직해서 좋군. 성격은 더럽지만 말이야.' "아니요. 저야말로 당가희 소저께 감사 드려요. 이로써 당문의 입장을 재확인한 셈이니까요. 당 소저를 봤을 때, 조금 혼선이 있었는데, 이제 안심했어요. 고마워요." "그, 그래요? 그럼, 다행이구요." 안면이 다홍빛으로 달아올라있었지만, 약간은 안심한 듯한 모습으로 주저앉는 당가희였다. '야, 야, 그게 어디를 봐서 다행이냐? 당문 사람들이 남궁현한테 덤벼들면 넌 어느 쪽 편을 들려구!' 이번에는 포연강 녀석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섰다. 가녀린 여인들 사이에 자리를 잡아서 그런지 그의 거구가 더욱 우람해 보였다. "음, 수라사살(修羅四殺) 중 둘째 도살(刀殺)이오. 이상이오." "드릴 말씀이 있어요." "흠, 나한테 할 말이 뭐가 있다고? 뭐, 해보시오." 슬그머니 앉으려는 그를 제지한 것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번쩍 들어올린 매염경 소저였다. 마치 이 순간, 이 자리만을 기다렸다는 듯, 준비된 질문을 연이어 던지고 있는 듯 했다. "무림맹에는 모두 다섯 명의 십성(十聖)이 있었지요. 이 년 전에 무림맹 사람으로 현성(賢聖)이 배출되었구요. 최근에 천운학 소맹주가 십성으로 인정받았어요. 그러니까, 무림맹에서 열 명의 십성 중 무려 일곱 명이나 나온 셈이에요. 그런데, 삼 년 전에 십성 중 도성(刀聖)이 실종되었고, 석 달 전쯤에 괴성(怪聖)이 행방불명, 최근에 또 혈성(血聖)이 살해당했어요. 이제 네 명의 십성이 무림맹에 몰려있는 상황이 되네요.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도성이 실종된 날에서 한 달 후에 수라삼살(修羅三殺)이 출현했다는 거지요. 또 하나의 기이한 점은 과연 누가 혈성을 살해했는가 에요. 십성이란 호칭은 애들 땅따먹기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십성을 죽이려면, 십성에 필적하는 자라야 가능해요. 그런데, 제가 알기로 그에 필적한다고 보이는 독마(毒魔) 홍 루주님은 무환루에서 움직이지 않으셨어요. 게다가 혈성을 벤 것도 거대한 대도였다고 하지요. 무환루 사람 중에서 도를 쓰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인 것으로 알아요."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것이오? 매 소저?" 포연강의 어투가 퉁명스럽게 느껴졌다. "아, 그러고 보니 도성은 이 년 전에 시체가 발견되면서 사망처리가 되었더군요. 덕분에 엄청난 미모와 깊은 학식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미망인이 몸져눕고 말았었지요. 때마침 그녀의 시름을 달랜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현성이에요. 도성의 친동생이기도 한 사람이구요. 결국 그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작년에 혼인을……." 쾅! "그만! 그만해!" 버럭 고함을 지른 포연강이 홧김에 식탁을 부셔버리고 말았다. 오랫동안 포연강 녀석과 마주쳐왔지만, 이렇게 화를 내며 씩씩거리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어머, 전 도성에 대한 얘기를 드리고 있었는데요. 도살이라는 호칭과 잘 대조된다 싶어서 참고삼으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매염경 소저, 잘 들었소. 그러나, 그런 시시한 얘기 따위에는 관심이 없소. 그러니 거기까지 해둡시다. 날 귀찮게 하지 말길 바라오." "……." 장내에는 한 차례 차가운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일지라도 매 소저가 말한 도성이 누구인지 모를 리 없었다. '쩝, 그래도 매 소저, 짓궂은 데가 있군. 보아하니 포연강의 아픈 데를 건드려 버린 것 같은데.' 또 한 명 눈에 띄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보였다. '어라? 냉월화 누님, 포연강한테 너무 바짝 붙은 거 아니오?' 그의 한 팔에 매달리다시피 한 냉 누님이 포연강 녀석의 귓가에 계속 위로의 말을 속삭이는 게 보였다. 몹시 흥분해 있던 포연강이 그녀의 위로에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냉월화 누님이 좀 수상쩍단 말이야. 매염경 소저야 질문을 던져서 입장 조율을 하려는 것 같으니 이해가 가지만 말이야. 그래도 방금 전은 좀 심했어. 흠, 혹시, 혹시? 설마?' 뇌리를 스치고 가는 생각이 있어서 매염경 소저와 냉월화 누님을 번갈아 보았다. 나만의 기우일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무관해 보이지도 않았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12 03:13:07 고친날 2005-09-12 03:38:57 읽은수 6815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60)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0] 냉월화(冷月花) 누님 차례였으므로 그녀는 포연강(鮑然强)의 팔뚝으로부터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월녀궁(月女宮) 부궁주를 맡고있지만, 비밀 분타 분타주도 겸임하고 있는 냉월화라고 합니다. 앞으로 많은 협조 바랍니다." 냉 누님은 극단적으로 홍 영감님을 향해서만 포권을 취해 보였다. 무환루(無患樓) 우두머리 격인 영감님이니 무환루 소속인 이들에게는 결례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남궁현 일행에게는 명백한 결례였다. "할 말이 있어요." 역시 제갈혜가 손을 들어 보였다. 눈살을 찌푸린 냉 누님은 고개를 끄떡여 허락했다. 그녀의 개입이 마땅찮다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수라사살(修羅四殺)의 과거 살상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였다고 알고있습니다. 독자적인 정보도 갖고 있으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월녀궁은 무공성취를 핑계로 수많은 남자들을 폐인 내지는 죽음으로 내몰아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자들을 납치해서 강제로 혼인을 치른 일도 여러 차례 있었지요. 사파보다 더 더러운 짓을 일삼아온 월녀궁이 이 자리에 낄 자격이 있는지 정녕 의심스럽네요." '흠, 월녀심법(月女心法)에 대해서는 교옥정(喬玉淨) 누님한테 들은 적이 있었지. 그런데, 납치해서 혼인도 했어? 오호라, 월녀궁 애들은 노처녀로 늙을 일 없어서 좋겠다. 외로운 독신 남녀들을 짝지어 주는 거야말로 적극 장려하고 권장할 만한 일 아니겠어?'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명백히 월녀궁을 향한 비난이었다. 제갈혜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냉월화 누님의 입가에 잔잔한 냉소가 흘렀다. "인정하지요. 과거 우리 월녀궁은 분명 그런 과오를 저질러 왔습니다. 월녀심법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남자들의 양기를 취해왔던 것이지요. 내공의 성취도가 올라갈수록 양기를 뺏기는 남자의 생존율도 떨어지기 마련이었구요. 우리라고 양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꼭 월녀심법을 대성할 필요가 있는 몇몇 이들에 한해서만 이 방법을 쓸 수 있게 제한을 두었습니다. 더욱이 양기 갈취 대상이 된 남자들은 마땅히 이유가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방화, 강간, 살인, 강도 등을 일삼으며 세상에 해악을 끼친 이들을 잡아들였으니까요. 그러나, 그것도 과거의 일입니다.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월녀심법의 보안이 될 일양심법을 최근에 가까스로 구했답니다. 무공 쪽으로도 조그마한 성취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누구도 월녀궁을 사파라고 무시 못할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월녀궁 단독으로라도 용서치 않을 테니까요!" 마지막 말에 힘을 주어 말하는 것을 보니 냉월화 누님 스스로도 벼르고 별렀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무림맹은 인정 안 할걸. 정파 대부분도 인정 안 할 거구. 흐유, 결국은 정파 전체와 싸우겠다는 소리로군.' "아무리 보완이 되었다고 해도 과거의 과오를 이제 와서 묻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강제로 혼인을 당한 선량한 남성들의 권익은 어떻게 보상해줄 생각입니까?" 제갈혜가 아무리 무림맹과 반목된 관계로 이 자리에 앉아있었어도 근간이 정파라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월녀궁을 향한 어투 하나 하나에 뾰족한 가시가 돋아있는 게 느껴졌다. "호호호, 혼인과 관계해서 데려온 남자들은 일가친척 없는 가난한 이들로 제한했습니다. 어차피 강제로라도 혼인시키지 않으면 가난에 찌들어 독신으로 늙거나, 굶어죽을 인간들이에요. 외로운 청춘남녀들을 맺어준 게 뭐 대수란 말입니까? 오히려 저출산과 독신주의가 팽배되어 심각하게 문제시되고 있는 요즘에 좋은 본보기가 아닐까요?" "모순입니다.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과정이 더럽다면 결국 더러운 일일뿐입니다. 월녀궁의 처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호호호호, 이 봐요. 제갈세가(諸葛世家) 소저, 소저는 과연 그런 말할 자격이 있을까요? 제갈세가가 아무리 정파로 깨끗하게 치장했다고 해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닐 거예요." "무슨 소리예요?" "우리 월녀궁은 정보력에 있어서 상당히 취약한 편입니다. 그럼에도 제갈세가와 관련해서 아주 재미있는 정보 몇 가지를 얻을 수 있었어요. 단적으로 무림맹의 처사에 반대했던 몇몇 세력이 멸문 당하던 때 앞장섰던 문파 중 하나가 바로 제갈세가더군요." "실례예요. 우린 같은 파벌 문파에 대해서 무력 행사를 벌인 적이 결단코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단순한 의견 조율 수준이 아니었다. 상호 공방을 넘어서서 제살 깎기 비방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후훗, 그래도 재미있구만. 딱딱한 자리가 될 것 같아서 조금 긴장했는데, 이렇게 박진감 넘치는 자리라니!' "과연, 그럴까요?" "……." "한 때 월녀궁에서 무림맹의 행적을 알기 위해서 간자를 심어놓기도 했었지요. 대부분 발각되어 죽거나 폐인이 되었습니다만……." 이 말을 내뱉은 냉 누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희생당한 이들을 되돌이켜 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눈을 번쩍 뜬 그녀는 제갈혜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가끔 나처럼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이도 있었지요." "……." "벌써 십 년은 흘렀군요. 시녀로 위장해 있던 내가 그 책자를 발견했던 게 말이에요." "무슨 책자였는데요?" 질문을 던지는 제갈혜 쪽이 오히려 긴장한 듯 했다. 책자라고만 하면 찔릴 일이 하나 둘이 아닐 듯 했다. "정파 내 무림맹에 반하는 세력에 대한 정보, 분류, 그리고, 멸문 방법이 기술된 것이었지요. 시기와 방법이 너무 세세하게 적혀져 있어서 오한이 끼칠 정도였어요." "그게 어떻다는 거예요?" "호호호, 제갈혜 소저, 소저라면 모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끝까지 시치미를 떼려드는군요. 그럼, 내 입으로 말해주겠어요. 책자의 맨 뒷장을 펼쳐보니 개방 인장과 제갈세가 인장이 정확하게 찍혀 있었어요. 개방에서 정보를 제공하고, 제갈세가에서 분류, 계획해서 무림맹 맹주에게 상납한 살생부였던 겁니다." "그럴 리 없어요! 증거, 증거가 있나요?" "아쉽게도 없어요. 정파 내부 다툼 따위 우리가 알 바 아니었으니까요.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으니 방해할 이유도 없었구요. 지금 생각하면 무림맹을 궁지로 내몰 좋은 기회였을지도……." "닥쳐요! 증거가 없는 심증을 현실처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심증으로만 말을 하라면 비난거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어요. 아니, 구체적인 일례도 늘어놓을 수 있다구요." 제갈혜의 흥분이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왠지 점점 불안해지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래요? 다행이네요. 오늘 시간 많거든요. 얼마든지 늘어놔 보세요. 자세히 들어드리지요." 냉월화 누님의 도발도 만만치 않았다. 제갈세가의 머리와 월녀궁의 머리가 부딪히니 아무 상관도 없는 내 머리마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하오문(下午門)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매염경(每炎璟) 소저가 그들의 다툼에 껴들지 않았다는 정도일까? "한 해전에 교옥정이 무림강호를 뒤집어 버린 일이 있었어요. 그녀와 원한관계에 있는 고관대작의 아들들이 폐인이 되거나 죽는 사태가 발생했던 거구요. 그녀 혼자선 그들이 어느 곳에 사는지 알 길이 없었을 거예요. 하오문의 협조를 받았던 흔적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교옥정은 그들을 귀신처럼 찾아내 징계해버렸지요. 일이 커지고 나서야 추적의 달인인 청성삼검(靑城三劍)과 무림맹 현무단(玄武團)이 파견됐어요. 그런데, 교옥정은 너무나도 교묘하게 무림맹의 포위망을 벗어나곤 했어요. 이상한 일이었어요. 당시의 교옥정 무공 실력은 고작 해봐야 청성삼검의 일인을 간신히 상대할 정도였으니까요. 심지어 무림맹 상부에서 비밀로 청부를 넣었던 살막의 살수들조차 번번이 실패를 하더군요. 교옥정 스스로는 몰랐겠지만, 암중으로 그녀를 도운 고수가 적어도 서넛 이상 존재했음이 분명해요. 바짝 약이 오른 무림맹은 다른 정파들에게 협조를 요청했어요. 그녀는 전 무림의 주목을 받게 되었구요. 그 때 냉월화 부궁주님과 다른 제자들은 뭔가를 찾고 있었지요? 아마 외부 감시가 거의 없었을 겁니다. 아닌가요?" "뭘 말하려는 것인지는 잘 알겠군요. 그런데, 제갈혜 소저, 한가지 놓친 게 있어요. 우리가 풍악산(風岳山)에 도달했을 때쯤에 교옥정, 그러니까, 흑월은 월녀궁으로 피신한 뒤였어요. 시야를 흐릴 생각이었다면, 흑월은 좀 더 중원에 머물렀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점이 이상하긴 했어요. 묘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모든 원한을 풀지 않고 중도에 월녀궁으로 도주해 버렸지요. 원한을 비껴간 이들은 안심했어요. 그러나, 전 의문이 들더군요. 제가 아는 교옥정이라면 적어도 삼사 개월은 더 원한을 풀었어야 했으니까요. 뭔가 그녀의 심경에 변화를 준 듯 했어요. 뭐, 짐작은 가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교옥정은 그때까지 철저하게 이용당했다는 결론이 나와요." "누구한테 이용당했다는 건가요?" "흥, 저보고 시치미떼지 말라 더니 냉월화 부궁주님도 시치미를 잘 떼시는군요. 어디긴 어디겠어요? 바로 월녀궁이지요. 교옥정이라는 미끼를 중원으로 내몰면, 황실의 동창이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자연히 무림맹에 동창의 압력이 들어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겠지요. 무림맹의 주목을 이끌어낸 월녀궁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 일양심법만이 목적이 아니었을 겁니다. 혈해진경도 목적 중 하나였겠지요. 계획대로였다면 무림맹은 교옥정에게 계속 정신이 팔려있었어야 했어요. 설사 교옥정이 잡혀서 죽었다하더라도 월녀궁은 눈 하나 깜짝 안 했을 거구요. 그 기회를 틈타 풍룡 무영투도, 수라삼살과 접선을 벌여서 혈해진경(血海眞經)까지 손에 넣는 것이 월녀궁의 진짜 목적이었을 테니까요." "어디까지나 심증이군요." "맞아요. 심증일 뿐이니까 아무 말 안 했을 뿐이에요. 그래도 부궁주님의 심증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을 거랍니다." "호호호, 맞아요. 월녀궁 사람인 제가 들어도 그럴 듯 한데요. 아주 재미있었어요." 두 사람의 논쟁 같지 않은 논쟁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윙윙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아마 교옥정 누님의 이름이 언급된 순간부터 그랬을 것이다. 교 누님의 순수하면서 처절한 열의가 월녀궁에 의해 어느 정도 이용당했다는 것도 알 것 같았다. 아직도 기억난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내쳤어도 월녀궁 궁주만은 자신을 받아줬다고 당당하게 언급하던 그녀. '한 마디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군. 세상에 정말로 믿을 사람 하나 없구나. 그 때 교 누님을 말리지 않았다면 원한을 갚기 위해 계속 떠돌았겠군.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흥, 아직도 그런 소리를! 제가 다시 말씀드리지요. 그러니까……." 제갈혜가 맞받아 치려는 것을 보니 냉월화 누님이 뭔가 또 걸고 넘어간 듯 했다. 속에서 울컥 화딱지가 치밀어 올라 벌떡 일어섰다. 드르륵. 거칠게 밀리는 의자소리에 둘의 논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저기 두 분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제가 좀 급해서요. 먼저 제 소개부터 하고 넘어가면 안될까요?" "작삼 점소이, 남이 얘기할 때 멋대로 흐름을 끊어버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에요. 이번이 처음이리만큼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 드리겠어요. 다음부터라도 주의해 주세요." "……." 제갈혜는 선심이라도 쓰는 듯 자리에 앉아 버렸다. 상대가 없어진 냉월화 누님도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침착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칼이라도 뽑고 싶었을 것이다. '물과 기름인가?' "무환루의 일등 점소이 우작삼입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포권을 할까 하다가 멋쩍어서 여기저기 허리를 굽혔다. 역시 제 버릇 남 주지 못하는 모양이다. "할 말 있소." 남궁현이 한쪽 손을 들고 있었다. 허락할까 말까 망설이며 한동안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허락해봤자 쓸 데 없는 말로 시비나 걸어올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잠자코 바라보고만 있으려니까 남궁현의 이마에 힘줄이 시퍼렇게 툭툭 돋아나는 게 보였다. 그것을 보고 서슴없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거부하겠소." "뭐야! 너! 너!" "거부하오." "쳇, 공식 회합이라 봐주려고 했더니 시비조구나. 나도 너의 거부를 거부하겠다. 이봐, 점소이 넌 뭘 믿고 이 자리에 고개를 디민 거야? 일등이든 꼴등이든 점소이는 결국 점소이 아니겠어? 도대체 점소이라는 신분 하나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 막상 그의 지적을 받고 나니 할 말이 없어졌다. 이래 보나 저래 보나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13 06:14:57 고친날 2005-09-13 12:16:43 읽은수 7064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6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1] "수라사살(修羅四殺) 차도살(借刀殺)이라는 허명을 믿는 것은 아니겠지? 사정은 들었다. 그저 사람들의 오해로 빚어진 일이라는 것도 잘 이해했다. 네 자신도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을 잘 알고있을 터, 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을 거다. 의자 밀어 넣고, 조용히 사라져라. 본연의 점소이 일에나 충실히 만전을 기하는 게 좋아. 그렇지?" 남궁현의 안면에 득의양양한 조소가 떠올랐다. 이 순간을 기다려온 보람이 느껴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요약하자면, 만인 앞에서 창피를 주는 게 목적이었던 모양이다. 사정이라는 것을 누가 얘기했는지는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주령령, 비겁하게 남궁현 입이나 빌리려는 것이냐? 무환루(無患樓)에 다리를 붙잡혀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은 순전히 니 년 때문이었다. 그런데, 머릿수 늘었으니 이제 와서 사라지라고? 장난해!' "점소이가 어때서?" "몰라서 묻나? 좋아, 내가 이해하기 쉽게 해명해 주마. 점소이란 그저 주루 손님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하찮은 존재지. 남의 뒷정리를 도맡아 하며 입에 풀칠이나 하는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란 말이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머리끝으로 혈압이 치밀어 올랐다. 주령령을 향한 분노에 그의 도발이 더해져 주먹이 부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하찮다? 보잘것없다? 너, 점소이가 없는 주루를 상상해봤어? 주루에 점소이가 없다면 넌 주루에 들어왔을 때, 식탁 정리부터 해야해. 계산대에 가서 일일이 요리 목록을 뒤져야 하지. 요리가 언제 되었는지 니가 직접 주방에 알아봐야 하고, 니 발로 요리를 옮겨야 하지. 뿐만 아니라 먹고 난 식탁은 네 손으로 정리하고 가야해. 그런 불편함을 덜어주는 게 점소이의 역할이다. 좀 더 쾌적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게 점소이란 말이다. 너 같은 백면서생보다 백 배, 천 배는 보람찬 직업이다." "아, 그러셔?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좋겠지. 아무리 밑바닥 점소이라 해도 스스로의 일에 자부심이 없다면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할 테니까. 그 자부심, 언제까지 갈까?" "……." 불만에 가득 찬 시선으로 남궁현이 아닌 주령령을 노려보았다. 그녀와의 처절한 추억들이 떠올랐다. 수라삼살(修羅三殺)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내 목덜미를 잡아챘던 것은 언제나 령령이었음을 되새겼다. '자기 멋대로 붙잡아놓고 수라사살(修羅四殺) 따위의 도깨비감투를 씌워놓은 거잖아.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나더러 사라지라는 거야? 그것도 자기 입으로 내뱉지 못해서 애인 입을 빌려야만 해?!' 때마침 남궁현의 옆구리를 살포시 꼬집으며 뭔가 말문을 열 듯 말 듯 하던 그녀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꼴값들 떠네. 여기가 느그들 안방이냐? 그렇게 남궁현이 사랑스러워 죽겠으면 오늘밤이라도 합방해서 뜨겁게 불태워보시지.' 주령령에게 화살을 돌리고 무환루에서 발을 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시기가 나빴다. 난 이미 적잖은 인간들과 안면을 트고 말았다. 무환루와 인연을 끊는다는 것은 언제든 입막음 당할 각오를 해야한다는 뜻이리라. 녹녹 누님, 팽무진, 종리연, 동천위 …… 모두가 적으로 돌아서리라는 뜻이리라. 최악의 경우, 월녀궁의 추살령(追殺令)까지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교옥정 누님이 날 잡기 위해 검날을 번득이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처절했다. 적월, 은월이 내게 검을 겨누는 것 또한 달갑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만에 하나, 산 채로 생포되면 냉월화 누님의 임상실험대상으로 최후를 마감하리라는 게 뻔히 보였다. "남궁현 공자, 착각하지 마세요. 작삼 점소이는 당신이 생각하듯 간단한 신분이 아닙니다. 그의 배경 또한 공자에게 뒤지지 않는답니다." 느닷없이 매염경 소저가 우리 둘 사이에 껴들었다. 그녀가 언급하려는 의도가 사뭇 궁금해져 귀를 쫑긋 세웠다. "매, 매 소저……? 뭘 말하려는 것인지 상상이 안 가오." "주령령 소저한테서 상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군요. 그럼, 제가 대신 설명해드리지요. 작삼 점소이는 모두 다섯 가지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끙, 다, 다섯 가지 신분? 나조차도 모르는 신분이 있었던 말인가?' 짝짝짝짝. 남궁현 녀석이 실성을 했는지 호쾌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하하하하, 매 소저, 농담도 잘 하시는구려. 좋소, 어디 한 번 들어봅시다. 점소이 외 신분이라는 것은 주방장 보조에 홍등가 호객꾼 노릇까지 포함하는 것이오?" 그의 빈정거림에 화답하듯 눈매를 갸름하게 내리며 상큼하게 미소짓는 매염경 소저가 보였다. 순간 그녀의 입가와 눈가에 희미하면서도 섬뜩한 냉소가 스친 듯 싶었다. 잘못 봤나싶어 다시금 확인하니 여전히 상큼한 미소일 뿐이었다. '신경과민이로군. 항시 염기가 철철 넘치는 그녀가 냉소 따위 품을 리 없지.' "그 중 둘은 남궁현 공자도 잘 알고 있는 것이지요. 첫 번째, 작삼 점소이는 말 그대로 무환루의 점소이라는 표면적 신분을 갖고 있습니다. 두 번째, 수라사살(修羅四殺) 차도살(借刀殺)로써의 신분입니다. 이것은 먼저 홍 루주님께 여쭙는 게 바른 순서겠지요. 홍 루주님, 작삼 점소이의 별호는 남궁현 공자 말대로 빛 좋은 개살구인가요?" 홍 영감님은 녹 누님이 따라주는 화차를 마시며 장내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매 소저가 그를 직접 지적해 부르지 않았다면, 끝까지 침묵을 지켰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평소처럼 졸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젊다는 것은 좋군." "……." "젊은 혈기끼리 얽혀 상충하는 걸 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라네. 생명력이 넘쳐흐른다는 것은 나름대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 "……." "꼬리를 감추고 상대의 속내를 탐색하기 위해 잔머리를 쓰는 것도 좋지만, 화통하니 속 시원하게 다투는 것도 좋은 일일세. 아무리 침착하고 예의바른 인간이라 해도 흥분하면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드러내게 되지. 티격태격 다투며 조율하는 것도 내실을 다지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 홍 영감도 참으로 대단한 인간이었다. 논점을 이상한 데로 비틀어서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요약하자면, 강 건너 불구경이 참으로 재미있었다는 뜻 아니겠는가? 뭐, 내가 구경하는 입장이라면, 세월아, 내월아, 한 세월 지나가도 상관없기는 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입장에서는 열 불만 치밀어 오를 뿐, 이로운 게 없었다. "그래도 이쯤에서 정리하는 게 좋겠군. 작삼이야말로 수라사살(修羅四殺)의 자리에 잘 어울리는 존재지. 실력은 아직 미흡해도,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게 느껴지네만." "그러시군요. 그럼, 포 대협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포 대협? 끙, 몇 번을 들어봐도 안 어울려.' "내 생각은 물어볼 필요 없소. 영감 생각이 곧 내 생각이니 말이오." 매 소저에게 한 방 먹은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포연강의 대답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주령령 소저의 생각은 다른가 보군요. 남궁현 공자의 말이 곧 주 소저의 뜻이라고 봐도 될까요?" 매염경 소저는 배시시 웃으며 주령령에게로 화두를 돌렸다. 나도 령령의 속내가 궁금했기 때문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남궁현의 옆구리를 숫제 쥐어뜯고 있는 게 언뜻 보였다. 남궁현의 눈썹 끝이 바르르 떨렸다. '후후후, 꼬시다. 남궁현.' 모두의 주목에 견디지 못한 령령이 한숨을 내쉬며,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다르지 않아요. 한 순간, 단 한 순간도 다르게 생각한 적 없어요. 수라사살(修羅四殺) 차도살(借刀殺)이라는 별호가 그에게 정말 잘 어울린다고 항상 생각해 왔어요." '어라, 긍정이야? 그런데 말이야. 긍정이면 긍정이지, 그렇게 강조할 것까지는 없잖아. 어차피 한 번 쏟아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어. 남궁현을 통해서 네 의지와 생각, 확실히 전달받았으니 뒤늦게 말머리 돌릴 필요 없다구.' "수라삼살 모두가 확실하다고 인정했네요. 이래도 남궁현 공자는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하실 건가요?" "당연히 인정 못 하오. 수라삼살 입장에서야 녀석을 감싸는 게 당연하지 않겠소? 령령, 그, 그만하시오." 뒷말은 나지막하니 읊조렸지만, 들을 사람은 다 들을 수 있었다. "왜지요?" "풍악산 정상에서의 실적으로 차도살(借刀殺)이라 불리는 것 아니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오. 순전히 전대기인의 혼이 그에게 빙의 내지는 강림한 묘한 경우였소. 알 사람은 다 아는 속사정이오. 자신의 몸을 혼령에게 뺏기고 꼭두각시 인형처럼 움직인 것을 실적으로 삼을 수 있겠소? 스스로의 의지가 담긴 실적이 아니면 인정할 수 없소." "실질적인 실적이 중요하단 말씀이시군요. 그럼, 제가 아는 일례 하나를 들어 드리겠어요. 우리의 또 다른 조력자는 여러분도 짐작하다시피 철혈국주가 이끄는 강남표국(江南驃局)입니다. 최근에 란화표국(蘭花驃局)과 무림맹의 협공에 전멸 당할 위기에 몰렸었지요. 당시 강남표국을 도와 무림맹 세력을 괴멸시킨 것은 무환루 분들이었습니다. 그때 한 쟁자수의 활약이 두드러졌지요. 그는 강남표국의 정예, 흑검대를 압박해오던 무림맹 백호단을 공중에서 기습했어요. 그들의 진열을 산산이 흩트리며 한 명, 한 명 쓰러뜨렸지요. 믿을 수 없는 쾌속한 신법으로 백호단 사이를 누볐어요. 백여 명에 이르던 백호단이 단 한 명의 쟁자수에게 발이 묶여 혼선을 빚었다면 믿을 수 있겠어요? 그 바람에 백호단은 도리어 흑검대(黑劍隊)의 밥이 되고 말았습니다. 강남표국 흑검대 생존자들이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때의 쟁자수라더군요. 그 쟁자수를 무환루(無患樓)에서는 작삼 점소이라고 부른답니다." 처음에는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해서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로부터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에 등줄기가 서늘해져왔다. 마치 그 자리에 서서 직접 보기라도 한 사람처럼 너무나도 상세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요. 보나마나 다시 빙의라도 됐을 거요. 나한테마저도 밀리는 놈이 그런 대활약을 했을 리 없소. 더구나, 매 소저는 직접 보기라도 한 거요?" "아니오. 대신 쟁자수 두 명과 표사 두 명을 매수했었어요. 그 중에서 살아서 돌아온 자는 쟁자수 한 명뿐이었지만요. 정 못 믿으시겠다면 주 소저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그 자리에 주 소저도 있었으니까요." 잠시동안 불신의 빛으로 날 노려보던 남궁현은 령령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매 소저의 말이 정말이오?" "네, 그대로예요." "……." "그 정도로 남궁현 공자의 인정을 얻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럼, 작삼 점소이의 세 번째 신분으로 넘어가 보겠어요. 이것은 제 입으로 거론할 수 없는 부분이네요. 냉월화 부궁주님에게서 직접 듣는 수밖에 없어요." 그녀는 정말로 말문을 닫고는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처럼 다소곳이 앉아 버렸다. 당연히 모두의 시선은 냉월화 누님에게로 흘러들었다. 냉 누님은 탄식과 함께 손사래를 쳤다. "흥, 오늘 아주 시야를 톡톡히 넓히게 되네. 제갈세가 여식만 조심하면 될 줄 알았는데, 하오문에서 키우는 여우도 만만찮군." "칭찬으로 듣겠어요." "작삼 동생, 잘 들어둬. 바로 동생과 직결되는 얘기니까 말이야." "……." "우리 월녀궁(月女宮) 여인들은 모두 특이한 자수정 목걸이를 하나씩 지니고 있어. 월녀궁 지하동굴에서만 얻을 수 있는 진귀한 자수정이야. 차가운 한기를 내포하고 있어서 월녀심법을 익히는 이들에게 아주 유용해. 그런데, 자수정 목걸이의 진짜 용도는 다른 곳에 있어. 작삼 동생이라면 짐작하고 있으리라고 보는데, 어때?" "물론 잘 알지요. 서로의 종적을 찾을 때 아주 유용하잖아요." 그녀는 내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으며 난감한 표정을 떠올렸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모르고 있었구나. 확실히 그런 기능도 있지. 월녀심법(月女心法)을 삼성 이상 익혔다면 반경 오리 안까지 자수정의 존재를 감별할 수 있어. 자수정마다 내뿜는 파장이 미묘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상대방이 누구인지까지 알아보기도 해. 하지만, 자수정의 제일 중요한 쓰임새는 따로 있어. 하아, 고란하군, 곤란해. 뭐, 언젠가 알게될 사실이니 말해줄게. 자수정 목걸이는 월녀궁 여인들의 징표야. 하나뿐인 목숨과도 같아. 그것을 외부 이성에게 맡겼다는 게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야. 다른 월녀궁 여인들에게 이 남자를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이제, 이제 알겠지?" "아, 그러니까, 일종의 수호석(守護石)이군요. 그런데, 왜 사월은……. 킁,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14 10:29:07 고친날 2005-09-14 18:03:05 읽은수 7350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6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2] 냉월화 누님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가느다란 눈썹 끝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불만에 찬 시선으로 날 째려보던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질러왔다. "정말! 작삼 동생은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구제불능이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줄게. 이성에게 맡겨진 자수정 목걸이는 그와 일생을 같이 하겠다는 월녀궁 여인의 혼인서약이자 의지야. 지금 동생 목에 걸려있는 흑월의 자수정도 이와 똑같아." 철커덩! 냉월화 누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시동안 굳어있던 심장이 무섭게 날뛰면서 뜨거운 기류를 내뿜었다. 온 몸이 화끈 달아오르며 기이한 감정에 붕 떠버렸다. 나도 모르게 목에 걸린 자수정 목걸이를 움켜잡으며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러니까, 동생은 흑월의 남편 자격이 있어. 흑월은 나 다음으로 부궁주가 될 아이야. 물론 내가 월녀궁 궁주 자리에 올랐을 때 얘기지만……." "저기, 아직 식은 치르지 않았는데요." "그렇구나. 그럼, 홍 루주님한테 주례를 맡기면 되겠네. 신혼집은 비밀분타 내에 마련해줄게. 이제부터라도 마음 준비를 다지도록 해." "아니, 그 뜻이……." '쿨럭, 보통 혼인에 따른 마음 준비는 여자들 쪽이 하는 게 아니었나?' "하하하! 요화(妖花) 교옥정(喬玉淨)과 차도살(借刀殺) 우작삼(愚作三)의 결혼식이란 말이지.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그 밥에 그 콩나물이군." "남궁현 공자, 말에 가시가 있군요. 남궁세가는 월녀궁 전체와 적대시하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여도 되겠어요?" "……." 냉 누님의 강한 어조에 반격을 받은 남궁현은 할 말을 잃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말문을 닫아 버렸다. 대신 생각하지도 못했던 제갈혜가 그 말을 맞받았다. "월녀궁 부궁주님께서는 함부로 그런 말을 남발하시면 안됩니다. 남궁세가는 우리 제갈세가와 앞일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남궁세가를 적으로 돌릴 때는 제갈세가도 같이 적으로 돌리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주시기 바랍니다." "흥, 다시 해보자는 건가요? 제갈혜 소저?" "좋아요. 전 언제나 준비되어 있으니까 문제없어요." 둘은 말없이 칼날 어린 시선을 교차시켰다. 그대로 놔뒀다간 다시 논쟁으로 비화될 상황이었다. 그 찰나 시기 적절하게도 매염경 소저가 다른 곳으로 화두를 돌렸다. "작삼 점소이의 네 번째 신분은 녹 문주님께서 인정해주신 거예요. 이 또한 녹 문주님에게서 직접 들어야겠네요. 녹 문주님, 작삼 점소이는 하오문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매 소저는 어색한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이번에는 그 화살을 녹 누님에게로 돌렸다. 이번에는 그녀가 뭘 말하려는지 짐작은 되었다. 그러나, 하오문 자체는 내부반란을 일으킨 세력의 우두머리 여인에게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빈 강정이나 다를 바 없는 이름뿐인 곳의 소문주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잠시 심호흡을 들이키며 주변환기를 시킨 녹 누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국 그 말까지 나오게 되는군요. 작삼 동생은 나와 의남매 관계를 맺었습니다. 지금은 무림맹에게 밀려나 있지만, 언젠가는 하오문을 되찾게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그는 명실상부한 하오문의 소문주로 불리게 되겠지요." "잘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요? 지금의 하오문은 명백히 친무림맹 세력인 유 문주에게 넘어가 있습니다. 풍류공자 고휘천 공자가 단주로 있는 무림맹 백호단의 비호를 받고 있기도 하구요. 이르자면, 녹 문주님의 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무력입니다. 하오문이라는 이름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 있는 이상, 문주라는 호칭도 적절치 못하겠군요." 냉월화 누님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배알이 극한으로 뒤틀린 듯한 제갈혜가 살짝 트집을 걸어왔다. 반박을 할 수도 없는 것이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녹 누님도 그저 씁쓸한 미소를 떠올릴 뿐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남궁현 녀석의 거봐라 하는 듯한 의기양양한 눈웃음이 무지막지하게 거슬려왔다. "제갈혜 소저, 중요한 것을 잊고 계시네요." 제갈혜가 녹 누님의 호칭까지 문제삼자 냉랭하게 안면을 굳힌 매염경 소저가 한 팔을 거들고 나섰다. 스스로는 녹 누님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옛정이란 게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글쎄요? 제가 뭘 잊었는지 저도 궁금하군요. 해명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투는 냉월화 누님을 대하는 것보다 한결 부드러워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칼날을 품고 있었다. '젠장, 이게 무슨 회합이야! 아무리 고쳐봐도 싸우지 못해 안달 난 인간들의 집단패싸움이구만.' "하오문은 무력을 내세우는 세력이 아니랍니다. 하오문이 가진 힘은 정보력에 있습니다." "동감이에요. 하오문이 가진 힘은 정보력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도 정보력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녹 문주님께는 사천위 밖에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정보의 공백을 어떻게 매꿔주시려는지요?"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 문주가 가진 것은 겉만 그럴 듯 하게 생긴 하오문의 껍데기지요. 오랜 세월 구축해놓은 하오문의 정보망을 쥐고 있는 것은 바로 저, 남천위랍니다." "그래서, 고휘천 공자의 방문을 받은 것이었군요. 무림맹의 감시도 따르겠네요. 이 자리에 앉아있어도 괜찮은 것인가요?" 제갈혜는 정보망이 매염경 손에 쥐어져 있다는 말을 듣고도 잘못을 시인하기는커녕 다른 쪽으로 말꼬리를 틀어 보였다. 정말 칼만 안 들었다 뿐이지 외형상의 진검전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혹시 이게 말로만 듣던 논검비무(論劍比武)인가? 논검비무를 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이론과 응용력, 실전경험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흠, 말 그대로군.' "그에 대해서는 걱정해주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앞으로 일주일간 이곳에 머물러있어도 그들은 모를 테니까요." "그래요? 항간에 들리기로 풍류공자 고휘천 단주의 여성 편력이 장난 아니라고 하던데, 어떻던가요?" "왜 저에게 물어보시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야 매염경 소저와 고휘천 공자의 사이가 돈독하다고 소문이 나있거든요. 한밤중에 만나는 일도 잦다던데……. 물론 어디까지나 소문이지만." "……." 고휘천 얘기가 나오자 매염경 소저의 낯빛이 무서우리만치 싸늘해졌다. 회의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고 있었다. 아무래도 녀석과 매 소저의 관계가 생각보다 복잡한 듯 했다. 회심의 일격으로 승기를 잡은 듯한 제갈혜도 그리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뒤늦게 서야 실수했다고 자책하는 듯 했다. "사적인 이야기는 끌어들이지 않는 게 신상에 좋을 겁니다. 제갈 소저." 한참 후에야 매 소저가 차갑게 응수해왔다. 그것도 협박성이 짙은 언변이었다. 항변을 하려던 제갈혜는 뭔가 찔렸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씁쓸한 암운이 감돌았다. "간단히 제 입장을 말씀드리지요. 예전에도 언급했듯이 전 아직도 녹 문주님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작삼 소문주도 인정 못 합니다. 하지만, 하오문에 한 발을 딛은 남천위로써의 의무도 잊지 않았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몸은 하오문도입니다. 그에 합당하게 정보망을 움직일 것입니다." 무림인으로써의 매 소저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보통 여인으로 위장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나, 단호히 선언하듯 말을 맺는 매염경 소저는 잘 다듬어진 한 자루의 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작삼 점소이의 다섯 번째 신분에 대해서 언급해 드려야겠군요. 단지 심증일 뿐이지만, 홍 루주님의 말씀을 듣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작삼 점소이는 어느 누구보다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심증이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그녀가 입을 연 마지막이었다. 그때까지 엉거주춤 서있던 나는 슬그머니 의자에 몸을 붙였다. 나 다음으로 매 소저가 자기 소개를 하는 게 바른 순서였지만, 제갈혜와의 언쟁을 통해 간접적으로 언급되었기 때문에 모두의 암묵적 묵인 하에 넘어가 버렸다. 안색이 어두워진 매 소저의 손에 슬며시 깍지를 껴주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그 정도가 전부였다. 기운이 쭉 빠져있던 그녀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헉, 매 소저 악력도 장난 아니네. 고군분투하는 연약한 여인으로만 알았더니……. 역시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구만.' "월녀궁의 일대 제자 춘월입니다." "월녀궁의 일대 제자 명월입니다." 종종 생각하고 있는 일이었지만, 월녀궁 여인들의 이름은 월(月)자 돌림이라 그런지 기루의 기녀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무환루의 식객 팽무진이오. 필살검법의 대가로 정평을 높일 작정이니 종종 도와주면 아주 고마울 거요." '어이, 그냥 무공비급을 통째로 달라고 해라. 내공 높이는 기화요초라던가, 명검 몇 자루 정도 떨구라는 말도 보태라. 구체적으로 제시를 해야지 추상적으로 언급하면 정말 추상적으로 넘어간다고.' "무환루 이등 점소이 종리연이에요. 항간에는 풍룡이라고도 하나봐요. 이상이에요." 독마라던가, 도성 정도되는 거물급이 둘이나 회의석상에 있어서 그런지 구룡 정도는 눈에도 안 차는 모양이었다. "하오문 문주 녹녹이랍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반도의 손에서 하오문을 되찾고 말 것입니다." 트집잡기 좋아하는 제갈혜도 이때만큼은 조용히 넘어갔다. 독마라고 불려지는 홍 영감님을 의식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혹은 서로간에 다투느라 진이 다 빠져버린 듯도 했다. "허허, 같은 뜻을 지닌 이들끼리 화합을 도모하자는 뜻에서 만든 자리였는데, 본의 아니게 서로를 헐뜯는 자리가 되버렸군." "……." 홍 영감님이 마지막으로 석상 분위기를 요약 정리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영감님은 이런 분위기를 예상하고, 미리 자리를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평상시에 꾸벅꾸벅 졸기만 하니 뭘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 없기는 했다. "발단이 누구였건 간에 이것이 현재의 우리 모습이라네. 미리 액땜을 했다고 좋게 생각하세. 진정 힘을 합쳐야 하는 때마저도 내부분열이 일어난다면 곤란하니 말일세. 다과는 많이 있으니 좀 더 편한 분위기로 대화들 나누다 가시게. 난 먼저 올라가 보려네." 영감님은 녹 누님과 함께 그대로 올라가 버렸다. 약과를 버석버석 거리던 종리연도 석상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팽무진 손을 이끌고 사라져 버렸다. 잠자코 침묵을 지키던 남궁현 일행도 기어이 자리를 떴다. 그들이 계단 난간에 다다랐을 때쯤 뭔가 느껴져 올려다보았다. 순간 찹찹한 빛을 띈 주령령의 날카로운 눈매와 시선이 교차되었다. 잠시동안 멈춰있던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남궁현에게 찰싹 붙은 채 걸어가 버렸다. 포연강도 한숨을 내쉬며 사라지려는 찰나 냉 누님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그의 귀에 누님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 길이 없지만, 포연강의 우직하기만 하던 면상이 붉어진 것을 보니 남녀간에 오갈 법한 끈적끈적한 언질이라도 준 모양이었다. 그마저 허둥지둥 사라지고 나자 남은 사람은 냉월화 누님 일행과 나, 그리고, 매염경 소저뿐이었다. 남은 화차를 들이킨 냉 누님은 빈 찻잔을 내게 들이밀었다. "동생, 한 잔 따라봐." 마침 포연강 녀석이 갖다놓은 죽엽청 술병이 보였다. 쪼르르르륵. "카아, 시원하다. 동생도 한 잔 받아." "……." 쪼르르르륵. '끙, 넘치겠다. 넘치겠어. 그만 따라요. 누님.' "한 번에 쭉 들이키기다." 주루에서 일한 지 반년이 넘어가지만, 술과는 인연이 없는 나였다. 냉 누님이 장난기 어린 눈길로 계속 쳐다봤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단번에 쭉 들이키고 말았다. "쿨럭, 쿨럭. 으 써." "정파 놈들 정말 맘에 안 들어. 무림맹과 반목한 상황인데도 뻣뻣하게 나대면 뭘 어쩌자는 거야? 휴우, 다음에 보자, 동생." "네, 누님. 옥체보존하세요." "호호호, 그래, 그래. 꼭 이 옥체 잘 보존해올게. 수고해." 냉월화 누님 일행도 그대로 후문으로 나가 버렸다. 초라해진 석상을 지키고 있는 것은 이제 나와 매염경 소저뿐이었다. "나도 한 잔 따라줘요." 모두가 사라지고 나자 그제야 말문을 연 그녀가 내뱉은 첫 마디였다. "작삼 점소이도 한 잔 받아요." "……."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기분이 너무 우울해 보여서 두 눈 딱 감고 들이켜 버렸다. 그 후에 약속이나 한 듯 주거니 받거니 하며 죽엽청을 마셔야만 했다. 쿵. 역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식탁위로 고개를 들이박아 버렸다. 온몸에 힘줄기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온갖 사물이 몽롱하게 보였다. 뺨따구에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또 봐요." 그것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15 11:17:12 고친날 2005-09-15 11:17:12 읽은수 7059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63)-줄 잇는 불청객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3] 줄 잇는 불청객 "오라버니! 작삼 오라버니! 일어나요! 정말, 이런 데서 잠들다니, 남세스럽게……." 종리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귓고막을 울렸다. 그녀가 말한 의미를 되새겨 보려다가 그만 두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저려와서 이맛살만 찌푸려졌다. 내 어깨를 몇 차례 흔들어 보던 그녀는 포기했는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드르르륵. 식탁을 타고 바닥을 긁는 굉음이 들려왔다. 싫든 좋든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식탁? 내가 왜? 이크.' 다시금 머리를 쥐어 싸며 주저앉아 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이 달라붙기라도 한 듯 엄청난 조임이 느껴졌다. 식탁에 머리를 처박기 전까지의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렇군, 이런 게 바로 숙취라는 거구나. 도대체 술이라 불리는 것을 인간들이 좋아하는 이유를 당최 모르겠네. 백해무익(百害無益)한 데다가 맛도 더럽게 쓰더구만.' "소문주님 일어나셨군요. 좋은 아침이에요." "그렇구려, 좋은…… 아침이오." 동천위(東泉衛)가 생글생글 웃으며 어느 때처럼 아침 인사를 해왔다. 그녀의 손에는 무럭무럭 김이 오르는 소반이 들려있었다. "해장으로 드시라고 녹 문주님께서 끓이신 얼큰한 해물탕이에요." "어디……. 오오! 얼큰하군요. 속이 후련해지는 게 한 방에 뻥 뚫리는 것 같구려. 녹 누님께 잘 먹겠다고 전해주세요." "네, 그런데, 간밤에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좋은 일은 무슨, 남궁현 패거리하고 푸닥거리하느라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걸요. 주령령 하나 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는데, 아주 떼로 귀찮게 하려드니, 나 원 참." 고개를 갸웃거리던 동천위는 소반을 들고 조용히 주방으로 사라졌다. 대신 콧노래를 부르며 내려오는 팽무진 녀석이 보였다. 녀석이야말로 간밤에 실컷 즐긴 게 분명했다. '영계 먹고 배부르다고 트림하는 거지? 쳇, 부러운 놈.' "여어, 잘 잤……. 흠, 자네 벌써부터 앞날이 훤하이. 월녀궁 여인네만으로도 부족하다 이건가?" "네 녀석까지 트집을 잡으려 드는 거야? 정말 다들 왜 이렇게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해물탕 먹고 트림이나 실컷 할 테니까 방해 말게." "허허허, 내가 방해를 왜 해? 찢어져도 자네 다……." 실실 쪼개며 농을 뱉을 듯 하던 팽무진이 갑자기 얼굴빛을 일그러뜨렸다. "이, 이보게, 나라면 앉아서 해물탕을 먹기보다 먼저 세수부터 하겠네." "아, 거 참,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고 하더라. 얼큰한 해물탕 먹고 속 좀 차리게 그만 내버려둬." "쳇,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말게." 그는 이상한 말만 남기더니 무시무시한 괴물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허겁지겁 사라져 버렸다. 후루루루룩. "어허, 시원하다. 새벽부터 귀신이라도 본 거냐? 다 큰 녀석이 왜 저리 호들갑이야." 후루루룩, 툭. 한참 해물탕을 맛있게 먹고 있으려니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툭 쳐왔다. 이 시간에 날 귀찮게 할 또 다른 인간이라면 그녀밖에 없었다. "야,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 덴다. 쫄따구 주제에 귀찮게 하지말고 좀 내버려둬라. 무진이 옆구리 아니랄까봐 너까지 날 방해할 생각이야?" 툭 툭. '아, 정말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둘이 작당했냐?' "작삼 오라버니, 이제 일어났네요. 팽무진 오라버니 못 봤어요? 뒤뜰 정자에서 보기로 했는데, 아직 안 오네요." 물걸레를 든 종리연이 후문 쪽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무진이? 아까 전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위층으로 허겁지겁 사라지던데." "그렇군요. 그럼." 그녀도 팽무진처럼 종종 걸음으로 내 얼굴을 힐끔거리며 스쳐갔다. 평상시보다 유난히 빠른 걸음이었다. "쟤도 귀신을 봤나? 잠, 잠깐, 그럼 내 뒤에 서있는……." 툭 툭. 그제야 내 뒤에 서있는 인간이 종리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현관으로부터 불어온 바람결에 강렬한 울금향이 실려왔다.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귀신 대령이오." "……."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고개를 들이미는 그녀는 역시나 주령령이었다. 오랜만에 노출도 높은 새하얀 치파오를 걸치고 등장한 그녀였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장난기 어린 미소를 품고 있었으나, 내 면상을 흘겨본 그녀의 안면에 싸늘한 한파가 휘몰아치는 게 껴졌다. "맛있어?" "그럼요. 얼큰한데요. 한 그릇 내올까요?" "아니, 너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 그냥 구경만 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천.천.히 먹어." "……." 정말로 령령은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눈매 끝이 평상시보다 더 날카롭게 치켜진 게 진득하니 살의를 품은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화제를 돌려야 할 필요성을 느낀 나는 은근슬쩍 남궁현을 언급했다. "애인 분은 어디다가 두고 오셨어요? 딱 붙어 다니시는 게 아주 보기 흐뭇하던데요." "오늘 새벽까지 그이하고 그이의 그녀들과 친목 겸 단합으로 대작 좀 했거든. 아예 검남춘(劍南春) 술항아리를 갖다놓고 부어라, 마셔라, 하고 밤을 샜지. 나 빼고는 다 곯아떨어져 있어. 왜? 내가 그이와 붙어 다니는 게 떫어?" '쳇, 어쩐지 입에서 술냄새가 풀풀 풍긴다 했다. 술김에 장난을 걸어오는 중이로군.' "그, 그럴 리가요. 그냥 보기 좋던 걸요. 오래 전부터 남궁현과 재회할 날만을 손꼽아 오셨잖아요." "니가 어떻게 알어?" "헤헤헷, 령령 아가씨 곁에서 쭉 지켜봐 왔으니까 잘 알지요." "……." 난데없이 령령이 말문을 닫아 버렸다. 그녀의 눈빛이 약간은 자상하게 바뀌었다. 초점이 흐려지는 것이 오래 전 추억을 회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내 볼 쪽으로 눈길을 옮긴 그녀에게서 노골적인 살기가 넘쳐흐르는 게 살갑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어투부터 잡아먹을 분위기였다. "언제 다 먹어? 너무 숟가락 오래 놀리는 거 아니야?" "네, 먹긴 다 먹었는데……." "그럼, 가자." "네?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가요?" "그동안 새벽수련을 너무 쉬었잖아. 수라사살(修羅四殺)이면 사살답게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야하는 것 아니겠어?" "……." 질질질질질. 스르르르륵, 철커덕. 질질질질질. 퍼퍼퍼퍽 퍼퍽 퍽 퍽퍽퍽 퍼퍽……. 반시진이라는 시간이 왜 그렇게 길던지, 그녀의 주먹힘도 평소보다 꽤나 많이 들어가 보였다. 운 좋아 몇 차례 피하니까 돌 바닥이 움푹움푹 파여 있었다면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침상에 며칠 누워 있었다고 몸이 너무 굳었구나. 좀 더 분발해. 비록 그이가 눈치를 줘도 네 수련시간만큼은 절대로! 절대로! 빼.먹.지.않.을.테.니.까, 기쁜 마음으로 임하길 바래." 사박 사박 사박. 전혀 달갑지 않은 선언을 던지고 난 그녀는 후련한 발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제길, 꼴같잖은 남궁현이지만, 놈 덕분에 수련 시간만큼은 면하나 했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엎친 데, 덮친 격이잖아. 혹 하나만 더 단 격이군.' 녀석의 대한 원망을 뒤로 한 채 비틀비틀 일어섰다. 숙취가 채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된통 당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심하지는 않았다. 령령의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간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녀도 취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제대로 정조준하지 못하고 휘청거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맞바로 목욕을 하고, 깨끗한 마의를 말쑥하게 걸쳤다. 이마에는 녹 누님이 선물해준 전용 두건을 둘러매었다.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정말 오랜만인 것 같군. 좋아, 오늘 하루도 활기차게 열어보자.' 때마침 활짝 열려진 대문으로 검은 피풍의를 걸치고, 죽립을 푹 눌러쓴 두 명의 손님이 발길을 들였다. 비교적 몸매가 가냘파 보이는 손님의 어깨에는 보자기에 싼 기다란 짐이 걸려 있었다. 죽립 끝을 살짝 들어 보인 그들은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 생기가 넘치는 앞뜰을 호기심 깊게 둘러보고 있었다. 한밤도 아닌 아침부터 걸치고 다니기에는 너무 눈에 확 들어오는 차림이었다. '킥, 별난 손님들이군. '우린 수상한 인간들이오. 십중팔구 현상금이 붙었을 테니 제발 좀 주의해서 관찰해 주시오.' 하고 방방곡곡에 소리 없이 떠들어되는구나.' "어서 옵쇼! 이쪽입니다. 손님." 현관으로 걸어 들어온 두 손님을 정중하게 모시고 들어와서 창가 자리를 배정해 주었다. 먼저 들어온 손님에게 비어있는 자리 중 가장 나은 위치로 배석해 주는 것은 점소이가 가져야할 기본 소양이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러했다. "이봐. 점소이, 여긴 너무 밝아. 눈에 잘 안 띄는 가장 어둡고, 제일 구석진 자리로 줘." 몸매가 가냘픈 손님이 입을 열었다. 몸매만큼이나 가녀린 목소리인 것을 보니 여인이 틀림없었다. "사마 소저, 여기도 괜찮아요. 그리 나쁘지 않은 걸요." 명백한 남성의 목소리이기는 했다. 그러나……. '뭐, 뭐냐? 이 닭살이 오도독 돋는 병약한 미성은?' "안돼요. 천 공자님, 그들이 언제 어디서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다구요. 일단은 눈에 안 띄게 움직여야 해요." '이미 충분히 눈에 띈단다. 아그들아. 강호초출 풋내기 티 좀 그만 흘려라.' "그럼, 이층으로 모시겠습니다." "안 돼. 계산대가 잘 보이는 일층 구석으로 줘." '참으로 가지가지 한다.' "알겠습니다. 제일 구석진 일층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결국 그들을 현관에서 맨 좌측 끝 구석 자리로 배정해주었다. 자리에 앉은 그들은 죽립을 벗지도 않았다. 사연이 있어 보이긴 해도 상태가 심각한 인간들이었다. "뭘 주문하시겠습니까?" "이 주루에서 가장 맛있는 걸로 가져와.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지만, 맛없으면 환불시킬 테니 주방장한테 각오하고 만들라고 잘 일러둬." 빠직빠직. 내 점소이 생활 반년에 악취사흉(惡臭四凶)과 남궁현 일행 이후로 이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글러먹은 손님들은 오래간만이었다. 무환루 손님으로는 기념비적인 첫 번째에 해당되었다. '하지만, 그때랑은 사정이 무진장 다르거든. 쓴물 단물 다 먹으면서 일등 점소이 자리까지 올라왔단 말씀, 감히 어디서 무전취식을 하려드는 거야. 좋아, 누가 이기나 어디 해보자고.' "저기 손님, 저희 무환루에서 가장 비싼 요리는 바로 용봉탕(龍鳳湯)입니다. 자라와 닭을 따로 나눠 한번 가볍게 끓인 후 여기에 다시 인삼, 대추, 잣, 밤, 감초, 구기자, 계피, 당귀 등의 한약재를 넣고 강한 불에 단번에 끓여낸 요리지요. 몸에 아주 좋을 뿐만 아니라 그 맛이 정말 부드럽고 담백하기 그지없지요. 만병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오죽 하면 한 번 먹어본 사람들이 저희 무환루 용봉탕에는 틀림없이 진짜 용과 봉황을 요리 재료로 사용했을 거라고 장담하곤 한답니다." "그럼 그거 내와." "용봉탕은 자라와 닭의 신선도가 요리의 맛을 좌우한답니다. 갓 잡은 자라와 닭을 재료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조달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못 만든단 소리야?" "물론 만들 수야 있지요. 단지 은전 스무 냥을 선불로 주셔야만 합니다. 재료값으로만 은전 열 냥이 들어간답니다. 뭐, 다.른.싼.요.리.야 나가실 때, 계산하시면 되지만, 용봉탕은 하도 그 경우가 특수해서 오로지 선불로만 받습니다. 설사 드셔보시고 맛이 없다고 환불을 요구하셔도 재료값은 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크크, 단번에 은자 스무 냥을 꺼낼 수 있나 어디 보자. 없으면 꼬리말고 만두 한 접시나 먹고 사라져라.' 그러나, 죽립여인은 내 의도를 간파했다는 듯 가볍게 코웃음으로 화답해왔다. 그녀는 품속을 뒤적거리더니 숫제 금원보 하나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탁. "잔돈이 없으니까 먼저 이걸로 줄게. 점소이 네가 말한 대로 끝내주는 요리라면, 나머지는 네 몫이다. 하지만, 영 맛이 없다고 느껴지면, 즉시 환불 처리할 거야. 은자 열 냥 빼고 바로 거슬러줘야 해. 알았지?" '쳇, 생각보다 강하게 나오는걸.' 실제로 무환루의 용봉탕이 비싸긴 했으나, 요리값은 은자 열 냥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울컥한 김에 부풀린 것이었다. 신선도 운운한 것도 당연히 사실일 리가 없었다. '좋아, 누가 이기나 끝까지 해보자. 그 이름도 유명할 소지가 다분한, 불굴의 열혈 점소이, 오늘 무지막지하게 열 받았거덩.'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16 11:22:36 고친날 2005-09-16 15:16:55 읽은수 7106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6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4] 금원보를 먼저 챙긴 나는 내 방에 올라와 그간 어렵사리 모아놓은 은자 여섯 냥을 꺼냈다. 소위 신선도 높은 용봉탕(龍鳳湯)을 제현해 보이기 위해 난데없는 달음박질을 하게 되었다. "작삼 오라버니, 사서 고생이네요." 아까 전부터 종리연 점소이가 능글맞게 눈웃음짓고 서있는 게 그들과의 내막을 다 엿들은 모양이었다. 동이 점소이도 난처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으며 멋쩍게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쳇, 그렇게 됐다. 뒷일을 부탁한다." 후다다다닥. 항주 저자거리로 눈썹 휘날리게 내달려 조씨 아줌마네 어물전에 이르렀다. 바닷가를 낀 항주(杭州)의 특성상 생선의 종류와 신선도는 가히 최상이었다. "아, 작삼 점소이네. 오랜만이야." "헉헉헉,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혹시 싱싱한 자라 한 마리 없어요?" "그게 말이지. 방금 전까지 두 마리 있었는데, 다른 요리집에서 한꺼번에 사갔는걸. 요즘 따라 자라가 귀한 편이라서 말이야. 구하기 좀 어려울걸." "헉헉, 이런, 많이 파세요." 그녀의 말대로 하필이면 자라가 품귀현상을 빗고있는 때였다. 거의 반시진 가까이 발품을 팔고 나서야 가까스로 은자 다섯 냥에 자라 한 마리를 구할 수 있었다. '쳇, 더럽게 비싸네. 네, 봉급으로 두 달하고도 반달 치가 날아갔잖아.' 닭 또한 죽은 구렁이 몸에서 나온 구더기를 먹고 자라 육질과 약효가 뛰어나다는 녀석으로 샀다. 파는 노인장이 그렇다고 우기긴 했으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에휴, 빈털터리가 되 버렸군. 이제 남은 일은 녹 누님에게 달렸다.' 왼쪽 옆구리에 비린내를 진동하면서 허우적거리는 자라녀석을 끼고, 오른손에는 팔팔하게 날뛰는 닭 날개를 거머쥐었다. 무환루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한 시진은 경과해 있었다. 단숨에 주방으로 내달려가 녹 누님 앞에 그 놈들을 내려놓았다. "어머, 동생 재료 한 번 싱싱한 애들로 골라왔네." "헉헉, 누님, 이 놈들이면 최상의 용봉탕(龍鳳湯)이 만들어 질 수 있을까요?" "흠, 어떤 손님이기에 동생의 발품까지 팔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해볼게." 북천위 녀석의 외눈이 매섭게 번득였으나, 아랑곳없이 누님의 가녀린 양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부탁드려요. 누님." "호호호, 남세스럽게……. 맡겨둬." 녹 누님의 친근한 미소를 마주 대하니 적이 안심이 되었다. 가쁜 숨을 고르며 주방에서 나오자 여전히 죽립을 쓰고있던 그들이 날 불렀다. "어이, 점소이." "왜 그러시는지요? 손님." "몰라서 물어? 요리 아직 멀었어?" "아, 용봉탕 말씀이시군요?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제 겨우 재료를 구해왔거든요. 자라 품귀 현상이……." "자라가 귀하건 말건 그것은 우리 알 바 아니지. 한 시진 째, 녹차(綠茶)만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책임질 거야?" "죄송합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한 시진은 더 기다려야 하는 거야? 우린 바쁜 사람들이야. 손님이 그렇게 우습게 보여?" "……." 보아하니 죽립여인의 골이 잔뜩 난 듯 싶었다. 잘 하면 손해배상청구까지 할 기세였다. 명백히 내 실수가 컸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사마 소저, 혹시 저와 있는 게 따분했나요?" 병약한 미성을 지닌 죽립청년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덕분에 화제의 방향이 나로부터 그로 바뀌었다. 죽립여인의 압박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 천 공자님, 무슨 말씀을! 당연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대와 오붓하게 녹차를 마시며 정겨운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매우 기뻤습니다. 그동안 경황이 없어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오랜만에 만끽한 여유였습니다." "천 공자님." "이런 자리와 계기를 마련해준 점소이에게 전 오히려 고마움을 느낍니다. 공짜지만 녹차 맛 또한 다른 곳에 비해 손색없는 상등품이질 않습니까? 그 배려 또한 가슴 시리게 와 닿는군요." '이 녀석, 완전히 시를 쓰고 앉아있네. 틀림없이 풍부한 경험을 지닌 선수다. 그래도 버르장머리 없는 여자 쪽보다 마음 하나는 넉넉한 놈이로군.' 죽립청년이 한 편의 시와 같은 덕담을 늘어놓자 죽립여인은 맞장구치며 푹 빠져들고 있었다. 얼마나 빠져들었나 하면 이미 내 존재는 그녀의 안중에서 깔끔하게 지워져있을 정도였다. '녹차라? 동천위는 낯을 가려서 그런 생각도 못 했을 테고, 아무래도 눈치 빠른 종리연이 내놓은 모양이군. 혹시 나중에 한 몫 떼 달라고 조르는 거 아냐? 안 돼. 절대로 안되지. 나한테 진 빚이 얼마인데…….' 한 식경 정도 경과하자 녹 누님이 주방에서 나와 싱긋 웃으며 손짓하는 게 보였다. 주방으로 날렵하게 달려가 보니 향긋하면서 달작지근한 냄새가 흘러나오는 요리가 있었다. 간간이 한약재 냄새도 섞여 나왔다.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가능한 최선을 다해봤어." "괜찮아요. 누님. 오히려 제가 수고를 끼쳐드려서 죄송할 뿐인걸요." 즉시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용봉탕을 그들이 기다리는 자리에 내려놓았다. "일단 향긋한 향기가 맘에 드는데, 어디 맛은 어떨까?" 죽립여인은 젓가락을 깔짝여 고기 한 점을 뜯어내 입 속으로 쏙 넣어 버렸다. 그 다음에는 숟가락을 들어 국물 맛을 보더니 잠시 음미하듯 가만히 멈춰 있었다. "천 공자님도 한 번 들어보세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출출해서 견딜 수가 없네요. 하하하." '사내 녀석 웃음소리가 무슨 쥐꼬리만도 기운이 없냐.' 죽립청년도 몇 차례 깨작거리더니 가벼운 탄식을 내뱉었다. 비아냥거리는 한숨인지 기쁨의 탄성인지 당최 구분이 안가는 한숨이었다. "변두리 주루 요리라고 별다른 기대를 안 했었는데, 사르르 녹아나는 이 맛은 상당히 독특하군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별미일 성싶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사마 소저?" "네, 생각보다는 기대 이상의 용봉탕이네요. 물론 우리 집 전속 요리사 솜씨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 하네요." '그럼, 금원보가 바로 내 차지가 된 거야? 크크, 하늘이 나의 노고를 이해해 준거구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兩人對酌山花開 一杯一杯復一杯 我醉欲眠君且去 明朝有意抱琴來 둘이서 잔 드는 사이 소리 없이 산 꽃이 피어 한잔 한잔 들자 거니 다시 한잔 먹자 거니 난 위한 채 자고파 그댄 돌아가도 좋으리 낼 아침 오고프면 부디 거문고 안고 오시라. 느닷없이 청년은 시 한 수를 읊었다. 말하는 어투가 시적이다 싶을 정도로 거부감이 인다 싶더니만, 이젠 운취가 돌았는지 정말로 시를 읊고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요리를 그대와 마주 대하니 죽엽청(竹葉靑) 한 잔이 그리워지는군요." "호호호, 좋아요. 이봐, 점소이, 네가 이겼다. 그 금원보는 너 줄 테니까, 죽엽청 한 병 갖다 줘." "네, 감사합니다. 손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원보 하나가 굴러 들어왔다는 기쁨에 주저 없이 잽싸게 술창고로 뛰어가서 죽엽청 한 병과 술잔을 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죽립여인에게 살짝 속삭였다. "나중에 다른 소리하기 없습니다." "……." 잘 듣지 못했는지, 먹는데 정신이 팔려 그랬는지, 내 말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로지 용봉탕의 향기와 맛을 음미하듯 듯 먹으며 술잔을 나누는 데만 정신을 기울이는 그들이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음식다운 음식을 못 먹고 다닌 듯 했다. 금원보씩이나 갖고 다닐 만큼 부유한 인간들치고는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었다. '기이하다 해야할지, 개성적이다 해야할지, 참으로 고민 때리는 인간들이로구만.' 어쨌거나 금원보 하나가 그 정도 발품으로 들어왔다는 기쁨에 잠기려는 찰나였다. 뇌리를 울리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이 은근하게 울려 퍼졌다. '오라버니, 작삼 오라버니, 현관 쪽 앞뜰로 나와봐요. 진지하게 대화를 좀 나눠보자구요.' 종리연이었다. 어떤 대화를 원하는지도 알만했다. 아직 점심때까지 여유가 남아 무환루도 한적한 편이었다. 동천위 혼자 나둬도 별 무리는 없어 보였다. 잠자코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라버니, 잘 오셨어요. 제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시겠지요?" "흠, 모르겠는걸." "좋아요. 알기 쉽게 설명 드릴게요. 오라버니가 어물전 시장으로 나간 세, 죽립을 쓴 손님들의 투정이 장난 아니었어요. 그래서, 시간을 때울 겸 녹차라도 내오려 했더니 녹 문주가 또 얼마나 잔소리를 해대던지 정말 끔찍했다구요." '그야 자업자득(自業自得)이지. 첫 인상을 개판으로 찍어놓은 네 탓 아니겠냐.' "그러나, 전 용감하게 오라버니 핑계를 대고 내왔어요. 하아, 정말 너무 일방적 편애를 하는 기분이 들곤 해요." '다 내 인성에 의한 인복이다. 인복.' "오늘 저의 이런 노고에 힘입어 오라버니가 한 몫 잘 잡은 것으로 알아요. 더도 덜도 말고 반의 반만 내놓으세요. 그걸로 오늘 일은 잊어드릴게요." '내 이럴 줄 알았다.' "연아." "네, 오라버니." "그간 나한테 진 빚을 얼마나 갚아왔는지 기억하느냐?" "……." "원금은커녕 이자도 안 준 건으로 안다만. 뭐, 팽무진 녀석한테 엄청나게 신경을 기울이느라 네 주인의 존재를 잊고 사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월급을 타는 날이면 둘이서 오붓하게 서호로 놀러가서 다 탕진해버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원금 이자를 못 갚아 애타는 네 마음도 이해하는 바, 내가 몸소 나서서 직접 이자를 제해주기로 했다. 오늘 일로 이번 달 이자는 제해졌다. 좀 더 노력해주기 바란다. 그럼 수고." 빠직빠직. '쳇, 내가 네 속을 모를 것 같나? 돈 생기면 보나마나 팽무진 녀석에게 다 날려버릴 거, 가만 놔둘 성싶어? 이런 식으로라도 수금을 해야할 것 아냐? 네가 나한테 돈 받을 일 생길 때마다 이렇게 떼일 줄 알아라.' '작삼 오라버니, 미워요!' 귓속을 울리는 그녀의 전음입밀이 앙증맞게만 느껴졌다. 오늘 따라 속이 후련한 게, 막혀있던 앙금 하나가 뻥 뚫려나간 느낌이 들었다. 어느 덧 하루 일과를 마감할 시간이 되어갔다. 동천위, 종리연과 함께 손님들이 빠져나가 한적해진 무환루 내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대문밖에 걸려있던 호롱불도 꺼버렸다. 단지 종일토록 신경을 거스르던 존재들이 아직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헤헤, 손님, 저희 무환루는 이제 영업이 끝났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근방 주루들도 이 시간이면 문을 내립니다. 대신 서호주변으로 가시면 밤새도록 즐기실 수 있답니다." 내 말에 화답하듯 죽립 끝을 들어올려 주루 내부를 둘러본 여인은 고개를 끄떡거렸다. "그렇구나. 이제야 다른 인간들이 다 나갔다는 얘기네." "그럼요. 그럼 안녕히 가세……." "천 공자님, 이제 죽립을 벗어도 되겠어요." 죽립여인은 내가 축객령이 명백한 작별인사를 하는 것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죽립을 벗었다. 그녀가 죽립을 벗자 말아 올려져 있던 긴 머릿결이 스르륵 풀려 늘어졌다. 뜻밖에도 꽤나 지적인 외모를 자랑하는 면상이었다. 일순간 제갈혜를 떠올릴 정도였다. "그렇군요. 갑갑해서 혼났습니다. 다행이네요." 죽립청년도 맞장구를 치며 죽립을 벗었다. 순간 수많은 꽃들이 일시에 그의 주변에서 피어올랐다. 안면에는 병기운이 서려있었지만, 여성과 맞먹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 덕에 오히려 더 빛이 나 보였다. '킁킁, 이 향기, 아주 독특하지만, 어디선가 분명 맡은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니 안면도 무척 익잖아. 도대체 어디서 본 거야?' "저, 손님, 혹시 오래 전에 저와 어디서 마주친 적이 있던가요?" "글쎄요. 전 형씨를 어디서 본 기억이 전혀 없는데요. 더욱이 이렇게 먼 곳으로 여행을 나온 것도 오늘이 처음이라서 어디선가 마주친 적은 더더욱 없을 겁니다." "아, 그러시군요.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그럼 안녕히들 가십시오." "가긴 어딜 가? 우린 일이 있어서 왔다고. 일부러 주루 문 닫는 시간까지 기다려온 거란 말이야." "네? 누구한테 무슨 볼 일이 있으신 데요?" "일단은 너한테 볼 일이 있지!" 다짜고짜 사마 성씨를 가진 여인이 어깨 위로 손을 들어올렸다. 아차 할 새도 없이 거대한 짐 보따리가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부우우웅.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20 11:31:08 고친날 2005-09-21 09:04:32 읽은수 7220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6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5]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뇌려타곤(懶驢打棍)을 시전했다. 몸을 떼구르르 굴려서 짐꾸러미의 회전반경으로부터 벗어났다. 매일 아침마다 령령에게 쫓기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속도였으나, 얌전하던 손님이 느닷없이 폭도로 돌변한 것은 전연 계산 밖이었다. 콰자작! 그녀의 옆에 있던 식탁이 통째로 박살나고 말았다. 해체된 나무 조각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던 바닥을 다시 어지럽히고 말았다. "뭐야! 갑자기 뭐 하는 짓이야!" 피풍의 여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똥말똥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겉보기는 둔해 보여도 보고대로 날렵하구나. 일단 보통 사람의 범주는 벗어났네." "무슨 짓이냐고 했어. 더 이상 손님 대접받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우린 아직 손님이야. 청부 넣을 곳이 맞는지 틀린지 확인해본 것뿐이라고." "뭐, 청부?!" "그래, 그러니까 계산대에서 계속 꾸벅꾸벅 졸고있던 영감한테 볼 일이 있는 거야. 쫄따구는 그만 물러나 주시지." 곤란을 넘어서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내 손으로 직접 청부를 받은 일도 없지만, 이런 식으로 접선을 해오는 인간들도 처음 봤던 것이다. 소란통이 되 버리자 주방에서 녹 누님과 북천위가 모습을 드러냈고, 눈치 빠른 종리연은 재빨리 현관문을 닫아버렸다. 홍 영감님도 이례적으로 눈을 번쩍 뜨고는 뒷짐을 진 채 그들 앞으로……. '아니 그냥 지나가 버리면 나보고 어쩌라고!' 피풍의 여인은 냉랭하게 코웃음치며 홍 영감님 앞으로 신형을 날렸다. 등뒤에 꽤 무거워 보이는 짐꾸러미를 맸음에도 날다람쥐처럼 날렵했다. "어디를 내빼려고 하시나? 말 길을 못 알아들은 모양인데, 우린 청부하러 왔어." "청부? 허허허,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보통 주루라오. 잘못 아셨소. 묶고 가실 거라면, 작삼 점소이가 객실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아니라면 영업이 끝났으니 나가주셔야 하겠습니다." "청부를 고르는 조건이 까다로운 모양이군. 하지만, 이미 계약금을 저 점소이한테 줬단 말이야. 금원보 하나를 줬다고!" 덜컥. '계약금이라고? 약속이 틀리잖아.'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홍 영감님을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종리연이 고소하다는 조소를 품고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손님은 신의가 없으시군요. 손님과 우리 점소이간에 어떤 내기가 오갔는지 나를 비롯한 무환루 점원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작삼 점소이는 그 내기를 위해 어물시장 전체를 뒤져 싱싱한 자라와 약효가 뛰어난 산 닭을 구해왔지요. 그리고, 손님은 분명 내기에서 졌음을 승복했습니다. 작삼 점소이가 얻은 금원보는 순수하게 그의 노력으로 얻은 것입니다. 원래 용봉탕에는 소금에 절여 보관해온 고기들을 사용했으니 말이지요. 계약금이니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별개의 것입니다." '허걱, 무환루 사람들 모두가 다 알고 있다고? 이런!' "알고 있어. 금원보는 당연히 그의 것이지. 영감의 내력을 알아보려고 시험해본 거야. 손님들이 들어올 때는 졸기만 하다가 계산하러 다가오면 바로 깨서 계산을 할 정도라는 것은 보통 무림인도 쉬운 일이 아니야. 더욱이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점소이와 우리의 대화를 빠짐없이 듣고 있었던 게 확실하지. 내력이 느껴지지 않지만, 짐작은 가능해. 이른 바 무의 극에 다다른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경지, 노화순청(爐火純靑) 반박귀진(返撲歸眞)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겠지" "……." "남장 여자 점소이 둘에게서도 미약하지만, 내력이 느껴졌어. 녹차를 가져다준 점소이는 걸어다닐 때 숫제 발소리조차 내지 않더군. 그나마 우리와 내기를 걸었던 점소이에게선 내력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보고 받은 바가 있어 시험을 해봤더니 보시다시피 범인이라고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날렵했어. 생각하고 피한 게 아니라 반사적으로 피한 것이지. 평상시 혹독한 훈련을 받아왔다는 증거야." '오옷, 잘 아는군. 혹독하다 못해 처절하게 수련을 받아오긴 했지.' "쯧쯧쯧, 이런 난감할 데가 있나? 손님, 단단히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청부를 원하신다면 살막이라는 곳에 넣으시는 게 어떨는지요. 소문에 듣자하니 그들만큼 청부를 완벽하게 처리해주는 곳이 없다고 하던데요." 홍 영감님이 혀까지 차며 오리발을 내밀자 사마 성씨 여인은 단단히 열을 받아 버렸다. 실쭉 하고 냉소를 지어 보인 그녀는 서슴없이 길쭉한 짐꾸러미를 휘둘러 영감님에게 달려들었다. '식탁을 쉽사리 박살낸 것을 보면, 굉장히 단단하고 무거운 병장기일 거다. 그런 물건을 가느다란 팔로 자유자제로 부리는 걸 보면, 예사 여인은 아니란 말이야.' 부우우웅. "이 기회에 진정한 고수의 풍모를 견식 해보겠다!" "정말 못 말릴 아가씨로군." 홍 영감님은 피풍의 여인의 짐꾸러미 병장기가 그의 눈앞에 당도할 때까지 느긋하게 뒷짐을 지고 있다가 슬쩍 신형을 흔들었다. "맞았다!" 제대로 적중시켰다고 느낀 것은 그녀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무환루 안에 있던 사람들을 비롯해서 나까지 속아넘어갈 뻔했다. 그녀의 병장기가 쓸고 지나간 자리는 영감님이 사라지면서 흘려놓은 잔상이었던 것이다. 이에 질 새라 사마 성씨 여인은 더욱 더 가공할 기세로 짐꾸러미 병장기를 휘둘렀으나, 홍 영감님의 잔상만 수없이 늘려놨을 뿐이었다. 기어이 바짝 열을 받은 모양이었다. "제법 하는군, 영감! 이제 봐주지 않을 거야!" 홍 영감님은 이를 못 들은 척, 외면을 하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제길, 내가 우습게 보이나 보지?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리겠다고!" 대답은 뒤편에서 들려왔다. "그전에 니가 먼저 죽어." 귀신처럼 스르륵 나타난 새하얀 손이 사마 성씨 여인의 목을 섬전같이 낚아채 버렸다. 손의 임자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주령령이었다. 그녀의 뒤로 남궁현 일행들의 모습이 하나, 둘 보였다. 낯빛들에 힘이 없고 창백한 게 소위 걸어다니는 시체, 강시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포연강과 팽무진도 계단 난간에 기댄 채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안 보인다 했더니 숙취로 다들 퍼져있었구만. 하기사 천하의 주령령이 술주정을 할 정도였으니 쟤네들이야 오죽할까? 크크크, 샘통이다.' "커컥." 령령의 손에 잡힌 여인이 숨이 막히는지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러자 천씨 녀석이 벌떡 달려나오며 고함을 질렀다. "그 손, 놓지 못하겠습니까!" 퍽. 철퍼덕. "아차, 미안,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 그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주먹을 휘둘러 버렸다. 그게 그만 직통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구석으로 날아가 처박힌 그의 오뚝한 콧날에서 코피 한 방울이 애처롭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뭐, 이렇게 사내 녀석이 싱거워?' "천, 천 공자……. 니, 니 녀석들……. 커 커컥." 령령은 손을 놓기는커녕 더욱 힘을 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상대를 점혈 해주며 타협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주령령 손에 걸리면 둘 중 하나였다. 살거나, 죽거나……. 비록 산다고 해도 사지육신이 멀쩡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대표적인 산 증인도 있지 않은가! "뭘 그렇게 힐끔힐끔 거리세요? 작삼 오라버니, 제 얼굴에 이상한 거라도 묻었어요?" "아니 오늘 따라 창 너머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것 같아서……. 헤헷." 홍 영감님의 손이 사마 성씨 여인의 혈도를 몇 차례 건드리자 그대로 굳고 말았다. 령령이 손을 떼고 물러섰다. "입은 열 수 있을 것이네. 그쪽 정체를 듣고 싶은데 말해줄 수 있겠나?" 뚱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그녀는 천 공자 걱정을 먼저 했다. "천 공자는 괜찮은가?" "그렇다. 멍이 좀 들고, 코피를 흘리긴 했지만, 별 이상은 없어 보이는군. 염려말고 말해보게." "좋다. 그 전에 한가지 더 선결 조건이 있다." 정말 가지가지로 한다 싶었다. 이렇게 몰려있음에도 조건을 내세울 여지가 있단 말인가! 주객전도(主客顚倒)란 말이 그대로 들어맞는 여인이었다. "반드시 우리의 청부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해라. 그럼 우리의 정체와 모든 속사정을 털어놓겠다." "흠, 우린 지금 그 어떤 청부라도 받아들일만한 상황이 아니라네. 따라서 자네들의 정체나 사정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소리로구먼. 잘 알았네. 이제 자네들의 처리 여부만 결정하면 되겠는걸. 알다시피 자네들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네. 고통이 남지 않도록 한 순간에 저승으로 보내서 뒤뜰 응달진 곳에 잘 묻어주도록 하겠다. 이름을 모르니 무명남(無名男)과 무명녀(無名女)로 묘비를 세워 매년 이날 이 시간에 정성껏 제사를 올릴 테니 아무 미련 없이 떠나길 바라네." '크큭, 그새 영감님 농기도 알게 모르게 많이 늘었네.' "잠, 잠깐 생각할 시간을 좀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우리 무환루 사람들은 매우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다네. 이제 하루를 마감하고 취하려는 귀중한 휴식 시간을 너희들처럼 정체도 알 수 없고, 버르장머리 하나 없는 부랑아들에게 낭비할 수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젠장, 그러니까 잠깐만, 잠깐만 생각할 시간을 달란 말이야! 더구나 영감은 하루종일 잘만 자던데, 이제 와서 또 자겠단 소리가 나와?" '음, 그것에 대한 해명은 내가 해줄 수 있다만,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하겠군. 뭐, 알 사람들은 다 알 사정이겠지만.' 끼이이익, 덜컥. 홍 영감님과 사마 성씨 여인이 치열한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닫혀있던 현관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오는 인영이 있었다. 걸치고있던 갈색 피풍의가 힘없이 흘러내렸다. "매염경 소저!" 그녀는 몹시 숨이 찼는지 현관문을 닫고는 그대로 등을 돌려 기댄 채 심호흡을 몰아쉬었다. 급하게 뛰어왔음에도 피풍의를 벗지 않은 탓에 소나기라도 맞은 듯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휴우, 이제 좀 살겠네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곳에 와 있었네요. 늦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매 소저는 이들을 알아요?" "아니요. 단언할 수는 없어요. 단지 짐작만 할 뿐이에요." 느닷없이 뛰어든 그녀 탓에 영감님과 사마 성씨 여인의 신경전은 멈추고 말았다. 더구나 그들의 정체를 알지도 모른다는 매 소저의 어정쩡한 언급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 입술만을 주시하게 되었다. "우선 엿보는 사람이 없어야 해요. 대문은 제가 걸어놓고 왔으니까, 불이 새나가지 않게 현관과 덧문 모두 닫아주세요. 만약 이들이 제가 생각하는 신분이 맞는다면 문제가 심각해지니까요." 즉시 홍 영감님과 정체불명의 그들을 제외한 모두가 나서서 정리했다. 남궁현 녀석도 선뜻 나서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매염경 소저는 사마 성씨 여인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다른 이들도 자연히 그녀 주변에 포진하는 자리를 잡게 되었다. "최근에 무림맹과 마황맹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었어요. 그들의 맹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듯 좌불안석(坐不安席)이더군요. 입단속을 엄중히 하는 바람에 좀처럼 그 이유를 알아낼 수가 없었어요. 단지 마황맹 쪽 상부에 있는 사람 중 하나가 저와 접선이 되는 기루에 들어가 준 덕분에 실마리 한 가닥을 얻을 수 있었어요. 술이 과하게 들어간 상대방은 딱 한 마디를 술주정으로 내뱉었어요. '도대체 이놈의 폭도는 어디 처박힌 걸까?' 그게 전부였지만, 그 한 마디로 마황맹 쪽 의문은 풀리더군요." "뭐? 어느 놈이야! 어느 빌어먹을 녀석이 감히 그런 망발을! 내 당장 달려가서 허리를 분질러버릴 테다. 누구야!" 잠자코 듣기만 하던 사마 성씨 여인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혀를 쯧쯧쯧 차던 홍 영감님이 그녀를 손가락 끝으로 톡톡 건드리자 잠잠해졌다. 단지 안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호호호, 알아서 자기 정체를 고백해 주는군요. 이 귀여운 아가씨는 말 그대로 폭도(爆刀)인 듯 하네요." "아, 그렇다면……." 제갈혜가 뭘 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거렸다. '쳇, 나도 좀 알자. 그렇게 말하면 영 모르겠거덩.' "한 번 열 받았다 하면 거칠 것 없이 대도를 휘두르며 행패를 부리는 여인이 마황맹에 딱 한 명 있습니다. 덕분에 폭도(爆刀)라는 별호가 붙어버리기도 했지요. 그녀는 마황맹 맹주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자, 소맹주의 하나뿐인 여동생입니다. 이름은 사마월향(司馬月香)입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21 10:13:18 고친날 2005-09-21 11:31:52 읽은수 7152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66)-드러나는 혈해진경의 행방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6] 드러나는 혈해진경의 행방 그녀를 둘러앉았던 사람들은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정보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인 한 명 대동하지 않고 나타나 왈가닥 행패를 부리던 그녀가 마황맹 맹주의 딸일 줄이야! 그러나, 내 의문은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그럼, 저 쪽에 찌그러져서 콕 처박혀 있는 청년은 누군가요? 저 사람도 마황맹 사람인가요?" "아마, 마황맹 사람은 아닐 거예요. 전혀 들은 바가 없는 사람인걸요. 무림맹 쪽은 마황맹보다 배는 엄중하게 입단속을 하고 있어서 확실한 정보도 없어요. 다만 맹주를 제외한 윗사람들 모두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구요. 특이할만한 정보라면 마황맹, 무림맹 양쪽의 소맹주 모두가 반 년 전부터 잠적중이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아무개를 빼다 박은 듯한 천씨 공자의 정체는 사마월향 소저로부터 직접 들을 수밖에 없겠네요." 매염경 소저와 편하게 대화하는 게 습관이 들어버린 덕분에 별 생각 없이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며 말문을 열었다. "잠깐만요. 작삼 점소이, 그 아무개란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바로 그녀의 반문을 받고 말았다. 멋쩍어진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실웃음을 흘렸다. "천운학(天雲鶴) 녀석 말이에요. 그 인간은 미소년이라기보다 미소녀에 더 가까우리 만치 여성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잖아요. 뭐, 그런 게 미소년인가? 헤헤헷, 게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향기를 흘렸던 것 같거든요. 하도 독특한 향이었기에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네요. 이 인간이 뿌린 향냄새도 비슷하더라구요." 내 말을 듣고있던 제갈혜가 반사적으로 기절해있는 천씨 공자에게 다가서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녀석의 몸을 돌려 안면을 살핀 그녀는 잠시동안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남궁현이 재빨리 다가와 제갈혜를 꽉 끌어안아 주었다. '우쒸, 이런 상황에서까지 닭살 피울래?' "닮, 닮았어요. 작삼 점소이 말대로 천운학 공자와 안면이 흡사해요. 더구나, 미약하게 풍겨 나오는 이 향기만큼은 잊을 수 없어요. 바로, 천운학 공자가 애용하던 용연향(龍涎香)이에요." "용연향(龍涎香)?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나 봐요?" 제갈혜(諸葛惠)는 천운학에 대한 악몽이 다시금 떠올랐는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남궁현(南宮炫)은 그녀를 달랜다고 정신이 없었다. 매염경(梅炎璟)소저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느라 내 질문을 미쳐 듣지 못한 듯 했다. 팽무진(彭無盡)은 한 무식 하는 인간이니 기대할 수 없고, 포연강(鮑然强)은 원래 무뚝뚝한 인간이니 응당 그러려니 했다. 종리연(鐘理戀)의 입술은 아까 전부터 샐쭉하니 튀어나온 게 단단히 토라져 있는 빛이 역력했다. '끙, 난처한걸. 이런 걸 사면초가라고 해야하는 게로군.' 정작 대답은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던 주령령(周鈴鈴)의 입에서 나왔다. "용연향(龍涎香)은 향유고래 수컷의 창자 속에 생기는 이물(異物)이 근원이 돼. 그 이물에서 향료성분을 추출하여 향수를 만드는데, 한 마리의 향유고래에서 뽑을 수 있는 용연향의 양에는 한계가 있지. 당연히 금보다 더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게 용연향이야. 금보다 더 귀한 용연향을 매일같이 쓸 수 있는 사람은 엄청난 갑부여야 하지." "그렇다면, 이 사람이 천운학 공자가 맞는……?" "본인은 아닐 거라고 보이는데. 단지 천운학 소맹주와 어느 정도의 연관성을 지닌 인간으로 보이는군." '엉? 주령령, 무림 최고의 안하무인(眼下無人) 천운학을 본 적이 있단 말이야? 어조에 확신이 담겨있잖아. 흠, 궁금해지는데. 전설적인 두 안하무인이 마주쳤다면 어떤 대재앙이 초래되었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얘긴걸.' 령령과 나의 대화를 들었는지 깊은 상념에서 깨어난 매염경 소저는 시선을 사마월향(司馬月香)에게로 돌렸다. "아무래도 사마 소저에게서 직접 해명을 들어보는 편이 낫겠군요. 과연 천씨 공자가 천운학 본인인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는지 말이에요." 하는 수 없이 홍 영감님은 사마월향의 점혈을 풀어줬다. 사마월향은 바로 대도로 보이는 짐보따리를 움켜잡으며 으르렁거려 왔다. "잘도 나를 귀찮게 했겠다!" '끙, 누가 누구를 귀찮게 했는지 좀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주객전도(主客顚倒)가 아니라 아예 적반하장(賊反荷杖)일세.' "커컥." "죽고 싶어?" 아니나 다를까 주령령이 솔선수범 나서서 사마월향의 가녀린 목을 움켜잡아 버렸다. 그녀의 귓가에 령령의 직설적인 경고가 흘러들자 그제야 포기했는지 의자를 끌어와 털썩 주저앉는 것이었다. '폭도(爆刀)고 나발이고, 풍악산 처녀 귀신 회장을 역임한 령령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로구만.' "쳇, 이렇게 무례한 꼴은 난생 처음 당해보는군. 그는 천운학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와 관계는 있다. 바로 천운학 (天雲鶴)소맹주의 남동생 천세후(天世厚) 공자니까." 좌중에 잠시 기이한 침묵이 흘렀다. 그 누구도 선뜻 나서서 침묵을 깨려들지 않았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가운데, 침묵을 깬 인간은 다름 아닌 본인이었다. 벌떡. "아이고, 아직도 얼얼하군요. 참으로 무서운 일격이었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누워있었나요? 이런 실례가! 하하하, 제가 기절을 잘 하는 체질이라서 말이지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딱 맞춰서 깨어나는 신기한 체질일세.' 넉살좋게 웃으며 사마월향 옆에 앉는 게 약간 푼수 끼가 보인다고 해야할지, 사람이 좋다고 해야할지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의 코피 자국을 본 사마월향이 얼른 손수건을 꺼내어 슥슥 닦아내었다. 그가 자리에 나타나자 사마월향의 분위기가 한 결 부드러워졌다. 여성스러워졌다고 해야할까? "사마월향 소저의 말을 들었네. 그러나, 우린 여태까지 천운학 소맹주에게 또 다른 형제가 있단 소리는 처음 듣는 얘길세." "그게 외부에는 제 존재 자체가 비밀이랍니다.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다르다고 하더군요. 한 마디로 형제는 형제지만, 남의 자식이다, 이거지요. 그 점이 맹주님의 심기를 거슬렸는지 이 날 이 때까지 격리 생활을 해왔습니다." "부친이 맹주가 아니다? 실례인 것은 알지만, 그럼 부친이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그것은 어머니도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으니 영원히 비밀이 되었다고 해야하겠군요? 날 격리 시설에 가둔 무림맹 맹주가 알려줄 리는 없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빠져 나왔는가?" "그걸 일일이 설명하자면 매우 깁니다만, 짧게 요약해드리겠습니다. 사마 소저가 절 구해줬답니다." "……." 단도직입적인 결론에 좌중은 다시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생각해봐도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마황맹과 무림맹이라면 사파, 정파의 기치를 내걸고, 대립하는 무림의 양대 최고봉이자, 앙숙관계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어떻게 마황맹의 소공녀라 할 수 있는 사마월향이 무림맹 깊은 곳에 격리되어 있던 천세후 공자의 존재를 알고 구해냈을까? "역시 사마월향 소저의 자초지종을 들어야겠군. 말해주겠는가?" "흥, 내가 개야?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게?" 그녀는 홍 영감님의 정중한 제의에 코방귀를 껴버렸다. 사면초가(四面楚歌)인 상황에서도 이러한데, 자기 안방인 마황맹에서는 얼마나 왈가닥으로 통했을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진짜 개로 만들어 줘?" "쳇, 말하면 될 거 아냐." 령령이 그녀 뒤에 서서 나지막하니 읊조리자 사마월향의 치켜올려진 눈 꼬리에서 힘이 빠져버렸다. "나도 천세후 공자에 대한걸 몰랐어. 다만 무림맹 천운학 소맹주의 여성적 미모가 장난 아니라는 소문만 들었거든. 처음에는 사마장령(司馬將靈) 오라버니에게 직접 보고싶다고 정중하게 부탁을 했었더랬지." '마황맹 소맹주 이름이 사마장령(司馬將靈)이로군. 쩝, 어찌 이름에서부터 피냄새가 줄줄줄 흐르네. 정중하게 낭패를 부렸다는 것은? 건물 몇 개는 때려부쉈다는 소리로군.' "처음에는 일언지하에 거절하던 오라버니도 결국 허락을 하고 말았어. 그러니까 정확히 일 년 전이었지. 무림맹 부근까지 올 일이 있었던 오라버니는 얌전하게 구경만 한다는 조건으로 날 데리고 왔었어." 사마월향의 오라버니, 사마장령(司馬將靈)이라는 작자도 무림맹 소맹주처럼 어지간히 호전적(好戰的) 성향의 인간인 모양이었다. 그가 일 년 전에 무림맹 근처까지 암행한 것은 어디까지나 무림맹 동향을 직접 살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의 철통같은 보호, 내지는 감시를 받으며 무림맹 근처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관이 접하고 있던 대로(大路)는 천운학 공자가 애용하는 길목이었다던가? 사마월향은 오랫동안 천운학 공자의 '소문난 미모' 를 구경하기 위해 참고 또 참았다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났음에도, 천운학 공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성질 급한 왈가닥 소공녀를 무려 사흘씩이나 기다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슬슬 열이 오르려는 찰나 그녀의 오라버니, 사마장령이 약속이 있다며 간밤에 자리를 비웠다고 한다. 폭도(爆刀) 사마월향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즉시 야행의 차림을 하고 나선 그녀는 정정당당히 월담을 했다고 한다. 길도 모르고 무작정 월하월담을 해버린 그녀는 무림맹 깊숙이 구석진 별채에서 밤하늘을 향해 낭랑하니 시를 읊고있는 한 청년을 보게 되었다. 참으로 소문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보여주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 되었다고 한다. "꽃보다 더 아름답고, 꽃보다 더 부드럽고, 꽃보다 더 향기로운 남자 중의 남자였어. 우리 마황맹에는 한결같이 무공에 미친 딱딱한 인간들만 득실거렸거든." '너도 만만치 않아.' "천세후 공자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의 딱한 처지도 알게되었지만, 당시 나로서는 별 뾰족한 수가 없었어. 새벽녘이 다다라 아쉬운 작별을 해야만 했었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장령 오라버니에게 급한 일이 생겼는지 나와 호위무사들만 동행시켜서 강제 귀환시켜 버렸구. 무황맹에 오고 나서 처음 일주일은 별 생각 없이 지냈어. 시간이 흐르고 흘렀어. 어느덧 나도 모르게 천세후 공자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게 되었지.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목욕을 할 때도! 몸을 풀 때도! 심지어 뒤간에 갔을 때조차 머릿속을 매운 생각은 오로지 하나 뿐이었어!!" "저, 사마월향 소저, 그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목소리 좀 낮춰주시겠어요? 이왕이면 목소리에 실린 내공도 빼주세요. 저희 주루에 투숙한 손님들의 단잠을 방해하는 것은 몹시 실례라구요." 나도 모르게 그녀를 제지하고 말았다. 철저하게 심신에 새겨진 점소이 봉사 정신이 발동하고 만 것이었다. 한참 흥분하고있을 때 초를 쳐버리자 사마월향 소저의 분노 어린 시선을 고스란히 받게 되었다. "안타깝군. 하도 시끄럽기에 목뼈를 부러뜨릴까 말까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 주령령의 시기 적절한 경고 덕에 사마월향은 다시 수그러들었다. 잠시 숨을 돌린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 와중에 서양으로부터 연인의 사랑에 대해 번역이 된 책자를 입수했지. 처음에는 천세후 공자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고자 심심풀이로 읽은 것이었어. 그러던 것이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들더군. 마지막 책장을 덮고는 그들의 애달픈 사랑에 공감하며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지." "책 제목이랑 내용이 뭐였는데요?" "……. 정말 넌 초치는데 일가견이 있는 점소이구나. 남이 얘기를 할 때는 끝까지 들어주는 게 예의란 말이야. 그래서는 평생 가도 애인은커녕 여자 손목 한 번 못 잡을 거다. 잘 명심해두라구." "나도 궁금하던 중이었다." "저도 궁금했어요. 책 내용을 모르고서야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도 의미가 없잖아요." 령령과 매 소저가 거의 동시에 대꾸를 해왔다. 다른 이들도 내심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서양문물을 접하기 쉬운 노릇은 아니었다. 색목인만 해도 흔하게 보이는 게 아니었다. "……." "쳇, 말하면 될 거 아냐. 적녀적남연애사(敵女敵男戀愛事)라는 다소 긴 제목이었지. 주리애라는 여인과 노미오라는 남자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야. 가장 큰 문제는 두 연인의 가문이 서로 적대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인데, 결국 연인의 희생으로 적대관계에 놓여있던 두 가문은 길고 긴 앙숙 관계를 청산하고 사이좋게 지냈다고 하지. 정말 공감이 갈 수밖에 없는 글이었어. 천세후 공자와 내가 속한 두 가문도 엄청난 앙숙 관계니까. 난 책장을 덮고 나서야 망설이고, 망설이던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됐어. 천세후 공자를 향한 내 사랑을 꽃피우고 말겠다는 절대절명의 결의!!" "목소리 크다. 날 갈등 때리게 하지 마라." 역시 주령령,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후후훗, 사마월향, 령령한테 밉보였구나. 이제 니 고생길이 훤하게 보인다. 훤하게 보여.'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22 11:22:02 고친날 2006-01-27 10:13:16 읽은수 6821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67)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7] "……. 보시다시피 요 반년동안 사마장령 오라버니와 무림맹 소맹주는 두문불출 중이지. 내 심부름꾼을 통해서 천세후 공자와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야. 공교롭게도 우리 오라버니가 익히는 무공과 무림맹 소맹주가 익히는 무공 계통이 같다는 것도 알아냈어. 반년 전에 무림 전체를 진동시켰던 것이기도 해." "혈해진경(血海眞經)!" 모두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소리를 모았다. 모두가 은연중에 잊어갔으면서 내심 은연중에 골머리 앓았을 전대기인의 무공비급! '큭, 난 왜 이리 아랫배가 아프지?' "어이, 여자, 쟤네 들 목소리도 더럽게 크잖아. 목 안 따도 돼?" "니 목 먼저 따고 생각해보지." "쳇." 사마월향 소저의 대도 짐꾸러미를 보자 혈해진경과 관련해서 마음에 걸리는 인간이 하나 떠올랐다. 개방의 잠룡(潛龍)이라 불리는 소방(蘇芳)을 대도 하나로 몰아붙인 가짜 수라삼살(修羅三殺) 중 도살(刀殺)이었던 녀석! "사마월향 소저, 혹시 오라버님이 도객으로 이름이 높은 사람인가요?" "오호, 넌 뭘 좀 아는구나. 그럼, 사마장령(司馬將靈) 오라버니는 어엿한 구룡(九龍) 중의 일인이라고. 마룡(魔龍)이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도객이지." "혹시 반년 전에 서안이나, 풍악산(風岳山)에 간다는 언질을 주지는 않았나요?" "아니, 그런 말은 없었어. 하지만, 한 해전부터 거의 마황맹에 붙어 있지 않았다고. 은근히 아버지의 지원도 받는 것 같던데……." "아!" 눈치 빠른 매염경 소저와 제갈혜가 나지막한 탄성을 내뱉었다. 이로써 가짜 수라삼살 행세를 했던 세 명 중 한 명의 정체가 드러난 듯 했다. '나머지 두 명 중 혈살 행세를 하는 녀석이 당세옥이라고 포연강이 언급했던 기억이 난다. 들어본 적은 없지만, 매 소저라면 알지도 모르지. 나중에 기회 나면 물어보지, 뭐.' "험험, 이야기가 많이 샜군. 중대한 결심에 대해서 더 듣고 싶어지는구만." 좌중의 신경이 혈해진경으로 기울자 홍 영감이 나서서 환기를 시켜주었다. 적어도 혈해진경 한 쪼가리가 영감님 손에 있는 게 걸렸던 모양이다. "뭐, 특별하달 것도 없어. 단지 두 집안의 화합을 위해서 두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부분이 맘에 안 들었어." 주변에 몰린 인간들이 혈해진경에만 신경을 기울이자 화제를 이끌어 가는 주체로써 맥이 빠진 듯 했다. 약간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폭도(爆刀) 사마월향 소저의 결의라면 간단한 것은 아닐 거예요. 정말 궁금해지는데요." "하하하, 너 아주 꽉 막힌 녀석은 아니구나. 정말 별 것 아냐. 적녀적남연애사를 읽으면서 한가지 느낀 바가 있어서 실천해보려는 것뿐이라고." 기고만장 팔짱을 끼며 단번에 웃음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녀를 보니 무척이나 단순 무식해 보였다. 수줍은 듯 말문을 닫고있는 천세후를 놓고 봤을 때, 대단히 비 이상적인 연인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서로 뒤바꼈군. 아무리 세상 말세라지만, 좀 심각한 것 아냐? 뭐, 스스로를 여인으로 인식하는 남자도 있다고 듣긴 했는데, 설마…….' "호호호, 뜸을 잘 들이시네요. 어떤 결의를 하셨는지 정말 궁금한 걸요." 이제 매 소저도 패도 사마월향의 성격에 대해서 차츰 간파해가기 시작한 듯 했다. 붕 띄워주면 콧대가 높아져서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지어서 털어놓을 녀석이었던 것이다. 쾅! 기어이 식탁을 두 손으로 내려치며 벌떡 일어선 사마월향이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다. "간단해! 천세후 공자와 내가 맺어져서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백년해로(百年偕老)하기 위해서는, 오직 한가지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마황맹, 무림맹 두 가문을 희생시키면 되는 거야! 그들이 희생되어야만, 우리의 사랑이 화사하고, 굳건하게 꽃필 수 있단 말이야!!" "……." 이번에도 좌중은 할 말을 잃었다. 아무리 마황맹 맹주조차 두 손, 두 발 다 든 속수무책(束手無策) 왈가닥이라지만,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무림의 양대 최고봉을 무슨 수로 희생시키겠다는 말인가! '축하해. 너야말로 진정한 의미로 빛 좋은 개살구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너만의 세계를 훌륭하게 구축했구나. 훌륭해. 정말 훌륭해.' "아차, 너무 흥분해서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네." 령령을 의식한 그녀는 슬그머니 고개를 힐끔 돌렸다. 그러나, 주령령은 사마월향의 목을 조르지 않았다. 단지 엄청난 바보 하나를 봤다는 듯한 시선으로 거리를 두고 있을 따름이었다. "투숙객들은 모두 수혈을 집혔다. 니가 아무리 떠들어도 세상 모르게 자고 있을 거다." "뭐! 그럼, 왜 자꾸 날 협박한 거야!" "여긴 마황맹이 아니야. 네 안방이 아니라, 내 안방이다. 남의 집에서 갖춰야 할 기본 예의를 가르쳐준 것이다. 이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너 같은 바보가 기본 예의에 대한 소양을 갖췄을 리가 없지." "……." '오호, 통렬한 일격인데, 오늘 밤 따라 주령령이 말을 많이 하네. 혹시 남궁현 때문인가? 남궁현이 제갈혜만 신경 쓰니까 은근히 열 받았는지도 모르겠군. 상대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했던 사마월향이 멋모르고 날뛰다가 희생양이 된 것이로군. 크크.' 모두 얼척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으나, 홍 영감님만큼은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오히려 핵심을 찔러오는 진중한 관심까지 보이고 있었다. "흠, 마황맹에서 소공녀로 군.림.하.는 사마월향 소저라면, 누구보다 그들의 힘을 잘 알 것이네. 마황맹도 벅찬 판국에 무림맹까지 어떻게 무너뜨리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말해줄 수 있겠는가?" "물론! 여기까지 내가 여기까지 말한 이상, 당신들 모두 한 배를 탄 셈이니 당연히 알 권리도 있지." '어이, 어이, 나까지 태우지 마. 난 그 배에 절대로 타지 않을 거야. 설사 타더라도 기회를 봐서 뛰어내릴 거라구.' 콧대가 높아질 때로 높아져 어깨를 으쓱거린 그녀는 자랑하듯 언급했다. "마황맹과 대등한 무력 세력은 오직 하나 뿐이야. 바로 무림맹이지. 이 둘의 주력을 끌어내서 서로 붙여주기만 하면 만사형통(萬事亨通)이란 말씀." "허허허허허허허!" 느닷없이 홍 영감님이 실성한 사람처럼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항시 꾸벅꾸벅 졸기만 하고, 눈을 뜨고 있는 때조차도 엄숙한 분위기로만 일관하던 그였기에 더욱 뜻밖이었다.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광소를 터뜨리던 홍 영감님은 시작하던 때처럼 갑자기 웃음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사마월향을 꾸짖듯 정문일침(頂門一鍼) 한 마디를 가했다. "이독제독(痢霽)이라 이건가? 언뜻 듣기엔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군. 필시 한 산에 두 마리 호랑이가 공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외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제왕의 상을 타고난 자존심 때문에 반드시 끝장을 봐야하니 말일세. 그렇기 때문에 두 호랑이는 서로의 영역을 건너지 않고 견제만 하게 되지. 자신의 우세가 절대적으로 점쳐지지 않는 한, 그 형세는 계속 유지되기 마련, 지금의 마황맹과 무림맹이 그러하네. 그 평형을 깨기란 감나무 아래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요원한 일인 것일세." "흥, 구더기 무서워서 장도 못 담글 영감이로군. 걱정할 것 없어. 평형은 이미 깨졌어. 저 여자가 이미 말했잖아. 마황맹, 무림맹 모두 난리 났다구. 지금은 단지 조무래기들 몇몇이 여기저기 퍼져서 우리를 찾는 정도일 테지만, 조만 간에 우리 오라버니랑 무림맹 소맹주가 출관을 할거야. 그날 그들은 엄청난 분노에 사로잡혀 주력을 이끌고 맹을 뛰쳐나오게 될걸. 내 명예를 걸고 장담할 수 있어." '문제는 니 명예 쪽에는 별로 신뢰가 안 간다는 거겠지.' 홍 영감님의 지적에 또박또박 말대꾸를 해오는 사마월향의 자신감 어린 단정을 보니 필시 무슨 수작을 부려놓은 듯한 어투였다. '단순무식 왈가닥치고는 제법 하는 모양인데.' "어째서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가?" "그야, 우리 오라버니와 나만 아는 비밀 장소에 서신 하나를 남겨놨거든. 사마장령 오라버니는 아버지와 달리 날 정말 애지중지 해줘. 출관을 깨는 날, 서신을 보고, 내 가출을 알면 달려오지 않을 수 없지. 천운학 소맹주도 경우는 좀 다르지만,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으니까 반드시 올 거야. 천 공자로부터 용연향이 나지? 그를 무림맹 은거지에서 탈출시키면서 천운학 소맹주의 방도 잠깐 들어가 봤거든. 거기서 용연향이 담긴 병을 모조리 쓸어왔어. 그 자리에는 천 공자를 내가 납치했다는 서신을 대신 남겨놨지. 쓸어온 용연향 대부분은 안뜰 연못에다가 부어버렸고, 병도 연못 속에다가 쳐 넣었어. 몇 병은 천세후 공자가 쓸 수 있도록 챙겨왔고. 천운학 소맹주라는 사람, 더럽게 자존심이 강하다던데, 그런 꼴을 당하고서 가만히 있겠어? 제일 중요한 점은 둘 다 상대가 혈해진경을 익혔다는 사실을 몰라. 당연히 출관할 때는 절대적인 자신감에 젖어있을 게 뻔해." '응? 단순무식 왈가닥치고는 꽤나 치밀하게 움직였는데.' "그들이 동시에 출관하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물론 동시에 출관할 리는 없지. 하지만, 마황맹에는 나의 측근이 있고, 무림맹에는 천세후 공자의 측근이 있어. 나머지 한쪽이 출관할 때까지 숨어 있다가 둘 다 출관하게 되면 우리의 흔적을 흘려서 따라붙게 만들 거야. 최종적으로는 우리를 쫓다가 정면충돌하게 만들 거라구." "사마월향 소저는 오라버니 사마장령을 위기로 내몰 생각인가보지?" "흥, 천만에. 우리 오라버니는 절정의 도객이라구. 그깟 무림맹 소맹주 녀석에게 질리 없어."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군. 그러니까, 이런 계획에 찬성을 했겠지.' "그럼, 우리에게 하려던 청부는 무엇이었나?" "뻔하잖아. 마황맹과 무림맹의 선발대로부터 우리를 호위하면서 그들의 추적을 따돌리는 게 당신들의 일이 될 거야. 일전에 무림맹 일부 세력이 강남표국을 치기 위해 움직이는 동정을 포착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었지. 그 보고 속에 당신들에 대한 내용도 곁들여져 있었어. 꽤 뛰어난 추혼대였는데, 살아서 보고한 놈은 딱 한 녀석뿐이었다구. 그만큼 강력한 무력끼리 충돌한 엄중한 싸움터였단 소리겠지. 정확히는 사파도 아니면서 무림맹과 대립하는 세력이라는 점도 무척이나 매력적이더군. 이제 보니 정보력도 만만찮은 편인걸. 어때? 당신들 입장에서도 구미가 당기는 얘기일 거야. 어차피 언젠가는 무림맹과 충돌할 생각 아니었어?" 홍 영감님은 이마에 손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천세후 공자는 흥미롭다는 듯 미약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소리장도(笑裏藏刀), 바로 네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사마월향 소저가 실천하고 계획한 일들 모두가 실제로는 네 녀석 머리에서 나온 것 아니냐?" "무슨!" 홍 영감님의 뜻밖의 지적에 반박하려던 사마월향은 천세후 공자가 그녀를 제지하자 못 이기는 척 주저앉으며 고개를 휙 틀어버렸다. "이런, 사마 소저가 어설펐나 보군요. 맞습니다. 그래도 마황맹과 무림맹 둘 다 희생시키겠다는 것만큼은 사마 소저 의지랍니다. 전 단지 약간 거들고 있는 중일 뿐입니다."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속에 칼이 있다라는 말처럼 천세후 공자의 비릿한 미소가 정말 날카롭게 느껴졌다. '안면에 병기가 완연하고 실없이 웃길 잘 하기에 미더운 놈인 줄로만 알았더니 꼭 그렇지도 않네.' 갑자기 홍 영감님의 손이 허공에 무수한 잔영을 남겼다. 두 연인은 기습적인 공격을 받아 굳어버리고 말았다. "얘긴 잘 들었네만, 그 청부를 받을 생각은 없네.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해 마황맹과 무림맹 양쪽에서 압사 당할 수는 없는 노릇, 승산 없는 일에 껴들어 무리하고 싶은 생각 따위는 애초부터 안중에 없었지." 종리연이 언제 준비했는지 밧줄을 꺼내어 그들의 손과 발을 결박해버렸다. 이어서 포연강이 그들을 번쩍 들어올려서 양어깨에 하나씩 걸쳤다. 성큼성큼 술창고가 있는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니 그들이 어디에 갇히게 될지는 안 봐도 상상이 되었다. "타초경사(打草驚蛇)에 조호리산(調虎離山), 차도살인(借刀殺人)을 이용한 연환지계(連環之計)라! 천세후 공자도 만만한 이는 아니로군. 그동안 치러왔던 청부가 이런 월척을 낚게 할 줄은 몰랐네. 아니, 낚싯대를 망가뜨리는 뱀장어일지도 모르지. 어떤 면으로 보나, 외줄 타기 곡예 같은 모험일세. 앞으로 갈 수는 있어도 뒤로 갈 수는 없지. 금선탈각(金蟬脫殼)으로 위기를 모면하지 못하면, 남는 것은 괴멸뿐. 좀 더 생각해보세. 한 번 생각할 일, 열 번 생각하면 좋은 복안이 나올 수도 있는 법." 언제나 느끼는 것이었지만, 갑론을박이 있고 난 후 종합적인 요약정리는 홍 영감님이 도맡아 해주고 있었다. 설사 중간에 들어와 전반적인 내용을 모른다해도 영감님의 결론을 듣게 된다면 쏙쏙 잘 이해될 정도였다. '그래도 너무 심한 축약은 피해주세요. 머리 아파요. 영감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23 12:26:50 고친날 2005-09-23 18:20:41 읽은수 7057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68)-소방의 죽음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8] 소방의 죽음 뜻밖의 방문자이자 황당한 두 연인을 지하 연무장에 감금시키는 것으로 일단락을 맺었다. 기이하게도 그들의 감시를 주령령이 자처하고 나서더니 잠자리마저 지하 연무장으로 옮겨 버렸다. '령령한테 딱이군. 항시 어두컴컴하니 심심할 때마다 귀신 놀음을 하며 갖고 놀기 좋겠구만.' 점혈을 하면 반시진마다 피가 통하도록 풀어줘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결박과 재갈로 대체되었다. 밥은 아침 한끼와 저녁 한끼만 제공되었다. 그것도 령령의 감시 하에 종리연이 퍼 먹여주는 방식이었으니 제대로 넘어갈지 의문이었다. '뭐, 잘들 먹겠지. 천세후란 녀석은 천성이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듯한 녀석이고, 사마월향이란 애도 화끈한 성격만큼 털털하니 령령이 아무리 겁을 줘도 그때뿐일걸.' 뒤간 대용으로는 난감하게도 요강 하나만이 달랑 배치되었다. 그들이 뒤간을 원할 때도 종리연의 손길을 거쳐 바지춤을 풀어야 했으니 오죽이나 창피하고 불편했을까? 그것도 주령령이 지켜보는 앞에서 말이다. '뭐,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 무환루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로 멋대로 몰아붙인 인간들이리만큼 감시도 엄중해야겠지. 워낙 귀하신 몸들이니까.'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이 있건 없건 령령과의 수련이 그곳에서 그대로 이어졌던 것이다. 퍼퍼퍼퍽, 퍽, 퍽퍽. 언제나처럼 령령의 손길은 매섭고 한 점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몰입도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날 향해 날린 각이 빗나가 사마월향과 천세후 사이에 꽂혀버릴 정도였겠는가? 그녀의 맨발바닥이 돌벽에서 떨어진 순간 부셔진 돌조각들이 그들의 어깨 위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두 손과 두 발을 결박당한 것도 모자라 재갈까지 물려진 그들이 항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더욱이 상대는 령령이었다. '쩝, 이거 무지 미안한걸. 본의 아니게 간접적으로 죽일 뻔했잖아.' 그 이후 의도적으로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뇌려타곤을 시전했고, 종종 반격을 가해 령령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솔직히 내 코가 석 자였다. 몇 대 제대로 맞고 정신이 없어지면, 나도 본능적으로 신형을 날리기 때문에 연무장 어디로 굴러갈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슬아슬한 새벽 수련으로 그들의 선잠을 깨우곤 했다. 하루는 종리연이 먼 곳으로 심부름을 나가는 바람에 내가 그녀 대신 밥을 갖다 준 일이 있었다. 밥을 먹이기 위해 재갈을 풀어줬더니 폭도(爆刀) 사마월향(司馬月香)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오열을 하는 것이 아닌가? "으아아앙……." "왜, 왜 그러시오? 사마 소저." "엉엉, 지독한 놈들, 차라리 날 직접 패고, 지져라. 매일 아침 생지옥도 이런 생지옥이 없어. 깜깜한 허공을 가르고,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러대니 겁이 나서 간이 다 쪼그라들었잖아. 같은 편을 그렇게 인정 사정없이 팰 정도면, 우리 정도는 정말 우습게 생각할 거 아냐?" "……." 할 말이 없었다. 등뒤에 주령령이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중인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들 걱정을 하는 것은 쥐가 고양이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한심한 일이었다. 사마월향이 울먹이는 모습을 보니 여인은 여인이로구나 하는 씁쓸한 연민이 가슴 한 구석에서 피어오를……. "울지 마세요. 사마 소저, 저들이 고민에 빠진 며칠 간 이런 수모를 당하리라고 내 누차 말하지 않았습니까? 각오하고 왔던 일, 언젠가는 같은 배를 탄 동지가 될 것이 틀림없답니다. 대신 시 한 수로 그대의 슬픔을 달래드리겠습니다." "천 공자님." 소리장도(笑裏藏刀) 천세후는 즉시 지하 연무장 바닥에 나지막하니 깔리는 미성으로 시 한 수를 읊었다. 書堂來早至 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 先生乃不謁 아침 일찍 서당에 이르렀다. 방안은 모두 존귀한 사람들이네. 배우는 이 열 명이 되지 못하고 선생은 날 알아보지도 못하노라. 사마월향은 눈물을 바로 그치며 황홀하다는 듯,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었지만, 내 속은 정 반대였다. 천세후가 읊은 시가 어디서부터 흘러왔는지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삿갓을 쓴 유명한 나그네가 파격으로 읊은 유명한 한시가 아니던가! 암중에 담긴 의미 또한 신랄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여기에다가 끌어와? 그것을 듣고 황홀해하는 패도 사마월향의 단순무식이 유감 없이 그 빛을 발했다. 지적인 외모와는 영 딴판인 내면이 엿보였다. '이 놈 재갈을 풀지 말걸. 연민과 동정이 가슴 밑바닥에서 고이려다 말았다. 너희들은 정말 타고난 천생연분이다.' 그들이 온지 닷새가 되는 날이었다. 전날 저녁부터 하늘을 뒤덮었던 우중충한 구름들 덕분에 밤새 별 하나 구경할 수가 없었다. 아침이 지난 지금에는 숫제 세상을 시꺼멓게 뒤덮고 있었다. 드디어 머릿수가 한가득 모인 구름 떼가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내리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자연 손님 발길도 뚝 끊겨 현관에 우두커니 기대앉아 있는 게 오늘의 일이었다. 후두두두둑. "간만에 보는 비네요. 비가 넉넉하게 쏟아지는 것을 보니 올 봄 가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요. 작삼 공자님." "어? 적월 소저 언제 왔어요?" "방금요.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세요? 애인 생각에라도 빠진 거예요?" 적월 소저가 한 말이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오래 전 망아루에서 비가 후줄근하게 내리던 날의 회상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단지 애인이 아닌 친구에 대한 회상이었다. "애인? 나한테 그런 게 있을 리가……." "그럼, 교옥정 언니는 누구예요? 조만 간에 혼인도 한다면서요?" "그야, 뭐, 헤헤헷, 그렇게 됐습니다." 냉월화 누님으로부터 들은 자수정 목걸이 사연은 지금 생각해도 묘한 체험이었다. 내심 교옥정 누님이 내 여자가 됐으면 하는 생각을 안 한 바는 아니었으나,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오히려 꿈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녀와 혼인을 해서 비밀 분타, 더 나아가 월녀궁의 일원이 될 날이 은근히 기다려진다. 그 순간이야말로 주령령과의 귀찮은 새벽 수련과 더불어 수라사살의 멍에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될 테니까……. "킁킁킁, 이 무슨 코가 썩는 듯한 냄새야?" 현관을 타고 은근슬쩍 흘러드는 기이한 악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덕누덕 기운 옷을 걸친 중년 거지 한 명이 쪽박을 들고 들어서는 중이었다. '지, 지독하다. 일찍이 악취삼흉(惡臭四凶)에 비견되는 놈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장담했었는데, 오늘에서야 나의 식견이 좁았음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는구나.' "이보게, 점소이 양반, 더도 덜도 말고 이 쪽박의 반만 채워주게. 그럼, 내 그 마음을 어여삐 여겨 조용히 지나가겠네." '얼씨구, 좋게 말해도 줄까 말까 하는 판국에 공갈, 협박을 해오네 그려.' 스르릉, 챙. 그의 몰골을 가만히 주시하던 적월 소저가 바로 검을 뽑아들어 거지의 목젖을 겨누었다. "어디서 감히 행패를 부리려 드느냐! 그 자리에서 한 발만 더 내딛으면, 가차없이 목을 베겠다. 좋게 말로 할 때 썩 사라져라! " "허허, 이런, 이런, 얼굴은 예쁘장한 소저가 말투는 사갈 마녀로세. 지나가는 불쌍한 거지 적선해주는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人之常情)이거늘 반대로 베겠다? 흐흐흐, 벨 테면 베라. 내 피가 흐른 주루는 앞으로 십 년 간 재수가 없을 테고, 빚만 잔뜩 진 채 홀라당 말아먹을 것이다." "뭣이!" 잔뜩 흥분한 적월 소저의 검이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지려는 찰나 재빠르게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적월 소저, 진정하세요." "아, 이런 추태가……. 죄송합니다." 안면이 벌게진 채 흥분을 감추지 못한 적월 소저는 그대로 검을 거둬들여 검집에 꽂아 넣었다. 단지 눈빛만으로도 거지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좋소. 거지 양반, 거기 그대로 서 계시오. 내 밥과 반찬을 넉넉히 가져다 담아줄 테니, 섣부른 거동은 하지 말길 바라겠소." "오호, 말이 통하는 점소이로군. 그래, 어서 가져오게. 난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 하루 종일 죽치고 이 곳에 있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네." 속에서 부글부글 끓었지만, 눈길을 돌렸다가 비단 이곳에만 거지가 들어온 게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거리 곳곳마다 거지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주방 녹 누님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밥과 반찬을 덜어와 거지의 쪽박에 퍼주었다. 그러나, 중년 거지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쪽박의 밥이 아니라 주루 내부의 손님들이었다. 현관에서 내부를 충분히 구경한 거지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누군가를 찾고있었군. 필시 개방 녀석들이다. 별다른 매듭이 없는 보통 거지로 위장하고 있지만, 적월의 검봉 앞에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걸 보니 고수가 틀림없다. 혹시 무림맹에서 천세후 공자를 찾으려고 보낸 것일까?' 주방에 가는 척, 홍 영감님이 졸고 있는 계산대를 스쳐지나가며 한 마디 중얼거렸다. 여전히 꾸벅꾸벅 거리는 영감님이었으나, 반쯤 깨어있다는 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었다. "난데없이 거지들이 득시글거리는데요. 비가 오는 데도 아랑곳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네요." 내가 말하지 않는다고 모를 영감님은 아니었으나, 조바심에 한 마디 흘리고 다시 현관으로 되돌아왔다. 중년 거지가 사라졌음에도 지독한 악취의 여운이 현관을 맴돌고 있었다. "찾았다! 이쪽이다!" 우루루루루루. 고함 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거지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소리가 들린 한 방향을 향해 일제히 신형을 날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들이 찾는 게 천세후 녀석이 아닌 모양이었다. "보통 거지가 아니었군요. 설마 저들이 말로만 듣던 개방 사람들?" "아마 맞을걸요. 누굴 찾기에 파리 떼처럼 왱왱거리면서 몰려다니는지 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들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항주 전체를 떼로 누비며 썩은 악취를 흘리는 게 장관이었다. '다만 눈살 찌푸려지는 장관이지.' 비 때문에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진 상황에 거지 떼가 거리거리 난입하자 호기심에 고개를 내미는 시선들도 이곳저곳에서 보였다. 휘리리릭. 순간 빗속을 가로지르는 왜소한 인영 하나가 거지 떼가 몰린 골목에서 솟구쳐 올랐다.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으아아악!" 아주 찰나였지만, 내 쪽을 힐끔 돌아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가에서 섬뜩한 섬광이 번뜩였다. 아주 짧은 한 순간에 불과했지만, 매우 강렬한 인상을 심어놓은 인영은 그대로 종적을 감춰버렸다. "저 쪽으로 도망갔다. 잡아라!" 우루루루루루. 다시 대열을 모은 거지 떼들이 그 뒤를 이었다. 궁금한 마음에 비를 맞으면서도 비명이 들렸던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큭, 이런! 무슨 일이야. 도대체.' 십 여명의 거지들이 길가에 버려진 거적때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나마 꿈틀거리는 녀석들은 숨이라도 붙어 있었을 것이다. 조금의 미동도 없는 녀석들 주변으로 핏빛 파동이 빗물을 타고 번지는 것을 보니 가망이 없거나,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닌 듯 했다. '도주를 하면서도 순식간에 인명살상을 하다니 무서운 놈, 그것도 냄새나는 거지 떼에게 쫓기는 입장이라니 묘하구만. 뭐, 지독한 악취 때문에라도 잡히고 싶지 않을걸.' 멀리서 새로운 거지 떼가 뒷수습을 하기 위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조금의 불똥이라도 튈지 모르는 일이라 귀찮은 생각이 들어 그 자리를 벗어났……. "이크! 적, 적월 소저?" "아, 죄송해요. 저도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살짝 뒤따라왔었어요." "휴우, 간 떨어질 뻔했잖아요. 일단 이 자리부터 벗어납시다." 다시 무환루로 돌아와 현관 문턱에 기대어 앉았다. 한동안 두런두런 얘기 상대가 되었던 적월 소저는 시간이 흐르자 작별 인사를 남기고는 후문으로 사라졌다. 처음에는 담장을 넘었던 냉월화 누님이 품위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는지 교묘히 위장된 입구를 마주보는 담장에 뚫어버렸다. 닫아놓으면 보통 담장처럼 보이지만, 잘 보면 손잡이가 보이기도 했다. '모르는 인간이 알아채면 기겁할 일이지.'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밤이 돼서도 좀처럼 그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비가 모인 하류 쪽은 홍수가 염려될 정도였다. 번쩍, 우르릉 쾅쾅! 일순간 까맣게 덮여있던 세상이 하얗게 빛났다. 번개가 번쩍이고 나자 천둥이 천지를 울렸다. '음산한 밤이로군. 그나마 악취를 몰고 항주 거리를 휘젓던 거지 떼들이 사라져서 정말 다행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24 12:15:50 고친날 2005-09-24 12:19:11 읽은수 7218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69)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69] 우르릉, 쾅쾅! 연이어 천둥 번개가 항주를 뒤덮으며 좀처럼 떠나질 않았다. 정말로 홍수가 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으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왠지 이런 날씨가 맘에 든단 말씀이야. 내 속을 후련하게 뚫어주는 기분이 드는 게 나쁘진 않아. 손님이 없어 심심한 게 흠이지만.' 신시(申時)로 접어들어 비구름 때문에 흐린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인적이 끊어져 갔다. 더 이상 손님 받기는 글렀다고 지레짐작하던 차였다. 죽립을 쓰고, 피풍의를 걸친 인간 하나가 천천히 대문 앞을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마침내 주루 뜰로 발을 들여놓았다. '어라, 이 시간에 손님이? 별난 일이로군.' "어서 오십시오. 손님. 자 이 쪽으로 오세요." 하루 종일 손님의 발길이 뜸하게 끊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장 상석이라 할 수 있는 창가의 자리로 안내해줄 수 있었다. '흠,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나보다는 목 하나 정도 작은 손님이었네.' 그러나, 손님은 푹 눌러쓴 죽립을 좌우로 흔들더니 맨 구석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필이면 예의 그 연인들이 앉았던 자리였다. "아, 오늘 날씨가 비바람 때문에 차다는 것을 깜빡했군요. 그럼, 손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말없이 구석 자리로 사박사박 걸어가 앉은 죽립인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죽립 끝을 타고 빗물이 뚝뚝 흘러내렸으나, 벗을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최대한 상냥하게 두 손을 싹싹 비비며 말을 걸었다. "저, 손님, 어떤 요리로 갖다 드릴까요? 거의 웬만한 요리가 가능하니까, 마음에 두신 것이 있으시면 머뭇거리지 마시고 말씀해주세요." 이번에도 죽립인은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주루 일층을 두리번거리더니 그를 제외하고 유일한 손님이 앉아있는 식탁으로 눈길을 돌렸다. 식탁 위에는 따끈한 만둣국이 놓여있었다. 죽립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것을 가리켰다. "아, 만둣국 말씀이시군요. 이렇게 쌀쌀할 때는 뜨끈한 만둣국이 제격이지요. 한 그릇 갖다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기이한 손님이라고 느껴지기는 했으나, 지하 연무장에 갇혀있는 두 연인보다는 훨씬 양호해 보였다. 하기사 그들을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 집어넣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뚜벅 뚜벅 뚜벅. 주방에 있는 녹 누님에게 만둣국 하나를 주문하고 나오려니까, 현관에 네 명의 손님이 추가로 들어서고 있었다. 죽립을 쓰고 피풍의를 걸친 것이 앞선 손님과 똑같았다. '죽립과 피풍의가 최근 유행으로 자리 매김을 했나? 꽤 많은 인간들이 즐겨 입는걸.' "어서 오세요. 손님. 자리는……." 종리연이 자리를 비운 관계로 다소 낯가림이 있는 동천위가 그들을 자리로 안내하려고 뜸을 들이는 순간이었다. "필요 없다. 우리가 알아서 앉을 테니 뜨끈한 만둣국이나 내오너라." "예,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새……." 그러나, 그마저도 일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말을 맺을 수 없었다. 당황한 동천위는 안면이 달아올라서는 주방으로 쪼르르 달아나 버렸다. '손님도 손님이지만, 동천위도 점소이 체질이 아니야. 일한 지가 몇 달째인데, 아직도 낯가림을 해서야 쓰나.' 네 명의 손님들은 정말로 멋대로 앉아 버렸다. 두 명은 뒷문으로 빠지는 통로가 자리잡힌 주방 쪽에 자리를 잡았고, 다른 두 명은 현관 입구 쪽에 그대로 앉았다. 혼자 먼저 들어온 왜소한 죽립인과는 달리 죽립과 피풍의를 벗어서 빈자리에 걸어놓았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정상인다운 행동이었다. '어라, 검은 무복(武服)? 뭐하는 종자들이야?' 맞춰 입은 듯한 흑의무복를 드러낸 그들의 인상은 감옥에서 갓 나온 범죄자들처럼 험악했다. 팔목과 발목 끝을 헝겊으로 칭칭 동여맨 것을 보니 영락없는 무림인의 그것이었다. 더욱 가관은 그 다음부터였다. 쿵! 쿵! 후문 통로 쪽에서 갑자기 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퍼져왔다. 가장 덩치가 거대한 녀석이 나무바닥에 금이 갈 정도로 무거운 철퇴 두 개를 덤으로 내려놓았다. 자신의 얼굴 만한 쇠구를 의자 양옆에 두고는 손잡이 부분을 양다리에 살짝 걸치는 것이었다. 그와 자리를 같이 했기에 작은 체구가 더욱 작게만 느껴지는 흑의인은 식탁위로 십여 개의 소도를 질서정연하게 깔아놓고 있었다. 현관에 자리를 잡은 흑의인 중에 키가 훤칠하게 큰 녀석은 피풍의를 뒤져 두 개의 짤막한 봉을 꺼내들었다. 양끝을 맞춰 돌리자 조임세 소리가 철커덕 들리면서 고정이 되는 듯 했다. 말 그대로 기다란 철봉이 되고 말았다. 기다란 철봉을 어깨 위에 기대더니 한 쪽 팔을 슬그머니 그 위에 걸쳤다. 이 일행의 두목으로 보이는 녀석은 꽤나 준수한 외모를 가진 호남이었다. 여유가 넘치는지 팔짱까지 끼고는 실실 쪼개고만 있었다. 다른 놈들보다 손님다운 자세를 보였지만, 위험하기로 따지면 아마 이 중에서 제일일 듯 했다. 처음부터 만둣국을 먹고있던 손님도 요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불안감을 느꼈는지 다 먹지도 않은 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계산대에 은자 한 냥을 내팽개치듯 올려놓고는 거스름돈도 받지 않고 바삐 나가 버렸다. '쳇, 이것들이 뭘 하자는 거야? 설마 들키고 만 것인가?' 못내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한번 깊게 심호흡을 들이킨 뒤 차례차례 만둣국을 날랐다. 처음 혼자 들어온 죽립인을 비롯해 나중에 들어온 네 명의 인상파 놈들에게까지 다 돌리고 나서야 어떻게 되는 상황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흑의무복 인상파 놈들은 우리 주루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정문과 후문을 막으며 빙 둘러싸듯 배치된 정면의 교차점에는 만둣국을 천천히 음미하듯 먹고 있는 죽립인이 앉아있었던 것이다. "야아, 이거 보기보다 별미로군. 먹을 만 한데, 그래. 니들도 살벌하게만 굴지말고 어서 먹어둬." 팔짱을 끼고 실실 쪼개던 두목 같은 놈만 만둣국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으며 숟가락을 열심히 놀렸다. 나머지 인상파 녀석들은 녹 누님이 정성 들여 만든 만둣국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로지 죽립인의 식사가 마저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듯 했다. 마침내 만둣국을 깨끗하게 비운 죽립인은 마지막 입가심으로 냉수 한 잔을 들이켰다. 탄식과도 같은 한숨을 내쉰 그는 기어이 말문을 열었다. "휴우, 참으로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었다. 개방사걸(　　四乞) 너희가 날 기다려줬으니 나도 너희를 기다려주겠다. 이미 다 식었겠지만, 천천히들 들도록 해." 뜻밖에도 죽립인의 목소리는 가느다란 여인의 음성이었다. 개방사걸이란 별호를 가진 것을 보니 아무래도 개방과 연줄이 있는 놈들인 모양이었다. 단지 찜찜한 구석이 느껴졌다. '개방 소속이라기보다는 마교 아그들에게 더 가까운 것 같은데, 다른 놈들이랑 헷갈린 게 아닐까?' "오호, 이제 다 먹었나 보군. 나도 맛있게 먹었지만, 내 부하들은 엊그제 본방에서 너무 거하게 먹은 것이 아직도 소화가 안 된 모양이야.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길 바라겠네. 대신 우리 쪽은 기다려줄 필요가 없다네." "신임 방주의 성화가 그만큼 대단하다는 말인가?" "그렇게 잘 알고 있다면 얘기도 수월하겠군. 개방의 신물은 개방의 것, 좋은 말로 얘기할 때 내놓길 바라겠네." '개방의 신물? 설마 타구봉?' "싫다면?" "그럼 무력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겠지. 이미 항주 전체가 개방의 문도들로 천라지망(天羅地網)이 깔려있다. 설사 우리 손을 벗어난다 하더라도 다른 문도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게 작금 네 놈의 현실, 우리에게 타구봉을 깨끗하게 인계한다면, 네 녀석 한 목숨만은 보장해줄 수 있다." "목숨만을 붙여놓고, 걸레로 만들겠다고? 어차피 본방으로 끌려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몸이다. 이 자리에서 끝을 맺는 것도 좋겠지." '이 사람도 개방 사람이었었던 모양이군. 타구봉은 왜 갖고 나온 걸까?' 준수한 외모의 사나이는 잠시동안 미간을 일그러뜨렸다가 코웃음과 함께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 쉽게 넘겨주지는 싫다는 말이로군. 그래, 그렇게 나와야 구룡의 한 사람이라고……." 휘리익, 펄럭. "히야야아압!" 죽립인이 느닷없이 기합소리를 지르며 피풍의를 후문 쪽에 자리잡은 녀석들에게 던졌다. 선공(先攻)을 하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두목 녀석의 끝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죽립인이 저렇게 기세 등등하게 살기를 내뿜는 것을 보니, 뭔가 지독한 욕이라도 내뱉은 모양인가 보군.' 안 그래도 긴장감이 감돌던 주루 안이 순식간에 생사를 내건 싸움터로 돌변하고 말았다. '제기랄, 싸울 테면 주루 안을 난장판으로 휘젓지 말고 밖으로 나가서 싸워! 점소이라는 존재가 니 놈들 뒤치다꺼리나 하라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후문을 향해 날아가던 피풍의는 재빨리 철퇴를 들어올려 받아낸 거구에게 막혀 갈가리 찢겼다. 뒤늦게 서야 작다리가 시야를 확보하고 소도를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 시점에 죽립여인은 의자를 박차고 날아올라서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상황이었다. 치켜진 죽봉 끝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정확히 거구의 머리를 향해 내려꽂히고 있었다. "셋째, 조심해!" 키다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신형을 날려왔다. 키도 훤칠한데다가 봉까지 길어서 죽립인의 죽봉 끝을 살짝 건드리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죽봉은 거구의 머리 대신 어깨로 떨어져 내렸다. 퍼억. "으아아악!" 죽립여인이 아직 공중에 떠있는 동안, 준비를 마친 작다리의 손에서 소도 여러 개가 빗살 치듯 솟구쳐 올랐다. 공중에 떠 있는 죽립여인으로써는 피할 방도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하게 죽립을 벗어서 소도가 날아오는 방향으로 휙 던져 버렸다. 팍팍팍팍. '오옷, 대단한데, 다 막겠는걸.' 선회하며 날아든 죽립에 소도들이 박혀든 덕분에 자연스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내심 그녀의 안전에 마음놓으려는 찰나, 소도 하나가 죽립을 살짝 스치면서 그대로 여인의 안면을 향해 날아드는 게 아닌가! 챙. 다행스럽게도 재빨리 죽봉을 들어 소도를 퉁겨낸 그녀는 바닥에 사뿐히 안착했다. 길게 늘어지며 흩날리는 새까만 머릿결이 무척이나 인상깊……. 철렁. '뭐, 뭐지? 왜 가슴이? 처음 보는 여인이 분명한데, 왜 가슴이 철렁거리는 걸까?' 잠시 스치듯 본 안면이었지만, 꽉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우면서 예쁘장한 티가 났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라 낯이 익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어디서 봤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는 점도 문제였다. 쿵! '으악, 주루 바닥에 구멍이!' 여인이 내려앉은 지점을 향해 거대한 철퇴가 날아들었다. 물찬 제비처럼 사뿐히 신형을 날리는 그녀가 멋있기는 했으나, 대신 무환루 바닥에 치명적인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우지끈 쿵쾅! 이번에는 키다리가 휘두르는 봉에 식탁이 반으로 쪼개지고 말았다. 키다리와 거구는 연이어 여인에게 공격을 퍼부었고, 작다리는 여인이 근접전에서 멀어지면 주저없이 단검과 비수를 선사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무환루 내부가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내 분신과도 같은 무환루 식탁이 쪼개지고, 의자가 박살날 때마다 개봉사걸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다. '비겁하게 남자 세 놈이 여자 한 명을 에워싸고 뭐 하는 짓거리냐? 그것도 모자라서 멀쩡한 남의 집 기물까지 파손하고 난리냐고!' 처음 보는 이들이었지만, 홀로 고군분투하는 여자 쪽을 응원하게 되었다. 함부로 남의 주루 내부를 박살내는 것도 열 받는 일이었지만,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끌리는 구석이 느껴지는 여인에게 동정표가 가는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다. 물론 눈치가 보여서 속으로만 몰래 응원 했다. '그나저나 여인의 죽봉이 참으로 특이하네. 철퇴를 받았는데도 휘어지기만 하지 박살나지는 않는단 말씀이야. 혹시 저게 타구봉인가?' 바로 그때, 계속 궁지에 몰리기만 하던 여인이 무서운 속도로 신형을 뽑아 올리며 비수를 날리려드는 작다리 앞으로 파고들었다. 퍼억, 뿌드득. 방심하고 있던 작다리는 그대로 목젖을 죽봉에 찔리면서 나가 떨어졌다. 눈빛이 흐릿해지면서 목이 살짝 돌아간 것을 보니 이미 이승 사람일 수 없었다. '쩝, 정말 손속에 인정 하나 안 두는 여인이네. 괜스레 응원했다가 된서리만 맞는 것 아닐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26 17:20:46 고친날 2005-09-26 17:20:46 읽은수 7241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70)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0] "막내야! 막내야! 대답해! 대답하라구, 크아아악! 크아아아아악! 이 자식아!" 거구 녀석이 주루가 떠나갈 듯 고함을 지르며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키다리는 오히려 침묵을 지켰으나, 입술을 부르르르 떠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다. 쿵! 콰자작! 거구가 분기를 못 참고 철퇴를 휘둘러 또 애꿎은 식탁 하나를 박살내 버렸다. 이러다가 무환루(無患褸) 살림살이를 다 때려부수는 게 아닐지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이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종자야! 오늘이 명년 네 놈의 제삿날이다!" '젠장, 니 놈이나 좀 그만 부셔. 식탁과 의자가 무슨 죄가 있다고 무차별적으로 박살내는 거야! 무환루 일등 점소이를 흥분시켜서 좋은 일 없다는 걸 도대체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오호라 나이에 비해 꽤나 동안(童顔)이다 생각했었더니 남장 여자였군. 사냥 뒤 만끽할 즐거움이 하나 더 늘었는걸. 어차피 죽을 녀석, 철저히 즐겨주겠어. 흐흐흐." 앞선 두 놈과 달리 호남 녀석은 아직도 기고만장 거드름을 피우며 상당히 음침하게 중얼중얼 거리고 있었다. 거구 녀석이 버럭버럭 소란을 피우는 통에 뭐라고 중얼거렸는지 제대로 듣지는 못 했지만, 녀석의 음흉한 미소로 미뤄볼 때, 일종의 음흉한 음모로 여겨졌다. '아무렴 무슨 상관이야. 남 일인걸. 휴우, 분명 남 일이긴 한데, 한없이 불안한 이 기분은 뭘까?' 세 명에서 한 명이 줄었지만, 여인은 조금의 여유도 얻을 수 없었다. 한 명의 죽음이 오히려 그들의 적대감과 분노를 극도로 자극시킨 듯 했다. "흐아아아압! 작다리의 손을 떠난 철퇴가 매섭게 정면 공간을 가르며 짓이겨 들었다. 여인이 그 기세에 밀려 측면으로 피하려 들면 키다리의 철봉이 그 길목을 여지없이 찔러왔다. 작다리와 키다리의 호흡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게 꽤 오랫동안 합격술을 연마해온 듯 했다. 이 기세에 이미 고인이 된 작다리마저 있었다면, 죽봉 여인은 꼼짝없이 된서리를 맞았을 것이었다. '어째서 이들의 첫째이자 두목인 듯한 놈은 꿈쩍도 안 하는 걸까? 어째서?' 그 해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셋의 치열한 접전에 밀려 주루 구석에 숨어 구경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쩝, 이런 상황에서도 맘놓고 편하게 졸 수 있는 홍 영감님께 존경심을 품지 않을 수 없구만요. 다음에 틈나면 한 수 가르쳐 주시구려. 엉?' 현관입구에 앉아 계속 거드름이나 피우고 있어야 할 개방사걸(　　四乞) 첫째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지루해서 화장실에라도 간 것일까?' 별 생각 없이 아직도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는 세 남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개방사걸 첫째 호남 녀석이 어느새 여인의 배후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식탁의 그림자와 그림자 속을 물 흐르듯 매끄럽게 동화되어 이동하는 것이 높은 수준의 은신술과 추종술을 익힌 듯 했다. 하마터면 예의 주시하고 있는 나마저도 깜빡 속아넘어갈 지경이었다. 하물며 한참 전투에 정신이 팔려있는 여인이 알 리 만무했다. '죽봉 여인이 위험해! 어디선가 본 듯 만 듯 하긴 해도 명백히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인간이다. 섣불리 개입했다가는 주령령의 타박이나 받을 게 분명하지만, 그렇지만!' 더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 시점을 기해 작다리와 키다리의 공세가 일격필살기 난무로 이어지고 있었다. 방어를 무시하고는 오로지 공격 일변도로만 주력한 것이었다. 당연히 죽봉 여인의 입장에서는 약간 버거워졌어도 상대의 빈틈이 여기저기 보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기회가 생긴 것으로 여긴 그녀는 반격에 나섰다. 전면을 막아서고 있던 작다리의 격한 공세로 틈이 벌어졌던 것이었다. 죽봉 여인의 신형이 서슴없이 작다리의 몸 안쪽을 파고들었다. 녀석의 거구를 방패삼아 키다리의 공세로부터 벗어나면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일석이조(一石二鳥)의 꿩먹고 알 먹기를 노렸을 터였다. 퍼어억. "끄아아아악!"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거구의 턱을 제대로 날려버렸다. 보아하니 턱뼈가 완전히 박살난 듯 했다. '제길, 아무리 생각해도 저 년 또한 꽤나 겁나는 과거를 지닌 것 같구만. 이거 도와줘야 해? 말아야 해?' 그러나, 거구는 바로 쓰러지지 않았다. 일그러진 턱이었지만, 순간적으로 피식 미소를 지어 보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거구는 그대로 철퇴를 손에서 놓고는 죽봉 여인을 덥석 끌어안아 버렸다. 녀석이 실신 내지는 사망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그녀는 거구를 방패로 삼고자 바짝 붙어있었다. 덕분에 그대로 거구의 우악스런 팔뚝에 붙잡히고 말았다. 뒤이어 키다리의 철봉이 쇄도해왔다. 쉬쉭 쉬쉬쉭, 탕탕 탕탕탕. 그녀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면서도 침착하게 죽봉이 들린 자유로운 팔로 키다리의 공세를 저지하고 있었다. 안면이 벌게진 것을 보니 거구의 억센 팔 힘에 숨이 막힌 듯 했다. "하하하하! 셋째야 잘 했다. 결단코 막내와 너의 공을 잊지 않으마!" 첫째 호남 녀석이 승리를 확신했는지 여인의 등을 향해 솟구쳐 오르며 탄성을 질렀다. 어느새 녀석의 주먹에 철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그제야 죽봉 여인도 덫에 걸렸음을 느낀 듯 했다. 거구의 품에서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는 게 보였다. 그러나, 거구 또한 작다리 녀석과 마찬가지로 이승 사람이 아닌 듯 했다. 최후의 숨결 한 모금까지 짜내어 팔뚝을 조이는데 쓴 모양이었다. 격분해있는 키다리의 공세는 그녀에게 숨 쉴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대로 지켜만 볼 것인가 주저하다가 웬 일인지 날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의 또랑또랑한 눈빛에는 무수한 감정들이 배어 나왔다. 그리움, 슬픔, 아쉬움, 좌절, 그리고 마지막에 떠오른 것은 씁쓸한 미소…….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텅 비었다. 그녀를 놓칠 수 없다는 본능이 잠들어 있던 내력을 일깨운 듯 했다. 전신에서 청아하면서도 힘찬 힘줄기가 퍼져 나왔다. 본능이 이끄는 바대로 호남 녀석을 향해 날아들었다. 평상시에는 더럽게 말을 듣지 않던 봉조신법(鳳鳥身法)이 자연스레 발현돼버렸다. 휘리리릭. "뭐야? 이 녀석이? 비켜!" 퍼억. 녀석의 주먹이 내 가슴에 작렬해 버렸다. 상대의 속도에 내 속도가 더해져 버렸기에 피할 겨를이 없었다. 숨이 턱 막혀왔다. 그대로 나가떨어지면서 죽봉 여인의 등과 부딪히고 말았다. 그녀가 거구의 팔뚝에서 풀려난 대신에 중심을 잃고 바닥을 뒹구는 사이, 키다리의 철봉이 수많은 환영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다급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맨 손으로 환영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다가 기어이는 진짜 철봉을 낚아채 버렸다. 황당한지 기가 막힌 지 자신의 빈손만을 바라보는 그의 인중을 노리고 재빠르게 철봉을 던져 넣었다. 쉬이익. 그러나, 긴 철봉은 손에 익지 않은 탓인지 녀석을 맞추지도 못했을 뿐더러 도리어 그의 손에 쥐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젠장! 날 놀리는 거냐? 언제라도 뺏을 수 있으니까 돌려주겠다. 이 소리냐? 어디서 굴러먹다 튀어나온 놈인지 몰라도 곱게 넘어갈 생각은 말아라!" '니 놈보다 내가 더 황당하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난타되는 철봉을 향해 맨손으로 휘젓다니!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니 놈 상대는 나야!" 어느새 단호히 벌떡 일어선 그녀가 죽봉을 양손에 꽉 쥐고는 상대를 겨누었다. "작삼 오라버니, 고마워요. 이제부터 제가 상대하겠어요."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있다가 설명해 주겠어요. 지금은 이놈들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이에요." "……." 두 녀석은 약속이라도 한 듯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동시에 공격해올 거라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오른발에 몸의 체중을 실어주면서 무릎을 약간 구부렸다. 왼발을 앞으로 내딛으면서, 왼 주먹은 명치 앞에 수평으로, 오른 주먹은 살짝 돌려 어깨 위로 올렸다. 맨 손으로 싸우는 삼재권법(三才拳法) 중 선인지로(仙人指路)와 금침암도(金針暗渡)를 연이어 펼쳐 상대를 견제한 것이었다. 허구 헌 날, 주령령을 상대하며 한 대라도 덜 맞기 위해서는 삼재권법이라도 필사적으로 펼쳐야 했었다. 당연하다. 아는 게 그것 밖에는 없지 않은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몸에 완벽히 익어버린 삼재권법(三才拳法)이었다. 순간 날 힐끔 돌아본 여인의 눈가에 반짝 생기가 어렸다. 빙긋 웃는 입술로 한 마디 할 듯 하던 그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정색을 하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래, 삼재권법이 꼴사납게 보인다 이거지? 너 같은 고수에게는 아무리 우습게 보여도 나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자산이다. 하나뿐이었던 친구에게서 우여곡절로 전수 받은 나만의 필살기란 말이다!' 곧바로 상대에 대해 생각이 미쳐 시선을 돌렸으나, 상황이 또 묘하게 돌고 있었다. 둘이 같이 덤벼와도 버거울 판국에 키다리 녀석만 신형을 날려왔던 것이다. 첫째인지 하는 놈은 반대방향으로 꽁지를 빼고 있었다. 녀석답게 한 마디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도망가는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신호탄을 쏘아 올려 포위망을 굳히려는 거다. 대어를 잡는 공을 독식할 수 없는 게 아쉽지만, 임무는 임무다! 이제 각오들 해라! 목이나 길게 늘어뜨려 놓으란 말이다! 으하하하!" '정말 재수 없는 놈이네. 아까부터 동료들을 이용하기만 한 거잖아.' "대형! 어서!" 당황한 여인이 첫째 녀석을 잡고자 신형을 날렸으나, 맞바로 키다리 녀석의 방해를 받았다. 실력차가 월등함에도 상대 또한 필사적이라 쉽지 않았다. "작삼 오라버니, 그의 발목을 잠시만 잡아주세요! 부탁드려요!" '아차, 내 정신 좀 봐.' 뒤늦게 서야 놈을 향해 신형을 날……. '크흑, 이놈의 봉조신법, 정작 내 의지로 써먹으려 들면 말을 안 듣네. 아이고, 골치야.' 급한 김에 힘껏 내달렸으나, 제대로 신법을 발휘하는 놈을 따라잡을 리 만무했다. 의외로 녀석은 꽤나 두꺼워 보이는 현관문에 빗장과 자물쇠가 걸린 것을 보고 당황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보니 덧문까지 사그리 닫혀 있었다. '종리연이 안 보인다 했더니 보안유지에 들어가 있었군.' 그러나, 녀석은 침착하게도 덧문을 향해 돌진했다. 와장창! 얇은 덧문답게 그의 주먹 앞에 쉽사리 박살나 버렸다. 놈은 그대로 나가버린 것이었다. '으악! 잡았어야지. 뭐 하는 거냐!' 나 또한 부랴부랴 그가 나간 깨진 덧문으로 몸을 던져……. 빠아아악! "으아악!" 순간 이마가 깨질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수많은 별들이 눈앞에 아롱거렸다. 뭔가 둔탁하고 육중한 것에 이마를 부딪히고는 그대로 나자빠진 것이었다. 아마도 녀석이 도주하면서 돌멩이를 던졌던 모양이다. 머리통이 욱신욱신 얼얼한 게 한동안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휘리리릭. 거꾸로 깨진 덧문 바깥쪽에서 새까만 인영 하나가 날아들어왔다. 낯이 익다 싶어 골똘히 올려봤더니만, 흑경(黑鏡)이 달린 눈가리개를 쓰고, 야행의를 걸친 주령령이었다. 어깨에 축 늘어진 남자 한 명을 둘러매고 있었다. 잠시 날 내려다본 령령은 그대로 지나쳐 계산대 앞으로 갔다. 그 때까지 꾸벅꾸벅 졸고 있던 홍 영감님이 슬그머니 눈을 뜨더니만, 남자의 턱 아래로 손을 넣어 맥을 짚었다. "쯧쯧쯧,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군. 어디 보자. 두개골이 완전 박살났군. 즉사한 게 당연하지. 주변에 숨어있던 자 중에 혹시라도 산 자가 있는가?" 령령은 그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알 만했다. 깔끔하니 인정 사정없는 그녀가 뒤끝을 껄끄럽게 남겨놨을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구, 영감님, 좀 도와주시지. 왜 계속 구경만 하셨어요?" "허허허, 이 몸이 노곤 노곤한 이유도 있겠지만, 젊은 열혈남녀들이 산 강호 경험을 쌓게되는 좋은 기회를 망치기도 싫었다네. 그나저나 자네 이마는 괜찮은가?" "아니, 짱돌에 맞았는데, 괜찮으면 그게 인간이겠어요?" "보아하니 멀쩡하구먼, 멍 자국만 조금 남았을 뿐이잖은가? 보게, 자네한테 부딪힌 짱돌은 이렇게 박살났다네." "……." 그제야 나와 부딪힌 짱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나가려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그를 낚아채서 야멸치게 던져 넣은 것이리라. '그, 그렇다면, 령령! 이 년이 녀석을 던져 넣었구나!' "왜 째려보는데, 할 말 있어?" "헤헤헷, 비에 젖은 령령 아가씨의 눈빛이 심금을 울리게 하는군요, 우수 어린 눈빛이 아주 환상적이네요. 최곱니다." "……." 주령령이 고개를 약간 비틀며 지긋이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나의 본심을 꿰뚫어보기 위해 위협하는 기분이 들었다. 적어도 흑경 너머의 그녀의 눈이 어떤 감정을 띄고있을지 짐작은 갔다. "아차, 키다리 녀석은 살아있어요. 녀석한테 자초지종을 물어보면 될 거예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27 23:13:48 고친날 2005-09-27 23:13:48 읽은수 7239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7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1] 재빨리 키다리 녀석에게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개봉사걸의 목표가 되었던 그녀의 압도적인 봉술 아래 키다리 녀석이 제압 당하려는 찰나였……. 퍼어억! "어라? 또, 또 죽여버렸네." "휴우, 잘 했어요. 작삼 오라버니, 이로써 개방사걸이 모두 사라졌네요. 당분간 이 주루는 안전할 거예요. 저만 떠나고 나면, 다른 개방 녀석들도 절 따라올 거구요." 죽봉 여인은 어설프게 피식 웃어 보이고는 그대로 나가려 들었다. 그녀의 정체를 아직 모르기는 했지만, 주루의 안전을 위해 사라지겠다는 그녀를 말리기도 어려웠다. "어디로 가려는가? 우리 무환루는 자네 덕에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나 진배없게 되었네. 천하 제일의 정보통, 개방이 설마 이 정도까지 추격하고서도 갈피를 못 잡을 곳으로 보이느가? 항주 바닥은 생각보다 좁은 곳이라네. 자신이 저지른 일은 끝까지 책임을 져야만 하지.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네. 이곳에 온 목적이 있을 터, 감추는 것 없이 허심탄회하게 털어놨으면 하네." 여인의 안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게 주저하는 티가 역력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기어이 마음을 굳혔는지 침을 꿀꺽 삼키며 말문을 열었다. "전 소방(蘇芳) 오라버니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자 친동생이에요. 제가 여기까지 온 목적은 원래 한 가지 슬픈 소식을 전해드리기 위해서였어요." '소, 소방? 소방! 그렇구나!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다 했더니만, 정말 소방을 쏙 빼닮은 여인이었구나. 그래서, 낯이 익어 보였던 거야. 몰랐는걸, 이렇게 귀여운 여동생이 있었다니?' "그간, 개방 내부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무림맹을 따르는 북개방과 독자 노선을 추구하는 남개방으로 갈려서 서로 힘 겨루기를 해왔었던 거예요. 이전까지는 가까스로 그 균형이 유지되어 왔는데, 이번에 무림맹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그마저 깨지고 말았지요. 소방 오라버니는 그 와중에 그만……." 여인은 거기서 일단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듯 했다. '뜸들이기는, 궁금해 죽겠으니 어서 말해봐. 어서!' "휴우, 그만 독살(毒殺)을 당했어요." "……." 잠시동안 소방이 독살을 당했다는 말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 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아니,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거, 거짓말이지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 녀석이 얼마나 영악한 녀석인데 독살 따위를 당하겠어요? 어떤 역경에 놓여 있어도, 어떤 고수를 만나도 멀쩡히 살아남을 녀석이라구요. 그런데, 그런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려들다니……. 하, 하하하하. 정말 우습지도 않군요." 그녀 말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어색한 웃음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그 이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나지도 않았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오라버닌 자신의 죽음을 작삼 오라버니에게만큼은 비밀로 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여기까지 오고서도 망설이다가 그냥 떠나려고 했던 거구요." "쳇, 소저, 끝까지 우기기요? 어디 증거라도 있습니까?" "이젠 어쩔 수가 없네요. 이 반쪽 짜리 철봉, 오라버니의 유품이에요. 아마 저보다 작삼 오라버니가 보관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그녀가 피풍의를 뒤져 건넨 반쪽 짜리 철봉은 분명 내 철봉과 하나의 짝을 이루는 나머지 부분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두어 달의 시간동안, 장난 같으면서도 장난 같지 않은 사제지간을 유지해오게 만든 소방의 철봉, 그와 꿈같은 무공 수련에 임하게 만들었던 소방의 반쪽자리 철봉. "소방 오라버니는 한 명뿐인 친구에게 뼈아픈 상처를 남겨줬다고 탄식하곤 했어요. 그 날 이후로 시름시름 앓다시피 안색이 나빠졌구요. 살아도 산 사람이 아니었어요. 독살 당할 것을 알고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어쩌면 일부러 독살 당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오라버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부탁 한 마디를 남겼어요. 만에, 만에 하나, 작삼 오라버니를 보게되면 꼭 전해 달라는 거였어요." "……." 소방의 모습이 담긴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가 기울여졌다. 비참하게 토혈을 하며, 고통 속에서 맞이했을 그의 죽음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소방의 죽음, 그 말이 확실시되는 순간, 눈앞이 새하얘졌다. 방금 전까지 이마가 깨질 듯 아파 왔던 통증도 바람에 날리듯 단번에 사라져 버렸다. 이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어요. 저승에 가서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져서도, 억겁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평생을 참회하며 살겠노라고 전해 달랬어요." 무릎에서 힘이 스르륵 빠졌다. 털썩. 소방의 철봉을 양손에 꽉 움켜잡고는 그대로 멍청히 주저앉아 버렸다. 눈앞이 흐릿해져왔다. 양 볼을 타고 뜨끈한 게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목이 매여왔다. 넋이 나가다시피 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머릿속 생각들을 주르륵 입 밖으로 뱉어내고 말았다. "바보구나. 그딴 것 내가 가슴속에 담아놨을 것 같아? 난 단지 너만 무사히 잘 있었으면 그걸로 만족했을 거야. 네 건강한 모습을 먼발치에서 스치듯 보기만 했어도 한 번 웃고는 깨끗하게 잊어버렸을 거라고. 저승에 가서도 참회하겠다고? 멍청한 놈! 바보같은 놈! 땡추! 말미잘! 해삼! 멍게 같으니라고! 그런 것 따위 하나도 달갑지 않아. 네 놈이 날 백 번 만 번 배신하는 것보다도 달갑지 않단 말이다!" 정신병자처럼 이성을 잃고 흥분해버린 나머지 언성까지 드높이고 말았다. 한참을 내 멋대로 떠들고 나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무리 내가 소방 녀석의 죽음에 대해 격분해 봤자 그의 생환을 바랄 수는 없는 것이었다. 평상시와 다른 내 모습에 놀란 인간들이 고개들을 디밀고 있었다. 추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키득키득 실 웃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이 딴 일로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탁. 팽무진 녀석이 격전 속에서도 멀쩡하게 살아남은 식탁 위에 죽엽청 단지를 내려놓았다. "어이, 어딜 가나? 친구? 여기 앉아보게. 기분 나쁜 일, 슬픈 일이 있었을 때는 바로 툭툭 털어 내야하는 법일세. 속에 꿍 하니 담아둬서는 안 되는 거야. 내 자네 속을 이 죽엽청 단지로 말끔히 씻어주겠네." "……." 머릿속에 텅 빈 듯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울분과 함께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니 기운도 쭉 빠졌다. 거절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기에 녀석의 맞은 편에 털썩 앉았다. "내 친구에게 비보를 전해준 소저도 여기 앉으시오." 녀석이 친구라는 말을 강조하자 죽봉 여인의 안색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입술이 불룩 튀어나온 그녀도 같이 자리를 잡았다. 가벼운 바람을 타고 울금향이 밀려왔다. 소방의 동생답게 같은 향을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고 있던 종리연이 슬그머니 팽무진의 옆자리로 껴들어왔다. 그들 사이가 어떻다는 것을 잘 알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팽무진도 내심 그녀의 동석을 반기는 듯 했다. 녀석이 죽엽청 한 잔을 따라주기에 덥석 받아들었다. "숨도 쉬지 말고 한 번에 죽 들이켜야 하네. 알겠나?" 꿀꺽 꿀꺽 꿀꺽. 쓰디 쓴 죽엽청이 목구멍을 따라 단번에 넘어갔다. 뱃속에서 불이 이는 듯 했다. "허허허, 이 친구 이러다가 주정꾼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소저도 한 잔 받으시오." 안면이 살짝 달아오른 그녀는 팽무진을 지긋이 흘겨보며 잔을 받았다. 단번에 쭉 들이킨 그녀는 바로 팽무진에게 한 잔 따라줬다. 히죽 웃어 보인 그도 한번에 죽엽청을 들이켰다. "카, 시원하다. 참, 그러고 보니 통성명을 하지 않았구려. 난 장차 천하 제일인이 될…… 소지가 다분한 필살검법의 대가, 팽무진이라 하오. 실례되지 않는다면, 소저의 방명을 물어봐도 되겠소?" "아, 그러시군요. 전 소방 오라버니의 둘도 없는 혈육이자 동생인 소화(蘇華)라고 합니다. 두 분이 아신 지 꽤…… 오래되었나봐요?" '이름이 소화였구나. 좋은 이름이다. 이 여인을 보면 볼수록 소방이 떠올라. 어차피 서로 갈 길이 다른 인연, 머릿속에 담아두지 않는 게 좋겠군.' "아니오. 서로 안면이 생긴지 한 달 남짓이나 되었을 거요. 이런저런 일로 인연이 생겨 이곳에 눌러앉게 되었지요. 이 녀석을 난 친구로 생각하지만, 이 친구는 아직 거리감이 있는가 보오." '거 미안하군.' 그의 말에 소화의 또랑또랑한 눈빛에 힘이 들어갔다. 보면 볼수록 여러모로 기이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개방 녀석들에게 쫓기는 이유나 압시다. 말해줄 수 없겠소?" '녀석 기특하네. 내 가려운 데를 알아서 잘도 긁는구나. 그러고 보니 타구봉 어쩌고저쩌고 한 것 같은데.' "죄송해요. 그것을 말씀드렸다가는 공자님의 목숨을 보장드릴 수 없어요." 날 쏙 빼놓고, 둘 사이의 묘한 대화가 한참 무르익어 갈 무렵이었다. 쾅! 콰자작. 느닷없이 옆에 있던 식탁 하나가 박살나고 말았다. 팽무진이나 소화는 흠칫해서 돌아봤으나, 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자기 감정 표현에 충실할 인간이 오직 한 명밖에 없음을 잘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까만 인영이 바람처럼 내 곁을 스쳐지나갔다. 거칠게 물결쳐오는 혈향(血香)이 후각을 자극해 왔다. "주령령 소저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구만, 자네 뭐 잘못한 것 없는가?" 조금 겁을 먹은 듯한 팽무진이 식탁 위에 바짝 몸을 붙이고는 나지막하니 속삭여왔다. "뭐, 잘못 먹었냐? 내 친구가 죽은 거랑 그녀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주령령이 이유 없이 심술부리는 거 하루 이틀 봤냐?" "쉿, 자네 목소리가 너무 크네." "흥, 들으라면 들으라지. 난 잘못한 것 없어." "……." 말을 내뱉자마자 뒤통수를 향해 날카로운 살기가 와 닿았다. 누구로부터 발산되는 것인지 짐작은 했지만,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역시 잔뜩 독이 올라버린 주령령이 커다란 눈망울을 치켜 뜬 채 노려보고 있었다. 나 또한 그녀를 지긋이 노려봤다. 순간 령령의 눈동자가 미약하게나마 흔들거린 듯 했다. 그녀는 그대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의외로 시시했다. "자네, 후환이 두렵지 않은가?" "……." 팽무진의 걱정 어린 한 마디를 코웃음으로 가볍게 일축했다. 단지 그에게 빈 사발을 내밀어 보였다. 술이란 좋은 것이었다. 나에게 용기라는 선물을 안겨줬으니 말이다. 뜨악해 하는 그를 대신해 소화가 죽엽청을 따라줬다. 그녀를 향해 가볍게 머리를 끄떡여 보이고는 다시 쭉 들이켰다. 사람들이 왜 술독에 빠져 사는가 약간은 이해될 것 같았다. "방금 그 여자는 누구인가요?" 나와 령령 사이의 별 것 없는 실랑이에 신경이 쓰였는지 대놓고 호기심을 보이는 소화였다. "이곳의 실세라고나 할까? 그런 게 있소." 내가 슬며시 고개를 좌우로 저어 보이자 무슨 뜻인지 알아챈 그는 그저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봉해 버렸다. '기특한 녀석, 고맙다.' 자리에서 일어선 홍 영감님이 녹 누님과 함께 올라가다 말고, 소화를 돌아보며 한 마디 했다. "자네 덕분에 우린 생각에도 없던 청부를 맡게 되었네. 조금이라도 책임감이 있는 친구라면 이번 청부에 참가하도록 하게. 개방 뒤에 무림맹이 있다면 같은 적을 둔 셈, 피할 이유도 없을 걸세. 그리고……." 영감님은 말을 멈추더니 잠시동안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네 오빠의 친구, 작삼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 "……." '갑자기 뜬구름 잡는 소리를 다 하시네. 친구가 죽은 마당에 친구의 동생이고 나발이고 무슨 소용이 있다고.' 하나, 둘 사라진 가운데, 제갈혜를 비롯한 남궁현과 당가희가 슬며시 동석할 기미를 비췄다. 그들을 향해 한 마디 쏘아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리는 소방에 대한 회고를 하는 자리요. 단순히 술판이나 벌이자고 있는 자리가 아니란 말이요." 내 지적에 제갈혜는 잠시 소화를 향해 눈을 차분하게 내리깔고는 입술을 다물어버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마침내 생각을 정리했는지 말문을 열었다. "작삼 점소이, 한 가지 잊고 있군요. 나도 한 때 그의 친구였던 사람이에요. 동석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쳇, 맘대로 하시오. 하지만, 남궁현이 소방을 타박했던 것만큼은 잊지 않았습니다. 내 말뜻 아시겠습니까?"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28 23:38:38 고친날 2005-09-30 13:39:18 읽은수 6937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72)-세 번째 청부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남궁현 녀석이 즉시 발작을 하려들었다. 머리가 있고, 귀가 달린 자라면 자신에게 축객령이 떨어졌음을 모를 리 없었다. 의외로 제갈혜가 그를 막아섰다. 그녀가 녀석의 귓가에 대고 소곤소곤 속삭이자 잔뜩 흥분해있던 그의 얼굴이 오히려 더더욱 달아올라버렸다. 단지……. '매끄럽게 기분전환 되 버렸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잡아먹을 듯 흥분하더니만. 하여튼 남궁현을 갖고 노는 제갈혜 수완만큼은 가히 일품이다, 일품이야.' "알겠소. 천천히 오시오. 그 동안 당 매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며 기다릴 테니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말아 주시오." 제갈혜 안면도 약간 붉어져 있었다. 그저 발그레한 미소로 고개를 끄떡일 뿐이었다. 그가 올라가고 나자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 내린 그녀는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소화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소.화.동.생, 소방과 오붓이 마주 앉았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참으로 오랜만이네요." "그렇군요. 제.갈.혜.언.니, 너무 오랜만에 보네요. 저도 반가워요." '아, 둘이 초면이 아니었구나. 그런데, 왜 서로 시선을 냉랭하게 피하고 있지?' "소화 동생,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혹시 소방이 저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이 남았다던가 하는 말은 안 하던가요?" "아, 그거요. 아주 딱 부러지게 말해주던걸요. 받은 데로 돌려준 것뿐이라구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꼭, 꼭, 꼬옥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래요?" "네, 그랬어요." "정말요?" "그럼요. 그렇다니깐요." "……." "……." 두 여인은 잠시동안 실랑이를 벌이듯 서로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팽무진과 종리연도 둘 사이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만 입을 다물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작하는데 신경을 돌려버렸다. "소화 동생, 척 보니까 머리에 두건을 두르면 더 예뻐질 것 같아요. 혹시 예전에 재미 삼아 두르고 다니지 않았나요?" "아니오. 그런 적 없는데요." "옷 입는 취향도 바뀐 것 같네요. 예전에는 너덜너덜한 옷을 즐겨 입더니……." "어머, 그런 기억이 전혀 없는데요. 다른 분과 헷갈리셨나보네요." "게다가 동생 가슴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납작하네요. 잘못하면 선머슴으로 알아보겠어요. 이걸 어째요?" "흥, 예전보다 많이 커졌다구요. 그런 걱정일랑 눈곱만치도 해주실 필요가 없거든요. 언니 가슴에 넣고 다니는 솜 주머니나 빼는 게 어때요? 그렇게 허세 부리다가 남궁현 공자가 실물을 보게되면 엄청나게 실망할걸요. 허리끈도 좀 느슨하게 매세요. 그러다가 질식사하겠어요." "……." "……." 제갈혜와 난데없는 언쟁을 벌이던 소화는 줄곧 나를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내 안색을 살폈다. 눈치채고 싶지 않아도 너무 자주 그러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되 버렸다. 그러나, 그들의 뜬금 없는 논쟁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뭐라고 떠들건 말건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두 번 다시 소방과의 진한 우정을 느낄 수 없다는 슬픔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술이라도 마시면 잊을까 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군. 마시면 마실수록 너에 대한 기억은 선명해지기만 하는구나. 어째서냐? 어째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느냐? 왜? 왜!' "왜! 왜!! 왜!!!" 속에 억눌려 있던 그 한 마디를 내뱉은 나는 잔뜩 격분해서 벌떡 일어서 버렸다. 그와 함께 좌중의 소란도 일거에 소멸되었다. 매서운 시선으로 그들을 한 번 쓰윽 훑어보았다. 철퍼덕. 그리고, 기억이 끊어졌다. [72] 세 번째 청부 온 세상 천지를 뒤덮은 태반은 회색 빛 하늘이다. 희뿌연 바람이 칼바람처럼 스쳐지나간다. 바람 따라 흐르는 까만 까마귀 떼 울음소리가 처절하도록 구슬프기만 하다. 하늘 아래 뾰족하게 솟아있는 회색빛 바위산이다. 인적이라고는 나 혼자뿐이다. 정상 위에 홀로 서서 무미건조한 고독을 즐긴다. 소리가 들린다. 간곡히 애원하듯 외치는 소리가 절벽 아래에서 들려온다. 무심결에 고개를 내려본다. 절벽 끝에 힘겹게 매달려 신음하는 인간이 보인다. 소방이다. 날 철저하게 배신해버린 소방이다. 한 손을 내밀어 제발 붙잡아달라고 애원하는 소방이다. 외면한다. 받은 데로 돌려주는 거라고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 시간이 흐른다. 점점 희미해지던 그의 목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내려본다. 그가 보이지 않는다. 찢겨진 누더기 조각 하나만이 절벽 끝에 매달려 펄럭펄럭 나부낀다. 히죽 웃는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물방울이 볼을 타고 떨어진다. 그 자리로 걸어가 누더기 조각을 떼어낸다. 걸어간다. 소방을 삼켜버린 암흑의 무저갱으로 걸어간다. 다리 밑이 허전하다. 안도한다. 다시는 그 무엇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고 안도한다. 덜커덕, 덕커덕, 덜커덕. 쿠쿵. '우우웅, 아이쿠 머리야. 침상에서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 거야? 여태까지 자다가 굴러 떨어진 적은 없었는데.' 덜커덕, 덜컥덕, 덜커덕, 쿠쿵. 욱신욱신 머리를 조여오는 뼈아픈 조임에 억지로 뒤척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바닥에 머리를 들이받고는 번쩍 눈을 떠버렸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던 흔들림이 현실로 느껴졌다. 바닥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평상시 올려보던 높다란 천장이 아니었다. 숨막힐 듯 나지막하게 변해버린 묘한 천장이었다. 풍문에 지진이라는 무서운 재해가 존재한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다. 지진이라는 게 일어나면 바위가 솟구쳐 오르고, 하늘과 땅이 뒤바뀐다고 했다. '설마 지진?' 지진에 의해 무환루가 붕괴하고 내 방마저 운명을 같이한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한 의문이 들었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세우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욱신욱신 머리를 조여오는 고통 때문에 이마를 짚어야만 했다. '어라? 세상이 점점 멀어지고 있잖아?' 문명의 손길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숲길이 밑도 끝도 멀어져 가고 있었다. 싸늘한 바람이 등판을 훑으며 스쳐갔다. "아, 이제 깨어나셨군요. 아직도 안색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숙취가 덜 풀렸나 본데요." "천세후 공자?" 그의 옆에는 사마월향이 찰떡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시선을 돌려 내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그들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두두두두, 덜커덩, 두두두두두, 덜커덩. 주변 상황이 납득될 때까지 이리 두리번, 저리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마차?" 두 마리의 흑마가 거친 숨결을 내뿜으며 끌고 있는 것은 분명 마차였다. 그것도 모두 네 대씩이나 되었다. 난 그 중 세 번째 마차에 타고 있는 중이었다. 뒤쪽으로 흘끔 시선을 돌리자 마부석에 동천위와 나란히 앉아 힘껏 채찍질을 하고 있는 북천위가 보였다. 평상시 같으면 날카롭게 째려볼 인간이었으나, 오늘따라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게 봐주는 것도 같았다. '쳇, 내가 불쌍해 보이냐? 동정이라도 간다는 거냐?' 이리저리 기운 천쪼가리로 대충 얼기설기 이어져있는 마차지붕 아래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홍 영감님이 보였다. 물론 그 옆에는 녹 누님이 있었다. 날 보고 싱긋 고개를 끄떡이기에 나도 엉겁결에 고개를 끄떡여 인사했다. "여어, 일어났군. 간밤에 잠은 잘 잤나?" 내가 탄 마차를 몰고 있는 인간은 바로 팽무진이었다. 녀석의 옆에는 약방의 감초, 종리연이 앉아 있었다. "그럭저럭, 그나저나 이거 어떻게 된 일이야? 무환루는 어디 가고, 마차는 또 무엇이며, 얘네 들은 어떻게 풀려난 거야?" "귀찮을 정도로 질문이 많군. 그래도 내 친절하게 일일이 설명해줌세. 기억이 날까 모르겠네만, 결국 저들의 청부를 접수해 버렸네. 자네 옆에서 곤하게 잠들어 있는 아가씨 덕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고나 할까?" "뭐?" 그제야 내 바로 곁에 한 여인이 잠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방의 면상을 쏙 빼닮은 여인이 고양이처럼 몸을 둥글게 만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를 보자 어젯밤 일들이 주마등처럼 흐릿하게 떠올랐다. 죽립여인 소화의 등장, 개방사걸의 난입과 난동, 그리고, 소방의 죽음. '쳇, 어쩐지 새벽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재미없다 싶었지.' 그의 죽음을 생각하자 새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추하게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재빨리 손등으로 훔쳐냈다. "새벽 일찍부터 종리연이 깨우기에 나와보니 무환루 앞으로 마차 네 대가 도착해 있더군. 생각할 것도 없이 필수품만 간단히 챙기고 올라탔다네.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는 자네 때문에 소화 소저가 상당히 무리를 했지. 자네는 물론이려니와 자네 짐까지 알아서 척척 정리하던걸. 내가 하겠다고 한사코 말려도 듣지 않더군. 오라버니의 친구이리만큼 자신이 직접 거들겠다고 고집 피우기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 무환루 사람들도 그런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이 내버려두더구만." "……." 소화(蘇華)를 내려다보니 미간이 찌푸려졌다. 보면 볼수록 소방을 떠오르게 만드는 그녀가 달가워질 리 없었다. "뒤편에는 잘 보이다시피 홍 영감님과 포연강 대협, 녹 아주머님 일행이 타고 있고, 이 앞에는 남궁현과 그의 여인들이 타고있다네. 주령령도 타고 있다는 얘기지." 그 말을 마친 녀석은 의미심장하게 힐끔 돌아보았다. "그럼, 맨 앞에 앞장서가는 한 대는 뭔데?" "흑월이라는 여인과 사월이라던가? 하여간 월녀궁 사람들이 타고 있지. 무환루가 드러난 까닭에 비밀 분타도 덩달아 위험하다며 일단 흩어지더군. 다음 집합 장소로 모인다나? 그 중에 일부는 우리 청부를 돕겠다고 나서던걸. 청부를 돕는 게 곧 자기네들을 돕는 일이라나? 암중에 호휘 하는 세력까지 붙여줬다고 하더군. 아, 참, 그러고 보니 자네 흑월이라는 월녀궁 제자와 혼인 예정이라고 했지? 하하하, 미리 축하하네." '뜬구름 잡는 소리하네. 그런데, 교옥정 누님? 어째서 이번 청부에 합류했지? 위험할 텐데.' 예전에 냉월화 누님과 제갈혜가 심하게 격론을 벌였을 때, 슬며시 흘러나왔던 얘기가 떠올랐다. 월녀궁이 교옥정 누님을 무림맹 시선을 끄는 미끼로 이용했다는 지적, 어쩌면 이번에는 숫제 무환루 사람들을 이용해서 무림맹의 힘을 간접적으로 재보려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뭐, 설사 그렇다고 해도 거꾸로 이용했으면, 이용했지, 순순히 남의 장기말이 되어줄 영감님이 아닌걸.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홍 영감님의 독마(毒魔)나 혈살(血殺)로써의 진면목을 보게될지도 모르지.' "그럼, 행선지는 어떻게 되?" "몰라." "뭐?" "거 참, 모른다니까. 그렇게 궁금하면 눈앞에 있는 백면서생 공자에게 물어보도록 해." 뾰룽퉁한 시선을 천세후 공자에게로 돌렸다. 천운학이랑 닮은 외모가 무척이나 맘에 안 들었다. 무엇보다 녀석의 주위로 환하게 피어오르는 꽃동산이 장난 아니게 역겨웠다. "하하하, 다음 행선지 말이로군요. 저한테 물어보셔도 알 수가 없답니다. 어디까지나 무림맹과 마황맹 추격 상황에 따라서 그 길이 엇갈리게 마련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대처방안이 없는 것이,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전에 내가 얼결에 날린 주먹에 쭉 뻗어버렸음에도 여태까지 불평 한 마디 안 하는 그를 무조건 미워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림맹과 마황맹 추격 상황을 알아야 앞으로 가건, 뒤로 가건 할 것 아니오? 기약 없이 무조건 앞으로만 간다고 되는 일이오?" 역시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그것은 매염경 소저께서 따로 정보를 준다고 하셨습니다. 사마월향 소저 측 사람의 정보통도 믿을 만 할 겁니다. 무엇보다 저 또한 무림맹에 남겨놓은 한 수가 있으니 편히 마음 놓으셔도 될 겁니다." "……." 녀석은 내가 어떤 말을 하건 여전히 싱글벙글이다. 그 속에 뭐가 들었을지 알 수는 없지만, 태연하게 나오는 웃음은 아닐 것이다. '쩝, 일단 사과는 해야겠군.' "지난번에 미안하게 됐습니다. 그 때는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주먹을 올리고 말았습니다." "그 일이라면 제가 잘못한 바가 크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시겠습니까?" "……." 내가 마지못해 사과를 하겠다는데, 녀석은 능글능글 웃으며 정중하게 거절해 버렸다. 오히려 한 가지 요구를 하겠다고 가볍게 응수하는 게 아닌가? '이런 젠장, 똥 밟았군.' "도대체 요구할 게 뭐요? 꼭 들어줄 수는 없겠지만, 내 세이경청(洗耳敬聽)은 해드리리다. 말해보십시오." "별 것 아닙니다. 짬이 나는 통에 작삼 점소이의 신상에 대한 얘기를 잠깐 들었답니다. 특히 소방이라는 친구의 일은 안타깝게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뭐요?" "부족한 데가 많긴 하나, 저의 친구가 되어 주실 수 있겠는지요?" "……." '뭐냐? 이 녀석,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29 23:56:12 고친날 2005-12-29 19:22:37 읽은수 6818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7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3]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엉뚱한 요구였다. "싫소. 내가 공자를 모르듯, 공자 또한 나를 모를 것입니다. 억지 친구로 사귄다고 해서 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서로를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친구가 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란 소리군요. 시간이 필요하다는 좋은 지적이네요." "……." 빠직빠직. 뒷골을 울리는 녀석의 반격에 잠시 넋을 잃을 뻔했다. 꿈보다 해몽에도 한계라는 게 있는 거다. 어떻게 내 확고한 의지가 담긴 거절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좋습니다. 시간을 드리지요. 이제부터 우리 둘 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하하하하, 이런 흐뭇한 날, 시 한 수 읊지 않는다면 또 언제 읊는단 말이오." "……." 可憐楊柳傷心樹可憐桃李斷腸花 此日 遊邀美女此時歌舞入娼家 娼家美女鬱金香飛去飛來店小二傍 的的朱簾白日映娥娥玉顔紅粉粧 늘어진 버들에도 애끊는 마음이여 복사꽃도 애달파 서러운 것을. 즐거워라 이날을 젊은 아가씨, 노래하며 춤추며 때를 보내리. 울금향같이 사뭇 예쁜 아가씨, 점소이 옆을 따라 오고 가느니. 주렴엔 햇볕 눈이 부시고, 옥안엔 단장도 더욱 곱구나. "어떻습니까? 달리는 마차 안에서 듣는 시 한 수의 여유, 심신이 한결 후덕해지는 게 느껴지지 않는지요?" 녀석은 정말 시 한 수를 읊기 위해 일생의 심력을 소모했다는 듯 피곤해 하면서도 만족한 표정이었다. '자화자찬(自畵自讚)도 정도껏 해라. 인간아.' 자장가를 음미하듯 눈을 꼭 내려 감고서 세이경청(洗耳敬聽)하던 사마월향(司馬月香)의 한 마디가 내 속을 박박 긁어내렸다. "천 공자님 시는 매번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요. 끝없이 펼쳐진 메마른 사막 한 가운데, 외로이 솟아오르는 생명의 옹달샘 같아요. 정말 최고예요." 빠직빠직. '야, 어디서 한 소절 따와서 아는 척하긴, 그거 원래 점소이가 아니라, 공자가 들어가는 거잖아. 너 지금 나 약올리는 거 맞지? 그렇지!' 녀석을 상대할 때마다 혈압이 오르는 것 같아 자리를 옮겨 버렸다. 마부석 뒤쪽에 바짝 붙고는 시선을 휙 돌려버렸다.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닭살 꽂히는 시 낭송이 이어졌다. 내가 할 일이라고는 오로지 마이동풍(馬耳東風)을 주문처럼 외우며 더더욱 거리를 두는 것뿐이었다. 마차는 해가 떠있는 동안은 쉬지도 않고 종일토록 달리기만 했다. 말이 지치는 것을 감안해 잠깐씩 휴식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침을 건너뛴 일행은 점심마저도 건포로 대충 해결해야 했다. 소화도 그 때쯤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새벽 일찍부터 일어나 나와 내 짐까지 옮기느라 무척 피곤했을 것이다. '혹은 밤새도록 제갈혜와 쌓인 회포를 푸느라 잠을 안 잤을 수도 있겠지. 언뜻 보면 가볍게 실랑이를 벌이는 듯 했지만, 둘 사이에 끈끈한 정이 느껴지더구만.' "잘 잤습니까? 소화 소저." 가볍게 하품을 한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네, 정말 간만에 제대로 자보는 단잠이었어요. 그동안 개방 문도들에게 쫓기느라 숨돌릴 여유도 없었거든요. 잠은커녕 제대로 먹지도 못할 지경이었어요." "저 때문에 수고를 끼쳤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제가 누군지 아셨을 테니 이제 말을 놓으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그냥 편하게 소화 동생이라고 불러주세요."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소방 녀석과 장난으로 친구가 되었다가 진한 우정을 쌓아 버렸다지만, 녀석을 생각나게 만드는 소화 소저와 편하게 지내기란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분명 끌리는 구석도 있었지만, 거부감도 그에 만만찮게 느껴졌던 것이다. 소화는 내 다음 대답을 기다리는 양, 또랑또랑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좋다. 이제부터 편하게 소화 동생이라고 부르마." "그럼요. 저도 맘놓고 작삼 오라버니라고 부를게요. 괜찮지요?" "휴우, 맘대로 해라. 너나, 소방 녀석이나 초롱초롱 눈빛 공격이 작살이야.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 이 말이지." "……." "그나저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이번 청부에 왜 따라온 거야? 상대는 개방도 아니고, 바로 정파 제일의 최고봉 무림맹이라고, 게다가 사파의 최고봉, 마황맹까지 혹으로 붙었단 말이야. 홍 영감님이 뭐라고 하건 그냥 떠나야 했어. 자책감 때문에 그런 거야?" 소화는 배시시 웃더니 잠을 자면서 풀어놓았던 머리를 슬며시 모아 올려서 가죽끈으로 질끈 묶었다. "제가 벌인 일에 대한 자책감이요? 아주 없잖아 있지만, 그 때문에 남은 것이 아니에요." "……." "소방 오라버니로부터 작삼 오라버니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들었어요. 그 때마다 참 재미있는 사람이로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소방 오라버니는 좀처럼 타인을 믿지 않았거든요. 비정하게 이용만 당하고, 배신당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니까요. 언젠가 작삼 오라버니와 직접 여행이라도 같이 하면서 어떤 사람인가 느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때마침 넝쿨째 들어온 이 좋은 기회를 제가 마다할 리 있겠어요?" "……." 다 큰 처자가 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스스럼없이 늘어놓는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졌다. 또랑또랑한 눈망울하며, 앵두 같은 입술하며, 아이처럼 느껴지는 순수함 속에서 다시 한 번 소방의 그림자를 ……. '쳇, 재미없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건너편에서 이쪽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천세후 녀석이 거슬렸다. 물론 소화 녀석도 거슬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아직 소방의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런 판국에 귀찮은 혹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기분이라 불편한 심기를 감추기 어려웠다. 그 후로부터는 입을 봉해버렸다. 천세후 녀석이랑 말하는 것도, 소화 녀석이랑 말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는 시뻘건 노을이 지고, 별빛이 반짝일 때가 되서야 멈춰 섰다. 인적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깊은 산중이었다. 아무리 중간 중간 짬을 내 쉬면서 내달렸어도 말들이 더할 나위 없이 지쳐 버렸다. 마부석에서 번갈아 말을 몰던 팽무진과 종리연도 꽤나 지쳐 보였다. '그래도 어쩌겠어? 난 아직도 말 다루는 게 서툴단 말이야.' 마차를 한 곳에 몰아놓고는 다들 마차에서 내렸다. 두 번째 청부가 오랜 시간동안 마차를 타고 이동한 한 거라 그때 참여를 했던, 무환루 사람들은 그나마 나아 보였다. 반대로 무환루에 남아있었던 녹 누님일행과 무사안일주의로 지내왔을 남궁현 일행이 꽤나 지친 듯 했다. "아침부터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으니 허기가 질 걸세. 저녁은 제대로 먹도록 하지. 천막도 칠 필요 없네. 마차에서 그대로 자도록 한다. 새벽이 되면 바로 일어나 달려야 할 테니 체력들을 아껴두는 게 좋을 것이네." "……." 홍 영감님의 선언은 앞으로의 여정이 꽤나 고달파질 거라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해주고 있었다. 더구나 기약할 수도 없는 애매한 여정이 아닌가? 저녁 요리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었다. 그저 끓는 물에 건포를 넣고 양념을 맞춘 게 전부였다. 두 번째 청부를 받았을 때도 매 끼니가 이런 식이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요리를 한 사람이 녹 누님이라는 정도일 것이다. 별 생각 없이 그릇에 담긴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음? 의외로 먹을 만하네. 그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잖아?' 연이어 숟가락이 가던 그릇을 급기야 입을 데고 후루룩 마셔버렸다. 건포도 적당하게 풀려있는 데다가 그 향과 맛이 식욕을 부추겨 주었다. "녹 누님, 요리 좀 남았나요?" "어머, 벌써 다 먹었니? 호호호, 많이 했으니까 얼마든지 먹으렴." "휴우, 역시 녹 누님이 요리를 하니까 시시한 건포조차도 엄청난 별미가 되네요. 어떤 인간은 멀쩡한 요리 재료를 갖다줘도 숯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말이에요. 그 뿐이면 말을 안 해요. 억지로 먹이기까지……." 얼결에 나오는 데로 술술 불어버렸다가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내뱉고 말았다. 바로 뒤통수로 따가운 시선이 와 닿았다. 슬며시 돌아보니 남궁현 곁에 붙어 앉아 깨작깨작 숟가락을 놀리던 주령령이 섬뜩한 눈초리를 흘리고 있었다. 등줄기에 서늘한 땀방울이 흘러내릴 무렵 살기가 일시에 사그라졌다. 무슨 일인가 다시 돌아보니 령령이 보이지 않았다. '어라, 어디로 사라졌지? 그러고 보니 종리연까지 사라졌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한가한 시간이 되자 교옥정 누님이 사월과 함께 다가왔다. 사월, 나를 보자 눈살부터 찌푸렸다. "작삼, 오랜만이야." "네, 교 누님도 그간 별고 없으셨어요?" "으응." 내 옆에 살포시 앉은 그녀는 할 말을 잊었는지 한동안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안면이 약간 상기된 듯도 싶었다. "냉월화 언니가 자수정 목걸이에 대해서 말해줬다고 하더라. 언젠가는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작삼 동생은 어떻게 생각해?" "저, 그게,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찔러오니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일단은 말을 얼버무리며 필사적으로 생각하는 게 다였다. "사실 내가 건네주기는 했지만, 작삼 동생 의향을 물어본 게 아니라 내 일방적 결정이어서 약간은 걱정했었거든. 지금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거절해도 좋아." '아니, 이 사람이!' "아니, 누가 거절한다고 그래요. 나도 누님이 좋아요. 좋다구……. 아차." 나도 모르게 욱하는 성질대로 떠벌리고 말았다. 내 말에 교옥정 누님의 상기됐던 안면이 부드럽게 풀렸다. 더욱 험악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린 사월과 좋은 대조가 되었다. '사월, 저거는 왜 따라 온 거야? 그냥 냉월화 누님 뒤나 따를 일이지.' "그래, 다행이다. 오늘 하루 종일 마차에 올라서 그것만 생각했거든. 동생이 날 거절해버리면 어쩌나 하고 말이야."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내 스스로가 누님한테 부족한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그 반대로 걱정했었다구요." "좋아. 혼인하자. 이번 청부만 무사히 해결되면, 정정당당히 월녀궁으로 입궁해서 혼인식을 치르자. 그럼 그때부터 작삼도 월녀궁 사람이 되는 거야." "……." 그녀 못지 않게 무안해진 나는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가……. 허걱. '주령령(周鈴鈴)?' 심상찮은 표정으로 내려보는 주령령과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를 알아챈 교옥정 누님이 재빨리 내 앞을 막아서면서 그녀의 시선을 대신 받았다. 잠시동안이었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무척 거칠어지고 있었다. 령령의 손에서 피투성이가 된 거지 한 명이 툭 떨어졌다. 아마도 줄곧 우리의 행적을 미행해온 개방 녀석 같아 보였다. 거지 녀석은 곧 포연강의 억센 주먹에 멱살을 붙잡히고 말았다. 그의 억센 힘에 몇 군데 부러지고 나면 없는 사실도 만들어 술술 불어버릴 터였다. 그런데, 정작 녀석을 반죽음으로 내몰아 끌고 온 령령은 녀석에게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월녀궁 여자, 저 녀석은 아직 우리 수라사살(修羅四殺)의 일원이야, 월녀궁(月女宮) 사람 운운하기에는 아직 멀었지. 가급적 멋대로 갖다 붙이는 일만큼은 삼가 해줘." "흥. 그쪽이야말로 웬 참견? 당신은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잖아? 작삼 동생이 나와 혼인하건 말건 왜 참견하려 드는 거야?" "……." "……." 둘의 대치는 령령이 먼저 돌아서 버리는 것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령령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에 약간은 겁이 났다. 수련을 빙자한 화풀이 대상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일 터였다. 재미없는 상상이 되 버렸다. "작삼 동생, 걱정할 것 없어. 무환루와 우리 월녀궁은 한동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지. 그러자면 동생의 처우 문제도 당연히 무환루 쪽에서 한 발 양보할 수밖에 없어. 저 여자 고집에 결단코 기죽지마, 알았지?" "……." 내게 다짐하듯 말을 마친 교옥정 누님은 아직 오한이 가시지 않은 내 어깨를 살포시 안아 주었다. 그녀의 온기와 사향이 얼어붙었던 내 속앓이를 풀어주었다. 나도 더불어 그녀를 꽉 끌어안아……. "에헴, 에헴." 바로 곁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는 바람에 그녀와 나는 아쉬움을 남기며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름 아닌 소화가 새침한 얼굴로 서있는 게 보였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09-30 23:43:16 고친날 2005-12-29 19:23:40 읽은수 8572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74)-여기까지가 딱 5권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4] "작삼 오라버니, 이 분은 누구세요? 소개 좀 해주시겠어요?" "어? 아, 그러니까, 월녀궁 사람인 교옥정 누님이라고 해. 당분간 같이 움직일 사람이야." "아, 그러시구나. 처음 뵙겠어요. 교옥정 언니, 전 소방 오라버니의 동생인 소화예요.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어요." 그녀를 바라본 교 누님의 눈매가 잠시 흔들거렸다. 그녀의 인중을 뚫어지듯 살피던 누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소.방.의.동.생 이시라구요? 그렇군요. 전 앞으로 작삼 동생과의 혼인을 약속한 교옥정(喬玉淨)이라고 해요.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고 싶네요." "혼, 혼인?" 소화는 그 말을 듣고는 깜짝 놀라며 뒷걸음을 쳤다. 하기사 다 큰 처자에게 혼인이란 용어가 얼마나 남세스런 용어인지 이해가 가긴 했다. "네, 작삼과 난 혼인할 사이지요. 이번 일만 끝나고 나면 월녀궁에서 정식으로 혼인할 생각이에요." "그, 그렇군요. 미리 축하 드려요. 정말,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아요." "고맙군요." "아, 전 일이 있어서, 있다가 봬요." 소화는 무엇에 쫓기는 사람 마냥 허둥지둥 사라져 버렸다. '실없기는.' 교옥정 누님을 돌아본 순간 흠칫했다. 그녀의 옥안에 차가운 냉소가 스치듯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아주 잠시동안이었지만, 깊게 각인되고 말았다. '이상해, 이상해, 서로 아는 눈치였는데.' 령령의 손에 잡혀 피투성이가 된 거지 녀석은 예상대로 개방 소속이었다. 포연강(鮑然强)이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불게 만들까 고민하는 사이 알아서 술술 불어 버렸다. "말하겠습니다. 다 말할 테니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집에 환갑 넘은 노모와 토끼 같은 아내, 다람쥐 같은 아들, 딸이 있습니다. 제가 죽으면 누가 그들을 먹여 살린단 말입니까?" 지독하게 악취를 풍기는 녀석이었기에 별로 신빙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떠벌리는 말 또한 참신함이 떨어졌다.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꽤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꾀병 같기도 했다. "오냐, 토씨 하나 틀림없이 다 불기만 해라. 괜찮은 정보라면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무사히 보내줄 뿐만 아니라 금원보도 몇 개 챙겨주마." 포연강의 대응 또한, 참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캐낼 것이 다 떨어지고 나면 당연히 살려보낼 리 없었다. 하물며 금원보를 건네줄 리도 없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만큼은 양보고, 미덕이고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반년동안 저 인간들 속에서 부대껴오고도 눈치 못 까면 그게 바보인 거다.' 새벽부터 길을 나선 네 대의 마차가 개방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미 개방 본단으로 연락이 취해졌다고 한다. 자신은 단지 마차들의 종착지를 알아보기 위해 추격 중이었으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개방 특유의 종적을 남겼다고 한다. 다른 개방 아그들이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포연강이 뭘 더 물어봐야 할까 잠시 여유를 부리는 새, 교옥정 누님이 녀석에게 다가갔다. 월녀궁과 관련해서 개방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캐물어 볼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거지 녀석은 배를 끌어안으며 단말마와도 같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악! 허억! 살, 살려줘." 퍼어억. 곧이어 그의 배가 애라도 낳을 듯 남산만하게 불러오더니만, 손 쓸 사이도 없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마치 개구리가 사람 발에 밟혀 복부가 터져 죽는 것처럼 내장 쪼가리가 사방으로 비산 되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즉사였다. 덕분에 녀석에게 뭔가 물어보기 위해 바짝 다가섰던 교옥정 누님이 내장과 함께 난데없는 핏물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말았다. "꺄아악!" 제갈혜와 사마월향이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남궁현 녀석이 재빨리 제갈혜를 부축해줬다. 그녀야 비위가 원래 나쁜 편이라는 것을 아니까 납득이 되었지만, 폭도(爆刀) 사마월향이 머리에 손을 올리며 천세후 녀석 쪽으로 기우뚱하는 모습에서는 설득력이 희미해 보였다. 그녀보다는 천세후(天世厚) 녀석이 구토라도 하는 게 더 나아 보이리라. 뜻밖에도 녀석은 기분 나쁘게 능글능글 웃고 있었다. 한 쪽 어깨로는 사마월향을 부드럽게 안아들면서 다독거리고 있었으나, 얄팍하게 내려 뜬 시선은 교옥정 누님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듯한 미소였다. '재수없는 녀석, 아차, 교옥정 누님이!' "교 누님! 괜찮으세요?" 깜짝 놀란 나는 다급히 수건을 챙겨들고 나와 피범벅이 된 그녀의 안면과 목 부분을 닦아 내었다. 내장 조각이 끔찍하게 묻어 나왔다. "그 수건 저리 치우지 못해! 내가 잘 닦아드릴 거니까 저리 꺼져. 어디서 땀내 나는 수건을 함부로 언니의 옥안(玉顔)에 디밀어?" "……." 사월이 길길이 날뛰며 향내나는 수건을 한아름 안아들고 뛰어왔다. 그녀 뒤로 다른 월녀궁 여인들도 허겁지겁 뒤따랐다. 내 수건은 이미 시뻘겋게 물들어버렸기 때문에 한 발 조용히 물러서 줬다. '사월, 왜 그렇게 날 미워하는 거냐? 처음 봤을 때부터 날 잡아먹을 듯 미워했었지. 지금도 똑같구나.' 유감스럽게도 난 아직 월녀궁 사람이 아니었다. 사사건건 시비조인 사월의 태도가 마땅찮기는 했지만, 아직은 교 누님에게 있어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의외라면 사월을 제외한 다른 월녀궁 여인들이 내게 조심스럽게 허리를 숙여 보이며 지나간 점이랄까? '하기사 교옥정 누님의 입지가 월녀궁에서 강한 편이지? 나도 그 덕을 보는 걸까?' 그녀들을 피해서 물러서다가 교 누님의 안면을 힐끔 바라봤다. 교옥정 누님의 안면은 전혀 놀란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밀랍인형처럼 한 점의 변화도 찾아볼 수 없는 딱딱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초점이 흐릿하다 싶어 시선을 돌려보니 그 끝자락에는 주령령이 서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낯빛 또한 딱딱하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약간은 고소하다는 빛이 감돌고 있었다. '휴우,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거야?' 핏빛으로 물든 수건을 들고 발걸음을 돌렸다가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그 자리에는 교옥정 누님이 냉소를 띄울 때처럼 차가운 미소를 떠올리고 있는 소화가 서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우두커니 쳐다보는 나를 발견한 그녀는 적잖이 당황한 듯 낯빛을 붉히며 종종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얘는 또 왜 이래? 뭐가 불만인 거야?' 아무리 내가 둔한 편이라는 소리를 종종 들어도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할 만큼 눈치 없지는 않았다. '끄응, 첫날부터 뒤죽박죽인 하루로군. 왜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고, 또 미워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야.' 그러고 보면, 이 무리의 성립 자체가 희한한 일이었다. 서로 호감을 가진 관계보다는, 적대적인 감정을 유지하고 있는 인간 군상들이 더 많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 무리로 합쳐 협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었다. '설사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라 해도 말이지.' 피범벅이 된 교 누님은 월녀궁 여인들이 핏자국을 닦아내자 말도 없이 신형을 돌려 아득하니 사라졌다. 아무래도 목욕을 할 호숫가나 냇가를 찾아 사라진 듯 했다. 그 뒤를 옷가지와 수건을 챙겨든 사월이 뒤따랐다. 월녀궁 여인들은 남아서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여어, 멍청하게 뭘 하고 섰는가? 우린 우리 할 일을 해야지. 안 그런가?" 그나마 정겨운 미소를 띄운 팽무진이 삽 한 자루를 내밀고 있었다. 녀석의 외팔에도 삽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종리연과 동천위의 도움을 받아 산골짜기 외진 구석에 웅덩이를 팠다. 보자기에 싸온 시신 조각을 넣고는 깔끔하게 위장 처리를 했다. "자네 뒤처리를 매우 능숙하게 하는구만." 팽무진이 씩 웃으며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평상시에 착실하게 쌓아올린 경험에서부터 우러나온 거니까. 여기 땅 색깔이 티 나잖아. 이렇게 흩뿌려야 제격이지. 이왕이면 잔디도 좀 깔고……." "……." 내 응수에 팽무진의 안면이 떨떠름하니 식는 게 보였다. '쳇, 너도 망아루에서부터 점소이 생활을 해봤어 봐. 니 성격이라면 오히려 나보다 더 많은 경험을 쌓았으면 쌓았지, 덜하진 않을 거다.' 시체를 묻고 나오니 핏물로 범벅이 된 개방 문도 폭발 현장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월녀궁 여인들이 싹 정리해놓고 철수한 듯 했다. 아직도 피냄새가 가시지 않은 현장에는 천세후와 사마월향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천세후가 기다렸다는 듯 싱긋 웃으며 말을 건네 왔다. "개방 녀석이 산산조각 난 시점이 아주 미묘하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작삼 점소이?" '이게 남의 속사정을 알면서 긁는 것인가? 모르면서 긁는 것인가? 누가 수작을 부렸는지 알 사람은 다 안다. 알기 때문에 모르는 척 하는 거다.' "천 공자, 헛소리하지 말고 잠이나 일찍 주무시지요. 홍 영감님이 말했듯이 내일부터 더욱 바빠질 거요." 살짝 비꼬는 듯한 그의 어투가 너무나도 거슬렸다. 녀석은 내 말은 아랑곳없이 계속 말을 이었다. "과연 누가 이길까요? 장래 혼인을 약속한 흑월 소저? 아니면 현재의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주령령 소저? 이도 저도 아니라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소화 소저?" "교옥정 누님과 주령령 사이가 나쁜 것은 인정하는 바이오. 그런데, 거기에 소화 동생은 왜 넣는 거요?" "왜냐하면……, 두 명보다는 세 명이 대립하는 구도가 훨씬 재미있으니까요. 하하하하, 농담입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자신의 제의를 거절했다고 심사가 뒤틀린 것인지 늘어놓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약삭빠르게 주둥이만 살아서 나불나불 거리는 네 놈 따위랑 마음에도 없는 친구를 해? 너에게 있어 친구란 단물만 쪽쪽 빨아먹다가 그 가치가 다 되면 헌신짝 내버리듯 하는 소모품 아니냐? 철썩 같이 믿었던, 소방도 결국에는 날 배신했다. 하물며 너처럼 믿음이 안 가는 놈이라면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차 안의 공간은 이리저리 쌓여있는 짐 더미 덕분에 생각보다 넉넉하지 못했지만, 다섯 명이 밤이슬을 피해 잠들기에는 딱 알맞았다. 종리연이 자리를 비운 것을 보니 밖에서 은신한 채 경계라도 서는 모양이었다. 단지 소화 동생이 바로 옆에 누워있다는 게 거슬렸다. 그녀가 내뿜는 알싸한 울금향과 살짝 맞닿은 부드러운 맨살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쳇, 친구의 동생이라는 점보다는 여자에 더 가깝게 보이는 걸. 어쩔 수 없잖아. 나도 남자라고.' 하는 수 없이 담요 하나만 달랑 들고서 바깥으로 나왔다. 홍 영감님과 녹 누님이 탄 마차의 마부석에는 담요도 없이 새우잠을 자고있는 북천위가 보였다.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외눈을 살짝 떴다가 다시 감아 버렸다. 사천위의 특성상 동천위도 어딘가에 은신한 채 가수면을 취하고 있을 듯 했다. 북천위(北泉衛), 기이한 구석이 있는 놈이었다. 녹 누님에 대한 충성도는 극성맞다 싶을 정도로 높아 보였다. 주방에 찰싹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보다보면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하곤 했다. '에이, 괜한 망상 따위 잊어버리고 잠이나 자자.' 마차 바닥에 담요를 깔고 그대로 잠들었다. 두두두두, 덜커덕, 두두두두, 덜커덕. 연 사흘째 강행군이 이어졌다. 그 사이에 개방 녀석 한 놈이 더 령령에게 끌려왔다. 그 이외 여럿 더 있었다고도 하는데, 령령에게 모조리 피떡이 된 것으로 안다. 왠지 그녀의 손속이 날이 가면 갈수록 가차없어 지는 것 같았다. 항주(杭州)를 떠난 일행은 절강성(浙江省) 남서쪽 방향인 동려(桐廬), 란계(蘭溪)를 경유하고 있었다. 무림맹이 절강성의 북쪽 안휘성(安徽省)에 위치한 점을 고려해볼 때, 확실히 무림맹의 주력이 따라붙은 모양이었다. 그 말은 곧 천운학(天雲鶴) 소맹주가 폐관을 깨고 나왔다는 말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 방향으로 쭉 가게 되면 중원 남단에 위치한 운남성(雲南省)에 이르게 되는데, 바로 마황맹이 위치한 곳이기도 했다. 무림맹을 등지고 마황맹쪽으로 달리고 있다는 것은 아직 사마장령 소맹주 녀석은 출관을 못했다고 해석되었다. 무림맹에 대한 정보는 매염경 소저로부터 받고 있었다. 그녀의 종적을 최대한 보호해주기 위해서 정보통과 접선하는 일은 주령령에게만 일임되었다. 따라서 어떤 수단으로 정보를 주고받았는지는 오직 주령령만이 알고 있었다. 마황맹 쪽 정보는 단연코 사마월향에게 맡겨졌다. 무엇보다 그 스스로가 자신의 일을 하오문에 맡겨놓을 수 없다고 떼를 쓰는 통에 그렇게 결정 난 것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마황맹의 현황 또한 하오문으로부터 받고 있는 듯 했다. 사마월향 소저 쪽 사람이 제공하는 정보는 오직 하오문의 정보와 겹치는 것만 받아들여지는 듯 했다. 단적으로 사마월향의 주장이 곧이곧대로 통과된 사례가 없었다. 그녀가 아무리 성깔 부리며 우겨도 네 번 중 한 번이나 동의를 얻어내는 정도일까? 사마월향의 말이 단호하게 거절되면 될수록 적의 입김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느냐 죽느냐의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0-14 11:16:04 고친날 2005-10-14 11:16:04 읽은수 7274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7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5] 두두두두, 덜커덩 덜커덩, 두두두두두, 덜커덩. 무림맹의 주력을 피해 마차를 달린 지 정확히 닷새 째 되는 날이었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홍 영감님의 재촉에 새벽 일찌감치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세수는커녕 아침밥조차 쫄쫄 굶은 채 마차에 올라타야 했다. 동이 터 오기도 전에 네 대의 마차가 부산하게 내달리게 되었으나, 이 또한 길게 가지 못했다. 한 발 늦은 것이었다. "으윽, 뭐야? 이 지독한 악취는?" 사방팔방에서 풍겨오는 고약한 악취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소화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문을 열었다. "이 냄새는 분명 수년간 팍팍 썩힌 일반 개방도들의 체취예요. 적어도 수백 명이 이 곳을 에워싸고 있는 것 같아요." "아이고, 머리야. 대단하군, 대단해. 이거 개방의 비밀 병기 아냐?" 짝짝짝짝. 느닷없이 소화가 손뼉을 치며 앙증맞은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작삼 오라버니, 잘 아시네요. 맞아요. 말 그대로 개방의 비밀 병기예요. 이렇게 에워싸면 지독한 악취 때문에 보통 인간들의 정신은 혼미해지겠지만, 수년간 그 악취 속에서 굴러다닌 개방 문도들은 오히려 힘을 얻어요. 특히 이렇게 포위 당한 상황이라면 좋지 않아요. 곧 그들의 타구진(打狗陣)이 발동될 거예요." "……." 마치 자기네 안방일 인양 신이 나서 주절주절 늘어놓는 소화의 입심이 더 대단해 보였다. 개방 문도도 아니면서 그들의 속사정에 정통하고 있지 않은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개방에서 잠룡(潛龍)이라고 불렸던 소방의 동생이잖아. 더구나 오랫동안 개방에게 쫓겨왔으니 그들의 습성을 좀 알 법도 하지.' 퉁! 퉁! 퉁! 퉁! 수백 개, 수천 개는 될 듯한 나무 작대기가 방아처럼 대지를 찧는 소리가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퍼져왔다. 마치 우리를 방아처럼 찧어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어얼씨구씨구 들어간다!" "들어간다!" "저얼씨구씨구 들어간다!"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잊지도 않고, 또 왔네!" "또 왔네!" "또! 왔! 네!" 각설이 타령 전반부를 웬 늙탱이가 내공을 실어 외치자 다른 녀석들이 맨 끝 한 마디를 강조해 주고 있었다. 마지막 한 마디는 다시 한 번 더 강렬한 어조로 외쳐주었다. 직역하자면, 우리가 포위 당했다는 것을 넌지시 경고해주는 의미 같았다. 작대기 박자에 잘 맞춰진 그들의 구령이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대상이 우리 일행이라는 게 씁쓸했다. "오호라, 개방 사람들이야말로 운치가 뭔지 아는군요. 동방의 한 나라에서 유래되었다는 그 유명한 각설이(覺說理) 타령을 그대로 따왔는걸요." 그들의 구령을 가만히 귀담아 듣고 있던 천세후 녀석이 무릎을 탁 치며 아는 척을 해왔다. '얜 또 뭔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는 거야.' "각설이(覺說理)란 말 그대로 옛 성현의 깨달음을 전하는 말, 일설에 의하면 백제라는 나라가 나당연합군에 패망하자 지배 계층을 이루던 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숨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하층민으로 전락하며 부른 각설이 타령 속에는 옛 영화를 그리며, 현세를 비웃는 쓰라린 심정이 그대로 담겨있는 셈이랄까요? 각설이 타령 속에는 여러 가지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영은 돌고 도는 것이니 언제 자신들처럼 비참하게 될지 알 수 없다는 비웃음과 경고, 공덕을 쌓아 올바른 영의 윤회로 가라는 충고도 들어있지요." '나당연합군? 쳇, 그까짓 당나라 군대! 빌어먹을 신라!' 녀석의 말에 상당한 거부감이 일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하나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녀석은 내 아픈 과거 하나를 톡톡 찔러내었다. '니가 제일 썩을 놈이다. 잘난 척 헛소리나 내뱉고 말이야. 도대체가 생겨먹은 것부터 시작해서 맘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어.' "맞아요. 적어도 전대 개방 방주님은 심기가 깊은 분이셨어요. 지금의 대리 방주 녀석처럼 사리사욕을 따라 권력에 빌붙는 짓은 안 하셨다구요." 뜻밖에도 소화가 전대 개방 방주를 두둔하고 나섰다. 마치 잘 아는 지인이라도 되는 양. "아 거 참, 그만들 해. 지금 발등 위에 불이 떨어졌구만, 쓰잘 데 없는 소리들이나 하는 거야?" "이런, 이런, 작삼 점소이에게는 삶의 여유가 부족하구려. 그럼 이제부터 삶의 여유란 무엇인가, 진지하게 대화로 풀어봅……." '니가 지금 날 가르칠 상황이냐? 무림맹이 등뒤에 바짝 붙어있고, 당장만 해도 개방 거지들이 사방팔방 에워싼 형국이잖아. 다 네 연놈들 따라 온…….' 휘리리리릭. 끝까지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려던 천세후 녀석의 입심을 끊어준 것은 다름 아닌 주령령이었다. 한낮임에도 야행의를 걸치고 쇠갈고리를 양 손목에 찬 그녀의 신형이 물찬 제비처럼 튀어 올랐다. 쉬이이익. "끄아아아악!" 령령의 신형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그들의 진형을 휘젓자, 전면을 막고있던 몇몇 거지들이 속수무책으로 나자빠지고 있었다. '오호,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이군. 령령이 좀 성질 더러운 여인이긴 해도 그림이 되는 점만큼은 확실히 인정해야겠구만.' 그러나, 그녀의 일방적 학살도 길게 가지 않았다.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는지 바로 늙탱이의 외침이 메아리 타고 흘러나왔다. "앉은 귀신은 깍귀!" "깍! 귀!" 그 말이 신호였는지 흐트러졌던 거지들의 진형이 일시에 회복되며 봉을 쳐들어 올렸다. "두 발 가진 까마귀!" "까! 마! 귀!" 붕, 부우우웅, 붕붕. 수십여 개의 봉이 한 울음을 토해내며, 령령을 압박해왔다. 물찬 제비 같던 그녀의 신형이 현저하게 둔해져 갔다. "세 발 가진 통노귀!" "통! 노! 귀!" 이제는 발이 어지러워진 령령의 신형을 따라 봉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떼 놓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들이 연환되자 무서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네 발 가진 당나귀!" "당! 나! 귀!" 퍼퍼퍽, 퍽, 퍽. 그런데, 실상 전면을 어지럽혔던 봉들은 단순한 눈가림에 불과했다. 그들의 후면에 숨어있던 자들이 날렵하게 튀어나오며 령령을 기습했다. 다급히 피하느라 공중에 신형을 띄웠던 그녀는 이어진 연타를 고스란히 얻어맞고는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신음 한 번 없이 조용히 떨어지는 게 마치 가을바람에 지는 추풍낙엽의 가녀림 같았다. 그녀의 우세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별 생각 없이 관전 중이던 내 가슴까지 철렁거렸다. '저런, 빌어먹을 잡것들! 감히 령령을!' "작삼 점소이, 후련하시겠군요." 천세후 녀석이 얄밉게 미소지으며 한 마디 거들었다. "엉? 무슨 말이오?" "항시 그녀에게 고된 훈련을 받는다 들었습니다. 심심하면 된서리까지 맞는다 했으니 평상시에 쌓인 울분이 오죽 크시겠습니까? 령령이란 여인이 저 꼴 나는 것을 보니 그 아니 통쾌한 일이겠습니까?" "뭐, 그, 그렇기야 하오." 떨떠름한 어조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미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남의 손에 패대기쳐지는 것은 왠지 개운치 않았다. "천세후 공자, 꼭 그렇지도 않을 거요. 작삼 녀석과 령령 소저의 관계는 뭐랄까, 실로 오묘한 구석이 있단 ……. 하하하하하, 아 참, 내 주책 좀 봐. 음음. 난 아무 말도 안 했소. 안 했어." "……." 느닷없이 팽무진 녀석이 껴들어 한 마디 내뱉었다. 듣는 나조차도 이 놈이 뭔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 판국인데, 며칠 지내지 않은 천세후 녀석이 이해할 리 없었다. "음, 과연, 그런 것이었구려. 조금은 알 것 같군요." '뭐? 나도 이해 못 한 것을 니가 알았다고!? 뭐냐? 뭔지 나도 좀 알자! 이 잡것들아!' "흥, 개방의 타구진(打狗陣)을 우습게 본 벌이에요. 수백 년의 전통을 가지고 내려온 절세의 진이라구요. 설사 십성(十聖)이나 육마(六魔)라해도 쉽사리 뚫을 수 없을 걸요." 뾰룽퉁 새침해진 소화(蘇花)가 어깨를 으쓱 이며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내지는 령령이 구르는 것을 고소해하는지도 모르겠군.' "먹는 귀신은 아귀라!" "아! 귀! 라!" 진이 분산되며 아직 제 정신을 못 차린 듯한 령령을 수십 명의 개방녀석들이 봉을 앞세우며 빙 둘러쌓았다. 뒤이어 하늘로 솟구쳐 오른 십 여명의 개방 고수들이 방아를 찧듯 봉을 내려찍고 있었다. 마무리 한 수 인 듯 했다. '저런! 령령이 죽겠다. 죽겠어!' 발을 동동 구르며 뛰쳐나갈까 말까를 망설이는 사이, 남궁현과 제갈혜, 당가희의 신형이 솟구쳐 올랐다. 제갈혜와 당가희가 비수를 뿌리며 남궁현의 제왕검법이 빛을 발했으나, 진세를 뚫지는 못했다. 그저 지지리 운 없는 거지 몇 명만이 비명을 달리 했을 따름이었다. 그 때였다. 섬전처럼 무서운 기세로 대기를 가로지른 신형 하나가 진세를 꿰뚫었다. 몇 차례 소요가 있은 후 다시 튀어 나왔다. 바로 포연강이었다. 녀석의 품속에는 죽은 듯 축 늘어져있는 주령령이 안겨 있었다. 즉시 남궁현 일행도 그 자리로부터 물러났다. 대신 아직도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는 선두 마차 지붕 위로 낯익은 인영 하나가 올라섰다. '출발 직전에 단약을 세 개씩 받았을 것이다. 그것을 지금 즉시 깨물도록 해라!' '홍 영감님?' 그의 전성이 내 귀에 울려 퍼졌다. 마차 안에 있던 모두가 단약을 꺼내 입에 무는 것을 보니, 동시에 들렸던 모양이었다. '육합전성(六合傳聲)? 끙, 영감님 무공 수준이 꽤나 높잖아. 독마(毒魔)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구만.' 주저할 것 없이 단약을 꺼내 질끈 깨물었다. 아릿하며 쓴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흘렀다. 령령을 죽일 심산이었는지 포획할 심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뺏긴 개봉 거지 떼들이 바짝 약오른 듯 했다. 성난 파도처럼 일시에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앞에 서 있는 것은 오로지 홍 영감 한 사람 뿐이었다. 영감님은 그저 묵묵히 등판을 돌려 보이고 있었다. 뭘 생각하는지 뭘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러서라! 모두들 물러서라! 그는, 그는……!" 머리 위에서 예의 각설이 타령을 외치던 늙탱이 목소리가 들렸다. 홍 영감님의 조용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나를 아는가? 그 작자로군. 그렇다면 이미 늦었다는 것도 잘 알 것이다." 순간 두 손을 가슴팍에 모으고 있던 영감의 신형이 기지개를 펴듯 펼쳐졌다. 자주빛 기운이 일시에 일어나며 퍼져 나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때마침 바람이 일어 자주빛 기운을 실어주고 있었다. '마치 만들어진 바람같군. 홍 영감님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으니 말이야.' 피슈슈슉, 피슈슉, 피슉, 피슉. "끄아아아악! 끄아아악!" 전면에 날아들던 거지 떼들이 뭔가에 몸 한 편을 격중 당하고는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힘에 밀려 나가떨어졌다기보다 고통에 겨워 나뒹굴었다는 표현이 더 옳을 듯 했다. 선두에 있던 수십 명의 개방 거지들이 비명과 함께 떼굴떼굴 구르자 그 뒤를 따르던 다른 녀석들은 겁을 먹었는지 마차로부터 허겁지겁 멀어져 갔다. 슬그머니 돌아보니 바닥에 쓰러진 거지들 대부분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마차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경련을 멈추고 침묵을 지키는 자들의 숫자 또한 늘어나고 있었다. 그 한 번의 신위에 겁을 먹었는지 아무도 우리 뒤를 따르지 않았다. 그것이 세 번째 청부를 받고서 일어난 적과의 첫 대면이었다. '일단은 우리 쪽이 약간 우세한 것인가? 그나저나 홍 영감님의 활약은 처음 보네. 역시 생각대로 대단한 영감님이었어.' 한 편으로는 령령에 대한 걱정이 들기도 했으나, 고개를 흔들었다. 엄연히 남의 사람이 아닌가! 그녀를 걱정해줄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더욱이 내가 주령령을 걱정하는 것은 쥐가 고양이 생각해주는 것과 다를 바 없으리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0-18 11:20:06 고친날 2005-10-18 17:25:23 읽은수 6859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7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6] 그 자리를 다급하게 벗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말을 사는 일이었다. 건초에 미리 해독 성분을 섞어 넣었다고는 하나, 말들에게는 그 효능이 완전하지 않다고 했다. 이미 입에 거품을 물고 부르르 떠는 녀석들까지 보였다. 녀석들을 데리고, 으슥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은 주령령(周鈴鈴) 몫이었다. 냉혈마녀답게 순식간에 쾌차해 보였던 것이다. 곧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말들의 짧고도 긴박한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최후를 마무리짓는 일에는 절대로 빠지지 않는구만, 완전 사신(死神)이로세.' 개방은 두 번 다시 포위망 조성을 하지 않았다. 그저 간간이 멀리서 지켜보는 게 느껴졌다. '지켜보건 말건 상관은 없는데, 악취 좀 풍기지 말아라. 제발 부탁이다.' 개방으로부터 벗어난 지 이틀째 저녁이 되어서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꽤 오랫동안 정신 없이 달렸기 때문에 말은 물론이려니와 그 위에 올라탄 사람들까지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이런 상황을 즐기는 인간들이 있다는 게 매우 유감이었다. "천 공자님, 바로 저 산 너머가 우리 마황맹 추혼대 제 일진이 숨어 있는 곳이에요. 그리고, 이 쪽 고개를 넘어가면 이진이 숨어있을 걸요. 지금쯤이면 사마 오라버니도 근처에 다다랐을 거예요." 사마월향이 천세후에게 살짝 기댄 채 아양을 떨었다. 천세후 녀석은 그녀가 귀여워 참을 수 없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응석을 받아 들였다. "다행입니다. 사랑을 향한 우리의 대계가 그 끝을 보이기 시작하는군요. 나선의 대지에 다다랐으니 다 이룬 거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게 우리의 원대로 풀리는 겁니다." "아잉, 천 공자님." 뽁뽁뽁뽁. '으윽, 닭살이야. 저 것들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죽을 거다. 이번 청부가 제발 성공적으로 완료되어야 할 텐데. 다시는 저 연놈들 보지 않도록…….' 그나마 간만에 받아든 녹 누님의 향긋한 요리가 위안 거리였다. 그녀의 요리 속에는 뭔가 포근한 기운이 어려있었다. 한참 얼큰한 국물을 들이키고 있을 때였다. 일찌감치 식사를 마친 홍 영감님이 뒷짐을 지고 일어섰다. "주령령, 종리연, 피아를 가리지 말고 주변 정리를 해라." 종리연이 팽무진 곁에서 약간은 아쉬운 표정으로 떨어질 때쯤, 주령령의 신형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몇 차례 짧은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그들이 홍 영감님 곁에 다시 나타났을 때에는 비릿한 혈향(血香)으로 젖어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과가 궁금할 것이다. 간단하게 상황 정리를 해주마. 우리가 발을 들인 귀주성(貴州省)은 보시다시피 마황맹 구역이다. 방금 죽인 자들 중에는 무림맹 추격조 뿐만이 아니라 마황맹 정찰조까지 섞여 있었다. 그만큼 상황은 긴박하다. 무림맹 주력과 마황맹 주력 모두가 우리로부터 이틀거리로 좁혀들었다. 잠시 후면 우리와 비슷한 복장의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미리 수배를 해둔 이들이니 신경 쓰지 말고 중요한 짐들을 바로 내리도록 한다." "저기 영감님, 그럼 우리는 다른 마차에 타나요?" "아니, 도보로 이동한다. 피땀 흘려 익힌 경공은 나뒀다가 국 끓여먹을 테냐?" "……." 홍 영감님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다. 그 동안 발목에 철환(鐵環)을 차고서 경공 수련을 꾸준히 받아오기는 했으나, 눈에 띌 정도로 실력이 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쓴 소리를 할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쫑알쫑알 불만이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쳇, 피땀은 흘렸어도 그 정도 수준의 경공은 아니라구요. 뜀박질이 약간 더 빨라지고, 숨이 덜 차는 정도일 뿐인데.' "더 이상 설명할 시간이 없다. 신속하게 짐을 정리하도록 한다. 우리가 감쪽같이 사라져줘야 마황맹 주력과 무림맹 주력이 서로에게 화살을 돌리게 된다. 제대로 된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취하려면 뒤처리가 말끔해야 하는 것이지." 나야 옷 몇 가지를 넣은 봇짐을 두르고, 이제는 두 개가 된 두 철봉을 허리춤에 매다는 것으로 간단히 끝이 났다. 그 이외 잡다한 것들, 특히 소화가 친절하게 알아서 챙겨왔던 춘화집(春畵集) 묶음은 아쉽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령령만큼은 곱게 넘어가 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쩝, 무환루로 옮겨오고 나서 한 푼 두 푼 아껴 꾸준히 모아놓은 춘화집들이었는데…….'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마차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내 모양새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소화가 마차 안으로 쫄래쫄래 들어갔다. 그녀가 다시 나왔을 때는 내가 어쩔 수 없이 포기했던, 춘화집 보따리가 매여져 있었다. "아, 저기, 그게……." "이거요? 제 짐이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다른 사람들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마음 푹 놓으세요. 작삼 오라버니." '허 참, 남세스럽지만, 기특한걸.' "그래? …… 고맙다." "피, 신경 쓰지 말래두요." 약간 안면이 벌게진 그녀는 고개를 휙 돌려 시선을 피했다. '쩝, 하는 짓짓이 소방을 쏙 빼 닮았군. 그래도 묘한걸. 보통 여자들은 춘화집을 보면 기겁이나 하고 외면해 버릴텐데, 이 녀석은 반대로 알아서 챙기잖아. 혹시……. 어쩌면?' 소문에 듣기로 남자들 중에서 남색을 밝히는 인간이 드물게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여자들 중에서도 드물게 여색을 밝히는 이들이 존재한다고 들었다. 남색을 밝히는 남자가 스스로를 여자로 인식하듯, 여색을 밝히는 그녀들 또한 스스로를 남자로 인식한다는 소리다. 저만치 앞서가는 소방의 가녀린 몸매를 샅샅이 훑어봤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부분이 있는지 자세히 눈여겨봤다. 키가 좀 작고, 가슴 발육이 부족하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 그 이외에는 여자로써 딱히 손색이 갈 부분이 없었다. '끙, 친구의 여동생을 두고 못 하는 생각이 없군. 설사 그녀가 여색을 밝히는 부류라고 해도 내게 소중한 사람임에는 변함이 없다. 더 이상 헛 생각하지 말자.' 부스럭, 부스럭. "누구냐!" 수풀을 헤치는 인기척에 깜짝 놀라 긴장한 나머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철봉을 뽑아 들었다. 어쩌다 보니 양손에 하나씩 들려 쌍철봉이 되고 말았다. "놀라지 마시오. 우리들이오." '으잉? 홍 영감님하고 비슷하게 생겼잖아!' 그들의 선두에 나선 영감의 외양은 정말 홍 영감님과 흡사한 구석이 있었다. "내가 말한 이들이다.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홍 영감님이 바로 나섰다. 그러고 보니 모두들 인기척을 느끼고 있었음에도 조용히 있었다. 그제야 영감님이 언급했던 말이 생각나 무안해졌다. 곧이어 숲 속에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모두가 우리 일행의 모습과 옷 입은 자태를 모방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우리와 분간이 어렵다 싶을 정도였다. 그들은 우리가 타고 왔던 마차에 오르자마자 그대로 떠나 버렸다. 인사말 한 마디 오가지 않은 썰렁한 첫 만남이자, 마지막 대면이었다. '뭐 하는 인간들이지? 잘못하다가는 양 진영에 압사 당할텐데……. 뭐, 알아서들 피신하겠지.' 우리가 마차에서 내린 부근의 자세한 지명은 알 수 없었다. 몇 날 며칠을 마차 속에서 살다시피 했고, 뭔가 알고 있을 사마월향은 천세후 녀석 상대로만 입을 열었다. 건방진 안하무인 왈가닥이지만,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천세후에게 아양을 떠는 빈도가 급격히 늘었다. '꼴 사납지만, 일단 봐주지.' 귀주성 전체가 산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악 일색이었다. 마차를 달리면서 온 길도 산골짜기 사이를 파고들어야만 했었다. "여기서부터 경공으로 이 절벽을 타고 오른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조심해서 따라오도록." "아니, 저기 저는……?" 휘리리릭. 그 말만 남긴 홍 영감님의 신형이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져 갔다. 녹 누님과 사천위들도 그 뒤를 따랐다. 주령령을 비롯한 남궁현 일행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무공과 인연이 없다는 천세후는 사마월향에게 안겨 올라가 버렸다. '아니, 나 아직 경공 시전 못 한다니까!' 할 말을 잃은 채 멍 하니 서있으려니까 옆구리를 툭툭 찌르는 손길이 있었다. "소화?" "작삼 오라버니는 아직 경공이 미숙하지요? 제가 잡아드릴게요. 손 내밀어봐요." "아, 그렇긴 한데……." 그녀와 나의 신장 차이가 작지 않았다. 경공이 일천하다 못해 발동조차 내 마음대로 걸리지 않는 나로서는 이래저래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동생, 여기서 뭐해? 우리도 가야지. 뒤쳐질 수는 없잖아." "교 누님." "걱정하지마, 사월, 그 쪽을 부탁해." "알았어요. 흑월 언니." 사월이 마지못해 내 왼 팔에 팔짱을 껴왔다. 오른 팔은 교옥정 누님에게 팔짱이 끼워졌다. 양팔에 와 닿는 뭉클한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탁, 휘리리리릭. 까마득한 절벽이었지만, 교옥정 누님과 사월의 도움으로 쉽게 오를 수 있었다. 뾰롱퉁해진 소화의 신형이 우리를 앞질러 올라가 버렸다. 한 식경 정도 오르자 절벽도 그 끝을 보였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대기 중이었다. "늦었군. 지금부터는 걸어서 천천히 이동하겠다." '사방팔방이 산 천지, 하늘은 우중충하니 금새 비가 쏟아져도 하나 이상할 것 없고, 마을은커녕 인적 자체가 느껴지지 않아. 그래도 시원한 것 하나는 맘에 드는군.' "이 산 이름은 뭔가요? 사람은 없나요?" 짐 하나 없이 느긋하니 뒷짐을 지고 오르던 홍 영감님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씩 웃어 보였다. "묘령산(苗嶺山)이라 하네. 이 산 동쪽으로 가면 바로 귀주성의 성도 귀양이지. 아까 그들도 귀양에서 온 참일세." "바로 옆이 귀양이라구요! 영감님, 우리 귀양 시내로 들어가면 안돼요?" "그럴 수는 없네. 이 묘령산도 일부러 인적인 없는 가파른 절벽 쪽을 골라서 올라온 걸세. 우린 아직 마차에 타고있는 것이네. 그들이 충돌하기 전까지는 조용히 숨어서 이동해야 한단 말일세." "……." 납득은 했어도 아쉬움이 남았다. 귀주성의 성도 귀양(貴陽)에는 여러 유명한 곳이 있었다. 물에 비친 누각의 풍경이 일품이라는 갑수루(甲秀樓), 그 끝이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기린동(麒麟洞), 홍복사(弘福寺)란 절이 있는 검령산(黔靈山), 이 모두가 소문으로만 귀담아 들은 곳이었다. 기회가 되면 가보리라 생각했는데, 눈앞에 두고도 군침만 삼켜야 한다니……. '이번 청부만 끝나봐라. 내 기필코 귀양 구경을 하고 말 테다. 나 혼자서라도 하고 만다.' 솔직히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었다. 단지 뭘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도리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 아니겠는가?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0-20 23:13:51 고친날 2005-10-20 23:13:51 읽은수 6899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77)-악몽(惡夢)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7] 악몽(惡夢) 묘령산(苗嶺山)은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는 산이었다. 의외로 높은 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참을 올라야 했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차가운 안개가 휘감아 돌았다. "안개가 지독하네요." "허허허, 우리한테는 안개처럼 비칠지 몰라도 아래 성도 사람에게는 구름으로 보일 걸세. 그것도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비구름이라네. 옷이 금새 축축해지지 않았는가?" "그, 그렇긴 하지만, 너무 낮은 곳에 있는 구름이네요." "귀주성 자체가 높은 지대에 위치한 산악지대일세. 우리가 체감으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는 셈이지." "……." 고지대여서 그런지 쌀쌀한 한기가 감돌았다. 거기에 축축하게 스며드는 물기는 별로 달가울 게 없었다. 다만 자욱히 낀 구름 사이로 간신히 언뜻언뜻 내비쳐지는 경관에 눈이 쏠렸다. 서쪽 산자락 아래로 까마득한 성도가 보였다. 마치 내가 신선이라도 된 듯한 묘한 신비감에 빠져들었다. 머릿결을 쓸어 넘겨주는 시원한 산바람이 지친 심신을 달래주었다. '뭐, 나쁘진 않군.' "앞으로 최소한 사흘 간은 쥐 죽은 듯 이동해야 하네. 화기 노출을 피해야하며, 개인 행동도 금해야하며, 일체의 대화 또한 당분간 자제했으면 좋겠군. 정 대화를 해야한다면, 전음을 사용하도록 하게." '헉, 내가 전음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홍 영감님의 요구는 점점 노골적으로 날 압박해왔다. "조금만 참게. 일이 잘 성사되어 계획대로 사마장령(司馬將靈) 소맹주와 천운학(天雲鶴) 소맹주가 충돌하게 되면, 정사대전(正邪大戰)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네. 두 세력은 꽤나 오랜 세월동안 참아왔었지. 그 인내력이 이제 한계에 달할 정도로 말이지. 한 번 불붙기 시작하면 어느 한 쪽이 지리멸렬할 때까지 꺼지지 않을 걸세. 남은 한 쪽도 무사할 리가 없지. 정사에 휘말리지 않고 중도로 남아있던 세력들에게 기회가 찾아오는 걸세. 그때야말로 우리가 세상에 날개를 펼칠 때인 것이다." "……." 마지막 말을 언급할 때 영감님의 눈가에 섬광이 번쩍였다. 그만큼 그의 말에는 확신에 가까운 힘이 실려 있었다. '그 말뜻은 그러니까, 마황맹, 무림맹, 정파, 사파 녀석들을 싹 밀어버리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인 그 자리에 무환루 지점을 세운다는 소리렷다? 당장 정파 구역만 해도 열 군데는 거뜬히 세워지겠는걸. 어디 보자. 그럼, 수많은 아그들이 내 밑으로 주르륵 생긴다는 소리잖아. 더불어 수입 또한 짭짤해진다는 말이지. 흐흐흐. 생각만 해도 좋은걸.' '작삼 오라버니, 실성한 사람 같아요. 자꾸 찌푸렸다가 웃었다가 자꾸 그러면 후문에 털 난다는 말도 못 들어봤어요?' 아까부터 도톰한 입술을 샐쭉하니 내밀고는 '나 단단히 삐쳤으니 알아서 각오들 하쇼.' 하고 온몸으로 노래를 부르던 소화가 한 마디 전음입밀로 시비를 걸어왔다. 나도 한 마디 하려고 눈을 부라리자 그녀는 재빨리 앵두 같은 입술 위에 집게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이제부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 못 들었어요? 정 하려거든 전음으로 대화를 해라잖아요. 할 수 있으면 전음으로 대답해보세요.' 이 영악한 녀석에게 화를 낼까 말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단지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훗, 후문에 털이 나? 얌마, 후문에 털이 난 지가 언젠데,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얘기를 하고 있어.' 의기양양하게 피식 코웃음을 내며 시선을 돌렸다. 의외의 반응에 뜨끔했는지 의문에 가득 찬 녀석의 전음이 이어졌다. 소방의 동생 아니랄까봐, 호기심 어린 점에 대해서 참지 못 하는 듯 했다. 모두 다 마이동풍(馬耳東風)으로 무시해버렸다. 무엇보다 난 전음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시비 걸면 안 돼지. 내가 누구냐? 역대 망아루(忘我樓)에서부터 현재 무환루(無患樓)에 이르기까지 일등 점소이 자리를 독식해온 귀하신 몸이다 이거야.' 으쓱해진 나는 콧대를 높이며 속력을 내었다. 바짝 열이 오른 소화가 쫄래쫄래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신이 난 나는 더욱 발을 빠르게 놀렸고, 이에 소화도 질 새라 따라 붙었……. 쿵. "어이쿠." 너무 앞서간 탓에 그만 선두 일행과 부딪히고 말았다. 상대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기에 헤헤거리며 사과를 하려다가 안면이 굳어버렸다. '하필이면 주령령, 너냐!' 어쩐지 부딪힌 상대의 살결이 꽤나 부드럽다고 느끼기는 했다. 원래대로라면 울금향만 맡아도 경직되었을 터였다. 그런데, 소화마저 같은 울금향을 사용했기 때문에 내 코가 많이 무뎌져 있었던 것이다. 말없이 우리 둘을 돌아다본 령령의 안색에서 살기가 풀풀 돋아났다. 그녀는 잠자코 내 목 언저리 옷깃을 가다듬었다. 더불어 내 목줄기마저 슬그머니 어루만지는 그녀의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조용히 있으라는 홍 영감님 말씀 그새 잊었어? 신중을 기하느라 네 녀석 새벽훈련까지 중단시켰다. 그런데, 오히려 기고만장해져서 보이는 게 없는가 보구나. 자고로 북어와 남자는 사흘에 한 번씩 패라고 했지. 앞으로 사흘만 기다려. 그동안 중단했던 훈련까지 모조리 셈해서 한 번에 돌려줄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아.' 사신(死神)처럼 무시무시한 전음을 남긴 그녀는 그대로 몸을 휙 돌렸다. 령령의 사형선고 덕에 지금까지 희희낙락했던 기분이 일시에 수그러들고 말았다. '끙, 열흘 치를 몰아서 한 번에 맞으면 십중팔구 너끈히 사망일텐데. 장차 전 중원 무환루 지점의 수석 점소이가 될 내 몰골이 말이 아니겠구만.' 의기소침해진 나는 그 이후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며 그녀의 뒤를 따라야만 했다. 내가 잠잠해지자 소화마저 대충 눈치를 챘는지 더불어 조용해졌다. 대신 교 누님이 가만히 내 옆으로 다가섰다. 덥석 팔짱을 낀 그녀는 보란 듯이 령령 옆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주령령(周鈴鈴) 옆으로 교옥정(喬玉淨) 누님이 서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나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아 주는 형국이 되었다. '작삼 동생, 령령 저 년이 어떤 식으로 협박을 해도 절대 굴하지 마. 어차피 이번 일만 무사히 해결되고 나면 우리의 혼인식이 있을 거야. 그럼, 더 이상 수라사살(修羅四殺)이니 하는 족쇄에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어. 내가 너의 방패가 되 주겠어. 나로 부족하면, 월녀궁(月女宮)이 너의 방패가 되어 줄 거야.' 교 누님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은 내 발걸음에 힘을 보태 주었다.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을 그녀가 떠올려 준 것이었다. '크크크, 그렇지. 앞으로 령령 손아귀에서 놀아날 이유가 없지. 난 이제 수라사살이 아니게 되거덩.' 의기소침해져있던 나는 바로 어깨를 활짝 폈다. 교 누님과 얽혀진 팔짱에 더욱 힘을 주었다. 더 이상 성질이 오락가락 더러운 주령령에게 주눅들어 지낼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교옥정 누님의 나긋나긋 부드러운 살냄새가 날 더 훈훈하게 만들어줬다. 아스라이 넘실거리는 난향에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월녀궁, 앞으로 난 월녀궁 남자가 되는 거다. 사월이 조금 거슬리겠지만, 은월과 적월이 있기에 월녀궁 적응 따위는 문제도 아니다. 더구나 냉월화 누님과도 나쁜 관계는 아니지. 단지 궁주 아줌마와 안면이 없는 게 약간 걸리지만, 설마 날 홀대야 하겠어?' 과연 교 누님이 나와 바짝 붙어 서자 낯빛이 더 어두워진 주령령을 느낄 수 있었다. 나름대로 열이 올랐던 모양이었다. 남궁현에게 바짝 붙어 서더니 그의 팔짱을 껴버렸다. 약간 놀란 듯한 남궁현의 안면에 은근히 홍조가 돌았다. '흥, 좋아할 것 없다. 남궁현, 령령의 본성이 어떤가 알면 그리 달갑지는 않을 거다. 더더구나 가끔 발작도 하거덩? 그 때는 네 명복을 빌어주마.' 녀석의 명복을 미리 빌어주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도 되었다. 그러나, 아주 약간은 녀석이 부럽기도 했다. 가슴 한 쪽이 미세하게 찡하니 저려왔다. '쳇,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잖아. 내가 교 누님과 미래를 약속했듯, 그녀 또한 녀석의 여자였다. 이제 와서 무슨 미련을…….'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0-26 09:22:17 고친날 2005-10-26 09:22:35 읽은수 6488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78)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8] 산행의 목적이 눈요기나 하자고 올라온 게 아니었기 때문에 다들 말이 없었다. 특히 홍 영감님이 한마디하자 그 말많던 천세후까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 하나만은 정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지.' 일행 대부분이 약간씩은 긴장하고 있는 듯 발걸음이 사뭇 조심스러웠다. 독마(毒魔)라는 바탕에 혈해진경(血海眞經) 해독편까지 익힌 홍 영감님이야 일행 중 최고의 고수이리만큼 소리 하나 없이 느긋하게 걸어가도 그러려니 했다. 풍룡(風龍) 종리연(鐘理戀)이야 나쁘게 말하면 양상군자(梁上君子)계의 샛별, 내지는 좋게 말해도 무영투도(無影偸盜)라 불리는 존재니까 조용해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러나, 주령령은 남궁현에게 찰싹 매달려가다시피 하는데도 아주 고요했다. 보통 여인처럼 치렁치렁 치맛자락이 늘어진 평상복을 걸쳤는데도 옷 구겨지는 소리 하나 흘리지 않았다. 살기(殺氣)를 누그러뜨리자 그 기척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영락없이 대낮에 처녀 귀신 활보하는 꼴일세.' 절벽을 오르고 나서 두 시진은 흘렀을까? 앞서거니 걸어가던 홍 영감님이 뭔가 감지했는지 손을 번쩍 치켜들어 일행을 멈추게 했다. 고개를 계속 갸웃갸웃 거리며 초조해하는 기색이 평상시의 영감님답지 않았다. 곧이어 뜻하지 않게 영감님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허허, 역시 무리였는가? 계획은 사람이 해도 성사는 하늘에 달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늘이 우리를 버린 게로군." '으잉? 뜬금 없이 웬 하늘 타령이셔? 온통 안개구름 투성이라 하늘은커녕 한치 앞도 가물가물 안 보이는구만.' 영감님이 그 말을 내뱉자 일행 모두의 긴장도는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낭랑한 웃음소리가 건너편 숲 속에서 울려 퍼져왔다. "하하하하, 역시 늙은 독마(毒魔)가 젊은 도성(刀聖)보다 낫군요. 깜짝 놀래켜주려 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깔끔한 미성의 미소년, 천운학(天雲鶴)이 그 신형을 드러내었다. 날다람쥐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날렵하게 나타난 그는 우리 일행으로부터 십여 장 떨어진 거리의 소나무 가지 끝에 살짝 내려섰다. 구름과 학 문양이 새겨진 상아빛 비단옷이 자욱한 안개구름과 잘 어울렸다. 여자로 오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의 외모 덕분에 하늘에서 막 강림한 선녀처럼 느껴졌다. 바람결에 넘실거리는 고급스러우면서도 은은한 용연향이 다시금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천운학! 이 개자식, 니 놈 면상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소방을 사지로 내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를 다시 보게 되자 울컥 치미는 게 있었다. 주먹이 부르르르 떨렸다. 등뒤에서 슬며시 끌어안아 오는 교 누님의 따뜻한 포옹이 없었다면 언제까지고 부르르 떨며 서 있었을 것이다. 여인처럼 서글서글한 녀석의 눈빛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둘러보고 있었다. 무엇을 발랐는지 자주빛으로 반드르르 빛나는 그의 갸름한 입술이 열렸다. "이런, 이런 이렇게 기쁠 수가! 제가 마음에 걸려하던 분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있었군요. 처음에는 민폐를 끼친 제 동생 덕분에 적잖이 걱정되었는데, 오히려 제가 빚을 지고 마는군요." "그만큼 천 공자가 뿌린 씨앗이 많다는 소리 아니겠나? 웬만하면 다른 녀석의 얼굴도 봤으면 좋겠군. 내가 느낀 기운은 천공자가 아닌 다른 것이었네." 한껏 기뻐하는 녀석의 미성에 일침을 놓은 것은 싸늘한 홍 영감님의 응대였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의외로 천운학 녀석은 더 이상 기쁠 수 없다는 듯이 목청껏 광소를 터뜨렸다. 웃음 속에는 강력한 내기마저 어려 있었다. "작삼 동생, 어서 귀를 막아." 교 누님의 지적에 재빨리 귀를 막고 그의 광소에 대항했다. 그러나, 한 박자 늦었는지 귀에서 손을 떼자 손바닥에 묻어난 시뻘건 핏자국이 보였다. "이 자식이!" 한참동안을 웃어젖히던 녀석은 거짓말처럼 정색을 하며 웃음을 거둬드렸다. 반드르르 빛나는 입술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걸쳐졌다. "다행입니다. 난 또 내 성취도가 낮아 발각되었나 걱정했었거든요. 역시 당 숙부의 지적대로군요. 독마가 혈해진경(血海眞經) 해독(解毒)편을 익혔다면 용독(用毒)편을 익힌 자신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거라더니……." 휘이이잉. 천운학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새까만 그림자 하나가 그의 옆에 신형을 드러내었다. 새하얀 천운학의 옷차림과 대조적으로 남색 도포를 휘날리는 문사 차림의 중년 남자였다. "무색, 무미, 무취의 무형지독(無形之毒)은 당가 최고의 비전입니다. 방책이 있다면 오로지 혈해진경 해독편 밖에 없을 거라고 자부할 정도니까요. 뜻밖에도 그는 …… 의심할 여지없이 해독편을 익힌 듯 합니다." 마지막 말을 내뱉던 그는 그 말을 하면서 홍 영감님과 나를 째려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아주 복잡미묘해 보였다. 두려워하는 것인지, 미워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눈빛이었다. '저 인간은 또 왜 저래? 아, 참! 가짜 수라삼살 중에서 혈살을 가장하고 있던 사람이 사천당문의 당세옥이라고 했던가? 혈해진경 용독편을 낚아채 간 인간은 저 사람?' 그는 잠자코 시선을 다른 이에게로 옮겼다. 뜻밖에도 그 시선 끝에 걸려있는 사람은 남궁현의 여자였다. "가희야, 천운학 공자님께서 너만큼은 봐주겠다고 하셨다. 어서 이 자리에서 물러나거라. 형님께서 널 얼마나 걱정하고 계신지 알기는 하느냐?" '끙, 당가희의 숙부라는 인간이 당세옥이었어?' "싫어요!" 당가희는 도리질을 하며 한 여름의 매미처럼 남궁현의 팔뚝에 찰싹 달라붙었다. "난 죽으나, 사나 남궁현 오라버니랑 같이 있을 거예요." "……." "그러니까, 절 못 본 것으로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당 숙부."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쉰 당세옥은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대대로 당가 여인들의 고집은 전 무림에서 알아주는 것이니 내가 어쩔 수 있겠느냐? 네가 택한 인생이니 네 맘대로 하려무나." "고마워요. 고마워요, 당 숙부! 이 은혜 잊지 않을 게요." 펄쩍펄쩍 날뛰며 기뻐하는 당가희와 달리 당세옥의 눈동자는 서글프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마치 망자의 마지막을 담아두려는 듯한 연민처럼 느껴졌다. 곧이어 그의 눈빛이 사납게 번들거렸다. "홍홍! 너와 난 끝까지 자웅을 가릴 수밖에 없는 신세로구나.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겠지? 자리를 옮겨서 한 바탕 놀아보자!" '엥? 영감님의 이름이 홍홍 이었어? 끙, 여자 이름 같잖아. 그래서, 아무도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거였군. 그래도 녹녹 누님의 이름이랑 잘 어울리잖아.' 당세옥의 일갈에 홍 영감님이 내심 갈등하는 듯 했다. 한참 고민을 하던 영감님은 마침내 결정한 듯 천운학 녀석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천 공자, 공자 이외에 다른 이들의 손을 빌리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는가?" "물론이지요. 제 부하들은 여전히 마차 뒤를 쫓고 있습니다. 사마장령(司馬將靈)의 눈을 속일 필요가 있거든요. 뭐니뭐니 해도 이 하늘 아래 제 적수라 부를 만한 녀석은 그 인간뿐이니까요.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빙긋 하고 녀석이 웃자 화사한 봄꽃이 일시에 만개하는 착각이 일었다. 녀석에 대한 원한에 이글이글 타오르면서도 그렇게 보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홍 영감님이 안절부절 자리를 뜨지 못하자 녀석은 쐐기를 박듯 말을 보탰다. "뭐, 안심이 안되면 이 자리에서 싸우는 것도 괜찮겠지요. 단, 혈해진경 독경을 나눠 익힌 두 사람이 용호상박으로 싸운다면, 엄청난 독기가 주변으로 몰아치겠지요. 산짐승들은 물론 풀 한 포기 남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저들도 모조리 중독 당해 죽겠지요." 그 말에 움찔한 홍 영감님은 기어이 신형을 돌려 산골짜기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당세옥도 사라졌다. 혼자 남은 천운학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난 아직 혈해진경 검경의 묘용을 완전히 터득하지 못 했답니다. 검경이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지도 알지 못 합니다. 운이 좋다면 여러분이 절 이길지도 모릅니다. 합공을 해도 좋고, 비겁한 수를 써도 좋습니다. 최선을 다 하세요. 오늘 이 자리에서 지는 쪽은 더 이상 살아서 숨을 쉴 수 없을 테니까요." 녀석의 의기양양하게 선언을 했다. 우리 일행 또한 혈해진경이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지 모르기 때문에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까지 잠자코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포연강이 마침내 앞으로 나섰다. "천 공자, 부득이하게 합공을 하려하네. 허락해주겠는가?" "물론이지요. 설마 그대 혼자서 날 상대하려는 과대망상을 꿈꾼 것은 아니겠지요?" '녀석,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밉상일세.' "……." 포연강은 신형을 부르르 떨며 한 차례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자존심을 이렇듯 처참하게 망가뜨리는 녀석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혈해진경을 익히기 이전이었다면 저런 광오한 말 따위 내뱉지 못했으리라. "내가 호명하는 분들은 앞으로 나와서 힘을 보태주시오. 교옥정 소저, 남궁현 공자, 소화 소저, 그리고 주령령, 이상이오." '우와, 과연 최강이라 부를 만한 구성이네. 아무리 천운학 녀석이 혈해진경을 익혔다고 해도 이들 모두를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내 손으로 직접 천운학 녀석에게 복수하지 못 하는 게 아쉽지만, 이로써 소방의 원혼도 약간은 위로를 받겠지.' 그러나, 호명을 받고 앞으로 나서는 이들의 표정이 결코 밝지 않았다. 특히 시종일관 묵묵히 천운학과 시선을 주고받는 주령령의 낯빛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어라? 주령령, 천운학과도 아는 사이였어? 쳇, 남궁현이 바람 필 때, 너도 맞바람 피웠나 보구나. 어쩐지 천운학이 널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했다. 옛 연인인가 본데, 그래서 어디 제 실력이나 발휘하겠어? 차라리 넌 그냥 빠지는 게 낫겠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0-29 13:11:36 고친날 2005-10-29 13:11:36 읽은수 6479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79)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79] "좋습니다. 하나 하나가 구룡(九龍)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인 실력자들, 제 실력을 검증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이들이군요. 그럼 시작들 할까요?" 천운학은 먼저 검을 뽑지 않았다. 의기양양 실낱같은 미소를 흘리며 소나무 가지에서 사뿐히 내려온 게 전부였다. 챙, 차창.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령령은 치렁치렁한 치마를 쭉 찢더니 허리 옆으로 매듭을 지어 올렸다. 경황이 없었는지 속에 야행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덕분에 새하얀 허벅지 맨 살결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꿀꺽. '캬, 언제 봐도 쭉 뻗은 다리 각선미 하나는 일품이라니까.' 보일 듯 말 듯한 고의의 아슬아슬함도 충분한 눈요기 거리가 되었다. '미인계(美人計)라도 쓸 작정인가? 흠, 천운학 녀석에게는 미인계가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보아하니 남색 취향을 지닌 것 같은데.' 쩡! 포연강이 뽑아 올린 무시무시한 위력의 도기가 천운학을 가로지르려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뽑혀졌는지 가느다란 몸매의 검날이 그 앞을 가로막아 버렸다. 둘 사이에서 일어난 반탄력이 대기 중에 퍼져 나왔다. 가까스로 소나무 둥치를 부둥켜안아 바닥을 꼴사납게 구르는 것만큼은 면했다. 뒤따르던 다른 이들도 약간은 주춤했으나, 방비를 하고 있었는지 곧 물살을 가로지르는 물고기처럼 그 사이를 뚫어 버렸다. 챙챙챙챙챙. 동시에 일괄적인 공격이 퍼부어졌다. 평상시에 불과 물 같던 남궁현과 교 누님의 검기가 이때만큼은 사이좋게 교차되며 떨어져 내렸다. 소화의 봉 또한 기이한 선을 그으며 작렬하고 있었다. 마치 용이 창공을 누비며 울부짖는 듯한 흐름이었다. 철컥. 손목 보호대에서 은빛 갈고리를 뽑아 올린 주령령의 신형 또한 섬전처럼 그들 속에 섞여 들어갔다. 조용히 가라 앉아있던 그들의 내기가 무섭게 끌어올려졌다. 내 강호 경험이 일천하기는 해도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싶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격돌이 될 듯 싶었다. 모두가 단 일격에 천운학을 쳐죽이기로 마음먹은 듯 했다. '그야 천운학 녀석의 실수지. 한 자존심 하는 녀석들인데, 거기에 불을 붙여? 얼마나 잘 싸우는가 보겠다.' 쩡! 쩡! 쩡! 그다지 속도감 있는 대결은 아니었다. 다만 일 초, 일 초가 그들의 평생 절학이 담긴 비기인 듯 했다. 잔뜩 기운을 머금은 병장기가 천운학의 검과 부딪힐 때마다 천지를 가르는 굉음이 퍼져 나왔던 것이다. 천운학은 오로지 방어로만 일관하고 있었다. '쳇, 보기보다 별 거 아니었잖아. 혈해진경을 익혔다고, 으름장을 놓기에 꽤나 강한 줄 알았더니만.' 척 하니 보기에 밀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순간이었다. 고여있는 연못처럼 잠잠하던 천운학의 기세가 갑자기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날카로울 듯한 살기가 전신에서 퍼져 나왔다. '무, 무서운 기세다. 움, 움직일 수가 없어.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그냥 몸을 풀고 있었던 거야?' 쩡! 천운학 녀석의 좌측으로 신형을 내려꽂던 남궁현이 더 빠른 속도로 튕겨 나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힘없이 떨궈지는 검은 이미 산산조각 깨져서 검자루만 남아 있었다. "천운학!" 주령령이 그의 위기를 감지하고 쏜살같이 날아갔을 때는 한 발 늦어 있었다. 휭, 서걱. 코웃음치며 가볍게 한 번 휘두른 그의 검날에 령령의 갈고리 꼬챙이들이 날아가 버렸다. 다른 손을 가볍게 내젓자 령령의 신형이 그대로 빙글 돌았다. "가소로운 그대, 용케도 한 목숨 부지하며 끈질기게 숨어있었군요. 다시 봐서 아주 반가워요." 퍼억. 여유롭게 한 마디 내뱉더니만, 령령을 그대로 차버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을 굴러 버렸다. 축 늘어진 게 바로 실신해 버린 듯 했다. 울컥. '저 자식이 감히!' 사태가 급변하자 서로 눈치를 주고받은 포연강과 교옥정 누님, 소화가 각자의 절초를 구사하며 하나가 되었다. 내뿜는 기운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가볍게 볼 수 없었는지 천운학도 바로 막기보다는 슬그머니 피하고 있었다. "니 녀석이 아무리 잘났어도 이것만은 막을 수 없을 거다!" 포연강이 한 마디 내지르며 공격을 하자 천운학의 안색이 아주 잠시동안 살짝 일그러졌다. 그러나, 오히려 금새 웃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감히 날 도발하는 것이오? 여전히 말하는 게 서툴군요. 도발이라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지요. 내가 한 수 가르쳐 주겠습니다." "……." "그녀는 그와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애까지 가진 듯 싶더군요. 복 받은 부부라고 해야할까?" "너 이 자식! 죽어!" 격분한 포연강이 폭갈을 지르며 대열을 이탈해 버렸다. 교옥정 누님과 소화가 다급하니 그 뒤를 따랐지만, 한 발 늦은 듯 했다. "당신, 정말 너무 단순해요." 쩡! 약간의 기세를 끌어 모은 천운학은 그대로 포연강의 도를 깨버렸다. 사방으로 비산되는 도조각 때문에 그들은 서둘러 신형을 뒤로 뽑아야 했다. 퍽! 퍽! 퍽! 그러나, 한 순간의 틈새는 치명적이었다. 뒤이은 발길질에 포연강부터 시작해서 교 누님, 소화까지 모두 바닥을 굴러야 했다. "아, 이거 시시하군요. 구룡급 네 명에 십성급 한 명이면 엇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죄송, 내 착각이었습니다. 하하하하."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는 이들이 듣던지 말던지 혼자 주절거린 그는 상쾌하다는 듯이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터뜨렸다. '젠장, 움직일 수가 없었어. 너무 압도적이야. 이게 바로 혈해진경을 익힌 자의 경지인가?' 천운학은 결전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멀쩡한 일행을 비웃 듯 둘러보았다. 그의 서글서글한 눈빛은 오히려 소름을 돋게만 만들었다. 구석으로 눈을 돌린 천운학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이런 남은 심사숙고해서 한 마디 해주는데, 감히 수면을 취하다니!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군요." '이런 썩을! 니가 기절시킨 거잖아.' 천천히 검을 들어올린 천운학의 손이 다시 떨어지는 찰나였다. 너무나 느릿느릿 움직이는 한 수였기 때문에 막으려고 하면 막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주 잠시동안 허리에 매어져 있는 두 철봉에 손이 갔었다. '쳇, 내가 왜? 나한테 녀석을 도울 이유가 없다.' 짧은 스침 하나로 손을 다시 거두어 들였다. 대신 당가희가 신형을 날려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잘 생각했다. 당가희, 당세옥이라는 자가 녀석에게 니 신변을 부탁한 모양이니 널 베지는 않을 거다. 운 좋으면 네가 사랑하는 남궁현도 덤으로 살려줄지도 모른다.' 약간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속으로 당가희를 응원했다. 휘잉. 서걱. '어? 어? 저럴 수가!' 천운학은 검이 들린 손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다. 도리어 눈에도 보이지 않는 속도로 휘둘러 버렸다. 당가희의 가냘픈 몸매가 비스듬히 반 조각나며 기울어졌다. 철퍼덕. 이등분이 된 그녀는 눈을 감지도 못하고 남궁현의 발치에 떨어졌다. 샘물처럼 솟구쳐 나오는 핏물이 남궁현의 백의를 시뻘겋게 물들였다. 검을 한 차례 휘둘러 묻어있던 핏물을 떨궈낸 천운학은 시선을 제갈혜에게로 돌렸다. "제가 기대했던 것은 당가희가 아니라 제갈혜 당신이었습니다. 남궁현을 위해서라면 한 목숨 아낌없이 바쳐줄거라 생각했는데……. 실망이 큽니다." "……."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든 제갈혜는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 짐작한 탓이리라. '제길, 죽음 앞에서 올바른 정신을 가진 인간이 있을 리 있겠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녀 못지 않게 나 또한 덜덜 떨려왔으니 말이다. "하하하하, 이런, 이런 겁먹었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전 맛있는 본 요리에는 먼저 손을 대지 않습니다. 살짝 입맛을 달궈주는 입가심 요리부터 천천히 음미하지요. 이렇게." 휘이잉. 그저 가볍게 휘두른 검이었다. 그 한 번의 휘두름에 멀거니 피해있던 월녀궁(月女宮) 여인들의 목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핏물을 찍찍 뿜으며 서있던 몸들이 하나 둘씩 중심을 잃어갔다. "저런, 입가심 거리도 안 되는군요." '이 녀석이!' 천운학(天雲鶴)의 다음 눈길이 녹 누님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매서운 기세에 몸이 굳었으나, 더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재빨리 그녀를 향해 내달렸다. 천운학의 검이 다시 휘둘러지려는 찰나, 동천위와 북천위의 신형이 일시에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래, 어쩌면, 북천위라면, 약간은 시간을 벌어줄지도…….' 그새 천운학의 등뒤에서 꿈틀거리던 인간들이 일어나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난 그저 그 짧은 간격동안 녹 누님 앞을 가로막고 서있을 생각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0-31 15:15:21 고친날 2005-11-01 08:36:31 읽은수 6391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80)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0] 북천위(北川衛)의 외눈에서 강렬한 독기가 배어 나왔다. 어떻게 보면 절박함의 극치를 달리는 듯도 싶었다. 이번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그의 굳은 각오가 엿보였다. '어라? 동천위(東川衛)는 어디로 간 것이지?' 그녀에 대한 의문을 품을 무렵 천운학과 북천위가 격렬하게 충돌……. 쉭, 서걱. 단 일 검이었다. 장난처럼 휘두른 그의 검에 북천위의 도와 목이 동시에 베어져 버렸다. 공중으로 살짝 치솟아 오른 북천위의 시선이 날 향하고 있었다. '아니, 내 등뒤를 향하고 있어. 마지막 순간만큼은 녹 누님을 눈 안에 담아가겠다는 듯이…….' "꺄아아아악!" 녹 누님의 비명소리가 더할 수 없이 애달프게 울려 퍼졌다. 하기사 목이 덜커덕 베어져 날아가는 장면에 기겁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녹 누님도 결국은 여자이지 않던가? 천운학이 이어서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가볍게 발 아래로 검날을 돌려 찍었다. "허억." '설마 동천위?' 녀석의 그림자 속에 숨어들었던 동천위가 가벼운 신음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었다. 왼쪽 가슴을 검에 관통 당한 채 거친 숨을 간신히 내뱉고 있었다. 단검을 쥔 양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성동격서(聲東擊西)라, 어리석군요. 구룡급 네 명에 십성급 한 명이 동시에 덤벼들었어도 저 꼴로 나뒹구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미흡한 실력으로 서툰 짓을 하니 이 꼴이 나는 게지요." "나둬. 그녀를 나둬라!"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싫은걸." 뿌드득. 녀석은 꽂혀있던 검날을 그대로 돌려서 비틀어 버렸다. 한 차례 격하게 떨던 동천위는 그대로 두 눈을 부릅뜬 채 잠들고 말았다. "너, 잘도!" 무지막지하게 화가 난 나는 일순간이나마 그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달려들었다. 북천위의 목이 날아가건 말건 하등 꺼려지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동천위는 달랐다. 그녀의 비참한 최후에 눈이 번쩍 돌아갔다. 청아한 기운이 전신에서 가닥다각 일어섰다. 이렇게 힘을 쥐어짜 내 혼신의 일격을 펼친 것은 처음이리라. 쩡! 양손에 쥔 철봉이 그의 검에 쩌꺽 자석처럼 달라붙기만 했다. 억지로 힘을 줘 떨어뜨리다가 비틀비틀 중심을 잃고 말았다. "이제야 보는군." "……." 쩡! 쩡! 쩡! 피식 피식 실낱같은 미소를 흘리던 녀석이 갑자기 검을 휘둘러 왔다. 도저히 내 안력으로는 그의 검을 볼 수 없었으나, 육감을 총 동원해서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바를 따라 철봉을 휘둘렀다. 그의 검에 내 철봉이 부딪힐 때마다 쩌릿쩌릿 엄청난 충격이 양팔을 통해 전신으로 밀려들었다. "그만 두십시오. 형님! 포기하겠습니다. 형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니, 이들을 그만 놔주십시오. 형님." 더 이상 천운학의 참살을 두고 볼 수 없었는지 천세후가 나서며 그를 만류했다.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이면 혼자서 도망가 버려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녀석이라고 무시하고 있었는데……. "내가 왜?" "형님이, 형님이 이렇게 화가 나서 단숨에 달려온 것은 바로 저 때문이지 않습니까? 이들은 그저 저의 청부를 받은 자들일 뿐입니다. 결국은 형님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이들입니다. 이 정도면 정신을 차렸을 겁니다. 제발 봐주십시오. 형님." '천세후.' "착각하지 마라." "네?" "널 뒤쫓아 온 것이 아니다. 사마장령 바보 녀석이야 네 놈에게 붙어있는 더러운 마교 종자 여인을 뒤쫓아 왔겠지만, 난 다르다." "……." "난 오히려 경계를 허술하게 해서 네 도주를 도왔다. 연공 중이었어도 들을 것 다 듣고, 내릴 지시는 다 내리고 있었단 말이다. 네가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그도 실은 내 부하 중 한 명일뿐이다." "설, 설마." "그렇다. 넌 미끼였다. 십중팔구 이 녀석들을 네 놈이 끌어내리라는 것을 짐작했기에 일부러 도망갈 길을 내준 것이다. 연공하는 내내 내심 걸려왔거든. 특히……." 휙, 쩡! "큭!" 쩡! 쩡! 그의 검과 부딪힐 때마다 격심한 충격이 양팔로 밀려들었다. 뼈가 부러질 듯한 통증이 전신을 파고들었다. '이게 혈해진경(血海眞經)의 힘인가? 제길, 그러니까, 그때 하나 정도는 챙겼어야지. 망할 현현자 영감 때문에…….현현자(炫炫者) 영감, 듣고 있다면 날, 도와줘야지. 이딴 싸가지가 활개치도록 놔둘 거요!' "정파 무림계의 정상에 우뚝 설 내가! 더 나아가 전 무림계를 장악할 내가! 하류 중의 하류, 밑바닥 점소이에게 경어를 써야했던 과거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뭐? 그런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냐? 이런 좀생이 같으니!' "금괴 한 상자를 내걸었지만, 이 녀석은 끝끝내 잡히지 않았다. 전대 은거 기인의 혼인지 뭔지가 이 녀석을 도왔겠지. 당시에도 혈해진경을 공으로 넘겨주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 혼 쪼가리는 시험하려 들고 있는 것이었다. 필시 혈해진경을 뛰어넘는 그 무엇인가가 이 녀석에게 전수된 게 틀림없었다." '별 오만 가지 상상을 다 하고 있었구만, 그럴 일 따위는 절대로 없어. 거저 줘도 안 배울 구타심결(毆打心訣) 따위로 천하제일무학, 혈해진경(血海眞經)을 넘을 수 있겠어?' "지금에야말로 확신 할 수 있다. 나의 적수는 이 세상 아래 사마장령 그 놈 뿐이다. 그러나, 점소이 이 놈은……." 천운학 녀석은 무슨 할 말이 많은지 계속 주절거리고 있었다. 날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이 상서롭지 않았다. 쩡! 쩡! 쩡! 쩌엉! "크아아악." 그의 연이어지는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느꼈다. 땅 속에 있던 그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다. 처음에는 기습인가 하고 흠칫했다가 녹 누님을 안아들고 사라지는 검은 인영에 안도하게 되었다. '저 녀석이 말로만 듣던 서천위(西川衛)인가? 다행이군. 이로써 녹 누님은 무사하게 되었다.' 서천위라고 짐작된 이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이를 악물고, 천운학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의외로 철봉은 부러지거나, 베어지지 않고, 녀석의 검을 무사히 받아내었다. 갑자기 천운학이 공격을 멈췄다. 그의 입꼬리 한쪽이 기이하게 올라갔다. "봤느냐? 총 십일 합이다. 궁극의 파괴 무학이라는 혈해진경을 응용해 펼쳐낸 나의 검을 무려 열 한 번이나 막아냈다. 생판 무공과는 인연이 없던 녀석이 반 년 사이 이렇게 성장했다. 우연일까?" '제길,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냐? 뭐, 길게 쫑알거릴수록 좋기야 하지. 그새 다른 인간들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날 테니까.' "이게 말하는 것은 오직 하나인 거다. 이 녀석에게는 뭔가가 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은 혈해진경의 천적인 것이다. 바로 나의 천적이란 말이다!!" 천운학의 검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의 절초가 펼쳐지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쳇, 막을 수 없다. 이것은 현현자 영감이 내 몸에 다시 깃든다고 해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은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가? 소방의 복수는커녕, 교옥정 누님과 혼인도 못 해보는구나.' 이제는 내 차례라는 것을 느끼며 울적한 심정으로 철봉을 고쳐 쥐었다. 은근히 쓰려오는 손바닥에 잠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철봉을 쥐고 있던 두 손바닥이 엉망진창으로 찢겨져 나갔음을 알게 되었다. 철봉 끝을 타고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를 공격하려던 천운학이 뭘 느꼈는지 다급히 검의 방향을 틀었다. 방어 자세를 취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한 줄기 회오리가 그의 전신을 격타했으나, 천운학의 방어를 뚫지는 못했다. "하하하하! 봤느냐? 이게 바로 무적 낭인의 필살검이란 거다. 최후의 진기까지 끌어올려 일격에 쏟아 붓는 나만의 절초란 말이다." '팽무진…….' 천운학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 한 순간의 틈을 만든 팽무진이 뒤로 신형을 날리며 내 앞에 내려섰다. "도망가라. 친구로써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뿐이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라." "하, 하지만,……." "공짜는 아니다. 먼 훗날, 나의 영전에 녀석의 목을 바쳐라. 그것으로 오늘의 빚은 잊도록 하겠다. 어서!" 팽무진(彭無盡)이 나서자 어딘가 은신해 있던 종리연(鐘理戀)까지 나타나 비수를 날렸다. 천운학의 안면이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이 피라미들이……. 낭인에 도둑이라, 점소이와 동급이라 할만한 하류이긴 하군." 쉬이익. 잠시동안 천운학의 신형이 모습을 감추었다가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종리연의 신형까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으나, 그녀의 안면이 왠지 창백해 보였다. "여, 여기까진가? 어서……, 어서 도, 도망……." "무진!" 힘겹게 심호흡을 몰아쉬던 팽무진이 어서 가라는 듯 외팔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챙그랑.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검이 바닥에 떨구어진 그 직후였다. 무진의 정수리 끝에서부터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박이 쪼개지듯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반으로 쪼개지는 것이었다. 피 분수가 사방으로 튀었다. 내 안면으로 그의 핏물이 뿜어져 내리는 게 느껴졌다. '무진…….' "팽무진!" 종리연의 비명소리가 산자락을 가득 메웠다. 코웃음치는 천운학의 모습이 보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저려왔다. 그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하류들의 최후란 이런 거다. 아무리 하늘을 향해 발버둥 쳐도 더욱 더 비참해지기만 할 뿐이지. 점소이 니 놈 또한 다르지 않다. 하늘로 도약하려 들었던 너의 시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늘이 선택한 것은 존귀하디 존귀한 바로 나, 나의 의지가 곧 하늘의 의지, 너의 존재를 이 세상에서 말살해 보이겠다." 천운학의 검에 다시 한 번 천지를 아우르는 기운이 몰려들었다. 그의 기운을 멀쩡히 버텨내는 검을 보니 보통 검이 아닌 듯 했다. '보검? 그런 게 존재하긴 했구나.' 그에 대한 분노로 부들부들 떨자 오히려 전신에서 솟구쳐 나온 분노의 기운과 청아한 기운이 엉망으로 뒤섞여 들었다. 서로 융합하지 못하고 내부를 진탕으로 맴도는 게 느껴졌다. '쳇, 하필 이런 때 주화입마냐? 정녕 녀석은 하늘의 의지를 잇는 자란 말인가? 소방, 팽무진, 미안하다. 나도 니들 뒤를 따라야 할 것 같다.' 두 기운에 얽혀 전신이 부르르 떨리는 동안, 천운학의 검이 횡으로 가로 그어져 왔다.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막을 도리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또 하나의 인영이 그와 나 사이에 껴들었다. '울금향? 소화? 아니면…….' 쩌어어엉! 어떻게 막았는지는 자세히는 알 수가 없었다. 단지 손목 보호대 조각이 산산이 박살나 흩날리는 것을 보고는 날 막아섰던 것이 주령령임은 알아챌 수 있었다. '이 미친 여편네가 왜?' 주르르르륵. 뒤로 한껏 떠밀려진 령령의 신형에 휘말려 나까지 떠밀려 지고 말았다. 아주 잠시동안 위기를 모면했나 했다. 그러나, 하늘이 날 버렸다는 점에 의심할 구석은 없었다. 주르륵 밀린 뒤편은 하필이면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려운 절벽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령령의 신형이 날 짓누르며 떨어져 내려서 바닥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주령령은 천운학의 공격을 막아낸 순간 기절해버린 모양이었다. '제길, 절벽하면 기연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잖아. 그런데, 내게는 오히려 죽음으로 이어지는 지름길로 밖에 안 보이는구나. 흐흐흐, 안 되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절벽 끝에 서서 내려다 보는 천운학의 안면에 미소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마무리를 짓겠다는 듯이 검을 들어올린 찰나였다. 부우우웅. 그의 배후에서 누군가가 대도를 찔러오는 게 언뜻 보였다. 낯선 안면이었지만, 대도를 휘두르는 자세만은 낯익어 보였다. '가짜 수라삼살 중 도살? 그렇군. 사마장령이구나. 그 역시도 우리의 행보를 눈치채고 있었던 말인가? 어쨌거나 뜻하지 않게 목적은 달성했구나. 정사대전이 일어나겠군.' 허무했다. 정사대전이 일어나건 말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소방이 죽은 것도 모자라 팽무진마저 죽고 말았다. 하필이면 내 눈앞에서 날 대신해 방패막이를 해주다가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해 버렸다. 그가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그가 죽고 난 지금에야 느낄 수 있었다. 평상시에는 공기처럼 편하게 느껴졌기에 오히려 그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안하다. 팽무진.' 이제 내가 그들의 뒤를 따를 차례였던 것이다. '나의 영전에 녀석의 목을 바쳐라!! 나의 영전에 녀석의 목을 바쳐라!! 나의 영전에 …….' 슬그머니 눈을 감으려다 머릿속을 울리는 고함 소리에 눈을 번쩍 뜨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머릿속을 울리는 것은 팽무진의 의지였다. 끝없는 허탈감과 끓어오르는 분노에 휘말렸다. 떨어져 내리면서도 손을 뻗었다. 절벽 끝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천운학을 향해 손을 뻗고 휘둘렀다. '천운학, 천운학, 천운학, 천운학, 천운학,…….' "천! 운! 학!" 마지막으로 엉망진창이 된 전신의 기운을 끌어 모아 소리를 버럭 질렀다. 급격히 힘이 빠진다. 눈이 스르륵 감겨진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게 느껴진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1-01 15:23:29 고친날 2005-11-01 15:23:29 읽은수 6587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81)-광소(狂笑)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1] 광소(狂笑) 새빨갛다. 온 세상이 노을이라도 진 것처럼 새빨갛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한없이 새빨갛기만 하다.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켜 본다. 바로 옆에는 주령령이 죽은 듯 눈을 감고 누워 있다. 그녀의 턱밑에 손을 댔다가 섬뜩한 소름이 돋았다. 밤하늘처럼 고요하고,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것이다. '하기사 그런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살아있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그런데, 난 어떻게 살아있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턱밑에도 손가락을 찔러 넣는다. '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아. 차, 차가워.'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가 다시 한 번 더 놀란다. 내가 서있는 바닥은 평범한 바닥이 아니다. 강의 표면처럼 매끄러울 뿐만 아니라 내가 움직일 때마다 동그란 파동을 그리며 퍼져 나간다. '혹시 이승을 떠나게 되면 저승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떨어져 내린다는 망자(亡者)의 바다인가?' 언뜻 들은 풍월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저승에 대한 수많은 억측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는 것은 나 또한 죽었다는 소리로구만. 하필이면 주령령과 같이 죽다니 참으로 묘한 운명이로군.' 촤아악, 촤아악, 촤아악……. 느닷없이 노 젓는 소리가 들려온다. 령령과 날 태울 배인가 하여 시선을 돌려본다. 돛도 없이 흘러가는 조각배가 보인다. 예닐곱 명 타면 다 차버릴 조그마한 조각배다. 노를 젓는 뱃사공은 새까만 삿갓에 새까만 도포자락을 걸치고 있다. '저승사자인가? 쳇, 멀리서 봐도 칙칙해 보이는구만. 이왕이면 노출 만점의 아리따운 아가씨가 친절하게 안내해주면 좋을 텐데. 그럼, 저승 가는 마음도 편할 테고, 이승에 대한 미련도 쉽게 끊어지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어?' 그런데, 뜻밖에도 저승행 조각배는 우리를 본 체 만 체 지나친다. 알고 보니 만선이다. 빈자리가 없는 조각배다. 조각배 안에는 이미 열 명 남짓한 망자들이 고개를 수그리고 앉아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옆모습들을 흘겨보니 왠지 낯들이 익다. '어? 팽무진이잖아! 당가희, 동천위, 북천위, 그리고, 끙 하여간 이름은 모르겠지만, 월녀궁 아이들이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지른다. "어이, 팽무진! 팽무진! 나야, 나!" 팽무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눈자위가 새까맣고, 안면에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진 게, 망자 티가 확 나타난다. 내 소리에 당가희가 슬며시 돌아봤다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랐는지 고개를 휙 돌린다. '죽어서도 생전 성격은 변하지 않는구만.' 반면에 북천위의 안면에는 수심이 가득하다. 무엇이 그렇게 걱정이 되는 걸까? 그의 곁에는 동천위가 행복한 표정으로 붙어있다. 도저히 망자처럼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어랍쇼, 이게 누구야? 작삼 자네로군." 팽무진이 날 보고는 반갑다는 듯 씨익 웃는다. 아무리 망자라 해도 친구는 역시 친구다. "나도 죽은 모양이야. 수십 장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졌으니 무사할 리가 없지." 뒷머리를 슬그머니 긁적인다. 내 방패막이를 해주며 죽은 녀석에게 예의가 아니다. 할 말이 없었다. "아냐, 네 녀석은 아직 안 죽었어. 죽은 녀석들은 이마에 '망자의 표식' 을 받는다고. 자네 이마는 아주 깨끗해. 죽을람 백 년도 더 남은 녀석이 헛소릴 하는군." "백, 백년?" "그래, 저승사자 명부를 슬쩍 훔쳐다 봤지. 명이 보통 인간의 두 배는 되는 것 같던걸." "……." "내가 남긴 유언 잘 기억하라구. 저승에 떨어지면, 고수고 하수고 없어. 진정한 평등만이 존재하지. 자네가 천운학 그 자식을 저승으로 떨궈주면, 내가 다시 한 번 지근지근 밟아줄 테니까 아무 염려할 것 없어." "……." "흠, 진미희 소저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구먼. 언젠가 강제로 품어서라도 내 여자로 만들어야지 하는 야망이 있었는데, 영영 꿈으로만 남는군. 그리고……." "……." "종리연 녀석한테 나 잊고 좋은 남자 만나라는 말 좀 전해줬으면 좋겠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란 녀석은 종리연을 그저 뒤풀이 노리개로만 여긴 것 같아." 신기전 화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그의 입심에 질려 듣기만 하던 나는 기어이 한 마디 내지르고 만다. "킁, 왜 이리 이승에 대한 미련이 많아? 진미희가 너한테 호락호락 넘어올 여인이냐? 같은 남자로써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만." "……." 이번에는 녀석이 침묵을 지킨다. 팽무진이 얼마나 진미희에게 빠져 있었는가는 익히 잘 아는 바이긴 했다. 씁쓸한 일이다. "쳇, 종리연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라. 녀석은 진심으로 행복했을 테니까. 강한 애다. 네가 없어도 좋은 남자 만나 백년 만년 해로할 거다. 자기 앞가림 잘 하는 녀석이다." "그런가? 후훗,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 이제야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겠어. 그럼, 먼 훗날에 보자고, 수라혈황(修羅血皇) 나으리. 하하하하!" 팽무진은 무엇이 그리 통쾌한지 박장대소(拍掌大笑)를 터뜨리며 멀어져 갔다. 어느 구석을 봐도 망자로 보이지 않는 놈이다. 저승에 가서도 여전히 유쾌하게 살아갈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한 줄기 쓴 미소가 배여 나온다.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내린다. '수라혈황(修羅血皇)? 별 헛소리를 다 하는구만.' 그들이 탄 조각배가 멀어지면서 다른 조각배가 또 다가온다. 팽무진 말대로라면 령령과 나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럼, 저 조각배도 우리를 지나쳐서……. 그 저승사자는 자신의 빈 조각배를 보며, 한숨만 푹푹 내쉰다. 잠자듯 누워있는 령령과 일어나 성큼성큼 돌아다니는 나를 보더니만, 까만 삿갓 아래로 눈을 반짝였다. '아니, 저 저승사자가 미쳤나? 왜 날 먹음직스런 시선으로 노려봐?' 까만 삿갓은 갑자기 우리 쪽을 향해 미친 듯이 노를 젓는다. 신명이라도 난 듯 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얼이 빠져 발이 묶인 찰나 매서운 바람 한 줄기가 불어닥친다. 콰쾅! 까만 삿갓의 저승사자가 저만치 나가떨어진다. 조각배는 말 그대로 조각조각 장작 쪼가리가 되어 버린다. 저승에서조차 령령의 무시무시한 장과 각은 그 위력이 감하지 않아 보인다. 그녀의 단호한 시선이, 왕방울처럼 커다란 눈망울이 새빨간 천지 아래 번득인다. '끙, 얘는 언제 일어났데? 그냥, 계속 잠이나 자지. 니가 더 저승사자 같잖아.' 이번에는 날 돌아본 주령령이 한 발자국씩 걸음을 떼며 다가온다. 그녀가 발을 뗄 때마다 퍼져오는 물결 파동조차 날 섬뜩하게 만든다. 서서히 뒤로 물러서던 나는 발이 꼬여서 그만 넘어져 버린다. "그, 그만해!" 너무나도 겁이 난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번쩍. 우르릉! 콰쾅! 툭툭, 후두두둑, 쏴아아아아……. 눈앞에 번쩍이는 번개에 이어 천둥이 세상을 진동시켰다. 이미 한두 방울 씩 떨어지고 있었을 비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쳇, 또 꿈이었나? 너무, 너무 현실 같은 꿈이었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흠칫 놀랐다. 옷매무새가 엉망이 된 령령이 죽은 듯이 누워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해서 그녀의 턱밑으로 슬며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엥? 이상 없잖아. 멀쩡하구만. 그나저나 어떻게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무사했을까?' 절벽 위로 시선을 올려다보니 너무 까마득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천운학과 사마장령의 충돌 상황도 종료된 것 같았다. 몸을 일으켜 일어났……. 뿌드드드득. "아코." 전신이 욱신욱신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떨어질 때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그러고 보니까 내 위에 령령이 있었잖아. 으그극, 주령령이 멀쩡한 이유를 알겠군.' 사방을 둘러봐도 절벽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떨어져도 이렇게 운 없는 곳으로 떨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쏴아아아아. 그래도 후두두둑 떨어져 내리는 비가 너무 시원했다. 땀과 먼지로 뒤덮였을 전신이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이, 이것은……?' 내 발 아래로 시뻘건 핏물이 고여 들었다. 누구의 피인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전신에서 경련이 일었다. 무릎에서 털썩 힘이 빠져나갔다. 그제야 눈앞에서 반으로 쪼개져 나간 팽무진의 최후가 끝없이 그려졌다. 종리연의 비명소리가 귓고막을 무한으로 메웠다. "하, 하, 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웃었다. 미친 듯이 웃었다. 아니 미칠 때까지 웃는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미치고 싶다. 차라리 미치고 싶다. 친구의 죽음을 발판 삼아 살아남은 나에게 온전한 정신을 가질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떻게 나란 인간은 잠시동안일망정 그의 죽음을 잊었단 말인가? 어떻게 그의 피를 뒤집어쓰고 곤하게 잠들 수 있었단 말인가?' "하하하하하하하하……."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깎아지르듯 올라간 절벽 사이사이를 메웠다. 말 그대로 광자의 웃음, 광소(狂笑)였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1-02 15:14:12 고친날 2005-11-03 14:34:44 읽은수 6837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8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2] 한참동안 미친 사람처럼 광소를 터뜨리던 나는 잠자코 시선을 돌렸다.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주령령,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천운학의 마지막 필살기를 맨몸으로 맞았지? 손목보호대가 깔끔하게 산산 조각날 정도였다면, 이년 내부는 엉망이 되었을 거야. 아무리 내 몸을 통해 완화되었어도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 충격이 이만저만 아닐걸.' 적어도 당분간 령령이 깨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자 평상시에는 마음 속 깊이 꾹꾹 묻어놨던 억하심정들이 한꺼번에 솟구쳐 나왔다. 팽무진의 죽음으로 터져 나오는 공황을 풀어낼 상대가 필요했다. "주령령, 이제 생각해보니 널 만나고 나서부터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 같구나. 그렇지? 그렇지?" 가만히 령령의 뺨을 거칠게 어루만졌다. 부드러우면서도 매끄러운 살결이었다. 아무 반응이 없자 자신감을 얻었다. 확! 불이 당겨졌다. 찰싹. 있는 힘껏 그녀의 싸대기를 갈겨 버렸다. 령령의 고개가 휙 틀어졌다. 평소에 발산되던 호신강기(護身剛氣)가 사라져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약해져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령령의 새하얀 볼 살에 푸른 멍이 번졌다. "크크크, 그러게 마음 좀 곱게 쓰지 그랬어? 다 자업자득(自業自得), 니 무덤 니가 판 격이지." 찰싹! 찰싹! 찰싹! 아예 그녀의 배 위에 올라앉아 마구 싸대기를 날렸다. 그녀의 고개가 좌우로 휙휙 돌아갔다. 입술이 터졌는지 실낱같은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신이 났다. 아무 거동도 못 하고 죽은 듯 누워있는 령령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큭큭큭, 령령,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겠지? 그동안 잘도 날 바보 취급 해왔겠다. 수련? 그 따위 빌어먹을 핑계, 갖다버려! 다 니 년 화풀이 대용으로 당해온 것, 누가 모를 줄 알구? 단지 참았을 뿐이다. 참았을 뿐이라고!" 그녀의 뺨을 향해 손을 쳐들었다가 멈췄다. 오동통한 입술 사이로 흐르는 피와 퍼렇게 멍이 든 살결을 보자 분기가 약간 누그러졌다. 그만 손을 거두고 말았다. 대신 령령의 가느다란 목 위에 두 손을 모았다. 미끄러질 듯 매끄러운 목줄기였다. 가만히 움켜쥐고만 있어도 더할 나위 없이 흥분되었다. "너만, 너만 아니었다면 적어도 팽무진을 만나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야. 그뿐 만인가? 소방의 뒤를 뒤따라가는 바보 같은 짓도 저지르지 않았을 테지. 결국 다 니 년 때문이었어. 니 년 때문에 모두 죽은 거야!" 그동안 쌓여있던 모든 억하심정이 두 손아귀 끝으로 몰려들었다. 손끝이 벌벌 떨려왔다. 흉내만 내려던 것이 나도 모르게 혈압을 올려 버리는 바람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 버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조르면 이 세상 하직할 것이 확실했다. 우르릉! 쾅쾅! 다시 한 번 거칠게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다. 빗줄기가 한 층 더 거세졌다. 깜짝 놀라 손을 거둬들였다. "하악, 하악, 하악……." '내가 뭐 하는 짓이지?' 가슴이 쿵쾅거렸다. 잠시동안이었지만, 령령을 죽일 뻔했다. 어쩌면 천운학을 향한 분노까지 덤으로 곁들였는지 모른다. 기이한 심정이 들었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안하무인 주령령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묘한 흥분을 느꼈다. "큭큭큭큭, 기억해? 오래 전에 니 년한테 반죽음을 당하고서 맹세했었던 말이 있었지." "……." 앞으로 며칠 간은 거뜬히 실신해 있을 주령령이 대답을 할 리 없었다. 기분이 무척 유쾌해졌다. "언젠가는 네 년을 홀라당 발가벗겨서 이 세상에서 제일 비참하게 유린해 버리겠다! 전신의 살가죽을 산 채로 벗겨내어 소금밭 위에서 죽을 때까지 구르게 해주겠다!! 토막토막 잘라서 길거리 개 먹이로 뿌려버리겠다!!! …… 아마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해?" "……." 주르륵 핏줄기를 흘러내리는 령령의 입술은 한치의 미동도 없었다. 기다란 속눈썹만이 바람을 따라 까딱일 뿐이었다. 빗물이 령령의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새까만 머릿결과 전신에 간신히 붙어있는 헝겊쪼가리들을 적셔주었다. 평상시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매혹적인 자태로 재 탄생하고 있었다. "큭큭큭, 생선도 이런 생선이 또 없겠군. 특급 횟감으로 만들어도 손상이 없을 싱싱하고, 매끈한 생선이 '나 잡아 잡수.' 하고 도마 위에 축 늘어져있는 꼴이라니 말이다. 요리사 입장에서 보면 더 할 수 없이 훌륭한 요리 감인 거다. 우하하하하!" "……." 여전히 주령령은 침묵을 지켰다. 무반응의 그녀를 상대로 혼자 화내고, 때리고, 떠들자니 약간은 우울해졌다. 무섭게 치솟던 분노까지 조금 수그러들었다. "뭐, 좋아. 내가 크게 양보하지. 세 가지 중에서 두 가지는 감해주마. 그저 너덜너덜 비참하게 유린한 후에 편하게 안락사 시켜주겠어. 덤으로 무덤까지 만들어 주지. 난 너와 달리 관대한 남자니까." 갑자기 그녀의 시퍼런 입술가에서 목줄기까지 흐르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꽤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허리를 숙였다. 목줄기 끝에서부터 피를 핥아 내기 시작했다. '이게 령령의 피맛이로군. 내 피와 똑같은 맛이다. 그녀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란 말이다. 이 년 때문에 그동안 내가 흘린 피에 비하면 약소하지만, 이걸로 봐주지. 난 관대한 남자니까.' 핏줄기를 따라 할짝거리다가 령령의 입술가에 닿았다. 약간은 망설이다가 가볍게 입맞춤을 해줬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입술이었다. 내 결심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으나, 아주 약간 마음이 흔들렸다. "네 입으로 분명히 말했지? 아무 때나 덤벼보라고,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으렷다? 그러니 저승 가서 내 탓 따위 하지 말길 바래." 괜스레 변명을 늘어놓는 추태까지 보이고 말았다. 찌익, 찌이이익. 맞바로 죽은 듯 누워있는 령령의 옷자락들을 뜯어내었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누더기 쪼가리라 쉽사리 잘 뜯어졌다. 가슴가리개를 뜯어내자 탐스런 가슴이 출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꿀꺽. 눈동자가 커지며 침이 넘어갔다. 손이 떨려왔다. 찌이이익. 마지막으로 고의마저 뜯어내자 더 이상 걸쳐진 게 없었다. 계곡 사이의 새까만 풀숲이 생각보다 무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자극적이었다. 쏴아아아. 그녀의 새하얀 나신 위로 빗물이 쏟아져 내렸다. 수려한 곡선을 타고 빗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아름다웠다. 여태까지 내가 지켜봐 왔던 주령령(周鈴鈴)의 자태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섬섬옥수(纖纖玉手), 가냘프고 고운 여자의 손. 무공을 펼칠 때 령령의 손은 최악의 흉기다. 지금은 그저 가늘고 기다란 미녀의 손일 뿐이었다. 세요설부(細腰雪膚), 가는 허리, 눈처럼 흰 피부. 다 벗긴 령령의 허리는 정말로 가늘었다. 피부는 눈처럼 새하야면서, 뽀얗게 빛이 나는 착각이 일었다. 기향패훈(肌香佩薰), 피부에서 발산되는 향기, 령령의 살결에서 피어오르는 울금향은 독특했다. 성욕을 자극하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오발선빈(烏髮蟬嬪), 까마귀처럼 검은머리, 매미 날개 같이 옅은 귀밑머리. 령령의 머리처럼 새까만 칠흑의 머리는 결코 흔하지 않으리라. 아미청대(蛾眉靑黛), 짙고 푸른 눈썹. 령령의 눈썹은 명필가의 붓으로 온 정성을 다해 그린 양, 시원하게 그어져있었다. 주순호치(朱脣皓齒), 붉은 입술, 새하얀 이. 오히려 시퍼래져서 연보라빛으로 청순하게 물든 령령의 입술은 매우 매혹적이었다. '휴우, 안타깝군. 좀 있으면 이 나신의 주인이 이승을 떠나리라 생각하니…….' 도마 위의 생선처럼 쭉 뻗어있는 주령령의 나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니 마음이 약해질 뻔했다. 그냥 덮어두고 이대로 넘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빗물을 타고 바닥에 고여든 시뻘건 핏물에 시선이 머무르자 전신의 피가 거꾸로 도는 걸 느꼈다. 이승을 떠난 친구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날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주범, 주령령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큭큭큭, 한심하군. 기회가 왔는데, 마음이 약해져서야 쓰나? 몇 번이고 날 죽이려 들었던 이 세상 최악의 냉혈마녀(冷血魔女)다. 잊으라고 해도 도저히 잊을 수 없지. 돌려주겠어. 쌓인 만큼 모조리 돌려주겠어!"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1-03 02:23:03 고친날 2005-11-03 03:06:41 읽은수 7774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8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3] 철퍼덕. 걸치고 있던 윗도리들을 모조리 벗어 던졌다. 물에 젖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령령의 기다란 허벅지를 살짝 열어제쳤다. 부드럽고도 까만 수풀이 듬성듬성 돋아 있어 은밀해야할 계곡이 은밀하지 않았다. 호흡이 몹시 가빠졌다. 그 위로 가만히 상반신을 포개었다. 안면을 령령의 가슴사이에 묻어버리고는 두 손바닥으로 양 젖가슴을 거칠게 주물럭거렸다. 너무나도 탐스러운 젖가슴은 손아귀 안에 다 들어오지 않았다.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양 가슴의 돌출부를 슬슬 비볐다. '어라? 꼿꼿이 서네?' 동시에 령령의 몸에서 잔 경련이 인 듯 싶어 그녀로부터 다급하게 신형을 일으켰다. 숨까지 멈추고 가만히 추이를 살폈다. 의식이 깨어나려는 조짐인지, 자연스럽게 스쳐 가는 생리적 경련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에 하나,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선택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변명 따위 통할 리 없는 차가운 여자, 반년동안 그녀를 겪어온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그녀가 날 죽이거나, 내가 그녀를 죽이거나, 둘 중 하나! 어차피 자존심 강한 그녀는 반드시 날 죽이려 들 거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그녀를 죽여야 한다. 평상시라면 상상 자체가 불가능할 터! 그러나, 내력이 바닥난 지금의 령령이라면, 충분히 시도할 가치가 있지.' 두 눈에 살기를 띄우고 가만히 기다렸다. 만에 하나 깨어나는 기척이 있다면 전력을 다해 짓이겨버릴 작정이었다. 절벽 가에 굴러다니는 두 철봉에 시선을 두었다. '호신강기가 사라질 정도로 내력이 미약해졌다. 철봉 하나만 쥐어져있으면 저승 마차 태우기는 어렵지 않다. 그대로 머리통을 날려버릴 테니까.' 한 식경은 지켜봤을까? 주령령은 여전히 죽은 듯 침묵을 지켰다. '옛 성현 말씀에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보라 했으렷다?' 살금살금 주령령 곁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왼쪽 젖가슴 아래로 손바닥을 찔러 넣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령령의 오른쪽 젖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봉긋 솟아있는 분홍빛 유두 끝을 집게손가락으로 슬며시 돌리며 짓눌렀다. '아직은 심장 박동에 변화가 없다. 이왕 두드려 보는 돌다리, 조금 더 확실히 두드려서 나쁠 것 없겠지.' 이번에는 손가락 대신 혓바닥으로 할짝할짝 핥았다. 시선을 령령의 안면에 박아두고는 세세하게 살폈다. 오른손은 여전히 그녀의 왼쪽 가슴 위에 올려놓은 채였다. 변화가 없었다. '좀 더 강하게 나가볼까?' 봉긋 솟은 분홍빛 유두에서 혓바닥을 떼었다. 대신 탐스런 젖가슴 그 자체를 미친개처럼 물어 버렸다. 오래 전 령령의 허벅지를 물었을 때에 준할 정도로 강하게 물어 버렸다. 찝찌름한 피가 혀에 닿았을 때가 돼서야 입을 떼었다. 동그란 젖가슴에 내 이빨자국이 흉하게 남아버렸다. 이렇게 온갖 모욕을 줬는데도 박동에 이상이 없었다. 령령이 제 정신을 차리고 있다면 흥분하지 않을 리 없었다. 방금 전의 잔 경련은 그저 자연스럽게 스쳐 가는 생리현상이었던 것이다. "큭큭큭, 난 또 깨어나려는 줄 알고, 괜히 긴장했잖아. 하마터면 맞바로 죽일 뻔했어. 맘껏 유린하지도 못 하고 그냥 죽여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가벼운 처사지. 암, 암, 그동안 쌓인 게 얼마나 많은데……. 흐흐흐, 하하하하하하!" 긴장이 풀려서인지 미친 놈 마냥 피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정말 실없는 웃음이었다. 내심 이러다가 정말로 미쳐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일 정도였다. 그 불안감을 잊기 위해 오히려 더욱 더 강렬하게 웃어야만 했다. "하아, 하아, 하아 너무 웃었나? 골이 다 띵할 정도로 숨이 차 오르는군. 크크크, 이제 도마 위의 생선을 본격적으로 시식해 보실까?" 급하게 바지 가랑이를 까 내렸다. 그동안 쌓인 억하심정들을 마음껏 쏟아 내버릴 작정이었다. 령령의 계곡 사이 은밀한 곳으로 발딱 일어선 가운데 다리를 힘차게 찔러 넣었다. 주르륵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갔다. 전신에 이루 형용하기 힘든 묘한 쾌감이 번져나갔다. 그 이후부터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미친 듯이 돌진, 또 돌진, 그 뿐이었다. 마치 오랜 세월 배꼽을 맞춰온 듯 거부감 하나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넋이 나갈 듯 헐떡이며 돌진하는 동안, 령령의 나신에서는 몇 차례의 잔 경련이 일어났다. 왠지 계곡 사이 은밀한 곳이 내 돌진에 맞춰 조여오는 듯한 느낌도 들었으나, 령령의 실신에 대한 의구심을 풀어낸 지 오래였다. 더 이상의 의심은 불필요했다. 오로지 전신을 아우르는 유희만이 있을 뿐이었다. "헉헉헉헉헉헉, 허어억!" 절정의 쾌감이 온 몸으로 짜릿하게 퍼져 나갔다. 다른 여자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색다르면서도 기묘한 쾌감이 짜르르르 퍼졌다. 그대로 령령의 두 젖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흥분을 자아내는 그녀의 살내음이 한결 강해진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령령의 젖가슴 왼편 아래에 손을 찔러 넣었다. '쳇, 뭐야. 똑같잖아.' 상반신을 세우고는 심호흡을 내뱉었다. 실신해 있는 주령령의 미모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그대로 물어뜯고 싶다는 욕망을 느낄 정도였다. '킁, 개냐?' "주령령, 한 번으로 끝날 거라 착각하지 마라. 내 체력이 얼마나 질긴지 너도 익히 알고 있겠지? 내가 완전히 녹초가 될 때까지 계속 휘저어주마. 오랜 시간 쌓인 내 울분을 모조리 발산해주겠다 이 말이다." "……." 물론 그녀의 대답을 기대한 바는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라도 한 마디 내뱉으며 흥을 돋구고 싶었던 것이다. '엉? 새침한 안면이 마치 내키는 대로 먹으라는 것처럼 보이는걸. 크크크. 좋아, 아주 좋아.' 다시 가벼운 애무부터 시작했다. 한동안 쉬었던 가운데 다리는 금새 일어섰고, 곧바로 돌진을 할 수 있었다. 거칠게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행하는 그녀와의 관계는 묘한 정취와 흥분을 안겨줬다. 내 인생 통 털어 이렇게 격하고 거칠게 발산한 날이 없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리라. 도대체 몇 번의 절정에 이른 것일까? 처음에는 하나, 둘 세면서 절정을 맞이했으나, 어느 순간에서부터인가 세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발정 난 수캐처럼 그 행위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주령령에게 처절하게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허리를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제길, 내 체력의 한계는 어디냐? 이제 그만 하고 싶다. 이제, 이제 그만하고 싶……. 아냐, 아냐! 아직 부족해. 내가 받은 수모와 고통을 이 정도로 무마시키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고!" 처음에는 그저 유린했다는 흔적이 남을 정도로 서너 번하고 말 작정이었다. 주령령과 속궁합이 똑 맞아떨어짐을 느끼고는 정신 없이 돌진해버린 게 대략 두 시진 전 일이었다. 직후 한 시진동안은 귀신에게라도 홀린 양 쾌감에 온 신경을 내맡겨 버렸다. 령령의 절대적 마력에 빠져 헤어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다음 한 시진부터는 체력전이었다. 그저 체력이 다 하면 그만둬야지, 그만둬야지 하던 게 지금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체력은 바닥을 기고 있었으나, 복수라는 일념 하나로 억지를 쓰는 중이었다. "허억, 허억, 허억, 끄어어억." 철푸덕. 너무나도 지친 나머지 마지막 절정에 이르자마자 뒤로 나자빠졌다. 한동안 심호흡을 내쉬다가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무 생각 없이 바닥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흠칫 몸서리치고 말았다. 바닥이 온통 시뻘건 핏물투성이었다. 돌진에 몰입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비가 그쳐버렸다. 두 시진 전 팽무진의 피가 이렇듯 깔끔하게 남았을 리 없었던 것이다. '팽, 팽무진 녀석의 원한이 그렇게 깊단 말인가?' 아주 잠시동안 머리카락이 삐쭉 솟구치는 것을 느꼈으나, 길지 않았다. 핏물의 근원지가 어딘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령령의 허벅지 사이 계곡에서부터 유출되고 있었다. 아마도 나의 무리한 돌진으로 인해 그녀의 은밀한 곳이 심각한 타격을 받은 듯 했다. '끙, 두시진 동안이나 해버렸으니 몸 성할 여인이 어디 있겠어?' 핏물 속에는 절정의 분비물들이 너저분하게 섞여 있었다. 비릿한 피냄새와 기이한 밤꽃 냄새가 코끝을 자극해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찔꺽찔꺽 내뿜었는지 연못 위에 두둥실 떠다니는 개구리 알이 연상될 정도였다. 다시금 허벅지 사이 계곡으로부터 시뻘건 피를 뿜으며 실신해 있는 령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흐리멍덩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미쳐있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내가 무슨 짓을……." 두 시진동안의 길고 격한 정사로 끝없이 치솟던 분노가 상당히 희석되었다. 정확히는 분노의 대상이 틀렸음을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수련이었어. 가끔 령령 이 년이 미쳐 날뛰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난 아직까지 살아있다구. 도대체, 도대체 왜 주령령에게 화풀이를 한 거지?" 비로소 내가 한 짓이 얼마나 간사하고, 패악무도한 짓인지 깨닫게 되었다. 팽무진을 죽인 것은 천운학이었다. 주령령은 오히려 날 감싸다가 같이 이 곳에 처박히지 않았던가? "그동안 날 안하무인으로 무시해왔던 그 자체로 밉상 맞은 여자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러나! 그게 죽일 이유까지는 되지 않았다. 난, 왜? 어째서?" 갑자기 밀려드는 후회와 자책감으로 가슴이 떨려왔다. 나신인 채로 핏물 속에 누워있는 주령령을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아직도 죽은 듯 침묵을 지키는 그녀를 내려보자 시야가 흐려졌다. "미안,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목이 메어와서 제대로 말을 잇기도 힘들었다. 툭, 투투툭. 나도 모르게 눈물이 또르륵 떨어져 내렸다. 억울해서, 아파서, 화가 나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었다. 내 일생 처음으로 제대로 흘리는 참회의 눈물일 것이었다. 정말 난 몹쓸 놈이다. 어쩌면 천운학보다 더 나쁜 놈일지도 모르겠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1-04 14:14:32 고친날 2005-11-04 14:14:32 읽은수 7118 [ 10 K ] 제목 점소이 작삼(84)-살막의 추격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4] 살막의 추격 천운학과의 결전으로 여기저기 찢어졌던 주령령의 옷자락은 내 손길을 거치면서 넝마가 된 상황이었다. 도저히 옷이라고 불릴 만한 게 아니었다. 내 옷가지 여분이 들어있던 봇짐마저 절벽 위에 남겨놨던 모양이었다. "휴우, 하는 수 없군. 급한 데로 ……." 우선 마의 윗도리를 령령의 상반신에 입혔다. 넝마 조각 중에서 그나마 면적이 되는 쪼가리 두 개를 모아 매듭을 지었다. 그것을 그대로 령령의 가느다란 허리에 두른 후 마무리 매듭을 지었다. 그럭저럭 치마 형태가 만들어졌다. "쩝, 나중에 령령이 깨어나면 수상하게 여길 거다. 필시 꼬치꼬치 캐물을텐데, 뭐라고 핑계를 대야하지? 이것 참." 일단 정신을 차리고 나니 앞으로 닥쳐올 난관들이 걱정되었다. 제일 큰 난관은 령령의 의구심이었다. 그녀가 의심을 품으면, 남궁현 녀석까지 덩달아 난리 호들갑을 귀찮게 떨 것이 분명하다. '물론 녀석이 무사하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지만.' 막판에 사마장령이 개입했기 때문에 그 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모두 무사히 탈출했기를 바랄 뿐이었다. '남궁현은 빼고.' 녀석이 맘에 안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따져봐도 나와 상극을 달리는 녀석이니 말이다. 불현듯, 팽무진의 마지막 순간이 뇌리를 스쳐갔다. 눈앞에서 녀석의 몸이 반으로 갈리는 참상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팽무진의 마지막 유언이 끝없이 메아리쳤다. '나의 영전에 녀석의 목을 바쳐라! 나의 영전에 녀석의 목을 바쳐라! 나의 영전에…….' 입꼬리가 기이하게 말려져 올라갔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애매한 기분에 휩싸였다. 날 향한 조소, 친구의 죽음을 향한 슬픔. 두 감정이 부조화를 이루며 가슴속에서 휘감겼다. 답답했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 사소한 걱정거리나 늘어놓았던 내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여전히 죽은 듯 침묵을 지키고 있는 령령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 바로 곁에 털썩 무릎을 꿇고는 그대로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주령령, 용서해달라고는 안 하겠다. 단지 기다려다오. 내 손으로 천운학을 끝장내는 그 날까지만 참아다오. 그 날이 지나고 나면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자백하겠다. 그 이후 날 구워먹건 삶아먹건 맘대로 해라. 일단은…… 소방과 팽무진의 복수를 우선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니 오늘 일, 잠시만 눈감아 줘. 부탁이다." "……." 물론 대답이 있을 리 없었다. 조용히 몸을 일으켜 그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식으로라도 위안을 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하아, 바보 같군. 바보 같아." 해는 서산으로 기운지 오래였다. 붉은 석양이 절벽 끝자락에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이번 청부는 어려운 바가 많다. 만약 일이 틀어져 상황이 어려워지면 서슴없이 도주해라. 집결지는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 무인루(無人樓)다.' 떠나기 직전 홍 영감님이 모두에게 전달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흘려들을 뻔했던 한 마디였다. 용케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소화가 동행하는 내내 깜빡했다며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혹시라도 내가 잊어버릴까봐 다짐을 받아둔 것 같다. 여러모로 기특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소화 녀석은 무사히 탈출했을까?' 집결지에 도착하는 일만을 생각해도 버거운 바였다. 더구나 내게는 주령령이라는 짐이 딸려있는 상황이었다. "으그그그, 그만, 왜 이리 잡념이 많아. 행동에 옮기고 나서 부딪혀봐야 하는 것 아니겠어?" 잡념을 떨치듯 고개를 절레절레 세차게 흔들었다. 바닥을 뒹구는 철봉 두 개를 허리에 질끈 묶어 넣었다. 소방이 남긴 유일한 유물, 내 일생동안 곁에서 떨구지 않을 것이다. 맞바로 주령령을 등에 업었다가 등뒤로 느껴지는 물컹한 감촉에 그만 손을 놓을 뻔했다. 연이어 령령의 진한 살내음이 코끝을 물씬 자극해왔다. 가운데 다리가 발딱 서버린 것은 당연한 반응이리라. '이 년의 관능미는 과연 천하일품일세. 남궁현 녀석이 안절부절못할 만도 하지. 에휴, 아서라, 아서. 남의 여자다. 이미 충분히 실례를 저지를 만큼 저질렀다. 더 이상 무례한 짓 따위 하지 말자고.' 주변을 둘러보니 마침 절벽 가운데 샛길이 보였다.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무엇보다 끔찍한 기억이 남아버린 묘령산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였다. 비는 그쳤어도 자욱하게 구름이 껴있는 모양이었다. 달은커녕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이었다. 밤눈 하나는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내 시야에 영향을 주진 않았지만, 내가 어디로 걸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면 묘령산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가야 했던 것이다. '흠, 일단 내려가 보자. 인적 있는 마을이 나오면 길을 알 수 있겠지.' 가파른 샛길을 빠져나오니 드넓은 구릉지가 나타났다. 시원한 산바람이 머릿결을 쓸고 지나갔다. 막 봄의 향연이 산을 뒤덮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싱싱한 풀냄새가 너울너울 풍겨왔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을 때였다. 바스락, 바스락. 풀잎과 나뭇잎을 밟으며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소리가 나지막하니 들려왔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적인가? 아군인가? 흠, 어떻게 할지는 우선 확인을 하고서 결정하자. 끙, 은신(隱身)에는 별로 자신이 없는데.' 등에 업었던 주령령을 가만히 풀숲 위에 내려놓았다. "지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나? 흑웅(黑熊)?" 십대 중반 소년의 목소리였다. 왠지 귀에 익었다. "글쎄요. 제가 귀가 어두워서 말입니다. 그냥 살랑살랑 바람소리밖에 안 들리는데요." 약간은 어눌해 보이는 사나이의 목소리였다. 아이에게 경어를 쓰는 어른, 주종(主從)의 관계라고 느껴졌다. "그래? 내가 잘못 들었나보군." 두런두런 대화를 하며 나타난 두 인영은 검은 야행의에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소년의 신장은 보통 아이와 매일반이었으나, 흑웅(黑熊)이라는 사나이는 정말 곰처럼 덩치가 산만했다. 팔뚝도 어마어마하게 굵어서 그의 주먹에 맞으면 뭐든 가루가 될 듯 했다. "아니오. 도련님,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분명히 좌측 십여 장거리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느닷없이 흑웅의 거대한 덩치 뒤에서 신형을 드러낸 야행의 사나이가 정확히 내가 있는 쪽을 짚어냈다. "흠, 난 또 내 귀가 둔해진 줄 알았지. 이 산에는 산짐승이 유난히 많은가 본데." "산짐승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뒤져볼까요?" "그만 둬. 흑랑(黑狼), 또 헛수고할라. 이 높이에서 떨어지고 녀석들이 무사하리라 보는 거야? 우리는 녀석들의 시체만 회수하면 그만이야." "……." 흑랑이라는 녀석은 우리가 숨어있는 바위 쪽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물론 아주 조용히 내뱉어야만 했지만. 휘리리리릭. 느닷없이 검은 인영 하나가 경공술을 펼치며 날아왔다. 하필이면 방금 전에 내가 지나쳐온 샛길 쪽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흑견(黑犬)이군. 그래, 뭐 좀 발견한 것 있어?" "흐흐흐흐, 아주 재미있는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 소년은 더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한 마디 말보다 한 가닥 번득이는 눈빛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법이었다. "아주 상당한 량의 혈흔을 발견됐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주 묘하지 뭡니까? 아무리 냄새를 맡아보고, 맛을 봐도 어떤 생물체가 흘린 피인지 당최 종잡을 수가 없던걸요." 흑견이란 사내의 말은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다. 종래는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몰래 엿듣고있는 내 입장에서는 녀석이 뭘 말하는 것인지 아주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커헉, 야, 이 변태 자식아! 냄새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맛까지 보냐!' "됐어! 내가 직접 알아볼 테니까 안내나 해." 호기심에 숨을 죽이던 소년은 역정을 내며 흑견 제쳐두고 걸음을 내딛었다. "호호호호, 흑견이 하는 일이 매사 그렇지요. 대신 제가 잘 조사해 왔으니까 가실 필요 없어요. 도련님." 소년 앞으로 날씬한 흑의 여인이 나비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검은 복면 때문에 안면은 안 보였지만, 상당히 잘 빠진 몸매의 소유자였다. "오, 흑접(黑蝶)! 그래, 나한테는 오로지 흑접뿐이다. 어서 보고해봐." "피이, 말로만. 도련님한테는 흑룡(黑龍) 언니가 더 소중하잖아요. 안 그래요?" "또 그 소리, 누가 그딴 흉터투성이 여자를 좋아하겠어? 그저 심심할 때 갖고 놀기 딱 좋은 암컷일 뿐이야. 이번에 안 데려온 것 보면 모르겠어?" "정말이요?" "정말이라니까." "그럼, 모두 앞에서 증거를 보여주세요." "좋아.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다." 여인은 기쁜 듯 허리를 숙여 소년의 엷은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소년은 아주 능숙하게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얼마나 진하게 입맞춤을 하는지 훔쳐보는 내가 다 흥분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녀석의 왼팔은 여인의 젖가슴을 주물럭거렸고, 오른손은 당연하다는 듯 여인의 계곡을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저, 저, 저, 이런 빌어먹을! 나이도 어린 미성년자 녀석이 감히! 엉? 잠깐, 흑룡이라고? 설마, 저 녀석은…….' 평상시에 이런 일이 잦았는지 다른 녀석들은 즉시 시선을 돌려 망을 보는 척 했다. "흐응, 흐응, 으으응." 여인의 끈적끈적한 비음이 묘령산의 정적을 산산이 깨뜨리고 있었다. 한동안 뜨겁게 달라붙어 있던 둘은 드디어 입술을 떨어뜨렸다. '크으, 입맞춤 한 번 찐하게도 하네.' "역시 흑접이 최고야. 그럼 이제 슬슬 보고를 들어볼까?" "호호호, 다른 때 같으면 바로 숲 속으로 들어가서 한 판 질펀하게 하자고 하셨을 텐데. 말 돌리시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신경 쓰이시나 봐요?" "……." "어머머, 난 농담이었는데, 도련님은 진심이셨군요. 휴우, 알았어요. 제가 알아본 바를 알려드릴게요. 혈흔 속에는 크게 세 가지가 섞여있었어요. 개코라는 흑견이 헷갈린 이유가 있었어요." "세 가지? 그게 뭐야?" "첫째, 피 자체는 사람의 것이에요. 그것도 여인만의 특별한 것, 매달 한 번씩 찾아오는 생리혈이었어요. 죽은피가 쏟아져 나온 거니까 냄새이건 맛이건 특이할 수밖에 없겠지요." '뭐? 생, 생리혈? 바로 달거리 하혈이었단 말이야? 끙, 나 혼자 괜스럽게 착각했잖아.' "둘째 내용물은…… 도련님이 나와 관계를 맺을 때 절정에 달하면 부르르 떨면서 내뿜는 것 있지요? 바로 그것이었어요." 흑접은 말하기 남세스럽다는 듯 약간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무엇을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그래? 그렇다면 세 번째는 뭐야?" 소년이 약간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렸다. 그러나, 나보다 더 당황했을까? '세 번째? 그게 뭐야? 나도 궁금해지네?' "셋째는 제가 말 안 해도 짐작이 가시겠지요? 절정이란 것은 남자만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절벽에서 떨어진 두 사람은 멀쩡히 살아 있어요. 뿐만 아니라 그 상황에서 추잡하게 성관계까지 가졌지요.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적어도 수십 번은 했어요. 남자의 방사량이나 여자의 방사량이 비슷한 걸로 봐서 아주 이상적인 성교를 했다고 볼 수 있지요. 둘 모두가 거의 동시에 절정을 느끼며 방사를 한 거예요." 휘이이이잉. 순간 산바람이 꽤 오랫동안 거칠게 나부꼈다. 덕분에 흑접이란 여인이 말하려던 셋째 내용물에 대해 거의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킁킁킁, 냄새가 납니다." 느닷없이 망을 보던 흑견이란 남자가 말문을 열었다. 소년의 눈빛이 무섭게 반들거렸다. "무슨 냄새가 나?" "피 냄새입니다. 바로 방금 위에서 맡았던 혈흔의 비릿한 피 냄새가 납니다." "어느 쪽이야." "바로 저 쪽입니다." 흑견은 주저 없이 내가 숨어있는 바위 쪽을 가리켰다. 순간 나와 소년의 시선이 교차되고 말았다. 소년의 안면의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녀석은 대뜸 반말을 던져왔다. "하하하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혈접(血蝶) 말대로 살아있었구나. 우리 이거 얼마 만인지?" 그 한 마디로 녀석의 이름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의 정체는 바로 살막 소막주 조진후였던 것이다. '쳇, 반갑다는 놈이 보자마자 찍찍 반말 짓거리냐? 망아루에 있는 동안 거짓으로 가장하며 독만 품고 있었구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1-06 14:15:33 고친날 2005-11-06 23:54:28 읽은수 7266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8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5] "진후야, 복면은 벗는 게 어때? 피차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애써 신비한 척 할 필요는 없잖아?" "그렇긴 하군. 내 수려한 외모를 이까짓 복면 따위로 가린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긴 하지." '뭐, 뭐라고? 이 놈이 쥐약을 먹었나? 왜 이래?' 조진후는 머릿결 하나라도 손상당하면 안 된다는 듯이 정말 조심스럽게 복면을 벗었다. 가볍게 손뼉을 치자 흑견이라는 녀석이 잽싸게 거울을 꺼내 녀석 앞에 섰다. 한참 거울을 보며 머리 모양새를 가다듬은 조진후는 날 보며 씽긋 미소지어 보였다. 상상치도 못한 녀석의 반응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가 반말을 쓰는 게 불만이야? 아니면 너무 잘난 내 외모에 질투라도 생겼어?" "쳇, 남의 일에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지만, 한 가지는 물어보고 싶군." "뭐가 궁금한데?" "어느 쪽이 네 진짜 본성이지? 망아루에서의 바른 생활 소년이냐? 아니면 이 곳에서의 불건전 미성년이냐?" "하하하하하! 너 정말 웃기구나. 바른 생활 소년? 강제로 독환(毒丸)을 삼키고, 포로로 잡힌 내가 뭘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거지? 당연히 상대의 비위를 맞춰줘야 하는 것 아니겠어?" 문득 녀석의 말이 틀리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령령 밑에서 아부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지 않았는가? 단지 뭔가 앞뒤가 안 맞다는 생각이 들어 한 마디 보탰다. "잠깐, 포로로 잡혔을 때, 먼저 독환을 깨물려고 했던 것은 너잖아. 이빨 사이에 껴놨던 게 독환 아니었어?" "어, 아닌데." "……." "다른 녀석들의 이빨에 낀 거야 독환 맞아. 하지만, 내가 누구야? 살막의 소막주라고. 함부로 죽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 그거, 사면환(死眠丸)이라고 불리는 거거든. 그걸 씹으면 죽은 듯한 수면에 빠져들어. 내가 사면환을 씹고 죽은 척 하면 다른 녀석들이 날 구해내기 쉬워지잖아. 안 그래?" 약간은 어이가 없어졌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착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꺼풀 들춰보니 꽤나 간사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외모우월주의까지 도드라지게 갖추고 있는 놈이었다. 은근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뭐, 좋다. 이왕 묻는 김에 한 가지 더 물어보자.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질문이니까 대답 안 해줘도 된다. 너, 흑룡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흑룡(黑龍)을 악취삼흉(惡臭三凶) 손에서 구해내기 위해 나한테 애걸복걸하지 않았어?" "후훗, 물론 진심이었다. 당시 날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흑룡 녀석뿐이었다. 당연히 녀석의 생존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 "……." '조진후, 이름 한 번 아주 잘 지었구나. 일단 조진 후에 차분히 대화를 나눠야 하는 놈이었어.' "그럼, 이번에는 나도 좀 물어보자. 네 녀석 등뒤에 널브러져 있는 여자가 주령령(周鈴鈴)이라는 계집 맞아?" 고개를 끄떡여 줬다. 무림맹 내지는 천운학에게서 들을 얘기 다 들었을 테니 감출 이유도 없었다. "오호, 그거 반가운 소리로군. 혹시 말이지. 소화(蘇花)의 소재도 알고 있나?"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니 말이다. "소화는 왜 찾는데?" "엉? 아, 그게 말이지. 흐흐흐, 그야 개인적으로 빚이 있으니까, 네 뒤에 계집처럼 말이지." "……." 소방에게 쌓인 원한을 동생인 소화에게 대신 갚으려는 의도인 듯 했다. 주령령과의 원한도 어떤 경로로 생겼는지 충분히 납득이 갔다. 보나마나 망아루(忘我褸)에 잡혀있는 동안, 몇 대 쥐어 박힌 모양이었다. 령령의 기준에서 쥐어박는 거라면, 조진후 기준에서는 반 작살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가 제안 한 가지 하겠다. 서로 밑지는 장사는 아닐 거야. 조금만 양보하면 서로 칼을 겨눌 필요가 없게 된다. 들어보겠어? 작삼 점소이?" "……." 반말로 일관하는 조진후 녀석의 어투가 마음에 안 들기는 했다. 그러나, 싸울 필요가 없다는 녀석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좋다. 들어보지." "서로 마주치지 않은 걸로 치는 거다. 추잡한 혈흔 또한 내가 깔끔히 위장해주지. 넌 그냥 네 갈 길 가면 되는 거야. 어때? 끌리는 제안 아니냐?" '추잡한 혈흔? 으그그, 녀석 못하는 말이 없군. 요컨대 날 못 본 것으로 해주겠다, 이 소린데, 무슨 심산일까? 안심시켜놓고, 뒤에서 치겠다는 소리? 뭐, 아주 나쁘지는 않군. 빠져나갈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니 말이야." "나쁜 제안은 아닌데,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구." 녀석의 마음이 돌변하기 전에 승낙해 버렸다. 주령령을 등에 업고는 서둘러 빠져나가려던 찰나였다. 그녀를 업고 지나가려 하자 조진후의 아미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의 손짓을 따라 부하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말 길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군.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네가 업은 계집, 어차피 내상을 입어서 짐만 될 여자다. 내려놓고 가라. 나도 천운학 공자에게 할 말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 어쩐지 쉽게 넘어간다 했다. 인사불성 주령령을 순순히 넘겨달라는 소리였던 것이다. 녀석의 수중에 주령령이 넘어가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까? 조진후 녀석의 변태적인 행각을 고려해볼 때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잘 생각해봐. 너한테 득이 되었으면, 득이 되었지, 손해 날 제안은 아니야. 망아루에 있어봐서 잘 안다고. 심심하면 그녀한테 맞고 살았잖아. 한 번은 죽을 뻔했던가? 복수는 복수대로 하면서 네 한 목숨 건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뒤처리는 걱정 마라. 살아서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나?" 내 정곡을 콕콕 찌르는 지적들이었다. 틀린 말 하나 없었던 것이다. 단지 마지막 한 마디가 맘에 들지 않았다. 살아서 다시 볼 수 없다는 말……, 너무나 거슬렸다. "별로 안 당기는데." "오호, 배꼽 한 번 맞춰봤다고 그새 맘을 뺏겼나? 아,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이지. 그래도 잘 생각해봐라. 세상의 절반은 여자다. 한 순간의 오판으로 다시는 그 짓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다시 묻겠다. 그녀를 넘겨주지 않겠는가?" "안 넘겨줄 건데." 조진후의 반반한 외모가 약간 일그러졌다. 녀석의 눈빛에 싸늘한 조소가 떠올랐다. "작삼 점소이, 듣기로 그 새 무공 좀 늘었다며? 그깟 삼재검법(三才劍法), 늘어봤자 거기서 거기겠지만, 내가 좀 견식 해주지. 흑웅(黑熊)! 상대해줘라." "예, 도련님." 쿵! 흑웅(黑熊)이라는 거대한 덩치 복면인이 앞으로 나서며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쇠기둥을 내려놓았다. 워낙 덩치가 커서 등에 메어져 있던 쇠기둥 자체가 안 보였던 것이다. 그것을 내려놓으니 내 키와 맞먹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굵기만 해도 내 다리 한쪽과 맞먹었다. 흑웅 녀석이 앞으로 나서자 나머지 녀석들은 뒤로 물러서며 구경꾼처럼 여유를 부렸다. 조진후가 앉은자리 옆으로는 흑접이라는 복면여인이 찰싹 달라붙어 애교를 부렸다. 내가 흑웅에게 단번에 박살날 거라고 확신들 하는 것 같았다. 싸우기도 전에 기분이 나빠졌다. "점소이 주제에 감히 도련님의 제안을 거부하다니! 간덩이가 부을 데로 부은 모양이구나! 니 놈 배를 갈라서 간덩이 크기를 직접 확인해주마!" '말하는 꼬락서니하고는, 그 주인의 그 부하답구만.' 부우우웅. 쿠웅! "이크!" 부우우웅, 쿠웅! 흑웅은 다짜고짜 우직하게 쇠기둥을 내려찍었다. 어둠 속을 파고들어 쿡 찌르고 빠진다는 살수답지 않게 무식함 그 자체로 뭉쳐진 놈이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내려찍는지 바닥이 움푹, 움푹 파였다. 그래도 난 코웃음치며…… 도망 다닐 수 있었다. '흥, 령령보다는 몇 수 아래구만. 넌 흙바닥에 쇠기둥으로 구멍을 내지만, 령령은 돌바닥에 맨주먹으로 구멍을 내거덩. 깊이도 비슷하네. 게다가 넌 너무 느려 터졌어.' 부우우웅, 쿠웅! 샤샤샤샥. "이 쪼끄만 녀석, 다람쥐 마냥 도망가는 법만 배운 모양이로구나! 니 사부는 다람쥐렷다!" '어쭈, 이 녀석이 도발을 하네.' "흥, 이 커다란 녀석, 달나라 토끼 마냥 콩콩콩 방아 찍기만 하는 거 보니까, 니 사부야말로 달나라 토끼지? 그렇……지? 으잉?!" 발정 난 숫곰마냥 쿵쿵쿵 뛰어다니던 흑웅의 신형이 우뚝 멈춰 섰다. 녀석의 안면에 칠흑 같은 어둠이 스며들었다. 난 그저 쇠기둥을 방아처럼 내려찍는 우직한 공격을 비꼰 것뿐이었는데, 녀석은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호호호, 저런, 저런 흑웅한테 토끼라는 말을 하면 안 돼. 그 때문에 그는 살막 여인들한테 인기가 없거든. 우리들도 흑웅 앞에서는 함부로 내뱉지 않는 금지 단어야." 조진후 곁에 똬리를 틀고 붙은 뱀처럼 바싹 붙어 앉은 흑접이 한마디 던져줬다. '제길, 그런 말은 싸우기 전에 해줬어야지.' "이 녀석이 감히, 감히, 우오오오오!" 쿵쿵쿵쿵쿵쿵. 흑웅 녀석의 신법은 마치 거대한 산이 날아다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쇠기둥의 방아찧기도 한 몫을 해줬다. 단지 여전히 느렸다.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너, 이 자식, 오냐! 그렇게 나온다면, 나한테도 생각이 있다!" '쳇, 자기가 느린 것 가지고 화를 내네.' 화를 버럭 낸 흑웅 녀석은 이번에도 쇠기둥을 찍었……. 아니 날렸다. 그것도 엉뚱한 방향으로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나 원 참, 아무리 화딱지가 나도 겨냥은 제대로 해야지.' "흑웅, 무슨 짓이야!" 조진후가 당황한 듯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쇠기둥이 날아간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맙소사! 인사불성 주령령한테 날렸어? 이런 썩을!'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1-09 06:17:37 고친날 2005-11-09 06:17:37 읽은수 6728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86)-현현자와의 재회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6] 현현자와의 재회 인사불성 주령령에게서 내력이 느껴지기는커녕 내뿜는 생기마저 미약했다. 호신강기(護身剛氣)가 완전히 걷혀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쇠기둥에 직격 당하면 뼛조각조차 추리지 못할 판이었다. '안 돼! 더 이상은 잃을 수 없어!' 전력을 다해 령령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전신을 아우르며 치솟아 오르는 청아한 기운을 느끼며 박차 오르려는 찰나였다. '어? 어어? 얼라리요! 이게 뭐야!' 갑자기 주변 정경이 거북이처럼 느려지고 있었다. 모든 사물들이 천천히 흘러가더니만, 마침내는 정지되어 버렸다. 새까만 어둠이 등뒤에서 몰려왔다. "안 돼, 안 된다구!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두 손, 두 발을 허우적거리며 령령에게 다가가면 할수록 거리가 생기는 것 같았다. 급기야 칠흑 같은 암흑 속에 빨려들고 말았다. 허공을 붕붕 떠다니는 기분이 왠지 낯익었다. 내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공간이었다. '제길, 다 알고 있다구요. 나와요! 현현자 영감탱!' '허허, 이 봐, 이 봐, 간만에 보는데, 영감탱은 너무 하잖아.'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허공 중에 울려 퍼져왔다. 곧이어 그의 모습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형상을 갖춰 나갔다. '알았어요. 영감탱이란 말, 취소할 테니 빨리 풀어주기나 해요. 빨리 풀어달란 말이오!' '흠, 구타신공(毆打神功)이 제대로 발현되긴 했군. 이대로 봉조신법(鳳鳥身法)을 발휘해 쇠기둥 앞으로 달려나가는데는 문제가 없다고 치세. 그 이후는 어떻게 할 텐가?' '그야……. 쳇, 이 무적 철봉으로 쳐내거나, 몸으로 받아내면 되겠지요. 적어도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방도가 있을 거 아뇨!' '아니야, 틀렸어. 자네도 느낄 테지? 천운학의 공세 11합을 받아내면서 자네 몸은 엉망이 되었지. 주령령이 약간의 수를 부렸지만, 절벽 위에서 떨어진 충격 또한 남아있네. 이대로 쇠기둥을 맞받아 쳤다가는 십중팔구 자멸이네. 연이어 쌓이는 충격들을 우격다짐으로만 받아내서는 효율적이라고 할 수 없지.' '크으으으…… 아아악! 젠장! 나더러 어쩌라고! 이따구 구타심결(毆打心訣) 따위로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이에요? 맞는 일밖에 더 하겠습니까! 자잘하게 알려준 다른 무공들조차 정작 써먹으려는 찰나에는 떠오르지도 않고, 발현도 안 된다구요. 도대체 뭐 하자는 수작이오?' '끌끌끌, 기억력에 의지해 익힌 무공은 무공이 아닐세. 스스로 납득하고 적용에 적용, 연환에 연환을 할 수 있게 되고, 뜻하는 바대로 자유롭게 펼쳐낼 수 있어야 비로소 무공 하나를 섭렵했다고 할 수 있지. 무학의 길은 멀고도 험하네. 그 험난한 길을 편하게 걷고자 했다면, 그야말로 자네의 착각이라 할 수 있겠지. 자꾸 부딪히고, 좌절하다보면 언젠가는 완전히 체득하게 될 날이 올 걸세.' '빌어먹을, 그딴 헛소리는 그만 늘어놔요! 이러다가, 이러다가 령령이 죽겠소! 죽는단 말이오!' '안 죽어. 걱정 말게. 자네와 내가 이렇게 수다를 떠는 동안, 바깥 시간은 정지되어 있네. 정확히는 이곳에 시간 개념이 없다고 보는 게 낫겠군.' '…….' '반년 동안, 주령령에게 맞으면서 구타심공의 기본 바탕이 마련되었군. 전신의 혈도를 추궁과혈(推宮過穴)의 수법으로 타작 당했기 때문에 금강불괴(金剛不壞)의 효과까지 누리게 되었구먼. 스스로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겠지? 령령의 구타가 자네에게 얼마나 득이 되고 있었는지…….' '…….' '이거야, 원. 멀뚱멀뚱 고개를 갸웃거리면, 금시초문으로 알아듣지 않겠나?' '금시초문인데요.' '…….' '…….' '쳇, 그 정도는 눈치 하나로 딱딱 알아내고 즐거운 마음으로 구타를 당했어야지. 보아하니 꽤나 피해 다닌 모양인데, 어디 그래서야 제대로 구타신공의 효능을 보겠어?' '크으으으,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는데, 영감님이 나랑 바꿔서 맞아보슈. 령령 주먹이 얼마나 매운지 알기나 해요!' '내가 왜? 아쉬운 것은 넌데.' '…….' '이제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가 되었다. 구타신공이 방어에 특화된 내공이긴 하나, 조금만 손을 보면 공방이 훨씬 깔끔해지지.' '잠깐, 구타신공을 제대로 활용할 무공이 있단 말이오? 있다면, 있다면! 어째서 천운학과 싸우기 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요? 내가 천운학만 막아낼 수 있었어도 다른 녀석들이 죽는 일은 없었을 것 아니오!' '아니, 내가 알려줬다 해도 너로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강제적이었지만, 네가 반년동안 피.나.게 수련해온 것, 잘 안다. 그러나, 천운학은 무학에 있어 타고난 천재, 뿐만 아니라 지난 이십 년 동안 노력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지. 그런 녀석이 내가 남긴 절정의 파괴무학, 혈해진경(血海眞經)까지 익혔다. 아직 미숙해도 네 녀석 정도는 아주 우습게 짓뭉갤 수 있지. 직접 겪어봐서 잘 알 것이다. 지금 당장 천운학의 맞수는 혈해진경을 익힌 다른 녀석들뿐이다.' '잠깐, 혈해진경도 영감이 남긴 거란 말이오?' '응? 몰랐나? 자네 모르는 게 너무 많군. 아무리 모르는 게 약이라지만, 아는 게 힘이라는 말도 있네. 부연 설명을 하자면, 혈해진경 중에서도 검경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무학이지. 도경, 독경, 권경은 다른 녀석들을 쓰러뜨리고서 강제로 빼앗다시피 한 거야. 후인들을 위해 최종적으로 보완해 책으로 남긴 거라네.' '그럼, 왜 나한테는 혈해진경 쪼가리 하나 남겨주지 않은 거요? 어째서? 어째서!' '허허, 각 사람들에게는 타고난 재질이란 게 있네. 자네는 혈해진경을 익힐 재질이 아니었어. 무학에 대한 기본바탕이 있길 했는가? 혈해진경을 시전할 내공이 있길 했는가? 더욱이 무공에 대한 욕심이나 끈기도 없지 않았는가?' '…….' '실망할 것 없네. 대신 자네는 구타심결을 익힐 최상의 체질과 성정을 타고났으니 말일세. 자네가 혈해진경을 익히지 못하는 것처럼, 천운학 또한 구타심결을 익힐 수가 없는 것이지.' '…….' '주령령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치라도 있다면, 이제부터 내가 알려주는 잔기술들을 단번에 체득해야 한다. 똑똑히 봐둬라.' 쉬이이이익. 느닷없이 어둠의 장막을 뚫고서 날아오는 쇠기둥이 있었다. 바로 흑웅 녀석이 던진 쇠기둥과 똑같은 것이었다. 내 자리에는 현현자 영감이 철봉을 들고서 나와 겹쳐져 서있었다. 손안의 철봉이 꼬리에 불붙은 뱀처럼 지랄발광 춤을 추며 멋대로 허공을 매웠다. 쇠기둥이 지척에 이른 순간이었다. 철봉이 물처럼 스르륵 흐르더니 쇠기둥 끝에 철컥 붙어버렸다. '착(着)!' '상대방의 필살기를 꿰뚫어보고, 서로의 병장기를 하나로 붙여버리는 기술이지. 상대의 공방을 봉해버리는 장점도 있다네. 천운학이 잘 쓰는 방법이던걸.' 곧이어 철봉을 타고 강맹한 기력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는 빨아들였다고 해야할까? '흡(吸)!' '착(着)으로 이어진 병장기를 통해 쇠기둥에 실린 물리적 힘과 기력을 흡수하는 기술일세. 흡성대법(吸星大法)에서 따온 방법이지만, 차이점이라 하면 내 힘으로 흡수하지는 않는다는 점이지.' 당연했다. 융합 자체가 불가능한 힘이었다. 나와 성향이 다른 엄청난 양의 기력들이 팔 끝에서 길길이 날뛰었다. 현현자 영감은 그 기력들을 내 몸에서 뽑아 올린 청아한 기운, 구타신공으로 밀어붙여 버렸다. '봉(封)!' '흡수한 기력을 나의 기력으로 팔 끝에 강제적으로 모아두는 기술이네. 이렇게 되면 쇠기둥에 실렸던 공세는 그 힘을 태반 상실하지.' 현현자 영감은 그대로 쇠기둥을 가볍게 두드렸다. 대부분의 힘을 상실하고 관성적인 힘에 의지해서만 날아오던 쇠기둥은 일순간 허공에 멈춰섰다. '탄(彈)!' '되받아 치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네. 그동안 쇠기둥이 허공에 머무르도록 조절해줄 필요가 있는 것이지.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허공에 잠시 멈춰선 쇠기둥을 엄청난 힘으로 쳐내버렸다. 팔 끝에 몰려져 있던 힘들이 내 기운에 밀려 다시 쇠기둥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반(反)!' '받은 것은 그대로 되돌려주는 게 예의 아니겠나?' 꽝! 쐐애애액! 상대의 기운을 담아 쳐버리자 쇠기둥은 그대로 되튕겨져 버렸다. 그 뒤는 알 수가 없었다. 깜깜한 암흑 속이었으니 말이다. '이 잔기술들을 연환해 펼쳐내는 데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따른다. 최상의 동체 시력과 상당한 수준의 폭발적 근력이 필요하단 말이지. 현재의 자네 몸으로는 성공하건 실패하건 한 번의 시전이 한계야. 그래도 시도해 볼 텐가?' '쳇,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소? 그보다 이런 긴박한 순간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영감탱의 의도가 더 궁금하오.' '허허허허허, 그야 당연하지. 다른 때 나타났으면, 지금처럼 초롱초롱 학구열에 불타는 눈빛 따위는 볼 수 없었을 게야. 고등어 눈깔 마냥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내 말을 흘려들었겠지. 아니라고 할 텐가?' '…….' '더구나 눈앞에 실험상대로 써먹기에 적당한 녀석들이 있잖은가? 잘 해보게. 주령령이 사느냐, 죽느냐는 순전히 자네 손에 달렸으니 말일세.' '킁, 살막의 정예가 상대하기 적당한 놈들이오?' '천운학이나 사마장령에 비하면 눈 가리고 아옹하기, 도랑 치고 가재잡기가 아니겠는가?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는 법, 일단은 내가 일러준 잔기술에 충실히 적응해보게. 반드시 빛을 볼 날이 있을 걸세.' '적응이 되면 천운학한테도 써먹을 수 있는 거요?' '당연히 불가능하지. 그렇게 복수가 하고 싶다면 일단 구타신공부터 꾸준히 연성하게. 주령령한테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구타당한다면, 한 가지 가능성을 얻을 수 있긴 하네만.' '사절하겠소. 구타신공은 무슨 얼어죽을, 구타신공, 차라리 구타마공이라고 해주시오. 이제 수련이라면 지긋지긋 넌더리가 나오. 더구나 주령령은 남궁현의 여자가 될 사람, 난 교옥정 누님의 남자가 될 사람, 남남끼리 치고 박으면서 수련한다는 게 말이나 되오? 복수는 꼭 하고 말 거요. 뜻이 있는데, 길이 있다고 했소. 일단 뜻은 있으니 절반은 끝난 거요.' '오호, 그렇게 해버렸는데, 남남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문제없소. 나만 꾹 입 다물고 있으면 까짓 거 주령령이 눈치챌 리 없다구요.' '…….' '…….' '자네, 은근히 파렴치하구만.' '흥, 남이사! 반년동안 저 년한테 줘터지며 살아온 걸 생각하면, 아주 약소하게 보복한 거라구요!' '그럼, 왜 살리려 드나? 그냥 넘겨주고 도망가버리면 되지.' '…….' '뭐,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게. 셋을 세겠네. 도망을 가건, 맞받아 치건, 마음대로 해보게나.' '잠, 잠깐 마음의 준비를…….' '…….' '…….' '셋, 둘, 하나!' 한심하다는 듯 빤히 쳐다보던 현현자 영감탱이 셋을 내리 세 버렸다. 순식간에 어둠의 장막이 걷혔다. 주변 정경이 영감 말대로 처음 때와 동일하게 굳어져 있었으나, 그 또한 한 순간이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문제의 쇠기둥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1-10 22:32:06 고친날 2005-11-10 22:32:06 읽은수 6391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87)-살막의 추격(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7] 살막의 추격(2) 평소에는 지독히도 안 들어 먹히던, 봉조신법(鳳鳥身法)이 이번에는 제대로 발동이 걸렸다. 쐐애애애액, 휘리리리릭. 쇠기둥이 먼저 도착하느냐? 내가 먼저 도착하느냐?……가 령령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의 판가름이 될 듯 했다. 내 평생 이렇게 전력을 다해 달린 적이 없다고 자부할 정도였으나, 아쉬운 일이었다. 출발 자체가 너무 늦어버렸던 것이다. 쐐애애애액! 쇠기둥이 주령령의 머리에서 한 장 앞으로 다다랐을 때, 나 또한 그 빌어먹을 쇠기둥과 한 장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남은 것은 도박뿐이었다. '쇠기둥 앞으로 나서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렇게 되면 미친 짓 한 번 해보는 수밖에!' '착(着)! 흡(吸)!' 철봉을 앞으로 내밀어 쇠기둥 꼬리에 살짝 갖다 붙이고는 착(着)과 흡(吸)을 동시에 시전해 버렸다. 쩔꺽. 자석처럼 쇠기둥에 철봉이 붙어버리자 오히려 내 몸이 질질 끌려들었다. 억지로 버티며 연이어 흡(吸)을 전개, 상체를 뒤로 젖혔다. 쇠기둥에 실린 기운과 힘을 팔 끝으로 거두어 들였다. '끄아아악, 허, 허리 부러지겠다.' 키키키킹. 쿠웅. 철봉과 마찰을 일으키며 령령에게 다가서려고 버티던 쇠기둥을 가까스로 저지할 수 있었다. 잠시 후 관성에 의한 힘도 사라져서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허겁지겁 일어나 보니 령령의 어깨 부근이 약간 찢겨져 있었다. 피가 주르륵 흐르고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다른 곳은 멀쩡했다. 대신 내 손바닥이 너덜너덜 찢겨져 버렸다. 철봉을 놓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쓰라렸다. "녀석, 희한한 술수를 부리는구나! 그렇다면, 널 먼저 저승에 보내주겠다!" 쿵쿵쿵쿵쿵. 흑웅(黑熊) 녀석이 버럭 고함을 지르며 돌진해오고……. "허억." 령령을 구하는데만 정신이 팔려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흡(吸)을 전개해 체내로 빨아들인 쇠기둥의 기력을 봉(封)하지 않은 것이었다. 팔 끝에 몰려져 있던 기력이 미친 듯 날뛰며 전신으로 퍼져나가 버렸다. '젠장, 령령이 받을 타격을 내가 고스란히 받아낸 격이잖아.' "흑웅 멈춰! 명령이다, 멈추라구! 내 말 안 들려!" 조진후가 녀석에게 호통을 쳤으나, 흑웅의 귀에는 아무 것도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며 달려오고 있었다. 몸 안에서 날뛰는 기력들을 구타신공으로 양 팔 끝에 몰아붙였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 두 주먹을 휘어 감았다. 부우우웅. 그의 거대한 주먹이 내 정수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반사적으로 그 주먹을 내 주먹으로 맞받아 쳐버렸다. 퍼어엉! 우드드드득. "크아아악!" 두 주먹이 마주쳤을 때 밀린 쪽은 내가 아니었다. 흑웅의 주먹에서 뼈 째 박살나는 소리가 우드득 들려왔다. 오히려 녀석의 주먹과 충돌한 내 주먹은 한결 가뿐해졌다. '그렇다면?' 뭔가 감이 잡힌 나는 다른 주먹을 흑웅 녀석의 배때기에 냅다 쑤셔 넣었다. 퍼어엉! 우지직. "허억." 역시 마구잡이로 날뛰던 기력이 충돌 순간 상대의 몸으로 방출되어버렸다. 떡 벌린 입에서 신음 한 마디를 내뱉은 녀석은 그대로 널브러졌다. 쿵. 재빨리 물러서며 흑웅 녀석을 주시했다. 언제 일어나 반격해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경계를 하다 이상한 점을 알아채게 되었다. '뭐야? 허리가 저렇게 휘어질 수도 있는 거야?' 녀석의 상체와 하체가 기이하게 휘어져 있었다. 흑웅이 죽건 살았건 당장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 하나는 분명했다. 다음에 내가 할 행동은 뻔했다. 령령을 끌어안고는 바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느껴도 정상이 아닌 이 몸으로 살막 녀석들과 맞붙을 수는 없었다. 쪽수로도 밀리는 데다가 무엇보다 두려웠던 점은 일수필살 (壹手必殺) 흑룡 단수연(丹粹姸)의 출현이었다. 최근 두 번째 청부 때 봤던 일수필살의 살기가 장난 아니었다. 소방이 죽었으니 대신 나에 대한 원독을 곱씹고 있는 듯 했다. "흑웅! 흑웅! 흑웅이 죽었어! 저 개자식, 죽여! 계집만 산 채로 내 앞에 끌어다 놔!" "복명!" 등 뒤편에서 들리는 조진후의 일갈에 남아있던 세 명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누적되었던 피로와 충격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령령까지 끌어안고 뛰는 판국이니 봉조신법이 제대로 발휘될 리 없었다. 휘리리리릭.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던 구릉지가 끝나고 가파르게 경사진 산골짜기가 윤곽을 드러냈다. 슈슉, 슈슈슉. 여러 개의 비수가 살기를 내뿜으며 날아드는 게 느껴졌다. 령령의 허리를 왼팔로 끌어안고는 오른팔을 풀었다. 재빨리 철봉을 등뒤로 빼내어 착(着)을 시전하며 살짝 휘둘렀다. 철컥, 철컥, 철컥……. 슈욱. 대부분의 비수들이 철봉에 들러붙었으나, 시간차를 두고 날아온 비수 하나만은 막지 못했다. 등판에 박혔는지 뜨끔거렸다. '거 더럽게 따갑네. 별로 아프지는 않지만 말이야.' 슉, 슈슈슉, 슈슉. 이번에는 측면에서 여러 개 날아들었으나, 발걸음을 빨리 놀려서 슬그머니 앞질러……. "아쿠." 비수 하나가 장딴지를 제법 깊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 이후에도 비수 공격이 이어졌다. 큰 타격은 없어도 무지막지하게 거슬렸다. 더욱이 령령을 버겁게 안고 뛰는 판국이라 반격 자체가 불가능했다. 뒤로 바짝 붙어 사사사삭 달려오는 세 명의 포위진, 평소에 꾸준히 훈련했는지 손발이 척척 잘 들어맞는 연놈들이었다. '제길, 한 놈만 떨굴 수 있어도 좋을 텐데.' "끄아아악!" 갑자기 한 놈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떼구르르 굴렀다. 아마 바위 돌출부에 엄지발가락이라도 부딪혀 꺾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다른 연놈들 발걸음까지 덩달아 늦춰졌다. '그럼, 이 틈에!' 발끝에 기력을 돋우어 튀어 올랐다. 이대로 격차를 두고 도주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약간의 오판이 있었다. 조진후가 먼저 앞질러 내려와 길목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녀석의 손에서 비수가 번뜩였다. "오호, 제 발로 기어 들어오는 구나. 그것도 좋지. 순순히 그년을 내려놓고 자결을……." "오냐! 령령을 내줄 테니 받아봐라. 옜다!" 녀석의 면전에 령령을 던져 버렸다. 당황한 조진후가 령령의 신형을 받아들며 뒤뚱거렸다. '천재일우의 기회!' 재빨리 조진후의 등뒤로 파고들며 철봉을 녀석의 턱밑에 껴 넣었다. 뒤늦게 내 뒤로 따라붙었던 연놈들이 그 자리에 멈춰선 채 노려보는 중이었다. 전세 역전이었다. 일단 눈깔에 팍 힘주고 씨익 웃어 보였다. 느긋하게 한 마디 했다. "어이, 어이, 좀 뒤로 들 물러서시지. 까딱 잘못했다간 내 팔에 힘들어간다고." 내 협박에도 불구하고 두 연놈은 꼼짝하지도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여차하면 기습할 틈새를 노리는 것도 같았다. 확실하게 위협해줄 필요가 있었다. "진후야, 안되겠다. 니 부하들이 니 녀석 죽는 것 따위는 신경 안 쓰는 것 같다.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일단 이 철봉으로 목구멍부터 구겨줄게." "형, 형님 잠시만요. 쟤네는 제 명령만 들어서 그래요." 조진후가 다급하게 말을 돌렸다.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경어가 쏟아져 나왔다. "흑접, 흑랑, 물러서." "복명!" 이런 상황에서도 지킬 것을 지키며 물러서는 그들을 보니 조진후가 약간은 부러워졌다. 나한테 유일하게 하나 있는 부하, 종리연은 뭔가 하나 시키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기 일쑤였다. 종종 심심찮게 하극상을 저지르기도 했다. 팽무진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그가 나보다 더 녀석의 상관다워 보였었다. 문득 한 가지 궁금해졌다. "니 명령이면, 쟤네들 무슨 짓이건 다 하는 거야?" "그럼요. 제 친위대인걸요." "흠, 그렇단 말이지. 그럼, 저 삭막해 보이는 복면들 벗으라고 해." "네? 그, 그렇지만, 살수한테 안면노출은 목숨을 버리라는 것과 똑같아요." "오호? 그래? 그럼, 니가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해?" "……. 흑접, 흑랑, 복면 벗어." 이번 명령에는 녀석들도 주저하는 티가 역력했다. 잠시 머뭇거리는 것이었다. "큭큭, 하극상이군. 진후, 너도 어쩔 수 없구나. 날 원망하지는 말아라." 철봉에 약간 힘을 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진후의 잘생긴 안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잠깐, 잠깐 기다려!" 흑접이라는 여인이 다급히 날 만류하며 복면을 벗었다. 그녀가 벗자 흑랑도 마지못해 주섬주섬 벗어 보였다. 흑랑은 날카로운 인상의 삼십대 후반 중년이었다. 반면 흑접은 이십대 초반의 상큼한 미녀였다. 눈매가 서글서글 갸름하고 눈, 코, 입이 뚜렷하며 피부가 아기처럼 새하야니 부드러웠다. 확실히 보통 안면에 흉터까지 드문드문 있는 단수연보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단언할 수 있었다. 단수연이 조진후를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음을……. 나만큼 그 사실을 잘 꿰뚫어보고 있는 이도 없을 것이다. '잘 알고말고. 한 남자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는 여자란 결단코 흔치 않지.' 지금 생각해보면 살막 소막주라서 애지중지 감쌌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흑접과 조진후의 초반 대화로 미루어 볼 때, 조진후와 단수연의 관계 또한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되었다. '연상과 연하의 관계다 이거지? 그것도 단수연은 조진후만 바라보는데, 조진후는 양다리 내지는 문어발이다, 이거네. 에휴, 이러니까 빈익빈(貧益貧) 부익부(富益富)라는 말이 있는 거다. 없는 사람은 계속 없고, 있는 인간은 두발, 세발, 네발 늘려만 나가고…….'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1-12 18:12:44 고친날 2005-11-13 23:26:29 읽은수 6938 [ 12 K ] 제목 점소이 작삼(88)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8] 흑랑(黑狼)은 절이라도 다니며 마음의 수양을 꾸준히 쌓았는지 안면 변화가 전혀 없었다. 뭘 생각하는지 짐작 자체가 어려웠다. 상대적으로 흑접(黑蝶)은 고운 아미를 일그러뜨리며 날 째려보고 있었다. 도톰한 입술 끝이 바르르르 떨리는 게 안쓰럽게 보일 지경이었다. '역시 미인은 화를 내도 예쁘구만.' 그렇게 잡아먹을 듯 흘겨보며 반개(半開)하던 그녀의 눈동자가 갑자기 동그랗게 커졌다. 곧 안정을 찾으며 갸름해졌으나, 입술 가에 감도는 미소가 꺼림칙했다. 아니, 조소라고 해야할까?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해도 상황에 변화가 생겼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등뒤에서 들리던 풀벌레 소리, 새 소리가 아까 전부터 들리지 않아. 너무 조용해. 설마!' 느껴지는 바가 있어 조진후의 목을 힘껏 잡아끌며 몸을 급하게 틀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었다. 구타심결의 효능 중 그나마 맘에 드는 것 중 하나가 어둠에 구애받지 않는 시야였다. 그런 시야에도 잡히는 게 없었……. 슈우욱. 날카롭게 밤 공기를 가로지르는 바람 한 줄기, 헛바람을 들이키며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목 부분에 제법 깊은 혈선이 그어졌다. 약간만 늦었더라면 찍 소리도 못하고 저승 마차를 탈 뻔한 위력이었다. 다른 비수와 별 다를 바 없는 철호비(徹護匕) 하나로 이 정도 압박을 줄 수 있는 살수란 흔치 않았다. "칫." 버드나무 뒤편 그림자가 분리되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복면에 야행의 차림 여인이었다. 호리호리하면서도 날씬하게 잘 빠진 몸매, 칙칙하게 착 가라앉은 날카로운 눈매……. 살기는 내부로 갈무리된 듯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가 누군지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오랜만이오. 일수필살 흑룡 소저." "오호, 바로 날 알아보는군요. 그런데도 철봉에서 손을 떼지 않을 셈인가요? 옛 정을 생각해서 한 번 정도 봐주겠어요. 도련님을 그만 보내주시는 게 어때요?" 역시 일수필살(壹手必殺) 흑룡(黑龍) 단수연(丹粹姸)이었다. 내가 두려워하던 존재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조진후가 이곳에 있는 이상, 언젠가는 나타나리라 짐작했던 바였다. 단지 그 시기가 나쁠 뿐이었다. "옛 정이라? 옛 정 운운하는 사람이 다짜고짜 철호비부터 날린단 말이오? 이 녀석을 놔줬다가 다른 철호비에 목구멍 뚫릴까봐 겁나는 걸 어쩌겠소?" "작삼 점소이, 괜스레 고집 피우지 말아요. 지금이라도 당장 그대를 죽일 수 있으니까요." "……." 빈 말이 아니었다. 철호비를 손끝으로 쓰다듬는 단수연의 작태에서 명백한 위협이 느껴졌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주르르륵 흘러내렸다. 그 때였다. 조그마한 인영이 바로 내 곁에 사뿐히 내려섰다. 적의 협공인가 하고 긴장했던 것은 잠시였다. "흥, 누구 마음대로 작삼 오라버니를 건드리겠다는 거야? 머리카락 하나 떨어뜨리기만 해봐. 그전에 조진후라는 놈을 조져버릴 테니!" 소화(蘇花)의 뜻밖이면서, 시기 적절한 등장이었다. 다만 상대가 좋지 않았다. 상대가 살막의 최고수, 일수필살 흑룡인만큼 소화로써는 한두 수는 밑지리라 생각했다. 재빨리 그녀를 만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도발이 먹힌 듯 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며 소화를 바라보던 일수필살이 순순히 고개를 끄떡였다. "좋아요. 나 또한 도련님이 피 보는 일을 원하지는 않아요. 도련님만 돌려보내 주세요. 그럼 조용히 물러나지요." 소화가 날 눈짓하며 고개를 끄떡였기에 일단 철봉에서 힘을 뺐다. 길게 한숨을 내쉬는 조진후 녀석에게 한 마디 보탰다. "령령 흠집 내지 말고 조심스럽게 내려놔라. 옳지, 옳지, 그리고, 천천히 가는 거야. 천천히." 녀석은 뭐가 그리 아쉬운지 령령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도대체 망아루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령령이 깨어나면 물어볼까 하다가 관두었다. 오히려 역정만 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진후가 흑룡 곁으로 무사히 돌아가자 흑랑과 흑접도 그녀 곁에 붙어 섰다. 조진후가 일수필살 단수연의 등뒤로 돌아 붙더니 그 뒤에 후다닥 숨어 버렸다. 날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지금이다! 주령령을 회수하고, 두 연놈은 죽여버려!" '킁, 내 이럴 줄 알았다. 녀석을 놓아줘선 안 되었는데.' "복명!" 흑랑과 흑접이 녀석의 명대로 우리에게 달려들려는 찰나였다. 단수연은 한 발짝도 떼지 않은 채 한 마디만 내뱉었다. "흑접." "예? 흑룡 언니, 무슨 일?" 쉬이익. 흑접이 반문하며 돌아선 순간, 단수연의 손에서 단도가 번득이며 빛을 뿜었다. "꺄아아악!" 흑접이 칼날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얼굴을 감싸안은 두 손 사이로 핏물이 쉴새없이 떨어졌다. 주춤 물러선 흑랑은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으나, 새하얀 게 핏기가 싹 가신 듯 했다. "흑, 흑룡, 이게 무슨 짓이야!" 조진후가 무심코 흑접 곁으로 뛰어가려 하자 단수연이 단호하게 그 앞을 가로막았다. "임무 실패에 대한 징벌입니다. 제가 작삼 점소이 뒤로 숨어든 것을 그녀의 눈빛이 알려준 셈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 일을 그르쳤습니다. 표정 절제조차 못하는 살수가 살막의 일원이 될 수는 없는 법이지요." "……." "흑랑, 안면노출에 대해서 상부에 보고하지는 않겠다. 이번 한 번은 봐주겠다. 그나마 네 녀석이 가장 쓸만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절대로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흑랑의 목소리가 약간 떨린 듯 들렸다면 내 착각일까? 그녀의 서릿발 같은 단언에 조진후건, 흑랑이건 꼼짝달싹 못하고 설설 기어버렸다. 아마도 살막 막주나 장로는 되어야 그녀에게 한 마디 할 수 있으리라. 일수필살 흑룡 단수연이 살막에서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지 새삼 신선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흑접, 목숨은 붙여두겠다. 두 눈을 잃었으니 무림인으로써 살지는 못하겠구나. 홍등가에 몸을 팔아 연명해도 좋고, 비렁뱅이로 구걸해서 살아도 좋다. 그런 게 싫다면, 독단을 깨물어 구차한 목숨 끊어버리는 것도 좋겠지. 남은 네 인생, 좋을 대로 하려무나. 이제 뭘 하든 네 자유니까." '무, 무섭네. 아무리 돌려 생각해도 질투 때문에 가혹하게 구는 것 같은데.' 단수연의 사형 선고와도 같은 말에 흑접은 그저 입술을 질끈 깨물 뿐이었다. 핏물이 쉴새없이 바닥을 타고 흘러내려 풀들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파괴된 동공이 주는 극통이 장난 아닐 텐데도 신음조차 내뱉지 않았다. 아마도 단수연을 향한 불복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일수필살 흑룡 단수연은 날 돌아보며 고개를 끄떡여 보였다. 그리고는 빙글 몸을 돌려 암흑 속으로 신형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그 뒤를 조진후와 흑랑이 허겁지겁 뒤따랐다. 왠지 다음에 다시 보자는 듯한 예고장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기분 나쁜 여자였다. '조진후, 문어발 작업을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겠는걸. 이젠 여자들이 먼저 널 피할 거다. 단수연의 보복이 무섭지 않은 애들이 어디 있겠어?' "휴우, 정말 무서운 여자였어요. 혹시나 해서 내려와 봤는데,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오라버니, 다친 곳은? 꺄아악! 이게 뭐예요? 세상에!" 소화가 호들갑을 떨며 한약 냄새가 진동하는 약갑을 꺼내 여기 저기 진득하게 발랐다. 날 이렇게 걱정해주는 녀석이 있다는 게 흐뭇했다. 단지 소화에게 소방의 그림자가 겹쳐져 보였다. 쓴웃음이 배어 나왔다. 아직도 녀석을 잊지 못한 것이었다. 아니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더불어 팽무진까지……. 뿌드득, 뿌드득, 빠득, 빠득. 동공이 파괴된 극통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극심해졌던 모양이다. 두 손으로 바닥을 마구 긁으며 부르르 떠는 흑접이었다. 감겨진 두 눈에서 턱을 타고 떨어져 내리는 시뻘건 핏물을 보니 소름끼칠 정도로 끔찍했다. 문득 불쌍하다는 생각과 함께 미안한 감이 들었다. 복면을 벗게 만든 것은 바로 나였다. 그녀의 표정 변화로 덕을 본 것도 나였다. 대신 그 대가를 치른 것은 그녀였다. "잠깐 약갑이랑 붕대 있으면 좀 빌려줘." "네?" 의아해 하는 소화를 뒤로하고, 흑접(黑蝶)에게 다가섰다. 내 발자국 소리를 들은 그녀가 이를 악 다물고 비수를 꺼내드는 게 보였다. 내가 보복이라도 하려는 줄 알고 경계하는 듯 했다. '그래도 삶에 대한 의지 하나는 아주 강한 여인이네. 아직 독단을 깨물지는 않았구만.' 경계하지 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편에게조차 처참하게 버려진 판국에 이 세상 누구를 믿겠는가? "오라버니!" 소화의 비명이 들림과 동시에 흑접의 비수가 내 허벅지에 꽂혔다. 죽봉을 날리려는 소화를 재빨리 손을 저어 만류했다. 흑접이 비수를 꽂고 휘젓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다. 약갑에서 고약을 발라내어 그녀의 두 눈 위에 처덕처덕 발랐다. 내 허벅지가 아파 봤자, 흑접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킁, 이번에는 좀 세게 박았나 보네. 약간 아프긴 하네.' 고약 냄새를 맡은 그녀 손에서 힘이 약간씩 빠져 나갔다. 비수가 힘없이 떨궈졌다. 고약을 바른 위에 붕대로 칭칭 감고 나니 출혈이 확실히 줄어들었다. 소매 자락으로 흑접 안면에 흘러내린 핏자국을 닦아냈다. 일어서며 한 마디 남겼다. "미안하게 되었다." "……." 피차 적이었던 관계다. 그 이상의 사족은 무의미하다고 여겨져 그만 두었다. 되돌아와서 령령을 안아들고는 산길 아래로 내려갔다. 소화가 뒤따르며 앙칼지게 한 마디 했다. "오라버니, 지금 우리 상황에 령령까지 데려갈 수는 없어요. 그냥 적당한 곳에 숨겨놓고 가는 게 좋겠어요. 때되면 일어나서 제 발로 걸어올 거예요." "그랬다가 그 이전에 굶어 죽거나, 산짐승한테 잡아먹히거나, 적한테 발각돼서 죽으면 어쩌려구?" "흥, 이 여자가 오라버니한테 어떤 짓을 해왔는지 저도 들은 게 있어요. 죽으면 오히려 잘 된 거 아닌가요?" "……. 휘유, 글쎄다. 미운 정도 정이래잖냐?" "죽으나, 사나 자기 운이지요. 주령령 신경 쓰다가 우리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구요." 어쩐지 소화의 어투가 날카롭다고 느껴졌다. 주령령과 초면일텐데, 왜 이렇게 모질게 말하는 것일까? "뭐, 어떻게 되겠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도 산 것 보면, 운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잖아." "……." 내가 물러설 기미를 안 보이자, 소화도 포기한 듯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왠지 주령령을 포기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남궁현과 주령령 두 원수가 만나 닭살을 피워되는 꼬락서니가 눈에 가시긴 할 테지만, 그래도 무사히 데리고 와서 재회시키고 싶었다. '뭐, 좀 찔리는 구석도 있긴 하지.' "흑흑흑흑, 흑흑흑흑,……." 얼마나 내려갔을까 애간장 끊어지게 흐느껴 우는 여인의 목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바로 흑접이 있는 방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착 가라앉은 밤공기 덕분에 산자락을 타고 울려 비교적 뚜렷하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잠시 주춤거렸다. 가슴속에 울렁거리는 게 있었다. '버림받아 혼자가 되었다는 것은 슬프지. 그것도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밑바닥에서 새로 시작하자면 힘들고 고달픈 법일 수밖에 없지.' 오래 전, 고향집에서 쫓겨 나오던 때가 생각났다. 피를 나눈 형제임에도 노자 몇 푼 쥐어주고 매정하게 쫓아낸 형이 야속하게 느껴진 때가 떠올랐다. 얼마나 암담했던가? 얼마나 하늘이 노랗던가? 문밖을 나서는 내 몸이 내 것 같지 않던 시절이었다. '훗, 어쩔 수 없군.' "어? 작삼 오라버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지금? 오라버니!" 역정을 부리며 달려오는 소화를 뒤로 한 채, 발걸음을 되돌렸다. 울음소리가 고즈넉하게 울려 퍼지는 곳으로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소화는 잔뜩 화가 났는지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 한다면 하는 내 쇠고집, 말리지도 못할 테니. "흑, 흑흑흑, 흑흑……." 한참 울던 흑접은 내 인기척을 알아채고는 눈물을 멈추었다. 비수를 꽉 움켜쥔 손을 보니 날 못 알아본 듯 했다. 어쩌면 뒤처리를 하러온 살막 사람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피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안면은 정녕 안쓰러운 정도가 아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녀 옆에 사신이 대기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덜 경계하도록 그녀 근처에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살막에는 사람이 넘쳐서 멀쩡한 인간, 맹인 만들어서 버리기도 하는군. 그런데, 말이지, 우리 쪽에는 사람이 없어. 원래 없기도 했지만, 이번에 꽤 죽기도 했지." "……." 내 목소리를 알아챈 듯 했으나, 여전히 그녀의 경계심은 풀리지 않았다. 되려 비수를 쥔 손에 힘이 더욱 강하게 들어갔다. 우리측 사상자에 대한 얘기를 꺼냈으니 보복이라도 하려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얼마나 없냐 하면 ……." "……." "맹인이 있어도 할 일이 넘칠 정도지." "……." 흑접의 안면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직 못 알아챈 듯 했다. "나한테 부하가 한 명 있거든. 그런데, 그 녀석 지독히도 내 말 안 들어. 상명하복은커녕 걸핏하면 하극상이지. 더군다나 이번에 죽은 애 중에 하나가 걔 옆구리야. 이제는 나한테 화풀이하려 들 게 뻔해. 정말 기가 찰 노릇이지. 어떻게 제대로 된 부하 하나가 없냐?" "……."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 부하 할 생각 없어? 뭐, 시늉을 낼 필요도 없어. 그냥 내가 말한 하극상 녀석보다 나으면 되. 내 말 안 들어도 상관없어. 나한테 덤비지만 안으면 되는 거야. 어때?" "……." 내 말이 진정 의외라는 듯, 묘한 표정을 떠올린 흑접은 뒤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긴장이 가시자 힘이 쭉 빠진 모양이었다. 축 늘어뜨린 어깨가 한없이 가냘퍼 보였다. 문득 으스러지게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아직 그녀와 나는 적이었다. 동공이 터져나가 고약을 바르고, 칭칭 붕대를 감아버린 눈으로 뭘 보고 있는 것일까? 마치 옛 일들을 되돌이켜 보는 중인 것 같았다. 살막에서의 지난날들을, 소막주와의 지난 추억들을 되새기는 것 같았다. 한 식 경이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흑접의 말문이 열렸다. 얼마나 울었는지 잔뜩 쉰 목소리였다. "생각해보겠다.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서 결정하겠다. 그게 한 달이 될지, 두 달이 될지, 또는 몇 년이 될지 모른다. 그동안 네가 나를 책임져야 한다. 그래도 좋다면, 고려해보겠다." "후훗, 그래, 좋다. 꽤 비싸게 구는 부하의 등장이군. 책임져주지. 몇 년이고 기다리고, 기다려서 꼭 내 부하로 만들겠어. 그때 가서 싫다고 해도 하는 수 없지만 말이야." "……." 피식 코웃음을 짓고는 조심스럽게 흑접을 업었다. 한 번 책임지기로 한 이상 산길 이동은 당연히 내 차지였다. "오라버니! 그럼, 그럼, 얘는 어떻게 해요!" "아, 령령? 그야 네가 업고 와야지." "뭐라구요! 정말, 정말!" "아, 부탁해. 오라버니가 이렇게 싹싹 빌게. 좀 부탁한다." "……." 결국 소화는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령령을 업었다. 나라면 안았겠지만,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그녀로써는 업는 게 고작이었다. 소화가 령령을 업는 것도 좀 우스꽝스러운 일이긴 했다. 령령의 긴 다리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1-13 20:28:35 고친날 2005-11-15 04:03:38 읽은수 4547 [ 3 K ] 제목 작삼 출판과 관련해서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일단 아실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름 없는 출판사(그러니까 무협, 환타지 장르 쪽에서...) 쪽에 멋 모르고 맡겼다가, 출판 연기로 이어져서.... 계약 파기했습니다. 이미 1,2권 시중에 소량 풀리긴 했네요. 그로 인해 당장 작삼 자체로의 재출판 문의는 없습니다. 어쨌거나 출판 실패의 선례를 남긴 셈이고, 더더구나 1,2권이 적으나 풀려있다는 게 출판 부적격의 원인이 되겠지요. 그런 곳과는 계약 안 하느니만도 못하다고나 할까.... 이미 지나간 과거이고, 따져봤자......화딱지만 나니까 통과. 현재 앞으로 한 달내로 작삼 6권 분량으로 완결될 예정에 있습니다. 그럼, 차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작삼 출판 경유 가능성은 세 가지 정도로 추려 볼 수 가 있겠습니다. 1)뭐, 그냥 지금처럼 계속 컨텍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 본다. 단,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2)책으로 갖고 싶다는 분들, 모아서, 선불입금, 주소확인 등등의 과정을 거쳐 인쇄소에서.... 필요한 만큼 찍어서 택배로 보내드린다. 단, 이 경우는 최소한...신청인원이..100분은 넘어야 하구요. 그래야 인쇄소에서 찍어 줄 테니깐요. 책이 좀 싼 대신 표지나 질이 일반 소설책 보다 떨어질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뭐 요즘은 좀 나아졌으려나? 이 경우 표지 그림은 물론 제가 그립니다. 크크. ㅡ_ ㅡ ;;; 왜용? 그래도 저 한 때 만화 그린다고 3년 미쳐있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아주 나쁘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소장용으로...최악의 경우...추진할까 고려중인 것입니다. 그래도 한 해라는 시간을 공들여 썼는데, 그냥 묻혀버린다면 개인적으로도 매우 섭섭한 일입니다. 그냥 몇 분의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물론 원하시는 분에 한해...ㅡ_ ㅡ ..변변찮은 낙서 추가도 가능합니다. 3)일단 지켜보고 냉혈마녀 출판 상황을 지켜본다. 흠, 물론 냉혈마녀 쓰지도 않았지만, 이것은 무조건 완간을 전제로 해서먼 계약 할거라..흠. 1번 경우처럼 그냥 컨텍이 들어오면 좋은데, 그냥 없다하면, 냉혈마녀 출간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점소이 작삼(부제, 구타연공)은 냉혈마녀와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형태입니다. 일인칭 시점의 재미와 의구심, 심리, 음모를 최대한의 재미로 끌어올리기 위해 나름대로 궁리한 형태입니다. 물론 그 모티브는 장상수님의 삼우인기담에서 받은 감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냉혈마녀가 증판 효과를 볼 경우, 작삼도 부가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단 증판이 되기나 하려나..크크. ㅡ_ ㅡ .. 작삼도 좀 매니아 틱한 게 있었지만, 냉혈마녀의 매니아 틱한 구석도 상당합니다. 소설에서 아마.... 일명 포스가 뿜어져 나올 겁니다. 작삼과는 정반대 의미로의 포스요. 이렇게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1번 경우도 좋지만, 3번 경우가 가장 바람직하다고나 할까? 이왕이면 한 출판사에서 나와주는 게 좋을테니까요. 남매 소설이 다른 출판사에서 따로 따로 떨어져 다니는 것은 좀 묘한 ...재미이기도 하겠지만요. 2번은 최악의 경우입니다. 냉혈마녀 완간을 전제로 할 거니까, 겨우 완간상태로 마칠 경우..... 작삼은 그 여파를 거의 누릴 수 없게 되니...묻힌다고나..할까.....그럼, 소장을 원하시는 분에 한해서만, 한 100분? 정도에 한해서...이뤄질 일입니다. 흠. 흠. 흠. 그냥 심심해서 써봤습니다. ㅡ_ ㅡ ;;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1-15 20:26:34 고친날 2005-11-15 20:40:01 읽은수 6696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89)-동상이몽(同床異夢)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89] 동상이몽(同床異夢) 등에 업힌 흑접(黑蝶)의 전신에서 잔경련이 흘렀다. 가끔 미약하게 신음을 내뱉기도 했다. 상처가 아물기 전까지는 지독한 극통 속에서 헤맬 듯 했다. '휴우, 진짜 문제는 그 이후부터지. 영원히 빛을 잃어버린 절망감이 장난 아닐텐데.' 문득 다른 이들의 근황이 궁금해졌다. 그에 대해 뭔가 알만한 소화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소화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흥, 몰라요. 나 도망치기도 바빴는데, 다른 데 신경 쓸 틈이 있었겠어요?" "……." 뚱한 대답만이 되돌아왔다. 아까부터 단단히 토라졌는지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기색이었는데, 지금은 뭔가가 달라도 상당히 다른 분위기였다. '령령이 무거워서 그런가? 아니면 흑접까지 데리고 와서 그런가?' "이 여자 옷은 왜 이래요?" '응?! 갑자기 웬 뜬구름 잡는 질문?' 속으로 뜨끔한 구석이 있었지만,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흐지부지 얼버무렸다. "아, 그, 그거? 천운학의 공격을 막았을 때, 그 기세로 갈가리 찢겨나간 모양이더라.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나서 정신을 차리니까 걸레 조각이 되어있었어. 하는 수 없이 내 옷을 걸쳐줬지." "희한하네. 속곳까지 갈가리 찢겨나갔나 봐요?" "글, 글쎄? 아, 그렇지. 절벽 바람이 무진장 세더라구. 아마 바람결에 휘날려 간 모양이다. 그래, 그게 분명해." "……." 다급히 되는 데로 얼버무리고 나니 뭔가 좀 어색하기는 했다. 입을 꾹 다물어버린 소화는 뚱한 시선으로 날 흘겨볼 뿐이었다. 죄스러운 마음에 내려오는 내내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끙, 소방처럼 꽤나 예민하게 구네.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천운학과 사마장령의 대결이 누구의 우세로 돌아갔는지 또한 의문이었다. 살막 녀석들과 부딪힌 일을 제외하면, 다른 추격자들을 보지 못했다. 천운학 녀석 뒤로 몰아쳤을 게 뻔한 무림맹 주력은커녕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마황맹 세력권이라 해도 허겁지겁 철수했어야만 하는 까닭이 뭘까? '심지어 마황맹 아그들도 안 보이네.' 묘령산 어귀까지 내려오자 시야 거리에 커다란 마을 하나가 보였다. 바로 근방에 귀양(貴陽)이 있었던 것이다. "작삼 오라버니, 제가 나가서 마차랑 옷가지 좀 구해올게요. 귀주성(貴州省) 수도인 만큼 고정 간자들이 적잖이 있을 거예요. 절대로 풀숲에서 나오지 마세요." 내려오는 동안 삐친 게 풀어졌는지 소화의 어투가 약간 부드러워졌다. "그냥 내가 다녀오는 게 어떨까?" "안돼요. 이 년 꼬락서니도 말이 아니지만, 오라버니 몰골도 말이 아니에요. 변변한 변장술 하나 아는 것도 없잖아요." "후우, 뭐, 그렇긴 하지. 그럼 부탁할게. 조심해라." "호홋, 걱정 말아요. 이래봬도 내가 개방의……. 아, 아니 그러니까, 개방 거지들의 추격을 받고도 잘 피해 다녔잖아요. 그, 그럼 이따가 여기서 봐요." 업고있던 령령을 휙 내던져놓은 소화의 신형이 귀양을 향해 사라졌다. 주령령은 여전히 깨어날 기색이 안 보였다. 휘리리리릭. '소화, 오늘 하루종일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변화무쌍 들쭉날쭉 그 자체네. 혹시, 쟤도 달거리 하는 날인가?' 당황한 듯, 안면이 벌게지며 허둥지둥 거리는 모습에 의구심이 들면서도 절로 미소가 배어 나왔다. 무환루에서 본 이후 가장 귀엽고 예쁘장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동안의 소화는 소방의 죽음 탓인지 안면에 그늘이 져 있었다. 날 보는 시선에서도 힘이 약간 빠져있음을 느껴왔었다. 밝아졌다가, 토라졌다가, 당황하는 감정의 기복이 묘하긴 하지만, 힘이 있어 보여 나쁘진 않았다. 뿌드득, 뿌드득. 흑접(黑蝶)이 괴로운지 누운 채로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손에 얇은 면사 장갑을 끼고 있어서 손톱이 상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흠, 말이라도 걸어줄까? 그럼 다른 생각을 하느라 고통도 덜 느끼겠지.' "이 봐, 흑접, 본명은 뭐야? 뭐라고 부르면 되?" "으으, 내 본명?" "그래, 일수필살 흑룡의 이름이 단수연이듯, 너도 이름이 있을 것 아냐?" "이름 같은 것 없었다. 흑조(黑組) 42호로 불렸었다." "엉?"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것 뿐이야. 살막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젖을 떼고 걸을 수 있게된 순간부터 살수로써의 수업이 시작되었었지. 당연히 부모 얼굴 같은 것 기억나지도 않아. 오로지 교관이 부르던 번호만 기억할 뿐…… 으윽." "……." "헉, 헉, 흑접이란 호칭도 어엿한 살막의 살수로써 인정받게 된 스무 살 되던 날, 가까스로 받은 것이다. 그 호칭을 얻기 위해 십여 년 이상 동거동락(同居同落)해왔던 같은 방 동료를 쓰러뜨려야 했다. 그것도 오랫동안 반복된 지옥 훈련에서 겨우 살아남은 동료를 말이다." '쩝, 질문 하나 잘못 던졌다가 무지하게 심각해져버렸네. 무슨 이름 하나 짓는데도 이렇게 처절한 비사(秘事)가 다 있냐?' "언젠가, 언젠가 먼 훗날 낳을지도 모르는 내 자식들에게 그런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진후 소막주에게 접근했지. 그의 첩으로만 인정받아도 내 후세들은 그런 생지옥을 겪지 않을 테니까." "……." "단수연! 독한 년이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같은 방 동료 다섯 명을 단번에 베어버렸었지. 자신의 물건에 손을 댄 동료들도 시비를 걸어 죽이기 일쑤였구. 결국 막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아 흑조 중 유일하게 정식 이름을 갖게 된 년이다. 하아, 하악,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어. 조바심 나서 소막주에게 앙탈부렸던 게 오히려 화를 자초한 셈이 되었지. 으윽!" "그러니까, 단수연은 소막주를 자신의 물건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 말이네. 그럼 오히려 다행이잖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어디야?" 얼결에 내뱉은 내 말에 흑접이 말문을 닫아버렸다. 부르르르 떠는 게 극통으로 떠는 것인지 화가 나서 떠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퍼억. 그녀의 주먹이 정확하게 내 복부에 꽂혔다. 중상자의 주먹이 그렇듯 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어안이 벙벙했다. 퍽, 퍼퍼퍼퍼퍽. '내 말이 좀 자극적이었나? 이거 원, 령령에 비하면 솜주먹일세. 아프다고 할까? 말까? 은근히 고민되네.' 한참동안 주먹을 날리던 그녀는 제풀에 지쳤는지 거친 숨을 내쉬며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어왔다. "헉헉헉헉, 젠장! 너, 나보다는 강하구나." "쩝,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맞는 데 이골이 낫다고 보는 게 낫겠군. 저기 널브러져 있는 애 주먹이 장난 아니거든. 그냥 맨주먹으로 돌 바닥을 톡톡 쳐도 구멍이 슝슝 뚫려." "……." "……." "그런 여자를 잘도 건드렸군." "어? 어어? 으응? 응? 무슨 ……." 다급히 항변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제야 현장 조사를 제대로 했던 녀석이 흑접이었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쨌거나 한 때 적이었던 관계 아닌가? "좋아하는 사이야?" "쳇, 아서라. 아무것도 몰랐던 처음에나 잠시 혹했을 뿐이지. 령령이 얼마나 쌀쌀맞고, 제멋대로인지 알기나 해? 예전에는 시빗거리만 생기면 바로 자기 방으로 끌고 가서 팼었다고. 지금은 아예 아침마다 반시진씩 구타를 일삼지. 수련이라고는 하지만, 다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구. 무엇보다 저 녀석 임자 있는 몸이야." "그럼, 합의 하에 한 게 아니라 강제로 덮친 거였어?" '킁, 사람 난감하게 만드네.' "……. 당, 당연하지. 령령이 실신한 상태가 아니었으면, 내 손이 쟤 속곳에 닿기 전에 내 목이 먼저 날아갔을 걸." 뭔가 할 말이 있는지 고개를 들어 말문을 열려던 흑접이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시 내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더니 잠시동안 힘겨운 신음을 내뱉었다. 통증이 격하게 찾아온 모양이었다. "하악, 하악, 쳇, 더럽게 아프군. 요컨대, 저 여자가 아주 밉살맞게 굴어왔다, 이 소리네. 그럼, 앞으로도 계속 구타를 당해야해?" "흐흐흐, 이젠 그럴 필요 없지. 난 교옥정 누님하고 혼인할 사람이야. 곧 월녀궁 사람이 되는 거라구. 그럼 더 이상 령령의 간섭을 받을 이유가 사라지지. 그 때부터는 완전한 해방이라 할 수 있지." 이 말을 할 때는 왠지 실 웃음이 계속 나왔다. 주령령의 구타로부터의 해방, 교옥정 누님과의 혼인, 내 일생일대의 전환점이 곧 눈앞에 닥쳐왔으니 말이다. "요화(妖花) 교옥정(喬玉淨)? 수많은 남자들을 강간해서 폐인으로 만들었다는 요사스런 강간마녀?" 흑접이 그 말을 내뱉자 가슴속에서 불길이 확 치미는 걸 느꼈다. 요화까지는 참을 수 있었어도 요사스런 강간마녀란 언급에 눈이 휙 돌아갔다. "아니야! 그것은 다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알려졌을 뿐이라구. 교옥정 누님처럼 따뜻한 사람도 없어!" 나도 모르게 흑접의 가냘픈 어깨를 잡아채 흔들며 고함을 질러버렸다. "흥,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 "어? 미, 미안." 분명 교옥정 누님에 대해서 외부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을 것이었다. 흑접이 속사정을 알리 없었다. 괜스레 중상자을 상대로 흥분해버린 게 무안해져서 잡았던 어깨를 천천히 놓았다.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게 있군. 저 여자가 나중에 깼을 때 니가 한 짓을 고자질해버리면 어떻게 될까? 십중팔구 구타로 인한 사망이겠지?" 꿀꺽. 군침이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다. 미쳐 생각해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흑접을 데려오지 않았을 터였다. "그, 그렇기야 하지." "흥, 농담이야. 겁먹지 말라고. 난 다른 사람 약점잡고 협박이나 일삼는 모리배가 아니야. 너처럼 미녀가 실신했을 때 덮치기나 하는 변.태.강.간.마.도 아니고, 대신 넌 내 의식주를 책임져주겠다는 말만 성실하게 이행하면 돼. 알겠어?" "……." "지켜보겠어. 네가 내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지 지켜보고, 또 지켜보겠어. 날 강제로 덮쳐도 자격 상실이야. 내가 아무리 눈이 멀었어도 여자는 여자야. 날 상처 입히지는 말았으면 좋겠군. 적어도 아직은 널 믿고싶으니 말이야." "……." "졸리군. 어이, 변.태.강.간.마씨 팔이나 빌려줘. 잠 좀 자게." 결국 내 팔베개를 베고 잠드는 그녀였다. 아니 잠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흑접의 잔경련이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에휴, 이거 불쌍해서 주워왔다가 상전 하나 모시는 꼴 되는 거 아니야? 이걸 확, 보내버려?' 아주 잠시동안 울컥 하는 게 있어 슬그머니 주먹을 쳐들었다. 그대로 명치를 가격해버리면 한 순간에 저승열차를 태울 수도 있을 듯 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아주 잠시동안이었다. 두 눈에 피로 물든 붕대를 칭칭 감고서 바르르르 떠는 흑접을 보니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마치 빗물에 흠뻑 젖은 강아지가 죽기 직전 내 품 안에서 바르르르 떠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마음 속 밑바닥에 미약하게나마 깔릴 뻔했던 살의가 눈 녹듯 사그라졌다. 안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들을 슬며시 쓸어 넘겨주었다. 그래도 눈매가 고운 여인이었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쳇, 령령한테 이르건 말건 마음대로 해라. 까짓 거 맞아죽기 밖에 더 하겠어?'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1-17 20:15:52 고친날 2005-11-17 20:30:07 읽은수 6777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90)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0] 사방천지로 자욱한 새벽안개가 깔려왔다. 시야가 가려진 것은 둘째 쳐도 축축한 습기 때문에 찜찜했다. 팔베개를 베고 누운 채 여전히 신음을 흘리던 흑접이 한기를 느꼈던 모양이다. 팔은 내 가슴 위로, 다리는 내 배 위로 척 올려놓더니 찹쌀떡처럼 찰싹 붙어왔다. 가냘픈 신음 소리가 모락모락 입김과 함께 귓전으로 바짝 뿜어져 나왔다. 야릇하면서 묘한 정취가 느껴졌다. '아까는 강아지 같더니만, 이제는 고양이 같은 여인이로세. 기분이 나쁘진 않은데, 이래서야 움직일 수가 없잖아.' 일순간 한 겨울에도 추위를 타지 않았던 내 전신이 부르르 떨려왔다. 어디선가 귀신이 노려보는 듯한 한기를 느꼈달까? '설마?' 잽싸게 고개를 돌려봤으나, 령령은 소화가 내팽개쳐놓고 간 그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고개가 내 쪽을 향하고 있긴 했지만, 별 것 없는 신경과민이었다. '에휴, 신경 끄자, 꺼, 령령이 정신차렸으면 저 꼴로 가만히 누워있을 리 없지.' 반시진 정도 더 지났을까? 뚜그덕, 뚜그덕. 뚜그덕…….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숨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디를 향해 이동중인가도 확실해졌다. "작삼 오라버니, 마차 구해왔어요. 이제 나와도 되요." '민가에서 달구지라도 훔쳐온 모양이군.' "아, 소화 왔구나." 그녀의 도착을 확인하고는 일어나려는 찰나 흑접이 제대로 잠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미약하던 신음소리 대신 쌔근쌔근 숨결이 느껴졌다. 고통에 겨워하던 그녀에게 숙면 만한 처방이 없으리라. '쩝, 이 녀석을 깨우긴 싫은데.' 일어날까 말까 잠시 고민하는 새 소화의 고개가 쏙 들이밀어졌다. 그녀의 가느다란 눈썹 꼬리가 지긋이 치밀어졌다. 뾰룽퉁한 입술이 처음 때보다 두 배는 더 튀어나왔을 것이다. "이게 뭐예요? 누군 마차랑 옷가지랑 요깃거리까지 구해 오느라 생고생했는데, 오라버니는 ……." 그녀의 언동으로 흑접이 깰까 염려된 나는 즉시 집게손가락을 입술사이에 세워 보였다. 뚱한 시선으로 상황을 파악한 소화의 안면은 그래도 풀리지 않았다. 사박사박 걸어오더니 흑접의 몸 이곳저곳을 톡톡 찍었다. "이제 입 열어도 되요. 수혈(睡血)을 찍었으니까 쥐도 새도 모르게 잠만 잘 걸요." "엉? 그런 게 있었어? 그럼, 진작에 수혈이라는 걸 찍어주지 그랬어?" "흥,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이 여자 눈이 먼 상황에서도 내가 다가서는 것을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구요. 그런 판국에 내가 점혈을 하려들었다면 죽이려는 줄 알고 비수를 던졌거나, 오라버니 목을 조르면서 협박했을 걸요." "설, 설마." "살막의 살수였던 여자예요. 보통 여인들처럼 생각했다간 큰 코 다치는 수 있어요." "……." 소화의 반박에 할 말을 잃어 입을 다물었던 것은 잠시, 곧 눈을 휘둥그래 뜨며 입까지 덩달아 떡 벌려야 했다. 다시 나타난 소화는 내가 알던 소화가 아니었다. 꽤나 비싸 보이는 연분홍 비단 저고리, 치마에 반짝이는 장신구로 호화롭게 치장하고 나타난 것이다. 가냘픈 목에는 진주 목걸이가, 가느다란 양 팔목에는 은팔찌가, 깔끔하게 묶어 올린 뒷머리에는 옥비녀가 살포시 꽂혀있었다. 연하게 화장을 했는지 살결이 한결 고와 보였다. 울금향도 더 강렬하게 풍겨왔다. 은근히 선머슴 같던 소화였다. 그런 그녀가 부잣집 소공녀 차림새로 나타나자 귀티 어린 깜찍함이 폭발적으로 발현되었다. "와, 무진장 예쁘게 변했는걸."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소화 안면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흥, 나 원래 예쁜 편이었다구요. 오라버니 신경이 무뎌서 그렇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그런가?" 왠지 멋쩍어져서 뒷머리를 긁적긁적 긁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띄운 소화가 내 앞에 보따리 하나를 덥석 내려놨다. "흑접은 추위를 타는 듯 하니 그 위에 그대로 보자기 안의 가죽 두루마기를 입히세요. 주령령은 제가 마차 안에서 갈아 입힐 테니까, 그새 오라버니도 옷 갈아입어요." 말을 마친 소화는 령령을 업고 수풀 밖으로 나가 버렸다. 보자기를 풀어보니 따뜻해 보이는 가죽 두루마기와 생전 입어본 적이 없는 연하늘빛 비단 옷들이 들어있었다. 이미 소화의 차림새를 보고 짐작했으므로 겸연쩍었어도 주섬주섬 갈아입었다. 매듭짓기가 낯설어서 옷매무시를 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직도 갈아입고 있어요? 봐요, 내가 도와줄 테니." 어느새 일을 해치우고 온 소화가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난감했던 차에 한 팔 거들어준다 하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으, 응, 도와주면 고맙지." 소화의 협조 아래 단정하게 마무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뒷머리 주머니까지 그녀의 도움으로 묶을 수 있었다. "흑접 좀 안아들고 와요." 먼저 쪼르르 나가버린 그녀 뒤로 흑접을 안고 나갔다가 멈춰서 버렸다. 간신히 굴러다닐 달구지 정도만 구해와도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작 소화가 구해온 것은 부자들이나 타고 다닐 고급 쌍두마차(雙頭馬車)였다. "소화야, 너 돈이 어디서 나서? 설마 훔쳤……." "흥, 소방 오라버니 사부님이 남겨주신 비상금으로 산 거예요. 개방의 방주나 되셨던 분이 노자 몇 푼 쥐어주고 말았겠어요?" "그, 그래?" 소화를 따라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가 제대로 놀라고 말았다. 내부에는 무슨 짐들이 수북히 쌓여있는지……. 먼저 들어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주령령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소화는 말없이 눈앞의 긴 의자를 젖혔다. 뜻밖에도 의자 아래가 텅 비어 있었다. 흡사 장례식 때 죽은 사람이 들어앉을 관처럼 보였다. "흑접, 여기에 눕혀요." "엉? 거기 눕혔다가 질식사하는 것 아니야?" "아니에요. 요 옆에 숨구멍이 뚫려져 있어요. 은신을 대비해서 특별 제작된 마차니까 걱정 안 해도 되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안락하게 잠들어 있도록 수혈을 짚었으니까 마음 푹 놓으세요." "그럼, 령령은 어디 있어?" "다른 의자 아래 있지요. 바로 저기." 소화가 가리킨 곳은 짐들이 수두룩하게 쌓여있는 자리였다. 옷을 갈아 입혀 눕히고 난 후, 짐까지 쌓아올렸던 모양이었다. 하기사 내가 옷 갈아입는다고 시간을 좀 끌었는가? 기다리다 지쳐 마무리지은 듯 했다. "걔, 중간에 깰지도 모르는데." "휴우, 오라버니 저 못 믿어요? 이 소화, 매사 빈틈없이 일 처리하는 것 잘 알잖아요. 쟤도 수혈 꾹꾹 눌러놨으니까 좋든 싫든 며칠 푹 잘 거예요. 그새 집결지에 도착해서 꺼내주고 시치미 뚝 떼면 그만이라구요." 소화의 호언장담에 더 이상 가타부타 언급하지 않았다. 똑똑한 것을 둘째 쳐도 꼼꼼하기 그지없는 그녀가 그런 점을 놓쳤을 리 없었다. 가죽 두루마기로 따뜻하게 싼 흑접을 빈 공간에 슬그머니 눕혔다. 뚜껑이 철컥 닫히고 나자 그야말로 감쪽같았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마차 옆에 쌓여있던 짐들마저 그 위에 올려버렸다. 이로써 두 사람에 대한 위장은 깔끔하게 마무리지어졌다. 대신 마차 안에는 빈자리가 없게 되었다. 하는 수없이 소화와 나는 마부석에 앉아야만 했다. 가죽을 덧댄 마부석이라 오히려 안락한 기분마저 들었다. "설마 도망자들이 봄나들이 나온 부잣집 여식으로 활보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 할 거예요. 일단 요기부터 하고 떠나요." 소화가 열어제친 목갑 속에는 경단과 약과를 비롯한 온갖 다과들이 들어 있었다. 역시 평상시 먹기 힘든 고급 요리들이었다. 입안에서 톡 터지는 경단의 단 맛이 정말 좋았다. 한 바탕 역경을 치르고 난 후의 여흥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이거 진짜 봄나들이가 따로 없는걸.'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1-20 16:18:26 고친날 2005-11-21 09:04:50 읽은수 6969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9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1] 뚜그덕, 뚜그덕, 뚜그덕……. 집결지인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로 가자면 광서성(廣西省)이라는 넓은 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쌍두마차로 아무리 서두른다 해도 일주일은 걸릴 거리였다. '하물며 지금처럼 유유자적 가면 열흘은 너끈할 거다. 그 안에 령령이 깨어나면 큰 일인데.' 아무리 소화가 뒤끝 없게 처리했다고 해도 은근히 걱정되었다. 게다가……. 콩, 콩. 콩콩. "저기 소화야, 마차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니? 아까부터 콩콩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 호호호호호!" "……." 그저 아무 말 없이 해맑게 미소짓는 소화였다. 급기야는 꽃망울이 바람에 터지듯 화사하게 웃음을 터뜨려 보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작삼 오라버니, 둘 다 수혈이 집혀져 있어요. 일주일 안으로는 절대로 못 깨어난다구요. 제발 좀 신경 끄세요. 집결지로 가는 동안 귀찮게 굴 존재가 없으니 좀 좋아요? 오라버니는 인생을 즐기며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해요." "인생을 즐긴다라? 글쎄다. 분명 나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지." 말고삐를 쥐고 가던 내 손에는 어느 덧 붓 한 자루가 대신 쥐어져 있었다. 눈앞에는 커다란 화선지 하나가 나비처럼 하늘하늘 내려와 살풋이 놓여졌다. 갸름한 얼굴선을 한 번에 내려긋고, 양 눈썹을 시원하게 휙휙 그었다. 커다란 눈망울을 그리고 나니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매가 인상깊어졌다. 오똑한 콧날과, 오동통하지만, 고집스럽게 다물려진 입술, 누군가를 빼닮은 그림이 되고 말았다. 너털웃음이 나왔다. 그림에 대한 나의 집념이란 상상만으로 머릿속에서 그려버릴 만큼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절망도 깊었기에 지금껏 잊고 산 것이 아닐까? "그저 다 추억거리일 뿐인걸." "정말, 그 멍한 표정을 보니까 인생 다 산 사람 같네요. 안되겠어요. 앞으로 일주일, 다른 잡념 따위 모두 잊어요. 아니 내가 잊게 해주겠어요." "……." 소화의 단호한 선언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시금 그녀를 돌아보니 해맑던 두 눈가에서 빛줄기가 초롱초롱 쏟아져 나왔다. 너무 눈부셔서 똑바로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이 녀석, 도대체 뭘 생각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네. 인정 사정없이 빛나는 눈동자도 소방하고 똑같은 것만은 확실하군.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로구나.' 콩, 콩콩, 콩콩……. 살살 불어오는 봄바람 결에 희미한 잡음이 섞여있는 듯 했다. 그에 대해 뭔가 잊은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개의치 않기로 했다. '소화와 나 둘 뿐이다. 잠시동안 만이라 해도 좋다. 모든 근심걱정 훌훌 털어 버리고 가뿐한 마음으로 여행을 즐겨보자.' 콩, 콩콩콩, 콩콩……. 기이한 잡음은 조금씩 잦아들더니 어느 틈엔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그 때쯤에는 내 뇌리 속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부잣집 소공녀로 변신한 소화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였다. 가는 곳곳마다 관심 어린 시선이 쏟아져 내렸다. 소화의 깜찍한 외모와 해맑은 미소는 수많은 행인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압권이었다. 여인들마저 질시의 시선보다는 귀여워 어쩔 줄 몰라하는 분위기로 일관했다. 다만 입을 떡 벌리고는 군침을 질질 흘리며 멈춰선 남정네들의 뜨거운 눈빛들만은 꺼림칙했다. 뭘 상상하는지 쉽게 알 수 있는 시선들이었다.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급기야는 쥐새끼처럼 얍실한 면상을 지닌 녀석이 기분 나쁘게 히죽거리며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녀석이 걸치고 있는 새하얀 무복이었다. '무림맹(武林盟)? 제길 백호단 나부랭이다. 마황맹 구역이라고 무림맹이 철수한 줄 알았더니, 이게 웬 날벼락이야.' "앗, 오라버니, 곡마단인가봐요." "엉, 어디?" 곡마단 미녀들이 한 미모 한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재빨리 고개를 돌려봤다. 휙, 쿵.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고개를 돌린 사이, 가벼운 타격음이 들린 듯도 했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호호호, 미안해요. 제가 잘못 봤나봐요." '어라, 무림맹 백호단 녀석, 어디로 사라졌지? 쩝, 일이 생겨 되돌아갔나?' 그 이후에도 백호단 놈들이 한 두 녀석, 어슬렁거리며 다가왔다. 이만저만 신경이 쓰이는 일이 아니었으나, 소화가 탄성을 지르며 손가락질하는 곳으로 신경이 돌려졌다. 다시금 시선을 돌리면 그 때마다 백호단 녀석들이 사라져버리곤 했다. 그 속도가 가히 섬전에 비견될만했다. 나중에야 어찌된 일인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래도 대단히 빠른 일격이네. 그 짧은 사이 행인들도 눈치채지 못할 속도로 깔끔하게 해결해 버리다니.' 짝, 흔들흔들. 덜커덩. "와아, 오라버니, 오라버니, 저기 봐요. 저기. 저기." 갑자기 손뼉을 치며 소화가 일어서는 바람에 그 비싸 보이는 쌍두마차조차도 잠시 흔들렸다. '이번에도 날 속이려는 거야? 에휴, 그래, 속는 척 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세심한 배려라 할 수 있겠지.' 마지못해 시선을 돌려보니 황새 한 쌍이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꼭대기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흠, 멋진 황새 한 쌍이네." "어머, 황새라니요? 쟤들은 엄연히 두루미라구요. 머리꼭대기를 봐요. 새빨갛잖아요. 우아하게 흐르는 몸매! 유연하게 휘날리는 날갯짓! 마음에 와 닿는 둘의 애달픈 사랑! 밋밋하기 짝이 없는 황새들은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자태라구요." "두루미나 황새가 다를 바 있냐? 생김새든지 하는 짓이든지 비슷비슷하구만." '더욱이 마음으로 느껴지는 사랑이란 것은 단지 네 생각일뿐이잖아.' "정말, 오라버니하고는 무슨 대화를 못 나누겠어요. 그렇게 운치 없이 살다가는 누군가가 오라버니를 사모하려는 마음이 들다가도 만다구요." "……." '아무렴 어쩌랴? 난 옥정 누님하고 혼인 얘기 끝났어. 이미 인생의 막장에 이르렀다고. 누구처럼 양다리 걸칠 기술도 없고, 생각도 없다. 그저 누님이랑 알콩달콩 오붓하게 살고 싶은 생각뿐인걸. 하지만! 천운학, 이 자식만은 가만 놔두지 않을 거다. 절대로! 절대로!' 내 낯빛이 어두워지자 소화의 낯빛까지 덩달아 어두워졌다. 그제야 일주일 모든 걸 잊자는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애써 미소를 떠올리려……. "정말 안타까운 일이오. 소저가 이렇다면 이런 것이고, 소저가 저렇다면 저런 것인데. 그런 것 하나 맞춰주지 못 한다니! 한 사람의 남자로써 명백한 실격이로군요." '깜짝이야. 누구야?' 난데없이 등 뒤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한 번 더 놀라고 말았다. 마부석 뒤편 마차 지붕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떡 하니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 마차 곁을 스쳐 가는 바람을 따라 하늘하늘 넓은 소매가 펄럭이는 문사풍의 백의, 안면을 살짝 가린 하얀 선섭, 드러난 일부만으로 신의 조각임을 느끼게 해주는 반듯한 안면, 무엇보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느끼하기 그지없는 여유 만만의 말투. 백호단의 단주이면서 풍류공자로 유명한 고휘천(高諱泉)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항주에 붙어 있어야할 자식이 여기 왜 있는 거야!' 그의 등장에 안 그래도 소화의 귀여움에 쏙 빠져 있던 여인들이 이번에는 이구동성(異口同聲), 여출일구(如出一口)로 꺅꺅 비명을 질렀다. 심지어 이마에 손을 올리며 풀썩 쓰러지는 처자까지 보였다. 풍류공자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 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무임 승차를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요. 그만 내려가 주시겠어요?" 냉대 어린 소화의 축객령이 서릿발처럼 떨어져 내렸다. "쌀쌀 맞은 처자시군요. 보통은……." "보통은 아련한 눈빛으로 자기 소개를 하고서 공자의 고매한 방명을 물어들 본다구요?" "하하하하, 이거 제가 말을 꺼내기가 아주 무색하군요. 뭐, 비슷하다고 해둡시다. 그보다는 소저에게 보낸 부하들이 되돌아오지 않아서 제가 직접 와본 것이라 해두지요." "하얀 옷을 입은 무례한 작자들 말인가요? 다짜고짜 다가오기에 알아서 처리했답니다. 역시 그 부하들의 그 주인답게 무례하시네요." "이런, 이런, 오해십니다. 명문세가를 비롯해 소문난 미녀 분들에 대해 모르는 바 없다고 항시 자부해왔는데, 소저만큼은 전혀 알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소저의 방명을 알아내고자 부득이하게 실례를 범했던 것이랍니다.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기꺼이 사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 공자의 이름이 궁금하지도 않고, 제 이름을 알려드리고 싶지도 않답니다. 사과도 받은 셈치겠습니다. 용무가 끝나셨으면 그만 내려주셨으면 합니다." "……." 사이에 있던 날 완전히 외면하다시피 벌어지던 둘의 설전은 일단 소화의 승리로 끝난 듯 싶었다. 소화의 쌀쌀한 어투로 미뤄볼 때, 풍류공자 고휘천에 대해 이미 잘 꿰뚫고 있는 듯 했다. 개방 사람이었던 소방의 동생이라 그런 모양이었다. '풍류공자 고휘천' 하면 뭇 여성들에게는 무한한 사모와 무성한 소문을, 많은 남성들에게는 끝없는 질투와 원한을 받는 대명사로 유명했다. 고휘천은 여성에 대한 세 가지 규칙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하나, 한 번 점찍은 여인은 그녀가 항복선언을 하고 스스로 옷고름을 풀어줄 때까지는 절대로 작업을 중단하지 않는다. 둘, 한 번 넘어온 여인은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이로 인해 수많은 여인들이 상사병을 앓는다고 전해져 왔다. 셋, 여성에게는 연령,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절대로 손찌검을 하지 않는다던가? 반대로 여성에게 손찌검을 한 남자는 끝까지 쫓아가 처절하게 응징한다는 말도 있었다. '뭐, 어디까지나 소문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기는 해.' 잠시 침묵을 지키며 고고하게 섭선을 부치던 고휘천이 나지막하니 입을 열었다. "소저, 이 근처에 유명한 주루가 한 곳 있답니다. 점심 오찬을 조촐하게 즐기기에 딱 좋은 곳입니다. 그 곳에 두 분을 초대하고 싶은데, 오시지 않으시겠습니까?" "흥, 말 길을 못 알아들으셨네요. 분명히 내리라고 하지 않았나요? 전 동문서답(東問西答)으로 딴청 피우는 남자를 무엇보다 싫어하거든요."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공자는 어디선가 본 듯한 기억이 있어서 오히려 생각날 듯 하긴 한데, 소저는 도저히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겸사겸사 모실까 한 것인데……." 고휘천은 말끝을 흐리며 마차에서 신형을 사뿐히 내렸다. 탁 접은 섭선으로 머리를 탁탁 치며 소화를 힐끗 돌아보고는 점점이 사라져 버렸다. 아니 비명을 지르며 환호하는 여성들에게 에워 쌓였다고 해야할까? 날 본 듯한 기억이 있다는 그의 말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않는 기분이 들었다. '쩝, 그 때 분명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설마……. 매화루 연무장? 그 자리에 있었을까?' "작삼 오라버니, 어서 가요." "으, 으응." 꿀꿀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말고삐를 팽팽하게 당겼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1-23 22:37:32 고친날 2005-11-24 05:02:42 읽은수 6693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9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2] 뚜그덕, 뚜그덕, 뚜그덕……. 해가 지고, 노을이 번져 왔다. 곧 암흑이 찾아올 터였다. 고휘천 녀석이 남긴 묘한 여운 때문에 찜찜하긴 했지만, 소화의 야단법석 애교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녀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것도 새롭다면 새로운 발견일 것이다. "한 고개만 더 넘으면 귀주성(貴州省)과 광서성(廣西省) 접경지역인 남단(南丹)이에요. 그 곳에서 하룻밤 쉬었다가 가요. 말들이 너무 지친 것 같아요." "그러자꾸나. 귀주성을 벗어나려고 꽤나 서둘렀으니까 말들 고생이 컸지." "아하암, 저도 무척 졸려요. 눈꺼풀이……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오네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연이어 하품을 하던 소화의 신형이 갸웃 기울어 졌다. 내 어깨 위로 그녀의 머리가 기대어졌고, 기다란 머릿결이 가슴 위로 사르륵 흘러 내렸다. '어어, 얘가 왜 이런다? 내 손만 스쳐도 얼굴 붉히던 녀석이 제법 과감하게 나오네.' 처음에는 그냥 피곤해서 그러려니 했었다. 힘없이 흔들거리던 소화의 상체가 내 무릎 위로 풀썩 넘어져버렸다. "끙, 소화야. 그렇게 기대어오면 내가 말고삐 잡기가 힘들어. 여기서는 안 된다구." 불러도 안 일어나기에 하는 수 없이 말고삐를 당겨 말들을 세웠다. 본격적으로 그녀의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소화야, 일어나 봐. 응? 얘, 얘가 왜 이리 꼼짝도 안 하지? 설, 설마 죽었나? 소화야, 소화야!" 아무리 흔들어도 꼼짝하지 않는 그녀를 보고 나서야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봉착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이 노기로 바뀌는 데도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푹 잠들었을 뿐이지요. 적어도 오늘밤은 일어나기 어려울 거랍니다." 낯익은 목소리가 우거진 숲 저편에서 들려왔다. 접혀진 섭선으로 어깨를 톡톡 치며 나타난 문사풍 백의 미공자가 누구인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무림맹 백호단 단주, 풍류공자 고휘천 바로 그가 이 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냐?!" "어허,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 또한 고운 법 아니겠습니까? 공자는 좀 많이 배워야 하겠구려." "용건만 간단히 얘기해라." 그와의 말장난에 휘말릴 이유가 없었다. 급한 것은 소화의 상세였다. "하하하, 성미도 급하시구려. 한 마디로 소저는 상심향(象深香)이라는 수면향에 취해 잠든 것이오. 말 그대로 코끼리조차 깊은 수면에 빠져들게 할 만큼 강력한 것이지요." "뭐라구! 그 말은 니 놈이!" "맞습니다. 낮에 마차 지붕에 올랐을 때 소저와 대화를 하면서 살짝 뿌려드렸지요. 아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여자에게는 손찌검을 하지 않는다는 제 원칙을 지키기 위해 잠시 재워둔 것뿐이니까요." "젠장, 뭐가 문젠데 걸고 넘어가는 거야!" "당연히 문제지요! 공자처럼 별 볼일 없는 작자 때문에 절 거부했다는 것 자체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습니다!" '이, 이 자식, 바보인가? 당연히 그럴 리가 없잖아. 도망가기에도 바쁜데, 니 놈 상대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 고휘천은 애매한 일갈을 내질렀다. 다행이라면 날 못 알아본 점이지만, 불행이라면 그의 목표가 나라는 점은 변치 않으리라는 점이었다. 한 마디로 그의 고매한 자존심에 티 하나 묻었다고 열 받았다는 소리 아닌가! "아, 이런, 이런, 약간 흥분해버렸습니다. 일단 공자부터 처리하고서, 나중에 깨어난 소저를 달래볼까 합니다. 실종된 공자를 찾아 돕겠다 나서면 당연히 반색하겠지요. 시간이 흐르면 공자와의 추억은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저와의 새로운 추억에 물들어 가는 게 자연의 섭리." '크윽, 이 녀석에 대한 소문, 도대체 누가 퍼뜨렸어? 제대로 된 정보를 퍼뜨렸어야지!' 녀석의 세 가지 원칙에 대한 소문이 어느 정도나 뒤틀려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언뜻 들으면 비슷한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나, 현실과 동떨어진 바도 컸다. "마지막 순간, 저의 화려한 기술이 발휘되면 세상 그 어느 석녀건 스스로 옷고름을 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녀는 제 관심 밖이 되는 것이지요. 이후 일은 제 알 바가 아니란 소리지요." "당신 너무 뻔뻔……." 철커덕, 휘잉. 슬며시 흔들던 섭선을 느닷없이 나에게 휘둘러왔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때문에 날렵하게 고개를 뒤로 제쳐 피했으나, 콧등이 아려왔다. 코피 한 줄기가 주륵륵 흘러 내렸다. "뭐, 뭐야! 이거!" "하하하하, 날다람쥐처럼 재빠른 구석이 있군요. 보통은 이 한 번의 기습으로 저승마차를 타곤 했는데 말이지요." '이, 이 녀석 그러니까, 연적 관계에 있는 남자들은 다 죽여왔다는 소리야?!' 철커덕. 그제야 녀석의 섭선 부채살에서 얄팍한 쇠창살들이 튀어 나왔다 들어가는 게 보였다. 아무런 병장기도 들려 있지 않아 보여 경계를 늦추고 다가섰었던 게 화근이었다. "잠, 잠깐 내가 검이라도 들고 싸우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병장기를 항시 휴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무림인의 기본 중 기본입니다. 기본이 안 된 인간은 도태되어야 하는 것 또한 자.연.의.섭.리!" '기본이 안 된 것은 너잖아!' 휘이잉, 휘이잉. 말을 끝맺기도 전에 녀석의 공격이 이어졌다. 섭선의 부채살에서 튀어나오는 쇠창살 공격이란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당연히 상당한 애를 먹어야 했다. 더욱이 철봉을 뽑으려면 마차로 되돌아가야 했으나, 그럴 여유가 허용되지 않았다. 고휘천 녀석이 날렵하게 내 앞을 가로막아 버린 것이었다. 야비한 만큼 눈치 또한 빠른 놈이었다. '이 자식, 실력은 구룡급인데, 하는 짓은 변방 오랑캐 저리 가라네. 뭐 이래!' 하는 수 없이 맨 몸으로 녀석과 맞닥뜨려야 했다. 실전 경험으로는 삼재권법을 사용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오로지 령령 상대로 도망 다니면서 급하게 방어를 할 때나 써먹었을까? 그녀 상대로 반격은 거의 상상하기가 어려웠으니 그럴 수밖에……. 맹호희산(猛虎戱山)에 독헐반미(毒歇反尾)를 연이어 펼쳐 몸을 빼는 동시에 팔을 들어 안면과 가슴을 막았다. 방어와 회피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박투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상대가 생전 처음 보는 무기를 휘둘러왔으므로 대응하기가 곤란했다. 회피하며 반격하는 게 주를 이루던 삼재검법 초식들을 맨주먹으로 펼쳐 보이니 꽤나 우습게 되어 버렸다. "오호, 삼재검법을 권법으로 응용한다라? 재미있는 발상이긴 하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 또한 맨주먹이었다면 해 볼만했을 뻔했겠군요." "그럼, 너도 맨주먹으로 싸워!" "안됩니다. 이 철선은 제 몸의 일부가 된지 오래, 떼 놓고 싸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뭐라……. 으윽." 휘이익, 휘이익. 쉬잉. 고휘천은 내가 말할 틈 따위 주지 않고 연이어 공격을 퍼부어 왔다. 그만 팔뚝을 스치고 말았다. "응? 아주 신기한데요. 지금의 공격으로 팔이 잘렸어야 정상인데, 피만 조금 새고 마는군요. 팔뚝에 방어구라도 차고 있는 겁니까?" 그 이후로도 녀석의 강공이 내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철선의 부채살에서 튀어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쇠창살 때문에 거리 조정이 어려웠다. 잠시 당황했던 녀석의 안면에 조소가 떠올랐다. "생각 외로 한 수 하는군요. 뜻밖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피하기만 해서는 아까운 옷만 버릴 뿐입니다. 피로 빨갛게 염색하실 생각인가요? 이런 쯧쯧, 돈이 모자라서 그러시는 거라면 염색 비용, 제가 보태드리지요." 녀석의 명백한 우롱에 눈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이 자식이!" 조용히 잠자고 있던 구타심공에 불이 붙어 버렸다. 청아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으며 가닥가닥 일어나고 있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고휘천의 전면으로 힘차게 박차 올렸다. "기회! 이제야 결말을 짓게 되는군요!" 탁. 딸깍. 펼쳐져 있던 철선을 접은 그는 날 향해 그 끝을 돌렸다. 새까만 것들이 내 전면으로 솟구쳐 왔다. '쇠창살?!' 즉시 청룡탐조(靑龍探爪)의 수법으로 왼손을 비틀어 올려 앞으로 내었다. 착(着)과 흡(吸)을 발현시키며 쇠창살들을 맨손으로 잡아내었다. 흡(吸)으로 쇠창살들의 기운을 빨아냈기 때문에 왼손이 망가지는 것은 면했다. 그래도 무지막지하게 따가웠다. "끄으윽! 이 자식 죽인다!" "어라? 그, 그걸 막다니요?" 퍼어억! 황당해하는 녀석의 안면에 오른손으로 백사토신(白蛇吐信)을 펼쳐 그대로 박아 넣었다. 넘어져 자빠지는 녀석의 몸뚱이가 바닥에 닿기 전에 가볍게 차 올렸다. 그 이후로는 생각하시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붕 떠버린 놈의 전면에 주먹질과 발길질을 인정 사정없이 쏟아 부었다. 동네 깡패들간 집단 난투극에나 어울릴 법한 장면이었다. 퍽, 퍼퍼퍽, 퍽, 퍼퍽. "그, 그만!" 한참을 박 터지게 맞던 녀석이 쓰러진 채 부들부들 손을 들어 보였다. 계속 때릴까 하다가 반항할 기운이 없어 보여 일단 기다렸다. 심호흡을 몇 차례 내쉬며 숨을 고르는 게 보였다. "하고 싶은 말만 간단히 해. 아직 쌓인 거 많으니깐." 때리던 자세 그대로 녀석을 노려보았다. 어떤 잔 수를 부릴지 알 수 없는 만큼 약간의 경계도 보태었다. "내가 직접 여인에게 손찌검하지 않는다는 소문은 들었겠지요?" "그래, 듣긴 들었다." "그 소문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그런데, 추가할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뭐?" "내 부하가 손을 대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요." "……." 그제야 깜짝 놀라 소화가 쓰러져 있는 마차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미 그 곳에는 검은 복면인 하나가 검을 들어 소화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게 아닌가! 뿐만 아니라 마차 또한 십여 명의 복면인들에게 에워 쌓인 형국이 되 있었다. "하하하하! 다시 형세 역전이로군요. 만약을 대비해서 항시 제 주변에 은신해 있는 녀석들이랍니다. 아주 잠시동안이었지만, 많이 놀랬습니다." 안면이 파랗게 퉁퉁 부어오른 고휘천이 기이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비틀비틀 일어서더니 피 섞인 침을 바닥에 탁 내뱉었다. 그의 두 주먹 사이에서 뿌드득거리는 소리가 흘렀다. "오늘은 저의 자존심이 종이장처럼 구깃구깃 구겨지는 날이었습니다. 부하 간지호 녀석이 어떤 얼빵한 놈한테 터진 일로 자존심이 팍 상했었는데, 오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군요. 일단 맞은 만큼 돌려드리겠습니다." "어이, 잠깐, 우리 대화로 해결하는 게 어때?" "어떤 대화 말입니까?" "그냥 나도 쇠창살로 긁힌 거 잊어줄 테니까, 당신도 나한테 맞은 거 잊고 그냥 가는 거야. 어때?" "그렇게는 안……." 휙, 슈슉. "끄어억." 소화를 검봉으로 위협하고 있던 복면인 녀석이 목을 움켜쥐며 풀썩 쓰러졌다. 마차를 에워싸고 있던 복면인 반수 또한 암기에 맞아 풀썩풀썩 쓰러졌다. "이 음적들! 무당의 이름으로 용서치 않으리라!"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여러 명의 도인들이 일시에 날아들었다. 그들이 칼날을 세우고 마차를 향해 달려든 덕에 다른 복면인 녀석들도 하나 둘 쓰러져 갔다. 내가 도울 필요도 없이 순식간에 제압되는 상황이었다. 안도의 한숨과 동시에 득의의 미소가 흘러나왔다. "흐흐흐, 다시 형세 역전……. 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고휘천이 서있어야 할 자리에는 이미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느새 바람과 함께 사라져 있었다. '자식 대단히 빠르네.' 느닷없이 난입해준 도인들 덕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아마 기회를 엿보다가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실로 시기 적절한 난입이었다. "무량수불,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형제께서는 다치신 곳이 없으신지요?" 중년의 도인이 무량수불을 되뇌며 다가온 순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너무나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두 번 다시 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던 인간이기도 했다. '방, 방금 전에 무당파라고 했었지? 이런 젠장, 산 넘어 산이라더니!'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1-26 23:13:35 고친날 2005-11-26 23:13:35 읽은수 7167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93)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3] "무당의 이대 제자 현허(玄虛)라고 합니다. 소협의 방명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포권지례에 나 또한 마주 포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 예, 저는 우작삼(愚作三)이라고합니다." 얼결에 말해놓고 나니 가슴이 한 차례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현허는 고개만 한 번 갸웃거렸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기사 누가 나의 기이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겠는가? 나 자신도 별생각 없이 급조해버린 이름인 것을……. "혹시 음적의 신분이나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날이 어두워서 저희는 잘 보지 못했답니다." 바로 대답해주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아 버렸다. 풍류공자 고휘천을 언급해봤자 나에게 이로울 게 없으리라. 그의 인기와 명성은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될 것이다. 거꾸로 우리 정체를 캐물으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글쎄요. 갑자기 당한 일이라 아는 바가 없네요. 그나저나…… 대무당파의 높은 분이셨군요. 위기에 빠진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읍할 따름입니다. 과연 무당의 정의가 온 무림에 살아 숨쉰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무당파에 대(大)자를 붙여 살짝 띄워주었다. "껄껄껄, 당연합니다. 무당은 정의 빼면 시체랍니다. 스스로의 도를 닦아 심신을 단련하는 게 목적이기는 하나, 궁극적으로는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무림의 정의를 실현하는 데 그 의의를……. 어이구, 내 정신 좀 봐." 설탕처럼 달콤한 내 말에 현혹된 티가 바로 드러났다. 호탕하게 웃으며 무당파 자랑을 죽 늘어놓으려던 현허는 자신의 이마를 탁 치며 말을 끊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날 알아보지 못 했다. 령령의 존재감이 너무 부각되어 나 따위는 기억의 저편으로 날려버린 모양이었다. '쳇, 그때도 날 보면서 포권하지 않았어. 눈은 령령에게서 떼지 못했었지. 이 사람, 도인 주제에 은근히 속물이라니까. 그래도 호탕한 구석이 있어서 맘에는 들었다.' "일단 우리는 음적 무리를 뒤쫓아야겠습니다. 그의 하는 음행을 보아하니 악녀 주령령과 관계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드는군요. 아차, 이거 외인에게 못 할 말을……." "주령령이라구요? 어떤 여인이기에?" 속으로는 살얼음판 위를 기어가는 기분이 들었으나, 겉으로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었다. "험, 험, 그, 그렇지. 대협께서는 소저의 건강부터 챙기셔야 할 것입니다. 한약 비방에 대해 옥경(玉鏡)에게 남다른 조회가 있으니 그녀와 옥청(玉淸)을 남겨두겠습니다. 저희는 음적의 행방을 찾는 게 급선무라서 말이지요." "아, 아니 안 그러셔도 되는데……." '하필 남겨도 옥청 그 꼬마냐? 제발 그냥 데려가라.' 옥청은 령령의 손에 뜨거운 애무를 받고 저승으로 떠나버린 옥허 녀석과 동행해왔던 꼬마였다. 행여나 나를 알아보면 곤란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혹 하나 떼려고 말 돌렸다가, 혹 하나 더 단 격이 되 버렸다. "하하하, 우리 무당은 원래 마음 씀씀이도 대범하답니다. 옥경, 옥청, 너희는 남아서 저분들을 남단(南丹)까지 잘 모셔다 드려라. 특히 옥경, 너는 소저의 건강을 책임지고 잘 보살펴드리도록 하고." "피이, 현허 사숙, 또 나만 쏙 빼놓으려구요? 제가 얼마나 이 순간을 학수고대하면서 태극검법(太極劍法) 수련에 박차를 가해왔는지 알기나 하세요!" 맨 처음에 일갈을 내지르며 무당 도인들 사이에서 톡 튀어나왔던 여인이었다. 무당파에는 남자 도인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여자 도인도 있었다. 그것도 의외로 한 인물 하는 여인이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보아하니 한 성깔도 하겠는데. 물론 령령에 비하면 새 발의 피겠지만.' "어허, 안 되느니라. 어찌 얄팍한 실력으로 음적의 고강한 무공을 당해내려 한단 말이냐? 대협의 높은 실력으로도 너덜너덜 피투성이가 된 것이 안 보이느냐? 그의 상처부터 치료해드리도록 해라. 대협, 다음에 또 보도록 합시다." 대무당파라고 했더니만, 소협이 대협으로 바뀌어졌다. 무당파에 대한 그의 자부심이 얼마나 강한지 잘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 인간 속생각이 겉으로 확 드러나서 사람 속이는 짓은 평생 가도 못할 위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도인 체질인 사람이로세.' "예,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얘들아, 가자!" "예, 사숙!" 현허 도인의 뒤를 따라 십여 명의 무당 도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신형을 날렸다. 그들의 황색 남화건과 도복이 시커먼 밤하늘 위에서 펄럭펄럭 휘날렸다. '역시 남다른 조직이로군.' 안 그래도 가느다란 옥경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쳇, 사숙은 만날 나만 무시해." "안 그렇습니다. 옥경 사매, 사숙님은 사매를 걱정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옥청 녀석이 당당하게 훈계하듯 입을 열었다. 소년이 목 하나는 더 커다란 아가씨에게 훈계를 하는 꼴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흥, 나보다 빨리 들어왔다고 사매, 사매 맘대로 부르지마. 너보다 육 년은 더 살았다고. 둘만 있을 때는 사매라고 하지 말라고 했지?" "사, 사매." "어쭈, 좀 맞아야 정신 차리겠어?" 그녀가 번쩍 손을 들어 보이자 옥청이 내 뒤로 잽싸게 숨어들었다. 뒤늦게 서야 멀뚱멀뚱 내 시선을 의식한 옥경의 안면이 빨갛게 물들었다. '쩝, 이거 무당파 내부단속부터 해야겠네. 이리 위계질서가 엉망진창이어서야.' 그녀는 상황이 난감해지자 그대로 소화 쪽으로 피신해 버렸다. 맞바로 눈깔을 뒤집어 보고, 맥을 짚는 등, 한약사들이 하는 흉내는 다 내었다. 과연 한약 비방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의심이 갈 지경이었다. "옥경 사매가 신경이 날카롭기는 하지만, 부모님이 한약사세요. 무당파 옥(玉)자 돌림 속가 제자들 중에서 그쪽으로 가장 정통해 있어요." '아, 그러니까 속가 제자였다는 말이네. 어쩐지 무당파 정통 제자들 중에 여자가 있을 리 없지.' "무당파에도 여자 도고들도 있어요. 부분적으로 혼인이 허용되기 때문에 무당파 사람들끼리 부부가 된 이들도 있구요." 옥청의 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가타부타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 내 눈빛만 보고도 심중을 알아차린 듯 했다. 마음 속을 꿰뚫어 보는 기이한 무공이라도 익힌 게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끙, 이러다가 내 정체까지 알아보는 것 아니야?' "깊이 잠들었다는 점 빼고는 아무 이상 없어요. 적어도 한 시진 동안은 아무리 흔들어도 안 일어날 거예요. 상심향(象深香)을 쓴 모양인데, 음적 녀석, 꽤나 부자인가 봐요. 그거 한약방에서도 구하기 힘들 정도로 비싼 건데." 그 순간 날 구원해준 것은 옥경이었다. 그녀가 다가오자 옥청은 다시 내 뒤로 바짝 붙으며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공 실력으로 옥청이 옥경에게 밀릴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단지 사나운 사매라고 머릿속에 달고 있어서 의식적으로 피하는 모양이었다. "휴우, 다행이군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안심했습니다." "호호호, 뭘요. 대협의 용감무쌍한 활약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정말 멋졌어요. 공중으로 연이어 차올리면서 소나기처럼 파바박 퍼붓는 위력적인 권과 각, 환상 그 자체였어요." '이 여자, 무공광이로군. 눈빛이 맛이 갔어. 정말 가지가지 하네.' "아차 내 정신 좀 봐. 잠시만요." 옥경은 즉시 내 팔뚝에 난 상처들을 세세히 살폈다. 금창약을 꺼내 바르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하네요. 이 정도 출혈이면 깊이 베였어야 정상인데, 대협의 상처는 보기보다 얇아요. 마치 급속도로 아무는 것처럼 보이네요. 물론 제 착각이겠지만요." '뭐, 회복 속도만큼은 끝내 주더라. 맞는데 이골나다 보니까 회복하는 것도 빠른가보지. 벌써 아물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걸.' "날이 어둑어둑하니 쌀쌀하네요. 환자도 있고 하니 어서 남단으로 갑시다." "네, 대협." 즉시 마차를 몰아 남단으로 향했다. 지척이었기 때문에 금새 도착할 수 있었다. 자그마한 객잔에 방을 잡아 소화를 눕혔다. 바로 건너편 방에 옥청과 옥경이 방을 잡았다.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봐서 옥경이 또 옥청을 갈구는 듯 했다. 아무리 속가 제자라지만, 별난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어떤 남자가 데려갈지 몰라도 반듯한 외모에 혹해 혼인했다가는 한 고생할 터였다. '흠, 혹시 옥청이 옥경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거 아냐? 흐흐,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이튿날 소화는 한숨 잘 잤다는 듯이 개운하게 일어났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바 없는 듯 했다. 다쳤던 팔뚝에는 붕대를 칭칭 감아놨고, 너덜너덜해진 비단옷은 슬며시 여벌의 옷으로 바꿔 입었다. 옥청과 옥경에게도 미리 함구(緘口)를 부탁했기 때문에 소화가 일어나자 그들은 남인 양 모르는 척 행세해 줬다. '무당파, 오히려 신세를 져버렸네. 정파 무림인이라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니로구나.' 마차에 오르며 그들에게 넌지시 고개를 끄떡였다. 그들도 살짝 응수해주고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마 다음 행선지를 나도 모르게 전음입밀로 받았던 모양이다. 만에 하나 고휘천이나 무당파의 추격이 있지 않을까 싶어 은근히 길을 서두르게 되었다. 소화의 애교도 한 풀 꺾였다. 내 분위기에서 뭔가 이상한 기척을 느낀 모양이었다. '하여간 예민한 녀석이라니까. 그래도 모르는 게 약인 일이 있는 법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2-01 22:13:21 고친날 2005-12-01 22:13:21 읽은수 6798 [ 11 K ] 제목 점소이 작삼(94)-기이한 내기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4] 기이한 내기 대놓고 서두른 탓에 소화의 장난기 섞인 애교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대신 예상보다 앞당겨 집결지, 광동성(廣東省) 광주(廣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열흘은 넉넉히 걸릴 거라고 생각했던 예정일이 일주일로 줄어든 것이다. 추격에 대한 걱정도 한 몫 했지만, 관이나 다를 바 없는 마차 의자 속에 잠들어있는 인간들도 걱정이 되었다. 소화의 일처리가 아무리 능숙 능란하다해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사람일이다. 꼬이려고 하면 밑도 끝도 없는 법이다. 더욱이 한 여인은 중상을 입은 중환자요, 다른 한 명은 성질 더럽기로 천하 으뜸인 냉혈마녀 아니겠는가? 령령이 그 속에서 깨어나 역정부리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적어도 교 누님과의 혼인으로 수라사살(修羅四殺)과 영원히 인연을 끊기 전까지는 아무 일 없어야지. 그 이후야 령령이 남궁현이랑 결혼을 하건 미쳐서 발광을 하건 무슨 상관이겠어?' 광동성의 성도, 광주(廣州), 규모가 큰 상업도시로써 대외 무역의 중심지라던가? 역시 오만가지 사람들이 북적북적 거리고 있었다. 광주에 가까워오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상당히 따뜻해졌다. 새벽이면 슬며시 찾아오던 한기도 상당히 누그러졌다. 그래서인지 이름도 모를 봄꽃들이 화사하게 만개해 있었다. '뭐 나야 상관없었지만, 소화가 춥다고 난리법석이었잖아. 그렇다고 손만 잡아도 뻘게지는 녀석을 껴안고 잘 수도 없는 일, 이제 호들갑 떠는 일은 없겠구먼.' 남은 문제는 무인루를 찾는 것이었다. 무인루(無人樓), 이름 한 번 별난 주루였다. '사람이 없으면 장사가 어찌 되누? 이름을 지어도 괴이하게 지었네.' 객잔 구석에 마차를 세워놓고, 이리저리 발품을 팔아야 했다. 장장 한 시진 넘게 돌아다니며 수소문을 해봤으나 다들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찾다, 찾다 지쳐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저자거리 구석에 있는 보따리 행상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저 아주머니, 혹시 무인루(無人樓)라는 곳 위치 좀 아세요?" 길가 구석에 봄나물을 펼쳐놓고는 모락모락 곰방대를 입에 문 중년 여인에게 물어보았다.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이 아주머니 벌써 가는귀 먹었나?' 약간 더 언성을 높여 말했다. "무인루란 곳 들어보셨어요?" "아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안 들리네. 파리가 윙윙거리는 소리밖에 안 들리네 그려." "아니, 그럼 내가 파리란 말이오!" "작삼 오라버니, 잠시만요. 제가 말해볼게요." 머리에 살짝 열이 올라 한 마디 더 하려는 것을 소화가 제지하고 나섰다. 뭔가를 아줌씨의 손에 살짝 쥐어준 소화가 아주 나지막하니 말문을 열었다. "언니, 우리가 여기 지리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무인루라는 곳의 위치나 관련된 이야기, 소문 같은 것 들어본 적 있어요?" '언, 언니?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호호호, 동생, 그거야 이곳에서 오래 산 토박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이름이야." '동, 동생? 이 아줌마가 노망이 들었나? 내일 모레면 며느리가 손자 손녀를 안아들고 놀러와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 그래도 그 한 번의 뇌물과 아부가 적중된 것은 확실했다. 아줌씨의 입에서 기대했던 말들이 술술술 흘러 나왔던 것이다. "주루 이름이 뭔지는 잊어버렸지만, 십 년 전쯤에 아주 번성했던 주루가 하나 있었지. 루주님의 수완이 훌륭해서 상당히 번성했기 때문에 광주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어. 그러던 게 그만, 무림인의 화를 사 주루 일가족과 식솔들이 모조리 살해당해버렸다고 하더군. 그 일에 대해 정확한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어. 생존자가 하나도 없으니 말이야.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그 말을 마친 아주머니는 아련한 회상에 빠지듯 그물처럼 주름진 눈꺼풀을 가늘게 내려 떴다.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는 듯 싶었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당연하지. 무인루의 위치만 알면 그만. 구구한 과거까지 알 필요는 없잖아.' "온통 핏자국으로 얼룩 졌던 그곳은 점점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져 버렸어. 심지어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까지 있어서 그 근처에는 아무도 얼씬하려 들지를 않지. 언제부터인가 몇몇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 하곤 해. 사람 대신 한 서린 귀신들만이 사는 주루……, 무인루(無人樓)라고 말이지." '그러니까, 그런 것 따위 알 필요가 없다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무인루의 구체적인 위치일 뿐.' 그런데, 이 빌어먹을 아줌씨는 그 말까지만 내뱉고는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곰방대만 뻐끔 이며 시선을 돌리기까지 했다. 뭘 원하는지 뻔한 작태였다. '이 아줌씨가 정말 해도 너무 하네.' 발빠른 소화가 한 발 먼저 선수를 쳤다. 행상 아주머니의 손에 또 뭔가를 쥐어준 것이었다. "아, 뭐 이런걸. 괜찮은데. 험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쥐어든 손은 재빠르게 뒷주머니로 향해 버렸다. "저 뒷산으로 두 고개만 넘어가면 돼. 오랫동안 인적이 없었기 때문에 엉망이겠지만, 길이 나있었던 흔적 정도는 쉽게 찾을 수 있지." 행상 아주머니는 간단히 매듭짓고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마치 홍 영감님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기분 나쁘기는 매한가지인 여자였다. 따그닥, 따그닥. 덜커덩. 따그닥, 따그닥, 덜커덩……. 행상 아주머니 말대로 길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인적이 없었는지 잡초만 무성했다. 다행이라면 쌍두마차가 지나갈 정도의 너비는 된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산중에 주루가 있다는 말에 의아심이 생겼으나, 가면 갈수록 주루가 들어설 요지중의 요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광주 곳곳에 만발해 있는 꽃들도 산중에 오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두 번째 고개를 넘을 때는 양옆으로 무성하게 자란 소나무들 덕분에 시야가 제한되었다. 오로지 앞만 보인다고나 할까?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와아! 정말 예뻐요. 작삼 오라버니." "……." 소화 말 대로였다. 소나무 숲이 끝나고 눈앞에 확연히 드러난 정경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널따란 호수 하나가 우거진 수풀 사이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호수 주변으로는 심하게 풍겨오는 꽃향기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노랗게, 빨갛게, 파랗게 물들어 있는 꽃밭 또한 대단한 정경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찾던 무인루가 호수 저편에 세워져 있었다. 삼층은 될법한 으리으리한 건물이었다. 단지 오랜 세월, 모진 풍파를 못 이겨 여기저기 손상된 곳이 눈에 띄었다. '여기가 번성했던 이유를 알만하구만. 분위기 좋아하는 대감집 연인들이 종종 찾아와서 즐겼을 만한 곳이네. 그것도, 사방팔방 시선이 가려졌으니 연인으로 가장된 불륜도 성행했겠는걸.' 마차를 몰아 무인루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허물어진 담벼락과 파괴된 잔해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일러주는 듯 싶었다. "늦었구려." 담벼락 그늘 아래 새까만 흑의를 걸치고, 팔짱을 끼고 선 인물이 있었다. 지금은 죽립을 벗어버렸지만, 그의 이름을 내가 모를 리 없었다. "곽 대협!" "정말, 니네들 빼고는 다 모여 있었단 말이야. 왜 이렇게 늦었어?" 적미호가 볼멘 소리로 내며 무인루 안에서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천운학 녀석과의 교전 소식을 듣고는 달려온 듯 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동생! 살아있었구나. 살아있었어!" "교 누님, 누님도 무사하셨군요." 무인루 안쪽에서 사박사박 걸어오던 교 누님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작삼 동생!" 그녀는 무안하게도 다른 이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덥석 안겨왔다. 교 누님과의 포옹이 왜 이렇게 눈물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반가웠다. 미치도록 반가웠다. 무인루 안으로 들어서자 천운학과의 결전에서 처절하게 나가떨어졌던 이들도 멀쩡하게 생존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사마장령이 들이닥쳐 천운학과 부딪쳤을 때 내뺀 모양이었다.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는 녹 누님, 넉살좋게 껄껄거리는 포연강,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게 꾸벅거리는 홍 영감님을 비롯해서 안면이 살짝 굳어있는 제갈혜 소저, 구석에 파묻혀 쪼그려있는 종리연 녀석, 쌍칼 눈을 하고 째려보는 사월 녀석, 씩씩거리며 다가서는 남궁현 녀석까지 모두가 무사……. "야, 이 자식아! 주 소저, 주 소저는 어디 가고, 너만 온 거야!" 퍼엉! 다짜고짜 멱살을 잡힐 뻔한 순간, 교 누님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남궁현 놈과 일 장을 교환했다. 둘 다 한 걸음씩 주춤거리며 물러서 버렸다. "오호라, 초록은 동색이다, 이거지? 좋아, 좋다구. 안 그래도 월녀궁과의 동맹만큼은 맘에 안 들었어. 이 참에 끝장을 보자!" 채앵. 열이 바짝 오른 남궁현 녀석이 검을 뽑아들었다. 교 누님도 하는 수 없이 검을 뽑아들고 놈과 대치하려 들었다. "잠시만 기다려요. 누님. 남궁현, 너도 좀 기다려." "니가 나하고 해보겠다 이거냐? 실력 좀 늘었다 이거냐? 좋다. 오늘 사생결단 내보자. 저번처럼 쉽사리 넘어가 주지 않을 거다." "얌마! 내가 살아 있으면, 령령 아가씨도 당연히 살아있을 것 아냐? 어디에 살아있느냐고 물어보는 게 순리 아니야?" "뭐? 정, 정말이냐? 그녀가 살아있다는 게 사실이냐?"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 남궁현의 안면에 화색이 돌았다. 짜증나서 령령이 있는 데를 말하지 말아버릴까 하다가 그것도 관뒀다. 령령의 주먹이 더 무서웠으니까. "령령 아가씨한테 큰 상처는 없었다. 내상을 약간 입었는지 실신한 상태야. 아예 소화가 수혈을 짚어서 비밀 장소에 눕혀놨으니까 아무 일 없을 거야. 아가씨 좀 꺼내게 저 쪽에, 저어 쪽에 물러서 있어. 방해하지말고." 잠시동안 날 노려보던 그는 내가 팔짱까지 끼고 버티자 한숨을 내쉬며 물러섰다. 나의 정정……당당한 승리였다. '역시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이 이긴다니까. 령령을 인질로 써먹은 셈이군. 크크, 거 꼴 좋다.' 약간은 찔리는 구석이 있어 뒤늦게나마 서둘렀다. 소화의 도움을 받아 마차 안에 쌓인 짐들을 하나하나 내렸다. "령령 아가씨, 령령 아가씨?" "……." 짐을 내리면서 나지막하게 령령을 불러보았다. 대답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아직도 잠들어 있다는 반증이었다. '흠, 구태여 곤하게 잠들어있는 령령을 먼저 내릴 이유는 없지. 흑접 쪽이 더 급해. 아무리 고약을 바르고 붕대로 싸맸어도 그녀 쪽이 더 시급해.' 바로 흑접(黑蝶) 쪽 의자를 개봉하고 그녀를 안아 올렸다. 다행스럽게도 흑접은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소화의 수혈 짚는 솜씨가 꽤 깔끔했던 모양이다. 두 눈가에서 볼을 타고 흘러내린 핏자국이 새까맣게 말라붙어 있었다. 여전히 꺼림칙했다. "소화야, 수혈 좀 풀어 줘. 한시바삐 치료하고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네, 오라버니." 소화의 날렵한 손놀림이 흑접의 신형을 톡톡 어루만지자 곧이어 가벼운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제 홍 영감님께 치료를 부탁할 일만 남아있었다. "이게 누구냐? 누구냔 말이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남궁현의 눈이 부릅떠져 있었다. 날 아주 잡아먹을 기세였다. "내 부하." "너, 감히 날 상대로 장난 하냐!" "쯧쯧, 방해말고 저 쪽에 있으라니까 거 대개 말 안 듣네. 중환자를 먼저 꺼내는 게 도리 아니겠어? 령령 아가씨는 이 녀석에 비하면 약과야." "이 자식이 정말!" 남궁현 녀석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차하면 검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하지만, 그는 대단히 큰 실수를 범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인루 쪽에 있을 때는 제갈혜 소저가 곁에 있었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내 오른쪽으로는 소화가 , 왼쪽으로는 교옥정 누님이 검집에 손을 올려놓은 채 서 있었다. '오호, 잘 하면 남궁현 오늘 아주 박살 낼 포진이 되겠구나. 선제 공격에 의한 정당방위를 내세우면 그 누구도 반론을 내세우지 못하겠…….' 콰아아앙! 한참 남궁현 녀석을 박살낼 상상 속에 빠져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굉음이 터져 나오며 마차 뒷부분이 통째로 산산조각 날아가 버렸다. 바로 령령이 누워있던 자리였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주령령(周鈴鈴)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섬뜩한 모습이었다. 새하얀 나삼의를 펄럭이며 일어선 그녀의 자태를 보니 풍악산 처녀귀신 회장 시절이 연상되었다. 나삼의 이곳 저속에 시뻘건 피로 얼룩져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새까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던 령령이 천천히 고개를 틀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에서 소름끼치도록 무시무시한 살기를 발현되었다. "헤헤헷, 령령 아가씨, 기침하셨습니까? 아직 주무시는 줄 알았지 뭡니까?" 즉시 아부를 떨며 허리를 깊숙이 꺾어 보였다. 맛간 령령 앞에 무슨 말이 필요하랴? 아부만이 살길이었다. 침묵을 지키며 가만히 서있던 령령이 나삼의 치마를 펄럭이며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아주 잠시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으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 퍼어엉! "이히히힝!" 말의 비명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말 한 마리가 사라져 있었다. 정확히는 산산조각 고깃덩어리가 되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비명 소리는 그 옆에 있던 말이 지른 것이었다. 죽은 놈이 소리를 낼 수는 없을 테니까. 귀찮다는 듯 남은 말을 지긋이 노려보던 령령이 가만히 손을 휘저었다. 퍼억! 철퍼덕. 이번에는 머리통만이 날아갔다. 고개를 잃은 말의 몸뚱이가 그 자리에 널브러졌다. 잠시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주령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신형을 돌려 천천히 무인루 안으로 걸어갔다. 남궁현도 그녀의 기행에 질려버렸는지 말을 건네지 못했다. 쉬이익. "헉." 뭔가가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놀라서 돌아보니 소화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마도 령령이 날 향해 암기를 던지는 게 보이자 재빨리 받아낸 듯했다. '령령, 분명 나한테 화를 내고 있다는 소린데. 뭣 때문에 열이 오른 걸까? 설마 자기보다 흑접을 먼저 꺼냈다고 그런 걸까? 흠, 정말 그럴 수도 있겠네.' "야, 무슨 일 있었어?" 남궁현이 슬슬 령령 눈치를 보며 나한테 속삭여왔다. '크크크, 이제 겁나기 시작했냐? 걱정 마라. 저 정도는 빙산의 일각이다. 혼인하고서 같이 잠들어 봐라. 언젠가 발작 일으키는 거 보게 될 거다. 넌 그 날로 개타작 당한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2-03 15:17:00 고친날 2005-12-03 23:19:35 읽은수 6642 [ 11 K ] 제목 점소이 작삼(9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5] 홍 영감과 포연강(鮑緣强)은 주령령(周鈴鈴)의 성질을 잘 이해한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 영감님은 꾸벅꾸벅 거리며 졸고 있었으나, 잠들지 않았다는 걸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포연강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먼 산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다른 녀석들도 그녀로부터 한 걸음씩 거리를 두었다. 그런 상황에 단 한 녀석만은 령령과의 거리를 좁혀왔다. 무인루(無人樓) 구석에 콕 처박혀 앉아있던 종리연(鐘理戀)이 벌떡 일어서더니 내 쪽을 똑바로 직시하며 저벅저벅 걸어왔던 것이다. 주령령은 그녀의 안중에 눈곱만치도 없는 듯 했다. "너, 너! 우작삼! 어떻게, 어떻게! 그 뻔뻔한 면상을 들이밀 수 있지? 어떻게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느냔 말이야!" "……." 그녀가 나에게 삿대질하며 역정부리는 순간, 올 게 왔다는 게 느껴졌다. 팽무진 녀석의 옆구리였던 종리연이 고이 넘어갈 리 없다고 짐작은 했었다. 단지 예상보다 그 수위가 높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부하라는 애가 본격적인 하극상을 범해온 것이다. 그래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진 죄책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스스로도 잘 느끼고 있었으니까. "팽무진(彭無盡) 오라버니가 너 때문에 한 목숨 바쳤는데, 어떻게 웃는 낯으로 얼굴을 디밀 수 있지? 너도, 너도 그 자리에 뼈를 묻었어야 하는 것 아니야!" "……." '그럴지도 모르지. 백 번 죽어도 할 말 없다. 하지만, 내게는 반드시 해야할 일이 하나 있다구. 그 이전에는 쉽게 죽어 줄 수 없어. 미안하다. 종리연.' 종리연에게 미안하다고, 아직 죽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말해도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종리연, 좀 심한 것 아니야? 작삼 동생도 최선을 다 했어. 우리가 떼로 덤볐어도 소용없었던 녀석을 상대로 뭘 할 수 있겠어?" 교옥정(喬玉淨) 누님이 침묵을 지키는 날 보다못해 대신 응수해줬다. 그러나, 별반 달갑지 않았다. 교 누님의 의도야 그럴 리 없겠지만, 내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한가 역설하는 듯 들려왔다. "최선을 다 했어? 그런 녀석이 쌍두마차까지 타고 들어와서 웃어? 두 말할 필요 없어. 죽어, 이 자리에서 죽으란 말이야. 양심이 있는 놈이라면 어서 자결해!" "……." 종리연의 목소리가 무인루 내부를 쩌렁쩌렁 울렸다. 울컥한 교옥정 누님이 한 마디 할 듯한 순간이었다. 휙, 우드득. 그 순간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교옥정 누님도, 소화도 아니었다. 종리연을 그대로 스쳐 지나갈 뻔했던 주령령이 섬전처럼 그녀의 목을 움켜잡아 버린 것이다. 종리연 덕에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질 뻔했던 령령이 다시금 되돌아와 버렸다. '끙, 약간 불안하다 싶었는데, 역시 령령이다.' 끼이익. 주변 공기가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주령령 발끝 마루가 내려앉으며 삐꺽거리는 소리를 내뿜었다. 대신 종리연의 발끝이 마루에서 두 치정도 떨어져 버렸다. 숨이 막힌 종리연이 발버둥을 쳤으나, 령령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런 넌 왜 살아왔어? 너도 같이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정상 아니야?" "커컥, 나, 난, 천, 천운학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살아온 거야! 녀석이, 녀석이 죽기 전에는……. 커컥." 령령에게 목줄기를 붙들린 탓에 종리연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저 녀석도 그 때문에 살아 있을 거다. 나름대로 소신이 있는 놈이다. 만만히 보지 마라." "……." '엥? 웬 일로 령령이 날 두둔해주지? 나한테 화나있는 것 아니었나? 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잠시 뜸을 들이던 령령이 종리연을 자신의 눈 아래로 확 끌어내리더니 매섭게 노려보았다. 멀찍이 서 있는 나조차 오금이 저려올 정도의 살기가 퍼져 나왔다. 하물며 그 대상인 종리연이 멀쩡하겠는가? 뜨끈한 지린내가 모락모락 코를 찔러왔다. '킁킁, 뒷간 구린내까지 풍겨오는 것 같은데, 설마…….' "한 가지 잊은 게 있다. 작삼은 네 주인이다. 작삼이 죽으라면, 죽는시늉이라도 내라고 하지 않았던가? 주인에게 대드는 미친개가 쓰일 곳은 한 군데뿐이다. 대들보 위에 뒷다리를 묶어 올린 후 피륙이 동 날 때까지 흠씬 두들겨 팬 후, 돼지들의 먹이로 던져질 뿐이지. 이번 한 번만은 상황이 상황이리만큼 봐주마. 다음은 없다." 철퍼덕. 종리연을 내팽개쳐버린 령령은 잠자코 무인루 복도 안으로 들어갔다. 주루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안다는 듯 스스럼없이 쓱 사라져 버렸다. "쿨럭, 쿨럭, 헉, 헉, 허억." 몇 차례 기침을 하며 심호흡을 가다듬던 종리연이 비틀비틀 일어섰다. 울먹울먹하던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흑, 흐흑, 무진 오라버니!" 팽무진을 부르며 울음을 터뜨린 종리연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쯧쯧, 연아, 네가 실수 한 거야. 화를 내더라도 령령이 사라지고 나서 냈어야지. 괜스레 령령 앞에서 깔짝거리니까 맞바로 반응하는 것 아니냐?' 그녀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노란 물 자국이 공허하게 흘러내렸다. 진한 지린내와 구린내가 두둥실 맴돌며 묘한 여운을 보탰다. 모두들 약속이나 한 듯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꾸벅꾸벅 홍 영감마저도 이때만큼은 자발적으로 걸어 나왔다. 밖이라고 해서 괜찮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주령령에게 박살나 형체를 잃어버린 말의 잔해와 머리만 박살난 다른 말의 피비린내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발빠른 파리들이 윙윙거리며 꼬여들었다. '이런 걸 두고 사면초가(四面楚歌)라 하지.' 사람들의 시선이 왠지 날 향한 듯 했다. 뭘 의미하는 질 알 만한 시선들이었다. 이번 일로 그들의 손과 발이었던 아랫사람들이 몰살당해 버렸다. 생각해보면 교 누님의 부하들도 사월만이 남았을 뿐 모조리 죽어버리지 않았는가? 종리연마저 저 꼴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젠장 이런 걸 두고 사면초가 중의 사면초가라 하지.' "으으으음." 수면에서 깨어난 흑접의 신음 소리였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홍 영감님, 흑접 눈 좀 봐주세요." 내 말에 번쩍 눈을 든 홍 영감님이 흑접 곁으로 다가왔다. 말라 비틀어져버린 붕대를 조심조심 뜯어내며 상세를 살폈다. 턱을 쓰다듬으며 실눈으로 내려다본 영감님의 말문이 열렸다. "난 이 처자를 치료할 터이니, 그동안 작삼 자네는 안뜰 정리나 좀 하게." "쳇, 알았다구요. 잘 치료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염려 마라. 응급처치를 잘 한 탓에 덧날 염려는 없어졌다. 단지 파괴된 동공은 치명적이다." '휴우, 알아요. 누구보다 걔 스스로가 잘 인식하고 있을 걸요.' 가슴이 답답해졌다. 흑접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강호에서 흑룡 일수필살에게 밀린 것이다. 비단 그녀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나 또한 천운학에게 밀린 셈이니. '큭큭, 녀석하고 날 비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지.' 말없이 말들의 잔해를 묵묵히 내려보다가 남궁현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야, 너도 도와." "뭐, 뭐라구? 감히 니가 날 부려먹겠다는 거냐!" "누가 이 난장판을 만들어놨지? 네 옆구리 아니냐?" "누가 내 옆……! 좋다. 인심썼다. 제길." 말을 얼버무리는 게 좀 이상했지만, 투덜거리면서 기어 나온 그의 손에 삽 한 자루를 쥐어줬다. 아까부터 갑자기 말이 없어진 소화도 묵묵히 쌍두 마차 잔해 정리를 도왔다. 곽철 대협 또한 묵묵히 삽자루를 쥐고 일을 도왔다. 역시 대협은 다른 법이었다. 교옥정 누님은 주르륵 흘러내리는 말의 내장 덩어리를 보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 비위가 상한 모양이었다. '쩝, 꽤나 비싼 마차일텐데 이렇게 박살내놓다니……. 인정 사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빌어먹을 주령령, 어디서 나삼의는 찾아 입어 가지고……. 어? 어랍? 령령은 왜 나삼의 치마를 걸치고 나타났을까? 잠잘 때나 입는 옷 아니야? 다르게 생각해도 수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 설마 그녀의 취미생활에 대해서 소화가 알고 있었다는 얘기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화가 령령에게 하얀 나삼의를 입힌 이유, 령령이 여기저기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이유, 더욱이 점잖게 기다리기는커녕 마차를 박살내고, 무고한 말들을 죽여버린 이유, 수많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왜 이리 복잡해? 아하, 그렇지. 소화에게 물어보면 되겠다.' 단순한 결론 도출에 흔쾌히 소화를 돌아보았더니 이게 또 웬 일? 마차와 말들의 잔해를 정리하고 있었지만, 귀엽기만 하던 소화의 안면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잔해 하나, 하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얜 또 왜 이래? 혹시 마차가 박살나서 그런가? 아까운 돈을 날려버려서? 혹시 죽어버린 말들이 어렸을 때부터 키워왔던 애마(愛馬)라도 되는 거야? 으아아악!' 의문이 해결되기는커녕 더 늘어버렸다. 령령이나 소화 둘 중 하나가 입을 열어야 짐작이라도 할텐데, 그럴 여지가 안 보였다. 끝을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져 버린 것이다. "다 치료했다. 이젠 안정을 취하는 일만 남았다." 혼돈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려는 찰나, 홍 영감님의 한 마디가 나의 상념을 일깨웠다. '모르는 일은 덮어두자. 해결할 일이 산더미처럼 산적해 있다.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는 거야. 좋았어.' "수고하셨습니다. 영감님. 그런데, 얘 시력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없나요?" "불가능하다. 동방의 전설적 명의 허준(許浚)이 치료한다 하더라도 고칠 수 없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네?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홍 영감님의 미간이 보일 듯 말 듯 찌푸려졌다. 자조적인 미소가 주름을 따라 기이하게 그려졌다. 화를 내는 것인지 비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희한한 표정이었다. '이 영감님은 또 왜 이런데? 다들 이상해. 정말 이상해.' "우리 모두가 죽느냐 사느냐의 곤경에 처해 있다는 것이 요점이지. 가능하면 너희들만이라도 피신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눈을 피해 연락할 방도가 없었다. 모두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움직일 수조차 없었지. 상황만 악화 되 버렸군. 미안하다." 영감님의 말에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이들의 안면 모두가 그늘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체념한 듯도 하고, 최후의 일전을 다짐하는 듯도 했다. 내가 너무 들떠 버린 덕에 미쳐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우와아악, 이거 환장하겠네. 간신히 늑대굴을 피해 달아났더니 이번에는 호굴 속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뭐야? 좋아, 침착, 침착하자. 내용부터 알고 나서 절망하던가, 좌절하던가 하자.' 일단 심호흡을 몇 차례 들이쉬었다. 천운학이 다시 들이닥쳤다고 해도 놀라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었다. 삽 자루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남궁현 녀석의 시비도 걸려오지 않았다. 그저 침울하게 이를 악물고 잔해 정리에 기를 쓸 뿐이었다. "영감님, 자세한 상황이나 좀 들어 봅시다. 아까부터 의구심 일어나는 일들이 구름처럼 산적하고 있지만, 다 잊기로 했습니다. 모조리 기억의 저편으로 넘겨버리기로 했다구요. 하지만! 생사가 걸린 문제라면 저도 알 권리가 있습니다. 있고말고요." "궁금하면 그냥 물어보게. 감출 일도 아니라네." "……." "요건만 얘기하면 아주 간단하네. 다른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그만 당세옥 녀석의 은밀한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고 말았지. 결과적으로 우린 지금 그에게 붙들려 있는 꼴이 되었네. 근방에 녀석의 기운이 느껴지니 말일세." "당세옥이요? 그 녀석은 영감님하고 호각이 아니던가요?" "그와 나만 따로 떼 놓고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알다시피 우린 혈해진경(血海眞經) 독경(毒經)의 용독(用毒)과 해독(解毒) 부분을 각각 나눠가졌어. 그가 공세에 있어 우세하다면, 난 방어에 있어 우월하지. 그와 겨뤄본 결과,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적으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단순한 소모전에 불과했지. 모순(矛盾)다운 모순(矛盾)이랄까?" 갑자기 당세옥이란 인간이 핵심문제로 부각되어 버렸다. 분명 곤혹스러워 할 일이지만, 홍 영감님이 있는데, 어째서 붙들려 있다는 말이 나올 수 있을까? 그 의문은 영감님이 바로 해결해줬다. "정확히는 날 제외한 다른 이들을 볼모로 잡았다고 해야겠지. 그의 독공은 무서웠네. 아무리 내가 그와 호각을 이룬다고 해도 해독에 우선한 독공이라네. 다른 이들이 그의 독공에 선공 당했을 때, 내가 먼저 해독하리라는 보장이 없네. 더욱이 내가 해독에 열중하는 사이, 당세옥 녀석이 가만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지. 결과적으로 그와의 대결이 시작되면 날 제외한 모든 이들은 몰살당한다고 봐야겠지. 대량 살상에서 독공을 따를 만한 게 없으니 말일세." "그럼, 왜 당세옥은 바로 덮쳐오지 않지요? 당해낼 수 없다면서요?" "엊그제 혈해진경 해독편을 요구했다네. 날 협박해오는 셈인 것이지. 내가 마음먹고 녀석과 겨룬다면 양패구상도 불가능은 아니니 말일세. 그것만 넘겨주면 순순히 물러나겠다고 하더군. 이틀의 말미를 줬지. 어제부터니까 이제 하루가 남았을 뿐이네." "그럼, 해독편을 넘겨주실 생각이신 가요?" "흘흘, 그 이외에는 다른 수가 없지 않겠는가?" "안됩니다. 그것만은 안됩니다." 그 말에 바로 반박하고 나선 이는 심각하게 안면을 굳힌 제갈혜 소저였다. "해독편을 넘겨준 직후는 물러가겠지요. 그 뿐입니다. 용독편과 해독편을 하나로 합쳐 터득한 그는 조만간 우리를 습격해 올 겁니다. 반쪽만 아는 홍 영감님이 그를 당해낼 수 없겠지요. 뿐만 아니라 해독편을 통해서 홍 영감님의 약점도 꿰뚫어 볼 겁니다. 그때야말로 우리 모두가 진정 몰살당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 여자 말은 잘해. 그래, 대책은 뭔데?' "그래서, 어쩌자는 말인가?" "……." 그 이상에 대해서는 천하제일지(天下第一知)라는 제갈혜도 단호하게 답하지 못했다. 36계 모두를 동원해도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뭐, 마지막 36계로 도망가는 것은 고려해 볼만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와 홍 영감님, 제갈혜가 열을 올리는 사이 무인루 앞마당 정리는 끝났다. 그러나, 더욱 찹찹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장내를 사로잡고 있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2-06 15:28:51 고친날 2005-12-06 19:03:39 읽은수 7163 [ 12 K ] 제목 점소이 작삼(96)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6]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정말 궁금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럼, 천운학(天雲鶴)과 사마장령(司馬將靈)의 대결은 누구의 승리로 끝났나요?" "정확한 전황은 밝혀지지 않았어요. 단지 두 가지 사실만은 확실해요. 첫째, 두 고수의 대결 직후 무림맹(武林盟)과 마황맹(魔皇盟)은 충돌 없이 전장을 이탈했다는 점, 둘째, 일 년 후, 재결전에 임하기로 공식 선언했다는 점. 이로 미뤄보아 결론은 하나 뿐이에요." 제갈혜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명료하게 상황 정리, 분석에 들어가 있었다. 아직까지 그녀는 천하제일지(天下第一知)였다. "네? 그게 뭔데요?" "양패구상(兩敗俱傷), 아마 동귀어진(同歸於盡) 직전까지 갔을 거예요. 혈해진경은 극도의 파괴력을 지닌 비급, 둘 다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혔을 게 틀림없어요. 천적이 되는 상대방을 반드시 죽이기 위해 훗날을 약속했을 거예요." "그럼, 천세후(天世厚)와 사마월향(司馬月香)은요?" 그들에게 호감이 가지는 않았다. 단지 그새 나름대로 미운 정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특히 천세후의 사정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동정이 가기도 했다. "세간에는 그들 얘기가 없었다. 철저하게 묻혀진 것이지. 이로써 명운을 걸었던 세 번째 청부는 ……실패로 끝났다." "……." 홍 영감님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매듭짓고 눈감아 버렸다. 한 동안 뜨지 않을 듯 했다. '쳇,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청부 기필코 성공시키고 말겠습니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어떤 수모를 겪는다 해도 반드시, 반드시!' 물론 내 속으로만 하는 다짐이었다. 좌중은 더욱 침울하게 입들을 다물었다. 청부는 실패했고, 상황은 악화일로(惡化一路)로 치닫고 있었다. 극에 이른 긴장감이 고조되고, 또 고조되는 순간이었다. "거기 있는 사람들, 조심하게!" 휙, 휙휙. 갑자기 무인루로부터 탁자와 의자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하필이면 말들이 폭사(爆死)한 위치에 그대로 퍽퍽퍽 박혀들었다. "아니, 어느 개자식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가 간신히 신형을 빼낸 남궁현이 한 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의 앞에 남산만한 덩치를 내보이며 팔짱을 낀 포연강이 서 있었다. "하하하하, 사내대장부가 쫀쫀하게 그까짓 탁자 날아온 정도로 흥분하면 안되지. 미리 경고까지 해주지 않았던가?" "그, 그렇기야 하지요." 호쾌하게 웃으며 넘어가는 포연강의 응수에 남궁현은 떨떠름하게 얼버무렸다. '하기사 구룡(九龍) 주제에 십성(十聖)에게 대들 수야 없는 일이겠지. 쩝, 남궁현, 오늘따라 자존심 연이어 구겨지는 구나. 옆구리로부터 무시당해. 머리 위로 탁자 날아들어. 하하하, 꼬.시.다.' "자, 자 그렇게 침울하게 서있지들 말자고, 아직 하루의 여유가 남지 않았는가? 생각할 시간은 넘치고 또 넘치네. 이런 때는 환기가 필요한 법이지." 포연강은 그대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품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번쩍번쩍 금원보 하나를 탁자 가운데 탁 소리나게 내려놓는 것이었다. 수상한 행각에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제갈혜가 모두의 의중을 대신해 질문을 제기했다. "포 대협, 무슨 뜻인가요? 말씀을 하셔야 저희도 대답을 해드리지요." "흠, 흠, 내기를 하자면, 내거는 것이 있어야 할 것 아니겠나? 이르자면 참가금이지." "그런 것이었나요? 좋아요, 소녀도 참가해 보겠습니다." 제갈혜는 냉큼 손가락에 끼고 있던 옥반지와 옥팔찌들을 몽땅 빼버리더니 탁자 한 가운데 와르르 내려놓았다. "호호호호, 내기? 내기란 말이지? 마교(魔敎)에서 내기하면 날 따라올 자 없었지. 나도 낀다!" 내기란 말에 신이 난 적미호(赤美狐)도 바로 탁자로 다가섰다. 다만 탁자 위에 내려놓은 것은 은전 하나뿐이었다. '뭐야? 시시하게 스리.' "흥, 그런 눈으로들 보지 말아요. 이게 제가 가진 모든 것, 저한테는 꽤나 소중한 가치를 지닌 은전이라구요." '얘도 말은 잘해.' 그러나, 의외로 포연강과 제갈혜는 고개를 끄떡여 인정해줬다. 진정 뜻밖이었다. '어? 은전 하나로 내기 참가가 된단 말이야? 나, 나도 참가해 볼까? 은전 하나 놓고 다 쓸어간다면 이거 만한 장사가 없잖아?' 내가 갈등하고 있는 새, 교옥정(喬玉淨) 누님마저 탁자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가 내려놓은 것은 손바닥만한 푸른빛 옥패였다. 차가운 기운이 강렬하게 느껴지면서 맑은 빛을 내뿜는 게 상서롭지 않았다. "빙공을 익히는 사람들에게는 무가지보(無價之寶)나 다를 바 없어요. 월녀궁 지하동굴에서 나온 옥석으로 만들었지요. 참가금으로 충분할 거랍니다." "어머, 그런 것을 내놓기에는 아깝지 않아요?" 적미호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빛은 옥패를 향해 반짝거렸다. 이미 자기 것이라고 침이라도 발라놓은 듯 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이런 게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작삼 동생과 재회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교 누님의 그 한 마디는 한참 떠오르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다시금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단 한 사람, 예외가 있었지만. '누님, 역시 교 누님 밖에 없습니다. 누님이 최고요.' 가슴 찡하는 감동에 콧등이 시큰거렸다. '제길, 교 누님의 소중한 옥패를 저런 시건방진 연놈들에게 뺏길 수 없다. 나도 참가다.' 재빨리 속주머니를 뒤져 걸리는 모든 것을 빼 보았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것은 동전 몇 개와 푸석푸석한 먼지뿐이었다. 망설여졌다. 동전이라도 꺼내놓을까 망설이는 찰나였다. 안면이 창백하게 굳어있던 소화가 탁자로 사박사박 다가섰다. 허리춤에서 돈주머니를 풀어 올려놓기에 그녀도 참가하려는 줄 알았다. "제가 가진 은전 모두예요. 작삼 오라버니의 참가금 대신이에요." "엉? 그, 그 돈은……." '괜찮아요. 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돈이 아니에요. 내기에 걸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오라버니가 저 대신 내기에 응하세요. 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그녀의 아리송한 전음입밀(傳音入密)이 뇌리에 은은하게 울려왔다.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교 누님의 옥패로 시선을 돌리니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님 옥패도 되찾아 드리고, 다른 것들도 짭짤하게 챙기면 그거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 꿩 먹고 알 먹기지. 좋아, 해보자.' 소화의 돈주머니도 되찾을 각오를 하며 의자에 엉덩이를 착 붙였다. 골이 난 듯한 남궁현 녀석은 탁자가 안 보이는 척 외면하며 딴청을 피웠고, 곽 철 대협은 관심 있게 탁자를 지켜봤으나, 참여할 의도는 없어 보였다. 녹 누님은 여전히 엷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단지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사선 위에 한 발을 올려놓은 듯 보였다. '그럴 법도 하지. 이번에 녹 누님의 사람들을 대거 잃어버렸으니. 북천위야 그렇다 쳐도 동천위까지 같이 죽어버리다니……. 쩝, 괜찮은 구석이 있는 순한 여자였는데.' "자, 자, 더 이상 내기에 응할 사람은 없는 것 같군. 좋아, 시작이 나였으니 내기 방식과 의제 또한 내가 정하려 하네. 반대 없나?" "그럼요. 어떤 내기라 하더라도 이 제갈혜, 물러선 적이 없답니다." 제갈혜의 호언장담대로 전 무림에서 머리싸움으로 그녀를 당해낼 만한 사람이 드물 터였다. 하물며 내기 탁자로 몰린 구성원들만 봐도 그녀가 밑질 이유가 없었다. "좋네. 내기 방식은 누가 그 분야에 으뜸인 과거를 갖고 있느냐일세. 의제는……." 꿀꺽. 탁자 위로 색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두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 빛이 났다. 이런 식의 내기를 해본 적이 없어서 자못 그 향방이 궁금해졌다. '과연 내가 이 녀석들을 이길 수 있을까? 이 중에서 최고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내게 승산이 있는 것일까?" "의제는……, 험, 험, 에, 그러니까……." '거 뜸 무지하게 들이네. 쌀이 밥이 되다 못해 죽이 되겠네.' "험, 험, 조금 남세스럽지만, 말하겠네. '이 중에서 어느 누가 뒤를 닦는데 가장 비싼 내용물을 사용했느냐?' 일세. 말하기 싫은 참가자는 기권해도 좋다네." 쿠쿵!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의제란 말인가! 순간 탁자 위로 차가운 한파가 몰아 닥쳤다. 포연강 본인을 제외하고는 참가자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기막힌 상황! 창피를 무릅쓰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무안한 의제! 그렇다고 기권해버리기에는 모여든 참가금에 눈독이 가는 상황. "내가 의제를 말했으니 내가 먼저 말하도록 하겠네. 난 언제나 새하얀 화선지만을 애용했지. 먹이 번진 폐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거야." 자신이 말해놓고도 무안했는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번 내기는 함정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치부를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고도의 심리전이었던 것이다. '쳇, 이미 난 졌네. 먹이 묻어 난 폐지로 뒤를 닦기 시작한 것도 최근인걸. 그 이전까지는 새끼동아줄로 쓱쓱 문지르고, 나뭇잎으로 마무리지은 게 전부라고.' 체념한 상태에서 다른 이들을 바라보니 표정들이 똥이라도 씹은 듯 했다. "하하하하, 이거 모두들 기권한 듯 하군. 천하제일지(天下第一知)도 이때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지. 그럼, 내가 모두 챙겨가……." "잠깐! 아직 기권은 안 했다구요." 포연강의 도발에 발끈한 제갈혜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제갈혜의 안면이 도화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마침내 말문을 열어 보였다. "고반여사(考槃餘事)에 이르기를 '고려지(高麗紙)는 누에고치로 만들어서 능(綾)같이 희고 명주같이 질기며, 글을 쓰면 먹을 잘 받아들여서 사랑스럽다. 이것은 중국에는 없는 것으로 또한 진품(珍品)이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희 제갈세가에서는 그 비싼 견지(繭紙)를……, 견지(繭紙)를 애용했습니다." 뜸을 들인 부분은 뒷간에서라는 말을 하려다 만 듯 했다. 포연강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후련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녀에게 졌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나름대로의 소득이 있었다는 듯 만족한 표정이었다. 제갈혜의 안면이 더욱 붉어졌다. 교옥정 누님은 제갈혜의 말을 듣고 나서는 더 두고 볼 것도 없다는 듯 기권해버렸다. 이왕 질 것, 체면을 차리고 빠진 듯 했다. '그래도, 젠장. 누님의 옥패를 뺏길 수는 없어. 소화의 은전 주머니도 뺏길 수 없다구.' 남은 사람은 적미호뿐이었다. 그녀는 안면이 붉게 물들지도 않았다. 황당하다는 표정도 아주 잠시동안이었다. 순식간에 안정을 찾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여유만만한 미소까지 내비치고 있었다. "남은 사람은 작삼 점소이뿐이네요. 뭐, 난감한 표정을 보아하니 가망이 없는 듯 하군요. 최근에는 폐지를 사용하곤 하지만, 마교에 있었을 때는 오로지 사천성(四川省) 양잠으로 생산되는 최상급 비단만을 애용했어요. 비단 금(錦)자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비단은 금(金)값이라구요. 그만큼 제값을 해요. 이 세상에서 비단만큼 부드러운 게 있을까요? 후문은 남녀를 불문하고 민감한 곳이에요. 아무리 질 좋은 종이라 해도 종종 긁혀서 상처가 남거나 덧나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비단은 다르지요. 그 부드럽고, 미끌미끌한 촉감이란! 후문으로부터 시작해서 전신으로 치닫는 기막힌 쾌감에 부르르 떨어버릴 걸요. 호호호호호." 적미호의 교소가 간드러지게 울려 퍼졌다. 승리를 확신한 그녀의 섬섬옥수는 재물들을 탐욕스럽게 끌어가고 있었다. 적미호의 적나라한 표현에 제갈혜와 교옥정 누님의 안면이 시뻘겋게 물들고 말았다. 포연강은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모두들 나 따위는 기대도 안 한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뭔가, 뭔가 돌파구가 있을 거야. 돌파구가…….' 순간 뇌리를 스치고 번쩍 지나가는 과거가 있었다. 바로 내가 원하던 바로 그것이었다. 쾅. "그만! 그 손 내려놓으시오. 적미호 소저." "으응?" 흥분한 나는 탁자를 두 손으로 내려 찧으며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아직 난 말하지 않았습니다." "호홍, 그래? 좋아 기다려줄게. 말해봐." 적미호는 너라고 별 수 있겠냐는 듯 손사래를 치며, 잠시 기다려줬다. 그러나, 그녀는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최후까지 참은 자가 웃는다는 절대불변의 법칙을! "혈해진경(血海眞經)이 바로 내 손을 거쳐 퍼져나갔다는 것, 모두들 잘 알 겁니다. 사실은 지하 도서관에서 혈해진경을 찾은 순간, 아릿해 오는 극통이 엄습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전! 부득이하게 혈해진경의 일부를 뜯고 말았습니다. 오랜 세월로 눅눅해진 탓에 더할 수 없이 부드러워진 촉감을! 깊은 역사처럼 농익은 고서 특유의 우아하면서 고상한 촉감을! 내 후문으로 직접 느꼈다, 이겁니다!" "……." 모두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의외의 반전에 할 말들을 잊은 듯 했다. 하기사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전 무림인들이 혈안이 되어 찾았었던 혈해진경으로 후문을 닦아낸 인간이 있으리라 감히 상상이 되겠는가! '휴우, 실수도 그런 실수가 없었지. 뭐, 이제 다 남의 손으로 들어간 것, 신경 쓸 바는 아니지만.' 모두의 패배를 확인한 나는 탁자 위에 재화들을 내 앞으로 끌어 모았다. 옥패와 은전 주머니는 따로 빼내었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일이었다. 별 것 아닌 실수로 일확천금을 손안에 쥐는 날도 있다니! '잠깐, 작삼! 혈해진경의 어느 부분을 찢은 것이더냐?' 느닷없이 홍 영감님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이 들려왔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가물가물했다. "어디 보자. 진경 맨 끝자락이었어요. 세네 장은 족히 사용했었는데……, 아, 그렇지. 용독편(用毒編)이었던 것 같아요." 용독편이라는 언급을 하자마자 홍 영감님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안 그래도 조용했던 탁자 주변이 내 한 마디로 해서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하하하하하하! 그랬구나, 그랬어! 하하하하하! 하늘은 아직…… 우리편인 것이다." 홍 영감님이 갑자기 미친 듯 광소를 터뜨렸다. 평상시 조용하게 일관하던 인간이 갑자기 왜 미친 척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특히 마지막 하늘 언급을 할 때는 미약한 살기마저 배어 나왔다. "그런가? 아직은 죽을 팔자가 아닌 게로군. 정말 질긴 목숨이야." 뭐라고 궁시렁궁시렁 거리며 일어서던 포연강의 손바닥 속에는 어느새 빼갔는지 금원보가 쥐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제갈혜와 적미호 소저도 부스럭 부스럭 자기들이 내걸었던 재화들을 걷어가고 있었다. "잠깐 이게 무슨 짓들입니까!" "호호호, 작삼 점소이, 죽을 사람에게는 필요 없지만, 살 사람에게는 장신구가 필요한 법이랍니다. 특히 얘네 들은 우리 가문 대대로 물려줘야 하는 거라서 호락호락 넘겨줄 수 없어요. 치사하게 여자의 물건을 가로채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가, 가로채? 야, 니가 가져가라고 내건 거잖아!' "그렇지, 간단한 사례 정도는 해야겠군요." 제갈혜는 떨떠름해하는 내 손위에 은원보 두 덩이를 올려놓고 총총총 사라졌다. 갑자기 모두들 부산떨며 무인루(無人樓) 안으로 쏙쏙 들어가 버렸다. 뒤에 남은 사람은 나와 교옥정 누님, 소화, 그리고, 막 치료를 받고서 풀밭 위에 누운 채 미약하게 숨을 내쉬는 흑접뿐이었다. 황당해서 오리발 군상들의 뒷모습만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체념을 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자식들, 자기들이 이겼어도 이렇게 오리발 내밀었을까?' 잠자코 한숨을 내쉬며 옥패는 교옥정 누님에게, 은전 주머니는 소화에게 돌려줬다. 교 누님은 미안해하면서도 냉큼 받아 넣었지만, 소화는 한사코 안 받으려했다. 그냥 억지로 쥐어줬다. 흑접을 안아들고 생각해보니 모두의 표정속에서 생기가 감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갈혜의 어감도 뭔가 달라져 있었다. '내가 한 말이 그렇게 재미있었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2-10 11:23:37 고친날 2005-12-16 01:15:32 읽은수 7451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97)-당가 사나이의 비원(悲願)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7] 당가 사나이의 비원(悲願) 이튿날 전신에 붉은 색 무복을 걸치고 붉은 영웅건을 매고, 붉은 장갑을 낀 영감님이 내 앞에 섰다. 평상시 꾸벅거려왔던 허술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당당한 기도와 자세가 느껴졌다. 문제는 영감님이 내게 황당한 제안을 해오는데 있었다. "네?! 영감님하고 당세옥이 싸울 자리에 제가 왜 따라갑니까? 여기서 저보다 실력 떨어지는 사람도 없잖아요?" 선견지명 어린 내 실수 덕에 당세옥의 용독편(用毒篇) 습득에 빈틈이 생겼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 수 있었다. 그로 인해 홍 영감님의 결전 의지가 새로워지고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는 것도 느껴졌다. 다른 이들도 한 고비 넘겼다는 안도감에 빠져들어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런데, 내가 왜 영감님하고 같이 가야하냐고!' 무엇보다 독(毒)이라는 영역은 내게 있어 신비의 영역이자 기피 영역이었다. 아는 게 없을뿐더러 관련해 들어온 바도 살 떨리는 것들뿐이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무림인들이라 해도 독에 노출되면 속수무책으로 당한다고 하지 않는가? 어떻게 중독되었는지도 모르고 단숨에 죽는가 하면, 내장이 녹아드는 극통을 몇 날 며칠이고 처절하게 느끼며 천천히 죽기도 한다고 들었다. 더욱이 당세옥이라 하면 가짜 혈살(血殺)로 위장했던 놈이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수많은 이들이 그의 독공에 비운을 맞이했다. 월녀궁 여인 중 한 명도 그렇게 죽었었다. "냉월화에게서 언뜻 들은 바 있다. 극약에 대한 자네 내성에 대해서 말일세. 극약과 독은 종이 한 장 차이, 극약이 독이 될 수도, 독이 극약이 될 수도 있지. 당세옥은 독공의 대가, 무공의 고하보다 독에 대한 내성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독공을 뺀 그의 순수 무공 실력은 자네보다 우월하지 않다네. 자네와 내가 합공을 펼친다면 수월하게 이길 수 있지." "영감님, 차라리 사월(死月)이랑 같이 가세요. 걔가 저보다 냉월화(冷月花) 누님의 극약을 더 많이 섭취했으면, 섭취했지. 덜하진 않았다구요." "흘흘, 자넨 냉월화에 대해 아는 바가 없군. 사람이란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네." "……." "사월(死月)이 가면 십중삼사(十中三四) 정도로 해독해가며 아슬아슬하게 싸우겠지만, 자네가 가면 십중팔구(十中八九)로 해독해가며 여유 있게 싸울 수 있게되지." 사월이 날 미워하는 정확한 원인은 아직도 모른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 그녀만큼은 아니어도 나 역시 그녀가 싫다. 사월이 무사생환한 것 또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오호라, 그러니까 내가 싫다고 하면 사월과 대신 간다, 이 말씀이시네. 그럼, 그 년 십중육칠(十中六七)로 죽겠네?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팽무진을 비롯해 좋은 이들이 생을 달리해 버렸다. 반면 응당 죽었어야 할 연놈들은 악착같이 살아남아 째려보기나 하니 기분 좋을 리 없었다. 이런 기회를 빌미로 사월 하나 보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크크크, 내 말 한 마디면 진정한 차도살인(借刀殺人)이 되는 것이로군.' "싫습니다. 전 절대, 절대로 안 가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제 사월이 독공에 난자 당해 죽는 일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그런가? 그럼 하는 수 없지. 그럼, 다른 이를 데리고 가는 수밖에. 음, 벌써 준비되었나? 그럼, 가도록 하지." 코뚜레에 콧구멍이 뚫려 푸줏간으로 질질 끌려가는 황소를 상상하며 홍 영감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당연히 풀이 잔뜩 죽은 사월이 서있을 것을 예상……. "교, 교옥정 누님! 어째서!" "다녀올게. 작삼 동생. 별 일 없을 거야." 사월 대신 흑의무복으로 갈아입은 교 누님이 허리에 검을 철커덕 끼우고 있었다. 홍 영감님 뒤를 따르는 교 누님을 보니 가슴이 덜텅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한마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홍 영감님, 어째서 사월이 아니라 교 누님이랑 가는 겁니까!" "흘흘, 몰랐나? 독에 대한 내성이 사월보다 흑월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걱정 말게, 운 좋으면 무사히 생환할 수 있을 테니……. 당세옥은 용독편 마지막을 익히지 못 했다. 해독편을 원하는 것도 역으로 추측해서 용독편을 완성시키려는 것일 테지. 말하자면 그보다 내가 약간 더 우위에 있는 셈, 나와 흑월이면 녀석의 숨을 끊어놓을 확률이 좀 더 높아진다. 자네는 걱정말고 은신처에 잘 숨어있기나 하게." '말도 안 돼, 어째서 하필이면 교 누님이야! 어째서!' 은신처는 오래 전부터 세워진 듯 무인루 바닥에 교묘하게 지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숨구멍이 쥐구멍과 연결되어 있어서 입구를 독으로부터 어느 정도 차단해 줄 수 있는 듯 했다. 물론 당세옥이 본격적으로 은신처 입구를 파괴하고 들어온다면 속수무책으로 전멸 당할 것이 뻔했지만 말이다. 끼익 끼익. 홍 영감님과 교 누님이 지하 은신처 계단 위를 오르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당세옥을 때려잡아도 교 누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교 누님! 가지 마시오. 안 되오!" "작삼 동생, 괜찮아. 이래봬도 나 꽤 단련되어 있어. 무사히 살아 돌아올 테니 여기서 기다려 줘." '단련? 단련이라니? 무슨 의미지?' 환하게 미소지으며 돌아서는 그녀를 보니 모든 게 마구잡이로 뒤섞여져서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었다. "가겠습니다! 영감님이 바라는 데로 내가 가겠습니다!" "흘흘흘, 가려는가? 나야 대환영이지. 어서 나오도록 하게." "작삼……."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얄밉게 미소짓는 영감과 걱정스런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교옥정 누님을 보니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허리끈에 철봉 두 개를 꽂아 넣고, 녹 누님이 준 점소이용 두건을 머리에 질끈 매고는 벌떡 일어섰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날 바라보는 여러 시선들 속에서도 갖가지 감정이 느껴졌다. 무뚝뚝하게 무시하면서도 연이어 흘겨보는 남궁현, 별걸 가지고 호들갑 떤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의 포연강, 안절부절 못 하며 굳어있는 적미호, 내 시선을 피해 눈길을 돌리는 제갈혜, 여전히 사선에 한 발을 내놓은 듯 힘없이 미소짓는 녹 누님, 고소하다는 듯 대놓고 킥킥거리는 사월. '저, 저게! 끙, 너 조심해라. 언젠가 뼈저리게 후회할 날 올 테니. 그때 가서 질질 짜지나 마라.' 걱정스럽게 날 올려다보는 소화와 약간은 진정되었는지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흑접을 보니 절로 안타까워졌다. 홍 영감님이 십중팔구로 생환을 장담했지만, 사람일이란 부딪혀 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인 것이다. 영영 저들을 보지 못하게 되도 이상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소화." "네, 작삼 오라버니." "만약에 말인데, 내가 좀 늦으면, 흑접의 눈이 나을 때까지 간병 좀 부탁해." "흥,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가 돌아올 때까지 몇날 며칠, 몇 년이고, 내 한 목숨 붙어있는 그 날까지 계속 돌봐줄 테니까요. 잘 싸우고 오기나 해요." 약간은 볼멘 소리가 나왔다. 피식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소방 녀석을 생각해서라도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약간은 내가 무심하게 굴지 않았는가 싶다. "교 누님, 소화랑 흑접 좀 부탁드릴게요." "알았어. 작삼 동생은 모든 일 다 잊고 당세옥을 쓰러뜨릴 생각만 해." "그럼요. 제가 좀 약하긴 해도 목숨 하나는 질긴 놈 아닙니까! 하하하하!" "……." 은신처 안에는 의외로 정적이 감돌았기 때문에 내 웃음소리만 어설프게 울려 퍼졌다. 마치 다들 죽으러 가는 인간을 배웅해주는 듯한 분위기였다. 끼이이익. 덧문을 열어제치고 나오는 순간 발치에 서있던 곽 철 대협의 한 마디가 정곡을 콕 찔러 버렸다. "살아서 돌아오시구려. 만에 하나, 그대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한 단계 더 강해져 있을 거라 들었소." '뭐? 만에 하나? 아무리 곽 대협이지만, 오늘 따라 말하는 게 심한걸.' 간밤에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다들 조용히 잠들었을 뿐이다. 아마도 내가 도착하기 전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던 모양이었다. '쳇,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나 뭘 생각하는지 도통 알 수 없단 말이야. 뭐, 내가 뭘 생각하는지 그들도 모르겠지만 찜찜하군.'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2-16 01:13:59 고친날 2005-12-16 11:12:32 읽은수 6598 [ 18 K ] 제목 점소이 작삼(98)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8] 해가 중천에 떠 따뜻하게 달아오를 사시(司時) 무렵, 홍 영감님을 따라 무거운 발걸음을 떼 내야만 했다. 무인루(無人樓)로부터 호수를 등지고, 소나무 숲으로 들어간지 한 식경이나 되었을까? 으슬으슬 기분 나쁜 기운이 숲 전체를 휘어 감고 있는 묘한 지역에 들어서게 되었다. 꽃은 시들거나 새까맣게 변색되어 버렸고, 나뭇잎들까지 바싹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응당 푸른빛으로 치장하고 봄맞이에 한창이어야 할 수풀이 암울하게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새소리는커녕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발에 밟히는 개미 녀석들도 없고. 어라?' 파사삭 부서지는 나뭇가지를 헤치며 들어갔다가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부리를 꼭 다물고, 자취를 감췄던 산새들이 싸늘하게 굳어진 채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얼마 못 가 산짐승들마저 오붓하게 널브러져 있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혀를 빼문 녀석도 있었고, 피를 토하며 바동거리다가 뻗은 듯한 녀석도 보였다. 한참 썩어들고 있었는지 고약한 악취가 물씬물씬 풍겨 나왔다. 응당 꼬여야 할 파리 한 마리조차 없었다. '당세옥 짓인가? 자신의 독공이 어느 정도 향상되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인 거야?' 그에 대한 혐오감에 치를 떨기에는 시기상조였다. 거기까지는 약과에 불과했던 것이다. 홍 영감님 뒤를 따라 무작정 숲을 헤치고 들어갔다가 발바닥에 물컹거리는 촉감을 느꼈다. 눈길을 밑으로 돌렸다가 후다닥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내가 발을 올려놨던 자리에는 두 젊은 남녀가 다정하게 포개져 있었다. 그것도 윗도리를 풀어헤치고 아랫도리마저 막 까 내리려는 찰나였다. 정확히 말하면 남자는 그 자세 그대로 경직되어 있었다. 반개한 눈자위가 잿빛인 것을 보니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반면에 여자 쪽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부끄럼 없이 봉긋 드러난 가슴이 힘겹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곱게 자란 속눈썹이 간헐적으로 부르르 떨렸다. 미간을 찌푸린 홍 영감님이 여인의 이마 한 가운데를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짓누르자 눈매의 경련이 급격하게 잦아들었다. 눈동자에서도 서서히 빛이 사라지더니 양 귓가로 시뻘건 핏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 순간이었다. "과연 수라삼살(修羅三殺) 중 최고로 흉악한 혈살(血殺)다운걸. 민간인은 해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다 헛소문인 게로군." 둘레가 굵직한 느티나무 뒤편에서 당세옥이 음험한 자태를 드러내었다. 문사 차림 남색 도포에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빨간 장갑을 낀 것까지는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그런데, 이마에 살(殺) 자가 새겨진 철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은 성질 고약한 악취미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가 가짜 수라삼살 흉내를 낼 때 쓰던 위장 가면이 아닌가! '무림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까지 건드리는 걸 보면 성질 하나는 더럽네 그랴. 혹시 저 인간 외톨이 중년인가? 손잡고 나들이 나온 연인을 보자 배알이라도 뒤틀렸나?' 사람들이 두려워 피한다는 무인루(無人樓) 인근 숲 속에 이들이 들어온 이유는 뻔할 뻔자였다. 혈기왕성한 두 젊은 남녀가 남의 시선을 피해 할 일이라고는 오로지 그것밖에는 없으리라. 더구나 뭘 하는 중이었다는 현장 증거까지 확실하게 잡혀있지 않은가!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여인의 고통을 덜어준 것뿐, 상태로 보아 살아남기는 그른 처자였네. 오히려 당세옥 자네가 더 의문스럽군. 무공을 모르는 보통 사람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던 자네가 아니던가?" "아냐, 아냐, 홍홍 자네라면 충분히 살릴 수 있었어. 암, 그렇고말고. 자네를 믿었기 때문에 내 독공을 약간이나마 써먹어 본 것이지." "물론 나의 내공을 반정도 소진해서 살릴 수도 있었겠지. 대신 직후에 들이닥친 자네에게 우리가 죽었겠군. 더욱이 내가 도착했을 때, 사내만은 확실히 죽어있었다. 이것은 어떻게 해명할 텐가?" "사내는……, 사내는……, 여인을 강제로 겁탈하려 들었다. 그래서, 약간 손을 봐준 것이다." "허허허, 이건 참, 우스운 변명이로구먼. 그런 것치고는 여인이 반항한 흔적이 전혀 없는걸. 반항하는 여인이 옷고름을 스스로 풀어헤친단 말인가?" 확실히 홍 영감님의 말 대로였다. 막 저승의 강을 건너버린 여인의 한 손은 활짝 풀어헤쳐진 윗도리 옷고름 위에 올려져 있었고, 다른 한 손은 치마를 벗고있는 형상이었다. 남자는 자기 옷을 까 내리기에도 급급한 형상으로 굳어있었던 것이다. "풋, 말장난하러 왔는가? 어서 해독편이나 내놓게, 설마 다른 이들을 죽게 내버려둘 생각은 아니겠지?" "그들에게 자네가 다가설 여유란 없네. 해독편도 얻을 수 없을 테지. 이 자리가 바로 당세옥, 자네가 저질러 온 과오의 대가를 치르는 자리가 될 것이라네." "……." 당세옥과 홍 영감님간에 치열한 눈싸움이 오가고 있었다. 나 따위는 이미 그들 안중에 없어 보였다. 굳은 각오를 다지며 따라온 내 자신이 무안할 지경이었다. "저 녀석을 믿고 있는 것인가? 천운학 소공자가 녀석을 꺼린다고 해서 나까지 그러리라 보는가? 확실히 반년 전 풍악산(風岳山) 정상에서 보인 녀석의 신위는 오금이 다 저릴 정도였다. 정파 최고수라 불리는 십성(十聖) 중 두 명이나 앞에 두고도 당당했던 그의 기세에 나마저 경외심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그는 그저 빈 껍데기뿐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말고, 해독편이나 순순히 내놓아라. 홍홍." 이제야 당세옥은 날 지목하며 주저리 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다. 뭐, 결론만 따지면, 매한가지로 다를 바 없긴 했다. "괴로운가 보군. 넘치는 독기운을 감당치 못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 "이 아이가 미리 손을 쓴 탓에 자네의 용독편은 불완전한 상태로 전해졌지. 그런 용독편을 나와의 결전으로 극한까지 끌어올렸으니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수가 있다면 해독편을 통해 용독편을 거꾸로 되짚어 내거나, 해독편 자체를 익혀 진정시키는 수밖에 없겠지." "……." 홍 영감님의 정문일침(頂門一鍼)에 당세옥은 시인하듯 침묵을 지켰다. 대신 그의 전신에서 모락모락 검은 기류가 새어나왔다. "크흐, 흐흐흐, 하하, 하하하하하!"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허리까지 젖히며 웃는 그를 보니 두근두근 불안해져 왔다. 슬그머니 뒷걸음질까지 쳤다. '당세옥이 겁나서 피하려는 게 아니야.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협상 결렬이구나! 좋게 봐주려 했더니…… 좋다! 무인루에 숨어있는 모든 연놈들까지 저승 동무로 삼아주겠다!!" 일갈은 내지르며 빨간 장갑을 벗어 던진 당세옥이 홍 영감님을 향해 날아들었다. 불규칙하게 흘러내리던 검은 기류가 그의 새까만 손을 따라 움직였다. "불가! 절대로 불가하다!" 홍 영감님 또한 이에 질 새라 일갈을 내지르며 붉은 기류를 일으켜 대응했다. 그러나, 당세옥의 검은 기류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놓여있었다. 홍 영감님은 공방에 있어 한 수 밀리고 있었다. '그래도 정정하게 잘 싸우시네.' 휘이이잉. 일순간 검은 기류가 당세옥의 팔뚝을 타고 돌개바람처럼 소용돌이치며 밀려왔다. 홍 영감님이 이를 악 다물며 전력으로 방비를 하려는 사이 당세옥의 공격 방향이 교묘하게 뒤틀렸다. 영감님을 공격하는 채 하고는 실제로는 나를 향해 검은 기류를 날린 ……! '허억! 제기랄!' 퍼어엉. 숨들이길 틈도 주지 않고 휘몰아친 검은 기류가 내 복부에 적확히 격중되었다. 그 어떤 고춧가루보다, 그 어떤 열탕보다 뜨거운 기운이 내 전신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몸에서 불길이 확 일어나 활활 타오르듯 뜨거워졌다. "일단은 이 녀석부터 재물로 삼아 주겠다!" "어림없다!" 퍼어엉. 이번에는 허리 부분에 따뜻한 기운이 쏟아져 흘러왔다. 홍 영감님이 무슨 수를 쓴 듯 했다. 아주 일순간이나마 내 전신을 휘어 감던 뜨거운 기운이 약간 수그러들었다. '가만있으면 아무것도 안 풀린다. 당세옥 녀석의 순수 무공수위는 약하다. 녀석의 독공은 내가 시기 적절하게 해독해줄 테니 안심하고 쉴 새 없이 몰아치거라!' 홍 영감님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이 머릿속으로 세차게 흘러들었다. 용기 백배한 나는 즉시 두 철봉을 뽑아들고, 당세옥에게 겁도 없이 달려들었다. 그는 내게 회심의 일격을 날리고는 아예 신경을 꺼 버렸었다. 줄기차게 홍 영감님을 몰아세우던 당세옥의 얄팍한 눈에 경악 어린 당혹감이 스쳐지나갔다. "어떻게!" "당세옥, 자네가 나보다 약하다는 반증이다! 다른 이들을 공격해도 내가 동시에 해독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말도 안 돼! 위력에 있어서는 용독편이 압도적이다. 해독 따위 할 시간이 있을 리 없다. 에잇!" 펑 펑 펑. 다시금 그가 날린 검은 기류가 내 전신에 격중 되었다. 이어서 홍 영감님이 뒤에서 내 등을 연타해줬다. 여러 기운들이 일시에 내 몸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해독을 펼치면 선행된 중독증상은 사라져야 하는 걸로 아는데, 지금의 내 상태는 뭔가 약간 의심스러웠다. '쳇, 알게 뭐냐! 이랬든 저랬든 내가 지금 이 순간 믿을 인간이라고는 영감님 밖에 없잖아! 해독술의 전문가인 영감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실까.' 몸 속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증상을 무시한 채 당세옥에게 나탁탐해(　　探海)와 이산도해(移山倒海), 청룡출수(靑龍出水)를 연환 해서 쉴새없이 몰아쳤다. 챙 챙 채채챙. 단검을 꺼내들고 간신히 막아내는 그를 보니 검술은 그의 특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가장 자주 쓰는 수법은 청룡출수(靑龍出水)로구나. 뭐 말 그대로 찌르는 기술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지.' 멀쩡하게 덤벼오는 날 보며 당황해하는 당세옥을 보니 짜릿한 기분과 함께 묘한 감회가 떠올랐다. 자신감도 붙었다. 영감님의 해독술이 기대 이상으로 효과를 보이는 게 분명했다. 발끝을 박차며 근접거리로 달려드려는 순간, 그의 안면에 가소롭다는 조소가 떠올랐다. 아니나다를까, 살짝 뒤로 물러서며 소매 속에서 뽑아든 그의 검은 손바닥에는 몇 자루의 비수가 들려있었다. 쉬익, 쉬쉬쉭. '아차!' 사천당문의 암기술이 무림의 일절로 불린다는 것을 깜빡 잊고 말았다. 퍽, 퍽, 퍼퍽. 피할 겨를도 없이 모조리 명중 당해 버렸다. "으아아악!" 급한 대로 안면은 팔뚝으로 막았지만, 여러 개의 비수가 다른 부위에 꽂혀들었다. 무지막지하게 따.가.웠.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었지만, 지독하게 화딱지가 나서 삼재검법 시전을 넘어서서 시정잡배마냥 마구잡이로 휘몰아 쳐버렸다. "어, 어떻게?" 어리둥절하다는 듯 입을 채 다물지 못하는 그였지만, 내 철봉을 사사삭 잘 피해내는 그이기도 했다. "맞아라! 맞아! 제발, 한 대만이라도 맞아라!" "커어억!" "그럼, 그렇지. 한 대는 맞았……? 어?" 당세옥은 내 철봉에는 끝끝내 한 대도 맞지 않았다. 대신 홍 영감님의 단검에 옆구리를 뚫리고 말았다. "헉, 허어억, 정말로 아픈걸. 이거, 이, 이거 너, 너무 비겁……." 말을 미쳐 끝내지 못한 당세옥이 그대로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철가면의 가죽끈도 그 수명이 다했는지 툭 끊어졌다. 철가면이 바닥을 떼구르르 굴렀다. 당세옥의 안면이 굴뚝 아궁이 연기에 그슬린 것처럼 새까맣기 그지없었다. '악취미 속에 또 다른 악취미로세. 철가면을 쓴 것도 모자라 분장까지 까맣게 했냐? 이게 말로만 듣던 저주 의식 아냐?'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았을망정 널브러지지는 않았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으며 간신히 버티는 중이었다. "비겁하기로 따지면 자네가 나의 스승이지. 안 그런가?" 그로부터 한 발자국 거리를 두며 털썩 양반다리로 마주 앉은 홍 영감님의 어조가 왠지 부드러워졌다. 마치 옛 친구를 대하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아니 돌아가는 대화로 미뤄보아 친구 이상의 연분이 있는 듯 했다. "헉, 허헉, 그, 그렇지. 크크, 이로써 피장파장인 건가?" "……." "그, 그런데, 어떻게 저 녀석의 해, 해독을 그, 그……렇게, 빨리 할…… 수 있……었지?" 당세옥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그래도 궁금한 것은 참을 수 없었는지 끝까지 물어왔다. 하긴 나도 약간은 궁금해졌다. "자네 말대로 해독할 시간 따위 없었다. 이독제독(痢霽)으로 일시적으로 독기운들을 상충시켜놨지. 이 친구 체질이 좀 특이해서 버텨줄거라 믿었다네." "헉, 헉, 그, 그런가? 무, 무림사에 헉, 헉, 회, 회자될…… 특이한 체질이군." '뭐, 뭐야! 해독을 한 게 아니라고! 어, 어쩐지 아까부터 전신이 마구 뜨거워지고, 따갑고, 아려오고…….' 홍 영감님의 말을 듣고서야 내 몸에 심각한 이상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공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흐름이 전신의 핏줄기를 따라 번지는 게 느껴졌다. 작금의 사태에 깜짝 놀라 다급해진 나와 달리 홍 영감님은 당세옥과 둘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영, 영감님, 어서 해독을, 해독을!' "……." "헉, 헉, 가희 녀석, 남궁 녀석을 감싸다가 죽어버렸다더군. 젠, 젠장, 저, 저승에 형님이 오시면……, 무, 무슨 낯으로 뵌단 말인가! 헉, 허헉, 우리…… 당가 사람들…… 고집은, 황소 고집이지. 가, 가희 녀석 자, 자신의 선……선택에 미, 미련은 안 남겼을 거야." "당가 놈들 중에서 니 놈 고집이 제일일 테지. 어때, 속이 후련한가? 잠시나마 독공으로 강호 정상에 서봐서?" "헉, 헉 아, 아니, 우, 우리 사천당문을 강호 정상에 우뚝 세우겠다는 내 꿈은, 나의 비원은, 여기서 끝……났네. 부, 부탁이 있다네." "뭔가?" "헉, 허헉, 내 품속에 있는……, 혈해진경 용, 용독편을 우, 우리 당가에 전해주게." "알았네. 내 그리 하지." 홍 영감님이 고개를 끄떡이자 당세옥이 신형이 옆으로 미끄러지듯 기울어졌다. 이제야 숨이 끊어진 듯 했다. 가는 순간까지 할 말은 다 했으니 진정한 황소 고집 사나이였다. 당면한 문제가 시급해졌다. "영, 영감님, 몸이, 몸이 불덩이 같아요. 아니 산불 속에서 뒹구는 통돼지가 된 기분이에요. 어, 어서 해독을……." 그러나, 영감님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다. 잠자코 당세옥의 품속에서 혈해진경(血海眞經) 용독편을 꺼내더니 한 장 한 장을 속독으로 읽어내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몇 차례나 독촉했으나, 영감님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한 번 독서에 빠져들면 누가 뭐라 하건 안 들리는 영감님을 이해하긴 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이러다가 몸이 폭발할 것 같다고! 사람 목숨이 와리가리 하는 판국에 책이 눈에 들어오나! 이 영감탱이가 진짜!' 이런 저런 불만을 다지며 진정, 진정으로 끓어오르는 속을 가까스로 삭히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반시진은 지났을까? 전신을 뜨겁게 달구던 열기가 뱃속으로 좁혀져 들어갔다. 그렇다고 해서 편해진 것도 아니었다. 복통도 이런 복통이 없었다. 얼마나 배가 아팠는지 배를 끌어안고 떼구르르 구르기까지 했다. "영감님, 홍 영감님! 나 죽어요! 나 죽어. 애라도 밴 것 같아요. 정말이라니깐요! 홍 영감!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약속이 다르잖아!" 얼마나 급했는지 영감님 욕설까지 내뱉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홍 영감님은 자연과의 완벽일체가 되었는지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오로지 용독편만을 정신없이 읽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독서에 빠져있는 홍 영감님의 피부가 점점 새까맣게 변해갔다. 시간이 지나 완전 새까매지고 나서야 영감님의 용독편 탐독은 끝이 났다. 책장이 탁 닫혀졌다. 즉시 만세 삼창을 부르며 재빠르게 영감님을 불렀다. "영감님, 영감님, 이번에는 뱃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구요. 어서, 어서 해독을, 해독을!" 오히려 이번에는 더 심각했다. 아예 눈까지 질끈 감고는 깊은 명상에 잠기는 게 아닌가! 여전히 내 말은 씨알도 안 먹히는 듯 했다. 이제는 허탈감 어린 체념이 찾아들었다. 속으로 투정 한 마디를 내뱉을 따름이었다. '제기랄,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네.' 반시진은 더 지났을 것이다. 새까매져 있던 영감님의 피부가 본래의 살색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완연한 본래의 색이 돌아오자 홍 영감님의 눈도 딱 떠졌다. 날 천천히 돌아보더니 진리를 깨달은 부처나 떠올릴 법한 염화 미소를 피어 올렸다. '이 영감탱이가 날 놀리는 것 아니야! 우씨!' 웃어른만 아니었다면 귀싸대기를 스무 대 날리고도 추가로 열 대는 더 날렸을 것이다. 정말 얄궂은 미소였다. "아, 자네 해독을 시켜줘야 하겠군. 깜빡 잊고 있었구먼. 미안하이." '빨리도 알아챈다. 한 시진은 흘러갔다.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야!' "꺼어어억." 난데없이 걸쭉한 트림이 튀어나왔다. 지독한 악취가 몽실몽실 피어 나왔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뱃속이 급격하게 진정되면서 대신 엉뚱한 곳으로 힘이 몰려들었다. 걸음이 엉거주춤 꼬여버렸다. "이리 오게나. 해독을 해야하지 않겠는가? 아프지 않게 살살 해줄 테니 어서 오게나." '됐네. 마차 떠났네. 이 빌어먹을, 빌어먹을! 영감탱. 지금은 그,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엉덩이에 잔뜩 힘을 불어넣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걸어나왔다. 내 수상쩍은 행보에 눈치를 챈 영감이 뭔가를 휙 던져줬다. 얼결에 곁눈으로 받았지만, 신경이 온통 한 군데로만 쏠려있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뒷간에 가는 모양인데, 맨손으로 가서야 쓰나, 후문을 닦기에 딱 알맞은 폐지라네. 난 이 친구를 묻어줘야 하겠으니 자넨 뒷일부터 해결하고 천천히 오게나." '쳇, 그나마 막판에 눈치 깠나? 진작에 해독을 시켜줬으면 이런 일도 없잖아. 도대체 며칠동안 쏟아낼 분량이 몰려든 거야?' 한적한 곳으로 엉기적엉기적 기어가다시피 해서 후다닥 바지를 까 내렸다. 이를 데 없이 한적한 곳이었으나, 이를 데 없이 음산하기도 했다. 하필이면 뒤를 까 내린 앞에 산만한 곰탱이 한 마리가 커다란 입을 쩍 벌린 채 죽어 있었다. 녀석이 노려보는 위치 또한 참으로 난감한 자리였다. 곰탱이가 금새라도 벌떡 일어나 그곳을 확 물어 뜯어버릴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녀석이 당장에 벌떡 일어나 덤벼든다 해도 볼 일만은 봐야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인내심이 바닥나 있었다. 뿌지직, 뿌지지직. 뿌직, 뿌직. '어, 시원하다. 이제 살 것 같다. 휴우, 단지 내 살다, 살다 이렇게까지 지독한 악취를 동반하면서 볼 일 보기는 처음이다. 내가 싼 내용물에 내가 중독 당해 죽겠다.' 이루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역한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주변 정경이 조금 더 암울해진 듯 했다. 그렇게 한 식경을 내리 쏟아내고서 홍 영감님이 준 폐지를 북 찢어 후문을 닦아내었다. '오오, 감촉 죽이는구만. 홍 영감님 쓰라고 녹 누님이 챙겨준 것인가 보군. 역시 녹 누님의 꼼꼼함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마지막 남은 폐지로 깔끔하게 뒷마무리를 하고 나자 절로 상쾌해졌다. 까 내린 바지를 끌어올리다가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부산물에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칠흑처럼 새까만 진흙덩어리가 연상되는 부산물 위에 포개진 폐지 조각이 왠지 낯익어 보였다. 후문을 닦아 내리던 부드러운 감촉 또한 처음이 아니었다. '커헉, 혈해진경 용독편이잖아! 홍, 홍 영감!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걸 암상에 팔아먹으면서 이윤의 절반에 절반을 떨궈도 엄청나게 한 몫 잡을 수 있는 건데. 저걸로 닦으라고 내줘! 드디어, 드디어 노망이 든 게야!' 이번에는 정말 진지하게 뒤 묻은 혈해진경 쪼가리를 건져낼까 고려하게 되었다. 허나,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진경의 반 쪼가리는 이미 홍 영감이 없애버렸는지 보이지 않았고, 눈앞에 보이는 부분 또한 내 부산물에 상당부분 변색, 내지는 부식 당해 있었다. 이미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홍 영감님이 기다리는 자리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돌렸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무덤 하나가 보였다.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아있는 영감님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쓸쓸해 보였다. '쳇, 그래, 까짓 거 내가 봐준다. 이왕 기다린 거 좀 더 기다려주지.' 그가 훌훌 털고 일어설 때까지 기다리려주기로 했다. 불현듯 시선을 돌렸다가 그들을 보고 말았다. 윗도리를 벗어 젖히고 아랫도리를 까 내리던 자세 그대로 죽어버린 젊은 연인들에게 눈길이 꽂혔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었다. 우리와 아무런 상관없이 그저 순수하게 인생을 즐기러 왔던 두 청춘연정이 애꿎게 희생당한 것이다. '그래도 약간은 부러운걸. 최후까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즐기다가 행복하게 간 거잖아. 나도 죽을 때는 그렇게 죽고 싶다고. 쳇.' 철봉을 들어 땅 한 구석을 파내었다. 오로지 하나만을 깊게 파내고서 두 연인을 굳은 그대로 함께 묻어버렸다. 저승에서도 그들은 생사고락을 같이 할 터였다. 자연스레 나만을 목 빠지게 학수고대하고 있을 교옥정 누님이 생각났다. 상큼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더 이상은 혼자가 아니었다. 나에게도 돌아갈 곳이 생긴 것이다. 바야흐로 모든 것을 잠시 접어둘 순간이 도래했다. 교옥정 누님과 신혼의 단꿈에 빠질 때가 된 것이다. 수라삼살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을 꿈꿀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눈앞에 펼쳐지게 된 것이다. '어라, 이 영감탱이 왜 이리 조용해? 설마 죽기라도 한 거야?' 연인을 묻어 버리고,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든 순간까지도 홍 영감님의 자세에는 변화가 없었다. 다만, 규칙적으로 새나오는 숨결 소리가 그의 생존에 대해 말해줄 뿐이었다. 그래도 숨결 소리가 너무나 규칙적이었다. 마치……. '마치 잠이라도 든 것처럼, 잠이라도, 잠이라도!' "영감님, 영감님, 영감님! 아 정말, 이런 상황에까지 잠들면 어떡해요! 일어나요, 일어나라구요!" 홍 영감님은 정말 깊이 골아 떨어져 있었다. 당세옥과의 결전이 그에게도 매우 힘겨웠던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를 들쳐업었다. 젊은 처자도 아닌 다 늙은 영감탱을 업은 게 찜찜하긴 했어도 그리 기분 나쁘진 않았다. 아니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무사히 살아남았다. 난적 중의 난적을 땅속에 묻어버리고 무사히 살아남은 것이다. 남은 일은 교 누님과의 혼인 뿐, 어찌 아니 즐거우리! 무인루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한 결 가벼워졌다. 오늘따라 산자락을 붉게 물든 노을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제 불행은 끝났다. 남은 것은 행복, 그 자체뿐이리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2-19 22:27:21 고친날 2005-12-19 22:27:21 읽은수 7706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99)-작삼 장가가는 날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99] 작삼 장가가는 날 상당한 강적 내지는 난적이라 생각했던 당세옥, 스스로 자승자박(自繩自縛)에 빠져준 덕택에 수월하게 쓰러뜨릴 수 있었다. 불완전한 게 뻔히 보이는 혈해진경(血海眞經) 용독편(用毒篇) 수련을 무리하게 강행한 탓이리라. '그나저나 당문에 용독편을 전해주마 약속해놓으시고서 없애버린 어르신 속셈을 모르겠네. 뭐, 알아서 할 양반이긴 하지만, 찜찜한 걸.' 무인루(無人樓)에 채 당도하기도 전에 마중 나온 이들을 볼 수 있었다. 홍 영감님이 곯아떨어지기 직전 미리 전음입밀(傳音入密)이라도 보낸 모양이었다. 상식적인 선에서 전음입밀이 닿기에는 꽤나 먼 거리였지만, 영감님이라면 가능할 터였다. '그럼, 그럼, 용독편까지 익혀버렸으니 독경(毒經)을 독점한 거잖아. 명실공히 독공의 일인자! 그 정도 거리야 누워서 식은 죽 먹기 아니겠어?' "에헴, 다 왔구먼. 간만에 인마(人馬)를 타보니 나쁘진 않구나." '얼라리? 언제 깨어난 거야? 그 인마(人馬)란 게 날 두고 하는 소리?' 홍 영감님은 언제 업혀왔냐는 듯 정정하게 걸음을 떼고 있었다. 혹시 자기 발로 걷기 귀찮아서 잠든 척했던 게 아닐까 하는 의문도 떠올랐다. '에휴, 아무렴 어때? 사지 멀쩡하게 살아 돌아왔잖아. 그럼 그걸로 그만이지, 뭘 더 바라리?' "작삼 동생!" "작삼 오라버니!" 제일 먼저 뛰쳐나온 이들은 역시나 교옥정 누님과 소화 동생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달려나왔다. 교 누님의 안면에는 안도의 홍조가 떠올랐고, 소화의 안면에는 기쁨의 미소가 흘렀다. "휴우, 정말 다행이야. 행여나 생과부가 되는 게 아닌지 걱정하고, 또 걱정했지 뭐야." "누님도 참 별 걱정을 다……." 와락. 덥석 안겨오는 교 누님의 갑작스런 포옹에 파묻혀 말문을 잃었다. 부드러운 살결과 싱그러운 살내음이 너무나 포근하게 와 닿았다. 다만 은은하기만 했던 난향은 더 이상 은은하지 않았다. 취할 듯 유혹적인 매력이 폭발적으로 발산되었다. '헉, 엉뚱한 곳으로 힘이 들어가네. 남세스럽게.' 다행스러운 점은 교 누님이 내 몸의 이상을 알아차리고도 당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화빛으로 홍조를 떠올린 그녀는 포옹을 풀지 않고 도리어 더 강하게 안겨왔다. 덕분에 다른 이들의 시선으로부터 그곳을 가릴 수 있었다. '역시 누님, 누님뿐입니다.' 나와 교 누님의 포옹에 소화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어깨너머로 슬며시 바라보자 환한 미소로 고개만 끄떡였을 뿐이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 버렸다. 그녀의 왜소한 어깨가 더욱 작게만 느껴졌다. '소화……?' 홍 영감님을 마중 나온 녹 누님의 미소도 남달랐다. 살얼음 위를 걷는 듯 어설펐던 미소는 더 이상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결의에 가득 차 보였다. '어떤 의미로 녹 누님도 변한 것 같군.' 단 두 명을 제외하고는 다 얼굴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 두 명이 누구인가는 더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직도 완쾌되지 않았을 눈 때문에 간간이 고통에 시름할 흑접(黑蝶), 단단히 열 받은 듯 하긴 한데, 원인이 무엇인지 갈피가 안 잡히는 주령령(周鈴鈴), 이 두 명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뭐, 흑접이야 십중팔구 잠들어 있겠지. 주령령이야 워낙 제멋대로 여자니까 잊자고, 어차피 이제는 남남일 뿐이니.' "이야, 작삼 점소이, 한 건했네. 잘 했어!" 반갑게 다가오려던 적미호가 그대로 우뚝 멈춰 섰다. 나와 교옥정 누님 사이의 포옹이 꽤나 진해 보였는지 심술궂게 미소짓기만 했다. 이미 남의 부인이 된 여인이지만, 적미호만이 지닌 매력은 가히 독보적이다. 건드리면 데일 것을 뻔히 안다해도 꿀꺽 삼키고 싶어지는……. '우윽, 왜, 왜 이러는 거야? 갑자기 남의 여자에게 눈이 가? 거 이상하네. 아무리 예쁜 여자래도 임자 있는 여인에게는 느껴지는 바가 없었는데.' 가운데 다리에 힘만 한 층 더 들어가 버렸다. 교 누님이 가려주지 않았다면, 엄청난 망신살이 뻗쳤을 것이다. "호호호호, 이제 곧 혼인식 올리고, 신혼 돌입이다. 이거지? 질 수 없겠는걸. 안 그래요? 자기?" 그녀는 바로 옆에 무뚝뚝하게 서있는 곽 철 대협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의 안면이 벌개졌다. "험, 험, 미호 소저, 따뜻한 숲 바람이나 쐽시다. 이런 날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썩히기엔 아깝지 않겠소?" 둘은 묘한 분위기를 살랑살랑 풍기며 사라져 버렸다. 노을지는 수풀 정경이 아무리 좋아도 이제 곧 해가 지려는 마당이다. 뭔가 앞뒤가 안 맞았다. 곽 철 대협 답지 않다고 해야 할까? '아니, 저 목석 같은 양반 면상이 벌게지기도 하네. 허, 참 별일일세. 게다가 대놓고 자기? 닭, 닭살 돋아.' 다른 이들도 무안해졌는지 하나 둘 사라져갔다. 단지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제갈혜만 유난히 킁킁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자 속으로 중얼중얼 거리며 사라지는 게 은근히 신경만 쓰이게 만들었다. "다 갔어요. 누님. 이제, 이제 놓아주셔도 되요." "……." 창피함을 무릅쓰고, 봉했던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내 허리에 둘려진 그녀의 손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대답도 기피한 채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교 누님?" "정말 이대로 놔줘도 좋아?" "……" 쿠쿵 쿠쿵, 쿠쿵 쿠쿵. 가슴 고동이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아니 그녀에게 안겨진 그 순간부터 가슴 고동이 비이상적으로 요동쳐왔다. 단지 참았을 뿐이었다. '뭐, 참지 못한 부분도 있긴 하지.' 교옥정 누님의 향기가 한 결 더 강하게 느껴졌다. 내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망설이자 교 누님의 짤막한 한숨이 들려왔다. 천천히 손을 풀어버리고 돌아서는 그녀였다. 흑의 경장을 통해 드러난 누님의 두툼한 둔부와 잘록한 허리가 두 눈에 확대되어 들어왔다. 오늘따라 누님의 뒷모습이 너무나 요염하게 와 닿았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막혀있던 둑이 홍수에 밀려 무너지듯 속으로 억눌려있던 뭔가가 쾅 터져 버렸다. '더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 교 누님의 가녀린 어깨를 움켜잡아 거칠게 돌려 세웠다. 휘둥그래진 그녀의 눈빛을 무시한 채 가녀린 허리를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매혹적으로 번들거리는 분홍빛 입술을 탐닉하면서도 한 손은 어느 틈에 두툼한 둔부를 주무르는 중이었었다. "안 돼, 이 바보야!" 그녀는 날 완강하게 거부하며 밀쳐 버렸다. 무방비 상태로 밀린 난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휘잉. 한 줄기 차가운 바람이 그녀와 나 사이를 스쳐갔다. "어, 어째서?" "여긴 사람들이 언제 지나다닐지 모르는 무인루 앞마당이야. 알았어? 흥." 콧소리를 내며 허리 뒤로 깍지를 낀 교 누님이 적미호가 사라진 반대편 수풀로 잰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던 나는 그녀의 뒤로 후다닥 쫓아가야 했다. 그 날 밤, 자정 무렵에야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것도 잔뜩 진이 빠진 채로……. '에구구, 삭신이야! 누님의 허리 비틀기 연계기에 그냥 당해 버렸네. 다음에는, 다음에는! 결단코 지지 않겠다. 나도 비장의 기술을 만들어야지. 그런데, 수련은 어떻게 하냐?'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2-22 18:30:43 고친날 2005-12-22 18:30:43 읽은수 6782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100)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0] 비록 교 누님의 주도적 공세에 밀려버렸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흐흐흐, 회상만 해도 죽이는걸.' 그녀의 간드러진 비음이 아련하게 귓가를 맴돈다. 야들야들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살랑살랑 흘러내린 흑발에 묻어난 난향이 코끝을 맴돈다. 남은 것은 혼인을 통해 정식 부부로 공인 받는 일 뿐이다. 그 누가 우리 앞날을 막을 수 있겠는가? 설사 주령령이라 해도 막을 수 없으리라! '뭐, 막을 이유도 없잖아.' "에그머니나! 소화야!" 무인루 문간에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은 그림자가 울금향을 풀풀 풍기고 있어 순간 깜짝 놀랐었다. 령령의 처녀귀신 놀이가 본격적으로 재개된 줄 알았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녀 대신 소화가 자리잡고 있었다. 단지 두 볼이 잔뜩 부풀어오르고, 오동통한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 게 단단히 토라진 듯 했다. "작삼 오라버니, 초점 없는 시선에 안면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까지는 봐줄 수 있어요. 하지만! 입가에 침까지 주르륵 흘리진 말아요. 보기 흉해요." 그녀 말에 재빨리 입가로 소매를 훔치며 얼버무렸다. "여, 여기서 뭐 하는 거니?" "흥, 뭐하긴 뭐해요? 오라버니 방 못 찾을까봐 기다리고 있었지, 비상시국이 해제된 마당에 꼬락내 풀풀 나는 은신처 바닥에 옹기종기 웅크리고 있어야겠어요? 당연히 각 방으로 배정되었지요. 내 방보다 작삼 오라버니 방을 먼저 청소하고 기다렸는데도 정작 당사자는 코빼기도 안 비치던데요. 네?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라버니?" "아, 미안, 미안, 당세옥 녀석하고 생사를 결하고 나니까 속이 답답하더라구. 그래서, 숲 속에서 자연과의 일체화를 통해 머릿속을 깨끗이 비워냈지, 뭐. 하하하하." "자연과의 일체화? 킁킁킁, 난향이랑 밤꽃 구경을 했나봐요? 희한하네. 이 향기를 풍기는 난초는 맑고, 은은한 청향으로 이름높은 한란이에요. 사천성(四川省), 운남성(雲南省) 접경 지역에나 서식하는 고고하면서도 까다로운 녀석이라구요. 한참 떨어진 이곳 광주(廣州) 야산에 서식하다니 정말 묘하네요. 더욱이 밤꽃은 육, 칠월 초여름 경에나 피잖아요. 무슨 수로 이 초봄에 구경을 했을까?" '끙, 무슨 꼬투리를 이리 세세하게 잡는 거야? 내가 그러면 그러려니 하지.' 사박 사박 사박. 남 눈치 보인다며 도중에 길을 엇갈려 갔던 교 누님이 나타났다. 나와 소화가 얘기중인 것을 보자 조용히 스쳐갔을 뿐이었다. 다만 상당히 강한 난향과 밤꽃향기가 흘러 나왔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수 시진동안 서로를 탐닉하며 살결을 부대꼈으니 그 향이 고스란히 나에게도……. "아하." "엉?" "아하." "……." "아하아!" "……." 소화 녀석의 고양이 눈이 추궁하듯 날카로워졌다. 가느다란 입술로는 연이어 아하, 아하를 연발하고 있었다. 점점 내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쩝, 거 무지하게 무안을 주네. 남녀간의 일이란 게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뭐.' "안 올라와요? 오라버니 방 안내를 위해 긴 긴 시간을 문가에 쪼그려 앉아 기다렸어요. 그 목적은 달성해야 제 체면이 설 것 아니겠어요?" "으, 으응." 끼익, 끼익. 무인루 내부는 오랜 세월 방치된 탓에 여기저기 먼지가 휘날렸다. 끼익거리며 마찰음을 내는 나무이음새가 불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잠자코 앞서간 소화를 따라가 보니 이 층 맨 왼쪽 구석에 자리잡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연인지 풍악산 망아루에서의 내 방 위치와 흡사해 보였다. 철컥, 끼이이익. 문을 열고 발을 내딛자 바깥과 다르게 상당히 깨끗한 내부를 엿볼 수 있었다. 간단하게나마 손질까지 한 듯 했다. '역시 소화, 깔끔함 하나는 남다르네. 소방 녀석도 개방 거지답지 않게 깨끗하더니만. 역시 피를 나눈 남매라 이건가?' 단단히 토라진 듯한 소화가 그대로 휙 몸을 돌래 나가려 했다. '휴우, 일단 감사 인사 정도는 하는 게 예의겠지?' "고맙다. 소화, 이 무인루 안에서 제대로 날 챙겨주는 사람은 역시 너뿐이다." 교옥정 누님과 녹녹 누님이 불현듯 떠올랐지만, 언급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소화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중이니 말이다. 발걸음을 돌려 바로 나갈 듯 하던 소화의 신형이 우뚝 멈춰 섰다. "제가 좀 어려 보여도 알 건 다 아는 나이에요. 성인 남녀간에 무슨 일이 있다해도 다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도 오라버니, 육체적 교합을 통한 사랑은 언젠가 식을 날이 올 거예요. 그러나, 정신적인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은 꺼지지 않는 불처럼 영원해요. 그 무엇보다 우월한 것임을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 끼이이익, 철컥. 콩콩콩콩. 소화는 아리송하면서 뼈있는 지적을 남기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뭐, 이해하고자 하면 한 마디로도 축약 가능하긴 했다. "그러니까 이성간에 맨살 맞대고 비비는 게 불결하다는 거잖아. 한 마디로 내가 아주 불결해 보인다는 뜻이로군." "조금 다를걸." "……." 낯익은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으나,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바로 흑접의 목소리였다. 내 침대 맞은 편에 그녀의 침상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여어, 이제 눈은 괜찮은 거야?" "가끔 통증이 오긴 하지만, 그럭저럭 참을만하다. 적어도 끙끙 앓는 소리내는 일 따위 없을 테니 안심해." "흐흐, 그것 다행이네. 그런데, 왜 내 방에 침상까지 옮겨놓은 거야? 행여나 내가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 "……." 심심풀이로 꺼낸 농담 한 마디 때문에 오히려 냉기 어린 정적이 흘렀다. 흑접의 숨결이 한층 날카로워져 있었다. '아이구, 예민하게 구네. 이럴 거면서 왜 내 방에 들어온 거야!' "그 때는 우리 사이의 약속을 재고해볼 필요가 생기는 것이지. 신경 쓰이는 일은 따로 있어." "엉?" "아주 미약하지만, 이 난향 속에는 다른 향기도 섞여있거든." "……." '으윽, 나도 자알 안다. 밤꽃 향기다. 밤꽃 향기라고! 한 바탕 질펀하게 놀았느냐고 물어보면 될 걸 가지고 왜 이리들 빙빙 돌리냐? 제갈혜한테 오염되기라도 한 거야!' "살수 수업을 받을 때 남녀를 떠나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게 바로 방중술이다. 방중술의 요체는 이른 바 이성을 유혹해 내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지. 나처럼 선천적 매력을 타고났거나 작업실력이 월등한 살수라면 구태여 필요 없지만, 영 아닌 녀석들을 위해 존재하는 게 있다." '엥? 웬 살수 수업? 방중술?' "바로 음약이나 춘약같은 미약(媚藥)이다. 상대가 무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면 싸구려 가루 미약을 써도 무방하겠지만, 아닌 경우가 더 허다하다. 더욱이 암살 대상자 주변에는 그 쪽으로 능통한 호위들이 암암리에 붙어있으니까."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거기서 미약이 왜 나와?' "최근 들어 독약(毒藥)을 감쪽같이 사용해 증거인멸을 유도하는 방법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미약(媚藥)도 독약의 한 종류인만큼 그 방편 또한 다양해지고 있지. 그 중 하나가 바로 재료 성분들의 분해 결합이다." "……."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지금 네게 묻어난 난향 속에 섞여있는 황백이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효능이 없지만, 한 가지 성분과 만나면 제혼향(制魂香)이라는 강력한 미약(媚藥)이 된다. 이성(異性)이라는 조건만 충족되면 누구에게나 발정해버릴 정도지." 흑접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미약하게 집히는 바가 있었다. 설마, 설마 하는 기분이 들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흑접, 그 한 가지 성분이란 게 뭐지?" "젊은 성인의 신선한 땀이다. 그것도 피부접촉을 통하면 모공을 통해 제혼향(制魂香)이 흡수된다. 조건이 약간 까다롭지만, 효과만은 죽여주지." '설마 교 누님이 나한테 미약을 썼다는 소린가? 도대체 이해할 수 가 없군. 조만 간에 혼인할 사이에 미약이라니! 더욱이 그딴 것 없어도 누님이 유혹해왔다면 백이면 백 다 넘어갔을 게 뻔할 뻔자인데. 어째서? 왜?' "게다가 제혼향(制魂香)을 사용하면, 시전자와 시전대상자 모두가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 한 마디로 정신없이 성교에 몰입할 수 있지. 그래서, 우리 살수들은 별로 사용하지 않아." "응? 왜?" "죽여야 할 상대 앞에서 나까지 몽롱하게 흥분해 버리면, 상대를 암살하기가 어려워져. 일종의 자승자박(自繩自縛)이 되 버리니까." '오호, 그렇다면 얘기가 전연 달라지는데.' 적어도 누님이 나에게 다른 뜻을 품었다는 소리는 아닌 것이다. 오로지 꿈속을 헤매는 듯 황홀한 쾌락 하나만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는 말인 것이다. 그만큼 날 아끼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몇 시진이나 정신 없이 해버린 거로군. 아, 괜히 의심만 품었네. 역시 교 누님이 최고야. 흐흐흐흐.' 그 날밤 잠자리에 누우면서 내가 느낀 기분은 최상이었다. 잠시동안 품었던 교 누님에 대한 의심은 오히려 기쁨으로 바뀌었다. '당연하지. 다른 사람은 다 날 배신해도 교 누님만은 그러지 않을 테니까. 음, 소화도 껴줘야 하나?'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2-26 04:28:40 고친날 2005-12-26 04:28:57 읽은수 6678 [ 6 K ] 제목 점소이 작삼(101)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1] 이튿날 창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에 그만 잠을 깨고 말았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것을 보니 내가 꽤 오랫동안 늦잠을 자버린 듯 했다. '쩝, 당세옥과 일전을 치러 지친 상황에 교 누님과 밤새도록 질펀하게 한바탕 했으니 축 늘어질 수밖에. 그래도 간만에 개운하게 잘 잤다. 푹신한 침대 위에서 따뜻한 이불 덮고 잔 게 이 얼마 만이냐!' 간밤의 일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배어 나왔다. 제혼향(制魂香)이라는 미약에 의지하긴 했어도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가 되었다. 일찍이 그렇게까지 격렬한 쾌감에 몸부림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실신한 주령령(周鈴鈴)을 강제로 덮친 것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쾌감이었다. 당시 심중이란 혼돈 그 자체였고, 령령에게 쌓인 것 또한 워낙 많았던 때였다. 상황이 되자 억눌려 있던 억하심정들이 기이하게 터져 나온 것이다. 마치 시간(屍姦)이라도 한 듯 찜찜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그녀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만이 남는다. 추억거리로는 별로 달갑지 않다는 뜻이다. 더구나 만에 하나 흑접이 변심해서 령령에게 찌르기라도 한다면 그 날이 내 제삿날이 되 버리는 것이다. '뭐, 그것도 나름대로 아슬아슬한 쾌감이 있긴 했지. 날 철저하게 깔보던 냉혈마녀를 나름대로 통쾌하게 응징한 것 아니겠어?' 이미 일어난 흑접은 방 한구석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면상이 한결 뽀얘지고 옷도 깔끔한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것으로 봐서 소화의 시중을 받은 듯 했다. 소화(蘇華), 이래저래 마음 씀씀이가 괜찮은 녀석이다. 애교 또한 철철 넘치지 않는가? 녀석과 어떤 남정네가 엮일지 몰라도 알콩달콩 사는 재미가 제법 쏠쏠할 터이리라. 똑똑똑. "험험, 일어났는가? 들어가 봐도 되겠는가?" 포연강 목소리였다. '으잉? 녀석이 웬 일로 체면치레를 하나? 점잖은 구석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예, 지금 일어났습니다. 포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앞 방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놨다네. 욕조물이 식기 전에 어서 목욕부터 하게나." "……." "아, 그리고 침대 위에 갈아입을 새 옷도 놔뒀으니까 말쑥하게 갈아입고 오시(午時) 이전까지 홍 영감님 방으로 가보게. 긴히 전할 말이 있다 하네. 알아들었는가?" "아, 네, 그럼요." "난 분명히 전했으니 하나라도 빼먹지 말고 그대로 행해야하네. 그럼 난 가네." "예, 살펴 가십시오." 그는 얼굴 한 번 들이밀지 않았다. 할 말만 툭 던져놓고는 쫓기듯 허겁지겁 사라져 버렸다. 뭔가 구리구리 수상쩍은 냄새가 풀풀 나는 어투였다. '앞 방? 빈방인가보지?' 끼이이익. 아직도 잠이 가시지 않은 눈자위를 비비며 앞 방문을 열어 젖혔다. 내 방 못지 않게 깔끔한 정경이 보였다. 그 순간 강렬한 울금향이 확 밀려나오며 코끝을 자극해왔다. 전신이 그대로 경직되고 말았다. 누구의 흔적인지 금새 알아차렸던 것이다. 한 때 소화의 울금향과 헷갈렸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소화(蘇華)의 그것은 미약하면서 은은한 구석이 있는 반면 주령령(周鈴鈴)의 울금향은 톡 쏘듯 알싸하면서 한결 강렬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스쳐간 자리에는 반드시 울금향이 감돌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방 배치도 망아루 때와 흡사했다. 내 방이 맨 좌측 구석진 남향이면, 령령의 방은 바로 내 방 맞은편 북향인 것이다. '내가 방을 잘못 들어왔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근처 방문들을 열어봤으나, 먼지만 수북하게 피어올랐다. 욕조문을 열어봐도 먼지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령령의 방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남자 옷 한 벌이 올려져 있었고, 욕조 속에는 따뜻한 물이 모락모락 김을 뿜었다.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쳇, 차라리 내 방 욕조에나 채워주지.' 간만에 따뜻한 욕조에 몸을 뉘였더니 눈꺼풀이 스르륵 감겨졌다. 몇 차례 꾸벅꾸벅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얼마 못가 코끝을 콕콕 찔러오는 울금향에 번득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잠들었다가 령령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한바탕 경만 치를 게 뻔했던 것이다. 서둘러 목욕을 끝내고 나서 옷을 펼쳐봤다가 다시 한 번 더 놀랐다. 재질이 자주빛 비단인 것은 둘째 쳐도 소매와 옷깃에 수놓아진 용무늬가 특이했다. 윗도리 끝단이 무릎 위까지 내려올 뿐만 아니라 소매도 펑퍼짐한 게 평상복이라기보다는 예복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새하얀 비단 버선과 남색 포초혜가 눈에 들어와 마저 착용했다. 비단 허리띠를 매고 매듭지음으로써 마무리를 지었다. '오늘 누구 잔칫날인가? 설마 주령령이 남궁현하고 혼인하는 날? 그럼 제갈혜도 같이 합동 혼인식을 치르겠네.' 약간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후련한 기분도 들었다.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것을 보니 역시 령령은 그 날 일을 모르는 게 확실했다. 발걸음을 바로 옮겨 맞은 쪽 반대편으로 쭉 걸어갔다. 습관적으로 무환루 시절 방위치를 따라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영감님, 접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오, 이제 끝났는가? 어서 들어오게." 별 생각 없이 두드렸는데, 바로 응답이 왔다. 끼이익. 철커덕. 영감님도 나름대로 예복을 차려입고 대기 중이었다. 특이하게도 약방에 감초 같던 녹 누님이 안 보였다. "오늘 누구 혼인식이 있는 날인가요?" "그렇네." "설마, 그들의 혼인식날인가요?" 내 옷깃을 여미며 꼼꼼하게 복장 점검을 하던 홍 영감님은 허술한 내 머리 상태에 혀를 쯧쯧 차며 머리 주머니를 꺼내 손수 묶어 주었다. "그들? 이보게, 자신의 일을 남의 일로 치부해서야 쓰겠는가? 오늘은 누가 뭐라 해도 자네의 날일세. 예정대로라면 일주야 후 냉월화(冷月花)가 도착하고 나서 쌍방이 격식을 갖춘 후 치렀겠지만, 약간의 변동이 생겼네. 그래서, 신부측의 요청에 따라 오늘로 변경했다네." '응? 교 누님이? 무슨 변고가 생겼기에 예고도 없이 앞당겨 버렸을까? 나야 누님과 첫날밤을 빨리 치르면 치를수록 좋긴 하지만.' "그래도 육례를 따라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 청기(請期) 친영(親迎)의 과정을 거치고서 정식 혼인을 치러야 하지 않습니까? 일부도 아니고 다 생략해버린다는 것은 좀 찜찜한데요." 내 입장이야 원래 묘하다 쳐도 냉월화 누님의 부재는 작지 않았다. 교 누님의 사문, 월녀궁이 직결된 문제이지 않은가! 궁주의 전갈도 받아야 할 테고, 여러 일이 있을 텐데, 교 누님이 너무 급하게 서두르는 티가 났다. "어허, 그런 게 다 허례허식(虛禮虛飾)이라네. 지금처럼 눈만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에 일 분, 일 초가 아까울 따름이지. 그저 속전속결(速戰速決)이 최고라네." "으음, 그렇기도 하군요. 그럼 교 누님은……?" "걱정 말게. 자네가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다들 오래 전에 준비를 마쳐버렸네. 작삼 자네만 식장에 도착하면 만사형통이 되는 걸세." "쩝, 선택의 여지가 없네요. 식장은 어디 있지요?" "바로 후원 창고에 자리를 마련해놨지. 자네를 기다리느라 애간장들이 모두 다 타버렸을 걸세. 아,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서두르세." "……." 영감님이 쏟아놓은 말 중에서 기이한 구석이 언뜻 비쳐졌으나, 다짜고짜 서두르는 통에 길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교 누님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일념 하나로 후다닥 뛰듯 걸음을 옮겼다. '교 누님, 기다리세요. 제가 갑니다. 이 순간만이라도 만사 잊고 우리 둘만의 세상 속에 빠져보자구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5-12-28 13:29:04 고친날 2006-01-12 16:00:00 읽은수 8190 [ 13 K ] 제목 점소이 작삼(102)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2] 끼이이익. 깨끗하게 된 창고 안은 제법 넓었다. 교 누님과 조촐하게 혼인식을 치르고 하객들의 축하를 받기에 딱 적절한 공간이었다. 하객이래 봤자 열 명 안팎의 무인루(無人樓) 인간들이 고작일 테니 말이다. 창가를 통해 비스듬히 스며드는 햇살이 혼인상 앞을 비추었다. 우리의 앞날을 미리 축복해주는 듯 싶었다. 상 좌측으로는 곽철(郭鐵) 대협이 적미호(赤美狐) 부인과 함께 서 있었고, 우측으로는 녹녹(綠綠) 누님과 포연강(鮑然强)이 서 있었다. '령령을 비롯해서 남궁현 패거리는 안 보이네. 뭐, 나와는 담쌓은 놈이니까, 느그들 결혼식에 불참하는 것으로 갚아주지. 크크.' 창가 옆으로 스며드는 찬란한 햇살 덕에 혼인상 뒤편의 교 누님 모습이 흐릿하게 비쳐졌다. 가슴이 두근두근 참을 수 없는 격동에 터질 듯 가빠왔다. 실룩실룩 새어나오려는 미소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바짝 다가섰다. '으잉?' 시야가 적응되어 전면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잘못 봤나 싶어 눈자위를 몇 번이고 문질러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쳐봐도 변하는 게 없었다. '교 누님이 세 사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새하얀 망사로 얼굴을 가려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 세 명이 혼인상 건너편에 서 있었다. 색동 비단 저고리와 치마를 길게 늘여 입고,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세 명의 신부가 내 앞에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두 명은 나와 키가 엇비슷했고, 한 명은 목 하나 정도가 작아서 유난히 도드라졌다. 탁. 그제야 생각난 게 있어 무릎을 탁 쳤다. 홍 영감님을 돌아보며 한껏 웃음 망울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이 세 명의 신부 중에서 두 명은 가짜고, 한 명은 진짜 신부인 교 누님이다, 이거네요. 어느 지방 관습인가는 몰라도 혼인식장에 얼굴을 가린 여러 명의 신부가 동시에 난입시킨다던가? 신랑으로 하여금 진짜를 가려내게 한다는 것을 익히 들은 적 있지요. 두 사람의 사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시험해보는 일종의 통과의례라고 하더군요. 과연 그런 것이었군요. 하하하하, 과연, 과연……." 동의를 표하는 미소를 상큼하게 지으며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내가 예상했던 폭소로 화답해주지 않았다. 포연강은 팔짱을 끼고서 두 눈을 딱 감아 버렸고, 적미호는 웃을까 말까 억지로 참는 듯 미묘함을 보였다. 곽철 대협은 먼 산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는 자세를 보였으나, 천장이 꽉 막혀있는 창고 안에서 먼 산은커녕 가까운 언덕배기 하나 보일 리 없었다. '쩝, 딱한 양반, 속이 너무 뻔히 보여 측은할 지경이다.' 급기야 녹 누님은 날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외면해버리기까지 했다. 이제야 뭔가 일이 심각하게 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의중에 반하는 무슨 일인가가 강제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설마 교 누님이 전설의 도술이라는 분신술(分身術)을 익히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내 눈이 사팔뜨기가 돼서 잔상이 보이는 걸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휴우." 땅이 꺼지도록 체념 어린 한숨을 쉬고는 홍 영감님을 돌아보았다. 뒷머리를 긁적이던 영감님이 몇 차례 헛기침을 하더니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험험, 분명 어딘가는 그런 관습이 있겠지. 단지 눈앞의 신부들은 모두가 진짜라네." 간단명료하게 그 말만 내뱉어 주었다. 나머지는 내 상상에 맡긴다는 듯 침묵으로 일관했다. 결국 진실은 당사자들에게 직접 캐물어 봐야 할 듯 했다. 세 명의 신부들을 돌아보았다. 적어도 세 명의 망사 신부 중에 교옥정 누님이 섞여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창고 내부로 울금향이 강렬하게 감돌았지만, 교 누님의 은은한 난향 또한 그 속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교 누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누님은 아시지요? 제가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되네요. 알기 쉽게 요약 정리해서 말씀 좀 해주세요." "……." 내 질문에 바로 답하는 여인은 없었다. 단지 맨 왼쪽 여인의 신형이 실낱같이 떨리고 있었다. 잠자코 그녀를 주시했다. 망사 바깥으로 내 일거수 일투족을 다 보고 있을 테니 반응이 없을 수 없었다. 과연 그녀는 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야멸치게 돌려버렸다. 이어서 가느다란 전음입밀(傳音入密)을 날려왔다. '작삼 동생, 미안해, 지금의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 나도 더 이상은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식장에는 절대 안 나오리라 생각했던 그녀, 더 더욱이 상상 자체가 불가능한 자리에 오롯이 서있는 그녀를 똑바로 직시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강렬한 울금향을 내뿜는 여인이 그녀말고 또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적어도 이 무인루 안에는 말이지.' "령령 아가씨, 제 혼인에 어떤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도대체! 무엇이 신경 쓰였기에 마지막 순간까지 훼방을 놓는단 말입니까!" 콰앙. 말을 하다보니 저절로 북받쳐 올라 혼인상 위에 불끈 쥔 주먹을 내려찍고 말았다. 새침하게 망사 속에 숨어있던 주령령이 맞바로 전음입밀을 던져왔다. '훼방 같은 게 아냐. 단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말이야. 네가 월녀궁(月女宮) 사람이 되 버리면 앞으로의 구타심공(毆打心功) 수련에 막대한 차질이 생기겠더라구. 자기네 사람이라는 이유로 냉월화가 개입하려 들게 뻔하니까. 나 그런 꼴 두 눈뜨고는 못 보거든. 막히면 줘 패야 내 적성에 맞는데, 그렇다고 동맹 맺은 인간들과 싸울 수는 없잖아. 그래서, 선택한 게 위장혼인이지. 말 그대로 한시적인 위장이니까 넌 눈곱만치도 신경 쓸 필요 없어.' 생각지도 못했던 주령령이 내 신부로 서 있다는 사실에 잠시동안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령령의 전음입밀을 듣고 있노라면 약이 올라 참을 수 없게 되 버렸다. "아니, 그게 말이나 되오? 천지신명이 내려다보는 일생일대 거룩한 전환기에 반 장난으로 껴든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오!" '엉, 충분히 가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네 구타신공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나만큼 제대로 수련시킬 수 있는 존재가 있을 것 같아? 설설 수련하겠다는 나약한 다짐으로 일 년 후의 천운학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어림 반푼 어치 택도 없거든.' 혹시나 했었는데, 역시나! 주령령은 구타심결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망아루(忘我樓) 점소이 방에 구타심결이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토록 혹독하게 수련해 왔던 것일까? 오히려 오기가 치솟아 올라 버렸다. '젠장! 그 빌어먹을 구타심공을 익히게 만든 주범이 바로 니년이었냐? 여기까지 끌려온 억지 점소이 인생,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남의 인생에 개입해서 감 내놔라, 떡 내놔라 하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된단 말입니까!" '엉, 이해돼. 이젠 너의 단독적인 인생이 아니거든. 우리 모두의 사활이 걸린 일이기도 하거든. 더구나 너 나한테 뭔가 감추고 있는 게 있지? 안 그래?'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뜨끔하게 들었다. '설마, 설마 그 날 일을 흑접에게 듣기라도 한 거야? 아니야, 아니야, 아직은 령령이 뭘 꼬집어 말하는지 알 수 없지. 그 날 일을 알았다면 말보다는 주먹다짐부터 했을 년이니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납니다. 실신한 아가씨를 살리기 위해 온갖 우여곡절을 거쳤는데, 의심만 받다니 섭섭할 따름입니다." '그래? 아무 일 없었어? 그럼 그걸로 됐어. 뭔가 찜찜해서 그냥 떠본 거니까 신경 쓸 거 없어.' "……." 그녀의 전음입밀에 남몰래 안도했다. 일단 령령이 그에 대해 모르는 것 하나는 확실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요 옆 녀석은 너도 알다시피 소화란 아이야. 당돌하게도 너한테 가르칠 게 있다더군. 오라버니가 남긴 비전무학이라나? 남의 남편을 가르치기에는 꺼림칙한 구석이 있다고 역시 임시로 위장혼인을 하기로 했어. 싫어? 싫으면 싫다고 얘한테 말해. 대신 직접 말해줘야 해.' 싫을 리 없었다. 소화라면 위장 혼인이 아니라 실제 혼인이라 해도 반길 터였다. 교옥정 누님이 농염한 색정미를 지녔다면, 소화는 갓 여문 성숙미를 지녔다고 해야할까? '그럼, 주령령은?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마구 난타 폭력 여성이긴 하지. 그래도 천부적으로 타고난 관능미가 빛난다고 해야 할까? 잘 보면 청초하면서 지적인 외모도 언뜻 비친단 말씀이야. 성격만 좀 부드러워지면 매파가 줄을 이을텐데. 엉? 내가 무슨 소리를…….' 필시 주령령이 교 누님에게 모종의 협박을 가했을 텐데도 화를 낼 수 없었다. 걸리는 바가 있어 끝끝내 쓴 소리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와의 위장혼인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내심 반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짝사랑 연정이라는 게 쉽게 지워지는 게 아니니 말이지.' "흠흠, 대충 분위기 정리가 되어가는군." 옆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슬그머니 예의주시하고 있던 홍 영감님이 드디어 중재를 하고 나섰다. "월녀궁을 의식한 위장이라 해도 혼인은 혼인이지. 생략할 것은 다 생략해도 백년가약(百年佳約) 서약과 합환주(合歡酒) 정도는 나눠야 하겠지." '쳇, 짜고 치는 놀음판이로군. 홍 영감님마저 이럴 줄은 몰랐다. 수련, 그 놈의 수련이 날 아주 잡는구나. 도대체 령령은 왜 그렇게 수련에 집착하는 거야?' "신부 교옥정, 주령령, 소화는 신랑 우작삼을 맞이해 검은머리 파뿌리 되는 그 날까지 아내로써의 본분을 다 하겠다고 서약하겠는가?" "예." 교옥정 누님은 단호히 대답해 보였다. 소화의 기어 들어가듯 작은 목소리도 언뜻 들린 듯 했다. 그러나, 주령령은 한 마디도 벙긋하지 않았다. 단지 홍 영감님만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흠, 일단은 보류로 넘어가지만, 크게 보면 긍정적인 답안이라 볼 수도 있겠지. 인정하는 바이네." 령령과 영감 사이에 은밀한 전음입밀이 오고간 듯 했다. 말 그대로 암중서약 그 자체였다. '인정은 개뿔, 서약까지 위장으로 얼렁뚱땅 넘어가겠다고? 난 그렇게 못하지. 남들이 뭐라고 떠들어도 난 나야!' "신랑 우작삼은 신부, 교옥정, 주령령, 소화를 맞이하여 검은머리가 파뿌리 되는 그 날까지 남편으로써의 본분을 다 하겠다고 서약하겠는가?" "……."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주령령, 소화와는 혼인을 빙자한 위장일 뿐이었다. 애초의 내 의지와는 동떨어진, 일방적 통고인 것이다. 귀찮기 그지없는 새벽수련을 무려 한 해나 더 연장해 받을 것을 생각하니 암담할 뿐이었다. "험험, 이보게, 신랑, 서약하겠는가?" "……." 내가 꿍한 얼굴로 말문을 닫아버리자 장내에는 머쓱하면서도 서늘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무엇보다 눈앞의 주령령이 가장 날카롭게 째려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와장창! 쿵창! 순간, 내 머리 위 천장을 박살내며 떨어져 내리는 인영이 있었다. "작삼! 네 놈에게만은 보내줄 수 없다! 하고많은 쾌남들 중에서 하필이면! 어째서! 네 놈이어야만 하는 거냐!" 바로 주령령의 정식 약혼자인 남궁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령령과 얼굴을 마주 보고 서 있어야 하는 인간은 내가 아니라 녀석이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아무리 위장이라 해도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있는 ……. '어? 이, 이 녀석 보게! 내가 맨손인 거 뻔히 보이면서 검을 차고 식장으로 난입해? 야, 야!' 부셔진 천장 너머로 새하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재빨리 펑퍼짐한 소매로 햇빛을 가리며 뒷걸음질 쳤으나, 발뒤꿈치에 장애물이 걸려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챙, 쉬이이익 그새 날카로운 쇳소리가 면전에서 들려왔다. 무식할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강맹한 제왕검법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비겁하게 햇살을 등지고 습격해 온 남궁현의 검세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것이다!! 남궁현의 손에 들린 검이 일직선을 그으며 떨어지려는 찰나였다. 필생의 전력을 다 한 듯 수십 가지 변화가 담겨있는 일 검이었다. '킁, 그딴 거 보이면 뭐하냐? 피하질 못하는데, 이런 우라질!' 길고 긴 예복 끝단에 다리까지 휘감겨 꼼짝달싹 못할 형편이었다. 환하게 꽃 피려던 환희가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 치는 게 한순간이듯, 한 목숨 피고 지는 것 또한 일순간의 일이었다. 그 때였다. 휙, 까앙! 쉬리리릭. 우당탕, 쿵탕. 실로 전광석화(電光石火)같은 한 수가 면전에서 펼쳐졌다. 그의 뒤통수로 강맹하게 날아든 놋잔 덕택에 남궁현은 눈을 까뒤집으며 검을 놓쳐버렸다. 뒤이어 한 망사 여인이 남궁현의 등뒤로 신형을 날리더니 그의 뒷덜미를 낚아채 휙 던져버렸다. 그대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남궁현 녀석은 구석 고물 더미 속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끼이이이익. 창고문을 열고 허겁지겁 제갈혜가 달려왔다. 고물 더미 속에 묻힌 남궁현을 들쳐업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나가 버렸다. "……." 돌아가는 상황이 기가 막히고 황당해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망사 여인은 안면에 드리워진 망사가 거추장스러웠는지 휙 낚아채 집어던졌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주령령이었다. 출렁이며 흩날리는 긴 흑발의 그녀가 꽤나 아름답게 비쳐졌다. 하늘에서 갓 강림한 선녀라 해도 믿을 판이었다. '그, 그래도 무서운 것만은 어쩔 수가 없네. 자기 약혼자까지 주저 없이 한 방에 날려버리다니!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여편네, 주령령이야.' 살았다고 안도하며 일어서려는 순간, 령령이 내 가슴 위를 조막한 발바닥으로 짓눌러 버렸다. 천근추인지 뭔지를 시전했는지 엄청난 무게가 압박해와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다. 그저 팔 다리로만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야, 작삼 신랑, 서약할거야? 말 거야?" "커컥, 맘, 맘대로 하세요." "뭘 맘대로 해? 엉? 엉?" "커, 커컥, 서, 서약한다구요. 검은머리 파뿌리 대머리 다 서약해요." "그래? 그럼 합환주만 거치면 형식적인 절차는 끝나네. 돌려먹어야 할 놋잔은 방금 박살났지. 그래도 걱정할 것 없어. 이 주전자도 놋으로 되어 있다 이거야." 합환주가 왜 놋잔인고 하니 두 연인의 사랑이 놋잔처럼 영원히 녹슬지 말라는 뜻이라던가? 혼인상 위에 놋주전자를 가볍게 낚아챈 령령이 따르지도 않고 날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맞바로 교 누님에게로 주전자를 날렸다. 놋주전자를 받아는 누님은 망설이지 않고 한 모금 쭈욱 들이켰다. 이번에는 소화에게 건네주었다. 짐짓 망설이던 소화도 결국 약간 입을 대었다. '킁, 그래도 합환주를 주전자로 마시는 여인들은 내 평생 처음 봤네. 이게 다 이 빌어먹을……. 웁웁.' 꿀꺽 꿀꺽 꿀꺽. 령령이 마지막으로 놋주전자 주댕이를 내 입에 처박아 넣는 바람에 숨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아예 작정을 했는지 주전자 안 내용물이 비고 나서야 발바닥을 떼 주었다. 홍 영감님의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내 일평생 이렇게 요란한 혼인식은 처음 보는구만. 맘대로들 지지고 볶게나." 영감님이 신형을 돌려 창고를 나서자 다른 사람들까지 따라 나가 버렸다. 이제 창고 안에는 주령령과 나, 교옥정 누님, 그리고 소화만이 남게 되었다. "켁, 케켁, 켁." 숨구멍으로까지 술이 들어간 탓에 사례가 걸렸다. 물론 령령은 눈곱만치도 개의치 않고 있었다. "너 속으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거기서 넌 제외다. 이 마녀야!' "착각하지마. 우리가 너한테 시집온 게 아니라, 네가 우리한테 장가든 거니까." "……." "교옥정이든 소화든 다른 애들과의 사생활은 내 알 바 아니야. 하지만, 한 가지만은 알아둬. 앞으로 일 년 간 너와 나 사이에는 지옥 수련만이 있을 뿐이야. 외형상 정식 부부니까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지. 설사 월녀궁 궁주라해도 마찬가지야. 앞으로 하루 네 시진은 죽었다고 생각해. 각오 단단히 해두라구." "……." "어쭈, 뭐냐? 그 반항적인 눈빛은?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좋아, 금일 금시로부터 지옥 수련을 재개하자고." "잠, 잠깐만요! 아직 준비가……." 퍽, 퍼퍼퍼퍽, 퍼퍽 퍼퍼퍼퍽. 령령과 나 사이에 벌어지는 열기가 너무 뜨거웠는지 교 누님과 소화마저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아냐! 이게 아니라고! 내가 바라던 그 날은 이런 게 아니야!' 퍽, 퍼퍽, 퍼퍼퍽, 퍼퍼퍽, 퍼퍼퍼퍽…….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6-01-03 12:24:53 고친날 2006-01-03 12:25:13 읽은수 6426 [ 8 K ] 제목 점소이 작삼(103)-그들의 재결전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3] 그들의 재결전 "우와아아아! 사마장령 만세! 이겨라! 사마장령!" "우우우우! 꺼져라! 사파 녀석들, 천운학 소맹주가 최고다!" "이 빌어먹을 버러지들이!" "죽어버려! 정파 잡것들!" 정방형 가로 세로 십 장, 높이 두 척의 대리석 무도장, 만드는데 꼬박 반년이 걸렸다는 말처럼,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무도장 외곽으로는 두 용이 치열하게 뒤엉켜 싸우는 모습까지 조각되어 있었다. 단 한 번의 결전을 위해 만든 것치고는 엄청난 사치였다. '썩을 놈들, 그냥 흙바닥 위에서 싸우면 되지. 뭔 격식을 그리 따지누? 차라리 나 같은 불우 이웃한테나 좀 써봐라.' 무도장을 둘러싼 수 천명의 정사 무림인들 사이에 환호와 야유가 엇갈렸다. 중앙에는 천운학과 사마장령이 꽤나 비싸 보이는 검과 도를 차고서 서로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천운학은 정파 티를 내는 듯 새하얀 백의무복을, 사마장령은 사파 티를 내는 듯 새까만 흑의무복을 착용했기 때문에 눈에 띄게 대조를 이루었다. 천운학 뒤편 진영으로는 그의 약혼녀라는 은발의 빙궁 미녀 빙룡(氷龍) 빙예운(氷銳雲), 점창파의 수제자 화룡(火龍) 모용천풍(募容天風), 그리고, 생각만으로도 이가 갈리는 풍류공자 고휘천(高諱泉)이 보였다. 그 이외 여러 고위급 인물들이 보였지만, 일단 나와는 안면이 없는 이들이었다. 단지 오붓하게 팔짱을 낀 두 중년 부부가 보였는데, 그들을 보는 포연강의 눈길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냉월화 누님이 곁에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뛰쳐나갈 기세였다. '어라? 여자 쪽이 왠지 냉월화 누님이랑 많이 닮았네. 꽤나 미인인걸. 좀 더 온화해 보인다는 정도나 다를까? 엥? 냉 누님이랑 포연강은 또 왜 붙어있어? 내가 없는 새 뭔 일 있었어?' 그 누구보다 무림맹 진영 정 중앙에 지팡이를 짚고 앉아있는 백발 노인이 신경 쓰였다. 눈 밑에 새까만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병약해 보이는 게 금새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백발 노인을 중심으로 정의수호대(正義守護隊)가 밀집해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물샐틈없이 보호하는 진세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고위급 인물인 듯 했다. '혹은 감시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내 착각일까?' 사마장령 뒤편 진영으로는 병약한 무림맹 백발 노인과는 달리 거대한 풍모를 자랑하며 우뚝 서 있는 회백색 장발 장년이 보였다. 전신에 검은 갑옷을 두르고 검은 망토를 휘날리면서 거대한 대도를 세우고 있었다. 은근히 진중을 압도하는 위압감이 드는 인간이었다. 그의 뒤편으로는 귀령대(鬼領隊)라는 마교 최강의 부대가 밀집해있었다. 그로 미뤄볼 때, 그가 가질 마황맹에서의 직위는 오직 하나 뿐이었다. '잘 보면, 생겨먹은 자체도 사마장령하고 비슷하단 말씀이야.' 그 이외 눈에 익은 인간이라면, 원호영 마교 교주 정도? 그리고……. '사마월향(司馬月香)!' 그녀는 귀령대 뒤편 또 다른 마황맹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앉아있었다. 건너편 무림맹 사람들을 뚫어지게 훑어보며 안절부절못하는 것만으로도 누굴 찾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천세후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비치지 않았다. 그는 무림맹 사람이면서 무림맹 사람이 아닌 만큼 보나마나 무림맹 어디 구석지에 유폐되어 있을 터였다. 몸 성히 살아만 있어도 다행일 정도였다. 한숨이 나왔다. '휴우,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백두산 깊은 산중에 고고하게 파묻혀 수련했던 한 해동안 홍 영감님 또한 나름대로 세력을 모은 듯 했다. 인간들 머릿수가 장난 아니게 많아 보였다. 정파와 사파 구경꾼의 중간 진영인 동쪽 언덕을 매운 인파 대부분이 실제로는 우리측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무환루에서는 녹 누님과 서천위 녀석을 제외한 모두가 참여했고, 월녀궁은 냉월화 누님을 위시한 비밀 분타 대부분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초면인 노파 서너 명이 더 섞여 있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익히 알고 있던 강남 표국 사람들만 해도 철혈국주(鐵血局主) 유호정(猶豪訂) 아줌씨, 천방지축 풋사과 초초(草草), 얼렁뚱땅 초일후(草佚後) 사부, 투지에 불타올라 눈들을 번득이는 흑검대 아해들, 그리고, 살기에 전신을 내던진 듯한 최량(崔良)? '우잉? 피만 봐도 덜덜 떨며 구토까지 하던 아이가 웬 일이래? 더군다나 살기를 날리는 방향이? 방향이……?!' 최량이 노려보는 방향은 정파 쪽도 아니었고, 사파 쪽도 아니었다. 오로지 주령령의 등뒤를 향해 날로 잡아먹을 듯 섬뜩하게 노려보는 중이었다. 눈앞에 둔 거사가 워낙 커서 그의 일은 일단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령령이 관계된 일에는 무조건 두 눈 딱 감고, 간섭하지 않는 게 상책이거든.' 보태면 천금대인(天金大人) 하후돈의 마부로 있었던 검은 피풍의 여인도 보였다. 화사(花史)와 관계된 인간이었기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녀석의 호위 무사 아냐? 왜 이곳에 그녀가 있는 걸까? 설마 천금대인마저 우리와 관련되어 버린 걸까?' 여기까지는 그나마 낯이 익은 이들이었다. 그 이외 인간들과는 안면 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저 나름대로의 개성을 발산하는 인간들에게 눈길이 약간 가는 정도랄까? 그 중에서도 사이좋게 붙어있는 백발 노부부가 가장 거슬렸다. 그들에게서는 그 어떤 내공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뱉고 들이쉬는 호흡과 행동이 사전 모의라도 한 듯 딱딱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첩첩 산중에 은둔하고 있었던 절세 고수다, 이 소리겠지. 그런데, 왜 아까부터 기분 나쁘게 흘끔흘끔 흘겨보는 거야? 령령이야 워낙 여기저기 피를 뿌리고 다니니까 충분히 납득하겠는데, 왜 나까지 흘겨봐?' 한 마디로 요약해서 홍 영감님과 관계된 세력들 중 한 가닥 하는 인간들 대부분이 모여든 듯 했다. 나 또한 약간의 주목을 받았다. 존경이나 호기심의 눈빛이 아니라 질시와 살기 섞인 남정네들의 눈빛이었다. 내 바로 옆에는 주령령을 비롯해서 교옥정 누님과 소화가 붙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흑접과 적월, 사월마저 앞뒤로 포진하고 있었다. 생판 모르는 남들이 보면 꽃밭 중의 꽃밭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나 같은 어리버리 녀석한테 이런 미녀들이 떼로 붙어있느냐고 쓴 소리할지도 모른다. '쩝, 쟤네들이 속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만. 교옥정 누님 빼고는 다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는 애들이라고.' 지난 한 해동안 백두산(白頭山) 지옥 수련에 동참했던 이들이 바로 그녀들인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낮시간을 령령과 정신 없이 굴러다니는데 할애해야만 했다. 한 해씩이나 흘렀으면 맷집에 단단히 독이 오를 법도 한데, 그녀의 손속은 여전히 맵기만 했다. 소화가 가르쳐 준 것은 양의심법(兩意心法)이라는 꽤 복잡한 것이었다. 철봉이 두 개인만큼 삼재검법도 양쪽으로 나눠 연환시키면 이를 데 없이 오묘해진다던가? '그런데 말이지. 난 아직도 양의심법이라는 게 도통 이해가 안 간단 말씀이야. 아무리 따로 따로 움직이려 해도 은연중에 같이 반응해 버린다고.' 위장 혼인 관계인 령령이나 소화는 당연히 남남인 관계, 남녀가 유별한 밤에는 우연이라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반면 교옥정 누님은 스스로의 월녀검법(月女劍法) 수련에 매진했기 때문에 낮에는 거의 볼 수 없었다. 대신 해가 떨어지고 수련이 끝나면 언제나 그녀가 찾아들었다. 사나흘이 멀다하고 끝없는 쾌락에 몸부림치곤 했다. 교 누님은 나의 유일한 도피처이자 안락한 안식처였던 것이다. '교 누님이 함께 해줬기 때문에 령령과의 지옥수련을 끝까지 버텨낼 수 있었지. 빌어먹을 령령, 이제는 끝이다. 오늘로 영원히 안녕이란 말이다.' 적월과 사월은 교 누님의 호위로 따라왔다. 사월이야 원래 교 누님을 철석같이 따르던 터라 그러려니 했지만, 적월의 동참은 의외라면 의외였다. 수련하는 동안 마주칠 기회도 거의 없었다. 그저 먼발치에서 우연히 시선이 교차되는 게 고작이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고개를 꾸뻑 숙여왔다. 코방귀를 뀌며 무시하는 사월과 너무 좋은 대조가 되었다. 다만 흑접만은 백두산 지옥 수련에서 묘한 위치를 유지했다. 수련에 임하는 낮에는 나와 떨어져 지냈지만, 수련이 끝난 밤에는 철거머리처럼 내 꽁무니에 달라붙었던 것이다. 심지어 교 누님과 밤일을 치르는 순간에조차 한 방에 잠들어있었다. 아무리 눈이 안 보이는 그녀라 하더라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야 약속한 게 있으니까 아무 말 못했지만, 교 누님까지 아무 말 안한 것은 참 희한하단 말씀이야.' 앞이 안 보이는 흑접이었지만, 백두산에서 반년을 지낸 뒤로는 혼자서도 척척 잘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다른 맹인들이 그러하듯 주변 지리를 암기하는가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너무 궁금해 몇 번이고 캐물어 보기까지 했었다. 그때마다 흑접은 얄밉게 미소짓기만 했다. 나중에서야 그녀 나름대로 뼈를 깎는 수련에 임하는 중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툭하면 여기저기 피투성이가 돼서 나타나기에 몰래 뒤를 밟았던 것이다. 새벽같이 나서는 흑접 뒤를 살금살금 따라가니 백두산 천지가 보였다. 새파란 하늘을 담아낸 천지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영험함과 신비함이 감돌았다. 천지 속에 수 천년을 살아온 청룡이 잠들어 있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로 한없이 맑고 깊었다. 그러나, 그 절경만큼이나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백두산 천지의 절경을 음미하고자 찾아왔던 유람객들 상당수가 산바람에 휩쓸려 실족하거나 천지에 빠져 행방불명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 천지의 절벽 위에서 거친 산바람을 마주 대하고 춤추는 그녀를 목도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나 미친 듯 춤추는 그녀를 봤다. 목숨까지 담보로 내걸고 추는 그 춤에 어떤 의미와 무게가 담겨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 날 이후로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그저 해가 떨어지고 넝마가 된 그녀가 들어오면 옷부터 벗겼다. 세욕을 시키고 여기저기 긁힌 상처에 고약을 발라주었다. 땀에 절은 그녀의 옷 빨래 또한 내 몫이었다. 죽은 듯 드러누워 숨넘어갈 듯 헐떡이는 그녀를 보면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느 틈엔가 그녀는 내 하루 일과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괜히 주워왔다는 생각이 한 번도 안 든 것은 아니지만, 나날이 나아지는 녀석을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왔지.' 지금 생각해보면 물리고 물리는 묘한 줄다리기 관계가 있었다고나 할까? 서로 관계가 없는 듯 있는 기이한 뭔가가 있었다. 문제는 그게 뭔지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아무렴 어때? 시련의 시간은 끝났는걸. 오늘 이 자리를 위해 참아온 일 년이다. 니네가 끝장나거나. 우리가 끝장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6-01-06 14:14:56 고친날 2006-01-06 17:52:44 읽은수 6114 [ 17 K ] 제목 점소이 작삼(104)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4] 바스락 바스락. 극도로 긴장된 탓인지 손이 자꾸 바지춤 주머니로 미끄러져 들었다. 주머니 속에는 자그마한 환단 하나가 처박혀 있었다. 내가 인간이라는 종자들 중에 최초의 임상 실험자로 선택되었다는 증거였다. 이것을 먹느냐, 마느냐 최종 결정은 내 손에 달려 있었다. 환단이 내 손으로 들어오기 전까지의 사연도 간단치 않았다. 어젯밤이었다. 이 곳으로 모이기 위해 하룻밤을 유했던 객잔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똑똑똑. "작삼 동생, 잠시 봤으면 싶은데 괜찮을까?" 온 세상이 새까맣게 뒤덮인 자정 무렵, 느닷없이 냉월화(冷月花) 누님이 찾아들었다. 마침 교옥정(喬玉淨) 누님이 잠이 안 온다며 자리를 비운 틈이었다. '엉? 냉 누님이잖아. 이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이지?' "그럼요. 금새 나가겠습니다. 누님." 준비하고 말 것도 없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복장과 병장기를 갖춘 채 누워있었던 것이다. 물론 홍 영감님의 전달 사항이기도 했다. 끼이이익. 문 앞에는 새하얀 궁장의에 허리에 연검띠를 두른 냉 누님이 서 있었다. 배시시 미소 진 옥안이었지만, 미묘한 갈등이 스쳐 보이기도 했다. 내 곁으로 시선을 던진 누님 안면에 비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어머, 동생, 쥐새끼 한 마리가 달라붙었네. 좀 떨쳐 놔두고 오지 않을래?" '휴우, 눈치 없는 것.' 속으로 남 몰래 한숨쉬며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예상대로 흑접(黑蝶)이 바짝 붙어 있었다. 멀어진 두 눈에는 녹 누님이 꼼꼼하게 바느질해준 가죽 안대를, 잘록한 허리에는 수 십 개의 비수가 빼곡하게 꽂혀진 허리띠를, 가느다란 팔뚝에는 간단한 조작으로 단도가 튀어나오는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나름대로 살벌하다면 살벌한 복장이었다. '은근히 묘한 매력까지 두루 갖췄다고나 할까?' 그녀는 백두산 지옥 수련에서 복귀하자 내 꽁무니에 찰거머리처럼 찰싹 붙어 버렸다. 심지어 뒷간근처까지 따라오곤 하는 것이었다. 보통 여인이라면 오물 냄새에 손사래치며 기겁할텐데, 살막 살수 출신이어서 그런지 아랑곳 않는 집요함을 보여 주었다. 몇 차례 울컥 짜증 내려다가도 두 눈을 가린 가죽 안대만 보면 할 말을 잃곤 했다. 최근에는 거의 자포자기로 신경을 끄고 있었다. '쳇, 아무리 계약이고, 약속이 우선한다고 해도 냉 누님 성질 건드려서 좋을 것 없다구.' "저기 흑접, 미안한 데, 잠시만 방에서 기다려 주겠어? 내 개인적인 사생활이잖아." "나? 신경 쓰지마. 여태까지 그래왔으면서 뭘 그래? 그냥 없는 셈치고 볼 일 봐." "아니, 그게, 그게 아니라고!" "안? 여긴 바깥인데?" "우그극, 너 정말!" 우리 둘이 아옹다옹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냉 누님의 안면에 점점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었다. 누님의 손이 점점 허리의 연검띠를 향해 내려가고 있음을 각박하게 느끼며 흑접 설득에 열을 올렸으나, 그녀는 여전히 요지부동……. "흠, 알았어. 볼 일 봐." "……." 사박사박사박, 끼이이익, 철커덕. '저, 저게 정말!' "흥, 시시한 쥐새끼로군." 냉 누님 또한 신형을 돌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 후원으로 가더니 기어코 어둑어둑한 곳간 앞에까지 이르렀다. 냉 누님의 가느다란 목덜미가 달빛에 반사되어 새하얗게 반짝였다. 묘한 분위기에 숨결이 거칠어졌다. 가슴 고동도 두근두근 빨라졌다. '혹, 혹시, 생사결을 눈앞에 두게 되면 살짝 흥분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냉 누님이 그 경우인가? 역시 월녀궁의 부궁주답게 취향도 특이하시네.' 갓 중년에 들어서 그녀였지만, 농익을 대로 농익은 풍성한 몸매는 물론 잔주름 하나 없는 옥안까지 젊은 여인 못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곳간 문을 열고 단 둘이 들어서게 되자 기대감은 극도로 높아졌다. '내가 유부남이면 어때? 상대가 나보다 높은 사람이면 어때?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잊고 즐기는 거야.' 순간 곳간 한 구석에 수북하게 쌓여있던 풀 더미 속에서 샛노란 안광을 번득이는 뭔가가 튀어 올랐다. 깜짝 놀라 넘어질 뻔했으나, 냉 누님이 재빨리 안아주었다. 등뒤로 느껴지는 뭉클한 감촉에 가운데 다리가……. "쉿, 조용하게나." "엥? 홍 영감님?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뭘 하긴,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지.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으니 일단 보고 있도록 하게." 벌떡 일어설 뻔했던 가운데 다리가 축 늘어져 버린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었다. 홍 영감님의 왼손에는 비실비실 생쥐 한 마리가 생사를 초탈한 듯 늘어져 있었다. 생쥐 주변으로 샛노란 안광을 번득이는 고양이가 펄쩍펄쩍 뛰어오르고 있었다.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것이 근방 두목 고양이 정도는 될 듯 했다. 영감님은 잔뜩 풀이 죽은 내 안면을 보고는 약삭빠르게 실실 쪼개고 있었다. "흘흘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은 자네를 위해서 있는 말 같군. 실망할 것 없네. 자네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것이 있으니 말일세." 그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오른손을 펼쳐 보였다. 손바닥 위에는 자그마한 환단 하나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음? 혹, 혹시? 저것이 바로 서방에서 건너왔다는 소문 속의 그것이 아닐까? 수컷 생쥐에게 먹이면 암컷 고양이조차 덮쳐버릴 정도로 강력하다는 환상의 정력단?!' 엄지손가락으로 환단을 반으로 톡 쪼갠 영감님은 그 반쪽을 가루 내어 생쥐에게 먹였고, 나머지 반쪽은 냉 누님에게 넘겨주었다. "자, 잘 보게. 현세에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진풍경이 이어질 걸세." '오옷! 역시 내 예상대로 환상의 정력단이었군.' 찍찍찍찍. 강제로 벌려진 주둥이 사이로 환단 가루를 삼킨 생쥐 녀석은 곧 지랄발광을 떨었다. 찍찍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연신 몸을 비벼댔다. 약효가 아주 끝내주는 모양이었다. 그르르릉, 야옹, 야아옹. 토실토실 고양이는 아직 생쥐에게서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 하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날카롭게 발톱을 세우며 그릉그릉 거리는 것이 식욕이 인 듯 했다. 그 때였다. 괴롭게 발광을 하던 비실비실 생쥐 녀석이 사사삭 일어서며 포효했다. 찌지지직, 찌지직! 찌직, 찌직! '쩝, 생쥐의 포효래 봤자 생쥐는 생쥐구만. 저게 구애의 포효인가?' 야아아아옹. 토실토실 고양이, 잠시 움찔했으나, 분노만 배로 뛰어오른 듯 했다. 그럴 법도 했다. 먹이에 불과한 생쥐 녀석이 목숨을 구걸하기는커녕 감히 사랑 고백까지 해왔으니 오죽이나 황당할까! '발광 난 령령에게 이 몸이 작살나기 직전 살려달라고 빌기는커녕 되려 사랑 고백을 해버리면 저런 표정을 지을까?' 찌지지직, 찌직, 찌직! 야옹, 야옹! 야아옹! 교섭결렬이었다. 이르자면 생쥐의 구애는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덤으로 목숨까지 잃을 위기에 놓여버린 것이었다. 그럼에도 생쥐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고양이를 향해 펄쩍 뛰어올라 온 몸으로 구애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생쥐의 처절한 구애가 고양이를 감화시킬 것인가?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상황 추이를 지켜보았다. 파다다닥, 파닥, 파닥. 한 동안 격하게 뒤엉켜 몸부림치던 두 마리의 대결은 먼지가 가라앉으며 최종 판가름을 보여주었다. 설마, 설마 했지만, 예상외의 결말을 보여주고 있었다. 지친 듯 축 늘어져버린 고양이, 의기양양 발딱 서버린 생쥐. 주객전도(主客顚倒)가 되어버린 둘의 양상이 참으로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저 환단을 먹으면 나와 주령령도 저런 꼴이 된다 이거지? 쳇, 아서라. 내일 거사가 성공하고 무사히 살아남는다면, 다시 남궁현의 품으로 돌아갈 여자다. 잊자, 잊어. 일 년 동안 그만큼 끔찍하게 지내왔으면 됐지. 뭘.' 그러나, 둘의 양상은 내가 기대했던 진풍경과는 약간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고 해야할까? 축 늘어진 고양이 목줄기에서는 시뻘건 피가 펑펑 솟구쳐 올랐다. 생쥐의 조그만 주둥이에는 고양이의 목에서 갓 뽑아낸 듯한 생살 덩어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곧이어 녀석은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그마한 두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빛을 뿜었다. 맛이 간 게 확실한 생쥐는 맞바로 홍 영감님을 향해 뛰어 올랐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퍼엉! 공중으로 훌쩍 날아오른 녀석은 얼마 못 가 산산이 터져 버렸다. 폭주해버린 생쥐의 잔해가 여기저기 널려졌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고양이를 향한 생쥐의 구애가 결국 쌍방 간의 피만을 불러일으켰구나. 끙, 이거 슬프다고 애도를 해줘야 하나? 우습다고 비웃어줘야 하나?' "어떤가? 환단의 위력이?" "흠, 역시 믿을 소문 없네요. 정력단은 뒷구멍 암거래가 아니라 믿을만한 환약사에게서만 처방 받아야겠는데요." "……." 내 솔직한 대답에 홍 영감님과 냉 누님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나마저 덩달아 입을 닫아버리자 곳간 속에는 기이한 정적이 감돌았다. 인내심 적은 냉월화 누님답게 먼저 말문을 열었다. "작삼 동생, 이것은 내가 만든 가증환(加增丸)을 홍 루주님께서 개량한 거야.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잠력을 끌어낼 수 있지. 단지 약효가 강한 만큼 후유증도 강해." '가증환(加增丸)!' 순간 끔찍한 추억 한 편이 생각나 버렸다. 그것 때문에 뒷간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슬픈 과거가 생생하게 떠오른 것이었다. 냉 누님이 관련된 환단이라면 당연히 정상적일 리 없었다. 누님에게 팔짱껴져서 잡히지만 않았다면 그대로 내뺐을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렇네. 복용자의 잠력이 일순간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에 육체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지. 수 차례, 개, 고양이, 말, 소등의 동물들을 통해서 임상실험을 해봤는데, 결과는 보다시피 하나로 일치했네. 그 위험성 때문에 아직 인간에게 시도한 적은 없지만, 원래 무림인이 복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을 감안하면 결과는 매일반일 거라 생각하네." "쳇, 그럼, 제가 여기 있을 이유도 없잖아요. 김만 팍팍 샜다구요. 그만 가볼게요. 영감님." 하지만, 냉 누님의 팔짱은 풀리지 않았다. 그녀의 푹신한 가슴 감촉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가증환(加增丸) 이야기가 나온 이상 같이 있어봐야 좋을 것 없는 인간 일 순위가 바로 냉 누님 아니겠는가! "서두르지 말게. 짐작일 뿐이지만, 단 한사람만은 이 개량 가증환을 먹고 제대로 된 효능을 볼 수 있다는 것이지." 그 말에 불안감만 가중되었다. 뻔한 대답일 거라 생각 들었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단 한 사람이, 단 한 사람이 누군데요?" "……." 영감님은 대답하기 곤란했는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뜸을 들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마침내 마음을 굳혔는지 굳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바로 자넬세. 작삼 자네 말일세."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홍 영감님은 그 한 마디를 하기 위해 날 이 곳간으로 불러낸 것이었다. 냉월화 누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이해될 터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나마 머리회전이 가장 정상적이다 싶었던 홍 영감님이 이런 비상식적인 일에 앞장 설 줄은 몰랐다. 어이없고, 당혹스러워서 펄쩍 펄쩍 발광하고 싶은 기분이 절로 일었다. "아니! 먹으면 폭사한다면서요? 자살할 마음을 먹지 않고서야 어느 미친 연놈들이 그걸 먹겠어요? 저도 죽고 싶은 마음이라곤 새 발의 피만큼도 없는 정상인이라구요!" "바로 그걸세. 자네가 먹으면 적어도 폭사될 일은 없을 거라네. 무림인 입장에서라면 생명과도 같은 비싼 대가를 치러야 되겠지만, 자네 입장에서라면 오히려 환영할 만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꿀꺽. 가뜩이나 혼란스럽던 와중에 영감님이 덧붙인 말은 나의 혼란을 한 층 더 부채질해 버렸다. 기이한 호기심이 굴뚝 연기처럼 모락모락 피어났다. "무슨 뜻이지요? 환영할만한 일? 도대체 어떤 게 제 입장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라는 건지 말씀 좀 해보세요." "익히 느꼈다시피 자네가 익힌 구타심결(毆打心訣)은 혈해진경(血海眞經)과는 상반되는 성향을 지니고 있지. 혈해진경이 궁극적인 파괴를 지향한다면, 구타심결은 절대 방어를 근간으로 삼는 무학이란 말일세. 자네가 가진 초인적 맷집은 단지 빙산의 일각이지. 자네가 이 환단을 복용한다면 목적한 바를 이루고도 한 목숨 건사할 수 있을 거야. 다만……." 처음으로 영감님 입에서 구타심결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하기사 령령조차 아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모든 음모의 핵심에 있을 인물이니 말이다. "다만?" "그 여파로 자네가 지금껏 쌓아온 구타심공(毆打心功)이 단박에 박살나 무위자연으로 흩어질 걸세. 내공 한 줌 없는 보통 사람이 되는 것이지." "……." 내공 한 줌 없는 보통 사람, 더 이상 어설픈 무림인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뜻, 그게 의미하는 바는 결단코 작지 않을 터였다. 태생부터 무림인이었던 인간들이라면 사형선고와 마찬가지인 이야기지만, 난 한 때 무림인들을 경멸하기까지 했던 사람이다. 기연 같지 않은 기연을 얻어 령령의 횡포를 맞이하게 된 불운아 중의 불운아일 뿐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과 뭔가 다르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약간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적어도 무림이라는 세상에 약간씩, 약간씩 흥미를 느끼고 있는 때였다. '그럼, 과연 내 입장에서 환영할만한 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들어는 봐야 하겠지?' "이제 대충은 납득이 가네요. 그럼, 영감님 이것만이라도 짚고 넘어갑시다. 구체적으로 제 입장에서 환영할만한 일이란 것은 뭡니까?" "흘흘흘, 이제야 대화가 되는구만. 환영할만한 일일뿐만 아니라 획기적이라고까지 말 할 수 있지. 내일의 주인공은 자네도 잘 알다시피 바로 주령령일세. 령령이 지닌 최후의 절초는 우리들 중 최강이지. 방심한 천운학과 사마장령이라면 한 수에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장담할 정도이니, 새삼 그 위력이야 논할 필요 없지. 허나, 시전시간이 긴 만큼 상대방의 반격에 무력하다는 최악의 약점 또한 지니고 있어. 그래서, 방어력에서만큼은 압도적 우위에 있는 자네와 한 조를 이루게 된 것일세. 그녀와 한 해동안 모의 수련을 반복해온 자네이니 사실 나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네." "그렇지요." "그런데, 작삼 자네가 령령을 한 발 앞질러 그들을 제압해버린다면 어떨까? 전 강호 무림인들은 그 날의 주인공으로 자네를 기억하게 되겠지. 수많은 무림 호사가들의 입과 글에 자네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겠는가?" 영감님의 지적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왠지 두 귀가 솔깃해졌다. "또 생각해보세. 그 이후 후유증으로 구타신공을 상실해버린 자네를 령령이 더 귀찮게 굴 이유 또한 사라지지. 더 이상 위장 혼인으로 자네의 심신을 고달프게 할 수 없다는 소리지." 그 말 또한 반가운 바였다. 일 년동안 지내오면서 령령의 냉정한 성품에 대해 뼈저리게 느껴왔다.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한 말 한 마디 건넨 적 없는 그녀, 차라리 남남이라도 그보다 낫겠다 싶은 때가 어디 한 두 번이었겠는가? "또한 내공이 파괴되면 여타 무림인들에게야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사형선고일테지만, 자네에게는 자유선언일 뿐이지. 그 시로 더 이상 더러운 음모가 판치는 강호에 관여될 필요가 없어지니 말일세. 자네가 진정 원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네. 어떤가? 아주 매력적으로 끌리지 않는가?" '내공이 사라진다라? 이 엿 같은 구타신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차후 새로운 내공구결을 얻어서 심심할 때마다 독학으로 수련해보는 것도 좋겠군. 솔직히 무림이라는 세상이 아주 조금은 마음에 들기 시작했거든. 보통 사람이 누릴 수 없는 세상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나름대로 매력적인 구석이 있지.' 영감님의 마지막 언급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손에 익을 대로 익어버린 삼재검법이다. 구타심공을 잃는다고 해서 그동안 체득해온 가닥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새로운 내공 구결 정도는 지천에 널려 있다. 소화에게 부탁하면 그 중에 하나 정도는 쉽게 건질 수 있을 것이다. '뭐, 솔직히 이 놈의 강호라는 세계에 대해서 좀 질리긴 했지. 어느 순간 맘 내키면 그 때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을 거야. 그래, 잠시 좀 쉬어볼까?' 한참동안 홍 영감님 말을 경청하던 냉 누님이 비로소 팔짱을 풀어주었다. 대신 등뒤로 다가와 살포시 안더니 두 팔을 허리 옆으로 둘러왔다. 배 앞으로 깍지를 껴 내려놓는 누님의 손가락 끝 위치가 아주 미묘했다. 등뒤로는 냉 누님의 봉긋한 가슴이 짓눌러왔고, 귓가로 누님의 입김이 느껴졌다. 가운데 다리 뿌리 부근에는 누님의 손길이 간지럼을 태워왔다. 홍 영감님 보는 앞에서 가운데 다리가 발딱 서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써야 하는 힘든 상황이었다. '흐흐흐, 그래도 나쁘진 않은데. 홍 영감님만 없었으면 바로, 바로…….' "난 다르게 생각해. 한 번 무림인은 내공을 잃었다고 해서 보통 사람이 되는 게 아니야. 과거 금분세수(金盆洗手)로 강호와 인연을 끊으려했던 수많은 무림인들도 복잡하게 얽힌 은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단다. 너 또한 알게 모르게 수많은 은원을 만들어왔을 거야. 만약 네가 내공 한 줌 없는 약골로 추락해버린 것을 그들이 안다면 가만 놔둘까? 무리수를 두기보다 네 역할에 충실한 게 좋지 않을까? 령령에게 그녀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듯, 네겐 너만의 역할이 있어.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지. 더구나 개량 가증환을 먹고난 후에 작삼 동생이 무사하리란 보장 또한 없어. 어디까지나 홍 루주님의 짐작일 뿐이니까." '어랍쇼? 웬 일로 냉 누님이 만류를 해오지? 예전 같았으면 성질대로 바로 먹였을 텐데.' "험, 험, 뭐 결정은 자네가 하는 것이네. 아직 하룻밤의 시간이 있으니 잘 생각해보게나. 냉월화 부궁주, 그만 가보는 게 좋겠군. 지금쯤이면 포연강이 부리나케 자넬 찾지 않겠는가?" 그 말에 흠칫 놀란 냉 누님은 내 등에서 몸을 떼었다. 약간은 신경질적인 눈매를 가느다랗게 내려 뜨더니 그대로 곳간을 나가 버렸다. 둘의 사이가 얼마나 급진전되어 있는지 약간은 짐작이 갔다. "제가 없는 새 냉 누님이랑 포 형님이랑 혼인이라도 했나요?" "흠, 아직은 안 했지만, 내일 거사만 성공한다면 맞바로 둘의 혼인식이 있을 것이다. 비단 저 둘만의 일은 아닐 게야. 남궁현의 혼인식도 있을 듯 싶구나." '주령령, 제갈혜와 한단 말이겠지. 녀석도 그동안 수련을 쌓느라 정신 없었나 보지?' 홍 영감님은 내 손에 자그마한 환단 하나를 쥐어 주었다. 뒷짐을 지며 나가는 영감님의 전음입밀이 아련히 들려왔다. '나한테서 가증환 받은 일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는 말게. 설사 냉월화 부궁주나 교옥정이 와서 물어봐도 모르는 척 해야하네. 그 한 알은 이 세상에서 오로지 자네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환단이라네. 거사 직전 자네에게 전음을 날리겠네. 만약 결심이 섰다면 바로 삼키도록 하게. 모두의 기억 속에 우작삼 이라는 이름 석 자를 새겨둘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를 놓치지 말길 바라네.' 그 날밤, 난 설레는 기분 때문에 제대로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거사 직전이라 잠을 설칠 판에 내 일신내공을 날려버릴 환단을 품고 있었으니 잠 한 줄기 올 리 없었다. 쩡! 파바바밧! "우와아아악! 사람 살려!" "우웁, 각 파의 호신강기를 일으켜 대항하시오! 어서!" 잠시간의 상념을 일깨우는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대기를 가로지르는 무지막지한 진동이 무도장 중앙에서부터 둥그렇게 퍼져 나왔다. 가까운 곳에 있던 수많은 구경꾼들이 피를 토하며 퉁겨나가 버렸다. 내공이 약한 무림인들도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나가떨어졌다. 각파 우두머리 고수들은 재빨리 천근추를 밟으며 대항했지만, 표정들이 꽤나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 순간 저들의 표정을 그림으로 남기면, 상당히 비싸게 팔리겠는걸.' 천운학과 사마장령이 탐색전을 끝내고, 서로 부딪혔던 것이다. 한 해라는 시간동안 그들의 내상은 완치되버린 듯 했다. 뿐만 아니라 혈해진경의 수련자로 무섭게 성장해버리기까지 한 것이다. '지금이다! 작삼! 결심이 섰다면 주저말고 환단을 삼키도록 해라. 길은 우리가 뚫을 터이니 힘을 아껴라. 최후의 한 방을 위해서!' 홍 영감님의 전음입밀이 들리자 환단을 꺼내 들긴 했다. 그러나,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볼뿐 삼키지는 못했다. 냉월화 누님의 지적 또한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새 나도 무림인으로써의 미련이 생겨 버린 것이다. "뭐해? 정신차려!" 퍽. 곁에 있던 령령이 내 등을 강하게 내려치는 바람에 그만 환단을 삼켜버리고 말았다. 씹지도 못한 그것은 그대로 목구멍을 넘어가더니 사르르르 녹아들었다. 마치 날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제길! 주령령, 넌 끝까지 그 모양으로 살래!' 운명의 여신이 제 멋대로 날린 농간에 또 다시 놀아나는 꼴이 되 버렸다. 선택의 여지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로지 그 끝을 향해 전력질주로 최선을 다하는 것 뿐! '에구, 아주 미친다. 미쳐. 내가 이 년 때문에 제 명에 못 살 거다. 쳇, 차라리 이 놈의 구타신공 버려버리자. 저 년이랑 두 번 다시 엮일 일 없도록! 어차피 한 번 뽑은 칼, 내 일신내공을 완전히 불살라서 강호 만방에 명성을 떨쳐 보이리라! 그리고, 과감히 자유인으로 돌아서는 거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6-01-10 11:33:18 고친날 2006-01-10 16:46:48 읽은수 6446 [ 7 K ] 제목 점소이 작삼(105)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5] 뱃속으로 홍 영감님이 손을 봤다는 개량 가증환이 사르르륵 녹아들었음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적잖이 신경 쓰였지만, 시간은 날 기다려주지 않았다. 홍 영감님이 내공을 실어 외쳤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자, 그 누구도 용서치 않는다. 적대할 의지가 없다면 즉시 물러서라!!" "우와아아아아!" 그것이 신호였는지 숨어있던 우리측 사람들이 일제히 각자의 병장기를 빼들고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렀다. 그 한 번으로 우리측 진영의 규모가 확연히 드러났다. 수백 명은 될 듯한 규모, 인원 자체는 오히려 왜소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선 인간들은 일당백 정예였다. 홍 영감님이나 포연강만 해도 정사 최고수라는 육마(六魔)와 십성(十聖)에 포함되는 판국이다. 곽철 대협, 남궁현 녀석, 제갈혜 소저, 교옥정 누님, 냉월화 누님, 종리연 녀석, 철혈국주처럼 구룡(九龍)에 들어가거나 그에 준하는 사람들 또한 상당수 섞여있었다. 일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의문 투성이인 인간들도 숨어 있을 것이었다. '그 중 제일은 주령령이 아닐까?' 령령과는 항상 마주 대하며 수련해 왔음에도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자신에 대해서는 언제나 함구무언(緘口無言)인 여인, 그녀에 대해서는 그저 몸으로 체득하며 짐작하는 게 전부였다. 내가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주령령, 그녀는 항상 자신의 힘을 억누르고 있었다. 한 번 분출되기 시작하면 자신도 자제할 수 없다는 듯 참고 또 참는 걸 피부로 느껴왔었다. 령령이 전신전력을 다 끌어내면 어느 정도 위력까지 보여줄지 정녕 궁금한 바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종종 폭발해서 무지막지하게 발작하는 거잖아. 인간이란 쌓인 게 있으면 그때, 그때 풀어줘야지. 꾹 참고 있다가 일시에 터뜨리는 게 더 실례란 말씀이야.' 한 마디로 이번에 모인 우리측 전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보자면, 한 두 개 문파 정도는 우습게 밀어버릴 세력인 것이다. 문제는 정사 최고수들이 대규모로 운집해 있다는 것이었다.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를 범하는 게 아닐지 걱정부터 앞설 지경이었다. 전 무림의 이목이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자리에 뛰어든 우리는 좋든 싫든 단숨에 주목받게 되어 있었다. 이번 거사의 초점은 바로 그 부분에 있었다. 어부지리(漁夫之利)의 백미를 취하는 것이다. 혈해진경 습득으로 최강자의 자리에 선 천운학과 사마장령이 다투는 틈을 파고들어 단숨에 사로잡는다. 그들을 포로로 내세워 우리의 요구를 정파와 사파에 강제로 수용시키고 당당히 물러선다. 그 한번의 포석으로 전 무림은 우리의 존재와 위력을 알게 될 것이다. 마황맹과 무림맹에 좌지우지되던 강호에 새바람이 일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그늘에 가려 신음하던 군소 세력들이 벌떼처럼 모여들리라. 그들을 규합시켜 제 삼의 세력으로 굳건히 일어서서 더 이상 정파나 사파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계획, 무모하다면 무모하고, 솔깃하다면 솔깃한 홍 영감님의 계획이었다. 상상 밖의 경지를 보여주는 천운학과 사마장령의 대결 때문에 정신이 없던 구경꾼들이었다. 우리의 등장은 그들의 혼란에 부채질만 더한 격이었다. "정파 놈들 역시 믿을 것 못 된다. 놈들의 음모다! 쳐라!" "웃기는 소리! 다 사파 녀석들이 파놓은 함정이다. 이 참에 우리 정파를 말살시키려는 그들의 비겁한 계략이다!" "졸렬한 놈들! 용서할 수 없다!" "우와아아아!! 쳐라!" 챙챙챙챙, 차창, 쉬이이잉! '우잉? 이게 뭔 일이래?' 정파와 사파 진영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접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도장 주변에 있던 무림인들이 상대 진영 무림인들을 맹렬하게 비난하며 덤벼든 것이 시발이었다. 주저하던 무림인들도 흐름에 휩쓸려 병장기를 뽑아들었다. 애매한 구경꾼들만 이리저리 밀물처럼 밀려들고, 썰물처럼 빠져들며 도주하기 바빴다. 공포에 질린 아녀자들의 비명소리와 마구잡이로 난무하는 검광소리가 무도장 주변을 매워버렸다. 귀령대(鬼領隊)와 정의수호대(正義守護隊) 일부 또한 격전의 흐름 속에 뒤섞여 있었다. 무림맹과 마황맹 본 진영도 적잖이 당황한 듯 즉시 각자의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상대를 살벌하게 노려보며 비난을 던질지언정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했다. 쩡! 쩡쩡! 쩌어엉! 당사자인 천운학과 사마장령이 주변 소란에도 아랑곳없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인접한 무도장 주변으로는 그 누구도 접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빗나간 칼바람 하나가 허공을 스쳐나가며 바닥을 움푹 패어 버렸다. 튕겨나온 장력 한두 줄기가 대리석 무도장 곳곳을 붕괴시키고 있었다. 단 한 순간의 빈틈도 허용할 수 없을 만치 필사적이었다. 상대방을 이곳에서 반드시 쓰러뜨리고 말겠다는 필살의 의지가 나에게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아마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난 직후에 상대진영 고수들까지 쓸어버릴 작정이었겠지. 정파나 사파, 둘 중 하나는 지리멸렬해야 끝날 대결이었던 거다.' 덕분에 우리들에게는 약간의 여유가 주어졌다. 그저 앞을 가로막거나 밀려나온 송사리 한 두 마리를 이리 휙 저리 휙 던져버리며 전진하면 그 뿐이었다. "뭐냐! 너희들은! 사파 비밀 부대냐?! 물러서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이 몸이야말로 정의수호대 중 최강을 자랑하는 청룡단의 단……." 쉬이이잉, 서걱서걱. "크억!" 쉬이잉. 서걱. "단, 단주님! 감히! 크아악!" 청의무복을 입고 기다란 대검을 휘두르며 휘황찬란하게 등장했던 거구 아무개와 그 일파의 등장은 짧고도 짧았다. 소나기처럼 물샐틈없이 쏟아지는 월녀궁 노파들의 검진에 휘말려 가차없이 저승마차에 타버렸다. 다른 청룡단 아해들 또한 뒤이은 월녀궁 여인들에게 파죽지세로 밀리는 상황이었다. '쩝, 청룡단 단주였냐? 이름이나 알려주고 죽지. 정의수호대 단주 녀석들 중에서 가장 별 볼일 없게 사라졌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정파 사파 본 진영에서 고수들이 떼거지로 날아들었다. 이제 와 드러난 게 조금 아쉬웠지만, 생각 외의 동요 덕에 상당히 덕을 보며 내려온 것만은 사실이었다. "더 이상 머뭇거릴 틈이 없다. 길은 우리가 뚫는다. 너희는 힘을 아끼도록 해라!" 홍 영감님이 일갈을 지르며 무리의 선두로 신형을 날렸다. 그가 손을 휘저을 때마다 여러 가닥의 자색 기운이 화살촉처럼 솟구쳐 올라 적들을 관통해 버렸다. 잠시 뒤척이던 그들은 안면이 시커메지며 고개를 떨구었다. 뒤이어 도착한 다른 이들이 영감님의 자리를 매웠다. 찹쌀떡처럼 찰싹 붙어서 검을 휘날리는 두 노부부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솔직히 이렇게 대규모로 소용돌이치는 한 가운데 내던져지긴 처음이었다. 강남표국을 호위하며 백호단과 충돌했던 때와는 비교조차 어려운 판국이었다. 사방팔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나 여기 저기 튀어 오르는 피분수 정도는 애써 무시할 수 있어도, 숨막히게 풍겨 나오는 혈향(血香)만큼은 참기 힘들었다. '숨은 쉬고 살아야 할 거 아니야. 이래서야 질식하기 딱 알맞지. 핏물 뒤범벅 단장을 즐기는 주령령이나 아주 퍽 좋아하겠네.' "한 눈 팔지마, 바보야. 안 되겠어. 꽉 잡아." 휘리리리릭. 느닷없이 령령이 내 뒷덜미를 낚아채며 날아 올랐다. 우리의 진로를 방해하는 녀석들은 교 누님과 소화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이 뒤따르며 처리해 주었다. '흑접이 제일 신기하네. 피아 식별은 어떻게 하는 걸까?' 탁. 찰싹찰싹.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고개가 좌우로 휙휙 돌았다. 번쩍번쩍 별들이 빛나면서 양 뺨따구가 얼얼해졌다. "정신차리라고 했지! 무도장이 눈앞이야. 난 이제부터 최후 절초 시전에 들어갈 거야. 네 녀석이 날 발끝의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다는 것 잘 알아. 하지만, 내 뒤로 교옥정이나, 소화, 흑접, 적월, 사월이 서 있다는 것을 잊지마. 네가 못 막으면 다 같이 황천행이야. 알았어?!" 얼결에 고개를 끄떡여주자 령령은 바로 최후 절초 시전에 들어갔다. 구체적으로 무슨 무공의 무슨 초식이다라는 설명도 없었다. 마치 누구든 알면 안 된다는 듯한 어투로 일관해 왔었다. 커다란 령령의 눈매가 반개하면서 마약 먹은 인간처럼 동공이 격하게 부르르 떨렸다. 새까맣던 눈동자가 점점 희멀겋게 변색되어갔다. 새하얀 대낮임에도 새파란 불덩이가 틱틱틱 튀어 올랐다. '홍 영감님은 령령의 그 잘나디 잘난 최후 절초 이름을 알 테지. 뭐, 궁금하지도 않아. 무적 백조 신공의 허리 꼬아 비틀기라는 이름이 붙어있어도 상관없으…… 우갸갸갸갹. 아욱, 배, 배가…….' 그제야 뱃속에서 신호가 치밀어 올랐다. 뜨거운 것이 용솟음치듯 전신으로 치달아 오르고 있었다. 쩡, 쩡. 하필이면 그 때, 무도장 중앙에서부터 먼지와 함께 엄청난 위력의 파장이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앞에서 자세잡고 있던 연놈들이 비명 지를 새도 없이 펑펑 터져 나갔다. 배는 아파 오지, 전신은 뜨겁지, 령령이 시전에 들어가 꼼짝도 안 하지, 교 누님과 소화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은 내 등뒤를 막는다고 정신 없지……. '하이고, 사면초가(四面楚歌) 배수진(背水陣)에 진퇴양난(進退兩難) 외길일세. 내가 미친다, 화끈하게 미쳐뿌러!'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6-01-14 17:20:28 고친날 2006-01-14 17:41:33 읽은수 5534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106)-차 한 잔의 여유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6] 차 한잔의 여유 그 때였다. 귀청이 찢어질 듯 전장을 뒤덮던 소음이 일시에 수그러들었다. 서로를 향해 창검을 겨누던 무림인들도 그대로 멈춰서 버렸다. 온 천지를 집어삼킬 듯 거칠게 밀려들던 기의 폭풍마저도 우뚝 멈춰 서 있었다. 령령이나 교 누님 쪽을 돌아보려 했으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저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만물이 정지해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기이한 정적만이 고요하게 감돌았다. 왠지 잠이 솔솔 오는 듯 한 게……. 사방팔방에 그늘져 있는 새까만 어둠. 그 가운데 비쳐드는 한 줄기의 빛. 창가에서 스며드는 따사로운 햇살이 식탁 하나를 환하게 비추었다. 식탁 위에는 은은하면서 푸른빛이 독특하게 반짝이는 주전자 하나와 같은 재질의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주전자 주둥이에서 새하얀 김이 꿈결처럼 몽실몽실 일렁였다. 갑자기 건너편 어둠 속에서 손 하나가 쑥 튀어 나왔다. 그것은 주전자를 들어올리더니 쭈르륵 쭈르륵 찻물을 따라내었다. 빨려들 듯 상큼하면서 향기로운 차향이 넘실넘실 물결쳤다. 찻잔 하나가 내 앞으로 매끄럽게 밀려왔다. "마셔보게. 보기보다 꽤 비싼 값을 하는 차라네." "……." 항거하기 힘든 권유를 따라 나도 모르게 찻잔에 입을 댔다. 싱그러운 향기가 입안 가득히 차 올랐다. 후루루루룩. "아, 좋다. 역시 뜨끈한 만년설삼차를 마시고 있노라면 절로 흥과 운치가 일어난단 말씀이야." 만년설삼차라는 말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뭘 그 정도 가지고 놀래는가? 이왕 멋 부리는 거 만년설삼차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음, 옆자리들이 휭 하니 허전하구만. 황실 공주들이라도 앉혀 볼까나?" "……." "응? 싫어? 그럼, 아랏사 공녀나 고려 왕녀는 어떠한가? 꽤 미인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처음에는 손에 잡힐 듯 말 듯, 가물가물한 인물이었다. 어디선가 본 적은 있는데, 구체적인 때와 장소가 확연히 떠오르지 않았었다. 한참을 더 궁리하고 나서야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꿈속일지라도 안면 익은 얼굴, 누차에 걸쳐 들어본 목소리, 바로 그 영감탱이었다. "됐습니다. 현현자 영감님." "왜? 자네가 무지 밝히는 거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다고." "그림의 떡이잖아요. 만년설삼차라 해서 잠시 기대를 가졌는데, 전부 허상이었군요." "하하하하, 아무리 허상이라 해도 재미있지 않은가? 암흑 속에서 주거니 받거니 머릿속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낫지 않은가?" 현현자 영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주위 정경을 둘러보니 꽤 눈이 익었다. 독특하디 독특한 나뭇결, 낯익은 창가 풍경,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수풀냄새……. "악취미시군요. 망아루 창가 정경을 그대로 따오다니 말이에요." "고상한 취미라고 해주게. 이만하면 편안한 대화를 나누기에 딱 적절하다 싶으이." "편안한 대화라?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건데요?" 후루루룩. 현현자 영감은 잠시 뜸을 들이며 실감나게 차를 들이켰다. 기분만 내는 만년설삼차라 그런지 김만 팍 새 버렸다. 후루루루룩. 그래도 맛은 괜찮은 편이었다. "아깝지 않은가?" "뭐가요?" "구타심공(毆打心功) 말일세." "하하하하하, 난 또 무슨 얘기라구. 이미 다 끝난 일이에요.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령령 요 년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게 되었는걸요. 어차피 무림에 대한 환멸도 나고, 슬슬 본업에 충실해야겠다는 생각도 들던 참이었어요." 후루루루룩. "아직 끝나지 않았네. 환단의 효능은 일순간, 구타심공을 일으켜 약효에 융화시키지 않는다면, 그저 스쳐 가는 뱃멀미 정도에 불과하지." 후루루루, 쿨럭, 쿨럭. 기분뿐인 만년설삼차를 들이키다가 사례가 들려버렸다. 그만큼 현현자 영감탱의 언급은 솔깃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오잉? 정말요?" "암, 그렇다마다. 복통이 지나가는 잠시 동안, 뒷짐지고 나 몰라라 하면 그만이지. 뒷일은 주변 아이들에게 맡겨놔도 충분할 듯 싶은데?"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럼, 그럼, 교씨 아이나 소씨 아이 실력이면 충분해. 팔이나 다리 하나만 양보하면 무난히 막아낼 수 있겠지. 뭐, 운 없으면 양팔 다 잘릴 수도 있고, 최악의 상황이래 봐야 모가지가 댕강 날아가는 정도가 고작일 걸세." "……. 아주 악담을 하슈. 그까짓 구타신공보다는 교 누님의 머리카락 한 올, 소화의 속눈썹 한 가닥이 더 소중하다구요!" 후루루루룩. "헐헐, 그런가? 정말 한 줌의 미련도 없는 것인가?" 차를 쭈욱 들이키며 밉살스럽게 실실거리는 현현자 영감탱의 미소를 보니 짜증이 치밀었다. 한 마디로 다른 이들의 신체 일부와 구타신공을 맞바꾸라고 부추겨오는 것이었다. 쨍강. 식탁 위에 빈 찻잔을 내팽개치고는 자리를 박차며 일어섰다. 다른 이들이 목숨걸고 사투를 벌이는 판국에 차나 홀짝거리는 내 꼬락서니가 너무나도 한심스러웠다. "쳇, 수고하슈. 구타신공을 날리고 나면 영감 볼일도 없겠구려. 아주 속 시원합니다 그려. 아주 속 시원해요." "허허허허, 자네 경로 사상이 좀 부족하구먼. 윗사람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리를 비우려 들다니! 그것은 경우가 아니야. 아직 얘기도 안 끝났다네. 이왕 물어보는 거 몇 가지 더 물어봄세." "……." 약간의 갈등이 없진 않았으나, 다시금 엉덩이를 붙여야만 했다. 이 가상의 공간은 어디까지나 현현자 영감의 것이었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영겁의 시간동안이라 해도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후루루루룩. "자네 결심은 잘 알아들었네. 그럼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겠군. 착(着), 흡(吸), 봉(封), 탄(彈), 반(反)에 대한 수련은 게을리 하지 않았겠지?" "그럼요. 지난 한 해 동안 령령한테 몰릴 때마다 슬그머니 써먹으면서 짭짤한 효과를 봤지요. 단지…… 결과적으로 더 터지기만 했지만요." 내가 슬그머니 볼멘 소리를 하자 현현자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수염을 쓸어 내렸다. "한 술 밥에 배부를 듯 싶은가? 줘 터지고, 나가떨어지면서 배우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무도의 길이라 할 수 있지. 요즘 녀석들은 너무 물러 터졌어. 곱게 배운 솜방망이 무공으로 누굴 상대할 수 있겠는가? 천생이 강한 사자조차도 자신의 새끼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절벽으로 내몰거늘." "……." "허허, 인상 펴게나. 젊었을 때 인내하면서 웃는 습관을 들여야 나처럼 곱게 늙는다네." "……." "험, 험, 관건은 지금 당장 눈앞의 두 녀석을 요리해야만 한다는 것이지. 현존 무림 최강(最强)의 무공비급 혈해진경(血海眞經)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야. 강(强)은 더 강한 강(强)에 깨지는 법, 자네가 삼킨 환단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지. 일신의 잠력을 극대화시켜 내공을 한 층 강하게 부풀려준다네. 거기에 천씨 아이와 사마씨 아이의 기운까지 합쳐 되돌려 준다면 그들의 내공을 무위로 돌릴 수도 있겠지. 대신 앞서 말했듯 지금까지 개 고생하며 쌓아왔던 구타심공(毆打心功)이 그 힘에 밀려 붕괴될 것이네. 뭐, 한 해 반 쌓은 걸로 그 정도 덕을 본다면 결코 손해보는 것은 아닐 게야. 뒤에 있는 아이들 안녕(安寧)이 더 소중하다 했으니 선택의 여지 또한 없겠지. 그런데, 말일세. 소씨 아이의 양의심법(兩意心法)은 어느 정도 터득했는가?" 안 그래도 일그러져 있던 미간이 한층 더 찌푸려졌다. 내 속에 기생하고 있는 사념체 영감이다, 나보다 더 잘 알면 더 잘 알았지, 모를 리가 없는 것이었다. "거 참, 뻔히 아는 거 왜 일일이 물어보는 겁니까?"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하지, 자네 스스로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거라네." "휴우, 양의심법 쪽으로는 진전이 없잖아요. 자꾸만 손발이 꼬여서 실패한 거 영감님도 잘 알면서." "허허허허, 스스로를 잘 아니 다행일세. 양의심법이란 기실 심법이라기 보다는 좌뇌와 우뇌의 사고를 나누는 일종의 요령, 천씨 아이와 사마씨 아이는 거의 동시에 주씨 아이의 기운을 느끼고 암묵적인 합의 하에 반격해 올 걸세. 이때 필요한 또 한 가지가 양의심법일세. 당면한 제일 큰 문제는 양의심법 습득이 거의 안되었다는 것이지. 이대로 그 둘을 맞닥뜨리면, 주씨 아이의 절초 시전이 끝나기 전까지 쉴 새 없이 밀리기만 할 게야. 득은 주씨 아이가 보고, 자네 구타심공은 날아가고, 남는 것은 없고, 손해만 보고 끝나는 것이지. 재주는 원숭이가 부리고 돈은 장사꾼이 먹는다고나 할까?" 쿠쿵. "……." 내 이름 석자를 무림사에 화려하게 새기고서 미련 없이 돌아서겠다는 결심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현자 영감의 말을 듣고 나니 멋모르고 환단을 넓죽 받아 넣은 일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빛 좋은 개살구였다. 어쩐지 얘기가 너무 쉽게 돌아간다 싶었다. 이게 다 그 빌어먹을 홍 영감탱의 음모인 것이다. 도대체 어떤 꿍꿍이를 감추고 있기에 날 함정으로 떠밀어 넣은 걸까? "뭐, 아주 수가 없는 것도 아니지. 내가 약간만 도와주면 양의심법 구현도 어려운 게 아니라네." "정말입니까?" 반신반의한 눈빛으로 현현자 영감을 흘겨보았다. 구타신공을 없애는 일에 그 일부나 다름없는 그가 적극적으로 나오는 것부터가 수상쩍은 바였다. "허허, 이 사람 속고만 살았나? 왜 이리 사람 말에 의심부터 하고 드는가?" 내가 속고 산 게 어디 하루 이틀이겠는가? 산 사람 말도 못 믿는 판국에 사념체 말을 어찌 믿겠는가? 하지만, 이번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심한 일이었다. 난 왜 이렇게 외통수 선택만을 강요당하는 걸까? "좋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은 뭐지요?" "아주 간단한 일이지. 팔 한쪽만 빌려주면 되네. 자네는 둘 중 아무나 고르게. 남은 한 쪽은 내가 처리함세." "오호, 과연!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그럼 왼팔을 빌려드리지요. 오른쪽의 천운학은 제 상대니깐요." "그럼, 자네의 동의 하에 왼팔을 가져가도록 하지." 탕! 현현자 영감이 찻잔을 식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쩍쩍쩍, 투툭. 찻잔이 놓여진 자리로부터 균열이 퍼져 나갔다. 어둠으로 둘러 쌓여있던 사방의 벽들도 더불어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렸다. "이제 허상의 공간을 깨고 현실로 복귀하겠네. 복통이 한 결 더 심해지겠지만, 구타심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게. 주씨 아이에게 순서가 돌아가지 않게 하려거든 말일세!" 그의 마지막 한 마디가 산골짜기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 임박한 것이다. 최후에 웃는 자가 누가 될 것인지 판가름날 때였다. 천운학이나 사마장령이 될까? 혹은 주령령이 될까? 이도 저도 아니면, 바로 이 몸이? 물론 내가 원하는 바야 뻔했다. '휴우, 그런데, 현현자 영감탱 또 무슨 꿍꿍이 있는 거 아냐? 몸 빌려 줬다가 좋게 끝난 적 없었잖아. 은근히 걱.정. 되.는.걸.'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6-01-18 23:40:02 고친날 2006-01-18 23:40:02 읽은수 6360 [ 18 K ] 제목 점소이 작삼(107)-최후에 웃는 자는 누구?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7] 최후에 웃는 자는 누구? 현현자 영감 말대로 복통이 한결 더 심해졌다. 전신에 녹아나 있던 구타심공(毆打心功)이 이에 동조하듯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아프다고 투정부릴 시간 따위 없었다. 기의 폭풍이 눈앞으로 질주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재빨리 철봉 끝으로 착(着)과 흡(吸)을 연이어 펼쳐 기의 폭풍일부를 흡수했다. 그 기운을 머금었다가 내뱉는 봉(封), 탄(彈), 반(反) 과정에 내공의 일부가 섞여 들었다. 콰콰쾅. '아욱, 두 귀가 다 멍멍해지네.' 그 여파로 근처에 있던 몇몇 무림인들이 퉁겨나갔다. 다행히 내 뒤로는 그 여파가 새어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맹렬히 열을 올리는 녀석들도 보였다. 챙챙, 차차창, 치이잉. "화산의 검을 받아라! 정의의 심판을 받아라!" 챙챙. "웃기는 소리! 네놈들의 위선에는 신물이 난다! 내 도끼나 받아라" 휘이이이잉. 퍼억. 현실로 돌아오자마자 시끄러운 소리들이 귀고막을 가득 매워왔다. 화산 운운하던 녀석의 머리통에 도끼가 박혔고, 상대의 목줄기 뒤로는 피를 머금은 검봉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과히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다. 찌지지직. 지직. "앗, 따가워! 작작들 좀……." 꿀꺽. 엉덩이를 관통하는 따가운 기운을 느껴 돌아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 곳에는 무아지경으로 빠져든 주령령이 서있었다. 더구나 내가 알던 그녀도 아니었다. 반개한 두 눈가에서 눈동자가 완전히 자취를 잃고 파란빛만 흘러 나왔다. 머릿결 하나 하나가 살아있는 문어발처럼 공중을 휘저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끈적끈적 사이한 기운이 칼날처럼 발산되었다. 덕분에 령령의 옷자락이 하나 둘 베어져 속살이 군데군데 드러나는 중이었다. '쩝, 저대로 놔두면 전라가 되 버리겠네. 하지만, 귀신도 놀라서 도망갈 자태다. 미친년 최종판이로세.' 찌지직, 퍼엉. "꺄아악!" 가까이 있던 사월의 옷자락이 하늘하늘 흩날렸다. 언뜻 핏방울이 튀는 걸 보니 외상까지 입은 듯 했다. 령령의 기운이 반경 두 장 정도까지 퍼졌기에 모두가 그녀로부터 거리를 벌려야 했다. '다른 데 한 눈 팔지 말도록! 저 두 녀석에게만 집중해라.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아해들이다. 까딱하면 네놈이 먼저 황천 가는 수 있다.' '쳇, 알았다구요.' 머릿속을 윙윙 울리는 현현자 영감의 존재를 느끼면서 왼쪽 팔을 움직여 봤다. 예상대로 끊어진 실처럼 허전한 게 무감각하기만 했다. 왼발만큼은 내 의지대로 움직여주었다. 약속대로 왼팔 소유권만 가져간 것이었다. '온다! 녀석들이 주씨 아이의 기운을 느꼈다.' 그 울림처럼 천운학과 사마장령이 대결을 멈추었다. 먼지가 걷혀진 무도장 사이로 서로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는 녀석들이 보였다. 잠시 대결을 중단하기로 잠정적 합의를 본 듯 했다. 령령의 기운이 그냥 지나치기엔 꽤나 위협적으로 느껴진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휘리리릭. 둘의 신형이 거의 동시에 내 앞으로 날아들었다. 물론 내 뒤의 령령이 그들의 목표일 것이었다. 현현자 영감 쪽은 잊기로 했다. 손가락 하나만 빌려줘도 너끈히 해결할 인간이었다. "어딜 지나가시려구! 니 녀석 상대는 바로 나거든!" "점소이 녀석! 아직 살아 있었구나. 이번에는 아주 끝장을 내주마. 그 요망한 입부터 짓뭉개주겠다!!" '아그그그극.' 천운학이 버럭 내지른 사자후에 귀가 멍멍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박은 고사하고, 화낼 틈도 허락되지 않았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덧씌워진 검이 무자비하게 휘둘러져왔다. 다급하게 철봉으로 맞서며, 착(着)을 운용했지만, 그 또한 용이하지 않았다. 녀석의 검은 너무나 강했고, 너무나 빨랐다. 한 해전보다 더욱 강해져 버렸다. 쩡, 쩡, 쩡! 그의 검에 내 철봉이 부딪힐 때마다 전신이 요동치며 비명을 질렀다. 발바닥이 움푹움푹 땅을 파며 꽂혀 들어갔다. 그러나, 겉과 달리 속은 편안해졌다. 복통과 함께 미친 듯 날뛰던 뜨거운 기운이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천운학의 공세가 되려 복이 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래도, 이래도! 이래도! 버틸 테냐! 흥, 표정 관리 하나는 잘 하는구나. 지금쯤 네 놈 속은 완전히 허물어졌을 것이다!!" 그의 사자후마저도 가냘픈 미성으로 들려왔다. '휴우, 이제 좀 살 것 같다. 시원한 게 아주 그만이네. 그만 떠들고 더 휘두르기나 해라.' 가타부타 대꾸 없이 반짝반짝 기대감 어린 눈빛을 빛내자 천운학의 아미가 일그러졌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는 듯 자신감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혼마저 뺏길 듯한 매혹적인 미소, 이런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화사한 꽃밭이 펼쳐졌다. 맛이 간 구경꾼 여인들의 비명과 환호가 아련히 들려왔다. '아까운 놈이로세. 여자보다 더 아름다운 남자라……. 차라리 여자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것을! 휴우, 내가 무슨 망발이람. 놈에게 사무친 원한이 대우주를 푹 찌르지 않는가!' "흐흐흐흐, 아주 좋아. 내 눈에 거슬리는 연놈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들었군. 마지막이다. 네 놈뿐만 아니라 네 뒤 계집년들까지 일 검에 보내주리라!" "뭐야! 이 자식이! 감히 누구한테!" 령령이나 사월은 계집년이라는 말을 골백번 들어도 지당한 여인들이었다. 하지만, 교옥정 누님을 비롯해서, 소화, 적월, 흑접까지 싸잡아 매도해버린 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끼이이이잉. 뒤로 돌려 역으로 움켜쥔 천운학의 검날에서 괴이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의 주변으로 매섭게 이는 소용돌이 덕분에 먼지 무더기가 눈앞을 가렸다. 적어도 한 가지는 느낄 수 있었다. 이 일 검을 막지 못하면, 나를 비롯해 내 뒤에 서있는 여인들까지 비명횡사 당하리라는 사실을……. '그럴 수야 없지. 그럴 수야 없지!' 이를 악 다물고, 몸 안에 넘쳐흐르는 기운 모두를 팔 끝으로 몰아 넣었다. 구타신공은 물론 환단으로 증폭된 힘에 천운학과 충돌하면서 흡수한 기운까지 모두 한 기류가 되어 흘렀다. 오른쪽 팔뚝의 혈맥들이 멋대로 울룩불룩 꿈틀거렸다. 봉(封)으로 힘껏 억누르지 않았다면 오래 전에 폭발해 버렸을 것이다. 쉬이이익. "잘 가라! 점소이! 네 놈만큼은 내 기억 속에 남겨두마. 아주 재밌었다!" "웃기지 마! 너나 꺼져버려!"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한 호흡 가다듬으며 맹호희산(猛虎戱山)으로 철봉을 머리위로 쳐들었다가 청룡출수(靑龍出水)로 찔러내었다. 쩌어엉! 천운학의 검봉과 마주치면서 전신이 산산 조각나는 충격을 느꼈으나, 뒤로 약간 빼면서 착(着)으로 양끝을 붙였다. 맞바로 흡(吸)으로 전환해 그의 검에 서린 기운을 빨아내었다. 뚜둑, 툭툭. 안 그래도 힘의 팽창으로 미어터질 듯하던 팔뚝 핏줄이 여기저기 터져 나갔다. '제길, 어차피 무림과의 인연은 여기까지다. 아까워하지 말자. 팔 좀 뭉개지면 어때! 교 누님의 목숨과! 소화의 목숨과! 적월의, 흑접의 무사태평(無事太平)과 맞바꿀 수 있다면, 오른팔 하나쯤은 오히려 싼 편이지!' 봉(封)으로 모든 기운을 융합시키자마자 탄(彈)을 건너뛰고, 바로 반(反)을 시전했다. 손끝을 통해 모든 기운을 한 줌 미련 없이 밀어내었다. 우우우우웅. 퍼퍼펑! "이익, 이럴 수가! 너 따위에게 내가, 이 내가! 으으윽, 아아악!" 자신의 기운에 내 기운까지 돌려 받은 천운학은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마지막 비명소리는 절정에 달한 여자가 자지러질 때 내뱉는 신음처럼 느껴질 정도로 처절하고도 아름다웠다. 쩍쩍쩍, 파사사삭. 철봉에 균열이 일더니 급기야 먼지처럼 흩날렸다. 동시에 긴장이 가시며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전신이 물 빠진 독처럼 텅텅 빈 것은 물론이려니와 오른쪽 팔이 피범벅으로 너덜너덜해졌다. 무도장 위로 나가떨어진 천운학을 돌아보았다. 실신한 그의 옥안이 파리하면서도 생기가 없었다. 떨어지면서 머리에 충격을 받았는지 가느다란 목줄기가 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한 줌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죽었건 살았건 내공이 소실된 것만은 확실했다. '이제야 끝났나? 기다리다가 진 다 빠졌다네.' 현현자 영감의 울림을 듣고는 왼쪽을 돌아보았다. 이미 피 한 사발을 토하고서 대(大)자로 쭉 뻗어 있는 사마장령이 보였다. 녀석 역시 내공이 소실된 듯 했다. 병장기 소리와 온갖 욕설로 난무하던 무도장 주변이 쥐 죽은 듯 잠잠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내가 이겨버린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애매한 기분이었다. 이제 난 내공 한 줌 없는 보통 사람인 것이다. '아니야, 아직 안 끝났네. 마지막 뒷마무리는 확실하게 해야하지 않겠나?' '네? 사마장령도, 천운학도 쓰러뜨렸는데, 누가 또 남았나요?' 휘리리리릭. 그 순간 사파 진영에서 무도장 위로 날아오르는 신형 하나가 보였다. 양손에는 철장갑을 꼈지만, 겉옷은 화려한 주단예복을 걸친 예쁘장한 여인이었다. 두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을 품고는 비감 어린 표정으로 덤벼들고 있었다. "감히! 사마장령 님을! 감히! 감히!" 하필이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는 순간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역시 왼손이 자기 멋대로 들려졌다. 중지 손가락이 가볍게 튕겨지자 한 줄기 바람이 여인의 이마로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퍽. "끼아악!" 현현자 영감에게 이마를 얻어맞은 여인은 불여우가 변신할 때 훌쩍 재주넘듯, 한 바퀴 휘잉 돌았다. 그대로 털썩 자빠져 버리더니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바로 실신한 듯 했다. 긴장된 등장에 비해 상당히 김 빠지는 여인이었다. '허허, 이로써 혈해진경을 익힌 아해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 셈이로군. 몸상태가 안 좋다고 해도 익힌 것은 익힌 것이지.' 그제야 철장갑을 낀 여인이 권경의 후인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몸 어디가 안 좋았기에 무도장에 껴들지 않은 것일까? 더욱이 사마장령과 꽤나 친해 보이기까지 했다. '에이, 아무렴 어때? 이제 다 끝났는걸.' '어허, 마무리가 아직 덜 되었네. 내 확실히 마무리 해줌세.' '네? 아직두요? 여기 혈해진경을 익힌 네 명이 모두……. 설마?!' 그 때부터 왼발이 내 의지를 벗어나 자기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 바닥을 탁 차버리며 몸체를 뒤편으로 빙글 돌려세우는 게 아닌가! 왼발이 다시 바닥을 박차자 이번에는 몸이 앞으로 내밀렸다. 하필이면 령령 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잠깐만요. 홍 영감님은 그래도 내 편이라구요. 왜 영감님까지…….' '착각 말게. 누가 녀석을 잡겠다고 했나? 홍씨 녀석은 앞으로도 할 일이 많은 놈이야. 이런 데서 죽을 놈이 아니지.' '그럼, 그럼? 그럼?!' 그 순간 령령으로부터 폭발적인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반개했던 눈자위가 확연히 떠지며 무도장을 노려보는 상황이 되었다. 붕 떠있는 내 몸이 가로막지 않았다면, 확실히 무도장을 노려봤을 시선이었다. "넌 뭐야! 어서 비키기나……." 짜아아악. 이번에는 왼손이 자기 멋대로 움직였다. 령령의 뺨따구를 무자비하게 쳐 올린 것이었다. 나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그녀는 그대로 핑그르르 돌며 나가 떨어졌다. "이게 정말! 우웨엑." 바로 발딱 일어서며 째려보던 령령은 새빨간 피를 게워내며 부르르르 떨었다. 심각한 내상을 입은 듯 가부좌를 틀며 내기를 다스리는 게 보였다. '영, 영감님, 노망 드셨어요? 어쩌자고 잠자는 사자를 건드렸어요? 쟤가 제 정신 들면 제일 먼저 나부터 죽이려고 할거라구요.' '내상 입는 쪽이 미쳐 날뛰는 것보다 낫지 않겠나? 어디 보자, 육합전성 한 번 쓰면 구타신공 완전 소실이구만. 내가 조율해줄 테니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어디 해보게나.' '…….' 이거였다. 뭔가 불안한 게 있다 싶었더니 바로 이거였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는 정도가 아니라 콧수염, 턱수염까지 왕창 잡고 쥐어뜯은 격이었다. 령령이 제 정신 차리고 일어서면, 보복부터 감행해올 게 눈에 선히 보였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사방팔방은 여전히 조용했다. 하기사 그 어떤 바보가 외형상 천하 제일 고수에게 시비를 걸겠는가? '으잉? 내가 천하 제일 고수야?! 으흠, 거 나쁘진 않군. 좋아, 무림사에 길이 남을 한 두 마디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만.' "어험, 어험." 우르르르릉. 그냥 시험삼아 음성을 가다듬었을 뿐인데, 양 산맥이 메아리쳤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야단법석을 떠는 꼴이 둘도 없는 진풍경이었다. 이 순간을 가슴 깊이 새겨두기로 했다. "아아, 조용, 조용, 질서를 지켜 주세요. 아, 거기 젊은 양반, 노약자한테 자리 좀 양보하세요. 민망하게 새파란 사람이 영감님을 눈앞에 세워두고 앉아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아, 험험 그게 아니고. 간단하게 마황맹, 무림맹 지도자 어르신들께 한가지 부탁 말씀 올리고자 올라왔습니다." 쿵. "뭐야! 부탁? 그 한 마디 하자고, 우리 아들을 죽사발로 만들어 놓은 거냐! 이, 이, 이……." 마황맹 진영 맨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던 회백색 장발 장년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노려보았다. 거대한 대도의 도신 절반이 바닥에 박혀든 것을 보면 얼마나 열 올랐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사정도 말이 아니었다. 어른이라고 봐주거나, 고수라고 해서 피해갈 상황이 아니었다. 난 그 누구보다 당당해야만 하는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최대한 눈을 부라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 이가 뭐요? 그 다음 할 말이 뭐요?" 육합전성으로 울려 퍼졌기에 내 고압적인 어투는 한결 더 힘을 얻었다. "크윽,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니 놈, 아니 그쪽 할 말이나 해라." '거 참 사람 싱겁기는.' "어이, 무림맹 어르신 할 말 있습니까?" 그러나, 백발 노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만면에 쓰디쓴 조소만 떠올리고 있었다.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대답은 뜻밖의 곳에서 들려왔다. "없다." 모기가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는 분명, 풍류공자 고휘천에게서 새어 나왔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그를 지긋이 흘겨보았다. "아, 아니, 없, 없소, 아니, 아니요. 없습니다. 네, 그럼요. 절대로 없습니다." '저 자식이 무림맹 우두머리라고? 말도 안 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쳇,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일단 사방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무환루의 일등 점소이자, 망아루의 조교 점소이를 지낸 바 있는 우작삼이라고 합니다. 내가 이 자리에 선 것은 한 가지 청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청부 내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없습니다. 다만 두 사람을 데려가는 것으로 청부를 마무리짓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황맹에서는 사마월향 소저를 데려가겠습니다." "뭐라고! 니가 감히 우리 딸마저! 아니, 그, 그게." 마황맹 맹주가 내게 항의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사마월향은 주저 없이 달려나왔다. 무도장 위로 사뿐히 올라서서는 침착하게 사마장령의 맥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체념한 듯 마황맹 맹주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어랍쇼. 사마월향이 왜 이리 차분해졌냐? 이 년 평소 성격으로는 길길이 날뛰며 대도를 휘둘러야 정상 아냐?' "휴우, 다행이군. 대가 끊기는 줄 알고, 놀랬잖아. 살아만 있으면, 후일을 기약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지. 월향아, 그만 내려오거라." 그러나, 사마월향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내 뒤로 바짝 붙어 서 버렸다. 핼쑥해져 있던 그녀의 안면에 생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당황한 마황맹 맹주는 내 눈치만 살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발만 동동거렸다. 실제로 그가 서있는 마황맹 진영 땅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치고 있었다. "무림맹 진영에서는 천세후 공자를 내주셨으면 합니다만." 천세후가 이 자리에 없는 것은 자명했지만, 일단 모르는 척 가장하며 운을 뗐다. 잠시 무림맹 진영에 정적이 흘렀다. 고휘천을 말없이 흘겨보자 녀석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해 왔다. "천, 천세후 공자가 누구지요? 모르는 사람입니다."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쉽게 인정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닷새 드리지요." "정, 정말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 무림맹에는 천운학 공자 한 사람만 있을 뿐이에요." "나흘 주겠소." "진짜라니깐요." "사흘이오." "아, 왜 사람 말을……." "이틀." "아, 알았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닷새는 주셔야 그나마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데려올 수 있습니다." 실웃음이 입가를 타고 번졌다. 날짜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무림맹 녀석들의 인정과 확답을 받아냈다는 게 중요했다. 오랜 시간 날 귀찮게 굴고, 깔봐왔던 놈들이 드디어 내 발아래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하루도 필요 없다네." "……?"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백발 노인장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젊은이 소문은 내 익히 듣고 있었지만, 소문이란 믿을 바 못 된다는 것을 오늘 깨달았네. 우리 천세후를 잘 부탁하네." "뭐라구요? 천세후는 무림맹에……." 난 그가 당연히 무림맹 한구석에 갇혀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백발 노인장 옆에 있던 정의수호대 녀석 중 하나가 비실비실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내 근처에 이르자 몹시 무거웠는지 갑주를 벗어 던지며 몇 차례 심호흡까지 내뱉었다. 안면 한 쪽을 잡아뜯자 떡반죽처럼 늘어나며 떨어지는 게 있었다. '인피면구?' 천세후는 바로 백발 노인을 향해 큰절을 세 번 올리더니만, 주저 없이 내 뒤로 잰걸음을 옮겼다. 찰떡처럼 찰싹 붙어버린 두 연놈 사이에서 닭살 같은 깨가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그간 고생 많았소. 이젠 고생 끝 행복 시작이오. 희망 찬 새 날의 찬란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구려." "천세후 공자님, 천세후 공자님! 우에에에엥." "울지 마시오. 내 이 날을 위해 시 한 수 지어왔소. 들어보시겠소?" '어찌 이 놈은 변한 게 하나도 없냐?' 무도장이 그들만의 무대인 듯 주객전도가 된 양상이었다. 수천 명의 시선이 쏟아져 내리는 데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로지 이 공간 속에 그들만 외따로 서있는 착각마저 들었다. '끙, 이러다가 오늘의 주역으로 이 놈들이 기록되는 거 아냐? 모두가 지켜보는 아래 떳떳이 합쳐진 정파와 사파의 미래. 이런 무림사로 뒤바뀌는 거 아냐?'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한 발 뒤로 접어야 했다. 그보다 우선되는 근심거리가 당면하고 있었다. 뇌리를 울리는 전음입밀 한 가닥. '이 자식, 너 죽었어. 내가 운기조식만 마치고 일어서면 너부터 작살낼 줄 알어. 마황맹이고, 무림맹이고 다 필요 없어. 난 니 놈 한 놈만 조질 거야. 니가 나한테 그런 쪽을 먹이고도 무사하리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직 운기조식 자세를 풀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 급한 순간은 넘긴 듯한 령령의 경고가 울려 퍼졌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여태까지의 위세 당당함은 오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어떤 허세도 령령에게 무력함을 나만큼 잘 아는 인간이 또 있겠는가! '흠, 구타심공이 자네 안에서 사그라지는 게 보이는군. 나도 덩달아 사라지겠는걸. 휴우, 관심 있으면 다시 익혀보라고 하고 싶네만, 자네가 다시 구타심공을 익힐 리는 없겠지. 수고하게. 인연 있으면 다시 보세나.' '영감님, 자깜만요. 구타심공이 아직 사라지면 안된다구요.' '미련이 남으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네.' '그게 아니라니깐요!' 더 이상 현현자 영감탱의 울림이 들리지 않았다. 속박이 풀리면서 왼팔이 되돌아왔지만, 그 속에 살아있던 청아한 가닥 한줄기마저도 희미해져 갔다. 뒤틀린 오른팔의 고통이 한층 더 격해져 왔다. 이제 난 내공 한 줌 없는 보통 사람인 것이다. '너, 죽었어. 그 자리에 꼼짝 말고 기다려. 엉!' '내가 미쳤냐! 가만히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게. 굼벵이도 밟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어간다는 걸 몰라?' 서로 껴안고 떨어질 줄 모르는 천세후와 사마월향을 남겨두고 서쪽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어딜 가? 작삼 동생, 이젠 철수해야지. 그 쪽이 아니야. 그 반대쪽이야.' 교 누님의 아리따운 목소리가 전음입밀로 흘러들었다. 싸우느라 녹초가 되었는지 전음마저 흐릿하게 흔들거렸다. 왠지 마음이 약해지려 했다. 그냥 다시 되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들……. '야! 어딜 내빼! 이리 후딱 안 와! 셋 세기 전에 돌아서! 야! 야! 야!!' 늦춰졌던 발걸음에 없던 힘이 솟구쳤다. 령령이 회복하고 일어서기 전에 숨어야만했다. 교 누님이나 소화를 보는 일은 몇 주 후로 미뤄도 늦지 않았다. 흑접도 자기 갈 길 보내면 그만이었다. 내가 보통 사람이 된 이상 계약은 당연히 없는 얘기였다. 일단 한 목숨 무사히 간수해야 그들과도 재회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령령 근처에 얼씬거렸다가는 어떤 꼴이 될지 자명했다. 구타심공을 잃어버린 이상 맷집이고, 뭐고 간에 존재하지 않는다. 령령의 성난 권각에 한 대만 스쳐도 개 박살나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일이었다. 내게 얽혀있던 은원관계는 청산되었다. 청부고, 복수고, 나발이고 간에 다 해결했다. 더구나 난 더 이상 무림인도 아니었다. '적어도 내공을 다시 쌓기 전까지는 말이지. 뭐, 이 나이에 뚝딱하고 쌓을 내공 구결이 있겠어? 만년설삼? 만년하수오? 만년내단? 그런 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겠냐? 못 해도 십 년 이상은 보통 사람이다. 내공 쌓으려고 발버둥치다가 늙어 죽겠다. 에라, 그냥 포기하자. 포기해.' 이제 무림이라면 지겨웠다. 신물이 났다. 무림을 떠나 보통 인간으로 무사히 생존할 유일무이한 기회가 서쪽 언덕 너머로 보였다. 언덕에 자리잡고 있던 사람들이 허겁지겁 좌우로 좌악 갈라섰다. 그 누구도 외형상 천하 제일 고수인 나에게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 단지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 목표는 오로지 강 위에 외로이 떠 있는 조각배였다. 모두의 시선을 등뒤로 가리고서 은밀히 단도를 꺼내들었다. 그걸로 조각배에 묶인 밧줄을 사사사삭 끊어 내고는 그 위로 몸을 뉘었다. 여기까지 내 발로 걸어온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생존하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준 것이다. 조각배의 끝이 어디로 향하건 간에 령령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제일 중요했다. 출렁이는 조각배 위에 누워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니 후련하면서도 시원섭섭한 감상이 떠올랐다. '휴우, 이젠 못 쫓아오겠지? 잠이 솔솔 오는걸.' 항거할 수 없이 덤벼드는 수마(睡魔)에 두 손 두 발 다 들어 버렸다. 슬며시 고개를 떨구었다가 조각배 바닥에 고여든 새빨간 핏물 웅덩이를 보았다. 오른팔 여기저기에서 샘물처럼 퐁퐁 솟구쳐 오르는 피분수도 언뜻 보였다. 눈을 감기 직전 두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피곤해서 잠이 오는 걸까? 피가 빠져 죽으려는……?'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6-01-27 18:15:42 고친날 2006-01-28 09:24:43 읽은수 5816 [ 9 K ] 제목 점소이 작삼(108)-비몽사몽(非夢似夢)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8] 비몽사몽(非夢似夢) 짹짹짹짹, 짹짹짹. 생기발랄하게 지저귀는 참새 노래 소리를 음미하며 눈을 떴다. 꽤나 늦잠을 잤는지 해는 이미 중천이었다. 열려진 창가 사이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새봄의 기운이 완연했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난 순간, 전신의 뼈마디들이 뿌드득 비명을 질렀다. 이에 화답하듯 온몸 구석구석에서 각종 고통을 호소해왔다. 오른팔이 불편해 내려다보니 새하얀 붕대가 어깨까지 칭칭 동여매져 있었다. 윗도리도 벗겨져 맨 가슴팍이 드러나 있었다. 누군가가 치료한 흔적이었다. '조각배를 타고 떠내려간 것까지는 생각나. 단지 그 다음부터는 기억나는 게 도통 없어. 내 발로 올라온 건가? 아님 누가 날 옮겨놓은 걸까? 게다가…… 여기는 또 어디야?' 눈에 익은 방안 정경이 무환루(無患樓)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얼마나 닮았냐 하면 잠시동안은 예전 내 방이라고 착각까지 했을 정도였다. 끼이이익.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인기척이 있어 시선을 돌렸다. "엉? 소화(蘇華)잖아." 내가 일어나 있는 것을 본 그녀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휘둥그래진 눈으로 멈춰서있었다. 말없이 아미를 일그러뜨리더니 고개까지 떨구었다. 움츠려진 녀석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와락. 갑자기 소화가 침대 위로 몸을 던져 안겨왔다. 덕분에 전신의 뼈마디가 한 번 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에 대해 가타부타 불평할 수도 없었다. 가슴 팍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때문에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이대로……, 이대로 안 일어나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오라버니." 소화의 격정 어린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별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다독거리며 안아주었다. '손만 잡아도 안면 붉히던 녀석이 꽤나 대담해졌네. 아직 풋사과 가슴이지만, 많이 여성스러워졌는걸.' "깨어나셨군요." 또 다른 방문객이 문간으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어라? 적월 소저까지 있었네요." 그녀의 등장에 민망해진 소화가 후다닥 물러났다. 급기야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나가기까지 했다. 적월도 더불어 민망했는지 뒷머리만 긁적였다. "쾌차하셔서 다행입니다." 짧고 간결했지만, 꾸밈없는 떠오른 미소에 그녀의 진심이 와 닿았다. 아마 적월만큼 한 마디 말에 무게를 둘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참, 제가 어떻게 이곳에 와 있는 거지요? 또 여긴 어딘가요?" 무도장이 세워졌던 위치가 마황맹과 무림맹의 중간 지점인 호남성(湖南省) 익양(益陽)이었다. 조각배를 타고 내려간 지류의 끝에는 그 유명한 동정호(洞庭湖)가 있다. 말하자면 아마도 이곳은 동정호 부근의 한 객점일 터였다. '동정호에는 동정호만큼이나 알아주는 악양루(岳陽樓)가 있지. 그럼, 여기가 혹시 악양루일까?' "네? 무슨 말씀이신지?" "……." 그에 대한 대답은 전연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바로 내 뒤편 구석이었다. "쯧쯧쯧, 아직 잠이 덜 깼나 보군. 머리나 식힐 겸 더 자는 게 어때?" "흑접?" 방구석 한 쪽에 가죽안대를 쓰고 검은 망토를 이불처럼 두른 흑접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왜? 뭘 새삼스럽게 놀래? 니가 여기 있으니까 나도 여기 있는 거잖아. 출혈로 기절한 널 조각배에서 꺼내든 것은 소화야. 주위 이목을 피해서 일행에 합류하느라 무지 귀찮았었지. 그나마 숨어있는 놈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는 재미가 쏠쏠하더군. 한 년, 한 놈 보낼 때마다 왕년의 감각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지. 풋, 가소로운 것들, 감히 내 앞에서 살행을 펼치려 들어?" 그녀의 안면에 기이한 미소가 걸렸다.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을 미리 그리며 만끽하는 듯 했다. 흑접의 새빨간 입술이 매혹적이면서도 섬뜩하게 반들거렸다. "난 이곳에 처음 왔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꽤나 익숙해 보이던걸. 무환루라고 부르는 걸 언뜻 들었지." "뭐! 무환루! 그, 그럼, 령령도 근처에 있는 거야!" "너 빼고는 전원 무사 복귀했어. 단지 주령령은 요 며칠 간 코빼기도 안 보여. 왜? 찔리는 일이라도 있어? 아, 그거? 킥킥킥킥." 뭔가 눈치챘는지 배까지 끌어안고 폭소를 참는 그녀였다. 순간 몇 대 밟아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우, 내 저걸 그냥 콱. 아이고, 내가 참는다. 참아.' 눈이 안 보인다 해도 그녀는 엄연히 무림인이었다. 내공이라고는 한 줌도 없는 나와는 이미 다른 세계 사람인 것이다. 섣불리 밟으려 들었다가는 내 목만 날아갈 판국이었다. 적월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교 누님은 어디 계십니까?" "저, 그것이……. 죄송해요.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모종의 비밀 임무가 주어진 것 같기도 하고……." 왠지 말끝을 흐렸다. 아마 내가 알아서는 안 되는 월녀궁 내부 일인 모양이었다. '하기사 아무리 혼인을 했다고 해도 공은 공, 사는 사, 아직 난 외부인에 불과하지.' 일단 령령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자코 윗도리를 추스르며 일어섰다. 가벼운 현기증에 눈앞이 핑 돌아 기우뚱 넘어질 뻔했다. "작삼 공자님!" 놀란 적월이 재빨리 부축해준 덕에 사나운 꼴은 면할 수 있었다. 팔뚝에 맞닿은 푹신한 가슴 감촉에 그만 엉뚱한 곳으로 힘이 쏠려버렸다. 씁쓸한 자조(自嘲)가 떠올랐다. '에휴, 한심하군. 한심해. 가운데 다리야, 가운데 다리야, 어찌하여 복잡한 내 심사를 이리도 몰라주느냐?' "공자님,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발이 잠시 꼬였을 뿐입니다." 그녀의 부축을 조용히 뿌리치며 걸음을 내딛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온몸에서 뿌드득거리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참았다. 아주 잠시동안이었을지라도 천하 제일 고수로 인정받은 나였다. 이제 와서 약한 모습 따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돌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걱정되는지 적월이 바짝 붙어왔고, 흑접이 약방의 감초처럼 슬그머니 뒤따르고 있었다. 어쩐지 손님이 적었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가로운 탓인지 계단 난간 끝에 기대앉은 녀석이 보였다. "여어, 종리연, 안녕? 오랜만이다." "……." 날 한 번 쓱 돌아본 종리연의 안면에 한숨이 나왔다. 생기발랄하던 과거의 종리연은 이미 없었다. 그저 비루먹은 당나귀처럼 흐릿한 눈자위에 생기라고는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중환자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시선만 던진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묘한 괴리감만 느껴졌다. 텅텅 비어있는 일층 본관을 둘러보았다. 계산대에는 예전 여느 때처럼 꾸벅꾸벅 졸고있는 홍 영감이 앉아 있었다. 현관 앞에는 새로 들어왔는지 낯선 신참 점소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휴우, 이젠 넉살좋은 팽무진(彭無盡) 녀석도 없고, 다소곳하던 동천위(東川衛)도 없구나. 북천위(北川衛)의 따가운 눈초리까지도 그리워지는 걸.' 신참에 대한 호기심마저 접어버리고는 주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녹 누님에게 문안인사라도 올리고자……. 爾本無家依我屋 旣依胡乃反穿爲 固知爾亦無長慮 我屋顚時爾失依 너는 집도 없어 내 집에 사는데 네가 사는 집에 구멍은 왜 뚫나. 너 정말이지 생각이 짧구나 내 집 무너지면 너도 살 곳 없는데. 주저리주저리 한시를 읊어대는 낯익은 미성에 발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슬그머니 돌아보니 한 손에는 섭선까지 펼쳐들고서 운을 따라 휘젓고 있었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천 공자,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천세후 녀석이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봐도 매스꺼운 미소에 짜증이 갑절로 치밀었다. 녀석의 징그러운 미소보다 천운학의 조소 어린 미소가 더 나으리라. "아아, 작삼 점소이, 드디어 쾌차했군요. 하하하하, 활기찬 항주 사거리를 보노라니 절로 운치가 돌았답니다. 나도 모르게 딱 어울리는 시구 하나가 떠올라 읊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냐, 시구 한 번 아주 멋들어지는구나. 여기가 내 집이지, 니 집이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폐를 끼치고 있는 쥐새끼는 바로 너잖아!' "험험, 한시를 읊조리건, 야사를 나불거리건 내 알 바 아닙니다. 다만! 왜! 하필이면! 무환루 안에 천 공자가 있는 겁니까?" 탁. 녀석이 펼쳐들었던 섭선을 무릎 위에 내려쳐 오므렸다. 접혀진 섭선 끝으로 이마를 톡톡 치며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 말이군요. 휴우, 거기에는 가슴을 저미게 하는 뼈아픈 사연이 있지요." "……." 잠시 뜸을 들이며 몇 차례 한숨을 추가로 푹푹 내쉬었다. 잠자코 녀석의 말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무림맹에 갇혀있던 동안은 먹고사는 문제만큼은 걱정할 필요 없었지요. 그런데, 막상 자유의 몸이 되고 나니 일신에 금품 하나 없지 뭡니까? 사마월향 소저는 여리디 여린 여인의 몸, 차마 밤이슬 속에서 새아침을 맞게 할 수 없었답니다. 우여곡절로 여기 저기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점소이로 취직했답니다. 다만, 취직한 주루가 우연히도 무환루였던 것이지요." '폭도(爆刀) 사마월향이 여려? 마황맹 아그들이 다 웃겠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우연히 여기로 흘러들었다는 게 말이나 돼?!' 어떻게 몰아붙여야 녀석을 무환루에서 몰아낼까 고민하는 사이였다. 주방에서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꺄악!" 깜짝 놀라 돌아보니 낯익은 여인 하나가 앞치마를 두른 채, 헐레벌떡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양손에는 막 조리된 듯한 요리 하나가 모락모락 김을 뿜어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사마월향이었다. "천 공자님! 천 공자님! 드디어! 드디어! 제 손으로 요리를 만들었어요! 천 공자님!" '얼씨구, 너까지 합류했냐? 아주 우리 무환루를 말아먹으려고 작정했구나.' 사마월향이 들고 온 요리가 어떤 것인지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채 걸러내지 못한 자라 등 껍질이 그릇 한 구석에 삐죽 튀어 나와 있었던 것이다. "정말입니까? 녹 아주버님의 손 하나 빌리지 않고 만들었단 말입니까?" "그럼요. 이번에는 그녀의 손 한 번 빌리지 않았어요. 옆에서 지시하는 내용 그대로 따라 만들었다구요." "좋습니다. 제가 한 번 맛을……. 아니지, 선배가 먼저 시식을 해야 올바른 순서이지 않겠습니까?" 천세후가 날 두고 선배라고까지 칭해주자 뺄 수가 없었다. 기대감 어린 사마월향의 반짝이는 눈빛도 부담스러웠다. 하는 수 없이 수저를 들어 고기 한 조각과 국물을 입 안에 우겨 넣었다. 순간 입안에서 폭발하는 독극물에 자극 받고 말았다. 뱃속으로 넘어간 일부가 오장육부를 미치게 만들었다. 구토물이 목구멍으로 솟구쳐 올라 재빨리 허리를 접어야만 했다. "쿨럭, 쿨럭, 케에엑." "저런, 이번에도 실패로군요. 사마 소저." "아잉, 이번에는 제대로 만든 줄 알았는데, 뭐 다시 만들어 올 게요.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다시 주방으로 잰걸음을 되돌리는 그녀, 기가 찼다. '당가 녀석의 독공조차 버텨낸 나였는데, 이 빌어먹을 년의 독극물에는 내장이 다 뒤틀리네. 이 연놈들을 내 기필코 쫓아내고 말…….' 천세후의 면상이라도 후려칠 양으로 고개를 든 찰나였다. 눈앞에는 새하얀 비단 치파오를 빼 입은 주령령이 서 있었다. 어깨는 물론 매끈한 허벅지까지 여과 없이 노출되어 더욱 자극적인 치파오였다. 남궁현이라도 만나고 왔는지 옅은 분장에 온갖 장신구로 치장한 상태였다. 깜짝 놀라 숨을 들이키자 질식시킬 듯 강렬한 울금향이 들이밀려왔다. 양끝이 쭉 찢어진 왕방울 눈매가 인상적인 주령령,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가 향한 곳은 내가 아니라 땅바닥이었다. 하필이면 그녀의 녹피 가죽신과 발등이 샛노란 구토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방금 전 내 목구멍으로부터 토해진 것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죽, 죽었다!' =+=+=+=+=+=+=+=+=+=+=+=+=+=+=+=+=+=+=+=+=+=+NovelExtra(novel@quickskill.com)=+= 묘한[妙翰] 글쓴날 2006-02-05 12:18:39 고친날 2006-02-06 15:19:31 읽은수 5717 [ 24 K ] 제목 점소이 작삼(109)-완결 글보기 화면설정 댓글 부분으로 고치기 지우기 [109] 휘익. 아니나 다를까 령령의 손이 섬전처럼 허공을 휘저었다. 다급해진 나는 맞바로 뇌려타곤(懶驢陀坤)을 시전 했다. 별 볼일 없는 떼구루루 몸 굴리기 수법이지만, 구타심공(毆打心功)이 없어서 그런지 반응마저 느려 터졌다. "아이쿠, 령령 아가씨, 사람 살려요!" 일단 도망치고 볼 일이었다. 식탁 사이로 몸을 숨긴 채 령령의 반응을 기다렸다. '어라? 왜 이렇게 조용하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뜻밖에도 령령은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에는 천세후 녀석의 섭선이 들려 있었다. 방금 전의 일격은 날 노린 것이 아니라 섭선을 노린 것이었다. '하지만, 왜?' 꿀꺽. 긴장한 천 공자의 목젖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글줄 좀 안 다고 아무거나 나불거리지 마라. 내 귀에 거슬린다. 자작할 실력이 없어 다른 명인들의 시구나 읊조리는 게 자랑이냐?" "……." 와그작. 섭선이 령령의 손안에서 부스러져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것으로 발등 위의 토사물을 닦아내고는 바깥으로 휙 던져 버렸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나 따위는 이미 령령의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내 쪽은 본 척 만 척 스쳐 지나가는 그녀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불쑥 내밀고 있던 사마월향과 시선이 마주쳐버렸다. 사마월향은 뒤미처 외면 못하고 그대로 굳어있었다. "흥, 너도 공연히 폐 끼칠 생각하지마. 무환루를 편한 피신처라고 만만히 보지말길 바래. 이곳은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한 용담호혈(龍潭虎穴)이야. 발 한번만 잘못 딛으면……." 쾅, 콰자작. 령령의 쭉 뻗은 다리가 붕 떠올랐다가 시원하게 내리꽂혔다. 그녀 옆에 서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멀쩡한 식탁 하나가 산산조각 나버렸다. "바로 이 꼴이 되는 거지." 주령령의 고압적인 기세에 모두가 질려 버렸다. 그녀가 위층으로 올라가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입술 하나 벙긋하지 못했다. "휴우, 할 말이 있으면, 조용히 타이르지. 왜 비싼 섭선과 멀쩡한 식탁을 부셔버리는지, 원. 보아하니 여인 특유의 불만이 한가득 쌓인 것 같던데요. 달거리를 할 때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과 비슷하군요." 말을 마친 녀석의 눈빛이 날 향했다. 마치 아는 바가 없냐고 답을 구하는 것 같았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나라고 아는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죽인다고 협박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냥 넘어가 버리다니! 더구나 지금 일도 나한테 화낼 일을 요 연놈들한테로 돌린 거잖아. 거 참.'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손님이 없어 한가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손님이 찾아들었다. 반갑다면 반갑고, 어색하다면 어색한 손님이었다. "매염경(梅炎璟) 소저께서 어인 일이신지요?" 평상시처럼 문란해 보이면서 노출이 심한 주단 치파오가 아니었다. 그녀답지 않게 지극히 단정한 분홍빛 궁장의 차림새였다. 짙은 지분도 지우고 가볍게 단장한 채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색정적인 향기가 풀풀 난단 말씀이야. 괜히 항주 삼대 유명인이겠어?' "흥, 오랜만에 재회하는 것인데, 첫인사치고는 쌀쌀맞으시네요. 오랫동안 화화루에 놀러오지도 않으시고 아주 얄궂으시네요. 혼인했다고 체면치레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쟁쟁한 안부인들에게 쥐여살고 있으신 때문인가요?" "……." "호호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매염경 소저가 손사래를 치며 화사한 웃음 망울을 터뜨렸다. 언제 봐도 아찔한 미소다. 저 미소에 얼마나 많은 뭇남성들이 목매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리라. "특별히 무환루를 찾으시는 손님들이 있어서 모셔 왔어요. 무환루의 독특한 요리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던데요. 이리들 들어오세요." '독특한 요리? 우리 주루에 그런 것도 있었나?' 그녀가 주루 문간에 대고 말하자 노부부로 보이는 두 노인장이 어디선가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뒤를 이어 두 소년 소녀가 쫑긋 고개를 디밀고 주루 안을 훔쳐보고 있었다. 소년은 열 살 남짓 치기 어려 보였고, 소녀 쪽은 그보다 성숙해 보이는 게 못해도 열댓 살은 되어 보였다. 훗날 장성하면 미인 소리를 들을 법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커다란 눈망울 양끝이 쫙 치켜올려져 있는 점이었다. 눈매가 저렇게 날카로운 여인 치고 순한 이가 없었다. 령령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전 녹 문주님께 일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떠야겠어요. 아무 때라도 놀러오세요.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마지막 두 마디는 나만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속삭여 왔다. 그녀의 촉촉한 혓바닥이 내 귓불을 날름 핥아왔다. 아랫도리가 후끈 달아오른 순간, 매 소저는 매정하게 주방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끙, 이 여자가, 살짝 흥분만 시켜놓고 사라지네.' "험험, 이보게, 점소이, 우리 손님일세. 주문 좀 받아주게." 더할 수 없이 찰싹 붙어 앉아있는 노부부 중에서 할아버지가 말문을 던져왔다. 하기사 현관 앞에서 섭선을 부치고 앉아 너스레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천세후 녀석이 점소이처럼 보일 리 없었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어떤 요리를 주문하시겠습니까? 손님." "우린 그냥 벽라춘(碧螺春)향을 음미하며, 잠시 나눌 얘기가 있다네. 아이들을 위해 마파두부(麻婆豆腐) 한 접시를 내오는 것도 좋겠지." 노파 쪽은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었는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아까부터 영감 혼자서만 말문을 열고 있었다. "벽라춘차 한 주전자, 마파두부 한 접시 접수받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손님." 간만에 들어온 주문이었다. 최근에는 주루 운영이 가능할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손님이 확 줄어들어 버렸다. 간혹 오가는 이들도 왠지 낯익어 보였다. 물론 나만의 착각일 테지만 말이다. 주문을 위해 주방으로 들어섰다가 그대로 굳고 말았다. 주방에는 매염경 소저가 새하얀 천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것도 윗도리를 훌러덩 벗어버리고 커다란 젖가슴을 출렁 늘어뜨린 채였다. 흑단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걷어 드러낸 새하얀 목덜미가 선명하게 대조되었다. 문제는 섬뜩하게 날이 선 부엌칼을 들고 서있는 녹 누님에게 있었다. 모종의 보고에 심한 충격을 받았는지 부르르 경련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칼날이 향한 목표물은 바로 매 소저의 가녀린 목덜미였다. 당연히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부엌칼을 움켜쥔 누님의 팔목을 재빨리 낚아채며 만류했다. "안됩니다. 녹 누님. 매 소저와 훗날 보기로 약속했단 말입니다. 그녀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몰라도 이번 한 번만 봐주십시오. 누님." "……." "녹 누님. 제발요." "휴우, 어차피 하오문을 이어나갈 아이는 남천위(南川衛) 하나밖에 없다. 팔 다리를 몽땅 잘려버린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냉큼 꺼져라." 녹 누님은 매 소저와 눈 마주치기도 싫다는 듯 등을 돌려 버렸다. 매 소저는 조용히 일어나 허리끈 아래로 늘어져 있던 윗도리를 주섬주섬 걸쳐 입었다. 옷매무시를 정리한 그녀는 나가면서 누님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옥체 보존하십시오. 문주님, 근일간 또 찾아뵙겠습니다." "……." 물론 녹 누님은 돌아보지 않았다. 절도 받지 않았다. 둘 사이에 어떤 앙금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매 소저는 난감하게 내려다보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요염하게 배시시 미소지었다. 그녀의 전음입밀이 귓가에 울려왔다. '빚을 졌군요. 작은 문주님. 이 시간부로 화화루는 작은 문주님 것입니다. 언제든 찾아오세요. 그 날은 화화루 문을 닫고 모든 아이들을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화화루는 하오문의 숨겨진 전신, 인사 올릴 아이들이 많답니다. 그 날 제 진면목도 아낌없이 보여드리지요.' 작은 문주라는 호칭이 그녀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화화루를 맡긴다는 소리에 떨떠름해지긴 매한가지였다. 총총히 사라지는 매 소저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작은 문주라? 더 이상 무림인이 아닌 나에게 아직 볼 일이 남아있단 말인가? 가주지, 이 참에 화화루의 진면목을 구경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니, 그보다 매염경 소저의 진면목이 더 궁금해지긴 하지만.' "작삼 동생." "네? 네, 녹 누님." "그녀에게 깊이 빠져들지 말거라. 남천위가 진정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하오문 하나뿐, 하오문의 건제를 위해서라면 내 목까지 칠 수 있는 아이다." 그녀의 주의를 듣는 순간, 뜨끔해왔다. 어떻게 내 속을 꿰뚫어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 "주문을 가져왔는가?" "아차 그렇지. 벽라춘차 한 주전자와 마파두부 한 접시가 있어요." "마파두부는 시간이 필요하니, 벽라춘차부터 내가게나. 아마 자네와 할 말이 있어 온 분들 같으니 세이경청(洗耳傾聽)하도록 하게." "네? 저한테요? 헤헷, 설마. 가보겠습니다. 누님." 오늘따라 녹 누님이 한층 진중해 보였다. 마치 세 살 먹은 아이 나들이 보낼 때의 어머니 같다고나 할까? 그녀의 그런 점이 좋았다. 홍 영감도 믿을 수 없는 이 마당에 무환루에서 신뢰가 가는 유일한 어른이라고는 그녀밖에 없었던 것이다. "먼저 벽라춘차를 내왔습니다. 손님, 마파두부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는군요." "흠, 시간은 넉넉하이, 차나 마시면서 기다리도록 하지." 찻잔 네 개를 내려놓고 그들 앞에 쪼르르륵 따라내었다. 그들의 이목이 유난히 내게 쏠려있어서 거북스럽기 그지없는 자리였다. 얼른 따라내고 거리를 두려는 찰나 영감의 말문이 다시 열렸다. "다 좋은데 말일세. 아까부터 신경에 거슬리는 게 하나 있군." "네? 뭘 말씀하시는 것인지?" 후루루루룩. 탁. "구석에서 노려보는 맹인 아이 말일세. 우리 부부는 누군가의 감시를 받는 것에 익숙지 않다네. 괜찮다면 저 아이의 코와 귀를 도려내고, 혀까지만 뽑았으면 하네만. 아아, 자네 손을 빌릴 것도 없네. 이 노부가 직접 실력 행사를……." 두 노부부가 동시에 소매를 걷어붙이며 일어섰다. 명백한 시비였다.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진한 살기가 진동해왔다. 보통 사람인 나에게는 버거운 압력이었다. 날 향한 위협인지 흑접을 향한 협박인지 아리송해졌다. '어럽쇼! 이제 보니 정사 재결전 때 봤던 인간들이다. 찰떡처럼 붙어서 떨어지지 않던 기이한 노부부, 바로 그들이야! 그럼, 날 알고 왔다는 얘기잖아. 이런 썩을!'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녀는 제 동료이자 제 사람입니다! 아무리 은거기인 노선배라 하셔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기가 치밀어 버렸다. "어험, 그런가? 그런데, 이를 어쩐다. 우리도 명성에 살고, 명성에 죽는 인간들이라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잘라야 하는 법, 한 가지 조건을 수락해서 우리의 체면을 세워준다면, 다시 곱게 앉도록 하지." 홍 영감님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명백히 시비를 걸어오고 있음에도 영감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위층에 머무르고 있을 곽철대협도 고개 한 번 내밀지 않았다. 포연강은 근래 월녀궁 비밀분타에 눌러 사는지라 코빼기도 안 비쳤다. 냉월화 누님에게 푹 빠져있다는 적월의 언급이 사실인 듯 했다. "좋습니다. 영감님, 일단 조건이나 들어보지요." "별로 어려운 것은 아닐세. 그저 자네 처들에 대한 자네의 견해를 듣고 싶을 따름이라네." "……."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난 또 무공 한 수 겨뤄보자고 할 줄 알았다. 하다 못 해 논검비무라도 하자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남의 사생활에 대해서 캐묻는단 말인가! 그것도 노부부가 애들까지 꿰차고 와서 물어본다는 것은 상당히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내 사생활이 궁금해서 시비를 걸었단 말이야? 나 원 참, 아무리 세상에 유별난 인간들이 많다지만, 이런 별종들은 처음 봤네. 혹시 내 뒤를 캐내서 책자로라도 내려는 거야? 뭐야?' "아, 뭐 싫음말고." "알았습니다. 알았다고요. 그딴 거 즘이야 다 알려줄 테니 책으로 찍어내 팔든 말든 마음대로 하세요." "걱정 말게. 단지 우리 노부부 가슴속에 품어두기만 할 거라네." 그들의 진의가 점점 더 의심스러워졌다. 인생의 황혼기를 한참 전에 넘긴 이들이 뭐가 아쉬워서 청춘남녀들의 신혼기에 관심을 가진단 말인가? "휴우, 별로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교옥정 누님과는 절친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낮에는 그녀가 수련과 임무에 쫓기는지라 보기 어렵구요. 주로 밤에 만나곤 했지요. 물론 부부가 밤에 만나 뭘 하는지는 알려드릴 필요 없겠지요?" "그걸로 끝인가?" "끝인데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다른 아내들도 있지 않은가, 이 소릴세." "아, 그거 말씀이로군요. 뭐, 이제 와서 감출 필요도 없지요. 다 끝난 일이니까요. 기실 주령령 아가씨와 소화와는 그저 위장 혼인을 했을 뿐입니다. 온종일 수련을 해야하는 처지에 이미 교 누님과 제가 혼인을 한 사이라 남의 눈치가 거슬린다나요? 그래서, 위장 혼인을 했지요." "위, 위장 혼인? 합, 합방을 한 일은 한 번도 없었는가?" "합방? 합방이요? 하하하하하." 갑자기 소화와 령령과의 합방 얘기가 나오자 웃음보부터 터져 나왔다.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소화가 신체 접촉에 얼마나 민감한지 이들이 알기나 할까? 손 한 번 스쳤다고 얼굴 붉히는 그녀를 정녕 이들이 짐작이나 하겠는가? 령령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남녀의 정은커녕 날 못 잡아먹어 안달 난 그녀가 나와 합방을? 있다고 한다면 오로지 흑접을 건진 그 날밤뿐이었다. 그것도 그녀가 실신한 것을 내가 반쯤 미쳐서 덮쳤던……. '헉, 잊고 있었는데, 기, 기억나고 말았다. 설마, 이 노부부들, 령령의 사주를 받고 그 때 일을 캐물으려는 것인가! 역시 령령, 뭔가 눈치채고 있었구나.' "절,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령령 아가씨와 나 사이에는 오로지 혹독한 수련만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위장 혼인을 한 후부터 줄곧 두들겨 맞으면서 간신히 피해 다니는 게 일이었다구요. 사실 그녀는 남궁현 공자와 약혼을 한 사이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만 간에 혼인까지 치른다고 들었습니다." "풋, 케켁." 목이 말랐는지 차를 물처럼 꿀꺽 꿀꺽 마시던 노파가 찻물을 토해냈다. 급하게 마시다가 사래가 걸린 듯 했다. "남, 남궁현과 혼인을?! 어, 어째서 그런 일이!" 처음으로 그녀의 말문이 열렸다. '난 또 벙어리라 입술에 빗장 걸고 있는 줄 알았지.' "두 해전,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전부터 사귀어 온 선남선녀 사이니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곁에서 지켜봐 온 제가 다 질투 날 지경이었지요." 파지지직. 갑자기 식탁에서 새까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영감의 손이 올려진 탁자 부분이 타다다닥 타 들어가고 있었다. '젠장, 왜 이 인간이나, 저 인간이나 우리 무환루 식탁에 화풀이야?' "그럼, 위장혼인이고 뭐고 간에 당장 때려치웠어야지! 어째서 지아비를 깔아뭉개며 외간 남자에게 정을 주는 여인 따위와 살아왔단 말인가!" 격양되었는지 고함까지 치는 영감이었다. 주객전도도 이런 주객전도가 없을 듯 했다. 당사자인 내가 조용한데, 제 삼자인 그가 화를 내는 까닭이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의아한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자 그제야 자신들의 추태를 알아차렸는지 뒷수습에 나서고 있었다. "험, 험, 미안하이. 그만 망발을 보이고 말았구만. 얘기를 듣다보니 타인인 우리 입장에서도 화가 치밀지 뭔가? 휴우, 우린 이만 급한 볼 일이 있어 가봐야겠네." "저기 마파두부가 아직 안 나왔는데요." "알아서 하게. 대금은 여기 있네. 잔돈은 알아서 하게." 탁. 식탁에 은원보 두 개를 내려놓은 영감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노파도 그를 뒤따라 거의 동시에 일어섰다. 사람 무안하게 만들어놓고 떠나가는 그들을 보니 왠지 맥이 풀렸다. 나도 모르게 말문을 열어 버렸다. "좋아하니까요." "뭐, 뭐라고 했는가?" "처음 봤던 그 날부터 제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령령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겉으로 부정하고, 또 부정해도 그녀를 짝사랑하는 속마음 하나만큼은 변치 않더군요.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을 정도니까요. 그녀와의 가혹한 수련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다 피가 되고 살이 되었으니까요. 이제 와서 막상 떠나보내려니까 아쉬워지는군요. 부디 남궁현 공자와 주령령 아가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하하, 왜 이런 얘길 영감님한테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냥 어느 멍청이의 넋두리라고만 알아두십시오." "젊은이." "네?" "아, 아닐세. 다음에 또 놀러오겠네. 수고하게나." 급한 볼일이 생겼는지 허겁지겁 자리를 떠버렸다. 소년도 그들 뒤를 따라 나섰으나, 소녀만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날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생긋 웃어 보였다. '엥? 내 얼굴에 먹물이라도 묻었냐?' 소녀는 곧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엉망으로 훼손된 식탁과 은원보 두 개였다. 그것도 식탁 깊숙이 박혀있어 좀처럼 빠지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인간들, 줄려면 곱게 줄 것이지.' "야, 천세후, 와서 은원보 좀 뽑아봐." "……." 천세후는 못 들은 척, 은원보 대신 시구를 뽑아내고 있었다. 점소이 일을 하겠다는 것인지, 말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령령에게 혼쭐나고도 기고만장 거드름이었다. '쯧쯧, 저러다가 제대로 한 번 경칠 날 있을 거다.' 우지직. 탁.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선 흑접이 대신 은원보를 뽑아내 주었다. 한 번들은 소리로 정확히 위치를 짚어내는 그녀가 신기막측(神奇莫測)할 따름이었다. 이젠 그녀를 곁에 놔둘 이유가 없었다. 난 그저 보통사람에 불과하지만, 흑접은 어엿한 무림인으로 환골탈태한 상태였다. 그것도 상당한 고수급으로……. "야, 흑접(黑蝶), 이제 네 갈 길 가라. 보다시피 난 평범한 일등 점소이일 뿐이다. 무림과 더 이상 아무 관계없단 소리지. 지금의 너라면 어디서 뭘 해도 네 한 몸 건사하는데 무리 없을 거다." "내 마음대로?" "그래, 니 마음대로 가. 여비는 내 전 재산 전부 탈탈 털어 주마. 모자라면 가불이라도 해볼게." "흥, 필요 없어. 내 거취는 이미 정해졌으니까." "엉? 어딘데?" "너다. 이제부터 넌 내 주인이다." "……." 흑접은 다시 구석으로 걸어가 쭈그려 앉았다. 안대로 가려진 시선 끝이 나에게 머무르는 착각이 들었다. 전에도 종잡을 수 없었지만,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그녀였다. 그 날밤이었다. 정체불명 노부부에 대한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며 엎치락뒤치락 거리다 간신히 잠든 때였다. 들숨을 들이쉬다가 낯익은 향기를 느꼈으나, 어디까지나 비몽사몽 중이었다. 후우. 웬 실바람이 아지랑이처럼 귓구멍을 살살 파고 들어왔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며 피해봐도 마찬가지였다. 하도 귀찮아서 베개로 양 귓구멍을 덮어버렸다. 훅. "흐읍, 뭐, 뭐야!" 콧구멍으로 치고 들어온 실바람 덕에 숨구멍이 막힌 나는 바로 잠을 깨 버렸다. "령, 령령 아가씨?"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침상 머리맡에 교교히 앉아있는 그녀가 보였다. 무표정하기만 한 새하얀 옥면이 섬뜩하게 비쳐졌다. 나삼의가 치렁치렁 늘어져 있어 한 층 더 소름끼쳤다. 선자불래 내자불선(善者不來 來者不善)! '선한 자는 오지 않고, 오는 자는 선하지 않다. 그거겠지.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이 오밤중에 령령이 단독으로 왔다는 것은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뜻이렷다?' 강렬한 울금향이 내 폐부를 가득 매워왔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떨어졌다. 숨이 가빠왔다. 꿀꺽. '흑, 흑접은?' 곁눈질로 다급하게 흑접을 찾았으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 곁에 남겠다더니 그새 변심이라도 해버린 듯 했다. '쳇, 그럼 그렇지. 걔가 뭐가 아쉬워서 남아 있겠냐? 그냥 떠나기 무안하니까 뻥 한 번 쳐본 거겠지.' 주령령은 한 마디 말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 초조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애간장을 바짝바짝 태우는 데에 그녀 만한 적임자가 없을 것이다. "혹시 나한테 할 말 없어?" "……." 근 반시진만에 내뱉어진 그녀의 한 마디였다. 뭔가를 꼬투리 잡는 어감이 와 닿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주령령은 그 날 밤일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천운학을 잡기 위해 날 내버려 둔 것이리라! 토사구팽(　死狗烹)! '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를 삶는다. 이건가? 천운학을 잡았으니, 나도 살려둘 필요 없다는 말이겠지. 남궁현과 혼인을 앞둔 지금 주변정리를 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 작삼아, 작삼아, 드디어 이곳에서 그 운명을 다 하게 되는구나.' 도움을 청한다고 해서 살 길이 생길 리도 없었다. 강한 것은 둘째 쳐도 빠르기만으로도 풍룡(風龍) 종리연을 압도하는 그녀였다. 눈앞에 앉아있는 내 목숨을 취하는 일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쉬운 일이 될 터였다. 마지막 순간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러고 보니 난 그 때 분명 실신한 령령 앞에 부복해 다짐했었다. 천운학에게 복수만 하고 나면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 달게 벌을 받겠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 때 깨어있었던 게 아닐까? 시치미 떼고서 오늘만을 기다려 온 게 아닐까? 쳇, 오냐, 다 털어 내마. 네 마음대로 해라.' "휴우,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었습니다. 령령 아가씨도 알고 계신 듯 하니 숨길 까닭이 없겠군요. 작년 이맘때쯤이었지만, 유난히도 쌀쌀한 밤이었지요. 세 번째 청부를 받고 이동하다가 천운학의 습격으로 절벽에서 떨어졌던 그 날 밤 그러니까……." "그만!" 그녀의 성난 일갈과 동시에 멱살을 붙잡히고 말았다. 싸대기라도 올려쳐지는 줄 알고 긴장했으나, 더 이상 반응이 없었다. 그녀의 거친 숨결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방 안 가득히 차있던 울금향이 한 결 더 강해졌다.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지나간 과거 얘기 따위에는 터럭만큼도 관심 없어. 내가 여기 온 이유는 현재를 듣고 미래를 논하려는 거야."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빌어먹을! 귀 후비고 잘 들어 둬. 여자란 아무리 좋아하는 남자가 있어도 먼저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 따위 죽어도 못해. 웬 줄 알아?" '으잉? 이것은 또 무슨 소리람?' "글, 글쎄요?" "그것은, 그것은 여자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소망이니까. 이 남자가 날 좋아한다는 확신이 필요한 거야. 그것이 확인되기 전까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남자 주변을 맴돌면서 기다리는 것뿐이지. 알겠어?" "……." "이래도, 이래도 할 말이 없어?" 자신도 모르게 내공을 일으켰는지 령령의 두 눈자위에서 더 할 수 없이 시퍼런 불빛이 뚝뚝 흘러내렸다. 단지 기이하게도 무섭다거나, 살벌한 느낌이 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 스스로가 각박한 궁지에 내몰린 듯 애절해 보이기만 했다. 이렇게 상세한 설명까지 들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도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게 말이나 돼? 분명 령령이 사랑하는 남자는 남궁현이잖아. 풍악산에서도 그 녀석 때문에 펑펑 울었고, 줄곧 전전긍긍 신경 써오고 있었잖아. 뭔가 잘못됐어? 모를 일이다. 모를 일이야. 에라, 될 데로 되라.' "할 말이 있습니다." "……." 그녀의 기대 어린 눈빛이 너무 부담돼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말문도 똑바로 단호히 내뱉을 수 없었다. "에, 그러니까, 전 령령 아가씨를 진심으로…… 좋아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구요. 가능하면, 가능하면 앞으로도……읍." 미쳐 말문을 닫기도 전에 령령의 기습적인 입술 공격을 받았다. 입술과 입술이 합쳐지고 혀와 혀가 끈적하게 뒤엉켜 서로를 숨가쁘게 탐닉했다. 포옹을 한 채 몇 차례 뒹굴자 령령의 나삼의가 가볍게 흘러내렸다. 한 꺼풀도 걸치지 않은 눈부신 전라였다. 은은한 달빛에 반사된 령령의 속살이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와의 결합은 너무나도 능숙하고 순조로웠다. 마치 맑은 하늘에 순풍을 만나 바다 위를 씽씽 질주하는 돛단배 같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령령의 반응이었다. 그토록 자존심 강하고, 도도했던 그녀가 이리도 쉽사리 허락할 줄이야!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지 활짝 열려진 허벅지 사이 계곡은 내 가운데 다리를 너무나 수월히 받아 들였다. 거칠게 숨을 내몰아 쉬던 령령은 급기야 내 배 위에 올라타 버렸다. 전율적으로 요동치는 허리의 유연함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한 시진은 흘렀을까? 수 차례에 걸쳐 절정에 다다른 뒤에야 진이 빠져 떨어졌다. 목욕이라도 한 듯 전신이 끈적끈적한 땀으로 뒤덮였다. '냉혈마녀 주령령이 이렇게까지 뜨거운 여자였나? 오늘 밤, 여러 가지로 놀라고 마는군.' 거친 숨결을 내쉬던 주령령이 그대로 덥석 안겨왔다. 그녀의 부드러운 속살과 싱그러운 살내음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운데 다리가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그것을 느꼈는지 령령의 안면이 붉게 물들었다. 도리어 그녀의 부드러운 옥수가 내 엉덩이를 옥죄어 왔다. 그녀의 계곡과 내 가운데 다리가 서로를 어루만졌다. 진득한 령령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나한테서 현모양처를 기대하지마. 내 발아래 널 복종시킬지언정 내가 네게 복종하는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아줘. 나도 널 좋아해." "……." "한가지 부탁이 있어. 모레가 오라버니 혼인식날이야. 거기서 제발 인상쓰지 말고 가식으로나마 축하해줬으면 좋겠어." "네? 령령 아가씨의 오라버니요? 전 모르는 사람인데요." "아니,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남궁현 공자, 그 사람이 내 오라버니야."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동안 주령령이 보여왔던 묘한 행각에 대한 의문이 아주 약간은 풀리고 있었다. "그럼, 주령령이란 이름은?" "내 이름? 후훗, 너만 알아둬. 내 본명은 남궁령령이야. 내 눈매가 왕방울 같다고 해서 조부님이 지어주신 이름이지. 사정이 있어서 가명을 쓰고 있는 거야. 왜? 이상해? 을지마루?" "……?!" 다시 한 번 더 머리가 띵하고 울려왔다. 을지마루, 그 저주받은 이름이 그녀 입에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을지라는 성 때문에 주변사람들의 경계를 받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심심하면 관원들이 쳐들어와 시비를 걸었고,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낭인들 덕에 숨죽여 살기도 했다. 더구나 외지인들만 보낸다는 혹독한 최외곽 전쟁터으로 내몰리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끝까지 을지라는 성을 버리지 않았다. 돈만 아는 고집쟁이 형마저 그 성만은 버리지 않고 지켜왔던 것이다. "걱정 마, 나만 알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우작삼 이라는 가명보다 훨씬 멋지고 좋은 이름이야. 아주버님도 아주 멋들어지고 훌륭한 분이었어." "형, 형을?" '이, 이 여편네가 언제 우리형과 안면 튼 거야?'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내가 알던 주령령과는 너무나도 다른 남궁령령이 내 품안에 안겨 있었다. "아가씨, 목욕물 대령했습니다." 낯익은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마루 바닥 위에 부복한 흑의 망토 여인이 보였다. 그녀가 누구인지 모를 리 없었다. '어, 어라? 흑접? 령령한테 아가씨?' 이젠 놀랄 기운도 없었다. 령령이라면 그녀를 자신의 종으로 부리고도 남을 구석이 충분했다. "수고했다. 편하게 대기하도록. 난 이이와 할 일이 더 남아있으니깐." "복명." 흑접은 정말 평상시 그대로 구석에 가서 웅크려 앉았다. 남궁령령은 그녀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찰싹 붙어왔다. 그녀의 부드럽고 끈적끈적한 애무에 다시금 힘이 들어가 버렸다. 그녀와의 격한 정사에 함몰 당해서인지 더욱 정신이 없었다. 급기야 아직도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니가 하는 착각마저 일었다. '이거야 원,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안 가네. 이러다가 눈뜨고 나면 다 꿈이었어. 이러는 것 아냐?' 이틀 후, 남궁세가 안뜰에서 성대한 혼인식이 치러졌다. 신부측인 제갈혜의 제갈세가 사람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하객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시종일관 불편한 분위기였다. 신랑측인 남궁현의 안면이 불편하게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갈혜보다 남궁령령 쪽에 더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 옆에 내가 서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침내 그의 전음이 내 뇌리를 강타해왔다. '너 우리 령령한테서 안 떨어져! 팔 안 빼!' '을지마루, 화내지 말고 유연하게 넘어가. 수많은 하객들이 지켜보고 있어.' 눈치 빠른 남궁령령의 만류가 이어졌다. "……." 두 전음이 머릿속에서 동시에 상충했다. 내공이 사라진 게 상당한 부담이었다. 자연히 내 인중에 내 천(川) 자가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남궁현의 도발과 남궁령령의 만류 사이에서 이맛살을 찌푸리며 갈등하는 구도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인상 펴라는 소리 안 들려? 예전처럼 강도 높은 수련을 다시 시작해볼까? 남편이라고 봐주리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너 잘 알지? 내가 하려고 맘먹으면 뭐든 하는 거.' 재빨리 거짓 미소를 지으며,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남궁현 공자, 제갈혜 소저, 백년해로하시오! 오래 오래 잘 먹고 잘 사시오!" '너 미쳤냐! 니 놈이나 잘 먹고 잘 살아라!' 머릿속에 울리는 남궁현 녀석의 전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팔짱끼고 서서 냉랭하게 흘겨보는 령령 때문에 식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억지 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우우욱, 소화한테 졸라서라도 전음인지 뭔지 꼭 익히고 말 테다. 네 놈 돌잔치 때 두고보자!' -점소이 작삼 완결- 여기까지 읽으느라 수고들 하셨습니다. 모자람도 많았고, 아쉬움도 남는 작삼이 드디어 그 막을 내렸습니다. 제 처녀작이자, 첫 출판작이자, 첫 고배를 안겨준 작삼이 이렇게 대미를 마감하게 되네요. 다음 달부터 냉혈마녀로 찾아뵙겠습니다. 냉혈마녀는 작삼의 또 다른 주인공, 남궁령령의 이야깁니다. 필시 작삼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겠지만, 엄연히 독립된 또 다른 이야기가 될 겁니다. 시점 하나 바뀌는 것으로 얼마나 생소해질 수 있는지 보여드릴 작정입니다. 서로 맞물리면서도 엇갈리는 흐름을 나름대로 흥미롭게 그려볼까 합니다. 성격도 흐름도 그 궤를 달리 할 예정입니다. 일단 주인공부터가 무협소설에서는 생소한 축인 여성입니다. 간결한 문체면서 부드러운 어조를 유지해야하는데, 그게 생각처럼 그려질지 모르겠습니다. 웬만하면 질주도 거의 참여를 하려 합니다. 작삼을 쓰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해 버렸습니다. 냉혈마녀에서는 약간이나마 성장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만, 과연 뜻대로 될지 의문입니다. 그 동안 안녕히 계십시오. 그럼 이만. 묘한 올림. =+=+=+=+=+=+=+=+=+=+=+=+=+=+=+=+=+=+=+=+=+=+NovelExtra(novel@quickski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