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 고교 일진협회※ 






♡프롤로그 









철조망을 사이로 땅이 갈라지고 

바다가 갈라지고 

하늘이 갈라져 버린 나라. 


심지어 몸과 마음도 둘로 나뉘어진 21C 한반도에는 지금 

총과 탱크대신에 

사시미와 봉고차가 난무하는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명 조폭과의 전쟁. 





검찰들 마저도 벌벌 기는 3대 전국구 조직폭력배. 

강호파의 사아칸(39세). 

구제파의 소이켠(22세). 

대파의 한동구(33세). 



그들과의 전쟁을 선포한 시다바리 조폭이 있었으니 

어디가서 그 이름을 대면 아무도 모르는 

심지어 신발가게 알바생이냐는 질문을 받게 될, 


쓰래빠의 보스. 연개소리였다. 



그녀의 전쟁선포 이유는 나름대로 심오했다. 


자신이 미국에 유학을 가있는 동안 미친개에게 물려 돌아가신 

쓰래빠의 전 보스였던 

자신의 아버지. 연개소문의 복수를 하기위해서.. 

모든 조직을 해산시키고 미친개를 찾아 죽여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연개소리의 최종 목적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쓰래빠의 조직원은 축구팀보다 더 적은 10명이 전부였고 

그 중에서도 그녀가 믿을만한건 전국구에서도 탐을 내고 있는 

연개소문의 오른팔이었던 이민규(21세)와 

연개소문의 왼팔이었던 변태기(21세)가 전부였다. 




그래서 그녀는 결심했다. 


우선 쓰래빠의 멤버를 늘리자고.. 



비록 그 인원이 적더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만 말이다. 

하지만 쓰래빠의 보스가 힘없는 여자에다 양아치 집단만도 못한 조직이라는 것을 

안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내저었고 멤버영입 한달이 지난 후에도 쓰래빠의 인원은 

고작 10명이 전부였던 것이다. 



결국 연개소리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고 

몸과 마음은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그러다가 냉철하고 판단능력이 뛰어난 이민규가 솔깃한 의견을 내세웠는데 

그건 바로 고등학생들 중 뛰어난 실력자들을 조직에 영입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조폭들 중에는 중,고교시절 속된 말로 조금 놀았다는 사람들이 

주를 이루었기때문에 연개소리는 이민규의 말도 꽤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방법에도 약간의 문제는 있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죽을 지도 모르는 이 싸움에 끼어들려고 할것인가. 


연개소리는 그들을 설득시키는 것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있는 거라곤 타고난 미모뿐이었던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내었다. 



"미인계로 모두 쓰래빠를 신게 만들겠어. 후훗." 



연개소리는 일단 이민규에게 전국 일진명단을 만들어 올 것을 명령했다. 


그로부터 일주일후. 









"명령하신 명단입니다." 



"그래? 수고했어." 









연개소리는 이민규에게서 서류봉투를 건내받았다. 

그리고 봉투에서 나온 것은 이민규의 깔끔한 외모만큼이나 정리가 잘 된 

전국 각 고등학교에서 내놓을 만한 녀석들의 명단이었다. 


연개소리는 한장 한장 넘겨가며 서류를 눈으로 읽어내려갔다. 









①서울S고교 3학년. 새신. ②서울H고교 3학년. 신유인. 

③대전K상고 3학년. 유시호. ④대구G고교 3학년. 강호두. 

⑤인천B고교 2학년. 김희웅. ⑥부산L고교 3학년. 이시백. 

. 
. 
. 
. 
. 








"다들 학교에서 한 딱가리하는 놈들입니다. 형님." 









짙은 눈썹을 위아래로 꿈틀거리며 변태기가 자신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연개소리는 그런 변태기를 힐끔 쳐다보다가 일진 명단이 적힌 종이쪼가리로 

다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모두 각 지역에서 유명한 녀석들이지만 

특히 서울S고에 다니는 새신을 눈여겨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연개소리는 이민규의 말에 다시 앞장을 넘겨보았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새신이라는 이름은 첫번째장 맨위에 있었으니깐 말이다. 









"보통 고등학교에서 짱먹는다는 녀석들 10명보다 이녀석 한명을 영입하는 것이 

훨씬 더 조직에 힘을 줄만큼 그 값어치가 뛰어난 녀석입니다." 









연개소리는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녀석이길래 강호파도 탐내는 천하의 이민규가 저리도 칭찬을 하는지 말이다. 

그랬기에 연개소리는 귀차니즘으로 읽지않았던 아래의 신상정보를 읽어보기로 했다. 






─────────────────────────────────────────────────── 
서울S고 3학년. 새신(나이 19세). 

부친과 모친 모두 살아계심. 형제는 없음. 

현재 강남에 거주. 서울 200개 고등학교를 모두 재패한 알아주는 실력자. 

서울 중,고교에선 이시대 새로운 신(神)이라는 뜻으로 "신이"라고 불리어짐. 

중2때 서울 B중에 다니던 김치한에게 전치 8주의 상처를 입혀 퇴학당할뻔한 위기에 놓임. 

그러던 중 김치한의 부모님과의 합의하에(※아무래도 돈으로 합의본것 같음) 서울K중으로 전학을 가게 됨. 

하지만 한달간 가출을 함과 동시에 무단결석으로 서울K중에서 서울Y중으로 또 한번 전학을 감. 

그밖에도 고1,고2때 3번의 전학끝에 현재 서울S고에 재학중임. 
─────────────────────────────────────────────────── 









연개소리는 서울200개 고등학교를 모두 재패했다는 글귀에 유독히 눈이 갔다. 

이건 완전 만화책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긴 지금 자신이 저지르려고 하는 일도 만화 스토리같기는 피차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뭐, 그놈도 꽤 쓸만한 놈인건 사실이지만 

2번에서 6번까지도 절대로 만만하게 보시면 안됩니다. 형님." 



"2번에서 6번?" 









변태기의 말에 연개소리가 명단에 적힌 2번에서 6번까지를 

죽 훑어보며 변태기에게 되물었다. 









"옙! 형님. 아, 그리고 이건 참고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건데요. 

잠시 귀 좀." 









주변을 흘끔흘끔 살피는 척 연기를 하며 연개소리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미는 변태기. 

그리고 연개소리가 귀를 가까이 대어주자 변태기가 귓속말로 이야기했다. 









"그녀석들 생긴게 또 장난이 아니랍니다. 요즘 시대가 만능엔터테이너 시대라 보니 

학교짱에다가 얼짱까지 도맡아한다는 소문도 있고요. 아차. 그리고 또 중요한 사실은 

고놈들 모습이 꼭 제 2년전 모습을 보는 것 같다는 거죠. 하하하." 









연개소리는 변태기의 입에서 귀를 뗐다. 









"음흠흠!!" 









그리고 이유없이 헛기침을 하였다. 

아마도 잘생겼다는 말에 귀가 솔깃한 모양인듯 했다. 


변태기는 얼굴을 붉히며 창가쪽으로 뒤를 돌아서는 연개소리를 보자 

꽤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대었다. 


연개소리는 얼굴을 붉힌체 창밖 도시풍경을 바라보다가도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두어번 저은 후 다시 뒤돌아 이민규와 변태기를 보았다. 









"그럼 이 녀석들만 꼬시면 되는거겠군." 



"일단 이 여섯명을 중점으로 우리파에 영입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여섯명만 보유한다면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녀석들도 족히 50은 될것입니다." 









이민규가 딱 부러지게 말하자 연개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은?" 



"다음은 놈들에게 싸우는 방법을 제대로 가르쳐야 겠죠." 









이민규의 표정은 비장했고 연개소리는 그런 이민규가 믿음직스러웠다. 

연개소리는 일진명단을 다시금 훑어보았다. 

명단에 쓰여져 있는 총 인원은 650명. 

이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서울S고교 짱이라는 새신. 

그리고 서울H고교 짱, 신유인. 대전K상고 짱, 유시호. 

대구G고교 짱, 강호두. 인천B고교 짱, 김희웅. 부산L고교 짱, 이시백. 

이 여섯명이였다. 



일진계보를 본 연개소리는 내심 기뻤지만 고민이 하나 생겼다. 

과연 이들을 어떤 방법으로 쓰래빠를 신게 만들것인가. 


이것이 바로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수로 이 녀석들을 꼬시지?" 









연개소리는 이민규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그 답변은 이민규가 아닌 변태기가 하였다. 









"형님, 남자를 꼬시려거든 우선 남자를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그럼 역시 약속을 하는 것이 좋겠지?" 



"그게 아니지요. 남자는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아주 뇌출혈한(내추럴한) 만남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만날려면 형님께서 당연히 가방을 매셔야지요. 

테이크 어_ 빽!(Take a bag!)" 









연개소리를 바라보는 변태기의 눈에는 사뭇 진지함이 배어있었다. 

연개소리는 변태기의 그런 눈빛을 마주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학교에 가라고?" 



"예엣_! 바로 그거지요. 학교에 가서 아주 자연스럽게 접근하시는 겁니다." 



"그 다음엔??" 



"다음엔 뭐 치마를 올리시야지요." 









따악_!! 



연개소리의 표정이 싸악_ 굳어지더니 손바닥으로 서슴없이 변태기의 머리를 한대 내려쳤다. 









"이새끼가 지금 누굴 창녀로 아나?!!!" 



"혀,형님!! 농담입니다. 농담!!" 









변태기는 팔로 머리를 막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씨이씨이. 죽을라고." 



"태기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뭐얏?!!" 









변태기의 편을 들고 나서는 이민규의 말에 연개소리는 거의 폭발할 지경이였다. 









"놈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것까진 좋을 듯 합니다." 









연개소리는 이민규를 노려보았지만 그것도 이민규가 말을 잇기전까지였다. 









"형님을 좋아하게 만드십시요." 



"....뭐? 날 좋아하게 만들어라고?" 



"예." 



"그게 말처럼 쉬운건줄 알아? 그리고 이 많은 인원이랑 다 사겨란 말이야,뭐야?" 



"사귀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가 아닌 그냥 친구로써 형님을 좋아하고 믿게 만드시라는 겁니다." 



"이민규. 지금 니말은 나보고 남장이라도 하라는 거냐?" 



"그렇습니다." 



"하.." 









연개소리는 어처구니가 없어 더이상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 









"이민규, 너 날 tv로 보는거지? 엉? 내가 여자보스라고 우스워?" 



"형님, 고정하시지요." 



"변태자식, 넌 벽보고 서 있어!!" 



"아. 예에_" 









변태기는 연개소리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벽쪽으로 몸을 돌려 밋밋한 벽을 바라보았다. 









"후. 좋아. 니말대로 남장이던 변장이던 모두 해주지. 

대신 그자식들한테 탄로라도 나는 날에는 각오하는게, 

아니 그때 그순간부터 넌 내 개가 되는거야. 내말 알아들어?!" 



"연개형님께서 돌아가신 그 순간부터 이미 전 형님의 개가 되었습니다." 

(※모든 이들은 연개소문을 연형님이 아닌 연개형님으로 불렀다.) 








순간 연개소리는 할말을 잃었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이민규는 그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부하인것을 말이다. 

그 어떤 힘든 상황이 와도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엄연히 한 조직의 보스로써 남장을 하면서까지 조직원을 구한다는 사실이 

창피할 뿐이였다. 









"시끄럽고. 이번주 안으로 당장 학교에 갈 수 있도록 전학준비해." 



"첫번째 대상은?" 



"알면서 왜 물어?! 서울S고. 새신이다." 









이렇게해서 그녀만의 조폭과의 전쟁이 시작된것이다. 

비록 현재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과 이민규, 그리고 변태기가 전부이지만 

언젠가는 한반도의 모든 이들이 또 전국구 No.1 강호파의 보스 사아칸이 쓰래빠를 신게 될 

그날만을 기다리며.. 


정체불명의 미친개를 붙잡아 자신의 아버지 무덤 앞에 무릎을 꿇게 할 그날만을 기다리며 

그녀는 전국의 일진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로 한다. 


그리고 훗날 사람들은 고등학생 일진들을 모아 만든 조직 쓰래빠를 


전국 일진 고교협회라 불렀다. 






♡1 








서울S고. 





수근수근. 

소란소란. 





거참. 사람 처음 보나? 대게 시끄럽구만.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나를 보며 궁시렁거리는 교복쟁이들. 

하긴 그럴만도 했다. 


무스로 앞머리를 깔끔하게 쓸어넘긴 민규와 머리를 샛노랗게 탈색한 태기가 

검은 정장을 입고 내 양옆에서 걸어가고 있었으니깐. 


그나저나 남자교복도 꽤 입을만은 한데? 









"저 떡대들은 뭐야?" 

"가운데 저새끼 전학생인가 본데?" 

"꺄아!! 장난아니다~!! 몇학년일까??" 









나원참,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어쨋든 머시매든 가시네든 간에 너나 할거 없이 떠들어대는 아이들을 

태기가 한번 째려봐주자 소란은 잠시 잠잠해졌고 우리 세사람은 그렇게 녀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교무실을 찾아갔다. 



하. 지. 만.-_- 









"너희들 알기는 알고 가는거야?!" 









도대체 교무실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건지 

벌써 몇번째 층을 오르락 내리락거리고 있는 중인지 모르겠다. 

덕분에 다리알이 더 팽팽해진 기분이다. 

이걸로 일주일간 계란 후라이 걱정은 하지않아도 될듯 싶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걷고 여러 교실을 지나고 

다시 계단을 내려온 끝에 우리 세사람이 서 있는 곳은 학교 건물 옆 화단이었다. 









"아,씨펄. 종아리에 알배긴것 좀 봐. 이게 다 니놈들 때문이야! 

제대로 알아봐야 할 거 아냐?!" 









난 화단 근처에 있던 큰 돌멩이에 대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바지를 걷어보았다. 









"에이~ 형님 다리알은 옛날부터 알아줬잖습니까? 

저는 맨첨에 형님 치마입은거 보고 무슨 육상선순줄 알았다니깐요? 하하." 



"음흠흠!!" 



"왜?" 









굳어있는 내 안면근육을 눈치챈 민규가 주먹을 입에 대고 헛기침을 해보인다. 

그래봤자 변태기 저놈이 어지간히도 알아듣겠다. 

되리어 민규에게 되물으며 뒷주머니에서 던힐이라고 적힌 담뱃갑을 꺼내드는 그런 놈이였으니깐. 



담배 한대를 꺼내어 입에 무는 변태기. 

그리고 라이터를 켜 불을 붙이는 얄미운 인간. 




팍!! 







"악. 뜨거!!" 







난 앉은체로 녀석의 발을 힘껏 밟아버렸다. 


그러자 담뱃불에 데였는지 라이터 불에 데였는지 

태기는 담배와 라이터를 모두 손에서 놓아버렸다. 







"개새끼, 한번만 더 내 다리알이 어쩌니하면 

그땐 담배 한보루를 콧구녕에 쑤셔 박을 줄 알어!!" 







그런데 그때였다. 


드르륵. 머리위에서 창문이 활짝 열리더니만 머리에 고이 붙어있는 머리칼보다 

도망간 머리칼이 훨씬 더 많은 노인네가 우리를 보고 있는게 아닌가. 


민규와 태기는 노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도 머리를 뒤로 젖혀 노인을 올려다 보았고. 







"누구신지..?" 







우리 세사람을 보며 벙져있는 노인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에 대답은 하지않고 창문안을 들여다 보는 민규와 태기였고 

잠시후 태기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한다. 







"오호! 디스 이즈 티쳐룸?" 







태기의 물음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체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 

정말로 교무실이 맞는 듯. 태기는 창틀을 짚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에 노인은 더더욱 황당해하며 뒤로 물러섰고. 

대충 상황파악이 되었던 민규는 태기의 다리를 부여잡고 밖으로 끌어내었다. 







"혹시..연개소문군?" 



"네?..아,예." 







바닥에서 일어난 나를 보며 노인이 물었다. 

(남장을 해야 했기때문에 이름은 아빠의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다. 

물론, 모든 서류는 민규가 위조한 것이었다.) 







"그런데 누구세요?" 



"전 이 학교 교장되는 사람이올시다." 



"예..교장..교장.. 네에?! 교장요??" 







저 노인네가 교장이란다. 


그렇게 난 교장이라는 인간과 화단에서 첫 대면을 하였다. 

뭐 교장선생은 창밖으로 나를 보았지만. 







"영감, 우리형님." 







파악!! 







"윽. 그,그게 아니라 교장선생님, 아무쪼록 우리조카 잘 좀 부탁드립니다." 







하마트면 탄로날뻔 했다. 

그나마 중간에서 내가 발로 밟아 위기를 모면했지만 말이다. 

후. 하여간 태기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네, 걱정마십시요. 하하..하." 







우째됐던 지금 우리 세사람은 교무실 안에 들어와 있고 

교장과 이것저것 앞으로의 내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였다. 

그런데 저 교장선생 왜 저렇게 긴장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다른 선생들 표정은 또 왜 저렇고. 

누가 보면 꼭 우리가 돈 뜯으러 온 사람인줄 알겠네. 







"이왕이면 3학년 14반으로 넣어주십시요." 







민규가 말했다. 


3학년 14반. 

바로 새신이라는 녀석이 들어있는 반이였다. 







"네? 3학년 14반 말입니까?" 



"왜, 문제있습니까?" 



"아, 그건 아니지만.. 그반에 꼴통놈들이 많아서요." 



"상관없습니다. 무조건 그 반으로 넣어주십시요. 돈은." 



"아~ 무,물론이죠!! 하하." 







민규의 말을 끊어버리며 손을 마구 흔들어대는 교장이였다. 

하긴, 학교에 나를 받아주는 조건으로 거금을 받았다는 걸 다른 선생들이 알면 좋을건 없겠지. 







"그럼 교장선생님만 믿고 저희들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하. 네, 조심히 가십시요." 







민규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허리까지 굽히며 인사를 하는 교장선생. 

정말 나약한 노인네다. 


그렇게 민규와 태기가 교무실 문쪽으로 걸어가고 

내가 자신들을 바라보면 태기녀석이 손짓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해댄다. 


물론,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태기가 뭘 말하는지.. 태기의 정신세계도.. 







"참 듬직한 삼촌분들을 뒀구나. 황선생님?" 







민규와 태기가 나가자 교장은 내어깨를 손바닥으로 살짝 감싸며 황선생이라는 사람을 불렀다. 

그러자 연갈색 렌즈의 색안경을 낀 여자가 또각또각 구두굽소리를 내며 나에게 걸어왔다. 







"네?" 







나를 한번 쳐다본후 교장에게 묻는 여자. 

오~ 성깔 좀 있어보이는데? 







"조회시간에 이 아이 좀 데리고 가세요. 황선생네 반이니깐요. 

자, 인사해야지? 너희 담임선생님이시다." 



"안녕하세요? 연개소리, 아니 연개소문이라고 해요." 







난 고개를 빳빳히 쳐들고 인사를 했다. 

그야말로 말로만 말이다. 







"꽤 건방진 아이로군요. 알겠습니다, 교장선생님. 

소문이라고 했지? 날 따라오렴." 



"그러죠. 뭐." 







건방지다라.. 


쳇, 색안경 니가 내 담탱이라서 봐준다. 


난 3학년 14반 담임이라는 색안경을 따라 교무실에서 나왔다. 







또각또각. 

여자의 구두굽 소리. 



정말 듣기싫다. 

마음같아선 발로 확 걷어찬후. 굽을 분질러 버리고 싶지만 

우리 쓰래빠 조직을 위해 내가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젠장할. 







"너같은 애들이 많아서 친구 사귀는 데에는 별 문제 없을거야." 







계단을 오르며 여자가 말했다. 


너같은 애들? 썩_ 듣기 좋은 말은 아닌데? 







"너희 삼촌들 건달이니?" 







이또한 여자가 한말이었다. 







"네." 



"당당하구나." 



"쪽팔릴건 없잖아요?" 



"그러니깐 비정상이지." 



"네?" 







드르륵_ 



여자의 거북스런 대사에 난 째려보며 물었지만 

어느새 교실앞에 도착한 여자가 앞문을 험악하게 열어재꼈다. 




웅성웅성. 

시끌시끌. 





문이 열리자 돼지우리를 연상시킬 만큼 소란스러운 잡음이 복도 밖으로 새어나와 

난 귀를 막아야만 했다. 




꿀꿀꿀. 

멍멍멍. 



완전 동물농장이 따로 없구만. 



난 여자를 따라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시끄러워!! 그만 입 못 다물어?!!!" 







탕탕. 교탁 옆구리를 손바닥을 두드리며 여자가 꽥꽥 고함을 질렀다. 

그에 조용해지는 3학년 14반 녀석들. 

아마도 전학생의 등장에 잠시 입을 다무는 것 같았다. 







"우리반에 전학생이 왔다. 또 싸우지말고 친하게 지내도록. 

넌 저기 빈자리에 앉아." 







이거 대접이 왜이래? 







"이게 다예요? 제소개는요??" 



"넌 니소개가 하고 싶니?" 







한심하다는 말투로 나를 흘겨보는 여선생. 


당신이 얄미워서라도 해야겠어! 







"물론이죠!" 



"그럼 하던가." 







윽. 재수없어. 


어쨋든 난 여자를 의식해 큰소리로 내소개를 했다. 







"안녕! 난 연개소문이라고 한다. 너희들과 잘 지내고 싶다!" 



"풋~! 아하하!!" 

"야, 저새끼 지금 뭐라고 씨불렁거리는 거냐?" 

"킥킥킥. 연개소문이래. 하하하!" 







그런데 이 웃음소리는 뭐다냐? 내 목소리가 그렇게 우스운가? 

딴에는 티안내려고 굵게 낸건데. 


그나저나 어떤 새끼가 우리아빠 이름을 비웃은 거야?! 







"다했음 들어가봐." 







마치 이런 상황을 예측했다는 듯이 여자가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존심 상해. 전부 다 가만 안둘거야! 


난 이를 악 물며 2분단 맨끝 빈자리로 걸어갔다. 

내가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자 피식피식 웃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건방진 녀석들이었다. 


참자참자. 어린것들이 뭘 알겠니? 


그렇게 난 부처의 마음이 되어 놈들을 너그러이 용서해주기로 하며 빈자리에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만약 돼지였음 인기가 많았을 법듯한 뚱뚱한 녀석이 

책상에 얼굴을 묻고서 웃어대었고 

이번에도 난 녀석의 머리를 책상에 박아버리려는 내손을 간신히 진정시켜야만 했다. 



난 여자가 조회를 하는 내도록 반녀석들의 뒷통수를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염색을 하고 파마를 한것이 그야말로 불량스러워 보이는 녀석들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새신이라는 놈은 도대체 어떤 새끼야? 

사진을 안 봤으니 알 수가 있나. 


그렇게 얼굴도 모르는 새신이라는 녀석을 찾고 있는데 옆에서 반가운 소리가 

내 귓구멍을 자극시켰다. 







"신아, 오늘 우리 애들끼리 술 빨러 가는데 같이 갈래?" 







신..신.. 


역시 새신을 말하는 거겠지? 


난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고 그곳에는 온갖 아양을 떨어대는 빡빡머리와 

대답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까만머리가 앉아있었다. 


내 눈썰미가 정확하다면 빡빡머리는 씨다바리고 

까만머리가 새신일터. 

내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좌르륵 번졌다. 


새신을 찾아서냐고?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더 정확한 이유는 놈이 꽤 반반하게 생겼기때문이다. 


후후. 일단 면상은 통과다. 







띠리리리리리리리릴리♬ 




종이 울리고 드디어 기다렸던 쉬는 시간 10분이 다가왔다. 



스윽_ 난 의자를 밀고 일어나 새신, 아니 새신의 짝에게 다가갔다. 







"뭐야?" 







내가 자신의 옆에 서서 노려보자 빡빡머리가 

나름대로 인상을 써재끼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인상 한번 드럽군. 







"비켜." 







멋드러지게 폼나게 내가 말했다. 

진짜 사나이답게 말이다. 







"지금 나보고 하는 소리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어보이는 빡빡이. 







"어. 너보고 하는 소리다." 



"너.. 좀 놀았냐?" 







내 배짱에 경계를 하기 시작하는 빡빡이였다. 

짜식_ 쫄기는. 

넌 탈락이야.(어차피 명단에도 없었지만.) 







"그래, 존나게 놀았다!" 







암 어렸을때 소꿉놀이 좀 했지. 







"나한테 원하는게 뭐야?" 







이거 웃기는 놈일쎄? 







"나랑 자리바꿔." 



"왜..왜?" 



"거 말많네. 콰악!" 







난 한손을 높게 쳐들며 빡빡머리를 때리려는 시늉을 해보였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박력있는 모습이었던것 같다. 







"비..비켜줄게. 어렵지도 않은데 뭐." 







역시 예상대로 몸을 움찔하며 허둥지둥 가방을 챙기는 빡빡이였다. 

그렇게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건만 나를 방해하는 녀석이 나타났으니. 

바로 새신이었다. 







"그냥 앉아." 







시선은 창밖을 향한체 입만 궁시렁대는 새신. 


내가 마음에 안드는 건가? 하긴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할리는 없지. 







"그..그럴까?" 







새신의 말에 빡빡이는 우리 두사람의 눈치를 봐가며 다시 의자에 궁뎅이를 붙였고 

"쓰읍!" 내가 인상을 쓰며 입모양을 해대자 뒷통수를 긁적이며 빡빡이가 말했다. 







"역시 난 치질이 있어서 저기에 앉는게 좋겠어." 







결국 되도 않는 내인상에 쫄아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내자리로 가버리는 빡빡이였다. 

다행이도 새신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질않았고 난 털푸덕. 의자에 앉았다. 







"내이름은 연개소문이라고 한다. 넌 이름이 뭐냐?" 







난 새신이야.라고 말해. 어서. 


난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건만 새신은 귓구멍이 막혔는지 창밖만 보고 있었다. 

지금 혼자 영화찍는거야,뭐야? 

왠지 자존심이 상했지만 조직을 위해 자존심 하나 굽힐수 밖에 없었다. 







"너 새신 맞지?" 



"........."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새신이였다. 

자기 이름을 어떻게 아냐. 뭐 그런거겠지. 







"니짝이 말하는 걸 들었어. 뭐 지금부턴 내가 니짝이지만." 



".........." 







이봐. 왜 그렇게 쳐다보는거야? 

무서워서 말도 못걸겠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너 쓰래빠 신을래?" 







아악. 이게 아니지. 나도 참, 허허. 


뜬금없는 내말에 한쪽 눈을 찌푸리는 새신. 

나도 내가 어처구니없는건 다 안다고. 







"아, 그러니깐 한마디로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 이말이지. 하하." 



"........." 



"하하하.." 







뒷통수에서 땀이 다 나는구만. 


당황한 나는 연신 웃기만 했다. 

그러자 드디어 입을 여는 새신이 아닌가. 







"재밌냐?" 



"하..하.." 







거참, 무안하게시리. 


한심하게 날 쳐다보는 새신. 

목젖에서부터 차츰차츰 머리끝까지 화가 끓어 오르지만... 


.....조직을 위해서다. 


난 조직을 위해서라며 대뇌에 세뇌시켰다. 







"진심이다. 너랑 친해지고 싶다." 







난 다시 목소리를 깔며 새신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그렇게 손을 내미는데 뻘쭘하게 내손을 탁. 쳐버리는 왕싸가지 새신이었다. 

그것도 콧방귀를 뿡. 끼면서 말이다. 

훗, 깡다구 한번 맘에 드는구만.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새신은 나랑 앉기가 싫었는지, 아님 화장실이라도 가려는건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키도 통과! 



그런데 그때. 



드르륵. 쾅!! 


교실 뒷문이 열리고 정체불명의 인간들이 나타난것이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야!!개새끼 새신!! 씹팔, 나랑 맞장떠!!!" 


"신발새끼, 저기에 있네!!" 







식하게 생긴 녀석들이 새신을 발견하곤 무섭게 달려들었다. 

각자 손엔 파이프를 하나씩 들고 말이다. 







"이야아!!" 







그것을 그저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 새신. 

놈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근처에 왔을때쯤 내가 크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스퇍!!!" 







내잉글리쉬에 홀리기라도 한듯 일제히 제자리에 멈추어 버리는 녀석들. 

좋았어. 일단 기선제압에는 성공했다. 

(어디까지나 지생각임.) 







"이새끼는 뭐야?" 


"글쎄, 첨보는 놈인데?" 


"새끼가 뒈질려고." 







뭐라고 꽁시렁거리는 거야? 


난 영화속 한장면처럼 멋나게 녀석들을 째려보았다. 

훗. 새신 잘 보라고. 너도 내가 마음에 들거다. 



그렇다. 난 새신에게 잘 보이기위해 싸움에 끼어드는 것이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새신에게 덤비는 이녀석들을 내가 무찌른후 새신에게 호감을 받는거다. 

그렇게 조금씩 신뢰가 쌓여가고 나중엔 녀석을 우리 조직에 영입. 

이것이 내계획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놀랄건 없다. 

기본이니깐. 후훗. 







"이새끼가 야리네?" 







자기 배를 믿어서 그런건지 다른 놈들과는 달리 파이프를 들고 있지않은 떡대가 

손바닥을 펼쳐들며 겁을 주었다. 

하지만 난 겁먹지 않았다. 

왜냐! 난 쓰래빠의 보스이니깐. 







"너희들의 상대는 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안봐도 비디오다. 새신은 지금 많이 놀랐을 것이다. 

좋아. 조금 더 밀고 나가볼까? 







"너희들 같은 조무래기들은 나혼자서도 충분하다. 덤벼라!" 



"이게 진짜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퍼억!! 




기어코 내얼굴로 날아와버린 떡대의 묵직한 주먹이었다. 


우당탕!! 


그에 난 한방에 쓰러져 버렸고 교실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줄로만 알았다. 

윽. 이럴줄 알았음 미국에서 럭비라도 배워두는 거였는데. 

그럼 옆치기는 잘 했을 거 아냐. 


난 새신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다가 새신 뒤의 유리창에서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했고 

그들은 바로 민규와 태기였다. 


아까 태기의 손동작을 이제야 알것 같다. 

내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겠다는 뜻이였던 거다. 

내가 맞아 쓰러진 것을 본 민규와 태기의 얼굴은 괴물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안돼. 녀석들을 막아야만 해. 


난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한쪽 손을 머리높이까지 척 들어보였다. 

민규와 태기에게 나서지 말라는 신호였다. 







"지금 뭐하는 거냐?" 







떡대가 물었다. 

난 들고 있던 손에서 중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접어보였다. 

그리고 상큼한 미소또한 잊질 않았다. 







"이..이게 진짜 죽을려고!!" 







뻐억!! 


다시 날아온 떡대의 주먹. 



쿠당. 쓰불, 드럽게 아프네. 

남자의 주먹이 이렇게 아플 줄이야. 

지금까지 곱게 자라온 나로선 남자의 주먹을 처음 맛보는 순간이었다. 







두번. 



저놈한테 두번 맞았다. 







"병신. 나대지마." 







바닥에 넘어져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새신이 말했다. 


젠장. 내계획은 이게 아닌데. 

하지만 두대나 맞고 여기서 포기할순 없어. 


난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둬.. 놔둬. 저새끼는 내가 죽여버릴거야. 윽.." 



"뭐?" 







굳게 쥔 주먹을 내리며 나를 보는 새신. 

난 입술에서 나오는 피를 혀로 핥아내며 씨익 웃어보였다. 

그리곤 주먹을 꽈악 쥐며 떡대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덤벼." 







♡2 










"핫. 좀만한게 간은 배밖으로 나왔구만? 좋아. 소원대로 해주지." 







퍼억!! 




결국 설치다가 한대 더 맞아버렸다. 

이로써 떡대에게 세대를 맞은 셈이다. 


난 지금 민규녀석을 원망하고 있다. 

남장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맞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아아. 금쪽같은 내얼굴.ㅠ_ㅠ 







"아주 죽여주마!!!" 







뒤로 나자빠진 나에게 발을 처드는 떡대였다. 

그리고 떡대의 곰발바닥이 내가슴을 짓누르려 할때 

콰당탕!! 의자 하나가 떡대의 몸통을 덮쳐버린다. 







"아악!" 







의자와 함께 쿵!하고 넘어져 버린 떡대. 

그렇다. 맞다. 바로 새신이 앞에 있던 의자를 떡대에게 집어던진 것이였다. 

한마디로 내 생명의 은인이다. 







"니놈들 상대는 처음부터 나였던 걸로 알고 있는데?" 







목과 손목의 근육을 풀어주며 새신이 말했다. 

오. 멋진 모습. 







"윽..씨발, 개새끼. 죽여버려!!!" 







배위에 있던 의자를 치우고 몸을 가누며 떡대가 소리치자 

한참을 지켜보고만 있던 파이프를 든 녀석들이 이를 악 물어보였다. 


일제히 새신에게 달려드는 녀석들. 







"이야아아!!" 







휘익_ 


그리고 한녀석이 새신에게 파이프를 휘두름과 동시에 그렇게 불공평한 싸움은 시작되었다. 





쨍그랑!! 


새신이 머리를 숙이며 파이프를 피해버리자 애꿎은 유리창이 깨져버리고 

난 들을 수가 있었다. 

태기의 외마디 비명소리를. 

(아마도 유리세례를 받은 듯 했다.) 


하지만 민규와 태기의 걱정도 잠시 난 새신이 싸우는 모습에 집중해야만 했다. 

무기를 든 비겁한 녀석들을 맨손으로 시원하게 상대해주고 있는 새신. 

자신의 얼굴로 날아오는 파이프를 이리저리 피하는 것이 무슨 이소룡같았다. 




휙휙. 무거운 공기를 가르는 파이프 소리를 그저 듣기만 해도 

난 무섭기만 한데 새신은 듣기좋은 음악감상이라도 하는 것 마냥 얼굴이 환해보였다. 


싸움을 즐기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이말이 제법 어울리는 것 같았다. 



파악. 타악. 


초침이 돌고 분침이 한칸씩 움직일때마다 한놈씩 바닥에 쓰러지고 

떡대에게 맞아 얼얼해진 내 볼도 점점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윽." 







떡대를 제외한 나머지 녀석들은 결국 새신에게 두손을 들어보였다. 

얼굴 곳곳 피가 터진 녀석들에 비해 너무도 깨끗한 새신의 피부. 

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한대도 안 맞을 수가 있는거지? 

파이프를 든 녀석들이 멍청한건지 아님 새신이 잘난건지 난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병신새끼들 같으니. 새신!! 덤벼라!!!" 







뒤늦게 나서는 떡대의 모습이였다. 


내가 격투기만 배웠더라면 저 뚱땡이 떡대를 날려버렸을텐데.. 

어린시절 죽어라 공부만 했던게 심히 후회된다. 


......사실은 젝키(※1997~2000년 가요계를 강타했었던 10대 그룹)만 죽어라 쫓아다녔었다. 쿨럭. 







"돼지새끼, 가서 꿀꿀이 죽이나 더 먹고 와라." 







퉤엣. 새신이 교실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후후. 꿀꿀이 죽. 







"지는 신발새끼 주제에!!" 







정말 떡대의 유치한 발언이였다. 

어쨋든 떡대는 우습지도 않은 그 한마디와 함께 새신에게 몸을 날렸고 

곧. 쿠웅! 새신의 발에 차여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으윽." 







부라보 새신~!! 나이스 새신~!! 

내가 그대를 위해 노래 한곡 불러주겠소!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펄쩍!!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이상. 추억의 동요였다.-_- 





떡대는 한방에 일어날 생각을 하질 못했다. 

아니 어쩌면 겁이 나서 하지 않았는건지도 모른다. 


돼지새끼 떡대는 그러고도 남을만큼 구질하게 생겨 먹었으니깐. 







"내가 꿀꿀이 죽이나 더 처먹으라고 분명히 말했지? 

나한테 맞아봤자 니놈 살밖에 안빠져. 어때? 그 비게덩어리 내가 다 제거해줄까?" 







새신은 한손가락씩 안쪽으로 접어보이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하나.두이.서이.너이.다섯. 

정확히 다섯걸음만에 떡대 앞에 도착하였다. 



타닥타닥. 

엉덩이를 뒤로 질질 내빼는 떡대의 비굴한 모습. 

난 바닥에서 일어나 떡대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새신이 말한다. 







"정확히 세대. 안 갚아줘도 돼냐?" 







저녀석 내가 세대맞은걸 어떻게 알았지? 

(누구나 알 수 있음.-_-) 


난 지금 새신에게 이빠이 감동받았다. 







"물론, 갚아줘야지. 그래야 예의지." 







난 씨익 미소지으며 떡대에게 다가갔다. 

나를 노려보는 떡대놈. 훗. 니가 노려보면 워쩔건데? 

너같은 돼지새끼는 하나도 안 무섭다고. 


난 쓰래빠를 신은 발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그리고 떡대의 얼굴에 비비려는 찰나에 드르륵_ 교실문이 열렸다. 

뒷문이 아닌 앞문이. 



나와 새신. 그리고 반아이들 모두 앞문으로 시선을 꽂았다. 

어른이었다. 

그러니깐 한마디로 나 연개소리 딱 걸린거다. 







"이게 뭐야?!! 이것들은 아침부터 싸움박질이야!! 

신이 넌 그놈에 주먹 가만히 안놔두면 가시라도 돋니?! 후.. 

긴말 할거 없고 당장 복도에 나가있어!!!" 







이 학교 여선생들은 하나같이 기차화통을 삶아먹었나.. 

목청이 장난이 아니다. 


물이 빠지다못해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여선생이 고함을 지르자 

군말없이 교실에서 나가버리는 새신이었다. 


쯧. 괜히 나때문은 아닐지.. 

하긴, 내가 있으나 없으나 어차피 싸웠을 텐데 나때문은 아니지. 


난 새신을 애처롭게 바라봤다. 

그치만 새신은 이미 나가버린 뒤였고 난 떡대를 밟으려던 발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곤 내자리로 조용히 돌아가려는데 앙칼진 목소리로 여선생이 말했다. 







"넌 뭐야?!!" 







내가 뭐냐니.. 

세상에 별 웃기는 짜장같은 질문을 다 받는군. 







"사람이죠." 







난 여선생에게 대답해주었다. 

정말 진심으로 답한거였다. 







"으..너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거니? 

너도 공범이잖아. 공범! 어디서 시치미를 떼?!" 







엥? 공범이라뇨?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하지만 선생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이미 확신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이를 갈며 선생이 말했다. 







"당장..나갓!!" 









드르륵. 쾅! 




결국엔 죄없는 나까지 나와버렸다. 

정말 억울하다. 

떡대를 한대라도 때렸음 덜 억울하련만.. 


난 2분 먼저 교실에서 나간 새신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복도에 있어야 할 녀석이 어디로 사라진거야? 


그렇게 보이지 않는 새신을 찾아 복도를 두리번거리는데 

방금 막 모퉁이를 도는 누군가가 보였다. 

시커먼 머리통으로 봐선 새신이 틀림없었다. 


난 녀석을 놓칠새라 허겁지겁 달려갔다. 

새신이 돌았던 모퉁이를 돌아 계단을 올랐다. 


한층을 오르고 두번째 층을 오르면 새신은 보이지 않고 녹슨 철제문이 보였다. 


약간 벌어져 있는 문. 

난 문을 열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옥상 담에 기대어 있는 새신이 보였고 

그제서야 난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수가 있었다. 


난 새신의 옆으로 다가갔다. 







"여기에 있으면 혼나는 거 아니니?" 







핫. 모르고 본래의 목소리를 내버렸다. 

그에 날 이상하게 쳐다보는 새신이었다. 


빨리빨리 수습해야 돼. 







"여기에 있으면 혼나는 거 아니냐?" 







난 가래끓는 목소리를 간신히 내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다행이도 고개를 돌려버리는 새신이였고 녀석은 자켓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담배였다. 







"왜 왔어?" 







새신이 담배 한대를 입에 물며 말했다. 

완전 동양판 브래드피트가 따로 없었다. 







"선생님이 나보고도 나가라잖아." 







동양판 브래드피트가 담배끝에 불을 붙였다. 







"줘?" 







담뱃갑을 들어보이는 동양판 브래드피트. 새신. 







"난 안펴." 



"그거 달린 새끼가 꼬바리도 하나 못하냐?" 



"누,누가 못한데?!!" 







못한다.-_- 

그래도 괜찮다. 난 그게(?) 안달렸으니깐. 







"오늘부터 금연할려고 했는데 이거 안되겠구만? 하나 줘!" 







줴길, 하는 수 없지. 한번 펴보는 수 밖에. 


피식 웃어보이며 담배한대를 건내주는 새신에게서 난 담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담배를 당당히 입에 물었고 더욱더 위풍당당하게 새신에게 말했다. 







"불!" 







타앗. 라이터를 나에게 집어던지는 신발녀석. 







"손없냐?" 



"........" 







동양판 브래드피트여서 봐준다. 


난 바닥에 떨어진 라이터를 비굴하게 주워들어 불을 켰다. 

그리곤 담배에 불을 붙인후 한모금을 빨아보았다. 







"켁켁! 콜록콜록." 







으아. 목따거. 

이런걸 왜 피는거야? 맛도 없구만. 


난 입에서 담배를 뺀후 연신 기침을 해대었다. 

그러자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짓는 새신이었다. 







"컥. 콜록콜록. 오해하지마. 

나 원래 필줄 아는데 잠시 금연해서 맛을 잃어서 그래. 콜록." 



"병신. 오늘부터 금연했다메? 몇시간만에 맛을 잃냐?" 







새신은 내손에 쥐어져 있던 담배를 뺏어내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휴. 다행이다. 







"너 어디서 왔냐?" 







담배를 발로 지져끄며 새신이 물었다. 

오우. 벌써 나에게 관심이 생긴건가? 

역시 난 관심 받을 수 밖에 없는 존재란 말인가. 


난 새신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었다. 







"집에서 왔다." 







띠옹. 이건 새신이 뻥지는 소리다. 







"재밌냐?" 



"어? 그런거 아니다." 







난 목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담배를 물고서 날 빤히 쳐다보는 새신. 







"너 목소리.." 







헉. 눈치챈건가? 이럼 곤란한데. 







"왜 그모양이냐? 변성기가 오다가 도망갔냐?" 







윽. 눈치챈게 아니였군. 

그럼 그렇지. 내 이 완벽한 남장을 눈치챌리가 없지. 







"내 목소리가 뭐 어때서?? 

이래뵈도 2004년판 헐크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난 목소리를 더욱더 굵게 내었다. 

그러자 눈살을 찌푸리는 새신이였고 난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너 생긴건 또 왜 그따구냐?" 



"내가 생긴게 어때서?!" 



"꼭 기집애처럼 생겨가지고 비리한게. 미쳤냐?" 







그게 왜 미쳤다는 거야? 

돼지새끼 말대로 신발주제에 짜증나게 구네. 







"힘도 없는게 왜 나대냐고. 맞고 싶어서 환장한거냐?" 







난 또 무슨 얘기라고. 







"널 지켜주고 싶었다." 







이러면 감동받겠지? 후후. 







"변태냐?" 







어랏? 이게 아닌데. 







"그게 아니라, 너랑 친해지고 싶었다고." 



"그만 웃겨라." 







그놈 참 비싸게 구네. 







"너 이름 뭐냐?" 



"이름?" 



"그래." 







아까 내가 소개할때 뭘 들은거야? 







"연개소문. 연개소문이야." 



"개소문? 그게 이름이냐?" 







아악. 개소문?? 저게 진짜!!! 







"개소문이 아니라 꽃게할때 그 게소문이야!" 







뻥이였다.-_-; 







"그게 그거지. 승질은." 



"달라!" 



"간댕이가 부었구만? 너 내가 우습게 보이냐?" 







깨갱. 







"아,아니.-_-" 



"벼엉신." 







털썩. 새신은 바닥에 누워버렸다. 


난 새신을 내려다 봤다.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며 푸른 하늘을 향해 감히 담배연기를 내뱉는 새신. 

담배연기가 구름이 되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난 그의 옆에 드러누웠다. 







"별봐라." 







이녀석이 지금 뭐라고 그러는거야?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뭘 보라고?" 



"별말이다. 별!" 







벼얼? 이 시퍼런 아침에 시방 뭘 보라고? 

정녕 새신은 미쳤다는 말인가. 







"별이 어딨는데?" 



"안보이냐?" 



"그럼 넌 보이니?" 



"눈은 폼이냐?" 







난 너무도 당당한 새신의 말에 혹시나하고 뚫어져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전부구만 도대체 별이 어딨다는 건지. 


그렇게 햇빛에 가려진 별을 찾느라 눈에 힘을 너무 주었는지 

피로를 느낀 난 등신같이 잠이 들었나보다. 


꿈속에서 그리운 아빠를 만나 개불과 자장면을 사먹고 

수영을 한 나는 옷깃을 스치는 인기척에 눈을 떠야만 했다. 



그..그런데 이게 웬일? 


내 교복자켓의 단추를 누군가가 풀고 있는게 아닌가. 


화들짝 놀란 나는 눈을 번쩍 떴고 범인을 보았다. 


첫번째 단추를 풀고 두번째 단추를 마저 풀고 있는 처음 보는 여자애. 







"지금 뭐하는 짓이야?!!" 







난 여자애의 손을 뿌리쳐 버리며 바닥에서 일어났고 

주위를 둘러보았을때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껌을 짝짝 씹으며 나를 보는 몇몇 여자애들과 

옥상 한쪽 구석에 모여 앉아 담배를 피고 있는 남자아이들. 


도대체 새신녀석은 어디로 사라진거야?! 



♡3 








새신의 모습은 내 시야 어디에도 포착되지 않았다. 

난 흥분된 가슴을 진정시키며 옷을 벗기려고 했던 변태같은 여자애를 보았다. 







"너희들 뭐야?!" 



"후훗~!!" 









내 물음에 여자애는 간지럽게 웃어보였다. 


마리앙뜨아네트를 연상시키는 

밸밸 꼬은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예쁜 그런 여자애였다. 

웃으니 보조개가 앙증맞게 들어가는 것이 한편으론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 뭐하는가? 

정신은 뻘겋게 물든 변녀인 것을..-_- 


아마 좋아라하는 색도 무지개의 마지막 색깔인 보라색일게 분명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인형도 아마 텔레토비의 첫째. 보라돌이 일것이다. 


마리앙뜨아네트가 말했다. 







"부끄러워 할 거 없어요. 오라버니~♡" 







코맹맹이 주제에 윙크까지 해보이는 앙뜨아네트. 

그런데 오라버니라니.. 

내 살다살다 그런 소리까지 듣게 될줄이야. 


난 인상을 찌푸렸다. 







"오라버니, 전 준비가 다 됐어요." 



"킥킥킥." 

"쿡쿡쿡." 







무슨 준비가 다 됐다는 거야?! 

그리고 남방 단추는 왜 푸는 건데?! 


앙뜨아네트의 친구들로 보이는 여자애들이 재밌다는 듯 낄낄 웃어대었다. 

거기다 모퉁이에 쭈그려 앉아있는 남자들은 

"삐익삐익" 혀루라기까지 불어대었고 말이다. 


이것들 내가 전학생이라고 가지고 노는거 아냐? 







"오빠~ 오빠 이름 개소문 맞죠? 제가 다 알아봤어용~♡" 



"아하하!!" 

"까르르~깔깔." 







앙뜨아네트의 말에 폭소를 터뜨리는 녀석들이었다. 

내 저것들을 그냥!! 







"이 쌍년들이!! 누가 웃으래?!! 존말할때 조둥아리 안 다물어?!!" 




"하..하..흠흠." 

"........." 







방금 저 무시무시한 쌍쌍욕을 내뱉은건 절대 내가 아니다. 

기어코 정말 아니다. 


밸밸 꼬인 머리칼만큼이나 꼬이고 꼬인 성격을 지닌듯한 

앙뜨아네트의 조막만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난 놀라움에 입을 벌려야만 했다. 


앙뜨아네트의 한마디에 주눅이 들어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려버리는 여자애들. 

이거 구지 내가 혼내줄 필요도 없겠는데? 







"오빠, 기집애들의 웃음소리에 상처받으셨지요? 

하지만 제가 따끔하게 야단을 쳤으니 다음부턴 그러지 않을 거예요. 호홋." 







-_- 이번엔 다음부터 너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한때 피아노를 조금 만진듯한 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가식적인 웃음소리를 내던 앙뜨아네트는 갑자기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반짝이는 눈에서 음흉한 눈빛으로 돌변해버린 마리앙뜨아네트. 

갑자기 온몸에 오한이 서리는 것이 심히 두렵기만 하다. 







"흐흐흐.오빵?" 







나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오는 앙뜨아네트. 

그녀가 한걸음 나에게 다가오면 두려움에 난 두걸음 뒤로 물러나고. 

또 다시 음흉한 그녀가 한걸음 다가옴과 동시에 난 도망쳐야만 했다. 







"오빠!! 사랑하는 구만유~" 







하지만. 비러먹게도 스텝이 꼬여버린 난 

웨이브를 흩날리며 달려드는 앙뜨아네트에게 붙잡혀야만 했던것이다. 







"아악!! 이거 왜이래?!! 놔!! 못 놔?!!" 



"오빠~ 난 준비가 다 됐다니깐요??" 



"무슨 준비가 됐다는거야?!!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야!!" 








덥썩! 







".........." 







순간 중요한 보석 하나가 잡혀버린 그런 느낌. 

그리고 눈을 깜빡이며 말이 없는 그녀. 





타다닥_ 



난 두 팔로 가슴을 가리며 앙뜨아네트에게서 빠져나왔다. 

바닥에 주저앉은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 보는 앙또아네뜨. 


이런. 내가 붕대를 너무 느슨하게 감았나보다. 







"현아야, 왜 그래? 왜?" 







멍한 표정을 짓는 앙뜨아네트에게 단발머리 여자애가 물었다. 

앙뜨아네트의 이름, 현아인가보다. 


단발머리의 물음에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는 앙뜨아네트의 입을 보자 

내 심박수는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했고 내 입술은 바싹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이로써 내 남장생활은 하루도 채 안되어 끝나버리는 것인가! 


앙뜨아네트가 말했다. 







"뭔가.. 물컹한게 잡혔어." 







우르릉 쾅! 



역시 내 가슴을 만진거였어.ㅠ_ㅠ 

이 변태같은 지지배. 


아차. 이게 아니지. 

나.. 들켜버린 거잖아? 



난 앙뜨아네트의 쟁반같은 두 눈을 보았다. 


앙뜨아네트의 눈은 내 가슴을 보고 있었다.-_- 







"물컹한 거라니?" 







어리둥절해 하며 단발머리가 물었고 

그러다가 뭔가 알겠다는 얼굴로 씨익 웃어보였다. 




이제.. 끝이야. 







"현아.. 너 혹시..? 푸웃~!" 







앙뜨아네트를 보다가 나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단발머리. 

그리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웃어보인다. 


저.. 저것이 시방 어딜 보는거야?! 


그녀의 시선이 꽂힌 곳은 민망하게도 가슴보다 더 아랫부분.. 


차마 내입으로 말을 못하겠다.-_-* 







"너무 응큼하다~ 아무리 좋다지만 진도가 너무 빠른거 아냐? 

시험범위를 벗어났다구. 어떻게 뽀뽀도 하기전에.. 거시기를 잡아버리다니.. 

큭큭.." 



"현아야, 그게 정말이야?" 



"우우~~" 







어떻게 저 여자애 친구들도 하나같이 변태일 수가 있는거지? 

아니,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걸까? 


그리고 난 앙뜨아네트의 말에 또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그런가? 하긴 남자가 가슴이 나왔을리가 없지. 

그럼 역시.. 나 거시기 만진거야? 꺅!! 어뜩해!! 

오빠 미안해용♡♡>_<" 







말로는 미안하다지만 표정은 영 미안해하는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더 즐기는 모습. 


어찌됐던간에 들키지 않은건 천만다행이지만 

저 아이들에게 적응이 안되는건 사실이다. 







"에이~ 오빠, 그렇다고 부끄러워 할것까진 없어요. 

그냥 제가 다 책임질게요!!" 







그렇게 미친 앙뜨아네트는 또 한번 나에게 달려들었다. 

한마리의 여우, 아니 늑대처럼.. 







"오지마!! 오지말라고!!" 







난 기겁을 하며 소리쳤고 







"오빠아♡" 







그녀는 좋다고 달려들었다. 





튁! 




그리고 그때 그녀와 나 사이로 무언가가 떨어졌으니 

그것은 빨간 잿불과 함께 불꽃을 튀기는 꽁초 하나였던 것이다. 

그에 깜짝 놀란 앙뜨아네트는 제자리에 멈추었고 

나와 동시에 꽁초가 떨어진 곳을 올려다 보았다. 



도대체 누가 던진거지? 

혹시.. 새신이..? 


하며 위를 올려다 본 나는 낯익은 얼굴들에 

화들짝! 놀라 그자리에 얼어버리고 말았다. 







"어이, 꼬마아가씨! 그 정도면 됐잖아?" 







방금 그 꽁초는 놈의 것이였는지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말하는 변태기와 

그 옆에서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는 민규가 

학교 옥탑방 위에 보란듯이 서 있었다. 







"저새끼들은 뭐야?" 







방금 전의 지나치게 밝았던 얼굴과는 달리 무섭게 굳어져버린 

앙뜨아네트가 두 사람을 노려보며 혼잣말씩으로 물었고 

태기와 민규의 등장에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지져 꺼버리며 

구석탱이의 남자들이 일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일이 터지고야 만것이다. 

저것들은 또 언제 저위에 올라가 있었던 거야? 







"형씨들 그만 내려오지 그래?" 







몸에 비해 머리가 유난히 큰 남자애가 민규와 태기에게 말했다. 







"우린 형씨가 아니거든?" 







물론 태기가 한말이였다. 







"그럼 호박씨냐?" 



"오~ 저새끼 개그를 아는데? 하하." 







전혀 웃기지도 않는구만 배까지 잡고서 웃어대는 태기. 

난 그런 태기를 보며 쓰래빠의 앞날을 걱정해야만 했다. 


배를 잡고 웃어대던 태기는 뭔가가 생각이라도 났는지 웃음을 멈추며 고개를 들었고 

눈에 힘을 주며 대두녀석을 째려보았다. 







"근데 너 방금 나한테 깠냐?" 



"뭐..뭘까?" 



"말! 말말이다! 이 씨팍새끼야!" 








휘익_.. 퍽!!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옥탑방 위에서 뛰어내리며 

곧장 대두의 가슴팍을 쳐버리는 태기였다. 


오! 멋진 킥! 



앗. 이게 아니지. 

으악!! 저자식이 미쳤나!! 


결국 태기녀석이 먼저 싸움의 불씨를 터뜨려 버렸고 

한숨을 한번 더 내쉬며 민규가 뛰어내렸다. 



타악. 정확한 착지. 







"저.. 저 개새끼들이!!" 







태기에게 차여 바닥에 나자빠진 친구를 보곤 흥분해버린 남자애 하나가 

팔을 척 펼치며 태기와 민규를 가리켰고 

곧 모든 녀석들이 두 사람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형님, 저희만 믿고 후딱 피하십시요." 


"죄송합니다, 형님."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녀석들을 보며 나에게 작게 속삭이는 태기와 민규. 

전자는 태기였고 후자는 민규였다. 







"새끼들 다 죽었어!!" 







남자녀석들은 태기와 민규가 조폭이라는 것도 모르고 

겁도 없이 애송이 주먹을 들고 덤벼들었다. 

그에 가소롭다는 듯 입가에 웃음을 띠는 두 사람이었고 

정확히 3초후 결과가 눈에 선한 싸움은 결국 시작되었다. 







"이것들을 어떻게 요리해줄까? 응? 민규야." 



"대충해." 



"대충? 에이, 대충이란 요리는 없쥐~" 







뒷주머니에서 작은 봉 하나를 꺼내는 태기. 

(그 봉은 태기가 여의봉이라고 불러대던 것으로 플라스틱으로 되어있었다.) 

태기는 여의봉에 달린 단추를 살짝 눌렀고 

그러면 곧 짧은 봉은 마치 손오공의 진짜 여의봉 마냥 길게 늘어나버렸다. 

(어디서 저런걸 구입한건지는 나도 모른다.-_-) 


오랜만에 여의봉을 사용할 수 있게 되어서 그런지 

태기의 얼굴은 정월대보름의 둥근 보름달처럼 밝아보였다. 

어쨋든 싸움은 시작되었고 옥상안은 이제 주먹과 발길질 소리로 가득 차버렸다. 


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옥상입구로 달려갔다. 


비겁하다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쩔수 없지만 난 조직 쓰래빠를 위해서 이런 선택을 한것이다. 

내가 조폭이라는 것을 아이들이 알아선 안된다. 

민규와 태기가 일러준 계획대로라면 새신과 충분히 친해진 다음에 밝혀야만 한다. 

그리고 난 확신했기 때문이다. 

민규와 태기. 

절대 지지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오히려 대두 친구들을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으니깐. 




난 옥상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그때. 타앗. 


누가 내 손목을 잡아버리는 바람에 도중 멈춰야만 했다. 







"오빠!" 







내 손목을 잡은 사람은 바로 앙뜨아네트였다. 


현아..라고 했었던가? 







"........" 







난 현아라는 아이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무슨 할말이 있는 것 같았다. 







"저 진심이예요. 오빠한테 첫눈에 반했어요." 







엑! 갑자기 왜 이렇게 진지한거야? 

아까랑은 영 딴판이잖아? 


난 그 아이의 고백에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후. 난 남장을 해도 인기가 많으니.. 

이거 피곤해서 원. 살 수가 있나. 

그리고 이런 생각밖에 들지가 않았다.-_- 







"개소문 오빠, 좋아해요!!" 







내 손목을 두 손으로 꼬옥 잡고 날 지그시 바라보며 

앙뜨아네트 머리, 현아가 말했다. 



개소문.. 하아. 

또 뒷골이 땡기는 것 같다. 



난 현아의 손을 내쳐버리며 냉정한 어투로 대답해주었다. 







"난 사귀는 사람이 있어!" 



"...네..?" 







꽤나 충격받은 얼굴이다. 

이제 좀 떨어져 나가겠지? 







"더 훌륭한 사람 만나." 







난 멋지게 라스트를 장식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현아는 얼어붙은 것 같았다.) 


이거이거 첫날부터 고백하는 사람이 있으니 앞으로 어찌 생활할고. 

난 마음속으로 행복한 한숨을 내쉬며 교실로 들어갔다. 



아앗!! 신발자식, 여기에 있었잖아?! 


남자애들에게 둘러쌓여 웃고 떠들어대고 있는 새신. 

난 깨우지 않고 혼자 내려간 새신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성큼성큼 녀석에게 다가갔다. 







"여어~ 새신, 너무 한거 아냐?" 







난 의자위에 다리 한쪽을 척 올리며 능청스럽게 이야기했다. 

나름대로의 가게였다. 


그에 내 다리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새신이였고 

난 한술 더 떠 나오지도 않는 가래까지 바닥에 내뱉었다. 







"카악! 퉤_엣,엣.." 







어억!! 이럴순 없어!!! 


깔끔하게 끊기지 않고 구질하게 늘어지는 침. 

이런 부끄러울때가.ㅠ0ㅠ 


그렇게 난 침이 끊기지가 않자 하는 수 없이 손으로 직접 끊을 수 밖에 없었다. 

(새신의 표정은 그야말로 똥이라도 밟은 표정이었다지?) 







"퉷." 







난 침묻은 손가락을 더럽지만 교복에 닦아내었다. 


연개소리, 그냥 방금건 잊는 거야. 

없던걸로 치자구. 


새신은 절대 잊지않겠지만.ㅠ_ㅠ 



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신에게 말하였다. 







"치사하게 혼자 가면 어떡하냐?" 







그리고 드디어 새신이 내 말을 받아쳐 주었던 것이다. 







"그럼 내가 널 모시고 가기라도 해야 한다는 얘기냐? 너 뭐되냐?" 







당연하지! 쓰래빠의 보슨데!! 







"뭐되긴! 그냥 우린 친구니깐. 친군 원래 함께 하는 거다." 







난 목소리를 바닥에 깔며 당당하게 말하였다. 

아~ 진짜. 무슨 영화도 아니고. 나 너무 멋있는 거 아냐? 


그렇게 난 내자신에게 만족하는데 새신은 그렇지가 않은지 피식 코웃음을 쳐보였다. 







"니가 내친구였냐? 난 꼬바리도 못하고 

가래도 존나 더럽게 뱉는 놈 친구로 둔 기억이 없는데?" 




"하하하." 

"푸하하." 







새신의 말에 녀석의 친구들이 웃어대었다. 

역시 그게 문제였군. 

신발의 친구가 되려면 우선 담배와 가래를 뱉을 줄 알아야 하는 거였어. 


난 새로운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드르륵. 쾅!! 







"짱!! 큰일났어!!!" 







이때. 누군가가 교실문을 부실 기세로 소리치며 들어왔다. 

앞머리에 유난히 힘을 준 남자애. 







"무슨 일이야?" 







새신이 묻고 남자애가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옥상에서 2학년 깡식이 애들이 어떤 좀만한 새끼들한테 

보신탕 집 개마냥 졸라 얻어터지고 있어!!" 







아무래도 그 좀만한 년석들은 민규와 태기를 말하는 것 같았다. 

태기가 안다면 또 한바탕 난리 부르스를 치겠군.-_- 







"그게 사실이야?" 







새신 옆에 서 있던 바람머리가 물었다. 







"그래! 진짜라니깐!!" 







앞머리에 힘을 빡 준 아이가 다급히 대답을 하고. 

그러면 곧 움직이지 않길 바랬던 새신이 나즈막히 욕을 내뱉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씨발." 







그리곤 내가 잡을 틈도 없이 옥상을 향해 달려가는 새신이였다. 

거기다가 그 뒤를 쫓아가는 남자아이들. 




헉! 이 일을 어쩌지?!! 



♡4 








철컥. 꽈앙! 




급하게 새신의 뒤를 따라 옥상에 왔을 땐. 

남자아이들은 모두 쓰러져 있는 상태였고 

여자아이들은 눈물을 짜내며 두 팔을 들고 있었다. 



여의봉을 어깨에 짊어지고 여자애들의 앞을 왔다갔다하고 있는 태기와 

담에 기대어 담배를 피고 있는 민규. 

난 새신의 표정을 살폈다. 

인상을 쓴체 바닥에 힘없이 널부러져 있는 2학년 남자애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새신녀석이었다. 







"아직 민증도 없는 쉐리들이 옥상에 올라왔음 하늘이나 구경하고 내려갈것이지, 

어디서 담배를 펴? 담배를! 니들이 이러고 다니는거 니들 부모님들도 다 아냐? 

부모는 지금 이시각에도 쌔가 빠지게 일하고 있는데 니놈들은!" 



"너 뭐냐?" 







여자애들에게 열심히 연변을 토해내고 있는 

태기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버리며 새신이 말했다. 

그에 이제서야 옥상입구를 보게된 태기는 입을 다물곤 두 눈을 깜빡거렸고 

민규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담배를 바닥에 던져버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너 뭐냐고." 







아무 말도 없는 태기에게 새신이 또 한번 물었다. 







"나?" 







여의봉을 든 반대쪽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척 가리키며 반문하는 태기. 

그러다가 새신의 뒤에 서 있는 나를 뒤늦게 발견한다. 







"어랏? 형." 







얼굴이 환해지고 손을 마구 흔드는 것이 아무래도 "형님"이라고 말하려는 듯.-_- 

난 앞으로 닥치게 될 일을 막아보고자 재빨리 새신의 눈을 막아버렸다. 


변태기의 얼굴대신 내 얼굴로 말이다. 







"저,저사람들!!!" 







크고 우렁찬 내 목소리에 깜짝 놀라 말을 중단해버리는 태기와 

자신의 눈 앞에 내 얼굴이 드리워지자 한쪽 눈을 찌푸리는 새신. 

난 대단한 애드립을 해야 했기에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 







여전히 인상 쓴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새신이었고 

난 태기와 민규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저사람들 우리 삼촌들인데 머리가 조금 이상해. 정말이야!!" 







두 사람에겐 정말 미안했지만 내 머리론 도저히 이 방법밖에 생각나지가 않았다. 







"니눈엔 저게 정신나간 것처럼 보이냐?" 







섹시한 턱선이 돋보이는 턱으로 민규와 태기를 가리키며 새신이 말했다. 

그래, 한번만에 믿어줄거라곤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연개소리 포기하진 않는다. 







"그러니깐 11시병이라고. 꼭 11시만 되면 정신이 헤까닥 거리거든. 하하. 정말이야. 

정말이라구. 자, 지금이 11시니깐 못 믿겠음 니눈으로 직접 확인해보면 되잖아." 







난 살짝 옆으로 비켜 서 주었다. 

그리곤 민규와 태기를 무섭게 째려봐주었고 말이다. 


내 눈을 보자 약간 흠칫거리는 태기, 

그리고 옥상이 주저앉으랴 한숨을 내쉬던 민규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러더니만 서로의 마음이 통했는지 나를 위해 멋진 연극의 막을 끌어올린다. 







"아헤헤~ 누님들은 누구세요?? 어랄랏?! 여기는 또 어디야??"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대며 바보연기를 하는 태기였다. 

휴우. 그야말로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온다. 







"아닛! 넌 미스터 변이 아니더냐?! 

슈퍼타이는 또 어디에 팔아먹고 그렇게 호들갑인게냐?" 







정말이지 민규의 연기는 놀라움 그자체였다. 

그렇게 옥상위의 모든 사람들은 벙진체 그들을 바라보았고 

난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야만 했다. 


그러기를 10분째. 







"다,당신은 빡빡머리 이법사?" 



"후후. 어리석은 미스터 변같으니. 난 이법사가 아니라 이박사다! 

너의 두자리 지능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나." 



"이박사..이박사라.. 그렇다면 니놈이 저팔계의 삼겹살을 잘라 

상추에 싸먹었다던 그 이박사라는 것이냐?!" 







-_- 이봐, 이제 그만 할때도 되지 않았니? 

난 웃음을 참는 것도 잠시 끝낼줄 모르는 두 사람을 보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고로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니깐. 







"저팔계의 삼겹살은 참으로 일품이었지. 

다음엔 순대를 만들어 소금에 찍어 먹을 생각이라네." 



"이..이런 야만인같으니라고! 

순대는 떡볶이 국물에 찍어먹어야 제맛이거늘.." 







저것들 아주 재미가 들었구만? 

난 왠지 길어질것 같다는 생각에 녀석들의 연극에 끼어들기로 마음먹었다. 







"삼촌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어서 집에 가서 약먹어야지!! 어젯밤에도 안 먹었잖아!" 







난 민규와 태기에게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졌을때 자그맣게 이야기했다. 







"됐으니깐 어서 내려가." 







내 말에 하던 동작을 멈추고 살짝이 고개를 끄덕이는 민규와 

뭔가를 아쉬워하는 태기였고. 

두 사람은 마지막 씬을 찍기 시작했다. 







"이 저팔계의 웬수!! 내 여의봉을 받아랏!!" 



"으하하하!! 미스터 변, 감히 니가 날 이길수 있을 것 같으냐?! 

어림 십원어치도 없다!!" 







호탕하게 웃으며 옥상문으로 달려가는 민규. 







"게 서랏!! 어허! 서지 못할까?!!" 







그리고 여의봉을 든체 팔짝팔짝 민규를 따라가는 태기. 

그렇게 그들은 연극의 막을 내리며 유유히 사라져 갔다. 


새신과 아이들은 옥상계단을 내려가는 두 사람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리고 이제 살았다싶어 한숨을 내쉬는 나에게로 시선을 돌려버리는 새신이였고 

그에 난 또 한번 긴장해야만 했던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새신. 



쿵쾅쿵쾅. 


내 심장소리가 녀석의 발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오고 

잠시후 새신이 내앞에 섰다. 


나를 똑바로 직시하는 새신과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나, 연개소리. 


드디어 새신이 말했다. 







"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허튼 수작 부렸다간 죽는 수가 있어. 

이 말 명심하는게 좋을 거다." 







새신은 이말과 함께 2학년 애들을 데리고 옥상에서 내려가버렸다. 


난 지금 왠지모를 분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화산속의 마그마가 끓어오르듯 무언가가 머리털 끝까지 용솟아오른다. 


새신.. 신발주제에 니놈이 내 자존심을 깔아 뭉개버렸겠다? 

너야말로 명심하는게 좋을거야. 

나, 쓰래빠의 보스. 연개소리. 

기필코.. 반드시 니놈을 충성스런 내 개로 만들어 버릴테니깐. 

몇일동안 실컷 짖어놓는게 좋을거다. 









\그날 저녁. 






짜악_!! 







"이새끼들이 멍청한 것도 유분수지. 거기가 어디라고 끼어들어!!" 







난 지금 민규의 뺨을 힘껏 내려치며 울분을 토해내고 있다. 

나에게 뺨을 맞자 고개를 숙이는 민규녀석이었고 

어쩔줄 몰라하며 입술을 깨무는 태기였다. 







"형님, 고정하시지요? 저희는 형님이 걱정되서." 







짜악!! 







"누가 니놈들한테 도와달랬어?!! 그정도는 나혼자서도 해결할수 있다고!! 

이새끼야, 넌 그렇게 내가 약해보여?! 엉?!! 약해보이냐고!!!" 







퍽!퍽! 







"욱. 그런거 아닙니다, 형님!!" 







내가 정강이를 차고 무릎으로 복부를 찍어버리자 

태기가 고통을 호소하며 용서를 빌었다. 







"아니긴." 




퍽! 





"뭐가 아니야?!!" 



"형님!! 고만, 고만하십시요. 마이 묵었다 아닙니까?!" 







-_- 그럼 그렇지. 

변태기 니놈이 맞는다고 정신을 차릴 놈이 아니지. 

난 분위기 파악못하는 태기의 말에 어처구니를 잃어 그저 놈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내 눈치를 보며 실실 웃기 시작하는 변태기. 

그런 놈을 보자 기운이 다 빠지는 것 같았다. 







"형님, 이제 화푸셨지요?" 







능글맞게 웃어보이는 태기였다. 







"손들어." 



"예?" 



"당장 벽보고 손들어!!" 



"아,예에_" 







아빠는 정말이지 저런 녀석이 뭐가 귀엽다고 옆에 두고 일을 한걸까? 

난 한숨을 쉬며 의자에 앉았다. 







"내일부턴 절대 학교로 오지마." 



"예,알겠습니다." 







민규가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대답을 하였다. 

그건 그렇고 새신 그놈이랑 무슨 수로 친해진담. 

꽤 비싸게 구는 녀석이라 쉽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난 오늘 학교에서 새신과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다가 생각난 사실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담배와 가래였던 것이다. 


맞어. 새신은 내가 담배를 못펴서 친구로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했었지? 

거기다가 남자가 가래까지 제대로 못뱉으니.. 

난 민규를 올려다 보았다. 







"너 담배 필줄 알지?" 



"옙!! 당연히 필줄 알지요! 기본이지 않습니까?!" 







난 민규한테 물었건만 대답은 나서기 좋아하는 태기가 하였다. 

휘유. 







"야!! 누가 너보고 물었어?!! 어쭈! 벽 안봐?!" 







홱. 

내가 눈을 부릅 뜨고 소리를 치자 잽싸게 벽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태기였다. 







"당연히 필줄 압니다만, 왜 그러시는지.." 







난 민규의 목소리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나 담배 피는 것 좀 가르쳐 주라." 



"예?" 







꽤나 놀란 모양이다. 







"왜? 싫어?" 



"그,그건 아니지만. 갑자기 왜..?" 



"그놈이 담배 피는 걸 좋아하거든." 



"예?" 



"못 알아들었음 됐고. 하여간 담배 피는 것 좀 가르쳐줘." 



"하지만 형님." 







후. 왜 이렇게 군말이 많아? 

역시 민규는 고지식하다니깐? 


왠지 민규는 쉽사리 가르쳐 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난 하는 수 없이 뒤돌아 서 있는 태기에게 소리쳤다. 







"변태기! 나 담배 피는 것 좀 가르쳐 주라." 



"옙!! 물론이죠!!!"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태기였다. 

역시 태기놈한테 배우는 게 더 빠르겠군. 







"형님, 그럼 일단 밖으로 나가시죠?" 







반응이 즉각즉각 오는 것이 정말 빠른것 같다.-_-; 

난 하는 김에 마저 다 배우자는 생각으로 하나를 더 부탁하였다. 







"아차. 그거하고 가래 뱉는 것도 좀 가르쳐줘. 그래줄수 있지?" 



"옙! 물론.. 엥? 가래요?" 



"그래, 왜? 너도 가래 뱉을 줄 몰라?" 



"에이~ 설마요? 제취미중 하나가 가래 뱉는 건데요? 하하." 



"그럼 가르쳐 줄 수 있겠네. 어서 나가자." 







난 어벙벙해져 있는 민규를 지나 사무실에서 나왔다. 

빨리 배울수록 좋다. 

하루 빨리 이 두가지를 습득한다면 새신과 하루 빨리 친구가 될 수 있다. 

또 한시간 더 빨리 배우게 된다면 한시간 빨리 놈과 친해질 수가 있다. 

그렇기에 난 담배 피우는 법과 가래 뱉는 법을 

빨리 내것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형님, 일단 한번 빨아보십시요." 







척. 나에게 불붙인 담배 하나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건내주는 태기. 

난 마음을 단단히 먹고선 담배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태기가 시킨대로 담배를 길게 한모금 빨아보았다. 







"그런 다음 입안에 있는 담배연기가 

형님이 좋아하시는 술이라고 생각하고 삼켜보십시요." 







술? 담배연기가 술이다? 


난 입안에서 맴도는 담배연기를 몽땅 삼켜버렸다. 







"으켁!! 콜록콜록." 







우어억. 속에서 뭔가가 올라올것만 같다. 

모두 삼킨게 아니였는지 콧구멍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완전 용가리가 된듯한 그런 기분이다. 







"에이, 형님. 그게 아니지요. 

"흡!"하고 들이마신 다음에 "후~"하고 내뱉어야 되는 겁니다. 

다시 한번 해보십시요." 







저자식이 그냥 삼켜라고 할때는 언제고. 

난 화를 참아내며 다시 한번 시도해보았다. 


우선 담배를 빨고. 







"흡!" 







연기를 내뱉는다. 







"후~" 







응? 아무렇지도 않잖아? 

그럼 나 이제 완전히 마스터 한거야? 







"너도 봤지? 나 기침 안하는거. 응??" 







난 기쁜 마음에 태기에게 소리쳤지만 그 기쁨도 아주 잠시였던것이다. 







"기침하면 빙신이게요?" 



"뭐?-_-" 



"방금 형님께서 한거는 입담배(입기) 아닙니까? 

연기 색깔보니깐 알겠구만. 그거 하면 담배만 아깝습니다." 



"입담배? 너 던힐만 피지 않았었냐?" 



"하하하. 형님, 입담배(입기)는 말입니다? 

담배이름이 아니고 담배 피는 방식을 말하는 겁니다. 

방금 형님께서 하신게 입담배(입기)고요. 제가 첨에 말한게 속담배(속기)입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한거야? 







"그럼 입담배는 피면 안된다는 거야?" 



"안된다기 보다는 솔직히 쪽팔리지요." 







쳇, 그럼 좋아할 필요가 없었던 거잖아? 







"제대로 피실려면 삼키셔야지요." 



"됐고. 가래나 한번 뱉어봐." 







그리하여 난 담배를 배우는 건 일단 뒤로 미룬후-_- 

(그 역겨운 걸 또 한번 삼킬 자신이 없었다.) 

가래 뱉는 것에 몰두하기로 했다. 

뭐 담배를 피우는 것보단 차라리 가래 뱉는 것이 훨씬 쉬웠다. 

비록 물이 없음 힘이 들기는 했지만 몇번의 연습끝에 

난 성공적으로 가래를 뱉을 수 있게 되었던것이다. 



더럽다고?? 

뭐 그래도 할 수 없다. 

새신 그놈을 우리 조직에 넣을 수만 있다면 내 개똥으로 만든 약이라도 먹을 수 있으리~!! 



정말이다.-_- 









\다음날. 







"크하악. 퉷!!" 







후후. 좋았어. 

이 페이스 그대로 밀고 나가는 거다. 


난 지금 1.5ℓ 생수병을 손에 쥐고서 학교로 가고 있다. 

만발에 준비가 다 되었다. 

이제 새신만 만나면 되는거다. 


난 교문을 통과해 학교 현관으로 걸어갔다. 


마음이 무겁다. 

왜냐고? 

그건 두가지 중 하나는 해결이 되었지만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담배 못 핀다고 친구 하기 싫다고 하면 어떡하지? 

그러면 정말 어떡하지? 

어떡한담?ㅜ_ㅜ 



난 이런 고민에 머리속 가득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3학년 교실이 있는 4층에 이르렀을때 머리에 집중되었던 신경은 

내 양쪽 귀로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내 귓구멍으로 들어와 귓바퀴를 돌고 도는 낯익은 목소리. 







"왜 야리는데?! 씨팍. 눈 안깔아?!!" 







이건 분명 앙뜨아네트의 앙칼진 목소리였다. 

난 사실을 확인하고자 앞을 보았고 우리반 앞에 모여있는 무리중 

제일 튀는 저 뒷통수는 다름아닌 앙뜨아네트의 것이 분명하였다. 


왠지 3학년 여자애와 시비가 붙은 것 같은 앙뜨아네트, 현아. 

쉬지도 않고 톡톡 쏘아대는 모습이 역시나 보통 성깔이 아닌것 같았다. 


후. 그냥 모르는 척 교실로 후딱 들어가 버려야 겠다. 

난 그럴 마음으로 슬금슬금 교실로 들어가려는데 

저 망할놈의 단발머리가 날 발견한 모양인지 손가락을 펼치며 소리 치는 것이 아닌가. 







"현아야!! 저기!! 저기 개소문 선배!!" 



"뭐얏?!" 







단발머리의 외침에 0.1초의 쉼표도 없이 뒤를 돌아보는 앙뜨아네트였다. 

윽. 이런. 







"오빠아~!!>ㅁ<"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한손엔 장미꽃다발을 든체 좋다고 달려드는 현아양. 

이봐, 난 남자가 아니라고오.ㅠ0ㅠ 


하지만 그녀가 이 사실을 알턱이 없었다. 







"응. 안녕? 하하." 



"오빠!! 이거 오빠 줄려고 제가 요근처에서 샀답니다? 

꽃이 참~ 향기로와요.♡" 







나에게 꽃다발을 내미는 현아였다. 

여자에게 꽃을 받다니.-_- 







"하하. 고맙지만 사양할게." 



"왜요? 꽃이 싫으신거예요??" 



"하하.. 좀 그렇네." 







휙_ 


내말이 끝나자마자 복도 창밖으로 꽃을 냅다 던져버리는 현아였다. 

그것도 활짝 웃으면서 말이다. 







"사실은 저도 꽃이 싫답니다~♡ 호호호." 



"하하.;;" 







그렇게 현아에게 붙잡혀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였다. 

복도 끝에서부터 한 남자를 중심으로 걸어오고 있는 남자들. 

현아를 제외한 복도의 모든 아이들은 동시에 그 남자들을 보았고 

그들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난 그 중심의 남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알 수가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새신. 

난 이때다 싶어 창밖을 가리키며 현아에게 크게 소리쳤다. 







"앗! 장미괴물이다!!" 



"네??" 







예상대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현아였다. 

난 그 기회를 틈타 내 팔을 꼬옥 붙잡고 있던 현아의 손을 떼어내버리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새신에게로 무작정 달려갔다. 







"악. 개소문오빠아!!" 







내 계획적인 뻥을 눈치챈 현아가 소리치고. 







"새신, 보여줄게 있어!!" 







난 새신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옥상으로 끌고 갔다. 

다행이도 갑작스러움에 어안이 벙벙해진 새신은 힘없이 나를 따라와 주었다. 


현아가 오기전에 빨리 끝내야만 해. 







"하아하아." 







어쨋든 지금 새신과 내가 서 있는 이곳은 학교 옥상이었고 

난 가쁜 숨을 골라내었다. 







"뭐야?" 







그런데 신발놈은 숨이 하나도 안 찬 모양인지 자기 팔짱을 낀체 나에게 묻는다. 







"하아. 보여줄게 있어." 



"뭘?" 







난 침을 삼킨후 생수병을 열었다. 

그런 나를 인상을 쓰고서 의아하게 바라보는 새신. 


후후. 너도 깜짝 놀랄거다. 

난 새신의 놀라는 얼굴을 떠올리며 생수병 통채로 물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벌컥벌컥. 이렇게 말이다. 







"지금 사람 납치해서 뭐하는 거냐?" 







그녀석 참 인내심이 쥐꼬리만큼도 없어서야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꼬. 

조금만 기달려 보라고. 







"하아_.." 







생수병의 물 1/3 가량을 마신 난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선 

온몸의 정기를 끌어내었다. 


그리고는. 







"카악_ 퉤엣!" 







옥상바닥에 시워_언 하게 가래를 내뱉었다. 


후후. 어떠냐? 

이정도면 새신 니친구로써 손색이 없겠지? 



난 자신있게 고개를 들어 새신을 보았다. 





♡5 






깔끔하고 말끔,시원하게 성공을 했건만 

어째 새신의 얼굴엔 먹구름이 잔득 끼어져 있었다. 

바닥을 한번 내려다 본 후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드는 새신. 


새신이 말했다. 







"방금 뭐한거냐?" 







뭐한거냐니. 

무슨 질문이 그래? 


난 알면서 물어오는 새신의 행동에 대답을 하지말까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그래도 사람이 물었음 대답을 해주는 것이 도리였기 때문에 아주 태연하게 대답해주었다. 







"가래 뱉었잖아." 







내말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새신이였다. 

이게 뭐야? 

내 계획이랑은 전혀 틀리잖아? 

내 계획대로라면 새신은 놀라워 해야 하는건데.. 


아. 이 바가지채 밀려오는 허탈감이 웬말인가. 

난 새신의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까 싶어 녀석의 입술로 시선을 깔았다. 

한번쯤 만져보고픈 그런 입술을 가진 새신. 

난 침을 삼켰다.(도무지 왜 삼킨건지를 모르겠다;;)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는 예쁜 입술로 새신이 말한다. 







"지금 나랑 맞장이라도 뜨자는 거냐?" 







불만끼가 제법 많은 그런 얼굴이다. 

신발이랑 내가 맞장이라니 당치도 않는 소리다. 


그래, 사람들이 만약 나는 왜 같은 보스이면서 영화 "조폭마누라"의 신은경처럼 

싸움을 못하냐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나, 연개소리. 




솔직히 할 말은 없다.-_- 


아빠의 밑에서 공주처럼 너무 곱게 자란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랄까. 







"맞장은 무슨~. 하하. 난 그저 너랑 친구가 되기위해서 그런거다." 



"뭐? 다시 말해봐. 뭐가 돼?" 



"친구말이다. 새신, 어떠냐? 이젠 날 친구로 받아주는 것이." 







난 피아노의 낮은 음자리 "도"정도의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새신은 자존심 다 구긴 내 말에 콧방귀만 껴댈 뿐이었다. 







"넌 친구 사귈때 그딴식으로 사귀냐?" 



"어?" 



"이게 친구하자는 태도냐고." 



"그,그거야!!" 







아후. 왜 이렇게 내행동을 이해 못하는 거야? 

내가 누구때문에 이런것까지 배웠는데. 







"그거 뭐? 말해봐." 



"니가 가래 못 뱉는 친구는 싫다고 했잖아." 







난 말꼬리를 흐렸다. 

모르겠다. 왠지 이런 말을 한다는게 쑥스러웠다고나 할까? 

(솔직히 주인공인 내가 왜 이딴 대사밖에 없는 건지 모르겠다.-_-) 



여전히 굳어진 인상으로 새신이 말했다. 







"내가 언제?" 







뭐야? 지금 시치미 떼는거야? 







"어제 분명히 그랬잖아! 담배 못 피고 가래 못 뱉는 친구따윈 둔적이 없다고. 

미안해. 담배는 다음에 꼭 보여줄게."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그때 새신의 표정이 어땠는지 모르겠다. 







"........." 







아무 말도 없는 새신. 


그렇게 10초 정도가 흐르고 난 궁금함에 살며시 고개를 들어 녀석을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인상을 쓰고 있을거라 생각했던 새신이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난 어리둥절 했다. 







"푸웃~ 하하, 하하하." 







내가 의아하게 자신을 쳐다보자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마는 새신이었다. 

도대체 왜 웃는거야?-_- 거참, 황당하네. 







"하하하." 







웃고 또 웃는 신발. 

그런 녀석을 마치 미친놈 바라보듯 보고 있으면 

드디어 정신을 차린 새신이 웃음을 거두고 기침을 하였다. 







"흠흠. 뭘 보냐?" 







-_- 이제서야 제정신이 돌아온 모양이구만? 


난 별다른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에 내 대답을 스킵(Skip)하고 다음 대사를 읊는 새신이었다. 







"너 무슨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하고 있는 모양인가 본데? 

난 친구를 사귈때 그딴 더러운 것들을 보는 게 아니라 딱 세가지만 본다." 



"세가지?" 



"머리(Head),힘(Power),의리(Principle)." 







머리와 힘. 그리고 의리는 본다고? 







"너 나랑 그렇게 친구가 되고 싶냐?" 







헙. 지금 뭐야? 

나한테 고백. 아니아니, 마음을 열어주는 거야? 


난 조금이라도 늦을 새라 후딱 대답을 해버렸다. 







"응!! 하고 싶어!! 진짜 진짜~ 하고 싶어!!" 







내 눈은 그 어느 별보다도 반짝이고 있었다. 







"왜?" 







응? 왜냐고? 


음.. 왜냐하면.. 







"우리 조직에 니가 꼭 필요하거든!" 







...... 





.... 









순간 눈이 팽이처럼 돌아가고 있는 약먹은 참새 한마리가 

머리 위를 지나간것만 같았다. 

지지배배. 이렇게 말이다.-_- 



윽. 연개소리, 드디어 일낸거야. 







"뭐? 방금 뭐라고 그랬냐?" 







못들은 건지 아님,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건지 새신이 물었다. 

이럴때 재빨리 스피드하게 수습해야만 한다. 







"그,그러니깐 내말은.. 아, 그래! 니가 새신이니깐. 

하하. 니가 새신이라서 너랑 친구가 되고 싶다 이말이지. 하하하!" 



"........" 







그래, 맞어. 

니가 서울에 있는 모든 고등학교를 제패했다는 그 새신이어서 널 친구로 삼고 싶어 하는 거다. 

하지만 새신은 내 대답이 충분한 이유가 되질 못한 모양인지 날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뿐이었다. 


그러다가 잠시후 새신이 드디어 입술을 떼었다. 







"보여줘. 만약, 내가 말한 세가지 전부를 보여준다면 기꺼이 니친구가 되어주지." 







난 생각지도 못한 새신의 말에 하늘을 품안에 넣은 만큼 기쁘고 또 기뻤다. 

그리고 모든것을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말이다. 







"그래. 단, 니가 그 세가지를 보여 준다면 말이지." 







세가지라면.. 아까 말한 머리,힘,의리를 말하는 건가? 

새신은 내가 묻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말해주었다. 







"우선은 머리다." 



"머리? 머리를 보여달라고?" 



"그래. 왜? 못하겠냐?" 



"아니, 그게 아니라.." 







머리를 보여달라니. 

뭘 어떻게 보여달라는 거야? 

난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기에 녀석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원하는 스타일이 어떤건데? 염색? 아님 파마??" 



"......." 







남은 정말 진지하게 묻고 있건만 똥씹은 표정을 짓는 신발이었다. 

그럼 역시 염색과 파마는 아니라는 말인데.. 


서, 설마...-0- 







"저기.. 혹시나 해서 말인데.. 

머리를 모두 밀라는 건 아니지? 제발 그것만은.." 







순간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이 머리를 내가 어떻게 기른 머리인데!!(지금은 가발을 쓰고 있지만.) 

절대 그럴순 없어!! 없다고!!ㅠ0ㅠ 







"대가리 빠가냐?-_-" 







엥? 지금 새신이 뭐라고..? 



. . . 아, 저게 진짜 내뱉으면 다 말인줄 아나?!!! 



난 건방진 새신을 째려보았다. 

째릿,째릿 온몸에 전기가 통할 정도로 말이다. 







"내가 말한건 머리를 지지고 볶는게 아니라, 니 지능을 보여달라는 거다! 

그런데 이젠 볼 필요도 없겠구만? 대충 니 IQ가 얼만지는 알겠다. 

너 두자리지? 아님 세자리 겨우 턱걸이던가." 







뭐, 뭐야? 그런거였어?? 

그럼 진작에 그렇다고 얘길했어야지! 

그냥 머리라고만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어? 







"시간 끌 필요없이 내일 시험칠테니깐 그렇게 알고 있어." 



"시험??" 



"왜? 싫냐? 아, 싫음 말던가." 







그냥 옥상에서 내려가버리려는 새신. 

난 새신을 잡았다. 







"싫긴~ 그럴리가 있겠어? 호호, 아니-_- 하하하!!-0-. 

짜식~ 소심하긴." 



"뭐?" 



"엉? 그,그러니깐 무슨 시험이냐고~ 그 말이야. 하하하..하아." 



"잡종시험이다." 



"엉? 잡종이라니?" 



"문학,수학,영어,역사,윤리,과학,음악,미술.. 내멋대로 낼거라고. 

문제는 총 5문제. 이중 세개만 맞쳐도 통과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냐?" 







말도 안돼. 

새신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놈이였던가? 

그런 말은 못들었는데.. 







"그건 솔직히 좀 너무하다." 



"그러니깐 싫으면 때려 치우라고!" 







이자식, 해도 너무 하잖아?ㅠ_ㅠ 

나랑 그렇게까지 친구 먹기가 싫은 거였어? 나뿐놈 같으니라고. 







"그럼 내일을 기대하마." 







탁. 얄밉게 살짝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내 어깨를 치는 새신이었다. 


후우. 여기서 이렇게 내 꿈은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건가? 

정말이지. 이제 겨우 첫계단을 밟았는데 벌써부터 앞날이 까마득하기만 하다. 


시험이라니.. 시험.. 시험... 하아_ -_- 












\그날 밤. 개소리네 집.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저술한, 

우리 나라 주변의 어족과 그 정보에 대해 저술한 책은??" 



"..유..아!유산어보?" 



"땡!! 형님, 제가 분명히 "자산어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유산입니까?? 벌써 다섯번째입니다." 







그렇다. 

태기놈의 말대로 난 같은 문제를 다섯번째 틀리고 있는 중이다. 

에이씨, 짜증나게. 자산이나 유산이나 어차피 죽은 놈들이 남긴거구만. 

뭐가 이렇게 복잡한거야? 







"알았으니깐 빨랑 다음 문제나 내봐!" 







다음은 민규가 문제를 읊기 시작했다. 

민규놈이 내는 건 왠지 어려울것 같은데.-_- 







"한국 광복군 탄생의 계기가 된 의거로서,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거행된 일제의 전승축하식장을 폭파한 의사는 누구인가?" 







아이 씨팍, 역시 어려운 문제만 골라서 내는군. 

그나저나 의사라.. 의사가 폭탄을 던졌다?? 

그렇다면 범죄자란 말인데.. 흐음.. 







"형님, 10초 세겠습니다." 



"아, 좀 기다려봐! 생각하고 있잖아!" 



"시험은 시험입니다. 십,구,팔,," 







냉정한 놈. 에라이 모르겠다! 

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되는 대로 정답을 외쳤다. 







"윤..윤.." 



"오~! 형님, 성은 맞습니다요." 







태기가 눈을 크게 떠보이며 말했다. 

성은 맞다고?? 윤씨가 맞다니.. 난 그저 아무 생각없이 말한거였는데.. 


윤씨 성을 가진 의사출신의 범죄자라.. 혹시..? 







"아! 윤복길!!" 



"땡.-_- 윤복길이 아니라 윤봉길입니다. 형님." 



"뭐야? 그럼 윤복길은 누구야?!" 



"형님! 윤복길은 전원일기에 나오는 사람 아닙니까? 것도 몰라요??" 



"시끄러!! 빨랑 다음 문제나 내!" 



"아,예에_" 







젠장, 공부를 시작한지 벌써 다섯시간이 넘었는데 발전한건 하나도 없다니. 

내 머리가 이렇게 돌대가리였던가? 

그러고 보니 나 미국에 머무른지도 3년이 넘었었는데 음식주문 하나 못했었지? 


하아. 난 순간 허무감을 느꼈다. 

인생을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유전적 원인 등에 의한 뇌 기능 이상으로 지능발달이 떨어지고 인격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정신 장애의 명칭을 4자로 말하시오." 







난 태기가 낸 문제를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지능발달이 떨어졌다?.. 지능발달이 떨어졌다.. 

이거 혹시 내얘기 아냐? 

이새끼가 일부러 나 들으라고 낸게 분명해! 후. 혈압이야. 







"변태기, 그거 지금 나보고 한소리지?" 



"예? 무슨.." 







타앗! 난 태기의 뒷통수를 한 대 갈기며 소리쳤다. 







"새끼야, 내가 등신인줄 알아?! 정답이 "돌대가리"잖아! 

너 지금 나보고 돌대가리라는 거 아냐?!! 틀린 문제 또 틀렸다고!! 

맞지? 그런거지?!!" 



"아,아닙니다!! 형님. 그건 잘못된 오해이십니다!!" 



"이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리고 정답은 "돌대가리"가 아니라, "정신박약"이라고요!!" 



"......." 







-_- 정답이 정신박약이라고? 

돌대가리가 아니고?? 


정신박약..? 






저게 진짜. 죽을라고! 







"뭐? 내가 정신박약이라고?!! 너 일루 와!! 어쭈, 일루 안와?!!" 



"형님 가면 또 때리실려구요??" 



"안때려!! 안때리니깐 빨랑 일루 와!!" 



"엄창 찍으십시요. 안 때린다고." 







벽에 찰싹 달라붙어 울상을 짓는 변태기다. 

저녀석은 정말 하루라도 맞을 짓을 안하면 몸에 두드러기라도 나는 모양인가보다. 







"형님, 고정하십시요. 어서 끝내시고 주무셔야 하지 않습니까?" 



"형님!! 민규 말이 백번 천번 맞습니다. 한번만 봐주십시요~!" 







난 시험도 시험이지만 민규를 봐서라도 한번 참기로 했다. 

(내가 학교에서 전화를 건후 고등시험문제지를 모두 준비해놓은 사람이 바로 민규였기 때문이다.) 







"너 민규한테 고맙다고 해. 그 다음 문제." 



"행진을 할 때 어느 쪽 발을 먼저 내밀까요?" 







손부채질을 해가며 태기를 째려보는 나에게 다음 문제를 내는 민규. 

행진을 할 때 어느 쪽 발을 먼저 내미냐고? 

후훗. 이번 문제는 꽤 쉬운데? 새끼들 그래도 양심은 있나보구만? 







"그야 당연히 앞발이지." 



"-_-" 







일제히 인상이 굳어지는 녀석들이다. 

내가 정답을 맞쳐서 놀란건가? 놀란것 치고는 표정이 상당히 껄쩍지근한데? 







"왜? 아니야?" 



"형님, 제가 말씀드린건 짐승들의 행진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진을 말한겁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한마디로 또 땡이라는 거죠! 정답은 왼발입니다,형님." 



"아, 저 변태자식이 진짜 죽을려고!! 오늘따라 말끝마다 꼬투리네!!" 








우당탕탕. 쿵당당. 쾅!!★☆ 






하아. 결국 난 모든 문제를 틀리고 만것이다. 

마음같아선 다 집어치우고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조직을 위해서 이정도 고난쯤은 이겨내야 한다는 민규의 말에 난 하는 수 없이 밤을 지새야만 했다. 




그리고 내 토끼눈 만큼이나 밝은 다음날 태양이 하늘위에 두둥실 떠올랐다. 







"형님! 1995년에 출범하여 공산품과 농산물 및 

서비스 교역에까지 무역자유화를 추구하는 국제 경제기구는?" 



"W.T.O!!" 



"오오! 역쉬 형님이십니다~!" 



"후후. 이정도야 뭐, 척하면 삼천리 아니겠어?" 



"형님! 그렇게 어려운 속담까지?! 

역시 형님께선 하나를 가르쳐 드리면 열을 아시는 군요?" 



"짜식, 애교는. 좋아, 기분이다! 

냉동실에 초코파이 얼려 놓은거 있으니깐 하나 먹도록 해." 



"옙! 감사합니다, 형님!!" 







이제야 조금은 알것도 같다. 

아빠가 왜 태기를 곁에 두셨는지 말이다. 


애교만점! 변태기♡ 







"긴장하시지 말고 잘하십시요. 괜히 긴장하시다가 틀리시지 말구요." 







그에 비해 애고 빵빵점인 민규였다.-_- 







"이민규! 재수없는 소리 하지도 마! 넌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몰라?!" 



"아.. 죄송합니다. 형님." 



"후_ 됐어! 그만 갔다올게!" 







쾅. 





으아. 떨린다, 떨려. 

중학교에 배치고사 치러 갈때도 이렇게까지 떨리지는 않았었는데. 

오히려 소풍가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학교 중간고사때는 가방없는 날 같은 그런 기분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 이거는 뭐 800m 높이에서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기분이니.. 







"후.. 연개소리, 힘내. 넌 할 수 있어. 

잘 할거야. 아자,아자, 아자아!!" 







푸하하하. 이제야 좀 갑갑한 속이 풀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 난생 처음으로 어젯밤에 코피까지 쏟을 뻔!(중요)하면서까지 공부를 했잖아? 


새신, 무슨 문제든지 마음껏 내보라고. 

이 천재 연개소리가 싸그리 다 풀어주겠어! 







"으하하하!!" 



"엄마, 저 형아 이상해." 

"어머, 미친남자! 형수야, 저런건 보면 안돼. 얼른 가자." 







-_-+ 저 아줌씨가 지금 누구더러 미친남자라는 거야? 

(그래도 자신의 완벽한 남장에 흡족해 하고 있음.) 

이보쇼, 아줌마! 난 멀쩡하다고요!! 


5~6살쯤 되어보이는 어린 남자애를 데리고 황급히 걸음을 재촉하는 땡땡이 몸빼치마 아줌마였다. 

쳇, 저런 아줌마는 신경쓰지말고 넌 빨랑 가서 새신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는거야. 

그리고 당당하게 새신의 친구가 되는거지. 

후후. 신발아, 왠지 너랑 나는 베스트 푸렌드가 될것 같구나~♡ 





하지만. 그런 내 마음가짐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산산히 조각나고 말았다. 







"첫번째 문제. 어머니께서 바구니에 사과 10개를 담아오셨다. 

그 중 형 영태가 4개를 먹고 동생 영대가 6개를 먹었다." 







이게 문..제?-0- 


이럴수가. 럴수럴수.. 이.럴.수.가! 


그럼 어젯밤 내가 눈이 빠지도록 공부했던건 모두 무엇이었다는 말인가! 

난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문제는 분명 남은 사과의 갯수를 묻는 것일터! 

이건 수학이 아니라, 완전 초등학교 1학년 산수문제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내 생각은 신발에겐 틀린 것이었다. 








"여기서 문제! 과연 동생 영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_- 그게 무슨 문제야?" 



"병신아, 윤리문제잖아! 그것도 모르고 풀려고 그랬냐?!" 







유,윤리? 이게에?? 어떻게?? 







"윤리라고? 어째서?" 



"답, 모르냐? 모름 첫번째 문제는 틀." 



"아,아니야!! 누가 모른다고 그랬냐? 

넌 임마, 그 섣불리 생각하는 버릇 좀 고쳐." 



"우리. 아직 친구가 아닌 걸로 아는데?" 



"하하. 농담이야. 농담." 







젠장. 도대체 정답이 뭐야? 

형이 사과 4개를 먹고 동생이 사과 6개를 먹었는데 

문제는 동생이 어떻게 되었겠냐는 거라니. 

후. 도무지 감이 잡히지가 않는다. 







"3초만에 맞쳐. 일! 이! 사 - ㅁ." 



"아! 알겠어!! 정답!!" 



"그냥 곧바로 말해." 



"정답은.." 







에라, 모르겠다.ㅠ_ㅠ 







"잠이 들었어!!" 



"뭐?" 







예상대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다. 

그래, 나도 아닐줄은 알고 있었다고.ㅠ_ㅠ 







"그러니깐 사과에 독이 들어있었던 거야. 

그래서 잠이 들어버린 거지. 하하.. 아닌가?-0-;" 



"아닌 줄은 아네. 내가 분명히 그랬지? 

이건 역사문제가 아니라 윤리문제라고. 븅신-" 







-_- 백설공주 이야기가 역사..라고? 

이거 누가 진짜 바본지 모르겠네.(둘 다 바보임.) 







"그래서 정답이 뭔데?" 



"정답은 형 영태한테 오지게 얻어터졌어." 



"말도 안돼! 그게 무슨 정답이야??" 



"이건 어르신에 대한 공경심을 이야기하는 거다. 

형님이 4개를 먹었는데 감히 지까짓게 6개를 먹어? 

그러니깐 죽도록 얻어터져야지! 왜? 불만있어? 불만있냐고!!" 



"부,불만은 무슨." 







제길, 맞는 말이잖아? 

신발주제에 머리가 제법 좋은데? 

이거 첫번째 문제는 놓쳐버린건가? 







"다음 문제는 예체능 음악문제다!" 







음악? 그러고 보니 음악공부는 하나도 안했잖아? 

난 베토벤의 숭어랑 모나리자의 운명, 슈바이처의 세레나데밖에 모르는데.. 

그럼 두번째 문제도 포기해야 하는건가? 

안돼, 이럴순 없어!! 







"이번 문제는 두가지를 모두 맞쳐야만 한다." 







두가지씩이나? 

제발 내가 유일하게 아는 세사람 중에서 나오기를.. 


제발.. 제발.. 



난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피리, 하모니카의 일인자는 각각 누구인가?" 







엥? 피리와 하모니카? 

누구지? 누가 일인자지?? 


아니야, 내가 아는 세사람은 모두 유명한 음악가들이니깐 

아마 피리와 하모니카도 잘 연주하셨을거야. 

전 당신들을 믿습니다. 







"정답! 베토벤과 슈바이처!" 



"틀렸어." 







아악!! 슈바이처를 하는 게 아니라 모나리자를 하는 거였어!! 







"정답은 개구리 왕눈이와 까치다. 이렇게 쉬운것도 못맞추다니. 

다음 세번째 문제!" 







-_- 정답이 왕눈이와 까치라고? 

그 야구선수 까치..?(그러고 보니 하모니카를 부는 걸 본적 있음.) 


그제서야 난 새신이 내고 있는 문제의 수준을 대충 파악할 수가 있었다. 

이제 세문제 남았다. 

이 세문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풀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새신과 친구가 될 수 있다. 


난 정신을 가다듬고 두 귀를 활짝 열어 새신의 말에 집중을 하였다. 







"세번째 문제는 과학이다. 

지금부터 내가 들려주는 것은 노스트라다무스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중의 한부분이다. 

『아들아, 그 원인은 이것이다. 종말이 올 때 갖가지 이변이 덮쳐온다. 

그리고 지구 대이변의 마지막은 이것이 불러 일으킨다. 

유례없는 질병, 전쟁, 기아, 대지진 …. 아들아, 이리하여 ‘세상의 변혁과 별들’은 합치하는 것이다. … 

모든 예언적인 직감은 창조주이신 신으로부터 근원적인 원리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행히도 후세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뭐야? 이건 지금까지 낸 문제들이랑 수준이 다르잖아? 

이러면 안되는 건데.. 


난 걱정을 했고 새신은 세번째 문제를 마무리지었다. 







"여기서 이것은 무엇인가!" 



"몇글잔데?" 







난 뾰루퉁한 표정으로 새신에게 물었다. 







"몰라. 니가 알아서 맞쳐!" 






치사한 놈. 


그 원인은 이것이다. 지구 대이변의 마지막은 이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뭐냐고. 

아니야, 아무리 문제수준이 높다고 해도 새신이 어디 가겠어? 

"세상의 변혁과 별들"은 합치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지구와의 충돌을 말하는 것일텐데.. 

순간 난 떠오르는 것이 한가지 있었다. 


후아후아. -0- 하늘을 믿는 수 밖에.. 







"정답!! 어린왕자!!!" 



"........" 







시험문제가 적힌 것으로 보이는 종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새신이 내 대답에 고개를 들었다. 


틀린건가..? 


그렇게 자신감 없이 새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숨이 넘어갈 정도로 천천히 입술을 떼는 새신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새신이 정답을 말한다. 







"제법인데? 맞았어. 어린왕자가 장미 한송이를 입에 물고 지구를 침략하게 돼. 

다음 네번째 문제!" 

(※실제 정답은 화성입니다.^-^) 






정말 맞춘거야? 

하_ 말도 안돼. 그런게 정답이라니. 


솔직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기쁜건 사실이었다. 

어린왕자가 장미를 입에 물고 지구를 침략한다니.. 

하하하. 역시 신발다운 발상이었던 것이다. 







"네번째 문제는 역사다. 조선시대에 좌·우 포도청이 처음 생긴 것은 성종 12년, 1481년의 일이다. 

그 후로 4백여년 동안 포도청이 서울의 치안을 맡아 왔다. 

그리고 포도청에는 이사람 이름만 들으면 포도청 내에서 포졸이나 포리들에게 식사나 담당하는 말하자면, 

찬모같은 존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이사람을 비밀 여자 경찰이라고 말했었는데.. 

여기서 문제다. 이사람은 누구인가?" 



"하하. 그거야 식은 죽 먹기지! 날 뭘로 보고." 







그 프로그램을 내가 얼마나 즐겨 봐왔었는데.. 

이제 딱 한문제만 맞추면 되는 건가? 







"정답은 하지원이야!" 



"후.." 







정답은 장담코 확실한데 갑자기 한숨을 내쉬는 새신이었다. 

짧게 한숨을 토해내다가 이내 종이를 한장 넘기는 새신. 







"..후. 정답이다." 

(※실제 정답은 차모 혹은 다모(茶母)인거 여러분도 아시죠?) 






아싸!! 내 그럴줄 알았다니깐? 푸하핫!! 


마지막 한문제다. 

이번 한문제만 맞추면 새신이 말한 첫번째 시험은 무사히 통과하게 된다. 

난 마치 세문제를 모두 맞춘것 마냥 벅차오르는 환희와 감동을 느꼈다. 







"마지막 문제. 이번 문제를 맞쳐야만 시험에 통과한다는 것쯤은 너도 알고 있겠지?" 



"물론이지! 빨리 문제나 내라고." 



"보기와는 달리 머리가 좋군. 마지막 문제는 체육이다. 

우리와 같은 한민족으로써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이름을 가슴팍에 달고 

우승을 한 세계적인 마라토너는 누구인가?" 







세계적인 마라토너?? 

마라토너.. 



내가 아는 마라토너는 딱 한사람뿐인데.. 







"빨리 말해." 



"정답은.." 







틀리면 어떡하지..? 

아니야. 맞을 거야. 맞겠지.. 

그럴까..?ㅠ_ㅠ 





난 떨리는 마음으로 내가 아는 정답을 말하였다. 







"정답은.." 




♡6 








"정답은..하니야." 







하니.. 하니, 맞을란가? 


난 새신을 보았다. 

새신의 멋진 입술이 차츰차츰 열리고 내 가슴은 뛰었다. 







"맞어. 세계적인 마라토너는 하니야. 여기서 진짜 문제! 

그럼 하니가 다녔던 중학교는 과연 어디인가?" 







정답은 정답인가 보구만. 







"빛나리 중학교.-_-" 



"정답! 맞았어. 이것으로 첫번째 관문은 통과다." 







통과. 


그토록 바래왔던 말을 새신이 해주었다. 

그런데 왜 기분은 생각만큼 기쁘지가 않은걸까? 


문제가 적힌 종이들을 구겨버린 후 폼나게 뒤로 휙 던져버리는 새신. 

반아이들은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있었다. 







"두번째 관문은 어제도 말했듯이 힘이다. 영어로는 파워(Power)라고도 하지." 







아차. 아직 끝난게 아니였지? 

난 새신의 말에 빙긋 웃어보였다. 







"힘? 나 힘은 좀 쎈데." 







새신의 얼굴. 한심해 하는 얼굴이다. 







"퍽이나 쎄기도 하겠다. 

춘삼이한테 한방에 나가떨어졌던 놈이." 







춘삼이? 

그때 그 떡대를 말하는 건가? 


우. 또 그때의 쓰라린 기억이 되살아 나는 것 같다. 







"싸움은.." 



"못한다고?" 







윽. 못한다고 했다간 시험도 치르기 전에 떨어질것 같은 분위기구만? 


결국 난 새신의 눈치를 살피며 거짓말을 해버렸다. 







"자신있어! 그때 그자식은 내가 봐준거다!" 



"픽. 까고 있네." 







뿡뿡. 또 콧방귀를 끼는 새신이다. 

냄새나는 자식.-_- 







"진짜라니깐!! 전학 첫날이라서.. 그래서 봐준거야! 

너 임마, 오빠, 아니 형 못 믿냐? 후~" 







난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에 걸치며 입바람으로 앞머리를 흩날렸다. 

물론 의도는 멋있어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럼 오늘밤에 학교 앞으로 나와라." 



"학교? 학교는 왜?" 



"근처 공사장에서 큰싸움이 있을거다. 

상대는 F고. 겁나면 구지 나올 필요는 없어." 



"겁, 겁나기는!! 내가 누군데 그딴거에 겁이나?!!" 



"니가 누군데?" 



"나?" 







난 쓰래빠의 보스 연개소리다! 







"... 니 친구지~ 하하." 



"아직이야." 







쳇,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정말 비싼 녀석이다. 

새우잡이 배에 팔아넘긴다면 적어도 배전체는 받겠군. 

놈의 행동으로 보아선 말이다. 

그에 비해 난 무슨 엿가락 한개값 밖에 안되보이니.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건지 모르겠다. 







"오늘밤 9시. 학교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니깐 야구 빠따 하나정돈 준비해오는게 좋을거야. 

뭐 내가 보기에 니놈은 야구 빠따보단 아예 엔진달린 신발을 준비해오는게 

니 몸 하나 겨우 지킬수 있을 것 처럼 보이지만." 







이거이거 꽤 귀에 거슬리는데? 







"내가 왜 엔진달린 신발을 준비해야 한다는 거야?!" 



"진짜 니자신을 몰라서 묻는 거냐?" 



"그래! 모른다!" 



"병신, 그래야 맞기전에 빨리 토낄거 아니냐?" 







살짝 비웃음 섞인 말투로 이야기하는 새신. 

으으. 저게 진짜! 

후우후우. 교실안은 갑자기 왜 이렇게 더운거야?! 

두고봐, 신발. 

꼭 맨손으로 가서 니가 끼어들지도 못할 정도로 F고 녀석들을 모두 무찔러 버릴테니깐. 


오늘 패싸움은 내이름을 건 패싸움으로 길이길이 기억될것이다. 

일명, 연개소리전(투)으로 말이지. 







"후후후.." 



"미쳤냐?-_-" 













\개소리네 집. 







쏴아아아 ─ ‥ 







여기는 우리집. 

그리고 지금 시각은 9시 15분 전. 


난 욕실 앞에 서 있다. 

욕실 안에선 태기가 샤워를 하는 중이고 말이다. 

그런데 응큼하게 왜 여기에 있냐고? 


쉿! 그건 일급 비밀이다. 





똑똑. 







"태기야, 아직 멀었니?" 







난 욕실문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물었다. 

곧이어 샤워기의 시원한 물줄기 소리와 함께 태기의 우렁찬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왜요? 똥누시게요??" 



"하하. 그런거 아니야. 그냥 한번 불러봤어. 초코파이는 먹었니?" 



"옙! 딱딱하게 언것이 정말 맛있었습니다." 



"맛있었다니 다행이네. 음.. 그럼 태기야, 천천히 샤워해." 







꿀꺼억. 



난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아무데나 내팽겨쳐진 태기의 티셔츠와 바지. 

난 살며시 바지를 주워들었다. 


조심조심. 들키면 끝장이다. 



그렇다. 난 태기의 바지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지뒤에 꽂혀있는 여의봉을 말이다. 


나 연개소리. 맨손으로 가리라 굳게 마음을 먹었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내가 겪어보는 최초의 큰 싸움이라.. 많이 떨렸으니깐. 

그리고 이런 무기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폼나지 않은가.(전혀.-_-) 




하아_ 정말 긴장되는 순간이다. 

자신의 보물 1호라고 늘 외치고 다녔던 여의봉을 내가 가져간걸 안다면 

태기녀석은 아마도 날 죽이려 들것이다. 

(보스라서 진짜 죽이기야 하겠냐만은.) 







"거기 멈춰!" 







흠칫. 



갑작스런 태기의 목소리에 놀란 난 동작을 멈추어 버리고. 







"멈추시오오~ 낭자아아♬ 고운 꽃신 신고서 어딜 그리 급히 가는 것이오. 

엉덩이를 흔들지 마시오오. 씰룩씰룩 흔들지 마시오오.♪ 

당신의 엉덩이와 함께 내 가슴도 흔들리는 구려으이으이.♬" 



"...후. 뭐야? 판소리였잖아?" 







그런 놀라움도 잠시 이어지는 태기의 어설프기 짝이 없는 판소리에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스윽. 드디어 난 여의봉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홱_ 바지를 냅다 던져 버리고선 집을 빠져나왔다. 







"형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민규의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도록 현관문을 쾅. 닫아버리면서 말이다. 


뛰어야 한다. 

되도록이면 빨리 뛰어야만 한다. 



난 있는 힘껏 학교를 향해 전력질주를 하였다. 

아직 완전한 봄이 아니라 밤은 차기만 했다. 

그래도 난 뛰고 또 뛰었고 그러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뿡.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소리. 







뿡뿡. 






내가 빠르게 뛰면 뛸수록 더 크게 들려오는 소리. 


그것은 바로 방귀소리였던 것이다. 

저녁에 먹은 꽁보리밥이 소화가 덜 된 모양이다. 

(tv에 나온 꽁보리밥이 먹고 싶다던 태기를 위해 민규가 손수 지어준 밥이였다.) 



제길.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쑥스럽지만 괜찮다. 

아무도 못들었는 걸 뭐.-_- 







"하악하악." 







어쨋거나 저쨋거나 간만의 달리기를 통해 꽁보리밥을 모두 소화해낸 나는 

정확히 9시가 되어 학교 앞에 다다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제일 늦게 온 모양인지 학교 앞에는 S고로 보이는 녀석들이 많이도 모여있었고 

학교 벽에 기대어 앉아 담배를 피고 있던 새신이 제일 먼저 눈에 띠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새신이 담배를 바닥에 지진후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일어섰다. 

짜식, 안 본사이에(그래봤자 5시간.) 키가 부쩍 더 큰것만 같다. 







"그것 가지고 되겠냐?" 







내손에 들려있는 여의봉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어보이는 새신이었다. 


역시 문구점에 들려 야구방망이라도 사올 걸 그랬나? 

에이, 아니야. 태기는 이걸로 잘만 싸우던걸? 

난 다른 사람들이 들고 있는 무기를 살펴 보았다. 

하나같이 야구방망이며 쇠파이프며 장난이 아니였고 

다만 녀석들과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바로 새신이었던 것이다. 







"넌 왜 아무것도 안 가져 온거야?" 







궁금함에 내가 묻자 새신은 손에 붕대를 감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이길수 있으니깐." 







호. 자신만만이구만? 

녀석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쳐나다 못해 철철 흘러내렸고 

붕대를 동여매고 있는 손엔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잠시후 붕대를 모두 동여맨 새신은 손을 오므렸다,폈다를 반복하며 

마지막으로 붕대를 점검하였다. 







"그럼 슬슬 가볼까?" 







입가에 미소를 띠며 중얼거리는 새신. 

그 모습에서 난 신비한 빛줄기를 볼 수 있었다. 

물론, 착시현상이었겠지만 말이다. 


새신의 말에 일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는 남자아이들의 얼굴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난 넘쳐나는 자신감을 가진 이들에게서 승리를 미리 엿볼수가 있었고 

나또한 다시 한번 마음을 단단히 먹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쿵쾅쿵쾅. 




심장소리와 발소리가 뒤엉켜 긴장된 분위기를 연출하고 

새신을 앞세워 남자들은 하나,둘 공사장으로 걸음을 하였다. 







"F고 녀석들은 비겁하기로 유명하니깐 다들 정신 바짝 차려." 







새신이 말하고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단 5분만에 우리 모두는 학교에서 600m 떨어진 공사장에 도착하였다. 

밝은 달빛조차도 집어 삼킬만큼 어두컴컴한 공사장 안은 

한마디로 호랑이 굴이나 다를게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호랑이는 우리가 될것이다. 







"아직 안온건가?" 







노란 장발머리 윤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에 아이들은 공사장 안까지 따라 들어온 긴장감을 저마다 한숨소리로 내쫓아 버렸고 

덩달아 나까지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런데 그때. 여기저기 세워져 있던 철근 사이로 

사람의 형체가 하나,둘씩 희미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난 그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나, 둘, 셋, 넷... 



총 합이 열이라는 것을 내가 알았을 때쯤 

아이들은 방망이와 파이프, 그리고 각목을 꽈악 쥐기시작했다. 

나또한 여의봉을 움켜 잡았고 말이다. 

(이시각 변태기는 여의봉을 애타게 불러대고 있었다.-_-) 


서서히 그 형체가 짙어지는 사람들. 

그리고 처음 듣는 목소리가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공사장 안을 울렸다. 







"새신, 서울 제패는 이제 그만 F고에게로 넘길때가 온것 같다." 







껌을 질겅 씹으며 건방지게 이야기하는 F고 남자아이. 

딴에는 쎈척하려는 건지, 아님 여유를 부리는 건지 풍선을 크게 불어보인다. 







"푸우 ─" 







우리 모두는 그 풍선껌에 주목하고 

자신이 진짜 고무풍선인것 마냥 겁도 없이 부풀어 오르던 껌은.. 


끝내 팡! 하는 작지만 요란한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읍, 퓃펫페." 







입가에 눌러붙은 찐득이는 껌들을 정신없이 떼기시작하는 F고 남자애. 

(이름을 모르는 관계로 껌딱지라 부르겠다.) 







"킥킥킥." 







껌딱지의 우스광스러운 모습에 저마다 웃음보를 터뜨리는 S고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새신이었고 

상대편 녀석들을 훑어보며 새신이 물었다. 







"왜 니놈들 뿐이냐?" 







주머니에 여전히 손을 찔러넣은체 허리를 반듯이 펴고 서 있는 새신. 

몸매가 웬만한 모델들 저리 가라다. 


새신의 물음에 마지막 껌찌꺼기를 떼어내며 껌딱지가 대답했다. 







"너희들 쯤이야, 우리만으로도 충분해." 



"훗, 그래? 그거 참 재밌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새신. 

그리고 몇초후 미소는 사라지고 굳어져 버린 얼굴로 새신이 차갑게 말한다. 







"개소문, 그럼 어디 솜씨 좀 볼까?" 



".........." 







무슨 소문이 나돌았길래 개소문이라는 거지? 

난 뜬금없는 새신의 말에 혼자 고민해야만 했다. 


그런데 왜 모두들 날 보는건지.. 

원참, 알 수가 없다. 


차갑게 식어버린 눈으로 F고 놈들을 바라보던 새신이 이내 날 돌아보고. 

그러면 그제서야 새신의 말을 이해한 나였던 것이다. 







"나?" 



"그럼 여기에 그런 희안한 이름 가진 녀석이 너말고 또 누가 있냐?" 







왜? 너있잖아, 너.-_-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딱♬ 


휴. 말을 말자. 







"좋아! 나만 믿어." 







난 당차게 한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곧 새신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녀석이 너희 열놈을 모두 상대해 줄거다." 







난 목구멍으로 침을 삼켜야만 했다. 


좋아! 연개소리, 까지것 그냥 한번 부딪혀 보는 거야. 

넌 아직 젊잖아? 

일단 난 껌딱지에게 웃어보였다. 

마치 승자의 모습처럼 말이다. 







"하하. 우릴 너무 과소평가 하는 거 아냐? 이거 섭섭한데?" 







목을 좌우로 꺽으며 F고 껌딱지가 말했다. 


후후. 내가 그 쓸데없이 높기만한 콧대를 확 꺽어주마. 

난 여의봉을 들어올렸다. 

그리곤 무술인처럼 오라고 손짓을 해보였다. 

"아뵤~" 이렇게 말이다. 







"얘들아, 저새끼 아작을 내버려라!" 







날 비웃던 껌딱지가 소리치고 그러면 뒤에 있던 F고 9명이 

각목을 들고서 일제히 덤벼들었다. 

새신, 지금부터 내 실력을 잘 지켜 보드라고. 







"이얍!" 







난 여의봉에 붙어있는 빨간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여의봉이 1m 길이로 늘어났고 

그럼과 동시에 맨 먼저 달려들던 키다리 하나가 복부를 정통으로 찔려 뒤로 나자빠져 버렸다. 

(절대 일부러 그런거 아님.) 



오우! 이거 횡재했는걸? 


얼떨결에 한녀석을 쓰러뜨린 것도 모르고 새신은 놀라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일단 스타트는 좋았다. 

이대로 계속 밀어붙이는 거다. 



그때 그렇게 하나에 만족하며 방심하고 있을 찰나였다. 







"새끼야! 뒤 안봐?!!" 







새신의 고함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다 본 내 눈앞에 

황토색 각목하나가 떡하니 날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악!" 







난 나도 모르게 소리부터 질렀고 눈을 찔끔 감으며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쯤이면 두터운 각목이 내 얼굴에 부닥칠때도 되었건만 

아무 통증도 느껴지지가 않자 난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보았다. 







"이이.." 







자신의 각목을 막아버린 내 여의봉을 밀쳐내기위해 이를 가는 F고 남자. 

그랬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놈을 막아낸 것이었다. 

흐흐_ 역시 내 몸속엔 무서운 힘이 잠재되어 있었던 거야. 


난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점점 기운이 빠진다. 

일단 놈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더이상 어쩔줄 몰라하는 나를 보자 

새신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악. 안돼.ㅠ0ㅠ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난 결국 새신의 친구로 실격이라도 될까봐 소리없는 절규를 내질렀다. 

그나저나 팔이 너무 아프다고요!! 



그렇게 팔의 기운이 슬슬 없어져 갈때쯤. 







퍼억!! 





아군(S고) 한명이 F고의 허리를 힘껏 발로 차버렸다. 

그에 "욱"하는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는 남자였고 

다음은 퍽퍽퍽!!!-_- 


상상에 맞기도록 하겠다. 



어쨋든 새신의 고개짓과 함께 S고 남자아이들 5명이 F고에게 달려들었고 

그렇게 공사장(판)은 완전한 싸움판으로 변해버렸다. 







"너같이 싸움 잘하는 녀석은 살다살다 처음 본다." 







내옆에 다가선체 S고와 F고의 싸움을 지켜보며 새신이 말했다. 


그래, 물론 나도 알고 있다. 

비꼬는 말이라는 것을.. 







"그럼 나.. 실격인거야..?"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담배 한대를 꺼내 물며 불을 붙이는 새신. 

잠시후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새신이 말한다. 







"후_.. 글쎄?" 







글쎄라니.. 참 애매모한 대답이 아닐수 없다. 


난 기진맥진하여 거의 쓰러져 버린 F고를 바라보며 여의봉의 빨간 단추를 또 한번 눌렀다. 


슈욱. 원래의 크기로 되돌아온 여의봉이 내 손 안을 채우고 

난 마음속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갑자기 허무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과연 내가 전국의 수많은 조직들과 싸워 이길수가 있을까? 

또 아빠의 원수를 찾을 수는 있을까? 

아니 무엇보다 이녀석을 내편으로 만들수나 있을 런지.. 



이렇게 왠지모를 기분으로 내 자신을 점점 잃어가고 있을 때쯤 

껌딱지를 포함한 F고 녀석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져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는 정말 S고가 승리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새신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고 

담배를 바닥에 내던진 후 발로 비벼대며 말하였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니? 

이곳에 온 F고 녀석들은 모두 저렇게 뻗어버렸는데? 


난 새신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곧이어 F고 10명과 그다지 힘들지 않은 싸움을 벌였던 S고 5명이 

새신의 뒤에 서 있던 2학년 남자들과 합류하고 

사람들의 표정에서 난 공사장 내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할 수가 있었다. 







"쥐새끼처럼 숨어있지 말고 이제 그만 나오지 그래?" 







새신이 말했다. 


나오라니..? 

도대체 누가 숨어있다는 거야? 


이렇게 의문을 가질때 밤하늘만큼이나 어두운 그림자들이 

점점 하얀 콘크리트 벽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들과 가죽잠바를 입은 사내놈들.. 


저 교복은 분명 F고의 교복이 분명했지만 

가죽잠바를 걸친 사내들은 학생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우리보다 서너살 정도는 더 많아 보였다. 







"신아?" 







상대편을 본 현호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새신을 바라보면 

새신이 질문조차 없었던 대답을 내뱉었다. 







"조폭새끼들이야."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다. 


훗. 새신 말대로 정말 비겁한 놈들이로군. 

자신들 싸움에 조폭을 끌어들이다니.. 







"새신, 예전의 빚을 이제야 갚게 되어서 정말 미안하다." 







까치머리의 남자아이. 

저 아이가 F고의 대가리인가 보다. 







"오늘 갚을 수 있기는 한거냐?" 







새신의 말에 웃어보이는 까치머리. 







"이자까지 쳐서 두둑히 갚아주지." 



"..모두 나가." 







까치머리가 고개를 까딱이자 대략 20명은 되어보이는 F고 녀석들이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콘크리트 벽에 기대선체 팔짱을 끼고 이를 지켜보는 가죽잠바들이었다. 







"짱! 무슨 소리야? 모두 나가라니?!" 



"저자식들은 나혼자서도 충분해. 그러니깐 모두 나가있어." 



"웃기지마! 아무리 짱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저새끼들까지는 무리야!" 







노란 장발머리 윤호가 말했다. 







"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는 거냐? 

짱의 말은 무조건 절대복종이란걸 모를리는 없을텐데?" 



"하지만.." 



"나가." 







새신의 말은 단호했고 S고 아이들은 고개를 숙였다. 


뭐야, 지금? 새신 자기 혼자 멋있는 척 다 하는 거야? 

저 많은 녀석들을 어떻게 자기 혼자선 감당하겠다고. 

엑. 말도 안돼. 

그렇게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건만 S고 아이들은 새신의 한마디에 뒤로 돌아섰다. 

단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건물을 빠져나가 아이들.. 

이것이 방금 새신이 말한 절대복종이라는 것인가. 







"넌 왜 안나가?" 







새신이 정면을 응시한체 물었다. 







"그러는 너는 왜 안나가냐?" 







이번엔 내가 반문했다. 


그러자 나를 보는 새신이었다. 







"원래 대가리는 나가는 게 아니야." 



"그럼 나도 안나가." 



"넌 임마, 꼬붕이잖냐? 헛소리 하지말고 당장 나가." 







윽. 뭣이? 꼬,꼬붕??-0- 


평소부터 욱하는 성질이 있었던 나는 새신을 째려보았고 

새신은 내가 쓴 모자의 창을 푹 눌러버리며 말했다. 







"넌 어째 하는 짓이 계집애 같냐? 터지기 전에 빨랑 꺼져." 







순간 새신의 행동에 내 심장이 반응을 했다. 

그게 어떤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건 새신의 말과 행동에 심장이 뛰었다는 거다. 


그,그래.-_-; 아마 나도 모르게 겁이 났었던거다. 

그래서 심장이 아주 잠깐 미세하게 발작을 일으켰던 것이다. 

으. 쪽팔리게 조직의 보스로써 겨우 고등학교 대빵에게 쫄아버리다니. 

이것은 참으로 치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소문!! 빨리 꺼져!!!" 







끝내 언성을 높이는 새신이었다. 

쳇, 그래. 간다고! 가면 될거 아냐?! 


왠지모를 자존심에 나까지 뒤돌아 서 버리고 말았다. 

난 저자식의 명령따윈 듣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끝까지 곁에 있어줄까? 


아니야. 꺼지라는데 구지 도와줄 필요가 있겠어? 

그래도 혼자서는 무리일텐데.. 



그렇게 두가지 고민에 빠진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로 

무작정 뒤돌아 걸어나가기만 했고 

그러다가 가죽잠바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담배를 펴대며 새신과 F고 녀석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가죽잠바들.. 

그런 놈들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걸어가고 있을때 

난 낯익은 물건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가죽잠바를 입은 남자들의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 


그것들은 하나같이 죄다 같은 팬던트가 매달려 있었고 

눈을 찌푸려 그 팬던트들을 자세히 봤을때야 비로서 

그 팬던트의 모양이 대파줄기를 본따 만든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난 그들이 전국구 3대 조직중 하나인 대파의 조직원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전국구 No.3 대파와 F고가 함께 있는 거지?? 


♡7 





결국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아직도 가죽잠바 놈들의 목걸이가 마음에 걸린다. 



대파줄기.. 


그건 분명 전국구 3대조직 대파를 상징하는 것이 확실했다. 

F고가 대파와 관련되어 있다면 아무래도 이번 싸움은 무모한 싸움이 될것만 같다. 


만약, 새신이 이긴다고 하더라도 저 조무래기들은 분명 자신들의 웃사람에게 

이 사실을 모두 털어놓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혹시 또 모른다. 


새신의 실력을 보고 감탄해 자신들의 조직에 스카웃하려 할지도.. 



아악! 그건 절대 안된다! 

절대 있을 수도 아니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다! 







"저자식 표정 존나 웃기다." 



"그러게." 







-_- 나보다 더 먼저 공사장 밖으로 나온 S고 녀석들이 말했다. 

내 표정이 뭐가 어때서! 







"그 모자 "아디닥스"냐? 요새는 별별 희한안 짝퉁이 다 나오네." 







내 모자에 큼지막하게 적힌 상표를 보며 준수라는 녀석이 시비를 건다. 

젝일. 방바닥에 굴러다니길래 대충 주워서 쓰고 온건데. 

그게 동네 시장에서 구입한 짝퉁 모자였나 보다. 

오늘따라 쓰래빠 보스, 연개소리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이대로 내 체면이 발끝까지 깍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짝퉁이라니! 이래봐도 "아디다스"와 "닥스"를 섞어 놓은 거라고! 

너희들은 그런것도 모르냐? 촌스럽긴." 



"그러니깐 짝퉁이지." 







우씨. 속을 줄 알았는데 안 속잖아? 

보기보다 제법 똑똑한데? 







"너,너희들은 걱정도 안돼?" 







난 끝까지 거짓말을 해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다른 화제로 잽싸게 돌려버렸다. 







"뭐가?" 







윤호가 물었다. 







"너희 짱은 혼자 싸우고 있는데 걱정도 안되냐고!" 



"......." 







아무런 대답도 없는 아이들.. 

잠시후 윤호가 말한다. 







"...어쩔수 없어. 명령이니깐." 



"훗. 겁이 나는게 아니고?" 



"말 조심해." 







발끈할것 까지야. 


그래, 나도 알고 있다 

S고 녀석들은 지금 겁이 나서 그러는게 아니라 

자신들만의 규칙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한숨만 쉬어대는 녀석들.. 

난 새신을 떠올렸다. 

그럼과 동시에 가죽잠바 놈들의 얼굴이 겹쳐지고. 






두근. 






가슴이 뛴다. 



왜이러지? 난 상관없는데. 

이 싸움에서 만약 새신이 진다면 난 녀석을 버리고 또 다른 녀석을 찾아가면 되는 건데.. 

그저 싸움의 결과만 기다리면 되는데.. 



그런데 이상하다. 


놈이 자꾸만 걱정된다. 





끝내 난 여의봉을 움켜 잡았다. 

결심을 한것이다. 







"난 다시 들어가겠어!" 







새신을 도와주기로.. 

(도움도 안될텐데.-_-;) 







"......." 







내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치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이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모두 똑같았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알수가 없었다. 







"잘난척 하지마." 







윤호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잘난척이라.. 







"잘난척이라도 좋아. 그러니깐 너희들도 함께 가." 



"..안돼." 



"왜? 명령이니깐? 명령이니깐 친구가, 선배가 다쳐도 좋다는 거야?!" 



"멋대로 지껄이지마." 



"후. 그래, 나는 갈테니깐 너희들은 여기 앉아서 마냥 기다리기만 해!" 







난 이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새신이 있는 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후후. 내가 생각해도 방금 그 장면은 정말 기가 막히게 멋졌던것 같다. 

아마 녀석들도 깨달은 바가 있겠지? 


잠시후면 드라마 속처럼 




"연개소문! 니말이 옳았어. 그동안 우리가 잘못 생각했던거야." 




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할거다. 

분명히. 움후후후.-▽- 







(♬하지만 현실 그렇지가 않았다.) 






- 준수와 노란 장발머리 윤호의 대화 - 






"저새끼 또라이 아니냐?" 



"그러게 말이다. 괜히 안에 들어갔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려고." 



"그런데 윤호 너 임마, 어느 이발소 가서 한거냐? 

머리색이 장난이 아닌데?" 



"(피식.) 맥주에 머리만 담궜을 뿐이데." 








- 2학년 아이들의 대화. - 







"으. 춥다. 집에 언제 간다냐?" 



"난 빨리 가서 잠금이 봐야 되는데." 



"아! 그거 존나 재밌지 않냐? 그런데 잠금이 물탱크 잠궈서 어떻게 됐냐?" 



"어떻게 되긴, 그후로 그 동네에 물이 끊겨서 1년동안 가뭄이었다잖아." 



"하여튼 잠금이 그년이 미친년이라니깐?" 







(-_- 한편 이 사실도 모르고 겁도 없이 공사장 안으로 뛰어들어간 우리의 주인공 연개소리는..) 










퍽. 퍼퍽!! 


공사장 안은 둔탁한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에게 날아오는 각목을 피하고 피하고 또 피하던 새신은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쇠파이프를 주워들었다. 





씨-익. 


싸늘한 미소. 


F고와 무기전을 치르는 새신의 얼굴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진정한 싸움꾼의 모습. 







"씹팟! 개새끼들아 지금 뭐하는 거야?!! 어떻게 한놈을 못 죽여?!!" 







F고 대가리, 까치머리가 성난 얼굴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런 까치머리의 말을 새겨 듣는 건지 F고 녀석들은 더욱더 이를 악 물고서 새신에게 달려 들었고 

새신또한 그들을 열심히 받아 쳐주었다. 


각목이 날아오고 새신이 그 각목을 파이프로 막아버리고 

발로 F고의 복부를 차버린다. 


그리고 뒤에서 두 녀석이 덮치려 하면 눈치 빠른 새신은 고개를 숙여 

녀석들의 주먹을 피한 후 파이프로 내려쳤고 마무리로 멋진 미소또한 잊질 않았다. 




-_- 이거 내가 구지 안와도 됐었잖아? 

그렇게 새신의 날렵함과 싸움실력을 보고 감탄에 젖여 있을때쯤 바로 그때였다.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대파의 조직원, 가죽잠바들. 


내 가슴은 뛰어야만 했다. 


절대 두려워서, 무서워서가 아니다. 

바로 설레임때문이었다. 


이제 조금씩 내꿈의 문턱에 올라선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다. 

난 여의봉의 단추를 눌러 길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새신에게 달려가 녀석의 등에 내등을 맞대고 섰다. 


갑작스런 나의 출연에 의아해 하는 가죽잠바와 F고였고 

새신은 적지않게 놀라는 것 같았다. 







"왜 왔어?!!" 







새신이 등을 돌린체 소리쳤다. 







"의리가 있지! 어떻게 혼자 가냐?!" 



"지랄을 하네!" 







짜식_ 속으로는 감동 받았으면서.. 쑥스러워 하기는. 


좋았어! 연개소리, 지금부터 니 실력을 놈들에게 본격적으로 보여 주는 거야! 







"새신, 나만 믿어." 







내가 목소리를 척 내리깔며 작게 소곤거렸다. 

그러자 콧방귀를 픽 끼는 새신이였고 







"터지지나 마라." 







난 상처받아야만 했다.ㅠ_ㅠ 


저게 끝까지 날 무시하네? 

흥! 두고 보라지. 내손에 태기의 여의봉이 있는 한 절대 두려울 것이 없을테니깐! 







"강아지 한마리가 제발로 또 굴러 들어왔군. 

형아들은 봐주는 것따윈 없으니깐 미리 각오하는게 좋을거다. 이 애송이들아." 







비맞은 중마냥 혼자 궁시렁거리며 대파가 말했다. 

저 가죽잠바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애송이는 버섯이름이고!! 빨리 덤비기나 해!" 







크고 우렁차게 내가 한마디 외쳤다. 

그러자 눈살을 찌푸리는 새신이 아닌가! 

녀석이 말했다. 







"넌 꼭 이런데서까지 유식한 티를 내야겠냐?" 







아마도 애송이에 대해 내가 한 설명을 말하는 가 보다. 

하긴 아는 척을 하면 무식한 대파녀석들이 기분 나빠 할 수도 있겠군. 푸하하! 

(※애송이란? 애티가 있어 어려보이는 사람 또는 생물.) 







"둘 다 조져버려!" 







유난히도 가죽에서 광이 많이 나는 대파가 크게 소리치자 

그나마 몸을 가눌 수 있는 F고 몇몇 녀석들과 함께 대파 5명이 동시에 덤벼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쇠파이프를 고쳐 잡는 새신과 침을 삼키는 나. 

우리 두사람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서 놈들을 바라보았다. 







"맞더라도 날 원망하진 마라." 







새신이 앞을 응시한체 나에게 말했다. 







"걱정마.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테니깐." 







나의 멋지구리한 대사였다. 훗. 







"이야아!!" 







드디어 놈들이 가까이 다가왔고 새신과 난 환상적인 콤비가.... 



되지 못한체-_- 녀석들을 상대해주었다. 




겨우 한대도 내려칠까 말까하는 나를 놈들로부터 막아주기 바쁜 새신은 그야말로 검을 든 기사. 

아니 무적이었다. 



내머리로 향해 날아오는 각목을 파이프로 막아주는 새신. 

나에게 날아오는 주먹을 주먹으로 막아준 새신. 

가죽잠바의 발차기를 날렵하게 막아주었던 새신. 



젠장. 아까부터 계속 도움만 받고 있잖아? 

난 이사실에 기가 막히고 허탈하기까지 했다. 







"병신. 너 도대체 왜 온거냐?" 







숨에 차 허덕이며 새신이 째려보았다. 

나도 그게 궁금하다고.ㅠ_ㅠ 



결국 난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힘없는 여자에 불구했던건가. 

난 쓰래빠의 보스라는 직위와는 달리 힘없는 내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내자신을 자책하고 있을 때 두 눈에 칼이 들어왔다. 


아니 칼이 보였다. 

가죽잠바의 손에 들린 칼이 말이다. 


새신의 뒤에서 비겁하게 칼을 들이미는 가죽잠바. 

그리고 순식간에 그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일명. 여의봉사건.-_- 







"안돼!!!" 







놀란 나는 새신을 구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새신을 밀어버리고선 손에 쥐고 있던 여의봉을 힘껏 들어올렸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날아오던 사시미는 정확하게 태기의 여의봉 정중앙에 꽂혀버렸고.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아무생각도 들지가 않았다. 

순간 공사장 안은 정적이였고 모두들 숨을 죽이고서 나와 가죽잠바를 보았다. 


그렇게 1초가 지나고.. 

3초가 지나고.. 5초가 지났다. 







"끄아아악!!" 







툭. 


난 손에서 사시미가 꽂힌 여의봉을 놓아버렸다. 

그럼과 동시에 나에게 밀려 넘어졌던 새신이 잽싸게 일어나 가죽잠바를 때려 눕혀버렸고 

잠잠해졌던 싸움은 다시금 불이 붙었다. 


이..이를 어쩌지? 


이 사실을 태기가 안다면 한바탕 난리가 날텐데.. 


난 치열한 싸움속에서 쭈그리고 앉아 여의봉을 손에 들었다. 

다행이도 반 토막나지는 않았지만 사시미에게 찔린 상처가 역력히 남아 있었다. 



태기가 우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이 큰일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참나원,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아니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쿵쾅쿵쾅. 낯익은 발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공사장 안의 모든 사람은 또 다시 동작을 멈추고 침묵을 했다. 




퍽! 




그리고 새신의 마지막 펀치와 함께 가죽잠바가 쓰러지고 







"형니임!!!" 







-_- 도대체 어떻게 안건지 태기가 들어왔다. 

민규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S고녀석들도 함께. 



일단, 싸움은 더 빨리 끝날것 같았지만 그래도 걱정은 걱정이다. 


바로 태기때문에 말이다.-_-; 







"형님, 다친데는 없으십니까?" 



"응.. 난 괜찮은데..그게.." 







나에게 달려온 민규의 걱정스런 질문에 난 대답을 해주면서도 여의봉을 바라보았다. 

그에 민규와 조금 뒤늦게 달려온 태기가 여의봉을 내려다 보았고 


끝내 태기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다. 







"여..역시 형님이 들고 가셨군요..?" 







태기가 이를 악물며 나에게 물었다. 


서, 설마 때리기야 하겠어? 







"어?...어..그게.." 



"이게 저한테 얼마나 소중한건지.. 형님이 더 잘 아시면서.. 

그런데.. 어떻게.." 



"미안해.." 



"형...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에라이, 이젠 나도 몰라.ㅠ_ㅠ 







"내,내가 그런거 아냐! 저, 저놈이 그랬어!! 저새끼가 그런거라고!!" 







난 사시미를 내던졌던 가죽잠바를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러자 눈물을 글썽이며 불쌍한 가죽잠바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태기였고 

난 잠시 눈을 감아야만 했다. 







"씨,씨발.." 







나지막한 욕한마디와 상처난 여의봉을 꽈악 움켜쥐는 태기. 

결국 변태기가 폭발했다. 


♡8 





화산이 폭발했다. 

핵폭탄이 폭발했다. 

똥차가 폭발했다. 


그리고 변태기가 폭발했다. 

마치 한마리의 독수리를 보는 듯.. 

(태기가 쓴 두건이 그런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가죽잠바는 뒤로 주춤거려야만 했다. 







"개자식, 니가 빵에 갇혀 바퀴벌레를 잡아 먹는 빠삐용의 기분이 어떤지 알어?" 







이를 악물고서 이야기를 하는 태기의 모습엔 진지함이 묻어나다 못해 아주 스며들어 있었다. 

태기의 물음에 고개를 흔들던 가죽잠바는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지만 

태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바람에 거리는 전과 동일해져 버렸다. 

일단 기선제압에선 태기가 열 수 위다. 







"그럼 국에 쓸 콩나물 뿌리를 딴다는게 실수로 그만 

콩나물 대가리만 다 따버린 그 좆같은 기분을 니가 알고 있냐? 

지금 내가 그 기분이야." 







-_- 조금 많이 황당한 대사였지만 그래도 폼은 난것 같다. 

양팔을 벌려 여의봉의 양끝을 고쳐 잡는 변태기. 

드디어 싸울 태세를 갖춘 것이다. 







"씨발, 덤벼. 빨랑 덤벼봐봐!" 







흥분한 태기가 소리치자 가죽잠바는 괜시리 가죽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어보였다. 

그리고는 두 주먹을 가슴위에 두었다. 







"정신 나갔다던 니네 삼촌 아니냐? 어째 멀쩡해 보인다?" 







이건 나와 함께 태기를 지켜보던 새신이 한말이다. 

갑작스런 질문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어쩔수 없다. 

대충 둘러대는 수 밖에.. 








"지금은 11시가 아니거덩." 



"아.." 







어영부영 넘어간것 같기는 하다만 새신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하긴 옥상 위에서 두 사람의 인상이 그만큼 강했으니 기억 못하는게 더 이상하겠지만 말이다. 

어쨋든 태기는 지금 여의봉을 들었고 가죽잠바는 주먹을 쥐었다. 

아니 다시 쇠파이프를 들었다. 

이로써 무기 대 무기. 남자 대 남자. 싸움은 공평성을 갖추었다. 







"니놈이 우리가 누군지 몰라서 까부는가 본데? 결국엔 후회하게 될거다." 



"개그치고 있네. 후회할 새낀 바로 너야." 







긴 대사는 가죽잠바의 것이었고 짧은 대사는 태기의 것이었다. 

과연 태기는 가죽잠바 목덜미에 걸려 있는 대파줄기를 못 본것일까? 

그래, 만약 봤다고 치더라도 물러설 변태기가 아니겠지만 뒷일이 걱정되는 건 솔직히 사실이다. 


태기가 아닌 저 가죽잠바가 말이다. 후후. 







"그럼 누가 후회하는지 어디 시작해볼까?!" 







가죽잠바가 먼저 덤비었다. 

한마디로 이제부터 게임 스타트인 것이다. 





- Game Start - 








태기는 두 눈에 힘을 풀었다가 곧 다시금 힘을 주었다. 

가죽잠바가 쇠파이프를 높이 치켜든체 태기에게 달려들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S고 녀석들과 F고 녀석들이 일제히 서로에게 주먹과 각목, 파이프를 겨누었다. 

그렇게 광택이 가장 많이 나는 가죽잠바 한 놈과 새신을 제외한 나머지 녀석들은 상대와 피터지는 싸움을 벌이었다. 

물론, 민규도 포함해서 말이다. 

또래를 상대하는 S고와 F고. 그리고 나머지 가죽잠바들을 혼자 도맡은 민규. 

마지막으로 여의봉의 원수만 눈에 보이는 태기. 

지금 이대로라면 두려울 것은 하나도 없다. 

마지막에 미소 짓는 자는 당연히 우리들이 될테니깐. 





쒸이잉. 



파이프가 어두운 공기를 가르고 태기의 오른쪽 어깨에 떨어지려고 하였다. 

하지만 성격이든 행동이든 얍삽 빠르기로 소문난 태기는 보란듯이 파이프를 피해주었고 

다시 한손으로 여의봉의 1/4지점을 고쳐 잡고선 여의봉의 끝을 가죽잠바에게로 들이밀었다. 







"이야야얍얏!!" 







사사사삭. 

빠르게 손을 놀리는 태기. 

무슨 소림무술을 보는 것처럼 그 속도가 점점 빨라져 갔다. 

나중에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여의봉을 이리저리 움직여 가죽잠바를 공격하였고 

둔한 가죽잠바는 한대도 피하지 못한체 여의봉이 날아오는대로 모두 맞아주었다. 

모든 이는 무기를 거두고선 태기에게로 시선을 집중하였다. 

태기의 일방적인 공격은 약 1분간 계속되었고 

휘휙휘익. 한손으로 여의봉을 여러바퀴 돌림으로써 태기의 공격은 벌써 막바지에 이르렀다. 




퍽! 멋진 여의봉 묘기후 가죽잠바의 배꼽부위를 찌르는 것으로 모든 공격을 마무리 짓는 변태기였다. 

그와 반대로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한체 어이없게 쓰러져 버린 가죽잠바는 

고통스런 신음소리만 연신 내뱉어댈 뿐이였다. 

이것으로 여의봉의 복수는 갚아준 것만 같았다. 

아마 태기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처난 여의봉에겐 그게 끝이 아니였고 

우지직. 예사롭지 않은 소리와 함께 툭.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버리는 여의봉의 반쪽. 

그렇다. 결국 태기의 힘에 견디지 못한 여의봉이 두동강이 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순간 쌩한 바람이 건물안을 스쳐 지나가고 얼어붙은 태기와 함께 우리 모두는 바닥에 떨어진 여의봉을 바라보았다. 


아. 끝내 부서지고 말았구나. 

이젠 어쩔 도리가 없다. 멋있게 전사한 여의봉의 명복을 빌어주는 수 밖에.. 







"제,젠장." 







여의봉을 내려다 보며 중얼거리는 태기의 눈엔 또다시 눈물이 한 가득 고여 있었다. 

그런 태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치가 지지리도 없는 광택나는 가죽잠바가 입을 열었다. 







"넌 누구냐?" 







광택나는 가죽잠바의 질문에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태기다. 







"지금.. 나보고 물었냐?" 



"그래. 왠지 알아둬야 할것 같아서 말이야." 







태기는 광택나는 가죽잠바의 말에 고개를 떨구며 피식 웃어보였다. 

잠시후 태기는 고개를 들었고 쓰래빠를 신은 한쪽 발을 척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난 쓰래빠다!" 



"........" 



"그 정도만 알아둬. 공부도 못하는게.." 







정말 멋있었다. 멋졌다. 

저 대사는 보스인 내가 했어야 하는 건데.. 정말 아쉽다. 







"훗. 기억해두지. 다음엔 이런 애들 싸움이 아닌 정식으로 한판 붙어보자고. 

내가 우리 보스한테 잘 말해둘테니깐. 그만 가자!" 







역시 저 광택나는 가죽잠바가 저 중에서 뭔가 하는 놈이였던 것이다. 

놈의 한마디에 몸을 추스리고 일어나는 가죽잠바들을 보니 문득 그런 확신이 들었다. 

유유히 공사장을 빠져 나가는 가죽잠바들.. 

그렇게 나가버리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광택나는 가죽잠바가 뒤를 돌아보았다. 


태기를 바라보는 가죽잠바. 

녀석이 말했다. 







"그리고 이건 니가 오해하는 것 같아서 살짝이 말해주는 건데? 

나 농고에서 10등했다." 







-_- 아까 태기의 말이 신경쓰였던 모양인지 광택나는 가죽잠바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런 가죽잠바의 자랑아닌 자랑을 그저 듣기만 하던 태기는 다시 돌아서 가버리는 놈들을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봐주었다. 







"도,도망가자!" 







가죽잠바, 그러니깐 대파녀석들이 가버리자 믿던 힘이 사라져 버린 F고는 

잔뜩 쫄아버린건지 너나 할거 없이 S고와 새신의 눈치를 보며 도망쳐 버렸다. 

이것으로 이번 싸움도 S고의 승리로 끝나고 만것이다. 







"저자식 대단한데?" 







새신이 태기에게서 시선을 떼지못한체 말을 했다. 

훗, 당연하지. 태기가 누구 부한데? 


지금 이순간만큼은 녀석이 자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난 흐뭇한 미소를 띠우며 태기를 바라보았다. 

(비록 태기는 두동강이 난 여의봉을 껴안고서 울고 있었지만.) 


그나저나 정말 다행이다. 

자칫 잘못하면 크게 다쳤을 지도 모르는 이 싸움에서 모두 무사하니 말이다. 

그것도 승리까지 하면서.. 

어찌보면 이게 다 태기와 민규의 공이 컸다고도 볼 수 있다. 

뭐 그덕에 새신의 실력을 모두 보지못해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많지만. 

그래도 다행은 다행이다.^-^ 


아차. 그러고보니 나 이렇게 마냥 좋아할것도 아니잖아? 

신발녀석 내 싸움실력을 보고 분명히 실망했을 텐데.ㅠ_ㅠ 

으아. 신령님 당신은 저에게 단물만 주시는 것도 아니셨군요. 







"그런데 너 진짜 왜 온거냐?" 







쿵! 아니나 다를까 내 가슴을 짓누르는 새신의 질문이었다. 







"그야, 도와주려고.." 







별 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건 내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난 말꼬리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게 도와주러 온거였냐?" 



"..역시 난 안되겠지? 니 친구로써.." 



"알긴 아네."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막상 들으니 가슴이 찢어지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한 계단 오르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런 허탈한 순간이었다. 

내꿈을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인물을 이대로 포기해야만 하는 건가? 

정말 머릿속이 까마득 하기만 했다. 







"흐흑. 우리 불쌍한 의봉이.." 







하아. 일단 저녀석부터 달래야 겠구만. 

난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주저앉아 울고 있는 태기에게 몸을 돌렸다. 

그렇게 태기에게 다가가려는데 그때. 그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내 귀를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만 했던 그 목소리는 바로 새신의 것이었다. 







"친구말고. 너 내 동무 해라?" 







난 새신을 보다가 고갤 돌려 민규를 보았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민규. 

저것은 필시 긍정의 뜻일터. 그럼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니라는 말인데. 







"싫냐? 싫음 말고." 







아직도 상황파악이 완전히 되지 않은 나에게 새신이 말했다. 

S고 녀석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버리려는 신발. 

난 나도 모르게 그런 녀석의 옷깃을 잡아버렸고 (정말 남자답지 못한 행동이었다.-_-) 

새신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니가 원하는 만큼의 싸움실력을 보여주지 못했어. 그래도 괜찮아?" 







사람들의 숨소리밖에 들리지가 않는다. 

공사장 내 공기는 침묵 그자체다. 

난 새신을 보고 또 보았다. 







"니가 그랬잖아. "남자가 의리가 있지."라고. 그것만 있으면 돼. 지금은 말이야." 







툭. 내 머리 위 "아디닥스" 모자의 창을 손으로 눌러버리는 새신. 

완전 감동의 도가니 탕이였다. 


그럼 나 이제 첫번째 계단위에 두 발을 올린거 맞지? 그렇지?? 하하. 

역시 연개소리 해낼줄 알았다니깐? 

앞으로도 이 페이스로 계속 밀고 나가는 거야. 

그럼 언젠가는 쓰래빠의 가족이 늘어 전국구를 쳐부수고 아버지의 복수를 할 날이 꼭 있을 테니깐. 

조금만. 조금만 더 많이 힘내는 거야. 

아버지, 저 꼭 아버지의 사랑스런 자랑스런 딸이 될게요. 

그러니깐 꼭 지켜봐주세요. 꼭이요. 꼭요! 


그렇게 내가 콘크리트 벽을 응시하며 각오를 새로이 다지고 있을 때에도 

우리의 변태기는 이미 세상을 떠난 가엾은 여의봉을 껴안고서 펑펑 울고 있었다. 







"의봉아!! 의봉아!!" 







동무. 그래! 신발아, 내 반드시 너의 멋진 동무가 되어주마! 







"으흐흐. 빠샤!" 



"너 지금 뭐하냐?" 



"빠이팅." 



"미친.-_-" 










\둥근 해가 떴습니다.♬ 






"태기는?" 



"자기 방에 있을 겁니다. 형님." 







학교 갈 준비를 모두 마치고 방에서 나온 난 평소와 다름없이 거실에 나와있는 민규를 보았다. 

그치만 뭔가가 허전한것이 역시 요란스러운 태기녀석이 보이지가 않는다. 

매일 형님, 잘 갔다오라며 현관까지 배웅해주던 놈이 아직도 방구석에 처박혀 있다니. 




벌컥. 



난 태기의 연갈색 방문을 열었다. 


책상위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변태기. 







"뭐하." 







내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들어보이는 태기를 보자 난 말문이 잠겨버렸다. 

빨갛게 충혈되어 있는 태기의 두 눈은 복어 배떼기마냥 팅팅 부어있었고 

몰골은 참으로 말이 아니였다. 







"형님, 학교 가시게요..?" 







얼마나 울었는지 가래섞인 걸걸한 목소리로 말을 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태기를 보자 

난 또 한번 쓰라린 양심의 가책을 맛봐야만 했다. 


멍충이 연개소리. 여의봉은 왜 들고 가서는.. 에효효. 







"아,아니~! 일어날 필요없어!! 하하하. 그럼 다녀올게~!" 







쾅.-_- 되도록이면 이 집을 빨리 벗어나는게 좋을 듯 싶다. 

아니, 그것보다는 역시 여의봉을 하나 사주는게 더 현명한것 같기도 하다. 







"형님, 태기는.." 



"많이 피곤한가봐. 그냥 둬. 하하." 



"아마 상심이 큰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아, 나 그만 갈게. 태기 좀 위로해줘." 



"예. 염려붙들어 매십시요.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요. 형님!" 







그래, 부디 민규 니말이 태기녀석에게 큰 위로가 되었음 좋겠구나. 

그렇게 난 언짢은 기분으로 집을 나서 학교로 향했다. 



13-2번 버스가 안오는 것도 어제와 똑같았고 

겨우 탄 버스안에 교복쟁이들로 만원을 이루는 것도 어제와 별 다를게 없었다. 

하지만 단 한가지 다른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늘부로 나 연개소리는 새신이 친구라는 사실이다. 으하하하. 

음흠. 새신 니놈이 나에게 형님이라 부를 날도 그리 멀진 않았구나. 





시끌시끌. 와글와글. 



뭔놈에 학교는 항상 돼지우리 같은지. 

내 고막을 건들여 중추신경을 마구마구 자극시키는 것 같다. 

(전혀 말도 안되는 이야기.-_-) 


그런데 계단을 올라 북적한 3학년 교실 복도를 지나갈때였다. 


다다다다_ 


뒤에서 들려오는 발빠른 뜀박질 소리. 

그 소리가 무척이나 컸기에 난 뒤를 돌아다 보았고 바로 그때. 





쪼오옥♡ 




부드러운 뭔가가 내 오른뺨에 닿이는 것이 아닌가! 

이,이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에게 받았었던 뽀뽀?! 

수염의 까칠함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선 여자가 확실하다. 


눈 깜짝한 1초동안 내 뺨을 훔친 입술의 촉감은 사라져 버렸고 

그럼과 동시에 여자아이의 웃음소리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꺄르르르~" 



♡9 




"옵빠! 사랑해요~!!" 







복도끝까지 달려가 두 팔 벌려 하트를 만들며 천진난만하게 소리치는 현아양이었다. 

저노무 가시네를 진짜.-_-+ 


비록 귀여운 여자애의 뽀뽀였지만 그래도 여자에게 기습 뽀뽀를 당하는 건 상당히 껄쩍지근하다. 

나에게 손을 크게 흔들어 보인후 계단으로 사라져 버리는 현아를 보자 가엾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나에 대한 현아의 감정이 나름대로 진지해 보였으니깐. 

바보같이 자신과 똑같은 여자인 날 좋아해버리다니.. 뭐 그 감정도 순간이겠지만은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북북. 

난 현아에게 뽀뽀를 받은 오른쪽 뺨을 손으로 두어번 비빈뒤 3학년 1반 교실문을 열었다. 

고3답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아이들과는 달리 유난히 시끄러운 1분단 맨 끝자리. 

그곳은 친구 새신의 자리였다. 


친구놈들을 모아놓고 또 무슨 일을 저지르려는 건지 녀석의 얼굴은 햇빛을 일방적으로 다 맞고 있는 양 환해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들 하고 있어? 나도 끼워줘." 







난 자연스러움을 보여주고자 내 책상위에 가방을 얹어놓으며 새신에게 물었다. 

그러자 일제히 이야기를 멈추고 나를 보는 아이들. 

그리고 새신이었다. 







"오. 동무 왔냐?" 



"응? 어. 안녕? 흐흐." 







동무랜다. 동무. 







"오늘밤, 한잔하러 갈건데 동무 너도 갈래? 아니다, 너도 가자." 



"술?" 



"그래, 술." 







술이라.. 거 좋지! 

나름대로 내 자신이 애주가라고 생각할만큼 술마시기를 좋아했던 난 새신의 권유에 흔쾌히 응하였다. 

그나저나 먼저 술자리를 권하다니 역시 날 친구로 받아준게 맞기는 맞는가 보다. 







"야야, 뭐해? 자리 안내주고!" 







내자리에 앉아 있던 재수를 발로 툭툭치는 새신녀석이다. 

이거 쑥스러운데? 







"신이 너 저놈이랑 친구 먹었냐?" 







재수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저놈이라니. 내 동무다." 



"도옹-무?" 



"그래. 동무." 







재수에게서 시선을 떼곤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 새신. 

녀석의 미소에서 새신과 내가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 







"8시까지 K호프로 와." 



"응! 알았어." 







술맛을 떠올리며.. 오로지 술만을 생각하며 그렇게 오늘 수업을 모두 마쳤다. 

물론 영어 한단어도 숫자 하나도 그리고 오늘 들었었던 과목조차도 기억에 남는건 전혀 없었다. 

어쨋든 난 새신이 일러준 약속시간 및 장소를 텅빈 머릿속에 담아두며 

사복으로 갈아입기위해 집으로 향하였다. 





딩동. 







[형님, 오셨습니까?] 



"그래." 







초인종 스피커를 통해 민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과 동시에 굳게 닫혀있던 철제문이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틈을 벌려주었다. 

그 틈을 더 많이 벌리고서 안으로 들어간 난 정원 한구석에서 땅을 파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 순간 놀람을 금치 못했다. 

모종삽으로 땅을 파헤친후 빈공간에 긴 상자를 고이 놓아두는 태기. 

상자 안에 들어있을 물건이 대충 짐작이 되었던 나는 감히 뭐라하지 못한체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만 볼뿐이었다. 

여기서 난 여의봉에 대한 태기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새삼 또 한번 알게 되었다. 







"아, 형님 언제 오셨습니까? 오셨으면 기척이라도 좀 하시지. 몰랐습니다." 







어느새 내 존재를 눈치챈 태기가 흙을 덮다말고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녀석, 얼굴이 헬쓱한 것이 아침, 점심 두끼를 모두 굶은 모양이구나.. 

내가 죽을 년이지. 후.. 







"응. 미안해. 니가 너무 열심인것 같아서 말 못했어." 



"형님, 시장하시지요? 저녁 차리겠습니다." 



"아! 아니야!! 그냥 하던거 계속 마저 해. 어차피 난 또 나가봐야 하는 걸?" 



"어디.." 



"새신이랑 술마시기로 했거든. 이제 본격적으로 녀석과 가까워져야 하지 않겠어?" 



"그렇군요. 잘됐습니다. 형님." 



"다, 태기 니덕분이야. 고마워." 







난 태기의 왼쪽 어깨에 손을 얹지며 말했다. 

그러자 눈물이 그렁이는 태기였고 녀석은 아마도 감동을 받은 모양인것 같았다. 







"사내자식이 울기는." 



"형님.." 



"그래, 이자식아." 







난 태기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었다. 

이게 바로 자신의 부하들을 보살피는 진정한 보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자, 코풀고." 



"패앵_" 








★ 







끼이잉. 







"같이 안가봐도 되겠습니까? 형님." 







약속시간 20분전. 

태기와 함께 대문 앞까지 배웅을 하던 민규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아, 안와도 된다니깐? 내가 지금 돈거래라도 하러 가는 줄 알어? 

그냥 단순무식 고삐리들이랑 술마시러 가는 거라고. 내 걱정말고 잠이나 자." 



"그래! 형님이 걱정말라잖아! 우린 그냥 가서 고스톱이나 마저 치자." 







민규의 등짝을 내려치며 태기가 말했다. 

어쭈? 변태기 이제 살판난다 이거지? 

갑자기 왠지모를 배신감이 마구 밀려오는건 왜일까? 

난 이를 악물고선 민규를 보았다. 







"그래. 태기랑 같이 고스톱이나 쳐. 그럼 다녀오마." 



"형님.." 



"형님! 술 남으면 좀 가져오십시요! 안주도요!!" 







뒤돌아선 나를 향해 크게 소리치는 변태기. 

아까 위로해주는게 아니였는데.. 안아주는게 아니였는데.. 

정말 후회막심이다. 







\K호프. 




그렇게 후회를 하며 도착한 K호프집. 

난 가게 앞에 다가섰다. 

그러자 맞대고 있던 두개의 유리문이 스르륵. 떨어지면서 내 앞길을 활짝 열어주었고 

그러자마자 이루마의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문밖으로 흘러나왔다. 

일단 입구벽에 부착되어 있는 거울을 한번 보고. 

"흠. 가발 OK. 모자 OK. 의상 OK." 

좋아. 아주 완벽해. 이거 척봐도 남정넨데? 







"동무! 여기다, 여기!!"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내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자니 

카운터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새신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뽀송뽀송해 보이는 흰셔츠에 갈색 보잉선글라스를 낀 새신이 모습은 그야말로 연예인 저리 가라였고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거기 멀뚱히 서서 뭐하냐? 빨랑 와서 한잔 받어." 







술잔을 들어보이며 새신이 말했다. 







"응? 아, 그래. 술, 술 받아야지!" 







간만에 술을 보자 눈이 뒤집힌 것일까? 

난 감탄도 잠시 새신의 말에 후다닥 테이블로 달려갔다. 







"이건 너랑 내가 동무가 된 기념으로 주는 첫잔이다. 한방울도 남기지마." 



"물론이지!" 







한 잔 가득 소주를 따르는 새신이었다. 

한방울 남길게 어딨다고 그런 걱정을 한담? 

난 알콜향을 음미하며 소주를 시원하게 원샷하였다. 







"캬아- 자, 너도 받아." 







난 그렇게 내 잔을 다 비운뒤 새신의 빈잔에 소주를 따르었다. 

그리고 다시 소주병을 빼앗아 내 잔을 채워주려는 새신. 

그런데 그때 그런 새신의 손을 저지하고 나서는 한 녀석이 있었다. 







"잠깐! 설마 이걸로 신고식을 대신 하려는 건 아니겠지?" 







신고식? 웬 신고식? 

난 새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준수를 보았다. 







"소주 한 병. 나발 불 수 있지?" 







음흉한 미소로 웃어보이는 준수였다. 







"신고식은 무슨. 얜 그냥 내 동무야. 다 집어쳐." 







새신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준수를 뿌리치더니 술잔에 술을 마저 따르기 시작했다. 

날 감싸준건 고맙다만 어째 분위기가 좀 그렇군.-_- 







"동무? 그런게 어딨어? 다 똑같이 해야지!" 



"너 지금." 



"악. 아니야! 마실게! 나 마실수 있어!!" 



"뭐?" 



"암 마실수 있어. 이정도야 누워서 쮸쮸바 빨기지 뭐~ 하하." 







순간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난 일을 수습하고자 신고식을 받아드리기로 했다. 

뭐 솔직히 말하자면 소주에 군침이 돌았던 것이다. 

난 아직 뚜껑도 열지 않은 새 소주를 집어들었다. 

그렇게 내가 뚜껑을 열면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였고 그러면 난 왠지모를 우쭐함이 느껴졌다. 







"마시지마." 







새신의 목소리따윈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미 소주의 향이 내 코를 사로잡아 내 정신까지 앗아갔기 때문에 말이다. 

난 소주병의 주둥이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꿀떡꿀떡. 


혀를 맴돌아 목구멍으로 잘도 들어가는 소주. 

아~ 이 얼마만에 맛보는 술맛이던가! 

뭐랄까? 그 소주 한병을 원샷하던 그때의 기분은 

큰 절벽위 폭포를 미끄럼틀 삼아 내려가는 그런 아찔한 기분이랄까? 

아님, 10층 높이의 과자빌딩을 먹어치우는 그 달콤함? 

어쨋든 그순간 행복했던건 사실이다. 





쿵. 







"캬아-" 







끝내 성공한것이다. 

나를 보는 저 눈빛들.. 감탄사를 연발하는 저 입들.. 

난 자신감 가득찬 낯빛으로 젓가락을 들어 골뱅이 하나를 집어먹었다. 







"우와! 대단한데?" 



"30초만에 소주 한병을 다 마시다니. 너 괜찮아?" 







짜식들. 뭐 그리 대단하다고. 움후. 움하하핫! 


결국 소주 한병을 다 마심으로써 난 녀석들과 친구가 되었다. 

뭐 말이 친구지. 이것도 하나의 계획일뿐이다. 

새신과 친해지려면 그의 친구들과도 친해져라. 바로 이것이다. 







"난 니가 전학 오던 그 순간부터 마음에 쏙_ 들었어. 헤헤." 



"그래? 왠지 그런것 같았어." 



"너 주량 얼마야? 술 졸라 잘 마신다. 딸꾹!" 



"그냥 좀 마셔." 







녀석들과 술을 마신지 벌써 3시간이 흘렀고 테이블에 있는 술만도 소주 15병에 맥주 5병이였다. 

물론 모두 빈병인만큼 녀석들은 째릴대로 술에 째려있었고 말이다. 

그건 그렇고 신발은 또 어디로 간거야? 

난 새신을 찾을 겸, 바람도 쐴겸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게? 술마시자. 술! 딸꾹." 



"하하. 화장실 좀 갔다올게.^-^;" 







윽. 일어서니 머리가 어질한게 많이 마시기는 마셨나보다. 

난 테이블 사이를 지나 입구로 걸어갔다. 

자동문이 열리고 시원한 밤바람이 뒤엉킨 머리속을 말끔히 씻어주는 것만 같았다. 







"왜 나왔냐?" 







역시나 밖에 나와 있었던 새신은 청승맞게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가 그런 자신을 내려다 보자 뭔가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벌떡 일어서는 새신이였고 

담배연기는 내 코가 아닌 까만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답답해서. 그러는 넌?" 



"이하동문." 







담배를 바닥에 버리곤 발로 비비기 시작하는 새신이다. 

난 바닥에서 시선을 떼곤 새신을 보았다. 

지금의 하늘만큼이나 까만 머리색이 유난히도 잘 어울리는 아이. 







"너 술 잘 마시더라?" 







훤칠한 키와 남자다운 넓은 가슴. 

저기에 안기면 딱 좋겠는데.. 


윽. 내가 지금 뭐라고 그러는 거야? 

연개소리, 미쳤구나. 드디어 미친게야. 







"친구 사귀기엔 문제 없.. 야,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냐? 야!" 



"응? 뭐, 뭐라구?" 



"..하아. 됐다." 



"근데.. 너 여자친구 있어?" 







엥? 연개소리 너 지금 무슨 질문을 한거니? 

갑자기 여자친구라니? 







"그건 왜?" 



"어? 그,그냥. 하하." 



"왜? 없으면 소개라도 시켜줄거냐?" 



"그, 그러지 뭐. 하하하." 







소개는 얼어죽을.. 내가 미쳤냐? 누구 좋으라고. 







"없어." 



"그래?" 







아악. 연개소리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너.. 설마..? 







"너 대게 좋아한다? 너 혹시 나 좋아하냐?"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절대 그래선 안된다고. 







"무슨 소리야?! 내, 내가 널 왜 좋아해?!!" 



"새끼 오바하기는 농담이다. 농담. 설마 남자인 니가 날 좋아하겠냐? 

만약 그랬다간 넌 내손에 뒈져. 알았냐?" 







핫. 그러고보니 난 지금 남자였지? 

바보같이 그렇게까지 역정낼건 없었잖아. 너무 티난다고. 





툭. 






그렇게 손톱만 물어 뜯으며 새신에 대한 이상한 내 감정을 부인하려 하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치고선 호프집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었다. 

그에 인상을 쓰는 것도 잠시 H고 교복을 입은 인간이 소리치는 바람에 내 시선은 그녀석에게로 향해졌고 







"유인아, 잠깐만!! 신유인!!" 







H고 교복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유인.. 신유인이라면 민규가 뽑아준 명단에 있었던 이름인데.. 

그럼 설마 방금 들어간 그녀석이 H고교 짱. 신유인? 


♡10 





신유인. 나이 19세. 안양 K중에서 서울 M중으로 전학을 감. 

1년동안 서울 100여개의 중학을 재패한 화려한 경험이 있음. 

현재 H고에 재학중이며 새신의 뒤를 잇는 최고의 실력자임. 







"신유인이라는 이녀석도 반드시 우리 조직에 필요한 인물입니다. 

새신을 못 잡는다면 이녀석이라도 잡으셔야 합니다." 




라고 민규가 그랬었지. 


신유인.. 만약 방금 들어간 녀석이 정말 내가 찾고 있던 그 신유인이라면.. 

요우! 이거 횡재했는 걸? 

토끼 한마리가 제발로 굴러들어오다니.. 

아니야. 확인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단정 지을 수만은 없어. 

만약 그놈이 아니라면 완전 김새는 거잖아? 



덥썩! 


난 신유인이라는 이름을 부르며 막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는 H고의 손목을 잡아버렸다. 

그에 멈칫하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는 H고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였다. 







"뭐예요?" 



"너 방금 뭐라고 그랬냐?" 







난 처음부터 놈의 기를 꺽어놓기위해 두 눈에 힘을 주고서 

최대한 껄렁하게 질문을 내던졌다. 







"뭐예요..라고 했는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그 전에 뭐라고 했냐는 말이지. 

방금 누굴 부른거야?" 



"그건.. 왜요?" 







눈망울이 꼭 생선 주는 개를 보는 고양이 같은 것이 나를 경계하는 눈초리다. 







"어쭈! 빨랑 말 안하지?" 



"유, 유인이요. 신유인." 



"H고교 짱. 맞지?" 



"전 아닌데요..?" 



"아니, 너말고 신유인 그 새끼말야!" 







으메~ 이렇게 답답한 녀석을 봤나. 

5분만 더 대화했다간 십이지장이 뒤틀리고 염장이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 







"예. 맞는데.. 왜 그러시는데요..?" 







역시 횡재한게 맞았어. 







"됐어. 들어가봐." 







내가 찾던 신유인이라는 게 확실해진 난 겁먹은 남자아이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나를 미심쩍게 바라보다가 자동문 사이로 잽싸게 들어가버리는 남자아이였고 

내 머리는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다. 

기회가 찾아왔으니 무조건 난 그것을 잡아야만 한다. 







"왜그래?" 







유리문을 통해 H고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서 있는 나에게 새신이 물어왔다. 

새신도 붙잡고 신유인도 붙잡고.. 

오늘 밤엔 축제라도 벌여야 되는 거 아닌가? 우후후. 







"악. 눈발이 장난이 아닌데? 신아, 얼른 들어가자!" 



"너 미쳤냐? 무슨 눈이 온다고 그래?" 



"오잖아! 빨리 들어가자!" 




"야." 







난 4월에 올리없는 눈이 온다는 뻔히 다 보이는 거짓말을 하며 

새신을 잡아 이끌고서 다시 가게안으로 들어왔다. 


이루마의 "Dream A Little Dream Of Me"를 들으며 내 손을 뿌리쳐 버리던 새신은 

인상을 쓴체 제자리에 앉았다. 

그런 새신을 따라 자리에 앉은 난 먼저 들어왔던 H고를 찾아보았다. 


가만, 녀석이 어디에 앉은거지? 


흐음.. 오라! 저기에 앉았구만? 


입구쪽 창가에 앉은 H고와 한 남자아이. 

내 예상이 맞다면 답답한 H고 앞에 앉은 남자가 신유인이라는 녀석일게 분명했다. 

약간 노르스름한 머리로 휴대폰을 만지며 답답한 H고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신유인. 

음악소리때문에 그리고 술에 취해 시끄러운 녀석들때문에 

H고와 신유인의 대화소리가 여기까지 들리지는 않았다. 







"뭘 그렇게 눈알이 빠지도록 보냐?" 







맥주 한잔을 들이키며 새신이 물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아. 이러고 있을게 아니라 좀 더 가까이 가봐야 겠어. 

이렇게 생각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새신의 팔목을 붙잡았다. 







"신아, 우리 자리 옮기자!" 



"왜?" 



"단 둘이 할 얘기가 있거든." 







할 얘기가 있다는 말에 새신은 인심쓰는 양 마지못해 일어서 주었고 

난 그런 새신을 데리고 비어있던 창가쪽 테이블에 앉았다. 

그곳은 신유인이 앉아있던 테이블 바로 뒷 테이블이였다. 

이제 좀 뭔가 들리겠지? 







"할 얘기가 뭔데?" 



"응? 그게.." 







난 새신의 질문을 뒤로 한체 신유인과 H고의 말에 귀를 집중시켰다. 

녀석들의 대화에서 신유인과 친해질수 있는 좋은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 

설마 답답한 H고 저놈이 내 얘기를 하는 건 아니겠지? 







"내동생, 학교에서 알아주는 얼굴 마담이야. 

유인아, 내동생 마음 좀 받아주라? 응?" 



"관심없어." 







엥? 뭐야? 여자 얘기잖아? 

H고 동생이 신유인을 좋아하는 가 본데? 

그리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아니였지만 그래도 혹시나라는 생각에 

난 두 사람의 대화를 계속 엿들어보았다. 







"야, 할 얘기가 뭐냐고!" 



"아우. 좀 가만히 있어봐. 잘 안들리잖아." 



"뭐?" 







그순간 신발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것 같다. 







"내동생 밥 안먹은지 벌써 3일째야." 



"밥 줘. 밥주면 되잖아." 



"밥을 줘도 안먹으니깐 그러지!" 



"반찬이 별로였나 보네." 



"신유인!" 



"씨발, 나 귀 안먹었다?" 







-_- 이래선 별 도움되는 이야기는 하나도 없잖아? 

신유인 니가 몇반이라던가 곧 어느 학교와 한판 붙는다던가.. 

뭐 그런 영양가있는 이야기 좀 해보란 말이다. 







"그래도 딱 한번만 만나봐. 부탁." 



"너 자꾸 그딴 소리할거면 오늘 술값 니가 다 내!" 



"후.. 알았어. 치사한 새끼. 안하면 될거 아냐. 

그건 그렇고 잠깐 귀 좀 대봐. 중대한 이야기야." 



"뭔데 그래?" 







어랄라? 저것이 그냥 말할것이지. 소심하게 왠 귓속말이야? 

왠지 중요한 이야기인것 같은데.. 


난 놓쳐서는 안될 이야기인것 같았기에 의자를 뒤로 빼내어 신유인과 최대한 등을 밀착시켰다. 

이러면 조금은 들리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 







하지만 내가 바라는건 들리지가 않았고 정작 들리는거라곤 







"너 지금 나 갖고 노는거냐?" 







굳어있는 새신의 목소리뿐이였다. 


난 어떻게 해서든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두 발을 들어 의자를 살짝 뒤로 젖혀 보았다. 

그런데 그때.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서는 신유인이 아니라 

의자를 앞으로 당기며 일어서는 신유인이 아닌가! 

그 바람에 난 쿠당탕! 의자와 함께 뒤로 자빠져 버렸고 

호프집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아야만 했다.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 보는 새신.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테이블에 있던 술병과 잔을 드는 망할놈의 신유인. 

지금 나에겐 등의 쓰라림을 보듬어줄 손보단 내 키만한 쥐구멍이 더 절실했다. 







"한잔 받으시죠?" 







얼굴이 빨개진체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내려다 보며 

술잔을 건내는 신유인이였다. 

그에 내가 얼떨결에 그 술잔을 받아들면 신유인이 술잔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좔좔잘. 그렇게 투명한 소주가 내 손 위 빈 술잔을 채워나가기 시작했고 

1/4, 1/2... 그리고 촤르륵.. 

넘치기 시작하는 소주였던 것이다.-_- 


난 황당한 얼굴로 신유인을 올려다 보았다. 

무표정한 신유인의 얼굴은 넘치는 술이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넘쳐나는 술을 보다가 멍한 내 얼굴로 시선을 옮기는 신유인. 

그가 말했다. 







"난 스토커는 취미없어." 







스토커?-_- 

그거 지금 나보고 하는 소리? 


젠장. 그렇군. 결국 자신들의 말을 내가 엿듣는다는 걸 눈치챈 모양인가보다. 

나름대로 티 안나게 했는데.. 눈치빠른 자식. 







"지금 뭐하는 거냐?" 







이를 지켜보던 새신이 선글라스를 눈 아래로 살짝 내리며 말했다. 

그에 소주병을 제대로 들며 자신의 자리에 앉으려는지 뒤로 돌아서는 신유인이였고 

새신이 선글라스를 다시 올리며 말을 했다. 







"너 H고 신유인이냐?" 







새신도 신유인을 아는 듯 했다. 


새신의 물음에 의자를 빼다말고 뒤돌아 서는 신유인. 

여전히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이다. 







"맞구만. 너 나 알지? S고 새신." 



"새, 새신?!"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신유인에 비해 자빠진 나를 보며 비웃어대던 

H고 답답이가 입을 떡 벌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무뚝뚝한 신유인의 반응에 기분이 상한 새신은 선글라스를 벗은 후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며 다시 이야기했다. 







"나 S고 새신이라고! 나 몰라?" 



"새신? 새 신발?" 



"풋~" 







신유인의 진지한 대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그에 인상을 쓰며 나를 보는 새신이였고 난 시선을 피하며 입을 막아버릴 수 밖에 없었다. 







"진짜 나 모르냐? 서울에서 얼마나 유명한데, 날 몰라?" 







저거 은근히 자뻑이구만?-_- 

신유인은 새신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새신 체면이 말이 아닌데? 

악. 이게 아니지. 저자식 분명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텐데.. 

자신은 신유인을 알아봤는데 신유인은 자신을 못알아보니.. 







"씨바, 사실 나도 너 몰라. 조또 구라친거다!" 







-_-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피식. 



자존심 상한 새신은 선글라스를 다시 꼈고 

그런 녀석을 보며 살짝 웃어보이는 신유인이었다. 

신유인의 웃음에 한껏 째려보기 시작하는 새신. 

저자식 주변에 검은 기가 서린 것이 뒷일은 불보듯 뻔하다. 







"신아, 밖에 날씨 쥑이지 않아? 

이야~ 바구니 들고 피크닉 가면 딱이겠네! 우리 나가자. 엉?" 







난 이 사태를 미리 수습하기위해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 새신을 일으켰다. 

하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 녀석이였고 







"밤에 무슨 피크닉이냐?!" 







도리어 욕만 얻어먹었다.-_- 







"너 그 웃음은 무슨 의미야?! 씨바, 너만 나 모르냐? 

나도 너같은 새끼 누군지 모른다고!" 



"신아, 나가자. 빨랑!" 







어쨋든 난 최대한의 노력끝에 발광직전인 새신을 끌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신유인, 비록 오늘은 니녀석 얼굴만 본걸로 만족하겠지만 

다음번엔 반드시 널 꼬득여 우리 조직에 몸 담게 할것이다. 







"이거 놔. 동무!" 







내 손을 뿌리치며 더운지 남방단추를 두어개 풀어헤치는 새신이었다. 

자식, 많은 열받은 모양이다. 







"너 그자식이랑 아는 사이야?!" 



"응? 아니. 몰라." 



"그런데 왜 거기에 앉은 거야?!!" 



"그야, 너한테 할 말이 있으니깐.." 



"무슨 말!!!" 







무슨 말이냐고? 에라이, 모르겠다. 







"나 널보면 가슴이 막 두근거려." 



"개새끼, 나 좋아하면 죽인다고 그랬지?!" 







말도 안되는 내 말에 버럭 화를 내며 앞서 걸어가버리는 새신이다. 

하긴 지금의 난 녀석에겐 남자니깐.. 

미친 소리로 들리겠지. 


휴. 그나저나 위기는 모면한것 같은데? 

암, 싸워선 안되지. 

얼마후면 같이 일하게 될 동료가 될텐데.. 

두 사람이 싸우게 해서는 안돼. 







"신아, 같이 가자!" 







난 마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열받은 새신의 곁으로 달려갔다. 

보이지 않는 친구들 곁에서 밤하늘 아래를 밝혀주는 노란 달에게 

내 꿈이 하루 빨리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작지만 큰 부탁과 함께.. 
 
   
   
 















♡11 





"아, 나 존나 급해." 







대략 150m를 걸었을 때쯤 인상을 찌푸리며 새신이 말했다. 

큰거 아니면 작은거. 둘중에 하나다. 







"작은 거면 저기 차 뒤에서 눠." 



"내가 개냐?! 아무데서나 찍찍 싸게!" 







난 별 대수롭지 않게 말을 했건만 그런 내 말에 버럭 화를 내는 새신이었다. 

젠장. 나올려던 오줌도 놀라서 다시 들어가겠구만. 







"왜 승질을 내냐? 사내새끼가 소심하게." 



"뭐야?" 



"엇! 저기 공원이다! 저기에 화장실이 있을 거야!" 







새신의 째림에 시선을 회피해버린 나는 고개를 돌렸고 

하늘이 날 살린건지 아님 새신을 살린건지 어느새 우리 둘은 공원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새신은 화를 내는 것도 잠시 공원 안으로 잽싸게 들어갔다. 

녀석의 속도로 보아하니 얼마나 급한건지 새삼 알것도 같다. 


인간 치타. 

그래, 지금의 새신에겐 딱 어울리는 별명이다. 


난 녀석의 뒤를 따라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은 또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야?" 







차근 차근 찾아 볼 생각은 하지 않고 

눈 앞에 보이지 않자 신경질부터 내는 다혈질 같은 녀석. 

화장실을 나타내는 화살표 표지판을 새신보다 먼저 발견한 나는 녀석을 끌고서 화장실로 걸어갔다. 







"그럼 이따 봐." 



"그래, 동무!" 







그리고 드디어 화장실 앞에 도착하였고 

자연스레 새신은 왼쪽에 있던 남자 화장실로 난 오른쪽에 있던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순간 우리 두 사람은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뭔가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던 나와 새신은 다시 화장실에서 나왔고 

남자와 여자 화장실의 갈림길 중간에서 만나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너.." 







뭐라고 말하려는 듯한 새신이다. 

이런 바보같이.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버리다니.. 

너무 긴장을 풀었던 것 같다. 







"변태냐? 왜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고 지랄이냐?" 






지금 새신의 눈은 그야말로 변태를 보는 그런 눈빛이었다. 







"어? 어랏? 진짜. 하하. 나 변탠가 보다. 얼른 들어가세나. 동무!" 







어쨋든 나는 식은 땀을 흘려대며 이 사태를 수습하고자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신발녀석. 

이러다가 내가 여자라는 게 들통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난 나보다 5cm 더 큰 새신의 어깨에 손을 얹지며 남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놔." 







화장실로 들어오자 자신의 어깨에 있던 내 손을 떨쳐내버리는 새신이었다. 







"왜? 좋아서 그러는데." 



"넌 어깨동무하고 오줌 눌거냐?" 







아, 정말 일리가 있는 말인것 같다. 

생각 깊은 새신은 벽에 나란히 붙어있던 변기로 걸어가 허리띠를 풀고 자크를 내렸다. 

잠시후 시원한 물줄기 소리가 들려오고 

난 좌변기가 있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새신이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했다. 







"넌 안누냐?" 







순간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한 바가지 쏟아져 내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어? 아.. 그게 나는.. 아! 똥, 똥누려고. 하하." 







하지만 다행이도 나의 재치있는 순발력으로 아슬아슬한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휴.. 하여튼 큰일날뻔했다. 


촤르르륵_.. 

볼일을 끝낸 나는 변기에 물을 내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먼저 나와있던 새신이 담배를 입에 물고선 불을 붙이고 있었다. 







"아, 시워언_하다! 자, 이젠 가볼까나?" 







난 두 손을 머리 뒷통수에 대고 깍지를 낀체 앞으로 걸어나갔다. 

하지만 새신은 걸을 생각도 하지 않으며 담배만 피어댈 뿐이었다. 

그에 나또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려던 그때. 새신이 말했다.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없냐?"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설마 저자식이 눈치를 챈건 아니겠지? 


난 뒤 돌아 보기 전에 약간의 심호흡을 한번 하였다. 

하아. 후우. 

연개소리, 난 니가 멋진 연기를 보여줄거라 굳게 믿어. 

아직이야. 아직 모든걸 밝혀선 안돼. 


난 뒤를 돌아 새신을 보았다. 







"뭐? 숨기는 거라니? 혹시 너, 내가 소주 한병 꽁쳐 논거 눈치챈거야?" 







새신은 가만히 나를 보기만 하였다. 

이거 꽤 숨막히는 분위긴데? 


그렇게 새신의 다음 대사를 기다리며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는데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퉁겨내는 새신. 

새신이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나에게 말했다. 







"후.. 아니다. 그만 가자, 동무." 







내 옆을 지나가버리는 신발녀석. 

엥? 이거 뭐야? 나혼자 괜히 쫄았던 거야? 

난 또 눈치챘다고. 그럼 그렇지. 

내 연기가 얼마나 완벽했는데 절대 눈치 챌리가 없지. 

암, 그렇고 말고. 







\다음날, 개소리네 집. 







"갔다 올게~" 



"예. 다녀오십시요, 형님." 







철컥. 

민규의 배웅을 받으며 학교에 가기위해 난 현관을 나섰다. 







"훠이훠이, 합!" 







아침부터 운동에 열심인 태기는 어제 새로 구입한 여의봉으로 

정원의 터줏대감인 큰 고목나무를 상대하고 있었다. 

불쌍한 나무영감. 

태기에게 맞은 상처가 여기저기에 나있었다. 







"임마, 고만 좀 괴롭혀. 까진거 안보여?!" 



"엇. 형님 오늘은 왠일로 일찍 가시는 겁니까? 맨날 지각만 하시더니만." 







저게 씨. 이젠 살판난다 이거지? 







"시끄러워! 일찍 가든, 늦게 가든 내맘이야." 







하여간 태기 저 놈은 귀여워 할래야 할 수가 없다니깐? 

(귀여워 할때는 언제고.;;) 

난 태기와 조금만 더 같이 있다간 학교 갈 마음도 잡치겠다 싶어 귀를 틀어 막고선 집을 나와버렸다. 

쾅! 날벼락같은 대문 소리와 함께 대문 아래 틈새로 새어나오는 태기의 목소리. 







"형님! 오실때 꼭 요구르트 사오십시요!" 



"요구르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따악. 난 바닥에 나뒹굴어 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발로 차버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이런 내 말을 들었을리 없는 태기가 또 한번 크게 소리쳤고 

난 두 손으로 열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요구르트 없으면 야구르트 사오십시요!! 싸랑합니다, 형님!" 







저걸 죽여? 살려? 

다른 조폭애들은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애들을 모집한다는데 

이놈들은 나한테 다 맡기니.. 


하긴 10명 밖에 없는 조직을 누가 조폭으로 보겠냐만은.. 

어휴. 속 천불나. 

그렇게 난 현실에 대한 불평, 불만을 가슴속에 터놓으며 교문을 들어섰고 

태기녀석 말대로 너무 일찍 등교를 한건지 운동장은 휑하기만 했다. 


난 답답한 넥타이를 풀어내며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조용한 공기를 마시며 모퉁이를 돌때 타악. 

누군가와 부딪혀 버린 것이다. 

아니 부딪혔다기 보단 박치기. 

그래, 박치기가 더 올바른 표현인것 같다. 

그냥 박치기도 아닌 입술 박치기.-_- 







"으악." 







난 갑작스러움에 어안이 다 벙벙했지만 금새 정신을 차리곤 녀석과 떨어졌다. 

그리고 꼭 감았다가 뜬 내 눈에 비친 것은 다름아닌 남자. 

그것도 무슨 개같은 인연인지 







"나 좋아하지 말랬지?" 







바로 새신이었던 것이다. 

윽. 맙소사. 

가슴이 벌렁벌렁 정신을 못차리겠다. 

뭐야? 이 이상한 기분은 도대체 뭐지? 왜 두근거리는 거지? 

심장이 미쳤나? 돌았는 건가?? 







"오빠.." 







그렇게 황당,해괴망측한 이 사건에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는 뒤가 아닌 앞, 내 앞. 새신의 뒤. 







"현아야?" 







그렇다. 현아가 날 불렀던 것이다. 

얼굴이 새파래진 것이 아마도 새신과 나의 박치기 장면을 본 듯. 

현아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래, 그것까진 내가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럼 어디부터가 신경쓸 일이냐고? 



바로 지금부터다. 







"오빠.. 그때 사귄다던 사람이.. 바로 신이 선배였군요..? 

어, 어떻게 그럴수가.." 







타닥. 황당하기 짝이 없는 말과 함께 나와 새신을 지나 계단을 내려가버리는 현아였다. 

나랑 새신이 사귄다고..?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있는 거지? 

으아. 오해를 풀려면 꽤나 골치가 아프겠구만. 

아니지? 오해를 풀일이 어딨어? 

차라리 잘된거잖아? 

이젠 현아 고 기집애가 나를 따라다닐 일도 없을 테니깐. 

우후후. 그래, 잘된거야. 잘된거라고.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생각할만한 일은 아닌것 같았다. 

나를 노려보고 서 있는 새신. 







"왜..?" 







난 조심스레 물었고 새신이 대답했다. 







"너.. 진짜 나 좋아한거였냐?" 



"-_-.." 







신발녀석의 오해를 푸느라 몇시간을 투자한건지 모르겠다. 

재수도 옴붙었지 하필 내가 일찍 온 날에 새신은 모임에다 현아는 주번이라니.. 

이건 필시 하느님이 따분함에 장난을 치고 계신게 분명하다. 

그나저나 책 한장 한장을 넘길때마다 보이는 이 야릇한 장면은 뭐란 말인가! 

오늘 아침 새신과 내가 박치기를 하던 장면이 자꾸만 눈 앞에 아른거리고 

머릿속을 유유히 떠돌아 다녔다. 

새신과 뽀..뽀뽀를 하다니.. 쿵쾅쿵쾅. 

뽀뽀.. 새신과 내가 뽀뽀.. 







"개소문! 방금 내가 읊은 시를 지은 사람이 누구지?" 







으아. 가슴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것만 같다. 


퍽. 



그런데 창문을 보다가 갑자기 내 의자를 발로 차는 새신이다. 

그에 난 얼굴을 찡그리며 녀석을 보았고 

그것도 잠시 새신의 입술이 내 눈을 지배해버렸다. 

두근두근. 


연개소리, 정말 새신의 말대로 넌 타고난 변태란 말인가? 

왜 자꾸 그 장면이 떠오르는 거지? 







"야, 너 부르잖아." 



"응?" 







내 물음에 칠판쪽을 턱으로 가리키는 새신. 

그에 난 앞을 보았고 화려한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문학선생이 

안경너머로 날 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개소문, 다시 묻겠다. 방금 내가 읊은 시를 누가 지었지?" 



"제가.. 안 지었는데요?" 



"후우.." 







내 진실된 대답에 한숨을 길게 내리쉬는 문학선생이었다. 

난 내가 틀린건가 싶어 새신을 보았고 

나와 눈이 마주친 새신이 한다는 소리가. 







"나도 아닌데?" 







라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누가 지은건지.. 참으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두..둘 다. 당장 나갓!!" 







승질하고는.-_- 


결국엔 우리 둘 다 복도로 쫓겨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말도 안되는 문학선생의 질문에 투덜투덜인 나와 공부 안해서 좋다는 새신. 

우린 차가운 복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런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안 지었으니깐 안 지었다고 하는 거지. 

짜증나게시리." 



"병신. 넌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어쭈. 그러는 자기도 틀린 주제에 꼭 뭘 안다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럼 넌 안다는 거야?" 



"그거 선생 지가 지은거야." 







문학선생이 지었다고? 그러고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오~ 신발 제법인데? 

가만, 답을 알면서 자기는 왜 틀린거지? 







"근데, 왜 정답을 말 안했어?" 



"공부하기 싫어서." 







오. 역시.. 저 여유로움.. 본받아야 겠어. 


새신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한 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드르르. 드르르. 


그때 내 허벅지 살을 뒤흔드는 진동의 떨림을 느낀 난 잠시 감탄을 뒤로 미루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잠깐만." 







난 허벅지에서 손바닥으로 옮겨진 진동을 멈추기위해 재빨리 폴더를 열었다. 

얼핏 액정에 뜬 이름으로 보아 태기인듯 했다. 

이자식이 또 요구르트 사오라는 거 아냐? 







"왜?" 







난 다짜고짜 용건부터 물었다. 

그러자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태기의 목소리였다. 

왠지 급박해 보이는 상황이다. 






[형님!! 어서 오십시요!! 애들이랑 잠시 소풍을 나왔는데..!!] 







이것들이 날 두고 소풍을 가?-_- 

왠지 요즘들어 날 따돌리는 것 같더니만.. 







"근데? 뭐?!" 



[왔는데.. 대파녀석들이..!!] 







대파? 소풍을 가는데 김밥은 안 싸가고 대파를 들고 갔다고? 

이런 미친놈들을 봤나. 







"그래서 나보고 지금 김밥이나 사오라고? 이것들이 날 지들 씨다바린줄 아나." 



[형님, 그게 아니라 대파새끼들이랑 우리 쓰래빠 애들이랑 한판 붙었다고요!! 

수적으로 우리가 너무 불리합니다!! 형님, 어서 오셔서 도와주십시요!!] 







뭐? 그 대파가 아니라 그 대파였어?! 


상황파악이 되었던 나는 핸드폰을 닫아버리곤 바닥에서 벌떡 일어섰다. 







"왜그래?" 







그런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새신. 

하지만 새신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내 머릿속엔 온통 우리 애들의 다친 모습만이 가득 찰뿐이였다. 







"개새끼들.. 우리 애들 건드렸다간 절대 용서 안 할거다. 두고봐.." 







난 있는 힘껏 복도를 내달렸다. 

둔탁한 내 뜀박질 소리.. 

그리고 함께 들려오는 새신의 발소리.. 


난 우리 애들이 있는 곳으로 온 힘을 다해 달려갔고 

영문을 모르는 내 동무, 새신또한 나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우선 치마를 찾아야만 한다. 

이기기위해선 반드시 치마를 입어야만 한다. 

무조건 대파 니놈들을 용서치 않겠다. 


각오하라고. 

♡12 





"오빠!! 어디 가세요?! 사랑에 도주라도 하시는 거예요?!!" 







운동장에서 체육수업 중이던 2학년 5반 무리속에서 들려오는 현아의 말을 

그냥 무시해버리며 난 달리고 또 달리었다. 

사랑에 도주? 웃기는 소리. 

난 지금 그딴걸 할만큼의 여유따윈 전혀 없다. 

하긴 난 아니더라도 오해를 살만은 했다. 

내곁엔 새신이 함께 있었으니깐. 







"야, 어디 가는 건데?!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치마부터 찾아야 해!" 







그렇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 

그리고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바로 치마였던 것이다. 







"너 목소리.." 







다른 생각보단 오직 쓰래빠 애들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가득 찼던 나는 

여지껏 새신 앞에서 변조해왔던 목소리가 아닌 내 본래의 목소리로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그에 그것 하나 놓치지 않는 새신이였고 여기서 지금까지 세워왔던 모든 내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난 거기에 개의치 않고 계속 달려갔다. 


교문을 빠져나와 태기와 아이들이 있을 공원을 향해 내달렸던 난 어느 동네에 이르렀고 

작은 주택들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다. 


타닥타닥. 우리들의 뜀박질 소리. 

왈왈알. 동네개들의 울음소리. 

이런 소리들을 들으며 동네 내리막 길을 달렸던 난 드디어 발견했던 것이다. 


어느 집 옥상 빨랫줄에서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는 흰 땡땡이 치마를 말이다. 

어디서 본듯한 흰 땡땡이 몸빼치마. 

지금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난 저거다 싶어 무턱대고 그 집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에 영문도 모르고 날 따라 들어오던 새신이 숨을 헐떡이며 나에게 물었다. 







"하아, 너희 집이냐?" 







주인이라도 나올까 몰래몰래, 그리고 살금살금 녹슨 철제 계단을 오르며 내가 대답했다. 







"아니." 



"근데 여긴 왜 들어온건데?" 







내 말에 두 발을 멈추고선 언성을 높이는 새신이었다. 

이러다가 집주인한테 들키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쉿! 좀 작게 말해." 







새신은 얼굴을 찌푸렸다. 

어쨋든 우여곡절 끝에 올라온 옥상 위. 

난 주위를 한번 둘러본후 빨랫줄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봄바람에 나풀거려대는 몸빼치마였다. 

난 양끝에 물려있는 빨래집게를 뽑아버리며 빨랫줄에서 몸빼치마를 걷어내었다. 







"그건 왜 또?"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새신이다. 

난 흰 땡땡이 몸빼치마를 입으며 이야기했다. 







"이길려면 이게 필요해." 



"뭘 이겨?" 







몸빼치마의 늘어나는 고무줄 덕택에 교복바지 위에도 수월하게 입을 수 있었던 나는 

흡족스러움에 미소를 한번 짓고선 바지를 벗어내었다. 

그러자 매끈한 다리가 봄바람을 맞고 새신의 눈을 자극시켰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임.) 

그만큼 새신은 많이 놀란듯 했다. 

난 몸빼치마를 털면서 다시 한번 점검한뒤 새신을 보았다. 

그리고 아직도 몸빼치마와 다리를 보고 있던 새신의 양 어깨를 잡으며 난 심호흡을 한번 했다. 








"후우." 







내가 자신의 어깨를 잡자 고개를 들고서 나를 보는 새신. 

마음을 굳게 먹고 내가 말했다. 







"우리 동무 맞지?" 



"너.." 







대답을 하지 않는 새신이었다. 

아니 못하는 것 같았다. 







"신아, 우리 동무지?" 







난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그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새신이였고 난 당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몇초후 봄바람치곤 제법 쎈 바람에 엉성하게 쓰고 있었던 내 가발이 벗겨져 버리고 

철컥. 옥상아래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마당으로 나왔다. 


하지만 이런 긴급상황에도 난 새신에게 대답을 듣기위해 차분한 마음으로 또 한번 질문을 하였다. 







"우리 동무 맞지?" 







계속되는 내 질문에 바닥에 떨어진 가발과 내 긴머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새신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기다렸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래." 







마치 세상을 다 가진듯한 새신의 시원한 대답에 내 얼굴은 미소로 번져났고 

가슴속엔 감동의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형수야, 엄마 빨래 걷어올게~" 







이윽고 옥상아래에서 들려오는 아줌마의 목소리에 우리 둘은 눈이 휘둥그레져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는 발소리에 우린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손을 꼭 잡고선 







"하나,둘,셋!" 







약 3m쯤 되는 옥상에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타악! 정확한 착지였다. 

우리 두사람은 무사히 탈출한 것을 눈빛으로 자축하며 또 다시 달려갔다. 

난 날 붙잡고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지 않는 새신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하지만 내가 먼저 얘기해 줄것이다. 

빌어먹을 대파놈들을 물리친후 모두 다 말이다. 


난 더욱더 힘껏 전력질주를 하였다. 





\어느 조그만 공원(?). 




태기가 일러준대로 달린 끝에 우리가 도착한 곳은 공원이라기 보단.. 

그냥 잔디밭이었다. 

양 옆엔 차가 달리고 있는..-_- 


새신과 내가.. 그리고 이녀석들이 이곳엔 어떻게 온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쨋든 찾아오기는 제대로 찾아온것 같았다. 

좁은 잔디밭을 벗어나 도로까지 침범한 태기는 5명쯤 되는 사내놈들과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잔디밭에 뻗어 마구 밟히고 있는 8명에 남자들.. 

그들은 모두 우리 쓰래빠 애들이였고 난 인상을 쓴체 민규를 찾아보았다. 


많이 지친듯 숨을 빠르게 쉬어대며 한 사내를 상대하고 있는 이민규. 

상대의 목에 걸려있는 대파 뿌리모양의 목걸이 팬던트로 보아 그는 전국구 No.3 대파의 부보스인것 같았다. 

(※대파는 강호파, 구제파와 마찬가지로 전국구 조직이였지만 전국구 No.1,No.2인 강호파와 구제파에게 

그 세력이 밀려 각 지역에서 차지하고 있는 구역은 몇군데 밖에 없었다. 하지만 5년전 No.2였던 조직답게 

그 인원이 많아 현재에도 전국구로 왠만한 조직이 함부로 이들을 건들지는 않았다. 

대파는 소유한 구역이 많이 없는 대신 각 지역에 작은 보스를 하나씩 두었던 것이다.) 




퍼억!! 민규가 복부를 맞고 쓰러지자 오른발을 높이 쳐드는 대파의 서울지역 부보스 강형창이었다. 

난 민규가 맞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고자 크게 소리쳤다. 







"멈춰!" 







그에 강형창뿐만 아니라 모두가 동작을 멈추었고 일제히 시선을 나에게 꽂았다. 







"또 조폭이냐?" 







내 옆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새신이 중얼거렸다. 

난 강형창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형님..?" 







성치않은 몸을 가누며 민규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내가 입은 몸빼치마를 보며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하! 형님, 치마가 그게 뭡니까?" 







도대체 뭐가 그리 우스운지 도로가에 있던 태기가 내 치마를 가리키며 웃어대었다. 

후우. 이번 한번만 참아준다. 







"개새끼들!! 너흰 이제 라면속 대파신세다! 으하하!!" 







그랬다. 민규와 태기는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치마를 입은 그 이유를 말이다. 

난 자신있게 웃고 있는 태기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강형창을 보았다. 

껌을 짝짝 씹으며 건방진 자세를 하고 있는 강형창을.. 


그가 입을 열었다. 







"이 계집은 또 뭐야?" 



"저 반찬새끼가 지금 뭐라고 지껄였어?!!" 







강형창의 말에 욱하며 고함을 치는 태기였다. 

짜식_ 내 생각은.. 


난 금방이라도 놈에게 달려들 것만 같은 태기를 작은 손동작으로 막아내었다. 







"넌 뭐야?" 







또 한번 내 정체를 물어오는 강형창의 질문에 난 살며시 웃어보이며 이렇게 대답했다. 







"난 쓰래빠의 보스, 연개소리다." 







내 말에 강형창뿐만 아니라 새신도 나를 보았다. 

연개소리. 연개소문의 하나뿐인 외동딸. 그게 바로 나, 연개소리였다. 







"쓰래빠? 아~ 그 좀만한 조직? 하하하. 

양아치 조직인줄은 내 짐작하고 있었지만 보스가 여자일줄이야." 



"씹, 아가리 못 다물지?" 



"훗. 입만 살아가지고." 







퍽. 힘겹게 말을 내뱉은 민규의 허리를 처참히 밟아버리는 강형창이었다. 

그렇게 대파는.. 강형창은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내가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초코파이를 태기가 몰래 먹었을 때와는 차원이 틀릴 정도로 화가 났다. 

나를 욕하는 건 조금 참을 수는 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저지경으로 만들고 우리 아버지의 조직이였던.. 

그리고 지금은 나의 조직인 쓰래빠를 비웃는 것은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 

난 오랜만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왜? 아가씨, 나랑 싸울려고?" 







내 주먹을 본 강형창이 콧방귀를 끼며 내게 물었고 







"아가씨 정도는 우리 애들이 상대해줄거야. 얘들아, 살살 다뤄라."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민규,태기 또 내 미소와 함께 불꽃튀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조무래기들 1분.. 강형창 2분. 정확히 3분 뒤에 다 설명해줄게." 







난 새신에게 나즈막히 이야기 했고 

강형창의 졸병이 주먹을 들고서 나에게 달려들면 뻐억! 난 발을 날렸다. 

치마를 입은 한 이제 나는 새신이 알던 그 연개소문이 아니다. 

난 쓰래빠의 보스, 연개소리이다. 



퍽! 퍼억!! 



난 그렇게 한 놈, 두 놈 쓰러뜨리고 또 넘어뜨렸다. 

그렇다. 어릴적부터 치마를 즐겨 입었던 나는 운동중에도 또 훈련중에도 절대 치마를 벗지 않았다. 

그렇게 치마를 입은 상태로 운동을 하는 것이 몸에 배였던 나는 이상하게도 

바지를 입고서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싸움을 못하는 척 했냐고? 

그건 솔직히 나도 몰랐었다. -_- 

S고에 오기 전까지 싸울 일이 없었던 나는 전학 온 첫날 춘삼이에게 맞을 때에도 

몸이 감각을 잃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치마를 입으면 어떨까하고..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마디로 내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말도 안된다고. 믿기 힘들다고 모두들 말하겠지만 이건 엄연한 사실이다. 

지어낸 소설같은 영화같은 사실이라는 말이다. 


1분 경과. 



뻐억! 이젠 2분 남았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자신의 부하들을 보며 당혹감을 금치 못할때 난 흡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형창, 이젠 니 차례야." 







난 몸빼치마를 살짝 걷어올려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양끝을 짜매었다. 


1분 40초. 20초가 지났다. 

내가 새신에게 말한 대로라면 1분 40초 안에 놈을 쓰러뜨려야만 한다. 

난 공격을 유도하기위해 오른손 검지를 까딱거려 보였다. 







"계집주제에 제법이군. 하지만 이번엔 그리 쉽게는 안될거다. 각오해라!" 







쒸웅 - 봄바람 사이로 주먹을 휘두르며 공격을 하는 강형창이었다. 

하지만 난 놈의 주먹을 피할 수가 있었고 놈이 주먹을 내리고 다른 공격을 시도하려 할때 

난 놈의 급소를 무릎으로 박아버렸다. 







"욱!" 







그에 털썩. 맥없이 주저앉아버리는 강형창이었다. 

난 놈이 진정할 여유도 주지 않은체 다음 공격을 퍼부었다. 


뻐억! 40초가 흘렀다. 

이제 1분 남았다. (뭐 구지 1분을 쓸 필요도 없었지만.) 


결국 강형창은 잔디위에 누워버리고 말았다. 

난 승자가 되어 놈을 내려다 보았다. 

기진맥진하여 실눈으로 나를 보는 강형창. 

놈에게 내가 물었다. 







"단 한번만 묻겠다. 미친개가 누구지?" 



"......." 







아무런 대답이 없는 강형창이다. 

난 놈의 왼손을 발로 밟으며 다시금 물었다. 







"두번만 묻겠다. 미친개가 누구지?" 



"윽. 모,모른다."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아님 알면서 일부러 모른다는 건지 강형창은 고통스러움에 얼굴을 찌푸렸다. 

난 놈이 진실을 말하게끔 협박섞인 질문을 내던졌다. 







"똥차 호스를 콧구멍에 집어넣기전에 순순히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픽_. 

강형창은 내 말이 우습게 들리는지 코웃음을 쳐보였다. 

그에 난 뒤에 서 있던 태기를 불렀다. 







"태기야." 



"네, 형님. 똥차부를까요?" 







후후. 내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눈치 빠른 태기가 얼른 알아듣고선 핸드폰을 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태기의 행동에 강형창은 위험을 직감하고선 오른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몰라. 정말 모른다고. 

우리쪽은 이름을 부르지 그런 별명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어. 정말이야." 







놈의 반응으로 봐선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대파쪽에는 미친개라는 녀석이 없다는 얘긴데.. 

난 강형창을 노려보았다. 







"정말이야?!" 



"그,그래!" 



"정말이면 꺼져! 니놈한텐 별 볼일 없으니깐. 

아! 그리고 너희 보스한테 전해. 너희 팬던트는 쓰래빠가 접수한다고." 







난 말을 마침과 동시에 턱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그러자 민규와 태기가 놈들의 목걸이를 일일이 뺏어내었고 

살짝 겁을 주자 일제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형님, 멋지십니다요." 







목걸이를 흔들어 보이며 태기가 말했다. 

민규는 나를 보며 살짝 웃어보였다. 


난 태기에게서 대파놈들의 목걸이를 건내받았고 강형창이 대파뿌리를 비롯해 

대파줄기 팬던트를 보며 무언가를 떠올렸다. 


드라마나 영화속에선 대부분 이럴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대파를 쏭쏭 썰어 넣은 얼큰한 라면국물을 떠올렸다.-_- 

모두들 알겠지만 난 원래 이렇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내 앞에 서는 바람에 따사로운 햇빛을 가로막아버렸다. 

그에 난 고개를 살며시 들어보였고 새신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런.. 잠시 잊고 있었다. 


떨리게도 새신의 입술이 열리고 예상했던 질문을 내뱉기 시작했다. 







"자, 이젠 설명해보시지?" 


♡13 






"조카! 학교는 어쩌고 여긴 왠일이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태기가 여의봉을 허리춤에 숨기며 나에게 물었다. 

녀석도 뒤늦게 새신을 본 모양인지 수습에 들어가기 바뻤고 민규또한 당황을 금치못했다. 

하지만 수습을 위한 연기던 당황을 하던 그런것은 이제 별 의미가 없었다. 

새신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테니깐.. 







"우리 조카, 또 땡땡이 쳤구만? 삼촌이 조퇴하면 했지 땡땡이는 치지 말랬지? 

이녀석 집에 가서 엉덩이 좀 맞아야." 







난 옆에서 쉴새없이 떠들어대는 태기의 입을 약간의 손짓으로 막아버렸다. 

그에 말을 도중에 멈추어버리는 태기였고 

주위엔 자동차소리와 우리 쓰래빠 아이들의 기침소리만 흐를 뿐이었다. 

난 새신을 마주했다. 







"니가 말해봐." 







그러자 굳은 표정으로 내게 말하는 새신이였고 

난 언제까지고 다물고 있을 것만 같았던 입술을 뗄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깐..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맞어. 널 속였어."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내 말에 귀기울이는 새신. 

그와 반대로 태기와 민규는 고개를 떨구었다. 







"보다시피 난 여자야." 



"이유만 말해. 니가 여자건 남자건 그딴건 중요하지 않아. 

왜 날 속인건지 이유만 말해." 







새신의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이유.. 그래, 말해야지. 말해야 되겠지. 

그렇게 난 언젠가는 말해야 될 사실을 조금 일찍 밝히게 되었던 것이다. 







"너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저 두사람 내 삼촌이 아니야. 

피라곤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남이지. 그리고 내 이름은 연개소문이 아니라 연개소리야. 

우리 아버지 성함이 바로 연개소문이었지. 뭐 이제 그 이름도 땅속에 묻히고 말았지만.." 



"길어. 이유만 말해." 



"하.. 그래, 좋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난 저녀석들을 데리고 있는 쓰래빠의 보스. 연개소리라고 한다. 

새신, 니가 우리 조직에 들어와줬으면 해. 다른 이유는 없어. 오직 이것뿐이야." 







난 새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내가 간단명료하게 말을 끝마치자 새신은 무표정한 상태로 오른쪽 입꼬리만 살짝 올릴뿐이었다. 

하긴, 이런 내말이 우습게 들리겠지. 그래, 그럴거야. 







"그러니깐 니말은 니가 조폭 대가린데 날 너희 조직에 영입하고 싶다. 이거냐?" 



"그래." 



"왜? 이유가 뭔데?" 







또 이유를 묻는다. 그럼 또 다시 난 그 이유를 말해준다. 







"니가 잘 생겼거든." 







순간 주위는 침묵이였고 녀석들의 표정을 보니 왠지 내가 말실수를 한것만 같았다. 

하지만 난 진지했다. 







"형님, 그게 아닌것 같습니다만.." 







민규가 조심스럽게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에 난 새신의 눈치를 한번 살핀뒤 헛기침을 살짝 해보였다. 







"흠흠. 농담이고 니힘이 필요해." 







난 새신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 


순간 난 녀석의 감정선을 흔들리게 할만한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엔 역시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조직, 대파놈들이 우습게 볼 정도로 힘도 없고 작은 조직이야. 

하지만 난 우리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싶어. 우리 아버지를 죽인 그 미친개를 잡아서 복수를 하고 싶다고. 

그놈이 어떻게 생긴 놈인지 어느 조직에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반드시 강한 녀석들을 모아 

대한민국에 있는 조폭이란 조폭새끼들을 다 때려부시고 말거야. 그러기엔 니힘이 필요해." 







난 아버지의 복수라는 단어로 새신에게서 동정심을 유발하고자 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 바람대로 새신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것이다. 

눈가에 이슬이 촉촉히 맺히는 새신. 

그의 입술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고 그러면 내 가슴은 심하게 떡방아질을 해대는 것만 같았다. 


새신이 손가락 끝으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아, 씨발. 눈에 모래 들어갔다. 우리 딴데 가서 얘기하면 안되냐?" 







쿵! 



-_- 괜히 긴장했다. 


결국 우린 차가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다시 한번 주위를 맴도는 긴장감. 


새신이 물었다. 







"하던 얘기 마저 해봐." 







하던 얘기를 마저하라니.. 

정말 맥이 좍 빠진다. 







"아까 그게 단데?" 







설마 성의없다고 싫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설녕 그렇다고 해도 어쩔수는 없다. 

난 더이상 할 얘기가 없으니깐. 


새신은 내 말에 피식 웃어보였다. 

역시 날 비웃는거다. 







"담배나 한대 줘봐라." 







남은 긴장돼 죽겠구만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새신이었다. 

갑자기 담배를 달라니.. 


난 새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서 있는 민규와 태기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인내심을 담은 한숨을 토해내며 자켓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는 민규였다. 

민규는 담뱃각에서 담배 한대를 빼내어 새신에게 주었다. 

물론 한 손으로 투박하게 말이다. 


그 담배를 건내받은 새신은 담배를 입에 물며 이야기했다. 







"니말은 즉, 전국 최고의 조직을 만들기위해서 내가 필요하다? 불!" 



"저새끼가 진짜!" 







새신의 건방진 말투에 발끈해보이는 태기였다. 

난 그런 태기를 한 손으로 저지했고 또 한번 눈치를 주었다. 

그 눈치를 받은 민규가 이번에도 하는 수 없이 은색 라이터를 꺼내었고 

난 라이터를 건내받는 새신을 보며 이야기했다. 







"최고의 조직이라기보단 우리나라에 있는 모든 조직을 없앤다는게 맞겠지. 

한마디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처럼 대한민국의 조직이란 조직을 우리 쓰래빠로 통합시킨다는 거다." 



"니가 그런다고 새로운 조직들이 안 생겨날것 같냐? 

지금 이 시각에도 조폭을 꿈꾸는 쓰레기같은 새끼들이 길바닥에 널려있어." 



"애송이 조직들쯤이야 금방 해치울수 있어." 



"내가 보기엔 지금 너희 조직이 애송이로 보이는데?" 







후아.. 참자. 다 맞는 말이니깐. 


난 터져오를려는 화를 간신히 참아내며 새신을 마주했다. 







"그러니깐 너에게 부탁하는 거야. 니 힘이 필요해." 







그래. 지금 나에겐 그 누구보다도 새신 니힘이 절실히 필요하다. 

새신은 아무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5초.. 

라이터 뚜껑을 열며 불을 켜는 새신이다. 

불꽃을 응시하며 새신이 말했다. 







"그다지 별 도움은 안될거다." 



"아니. 충분히 돼." 







살짝 미소를 지으며 라이터를 담배끝에 가져다 대는 새신. 

잠시후 담배에 불이 붙고 새신은 뚜껑을 닫아버리며 라이터의 주인이였던 

민규에게 라이터를 돌려준다. 


민규는 라이터를 건내받고선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난 다시 새신을 보았다. 


담배를 한모금 길게 빨던 새신은 연기를 내뱉으며 나에게 말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난 새신이 내뱉은 담배연기에 아니 말에 내 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그래서 다시 한번 물어보았고 그에 새신이 말을 했다. 







"단, 조건이 있어. 날 이긴다면. 니가 날 이긴다면 니 부탁대로 딸딸인지 쓰래빤지 거기에 들어가주지. 

내 보스라면 적어도 나보다 싸움은 더 잘해야 할테니깐. 나도 나보다 약한 놈 밑엔 있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사내새끼가 존심이 있지. 안 그래?" 







새신은 민규와 태기를 보며 비꼬는 투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에 가만히 있을 태기가 아니였고 







"킥. 분명 우리 형님이 이길거다! 넌 나한테 갈굼 당할거 미리 각오하기만 하면 되는거야. 

알겠냐? 이쨔샤!" 







새신은 태기의 말에 그저 코웃음만 칠뿐이였다. 

새신과 싸워야 한다? 싸워서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고? 

약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그래야만 할줄이야. 


새신에게 이길 자신이 없는게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길 자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결은 내일이다." 







새신은 이 말과 함께 자신있는 여유있는 미소를 띠었다. 

내일.. 내일 새신과 주먹을 겨룬다. 

내일 신발녀석과 맞장을 뜨는거다. 






\그날밤. 개소리네 집. 





"하아." 






밤하늘에 별이라고 해봤자 보이는 건 고작 12개가 전부다. 

공기좋은 시골에 가면 이것보다 더 많이 볼수가 있을까? 

그래, 그럴수 있겠지? 


난 현관 앞 작은 계단에 걸터앉아 목이 부러져라 하늘만 올려다 보고 있었다. 

아직도 고민이다. 머리가 복잡하다. 내일 그냥 싸우면 되는거지만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건지.. 

만약, 내가 지게 된다면 새신을 포기해야만 하는 거겠지? 

정말 그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 새신의 뜻은 확고했으니깐.. 







"하아." 







그렇게 밤하늘을 보며 두번째 한숨을 내쉴때. 삐그덕. 현관문이 열렸다. 







"악." 






그에 난 현관문 끝 모서리에 등을 부딪혀 버렸고 쓰라림에 닫지않는 손으로 등을 비벼야만 했다. 







"헉. 형님, 괜찮으십니까? 거기에 앉아계신줄 몰랐습니다!" 







당황을 금치못하며 어쩔줄 몰라하는 민규였다. 

정말 쓰라리고 아프지만 민규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등신같이 문앞에 앉아있던 내가 잘못이지. 







"괜찮아." 







난 등에서 손을 떼며 민규에게 안심을 시켜주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비는 민규. 

난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뜻을 보였다. 







"좀 앉아." 



"예. 형님." 







살포시 내 옆에 앉는 민규다. 







"그런데 형님 무슨 근심이라도 계시는 겁니까? 왜 이밤에 혼자." 



"그냥. 잠이 안와서." 



"아, 예.." 







난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넓게 펼쳐진 깜깜한 밤하늘. 그 끝은 과연 어디일까? 

난 넓고 광대한 하늘, 우주에 내 영혼을 내던지고 싶었다. 

모르겠다. 그냥 밤하늘을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형님, 내일 싸우시려면 푹 자두셔야 합니다." 







20분후. 민규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난 목이 뻐근함에 하늘이 아닌 땅을 내려다보았다. 







"민규야." 







개미 한마리 보이지 않는 시멘트 바닥을 보며 내가 말했다. 







"네, 형님." 



"내가 이길수 있을까?" 



"무슨.." 



"새신.. 그놈말이야." 



"아.. 물론이죠. 형님은 반드시 이기실겁니다." 







난 그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던 것일까? 

민규의 그 한마디에 순간 힘이 불끈 샘솟는 것만 같았다. 

내가 반드시 이길거라는 그 한마디에 말이다. 


난 옆을 돌아 민규를 보았다. 

내가 자신을 보자 살짝 미소를 짓는 민규였다. 

마치 내가 해낼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듯 고개를 끄덕이는 민규. 

역시 내가 부하 하나는 잘 뒀다니깐? 

난 감격에 핑도는 눈물을 감추기위해 억지로 웃음지으며 민규에게 말했다. 







"이민규! 내 연습상대가 되어주지 않겠니?" 



"예? 연습상대요?" 







눈을 동그랗게 떠보이는 민규다. 

녀석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중.) 







"그래! 내일을 위해. 밝은 우리 쓰래빠의 앞날을 위해 연습을 해야겠어." 







난 계단에서 벌떡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며 당차게 이야기했다. 

그래, 노력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여러가지 기술을 익힌 다음에 새신을 상대하는게 좋을거야. 

녀석은 절대 만만한 놈이 아닐테니깐. 


난 꽉 쥔 주먹을 민규에게 들어보였다. 

그에 침을 한번 삼킨후 계단에서 일어서는 민규였고 난 목을 좌우로 움직여 우드득. 우드득. 근육을 풀어주었다. 







"자. 이제 덤벼봐."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에 침을 바르는 민규였다. 

그리고 곧장 주먹을 들고 나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휙휙 - 바람을 일으키며 민규의 주먹을 피한 나는 겨우 찾은 틈을 파고들어 

뻐억! 강력한 펀치를 날렸다. 







"윽!" 







나에게 맞은 복부를 움켜잡으며 뒤로 주춤거리는 민규였다. 







"또 덤벼봐." 







내 말에 민규는 미간을 찌푸리며 하는 수 없이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 역시 원피스 잠옷을 펄럭이며 뛰어오른 나에게 가슴을 내주고야 말았다. 







"하아하아 -" 







15분후 지쳤는지 바닥에 앉아 일어날 생각을 하지않는 민규였다. 

난 그런 민규에게 오른손을 내주었다. 

그러자 망설이다 그 손을 잡고 일어서는 민규였고 우린 다시 현관 앞 계단에 앉았다. 







"괜찮냐?" 



"하아하아. 네, 형님." 



"들어가서 피 좀 닦아라." 



"괜찮습니다. 형님." 



"괜찮기는 뭐가. 전설의 고향이라도 찍을거냐? 가서 닦고와." 







난 민규의 입술에서 나오는 피를 손끝으로 닦아내며 이야기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에 계단에서 일어서는 민규였고 타이밍도 참 죽이지 바로 그때 삐그덕. 현관문이 열린 것이다. 







"악!" 







그리고 그 바람에 난 또 한번 등의 쓰라린 고통을 맛봐야만 했다. 

장담코 분명 살갗이 벗겨졌을거다.ㅠ_ㅠ 


난 순간적인 짜증스러움에 뒤를 홱 돌아보았다. 







"헉! 형님, 괜찮습니까?!" 







민규때와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용서를 비는 태기였다. 

후.. 이번에도 태기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멍청이같이 문 앞에 앉은 내가 잘못이지. 







"괜찮아." 







난 이를 악물고서 화를 억눌렀다. 

하지만 태기는 그렇게나 미안했는지 내 등을 만지며 나에게 물었다. 







"살 안까졌어요? 어디 한번 봅시다, 형님." 



"괜찮아." 







난 태기의 손을 내치며 다시 한번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렇지만 착하디 착한 변태기는 끝까지 걱정을 하였다. 







"좀 봅시다, 형님. 후시딘이라도 발라야죠." 







끝내 내 잠옷안을 들여다 보는 변태..기였다.-_-+ 


타악! 







"이 변태자식이 지금 어딜 보는거야?!! 너 당장 나랑 맞장떠!! 빨랑 맞장뜨자고!!" 



"혀,형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고정하십시요!" 



"어쭈! 일루 안와?!! 너 이새끼 지금 이시간부터 안에서 현관문 열때 노크 안하면 뒈질줄 알어!! 알았어?!" 







. . . 







그날밤 태기는 민규 다음으로 좋은 연습상대가 되주었다지? 아마.. 







\다음날이예요♬ 





다음날, 학교. 

결국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놈에 연습이 뭐길래.. 



엥? 그런데 저 신발놈이 왠일로 이시간에 자리에 앉아있대? 

그렇다. 내가 교실문을 열었을때 새신은 이미 자리에 앉아있었다.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신발녀석. 

난 교실에서 뛰어다니는 우왁스러운 아이들을 지나 새신의 옆. 즉 내자리에 앉았고 

내 존재를 알아챈 새신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안녕?" 



"오늘 저녁 8시. 그때 그 공사장으로 나와. 

당연히 혼자 나오는건 기본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을테지?" 







남은 정겹게 인사를 했건만 무뚝뚝하게 약속시간과 장소를 이야기하는 새신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 공사장이라는 건.. 아마도 F고와 패싸움이 있었던 그곳을 말하는 거겠지? 


난 새신의 말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다시 창밖을 보는 새신. 



그렇게 시간은 흘러 흘러.. 약속한 8시가 되었다. 

활동하기 쉬운 짧은 주름치마를 입고 머리를 질끈 묶는 둥 만발의 준비를 마친 난 

민규와 태기가 올새라 장소를 말해주지 않고 그냥 나와버렸다. 


내가 약속장소인 공사장에 도착했을땐 새신이 먼저 와 담배를 피고 있었다. 







"왔냐?" 







나를 본 새신은 들고 있던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모금 빤뒤 바닥에 던져버렸고 

이내 내 손을 잡으며 말을 했다. 







"그럼 이제 슬슬 가볼까?" 







엥? 간다니 어딜? 

난 알수 없는 새신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딜 가는데?" 







내가 물었고 그러자 새신이 나를 끌고가며 대답을 해주었다. 







"어디긴 오락실이지." 


♡14 






삐용삐용. 두두두두 - 



새신이 나를 데리고 온 곳은 바로 오락실이였다. 

꿈과 젊음이 가득한 곳. 

오.락.실.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싸워서 자신에게 이겨야만 우리 조직에 들어오겠다고 할때는 언제고 뜬금없이 오락실이라니 말이다. 

설마 오락으로 결투를 벌이자는건 아니겠지? 

만약 그게 정답이라면 진짜 어이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싸우자는 거야?" 



"그래. 게임으로 승부를 내는거지." 







정말 어이가 없다. -_-; 

난 오락실 내를 두리번거리고 서있는 새신을 벙진체 바라보았다. 

진지한 저표정. 

단지 웃자고 장난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게임으로 승부를 내자고..? 주먹이 아니라?" 







그래도 혹시나하는 생각에 난 새신에게 넌지시 물어보았고 

오락실 기계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새신이 대답했다. 







"기집애가 주먹질이 뭐냐? 그리고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댄데 주먹으로 쌈박질을 해?" 







그럼 주먹으로 먹고 사는 나같은 애는, 그리고 민규랑 변태기 같은 놈들은 뭘먹고 살아라는 거야? 

..라고 정말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시비도.. 막말도 신발이 쓰래빠를 신은 후에야 비로소 맘놓고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시대가 팬티엄 시대인만큼 승부도 이걸로 결판지어야 하는거다."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못먹는 감찌르듯 쿡쿡 찔러대는 신발녀석이었다. 

이게 진짜! 

그런데 머리로 결판을 짓자고? 

또 저번처럼 지식이니 뭐니를 운운하는건 아니겠지? 







"머리?" 



"그래. 머리. 한마디로 주먹싸움이 아니라 두뇌싸움이라는 거지. 

아! 저기 있었네." 







두뇌싸움이라.. 


내 손을 다시 쥐어잡고 어디론가 끌고 가는 새신이다. 


삐옹삐옹. 오락실 기계의 시끄러운 소음이 내 귀를 쥐어뜯고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광선이 내 눈을 막아버리는 가운데 

새신이 나를 앉힌 곳은 바로바로 한글이 뒤엉키는 고난위도의 두뇌회전을 요구하는 테트리스였다. 

동전주입구에 백원을 넣고 이어 백원을 한번 더 넣으며 새신이 말했다. 







"승부는 3판 2승제다. 참고로 내 별명이." 



"신발이겠지." 



"뭐?" 







아뿔싸.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버렸다. 







"아무말도 안했어." 







난 새신의 얼굴이 바윗돌마냥 굳어질새라 얼른 말을 정정하였다. 

내가 자신을 신발이라고 부른다는 걸 안다면 분명 죄없는 오락실 기계 하나를 부시고 나가버릴터.. 

절대 놈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오락실 주인아주머니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니 별명이 뭔데?" 







난 관심없는 투로 툭 내뱉는 듯 질문을 던졌다. 







"내 별명이 테트리스 "신"이야. 괜히 머리 굴리지말고 미리 항복하는게 좋을거다." 







테트리스 "신"이라.. 그렇게 잘하는가? 


난 의심반, 걱정반으로 새신을 보았다. 

잠시후 새신이 빨간버튼 하나를 누르면 







"자, 이제 시작해볼까?" 







두개의 칸으로 갈라진 빈화면이 나타남과 동시에 문을 열고 

삐에로 두명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도로 들어가버렸다. 


Start! 


드디어 첫번째 게임(오락)이 시작되었다. 


노란색 "ㄱ"모양의 도형이 상단에서 내려오기 시작하면 

난 버튼을 두번 눌러 "ㄴ"으로 만들었다. 

살짝 엿본 새신의 칸에선 빨간 "l"모양, 즉 작대기 두개가 나란히 누워있었다. 


젠장. 초반부터 작대기가 두개씩이나 나오다니.. 

그에 비해 난 "ㄱ"에다 또 "ㄱ"인것이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게임은 어느덧 중반부에 이르렀고 새신과 내 머리는 거의 터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테트리스. 1Round였다.) 

삐에로들이 나와서 하품을 세번하는 동안 우리 두사람의 입은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악. 씨발! 작대기 왜 안나와?!!" 

(초반에 너무 많이 나와 더이상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새신쪽이었음.) 



"아, 짱나!! 짱나뒈져!! 또 잘못 놨잖아!!" 

(눈에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시력장애가 오는 개소리였음.)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이고 계속 쌓이고.. 


띠디디딘_♬ 

결국 두집안 모두 셔터를 내리고 말았다. 







"누가 이겼지?" 



"글쎄.." 







자신의 테트리스에 너무 집중을 한 나머지 상대편을 보지못한 우리 둘은 

알 수 없는 결과에 서로의 얼굴만 끔뻑끔뻑 바라볼 뿐이었다. 

그냥 내가 이겼다고 확 우겨버려? 

아니지.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신발이 아니야. 


난 내 승리로 이끌기위해 온갖 잔머리를 굴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데 그때 테트리스를 재미나게 구경하고 서 있던 꼬마녀석이 십원짜리 동전 하나를 

기계위에 떡 얹어놓는 것이 아닌가? 

꼬마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얘기했다. 







"봐. 형아가 이겼어." 







자그마한 손으로 오락기 화면을 가리키며 이야기하는 꼬마였다. 

그에 우리 둘은 자연스레 화면을 보았고 또 앗뿔싸! 카운트 다운에 들어간 내쪽과는 달리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고 있는 신발쪽이 아닌가. 


열심히 돌아가던 내 잔머리는 얼어 할말을 잃게 만들어버렸고 

새신의 다물어져 있던 입술은 생기를 띠며 미소짓기 시작했다. 







"나도 연결해야지." 







기계위에 얹어놓았던 십원을 다시 들고선 동전주입구에 넣으며 꼬마가 말했다. 







"누나, 비켜요!" 







어쭈시구리. 아주 당당하게 소리치는 꼬마였다. 

바보같이 기계가 십원을 도로 뱉은 것도 모르고 열심히 버튼을 두드려대는 꼬마. 







"야, 꼬맹이! 여기 앉아서 해." 







의자를 내어주며 새신이 일어섰다. 

얼굴엔 웃음꽃이 핀체로 말이다. 







"1:0! 자아~ 다음 게임으로 가볼까? 하하." 



"웃음꽃이 활짝 폈구나?" 



"븅아, 그걸 바로 꽃미소라고 하는 거다!" 







지랄병.-_- 자뻑, 미친놈, 섞은 계란 노른자, 양념빠진 배추나부랭이, 할배꽃. 







"두번째 대결은 격투기다!" 







마음속으로 자기욕을 하는지도 모르고 좋다며 나를 끌고 온 곳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철권" 앞이였다. 

우후후. 이번 승리는 그야말로 내가 따놓은거나 마찬가지다. 


이번 역시 직접 동전주입구에 이백원을 넣으며 새신이 말했다. 







"너 내 별명이 뭔줄아냐?" 







이게 내가 무슨 붕언줄 아나? 

난 왠지 날 무시하는 듯한 새신의 발언에 인상을 쓰며 대답해주었다. 







"테트리스 "신"이라고?" 



"철권 "신". 그게 바로 내 별명이다. 

한마디로 쪽팔리게 "KO"당하지말고 미리 항복하라는 소리지." 







얼씨구? 언제는 테트리스 "신"이라더만. 


난 새신의 황당한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아무런 대꾸도 하지않고 놈을 쳐다보기만 했다. 


삥삥삥. 그런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체 캐릭터고르기에 여념이 없는 새신. 

자기전용 캐릭터만 사용하는 여느 아이들과는 달리 새신은 꽤 신중해 보였다. 

왠지 철권을 처음 접하는 그런 인간같았다.-_- 


과연 철권 "신"이라던 별명은 한낮 거짓나부랭이에 불과했던 것인가? 

아님 공갈딱지에 불과했던 것인가? 


어쨋든 우람한 근육질을 선택한 새신은 흐뭇하게 웃으며 자신이 택한 캐릭터를 보다가 나에게 말했다. 







"뭐해? 안 고르고." 



"어? 어. 지금 고를려고 했어." 







그나저나 뭘 고르지? 

난 두줄로 나열되어 있는 여러 캐릭터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것도 괜찮은 것 같고 저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그런데 그때 중간 아래의 숫자가 "0"으로 바뀌더니만 

우락부락 험상궂게 생긴 남자 캐릭터 주변이 반짝이며 선택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Ready Go!! 

그렇다. 캐릭터 선택시간이 끝난 것이다. 


이런 젠장. 어쨋든 게임은 시작되어버렸고 난 더러운 기분으로 게임에 임해야만 했다. 

여기서 지면 끝이다. 

정말 끝이고 끝장이다.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락실이 문닫는 일이 있어도 정전이 되어 기계가 꺼지더라도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강력한 펀치를 날리는 새신의 캐릭터. 

다행이도 멋지게 막아주었다. 







"아씹! 이거 필살기 어떻게 쓰는 거야?!" 







담배 한대를 입에 물고선 버튼을 무잡이로 눌러대는 새신이었다. 

철권 "신"이라더만 그것도 아닌것 같다. 



1분후. 







"앗싸!! 얏호!!" 







이겼다. 

내가 이긴것이다. 으하하핫!! 


두팔을 벌려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면 새신은 신경질을 내야 정상일텐데 

뭐가 우스운건지 피식 웃어보였다. 

이상한 녀석. 


어찌되었던 현재 스코어 1:1. 

마지막 한판만 남은 것이다. 

한마디로 한판 승부다. 







"다음은 뭐냐?" 







난 왠지모르게 마지막 게임도 자신있었기에 의기양양하게 새신에게 물었다. 







"다음은 저거야." 







오락실 안 노래방 박스를 가리키며 새신이 말했다. 

그렇다면 마지막은 노래대결? 노래로 승부를 내자는 말? 







"노래를 부르자고?" 



"그럼 저안에 들어가서 레슬링이라도 할래?" 



"아니.-,.-" 







내 어깨에 팔을 두른체 빈 노래방 박스 안으로 들어가는 새신. 

우리 둘은 각자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먼저 한곡 땡겨봐." 



"그럼 먼저 땡길까?" 







난 책자를 열심히 뒤적이고 있는 새신과는 달리 평소 한곡만 고집해왔기에 

머릿속에 넣어두었던 번호를 꾸욱꾸욱 누르기 시작했다. 

몇초후 "내생에 봄날은"이라는 흰색 제목이 화면에 뜨고 힘차고 경쾌한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찌릉내 나는 부둣가를 내 세상처럼 누벼가며 두 주먹으로 또 하루를 겁없이 살아간다♬ 

희망도 없고 꿈도 없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기막힌 세상 돌아보면 서러움에 눈물이 나!! 

비겁하다 욕하지마. 추저운 뒷골목을 헤매고 다녀도 내 상처를 끌어안은 그대가 곁에 있어 행복했다♬" 







딴따단딴♬ 노래가 끝나고 잠시후 60점이라는 기막힌 점수가 화면에 나타났다. 

이럴수가! 그 멋진 노래를 60점으로 평가하다니.. 

이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무슨 비리가 숨어있는게 틀림없다. 

예를 들면 내가 노래에 흠뻑 취해있는 동안 새신이 노래방 기계에게 백원을 더 주었다거나.. 

뭐 그런거 말이다.(헛소리.) 







"하하! 내가 이긴거나 마찬가지잖아? 구지 부를 필요도 없겠는데? 안글냐?" 







자신만만해하는 신발이다. 

자신이 있는게 어쩌면 당연한 것일테지만 그러나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일! 

난 끝까지 큰소리를 떵떵 쳐대었다. 







"그런게 어딨어? 누가 아냐? 너 빵점 먹을지!" 



"병신. 너 아직도 모르는 가 본데? 내 별명이." 



"노래 "신"이라고?" 



"..그렇지!" 







웃기시네.-_- 


난 비웃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위해 콧방귀를 껴주었다. 


버튼을 노래번호대로 누른후 노래제목과 함께 흘러나오는 반주. 

난 긴장해야만 했다. 

여기서 이대로 무너져야만 하는 것인가. 우르르르 콰광쾅! 

후 - 착찹하다. 


어찌되었던 저찌되었던 새신의 노래는 시작되었다. 







"거치른 벌판으로 달려가자! 내일의 희망을 마-시자!! 

보석보다 찬란한 무지개가 살고 있는 저 언덕넘어 내일의 희망이 우리를 부른다~!! 

젊은그대 잠깨어오라 젊은그대 잠깨어오라 아- 사랑스런 젊은그대 아 -♬" 







..... 






아무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노래 "신"이라던 녀석의 노래는 정말.. 아주 정말 끝내줬다. 


내 인생 최악의 노래. 



딴따단딴♬ 그리고 노래는 끝이 났고 거대한 팡파레 소리와 함께 점수가 뜨기 시작했다. 





"0점!" 




뭐야? 0점이란게 그러니깐 빵점이란게 나올수도 있는 거였어? 

핫..하하핫! 여신님! 역시 당신은 제 편이셨던 거군요. 

그럴줄 알았습니다. 암~ 그럼요. 







"후후. 내가 이겼지?" 



"......." 






아무런 대답이 없는 신발녀석. 

아무래도 충격이 큰듯 놈은 화면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자칭 노래 "신"이랬으니 그 충격이 좀 클까? 

하지만 내가 이긴건 이긴거고 승리자는 바로 나다. 







"내가 이긴거 맞지?" 







난 다시 한번 얄밉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쾅! 마이크를 집어던지며 녀석이 대답한다. 







"아,그래!!" 







\개소리네 집. 




벌컥! 







"꺄아!! 드디어 해냈어!! 내가 해냈다구!!" 






새신과의 불꽃튀는 결투끝에 환희의 승리를 맛본 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고스톱에 열중인 민규와 태기를 붙잡고 팔짝팔짝 뛰어대었다. 







"뭘요? 뭘 해냈다는 겁니까? 형님." 







빨간 화투 3장을 들고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태기가 물었다. 

눈치없는 자식. 







"뭐긴 뭐가 뭐야? 새신한테 내가 이겼다고!" 



"예에? 그럼 방금 싸우시고 오시는 겁니까? 몸은요? 다친덴 없어요??" 



"새끼야, 보면 모르겠냐?" 



"역시!! 형님, 전 형님이 이기실줄 진작부터 알았습니다." 







왠지 민규와 태기는 내가 새신과 큰 몸싸움을 벌이고 온걸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는게 어쩌면 당연한 것일거다. 

또 내 입으로 오락에서 이겼다고는 차마 말할수가 없었다. 







"그, 그렇지 뭐. 하하. 내가 누구냐? 나 쓰래빠 보스 연개소리라고. 하하하." 



"형님, 그럼 2,3일후에 형님 전학하실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힘들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데 화투를 담요위에 놓으며 민규가 이야기했다. 

갑자기 전학이라니..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에 난 웃음을 멈추곤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물어보았다. 







"전학?" 



"네, 형님. 새신건(件)도 해결됐으니 이젠 신유인을 건지셔야죠." 







아차. 그렇지. 

난 지금 쓰래빠 애들을 모으고 있었던 중이었지? 

잠시 잊고 있었다. 

신유인이라니.. 그럼 H고로 전학가야 하는건가? 







"그럼 새신은?" 



"물론, 같이 가야지요." 



"그녀석이 과연 가려고 할까?" 



"원치않아도 가야합니다. 오늘 승부에서 형님이 이기셨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 그,그렇지." 



"그럼 지금 이시간부터 새신은 형님부하입니다. 

그러니 개인 의견따윈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형님이 시키시는 대로 하는게 도리이지요." 







부하. 새신이 내부하라.. 

민규와 태기와 똑같은 내부하.. 


그럼 지금부턴 혼자가 아닌 새신과 함께 녀석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모으게 되는 건가? 

순간 가슴이 심하게 뛰기시작했다. 

흥분된다. 


내꿈이 이루어 질 날도 그리 멀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아버지의 복수를 할 날도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후 강렬한 눈빛으로 민규를 보며 이야기했다. 







"3일후. H고로 전학간다. 이민규 부탁하마." 



"걱정마십시요. 형님." 







기다려라, 신유인. 

곧 새신과 함께 내가 널 찾아가마. 



♡15 







"형님! 여기 요구르트 드십시요!!" 







대문을 막 빠져 나가려는 나를 소리 높여 붙잡는 태기였다. 

오른손엔 요구르트 하나를 왼손엔 빨대 하나를 들고서 나에게 달려오는 태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요란법썩인지. 

난 대문 앞에 멈춰섰다. 






"왜그래?" 



"형님, 식사 안 하셨잖아요. 그래서 요구르트라도 드시라구요." 







태기는 내가 아침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오늘따라 속이 거북해 아침을 먹지 않았을 뿐이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아 두 손으로 나에게 건내는 변태기. 

난 옅은 미소를 띠우며 요구르트를 받아들었다. 

하루 이상 냉장고에 보관되었던 요구르트답게 손끝에 찬 기운이 느껴졌다. 

난 살며시 빨대를 입에 물고 단숨에 요구르트를 빨아들였다. 

찬 기운이 가슴 속으로 옮겨 가는 것만 같았다. 







"하아. 맛있네." 



"그쵸? 제가 이 맛에 2년째 요구르트 받아 먹는 거 아닙니까. 하하." 







그래. 요구르트가 맛있는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내 쵸코파이를 따라잡지는 못하는 것 같구나. 

난 빈 요구르트 병을 태기에게 건내주었다. 







"그럼 형님, 학교 잘 다녀오십시요." 






허리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변태기였다. 

난 그런 태기의 인사를 받으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고 20분후 학교에 도착하였다. 

오늘 새신에게 어떤 식으로 전학이야기를 꺼낼지 곰곰히 생각을 하며 3학년 14반 교실에 도착. 

뒷문을 막 들어설 찰나였다. 







"개소문오빠!" 







우리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아니, 학교에서의 내 이름을 부르는 

여자애의 발랄한 목소리에 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봐야만 했다. 

오랜만에 듣는 이 목소리.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분명 앙뜨아네트 머리, 현아일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뒤를 돌아본 내 눈에 들어온것은 역시나 현아였고 

그녀는 놀랍게도 예전과 변함없이 생글생글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새신과 내가 사귄다는 그 말도 안돼는 오해를 스스로 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오빠, 저 이틀동아 곰곰히 생각해봤어요."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으니 현아가 웃으며 말했다. 

큰 눈이 반달이 되었다. 







"생각? 무슨 생각?" 






난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뜨며(깜빡이며) 현아에게 물었다. 







"오빠랑 신이선배요." 







역시 그거였군. 

현아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뭐 요즘엔 동성애가 늘어나는 추세잖아요? 

그래서 그게 그리 이상할 것까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_- 







"그래서?" 







난 이해할 수 없음에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했고 현아는 올망똘망한 눈으로 이야기했다. 







"한마디로 신이선배를 제 라이벌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예요. 

제가 여지껏 살아오면서 첫눈에 반한 사람이 오빠뿐인만큼 절대로 포기 못하겠어요. 

그러니 꼭 지켜봐주세요. 저 현아, 꼭 열심히 할게요!" 







-_- 그 누가 앙뜨아네트를 말릴리오. 

난 기가 막힘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아가씨 똥물에 빠져도 단단히 빠졌구나."하고.. 







"어이! 내 남자한테 무슨 볼일이야?" 







그런데 그때 큰 무언가가 내 뒤를 가리더니 불량기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난 뒤를 올려다봤고 그것은 바로 신발이었던 것이다. 

새신? 







"우리가 사귀는 사이란걸 너도 잘 알텐데?" 







한 팔로 내 목을 살짝 감싸며 이야기하는 새신의 모습에 현아는 약간 움찔했지만 

그것도 잠시 태연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하는 것 같았다. 

현아가 두 눈에 힘을 주며 새신에게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신이선배! 결투를 신청해요!" 







지금까지의 당찬 모습 중에서도 지금이 가장 당차보였다. 

도대체 저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오는 건지.. 

역시 사랑의 힘은 위대한가 보다. 


새신은 현아의 말에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너 지금 나한테 삿대질 하는 거냐?" 



"예?..서, 설마요. 하하." 







휙. 겁없이 새신을 가리키고 있던 앙증맞은 손가락을 낼름 등 뒤로 숨겨버리는 현아양이었다. 

방금전의 그 강한 모습은 어디로 간건지.. 

이럴때보면 현아도 별 수 없는 여자, 아니 인간인것 같았다. 







"좋겠다? 기집애들한테 인기 많아서." 







내 귀에 대고 나지막히 속삭이는 새신이었다.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잘 알 수 있다. 

이것이 날 비웃는 말이라는 것을.. 


뭐 그런거겠지. 

여자가 여자한테 인기가 많아서 뭐에 쓰냐는.. 

어쩌면 그 말이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난 굳게 다짐했다. 

나에 대한 현아의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빨리 포기시키자고 말이다. 

뭐 내가 여자라는 것을 밝혀버린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겠지만 그건 상처를 너무 많이 남기기에 

그럴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영 없는 것만은 아니다. 

옛말에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바로 전학이야기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난 힘겹게 입술을 떼내었다. 







"현아야, 할말이 있어." 



"네! 하세요, 오라버니~" 







새신의 눈치를 보다가도 내가 말을 걸자 좋다고 활짝 웃어보이는 현아. 

귀여운 것이 남자들한테도 제법 인기가 많을 것 같은데 어쩌다가 나같은 걸 좋아하게 됐는지.. 

정말 이해가 안된다. 

하긴 내 생김새가 첫눈에 반할 정도로 완벽한건 사실이지만 동성에게도 그 뭐식이냐 

호르몬? 아니 페로몬같은게 통할 줄이야. 







"나 많이 좋아해?" 







대답은 뻔하겠지만 그래도 내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꺼낸 질문이었다. 







"그럼요! 우리 부모님보다 더 좋은 걸요? 헤헤." 







저 천진난만한 웃음. 거짓이 아닌것 같다. 







"그런데 왜요?" 



"언, 아니 오빠는 말이야. 현아가 오빠에 대한 감정이 아주 작은 거라면 

오빠같은 사람말고 더 좋은 사람에게 갔으면 좋겠어." 



"아니예요! 오빠같은 사람이라뇨! 오빤 충분히 멋있어요. 진짜예요! 

제 친구들한테도 한번 물어봐요." 







현아야, 그건 물어보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란다. 







"현아야, 오빠 그만 잊어." 



"싫어요! 오빨 좋아하는 건 제 자유예요! 아무리 개소문오빠라고 해도 

자유로운 새의 날개를 꺽을 자격은 없어요!" 







완전 영화가 따로 없다. 

그리고 그걸 새신도 느낀 모양인것 같았다. 

나와 현아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새신이 말했다. 







"너희 둘, 지금 영화찍냐?" 







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현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냥 솔직히 말할게. 어차피 내일모레면 너도 알게 될테니깐." 



"솔직히 말하다뇨..? 뭘요?" 







현아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것이다. 

알 수 없는 내 말에 현아가 날 바라보고 새신또한 팔을 풀고서 나를 보았다. 







"나 전학가." 







쿠궁! 이건 내가 생각하는 현아의 심장 떨어지는 소리이다. 

현아의 눈,코,입. 그리고 몸은 충격으로 인하여 완전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진짜 마음같아선 현아의 어깨를 툭 친후 "땡!"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분위기상 그런 개그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정말이세요?" 







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그에 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거짓말.. 오빠는 지금 절 떼어놓으시려고 거짓말을 하고 계신거예요." 



"니가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왜? 이유가 뭐예요?!" 







현아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눈가엔 눈물을 한가득 담아둔체 말이다. 







"사정이 있어서 그래." 



"무슨 사정요?" 



"그것까진 니가 알 필요없어." 



"..오빠, 너무 해요!!" 







끝내 흐르는 눈물을 들키지 않기위해 달려가버리는 현아. 

하지만 그 눈물은 이미 일찌감치 나에게 들켜버린 것을.. 

너무 오바스런 행동이었다. 

뭐 현아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어쨋든 떼어놓는데에 일단은 성공한것 같다. 







"연극의 한 수단이냐? 아님 진짜냐?" 







잠시 잊고 있었던 새신이 나에게 물었다. 

학교 오는 길에 그렇게 고민했던 걸 이런식으로 말하게 될줄은 생각도 못했다. 

이거 현아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뭐?" 



"전학말이다." 



"아, 그거? 너도 같이 갈거야." 



"내가 잘못 들은건 아니지?" 



"귓구멍이 뚫렸다면 아마 니가 들은 게 맞을 거야." 



"넌 내가 갈거 같냐?" 



"물론, 아니지.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널 꼭 데려 가야 겠어." 







그렇게도 기가 막히는지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다가 나를 보는 새신. 

그리고 어이없는 질문이 시작되었다. 







"내 다리가 부러져도?" 



"휠체어 정도는 얼마든지 사줄수 있어." 



"우리 부모님이 안된다고 그래도?" 



"너 미국에 계시는 부모님이랑 인연 끊은거 다 알아." 



"과연 그 학교에서 날 받아줄까?" 



"돈이란건 써라고 있는 거야. 나 돈 많아." 



"..내가 싫다면?" 







드디어 인상이 굳어져버린 새신. 

하지만 난 끝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민규말대로 새신은 오늘부터 내 부하니깐. 







"이게 어제 내가 이긴 승부의 조건이야." 



"조건? 그런것도 있었냐?" 



"어제 내가 이긴 그 순간부터 넌 쓰래빠의 멤버야. 그리고 내 부하지. 

이제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다시 한번 말해줄까? 넌!" 



"야! 화장실, 화장실 가서 얘기해." 







언성이 높아지는 내 입을 갑자기 손으로 막아버리는 새신이었다. 

그리고는 주위를 살피며 날 어디론가 끌고 갔고 그곳은 다름아닌 화장실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남자화장실. 

새신은 화장실 문을 잠궈버리더니 교복 자켓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들었다. 

녀석도 이 현실이 갑갑한 모양인가 보다.(누구때문인데?) 

그나저나 왜 남자화장실로 데려온거야? 







"왜 하필이면 남자화장실이야?" 







난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러자 담배 한대를 입에 물고서 불을 붙이며 새신이 말했다. 







"그럼 남자가 남자화장실로 오지. 여자화장실로 가리?" 



"이거 왜 이러셔? 나도 엄연히 여자라고!" 







휙! 그때 갑자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머리에 씌워져 있던 컷트가발을 벗겨내버리는 새신이었다. 

그럼과 동시에 실핀으로 우스광스럽게 고정되어 있던 내 머리가 드러났고 

그런 내 머리를 보며 새신이 말했다. 







"학교에서도 여자라고?" 







젠장. 내가 졌다. 


난 할말이 없음에 새신의 손에서 가발을 뺏어내며 헛기침만 하였다. 







"후 - 근데 어디로 전학가는 건데?"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새신이 물었다. 

어디로 가는 지 또 왜 가는 건지를 새신이 안다면 더 안간다고 난리칠게 분명한데 어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로 대충 얼버무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난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기로 한것이다. 







"H고. H고로 갈거야." 



"H고? 왜 하필 거긴데?" 



"너도 잘 알거야. 몇일전 호프집에서 봤던 신유인이라고." 



"아~! 씹팔, 그 개자식?!" 







역시 예상대로 반응이 좋지가 않았다. 







"근데 그새낀 왜?" 



"그애때문에 가는 거야." 



"왜? 그 자식도 너희 조직에 필요하냐?" 



"너희 조직이 아니라, 이젠 우리 조직이야." 







방금 대사, 멋졌다. 







"아무튼 그자식은 싫어." 



"싫어도 어쩔수 없어. 그녀석도 필요해." 



"나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웃기지마! 너혼자서 사시미를 들고 설치는 수십명이나 되는 조폭새끼들을 

이길수 있을 것 같아?! 자신감만으론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 







탁. 들고 있던 담배를 변기벽면에 내던져 버리는 새신이다. 

여기서 난 새신의 현재 정신상태를 알 수가 있었다. 

놈은 열이 받은 거다. 

이쯤에서 난 놈의 마음을 흔들게 할 어떤 동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새신을 더 열받게 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난 더러운 화장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보스가 부하에게 할 행동은 아니였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자존심을 굽힐 줄도 알아야 하는 거니깐. 

난 무릎을 꿇은 체로 새신을 올려다보며 부탁을 했다. 







"부탁해. 이번 한번만이라는 말은 할 수가 없지만 날 도와줘." 







여전히 성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새신. 

난 그런 녀석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화장실내의 시큼한 냄새분자가 교복에 하나,둘씩 달라붙을 때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새신이었다. 







"하아. 생각 좀 해봐야 겠다." 







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새신. 

난 고개숙여 내 무릎을 보았다. 

아버지 앞에서 구구단을 외울때를 제외하곤 타인에게 난생 처음으로 꿇어본 무릎. 

피식. 그런 내자신을 보니 웃음이 튀어나왔다. 







"연개소리. 너 오늘 스타일 너무 구기는 거 아냐?" 







\3학년 14반 교실. 



점심시간이 끝난지 그러니깐 2시간 정도가 지났으니깐 지금이 아마 수업 마지막 시간일것이다. 

쉬는 시간내내 친구들이 와도 그리고 후배들이 찾아와도 자리를 뜨지않고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 

그런 녀석을 보자니 나까지 한숨이 튀어나왔다. 

솔직히 미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고맙게 느껴졌다. 

이 일에 대해 그러니깐 우리 조직에 대해 진진하게 고민을 해주어서 말이다. 


나또한 6시간동안 턱을 괴고 생각을 해보았다. 

어젯밤 민규가 했던 말이 과연 옳은지를 말이다. 



"새신은 형님 부하입니다. 그러니 개인의견따윈 아무 쓸모도 없습니다." 



개인의 의견따윈 아무 쓸모도 없다. 

그 말은 즉, 내 의견이 최우선이고 내 말이 곧 법이다.. 

새신이 내 부하. 



"너 친구말고 내 동무해라?" 



맞어. 새신은 내 부하가 아니라 동무였어. 

그리고 난 부하에게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에게 동무에게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는 게 맞는 거야. 


순간 난 민규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의 의견을 절대 무시해선 안된다. 

아무리 보스라도 그럴 자격은 없다. 


조금씩 존재하지 않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잠시후 하루를 끝마치는 종이 교내에 울려 퍼졌다. 


난 새신을 보았다. 

영어들로 빽빽한 칠판을 바라보고 있는 새신. 

난 작은 한숨을 토해내며 종례가 시작하기도 전에 가방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담갖지는 마. 정 니가 가기싫다면 구지 안가도 되니깐. 

그리고 우리 조직에 들어와줘서 정말 고마워. 아무래도 난 정말 좋은 친구를 둔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 







새신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난 살짝 웃어보였다. 







"먼저 갈게.^-^" 







그리고는 교실을 나가기위해 뒷문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젠 됐어. 새신이 H고로 함께 가지 않는다고 해도 연개소리 넌 충분히 해낼수가 있을 거야. 

부하를 친구로 바라보고 대하는 니 태도 정말 멋졌다구. 







"등신, 종례 안 듣고 그냥 가냐?" 







그렇게 뒷문으로 걸어가려는데 갑자기 날 붙잡는 새신의 목소리였다. 

그에 난 뒤를 돌아다보았고. 







"응?" 



"언제 가면 되냐고. 신유인 그 개쉐이한테." 





♡16 








내가 정녕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정말 선생의 지겨운 수업내용을 견디다 못해 잠이 들었는 걸지도 모른다. 

포기하고 망연자실해있던 나에게 새신의 말은 무더운 여름날에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과도 같았다. 

하지만 믿을 수 없던 새신의 승낙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듯 

새신은 지금 내 옆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좋은 녀석, 착한 자식. 

그게 바로 새신이었다. 


난 들뜬 기분에 태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Rrrr. 

신호가 가고 찰카닥. 태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니임! 변태기 전화 받았습니다!] 







활기찬 녀석. 전화를 받을 때도 활기가 넘쳐났다. 







"지금 신이랑 집으로 가는 길이니깐, 환영회 준비해놔." 



[예? 환영회요? 저희 원래 그런거 안했잖습니까? 갑자기 왜..?] 



"이제부터 할거야. 잔말말고 준비해놔. 술도 많이 사놓고. 끊어." 



[형님! 잠시만요! 형니임-!] 







탁. 태기가 할말이 있는 듯 했지만 그냥 끊어버렸다. 

무슨 바람으로 갑자기 환영회를 하냐고? 

그 대답은 바로 내 마음이다. 후후.(속보이는 주인공.) 







"야, 배 안 고프냐? 우리." 



"집에 가서 먹자!" 



"뭐?" 



"우리 집에 가서 먹자구. 애들이 맛있는 거 잔득 해놨댔거든. 하하. 아! 택시이 -" 







난 근처 음식점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새신을 붙잡고선 택시를 잡았다. 







"신사동으로 가주세요!" 







택시를 타고 가면 아이들이 환영회를 준비하는데 시간이 촉박하지 않냐고? 

물론, 촉박하겠지. 

하지만 난 그런것도 고려하지 않는 매정한 보스는 아니다. 

청담동에 있는 우리 집으로 가기위해 잡아 탄 택시안에서 신사동이라고 말한 이 부분에서도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긴 시간동안 달린 끝에 도착한 신사동에서 난 기사의 귀를 탓하며 

다시 청담동으로 가달라고 말하였다. 

이 정도면 다 준비했겠지? 

어쨋든 택시안에서 장작 1시간 정도를 투자한 우리는 드디어 집에 도착하였고 

난 새신의 투덜거림을 받아주며 택시비를 지불했다. 

그런데 택시비가 만원이 넘다니.. 

애들을 하나씩 영입할때마다 내 등골이 다 휘는 건 아닌지 참으로 걱정이다. 


난 민규가 열어준 대문을 마저 열고 새신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원을 지나 현관문 앞. 

난 기대에 찬 눈으로 새신에게 주의를 주었다. 







"후후. 마음 단단히 먹어. 놀랄거야." 



"뭐?" 







현관문을 염과 동시에 폭죽이 펑! 귀를 막는 게 좋을 거라고. 


난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새신에게 야릇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퍼벙펑펑★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야 할 폭죽은.. 

온데 간데 없고. 







"형님! 오셨습니까?!!" 







문 앞 양옆에 일렬로 마주 보고 선체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쓰래빠 애들만이 보일 뿐이었다. 







"깜짝이야. 씨바, 염병. 놀라 자빠지는 줄 알았네." 







나를 위해 놀란 척해주며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는 새신이다. 

하. 이것들이 파티의 기본인 폭죽을 빠뜨리다니.. 두고 보자. 

난 검은 양복을 입은 8명의 부하녀석들을 째려보며 새신을 따라 거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가로 2m, 세로 1m 50cm의 넓은 상이 내 눈에 들어왔고 

그와 함께 







"형님! 오셨어요~?" 







태기의 우렁찬 목소리가 내 귓속을 파고 들었다. 







"상차린다고 진짜 힘들었다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형님. 

멋지지 않습니까?" 







저렇게 자신만만해 하는 변태기가 차린 상을 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일단 콜라 및 사이다로 시작하는 양 끝 상모서리와 함께 

양 테두리엔 자장면과 짬뽕이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으며 

중앙엔 탕수육,팔보채,군만두,깜풍기,양장피,라조기등이 빽빽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딱봐도 동네 중국집 "소림사"에서 시킨거구만 차린다고 힘이 들어? 

순간 1시간동안 투자했던 택시비가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았다. 







"형님, 오셨습니까?" 







그때 주방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들고 나오며 인사를 하는 민규였다. 

10년을 나타내는 긴 초 하나를 중앙에 꽂은 쵸코케잌을 들고 있는 민규. 

이것들이 그래도 완전히 생각이 없는 것만은 아니였나 보다. 

그리고 난 오늘의 메뉴에서 한가지를 알 수가 있었고 그것을 눈치빠른 새신또한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설겆이는 안해도 되겠구만." 







새신의 단 한마디에 케잌을 상위에 놓다말고 움찔거리는 민규와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태기. 

그랬다. 이것들은 설겆이가 하기 싫었던 것이다. 

정말 성질같아선 자장면의 짜장으로 얼굴에 팩을 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시켜버린 것을. 

난 화를 억누르기로 했다. 

그렇게 내 자비심과 함께 조용한 침묵속에서 이루어진 30분동안의 식사가 모두 끝나고 

술상과 함께 선물상자를 들고 오는 부하1,2 이토(히로부미)(별칭)와 히틀러(별칭)였다. 

난 히틀러가 두 손으로 건내는 선물상자를 받아 새신에게 주었다. 







"이게 뭔데?" 







선물상자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새신이 물었다. 







"이건." 



"이건 우리 조직에 들어온 기념으로 주는 조그마한 선물이다." 







내 말을 가로채버리는 변태기. 

후우 - 이번 한번만 참아준다. 






"선물?" 



"그래. 어서 풀." 



"잔말말고 빨랑 풀어봐라." 







이번 역시 내 대사를 뺏겨 버렸다. 

난 태기를 힘껏 째려보았다. 

그러자 내 눈치를 받고 입을 꾹 다물어버리는 태기다. 

새신은 빨간 리본을 풀고선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상자안에는 쓰래빠가 들어있었다. 







"우리 조직의 상징이야. 너도 봐서 알겠지만 우린 항상 쓰래빠만 신고 다녀." 



"그럼 나도 신어야 하는 거냐?" 



"임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새신의 물음에 태기가 소리쳤다. 







"쪽팔리게 이걸 신어라고?" 







새신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 - 쪽팔린다라. 난 지금 무지하게 상처받았다. 







"태기야." 



"네, 형님." 



"너도 쪽팔리냐?" 



"아니요! 전 자랑스럽습니다!" 







거실이 떠나가라 소리치는 태기였다. 

난 민규에게 같은 질문을 내던졌다. 







"민규야." 



"네, 형님." 



"너도 쪽팔리냐?" 



"아닙니다. 쓰래빠는 패션의 기본. 제 외모를 더욱더 빛내주기에 전 쓰래빠를 사랑합니다!" 







약간 오바스런 대답이었지만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난 새신을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는 새신이었다. 

패션을 모르는 인간같으니.. 

뭐 언젠가는 신겠지. 지금 그게 그리 중요한건 아니니깐. 

그나저나 치수가 맞는 지는 봐야 하는데..-_- 




챙! 







"쓰래빠의 화려한 미래를 위해!" 







드디어 첫잔이 목구멍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우린 술을 마시고 또 마시고 가무(歌舞)를 즐겼다. 







"울고 있는 너의 모습. 바보같은 너의 모습. 요구르트 속의 유산균 좋아. 유산균 좋아-♪ 

니가 내 요구르트 먹으면. 몇개 먹었냐고 물으면 두 개 먹었다는 니가 난 너무 싫었어. 

요구르트 숨기고 싶었어. 아무리 숨겨도 넌 계속 내 요구르트 먹었고 

나는 빨리 뱉어라 했어.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애를 써도 넌 뱉을 순 없었어. 

아직도 너의 그 미소, 내 요구르트 먹던 그 입술. 생각나는 게 너무 싫었어. 너무 싫었어.♬-" 







가수 비(본명:정지훈, 1998년 [팬클럽]이란 그룹 및 2002년 [나쁜 남자]로 데뷔.)의 

노래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제멋대로 개사한 태기가 여의봉을 마이크삼아 열심히 열창을 해대었다. 

그리고 그 뒤에선 부하 1에서 8인 이토(히로부미),히틀러,김일성,오노,신창원,김정일,궁예,전두환이 재롱을 부리며 춤을 추었다. 







"하하! 고작 그것밖에 못하냐? 노래란 말이야. 이렇게 하는 거라고." 







신발녀석, 그렇게 마셔대더니만 결국 취했는 모양인가 보다. 

노래부르기에 한창이던 태기의 노래를 막아버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새신. 

그에 태기는 피식 피식 웃어재끼며 새신에게 말한다. 







"어쭈? 자신억억인데? 딸꾹! 어디 한번 쎄차고 앙칼지게 불러보라우." 






태기의 말에 씨익 웃어보이는 새신이다. 

새신은 상위에 있던 양주병을 들었다. 

양주병 안에는 1/3가량의 술이 남아있었다. 







"흠흠." 







진짜로 부를 모양인지 목을 가다듬기 시작하는 새신이었다. 

난 새신의 노래실력을 잘 알기에 맨정신으론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술 3잔정도를 더 따라 마셨다. 

그리고 잠시후 새신의 노래가 거실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요를레오! 우후! 청바지에 리-입스틱♬ 야! 너! 이휘~ 

이리 와봐! 컴온컴온♬ 나랑 한번 붙어볼래?! 와오!!" 







그날 밤, 조직 쓰래빠의 귀는 모두 썩어나갔다. - 







\다음날 아침은 또 오고. 







"으음. 쩝쩝." 







입맛 다시는 소리와 함께 난 잠에서 깨어 눈을 떴다. 

아오. 그런데 허벅지가 왜이리 무거운거야? 

욱씬,욱씬 쑤시는 게 진짜 장난이 아니다. 

난 눈알을 아래로 깔며 허버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저 물건은 무어란 말인가?! 

사람의 머리통으로 보이는 저 형체. 

난 잠이 덜 깬건가 싶어 눈을 비빈후 다시 보았다. 







"히익!" 







그것은 바로 쓰래빠를 양쪽 귀에 걸고 있는 새신이었던 것이다! 

저자식이 왜 여기서 자는 거야?! 

난 놀람에 나도 모르게 다리를 홱 빼버렸다. 

그에 쿵!하며 바닥에 떨어져 버리는 새신의 머리였고 







"악-. 씹, 뭐야?" 







잠꼬대와 함께 다시 잠을 청하는 신발이었다. 

주변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술병과 휴지조각들.. 그리고 쓰래빠 애들.. 

그러고보니 어제 환영회를 하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나보다. 

이제야 상황파악이 되었던 나는 어이없는 웃음과 함께 거실바닥에서 일어났다. 

지금 시간이.. 오전 8:50. 

지각도 끝내주게 지각이었다. 

난 새신을 깨우려다 몇일후면 전학을 갈텐데 하루쯤 안가도 될듯싶어 그냥 자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날 저녁, 난 친구와 후배들을 만나러 간다는 새신을 따라 공사장으로 행차했다. 

F고와 싸움이 있었던 그 공사장. 

2층에서 3층까지 쌓아올린 것이 단기간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집이 완성되면 얘네들은 어디에서 모임을 가질까?하는 의문을 가지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S고 3학년 일진이자 새신의 친구인 현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전학 간다는 게 사실이냐?" 







난 옆에 서 있던 새신을 보았다. 







"그래." 







시원하게 대답을 해주는 새신이다. 







"갑자기 왜 가는 건데? 이사라도 가냐?" 







이번엔 노란 장발머리 윤호가 물었다. 







"이사는 무슨. 한놈 납치하러 가는 거다." 







신유인을 말하는 듯 했다. 







"납치? 그게 무슨 말이예요?" 







3학년들의 질문에서 2학년 후배놈들의 질문이 줄줄이 이어져나갔다. 

그리고 새신또한 나름대로 정성스럽게 답변을 해주었고 말이다. 







"너희들도 알거다. H고의 신유인이라고." 



"그자식이 왜요? 아니, 이유는 묻지않을게요. 

저희들이 놈을 잡아다 드릴게요. 그러니깐 짱, 전학 가지마세요." 



"그래요! 저희는 짱이 필요하다구요. 짱이 안계심 서울 No.1 S고도 이제 끝이예요." 



"새끼들아, 내가 어디 아프리카라도 가냐? 호들갑은. 그리고 끝은 무슨 끝이야? 

현호,윤호,준수도 있는데." 







공사장 안의 어둠은 점점 짙어져만 같다. 







"갑자기 신유인 그 자식은 왜?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얘기해줘." 







현호의 물음에 새신은 고갤돌려 나를 보았다. 

저 눈빛은 아마 허락을 요구하는 것일터.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새신이 말했다. 







"쓰래빠. 내가 몸담은 조직의 이름이다." 







웅성웅성. 새신의 한마디에 42명의 아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새신의 입에서 튀어나온 우리 조직의 이름을 들으니 새삼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직..요?" 



"그래. 내 옆에 있는 이녀석이 조직의 두목이다." 







순간 내 얼굴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개소문이? 너 지금 장난치는 거지?" 







내 얼굴을 알아본 윤호가 얼굴을 찡그리며 새신에게 물었다. 

그에 자존심이 조금(많이) 상한 나는 쓰고 있던 창모자를 벗어버렸고 

그와 동시에 꼬아 올렸던 머리칼이 목선을 따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사장 내의 술렁거림은 한층 더 심해졌고 

내가 여자라는 사실에 놈들의 입은 파리라도 기다리는 것 마냥 다물줄을 몰랐다. 







"마,말도 안돼.." 



"개소문이 여자..여자였다니." 



"오! 마이 갓-" 







새신은 놀라 어벙벙해져 있는 놈들에게 큰소리로 이야기했다. 







"쓰래빠의 목적은 전국구 통일이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복수이기도 하지. 







"난 너희들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너희들이 나를 믿고 따른다면 이 비탈길을 너희들과 함께 걸어가고 싶다." 







새신의 연설은 끝이 났고 아이들도 일제히 침묵하였다. 

냉랭하면서도 뜨거운 공기. 지금 공사장의 공기이고 분위기였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종종 연락하고. 그만 가자." 







새신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리고 그 뒤를 내가 따랐다.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새신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버린 그런 기분이다. 

내가 나쁜 년일까? 

어떻게 보면 그것은 모두 다 내 이기적인 꿈일뿐이고 야망일뿐인데.. 

난 새신을 보았다. 

입을 굳게 다문체 앞만 보고 걸어가는 새신. 

이녀석은 왜 나와 함께 하는 걸까? 

오로지 사나이의 약속때문에? 승부에서 졌으므로?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난 역시 바보인가보다. 







"지금 니가 바보같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때 새신이 침묵을 뚫고 말을 했다. 

마치 내 속마음을 꽤 뚫어보는 것 마냥 녀석의 표정은 진지 그 자체였다. 







"글쎄.." 







난 맞다고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새신은 확신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신경쓰지마." 



"좋다니? 뭐가?" 



"글쎄.." 







새신은 나와 같은 대답을 하였다. 



몇일후. 

오늘은 한 주를 시작하는 활기찬 월요일. 

새신과 나, 두 사람의 전학준비를 하느라 예상보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H고로 전학을 한다. 



끼이익_ 


쓰래빠의 간판인 검은색 BMW(차 이곳 저곳에 손수 스프레이로 BMW라고 적은.)가 H고 교문 앞에 멈춰서고 

태기의 에스컷트와 함께 새신과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곧장 차가 출발해버리고 우린 많은 학생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교문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하였다. 

새신과 나, 두 사람 모두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난 S고에서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남장은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과감히 가발을 벗어던져 버리고 치마를 입었다. 


한 걸음에 새신은 교복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두 걸음, 난 치마를 한번 접어올렸다. 

세 걸음, 새신이 남방 단추 하나를 풀었고 

네 걸음에 난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겨 귀걸이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우리 두 사람은 타인의 눈엔 그야말로 환상을 넘어선 금상첨화, 희황찬란한 커플이었다. 

우리는 드디어 H고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교문을 위엄있게 지키고 있던 대머리 학주에게 보란듯이 팔을 벌려(영화 "엽기적인 그녀"처럼.) 

학생증을 척 내밀어 보이며 교문을 들어섰다. 

이제 신유인과 나, 신유인과 새신의 만남. Comming Soon이다. 




♡17 






멋지게 영화의 메인장면을 연상시키듯 학생증을 내밀며 들어선 H고 교문(정문). 

새신과 나는, 즉 신이와 나는 자신의 모습에 뿌듯해하며 서로에게 미소지어보였다. 

그렇게 무사히 교문을 통과하는 가 싶었는데 바로 그때, 

목뒷덜미를 누군가에게 잡혀버리고 만것이다. 

동시에 목뒷덜미를 잡힌 우리 둘은 앞으로 오도 가도 못한체 발이 묶여버렸고 

그에 어떤 인간인가 싶어 뒤를 홱 돌아보는데. 







"요놈들이 어딜 들어가시려고??" 







성탄절 단골 영화인 "나홀로 집에"라는 영화에 나오는 금니범인(조 페시)을 닮은 

학생주임이 금니가 아닌 눈부신 은니를 살짝 드러내며 괴팍스럽게 웃어보였다. 

이 사람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거 왜 이래? 못놔?" 







신이또한 열이 받았는 지 악을 썼고 그러면 곧 등교길의 아이들이 일제히 

신이와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학주는 나와 신이의 발버둥에 못이기겠는 지 목뒷덜미를 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놨다! 이젠 어쩔거냐?" 







어쩔거냐니.. 

학주의 아리송한 질문에 나와 신이는 인상만 쓰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우리를 눈썹 앞머리를 꿈틀거리며 보고 있는 학주였고 

그의 눈동자가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남자, 왜 자꾸 훑어보는 거야? 

우린 학주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아래로 내려가있던 학주의 눈동자가 다시 제자리를 찾으며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누군줄 아냐?" 







대충 이 학교 학생주임이라는 건 알겠다만 그래도 오늘 처음 온 우리가 이 사람을 알리가 없다. 

신이와 나는 일제히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러자 학주가 우리에게 또 다시 질문을 내던졌다. 







"근데, 첨보는 녀석들인것 같은데 몇반 놈들이냐?" 







그것 또한 우리가 알턱이 없다. 

나보다 신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전학왔는데?" 



"뭐? 다시 말해봐." 







재대답을 요구하는 학주였다. 

아무래도 말이 짧아서 그러는 가 보다. 

신이는 옆에 있던 나를 힐끔 보더니 학주에게 말했다. 







"오늘 전학왔다고..요." 







말끝이 흐려졌다. 

그와 동시에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신이의 머리를 힘껏 내리치는 학주였다. 


탁! 







"태도불량!복장불량!싸가지불량!" 







넥타이와 단추 하나를 풀어헤친 신이의 교복남방을 지휘봉으로 세번 찌르며 학주가 말했다. 

순간 그 모습이 왜 삶은 감자를 젓가락으로 찌르는 것처럼 보였을까? 

난 키득키득 입을 막고 웃음을 토해냈다. 

그런데 마냥 그렇게 신이의 눈총을 받으며 웃을 처지만은 아니였던 것이다. 

왜냐고? 

그 다음 타겟은 나였기때문이다.-_- 







"새끼야, 넌 왜 웃어?!" 







탁! 


신이때와 마찬가지로 내 머리를 내리치는 학주였다. 

그에 자존심이 상한 난 학주를 노려보았고 지휘봉으로 내 귀걸이를 살짝 치며 학주가 말했다. 







"전에 학교는 어땠는 지 모르겠지만 우리 학교는 절대 안된다. 그리고." 







다음은 내 치마였다. 







"커피배달 왔냐? 당장 한 단 내려입어! 

오늘은 첫날이라서 봐주는 거지만 내일부턴 어림도 없을 줄 알어! 알았어? 몰랐어?!" 







봐준다니 참으로 고마워해야 할 노릇이었지만 신이나 나나 자존심만 먹고 사는 동물이었기에 

순순히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탁!탁! 







"이것들이 왜 대답이 없어?!" 







각자 한 대씩 더 쥐어박히고 말았던 것이다. 

얼마나 아프던지.. 지휘봉이 아니라 무슨 파리채 손잡이로 맞는 줄 알았다. 

어쨋든 옛말에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우리 두 사람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였다. 







"네.." 



"어험!! 들어가봐!" 







그런 우리를 동그란 안경알 너머로 바라보며 학주가 말했다. 

그제서야 교문통과를 허락받은 우리는 단추를 채우고 치맛단을 내리며 학교현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것도 학주의 눈치를 받아가면서 말이다. 







"앞으로 또 피곤하게 생겼군." 



"그러게 말이야." 







전자는 신이고 후자가 나였다. 

그렇게 신이와 나의 투덜거림은 교무실에 들어섰을 때야 비로소 끝이 났다. 









★★★ 









"빈 자리도 없는데 굳이 우리 반에 집어넣다니 이해가 안되는 구만." 







출석부를 오른 팔에 낀 남선생 하나가 비맞은 중처럼 혼잣말씩으로 중얼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그 비맞은 중 뒤를 우리가 따랐다. 

S고의 경우처럼 교장에게 미리 사주하여 손을 써놓았던 민규와 태기. 

그랬다 신유인이 3학년 10반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낸 그들은 교장에게 우리 두 사람을 

10반으로 넣어달라고 말해놓았던 것이다. 

그랬기에 지금 우리 앞에 걸어가고 있는 저 선생이 저런 말을 하는 것이고 말이다. 



드르륵. 많은 계단을 오른 끝에 우리는 교실 앞까지 도착하였고 담임선생이 앞문을 열었다. 







"들어와라." 







우린 담임의 말에 따라 교실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S고만큼은 아니지만 반아이들의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조용! 오늘 우리 반에 두 사람이 새로 전학을 왔다. 자, 새신 너부터 자기소개 한번 해봐라." 







신이는 담임의 말에 목을 가다듬는 듯 했다. 

그리고는 반아이들을 훑어보며 소개를 시작한다. 







"내 이름은 새-신이고, S고에서 왔다." 







우선 여기까지다. 

신이의 단 두마디에 반아이들은 심하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두들 신이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난 그런 녀석들을 둘러보았고 거기서 1분단 넷째줄(다섯째 줄까지 있었음.)에 앉아있는 

놈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비록 엎드려 있었지만 난 저 뒷통수를 한 눈에 알아봤다. 

누리끼리한(노르스름한) 저 뒷통수를 말이다. 


신이의 자기소개는 계속 이어졌다. 주욱- 







"왠만한 놈들은 내가 누구인줄은 잘 알고 있을거다. 

그러니깐 긴 말할거 없이 알아서들 행동해라." 







따악! 


신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서 있던 담임의 손바닥이 나를 스쳐지나 

신이의 뒷통수에 내려꽂혔다. 

그에 나도 놀라고 신이도 놀라고 반아이들도 놀란것 같았다. 







"그래! 나도 너 잘 안다. 그럼 나도 알아서 행동해야 겠구나?" 







이 선생, 이해가 정말 빠르다. 

아니 말에 일리가 있다. 


난 신이를 보았다. 

담임을 힘껏 노려보는 신이의 눈동자는 마치 살타사우루스(초식공룡)를 바라보는 

티라노사우루스(거대한 육식공룡)의 매서운 눈빛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어른을 이길수 있다고 하더라도 선생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다음 개소리가 인사 한번 해봐라." 







담임의 말처럼 다음은 내 차례였다. 

반아이들은 담임의 말에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분명하다. 이것들은 내가 이름을 말하자마자 껄껄 웃어댈것이다. 

난 그 점을 유념하며 내 소개를 시작했다. 







"만나서 반가워. 난 연개,(쉼표중요.)소리라고 해. 친하게 지내자~!" 







아이들은 내 작전에 말려든것 같았다. 

모두들 내 이름이 소리라고 알아들었을 터. 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때 대범하게 질문을 휙- 던져오는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질문! 너희들 사귀는 사이니?" 







신이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앞을 보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여자아이에게 대답을 해주었다. 







"미쳤냐?!" 

"웩-!" 







위가 신이였고 아래가 나였다.-_- 

여자아이의 독점 취재(?)는 계속 되었다. 







"그럼 왜 같이 전학오는 거야? 같이 사니??" 



"손보람! 궁금한게 뭐가 그렇게 많아?! 질문은 됐고! 너희들을 위해서 손수 창고에서 책상을 가져왔다. 

저기 빈 자리에 앉도록 해. 그만 들어가봐." 







담임이 2분단 맨 끝자리를 30cm자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섯번째 줄까지 있는 네 분단 중 유일하게 여섯번째 줄이 있는 2분단이었다.) 

한마디로 신이와 난 H고에서도 짝이라는 뜻이다. 

왜일까? 신이와 짝이라는 것이 왠지 싫지만은 않았다. 

난 아직까지도 담임을 노려보고 서 있는 신이를 끌고서 빈 자리로 걸어갔다. 







"영감탱, 졸라 짜증나지 않냐?" 







조회를 막 시작한 담임을 노려보며 신이가 나에게 말했다. 

그에 난 억지로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와중에도 신이의 "담임씹기"는 계속 이어졌다. 

난 엎드려 있는 신유인을 보았다. 

아니 그의 등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담임의 외침도 들려왔다. 







"신유인! 이 새끼야, 넌 아침부터 또 자냐?!" 







담임의 말에 부시시한 머리칼을 흐트려 대며 일어나는 신유인. 

머리가 바닥 쓴 빗자루마냥 더 부시시해졌다. 







"뭐? 신유인?" 







담임씹기에 열중이던 신이도 담임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을 들은 모양인지 

고개를 들고 신유인을 보았다. 

순간 우리 두 사람의 눈빛은 복사한것 마냥 똑같았으리라. 

그때만큼은 이 3학년 10반 교실안에는 신유인과 새신, 그리고 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머리칼을 흐트려대며 하품을 하던 신유인은 우리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건지 뒤를 돌아보았고 

그에 우리는 잽싸게 고개를 숙여 앞에 앉은 아이들의 등뒤로 숨어버렸다. 







"우리의 정체를 눈치챈것일까?" 







심각하게 내가 물었다. 







"병신아, 알리가 있냐?" 







하긴.. 신이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난 전학 오기 전부터 어떻게 하면 놈과 가까워질 수 있을까하고 고민을 해보았다. 

정말 많이 고민을 하고 또 해봤지만 역시 그 방법밖엔 없는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미인계로 저놈을 꼬실거야." 







그렇다. 내가 생각해낸건 바로 미인계였다. 

내 이 화려한 외모로 놈을 꼬시리라. 

하지만 신이의 생각은 달랐는 지 눈살을 찌푸리며 나에게 말했다. 







"웃기시네. 저놈이 언간히도 너한테 넘어오겠다. 

사내자식은 자고로 이게 최고여야 하는 거야." 







주먹을 쥐어보이는 신이. 싸움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주먹이 쎈 자가 곧 대한민국을 통일시킨다. 들어는 봤냐?" 







이 자식이 또 날 무시하네? 

신이의 발언에 기분이 조금 상했던 난 두 눈을 크게 뜨고서 대답을 했다. 







"당연하지! 천번도 넘게 들었다!" 







사실 뻥이였다. 

그리고 그것을 신이도 알고 있는 듯 했다. 







"공갈까네. 이거 내가 방금 지은 건데." 







한 방 먹었다. 

잠시후 쉬는 시간을 알리는 멜로디가 교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고 

담임이 나가자 신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보며 씩- 웃어보인다. 







"내기 할까? 누가 먼저 놈을 꼬시는 지." 







매우 자신있어 보이는 얼굴이다. 

자식, 믿음직스러운데? 

난 신유인에게로 걸어가고 있는 신이를 보았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내기에서 내가 져도 좋으니 제발 성공만 하라고.. 


꿀꺽. 드디어 신유인이 앉아있는 1분단 넷째줄에 신이가 멈춰섰다. 

자신의 등장에도 고개 한번 들지않는 신유인의 반응에 기분이 상했는 지 책상다리를 살짝 차버리를 신이였다. 

그에 고개를 들어 신이를 보는 신유인이다. 

신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젠 내가 누군지 알겠지?" 







왠지 호프집에서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아무 말이 없는 신유인이였고 신이는 참는 것 같았다. 

손을 내밀며 신이가 말했다. 







"만나서." 







쿠당탕! 내가 보기엔 악수를 청하려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신유인의 주변에 앉아있던 남자놈들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는 게 아닌가. 

그 소리에 신이가 놀라 흠칫거렸고 2분단 끝줄에서 나도 놀라 괜시리 몸을 움찔거렸다. 

주먹을 쥐고서 신유인의 주변을 감싸며 신이를 경계하는 녀석들. 

내 살다살다 별 웃기는 광경을 다 보는 것 같다. 

신이또한 기가 막혔는 지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띠며 녀석들에게 말했다. 







"새끼들 오버하기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버리는 신이였다. 

녀석의 얼굴은 왠지 화를 많이 참는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이 난 대견스러웠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하, 꼴 조오타! 꼬맹아, 이제부터 이 누님이 하는 걸 잘 지켜보드라고." 







비웃어줄 뿐이였다. 

난 신이가 노려보던 말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신유인에게 가기전 치맛단을 한 단 올리는 것 또한 잊질 않았다. 







"니가 성공하면 내가 너한테 형님이라고 부른다." 







비웃음 섞인 말투로 신이가 말했다. 

좋았어! 방금 그 말 꼭 기억해둘 것이야. 

두고봐라. 신이 넌 나한테 형님이라고 부르게 될테니깐. 

난 신이에게 가소롭다는 미소를 보여준뒤 신유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도착. 난 신유인만 볼 수 있을 정도로 치마를 살짝 올려보였다. 

그러자 예상대로 내 다리를 보는 녀석이였고 곧 놈의 시선이 내 다리를 따라 내 얼굴에 꽂혀버렸다. 

난 상큼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립글로스 덕에 반짝이는 입술을 떼어내며 신유인에게 말했다. 







"안녕? 이름이 뭐니?" 







내 물음에 대답은 하질 않고 살짝 웃어보이는 녀석. 

난 그 미소가 나한테 반했다는 뜻인줄 알았다. 


하지만. 쿠당탕!! 이번 역시 신이때와 마찬가지로 책상 및 의자가 뒤엎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야!! 너 지금 우리 유인이한테 뭔짓거리야?!!" 



"저 개소리같은 게!!" 







여자들의 앙칼진 고함소리가 이어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녀들은 왠지 신유인의 추종자처럼 보였다. 

그런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못 알아들었을 줄 알았는데.. 


나를 무섭게 째려보는 여인네들.. 

남자의 주먹보다 여자의 손톱이 더 무섭다고(누가?) 결국 난 꼬리 아홉개를 내리곤 

제자리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하아-" 







그리고 내 한숨소리와 함께 신이와 내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온 한마디. 







"무서운 놈." 






♡18 







"여기로 패스해! 패스!!" 



"야! 막어!!" 







점심시간, 축구를 하고 있다. 

신유인이 11반 애들과 축구를 하고 있다. 


우리는 축구를 보고 있다. 







"새끼들 저것도 공차기라고." 







10분째 나무아래 벤치에 앉아 축구경기를 보며 꽁시렁거리기에 여념이 없는 새신. 

난 긴머리를 풀었다 묶었다하며 신이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우리 애들 같았으면 벌써 두 골은 넣었다!" 



"왜? 너도 하고 싶어?" 







결국 머리를 묶기로 결정을 내린 난 검은 고무줄로 머리를 질끈 짜매며 신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팔딱 뛰는 신이녀석이다. 







"누가? 누가 그래?!" 







그냥 못들은 척 했다. 


소파, 방정환이 보우하사 어린이날도 곧 얼마 남지 않은 5월초라서 그런지 낮은 덥기만 하다. 

난 무릎 옆에 놓아두었던 생수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하나뿐인 공을 차지하기위해 

운동장 이 곳, 저 곳을 뛰어다니는 신유인의 모습은 프로 축구선수 못지않게 열정적이어 보였다. 

드디어 공을 차지한 신유인. 

몸을 틀어 상대편 골대를 향해 전력질주를 한다. 

여기저기서 달려드는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상대편 골대와 3m정도의 거리를 두었을 때 즈음. 

슛-! 

그리고 







"이얏호!" 



"으아아아!!" 







10반 남자들의 환호성과 함께 골인! 

신유인이 첫 골을 터뜨린것이다. 

난 벤치에 앉아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하지만 신이에게는 그게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였나 보다. 







"저 정도야, 뭐." 







자신에겐 식은 죽먹기라는 뜻일까? 

신이는 시선을 학교 본관쪽으로 돌려버렸다. 

축구공을 손에 들고서 상대편 골대에 연신 집어던지기를 반복하는 희한한 골세레모니를 펼치고 있는 신유인. 

그에 "삐익-",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이어졌다. 

공이 손에 닿였으므로 반칙. 

하지만 같은 또래인 심판녀석도 신유인이 무섭게 째려보자 호루라기를 입에서 빼버릴 수 밖에 없었다. 

상대를 제압하는 저 눈빛. OK. 마음에 들었다. 







"니가 오늘 전학왔다던 S고, 새신이냐?"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언제 왔는 지 남자아이들이 신이 앞을 둘러싸고 있었다. 







"잠깐 우리 좀 보실까?" 



"보고 있어." 







한 녀석의 시건방진 말에 신이는 건성으로 대답하였다. 

아니 어쩌면 개그였을 지도 모른다. 







"이자식이 장난인 줄 아나. 따라오라고." 







또 다른 녀석이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듣고 순순히 따라갈 신이가 아니였다. 







"귀찮으니깐, 여기서 말해." 







신이의 말에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미간을 흐트리는 남자아이들. 

그 중 뒷통수가 짱구인 남자가 신이 옆에 앉아있던 나를 보더니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곧 시선은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아, 니가 새신과 같이 왔다던 그 애구나? 소문엔 여친이라던데?" 







엥? 이 짱구머리가 지금 뭐라고 그러는 거래? 

내가 신이 여자친구라고? 그렇게 소문이 났다고? 

난 신이를 보았다. 

신이또한 나를 보고 있어서 우리 둘은 눈이 마주쳐야만 했다. 

그리고 곧 우리 둘은 눈살을 찡그렸고. 







"미쳤냐?!" 







동시에 외쳤다. 

입은 그렇게 움직여버렸지만 머리에 열이 채이지는 않았다. 

물론, 기분도 나쁘지는 않았다. 

무슨 뜻이냐고? 대답은 "글쎄."다. 

나도 잘 모르겠다.(그런데 신이는 왠지 그 소문에 기분 나빠하는 눈치다.) 

남자아이들은 치를 떠는 우리의 반응이 나름대로 재밌었던 모양인지 

짱구머리를 내세워 나를 건들이기 시작했다. 

소위말해 찝적? 그런거 말이다. 







"아니야? 그거 잘됐네. 너 이름이 뭐냐? 나랑 잘해볼 생각없어?" 







내 머릿자락을 잡으며 짱구머리가 말했다. 

난 개인적으로 못말리는 짱구는 노(NO)다. 

짱구머리의 손을 쳐내며 내가 말했다. 







"하지마." 







여자다운 말투였다. 

내가 아무리 조직의 보스라고 해도 가끔은 남자앞에서 여자이고 싶다. 

아니 어쩌면 내 속마음은 신이가 막아주기를 바란것일지도 모른다. 

여자란 알 수 없는 종족이니까. 

그리고 이런 내 바람이 통하였는 지(통하였느냐?) 신이가 벤치에서 일어서며 놈들에게 이야기했다. 







"쏠린다. 딴데 가서 얘기하자." 







뭐 기분과 방식은 내가 생각했던 거랑은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신이가 날 보호해준 것은 틀림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피식거리며 날 지나쳐 학교 본관 옆 모퉁이로 걸어가는 신이를 남자들이 따라갔다. 

난 그들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저 정도 숫자쯤이야, 신이 혼자서도 충분할테니깐 내가 굳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벤치에서 150m 떨어진 본관 옆 모퉁이 앞에 다다른 신이와 남자들이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체 남자들을 보고 서 있는 신이녀석. 

남자들이 번갈아가며 뭐라고 얘기하는 듯 했다. 

그렇게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조금 오버하여) 신이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으니 

어느새 축구경기가 전반을 막 끝내고 있었다. 

바닥에 침을 찍 뱉는 짱구머리였다. 







"물 좀 마실게." 







내 손에 들려있던 생수병을 누군가가 빼앗았다. 

그에 난 고개를 돌렸고 그러면 곧 내 생수를 들이키며 내 옆에 앉는 신유인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운동으로 인해 땀에 흠뻑 젖은 교복남방이 섹시하게 보였다. 

그리고 먼저 접근하는 신유인을 보자 웬 떡인가 싶었다. 

반정도 남아있던 물을 1/4가량만 남겨두고 다 마셔버리는 녀석이다. 







"하아. 고마워. 신경써줘서." 







나에게 생수병을 건낸후 목에 걸려있던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신유인이 한말이었다. 

누가 이녀석의 말을 들으면 내가 생수병을 사들고 녀석을 일부러 기다리기라도 했는 줄 알겠다. 

난 신이가 있는 곳을 보았다. 

신이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툭 쳐보이는 한 녀석. 

신이는 가소롭다는 듯이 살짝 웃고 있었다. 

난 다시 신유인을 보았다. 

머리칼에 맺혀있는 땀방울이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녀석 참 샤프하게 생긴것 같다. 

난 신유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늘은 바람이 하나도 안부네." 







하늘을 올려다보는 신유인이었다. 

신이와 신유인. 둘은 정말 환상의 콤비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탐이 난다. 

저... 






얼굴이. 


어느새 난 신유인의 외모에 빠져들어 신이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니, 아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근데, 어째 낯이 익다?" 







하늘에서 내 얼굴로 시선을 옮긴 신유인이 던진 질문이었다. 

아마 그때 호프집에서의 일이 떠오른 모양인가 보다. 

하지만 그때의 난 남장을 하고 있었기에 눈치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연예인이랑 닮아서 그런걸거야." 







난 예쁘게 웃어보였다. 

그러자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녀석이었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에게 물었다. 







"누구?" 



"송혜교." 



"흐음." 







미심쩍어하는 얼굴, 말도 안된다는 얼굴이다. 





"어떤 이는 전지현을 닮았다고도 하더라구. 난 잘 모르겠는데." 







난 머리를 풀어보이며 이야기했다. 

내 긴머리칼이 찰랑거리며 허리에 길게 늘어졌을 것이라. 

난 두 눈을 치켜 떠보였다. 

그렇게 이쁜 척을 했건만 녀석이 한다는 소리가. 







"나도 잘 모르겠다." 






이러는 것이다. 제기랄. 

난 다시 머리를 억세게 묶어버렸다. 

그렇게 내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머리를 묶고 있는데 녀석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내 어깨너머를.. 

신유인이 말했다. 







"저거 니친구 아니냐?" 







내 친구? 

순간 신유인의 말과 함께 머리위로 구름상자가 나타나며 누군가의 얼굴이 상자안에 드러났다. 

신이를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과 동시에 신유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멋진데?" 







난 벤치에서 일어섰다. 





♡19 








뒤돌아 본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학생주임(학주)의 뒷모습이었다. 

그의 살색을 띠는 대머리는 강렬한 햇빛에 반사되어 내 시력에 자극을 주었고 

그의 앞엔 죄지은 장발장마냥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아이들이 있었다. 

신이를 비롯한 짱구머리 패거리들. 

그들은 모두 얼굴에 상처 하나씩을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신이를 제외하곤 말이다. 

이제 상황을 알것 같다. 

신이는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짱구머리 패거리들을 살짝 손봐주었고 

그런 과정에서 재수없게도 그만 학생주임에게 걸리고 만것이다. 

반짝이는 대머리 학생주임은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녀석들의 머리를 차례대로 때려주었다. 

탁,탁,탁. 

마지막으로 신이는 탁탁, 두 대를 때린다. 

그에 두 눈을 번쩍 뜨고 항의하는 신이였고 곧 그 댓가로 한 대를 더 맞게 되었다. 

쯔쯧, 불쌍한 인간같으니.. 

난 고개를 돌려 운동장을 보았다. 

곧 후반전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가야겠네." 







벤치에서 일어서며 신유인이 말했다. 

"그래, 열심히 해."하고 내가 말하기도 전에 운동장쪽으로 달려가버리는 신유인이다. 

새침한 녀석. 


난 생수병을 들어 조금 남아있던 물을 몽땅 마신후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빈 생수병 주둥이를 잡고 본관쪽으로 걸어갔다. 

가는 도중 쓰레기통이 있길래 생수병을 버렸고 드디어 본관 옆 모퉁이 앞에서 벌을 서고 있는 

신이 앞에 다다랐다. 

난 곧 신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학생주임이 있었으므로 그냥 외면해버렸다. 

그렇게 신이녀석을 그냥 지나치려는데. 







"야! 개소리!!" 







내 뒷모습을 향해 신이가 소리친다. 

그에 뜨끔한 나는 제자리에 우뚝 서 버리고 서서히 뒤를 돌아보려는데 

학생주임의 우렁찬 고함소리가 내 목을 붙잡아버린 것이다. 







"너 이노무 자식! 방금 뭐라고 그랬어?! 뭐? 개소리?! 그게 지금 선생한테 할 소리야?!" 



"아악, 잡아당기지 마요!" 







녀석의 말로 견주어보아 머리카락아니면 볼을 꼬집히는 것 같았다.(과연..?) 

아마 저 학생주임은 웃기는 짜장같은 내 이름을 아직 모르는 가 보다. 

어쨋든 저런 일엔 휘말리지 않는 게 되도록이면 좋다는 걸 무식한 나도 알고 있었기에 

난 계속 모르는 체 할 수 밖에 없었다. 


뭐, 신이한테는 꽤 미안한 일이지만 잔소리 몇 번으로 떼우면 되겠지. 




교실. 5교시가 시작되기 5분전 운동장과 다른 반에서 놀던 아이들이 하나,둘 제 교실을 찾아 들어갔다. 







"유인아, 너 너무 멋있었어~" 



"자, 물마셔." 







2:0으로 11반에게 승리한 10반 남자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오자 

몇몇 여자아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들에게로 달려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유인에게 말이다. 

축구를 하고 들어오는 신유인의 이마를 닦아주는 여자들, 

그리고 물을 주는 여자들. 그녀들의 얼굴엔 웃음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신유인은 마치 여자들의 그런 행동이 당연하다는 듯이 물을 받아 마시며 자기자리에 앉았다. 


신이는 5교시가 곧 시작될 참인데도 들어오지 않았다. 

많이 혼나고 있는 건가? 

거, 학생주임도 참 대머리, 아니 까까머리 중마냥 자비를 베풀 것이지. 

지독한 사람이다. 




띠리리리♬ 

드디어 5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고 그제서야 뒷문이 열리며 

내 영원한 짝, 신이가 들어왔다. 

입가엔 밴드하나를 비스듬히 붙이고 말이다. 

주변에 앉아있는 아이들의 시선속에서 의자를 빼내어 내 옆에 앉는 신이녀석이었다. 







"지금 와?" 







낭창스럽게 내가 물었다. 

그러자 나를 째려보는 신이다. 







"보면 모르냐?" 







녀석, 많이 삐진 모양이다. 

어쨋건 누군가가 죄를 지었다면 그건 나였기에 난 신이에게서 흑판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난 눈동자를 옆으로 돌려 신이를 보았다. 

신이 얼굴에 붙어있는 살색 반창고가 유난히 눈에 띠었다. 







"밴드, 누가 붙여줬니?" 







그냥 한번 물어보았다. 

신이는 밴드를 손으로 한번 쓸어만지더니. 







"양호선생 이쁘던데?" 







라고 말했다. 

그단새 양호실에 다녀왔나보다. 

그런데 양호선생이 예쁘다고? 얼마나 예쁘길래 저녀석이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래도 설마 나보다 예쁠까?(착각은 온 국민의 자유.) 







"양호실은 어디에 있어?" 







그래도 궁금하기는 했다. 







"니가 지금 무슨 빤스를 입었는 지 대충 감은 잡힌다." 







엥? 이건 또 무슨 소리? 

내 질문에 대한 답은 하지 않고 엉뚱한 소릴하는 신이다. 

나는 신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오늘 집에서 교복을 입을때 훔쳐본건가..? 

신이가 곧 내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었다. 







"치사빤스." 







아무래도 훔쳐보지는 않았는 것 같다. 

난 신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고 있었기에 머쓱히 웃어보였다. 

그런 나를 신이는 좋게 보지는 않았다. 







"혼자 살면 살 맛이 나냐?" 



"내가 뭘.."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않았다. 







"말을 말자." 







휴. 다행이다. 


수업이 시작되고 일어선생의 연설은 계속 이어졌다. 

왜놈들의 언어따윈 관심없다. 

하지만 반 아이들은 우리나라의 적, 왜놈들의 언어일지라도 입시를 위해서라며 

두 눈에 쌍라이트를 켜고 선생의 말에 집중을 했다. 

신유인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까 신씨랑 무슨 얘기했냐?" 







앞 사람의 등뒤에 얼굴을 숨기며 신이가 물었다. 

신이는 그런 와중에도 신유인과 내가 같이 있는 걸 본 모양이다. 







"나보고 전지현(본명:왕지현, 여성 패션지인 에꼴모델로 데뷔.) 닮았데." 



"저새끼 미친거 아니냐?" 







신이는 신유인의 뒷통수를 정말 미친놈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내 어디가 전지현보다 못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된다. 




다음날, 등교길. 

신이와 난 지금 학교 가는 길에 위치해있는 전봇대 뒤에 숨어있다. 

대충 짐작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는 신유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민규의 정보망에 의하면 신유인은 친구들과 함께 이 길을 지나갈 것이다. 







"저기 온다!" 







신이가 말했다. 

난 전봇대 뒤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밀어보았다. 

정말 신유인이 오고 있었다. 







"잘 할 수 있겠냐? 그냥 나한테 맡기지 그래?" 



"걱정마셔. 난 자신있으니깐. 우후후." 







난 말 그대로 자신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신이는 꽤 못미더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쳇, 그런 표정도 몇 분후면 짓지 못할거다. 

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아침에 향수까지 뿌려 준비한 분홍 꽃무늬 손수건을 주머니에서 꺼내들었다. 







"내가 하는 거 잘 봐." 







난 신이에게 그렇게 말하곤 전봇대 뒤에서 나와 신유인이 오고 있는 곳으로 당당하게 걸어나갔다. 

우선 턱을 들고 가슴을 쭉- 펴고 눈을 살짝 치켜 뜨고.. 

머리칼을 살짝 귀 뒤로 넘겼다. 

그리고 신유인과의 거리가 좁혀졌을때 



툭. 




신유인의 어깨와 내 어깨가 부딪혔다. 

그에 난 털퍼덕, 바닥에 쓰러졌다. 

물론, 나의 의도된 행동이었다. 







"어머." 







이제 신유인이 날 일으켜 줄것이리라. 

난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 계획과는 달리 신유인은 매정하게 날 지나쳐 가버렸고 난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나처럼 어여쁜 소녀가 넘어졌는데, 그것도 그냥 멍청하게 넘어진 것도 아니고 

자신과 부딪혀서 넘어진건데! 못본척 그냥 가버리다니! 

난 지금과 같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준비해두었던 2차 방법을 쓰기로 했다. 

나의 손목 스냅을 이용하여 들고 있던 손수건을 휙! 신유인의 앞 발치에 던져버렸다. 

내 계획대로라면 신유인은 걸음을 멈추고 손수건을 주워서 나에게 돌려준다. 

난 고개를 들지않고 눈알만 돌려 신유인의 발을 바라보았다. 

신유인과 손수건과의 거리 한 걸음 반, 이제 한 걸음. 





팍. 





놈은 내 손수건을 무참히 밟아버렸다. 


맙소사! 







"하하하. 그러게 내가 뭐랬냐? 그냥 나한테 맡기랬잖아." 







이를 전봇대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신이가 튀어나와 호탕하게 웃어재꼈다. 

"하하하" 웃고 "키키킥" 또 웃고 "푸하하!!" 또또 웃었다. 


빠직. 나, 연개소리의 자존심에 큼지막한 스크라치(Scratch)가 생겼다. 







"야야, 그만하고 일어나라. 꼴 사납다." 







신이가 오른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나, 연개소리는 그 손을 뿌리쳐버리며 바닥에서 벌떡 일어섰고 

마그마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신유인에게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야! 너!!" 







투명 메니큐어를 발라 윤기나는 손톱으로 신유인을 찌르듯 가리켰다. 

내 목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신유인을 비롯해 그의 친구들도 걸음을 멈추고선 뒤를 돌아보았고 

신유인이 눈을 깜빡거리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불렀냐는 듯 제스처를 해보였다. 

무척이나 열이 받았던 내가 말을 이었다. 







"한판 붙어!" 







다들 내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너랑?" 







신유인은 자신을 가리키고 있던 검지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내 말을 재확인하려 했다. 

내 눈엔 놈이 쫀것처럼 보였다.(우리 주인공, 안과라도 가봐야 할듯..) 

내 눈 오른 쪽, 왼 쪽 1.5, 1.5다.(에이!설마~) 


난 크고 우렁차게 신유인에게 말했다. 







"아니, 얘랑!" 







그것도 손가락으로 신이를 찌르면서.. 





♡20 






검은 머리칼, 잘 다려진 흰 교복남방, 

깔끔하게 밑단을 줄인 교복바지, 하얗지도 검지도 않은 황색의 피부, 

쌍꺼풀 없는 눈, 하지만 그게 매력인 남자. 

그런 신이를 모두들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예상치 못한 내 말에 신이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내 귀 가까이로 다가와 자그맣게 따져드는 신이다. 







"왜 나한테 떠넘기고 난리냐?" 



"난리부린적 없어." 







시선은 신유인을 향한체 작은 목소리로 신이에게 대꾸했다. 







"니가 직접 싸우지, 왜 날 시키냐고." 







여전히 목소리를 낮추며 따져드는 신이였다. 

그에 난 내 뜻을 정확하게 밝혔다. 







"보스는 원래 나중에 나서는 거야." 



"얼씨구." 







기가 막히다는 얼굴이다. 

신이는 그런 얼굴로 날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포기한듯 신유인을 보았다. 

한판 붙어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두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그건 냄비를 열어봐야 알 것이다.(뚜껑아닌감?) 







"그래! 이 기회에 나랑 한 판 떠보자!" 







신이가 외쳤다. 

신유인은 신이의 그런 발언에 입술을 올리며 소리없이 웃어보였다. 

꽤 자신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신이의 기세또한 만만치 않았다. 

신이가 주먹을 풀기 시작하자 신유인이 입을 열었다. 







"항복." 







응? 항복? 

신이의 두 걸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난 알 수 없는 신유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신이도 나와 마찬가지로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우리 둘의 어벙벙한 얼굴을 보며 신유인이 말했다. 







"내가 졌다구." 







두 손을 조금 들어올리며 살짝 눈웃음 짓는 신유인이다. 

녀석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곤 학교를 향해 친구들과 함께 발길을 돌렸다. 







"너도 들었지?" 



"응?" 







신이가 물었고 난 대답대신 반문을 했다. 

신이는 가슴을 쫙 펴고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아하하! 나한테 쬡도 안되는 새끼가 어디서 개겨? 푸하하." 







난 신이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멀어져 가는 신유인의 뒷모습을 보았고 

어느새 신이는 웃음을 멈추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 

신이의 입술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이겼는데, 왜 기분이 드럽냐?" 







자신의 머리칼을 흐트리며 신이는 걸어갔다. 

신유인. 

다혈질도 아닌, 그렇다고 단순한 것도 아닌 요리하기 힘든 성격의 소유자. 

도대체 저녀석에게 어떻게 해야만 친해질 수가 있을까? 

정말 해답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힘든 도전, 그 대상은 신유인이었다. 



다음 날에도 우리의 도전은 계속되었다. 

오늘은 어제 그 전봇대가 아닌 학교 정문 옆 용달트럭 뒤에 숨어있었다. 







"이번엔 꼭 넘어올거야." 







그렇다. 오늘은 신이에게 맡기기로 한것이다. 

난 자신을 믿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위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몇분 후 모퉁이 뒤에서 어제 보았던 남자들과 함께 신유인이 걸어왔다. 

여전히 가방없이 등교하는 그였다. 

신이는 용달 뒤에서 나갈 태세를 갖추었다. 

무릎을 펴고 벌떡 일어나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어 입에 무는 신이다. 

"사내놈들은 이 담배 하나로 친해지기도 하는 거야." 

라고 어젯밤 신이가 말했었다. 

용달 뒤에서 나와 등교길의 아이들과 합류하는 새신. 

신이는 그렇게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신유인과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걷고 담배를 입에 물고 당당하게 나아갔다. 

드디어 신유인과 마주친 신이는 신유인의 앞을 막은 후 목소리를 깔기시작했다. 

그들이 지금 서 있는 곳은 학교 정문 앞이다. 







"불 좀 빌려주라?" 







신이가 거침없이 한 마디 내뱉었다. 

그에 눈을 내리깔며 신이의 담배를 본 후 다시 신이의 눈을 마주하는 신유인이었고 

그는 무표정이었다. 







"불 없냐?" 







신이는 신유인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자 다시 한번 물었고 

신유인은 이번엔 아예 신이를 보지도 않았다. 

신이의 뒤를 보고 있는 신유인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나도 보았다. 

신이의 뒷통수를 가린 학생주임의 벌거벗은 머리통을 말이다. 


으악. 이를 어째. 신이녀석 걸려도 단단히 걸렸다. 







"임마, 불 없냐고!" 



"라이터말이냐?" 







툭. 굵직하고 허스키한 어른의 목소리에 신이는 물고 있던 담배를 그만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신이. 

곧 신이의 눈동자에 학생주임의 얼굴이 비쳤다. 

화들짝 놀라는 신이와 피식 비웃음 지으며 교문으로 걸어가는 신유인. 

결국 이번에도 실패로 돌아가고 만것이다. 







"새신, 아주 대담하구나. 당장 따라와!" 







하늘색 반팔 셔츠가 돋보이는 학생주임은 신이의 오른쪽 귀를 잡아당겼다. 







"악! 놓고 말해요, 쌤!" 







교문으로 처절하게 끌려가는 신이다. 

난 용달트럭 뒤에서 나와 그런 신이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하아."하고 갑갑함에 한숨을 내쉬고 하늘을 우러러 봤다. 


아버지, 저 좀 도와주세요. 

제가 지금 저 좋자고 이러는 게 아니잖습니까? 

다 아버지를 위해서라구요. 휘유~. 






개소리네 집. 

그날 밤 우리는 거실에 모여 앉아 긴급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우리라하면 나, 새신, 이민규를 뜻하는 거다. 

태기는 저녁준비를 위해 장을 보러 갔다. 







"어려워, 어려워도 너무 어려워." 







머리를 쥐어싸며 내가 말했다. 

도대체 어찌하면 놈과 친해질 수가 있을까? 

정말 머릿속이 깜깜하기만 하다. 







"형님, 너무 고민하시지만 마시고 새신에게 했던 것처럼만 하십시요." 







민규는 너무 쉽게 말하는 것 같다. 







"신유인은 신이처럼 단순하지가 않아서 말이야." 



"뭐야?" 







내 말에 발끈하는 신이다. 

난 복숭아뼈만 긁었다. 







"그럼 형님, 이 방법은 어떻습니까?" 



"어떤 방법?" 







난 두 눈을 크게 뜨고 민규의 얼굴에 집중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tv에서 처럼 신유인을 위기의 순간에서 구해내는 겁니다. 

형님께서 생명의 은인이 되십시요." 







위기의 순간, 생명의 은인. 







"위기의 순간이라고?" 







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했다. 







"녀석은 싸움을 잘 하니깐, 폭력에서 구해내는 건 무의미합니다." 







참 어렵다. 

신이와 나는 서로를 쳐다봤다. 

신이는 도통 모르겠다는 눈빛이다. 

나랑 똑같다. 







"그럼 어쩌지?" 







난 민규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을 잔뜩 기대하며 물어보았다.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허탈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알았다. 

민규도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을 말이다. 



철컥. 그렇게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데 

장에 갔던 태기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에 우리 셋은 태기를 보았고 태기에 이어 집안으로 들어오는 낯선 손님의 등장에 

모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그건 뭐야?" 







흥분상태인 내가 태기에게 물었다. 







"아, 영계가 싸길래 몇 마리 사왔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요. 

제가 도라지 넣고 푹- 꽈 드리겠습니다." 







녀석, 돈이 없어서 인삼대신 도라지를 사왔나보다. 


아, 이게 아니지. 







"누가 그걸 물었어? 니 뒤에 있는 그 똥개는 뭐냔 말이야." 







난 태기의 뒤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개 한 마리를 가리켰다. 

울퉁불퉁, 찌글찌글 정말 못 생긴 개였다. 

태기는 뒤를 돌아보았다. 







"앗, 얘가 얘가 여기까지 따라왔네." 



"따라왔다고?" 







벌떡 일어나 태기의 발등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 찌글이. 







"예, 형님. 닭집 앞에서 본 갠데 여기까기 따라왔네요. 

임마, 빨랑 못 나가?!" 







난 태기의 발에 밀리고 있는 개를 빤히 쳐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정이 안 가게 생겼다. 

개라.. 개라.. 

그렇게 개를 보자 뭔가가 떠오르려고 하는데 

신이가 탁자를 손바닥으로 탁, 내려치며 우리에게 말했다. 







"바로 저거야! 저 불독을 이용하는 거라고!" 







저 개를 이용한다고? 

그때 떠오르려고 했던 무언가가 번쩍하고 생각이 났다. 

아마도 지금 신이가 생각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작전이 동일한 것 같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드디어 날이 밝았다. 







"이번엔 정말 성공예감이야." 



"나도 그래." 







내가 말하고 신이가 확신을 했다. 

어제 그 자리에 주차되어 있는 용달트럭 뒤에 숨어있는 우리 두 사람 앞엔 찌글이 불독이 풀을 뜯고 있다. 

잡초를 뜨어 입에 넣었다가 맛이 이상했는 지 다시 뱉어내는 불독이다. 







"과연 이 개가 우리가 시킨대로 잘 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 되어 불독머리를 쓰다듬으며 신이에게 물었다. 







"불독은 사나워서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해줄거야." 







불독은 개들 중에서 머리가 가장 나쁘다는 것 같던데.. 







"근데, 이거 정말 불독 맞아?" 



"그럼 니 눈엔 이게 진돗개로 보이냐? 생긴걸 봐라. 

코도 납작하잖아." 







신이가 불독이라고 우기는 개는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렇게 개와 함께 10분을 용달 뒤에 있었던것 같다. 

교문 닫을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건지. 

결국 학생주임의 지시아래 교문이 닫혀버리고 

그제서야 느기적 느기적 등교길에 오른 신유인이었던 것이다. 

오늘은 왠일로 혼자였다. 







"왔다!" 







신이와 나는 또 한번 의지를 불태웠다. 

신이는 불독의 푸짐한 엉덩이를 밀어대었다. 

불독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질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 우린 쓰래빠였다. 

신이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주워들어 불독의 항문을 살짝 찔러버렸다. 

그에 "깨갱."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불독이었다. 

그리고 신유인이 불독과 가까워질때쯤 신이와 내가 동시에 외쳤다. 







"물어! 힘껏 물어버려." 



"멍멍아, 물어. 어서 물어라고." 







하지만 역시 불독녀석은 바보같기만 했다. 

우리의 작전과는 달리 신유인이 지나가자 항문에 힘을 주어 대변을 누는 것이 아닌가.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개에게 물려 위험에 처한 신유인을 멋지게 구해내어 생명의 은인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작전이었는데.. 

이렇게 또 물거품이 되버리다니.. 







"젠장!" 







신이가 일어서더니 용달 뒤에서 나갔다. 

그에 나도 그를 따라 용달 뒤에서 빠져나왔고 달리기도 전에 신이가 크게 외쳤다. 

신유인의 등을 향해서. 







"너! 조폭 따까리 될 생각없냐?!" 







그에 신유인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고 그동안 참아왔던 신이의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너무나도 직접적인 신이의 발언. 

난 마른 침을 삼켜야만 했다. 

 






♡21 







"응." 







내가 잘못 들은 것일까? 

그건 분명 신유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단번에 승낙의 의사를 표시하다니 난 놀랄수 밖에 없었다.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입을 쩍 벌리는 신이다. 







"너, 정말 우리 조직에 들어와줄거니?" 







난 감동에 찬 떨리는 목소리로 신유인에게 물었다. 

하나의 희곡같은 이 숨막히는 스토리,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였다. 

어느새 내 눈가엔 눈물이 맺혀있었다. 

아아~ 이 여린 소녀의 마음이여.. 







"내가 거길 왜 들어가?" 







오잉?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신유인의 실망스런 대답에 내 눈물은 볼을 타고 내려가지 못한체 도로 쏙 들어가버렸다. 

신이도 꽤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이다. 







"아깐 좋다며." 







이해할 수 없음에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될 생각없냐며." 







거침없이 말을 술술 내뱉는 녀석이다. 







"그래서 응이라고 말한거야." 







젠장. 좋다 말았다. 

난 기가 막히고 팔짝 뛸 이 상황에 할말을 잃었다. 

물론, 신이도 마찬가지였다. 

불독은 대변을 눈뒤 신유인의 검은 구두에 납작한 코를 대고서 냄새를 맡고 있었다. 







"퍼그네." 







그런 개를 보며 혼장 중얼거리는 신유인이었다. 

그런데 퍼그라고? 신이가 자신있게 외치던 불독이 아니고? 

왠지 애가 사납지가 않고 멍청하다고 했더니만 퍼그였을 줄이야. 







"너네 개야?"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내리쬐는 햇빛때문에 신유인은 눈을 찌푸리며 우리를 보았다. 

찌글이의 납작한 머리를 쓰다듬는 신유인이다. 







"미쳤냐? 그 못생긴 개랑 내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내것도 아니야." 







경악하는 신이와 무책임한 나의 대답이었다. 







"정말? 그럼 내가 가져도 되겠네?" 







그런 우리 둘의 대답에 신유인의 얼굴은 꽤 밝아졌다. 

뭐 똥만 싸는 멍청한 개따윈 아무 쓸모도 없지만. 







"아는 사람 개야." 







태기가 꽤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 섣불리 내줄수는 없었다. 

내 말에 신유인은 아쉬운 듯 찌글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런 신유인을 내려다보았다. 물론, 신이도. 






"뭐 난 니가 조직에 도움이 될거란 생각은 하질않지만 이녀석은 니가 꼭 필요하다니깐. 

다른건 몰라도 이녀석만은 진심이야." 







나보단 지금 신이의 표정이 더 진지해보였다. 

지금 내 심정은 뭐랄까, 프로 레슬러인 골드버그(Willliam Scott Goldberg)를 곁에 둔 그런 든든한 기분이었다. 

찌글이를 만지던 신유인은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재미없어." 







교복 바지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으며 신유인은 담벼락이 가장 낮은 후문쪽으로 걸어나갔다. 

신이는 신유인의 뒷모습을 보며 화를 참는 건지 이를 악물었고 

난 그런 신이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었다. 


그래. 일이 쉽게 풀릴거라곤 애당초 기대도 하지않았다. 

그로부터 며칠동안 신이와 나는 포기하지 않은 체 신유인에게 접근했고 

끊임없이 거절을 당하였다. 

예상대로 힘겨운 상대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집까지 따라가서 어쩔려고?" 







학교가 다른날보다 일찍 파한 토요일, 신유인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가는 나에게 신이가 물었다. 

내가 지금 신유인을 따라가는 이유? 

신유인의 집을 알아내면 혹시나 신유인을 꼬셔낼만한 단서가 있을 지도 모르기때문이다. 

난 이런 대답조차도 하지않은체 신이의 손을 끌어당겼다. 


학교에서 100m 조금 덜 된 곳에 세워져 있던 오토바이 위에 올라타는 신유인이다. 

그에 난 재빨리 택시를 잡았고 가기싫어하는 신이를 먼저 태우곤 뒤이어 뒷좌석에 올라탔다. 

부아앙-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출발하는 신유인의 오토바이. 

난 택시기사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저씨, 저 오토바이 따라가요!" 



"영화촬영하는 거예요?" 







룸밀러에 비친 택시기사의 눈빛은 그 어떤 설레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영화촬영이라니.. 이 아저씨가 지금 농담하나. 







"맞아요! 맞으니깐 촬영에 협조 좀 해주세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농담에는 구라다. 

신이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역시나! 그런데 카메라는 어디에 있죠?" 







출발할 생각은 하지않고 계속 쓸데없는 질문을 해오는 택시기사였다. 







"몰래카메라예요!" 



"OK!! 그럼 출발합니다!" 







다섯살박이 아이같은 천진난만한 웃음을 가진 택시기사는 자동차 기어를 잡아당기더니 

드디어 가속페달(엑셀 레이트)을 밟기 시작했다. 

차선 이곳저곳을 오가며 겁없이 쌩쌩 달리는 신유인과 

몰래카메라 촬영이라 굳게 믿고 신난다고 달리는 택시기사. 

그들의 무서운 질주는 10분동안 계속되었다. 




끼이잉. 


신유인이 어느 골목길 안에서 멈추자 우리가 탄 택시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조용히 멈추어 섰다. 







"여기 있어요." 







난 택시요금을 지불하며 택시문을 열었다. 







"아유~ 아닙니다. 전 tv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걸요. 

그런데 방송은 언제쯤 되는 지.." 



"네? 방송요?" 







생각지 못한 택시기사의 물음에 난 조금 당황하였다. 

하지만 내가 누구던가. 







"본방은 오늘 밤 9시쯤에 해요." 







대충 둘러대었다. 

어쨋든 난 돈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 넣으며 한쪽 발을 땅에 디뎠고 

다음 왼쪽 발을 땅에 디디려는 순간 덥썩, 내 팔을 잡아버리는 택시기사였던 것이다. 

헉. 설마 벌써 눈치를 챈건가? 


난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택시기사를 보았다. 

두근두근. 나도 모르게 해버린 거짓말에 심장이 뛰었다. 

짧은 콧수염을 움직이며 택시기사가 말했다. 







"재방송은 언제.." 



"네?" 



"제가 보시다시피 일때문에 본방송을 못 볼 것 같아서요. 하하." 







휴우. 십년 감수했다. 

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억지스레 웃음지었다. 







"내일, 아침 9시에 할거예요." 



"아, 그래요? 그럼 재방송을 봐야 겠네요. 하하." 



"예.. 수고하세요." 







부우웅. 택시가 방긋 웃으며 떠나버렸다. 

정말 이상한 택시기사였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신유인이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지 봐야 한다. 







"신아, 어서 가자." 



"근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와놓고. 빨리 가자." 







신이는 지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신유인을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신유인을 포기한다면 인천에 가서도 그리고 대구에 가서도.. 

부산에 가서도 녀석들을 데려오지 못할것이기에 난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난 신이와 함께 신유인이 들어갔던 골목안으로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아서 신유인의 오토바이를 제일 먼저 찾으려고 할때, 바로 그때였다. 




퍽!! 퍼억!! 



둔탁한 주먹질 소리가 골목안을 사로 잡은 것이다. 

몇몇 남자들에게 둘러쌓여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하고 있는 교복입은 남자아이. 

그리고 그 남자아이의 품안엔 한 사내가 들어있었다. 

먼저 남자들에게 맞고 있었는 지 사내의 옷 곳곳엔 빨간 피가 묻어있었다. 

그리고 그 피는 신유인의 흰 교복남방에 퍼져 나갔다. 







"이 새끼야, 돈 갚어! 돈 갚으라고!!" 







남자의 말로 미루어 보아 그들은 사채업자인듯 했다. 







"저거 뭐냐?" 







황당한 광경에 입을 벌리고 보고 있는 나에게 신이가 물었다. 

나에게 대답을 기대하고 묻는 것은 아니였다. 







"저새낀 왜 등신같이 계속 맞고만 있는 거냐?" 







신이 말처럼 신유인은 저항 한번 하지않고 남자들에게 맞고만 있었다. 

아마도 사정이 있을 터. 







"니형이 다리병신이 되서 못 갚으면 너라도 갚아야 할거 아냐?!" 







역시나 사정이 있었다. 

난 두 눈에 힘을 불끈 주었다. 

불의를 보면 원래 눈에 힘이 들어간다. 







"신아, 준비됐지?" 



"무슨 준비?" 







난 놈들을 노려보며 멋있게 신이에게 물었다. 

하지만 신이는 멋을 몰랐다.(영화도 안 보는 가 보다.) 







"싸울 준비. 신유인을 구해내야지." 



"내가 왜?" 



"너만 아니라, 나도 같이 해야지." 







찡긋. 난 살짝 웃어보이며 윙크를 했다. 

그에 인상을 쓸줄 알았던 신이는 눈만 깜빡이더니 고개를 홱 다른 쪽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마 보기도 싫다, 뭐 그런거겠지. 나쁜 놈. 

어쨋든 난 두 주먹을 꽈악 쥐었다. 

그리고 이 말과 함께 놈들에게 달려나갔다. 







"동작 그마-안!!!" 







뻐억! 놈들의 복부에 꽂히는 주먹에 예전보다 더 큰 힘이 실린것만 같았다. 

예감이 좋다. 계속되는 운동으로 인해 주먹이 단단해지는 듯 했다. 

아,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신이가 쓰래빠를 신은 다음날부터 나무영감 뺨때리기 운동을 시작했다. 







"넌 뭐야?!"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의 동료를 때리는 나에게 양복을 입은 한 녀석이 물었다. 

이놈들도 조직원들일까? 그래, 그럴수도 있겠지. 

요즘엔 사채업자들 대부분이 조폭들이니까. 

난 나에게 질문을 내던지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며 우렁차게 대답을 해주었다. 






"나? 난 쓰래빠 보스 연개소리다! 이 썩을 놈아!" 







뻐어억! 강력한 강펀치. 정확히 놈의 오른쪽 볼에 떨어졌다. 

놈은 한 방에 나가떨어졌고 내가 뒤를 돌아봤을땐 신이가 다른 녀석들을 손봐주고 있었다. 

그런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신유인, 그리고 많은 피를 쏟아 의식을 잃어가고 있는 남자. 

그렇게 신이와 나, 우리 둘은 사채업자 놈들을 손쉽게 해치워버렸다. 







"꺼져! 죽이기 전에." 







신이의 외침에 남자들은 허둥지둥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신유인에게 다가갔다. 

남자를 부축하여 일어서는 그였다. 







"누구야?" 







신유인은 내 물음에 "형"이라고 대답했다. 

신유인이 형을 부축하며 향한 곳은 작은 한옥집이었다. 

녀석의 집인듯 했다. 

녹슨 초록대문을 열고서 안으로 들어가려는 신유인. 

그런 뒷모습을 보며 신이가 소리쳤다. 







"병원 안 가냐? 내가 보기엔 가야 할것 같은데." 







신유인의 형을 가리켜 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신유인의 형은 군데군데 살갗이 터져 피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골목길에 내팽겨쳐진 휠체어. 

그의 다리가 성치않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었다. 

신유인은 신이의 말을 흘려들으며 집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신이는 신유인의 팔을 잡았다. 







"병원 안 가냐고." 







신이의 목소리는 낮은 저음이었다. 

화를 참고 있다는 것이다. 







"신경꺼." 







그에 대한 신유인의 대답이었고 신이는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병원 안 가냐고." 



"괜찮아." 



"너희 집에 장의사라도 불러났냐?" 



"안 죽어." 



"너희 형, 피 쏟아내는 거 안 보이냐?" 







신이의 거침없는 질문에 신유인의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은 계속 되었다. 







"안 나오게 막으면 돼." 



"니가 의사냐?" 







그리고 신유인의 목소리는 높아져만 갔다. 







"꺼져. 꺼지라고!!" 



"뭐? 이 새끼야, 기껏 걱정해줬더니만 꺼져라고? 

좋아. 꺼져주지. 너희 형쯤이야 동생인 니가 잘 알아서 하겠지. 야! 그만 가자." 







끝내 신이는 돌아서버렸다. 

난 신유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가 않아 고개를 숙여버렸다. 

그리고 땅만 쳐다보며 신이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에.. 아니 조금 슬픈 목소리에 

우리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병원비가 없어.." 



♡22 





이곳은 병원. 







"얼마면 돼? 얼마면 되는데?" 







난 접수대에 서 있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약간 황당해하는 얼굴이다. 







"약 1주일 정도는 입원해 있으셔야 할 것 같네요. 

치료비, 입원비 총 112만원입니다." 







헉! 112만원? 생각보다 많은데? 

난 많은 병원비에 움찔하였지만 옆에 신유인이 있는 관계로 애써 태연한 척 하였다. 







"카드돼죠?" 



"물론입니다. 일시불로 해드릴까요? 아님, 분할로 해드릴까요?" 



"12개월 할부로 끊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하아- 아무래도 전세 보증금을 빼야 할 것 같다. 

난 간호사에게 내주었던 카드를 다시 건내받고선 영수증에 싸인을 하였다. 

볼펜 끝이 떨리는 것이 가슴이 쓰라린다. 







"하하! 이젠 괜찮을 거야. 걱정마." 







일부러 웃는다는 건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참 힘든 일이다. 







"..저기." 







뭔가 말하려는 듯 신유인은 입을 웅얼거렸다. 







"응. 말해." 







하지만 신유인은 입술을 닫아버렸다. 

왜 그러는 거지? 조금 궁금하기는 했지만 별 얘기 아니겠지하는 생각에 

신유인을 지나 병원 입구이자 출구로 향했다. 

물론, 신이와 함께 말이다. 


그런데 그때 그런 우리 등 뒤로 신유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저기.. 고마워." 







결국엔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거다. 

난 살짝 웃음을 띠며 신유인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약간 쑥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뭐 두 볼에 홍조까지 띠고 있었더라면 꽤 귀여웠을 테지만 그것까지는 아니었다. 

난 신유인에게 말했다. 







"고맙긴, 친구끼리 돕고 사는 거지." 







내가 한 말이지만 아주 인상적인 대사였다. 

신유인 그리고 신이까지도 감동받은 얼굴이었으니까. 후훗.(혼자 생각.) 







"그럼 집으로 가볼까?" 







난 신이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가던 길을 계속 걸어나갔다. 

신이는 무드없게도 내 팔을 냉정하게 뿌리쳐 버렸다. 







"어깨동무 하지마. 난 그거 진짜 싫어." 







이상한 녀석이다. 

난 먼저 걸어가버리는 신이와 나란히 하기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그런 우리 둘을 달리기로 따라잡는 남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신유인이었다. 

신이와 난 어리둥절함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내 눈을 직시하며 신유인이 말했다. 







"너희 조직에 들어가면 돈 많이 벌 수 있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돈, 많이 줄 수 있음 너희 조직에 들어갈게. 아니 들어가고 싶어. 받아줘." 







돈때문에 우리 조직에 들어온다고? 

정말 가슴이 찌릿한 순간이었다. 

원칙대로라면 돈때문에 들어오려는 녀석따윈 필요도 없지만 

그렇지만 난. 







"물론이지! 얼마면 돼? 얼마면 되는데? 돈 많이 벌게 해줄게!" 







녀석이 참말로 필요했기에 원칙따윈 그냥 씹어먹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난 그토록 원했던 H고의 명물인 신유인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병원비가 걱정이다. 



집. 







"예엣?! 대치동에 있는 18평 한옥집 전세 보증금을 빼라구요?!" 



"그래. 어차피 거기엔 잘 가지도 않잖아." 



"하지만 형님."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태기녀석은 참 말이 많은 것 같다. 

병원비 및 신유인의 형이 진 빚을 대신 갚아주기위해 대치동에 있는 한옥집 전세 보증금을 빼라는 

나에게 태기가 반발을 하고 나섰다. 

하긴, 그럴만도 하겠지. 

그 집에서 틈만 나면 친구들이랑 노름판을 벌였으니까. 


난 태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뭐?" 



"아, 아니. 전 그냥." 







그러자 금방 꼬랑지를 내리는 태기였다. 

자식, 까불기는.. 







"언제까지 빼면 되겠습니까? 형님." 



"내일 당장." 



"네, 알겠습니다." 







내 말에 민규는 금방 고개를 숙였다. 

보자, 대치동에 있는 한옥집 전세값으로 9000만원쯤 줬으니깐, 

병원비 112만원을 빼고도 8888만원이 남는 군. 

거기서 빚 8500만원을 빼면.. 

에게, 겨우 388만원밖에 안 남잖아? 

머릿속으로 계산을 다 마친 난 정말 가슴이 미어졌다. 



신이와 난 태기가 저녁을 준비할 동안 정원에 나와있었다. 

무지개 색깔의 파라솔이 태양을 가리고 있는 테이블 위에는 오렌지 쥬스 두 잔이 놓여있다. 

난 쥬스를 한 모금 마신후 테이블 위에 얹어놓았다. 







"이제 좀 속 시원하냐?" 







신이가 물었다. 







"뭐가?" 



"니가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신유인을 얻었잖아." 







난 또 뭐라고. 

흠, 속이 시원하다라.. 







"글쎄, 어깨가 한 층 더 무거워진 느낌이야." 







이렇게 말하곤 정원 위 풀을 뜯어먹는 찌글이를 보았다. 

아까 태기가 밥을 주는 것을 봤는데 금방 배가 꺼진 모양이다. 

신이는 쥬스잔을 입에 가벼다 대었다. 

그리고는 쉬지도 않고 마셔버린다. 



그때 쾅쾅쾅! 누군가가 대문을 두들겨 대었다. 







"누구지?" 







난 조신하게 벨을 누르지않고 무식하게 대문을 두들기는 정체불명의 사람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신이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누군데, 문을 두드리는 거야?!" 







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인간은 쾅쾅쾅, 계속 문을 두드렸고 

결국 난 의자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누구야? 


쾅쾅쾅. 시끄러운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씩씩거리며 대문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벌컥, 손잡이를 잡고서 대문을 열었다. 







"뭐야?!" 



"아, 안녕하세요?" 







여자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토색 모자와 자켓을 입으신.. 

자켓 왼편 가슴팍엔 "오예! 야쿠르트"라고 수놓여 있었다.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다. 







"4월달 야쿠르트 대금 받으러 왔는데요?" 







난 아주머니의 말씀에 인상을 펴고선 주저없이 큰소리로 태기를 불렀다. 

(야쿠르트는 태기가 받아먹는 것이므로..) 







"변태기!!" 







하지만 녀석은 못들었는 지 무대답이었다. 

난 다시 한번 태기를 소리쳐 불렀다. 







"태기야!! 변태기!!" 



"저기, 죄송하지만 제가 좀 바뻐서요.." 







야쿠르트 아주머니는 손목시계를 내려다 봤다. 

결국,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올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스 체면상 다시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으. 피같은 내 돈.. 


한달치 야쿠르트 값을 지불한 나는 아주머니를 돌려보내곤 다시 정원 테이블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은 난 남아있던 쥬스를 마저 다 마셔버렸다. 

목이 탔기에. 

벌컥벌컥. 







"카아." 



"누군데 그래?" 







신이가 물었다. 







"태기놈 애인." 







건성으로 대답해버렸다. 

그렇게 쥬스로써 열을 식히고 있을때쯤 또 한번 나를 열받게 만드는 소리가 있었으니. 

쾅쾅쾅!! 대문 두드리는 소리였던 것이다. 

이 아줌마가 초인종은 폼으로 달아났는 줄 아나?! 

이번 역시 방금전의 그 야쿠르트 아주머니일거라고 생각했던 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대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벌컥! 대문을 열었고 







"아줌마! 손가락 없어요?! 벨 누를 줄 모르냐고ㅇ."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게 왠일?!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아주머니가 아니었던 것이다. 

난 어벙벙함에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얼굴 곳곳에 상처가 난 체로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사람들. 

앞면이 있었다. 

S고에 다닐때 보았던 신이를 따르는 친구들과 후배들. 

난 뒤를 돌아 신이를 보았다. 

신이는 그런 나를 "뭔데 그래?"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잠시 후 S고 아이들이 크게 외쳤다. 







"저희를 받아주십시요!!" 






♡23 




"우리를 조직에 받아주십시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예고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들. 

그들은 다짜고짜 자존심과 함께 무릎을 꿇고서 이웃집이 창밖을 내다볼 정도의 큰 소리로 외쳤다. 

그들의 목소리는 정말 우렁찼기에 신이가 못 들었을 리 만무했다. 

이윽고 신이가 의자에서 일어나 대문쪽으로 걸어왔다. 





"뭔데 그래?" 





아직 대문 밖 남자들의 정체를 알지못했던 신이가 내 곁으로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과 동시에 신이는 열린 대문 밖을 내다보았다. 





"뭐야, 너희들." 





저음이다. 

내가 돌아본 신이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신이를 우러러 보는 S고 남자아이들의 표정은 마치 그의 등장을 기다린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선배, 다시 돌아와주세요." 





모자란 나의 예상과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난 신이를 돌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신이의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 녀석의 마음까지도 흔들리고 있는 건 아닌지.. 

내심 조바심이 났다. 





"너희들 얼굴, 누가 그랬어?" 




신이의 말에 난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남자아이들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을 말이다. 저마다 입술이 째지거나 피멍이 든 아이들은 누군가와 크게 싸운듯 했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와주십시요." 



"누가 그랬어?" 





신이의 질문도 한결 같았다. 

남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는 가 싶더니 이내 신이가 서 있는 정면을 응시하였다. 

그리고는 3학년 현호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시선은 바닥을 향한체.. 





"신이 니가 간 후로 여러 학교와 충돌이 있었어. 

우리 학교를 누르기위해 발버둥 치는 놈들이 허다했지." 



"그래서?" 



"그래서라고? 그래서 어떻게 됐겠냐? 니가 없는 S고가 어떻게 됐겠냐고." 





바닥만을 응시하며 이야기하던 현호는 고개를 빳빳이 들어 신이를 보았다. 

이를 무는 현호다. 





"끝났어. 서울 No.1 자리는 이제 끝났다고." 



"선배님, 제발 돌아와주십시요!" 

"선배님!" 





모두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랬다. 신이는 S고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었던 거다. 

신이가 없는 S고는 붕어없는 붕어빵과 솜없는 솜사탕과 같았다.(뭔가 아닌것 같은..) 

아니 다시 정정하겠다. 

팥없는 붕어빵과 색소없는 솜사탕과 같았다. 

그리고 신이는 쓰래빠에게 있어서도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럴수 없어." 





신이의 대답에 가빠오르던 내 가슴은 진정을 되찾으며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남자들의 눈빛에서 원망서린 기색이라고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선배님에겐 볼일이 없습니다." 





한 녀석의 조금은 시건방진 말이 끝나자 모두들 상체를 틀더니 곧 나에게로 향하였다. 

이제 그들이 나에게 무릎을 꿇은 격이 되었다. 당황한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S고 남자들이 말했다. 





"부디 저희들을 조직에 받아주십시요. 평생 모시겠습니다." 





정말 귀가 쏠깃해지는 말이다. 

문득, 민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명단에 있는 녀석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면 적어도 50명씩은 거저 들어올거라던 말. 

그 말이 이제서야 믿음이 갔다. 

신이를 이정도로 따르는 녀석들이라면 조직원으로써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조직 내부의 분열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엔 그저 설마하는 생각뿐이었다. 





"좋아." 





내 대답은 단순 그 자체였다. 나는 그런 신이의 말을 그냥 무시해버렸다. 





"감사합니다, 형님!" 





모두들 무릎을 꿇은 체로 나에게 큰 절을 하였다. 

이거 쑥스럽구만. 하하. 





"안돼! 절대 안돼!" 





신이는 절사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난 대꾸하지 않았다. 





"이자식들까지 끌어들이면 내가 그만 둬!" 





그리고 또 다시 날아온 신이의 발언이었다. 대발언. 

난 어린 아이같은 신이의 행동에 왠지모르게 화가 났다. 

그래서 그만 언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뭐? 새신, 넌 조직이 무슨 애들 장난인줄 아니? 

니가 들어오고 싶음 들어오고 나가고 싶음 나가게. 헛소리 하지마." 



"그래? 말 한번 잘 했다. 너야말로 이런 일에 애들을 끌어들이냐?!" 





신이는 40명정도 되는 S고 남자아이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나도 모르게 말문이 막혔다. 

솔직히 나또한 학생들을.. 아직 어리기만한 고등학생을 조직의 세계에 끌어들인다는 것이 석연치가 않았다. 

물론, 나도 고등학생의 나이지만. 

지금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은 아이들에게 언제 끊어질지 모를 생명의 실을 잡게 한다는 것이 

큰 죄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미래가 비록 지구상의 하늘과 바다보다 넓지 못하다 하더라도, 

보잘것 없는 작은 미래일지라도 내가 빼앗을 권리는 없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지만 제발로 굴러들어오는 내 꿈의 일부분을, 

퍼즐의 한 조각을 막고 싶지는 않다. 절대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난 이기적이니까.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져도 좋다. 

그게 하찮은 짐승이라 해도, 한심한 다리 밑 거지라고 해도, 

그리고 죽어마땅한 연쇄살인범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난 나에게 떨어지는 무수한 욕들과 함께라 해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 이기심을 충족시킬 것이다. 





"신이 니가 이래라 저라래 할 권리는 없어. 쓰래빠의 보스는 나야." 





**************** 




다음에 전화하겠다는 말과 함께 S고 녀석들을 돌려보낸지 30분하고도 11초가 지났다. 

지금 거실안은 냉랭한 찬기운만이 감돌고 있다. 

신이와 나는 밤색 테이블을 중간에 두고 마주 보고 앉은 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신이의 오른쪽 어깨너머를, 신이는 내 왼쪽 어깨너머를. 

신이의 오른쪽 어깨너머에는 전기뱀장어 2마리가 오붓하게 살고 있는 큰 사면체의 어항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내 왼쪽 어깨너머에는 아마도 우리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찍은 내 300일 사진이 벽에 걸려 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지 1000일되는 날까지 챙겨 주셨다. 

그리고 거실벽 한 면에는 100일부터 1000일때까지의 기념사진 10개가 차례대로 걸려 있었다. 

어쩌면 신이가 보고 있는 것은 300일 기념사진이 아닌 400일이나 500일 기념사진일지도 모른다. 

또 그런 사진들을 보며 아기인 내가 귀엽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신이가 보고 있는 것은 개소리 옆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 찌글이였다.) 





"어구, 요놈의 개새끼가 또 아무데나 오줌을 갈기네. 형님, 잠시만 비켜주십시요." 





두루마리 휴지를 한 뭉치 뜯어 나에게 다가오는 태기였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뜨거운 느낌에 나도 바닥을 내려다보았고 내 옆엔 찌글이녀석이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이.. 이 개가! 





"저리로 못 가!" 





깨갱! 내 발에 차여 저만치 나뒹구는 찌글이 퍼그였다. 

다른 집 개들은 변기에 앉아서 용변을 본다던데. 으구, 속 터져. 

태기는 들고 온 휴지뭉치로 찌글이의 누런 소변을 닦아내었다. 

그 하얗던 휴지가 곧 노랗게 물들었다. 





"저거 변기에다 볼일보게 만들어. 아님, 당장 내쫓아버려!" 



"예? 형님, 개가 원숭이도 아니고 어떻게 변기에다.." 



"쓰읍!" 





닌 태기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입을 꾹 다문체 찌글이를 안고서 화장실로 들어가버린다. 

변기에 앉아서 오줌을 누는 개라.. 

만약, 그러기만 한다면 난 떼돈을 벌것이다. 으하하. 





"그애들까지 끌어들이지는 마." 





잠시 황홀한 상상에 빠져있자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신이가 확고한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정말 미치겠다. 





"왜 안된다는 건데? 이유를 말해봐." 



"내 친구들이고 내 후배들이야. 위험에 빠트릴수는 없어." 



"안 위험해. 내가 있으니까." 





나를 보던 신이는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위험하지가 않다고? 그렇게 자신있음 전국 제패고 뭐고 너 혼자서 하지 그래?" 





솔직히 혼자서는 많이 역부족이다. 아니, 무리이다. 

그랬기에 난 그렇다할 반발을 할 수가 없었다. 





"걱정마." 





그래서 이런 조건을 달았는 지도 모른다. 





"직접적으로 싸움에 개입시키지는 않을 테니깐. 그리고 싸움을 시키더라도 2년후야." 



"2년?" 



"그래, 우리 쓰래빠가 정식으로 움직이는 날은 2년후라고. 

너와 내가 21살이 되는 해. 그때쯤이면 니 친구도 후배도 모두 20대야. 

어린애들이 아니라고. 그때에도 조직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녀석들이 있다면 난 능력판단하에 기꺼이 받아줄거야. 

그러니 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마." 



"그 말 진심이냐?" 



"그래. 한 입가지고 두 말하면 머리만 아프지." 





신이는 내 조건에 꽤 만족을 했는 지 빙긋 웃어보였다. 

이런 젠장. 2년씩이나 늦추어야만 하는 건가? 겉으로 티를 낼수는 없었지만 마음 전체가 쓰라려 왔다. 

이렇게해서 아버지의 복수는 쓰래빠의 전국제패는 2년씩이나 늦추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그동안 애들이나 모아야 겠군. 


다음날. 학교에서 신유인과 마주쳤다. 

정확히 말하자면 교실 앞 복도에서 말이다. 





"3일후에 니 통장으로 돈이 들어갈거야. 고마워 할건 없어. 흔히들 말하는 계약금과 같은 거니까." 



"야, 난 안 줬잖아." 





신이자식, 왜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거야? 

난 팔꿈치로 신이의 옆구리를 살짝 쳤다. 





"고마워." 





유인이가 말했다. 설마 부담스러워하는 건 아니겠지? 





"고마워할 거 없대도." 



"..풋, 키킥킥." 





어랏? 왜 갑자기 웃는 거야? 

부담스러워 하는 건 아닐까하는 내 고민과는 달리 웃기시작하는 유인이의 모습에 난 의아하기만 했다. 

그리고 유인이의 시선은 신이와 내 발로 향해져 있었다. 

쓰래빠를 신은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우리 발로. 





"너흰 왜 매일 슬리퍼만 신고 다녀?" 





신이와 난 마주 보았다. 진짜 기가 막힌다. 

우리 조직의 상징, 쓰래빠를 비웃다니. 

신이가 들고왔던 상자를 유인이에게 내밀었다. 





"니꺼다." 



"이게 뭔데?" 





유인이는 웃음을 멈추고선 그 상자를 건내받으며 물었고 신이는 그저 살짝 미소를 띨 뿐이었다. 

음흉한 미소다. 전혀 긴장감따윈 없는 손으로 상자의 뚜껑을 여는 유인이었다. 

그리고 그 상자안엔 





"슬리퍼..잖아." 





유인이의 쓰래빠가 들어있었다. 





"너도 우리 조직원이니까, 이제부터 그걸 신도록 해." 



"싫." 



"싫어도 어쩔수 없어." 





난 유인이의 말을 끊어버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쓰래빠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는 유인이녀석이다. 

나와 신이는 그런 유인이를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울상인 유인이를 혼자 두고 먼저 교실로 들어온 나와 새신. 

우린 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내맡겼다. 

시끌벅쩍. 와글와글. 

고3도 시끄러운 인간의 자손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몇년째 학교생활을 했던 우리들에겐 이정도 소음쯤이야 익숙하기만 하다. 





"어제 뉴스 봤어? 탈옥범 김만수가 잡혔다는 거." 


"아, 그거 나도 봤어. 인천에서 잡혔다지? 그것도 고삐리한테. 바보같이." 


"근데 그 김희웅이라는 애가 인천바닥에서 존나 잘 나가는 애라잖아. 보나마나 얼마 안있음 팬카페도 생길걸?" 





가만, 방금 저녀석들이 김희웅이라고 했었던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같은데. 

난 앞자리에서 어젯밤 뉴스이야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김희웅이라는 이름. 분명 귀에 익은 이름이었다. 

인천에 김희웅. 

혹시.. 







♡24 






김희웅, 김희웅. 

학교 수업을 듣는 내내 김희웅이라는 이름 석자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대체 어디서 들었길래 그 이름이 귀에 익기만 한건지. 

그것도 인천시민을 말이다. 

정말 몰라도 도통, 도무지 모르겠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해?" 





인상 쓴 얼굴로 학교 현관을 막 빠져나오자 신이가 궁금했던 모양인지 나에게 물었다. 

신이도 김희웅을 모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도움을 청하기는 커녕 대답도 하지 않았다. 





"웃기네." 





그런 나를 보며 혼자 궁시렁거리는 신이다. 그렇게 생각날듯 말듯한 김희웅을 떠올리기위해 애를 쓰며 

걷다보니 어느새 교문을 나와버렸다. 

그때 "언니!"하며 내 앞을 가로막는 한 여자아이. S고 교복이다. 





"아무 말 하지 마세요." 





웃기다. 웃기는 자장 곱배기다. 

오랜만에 보는 현아는(여전히 앙뜨아네트 머리였다.)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무슨 말따윈 할 생각도 없었는데. 

어쨋든 현아의 검지는 내 입술을 막고 있었다. 

자그맣게 심호흡을 하는 현아. 마음이 복잡했는지, 그리고 그런 마음이 대충 정리가 되었는지 

내 입술에서 손가락을 떼어내며 여린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언니한테 드릴게 있어서 왔어요. 그러니 쫓아내지 말아주세요." 





쫓아낼 생각따윈 전혀 없었다. 

거기다 여기는 내가 이 애를 쫓아내고 자시고 할 공간도 아니다. 





"줄거라니?" 



"이거요. 지금 제 마음을 나타낸거예요." 





현아가 내게 건네준것은 책이었고 현아는 그 책만을 나에게 준체 뒤도 안 보고 달려가버렸다. 

그리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어중간한 책. 

정말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나저나 내 생일도 아닌데 왜 이걸 주는거지? 





"쟤는 니가 여자인거 알고 있었냐?" 





조용히 보고만 있던 신이가 물었다. 

듣고 보니 그렇다. 현아가 내가 여자인걸 알고 있었던가? 

방금 그 행동으로 보아선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거참, 이상하다. 어떻게 안걸까? 

난 두 손에 들어있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책의 표지가 한 눈에 들어왔고 

표지에 쓰여있는 하얀 글자는 이러했다. 

-그녀의 드레스, 그녀의 턱시도.- 

푸지직. 새까맣게 타 들어가는 내 머릿속. 

그리고 신이의 목소리. 





"너 오늘 나랑 말 안 하기로 작정을 했냐?" 





************* 





23일(15시경.) 인천광역시 계양구 작전1동에 나타난 탈옥범 김만수(31세)가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김만수는 결혼을 앞두고 있던 애인이 자신을 버리고 이모씨와 바람이 나자 이에 격분해 애인 진모씨를 

살인한 죄로 2003년 5월 인천교도소에 수감되어 2003년 12월에 탈옥을 하였다. 그런 김만수가 검거된것은 

인천. 그것도 고등학생에 의해서이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김만수가 인천 B고의 김모군(18세)에게 

붙잡힌 뒤였다. 김모군에게는 김만수를 잡기위해 걸어두었던 현상금 2,000만원이 주어졌다.‥‥ 


위는 태기가 읽은 오늘자 신문의 내용을 간추린것이다. 

민규는 자신의 조사에 의하면 신문의 김모군이 김희웅이라고 했다. 

그리고 김희웅은 내가 찾아야 할 명단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살인범, 거기다가 탈옥범을 잡아내다니.. 

쓰래빠를 신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 

난 신문에 영웅의 사진까지 실려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이로써 내 다음 계획이 성립되기도 했다. 

김희웅을 데리러 인천으로 간다. 일명, "인천 상륙 초특급 대작전!".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임마 이거 정의파 아닙니까? 형님, 아무래도 우리에겐 위험한 인물인것 같습니다." 





신문을 내려놓으며 태기가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이건 또 무슨 땅콩 까는 소리인지.. 





"그게 우리랑 무슨 관계야?" 



"무슨 관계라뇨? 명색이 우리도 깡팬데, 누가 압니까? 우리까지 쳐넣을지." 





역시나 헛소리였다. 





"누가 깡패야? 변태기 또 터지고 싶지?" 



"아,아닙니다. 형님." 





난 깡패가 아니다. 

김희웅이 정의파라면 그와 나는 같은 종족인 셈이다. 

나의 숨은 목표또한 곧 정의이니까. 



그 주 토요일. 학교가 파하고 버스터미널. 





"진짜 가기싫은데. 가기싫은데. 가기싫은데." 





그 놈 참 말이 많다. 

인천행 직행버스표를 구입하는 그 순간까지도 유인이는 같은 말만 계속 연발해대었다. 

아니 칭얼댄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안돼! 너도 명예로운 쓰래빠의 한 일원으로써 가야만 한다고." 



"설마 우리 세 사람이 전부라는 건 아니겠지?" 





약간 당혹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찔릴 필요는 없었다. 

쓰래빠의 인원이 우리 셋뿐은 아니었으니까. 





"물론이지!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아. 그리고 너희들은 대표로 가는거고. 

난 보스니깐 가는거고." 



"웃기시네." 





버스표에 적힌 시간을 보며 신이가 말했다. 

윽, 저자식을. 어쨋든 버스는 pm. 3:30에 출발해서 목적지에는 대략 50분후에 도착한다. 

50분후면 김희웅을 볼 수가 있다. 녀석도 잘 생겼으면 좋으련만. 

난 머릿속으로 김희웅의 얼굴을 대강 그려보았다. 

물론, 상상만은 끝내줬다. 


몇분후 인천행 직행버스가 우리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줄을 안 서는 바람에 우린 맨 마지막으로 버스에 올라섰다. 

우리 세사람은 멋지게 버스 안으로 들어섰고 그러자 좌석에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를 보았다. 

신문을 펼쳐보고 있던 할아버지도, 달걀을 까고 있던 아주머니도, 안경알을 닦고 있던 눈 나쁜 총각도.. 

모두 모두. 

그렇게 우리의 등장은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동양스러운 검정색의 머리칼이 돋보이는 신들(신이와 신씨.)은 

각각 까만 정장(조폭의 상징이기에.)을 차려 입었고 난 긴머리를 양갈래로 내려 묶은 뒤 

까만 재킷에 까만 주름치마(무릎 조금 위의)를 입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하나. 패션의 마지막. 

신발은 쓰래빠로 마무리를 지었다. 

신들은 맨발이었고 나는 까만 무릎 양말을 신었다. 

아주 완벽한 조화였다. 





"누가 죽었나봐." 

"그런데 신발이 저게 뭐야? 픽, 웃긴다." 





사람들의 말따윈 그냥 무시해버렸다. 

패션을 모르는 인간들이기에.. 





"아, 쪽팔려." 





유인이가 자그맣게 얘기했다. 

주위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그치만 신이는 이런것에 익숙해졌는지 별다른 투정은 부리지 않았다. 

우리 셋은 버스표에 적힌 좌석을 찾아 걸어갔다. 신이와 유인이는 11번, 12번좌석으로 같이 앉게 되었다. 

나는 13번으로 건너편 좌석이었다. 

신들은 비어있는 11번,12번 좌석에 앉았고 나는 비어있는.. 앗뿔싸! 13번은 비어있지가 않았다. 

왠 노파가 보란듯이 앉아있는 13번 자리. 

난 잘못 본건가 싶어 다시 표를 보았고 내 눈은 정확하기만 했다. 

13번. 13번 맞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난 할머니를 노려보았다. 

빨리 일어나라고. 

늙으면 느는건 눈치뿐이라던데. 이 할머니는 그렇지가 않은 가 보다. 

하지만 난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조금은 버릇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두 눈 딱 감고 말을 해버렸던 것이다. 





"할멈(할머님), 제 자리예요." 





허걱, 혀가 꼬여버렸다. 

순간 다시 한번 집중되는 시선들. 젠장. 

이젠 나도 모르겠다. 예의고 뭐고 50분동안 서서 갈 수는 없다. 





"제 자리라고요." 



"아구, 미안해서 어쩌나.. 내가 자리를 잘못 찾았나보네. 자, 여기 앉아요." 





할머니는 순순히 자리를 내주셨다. 

뭔가가 굉장히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쨋든 할머니가 내 뒷좌석에 앉자 그제서야 난 13번 좌석에 앉을 수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수근거림을 들으면서 말이다. 

버릇이 없다느니.. 할머니한테 자리 좀 양보하면 어떻냐니.. 등등. 

아~ 그때 혀만 꼬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욕을 먹지는 않았을 텐데. 

정말 울고 싶었다. 왜냐고? 심지어 신이와 유인이한테까지 욕을 먹었기 때문이다. 





"너, 참~ 못됐다."(신이) 

"허억. 좀 그렇다."(유인) 





그렇게 억울한 오해속에서 50분이 창밖 하늘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도착한 인천. 

난 배고프다는 유인이의 입을 막아버리며 녀석을 데리고 도로가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곧장 김희웅의 학교로 가기위해서였다. 





"그녀석 보면 뭐라고 말할건데? 생각은 해놨냐?" 





뒷좌석에 앉은 신이가 물었다.(난 앞좌석에 탔다. 보스니까.) 

난 룸미러로 신이를 보았다. 

눈,코,입. 얼굴이 다 보였다. 녀석의 얼굴이 작아서인지, 아님 멀찍이 앉아있어서인지. 

어쨋든 가슴이 또 뛴건 사실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감정, 그런건 아니라고 본다. 

아니, 아닐거다. 





"몰라. 보고." 





대충 넘어가버렸다. 

신이는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내 뒷모습을 보았다. 

끼이익. 어느새 택시 운전기사는 우리를 인천 B고등학교 앞에 데려다 주었다. 





"여기야. 여기에 녀석이 있어." 





이곳에 세번째 멤버가 있다. 

난 신들을 양 옆에 끼고서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수업시간인지 학교는 산산하기만 했다. 

2학년 5반. 민규가 알려준 김희웅이 속한 반이다. 

우리 셋은 대강 눈치로 2학년 교실을 찾아올라갔다. 

정말 조용하다. 

불투명 유리창으로 모든 교실안은 보이지가 않았다. 

물론 2학년 5반도 마찬가지였다. 

5반 앞문에 선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잡이를 잡았다. 

수업시간일텐데 문을 막 열어도 괜찮냐는 내 말에 신이는 사람이란 자고로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녀석에게 우리의 깡다구를 보여주자고 했다. 

그래서 난 그 말에 힘입어 벌컥! 교실문을 열고야 만것이다. 



조-용. 



말그대로 문을 열어도 교실안은 조용했다. 

그리고 





"뭐야? 아무도 없잖아?" 





텅빈 교실안. 

그랬다. 우리 셋 다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 

바보로 이루어진 쓰래빠. 아, 민규는 예외다. 

결국 우리는 허탈하게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배고파. 뭐라도 좀 먹어." 





학교에서 나오자 유인이가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허기가 지는 것 같다. 





"그래, 배라도 든든하게 채우고 나서 놈을 찾도록 하자." 





내 말에 환하게 웃어보이는 신이와 유인이었다. 






************ 






"든든하게 채우자는 게 바로 이거냐?" 





컵라면 3개를 앞에 두고서 신이가 불만을 토해냈다. 

우리 세 사람은 편의점 안에 들어와 밖을 내다보며 컵라면을 먹고 있다. 





"국물까지 다 마셔봐. 얼마나 배부른데." 





사실 돈을 아껴야만 했다. 

돌아갈 차비를 위해서.(그리고 김희웅을 만난다면 밥이라도 사줘야 할게 아닌가.) 

솔직히 이녀석들은 할 말이 없어야 한다. 

어차피 차비고 뭐고 다 내가 내는 거니까. 

보스란 참 힘든 직업이다. 에휴. 유인이녀석은 복스럽게 잘만 먹는구만. 

신이 저 놈은 왜 저렇게 탈이 많은건지. 힘들다, 힘들어. 

끝내 배고픔에 못 견디겠는지 신이도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잘라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후루룩, 짭짭. 맛 좋은 라면. 

그 순간만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세명 모두 국물을 들이키려는 찰나에 쾅! 일이 터지고 만것이다. 





"손들어! 움직이면 죽을 줄 알아!" 

"가진거 다 내놔!" 





그들은 강도였다. 

때이른 저녁의 편의점 강도. 

손엔 칼을 들고 있는 한 녀석과 편의점 알바생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한 녀석, 

이렇게 두 명의 강도말이다. 그 중 한명은 알바생을 인질로 잡고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뭐야? 저것들은." 

"하-, 국물은 새우탕이 최곤데." 

"마음대로 해. 난 그 여자가 누군지도 몰라." 





그에도 무뚝뚝하기만 새신, 신유인 그리고, 나였다. 



♡25 





편의점 강도들은 슈퍼마켓에서 파는 판타롱 스타킹을 얼굴에 쓰고 있었다. 

콧망울까지 오는 찢어진 스타킹은 놈들이 얼굴을 숨기기위해 애쓴 노력이 엿보였다. 

그리고 녀석들은 나름대로 성공한것 같았다. 

스타킹을 뒤집어 쓴 그들의 모습은 일그러진 찐빵과도 같았으니까. 

인질을 잡고 있는 강도의 손끝은(칼끌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아주 미세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난 느낄수가 있었다. 놈들은 이것이 두 번째다. 

처음엔 운좋게 성공해 약간의 용기가 생겨 두 번째 범행을 벌이려는 거겠지만 그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왜냐, 그들의 앞에는 지금 우리가 서 있으니까. 푸하하. 

하지만 별로 관여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이곳에 라면을 먹으러 온것 뿐이니깐 말이다. 

뭐 인질로 잡힌 여자에겐 참으로 미안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저 팔자려니 해야 하지 않겠는가. 놈들도 여자가 돈만 주면 순순히 물러날것이다. 





"빠,빨리 손들어!" 





인질을 잡고 있지 않은 한 녀석이 우리의 무반응에 조금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정확히 나를 가리키고 있는 칼끝이 매우 날카로웠다. 

과도보다는 조금 큰 식육점 칼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이다. 





"에이,씹. 국물 맛 떨어지게." 





라면 국물을 몽땅 다 마신후 테이블 위에 얹어놓은 유인이와는 달리 한 모금만 마신 신이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더 마실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그만 갈까?" 



"살려주세요." 





양 팔을 머리 뒷통수에 두른체 강도들 사이를 삐집고 나가려고 하자 인질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했다. 

그것도 나를 보면서.. 참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인질로 잡혀있는 여자에게 한 마디 해주었다. 





"전 아줌마 안 죽여요. 그건 저 강도한테 말해야죠." 





실망한 낯빛이다. 그때 왠지모르게 마구 뒤엉킨 기분이 들었다. 





"빨리 가자." 





옷매무새를 다듬는 두 사람에게 내가 말했다. 

나는 내 앞을 막고 있는 칼날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밀어내었다. 

벙진 얼굴로 나와 내 손동작을 주시하는 편의점 강도였다. 

신이와 유인이는 내 뒤를 따라붙었다. 그러자 인질이 아까의 그 떨리는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도와주세요.." 





처음과 다른 대사였다. 말귀를 알아들은 모양이다. 

도와달라라.. 조금 고민은 했지만 내 두 발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역시 남일엔 참견하지 않는게 좋을 듯 싶다. 





"지금 장난쳐?! 거기 안 서?!" 





편의점 카운터 옆에 섰을 때 즈음 인질을 잡고 있던 강도가 크게 소리쳤다. 

그래, 그들의 눈에 비친 우리가 얼마나 웃겼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걱정되었던 거다. 





"걱정마. 신고는 안 할테니까." 

"하던거 마저 해." 





그리고 그것을 신이와 유인이도 잘 알고 있었다. 

애절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편의점 알바생. 하지만 난, 우리는 그냥 그 눈빛을 외면해버렸다. 

Play boy(*미국의 남성 취향의 월간잡지.)가 수두룩하게 꽂혀있는 카운터 옆 책꽂이를 지났다. 

그리고 손잡이에 "미시오."라고 적힌 출구(혹은 입구)를 살며시 밀어 유리문을 열었다. 

편의점 앞 차도를 보니 아까보다 자동차가 더 많이 늘어난것 같았다. 

그렇게 퇴근시간이 되었고 여름 해는 점점 기울고 있었다. 


한 남자 한명이 우리를 지나 편의점으로 들어가려 했다. 

난 그 남자의 앞을 가로 막아섰다. 그러자 동그란 눈으로 나를 보는 남자다. 





"다른 편의점으로 가는 게 좋을거야." 





내 말에 남자는 왼쪽 눈썹 산을 올리며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생판 모르는 남을 걱정하는 이 마음. 난 전생에 마음씨 고운 선녀였을 지도..(글쎄?) 





"들어가면 후회할거야." 



"무슨 소리예요?" 





하지만 어리석은 남자는 그런 나를 밀어버리더니 편의점 문을 당겨 안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후, 정말 바보같기는. 





"그만 가자." 





나는 더이상은 참견 말자는 생각으로 발길을 돌리려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지 모르겠다. 편의점에 중요한 뭔가를 두고 온 그런 기분이다. 





"희웅아!" 





그때, 편의점 안에서 여자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더 반가운 이름도 함께.. 

우리 세 사람은 동시에 뒤를 돌아 편의점을 바라보았다. 또 귀를 의심해야만 했다. 

나는 신이를 보았다. 자신의 생각도 내 생각과 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유인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아."하고 동시에 새어나오는 한숨소리. 

다음은?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우리는 당장 편의점 문을 당겼다. 

여전히 강도에게 붙잡혀 있는 여자와 그 앞에 서 있는 남자아이. 

방금전에 들어간 그 남자였다. 

인질을 잡고 있지 않은 강도가 우리를 보더니 짜증스런 말투로 소리쳤다. 





"너흰 또 왜 왔어?" 





나는 김희웅으로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질문에 답해주었다. 





"중요한걸 빠뜨리고 갔거든." 





이렇게 금방 마주칠 줄이야. 이건 필시 운명이다. 

녀석이 우리와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하늘이 정해주신 그런 운명말이다. 





"희웅아.."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며 남자아이를 부르는 편의점 알바생이었다. 

그에 강도는 여자의 목에 칼날을 바짝 갖다대어 위협을 했다. 





"입 못 다물어?!" 



"풀어줘." 





남자가 나지막히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간신히 뭔가를 참는 듯한 떨림이다. 그리고 어깨와 함께 두 주먹도 떨리고 있었다. 

순간 난 걱정 하나가 생겼다. 

과연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분명 아는 사이임에는 틀림없는데.. 

이럴줄 알았음 아까 도와주는 거였는데. 정말 후회스럽다. 

아니지? 아직 늦지는 않았다. 적어도 여자가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까지는 말이다. 





"그 칼 당장 치워!" 





난 손을 척 뻗으며 겁없는 강도에게 외쳤다. 

그렇지만 강도는 정말 겁이 없었다. 





"여자를 살리고 싶으면 돈 가져와. 돈!" 





돈? 안된다. 또 전세 보증금을 뺄수는 없다. 





"웃기고 있네. 거지새끼들 줄 돈이 어딨냐?" 





자기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신이가 말했다. 당당한 모습이다. 





"그럼 우리도 어쩔수가 없지." 





여자의 목에 갖다댄 칼에 힘을 가하는 강도였다. 

여자의 목과 칼날 사이에 선이 생겼다. 저녀석, 정말 찌를 생각인가? 

그렇게 이 상황을 어찌하면 좋을 지 생각하고 있는데 휘리릭- 무언가가 강도에게로 날아갔다. 

아주 빠른 속력으로.. 


툭! 





"악!" 





그 무언가가 목표지점에 도달한 소리. 

그리고 내가 눈을 한번 깜빡였을때 여자를 잡고 있던 강도의 손등엔 면도칼로 보이는 것이 정확히 꽂혀 있었다. 

그 충격에 강도는 들고 있던 칼을 손에서 놓아버렸고 그 틈을 이용해 여자는 강도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랬다. 강도는 김희웅이 던진 면도칼에 손을 찔려 작은 희망이었던 여자를 놓쳐버리고 만것이다. 





"이,이런 젠장!" 





손등에 꽂힌 면도칼을 빼내자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피를 막기위해 다른 한 손으로 손등을 움켜쥐는 강도다. 

다른 한 녀석은 그런 자신의 동료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안된 강도들은 갑자기 달려드는 신이와 유인에게 맞아 쓰러질 수밖에 없었고 

난 김희웅이 보는 앞에서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썩 내키지 않는 112를 눌러주었다. 






*********** 






2인조 강도들은 신고후 5분내에 도착한 경찰들에게 수갑을 차인체 경찰차에 올라탔다. 

놈들이 우리를 얼마나 원망스럽게 쳐다보던지 내가 잘못한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경찰들이 온 후에 안 사실은 편의점 알바생이 김희웅의 친누나라는 것이다. 

김희웅이 놀란 누나를 위해 청심환을 사러 약국에 갔을때 나는 여자에게 그의 누나에게 사과를 하였다. 

혹시나해서였다. 





"저기..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뭐가요?" 





그녀의 새침한 목소리였다. 

설마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건 아니겠지? 이런 걱정감으로 신이와 유인이를 보았다. 

그들은 밀대로 편의점 바닥을 닦고 있었다. 여자의 마음을 돌리기위한, 김희웅에게 잘 보이기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니까 조금전에 그 놈들.." 





말이 쉽게 튀어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알아듣는 듯 했다. 





"아, 고마웠어요. 도와주신거." 





여자의 말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니지, 우리가 도와주지 않고 그냥 나가버린건 기억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난 웬 떡인가 싶었다. 





"그런데 왜 다시 들어오셨어요?" 





그렇지만 떡같은 것이 그냥 굴러 들어올리는 없었다. 

귀밑까지 오는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자의 물음에 난 입을 다물었다. 

카운터 위에 놓여있는 노트 표지에는 아기자기한 글씨체로 "김희현"이라고 적혀있었다. 

여자의 노트이고 여자의 이름인것 같았다. 김희현. 참으로 예쁜 이름이다. 

내 이름보다 더.더.더. 


그때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을 통해 밖으로 배출해내었다. 





"아, 그게 바뻐서 나갔는데 생각해보니깐 그냥 가버리는건 도리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온거예요. 언니를 구하기위해서." 





정말 가식이 따로 없었다. 그렇지만 여자는 수줍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믿음을 표시했다. 

후훗, 이로써 여자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우리에게 찾아온 작은 위기 하나를 모면하는 순간이었다. 





"어서 오십시요!" 





여자에게 잘 보이기위해 큰소리로 외쳤는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아닌 약국에 갔던 김희웅이었다. 

뛰어갔다 온건지 얼굴에 땀이 한 바가지다. 





"누나, 이거 먹어." 





흰 약봉지를 여자에게 내밀며 말했다. 





"고마워." 





참 보기좋은 남매이다. 

여자가 약을 먹는 동안 김희웅은 청소중인 신이와 유인이를 보았다. 

그들의 행동을 이해못하는 얼굴이었다. 

내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녀석이 물었다. 





"여기서 뭐해요?" 





약간 무안한 질문이다. 





"희웅아, 날 구해준 친절한 분들이야."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어." 





내가 생각해도 그럴수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수는 없다. 





"저기 희웅군 할 말이 있는데 잠시 시간 좀 내주실수 있나요? 

아주 잠깐이면 돼요." 





나는 정중하게 시간을 청했다. 그에 여자는 동생에게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보면 볼수록 좋은 누나이다. 





"따라와요." 





김희웅은 마지못해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를 따라 나가려는데 내 손목을 붙잡는 여자다. 





"아직 여자친구는 없어요. 잘 해보세요." 





이 여자 뭔가를 오해해도 단단히 오해한듯 싶다. 

나는 편의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김희웅은 편의점 건물 벽에 기대고 서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섰다. 





"빨리 말해요." 





나랑 얘기하는게 싫은 건지 아님, 성격이 급한건지 알 수가 없다. 

뭐 나도 길게 말하는 건 귀찮으니까. 





"그럼 요점만 말할게요. 저희 조직에 들어와주세요. 김희웅군." 





정말 요점만 말했다.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편의점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단지 여러 자동차들만이 차도 위를 달릴 뿐이었고 밤 하늘 위 뿌연 달만이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은 마치 비가 올것처럼 느껴진다. 

김희웅의 표정은 뭐라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표정을 나는 곧 그의 말로써 이해할 수가 있었다. 





"사람을 잘못 보신것 같은데요. 전 김희웅이 아니라, 강희웅입니다." 





그때 편의점 앞을 지나가는 연인 한 쌍을 보았다. 

그들은 우리를 지나 앞으로 계속 걸어나갔다. 

다정하게 팔짱을 낀체.. 






♡26 





콰앙! 

이럴 수는 없다. 내가 다른 사람을 김희웅으로 착각하다니‥. 

나는 이름이 희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가 내가 찾던 김희웅인줄로만 알았다. 

허나 그 남자는 이름만 같을 뿐 성(姓)은 강씨였던 것이다. 

김희웅이 아니라, 강희웅이라니‥. 이런 실수가‥. 

난 급히 편의점 문을 열었다. 더이상 이 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어서 오십시." 




카운터 안에 서 있던 여자가 편의점 문이 열리자 인사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가 곧 나라는 것을 알자 끝을 맺지 않았다. 신이와 유인이는 여전히 밀대로 바닥을 닦고 있었다. 

도대체 몇 번이나 닦은 건지 바닥의 흰 타일에 내 얼굴이 비칠 정도다. 

난 유인이가 들고 있는 밀대의 중간을 잡고 뺏은 후 바닥에 내동댕이 쳐 버렸다. 

그러자 유인이가 바닥에 내팽겨쳐진 밀대를 내려다본 후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왜 그래?" 




신이가 하던 행동을(바닥을 닦는) 멈추고선 나에게 물었다. 




"당장 그만둬. 시간이 없어." 




나는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보았다. 두 눈을 크게 뜬 여자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신이에게 방금 내가 말한 것처럼 이 곳에서 괜한 시간을 허비한것 같다. 

월요일에 등교를 하려면 늦어도 내일 밤에 올라가야만 한다.(유인이가 무조건 학교에는 가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저 놈이 뭐래? 안 한데?" 




신이는 나의 좋지 못한 표정이 그렇게 해석된 모양이었다. 차라리 그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자에게서 신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신이가 들고 있는 밀대의 머리는 때구정물로 더러워져 있었다. 





"사람을 잘못 봤어. 김희웅이 아니야." 




내 말에 신이와 유인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의 입으로 말했듯이 그는 김희웅이 아니다. 




"그자식 이름이." 



"성이 강씨였어." 




난 신이가 무엇을 말하려는 지 알고 있었기에 끝까지 듣지 않은체 말을 가로막아 버렸다. 

신이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실망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왠지모를 울분이 가슴속에서 치솟아 오를 것이다. 나는 그랬다. 

아무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배신감이 밀려왔고 아무도 나를 비웃지 않았는데도 누군가가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니가 하는 일이 그럼 그렇지." 




타앗. 괜한 짓을 해버린 꼴이 된 신이는 들고 있던 밀대를 힘껏 던져버렸다. 

밀대는 카운터 바로 앞에 떨어졌다. 여자는 자신에게 던지는 줄로 착각한건지 몸이 굳어있었다. 

신이는 주저함도 없이 발머리에 힘을 실어 문을 찼다. 그러자 바람소리를 내며 문이 활짝 열렸다. 

유인이는 알아듣지 못할 말로 투덜거리며 신이를 따라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나도 뒤따라 가려는데 어느 정도 긴장을 푼 여자가 나에게 말했다. 




"왜요? 잘 안됐어요?" 




아까와는 다른 호기심어린 눈빛이다. 아마도 자신의 동생과 나의 진전을 말하는 듯 하다. 




"네. 잘 안됐어요." 




나는 대답을 했지만 여자의 질문 속에 내포된 것과는 전혀 다른 뜻의 대답이었다. 

여자는 동생대신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런.."하고 말하는 것 같다. 

난 여자가 또 무슨 헛소리라도 할까봐 발길을 재촉했다. 

"다음에 또 오세요."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내 귓바퀴를 타고 들어왔다. 

오기는 뭘 와? 난 대답대신 편의점 문을 세차게 닫아버렸다. 편의점 벽에는 강희웅이라는 녀석이 아직도 붙어있었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곧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피어대었다. 

얄미운 자식. 나는 놈을 째려본뒤 신이와 유인이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자기네들끼리 30m정도를 먼저 걸어가고 있었다. 앗! 왜 나만 두고 가는 거야?! 

설마 이 모든걸 내 탓으로 돌리려는 건 아니겠지? 

난 아이들과의 거리가 지금보다 더 멀어질새라 두 발을 힘껏 굴렸다. 




"같이 가!" 






********* 





달그락. 이것은 기계 동전주입구로 들어간 오백원이 기계 속 동전통에 떨어지는 소리이다. 

벌써 오천원째이다. 으~ 피같은 내 돈. 

이것들은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기계 속 인형(토끼,곰,코끼리인형 등등.)들은 어서 낚아보라는 듯이 

자신감을 내비쳤다.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이 녀석들은 제대로 뽑지도 못하면서 왜 자꾸 하는 거냐고! 신이와 유인이는 자신들에게 쓸데없이 청소를 시킨 

나에게 복수를 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니면 벌써 인형뽑기에 중독이 되었다거나 오기로 한다거나‥ 이 중에 하나다. 




"아, 잘 좀 해봐." 



"이거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유인이의 충고에 기계탓으로 돌리는 신이였다. 하는 것 하고는. 

난 녀석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자는 생각에 마지막 동전인 이백원을 동전주입구에 넣었다. 




"너도 하려고? 아서라." 




자기 주제는 모르고 나를 무시하는 신이의 발언이었다. 열쇠고리 한 개라도 뽑았음 내가 말을 안한다. 

난 유리상자 안에 들어있는 인형들을 두루 살펴보았다. 제일 뽑기 유리한 위치에 있는 녀석을 낚을 생각에서였다. 

그때 내 눈에 띤것은 단발머리의 작은 여자인형이었고 난 이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인형을 뽑기위해 정신을 집중시켰다. 이제 내 두 동공안에는 여자인형만이 가득 차 있다. 

집게가 위로 조금 올라갔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인형의 위에서 빨간 버튼을 누르니 집게가 점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온 신경을 집게와 인형에 곤두세우고 있는데 순간 인형과 여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 여자는 편의점 알바생이었다. 

집게가 인형의 팔과 허리를 감싸쥐자 카운터 위에 있던 노트가 떠올랐다. 

그리고 앞면에 적혀있던 이름. "김희현." 그녀가 남자아이의 친누나라는 것은 경찰들로 인해 확실시 되었었다. 

누나는 성이 김씨인데, 동생은 강씨이다? 

말이 안되는 소리였다. 혹 아빠가 서로 다르다면 말이 되겠지만 그래도 뭔가 의심스러운 냄새가 풍겨졌다. 

집게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인형이 출구에 도달하였다. 집게는 벌어졌고 인형은 떨어졌다. 

신이와 유인이의 감탄사와 함께‥. 





"우와! 대단하다. 시행착오없이 단 한번에 낚아올리다니!" 

"개소리, 너 나랑 다음에 낚시나 하러 가자." 




지금 내 머릿속에는 온통 편의점 여자와 그 동생의 얼굴뿐이었다. 

그렇기에 유인이와 신이의 말이 들어올 자리는 없었다. 난 인형을 꺼내들고 편의점을 향해 달려갔다. 




"쟤 지금 어디가냐?" 

"갑자기 신(神)들렸나봐." 




신이와 유인이는 그런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내가 점점 멀어져가자 그제서야 이상했는지 

내 뒤를 따라왔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난 편의점에 도착하자마자 김희현이라는 여자에게 동생의 이름과 학교를 물어볼 참이었다. 

밤은 어두웠지만 이 순간만큼은 낮처럼 밝기만 했다. 내 가슴속에 태양이 자리잡은 것 같았다. 

내가 힘든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들뜬 마음에 도착한 이 곳은 편의점. 

내가 문을 열었을 땐 자신이 강희웅이라고 밝혔던 남자는 온데간데 없었다. 

심지어 편의점 벽에도. 대신 여자가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또 오셨네요?" 




여자는 꽤나 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인가 보다. 

하긴 내 미모는 그만큼 월등하니까. 아, 지금 자만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들고 있던 인형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인형을 바라보는 김희현이었다. 




"예쁜 인형이네요." 




이번에도 웃으며 말을 했다. 난 그 웃음을 받으며 준비했던 멘트를 서슴없이 날렸다. 

그때 신이와 유인이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가지세요!" 




내가 말하자 미소 짓는 김희현과는 달리 인상을 찌푸리는 두 사람이었다. 




"너 그 인형 주려고 여기까지 다시 온거냐?" 




신이가 한심하다는 투로 물었지만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김희현이 두 손으로 인형을 잡아들었다. 




"고마워요." 




고맙기는, 그 인형이랑 당신 동생이랑 바꾸자는 거야. 

하지만 김희현에게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난 내 예감이 맞기를 바라며 여자에게 물었다. 




"언니 동생말이예요. 이름이 뭔지 알고 싶은데." 



"아하! 뇌물?" 




인형을 가리키며 윙크를 해보이는 여자다. 뇌물이라니‥. 

또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김희현은 마치 귀여운 강아지라도 보는 듯이 나를 보며 킥킥대었다. 

주먹으로 분홍 입술을 가리면서. 

잠시후 입에서 손을 떼더니 내 물음에 답해주었다. 




"희웅이예요. 김희웅." 




역시! 놈은 나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건방진 놈 같으니‥. 

말그대로 건방지기 짝이 없었지만 난 그냥 귀엽게 봐주기로 했다. 자비를 베풀기로 한것이다. 




"B고 다니죠?" 



"어머! 그걸 어떻게." 




김희현은 놀란 얼굴을 해보였다. 이로써 그녀는 내가 진작부터 자신의 동생을 짝사랑했다는 걸로 생각할 터였다. 




"뭐야? 그럼 그자식이 맞았다는 거야?" 




이를 듣고만 있던 신이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또 무시해버렸다. 




"지금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있을까요?"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그에 여자는 골똘히 생각하는 가 싶더니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PC방에 

있을 거라고 했다. PC방. 여느 고등학생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 오락실이나 당구장, 호프집보단 

PC방이 건전하지. 




"PC방이 정확히 어디에 있죠?" 




내가 물었고 여자가 대답했다. 




"저도 잘 몰라요." 




‥‥그리하여 우리 셋은 지금 편의점 근처에 위치한 PC방이라는 PC방을 다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인천 시내에 PC방은 왜 이리도 많은 건지. 벌써 5군데를 들어갔다가 나왔는데도 몇 개나 더 보였다. 

우리들은 짜증스러움과 답답함에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심지어 배까지 고팠으니 오죽했겠는가. 

결국 우리는 도중 하차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다시 편의점으로 돌아가기로 한것이다. 

누나를 생각하는 동생이니 다시 편의점으로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만약, 오지 않는다하더라도 집으로 찾아가면 되는 거니까 그리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언니, 희웅이 왔어요?" 



"아니, 안 왔는데요. 왜요? 못 찾으셨어요?" 




편의점에 도착했을때 김희현은 두르고 있던 앞치마(유니폼)를 벗고 있었다. 

옆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껌을 씹으며 나를 보고 있다. 아마 교대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럼 우리 집으로 가요. 희웅이 곧 올거예요." 




역시 내 예상대로 여자는 착하고 순진하기까지 했다. 난 흔쾌히 좋다고 하였다. 

김희현을 따라 버스를 타고 간 곳은 꽤 높은 지대였다. 계단은 없었지만 콘크리트로 된 오르막길이 높기만 했다. 

어느 정도 올라가다보니 한옥집이 여러채 보였다. 김희현은 벽이 빛바랜 파란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지붕은 빨간색이었다. 

들어오라는 그녀의 말에 따라 우리가 들어간 집은 한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그리고 어둠. 

김희현이 마루 위에 매달려 있는 전구를 켜자 마당이 어느 정도 환해지기 시작했다. 

수돗가에 있는 비누통 하나와 세숫대야 한 개. 그리고 조그만 아령 두 개와 훌라후프가 전부였다. 

우리는 마루에 올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이 곳엔 이들의 부모님이 안 계신듯 했다. 




"배고프죠? 조금만 기다려요." 




라고 말하곤 방에서 나가는 여자였다. 아마 밥을 차리러 가는 것 같았다. 

괜히 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녀석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밥 좀 많이 줬으면 좋겠다." 

"난 맛있는 반찬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김희현이 차려온 밥상은 화려한 진수성찬이 아닌 소박한 밥상이었다. 

그래도 우리들은 맛있게 먹어주었다. 그만큼 배가 고팠기에. 

그렇게 집에 온지도 2시간이 훌쩍 넘었다. 슬슬 잠이 오려고 하는데 놈은 왜 이리도 안 오는 건지‥. 

인내심이 점점 바닥을 드러낼 참이었다. 

철컹. 그때 대문이 열리고 이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희웅인것 같았고 또 김희웅이길 바랬다. 




"왔네요." 




밖을 내다보던 여자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드디어 김희웅이 모습을 나타내었다. 녀석은 방안에 떡하니 앉아있는 우리를 보곤 꽤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 인상이 굳어졌다. 




"늦었네?" 




내가 이겼지?하는 표정으로 김희웅에게 물었다. 




"나가." 




하지만 녀석의 대답은 서쪽으로 새어나갔다. 




"손님한테 거짓말을 하면 쓰나?" 




신이가 입을 열었다. 유인이는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 희웅아, 이야기라도 들어봐. 너 밥 안 먹었지? 밥 차려줄게." 




나에게 윙크를 해보이더니 부엌으로 가버리는 김희현이다. 고백하라는 것 같았다. 

오해를 해도 아주 단단히 한게 틀림없다. 하긴, 그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자세를 바로하고 앉았다. 정중하게 말이다. 그래도 난 엄연히 부탁을 하러 온 사람이었기에 말이다. 




"김희웅. 니 힘이 필요해. 제발 우리 조직에 들어와줘." 




김희웅은 여전히 성난 얼굴이었다. 그가 말했다. 




"너희들도 뉴스를 보고 온거겠지. 말 안해도 다 알아. 

인천에 있는 많은 조직들이 나에게 들어올 것을 권했어. 하지만 내 대답은 한결같았지." 




우리는 김희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대문 밖에선 동네 개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싫어." 




그리고 그것이 대답이었다. 김희웅의 눈빛은 진지하기만 했다. 

왠지 더이상 부탁할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난 우리 누나랑 그냥 행복하게 살고 싶어. 날 좀 내버려둬. 

하‥, 이럴줄 알았음 그자식 잡는 게 아니였는데‥." 




고개를 떨구는 김희웅이었다. 난 조용히 노란 장판 위에서 일어났다. 





♡27 






한 아이가 도화지 위에 검은 물감을 쏟아버렸다. 

도화지는 곧 검게 물들었고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것만 같았다. 

그런 아이를 보며 아이의 아버지는 큰 붓에 노란 물감을 묻힌 후 검게 물든 도화지 한 켠에 노란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아이는 아버지의 이상한 행동에 눈물을 머금고 도화지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도화지 위의 노란 점 하나. 

아이의 아버지가 자상하게 이야기했다. 




"잘 보렴. 이 노란 점이 도화지를 밝혀주고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이 검은 도화지는 까만 밤하늘이고 이 노란 점은 밤을 환하게 밝혀주는 달이라고 말이야. 

우리는 지금 밤을 그린거란다." 




그랬다. 남자의 말처럼 노란 점은 검게 물든 도화지의 작은 빛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나에게 있어 달같은 존재였다. 


인천 하늘에도 달은 있었다. 




"이대로 포기할거냐? 여기까지 와서." 




나는 김희웅의 눈빛을 보자 그를 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이상 그를 귀찮게 하기는 싫었다. 

탈옥범을 잡았던 자신의 정의까지 후회하는 녀석을 보자, 내 마음이 그만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게 김희웅의 집에서 순순히 내가 나온 이유였다. 




"설마 진짜 놈을 포기하려는 건 아니지?" 




신이는 나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 법. 




"하기 싫다잖아." 




내 대답은 아주 단순했다. 이런 내 말에 신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만 볼 뿐이었다. 

마치 정지된 인형처럼‥. 

유인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허탈한 한숨소리였다. 이들은 내가 이렇게 쉽게 물러설 줄이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 꿈을 위해 타인의 꿈을 무참히 밟아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김희웅이 그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난들 어쩔수가 있었겠는가. 

난 눈앞에 펼쳐진 내리막길을 바라보았다. 속력을 내어 뛰어갈까? 그냥 걸어갈까? 

순간 이런 불필요한 고민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마치 가지말라고 내 몸이 이야기하는 듯 하다. 


쾅! 대문이 저절로 열렸다. 

김희웅의 한옥집 대문. 그리고 누군가 다급히 튀어나왔다. 뒤도 안 보고 달려간다. 

내리막길이라 빠른 속도로 질주해나갔다. 




"저자식, 어디 가는거야?" 

"글쎄‥." 




신이와 유인이가 어리둥절해 하며 달려가는 김희웅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약 5초동안 아무 생각도 들지가 않았다. 

아니, 내 머리속에 생각이란게 존재하지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텅텅 비어있는 깡통처럼. 




"뭐해? 안 따라갈거야?" 




하지만 내 어깨를 흔드는 신이의 말에 제정신이 들었다. 김희웅의 요란한 뜀박질소리도 내 귓속으로 들어왔다. 

왜 갑자기 달리는 걸까? 어디로 가는 거지?하는 의문이 이제서야 들었다. 

그의 뒷모습은 왠지모르게 침체된 어떤 오로라(*극광)로 둘러쌓여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달렸다. 그리고 두 아이들로 달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떨어지지 않던 발이 김희웅을 보자 떨어진 것이다. 

이는 내 마음 한 켠에선 놈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빠른 속력으로 인해 바람이 생겼다. 

바람은 내 콧속으로 들어왔고, 눈 속으로도 들어왔다. 두 귀는 스쳐 지나갔다. 

김희웅은 내리막길을 벗어나 차도 옆 인도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간판에 불이 들어온 곳은 거의가 유흥업소였다. 

5분을 넘게 달렸다. 아니, 10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김희웅이 몸을 틀어 들어간 곳은 3층이 당구장인 

조금 허름한 건물이었다. 우리 셋은 간판을 다시 확인한후 주위를 살피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인천 K당구장.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담배연기가 자옥하게 낀것이 무슨 사우나실 안개를 연상케 했다. 

야간 알바생은 카운터에 앉아 졸고 있기에 바뻤다. 김희웅은 당구 큣대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큣대를 무기 잡듯이 잡은 그의 야무진 손은 당구를 치러 온 사람처럼은 보이지가 않았다. 

구대 두 군데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남자들이 게임을 멈추고 김희웅을 보았다. 

(우리는 여전히 문 틈새로 엿보고 있었다.) 

조명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남자들의 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분위기는 험악하고 긴장감이 흘렀다. 




"싸움이라도 날것 같은 분위긴데?" 

"나도 지금 그렇게 생각했어." 




(허리를 약간 숙이고 지켜보던)신이와 (쭈그리고 앉아 지켜보던)유인이가 서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무작정 끼어들 수는 없는 문제였다. 

나는 문 안으로 귀를 기울였다. 




"전화하지 마세요." 




김희웅이 긴장감 속에서 첫마디를 내뱉었다. "전화하지 마세요."라‥. 

그렇다는 건 저 중 김희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단정 지을 수가 있다. 

그리고 당구장 안에서 여자 냄새는 전혀 풍기지가 않았다. 김희웅을 사랑하는 남자라‥. 

여기서 나는 알 수가 있었다. 나의 터무니없는 짐작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왜 저들이 김희웅에게 자주 전화를 거는 것일까? 저들의 대화를 더 듣지않는 단엔 알 수가 없었다. 




"네가 우리 말을 받아준다면 우리가 그렇게 전화 걸 일은 없잖아. 그래, 생각은 해봤나?" 




한 남자가 큣대로 당구공을 쳐내며 말했다.(무슨 색 공을 쳤는 지는 보이지가 않았다.) 

엉덩이를 내밀고 한쪽 팔을 쭉 편것이 폼은 났지만 그리 멋있지는 않았다. 

남자의 말로 미루어보아 그들은 우리와 같은 처지인것 같았다. 김희웅을 얻으려는. 

내 예상이 맞다면 저들도 조폭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 생각따위를 할 시간은 없어요." 


"변함이 없다는 건가? 후회하게 될텐데." 


"당신들과 손 잡는 그 순간부터 난 후회하며 땅을 칠거예요." 




김희웅은 냉정함을 유지했다. 그는 그 어떤 조직에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다른 놈들에게 양보하려고 녀석을 포기한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남자는 허리를 펴고 김희웅을 노려보았다. 

어깨가 꽤 넓은 사내였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계집년 목소리가 참 예쁘던데. 네 누나냐?" 




김희웅이 흔들렸다. 




"저새끼, 지금 협박하는 거냐?"라고 말하는 신이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삼류영화같은 남자의 발언이었지만 사람의 심리를 잘 이용한 예였다. 

아무리 굳건하고 냉정한 인간일지라도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면 거대한 돌더미가 무너지듯 

철저히 무너져 내리고 말것이다. 남자는 김희웅에겐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중한 가족이 누나 단 한 사람뿐이라는 것도‥. 




"우리 누나한테 눈길이라도 줬다간 절대 가만 두지 않을거야." 




김희웅은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며 경고를 하였다. 

하지만 그런 경고따윈 남자들에겐 코흘리개 꼬마의 삿대질정도로 밖에 보여지지가 않을 것이었다. 

그들은 다시 당구게임에 열중하였다. 남자가 대표로 김희웅에게 물었다. 




"김희현. 아주 예쁜 이름이야." 


"개새꺄, 닥쳐!" 




휘익-. 김희웅은 사냥꾼에게 덤벼드는 한 마리의 치타와도 같았다. 난 지금의 저 아이를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 

이성을 잃은 치타. 그것은 김희웅이었다. 들고 있던 큣대를 서슴없이 남자에게 날리는 김희웅은 무척이나 빨랐다. 

그랬기에 남자는 가슴을 맞고 구대위에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남자는 가슴을 움켜쥐고서 대항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가슴의 통증이 심한듯 해보였다. 




"저 개새끼가!" 




그렇다 해도 동지가 무엇인가. 남자와 당구를 함께 치던 이들이 동지애를 발휘하여 김희웅에게 떼거지로 달려들었다. 

난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소란에 자고 있던 알바생이 깨어났다. 20대 초반같은 꽤 어려보이는 남자다. 

알바생은 당황을 금치못하더니 카운터 안으로 고갤 숙여 숨어버렸다. 그의 손엔 핸드폰(폴더)이 쥐어있었다. 

신이와 유인이는 싸움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김희웅은 정말 잘 싸워주고 있었다. 

쿵! 한 녀석이 집어던진 빨간 당구공이 우리쪽으로 날아와 문에 튕겨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를 표적으로 한 공이 아니었다. 표적은 김희웅이었고 그것을 김희웅이 피하는 바람에 

우리가 숨어있던 입구로 날아온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셋은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들킨줄 알았으니까. 




"안 들어가도 되겠냐? 저자식 맞고 있는데." 




신이의 말대로 힘이 부축였던 김희웅은 남자들에게 맞고 있었다. 다행이도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다. 




"괜찮아. 우리가 굳이 도와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곧있음 경찰들이 들이닥칠테니까." 

"경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난 봤으니까. 기특한 알바생 녀석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거는 것을. 

그건 분명 경찰서였을 것이다. 알바생은 그만큼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다 아는 수가 있지. 우린 그저 때를 봐서 김희웅을 피신시키면 되는거야." 




신이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못 믿겠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상한 사람 보듯이 말이다. 

이제 슬슬 경찰이 올때가 됐다. 김희웅은 마지막까지 잘 버텨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후 내 말이 정말이라고 말해주듯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난 경찰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당구장 문을 열었다. 콰앙! 




"김희웅! 경찰이야. 빨리 나와!!" 




김희웅과 남자들은 싸움에 반쯤 미쳐 내가 문여는 소리를 듣진 못했지만 나의 고함소리만은 들은 눈치였다. 

모두들 나에게 시선을 주목시켰다. 나는 김희웅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어딜!" 




그러자 덩치가 큰 녀석이 김희웅의 앞을 가로막았다. 빠져 나올 수없는 상황이다. 

곧있음 건물 안으로 경찰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시간이 촉박했다. 

그랬기에 난 바닥에 있던 빨간 당구공(보이는 대로.)을 집어들었고 덩치 큰 남자를 향해 힘껏 던져버렸다. 

빨간 당구공은 무섭게 날아가 남자의 뒷통수로 정확히 떨어졌다. 




"악!" 




당구공이 만만치않은 무게였기에 남자는 머리를 감싸며 쓰러졌고 그 틈을 이용해 김희웅이 입구로 달려왔다. 

경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건물 안으로 들어올것 같았다. 나는 김희웅이 입구를 빠져 나오자마자 

문을 닫아버렸다. 남자들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또 경찰들이 이들을 발견하도록 시간을 벌기위해서 였다. 




"옥상으로 올라가!" 




난 큰소리로 소리쳤다. 그리고 경찰들이 건물로 들어섰다. 





♡28 






"갔어?" 


"응. 간것 같은데?" 




현재 상황을 살펴 보러 간 유인이가 반가운 소식을 안고 돌아왔다. 유인이의 말대로 옥상아래에선 

김희웅과 싸움을 벌이던 남자들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고 있었다. 뭐 그래봤자 조사후 곧 풀려나겠지만. 

내가 옥상아래에서 시선을 떼어 고개를 들었을때 도시의 불빛들이 여기저기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어느 곳이든 밤의 풍경은 아름답기만 했다. 그래서 나는 밤이 좋았다. 이 밤공기도. 




"그 놈들은 뭐냐?" 




옥상주위를 막고 있는 낮은 담장에 나란히 기대어 앉아있던 신이와 김희웅. 

어느새 담배 한 대를 손에 든 신이가 김희웅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이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으며 담배에 라이터 불을 붙였다. 나는 다시 밤 풍경에 빠져 들었다. 

태기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민규는 또 공부중이겠지? 

훗, 그래도 가족이라고 녀석들의 얼굴이 밤하늘에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전화도 한 통 해주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 그게 아니지. 이것들은 형님이 무사히 도착을 했는지 전화를 해야 할거 아냐?! 

갑자기 솟아오르는 열로 인해 태기와 민규의 얼굴이 불길에 타버렸다. 




"전 도와달라고 한적 없어요." 




드디어 김희웅이 입술을 떼었다. 뒤늦게 입을 연 그였지만 신이의 질문과는 전혀 무관하였다. 

유인이는 자기 혼자 옥상문 옆에 앉아있었다. 우리가 꼭 따돌리는 것처럼.(왕따처럼.) 




"걱정마. 들어오란 소리 안할테니까." 




난 김희웅이 부담스러워 하지않게 안심시켜주었다.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은 쓰라려 왔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으니 말이다. 김희웅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에 난 살짝 웃어주었다. 




"제가 조직에 들어간다고 해서 뭐가 바뀌죠? 어차피 도움도 안될텐데." 




김희웅의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주위가 깜깜한 탓일것이다. 

참 순하게 생긴 아이이다. 이런 아이가 과연 손에 칼을 쥘수가 있을까? 역시 포기하기를 잘 한것 같다. 




"그건 조직에서 결정하는 거야. 

지금은 네 명성만으로 널 영입하고 싶어하지만 그 다음 네가 잘하고 못하고는 조직에서 하기 나름이지. 

너처럼 어린 녀석들은 그 어떤 놈들과도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조직에서 능력것 단련시키고 만들어야만 되는 거야. 

다른 조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쓰래빠는 그래." 


"쓰래빠요?" 




김희웅이 물었다. 높은 곳이어서 그런지 초여름 밤도 춥기만 했다. 한기가 돈다. 




"그래. 촌스럽지만 우리 조직 이름이야." 




나대신 신이가 대답해주었다. 그리 썩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다. 망할 신발같으니. 




"하지만 전 아직 고등학생이예요." 


"그럼 우리는 무슨 노땅이냐?" 




아직 이해가 안 간다는 김희웅의 물음에 신이가 발끈하며 반문했다. 

고등학생‥ 그렇지. 아직 우리는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 아이들이다. 




"우리도 고등학생이야. 너보다는 한 살 많지만." 




김희웅은 놀란것 같았다. 우리 셋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이래봐도 이녀석들 서울에서 꽤나 알아주는 애들이야." 




이렇게 말하면서도 왠지모르게 뿌듯함을 느꼈다. 

두 사람 모두 나와 한 배를 탄 사람들이기에 더없이 좋기만 했다. 

이 배에 김희웅도 함께 탔으면 좋으련만. 




"그렇군요. 흠. 이만 가봐야겠어요." 




역시 기대는 일찌감치 하지 않는게 좋을 듯 싶다. 김희웅은 바닥에서 일어나 바지를 털었다. 

그리곤 옥상문이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우리는 그저 가만히 보기만 했다. 

옥상문 옆에서 입술을 다문체 앉아있던 유인이가 가까워진 김희웅에게 한마디했다. 




"좋은 녀석이야." 




누구를 가리킨 말인지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좋은 녀석이란게 난지, 새신인지, 아님 김희웅인지. 

뭐 개인적으로 나였으면 좋겠지만. 어쨋든 김희웅은 옥상문 앞에서 멈쳐섰고 뒤를 돌아보며 나에게 말했다. 




"아깐 고마웠어요. 괜찮다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세요. 서울에서 오신것 같은데." 




지금만큼은 김희웅을 좋은 녀석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의 말에 우리 세사람은 미소를 띠울 수밖에 없었다. 

유인이는 바닥에서 일어나 김희웅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신이는 나를 보며 웃었다. 

잘은 모르지만 하늘의 달도 같이 웃었을 것이다. 






******** 






김희웅의 집에는 방이 2칸있었고 부엌이 하나 따로 있었다. 

나는 여자이므로 김희현과 아니 언니와 한 방에 누웠고 녀석들은 김희웅의 방으로 갔다. 

괜시리 이 집에 방이 한 칸만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후우. 오늘 밤은 잠이 안 올것만 같다. 불을 꺼버린 방안은 컴컴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난 가위라도 눌릴까봐 몸을 옆으로 돌아누웠다. 기척소리에 언니가 깼는지 나에게 말했다. 

(어쩌면 나와 마찬가지로 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희웅이 참 귀엽죠?"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건지 대충 알것 같기도 하다. 




"네. 귀엽네요." 




조금 귀여운 면도 있는 것 같았기에 그냥 귀엽다고 해두었다. 이어 나는 언니에게 편하게 말을 놓으라고 했다. 

그러자 금새 말을 놓는 언니였다. 




"희웅이는 부모님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 




가족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좋은 정보가 될지도 모른다. 아차. 이젠 필요도 없게 되었지만. 




"엄마는 희웅일 낳자마자 돌아가셨거든." 



"아버지는요?" 



"아빠는 내가 5살때 다른 여자와 도망가버렸어. 희웅이가 뱃속에 있을 때였지. 

엄마가 돌아가시자 외할머니께서 우리를 맡아 기르셨어. 그 분도 작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언니의 이야기는 이 밤을 더욱더 고요하게 만들었다. 김희웅이 누나를 아낄만 했다. 




"힘드셨겠어요." 



"힘들긴, 난 우리 희웅이만 보면 힘이 쏟는 걸. 멋지게 잘 자라고 있잖아. 

희웅이가 20살이 되면 그때 연예인이나 한번 시켜보려구. 호호. 어때? 인기 많이 끌겠지?" 




그 진지하던 분위기가 금새 붕 떠버렸다. 연예인이라니‥. 

이 언니도 꽤나 괴짜인것 같다. 하긴, 내가 자신의 동생을 좋아한다고 오해하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겠지만. 




"우리 희웅이 잘 좀 부탁할게. 집에 데려온 여자는 네가 처음이거든. 

네가 꽤 마음에 들었나봐." 




이봐요. 저만 데려온게 아니거든요? 이 여자에게 신이와 유인이는 투명인간같은 존재인가보다. 




"아무쪼록 잘 부탁해‥." 




여자의 목소리엔 피곤함이 흠뻑 묻어있었다. 그렇게 여자는 잠이 든것 같았다. 

마지막에 잘 부탁한다는 그 말‥ 그 말이 왠지 이상하게도 머리속에 박혀버린것만 같은 기분이다. 

다음날 우리는 아무 수확도 거두지 못한체 서울로 올라왔다. 아, 김희웅의 배웅을 받으면서 말이다. 

포기는 했지만 김희웅을 두고 오기싫었던 난 내 연락처를 남겨두고 왔다. 혹시나 생각이 바뀌면 전화하라고‥. 

신이는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 동안 우리는 학교생활을 착실히 해나가며 실력을 늘이는데 열중해왔다. 

튼튼한 체력을 위해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건 이틀전에 민규와 태기가 대구로 갔다는 것이다. 

그곳에 있는 꼴통녀석을 만나기위해서였다. 

강호두. 

그녀석의 이름이다. 태기의 조사에 의하면 교내 팔씨름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거머쥐었다고 했다. 

태기는 팔뚝이 굵은 것만은 확실하다고 했다. 태기의 조사는 언제나 허술했다. 

어쨋든 이번엔 꼭 성공해야 할텐데‥ 걱정이다. 


쒸익- 툭. 

30분째 정원에서 과녁맞추기에 열심인 신이와 유인이였다. 과녁맞추기가 취미생활 중 하나였던 신이는 

언제나 정 중앙에 꽂곤 했다. 그의 실력은 백발백중이다. 유인이도 어느 정도 잘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저 조그만 화살이 표창이나 단검으로 변할 것이다. 그들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난 신이, 유인이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찌글이와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이젠 찌글이도 대소변을 잘 가리는 편이었다. 내 바람대로 변기에 누지는 못했지만. 




"또 풀 뜯어먹냐?" 




난 신발 끝으로 찌글이의 엉덩이를 살짝 찔러대었다. 

그래도 그것에 구애받지 않고 열심히 풀을 뜯어대는 개새끼(찌글이)였다. 하긴, 나무를 뽑지않는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Rrrr. 그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오랜만에 울려대는 핸드폰이었다. 

난 태기나 민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액정에 뜬 번호는 처음 보는 번호였다. 난 폴더를 열어 전화를 받았다. 




"네. 누구세요?" 




전화 건너편은 사람의 숨소리로 가득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예요. 김희웅." 




김희웅? 인천에 있는? 왠지 좋은 소식일거란 생각에 재빨리 대꾸해주었다. 녀석, 생각이 바뀐거가? 




"응. 말해." 


"‥도와주세요." 




조금 주저하는 듯 했지만 말을 잇는 김희웅이었다. 




"저희 누나가‥ 저희 누나가 놈들한테 잡혀갔어요. 

저 혼자선 무리예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희 누나 좀 구해주세요." 




납치인가‥? 




"놈들이라니, 누구?" 



"배고파. 그때 당구장에서 그놈들." 




배고파라면 인천을 잡고 있다던‥. 특이한 조직이름에 태기와 한참을 웃었던 그 조직? 




"기다려. 곧 갈게." 




예상을 못한건 아니지만 정말 일어날 줄이야. 놈들은 김희웅이 자신의 조직에 들어오지 않자 

협박을 하기위해 그의 누나 김희현을 납치한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포악한 자들이라면 그녀가 위험할지도 모른다. 

덩달아 김희웅까지도‥. 난 전화를 끊자마자 집에서 뛰쳐나왔다. 신이와 유인이는 여전히 과녁맞추기에 여념이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김희웅. 절대 너 혼자 가서는 안돼. 







♡29 





"형님, 어디 가십니까?" 




급히 대문을 열고 나오니 차 보닛에 기대어 서 있는 부하와 마주쳤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칼, 그리고 멋으로 기른 턱수염과 콧수염까지 갈색인 20대 중반의 남자였다. 

자세히 얘기하자면 25살, 부하3 오노(별칭)이다. 별명이 오노라고 해서 미국 쇼트트랙 선수인 아폴로 안톤 오노를 

닮았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사람처럼 얍삽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차라리 잘됐다 싶어 

냉큼 앞자리에 올라탔다. 물론, 운전석은 아니다.(미성년자를 떠나 운전을 못하므로.) 

난 차창을 열고 오노에게 외쳤다. 




"빨리 타! 갈데가 있어." 




그러자 이유도 묻지않고 옆자리(운전석)에 앉는 부하3, 오노였다. 

오노는 시동을 건후에야 어디 가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난 인천이라고 단답형으로 말해주었다. 




"인천요? 거긴 왜‥." 


"갈거야, 말거야?!" 




마음이 너무나도 급하기만 했던 나였기에 소리부터 질러버렸다. 오노의 얼굴에 무안함이 서려있었다. 

나도 조금 무안했다. 




"당연히 가야죠. 형님 명령이신데‥." 




기어를 바꾸고 엑세레이트를 밟았다. 검은 차는 곧 출발했다. 차종은 페라리였다. 

차 뚜껑에 흰 스프레이로 페라리(Ferrari)라고 쓰여져 있는. 그렇게 무늬만 페라리인 우리의 자동차는 

인천을 향해 달려갔고 난 계속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김희웅이 섣불리 행동할까봐, 그래서 아까운 사람을 

잃기라도 할까봐. 머리속에 거미줄이 쳐진것만 같았다. 그것도 마구 복잡하게-. 


Rrrrr. 자동차가 서울을 벗어났을때 핸드폰이 울렸다. 난 김희웅에 대한 걱정때문에 전화소리를 듣지 못했다. 




"형님, 전화왔습니다." 




오노가 가르쳐 줬을때야 비로소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는 김희웅이 아닌, 태기였다. 

민규와 대구에 가있는‥. 




"형님! 뭐하십니까?" 




우렁찬 목소리였다. 힘이 넘쳤다. 




"그냥 있어."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는 않았다.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시간에 결정한 판단이었다. 어쩌면 어리석었을 지도 모른다. 




"너희는 어떻게 됐어?" 



"아, 그게 강호두 그녀석이 완전 쥐새끼여서요. 찾기가 여간 힘든게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은 뭐하는 거야?"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속이 뒤틀릴 것만 같았다. 




"잠복근무 중이죠. 그냥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 빨리 찾아." 



"네?" 



"실패하지 말라고! 그냥 왔다간 둘 다 죽을 줄 알아!!" 




탁. 막무가내로 전화를 끊어버리고 닫아던 창문을 내렸다. 바람이 내 얼굴을 때리고 차안으로 들어왔다. 

이제야 조금 답답함이 가셨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태기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건 없었는데 말이다. 

힐끔 쳐다본 오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핸들을 꽉 잡고서 앞만 바라보았다. 난 핸드폰을 보았다. 

태기에게 다시 전화를 걸려니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결국 주머니에 넣고 말았다.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해가 산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밤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끼이익-. 자동차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 김희웅의 집앞에 멈쳤다. 오노가 먼저 내려 문을 열어주려 했지만 

그 전에 내가 내려버렸다.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다. 오노는 나를 따라오려 했지만 난 그냥 차안에서 기다리라 말했다. 

김희웅의 집, 감색대문은 긴장감없는 모습으로 활짝 열려있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한 켠에 있던 세숫대야가 대문과 가까운 곳에 뒤집어진체 죽도와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방문도 열려있었다. 김희웅은 마루에 앉아 고개를 숙인체 해잃은 해바라기마냥 앉아있었다. 

나는 죽도를 주워들어 김희웅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선후 죽도를 내밀었다. 그러자 고개를 드는 김희웅이다. 

녀석의 눈엔 그날밤 옥상에서 보았던 빛(생기)이 없었다. 마치 생명을 잃은 눈동자와도 같았다. 

하지만 울것 같지는 않았다. 




"오셨네요." 




힘없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누나는?" 




없는 줄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할 말이 없어 그냥 물어보았다. 

살짝 방안을 들여다보니 물건들이 엉망진창으로 방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놈들의 흔적이었다. 

방바닥엔 내가 언니에게 주었던 단발머리 인형도 있었다. 




"놈들이 데려갔어요.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넋빠진 모습이었다. 거의 50%정도는 포기하고 있는 눈치였다. 망연자실. 

하지만 벌써 포기하기엔 너무 이르기만 하다. 




"너희 누나 죽었냐?" 




거친 내 말투에 김희웅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재수없는 말이란건 알지만 녀석을 위해서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해오던 존댓말이 아닌 반말이었다. 대충 파악한 결과 김희웅은 자기보다 나이많은 사라에겐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다. 

하지만 화가 났을땐 그 바르던 예의는 사라지고 불 타오르는 듯한 강력한 눈빛만이 남았다. 

그때 신이, 유인이와 함께 자신의 집에 찾아왔을 때도 그랬다. 그래도 아까의 그 생기없는 눈빛보단 지금이 나았다. 




"무슨 소리긴, 내가 묻잖아. 너희 누나 죽었냐고." 



"죽긴 누가 죽어!" 




벌떡. 마루에서 일어서는 그였다. 나를 매섭게 노려보기까지 하면서. 

그 눈빛에 빨려 들어갈것만 같았다. 나는 보일듯 말듯 희미하게 웃으며 녀석에게 죽도를 다시 한번 내밀었다. 

그리곤 말했다. 




"그럼 구하러 가야지. 뭐하고 있는거야." 




나를 노려보던 김희웅의 눈빛이 사르르 풀리기 시작했다. 죽도를 내려다보았다. 




"구할수 있을까‥?" 




그가 물었다. 




"구할수 있어. 너 자신을 믿어." 




나도 알고 있다. 자신을 믿는다고 해서 이길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니 상대가 약하다면 이길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그들이 인천 최대의 조직이라면 솔직히‥. 




"난 그렇게 어리석지가 않아요." 




김희웅도 알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넋놓고만 있을거야? 도와달라며." 



"누나‥." 



"내가 도와줄게. 같이 가." 




죽도가 내 손에서 천천히 빠져나감을 느꼈다. 김희웅이 죽도를 잡은 것이다. 




"누나, 당장 가요!" 




너무 힘을 실어 준것 같다. 김희웅은 죽도를 쥐고서 대문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마음만 앞선 것이다. 

나는 녀석의 목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김희웅은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앗! 누나, 왜 그러세요?" 



"너 어딘지는 알고 가냐?"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다. 용기 충전 만땅으로 가득 찼던 녀석의 얼굴이 좌절로 바뀌었다. 

그랬다. 김희웅은 자신의 누나가 어디에 잡혀있는 지도 몰랐던 것이다. 다시 마루에 주저앉았다. 




"그럼 이제 어떡하죠?" 



"걱정마. 놈들이 원하는 게 김희현이 아니라, 너라면 반드시 전화가 올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리자고." 




내 말을 들은 김희웅의 얼굴엔 다시금 혈색이 돌았다. 김희웅, 알고 보면 단순한 녀석일지도. 

우리 둘은 마루에 앉아 멍하니 전화만 기다렸다. 오늘따라 달이 보이지가 않았다. 출근을 안 한 모양이다. 




"누나가 그렇게도 좋냐?" 




마루에 앉아 전화를 기다린지 3시간즈음 지났을 무렵 내가 물었다. 뻔한 질문이었지만 너무 고요해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될것 같았다. 김희웅은 똑바로 세운 죽도를 바라봤다. 




"제 은인이예요. 전 그 은혜를 꼭 갚아야만 하죠." 



"은혜?" 



"네. 누나가 절 키워줬거든요." 



"너희 누나가 들으면 섭섭해 하겠다. 가족은 원래 그런거야. 서로 서로 돕고 사는거지. 아무런 조건없이." 




난 너무나도 아름다운 말을 해주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도 나에게 조건없는 사람을 해주셨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부모도 그럴거라 믿는다. 




"가족‥ 맞아요. 누나는 저에게 있어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어요." 




김희웅은 슬픈 눈으로 미소지었다. Rrrr. 깜짝이야. 우리 두 사람의 가슴을 들석일 정도로 큰 벨소리가 마당에 울려퍼졌다. 

김희웅의 핸드폰 벨소리였다. 우린 서로를 마주 보며 침을 삼켰다. 마음을 가다듬기위해서 였다.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대는 녀석이다. 




"여보세요."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한건지 김희웅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김희현을 붙잡아두고 있는 그 배고파 일당이 틀림없을 터였다. 

난 전화내용을 들을 수 없는 대신 김희웅의 표정을 살폈다. 




"거기 어디야?" 




눈썹과 눈 중앙에 힘이 쏠렸다. 인상을 써서 주름이 생겼다. 




"개새끼들, 우리 누나한테 손끝 하나 대봐, 다 죽여버릴거야!" 




그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젠장!" 




핸드폰을 닫은 김희웅은 마루에서 일어나 죽도를 다시 움켜잡았다. 금방이라도 폭발할것만 같은 그는 카운트다운을 

눈 앞에 둔 다이너마이트와 같았다. 나도 마루에서 일어섰다. 




"뭐래? 누구야?" 



"배고파 놈들이 맞았어요. 항구에 있대요." 



"항구?" 



"네. 근처예요. 제가 알고 있어요. 누나를 살리고 싶으면 빨리 오랬어요. 한 시가 급해요." 




녀석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디에 초점을 둬야할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럴때일수록 침착 또 침착해야만 한다. 




"총있어?" 



"네?" 




내 질문의 뜻을 이해못하는 눈치였다. 




"총있냐고. 네가 어렸을때 가지고 놀던거라도 좋으니까 빨리 가져와봐." 



"장난감 총요?" 




왠지 긴장을 푸는 것 같았다. 그럼 진짜 총이라도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뭐 그런게 있음 좋기야 하겠지만. 




"왜? 없어?" 



"아니요. 있긴한데, 갑자기 왜‥." 



"그럼 빨리 가져와. 한 시가 급하다며!" 



"아, 네." 




김희웅은 자신의 방으로 뛰어들어가(신발을 신은체) 작은 총 하나를 들고 나왔다. 한 손에는 하얀 총알이 들어있는 통이 있었다. 

난 그 총을 받아들어 충분한 양의 BB탄을 넣었다. 




"그럼 가볼까?" 




난 김희웅에게 윙크를 해보였고 녀석은 아무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문을 급히 나오니 오노가 차안이 아닌 차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 



"빨리 타." 




지금 한 말은 오노에게 또 김희웅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차에 올랐다. 

당연히 오노는 운전석에, 나와 김희웅은 뒷좌석에 앉았다. 오노는 김희웅이 알려주는 대로 핸들을 돌렸다. 

달없는 밤은 안 좋은 미래라도 말해주듯 고요하기만 했다. 불안하다. 

자동차는 김희웅의 말에 따라 항구 근처에 멈쳤다. 




"형님, 저도 가겠습니다." 




오노는 나를 따라오려 했지만 내가 막아버렸다. 난 칼이라도 있음 줘보라고 했다. 그러자 차안에서 신문지에 

쌓여있는 사시미 하나를 건네는 부하녀석이다. 난 오노의 금쪽같은 턱수염을 잡아당겼다. 한 가닥밖에 안 뽑혔다. 




"악, 형님." 




많이 따가운지 턱을 비벼대었다. 나는 이렇게 무식한 칼이 아닌 작고 보관하기 좋은 칼을 달라고 했다. 

그에 알겠다는 듯이 웃으며 허리춤에서 갈색 칼집에 들어있는 단검을 주었다. 딱 좋은 크기였다. 

나는 그 단검을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으로 안쪽 허벅지에 매었다. 바깥쪽에 매어두면 들킬 위험이 있기에. 




"형님, 정말 제가 안가도." 



"괜찮아. 조금 이따가 봐." 




난 녀석을 안심시키기위해 웃어보였다. 그래도 오노는 걱정스럽게 나를 보았다. 난 아이들을 데리고 올것을 하고 

후회도 했지만 이내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부터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1시간이 지나도 오지않으면 먼저 서울로 가." 




난 가다말고 뒤돌아서 오노에게 말했다. 아니 부탁했다. 




"하지만." 



"명령이야." 




내 나름대로의 부탁이었다. 아주 서툴기만한. 

나는 10m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 김희웅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어깨를 나란히 했을때 함께 달렸다. 

항구에도 밤은 깊어갔지만 많은 배들의 불빛때문에 어둡지는 않았다. 젖은 땅에서 비린내가 올라왔다. 

가까이에서 보이는 바다는 파랗지않고 시커멓기만 했다. 어느 정도 달렸을 즈음 파란 컨테이너를 발견했다. 

김희웅은 저 곳에 자신의 누나가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컨테이너 앞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사람이라곤 주변을 살피고 있는 보통 체격의 남자 둘이 전부였다. 한 눈에 봐도 배고파의 조직원같았다. 

우리는 놈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컨테이너 뒷쪽으로 숨어들었다. 




"어떻게 하죠? 이대로 달려들까요?" 




김희웅이 자그맣게 소근거렸다. 




"아니. 그건 너무 위험해. 안에 있는 녀석들이 들을지도 몰라." 



"당연히 조용하게 처리해야죠." 




김희웅은 자신이 그걸 모를것 같냐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나에겐 더 좋은 방법이 있었다. 




"넌 그냥 가만히 보기만 해." 




난 김희웅이 주었던 총을 꺼내들어 조준을 하였다. 목표지점은 놈들의 오른편 앞쪽에 있는 중간크기의 선박이었다. 

어느 정도 조준을 끝낸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티잉. 하얀 총알(BB탄)이 총구를 빠져나와 선박을 향해 날아갔다. 

배 옆머리에 정확히 부딪힌 총알은 튕겨 남자 한명에게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앗, 따거!" 




내 계획대로 남자의 목에 부딪힌 것이다. 남자는 목을 어루만지며 주변을 살폈다. 

옆에 있던 동료가 왜 그러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남자는 누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놈들은 총알이 날아온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내 계획이 차질없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이야." 




나는 감탄하고 있는 김희웅을 이끌고 컨테이너 뒤에서 나와 앞쪽으로 갔다.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3cm정도되는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사람이 있었다. 한 명. 그것도 여자. 

그 사람은 우리 찾던 김희현이었고 묶여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컨테이너 안에는 김희현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희웅에게 장소를 알려주었다는 건 놈들도 여기에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아무도 없었다. 설마 아까 그 두 명으로 해결을 보려는 건 분명히 아닐텐데. 왜냐면 놈들은 김희웅의 실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얕잡아 볼리가 없다. 




"누나는요?" 



"안에 있어." 



"네? 그럼 빨리 들어가야죠! 기회는 지금뿐이라고요!" 




홱-. 머뭇거리는 나를 밀어내며 안으로 들어가는 김희웅이다. 김희현이 혼자 있는 걸 보고 너무나도 쉽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도 조금 망설이기는 했지만 별일 있겠냐 싶어 뒤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컨테이너 안에는 이상한 상자들로 가득했다. 




"누나!" 




김희웅은 자신의 누나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을 묶어놓은 끈을 풀어주려 했다. 

김희현은 수건이 입을 막고 있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마구 흔드는 것이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것 같았다. 

예감이 안 좋다. 김희웅이 끈을 풀어준뒤 수건도 마저 풀어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외쳤다. 




"희웅아, 어서 도망쳐!" 




도망쳐라는 그 한마디.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김희현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곳곳에 있던 수많은 상자뒤에서 

사람의 발기척이 들려왔다. 밖에 있던 두 녀석들도 들어왔다. 저 두 녀석은 어떻게 할 수도 있었지만 상자뒤에 숨어있는 

녀석들을 상대하기엔 조금 역부족이었다. 제발 그들이 무기를 들고 있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함정이야." 




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김희웅도 이미 눈치챈 모양인듯 했다. 김희현은 자신의 동생 뒤에 숨어있었다. 

곧 상자뒤에 숨어있던 놈들이 하나,둘씩 튀어나왔다. 






♡30 






"옵션으로 짭새라도 달고 올 줄 알았는데, 용기 한번 대단하군."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한 남자가 까만 양복을 털며 말했다. 검정색은 남자의 마른 몸을 한층 더 말라보이게 했다. 

입가의 주름과 더불어 볼품없는 몸매는 그의 나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대략 30대 후반으로 보였다.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혼자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이 그의 높은 지위를 짐작하게 했다. 

그런데 이 조직은 이상하게도 뚱뚱하거나 체격이 큰 사람은 많이 보이지가 않았다. 

조직의 이름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머리가 훤한 남자 하나가 재킷 안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한 대를 빼내어 그의 입에 물려주었다. 그런 다음 불까지 붙여준다. 행동이 꽤 조심스러웠다. 




"저자식은 누구냐?" 




김희웅의 얼굴 가까이에서 내가 물었다. 김희웅은 남자를 매섭게 직시하고 있었다. 




"김빈곤. 배고파의 우두머리예요." 




엥? 저렇게 비실한 인간이 보스라고? 여기 있는 남자들보단 높다는 걸 대충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보스일 줄이야. 의외였다. 배고파는 어쩌면 만만한 조직일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긴장이 아까보단 한 층 풀렸다. 




"오~ 자신만만이구만. 애인까지 데려오다니. 하하, 역시 대단해." 




남자는 입을 벌리며 웃어대었다. 그러다가 그만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고 

남자와 담배를 주었던 빡빡머리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는 흰 연기를 피어내며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빡빡머리는 김빈곤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허리를 굽혀 담배를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공손히 김빈곤의 입에 가져다대었다. 장담하건데, 놈은 발길질감이다. 

퍼억! 내 생각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며 빡빡머리는 김빈곤에게 복부를 내주고 말았다. 

김빈곤은 비실했지만 발차기는 의외로 힘이 있었다. 바닥에 나자빠진 빡빡머리는 엉덩이에 스프링이라도 장착했는 지 

잽싸게 일어섰다. 그리고는 헌 담배를 버리고 새 담배를 꺼내어 김빈곤에게 주었다. 




"후-. 보다시피 내 부하놈들이 워낙에 바보같아서 난 너같은 녀석이 필요해. 

용기있고 똑똑하고 힘있는. 그래, 생각은 바뀌었겠지? 하긴, 그러니 여기에 온거겠지만." 




김빈곤의 미소는 확신을 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나는 정말 그런건가 싶어 김희웅을 보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기만 했다. 




"얼마전에 내 부하놈들이랑 몸 좀 풀었다더군. 이제 그만 화해해야지? 곧 한 솥밥 먹게될텐데. 

하하, 김희웅, 대답은 물어보나마나 'OK'겠지?" 




모두들 김희웅의 눈과 코와 입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김빈곤은 좋은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그가 거절에 의사를 밝혔음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난‥." 




뭔가 말하려는 김희웅이었다. 눈빛에 힘이 있었다. 예상컨데 분명 거절에 뜻을 밝히려던것 같았다. 

하지만. 




"꺄악, 희웅아!" 




방심하고 있던 찰나에 뒤에서 접근해온 배고파의 한 녀석에게 김희현이 붙잡히고 말았다. 

아주 버러지같은 상황이 된것이다. 나는 영화에서도 흔히 나오는 이런 장면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놈들은 정말 비겁했다. 




"누나!" 




김희웅이 곧 주먹을 쥐고서 놈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주먹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체 접어야만 했다. 

김희현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사내였다. 그것도 비겁한 웃음을 띠면서‥. 




"자, 사람 애태우지 말고 어서 대답을 해보시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김희웅은 뒤에서 들려오는 거북한 목소리에 이를 갈아야만 했다. 

김희웅의 시선은 누나의 목에 붙어있는 칼날에 꽂혀있었다. 그에겐 이미 선택의 권리따윈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이게 만약 객관식 시험문제라면, 보기는 단 하나뿐이다. 그게 정답이든 아니든 무조건 1번을 찍어야만 하는 것이다. 

투욱. 김희웅의 손에 들려있던 죽도가 시커먼 바닥위에 떨어졌다. 녀석이 놓아버렸다. 

모두들 오늘의 주인공인 김희웅을 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체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침묵도 아주 잠시였을 뿐 

그의 목소리가 컨테이너 안을 울렸다. 




"좋아. 할게. 뭐든지 다 할테니까 누난 풀어줘." 




결국엔 이렇게 되버리고 말았다. 김빈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김희현을 붙들고 있던 남자는 자신의 보스에게서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 김빈곤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고 

그것은 우리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다 묶어놔." 




도대체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약속이 틀리잖아! 이거 놔!" 




퍼억! 김희웅이 자신을 잡으려고 하던 김빈곤의 부하녀석을 쳐내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김희현의 목에 칼을 바짝 가져다대는 사내였다. 그를 보며 김빈곤이 말했다. 




"반항해봤자 너한테 득이 될건 하나도 없을거야. 내가 뭐 너를 못 믿는건 아니다만 

만약이라는 가정하에서 그러는거니까 잠시만 얌전히 있으라고. 하하." 




김빈곤의 계산은 철저했다. 그리고 영화를 많이 본듯 했다. 여러 악역들의 상황에서 대처방안을 연구했을 것이다. 

김희웅은 분한 얼굴을 한체 배고파녀석들에게 붙들려 버렸다. 그리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만히 계실까?" 




대머리 남자가 뒤에서 날 붙잡았다. 내 두 손목을 얇은 밧줄로 여러번 묶었다. 하지만 그리 꽉 짜매지는 않았다. 

발목까지도‥. 나는 지금 놈들에게 붙잡혔지만 기회를 봐서 이 곳을 빠져 나갈것이다. 

여기서 말한 기회란 배고파 놈들이 이 안에서 어느 정도 빠져나간 후를 뜻한다. 

그만큼 지금은 숫적으로 너무 많이 불리했다. 







************* 





내가 바란대로 김빈곤을 비롯한 22명의 사내가 컨테이너 안을 빠져나간 것은 20분전의 일이다. 

지금 우리는 벽에 등을 붙인체 나란히 묶여있다. 그리고 10m 앞에선 다섯명의 사내가 신문을 깔고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놈들은 많이 배고팠는지 라면에 정신이 팔려 우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마 손과 발이 꽁꽁 묶여있으니 신경쓸 필요가 

없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훗, 그것이 큰 화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몰랐다. 오로지 라면을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 그 방법만 연구했다. 난 등뒤에서 손목을 마구 움직였다. 

다행이도 놈들이 날 과소평가한 덕분에 그리 꽉 조이지는 않았다. 손을 그리고 손목을 심하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줄은 느슨해져 갔다. 그러기를 5분째다. 곧있음 잠시 나갔던 김빈곤 패거리가 들어올 것이다. 

그 전에 이 곳을 빠져나가야지만 된다. 스윽-. 벌어진 줄사이로 오른손이 빠졌다. 

한쪽 손이 나온 지금 다른 쪽 손은 식은 죽 먹기다. 난 라면을 먹고 있는 녀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줄을 

바닥에 살며시 놓았다. 이때까진 김희웅과 그의 누나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들은 내가 치마속 허벅지에서 

칼을 꺼낼때야 비로소 내가 줄을 풀었다는 것을 알았다. 난 조용히하라는 제스쳐를 해보였다. 

'쉿!'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노가 주었던 단검을 빼내어 등뒤에 숨겼다. 우리가 여기서 무사히 

도망치는 건 내 손에 달려있었다. 난 내 정면에 앉아있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칠때까지. 

몇초 후 드디어 라면국물을 마시던 녀석이 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 것이다. 




"저기‥ 목이 말라서 그러는데 물 좀 주세요." 




애절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 예상대로 놈들은 매정하기만 했다. 




"닥쳐. 그딴 부탁이나 하라고 주둥이를 안 막은 게 아니야." 




나에게 등을 보이던 녀석이 김치 한 조각을 씹으며 말했다. 그에 모두들 동의를 해보였다. 

그렇지만 여기서 포기할 내가 아니다. 나는 나를 보고 있는 녀석의 시선을 정착시키기위해 묶여있는 다리를 약간 움직였다. 

그러자 치마 한쪽이 무릎위 허벅지까지 올라갔다. 내 허벅지살이 훤히 드러났다. 놈은 입에 들어있던 라면국물을 토해내었다. 




"풋-. 콜록콜록." 



"새끼가 드럽게. 왜 그래?" 




옆에 있던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남자는 손등으로 입을 닦으며 라면국물이 목에 걸렸다고 했다. 

놈은 생수병 하나를 들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나에게 오려는 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생수병을 내미는 녀석이다. 하마트면,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뻔 했다. 

그것도 칼을 쥐고 있던 손을 말이다. 




"아차, 손이 묶여 있어서 안되겠구나. 그럼 내가 먹여줘야지." 




음흉하게 웃었다. 자신의 보스보다 훨씬 더 말라갱이였다. 




"야, 또 건드냐?" 




라면을 먹고 있던 한 남자가 의미모를 웃음을 띠어보이며 말했다. 그러다가 다시 젓가락으로 면발을 건지는데 열중했다. 




"킥, 물달랬지?" 




놈이 말했고 생수병의 뚜껑을 연후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셨다. 

난 놈의 행동에 집중했다. 김희웅과 김희현도 보고 있었다. 물을 마시는가 싶었던 녀석이 입에서 생수병을 떼었다. 

목젖이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입안에 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장 나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며 

놈이 한 손으로 나의 머리를 감싸 끌어당기며 자신의 입을 내 입술로 가져대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어쩌기는‥ 그냥 두 눈 딱 감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첫키스가 아닌걸 다행으로 여겨야만 했다. 

결국 놈의 입술과 내 입술이 포개어지며 물이 내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여간 찝찝한게 아니다. 

김희웅이 놀라 크게 뜬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놈의 뒤에 있는 나머지 네 인간들을 보았다. 

여전히 먹는데에 급급했다. 지금이 기회였다. 난 입안에서 놈을 발아들이며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살며시 앞으로 빼내었다. 

당연히 날카로운 모서리가 앞으로 오게끔 말이다. 난 놈의 배꼽 앞에 들이댄 칼끝을 위로 향하게 잡았다. 

정말 신중하고 빠르게 처리해야만 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랬기에 난, 푸욱! 손잡이를 힘껏 밀어냈다. 칼끝은? 놈의 목젖 아래 움푹 패인 부분에 깊게 꽂혀버렸다. 

난 놈이 순간적인 비명을 지를까봐 입술로 계속 막아내었다. 이 칼을 뽑으면 시뻘건 피가 내 얼굴과 옷으로 튀어버릴 것이다. 


놈의 동공이 커졌다. 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놈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나의 머리칼을 쎄게 잡아당기고 

나의 팔뚝을 꽈악 붙잡았다. 많이 아팠지만 참아야만 했다. 


‥‥‥‥‥ 


끝내 놈의 숨통이 끊어졌다. 

난 놈의 입술에서 입술을 뗀후 칼을 뽑아내었다. 목에서 피가 철철 뿜어져 나왔다. 

그 피는 곧 바닥에 흩어졌고 내 옷에도 튀었다. 나는 곧장 김희웅의 팔목을 조이고 있는 줄을 끊어주었다. 

(내 발목에 줄을 푼 뒤.) 

그것은 순식간에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네 사람 모두에게 들키지 않을 수만은 없었다. 

어느새 이상한 공기를 눈치챈 한 녀석이 우리쪽을 보았다. 그리고 옆에 쓰러져 있는 동료까지도‥. 




"뭐,뭐야?!" 




들고 있던 컵라면을 떨어뜨리며 엉덩이를 뒤로 주춤거리는 남자였다. 그에 다른 세명도 우리를 보았다. 

나는 벌떡 일어섰고 김희웅이 김희현을 풀어주었다. 




"느슨하게 묶은 게 잘못이었어. 여자라고 얕보면 안되지." 




난 자신있게 웃어주었다. 피에 젖은 칼을 한 손에 들고서. 그렇게 잔인하게 미소지었다. 




"저, 저 년이!!" 




라면국물을 뒤엎으며 일제히 바닥에서 일어섰다. 빨리 끝내야만 한다. 

김희현을 풀어준 김희웅이 내 옆에 섰다. 주먹을 쥐고 있었다. 




"오늘이 네 초상날이다!!" 




피비린내가 나는 컨테이너 안은 주먹소리로 가득해 졌다. 

놈들은 진짜 싸움꾼이었지만 나와 김희웅 앞에선 제대로 실력발휘를 못하고 있었다. 

나도 확실히는 모른다. 그게 진짜 실력인지 아니면 정말로 실력발휘를 못한건지. 곧 네 놈 모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내가 밝히고 싶은 것은 이번에는 칼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벌컥! 이때 컨테이너 문이 열리며 다섯명이 더 들어왔다. 그들은 신문지에 싸여있는 사시미를 들고 있었다. 


큰일이다. 




"이 쥐새끼들이." 




일제히 신문지를 벗겨내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누나, 기회를 봐서 여길 빠져나가!" 


"싫어. 같이 나가!" 




김희웅의 뜻을 이해못하는 김희현이었다. 힘없는 사람은 싸움에 방해만 될뿐이다. 

그 사람이 상대편에 있다면 이득이지만 우리편에 있다면 큰 약점이 된다. 허점은 되도록이면 드러내지 않는 게 좋다. 




"언니! 그렇게 해요! 왼쪽으로 계속 달리다보면 페라리 한 대가 있을 거예요. 

운전자에게 제 이름을 말하면 태워줄거예요! 어서 나가요!!" 




난 그렇게 말하곤 그녀의 앞길을 방해치 못하도록 놈들을 막았다. 김희현이 여기서 무사히 나간다해도 

내가 말한 페라리를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진짜 페라리를 생각한다면 영영 찾지 못할것이다. 

아니 어쩌면 오노가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한 시간이 지났다면 말이다. 




"누나, 빨리 도망쳐!" 




김희웅이 다시 한번 소리쳤다. 그에 여자는 울며 망설이다 결국엔 밖으로 나가버렸다. 

꼭 무사하라는 말과 함께‥. 


퍽! 퍼억! 칼에 찔릴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다행히 우리들은 주먹에 몇대 맞은 게 고작 전부였다. 

놈들이 들고 있던 칼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고 마지막까지 버틴 놈을 발로 차버리며 마무리를 지었다. 

놈들은 더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도 가자." 




김희웅에게 말했다. 우리 둘은 서둘러 컨테이너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어두운 바깥만큼이나 바다만큼이나 

어두운 앞날이 컨테이너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롱은 거기까지." 




김빈곤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다. 




"희웅아‥." 




김희현. 김희웅의 누나였다. 도망치다가 붙잡힌 것이다. 젠장할 노릇이다. 정말 갑갑한 상황이다. 




"누나!!" 




김희웅은 총을 보고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도 그럴것이 그 총구는 김희현의 머리를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총은 김빈곤이 들고 있었다. 




"걱정마. 한 발밖에 안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 한 발이 이 년의 머리통을 날리지 말라는 법은 없지. 

내가 머저리가 아닌단에야. 하하하." 




한 발. 한 발밖에 없단다. 정말 총알이 한 발 뿐이라면 저 녀석은 엄청난 바보이다. 

그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말해줬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바보가 아니라면 저 총에는 총알이 여러 발 들어있을 것이다. 

심리전, 고도의 두뇌싸움이었다. 




"희웅아‥." 




여자는 겁에 질려 있었다. 김희웅 또한 마찬가지였다. 




"풀어줘." 




김희웅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음성으로 부탁했다. 하지만 그 부탁을 김빈곤이 들어줄리 없었다. 




"그냥 이대로 쉽게 풀어달라고?" 




김빈곤이 물었다. 놈은 김희웅의 대답을 흥미진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즐기고 있다는 표현이 맞았다. 

털썩. 무릎을 꿇는 김희웅이다. 나는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오로지 저 총안에 들어있는 총알의 갯수 생각뿐이었다. 




"하하. 그 정도로는 안되지. 땅바닥이라도 핥으면 몰라." 



"그러면 풀어줄거냐‥?" 



"약속하지." 




얼어죽을 약속이었다. 나쁜 놈들이 하는 약속은 믿을 수가 없다. 영화에서든 현실에서든. 

김희웅은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다. 김희웅이 놈을 믿는 건 아닐것이다. 다만, 믿고 싶었던 거다. 

누나를 살려준다는 그 약속을‥. 


바다 비린내가 뭍은 시멘트 바닥을 혀로 핥는 김희웅이었다. 누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소중한 사람을 위해 남자의 자존심을 버렸다. 

난 눈을 감아야만 했다. 도저히 볼수가 없었다. 그리고 김빈곤에 대한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저 총안에 든 총알의 수만 알 수 있다면 어떻게든 해볼텐데‥. 하지만 현재로선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으하하." 



눈을 감은 와중에도 배고파 놈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희웅아, 그만해. 그만‥." 




그리고 김희현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다음에는‥ 다음에는‥ 

눈을 떠야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바로 무시무시할 정도로 큰 울림이었다. 

바다를 뒤흔드는 소리‥ 끔찍한 소리‥. 

김빈곤의 총소리였다. 



타앙!! 




















♡31 





타앙! 그것은 분명 탄환이 총구를 빠져나오는 웅장한 소리였다. 총소리가 울리고 메아리대신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떴다. 두려웠지만‥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을 차마 보기가 무서웠지만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누‥누나?" 




얼어붙은 김희웅의 목소리였다. 그의 두 동공이 커져 있었다. 조금씩 몸을 부르르 떨기시작하는 김희웅. 

나또한 이 현실에 몸서리쳐야만 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을때 총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제발 김희웅이 아니기를‥ 총알이 김희웅의 가슴을 뚫지 않았기를‥. 

그리고 나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김희현의 머리를 겨누고 있던 총은 그대로 탄환을 내뱉었고 눈 깜짝할 새에 

그녀의 뇌를 뚫고 지나갔다. 곧 머리에서 피가 철철 뿜어져 나왔다. 김희현의 눈은 커져있었다.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감지도 않았다. 믿기힘들었지만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것이다. 잔인한 김빈곤은, 

짐승만도 못한 그 자식은 그런 와중에도 그녀를 놓지 않고 있었다. 놈의 손이 빨갛게 물들었다. 웃고 있었다. 

허연 이를 드러내며‥. 




"어이쿠, 이거 손이 미끌어졌구만. 미안,미안. 하하하!" 




손이 미끌어졌단다. 하-. 저렇게 태연하게 이야기하다니. 놈은 무서우리만큼 잔인하고 악독했다. 

그리고 미쳤다. 




"이 개자식!! 죽여버릴거야!!" 




누나의 죽음을 눈 앞에서 본 김희웅은 극도로 흥분해있었다. 그리고 주먹 두 개, 발 두 개만 믿고 그에게 덤비려 들었다. 

총을 쥐고 있는 김빈곤에게 말이다. 난 늦을 새라 재빨리 김희웅을 제지했다. 




"놔! 이거 놔라고!!" 




내 손에서 벗어나기위해 몸부림쳤다. 그럴수록 난 녀석을 힘껏 붙잡았다. 




"안돼. 지금은 안된다고." 



"놓으라고 했지!!" 



"기다려, 기다려야만 돼." 




김빈곤을 처치하기 위해선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다. 

파악. 이제서야 김희현을 손에서 놓아주는 김빈곤이었다. 이미 영혼이 빠져나간 김희현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풀썩. 바닥은 이내 그녀의 피로 흠뻑 젖어버렸다. 정말 가엾은 여자다. 그런 그녀를 보며 김희웅은 한 층 더 크게 

고함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어쩌면 악을 쓴다는 표현이 지금의 그와 걸맞는 듯 했다. 




"누나-!! 누나, 눈 좀 떠봐!" 




하지만 김희현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니, 동생의 목소리도 이젠 들을 수 없었다. 가슴에 무거운 바윗덩이가 

얹어져 있는 것 같았다. 김빈곤은 악당같은 미소를 지으며 총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희망이 있었다. 




"둘 다 묻어버려." 




김빈곤은 이제 김희웅의 충성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둘 다'라고 했던 것이다. 

주위에 있던 놈의 부하들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거 놔! 다 죽여버릴거야!!" 




짐승처럼 몸부림치는 김희웅의 힘은 대단했다. 그렇지만 나는 녀석을 막아야만 했다. 의지만으로는 놈들에게 당할 

가능성이 충분히 높았으니까 말이다. 설녕 이긴다치더라도 온 몸에 상처투성이가 된 후일 것이다. 

나는 제발 행운의 여신(니케,로마 신화의 포르투나. 영어 fortune의 어원.)이 내 곁에 있기를 바라며 주머니에 

숨겨두었던 총을 꺼내들었다. 모두들 알다시피 장난감 총이었다. 하지만 배고파 놈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만약, 총에 대해 잘 아는 놈들이라면 금방 눈치를 챌것이다. 지금의 나로선 놈들이 바보이기를 빌고 또 빌뿐이다. 

난 놈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놀란 놈들은 제자리에 멈추었다. 김희웅까지도 얌전한 코알라가 되었다. 




"꼼짝마.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는 날엔 너희 머리통까지 박살나는 수가 있어." 




들킬까봐 심장이 벌렁거렸다. 정말 뭐라 말로 표현할 수없을 만큼 긴장이 되었다. 




"하하하, 꼬마아가씨가 꽤 당차군. 이거 재밌는데?" 




여유만만인 김빈곤이 말했다. 설마 눈치챈건 아니겠지? 나는 마지막까지 당당한 모습을 잃지않으려고 애썼다. 




"닥쳐! 이 총엔 너뿐만이 아니라, 네 부하들까지도 날릴 수 있는 탄환이 충분히 들어있어. 

죽기싫음 더이상 재잘거리지 않는 게 좋을거야."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총엔 많은 양의 BB탄이 들어있었으니까. 이것으로 놈들의 머리통을 날릴 순 없지만 

허벅지정도는 따갑게 해줄 수는 있었다. 김빈곤은 탄알이 여러발 들어있다는 내 말에 못 믿어하면서도 겁을 먹은 듯 보였다. 

그리고 총을 꺼내지 않았다. 정말 한 발뿐인 총이였나보다. 




"손 들어!" 




내가 크게 외쳤다. 하지만 서로 눈치만 보는 녀석들이었다.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빨리 손 안들어?! 이 새끼들이!!" 




방아쇠를 당기는 척 하자 그제서야 너 나 할거 없이 손을 번쩍 드는 배고파의 보스 김빈곤과 그의 부하들이었다. 

난 오노의 차가 있는 곳으로 발을 돌리었다. 놈들이 어떤식으로 공격해올지 모르기에 총을 겨누며 뒷걸음질을 쳤다. 




"안돼! 누나 데려가야 해. 놔줘, 제발!!" 




김희웅은 자신의 팔목을 잡은 내 손을 뿌리치기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럴수록 난 손에 힘을 주었다. 




"경찰에 신고한 후에 그때 데리러 오자. 응? 지금은 도망치는 게 우선이라구." 



"도망은 너 혼자 가!" 




도창친다는 표현이 꽤 우스광스러웠지만 어쩔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 생활신조가 손해보는 일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게 자존심대결인 싸움일지라도 말이다. 




"질거 뻔히 알면서 다짜고짜 싸울 수는 없어." 



"지기는 누가 져! 병신같은 겁쟁이!" 




그냥 두 귀를 막아버렸다. 겁쟁이라‥. 




"그냥 꾀많은 여우라고 해줄래?" 




배고파 녀석들과의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졌다. 한 15m정도? 난 지금이 기회다 싶어 뒤돌아 김희웅을 끌고서 힘껏 내달렸다. 

제발 오노의 차가 그 자리에 있길 바랄뿐이다. 오노의 차에서 내린지 이미 한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한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으면 먼저 가라고 했던 말이 심히 후회스러웠다. 놈들이 쫓아올지도 모르는 지금 이 시점에 

오노의 존재는 정말 중요하기만 했다. 




"놔! 제발 놔줘! 누나를 두고 올수는 없다고!" 




김희웅은 계속 악을 써대었다. 그런 녀석을 끌고 가려니 여간 힘이 든게 아니다. 어쨋든 난 지독한 바다내음을 맡으며 

소리를 들으며 뛰고 또 뛰었다. '오노야, 제발 가지마. 가지마.'하고 주문을 외웠다. 행운의 여신이 계속 내 편이었음 했다. 

그리고 200m정도를 넘게 뛰었을 때즈음 헤드라이터를 켠 자동차 한 대가 보였다. 가슴이 내 다리만큼 뛰었다. 

그 차가 짝퉁 페라리인지는 가까이 가야지만 확인이 가능했다. 그만큼 밤이 너무 깊었다. 




"형님!" 




오노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 다리에 힘이 풀리는 줄 알았다. 긴장이 풀린 것이다. 

오노는 나를 발견하자 놀라서 달려왔다. 그리고는 나를 부축하려 했다. 




"나는 됐고 얘 좀 차에 태워봐." 



"빨리 놔!!" 




오노는 김희웅을 붙잡았다. 그리고 차에 태우는 도중 김희웅의 주먹에 얼굴을 한 대 맞고야 말았다. 

다행이도 코를 피해 뺨을 맞았다. 그렇게 본의아니게 차에 타버린 김희웅은 곧장 내리려 했지만 오노가 재빨리 

문을 잠구는 바람에 갇혀버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난 오노의 옆자리에 올랐다. 




"내려줘, 빨리!" 




김희웅의 발악은 계속되었지만 그냥 무시해버렸다. 그나저나 갔을 줄 알았던 오노가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다니‥ 

정말 다행스러웠다. 




"왜 안 갔어?" 



"형님이 아직 안 오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혼자 갈수는 없지요." 




부하 하나는 정말 잘 둔것 같다. 정말 뿌듯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오노가 룸미러로 울고 있는 김희웅을 보며 나에게 물었다. 




"저녀석 누나가 살해당했어." 



"예?" 




오노는 이해하지 못했다. 




"너도 들어봤을거야. 인천조직, 배고파라고‥. 그놈들 짓이야." 



"예-? 형님! 형님은 다치신데 없습니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보는 오노였다. 내 부하들은 항상 이랬다. 다른 사람이 죽어도 자신이 모시고 있는 

사람만 다치지 않으면 된다. 그들의 신념이었다. 옛날 왕족을 모시던 신하들의 신념. 




"이것들을." 




갑자기 소매를 걷는 둥 오버하며 차에서 내리려는 오노다. 난 녀석을 붙잡았다. 




"됐어. 빨리 경찰한테 신고나 해." 



"예? 누구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누구긴, 경찰이지. 그럼 우체부한테 신고할래?" 



"아,예‥." 




하긴 깡패들이 흔히 짭새라고 불리는 경찰을 좋아할리 만무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깡패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포켓몬(*1995년 일본에서 초등학생용으로 제작된 오락게임으로 등장한 이후 텔레비전, 만화, 영화, 캐릭터상품 등으로 

만들어진 주인공.)처럼 깡패가 진화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조직폭력배! 깡패와는 차원이 다르다. 

오노는 내 명령에 따라 핸드폰에서 112를 눌렀다.(물론, 인천이겠지?) 




"다 죽여버릴거야. 절대 용서안해." 




뒤에서 김희웅이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눈물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충격이 클것이다. 

하룻밤 사이 소중한 누나를 잃었으니, 그 충격과 슬픔이 오죽할까. 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형님, 근데 그 총은 뭡니까?" 




어느새 신고를 마친 오노가 내 손 안에 있는 총을 가리키며 물었다. 난 장난감 총이라고 말해주려하는데 

오노가 먼저 장난감이 아니냐고 했다. 녀석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 




나는 신기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오노는 한 눈에 봐도 티가 난다고 했다. 그런데 왜 김빈곤은 알아채지 못했을까? 

혹시 알면서도 모른체한건‥. 그렇게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하다못해 곰팡이가 쓴것 같았다. 

몇분 후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경찰차 3대가 왔다. 그리고 하얀 구급차도 함께. 오노는 경찰차를 뒤에 달고 

컨테이너가 있는 곳으로 갔다. 김희웅은 멍하니 창밖만 보고 있었다. 많이 지쳐 보였다. 하지만 두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것처럼 촉촉히 젖어있었다. 우리는 또 다시 아까의 그 참혹한 곳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곳은 텅 비어있었다. 

배고파 놈들은 하나도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경찰 2명과 함께 컨테이너 안을 보았다. 역시 비어있었다. 

내가 죽인 그 사내의 시체또한 없었다. 




"누나‥누나!!" 




김희웅이 울며 소리치며 나를 밀쳐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누나를 찾고 있었다. 

김희현의 시체도 없어진건가? 나는 컨테이너 밖으로 나왔다. 경찰들이 바닥에 얼룩진 핏자국들을 보고 있었다. 

바다의 습기때문에 피는 채 마르지도 않았다. 그것은 허위신고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김빈곤, 설마 

시체들을 가져간것은‥ 그래, 없는 것으로 보아 그 놈이 가져간게 틀림없었다. 나쁜 새끼. 정말 비열했다. 

그렇게 경찰들은 컨테이너 주변 곳곳을 수사해나갔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김희현이 살해된 자리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김희웅을 보며 오노에게 물었다. 




"오노야‥." 



"네, 형님. 말씀하십시요." 



"너라면 어떻게 했겠냐?" 



"네? 뭐를 말씀이십니까?" 




김희웅에게서 고개를 돌려 오노를 보았다. 아니, 꼬집어말해 턱수염을 보았다. 




"네가 만약 그 새끼였다면 시체를 어떻게 했겠냐고." 




오노는 곰곰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바다를 멀리 바라보았다. 오노가 대답했다. 




"형님, 저라면 바다에 던지겠습니다."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바다에?" 



"네, 형님. 일단 급한대로 수습은 해야지 않습니까." 




바다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즉시 경찰에게 내 의견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경찰들은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괜히 헛수고라도 할까싶어 믿지않으려는 것이다. 정말 답답했다. 예감상 70%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난 내가 보았다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뭐? 네가 봤다고?" 



"그렇다니깐요!" 



"그런데 왜 이제야 말하는 거냐?" 



"그,그거야‥ 무서웠거든요." 




대충 얼버무렸다. 경찰은 즉시 무전기에 대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부터 난 기도를 했다. 부디 바닷속에 김희현이 있기를 하고‥. 

참고로 내가 죽인 그 남자는 없기를 빌었다. 만약, 내가 걸린다고 하더라도 난 정당방위였다고 우기고 또 우길것이다. 

그래도 안된다면 전세 보증금을 또 뺄 수밖에. 크흑. 

잠시후 경찰들이 몇명 더 오더니 차안에서 잠수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경찰은 시체들이 이미 파도에 휩쓸려 갔다면 못 찾을 수도 있다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오늘은 파도가 그리 쎄지 않아 걱정할 필욘 없을 거라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김희웅은 아직도 바닥에 앉아있었다. 

뭐라 위로의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난 혼자있게 하는 것이 위로라고 생각했다. 몇분 후 공기방울과 함께 

구조요원들이 튀어나왔다. 김희현은 없는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때 다른 한쪽 수면에서도 공기방울들이 일기 시작했다. 

수면이 몹시 흔들렸다. 푸학. 구조요원이 한 명 더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의 옆구리에는 사람 한 명이 끼어있었다. 




"찾았습니다!" 




산소마스크를 벗으며 구조요원이 소리쳤다. 







********** 







"누나!! 눈 좀 떠봐!! 죽지마. 다시 살아나‥. 어서 눈 떠. 빨리!" 




김희웅은 흰 천으로 가려져 있는 시체를 부둥켜 안으며 울고 또 울었다. 그는 누나를 따라 구급차에 올랐다. 

정말 바다에 던졌을 줄이야. 하긴, 내가 김빈곤을 나쁜 놈이라 말할 처지는 아니지. 나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였으니까. 

어차피 그 놈이나 나나 똑같은 살인자에 지나지 않았다. 나도 당분간 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할 것이다. 

멀어져 가는 구급차를 본후 경찰들의 눈을 피해 오노의 차에 탔을때 어떤 남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내 머리를 자극시켰다. 




"여기 한 사람이 더 있습니다!" 




재빨리 차문을 닫았다. 남자의 시체를 건져 올린것이다. 나라는 걸 눈치채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양심에 찔리는 것이 

조금 두려움을 느꼈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아니야. 빨리 서울로 가자." 




나는 창문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하룻밤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것 같다. 이로써 세번째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난 내가 죽인 사람들과 마지막에는 키스를 나눴다. 이번 역시 본의아니게 그렇게 되버리고 말았다. 

과연 나는 처음부터 그 남자를 죽이려던 생각이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핸드폰을 꺼내었다. 

어느새 배터리가 다 되어 전원이 꺼져 있었다. 그래서 운전중인 오노에게 핸드폰을 빌렸다. 

그리고 천천히, 또박또박 태기의 번호를 눌렀다. 






♡32 





"이 도둑노무 시끼야, 형님 전화 받았다! 그래, 갑자기 왜?" 




신호가 두 번 즈음 울렸을까? 태기에게 전화건 것을 후회할 틈도 없이 신호가 끊기고 태기가 전화를 받았다. 

여전히 밝은 느낌의 목소리였다. 오노는 자신의 폰으로 누구에게 전화를 거는 건가 궁금했는 지 운전도중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태기는 자신의 핸드폰 액정에 뜬 번호가 오노의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버릇없이 전화를 받는 것일테니까. 

나는 핸드폰을 귀에 갖다댄체 시커먼 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오노가 왜 도둑놈이냐?" 




내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아예 대놓고 나를 보는 오노다. 시선이 느껴졌다. 




"어랏? 형님이세요?" 




깜짝 놀란 모양이다. 태기는 내 목소리를 재확인하려 했다. 난 손을 바꿔 핸드폰을 잡았다. 




"내가 보기엔 오노보다 네놈이 더 도둑놈같구만." 




오노는 한번 더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이번에는 그럴려니하며 운전에만 열중했다. 자동차는 어느덧 고속도로를 씽씽 

내달리고 있었다. 밤속의 고속도로는 무서우리만큼 어둡고 쓸쓸하다. 




"오노새끼, 도둑놈 맞잖아요. 그것도 금.메.달 도둑놈. 하하!" 



왠지 놀림을 받는 그런 기분이다. 그래도 태기녀석, 매사 밝아보여서 좋다. 훗, 이번엔 그냥 나도 같이 웃어줘야 겠다. 

웃을 정도로 재밌는 유머는 아니었지만‥. 




"하하, 그렇지. 오노는 금메달 도둑놈이었지. 하하하." 




내 말에 오노의 표정이 변해버렸다. 그리 썩 좋은 표정은 아니다. 하지만 오노가 나에게 뭐라 한 소리할 처지는 아니었다. 

이것이 힘있는 자의 특권은 아닐까? 조금 얄미운 감이 있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형님, 오늘 저녁에 바퀴벌레라도 드셨습니까?" 




평소와 다르게 자신의 말에 웃어주는 내가 많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왜 하필 바퀴벌레일까? 

그것도 내가 제일 혐오하는‥. 




"웃어주면 고맙다고 절이라도 해야 할 판국에 뭐야?" 



"아니, 그게 아니라 형님께서 평소랑은 좀 다른것 같아서 그러죠." 



"그래?" 



"예, 조금요.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가만, 그러고보니 내가 왜 태기한테 전화를 건거지? 김희웅이 누나의 시체를 부둥켜 안고 울던 모습을 떠올렸을때 

갑자기 태기가 생각났다. 오늘 인천으로 오던 길에 태기에게 쌀쌀맞게 대했던 게 생각난 것이다. 

김희웅에게 가족이 누나 한 사람뿐이듯 나에게는 태기와 민규가 전부이다. 실제 혈연관계로 맺어진 가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버지께서 자식처럼 돌보던 그들이기에 나에게도 그들은 가족인 셈이다. 




"일은 무슨 일. 그냥 오노 핸드폰을 만지다가 우연히 너랑 연결된것 뿐이야." 




하지만 이렇듯 난 언제나 솔직하지 못하다. "아까는 미안했어."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게 입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아직도 대구냐?" 




사과의 말은 아예 포기해버렸다. 




"네, 차안입니다. 형님, 걱정마십시요. 민규랑 제가 꼭 강호두, 그 놈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있었다. 자신없는 힘. 




"천천히 해." 



"네? 뭐라구요?" 



"급하게 안해도 된다고. 그럼 나중에 보자."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오노에게 핸드폰을 돌려주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막판에 사과나 다름없는 말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태기는 평소와 다른 나의 행동에 의아해하며 핸드폰을 한동안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는 통화내용을 민규에게 막 떠벌릴게 분명하다. 그게 바로 변태기니까. 




인천에 다녀온지, 김희현사건이 있은 지 일주일하고도 며칠이 지났다. 나는 쓰래빠애들을 이끌고 김희웅에게 갔었다. 

김희웅에게 볼 일이 있어 갔다기보단 김희현에게 부조금(扶助金)을 주러갔다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김희웅은 초췌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내가 도와줄건 아무것도 없었다. 고작 부조금 얼마와 근조화환을 주는 게 전부였다. 

김희현 총살사건은 한동안 매스컴에서도 떠들어대었다. 용의자는 당연히 배고파 녀석들로 보고 있었다. 게다가 내가 죽인 

그 남자또한 놈들의 짓으로 단정 지어버린 것이다. 나로서는 잘된 일이다. 우리 애들도 내가 그런것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지가 않았고 말해줄 이유도 없었다. 자랑이 아니니까. 나도 잘 알고 있다. 




"요즘 왜 그러냐?" 




정원 테이블 의자에 앉아 멍하니 무언가를 주시하고 있으니 신이가 소리없이 다가왔다. 내가 뭘 보고 있었는 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 지조차도 모르겠다. 그냥 속 빈 인형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요즘 왜 그러냐니?" 




신이의 목소리에 잠시 빠져나갔던 혼이 내 몸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신이는 정말 걱정이다라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멍청하게 뭘 그렇게 생각하냐고." 




멍청이라니‥ 듣기에 좋지가 않다. 




"내가 멍청하다고?" 



"언제 멍청하댔냐? 이 멍청아." 



"방금 멍청이라고 했잖아." 




또 괜한데 열이 받기 시작한다. 근래에 느낀거지만 신발 저 놈은 태기랑 똑같은 것 같다. 항상 날 열받게 만든다. 




"그러니까 내가 언제 그랬냐고, 멍청아." 



"지금! 바로 지금!!" 




나는 신이에게 삿대질을 해가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내 이마를 툭 치며 나를 다시 의자에 앉히는 신이였다. 

난 황당함에 녀석을 보았다. 신이가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역시 개소리는 짖는 게 매력이라니까?" 




정말 기분 나쁜 말이었는데, 신발을 신발끈에 매달아 집밖으로 내쫓아도 모자랄 판국인데‥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모습을 다시 되찾은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리고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부글 부글 끓어올랐다. 

너무 답답하고 갑갑해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눈시울이 붉어졌다. 실컷 울고 싶었다.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싶었다. 내 얼굴이 추해지더라도 정원이 물에 잠기더라도 울고 싶었다. 




"야, 그 말이 그렇게 열받냐? 왜 울려고 그래?" 




당황한 신이의 얼굴이 뿌옇게 흐려진체로 보였다. 눈물은 두 볼을 타고 턱선으로 이어졌다. 




"미안, 내가 미안해. 이젠 안 놀릴게. 응? 그러니깐 울지마라. 응?" 




신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때 유인이가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찌글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유인이는 정원으로 나와 멀뚱히 나를 보고 서 있었다. 신이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야, 그만 울라니까? 내가 미안하다고. 제발." 




천하의 새신이 제발이란다. 사정까지 했다. 웃긴다. 웃겼지만 나는 계속 눈물을 흘려댈 뿐이었다. 

철컹. 대문을 열고 부하녀석들이 들어왔다. 어디에 갔다온건지는 나도 잘 모른다. 녀석들은 편한 캐주얼 차림이었다. 




"형님! 저희들 다녀왔습니다!" 




태기가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민규는 고개를 숙이며 저녁은 먹었냐고 물었다. 그에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태기는 울고 있는 나를 보더니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아니? 형님, 왜 우십니까?!" 




그 말에 민규와 아이들이 놀라 내 앞을 빙 둘러쌓다. 태기는 신이와 유인이에게 다그치며 물었다. 




"야, 꼴통들! 우리 형님, 왜 우시는 건데?" 




자기가 더 꼴통이면서 누구더러 꼴통이라는 건지‥ 기가 막힌다. 

태기의 물음에 신이는 괜시리 찌글이를 보았다. 설마 개새끼한테 죄를 덮어씌우려는 건 아닐테지? 하긴, 신이 탓도 아니었지만‥ 

신이가 아무 말이 없자 멀뚱히 서 있던 유인이가 두 입술을 떼내며 말했다. 




"신이가 울렸어. 난 아니야." 



"이, 임마! 내가 언제! 내가 얘 울리는 거 네가 봤냐?!" 




그에 당황해하는 신이였다. 티가 많이 났다. 금방 의심을 받을 게 분명하다. 




"이 신발노무새끼, 네가 감히 우리 형님을 울려? 우리 형님이 저렇게 억세 보여도 여자인 것을!" 



"뭐? 너 지금 나보고 신발이라고 그랬냐?" 



"씨발이라고 그랬다! 왜?!" 



"변태새끼, 뒈졌어!" 




아, 골치가 아프다. 이래서 내가 울고 싶어도 마음대로 못 우는 것이다. 

그 날 밤, 정원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리고 놈들은 모두 집밖으로 쫓겨났다. 




"형님! 이불이랑 베게라도 좀 주십시요!" 



"야! 개소리, 난 침대없음 못 잔다 말이야!" 




태기와 신이였다. 바보놈들, 서로의 팔을 베게삼아, 콘크리트 바닥을 침대삼아, 하늘을 이불삼아 자보라지. 

난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 유인이에게 말했다. 




"쟤들 못 들어오게 해." 



"응." 




그 날 순진한 유인이는 아침이 될때까지 정원에서 대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놈들이 들어오는 지 감시하기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난 다짐했다. 다시는 유인이에게 그런 심부름은 시키지 않아야 겠다고. 휘유-. 







********** 





7월, 학교는 어느덧 방학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신나게 놀기위해서는 치러야 할 관문이 하나 남아있었고 그것이 바로 기말고사였다. 

며칠 전, 민규는 설득시키는데 실패한 강호두를 만나러 시험기간에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었다. 어차피 나는 시험을 잘 쳐야 할 

큰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좋은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나에게는 그럴 시간에 운동이라도 조금 더 하는 것이 시간을 유용하게 잘 쓰는 방법이었다. 난 자꾸 따라오겠다는 신이에게 부탁을 했다. 

제발 학교는 졸업하라고.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난 그들의 장래를 망치고 싶지는 않다. 잠시 내 일에 도움을 청하기는 했지만 

이 일이 끝나면 그들을 놓아줄 생각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마음대로 하는 내가 이기적인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아니, 보이는 것이 정답이다. 나는 이기적이다. 




"형님, 전화왔습니다." 




대구로 가는 고속도로, 운전을 하던 민규가 나에게 말했다. 잠시 생각에 빠져 벨소리를 못들었다. 

나는 핸드폰의 폴더를 열었다. 그러자 차안을 시끄럽게 만들던 벨소리가 뚝 끊어졌다. 액정을 보지않아 전화 건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여보세요?" 




내가 들어도 내 목소리가 피곤하게 느껴졌다. 




"누나, 희웅이예요." 




전화 속 목소리는 나보다 더 힘없게 느껴졌다. 희웅이의 목소리를 듣는 게 거의 보름만인것 같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응. 왠일이야?" 



"방학때 누나한테 가도 될까 해서요." 



"나한테 온다고? 왜?" 




놀러오려는 건가? 




"누나가 전에 부탁하셨던 거, 지금 들어드려도 될까요?" 




부탁이라니, 내가 부탁을 했었던가? 나는 희웅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누나에게 힘이 돼드리고 싶어요. 제 힘이 쓸모가 있다면요. 저도 받아주세요." 




전화속 희웅이는 너무나도 정중했다. 그 아이는 지금 나에게 조직에 받아줄 것을 부탁하고 있었다. 

내가 포기했던 김희웅이 우리 조직에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새삼 자꾸만 웃음이 났다. 내 속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하! 당연하지! 받아주고 말고 할게 어딨냐? 이미 넌 내 동생이나 다름없는데. 고마워, 희웅아. 아니 환영한다. 하하." 




내가 웃어대자 민규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 뒷좌석에서 팔자좋게 자고 있던 태기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고마워요. 누나. 그런데 부탁이 있어요." 



"응? 부탁? 그래, 뭐든지 해! 다 들어줄테니까." 



"‥‥‥." 




잠시 머뭇거리는 희웅이였다. 뭔가 말하기 곤란한 부탁인 모양이다. 난 희웅이의 말을 기다렸다. 

잠시후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희웅이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있었다. 김희현의 복수, 그녀의 원수 배고파의 김빈곤. 

그 날 김희현이 죽던 모습이 떠올랐다. 끔찍했다. 지금 그 부둣가에 가면 아직도 핏자국이 남아있을까? 난 눈을 살며시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긴장된 마음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희웅이에게 말했다. 




"어차피 네 부탁과는 상관없이 내가 할 일 중에 하나였어. 그 놈들도 내 리스트에 있던 조직들 중 하나였으니까." 



"누나, 고마워요! 방학때 꼭 갈게요." 




금새 목소리에 활기가 돋는 희웅이였다. 전화를 끊으면서 문득 김희현이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희웅이를 잘 부탁한다던. 그게 이런 뜻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 훗, 그럴리가 없지. 



민규가 모는 (무늬만)BMW는 어느덧 서대구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었다. 








♡33 






민규가 자신 있게 차를 세운 곳은 조금 넓은 골목길 안에 있는 3층 양옥집이었다. 빨간 벽돌집이다. 

민규는 이 곳에서 강호두가 자취를 한다고 했다. 부모님은 경산에 계신다나? 어쨌든 떨어져 사는 것 같았다. 

내가 차에서 내렸을 때 핸드폰 시계는 오후 7시를 알리고 있었다. 학교가 마쳤을 시간인데 느낌상 집에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느낌일 뿐이므로 난 대문 앞을 얼쩡거렸다. 뒤늦게 민규와 태기도 차에서 내렸다. 이 동네에는 어린 꼬마들이 

많이 보였다. 꽤 시끌벅쩍 했다. 그래도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이 심심치는 않을 것 같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할머니 세 분이 

돗자리를 깔아놓고 앉아 마늘을 까고 계셨다. 




“벨이라도 눌러볼까요? 형님.” 




태기가 초인종에 손가락을 댄체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렇게 하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손가락에 힘을 주는 태기였다. 

꾸욱, 눌렀으니 소리가 날만도 한데 초인종에서는 아무런 멜로디도 들리지 않았다. 고장인가? 




“형님, 고장난거 같은데요?” 




태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라, 조금 당혹스러웠다. 사실 그렇게까지 당황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태기는 이름을 불러볼까요? 하고 내게 물었다. 난 골똘히 생각하다 관둬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이 영 찝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그 시선이 느껴질 때 잽싸게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챙 모자를 뒤로 쓴 남자꼬마와 눈이 마주쳤다. 꼬마는 약7~8살 정도로 보였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그것도 내가 다 무안할 정도로 티가 많이 나게 말이다. 난 별거 아니겠거니 하며 다시 대문을 바라보았다. 

민규는 1층 창문을 빤히 보고 있었다. 하지만 반투명 유리창이라 안이 보일 리 없었다. 




“할머니, 저 사람들!” 




그때 웬 꼬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셋은 동시에 소리가 나는 곳을 보았다. 아까 그 수상한 챙 모자 꼬마였다. 

옆에는 허리도 제대로 못 펼 정도로 나이 드신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아까 마늘 할머니들 중 한 분이셨다. 

그런데 분위기상 꼬마가 할머니를 데리고 온 것 같은데 무슨 일일까? 우리는 두 사람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누긴데 나무 집 앞에서 얼짱거리노?” 




입가에 주름이 많이 패이신 할머니께서 우리를 매섭게 노려보시며 말씀하셨다. 그런데 나무 집이라니?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 곳에도 나무로 만든 집은 보이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이 할머니 눈이 침침하신 모양이다. 하긴, 그 정도로 늙으신 것 같았다. 




“할머니, 여기엔 나무 집이 없는데요?” 




난 무릎을 구부려 할머니와 키를 맞추었다. 할머니의 눈이 이제야 겨우 내 코앞까지 왔다. 




“이기 지금 ‘시방’ 뭐라 카노?” 




이 할머니, 왕년에 좀 노셨나본데? 




“할머니, 그렇다고 욕까지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손녀만한 애한테 ‘시발’이라뇨!” 




난 키를 맞춰 줄 필요도 없겠다싶어 무릎을 다시 펴버렸다. 정말 이상한 할머니다. 난 그냥 할머니를 무시한 체 1층 창문을 두드렸다. 

혹, 유리창이 깨지기라도 할까 손에 힘을 조절해서 두드렸다. 그런데 타앗! 누군가가 내 엉덩이를 때렸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많이 황당했다. 난 엉덩이에 마찰력이 느껴지자마자 뒤를 돌았다. 마늘 까는 할머니였다. 아까 그 이상한 할머니. 

난 눈 중앙에 집중적으로 인상을 썼다. 




“가시네 웃기네. 니 누긴데 나무 집 창문을 두드리 쌌노! 니 누꼬! 으잉? 니 누꼬!” 




타악, 타악. 내 옆구리를 연속으로 때리기 시작하는 할머니였다. 어느새 동네 꼬마들이 모여 신기하다는 눈으로 구경으로 하고 있었다. 




“야, 뭐해? 이 할머니 안 떼어놓고!” 




민규와 태기에게 고함을 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녀석들은 왠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꽤나 난감해하는 표정이다. 




“퍼뜩 몬 꺼지나? 몽뎅이 어뎄노? 찬수야, 가서 몽뎅이 좀 가온나.” 



“네, 함으이-!” 




세살 박이정도로 보이는 아기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할머니였다. 그런데 뭘 가져오라는 거야? 몽뎅이? 풍뎅이? 

서, 설마 몽둥이는 아니겠지? 어디론가 팔랑팔랑 달려가는 아기를 보니 좋지않은 예감이 들었다. 

난 뒤늦게나마 마늘 할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을 시도했다. 허나 할머니의 주름진 손은 이미 나의 치맛자락을 꼬옥 붙잡고 

계셨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왜 맞아야 하는 거야? 정말 맞더라도 이유는 알고 맞고 싶었다. 난 민규와 태기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어깨를 움찔거리는 놈들이었다. 그러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조심스레 할머니에게 접근하는 민규였다. 

태기는 눈치만 보고 있었다. 민규가 할머니의 깡마른 팔뚝을 움켜 잡았다. 




“저기‥할머님.” 



“니는 또 뭐꼬! 오라~ 전에 누룽지 티바 먹던 놈이네. 맞제? 대가리에 오줌 묻히고 다니던 놈이랑!” 




할머니의 시선이 민규에게로 집중되었다. 민규는 왠지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마늘 할머니는 민규를 아는 것처럼 보이는데. 

흠‥ 그럼 머리에 오줌을 묻히고 다니던 놈은 태기를 말하는 건가? 나는 태기의 머리를 보았다. 전과 다름없는 노란 탈색머리다. 

혹시 머리색이 노랗다고 그러는 건가? 내 생각엔 이게 정답인 것 같았다. 




“할머니, 제가 언제 머리에 오줌을 묻히고 다녔다고 그러세요? 남들이 들으면 진짠 줄 알겠네.” 




숨어있다시피 조용히 있던 태기가 꼬마들이 보고 있자 창피했는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에 할머니는 타깃을 태기에게로 옮겼다. 




“이 놈이 ‘시방’ 어데서 늙은이한테 눈까리를 부릅 뜨고 떽떽거리노?” 




태기는 할머니가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방금전의 그 당당함은 어디로 사라지고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우리가 동네 똥개인줄 아나. 난 발끈하는 마음에 할머니에게 외쳤다. 




“할머니! 왜 자꾸 욕하는 거예요?! 이 할머니 안 돼겠구만?!” 



“혀, 형님! 그만 가시는 게 좋을 듯싶은데‥” 




할머니를 향해 고함을 꽥 지르는 내 입을 막아버리며 차안으로 끌고 가는 민규였다. 

태기는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다가 냅다 뛰어 차 앞좌석에 올라탔다. 난 민규가 떠미는 바람에 뒷좌석에 내팽겨 쳐져 버렸다. 

뒤창으로 마늘 할머니가 차를 향해 삿대질을 해가며 뭐라 뭐라 소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 황당한 노인네네.” 




난 구겨진 옷을 털며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태기는 빨리 차를 몰라며 재촉을 했고 민규는 태기의 말과 상관없이 시동을 켜고 있었다. 

녀석들, 왜 저 할머니한테 꼼짝을 못하는 거야? 난 정처 없이 차를 출발시키는 민규와 태기의 뒷모습을 보며 진지하게 얘기했다. 




“아버지는 너희들을 나약하게 기르지 않았거늘‥.” 




이 한마디에 뜨끔해 하는 녀석들이었다. 난 말을 덧붙였다.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할머니가 누구라고 생각 하냐?” 




나의 질문에 태기와 민규는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상대방의 얼굴에 답이 적혀있을 리도 없는데. 




“난 홍콩 할매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간을 빼먹는 무서운 할머니시지.” 




난 이렇게 말하고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어릴 적에 보았던 ‘홍콩 할머니귀신’을 떠올렸다. 

그 할머니가 공중에서 덤블링을 할 때는 정말 공포 그 이상이었다. 난 다시 눈을 뜨고 두 사람을 보았다. 




“너희들은 누구냐?” 



“저, 저는 마늘 할머니입니다.” 



“송구스럽지만 저도 마찬가진데요, 형님.” 




민규의 대답에 태기도 동의하였다. 역시, 이 녀석들은 아까 그 할머니를 무서워하는 게 확실했다. 민규는 차를 아까 그 집 근처에 세웠다. 




“그런데 그 할머니는 누군데 그 난리냐?” 




난 다리를 꼬고 앉아 팔짱을 낀체 녀석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태기가 놀라운 것을 말해주었다. 




“그 집, 주인입니다. 형님.” 




주인? 그렇다는 건 강호두가 자취하고 있는 집의 주인이라는 말? 하-. 강호두 불쌍한 놈 같으니. 

그런 주인과 한 지붕 아래에서 산다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동정심이 생겼다. 




“저 할머니 집 앞에 널려있던 누룽지 몇 개 주워 먹었다고 어찌나 호통을 치시던지. 그 날 죽다 살아났다니까요?” 




태기는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할머니들이 집안으로 들어가시기를 기다리다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어 밖은 어두워졌다. 민규는 자동차를 다시 마늘 할머니네 집(이하, 강호두가 자취하는 집) 앞으로 몰았다. 

우리가 탄 차는 집 앞에 정확히 주차되었고 우리의 존재를 알리지 않기 위해 차의 시동을 껐다. 시간이 벌써 10시가 다 되었는데도 

강호두는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럴수록 우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차 창밖을 응시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는 날 파리들이 

그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저것들은 뭐야?” 




태기가 챙겨온 요구르트를 빨며 말했다. 난 앞좌석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요구르트의 달콤한 향이 내 콧속으로 들어왔다. 

넓은 앞 창문을 보니 정말 웬 사내들이 차 뒤에 서 있었다. 어두워서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충 4~5명은 되 보였다. 

난 동네 양아치겠거니 하며 좌석 등받이에 편히 기대었다. 밤은 계속 깊어만 가는데 이 불량 청소년은 왜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건지‥ 

스르르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 






잠시 선잠이 들었다. 그 짧은 시간에도 꿈을 꾸었는데 이상하리만큼 괴상한 꿈이었다. 거품을 입에 문 개 한 마리가 팔딱팔딱 

우리 집 정원을 뛰어다니는 꿈. 꿈속의 개는 찌글이처럼 못생기지는 않았다. 




“형님, 강호두입니다.” 




민규의 목소리에 잠에서 말끔히 깨어났다. 강호두가 드디어 온 모양이다. 난 몸을 앞으로 당겨 창밖을 유심히 보았다. 

강호두로 보이는 녀석의 옆에는 웬 여자가 한 명 있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가 않았지만 반바지 아래로 쭉 뻗어진 다리는 정말 늘씬했다. 

긴 파마머리의 여자다. 그런데 그 커플들 앞에 남자 몇 명이 가로 막아섰다. 차 뒤에 서 있던 남자들이었다. 무슨 일이지? 

확실한건 분위기가 어두웠다는 거다. 밤이라서 어두운 것도 있었지만. 우리 세 명은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아니 태기가 전에 관찰해본 결과 흔히 있는 일이라고 했다.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들은 강호두 옆에 있던 여자를 

자신들 쪽으로 끌어당겼다. 강호두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상황의 전말이 궁금했던 난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두 사람에게 물었다. 민규는 저 여자가 깡패집단 우두머리의 여자일거라고 했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했다. 자기들이 목격한 것만도 이번이 세 번째라 말했다. 녀석은 일부러 깡패의 여자만 골라 사귄다고 했다. 

한마디로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밖을 보았을 때 강호두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일방적으로 맞고 있었다. 

대항할 마음이 전혀 없어보였다. 왜 저러는 걸까?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매를 자초하다니‥. 




“형님, 어쩔까요? 가서 도와줄까요?” 




태기가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말라고 말했다. 녀석은 힘이 없어 맞는 게 아니라, 자신이 일부러 주먹을 들지 않고 있었으니까. 

몇 분후, 남자들은 여자를 차에 태우고 동네를 떠났다. 강호두는 바닥에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민규는 시동을 걸고 차를 강호두의 곁으로 

이동시켰다. 두 사람은 곧 차에서 내렸다. 난 내리지 않고 창문만 조금 열뿐이었다. 강호두는 자신의 옆에 멈춰 선 자동차에는 전혀 관심도 

없어보였다. 이상한 녀석이다. 아까 그 할머니도 그렇고 저 집에는 특이한 사람들만 사는 모양이다. 태기와 민규가 녀석의 앞에 섰다. 

태기가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강호두의 어깨를 툭 밀쳐내었다. 




“너 매저키스트냐? 왜 자꾸 매를 벌고 다니냐?” 




강호두는 계속 숨만 헐떡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기침을 했다. 하늘을 위로 누운체 태기를 보았다. 




“이번 여자도 꽤 예쁘던데요?” 




이번에는 민규가 말했다. 몸매가 예뻤다는 걸까? 어쨌든 민규의 말에 태기가 꼬투리를 잡아댄다. 




“야, 너는 참 이상하다? 이 새끼가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적은데 왜 존대를 쓰고 지랄이냐?” 




별거에다 시비를 건다. 그에 대한 민규의 대답은 참으로 간단했다. 




“내 맘이야.” 




고개를 숙여 한숨을 쉬는 태기다. 민규는 처음 보는 사람에겐 언제나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 하지만 그것도 일주일이 넘기 전까지였다. 




“콜록, 또 너거들이가?” 




처음이다. 강호두의 목소리를 듣는 건‥. 특이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드디어 강호두가 입을 열자, 시선을 다시 그에게로 집중시키는 두 사람이었다. 




“그래, 또 우리다! 이젠 정들 때도 안됐냐?” 




두 손을 무릎에 걸친 체 태기가 툭 내뱉듯이 말했다. 민규는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또 폼 잡는다. 

첫 담배연기가 밤하늘에 삼키어져 버렸다. 




“정은 좆또.” 




무슨 뜻일까? 분명 욕 같았는데. 퍽! 곧장 강호두의 머리에 내리꽂히는 태기의 손바닥이다. 강호두는 거기에 반항하지 않았다. 

머리칼을 흐트려 대며 반동으로 상체를 일으켜 바닥에 앉았다. 두 다리를 쭉 펴고 있다. 




“깡패들의 애인만 골라 접근하는 건 무슨 이유에서 입니까?” 




입에서 담배를 빼내며 연기와 함께 질문을 토해내는 민규였다. 난 창문 틈새로 귀를 기울였다.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않을까 하고 염려했지만 강호두는 다행이도 대답을 해주었다. 




“스릴 있잖아. 이뿌고.” 




그게 그의 대답이었다. 깊은 뜻이 없었다. 강호두는 힘겹게 바닥에서 일어섰다. 집으로 들어갈 모양이었다. 

태기와 민규는 차를 보았다. 나를 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명령을 기다리는 뜻이기도 했다. 난 두 사람에게 차안으로 들어오라는 식으로 

고개를 안쪽으로 돌렸다. 내 뜻을 알아듣는 것 같았다. 강호두는 비틀거리며 민규와 태기의 사이를 지나 집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열쇠로 대문을 열었다. 왜 그냥 보내냐고? 훗, 다 이유가 있었다. 강호두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태기는 차 앞좌석에 

몸을 실었다. 민규는 담배를 바닥에 버린 후 차에 탔다. 




“형님, 왜 보내는 겁니까?” 




태기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나는 말없이 웃어보였다. 의미 있는 웃음이었는데 그걸 태기는 몰랐다. 솔직히 기대를 한건 아니었지만. 




“형님, 방금 오싹했습니다.” 




째려보았다. 그러자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 태기다. 이번에는 민규가 나를 보았다. 전혀 다른 질문이었다. 




“형님, 무슨 생각해두신 거라도‥.” 




역시 눈치 빠른 민규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재밌는 연극이 될거야.” 




내 말에 태기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연극요? 웬 연극?” 




하하, 너희들은 내 심오한 작전을 모를 거다. 아주 완벽한 내 작전을 말이야. 

민규와 태기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는 나의 각본이 영상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난 태기가 말한 대로 오싹하게 미소 지으며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애들 집합시켜.” 






♡34 





끼이익. 끼익. 검은 승용차 3대가 차례차례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하나, 둘 모여 넓은 운동장을 밝혔다. 

나는 민규와 태기, 그들과 함께 5시간 정도를 차안에서 기다렸다. 조금 뒤면 해가 뜰만큼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긴 시간도 꿈속에서는 짧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자동차들의 엔진소리에 태기가 제일 먼저 눈을 떴다. 

다음엔 몇 초 간격으로 민규가 잠에서 깨어났다. 




“형님, 형님, 애들 왔습니다.” 




나는 민규가 깨워준 후에야 눈을 비비며 창밖을 보았다. 정말 낯익은 승용차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달칵. 먼저 차에서 내린 태기가 뒷문을 열어주었다. 그제서야 난 차에서 몸을 빼내었다. 8명의 부하 녀석들은 내가 내리자 

허리를 반 굽혀 조용히 인사를 하였다. 답례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었다. 




“내가 너희들을 급히 부른 까닭은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로로 나란히 선 부하들의 총명한 눈은 내 얼굴에 집중하였고 그들의 귀는 내 목소리에 빠져 있었다. 

부하들의 머리 뒤로 보이는 초등학교 건물은 하나의 불빛도 켜놓지 않은 채 어두운 얼굴로 침묵하고 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아쉽지만 주먹도 필요 없는 일이다.” 




녀석들의 눈은 그게 무엇입니까? 하고 나에게 묻는 것만 같았다. 나는 굳게 다문 입을 다시 한번 열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 할일은 연극이다.” 




일제히 눈을 깜빡였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부하 녀석들의 자세는 꼿꼿했다. 만족스러웠다. 




“연극의 관객은 단 한 사람뿐이다. 우리는 그 한 사람을 위해 연극을 할 것이다. 연극의 제목은‥” 




그 어느 때보다 부담스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만큼 부하들은 내 다음 대사에 관심이 많았고 또 궁금해 하고 있었다. 

난 생각지도 않았던 제목을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지어내었다. 




“제목은 [호두까기 인형]이다.” 




진짜 멋진 제목이었다. 난 계속 말을 이었다. 




“이번 목표는 강호두라는 소년이다.” 




소년이란 말은 내가 뱉어놓고도 꽤 닭스러운 단어였다. 놈도 아니고 녀석도 아닌, 소년이라니‥ 웩! 




“이 녀석을 우리 조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연극이다. 대본은 따로 없다. 그냥 평소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결국 소년이란 호칭을 녀석으로 바꾸어버렸다. 입과 귀에 적응된 단어라서 역시 친근감이 갔다. 

이제 보스를 뽑아야 한다. 연극 속에서의 난 보스의 여자이기 때문에 그 보스를 뽑아야만 했던 것이다. 

일단 난 강호두가 얼굴을 알고 있는 민규와 태기를 후보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니 8명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해야 했다. 




“가위! 바위! 보!” 




선발방법은 만인의 게임인 가위, 바위, 보로 하였다. 한쪽 팔을 번쩍 든 부하 녀석들은 제각기 동작을 취하였다. 

하지만 더 이상의 가위, 바위, 보는 필요 없게 되었다. 결과가 한 눈에 보였다. 7개의 주먹의 단 1개의 보자기. 

남자는 자고로 주먹이었지만, 한 녀석만은 보자기를 선택하였다. 그 녀석의 조직 내 이름은 이토 히로부미. 간단히 이토라고 불렀다. 

이토가 보스 역에 선발되었지만 다른 녀석의 축하대신 손가락질을 받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계집애처럼 보자기를 내었다는 것. 

그것이 이유였다. 




“그만!” 




나의 외침에 부하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이제 좀 조용해졌다. 학교 운동장 한 켠의 세종대왕 동상이 

나를 향해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전쟁터에 나갈 채비를 하는 것 같았다.(이순신 동상을 보고 말하는 듯한.) 




“그럼 연극 내 조직의 보스는 이토로 결정한다. 앞으로 강호두가 볼 때 우리 조직의 보스는 바로 이토이다. 

너희들이 알아서 잘 행동할거라 믿는다. 만약, 연극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나는 오른손을 코앞까지 올려 주먹을 꽈악 쥐어보였다. 다음 대사를 대신하는 행동이었다. 부하들은 내 주먹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나에게 한, 두 번씩은 맞아본 놈들이라 그 위력을 다들 잘 알고 있었다. 슬슬 여름해가 출근할 모양이었다. 

운동장의 어두운 침묵은 퇴근하기위해 준비를 하였고 곧 새 한 쌍이 날아와 이들과 밝게 교대를 해주었다. 

하지만 부하 녀석들의 정장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연극에서의 우리 조직 이름은 참새반이다.” 




나는 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태기가 재빨리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 셋은 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는 교문 밖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곧 연극의 막이 웅장하게 열릴 참이었다. 

난 모습을 드러낸 해님과 함께 보이지 않는 술잔을 들었다. 




‘성공을 위하여‥건배!’ 




[호두까기 인형] 개봉박두. 







********* 






AM.11:50. 

이토를 포함한 8명의 부하들은 강호두가 다니는 G고교 앞에 차를 세워놓고 녀석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9시 즈음, 강호두가 등교했다는 연락을 이토로부터 받았다. 학교는 잘 다니는 모양이었다. 나는 부하들을 학교 앞에 배치해놓고 

민규, 태기와 함께 백화점으로 갔다. 아무래도 명품 정장이 연극을 빛내기에 유리했다. 디자인이 아무리 좋지 않더라도 명품이라는 것 

자체가 타인들의 눈을 뒤집어 놓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명품 정장을 두 벌 사는데 백만 원을 넘게 투자해야만 했지만 

내 꿈을 위해서 이정도 돈쯤이야 그냥 버릴 수도 있었다. 




“형님, 이 옷 이토한테 진짜로 주시는 겁니까?” 




옷을 사고(새 옷으로 갈아입고.) 백화점을 나온 지 10분이 넘었는데도 몇 번째 같은 질문만 되풀이하는 태기였다. 이젠 막 짜증이 난다. 

태기 녀석 이 옷이 그리도 탐이 나는 모양이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이 옷은 태기가 부티난다며 고른 것이었다. 




“그럼 너 달라는 소리냐?” 




참다못해 콕 집어 물어버렸다.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한데 태기는 뒤통수를 긁으며 웃어보였다. 




“네, 형님. 저 주세요.” 




구질한 인간. 과연 변태기 다운 대답이었다. 난 대답 없이 한숨만 쉬었다. 땅이 꺼져라-. 




“형님, 저 주시는 거죠? 연극 다 끝나면 저 주시는 거 맞죠? 예?” 




나의 한숨이 놈에겐 그렇게 받아들여졌나 보다. 그런 태기를 보며 민규는 웃기만 할뿐이었다. 한심하다는 거겠지. 

난 내 앞에 얼굴을 들이대는 태기의 정강이를 발 앞 꿈치로 차버렸다. 




“그걸 네가 왜 가져? 절로 비켜. 안 그래도 더워 죽겠구만.” 




오늘따라 정말 더웠다. 최고 기온을 자랑하는 대구다웠다. 이럴 줄 알았음 자동차를 백화점 주차장에 세워두라고 할 것을‥. 




“형님, 정강이만은 제발 차지 마세요. 제일 민감한 곳이거든요.” 




나에게 차인 정강이를 손으로 비벼대며 태기가 말했다. 얼굴을 오만상 찌푸린 것이 많이 아픈 모양이다. 

난 태기를 흘겨보며 톡 쏘듯 말했다. 




“그럼 거기를 때려줄까? 난 거기가 제일 민감한 데인 줄 알고 일부러 정강이를 찬거였는데.” 



“거기라뇨?” 




모른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태기다. 흠, 어디 장난 좀 쳐볼까? 나는 음흉하게 웃어보였다. 




“설마 몰라서 묻는 거냐?” 




이렇게 말하고는 한 쪽 무릎을 들었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바지 중앙을 가리는 태기였다. 

“악, 형님!”하는 비명과 함께. 하하하. 내가 변태 같다고? 모르는 소리. 가끔씩은 이런 장난도 필요한 것이다. 

어느덧 차 앞에 도착한 우리는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 차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뜨겁게 달아오른 차는 바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덜 갑갑한 밖이 나을 정도였다. 민규는 곧장 시동을 켜고 에어컨을 틀었다. 후아- 정말 무더운 하루다. 

8명의 부하들과 합류해 대구 G고교 앞에서 강호두를 기다린 지 몇 시간이 지났다. 교문을 나오는 학생들이 조금씩 눈에 띠기 시작했다. 

곧 있음 강호두도 나올 기미처럼 보였다. 나는 민규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차에서 내린 민규가 부하들에게 차안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였다. 승용차 4대는 일제히 교문에 주목했다. 강호두가 나오면 그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갈 예정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느낌상 30분도 채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드디어 강호두가 나타났다. 연극의 주인공이었다. 




“조금 붉은 머리에 하얀 얼굴. 그녀석이 강호두다. 공유하도록.” 




이토에게 전화로 강호두의 등장을 알리는 민규였다.(부하들은 강호두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다.) 

강호두와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자 민규가 먼저 핸들을 돌렸다. 조금씩, 아주 천천히 차를 몰았다. 자동차로 녀석의 뒤를 밟을 경우 

들킬 확률이 컸기에 우리 모두는 신중해야만 했다. 강호두는 덥지도 않은 지 땀도 닦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기만 했다. 

강호두가 걸어가는 길은 우리도 잘 아는 길이었다. 그 길은 강호두 네 집으로 가는 길이었기에 모를 리가 없었다. 

강호두 네 집은 G고교까지 걸어가도 될 만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승용차 4대는 나란히 골목 입구에 멈추었다. 

집으로 들어간 강호두를 여기서 기다릴 참이었다. 민규와 태기, 그리고 나는 강호두가 집에서 다시 나올 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슬슬 배가 고파져 왔다. 태기는 학교 앞 슈퍼에서 샀던 요구르트를 쪽쪽 빨고 있었다. 

나도 초코파이를 한 통 사놓을 걸 하고 후회가 되었다. 2시간 후 강호두가 골목에서 나왔다. 한껏 차려입은 모습이다. 

역시, 옷을 갈아 입기위해 집으로 온 것이었다. 햇빛을 받은 녀석의 머리칼은 더욱 붉게 보였다. 학교에서 가만히 두는지 모르겠다. 

뭐 내가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민규는 강호두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민규를 따라 부하 녀석들의 차가 움직였다. 

도로가로 나온 강호두는 택시를 잡아탔다. 사람을 따라가는 것보다 같은 자동차를 따라가는 것이 지금 우리로써는 반가운 일이었다. 

(지하철을 타지 않아서 더더욱 반가웠다.) 강호두가 탄 택시는 계속 직진만 하더니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했다. 

택시가 멈춘 곳은 동성로 입구였다. 시내는 일반 사람들보단 교복 입은 학생들이 주를 이루었다. 

택시에서 내린 강호두는 바로 보이는 영화관 앞으로 갔다. 쇼핑매장과 한 건물에 있는 큰 영화관이었다. 

혼자 영화라도 보려는 건가하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강호두는 건물 앞에서 세 명의 사내들과 아는 척을 하였다. 

머리스타일이 꽤나 화려한 남자들이었다. 일명 니뽄 스타일. 강호두는 그곳에 서서 남자들과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건물 앞에 있던 작은 무대 위에선 웬 여학생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곧 그 앞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러다가 놈을 놓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그 곳에서 빠져나오는 녀석이었다. 친구들로 보이는 남자들과 함께였다. 

강호두는 리어카에서 파는 과일주스를 사먹었다. 나도 먹고 싶었다. 




“형님, 가서 사올까요?” 



“시끄러워!” 




내 마음을 눈치 챈 건지 태기가 물었다. 하지만 나는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거절해버렸다. 

그냥 묻지 말고 사오면 좋을 텐데 하고 바랬다. 하지만 그것도 바람뿐 차는 또 다시 출발했다.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강호두가 친구들과 함께 택시를 탔다고 했다. 이번엔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택시 뒤를 우리가‥ 우리 뒤를 검은 승용차 3대가 

따랐다. 핸드폰 액정에는 9:00라고 적혀있었다. 강호두가 두 번째로 잡아탄 개인택시는 현란한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큰 간판의 화려한 네온 싸인. 나이트클럽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나이트다. 친구들과 택시에서 내린 강호두는 건물 앞 삐끼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어쨌든 연극은 시작되었다. 나는 가방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화장을 정리했다. 

더운 날씨에 지워질까 염려했었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나는 룸미러로 보고 있는 태기와 민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민규다. 이토에게 거는 것이었다. 




“준비해.” 




민규가 짧게 통화를 끝냈다. 곧 부하 녀석들이 하나, 둘 차에서 내렸다. 민규와 태기도 내렸다. 나는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달칵. 문을 열어준 것은 이토였다. 연극 속, 참새반조직의 보스. 내가 산 명품 정장을 입은 이토는 어느 조직의 보스 못지않게 위엄 있어 

보였다. 이토가 조심스레 손을 건네었다. 나는 태연하게 그 손을 잡았다. 나머지 부하들은 2열로 나란히 마주보고 섰다. 

그리고 그 양끝엔 민규와 태기가 있었다. 모두들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삐끼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강호두는 어느새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난 이토와 손을 잡고, 아니 팔짱을 끼고 부하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서‥ 무서울 게 없는 여자의 모습으로 이토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이토의 표정은 많이 긴장한 것 같았다. 난 이토의 볼에 입을 맞추는 척하며 이토의 귀에 대고 말했다. 




“긴장할거 없어. 실수는 절대 용납 못해.” 




더 긴장하게 만들 만한 발언이었다. 이토는 슬쩍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우리는 강호두의 옆을 지났다. 

난 살짝 미소를 띠며 강호두를 보았다. 녀석도 나를 보았다. 강호두의 입가에 왠지 모를 은은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쿵닥쿵닥. 빠빠빠♬ 나이트 입구를 들어서니 강렬한 비트의 음악이 나이트 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도 

꽉 채우고 있었는지 넓은 스테이지 위에서 사람들이 광적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는 긴장한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넓은 테이블로 

걸어갔다. 우리 테이블 옆에는 빈 테이블이 단 한 개 있었다. 그 곳엔 강호두가 앉을 게 분명했다. 그 전에 다른 사람들이 앉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나와 이토는 테이블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양쪽 소파에는 각각 민규와 태기가 앉았다. 

나머지 녀석들은 테이블을 뒤로 하여 서 있었다. 




“이토, 너 옷빨 좀 선다?” 




태기가 담배 한 대를 꺼내며 이토에게 말했다. 이 자식이 아직도 옷에 미련을 못 버렸나. 난 머쓱히 웃는 이토완 달리 태기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당장에 시선을 피하며 담배를 도로 집어넣는 태기다. 




“형님, 왔습니다.” 




민규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난 얼른 이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 볼에 뽀뽀해.” 



“예?” 




이토가 놀라며 묻는다. 난 대답하지 않고 볼을 갖다대었다. 그러자 힘겹게 뽀뽀를 하는 이토였다. 영광스러운 거겠지. 

이토의 나이 25살이었다. 아직은 젊은 나이였다. 강호두는 내 쪽을 보다가 친구들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역시나 우리 옆 테이블이었다. 

잘 돌아가는 중이었다. 우리는 많은 양의 양주와 안주를 주문했다. 곧 강호두 쪽 테이블에서도 술과 안주를 시켰다. 

술과 안주가 왔을 때 나는 배 한 조각을 이토의 입에 넣어주는 등 연기에 열중했다. 그런 중에도 강호두를 의식했고 녀석은 틈틈이 

나를 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을 때는 대놓고 나를 쳐다보는 강호두였다. 녀석은 겁이 없었다. 용기 한번 대단했다. 

나는 본격적으로 강호두에게 접근해보고자 이토와 함께 일어섰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였다. 이토는 따라오려는 부하들을 손으로 막았다. 

그렇게 내 허리를 감싸고 이토는 위풍당당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제법 연기가 늘었다. 강호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 앞에 도착한 나는 이토에게 말했다. 




“10분 후에 나와.” 



“네, 알겠습니다. 형님.” 




이토가 화장실로 들어가고 난 그 앞 벽에 기대어 녀석을 기다렸다. 그 ‘녀석’이란 게 이토냐고? 아니다. 그건 이 녀석이었다. 




“야, 니 양다리 걸쳐볼 생각 없냐?” 




바로 [호두까기 인형]의 단 하나뿐인 관객이자 주인공인 강호두. 

난 내 옆에 기대고 서 있는 녀석에게 웃어주었다. 








♡35 






집이 그리 부유한 것도 아닌데 강호두는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자신이 있는 건지 

여유롭기까지 했다. 빈틈이 많이 보였고 그만큼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는 나 자신도 서두를 필요가 없었기에 녀석의 

눈빛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보았다. 내가 이토에게 10분후에 나오라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벌써 반했나?” 




벽에서 등짝을 떼며 바로 서는 강호두다. 그는 가슴에 팔짱을 끼고서 웃어보였다. 아주 잠깐 노랗고 붉고 파란 조명이 사라지고 

하얀 조명만이 번쩍였다. 정말 순식간이었지만 난 강호두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있었다. 어젯밤에 깡패들에게 맞은 상처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오른쪽 광대뼈에 흰 반창고 한 개, 입술 끝에 붉은 상처. 심하지는 않았다. 




“아, 이거? 어제 죄 값 좀 치른다고.” 




반창고를 만지며 의연하게 말하는 강호두였다. 죄 값이라‥ 다른 남자의 애인을 넘본 것? 

글쎄‥ 마음 없는 여자를 납치한 것만 아니라면 그건 죄라고 할 수는 없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죄 값? 무슨 큰 죄라도 지었나보지?” 




왠지 다른 뭔가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오~ 말이 숏 다린데? 마음에 든다. 역시 웃 대가리 깔치라니까.” 




말이 숏 다리라고? 지금 웃어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었겠지? 그래, 그렇겠지. 그건 그렇고 역시 저 억양, 어색하기만 하다. 

그래도 사투리를 못 알아들을까봐 내심 조마조마 했었는데 전체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어 다행이라 여겨졌다. 오히려 신기하다고나 할까? 




“내가 물었잖아. 무슨 큰 죄라도 지었냐고.” 



“어! 존나 큰 죄지.” 




스마일-. 입이 커서 그런지 웃는 것도 크게 웃었다. 마치 만화 속 주인공들이 웃는 것 마냥. 

난 사람도 이렇게 웃을 수가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그 큰 미소에 잠시나마 빠져들었었다. 시원하게 웃는다고나 할까? 

아니 활짝-이라는 말이 딱이었다. 강호두는 미소를 거두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좀 시끄럽제?” 



“어? 어, 조금.” 




다시 활짝 웃는 강호두였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큰 입을 다물고서 5초 정도를 웃고 있었다. 계속 나를 보며 웃었다. 

흠,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왜 자꾸 싱글벙글 웃는 거야? 앞에 있는 사람 무안하게. 




“바쁜 일 있나?” 




히죽히죽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할말이 저거였는가? 조금 이해가 안 갔다. 그래도, 그렇지만 대답은 해줘야겠지? 




“아니. 없는데?” 



“후우-, 그 카면 나가자!” 




내 손을 덥썩 잡고 끌고 가는 녀석. 그런데 도대체 한숨 소리는 뭐야? 왠지 그 한숨으로 인해 내가 눈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어쨌든 이토에게 말한 10분 안에 난 강호두의 손에 이끌려 나이트 건물 밖으로 나갔다. 연극의 해피 엔딩은 지금부터 

내가 강호두의 마음을 얼마나 사로잡느냐에 달렸다.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야만 한다. 




“이야~ 호두소년, 벌써 한 건 한거가?” 




나이트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삐끼 두 명중 버버리 무늬의 두건을 쓰고 있는 남자가 말했다. 그들은 나를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의 일이 떠올랐는지 입을 하, 벌린다. 




“헉! 이 사람은‥아까 전에‥” 



“강호두, 또가? 니 진짜 미칬나?!” 




이들도 강호두의 특이한 취미를 알고 있는 눈치다. 하지만 강호두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쭐대기까지 했다. 

내 어깨에 팔을 걸치는 녀석이다. 




“하하! 짜식들 졸라 부러워하기는. 야, 이따가 완식이랑 윤덕이 나오면 내 먼저 갔다 캐라. 카면 간데이~.” 




강호두는 나를 이끌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건지 모르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냥 이쪽으로 가자.” 




무작정 왼쪽 길로 가는 강호두다. 정말 못 미더웠지만 어차피 대구지리를 모르는 나였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밤거리는 주점들의 화려한 간판으로 어둠을 빼앗기고 있었다. 밤이라서 그런지 낮만큼 무덥지는 않았다. 

약풍(弱風)이 텁텁한 가슴 속을 말끔히 헹궈주었다. 




“시원하제? 니 표정 보니깐 시원한거 맞네.” 




강호두가 내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 억양, 정말 적응이 안 된다. 




“응. 시원하네.”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며 대답해주었다. 샤워가 하고 싶다. 




“어? 니 말투 존나 닭살이다.” 




이 녀석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내 말투가 뭐 어때서! 




“니 이사 온 거가?” 



“무슨 이사?” 



“니 경기도 쪽에 사나? 왜 표준말 쓰는데?” 



“그래, 이사 왔어. 됐냐?” 



“그럼 그렇지. 그래도 니는 이제 대구에 사니깐 대구 말 써라. 니 말투 듣기 존나 거북하다.” 




뭐야? 내 말투가 거북하다고? 이 자식이 진짜 내 손에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강호두 녀석은 지나치게 솔직하고 또 직설적이었다. 

조금씩 놈의 성격이 파악되려고 한다. 난 열찬 머리를 식히기 위해 손 부채질을 했다. 




“왜? 덥나? 아까는 시원하댔으면서‥.” 




자신의 두 손으로 부채질을 해주는 강호두. 병 준 다음에 약 줘봤자다. 난 강호두의 손을 쳐내버렸다. 




“됐어. 필요 없어.” 




꽤 무안해하는 얼굴이다. 하지만 역시 직설적이었다. 




“니 존나 싸가지 없네? 하하.” 




없으면 없었지, 마지막에 그 웃음은 뭐야? 꼭 재밌어서 웃는 그런 웃음소리였는데. 강호두는 다시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신이는 어깨동무 하는 거 싫어하는데. 갑자기 그 녀석이 왜 생각나는 걸까? 두 사람 다 시험공부는 잘하고 있겠지? 




“니 이름 뭔데?” 




강호두가 물었다. 이름‥? 흠, 그런데 왜 내 이름을 말하기가 싫은 걸까? 난 대답을 머뭇거렸다. 




“갈차주기 싫으면 치아라. 영자야.” 




영자? 그건 누구래? 난 순간 녀석이 잠꼬대라도 하는 줄 알았다. 




“카면 나는 그냥 니보고 영자라고 부를게. 됐나?” 




되기는 뭐가 돼? 하필이면 왜 그런 촌스러운 이름인거야? 난 하는 수 없이 내 이름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숨길 필요도 없었다. 난 내 이름을 사랑한다. 




“내 이름은 연개‥” 




그래도 망설여지기는 마찬가지다. 휴-. 




“연개‥미.” 



“연개미? 그게 니 이름이가?” 




제길. 내가 지금 뭐라고 그런 거야? 이름이 연개미라니‥ 개미‥. 




“응. 개미야.” 




어째 내 원래 이름보다 더 괴상한 것 같다. 




“개-미? 아하하!! 개미가 뭐고. 존나 웃긴다!” 




사돈 남 말하는 녀석이었다. 우리는 도로가로 나왔다. 두 인도 사이에 있는 차도에는 자동차들이 조심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내 이름은 호두다. 귀엽제?” 




이거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뻔뻔하기는. 정말 얄미운 녀석이었지만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응.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네.” 



“하하, 깨물면 니 이만 뿌라진다. 자제해라.” 




지금 뭐니? 나더러 웃으라고 하는 소리야? 정말 유머스럽지 않은 말을 서슴치 않고 내뱉는 녀석이었다. 

완전 초등학교 저학년 개그수준이다. 난 대꾸해 주지 않고 앞을 보며 걷기만 했다. 




“니 몇 살인데? 20살이가? 아님, 21살?” 



“19살.” 



“뭐라고? 열아홉이라고? 헉, 늙어 보이는데?” 




이 자식이 진짜! 난 걸음을 멈추고 강호두를 째려보았다. 나보고 늙어 보인다니‥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다. 

제발 말을 내뱉기 전에 생각이란 걸 했으면 좋으련만. 




“눈깔에 힘 풀어라. 하하. 그카면 내랑 갑이네? 근데, 니 능력도 좋다. 그런 깡패새끼도 건지고.” 




내 어깨에서 팔을 떼고 자기 뒤통수에 양 깍지를 끼는 녀석이었다. 하-, 그냥 내가 참자, 참어. 그 누구를 원망하리. 

다 나 좋자고 시작한 일인데. 어느새 걷다보니 큰 나무(가로수)가 일렬로 심어져 있는 길에 다다랐다. 어느 정도 둘러본 결과, 

대구에 나무 하나는 참 많은 것 같았다. 길은 어두웠다. 가로등끼리의 간격이 너무 멀어 전체적으로 어두웠던 것이다. 




“음침하고 좋다 아니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길인데. 여기서는 뭔 짓을 해도 아무도 모르거덩. 어떤데? 니도 맘에 들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녀석이 변태적인 생각을 한다고 단정 짓는 걸까? 

강호두를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부아앙- 부앙. 소리는 크고 선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앞이었다. 




“가보자! 내 친구들이다.” 




내 손목을 잡고서 나를 또 끌고 가는 강호두다. 이 녀석은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대충 파악이 되었다. 

난 강호두와 함께 길을 달려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오토바이들이 서 있는 곳에 도착한 것이다. 어두운 길의 중앙이었다. 

총 여섯 대의 오토바이가 시동을 건체 세워져 있었다. 




“임마, 여서 뭐하노.” 




오른쪽 콧망울에 번쩍이는 피어싱을 한 남자가 강호두에게 말했다.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 무슨 녀석이 길 곳곳마다 아는 사람이니‥. 

강호두랑 결혼을 하면 일주일 내도록 모임에 따라다녀야 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뭐하기는 데이트하지.” 



“하여간 이 새끼 능력은 존나게 좋아요.” 




이번에는 곰돌이 모양의 헬멧을 머리에 쓴 남자가 말했다. 도대체 저런 헬멧은 어디서 난건지. 특이한 인간이다. 




“이번에는 누구 깔친데?” 




나무에 기대어 담배를 펴고 있던 남자가 물었다. 눈빛이 강렬했다. 




“지금까지의 양아치 새끼들이랑은 레벨이 다르지. 지금쯤이면 아마 난리 났을 거다. 그 조폭 새끼들. 하하.” 




어떻게 여자를 앞에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녀석은 차일 걱정은 하지도 않는 것일까?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그리고 파악된 것 같으면서도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그런 성격이었다. 




“뭐? 조폭? 설마 대가리는 아니제?” 




피어싱을 한 남자가 조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러자 나를 보는 강호두다. 이토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남자들이 인사하는 게 맞는 것 같더라. 개미야, 맞제?” 




서슴없이 나에게 물었다. 난 그런 녀석이 황당하기만 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이 자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맙소사. 




“니 진짜 돌았나?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니가? 이번엔 또 무슨 봉변을 당할려고? 

니가 금마들이랑 싸우면 내가 말은 안한다.” 



“미친놈.” 




오토바이 군단이 저마다 쓴 소리를 한마디씩 내뱉었다. 다들 말하는 방식이 식하고 서툴렀지만 그래도 걱정하고 있었다. 

친구를‥ 강호두를‥. 




“니 그만 할 때도 안됐나?” 




나무에 기대어 있던 남자가 담배를 바닥에 버리며 이야기했다. 침을 뱉어 담배 불을 껐다.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무게감이 있어 보였다. 




“무슨 혼자 독립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니는 그 버러지 같은 생각부터 고쳐먹어야 된다. 

니는 니가 그카는 게 그 씨발년한테 용서를 비는 거라고 생각하나? 이 미친 새끼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이야기 속에는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강호두가 지금 이러는 것이 어떤 여자한테 

용서를 비는 거라고? 그때 나이트 안에서 강호두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큰 죄를 지었다는 말. 여자에게 무슨 큰 죄를 

지은 걸까? 난 강호두를 보았다. 그 밝던 모습은 어디 가고 차가운 눈빛의 강호두만이 있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야, 호윤아 왜 카는데? 그만 해라.” 




피어싱이 어두운 분위기에 당황하여 남자를 말렸다. 저 남자의 이름이 호윤인가 보다. 

하지만 호윤이라는 남자는 강호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냥 육교 위에서 확 뛰어내리지. 씨발, 그렇게 맞아가지고 언제 뒈지겠노. 

죄 값 치르는 건 니가 그 년 곁으로 가는 것 밖에 없다. 니는 그렇게 생각 안하나? 왜? 또 뒤지는 건 무섭나?” 



“아가리 쳐 닫아라.” 




남자의 또 한번의 말 공격에 드디어 입을 여는 강호두였다.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많이 참는 듯한, 자신의 기분을 절제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전한 화산과도 같았다. 




“호윤아, 그만하고 가자. 아가씨, 금마 좀 델꼬 가세요.” 




진땀을 빼는 피어싱이었다. 다행이도 남자는 이쯤에서 그만 둘 것처럼 보였다. 오토바이에 오르는 남자였다. 

남자는 오르자마자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심한 소음을 내며 점점 멀어져 갔다. 




“호두야, 다음에 보자. 우리 가볼게.” 




강호두는 말이 없었다. 오토바이 군단도 기대하지는 않고 있었다. 쓴 웃음을 지으며 호윤이라는 남자가 갔던 길로 

오토바이를 모는 피어싱. 그리고 그 뒤를 곰돌이 헬멧과 나머지 사람들이 이었다. 오토바이의 엔진소리는 작아져만 갔고 

그 어두운 길 위에는 나와 강호두만이 남았다. 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위로를 해야 하나‥ 그렇다면 어떻게 위로를 해야 좋을지 

감이 안 잡혔다. 난 강호두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얼마동안은 이 어둠에 사로잡혀 있어야 할 것 같았던 분위기는 

이내 강호두의 목소리로 인해 바뀌고 말았다. 




“집 어딘데? 바래다줄게.” 




또 하나의 난간에 다다랐다. 






♡36 






집이 어디냐고? 게다가 친절하게 집까지 데려다준다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위로고 뭐고 간에 지금 처한 내 일부터 걱정해야 될 판국이었다. 




“너거 집 어디냐고. 가시나 정신 나갔네.” 



“뭐야?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가시나? 정신 나갔네?” 




저 입을 어떻게든 해야지. 하는 말마다 저렇게 몰상식하니 열이 식다가도 다시 불이 붙었다. 

강호두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게 뭐? 그럼 머시마라고 그럴까? 빨랑 가자. 밤이 늦었다.” 




또 다시 내 어깨에 팔을 두르는 녀석이었다. 연개소리, 지금껏 참아온 게 아깝잖니? 이왕 참는 김에 끝까지 참는 거야. 

나중에 놈이 조직에 들어오면 그때 손봐줘도 늦지 않아. 그러니깐 조금만 더 참자. 난 내 스스로를 타이르고 위로했다.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나저나 집이 어디라고 말하지? 후, 일단 거절부터 하고 보자. 




“아니야. 안 데려다줘도 돼. 그냥 혼자 갈게.” 



“무슨 소릴!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데. 내가 델다 줄게.” 




활짝 웃어 보인다. 놈의 웃음은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보였다. 알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녀석의 웃음은 다른 이들과는 뭔가가 달라보였다. 하는 수 없이 난 알겠다고 말했다. 대구지리라고는 강호두의 동네밖에 몰랐던 

나는 ‘달성동’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반가워하며 더욱더 크게 미소 지었다. 




“진짜? 우리 집도 거기 있는데. 하하! 니 뭐 느끼는 거 없나?” 



“느끼는 거 없는데?” 



“븅-신, 이게 바로 운명이라는 거다. 니는 지금 베토벤이 지은 운명 교향곡이 안 들리나?” 




역시 강호두는 미친놈이었다.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 반대편 인도로 갔다. 거기서 강호두는 택시 한 대를 어렵사리 잡았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택시 안에서 놈은 왜 그리도 말이 많은지 입에 청 테이프를 붙여 버리고 싶을 지경에 까지 다다랐다. 

대구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건가하는 의문도 들었다. 우리는 핸드폰 번호를 주고받았다. 

어느덧 강호두가 말한 동네에 이른 택시는 요금을 요구하였다. 할증이 붙어 3천원이 조금 넘게 나왔다. 




“어딘데? 이 근처가?” 




택시에서 내리자 나에게 묻는 강호두였다. 난 일단 걷고 보자는 생각에 무작정 눈에 띠는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동네는 조용했다. 

그렇게 골목을 걷고 또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 몇 분을 더 걸었을까? 지친 강호두가 짜증을 내었다. 




“아직 멀었나? 니 혹시 내한테 구라깐 거 아니가?” 




헉, 위기다. 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앞을 보았고 허름한 건물 하나가 눈에 쏙 들어왔다. 이젠 방법이 없었다. 

괜히 시간만 끌었다가는 연극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건 절대 안 된다. 난 눈앞에 보이는 허름한 건물을 가리켰다. 




“거, 거짓말은 무슨. 저기가 우리 집이야. 아~ 벌써 다 왔네.” 




난 그 건물 앞으로 태연하게 걸어갔다. 이상하게도 건물과 가까워질수록 암모니아 냄새가 내 코 끝을 자극시켰다. 웬 똥 구릉내가‥. 




“정말 여기가 너거 집이가? 하아-.”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는 강호두다. 건물을 잘못 정한 것 같은 예감이‥. 틈이 갈라진 나무 대문과 아래가 축축이 젖은 시멘트 건물. 

두 사람이 겨우 들어 갈만한 그런 크기의 건물이었다. 지붕도 따로 없었다. 그저 직사면체의 시멘트 건물이다. 

집에 대해서 더 이상 묘사할게 없을 정도다. 그림 그리기도 쉬운 그런 집. 하지만 이제 와서 말을 정정할 수는 없었다. 

맨 정신으로 자신의 집을 못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응. 맞아. 우리 집이야.” 



“진짜 가난하네.” 




측은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어쨌든 빨리 갔음 좋으련만. 내 연극이 들키기라도 할까봐 내심 걱정이 되었다. 




“저기 너도 그만 가봐. 오늘 즐거웠어.” 



“어. 그래. 니도 들어가라.” 




들어가라고? 그럴 수는 없지. 남의 집에 어떻게‥. 




“응. 알겠으니까 너도 가.” 



“어. 니 드가는 거 보고.” 




뭘 본다는 거야?! 그냥 가면 되지! 예상했던 대로 완전 드라마 식 전개가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분명 이 집 주인이 누구냐고 호통을 치겠지? 젠장. 




“빨리 드가라. 나도 좀 집에 가자.” 



“아, 알았어. 들어갈게. 잘 가.”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난 무조건 집주인에게 빌자는 심상으로 뒤돌아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잽싸게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어두웠다. 




“개미야! 우리 잘해 보제~? 사랑해! 하하하.” 




문밖에선 강호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걸음소리도 들렸다. 미친 인간, 만난지 몇 시간 됐다고 사랑한대야? 

저런 식으로 여자들을 꼬셨구만? 그나저나 여긴 왜 이렇게 어둡지? 그리고 냄새는 왜 이렇게 많이 나는 거고.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난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어 보았다. 조심스럽게 살포시.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끝에 닿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허공 위에서 발을 휘저을 뿐이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나‥ 이 곳은? 난 당장 문을 박차고 나왔다. 건물 벽에 스위치가 있었다. 

난 그것을 눌러보았고 곧 건물 내 천장에 달려있던 전구에 불이 들어왔다. 그랬다. 이 곳은 화장실이었던 것이다. 일명, 변소라고 하는‥ 

푸세식 화장실! 순간, 강호두와 내가 바보가 된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강호두는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제기랄, 후자가 아니길 바랄뿐이다. 난 화장실과 떨어진 곳으로 가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민규의 번호를 눌렀다. 




“형님, 어디십니까? 모시러 가겠습니다.” 




곧 민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강호두가 택시기사에게 말했던 장소를 말해주었다. 아니, 강호두 네 집 근처라고 하는 것이 

더 알아듣기 쉬울 터였다. 잠시 후 민규와 태기의 차가 내 앞에 섰다. 1시간이나 걸렸지만‥. 

우리는 밤을 보내기위해 제일 가까운 호텔로 갔다. M호텔. 건물 외관에는 ‘설운도 지금 막 도착!’이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지하가 작은 나이트클럽인 모양이었다. 카바레 같은 나이트. 




“형님 옷에서 똥내 납니다.” 




강호두만큼이나 솔직한 태기였다. 그단새 냄새가 옷에 베인 모양이다. 정말 스트레스가 쌓인 만큼 고단한 하루였다. 




“이 자식이, 말버릇이 그게 뭐야?!” 



“악, 형님 잘못했어요!” 




쿵쾅쿵쾅. 호텔 로비는 밤인데도 불구하고 활기를 띠었다. 태기와 나, 우리 두 사람으로 인해서. 






******* 






Rrrr. 다음날 아침.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침실로 들어왔다. 

난 눈부심에 눈을 찡그리며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어씌웠다. 하지만 전화 소리는 어쩔 수가 없었다. 배터리를 빼는 수밖에. 

난 손을 뻗어 선반 위에 있는 핸드폰을 잡았다. 배터리를 빼기 전 액정을 살짝 본 나는 배터리를 빼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강호두였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지금 너거 집으로 가는 길이다. 인났으면 빨리 세수해라.” 




놈의 말에 눈이 번쩍 뜨여졌다. 지금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그 변소로?? 난 고함부터 질렀다. 




“안돼!” 




벌컥! 

나의 고함소리에 놀란 민규가 침실 문을 열었다. 뒤엔 태기가 있었다. 두 명 다 어벙벙한 모습이었다. 




“안된다니 뭔 소리고?” 




강호두가 물었다. 




“그, 그게‥ 나 지금 밖이야!” 




녀석이 화장실 문을 열어서는 절대 안 된다. 




“밖? 어디??” 



“호텔!” 




뜨아. 사실대로 말해버렸다. 이 바보. 하는 일이 왜 맨날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호텔? 거긴 왜?” 




아니지.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강호두의 질투심을 자극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응. 새벽에 아저씨한테서 전화가 와서 호텔로 온 거야.” 



“아, 그런 거가?‥지금 좀 나온나. 나올 수 있으면.” 



“응. 그래, 지금 나갈게. 핫, 아저씨 왔어. 이따 다시 전화할게.” 




탁. 폴더를 닫았다. 민규와 태기는 아직도 방문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오늘 확실하게 놈을 유혹할 것이다. 나는 각오를 새로이 다지며 침대에서 내려와 욕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저것들은 언제까지 서 있을 생각인거야? 



‥‥‥ 



근처 매장에서 새 옷을 사 입은 나는 강호두가 기다린다는 음식점으로 갔다. 약속 시간이 넘어버렸다. 

강호두는 많이 기다렸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먼저 음식을 주문해 먹고 있었다. 매너 없는 인간 같으니. 

난 녀석이 있는 테이블로 갔다. 




“미안. 많이 늦었지?” 



“아니. 2시간이 뭐가 늦은 거고. 니는 뭐 먹을래?” 




뭐야? 의외로 착한 녀석이었잖아? 대놓고 성질부터 낼 줄 알았는데.(비꼬는 것인 줄 모르는 주인공.) 

새삼 난 강호두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나는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왔기에 간단히 돈까스, 우동 세트를 주문하였다. 

그런데 오늘이 주말이었던가? 




“오늘이 일요일이야?” 




물 한잔을 마시며 강호두에게 물어보았다. 강호두는 양상추 하나를 포크로 찍었다. 




“목욕탕 쉬는 날이다.” 




켁, 목요일이라는 뜻 같았다. 근데, 목욕탕이 쉬는 날에 왜 자기가 노는 거야? 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 학교 안 가니?” 



“개교기념일이다. 그러는 니는 왜 안 가는데?” 



“나? 나, 나는‥.” 




윽, 괜히 물어봤다. 




“딱 보이 학교 짤렸구만. 맞제?” 




이 녀석이 날 뭘로 보고. 




“어. 그‥그래, 맞아.” 




내 밑에만 들어와 봐라 네 놈의 주둥이에 반창고를 이틀 동안 붙여줄 테다. 난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나 자신을 또 한번 위로했다. 

잠시 후 돈까스와 우동 세트가 나왔다. 난 우동 국물부터 들이켰다. 엄청 뜨거웠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만큼 폼 나게 들이켰기에‥. 




“새벽에 호텔로 갔으면 금마랑 하룻밤 같이 있었겠네?” 




나에게 대뜸 물어온 녀석의 질문이었다. 녀석은 티슈로 입술을 닦으며 대답을 기다렸다. 

설마 벌써부터 질투하는 건 아니겠지? 나야, 뭐 대 환영이지만. 




“맞아. 왜? 아저씨랑 헤어졌으면 좋겠어?” 




난 찬 물을 마셨다. 뜨거움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치만 이미 혀가 데인 것 같았다. 




“아니. 깨지지 마라. 니가 그 새끼랑 깨지는 날엔 나랑도 깨지는 줄 알고 있어라.” 




강호두는 당당했다. 그리고 비장했다. 역시 사랑 따위로 여자를 만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다시금 밝혀졌다. 




“‥왜? 이유가 뭐야? 넌 양다리가 재밌니? 결혼도 두 집 살림하는 여자랑 살겠구나?” 



“미쳤나? 차라리 결혼 안 하고 말지.” 




얼씨구? 그건 또 싫은 모양이네. 난 말을 말자며 돈까스를 써는 데에만 열중했다. 

하지만 음식을 다 먹은 강호두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여튼 간에 니 이거 하나만은 알고 있어라. 내가 니랑 사귀는 이유는 니가 조폭 깔따구여서 그러는 거니까. 

그 새끼랑 끝나면 내가 니랑 사귈 이유도 없어지는 거다. 싫으면 더 이상 내랑 안 만나도 된다.” 




정말 당당한 녀석이었다. 잘도 저런 말을 지껄이다니. 여자들이 열 받아서라도 애인한테 다 일러바칠게 뻔했다. 

엥? 그럼, 이 녀석 일부러 이런 말을 하는 건가? 그렇게 해서 하루 빨리 매를 맞으려고? 알면 알수록 신기해빠진 남자다. 

어느 정도 녀석의 성격을 알 것 같았던 나는 슬쩍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강호두에게 말했다. 




“걱정 마. 그게 네 매력이야. 점점 더 마음에 들어. 쿡.” 




강호두는 완전 이게 아닌데? 하는 얼굴이었다. 많이 당황했는지 얼굴까지 붉어졌다. 난 고기 하나를 찍어 입안에 넣었다. 

바삭바삭하고 고소했지만 부드럽지는 않았다. 음식을 다 먹고, 난 강호두와 그 곳에서 나와 대구 시내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녔다. 

대낮의 시내는 어젯밤과는 달리 한산했다. 우리는 별달리 할일도 없고 해서 오락실과 PC방을 전전했다. 

처음에는 오랜만에 하는 게임에 신나기도 했지만 그것도 한, 두 번 하자 따분하기만 했다. 그렇게 오전을 보내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은 분식으로 해결했다. 점심을 먹고 강호두는 나를 야구장에 데리고 갔다. 야구 경기방법을 전혀 몰랐던 나는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강호두는 정말 즐거워 보였다. 미친 놈. 모르겠다. 녀석을 보면 이 말밖에 떠오르지가 않는다. 

야구경기는 초저녁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강호두는 자기가 응원하던 팀이 이겨 좋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경기장에서 나오자마자 택시를 탔다. 그리고는 강호두가 원하던 곳에 택시가 섰다. 당구장 앞이었다. 

강호두는 빨리 들어갔다가 나온다며 나보고 기다리라 말했다. 난 당구장 계단에 걸터앉았다.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언제까지 

이 연극을 하면 좋을까하고 생각했다. 끝은 어떻게 맺는 것이 멋질까?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머리를 쥐어짜봤지만 

신이와 유인이가 생각날 뿐이었다. 대구에 와서 전화를 한번도 해주지 않았기에 핸드폰을 들었다. 

신호가 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상대방이 수화기를 든 소리가 들렸다. 집에 전화했기에 신이 아니면, 유인이가 받을 것이었다. 

(찌글이는 전화를 못 받기에.) 




“누구세요.” 




무뚝뚝한 목소리. 유인이의 목소리였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모르겠다. 너무 반가웠다. 




“유인아, 나야! 소리!” 




그래서인지 내 목소리도 밝아졌다. 




“소리? 그게 누군데?” 




윽, 이 자식이 지금 나랑 장난치자는 거야? 반가움이 싹- 사라졌다. 




“누구냐니! 소리라고, 소리! 너 죽을래?!” 



“난 소리라는 사람 몰라.” 



“개‥개소리라고! 됐냐?” 



“아~ 너구나. 진작에 말하지. 난 또 미친 여잔 줄 알았어.” 




나쁜 놈. 울고 싶었다. 펑펑. 흐윽. 




“너 서울 가면 죽을 준비해.” 



“신아! 개소리가 전화 바꾸래!” 




괜히 신이한테 바통을 넘기는 유인이 녀석이었다. 그래, 신이와 나의 사이는 각별하니까, 신이는 나를 반겨 줄 거야. 

‥‥하지만 전화 건너편에서 신이의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신이가 지금 개 잡아야 된다고 받기 싫데.” 




툭. 뚜뚜뚜-. 난 한참을 끊긴 신호음을 들으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잠시나마 녀석들을 그리워한 내가 정말 밉기만 했다. 

두 놈 다, 두고 보자. 그렇게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으니 계단 밟는 소리가 들렸다. 난 뒤를 돌아보았다. 강호두가 내려오고 있었다. 




“거기 앉아서 뭐하노? 인나라, 가자.” 




어느새 내 앞에 선 강호두가 손을 내밀었다. 난 잠시 머뭇거리다 그 손을 잡고 일어섰다. 또 활짝 웃는 녀석이었다. 




“내가 며칠 전에 친구한테 돈 꿔줬는데 그거 받는 다고.”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먼저 말했다. 난 그저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강호두는 내 어깨가 아닌 허리에 팔을 둘렀다. 

처음엔 움찔했지만 그냥 참아주기로 했다. 녀석이 이럴 수 있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 

강호두는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계속해서 떠들어대었다. 




“그 캐가지고 금마가 뒷걸음질을 막 쳤는데 버스 맨 끝자리 있잖아. 거기 발판에 앉아뿟는 기라. 

그런데 그 옆에 뭐가 있었는 줄 아나?” 



“몰라.” 



“쓰레기통이 있었다 아이가. 하하하. 존나 웃기제? 우리 그때 배 쨌다 아니가.” 




참 웃긴다, 웃겨. 강호두 네 말투가 웃겨서 배꼽이 너덜너덜 해졌다. 




“가시나야, 사람이 웃기면 좀 웃어라. 무뚝뚝하기는.” 



“웃겨야지. 웃지! 그게 뭐가 웃기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속마음을 말해버렸다. 충격 좀 받아보라지. 하지만 녀석은 충격은 커녕 계속 웃기만 했다. 




“맞나? 나는 웃긴데.” 




하아-, 그냥 관두자. 우리 둘은 공원 앞에 다다랐다. 벌써 8시였다. 정말 따분한 하루였는데 시간은 참 빨리 지나간 것 같다. 

우리는 공원 앞을 걸어갔다. 강호두의 팔은 여전히 내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앞에서는 남자 다섯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그 사람들과의 거리가 점점 좁아져 갔고 이내 마주치게 되었다. 




“이야~ 부러운데?” 




남자 하나가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뭐야? 또 아는 사이인가? 정말 아는 사람도 많다. 

난 또 얘기가 길어지겠거니 싶어 하늘만 바라봤다. 달 옆에 작은 별 하나가 있었다. 




“뭔데? 할말 있나?” 




이건 강호두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서로 생판 모른다는 그런 말투‥. 




“네 친구 아니야?” 




난 혹시나 해서 강호두에게 물어보았다. 그에 녀석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임마들을 어예 아노.” 




그, 그렇다는 건‥ 




“어이, 돈 있음 좀 꿔주라?” 




동네 양아치? 









♡37 





아니다. 돈 달라는 걸 보니 앵벌이인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앵벌이라고 하기엔 옷에 때가 묻지 않았다. 

그냥 양아치라고 보는 게 더 나을 듯 하다. 강호두는 녀석들의 등장에 태연한 기색을 해보였다. 

가소로운 눈빛으로 남자들을 바라보던 강호두가 말을 꺼내었다. 



“꿔주면 언제 갚을 건데?” 



다들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는 얼굴이다. 두 사람은 이에 받아칠만한 말을 생각하는 눈치였고 다른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아무 생각도 없어보였다. 



“야, 임마들아, 니들은 내 꿈이 국내 최고의 사채업자라는 거 아나?”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사채업자가 꿈이라니. 

녀석이 사채업자가 된다면 분명 악덕 사채업자가 돼있을 것이다. 강호두가 우리 조직에 들어온다면 내 반드시 그 꿈을 막아야겠다. 

양아치들은 처음 그 기세와는 달리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알게 모르게 강호두와의 기 싸움에서 두 손을 든 것이다. 

강호두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꿔 줄 테니깐, 이자 3배 쳐서 갚아라. 알겠나?” 



다섯 명 중 어느 한 사람도 거기에 답하지 않았다. 



“왜? 싫나? 싫음 치아뿌라. 개미야, 고마 가자.” 



내 등을 살짝 떠밀며 걸음을 청하는 강호두였다. 난 정말 싱겁게 끝났다는 생각에 실망감이 밀려왔다. 

물론, 양아치역을 자청하고 나선 남자들에게 말이다. 강호두의 실력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정말 아깝다. 

결국 강호두와 함께 남자들의 옆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자신의 맡은 바 일에 충실하는 남자들, 양아치들이었고 

그로인해 난 조금이나마 희망을 갖게 되었다. 도대체 누구 편이냐고? 당연히 두 말 할 거 없이 난 강호두의 편이다. 

그럼 다시 앞으로 돌아가 양아치들이 어떻게 임무에 충실했고 나에게 희망을 가져다 준건지를 말해주겠다. 

우리가 그들의 옆을 지나려 할 때 빨간 챙 모자를 쓴 한 명이 강호두의 손목을 잡은 것이다. 그에 강호두는 멈춰 섰고 

나또한 걸음을 중단하였다. 



“니는 우리가 우습게 보이나?” 



빨간 챙 모자가 한 말이었다. 난 그들이 우습게 생겼다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그 뜻이 아닌 것 같은데.) 

강호두의 손목을 잡은 빨간 챙 모자의 손이 조금씩 떨리는 걸로 보아 놈은 손에 힘을 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 다른 네 녀석들도 용기가 생겼는지 우리를 빙 둘러 섰다. 

구레나룻이 참 인상적인 남자 하나가 내 머리카락 몇 가닥을 손에 쥐었다. 



“오~ 예쁜데? 너거 둘이 어디까지 갔노? 여자 니가 함 말해봐라.” 



손에 쥔 머리칼을 자신의 콧구멍 아래로 가져가는 구레나룻이었다. 나는 눈동자를 옆으로 돌려 그 녀석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달빛과 가로등 불빛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뤄 꽤 오싹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윽.” 



구레나룻은 그를 느끼고 손을 비스듬히 돌렸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 얹어져 있던 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뭐 내 성격, 그리고 실력으로 놈들을 혼내줄 수도 있었지만 여기서 내 힘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난 그 힘을 숨기기로 했다. 



“어머, 이거 놓으세요.” 



난 아직도 내 눈빛에 놀라 굳어있는 구레나룻의 손을 쳐내며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황당해하는 얼굴로 자신의 손과 내 눈을 번갈아보는 구레나룻이다. 강호두는 빨간 챙 모자의 손목을 잡았다. 

빨간 챙 모자는 손목에 모자와 동일한 색상의 손목아대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쪽은 강호두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기도 했다. 



“그 손 놔라.” 



강호두가 살기 띤 눈으로 빨간 챙 모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에 남자의 목젖이 움직이며 목구멍으로 침이 내려갔다. 

강호두의 기세에 조금 눌린 듯 했지만 여전히 손목을 잡고 있었다. 강호두는 남자의 손목을 꽈악 쥐기 시작했다. 

눈 주변으로 인상을 썼다. 그리고 빨간 챙 모자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다. 



“빨리 놔라.” 



강호두의 한마디에 빨간 챙 모자는 주변 눈치를 힐끔 보다가 끝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곧 강호두의 손목은 해방이 되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퍼억! 강호두는 마지막 글자에 강력히 악센트를 주더니 빨간 챙 모자의 손목을 자신에게로 당겨 녀석과의 간격을 좁혔다. 

그리고 빨간 챙 모자가 순간적으로 자신의 30cm 앞에 왔을 때, 오른쪽 발 전체에 힘을 가하여 복부를 차버렸다. 

그와 동시에 강호두는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었고 녀석은 바로 뒤에 서 있던 키 작은 남자를 밀어내며 뒤로 엎어졌다. 



“나는 아무 죄 없이 맞지는 않는다.” 



오른발을 내리며 강호두가 말했다. 흠, 그래서 여자를 데리러 온 놈들에겐 선처를 베풀며 몸을 내주는군. 

아무튼 무조건 일방적으로 맞고 다니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왠지 안심이 놓였다. 

하지만 일부러 죄를 만들어 매를 자청하고 나서지만 않는다면 더더욱 좋을 텐데‥. 빨간 챙 모자는 배를 움켜잡으며 인상만 찌푸릴 뿐 

일어설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빨간 챙 모자에게 밀려 넘어졌던 작은 남자가 일어서고 네 사람은 소심한 욕설을 지껄이며 

동시에 강호두에게 덤벼들었다. “이 자식이-!!”라는 말과 함께 날린 구레나룻의 주먹은 생각과는 달리 강호두의 왼쪽 어깨너머로 지나갔다. 

주먹을 피하지 않고 서있던 강호두는 스스로 자신을 피한 구레나룻의 주먹을 비웃었고 “어설픈 왼손잡이네.”라며 놈의 팔목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구레나룻이 다음 동작을 생각할 틈도 없이 그의 팔목을 꺾어버렸다. 구레나룻의 고통 섞인 비명소리는 공격을 시도해오던 

다른 세 남자를 공포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구레나룻을 옆으로 던져버리는 강호두. 앞으로 걸어 나갔다. 

세 남자에게 다가가는 그의 발걸음엔 여유가 있었다. 



“이‥이‥” 



키가 작은 남자는 에라, 모르겠다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강호두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휙- 휙-. 총 세 번. 하지만 단 한 대도 정확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았다. 주먹을 피해낸 강호두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다 끝났냐는 눈빛으로 

놈을 바라보았다. 작은 남자는 뒷걸음질만 칠 뿐 대답은 해주지 않았다. 결국, 힘없는 자는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강한 자에게 쓰러지고 

말았다. 남은 두 사람은 어찌할 줄을 모르며 벌벌 떨고 있었다. 강호두의 힘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눈빛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강호두의 눈엔 작지만 살기를 띠고 있었다. 



“이대로 토끼면 너거는 영락없는 개다.” 



강호두가 말했다. 하지만 남자들은 자존심이 뭐고 간에 도망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앞에 있던 좁은 골목 안에서 누군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누가 개라고??” 



한 명이었다. 아니 3명, 9명‥ 10명이었다. 설마 한 패거리는 아니겠지? 

하지만 두 사람이 남자들 사이로 들어감과 동시에 설마는 정말이 되어버렸다. 



“니는 뭐꼬? 뭔데 우리 후배들을 저따구로 만들어 놨노?” 


“엇! 점마 강호두 아니가?” 



그 중 덩치가 제법 큰 남자가 강호두에게 묻자 옆에 있던 배불뚝이 남자가 소리쳤다. 강호두를 아는 것 같았다. 



“명구, 니 아는 아가?” 


“어. 점마 울 학교 다닌다.” 



그렇군. 저 녀석도 대구 G고교에 다니고 있었군. 강호두는 관심 없다는 듯 녀석을 지그시 바라보고만 있었다. 

배불뚝이는 덩치에게 강호두가 자신의 학교, 최고봉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때 강호두가 살짝 미소를 띠었다. 



“아~ 그카면 니가 G고 대가리, 강호두가? 이거 뒤지도록 영광이네.” 



덩치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그를 보며 강호두가 입을 열었다. 



“숙여라.” 


“뭐라고? 점마 뭐라 카노.” 


“알면 숙이라고.” 



목소리에 거대한 무게가 실렸다. 그 순간 강호두가 사투리만 안 썼더라면 정말 멋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도 멋있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난 힘 있는 사람은 적이든 아군이든 간에 모두 사랑한다. 

단, 내가 인정할 만큼 강한 자만 말이다. 현재 강호두는 내가 인정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실력 전부를 아직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새끼가 건방지게!!” 



열 받은 덩치가 강호두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은 성난 멧돼지와도 같았다. 생태계의 파괴 주범인 멧돼지는 깔끔하게 처리를 해야 하는 법. 

강호두는 두 주먹을 가슴 앞에 들었다. 덩치, 이하 멧돼지는 묵직한 주먹을 강호두에게 날렸다. 

그리고 그 주먹은 강호두의 두 주먹에 꽂히고 말았다. 마치 권투를 연상케 하듯 강호두가 펀치를 막은 것이다. 

덩치는 주먹을 빼내며 다음 동작을 취하려 했다. 하지만 강호두가 그 시간조차 용납하지 않으며 공중으로 1m 가량을 뛰어올랐다. 

오른발을 앞으로 죽 뻗어 덩치의 뺨을 날리는 강호두였다. 멋진 발차기였다. 강호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탄력을 붙여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에 나머지 사람들이 공격을 해왔고 강호두도 그 공격들을 요리저리 피하기 시작했다. 피하며 맞공격을 했다. 

사람들이 일부러 피해간 건지 공원 앞엔 우리들 밖에 없었다. 난 하늘 위 달과 함께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는 본 것이다. 

쓰러졌던 덩치가 바닥에서 일어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 것을. 덩치의 손이 바지 주머니에서 조그마한 칼과 함께 빠져나왔다. 

그 칼은 폴딩 나이프였다. 비겁한 놈. 덩치는 칼을 펼치며 뒷모습을 보이고 서 있는 강호두에게 다가갔다. 

강호두는 다른 놈들의 공격을 막기에 정신이 없었기에 등뒤의 상황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렇기에 난 늦을 새라 큰소리로 외쳤다. 



“강호두, 뒤를 조심해!!” 



그리고는 덩치에게로 달려갔다. 덩치는 바보같이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고 그 덕에 시간을 벌 수가 있었다. 

난 오른발을 높이 들어 덩치의 손에 들려 있던 칼을 차 날려 버렸다. 그런 다음, 오른발을 땅에 닿지 않고 무릎을 조금 구부린 후 

다시 펼쳐내며 놈의 가슴을 힘껏 차내었다. 덩치는 너무 쉽게 뒤로 나자빠졌다. 강호두를 비롯해 모두들 나를 보고 있었다. 

내 모습에 어느새 살기가 사라진 강호두의 눈은 놀란 토끼와도 같았다. 



“등 뒤는 항상 무방비 상태야! 뒤통수에도 눈을 달고 있으라고! 하앗!” 



난 강호두에게 소리치며 녀석을 지나 놈들에게 달려갔다. 내가 남은 녀석들을 상대하는 동안 강호두는 쓰러진 덩치를 내려다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이 든 건지 입가 전체에 미소를 띠었다. 곧 강호두가 합류했다. 

싸움은 너무 빨리, 너무 쉽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 





우리 집(?)으로 가는 길.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동네 변소로 가는 길. 

수다쟁이 강호두는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건지 말도 붙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난 강호두가 내 싸움 실력에 대해 물을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맥이 빠진다. 집들이 모여 있는 골목에 들어섰을 때 

창문 곳곳에서 tv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모두가 잠들만큼 늦은 시간은 아니라는 증거였다. 벌써 변소가 있는 곳에 가까워졌다. 

이쯤에서 헤어져야 할 노릇이었다. 난 걸음을 멈추곤 강호두에게 그만 가보라고 했다. 난 녀석이 또 집 앞까지 데려다 준다고 할까봐 

내심 조마조마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강호두가 아닌가. 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공원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노란 달은 하늘에 똑바로 걸려 있었다. 



“그럼 내일 보자. 조심해서 가.” 



난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곤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녀석이 빨리 가기만을 바라며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는데 발소리가 아닌 

강호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지한 음색이었다. 



“이젠 알 것 같다.” 



쿵쾅쿵쾅. 혹시 내 연극이 탄로 난 것 일까봐 가슴이 뛰었다. 발도 더 이상 떨어지지가 않았다. 걸어갈 수가 없었다. 

난 침을 삼키며 강호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 



이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난 뒤를 돌아보았고 강호두의 모습은 어둠 속에 삼켜져 보이지가 않았다. 

묵고 있던 호텔로 돌아온 나는 샤워를 하는 내내 생각에 빠졌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사랑이 어떤 감정인지 이제야 할 것 같다니‥ 

나를 좋아한다는 건‥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머리 위로 떨어지던 물방울들이 양 옆으로 흩어졌다. 

그래, 갑자기 날 좋아할 리는 없을 텐데. 내가 녀석이 나한테 반할만한 행동을 한 적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그런 말을 한 것은 사랑을 알게 해준 사람이 나라는 것으로 밖에 짐작되지가 않았다. 난 손잡이를 내려 샤워기의 물을 껐다. 

만약, 강호두가 나를 진지하게 좋아하고 있다면‥ 일은 분명 꼬이고 말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난 화장대 앞에 앉았다. 

며칠동안 피부에 신경을 안 썼더니 푸석해진 것 같았다. 똑똑. 누가 방문을 두드렸다. 민규와 태기가 들어올 모양이다. 



“형님, 저희들 왔습니다.” 



민규의 목소리였다. 난 들어오라 말했다. 철컥. 문을 열고 민규와 태기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난 화장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형님, 이제 곧 서울로 올라가야 할 텐데 언제쯤 끝을 맺을 실건지‥” 



끝. 연극의 끝을 묻는 것이었다. 끝에 대해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난 대답하지 않았다. 



“형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은데요.” 



태기가 내 얼굴을 살폈다. 난 조만간 끝을 낼 거라며 그만 나가보라는 식으로 두 사람에게 말했다. 

민규와 태기는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곤 방에서 나갔다. 아직 얼마 지나진 않았지만 끝을 맺을 때가 온 것 같다. 

일이 더 꼬이기 전에 깔끔히 매듭을 지어야 할 것이다. 난 창문을 열었다. 다음날, 저녁. 내 핸드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강호두였고 곧 학교를 마치니 만나자고 했다. 장소는 시내 백화점 앞이었다. 내가 그 곳에 도착했을 땐 

이미 강호두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왔구나.” 


“가시나, 니가 늦게 온거다.” 



윽. 말투는 여전하군. 강호두는 교복차림이 아닌 사복차림이었다. 베이지 색 니트 조끼 안에 흰 반팔 셔츠. 

그리고 무릎까지 오는 칠부 바지. 강호두는 오른손에 호두 한 개를 들고 있었다. 웃기는 녀석. 자신을 자신이 들고 있다니‥. 

호두를 쥐고 있던 손을 내 어깨에 두르는 녀석이다. 강호두는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괜히 나 혼자 어제 일을 의식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일단 커피숍에서 간단히 밥을 먹은 후 밖으로 나왔다. 



“사실은 내 오늘 야자 땡땡이 쳤거덩. 뭐 맨 날, 천 날 일이지만. 하하.” 



시내 입구 쪽으로 걸어가며 강호두가 수다를 떨었다. 쇼핑몰 앞의 작은 무대 위에서 한 여학생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꽤 잘 부르는 편이었다. 여학생이 부르고 있는 곡은 서문탁의 ‘사랑‥결코 시들지 않는’이었다. 높은 가창력을 요구하는 노래였다. 

이제 좀 노래에 심취하려 하는데 여학생의 노래가 끝이 나버렸다. 사회자 한 명이 무대 위로 올라와 여학생과 인터뷰를 짧게 하였다. 

잠시후 여학생이 무대에서 내려가고 사회자는 다음 참가자를 뽑으려 하였다. 



“자신의 노래실력을 맘껏 뽐내실 분 또 있습니까?” 



순간 난 장난기가 발동했다. 강호두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그에 왜 그러냐는 듯 나를 보는 강호두였다. 난 씨익- 웃었다. 



“너 한번 나가봐라. 응?” 


“뭐? 미쳤나? 내가 저런 델 나가게.” 



예상대로 강호두는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어대었다. 하지만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올라가! 빨리! 넌 여자친구한테 이런 것도 못 해주냐?” 


“여자친구?” 



강호두의 표정이 바뀌었다. 뭐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까와 변화가 있었다. 솔직히 조금 무서웠다. 



“그‥그래.” 



간신히 대답했다. 강호두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만 한쪽 팔을 번쩍 들며 무대로 향했다. 



“저요! 제가 부를게요!” 


“아, 네! 남자분이 노래를 자청하셨습니다. 아이구, 훤칠하니 잘 생기셨네요.” 



드디어 무대에 오른 강호두였다. 사회자는 진행을 계속해나갔다. 이름, 나이, 학교를 형식적으로 물어나가는 사회자였고 

강호두는 큰 소리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럼 부르실 노래는 어떤 건가요?”라는 사회자의 물음에 강호두는 곰곰이 생각을 하더니 

“‘온 세상을 다 가져봐’요.”라고 했다. 사회자는 그 노래를 모른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그러자 강호두가 덧붙였다. 



“슬램덩크 주제간데요.” 



이런- 황당할 데가. 노래자랑대회에 나가서 만화 주제가를 부르다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강호두도 신이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꼴통 같았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강호두에게 건네주고 무대에서 내려갔다. 

강호두가 요청한 슬램덩크 주제가인 ‘온 세상을 다 가져봐.’의 반주가 흘러나왔다. 반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노래도 시작되는 곡이었다. 

노래가사 속에선 강호두의 사투리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꾸밈없는 너의 모습이 좋아. 때론 바보 같은 모습도 너무 귀여워-. 

네 곁에서 나도 왠지 솔직해져. 언제나 빛나는 너의 두 눈 때문 일거야.” 



강호두의 노래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웃음은 사라지고 진지하게 그의 노래를 감상하고 있었다. 나도 강호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노래를 듣고 있으니 많은 장면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신이와 문제를 풀던 장면, 공사장에서 태기가 부러진 여의봉을 끌어안고 울먹이던 모습, 

신이와 유인이네 학교 교문을 처음 들어서던 모습. 등등이‥ 떠오를 리는 없었다. 

내가 어릴 적에 즐겨 보았던 슬램덩크의 강백호하며 서태웅하며‥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참 재밌게 봤었는데‥ 후후. 



“어디서나 순수한 네가 좋아. 네가 저지르는 실수도 너무 귀여워.‥‥” 



반주는 계속 흐르는데 강호두의 목소리는 끊어졌다. 난 왜 그러나 싶어 녀석을 보았다. 당황해하는 걸 보니 가사를 까먹은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난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대 옆으로 달려갔던 것이었다. 



“아저씨, 마이크 있어요?” 



난 사회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사회자는 어리둥절해 하기만 했고 마이크는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쟤, 제 남자친군데 가사를 잊어버린 것 같거든요. 그래서 도와주려구요. 마이크 하나만 빌려주세요. 네?” 



내가 상황을 설명해주자 그제서야 환하게 웃는 사회자였다. 사회자는 의자 위에 있던 마이크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난 고마움을 목례로 대신했다. 어느새 1절이 끝나고 2절로 이어지고 있었다. 난 심호흡을 한 뒤 마이크 가까이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그리고 노래는 시작되었다. 



“조그마한 너의 음성이 좋아. 가끔 토라지는 모습도 너무 귀여워. 네 곁에서 난 언제나 행복해져. 

나를 향한 너의 마음 때문 일거야. 바람 되어 너와 함께 달리고 싶어. 저 하늘 너머 세상 끝까지.” 



사람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자의 음성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강호두가 옆을 돌아다보았다. 난 빙그레 웃어주었다. 

그러자 옅은 미소를 띠는 강호두, 호두였고 우리의 목소리는 은은한 화음을 이루었다. 



“온 세상을 다 가져봐. 내가 힘이 되어줄게. 그동안의 아픔과 외로움을 이제 던져버려-봐. 

힘차게 달려 나가봐. 저 환호성을 들어봐. 우리들의 꿈들을 이룰 때가 온 거야.” 



멋진 노래였다. 비록 1등은 하지 못했지만‥ 크큭. 




****** 





우리는 아까 일(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던.)을 떠올리며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그 순간, 연극이고 일이고 간에 또래아이와 웃고 떠들며 놀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강호두는 즐거워했고 나또한 즐거웠다. 



“넌 어떻게 만화 주제가를 부를 생각을 다했냐? 나이가 몇 갠데.” 


“내 가요 아는 거 없다. 알긴 알아도 가사 끝까지 모르거든.” 


“그럼 슬램덩크 가사는 다 알고 있다는 거냐? 기억 안 나서 쩔쩔 매던 주제에.” 


“그거야.” 



말을 못 잇는 호두였다. 난 녀석을 비웃어주며 공원 앞을 걸어갔다. 



“그거 뭐?” 



그런데 호두는 제자리에 멈춰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날 보는 건 아니었다. 난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돌려 호두가 보고 있는 곳을 보았다. 

남자 무리가 있었다. 또래 애들 같지는 않았다. 얼핏 봐도 성인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마치 호두를 기다린 것처럼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니가 강호두 맞제?” 



흰 반팔 쫄 티를 입은 사내가 물었다. 쫄 티로 인해 사내의 가슴근육이 드러났다. 도대체 웬 녀석들이지? 



“이번엔 좀 빠른데?” 



호두가 뒤에서 나즈막히 말했다. 빠르다니, 무슨 말일까? 혹시 저 녀석‥ 



“자기 애인이 바람난 걸 벌써 눈치 챈 건가? 하하.” 



역시 호두는 놈들이 우리 쓰래빠 애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난 아니라고 말하려했지만 타이밍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그건 내가 방심하는 틈에 어떤 놈에게 붙들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슨 우연인지 내 입을 손으로 막아버리는 녀석이었던 것이다. 



“강호두, 이 새끼 잘도 건드렸겠다.” 



쫄 티의 말에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어젯밤 이 장소에 나타났던 양아치 녀석들. 분명 그 녀석들과 한 패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호두는 사내의 말을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다. 젠장. 강호두, 설마 또 맞고만 있는 건 아니겠지? 이 녀석들은 우리 애들이 아닌데. 

난 내 입을 막고 있는 남자의 손을 떼어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한 사람이 더 합류하여 내 몸을 붙잡는 바람에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호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맞을 생각인걸까? 이렇게 이방인들로 인해 내 연극이 끝나고 마는 것일까?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호두는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쫄 티 주변의 사내들이 바닥에서 한 발자국 떼어내며 호두에게 

접근하려 하였다. 안돼. 안돼. 강호두, 제발! 난 마음속으로 연신 제발을 외쳐대었고 호두가 바닥에 고정했던 시선을 서서히 들어올릴 때 

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호두까기 인형. 강호두의 목소리를‥. 



“못해. 이번만큼은 절대 양보 못한다!” 






♡38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내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포기 못한다고? 나를‥? 

남자들을 바라보는 호두의 눈빛은 어떤 기(氣)로 인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녀석을 보니 내가 방금 들었던 말을 의심할 수도 없었고 

부정 따윈 더더욱 할 수가 없었다.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하-, 아냐. 섣불리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 

호두는 다른 의미로 내뱉은 말일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더 녀석을 관찰해봐야겠다. 그리고 조심해야 할 것이다. 



“저자식이 지금 뭘 양보 못한다는 거고? 골빈 놈 같으니. 손 좀 봐줘라!” 



반 발짝 정도 앞으로 나와 있던 짧은 뾰족 머리의 명령에 남자들이 한꺼번에 호두에게 달려들었다. 

곧 호두는 남자들에게 포위당했고 그들의 대장(뾰족 머리)은 이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호두의 주위를 둘러싼 남자들은 밝은 낯빛을 하고 있었다. 두려움이란 그림자는 그들에게 없었다. 오직 자신감뿐이었다. 

자만과 거만으로 포장돼있는 어리석은 자신감.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도 호두는 나를 보고 있었다. 자신을 포위하고 서 있는 남자들에겐 

신경조차도 쓰지 않고 있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여유로움이었다. 자신들이 수적으로 유리한 것을 믿고 의지하는 남자들의 자신감과는 

또 다른 자신감이었던 것이다. 나또한 자신이 있었다. 호두가 반드시 이길 거라 확신하는 자신감. 난 녀석을 믿었다. 

호두의 힘을 믿었고 호두의 자신감을 믿었으며 또 날 보고 있는 그의 눈빛을 믿었다‥. 휘익-. 남자들 중 성격이 급한 녀석의 주먹이 

제일 먼저 날아왔다. 호두의 뒤쪽이었다. 퍼억! 호두의 뒤통수를 노리고 달려들었던 그 주먹은 여유 있는 발목으로 인해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제 호두는 나를 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 높이 치켜들었던 다리를 내리며 남자를 보았다. 



“이‥이자식이!” 



뒤쪽에서 날아온 주먹을 멋지게 막아낸 호두의 실력에 남자들의 자신감은 조금 사라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수적으로 유리한 자신들의 상황을 승리로 연결시키며 일제히 호두에게 일격을 가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쉽게도 도전으로 끝날 뿐이었다. 전보다 투지로 불타있던 호두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남자들의 공격을 

가뿐히 막아내 보였다. 한 사람이 공격을 한번 해오면 호두는 두 번의 공격을 시도했다. 남자들은 실패했지만 호두는 두 번 모두 성공하였다. 



“새끼들아! 지금 뭐하는 거고?! 저 놈은 혼자다! 어떻게 한 명을 못 당하노!!” 



남자들의 대장(뾰족 머리)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참다못해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남자들은 여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젠장!” 



나를 붙잡고 있던 두 남자중 한 명이 나를 놓으며 싸움에 끼어들었다. 그는 힘껏 주먹을 날렸지만 그것은 헛방으로 끝날 뿐이었고 

호두의 발끝에 차여 쓰러지고 말았다. 그냥 봐도 알 수 있는 약한 공격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쓰러진 것은 그가 겁을 먹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자신의 주먹이 호두를 피해갔을 때 녀석은 이미 패배를 인정하고 말았던 것이다. 남자들의 대장은 싸울 생각도 하지 않고 

땀만 흘리며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의 눈빛이 나에게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아니었다. 그가 눈빛을 주고받은 것은 

내 옆, 남아서 날 붙잡고 있던 남자였던 것이다. 난 남자의 손이 바지 뒤쪽으로 향하는 것을 눈치 챌 수가 있었다. 

척! 목 끝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강호두, 거기 까지다!” 



비겁한 대장 녀석이 소리쳤다. 호두는 반사적으로 내 쪽을 보았다. 

타악, 타악. 그 순간 한 녀석이 호두의 손에 멱살을 붙잡힌 체 공중에서 바둥거리고 있었다. 



“그 손놓고, 당장 꿇어앉아라!” 



대장 녀석이 뒤늦게 승리를 예감하며 협박을 해대었다. 나의 목숨을 미끼로 날뛰는 다람쥐를 잡으려던 것이다. 

호두는 그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나를 응시했다. 내가 자신을 믿었던 것처럼 녀석도 나를 믿고 있는 것일까? 난 씨-익 웃어보였다. 

그에 호두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살짝 미소 짓는다. 역시 나를 믿고 있었다. 미소 짓고 있던 호두의 입술이 작게나마 열리고. 



“웃기는-.” 



퍼억! 쿵! 

붙들고 있던 남자의 얼굴을 주먹으로 쳐내버렸다. 바닥에 떨어진 남자는 피 섞인 침을 뱉어내었다. 



“감히‥.” 



호두가 자신의 말을 거역한데 화가 난 대장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나를 잡고 있는 남자에게 눈치를 보내었다. 

그러자 남자는 칼을 쥔 손에 힘을 주려했다. 차가운 감촉은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칼끝으로 내 숨통을 끊어놓을 작정인 것 같았다. 

칼이 든 남자의 손에 더욱더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슬슬 돌덩이 맛을 보여 줄때가 온 것이다. 난 머리를 힘껏 뒤로 젖혔다. 

빠악! 



“으악.” 



코뼈에 직접적으로 영향이 가서인지 남자는 들고 있던 칼을 손에서 놓아버리며 빈손으로 코를 어루만졌다. 

자유를 다시 되찾은 나는 뒤로 돌아 남자를 보았고 자세를 낮춰 그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타다닥.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놈들의 대장이 비겁하게 등을 돌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부하들을 버리고서 말이다. 

대장이 도망 가버려 싸울 이유가 사라진 이때에 남자들은 제각기 몸을 일으켜 달아나려 했다. 

우리는 그런 약해빠진 남자들을 붙잡을 이유는 없었다. 



“다친 데는 없니?”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는 호두에게로 다가갔다. 호두는 내 목소리에 반응하며 옷을 털어대었다. 

다친 데가 없다는 강호두. 일단은 녀석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겠지? 



“구해줘서 고마워.” 



네가 없었어도 내 힘으로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난 웃어 보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호두는 그 손을 빤히 보기만 했다. 

이 녀석은 만화나 영화도 안 보는 건가? 



“갑자기 악수는 왜 하자는 건데?” 



역시‥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호두였다. 난 더 무안해지기 전에 냉큼 손을 치워버렸다. 



“‥니 말이다.” 



뭔가를 이야기하려는 듯한 호두다. 난 호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응. 말해.” 


“니 이제 금마한테 죽는 거 아니가?” 



내가 죽다니‥ 누구한테?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호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니 조폭 애인한테. 나는 상관없지만‥.” 



호두는 지금 내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훗, 착한 자식. 난 걱정스러워 하는 호두를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사실을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적어도 방금 그 놈들과 난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만이라도 말이다. 



“너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녀석들은 우리 쓰래빠 애들이 아니야.” 


“쓰래빠‥?” 



아차. 아직 연극이 끝난 게 아니었지? 



“쓰래빠가 아니라, 참새반이라고 했어!” 



그냥 녀석의 귀를 바보로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호두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그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가려는 듯 했다. 난 참새반이 조직이름이라고 했다. 지금에서야 느끼는 거지만 왜 조직이름을 이렇게 지었던 것일까? 

그 당시의 내 머리에 의문이 갔다. 



“내가 보기엔 어제 그 놈들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아. 

아까 그 사람들이 정말 아저씨의 부하들이라면 왜 나를 인질로 잡았겠어? 안 그래?” 



호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쉽게 추측하고 쉽게 믿는 아이인 것 같다. 뭐, 내가 거짓말을 한건 아니지만.(연극 제외.) 



“그럼 우리 이쯤에서 헤어지자. 오늘은 가서 일찍 자.” 



빨리 헤어지고 싶었다. 그건 앞으로 호두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 때문이기도 했다. 

고백‥ 따위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만약을 대비해서이다. 난 인사를 하고선 호두에게서 돌아섰다. 하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저기‥개미야‥.” 



호두의 목소리가 날 붙잡았다. 콩닥콩닥. 가슴이 뛰는 가운데, 난 내가 염려하고 있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난 ‘응’하고 짧게 대답을 해주었다. 공원 나무의 잎사귀들이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 바람은 내 머리칼을 스쳐지나가기도 했다. 

난 살며시 눈을 감았다. 



“내 니 좋아하는 것 같다.” 


“강호두.” 


“어, 말해라.” 


“만약, 네?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누군가가 널 속였다면 넌 어떻게 할 거니?” 



머리 위, 별처럼 반짝이고 있는 비행기가 유유히 날아가고 있었다. 호두는 내 등 뒤에 서 있었다. 



“가만 안 둔다. 절대.” 



그것이 호두의 대답이었다. 그럼 나 몸조심해야 하는 건가? 난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호두는 이내 내 곁으로 다가와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말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호텔로 갈 거야. 네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 잘 가.” 



마음이 뒤숭생숭 하다. 호텔로 향하는 내 곁엔 아무도 없었다. 날 좋아하는 것 같다는 호두의 조심스런 발언. 

그것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체 한 켠에 자리 잡으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호두를 우리 조직에 넣어도 되는 걸까? 

그래, 나에게 호감이 있다고 해서 큰 영향을 주는 건 아니지. 그리고 난 녀석이 필요하니까. 후우, 그럼 문제는 단 하나. 

과연 호두가 모든 사실을 알고도 내 뜻을 받아들여줄까 하는 것이다. 분명 호두는 나에게 큰 배신감을 느낄 텐데‥. 

나의 연극은 처음부터 잘못된 방법이었을까? 연개소리, 뭐라고 말 좀 해봐. 넌 왜 연극을 하려고 한거니? 

너의 모자란 생각 때문에 한 아이가 상처를 받게 되었다. 난 내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나에게 질문을 내던졌다. 

하지만 난 묵묵히 침묵만 유지할 뿐이었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 

유리 아래 하얀 테이블보가 깔려져 있는 둥근 테이블 위에 노란 찻잔 2개와 요구르트 한 줄이 삼각형을 그리며 놓여있다. 

2개의 찻잔 속에는 녹차 티백이 걸려 있었고 요구르트 병에는 빨대 5개가 각각 꽂혀 있었다. 



“형님, 밖에서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계셨습니까?” 



검은 양복 안에 깨끗한 흰 와이셔츠를 차려 입은 민규가 참다못해 나에게 물었다. 

흰 셔츠에 맨 연두색 넥타이가 민규의 깨끗한 피부를 한층 더 밝아보이게 했다. 난 찻잔을 들었다. 찻잔의 아랫부분은 아직도 조금 뜨거웠다. 



“양아치들이랑 시비가 붙었을 뿐이야.” 



난 진짜 이유를 숨겼다. 호두가 나에게 고백을 한건 더욱이 말할 수가 없었다.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더러 왠지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양아치요? 감히 어떤 인간들이 겁도 없이!” 



양복 안에 입은 셔츠 단추를 푼 태기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흥분을 했다. 셔츠 안의 은색 체인이 돋보였다. 



“형님,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응. 그런 애송이들한테 당할 리가 없지.” 



난 민규의 걱정스런 물음에 녹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분히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자 태기가 다시 의자에 앉아 요구르트를 마시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태기가 빨대를 빨수록 요구르트 병속의 요구르트가 

아래로 줄어들고 있었다. 요구르트 세 개는 이미 빈병이다. 



“이제 그만 서울로 돌아갈까?” 



내가 꺼낸 말이었다. 그에 두 사람 모두 나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내가 한 말이었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지금 난 호두에게서 도망치려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튀어나왔다. 

Rrrrr. 민규의 핸드폰이었다. 민규는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선 전화를 받았다. 태기가 마지막 다섯 번째 요구르트를 마시기 시작했다. 

웃기는 말이지만 요구르트를 마실 때 놈의 표정은 항상 행복해보였다. 생각보다 통화를 일찍 끝낸 민규가 핸드폰을 닫으며 나에게 말했다. 



“형님, 지금 로비에 강호두가 왔답니다.” 


“뭐? 호두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호두가 이 곳에 올 줄이야‥. 난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민규는 아무래도 나 때문인 것 같다고 하며 

일단은 여기에 있는 게 좋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난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가보겠어.” 


“하지만, 형님‥.” 



난 의자에서 일어났다. 



“이쯤에서 연극을 끝내야겠군. 마무리는 나 혼자서 짓는다. 애들한테 말해둬.” 



그다지 좋은 결말은 아니겠지만 내가 시작한 일이니 내가 끝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난 천천히 문으로 향했다. 

철컥. 호실 문이 열리고 복도를 걸어가 엘리베이터의 내림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내 양옆엔 민규와 태기가 있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우리 셋은 안으로 들어갔다. 1층. 민규가 누른 버튼이었다. 우리는 침묵했다. 

1층 로비에 도착했을 때 민규의 말대로 정말 호두가 있었다. 그는 우리 애들과 주먹을 오가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싸우다가는 경찰이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난 태기에게 눈치를 주었다. 



“새끼들아, 다 동작 그만!” 



태기의 목소리가 로비 안을 가득 매었다. 그 큰 외침에 내 부하들은 하던 동작을 멈추었고 일제히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나를 본 부하 녀석들은 나에게 달려와 고개를 숙인 체 일렬로 나란히 섰다. 호두는 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형님 앞에서 이게 무슨 짓들이야! 니들이 깡패야? 동네 양아치 쉐끼들이야?!” 


“죄송합니다! 형님!” 



태기가 나무래자 모두들 용서를 구했다. 난 그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내 앞에 있는 호두에게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뿐이었다. 



“형‥님? 니가‥?” 



호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 눈을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혼자 앞으로 나아갔다. 

호두와의 거리는 1m가 조금 못되었다. 



“개미‥니가‥.” 


“내 이름은 개미가 아니야. 난 쓰래빠의 보스, 연개소리다.” 


“지금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건데?” 



이제 다 말해야 할 것 같다. 난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호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녀석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호텔로 들어오던 사람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미리 겁을 먹고는 다시 나가버렸다. 



“맞아. 널 속인거야. 우린 네가 우리 조직에 들어오길 원해.” 


“내를 속인 거라고‥? 그럼 그때 니랑 같이 있던 그 새끼는 뭔데?” 



이토를 말하는 듯 했다. 



“그 놈은 내 부하야. 처음부터 널 따라 그 곳에 간 거였어. 한마디로 학교에서부터 널 미행한거였지.” 



날 보고 있던 시선을 아래로 내리까는 강호두. 그가 쥔 주먹은 분함에 떨고 있었다. 

난 더 이상 할말이 없어야 될 처지였다. 



“‥내가 그랬제? 내 속이면, 내 갖고 놀면 절대 가만 안둔다고.” 



타닥. 민규와 태기가 좋지 못한 상황을 눈치 챘는지 내 곁으로 왔다. 자기들도 내 부하라고 날 지키려던 것이다. 

난 손을 내저으며 물러설 것을 요구했다. 



“너희들은 끼어들지마. 강호두, 내가 상대하지.” 



내 말에 민규와 태기는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난 두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정말로 녀석을 때릴 생각은 없었다. 

아프겠지만 처음 몇 대는 그냥 맞아줄 생각이었다. 



“강호두, 덤벼라.” 



드디어 호두의 주먹이 올라왔다. 내 뺨을 향해 날아오는 녀석의 분 섞인 주먹. 난 두 눈에 힘을 주고 떴다. 

용서를 비는 뜻으로 떳떳하게 맞기 위하여. 


철썩! 


하지만‥ 내 뺨에 부딪힌 것은 그의 주먹이 아니라, 손바닥이었다. 호두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속은 내가 미쳤지.” 



뒤돌아서는 강호두. 그는 나에게 등을 보인 체 호텔 입구로 걸어갔다. 난 달아오른 오른뺨을 만져보았다. 

아팠지만 아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참 웃기는 노릇이다. 



“형님‥.” 



태기가 걱정스럽게 나를 보았다. 



“괜찮아. 강호두는 그냥 놓아줘. 난 그만 쉬어야겠다.” 





********* 




방으로 오자마자 곧장 침대에 누웠지만 도통 눈이 감기지가 않았다. 아니 감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녀석의 눈빛이 자꾸만 보였기 때문이다. 울 것 같았지만 눈물을 흘러내지 않았던 그 눈. 

이것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적이 훨씬 더 많았지만 이만큼 죄의식을 느끼고 가슴 아팠던 적은 없었다. 

그건 녀석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기 때문일까? 답답했다. 머릿속, 가슴‥ 모두가 꽉 막힌 듯 답답하기만 했다. 

스윽. 끝내 난 침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강호두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만 될 것 같았다. 녀석에게 용서를 받아야만 할 것 같았다. 

난 대충 옷을 입고서 호텔 밖으로 나갔다. 곧장 택시를 잡아타곤 호두의 집으로 향했다. 


탁탁!! 



“강호두! 잠깐만 나와 봐! 꼭 해야 될 말이 있어. 잠깐이면 돼! 호두야!” 



난 초인종을 누르고 창문을 두드려 봤지만 호두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역시 화가 많이 난 것이다. 

그래도 난 포기할 수가 없어 그렇게 십분 간을 녀석의 이름을 불러대었다. 강호두, 호두야! 제발 나와 줘! 하고‥. 

벌컥! 그때 창문이 열렸다. 2층이었다. 



“그 학상 안 들어왔다! 가시나, 연애질 할 거면 딴 데 가서 해라! 오밤중에 예의 없이 이게 뭔 짓거리고!” 



쾅. 무서운 밤 할머니였다. 호두가 아직 안 들어왔다고? 그럼 어디로 간 거지? 

난 녀석과 그리 많은 날을 만난 사이가 아니었기에 강호두가 갈만한 곳을 알지 못했다. 대문에 기대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넓은 하늘을 보니, 하늘 아래에 있는 조그마한 나를 생각하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일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위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다니다가 아예 전국의 파렴치한 조직들을 모조리 

깨부수려는 나의 목적. 19살의‥ 아직 어리기만 한‥ 세상을 다 알지 못하는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들‥. 

난 그런 일들을 하기위해 힘 있는 자들을 모으고 다닌다. 성공률은 거의 희박한 일을 위해서 말이다. 어찌 보면 참 한심하고 미친 짓이다. 

내 생활을 다시 돌이켜보니 가슴이 북받치기 시작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하늘이 뿌옇게 흐려졌고 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흑‥으흑‥.” 



오랜만에 울어보는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 흘리는 눈물이었다. 다 관둬버릴까? 보스고, 조직이고 뭐고 다 포기해버릴까? 

순간, 신이가 떠올랐다. 그리고 유인이와 희웅이가 차례대로 눈앞에 그려졌다. 나의 친구들이다. 

녀석들은 날 어떻게 생각하는 진 모르지만 난 그 녀석들이 내 친구들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호두도‥ 강호두도 내 친구이다. 

내가 용서를 구해야하는 내 친구‥. 그때 호두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음침하고 좋다 아니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길인데 여기서는 뭔 짓을 해도 아무도 모르거덩. 어떤데? 니도 맘에 들제?’ 


강호두가 좋아하는 길‥ 그래, 그 곳이라면 자존심 강한 녀석이 울기엔 딱 좋은 길이야. 난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달렸다. 넓고 광대한 하늘 아래에서 달리고 또 달렸다. 하늘이 보기엔 보잘 것 없는 일이겠지만 난 이 길을 계속 달려 나갈 것이다. 

힘들고 위험해도 좋다. 눈앞에 가시동굴이 날 기다리고 있어도 좋다. 난 그 가시덩굴을 갈라내어 계속 앞으로 뻗어나갈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그리고 항상 내 곁에 있었던 민규와 태기와 함께‥ 또 착한 부하 녀석들도 함께 말이다. 


난 택시를 타고 시내 근처에 있던 그 길가에 도착하였다. 가로수가 많이 심어져 있던 길이었다. 여전히 어둡다. 

난 제발 호두가 있길 바라며 길을 따라 걸어 나갔다. 만나거든 무조건 잘못을 빌 것이다. 이건 자존심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호두가 날 용서해주던 안 해주던 난 미안하다고 말하겠다. 그것이 바로 친구이니까. 그때 내 눈앞에 남자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벤치에 조용히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 분명 호두였다. 후‥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난 호두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자신의 앞에 다가서도 호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호두야‥.” 



호두의 이름을 불렀다. 이젠 사과를 해야 할 차례였다. 



“‥미안해. 정말‥미안해.” 



입술이 무겁게 떨어지며 내뱉은 한마디. 


미안해. 


한결 마음이 놓였다. 호두가 사과를 받아주면 더 좋으련만. 훗, 거기까진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지? 



“이 말하려고 왔어. 나 내일 서울로 돌아갈 거야. 너와 친구가 되어서 함께 가고 싶었는데‥ 그건 무리겠지?” 



호두는 말이 없었다. 그래, 사과한 걸로 만족하고 그만 돌아가자. 난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기위해 손을 내밀었다. 

이번 역시 내 악수를 받아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안녕. 그동안 고마웠어.” 



내 손은 여전히 호두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갑자기 나를 향해 올라오는 호두의 오른손. 

호두는 세워져 있던 내 손을 눕혀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만들었다. 호두의 꽉 쥐고 있던 주먹이 서서히 내 손바닥 위에 얹어지고,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내 손에 뭔가를 놓아두는 호두‥. 그것은 호두를 반으로 가른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하트 모양으로 보이는 반쪽. 고개를 든 호두가 말했다. 



“호두 반쪽은 니가 가져라. 배고프다고 먹지 말고.” 


“호두야‥.”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니한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난 호두 반쪽을 꽉 쥐었다. 


대구의 하늘 아래, 또 한 명의 좋은 친구가 내 곁으로 다가온 것이다. 

자신의 반쪽과 함께‥. 



<img src="http://boardc.sayclub.com/files/fx/blob5/sayclub/le-/un-/mi-/leunmini/b2/5./%C8%A3%B5%CE.jpg%20copy.jpg"> 






♡39 






“조심해서 올라가라.” 


“응. 근데, 학교는 왜 또 안 갔냐?” 


“천천히 가면 된다.” 



벌써 오전 10시. 너무 천천히 가는 거 아니야? 호두는 아침 일찍 호텔 앞으로 와 나를 배웅해 주었다. 

말로는 천천히 가면 된다는 호두 녀석. 하지만 그가 지금 착용한 옷은 교복이 아닌 사복이었다. 군복무늬의 밀리터리 스타일의 민소매와 

군청색 건빵바지. 아무래도 학교에는 가지 않을 듯한 모양새였다. 흠, 그냥 속는 척 해주자. 



“방학 때 보자.” 



호두도 인천에 있는 희웅이와 마찬가지로 학교 문제 때문에 여름방학이 시작되거든 서울에 오기로 했다. 

지금 계획은 녀석들 모두 2학기 때부터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저 다니게 하는 것이었다. 조금 힘들겠지만 전학을 위해 

또 돈을 이용하는 수밖에. 그나저나 오늘은 비가 내릴 모양인지 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거기다 날도 조금 선선했다. 

서울도 이럴려나‥. 



“야! 호두과자! 넌 서울 오거든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내가 왜?” 


“내가 왜애-? 네가 우리 형님 뺨 때린 사실을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태기, 이 자식 겨우 잊고 있었구만 또 아픈 기억을 되살려 내다니. 어젯밤 그때를 생각하니 분하면서도 화가 났다. 

솔직히 주먹으로 맞는 것 보단 손바닥으로 맞는 것이 자존심이 더 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잘못한 것도 있고 하니 

뭐라 따질 처지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니 그냥 잊어버리는 것이 내 건강상 좋은 방법일터‥ 

그런데 태기 저 인간이 다시 생각나게 만든 것이다. 



“아, 어젠 진짜 미안하다.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호두도 생각이 난건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나에게 사과를 하였다. 정말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다. 



“사람 죽인 다음에 미안하다고 그러면 그 사람이 다시 살아 나냐?” 



하여튼 저 변태자식을 그냥. 난 앞에 앉아있는 태기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한 대 내려쳤다. 그러자 흠칫 놀라는 운전석의 민규와 

고개를 팍 숙이는 태기 녀석이었다. 난 태기를 째려보다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차밖에 서 있는 호두에게 말했다. 



“아니야. 난 괜찮아. 하하! 따지고 보면 잘못은 내가 했는걸. 아, 그만 가봐야겠다.” 


“‥어, 그래. 잘 가라.” 


“혹시 방학 때까지 어려운 일이라도 생기면 나한테 전화해. 알았지? 그럼 갈게.” 



차창이 올라가고 난 손을 흔들어 주었다. 호두도 다시 밝은 얼굴을 하고서 나에게 손을 크게 흔들어 보인다. 

그런 모습도 차가 출발하자 뒤로‥ 점점 뒤로 멀어져만 갔다. 난 네 손가락만한 작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호두를 보았다. 

푹신한 하얀 솜 위의 호두 반 토막. 호두가 준 선물이라면 선물이었다. 난 호두를 보며 침을 삼켰다. 군침. 안돼, 이건 먹으면 안돼는 거야. 

난 내 마음을 바로잡으며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민규가 모는 차는 부하들의 차량을 전후로 하여 고속도로를 향해 달려 나갔다. 

드디어 서울로 가는 구나‥ 며칠밖에 있지 않았는데 느낌은 한달을 머문 것 같았다. 



“결국엔 비가 오는 구만.” 



태기의 말대로 정말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투둑투둑‥ 오랜만에 보는 빗줄기다. 유리창을 타고 내리는 비덕분에 시야가 흐려졌다. 

난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어 보았다. 살결에 닿는 느낌이 차갑다. 하지만 시원했다. 아직 서울까지는 몇 시간을 더 달려야만 했다. 

그때까진 이 비도 그치겠지? 



서울. 개소리네 집. 


서울에는 비가 내리지 않은 것 같았다. 콘크리트 바닥이 물에 젖은 흔적이 없었으니까. 정원 안에서 차가 멈추고 태기가 차문을 열어주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띤 것은 다름 아닌 개새끼였다. 우리의 귀염둥이 찌글이. 

녀석은 반가운지 짧은 꼬리를 사정없이 흔들어대었다. 여전히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찌글아! 오빠 보고 싶었쪄?” 



찌글이를 끌어안고서 볼을 부비며 눈물겨운 재회를 하는 태기였다. 혹시나 오해라도 할까봐 미리 말해두는 거지만 찌글이는 수컷이다. 

하지만 태기는 그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계속 찌글이에게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인식시키면 암컷으로 변할 거라나? 

하여간 특이한 인간이다. 민규가 차에서 내리자 일성(별칭)이가 차에 올라탔다. 주택 내 주차장에 제대로 주차하기 위해서였다. 

난 민규를 뒤에 달고서 현관으로 걸어갔다. 태기도 곧 찌글이를 땅에 내려놓고 나에게 왔다. 신이랑 유인이가 집에 있으려나? 

학교는 끝난 지 한참된 것 같은데‥ 쿡. 분명 시험은 아작(*망치다.) 났을 거야. 난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었다. 

기왕이면 둘 다 있었음 하는 마음으로‥. 철컥. 



“여어-.” 



여어? 분명 신이의 목소리였다. 내 입가엔 함박꽃이 활짝 피었고 그 꽃은 금새 지고 말았다. 이‥이게 뭐야? 



“형님, 오셨습니까?” 


“많이 기다렸습니다, 형님~.” 



왁자지껄. 어수선하고 혼란한 분위기. 

대략 스무 명은 돼 보이는 인원이 거실에 죽치고 앉아 나의 헤드(head,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비디오 게임(video game)에 푹 빠진 3명, 볼륨(volume)을 어찌나 높여났는지 거실이 총소리로 가득했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속놀이(?) 혹은 두뇌게임이라고들 하는 화투를 치고 있는 3명, 

담요대신인 욕실용 발 닦이에 깔려있는 수두룩한 천원 권 지폐들은 판돈이 도를 지나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실 한구석에 처박혀 독서를 하고 있는 8명, 빌린 만화책이 만원은 넘는 것 같았다. 

헤드 셋을 끼고 노래를 듣는 1명,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4명, 그리고 소파에 팔자 좋게 누워 담배를 태우고 있는 신발 녀석까지. 

이들을 보고 있으니 슬슬 흥분상태에 이르렀다. 



“야! 네들 뭐야!!” 



좋지 못한 내 안색을 확인한 태기가 놈들을 향해 크게 고함을 쳤다. 그에 모두들 시선을 돌려 우리를 보았고 

심지어 헤드 셋을 끼고 있던 녀석도 태기의 고함소리를 들었는지 시선을 우리에게 향했다. 



“선배, 저 노란 머리는 누구예요?” 



노래를 듣고 있던 남자아이가 헤드 셋을 빼며 신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신이는 개소리 밥그릇 잡아주는 왼팔이라고 했다. 

내 옆에서 은근히 분노하는 태기였다. 하지만 무턱대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왜냐면 내가 옆에 있었으니까. 

솔직히 신이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헤드 셋 남자아이는 이번엔 민규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저 뺀질한 사람은요?” 



뺀질이라‥ 하긴, 민규의 머리에 잔뜩 발라져 있는 무스를 보니 뺀질해 보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렇지 저 녀석 말버릇이 왜 저런 거야? 



“개소리 밥 떠먹여주는 오른팔.” 



어쨌든 이것이 신이의 대답이었다. 뭐, 난 가만히 있어도 두 사람이 알아서 쫓아내 주겠구만. 

내가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건 민규와 태기의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동시에 크게 외쳤다. 



“이놈들 당장 나가!!” 





****** 





얼마 전 내 부하가 되겠다고 찾아온 악동들(신이 후배.)이 모두 나가버리자 집안은 썰렁 그리고 어수선 그 자체였다. 

거실 위아래를 왔다갔다하며 걸레질을 하고 있는 신이. 의외로 걸레질 실력이 뛰어난 것 같았다. 



“어허, 더 빡빡 닦지 못할까!” 



저 정도면 잘 닦는 거구만 태기는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신이를 따라다니며 괴롭혀대었다. 그리고 자기가 없었을 때 

사랑스런 찌글이를 괴롭혔을 게 분명하다며 의심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인이와의 통화에서 신이가 개를 잡고 있어서 

전화를 못 받는다고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모르는 척하는 게 좋겠지? 



“이정도면 깨끗한 거지, 도대체 얼마나 더 깨끗하길 바라는 거야?” 



참다못해 따지고 드는 신이다. 하지만 태기가 그를 보고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어쭈! 잘하면 걸레 던지겠다?” 


“쳇, 두고 봐! 다음엔 꼭 저 돼지새끼 잡아먹어 버릴 테니깐!” 



여기서 돼지새끼는 찌글이를 말하는 듯 하다. 신이는 다시 바닥 닦기에 열중했다. 인상은 오만상 찌푸리면서‥. 



“누가 돼지라는 거야? 너 임마, 잡아먹기만 해봐. 네 배떼기를 잡아 째서라도 찌글이를 구해내고 말테다!” 



후-. 애나 어른이나 똑같아요, 똑같아. 난 이마를 짚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을 옆에 서 있던 민규가 보았다. 



“그런데 유인이는 아직 안 왔어?” 



안 보이길래 신이에게 물었다. 신이는 위쪽으로 빠르게 기어가며 바닥을 닦았다. 



“방구석에 처박혀서 계속 자고 있어.” 



뭐야? 그 소란 속에서도 꿋꿋이 자고 있었단 말이야? 녀석의 무관심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런데 그 때,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방문이 열리며 유인이가 나왔다. 한 쪽 눈을 비비면서. 그러다가 크게 하품을 하는 녀석이다. 



“후-아암, 어. 개소리다.” 



하품을 하다가 나를 발견한 유인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저 인간에게서 내 이름을 들을 때면 놀림당하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정말 의문이다. 유인이는 헐렁한 여름 잠옷을 입고 있었다. 하루 종일 자려고 아주 마음을 먹었군. 녀석은 가만히 서서 신이를 바라보았다.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눈으로, 신기하다는 눈으로 말이다. 유인이가 손가락으로 신이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했다. 



“쟤 미쳤나봐.” 


“이 자식이 누군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냐?!” 



그에 곧장 반응을 하는 신이다. 여전히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근데 네들 시험은 잘 봤냐?” 



태기가 물었다. 그에 뜨끔해하는 두 사람. 뭔가가 수상하다. 다시 걸레질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신이와 주방으로 들어가는 유인이었다. 

“왜 대답이 없냐?”하고 태기가 묻자, 신이가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당연히 잘 봤지!” 



곧이어 “나도.”하는 유인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래, 장님이 아닌 이상 시험지는 잘 보고 왔겠지. 단, 답은 못 적어서 문제지. 

하여간 골치 덩어리들이다. 시험을 망친 신이가 화제를 돌릴 생각인지 걸레를 놓으며 우리를 향해 양반다리로 앉았다. 



“너희는 대구 가서 일은 잘 처리했냐?” 



녀석은 실패했기를 바라며 내던진 질문 같았다. 실컷 비웃어줄 생각이겠지. 하지만 이거 미안하게 됐는 걸? 

난 씨-익 웃어보였다. 그러자 김샜다는 얼굴인 신이다. 



“방학이 시작되기를 기다려. 그 때가 되면 얼굴을 볼 수 있을 거야. 푸하하!” 



난 팔짱을 낀체 호탕하게 웃었다. 아마 고백까지 받았다고 하면 깜짝 놀라겠지? 날 다시 보게 될 거다. 움후후. 

유인이가 물 컵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난 대구에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말해주었다. 호두가 주었던 반쪽 호두까지 보여주며 

하나도 빠짐없이-. 내 이야기를 들은 두 사람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원체 다물 줄을 몰랐다. 특히 신이가 더했다. 



“뻥치시네.” 



담배 하나를 꺼내 무는 신이었다. 저 녀석은 속고만 살았나. 아님 날 어떻게 본거야? 왠지 날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태기가 사실이라며 나를 거들었다. 그러자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며 신이가 말했다. 



“그럼 그 호두껍데긴지 뭔지는 아직도 널 좋아한다는 거냐?” 


“그렇지!” 



이제야 말귀를 좀 알아듣는 것 같다. 신이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넌?” 



나? 난‥ 그냥 친구인걸. 호두를 떠올렸다. 하지만 곧 호두는 사라지고 눈앞에 있는 신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사실대로 대답을 해주었다. 



“호두는 참 좋은 녀석이야. 그래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 말을 들은 신이는 날 빤히 바라보다 입에서 담배를 빼내었다. 유리 재떨이에 담배를 지져 끄는 신이다. 

그걸 본 태기가 아깝게 무슨 짓이냐며 호통을 쳤다. 신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정말 웬일이래. 

저 녀석이 한번밖에 안 태운 담배를 그냥 다 버리고. 같이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다. 


다음날. 오늘은 한가한 일요일. 

그래서인지 오랫동안 늦잠을 잔 것 같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떴고 집안은 조용했다. 

옷을 대충 걸쳐 입고 거실로 나오니 오노와 히틀러가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를 보자 소파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였다. 

난 그냥 앉아라고 손을 저었다. 



“다른 애들은?” 


“민규 형님은 신군, 인군과 함께 체육관에 가셨고 태기 형님은 찌글이 누님을 데리고 산책 나가셨습니다.” 



찌글이 누님이라니‥. 태기 녀석이 또 애들한테 되지도 않는 협박을 한 모양이다. 정말 못 말리는 인간이다. 

그나저나 체육관에 갔단 말이지? 이제 슬슬 싸우는 법을 제대로 가르칠 생각인가 보다. 난 오노와 히틀러에게 체육관에 가보겠다며 

나갈 준비를 하라고 했다. 단지 어떻게 하고 있을지 궁금했을 뿐이다. 준비를 끝낸 나는 오노, 히틀러 이 두 사람과 함께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은 집에서 200m 근방이었기에 걸어서 가기로 했다. 지금 시각은 오후 2시 25분이다. 어디선가 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여름은 여름인가 보다. 동네 체육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킥킥체육관. 건물의 2층이었다. 삐그덕. 관내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끔 살며시 문을 열었다.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파리만이 활보하고 다니는 이곳이다. 하지만 세 사람은 있었기에 조심스럽게 문을 연 보람은 있었다. 

민규가 두 사람 앞에 서 있고 두 사람 즉, 신이와 유인이는 입구에서 등을 돌린 체 바닥에 앉아있었다. 

민규 등 뒤의 창문 4개는 모두 열려있었다.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도 민규는 아래위 흰색의 여름 트레이닝을 입고 있어 

시원하게 보였다. 신이와 유인이도 짧은 트레이닝을 입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머리칼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숨소리가 거친 것이 무척이나 더워 보인다. 



“뭐야, 줄넘기 이천 개 가지고 뻗은 거야? 그러면서 이런 건 시시해서 못하겠다고? 이 녀석들아, 당장 일어서지 못해! 약해빠진 놈들.” 



민규의 화난 모습. 처음 본다. 민규는 녀석들을 매우 엄격하게 가르치고 있는 눈치였다. 

신이와 유인이는 민규의 마지막 말에 자존심이 뭉개졌는지 줄넘기를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약하다는 말은 두 사람에게 가히 치욕적일게 당연했다. 



“쳇, 지금 누가 약하다는 거야? 이 녀석은 몰라도 난 아니라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은 후 마저 줄넘기의 한쪽 끝을 잡는 신이었다. 그에 유인이가 뜀뛰기 자세를 취하며 신이에게 대꾸했다. 



“신발보단 강해.” 


“뭐야? 이 자식이!” 



휴우-. 저 둘은 어떻게 매일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걸까? 하루 빨리 친해졌으면 좋겠는데. 설마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는 꿈인 건 아니겠지? 

탁탁! 이때 신이와 유인이의 머리에 차례대로 떨어지는 파리채다. 어째 민규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기이다. 



“지금 뭣들 하는 거야?! ‥좋아, 그렇게 원한다면 싸우게 해주지. 둘 다 링 위로 올라가!” 



오잉? 쟤가 지금 뭐래? 난 오노, 히틀러와 함께 어리둥절해 하며 그들을 지켜보기만 할뿐이었다. 

설마 민규 녀석 저 둘을 맞장 붙이려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은근히 바라는 주인공.) 신이는 민규의 말에 꽤나 반가워했다. 

당연히 유인이는 무관심. 강물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는 형이었다. 



“진짜지? 나중에 두 말하기 없어. 명심해.” 


“입 다물고 올라가기나 해. 단, 이 싸움 이후로 다투는 걸 봤을 시 둘 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올라가!” 



난 지금 민규가 무슨 의도로 저러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생각 없이 그럴 위인은 아닌데 말이다. 

신이와 유인이는 줄 사이로 들어가 링 위에 올라섰다. 관장님이 이를 보신다면 크게 노하실 게 틀림없었다. 

정말로 싸울 거라면 빨리 끝내는 것이 좋다. 



“기권은 절대 없다. 내가 중단하라고 할 때까지 싸운다. 기억해.” 


“시작하자마자 찬물을 끼얹지만 않으면 돼.” 


“그건 걱정할거 없어.” 



민규는 신이의 말에 미소를 띠며 대답해주었다. 신이와 유인이는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과연 누가 이길까? 

매일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새신? 아니면 매일 도도한 척하는 신유인? 훗, 정말 기대되는 승부다. 

난 오노와 히틀러에게 누가 이길 것 같냐고 물었다. 그에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두 사람이었다. 오노부터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엔 인군이 이길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 같기는 하지만 속에 어떤 힘을 숨기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또 먼저 싸움을 거는 타입이 아닌 거라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상대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오죠. 그럴 때마다 한번도 져 본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대게 강한 녀석들이 자신의 힘을 티내고 다니지 않는 법이거든요.” 



다음은 히틀러가 의견을 말했다. 



“형님, 저는 분명 신군이 이길 거라 생각합니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저 녀석 깡다구가 장난이 아닙니다. 

저 나이에 따르는 후배들도 꽤 있는 걸 보면 그 파워도 장난이 아닐 거라 믿습니다. 일단, 싸움이 뭔 줄 아는 녀석입니다. 

5분도 채 안돼서 인군이 쓰러지고 말겁니다.” 



난 두 사람의 의견을 조합해서 승리자를 대강 추측해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냥 현실을 지켜 볼 수밖에. 



“그럼, 시이-작!” 



잠시 후 민규의 파리채가 링 위로 솟아올랐다. 





♡40 




시합이 시작된 지금, 신이와 유인이는 먼저 공격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멀찌감치 떨어져 탐색전에 들어갔다. 

두 사람의 눈빛을 비교했을 때 선한 눈의 유인이에 비해 신이가 한 수 위였다. 신이는 싸움을 할 때면 언제나 기 싸움에서 

승리의 40%를 먹고 들어갔었다. 



“역시 신군이 유리한 것 같은데요.” 



히틀러가 신이의 눈빛을 보며 신이의 승리를 예감했다. 하지만 글쎄‥ 



“아니. 그것도 상대에 따라서지. 유인이를 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어.” 



유인이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신이에게 생글생글 웃어주었다. 저 여유 속엔 신이와 만만치 않은 자신감이 들어있었다. 

그렇기에 승자는 저 두 사람이 주먹을 뻗지 않는 한 모르는 일이었다. 



“웃어? 뭐가 그렇게 재밌냐?” 


“그냥. 너랑 싸우면 재밌을 것 같아서.” 


“흥. 미 투(me too)다!” 



먼저 날아간 것은 신이의 주먹이었다. 예상 못한 건 아니지만 신이의 입가엔 미소가 스며있었다. 

지금 이 싸움을 즐기고 있는 저 두 사람이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장담컨데 저 미소는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유인이는 신이의 주먹에 왼쪽 뺨을 맞았다. 곧장 날아오는 신이의 오른 발. 퍼억! 쿵! 바닥에 주저앉은 유인이었다. 



“형님, 신군이 이긴 것 같은데요?” 



오노가 말했지만 난 동의하지 않았다. 승부가 이렇게 빨리 끝날 리가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음과 동시에 링 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유인이. 그는 바지 뒤 엉덩이를 털었다. 



“이젠 내 차례 맞지?” 



신이에게 물었지만 신이의 대답은 부정이었다. 



“웃기고 있네. 네 차례 따윈 애초에 없어!” 



동시에 둘의 주먹이 공기를 가르며 지나갔다. 그들의 싸움은 질서도 없었고 요령도 없었다. 그것이 보통 싸움꾼들의 방식이겠지만, 

저런 식으로는 언젠가 반드시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민규의 파리채가 던져진지 15분이 지났다. 

두 사람의 얼굴은 입술이 터질 뿐 아니라 피멍이 들었다. 다행이도 큰 외상은 없었다. 



“하악 하악-.” 


“헉헉헉.” 



둘 다 지친 것 같았다. 힘도 없어보였다. 웃음이 사라진지는 꽤 되었다. 신이와 유인이는 거리를 두고서 바닥에 한쪽 무릎을 붙인 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서로를 응시하며 경계는 늦추지 않았다. 



“다 끝난 거야?” 



링 밖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던 민규가 비웃음 섞인 말투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 유인이는 대답이 없었다. 



“웃기지마. 하아, 끝나기는 누가 끝났다는 거야!” 



다시 일어서는 신이었다. 그에 질 새라 유인이도 일어섰다. 유인이는 입술에 맺힌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었다. 

둘은 주먹을 쥐고서 서로를 향해 달려 나갔다. 이번엔 승부가 날까? 하긴, 이런 투견시합 같은 싸움에서 이긴다한들 그 사람이 

대단해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신이와 유인이의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 



“둘 다 그만!!” 



민규의 목소리였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민규에게로 향해졌고 신이와 유인이도 그 자리에서 동작을 멈추었다. 

서로의 주먹이 서로의 코끝에 있었다. 난 싸움을 중단시킨 민규의 의도를 이번에도 알지 못했다. 

가슴 중앙에 팔짱을 끼고선 민규가 녀석들에게 말했다. 



“지금 너희들이 서 있는 그 자리를 기억해라. 그와 동시에 너희들의 발끝과 발끝 사이에 있는 그 거리도 기억해라. 

싸움을 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상대와의 거리이다. 공격을 하기위해 상대에게 접근하더라도 

무조건 2보 이상의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이 거리에선 주먹을 휘두르더라도 코앞을 스쳐지나가기 때문이다. 

이때 거리는 방어태세를 갖추며 점점 좁혀나가야 한다.” 



신이와 유인이는 민규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주먹을 보았다. 곧 고개를 숙여 아래도 보았다. 주먹을 내리는 두 사람이다. 

민규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나와 부하들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싸움을 시작하기 전 기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쯤은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거다. 기(氣)는 곧 자신의 힘을 뜻한다. 

기 싸움에서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눈빛이다. 눈빛이 곧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다. 서로의 눈을 응시하되 절대 먼저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그럼 상대가 얕잡아보는 것은 물론, 자신이 패배가 80% 확실해지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싸움이 시작되기 전과는 사뭇 다른 기 싸움이었다. 승부의 80%를 차지한다는 민규의 말. 

신이와 유인이는 지지 않기 위해 다짐을 새로이 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머니에는 손을 넣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힘을 자만해 너무 여유로운 것도 좋지가 않다. 

약간의 긴장은 꼭 필요한 것이다. 너희들이 보는 만화책처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한 손으로 적을 상대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은 상대가 엄청 약한 초등학생이거나 본인이 싸움에 능통한 고수일 때 만이다. 너희는 싸움의 고수가 아니다. 

세상엔 네들보다 강한 인간들이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런 놈들과 상대하기위해선 두 손은 언제나 자유로워야만 하는 것이다.” 



민규의 말은 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어본 말이기도 했다. 민규는 지금 배운 그대로를 녀석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을‥. 



“또 주먹을 날리기 전 먼저 상대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까 추측하고 그에 맞는 최상의 방어 혹은 공격을 

하는 것이다. 상대의 습관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가 오른손잡이인지 왼손잡이인지를 말이다.” 


“젓가락을 쥐지 않는 한 그걸 어떻게 알아?” 



신이가 여전히 유인이를 응시하며 민규의 말에 토를 달았다. 그에 민규는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한 체 답을 내놓았다. 

상대의 발. 그것이 답이었다. 



“서로의 발을 봐라. 왼발이 나온 사람은 오른손으로 공격을 하기위해 준비 중일 것이다. 10명 중 9명이 대게 오른손잡이다. 

왼발과 왼손을 뻗어 상대를 가격하는 것은 대단히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그러므로 너희들처럼 왼발이 나와 있는 사람은 

오른손잡이인 것이다. 그 반대로 오른발이 나와 있는 사람은.” 


“왼손잡이라는 거군. 그럼 양손잡이는 어쩌지?” 



민규의 말을 자르며 또 다시 질문을 하는 신이었다. 양손잡이. 신이다운 질문이었다. 민규는 과연 어떻게 해결을 할까? 



“확률은 50대50. 대충 찍어서 방어를 해야겠지.” 



역시 대답을 회피하는 군. 그런데 신이 녀석 왜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신이는 앞으로 나아가며 유인이에게 오른쪽 주먹을 뻗었다. 

그에 주먹을 팔꿈치로 막아 보이는 유인이다. 민규의 말대로 상대의 흐름을 읽은 것이다. 



“상대는 오른손이 실패했으니 다음은 왼손으로 공격하려 할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다시 2보 간격을 유지하는 거다.” 



정말 신이는 발을 바꾼 뒤 왼쪽 주먹으로 공격을 했다. 유인이는 예상을 못했는지 턱을 맞고 말았다. 뒤로 2보정도 물러서는 유인이다. 

신이는 곧장 유인이의 멱살을 잡았다. 그때 민규가 이야기했다. 



“대부분 멱살을 잡은 뒤 자신의 곁으로 끌고 오지. 그때 거리는 불과 10cm 안팎. 손과 다리는 자유로울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 주먹과 다리를 사용하는 것은 큰 타격을 주지는 못한다. 그렇담 단 한 가지. 바로 머리이다. 머리를 써라.” 


“시끄러워!!” 



신이가 유인이의 멱살을 잡은 체로 민규에게 소리쳤다. 그때였다. 민규가 시킨 대로 머리를 쓰는 유인이었던 것이다. 

유인이는 힘껏 신이의 이마를 머리로 내리박았다. 빠악! 그에 신이가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반사적으로 놓아버렸다. 

신이는 이마를 감싸며 뒤로 주춤거렸다. 



“이‥이자식이. 완전 돌 머리 아냐?” 



유인이는 그저 웃어 보이기만 했다. 링에서 내려오는 유인이. 신이는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줄넘기를 주워드는 유인이다. 녀석이 민규를 신뢰하게 된 것이다. 아마 신이도 그럴 것이다. 



“싸움꾼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니?” 



아직 링 위에 있는 신이를 올려다보며 민규가 물었다. 신이는 이마에서 손을 떼었다. 



“깡!” 



에구,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신발 녀석이다. 하긴, 저 녀석은 ‘기술보다는 깡이다.’라는 말을 선호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일 테니까. 

민규는 살짝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바닥에 있는 신이의 줄넘기를 주워들었다. 



“깡도 좋지만, 일단은 체력이 따라줘야겠지?” 



신이는 링에서 내려와 줄넘기를 받아들었다. 민규에게 건네받은 줄넘기를 가만히 바라보는 신이다. 



“좋은 체력은 꾸준한 운동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다 보면 곧 주먹도 세지기 마련이지. 꾸준한 운동으로 단련된 주먹은 

그 힘이 장난이 아니거든. 난 앞으로 너희들에게 복싱이라는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웬 복싱?” 


“난 복싱선수 같은 건 관심 없어.” 



민규의 갑작스런 발언에 눈이 휘둥그레지는 두 사람이었다. 민규는 그들에게 선수가 되라고 하지는 않을뿐더러 시합에 나가라는 말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단지 복싱이라는 운동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이라 했다. 난 민규의 뜻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복싱은 실전에서도 매우 용이한 운동이다. 실제로도 복싱선수의 주먹의 파워는 보통 사람의 몇 십 배가 넘는다. 주먹은 발보다 

어떤 면에서든 유리하다. 발이 파워는 더 강하지만 스피드나 정확도에서는 손을 따라오지 못한다. 이것은 그냥 막 싸움에서도 

잘 나타나는 특징이다. 대게 사람들은 발보다는 주먹을 더 많이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꾸준히 연습만 하면 피하는 방법, 잘 맞는 방법, 

때리는 방법 등을 몸으로 익힐 수가 있다. 그래서 마인드 컨트롤(*마음을 조절함.)이 필요하기도 하다. 또 하나 사람은 주먹이나 물건이 

날아올시 본능적으로 눈을 감게 되어있는데 복싱을 배움으로써 눈을 안 감는 훈련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상대의 어깨를 미리보고 

잘 피할 수가 있다. 이후에는 바로 반격이 가능하다. 민규는 이를 노린 것이었다. 



“좋아! 까짓것 배워주지.” 


“줄넘기 이천 개 하면 되는 거지?” 



신이와 유인이는 민규의 뜻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 모두 줄넘기의 양 끝을 잡고서 뛸 준비를 했다. 



“아니. 삼천 개. 그 정도는 해야지. 앞으로 계속 늘여 갈 거야.” 


“뭐어? 삼, 삼천 개? 너 사람 잡을 일 있냐?” 


“힘들겠다.” 


“얌마, 너도 해야 돼!” 



훗, 안심하고 민규한테 맡겨도 되겠는 걸? 난 마지막까지 티격태격하는 녀석들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민규만 있다면 아이들이 강해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 같다. ‥‥ 정말 그랬으면 좋겠는데‥. 



“으자, 그만 가볼까?” 


“네, 형님.” 



난 부하들과 함께 체육관에서 나왔다. 체육관에서는 녀석들에게 푹 빠져 덥다는 걸 못 느꼈는데 밖은 정말 덥기만 했다. 

아직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는 아니지만 나의 목덜미에 땀을 흐르게 하기엔 충분한 더위였다. 가장 더운 8월. 왠지 두렵다. 

난 더위를 잊고자 방금 전 체육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 민규가 녀석들에게 맞장을 붙인 이유, 그것은 녀석들이 싸워봄으로써 

자신들의 실력이 얼마나 모자란 지를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다행이도 신이와 유인이는 그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어라? 형님!” 



집 앞에 도착했을 무렵,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던 태기와 마주쳤다. 찌글이와 산책을 하고 온 태기. 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빨간 치마와 머리에는 빨간 리본을 맨 찌글이가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고 있었다. 수컷에게 치마를 입히다니. 게다가 닭살스런 리본까지. 

정녕 태기는 미쳤다는 건가! 입이 떡 벌어졌다. 태기는 나에게 찌글이가 귀엽지 않냐고 물어왔다. 찌글이를 들어올려 쭈글쭈글한 턱을 

자신의 볼에 부벼대는 태기다. 



“귀엽기는 무슨. 개 꼬추 떨어지겠다.” 


“예? 에이~ 형님도 사상이 좀 그렇네요. 하하.” 



대체 뭐가 웃긴 건지. 저 놈을 정신 차리게 하기위해서라도 진짜 암캐 한 마리를 사줘야겠다. 





**** 





어느덧 시간은 흘러 드디어 종업식 날이 다가왔다. 

여름방학인 것이다. 강당에서 종업식을 마친 학생들은 각자의 교실로 돌아갔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담임만 들어오면 끝인데 왜 이리도 안 들어오는 건지. 유인이의 주위에는 방학동안 유인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아쉬워하는 여자들이 

원을 그리고 서 있었다. 심지어 아까운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는 여자애도 있었다. 이런- 정신 나간. 



“유인아, 방학해도 밥 꼬박꼬박 챙겨먹어. 알았지?” 


“아줌마가 챙겨주면 먹을게.” 



유인이도 마지막이라 자비를 베푸는 건지 여자들의 말에 일일이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데 저자식이 왜 날 보면서 말하는 거야? 

꼭 내가 밥을 안 준 것처럼. 



“보고 싶어서 어쩌지? 전화해도 돼?” 


“응. 근데 안 받을 거야.” 


“유인아, 방학동안 여자 사귀면 안돼. 그럼 우리가 넘 슬프단 말이야.” 


“그럼 사겨야지.” 


“나 방학 때 너희 집에 놀러가도 돼?” 


“오지마. 호박아.” 



여자아이들의 저 충격 받은 모습을 보라. 차라리 유인이 녀석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더 나을 듯 했다. 자비는 얼어 죽을. 

그런데 왜 여자애들이 고시고 즐거운 걸까?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싸이코(psycho)인 것 같다. 신이는 내 옆에 엎드려 쿨쿨 단잠에 빠져 있었다. 

강당에도 나오지 않더니만, 정말 제 멋대로 사는 인간이다. 


어쨌든 H고교의 종업식도 끝이 났다. 

난 아직도 잠이 덜 깨 눈을 반쯤만 뜬 신이와 주위에 흩어져 있는 여자들에게 디카(디지털 카메라의 줄임말.)며 폰카(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히는 유인이를 끼고서 교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교문에서 우리를 아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여자. 

오랜만에 출현하는 현아였던 것이다. 쟨 왜 또 온거야? 하지만 도망가기엔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언니-이!!” 



손을 우왁스럽게 흔들며 나를 부르는 현아양. 그녀의 모습은 발랄하기 그지없었다. 둘둘 말려 있던 앙투아네트 머리는 어느 새인가 

긴 생머리로 풀려 있었고 검던 머리색 또한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마 학교대신 미용실로 갔던 모양이다. 

하지만 S고 교복 차림이었다. 



“언니, 제가 준 책은 다 읽으셨어요?” 



아~ 그 이상한 책 말이지? 물론, 읽었을 리가 없지. 지금 다락방 어디에 처박혀 있을 텐데. 



“응. 다 읽었어.” 


“꺄~ 정말요? 느낀 건 있으세요??” 


“아니. 없어.” 



맥빠진 얼굴을 하는 현아다. 도대체 나한테서 뭘 바라고 온건지. 아~ 빨리 이 여자아이를 떼어놓고 싶다. 

하지만 하늘은 날 도와주시지 않았다. 으악. 



“언니 지금 집에 가시는 거죠? 저도 따라 갈래요! 언니 집, 한번 보고 싶었거든요. 호호.” 



그리하여 현재 현아까지 내 옆에 붙어있는 꼴이 되었다. 어찌나 찰싹 달라붙는지 뜨거운 태양이 나한테만 향한 것 같았다. 

으~ 징그러운 것. 녀석들이 한 소리라도 해줬음 좋으련만. 신이는 존다고 정신이 없었다. 유인이? 기대한 내가 바보다. 

이 무관심쟁이한테 말이다. Rrrrr. 핸드폰 벨소리였다. 내꺼. 난 내 팔에 팔짱을 낀 현아를 떨구어내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이대로 전화를 하면서 집까지 갔으면 좋겠다. 그럼 적어도 전화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현아가 팔짱을 끼지 못할 것이 아닌가. 

전화를 건 사람은 대구에 있는 호두였다. 



“호두니?” 


“어, 내다. 대구 멋쟁이! 내 어제 방학했다.” 



우리보다 하루 일찍 했군. 그런데 멋쟁이는 또 뭐야? 



“우리는 오늘. 그럼 서울에는 언제 올거야?” 


“내일 갈려고. 마중 나온네.” 


“당연히 가야지. 도착하기 20분전에 전화해.” 



통화를 하고 있는 동안 신이가 잠이 다 깼는지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현아도 꽤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궁금했는지 유인이에게 묻는 현아였다. 



“누구랑 통화하는 거예요?” 


“호두.” 


“먹는 거요?” 


“킥킥.” 



호두는 내일 낮쯤에 출발할거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쏘아보며 묻는 신이였다. 



“누군데?”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난 호두라 말하고 내일 온다는 말도 덧붙였다. 



“왜 오는데? 네 면상 보러 온다냐?” 


“말하는 것 좀 봐. 저 싸가지.” 


“아니다. 오라고 해. 난 신고식 준비나 해둬야 겠다.” 



오잉? 신고식이라고?? 갑자기 그런 건 왜 한다는 거야? 정말 신이 녀석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왠지 호두를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뭐, 설령 그렇다 해도 내일이 되면 이유를 알 수 있겠지. 끼익-. 유인이가 잡은 택시가 우리 앞에 멈추었다. 

우리는 모두 택시에 올라탔고 앞자리엔 유인이가 앉았다. 



“으응? 그런데 두 오빠들은 어디 가시는 거예요?” 



이제야 이상했는지 현아가 의아해하며 물었고 두 사람은 그냥 집이라고만 했다. 곧이어 나에게도 묻는 현아였지만 나또한 집이라고 대답했다. 



“모두 같은 동네에 사시는 거예요? 우와! 좋겠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같은 집이지. 곧 있음 알게 될 것이었기에 따로 말해주지는 않았다. 아마 깜짝 놀라겠지? 현아가 알아도 상관없냐고? 

음, 학교도 다르니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이 꼬마아가씨가 사실을 알더라도 변하는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 택시는 집 앞에 바로 멈추었다. 

유인이가 택시비를 지불하고 우리 셋은 차에서 내렸다. 이어 유인이도 내렸다. 난 초인종을 누른 후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여기가 언니네 집이예요? 와, 크다. 진짜 멋있어요.” 



하지만 앞으로 늘어날 식구들을 생각하면 턱없이 작기만 한걸? 달캉. 나를 확인한 태기가 대문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다함께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과 동시에 예상대로 놀라자빠지는 현아였고 

그녀를 그냥 무시해버리며 먼저 들어가는 신이와 유인이었다. 



“언니, 신이선배랑 저 오빠는 왜 들어오시는 거예요? 혹시 여기 놀러온 거예요?” 


“응. 매일같이 놀러와. 아니 거의 살다시피 하지. 잠도 여기서 자니깐.” 


“네에? 그럼 언니랑 같이‥ 셋이서?” 


“아니. 산촌-ㄴ” 


“삼총사라고요?! 히익! 어, 언니 저한테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다다다. 냅다 대문 밖으로 날아 가버리는 현아다. 삼촌들이랑 같이 산다고 뻥칠려고 했는데‥ 말하기도 전에 삼총사로 받아들이다니.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한다는 거야? 저 아이는 여전히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변한 거라고 해봤자 머리 스타일 뿐. 

특이한 생각에 유머스러움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기만 하다. 



“개소리, 빨리 밥 먹어!” 



거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서 나를 부르는 유인이었다. 아~ 정말이지, 저 녀석이 내 이름을 부르면 왜 기분이 나쁜 걸까? 

전에도 언급한 바 있지만 마치 날 놀리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단 말이야. 에라, 모르겠다. 우선은 밥이나 먹고 생각하자!  
 
   
 








※전국 고교 일진협회※ 






♡41 





아악! 벌써 오후 5시! 호두한테서 전화가 온지 10분이 넘었다. 이러다 제시간에 도착 못하는 거 아니야? 

오늘은 대구에서 호두가 오는 날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나갔어야 했는데 갑자기 배가 아픈 바람에 늦고 말았던 것이다. 

난 허둥지둥 운동화를 신고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에선 오노, 히틀러, 그리고 이토가 벽돌 격파를 하고 있었다. 

(최고 기록이 각각 9,10,10개 인걸로 알고 있다.) 아, 신이와 유인이도 있었다. 둘은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있었다. 

유인이가 신이의 발등에 앉아 발목을 잡아준다. 윗몸을 일으키던 신이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메이커 상표가 크게 적혀있는 

민소매(나시)티를 입고 있었다. 바지는 흰 칠부 바지였다. 



“너 어디 가냐?” 


“역!” 



간단히 대답했다. 신이는 매트 위에 누운 후 다시 윗몸을 일으키며 나에게 물었다. 몇 개나 한건지 얼굴과 팔에 땀이 흥건했다. 



“역에는 왜!” 


“왜긴 왜야, 마중 나가야지.” 



신이는 유인이와 자리를 바꾸었다. 이번에는 유인이가 윗몸일으키기를 할 차례였다. 유인이는 가뿐히 윗몸을 일으켰다. 

한 번. 처음이라 별로 힘이 들어가지 않고도 쉽게 일어섰다. 



“마중? 누가 오는데?” 



새신, 바보 아냐? 그걸 금세 까먹은 거냐고. 호두가 온다는 말에 어제는 그렇게 심술을 부렸으면서. 

난 긴 말 할 거 없이 짤막하게 호두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잡고 있던 유인이의 발목을 놓아버리며 벌떡 일어서는 신이었다. 

심하게 반응을 해 보인다. 쿵! 그에 중간쯤 몸을 일으켰던 유인이가 힘이 빠져 도로 누워버리고 말았다. 



“맞다! 오늘 그 자식 온다고 그랬었지!” 



이제야 생각이 난 모양이다. 



“그래서?” 


“나도 가!” 



자기도 간다니. 도대체 또 무슨 꿍꿍일까? 유인이는 매트 위에 누운 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초롱초롱했지만 그다지‥ 생각은 없어 보인다. 



“넌 안 가도 돼. 그냥 나 혼자 다녀올게.” 


“그래도 앞으로 한 솥밥 먹어야 될 사이인데, 마중 정도는 가야 도리지! 차는 밖에 있냐?” 



성큼성큼 대문으로 걸어가는 신이다. 저 녀석 갑자기 도리 같은 걸 따지다니, 분명 운동하기 싫으니까 잔머리 굴리는 걸 거야. 

흥, 내가 네 머리 꼭대기에 있다고. 난 신이의 잔꾀에 고개를 저으며 대문 밖으로 나갔다. 벌써 차 뒷좌석에 자리를 잡은 신이었다. 

신이는 팔자 좋게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나는 앞좌석에 올랐다. 

차안은 운전을 맡은 정일(별칭. 북한국방위원회 위원장과 똑같은 안경을 꼈기에 붙여진 것이다.)이가 미리 에어컨을 틀어놓은 덕분에 

땀이 한 순간에 마를 정도로 시원해져 있었다. 



“형님,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정일이는 곧 기어를 바꾼 후 엑셀을 밟았다. 차는 시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차안의 전자시계를 보니 5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이게 다 신이 저 자식 때문이다. 녀석이 말만 걸지 않았어도 도착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는데 말이다. 나쁜 놈. 난 룸미러로 신이를 보았다. 

날 노려보고 있는 신이었다. 으윽. 



“잘 생겼냐?” 



신이가 물었다. 왕자 병 기질도 있었다니, 저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것일까? 설령 신이가 잘 생겼다 쳐도 그렇게 말해 줄 수는 없다. 

그럼 병이 말기까지 갈 테니까. 



“넌 네가 잘 생겼다고 생각하니?” 


“당근이지! 아, 이게 아니라 나 말고 호두라는 인간 말이야-!” 



엥? 그럼 호두를 얘기했던 거였어? 난 또. 그런데 저 자식이 방금 자기가 잘 생겼다고 하지 않았었던가? 흐음‥. 



“호두? 그런대로 생겼어. 뭐 내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지.” 



난 룸미러를 보며 대답했다. 순간 녀석의 왼쪽 눈썹머리에 조금 인상이 들어간 것 같았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보였다. 

우리 차는 어느새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아직까지 많이 밀리지는 않았다. 



“네 스타일? 그럼 별 볼일 없게 생겼겠군. 너 눈 낮잖냐.” 



날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만히 듣고만 있을 리 없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눈이 높은데!” 


“네가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은?” 


“찰리 채플린!” 


“거봐라, 눈이 발가락에 붙어 있잖아. 하하.” 



윽, 저 놈이 나의 우상 찰리를 무시했겠다! 열이 받아 눈물까지 핑 돌 지경이었다. 두고 보자, 신발. 확 구겨(빠개) 신어 버릴 테다. 



“그 자식 싸움은 잘하냐?” 


“아마 너한테는 이길 거다. 5단 발차기도 능숙하게 할 줄 알거덩.” 



당연히 큰 구라(거짓말)였다. 어떻게든 얄미운 저 녀석을 한 방 먹이고 싶은 내 심정이라고나 할까? 

신이는 뭔가 생각하는 가 싶더니 나에게 또 다른 물음을 내던졌다. 



“대구에서 왔다면 사투리가 심하겠군. 하하, 볼만 하겠다.” 


“그게 매력이야. 넌 싸가지가 없는 게 흠이고.” 



웃음을 멈추는 신이다. 얼굴색이 변하며 창가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후훗, 나의 승리다.(유치한 주인공이었다.) 

다행이도 도로는 그다지 막히지는 않았지만 이미 약속시간은 넘어서버렸다. 지금쯤이면 도착하고도 남았을 텐데‥. 

보스로써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약속시간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니 말이다. 난 정일이에게 조금만 더 속력을 내달라고 했다. 

정일이는 흔쾌히 알겠다고 말했지만 보통 시내도로에선 한계가 있었다. 어쨌든 이리하여 저리하여 약속시간을 훨씬 넘어서야 비로소 

역에 도착할 수가 있었고 차에서 급히 내리자, 



“개소리야, 여기다!” 



나를 부르는 호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나 한참 전에 도착한 호두는 역 입구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호두는 여전히 활기차고 씩씩해보였다. 사투리 또한 여전했다. 정일이는 호두에게서 짐 가방을 받아든 후 트렁크에 실었다. 



“미안, 많이 늦었지?” 


“아이다. 니 덕에 사람 구경 드럽게 많이 했다. 아프리카인도 대구보다 더 많데?” 



안심하게 하려는 건지 아님 많이 기다렸다고 생색을 떠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리고 아프리카인이라면 흑인을 말하는 건가? 

분명 이 또한 녀석의 유머일 것이다. 강호두, 변함이 없구나. 



“형님, 더우신데 어서 타시죠.” 



앞문을 연체 나를 부르는 정일이었다. 난 호두에게 차에 타라고 말하였다. 호두는 뒷좌석, 난 또 다시 앞좌석에 올랐다. 

찰칵. 차문이 닫히고 화들짝 놀라는 호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히익, 니 뭐꼬! 간 떨어지게.” 



아마 뒤에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신이는 자신을 보고 놀라는 호두를 쏘아보며 말했다. 



“아깝네. 간 떨어졌음 좋았을 텐데.” 



저 인간이 또 뭐라고 나불거리는 거야? 후,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앞으로 또 시끄러워지겠군. 

우리가 탄 차는 좌회전 깜빡이를 넣은 체 3차선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좌우 백미러를 살피는 정일이다. 



“개소리야, 야는 뭔데?” 



호두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난 친구이자 쓰래빠의 멤버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앞으로 친하게 지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는 호두다. 



“아, 맞나? 잘 부탁한다. 내 이름은 강호두다.” 


“누가 물었냐?” 



에엑, 새신 정말이지 감당이 안돼는 녀석이다. 왜 자꾸 호두한테 시비를 거는 거야? 처음 보는 사이일 텐데. 

녀석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맞다. 안 물어 봤제? 하하, 미안.” 


“너도 참 한심하다. 네 눈도 발바닥에 붙었냐?” 


“엥? 그게 뭔 말이고. 눈이 발바닥에 붙었음 괴물이게.” 


“너 임마, 개소리 좋아한다며? 그게 바로 눈깔이 발바닥에 붙었다는 증거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룸미러로 본 호두의 얼굴은 굳어있었다. 윽, 열 받은 건 아니겠지? 하여간 항상 신이가 문제라니까? 

유인이랑 다투는 것도 매번 저 녀석이 먼저 신비를 걸어서잖아. 난 두 사람이 싸우기 전에 얼른 불씨부터 꺼야겠다고 생각했다. 



“호두야! 밥 아직이지? 배고프겠다.” 


“‥별로 안 고프다. 담배 펴도 돼제?” 



내 물음에 신이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호두였다. 휘유-. 일단 고비는 넘겼다. 

앞으로 친해져야 할 사이인데 벌써부터 등을 돌리게 해서는 안 된다. 



“여기가 네 안방이냐? 필려면 내려서 펴.” 



나에게서 대답할 권리를 먼저 선수쳐버리는 신이였다. 하지만 다행이 호두는 신이를 무시해버렸다. 



“아냐. 펴도 돼. 어차피 다 담배 피는 사람들인데, 뭘. 아, 나는 빼고. 하하.” 



내가 허락했지만 호두는 담배를 꺼내지 않았다. 벌써 화가 난건가? 그럼 안 되는데‥. 



“펴도 된다니깐‥.” 


“니는 안 핀다며? 괘안타. 나중에 피지 뭐.” 



호두는 나를 생각해서 일부러 피지 않는 것이었다. 자식, 사람 감동시키는 것도 여전하구나? 괜시리 두 볼이 붉어졌다. 

난 룸미러를 보았다. 하지만 재수 없게도 신이랑 눈이 마주칠 건 또 뭔가. 신이는 나를 노려보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들었다. 

담배였다. 



“놀고들 있네.” 



담배를 입에 무는 신이다. 왜 저렇게 심통인거야? 아아, 진짜 죽겠네. 호두와 신이가 서로 반대편 창가를 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신이는 담배를 피워대며‥ 호두는 손바닥에 턱을 괸 체‥ 그렇게 두 사람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끼이익-. 드디어 도착한 나의 집. my house-! 

신이가 제일 먼저 차에서 내려 대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점마 원래 저렇나?” 



차문을 닫으며 호두가 물었다. 그에 난 억지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으응. 좀‥.” 



난 호두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모두들 모여 있었다. 신이, 민규, 태기, 유인이, 나머지 부하들. 

그리고 반가운 얼굴도‥. 



“누님-! 안녕하세요!” 



희웅이였다. 오늘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너 어떻게 된 거야? 연락도 안하고.” 


“깜짝 놀래켜 드리고 싶었거든요. 헤헤.”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히 말하는 희웅이다. 왠지 전보다 더 야윈 것 같았다. 하긴,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지 못한 나는 어쩌면 다행이라고 여겨진다. 만약, 그 죽음을 내가 지켜봤다면 

나의 증오는 더더욱 커져 버렸을 테니깐. 아니 그게 오히려 더 좋은 건가‥? 

후우, 어찌됐건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에 변화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야랑 자는 누군데?”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던 호두가 희웅이와 유인이를 가리켰다. 아차, 두 사람은 초면이겠구나. 

난 호두에게 유인이와 희웅이를 소개시켜 주었다. 착한 두 사람은 신이와는 달리 호두를 반갑게 맞이했다. 

신이도 얘네들 같았음 얼마나 좋을까. 에휴, 너무 큰 걸 바라는 거겠지? 



“형님, 수박 드십시요.” 



주방에서 수박을 들고 나오는 궁예(별칭)였다. 궁예는 왼쪽 눈에 검은 안대를 하고 있다. 다쳤냐고? 천만에. 

왼쪽 눈 두덩이에 큰 반점이 있기 때문에 안대를 하고 다니는 것이다. 우리 쓰래빠 대식구는 테이블을 빙 둘러앉아 오순도순 

수박 한 조각씩을 손에 쥐었다. 솔직히 말이 오순도순이지, 한 사람은 그렇지가 않았다. 굳이 말 안 해도 다들 알거라 믿는다. 

호두가 가까이 있던 수박을 들려는 찰나에 그것을 잽싸게 집어버리는 신이였다. 참고로 신이는 호두와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하필이면 멀리 있는 수박을 잡을 건 뭐람. 이건 필시 호두에 대한 감정으로 밖에 보이지가 않는다. 그래도 유인이한테는 

이렇게 까지 시비를 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정말 속을 모르겠다. 



“호두 너 임마, 다음에 한번만 더 우리 형님 때리면 가만 안 둔다.” 



제일 큰 수박조각을 호두에게 건네며 태기가 말했다. 그래도 걱정했던 태기가 호두를 괴롭히지 않아서 다행이다. 

호두는 수박을 받으며 씨-익 웃어보였다. 그런데 이 따가운 시선은 뭐란 말인가. 난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보았다. 역시나 신이였고 

그는 역시나 호두를 노려보고 있었다. 왠지 좀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화가 난 것 같은 얼굴. 신이가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왜 저러지? 내가 호두한테 맞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었던가? 

아니야, 그게 녀석이랑 무슨 상관이겠어? 신이는 나에게서 눈을 돌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더 안 먹고.” 



민규가 말했다. 신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유인이도 신이를 보고 있었다. 뒤따라 일어서는 유인이. 

신이에게 가려는 참인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진짜 왜 저러는 거야? 뭔가 불만이 있음 말을 하던가. 

아무 말도 안하고 뚱해 있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 휴, 몰라. 저러다가 풀리겠지. 워낙에 단순한 인간이니까. 



“니 안 가봐도 되나?” 



호두가 수박을 상위에 놓으며 말했다.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두는 이렇게나 자기를 생각하고 있는데 신이 녀석은 정말이지! 



“응. 쟤 원래 저러니깐, 넌 신경 쓸 필요 없어.” 



난 수박을 잡히는 대로 갉아먹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목에 막히는 거야! 진짜 짜증나네! 





\정원 뒤뜰. 



작은 연못 위에는 녹색 나뭇잎 2개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비단 잉어 한 쌍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다. 

사료 몇 개가 떨어지자 잉어들은 수면 가까이로 올라와 둥근 입을 벌리고 먹이를 하나, 둘 삼키기 시작했다. 잉어들로 인해 

수면에는 둥그런 나이테가 그려지고 그와 함께 남자아이의 얼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수면이 잠잠해지기도 전에 또 다른 남자의 모습이 

수면 위에 비쳤다. 첫 번째 남자는 쭈그려 앉아있고 두 번째 남자는 그냥 서 있었다. 전자가 신이였고 후자가 유인이다. 



“나도 줘.” 



손바닥을 내밀며 유인이가 말한다. 신이는 그저 연못만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입술은 열렸다. 



“뭘 줘?” 


“물고기 먹이.” 


“너도 먹게?” 



신이는 원기둥 모양의 사료 통을 유인이에게 건네주었다. 유인이는 뚜껑을 열고 대중없이 연못에 뿌리기 시작했다. 

많은 양의 사료가 연못 위에 떨어졌다. 



“너 미쳤어? 애들 배터지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냐?” 



그에 신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유인이는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잉어들의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잉어들은 사료를 입에 넣기에 정신이 없었다. 



“봐. 배고팠나봐.” 



그러고는 사료를 더 뿌리려는 유인이다. 신이는 벌떡 일어나 사료 통을 빼앗았다. 



“임마, 물고기란 것들은 대가리가 나빠서 지가 밥을 먹었는지도 모른단 말이야!” 


“정말? 신기하다.” 



유인이는 처음 안 사실이라며 쭈그려 앉아 더욱더 연못을 뚫어지게 봤다. 신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의 옆에 앉는다. 

유인이가 주었던 사료는 점점 물에 가라앉고 있었다. 뒤뜰에도 붉게 변한 해가 저물기 시작했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무슨 일 있어?” 



유인이가 입을 떼 내었다. 시선은 여전히 연못을 향해있다. 



“네 눈엔 있어 보이냐?” 


“없어 보여.” 


“지금 장난치냐, 임마!” 



암컷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수컷을 보며 유인이는 양쪽 입 꼬리를 올려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게 5분간 침묵은 계속되었고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 침묵을 깨는 것은 유인이었다. 초저녁의 선선한 바람이 수면을 흔들어 놓는다. 



“너 개소리 좋아하지?” 



신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심하게 뜀박질한다. 유인이의 말에 반응을 하는 것이다. 



“‥갑자기 엉뚱한 소리야? 미쳤냐?” 


“응. 너 미쳤잖아.” 


“‥‥‥‥.” 



신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들었다. 입에 무는 신이. 옆에 있던 유인이가 자신의 라이터를 

빌려주었다. 담배 끝자락에 불이 붙고 재가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곧 신이의 입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한숨소리와 함께‥. 



“후-. 그래, 미친 거 맞나보다. 어울리지 않게 질투나 하고‥.” 



연못 안의 잉어 한 쌍은 붉어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들의 꿈이 이루어질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좁은 이 연못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호수를 자유로이 헤엄칠 수 있게 될 그 날을 말이다. 





다음날. 


우당탕탕 쿵탕! 아침부터 무척이나 소란스럽다. 벌써 운동을 시작한 모양이다. 난 잠을 더 청하기 위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곧 다시 어두워졌다. 이불을 뒤집어 쓴 것보단 눈을 감은 것이 영향이 컸다. 아무리 어두운 동굴일지라도 눈을 감은만 못하니깐 말이다. 



“야야, 그만 하래도! 형님이 아시면 큰일난다구.” 

“누가 먼저 시작한거야?” 

“누구긴, 신군밖에 더 있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또 나가봐야 하는 건가? 

휘익-.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 보기위해 이불을 치울 수밖에 없었다. 난 두 눈을 비비며 잠옷차림(원피스식의)으로 

방에서 나왔다. 거실로 나오니 바깥의 소란은 더 크게 들려왔다. 퍽! 퍼억! 주먹질 소리였다. 그리고 엎어지는 소리와 

뭔가 부서지는 소리도 겹쳐져 들렸다. 누군가 싸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난 더 빨리 걸어 현관에 다다랐다. 

쾅!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면 곧 정원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고 부하 몇 명(태기와 민규는 없었다.)과 희웅이가 보였다. 

유인이는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이자식,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환장은 니가 했겠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심하게 몸싸움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이 곧 시야에 들어왔다. 신이와 호두. 

언제부터 싸운 건지 얼굴이 성한 사람이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을 싸운 듯 신이에 비해 호두가 많이 지쳐있었다. 

그래서인지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 호두였던 것이다. 도대체 왜 싸우는 거야! 보나마나, 듣나마나 신이가 먼저 시비를 걸었겠지. 

이젠 정말 지치려고 그런다. 아니 이미 지쳤다. 저 녀석의 기분을 이리저리 맞춰주기엔 나 혼자 너무 역부족이다. 

엎어진 호두의 위에 올라타 얼굴에 주먹을 마구 가격하는 새신‥. 보고 있자니 내 눈이 뒤집어질 지경이다. 



“이 새끼야, 그만해!!” 



참다못해 내지른 고함소리에 모두들 나를 보았다. 하지만 신이의 주먹은 멈출 줄을 몰랐다. 맞고만 있던 호두가 무릎으로 

신이의 복부를 찍은 후 다리를 힘껏 쳐들어 신이를 날려버렸다. 그에 엉덩이를 찍고 주저앉아버린 신이다.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불만 있음 다 말하라고! 내가 네 기분까지 일일이 다 맞춰줘야 하니? 처음엔 유인이를 못 괴롭혀 안달이더니, 

이제는 호두야? 네가 그렇게 잘났어?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니? 한 명씩 다 상대해볼래? 아니, 내가 상대해줄까?” 



신이는 나를 바라보며 그저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용솟아 오른다. 터질 것만 같다. 

가슴도 터질 것 같고 머리도 터질 것만 같다. 도저히 화를 멈출 수가 없다. 난 맨 발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또 다시 큰소리를 내었다. 



“나랑 싸워! 내가 상대해줄 테니까!” 



나를 보던 신이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정말 나랑 싸울 생각인가보다. 

좋아, 까짓것 힘으로 할 수밖에. 신이는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었다. 그리고는 허리를 곧게 편 체 나를 응시했다. 신이가 말했다. 



“네가 내 상대가 될 것 같냐?” 


“뭐, 뭐야?”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이 놈, 저 놈 할 거 없이 다 짜증난다고. 그 중에서도 네가 제일 짜증나. 

너만 보면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다. 계집애가 대장이라고 깝죽대는 꼴 더 이상 쏠려서 못 보겠다. 그냥 관둘란다.” 


“뭐‥? 다시 말해봐‥ 못 들었어.”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쿵쾅거린다. 왜 이러는 걸까? 저딴 자식 그냥 포기해버리면 되는데‥ 없는 셈 치면 되는 건데‥.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지금 나에겐 숨쉴 여유조차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린 애들 전쟁놀이는 유치해서 못하겠다고. 잘해봐라, 네가 말한 그 전쟁도, 그리고 복수극도‥. 내가 없음 다 잘되겠지.” 



돌아섰다. 


대문을 향해 걸어가는 신이의 뒷모습. 난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숨을 죽인 체‥ 신이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잘됐어. 내가 바라던 바야. 제 발로 나가니 이처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어. 안 그래? 연개소리. 


쿵! 대문이 닫히고 내 심박수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허무하다. 뭔가가 허전하다. 이상한 기분이다. 정원이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때를 잘못 찾아온 눈앞의 안개였다. 



“네가 잘못한거야.” 



내 옆을 지나가며 유인이가 말했다. 집안으로 들어가는 신유인이다. 

내가 잘못한거라고? 내가 뭘? 난 잘못한 게 없는 걸. 다 신이 때문이야. 신이가 날 화나게 만든 거라고. 

그러니 잘못은 신이가 했어. 신이가 한거야. 



“누님, 괜찮아요?” 



희웅이가 다가와 내게 물었다. 



“응. 괜찮아.” 


“그치만 울고 계시는데‥.” 



난 희웅이의 말에 천천히 볼에 손을 가져다대보았다. 정말 촉촉한 물이 내 손끝에 만져졌다. 내가 울다니‥왜? 

내가 왜 울어야 하는 거지? 내가 왜 우는 거지‥? 호두는 그런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모두들 나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위로조차도 없었다. 묻는 사람도 없었다. 

난 얼굴에 눈물이 뒤범벅 될 동안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신아, 도대체 누가 잘못한거니? 






♡42 





그날 밤. 난 방에 틀어박혀 비디오 테잎을 보았다. 어릴 적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는 내가 심심하기라도 할까봐 아버지께서 

손수 구해다주신 코미디 영화였다. 나의 우상, 찰리 채플린이 주연인 '서커스'. 

그 밖에도 독재자, 시티 라이트, 모던 타임즈, 한가한 게으름뱅이 등등 그가 나왔던 작품은 거의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내 방 수납장에 한가득 정돈되어 있다. 언제나 봐도 찰리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오늘은 왜 저 모습이 슬퍼 보이는 건지‥. 

똑똑. 



“형님, 민규입니다.” 



방문을 두드린 사람은 들었다시피 나의 오른팔, 민규였다. 마음 한편에선 혼자 있고 싶은 생각이 남산만 했지만, 

그렇게 얘기했다간 아이들이 내 기분을 눈치 챌 수도 있었기에 기분대로 내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허락을 해주었던 것이다. 

민규는 혼자서 내 방으로 들어왔다. 민규도 이야기를 들어서 집안 분위기를 대충은 알 터였다. 



“형님, 식사는 거르지 마십시오.” 



입맛이 없어서 점심과 저녁, 모두 먹지 않았다. 하지만 내 배는 종을 치지 않았다.(배가 고플 때면 쩌렁쩌렁 울린다.) 



“내일 아침은 먹을게.” 



난 평소와 달리 힘없이 대답했다. 본인인 나조차도 느낄 수가 있었다. 배는 고프지가 않은데 그래도 굶었다고 기운이 없는 건가‥? 

tv의 LCD 안에서는 찰리가 인형을 흉내 내고 있었다. 



“‥형님.” 



난처해하는 얼굴로 나를 보는 민규다. 난 흐르는 눈물을 집어 삼키었다. 



“저 사람, 너무 슬퍼 보이지 않아?” 



민규가 tv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묵묵히 영화를 감상하고만 있었다. 민규는 내 말에 부정 할 줄을 몰랐다. 

거짓말 또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대답을 피하는 것이다. 하긴, 코미디 영화가 슬플 리가 없지. 나도 핑계일 뿐이니까. 

이 밤이 지날 때까지 대답을 하지 않을 것만 같던 민규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제가 보기엔 즐거워 보이는데요? 아니 행복하기까지 해보입니다.” 



처음이다. 나와 반대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돌이켜보면 몇 번 있었음. 주인공이 기억력이 나쁠 뿐임.) 

난 가만히 민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찰리 채플린은 사람을 싫어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싫어하면서도 자신의 몸을 희생해 

남들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것을 보면 그렇게 싫어한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신이 즐겁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저런 연기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제 말이 틀렸을 지도 모르지만요.” 



찰리는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건지 카메라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이기도한 이유였으니깐. 



“아니, 네 말이 맞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기위해 만든 영화인데 그것을 보고 우는 것은 큰 실례야. 

그만큼 그 아이에 대한 감정이 컸던 걸지도 모르지만.” 


“네? 그 아이라뇨?” 


“‥그냥.” 



민규는 내 말뜻을 이해한건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몇 분 뒤, 민규가 나가고 또다시 방안엔 나 혼자가 되었다. 

방밖에서 부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tv의 전원을 눌렀다. 

형광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신이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이 놈, 저 놈 할 거 없이 다 짜증난다고. 그 중에서도 네가 제일 짜증나. 

너만 보면 가슴이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다. 계집애가 대장이라고 깝죽대는 꼴 더 이상 쏠려서 못 보겠다. 그냥 관둘란다.’ 



‥진심이었을까? 만약, 그게 진심으로 했던 말이었다면 유인이 말대로 내가 잘못한거겠지? 항상 난 강한 척만 해왔으니까,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을 거야. 치마만 입었지 여자답지는 못했던 나.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는걸. 약해지면 내 꿈을 이룰 수가 없잖아. 

오히려 난 지금보다 몇 십 배는 더 강해져야만 해. 민규가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엔 강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으니까. 

하지만 누가 잘못을 했건 내가 먼저 심한 말을 한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기에‥ 사과는 해야겠지? 

난 침대에 걸터앉아 핸드폰의 폴더를 열었다. 액정 조명이 내 눈을 자극시켰다. 눈을 한번 꼬옥 감은 뒤 다시 액정을 주시했다. 

신이의 번호를 눌렀다. 조금 망설이기는 했지만 지금 난 마지막 숫자를 누르고 있다. 

뚜르르르. 다행이도 신호가 간다. 제발 받아주었으면‥. 하지만 신호는 오랫동안 계속 되었고 끝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고 말았다. 

좋아, 통화하지 못해도 좋다고. 하지만 신이가 일부러 내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난 폴더를 닫아버렸다. 여전히 방문 밖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작게나마 들린다. 뭐 이불을 덮어썼을 땐 소리의 희미함마저도 

곧 사라지고 말았지만. 오늘은 잠이 오지 않을 것만 같다. 



(같은 시간 거실.) 



개소리와 신이를 제외한 조직 쓰래빠의 멤버가 거실에 모여 있다. 인원은 모두 13명이다. 

민규는 직사각형 모양의 긴 상의 좁은 면에 앉아있고 부하 1~8까지가 양쪽 면에 앉아있다. 그리고 그 끝엔 각각 호두와 희웅이가 있었다. 

태기는 그 뒤쪽에 있는 소파의 손잡이에 걸터앉아 세워 잡고 있던 여의봉 끝에 턱을 붙이고 있다. 유인이는 VDO Game 중이다. 

거실 내 분위기는 사뭇 진지한 편이다. 



“민규 형님, 큰 형님은 좀 어떻습니까?” 



턱수염이 조금 더 길어진 오노가 방금 개소리의 방에 들어갔었던 민규에게 먼저 질문을 내밀었다. 

민규는 짧게 한숨을 토해낸 뒤 무겁게 말을 꺼낸다. 



“우시더군.” 


“하아.” 



그 짧은 한마디에 분위기는 한층 더 침체되었다. 호두는 맞은편에 보이는 개소리의 방문을 쳐다보며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을 태기가 아까부터 죽 응시하고 있었다. 



“야, 호두과자 대체 왜 싸운거냐?” 



수박씨를 툭 내뱉듯이 태기가 물었다. 하지만 가벼운 말투는 아니었다. 호두는 방문에서 눈을 떼고 상위에 얹어져 있는 

자신의 두 손을 보았다. 유인이를 제외한 모두가 호두에게 주목했다. 



“다짜고짜 와서 한판 붙자드라. 싫다니깐 무작정 주먹부터 날리데. 그래서 상대해줬지.” 


“그녀석이 왜 싸우자던? 이유가 뭐야?” 



태기가 곧장 또 다른 질문을 내던졌다. 하지만 그 해답은 호두도 모르고 있었다. 



“낸들 아나. 금마한테 물어봐라.” 



게임에 집중을 하지 않고 있었는지 유인이의 캐릭터가 적의 총탄에 맞아 소멸해버렸다. 

유인이는 모니터를 응시하다 손에 들고 있던 조이스틱을 바닥에 놓아둔다. 모니터에선 게임이 끝났음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에 

들어가고 있었다. 유인이는 마음속으로 그 숫자를 읽어 내려갔다. 

8 ‘팔’이 저린 것을 느꼈다. 너무 오랫동안 게임을 한 것 같았다. 

7 ‘칠’이라는 숫자가 모니터에 깜빡이고 있었다. 

6 ‘육’탄 공격을 퍼붓던 적군들은 총을 거두고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폭발은 계속 되고 있었다. 

5 ‘오’랜만에 해서인지 눈이 피로해졌다. 

4 ‘사’람들은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임소리만 아니면 정말 조용하다. 

3 ‘삼’국지, 

2 ‘이’니셜 D. 모니터의 숫자를 보며 유인이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또 다른 게임들의 이름이다. 

1 ‘일’심(一心), 굳게 마음먹은 유인이는 입을 열었고 End라고 적힌 글자를 보며 모두에게 말해주었다. 

정말 큰 맘 먹고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유. 나는 알고 있어.” 



일제히 유인이에게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이다. 개소리가 잠이 든 그 시각, 모두는 유인이가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야기는 전날로 되돌아갔다. 사람들은 유인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이유란 것을 듣고는 

제각기 동일하거나 서로 다른 감정에 휩싸이고 말았다. 

경악, 놀라움, 코믹‥ 호두의 씁쓸함까지. 거실의 분위기는 오묘해졌다. 



다음날. 

나는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했다. 액정에는 날짜와 시간뿐이었다. 

뭐야, 부재중이라고 떴을 텐데‥. 정말 일부러 안 받은 건가? 아침부터 기분이 돼지 울음소리(꿀꿀)해진다. 

그냥 사과만 하고 끊으려고 했는데, 도와주지 않는군. 난 그 말만이라도 전달하고자 문자의 발신함으로 들어갔다. 


-미안해.- 


라고 짧게 쓴 후 발신해버렸다. 성의 없는 문자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내 마음이 가장 잘 내포된 한마디라고 나는 생각한다. 

변명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솔직히 할 이유도 없다. 내가 하는 사과는 먼저 심한 말을 한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일 뿐 

다른 뜻은 없다. 다시 되돌아와 달라느니‥ 그런 건, 신이에게 맡기고 싶다. 만약,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이의 뜻일 테니깐, 

난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다. 세수를 하고(방내에 욕실이 딸려 있음.) 옷을 갈아입은 다음 거실로 나갔다. 

된장찌개 냄새다. 음식 냄새를 맡으니 뱃속이 비어있다는 사실이 몸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밥상에는 모두들 모여 있었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형님!” 



부하 녀석들이 크게 외쳤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안하던 짓을 다하고. 혹시 날 걱정해서? 왠지 그런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신이가 나간 뒤로 방에만 처박혀 있었으니 걱정을 끼칠 만도 했다. 난 크게 웃어보였다. 



“하하, 네들 갑자기 미쳤냐? 왜 그래?” 



섣불리 잘 잤다고 한다면 내가 자신들을 고려해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눈치 챌 수도 있기에 난 평소처럼 행동하였다. 

내 기분대로 툭툭 내뱉는 말투. 가만, 그런 점에서 난 신이와 다를 바가 없잖아? 그동안 싸가지 없다고 놀렸었는데, 많이 기분 나빴을 거야. 



“형님, 어서 식사하시죠. 배고파 죽겠어요.” 



태기가 오른손에 수저를 쥔 체 간절한 눈빛을 보내었다. 정말 배가 고파 보인다. 난 녀석들이 비어놓은 방석위에 앉았다. 

앉고 보니 바로 앞엔 호두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난 생긋 웃어주었다. 그러자 호두도 씨익 웃어 보인다. 

하지만 속에서부터 우러러 나오는 미소는 아니었다. 한눈에 봐도 느낄 수가 있었다. 



“많이들 먹어.” 



내가 수저를 들자 모두들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이미 반 정도를 먹은 유인이와는 달랐다. 


‘네가 잘못한거야.’ 


문득 유인이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내 가슴을 찔러 놓았던 그 한마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유인이는 평소완 달리 

어른스러워 보였던 것 같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동그랑땡을 집던 유인이가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젓가락 사이에 있는 

동그랑땡을 본다. 나도 보았다. 마지막 한 개였다. 유인이는 다시 나를 보더니 동그랑땡을 낼름 입속으로 넣어버린다. 

이상한 녀석, 왜 내 눈치를 보는 걸까? 난 동그랑땡엔 관심도 없는데. 



“커헉, 켁켁.” 



끝내 목에 걸린 모양이다. 가끔 보면 참 재미있는 녀석이야. 



“여기 물드세요.” 



앞에 앉아있던 희웅이가 자신의 물 컵을 유인이에게 건네주었다. 그에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는 유인이. 저러다가 또 체하겠다. 

물을 다 마신 유인이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나를 째려보았다. 내가 뭘 어쨌다고‥. 


아침 식사를 끝낸 집안은 나갈 채비를 하기에 분주했다. 변함없이 오늘 하루도 운동에 투자하기위해 체육관으로 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오늘은 호두와 희웅이도 가세했다. 두 사람은 태기가 맡을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태기는 격투 술에 비중을 두고 가르치는 민규와는 달리 

무기 술을 가르칠 듯 하다. 정원 벤치에 앉아 그런 그들을 보며 찌글이를 쓰다듬어주고 있자, 누군가가 곁으로 다가왔다. 

호두다. 추리닝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니도 갈거제?” 


“아니. 그냥 집에 있을래.” 


“왜? 니도 가자. 살 좀 빼야 되겠구만.” 



정녕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까? 나는 관심 없는 척 하면서도 은근히 내 배와 허벅지를 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찐 것 같기도 하고. 



“똥배 봐라. 똥도 안 누나?” 



제길, 그냥 가야겠다. 모든 체중을 다 가라앉혀 버리고 말테다! 난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대문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뒤이어 웃으면서 호두가 따라왔다. 속은 느낌이지만, 뭐 상관은 없다. 나 좋자고 하는 거니까! 



******** 



오늘도 체육관은 썰렁했다. 관장님께서 낚시를 가신다며 체육관 좀 봐달라고 하실 정도이다. 



최고를 꿈꾼다! 승리를 확신한다! 

우리는 쓰래빠! 위대한 쓰래빠! 

벗겨지면 다시 신자! 엎어지면 일어서자! 

가자, 가자, 쓰래빠 파이팅! 



이것이 우리 쓰래빠의 구호이다. 우리는 구호를 큰소리로 외친 후 각자의 자리로 가서 준비운동에 들어갔다. 

제자리에서 뜀뛰기를 하는 사람, 무릎운동을 하는 사람, 또는 옆구리운동을 하는 사람 등등 각자의 방식대로 몸을 풀었다. 

나는 열린 창문 앞에서 숨고르기를 했다. 그리 상쾌한 건 모르겠다. 체육관에 온지 2시간 정도 지났을까? 난 지금 열심히 달리고 있다. 

제자리에서지만. 이 체육관의 특이한 점을 예로 들자면 러닝머신이 두 대나 있다는 것이다. 동네 체육관치고는 꽤 시설이 좋은 편이다. 

뛰기 시작한지 40분 째다. 경사도를 조금 놓게 해서인지 서서히 숨이 차기 시작한다. 속도를 줄여 정면을 보고 빠르게 걸었다. 

러닝머신 앞에 붙어있는 큰 거울로 사람들이 보였다. 태기를 앞에 두고 호두와 희웅이가 있었다. 

아령을 들고 주먹 뻗기를 시작한지 30분 정도가 지났을 것이다. 녀석들의 얼굴 곳곳에 땀이 흘러내렸다. 

저런 식으로 오랫동안 연습을 하면 주먹의 속도가 조금은 빨리질 것이다. 



“그만. 자, 다음은 팔굽혀펴기 100회 실시.” 



태기의 목소리였다. 호두와 희웅이는 싫은 내색 없이 아령을 바닥에 놓고 엎드린 후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주먹의 파워는 상체의 근육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광배근과 삼두근, 대흉근 등등이 팔굽혀펴기로 단련되는 근육이다. 

팔굽혀펴기는 호흡이 가장 중요한데 너희들도 알겠지만 팔을 굽힐 때 숨을 들이마시고(들숨) 펼 때에 숨을 내쉬어야(날숨) 한다. 

운동은 호흡이 중요하다. 잘못된 호흡법은 폐에 무리를 줄뿐만 아니라, 운동의 역효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 



태기는 자신의 가르침에 만족을 느꼈는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나는 다른 곳도 보았다. 

민규가 유인이를 가르치고 있다. 검은 샌드백을 손에 붕대를 감고서 열심히 치고 있는 유인이와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는 민규. 

두 사람 모두 열심이다. 



“주먹이 약하잖아! 그렇게 때리면 누가 넘어나 가겠어?!” 



민규는 유인이가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유인이는 민규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세를 바꿔나갔다. 



“강한 펀치력은 다리에 있다고 했잖아! 몸의 무게 중심을 잘 움직이란 말이야! 그렇게 때리면 주먹의 힘만으로 칠 때보다 

몇 배에 이르는 타격력을 준다고 매번 말했잖아! 몸을 2시 방향에서 12시 방향으로 틀면서 왼손은 코에서 1개 반 또는 2개 들어갈 정도에 

갖다놓고, 오른손은 오른쪽 턱 옆에 둔 다음에 턱을 왼쪽 어깨에 붙이면서 날려! 몸은 약간 숙이고 무릎도 약간 굽혀! 

또 몸에 힘이 들어갔잖아. 항상 몸에는 힘을 빼란 말이야!” 



민규군 목이 남아나지 않겠어. 유인이를 보자니 왠지 쓸쓸해 보인다. 신이가 없어서일까? 나는 다시 속도를 높였다.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10분을 더 달리고‥ 옆의 비어있던 러닝머신이 서서히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희웅이가 달리고 있었다. 거울을 보니 호두가 바닥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다. 



“벌써 다 한거야?” 



희웅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눈웃음을 짓는 희웅이다. 



“100회 정도야, 아까 다했죠.” 



우리는 나란히 거울을 보면서 달렸다. 나도 조금만 더 뛰면 다시 숨이 찰 것 같았다. 



“힘들지? 괜찮아?” 


“아직까진 할만해요. 기본운동은 집에서도 매일 하던 일이거든요. 

저도 빨리 유인이 형처럼 제대로 된걸 배우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희웅이는 그렇게 말하곤 유인이를 보았다. 민규는 이제야 만족을 한건지 조용히 유인이의 주먹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누님은 괜찮아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하하, 그럼! 달리기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네, 그렇겠죠.” 



미소를 지어보이는 희웅이다. 나도 알고 있다. 희웅이가 말한 것은 운동이 아니라, 신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를 이해하고 더 이상 묻지 않는 희웅이가 고마울 따름이다. 정말 어른스러운 아이다. 한 살 더 많은 나보다 더. 



“희웅아, 콜라 좀 사와라!” 


“네! 그럼 누님, 다녀올게요.” 



희웅이는 태기의 부름에 러닝머신에서 내려갔다. 곧 돈을 받고선 체육관 밖으로 나가는 희웅이다. 

다시 나 혼자서 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조금씩 숨이 차기 시작한다. 거울 속의 난 땀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호두가 이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내 옆으로 올 것 같았다. 역시나 호두는 러닝머신에 올랐고 버튼을 눌렀다. 

기계의 발판이 내려가기 시작한다. 호두는 가볍게 발을 움직였다. 오른쪽 속목에 낀 검은 아대가 눈에 튀었다. 



“이제 살 좀 빠진 것 같네.” 



거울을 통해 호두가 말했다. 1시간 뛰었다고 해서 금방 살이 빠질 리가 없다. 그것을 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대꾸하지 않았다. 



“어제는‥.” 



또 뭔가 말하려는 호두다. 나는 듣고만 있었다. 몸이 뜨거워지고 더웠다. 



“어제는 시끄럽게 해서 미안.” 



신이와 싸웠던 일을 말하려는 가 보다. 나는 괜찮다고 용서를 해주었다. 솔직히 내가 용서를 하고 말고 할 것도 아니지만. 



“신이가 오거든 내가 사과할게.” 


“하아, 하아-. 네가 왜 사과를 해.” 


“손바닥도 부딪혀야지 소리가 난다고. 반은 내 잘못도 있으니깐.” 



나는 그냥 말없이 웃어보였다. 대꾸를 해주지 않는 것은‥ 그래, 네 마음대로 해. 하고 말하지 않는 것은‥ 

호두가 사과를 한다 말해도 그건 신이가 돌아와야만 가능한 것이었기에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호두과자! 나가서 족발 좀 사와라!” 


“에이씨, 먹고 싶으면 지가 가면 되지. 갔다 올게.” 



호두 역시 태기의 심부름으로 내 곁을 잠시 떠났다. 심부름 후에 다시 돌아오겠지. 신이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심부름이 끝나면 돌아와 줄 수 있을까? 하긴, 신이는 남 심부름 따윈 죽어도 안하니까,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소리지. 



“으아, 힘들어.” 



탁. 발판 위에 앉은 사람은 유인이었다. 민규가 휴식시간을 준 모양이다. 

유인이는 열심히 뛰고 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재밌어?” 


“하아, 재미로 하니? 요즘‥운동을‥너무‥게을리 했어.” 



이젠 말하는 것도 힘이 든다. 머리 털 속까지 땀이 가득 베인 느낌이다. 땀방울이 눈 중앙을 지나며 내려갔다. 따갑다. 



“너 신이 좋아하지?” 



켁! 순간 유인이의 발언에 숨이 막힐 뻔 했다. 아니 뜨끔했다고나 할까? 화살이 내 가슴 중앙을 명중한 기분이다. 



“미‥미쳤니? 운동 방해하지 말고 꺼져.” 


“킥, 너도 미쳤잖아.” 



너도 라니‥ 또 누굴 말하는 거야? 난 내 마음을 아직까지도 잘 알 수가 없었기에 뭐라고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유인이는 왜 자꾸만 기운 빠지게 만드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건지‥. 



“에이, 좋아하면서. 신이 보고 싶지?” 



쿵쾅쿵쾅. 가슴이 뛴다. 러닝머신을 너무 오랫동안 한 탓일 거다. 그래서 다리도 풀리는 것일 테고‥ 


쿵쿵쿵쿵-. 지이잉-. 

탕! 끝내 난 뒤로 밀려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는 유인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무릎이 아프다. 그리고 가슴도 아파져 온다. 신유인, 저 인간 때문에‥. 

아니 새신, 망할 그 인간 때문에‥. 난 입술을 깨물었다. 

스윽-. 내 눈앞에 나타난 흰 땡땡이 무늬의 손수건 한 장. 유인이의 것이다. 난 그 손수건을 받아들며 유인이를 보았다. 



“그걸로 땀 닦아. 학교까지 뛰어가려면 힘들 테니까.” 



학교? 내가 학교로‥? 이 순간만큼은 눈을 깜빡이지 않고 유인이를 보았다. 무슨 뜻이지? 



“학교‥?” 


“응. 신이랑 10분 후에 거기서 만나기로 했어. 난 민규 형이 안 보내 줄 테니깐, 네가 대신 좀 가줘.” 



무표정한 얼굴로 잘도 이야기하는 유인이다. 참 좋은 녀석. 난 손수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체육관 밖으로 달려 나갔다. 신이를 보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까마득했지만 

내 두 다리는 학교로 가기를 원했고 내 두 눈은 녀석을 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난 신이를 만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벌컥. 문을 열고나오니 호두가 계단에 앉아있었다. 옆에는 족발이 들었는지 검은 봉지가 놓여있다. 나를 보지도 않은 체 호두가 말했다. 



“니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온나. 둘이 같이‥.” 



둘이서 같이‥ 신이랑 같이‥ 

호두의 그 한마디로 인해 흩어져 있던 내 마음이 한 곳에 뭉쳐지는 기분이었다. 이제야 내가 모르고 있었던 뭔가를 알 것만 같았다. 

진짜 하고 싶은 말. 



“응!” 



난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43 






“할말이 있어.” 



농구골대와 2m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신이. 고개를 들어 농구골대를 바라본다. 신이는 황토색 농구공을 두 손에 들고 있었다. 

난 그 아이의 뒤에 있었다. 남자의 뒷모습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떨려온다. 



“신아‥.” 



내가 말을 걸기가 무섭게 뒤꿈치를 들고 두 팔을 펼치며 들고 있던 농구공을 살포시 던져버리는 신이다. 

콩당. 농구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더니 바구니 안을 통과하여 땅에 떨어졌다. 탕탕탕. 자신의 몸을 땅에 맡기면 

땅은 그 공을 퉁겨내 버린다. 하지만 공은 다시 땅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땅은 그에 질 새라 공을 내쳤다. 그러기를 몇 번, 

결국 땅은 가엾은 공을 안아주었다. 세상은 그렇게 삭막하기만한 곳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러니 신이도 날 받아주겠지. 

내가 공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신이를 보았을 때 신이는 핸드폰을 들고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짐작되는 사람은 단 한명. 



“신유인, 나다!” 



유인이가 맞았다. 신이와 만나기로 약속을 한 사람. 내가 아닌 신유인. 



“왜 안와? 못 오면 나도 그냥 가고.” 


“어! 개소리 안 왔어?” 


“난 너랑 만나기로 했어.” 


“흠‥미안! 난 못 가. 나대신 개소리가 놀아줄 거야. 그럼 끊을게!” 



신이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더니 이내 폴더를 닫아버린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넣는 새신. 뒤돌아섰다. 

그리하여 나와 마주 보고 서 있는 꼴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 신이다. 

매정하게 내 옆을 지나쳐 버리는 녀석. 



“미안해.” 



늦을 새라 얼른 내뱉었다. 그에 나와 반걸음 뒤에서 멈추는 신이다. 다행이다. 



“할말이라는 게 그거냐?” 



드디어 나에게 대꾸를 해주었다. 비록 기대에 못 미치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안심은 되었다. 나는 농구골대를 바라보며 신이에게 말했다. 



“다시 돌아 와주면 안 될까‥?” 


“그딴 조직, 엿이나 먹으라지.‥이게 내 대답이다.” 



신이의 목소리에 이어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아프다. 화가 나기보다는 서러움이 밀려왔다. 

내가 뭐 때문에 저 아이에게 이런 미움을 샀을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는 돌아 서 신이에게 달려갔다. 

오로지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떠나지 못하도록 잡아야 한다. 잡아라. 무엇이든 좋으니 저 아이를 잡아라. 

내 마음이 내 손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타악. 잡았다. 겨우 신이를 붙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내 손에 잡혀 있는 신이의‥머리카락. 그리고 가만히 멈춰 서 있는 신이. 

으악, 왜 하필 머리카락을 잡은 거야! 



“난‥지금 너랑 장난칠 기분 아니야.” 



스르륵. 머리칼은 내 손에서 떨어져나갔다. 다시 걸어 나가는 신이다. 

난 멍하니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더 이상 잡을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내 힘으론 역부족이었던 것일까? 

그렇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는걸.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가지 뿐. 난 골목을 빠져 나가려는 신이에게 외쳤다. 



“기다릴게! 네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거야! 정말 기다릴 거라고!” 



신이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저 묵묵히 교문을 나갈 뿐이었다. 신이의 모습은 이제 내 자리에선 볼 수가 없었다. 

그래,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녀석을 기다리는 거야.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라고. 



“하아.” 



난 한숨을 길게 내쉰 뒤 벤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것쯤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1%의 가능성에 기대고 싶은 마음이랄까? 지금의 나에게 선택권은 없다. 선택하는 권리는 신이에게 있을 뿐이다. 

벤치에 앉아 바라본 운동장은 넓기만 했다. 방학을 하기 전에는 이 곳에서 남자아이들이 농구나 축구를 하곤 했었는데‥ 

그때는 운동장이 참 좁아보였지. 





(킥킥 체육관 건물 앞.) 





“이민규, 날씨가 흐린 게 꼭 비올 것 같지 않냐?” 


“그렇네.” 



회색구름이 서서히 흰 구름을 집어삼키고 태양의 곁으로 다가가려는 시간. 

운동을 마친 조직 쓰래빠는 체육관에서 나와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연개소리의 오른팔, 왼팔인 민규와 태기가 흐린 날씨를 

운운하며 앞서 걸어가고 있다. 비가 올 것을 고려해 노란 3단 우산을 들고서 내려오고 있는 한 여성이 보인다. 

가슴선이 돋보이는 민소매 티에 하얀 허벅지를 드러낸 떨어진 구제 청반바지를 입은 여성이었다. 또각또각. 굽 소리를 내며 

쓰래빠의 옆을 지나가고 조직원들은(8명의 부하들) 여성에게서 눈을 뗄 줄을 몰라 몸과는 달리 돌아가는 고개이다. 



“새신 만나러 간 거 맞제?” 



제일 끝에서 걸어오고 있는 세 사람. 신유인, 김희웅, 강호두. 나란히 어깨를 맞추며 걷고 있다. 

호두는 짙은 향수냄새를 남기고 지나간 여성의 뒷모습을 보며 유인이에게 물었다. 

마음을 비우고 개소리를 보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영 내키지는 않는 짓이었다. 



“응. 맞아.” 



유인이가 간단히 대답만 해주었다. 호두는 고개를 돌리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보내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착한 행동이었다. 



“난 네가 막을 줄 알았어.” 



유인이가 말했다. 호두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다. 그때 자신이 개소리를 막았다고 해도 그녀는 분명 계단을 내려갔을 것이다. 

그럴 바에 그냥 막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희웅은 두 사람의 말을 가운데에서 듣고만 있었다. 자신이 나설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개소리를 보내준 건 참 잘했어. 칭찬해줄게.” 



희웅은 유인이의 어리 숙한 말투에 살짝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호두는 화를 낼 뿐이다. 



“니한테 칭찬 듣기 싫다!” 


“참 잘했대도. 집에 가서 도장 찍어줄게.” 



유인이는 호두의 말을 무시한 채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였다. 그런 유인을 보며 머리만 벅벅 긁어대는 호두다. 

희웅이는 가운데에서 여전히 웃고만 있었다. 태양을 가린 회색구름은 물 한 방울을 지상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한 방울은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한다. 




******* 




툭! 신이의 콧잔등 위로 떨어진 빗방울. 집 옥상에 올라온 신이는 코를 어루만지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먹구름이 잔득 낀 것이 한바탕 비를 뿌릴 것 같았다. 그게 소나기든 장마 비든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었다. 

신이는 옥상에서 내려가기위해 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때, 투둑, 투둑 머리 위로 빗방울들이 떨어지더니 

곧 추아악-,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얼른 옥상 문을 나왔다. 문안에서 옥상을 보았다. 시원하게 내리는 무더운 여름의 빗줄기. 

신이는 조금 젖어버린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 순간 한사람이 떠오르고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기다릴게! 네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릴 거야!’ 



신이는 머리를 털며 옥상 문을 닫았다. 

이미 갔을 거야. 비가 오잖아. 비를 맞으면서 기다릴 만큼 생각 없는 계집앤 아니니까. 신이는 생각했다. 

계단을 내려와 집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거실과 방. 할아버지와 떨어져 산지도 2년이 다 되어간다. 

1주일에 한번씩 일본에서 연락이 오는 할아버지. 항상 하는 말씀은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 대학은 일본에서 다니라는 것, 

듣기 짜증나는 소리뿐이었다. 신이는 빗물이 방안으로 들어오기라도 할까 방안에 있는 창문을 닫았다. 

유리창으로 비를 막자 빗소리도 잔잔해졌다. 


몇 시간 후. 


만화책을 보던 신이는 침대 앞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우산을 바라보았다. 

갔을 텐데‥ 분명 갔을 게 뻔한데‥ 자신도 모르게 만화책을 놓고 우산을 잡는 자신의 손을 발견하였다. 



“나도 참 미쳤군.” 



신이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으며 밖으로 나갔다. 한 손엔 우산을 들고서‥. 





(비 내리는 학교.) 





- 어디야? 신이랑 같이 있어? (염댕이 신유인.) - 

- 누님, 밖에 비와요. 비 맞고 있는 건 아니죠? (예절바른 희웅이.) - 

- 새신 금마가 꼬리한 짓 할라 카면 내한테 전화해래. 몽둥이 들고 달려 갈 테니깐. (사투리 대 마왕 호두.) - 




세 사람의 문자에는 걱정스러움이 묻어있었다. 갑자기 비라니‥ 

비가 내린지 5시간째. 그리고 그 비를 맞은 지도 5시간째다. 여름이지만 몇 시간동안 물벼락을 맞으니 온몸에 오한이 서려왔다. 

덜덜덜. 몸이 자연스레 떨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비나 맞으며 청승이라니. 하지만 빗속에서 몇 시간째 나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나의 속마음과 호두가 내게 했던 말이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오라는 호두. 그리고 그렇게 결심한 나의 속마음. 

하지만 정작 내가 신이에게 한말은 ‘미안해.’와 ‘다시 돌아와.’ 이 두 마디뿐이었다. 이것이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까? 

그 말을 하고도 기분은 개운치가 않았다. 내 가슴 속에 어떤 찌꺼기가 남아있는 듯한 그런 기분이다.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 

난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는 운동장은 흠뻑 젖어 그 특유의 흙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난 귀를 기울였다. 

빗소리를 들었다. 마치 비와 하나가 된 것만 같다. 내 눈은 빗줄기로 가득 찼고 내 코는 비가 만든 흙냄새로 가득 했다. 

내 귀에는 빗소리밖에 들리지가 않는다. 그리고 내 몸은 비에 흠뻑 젖었다. 서글퍼진다. 그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에 가슴이 아파져 왔다. 

왜 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 못했던 것일까? 



“‥좋아해. 널 좋아하는 것 같아.”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지만 가슴은 여전히 아프기만 했다. 내 말을 들어 준 것은 그리고 지금 내 곁에 있는 것은 

말없는 빗줄기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 때는 반드시‥. 


사람들에게 여러 통의 전화가 왔었다. 하지만 나는 단 한통도 받지 않았다. 그 여러 통의 전화 중에서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벌써 12시가 되었다. 하루가 끝나고 또 다른 하루가 찾아온 것이다. 빗줄기는 작아졌지만 난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내가 이런다고 돌아와 줄 신이가 아니니까. 그리고 기다리는 것 또한 녀석의 발목을 잡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난 이제 더 이상 신이를 잡을 수가 없다.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기운이 없다. 난 터벅터벅 진흙을 밟으며 걸어갔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자. 다들 걱정하고 있을 거야. 교문이 가까워졌다. 나는 닫혀있는 교문을 열었다. 

그리고 환청이 들려왔다. 



“시원해서 좋겠다.” 



신이의 목소리. 이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내 입은 스스로 벌어졌다. 



“나 자신이랑 약속했거든. 오늘 하루 동안만 기다리자고. 이제 귀찮게 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대로 옆으로 돌아 집이 있는 방향으로 힘없이 걸어 나갔다. 그러자 또 다시 들려오는 환청이다. 난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빗속에서 하루만 기다릴게. 그럼 네 곁에 있게 해줄 거냐?” 


“만약, 그 전에 비가 그치면‥?” 



아무도 없는데 혼잣말을 하는 바보 같은 나였다. 하지만 환청이라 생각되었던 것은 내 말에 대답까지 해주었다. 



“그럼 옷 말리면서 기다리지, 뭐. 비는 그쳐도 시간은 멈추지 않으니까.” 



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엔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신이가 서 있었다. 우산을 들고 있었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흠뻑 젖은 모습이었다. 

환청에 이어 환각인걸까? 아니 그렇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목소리도 모습도 모두 똑같으니까. 난 신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그 아이의 머리칼을 만져보았다. 정말 환각이라면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 젖은 머리칼. 무거운 가슴속의 짐이 떨어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머릿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눈앞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신이의 손이 자신의 머리위에 얹어진 내 손을 잡았고. 



“이제야 마음이 놓여.” 



이 한마디와 함께 난 쓰러지고 말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다음은 생각나지가 않는다. 

오로지 기억나는 것은 추위를 감싸준 따스함뿐이었다. 




********* 





“뭐야, 생각 없는 계집애였잖아?” 



신이는 쓰러진 개소리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보았다. 열로 인해 뜨거웠다. 

신이는 개소리가 빗속에서 얼마나 있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지 않았던 것은 차마 발이 떨어지지가 않아서였다. 

비를 맞으며 추위에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원하던 일이었으니까. 

신이는 눈을 감고 있는 개소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긴 속눈썹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신이는 개소리의 뺨을 어루만졌다. 

열이 달아오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빨리 집으로 옮겨야만 했다. 신이의 등에 업힌 개소리는 아픈 것도 잊은 채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늦은 밤. 한 대의 택시도 보이지가 않는다. 신이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근처에 작은 모텔이 있다. 되도록이면 빨리 개소리를 따뜻하게 해주기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신이는 거추장스러운 우산을 바닥에 버리고는 모텔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얄미운 빗줄기는 또 다시 강해지고 있었다. 


경마장. 


이 곳이 신이가 개소리를 업고 도착한 모텔의 이름이다. 매우 특이한 이름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신이에게 크게 중요치 않았다. 

신이는 4만원이라는 숙박비를 지불한 뒤 206호실의 키를 주인에게서 건네받았다. 방안은 그런대로 아늑하고 따뜻했다. 

불을 켜고 곧장 하얀 시트가 깔려있는 침대에 그녀를 눕혔다. 욕실로 달려가 마른 수건과 가운을 가져왔다. 

신이는 수건으로 개소리의 얼굴과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흠뻑 젖은 옷을 벗겨야만 했던 것이다. 

신이는 개소리의 웃옷을 잡은 뒤 망설이고 있었다. 하지만 체면, 미안함, 쑥스러움. 지금은 그런 것들을 따질 때가 아니다. 

바닥에서 일어나 형광등 스위치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틱. 스위치를 누르자 방안은 금세 어두워졌다. 신이는 다시 침대로 다가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걱정 마. 금방 잊을 테니까.”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개소리의 옷을 차례차례 벗기기 시작했다. 

한 개, 두 개 벗길 때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어댄다. 신이는 애써 자신의 마음을 다스렸다. 



“후우-.” 



가운으로 갈아입힌 후 신이는 다 끝났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보았다. 

아까만큼은 아니었지만 심장은 아직도 뛰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아차!” 



신이는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바닥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생각난 것은 해열제였다. 다시 불을 켜고서 방에서 나와 주인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해열제를 얻을 참이었다. 다행이도 주인에게는 약상자가 있었고 그 안엔 해열제도 들어있었다. 

주인은 돈을 받지 않고 액체로 된 해열제를 신이에게 주었다. 신이는 공손하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 후 호실로 급히 올라왔다. 

개소리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신이는 미소를 지으며 개소리에게 다가가 해열제 병의 뚜껑의 열었다. 

약 수저에 물약을 몇 방울 떨어뜨린 후 그녀의 야무진 입술 사이로 약을 넣었다. 입술 끝으로 약이 조금 새어나왔다. 

신이는 옆에 있던 수건으로 다정하게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자신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여자아이. 

자신이 본 여자들 중 가장 강한 아이.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여자. 진짜라고 느끼고 싶은 사랑. 

현재의 심정으론 이 여자가 자신의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마음뿐. 



“내가 무슨 생각으로 너한테 그런 말을 한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전부 사실은 아니야. 

아니 네가 날 미치게 만든다는 건 사실이었어. 그래, 그것만 사실이다.” 



신이는 수건을 침대위에 놓은 후 그녀의 하얀 볼에 손을 얹었다. 아직 열은 있었지만 조금은 식은 듯 했다.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그녀의 볼 가까이로 입술을 가져갔다. 곧 그의 입술로 뜨거움이 전해지고 그의 심장은 심하게 쿵쾅거린다. 

그녀의 귀 가까이로 입술을 옮긴다. 신이가 말했다. 



“네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넌 내가 지켜줄게.” 


“‥‥‥.” 


“지금부터 널 지키는 것, 그게 바로 내 꿈이야. 그래서 난 강해지겠어.‥지금 한말은 모두 사실이야.” 



심하게 울리던 빗소리가 잔잔해졌다. 날이 밝으면 시원하게 목욕을 한 세상이 그들을 환하게 반겨줄 것이다. 그의 진심과 함께‥. 



“네가 좋아. 이게 내 진심이야.” 







♡44 





머리가 맑다. 꽤 아팠던 것 같은데, 무슨 꿈을 꾼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 정도이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눈앞에 보인 것은 단순한 천장이었다. 벽지도 형광등도 낯선 것들이다. 공기의 냄새도 우리 집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이 낯선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았다. 창가 쪽이었다. 

그리고 그 곳엔 이 낯선 것들을 집어삼켜줄 만큼의 익숙한 뒷모습이 서 있었다. 순간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그것은 진짜 신이었다. 



“신아‥.” 



난 창밖을 보고 있는 신이를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그러자 눈부신 햇살이 방안으로 새어 들어오며 신이가 뒤를 돌아본다. 

그것도 환하게 웃으면서. 



“벌써 일어났어? 더 자도 되는데. 오늘 날씨 한번 진짜 끝내준다.” 



나를 보며 웃고 있는 신이를 보자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가슴이 따가워졌다. 난 가슴에 손을 얹어보았다. 

그런데 이 푹신한 감촉은 뭘까? 난 이불 안으로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입고 있는 것은 목욕 가운. 

에엑!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놀라자빠질 나는 이불을 걷어차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는데 이게 웬일! 

방바닥에 보란 듯이 펼쳐져 있는 내 옷가지와‥ 소, 속옷이 아닌가. 으헙, 거품 물기 일보직전이다. 신이 저 자식이, 내 몸에‥ 



“끄아아악! 너 이 자식 죽었어!!” 



난 주먹을 쥐고 신에게로 달려갔다. 



“하하, 어쩔 수가 없었다구. 근데 하나도 안 봤어. 진짜, 진짜야!”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눈감고 옷을 갈아입혔다고? 말도 안돼는 소리하지 마!” 



퍽퍽! 날 막을 수 없는 방어를 내게 하며 그저 등을 떠맡기는 신이다. 난 그 등을 사정없이 때려주었다. 이 변태! 태기만도 못한 인간! 



“악, 사실은 봤는데‥.” 


“뭐야?! 너 오늘 내 손에 한번 죽어봐라!” 


“봤는데, 금방 잊었어! 정말이야! 그대로 두면 감기들 텐데,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고!” 



휘익-. 내 주먹은 마지막 일격을 앞두고 공중에서 멈추어버렸다. 

신이의 손에 붙들린 체 말이다. 나도 알고 있다. 신이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정말이야. 믿어주라.” 



신이가 웃으면서 말한다. 그에 난 고개를 숙였다. 왠지 울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물을 보이고 싶진 않다. 

그때 모두에게 내가 우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지만, 이 녀석한테만큼은 절대 보이고 싶지가 않다. 



“‥믿어. 네 말 믿어.” 



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심히 내 손을 놓아주는 신이다. 

안겨도 될까‥? 저 가슴에 얼굴을 묻어도 될까? ‥역시 안 되겠지? 이런 망설임 끝에 난 신이의 가슴 안에서 눈물을 흘렸다. 

나의 뜻이었지만 나를 신이의 가슴속에 넣은 것은 내가 아니라 신이 자신이었다. 무릎을 구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를 

신이가 끌어안아주었다. 아니 감싸주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나는 신이에게 안긴 체 눈물을 쏟아내었다. 



“마음껏 울어. 보지 않을 테니까.” 





****** 





신이의 품은 정말 따뜻했다. 

윽, 그 생각을 하니 얼굴이 붉어진다. 난 신이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한 걸음 앞서 걸었다. 

계단을 내려와 1층이다. 주인아저씨가 계신 카운터 앞에 이르렀다. 호실 열쇠를 반납하는 신이다. 

주인아저씨는 열쇠를 받으며 나를 힐끔 쳐다본다. 앞머리가 벗겨진 탈모아저씨다. 



“허허, 아가씨 밤새 즐거웠나 모르겠네.” 



엑, 이 아저씨가! 내 두 볼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즐겁기는 뭐가 즐거웠다는 거예요?!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흥, 별꼴 만 땅 아저씨야.” 


“하하하.” 



돌아서 입구로 재빨리 걸어가는데 두 늑대의 웃음소리가 내 심장을 뒤흔들어 놓는다. 

‘경마장’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모텔을 빠져나와 길을 걸어갈 때도 난 신이보다 앞에서 걸어갔다. 

신이는 그런 나를 보기만 할 뿐 따라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젠 반대로 신이가 내 뒷모습을 보고 있는 꼴이 되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곧, 이내 내 옆에 멈춰서는 신이다. 



“왜? 쥐라도 났냐?” 



신이가 물었다. 난 방긋 웃어보였다. 



“아-니. 그냥, 내 뒷모습을 남한테 보이고 싶지가 않아서. 좀 추해야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을 리가 없는데 씨익 웃는 신이다. 우리는 나란히 걸어갔다. 다른 사람의 뒷모습을 본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그게 기쁜 뜻이든, 나쁜 뜻이든 모두 서글프기만 하다. 그러니 난 뒷모습 따윈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에게만은. 


집 앞. 

신이와 함께 바라본 건물 외관은 왠지 초상집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난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곧장 대문이 열리더니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형-니임!! 꺼이꺼이.” 



눈물을 한 움큼 쏟아내며 나에게 달려드는 변태기다. 난 왜 녀석이 무서운 걸까? 바락. 나를 안고서 울기 시작한다. 

내가 괴물한테 잡아 먹혔을까봐 걱정했다나?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건지. 귀 뒤로 황당한 땀방울이 뚝 떨어진다. 



“형님, 전화 한통도 없어서 걱정했습니다.” 



민규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머지 부하들도 그의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옷을 입은 유인이도 있었고 

신이를 째려보고 있는 호두도 있다. 그리고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귀여운 희웅이도 있었다. 



“겜방에서 밤 좀 샌다고. 미안해. 맞고를 치는데 너무 재밌는 거 있지?” 


“쿨쩍, 맞고요?” 



고개를 들고서 나를 보는 태기다. 뭔가 귀가 번뜩 열린 것 같은데‥. 왜 그러지? 

태기는 눈물을 닦더니 갑자기 웃어대었다. 미친놈. 



“하하핫! 형님도 이제야 맞고의 즐거움을 깨달으셨군요! 다음에 저랑 한 판 하시죠. 제가 다 잃어드리겠습니다!” 



역시 단순하다. 난 녀석들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호두가 무슨 할말이라도 있는 건지 신이를 붙잡았다. 

아, 그렇지! 그때 사과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화해라도 하려는 걸 거야. 정말 뿌듯함이 들었다. 




******** 





신이를 붙잡은 호두는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개소리와 그 외 사람들을 보았다. 그런데 희웅이를 끝으로 모두들 안으로 들어갔지만 

유인이는 현관문 앞에서 멈춰서버린다. 뭐 상관은 없다. 



“왜? 할말 있어?” 



신이가 자신을 붙잡은 호두를 보며 말했다. 그에 호두는 시선을 신이에게로 옮겼고 곧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는 궁금했던 것을 신이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난 아직 포기 안했다.” 



정원의 큰 나무를 바라보며 얘기하는 호두다. 언제나 당당한 그였지만 이런 말을 내뱉기엔 왠지 쑥스러웠다. 



“난 끝까지 포기 안할 거야.” 



그에 질 새라 신이가 말했다. 그는 호두 자신과는 달리 무척이나 당당한 모습이었다. 

쑥스러워하는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에 오기가 생기는 호두다. 



“임마, 내가 먼저 말했잖아!” 



신이는 웃어보였다. 



“그래, 언제든지 와라. 상대해줄 테니까. 대신 주먹으론 말고.” 



자신만만했다. 호두는 달아오른 얼굴로 발 앞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를 찼다. 그리고 그 모습을 현관 앞 계단에 앉아 유인이가 보고 있었다. 



“‥니 고백했나?” 



고민 끝에 물어보는 것이었다. 



“응, 했지. 그런데 쟤는 못 들었을 거야.” 



순간 가슴이 철렁했던 호두다. 하지만 개소리가 못 들었을 거라는 말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걱정 마. 좋아한다는 말도 못 들었으니깐.”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눈치 챈 건지 신이가 콕 집어 말해주었다. 계속 말을 잇는 신이다. 



“근데, 언젠가는 들을 거야. 꼭 날 좋아하게 만들 거라고. 너보다야, 내가 더 매력이 있으니깐. 푸하하!” 



그렇게 말하고는 현관으로 걸어 가버리는 신이다. 호두는 신이가 모르고 있는 개소리의 마음을 대강 알고 있었기에 불안하기만 했다. 

솔직히 이미 포기한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왜 하지 못했던 것일까? 

설마 아직도 자신의 본심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쳇.” 



호두는 바람이나 쐬자는 생각에 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런 호두를 유인이는 보고만 있었다. 

신이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왔다. 유인이는 고개를 들어 신이를 보았다. 씨-익, 웃었다. 놀릴 생각이다. 



“너무 빠른데? 고맙지?” 


“킥, 그래, 덕분에 보기는 봤다.” 



장난이었던 유인이는 깜짝 놀랐다. 그럼 정말로 같이 밤을‥? 유인이의 머리를 툭 치며 현관문을 여는 신이다. 



“거기까지다. 얼마나 비를 흠뻑 맞았는지 고생했다고. 그래도 고맙다, 임마.” 



신이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신이의 말뜻을 알아들은 유인이는 살짝 미소를 띠우며 계단에서 일어섰다. 

정원의 나뭇잎들은 밤새 맞은 빗방울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햇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 






“잘 먹었습니다!” 



후다닥-! 밥그릇을 비우자마자 쏜살 같이 달려 나가는 신이다. 그가 향하는 곳을 정해져 있다. 체육관 아니면 헬스장. 

며칠동안 제일 열심이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러는 걸까? 뭐 신이 덕에 다른 아이들도 영향을 받아 열심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도 잘 먹었습니다!” 



밥 먹는 속도도 몰라보게 빨라졌다. 

그 날‥ 신이가 다시 돌아온 날, 그때부터 신이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처음과 달리 화도 잘 내지 않을뿐더러 웃는 날이 늘어난 것이다. 

이젠 적응이 되기는 했지만,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저녁. 밖에서 운동을 마치고 온 녀석들은 잠시 잠깐의 휴식 끝에 지금 정원에서 또 운동중이다. 모두들 체력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민규와 태기, 두 사람과 맞붙여 놓는다면 아마 30분쯤은 버틸 수도 있을 것 같다. 



“형님, 우편물이 왔습니다.” 



정원 의자에 앉아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흰 편지봉투를 손에 들고 오는 민규였다. 우편물이라면‥ 수도세? 전기세? 

에이~ 그건 아니겠지? 난 민규에게서 우편물을 받아들었다. 카드였다. 신년도, 성탄절도 아닌데‥ 가만, 내 주위에 결혼할 사람이 있던가? 



“초대장입니다.” 



카드를 꺼내기 전 민규가 내게 한말이다. 초대장. 나는 꺼내든 카드를 열어보았다. 강호파의 사아칸(가명)이 보낸 것이다. 

자신의 생일을 와서 축하해 달라는‥ 날짜는 내일이었다. 강호파의 보스, 사아칸. 본명은 사돈길. 

강호파는 거대한 전국구 조직이다. 내가 상대하기엔 너무나도 힘든 상대이다. 



“아마 전국의 조직은 다 올 것 같습니다. 강호파가 이런 식으로 초대장을 보내는 것은 5년 전 사아칸이 제주도에 있는 카지노를 

인수한 기념파티이후 두 번째입니다. 그 날도 큰 싸움이 벌어졌었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가시지 않는 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가야지! 그러면 초대해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 



그래,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소위 잘나간다는 깡패새끼들이 다 모이는 자리라면, 반드시 미친개라는 놈도 있을 거야. 



“걱정 마. 초대장에는 무기 소지는 절대 불가라고 적혀있어. 아마 입구에서 검사를 할 거야. 

나만 가만히 있으면 싸움이 벌어질 일은 절대 없어. 대충 내일 참가하는 조직들을 읊어봐.” 


“예. 일단은 전국에 펼쳐져 있는 강호파의 세력들은 거의 다 올 것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전국구인 구제파의 소이켠도 부하 몇을 데리고 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구제파의 소이켠. 강호파의 뒤를 잇는 전국 최대의 조직. 그 곳의 보스가 강호파에게 당해 1년 전 그의 오른팔이 보스를 대신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가 바로 22살의 소이켠. 허나, 이제는 완전 보스로 자리를 굳힌 모양이군. 

설마 복수를 한답시고 내일 연회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건 아니겠지? 유심히 잘 봐둬야겠어. 



“또 세 번째 규모를 자랑하는 전국구 대파의 한동구 또한 분명히 올 것입니다. 그밖에도 초대를 받은 조직은, 

저희 쓰래빠를 비롯해 대파의 세력 아래에서 성장한 쪽파와 인천 최대 조직인 배고파, 부산의 왕파, 대전의 똥배파, 

울산의 복고파, 대구의 딴지파, 광주의 도레미파가 대표적입니다.” 



흠‥ 거물들의 집단 모임이구만. 난 카드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을 보니 

신이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웃옷이 땀에 젖어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길래 그렇게 진지하냐?” 



테이블 위에 있던 생수 병을 집어 들며 신이가 물었다. 나는 사실을 숨길 참이다. 그런데 그걸 민규가 미리 훼방을 놓았다. 



“내일 전국의 조직들이 모여. 거기에 갈 거야.” 



물을 마시던 신이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예상대로 자기도 간다는 신이다. 



“안돼! 위험할지도 몰라!” 


“왜 안 된다는 건데? 너도 가잖아!” 


“나와 넌 달라! 이렇게 보여도 난 조직의 보스고 넌‥.” 


“난, 뭐?” 



젠장, 지금은 절대 안돼. 



“넌 그냥 내 친구야. 쓰래빠의 일원이긴 하지만 아직은 내 친구라고. 부하가 아니야.” 


“‥난 무조건 갈 거야.” 


“안돼! 2년 동안은 절대로 안 된다고! 고집부리지마.” 



하지만 신이의 얼굴엔 이미 굳은 신념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 결심을 한 듯 했다. 신이가 내 눈을 마주하며 당당히 소리쳤다. 



“친구라면, 널 혼자 보낼 순 없어.” 


“나 혼자 가는 게 아니야. 민규랑 태기도 갈 거야.” 


“후‥ 잘 들어, 개소리. 넌 조직의 보스이기 전에 나한텐 여자이고 친구야. 

네가 말한 대로 네가 내 친구라면 나한테 명령 따윈 내릴 수 없어. 난 내가 명령을 내리면 내렸지, 

절대 굴복하진 않아. 나도 너랑 함께 갈 거다.” 



“니 혼자가 아니라, 우리도 겠지! 맞나 아니가?” 


“네, 맞습니다.” 



호두에 이어 희웅이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가까이 온 아이들이 우리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던 것이다. 

유인이는 역시나 관심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민규를 보았다. 살짝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후우, 좋아. 단, 모두들 조심해야 돼.” 


“걱정 마. 내 몸을 지키고도 여자 하나정돈 더 지킬 힘은 있으니까.” 



신이 녀석,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여자라니‥. 그거 설마 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좌우지간 어쨌든 간에 조금은 든든하겠는 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 녀석들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 


다음날. 

드디어 다음날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다. 지금 우리 쓰래빠가 서 있는 곳은 초대 장소였던 호텔 앞. 

모두들 정장을 차려 입고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건물을 바라보고 있다. 쓰래빠는 나를 중심으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큰 현수막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사아칸님의 39번째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습다. 이름이 아칸이라니‥ 무슨 로봇 만화 주인공도 아니고.(남 말할 처지는 아님.) 

우리는 다리가 예쁜 안내원의 말에 따라 지하에 마련되어져 있다는 연회장으로 내려갔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특징이라면 죄다 검은 옷이라는 것, 우리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 무식하게 덩치만 산만한 녀석들이 많다는 것, 이 정도다. 

연회장 입구에는 예상대로 두 명의 남자가 검문을 하고 있었다. 무기 소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우선 나부터 했는데 여자라서 그런지 허술하게 하는 것 같았다. 뭐 가지고 온 무기도 없지만. 

남자들은 나를 들여보낸 뒤 민규의 몸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다음은 태기‥. 

검문을 무사통과한 우리 쓰래빠 15명은 이리하여 연회장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저기 케이크를 앞에 두고 활짝 웃고 있는 사아칸이 보인다. 


그래, 네가 그렇게 웃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 엔돌핀(endorphin)이나 실컷 모아두라고. 








♡45 





“바쁘신 데도 불구하고 어려운 발걸음을 해주신 내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요즘 경기가 침체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들의 비즈니스 사업에도 큰 한파가 불어 닥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같은 식구들끼리 힘을 합쳐 위기를 모면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모신 것은 서로 친목도 다질 겸 새로운 얼굴들도 익히자는 취지에서입니다. 이렇게 모두 모이는 것도 

드문 일이니 부디 사이좋게(강조) 회포나 푸시길 바랍니다. 마음껏 즐기시다 가십시오.” 



짜작짝짝짝-. 

사아칸의 인사말이 끝나자 연회장의 사람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모두들 예의상 손뼉을 치는 것일 뿐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강호파의 보스, 사아칸은 심통 맞은 얼굴로(웃고 있었지만) 단상에서 내려왔다. 솔직히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은 

정말 의문이다. 이렇게 조직들이 대거 모이는 자리를 경찰들이 모를 리가 없다. 분명 호텔 어디선가 기회만을 엿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어? 아니, 아무것도.” 



한번 심각해지면 나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다. 신이는 그런 내 손을 잡으며 날 현실로 빠져 나오게 해주었다. 

지금 연회장은 시끌벅쩍이다.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 약한 사람들과 경계를 풀고서 인사를 하러 다니는 강한 사람들도 나뉘어져 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난 지금 경계를 하는 쪽이고 지금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저 사람은 경계를 풀어헤친 쪽이다. 

한동구, 내가 만만하다는 건가? 



“여어,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쓰래빠의 새로운 보스지?” 



척-. 악수를 청하는 한동구의 앞을 가로막는 민규와 태기였다. 한동구(전국구 No.3, 37세.), 대파의 일인자다. 



“말씀을 높여 주십시오.” 



성난 눈매로 이야기하는 민규다. 그에 한동구는 흥, 하고 콧방귀를 꼈다. 내밀었던 손을 내려버린다. 



“됐어. 그만해.” 



난 두 사람을 물러서게 했다. 한동구의 뒤에도 그를 호위하는 조직원들이 여럿 서 있었다. 이 사람은 분명 예전 자신의 부하들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운운하러 온 것이다. 훗, 그에 대한 대가를 치루게 한다는 건가? 



“처음 뵙겠습니다. 연개소리라고 합니다.” 



난 살짝 목례를 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으음, 처음은 아니지. 한 세 번은 봤나? 하하, 하긴 그때는 코흘리개 꼬맹이였으니 기억을 못하는 것도 당연하지. 

뭐 지금도 내 눈엔 어린애로 보이지만. 크하하.” 



개구리 같은 팅팅 부운 큰 눈에 납작한 콧대, 두터운 입술.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남자는 전에 상대해주었던 

그런 피라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은 참아야만 한다. 



“젊다는 건 좋은 거지요.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흥, 애비를 닮아서 참 낙천적이구만. 한마디로 쓸개 빠진 멍청이라는 소리지.” 



이 자식이‥ 우리 아버지를 잘도 모욕 했겠다?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추스렸다. 



“저희 아버지에 대한 말씀은 되도록이면 삼가 해주십시오.” 


“왜? 부끄러운 건 아는가 보지? 한 조직의 보스가 병으로 죽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하하. 

너희들은 쓰래빠의 전 보스가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 알고 있냐?” 



뒤에 있는 자신의 부하에게 질문을 내던지는 한동구였다. 우리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아니야, 난 처음 듣는 소리인 걸? 우리 아버지는 어떤 인간한테 칼부림을‥. 



“광견병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뭐? 뭐라고?? 내 눈은 서서히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의 인내심은 저 자식들이 지금부터 몇 마디를 더 지껄이느냐에 달렸다. 

한동구는 턱을 쳐들며 웃어대었다. 매우 기분 나쁜 웃음소리이다. 



“크하하핫! 맞아, 아주 잘 알고 있구나. 그 멍청인 미친개한테 물려서 그만 죽고만 거지. 의학이 발달한 이 21C에 말이야. 쿠하핫!” 



그럼, 그 미친개라는 게‥진짜‥개? 아니야, 저 놈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날 우습게보고 말도 안돼는 거짓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라고. 그따위 말도 안돼는 거짓말을 내가 믿을 줄 알고? 흥! 천만에! 



“형님‥.” 



날 염려하는 태기의 손길이었다. 난 괜찮다고 눈치를 보내었다. 하지만 괜찮을 리 없었다. 



“그 딸은 얼마나 멍청할까? 난 정말 궁금했어. 뭐 얼굴은 꽤 반반하다만, 그 나이에 조직을 떠맡다니, 너무 어려.” 



한마디만 더 지껄여라. 그땐 이 주먹으로 그 코를 더 납작하게 만들어 줄 테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딱 한마디만 더. 



“너만 괜찮다면 내 놀이개가 되어도 좋.” 


“요즘 대파가 잘 나간다는 소문이 있던데, 다 헛소문이었나 보군요. 그 팅팅 부운 눈을 보니 매일 끼니를 라면으로 때우시나 보죠?” 



주먹이 올라가려는 찰나 한동구의 말을 자르는 사람이 있었다. 다른 보스들과는 달리 밝은 색의 양복을 입고 온 눈에 띠는 남자였다. 

구제파의 소이켠.(No.2, 22세.) 하늘색 와이셔츠에 파란색 넥타이. 그리고 하얗게 탈색한 짧은 커트머리. 

무엇보다도 몸매가 좋았다. 얼굴로 민병철(구제파의 전 보스)의 오른팔이 되었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뭐, 녀석의 실력을 보지 않는 한 진짜 사실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크흑, 당신은‥.” 



기가 눌린 한동구의 모습이었다. 쳇,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금방 꼬리를 내리는 저 모습. 



“연개소문님은 제가 알던 분들 중 가장 늠름한 분이셨습니다. 꼭 장군 같다고나 할까? 개구리 같이 생긴 당신과는 격이 다르죠.” 


“윽, 알고 하는 소리요?” 


“네, 잘 알다마다요. 저희 전대 보스와 절친한 친구 사이셨는걸요.” 



우리 아버지와 민병철이 친구? 처음 드는 소리인데‥. 



“크흠! 그만 가봐야겠군요. 다른 사람들도 만나봐야 하니. 즐겁게 노십시오.” 



한동구는 헛기침을 토해내며 급히 자리를 피하였다. 역시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모두 거짓이었던 거야. 

그러니 아버지를 잘 안다는 사람이 나타나자 다른 곳으로 가버리는 게 아니겠어? 소이켠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동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왠지 좋은 사람인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저기 정말인가요? 저희 아버지와 당신의 보스였던 민병철이 친구였다는 말‥.” 



내 말에 소이켠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곧장 대답을 해준다. 



“아니요. 뻥이었어요.” 



에엑? 난 황당함에 얼어붙어버렸다. 태기가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라며 언성을 높였다. 

다른 사람들은 계속 지켜보았다. 



“하지만 저런 개구리 보다야, 당신 아버지가 나은 건 사실이지요. 그건 웬만한 양아치들한테 물어도 다 똑같은 대답을 할 거예요.” 



난 그를 보았다. 가벼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진실한 것 같았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던 인물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듣던 대로 쓰래빠에는 한 인물 하시는 분들 뿐이군요. 얼굴로 조직원을 뽑는 건가요? 

그래서야, 어디 예전처럼 성장이나 하겠어요? 과연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뭘 할 수 있을까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서 얼굴 따윈 통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도 피로 얼룩지면 곧 끝이니까요. 지금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당신들의 얼굴에 칼집을 내는 것 따윈 종이를 자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이 녀석도 날 아니 우리 조직을 얕보고 있는 걸로 밖엔 보이지가 않는다. 

솔직히 그것보단 너무나도 정곡을 찔러서 할말을 잃을 정도이다. 뒤에서 듣고만 있던 신이가 앞으로 나왔다. 



“계속 듣고 있자니 꽤 거북한데? 우리 누가 센지 어디 한번 겨뤄볼까?” 



재킷 소매를 걷어 올리려는 신이다. 자존심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그건 신이뿐만이 아니라 내 뒤에 서 있는 

우리 조직원 모두가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렇지만‥. 난 팔을 뻗어 신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해. 지금 네 실력으론 어림도 없어.” 


“윽‥뭐?” 



사실이니, 굳이 사과는 하지 않을 것이다. 신이는 분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 아이를 다치게 할 수는 없다. 

소이켠은 웃음을 띠며 신이를 보았다. 



“당찬 고양이군요. 그 고양이 이름이 뭐죠?” 



나에게 묻는 소이켠이다. 신이가 고양이라고? 난 신이를 걱정했다. 이 자존심 강한 아이가 자신을 고양이로 비유하는 남자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덤빈다 한들 결과는 뻔하다. 



“내 이름은 새신이다! 본명은 한신. 고양이가 아니란 말이다!” 



신이는 다행이도 화를 억제하고 있었다. 자신의 본명까지 이야기하는 신이. 무척이나 열이 받은 모양이다. 

소이켠은 가슴에 팔짱을 낀 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곧 생각한 것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새신이라면, 저도 들은 적은 있지요. 서울에 분포하는 고양이들 중 아마 최고 라죠? 이거 실수했네요. 

고양이가 아니라 살쾡이였는데. 그나저나 뜻밖인데요? 쓰래빠에 있을 줄은‥.” 


“그럼 나는 고양이?” 



뒤에서 궁시렁 거리는 유인이었다. 나름대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소이켠의 부하 한 명이 그의 귀에 대고 뭔가 속삭였다. 

그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소이켠이다. 



“그만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한번 뵙도록 하죠.” 



그가 돌아서자 일제히 양 옆으로 벌어지는 남자들이었다. 부하들 사이로 지나가는 소이켠. 

그의 부하들은 녀석이 지나가자 다시 모여 그를 따라간다. 호두와 몇몇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 중지를 펼쳐들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신이는 소이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표정이 없었다. 



“저 사람들을 잘 봐둬. 2년 후 우리가 쓰러뜨려야 될 사람들이니까.”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2년 후면 난 좀 더 강해져 있어야 한다. 아니 강해져 있을 것이다. 나의 부하들과 함께. 

우리는 심각해지는 것도 잠시 배를 채우기 위해 접시를 하나씩 들었다. 뷔페 테이블을 따라 각자가 먹고 싶은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테이블 정면으로 조직의 많은 보스들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왔다. 난 조직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한 네 사람에게 차례대로 가르쳐 주었다. 

우선 우리는 고기코너로 왔다. 길게 일자로 뻗은 테이블에는 갈비, 주물럭, 산적, 돈가스, 치킨 등 다양한 육류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돼지갈비 두 조각을 접시에 담으며 눈으로 맞은 편 과일코너에 있는 남자 한명을 가리켰다. 



“저기 앞에 있는 저 남자가 바로 똥배파의 조춘이야.” 


“머리에 왁스칠한 인간 말이야?” 



옆에 서 있던 신이가 물었다. 제대로 보고 있었다. 



“응. 대머리 맞아. 나이는 35세, 박치기가 특기지. 저 사람의 박치기는 1t이나 되는 강력한 이력이 있다고 해. 

나야, 안 부딪혀봐서 잘 모르지만. 어쨌든 머리를 조심해야 돼. 이곳에 있는 대머리는 모두 저 남자의 부하들이야. 

똥배파의 파율(派律)은 머리를 모두 미는 거야. 참고로 파율(派律)이란 조직의 규칙, 즉 법을 말하는 거야. 

그러니깐 우리 조직의 파율(派律)은 한마디로 쓰래빠를 신는 거지.” 



모두들 내 이야기를 심각하게 경청했다. 고기를 대충 주워 담은 우리는 앞 칸의 샐러드 코너로 갔다. 

야채와 채소들이 종류별로 있었다. 난 칵테일 잔으로 건배를 하고 있는 두 남자를 가리켰다. 



“오른쪽에 있는 남자가 왕파의 왕봉지, 왼쪽에 있는 남자가 오늘의 주인공인 사아칸이야. 왕파는 부산에서 제일 가는 조직이야. 

저 조직의 파율(派律)은 반드시 비닐봉지를 하나씩 지참하고 다니는 거야. 보스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부하들은 흰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지.” 


“봉지를 왜 들고 다니노? 웃기네.” 



호두가 양상추 하나를 깨물며 의문을 표시했다. 난 오이와 당근을 접시에 담았다. 



“왕파의 특징은 비닐봉지로 상대를 질식하게 만드는 거야. 

지친 상대의 머리에 비닐봉지를 씌운 뒤 힘껏 눌러버리지. 잔인한 놈들이야.” 


“강호파는?” 



신이가 물었다. 강호파. 가장 어려운 상대이다. 



“규모가 엄청나지.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거든. 이기려면 우리도 그만큼을 늘이는 수밖에 없어. 

강호파는 10년간 최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어. 경찰도 강호파라면 두 손, 두 발을 다 들 정도야. 

강호파에겐 특이한 특징 같은 건 없어. 그렇다고 실력이 뛰어난 녀석들이 많이 모인 것도 아니지. 

하지만 중상위(중[中]중에서 상[上])쯤 되는 실력을 지닌 자들이 고루 모여 있어. 그런 녀석들이 몇 백 명이나 된다고 생각해봐. 

아무리 실력 좋은 사람을 열 명 정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절대 이길 수가 없는 거야.” 


“조직원이 몇 백 명이나 된다는 거가?” 


“그건 나도 자세히는 몰라. 하지만 확실한건 구제파와 배고파를 합친 정도라는 거야. 나도 민규한테 들은 거지만. 

아차! 그리고 강호파에서 기억해두어야 될 인물은 바로 사아칸의 오른팔인 진형우야. 지금 여기엔 없는 것 같지만 

우리랑 같은 나이야. 작년에 강호파로 들어갔다는 얘기가 있어. 실력이 엄청나다던데.” 


“나, 그 사람 알아.” 



유인이었다. 진형우를 알고 있다고? 하긴,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닌다고 했으니까. 우리 모두는 유인이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정작 신유인 본인은 신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근데 나보다는 신이가 더 잘 알거야. 같은 학교에 다녔으니까.” 



같은 학교? 그럼 S고에? 전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다. 신이는 강호파의 사아칸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사아칸은 칵테일 잔을 입술에 대고 있었다. 



“진형우‥, 한때는 친구였지.” 



신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 진형우와 신이가 친구였다니‥. 

그럼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인가? 왠지 더 들어야만 사실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신이의 표정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듯 했다. 

후-, 어쩔 수 없지 뭐. 다음에 듣는 수밖에. 우리는 앞쪽에 있는 테이블로 건너갔다. 튀김코너. 

탕수육을 비롯해 해산물이나 야채를 튀긴 음식들이 잔뜩 있었다. 이번에는 인상을 쓰고서 자신의 부하에게 

호통을 치고 있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대파의 한동구. 너희들도 아까 봤다시피 재수 없는 놈이야. 저 녀석은 절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 

채식주의자지. 물론, 부하들에게도 권장하고 있어. 아니 그게 파율(派律)이지. 그 중에서도 생파를 즐겨먹어. 

생 양파까지. 한마디로 말해 독종이지.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야.” 



희웅이가 미간을 찡그렸다. 녀석, 양파에 대한 아픈 추억이라도 있는 건가? 우리는 옆으로 걸어가 과일코너로 왔다. 

내가 좋아하는 과일들이 쌓여있었다. 난 오렌지를 시작으로 미친 듯이 과일을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콕콕. 

그런 내 어깨를 툭툭치는 유인이다. 난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유인이를 보았다. 눈짓으로 희웅이를 살짝 가리킨다. 

희웅이의 얼굴이 굳어있었다. 희웅이의 접시는 테이블 위에 얹어져 있었고 그의 두 손은 주먹을 꽈악 쥐고 있다. 

어딘가를 매섭게 응시하고 있는 희웅이. 난 그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 곳엔 마른 남자가 음식을 주섬주섬 챙겨 먹고 있었다. 

배고파의 김빈곤. 이런‥ 저 녀석도 온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난 접시를 들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희웅이의 주먹을 잡았다. 



“저 말라빠진 인간은 누구냐?” 



난 희웅이를 살피며 신이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인천에서 자리를 굳히고 있는 배고파의 보스, 김빈곤이야. 제일 비겁한 놈이지. 저 조직의 특징은 하나같이 

모두 마른 사람뿐이라는 거야. 일부러 그렇게 뽑는 건지, 아님 굶는 건지 이유는 나도 모르겠어. 

파율(派律)은‥ 잘 몰라. 어쨌든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될 인물이지.” 



난 과일을 더 담아야 했지만 희웅이 때문에라도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희웅이를 떠밀다 시피해서 온 곳은 죽코너였다. 

난 그릇에 호박죽을 조금 담았다. 반대편에서 식혜를 퍼담고 있는 조직의 보스가 보였다. 



“저 남자는 울산의 복고파 보스, 오진국이야. 즐겨 듣는 음악, 즐겨 입는 옷 모두 옛날 풍을 좋아한대. 

나이는 32세. 옛날 것을 좋아하기엔 조금 젊지. 옛날 무기를 모으는 것이 취미래. 몸 어디에 표창 등 구식무기를 숨기고 있을 지도 

모르니깐 조심해야 돼. 복고파의 파율(派律)은 옛날 것을 사랑하자래. 웃기지?” 


“저기 점마는 딴지파 아이가?” 



호두가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대구에 살아서인지 알고 있는 듯 했다. 



“맞아. 대구에 있는 딴지파의 보스인 포천청이야. 저 조직의 특징은 이마에 있어. 

우두머리인 포천청은 이마에 달 문신을 부하들은 별 문신을 하고 있지. 저 놈들에겐 절대로 인질로 잡혀서는 안돼. 

이마에 문신을 새긴다는 소문이 있거든. 어떤 모양인지는 나도 몰라. 파율(派律)은‥.” 


“배신은 곧 개작두 처리! 맞제? 들어서 안다.” 



호두는 놈들의 파율(派律)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응. 딴지파의 아지트에는 큰 개작두가 하나 있댔어. 배신자나 적은 목을 잘라버린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믿어서 손해 볼 건 없지.” 



네 사람 모두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안 보이는 것 같은데. 아, 맞아. 쪽파가 비웠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쪽파의 보스, 김월래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윽-. 그때 다른 쪽에 있던 민규가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형님, 로비에서 김월래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데요. 어쩔까요?” 



흐음, 오긴 왔다는 건가? 난 가겠다고 말하였다. 민규는 조심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난 들고 있던 접시를 호두에게 맡겼다.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 너희들은 여기 있어.” 



난 민규와 연회장에서 빠져 나왔다. 문 밖에서는 태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월래, 과연 무슨 일로 날 찾는 것일까? 

어쩌면 대파의 보스인 한동구에게 명령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날 잡아두거나 처리하라고. 

난 양 옆에 민규와 태기를 끼고서 1층으로 올라갔다. 





♡46 





(한편, 연회장에서는‥) 



개소리와 그녀의 양손잡이가 연회장에서 나가고 네 사람은 비어있는 둥근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개소리의 조촐한 조직 설명회를 듣느라 퍼 담은 음식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어째 접시의 흰 부분이 더 많이 보인다. 

그래서 네 사람 모두 다 먹은 뒤 조금 더 가지고 올 생각이다. 신이는 개소리가 알려 주었던 각 조직의 보스들을 둘러보며 

스파게티를 포크로 돌돌 감았다. 똥배파의 조춘, 복고파의 오진국, 딴지파의 포천청, 배고파의 김빈곤, 왕파의 왕봉지. 

하지만 역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강호파였다. 그 중에서도 아직 모습은 안 보였지만 사아칸의 오른팔이 되었다는 진형우다. 

한때 콤비라고 불리었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던 남자아이. 15살 때부터 17살 때까지 2년 동안 떨어져 지낸 적이 없을 정도였던 

그와 사이가 멀어진 것은 17살이 되던 해의 겨울이었다. 신이는 고1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할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일본에서 방학을 보내었다. 그런데 처음 2주 동안은 연락이 되었던 진형우와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것. 그 불안한 기분은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었을 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진형우는 그 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신이는 그의 집에 가보는 등 매일 진형우를 찾는 데에 

시간을 매진했다. 하지만 그를 찾을 수는 없었고 2학년이 되던 해, 진형우의 소문이 학교 내에 맴돌았던 것이다. 그의 소문은 이러했다. 

방학이 시작되고 3주 뒤 길을 가던 그가 깡패들에게 둘러싸여있는 한 여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평소 불의를 보면 못 참았던 그는 

여자를 구해내기위해 깡패들과 몸싸움을 벌였고 무기를 든 상대를 보자 이성을 잃은 나머지 깡패 한 명을 그만 죽여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을 지나다가 우연찮게 발견한 강호파의 사아칸이 이 일을 수습해주는 대신 그가 자신의 조직에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것이 전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때 자신의 친구였던 진형우가 지금 강호파에 있다는 것은 확실시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이는 대파의 한동구도 신경에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개소리에게 상처를 주었던 개구리처럼 생긴 남자. 

그때 개소리의 얼굴은 잊을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그 슬픈 얼굴을 말이다. 또한 구제파의 소이켠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한낮 고양이에 비유했던 소이켠. 그녀는 자신이 소이켠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 했지만 신이는 언젠간 

녀석을 쓰러뜨려 그녀에게 인정받을 거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신이는 이런 저런 생각 끝에 테이블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들고 있던 포크와 젓가락을 놓고서 한 남자를 보고 있는 친구들. 단, 자신의 오른쪽에 앉아있던 유인이는 묵묵히 먹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녀석의 접시는 점점 깨끗해지고 있었다. 



“서울로 갔다는 소릴 듣기는 했지만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걸? 으흐흐.” 



깡마른 남자가 희웅의 접시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아는 척을 해왔다. 아니 신이의 눈엔 시비를 거는 것처럼 보였다. 

희웅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눈을 하고서 테이블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 이를 악물고 분노를 잠재우기위해 노력했다. 

연회장 한쪽에선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20대 여성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였다. 



“이런, 모른 척 하기야? 너무 섭섭한데. 아차, 누나의 장례식장엔 못 가서 미안하군. 장미로 만든 화환이라도 보낼 걸 그랬나?” 



접시를 말끔히 비운 유인이 드디어 포크를 접시위에 놓았다. 신이와 호두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몰라 의아하기만 했다. 

배고파의 보스, 김빈곤이 왜 희웅에게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분명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희웅의 저 폭발할 듯한 눈빛이 그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장례식장에 장미화환이라니‥ 

김빈곤의 얼굴엔 즐거움으로 가득 차있었다. 



“‥꺼져.” 



그 예의바르던 희웅이 나이 많은 어른에게 ‘꺼져’라는 비신사적인 말을 했다. 하지만 세 사람의 눈에 나쁘게 비치는 것은 

오히려 김빈곤이다. 하지만 김빈곤과 그의 부하들은 코웃음을 칠뿐이다. 



“그 계집이 쓰래빠의 보스라곤 상상도 못 했는걸? 알았다면 그 자리에서 없애버리는 거였는데. 

하긴, 그때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어. 계속 신경에 거슬렸지. 흐후후, 역시 그랬던 거야. 아하핫!” 


“꺼져, 꺼지라고! 넌 내가 반드시 죽여 버리겠어! 내가 제 발로 찾아갈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아.” 



희웅이 참다못해 고함을 내질렀다. 그에 주변의 모든 시선이 그들에게로 주목되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술렁이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개소리의 팔부하도 그 소리를 듣고서 그들에게 달려갔다. 



“이봐, 꺼지라잖아.” 



신이가 남은 스파게티를 감으며 김빈곤에게 말했다. 김빈곤은 당황하거나 반대로 열 받은 기색 또한 해보이지 않았다. 



“훗, 그러지. 그럼 기대하고 있으마. 되도록이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라고.” 



툭. 희웅의 어깨를 치며 부하들과 돌아서는 김빈곤이었다. 

희웅은 더러운 손이 자신의 몸에 닿았다는 사실에 온 몸을 떨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바닥에 눕혀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게 희웅은 10분간 말없이 앉아만 있었다. 다른 이들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잠시 후 희웅의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느낀 신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얘기해주지 그러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희웅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선 신이를 보았다. 희웅은 자신의 동료들에게 숨길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힘겹게 입술을 떼 내었다. 그리고 인천에서 있었던 끔찍한 사건을 꺼내놓기 시작한다. 




(호텔 로비.) 




저벅저벅. 연회장이 있는 지하에서 올라와 1층에 다다랐다. 로비에선 쪽파, 김월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민규는 쪽파의 조직원에게서 말을 건네받았다고 했다. 혹시 식당에 있는 건가? 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당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로비에 조폭들의 모습만 보일뿐 일반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여기 저기 덩치들이 난무한데 

누가 밖으로 나올 것인가. 아마 오늘 하루는 예약한 사람이 없을 지도 모른다. 식당으로 가는 도중 밖을 보았다. 

문이 유리로 되어있어 밖이 훤히 다 보인다. 풀장이었다. 바람에 물결이 일렁였다. 또는 물길이 솟아오르기도 했다. 

바람이 바닥에서도 나오는 것일까? 난 걸음을 멈추고선 밖으로 나가보았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그에 민규가 따라 나왔다. 뒤이어 태기도 나온다. 검은 그림자. 풀장 안에서 사람으로 보이는 형체가 여러 개 있었다. 아니 사람이었다. 



“싸우고 있나 본데요.” 



태기의 말대로 물 안에서 남자 셋이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 싸움이지 한 사람이 두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맞고만 있었다. 난 가까이 다가갔다. 



“형님, 그냥 가시는 게.” 



민규가 나를 막았다. 



“쪽파는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지만, 위험에 처한 사람은 그냥 놔둘 수가 없어!” 



하지만 난 내 의지대로 행동했다. 풀장 앞에 멈춰 섰다. 물속에서 한 사람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는 남자들. 물길이 내게도 튀었다. 



“그쯤 했으면 됐잖아? 이제 그만 하지 그래?” 


“넌 뭐야?” 



내 말을 들은 남자들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선 나를 올려다보았다. 꽤나 떨떠름한 표정이다. 남자의 상처에서 난 피가 물과 함께 

섞이고 있었다. 분명 약한 자를 괴롭히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비겁한 깡패새끼들 같으니. 이리 나와! 우리가 상대해줄 테니까!” 



물에 흠뻑 젖은 남자들은 콧방귀를 끼며 풀장에서 나왔다.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이 계집애가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나.” 


“킥, 새끼야, 넌 좋겠다? 치마 속에 숨겨줄 계집도 있고.” 



이 자식들이 지금 뭐라고 중얼대는 거야? 난 고개를 살짝 돌려 민규와 태기에게 신호를 보내었다. 

그러자 남자들에게 공격을 하는 두 사람이다. 퍽! 뻐억! 먼저 복부와 얼굴을 차인 남자들은 뒤로 주춤거리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섰다. 

정신을 차리고선 욕설과 함께 주먹을 날리는 그들이다. 



“이 개쉑히들이!!” 



하지만 민규와 태기는 그들의 주먹을 가뿐히 피하며 다음 공격을 퍼부었다. 뭐야? 별것도 아니잖아? 

난 물속에서 켁켁 거리고 있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옷이 물에 젖는 걸 원치 않았다. 남자는 나를 경계하다 결국 내 손을 잡았다. 

물속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리는 녀석이다. 그가 누워서 민규와 태기를 보았을 땐 이미 나쁜 놈들을 때려눕힌 뒤였다. 



“콜록, 콜록.” 



기침을 하며 다시 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다가 갑자기 킥킥, 웃어대는 인간이다. 이 녀석, 뭐야? 맞더니 머리가 이상해졌나? 



“쿡, 여자 치마 속에 숨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숨겨줄 의사는 없나보지?”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이다. 가만, 이 녀석‥? 

난 얼른 치마를 다리에 붙였다. 뭐 이런 변태 같은 자식이 있어? 퍽! 



“아악!” 



풍덩! 내 발이 움직이자 그를 피하기 위해 옆으로 구르던 남자는 그만 바보같이 풀장에 빠지고 말았다. 

그나저나 이 자식 엄청 빠르잖아? 그 가까이 있던 내 발을 재빨리 눈치 채고 피하다니‥. 

흠, 저런 얼간이들에게 그냥 맞고만 있을 형편없는 실력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사정이 있나보군. 



“왜 이리 안 오나했더니, 이런데서 물장난을 하고 있었구만.” 



풀장으로 나온 또 다른 사람은 다름 아닌 쪽파의 김월래였다. 기다리다 못해 직접 나를 찾아온 모양이다. 꽤 급한 일이기라도 한가보지? 

민규와 태기가 내 옆으로 다가와 김월래를 바라보고 섰다. 김월래가 달고 온 쥐새끼는 총20마리였다. 한마디로 10배다. 

쳇, 많이도 달고 왔군. 나랑 대화만 할 것 같지는 않은데? 



“저를 찾으셨다고요? 무슨 용무시죠?” 



원치 않게 물을 마신 변태 녀석이 기침을 하며 풀장에서 나왔다. 지금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녀석은 나를 탓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소리 없이 피해버리겠지. 뭐, 내가 바라던 바니까. 



“야! 팬티 좀 봤다고 사람을 차려는 게 어딨냐?!” 



윽! 이 자식, 쪽팔리게 뭐라는 거야? 내 얼굴은 곧 홍당무가 돼버리고 말았다. 낄낄거리며 웃어대는 쪽파 놈들이다. 

이 자식 이따가 두고 보자. 똥물을 퍼마시게 해줄 테다! 



“애인인가 보지? 그 나이면 뜨거울 때지.” 


“누가 애인이라는 거야?! 이런 변태랑 사귈 바에 차라리 이 녀석이랑 사귀고 말지!” 



나답지 않게(아니, 너다웠어.) 김월래의 놀림에 흥분하여 왼쪽에 서 있던 태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에 울상을 짓는 태기다. 



“형님, 전 형님을 여자로 생각해본 적이‥.” 


“하하하! 재밌군. 하지만 장난은 거기까지 하고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지.” 



표정이 변해버리며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은 김월래였다. 그리고 재킷 안에서 칼을 꺼내드는 놈의 부하들이다. 

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역시 대화를 위한 만남이 아니었어. 그 순간 내 머리에선 어떻게 하면 다치지 않고 놈들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빗발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대충 이런 일을 예상하기는 했지만 무기를 들고 있을 줄이야. 조금 힘들게 되었다. 



“아~ 또 개 같은 일에 말려들었잖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던 변태 녀석이 중얼거리는 소리다. 



“임마, 괜한 사람 원망하지 말고 은혜나 갚아.” 



김월래를 응시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에 투덜대는 녀석이다. 콧김과 함께 입을 크게 벌리며 김월래가 말했다. 



“크하하하! 죽어서 귀신이 되거든 동구형님을 욕하라고. 난 형님이 시켜서 하는 것뿐이니까.” 



대파의 한동구가? 흥, 쪽파가 성장하는데 자신들의 힘이 컸으니 시키는 대로 해라, 이거구만. 

처음 내가 예상했던 것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난 주머니에서 검은 머리끈을 꺼내어 입에 문 뒤 머리를 한 갈래로 모으며 말했다. 



“듣던 대로 쪽파는 대파의 똘마니였군. 걱정 마. 너흴 원망 할일도 없어.” 



난 입에서 머리끈을 빼낸 뒤 머리에 감았다. 긴 머리는 싸움에 걸리적 거리기만 한다. 그렇다고 아까운 머리를 자를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이‥방금 한 말 취소해라.”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김월래는 미간 사이로 주름을 만들며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사실을 굳이 취소할 필요는 없잖아?” 



난 팔짱을 낀 체 웃어보였다. 후, 그나저나 녀석을 열 받게 만들었으니 당장이라도 공격을 해올 텐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역시 물을 이용하는 방법밖엔 없겠지? 놈들이 아무리 칼을 들고 있다 해도 물속에서는 움직임이 둔해질 테니까. 

그때를 노리는 수밖에. 



“그 말을 후회하게 해주마. 얘들.” 


“설마 여기서 싸우시려는 건 아니겠죠?” 



김월래의 명령이 떨어지려는 순간, 낯선 목소리가 그를 멈추게 했다. 풀장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중 의자였다. 3m 가량 되는 높이의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 한명. 여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겼다. 



“누구지?” 


“강호파, 진형우야.” 



내가 의문을 표시하자 뒤에 앉아있던 변태 녀석이 잘 안다는 듯 가르쳐주었다. 저 녀석이 진형우라고? 

그런데 언제부터 저기에 앉아있었지? 접근하는 걸 전혀 못 느꼈는데. 



“크윽, 죄‥죄송하지만, 방해는 말아주었음 하오.” 



김월래가 예를 갖추며 녀석을 대했다. 부탁을 하는 그다. 저 녀석의 소문이 헛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강호파의 오른팔인 진형우.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이거 영광인 걸? 그건 그렇고 이 변태 녀석은 도대체 누구지? 

누구 길래 실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놈들에게 그냥 맞고만 있었으며 또 저 진형우를 보고도 제자리에 앉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궁금한 것이 태반이었다. 






♡47 





“초대장에는 분명 무기소지가 금지된 걸로 아는데요. 쪽파에게 도착한 초대장은 좀 달랐나보죠?” 

“‥방해하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가만 두지 않겠소.” 



진형우의 거침없는 말에 쪽파의 김월래가 진땀을 빼었다. 하지만 역시 대파의 명령은 거절할 수가 없는 모양이다. 

재킷의 벌어진 칼라사이로 손을 집어넣더니 부하들이 들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의 칼을 꺼내드는 김월래였다. 

매거넘(MAGNUM, 사냥용 칼)이다. 



“상대가 강호파라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표시군. 하긴, 말이 강호파지 여기엔 한 명뿐이니까.” 


“아니. 두 명이야.” 



나는 단지 혼잣말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뒤에 앉아 내 말을 받아치는 변태 녀석이었다. 지금 풀장에 있는 강호파가 두 명이라니. 

아까 민규와 태기에게 맞은 녀석들이 강호파라고 친다면 셋이 되는 건데. 하지만 두 명 모두 도망가고 없는 걸? 나는 혹시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강호파로 보이는 사람은 진형우 밖에 없었다. 어디에 숨어 있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진형우 때처럼 기척도 

나지 않는데. 내게 이런 의문을 가지게 한 당사자인 변태 녀석을 보았다. 바닥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올려다보는 녀석. 

입술을 아래로 비스듬히 틀어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어 웃어 보인다. 윽, 설마 이 변태 녀석이?! 



“뭘 그렇게 놀라? 입에 날 파리 들어가겠다.”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이다. 그럼 강호파인 이 녀석이 왜 그런 놈들에게 맞고만 있었던 거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 드는 기분이다. 



“가만 두지 않는다‥? 킥, 그런 말은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 될 말이 아닌가‥요?” 



억지로 존대를 쓰는 진형우다. 전혀 겁이 날게 없다는 저 자신감과 당당함. 그에 비해 김월래는 이를 갈며 얼굴 근육을 꿈틀거린다. 

남자의 자존심 문제였다. 자신의 부하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한 낮 어린놈에게 꼬랑지를 내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김월래는 

뒷일 따윈 생각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칼을 힘껏 움켜쥐는 그다. 손등의 힘줄이 훤히 드러났다. 



“이‥이‥죄다 없애버려!” 



성난 고질라 한마리가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이 칼을 바로 쥐고서 앞과 옆으로 달려 나왔다. 

끝내 심각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형님, 여긴 저희들에게 맡기고 얼른 피하십시오.” 


“이런 조무래기들은 저희 둘이서 충분해요.” 



민규와 태기가 싸울 자세를 취하며 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치사하게 나 혼자 도망갈 수는 없다. 본심? 훗, 그야 내 본심은‥. 



“미쳤냐? 간만의 짜릿한 싸움인데 너희한테 양보할 수만은 없지!”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놈의 부하들. 우리 셋은 놈들이 휘두르는 칼을 상황에 맞게 피하며 각자 한 사람씩 맡아 손목을 발끝으로 

찔러내었다. 휘익-. 그에 바닥에 내리꽂히는 칼 세 자루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변태 녀석은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만 있었다. 

당황해 할만도 한데, 겁먹지 않는 저 침착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설마 저 녀석 우리를 믿는‥아니 방패삼고 있는 거 아니야? 

타앙!! 그때, 모든 이의 동작을 멈추게 만드는 소리가 울렸다. 풀장의 수면이 소리의 충격에 일렁인다. 난 총소리가 났던 곳을 바라보았다. 

공중의자에 앉아있던 진형우가 일어선 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뻗은 오른손에는 어둠속에서 간신히 모습을 드러낸 

검은 권총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풀장 내 최상의 무기라 여겨졌던 칼을 든 남자들이 총을 보자 뒷걸음질을 쳤다. 



“윽, 진형우 비겁하게 총을 쓸 셈이냐?” 



김월래, 내가 보기엔 그 쪽이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라고 보는데? 김월래는 겁먹은 듯 했지만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척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었다. 그를 보며 진형우가 피식 웃어 보인다. 비웃음이었다. 



“누가 진짜 비겁한 건지 모르겠네. 하지만 걱정하지는 마. 난 비겁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휘익-. 퐁당! 물속으로 총을 던져버렸다. 

저 자식, 우리한테 다 떠맡길 셈인가? 뭐, 처음부터 우리 일이었기는 하지만. 쳇! 그래도 좀 도와주면 덧나나? 

그렇지만 나의 이런 생각은 더 이상 할 이유가 없어졌다. 



“쓰래빠의 보스, 연개소리님. 싸움은 분명 안 된다는 걸 아시죠?” 


“그럼 우리보고 그냥 두 손, 두 발 놓고 죽으라는 소리야?!” 



나대신 태기가 소리쳤다. 총소리 때문인지 태기가 많이 민감해진 상태인 것 같다. 진형우의 표정은 여전히 밝았다. 



“두 손, 두 발 다 놓으시라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죽으시라는 말은 아닙니다. 먼저 싸움을 걸어온 곳은 아무래도 쪽파인 것 같은데, 

괜한 싸움에 휘말리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규칙을 어겨 강호파에게 찍히지는 마시라는 겁니다. 저 놈들은 저한테 맡기세요. 

저런 인간들 쯤이야, 저 혼자서도 충분하니까요.” 


“뭐, 뭐야? 저 자식이 감히 우리를 만만하게 봤겠다!” 



진형우의 무시하는 발언에 김월래의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모양이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저 녀석, 꽤나 자신 있는 가 본데 그럼 어디 지켜보기나 할까? 



“좋아. 끝까지 규칙을 지키도록 하지. 하지만 너 혼자서 되겠어?” 


“충분해.” 



진형우가 아닌, 변태 녀석이었다. 조금 전부터 진형우를 잘 안다는 말투다. 역시 변태 녀석이 강호파가 분명하다고 여겨졌다. 



“연개소리님, 괜한 걱정은 건강에 해롭습니다.” 



타악! 3m되는 높이의 의자에서 사뿐히 뛰어내리는 진형우다. 착지 또한 안정된 자세였다. 드디어 땅에 발을 붙인 그를 보자 

약속이나 했다는 듯이 김월래의 부하들이 총 공격을 퍼붓기 위해 진형우에게 달려 나갔다. 여러 개의 날카로운 칼끝이 

그를 향해 돌진하고 우리 세 사람, 아니 변태 녀석까지 네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아졌다. 

휘욱-. 바람소리를 내며 맨 먼저 진형우에게 달려든 칼 하나가 녀석의 왼쪽 가슴을 노렸다. 한 방에 보낼 생각인가 보다. 



“위험해.” 


“저 놈이 걱정은 몸에 해롭댔잖아.”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변태 녀석이 일어서며 받아쳤다. 타앗. 아슬아슬하게 칼의 양면을 두 손바닥 끝으로 잡아내었다. 

오른쪽에서 달려드는 또 다른 한 놈이 가까워졌다. 진형우는 잡고 있던 칼의 주인의 낭심을 오른쪽 무릎으로 찍어버렸다. 

그에 남자는 손에서 칼을 놓고는 두 손을 고환이 있는 한 곳에 모아 잡으며 쓰러졌다. 그래도 급소를 살짝 비켜 친 모양이다. 

낭심은 잘못 맞게 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피하는 것이 좋다. 어쨌든 오른쪽에서 공격해오던 녀석의 칼이 

진형우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진형우가 머리를 숙여 재빨리 피했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놈이 다음 공격을 시도해오기 

전에 주먹으로 복부를 쳤다. 정확히 말해 신관이라는 급소를 말이다. 남자는 그 자리에서 복부를 움켜쥐고 침을 토해냈다. 

또 다른 녀석이 진형우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바보 같은 짓이다. 진형우는 자신의 멱살을 잡기위해 빠르게 날아오는 손을 막아내며 

손목을 낚아챘다. 손목을 비튼 뒤 나머지 손으로 날아오는 칼을 저지했다. 그런 다음 자유로운 다리로 녀석의 명치를 찼다. 

다리의 각도와 높이를 잘 조절하며 좁은 간격에서 힘든 기술을 구사해내었다. 



“형님‥.” 



나와 마찬가지로 진형우를 지켜보던 민규가 나를 불렀다. 이유는 나도 알고 있다. 



“그래. 정확히 급소만을 공격하고 있어. 맞은 녀석들이 당분간 일어서지 못하게 급소를 노리다니. 

혼자서 다수를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그래도 저런 상황에서 급소만을 친다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들 텐데‥. 

사아칸의 오른팔이 그냥 된 게 아니었어.” 



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김월래의 부하들은 무기를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형우의 털끝조차도 자력으로 건들지 못했다. 

정확히 1분 30초. 20명을 무릎 꿇게 만드는데 1분 3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단하다. 정말 대단해. 난 마음속으로 감탄 또 감탄하였다. 

찰캉. 바닥에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린 김월래였다. 놈은 쓰러진 자신의 부하들을 보자 전투 심을 잃었는지 뒤로 물러났다. 

상당히 당황한 듯한 놀란 찌글이(개소리네 퍼그.) 눈이다. 



“쓸모없는 네 부하들이나 데리고 얼른 꺼져. 오늘 밤 강호파에 대항하던 너의 시건방진 태도는 잊어주겠어. 

하지만 네 면상이 한번 더 내 눈에 띠었을 시 그땐 오늘밤 일이 기억날지도 모르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하하하!” 



역시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어대는 진형우. 무서운 녀석이다. 진형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호텔 안으로 

도망가는 김월래였다. 끝까지 비겁한 모습이다. 자신의 부하들을 버리고 혼자 내빼다니‥. 놈은 부하들에게 보스로써의 신뢰를 

스스로 버리고 만 것이다. 자신의 부하들이 진형우에게 죽임을 당한 것도 아닌데 왜 저토록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건 역시 진형우가 강호파이기 때문일까? 



“죽을까봐 상당히 쫀 모양이군. 쫄기만 하는 쪼다새끼. 킥킥.” 


“뭐? 죽다니?” 



또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변태 녀석의 말에 난 의문을 표시했다. 

분명 진형우는 누구 하나 죽이지 않고 깨끗한 공격만 했는데, 실력에 쫄았다는 건가? 



“어라? 넌 못 봤나봐? 둔하기는‥하하.”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까지 나를 비웃어대는 변태 녀석이었다. 윽, 자존심 상해. 도대체 이 내가 뭘 보지 못했다는 거야? 

내가 놈을 째려보고 있자 민규가 변태 녀석대신 말해주었다. 



“싸울 때의 진형우는 어렴풋하지만 살기를 띠고 있었습니다. 확실히 급소만을 노리며 한방에 끝내는 깔끔한 공격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급소를 치기 전 그의 눈은 다른 급소인 사혈만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사혈(머리 중앙부터 일직선으로 낭심까지 내려오는 혈에 집중되어 있는 급소. 이 곳을 강타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럼 죽일 생각이었다는 건가? 난 민규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았다. 



“사혈을 노리고 주먹이나 다리로 공격을 하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재빨리 주변에 있는 다른 급소를 치거나, 

혹 사혈을 치더라도 닿는 순간 힘을 빼버렸습니다.” 


“한마디로 저 녀석의 몸은 상대를 죽이기 위해 행동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머리가 방해를 해버린다는 얘기지. 

유치하게 말하면 놈의 주변에 천사와 악마가 있다고나 할까? 저 녀석은 적을 상대할 때 항상 갈등을 해.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거야.” 



변태 녀석이 민규의 말을 거들었다. 진형우의 몸과 마음이 따로 행동한다고? 그렇다는 건 녀석의 몸이 살육에 적응, 

아니 쪄들었다는 얘긴데. 난 진형우를 보았다.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내 앞에 멈춰선 그가 다짜고짜 웃어 보인다. 



“익히 얘기는 진짜 조금 들어서 압니다. 쓰래빠의 여 보스, 연개소리님. 맞으시죠?” 



이 자식, 뭐야? (진짜) 조금 들었다고 할 바에 차라리 들었다는 얘길 하지 말던가! 은근히 사람 자존심 상하게 하네. 



“그리고 이민규, 변태기씨 맞죠? 두 분의 이야기는 정말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어요.” 


“푸하하! 내가 좀 유명하긴 하지.” 



아악! 진형우, 저 자식 맘에 안 들잖아? 그리고 또 좋다고 헤벌레하는 태기 녀석은 뭐냐고! 부하가 보스보다 유명한 게 말이나 돼? 

오늘 일은 아무래도 일기에 써서 두고두고 기억해야겠다. 



“그나저나 연개소리님이 저랑 나이가 같은데다 미모까지 빼어나다고 들어서 실제로 뵙고 싶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놈에 대한 얼어붙었던 감정이 봄철 눈 녹듯이 사르륵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야, 물론 내가 한 미모 하기는 하지. 

하하, 소문이 제대로 났구만. 하지만 진형우의 뒷말은 풀장의 물조차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세상 말도 믿을 만한 것은 못되는 것 같네요.” 


“킥킥.” 



웃는 얼굴로 태연하게 잘도 말하는 진형우다. 거기다 재미있다고 웃어대는 변태 녀석까지. 강호파, 역시 마음에 안 든다. 

진형우는 내 옆에 서 있던 변태 녀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밝던 표정이 무표정으로 변했다. 



“그런데 쓰래빠도 미운 털이 박힐 것 같군요. 몇 분 전에 저희 조직원 두 명을 손봐주셨죠? 

거기다 배신자까지 감싸주다니. 아까는 뭐, 제가 몸이 근질해서 도와줬다지만 이래서야 도와준 보람이 없지 않습니까?” 



뭐라고? 그럼 이 변태 녀석을 때리던 남자들이 강호파였단 말이야? 그리고 같은 강호파인 이 녀석이 맞은 것은 배신을 했기 때문이고. 

맙소사! 괜한 일에 휘말렸잖아.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모르는 판국에 변태 녀석이 내뱉은 말을 정말 가관이었다. 



“난 지금 이 순간부터 쓰래빠야!” 



장난인지 농담인지 거짓인지(어차피 다 같은 말.) 녀석이 큰소리로 외쳤다. 말도 안돼. 다른 조직의 배신자를 우리가 왜! 

난 받아줄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고! 



“이우혁, 조직에 대한 확실한 배신은 곧 개죽음이라는 걸 알 텐데.” 


“그 정도 상식쯤이야, 당연히 알고 있지!” 



오히려 큰소리치는 변태다. 이 녀석 이름이 우혁인가 본데? 이제야 특이한 이 녀석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알면서 네 마음대로 조직을 옮기겠다는 거냐? 반드시 죽을 텐데도?” 


“괜찮아! 우리 형님이 날 지켜 줄 거야!” 



내 어깨에 팔을 척 두르며 당당하게 말하는 변태, 이우혁이다. 이 놈이 진짜 미쳤나? 

난 어깨를 틀어 녀석의 팔을 떨쳐 내었다. 진형우가 표정 없는 얼굴로 이우혁을 본다. 



“그럼 배신자를 받아준 조직도 개죽음이라는 걸 잘 알고 있겠지?” 


“그것도 상식이지!” 



이 자식, 뭘 믿고 큰소리치는 거야? 아님, 진짜 장난치는 건가? 그럼 상관은 없지만. 



“너 같은 박쥐 한 마리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냐?” 



진형우는 그야말로 진지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은 변태, 아니 이우혁도 진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띠며 말을 했지만 장난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우혁이 말했다. 



“걱정 마. 내가 지켜줄 테니까.” 



이 한마디에 이상하게도 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았다. 마치 변태 녀석에게 들어오라는 듯이 문 자체가 사라져버렸다. 

이우혁의 대답을 들은 진형우는 잠시 가만히 있는 듯 하더니 서서히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처음의 그 밝은 얼굴이다. 



“쿡, 재밌겠는 걸? 나, 벌써부터 몸이 근질거려. 너랑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큭큭.” 


“으-변태.” 



이우혁, 지금 누구더러 변태라는 건지. 그건 그렇고 진형우, 저 녀석 즐기고 있는 얼굴이잖아? 

정말 이우혁과 싸울 날만 기다리는 그런 얼굴이다. 그 정도로 두 사람 사이가 안 좋은가? 아님, 이우혁이 자신과 호각을 다투는 

실력이라든지. 만약, 후자가 맞다면‥흐음. 우리 조직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어차피 강호는 우리의 적이었으니까. 

좋아. 까짓것 인심 써서 받아주지, 뭐. 아, 진짜 난 너무 마음이 좋아서 탈이다. 



“네가 배신했다는 얘긴 보스한테 곧장 전해줄게.” 


“고마워!” 


“그럼 연개소리님, 부디 조심하세요. 저 녀석은 언제 어디로 날아갈지 모르는 박쥐니까요.” 



진형우는 뒤돌아 호텔 로비로 통하는 문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뒷모습에 자신감이 넘쳐난다. 그 누구라도 뒤에서 쉽게 

공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풍당당했다. 아차! 궁금한 게 있었는데. 난 늦을 새라 진형우를 불렀다. 



“잠깐만! 너, 신이 알고 있어? S고에 다녔던 새신 말이야. 정말 친구였니?” 



우뚝. 내 우렁찬 물음에 마치 풀장 안의 시간이 멈춘 듯 진형우가 제자리에 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그였다. 

두 눈을 깜빡거리면 곧 멈추었던 시간도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꿀꺽. 과연 둘은 어떤 사이였을까? 만약, 정말 친구가 맞다면 

지금은 왜 연락을 하지 않는 거지? 드라마처럼 깊은 사연이 있을 지도 몰라. 난 기대를 하고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신이‥? 네가 어떻게 알아?” 



갑자기 말을 놓는 진형우다. 아깐 그렇게 예의를 갖추더니만. 어떻게 저렇게 돌변할 수가 있을까? 윽, 저게 본심이겠지? 



“친구니까! 아니 우리 조직원이니까!” 



난 자랑스럽게 말해주었다. 사아칸의 오른팔인 진형우의 친구가 내 부하다.(이것이 개소리의 본심?) 

모두들 깜짝 놀랄 거야. 우후후. 



“정말? 신이가 쓰래빠? 우와! 놀랍다. 여기 왔어?” 



정말 놀라워하면서도 반가워하는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표출되었다. 



“응. 지금 연회장에 있을 거야.” 


“우와! 우와! 이게 무슨 우연이야? 아차, 너 뻥이면 죽었어!” 



내 말을 듣자마자 로비로 달려가는 진형우다. 그러다가 뒤돌아 나에게 주먹을 들어 보이며 ‘뻥이면 죽었어!’라니‥. 

난 그 자리에 벙져 녀석이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저렇게 반가워 할 거면서 왜 진작에 찾지 않았던 것일까? 

친구였다면 연락처 정도는 알 텐데‥. 지금은 S고에 안다니나? 



“좋아죽겠다는 얼굴이네.” 



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자 혼잣말에 대꾸를 하는 이우혁이다. 풀장 안의 락스 냄새가 진동을 한다. 



“저 녀석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친구야. 중에서도 새신이라는 녀석을 가장 아끼지. 뭐, 나도 형우한테 들은 얘기지만.” 


“그럼 넌 그 녀석이랑 친구가 아니라는 소리야?” 


“당근 친구지! 형님은 척보면 모르겠어? 난 살짝 봤는데도 금방 알아챘는데.” 



갑자기 펄쩍 뛰는 녀석이다. 그런데 이 녀석, 정말 우리 조직에 들어올 생각인가? 



“뭘 알아챘다는 거야?” 


“분홍색에 짱구그림.” 



분홍색, 짱구그림? 순간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이 자식이. 



“그게 뭔지 가르쳐 줄까?” 


“아악! 됐어! 안 가르쳐줘도 돼!” 



이우혁, 역시나 내 팬티를 본거야. 정말 쪽팔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자식, 나한테 넌 영원히 변태로 기억될 거야! 



“하하하!” 



풀장 내에 녀석의 목소리가 수면에 반사되어 하늘을 울렸다. 후, 정말 이런 녀석을 조직에 받아줘도 되는 것일까? 

어쨌든 확실한 것은 버릴 수 없는 골치 덩어리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이다. 이우혁, 네 밥값은 톡톡히 해야 할 거야. 

덕분에 쓰래빠는 강호에게 단단히 찍혔을 테니까. 





♡48 





“으아-, 형님 난 그만 가봐야겠다.” 

“어딜? 같이 연회장으로 가자. 애들 소개 시켜줄게.” 



기지개를 펴며 입을 동그랗게 벌려 하품을 하는 이우혁이다. 뒤로 넘어갈 듯 허리를 죽 편 체 기지개를 하는 것이 위태위태하다. 

젖은 머리를 털며 이우혁이 말했다. 



“미쳤어? 연회장으로 가라는 소린 나보고 공들고 우리 팀 골대로 들어가라는 것과 같아. 

거기 가면 강호가 득실거릴 텐데, 난 벌써 죽기는 싫다고.”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녀석도 자기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 왜 굳이 일부러 그 수위를 넘어서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왜 하필 우리 조직으로 들어오려는 걸까? 흐음, 어차피 이젠 한 배를 타게 됐으니 천천히 물어보면 되겠지만‥ 

그래도 역시 궁금한 건 참기가 힘들다. 



“너 왜 내 밑으로 들어오려는 거야? 너 정도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뭐?” 


“갑자기 형님한테 흥미가 생겼거든. 얼마나 센지 보고 싶어.” 



두 손을 뒤통수에 맞대어 깍지를 끼고서 나에게 웃는 얼굴로 대답을 해주었다. 단지, 그것 뿐‥? 

역시 진담과 농담을 구분할 수가 없는 녀석이다. 진형우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전부 이상하기만 하다. 

혹시 강호에는 이런 사람들 밖에 없는 건 아닐까? 



“후우, 정말 알 수 없는 녀석이군. 그나저나 어디로 갈 건데?” 


“으음‥울산. 가져올 게 있거든.” 


“울산?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집이 거기에 있어. 서울에서 이사간지 한 1년 즈음 됐을려나.” 



이우혁은 자신의 웃옷을 살짝 잡아당기며 울상을 짓고서 보았다. 젖은 옷이 상당히 찝찝한 듯 하다. 

그의 웃옷과 아랫도리(바지)에서는 지금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일단 방에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야겠어. 형님, 그럼 나중에 봐.” 


“너, 우리 집은 알고 있어? 내 연락처라도 받아가.” 


“훗, 형님은 날 뭘로 보고. 그런 것쯤이야 알아내려면 쉽게 알아낼 수 있어. 

형님은 그런 걱정 말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나 해. 그럼 재밌게 놀다 가.” 



이우혁은 우리 세 명에게 가볍게 손을 흔든 후 로비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앞모습만큼이나 가벼워 보였다. 

정말 저 아이의 속을 모르겠다. 우리 조직에 들어온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강호파에게 무슨 배신을 한 것일까? 

하지만 배신을 할 만큼 나쁜 녀석으로는 보이지가 않는데, 무슨 사정이 있는 거겠지? 



“형님, 정말 저 아이를 받아주실 생각이십니까?” 



풀장에서 나가버린 이우혁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민규가 궁금증을 토로했다. 

하긴, 다른 조직의 배신자를 믿을 수가 없는 거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네? 그럼 역시 받아주실 생각이 없는.” 


“이민규. 난 이미 이우혁을 우리 쓰래빠라고 생각하고 있어. 우리 한번 믿어보자.” 



난 고개를 돌려 민규에게 활짝 웃어보였다. 그에 옅은 한숨을 내쉬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민규다. 



“형님! 음식 바닥나기 전에 어서 가시죠? 뱃가죽이 내장에 달라붙을 것 같아요.” 



변태기, 비유를 해도 진짜. 킥, 그러고 보니 나도 못 먹었잖아? 난 ‘좋아’라고 대답한 뒤 두 사람과 함께 나란히 걸어갔다. 

여전히 밤하늘의 달은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나저나 신이는 친구를 만났을까? 기뻐하면 좋을 텐데. 




(그 시간, 연회장.) 



파릿, 파릿, 파지직?. 

연회장 한 곳에서 찌릿한 전기가 어느 한 테이블로 연속 공격을 하고 있다. 하지만 테이블에 앉아있는 타깃은 번개공격을 맞고도 

꼼짝달싹하지 않고 있다. 벌써 10분 째다. 희웅은 이를 빠득빠득 갈며 10m즈음 떨어져 있는 김빈곤을 노려보고 있다. 

용서할레야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죽여도 한 번 더 죽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누나의 원수. 자신에게 증오가 뭔지 똑똑히 알게 해준 

장본인인 배고파의 김빈곤. 그는 지금 다른 조직의 보스와 함께 허연 이를 드러내며 떠들어대고 있다. 자신이 죽였던 가엾은 

영혼에 대한 기억과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 체 말이다. 툭. 



“야, 그러다 눈알 빠지겠다. 네가 그런다고 저 새끼 몸뚱아리에 빵꾸라도 나겠냐?” 


“그래, 이제 고마 해라. 나중에 이 히야가 대신 복수해줄게.” 



비뚤게 앉아 희웅을 보고 있던 신이가 의자에 얹어놓았던 왼쪽 다리로 희웅의 엉덩이를 차면서 말했다. 

그런 신이를 희웅이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돌아보았고 이어 호두가 구수한 사투리로 신이의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희웅의 표정은 여전히 고집스러운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웃기지 마세요. 누가 복수를 해준다는 겁니까? 제 할일은 제가 직접 합니다. 그러니 저 자식한텐 눈독 들이지 마세요.” 



호두는 자신보다 한 살 어린 희웅의 당찬 말투에 할말을 잃어 눈만 동그랗게 뜰뿐이었다. 도와주려다가 혼만 나버린 꼴이다. 

신이는 두 사람을 보며 뜻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주변을 둘러보는 신이다. 양팔(민규와 태기)과 함께 나갔던 개소리가 

늦어지는 것 같아서였다. 분명 누가 불러내어 나간 것 같은데 그게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팔 부하에게도 물어보았지만 

아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신이는 입구를 멍하니 쳐다보다 고개를 살짝 저으며 의자에 얹은 다리에 

팔꿈치를 붙이고서 손등에 머리를 기대었다. 



“너 부르는데?” 



투명 유리컵에 든 콜라를 마시며 유인이 손가락으로 왼쪽을 가리켰다. 유인과 마주 보고 앉아있던 신이에게는 오른쪽 옆이었다. 

딴 생각에 잠겨있던 신이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기에 유인의 말을 미심쩍어했다. 하지만 밑져야 본전, 돌아보기로 했다. 



“으왓! 진짜 신이잖아?!” 



고개를 돌린 곳에는 또래정도로 보이는 남자 한명이 서 있었다. 신이도 놀랐는지 의자 위에 불량스럽게 걸쳤던 다리를 힘없이 

바닥으로 놓아버린다. 유인과 호두는 묘한 분위기에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입이 튀어나와있던 희웅 또한 잠시 입을 집어넣고서 상황에 집중했다. 



“진‥형우?” 



신이의 입에서 간신히 튀어나온 말은 유인, 호두, 희웅에게 낯익은 이름이었다. 진형우. 그렇다면 저 남자가 강호, 사아칸의 오른팔인 

그 진형우? 유인 역시 실제로 진형우의 얼굴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신선한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진형우가 테이블로 달려왔다. 

그 순간 두 사람(호두와 희웅)은 생각했다. 



‘공격인가?!’ 

‘공격이다!’ 



타앗. 동시에 잽싸게 의자에서 일어나 받아칠 준비를 했다. 그때 한 사람(유인)도 생각했다. 



‘목표는 콜라인가?’ 



순식간이었다. 유인이 테이블 위에 있던 콜라를 두 팔 안에 모두 사수한 것은.(삐질ㆀ) 

하지만 정작 진형우가 달려온 이유는 오직 하나! 신이었던 것이다. 



“신아!” 



신이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양팔 안에 신이를 집어넣었다. 와락. 신이를 안고서 밝게 웃는 얼굴로 볼을 비벼대는 진형우. 

그를 보고 두웅형제(호두,희웅)는 생각했다. 



‘이상한 녀석이다!’ 



그리고 할일 없이 콜라를 사수했던 유인도 마음속으로 말한다. 



‘휴, 다행이다.’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였다. 신이는 자신의 오른뺨에 왼뺨을 비벼대는 진형우의 행동에 전신의 털이 삐죽 섰다. 

이 녀석, 분명 진형우다! 신이 또한 반갑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달라붙기 좋아하는 진형우에게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신아,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 



볼 부비기를 멈추고 신이를 안은 체 얼굴을 마주하는 진형우다. 그의 두 눈에 눈물이 맺힌 건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신이는 역시 ‘오버대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1년 반만의 재회는 성공적이었지만 유인, 호두, 희웅에게는 강할 거라 

생각했던 진형우의 이미지가 각각 새롭게 새겨지게 되었다. 이를 테면, 유인에게는 ‘신이와 개소리 사이의 뛰어넘어야만 하는 장벽.’으로 

호두에게는 ‘내 사랑의 구세주.’로 희웅에게는 ‘게이 형’으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유인은 신이를 안고 있는 진형우를 째려보았고 

호두는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희웅은 인상을 찌푸리고서 멀리 떨어졌다. 



“그동안 어디에 있었냐?” 



신이가 물었다. 진형우는 씨익- 웃어 보이며 밝게 대답했다. 



“으히-. 지구!” 



신이는 황당함에 고개를 숙였다. 예전부터 신이는 항상 진형우를 돌봐주는 입장이었다. 

15살 때 가출한 진형우를 다리 밑 거지집단의 움막에서 찾아낸 것도 신이었고 학교든 집이든 비만 쏟아지면 우산 없이 

밖으로 뛰쳐나가 좋다고 뛰어다니는 진형우를 말리던 것도 신이었다. 또 동네 깡패들이나 선배들을 화나게 만들어 진형우에게 

달려올 때면 항상 뒷수습을 하던 것도 신이다. 신이는 진형우에게 있어 친구이자 형, 그리고 보호자와도 같았다. 

그런 신이를 진형우가 좋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너,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너네 보스가 가르쳐 줬지~!” 



손가락으로 신이의 뒤를 가리키는 진형우다. 모두들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어느새 연회장으로 돌아온 개소리와 

그녀의 양팔이 있었다. 진형우는 이제야 신이에게서 떨어졌다. 신이의 뒤로 걸어가는 진형우였다. 개소리의 앞에선 그가 손을 내밀었다. 

개소리는 그의 손을 내려다본 후 다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진형우다. 



“헤에-, 고마워. 신이를 데리고 와줘서.” 



그제야 진형우의 미소에 화답을 해주는 개소리다. 진형우만큼은 아니지만 그녀의 얼굴로 밝게 빛났다. 

진형우의 악수를 받아주며 개소리가 말했다. 



“고마우면 갚아.” 



히죽. 뭔가 뜻이 담겨있는 미소였다. 하지만 그것을 진형우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좋다고 헤벌레거리며 악수만 할뿐이다. 

신이와 진형우의 교우관계를 잘만 이용하면 진형우를 쓰래빠로 끌어들일 수 있다. 이것이 지금 개소리의 머릿속을 꽉 채워버린 계획이었다. 

그렇게 개소리는 무서운 여자였다. 개소리의 손을 잡고서 위아래로 흔들던 진형우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라, 보스다.” 



진형우는 개소리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자신의 두목인 사아칸의 앞에 섰다. 

사아칸에게 머리를 숙이는 진형우다. 쓰래빠는 사아칸에게로 눈을 돌렸다. 사아칸의 뒤에는 그의 부하 8명이 그를 경호하고 있었다. 



“어디로 갔나했더니 여기에 있었구나.” 


“네, 반가운 친구를 만나서요.” 



사아칸은 방금 전 진형우와 악수를 하고 있던 여자를 보았다. 쓰래빠의 전보스 연개소문의 하나뿐인 외동딸, 연개소리였다. 

이 어린 보스와 자신의 부하가 친구라고? 사아칸은 진형우의 옆을 지나 개소리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뚜렷한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살짝 목례를 하는 개소리다. 사아칸이 인사를 받으며 진형우에게 물었다. 



“형우야, 옛 친구냐?” 



아무래도 사아칸이 착각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진형우가 그것을 바로 잡아주었다. 



“형님, 연개소리님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제일 잘생긴 남자가 제 친구입니다.” 



그 말을 들은 두웅형제가 눈살을 찌푸린다. 사아칸이 개소리의 어깨너머를 보았다. 눈에 띠는 아이가 한 명 있었다. 

갈색 눈동자 안에 자신을 모두 집어넣은 한 남자아이. 그의 눈은 마치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킬만한 힘과 용기가 느껴졌다. 



“전에 말씀드린 신이라는 친구입니다. 지금은 연개소리님의 쓰래빠에 있다고 합니다.” 



뒤에서 진형우의 말이 들려왔다. 저 녀석이 새신. 한때 점쳐놓고 있던 인형이었는데 쓰래빠에서 먼저 낚아챌 줄이야. 

재빨리 손을 쓰지 않았던 자신의 게으름을 책망하는 사아칸이었다. 하지만 그 또한 개소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형우와 친한 것 같으니 녀석을 이용해 자기 조직으로 오게 만든다. 사아칸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다른 녀석들에게도 관심이 생긴 것이다. 



“아주 좋은 부하들을 두셨군요. 소문엔 모두 엄청난 실력자라던데, 그럼 이번에 열리는 ‘슈퍼 파이터 대전’에도 참가하시겠죠?” 



사아칸이 말한 ‘슈퍼 파이터 대전(Super Fights Tournament)’. 

그것은 강호파가 주관하는 1년에 한번씩 열리는 조직들 간의 격투대회였다. 출전자격은 강호파에서 인정하는 조직리스트에 

올라있는 조직들로 한정되어있다. 출전자격이 주어진 조직에서는 각각 5명까지 출전할 수가 있으며 이 곳에서 우승한 자에게는 

순금으로 된 파이터 컵과 함께 5천 만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일대일의 정정당당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 같지만 규칙에는 

자유로운 무기사용(단, 칼과 총은 금지)과 만약을 대비한 계약서(죽더라도 협회에서는 절대 책임을 물지 않는다는.)를 적게 되어있다. 

한마디로 여차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그런 대회이다. 하지만 이 곳에서 우승을 한다면 그 사람이 속해있는 조직은 전국에 이름이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그 조직에 들고 싶어 한다. 그것을 알고 있는 개소리에게 사아칸의 말은 달콤한 사탕과도 같았다. 

깜빡 잊고 있었던 대회. 개소리는 눈썹을 올리며 무섭게 웃어 보인다. 



“크큭, 그야, 당연한거 아니겠어요?” 


“하하, 올해에는 꽤 실력이 쟁쟁한 사람들만 나올 것 같군요. 저희 조직에서도 그렇고, 쓰래빠에서도 그렇고. 

아, 그리고 구제파에도 만만찮은 인물들이 있다고 하던데. 이거 모두 분발해야겠어요.” 



사아칸은 이번 대회에서 뛰어난 재량을 보인 사람들을 강호로 스카우트할 생각이었다. 그는 앞으로 2주일 뒤인 

경기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럼 2주일 뒤에 뵙도록 하죠. 기대하겠습니다. 형우야, 그만 가자.” 



사아칸이 돌아섰다. 진형우는 그의 뒤에 서며 신이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신이는 그저 보고만 있었다. 

신이가 손을 흔들어 줄때까지 계속 손을 흔드는 진형우다. 신이 대신 유인이가 손을 흔들어 준다. 단순한 재미였다. 

사아칸의 멀어져가는 등을 보며 개소리의 머릿속엔 오로지 파이터, 파이터, 파이터 생각뿐이었다. 그녀의 꿈을 이루기 위한 

작은 발판이 될 그런 대회였다. 개소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우승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손을 흔드는 진형우를 보며 

신이 또한 생각에 잠겼다. 사아칸이 말한 ‘파이터 대전’. 강호에서도 실력 있는 사람이 몇 나온다고 했으니 아마 진형우도 나올 것이 

틀림없다. 신이는 피식 웃었다. 진형우가 나온다면 자신도 나갈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그와 싸워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다. 

그리고 강한 자들과 싸움으로써 자신의 실력을 알게 되고 또 강해질 것이다. 이렇게 신이에게도 ‘파이터 대전’은 꽤나 기대되는 대회였다. 




다음날, 해는 중천에 뜨고‥. 


어젯밤 모두들 무리한 나머지 죄다 늦잠을 자고 말았다. 아! 나름대로(?) 바른생활맨인 민규만 제외하고. 

창밖으로 태양이 혈압을 높이고 우리는 거실에 모여 앉아 겉으로 보기엔 토론처럼 보이는 대화를 하고 있다. 

솔직히 이 자리는 ‘슈퍼 파이터 대전’에 대해 논의하기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난 그 이야기에 앞서 새로운 멤버인 우혁이를 소개하였다. 



“이름은 이우혁. 나이는 19살이야. 강호파에 있다가 사정이 있어 그만 두고 우리 조직에 들어온 거야. 다들 인사해.” 


“안녕-.” 

“안녕.” 

“지금 그 사진보고 인사하라는 거냐?” 



신이의 말을 끝으로 정다운 인사가 멈추었다. 내 옆에 마련되어 있는 이우혁의 사진을 보며 모두들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던 것이다. 

나는 한숨을 푸슉 내쉬며 우혁이의 얼굴을 보았다. 물론, 사진을 뜻하는 거다. 동해인지 서해인지 어쨌든 바닷가에서 찍은 것으로 

사진속의 우혁이는 남자 수영복을 아래에 입고 눈썹을 다 가리는 큰 수경을 머리에 쓰고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없었냐고? 왜 없을까. 녀석의 상반신의 여자 수영복, 분홍색 비키니를 가슴에 두르고 있었다. 



“저런 변태랑 동료라고??” 



신이가 소리쳤다. 아아-, 태기 녀석은 구해도 왜 하필 이런 사진을 구한 것일까? 뭐, 이것밖에 없다고 했으니 믿어주기로 했지만‥ 

그래도 역시 믿음이 안 간다. 



“가슴에 풍선 넣은 것 같아.” 



잠에서 덜 깬 유인이가 꺼벙한 눈으로 사진을 보았다. 



“강호에서 왜 나온 건데?” 



호두가 물었고 



“배신이라도 했겠죠.” 



희웅이가 받아주었다. 헉, 김희웅 저 눈치 빠른 자식. 배신했다고 한다면 녀석들이 허락하지 않을 게 분명한데. 

난 부하들의 표정을 살폈다. 민규와 태기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을 해뒀었지만 역시 세상에 비밀이란 없는 것일까?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큰 조직에서 왜 나온 걸까요?” 


“밥 안줘서 그런 거 아이가?” 


“변태라서 쫓겨난 거야.” 


“콜라 먹고 싶다.” 



차례대로 희웅이, 호두, 신이, 유인이었다. 그리고 네 사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팔 부하들이다. 

금세 배신이라는 화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역시 상식을 뛰어넘는 바보스러운 녀석들이다. 게다가 유인이는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희웅이가 또 다른 의문을 내던졌다. 



“흠, 그럼 많고 많은 조직 중에 왜 우리 조직으로 오려는 거죠?” 


“(보스가)예뻐서 그런 거겠지. 신아, 니 어떡할 건데?” 


“(진짜면)죽인다.” 


“‥‥.” 



이번 역시 호두와 신이가 차례대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유인이는? 아차, 맨 마지막 줄임표가 유인이 녀석이다. 

나 참, 이 와중에도 졸고 있다. 그런데 신이 녀석 죽인다니‥ 설마 우혁이랑도 싸우려는 건 아니겠지? 

휴-. 만약에 그렇다고 해도 이번에는 말리지 않아야겠다. 괜히 열 내서 말렸다가 또 집을 나갈지도 모르니까. 

그나저나 우혁이 녀석은 왜 연락이 없는 거야? 연락처 정도는 쉽게 알아낼 수 있다고 했으면서. 다 허풍이었던 게 분명해. 

후우,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난 소개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본론에 들어가기로 했다. 



“우혁인 나중에 올 거야. 다음은 너희들도 알겠지만 2주 뒤에 열리는 ‘슈퍼 파이터 대전’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해.” 



난 왼쪽에 서 있던 태기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자 한 걸음 앞으로 나가 대회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진지해지는 녀석들이다. 



“지금부터 ‘[강호배]슈퍼 파이터 대전(Super Fights Tournament)’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겠다. 질문은 설명이 끝난 뒤에 해라. 

강호파에서 주관하는 파이터 대전은 올해로 5회째다.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은 조폭들의 대회인 만큼 한 조직에 속해있는 

사람만이 출전할 수가 있다. 물론, 조폭이라고 다 출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슈퍼 파이터 대전’은 강호에서 개최하는 만큼 

강호의 조직리스트에 올라있는 이름 난 조직만이 참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참고로 그 리스트에 우리 쓰래빠도 있다. 

한 조직당 참가 할 수 있는 인원은 5명이 한계이다. 하지만 5명 모두를 출전시키는 조직은 극히 드물다. 경기는 토너먼트 식으로 진행되고 

우승자에게는 파이터 컵과 상금이 주어진다. 일단은 여기까지 질문 있는 사람은 해라.” 



태기의 설명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호두가 질문을 했다. 녀석들 꽤 관심이 있었나 보다. 



“경기 중에 죽는 사람도 있다면서?” 


“그래. 경기에 시작하기 전 죽어도 괜찮다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된다. 경기는 일대일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만 

무기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상대를 죽일 수도 반대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어. 하지만 칼과 총은 절대 사용할 수가 없으니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렇지만 자기 주제도 모르고 함부로 나가서는 안돼는 대회야.” 



겁이 날만도 한데 모두들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이해했다는 얼굴이다. 다음은 희웅이가 물었다. 



“조직의 보스들도 출전할 수 있나요?” 


“아니. 보스들은 자격이 없어. 뿐만 아니라 대회에서 3위까지의 성적을 가진 사람들도 출전할 수가 없지. 

아차, 준우승자와 준준우승자에게도 트로피랑 상금은 줘.” 


“민규형이랑 태기형도 나갈 거야?” 



유인이가 눈을 비비며 말했다. 민규와 태기. 이들은 출전할 수가 없어 참 아쉬운 일이다. 이 두 사람이 나간다면 우승은 

거의 따 놓은 당상인데 말이다. 



“우린 자격이 없어.” 


“왜요? 혹시‥.” 



희웅이가 알아챈 모양이다. 



“맞아. 나와 민규는 3회째 대회의 우승자와 준우승자야. 솔직히 내가 배만 안 고팠으면 이긴 경기나 마찬가지였는데, 쳇!” 



다시 아픈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나는 그때의 경기를 보지는 못했지만 팔 부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꽤나 멋진 경기였던 것 같다. 

둘은 호각을 다투는 실력이니까 쉽게 승부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 1,2,4회째의 우승자는 누구지?” 



신이가 심각한 얼굴로 태기에게 물었다. 1회의 우승자‥. 



“1회는 전대 보스이신 연개소문님이야.” 



맞아. 우리 아버지셨지. 그때 무척이나 기뻐하셨는데‥. 



“보스는 자격이 없다며?” 


“1회는 4년 전에 열렸어. 그때 연개소문님은 쥐포파라는 조직에 계셨어. 하지만 1년 뒤 쥐포파의 보스가 조직을 버리고 만 거야. 

그 후 연개소문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지금의 쓰래빠를 만드셨어. 정말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지.” 



태기의 눈망울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옆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는 태기다. 녀석, 또 우는 건가? 

우는 가 싶었던 태기가 다시 정면을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2회 우승자는 3년 전 강호파 사아칸의 오른팔이었던 윤진덕이라는 사람이야. 당시 나이는 31세. 

파이터 컵을 차지하자마자 죽어버렸지. 경기 중 피를 많이 흘렸는데 오직 정신력으로 끝까지 버텼던 거야. 

3회 우승자는 아까도 말했듯이 민규야. 물론 간발의 차이로 나를 쓰러뜨렸지만.(강조) 그리고 4회 우승자 즉, 

작년 우승자는 구제파의 소이켠이야. 정말 대단했지. 상대들도 만만치 않은 실력이었는데 모두 단 시간에 쓰러뜨린 거야. 

그 후로 그를 따르는 자들이 늘어났고 그래서인지 구제파의 보스가 죽고 사람들이 그를 보스로 내세운 건지도 몰라.” 


“그리고 5회 우승자는 반드시 우리 쓰래빠에서 나와야만 해.” 



난 태기에게서 바통을 이어받아 곧장 말하였다. 나의 본심과 진심을 그들에게 말해준 것이다. 내 말에 아이들은 아무런 반응 없이 

나를 응시했지만 그것도 잠시 곧 저마다 자신에 찬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대표로 신이가 말했다. 



“걱정 마. 3위까지 우리가 죄다 쓸어버릴 테니까!” 


“당그이 1등은 내고.” 


“그럼 난 2등.” 


“으음, 그렇다면 저는 3등을 할게요.” 



난 아이들이 날 생각하는 마음과 조직을 위하는 마음에 감동을 받아 코끝이 찡해졌다. 녀석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일부러‥.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 이하 신이, 호두, 유인, 희웅의 속마음.) 



‘형우랑 싸울 수 있어. 녀석, 많이 세졌겠지? 내가 이기면 쓰래빠로 끌고 오는 거야. 크크큭.’ 


오로지 진형우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가 궁금한 신이었음. 하지만 마지막 말은 개소리가 들었다면 보약까지 지어주면서 응원을 할 듯. 



‘후후, 링 위에선 얄미운 신이 녀석을 마음껏 때릴 수가 있어.’ 


호두는 신이와 붙기만을 간절히 빌 뿐이었다. 



‘5천만원에다 우승컵을 팔면 돈이 꽤 되겠지?’ 


그 뒤로 유인이는 방에 틀어박혀 돈 쓸 궁리만 한다는‥. 



‘반드시 승리해서 김빈곤의 콧대를 꺾어주는 거야. 배고파 녀석들도 분명 나올 테니까.’ 


착한 희웅이는 눈에 번개를(불꽃에서 한층 업그레이드 된.) 튀기며 이를 빠득 갈고 있었다. 

한편, 팔 부하는 자신들의 존재가 소외됨에 슬퍼하고 있었다고‥. 








♡49 





“흐앗!” 



타악! 파악! 쿵! 

그날 밤. 정원에선 남자들의 기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해가 진 저녁이 훈련하기에 아주 훌륭한 조건이므로 

6시부터 본격적으로 훈련에 들어간 것이다. 파이터 대전의 날짜가 잡히고 출전자가 확정된 지금 민규와 태기가 가르치고 있는 

훈련의 강도가 평소보다 5배는 높아졌다. 두 사람이 맡은 제자도 조금은 바뀌었다. 처음에 신이와 유인이를 맡았던 민규는 

유인이를 희웅이와 바꾸었다. 그러니까 민규는 신이와 희웅이를 맡았고 태기는 유인이와 호두를 맡은 셈이다. 아이들이 하고 있는 

운동을 보니 첫날인 오늘은 체력단련을 주된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윗몸일으키기며 역도에 아령 들기, 줄넘기와 팔굽혀펴기‥. 

벌써 5시간째다. 난 현관계단에 걸터앉아 내 무릎 위에 엎드려 있는 찌글이를 쓰다듬으며 훈련에 열중인 아이들을 보고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그들을 보니 왠지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아직 첫날이라 훈련의 강도가 극히 심하지는 않겠지만 내일부터는 장난이 

아닐 것이다. 만약, 민규와 태기의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해버린다면 경기에서 상대를 한 대도 때릴 수가 없게 된다. 

그만큼 그 곳엔 쟁쟁한 실력자들만이 출전하기 때문이다. 흠, 어쨌든 우리 조직에선 4명이나 나가는 건가? 그것도 전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녀석들이라니 뜻밖이었다. 민규와 태기가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했을 때가 19살. 그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만약, 올해에도 십대가 우승을 한다면 여러 조직에서 그 사람을 스카우트하기위해 접근해 올 것이다. 강호파가 대표적인 예이지만. 

민규와 태기가 우승을 했을 때에도 강호파가 가장 적극적으로 손을 뻗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충성심이 누구보다 

깊었던 두 사람은 냉정하게 유혹을 뿌리쳤다. 저 아이들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하긴, 선택은 자신이 하는 거니까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지. 오늘 훈련은 시작된 지 6시간 만에 끝이 났다. 저마다 피곤한 몸으로 자신의 방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 1시. 

잠이 오지 않았던 나는 물이나 마실 겸해서 방에서 나왔다. 주방으로 가기위해서는 거실을 지나야 한다. 

거실은 불이 꺼져 있었지만 tv의 조명 때문에 전체적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사람, 신이었다. 

tv에서는 두 남자가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tv에 헤드셋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리로 인해 시끄러울 일은 없었다. 

신이는 헤드셋을 끼고서 영화에 푹 빠져 내가 다가가도 알아채지 못했다. 난 왠지 재미있어 신이의 뒤통수를 보며 피식피식 웃고 서 있었다. 

슬그머니 신이의 귀를 막고 있는 헤드셋을 빼내었다. 그러자 놀란 듯 뒤를 홱 돌아보는 신이다. 



“한밤중에 뭐하냐?” 


“보면 모르냐? 훈령중이시다.” 



엥? 훈련이라고? 내가 보기엔 그냥 영화 감상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가 않는데? 난 헤드셋을 들고 있기 모해 목에 걸쳤다. 



“넌 내가 바본 줄 아니?” 


“싸우는 걸 눈여겨보는 거야. 그러니까 훈련이지.” 



하여간 신이 녀석도 못 말린다니까. 난 팔짱을 끼고서 tv를 응시했다. 



“너 바보구나?” 


“뭐야?” 


“물론, 남의 싸움을 눈여겨보는 것도 좋지만 보는 걸로는 훈련이 안돼. 훈련이란 건 체력이든 뭐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중 

하나인데 영화처럼 다른 사람이 싸우는 건 아무리 봐봤자 자기 것으로 만들기는 힘들어. 너처럼 무술영화를 보는 것이 훈련이 된다면 

매일 영화만 보는 사람들은 싸움은 물론이거니와 총도 제대로 다룰 줄 안다는 말이 되는 거잖아? 뭐든지 보는 것보다는 작은 거라도 

몸으로 직접 해보는 것이 훨씬 도움이 돼.” 



난 정말 훌륭한 스승인 것 같다. 가슴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온몸에 자신감이 생긴다. 신이는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몸을 돌려 나와 마주보고 섰다. 표정 없는 얼굴. 윽, 아는 척해서 삐진 건가? 

스윽. 신이가 두 팔을 뻗었다. 소파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 둘.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신이의 팔이 내 어깨 위에 얹혀지고 녀석의 얼굴이 나와 가까워졌다. 쿵쾅쿵쾅. 가슴이 뛰고 자꾸 침이 고인다. 

하지만 입술은 타들어가는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는 신이다. 서로의 입술이 가까워지고 있다. 어쩌지? 어쩌면 좋아. 

그냥 가만히 있어야 돼나? 고개를 돌려버릴까? 아님 도망쳐? 갑자기 다리까지 후들거린다. 난 눈을 꼬옥 감았다. 

피하면 될 텐데 왜 싫지가 않은 걸까? 뭔가가 뺨에 닿은 것 같다. 신이의 뺨과 내 뺨이다. 내 목에 걸려있던 헤드셋이 서서히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헤드셋이 끝내 내 목에서 나가버리고 신이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잠 오면 들어가서 자.” 



어라? 난 눈을 떴다. 헤드셋을 테이블 위에 얹어놓는다. 지금 뭐야? 나‥나 혼자 착각한건가? 으-. 맙소사. 

신이가 소파에 다시 앉았다. 리모컨을 들고서 tv를 꺼버린다. 거실은 컴컴해졌다. 



“방금 네가 해준 말, 생각해보니까 다 아는 얘기야.” 



역시 자존심이 상했나보네. 녀석도 참. 난 별다른 대꾸 없이 방으로 향했다. 컴컴해서 주방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불을 켜기엔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내 뒷모습을 향해 신이가 말했다. 



“반드시 우승해보일게.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두-근! 

심장이 멎는 줄로만 알았다. 


결국 난 왠지 모를 묘한 감정에 휩싸인 내 자신을 진정시키느라 잠이 들지 못했다. 우승해 보인다는 신이의 말. 

난 그 말속에 내포되어있는 신이의 굳은 신념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신념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그러니까 정말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신아, 기대할게. 네 신념을, 그리고 너 자체를 나는 믿으니까. 내가 곁에서 응원해주겠어.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그 일주일이라는 기간동안 아이들은 치기법과 정권지르기, 기본 유술기, 와술, 발차기 등을 꾸준히 배웠다. 

물론, 단기간에 완벽히 마스터하기란 여간 힘이 든 게 아니지만 네 사람 모두 스승이 놀랄 만큼 자기 기술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해가 진 저녁. 우리는 체육관에서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찰캉. 분명 집에는 아무도 없을 텐데 열려있는 대문이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도둑정도야 새끼고양이 다루는 정도여서 

그리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배고파. 뱃가죽이 내장에 달라붙으려고 그래.”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유인이가 말했다. 태기한테 운동을 배우더니만 요상한 말까지 배울 줄이야. 

우리가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정원에서 뛰어놀던 찌글이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정확히 태기의 발 앞에서 멈춘다. 

찌글이도 제 주인은 알아보는 모양이다. 배가 고프다던 유인이가 제일 먼저 집안으로 들어간다. 오늘 저녁은 뭘 먹지? 

이런 고민으로 유인이의 뒤를 이어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신발도 벗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유인이가 아닌가. 



“뭐해? 안 들어가고.” 



내가 의아하게 묻자 유인이가 나를 돌아보며 이유를 말해주었다. 



“도둑이 자고 있는데?”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난 유인이를 실없는 사람 취급하듯 보며 그의 어깨너머를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거실 바닥을 자기 집 방바닥마냥 대자로 뻗어 자고 있는 남자가 아닌가. 그 경우 없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혁이었다. 

우리가 온 줄도 모르고 쿨쿨 팔자 좋게 수면을 취하고 있는 녀석. 뒤늦게 들어온 사람들이 우혁이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묻는다. 



“저 녀석은 뭐야?” 



난 어깨를 들썩인 후 신발을 벗었다. 뒤에서 녀석의 정체를 아이들에게 알려주는 민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또 한번 놀라는 아이들이다. 난 우혁이의 옆에 멈춰 서고는 팔짱을 낀 체 오른발을 들었다. 공중에 떠있는 내 발은 녀석의 배를 향해 

낙하하기 시작한다. 다리에 힘을 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충격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녀석의 배에 내 발이 닿으려는 찰나, 

타악, 손에 잡혀버리고 마는 내 발목이 아닌가. 정확히 2cm즈음 되는 높이에서 동작이 멈추었다. 굉장한 손의 힘이다. 



“밟으면 토할지도 몰라.” 



어느새 잠에서 깬 우혁이었다. 누운 체 나를 바라본다. 난 들었던 발을 바닥에 놓았다. 그러자 우혁이가 발목을 놓아준다. 



“너 어떻게 들어온 거야?” 


“으라차, 걸어서 들어왔어. 킥.” 



바닥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죽 폈다. 우혁이는 이어 담을 타넘고 왔다며 덧붙였다. 집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멀뚱히 쳐다보는 

녀석이다. 그러다가 한쪽 손을 직각으로 들어 보인다. 



“안뇽! 처음 뵌다!” 


“나도 처음 뵈.” 



유일하게 유인이가 인사를 받아주었다. 왠지 어울리는 한 쌍이군. 신이는 관심 없다는 듯이 곧장 주방으로 들어간다. 

그나저나 우혁이 녀석 정말로 알아냈잖아? 허풍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저녁. 

고민 끝에 카레를 만들어 먹었다. 우혁이가 기념파티도 안 해주냐며 두덜대었지만 나의 협박(조직에 받아주지 않는다는.)으로 

곧 잠잠해졌다. 저녁을 먹고 난 뒤 30분의 휴식 끝에 훈련은 정원에서 또 이어졌다. 나는 현관계단에 우혁이와 나란히 앉아 

훈련 중인 아이들을 보았다. 우혁이는 거실에 굴러다니던 유인이의 비누방울을 불고 있다. 고운 빛깔을 연하게 띠고 있는 

비누방울들이 우혁이의 입 바람에 두둥실 떠올랐다. 



“쟤들 왜 저렇게 열심이냐?” 



빨대를 불며 질문을 하는 우혁이다. 비누방울 다섯 개가 만들어졌다. 



“일주일 뒤면 파이터 대전이잖아. 거기에 나갈 거야.” 



우혁이는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가만, 한 사람은 더 나갈 수 있는데‥ 물어나 볼까? 

난 기대는 일찌감치 버리고서 그냥 한번 물어보았다. 



“너도 나가볼래?” 


“그러지, 뭐.” 



아주 간단히(맥 빠질 정도로) 승낙을 하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별이 안 된다. 



“진심이야? 난 진지하게 묻는 거라고.” 


“후우-. 그래! 나간다고. 어차피 강호에 있었어도 난 나가게 되어있었어.” 



빨대에서 튀어나오는 비누방울 세 개를 보며 우혁이가 말했다. 헤에-. 이거 뜻밖인 걸? 내심 기뻤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너 나갈 실력은 돼?”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근처에 있던 찌글이가 비누방울을 보고는 신기했는지 가까이 다가왔다. 멍청한 표정으로 우혁이의 입에 

물려있는 빨대를 유심히 바라보는 찌글이다. 귀여울 때도 있었군. 



“걱정할 거 없어. 난 저런 훈련 따윈 하지 않아도 충분히 강하니까.” 



자신감이기보단 꽤 거만한 성격이다. 끝내 유인이의 비눗물을 몽땅 써버렸는지 비누통을 바닥에 놓아버린다. 

찌글이가 비누통에 납작한 코를 들이밀고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어쨌든 우혁이는 자신의 실력에 꽤나 자신이 있는 모양이니 

신경 쓰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가장 신경을 써야 할 인물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경기 전에 녀석의 실력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음날, 체육관. 

우혁이는 아침 일찍부터 어디로 간 건지 종적을 감추었다. 링 안에서는 팔부하중 오노와 일성이가 장난 반 운동 반으로 

복싱대결을 벌이고 있다. 링 주위를 둘러싸고서 나머지 부하들은 응원을 하고 있다. 링 밖에서는 파이터 대전에 출전할 선수인 

네 사람을 민규와 태기가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신이와 희웅이를 가르치고 있는 민규의 목소리가 제일 선명하게 들려온다. 

내가 지금 앉아있는 의자와 가장 가까워서이다. 



“나는 이 자세가 된다면 무조건 이긴다고 말할 수가 있다.” 



민규가 누워있는 신이의 배위에 올라앉은 상태로 두 사람에게 말하였다. 그런 민규를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신이가 대꾸했다. 



“지금 날 만만하게 보는 거야?” 



하지만 민규는 살짝 미소를 띠며 오해를 풀어주었다. 



“나와 너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나도 아마 졌을 거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위에서 날리는 펀치는 일반적으로 서서 날리는 펀치보다 

훨씬 강력하지. 지금 이 자세에서 내 주먹이 너의 안면에 닿은 순간의 펀치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고 있냐?” 


신이는 골똘히 생각했다. 희웅이 역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민규가 기다릴 생각이 없는지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그 위력은 네 머리가 땅바닥에서 받는 수치와 똑같다. 결국 약하게 타격하든 강하게 타격하든 너는 2배 강도의 펀치를 

허용하게 되는 것이지.” 


“그럼 신이 형은 반격할 수가 없나요? 저 상태로 주먹을 날리면 되잖아요.” 



희웅이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질문을 해왔다. 



“그래? 그렇다면 내가 신이의 목을 누른다면 어떨까?” 



민규는 왼손으로 신이의 목을 눌러보였다. 희웅이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하지만 신이는 뭔가 알고 있는 듯했다. 



“흥.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는 거군. 치사하기는.” 


“그렇지. 네가 만약 머리를 들어 허리를 세운다면 이 자세가 풀림과 동시에 나는 반격을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상대의 목을 누른다면 상대는 허리를 세우지 못해 내 얼굴에 주먹이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그와 반대로 나는?” 



퍼억! 

민규의 주먹이 신이의 뺨을 강타했다. 윽, 왠지 힘이 들어간 것 같았는데‥. 



“이 자식, 이게 무슨 짓이야?!” 



열받아 주먹을 마구 휘두르는 신이다. 하지만 주먹은 허공을 가로지를 뿐이다. 민규는 재미있어하며 희웅이에게 말했다. 



“내 말이 맞지?” 



신이 녀석, 오늘 열받아죽네. 

한편, 태기 쪽에서는 세 사람의 손에 나무로 만들어진 기다란 곤이 한 자루씩 들려있었다. 

곤술, 다른 말로는 봉술이라는 것을 익히는 중이었다. 태기는 무기 사용법을 가르치려는 것 같다. 

태기는 유인이와 호두의 앞에서 자세를 잡고 있었다. 



“이렇게 오른손에 봉을 쥐고 발은 가지런히 모아서야 돼. 그리고 양팔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리고 시선은 좌측 전면을 응시하는 거야. 

강호두, 너 사시냐? 지금 어딜 보는 거야? 오른쪽 말고 왼쪽 말이야!” 


“디게 그러네.” 



호두는 태기의 호통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왼쪽을 보았다. 유인이는 조용히 태기의 자세를 잘 따라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봉을 위로 들어올리는 거야. 그럼과 동시에 왼손으로 봉 손잡이의 아랫부분을 쥐어 봉을 몸의 우측에 수직으로 세우는 거지. 

이때 시선은 역시 좌측 전면을 봐야 돼. 그리고 아랫배가 나오지 않도록 배에 힘을 줘. 이것이 바로 준비동작이다. 

후아-! 힘들다. 좀 쉬다가 하자.” 



고작 준비동작 한 번했다고 힘들다는 태기였다. 윽, 저 녀석을 그냥. 



“왜? 그냥 계속 이어서 하자.” 


“나도 불붙었어.” 



그에 비해 적극적인 제자들이다. 두 사람이 부탁하자 태기는 어쩔 수 없다며 바닥에 놓았던 곤을 다시 집어 들었다. 

다들 열심이어서 좋기는 한데 아무래도 우혁이 녀석이 자꾸만 신경에 쓰인다. 정말 걱정하지 않고 믿어도 될까? 


이틀 후. 이제 사흘만 있으면 기다리고 기다렸던 ‘슈퍼 파이터 대전’이다. 민규는 일찍부터 경기장에 가 신청서 5장을 제출하고 왔다. 

민규의 말에 따르면 예년보다 신청자가 줄어든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만큼 겁 없고 실력이 좋은 놈들이 나온다는 

얘기도 된다. 우혁이는 요 이틀 동안 나타나지 않고 있다. 경기 전에는 나타나겠지 생각하고 있지만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쉽게 떨쳐지지 않고 있다. 



“형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얘들아 형님 잘 모셔라.” 


“예! 알겠습니다, 민규 형님.” 



나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는 민규다. 어디 멀리라도 가냐고? 멀지는 않지만 가기는 간다. 수련을 위해 산으로. 

태기와 아이들이 먼저 산으로 떠난 지금 민규는 다른 일 때문에 따로 가게 된 것이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애들은 너만 믿는다.” 


“걱정 마십시오, 형님. 그럼‥.” 



다시 한번 허리를 숙이는 민규다. 민규는 자신의 승용차에 몸을 실었다. 

부우웅-. 차가 떠나고 이제 집에는 팔부하와 나만이 남았다. 녀석들 때문에 썰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뭔가 허전한 기분이다. 

민규와 아이들이 산으로 떠난 지 하루가 지났다. 팔부하는 지금 체육관으로 갔다. 집에는 나와 찌글이 뿐이다. 

나는 찌글이의 밥그릇(뼈다귀 모양의)에 사료를 담아 찌글이에게 주었다. 할짝할짝 잘도 먹는다. 그렇게 찌글이가 밥 먹는 모습을 

쭈그려 앉아 뿌듯하게 보고 있는데 탕탕탕! 누군가가 대문을 두드린다. 나는 고개만 돌려 대문을 보았다. 

누군가의 몸이 대문의 여러 구명 틈새로 조금씩 보였다. 나는 ‘누구세요?’하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 전에 들려오는 

그 사람의 목소리에 물어볼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우렁차게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 



“신아, 나 왔어!!” 



진형우였다. 저 녀석은 또 우리 집을 어떻게 안거야? 








♡50 




대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나오자 실망한 눈초리로 나를 보는 진형우다. 정장이 아닌 캐주얼 차림이었다. 포근한 느낌이 든다. 



“신이 좀 불러주시겠습니까?” 



갑자기 존대로 바꾸는 녀석. 표정은 마치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다. 뭐야, 이 녀석? 



“없어.” 



나 역시 기분 나쁜 투로 말해주었다. 그러자 더더욱 나를 노려보는 진형우다. 나를 노려보다가 대문 안을 힐끔 쳐다본다. 

못 믿는 건가? 진형우가 다시 나를 보더니 기분 꿀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역시 날 못 믿는 거였어. 나는 어깨를 들썩여 보이며 들어 올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길을 터주었다. 

당당히 어깨를 펴며 들어오는 진형우였다. 가까이 다가온 찌글이를 힐끔 내려다본 후 앞으로 계속 걸어간다. 난 대문도 닫지 않고 

진형우를 따라 현관으로 갔다. 찌글이가 내 뒤를 졸졸 쫓아온다. 현관문을 여는 진형우. 뒤를 돌아본다.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난 입 안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이었다. 

난 진형우가 하는 짓을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신이 방이 어디냐고 물어오자 난 2층 오른쪽 방이라고 가르쳐주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진형우를 보며 현관문을 닫은 후 소파에 앉았다. 흠, 그래도 손님이니 대접은 해야겠지? 난 다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주스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타닥닥닥. 주스 한 잔이 올려져있는 쟁반을 손에 들고 주방에서 나오려니 2층에서 내려오는 진형우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없잖아? 어디에 숨긴 거예요?” 



내가 그 녀석을 왜 숨긴다는 거야? 난 테이블에 쟁반을 두었다. 편하게 두 팔을 벌리고 소파에 앉는 진형우다. 

주스 한 잔을 들고서 꿀떡꿀떡 마셔버린다. 



“하아-! 진짜 신이는 어디로.” 


“산으로 갔어.” 



테이블 위에 빈 잔을 놓아두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다. 



“산? 등산 갔나요?” 



모르는 사람의 속 좋은 소리다. 



“수련 중이야.” 


“수련요?” 


“파이터 대전에 출전할 거거든.” 



놀라는 진형우다. 오늘도 변함없이 푹푹 찌는 날씨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에어컨이 있는 곳으로 갔다. 



“파이터 대전요?” 



윽, 저 자식이 한번 말하면 좀 알아들어야 할 거 아냐?! 난 열을 식히며 에어컨의 몸체에서 리모컨을 빼내었다. 

전원을 누르고 온도를 조절했다. 



“너도 나가지?” 



나는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물론이죠. 그런데 신이도 나갈 줄이야. 우혁이는요?” 


“걔도 출전할 거야. 꽤 자신도 있는 것 같고.” 


“기대되네요.” 



싱긋 웃어 보인다. 도대체 이 무게감 있는 모습과 신이 앞에서의 그 발랄한 모습 중 어느 것이 진짜일까? 

아직도 나를 보며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표정은 밝아서 좋다만 이 위압감은 뭐다냐? 



“그런데 그건 그렇고, 연개소리님도 엄연히 여자이신데 이렇게 외간 남자를 함부로 집에 들이셔도 되는 건가요?” 


“괜찮아. 전혀 무섭지 않으니까.” 


“그래요‥?” 



갑자기 일어서더니 테이블에 두 손을 짚고 나에게 다가오는 녀석이다. 여전히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미소를 띤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 



“저도 예쁜 여자는 좋아하거든요.” 



점점 가까이 오는 녀석의 얼굴. 난 테이블 위에 있던 쟁반을 들었다. 깡! 은색 쟁반이 녀석의 이마를 짓누르고 

녀석의 얼굴을 가렸다. 모든 동작이 정지된 진형우다. 그런 녀석을 보며 내 뒤통수에서 떨어지는 왕 땀방울. 



“이게 무슨 짓이야?! 아프잖아!” 



어쭈, 도리어 큰소리다. 진형우는 다시 소파에 기대어 한 손으로 이마를 비벼대었다. 나를 노려보면서‥. 



“너도 어쩔 수 없는 늑대구나?” 


“무슨 소리야? 따분해서 장난 한번 쳐본 거야!” 



잠깐! 이 자식 다시 반말이잖아? 나는 반말이면 반말, 존댓말이면 존댓말,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그에 천장을 올려다보며 능청스럽게 “내 맘 아니야?”라고 말한다. 짜증스러운 녀석. 

타앙. 누군가가 대문을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대문은 열려있을 텐데. 



“앗, 신이 아냐?” 



진형우도 그 소리를 들은 건지 벌떡 일어선다. 신이가 벌써 올 리가 있나. 



“미안하지만, 내 부하 애들이야.” 


“쳇, 그런 거였어?” 



털썩. 도로 소파에 앉아버린다. 그런데 팔 부하 애들이 대문을 차고 들어올 녀석들이 아닌데. 잠시 후 찌글이의 울음소리까지 들려왔다. 


“깨갱깨갱!” 


저 자식들이 정녕 미친 건가. 겁도 없이 찌글이를 울리다니. 태기가 있었음 한 사람당 다섯 주먹감이다. 

나는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저벅저벅. 녀석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손잡이가 돌아갔다. 

철컥. 쾅! 

문이 열리자마자 발로 한 번 더 차버리는 팔 부하‥가 아니다. 으잉? 



“이우혁, 어딨어?!! 여기 있는 거 다 알고 왔으니까 당장 나오시지!!” 



야구 방망이를 하나씩 들고 있는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이었다. 처음 보는 녀석들인데, 누구야? 보아하니 우혁이 손님 같은데‥. 



“이우혁, 개새끼 어디 있어?! 이우, 어라? 형님‥.” 



형님? 저 놀라는 표정은 뭐다냐? 남자는 왠지 내가 아닌 진형우를 보고 있는 듯 했다. 그에 자연스레 나까지 진형우를 보게 되었다. 

그의 얼굴은 정면인 나를 향하고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든다. 담배 한 대를 입에 무는 진형우. 



“뭐냐?” 



남자들에게 하는 소리였다. 남자들은 치켜들었던 방망이를 내리며 진형우에게 말했다. 



“형님께서 여긴 어떻게‥.” 


“큰 형님이 시켰냐?”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고 계속 물고만 있었다. 하지만 곧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아닙니다. 이우혁에게 갚아 줄게 있어서요.” 


“우혁이한테 그 방망이라도 빌린 거냐?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감히 쳐들어온 거겠지?” 


“예? 그냥 이우혁이 이 곳에서 나온 걸 누가 봤다 길래‥죄송합니다, 형님!” 



왠지 겁에 질린 듯한 남자들이었다. 그나저나 진형우와 이들의 대화로 미루어보아 이 녀석들은 강호파인 것 같은데. 

남자들은 허리를 각이 지게 굽혔다. 진형우는 꺼내 든 라이터의 뚜껑을 열었다 닫아다를 반복하기만 할뿐 담배에 불을 붙이지는 않았다. 



“사과는 내가 아니라, 이 집 주인이신 쓰래빠의 보스, 연개소리님께 해야지. 안 그래?” 


“예‥? 쓰래빠‥.” 



목젖이 움직이는 것이 한 눈에 드러날 정도로 침을 삼키는 남자들이었다. 진형우는 드디어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주머니에 라이터를 집어넣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이거 제 부하 놈들이 실수를 한 것 같네요. 대신 사과드리죠.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자들이 일제히 현관 밖으로 나가 길을 터주었다. 진형우 녀석, 부하들이 보고 있다고 또 무게 잡는 거냐? 

난 녀석을 보기만 할뿐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현관까지 걸어간 진형우가 신발을 다 신은 뒤 나에게 말했다. 



“아, 신이가 오거든 이렇게 좀 전해주시겠어요? 결승전에서 만나자고.” 


“잠깐.” 



진형우의 말을 들은 나는 다짜고짜 녀석을 불러 세웠다. 그러자 뒤를 돌아보는 진형우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잔뜩 기대하는 얼굴. 



“에어컨 틀어났으니까 문 닫고 가.” 



순간 인상이 일그러졌다. 저 녀석이 저럴 때도 있군. 하지만 뒤에 있는 자신의 부하들을 의식해서인지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한다. 



“그거야, 기본이죠.” 



왠지 부하들이 없었더라면 크게 소리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시 반말을 했을 것 같다. 그런데 우혁이는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 길래 저런 놈들이 집까지 쳐들어오는 거야? 


Rrrrr. 

진형우가 나간 지 5분 즈음 지났을까? 테이블 위의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어대었다. 나는 더 이상 울지 못하도록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나야, 신이.” 



산에서 열심히 수련 중일 신이였다. 녀석의 목소리를 들으니 어찌나 반갑던지, 입이 절로 귀에 걸렸다. 



“응! 잘 지내고 있어? 안 힘들어?” 


“힘들긴. 넌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냐?” 


“그러엄! 할 일이 밥 먹는 것뿐인걸. 넌 잘 먹고 있어?” 


“어. 물고기랑 짐승이랑 직접 잡아먹는 기쁨이 커.” 



무슨 말이지? 음‥에이! 뭐, 어쨌든 고기만 먹고 있다는 뜻이겠지. 잘 먹고 있다니 다행이다. 



“밤에 이불은 잘 덥고 자?” 



신이가 물었다. 



“응. 덥지만 덥고 자기는 해. 거기 모기 많지? 안 물렸어?” 


“조금.” 


“그래도 긁지 마. 흉 지니까.” 


“노력은 해볼게. 잘 때 문단속은 잘하고 있지?” 


“물론이지. 넌 덥다고 벗고나 자지마. 산이라서 밤에는 싸늘하니까 감기 걸릴지도 몰라.” 


“어, 그래‥.” 


“‥‥‥.” 


“‥‥‥.” 



뭘까? 이 이상한 분위기는‥. 우리의 통화내용은 마치 연인 사이나 하는 그런 다정한 대화이다. 

신이도 그런 느낌을 받은 건지 말이 없었다. 윽,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바꿔야만 해. 문득, 방금 다녀간 진형우가 떠올랐다. 



“아, 맞다! 진형우가 너 찾아왔었어.” 


“그, 그래?” 


“응.” 


“뭐래‥?” 


“어? 그냥. 별말 안하던데. 아, 너보고 결승전에서 만나제. 하하.” 



으아, 진짜 진땀난다.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신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이상한 잡음이 들리더니 

신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오랜다. 그럼 다시 전화할게.” 


“응, 열심히 해.” 



철컥. 끊겼다. 아쉬운 기분이다. 나는 몇 분 동안 수화기를 멍하니 들고 있었다. 

띠띠띠띠-. 수화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 난 정신을 차리고서 그제야 전화기에 수화기를 놓아두었다.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신이와의 방금 그런 대화 왠지 싫지만은 않다. 

이틀 후. 정원 테이블에 앉아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청승맞은 짓이다. 하늘에는 뿌연 달 하나가 두둥실 떠 있었다. 

군데군데 별이 몇 개, 보이기는 했지만 내 눈을 만족 시켜주지는 못했다. 정말 시골 같은 곳에서는 많은 별을 볼 수가 있는 걸까? 

공기가 좋은 곳에 몇 번 가보기는 했지만 밤하늘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탈싹! 뭔가가 담에서 떨어졌다. 

난 무심결에 소리가 난 담장 아래를 보았고 그 곳에는 사람 한 명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서고 있었다. 

하지만 긴장이 되지 않는 걸 보면 만만한 상대인 듯한 그런 느낌이다. 담을 타 넘고 온 사람이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둠에 가려졌던 사람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 앞에 다가오자 그의 모습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우혁, 넌 벨 누를 줄 모르니?” 



그렇다. 도둑고양이는 우혁이 녀석이었다. 이를 드러내며 해맑게 웃어 보인다. 그걸 보니 할 말을 잃었다. 



“헤에-, 스릴 있잖아. 하지만 역시 형님 집 담은 너무 높아서 항상 착지가 불안정해.” 



반대편 의자에 앉더니 내가 마시던 주스를 자기가 몽땅 마셔버린다. 으윽, 아까워. 찌글이 앞발로 좀 저어 놓는 거였는데. 



“넌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니니?” 



내가 묻자 우혁이가 컵 안의 얼음을 입에 털어 넣은 후 대답을 해주었다. 



“형님, 미안하지만 내 프라이드야.” 


“프라이버드겠지.”(프라이버시를 말하려는 듯 했지만 둘 다 틀렸음.) 



내가 지적을 해주었지만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얼음만 아작아작 깨물 뿐이다. 난 다리를 꼬고 앉은 체 그런 녀석을 보았다. 

언제 모기한테 물린 건지 허벅지가 가려웠다. 긴바지를 입고 나올걸 그랬나? 난 후회를 하며 손톱으로 가려운 곳을 꾸욱 눌렀다. 

세로로 한번, 가로로 한번. 십자(＋)모양으로. 이제 가려운 게 가라앉겠지?(글쎄‥.) 



“맞아. 이틀 전에 강호파 피라미들이 너 찾아왔었어.” 


“그래?” 



뿌득뿌득. 얼음을 깨무는 가 싶더니 이내 삼켜버린다. 아쉬운지 빈 컵을 바라보는 우혁이었다.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런 놈들이 쳐들어 오냐?” 


“모르겠어. 기억 안나. 형님, 얼음 더 없어?” 



자기 일이면서 이렇게 무관심할 수가. 난 얼음은 냉장고에서 찾으라고 했다. 그에 귀찮다는 녀석이다. 



“나, 적어도 이것만은 좀 알아야겠어. 너 강호에 무슨 배신을 한거야?” 



우혁이는 멀뚱히 내 얼굴을 보더니 갑자기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윽, 내 얼굴이 따분하게 생겼나? 

아, 이게 아니지. 난 화를 꾹 참으며 녀석이 대답해주기를 기다렸다. 하품을 끝내고 다시 나를 응시한다. 

그러다가 또 다시 “으하암-.” 하품을 하는 녀석이다. 



“야! 왜 내 얼굴을 보고 하품하는 거야?! 죽고 싶어?!” 


“아, 미안, 미안. 좀 피곤해서.” 



정말 가끔씩 열 받게 하는 놈이다. 



“배신이라기보다는 보스의 신경을 건들인 거지.” 



이건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 같다. 신경을 좀 건드렸을까? 



“보스의 애인이랑 하룻밤 잤거든. 아니다, 이틀인가? 가물가물하네.” 



하지만 역시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만 하는 것이다. 



“뭐야? 사아칸의 애인이랑? 너 미쳤냐?” 


“어쩔 수 없었어. 그 누나가 나한테 좀 달라붙어야지. 돈까지 쥐어주는데, 안 넘어갈 남자가 어디에 있겠어? 안 그래? 형님.” 



글쎄‥ 난 남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런 이유였다니 조금은 의외였다. 

아니지, 의외랄 것도 없잖아? 이우혁, 역시나 여자를 상당히 밝히는 기질이 있었어. 



“근데, 다행인 게 보스한테 다른 여자가 생겨서 지금은 크게 상관은 안하는 것 같아.” 


“그런데 거기서 왜 나온 거야? 나올 필요도 없었네.” 


“형님도 진짜 눈치 없네. 내가 거기에 계속 있어봐 보스의 새로 생긴 여자도 나한테 반할게 뻔하잖아. 

그러기 전에 그냥 내 발로 나온 거야.” 



흐음‥ 그렇군.(우혁의 말에 금방 공감하는 개소리.) 애초에 화를 피한다 그 말인 거야. 알고 보니 생각이 없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우혁이는 피곤하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치, 조금만 더 놀아주지. 그나저나 난 왜 잠이 오지 않는 걸까? 

그건 아마도 내일이면 아이들이 온다는 기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일 모레면 그토록 기다렸던 파이터 대전이다. 

어느새 찌글이가 내 발밑에서 자고 있었다. 


다음날, 저녁. 오늘은 특별히 내가 중국음식으로 크게 한 상을 차렸다. 물론, 전부 시킨 것이지만 말이다. 



“큰형님, 형님들 오셨습니다.” 



히틀러의 목소리에 난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지금 막 대문을 들어서는 남자들. 정말 아이들이다. 

난 꾀재재한 모습의 남자들에게 다가갔다. 



“다녀왔습니다, 형님.” 



민규가 인사를 했다. 태기는 곧장 나를 안기에 바빴다. 



“형님! 정말 그리웠습니다.” 


“아하하, 나도야.” 



난 태기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태기의 어깨 뒤로 신이와 유인이가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엔 호두와 희웅이가 웃고 있었다. 

난 녀석들에게 말했다. 



“어서 와.” 




******** 




이렇게 다같이 모여 밥을 먹는 것도 오랜만이다. 태기와 호두, 그리고 유인이는 벌써 밥 두 그릇을 뚝딱해치웠다. 

다들 훈련이 힘들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었다고 했다. 



“내일 괜찮겠어?” 



그래도 걱정이 되어 물어보았다. 그러자 누가 먼저 할 거 없이 동시에 외쳤다. 



“문제없어(요)!” 



마치 짜기라도 한 것 같다. 다들 다시 열심히 밥을 먹기 시작한다. 

쿡, 하긴 이제부터 난 걱정 같은 건 하지 말고 이 녀석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거야. 걱정 같은 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니까. 

후우, 우승은 안 해도 좋으니까 모두들 다치지만 말아줘. 그날 밤, 난 일찍 잠이 들었다. 

집에 모두가 모였다고 생각하니 안정이 되고 가슴이 꽉 찬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까? 

새벽 2시. 더워서 그런 건지 눈이 번쩍 뜨였다. 창문이 닫혀있다. 난 창문을 열기위해 침대에서 내려왔다. 

드르륵. 창문을 여니 정원의 나무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크게 숨을 들이 키고 내쉰 뒤 뒤돌아서려는 순간 

문득 담배냄새가 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흰 연기. 아래를 보았다. 



“으악! 신아, 여기서 뭐하는 거야?” 



벽에 기대어 쭈그려 앉아있는 신이었다. 잠옷차림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머리를 뒤로 젖혀 나를 본다. 



“보시다시피 담배 피는데?” 


“그게 아니라, 왜‥. 후우, 아니다. 안 자?” 


“잠이 안와서. 너나 자.” 



고개를 내려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후욱, 담배연기가 앞으로 뿜어졌다. 



“경기에 나가는 건 너잖아. 피곤해서 괜찮겠어?” 



신이는 입에 물려있던 담배를 손에 빼들었다. 



“걱정 마. 내가 전에 말했지?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우승해 보이겠다고. 넌 큰소리로 응원이나 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우승 한다‥? 

두-근! 

또 가슴이 심하게 울렸다. 그날 밤이랑 똑같은 기분이다.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기분, 하늘을 날것처럼 설레이는 기분. 

어떤 것이 진짜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건 두 가지 마음 모두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내 입술이 열리고 내 머리도 모르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머리가 시킨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시킨 것이었다. 



“기쁘지 않아.” 


“응?” 


“네 몸이 부서진 다음 승리를 해도 난 전혀 기쁘지 않다고. 이기지 않아도 좋으니까 제발 다치지만 말아줘.” 



신이는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내 입술은 닫힐 줄을 모른다. 자꾸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인다. 



“왜 너만 보면 가슴이 벅 차는지 모르겠어. 너랑 단 둘이 이야기만 하면 어느 순간부터인지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려. 

너랑 통화를 끝낸 뒤에는 왠지 모르게 너무 아쉬워서 수화기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어. 네가 자꾸만 머릿속에 그려지고 

네가 없는데도 눈앞에 보였어. 정말‥보고 싶었던 것 같아.” 


“‥‥‥.” 



손에서 담배를 떨어트렸다. 신이가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밟으며 일어섰다. 그러자 나와 키가 맞추어졌다. 

내 눈을, 내 얼굴을 보고 있는 신이다. 



“정말 보고 싶었어.” 



순식간이었다. 내 말이 끝난 것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시간. 

신이가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51 





대전 날. 쓰래빠의 아침은 그 어느 집보다, 개미들보다 더 분주하다.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배부르게 먹인 다음 

우리는 현관문을 나섰다. 그나저나 우혁이 이 자식은 왜 안 오는 건지. 또 날다람쥐처럼 사라져버렸다. 아침은 제대로 먹었는지 

괜히 걱정이 된다. 설마 배고프다고 출전하지 않는 건 아니겠지? 싸워보지도 않고 기권 패라니 쓰래빠에겐 있을 수도 없는 일, 

있어서도 안돼는 일이다. 굶주려서 태기 말대로 내장이 뱃가죽에 달라붙어도 좋으니 제발 대회장에 나타만 다오.(드디어 본심이 드러남.) 

오늘이 무척이나 중요한 날이라는 걸 신(神)도 눈치 채셨는지 행운을 빌어주는 비를 요란하게 뿌려주셨다. 후후, 반드시 우승해보이겠소. 

오늘 벌어지는 예선전에서 다섯 명 모두 무사히 통과할 것이다. 민규가 검은 우산을 나에게 씌워주었다. 내가 제일 먼저 앞장을 섰다. 

찌글이는 비가 오자 제 집에 들어가서 불쌍한 얼굴로 태기를 바라본다. 달려오고는 싶은데 비가 앞길을 가로막다니‥ 쯔쯧, 

너의 사랑도 꽤 험난하구나.(태기 때문에 쓰래빠 사람들은 이미 찌글이를 암컷으로 생각하고 있음.) 



“나 안 늦었지?” 



담장 위에 앉아있는 우혁이다. 노란 우의를 입고 있었다. 내가 녀석을 무시하자 뒤따라오던 사람들 모두도 녀석을 본체만체 하였다. 

내가 대문을 나서자 쿵! 하는 소리가 정원 안에서 들려왔다. 우혁이의 엉덩방아 찧는 소리였다. 여전히 착지가 불안정한가 보군. 

비록 우혁이를 무시했지만 나의 입은 우산 속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다. 염려하던 일이 벌어지지 않아서. 휘유-. 

민규가 미리 집 앞에 세워둔 승용차의 뒷문을 열었다. 내가 차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우산을 떼지 않는 민규다. 

덕분에 비를 한 방울밖에 맞지 않았다. 뒤이어 우혁이 녀석이 차안으로 들어온다. 우의에 묻어있던 빗방울이 좌석 시트에 뚝뚝 떨어졌다. 



“앗, 차거! 야, 좀 조심해!” 



나는 팔에 튀긴 물을 털어내며 우혁이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러자 우의를 벗으며 나에게 물을 더 튀기는 녀석이다. 



“형님이 피해.” 


“뭐?” 


“물방울이 형님을 피할 수는 없잖아.” 



젠장! 맞는 말이다. 나는 우혁이의 말 빨에 입만 꾹 다문 체 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우혁이의 옆에 앉는 사람을 보자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으아, 왜 하필 신이가 이 차에 타는 거냐고!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며 울상을 지었다. 

이대로 자는 척이나 할까? 



“간만에 비가 오니까 정말 시원하다. 그치? 형님.” 



민규가 조수석에 앉고 운전은 정일이가 했다. 그리고 나를 부른 사람은 우혁이었다. 나는 옆을 돌아보지 않고 입만 움직였다. 



“엉, 그래.” 



차가 빗속을 뚫고 달리기 시작한다. 에어컨을 틀었다. 뒤에서는 나머지 사람들을 태운 세 대의 승용차가 따라오고 있다. 

모두 BMW다.(물론, 글자만.) 



“어제 예쁜 누나한테서 받은 키스마크야. 어때? 예쁘지?” 



내 어깨를 툭 치며 또 질문을 하는 우혁이다. 차라리 경기장에서 기다리지 왜 이렇게 날 난처하게 만드는 걸까? 

나는 보지도 않고 고개만 힘껏 끄덕였다. 



“형님, 그 성의 없는 대답은 뭐야? 오늘 그냥 확 져버릴까 보다.” 



이 자식, 협박을 하다니.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연스레 신이부터 눈에 들어왔다. 신이를 보자 어젯밤 일이 떠오른다. 

얼굴만 화끈거리면 될 것을 왜 입술까지 달아오르는 거야? 



“자, 봐봐. 찌인-하게 잘 나왔지? 일부러 형님 보여주려고 안 지웠어. 고맙지?” 



내 눈앞에 우혁이가 자신의 목덜미를 들이민다. 빨간 점도 아닌 자국 같은 것이 연하게 드러났다. 이런, 행실 바르지 못한 놈. 

그래도 나도 엄연히 여자인데 키스마크 따위를 아무렇지 않게 자랑이라고 보여주다니. 키스마크‥. 

순간 우혁이의 목덜미가 신이와 나로 바뀌었다. 아악! 도대체 왜 그런 걸까? 그 일이 있자마자 우리 둘은 일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정원의 나무만 바라봤다. 그러기를 5분. 서로 간신히 꺼낸 말이 신이는 ‘방금 이슬 맞았어.’였고 나는 ‘우산 줄까?’(이슬인데 웬 우산?)였다. 

이어서 신이가 ‘그냥 들어갈란다.’하고 받아침으로써 어색한 밤이 끝이 난 것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는 그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고 

눈만 마주쳐도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형님, 너무 넋 놓고 보는 거 아니야? 응큼하긴.” 



우혁이의 목소리에 사념(思念)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형님이랑 신이랑 어디 아파? 둘 다 얼굴이 빨가네?” 



우혁이의 말에 민규가 뒤를 돌아본다. 정말 아픈 거냐고 내게 물어왔다. 



“아프기는, 안 아파.” 


“나도.” 



내가 대답하자 신이도 얼른 따라서 대답을 했다. 민규가 안심을 하며 다시 앞을 보았다. 차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잠시 동안 잠잠한 가 싶었던 우혁이가 또 입술을 떼 낸다. 



“나는 어제 봤다?” 



허거덩, 눈과 입이 놀라고 철러덩, 심장이 내려앉는다. 봤다니? 그것도 어제 봤다니‥ 도대체 뭘 보았다는 것일까? 

설마‥. 그래, 역시 봤기 때문에 지금 우리 둘 사이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걸 거야. 난 가슴을 조마조마하며 신이를 보았다. 

신이 또한 예감이 안 좋았는지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눈빛으로 대화했다. 



‘우혁이가 정말로 본 걸까?’ 



먼저 내가 물었다. 



‘설마‥. 정원에는 나밖에 없었는데?’ 


‘아니야. 이 녀석은 담장에 앉아서 봤을 가능성이 충분히 커.’ 


‘그럼 어떡하지? 입을 봉해버릴까?’ 


‘안돼. 너무 섣부른 판단은 자칫 잘못하면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어.’ 



서로의 눈에서 불꽃이 파바박 일며 우혁이를 노려보았다. 우혁이는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번쩍 꺼내어 든다. 

사진이었다. 



‘이 자식, 사진까지 찍었을 줄이야!’ 


‘입뿐만이 아니라, 뇌까지도 봉해야겠어.’ 



우리 둘의 눈은 초점을 잃은 광기어린 눈빛으로 바뀌었다. 나는 늦을 새라 잽싸게 팔을 뻗어 우혁이의 손에서 사진을 빼앗아내는데 

성공했다. 그와 동시에 신이의 눈에선 빛이 나기 시작한다. 



“앗, 내 사진!” 



우혁이가 순식간에 비어있는 자신의 손을 보며 깜짝 놀란다. 나는 일이 커지기 전에 사진을 찢기 위해 바로 쥐었다. 그런데 이게 웬 것?! 

얼핏 쳐다본 사진 속은 키스를 하고 있는 신이와 내가 아닌 한 여인네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연예인 사진‥?” 



그랬다. 그것은 분명 여가수의 사진이었다. 



“형님도 이 가수 팬이었던 거야? 어제 팬 사인회 갔었거든. 그래서 보게 된 거야. 사진 뒤에 봐봐. 사인(sign)도 받았어.” 



정말 사진을 뒤집어 보니 사인으로 위장한 지렁이 몇 마리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나는 다시 신이를 보았다. 



‘그럼 어제 봤다는 게 가수였어?’ 


‘이 자식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신이가 그렇게 받아치는 것 같았다. 휴-, 어쨌든 십년감수했다. 어젯밤 일은 신이와 나, 우리 두 사람만 알아야 한다. 

무조건 우리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가 탄 자동차는 잠시 후 경기장에 도착하였다. 





********* 





대전 시작 1시간 전에 도착한 우리는 경기장 건물로 들어섰다.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경기는 맨 꼭대기 층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유는 아마도 경찰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대회이기 때문이다. 

우리 쓰래빠는 27층(마지막 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두 대로 나누어 탔다. 딩동. 초고속 엘리베이터는 단 시간에 

우리를 원하는 층에 데려다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남자들의 거친 음성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온다. 대단한 인파다. 

그만큼 조직들 사이에서 강호파의 ‘슈퍼 파이터 대전’은 큰 관심거리라는 얘기가 될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 바로 진형우였다. 경기장 입구에서 자신의 보스, 사아칸을 모시고 있는 중이었다. 무척이나 진지해 보이는 얼굴이다. 

우리는 경기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입구로 곧장 향했다. 형식상 들어가기 전 사아칸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수고 많으시네요.” 


“하하, 오셨군요. 보아하니 쓰래빠는 다섯 명씩이나 출전하는 것 같던데, 꽤 자신 있으신 모양이군요.” 


“강호파도 그런 걸로 압니다만. 멋진 승부 기대하겠습니다.” 



난 사아칸에게 악수를 청하였다. 그러자 흔쾌히 악수를 받아준다. 옆에서는 진형우가 신이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저 자식이.(자신도 모르게 열 받은 주인공.) 



“그럼 어서 들어가시죠. 쓰래빠의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아칸의 어울리지 않는 친절한 어투에 나는 고개를 숙인 후 안으로 들어갔다. 경기장 내부는 연출된 조명으로 어두웠다. 

대전을 펼칠 링은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는 한 늘씬한 여성 도우미에 의해 자리를 찾았다. 중간 즈음에 위치하는 나름대로 괜찮은 자리였다. 

장내의 좌석은 거의 다 채워진 상태였다. 우리 바로 앞에는 구제파가 앉아있었다. 소이켠의 하얀 머리통이 보인다. 

소이켠은 과연 어떤 선수를 내보냈을까? 선수에 대한 궁금증과 승부내용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더 부풀어 올랐다. 

몇 분 뒤 장내에 안내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운 여자 목소리다. 



[알려드립니다. 잠시 후 토너먼트 순서결정 볼 잡기가 있을 예정이오니 대전에 출전할 선수 분들은 지금 곧 대기실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방송이었다. 안내방송을 들은 선수들이 자리 곳곳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조직도 예외는 아니다. 

내 뒤에 앉아있던 다섯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로 내려가는 녀석들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을 불렀다. 



“잠깐만!” 



그에 나를 보는 주변의 몇몇 사람들과 다섯 명이다. 왜 이제 와서 말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일까? 



“모두들 조심해.” 



진짜 속마음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각자의 방식대로 대답을 한다. 조용히 미소 짓는 희웅이,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 보이는 호두, 

하품을 하는 유인이(이게 대답이라고?), 아까 보았던 연예인의 사진에 뽀뽀를 하는 우혁이(나쁜 놈!), 

그리고‥나를 보며 얼굴을 붉히는 신이. 나도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호두가 신이를 본건지 왜 얼굴이 빨개졌냐고 고함을 친다. 

신이는 아무 말 없이 아래로 걸어만 갈뿐이다. 



“형님, 다들 잘 할 겁니다.” 


“그럼요! 제가 본 녀석들 중 최고예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서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양쪽에서 안심 시켜주려는 민규와 태기였다. 

그래, 너희들 말대로 저들은 최고야.(아직 우혁이는 잘 모르겠지만.) 믿자. 걱정은 제쳐두고 우선은 믿고 기도하는 거야. 

저 아이들의 몸과 마음에 상처가 나지 않는 단계에서 무사히 경기를 끝나게 해달라고‥. 

몇 분 후, 주체자인 사아칸의 대전 시작을 알리는 연설이 짧게 이어졌다. 




(출전자 대기실.) 



기다란 나무 벤치 5개와 접이 식 의자 11개가 벽 사방에 놓여있는 대기실 안. 

의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정면에는 56인치의 TV가 있다. TV를 통해 경기장 내부는 물론 두 명의 출전자가 대전을 펼치는 모습을 

생방송으로 볼 수 있다. 당연히 방송은 장내의 대형 스크린과 대기실에서만 볼 수가 있다. 신이와 네 사람은 나란히 벤치에 앉아 

대전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TV와 제일 가까운 벤치에 앉은 그들이다. 주변에서는 다른 출전자들이 몸과 긴장을 풀고 있다. 

신이는 팔짱을 낀 체 다리를 꼬고 앉아 TV를 주시하고 있다. 혹시나 관중석을 비추기라도 할까봐서 이다. 그러면 운이 좋아 

개소리의 모습을 볼 수가 있을 테니까. 하지만 TV화면은 정지라도 된 것처럼 어두운 링만 보여주고 있다. 신이는 개소리만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입술에 그녀의 입술의 감촉이 아직도 남아있는 듯 느껴졌다. 정말 어젯밤 그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무슨 용기로 입을 맞춘 건지는 신이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개소리의 말을 듣자 

극심하게 가슴이 뛰었고 그녀의 눈과 입술을 보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이제 더 이상은 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의외였다. 개소리 그녀도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신이의 입가에 웃음이 묻어난다. 


그 옆에선 호두가 챙겨온 호두를 먹고 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것을 그 옆의 유인이 보고 있다. 



“호두가 자기 종족을 먹고 있네? 우와!” 



지금의 호두는 유인에겐 심심하던 찰나에 좋은 놀이감이었다. 호두는 호두 한 조각을 입안에 넣으며 유인이를 힐끔 쳐다본다. 

호두의 고소함이 입안을 맴돌았다. 



“잔인해. 피도 눈물도 없어. 머리를 먹었으니 다음은 팔인가?” 



호두가 아무 반응이 없자 유인이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호두는 껍질속의 호두 부스러기를 입안에 털어 넣는다. 그리고는 유인을 본다. 



“재밌나?” 


“아니.” 



유인은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호두 부스러기를 발로 밟는다. 이를 그 옆의 희웅이 보고 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누나와 원수, 김빈곤의 생각뿐이다. 희웅은 제발 예선에서 배고파와 붙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희웅의 옆에는 우혁이‥있었는데 또 사라졌다.(쿨럭.) 찾았다. 구석에서 상의를 벗고서 근육을 자랑하고 있는 남자를 

부럽게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아저씨, 대단하다. 여자들이 줄을 잇겠어. 난 믿을 거라곤 잘생긴 얼굴뿐인데. 그래도 아저씨는 몸매라도 되니 다행이야.” 



구제파의 제갈량(27세)은 자신의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너스레를 떨고 있는 우혁을 벙 져 바라보았다. 

도무지 칭찬인지 욕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결국 신경 끄고 풀던 몸을 마저 풀기로 했다. 하지만 우혁이 계속 자신의 신경을 건드린다. 



“아저씨 무슨 파에 있어? 강호는 아닌데‥ 음, 혹시 대파에 있는 거야?” 



제갈량은 묵묵히 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닌가? 그럼 구제파?” 



반사적으로 몸의 근육이 움찔거린다. 그것을 놓칠 우혁이 아니었다. 



“아~, 구제파였구나. 요번에 구제파에서 상당한 실력자가 나온다던데, 사실이 아니었나봐? 

여기가 무슨 보디빌딩대회인줄 소이켠이 착각한 모양이네. 킥킥.” 



제갈량은 이 말만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조용히 바닥에서 옷을 집어 든다. 그리고 그 모습을 우혁이 보고 있다. 



“따라와.” 



제갈량이 옷을 손에 쥐고서 문밖으로 향했다. 시건방진 꼬맹이에게 본때를 보여줄 참이었다. 우혁이 흥미로움에 벌떡 일어서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그 두 사람은 대기실에서 나갔고 그들의 모습을 진형우가 보고 있었다. 





********* 





대기실로 온지 10분이 지났을까? 

달칵. 문을 열고 남자 3명이 검은 천으로 가려진 유리 상자를 들고 왔다. 상자 안에는 번호가 적힌 탁구공만한 공이 들어있다. 

모든 출전자들이 유리 상자에 주목했다. 



“지금부터 토너먼트 예선전의 순서를 정하겠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면 앞으로 나오셔서 볼 하나를 고르시길 바랍니다. 

우선 미끄럼파의 손오준씨.” 



두 번째 벤치에 앉아있던 손오준이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한가득 긴장한 얼굴을 하고서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상자 뚜껑의 구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많은 볼이 손에 만져졌다. 



“미끄럼파의 손오준. 우리 조직의 정보망에 의하면‥.” 



어느새 신이의 옆으로 온 진형우가 뭔가를 이야기하려 했다. 신이뿐만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던 유인, 호두, 희웅 세 사람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강호파의 정보망이라‥. 뭔가 큰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진형우가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 조직의 정보망에 의하면 게이래. 그러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조금이라도 예쁘게 생긴 남자는 다 건드린다는 

더러운 소문이 있거든. 하지만 신이 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니까 내가 지켜줄게.” 



띠옹. 모두들 입을 떡 벌렸다. 귀를 쫑긋 세웠더니 정보라는 게 고작 그거라니. 신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반면 유인은 얼굴을 찡그린다. 동성연애자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그다. 유인은 제발 손오준과는 붙지 않기를 기도했다. 

두 번째 볼을 잡으러나간 사람은 대파의 공룡이었다. 그리고 진형우가 또 아는 척을 했다. 



“대파의 공룡. 우리 정보망에 의하면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가 쥐라기공원이었대. 그것도 two를.‥그것밖에 모르겠어.” 



이번 역시 영양가 없는 정보이다. 호두는 진형우가 놀리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화가 났다. 

다음 사람은 똥배파의 도영수였다. 머리가 시원하게 보인다. 



“우리 정보망에 의하면 똥배파의 도영수는 파율 때문에 머리를 민 게 아니라, 심한 탈모증이었대. 

한마디로 민 게 아니라 머리털이 다 빠진 거지.” 



무서울 정도로 진지하게 말을 하는 진형우다. 



“야! 너거 조직 정보망은 와 그런데? 하나도 도움이 안돼는 것뿐이잖아!” 



참다못한 호두가 소리쳤다. 그에 진형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신이를 보았지만 그 역시 진형우의 엉뚱함에 한숨만 내쉰다. 

희웅은 안 들은 지 오래고 유인만이 진형우의 말을 머릿속에 새겨듣는다. 



“휘유, 어쩔 수가 없어. 우리 조직 정보망은 원래 우혁이었는데, 그 녀석이 나가는 바람에 정보망이 바뀐 거야.” 



이우혁이 정보망이었다니‥. 처음 듣는 소리다. 알았더라면 많은 정보를 얻어내었을 텐데. 

하지만 그는 왜 자신들에게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던 것일까? 



“너희들이야말로 우혁이한테 들은 거 없어?” 



진형우가 물었다. 하지만 유인, 호두, 희웅은 고개를 저어 보인다. 그런 그들을 보며 신이가 한마디 했다. 



“정보 따윈 필요 없어. 상대가 누가 되든 간에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싸우면 되는 거야. 난 그딴 게 없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어.” 



그래. 그 녀석한테 약속했으니까. 

신이는 생각했다. 아이들 모두 신이의 말에 공감이 갔는지 심오한 표정을 저마다 지어 보인다. 



“다음, 쓰래빠의 김희웅씨 나와 주세요.” 



드디어 쓰래빠의 이름이 불리었다. 희웅이 앞으로 걸어간다. 볼 하나를 끄집어내는 희웅을 보는 아이들에게 진형우가 얘기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정보 중 이것만은 확실해. 이 대전에서 진짜 주의해야 할 인물은 바로 이우혁이야.” 



진형우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우혁을 응시했다. 구제파의 근육맨 제갈량과 함께 나갔던 우혁이 혼자서 들어왔다. 

진형우를 보자 손을 들어 보인다. 



“올해의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지.” 



신이가 그 말을 듣고서 살짝 웃음을 띠며 앞으로 나간다. 이제 자신의 차례이기 때문이다. 

출전자들이 번호를 하나씩 뽑을 때마다 관계자들 중 다른 한 명이 컴퓨터에 순서를 입력해 나간다. 

그리고 잠시 후, 장내의 스크린에 토너먼트 예선전의 대진표가 떠올랐다. 



[강호배] 제5회 슈퍼 파이터 대전(Super Fights Tournament) - 참가조직 총12팀, 출전자 수 총28명. 


[지금부터 제5회 슈퍼 파이터 대전을 시작하겠습니다!] 

관중들의 환호성과 함께 드디어 예선전이 시작되었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52 





“와아아아아!” 



링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고 예선 첫 번째 선수인 희웅과 방구만이 링 위로 올라왔다. 그러자 관중들이 흥분에 찬 환성을 질렀다. 

연개소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희웅을 주목했다. 그녀의 눈에 희웅은 상대선수를 마주 하며 허리를 숙여 예의를 따지는 것이 

컨디션은 좋아보였다. 그에 비해 상대선수는 거만하게 자신보다 어린 사람의 인사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고만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의 소개가 끝난 것은 방금 전이었고 이제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만이 남았다. 



[슈퍼 파이터 대전! 예선 그 첫 번째 경기! 쓰래빠의 김희웅(19)VS대파의 방구만(28). 과연 첫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땡땡땡! 



[네에-! 드디어 경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자의 굵은 목소리와 함께 시작종이 울렸다. 탐색전에 들어간 듯 희웅의 주변을 빙빙 도는 방구만. 희웅은 제자리에 선체 

눈동자로 그를 따라가고 있다. 희웅의 겉모습은 관중들이 보기엔 신중하고 태연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희웅은 지금 온 신경을 곤두세운 체 방구만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쏘아보는 방구만. 남자의 눈은 맹수와도 같다. 

언제 행동을 개시할지 모른다. 희웅은 그때를 잘 노려 한방에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구만은 좀처럼 공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돌기만 할뿐이다. 희웅은 상대가 언제 공격해올지 모를 바에 차라리 상대가 들어올 수 있겠금 덫을 놓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방구만이 자신의 뒤에 섰을 때 눈을 감았다. 아니 감은 척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방구만은 드디어 찾아낸 희웅의 빈틈을 

파고들며 주먹을 날렸다. 희웅의 함정에 빠져든 것이다. 눈을 뜬 희웅은 방구만이 더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휘익-! 

상대의 주먹소리가 들리자 희웅은 몸을 틀어 왼손 날로 방구만의 목을 쳤다. 그에 주먹을 멈추고서 뒤로 주춤하는 방구만이다. 

두 손으로 목을 감싼 뒤 고통에 얼굴을 찌푸린다. 희웅이 제대로 뒤로돌아 방구만을 보았다. 방구만 또한 계속 목만 가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침을 삼킨 뒤 방어자세를 취한다. 



[네! 강희웅 선수, 계속 걸어 나가고 있습니다. 공격을 할 건가요?] 



사회자의 말처럼 희웅은 방구만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빛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기선제압에서 이미 진 방구만은 방어자세를 취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경기가 시작된 지 아직 5분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희웅은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걸 할 생각이었다. 



“아프셨어요? 죄송해요. 막는 다는 게 그만 치고 말았네요.” 



제자리에 멈춰선 희웅이 방구만에게 말했다. 방구만은 뒷걸음질을 멈추고 희웅을 경계했다. 



“우리 시간 오래 끌지 말고 빨리 끝내면 안 될까요?” 


“뭐‥?” 


“어차피 그쪽이 질 텐데 괜히 힘 빼지 말자고요.” 



방구만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지고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자신보다 10년은 어린 녀석이 깝죽되는 꼴을 보자니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방구만은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방어자세에서 공격자세로 바꾼다.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할 소리다. 이 애송아.” 



희웅에게 달려들어 주먹과 발차기를 맹렬하게 퍼붓기 시작한다. 희웅은 정신을 집중하고서 그의 흐름을 읽어 내려갔다. 

머리를 숙여 주먹을 피하고 곧장 날아오는 다리는 탄탄한 팔로 방어를 하였다. 퍽! 퍼벅! 하지만 방구만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희웅은 방어를 늦추지 않는다. 타악! 방어를 하며 뒷걸음치던 희웅이 어느새 코너로 몰리게 되었다. 이를 놓칠 새라 방구만은 주먹을 뻗었고, 

희웅은 그 주먹의 아래로 내려가 재빨리 뒤로 빠진다. 그리고 방구만이 상황을 파악하는 짧은 시간에 방구만의 등 뒤로 나온 희웅이 

그의 목과 팔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앗! 잡았습니다! 김희웅 선수 언제 뒤로 빠진 거죠? 엄청 빠르군요!] 



상황을 지켜보던 사회자가 흥분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방구만은 희웅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섰다. 

하지만 그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상대를 잘못 만나신 것 같네요. 이제 그만 끝을 내죠?” 



희웅이 방구만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승리를 예감하는 희웅과 달리 분하기만 한 방구만이다. 



“웃기지마라. 내가 네까짓 놈한테 질 것 같으냐? 어린놈들이 주먹 좀 쓴답시고 

이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부터 난 마음에 안 들었다. 특히, 쓰래빠 같은 조직이 제일!” 


“죄송하지만 전 이딴 쓰레기 같은 세계에 관심은 없습니다. 제가 이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오직 하나. 

죽이고 싶은 놈이 있어서입니다.” 



희웅의 눈매가 어둡게 바뀌고 방구만을 붙잡고 있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죽이고 싶은‥놈?” 


“그렇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이쯤에서 물러서주십시오.” 


“읏. 헛소리 마라. 난 반드시 이긴.” 



파앗! 방구만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짐과 동시에 희웅은 손을 펴 방구만의 목을 쳤다. 



“커헉! 컥!” 



그에 신음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는 방구만이다. 희웅은 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었다. 방구만은 팔이 자유로워지자 

희웅에게 맞은 목을 움켜쥐며 몹시 괴로워했다. 방구만은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방구만 선수! 쓰러졌습니다! 시합 불가능인가요?!] 



사회자의 고함소리가 귓속을 파고든다. 정신은 온전했지만 도저히 일어 설 수가 없었다. 심판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방구만을 살핀다. 심판은 더 이상 시합을 진행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삐이익-! 휘슬을 힘껏 불며 오른팔을 들었다. 

그리고 희웅을 가리킨다. 희웅이 이긴 것이다. 



[방구만 선수 시합 불가능! 예선 1회전 우승자는 쓰래빠의 김희웅 선수입니다!] 


“와아아아-!!”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관중들은 환호성을 질러대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기쁜 사람들은 쓰래빠였고 

그 중에서도 연개소리가 가장 기뻐했다. 



“호구치기로 목을 정확하게 치다니 저 녀석 제법인데? 게다가 상대가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 호구치기를 했어.” 



얼굴이 밝아진 개소리가 방금 전 희웅의 공격을 떠올리며 말했다. 

호구치기. 합기도의 기술 용어로 네 손가락을 가지런히 모으고 엄지손가락 하나만 약간 둥그렇게 벌려 공격을 하는 것으로 

팔에 체중을 실어 상대의 울대에 꽂으면 상대는 곧바로 앞이나 뒤로 쓰러지게 된다. 그리고 상대가 말을 하고 있을 때 치게 되면 

상당한 효과를 볼 수가 있다. 그것은 말을 할 때에는 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있었던 희웅은 방구만에게 

일부러 말을 건네어 그가 말을 하게끔 유도한 것이다. 



“목을 보지 않고 뒤에서 정확히 호구치기를 하다니‥ 놀라운데요?” 



희웅을 가르쳤던 민규 또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기실로 들어가는 희웅을 보며 개소리가 생각한다. 



‘수고 했어, 희웅아.’ 





********* 





다음날. 어제 치러졌던 예선 열네 경기 중 다섯 경기를 치렀던 우리 조직은 모든 승리를 거머쥐었다. 

모두들 예상 밖으로 손쉽게 승리를 한 것이다. 그중 가장 짧은 시간에 경기를 끝낸 사람은 바로 우혁이다. 

상대의 기권 패로 얼떨결에 우승을 했다. 무슨 일인지 우혁이의 상대선수였던 구제파의 제갈량이 링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한마디로 우혁이의 부전승이다. 이제야말로 우혁이의 실력을 볼 수 있나 싶었더니만. 쳇, 결국 오늘을 기약하게 될 줄이야. 


오늘은 본선이니만큼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을 찾았다. 본선 제1경기는 유인이(19)와 미끄럼파의 손오준(26)이다. 

예정대로라면 희웅이와 배고파의 찬한기가 붙어야했지만 배고파가 늦게 온 관계로 순서를 바꾼 것이다. 



[네,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사회자의 말대로 양쪽 터널에서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나는 동편을 응시했다. 그쪽에서 유인이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습을 드러낸 유인이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뭔가가 깨름칙해 보이는 얼굴이다. 드디어 링 위로 오른 두 사람. 

손오준은 180cm가 훨씬 넘어 보이는 장신이었다. 땡땡땡. 종이 울렸다.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시합에 집중했다. 

3m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유인이와 손오준. 대형 스크린에 비친 유인이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손오준은 인상도 그리 험악한 편도 아니고 살기 또한 띠지 않았는데 왜 저토록 녀석이 긴장하고 있는 것일까? 유인이 답지 않다. 



“너랑 무대(링)위에 서다니 정말 기뻥. 나 어젯밤에 널 생각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엉♡” 


“윽.” 



손오준의 입이 움직이는 듯 했지만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유인이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는 거다. 



“너 쓰래빠에 있지? 거기에 있는 남자들은 모두 멋지던데‥하지만 난 네가 제일 마음에 들어. 

진형우 만큼이나. 훗♡ 너도 내가 마음에 들지?” 


“‥별로.” 


“어머! 그래? 하지만 너도 곧 내가 마음에 들 거야. 나한테 반하지 않은 남자는 없거든. 우리 보스도 나와의 밤을 가장 좋아하니까♡” 



유인이가 손을 들었다. 심판을 부르는 포즈였다. 나는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링 위를 뚫어져라 보았다. 심판이 유인이를 본다. 



“다른 사람이랑 바꿔줘요. 쟤랑 싸우기 싫어.” 



엥? 유인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그렇게 저 남자가 무서운 거야? 도대체 손오준에게 어떤 어마어마한 힘이 숨어있길래 

유인이가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유인이가 경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곧 기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심판 또한 내가 한 생각을 유인이에게 알려 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기권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되는 건가?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게이는 싫거든요.” 



유인이의 의사를 건네받은 심판이 휘슬을 입에 물려고 한다. 아악! 안돼!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건 싫은걸. 

그런데 그때, 유인이에게로 달려가는 손오준이 아닌가! 심판이 놀라 휘슬을 입에서 놓쳐버렸다. 



“그렇게는 안돼! 난 너의 그 고운 피부에 상처를 내고 싶거든! 이리 와!♡” 



손오준이 뻗은 주먹은 유인이의 얼굴을 노리고 있었다. 유인이는 상대의 주먹이 가까이 날아오는 것을 보자 팔을 뻗었다. 

유인이의 피부에 닿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붙잡혀버린 손오준의 주먹. 유인이도 얼떨결에 잡은 것 같았다. 



“훗, 내 손목을 잡다니‥ 역시 너도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거야.♡” 


“진짜 싫다아.” 



뻑! 유인이는 손오준의 팔을 당겨 그가 자신과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살짝 굽히는 가 싶더니 

이내 죽 뻗으며 탄력을 이용해 박치기를 했다. 정확히 손오준의 턱을 받았다. 쿵! 뒤로 쓰러진 손오준. 움직이지 않는다. 



“기절한 것 같은데요?” 



민규가 말했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심판이 뻗어있는 손오준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휘슬을 입에 물고서 ‘삐이익-!’불며 

손끝으로 유인이를 가리킨다. 



[기절한건가요?‥네! 시합불가능. 본선 1회전은 신유인 선수의 승리입니다!] 



상대의 턱을 정확히 받으면 기절한다는 것을 유인이가 새삼 일깨워주었다. 그런데 손오준은 가만히 있었더라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왜 덤벼든 것일까? 뭐,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말이다. 유인이가 링에서 내려가고 기절한 손오준은 

관계자 2명이 들것에 싣고 간다. 다음 시합은 가장 염려되는 희웅이의 싸움이다. 상대가 희웅이 녀석이 증오하는 배고파인 만큼 

걱정되지가 않을 수 없다. 



[본선 두 번째 경기는 쓰래빠의 김희웅(19)VS배고파의 찬한기(31). 기대되는 경기입니다. 네,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사회자가 침을 튀기며 소리치는 대로 희웅이와 찬한기의 모습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나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아래를 보았다. 

온 몸에 힘이 실려 있는 희웅이다. 상대선수보다 제일 먼저 링에 올랐다. 스크린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 본다. 

희웅이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눈빛이 살아있다. 어느 한 곳을 바라보는 희웅이다. 내가 있는 곳과 조금 떨어진 곳이다. 

아마도 배고파가 모여 앉아있는 좌석인 것 같았다. 김빈곤을 노려보고 있다. 



“이 시합은 보나마나 희웅이의 승리야.” 



내가 말했다. 그러자 형님이 보지 않고 어떻게 아냐는 태기다. 어떻게 아냐면‥. 

배고파의 찬한기에게는 이 시합에서 반드시 이겨야 될 목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웅이에겐 복수라는 뚜렷하고도 

무시무시한 목적이 있다. 게다가 녀석은 살기까지 띠고 있었다. 땡땡땡! 시작종이 울림과 동시에 바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뒷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희웅이다. 짧은 막대기. 태기의 여의봉이었다. 



“빌려달라기에 큰 맘 먹고 빌려줬어요.” 



묻기도 전에 태기가 말했다. 희웅이는 여의봉의 단추를 눌러 길어지게 만들었다. 푸슉-. 길어진 여의봉을 고쳐 잡는 희웅이다. 

상대는 검은 장갑만 끼고 있을 뿐 무기처럼 보이는 것은 들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저 장갑이 왠지 모르게 은근히 신경에 쓰인다. 

희웅이의 주위를 돌기 시작하는 찬한기. 너무 말라 얼굴의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다. 희웅이는 찬한기가 탐색전 따위를 할 시간조차 

주지 않으며 단순무식 할 정도로 공격을 퍼부으며 들어갔다. 양손으로 여의봉을 잡고서 속도를 내며 찬한기의 상반신을 찌르는 희웅이다. 

너무 한 곳만을 노려 여의봉을 잡은 만큼 다음 공격으로 바꾸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희웅이 답지 않게 앞뒤 가리지 않고 

공격을 한 것이다. 찬한기는 자신의 가슴을 찔러오는 희웅이의 여의봉을 피해 오른쪽으로 잽싸게 빠졌다. 그리고는 곧장 희웅이의 

옆구리를 노리며 팔꿈치를 넣으려 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찬한기의 머리통으로 여의봉이 날아온 것이다. 

희웅이는 이 상황까지 생각을 했었는지 여의봉의 위쪽을 잡은 왼손을 놓아버리며 오른손의 스냅을 이용해 여의봉을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까진 생각지 못했던 찬한기는 여의봉에 머리를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머리를 비빌 틈도 없이 곧장 찬한기에게 공격을 넣은 

희웅이다. 눈빛은 강렬했고 입은 꾹 다물고 있었다. 찬한기는 바닥으로 치고 들어오는 여의봉을 피해 엉덩이를 뒤로 끌며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앞으로 굴러 간신히 일어서는데 성공한 찬한기. 하지만 눈앞으로 날아오는 여의봉을 너무 늦게 발견하였다. 

푸악! 희웅이의 여의봉은 찬한기의 왼쪽 눈을 찔렀다. 아슬아슬하게 눈 중앙을 피한 여의봉. 고의는 아니었던 것 같다. 

희웅이는 정말 눈을 노렸고 실수로 그만 빗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비록 빗나갔다 하더라도 찬한기에게는 고통이었다. 

왼쪽 눈을 가리는 찬한기다. 



“이‥이 새끼가.” 



자신의 손바닥에 묻어난 피를 보며 찬한기는 흥분하는 듯 했다. 가죽장갑을 낀 주먹을 꽈악 쥐어 보인다. 



“난 너희들은 살려 둘 수가 없어.” 



희웅이가 뭐라고 말한다. 찬한기가 주먹을 날렸다. 희웅이는 그 주먹을 피했지만 이내 곧장 날아오는 다리에 옆구리를 맞고 말았다. 

쓰러질 듯 비틀거렸지만 이내 균형을 잡고 섰다. 다시 공격을 해오는 찬한기다. 희웅이는 여의봉의 길이를 조절하여 이를 놓칠 새라 

여의봉으로 맹공격을 퍼부었고 찬한기는 저항 한번 하지 못한 체 맞고만 있었다. 어느새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 내렸고 

희웅이의 머리에서는 땀이 흘렀다. 공격을 받는 자와 공격을 하는 자였다. 희웅이는 지친 건지 한 곳에서 숨을 골랐다. 

심판은 찬한기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피었다. 시합이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찬한기는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어내며 힘겹게 일어섰다. 



“죽여 버리겠어.” 



나지막이 말을 내뱉는 찬한기가 스크린에 잡혔다. 



[찬한기 선수 너무 무리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회자의 말 속에도 약간의 걱정스러움이 묻어있었다. 어쨌든 시합은 계속 되었다. 희웅이는 일어선 찬한기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흐아아앗!” 



기합을 넣으며 주먹을 내지르던 찬한기가 희웅이와 가까워졌다. 희웅이는 여의봉을 바로 쥐었다. 가까워지는 찬한기의 주먹을 

여의봉으로 막았다. 하지만 찬한기의 중점적인 공격은 바로 발차기였고 희웅이는 그만 보지 못해 찬한기의 다리에 맞아 

멀찍이 날아가 버린다. 



“희웅아!”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웅이는 여의봉을 세우고 몸을 가누었다. 하지만 찬한기는 그 틈을 이용해 

희웅이에게 달려들었다. 팔을 뻗었지만 주먹을 쥐지는 않았다. 희웅이와 그의 손이 가까워졌을 때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장갑을 낀 손가락 사이사이에서 날카로운 칼날이 튀어나왔다. 위험해! 다행이 희웅이도 눈치를 챈 것 같았다. 

하지만 완벽히 피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푸직! 희웅이의 오른팔에 꽂힌 네 개의 칼. 찬한기가 팔을 들자 칼은 희웅이의 팔에서 

뽑아져 나왔다. 희웅이는 팔을 움켜잡음과 동시에 다리를 뻗었다. 찬한기는 살짝 뒤로 뛰어 희웅이의 다리를 피한다. 희웅이가 일어섰다. 

오른팔을 움켜 쥔 손이 피로 얼룩졌다. 손을 떼고 여의봉을 잡는 희웅이다. 



“역시‥너무 싫어.” 



희웅이의 눈빛이 더욱 더 굳어졌다. 여의봉을 앞으로 뻗어 달려 나간다. 찬한기 또한 공격자세를 취하며 달려간다. 

다른 한 손에서도 칼날이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살기를 띠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서로의 거리가 좁혀져 오고 찬한기가 손을 뻗었다. 

이때 희웅이가 여의봉을 세로로 세우며 힘껏 뛰어 오른다. 우리 모두는 놀라움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의봉 끝자락에 매달린 희웅이가 

찬한기의 등 뒤로 잽싸게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여의봉을 힘껏 뻗는다. 

푸악! 여의봉이 찬한기의 등에 꽂혀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나무가 아닌 창이 꽂힌 기분. 아니나 다를까 앞으로 주저앉아버리는 

찬한기였다. 희웅이는 여의봉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 끝엔 뾰족한 칼날이 튀어나와있었다. 나는 태기를 보았다. 



“웬만하면 저도 사용 안하는 버튼인데. 하하.” 



당혹스러워 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여의봉의 끝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찬한기가 쓰러진 바닥은 피로 물들어가고 있다. 

심판이 그의 곁으로 다가간다. 선수의 상태를 확인하는 심판. 곧 휘슬을 불었다. 



[시합 불가능! 쓰래빠의 김희웅 선수 승!] 



희웅이가 이겼다. 팔을 움켜잡으며 링에서 내려가는 희웅이.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희웅이에게 가기 위해서다.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선수 대기실로 향했고 그러는 사이 본선 3회전이 시작되었다. 


진형우와 구제파, 민형재의 대결이‥. 







※전국 고교 일진협회※ 






♡53 





[본선 세 번째 경기는 우승 후보 강호파와 구제파의 경기입니다. 과연 강호파가 승리를 할까요? 

아님, 작년 우승자였던 구제파가 승리를 할까요? 네-! 선수들 입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대기실로 왔을 때, TV에서는 진형우와 구제파, 민영재의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희웅이의 팔은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의사가 말했다. 그래도 많이 아플만한데 희웅이는 오히려 싱글벙글이었다. 배고파에게 이긴 것에 만족을 하는 것이다. 

어쨌든 희웅이의 싸움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뭐, 간이 콩알만 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희웅이는 지금 의료실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다. 



“희웅이는 괘안나?” 


“응. 칼이 깊게 꽂히지 않아서 걱정할 건 없대.” 



호두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우리는 TV와 제일 가까운 벤치에 앉아있다. 

링 위에서는 진형우와 민영재가 시작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누가 이길 것 같노?” 



호두가 딱히 대상을 정하지 않은 채 질문을 했다. 강호파와 구제파라‥. 하지만 경기에서는 조직의 힘보다는 개인의 역량이 더 중요하다. 



“난 잘 모르겠어. 하지만 승부가 꽤 길어질 것 같아.” 



진형우가 싸우는 것은 한 번 본적이 있었지만 민영재의 싸움은 본적이 없어 아리송한 대답을 했다. 

그렇지만 희웅이 때처럼 길어질 거라는 것은 확신했다. 오른쪽 끝에 앉아있던 우혁이가 내 말에 토를 달았다. 



“오래 걸린다고? 과연, 그럴까?”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물었다. 



“오늘 시합 중 가장 짧은 시합이 될 거야.” 



단호한 우혁이의 말에 모두들 TV를 응시했다. 땡땡땡! TV스피커를 통해 종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된 것이다. 

민영재의 손에는 쇠파이프가 들려 있었다. 그에 비해 진형우는 맨손이다. 



“이야아아!” 



기합소리를 우렁차게 내며 달려가는 민영재다. 하지만 진형우는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쇠파이프를 들고 뛰어오는 민영재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3m, 2m, 1m. 뻐억! 잠시 화면이 정지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쿠궁! 바닥에 쓰러진 것은 진형우가 아닌 민영재였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일어날 줄을 몰랐다. 기절한 것 같았다. 



“봤어?” 



유인이가 말을 꺼냈다. 호두와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진형우는 거리가 가까워진 민영재에게 발차기를 날렸다. 

그리고 그 발끝은 정확하게 민영재의 미간 사이를 찔렀다. 전과 같은 급소를 치는 수법이었다. 



[시합 끝! 진형우 선수의 완승입니다!] 



사회자의 고함소리와 함께 시합은 끝이 났다. 우혁이의 말이 딱 들어맞은 것이다. 

스윽-. 내 옆자리가 비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는 호두다. 다음은 호두의 차례였다. 



“벌써 내네. 가볼게.” 


“같이 가. 나도 대기실에 오래 있으면 안 되니까.” 



난 나가려는 호두를 따라가기 위해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신이의 옆을 지날 때 나지막이 속삭였다. 



“관중석에서 지켜볼게.” 


“그래.” 





************ 





관중석으로 돌아왔을 때 다른 길로 갔던 호두가 이미 링 위에 있었다. 상대는 대파의 공룡(29)이었다. 

본명은 공순경. 공룡이라는 것은 아마도 저 거대한 몸집 때문에 생겨난 별명 같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종이 울리자마자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 두 사람. 공룡이 먼저 선제공격을 했다. 호두는 날아오는 주먹을 막았지만 

공룡의 무릎에 복부를 맞았다. 하지만 공룡은 호두가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다음 공격을 퍼부었다. 호두는 양팔로 그의 공격을 막았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펀치에 맞고 쓰러진 호두를 번쩍 들어올리는 공룡. 휘이익-! 아니나 다를까, 호두를 바닥에 내동댕이 쳐버린다. 


쿠웅! 



“호두야!” 



난 호두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쓰러진 호두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퉷! 힘 한번 졸라 무식하게 세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호두가 공룡을 노려보았다. 공룡은 콧방귀만 껴댈 뿐이다. 



“킥, 내가 너 같은 꼬맹이한테 질 것 같으냐?” 



목과 손가락의 근육을 풀며 호두에게 다가갔다. 호두는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공격을 시작하는 공룡. 호두도 예외는 아니다. 

두 사람은 주먹을 오고 갔다. 공룡이 오른손을 일직선으로 공격을 해올 때 호두는 그 주먹을 막으며 몸을 오른쪽으로 약간 틀었다. 

그리고는 밑쪽 정강이로 상대의 발목 안쪽 뼈의 급소를 강력하게 가격했다. 그러자 공룡은 앞으로 넘어졌다. 

왼쪽 발목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한다. 탈골된 것 같다. 여기서 포기를 하는 것일까? 나는 시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심판이 공룡에게 다가갔다. 무슨 말을 건네는 심판이다. 공룡은 한 손을 들더니 힘겹게 일어선다. 왼발을 절뚝거리는 공룡. 

역시 탈골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합은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호두의 승리이다. 호두는 공룡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호두가 오자 주먹을 날리는 공룡이었다. 하지만 발을 뗄 수 없는 그의 주먹은 헛방으로 끝나기에 충분했다. 

호두는 가볍게 그의 주먹을 피한 뒤 다리를 들어 그의 머리를 겨냥했다. 아니 그의 귀였다. 퍼억! 귀에 심한 충격을 받은 공룡은 

맞은 귀의 반대편으로 넘어졌다. 삐이익-! 



[공룡 선수 시합 불가능! 승자는 쓰래빠의 강호두 선수!] 


“와아아아!!” 



주변에 앉아있던 부하들이 좋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후우, 이것으로 세 명 모두 본선을 통과하였다. 이제 남은 사람은 신이와 우혁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본선 여섯 번째 경기의 선수였던 신이도 아주 싱겁게 경기를 끝내버렸다. 상대는 복고파의 강제수. 

등판에 세 마리의 용 문신을 한 남자였다.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강제수는 신이의 손가락에 양쪽 눈을 찔려 백기를 들고 말았다. 

신이 또한 진형우처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승리한 것이다. 다음은 모든 이가 손꼽아 기다렸던 마지막 시합, 우혁이가 출전하는 

경기였다. 다른 조직에 있던 사람들은 보나마나 우혁이가 이길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렇게 대단한 녀석인가? 

하긴, 예선전 때도 이상하기는 했다. 다른 조직도 아닌 구제파의 한 사람인 제갈량이 왜 링에도 오르지 않고 기권을 한 것이었을까? 

분명 사연이 있었을 텐데 알 수가 없다. 



[네에! 이우혁 선수 등장했습니다!!] 


“와아아!!!” 

“휘이익!” 



괴성을 지르는 사람들과 휘파람까지 불며 환영하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우혁이의 등장에 들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우혁이는 

관심도 없어 보인다. 묵묵히 링에 오르는 우혁이다. 상대선수인 구제파의 하시오도 올랐다. 



“이우혁, 제갈량이 진 빚은 내가 대신 갚겠다.” 


“빚? 난 돈 빌려준 적 없는 것 같은데.” 


“시치미 떼는 거냐? 시합이 시작되기 전 네 놈이 제갈량의 팔과 다리를 부러뜨린 걸 내가 다 알고 있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하고 있는 하시오다.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궁금하기만 하다. 



“아! 기억났다. 그거야, 그 근육 맨이 자꾸 까부니까.” 


“이 자식‥.” 


“역시 병신 같이 근육만 길렀지, 실력은 형편없더라고. 우리 형님한테도 지고 말거야. 물론‥너도.” 


“주, 죽여 버리겠어!!” 



시작종이 울리기도 전에 공격을 시작하는 하시오였다. 상대의 주먹과 발차기를 이리저리 피하는 우혁이. 



“아아! 이봐, 아직 종도 안 쳤다고. 이러면 안돼.” 


“개새꺄, 닥치고 덤벼!!” 



하시오는 너무 흥분한 상태였다. 도대체 우혁이 녀석이 뭘 어쨌 길래 저렇게 열을 내는 것일까? 

말릴 거라고 생각했던 심판은 말리기는커녕 종을 울렸다. 시작이 된 것이다. 땡땡땡! 



“그래, 종이 울려야 시작이지.” 



종이 울림과 동시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파악! 쿵!! 

앞차기를 해오는 하시오의 몸 우측으로 우혁이의 왼발이 대각선을 그리며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정강이로 하시오의 왼쪽 대퇴부를 강타했다. 이에 대퇴부에 마비증상이 온 하시오는 고목나무가 쓰러지듯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대퇴부의 충격부위가 뒤쪽인가? 옆쪽인가? 앞쪽인가? 에 따라서 충격의 강도는 매우 달라지게 된다. 

그야말로 앞쪽의 대퇴 사두근은 급소중의 급소라고 할 수 있다.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봐, 내 말이 맞잖아. 넌 내 상대가 안돼.” 



[‥아‥끝난 건가요‥? 네‥이우혁 선수의 승리입니다!!] 



관중석은 모두 열광했다. 본선 승리자 모두 우혁이와 못지않은 경기내용을 보여 왔지만 관중들이 이 정도로 흥분하지는 않았었다. 

조직원들이 인정하는 우혁이. 어쩌면 그가 이번 대전의 우승자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예감한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54 




두 번째 본선은 이틀 후로 미루어졌다. 부상당한 선수들을 위한 배려차원에서 이다. 우리 쓰래빠에서는 희웅이만 부상을 입었을 뿐 

나머지 네 사람은 외상을 입지 않았다. 첫 번째 본선을 치룬 다음날 밤,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갈비 집에서 회식을 하였다. 

음, 회식이라고 하기엔 좀 모하지만‥그래, 그냥 외식이라고 하자. 지글지글 익고 있는 고기가 만든 맛좋은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온다. 

허기가 갈수록 심하게 진다. 



“너희들 정말 멋졌다! 다시 봤다니까?” 



대전에 출전했던 다섯 사람에게 소주를 따라주며 태기가 말했다. 아이들이 무사히 승리를 한 것을 어쩌면 그들을 가르쳤던 

태기와 민규가 가장 기뻐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난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우혁이를 보았다. 고기가 빨리 익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불판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수고 했어.” 



우혁이에게 말을 건네었다. 그러자 불판에서 나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그다. 씨-익 웃어 보인다. 



“응.” 


“얌마, 너 인기 많더라?” 



옆에서 보고 있던 태기가 우혁이의 술잔에 소주를 따르며 넌지시 말을 건다. 우혁이는 자신의 술잔을 채워가는 소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냥 조금. 귀찮아 죽겠어.”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으며 우혁이가 말했다. 정말 알 수 없는 녀석이다. 마음을 열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의 주위를 

베일로 쳐놓은 남자. 아니 그것보다는 이 녀석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없다. 

‥이 아이는 우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난‥. 



“형님, 왜 그렇게 꽁해있어?” 



내 앞으로 빈 술잔을 내미는 우혁이다. 깜짝 놀랐다. 나는 술잔을 받아들었다. 



“내가 꽁해 있을 이유가 없잖아.” 


“고민 있어 보이는데?” 


“고민‥이야. 있지.” 



내 말을 근처에 앉아있던 신이도 들었는지 나를 본다. 시선이 느껴졌다. 



“역시! 무슨 고민인데? 나한테 말해봐, 형님.” 



방금 건네준 술잔에 우혁이가 술을 따라주었다. 술잔이 점점 무거워지고 차가워진다. 나는 그 술을 한번에 원샷하였다. 

코끝이 싸해지는 기분이다. 



“너야말로 말해봐.” 


“응? 뭘?” 



어리둥절해 하는 우혁이다. 



“난 너에 대해서 알고 싶어.” 



순간, 방안의 공기가 멈춰버렸다. 일제히 내 얼굴에 꽂힌 시선들. 

그리고 젓가락을 떨어뜨리는 사람, 입안의 고기를 흘리는 사람, 술을 마시다 뱉어내는 사람, 고기를 집던 동작을 정지해버리는 사람까지. 

왜 다들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혀, 형님‥. 좋아! 방 하나 잡아놓을 테니까 그리로 와.” 



이우혁, 이 자식이 지금 뭔 헛소리야?! 그럼 혹시 다들 내가 한 말을 그렇게 해석한거였어? 으윽, 만약 지금 여기에 있는 젓가락이 

나무젓가락이었다면 다 부러트렸을 텐데. 뭐라도 물어뜯고 싶은 심정이다. 



“야!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도대체 넌 누구냐?!” 



결국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여전히 심각할 줄을 모르는 우혁이 녀석이다. 



“누구긴, 형님 부하 이우혁이지.” 



후-, 됐다. 말을 말자. 갑자기 너에 대해 알고 싶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으니까. 나는 소주병을 들어 술잔에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는 꼴깍! 모두 마셨다. 



“지금 그 얘기가 아니잖아. 나도 알고 싶어. 넌 도대체 누구냐?” 



내 마음을 신이가 헤아렸는지 우혁이에게 물었다. 그에 입을 다물고 가만히 침묵하는 우혁이다. 이어, 호두가 말했다. 



“그래, 니 소개 좀 제대로 해봐라. 나는 이해 안되는 게 너무 많다. 니 강호파에 있을 때 정보망이었다매? 

그리고 왜 배신한 니를 강호파에서 가만히 냅두는 건데?” 


“나도 그 생각하느라 잠 못 잔적 많아.” 



유인이가 맞장구를 쳤다. 유인이도 은근히 궁금하기는 했나 보다. 우혁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호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형님 때문에 널 우리 조직에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나또한 널 조직원으로 인정한 것은 아니다.” 



조용히 있던 민규까지 합세했다. 왜 이렇게들 동요하는 걸까?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우혁이의 정체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난 과연 우혁이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지켜보았다.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더니 이내 들이켜 버리는 우혁이었다. 

손등으로 입을 닦은 뒤 녀석이 말한다. 



“너희들 지금‥.” 



눈에 힘이 들어갔다. 혹시 기분이라도 상한 것일까? 하긴, 한 사람을 상대로 여러 사람이 몰아붙였으니‥. 

하지만 이번 역시 괜한 걱정이었다. 



“너희들 지금 진실게임하자는 거지? 역시 사람이 많이 모이면 게임이 최고지!” 



쿠당. 황당해서 뒤로 넘어갈 뻔 했다. 맞아. 우혁이는 이런 녀석이었지. 모두들 포기를 한건지 밥 먹는 데에 열중하였다. 



“한 사람당 질문은 하나씩.” 



우혁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녀석에게로 집중되었다. 우혁이의 표정은 밝았다.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보라고. 성심성의껏 대답해줄게. 히이-.” 



우혁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인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술을 많이 마셨는지 두 볼에 홍조가 띠어있었다. 우혁이가 유인이를 본다. 



“정보망이면 나에 대해서도 잘 알아?” 


“임마! 그런 걸 물으면 어떡해?!” 



신이가 화를 내는 것처럼 정말 도움이 안돼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유인이는 자기 할말은 다 했다. 



“내가 제일 궁금한 거였어.” 



우리가 졌다. 설마 잠을 못 잤다는 것도 그 말도 안돼는 궁금증 때문이었니? 어쨌든 질문은 질문! 우혁이가 답을 해주었다. 



“너희 형, 다리 수술 잘 끝났다며? 그리고 1주일 전에 스스로 일어섰고 3일 전에 첫걸음을 떼었어. 맞지? 하여튼 축하해.” 


“우와-!” 



맞는 지 유인이가 감탄을 했다. 뭐야? 나도 모르는 사실이었는데‥. 쳇, 이거 은근히 기분 꿀꿀한 걸? 

우혁이는 다른 사람들에 관한 것까지 죄다 말을 해주었다. 그에 모두가 놀랐다. 



“형님은 신이를 조직원으로 만들기 위해 신이와 마지막 승부를 펼쳤어. 장소는 뿅뿅 오락실이었고 

승부는 3판 2승제로 처음엔 테트리스를 했어. 테트리스에서는 신이가 이겼고 두 번째는 철권으로 겨뤘지. 

세 번째는 노래대결. 두 번째, 세 번째 모두 형님이 이겼어.” 



헉! 그걸 어떻게? 아는 사람은 나와 신이 뿐인데. 이 녀석도 그 곳에 있었나? 



“형님, 그게 정말입니까? 그때 싸움으로 승부를 내신게 아니었어요?” 



태기가 물었다. 이런 젠장. 쪽팔려서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나는 부끄러움에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였다. 



“그리고 신이는 그때 노래대결에서 0점을 받았지. 참고로 형님은 60점.” 


“하하하, 그게 정말이가? 어떻게 불렀기에 빵점이 다 나오노?” 



모두들 배를 잡고 웃어대었다. 신이의 얼굴이 초고추장마냥 붉게 달아올랐다. 우혁이를 노려본다. 

하지만 우혁이의 입은 닫힐 줄을 몰랐다. 



“태기 형이 매일 요구르트를 물마시듯 하는 건 낫지 않는 변비 때문이고 민규 형은 5일 전에 지하철을 탔다가 어떤 아줌마한테 

성추행을 당했어. 그리고 유인이는 9살 때 게이한테 3일간 유괴된 적이 있었고 희웅이는 5학년 때까지 누나 따라 여탕에 갔었어.” 



뒤이어 팔 부하들의 비밀까지 죄다 읊어대는 우혁이었다.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올 때마다 움찔거렸고 

비밀이 들통 날 때마다 입에 거품을 물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호두의 차례였다. 



“그리고 호두는.” 


“됐다! 고마 해라!” 



치사하게 우리 비밀은 껄껄대며 다 들어놓고 자기 차례가 되자 입을 막아버리는 호두다. 지나치게 화를 낸다. 

그에 우혁이는 의미 모를 미소를 띠우더니 술을 마셨다. 도대체 호두는 우혁이가 무슨 말을 할까봐 불안해하고 있는 것일까? 

짐작되는 것이 없‥기는 하나 있다. 예전에 대구에서 오토바이를 탄 호두의 친구들을 만났을 때 그 중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었다. 


‘무슨 혼자 독립영화 찍는 것도 아니고. 니는 그 버러지 같은 생각부터 고쳐먹어야 된다. 니는 니가 그 카는 게 

그 씨발년한테 용서를 비는 거라고 생각하나? 이 미친 새끼야.’ 

‘그냥 육교 위에서 확 뛰어내리지. 씨발, 그렇게 맞아가지고 언제 뒈지겠노. 죄 값 치르는 건 니가 그 년 곁으로 가는 것 밖에 없다. 

니는 그렇게 생각 안하나? 왜? 또 뒤지는 건 무섭나?’ 


그때 호두는 폭발할 듯한 자신의 감정을 애써 추스렸다. 죽었다던 그 여자는 호두에게 어떤 존재였으며 무슨 관계였을까? 

그리고 지금 호두는 우혁이가 그 이야기를 꺼낼까봐 입을 막아버린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는 우혁이의 정보망 하나는 확실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도 질문이요. 강호파가 왜 형을 가만히 두는 거죠?” 



희웅이가 우혁이에게 물었다. 오노가 소주 8병과 함께 돼지갈비 6인분을 추가 추문했다. 



“그건 아마 사아칸도 알고 있기 때문이야.” 


“알고 있다니?” 



내가 물었다. 태기가 고기를 뒤집는다. 



“애들 몇 보내봤자 내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사아칸도 알고 있어. 형우라면 또 모르지만, 

그 자식이랑 내가 친구라는 걸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거지.” 


“아무리 너라도 몇 십 명은 무리지 않냐?” 



신이가 아니꼬운 듯 묻는다. 그에 우혁이가 생긋 웃으며 말한다. 



“그래서 여기로 들어온 거잖아. 너희들 정도면 물리칠 수 있을 거야. 형님, 지켜줄 거지? 히-죽.” 



저 뻔뻔한 미소. 하지만 미워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우혁이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진 건지 

(아무래도 아까 전 자신들의 비밀을 폭로한데 대해 정이 떨어진 것 같다.)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며 방금 전에 주문했던 술과 음식이 들어왔다. 



“진실게임 계속 안 해? 나 혼자만 대답하는 건 불공평하잖아.” 



우혁이가 한 말이다. 일리가 있다. 나는 누구에게 질문을 할까 둘러보았다. 호두가 내 눈에 띠었다. 물어볼까? 말까? 

왠지 말하기 싫어하는 눈치던데‥.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물어 볼 수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나는 용기 내어 물어보았다. 



“호두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술을 마시던 호두가 나를 본다. 진지한 내 목소리에 회식자리의 분위기가 한 층 가라앉았다. 호두가 자신의 술잔에 소주를 따른 뒤 

입안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물어봐라.” 


“그때 네 친구들이 말한 그 여자, 너랑 어떤 관계였는지 알고 싶어.” 



호두는 짐작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술을 들이켰다.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지. 호두가 입을 열었다. 



“내 소꿉친구‥내 첫사랑.” 



말끝에 쇠로된 추를 단 것처럼 무겁게 들렸다. 모두들 호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정말 좋아했었는데, 진짜 소중하게 여겼는데. 죽어버렸다. 아니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지.” 


“‥‥.” 


“하루는 둘이서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거든. 그날도 여전히 내가 까불랑거린다고 뛰노는데 

내 옆으로 차가 오고 있었나봐. 부딪혔으면 내 인생도 끝이었는데, 어떻게 살아있는 줄 아나? 킥.” 



술을 한잔 더 마시는 호두였다. 



“‥하영이가 내 구해줬다. 지가 내 떠밀고 대신 치어죽었다 아이가. 진짜 내 같은 게.” 


“됐어. 그만 해.” 



나는 호두의 말을 가로 막으며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랬었구나. 그래서 여자친구가 자기 때문에 대신 죽었다는 죄책감에서 

그렇게 맞고만 다녔던 거야. 스윽. 신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닫이문을 열고 방에서 나가는 신이. 화장실이라도 가는 것 같다.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네가 왜 불쌍하냐? 네가 죽었냐?” 



술 취한 호두의 말에 태기가 대꾸를 했다. 호두에게 고기를 먹이며 위로를 하는 태기다. 



********** 



내일모레면 펼쳐질 두 번째 본선. 세 개 경기 중 첫 번째 경기는 유인이와 희웅이의 승부이다. 우리 조직원간의 결투. 

승자가 누가 되든 상관이 없다는 얘기다. 



“너희는 대충해.”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유인이의 눈빛이 왜 저렇다냐? 마치 뭔가를 고뇌하는 표정이랄까? 

유인이가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희웅이를 보았다. 



“대충하지 마. 난 상황에 따라서 널 다치게 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너도 최선을 다 해.” 



진지한 저 모습. 끼어들 수 있는 공기가 아니다. 희웅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유인이도 이번 대전에서 우승을 욕심내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띠리링♬ 내 핸드폰에서 난 소리였다. 문자가 왔다는 알람소리. 난 핸드폰을 확인해보았다. 



- 이따 2차 갈 때는 우리 둘이 빠지자. 알았지? (신발꼬랑내) - 



신이가 보낸 것이었다. 둘이 슬쩍 빠지자고? 왜? 난 이유를 묻는 문자 한 통을 보냈다. 그러자 곧 부리나케 답장이 왔다. 



- 그냥. 할 말도 있고‥. (신발꼬랑내) - 



성의 없는 답변과 그 뒤의 줄임표는 뭘까? 나는 알겠다고 확답을 보내었다. 싫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으음, 그 표현보다는 좋았다고나 할까? 으흐흐. 앗뿔싸, 유인이랑 눈이 마주 쳤다.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리는 녀석이다. 

저녁 식사가 끝이 나고 우리는 갈비 집에서 나왔다. 달이 환하게 떠있다. 바람은 불지만 그리 시원한 바람은 아니다. 



“2차! 2차는 노래방으로 렛츠고!” 



아니나 다를까, 2차를 외치는 부하 놈들이었다. 사람들 모두 마음을 같이하며 노래방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신이에게 눈치를 주고받았다. 

먼저 행동개시를 하는 신이다. 



“으흠, 미안하지만 지금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나는 이만 빠져야 할 것 같아.” 


“뭐야? 친구보다 조직이 더 중요하다는 거냐?” 

“태기 히야, 그게 아이잖아. 조직보다 조직이 중요하나? 이거겠지, 맞제? 우혁아!” 

“미친놈. 하여간 미쳤어. 하하하. 그러니 등짝에 여드름이나 나지. 키키.” 



많이 취한 녀석들이었다. 덕분에 쉽게 빠질 수가 있을 것 같긴 하다. 신이는 나에게 한 번 더 눈치를 준 뒤 다른 길로 빠져 나갔다. 

하는 수 없이 우리끼리 가자며 손에 손을 잡고 노래방으로 향하는 쓰래빠다. 나는 더 늦기 전에 핑계를 대었다. 



“나도 빠져야 될 것 같은데? 은행에 세금 낼 게 있어서. 미안해.” 


“에엥? 세금요? 은행은 문 닫았을 건데요?” 



태기가 이의를 제기했다. 젠장, 하필 말도 안돼는 거짓말을 해버리다니. 큰 실수였다. 나는 다시 말을 정정했다. 



“사실은 은행직원이랑 만나기로 했거든. 하하.” 


“신이가 언제 은행에 취직을 했지?” 



내 곁에 있던 유인이가 작게 소곤거렸다. 윽, 어떻게 안거지? 어쩔 수 없이 유인이의 손에 돈 2만원을 쥐어주었다. 

그에 돈을 얼른 챙기며 앞으로 걸어가는 녀석이다. 



“배신자들은 놔두고 우리끼리 가자!” 



설마 신이랑 뽀뽀한 것도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어쩌면 우혁이 보다 무서운 놈은 유인일지도 모른다. 

나는 유인이가 만들어 준 빈틈을 이용해 그들에게서 빠져나오는데 성공을 하였다. 신이가 갔던 길을 따라 걸어갔다. 

신이는 쉽게 빠져나갔는데 난 왜 돈을 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까우면서도 이것밖에 안돼는 내 능력을 한탄했다. 



“야! 여기야!” 



어느 정도 걷다보니 어두운 골목에서 신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순간 변태인 줄 착각했다. 하지만 신이에게 말할 수는 없다. 

또 방방 날뛸게 분명하니까. 신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유인이에게 2만원을 뺏겼다고 말했다. 그러자 바보라며 놀려대는 신이다. 

우리 두 사람은 밤거리를 함께 걸었다. 단 둘이 걷기는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우혁이는 우리가 오락실에서 승부를 겨룬 걸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오락실 아들 아냐?” 


“설마‥.” 



지금 우리는 갈비 집에서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혁이의 정보망에 대해서 말이다. 뭐, 우리 둘이 이야기 해봤자 

무슨 결론이 나겠느냐 만은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달리 할 이야기가 없으니까. 



“우혁이 그 자식, 우리가 키스한 것도 알고 있을까?” 



신이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다. 신이 본인도 아차 싶었는지 걸음을 멈춘다. 금세 우리의 얼굴은 저녁노을처럼 붉게 물들었다. 

두 사람 모두 헛기침을 한번 내뱉은 뒤 가던 길을 계속 걸어 나갔다. 분위기가 쑥스럽다. 하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신이가 의견 하나를 제시했다. 



“놀이공원 갈래? 야간개장 했을 거야.” 



그리고 나는 얼떨결에 대답한다. 



“좋은 생각이다. 당장 가자.” 



이로써 쑥스러운 분위기는 대강 수습이 된 것 같다. 그리하여 지금 신이와 내가 몸 담은 곳은 바로 놀이공원이다. 

콕 집어 말한다면 바이킹 위. 



“으아악!!” 


“아아악!!” 



하마터면 놀이기구 안에서 오바이트를 할 뻔했다. 꼴에 배라고 멀미라니‥. 으웩. 

신이도 분수대 앞에 주저앉아 꼼짝달싹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난 그의 옆에 앉아 어지러운 정신을 가다듬었다. 

조금은 나아진 것 같다. 



“무슨 남자가 소리를 그렇게 지르냐?” 



심심해서 해본 소리다. 자존심 강한 신이의 얼굴에 먹칠이 되었을 것이다. 예상대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내가 무서워서 소리 지른 줄 아냐? 그게 바로 놀이기구를 타는 참맛이기 때문에 일부러 지른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얼씨구. 맞는 말이다. 나또한 일부러 지른 거다.(자신도 쪽팔렸던 거였음.) 우리의 등 뒤에서는 색색갈의 조명에 비친 분수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물이 조금 튀긴다. 신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앉았다. 연인들이 주를 이루었다. 

저 사람들도 키스는 해봤겠지? 나도 모르게 이런 의문이 들었다. 



“해봤겠지.” 



그리고 우연히 들어맞은 신이의 말이다. 속마음을 들킬 리도 없는데 괜시리 간이 좁쌀만 해졌다. 나는 다시 앞을 응시했다. 

서로의 등을 껴안으며 다정하게 걸어가는 남녀 한 쌍이 보인다. 저 둘은 서로를 많이 사랑하고 있을까? 



“사랑하겠지.” 



신이가 말했다. 역시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이상하다. 



“너 지금 내가 한 생각 읽었니?” 



그래서 말도 안 되지만 신이에게 물어보았다.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는 신이다. 



“내가 초능력자냐?”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앞을 보았다. 창피하다. 이런 내 마음을 신이가 눈치라도 챈 건지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더더욱 창피한 질문이었다. 



“이건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너 그때 내가 키스해서 화났어?” 


“아니! 절대 화 안 났어!”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신이도 쑥스러웠는지 헛기침을 했다. 나는 바닥을 보며 자그맣게 덧붙였다. 



“‥싫지는 않았어. 아니, 사실은 좋았어.” 



쿵쿵쿵. 가슴 속에 킹콩 한 마리가 날뛰는 기분이다. 이내 신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좀 볼래?” 



보라니? 난 지금 얼굴을 들 수가 없을 만큼 창피하다고. 결국 고개를 들지 않고 바닥만 쳐다봤다. 



“안 잡아먹으니까, 나 좀 봐.” 



팅팅.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말하는 녀석이다. 이 자식이. 



“앗, 머리는 왜 잡아당겨?!” 



어쩌다보니 고개를 들어 신이를 보는 꼴이 되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신이다. 관찰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 

윽. 무안함이 온 몸에 치 닿기 전에 말을 거는 신이었다. 



“그럼 우리 사귈래?” 



이건 또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솔직히 조금은 기대한 발언이기는 했지만, 막상 들으니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 마음에게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개소리야, 너도 신이를 좋아하니?’ 

당연히 좋아! 서슴없이 튀어나오는 나의 대답이다. 나는 뒷일 따윈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며 속마음을 신이에게 들려주기로 다짐했다. 



“난.” 


“잠깐!‥그냥 대답은 듣지 않을래. 대신, 우리 거래 하나 하자.” 



우잉? 갑자기 내 말을 막아버리는 신이었다. 난 좋아. 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이상한 녀석이다. 다짜고짜 거래를 하자니‥. 



“거래?” 


“그래. 이번 대전에서 내가 챔피언이 될게. 그럼 이유 불문하고 나랑 사겨줘. 약속해.” 



진짜, 진짜 이상한 인간이다. 그냥 사귀면 될 것을 왜 조건을 붙이는 것일까? 이게 신이의 스타일인가? 하긴,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흔쾌히 승낙을 해주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뭐.” 



그리고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정답게 마주 걸었다. 오늘 밤은 신이의 연애방식을 새삼 알게 되는 날이다. 

(신이는 개소리가 거절할까봐 입을 미리 막은 것이었음. 신이가 예상하던 개소리의 대답 : 난‥싫어, 난‥그럴 수가 없어, 난‥미안해.) 


하루가 금방 지나고 두 번째 본선 날이 다가왔다. 첫 시합은 두근두근 기대되는 희웅이와 유인이의 대결이다. 

결과로 따지자면 누가 이기든 상관은 없지만, 두 사람 모두 만만치 않는 실력을 가져서 심하게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만 될 뿐이다. 

그리고 갈비 집에서 유인이가 했던 말이 왠지 신경에 쓰인다. 하지만 이런 걱정 속에서도 대결은 시작이 되었다. 

사회자의 목소리는 오늘도 마이크의 힘을 빌러 우렁차기만 했다. 



[드디어 모든 이가 확수 고대했던 두 번째 본선 전! 그 첫 번째 시합은 같은 조직끼리의 대결입니다! 어쩌면 서열이 조금 더 높은 사람이 

이길지도 모르는 대결이 될 수도 있는데요. 짜고 치는 고스톱은 재미가 없죠! 과연, 짜고 치는 고스톱인지 자신의 실력과 운에 맞기는 

고스톱인지 함께 지켜보시죠!] 



정말 말이 많다. 내 옆에 있었더라면 마이크를 입안에 쑤셔 넣었을 텐데, 제기랄. 아깝다. 



[링 위에 오른 두 사람! 김희웅VS신유인! 오늘의 우승자는 누가 될까요? 네-! 경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종이 울린 건지 시합이 시작되었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링을 바라봤다. 나의 식구들이, 나의 친구들이 이번에는 적이 되어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다. 



“내가 한 말 잊지 마. 무조건 최선을 다 해. 안 그럼 너 대신 내가 김빈곤을 밟아줄 거야.” 


“‥훗. 그건 안 되죠. 제가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그 새끼만큼은 절대 양보 못한다고.” 



스크린에 비친 두 사람은 무슨 말을 주고받은 건지 매서운 눈으로 기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상대를 제압하기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저런 기 싸움 따위로 서로를 잘 아는 저 두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과연 누가 승리를 할 것인가? 

나는 그들의 움직임에 모든 신경과 시선을 집중시켰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55 




본선2-1. 김희웅VS신유인. 


　내 이름은 유인. 성은 신씨이다. 영어로 쓰면 Sin-You In(?). 네가 안으로‥으음, 하여튼 복잡한 뜻을 가지고 있다. 

한자로 어떻게 쓰냐고? ‥그런 건 너희들이 몰라도 된다.(쓸 줄 모르는 게 아니고?) 나는 지금 네모난 링 안에 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중이다. 

5m 전방에서 희웅이가 나를 노려보고 있다. 김빈곤은 내가 밟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농담을 했더니 금방이라도 나를 물어뜯을 기세였다. 

차라리 잘된 거지만, 그래도 만약 저 녀석이 충격을 받아 힘이 더 세지면 어떡하지? 명색이 내가 한 살 위인데 진다면 엄청 쪽팔린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신이가 나를 두고두고 놀릴 게 분명하다. 으윽, 그런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좋아! 일단 내가 먼저 공격을 날리는 거야. 

내가 형이니까, 선제공격은 당연히 내가 하는 게 옳은 거잖아? 나는 마음먹은 김에 곧장 실행으로 옮기기로 했다. 

우선 심호흡부터 한번 하고. 후아-아-함. 으이쿠. 하품이 쏟아질 뻔 했다. 하는 수 없다. 심호흡은 생략이다. 어서어서 끝내고 자야겠다. 

휘익-! 난 두 발을 사뿐히 떼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공중의 공기를 음미할 겨를도 없이 오른쪽 다리를 뻗어 희웅이의 얼굴을 겨냥하여 

공격을 시도했다. 시합이 끝나면 녹화 테이프를 보여 달라고 떼를 써야겠다. 지금 카메라에 비친 내 모습은 분명 멋졌을 거다. 

사악. 

아앗, 그런데 고개를 살짝 비켜 나의 공격을 더 멋있게 피하는 희웅이었다. 그리고 곧장 오른쪽 다리를 뻗는 희웅이다. 

눈치를 너무 늦게 채버렸다. 퍽! 



“쓰읍-. 아‥.” 


“아프세요?” 



2m 전방 앞의 희웅이가 묻는다. 



“하나도 안 아파.” 



아프다. 신발 끝에 꼬리뼈를 확실하게 맞았다. 금쪽같은 내 꼬리. 내가 먼저 맞은 걸 신이가 본 건 아니겠지? 제발~, 제발. 



“그럼 갑니다.” 



이번에는 희웅이가 공격을 해왔다. 오른쪽 주먹을 스트레이트(일직선으로)로 공격을 하려 했다. 주먹이 눈에 보인다. 

충분히 피할 수가 있다. 휘익- 사삭! 갑자기 사라진 희웅이.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짧은 거리에서 내가 놓칠 리가 없다. 

공간이동이라도 한 건가? 하지만 상식적으로 말이 안돼는 소리였고 희웅이는 아래로 몸을 숙여 스트레이트가 아닌 어퍼컷(아래에서 위로)을 

날렸다. 강력한 펀치에 턱을 맞은 나는 공중으로 뜨며 바닥에 떨어졌다. 쿠당! 



“와아아아아-!!” 



모르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온다. 나한테 하는 게 아니라 희웅이한테 하는 것이다. 짜증난다. 나는 분함에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턱을 맞는 순간 혀를 살짝 깨물었는지 입안에 피 맛이 감돌았다. 웩, 맛없다. 난 희웅이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오른쪽 팔뚝으로 

미끄러지듯이 내 주먹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내 주먹 바깥쪽으로 이동하여 몸을 비틀며 왼손 올려치기로 내 턱을 겨냥했다. 

다행인건지 나는 100% 그 주먹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턱이 빠질 것처럼 고통스럽다. 나는 침을 뱉어내었다. 피가 섞여 나왔다. 



“저더러 최선을 다하라더니 형은 왜 그렇지가 않죠?”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희웅이가 말했다. 내가‥최선을 다 안 해‥? 



“유인이 형, 그냥 저한테 승리를 양보해주세요. 저는 이번 대전에서 반드시 우승해야만 해요.” 


“뭐? 왜지?” 


“제 편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예요. 이번 대전에서 제가 챔피언이 된다면 많은 주먹들이 저를 따르게 되겠죠. 

그때 그 사람들과 함께 배고파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 거예요. 반드시 누나의 복수를 하고 말겁니다.” 



희웅이의 결심은 굳건했다. 양보‥. 



“싫어.” 


“왜죠? 형은 반드시 이겨야 될 이유가 없잖아요. 혹시 돈 때문인가요? 우승상금이 5천만 원이어서?” 



희웅이는 알고 있었다. 5천만 원, 절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난 우리 형을 위해서라도 

그 돈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한다. 



“유인이 형의 형님 때문이라면 조직에서 수술비를 대주잖아요. 하지만 제 복수는 조직이 대신할 순 없어요. 

할 수 있다하더라도 전 남이 대신 해주는 것 따윈 원하지 않아요. 이 손으로 직접 할 거라고요.” 



저 새끼가 말이면 단 줄 아나보다. 나는 바닥에서 일어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형의 형님은 이제 다리도 좋아지셨다면서요. 제발 부탁이에요. 전 형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기권해주세요.” 


“시끄러워. 날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고? 걱정 마. 그 바람은 내가 이루어지게 해줄게. 하지만 우승은 양보할 수가 없어.” 



누구에게도 절대. 설령 그게 악마라고 할지라도 난 양보 못 해.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 지는 

잘 모르겠다. 희웅이가 침을 삼키며 묻는다. 



“어째서죠?” 


“네 말대로 우승상금 때문이야. 난 그 돈을 개소리에게 줄 거야. 처음 도움을 받고 조직에 들어왔을 때 난 결심했어. 

반드시 은혜는 갚을 거라고. 남들이 보기에 네가 승리해야 될 이유가 더욱 분명하겠지만, 난 아니야. 나한테는 내 이유가 더 중요해. 

아까 맞은 건 다 무효야. 다시 해.” 



마네킹처럼 멍한 얼굴로 나를 보는 희웅이다. 순간 나는 녀석이 눈뜨고 잠이라도 자는 줄 알았다. 고개를 숙이더니 웃는 얼굴로 

돌변하여 나를 본다. 



“누구 마음대로 무효입니까? 그것도 치세요.” 



역시 저 녀석한테는 안 통한다. 나는 주먹을 편 후 다시 쥐었다. 그리고 달려갔다. 주먹과 다리를 이용하여 있는 힘껏 공격하였다. 

희웅이도 주먹을 막아가며 내 공격을 허용하지 않는다. 드디어 희웅이의 주먹이 내 눈앞으로 날아왔다. 이번엔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녀석은 또 사라졌다. 휘익! 아래다! 희웅인 몸을 숙여 내 시야를 벗어나 재빨리 안으로 들어와 어퍼컷을 날리려했다. 

타악! 

간신히 녀석의 주먹을 잡았다. 난 그와 동시에 오른쪽 무릎으로 희웅이의 옆구리를 찍었다. 옆으로 날아가는 희웅이. 

다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어섰다. 



“아직은 제가 한 수 위예요.” 


“음‥.” 



희웅이의 말에 나는 대답을 피했다. 다시 공격을 시도해오는 희웅이었다. 난 녀석이 내지르는 주먹을 피한 뒤 오른발을 날렸다. 

하지만 희웅이는 거뜬하게 내 오른발 공격을 피했고 왼손으로 스트레이트로 공격을 해왔다. 난 내 오른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재빨리 희웅이의 다리를 머리위로 흘려버리며 왼손 팔꿈치로 공격을 시도했다. 퍼억! 나에게 늑골(갈비뼈가 끝나는 지점)을 맞아 

저만치 날아 가버리는 희웅이다.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심판 아저씨가 희웅이에게 다가갔다. 희웅이는 손을 살짝 들어보이며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이걸로 끝날 리가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간신히 일어서는 희웅이가 심호흡을 길게 

한번 했다. 나는 희웅이에게 걸어갔다. 희웅이도 걸어오고 우리는 다시 치고 받았다. 



“이야아!!” 



난 녀석의 주먹에 맞기도 하고 치기도 했다. 내가 왼손을 죽 뻗어 녀석의 얼굴을 공격했다. 그때 희웅이가 왼발로 반원을 그리며 

내 몸의 좌측으로 빠지는 것이 아닌가. 결국 내 주먹은 빗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복부와 안면에 허점을 보이고 말았다. 

희웅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른발로 회전을 하며 내 얼굴을 강타했다. 뻐억!! 



“으, 윽.” 



발뒤꿈치에 얼굴을 맞은 나는 옆으로 쓰러졌다. 입술이 터졌나보다. 입술을 닦은 엄지손가락에 피가 묻어났다. 

나, 신유인 드디어 피 봤다. 나는 일어서며 희웅이에게 말했다. 



“이제 끝내자. 거울 보러 가야 돼.” 



얼굴에 멍이라도 들었음 어떡하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속 좋은 소리군요. 좋아요. 끝내죠.” 



희웅이의 눈빛이 강렬해지더니 두 주먹으로 마구잡이 공격을 퍼부어대었다. 나는 일부러 그 주먹을 피해주지 않고 모두 맞아주었다. 

앞으로 내가 저지를 일의 대가를 미리 치루는 차원에서였다. 오른발로 내 안다리를 걸며 나를 뒤로 넘어뜨리는 희웅이다. 

그에 누워있는 내 위에서 희웅이가 내 멱살을 잡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제 슬슬 지루한 경기를 끝낼 때가 온 것이다. 

위에서 주먹을 휘두르려는 희웅이다. 난 잽싸게 녀석의 손목을 감싸 잡았다. 오른손으로는 팔뚝 전체를 잡았다. 

그리고는 왼발을 빼서 무릎을 약간 굽힌 뒤 왼쪽 옆구리에 대었다. 오른발은 희웅이의 목에 걸었다. 잡고 있던 희웅이의 손을 잡아당기며 

오른발을 뒤로 밀어 허리를 꺾이게 하여 넘겨버렸다. 



“으윽!” 



이로써 완전 열십자 모양이 되었다. 나는 두 다리를 안쪽으로 조인 후 배를 들어올려 중관절을 꺾었다. 

쉽게 말하자면 희웅이의 가슴과 목이 내 두 다리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다리 사이로 희웅이의 팔이 나에게 잡혀 있다. 

내가 다리로 녀석을 조르면 조를수록 통증에 항복을 선언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힘부터 딸리는 희웅이가 이 기술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으-으윽.” 


“그만 항복해.” 



나의 배려에도 희웅이는 고통만 호소할 뿐 항복할 의사를 전혀 내보이지 않았다. 난 팔을 더 잡아당겼다. 

그에 내 허벅지를 깨무는 희웅이가 아닌가! 



“아악! 무슨 짓이야?!” 



찌글이랑 놀더니 이상한 걸 배운 모양이다. 난 희웅이가 항복은 죽어도 할 것 같지 않아 하는 수 없이 팔을 힘껏 당겨 탈골을 시켜버렸다. 



“아아악!!” 



그리고는 녀석을 풀어주었다. 빠진 팔을 움켜쥐며 인상을 오만상 찌푸리는 희웅이다. 이제 왼팔은 사용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만 항복해. 지금으로선 넌 날 이길 수 없어.” 


“항복은‥절대 못해. 윽.” 



타앗! 

난 희웅이의 대답을 듣자마자 발끝으로 녀석의 목을 겨냥했다. 희웅이는 내 속력에 따라가지 못해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이게 실력차이야.” 


“‥으‥.” 



이제야 포기를 하는 눈치다. 



“배고파를 해치우는 건 우리가 도와줄게. 대신 복수는 네가 해.” 


“유인이 형‥.” 



감동 받은 희웅이의 모습이다. 나는 희웅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좋아하는 희웅이. 역시 찌글이랑 같이 둬서는 안 될 것 같다. 



[네-! 신유인 선수VS김희웅 선수의 시합은 신유인 선수의 승리입니다!!] 



다음 대회에서 내 준결승전의 상대가 결정된다. 그게 진형우든 강호두든 간에 난 반드시 이길 것이다. 




(관중석) 



“야! 빨리 2만원 내놔.” 



태기가 민규에게 손을 내민다. 그는 승자의 미소를 얼굴 전체에 머금고 있다. 두 사람은 희웅과 유인의 대결을 보며 내기를 했다. 

민규는 자신이 가르친 희웅에게, 태기 또한 자신이 가르쳤던 유인에게 걸었다. 그리고 대결에서 유인이 이김으로써 태기가 또 다른 

승자가 된 것이다. 



“집에 가서 줄게.” 



꼿꼿한 자세로 민규가 말했다. 태기는 혹시라도 돈을 받지 못할까봐 민규에게 당장 내놓으라며 닦달을 해대었다. 

오늘 시합이 없는 우혁이 개소리의 옆에 앉아 그들을 재미있게 바라보고 있다. 



“결국 유인이가 이겼구나.” 



링을 바라보며 개소리가 중얼거린다. 우혁이 개소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엔 기쁨과 안타까움이 겹쳐 있었다. 

자신의 조직원인 유인이 승리한 데에 기뻤고 자신의 조직원인 희웅이 패한 데에 안타까웠던 것이다. 관중석 사이로 음료수 장수가 

돌아다녔다. 장사꾼이 우혁과 가까워지자 우혁이 캔 콜라 두 개를 달라고 했다. 콜라를 받은 우혁은 개소리에게 하나를 주었다. 

캔 고리를 따며 우혁이 말한다. 



“형님은 누가 이기길 바랬는데?” 



질문 하나를 던진 후 콜라를 꿀꺽꿀꺽 마신다. 개소리는 자신의 손에 든 콜라를 지그시 보기만 한다. 



“그런 질문이 어디 있어? 누가 이기든 상관없어. 심하게 다치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흐응‥그으래?” 


“그래! 그렇다고!” 



못 믿겠다는 눈으로 우혁이 보자 개소리는 억울해하며 콜라를 들이켰다. 우혁은 그런 개소리를 보며 의미 없는 미소를 흘린다. 



“그럼 나랑 신이랑 싸우게 되면 어떨까? 내가 이겨도 괜찮겠어?” 



뜬금없는 우혁의 물음에 개소리는 고민했다. 선뜻 아까와 같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가슴 속에 신이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어느새 그가 진정한 남자로 보였고 더 이상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지경에까지 왔다. 



“왜 대답을 못해? 형님,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응. 듣고 있어.” 



개소리는 남들과는 의미가 다른 신이와의 관계를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똑같지. 두 사람 모두 소중한걸. 다치지만 않으면 돼.” 



우혁은 개소리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개소리는 장내에 울려 퍼지는 사회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드디어 두 번째 경기! 진형우VS강호두! 기대되는 대결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 




본선2-2. 진형우VS강호두. 


　난 경상도 싸나이, 강호두다. 지금 나는 링으로 통하는 복도를 걷고 있다. 반대편 복도에서는 내 적이자, 상대선수인 진형우 자슥이 

걸어 나오고 있을 것이다. 난 이 대결에서 누가 이길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단지, 나는 젖 먹던 힘을 다 쭉 짜내서 싸울 거다. 

아, 맞다. 울 엄마는 젖꼭지가 성감대라서 내한테 젖을 먹이지 않았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나는 젖병 빨던 힘까지 다 내어 금마를 

쳐부술 거다. 드디어 링이 보인다. 앗뿔싸. 진형우가 먼저 링에 다다랐다. 벌써 여기서부터 질 수는 없다! 나는 오지게 뛰었다. 

링을 도착지점으로 하여 두 발을 빠르게 놀렸다. 



“헥헥.” 


[네! 강호두 선수가 먼저 링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왜 달린 거죠?] 



앗싸! 내가 먼저 올랐다. 후후, 기선제압에서 성공했다! 느긋하게 링에 오르는 진형우가 보인다. 

흐흐, 미련한 놈. 부디 공격도 미련하게 하기를. 자신이 없어서 그딴 걸 바라는 게 아니다. 그래도‥혹시라는 게 있지 않나. 

MC가 우리를 소개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시작종이 울렸다. 심판이 멀찍이 떨어졌다. 그래, 니는 거서 구경이나 해라. 

세상에서 젤 재밌는 게 불구경이랑 싸움구경, 그리고 내같이 잘 생긴 남자 구경하는 거라고 사람들이 안 카나. 



“야! 니 일찌감치 우승은 포기해라.” 



기선제압에서 성공한(자신 혼자만의 생각) 내가 소리쳤다. 



“싫다!” 



어쭈! 내보다 목소리 더 크게 내네? 질수야 없지. 난 배에 힘을 줬다. 



“싫으면 시집가라!!” 



저 놈 눈까리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게 쫀 것 같다. 이번 역시 내 승리인가? 하지만 진형우 고집은 신발과 만만치 않았다. 친구 아니랄까봐. 



“난 장가는 갔지, 시집은 안 가!!!” 



뭐꼬? 내보다 0.01배는 더 큰 것 같았는데. 안 된다. 이까짓 거에 물러 설 수는 없다. 



“니 내가 누군지는 아나?!!!!” 



씨파, 목젖이 얼얼하다. 하지만 이 톤까지는 못 따라 잡을 거다. 점마가 계집애 같이 생겼다고 설마 목소리까지 계집애 같겠나. 

기선제압 2에서도 내게 이긴 거다. 아~, 뿌듯~하다. 



“호두!!! 호두!!! 호두!!!! 이름도 거지같은 게.” 



윽! 절대 따라 잡을 수 없는 목청이다. 내가 졌다. 

앗, 아니지! 지금 그딴 게 중요한 게 아이지! 점마 지금 내 이름을 모욕했다 아이가! 

고귀한 10만 원짜리 이름을 무시했겠다.(호두의 어머니가 점쟁이에게 십 만원 주고 산 이름.) 



“니는 호두라는 이름의 뜻을 알고 지껄이는 소리가?” 


“당연히 알지. 먹는 거잖아. 나무 열매.” 



우와-씨! 정확하게 알고 있었네. 분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티를 낼 수는 없다. 



“개새꺄, 그건 우리 집 개새끼(찌글이를 말하는 거니?)도 다 안다! 니가 호두를 무시하나 본데, 호두가 얼마나 맛있는데! 

그만큼 이 몸도 매력적이지. 하지만 호두는 먹기가 힘이 들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단단한 껍질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내한테는 니를 이길 힘이 있다! 고로 니는 내를 절대 못 이긴다.” 



방금 막 지어낸 건데 존나 멋있는 말이다. 완전 어록감이다. 으하하! 

그런데 진형우의 얼굴은 전혀 감동 같은 걸 못 받은 눈치다. 무식하니까 이해를 못 하지. 



“국민의 기본 권리.” 



엥? 점마가 지금 뭐라고 씨불렁 거리노? 난 계속 들어보기로 했다. 



“사회, 참정, 청구, 자유, 평등.” 



그렇게 많은 권리를 누릴 수가 있었다니. 몰랐다. 나는 진짜 몰랐다. 



“그 중 넌 자유를 잘 사용하고 있는 예지. 착각은 이 나라 모든 국민의 자유라는 것을 잘 보여줬어.” 


“뭐, 뭐라꼬? 착각? 그게 어디 착각인지 아닌지 두고 보자!” 



나, 강호두 열 받을 데로 무진장 열 받았다! 진형우, 니 말대로 선빵의 자유까지 내가 써주마! 나는 내 열을 주먹에 담아 놈에게 날렸다. 

맞았으면 KO감인데 진형우는 미꾸라지처럼 아래로 쏙-! 잘도 빠졌다. 나는 쉴 틈도 없이 발차기를 시도했다. 

퍽! 하지만 그 발차기까지 막아내는 녀석이다. 바닥에 두 손바닥을 짚고 진형우가 발을 걸어오려 했다. 

그 정도에 이 강호두가 걸려 넘어 질쏘냐! 폴짝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리고는 공중에서 오른발을 뻗어 녀석의 안면을 가격했다. 

뻐억! 앗싸, 명중이다. 내 발에 차여 넘어진 진형우다. 



“아. 맞았잖아.” 



손을 코에서 입으로 쓸어 만지며 녀석이 중얼거린다. 뜻밖이라는 표정이다. 신발이랑 친구 아니랄까봐, 재수 털린다. 



“어떻노? 이래도 내 말이 착각이라는 거가?” 



나는 허리손을 하며 녀석을 보았다. 그에 기분 나쁘다는 얼굴을 해 보이는 진형우다. 



“아까 말해줬잖아. 이 병신아.” 



윽, 저, 저 자슥이! 그래, 누가 이기나 어디 해보자! 다리를 뻗으며 달려 나갔다. 진형우의 왼쪽 겨드랑이 아래를 노렸지만 

녀석이 피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반대편 다리를 굽혀 무릎으로 놈의 가슴팍을 찍었다. 이내 가슴중앙을 움켜쥐더니 

곧바로 반격을 해왔다. 주먹을 힘껏 내지르는 진형우. 목표는 내 가슴이었다. 아니 신장이다. 난 손바닥을 신장 앞에 펼치어 

간신히 막아내었다. 이어서 진형우는 반대쪽 주먹으로 목의 일직선 아래의 급소를 노렸다. 그것 또한 손바닥으로 막았다. 

무릎으로 내 낭심을 찍으려는 녀석이다. 재빨리 뒤로 뛰며 피하는 데 성공했다. 

점마는 어떻게 급소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거고? 조심해야겠다.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네.” 



씨-익 미소를 지으며 진형우가 말한다. 지는 미꾸라지 같으면서 사돈 넘 말하네. 진형우가 다시 공격을 해온다. 

이번에도 급소를 노린 펀치였다. 쳇, 내가 등시가 고걸 못 막을까봐? 날 개 무시했다. 명치로 날아오는 놈의 오른손 주먹을 잡아내었다. 

그리고는 다른 쪽 손으로 놈의 멱살을 잡았고 주먹으로 안면을 치려는 순간, 빠악! 내 이마에 박치기를 하는 진형우가 아닌가! 

이런, 방심했다. 나는 잡았던 멱살을 놓으며 이마를 감쌌다. 저거 완전 쇳덩어리 아이가? 저 머리에 턱을 받았다면 나는 그 자리에 

뻗어버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싸움 중에 항상 방심은 금물이야.” 



진형우의 목소리가 들리며 파바밧, 뭔가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에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두어 번 흔든 후 

정면을 응시했다. 빠르게 날아오는 조그마한 물건들. 개수가 세 개라는 것밖에 확인이 되지 않았다. 타탁! 



“으악!” 



무언가가 내 오른쪽 팔과 오른쪽 발등에 꽂혔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개가 빠르게 날아왔고 나는 순간적인 몸의 반응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피슝-! 다행이 내 오른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추륵. 긁힌 상처로 피가 약간 새어나왔다. 나는 팔에 꽂힌 물건을 확인해 보았다. 



“으, 동전‥?” 



그것은 바로 동전이었다. 백 원짜리 동전. 동전이 꽂힌 발등의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난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진형우를 보았다. 



“급소는 몸으로 맞출 수만 있는 건 아니지. 흠, 근데 동전 하나는 아쉽게도 빗나가버렸네. 그래도 선심 써서 삼백 원을 준 건데. 

그럼 네 몸값은 이백 원인가?” 


“으, 뭐야?” 


“아니다. 죽진 않았으니까 이백 원은 아니라는 소리네. 네 발등에 꽂힌 백 원, 너도 잘 알겠지만 그건 태중이라는 급소에 맞춘 거야. 

넌 더 이상 움직이지 못 할 거다. 그 고통은 죽고 싶을 정도일 테니까. 조금 있음 발등이 붓기 시작해서 시퍼런 멍이 들 거야. 

아마 한 달간은 아파서 움직이지도 못할걸? 재수가 없음 멍이 종아리까지 타고 올라올 거야. 그리고 팔에 꽂힌 백 원은 급소를 피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만약, 팔 뒤편이었더라면 그 동전은 수삼리라는 급소를 명중시켰을 거야. 뭐, 내가 이 정도 뿐이야.” 



젠장. 분하다. 분할만큼 발등이 아프다. 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팔에 꽂힌 동전을 뽑아냈다. 피가 흘러내린다. 

차마 발등의 동전까지는 뽑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동전으로 살을 뚫을 수가 있는 거고? 도대체 어떻게 던졌길래. 제기랄! 

내 발 앞으로 진형우의 발이 보였다. 내 앞으로 다가온 놈이다. 그리고 녀석의 말이 내 귀를 썩게 만들었다. 



“이건 꼭 말해야 될 것 같아서. 네가 호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단단한 껍질로 되어있다고 그랬었지? 

그래, 네 말대로 호두는 사람들에게 먹히는 자신의 알맹이를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단단한 껍질로 되어 있는 지도 몰라. 

하지만 말이야. 이것만은 꼭 기억해둬. 나, 진형우는 그 호두를 손대지 않고도 깰 수가 있어. 훗, 바로 백 원짜리 동전 하나로 말이지. 

하하하하!” 



진형우의 비웃음소리와 함께 인정하고 싶지 않은 MC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호두 선수 시합불가능! 강호파의 진형우 선수 승!!] 



끝내 나는 지고야 말았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56 


(한 편, 관중석은‥.) 


지금 관중석은 방금 일어난 일에 소란스럽다. 진형우가 던진 물체와 순식간에 강호두의 몸에 박힌 물체. 그것은 분명 동전이었다. 

고작 동전 2개로 경기가 끝나버리다니‥. 어떤 이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어 보기까지 한다. 어리둥절하기는 개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된 거지? 동전이 살에 박히다니.” 



하지만 우혁에게 그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개소리에게 말한다. 



“형님, 동전 있으면 좀 줘봐.” 


“왜? 오백 원밖에 없는데?” 


“그것도 괜찮아.” 



개소리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어 우혁에게 건네준다. 그리고 무엇에 쓰려고 하는 지를 유심히 보았다. 

우혁은 개소리에게서 받은 오백 원을 오른손에 쥐고서 설명을 시작했다. 



“동전을 사물에 박히게 할 만큼의 위력으로 던지는 요령은 의외로 간단해. 대신 연습은 많이 해야겠지만.” 



개소리는 우혁이 동전을 잡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우선 동전을 이렇게 엄지손가락과 중지손가락으로 동전의 옆면 쪽을 살며시 잡는 거야. 그리고 검지손가락으로는 동전의 날을 잡는 거지. 

던질 때는 손목의 스냅을 살려서 위에서 아래로 뿌리듯이 던져. 기술이 숙달되면 서너 개의 동전을 포개어 잡고 똑같은 방법으로 하면 돼. 

아, 그리고 반드시 동전의 날로 맞춰야만 해. 한마디로 표창 술과 같은 거지.” 



개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집에서 시험 삼아 연습을 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선 걱정은 호두이다. 



“호두는 괜찮을까?” 


“응. 괜찮을 거야. 한 보름정도만 고생하면 돼. 키득.” 



우혁이 개소리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개소리가 정작 걱정하는 것은 호두의 자존심에 금이 갔을까하는 것이었다. 

어느 덧 본선 마지막 경기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본선2-3. 임금VS새신. 



[쓰래빠의 2명, 강호파의 1명이 준결승전에 올라있는 지금 마지막 한 사람은 과연 어느 파에서 나올까요? 

제5회 파이터 대전은 그야말로 10대의 대전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그 틈에 20대인 임금선수가 낄 수 있을까요? 

자,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쳇, 염병할 사회자 놈 같으니. 20대인 내가 준결승에 오를 수 있겠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나, 임금은 준결승뿐만 아니라 결승에 올라 반드시 챔피언을 거머쥐고 말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진형우가 물러나고 

내가 보스의 오른팔이 될 수가 있다. 으하하하, 이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가! 



“무슨 생각을 하기에 혼자 실실 거리냐?” 



으응? 아, 누군가 했더니 내 상대 놈인 애송이었구만? 쓰래빠의 새신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 우선은 저 애송이부터 쓰러뜨려야겠어. 소문엔 진형우의 친구라지? 



“꼬마야, 너도 참 재수가 없구나.” 


“무슨 소리야?” 


“진형우 같은 놈이랑 친구에다, 나랑 붙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코웃음을 치는 새신이다. 저 놈이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고 있군. 좋아. 그렇다면 이 몸이 신경을 좀 써주지. 

난 꼬맹이에게 혼 심을 불어넣은 발차기를 날렸다. 희욱-! 가뿐히 피해내는 녀석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두 주먹을 차례대로 뻗었다. 

탁탁! 그러자 팔뚝으로 내 주먹을 막는 새신이었고 녀석이 무릎으로 내 하복부를 맞추었다. 뻐억! 



“우욱.” 



젠장. 방심했다. 저딴 꼬맹이한테 내가 질 리가 없다. 빨리 끝내주마. 난 녀석이 눈치 채지 못 하겠끔 뒷주머니에서 면도날을 꺼내들었다. 

이걸로 네놈의 힘줄을 끊어줄 테다. 



“이야아아!!” 



놈에게 발차기를 사정없이 날렸다. 

퍽! 퍽! 파악! 

역시 예상대로 내 발차기를 피해버린다. 그럼 이것 역시. 난 주먹을 뻗었다. 역시나 팔뚝으로 막아내었다. 


‘이때다!’ 


난 나머지 한쪽 손에 쥔 면도날을 바로 잡고선 새신의 팔뚝을 그었다. 분명 힘줄 하나가 끊어졌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내 손은 새신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너무 위험하지 않나?” 



내 손을 꽈악 쥐는 새신이다. 놈의 손에서 피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피를 보는 건 이 정도로 만족해달라고.” 



뻐억! 그의 발이 내 복부를 차며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어마어마한 힘의 발차기다. 이럴 수가. 

제‥기랄. 

휘이-잉. 쿵! 내 몸은 링 끝에 떨어졌다. 

그리고 내 의사와는 달리 데구르르 굴러 

타앙! 로프 사이로 떨어지고 만다. 순간 장내는 침묵되었다. 

저벅저벅. 새신이 걸어오는 소리. 이내 링 끝에 선 새신이 로프에 기댄 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강호파의 임금님, 장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나를 허무하게 눈 감게 만들었다. 



[네에-! 임금선수 장외입니다! 이번 시합은 쓰래빠 새신선수의 승리입니다!!] 




********** 




다음 날. 

모두가 손꼽아 기다렸던 준결승전이 다가왔다. 제5회 슈퍼 파이터 대전의 준결승은 모두 두 경기이다. 

첫 번째 시합은 신유인VS진형우의 대결이, 두 번째는 새신VS이우혁의 대결로 이루어진다. 이 날 관중석은 내기도박으로 떠들썩하였다. 

첫 번째 시합은 이번 대전의 다크호스인 진형우에게 돈을 거는 사람들이 많았고 두 번째 시합은 우승후보 이우혁에게 거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준결승까지 되니 조직에 가담하려는 자들이 속속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역시 강호파에 들어야겠어.” 

“나는 준결승에 세 사람이나 오른 쓰래빠에 들 거야.” 

“그래, 역시 쓰래빠가 낫겠지? 이우혁도 있으니까.” 



태세는 이처럼 쓰래빠 쪽으로 기울었다. 개소리는 주변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옆에는 민규와 태기, 그리고 희웅이 앉아있다. 호두는 어제의 부상 때문에 집에서 쉬는 신세가 되었다. 

호두는 유인에게 제발 진형우만은 꺾어 달라고 당부를 했었다. 지금 링 위에는 호두에게 당부를 받은 유인과 검은색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한껏 멋을 부린 형우가 서 있다. 두 사람 모두 어째 시합에는 흥미가 없어 보인다. 



“하아-암!” 



하마마냥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토해내는 유인과 



“으으으음♬, 후-.” 



즉석에서 지어낸 리듬을 허밍하며 귀를 파는 형우다. 심판은 그런 둘을 어이없게 바라보며 시작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종이 울렸다. 땡땡땡! 종이 울리자 두 사람의 인상이 달라졌다.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준결승1. 신유인VS진형우. 


이제 두 시합만 하면 파이터 대전이 끝난다. 여기서 내가 이기든 지든 시합은 하나가 더 남아있다. 

만약, 내가 이긴다면 결승전을 혹, 진다면 3,4위전을 치루게 되는 것이다. 어느 쪽이 되던 간에 상관은 없다. 

이러나저러나 신이 아님, 우혁이랑 만나게 될 테니까. 누가 되든 좋다. 두 사람 모두 한번쯤은 겨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저 녀석과 붙게 되었다. 신이의 새로운 친구인 신유인. 


아참, 내 소개가 늦었지? 난 진형우. 현재 강호파의 오른팔을 맡고 있다. 



“호두가 너한테는 꼭 이기래.” 



신유인이 나에게 말했다. 녀석은 부시시한 머리에 뽀얀 피부를 갖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슬리퍼(쪽발)를 신고 있었다. 

강호두도 슬리퍼를 신고 있었지. 



“그거 신고 나한테 이길 수 있겠어?” 



시선을 신유인의 얼굴에 꽂은 후 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이며 자신의 발을 바라본다.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는 수 없지. 개소리가 이거 벗으면 죽인 댔거든.” 



킥, 하긴 그 여자가 어련하시겠어? 문득 쟁반으로 여자에게 맞았던 기억이 났다. 

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동전 몇 개가 손에 잡혔다. 



“미안하지만, 동전 가지고 날 쓰러뜨릴 수는 없어.” 



동전 세 개를 꺼내들며 신유인을 보았다. 녀석의 눈길은 동전이 들려있는 내 오른손에 향해 있었다. 

장내가 술렁인다. 빨리 시작하지 않고 뭐하냐는 거겠지. 



“과연 그럴까?” 



휘익-. 난 동전을 날렸다. 목표는 차례대로 녀석의 염천혈(목의 울대부분)과 명치, 그리고 인당(미간 사이)이다. 

동전 세 개는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한 개만이라도 명중하면 이 승부는 내가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신유인의 손이 웬만한 사람은 볼 수 없을 만한 속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비친 것은 내가 동전을 날린 다음 

신유인의 오른손이 눈앞에 멈춰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렇다. 내가 날린 동전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았다. 

자신의 미간 사이에서 멈추어 있는 신유인의 주먹. 설마‥? 스르륵. 땡그랑, 땡땡. 신유인의 주먹이 서서히 펼쳐지고 

공중에서 백 원짜리 동전 세 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링 바닥을 굴러가다 힘을 잃고 누워버리는 동전들. 



“과연 그렇군.” 



당황한 감정을 추스르며 간신히 웃어보였다. 신유인은 내 공격을 막은 것에 대해 거만한 표정 따위는 티끌만큼도 짓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감정, 읽을 수 없는 얼굴이다. 



“훗, 아무래도 발을 움직여야겠군.” 


“당연하지. 우리가 장풍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재밌는 녀석이다. 흥미가 생겼다. 신이와 우혁이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싸울 맛은 나는 녀석인 것 같다. 

나는 주먹을 가슴 앞으로 내밀며 공격자세를 갖추었다. 왼손으로 모자의 뒤쪽을 살짝 눌렀다. 시야가 한층 더 넓어졌다. 



“봐주지는 않아.” 


“그래.” 



내 말에 대강 대꾸를 하는 녀석이다. 그럼 어디 시작해 볼까나? 난 녀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신유인은 내 주먹이 스트레이트로 날아올 것이라 예상하고 그에 맞는 방어자세를 취하였다. 쿡. 신유인 틀렸어. 

난 발바닥에 스프링을 장착한 느낌으로 사뿐히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몸을 웅크린 후 

한 바퀴 돌아 오른발을 뻗었다. 녀석의 이마 위다. 뻐억! 쿵! 신유인은 내 발이 미는 방향대로 뒤로 곧장 넘어졌다. 

난 뒤꿈치를 살짝 들어 녀석과의 거리를 2cm가량 좁히고 섰다. 그리고 신유인을 비웃어주려는데, 그럴 틈도 주지 않으며 

두 손바닥을 바닥에 짚고서 두 다리를 자신의 머리 쪽으로 뻗는 신유인이 아닌가! 엉덩이를 위로 들어 생긴 탄력으로 

내 허벅지를 힘껏 치는 녀석이었다. 순간 방심한 내가 뒤로 주춤거리고 어느새 신유인은 일어서 나를 보고 있었다. 



“목 부러지는 줄 알았어.” 



자신의 이마를 비비며 신유인이 말했다. 그에 대답을 해주었다. 



“걱정 마. 설마 초반부터 목을 부러뜨리겠어? 하지만 지금부터는 조심하는 게 좋아.” 



난 말을 하는 도중 녀석의 급소의 위치를 하나하나 파악해두었다. 


‘낭심‥, 거기는 안돼. 맞추면 타격이야 크겠지만,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는 곳일 테니까 맞출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 

그렇다면 안면에 있는 급소들은‥. 역시 한 방에 보내기엔 안면만큼 좋은 곳은 없지. 하지만 공격하기는 힘이 들어. 

상반신에 있는 급소들은 공격하기 수월한 만큼 상대가 방어하기에도 좋은 위치이지. 그럼 하반신은? 아래에 있으니 공격을 하면서 

급소들을 파악하기에는 나라도 힘이 들어. 그래, 그렇다면 차례대로 다 건드려보는 수밖에. 공격 패턴은 상하로. 

우선 귀 윗부분에 있는 객주인과 입술 아래에 있는 승장부분을, 다음엔 가슴 사이의 조금 아랫부분에 있는 명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허벅지 가운데에 위치하는 복토를 가격시키는 거야. 제발 하나라도 맞아라.’ 

(*①객주인과 승장 : 권투에서 상대를 쉽게 KO 시키기 위해 공격을 하는 곳으로 이 곳을 가격 당하면 망치로 후두부를 맞은 듯이 

정신을 잃게 된다. ②명치 : 치명적인 급소. 권투선수들 조차 이 곳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 필사적으로 피하거나 가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상대가 숨을 들이마시는 상태에서 명치에 충격을 받는다면 엄청난 고통으로 그 자리에 쓰러지며, 

그 후유증이 상당히 오래 남는다. ③복토 : 킥복싱, 격투기 등에서 주로 사용하는 로우킥(하단 발차기)으로 강타하는 곳. 

이 곳을 맞게 되면 다리가 마비되고 경련을 일으켜 쓰러지게 된다. 정신은 말짱하지만 다리가 마취 당한 것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어느 정도 생각이 미친 나는 신중하게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중 신유인이 먼저 공격을 해왔다. 하는 수 없지. 

퍼억! 타닥! 내 얼굴과 몸에 주먹과 다리를 번갈아 가며 공격을 해오는 신유인이다. 녀석의 공격은 마치 불꽃이 튀길 정도로 빠른 속력을 

내보였다. 그리고 나는 간발의 차이로 녀석의 공격을 모두 막아내었다. 신유인의 복부에 틈이 생겼다. 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녀석의 배를 힘껏 발로 찼다. 타아악-. 그에 뒤로 밀려나는 신유인이다. 나는 녀석에게로 달려가 다음 공격을 이어서 퍼부었다. 

제일 먼저 왼손 주먹으로 객주인이 있는 오른쪽 귀를 놀렸다. 흠칫 놀라며 머리를 옆으로 살짝 돌려 피해버린다. 

곧장 오른손 주먹을 승장부분에 날렸다. 쒸웅-. 탁! 날렸지만 곧 신유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다시 왼손 주먹으로 

신유인의 명치를 가격하려 했지만 이번 역시 놈의 팔뚝에 먹혔고 무릎으로 공격한 복토 역시 헛수고로 돌아갔다. 



“너무‥느려!” 



퍼억! 다리의 방향을 살짝 돌려 급소를 피한 신유인이 소리치며 내 뺨에 주먹을 날렸다. 난 한쪽 무릎을 바닥에 붙이고 앉아 뺨을 만지며 

녀석을 보았다. 맞은 뺨이 욱신거린다. 



“호두가 지지 말랬거든. 그리고 우승 상금은 내꺼야.”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알아서 말을 해주는 신유인이었다. 우승 상금 때문이라‥. 꽤 솔직한데? 

난 입안의 혀를 오른쪽 볼로 밀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관중석이 환호한다. 나름대로 경기내용에 만족을 하나보다. 



“승리의 이유라‥. 난 그런 거 없어. 그저 강한 놈들이랑 붙어보고 싶을 뿐이야. 그리고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 


“뭐야. 그럼 져도 상관없다는 거잖아.” 



신유인이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해석을 하였다. 녀석의 해석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그게 아니지. 여기서 벌써 져버린다면 결승에 오른 강한 녀석과 싸울 수가 없잖아. 안 그래?” 



저 녀석과 싸우기 전 나는 여기서 이기든 지든 상관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신이와 우혁이 그 두 사람 중 아무와 붙어도 좋다고 여겼다. 

하지만 신유인과 싸움으로써 생각이 바뀌었다. 두 사람 중 이왕이면 결승에 오른 녀석과 싸워보고 싶다. 

만약, 그 녀석과 싸워 내가 이긴다면 자동적으로 다른 한 녀석에게도 내가 이긴다는 것이 된다. 

훗, 이게 바로 여기서 내가 이겨야 될 이유이다. 난 주머니에 남아있던 동전 두 개를 손에 쥐었다. 



“소용없다니까?” 



신유인이 뭐라던 간에 힘껏 동전을 날렸다. 쒸웅-!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두 개의 동전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신유인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나도 함께 뛰었다. 신유인은 동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동전은 신유인이 아닌 양쪽의 코너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신유인은 동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뻐억! 어쨌든 동전에만 집중을 하고 있던 신유인은 

나를 보지 못해 내 무릎에 복부를 강타당하고 말았다. 



“윽.” 



뒷걸음질치며 인상을 쓴 체 복부를 움켜잡는 그다. 나는 신유인에게 다가가 다리를 높이 들어 신유인의 왼쪽 귀를 가격했다. 

뻑! 힘없이 옆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신유인. 쉴 틈 따윈 주지 않겠다! 곧장 녀석의 목과 얼굴을 발로 찬 뒤 멱살을 잡아 올려 

녀석의 뺨에 주먹을 날렸다. 퍼벅버벅!! 뻐억! 퍽! 쿠당!! 바닥 위로 떨어지는 신유인이다. 



“우욱.” 



입술에서 피를 흘려내며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 체 뻗어있다. 난 녀석의 목을 발로 밟았다. 



“이 정도 밖에 안 되냐?” 


“하아하아.” 



신유인은 숨을 헐떡이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만 항복하는 게 어때?” 



대답이 없었다. 그저 나를 노려만 볼 뿐이다. 나는 녀석의 목 위에 있는 발끝에 힘을 주었다. 



“으켁!” 



그에 고통스러워하는 신유인이다. 나는 한 번 더 기회를 주었다. 



“항복해.” 



신유인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픽-. 항복은‥ 네가 해!!” 



푸슉! 순간 종아리에 뜨거운 온도가 느껴졌다. 그에 반사적으로 다리를 들어버렸고 녀석이 다리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뒤로 넘어지고 만 것이다. 쿠당! 신유인이 재빨리 일어섰다. 난 녀석을 본 뒤 종아리를 보았다. 마치 뜨거운 불에 대인 듯 

붉은 줄이 짧게 생겨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손톱자국은 아니다. 다시 신유인을 보았다. 녀석이 한 손을 들어올렸고 그 손 안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동전‥?” 



그렇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동전을 내 눈을 피해 주웠던 것이다. 그리고 동전을 힘껏 내 다리에 그었고 

그에 생긴 마찰열로 화상을 입은 듯한 상처가 생기게 된 것이었다. 훗, 제법인데? 난 바닥에서 일어나 바로 섰다. 

휘웅-! 척! 나에게 동전을 던지는 신유인. 동전은 곧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돌려줄게.” 



녀석이 폼 나게 말했다. 난 손에 든 동전을 보았다. 뒤로 휙 던져버렸다. 



“잘 돌려받았지만, 필요 없어.” 



난 신유인에게 강력한 발차기를 선사했다. 거뜬히 어깨 뒤로 넘겨버리는 녀석이다. 

팍팍! 퍼억! 



“너 재밌는 녀석이야.” 



주먹을 던지며 내가 말했다. 퍼억! 



“넌 재미없어.” 



녀석이 내 펀치를 막아내고 내 복부로 발차기를 시도하며 맞받아쳤다. 뻐억!! 



“당연하지. 난 개그맨이 아니니까!” 



신유인의 발을 손날로 내려치며 말했다. 퍽! 



“재미없어.” 



박치기를 하려는 녀석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공격에는 같은 공격이다. 



“재미가 없다면 그만 끝내는 게 좋겠지?” 



빠악! 

난 신유인의 박치기 공격에 똑같은 박치기 공격을 날리었다. 운이 좋은 쪽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터고 운이 나쁜 쪽이 쓰러질 것이다. 

쿠앙!! 녀석의 이마와 내 이마가 서로 부딪혔다. 

정지된 시간과 흐름이 끊겨버린 공기, 그리고 숨죽인 관중들과 시선을 떼지 않는 심판. 




그리고‥ 




스윽-. 털썩! 





주저앉은‥나. 








※전국 고교 일진협회※ 






♡57 






쿠앙!! 녀석의 이마와 내 이마가 서로 부딪혔다. 정지된 시간과 흐름이 끊겨버린 공기, 

그리고 숨죽인 관중들과 시선을 떼지 않는 심판. 



그리고‥ 



스윽-. 털썩! 




주저앉은‥나. 


방금 전의 충격으로 잠시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다시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고 끊기었던 공기가 다시 순환되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입을 떡 벌렸고 심판은 휘슬을 입에 물었다. 

‘삐익-!’ 나, 진형우가 이긴 것이다. 쓰러진 건 내 쪽인데 어째서냐고?? 그거야, 간단하다. 

난 약 5분 후면 움직일 수 있지만 신유인은 나보다 더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감기려는 눈에 애써 힘을 주며 버티고 서 있는 신유인. 

하지만 다리에 힘이 빠지고 녀석은 비틀 거렸다. 그리고 쿠당! 쓰러지고 말았다. 의식을 잃은 것이다. 



[네-! 신유인선수 시합 불가능! 이로써 진형우선수가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난 잠시 의식을 잃은 체 잠이 든 신유인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강호두도 너도 수고했어. 다음엔 반드시 날 쓰러뜨리길 바래. 두 사람 모두.” 




준결승2. 새신VS이우혁. 



조금은 예상했던 거였지만 첫 번째 준결승전에서는 형우가 승리를 했다. 결승에 오른 것이다. 

보나마나 형님은 입에 거품을 물었을 게 분명하다. 유인이가 진 것도 진거지만 기절을 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피곤해죽겠다. 

어제 저녁 S고에서 신이를 따르던 녀석들을 찾아다니느라 몇 시간을 소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신히 찾은 녀석들인 만큼 

좋은 정보를 여러 개 얻어내었다. 우선은 S고에 형님을 사랑하는 현아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있다는 것과 

신이가 친구가 되기 위한 시험으로 형님에게 낸 문제의 수준, 태기 형이랑 민규 형이 학교 옥상에서 미친 짓을 한 것 등등‥. 

나의 완벽한 정보망이 내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얻어낸 것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뒤늦게 신이가 로프 사이로 들어와 링에 올랐다. 남보다 시합을 한 번 덜한 내가 준결승에 올랐다고 꽤나 틱틱대던 녀석이다. 

역시나 오늘도 똥 씹은 얼굴이다. 



“뭘 꼬나보냐?” 



신이가 날 째려보며 말했다. 성질은‥. 



“안 꼬나봤는데?”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어째 더 더러운 표정을 짓는 신이다. 내가 뭘 잘못 했다고. 

그저 조금 운이 좋아 대진표 끝에 걸렸을 뿐인데. 난 그냥 조용히 미소를 날렸다. 



“너랑 한번은 붙어보고 싶었다.” 



신이의 선홍빛 입술이 열리며 그의 목소리가 일직선으로 내게 왔다. 형우도 그렇고 이 몸의 인기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구만. 



“난 나를 덮치려는 여자들만으로도 벅차다고. 남자들은 되도록이면 자제해주길 바래.” 


“미친놈. 개그 하냐?” 



내 진심을 몰라주네. 난 바닥에 한숨을 쏟아 부었다. 

싸우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지만, 역시 내 취미는 아니다. 하지만 링 위에 올라선 이상 하는 수 없지. 

상대를 해주는 수밖에. 사회자가 뭐라고 나불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탁한 종소리가 세 번 울렸다. 



[준결승 두 번째 경기! 과연 승자는 누구일까요?] 


“와아아아!!” 

“이우혁, 힘내라!!” 



관중석에서 울려 퍼지는 고귀한 세 글자. 이.우.혁. 

기분이 나쁠 건 없지만 그래도 역시 피곤하기만 하다. 신이가 관중석을 흘깃 바라본다. 

사람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내 이름이 듣기에 꽤 거북한 모양이다. 아님, 부러운 건가? 짜식- 질투는. 흐흐. 



“저것들을 죽여? 말아?” 



나한테 묻는 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내 생각을 말해주었다. 



“죽일 수 있음 죽여 봐. 너 다굴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모르는 구나?” 



그래. 관중들은 머릿수가 무진장 많다. 나또한 그 들 속에 파묻히고 말거다. 내 말에 픽, 콧방귀를 끼는 신이다. 

나를 겁나게 무서운 시선으로 노려보는 신이. 왠지 선제공격을 해올 것 같은 분위기다. 뭐, 내가 양보해주지. 

피슉-. 싹! 역시 먼저 공격을 하는 신이었다. 앞에서 공격을 해오려던 녀석이 공중에서 한바퀴 돌며 내 뒤로 넘어왔다. 

그리고 스트레이트로 뻗어오는 주먹이다. 처억! 몸을 옆으로 살짝 비켜 신이의 주먹을 한 손으로 받아내었다. 



“오오오오!!” 



열광하는 관중들이다. 난 신이의 팔목을 꺾어내며 뒷발차기를 날렸다. 

한쪽 무릎을 굽히는 신이다.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고 뒤로 돌아 서 신이를 보았다. 미간을 찌푸리며 나에게 잡혀있던 손목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 



“크윽.” 



난 한쪽 눈썹을 들어올려 보이며 생긋 웃어주었다. 여유를 부린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자 신이는 더더욱 열 받은 얼굴을 해 보인다. 나를 노려보는 가 싶더니 오른손 주먹을 내 거기로 뻗어오는 신이었다. 

힉! 거긴 안 되지~. 난 손을 아래로 뻗어 신이의 응큼한 주먹을 막아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휘익! 바닥을 휩쓸며 내 다리를 

걷어차려 했다. 그렇군. 내 거기를 노린 건 걷어차기를 하기 위한 미끼였던 거야. 아쉽게도 눈치를 채버린 나는 무릎을 굽히고 

두 다리를 사뿐히 뛰어 신이의 발을 넘었다. 타악. 내 발은 다시 바닥을 밟았다. 



“미안. 모르고 피해버렸어.” 



난 뒤통수를 긁으며 머쓱히 웃어보였다. 



“제길.” 



분하다는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신이. 눈빛이 더욱 부리부리해 졌다. 가까이 가면 타버리겠어. 

신이는 분함을 이기지 못해 무차별 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주로 안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휙! 휙-! 턱! 턱! 



“앗, 얼굴은 안돼. 내 생명이거든.” 



난 금쪽같은 내 얼굴에 흠집이라도 날까 최선을 다해 막아주었다. 



“잘도 막는군.” 



공격을 계속 퍼부으며 신이가 말했다. 



“당연하지. 난 뭐든지 막을 수 있는 방패거든.” 



휘익! 터억! 코앞에 멈춘 신이의 주먹을 잡아내었다. 하마터면 코뼈가 산산조각 날 뻔 했다. 피식-. 신이가 웃는다. 응? 



“그래? 그럼 나는 뭐든지 뚫을 수 있는 창이야!!!” 



뻐억! 순식간에 내 왼뺨을 강타한 신이의 발이었다. 비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섰다. 뺨을 만져보았다. 얼얼하다. 

그런데 왜 웃음이 튀어나오지? 



“푸우‥푸‥하하!” 


“왜 웃어? 실성했냐?” 


“킥‥ 몰라. 그냥 웃겨. 하하하.” 


“미친놈.” 



타앗! 강력한 킥을 날리는 신이다. 나는 미끄러운 비누마냥 피했고 이어서 공격해오는 신이의 주먹을 팔뚝으로 막았다. 

어느 정도 웃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하아. 내가 맞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 그래서 잠시 어이가 없었나봐. 그리고.” 



빠악! 무릎을 들어올린 후 신이의 뒤통수를 밀어 당겨 내 무릎에 박아버렸다. 신이의 코가 내 무릎 위로 강하게 부딪혔다. 



“이게 나를 친 대가다!” 


“으윽.” 



뒷걸음을 치며 코를 감싸 잡는 신이. 꽤나 아플 것이다. 코피는 안나나 몰라. 

다시 관중석이 시끄러워 졌다. ‘역시!’하는 탄성을 내지른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또 공격할지 몰라.” 



코를 막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신이에게 한소리 했다. 아니 충고였다. 신이는 코에서 손을 떼었다. 

큰 충격은 입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내려칠 때 힘을 많이 주지는 않았으니까. 



“봐주지 마. 그러다가 뒈지는 수가 있어.” 



신이도 알고 있었나 보다. 그런 것 하나 눈치 채지 못하면 싸울 맛도 나지 않겠지만 신이의 저 표정, 정말 기분 나쁘다는 표정이다. 



“내가 살살하지 않으면, 네가 진짜로 크게 다칠 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씨발, 역겨우니까 잘난 체 하지 마.” 



좀 심한 말이다. 나의 배려도 몰라주다니‥. 하는 수 없군. 난 씩- 미소 지으며 주먹을 들었다. 



“좋아. 제대로 상대해주지. 이제부턴 두 눈 크게 뜨는 게 좋을 거야.” 


“눈은 네 놈보다 커.” 



이제야 인상을 펴고 웃으며 내말을 받아친다. 나를 똑바로 직시하는 신이 녀석. 순간 눈을 깜빡이려 했다. 

지금이다! 씨잉-. 뻐억!! 난 신이가 눈을 깜빡이는 그 짧은 순간에 녀석의 틈을 파고들어 강력한 어퍼컷을 날렸다. 

턱을 약간 빗나갔지만 신이는 충격에 공중으로 뜨며 바닥에 떨어졌다. 쾅! 



“윽!” 


“거봐. 눈 똑바로 뜨랬잖아.” 



곧장 신이의 가슴으로 뛰어올랐다. 쿵. 



“으헉!” 



신이가 그 반동으로 모진 숨을 토해낸다. 난 그의 가슴 위에 쭈그리고 앉아 신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잔인하게 웃어보였다. 



“히. 내가 제대로 싸우는 이상 넌 내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해. 보나마나 결과는 뻔하지.” 


“시‥시끄러워.” 



하여튼 자존심 하나는 끝 발 난다. 내 두 발목을 잡는 신이다. 난 가소롭다는 듯이 웃어준 후 신이의 이마에 머리를 받았다. 

빠악! 꽤 충격이 컸을 텐데도 내 발목은 신이의 손에 잡혀 있었다. 



“‥씨‥바, 석두(돌 머리)냐‥? 골‥깨지겠네‥.” 



미간을 찡그릴 대로 찡그리며 신이가 힘겹게 말했다. 과연‥어디까지 버틸 수가 있을까? 

퍼억! 오른손 주먹으로 녀석의 뺨을 강타시켰다. 그리고 다음은 왼손 주먹으로 반대편 뺨을 뻐억! 

그리고 다시 오른손 주먹으로 퍼억! 그러기를 열 차례‥ 신이의 왼쪽 눈 꼬리 옆에서 피가 터져 흘러내렸다. 

입술이 터져 피가 나는 것은 싸움의 기본이다. 



“사나이답게 포기해.” 



내 말에 신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피가 조금 들어간 왼쪽 눈을 깜빡이며 나를 노려 볼 뿐이다. 

난 다시 주먹을 들었다. 중지를 조금 위로 빼내었다. 조금 더 강한 타격을 주기 위해서다. 휘익-. 주먹을 날리려던 찰나. 

신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절대‥절대 지지‥않아‥. 나‥ㄴ‥반드시‥이겨야만 해‥.” 



날 보는 신이의 눈빛은 살아있었다. 승리에 대한 집념이 강한지 아닌지는 아직까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주먹을 내렸다. 그리고는 녀석의 눈에서 나는 피를 손바닥으로 한번 쓸어내렸다. 손을 보았다. 

빨간 피가 묻어있었다. 내가 왜 그런 거지? 나는 다시 손바닥에 묻어난 피를 신이의 볼에 스윽 닦았다. 



“뭐하는‥거야?” 



나를 죽일 듯이 째려본다. 



“헤에-. 미안.” 


“개새끼, 뒈졌어.” 



퍼억! 오른쪽 무릎으로 내 꼬리뼈를 찍어버린다. 그에 나는 앞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손을 뒤로 뻗어 꼬리뼈를 어루만졌다. 아프다. 뒤를 돌아보니 신이가 어렵사리 일어나고 있었다. 

시선은 나에게서 떼지 않은 채 말이다. 그 놈 근성 한번 대단하네. 퉤엣. 바닥에 침을 뱉어낸 후 입술을 닦아내는 신이다. 



“내가 네 놈의 털끝 하나 건들지 못할 거라고? 과연 그런지 아닌지 두고 볼까?” 



피 묻은 손등을 자신의 옷에 닦아내며 말했다. 



“아니야. 방금 건드렸잖아. 내가 틀렸어.” 


“병신아, 꼬리뼈에는 털이 없잖아.” 



엥?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 하겠다. 아니 어쩌면 이해를 하지 못한 건 신이 쪽 일지도 모른다. 

정말 털을 건드리려는 건가? 이상한 녀석이네. 이렇게 어리둥절해 하는데 내 앞으로 빠르게 돌진해 주먹을 뻗는 것이 아닌가. 

난 뒤늦게 막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헛수가가 되버렸다. 덥썩. 내 얼굴을 강타해야 할 주먹은 요상하게도 내 머리칼을 잡고 있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신이의 행동을 주시했다. 머리가 멍해진 기분이다. 



“건드렸어. 네가 틀린 거다.” 



퍽! 멋지지도 않은 대사를 피 묻은 입술로 어찌 그리 잘도 내뱉는지. 정신이 멍해진 덕분에 녀석의 킥에 옆구리를 맞아 

날아 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일어서려는 순간 전광석화와 같은 신이의 킥에 가슴을 차이며 뒤로 넘어졌다. 

쿠웅! 가슴도 가슴이지만, 등짝도 만만찮게 쓰라린다. 천장을 보고 누운 꼴이 된 나를 내려다보며 신이가 말했다. 



“네 정보망이 그렇게 대단하니 내가 왜 이겨야 하는 지도 잘 알겠지?” 



모른다. 조사를 안 해봤다. 난 눈을 끔뻑이며 신이를 보았다. 내 목에 발을 얹는 녀석이다. 

두 팔이 자유로운 상태라 일어설 수도 있었지만 귀찮아서 누워있기로 했다. 



“난‥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만 해. 조직 때문이라면 네가 이겨도 상관은 없지만 다른 이유가 생겨버렸거든. 

내가 결승에 올라 챔피언이 돼야만 하는 큰 이유가 말이야.” 


“큰 이유? 이기면 형님이 너랑 사겨주기라도 한대?” 



대충 넘겨짚었다. 신이가 형님한테 관심 있다는 것쯤은 진작에 알고 있었으니까. 내 목을 밟고 있는 신이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어라? 반응을 하네? 정말인가? 



“다, 닥쳐. 함부로 떠벌렸다가는 진짜로 가만 안 둬.” 



진짜인가 보다. 호오-. 그렇다면 내가 밀어줘야 하는 건가? 제3자는 나밖에 모르는 일이니까. 이거 재밌겠는데? 

나는 신이의 성질을 조금 건드려보기로 했다. 



“가만 안 두면?” 



푸욱. 윽, 숨쉬기가 힘이 든다. 



“죽인다.” 



발로 내 목을 힘껏 누르며 신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정도면 되는 걸까? 난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보였다. 



“윽. 그만해. 내가 졌어. 그러니까‥발 좀 치워‥줘. 케켁!” 



경기장 내가 조용해졌다. 나의 팬들은 경직되어 있었다. 



“졌다고‥?” 


“응. 항복!” 



신이도 의외였는지 나에게 물었다. 내 입에서 항복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조용했던 경기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벙져 있던 심판이 휘슬을 세게 불었다. ‘삐이익-!!’ 곧이어 들려오는 사회자의 외침. 

이우혁선수의 기권 패! 진형우선수와 함께 결승에 오른 사람은 쓰래빠의 새신선수입니다. 내 목에 찰싹 붙어있는 신이의 발이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난 목을 어루만지며 일어났다. 승리자인 신이의 표정은 그리 밝아보이지는 않았다. 

뒤돌아 링에서 내려가려는 나를 불러 세우는 신이다. 



“어째서지? 넌 충분히 반격을 할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신이는 내가 일부러 항복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다시 돌아서 신이를 마주 보고 섰다. 



“어째서냐고? 흐음. 글쎄‥? 아‥! 아마도 궁금해서 일거야.” 


“궁금하다고? 뭐가?” 


“결과. 결승에 오른 네가 과연 진형우를 꺾고 형님과 러브러브 할 수 있는지 하는 결과가 말이야. 

뭐, 나도 형우랑 싸워보고는 싶지만 어쨌든 그 이유도 내가 이길 수 있는 지가 궁금한 거니까. 네가 만약 형우한테 이긴다면 

나도 이긴다는 거겠지. 난 너한테 이길 자신이 있거든.” 


“그건 끝까지 겨뤄봐야 아는 거야.” 


“그래? 그럼 네가 형우한테 이긴다면 나중에 기회 내서 한번 제대로 붙어보도록 하지. 

형우한테 이긴 너라면 충분히 내가 상대해 줄 가치가 있을 테니까. 그럼 꼭 이기길 바래.” 



나는 멋진 미소를 날린 후 링에서 내려왔다. 벌써부터 결과가 기다려지는데? 으히히. 





(그날 저녁, 개소리네 집.) 



“아야! 아프잖아, 살살 좀 해라.” 


“가만히 좀 있어봐. 남자가 엄살은 왜 그렇게 심하냐?” 


“아아!” 



샤워를 하고 나온 신이의 상처를 거실에서 다시 손봐주고 있는 중이다. 아슬아슬하게 눈을 피해 살이 1cm가량 찢어진 상태여서 

병원에서 꿰맨 뒤 곧장 집으로 왔었다. 반창고를 붙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은 나는 약상자를 닫았다. 



“그런데 우혁이가 왜 항복을 한 거야? 도무지 이해가 안돼는 거 있지? 혹시 네가 협박이라도 했니?” 


“협박이라니! 그리고 그 새끼가 협박한다고 말을 듣겠냐?” 



그건 맞은 말이다. 그럼 왜 백기를 든 거냐고. 우혁이에게 물어보면 의문은 금방 풀리겠지만 경기가 끝나자마자 

사라져버린 터라 물어볼 수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신이가 결승에 진출했으니 진형우와 붙게 된다. 

옛 친구와의 대결. 그리고 신이를 무척이나 아끼는 진형우가 과연 신이를 상대로 어떤 시합을 보여줄까? 



“우혁인 나한테 모든 걸 맡겼어.” 



신이가 이야기 했다. 신이의 왼쪽 입술 끝이 붉게 부어있다. 



“아마 내일 경기장에도 오지 않을 거야. 그 녀석은 애초부터 파이터 대전에는 관심도 없었으니까.” 



난 신이의 맑은 눈을 응시했다. 



“약속‥잊지 마.” 



두 뺨을 붉히며 신이가 나지막이 말한다. 약상자로 시선을 돌리는 신이다. 약속이라‥. 



“응. 안 잊어.” 



난 눈과 입으로 웃어주며 신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내 손을 쳐버리며 인상을 쓰는 신이었고 

난 신이의 상처를 손바닥으로 툭 치며 장난을 쳤다. 



“왜? 귀여워서 그러는데?” 


“아악. 건드리지 마!” 


“에이~! 재롱 좀 그만 떨어라. 안 그래도 너 귀여워~.” 


“죽고 잡.” 



얼어붙은 공기. 신이와 나는 하던 동작을 멈추고 주위를 보았다. TV를 보다말고 과일을 먹다말고 우리 둘을 주시하고 있는 

부하 녀석들. 아차, 잠시 녀석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아삭! 사과 한 조각을 시원하게 베어 물며 태기가 말했다. 



“분위기가 묘-하네요? 형님.” 



윽. 식은땀이 등 뒤로 흘러내리는 기분이다. 괜히 찔렸던 우리 둘은 서로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내며 반대쪽을 보았다. 



“아! 개밥 주는 걸 깜빡했네.” 



라며 평소엔 관심도 가지지 않던 찌글이의 밥을 챙겨준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신이와 



“머리나 좀 감을까?” 



오늘 아침에 감았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욕실로 향하는 나다. 젠장, 하마터면 들킬 뻔 했잖아? 

이 자리에 유인이와 우혁이가 없다는 사실에 너무 방심을 했던 것 같다. 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자기가 하던 일에 열중하였다. 





************ 




다음 날, 경기장. 


[모든 조직원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슈퍼 파이터 대전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습니다! 

이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입니까?! 과연 다섯 번째 슈퍼 파이터는 누가 될까요? 이번 대전의 다크호스인 진형우선수일까요? 

아니면, 강력한 우승후보에게 항복을 받아낸 새신선수일까요? 링에 오른 두 선수, 서로를 마주 보며 인사를 나누고 있습니다!] 



슈퍼 파이터 대전 결승전(Super Fights Tournament The final round) 강호파 진형우VS쓰래빠 새신. 



그 어느 시합 때보다 많이 모인 사람들로 인해 관중석은 빽빽하게 차여 있다. 그래서 개소리의 위치만 대강 파악될 뿐 

모습은 찾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번 대전은 지금까지의 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승리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 한신. 아니 새신은 꼭 이 시합에서 우승을 하여 챔피언 트로피를 손에 넣고야 말 것이다. 

예상대로 우혁이가 경기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아 자동적으로 유인이가 3위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2등은 진형우. 1등은 내가 될 것이다. 되어야만 한다. 



“결승에서 너랑 만나게 되어서 너무 기뻐.” 



비 오는 날 활짝 게인 날씨처럼 맑은 얼굴을 해 보이는 형우다. 형우는 하얀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왔다. 

양쪽 귓불에는 조금은 굵은 은색 링이 가끔씩 반짝이고 있다.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에 헐렁한 박스티를 입었다. 난 형우를 응시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넌 안 기뻐?” 



형우가 말하고 풍선껌을 불었다. 분홍빛을 띤 풍선이다. 난 시합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왼쪽 눈 옆의 반창고가 시야를 조금 가리지만 뭐, 괜찮다. 큰 지장은 없을 듯 하다. 



“유인이랑 호두라는 녀석들은 괜찮아?” 



껌을 오물거린다. 심판이 우리 둘 사이로 다가왔다. 



“칼과 총을 제외한 무기사용은 허락합니다. 승부는 한쪽이 쓰러지거나 항복할 때까지이며, 

시합도중 당한 부상에 대해서는 일체 책임지지 않습니다. 그럼 시합을 시작하겠습니다.” 



심판의 형식적인 대사가 끝이 나고 이제는 귀에 익숙한 종소리가 울렸다. 땡땡땡. 결승전이 시작된 것이다. 



[제5회 슈퍼 파이터 대전의 결승전이 지금 막 시작되었습니다!!] 


“우와아아!!” 

“진형우 힘내라!” 

“새신 이겨라!!” 



관중석이 떠들썩해졌다. 형우의 이름과 내 이름이 뒤죽박죽 엉켜서 들려온다. 형우가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내 팬도 꽤 생겼어. 재밌지 않아?”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심판에게 질문을 했다. 



“시합 중에는 담배 피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죠?” 


“네, 그렇습니다.” 



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가 타기 시작한다. 한 모금 빨아 당기니 니코틴이 폐를 맴돌아 다시 밖으로 나왔다. 



“후우-.” 



내가 내뿜은 담배연기를 응시하는 형우다. 여전히 껌을 씹어대고 있다. 



“신이 너, 나한테 화난 거 있어?” 


“없어.” 


“그런데 왜 아까부터 대꾸도 안 해?” 


“내가 언제?” 


“‥아니다. 그럼 슬슬 시작해보는 건 어때?” 



펑. 풍선껌이 터지며 형우의 입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난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주먹에 힘을 실으며 공격자세를 취했다. 나와 반대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는 형우다. 건방진 자식. 

난 온 힘을 주먹에 담아 강력한 펀치를 날렸다. 휘익-!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가볍게 피하는 진형우. 2년 전과는 전혀 상반된 실력이다. 

아니 2년 전에도 주먹은 알아줬었지만 지금은 뭐랄까. 여러 차례 업그레이드를 거듭한 컴퓨터와도 같다. 

하지만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내가 한수 위다! 퍼억! 높이 쳐든 형우의 발차기를 두 손으로 잡아내었다. 

그런 다음 오른쪽 다리의 종아리 부분으로 형우의 허리를 가격했다. 뻐억! 



“앗!” 



그제야 주머니에서 손을 빼는 형우다. 



“Oh~, Good!"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들며 형우가 말했다. 녀석의 엄지손가락이 얄밉게 느껴진다. 

허리를 펴고 뛰어오르는 형우. 공중에서 한 바퀴 반을 회전한 뒤 손을 뻗쳤다. 휘익-!! 녀석이 뭔가를 던졌다. 

또 동전인가? 개수는 모두 다섯 개였다. 난 뒷걸음질치며 동전 다섯 개를 모두 피해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아니었다. 

피익-. 내 눈 옆에 붙어있던 거즈를 스쳐 지나간 동전 하나. 지익-. 거즈가 두 동강 났다. 총 여섯 개였나? 왜 하나를 못 봤던 거지? 

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동전들을 살펴보았다. 오백 원 5개와 백 원 1개. 이제야 알 것 같다. 



“훗, 오백 원과 백 원을 겹쳐서 던졌던 거군. 그래서 오백 원 보다 크기가 작은 백 원이 보이지 않았던 거야.” 


“맞아. 그래도 용케 피했네? 역시 내 친구라니까?” 


“말은 바로 해. 내가 네 친구여서 강한 게 아니라 네가 내 친구여서 강한 거다.” 


“킥. 그거나 이거나.” 


“달라!!” 



난 형우에게 번개처럼 달려가 혜성과 같은 주먹을 뻗었다. 난 녀석과의 간격차를 좁히고 섰고 녀석을 공격할 때마다 

심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내 입에 물려있던 담배의 재가 형우의 몸으로 떨어져나갔다. 



“앗, 뜨!” 



자신의 살갗에 떨어진 담뱃재를 털어내랴, 내 공격을 막으랴 바쁘기만 한 형우다. 내가 담배를 계속 빠는 바람에 

어느새 길어진 담뱃재가 휘어지며 형우의 팔위로 떨어지려 했다. 그걸 본 형우는 파앗! 뒤로 물러나며 발끝으로 담배를 차낸다. 

아슬아슬하게 내 입술은 피했다. 투욱. 사방으로 흩어지는 담뱃재와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이다. 



“아직 덜 폈는데 너무 한 거 아니냐?” 


“미안. 근데 그만 끊어.” 



한 마디씩 주고받은 후 우리는 서로 몸을 부딪쳤다. 서로를 막다보니 어깨를 붙잡고 있는 꼴이 되었다. 

나는 손을 형우의 허리춤으로 옮겨 들어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힘을 돕기 위해 다리를 들어 형우의 몸을 지탱한 뒤 

“흐아!!” 기합과 함께 뒤로 던져 버렸다. 하지만 덤블링으로 연결시키며 바로 서는 형우였다. 우리는 다시 혼신을 다하여 승부에 임했다. 

퍽! 뻐억! 서로가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고 발을 뻗었다. 누가 봐도 싸우고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한 미움 따위는 전혀 없었다. 

형우는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파앙!!! 그때 고막을 자극시키는 거대한 소리가 귓속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용트림과도 같았다. 나는 잘못 들었겠거니 하며 공격과 방어에만 열중했다. 형우가 주먹을 뻗으며 달려오고 

나는 주먹을 어깨 뒤로 넘겨버렸다. 그럼과 동시에 형우의 얼굴과 가까워졌다. 


파앙!! 



“악.” 



또 한번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내 귀를 먹먹하게 만들어놓았다. 나는 왼쪽 귓구멍을 막으며 주춤거렸다. 

뻐억! 그리고 그 절호의 찬스를 놓칠 리 없는 형우가 앞차기로 나를 날려버렸다. 나는 뒤로 한없이 밀리는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섰다. 

도대체 방금 그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는 뭐지? 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형우를 보았다. 웃는 얼굴로 풍선껌을 불어보이다가도 

다시 짝짝 씹어댄다. 혹시 저 녀석이 낸 소리일까? 



“왜 그래? 환청이라도 들었어?”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형우는 분명 또 그 거대한 소리로 나를 공격해 올 것이다. 소리의 원인을 알아내야만 한다. 



“네가 공격 안하면, 내가 하지 뭐.” 



쌔앵-. 발에 모터라도 단 것 마냥 빠르게 질주해오는 형우였다. 제일 먼저 공중차기를 선보인다. 

나는 몸을 살짝 돌려 공격을 흘려내었다. 퍽! 퍼벅!! 다시 맹공격이 시작되었다. 나는 소리가 난 곳을 생각하며 방어를 했다. 

형우의 얼굴이 내 얼굴과 또 가까워졌다. 파앙!!! 



“윽!” 



빠악! 퍽! 퍽!! 또 그 소리였다. 형우는 내가 소리의 충격에 멈칫하자 가차 없이 공격을 퍼부어대었다. 

나는 방어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날아오는 공격을 모두 맞을 수밖에 없었다. 맞으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형우가 가까워졌을 때 정체 모를 소리가 났었다. 정확히 형우의 얼굴이 내 옆모습과 가까워졌을 때다. 

사람의 안면에서 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은 바로 입이다. 입‥. 녀석의 입. 혹시‥껌? 


뻐억!!! 껌이라고 단정 지은 나는 형우의 뺨에 강력한 펀치를 날렸다. 그러자 형우의 입에서 껌이 튀어나왔고 

나에게 가하던 공격을 멈추는 형우였다. 난 또 다시 터져버린 입술의 상처를 손등으로 닦았다. 붉은 선혈이 손등에 묻어났다. 

형우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한번 문지르더니 바닥에 떨어진 껌을 보았다. 나는 주머니에서 다시 담배 한대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눈치 채고 때린 거야?” 



형우가 똘망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난 라이터로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해주었다. 



“정답이었다면 다행이네.” 


“호오-. 나 비겁하지?” 



감탄사를 내뱉으며 씩 웃어 보인다. 



“별로. 나도 피차마찬가지니까.” 


“담뱃재를 또 뿌리려고?” 


“한번 써먹은 건 또 안 써먹어. 그리고 그건 계획에 있던 것도 아니야.” 



난 입에 물려있는 담배를 오른손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웠다. 그나저나 그 껌 소리 한번 대단하군. 나는 바닥에 붙은 껌을 보았다. 



“가방에 하나 더 있는데, 너도 줄까?” 



껌을 향한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형우가 말했다. 



“소리가 다른 껌들보다 5배는 강하게 만든 껌이야. 생각 있음 말해. 몇 통 보내줄 테니까.” 


“필요 없어.” 


“그래? 그거 아쉽네.” 



난 담배를 한 모금 빤 다음 길어진 담뱃재를 털어내었다. 회색 눈이 바닥 위로 떨어져 내린다. 

난 형우에게 달려가며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손바닥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하여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와 있는 담배의 길이는 

1cm정도이다. 휙-. 휙! 난 스트레이트로 주먹을 뻗으며 형우의 맨 살을 노렸다. 요리저리 피하며 반격을 하는 형우. 

내가 뒷발차기를 하자 허리를 숙여 피해버린다. 나는 곧장 형우의 안면으로 오른손 주먹을 뻗었다. 그러자 역시 내 예상대로 잡아버리는 

형우다. 내 주먹을 세게 잡아버리는 형우. 치이익-. 



“악, 뜨거!” 



손가락 사이에 끼어져 있는 담뱃불에 대인 형우는 깜짝 놀라며 내 주먹을 놓았다. 난 형우가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무작위로 주먹을 뻗었다. 내 왼손 주먹을 피한 형우는 내 오른손 주먹에 목덜미를 내주었다. 하지만 뜨거움만 느꼈을 뿐 

타격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오른손에는 큰 힘을 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앗, 뜨!” 



형우는 날아오는 내 발차기를 막아내었고 또 다시 날아오는 내 오른손 주먹까지 팔뚝으로 막았다. 하지만 내 오른손에 닿은 

형우의 팔뚝은 담뱃불에 대이고 말았다. 



“뜨거!” 



후후 불며 자신의 팔뚝을 살피는 형우다. 내 오른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형우는 뜨거움에 인상을 일그렸다. 

퍽! 퍽퍽!! 팍! 휘익! 그리고 마지막으로 날아간 오른손 주먹은 정확히 형우의 왼쪽 눈앞에서 멈추었다. 

놀라서 숨도 쉬지 않는 형우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봐줬다.” 



난 주먹을 내리고 담배를 왼손으로 옮긴 후 입에 물었다. 그러자 형우가 짧은 숨을 토해낸다. 

자신의 목과 팔을 천천히 훑어보는 형우의 모습이었다. 



“뭐였지‥?” 


“담배빵이라는 거지.” 



나를 본다. 말을 계속 이어서 해주었다. 



“걱정 마. 흉지지는 않을 테니까. 살짝 건드렸을 뿐이야.” 



형우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자신의 눈을 만지더니 나에게 물었다. 



“왜 그만 둔거야?” 



마지막 공격을 말하는 듯 하다. 나는 담배를 손에 쥐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딴 거지같은 시합에 네 눈까지 걸건 없잖아. 안 그래?” 



녀석은 내 대답이 나름대로 마음에 든 건지 씨익- 웃기 시작한다. 나는 담배를 바닥에 던진 후 발로 비벼 껐다. 



“자, 다시 덤벼봐.” 



그리고는 주먹을 내밀며 형우에게 말했다. 하지만 형우의 대답은 가히 황당하기 짝이 없었고 날 허무하게 만들었다. 



“아니. 그만 둘래. 내가 졌어. 역시 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야. 히-.” 



등을 보이는 형우다. 형우는 링에서 내려갔다. 관중석은 모두 침묵했다. 이 얼떨떨한 기분은 뭐지? 그럼‥내가 이긴 건가‥? 


[네‥진형우선수, 중도 포기한 건가요? 아니면‥장외 인가요‥? 어, 어쨌든‥ 제5회 슈퍼 파이터 대전의 우승자는‥ 

쓰래빠의 새신선수입니다!!!] 


“와아아아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내가 정말로 챔피언이 된 것이다. 심판이 나의 팔을 들어올렸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나에게 열광했다. 난 쓰래빠가 앉아있는 곳을 응시했다. 

나보다 더 기뻐하고 있을 사람이 저 곳에 앉아 나를 보고 있다. 

이 정도면 네 곁에 있어도 괜찮겠지? 







※전국 고교 일진협회※ 






♡58 




하나, 둘, 셋! 찰칵!! 


금색으로 도금한 트로피를 안고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우리의 챔피언 새신! 

정원 밤하늘에 걸려 있는 누런 달님도 신이의 뒤에서 김치-를 하고 있다. 아니 치즈를 하고 있었나? 

어쨌든 우리는 파이터 대전을 무사히 치루고 게다가 1,3위가 모두 우리 조직에서 나온 데에 기뻐하며 정원에 모여 축하파티를 열었다. 

바비큐 파티는 미국에 있을 때 여러 번 해봤지만 한국에서는 처음이다. 



“다음은 나!!” 



방금 전에는 태기가 신이와 사진을 찍더니 이번에는 오노가 신이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팔 부하들은 어서 자신이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다들 슈퍼 파이터와 찍은 사진을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거라나? 피식-. 괜시리 웃음이 튀어 나온다. 



“아~. 배고파.” 



쏙 들어간 배를 비비며 옆에서 유인이가 중얼거렸다. 나는 부하들과 함께 민규가 굽고 있는 돼지를 보았다. 오우, 냄새 Good-! 



“조금만 기다려. 날고기를 먹을 순 없잖아.” 


“배가 없어.”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는 유인이다. 나는 유인이의 배를 보다 시선을 옆으로 돌려 내 배를 보았다. 유인이한테 비하니 

이건 완전 배가 아니라 산봉우리다. 



“형은 원래 살이 안 찌는 체질이잖아요. 그리고 방금 전에 우유를 5잔이나 마셨으면서 또 배가 고프다고요?” 



희웅이가 못 말린다며 유인이에게 한마디 한다. 우유를 5잔씩이나 마셨다면 배에 물이라도 찰만한데‥ 쩝, 왠지 꿀꿀한 기분이다. 

난 배에 힘을 주며 고목나무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 아래에 정답게 앉아있는 호두와 우혁이가 보인다. 

(경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우혁이가 와있었다.) 호두에게 뭐라고 우스개 소리를 해대는 우혁이와 그를 귀찮게 바라보는 호두다. 

난 의자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찌글이가 태기에게 안긴 체 누렇게 익어가는 돼지를 응시하고 있다. 



“둘이서 뭐해?” 



호두와 우혁이가 내가 다가오자 고개를 들고서 나를 쳐다본다. 우혁이의 손에는 장난감 망치가 들려 있었다. 

장난감이기는 하지만 치는 부분은 엄연히 쇠로 되어있다. 그리고 망치의 끝은 호두의 다리를 겨누고 있었다. 

그것도 진형우와의 대전에서 다쳤던 오른쪽 다리를 말이다. 



“우‥우혁아, 너 지금 뭐하는 거니?” 



황당함에 멍한 얼굴로 우혁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에 망치를 쥔 자신의 손을 쳐다보는 우혁이다. 호두는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시선을 회피해 버린다. 우혁이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이거? 망치로 치려고 그러는데. 왜?” 



으윽, 아무렇지 않게 왜라니‥. 



“뭐를? 호두‥다리를‥?” 



그래도 생각은 있는 애일거야. 하지만 우혁이는 나를 실망시키고 말았다. 



“에이~! 형님, 눈치 챘구나?” 



뜨아! 이 노무 자슥이. 난 우혁이의 손에서 망치를 잽싸게 낚아챘다. 



“얘가, 얘가 미쳤어! 너 호두 죽는 꼴 보려고 그러니? 안 그래도 멍 때문에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애를! 

하여튼 이 망치는 압수야!” 



순간 나 혼자만 느낀 것일까? 호두의 주변이 밝아진 것을. 호두는 마치 나를 구세주 보듯 우러러 보고 있었다. 

맞는 건 싫었나 보네. 그런데 왜 막지 않고 인상만 쓰고 있었던 거야? 이렇게 이해를 못하고 있는데 그 궁금증을 우혁이가 풀어주었다. 



“망치 이리 내! 남의 게임을 멋대로 방해하는 게 어딨어? 아무리 형님이라지만 너무 독재적인 거 아냐?” 


“게임? 무슨 게임?” 


“가위바위보! 나보다 호두가 한 박자 늦게 내는 거야. 그래서 호두가 내가 낸 걸 보고 자신이 지게끔 내는 거지. 

만약, 호두가 지면 망치로 내가 맞는 거고 내가 지면 반대로 호두가 맞는 거야.” 



무식한 녀석들. 벌칙이 망치로 맞는 거라니‥. 



“아우씨, 왜 보고 내는데도 자꾸 내가 이기는 건데? 내가 이래 돌이었나?” 



호두는 자신의 머리를 탓하고 있었다. 후우-, 호두야, 그건 네 머리가 나쁜 게 아니라 네가 너무 순진한 거란다. 

아무리 상대가 낸 것을 보고 낸다고 해도 일부러 질 수는 없어. 그게 바로 이기고자 하는 사람의 심리라는 거지. 

TV에서 실험하는 걸 봤거든. 어쨌든 게임이 뭔지 안 이상 망치를 돌려 줄 수는 없다. 



“빨리 줘, 형님.” 


“못 줘! 이 사기꾼아!!” 


“‥치.” 



입술을 삐죽 내밀며 포기를 해버리는 우혁이다. 사기꾼이라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 말인지를 우혁이 자신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호두의 표정은. 



“개솔아~.” 



퍽! 나도 모르게 발이 올라가버렸다. 나사 하나가 빠진 듯 행복한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호두를 보자 

기분이 몹시 down됐다고나 할까? 모르겠다. 내 이름을 놀리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으윽. 와 카노?” 


“핫.” 



난 호두의 머리를 밟고 있는 다리를 얼른 치워주었다. 머리칼을 탁탁 터는 호두다. 군침 도는 고기냄새가 풍겨져 온다. 



“형님! 어서 오셔서 드십시오!!” 



아니나 다를까, 태기가 나를 불렀다. 신이도 어느새 사진촬영을 마치고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우리도 어서 가자.”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바닥에서 일어난 우혁이었다. 



“앗싸! 바비큐다!!” 


“야, 우팔아 내 업고 가야지!! 임마!” 



좋아라 팔랑거리며 달려가는 우혁이를 애타게 부르는 호두. 

깊고 깊은 승리의 밤은 그렇게 풍성한 바비큐 냄새와 함께 우리를 한없이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다. 


파티가 끝나고 새벽. 

잠자리에 든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등을 한 신이는 우승상금으로 받은 돈을 서슴없이 나에게 주었다. 

조직에 써달라고는 했지만 역시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하기만 하다. 내가 이 돈을 받아도 되는 걸까? 하는 질문이 계속 내 머릿속을 파고든다. 

신이가 힘들게 탄 상금인데‥ 고작 응원밖에 하지 않은 내가 이 돈을 받을 자격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통통.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유리창으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난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다가갔다. 

드르륵. 유리창을 여니 잠옷차림의 신이가 서 있었다. 



“안 잤네?” 


“응. 생각 좀 하느라고.” 


“무슨 생각? 내 생각?” 



헉. 그 단세 내 마음을 알아챈 건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눈을 번쩍 뜨는 가 싶더니 이내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깐다. 

모두가 잠든 오늘 새벽도 고요하다. 



“네가 준 상금. 역시 못 받겠어.” 



그래. 다시 돌려줘야겠다. 



“왜?” 



나를 응시하며 의문을 표한다. 



“네가 다치면서 따낸 우승상금이잖아. 난 받을 수가 없어.” 


“너 착각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냐?” 


“뭐‥?” 


“내가 언제 너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그 돈 준줄 아냐? 우리 조직이 지금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돈 쓸 일이 태산일 텐데 보태 쓰라는 거야. 그리고 너도 봤겠지만 그게 어디 실력으로 번 돈이냐? 

새끼들의 어쭙잖은 양보로 얼떨결에 우승하게 된 건데. 난 진짜 챔피언이 아니라고.” 



신이는 등을 벽에 붙이고 섰다. 그 덕에 신이의 옆모습밖에 볼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침묵했다. 

신이는 자신이 따낸 슈퍼 파이터의 자리가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신이는 무언가 말을 이으려고 했다. 



“그래도 좋아. 지금은 가짜라도 만족해. 너랑 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약속‥.” 


“첫째,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우승한다는 것. 그리고 둘째.” 



신이는 입을 닫아버렸다. 얼핏 본 신이의 귀가 빨갛게 익어있었다. 난 살짝 미소를 띠며 미뤄두었던 대답을 해주었다. 



“좋아. 우리 사귀자.” 



내 대답에 놀라움을 감출 줄 모르는 신이다. 갑자기 매미 울음소리가 정원을 매었다. 한 마리가 울고 또 한 마리가 박자를 맞춘다. 



“대장이랑 부하가 사귄다는 건 말도 안 되지만 뭐, 인심 썼다! 갈 데까지 가보자고.” 


“잘 할게.” 



신이가 등을 돌려 나를 본다. 잘해준다고? 그 닭스러운 대사는 뭐니? 흠흠. 뭐, 귀는 즐겁다만 굉장히 쑥스럽다. 

나를 보던 신이가 갑자기 휙휙 주위를 둘러본다. 



“왜 그래?” 


“그 녀석이 있을까봐.” 


“그 녀석? 누구?” 


“아니. 없는 것 같다.” 



신이는 알 수 없는 말만 하더니 다시 나를 보았다. 나를 자신의 눈동자로 담아내는 신이. 어깨를 안으로 당기며 내 얼굴과의 간격을 좁혔다. 

까치발을 살짝 들어 키를 높인다. 신이의 그림자가 내 얼굴을 드리우고 곧 촉촉한 감촉이 이마로 느껴졌다. 

포근한 비누향이 코 주위를 맴돈다. 내 이마에서 입술을 떼는 신이. 나에게 키스를 했던 그 예쁜 입술로 신이가 속삭인다. 



“넌 이렇게 자다 일어난 모습이 매력이야.” 



나도 나지막이 속삭였다. 



“신아, 넌 잠옷 입었을 때가 제일 매력적이야.” 



그 시각. 나무 뒤에 몰래 숨어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찌글이가 소름이 돋아 닭이 되어버렸다는 말도 안돼는 

전설이 쓰래빠 사이에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고, 

‘꼬끼오-!! 꼬꼬꼬-꼬끼옥!!’ 수탉이 울었다. 집에 닭도 키우냐고? 

오우~. 기절초풍할 소릴! 닭을 키우는 게 아니라, 내 방 알람소리이다. 오늘 하루는 정말 놀라우면서도 바쁜 하루였다. 

바로 집에 찾아든 손님들 때문이다. 



“저희를 조직에 받아주십시오!” 

“목숨을 바쳐 형님을 모시겠습니다!” 



덩치가 곰만한 사람부터 시작해 나보다 작은 사람까지 생긴 모습도 다양했다. 하지만 모여든 이유는 모두 한가지였다. 

파이터 대전을 보고 우리 조직에 들기로 결심을 한 것. 거절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모두들 조직에 한번씩은 몸담았던 이들이기에 

싸우는 데에는 능통했다. 난 민규에게 닫아놓았던 사무실을 열어놓으라고 시키고 태기에게는 사람들에게 우리 조직의 상징인 

쓰래빠를 나누어주라고 말했다. 하루사이 찾아온 사람들의 수는 모두 67명이었다. 앞으로 일주일간은 더 모일 것이다. 


그날 밤. 거실에 모인 우리 쓰래빠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잔치분위기였다. 



“하루사이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니. 역시 파이터 대전의 힘이 크네요, 형님.” 


“응. 이게 다 다섯 명 덕분이야.” 



태기의 말에 신이, 유인이, 희웅이, 호두, 우혁이를 두루 보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방학도 다 끝나가는 데 놀러 한번 못 갔잖아? 

남들은 피서랍시고 여기저기 더위를 피하러 다니던데.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피서. 그래! 우리도 가면 되는 거야! 

난 생각만으로도 들떠 환하게 웃으며 부하들에게 말했다. 



“우리 바다 갈까??” 



뜬금없는 나의 발언에 모두들 쳐다본다. 



“바다요?” 



태기가 물었다. 



“그래. 바다! 한 이틀 정도 놀다가 오자. 응? 어때??” 


“좋지.” 

“나도.” 

“재미있겠네요.” 

“바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지!” 



신이, 유인이, 희웅이, 우혁이가 순서라도 정한 것처럼 차례대로 대답을 했다. 호두는? 



“우씨, 나도 가고 싶은데.” 



하며 자신의 다리를 본다. 우으, 불쌍한 녀석. 아직 보름은 더 있어야 된다지? 

탁! 



“가고 싶으면 가면 되잖아!” 



호두의 멍든 다리를 손바닥으로 치며 우혁이가 말했다. 호두는 죽을 듯이 소리를 쳤다. 



“아악! 이 자식이 뒈질려고!!” 



타악! 이때 신이도 호두의 다리를 때렸다. 



“으악!” 


“우리가 모시고 가줄테니까 걱정 마.” 



호두의 어깨에 팔을 걸치는 신이다. 호두는 눈물을 글썽였다. 물론, 감동 때문이 아니라 고통 때문이었다. 

툭! 가만히 있던 유인이까지 호두의 다리를 때렸다. 그것도 주먹으로‥. 



“끄아악! 니는 뭐꼬?!!” 



호두가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그러자 유인이가 태연스럽게 대답한다. 



“나도 한번 때려보고 싶었어.” 



푸욱. 모두들 유인이의 엉뚱함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로써 결정은 난 것 같다. 다함께 바다로 떠나는 거야. 

바다야, 기다려라! 우리 쓰래빠가 간다!! 


일주일 뒤. 

우리 눈앞에 펼쳐진 저것은 목마른 사슴의 목을 적셔줄, 귀여운 돌고래 떼가 헤엄쳐 다니는 넓고 푸르른 바다가 아니더냐! 

그렇다. 쓰래빠가 밟고 있는 땅은 뜨거운 모래사장이요, 눈앞에 있는 것은‥바다다! 



“꺄아악!! 바다다, 바다!!” 


“오예!!” 


“앗싸-!” 



눈이 뒤집혀 바다로 뛰어드는 나와 우혁이, 그리고 태기였다. 우리는 바다에 몸을 던졌고 바다는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었다. 

결국 호두는 오지 못했다. 시퍼런 멍이 무릎까지 올라와 쪽팔려서 못 간다고 했다. 난 마지막에 호두의 눈물을 보았다.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그래서 난 결심했다. 꼭 이번 겨울에 호두와 함께 북극곰 수영대회에 출전하기로. 

호두야,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 같이 바다에 뛰어들자구나. 끼룩끼룩. 하늘에는 갈매기 몇 마리가 날아다니고 

철썩철썩 파도가 내 몸에 싸대기를 날린다. 그나저나 이 많은 인파들. 감당이 안 된다. 바다에서 헤엄치다 모래사장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이 여럿 보인다. 뭐, 몸매는 봐줄만 했다. 



“형님! 여기 좀 봐요!” 



철썩! 나에게 물을 퍼붓는 태기다. 난 계속 모래사장을 응시했다. 민규에게 캔을 건네는 숏 커트머리의 분홍색 비키니를 

입은 여자가 보인다. 민규는 손을 저으며 호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계속 음료수를 권하는 분홍색 비키니다. 

민규 또한 이를 계속 거절한다. 다음에는 희웅이에게 접근하는 여자가 눈에 띠었다. 분홍색 비키니의 일행 같았다. 

웨이브머리의 하얀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청초한 이미지의 여자는 희웅이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거겠지. 

설마 자기 핸드폰을 자랑하는 거겠어? 착한 희웅이는 망설이는 가 싶더니 핸드폰에 연락처를 찍어주었다. 

그런 다음에도 계속 말을 거는 여자다. 희웅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만 히틀러의 뒤로 가서 숨어버린다. 에휴, 저 순딩이. 


푸악! 



“형님, 나 잡아봐라~!” 



나에게 물을 한 움큼 퍼부은 다음 헤엄을 치며 도망가는 우혁이다. 신경 끄고 유인이를 보았다. 

노란 염색머리가 얼굴을 붉히며 뭐라고 말을 건네자 무표정한 얼굴로 입술을 여는 유인이다. 

무슨 말을 한 것 같기는 한데 이 거리에서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충격적인 말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염색머리가 고개를 푹 숙이며 돌아섰으니까. 응? 그런데 저 쭉쭉빵빵은 뭐야? 내 미간은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긴 금발머리의 늘씬한 몸매가 하늘거리는 천조각 사이로 드러났다. 무슨 가슴이 저렇게 크담? 금발머리는 비키니로 가려있는 

풍만한 가슴을 내밀며 신이에게 다가갔다. 말을 거는 금발머리의 여자. 신이가 고개를 돌려 여자를 본다. 으악! 안돼!! 

난 앞으로 헤엄쳐나갔다. 철푸덕! 



“형님, 어디 가십니까?” 



나를 부르는 태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내 눈에는 오로지 신이와 발칙한 금발머리밖에 보이지가 않는다. 

신이한테 깔짝 되었다간 그 금발을 다 쥐어뜯어버릴 테다! 모래사장으로 올라온 나는 금발머리에게 걸어갔다. 



“이봐! 너 잠깐 나 좀 봐!!” 



금발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그리고 난 화들짝 놀라 뒤로 주춤거렸다. 에엑? 외국인? 



“What?" 



난 얼어버리고 말았다. 





************ 





부오오옹-. 여기는 보트 위다. 



“하하하! 너 질투 한 거였냐?” 



으윽. 나답지 않게 성급하게 행동하다니. 난 오렌지 주스에 빨대를 꽂아 쭉쭉 빨며 푸른 바다만 내려다보고 있다. 

그 외국인이 길을 묻는 건줄 누가 알았겠냐고. 쳇, 이거 이미지 구기는구만. 



“걱정 마. 설마 사귄지 한달도 안돼서 내가 널 차겠냐?” 



신이,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빈정대는 거야? 약 올라 죽겠네. 



“당연하지! 넌 날 찰 자격은 없어. 내가 널 찰 거라고.” 


“하하. 네가 찬다고 내가 차이겠냐?” 


“네가 안 차이면 어쩔 건데? 내가 싫다는데!” 


“뭐야? 너 자꾸 까불래?” 


“어쭈! 이게 형님한테 말하는 것 좀 봐!” 


“형님 좋아하시네! 계집애가 섬 머슴도 아니고 싸움 잘해서 뭐에 쓰냐?” 


“야! 새신!!” 


“왜!!!” 



배꼬리에 서서 이게 뭔 난리야? 하지만 역시 자존심상 물러 설 수는 없다! 그렇게 별것도 아닌 일로 다투고 있으니 

반대편 뱃머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소란스러운 거야? 



“야, 시끄럽지 않냐?” 



신이도 들었는지 뱃머리 쪽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같은 생각으로 뱃머리 쪽으로 갔고 그곳에서는 부하들과 아이들이 모여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헉! 어떻게 하지?!” 

“희웅아!!”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모르는 녀석들과 희웅이를 외치는 녀석들이다. 우리는 바다를 보았다. 

허억!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보트에서 떨어진 건지 바닷물에서 철푸덕거리고 있는 희웅이가 보였다. 

그리고 민규가 뛰어들려는 순간, 풍덩!! 다른 보트에서 한 남자가 뛰어내렸다. 그 남자는 허우적대는 희웅이에게 헤엄쳐 가고 있었다. 


저 남자는‥? 







※전국 고교 일진협회※ 






♡59 





늠름한 몸매의 남자는 팔과 다리를 헤저어가며 수영을 했다. 희웅이에게 도착한 남자는 희웅이의 허리를 감싸 안고서 

우리 보트로 헤엄쳐 온다. 그러자 보트를 운전하시던 아저씨께서 줄사다리를 아래로 내리셨다. 그 사다리를 밟고 올라오는 남자. 

일성이와 정일이가 희웅이를 받아주었다. 



“콜록콜록.” 



마셨던 바닷물을 토해내며 연신 기침을 해대는 희웅이다. 천만다행이도 희웅이는 무사해보였다. 



“저기 고맙습니다.” 



난 희웅이를 구해준 남자에게 공손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남자는 밝은 갈색머리에 햇볕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무릎까지 오는 회색 수영복을 입은 남자의 몸매는 한마디로 추르릅- 군침이 돌았다. 으흐흐. 

스윽. 손바닥을 내미는 몸짱 남자다. 그 손 한번 크구랴. 



“예?” 



난 손바닥의 의미를 물어보았다. 빵긋 웃으며 몸짱 남자가 말한다. 



“돈 둬.” 


“돈‥? 무슨 돈?” 


“구해준 값.” 



뭐야?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목적이 따로 있었잖아? 난 얼마면 되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남자가 아니었음 희웅이를 구해낼 수 없었을까? 하고. 정답은 ‘아니다’이다. 민규가 구해낼 수도 있었고 태기가 구해낼 수도 있었다. 

아님 내가 뛰어내릴 수도 있었고 말이다. 한마디로 생돈 들일 수는 없다는 얘기다! 



“못 줘!” 


“못 준다고‥?” 



밝게 웃던 몸짱 남자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손바닥을 접는다. 



“그래! 못 줘! 누가 당신보고 구해 달랬니? 당신 아니었어도 구해낼 사람 여기 잔득 널렸어! 이거 순 도둑놈 아니야?” 



몸짱이 먼저 말을 놓기에 나도 말끝을 짧게 잘라내었다. 몸짱 남자는 기가 찬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여자 니가 뭐라 카든 간에 결과적으로는 내가 구했다 아이가. 많이는 안 부를게. 십 만원만 둬.” 



시, 시, 십 만원?! 그 돈이라면 더더욱 줄 수가 없지! 



“싫어! 배 째!!” 



턱을 치켜들고 허리 손을 한 체 째려보는 나를 향해 한숨을 푹 내쉬는 몸짱 남자였다. 그러다가 누워있는 희웅이를 본다. 그가 말했다.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원점? 그건 또 뭔 소리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남자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원점으로 돌아가자고. 저 꼬맹이가 바다에 빠져있던 그 시간으로.” 



에엥? 그런 뜻이었어? 



“미, 미쳤니?” 


“안 미쳤다.” 



몸짱 남자는 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끝까지 당당한 저 모습.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야! 상어 밥이 되기 싫으면 닥치고 네 배로 돌아가지 그래?” 



팔 부하들이 태기와 함께 나를 거들기 시작했다. 태기는 곧 주먹이라도 날릴 것만 같았다. 하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람? 

그래,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희웅이의 은인인데 괜히 다치게 하지 말고 그까짓 돈 줘버리자. 이렇게 생각한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었다. 



“형님, 진짜로 주려고요?” 



이를 본 태기가 날 막으려고 했다. 난 손으로 저지했다. 십 만원권 수표를 몸짱 남자에게 주었다. 

그러자 다시 좋다고 웃으며 서슴없이 돈을 받는 그다. 승리의 저 미소. 으윽. 



“싸게 해준 거다.” 



사투리가 이처럼 얄밉게 들릴 줄이야. 으으-. 난 이를 갈았다. 우리가 탄 보트는 어느새 육지로 향하고 있었다. 

이휴, 바닷바람을 제대로 만끽하지도 못했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웅이를 원망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부오오옹-. 육지에 도착한 운전사는 보트를 세웠고 우리는 조심히 보트 위에서 내렸다. 

곧 몸짱 남자가 처음에 타고 있었던 보트도 우리 보트 옆에 멈추었다. 



“그럼 여기서 이만 헤어져야겠네. 나는 저쪽 빨간 지붕여관에서 묵고 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 온나.”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건만 몸짱 남자가 마음대로 떠들어대었다. 나는 생뚱맞은 얼굴로 보트를 보았다. 

몸짱의 보트에서 수영복을 입은 여자 몇과 남자들이 내리고 있었다. 



“도움?” 



그냥 무시해버리지 뭐가 궁금하다고 신이가 묻는다. 몸짱 남자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을 소개한다. 



“방학을 맞이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거다. 남을 도와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거지. 일에 따라서 가격은 천차만별! 

아까처럼 목숨이 따르는 일은 몇 십 만원을 받고 그 외 자질구레한 거는 오만 원 선으로 끝낸다. 졸라 싸지 않나?” 


“웃기시네. 이봐, 보아하니 학생 같은데 그럴 시간 있으면 집에 가서 얼음물에 발이나 담그고 공부나 해! 가자!” 



몸짱이 하는 일과 하는 말 모두가 못마땅했던 나는 괜히 심통을 부리며 등을 돌렸다. 

민규와 태기, 그리고 다른 부하들이 여관으로 향하는 나를 따라 모래 위를 걷는다. 곧 아이들도 내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모래사장에는 수많은 발자국들이 패여 있었고 새로운 발자국이 우리 뒤를 따랐다. 태양이 뜨겁다. 


파란 지붕 여관. 

우리 쓰래빠가 하루 묵을 곳은 파란 기와의 한옥집이다. 많은 인원으로 방 네 개를 잡았다. 

하나는 내 방, 또 하나는 민규와 태기의 방, 여관에서 제일 큰 방은 팔 부하들의 방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네 사람이 잘 방이다. 

우리는 대충 씻은 뒤 여관 마당에 있는 큰 마루에 머리를 맞대고 모여앉아 주인아주머니께서 차려주신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된장찌개는 가히 일품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해변 가로 갔다. 날이 저물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산이 아니라 섬으로 갈 걸 했나하는 후회감이 파도와 함께 밀려왔다. 하지만 이왕 온 거 신나게 놀다가자! 하며 

내 마음을 달래었다. 난 수평선 아래로 지고 있는 태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름답다. 

어릴 적 아버지의 어깨에 목마를 타고 바라보았던 석양도 이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었지. 

아버지, 당신이 살아계셨을 때의 태양이나 당신이 돌아가신 후의 태양이나 모두 같기만 하네요. 

그건 당신 한 사람이 죽어도 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거겠지요. 



“하나, 둘, 셋!!” 



오랜만에 아버지를 석양에 그리고 있는데 순간 내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코가 하늘과 가까워 졌다. 



“이야아아!!” 



나를 손에 이고서 미친 듯이 달려 나가는 아이들. 신이와 유인이, 그리고 희웅이와 우혁이의 고함소리가 한데 뒤섞여 들려온다. 

내 몸은 하늘보다는 바닷물과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악! 무슨 짓이야?! 놔! 놔줘! 제발!!” 



이 큰형님이 제발이라고까지 했는데‥ 녀석들은 나를 매정하게 바닷물에 집어던졌다. 

풍덩!! 내 몸이 떨어짐과 동시에 바닷물이 온 사방으로 튀었다. 기다렸다는 듯 나를 낼름 집어삼키는 바다다. 



“아하하!” 

“푸하하!!” 



아이들의 통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소금물이 내 귀와 입안으로 들어온다. 으, 짜-. 



“너 이 녀석들!! 가만 안 둘 줄 알아!!” 



나는 물속에서 나와 아이들을 쫓기 시작했다. 흰 반바지와 배꼽까지 오는 티셔츠에 물이 들어와 잠시 무게가 느껴졌다. 

하얀색 때문에 속에 입은 노란색 비키니가 비쳤다. 



“오~. 우리 형님 섹쉬한데?” 



우혁이가 모래 위를 성큼성큼 달리며 나를 희롱한다. 그래, 잡으면 너부터 조져주마. 



“어이! 거북이냐? 기지 말고 좀 뛰어라!” 



뛰고 있는데. 

윽, 이게 아니지. 신이 저 자식은 여자친구가 딴 남자한테 희롱을 당했는데 화내지는 못할망정 같이 쿵짝하고 있어? 

아아악! 도저히 못 참아!!! 



“너희들 잡히면 다 죽었어!!” 





************* 





틱틱! 장작 튀는 소리. 

나무를 재물로 하여 불의 신을 춤추게 한다. 

불길 속에는 과거도 있고 현재도 있고 미래도 있다. 



나는 달빛 아래에서 모닥불을 응시했다. 그리고 한쪽 뺨의 손바닥 자국이 매력적인 네 사람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캔 맥주를 마시고 있다. 



“입술이 아주 서울까지 튀어 나왔구만. 한번만 더 까불어봐라.” 


“에이, 형님 그만 화 푸시고 한잔 하시지요.” 



아이들을 쏘아보고 있는 나에게 캔 맥주 하나를 건네는 태기였다. 나는 한번에 반 이상을 들이켰다. 하아, 갈증이 사라지는 것 같다. 



“호두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우혁이가 빈 캔을 구기더니 모닥불 안으로 던졌다. 불은 캔의 등장에 당황하는 것 같더니 이내 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개밥주고 있겠지.” 



또 다른 맥주의 캔 고리를 따며 신이가 중얼거린다. 맥주를 우혁이에게 주었다. 

심부름을 갔던 궁예와 이토가 비닐봉지를 각자 손에 쥐고서 달려왔다. 비닐봉지에는 술과 음료수, 그리고 과자가 들어있었다. 

마지막으로 담배 한 보루도 나왔다. 우리는 술과 안주가 바닥날 때까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즐거운 밤을 보내었다. 



“아오! 또 피박이네!” 


“태기 성님, 그니깐 진작에 흔드셨어야죠.” 


“얌마, 네가 흔들지 말라매!” 



그리고 지금은 작은 담요를 깔고 세 명이서 고스톱을 치고 있는 중이다. 팔 부하는 민규와 태기의 편으로 네 명씩 나뉘었고 

나와 우혁이, 유인이, 희웅이는 신이와 한편이 되어 응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벌써 열판 째인데 민규 녀석만 따고 있다. 



“고스톱‘신’이라며! 이거 완전 공갈 아냐?!” 



참다못한 우혁이가 신이를 책망했다. 난 신이가 자기 입으로 ‘신’이라고 했을 때부터 석연치가 않았다. 

열판으로 날린 돈이 벌써 5만원이다. 계속 해봐야 돈만 더 꼴린다는 생각에 바닥에서 일어났다. 



“난 그냥 바다나 구경하련다.”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었다. 내가 일어서자 따분함에 지쳐 있던 유인이와 희웅이도 일어섰다. 

하지만 신이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우혁이도. 



“빨리 패 돌려.” 


“난 본전 찾을 때까지 못 일어나!” 



5만원 중 4만원은 내 돈이구만. 꼴랑 삼천 원만 보탠 주제에 목숨 거는 두 녀석들이었다. 

그래도 신이는 삼천 원이지, 우혁이는 백 원 보탰다. 



“후우, 그래 부디 따길 바란다.” 



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네들이 무슨 수로 이기겠니? 더 이상 안 꼴리면 다행이게? 



“형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민규가 패를 돌리다말고 일어서며 말했다. 



“됐어. 걱정 마. 이 근방에 있을 거야.” 



“그래! 네가 어딜 간다고 그래?! 내 돈 다 딸 때까지는 절대 아무데도 못 가! 알겠냐?” 

“형! 빨리 패 돌리라니까?” 

“아님, 돈 다시 돌려주던가!” 



이 자식들이‥. 

민규가 판을 접으려고 하자 난리를 치는 세 사람이다. 놈들의 등살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는 민규였다. 

난 유인이, 희웅이와 함께 해변 가를 거닐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피워놓은 모닥불이 보인다. 촌스럽게 기타를 퉁기는 이들도 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우리는 조직 안 같아.” 



얼마나 걸었을까? 유인이의 바늘과도 같은 일침이었다. 걸음이 멈추었다. 더 이상 발을 뗄 수가 없었고 떼 지지도 않았다. 

‘우리는 조직 안 같아.’ 머릿속을 뱅뱅 돈다. 



“조직 같지가 않아‥?”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하지만 유인이의 대답은 전혀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잔인하게 거침없이 내뱉는다. 



“응. 무슨 가족 같아. 공포심 같은 게 전혀 조성되지가 않아. 개소리도 명색이 보스인데 무섭지도 않고.” 



푹. 고개를 떨구었다. 다 맞는 말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희웅이가 위로를 해준다. 



“인상이 좋으니 그럴 수밖에요. 전 그냥 사촌에 친척 같은 분위기여서 더 좋기만 한걸요?”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한다. 사촌에 친척이라‥. 고개를 모래에 파묻다 시피하며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맞아. 우리 조직은 다른 조직들과는 달리 서열도 불분명하고 예의범절도 없어. 

아이들도 민규와 태기한테 막 대하고(특히, 신이랑 호두랑 우혁이랑.) 심지어는 나한테까지 소리치는 걸? 

아무리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지만. 게다가 나는 부하랑 사귀기까지 하잖아? 으아, 복잡하다, 복잡해. 



“어이! 아가씨, 어디서 왔니?”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처음 듣는 목소리이기에 보지 않고 하던 생각을 마저 했다. 

그냥 날 잡아서 확 잡아버릴까? 한번쯤은 무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을 거야. 

계속 이대로 갔다가는 조직에 분열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너 부르는데?” 



유인이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뭐라고?” 


“쟤들이 너 부른다고.” 



유인이가 가리킨 곳은 정면이었다. 그리고 정면에는 건장한 사내들이 일곱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내 자신을 가리켜보았다. 나? 



“그 비실한 것들이 설마 아가씨 이거는 아니지?” 



사내 한명이 새끼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물어왔다. 당연히 아니지. 



“내 친구들인데, 왜?” 


“그래? 그럼 친구들은 꺼지시고, 아가씨 우리랑 노는 게 어때? 우리 일곱 명 모두 아가씨한테 꽂혔거든.” 



그 중 덩치가 제일 큰 사내가 말했다. 아니 뚱뚱했다. 모두 내 나이 또래보다는 많아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언제 여기까지 걸어온 거지? 



“오, 헌팅이네?” 


“축하해요, 누님.” 



신기하게 바라보는 유인이와 진심으로 기뻐하는 희웅이다. 이봐요 들, 난 이런 거에 관심 없다고. 

그리고 남자친구도 이미 생겨버렸는걸? 



“관심 없어.” 



난 그렇게 말하고는 사내들을 무시하며 걸어갔다. 그에 내 곁을 따르는 유인이와 희웅이다. 

사내들은 내가 자신들을 무시하자 성난 모습으로 앞길을 막았다. 



“어허. 어딜 가시려고? 아가씨는 우리 좀 봐야겠어. 응?” 


“우리가 예뻐해 줄게. 같이 놀아.” 



길쭉한 녀석과 얼굴이 눌린 녀석이 능글맞게 다가왔다. 내 양쪽 볼에 콧김을 내뿜는 녀석들이다.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꺼져.”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러자 정말 못들은 건지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되물어오는 길쭉한 사내이다. 



“응? 뭐라고‥?” 



후우, 다시 말해주랴? 



“꺼지라잖아.” 



다시 또박또박 말해주려는 순간 나대신 대답을 해주는 이가 나타났다. 유인이와 희웅이는 아니었다. 

녀석들은 정말 내가 이 중 한명과 잘되길 바랬으니까. 



“네놈도 친구냐?” 



길쭉이와 납작이의 뒤에 서 있던 돼지가 소리쳤다. 그는 내 뒤를 응시하고 있었다. 난 뒤를 돌아보았다. 

신이와 우혁이었다. 두 사람은 한 판으로 남아있던 돈마저 다 꼴리기라도 한건지 인상이 좋지 않았다. 



“친구가 아니라!” 



신이가 언성을 높인다. 친구가 아니라 뭐? 

설마 너 홧김에 말하려는 건 아니지?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신이도 아차 싶었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친구가 아니면 뭔데?” 



뚱뚱한 사내가 코웃음을 치면서 물었다. 신이는 나를 응시했다. 나는 미간에 힘을 주며 냉정을 되찾으라고 눈치를 보내었다. 

다시 사내를 보는 신이. 



“‥도, 동무다! 어쩔래?!” 


“킥킥.”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서 웃음을 참는 우혁이가 눈에 들어왔다. 뭘 알고 웃는 거야? 



“이 새끼야, 친구나 동무나 그게 그거잖아! 지금 누구 놀리는 거냐?!” 



뚱뚱한 사내가 배를 철렁이며 화를 낸다. 그나저나 한 시름 놓았다. 정말 그 순간 신이가 다 말해버리는 줄로만 알았으니까. 

작은 파도가 바닷물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온다. 



“그게 그거라고? 저거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그게 그거라고?!” 



내가 생각해도 그게 그거인 것 같은데 왜 저리도 역정을 내는 걸까? 사내들이 한데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 자식이 맞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본데?” 



저마다 목과 주먹을 푸는 사내들이다. 이거 또 일나겠네. 피서까지 와서 이게 뭐냐고. 

하긴, 이번 원인은 나의 빛나는 미모 때문이니 별 수 없지. 솔직히 조금은 예상했던 일이었다. 

내 옆으로 다가와 두 사람과 합류하는 신이와 우혁이다. 



“맞기 싫으면 아가씨만 두고 꺼져! 마지막 경고야.” 



사내 한명이 눈을 부리하게 뜨며 배려를 해주었다. 하지만 네 사람의 대답은 모두 한결같았다. 

입술을 꼭 닫고서 동시에 오른팔을 굽혀 주먹을 가슴 앞에 올리더니 네 사람의 중지가 하늘을 향해 뻗었다. 

그리고 내가 양념으로 한 마디 했다. 



“너희들이나 꺼져!” 


“이‥이‥겁 대가리도 없이!” 



뻐억!!! 





‥‥‥ 





쉽게 끝나버렸다. 너무 시시했다. 


아이들 모두 입만 배렸다며 저마다 투덜대기에 바빴다. 하지만 신이와 우혁이는 그래도 고스톱 때문에 맺힌 한은 풀었다며 

어느 정도는 만족해했다. 해변을 한바퀴 돈 후 파란 지붕 여관으로 돌아온 우리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유인이와 우혁이, 그리고 희웅이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나니 신이가 나를 불러 세운다. 



“야!” 



난 방문을 열다말고 뒤돌아보았다. 자신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무언가 망설이는 신이다. 



“왜 그러는데?” 



내가 묻자 그제야 입을 연다.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마루 밑으로 들어갔다. 



“지금이 9시니까, 11시에 해변 가로 나와.” 



난 또 뭐라고. 



“그래. 알았어.” 



신이가 웃는다. 싱거운 녀석. 

신이는 그럼 이따가 보자며 얼른 방으로 들어 가버렸다. 저 녀석은 생긴 거랑 다르게 참 쑥스러움이 많은 것 같다. 

내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마루 밑에 숨어있던 고양이가 잽싸게 뛰쳐나와 어디론가 달아나버린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약속했던 11시가 되었다. 지금이 딱 11시니까 신이는 몇 분 전에 먼저 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삐그덕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캄캄하고 조용하다. 누가 소리를 듣고 나오기라도 할까 살금살금 대문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대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누군가와 부딪혔고 다행이도 얌전한 희웅이었다. 그런데 혼자 어딜 갔다 온 거지? 



“어? 누님, 어디 가세요?” 


“너야말로 이 밤중에 어딜 갔다 온 거야?” 



희웅이의 질문을 어영부영 넘겨버렸다. 희웅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해했다. 



“낮에 절 구해준 형한테요.” 


“뭐야? 그 도둑놈한테?? 왜??” 



아아, 또 짜증스러움이 밀려온다. 잠시 잊고 있었던 나쁜 놈이었는데‥. 



“고맙다는 말을 못했잖아요. 그래서 그 말.” 


“왜 못해?! 내가 했잖아!!” 



난 희웅이의 말을 끊어버리며 소리쳤다. 그 딴 놈한테는 고맙다는 말을 두 번씩이나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화를 내자 희웅이가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제가 하는 거랑.” 


“너!! 그 자식이랑 가까이 지내지마! 알았지? 물든단 말이야!!” 


“누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으윽, 또 마음이 약해진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애써 감정을 추스렸다. 

진정‥ 진정하자, 개솔아. 



“후우, 미안해. 그래, 그 말만 하고 온 거야?” 


“네. 그냥 통성명정도만 하고 왔어요.” 



네 이름씩이나 가르쳐 주고 왔단 말이니? 



“통성명?” 


“네. 그 형 이름이 이시백이라고 했어요.” 



이시백?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 것 같은데. 어디서 들어봤더라? 

아니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 자식 이름이 나랑 무슨 상관이야? 

희웅이는 내가 화를 푼 것 같았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꽤 즐거워 보였다. 



“누님, 그런데 있죠? 그 형이 부산에서 진짜 잘 나가는 싸움꾼이래요. 조폭들이랑도 접촉은 하고 지내는데, 어디에 속해있지는 않대요. 

아차!! 그리고 이번 대전에도 보러 왔었데요. 제가 싸우는 것도 봤댔어요. 누님도 놀랐죠??” 



그 도둑놈 같은 자식이 부산에서 잘 나간다고? 이시백. 이시백이라‥. 아, 진짜 어디서 들었던 거야? 



“그 형 좋은 사람이예요. 누님, 너무 싫어하지 마세요.” 



난 희웅이를 보았다. 시백이라는 녀석한테 퐁당 빠진 모습이다. 하는 수 없지. 



“알았어. 알았으니까, 어서 들어가.” 


“네. 그런데 누님은 어디 가시는 길이예요?” 



아차! 



“응? 나? 나‥나는, 아!! 목말라서 물 좀 사먹으려고!” 



난 당황했지만 대충 얼버무렸다. 하지만 역시나 어설픈 내 연기에 이상하게 생각하는 희웅이다. 



“물요? 방에 물 없어요?” 


“어? 이, 있는데 여기 물이 안 맞는 것 같아서 생수 사 마시려고. 하하.” 


“그래요? 같이 가줄까요?” 


“아니!! 괜찮아. 혼자 생각할 것도 좀 있고. 넌 어서 들어가!” 



난 희웅이의 등을 떠밀며 대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쾅. 대문이 닫히자 난 한숨을 내쉬며 한시름을 놓았다. 

아, 진땀나네. 허억!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손목시계를 보니 벌써 5분이나 지났다. 난 신이가 기다리고 있을 해변 가로 땀나게 달렸다. 


그러던 중 희웅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형 이름이 이시백이라고 했어요.’ 


그와 함께 눈앞에 아른거리는 종이 한 장. 


부산 L고교 3학년 이시백. 


탁.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설마 그 도둑놈 같은 녀석이 명단에 있던 이시백? 그래, 희웅이가 부산에서 잘 나가는 형이랬으니‥ 

그 사람이 맞을 지도 몰라. 이렇게 결론을 짓고 나니 입 밖으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제, 젠장.” 



왜 하필 내가 그렇게 욕을 해대고 못되게 굴었던 그 녀석이 이시백이라는 거야? 안돼. 이건 꿈이야, 꿈이어야만 해. 

으으-. 하지만 그 인간이 명단에 있던 이시백이라는 것을 안 이상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지금이라도 가서 사과를 해야만 한다. 

난 방향을 돌려 여관이 모여 있는 곳을 달려갔다. 빨간 지붕. 그래, 빨간 지붕에 묵고 있다고 했었지? 


기다려라, 이시백! 내가 지금 사과하러 간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60 




지나는 여관마다 지붕만 올려다보며 간신히 찾아낸 빨간 지붕 여관. 철제 대문 또한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하아.” 



난 숨을 크게 내쉰 뒤 마음을 다시 한번 가다듬으며 대문을 밀었다. 끼이잉. 대문의 외형과 마찬가지로 녹슨 철소리가 난다. 

대문이 밀리면서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벌어진 틈은 점점 더 넓어졌다. 대문을 조심스레 연 나는 소심하게 

고개를 빼꼼이 들이밀고선 안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내 두 동공과 부딪힌 여러 개의 눈동자가 있었고 

그 중엔 내가 찾던 도둑놈도 끼어있었다. 



“니 뭔데?” 



마루 위에서 카드로 작은 도박판을 벌이고 있던 사람들 중 차림새가 눈뜨고는 못 볼 정도로 천박한 계집 하나가 

물 빠진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일단 볼 일 있는 녀석만 불러내자는 심상으로 문을 활짝 열고 

대범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빨간 지붕 여관의 대문 내 모습은 내가 묵고 있는 파란 지붕 여관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니 완전 판박이였다. 

난 산만한 시선을 이시백이라던 도둑놈에게로 꽂았다. 



“너, 이시백 맞지? 할 말이 있어. 잠깐만 나와 봐.” 



멋들어지게 불러놓고는 대문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남자 여자 할 거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오~. 또 언제 꼬싰노?” 

“하이튼 동작 하나는 존나게 빨라요.” 



난 대문 안이 보이지 않도록 벽에 기대어 섰다. 그러다가 혹시 등에 뭐라도 묻을까 싶어 벽을 확인해보았다. 

손가락으로 문질러 본 결과 묻을만한 건 없었다. 다시 벽에 등을 기대었다. 철컹. 대문을 닫으며 이시백이 튀어나왔다. 

손에는 요구르트 한 줄을 들고 있었다. 다섯 개를 감싼 비닐을 벗기지도 않은 채 꽂은 빨대를 쪽쪽 빠는 이시백이다. 

이 녀석도 요구르트 마니아인가? 순간 녀석의 얼굴이 태기의 얼굴과 겹쳐져 보였다. 



“할 말이 뭔데?” 



빨대에서 입을 떼며 내게 묻는 그였다. 이 자식의 사투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얄밉게 들린다. 

골목에 세워져 있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나방이 모여 날개 짓을 하고 있었다. 어릴 적의 난 나방을 보고 파리라고 했었다. 

난 가로등에서 눈을 떼며 이시백에게 말했다. 



“낮에는 내가 미안해.” 



용서만 받으면 원점이다. 녀석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시계를 흘깃 보니 11시 15분이다. 난 기다리고 있을 신이가 생각났지만 날 이해해주리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건 사적인 일이 아니라 엄연히 공적인 일이니까. 



“미안? 왜? 내한테 무슨 잘못했나?” 



빨대를 두 번째 요구르트로 옮겨 꽂으며 묻는다. 푸욱. 빨대가 꽂혔다. 



“그냥. 오늘 못되게 군 걸 사과하는 거야.” 


“아‥.” 



이시백은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것이 내가 못된 소리를 한 이유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니가 뭐 때메 굳이 이까지 와서 사과하는지 알겠다. 니 조직 때문이제?” 



그는 내가 사과를 하는 목적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안 거지? 그렇게 티가 났나? 속내가 들통나버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 뭐가 쑥스럽노?” 



내 어깨를 툭 치며 내 반응에 재미있어하는 이시백이다. 그는 세 번째 요구르트를 빨고 있었다. 



“아, 아니야!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역시 사실이라고 한다면 가식적이게 보일 테니까 끝까지 아니라고 우기는 수밖에 없어. 나는 도리어 큰 소리를 쳤다. 

그러자 이시백이 그런 내게 대뜸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면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내를 조직에 넣을 생각이거든 꿈 깨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자유롭고 싶거든.” 



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 더 이상 진심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여겨졌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너를 찾고 있었어. 네 힘이 탐나.” 



어느새 네 번째 요구르트 병이 텅 비고 마지막 요구르트 병의 요구르트가 줄어들었다. 꾸르르-. 

이시백은 바닥난 요구르트를 마지막까지 빨아마셨다. 



“미안하지만 안 되겠다. 나는 명목 없는 싸움 따위는 할 마음이 없거든. 그만 가봐라.” 



통통. 요구르트 병을 집어던지고서 뒤돌아 대문을 여는 이시백. 여기서 쉽게 물러설 수는 없다. 난 녀석을 붙잡았다. 



“우리는 달라!” 



나의 한마디에 잡았던 대문 손잡이를 놓고서 뒤돌아 나를 응시한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지금부터 대사가 좀 많기 때문이다. 



“달라?” 



이시백이 묘한 얼굴로 물어왔다. 



“그래! 달라! 명목 없는 싸움이 아니야. 나한텐 큰 목적이 있고 중요한 이유가 있는 싸움이야. 

난 반드시 우리 아버지를 죽인 인간을 찾아낼 거야. 그리고 우리나라의 모든 조직을 하나로 통일시키겠어. 

만약, 그럴 수가 없다면 다 파산시켜버리고 우리 쓰래빠가 최강이 될 거라고. 내 부하들과 친구들은 나를 믿기 때문에 함께 하고 있어. 

절대 다른 인간들과 똑같게 보지마.” 



난 내 의지를 두 눈에 담아 이시백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나를 응시했다. 그러기를 몇 초. 입가에 미소를 띠며 이시백이 말한다. 



“이봐, 여자. 아주 잘 들었지만 그거는 니 목적이지, 내 목적은 아니잖아. 안 글나? 

니 목적에 할 일없이 내가 거들 필요는 없다 아이가. 괜히 미련 갖지 말고 그만 가봐라.” 


“도와줘.” 


“뭐라고‥?” 



이시백은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녀석이었다. 그래서 부탁도 비는 것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한가지 제안을 하기로 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날 도와줘. 

네 도움이 필요해. 대가는 원하는 대로 지불하지. 단, 내 목적이 성사되었을 때야.” 



그는 내 말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날 쏘아보았다. 나도 지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부산의 밤은 점점 깊어만 갔고 바다의 향기도 짙어만 갔다. 해변 가 하늘 위에서 색색갈의 불꽃이 피어오른다. 

피식-. 웃음을 살짝 내뱉고선 내 눈을 피해 하늘을 바라보는 이시백. 그의 눈동자에 예쁜 불꽃이 담겨있다. 이시백의 붉은 입술이 열린다. 



“좋다. 그거라면 생각해보도록 할게. 대답은 내일 해도 되제?” 



대답은‥내일‥? 내일‥. 

그 말은 즉, 하루 동안은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거지? 내 입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응!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럼 신중히 잘 생각해봐. 될 수 있으면 내가 웃을 수 있게 해줘.” 


“몰라.” 


“모르긴 뭘 모르냐? 그럼 내일 보자! 잘 자!” 



난 손을 흔들며 달려갔다. 가다가도 간절함에 뒤돌아 팔을 흔들어보였다. 이시백은 멀뚱히 나를 보고만 있었다. 

녀석의 대답이 과연 날 웃게 만들지, 울게 만들지 뭐라고 장담은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난 현재의 이 희망을 소중히 할 것이다. 

그러면 녀석도 반드시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겠지. 손목시계를 보니 어느덧 20분이 지났다. 이런, 신이가 기다리겠어! 



“하아, 하아. 미안해, 신아. 늦었지?” 



신이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나에게로 조용히 시선을 옮기는 신이다. 

신이는 내가 2배는 더 미안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미안해. 화났어? 진짜 미안해.” 



난 신이의 얼굴에 내 얼굴을 들이밀며 사과를 하였다. 최대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가식적인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뭐가?” 



드디어 신이가 입을 열었다. 난 활짝 웃으며 신이의 두 손을 잡았다. 



“늦을 이유가 있었어. 한번만 봐주라. 응?” 



신이가 자신의 손을 잡은 내 손을 내려다본다. 



“괜찮아. 그런 걸로 화 안내.” 



어라? 화낼 줄 알았는데. 신이의 말은 정말 의외였다. 그래서 믿음이 가지 않는다. 



“정말? 혹시 두고두고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배로 갚으려는 거 아니야? 그런 거라면 진짜 미안하다니까?” 


“화 안 났다니까. 시간이야 어쨌든 나오기는 나왔잖아. 그럼 된 거지, 뭐.” 



진짜 이상하네? 신이는 웃기까지 했다. 난 신이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신이가 내 손을 잡아버린다. 



“바닷바람이 시원하다. 좀 걷자.” 



신이는 내 왼손을 잡고서 모래 위를 걷기 시작했다. 해변에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낮처럼 그리 많지는 않았다. 

다들 텐트 속으로 들어가거나 시내로 나간 것 같았다. 파도에 밀려온 바닷물이 슬리퍼를 신은 내 발에 닿았다. 

곧 신이의 발도 적셔주었다. 



“오늘 낮에 희웅이 구해줬던 그 도둑, 아니 남자 있지? 걔가 글쎄 이시백이었던 거 있지?” 



난 시백이의 이야기를 신이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약속시간에 늦은 이유를 신이도 알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시백?” 


“응! 예전에 민규가 뽑아준 명단에 너희들과 같이 있던 이름이야. 부산 남자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녀석이래. 

그런데 오늘 그렇게 내가 싸가지 없는 꼴을 보여줬던 그 녀석이 이시백이었을 줄이야. 진짜 세상이 좁다는 게 맞는 말인 것 같아.” 


“그래?” 



신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재미없게. 



“응. 그래서 늦기 전에 기분 풀어주러 갔었던 거야. 조직 얘기는 그 녀석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길게 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확답은 받질 못했어. 그래도 내일 대답을 해준 댔으니깐, 기다려 보려고.”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나는 신이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후우, 역시 화난건가? 

난 의욕을 잃어 입을 꾹 다물고서 걸었다. 앞에서는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모래무덤에 로켓 폭죽을 꽂는다. 난 그 폭죽이 하늘 위에서 멋지게 터지기만을 내심 기다렸다. 아저씨가 심지에 불을 붙였다. 



“다 잘 될 거야.” 



심지가 타들어가고 신이가 말했다. 우리는 불꽃을 보기 위해 제자리에 멈추었다. 신이를 보았다. 신이도 나를 보고 있다. 



“너무 걱정 마. 잘 되겠지.” 



신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늘로 치솟아 오른 로켓이 터지며 노란 불꽃을 선사했다. 

아저씨의 곁에 있던 아이들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신이도 곧 사라질 불꽃을 바라보았다. 

난 불꽃보다 신이가 더 아름답게 보였다. 조금은 낯 뜨거운 말이지만, 하하하. 

아저씨는 그 다음 로켓을 모래에 심었다. 우리는 그 곳을 빠져 나왔다. 



“킥킥.” 



큰 바위가 보일 때쯤 신이가 느닷없이 웃어대기 시작한다. 그 웃음소리는 곧 파도소리에 파묻히고 말았다. 



“왜 웃어?” 


“갑자기 웃긴 게 떠올라서.” 



응? 



“웃긴 거‥?” 


“어. 너도 생각나지? 네가 무턱대고 날 끌고 학교옥상으로 올라갔잖아.” 



혹시‥ 윽. 신아, 왜 하필 그런 걸 떠올리고 그러니? 난 부끄러워 시선을 피했다. 



“그때 내 앞에서 생수를 들이키더니 갑자기‥킥‥하하하! 진짜 황당하고 기가 막혔지.” 



그러고 보니 난 그때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더러운 짓을 저질렀을까? 크아, 여자로써의 커다란 오점이 아닐 수 없다. 



“하하, 이제 와서 뭘 쪽팔려하냐? 괜찮아, 괜찮아. 귀여웠으니까.” 


“뭐? 귀, 귀여워‥?” 



신이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귀엽다는 말 우리 아버지한테 들어보고는 처음이다. 그것도 아버지가 아닌 다른 남자한테 듣게 될 줄이야. 

내 심장도 티 나게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 진짜 귀여웠어.” 



귀여웠다는 말 앞에 붙은 저 명사는 무어란 말인가! 진짜. 진짜라니‥으흐흐. 난 감격하고 있었다. 

우리는 바위 앞에 다다랐다. 우리키보다 2배는 더 큰 바위였다. 



“너 그때 낸 문제 정말 엉뚱했어. 난 그것도 모르고 밤까지 새면서 공부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그런 문제를 낼 생각을 다 했냐?” 


“아, 그거? 나도 그럴싸한 문제를 내려고 큰 맘 먹고 밤을 새서 교과서를 뒤졌는데 읽어도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머리는 아프지 그래서 내 멋대로 문제를 만든 게 그거야. 그때 집에 문제집이라도 있었더라면 보고 냈을 텐데. 

근데 너도 꽤 잘 맞추더라? 그게 무슨 뜻이겠냐? 너랑 나랑 수준이 똑같다는 거지. 푸하하.” 



그, 그런가? 맞는 말이라고 인정하는 내 자신이 왠지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서 부부는 닮는 대잖냐.” 



그렇게 생각하니 그리 기분 나빠 할만한 것도 못된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라‥부부. 부부‥? 



“뭐? 부부??” 



그게 웬 뚱딴지같은 소리냔 말인가! 벌써 부부를 따지고 들다니. 



“그래, 부부. 왜?” 



두 눈을 깜빡이며 순진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신이다. 넌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가 있는 거니? 응? 신아. 



“부부라니, 너랑 내가 왜 부부야?” 


“언젠가는 부부가 될 텐데, 조금 일찍 여보야, 그런다고 이상할 게 뭐있냐? 안 그래?” 


“응? 그, 그렇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언제 너랑 결혼.” 


“안 할 거야?” 



안 할 거냐고? 결혼을? 신이랑 내가 결혼‥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안 할 거냐?” 


“그, 글쎄.” 


“안 할 거라고?” 



집요하게 물어오는 신이다. 난 바위에 등을 기대고 섰다.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한테도 생각할 시간을 줘.” 



난 정말 진지했다. 신이도 진지한 것 같았다. 



“푸웃-.” 



아‥아니다. 그다지 진지해보이지는 않는다. 신이는 진지한 내 얼굴을 보자 폭소를 터뜨렸다. 또 왜 이러는 거야? 



“푸하하하!! 야, 너 왜 그렇게 웃기냐? 하하.” 


“왜 그래?” 


“아니. 그냥. 하하하!” 



신이는 밤새도록 웃었다. 같이 웃으면 좋으련만. 사람 무안하게시리. 


다음날. 우리는 남은 시간을 종일 바다에서 보냈다. 태양은 어제만큼 뜨겁지는 않았다. 

해변에는 어제 본 사람들도 있었고 낯선 사람들도 있었다. 얼마나 신나게 놀았던지 해가 지는 것도 몰랐다. 

모래의 열기도 조금씩 식어가고 있다. 슬슬 서울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우리는 아쉬움을 파도에 실어 보낸 뒤 

여관에서 짐을 챙겨 나왔다. 난 파란 지붕이 있는 곳을 보았다. 



“민규야, 차에서 기다려. 나 잠깐 누구 좀 보고 올게.” 


“예? 부산에서 누구를‥?” 



다른 이들에겐 시백이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민규가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고 무작정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파란 지붕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지금쯤이면 대답을 준비했겠지? 

하지만 내가 파란 지붕 여관에 도착했을 때 이시백도 그 일행도 보이지가 않았다. 주인아주머니의 말씀을 들어보니 모두들 바닷가로 

나간 듯 했다. 나는 길이 엇갈리기라도 할까 해변을 향해 무작정 달렸다. 넓은 해변 어디에 이시백이 있는 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주변 곳곳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해변을 두 바퀴나 돌았다. 


Rrrrr. 잠시 제자리에서 숨을 고르며 핸드폰을 받아보았다. 



“네.” 


“형님, 민규입니다. 지금 어디 계시는 겁니까?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만 돌아가야 하는 건가? 



“아니야. 지금 갈게.” 



난 전화를 끊고서 주변을 훑어보았다. 혹시나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이 지금을 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난 하는 수 없이 언제 있을지 모르는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 해변을 벗어나 여관 촌으로 향했다. 

그쪽에 차가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은근히 좋은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예 듣지도 못하다니. 


툭! 생각에 깊이 빠져 있다보니 앞에서 누가 걸어오는 지도 모르고 있었다. 난 이마를 비비며 고개를 들어 보았다. 



“이시백‥?” 


“어? 여자, 니였네?” 



오, 하느님 저를 완전히 버리시지 만은 않으셨군요. 잃었던 희망을 다시 찾은 기분이다. 

이시백을 발견한 나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활짝 핀 웃음꽃이었다. 난 이시백의 손을 붙잡았다. 



“여기 있었구나! 난 널 영영 못 만나는 줄 알았지 뭐니?” 


“으-, 이 여자가 와 카노?” 



내 손을 떨쳐내며 인상을 구부리는 녀석이다. 뭐야? 나처럼 어여쁜 여자가 손을 잡아주는데. 

난 버림 받은 손을 가슴에 붙이고서 이시백을 노려보았다. 



“그래. 생각은 해봤니?” 



이시백의 손에는 배낭이 들려 있었다. 집에 가려는 건가? 



“어. 다 했다.” 



생각을 끝냈다는 녀석의 말에 나의 태도가 달라졌다.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내리고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이시백을 보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선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 그것 참 다행이네. 그래, 대답은??” 


“하기 싫다.” 



뜨악! 너무 간단히 허무하게 대답을 해버리는 그였다. 

하기 싫다고‥? 이런 경우는 예상치 못했기에 나의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왜‥왜?!!”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위험하다 아이가. 죽고 나서 돈 받으면 뭐하노? 그거 가지고 저승 갈 것도 아니고. 안 글나?” 


“하지만. 다시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안 될까? 응?” 



난 정말 간절하게 부탁했다. 민규와 태기가 추천해준 사람은 모두 넣고 싶은 욕심이었다. 



“싫다. 또 생각하면 대가리 돈다.” 



이시백은 배낭을 어깨에 이고서 내 옆을 지나갔다. 그의 당당한 뒷모습을 보니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후우, 하는 수 없지. 하지만 그래도. 



“잠깐만!!” 



역시 미련은 영원히 버릴 수가 없는 쓰레기인가 보다. 난 이시백을 막아섰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펜을 꺼내어 녀석의 손바닥에 

글씨를 한자 한자 써나갔다. 서울 집 주소와 내 연락처였다. 



“뭔데?” 



자신의 손바닥을 보며 이시백이 물었다. 펜 뚜껑을 닫은 후 다시 가방에 넣었다. 



“만약에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거든 전화해. 알았지? 그럼 꼭!! 나중에 또 보자? 안녕!” 



난 손을 흔들어준 뒤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달려갔다. 언젠가는 손바닥에 적은 글자가 지워지겠지만 

그 전에 반드시 녀석의 생각이 바뀌기만을 바라며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뛰고 또 뛰었다. 





************ 




부산을 떠난 지 20분이 지났다. 내가 탄 승용차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중이다. 

운전은 민규가, 조수석에는 유인이가 앉아있다. 이번에는 꼭 앞에 앉아서 가고 싶대나? 뒷좌석에는 나 혼자만 앉아있다. 

신이는 유인이가 이 차에 탄 관계로 다른 차에 타게 되었다. 쓸데없는 데에 눈치가 빠른 유인이가 우리 사이를 의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어쩌면 유인이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을 지도 모른다. 신이도 나도 서로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사람이니까. 그나저나 이시백이 자꾸만 신경에 쓰인다. 녀석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소문만으로도 갖고 싶은 녀석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직에 넣을 수 없다면 다른 조직에 주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 


하아-. 이 고민은 또 며칠 갈려나? 



“똥 씹었어? 표정이 왜케 구려?” 



유인이가 몸을 아예 뒤로 돌려 나에게 물었다.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서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녀석이다. 

유인아, 말투가 그게 뭐니? 



“안 씹었어.” 



그에 맞춰 대답을 하는 나도 참 웃긴 인간이다. 유인이는 한동안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안은 불구하고 부담까지 된다. 



“뭐 할 말 있어?” 



견디다 못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유인이가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니까‥어젯밤에 내가 했던 말, 우리는 조직 같지가 않다는 말. 나쁜 뜻은 아니야. 

난 밖으로는 무섭고 안으로는 편안한 우리 조직이 좋아. 뭐, 대충 그런 뜻이었어.” 


“‥‥.” 



이 녀석도 엉뚱한 것에 고민하고 있었구나. 이미 난 그 말은 잊었는데. 난 얼굴을 펴고서 웃어주었다. 

그러자 유인이의 표정도 한결 밝아지기 시작했다. 



“네 맘 다 알아. 나도 너처럼 그런 게 좋아.” 


“진짜? 휴우. 난 또 네가 그것 때문에 삐져서 밥 안주면 어쩌나 했지. 다행이다.” 



윽. 고작 밥 때문이었니? 그 말을 들으니 머리가 아파온다. 



“응? 그런데 저 오토바이 아까부터 계속 따라오는 것 같은데? 아닌가?” 



유인이가 내 뒤를 응시하며 혼잣말을 했다. 오토바이? 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유인이의 말대로 오토바이 한대가 보였다. 

그 오토바이는 점점 우리와 가까워졌고 이윽고 곁으로 다가왔다. 더 이상 우리 차를 따라잡지 않는 걸로 보아 

왠지 우리와 속력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웬 오토바이지?” 



민규가 말했다. 오토바이의 주인은 우리 차로 오토바이를 바짝 붙이기 시작했다. 

탕탕! 아슬아슬하게 핸들을 조절하며 내 쪽 유리창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오토바이 주인이다. 

헬멧의 고글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난 의아함에 차창을 내려보았다. 그러자 고글을 올리며 얼굴을 보이는 

오토바이 주인이었고 얼굴을 확인한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너‥너 어떻게??” 


“왜 이렇게 느리노? 똥차 아이가?? 어쨌든 간에 내 먼저 가있을게!!” 



글자가 적힌 자신의 손바닥을 흔들며 앞서 달려 가버리는 이시백이었다. 지금 뭐야? 내가 그 단세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바라본 고속도로는 시백이의 검은 오토바이를 환영이라도 하는 듯이 길을 활짝 열어주고 있었다. 


이시백‥ 그럼 너‥. 
 
    
 













※전국 고교 일진협회※ 






♡61 




“아는 사람이야?” 



창밖으로 내밀었던 머리를 안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차안에서는 유인이의 호기심 어린 질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유인이도 얼굴을 봤을 텐데 마치 어린아이 같은 저 순진한 표정은 무엇이더냐? 나는 버튼을 눌러 차창을 올렸다. 



“몰라? 어제 희웅이를 구해준 사람이잖아.” 


“아‥맞다.”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그렇고 포기하고 있었던 이시백이 나를 따라올 줄이야.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내 머리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내 입은 벌써 현실을 직감한 듯 귀에 걸려 있었다. 싱글벙글. 지금 내 얼굴이다. 



“민규 형, 개소리 돌았나봐.” 



나를 지켜보고 있던 유인이가 몸을 앞으로 돌리며 민규에게 말한다. 그에 룸미러로 나를 힐끔 쳐다보는 민규였고 

곧 나에게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냐며 질문을 해왔다. 나는 지금까지 이시백과 있었던 일을 모조리 이야기해주었다. 

정말 집에 도착하면 시백이가 와있을까? 

민규가 모는 차는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려 나갔다. 



끼이익. 승용차 바퀴의 회전이 무뎌지며 곧 큰 주택 앞에서 조용히 멈추었다. 

태기가 타고 온 승용차가 20초 먼저 도착해있었다. 그 승용차에 타고 있었던 우혁이와 신이, 그리고 희웅이가 내렸다. 

곧 우리 차 뒤로 팔 부하들의 봉고차가 도착했다. 난 민규가 열어준 뒷문으로 사뿐히 내렸다. 하늘은 이미 어둑해져 있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눈에 띤 물체가 있었으니 바로 이시백이 타고 있었던 검은색 오토바이였던 것이다. 

그를 보자 난 뛸 듯이 기뻤다. 영문을 모르는 신이와 다른 사람들은 웬 오토바이냐며 의문을 토로했다. 

난 시백이를 반겨주기 위해 대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봐요! 아줌마! 나는 태기 히야가 아니라고 캤잖아요!! 이것 좀 놔요!!” 


“태기씨, 절 버리지 마세요. 엉엉! 우리의 사랑은 다 거짓이었단 말이에요? 태기씨-.” 



눈에 보이는 저 황당한 광경은 도대체‥뭘까? 대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호두와 웬 낯선 여자였다. 

옷차림이 꽤나 퇴폐적인 여성이 호두의 허리를 끌어안고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게다가 여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은 나를 또 한번 놀라게 만들었다. 태기. 분명 태기씨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왜 호두를 붙잡고 태기를 찾고 있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는 호두를 태기로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온 것을 뒤늦게 알아챈 호두가 손을 뻗으며 구조를 요청했다. 



“으아, 진짜 미치겠네! 개솔아, 내 좀 도와둬! 이 아줌마 좀 떼 봐라!” 



나는 일단 여자를 진정시키고 보자는 생각으로 대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는 호두에게 매달려 울고 있는 

여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 가니 여자가 입은 탑 사이로 확연히 드러난 가슴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뽀얀 허벅지는 검은 핫팬츠 아래로 죽 뻗어있다. 난 여자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고개를 돌려 나를 보는 여자다. 

얼마나 운건지 마스카라가 지저분하게 번져 있었다. 



“으흐윽, 왜요?” 



코를 훌쩍이며 여자가 묻는다. 



“저기‥죄송하지만 그 애는 태기가 아니거든요? 말투도 다르잖아요. 그쵸?” 


“쿨쩍, 뭐예요?” 



내 말에 눈을 찡그리며 호두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본다. 그런 여자를 보며 호두는 인상을 썼다. 

멍든 다리 때문에 제대로 도망도 못가고 붙잡혔던 모양이다. 



“흑, 정말이네. 그럼 우리 태기씨는?” 



태기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여자는 호두를 놓아주며 나에게 물었다. 그에 나도 모르게 대문 앞에 서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내 시선을 따라 여자도 그들을 본다. 그리고 뭔가를 발견한 듯 달려가기 시작했고 코맹맹이 소리로 크게 외쳤다. 



“태-기-씨!!” 



와락! 그녀가 태기라 부르며 껴안은 사람은 다름 아닌 신이었다. 으윽.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지? 

신이를 태기로 착각한 여자는 호두에게 했던 대로 눈물, 콧물을 다 짜내며 울기 시작했다. 



“태기씨, 왜 이제 오신 거예요? 엉엉. 이젠 도망가지 마세요. 꺼이꺼이.” 



신이는 자신에게 매달린 여자를 벙져 내려다보더니 다시 나를 보았다. 도대체 이게 뭐냐는 표정.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지금 이 일의 영문을 알기 위해서는 태기가 필요하다. 적어도 저 여자가 쉴 새 없이 연발해대는 태기라면 뭔가를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때 바닥에서 뭔가를 주운 유인이가 여자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안경이었다. 



“큭. 훌쩍훌쩍.” 



여자는 유인이를 한번 쳐다본 뒤 안경을 받아들었다. 



“내 안경‥.” 



자신의 안경이라는 여자. 곧 안경을 쓴 여자가 제자리에서 주변을 살핀다. 그러다가 자신의 앞에 있는 신이는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뒤로 주춤거렸다. 



“어머. 태기씨가 아니잖아?” 



이 자리에 있던 모두는 황당한 얼굴로 여자를 보았다. 상당한 원시구만? 



“야! 니 누군데? 아‥존나 황당하네. 대문 열어 줬디만 웬 첨보는 자식이 들어와서 지들 집 마냥 수박을 쪼개 먹질 않나, 

웬 괴상망측한 아줌마가 앵겨서 태기 히야를 찾지 않나. 놀러 못간 것도 서러워 디지겠는데, 으아악!!” 



호두는 이미 반쯤 미쳐 있었다. 그런데 첨보는 자식이라면 아마도 시백이를 뜻하는 거겠지? 그래도 일단은 현관 밖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 

난 민규에게 태기의 행방을 물었다. 



“태기 형은 주차하고 올 거야.” 



민규 대신 우혁이가 말했다. 



“태기씨가 곧 온다고요?” 



우혁이의 말을 들은 여자가 안경 안으로 손가락을 넣으며 눈물을 닦았다. 그 때 속담 속 호랑이 같은 태기 놈이 부하들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여자를 본 태기는 화들짝 놀라 입을 벌렸다. 역시 이 둘 사이에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의심의 여지가 없다. 



“태, 태기씨!!” 



여자는 태기의 등장에 반가워하며 태기의 가슴에 안겨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아내었다. 태기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들을 향해있다. 심지어는 찌글이까지 자신의 주인을 응시했다. 



“태기씨, 절 버리지 마세요!” 


“미스 황, 왜 이러는 거야? 늦었잖아. 그만 돌아가, 응? 집은 또 어떻게 안거야?” 


“싫어요! 전 못 돌아가요! 절 또 버리시려고요? 그럼 우리 아기는 어떡해요? 네? 으헝헝.” 



엥? 우리‥아기? 설마, 태기 저 자식이? 

이것이 밖에서 사고를 치다니! 난 태기를 째려보았다. 따끔한 내 눈초리를 느낀 태기는 두 팔을 저으며 소리친다. 



“형님, 오해 마십시요! 아닙니다! 이건 모함이라고요! 미스 황, 내 아이라니 무슨 개똥같은 소리야?” 


“엉엉엉! 싫어요, 전 아이 낳을 거예요!” 





*********** 





패앵-! 지금 거실바닥은 여자의 코푼 휴지로 너저분해졌다. 우리는 상 앞에 두 사람을 앉혀놓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태기는 여자의 뱃속에 자신의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전면 부인했다. 



“말도 안돼요! 제 아이가 아닙니다. 미스 황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구요!” 



하지만 태기가 미스 황이라 부르는 여자는 눈물과 함께 자신의 진심을 알리고자 했다. 



“흑, 제가 왜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태기씨 밖에 없다구요.” 



자신의 배를 보듬으며 여자가 말했다. 태기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상위에 있던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태기다. 

속이 무진장 탄 모양이다. 



“태기 형, 이 누나랑 잔 적 있어요?” 



모두와 함께 태기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희웅이가 질문을 했다. 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또 한번 코를 풀었다. 

코푼 휴지가 바닥에 하나 더 늘었다. 



“잠만 잔다고 애가 생기나? 홀딱 벗고 서로의 비밀을 속삭여야지. 형, 속삭였어?” 



능글맞은 우혁이의 질문에 태기는 주춤거리더니 여자를 흘끔 쳐다본다. 태기의 입술이 힘겹게 떨어졌다. 



“응‥딱 한번. 그치만.” 


“그럼 맞구만!” 



우혁이가 손바닥으로 상을 탕 치며 단박에 단정을 지었다. 그에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태기를 노려보았다. 고개를 숙이는 태기다. 



“얼~. 형님, 능력 좋네!” 


“몇 개월인데?” 



신이가 이 상황을 즐기며 농담을 던졌고 얼떨결에 여자의 희생양이 되었던 호두가 질문을 했다. 

여자가 휴지로 눈 밑을 닦으며 대답한다. 



“3개월이요.” 


“뭐? 3개월?! 미스 황, 다른 놈이랑 착각한 거 아니야? 나랑 만난 건 2개월 전이잖아!” 



우리 모두는 여자를 주목했다. 그리고 여자가 어떻게 받아칠지 기대했다. 



“무슨 소리예요? 3개월 전이잖아요! 태기씨, 그렇게 제가 싫으신 거예요? 그래도 전 괜찮아요. 하지만 우리 아이만은‥으어엉!!” 



또 다시 울음보를 터뜨린다. 으유, 머리야. 도대체 누구 말이 옳은 거야? 난 이마를 짚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때 잠자코 소파에 앉아있던 시백이가 입을 열었다. 



“남자가 순 도둑놈이네.” 



그에 모두의 관심이 시백이에게로 옮겨졌다. 여기에는 시백이가 왜 우리 집에 있는 지를 이해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묻지 않은 것은 태기의 일로 인해 잠시 관심 밖의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넌 뭔데 여기에 있는 거야?” 



도둑놈이라는 말에 발끈한 태기가 시백이에게 말했다. 시백이는 보고 있던 TV를 꺼버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난 이시백이고 알바차 여기로 온 거다.” 



사람들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나대신 민규가 시백이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대부분은 희웅이를 구해준 시백이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 듯 했다. 시백이가 우리 조직에 들어온 것에 대해 

누구보다 희웅이가 제일 기뻐했다. 우리는 다시 처음 화제로 돌아와 태기와 여자를 보았다. 그들의 뒤로 어항이 보인다. 

어항 속에는 며칠 전 한 마리가 술안주로 쓰인 관계로 뱀장어 한 마리만이 외로이 헤엄치고 있었다. 



“두 사람 사랑해?” 



이어지는 유인이의 질문이었다. 이번 물음에 여자의 눈빛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태기는 마치 쏠린다는 얼굴이다. 



“네! 사랑해요. 전 태기씨 밖에 없어요.” 



태기의 어깨에 기대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여자였다. 태기는 여자의 머리를 밀어내었다. 무안해하며 뽀글한 파마머리를 정리한다. 



“난 미스 황에게 한 톨의 감정도 없어.” 



태기가 딱 잘라 자신의 속마음을 밝혔다. 여자는 충격 받은 얼굴이었다. 



“그럼 사랑 없이 안았던 거야?” 



유인이의 성숙된 질문이었다. 여자는 태기의 대답을 기다렸다. 태기는 망설였다. 눈빛이 진지하다. 



“그땐‥.” 



모두 태기에게 집중했다. 그땐‥? 



“그땐‥내 의지가 아니었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니? 그럼 누구의 의지로 그랬다는 거야? 



“그게 뭔 말이고?” 



호두도 나처럼 이해가 안 된 모양이었다. 



“그건‥.” 



태기는 말을 잇질 못했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냄새가 풍긴다. 



“빨리 말해. 네 의지가 아니었다는 게 무슨 뜻이야?” 



내가 쏘아붙였다. 그에 두 눈을 질금 감더니 다시 번쩍 뜨는 태기다. 여자의 팔을 잡고서 벌떡 일어서는 변태기. 



“형님, 죄송합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라며 여자를 데리고 나가버리는 것이다. 현관문이 닫히며 거실에 썰렁한 바람이 불었다. 

모두들 태기가 나간 후 나름대로의 추측을 벌였다. 태기와 제일 가까이 있던 민규는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신이는 ‘나가요’한테 잘못 걸린 게 분명하다고 했다. 유인이는 관심 없는 지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 가버린다. 

희웅이는 무조건 여자 분이 가엾다는 말만 되풀이했고 호두는 마지막에 태기의 표정으로 보아 태기의 애가 맞다고 확신했다. 

우혁이는 여자가 태기를 속이는 것 같다고 했다. 이렇게 모두의 의견은 가지각색이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침묵하고 있는 내게 신이가 물어왔다. 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겠어. 내가 뭐라고 생각하던 간에 진실은 저 두 명이 알고 있을 텐데. 기다려보자. 

태기가 다 말해준 댔잖아. 어쨌든 난 그 여자보다는 태기를 믿어. 내 부하니까.” 



난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시백이에게 방을 가르쳐준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2층으로 올라가 마지막 하나 남은 방 앞에 섰다. 하얀색 페인트가 깔끔하게 칠해져 있는 방문을 열었다. 선선한 공기가 풍겨지는 방이다. 

오랫동안 비워둔 탓일 거다. 



“여기가 네 방이야. 웬만한 건 다 있으니까 특별히 불편한 건 없을 거야. 

그리고 방학 끝나면 부산으로 내려갈 거야? 난 되도록이면 네가 여기에서 학교를 마저 다녔으면 좋겠어.” 



시백이는 침대 위에 배낭을 던져 놓은 후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거야, 어렵지는 않지.” 



창문을 활짝 여는 시백이다. 창밖을 내다본다. 



“왜 생각이 바뀐 거야? 조금 놀랐어.” 



시백이가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하나를 물었다. 깜깜한 밤하늘 위로 라이터 불이 떠올랐다. 



“음‥몰라. 까먹었다. 아니다. 그냥.” 


“그냥?” 


“그래. 그냥 바꼈다.” 



참 오묘한 대답이다. 하지만 궁금증을 한꺼번에 씻어준 대답이기도 했다. 



“그럼 쉬어. 먼 길을 달려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땡큐!” 



난 방문을 닫고 나와 혼자 있게 해주었다. 내 방으로 내려와 옷을 갈아입은 뒤 정원으로 나갔다. 

정원에는 민규와 신이, 호두, 그리고 우혁이가 테이블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나오자마자 신이와 눈이 마주쳤다. 

빙그레 웃어 보인다. 귀여운 녀석. 



“형님, 아이스크림 먹을래?” 



우혁이가 내게 말했다. 



“내 것도 있어?” 


“자!” 



자신이 핥던 아이스크림을 내게 내미는 우혁이다. 그럼 그렇지. 



“됐어. 너나 먹어.” 


“형님은 신경 써줘도 그러네.” 



난 무시해버리며 빈 의자에 앉았다. 오늘 밤은 바람이 불어 시원한 편이다. 민규가 종이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부산에 있는 동안 호두가 받은 인원을 적은 명단입니다.” 



민규가 말했다. 종이에는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연락처가 적혀있었다. 꽤 많았다. 



“이틀 동안 70명 정도가 왔었다. 거기에 적어놓은 사람들은 내 나름대로 평가했을 때 도움은 될만한 놈들인 것 같드라.” 



호두가 아이스크림 막대를 깨물며 내게 말했다. 이틀 동안 70명이나 모였다니 그럼 현재 확정된 인원은 총 350명. 

이정도면 전국구 No.2인 구제파와도 맞먹는 인원이다. 난 만족스러웠다. 철컹. 그때 대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허겁지겁 들어왔다. 



“꺄악! 도와줘요!” 



아까 그 미스 황이다. 정원으로 급히 뛰어 들어와 내 등 뒤로 숨는 여자. 곧 태기가 뛰어왔다. 



“저 좀 도아주세요. 태기씨가 자꾸만 아이를 지우라고 해요. 엉엉.” 


“미스 황, 내가 언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 응?” 


“집에 가면? 사람들 시켜서 아이를 유산시키게 하려고요?! 싫어요. 전 낳을 거예요!” 



아아‥또 머리가 지끈지끈거린다. 여자는 나를 방패삼아 등 뒤에 몸을 숨겼고 태기는 여자를 붙잡기 위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설마 내가 그런 못된 짓을 하겠어? 아, 진짜 돌아버리겠네. 형님, 저 믿죠? 그쵸?” 



태기는 큰 누명이라도 쓴 것 마냥 억울해했다. 여자는 계속 내 뒤에서 징징거렸다. 자신을 버리지 말라는 여자. 

후, 아무래도 진지한 대화는 어려울 것 같다. 



“변태기.” 



난 가라앉은 소리로 태기를 불렀다. 



“네, 형님.” 


“일단 이 여자 네 방에 데리고 가.” 


“예? 제 방예요? 형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불쌍한 표정을 짓는 태기였다. 난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서 데리고 가.” 


“형님‥.” 


“어서!” 


“‥‥.” 



내가 언성을 높이자 여자도 태기도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하는 수 없이 여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태기다. 

그들이 현관 앞에 다다랐을 때 난 태기를 불렀다. 



“변태기! 잠깐만 와봐.” 



나의 부름에 걸어가는 태기를 현관 앞에 멈춰선 여자가 지켜보았다. 내 앞에 도착한 태기가 고개를 숙인다. 



“저 여자 재워놓고 정원으로 나와.” 



내 말에 태기는 한결 밝아진 얼굴을 했다. 



“저 여자와 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 지 다 말해줘. 알았지?” 


“형님‥네! 물론이죠!” 



태기는 여자에게 달려가 그녀의 팔을 잡고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웬만하면 그냥 낳지 그러노. 나는 애 좋아하는데.”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며 호두가 중얼거린다. 



“젊은 나이에 애는 무슨 애냐? 인생 종칠 일 있냐?” 



그에 신이가 아이스크림 막대를 반 토막 내며 대꾸를 했다. 그렇게 밤은 깊어만 갔고 1시간 정도가 흐르자 현관문이 열리며 태기가 나왔다. 

여자와 또 실랑이를 벌였는지 지친 모습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의자에 앉는 태기. 나는 이야기를 해보라했다. 



“형님은 제가 무슨 말을 하던 다 믿어주실 거죠?”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태기가 물었다. 



“그래. 내 부하를 내가 믿지 누가 믿겠냐? 말해봐.” 



태기는 나의 긍정적인 대답에 살짝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다. 


그 시각 새벽 1시. 우리는 졸음을 잊고 태기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니까 미스 황을 만난 건 정확히 2개월하고도 1주 전의 일이예요‥.” 












※전국 고교 일진협회※ 






♡62 




오랜만에 중학교 친구들을 만나 회포나 풀려고 물 좋다는 술집으로 갔었어요. 

그때 그 술집이름이‥아! ‘여인천하’였죠. 이름부터가 왠지 예쁜 여자들이 득실 될 것 같은 필(feel)이 오지 않나요? 

(우혁 : 오! 팍팍 오는데? 거기가 어디야??/개소리 : 시끄러워.) 


흠! 어쨌든 우리는 외관이 멋진 그 술집을 선택했어요. 입구를 들어서자 내관은 외관 못지않게 화려함 그 자체였죠. 

5번 room으로 안내를 받은 우리는 고급 양주와 많은 안주를 주문했어요. 그리고 빠져서는 안 될 아가씨들도 수대로 주문했고요. 

그때 5명이서 갔으니까 여자도 5명을 불렀네요. 

(호두 : 이뻤나? 혹시 그 중에 미스 황이 낀겨 있었는 거가?) 


아니. 미스 황은 없었어. 뭐 room으로 온 여자들 모두 그런대로 몸매도 괜찮았고 얼굴도 봐줄 만은 했어요. 



“오빠, 너무 잘 생겼당! 여자들한테 인기 많겠어!” 



보는 눈도 있었고 솔직하기도 했고, 



“자, ‘아’해봐.” 



애교도 있었지요. 단, 



“우리 옷 벗기 게임해요! 진 사람이 옷을 하나씩 벗는 거예요.”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개방적인 게 흠이었지만요. 

(우혁 : 형도 참! 그게 무슨 흠이야? ‘여인천하’라고 했지? 거기가 어디야?/신이 : [개소리의 눈치를 살피며]강남에 있어?) 


하여튼 재미는 있었어요. 한참을 놀다보니 빈 술병은 어느덧 7병이나 되었고 친구 몇은 취해서 여자들을 안느라 정신이 없었죠. 

(우혁 : 형은? 형도 정신이 없었어??) 


야! 난 일편단심 형이야. 아무나 안고 그러지는 않는다고! 

(우혁 : 일편단심?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소리야?/[모두들 흥미진진하게 태기를 바라봄.]) 


시, 시끄럽고!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예요. 

친구 중 봉규라는 녀석이 있는데 그 자식의 특징을 말하자면 땀 흘리는 여름에도 시도 때도 없이 오줌을 누는데, 

그냥 얌전히 누는 것도 아니고 꼭 옆에서 볼일 보고 있는 사람의 거기를 봐서 자기 것보다 크다 싶으면 시비를 걸거든요. 

그러다가 꼭 얻어터지고요. 그때도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옆에서 볼일 보는 인간만 없으면 된다는 생각에 혼자 화장실로 보냈어요. 

(신이 : 그런데 일이 터졌구만?) 


후, 그래. 그 친구가 화장실에 간지 10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머리며 입에서 피가 철철 나는 봉규가 

떠밀리다시피 상 앞으로 엎어지더라고요. 그리고 그 뒤로 웬 녀석들이 떼거지로 들이 닥치지 뭡니까. 



“야, 씨파! 너희가 저 불알자식 친구들이냐? 너희 거시기가 그렇게 크다며? 어디 얼마나 큰지 한번 까보자!” 

(개소리 : 그 자식 말하는 투가 왜 그래?) 


그치요? 그 자식 입술은 또 얼마나 두꺼웠다고요. 친구들은 얻어터진 봉규를 보자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는 

병을 깨뜨린 후 잡았어요. 취기가 돈 것도 문제는 문제였지만 모두들 욱하는 게 있었거든요. 



“저 자식들이 감히 우리 친구를. 다 죽었어!!” 


“이야야!!” 



결국 술판은 개판이 되었어요. 여자들은 겁에 질려 고함을 질렀고 전 하는 수 없이 항상 들고 다니는 여의봉을 뽑아들었어요. 

퍽! 퍼벅! 쨍그랑!! 

여자들은 room에서 도망치지도 못한 체 소파에 엎드려 있거나 테이블 아래로 들어가 숨었어요. 

전 테이블을 밟고 뛰어올라 터지고만 있는 친구들을 도와주었어요. 상대는 대략 10명 정도 있었죠. 

(개소리 : 친구들은 싸움을 못하냐?) 


음‥ 어느 정도 하기는 하는데‥ 그다지 썩-. 

어쨌든 전 놈들을 밖으로 유인하기 위해 한 놈씩 쓰러뜨리며 room에서 나오는데 성공했어요. 



“야! 저 자식 잡아!!” 


“씨발, 경찰이야!!” 



네, 한 녀석이 외친대로 경찰이 들이닥쳤던 거예요. 술집 종업원이 신고를 한 것 같았죠. 

저나 그놈들이나 경찰이라는 말에 겁이나 도망 갈 곳을 찾는 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어요. 하지만 그때 경찰들이 우리를 찾아내 

복도를 막아섰어요. 



“저 자식들 모조리 다 붙잡아!” 



그 중 짠 밥이 좀 되 보이는 형사 하나가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며 외쳤어요. 그러자 몇몇 형사들이 달려왔죠. 

(호두 : 그래서 도망 안 갔나?) 


당연히 도망갔지. 전 복도 반대편으로 힘껏 내달렸어요. 길게 늘어난 여의봉을 다시 줄여 주머니에 넣었죠. 

복도 끝에 다다른 저는 양 갈래 길에서 어느 쪽으로 갈까 잠시 망설였어요. 



“이새꺄! 거기 서!!” 



뒤를 돌아보니 경찰 두 명이 험상궂은 얼굴로 저를 쫓아오고 있었어요. 전 대충 가보자는 생각으로 오른편 복도로 방향을 틀었죠. 

타타타닥! 안주를 들고 가는 웨이터와 부딪혀 안주를 모두 떨어뜨렸지만 사과할 겨를도 없었어요. 

하여튼 저는 잡히지 않기 위해 죽자 사자 달렸죠. 그런데. 

(신이 : 그런데?) 


모두 헛수고였어요. 제가 선택한 오른쪽 길은 막다른 곳이었던 거예요. 

(우혁 : 이런‥.) 


저는 막다른 길에서 어찌 할 바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다가 경찰들이 가까워지는 것 같아 

제일 먼저 눈에 띤 room 안으로 몸을 숨겼어요. 제가 들어간 room안에는 웬 중년 남자 한명과 머리가 북실한 아가씨가 한명 있었어요. 



“넌 뭐야?!” 



아가씨의 매끈한 다리를 만지고 있던 남자가 저를 보자 불쾌한 듯이 소리쳤어요. 그때 경찰들의 목소리도 문밖에서 들려왔지요. 



“이 자식 어디로 토낀 거야?” 


“일단 room부터 뒤져보자고.” 



그 말을 들은 저는 순간 남자의 입부터 막자는 생각에 무작정 테이블로 뛰어가 중년 남자의 머리를 잡고서 테이블에 힘껏 받아버렸죠. 

쿵! 그에 남자는 맥없이 기절을 하고 말았어요. 그걸 본 아가씨는 소리를 지르려고 했고 전 무조건 입을 막아야만 했기에 

키스를 해버렸어요. 

(개소리, 신이, 호두, 우혁 : 오-./민규는 침묵.) 


아가씨는 갑작스러움에 놀라 눈만 크게 뜨고 있었어요. 

벌컥! 그때 문이 열리며 경찰들이 들어왔어요. 그 순간 심장이 미치도록 뛰는 거 있죠? 아주 죽음이었다니까요? 



“쳇, 없는데?” 


“그런데 저 아저씬 왜 저래?” 


“누구? 자는 것 같은데?” 


“그런가? 실례했수다!” 



탁. 다행이도 경찰들은 눈치 채지 못했어요. 전 아가씨의 입술에서 입술을 떼 내었지만 갑자기 제 목을 끌어안고 

적극적으로 저에게 키스를 퍼부어대는 아가씨가 아니겠어요? 당황한 저는 반대의 상황이 되어 멍하니 아가씨를 보았죠. 

(우혁 : 이야!) 


전 키스까지는 봐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가씨는 정도를 벗어나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여자의 손이 제 넥타이를 풀고 셔츠의 단추를 풀려고 했어요. 타악! 그에 여자의 탐욕스러운 손을 잡아버렸죠. 



“그만해.” 



일어나 셔츠 단추를 다시 잠구었어요. 여자는 뭔가 아쉬웠는지 혀로 자신의 입술을 쓸어내렸고요. 

전 무시해 버리고는 문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어요. 그리고는 문을 살짝 열어 밖을 내다보았죠. room밖은 아직도 소란스러웠어요. 



“나가는 거‥도와줄 수도 있는데.” 



그때 등 뒤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아주 솔깃한 말이어서 문을 닫고 여자를 보았어요. 



“도와줄 수 있다고? 어떻게?” 


“훗, 절 따라와요.” 



여자는 기절한 남자의 바지주머니에서 지갑을 빼내들었어요. 그리고는 자신의 옷, 그러니까 가슴 사이에 넣었죠. 

(신이 : 강남에 있어?/개소리：[신이를 째려봄]) 


여자는 소파에서 일어나 노래방 기기위로 올라갔어요. 창문으로 나가려는 듯 했어요. 나름대로 좋은 방법인 것 같았죠. 



“이리로 나가면 되요. 그다지 높지도 않으니까.” 



여자는 굽 높은 구두를 벗고는 창밖으로 던졌어요. 그리고는 창틀에 걸터앉았죠. 그 과정에서 여자의 짧은 미니스커트 사이로 

팬티가 보이기는 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어요. 

(우혁 : 형, 좋은 구경 많이 했네!/호두 : 근데 그 여자가 미스 황이가?) 


휘익! 여자가 먼저 창밖으로 뛰어내렸고 다음엔 제가 뛰어내렸어요. 1층이어서 정말 높지는 않더라고요. 

내려오니 여자는 바닥에서 자신의 구두를 챙겨 신고 있었어요. 어쨌든 그곳은 경찰차가 있는 정문의 왼편이었어요. 

만약, 반대편이었다면 뒷문이 있는 곳이니 경찰이 지키고 있었을 지도 모르죠.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전 훔친 지갑 안을 보고 있는 여자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어요. 여자는 지갑 안의 돈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소를 짓고 있었죠. 



“그래서 여기서 헤어지자구요?” 


“그럼?” 



당연한 것을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묻는 여자에게 반대로 질문을 했어요. 그러자 지갑을 흔들어 보이며 여자가 말했어요. 



“책임지세요. 전 어차피 이대로 들어가면 맞아죽을 지도 몰라요.” 



진짜 기가 턱 막혔죠. 

(개소리 : 웃기는 년이네. 자기가 훔쳐 놓고 누구더러 책임지라는 거야?/우혁 : 근데, 그 여자는 이뻤어? 이쁘면 용서되는데.) 


내가 말 안했나? 그 여자가 바로 미스 황이야. 이름은 황수경. 

(우혁 : 형, 절대 용서하지 마.) 


우린 그렇게 처음 만났어요. 전 조금 데리고 다니다가 따돌리자는 심보로 마지못해 미스 황을 데리고 그 곳을 벗어났어요. 

(호두 : 그때도 그 희한한 안경을 끼고 있었나?) 


아니. 그때는 렌즈를 착용하고 있었어. 하지만 머리는 지금처럼 북실했지. 

미스 황은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잔뜩 들떠있었어요. 아마도 지갑 속의 돈 때문인 것 같았죠. 



“우리 이제 뭐할까요? 전 놀이공원에 가고 싶은데.” 



길을 걷던 도중 제 앞을 막으며 미스 황이 물었어요. 놀이공원이라니‥그것도 첨보는 황당무개한 여자랑. 

전 입을 다물었어요. 



“갈까요‥?” 



미스 황은 저의 침묵이 긍정적으로 들렸나 봐요. 



“싫어.” 


“그럼 갑시당!” 



끝내 미스 황의 손에 이끌려 놀이공원으로 가버리고 말았죠. 그 밖에도 우리는 스티커사진도 찍고 심야영화도 보고, 

또 노래방까지 갔어요. 미스 황은 정말 즐거워했고 전 죽을 지경이었죠. 

(신이 : 싫으면 안하면 되지, 왜 억지로 하고 그래?) 


그럴 때마다 미스 황이 돌아가면 죽는다고 울먹이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어. 난 여자의 눈물에 무진장 약하거든. 

(개소리 : 그러니까 좀 고치래도.) 


죄송해요, 형님. 얘기 계속 할게요. 

저와 미스 황은 노래방에서 나와 포장마차로 들어갔어요. 술도 어쩜 그리 잘 마시는지 형님이랑 맞먹을 정도였어요. 

(우혁 : 형님, 술 잘 마셔?/신이 : 말도 마라. 무슨 술을 물마시듯 마신다.) 


어느새 둘이서 소주를 6병이나 비웠죠. 그렇게 같이 놀고 술도 마시다보니 나쁜 여자 같지는 않더라고요. 

제 눈에 비친 미스 황은 그저 조금 개방적이고 발랄한 여자였어요. 



“그만 들어가봐요.” 


“미스 황은?” 


“전 가게로 돌아가야죠.” 


“가면 맞아 죽는다며?” 


“쿡. 반은 뻥이었어요. 때릴지는 몰라도 죽이지는 않아요. 하루 혼나면 되는 걸요. 아! 잠깐 핸드폰 좀 줘보실래요?” 

(신이 : 드디어 작업 들어가는 거야? 형 연락처 따내려고?) 


맞아. 미스 황은 내가 준 핸드폰으로 자신의 폰에 전화를 걸어 서로의 폰에 서로의 번호가 남도록 했어요. 

그렇게 우리는 포장마차 앞에서 헤어졌고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어요. 한밤중에 심심해서 정원의 꽃과 나무에 물을 주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미스 황이었죠. 



“여보세요.” 


“태기씨, 저예요.” 


“누구요? 전 저라는 사람 모릅니다.” 


“으아! 끊지 마세요! 저 황수경이예요. 미스 황이요!” 



미스 황이라는 말에 진짜 끊으려다 불쌍해서 관뒀어요. 



“왜? 용건만 말하고 끊어.” 


“여전히 쌀쌀 맞으시네요. 잠깐만 나와 봐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싫어!” 


“태기씨‥.” 



미스 황이 울먹이며 제 이름을 말하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만나주었어요. 약속장소는 이틀 전 그 포장마차였죠. 

그날 미스 황은 이상한 모자를 쓰고 왔어요. 큰 꽃이 여러 개 달려있고 가에는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무슨 피크닉이라도 가는 줄 알았죠. 

하지만 한밤중에 모자를 쓰고나온 이유가 따로 있었어요. 

(개소리 : [눈을 비비며 잠옷차림으로 나오는 유인이를 바라보며.]이유?) 


네. 바로 멍이 든 얼굴 때문이었어요. 미스 황은 이틀 전 손님의 지갑을 훔치고 달아났다는 이유로 

방에 갇혀 주인에게 여러 차례 손찌검을 당했다고 했어요. 하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죠. 



“전 괜찮아요. 근데 제 말 맞죠? 죽지는 않았잖아요. 호호.” 



그때 주문한 소주 2병과 낙지볶음이 나왔어요. 전 미스 황에게 소주를 따라주었죠. 

미스 황이 그 술을 입안에 털어 넣더니 내게 말했어요. 아주 서글픈 눈빛으로요. 



“이틀 동안 태기씨가 너무 그리웠어요.” 

(유인 : [의자에 앉으며]개소리가 찌글이를 타고 다니는 꿈을 꿨는데 무슨 꿈인지 모르겠어.)/신이 : 개꿈이야.) 


눈탱이가 방탱이가 된 얼굴로 말을 하는데‥ 왠지 가여워 보이더라고요. 미스 황은 그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아버지는 하루하루 술에 쩔어 사시고, 엄마는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고‥ 정말 힘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집을 나온 게 2년 전 19살 때였어요. 당시 갈 곳이 없었던 저는 한달만 하자는 생각으로 술집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하지만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다시 세 달이 되었어요. 결국엔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술집에 몸담고 있는 신세가 되었죠. 

이젠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가 없어요. 빚도 빚이지만, 그 곳이 아니면 저를 받아줄 곳은 아무데도 없기 때문이에요.” 



그때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미스 황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는 것뿐이었어요. 그 사람은‥눈물을 흘렸죠. 



“절 이렇게 만든 아버지와 절 버린 엄마가 하루에 수도 없이 원망스러웠어요. 대학교에 다니며 웃고 떠들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또 소개팅이니 뭐니 하며 즐겁게 생활하는 제 또래아이들이 너무 부러웠어요. 다 똑같은 21살인데, 

왜 저만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전‥정말이지‥.” 


“너처럼 사는 21살이 있는 가하면 나처럼 사는 21살도 있어.” 



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미스 황을 보며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심스럽기도 했지요. 

미스 황은 제 말에 마시려던 술을 도로 테이블 위에 얹어놓았어요. 



“난 고1때 퇴학을 당했어. 지나치게 싸움을 좋아했기 때문이지. 난 퇴학을 당한 후에도 여전히 싸움만 하고 다녔어. 

그래서 늘 얼굴이 성할 날이 없었지. 왜 그렇게 싸움만 하고 다녔는지 모르겠어. 가슴 속에 남아있는 어떤 응어리를 없애기 위해선 

주먹을 휘두르는 일밖엔 없다고 여겨졌거든. 남에게 맞고 때리고 하는 동안에는 그 응어리의 존재를 느낄 수가 없었어. 

어쩌면 난 평생을 주먹만 휘둘러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때 내 상처를 어루만져 준 사람이 나타났어. 

그 분은 날 안아줄 만큼 넓은 가슴을 지니신 분이셨지.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셨어. 자신을 따라가서 그 훌륭한 주먹을 써보지 않겠냐고. 

비록 죽을 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난 난생 처음으로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그 분을 따라가기로 결심했어. 

그분과 함께 함으로써 난 내 존재가치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고 그럼과 동시에 가슴 속 응어리도 사라지는 것 같았어. 

지금은 내 곁에 계시지는 않지만‥. 나에게 있어 큰 형님은 아버지와도 같았지. 그러니까 너도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계시잖아. 아버지가 술만 마신다고 했었지? 야, 너도 술 좋아하지 않냐? 

술이나 한 병 사들고 가서 같이 대화나 해봐. 혹시나 때리시려고 하면 냅다 신발 들고 도망쳐. 아마 붙잡히지 않으려면 

네가 문 앞에 앉아있어야 될 거야. 하하하.” 


(유인 : 지금 무슨 얘기하고 있는 거야?/신이 : 좀 조용해봐. 감동 먹고 있는데./ 

우혁 : 형, 진짜 멋있다./개소리 : 하긴 우리 아버진 참 좋은 분이셨지.) 


그치? 정말 가슴에 확 와 닿는 이야기지? 그런데 망할 미스 황은‥. 

(호두 : 미스 황이 왜? 울고 있드나?) 


감동 받아서 울면 기분 좋게? 자고 있더라. 그것도 침까지 질질 흘리면서. 



“야, 자냐?” 



황당한 저는 미스 황을 흔들어 깨웠죠. 하지만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거예요. 

소주는 반병도 안 마셨는데 벌써 뻗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무래도 일을 하면서 몇 잔 마시고 온 모양이더라고요. 

10분간 깨워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래서 저 혼자 남은 소주를 다 마시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죠. 

(우혁 : 그래서 깨어났어?/유인 : 무슨 얘기 하는데?) 


아니. 결국엔 포장마차 할머니의 눈살에 못 이겨 미스 황을 등에 업고서 나와 버렸어. 그리고는 가까운 모텔로 들어갔지. 

(신이 : 거기서 일이 터졌군./개소리 : 그래서? 계속 말해봐.) 


전 미스 황을 침대에 눕힌 뒤 황급히 그 곳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제 손목을 잡아버리는 미스 황이 아니겠어요? 



“무서워요. 같이 있어줘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을 하는데 진짜 마음이 약해지더라고요. 하는 수 없이 전 미스 황이 다시 깊이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줬어요.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미스 황은 잘 생각도 하지 않는데 제가 자꾸만 졸음이 쏟아지는 거예요. 그리고는 깜빡 잠이 든 것 같은데‥. 

다음은 생각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제가 눈을 떴을 땐 전 침대 위에 있었어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죠. 

영문을 몰랐던 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이게 웬일? 옷이 홀라당 벗겨져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전 다시 이불로 몸을 감싼 뒤 옆을 보았어요. 

(개소리 : 그년이구만?!/우혁 : 태기형, 따먹힌 거였어??) 


옆에는 아니나 다를까 저와 마찬가지로 옷을 한 꺼풀도 입지 않은 미스 황이 곤히 잠자고 있는 거 있죠? 

전 침대에서 내려와 허겁지겁 옷을 입었어요. 그때 등 뒤로 끔찍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꺄아악!!” 



방이 날아갈 듯 고함을 지르는 미스 황이었어요. 



“왜? 왜?!” 


“꺄아악!! 이 변태! 어떻게 이런 짓을!!” 



정말 할 말을 잃고 말았죠. 

(개소리 : 당돌한 계집이네?) 


어쨌든 미스 황은 제가 그런 거라고 끝까지 우겼고 전 억울함에 머릿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어요. 

분명, 당한 것은 전데 미스 황이 자꾸만 저한테 죄를 덮어씌우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나더라고요. 그래서 손찌검을 할 뻔 했지만, 

그래도 여자라는 생각에 애써 참았어요. 전 모텔에서 도망쳐 나왔고 그 뒤로는 미스 황의 전화는 일체 받지도 않았어요. 

아니 아예 번호를 바꿔버렸죠. 

(개소리 : 뭐야, 그래서 바꾼 거였어?) 


어쩔 수가 없었어요. 그날 밤 정말 미스 황과 제가‥그, 그랬다고 치더라도 그때는 2개월 전이었기 때문에 

미스 황의 뱃속에 있는 애는 절대 제 애가 아니예요. 만난지 2개월 밖에 안 지났는데 애가 3개월인 게 말이 되냐고요. 

형님, 전 정말 억울합니다. 


‥그렇게 태기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유인 : 지금 미스 황 이야기 한거야? 난 제대로 못 들었어. 첨부터 다시 해줘. 응?) 











※전국 고교 일진협회※ 






♡63 





“태기형,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태기의 이야기를 가장 애처롭게 듣고 있던 우혁이가 태기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를 해주었다. 

나는 명색이 보스이면서 부하가 힘들 때 웃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미어졌다. 



“형, 걱정하지 마. 미스 황은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네가 어떻게?” 



자신 있게 말하는 신이의 말에 태기가 기대를 품고서 방법을 물었다. 신이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뭔가가 번쩍인 듯 소리쳤다. 



“확 납치해서 땅속에 파묻어버릴까??” 



모두들 신이를 청부살인업자나 악독한 사채업자 보듯이 쳐다보았다. 분위기가 그리 호응적이지 않자 신이는 괜히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드럽게 시커머니까 별이 다 안보이네.” 



정말 별이 보이지가 않았다. 태기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턱을 괴고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호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 좋은 방법이 있다!” 



테이블을 두 손바닥으로 탁 친다. 다들 호두에게 시선을 집중시킨다. 호두는 뭔가 거창한 수를 내놓으려는 건지 

심호흡을 크게 한번 내쉬었다. 



“뭐냐하면은 병원에 가서 누구 자식인지 검사를 해보는 거다. 태기 히야 애가 아니니까 당연히 검사를 해도 아니라고 나올 거 아이가. 

내 말 맞제?” 



아주 그럴 듯한 말이지만 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 확인해 본단 말인가! 우리는 고개를 흔들흔들 내저었다. 

하지만 이때 선비마냥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민규가 침묵을 깨고 놀라운 의견을 제시했다. 



“아니요. 호두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뭐? 요즘 병원에선 태아의 아빠도 가려낼 수가 있다는 거야?” 


“그렇지는 않지만, 미스 황을 속인다면 그것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미스 황에게 우리가 잘 아는 박사 한분이 계시다고 속이고 

검사를 받아보자고 말하는 겁니다. 만약, 미스 황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분명 거절을 하겠죠.” 



정말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두는 자신의 의견이 민규를 통해서라도 빛을 발해 뿌듯했는지 어깨에 힘을 준다. 

우리는 민규의 말에 찬성을 하며 미스 황을 속이기로 합의를 보았다. 



“자, 우리 내일을 위해 파이팅이나 한번 하자.” 



내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그러자 모두들 내 의견을 받아들이며 내 손등 위에 차곡차곡 손을 얹어나갔다. 

아이들의 손이 하나씩 모여 손 기둥을 이루었다. 



“성공을 꿈꾸며! 파이팅!!” 



부산에서의 피로가 누적된 사람들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휴식을 청하였다. 태기는 또 전과 같은 봉변을 당할지 몰라 

민규의 방에서 민규와 함께 밤을 보내기로 했다. 난 침대에서 뒤척이다 갈증이 남에 주방으로 갔다. 

물을 한 컵 마신 뒤 주방에서 나와 어두운 거실바닥을 밟아나갔다. 그리고 내 방 앞에 도달해 방문을 열려는데 

어디선가 신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어디선가는 현관 밖이었다. 난 의아해하며 현관문에 귀를 바짝 붙여보았다. 

신이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거절한다고 분명히 말했잖아. 난 어디에도 가지 않아. 내가 있을 곳은 여기야.” 



잠시 조용해졌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상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화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 다시 신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진형우. 자꾸 같은 말 되풀이하게 했다간 친구라도 가만두지 않아.” 



형우의 이름이 나왔다. 전화 상대편이 진형우라는 것이다. 신이의 목소리는 그리 밝지는 못했다. 아니 굳어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또 무엇을 거절한다는 것일까? 의문뿐이다. 난 현관문을 열었다. 그에 신이가 뒤를 돌았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탁! 급히 핸드폰을 닫아버린다. 얼굴은 못 볼 걸 본 얼굴이다. 



“개, 개소리.” 


“응. 왜?” 



당황한 나머지 내 이름을 더듬거리며 내뱉는 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왜, 왜?” 



정신이 없나보군. 



“안 자고 밖에서 뭐하니?” 


“어?” 



나의 물음에 더욱더 당황하는 신이었다. 그러다가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본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신이가 말했다. 



“그냥. 찌글이 자는 지 보려고.” 



자기 집에서 잘 자고 있는 찌글이를 들먹이다니. 뭔가 많이 수상하다. 



“그래?” 


“그래. 근데, 잘 자는 것 같네. 우리도 그만 들어가서 자자.” 



신이는 나를 지나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뒤도 안 돌아보고 자기 방으로 들어 가버리는 신이.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것일까? 

진형우가 전화로 신이에게 무엇을 권하였기에 신이가 거절한다고 말했지? 진형우‥ 그리고 강호파‥. 그럼 혹시‥. 

난 내 머리를 지배하는 불안한 생각을 떨쳐 내기위해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불안은 내 머리 끝에 매달려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아, 네가 분명히 그랬지?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라고. 그 마음 영원히 변치 않길 바래. 



다음날. 나와 우혁이가 미스 황의 팔을 한쪽씩 붙잡고서 현관 밖으로 끌어내고 있다. 

뒤에는 태기와 다른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일단 병원으로 가보자니까요? 누구 애인지 확인을 해보자구요!!”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애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확인한단 말이예요?” 


“아‥그건 걱정 마세요. 저희가 잘 아는 박사님 한분이 계시는데 노벨의학상을 타실 뻔 했는데 아쉽게 떨어지신 분이거든요? 

그만큼 우리나라 의학계에선 그야말로 최고죠. 어젯밤 그분께 사정을 말했는데 태아의 아버지를 충분히 알아낼 수가 있다더라고요. 

한시라도 빨리 태기 형애라는 게 증명되면 태기 형도 누나의 마음을 알아줄게 아니예요.” 



우혁이는 연습이라도 한건지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술술 잘도 내뱉었다. 분명 여자에게 있어 아주 솔깃한 말일 텐데 

미스 황의 표정은 차갑게 얼어있었다. 정원까지는 나왔지만 대문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내디딜 생각을 하지 않는 미스 황이다. 



“병원 가지 않아도 돼요! 확실하다니까요? 저 좀 믿어주세요!”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털어놓으려고 했지만 우리는 무조건 태기의 편이었기에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태기는 계속되는 미스 황의 거짓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는 믿는데 태기 형이 안 믿으니까 그러죠. 그러니까 박사님이 증명을 해주면 태기 형도 믿을 거라구요. 

어서 갑시다. 예약한 시간이 다 돼가요.” 



우혁이가 미스 황의 등을 떠밀며 대문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그러자 미스 황이 기겁을 하며 나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 아닌가. 



“잘못했어요!! 다 거짓말이었어요! 태기씨 아이라는 것도 거짓말이고, 아니 임신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예요! 용서해주세요. 엉엉!” 



뜻밖의 사실까지 알아내었다. 임신조차도 하지 않았다니‥. 심하게 우롱 당했다. 미스 황은 바닥에 무릎을 굽힌 체 용서를 빌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떡칠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그런 미스 황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이겼다는 승리감 때문일까? 

하지만 태기만은 미스 황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태기가 그녀의 앞에 섰다. 



“왜 거짓말을 한거야?” 



태기가 묻자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드는 미스 황이다. 다시 눈을 내리깔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사랑하니까요. 태기씨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라도 함께 있고 싶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임신하지 않았다는 게 들통 나고 말텐데?” 



유인이가 물었다. 그에 미스 황은 눈물을 닦아내며 주저 없이 이야기했다. 



“언젠가는 들킬 일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태기씨와 함께 있을 수 있지 않겠어요? 전 그것에 만족하고 싶었어요.” 



미스 황은 진심인 것 같았다. 진심으로 태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눈동자에 나타났다. 사랑. 미스 황이 태기를 사랑해. 



“형님, 데려다 주고 올게요.” 



태기가 나에게 말했다. 태기는 미스 황을 일으킨 뒤 평소답지 않은 무뚝뚝함으로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지금까지 태기를 죽 지켜봐온 나로서는 태기가 미스 황에게 이성에 대한 감정이 없다는 것쯤은 알 수가 있다. 

하지만 태기는 누구보다도 정이 많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녀석이다. 그렇기에 태기는 미스 황을 잘 타이르면서도 달래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이, 시시하게 끝났네.” 


“나도 좀 아쉽다.” 



허전하게 열려있는 대문을 보며 우혁이와 호두가 투덜거렸다. 그들을 보며 민규가 조용히 웃어 보인다. 

아이들은 점심밥을 먹기 위해 집안으로 들어갔다. 나또한 현관으로 향했지만 곧 따라오지 않는 신이 때문에 멈춰서버리고 말았다. 

신이는 반대로 대문 밖으로 나가려 했다. 



“신아, 어디 가니?” 



대문 바로 앞에서 우뚝 멈추는 신이다. 난 신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친구 만나러.”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신이. 갑자기 어젯밤 일이 마음에 걸린다. 혹시 진형우를 만나러 가는 것일까? 하지만 쉽게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 

신이 친구가 그 녀석 하나는 아니니까. 



“친구, 누구?” 


“너도 아는 친구야.” 



신이는 자꾸만 멀게 대답했다. 내가 아는 친구라‥. 정말‥형우인 거니? 



“‥‥.”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신이는 돌아섰다. 대문 난간을 넘었다. 

이제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꼴이 된 것이다. 나는 안에, 신이는 밖에. 

고개를 숙이고 서글픈 눈으로 땅을 보려는데 신이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형우 만나러 가는 거야.” 



역시‥. 난 신이를 붙잡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든 건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하지만 그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신아‥.” 


“괜한 걱정하지 마. 머리털 빠져.” 



신이도 내 불안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파이터 대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신이. 그런 그를 강호파에서 가만히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강호파는 신이를 나보다 더 크게 키워줄 지도 모른다. 어젯밤 신이는 전화로 거절한다고 말은 했지만 마음 한 곳에서는 

망설이고 있을 것이다. 탕. 대문이 닫혔다. 신이가 보이지 않는다. 



“하아‥. 그래, 고민하지말자. 신이 말대로 머리털만 빠질 거야.” 






************ 






이렇게 금방 들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릴 줄은 더더욱 몰랐다. 

미스 황은 두려움과 죄책감,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두 줄기의 눈물은 그녀의 뺨을 타고 턱 선으로 이어져 내렸다. 미스 황은 세 걸음 앞서 걸어가는 태기가 뒤돌아볼까 두려웠고 

또 돌아보지 않을까 겁이 났다. 처음부터 그런 거짓말이 나쁘다는 건 미스 황도 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아니 많았지만 그녀의 머리로는 생각나지가 않았다. 태기를 보지 못한 두 달 동안 무척이나 그리웠다.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태기. 그의 뒤를 밟고 간신히 알아낸 집. 그날 미스 황은 태어나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쁨과 환희를 만끽했다. 

미스 황은 그 행복을 조금이라도 오래 유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론은 이렇게 돼버리고 말았다. 



“집이 어디야?” 



이윽고 걸음을 멈춘 태기가 미스 황에게 물었다. 미스 황에게 보이는 것은 그의 등이다. 미스 황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어떤 집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주정뱅이가 살고 있는 진짜 집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항상 짐승들의 손길과 입김 속에 파묻힌 가짜 집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태기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미스 황의 반항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네가 원하는 곳.” 



태기의 말뜻은 양자택일(兩者擇一)하라는 것이었지만 미스 황은 그 뜻을 알지 못한 건지 엉뚱한 대답을 하였다. 

아니 미스 황에게 있어서는 현재의 진심이었고 그녀가 원하는 바람이기도 했다. 



“당신의 곁. 그 곳이 제가 원하는 곳이예요.” 



드디어 태기가 뒤돌아 미스 황의 눈을 마주 한다. 그들의 옆에 유치원 차량 한대가 하얀 매연과 함께 멈춰 섰다. 

차문이 열리고 꼬마 2명이 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후 차에서 내렸다. 



“난 내 옆자리를 너에게 내줄 마음은 없어.” 



그는 진지했지만 주변 분위기는 그렇지가 못했다. 아이들을 내려준 차량은 다시 매연을 내뿜으며 출발을 했다. 

남자아이 2명이 길가에 마주 보고 서 있는 태기와 미스 황을 빤히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자신들의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미스 황은 태기의 매정한 대답에 충격을 받은 상태이다. 하지만 조금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그리 심한 편은 아니다. 

태기의 표정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무표정하다. 



“어째서죠? 제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는 건지 말씀을 해주세요. 

만약, 제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면 빚을 내서라도 얼굴 전체를 뜯어 고칠게요. 제 몸매가 마음에 안 든다면 평생 동안 물만 마시고 

살 수도 있어요. 제 성격이 마음에 안 든다면 당장이라도 삭발을 하고 절에 들어가 성격을 고치고 올게요. 태기씨, 말씀해주세요. 네?” 



미스 황은 울부짖다시피 하며 태기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태기는 마치 돌부처와도 같았다. 



“네 자체를 싸그리 다 갈아치운다고 해도 내 옆자리에 있을 사람이 변하지는 않아.” 



태기의 말 속에는 다른 뭔가가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의 옆자리에는 이미 주인이 있다는 뜻일까? 아님, 예약된 주인이 있다는 것일까? 

미스 황은 말뜻을 반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태기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읽은 건지 이야기의 마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비록 지금은 비어있지만, 아니 앞으로도 죽 비어있겠지만 난 내가 원하는 그 여자가 아니면 안돼. 

그 여자가 아니라면 내 옆자리는 그 누구로도 채울 수가 없어.” 



미스 황은 그야말로 절망적이었다. 코를 들이마시며 그녀가 태기에게 물었다. 



“그 여자는 태기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기에 태기씨가 그렇게 말하시는 거죠? 고백했다가 차이기라도 했나요?” 



태기가 살며시 미소를 띠웠다. 



“고백‥? 아마도 난 영원히 고백하지 못할 거야. 그 여자는 날‥남자도 심지어는 오빠로도 생각하지 않거든. 

그저 말썽만 부리는‥후, 어쨌든 난 널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네 마음도 절대 받아줄 수가 없어. 

우리 될 수 있음 서로 얼굴 마주치는 일 없도록 하자.” 







************* 






신이가 진형우를 만나러 간지 1시간이 지났다. 난 1시간째 식탁 앞에 앉아 주스만 빨아대고 있는 중이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신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오늘따라 날씨도 덥다. 



“형님, 주방에서 뭐해?” 



주방으로 들어온 우혁이가 냉장고문을 열더니 물병을 꺼냈다. 식탁 위에 뒤집어진 체 놓여있는 컵 하나를 바로 세우고서 

그 안에 물을 따랐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우혁이가 컵을 손에 들며 물었다. 



“아니. 그런 거 없어.” 



주스가 들어있던 유리컵은 어느새 비어있었다. 꿀떡꿀떡. 물을 마시는 우혁이. 다 마셨는지 컵에서 입을 떼며 손등으로 입 주변을 

스윽 한번 닦아낸다. 



“표정이 우울한데?” 



하아-. 불안함과 함께 겹쳐진 고민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나 보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우혁이에게 물었다. 



“태기는 아직 안 왔지?” 


“응. 데려다주고 온 댔으면서 늦네. 혹시 미스 황한테 납치당한 게 아닐까?” 



나는 피식 웃어보였다. 집안이 조용하다. 



“다른 아이들은?” 



우혁이가 싱크대 개수대에 컵을 놓으며 대답해주었다. 



“유인이는 자기 방에서 게임하고 있고 희웅이는 시백이 서울 구경시켜준다고 데리고 나갔어. 민규형이랑 호두는 사무실로 갔고.” 



난 우혁이에게 사람들의 행방을 들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주스를 한 컵 더 마시기 위해 냉장고문을 열었다. 

그때. Rrrrr. 거실에 있는 집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어대었다. 



“어! 전화 왔다. 형님, 내가 받을게.” 



전화를 받는다며 거실로 나가려는 우혁이. 난 그를 막았다. 



“아니야!! 내가! 내가 받을게!!” 



모르겠다. 그냥 어쩌면 신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허둥지둥 거실로 나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전화수화기를 들었다. 

우혁이가 주방 문턱에 서서 나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여보세요?” 


“나, 신이. 왜 핸드폰 안 받냐?” 



정말 신이잖아? 전화를 건 사람은 진짜 신이었다. 



“응? 핸드폰. 아차! 내 방에 있다.” 


“그래? 지금 뭐하는데?” 


“지금? 아무 것도 안하는데? 왜?” 


“그럼 좀 나와라. 밥이나 먹자.” 



밖에서 단 둘이 밥이라고라? 그럼 데이트를?? 갑자기 막 두근두근 심장이 뛴다. 

달칵. 미스 황을 바래다주러 갔던 태기가 이제야 들어왔다. 인사를 하려던 태기는 내가 전화를 하고 있자 도중에 멈추어버린다. 



“언제 나가면 돼? 지금 나갈까?” 


“응. 사거리 K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빨리 와.” 



K커피숍. 택시로 기본요금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나는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형님, 다녀왔습니다.” 



내가 수화기를 놓자 기다렸다는 듯이 태기가 인사를 했다. 태기의 얼굴 표정이 왠지 힘이 없게 느껴진다. 

미스 황과 무슨 일이 있었나‥? 



“응. 다녀왔어? 미스 황은? 순순히 가든?” 


“네. 잘 타일러서 보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형님.” 



태기가 갑자기 변한 것 같다. 마치 태기가 아니라 민규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형님, 이만 들어 가보겠습니다.” 


“으, 응.” 



방으로 들어가는 태기의 뒷모습을 보며 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혹시 미스 황이 착한 태기를 또 괴롭힌 건‥ 흥! 그러기만 해봐라. 저 멀리 날려 보낼 테니까. 



“태기형, 좀 이상하지 않아?” 



우혁이가 거실로 나오며 내게 물었다. 녀석도 느낀 모양이다. 난 말없이 어깨만 으쓱여보였다. 

그리고는 나갈 준비를 하기 위해 내 방으로 들어갔다. 


무슨 옷을 입을까? 머리는 감을까? 화장도 할까?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이렇게 밖에서 단 둘이 얼굴을 마주할 때 난 보스에서 여자로 돌아간다. 

적어도 마음은‥.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신이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잘 알 수가 있다. 

신이를 향한 내 마음을, 내 감정을‥이제는 확신할 수가 있다. 급히 준비를 끝낸 나는 집에서 나와 서둘러 택시를 잡았다. 

병아리 깃털 마냥 노란 택시는 나를 신이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기위해 네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창밖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로 태양이 열을 잔뜩 내뿜는다. 



“아가씨, 데이트 가나봐?” 



인자하게 생기신 택시기사아저씨께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셨다. 나는 밝게 웃으며 대답을 해드렸다.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에이~ 아저씨 무당이구나?” 



싸악-. 갑자기 택시 안에 냉기가 서린다. 에어컨 때문인가‥? 하지만 인자하시던 아저씨의 표정이 굳어지신 것만은 틀림이 없다. 



“아‥그게 아니라, 길거리에 자리 까셔도 되겠다고요. 하하‥.” 



내가 말을 정정하자 아저씨가 얼굴을 푸신다. 정말 민감하시군. 



“아가씨 얼굴이 싱글벙글인 걸 보면 누구나 다 알 수가 있어. 그래. 신랑 될 친구는 잘 생겼고?” 


“아이참, 신랑은 무슨. 하지만 잘 생긴 건 사실이예요. 게다가 싸움은 또 얼마나 잘 한다구요. 공부를 좀 못해서 그렇지.” 


“공부는 못해도 되는 거야.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못하는 사람도 있는 거지. 1등이 두, 세 명 있을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아가씨, 남자는 말이지.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만 지켜줄 수 있음 그게 최고인거야. 남자는 공부를 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 

여자를 지켜주기 위해서 있는 거라고. 어차피 공부도 여자를 지켜주기 위해서 하는 거야. 아가씨 애인은 싸움을 잘한다며?” 


“네.” 


“그럼 공부는 못해도 되네. 주먹으로 아가씰 지켜주면 되니까. 허허허.” 



신이가 나를 지켜줘‥? 


난 다시 창밖을 보았다. 유리창은 거울이 되어 나를 비춰주었고 다시 신이를 보여주었다. 


비 오는 날, 나를 업고 여관으로 데려가준 신이. 그리고 밤새도록 간호를 해주었고, 울고 있는 나를 포근히 감싸 안아주었다. 

그리고 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했던 나를 위해 신이는 ‘마음껏 울어. 보지 않을 테니까.’라고 했었다. 

그 말에 내 눈에선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렸다. 그렇게 예전 일을 떠올리고 있을 때 거울로 변했던 유리창은 다시 유리창이 되어 

바깥을 보여주었다. 창밖엔 패거리에게 쫓기고 있는 희웅이와 시백이가 있었다. 족히 15명은 넘어 보이는 패거리에게 쫓기고 있는 두 사람, 

희웅이와 시백이. 그들이 내 눈에서 뒤로 밀려 났고 고개를 돌려 뒤쪽 차창으로 본 두 사람은 좁은 골목길로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그 뒤를 정체불명의 패거리가 쫓는다. 짧은 순간 내 머리는 빠르게 회전을 하며 굴러갔다. 

날 기다리고 있을 신이와 쫓기고 있는 희웅이와 시백이. 결국 난‥. 



“아저씨, 잠깐만요!” 



택시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내 사적인 일보단‥우선은 조직이고, 사랑보단‥내 조직원이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64 





약속장소를 50m즈음 남겨두었을 때 난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달렸다. 약속장소인 K커피숍과의 거리는 점점 길어져만 갔고 

희웅이와 시백이가 들어갔던 골목과는 가까워 졌다. 타닥타닥! 내 두 다리는 아스팔트 바닥을 한 대, 두 대 때려가며 나를 골목 안으로 

이끌어주었다. 골목은 세 사람 정도가 간신히 서 있을 수 있을 정도의 넓이였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숨은 가빠져 왔고 

골목은 곧 좌측으로 꺾이어졌다. 골목 좌측으로 방향을 틀자 막다른 곳이 보였다. 그 곳에는 내가 찾던 두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나와 가까운 이들은 희웅이와 시백이가 아닌 두 사람을 쫓던 패거리였다. 내 눈앞엔 그들의 등이 있다. 



“누님!” 



나를 보고 놀란 희웅이가 바보같이 큰소리를 쳤다. 그에 나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던 패거리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발견하였다. 

내가 여자라는 것을 한눈엔 확인한 그들은 코웃음을 치며 나와 아이들을 우습게보았다. 



“뭐야? 여자잖아?” 


“저 자식 지금 이 여자 보고 누님이라고 부른 거야? 좀만 한 자식. 어째 하는 짓도 좀만 하냐?” 



좀이라‥. 필시 나무좀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희웅이를 아주 얕잡아 본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 말에 기분이 상한 희웅이는 눈알이 빠질 듯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 옆에 서 있던 시백이는 이 상황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인지 

막대모양의 호박엿만 아작아작 깨물고 있었다. 



“김희웅! 무슨 일이야?” 



난 이제야 지금 이 현실의 원인을 물었다. 그러자 사내를 노려보던 눈에 힘을 풀고서 시선을 나에게로 향하는 희웅이다. 



“별일 아니예요.” 


“별일이 아닌데, 이 좀만 한 것들이 네들을 잡아먹을 것처럼 쫓아 가냐?” 



내 말이 마음에 든 희웅이가 피식 웃어 보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좀에는 좀이다. 

난 놈들이 희웅이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그러자 꽤나 기분 상한 얼굴을 해 보이는 사내들이다. 



“이년이 지금 뭐라고 입을 놀린 거야? 뭐? 좀만 한 것들? 이 씨발년이!” 



손을 번쩍 들어올리는 한 사내이다. 이 중 가장 다혈질인 듯 하다. 사내가 치켜든 손은 공기를 쳐내며 내 뺨으로 날아왔다. 

척! 하지만 그 정도도 못 막고 뺨을 내줄 내가 아니었다. 나에게 손목을 잡힌 사내는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이, 이게 감히 막아? 에잇!” 



나머지 한손을 마저 날리는 사내. 난 잡고 있던 손목을 오른쪽으로 돌리며 힘껏 꺾어버렸다. 

뿌드득. 사내의 손목의 뼈가 꺾어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아악!!” 



형편없는 사내는 맥없이 늘어진 자신의 손목을 움켜쥐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동료들이 침을 삼킨다. 



“김희웅, 무슨 일이야?” 



난 다시 희웅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희웅이가 아닌 시백이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내 때문인 것 같은데? 내가 꼬맹이랑 버스를 막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서 점마들이 자꾸 쳐다보데? 

그래서 난 또 내가 먹고 있는 엿 때문인 줄 알아서 ‘엿 먹을래?’카면서 권했디만 졸라 열 내잖아. 그거 때메 카는 거 맞지 싶다.” 



흠. 그럼 우리 애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거잖아? 하여간 요즘은 개나 소나 맞고 싶어서 까분다니까? 

시백이의 말을 들은 파마머리의 사내가 눈을 부릅뜨고서 언성을 높였다. 



“저 촌놈 새끼가!!” 



투욱. 촌놈. 그 두 글자가 시백이의 손에 쥐어있던 호박엿을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 충격으로 엿은 두 조각으로 나뉘었다. 아니 다시보니 세 조각이다. 



“뭐? 니 방금 뭐라고 그랬노?” 



인상이 굳은 시백이가 파마머리에게 물었다. 



“촌놈이라고 했다. 왜?” 



퍼억! 시백이가 무섭게 내지른 주먹이 파마머리의 윗입술에 정확히 꽂혔다. 그것을 보자 흥분한 사내들은 동시에 우리들에게 

앞뒤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뻑! 퍼억!! 골목은 곧 전쟁터로 바뀌며 적과 아군으로 나누어졌다. 몇몇 녀석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느낀 거지만 그들의 공격속도는 보통이 아니었다. 맷집 또한 단단한 것이 운동 좀 한 녀석들인 것 같았다. 예를 들자면 운동선수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운동과 싸움은 별개이다. 빠악! 예상보다 조금 길어졌지만 15명 모두의 무릎을 굽히는 데에는 성공하였다. 

시백이는 지금 자신에게 촌놈이라 불렀던 사내에게 바닥에 떨어진 호박엿을 강제로 먹이고 있는 중이다. 

그 말이 그리도 상처가 되었나 보다. 



“누님, 그런데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내들을 보다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희웅이가 물었다. 



“너희가 쫓기는 걸 우연히 봤어.” 


“어디 가시던 길이셨나 봐요?” 


“응. 그럼 뒤처리는 너희가 알아서 해.” 



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며 골목에서 나왔다. 예상치 못한 곳에 시간을 또 지체해버렸다. 

신이의 번호와 통화버튼을 차례대로 눌렀다. 뚜르르르-. 신호가 짧게 이어지더니 신이가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신아, 나 지금 가는 길이거든? 늦어서 미안해. 자초지종은 가서 얘기해줄게.” 


“안 늦었으니까, 천천히 와도 돼.” 



신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난 전화를 끊은 뒤 1초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힘껏 내달렸다. 

K커피숍 앞. 커피숍의 간판은 2층에 달려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간 나는 손잡이가 없는 유리문 앞에 섰고 자동문이라 적힌 유리문은 

나를 감지하고서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커피숍 내부는 하얀색 분위기로 깔끔한 이미지를 풍겼다. 창가에 홀로 앉은 신이가 보인다. 

신이는 테이블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그 곳으로 걸어갔다. 



“신아!” 



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정신을 번쩍 차리며 고개를 드는 신이다. 난 신이의 맞은 편 소파에 앉았다. 

신이는 아무 것도 주문하지 않은 상태였다. 곧 여종업원이 물 한잔을 들고서 왔다. 내 앞에 물 컵을 놓으며 종업원이 말했다.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신이가 나를 본다. 난 불고기 볶음밥을 신이는 해물 볶음밥을 주문했다. 여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간 뒤에도 

신이는 나에게 늦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래서 더 미안하기만 하다. 그리고 화난 건 아닐까하는 걱정도 된다. 



“왜 늦었는지 안 물어봐?” 


“걸어서 왔겠지. 왜? 물어봐줘?” 



신이는 태연했다. 부산에서도 그렇고‥. 원래 이렇게 마음이 넓은 녀석이었나? 사귀기 전에는 몰랐는데. 

어떤 게 참모습인지 감이 잡히지가 않는다. 난 신이를 또 한번 다시 보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신이가 말했다. 



“오다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응? 응. 택시 타고 오는데 희웅이랑 시백이가 어떤 남자들한테 쫓기고 있는 거야. 그래서 택시에서 내려서 걔네들한테 갔었거든. 

그래서 조금 늦은 거야.” 


“그래‥.”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그 남자들의 정체와 결말에 대해서 물었을 텐데 신이는 그렇지가 않았다. 전혀 궁금하지가 않은 모양이다. 

5분 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커피숍에서는 밥과 음료를 마셨을 뿐 별다른 일은 없었다. 특별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커피숍에서 나온 지금 우리는 쓰래빠 사무실로 걸어가고 있다. 데이트가 아니다. 뭐야, 이게. 

그런데 사무실에는 왜 가냐고? 신입조직원들이 나에게 인사를 하기위해 사무실에 와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단 둘이 같이 있기 위해 차를 타지 않고 사무실까지 도보로 가고 있는 중이다. 



“개솔아.” 


“응?”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신이었다. 



“넌 아빠랑 엄마, 둘 중에 누가 더 좋냐?” 



이상한 질문이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일까? 아님, 심심해서 묻는 것일까? 아빠와 엄마. 어렸을 때 많이 받아본 질문이다. 



“우리 아버지.” 



난 서슴없이 대답을 했다. 어머니와의 추억보다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더 많기 때문이다. 난 아버지가 더 좋다. 



“신아, 넌?” 



나도 같은 것을 신이에게 물어보았다. 신이는 입을 다물고서 고민을 했다. 하지만 두 입술은 곧 열렸다. 



“나는‥둘 다.” 


“두 분 다 좋다고?”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고.” 



보통이라는 뜻일 것이다. 질문과는 조금 빗나간 대답이다. 결국 둘 중 한 명을 선택한 나만 나쁜 딸이 돼버렸다. 

사무실이 있는 10층 건물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럼 팔 두 개 중 하나를 포기해야만 한다면 넌 어느 쪽을 포기할래?” 



계속되는 신이의 황당한 질문이다. 팔 두 개, 그러니까 오른팔과 왼팔 중 하나를 포기해? 흐음‥. 



“그야, 두 쪽 다 중요하지만 꼭 하나를 포기해야만 한다면 왼팔을 포기해야지. 난 오른손잡이거든.” 


“아니. 그 팔 말고 민규형이랑 태기형 말이야.” 



뭐? 그런 뜻이었어? 



“글쎄‥. 두 사람 다 절대 포기 못할 것 같은데.” 



그렇다. 난 민규와 태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 할 수가 없다. 



“그래도 꼭 포기해야만 한다면?” 



신이는 확실한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확실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럼 선택을 해야만 하는 내 자신을 포기할 거야. 그 둘 중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쓰래빠의 보스도 없어. 

두 사람 모두 나한텐 너무 소중해.” 


“‥‥.” 



신이는 잠시 침묵했다. 우리는 사무실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신이는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피곤해서 집에 가서 쉬고 싶다나? 

어쨌든 우리 둘은 건물 앞에서 잠시 헤어지기로 했다. 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갑자기 나를 불러 세우는 신이었다. 



“이게 마지막 질문이야.” 



오늘따라 양자택일을 많이 하게 한다. 난 물어보라고 했다. 



“그럼 네 남자친구인 새신과 네 조직원인 새신,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떠났다면 넌 누굴 쫓아갈 거냐?” 


“신아‥?” 


“궁금해. 답해줘.” 



장난칠,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다. 신이는 왜 이런 것을 묻는 것일까? 난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진지하게 생각해줘.” 


“난‥.”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했다간 신이가 속상해 할 것이다. 질문 속 두 사람 모두 똑같은 신이이지만, 

난 신이가 한 질문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사랑이냐, 조직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 두 번째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새신 그 자체야. 그것만은 사실이야.” 



툭. 간신히 대답을 한 나에게 손을 뻗더니 내 어깨를 살짝 치는 신이었다. 신이는 웃고 있었다. 



“하하. 진짜 재밌다니까? 넌 별것도 아닌 일에 심각할 때가 제일 웃겨. 킥킥.” 



윽. 이 자식, 날 갖고 논거야? 이거 은근히 기분 나쁘네? 나도 모르게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씨, 괜히 긴장했잖아!” 


“킥킥. 근데, 넌 좋아한다는 말을 그렇게 하냐? 많이 쑥스러웠나봐? 푸하하.” 


“으으‥ 나가 죽어! 이놈아!” 



나도 정말이지 쓸데없이 걱정했잖아. 난 등을 홱 돌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는 왜 이리도 안 내려오는 건지 열이 팍팍 오른다. 

딩동♬ 문자가 왔다. 난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핸드폰을 확인해보았다. 



- 삐졌냐? 미안. Ps. 나도 너 이따만시 좋아한다.(신발꼬랑내) - 



씨익. 나도 모르게 양쪽 입 끝이 마음대로 올라갔다. 좋아한다는 말에 화가 누그러졌다. 

사랑은 북극의 빙산도 녹일 수 있다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또 어디서 들은 말일까?) 귀여운 신이 녀석. 치, 봐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건물 10층(마지막 층). 사무실 문 앞에는 많은 남자들이 서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허리를 굽히고서 우렁차게 고함을 지르는 신입원들이었다. 

신입들 중에는 깔끔하게 양복을 입은 이들도 있었고 편하게 티와 바지만 입은 이들도 있었다. 

민소매 티를 입은 한사람은 팔뚝 아래로 용이 꿈틀되고 있었다. 



“그래. 다들 잘 왔어.” 



난 무게 있게 표정을 없애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방금 전 신입들의 인사소리를 들은 민규가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나를 보자 고개를 숙인다. 



“형님, 오셨습니까?” 


“응. 애들 밥은 먹였어?” 


“네. 자장면 한 그릇씩 사 먹였습니다.” 


“그래? 이왕이면 좀 더 비싼 걸 사 먹이지 그랬어? 다음에는 짬뽕 시켜줘.” 


“네, 알겠습니다.” 



난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는 호두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어? 역시 니였네?” 



난 요 몇 개월 간 잠시 비워두었던 자리에 엉덩이를 채워 넣었다. 한때 아버지의 자리였던 의자. 이제는 내 자리가 되었다. 

내 뒤로는 큰 유리창이 있다. 건물 밖 도시 풍경이 훤히 다 보인다. 그래도 유리창의 역할은 뭐니, 뭐니 해도 밤에 가장 빛이 난다. 

10분 뒤 신입들이 인사를 하기 위해 한사람씩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악수도 했다. 

그렇게 61명과 인사를 나눈 나는 지칠 대로 지쳤다. 앞으로 약 이틀간은 이 일을 더 해야만 한다. 

신입들을 다 보낸 후 사무실 안에는 나와 민규 뿐이다. 호두는 화장실이라도 간 것 같았다. 



“형님, 음료수 좀 드십시요.” 



냉장고에서 캔 콜라 하나를 꺼내어 나에게 권하는 민규다. 난 민규의 두 손안에 들어있는 캔을 받아들었다. 

한 모금을 마신 뒤 의자에서 일어났다. 



“세수 좀 하고 올게.” 



화장실로 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호두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다. 



“현아야, 니는 와그리 귀엽노? 푸하하! 깜찍한 것!” 



보아하니 여자랑 통화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름이 현아? 왠지 귀에 익숙한 이름이다. 현아. 현아. 현아. 

에이~, 설마. 현아라는 이름이 의외로 흔한 걸 거야. 내 추종자인 그 현아일 리가 없지. 



“그래, 그래! 그 카면 이따 보제~!” 



전화를 마친 호두가 휘파람을 불며 사무실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러자 나와 마주쳤다. 



“으, 깜짝이야!” 



흠칫 놀라는 호두다. 



“누구야? 여자친구?” 


“들었나?” 


“응. 어쩌다보니.” 


“맞나? 카면 숨길 필요 없겠네. 내 얼마 전부터 서울 여자랑 사귄다 아이가. 내보다 한살 어리다.” 



한살이 적어? 흠‥아니겠지. 우연일거야. 



“그래? 그럼 고2?” 


“어. S고 다니는데, 니도 알거다. 현아라고. 며칠 전에 우리 집 앞을 막 서성이데? 

니 찾아왔다던데, 이런 저런 얘기 하다보니까 왠지 마음 맞는 데가 많은 거야. 그 카다 보니까 사귀게 됐다. 

아가 귀여운 데가 한, 두 구석이 아이다. 하하.” 



윽. 그럼 정말 내 추종자였단 말이야? 그 현아랑 호두가 사귄다고? 아니야. 어쩜 잘된 일일지도 몰라. 

두 사람 모두 나 때문에 상처를 한번씩 받은 사람들이니‥. 뭐야? 그래서 마음이 맞는 다는 건가? 

혹시 이것들 둘이서 내 욕이라도 한 거 아니야? 



“왜 그렇게 쳐다보노? 니 욕 안했다. 니 주먹에 죽을 일 있나? 근데‥있잖아, 개솔아.” 


“뭐가?” 



망설이는 것이 뭔가 부탁할 자세다. 



“내가 접때 줬던 호두 있잖아.” 


“호두 반 토막? 그건 왜?” 


“이런 말하면 치사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다시 내 주면 안 되나?” 



이런‥씨. 



“왜? 현아 주려고?” 


“역시 보스답게 눈치가 장난이 아니네. 어!” 



얄미운 녀석. 흥, 내가 줄줄 알고? 한번 줬음 그만이야! 



“그거 먹었어. 맛있더라.” 


“뭐라고? 이‥이‥개소리!!” 



탁!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사무실로 들어 가버리는 호두였다. 그래도 녀석의 마음을 봐서 고이 간직해줬더니만‥ 

오늘 집에 가자마자 당장 먹어버릴 테다. 그나저나 호두와 현아라‥. 훗~, 재밌군. 







************** 






이틀 후, 개소리네 집 아침. 



“우혁아! 신이는 어디 있니?” 


“정원에 있을 거야!” 



철컥. 신이를 찾기 위해 현관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왔다. 신이에게 영화를 보러가자고 할 생각이다. 

오늘 아침 일찍 비가 퍼부어서인지 밖은 어느 정도 선선했다. 일찍이 입추가 지나도 무더위는 계속 되더니만, 이제 좀 한풀 꺾이려나? 

정원 앞뜰에는 신이가 없었다. 난 뒤뜰도 확인해보자 싶어 집 건물 코너를 돌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신이의 목소리가 나를 멈추게 만들었다. 



“생각할 시간을 조금 더 줘. 지금은 뭐라 말할 수가 없어.” 



신이의 목소리에는 진지함이 묻어있었다. 이번에는 또 누구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난 내 귀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좀 더 확인해 봐야겠어. 난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다.” 



뭘 모르겠다는 거지? 설마 또 형우인가? 강호파가 아직도 신이에게 손길을 뻗치고 있다니‥. 



“그래. 끊자.” 



전화를 끊은 것 같았다. 후우, 고민은 이제 그만 하자. 신이가 설마 날 버리겠어? 신이를 계속 믿는 거야. 

난 모퉁이를 돌아 신이에게 다가갔다. 신이는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하니?” 



내가 소리를 내자 그제야 내가 온 것을 알아챈 신이었다. 



“어? 그냥. 물고기 밥 줬어.” 



난 신이의 옆에 섰다. 연못 속의 잉어 2마리. 정말 오래 산다. 

뭐, 오래 살아서 좋기는 하다만 그래도 역시 둘 다 암컷이라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오늘 시간 있지?” 



신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신이가 수면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응. 많지.” 


“그럼 우리 영화 보러 가자. ‘헬리콥터 속 마법사’라고 얼마 전에 개봉한 건데 나 헬리콥터 시리즈 다 봤거든. 

이번이 마지막 편이래. 나 그거 보고 싶어. 가자, 응?” 


“그래, 가자. 근데, 나는 그것보다는 ‘분신안사’가 더 재미있겠던데. ‘그놈은 맛있었다.’도 괜찮고. 

‘헬리콥터 속 마법사’는 나중에 보면 안 되냐?” 


“안돼. 난 그것 말고는 보기 싫어.” 


“알았다, 알았어. ‘헬리콥터 속 마법사’보자. 됐냐?” 


“후후, 그래.” 



신이는 가끔씩 보면 고집이 센 것 같기도 하지만 항상 못 이기는 척 내 말을 들어준다. 의외로 상냥한 면도 있고 귀여운 구석도 있고. 

또 나를 이해해준다. 난 그런 신이에게 항상 미안하고, 항상 고맙고‥ 또 너무 좋다. 

이틀 전, 신이가 내게 했던 질문 중 남자친구인 신이와 내 조직원인 신이 중 누구를 따라갈 거냐는 그 질문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이틀 전에는 조직원인 신이를 택했지만‥ 정말 그런 상황이 된다면 나는 누굴 선택 할까? 그건 나도 알 수가 없다. 


신이와 나는 오후 3시에 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단 둘이 같이 집을 나서면 남들이 의심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형님, 어딜 가려고 그렇게 꽃단장을 했어?” 



오후 2시 30분. 데이트 준비를 마친 나는 방에서 나왔다. 거실에는 우혁이와 유인이가 소파에 앉아 만화를 보고 있었다. 

나를 본 우혁이가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눈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에 유인이까지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본다. 

하지만 시선은 거의 내 다리에 머물고 있었다. 윽, 치마가 너무 짧은 건가? 



“다리털 깎은 거야? 털이 하나도 없네?” 



띠잉. 보신각종으로 머리를 한대 맞은 기분이다. 유인이 녀석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창피하게. 



“나‥나갔다 올게!” 



난 유인이의 민망한 물음에 답해주지 않고 허둥지둥 현관 밖으로 나왔다. 닫혀있는 대문을 열려니 누군가가 밖에서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민규와 태기였다. 사무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형님, 어디 가십니까?” 


“응. 누구 좀 만나러.” 



민규의 물음에 간단히 대답을 해주었다. 



“누구요? 애인요? 오오! 형님도 드디어 애인이 생기셨군요!” 



태기의 말이 왜 이렇게 놀리는 것처럼 들리는 걸까? 난 인상을 쓰고서 두 사람의 사이를 밀치며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때 현관문을 박차고 나온 우혁이가 우리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형님!! 지금 전, 전화가 왔는데‥.” 



난 뒤돌아 우혁이를 보았다. 녀석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누구한테 왔는데?” 



태기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에 말을 잇는 우혁이었다. 



“형우. 형우한테서‥.” 



형우? 난 대문 안으로 다시 발을 들여놓았다. 형우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신이와 관련이 된 건‥? 



“형우가 그랬는데‥신이가, 신이가 지금 병원에 있데. 교, 교통사고래.” 



내가 예상한 것과는 조금 어긋난 말이었다. 하지만 신이와 관련이 된 건 맞았다. 신이가 교통사고라니‥. 

말도 안돼. 



“어느‥어느 병원이야?!!” 



끝내 난 이성을 잃고 말았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65 






극장에서 제일 가까이 있는 병원으로 가는 길. 진형우는 우혁이에게 신이가 있는 병원까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우혁이가 뒤늦게 물어보려고 했지만 진형우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에 있는 병원이란 병원은 다 뒤져보기로 

한 것이다. 민규는 엑세레이트를 있는 힘껏 밟았다. 하지만 막히는 도로에서는 그것도 한계가 있었고 차가 빠져 나갈만한 곳은 

찾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런 신이의 교통사고 소식. 우리는 극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었는데‥ 

신아, 넌 왜 병원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니? 가슴이 갑갑했다. 민규가 모는 차에는 태기와 우혁이, 그리고 유인이도 타고 있었다. 

유인이는 창밖만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우혁인 아랫입술만 깨물 뿐이다. 차는 도무지 앞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한자리에 계속 머물수록 불안감은 더 커져만 갔다. 얼마나 다친 걸까? 많이 아프겠지? 차라리 영화 보자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이번엔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는 건데‥. 

창밖의 풍경이 뿌옇게 흐려졌다. 슬프다. 가슴이 아프다. 걱정은 쌓여 괴로움으로 바뀐다. 

병원으로 출발한지 50분이 지났다. 막혔던 도로는 어느 정도 뚫려 원활한 소통을 이루었다. 병원이 가까워지고 있다. 

신아‥조금만 더 기다려줘. 내가 지금 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 


끼이익-! 병원 앞에 멈춘 승용차의 문이 내 손길로 인해 벌컥 열리었다. 난 곧장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변 곳곳에 있는 환자들을 보니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옆으로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를 실은 Stretcher Car가 

빠르게 굴러가고 있었다. 



“신아, 어디 있는 거니?” 



자그맣게 신이를 찾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까운 곳에 흰 가운을 걸친 의사 한명이 보였다. 난 그 의사를 붙잡았다. 



“여기‥신이‥신이 있나요? 오늘 교통사고로 들어온 환자‥제발, 제발 좀 찾아주세요. 우리 신이 좀‥제발‥.” 



의사가 자신의 가운을 붙잡은 내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접수처에 있는 간호사에게 한번 물어보시죠.”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가버렸다. 난 멍하니 의사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머릿속은 온통 까마득하다. 민규와 아이들이 다가왔다. 



“형님, 이 병원에는 없답니다. 아무래도 이렇게 무작정 병원을 찾아다니는 것 보다는 전화로 물어보는 편이 훨씬 더 빠를 것 같습니다.” 



난 텅 비어있는 머리만 살짝 끄덕였다. 난 태기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 벤치에 앉았다. 신아, 정말 어디에 있는 거니? 

민규와 세 사람은 간호사에게서 구한 서울시 모든 병원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어찌나 많은지 전화를 하는 데에만 1시간가량을 

잡아먹었다. 그리고 오늘 교통사고로 입원한 신이라는 이름의 환자는 모두 세 명. 서로 멀리 떨어진 병원 세 곳에 있었다. 

환자의 정확한 이름이 새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세 사람 중 우리가 찾는 신이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리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우리 네 사람은 세 팀으로 나누었다. 

민규는 ‘ㅈ’병원으로, 유인이와 우혁이는 ‘ㅍ’병원, 나와 태기는 ‘ㄱ’병원으로 향했다. 

꼭 내가 가는 곳에 신이가 없어도 좋다. 세 곳 중 한 곳에라도 신이가 있기만 한다면 난 그것으로도 좋다. 

태기와 함께 택시를 타고 도착한 ‘ㄱ’병원. 난 병원으로 들어가기 전 기도를 했다. 신이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 



“502호실로 가보세요.” 



간호사의 말에 따라 올라간 502호실. 그 곳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은 우리가 찾던 그 신이가 아니었다. 

난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병실에서 나왔다. 



“형님, 너무 걱정 마세요. 아직 애들한테 전화가 안 왔잖아요. 꼭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태기가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래, 아직 희망은 있어. 우리는 병원에서 나와 사람들의 전화를 기다렸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내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 태기는 계속해서 나에게 신이는 무사할거라며‥ 

많이 다쳤다 해도 그 녀석은 싸가지가 없어서 운전자를 때려눕힐 놈이라며 나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불안함은 좀처럼 가시지가 않는다. Rrrr. 기다렸던 전화가 왔다. 태기와 내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태기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민규였고 나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우혁이었다. 우리는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형님, 나 우혁인데 거기에 신이 있어?” 



곧장 나에게 이쪽 상황을 물어오는 우혁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곳에도 신이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아니.” 


“그래‥. 그럼 민규형이 간 병원에 있는 건가? 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하하.” 



우혁이는 힘이 없는 내 목소리에 애써 힘을 불어넣어주기 위해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난 전화를 끊고 태기를 보았다. 

태기는 전화를 귀에 대고서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럼 역시‥. 하아,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진형우, 넌 왜 병원을 가르쳐 주지 않는 거지? 병원도 가르쳐 주지 않을 거면서 왜 신이가 사고가 났다는 걸 우리에게 말해준거지?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진형우‥진형우‥. 

그런데 진형우는 신이가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안 걸까? 우연이라고 하기엔 뭔가 이상해. 강호파인 진형우가 어떻게‥. 

서, 설마‥? 문득 강호파가 신이에게 손길을 뻗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만약, 그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이건 다 강호파의 계략일지도 모른다. 난 시계를 보았다. 벌써 6시. 3시간이나 지났다. 

진형우, 내가 오늘 신이와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거지?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을 텐데, 왜 이런 거짓말을 한거야? 


난 빗속으로 뛰어 들어가 급히 택시를 잡았다. 



“형님?!” 



뒤에서 태기가 날 부르며 쫓아왔지만 난 택시를 탔고 택시는 내가 말한 목적지에 따라 출발을 해버렸다. 

바보같이 이제야 눈치를 채다니. 신아, 넌 예전처럼 웃으며 너그럽게 용서를 해줄 거야. 그렇지? 

아침에 오다만 비는 오후가 되어서야 마저 퍼붓기 시작했다. 난 신이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끼이익-!! 빗길에 미끄러지듯 멈춘 택시는 어느덧 극장 앞에 이르렀다. 



“어유, 고급 승용차가 왜 저리 많아? 아! 5,700원입니다.” 



택시기사는 앞에 일렬로 세워져 있는 승용차들을 보며 입을 벌렸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정차되어 있는 차들은 죄다 BMW 7시리즈와 벤츠S클래스였으니까. 우리 조직처럼 무늬만 BMW인 차들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였다. 

난 요금을 지불한 뒤 택시에서 내렸다. 비는 억수처럼 쏟아져 내 머리위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건물 안으로 비를 피한 건지 우산을 쓴 한, 두 명만이 지나다닐 뿐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난 극장 앞을 보았다. 그 곳엔 비를 맞고 서 있는 신이가 있었다. 


바보같이 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아니면, 비라도 피하지 미련하게 다 맞고 있다니. 



“신아!” 



초점 없는 눈으로 앞을 응시하고 있던 신이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옷도 머리도 모두 젖어있었다. 

제발 마음만은 젖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이 바보야! 비는 왜 맞고 있는 거야?! 비부터 피하자, 응?” 



난 신이의 팔을 붙잡고서 극장 안으로 이끌려고 했다. 하지만 신이는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뭔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이다. 



“신아‥?” 



쏴아아아-. 


빗소리가 내 목소리를 파묻어버린다. 아무 말도 없는 신이. 슬픈 눈으로 나를 보기만할 뿐이다. 

차라리 이대로 입을 닫고 있었으면 좋겠다. 저 입술이 열리면 왠지 가슴 아픈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난 아프고 싶지 않다. 신이를 놓치고 싶지 않다. 난 신이의 팔을 꼬옥 붙잡았다. 떨어지지 않도록, 그 누구로 뗄 수 없도록. 



“난‥널 놓질 않을 거야‥.” 



빗소리 때문에 내 목소리는 다시 작아져버렸다. 신이는 내 눈에서 자신의 팔을 붙든 내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슬픈 눈빛이다. 신이의 이런 눈빛은 본 적이 없다. 신이를 만난지 1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난 신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모르겠다. 저 슬픈 눈빛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나도‥널 놓치고 싶지 않아.” 



신이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거 무슨 뜻이니? 나 좋게 해석해도 되는 거지? 내 마음대로, 내 방식대로 생각해도 되는 거지? 

하지만 내가 해석하기도 전에 신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이젠 너무 팔이 아파.” 



내 손을 힘없이 놓아버리는 신이다. 그에 내 손도 신이의 팔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내 두 뺨으로 비인지 눈물인지 가려낼 수 없는 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뜨겁다는 것은 알 수가 있다. 눈도, 마음도 너무 뜨겁다. 



“신아‥미안해. 내가 잘못 했어. 늦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러니까 화 내지마.” 



신이는 슬픈 얼굴로 미소를 띠었다. 그 미소 또한 슬프게 느껴진다. 



“안 늦었어. 그래서 화 안내. 그런데 있잖아‥요즘 들어 너만 보면 너무 힘이 들어. 힘이 들어서 미칠 것만 같아. 

그리고 가끔은 울고 싶을 때도 있어. 네가 좋아서‥너무 사랑해서‥울고 싶다.”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신이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설마 헤어지자는 얘기일까? 

그래, 헤어져도 좋아. 사귀지 않아도 좋아. 



“그냥‥내 곁에만 있어줘.” 


“안돼. 지금은 아닌 것 같아.” 


“신아.” 


“하지만 다음엔‥그땐 반드시 네 곁에 있어줄게. 네 부하가 아닌, 조직원도 아닌, 네 친구도 아닌‥그냥 한남자로.” 



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이 차마 떨어지지가 않았다. 고급 승용차의 문이 열리더니 한사람이 내렸다. 

진형우다. 신이는 뒤돌아 그에게로 걸어갔다. 내가 아닌 진형우에게로 가고 있다. 애인이 아닌 친구를 선택했다. 

왜지? 뭐 때문이지? 신이는 차 앞에서 잠시 멈춰 섰지만 나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차안으로 들어가는 신이. 나를 보며 진형우가 말했다. 



“미안하게 됐어.” 



타악. 그 말을 남기고 진형우도 차안으로 몸을 숨겼다. 고급 승용차 다섯 대는 줄줄이 떠나갔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만이 내 곁에 남아있어 줄 뿐이다. 난 시야에서 점점 사라지는 승용차들을 바라보며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난 신이 널 믿었는데‥믿었는데‥어떻게‥. 

눈물을 흘리며 힘없이 내 발이 걸어간 곳은 집도 아닌, 강호파의 아지트도 아닌, 우리 사무실이었다. 

난 컴컴한 사무실로 들어와 불도 켜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보스. 연개소리]라 적힌 팻말이 놓여있다. 

보스‥. 

신이는 보스와 부하가 아닌, 여자와 남자로써 만나자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단 둘이 만난 것은 여자와 남자로써가 아니라는 것인가. 신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그리고 왜 진형우를 선택한 것일까? 난 신이에게 있어 겨우 그 정도였을 뿐인가. 옷과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춥다. 춥지만 가슴은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철컥. 사무실문이 열리며 복도의 불빛이 안으로 들어왔다. 빛과 함께 나타난 사람은 병원에 두고 왔던 태기였다. 

태기는 뛰어온 건지 흠뻑 젖은 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 다행이라는 듯 웃어 보인다. 

하지만 난 웃을 수가 없다. 웃음이 나지 않는다.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본 태기가 미소를 거두며 안으로 들어왔다. 

나를 위해서인지 태기는 불을 켜지 않았다. 



“형님, 여기 계셨군요. 청승맞게 뭐하세요? 신이를 찾아야죠. 

혹시나 몰라서 민규가 다시 병원에 전화를 해보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은 마세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네?” 



난 나지막이 말했다. 태기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에게 되물었다. 태기의 옷에서도 빗물이 떨어진다. 



“이젠 찾을 필요 없어. 신이는 우리를 떠났으니까.” 



그래. 신이는 이제 없어. 신이는 더 이상 쓰래빠가 아니야. 이젠‥우린 적이야. 

난 책상에 머리를 숙였다. 신이가 떠났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신이와의 얼마 안 되는 추억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교실, 학교옥상, 놀이공원, 정원‥.추억의 장소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신이의 얼굴도 뚜렷해졌다. 이렇게나 신이를 좋아했던 건가‥? 신인 나에게 있어 이렇게 큰 존재였었나? 



“‥울지 마세요.” 



태기의 음성에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도시의 불빛에 비친 태기의 얼굴이 슬프게 보였다. 

하지만 내가 잘못 본 것이었다. 



“형님은 그게 안 달렸다 뿐이지 남자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까 사내자식은 쓸데없이 우는 게 아닙니다, 형님. 

형님도 보면 은근히 울보라니까요? 하하하.”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태기다. 형님. 그래, 부하한테 눈물이나 보이고. 연개소리, 울지 마. 

태기 말대로 넌 울면 안돼는 거야. 넌 한 조직의 보스잖아? 울지 마. 계집애처럼 울지 말고 화가 나면 화를 풀 수 있도록 하면 돼. 

화를 푸는 거야. 슬퍼도 슬프게 만든 원인을 없애면 되는 거야. 그러고 난 다음 크게 웃는 거야. 

난 눈물을 닦았다. 



“그래. 태기 네 말이 맞아. 난 울면 안돼. 난 항상 웃기만 할 거야. 웃을 일이 없으면 반드시 만들 거야. 이제 절대 울지 않아.” 



이번에도 내가 잘못 느낀 것일까? 순간 내 이야기를 듣던 태기가 날 안타까운 듯이 바라본 것을‥. 





*********** 





다음날, 저녁. 


난 거울을 보며 나갈 준비를 하였다. 검은 정장에 검은 리본으로 머리를 질끈 묶었다. 

거울 속의 나는 눈빛이 살아있었다. 마지막으로 침대 위에 걸터앉아 오른쪽 손목을 붕대로 탄탄하게 감았다. 

만일을 대비해 숨기기 쉬운 작은 칼도 챙겼다. 난 나름대로 각오를 다진 후 방에서 나왔다. 모두들 밖으로 나가 집안은 조용했다. 

집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기 전에 나는 우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형우의 위치를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신호가 가더니 곧 우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왜애-?” 


“물어볼게 있어서 전화했어.” 


“물어볼 거?” 


“그래. 지금 진형우가 어디에 있는 알 수 있을까?” 



택시기사가 룸미러로 나를 보았다. 목적지를 말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형우? 형우는 왜?” 


“전할 말이 있어서 그래. 어디에 있는지만 가르쳐줘.” 


“흐음‥. 아마 ‘아프리카’에 있을 거야.” 



아프리카? 하룻밤사이에 외국에 나갔다는 말이야? 



“몇 시 비행기로 갔는데??” 


“응? 비행기? 그냥 차타고 가도 되는데?” 


“아프리카에 갔다며!” 


“어엉? 그 아프리카가 아니라 ‘아프리카’라는 유흥업소에 있을 거라고. 거기가 강호파가 관리하는 업소들 중 하나거든.” 



난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긴장했잖아? ‘아프리카’라‥. 그곳에 진형우가 있다는 말이지? 

난 전화를 끊은 뒤 택시기사에게 ‘아프리카’로 가달라고 말했다. 아저씨는 그곳을 알고 있었다. 택시는 출발했다. 

난 그곳에 도착하거든 진형우에게 한방을 먹여줄 생각이다. 그런 다음엔 어젯밤부터 벼뤄 두었던 말을 해주고 올 것이다. 

진형우‥내가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본 것 같다. 그렇게 치사한 녀석일 줄은 몰랐는데. 택시가 멈춰 섰다. 

차창 밖으로 ‘아프리카’라고 적힌 간판이 요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난 택시에서 내렸다. ‘아프리카’는 건물 지하에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는 빨간 카펫이 깔려있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아프리카’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났다. 

입구에는 덩치 2명이 지키고 서 있었다. 난 의연하게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나를 막는 두 덩치이다. 



“혹시 쓰래빠의 보스 아니십니까?” 



이 녀석들도 강호파인가 보다. 뭐, 나를 알아보니 얘기하기는 쉽겠군. 



“진형우 있나?” 


“들어가서 연개소리님을 모셔도 되는지 물어보고 오겠습니다.” 



오른쪽에 서 있던 이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훗, 안에 있다는 얘기인가?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뻐억!! 난 들어가려는 녀석의 옷을 잡아당기며 발차기를 날렸다. 그에 덩치가 안으로 밀려났고 그를 본 다른 녀석이 나에게 덤벼들었다. 

나는 놈의 주먹을 막아낸 뒤 팔꿈치로 코를 찍어버렸다. 파악! 그 충격에 코를 움켜잡으며 고개를 숙이는 덩치이다. 

드디어 안으로 들어왔다. 



“쓰래빠의 보스다!! 저 계집 막아!!” 



내 발에 차였던 덩치가 나를 가리키며 크게 고함을 쳤다. 그 소란에 곳곳에 있던 강호파의 조직원들이 내 앞을 가로막거나 

나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퍽!! 파악! 챙그랑! 까앙!! 강호파의 조무래기들은 하나같이 내 발이 차이거나 내 주먹에 맞아 맥없이 쓰러졌다. 

그들은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업소 안의 여자들이 너나 할 거 없이 소리를 질렀다. 

난 나에게 복부를 맞고 쓰러진 한 남자를 붙잡고서 물었다. 



“진형우는 어디 있어?” 


“으, 윽‥특실. 특실에‥.” 



퍼억! 진형우의 위치를 알아낸 나는 놈의 머리를 바닥에 박아버렸다. 

그리고는 진형우가 있다는 특실로 향했다. 사방에 room이 있는 빨간 조명의 복도를 지나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난 발견할 수가 있었다. 어느 room앞에 서 있는 우혁이를. 우혁이는 나를 보자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며 웃어보였다. 



“형님, 이제 오는 거야?” 


“이우혁,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냥 형님이 걱정이 되서 무슨 일인지 보려고. 그런데 용케도 앞문으로 들어왔네? 난 주방 창문으로 들어왔는데.” 



우혁이의 옆에는 강호파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 기절해 있었다. 난 특실 문을 벌컥 열어 재꼈다. 

안에는 진형우를 비롯해 그의 부하들이 다섯 명 있었다. 가운데에 앉은 진형우는 나의 등장에 그리 놀라는 얼굴이 아니었다.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듯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녀석의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나를 경계한다. 



“오셨네요.” 



휘익- 뻐억! 난 진형우의 말을 듣지 않은 채 곧장 뛰어들어 녀석의 뺨에 펀치를 날렸다. 

그에 맞은 뺨 반대편으로 쓰러지는 진형우다. 



“아니!!” 



진형우의 부하들이 나에게 달려들려고 준비를 했다. 그러자 진형우가 입에서 난 피를 뱉으며 손을 살짝 들어 보인다. 

그의 부하들이 이를 갈며 제자리에 멈추었다. 다시 자리에 바로 앉는 진형우다. 난 진형우를 매섭게 노려보며 한마디 했다. 



“내가 열이 받은 건 네가 신이를 데려가서가 아니야. 내가 진짜 열이 받은 건 네가 신이를 다치게 만들었기 때문이야. 

그딴 거짓말 함부로 지껄이지 마.” 


“‥‥‥.” 


“‥신이‥네 친구야. 잘 부탁한다.” 



난 그에게서 돌아섰다. 특실 문 앞에선 우혁이가 벽에 등을 기댄 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나오자 벽에서 등을 떼며 내 뒤를 따르는 우혁이다. 업소내의 강호파 피라미들은 우리를 두려워하며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나왔다. 우혁이가 담배 한대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이제부터 난 뭘 해야 좋을까? 자기 스스로 떠나버린 신이를 데리고 올 수는 없다. 

신이의 몸은 우리를 떠났지만 마음만은 그렇지 않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신아, 이번 한번만 더 널 믿어줄게. 








※전국 고교 일진협회※ 






♡66 



(1부 마지막.) 




SJ호텔. 이곳은 강호파의 사아칸이 소유하고 있는 호텔 중 하나이다. 서울에서 두 번째로 큰 호텔로 연간 수입액이 

몇 십억 대가 넘어가고 있다. SJ호텔 10층. 1002호실에 훤칠한 외모의 두 남자가 서 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신이와 

그의 등을 보고 있는 형우, 이 두 사람이다. 창밖 하늘엔 노란 달이 신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신이의 눈엔 그 달이 변하고 있었다. 

황당한 전학생에서 웃기는 여자로, 다시 조직의 멋있는 보스로 때로는 귀여운 친구로‥그리고 마지막은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변한다. 

자신에게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었던 여자, 연개소리. 그녀는 짧은 몇 개월 동안 자신에게 즐거움이라는 것을 오랜만에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 그녀를 자신이 울리고 말았다. 얼마나 계속될지 모르는 이별 속에서 그녀는 몇 번이나 더 울지 모른다. 

신이 자신이 그녀를 그리워하는 만큼 그녀도 자신을 그리워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연개소리는 이유도 모르는 배신에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신이는 생각했다. 

신이는 연개소리에게 떠나야만 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가 없었다. 

이유를 안다면 연개소리는 신이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신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연개소리가 날 찾아왔었어.” 



형우의 음성에 그녀의 얼굴이 달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신이는 달이 또 다시 그녀로 변하기 전에 얼른 커튼을 닫아버린다. 

개소리가 찾아왔었다니.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신이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래서?” 


“나보고 거짓말 하지 말래.” 


“거짓말?” 


“그런 게 있어. 아차, 그리고 또 하나. 널 잘 부탁한대.” 



날 잘 부탁한다고? 그녀는 자신을 원망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적에게 배신자를 부탁하다니. 

신이는 또 한번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죄책감을 느낀다한들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가 배신을 한 이유 또한 연개소리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신이는 냉장고로 걸어가 냉장실 문을 열었다. 

특급 호텔답게 과일과 음료 및 술들이 푸짐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다. 태기가 좋아하던 요구르트도 들어있다. 

신이는 요구르트를 보며 연개소리를 떠올렸다. 그녀는 초코파이를 좋아했지. 라고 생각했다. 



“지금 후회하는 거야?” 



냉장고 안으로 들어갈 듯 냉장고 속을 바라보는 신이의 모습이 형우의 눈엔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형우는 신이와 함께 중학교에 다녔을 때가 가장 즐거웠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신이가 자신이 탄 배에 올랐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기뻤다. 

하지만 지금의 신이는 자신이 알던 2년 전의 신이가 아니었다. 신이는 캔 맥주 하나를 꺼내어 고리를 열었다. 



“후회하면 다시 보내 줄 거냐?” 



맥주 한 모금을 마시기 전 신이가 대답했다. 곧 시원한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보내주지 않아도 넌 갈 수 있잖아.” 



이렇게 말하는 형우도 그럴 수 없는 신이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발목을 놔줘야 가던가말던가 하지. 꼭 붙들고 있으니 걸을 수가 있나.” 



형우는 그렇다할 대꾸 한마디로 하지 못했다. 신이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은 강호파. 그 중에서도 우두머리인 사아칸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거절을 해오는 신이에게 마지막 수단으로 협박을 하였다. 그것은 조직 쓰래빠의 전멸. 

보스 및 조직원을 모두 제거하는 것이었다. 강호파로써도 전부를 죽인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지만 

그 대표는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신이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쓰래빠는 거대한 강호파를 막을 수가 없다. 

현재 쓰래빠와 강호파는 생쥐와 호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이는 모두를 특히 연개소리를 위험하게 만들 바에 

차라리 자신 한사람만 희생하자고 생각했다. 벌써 그녀의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영원히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었다. 신이는 사아칸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기로 했다. 


똑똑똑. 누군가가 객실 문을 두드린다. 



“형님, 틀니입니다.” 



강호파의 조직원이라는 것을 확인한 형우는 남자에게 들어오라 말했다. 

문이 열리고 작은 체구의 남자가 한걸음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큰 형님께서 신이형님과 같이 좀 오시랍니다.” 



사아칸의 호출이었다. 

부하 틀니가 나간 뒤 몇 분 지나지 않아 형우는 신이를 데리고 제일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그 곳에 자신의 보스인 사아칸이 있기 때문이다. 



회장실. 


갈색 테이블 위의 커피 세잔이 모락모락 김을 피어올리고 있다. 사아칸은 머리에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띠 동갑인 애인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하하. 만나서 반갑네. 난 자네가 내 부탁을 들어줄줄 알았어.” 



사아칸이 자신의 왼쪽 소파에 앉아있는 신이를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신이에겐 그저 기분 나쁜 웃음일 뿐이었다. 

형우는 사아칸의 오른쪽 소파에 앉아 커피만 마시고 있었다. 그래도 가끔씩 신이의 표정을 살피는 것은 잊지 않았다. 



“내가 솔직히 이런 말은 안하려고 했는데.” 



사아칸의 말을 여기까지 들은 형우는 ‘그럼, 하지 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연개소리도 날 탓할 일만은 아니야. 나도 우혁이 녀석을 순순히 내주었으니까. 

한마디로 자네와 우혁이를 바꾼 거나 마찬가지지. 형우야, 안 그렇냐?” 



커피를 마시고 있던 형우는 갑자기 자신에게 바통이 넘어오자 입안에 있던 커피를 차마 삼키지 못한 체 도로 뱉어내버렸다. 



“콜록. 네, 그렇죠.” 



형우는 대답을 한 뒤 화장지로 입술을 닦았다. 그 모습을 신이가 보았다. 



“자네가 우리 조직에 들어온 동기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 잘 지내보자구. 이제 우린 같은 밥을 먹고 사는 동지잖아. 

우리가 보리밥을 먹으면 자네도 보리밥을 먹고 우리가 쌀밥을 먹으면 자네도 쌀밥을 먹는 거야. 하핫. 

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 말게. 보리밥을 먹을 일 따윈 없을 테니까. 하하핫!” 



신이는 사아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였다. 그의 말 따윈 귀담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사아칸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 요즘 파이터 대전 이후로 쓰래빠의 인원이 늘었다지? 얼마나 되나?” 



신이는 맞은편의 형우를 보며 대답했다. 



“강호파의 세발의 피정도입니다.” 


“응? 세발의 피씩이나 되나? 으하하하! 하하하!” 



쓰래빠를 비웃는 소리였다. 사아칸은 신이의 비유가 마음에 쏙 들었다. 그렇게 그는 신이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쓰래빠의 인원수만은 이미 No.2 구제파의 수준이 되었다는 진실을 신이는 말하지 않았다. 

앞으로 쓰래빠의 과제는 그 많은 인원의 실력을 얼마만큼 늘이냐 하는 것이다. 신이는 모든 걸 개소리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녀라면 할 수가 있다. 신이는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네. 자네만 잘하면 내 왼팔자리를 자네에게 줄 수도 있어.”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하하. 감사는 무슨. 그럼 가서 쉬게나. 형우가 오피스텔로 데려다줄게야.” 



타악. 


두 사람은 회장실에서 나왔다. 신이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려 했다. 그때 형우가 붙잡았다. 



“신아, 잠깐만!” 



형우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매직을 꺼내었다. 뚜껑을 연 뒤 회장실 문에 부착되어 있는 팻말에 줄 하나를 짧게 그었다. 

[회장실]이라 적혀있던 팻말은 [화장실]로 바뀌고 말았다. 

회장실 앞을 지키고 서 있던 부하 2명과 여비서가 당황해하며 형우를 쳐다본다. 



“말하면 알지?” 



형우가 그들에게 주먹을 쥐어보였다. 그에 땀을 삐질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부하들이다. 



“너, 보스가 한 말 마음에 안 들었지?” 



형우가 신이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뭐?” 


“그럴 때마다 나한테 말해. 골탕을 먹여 줄 테니까. 뭐, 들키면 끝장이지만.” 


“훗, 웃기고 있네.” 



신이는 입술 사이로 웃음을 작게 토해냈다. 



“이야, 너 이제 웃냐? 웃기기 진짜 힘들다.” 



그래도 형우는 이것에 만족스러웠다. 신이와 다시 재회하고는 그가 웃는 것을 통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작은 것에도 만족을 느꼈던 것이다. 


오피스텔. 

형우가 자신을 데려다준 오피스텔은 45평의 넓은 곳이었다. 신이 혼자 생활하기엔 정말 넓기만 했다. 

신이가 현관 앞의 스위치를 누르자 벽면에 붙어있던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노란색과 빨간색 조명이 조화를 이룬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정신적으로 너무 고단하기만 하다.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었다. 

이 담배 한가치가 자신의 피로를 얼마나 풀어줄 지는 모르지만 그는 입에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자 담배가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신이는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검은색 가죽의 중지갑을 열자 그리운 얼굴이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을 보고 있으니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빗질이 잘된 긴 머리칼도, 고사리 같지만 강철과도 같은 파워를 지닌 주먹도, 

자신을 노려보던 초롱초롱한 눈도, 자신이 입을 맞춘 그 예쁜 입술도, 언제나 거친 말을 서슴없이 해오던 목소리도, 


모든 것이 그리웠다. 


신이는 어제 개소리와 영화를 본 뒤 강호파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모두 말해주기로 했었다. 

그래서 같이 어디론가 멀리 떠나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어제야 비로소 그녀의 선택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자신과 함께 떠나자고 해도 그녀는 떠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조직을 버리고 혼자 도망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신이는 

새삼 또 한번 깨달았다. 분명 어제도 일 때문에 늦게 왔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보다는 일이다. 신이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또 한번 스스로에게 약속을 했다. 반드시 그녀의 꿈을 이루어 줄 거라고‥. 

신이는 사진 속 개소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신이의 키스를 받은 개소리는 3년이 지난 후에도 신이의 지갑 속에서 밝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그의 사랑은 영원했다. 






************** 






길었던 여름방학은 끝이 났다. 아니 짧았던 여름방학이 끝이 났다. 

으아, 모르겠다. 길면 길었고 짧으면 짧았던 방학이었다. 개학을 한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내 옆자리는 일주일 동안 비어있다. 신이는 아직도 방학이었다. 핸드폰을 버리기라도 한건지 전화기는 항상 꺼져있다. 

정말 나와의 인연을 끊고 살려는 모양인가 보다. 신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연락 한번 해주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유인이는 며칠간 삐져있었다. 



“개솔아, 숙제 가르쳐줘.” 



턱을 괴고서 혼자 과거에 빠져 있으니 유인이가 다가와 나를 건져내주었다. 유인이는 노트를 들고 있었다. 



“숙제? 무슨 숙제? 너 그런 것도 하냐?” 



이 녀석이 신이가 배신을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더니만 이제는 아주 미쳤나보다. 미친 데에는 약이 없다던데. 이를 어째. 



“해야 돼. 멍텅구리 시간이니까.” 


“뭐? 이번 시간이 학주 수업이라는 얘기야? 아씨, 그 선생은 싫은데.” 



멍텅구리라 하면 H고의 학생주임을 일컫는 말이다. 왜 멍텅구리라 부르는 지는 나도 모른다. 

그 별칭은 유인이 혼자서 부르는 말이니까. 



“안 했다는 거야? 후- 뭐야, 보스가 그런 것도 안하고.” 



마치 한심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유인이다. 



“야, 넌 보스가 그딴 걸 한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나도 모르게 흥분해 버렸다. 솔직히 난 졸업장을 따기 위해 등교만 하는 거지 성적은 전교 꼴찌다. 



“어머! 넌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니? 우리 유인이 놀래잖아!” 

“유인아, 노트 줘봐. 내가 다 해줄게.” 

“야야! 김성숙, 그걸 네가 왜 해? 내가 할 거야!” 

“황진이 넌 글씨가 개떡 같잖아!” 

“개떡 같아야 대신 한걸 안 들키지! 너 바보니?” 



이것들이 지금 뭐하는 거야? 주변에 있던 여자애들이 우리의 대화를 들은 건지 잽싸게 다가와 유인이의 노트를 빼앗았다. 

서로 유인이의 숙제를 대신 해준다고 난리들이다. 망할 것들 내 꺼나 좀 해주지. 


쉬는 시간이 끝이 나고 종이 울렸다. 

철컥. 교실 문이 열리며 무시무시한 학주가 발을 들여놓는다. 발은 총 네 개였다. 오잉? 



“아, 쌤! 흥분되잖아요. 이것 좀 놔줘요!” 



나머지 두 발의 정체는 우혁이었다. 학주에게 귀를 잡힌 체 소 끌려오듯 질질 끌려 들어온다. 

그를 본 반 아이들이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우혁이는 전학 온지 5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녀석의 활동범위가 워낙에 넓어 

선생님들은 물론이거니와 전교생이 거의 다 알게 되었다. 얼마나 발발거리며 돌아다니는 지,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이놈아! 흥분이 왜 돼?!” 



우혁이의 귀를 잡아당기며 학주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우혁이에게 물었다. 



“귓불이 제 성감대란 말이예요! 아앗, 쌤! 서요, 서. 빨리요!” 



타앗. 해괴망측한 우혁이의 말에 학주가 혀를 내두르며 귀를 놓아주었다. 변태 같은 자식. 핑계도 가지각색이구만? 



“귓불이 성감대라고 잡아당기지 말라는 놈은 내 살다 살다 네가 처음이다!” 


“하하. 쌤, 제 친구 호두 있잖아요. 걔네 엄마는 젖꼭지가 성감대여서 호두한테 젖 안 먹이고 분유 먹였다잖아요. 크하하. 웃기죠?” 



윽. 저 자식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안되겠어. 호두한테 다 일러줘야지. 

하지만 이미 앞줄에 앉아있던 유인이가 호두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빠른 녀석. 



“어라? 형님!! 공부는 잘 하고 있어??”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크게 흔드는 우혁이었다. 그럼 그렇지. 네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그만큼 학교에서는 형님이라 부르지 말랬건만. 지독히도 말을 안 듣는 녀석이다. 


방과 후. 수업을 마치고 유인이와 함께 교실에서 나오자 호두와 시백이가 복도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혁이 녀석은 또 딴 데로 샌 모양이다. 진짜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건지. 발에 끈이라도 묶어놔야겠다. 



“우혁이 이 자식 어디 갔노?!” 



유인이의 문자를 받은 호두가 얼굴이 빨갛게 상기가 된 체 우혁이를 찾았다. 유인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모른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핸드폰을 꺼내어 우혁이에게 전화를 거는 호두다. 그 모습을 시백이가 킥킥거리며 쳐다보고 있다. 

계단을 내려와 학교 현관을 빠져나오자 2학년 여자아이들이 희웅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어, 꼬맹이 인기 많은데?” 



시백이의 목소리를 들은 희웅이가 여자아이들 사이를 삐집고 나와 우리들에게 왔다. 

그를 본 2학년 여자아이들의 눈에 자연스레 유인이와 호두, 시백이까지 들어왔고 그녀들은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대신 항상 욕을 먹는 건 나였다. 젠장. 이 학교 남자들은 왜 나를 몰라주는 거냐고! 

어쨌든 녀석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여자들의 하트를 받으며 교문을 나왔다. 난 오늘도 변함없이 화살촉을 맞아야만 했다. 



“호두오빠!!” 



와락! 교문을 나오자 웬 고양이 한 마리가 호두에게 안겼다. 호두의 반쪽인 현아였다. 



“니 학교는?” 


“단축수업 했어요! 호호호.” 


“또 뻥까네. 현아야, 오빠야는 뻥까는 거 싫어한다고 그랬제? 또 조퇴했나?” 


“아니요. 조퇴 안했어요!” 


“쓰읍, 또 뻥깐다!” 


“뻥 아니예요. 땡땡이 친 거란 말이예요.” 



이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 아닐 수가 없다. 그야말로 천생연분이다. 

호두는 현아와 데이트를 할 거라며 다른 길로 걸어갔다. 외로운 우리는 학교 앞에 대기해있는 오노가 가져온 차에 올랐다. 

요즘 학교를 마치고나면 언제나 바쁜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과 신입들 또한 체력단련과 기술단련에 열중이다. 

차가 출발하자 길 위의 학생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나는 창틀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어김없이 신이가 떠오른다. 


신이 네가 없어도 우리의 일상생활은 변하는 게 없구나. 하지만 넌 조금은 변화가 있는 생활을 하고 있겠지? 

옛 친구와 그리고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신아, 2년 뒤에도 네가 내 적일지는 모르겠지만 난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전진해나갈 거야. 

설령 네가 내 앞을 막는다 하더라도 난 절대 뒷걸음치거나 제자리에 서지 않아. 

하지만 신아, 넌 그 전에 돌아와 줄 거지? 그렇지? 나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니까 꼭 돌아와 주길 바래. 



그렇게 돌아오지 않는 신이를 기다리고 있으니 어느덧 세 번의 가을이 지나갔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2부] 1. 






2007년 입춘(立春)을 코앞에 둔 사늘한 1월의 어느 날 밤. 

수도 서울 한강의 남쪽지역은 달빛의 기운을 받으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활기에 차있다. 

잠들지 않은 도시, 강남의 거리는 네온사인으로 화려하게 빛났다. 


퍼억! 챙그랑!! 


친구를 찾고 있던 밤하늘의 외로운 달은 ‘캐리비안’이라는 건물 하나를 주목했다. 유난히 시끄러운 곳. 

그리고 남에 비해 유달리 빛이 나는 한 소녀. 땅의 기운을 받고 자란 그 소녀는 덩치가 자신의 두 배나 되는 남자들을 이끌며 

건물 복도를 당당하게 걸어 나간다. 소녀의 앞을 막던 이들은 그녀를 보호하던 남자들의 칼부림에 의해 맥없이 뻗어나갔고 

어느새 복도는 붉은 선혈로 물들고 말았다. 콰앙! 소녀가 목적지에 다다르자 오른편에 서 있던 남자가 발을 들고는 문을 힘껏 차버린다. 

‘5’라는 숫자의 팻말이 붙은 문은 힘에 짓눌려 벌어졌고 이내 감추었던 속을 훤히 드러내었다. 

room안에는 소녀가 찾던 사내 한 놈과 함께 그의 동료들이 무서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네‥네 놈들은 뭐냐?!”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사내의 동료가 소녀에게 용기 내어 물었다. 소녀는 사내에게 꽂혀있던 시선을 질문을 던진 남자에게로 옮겼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값비싼 양복을 입은 동시에 코 아래와 턱 모두 깔끔하게 면도가 되어있었다. 

허나 깔끔한 그 역시 왼쪽 콧구멍으로 삐져나온 코털 한 가닥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소녀는 옥의 티에 피식 웃음을 띠며 정중하게 대답해주었다. 



“쓰래빠의 보스, 연개소리입니다.” 






************* 






저녁 늦게 부하들을 이끌고 ‘캐리비안’이라는 유흥업소로 향한 개소리. 

그녀가 그 곳에 간 이유는 최근 강남에서 성장하고 있는 씨파의 두목, 쌍칼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기 때문이다. 

씨파는 쓰래빠에게 크게 해가 되는 조직은 아니었으나 연개소리는 앞으로 크게 자랄 싹은 미리 없애자는 취지 하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씨파의 우두머리인 쌍칼은 사업상 중요한 일 때문에 작은 기업의 사장들을 접대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에 일이 망쳐지기 일보직전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3년 사이에 

순식간에 전국구로 성장해버린 조직 쓰래빠가 나타났으니 쌍칼은 머릿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전국의 여러 크고 작은 조직들이 쓰래빠로 인해 무너졌다는 소문을 그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조차 그 희생양이 될 줄이야‥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당신이 쌍칼이라는 자입니까?” 



개소리가 테이블 위쪽에 앉은 사내에게 공손히 질문을 했다. 쌍칼은 올 것이 왔구나하는 생각에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대답을 하기 전 개소리의 얼굴을 오목조목 살펴보았다. 단순한 호기심도 시간을 끌기 위해서도 아니다. 

마음 한구석에서 용솟음치는 성욕과 존경심 때문이었다. 그가 느끼는 성욕은 여자로써 성숙된 개소리의 몸과 소녀 같은 이미지의 

순수한 외모에서 비롯된 욕망이었고 존경심은 여자가 아닌 거대한 조직을 이끄는 대부의 자격을 가진 모습을 보고 생겨난 마음이었다. 

쌍칼이 바라본 쓰래빠의 보스는 칠흑같이 짙은 머리칼을 허리까지 풀어헤쳐 여성스러움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칼은 관리가 잘된 여우 털 마냥 윤기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검은 머리칼은 그녀의 하얀 피부를 돋보이게 해주었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더더욱 그녀를 깨끗한 여인으로 보이게 했다. 개소리는 요즘 여자들에겐 없는 꾸미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쒸욱- 푹! 


순간 오한이 서렸다. 각도가 조금만 어긋났더라면 피 묻은 과도가 자신의 왼쪽 뺨에 꽂혔을 것이리라. 

쌍칼은 그녀의 부하가 던진 과도에 또 한번 침을 삼켜야만 했다. 



“입에 꿀 처발랐냐? 우리 형님이 물으시잖아!” 



과도는 개소리의 왼팔인 태기의 것이었다. 복도를 걸어올 때 웨이터가 쥐고 있던 것을 잠시 빌린 것이지만 말이다. 

쌍칼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제야 대답을 했다. 



“그렇다‥내가 쌍칼이다.” 



개소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곧 자신의 오른팔인 민규에게 손을 내민다. 그 의미를 알고 있었던 민규는 챙겨온 계약서를 

사각형의 소형 가방에서 꺼내었다. 개소리의 손바닥 위에 계약서 한 장이 놓여졌다. 그녀는 계약서를 쥐고서 쌍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에 쌍칼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한번 읽어보세요.” 



쌍칼은 긴장한 손으로 개소리가 건넨 계약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개소리의 눈치를 한번 살핀 뒤 

계약서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계약서는 간단했다. 아마 세상에서 내용이 가장 짧은 계약서일 지도 모른다. 

쌍칼이 읽은 계약서는 이러했다. 



[계약서. 이 세계에서 발을 뗄 때까지 ‘씨파’는 쓰래빠를 모신다.] 



그리고 아래에는 그의 본명인 백두만이라는 글자와 함께 싸인을 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계약서의 ‘이 세계’라는 것은 조직들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다 읽으셨나요?” 



개소리가 물었다. 쌍칼은 고민에 휩싸였다. 자신이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이깟 계약서 한 장으로 인해 

자신의 조직이 끝나버리다니‥. 쌍칼은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다. 



“거절한다.” 



개소리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뭐라구요? 잘 못 들은 것 같은데.” 


“난 절대 네 년에게 굴복하지 않아!” 



스윽-. 개소리는 쌍칼에게 가까이 들이대고 있던 얼굴을 들어버렸다. 쌍칼을 지그시 내려다본다. 



“넌 내 발밑에 있게 돼있어.” 



개소리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예의 바르던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쌍칼에게서 등을 돌려 문밖으로 향했다. 

그를 본 쌍칼은 이쯤에서 끝내려는 가보다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심할 처지가 아니었다. 

민규와 태기의 사이에 선 그녀가 잠시 제자리에 멈춘다. 



“무조건 싸인 받아내.” 



보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주변에 서 있던 부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개소리는 room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민규와 태기가 따른다. 또 다른 부하 몇은 그들의 등을 향해 허리를 숙인 다음 다시 room으로 들어갔다. 

쾅. 문이 닫히고 잠시 후. 



“으아악!” 



하는 중년 남자의 고통 섞인 비명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왔다. 개소리는 악녀와도 같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 5분 후 ‘씨파’도 쓰래빠의 발아래로 들어온다. 


‘캐리비안’건물 앞. 

도로 가에 초 고급 승용차 다섯 대가 줄지어 정차해있다. 개소리는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허리숙인 부하들 사이로 

무게 있게 걸어 나왔다. 태기가 재빨리 달려가 승용차의 뒷문을 열었다. 그러자 곧 개소리가 차안으로 들어간다. 

태기는 차문을 닫고선 조수석에 올랐다. 개소리가 탄 차의 운전은 변함없이 민규가 했다. 

쓰래빠의 승용차들이 차례대로 출발을 하기 시작한다. 개소리가 탄 승용차는 가운데에 있는 세 번째 차였다. 

오늘밤도 어젯밤처럼 점점 깊어만 간다. 



“형님, 메뚜기가 쌍칼한테 싸인 받아냈답니다. 그런데 미친개라는 놈은 모른다는 군요.” 



전화통화를 하던 태기가 핸드폰을 닫으며 개소리에게 말했다. 기쁜 소식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원수는 오늘도 역시 찾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근데 태기야, 나 아까 멋있었냐?” 


“그럼요!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요.” 


“후후, 그래? 너도 아까 과일칼 던질 때 멋있더라.” 



두 사람은 서로를 칭찬하기에 바빴다. 인상이 무섭지 않은 개소리는 적이 자신을 만만하게라도 볼까 싶어 항상 무게를 잡고 있는다. 

당연히 적이 볼 때에만 말이다. 그녀의 올해 나이 22세. 민규와 태기는 24세. 쓰래빠의 연령층은 거의가 20대였다. 



“애들은 잘하고 있어? 현황 한번 말해봐.” 



개소리는 전국 각지를 다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을 만큼 하루하루가 바빴다. 

그렇게 경기도지역만 해도 작은 조직들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거물급 조직들만 없앤다면 제 발로 쓰래빠에게 

찾아올 놈들이기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쁜 이유는 역시 전국구인 강호파와 구제파, 

그리고 대파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쓰래빠와 마찬가지로 나날이 성장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개소리는 서울이외의 지역들은 

모두 일곱 사람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들은 그녀가 양팔 다음으로 믿고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인천은 15개 조직 중 현재 8개 조직을 흡수한 상태입니다. 배고파를 비롯한 나머지 6개 조직은 김빈곤 때문에 애를 먹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밤 김빈곤에게 접근할 예정이라고 희웅이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울산은 복고파를 제외한 나머지 조직들에게 

싸인을 받았고 대구는 12개 조직 중 7개 조직이, 대전은 13개 조직 중 9개 조직이, 광주는 18개 조직 중 5개 조직이, 

부산은 21개 조직 중 15개 조직이 저희 밑으로 들어왔습니다.” 



민규는 운전을 하며 개소리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전부 말해주었다. 모두들 잘하고 있었다. 

인천은 희웅대로, 울산은 우혁대로, 대구는 호두대로, 대전은 오노대로, 광주는 히틀러대로, 그리고 부산은 시백대로 개소리에게 

만족을 느끼게 해주었다. Rrrr. 태기의 핸드폰이 또 한번 울렸다. 유인이 건 전화이다. 

태기는 핸드폰을 열고서 귀에 가져다대었다. 전화 속은 무척이나 고요하고 긴장감이 흐른다. 



“형, 유인이야.” 


“그래. 거긴 어떻게 됐어?” 



유인은 개소리와 함께 경기도 안에 있는 지역을 모두 맡고 있다. 오늘 그에게는 중요한 임무가 맡겨졌다. 

그것은 대파의 황계철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황계철은 대파의 이인자로서 두목, 한동구의 오른팔이기도 했다. 

개소리는 최근 대파가 마약을 밀매한다는 소문을 접했다. 자신이 관여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감옥에 처넣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발 빠른 유인을 시켜 감시하게 한 것이다. 



“황계철이 움직였어. 형, 끊어야겠어. 위치는 문자로 보낼게.” 



달칵. 유인의 목소리는 모기소리만 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큰 조직의 뒤를 미행하는 것만큼 조심해야 할일도 없기 때문이다. 

태기는 전화를 끊고서 개소리에게 통화내용을 전했다. 



“유인인데, 황계철이 방금 움직였다 네요.” 


“그래? 위치는?” 


“곧 문자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개소리는 태기에게 위치를 파악하자말자 경찰에게 전화를 걸라고 시켰다. 뒷일은 경찰에게 맡길 작정이었다. 

개소리는 차창 밖을 보았다. 아직은 춥기만 한 이 밤. 드디어 자신의 꿈이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그리고 같은 밤하늘을 여섯 남자가 서로 다른 곳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유인, 우혁, 호두, 희웅, 시백‥그리고 신이‥. 











※전국 고교 일진협회※ 






♡[2부] 2. 






하얀 입김까지 삼켜버리는 짙은 어둠 속에 한 소년이 있다. 

유인은 누군가와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 용달트럭 뒤에 쭈그리고 앉아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태기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서였다. 문자를 전송한 유인은 핸드폰을 목에 걸었다. 찬바람이 그의 코끝을 시리게 한다. 

빨간 털모자도 하얀 털귀마개도 푹신한 빨간 털목도리도, 털장갑도 바람은 모든 것을 허망하게 만들었다. 



“으-추워.” 



유인은 고개를 뒤로 재껴 하늘을 보았다. 너무 어두워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는다. 

심지어 그 밝은 달조차도 어둠에 가려졌다. 눈이라도 올 것 마냥 흐린 밤이다. 



“눈 오면 좋겠다.” 



혼자 중얼거리는 유인이다. 새하얀 눈송이. 그와 참으로 어울리는 단어이다. 

부우웅-. 뒤쪽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유인은 재빨리 몸을 틀어 고개를 내밀었다. 

황계철이 기다리던 이가 나타난 듯 했다. 황계철의 뒤에는 그가 데리고 나온 부하 5명이 서 있었다. 

그들의 앞에 승용차 한 대가 멈추었다. 차에서 내린 이는 어려보이는 십대들이었다. 



“흐음‥.” 



유인은 트럭 뒤에 숨은 체 그들을 지켜보았다. 분명 있는 집 자식들일게 뻔한 십대들은 대파에게서 마약을 얻기 위해 

거금을 가지고 나왔다. 



“왜 이렇게 안 오지?” 



유인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경찰이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주위는 조용했다. 



“돈은 맞게 가져왔겠지?” 


“물론이죠. 돈은 가져왔으니 일단 물건부터 보여주시겠어요?” 



황계철은 가방을 들고 있는 부하에게 고개 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그의 부하가 앞으로 나와 십대들에게 가방을 열어 보인다. 

가방 속에는 포장되어 있는 하얀 가루들이 수북이 들어있었다. 십대 한명이 비닐 하나에 구멍을 뚫은 뒤 손가락에 가루를 찍어 

맛을 보았다. 마약이 확실했다. 친구가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돈 가방을 들고 있던 십대가 황계철에게 가방을 건네었다. 

황계철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고 바로 그때였다. 


위용위용위용!★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리는 경찰차의 사이렌소리가 어두운 거리를 요란하게 울리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어쨌든 마약과 돈을 서로 주고받은 그들은 자신들의 차로 급히 뛰어갔지만 

이미 네 대의 차에 탄 경찰들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경찰들은 차에서 내려 황계철 무리들과 십대들을 양쪽에서 포위했다. 

유인은 여전히 트럭 뒤에 숨어 이를 흥미 있게 지켜보았다. 



“너희를 마약거래를 한 혐의로 체포한다! 움직이지 마!!” 



어린 십대들은 부모님에게 혼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겁이 났다. 

하지만 감옥을 여러 차례 드나들고 죽을 고비도 수십 차례 넘긴 황계철은 두려울 게 없었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총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제일 가까이에 있던 십대 한명을 인질로 붙잡았다. 

경찰들은 모두가 아차 싶었다. 



“네놈들이야 말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한 발짝이라도 뗐다가는 이 꼬맹이의 목숨은 없을 줄 알아라.” 


“왜‥왜 그러세요?” 


“죽기 싫으면 닥치고 있어!” 



얼떨결에 인질로 붙잡힌 십대는 자신의 머리에 겨누어진 총 때문에 덜컥 겁이 났다. 너무 무서워 오줌이라도 쌀 것만 같았다. 

황계철은 자신의 부하들조차 버리고는 인질을 앞세워 자신이 타고 왔던 차로 걸어갔다. 경찰들은 갑갑함에 이를 물고는 하는 수없이 

길을 뚫어주었다. 유인은 자신이 숨어있는 곳과 가까워지고 있는 황계철을 유심히 보았다. 

그는 경찰들에게 신경을 쓰고 있느라 주변은 안중에도 없었다. 황계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유인은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뚜껑을 열자 작은 불길이 치솟았다. 얼굴 가까이 불을 가져다대본다. 



“아‥따뜻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니 어느덧 황계철이 자신과의 거리를 2보 정도까지 좁혀왔다. 

경찰들은 아직까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유인은 라이터 불에 바람을 불어보았다. 

그러자 불길은 흔들리더니 다시 치솟았다. 새로 산 보람이 있었다. 황계철이 유인이 숨어있던 트럭 옆을 지나갔다. 

그때 자연적으로 황계철이 유인과 마주쳤다. 유인이 쓰래빠의 조직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황계철은 예기치 못한 유인의 등장에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짐작할 수가 있었다. 신고를 한 사람은 쓰래빠라는 것을‥. 

유인은 트럭 뒤에 쭈그리고 앉은 체 씨-익 웃어보였다. 황계철은 그 미소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뒤늦게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황계철이 인질을 겨누고 있던 총을 유인에게 겨누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휘익-. 유인이 던진 라이터가 총을 쥐고 있던 황계철의 오른손에 떨어졌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라이터의 불길이 황계천의 손에 닿았다. 



“아악!” 



갑작스런 뜨거움에 황계철이 총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유인은 두 손을 포개어 만든 가짜 총을 황계천을 향해 뻗었다. 

그리고는 입으로 총성을 내뱉는다. 



“빠앙!” 



스윽-툭. 


총에 맞은 황계철이 힘없이 쓰러졌다. 경찰이 틈을 놓치지 않고 쏜 총알이 황계철의 허벅다리를 뚫은 것이다. 

그는 총에 맞아 주저앉은 뒤에도 유인을 보았다. 유인 또한 그를 보았지만, 이 곳에 오래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경찰이 자신을 발견하기 전에 떠나야만 했다. 유인은 바닥에서 일어나 바로 옆 담장을 넘었다. 

달려오는 경찰들의 발소리가 담 너머로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한 남자의 우렁찬 절규가 미처 담을 넘지 못한 체 골목을 맴돌았다. 



“으아아악! 젠장!!” 



걸어가는 유인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는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폈다. 

오늘도 정말 보람찬 하루였다고 유인은 생각했다. 


<b>미성년자 관람불가.-__-</b> 

울산 쓰래빠. 

울산 Y빌딩. 



“하아하아‥.” 


“좋아?” 


“응‥하아‥사랑‥해‥.” 



어두운 침실 안. 

침대 위 노란 조명만이 어둠을 거부하고 있다. 현대에 과학이라 불리는 double침대는 남녀의 사랑에 의해 몹시 흔들렸다. 

이불 속 남자는 자신을 떠받치고 있는 여자의 몸을 구석구석 탐닉했다. 남자의 혀가 자신의 몸을 탐낼 때마다 

여자는 극도로 흥분을 했고 남자에 대한 사랑은 커져만 갔다. 그 순간 여자는 행복했다. 

이 남자를 영원히 가지고 싶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남자가 가져주기만을 바랐다. 

그녀는, 김정미는 본래의 애인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우혁을 만난 뒤로 복고파의 보스 오진국에 대한 사랑 또한 

찬물을 끼얹은 듯 식어버렸다. 아니 식을 사랑 따위가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오진국의 올해 나이 35세, 그녀의 나이 25세. 나이차이부터가 너무 많이 났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해버린 우혁 역시 나이차가 좀 있었다. 

그리 큰 차이는 아니지만 문제는 그가 연하라는 것이다. 그렇다하더라도 김정미는 괜찮았다. 

우혁만 좋다면 그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우혁은 너무나 매력적인 남자였다. 



“흐으‥최고야‥사랑해.” 



깊이 파고 들어오는 우혁의 허리를 그녀는 황홀한 탄성을 내지르며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김정미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을 해오자 우혁은 뿌듯함과 재미를 동시에 느꼈다. 

오진국의 애인 김정미. 그런 그녀와 밤을 지세는 것은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도 있지만, 역시 더 큰 이유는 오진국 때문이다. 

울산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복고파. 그 조직을 차지하기 위해 김정미를 잠시 이용하는 것이었다. 

우혁은 오진국이 김정미를 무척이나 아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금 전 김정미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오진국 그도 알았으리라. 

울산 쓰래빠에게로 쳐들어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우혁은 침대 위에서 김정미와 즐기며 연락을 기다렸다. 



“‥누나가‥잘 해‥줄게. 뭐‥갖고 싶은 거‥있어‥?” 


“하아. 갖고 싶은 거?‥당연히 있지.” 



우혁은 김정미의 젖가슴에서 입술을 떼고는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모든 것이 성숙한 여자이다. 



“있어? 말해봐. 그게 뭔지.” 



김정미가 우혁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우혁은 그녀를 받아주었다. 몇 초간의 짧은 키스가 끝이 나고 우혁이 말한다. 



“조직‥누나 애인, 오진국의 조직이 갖고 싶어.” 



우혁이 생긋 웃어 보인다. 하지만 그의 말에 김정미는 웃을 수가 없었다. 

갖고 싶은 것이 복고파라니‥. 그녀는 두려웠다. 잠시 잊고 있었던 무서운 오진국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이 사실을 안다면 자신도 우혁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그녀는 오진국의 힘은 알고 있었지만 우혁의 힘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무작정 겁부터 먹은 것일지도 모른다. Rrrrr. 침실 내 전화기가 울렸다. 



“실례.” 



우혁이 팔을 뻗어 선반 위의 수화기를 집어 든다. 기다렸던 연락이 온 것이다. 



“여보세요.” 


“형님, 방아깨비입니다.” 


“그래. 오진국은?” 


“지금 오고 있습니다. 5분 후면 이 곳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인원은 아직 파악이 안 되었습니다.” 



우혁은 미소를 띠었다. 



“파악 하나마나 잔뜩 데리고 왔겠지. 알았어. 지금 내려가지. 애들 집합시키고.” 


“예! 알겠습니다, 형님!” 



우혁은 수화기를 놓았다. 김정미가 불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무슨 일이야? 오진국이라니?” 


“누나, 선물 고마워.” 



우혁이 침대에서 내려와 벗어놓았던 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한다. 그를 보며 김정미는 두려움을 느꼈다. 

선물이라니‥그게 무슨 뜻일까?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우혁이 김정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여전히 발가벗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다. 그녀의 실루엣은 실크이불로 인해 섹시함이 한층 돋보였다. 우혁이 말했다. 



“오진국은 누나랑 조직을 바꾸게 되어있어. 내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만들 거거든. 그러니까 인질은 얌전히 자고 있으라구.” 



타악! 우혁이 급소를 찌르자 김정미가 잠시 동안 의식을 잃었다. 우혁은 잠이 든 그녀를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쿡. 그럼 애들 중에선 내가 일등인가? 형님이 좋아하겠군.” 



그는 넥타이를 바로 매며 침실에서 나왔다. 이제 오진국을 맞이할 시간이다. 




인천 쓰래빠. 


쒸익-탁! 

이마, 눈, 코, 입, 뺨. 

배고파의 보스 김빈곤의 얼굴에 총 7개의 소도가 꽂혔다. 아주 정확히 꽂혔지만 그의 얼굴에선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그는 쓰러지지도 않았다. 왜? 괴물이기 때문에? 아니다. 소도가 꽂힌 곳이 그의 얼굴이기는 하지만 정확히 말해 사진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희웅이 3년간 갈아온 칼이 결실을 맺는 날이다. 희웅이 마지막 소도를 목표물로 향해 던졌다. 

곧 소도는 김빈곤의 머리 정중앙에 꽂혔다. 



“형님, 시간되었습니다.” 



희웅의 충성스런 부하인 사마귀가 다가왔다. 사마귀는 희웅에게 그가 입을 재킷을 두 손을 건네었다. 

희웅이 재킷을 받아들며 몸에 걸쳤다. 마지막으로 사마귀에게 소도 하나를 받았다. 

그 소도 한 자루가 잠시 후면 김빈곤에게 자신이 겪었던 아픔과 슬픔을 똑같이 겪게 해줄 것이다. 희웅이 사마귀에게 말했다. 



“애들은?” 


“모두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좋아. 그럼 가볼까?” 



얼마나 기다려 왔던 날인가! 희웅은 벌써부터 온몸이 근질거렸다. 

그 시각 김빈곤이 가장 아끼는 누이동생의 20번째 생일이 많은 사람들의 축하 속에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2부] 3. 





대구 쓰래빠. 

여기 대구에 내일 밤이면 개장할 신설된 나이트가 있다. 나이트의 이름은 ‘가즈 나이트’. 

사장이 즐겨보던 판타지소설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었다. 대구의 대부분의 구역을 접수한 강호두. 그가 바로 가즈 나이트의 주인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이트는 내일 밤에 문을 열 계획이었기에 현재 손님은 한 사람도 없이 허전하기만 하다. 

단 몇 개의 조명만이 켜진 무대 위. 그 곳에 하얀 밍크코트를 걸치고 있는 한 여성이 다리를 모으고 걸터 앉아있다. 

애띠어 보이는 여성의 얼굴은 조막만한 크기에 뽀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예쁘다기 보단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외모이다. 

그녀는 지금 3년간 사겨온 남자친구인 호두에게 잔소리를 듣고 있는 중이다. 



“공부 안하고 여긴 또 왜 온 거고?” 


“왜오긴! 오빠 얼굴 보러 왔잖아!” 


“그래서 내 사진으로 브로마이드 만들어서 줬다 아이가. 니 또 공부하기 싫어서 온 거제? 내가 니 속을 모를 줄 알고?” 



호두는 현아가 잘되기를 바랐다. 남들처럼 좋은 대학도 가고 MT라는 것도 가보고‥또 좋은 기업에 취직도 하길 바랐다.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아는 아직도 어리광이 심한 아이였다. 



“씨이- 나 공부하기 싫어! 재미없단 말이야. 나 대학 안 갈래. 이수생인 것도 쪽팔려!”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내년에는 꼭 대학 가면 될 거 아이가. 아니면 니 또 삼수할래?” 


“안 갈 거라고! 오빠도 안 갔잖아!” 


“임마, 나는 대가리가 돌이라서 못 간거고.” 


“나도 돌이야!” 



아무래도 말이 통할 것 같지가 않다. 왜 이리도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일까? 호두는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영 방법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니 자꾸 그 카면 오빠야 확 군대 갔뿐데?” 



현아는 눈이 동그래졌다. 갑자기 군대라니‥이게 무슨 천청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호두가 군대에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군대?” 


“그래. 니 내년에도 대학 못가면 내 니가 삼수하는 꼴 보기 싫어서라도 군대 갈 거라고.” 


“비‥비겁해.” 



현아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좋은 방법이었다. 현아는 충격 받은 눈치였고 호두의 작전은 성공한 듯 했다. 



“오빠야 신체검사도 받아 놨다. 니 몰랐제?” 


“‥시, 싫어! 오빠 군대 가는 거 싫어! 할게. 공부하면 되잖아!” 



호두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예쓰!’ 

현아는 분한 얼굴로 아래만 쳐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머리를 호두가 쓰다듬어준다. 자상한 오빠의 모습이다. 



“사랑하니까, 니가 잘되길 바라는 거다.” 



그리고 조금은 닭살 돋는 대사였다. 하지만 현아는 감동받은 얼굴이었다. 그녀의 두 볼에 홍조가 띠었다. 

현아가 호두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포근하고 따뜻하다. 



“흠흠.” 



그때 나이트 안으로 들어온 부하 한명이 그들의 곁으로 다가가는 것을 멈추고 헛기침을 하였다. 

자신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현아는 아쉬운 듯 호두에게서 떨어졌다. 



“무슨 일이고?” 



호두가 부하, 귀뚜라미에게 물었다. 귀뚜라미의 손에는 흰 종이묶음이 들어있었다. 



“형님께서 시키신 대로 다 했습니다.” 



귀뚜라미가 들고 있던 종이를 호두에게 내밀었다. 호두는 종이를 보았다. 그것은 계약서였다. 

총 4장의 계약서. 모두 각 조직의 보스가 직접 쓴 싸인들이 종이의 끝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현재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계약서는 모두 7장. 그리고 방금 손에 넣은 4장의 계약서. 그렇다는 것은 이제‥ 



“딴지파만이 남았습니다. 어쩔까요? 형님. 지금 쳐들어갈까요?” 



대구의 제일 큰 조직이었던 딴지파만 무릎을 꿇으면 된다. 호두는 피식 웃어보였다. 슬슬 몸을 풀 때가 온 것이다. 



“아니. 마지막은 내가 직접 한다. 애들 대기시켜 놔.” 



호두는 즐거워보였지만 현아는 걱정 투성이다. 그가 싸우러 갈 때마다 현아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사랑하는 남자가 다치기라도 할까봐, 싸움의 희생양이 되지는 않을까, 그녀는 그럴 때마다 머리칼이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번 싸움은 아주 큰 싸움이 될 거라는 것을‥. 




부산 쓰래빠. 


부오오옹-. 

넓은 바다위에 배 한척이 떠있다. 배이름은 ‘고잉매리호’. 

어릴 적 해적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시백이 원피스라는 만화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모두들 배이름의 뜻이 뭐냐는 질문에 시백은 항상 입을 다물었다. 만화에서 따왔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부끄러웠던 것이다. 


퍽!퍽!퍽! 


배안에는 창고 하나가 딸려 있었다. 지금 그 창고 안은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오싹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윗옷이 벗겨진 체 폭력을 당한 한 남자가 기둥에 묶여있고 앞에는 다섯 명의 남자가 서 있다. 그 중심이 되는 자가 바로 시백이다. 



“형님, 이 자식 꽤 끈질긴데요?” 



그의 부하, 여치가 답답함에 말했다. 그에 부하를 째려보는 시백이다. 이유는 호칭 때문이었다. 



“아‥죄송합니다, 선장.” 



그렇다. 시백은 부하들이 배안에서는 자신을 선장이라 부르길 원했다. 정말 황당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우욱‥콜록콜록.” 



1시간째 고문을 당한 남자는 피를 토해내며 연신 기침을 했다. 여치 말대로 정말 질긴 놈이었다. 

시백이 쥐고 있던 각목으로 남자의 어깨를 내려쳤다. 퍼억! 그 위력에 각목은 두 동강이 나버렸다. 



“빨리 말해라. 왕봉지 어딨노?” 


“윽‥말‥모한다.” 


“개새끼.” 



뻐억! 뻐억! 퍽! 


약이 오를 때로 오른 시백은 남자를 사정없이 발로 차기 시작했다. 그는 왕파의 보스, 왕봉지의 부하인 오춘삼이었다. 

얼핏 보면 충성심이 강해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오춘삼은 잠적해버린 두목의 위치를 정말 모르고 있었다. 

어찌 보면 현재 가장 답답한 사람은 그일지도 모른다. 정말 모르는데 자꾸만 말하라고 하는 쓰래빠가 너무나도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지, 진짜‥모한다.” 


“왜 말 못하는데? 이자식이 진짜!” 


“모르‥니까‥모한다.” 



시백은 그 말을 0.01%도 믿지 않았다. 그의 머리엔 이미 ‘오춘삼은 알고 있다.’라고 박혀있기 때문이다. 

정말 가여운 오춘삼이다. 



“구라 까고 있네! 씨발, 이 자식 바다에 던져버려!” 


“예! 알겠습니다, 선장!” 


“내 진짜 모른다. 모른다!!” 



끝내 오춘삼은 바다에 던져지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이도 그곳은 항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다였다. 

아니 항구 바로 밑이었다. 시백의 ‘고잉메리호’는 항구 앞 바다에 떠있었던 것이다. 

부산 쓰래빠 중 배를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시백은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왕봉지 그 새끼 무조건 찾아내!!” 



그의 우렁찬 고함소리에 바닷물이 잔잔하게 일렁인다. 추운 겨울, 시백은 열이 받아 덥기만 하다. 




서울 강호파. 


호랑이 가죽이 걸려있는 의자에 강호파의 보스, 사아칸이 ‘화장실’이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회장실이다. 

평소 눈이 나쁜 사아칸은 형우가 장난질을 해놓은 팻말을 알아채지 못했다. 어쨌든 지금 그의 앞에는 신이와 형우가 서 있다. 

사아칸이 가장 듬직하게 생각하는 그의 양팔들이다. 



“요즘 쓰래빠가 크게 성장하고 있더군. 대부분의 조직을 휩쓴 상태라지?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모르겠군. 

그런다고 지들이 우리를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건 그렇고 구제파와 대파는 어떻게 하고 있지?” 



사아칸이 형우에게 물었다. 쓰래빠에 대한 구제파와 대파의 움직임이 궁금했다. 



“두 조직 모두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특히 구제파는 크게 관여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그렇겠지. 소이켠은 남 일엔 관심이 없는 놈이니까. 그런데 대파는 의외군. 

그 자식들이 쓰래빠의 건방진 행동을 보고도 가만히 있다니.” 


“곧 움직일 것도 같습니다. 한동구의 오른팔인 황계철이 경찰에게 잡혔다는 소식이 들어왔거든요.” 



사아칸은 형우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한동구의 오른팔이 경찰에 잡혔다니 의외의 소식이었다. 



“왜? 어쩌다가 잡혔지?” 


“마약거래를 하다가 잡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고자가 쓰래빠라는 군요.” 



이제야 대파가 움직일 것 같다는 이야기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자신의 오른팔을 경찰에게 넘겼으니 한동구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사아칸은 이런 상황이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강호파 대신 대파가 쓰래빠를 처리해 줄 것이라 여겼다. 

사아칸은 대파의 실력이 쓰래빠보다 몇 수는 더 위라고 생각했다. 

만약, 쓰래빠의 손에 들어온 조직까지 움직인다면 이야기는 틀려지겠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그 조직들 모두 이 싸움에서 쓰래빠가 지기만을 바라고 있을 테니까. 대파가 이긴다면 자신들은 해방이 되는 것이다. 

사아칸의 입가에 미소가 흘러넘쳤다. 



“그럼 우리는 좀 더 지켜보기로 할까? 하하하, 아주 재미있겠군. 결과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걸?” 



그만 나가 봐도 좋다는 사아칸의 말에 두 사람은 회장실에서 나왔다. 

그들이 나오자 문밖을 지키고 있던 부하 두 명이 허리를 숙인다. 신이와 형우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형우가 내림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5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해.” 


“뭐가?” 



형우의 앞뒤 없는 말에 신이가 물었다. 



“쓰래빠말이야. 3년 만에 그렇게 커버리다니. 연개소리도 진짜 멋있지 않아?” 



신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쓰래빠의 이야기도, 그리고 개소리의 이야기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형우는 신이가 대답을 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텅 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신이가 1층 버튼을 눌렀다. 



“어쩔 거야? 난 대파가 질 거라고 보는데.” 



형우가 말했다. 그는 자신의 보스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뭘?” 


“대파가 지면 보스가 더 이상 지켜보기만 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 넌 어떻게 할 거야?” 


“‥‥.” 



이번에도 대답을 피해버리는 신이다. 형우는 멀뚱히 그를 쳐다보았다. 

어느덧 훌쩍 커버린 신이. 남자인 자기가 봐도 반할만한 남자였다. 단, 흠이 있다면 3년 전보다 더 무뚝뚝해졌다는 것이다. 



“너 지갑 좀 줘봐.” 



형우가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신이는 그 손바닥을 보기만 했다. 



“지갑은 왜?” 


“아직도 그 사진 끼우고 다녀?” 


“무슨 사진?” 


“그건 네가 더 잘 알거 아니야.” 



형우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이 또한 형우가 개소리의 사진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신이는 끝까지 지갑을 내밀지 않았다. 그에 형우도 곧 포기해버린다. 



“네가 연개소리를 좋아한다는 걸 보스가 안다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들키지 않게 조심해.” 



형우의 충고가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다. 1층에 도착한 것이다. 두 사람은 호텔 로비를 걸어 밖으로 나갔다. 

호텔 앞에는 승용차 2대가 대기해있었다. 그들이 타고 온 차였다. 



“그럼 내일 보자.” 


“그래.” 



신이는 형우의 인사를 받아준 뒤, 차에 올랐다. 그의 부하가 차문을 닫아주었다. 차가운 밖과는 달리 차안은 따뜻했다. 

하지만 3년 전 그녀의 품만큼은 아니다. 신이가 탄 차는 곧 밤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개소리를 떠난 지 벌써 3년, 개소리를 본지도 3년이 지났다. 그녀는 자신의 꿈을 향해 잘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자신의 몫이라고 신이는 생각했다. 


끼이익-!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는 부하였다. 그에 하마터면 앞좌석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운전을 하던 부하가 신이를 걱정했다. 신이는 괜찮다고 했다. 



“무슨 일이야?” 


“아, 그게. 개 한 마리가 갑자기 뛰어들어서요. 괜찮습니다, 형님. 개새끼 한 마리쯤이야, 뭐.” 


“부딪혔어?” 


“예?‥예.” 



신이는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당황한 그의 부하 역시 차에서 내렸고 자신의 형님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보았다. 

차에 살짝 닿기만 한 개는 다행이도 외상은 없었다. 하지만 충격에 잠시 기절한 듯 했다. 신이는 개를 들어 가슴에 안았다. 

혹시라도 모르니 동물병원에 데리고 갈 작정이었다. 



“형님‥.” 


“뭐해? 병원으로 안 가고.” 


“개 한 마리쯤이야 그냥 두시지‥.” 


“임마, 너 그러다가 벌 받아.” 



신이는 개를 안고서 다시 차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예전 자신이 모시던 사아칸은 이런 경우 오히려 더럽다며 자신을 야단치기 일쑤였었다. 

남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모를 따뜻함 때문일까? 그는 살짝 미소를 띠며 급히 운전석에 올랐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2부] 4. 





철커덩. 

유인은 가지고 있던 열쇠로 철제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개소리가 무척이나 아끼는 정원의 나무는 추위에도 

벌거벗은 체 가지를 흔들고 있다. 유인이 들어오자 그의 냄새를 맡은 늙은 퍼그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유인은 자신의 다리에 매달리는 개에게 관심도 주지 않으며 현관으로 걸어갔다. 거실 창을 보니 불이 켜져 있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선 유인의 눈에 소파에 앉아있는 개소리가 들어왔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와 초코파이를 

즐기며 독서를 하고 있었다. 초코파이를 처음으로 개발해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저술되어 있는 책이다. 

유인이 들어오려는 개를 막으며 현관문을 닫자 그제야 유인의 존재를 눈치 챈 개소리였다. 



“이제 왔어? 춥지? 따뜻한 커피라도 한잔 할래?” 



유인은 고개를 저었다. 커피를 싫어하는 그였다. 거절을 당하자 개소리는 유감이라는 듯 남은 커피를 한번에 다 마셔버린다. 

유인은 목도리를 풀어헤친 후 털장갑을 벗었다. 마지막으로 귀마개도 빼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개소리의 맞은 편 자리에 앉는 그다. 



“맞다. 오늘 수고 했어.” 



초코파이를 한입 베어 물며 개소리가 말했다. 유인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개소리가 읽고 있던 책을 자신의 앞으로 당겨보았다. 

페이지 빽빽이 글자가 있다. 도로 개소리의 앞에 두었다. 



“아! 방금 우혁이한테 연락이 왔었는데 자기가 1등이래. 아마도 복고파를 처리한 모양이야. 하여튼 그 자식도 대단하다니까? 하하.” 


“신이한테 연락은 왔어?” 


“‥‥.” 



전혀 다른 화제에 개소리는 입을 닫았다. 우혁의 얘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신이 얘기라니. 여전히 엉뚱하기만 한 유인이었다. 

유인은 침묵하는 개소리를 보자 굳이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직인 가 보구나? 근데, 진짜 오기는 올까?” 


“와!” 



그냥 한번 물어본 것이었는데 민감하게 반응하는 개소리였다. 그에 유인은 눈을 크게 떴다. 

개소리는 잠시 흥분된 감정을 추스렸다. 



“올 거야. 반드시.” 



신이가 떠난 지 3년이 지난 지금 조금 자신감을 잃은 그녀였지만 그래도 끝까지 그를 믿고만 싶었다. 

유인은 개소리를 바라보다 자신의 손목을 보았다. 시계의 분침이 어느덧 숫자10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초침은 쉬지 않고 돌아갔다. 그렇게 시간은 물 흐르듯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인천. 


끼이익. 끼이익. 


제우스 호텔 앞에 네 대의 승용차와 여섯 대의 봉고차가 힘차게 정지했다. 

주차요원들 뿐만 아니라, 호텔 앞에서 잠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배고파 2명이 어리둥절해 하며 이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차문이 열리며 검은 양복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내릴 때야 비로소 그들의 몸은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너무 늦게 알아챘다. 



“이‥이런 썅!” 



배고파 2명이 담배를 집어던지며 호텔 안으로 도망치려 하자 쓰래빠의 조직원 2명이 재킷 안에서 신문지로 싼 사시미를 

꺼내들며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푸욱- 푸욱-! 



“우욱‥윽.” 



눈 깜짝할 새에 쓰래빠의 칼이 각각 그들의 허파를 뚫었다. 배고파의 첫 희생양이 생긴 것이다. 

또 다른 쓰래빠의 조직원들은 주차요원의 복부를 주먹으로 힘껏 찔러 기절을 시켰다. 

이 일과 상관없는 자들은 다치게 하지 말라는 희웅의 분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희웅이 끌고 온 수 많은 부하들이 

호텔 안으로 돌진했다. 타다다닥! 그들의 등장에 호텔 관계자들이 놀라 뒷걸음질을 치는 가하면 

카운터와 벽 이곳저곳에 숨기 시작한다. 5명 쯤 되는 부하들이 호텔 입구를 지키고 섰고 10명이 조금 넘는 부하들이 로비를 지켰다. 

경찰에 신고하는 자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희웅은 나머지 부하들을 이끌고 연회장이 있는 호텔 2층으로 향했다.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절로 어깨가 덩실거렸다.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오르자 소란을 눈치 챈 배고파의 

몇몇 조직원들이 이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인원수나 실력 등 여러 면에서 적수가 되지 못해 그들은 쓰래빠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현재 배고파의 희생자는 7명. 쓰래빠에는 부상당한 사람조차도 없었다. 

3년간 기다려온 보람이 있었다. 개소리의 밑에 들어가길 참 잘했다. 

현재 희웅의 앞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희웅은 부하들이 열어준 길을 밟으며 연회장에 들어섰다. 



“꺄아악!!” 



퍽! 퍽!! 푸욱! 


김빈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옆에서 생일케이크를 자르던 여동생은 갑자기 들이닥친 사내들이 연회장을 무너뜨리고 있자 무서움에 몸을 떨었다. 

얼굴을 익히고 지내던 오빠의 부하들이 하나, 둘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뻐억!! 


저들은 왜 저토록 무섭게 칼을 휘두르는 것일까? 아무렇지 않게 칼로 사람을 찌르다니. 

김빈곤의 동생, 김희현은 고개를 돌려 오빠를 보았다. 그도 얼어붙은 체 떨고 있었다. 

푸슉! 



“아악!!” 



지금까지 배고파의 희생자 12명, 부상자 21명. 쓰래빠는 모두 0명이다. 

희웅은 누나의 복수가 이루어지는 광경을 보며 또 원수 김빈곤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 자신은 이것보다 더한 고통과 슬픔을 느꼈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콜록콜록.” 

“케엑-.” 



연회장 내 배고파의 조직원들은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한 체 고통스러워했다. 이제 김빈곤만이 남았다. 

희웅은 준비해왔던 소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김빈곤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김빈곤은 뒤로 물러선 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뭐, 뭣들 하는 거야?! 어서 나를 보호해라! 어서!!” 



그는 자신밖에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희웅은 그에 대한 동정심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김빈곤의 부하들은 부상을 입어 자신의 몸조차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이 보스를 지킬 수 있을 리가 없다. 

희웅이 가까이 다가왔다. 김빈곤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도 3년 전 희웅에게 저지른 죄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두려움을 느꼈다.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자신의 인생은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필이면 여동생의 생일날이 자신의 제삿날이 되다니‥. 

하지만 희웅의 목표는 그가 아닌 다른 이였다. 희웅은 절규하는 김빈곤을 바라보며 말했다. 



“잘 봐. 그리고 지금의 아픔과 슬픔을 잘 기억해둬. 소중한 이를 잃을 때의 고통을 머릿속에, 가슴속에 잘 새겨두라고.” 



희웅은 들고 있던 소도를 김빈곤의 동생을 향해 뻗었다. 자신이 겪었던 슬픔을 똑같이 맛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희웅 역시 잔인한 사람이었다. 


김빈곤의 동생, 김희현은 자신에게 향한 소도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무섭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처음 보는 이 남자가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는 지도 몰랐다. 

자신의 생일날에 사람들이 왜 피를 흘리고 있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참으로 슬픈 생일이다. 



“안‥돼. 내 동생은‥안돼.” 



김빈곤은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가 풀려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두 눈에서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15년 만에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의 동생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우리 누나는 되고 네 동생은 안 되냐?” 



희웅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소도를 쥔 주먹에도 힘이 들어간다. 희웅은 여자의 이마를 향해 힘껏 칼을 뻗었다. 



“안돼! 희현아!!” 



푸욱! 











※전국 고교 일진협회※ 






♡[2부] 5. 





연회장 안은 정적이었다. 김빈곤의 울부짖는 외침과 동시에 희웅의 소도가 앞으로 뻗어나갔다. 

김빈곤의 심박수가 급격히 빨라졌다. 하지만 곧 정상을 되찾아갔다. 그의 동생 희현이 감았던 눈을 떠보았다. 무감각하다. 

아무런 고통도 아픔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손으로 이마를 짚어본다. 멀쩡하다. 

희웅의 소도는 그녀를 피해 앞에 있던 케이크를 뚫었다. 소도 주변의 빵이 무너져 내렸다. 

순간 김빈곤이 외친 이름에 희웅은 소도의 방향을 바꾸어버렸다. 희현. 김빈곤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은 분명 희현이었다. 

희웅의 누나와 동일한 이름이다. 희웅은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현수막을 응시했다. 


[김희현님의 20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게 무슨 하늘의 엿 같은 장난일까? 희웅은 생각했다. 

그는 소도를 쥔 팔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케이크가 반으로 갈라져 내린다. 



“네 이름이 희현이냐‥?” 



재확인 차원에서 여자에게 물었다. 여전히 얼어있는 그녀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희웅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약해지면 안돼. 이름이 같다고 해서 죄를 덮어줄 수는 없다고.’ 


하지만 그의 몸은 거부하고 있었다. 투욱. 손에서 소도가 떨어졌다. 희웅은 다시 김빈곤을 노려보았다.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인간. 누나의 원수. 이 날이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렸는가? 자비 따윈 베풀어선 안돼. 난 부처가 아니니까. 

김희웅, 빨리 죽여 버려. 누나가 보고 있어. 억울하게 죽은 누나는 아직도 하늘로 못 올라가고 있다고. 

내가 복수해주기만을 바라고 있을 거야. 

하지만‥희웅은 복수를 그만두었다. 그를 용서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의 동생 때문일지도 모른다. 희웅의 누나와 이름이 같은 김빈곤의 동생 김희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왜 순간 자신의 누나로 보였던 것일까? 마치 누나 희현이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희웅은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왜‥왜‥! 난 누나를 위해서 이 길을 택했는데‥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데‥누난 왜‥날 막는 거야‥왜‥.” 


“형님‥?” 



그의 부하 사마귀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희웅은 그 물음에 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아니 심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좋아. 이 정도로 끝내지. 김빈곤, 네 조직은 우리가 접수한다. 반항은 곧 죽음이다.” 


“누‥누가 네 놈에게 조직을 내줄 것 같으냐?” 



휘익-탁! 


희웅은 발아래 떨어진 소도를 발등으로 쳐올려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김빈곤의 왼쪽 뺨을 스쳐지나가도록 

소도를 날렸다. 김빈곤의 몸은 굳어버렸다. 



“넌 이미 조직을 버렸어. 넌 부하들을 걱정하기는커녕 다친 부하들에게 자신을 지키라고 말했다. 

네 자신이 제일 먼저라는 거지. 그 순간 넌 네 조직을 버린 거고, 네 부하들 또한 너에게서 등을 돌렸을 거다.” 



김빈곤은 희웅의 뒤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부하들을 보았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모두들 고개를 돌린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다. 희웅이 사마귀에게 말했다. 



“뒷정리는 너한테 맡길게.” 


“예, 알겠습니다, 형님!!” 




희웅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희현의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희현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너희 부모님께 감사해라. 네 이름이 너와 네 오빠를 살렸으니까.” 



희현은 아직까지 가시지 않은 공포에 눈물을 흘리며 희웅을 보았다. 그가 다시 입술을 뗀다. 



“그리고‥울지 마, 누나.” 



누구에게 한말인지는 희웅 그도 모른다. 김빈곤의 누이동생 희현인지, 아니면 자신의 누나인 희현인지‥. 

하지만 누나라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세상을 떠난 희현일 지도 모른다. 희웅은 연회장에서 나왔다. 

답답함에 꽉 매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밖에는 희웅의 부하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끝내 희웅은 마지막에 부처가 되어 자비를 베풀고야 말았다. 




대구. 가즈 나이트 앞. 


여치는 호두의 명령대로 50여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불러들였다. 모두 실력이 보통이 넘는 녀석들이었다. 

1명을 2명의 인원으로 보면 맞을 듯싶다. 호두가 부하 2명을 이끌고 나오자 여치와 다른 부하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고 그를 맞이했다. 



“준비는 다 됐나?” 


“예, 형님!” 


“그 카면 슬슬 가볼까?” 



여치가 차문을 열어주었다. 호두는 차에 오르기 전 왠지 뒤가 따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았지만 부하들뿐이었다. 

호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차에 올랐다. 나이트 건물 옆. 벽 뒤에서 숨어 이를 훔쳐보는 이가 있다. 

호두가 느낀 시선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아는 호두에게 집에 간다고 말한 뒤 건물 옆에 숨어 그를 기다렸다. 

몰래 뒤따라가기 위해서이다. 오늘따라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현아는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기기라도 할까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호두가 자신의 눈앞에만 있다면 불안감이 덜할 것이라 생각했다. 호두가 탄 승용차가 출발하고 뒤따라 여러 대의 봉고차도 

함께 출발을 했다. 현아는 얼른 건물 옆에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아저씨, 저 앞에 봉고차 좀 따라 가주세요!” 



택시기사는 그녀를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것도 잠시 손님의 말에 따라 택시를 출발시켰다. 

앞서 달리는 봉고차가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택시기사도 기어를 높인 후 엑세레이트를 힘껏 밟았다. 정말 스릴 있는 상황이었다. 

현아는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하느님. 우리 오빠,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끼이익-!! 


호두의 차를 선두로 하여 봉고차들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목적지 앞에 멈추었다. 

봉고차 안에 있던 쓰래빠는 차례를 지키면서 빠르게 나왔고 호두 또한 여치가 열어준 문으로 위풍당당하게 내렸다. 

딴지파의 아지트는 공사가 1년 동안 중단된 3층 높이의 빈 건물이었다. 건물의 벽돌들은 추운 기온 탓에 꽁꽁 얼어있다. 

호두가 앞장선 쓰래빠는 건물을 보고 서 있었다. 호두는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 한대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긴장 탓에 담배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가 담배를 입에 물자 부하 여치가 라이터 불을 붙여주었다. 호두는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았다. 

사람들의 입김과 담배연기가 분간이 되지 않는다. 호두가 드디어 발을 떼자 부하들의 긴장감도 한층 고조되었다. 

건물 안에 있는 딴지파는 아직도 바깥의 사정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철컹!! 

검은 철문을 발로 차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은 전구 하나로 어둠을 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석쇠에 삼겹살을 구워먹고 있던 딴지파는 쓰래빠의 출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각목 및 쇠파이프를 들고 있는 그들은 

마치 싸움이라도 하러 온 것처럼 보였다. 딴지파의 조직원들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던지며 근처에 흩어져 있던 각목을 집어 들기에 

바빴다. 그것을 본 호두가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제일 많이 쓰러뜨린 놈에겐 오야붕을 만나게 해준다! 자, 지금부터 시작이다!!” 


“우와아아!!” 



호두가 내건 조건은 그들에게 있어 동남아여행권보다도 값진 상품이었다. 그만큼 개소리는 지방조직원들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다. 

호두는 그를 이용했다. 쓰래빠의 조직원들은 물불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딴지파에게 주먹과 무기를 휘둘렀다. 

퍽! 퍼억!! 



“이 새끼가 어딜!” 


“악!” 



미처 무기를 잡지 못한 이들은 쓰래빠의 폭력에 손 한번 쓰지 못한 체 맞아나갔다. 

한편, 호두를 따라온 현아는 겁이 남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호두가 타고 온 승용차의 문을 열곤 

운전석에 앉았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사람들이 문을 잠그지 않았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 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현아는 차안에서 두 눈을 꼬옥 감은 채 기도를 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퍼억!! 쓰래빠에도 다친 사람이 나오기는 했지만 딴지파만큼은 아니었다. 역시 실력 면에서 쓰래빠가 우위에 있었다. 

호두는 내기의 승리자를 가려내기 위해 부하들이 싸우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몸이 떨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거 몸이 근질거리는데?” 



자신도 저 치열한 싸움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오랜만에 굳어 있던 몸을 푸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호두는 불편한 재킷을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힘껏 달려 나가 굳게 쥔 주먹의 첫 번째 먹이 감을 찾아보았다. 

결국 제일 가까이 있던 녀석으로 결정지었다. 뻐억!! 살짝 점프를 하며 힘껏 팔을 내지른다. 목표 감은 광대뼈를 맞고서 쓰러졌다. 

호두는 옆에서 날아오는 각목을 오른쪽 팔뚝으로 막아내며 왼쪽 다리로 놈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바닥 위에 쓰러지려는 놈을 밟고서 

다음 상대를 향해 뛰어올랐다. 



퍼억!! 



그 광경을 나머지 부하들과 함께 2층 난간에 서 있던 포천정이 지켜보고 있었다. 포천정은 당혹감보다는 오히려 화가 났다. 

끝내 저 애송이 녀석이 자신의 조직까지 넘보다니. 너무나도 가소로운 일이다. 열이 받은 포천정의 얼굴에 핏대가 섰다. 



“새끼들아, 느그들 지금 뭘 구경하고 있는 거고?! 퍼뜩 가서 못 죽이나?!”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 그는 자신과 함께 있던 부하들에게 호통을 쳤다. 그에 움찔한 부하들이 일제히 아래로 내려갔다. 


퍽!! 빠악! 


싸움은 계속되었다. 운이 좋은 이는 각목에 맞아도 각목이 부러졌고 반대로 운이 나쁜 이는 각목 대신 팔이 부러졌다. 

출혈이 심한 사람은 얼굴이나 팔, 다리 전체가 피로 얼룩졌다. 다행인지 뭔지 쓰래빠에는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심하게 다친 사람은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퍼억! 퍼억! 카앙!! 

새로 합류한 딴지파의 조직원들은 이전 사람들과는 달리 쓰래빠와 동등한 실력으로 싸우고 있었다. 

호두도 단 한방으로 그들을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호두의 상대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쓰래빠의 최고 우두머리, 즉 오야붕이 인정한 사람들 중 한사람인 호두를 그들이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호두가 스포츠대회에서 4강에 진출했다면 그들은 예선조차도 통과하지 못한다. 실력차이는 그 정도이다. 



“죽기 싫음 알아서 엎드려라, 이 쉐이들아!!” 



뻐억!! 


포천정의 부하들은 호두의 주먹에 하나, 둘 힘없이 쓰러져 나갔다. 이제 포천정이 나설 차례가 왔다. 

그는 미간 중앙의 달 문신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그는 이 문신을 새길 때 크나큰 쓰라림을 느꼈었다. 


‘이 자식, 면상에 용 한 마리를 새겨주마.’ 


포천정이 이를 빠득빠득 갈며 결심을 했다. 그는 난간을 짚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계단으로 내려갔던 부하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폼 하나는 정말 일품이었다. 그 모습을 보았던 호두 또한 인정을 했다. 



“니는 내가 죽여주마!” 



포천정이 왼쪽 소매 안에서 나이프를 빼내든다. 손잡이 끝에 붙어있던 버튼을 누르자 날카로운 칼이 튀어나왔다. 

일단은 무조건 얼굴만을 공격할 작정이었다. 호두는 살짝 웃음을 띠며 여유 있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무기를 가지고 있는 딴지파의 보스일지라도 꽤 자신이 있었다. 호두는 싸우기도 전에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흐아아!!” 



포천정이 호두에게 뛰어들었다. 그것을 본 그의 부하들도 한결 힘을 내어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그래도 가장 어려운 상대를 보스가 맡아주니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포천정이 뻗은 나이프가 호두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호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리를 들어 나이프를 노렸다. 하지만 곧 포천정의 다른 쪽 손에 다리가 붙들리며 실패를 하고 만다. 

포천정은 간신히 붙잡은 호두의 다리에 나이프를 꽂으려 했다. 



퍼억!! 그렇지만 몸을 왼쪽으로 회전을 함과 동시에 날린 호두의 오른쪽 다리에 포천정의 나이프는 가까운 곳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큭. 애송이 주제에 제법이군.” 


“그런 얘기는 니말고도 해주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귀에 따까리가 앉았다.” 



포천정이 바라본 호두는 건방지기까지 했다. 그들의 치열한 싸움은 계속되었다. 맞고 때리고 부딪히고 넘어지고. 

뻐억! 복부를 발로 차인 호두는 강력한 힘에 건물 밖까지 밀려났다. 재킷을 벗어서인지 몹시 추웠다. 

하지만 추위를 느끼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포천정이 밖으로 나왔다. 호두는 일어섰다. 



“퉷! 그쪽도 꽤 하는데? 그럼 봐줄 필요는 없겠네.” 



호두가 넥타이의 매듭을 흔들어 느슨하게 풀며 말했다. 주먹을 꽉 쥐었다. 



“이야아!” 



퍽!! 

호두가 오른쪽 주먹으로 펀치를 날리자 포천정이 고개를 숙이며 피해버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호두의 복부를 노리는 

주먹을 뻗었고 그것을 호두는 허용하지 않고 막아내었다. 곧장 오른쪽 무릎으로 포천정의 턱을 내려찍었다. 

빠악! 



“으윽!” 



뒤로 주저앉은 포천정. 호두는 그가 일어설 시간조차 주지 않으며 다음 공격을 마구 퍼부었다. 

퍽!퍽!퍽퍽!퍼억!! 

휘우-웅. 파악! 호두의 연속공격을 받은 포천정은 마지막 킥에 날아가 합판더미에 부딪히며 바닥 위로 떨어졌다. 



“휴우‥.” 



싸움에서 우세인 호두를 보자 현아는 안심을 했다. 처음 상대에게 맞아 밖으로 튀어나온 호두를 보자 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현아는 마지막까지 호두가 무사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상한 기분에 돌아본 옆으로 웬 봉고차 한대가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그 봉고차는 전조등을 끈 체 힘차게 전진을 했다. 

그리고 봉고차 앞에는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포천정에게 다가가고 있는 호두가 서 있었다. 현아는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오빠!! 피해!!” 



큰소리로 외쳐도 보았지만 차창이 닫혀있어서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현아는 클랙슨을 여러 번 꽝꽝 눌렀다. 빠앙빠앙!! 그 소리에 호두가 돌아봤고 차안에 있는 현아를 발견하자 벙진 체 

상황파악을 하기에 급급했다. 뒤에서는 여전히 봉고차가 돌진해오고 있다. 그 차에 탄 이는 포천정의 오른팔인 지만식이다. 


빵빵!! 클랙슨을 울리던 현아는 가까워지는 봉고차를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바보 같은 오빠, 왜 눈치를 못 채는 거야!” 



하지만 대구의 강호두가 뒤에서 달려오고 있는 차를 눈치 채지 못할 리 만무했다. 호두는 일부러 포천정과의 간격을 좁히고 선체 

차가 가까워질 때쯤 재빨리 피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봉고차의 운전자가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하더라도 

정지거리(*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자동차가 정지하는 지점까지의 거리)로 인해 포천정을 치고 말 것이다. 

호두는 그 점을 노렸다. 그런데 현아가 이 곳에 있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호두의 작전을 알리 없었던 현아는 시동을 켜고서 핸드브레이크를 내렸다. 그녀는 차를 출발시켰다. 

호두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방패막이가 되어주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부우우-웅. 승용차는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왔고 곧 봉고차와 부딪히고 말았다. 


끼이익-펑!!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호두의 동공이 커지기 시작한다. 현아가 들어있던 그 자동차였다. 

뒤늦게 밖으로 나온 호두의 부하들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여치의 명령으로 양쪽으로 갈라져 봉고차 안의 지만식을 끌어내었고 

다른 한쪽에 뻗어있던 포천정을 마저 손보기 시작했다. 호두는 천천히 승용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현아가 머리에 피를 흘린 체 

핸들에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현아‥야?” 



문을 열려했지만 잠겨있는 지 좀처럼 열리지가 않았다.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지기만 한다. 끝내 호두는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뜨렸다. 

챙그랑!! 

그런 다음 깨진 틈새로 손을 넣어 잠겨있는 문을 여는데 성공했다. 



“현아야‥정신 차려라‥현아야‥.” 



호두는 피가 흐르고 있는 손으로 현아를 잡고 차에서 끌어내었다. 현아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빨리‥새끼들아, 빨리 차 가지고 와!!” 





************* 






대구, D병원. 306호실. 


즉시 현아를 차에 태우고 달려온 병원. 마음이 급했던 호두는 무작정 의사를 끌고 와 현아를 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는 그녀를 보자 호두는 정말 그녀를 잃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달님이 도운건지 그녀의 수술은 대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호두는 병실침대에 누워 잠자고 있는 현아를 보자 간신히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두 눈을 꼬옥 감고 쌔근쌔근 잠자고 있는 그녀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3년 전 개소리의 집 앞에서 대문 안을 빼꼼히 들여다보고 

있던 여자아이. 호두는 그 수상한 여자아이의 어깨를 뒤에서 툭툭 두드렸다. 그에 죄지은 사람마냥 화들짝 놀라던 그 여자아이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정말 귀여운 아기 곰을 보는 것만 같았으니까. 



‘까, 깜짝 놀랐잖아요! 당신 누구예요? 나 알아요?!’ 


‘그러는 너야말로 누군데 남의 집을 막 훔쳐 보노?’ 


‘남의 집? 그럼 여기가 그쪽 집이라도 된다는 거예요?! 그런 거짓말에 제가 속을 것 같아요?!’ 


‘여기 개소리집인데, 나도 같이 산다.’ 


‘헉! 네에?’ 



그때 현아는 개소리가 새로운 남자와 또 동거를 시작한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그 충격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던 것이다. 

당황한 호두는 자기 탓인 줄 알고 그녀를 달래기에 급급했고 어쩌다보니 그날 하루를 꼬박 같이 있어주었다. 

현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 말 없이 잘 들어준 호두에게 왠지 모를 묘한 감정을 느꼈다. 

호두 또한 개소리와는 달리 여자답고 귀여운 현아에게 또 다른 매력을 느꼈다. 그렇게 그들은 그 후로도 만남을 가졌고 

며칠 후 사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으‥응‥.” 



현아가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수술이 끝난 지 12시간이 지난 후였다. 



“현아야, 정신이 드나??” 



호두는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리고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지며 붕 뜨는 것 같았다. 



“오빠‥여기 어디야‥?” 


“병원이다. 근데 임마! 니 거긴 왜 있었노?” 


“‥오빤 괜찮아‥? 다친데‥없어?” 



현아가 힘없는 팔을 들며 호두의 뺨을 어루만졌다. 호두가 그 손을 잡았다. 



“그래. 하나도 안 다쳤으니까 니도 얼른 나아라.”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난 오빠가‥흑‥흐흑.” 



그때의 불안감이 또다시 떠오른 현아다. 호두가 큰 눈망울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고맙다, 현아야. 다음엔 내가 널 지켜줄게.” 


“흐, 흐흑‥으아앙‥!!” 



병실 밖에서는 부하들이 한숨을 내쉬며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이틀 후, 서울. 


오늘따라 도로는 크게 막히지 않았다. 쌩생 달릴 수준은 아니었지만 답답함은 적었기에 도로 위 모든 운전자들이 만족을 느꼈다. 

창밖에는 코트나 파카를 입은 사람들이 추위를 뚫으며 걸어가고 있다. 개소리는 따뜻한 차안에서 추위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아침 호두에게서 현아의 소식을 들었다. 괜히 자기 무덤을 팠다며 개소리는 현아를 꾸짖었다. 

지금 차안에서도 그 얘기중이다. 



“그냥 가만히 있지, 끼어들기는 왜 끼어들어? 호두가 무슨 바보도 아니고 뒤에서 오는 차를 못 알아챌 리가 있어? 

후, 괜히 사람 걱정이나 시키고. 바보 같은 계집애.” 


“하하! 형님, 그래도 사랑하니까 그런 거겠죠. 걔가 뭘 알겠어요? 호두의 머릿속을 꾀 뚫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조수석에 앉은 태기가 현아의 편을 들고 나섰다. 하지만 편이라기 보단 그 역시 현아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 순간 현아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는지를 말이다. 



“뭐? 사랑? 치, 웃기고 있네. 그런 짓이 사랑하는 사람에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몰라서 그러는 거야? 

호두도 봐. 애가 얼마나 걱정을 했음 안 쓰던 표준말을 다 쓰냐?” 



전화에서 호두는 정말 어설프기 짝이 없는 표준말을 썼었다. 



“그게 사람의 이기심 아니겠어요?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랑하는 사람이 다쳐서 자기가 걱정할 바엔 

차라리 자기가 대신 다쳐서 상대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다 떠넘기는 뭐, 그런 거 말이예요.” 


“난 절대 그런 짓은 안 해.” 



태기의 말을 들은 개소리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룸미러로 보던 태기가 살짝 미소를 머금는다.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현아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아마 저도 그랬을 거예요.” 



곧 차안은 침묵으로 둘러싸였다. 개소리는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그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하고‥. 

그녀 역시 말로는 현아를 탓했지만 자신도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신이를 위해 대신 부딪혔을 거라는 결론이 났다. 

개소리는 피식 웃으며 신이를 떠올렸다. 


Rrrr.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메뚜기다. 



“응. 무슨 일이야?” 


“형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당장 아지트로 와주십시요!” 



목소리에 긴박한 상황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무슨 일인데 그래? 차근차근 말해봐!” 



개소리가 목소리를 높이자 운전을 하던 민규와 조수석에 앉아있던 태기가 뒤를 돌아 그녀를 보았다. 

옆에서 자고 있던 유인도 잠에서 깨어났다. 



“지금 대파새끼들이 쳐들어왔습니다. 형님, 빨리 좀 와주십시요!!” 


“뭐, 뭐야? 알았어! 조금만 더 버텨!!” 



탁. 개소리는 핸드폰을 닫고선 민규에게 소리쳤다. 




“아지트로 가! 태기 넌 나머지 애들한테 그리로 오라고 연락해!” 



모두들 어리둥절했지만 보통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민규는 핸들을 꺾었고 태기는 핸드폰을 열었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2부] 6. 





개소리에게 상황을 대충 들은 민규는 현재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태기 또한 아지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녀석들로 하여 모조리 불러들였다. 끼이익-. 아지트인 ‘줄리모르나’라는 이름의 나이트클럽에 도착했을 때는 

메뚜기에게 연락을 받은 지 10분이 지나서였다. 아지트 앞에는 30명의 부하들이 간발의 차이로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가려던 중이었으나 곧 도착한 개소리를 보자 가던 길을 멈추고 제자리에 멈추었다. 



“형님, 오셨습니까!!” 



큰 목소리로 개소리에게 인사를 하는 쓰래빠의 충성스런 부하들이다. 그녀는 부하들이 만들어 놓은 길로 가슴을 편 체 

위풍 있게 걸어갔다. 반보 뒤로 민규와 태기, 그리고 유인이 뒤따른다. 그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허리를 굽히고 있던 부하들도 

일제히 허리를 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른 저녁시간. 클럽이 문을 열려면 아직 3시간도 더 있어야 한다. 

클럽의 문은 쓰래빠가 아닌 처음 보는 놈들이 지키고 있었다. 대략 대파가 분명했다. 수적으로 불리했던 녀석들은 싸울 생각도 

하지 않으며 클럽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냥 놔둘 쓰래빠가 아니다. 




“어허! 어딜 가시려고?” 




파악! 태기가 한 명을 붙잡았다. 다른 한 명은 민규가 잡아놓고 있었다. 유인이 하품을 하며 붙잡힌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민규에게 뒷덜미를 잡힌 사람은 호남형이었고 태기에게 가는 목을 잡힌 이는 쾌남형이었다. 개소리는 조무래기들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냥 보내줘.” 



보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붙잡힌 두 사람은 이제 살았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알겠습니다, 형님.” 



민규가 놈의 뒷덜미를 놓아주며 발로 엉덩이를 힘껏 차버렸다. 그에 대파는 이게 아닌데 하며 날아갔고 옆에선 태기의 발에 차여 

1초 더 먼저 클럽 안으로 날아가는 동료가 보였다. 쿠웅!! 꽤 요란하게 등장하는 쓰래빠다. 

메뚜기를 인질로 잡고 있던 대파의 보스, 한동구가 그들을 반겨주었다. 클럽 바닥엔 개소리의 부하들이 부상으로 인해 

여기저기 쓰러져있었다. 



“형님!!” 



두 손이 묶인 체 원형 통속에 들어있던 메뚜기가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한동구의 주위에는 약 30명은 넘어 보이는 그의 부하들이 쓰래빠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충분히 무찌를 수 있는 숫자였다. 



“드디어 오셨군. 정말 듣던 대로 미인인데? 3년 사이에 이렇게 성장하다니 놀라워.” 



한동구는 긴 담배파이프를 태우고 있었다. 개소리는 그의 발아래에 있는 하얀 휘발유통이 신경에 거슬렸다. 

통속에 들어있는 메뚜기와 담뱃불, 그리고 휘발유. 연관 지어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그쪽은 여전하군요.” 



한동구의 목에 걸린 금 체인을 보며 개소리가 대꾸를 해주었다. 금색으로 빛나는 대파모양의 펜던트가 인상적이다. 



“흥.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거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는 한동구다. 연기는 그의 콧구멍에서도 나왔다. 



“그래요? 그럼 낡은 것은 버려야한다는 것에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낡은 것? 그거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어린 계집의 건방진 말이 괘씸하기도 했다. 자신의 조직을 감히 낡은 것에 비유하다니‥ 

한동구는 이를 악물었다. 이제 개소리의 대답여하에 따라 인질의 목숨이 오가는 상황이 되었다. 



“어머. 눈치가 빠르시네요.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개소리는 한동구를 얕잡아보고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No.3인 대파를 상대로 어디서 그만한 용기가 나오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자신의 실력과 부하이자 동료인 자신의 조직원들을 믿었다. 한동구의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었다. 

열이 받는 건 물론이거니와 황당하기까지 했다. 



“그 말‥후회하게 해주지.” 



한동구가 결의에 찬 얼굴로 부하에게 눈빛을 보내었다. 일을 시행하라는 뜻이었다. 

한동구의 부하가 바닥에 놓여있던 휘발유통을 들고는 메뚜기의 머리위로 부어대기 시작한다. 

메뚜기는 당황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자신의 보스가 구해주기만을‥. 



“저 자식들이!” 



그 광경을 보고 태기가 막기 위해 앞으로 나왔다. 그를 개소리가 저지한다. 



“형님?” 



개소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 유인은 영화 같은 이 상황에 가슴 떨려했다. 흥미진진한 상황이다. 



“네 부하를 살리고 싶다면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그리고 내가 있는 곳까지 개처럼 기어서 와라. 그럼 이 자식을 살려주지.” 



한동구는 개소리의 높은 콧대를 꺾어주고 싶었다. 특히나 그녀의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될 수 있는 최대한 저 계집의 위신을 깎아내리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저 자식이‥.” 


“죽여 버리겠어.” 



민규와 태기가 각각 한마디씩 내뱉었다. 유인은 개소리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보았다. 보스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미간의 흔들림조차도 없다. 



“다음엔 어쩔 건데? 기름을 부었으니 이번엔 불이라도 붙일 거냐?” 


“지금 네 눈엔 내가 장난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냐? 아직 이 세계의 무서움을 모르다니. 

하긴, 그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 내 앞에서 기어라. 그럼 네 부하를 돌려주마.” 


“훗, 이봐. 난 사람이지, 개가 아니야.” 


“그 말뜻은, 즉.” 


“태워 죽이든지, 구워 먹든지 네 마음대로 해. 부하쯤이야, 널렸으니까.” 



한동구로써는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그는 개소리가 부하를 버릴 정도로 냉정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자기라면 모를까? 그녀는 정에 약할 줄 알았는데‥. 한동구는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파이프담배를 인질의 머리 위로 뻗었다. 

불씨가 있는 담뱃재가 휘발유에 닿으면 곧 불이 활활 타오를 것이다. 그럼 통속의 인질은 지옥에 있는 것처럼 괴로움에 비명을 

지를 것이다. 쓰래빠는 어떻게 좀 해보라고 자신들의 보스에게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그것은 곧 한동구의 말대로 하라는 뜻이기도 

했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네 놈의 보스를 원망해라.” 



한동구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메뚜기에게 마지막 말을 건네며 위로 향한 파이프를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스르륵. 파이프가 천천히 회전을 하고 담뱃재가 흔들리며 쏟아지려는 바로 그 순간! 


휘이잉-! 타앗!! 


그가 들고 있던 파이프가 어떤 물체에 맞아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한동구는 바닥에 떨어진 파이프담배를 보았다. 

담뱃재가 모두 바닥에 흩어졌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세로로 세워져 발레리나를 연상시키듯 회전을 하고 있는 은색 동전 한 개가 있었다. 

한동구는 동전의 소재지로 파악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곳은 개소리였다. 



“어, 어떻게‥?” 



그가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지자 개소리가 말했다. 



“3년 전에 열린 파이터 대전도 못 봤나봐? 하긴, 대파는 예선에서 죄다 떨어졌으니 보지 못했을 수도 있겠군.” 


“뭐‥야?” 


“넌 절대 내 부하의 털끝 하나도 태우지 못할 거다.” 



휘익-! 개소리가 던진 동전이 또 한번 공기를 둘로 가르며 날아갔다. 

쒸웅! 정말 간발의 차이로 피한 한동구였다. 하마터면 오른쪽 눈이 날아갈 뻔 한 위험한 상황이었다. 

개소리는 아쉽다는 듯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한동구를 가리켰다. 공격을 시작하라는 신호였다. 

개소리는 한동구가 라이터 불을 메뚜기에게 던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럴 여유를 주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곧장 공격을 명령한 것이었다. 쓰래빠는 기다렸다는 듯 대파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대파 또한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유인은 제자리에 선 체 2층을 올려다보았다. 



“한 놈도 빠짐없이 다 없애버려!!” 



계획대로 되지 않아 약이 모른 한동구는 악에 바쳐 고함을 질렀다. 

챙강! 까앙! 

각종 연장을 사용한 위험천만의 싸움이었다. 개소리는 가까이에 있는 적들을 쓰러뜨리며 한동구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다. 

그녀는 메뚜기의 앞을 가로막으며 한동구에게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정확히 콧등으로 뻗어오는 주먹을 손바닥으로 막아내는 

한동구였고 그는 왼쪽 다리로 강력한 킥을 날렸다. 휘익-! 개소리는 가볍게 뛰어올라 놈의 다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런 다음. 뻐억!! 무릎으로 옆구리를 찍는다. 한동구는 뒤로 주춤하더니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섰다. 

개소리가 잠시 그 틈을 이용해 메뚜기에게 말을 건넨다. 



“임마, 빨리 안 나오고 뭐해?” 


“손과 발이 묶여서요. 죄송합니다, 형님.” 



그때 한동구가 곁에 있던 부하가 들고 있던 각목을 빼앗아 들고는 개소리의 등을 공격하려 했다. 

그것을 눈치 챈 개소리가 허리를 숙였고 그에 한동구가 휘두른 각목은 메뚜기의 뺨에 떨어졌다. 

퍼억! 개소리는 살짝 웃음을 띠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미안미안!” 



메뚜기는 아팠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의 뺨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다시 개소리를 향해 휘둘러진 한동구의 각목은 

그녀의 목을 노렸다. 맞았다면 큰 타격을 입혔을 강도였지만 그녀는 오른팔로 간신히 각목을 막아내었다. 

한동구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처억. 각목을 잡고서 한바퀴 돌려 빼앗아버리는 개소리다. 



“흥, 그 실력으로 어떻게 수년간 No.3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의심스러운데?” 



그를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인정할 정도로 개소리가 한 수위인건 사실이었다. 

한편, 테이블 주변에는 대파의 조직원들이 여럿 쓰러져 있었다. 

휘리릭~! 사시미 하나가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다. 아래에는 노란머리의 태기가 있다. 칼끝이 조명에 번쩍이며 싸늘한 기운을 북돋았다. 

곧 칼끝은 태기의 머리칼과 0.1cm거리에서 우뚝 멈춘다. 손잡이는 태기의 손에 잡혀 있었다. 휘익-! 칼을 던져버리는 태기다. 



“이 새끼들아, 회 뜰 일 있냐? 사시미는 왜 들고 다녀?” 



푸욱! 사시미는 태기의 말과 함께 검은 테이블 위에 꽂혔다. 


뻐억!! 동편 스테이지 위에서도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흰색 조명이 한사람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중앙 스테이지의 주인공이 개소리라면 동편 스테이지의 주인공은 바로 그녀의 오른팔인 민규였다. 

그는 대파의 피라미가 던진 맥주병을 발로 차내어 공중에서 깨뜨려버린다. 챙그랑!! 병이 깨지자 병속에 들어있던 맥주가 

바닥으로 흩어져 내렸다. 맥주는 민규의 머리 위로도 떨어졌고 또 그의 얼굴에도 묻어났다. 

민규는 뺨에서 입술로 흘러내리는 맥주를 혀로 핥아내었다. 그 모습은 피에 굶주린 흡혈귀와도 같았다. 

그만큼 그의 얼굴은 차가워보였고 순간 소름이 돋은 피라미들이 뒤꽁무니를 빼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민규가 한마디 내뱉는다. 



“갈 땐 가더라도 술값은 주고 가야지!” 



퍽퍽! 바닥에 흩어져 있던 병조각을 발끝으로 힘껏 차내는 민규. 곧 날카로운 병조각이 그들의 허벅지에 꽂혔다. 



“으악!” 



털썩. 허벅지를 움켜쥐며 주저앉아버리는 패배자들이다. 



“뭐어, 술값은 치료비로 대신 하죠.” 



민규의 말은 그들에게 있어 손해 보는 장사였지만 힘이 없는 그들로썬 그에 만족해야만 했다. 

한동구는 자신의 부하들이 밀리는 것을 보자 분한 나머지 어금니를 깨물었다. 개소리는 그의 흔들리는 표정에서 자신의 승리가 

코앞에 다가왔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제 그만 패배를 인정하시지?” 



여전히 메뚜기의 앞을 막고선 그녀가 한동구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한동구는 전혀 그럴 의향이 없었다. 



“승자는 끝까지 해보지 않고서야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따악!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를 내는 한동구였다. 뭔가 준비한 모양이었다. 개소리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잠시 후 2층에 있던 각 room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room에 숨어있던 걸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의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대파의 조직원이라 생각했다. 그 수는 한동구를 의기양양하게 만드는 한편, 

개소리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2층 room의 총 개수는 모두 25개. 그 중 문이 열린 room은 24개였고 튀어나온 사람의 수는 

한 room당 3명씩이었다. 72명. 2층에 있던 인원의 수이다. 



“이젠 네 년도 끝이다.” 



머릿수가 쓰래빠의 2배가 되자 한동구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개소리는 분했지만 곧이어 마지막 room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이를 보자 가슴이 뻥 뚫리었다. 

천장에 있던 조명이 유일하게 비치고 있는 중앙의 13번 room. 그 안에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유인이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던 그가 언제 2층으로 올라간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유인과 그와 함께 2층에 있는 

부하들뿐이다. 유인은 싸움이 시작되었을 무렵 2층에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 불투명 유리창으로 흐릿하게 비친 사람의 형체. 

아무리 생각해도 아군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나이트 밖으로 나갔고 뒤늦게 도착한 나머지 부하들과 함께 2층 창이 있는 

건물 뒤편으로 갔다. 대파의 허를 찌른 행동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간 그들은 열린 창을 통해 room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room에는 대파의 조직원이 4명 혹은 5명이 숨어있었다.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쓰래빠의 갑작스런 출현에 

당혹을 금치 못했고 제대로 손 한번 쓰지 못한 체 쓰래빠에게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유인은 문을 확인해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대파는 안에서 문을 잠가놓은 체 숨어있었다. 그렇게 한동구의 마지막 작전은 어린 소년으로 인해 

산산조각나고야 말았다. 



털썩. 모든 것을 자포자기라도 하듯 한동구는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꾀에 자신이 넘어가고 말다니‥. 

그런 일은 이솝우화에나 있는 일인 줄로만 알았었다. 개소리가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한동구의 눈 아래로 종이 한 장이 떨어지고 

개소리의 목소리가 그것을 설명해주었다. 



“거기다 싸인 해. 그럼 너도 네 부하도 다 살 수가 있어. 어때? 살 수 있는 방법치고는 꽤 간단하지 않아?” 



계약서. 그녀가 던진 종이의 정체였다. 이어서 질문 하나가 한동구에게 떨어졌다. 



“그리고 이건 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혹시 너희 조직에 미친개라는 놈이 있어? 만약, 있다면 내일까지 무조건 내 앞에 데리고 와.” 



하지만 대파에는 그런 별명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한동구는 계약서를 보았다. 


[이 세계에서 발을 뗄 때까지 ‘대파’는 쓰래빠를 모신다.] 



“하아‥.” 



그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만약, 싸인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목숨은 여기까지이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의 목숨도 장담 할 수가 없다. 그는 손을 무겁게 들어올리며 엄지손가락의 살을 이빨로 세게 깨물었다. 

통증과 함께 손가락에서 새빨간 핏방울이 새어나왔다. 그는 계약서에 자신의 피로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곧 그의 혈서가 종이 위에 찍혔고 개소리가 주워든 계약서에는 빨간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yas] 


참으로 우스운 철자였지만 더 웃긴 것은 개소리도 그것이 틀린 철자인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결과는 쓰래빠의 승리였고 그들은 또 하나의 조직을 자신들에게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이트 밖. 



“이 자식, 언제 2층으로 갔었냐? 솔직히 말해봐. 너 거기에 숨으려고 갔었는데 우연찮게 대파랑 부딪힌 거지? 그치?” 


“아니야.” 


“나도 태기의 생각에 동감이다.” 


“진짜 아니야.” 



빙 돌리며 유인을 칭찬하는 태기와 민규의 앞으로 개소리와 메뚜기가 걸어가고 있다. 

메뚜기의 옷에서 풍기는 휘발유냄새가 과히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개소리는 꾹 참으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너 아까 나한테 실망했지? 나 원망했지? 괜찮으니까 사실대로 말해.” 


“아닙니다, 형님. 절대 실망도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쭈! 공갈치는 것 봐라. 야! 네 맘 다 알아. 솔직히 아까 죽을까봐 겁났지?” 


“전‥형님을 믿었기 때문에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 



개소리는 입을 닫았다. 자신을 믿었다는 부하. 그녀가 마음을 또 한번 다지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개소리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번져난다. 앞으로 더욱더 늘어만 가는 부하들에게 과연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리고 내 부하는 내가 지킨다. 라고 조심스레 대답을 해보기도 했다. 

그날 밤도 역시 승리의 여신은 쓰래빠를 선택하였다. 




부산. 


다다다다. 탁탁탁. 


두 남자가 밤거리를 달린다. 한 사람은 쫓기고 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쫓아가고 있다. 

그들의 간격은 불과 3m밖에 되지 않는다. 

하루 전날, 시백은 자취를 감춘 왕파의 보스, 왕봉지의 행방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오늘밤, 그가 묵고 있던 여관으로 쳐들어가 

그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시백은 그저 싸인만 받고 가려했지만 어쩐 일인지 왕봉지가 기겁을 하며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닌가! 

사실상 싸인을 받지 않아도 보스가 없는 왕파는 이미 쓰래빠의 손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시백은 계약서에 왕봉지의 싸인을 

받아야만 마음이 놓였기에 끝까지 그를 쫓아갔던 것이다. 시백은 줄행랑을 치는 왕봉지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쳤다. 



“이 자식아! 싸인만 하라니까!! 그게 뭐가 어렵노?!!” 


“쫓아오지 마!! 오지 말라고!!” 



왕봉지는 조직을 포기한 자신을 쓰래빠가 왜 쫓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죽어라 도망만 쳤다. 

강물 위 다리를 건너던 왕봉지는 시백을 완벽히 따돌리자는 생각에 다리 위로 올라갔다. 족히 10m가 넘는 다리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신이 다 아찔해져왔다. 하지만 시백이 가까워지자 그는 망설일 여지도 없이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씨, 씨바!” 



쑤웅. 첨벙!!! 

끝내 강물로 뛰어내리는 그였다. 그에 시백은 황당했지만 헤엄쳐 가는 왕봉지를 보자 왠지 모를 승부욕에 불타올랐다. 

싸인을 받지 못하면 자신이 진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시백 또한 다리 위에서 뛰어내려 강물에 몸을 맡겼다. 

수심은 깊었지만 바다에서도 거뜬히 수영을 해내는 그로써는 전혀 무리될 게 없었다. 시백은 헤엄을 치며 왕봉지를 쫓았다. 



‘으악, 미치고 환장하긋네. 점마 와 저리 끈질기노?’ 


‘쳇, 내가 놓칠 줄 알고?’ 



두 사람은 쫓고 쫓기는 입장이 되어 열심히 팔과 다리를 움직였다. 이윽고 젖은 옷으로 뭍으로 나온 그들은 

잠시잠깐의 휴식도 없이 달리는 것을 계속하였다. 추위는 극에 달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나 쫓기는 왕봉지로써는 

추위를 견디는 방법뿐이었다. 밤은 깊어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지하도가 보였다. 왕봉지는 저 곳에서 따돌리자는 생각으로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5초 간격으로 시백도 첫 계단을 밟았다. 


타다다닥! 


그들의 뜀박질 소리가 벽에 부딪혀 지하도를 울린다. 왕봉지가 지하철역에 도착했을 때는 운이 좋게도 막차가 잠시 정차 중이었다. 

그는 얼른 지하철 안으로 들어갔고 뒤따라 온 시백 또한 무임승차를 간행했다. 막차라서 그런지 탑승한 사람들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시백이 탄 것을 확인한 왕봉지는 다음 칸으로 옮긴 후 열린 문을 통해 지하철에서 다시 나와 버렸다. 

그 모습을 시백은 얼핏 쳐다본 창문으로 알 수가 있었다. 지하철이 서서히 출발하려 한다. 

시백은 황급히 지하철에서 내려 왕봉지를 쫓아갔다. 



“으아, 찰거머리 같은 자식!” 



따돌리는 것에 실패한 왕봉지는 머리를 쥐어뜯다 시피하며 지하도에서 빠져나왔다. 



“야! 싸인만 해달라니까!! 개새끼, 싸인 없나?!” 



시백은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며 왕봉지가 지나간 길을 그대로 달려 나갔다. 이제 두 사람의 얼굴과 몸은 땀으로 범벅되었다. 

차가운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에서 열이 났다. 그리고 지쳐만 간다. 결국 지친 왕봉지가 선택한 것은 감옥이었다. 

그만큼 시백의 손에는 잡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는 모른다. 다만, 며칠 전 자신의 부하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시백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을 뿐이다. 왕봉지의 눈앞에 드디어 파출소가 나타났다. 



“후우, 살았다.” 



그의 생각대로 경찰들은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왕봉지는 신에게 감사하며 파출소로 달려갔다. 

그것을 본 시백은 설마라는 생각으로 그를 계속 뒤쫓았고, 그 설마는 곧 사실이 되고야 말았다. 파출소로 들어가 버리는 왕봉지. 


투욱. 시백은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에서 계약서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계약서는 강물에 젖어있었다. 



“미친 새끼, 비겁하게 짭새한테 꼬바르다니.” 



시백은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줄 모르며 땅에 찰싹 붙어있는 계약서를 마구 밟아대었다. 

흰 종이는 그의 무차별한 공격에 힘없이 찢어져나갔다. 시백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사무실로 돌아와 계약서에 자신이 직접 싸인을 했다. 왕파의 왕봉지를 대신해서 말이다. 



[이 세계에서 발을 뗄 때까지 ‘왕파’는 쓰래빠를 모신다. -yess-] 



“후후후, 내가 이겼다.” 



시백은 계약서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서울. 


높아요 빌딩. 


여기는 개소리가 아지트 다음으로 오래있는 빌딩. 이름만큼이나 꽤 높은 건물이다. 

울산에서 방금 막 이곳에 도착한 우혁이 입구로 들어섰다. 그의 왼쪽 귀에 꽂힌 은색 피어싱이 차가운 바람에 얼어있다 

빌딩 안으로 들어오자 금세 녹아버린다. 한편, 대여섯 명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지금 막 닫히기 일보직전이다. 



“어엇? 잠깐만!” 



우혁은 허둥지둥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아슬아슬하게 엘리베이터에 올라 탄 그는 한 시름 놓으며 자신이 가려던 층을 누르기 위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19층에는 이미 불이 들어온 상태였다. 그리고 불이 들어온 버튼은 19층 하나뿐이다. 

그렇다는 것은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19층으로 간다는 뜻이 된다. 19층에는 개소리가 있다. 

우혁은 고개를 뒤로 하여 사람들을 보았다.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은 4명의 남자들과 밝은 색계열의 양복을 입은 한사람. 

그는 우혁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구제파의 보스, 소이켠. 


그는 도대체 개소리를 왜 만나러 가는 것일까? 사람이 적은 걸로 봐선 싸움을 걸기 위한 것으로는 보이지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어딘가에서 그의 명령을 기다린 체 숨어있는 부하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에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10층에 다다라있었다. 



‘어디 찔러나 볼까?’ 



우혁은 소이켠의 속셈을 알기 위해 한번 건드려 보기로 했다. 일단 눈치를 살폈다. 엘리베이터는 이제 15층에 이르렀다. 

‘15’라는 숫자가 ‘16’으로 바뀌는 순간 우혁은 빠르게 팔꿈치를 뒤로 뻗었다. 

눈 깜짝 할 새에 그의 팔꿈치는 소이켠의 명치를 찌를 것이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2부] 7. 






터억! 아주 완벽하게 막아내었다. 소이켠은 우혁의 재빠른 동작을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다. 

19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말로 하시죠?” 



우혁이 무안함에 슬며시 팔을 내린다. 그리고는 뒤통수를 긁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하하, 요거 안 먹히네.” 



소이켠이 웃음을 띠며 부하들과 함께 복도에 발을 디뎠다. 우혁이 모퉁이를 돌기 전 걸음을 멈추어 선다. 

그에 소이켠도 멈추었고 뒤돌아 자신을 보는 우혁과 정면을 마주했다. 



“여긴 무슨 볼일로 온 거죠?” 



소이켠의 흰 탈색머리와 우혁의 회색머리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쪽 보스한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온 겁니다.” 


“아‥그렇구나. 그럼 가죠?” 



빈정대며 모퉁이를 도는 우혁이다. 그들은 개소리가 있는 사무실 앞에 섰다. 문을 지키고 선 쓰래빠의 조직원 2명이 우혁을 보자 

고개를 깊게 숙이며 인사를 했다. 노크를 한 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연다. 



“형님, 나 왔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친숙한 말투에 개소리는 고개를 들어보았다. 방글 웃는 얼굴로 한쪽 손을 들어 보이는 우혁이 있다. 



“엇! 너 언제 왔냐? 자식, 그 얼굴은 여전한데?” 



개소리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의자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내 얼굴이 어때서?” 


“쪼개는 표정이 여전하다고. 하하.” 


“뭐? 쳇. 형님, 손님 왔어.” 



우혁이 입술을 내밀며 문에서 비켜서자 곧 건장한 체구의 남자들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개소리는 예정에도 없던 손님에 의아했다. 

우혁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소파에 누워 잠에 빠져있는 유인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모르고 자는 모습은 성인이 되어도 변함이 없다. 

우혁이 웃음을 참으며 유인의 곁으로 다가간다. 



“오랜만입니다. 우리 구면이죠?” 



어느새 소이켠은 개소리의 앞에 서 있었다. 공손히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그이다. 개소리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소이켠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이 무안해져왔다. 



“이우혁, 네가 데리고 온 거냐?” 



개소리의 물음에 유인의 머리칼을 잡아당기려던 손을 정지해버리는 우혁이었다. 



“응? 아니야. 건물 안에서 만났어.” 



다시 소이켠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소이켠의 손은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용건이나 말해요. 구제파가, 그것도 우두머리가 직접 이곳까지 행차하시다니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소이켠은 결국 손을 거두어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의자에 앉는 개소리다. 

그녀의 눈빛은 그를 금방이라도 삼킬 것처럼 깊고 강렬했다. 



“거래를 하려고 왔습니다.” 


“거래?” 


“당신의 조직과 동맹을 맺고 싶습니다.” 


“‥‥.” 



동맹. 조금은 말이 안돼는 제안이었다. 이 시대의 모든 조직을 없애려는 그녀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역시나 같잖은 듯 개소리가 웃어 보인다. 



“동맹? 후후. 그냥 가만히 계시면 제가 알아서 밟으러 갔을 텐데. 성질도 급하시군요.” 


“이이‥.” 



자신들의 보스를 무시하는 발언에 남자들이 눈을 부라렸다. 개소리는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우혁이 자고 있는 유인의 코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 손을 쳐내며 눈을 뜨는 유인이다. 그는 빨갛게 변한 콧등을 어루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흐릿한 시야로 우혁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보인다. 우혁은 재간둥이 같은 모습으로 씨익- 웃고 있었다. 



“언제 왔어?” 



눈을 스윽스윽 비비며 붙어있는 잠을 떼어내는 유인. 그가 묻자 소파의 손잡이부분에 걸터앉으며 우혁이 대답했다. 



“넌 언제부터 잤는데?” 



유인이 벽시계를 올려다본다. 



“1시간 전?” 


“난 59분 전에 왔어.” 



유인이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얼굴로 우혁을 힐끔 쳐다보았다. 개소리는 희웅이 팩스로 보내온 계획서를 검토 중이었다. 

인천 공항 주변에 카지노가 딸린 1만 5,000평 규모의 큰 호텔을 세운다는 총 57장의 계획안이다. 

그녀는 앞에 세워둔 소이켠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우리 구제파도 당신의 쓰래빠도 강호파를 이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소이켠은 개소리의 태도에 발끈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계속 펼쳐 나갔다. 강호파의 이야기에 개소리가 계획안에서 눈을 떼었다. 



“강호파?” 


“강호파를 가질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리죠. 저희와 힘을 합친다면 강호파도 큰 무리 없이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왜죠? 당신이 절 도와줄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소이켠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체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주었다. 



“네. 당신 말대로 이유도 없이 그런 짓을 할리는 없죠.” 


“그럼 이유가 있다는 건가요?” 


“전 당신과 싸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훗, 왜죠?” 


“당신이 연개소문님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전 연개소문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도 살아생전 욕심이 참 많으셨습니다. 

당신처럼 전국제패가 꿈이셨죠. 전국제패. 당시 어리기만 했던 저로서는 참으로 이상적인 단어였습니다. 

전 연개소문님이 꿈을 이루시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꿈은 결국 꿈으로 끝나버리며 연개소문님께선 세상과 

작별하셨습니다. ‥‥전‥그분의 딸인 연개소리님께서 부디 그 꿈을 대신 이루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그분도 무척이나 기뻐하시겠지요.”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소이켠은 티끌 하나 없는 눈으로 개소리를 응시하며 말을 했다. 개소리는 그의 눈빛 속에서, 

그의 말투 속에서 진실을 느꼈다. 이 사람이라면, 믿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 말‥후회하시지 않을 자신 있나요?” 


“‥‥.” 


“동맹 맺자던 말. 그 말말이예요.”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던 소이켠이 드디어 미소를 짓는다. 



“결심이 선건 이미 3년 전입니다.” 


“‥좋아요. 쓰래빠와 구제파, 동맹 맺도록 합시다.” 



개소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악수를 청하였다. 곧 소이켠의 손과 그녀의 손이 포개어진다. 

이로써 두 거물급 조직 간의 동맹이 성립된 것이다. 



그날 밤. 개소리네 집, 정원. 


개소리, 유인, 우혁. 세 사람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간단히 회포를 풀고 있다. 테이블 옆에는 통속의 장작이 불길에 

활활 타오르고 있는 중이다. 우혁이 와인 병을 들고서 두 사람의 잔에 와인을 한가득 따라준다. 



“야. 누가 와인을 이렇게 따르냐?” 


“나참. 형님은 언제까지 세상의 틀에 얽매여 있을 거야? 어차피 또 마실 거 미리 많이 따라두면 좋잖아. 안 그래? 유인아.” 



유인은 와인을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그 많던 술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다. 빈와인 잔을 테이블에 놓던 그가 입술을 닦는다. 



“봐! 이런 녀석도 있는데.” 



우혁의 말에 할말을 잃은 개소리였다. 그녀의 부하 2명이 대문 앞을 지키고 서 있다. 우혁이 유인의 잔에 와인을 또 한번 따르며 

개소리에게 물었다. 



“형님, 신이한테 연락은 왔었어?” 



그의 반갑지 않은 질문에 개소리는 와인 잔을 입술에 갖다대었다. 썰렁한 분위기에 우혁이 유인을 보았다. 

눈빛으로 자신의 잘못을 묻는 그이다. 



“안 왔데.” 



아무렇지 않게 유인이 단호히 대답을 했다. 다시 개소리에게로 고개를 돌린 우혁은 그녀의 표정에서 쓸쓸함을 느꼈다. 

한번 찾아가볼 수도 있을 텐데 그녀는 신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잊었나싶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내가 한번 연락해볼까‥?” 



우혁이 개소리를 생각하는 마음에 넌지시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우혁의 잔에 술을 따를 뿐이다. 



“됐어. 그자식도 생각이 있다면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곧 강호파로 쳐들어 갈 거라며? 그럼 신이랑도 싸우게 될 텐데?” 


“과연‥그럴까?” 



뜻 모를 대답이다. 하지만 우혁은 더 이상 묻질 않았다. 뜻을 모르겠지만‥알 것 같기도 했다. 

이게 바로 믿음이라는 것일까? 우혁은 신이에 대한 개소리의 믿음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곧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도‥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펑!! 



“으악! 야, 신유인! 이게 무슨 짓이야?!!” 



잠시 우혁이 딴 생각을 하고 있으니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유인이 와인을 불속에 부어버리는 바람에 불길이 커지고 만 것이다. 

깜짝 놀란 개소리가 뒤로 나자빠지며 유인에게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유인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냥 갑자기 궁금해서.” 


“또 뭐가!!” 


“불이 술에 잘 붙는지 갑자기 보고 싶었어. 근데, 진짜 멋있다. 그치?” 


“하아‥.” 



그의 엉뚱함에 또 두손 두발을 모두 들고 마는 개소리였다. 그 광경을 우혁이 그저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다. 

그날 밤. 약간의 소란은 있었지만 오늘도 역시 평화롭게 지나가는 구나. 하고 우혁은 생각했다. 




이틀 후. 여기는 팔팔 나이트. 



쓰래빠가 소유하고 있는 유흥업소 중 세 번째로 큰 곳이다. 새벽1시. 어제완 달리 손님이 적은 것이 아마도 월요일이기 때문인 듯 하다. 

2층 테이블 한곳에서는 남자 2명이 스테이지를 내려다보며 사람구경을 하고 있는 중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구경이었다. 



“오-. 169, 24, 50. 얼굴은 B플러스에 가슴은 85A.” 


“흠. 160, 28, 53. 얼굴은 C에 가슴은 80C. 쯧쯧.” 



우혁과 태기가 여자들을 보며 나름대로 평가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을 개소리가 한심하게 쳐다본다. 

하지만 머릿속이 호기심천국이었던 유인은 이번 역시 의문을 터놓는다. 



“앞에 숫자는 뭐야?” 



그에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을 했다. 비교 할 수도 없는 속도에 공동메달감이다. 



“키, 허리, 몸무게!” 



시작과 끝이 같았다는 걸 그들도 느꼈는지 서로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얼~! 뭔가 통했는데?” 



그 모습 역시나 한심하기만 했던 개소리다. 그녀가 1층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민규도 아래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왠지 조용한데요?” 


“응.” 



클럽 안은 음악소리로 충분히 시끄러웠지만 그들에겐 조용하게만 느껴졌다. 꼭 무슨 일이라도 꽝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개소리는 한숨을 얕게 내쉬며 불안한 생각을 떨쳐내었다. 그리고는 다른 생각을 집어넣기 위해 그리 궁금하지도 않았던 사실을 

남자들에게 물어보았다. 



“너희들은 왜 애인 안 만드냐?” 


“나?” 



우혁이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너희 넷 다!” 



태기를 제외한 세 사람의 시선이 개소리에게 향해졌다. 제일 먼저 우혁이 나름대로의 이유를 말해주었다. 



“난 한사람한테 얽매이는 게 싫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자유롭고 싶어. 난 나니까!” 



무슨 말인지는 대충 알아들었지만 역시나 이해가 안돼는 녀석이라고 개소리는 생각했다. 다음은 민규가 대답을 했다. 



“전 아직 인연을 못 만났습니다.” 



감성적인 그였다. 인연이라‥. 개소리가 피식 웃어 보인다. 



“유인이 넌?” 



우혁이 묻자 유인이 쏟아지는 졸음을 견뎌내며 입을 열었다. 



“난 내 이상형을 못 만났어.” 


“이상형? 네 이상형이 뭔데?” 



계속해서 우혁이 물었다. 



“돈 많이 벌어오는 여자.” 


“에엥? 그게 다냐?” 


“아니. 착한 여자. 그럼 착해서 벌어온 돈 다 나 줄 거 아니야.” 



개소리는 세 사람 모두 결혼을 늦게 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태기를 보았다. 

그는 질문을 회피라도 하는 듯 다른 곳만 보고 있었다. 태기의 이유가 개소리는 가장 궁금했다. 



“야! 변태기!” 


“네‥네? 왜요?” 



확실히 질문을 피하고 있었다. 



“넌 왜 여자친구 안 사귀냐?” 



모두의 시선이 태기에게 주목되었다. 대답을 꼭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저도‥아직 이상형을 못 만나서요.” 


“이상형이 어떤 사람인데?” 



태기가 테이블로 떨어뜨렸던 시선을 개소리에게로 옮겼다. 그녀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태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이상형은‥ 

강하지도 않으면서 강한 척 하고, 눈물은 안 흘릴 것 같은데 보기보다 잘 울고, 성격은 차가운 것 같은데 따뜻하고, 

또 항상 불안해보여서 곁에 두고 지켜주고 싶은‥그런 여자가 제 이상형이예요.” 



그는 이야기 도중 한시도 개소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대답이 끝나자 모두들 야유를 퍼부었다. 



“그게 뭐냐? 그러니까 태기 넌 애인이 없는 거야.” 


“형, 그냥 내가 형애인 해줄까? 한달정도는 해줄 수 있어.” 



특히나 개소리와 우혁이 가장 많이 비웃어대었다. 그에 가만히 듣고만 있을 태기가 아니었다. 



“야야, 너랑 사귈 바에 차라리 아까 그 C등급이랑 사귀는 게 낫지! 내가 미쳤냐? 네놈이랑 사귀게!” 



한편, 그런 그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태기의 마음을 유일하게 헤아리고 있는 단 한사람.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민규가 애써 웃고 있는 태기를 마음속으로나마 위로해주었다. 


파지직. 팍! 쨍그랑!! 


그때 1층의 입구에 있던 조명이 불꽃을 튀기며 꺼져버렸다. 카운터 위의 유리가 깨지며 쓰래빠의 조직원 한명이 피투성이가 된 체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자신의 의지로 보이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발에 차여 날아온 것이었다. 



“무슨 일이야?!!” 



개소리가 벌떡 일어나며 아래를 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살폈다. 



“꺄아악!!” 

“아악!!” 



챙그랑!! 태앵!! 


곧 입구로 어떤 무리가 들이닥치며 들고 있던 무기로 테이블과 의자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클럽 안의 손님들은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고 

붙잡힌 웨이터들은 사내들에게 폭력을 당하였다. 강호파가 보낸 녀석들인 것 같았다. 몇몇 사내들은 2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강호파가 한발 먼저 공격을 해오다니‥. 개소리는 민규에게 애들을 불러들이라고 명령을 했다. 

그리고는 곧장 테이블 위의 술병을 들어 사내들에게 달려갔다. 민규는 메뚜기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른 이들은 개소리의 뒤를 이어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이 새끼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쳐들어오고 지랄이야?!!” 



뻐억!! 챙그랑!! 


테이블을 발판으로 삼아 뛰어오른 개소리가 오른쪽에 있던 사내의 목 울대부분을 차버리며 앞에 있던 사내의 머리로 병을 내려쳤다. 

그런 다음 남은 손잡이부분을 다른 녀석의 이마로 던져버린다. 그녀는 도미노처럼 하나하나 쓰러뜨려가며 1층으로 내려갔다. 



“대가리는 누가 왔어? 너희만 온건 아닐 거 아니야?!” 



뻐억! 


우혁이 한 사내를 벽 귀퉁이로 몰아넣으며 소리를 쳤다. 사내는 좀처럼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우혁의 샌드백이 될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놈의 동료들이 쇠파이프를 날리려했다. 



“너희들은 한쪽에 찌그러져 있어!” 



슈욱-! 날쌘 우혁이 몸을 재껴 쇠파이프를 피해내었다. 그리고는 눈앞에 펼쳐진 파이프를 빼앗으며 안으로 힘껏 밀어버린다. 

퍼억! 그에 자신의 파이프에 자신이 당해버리는 사내였고 우혁은 그 후로도 덤벼오는 강호파의 조무래기들을 큰맘 먹고 

직접 상대해주었다. 



퍽퍽! 빠악!! 



“진짜 귀찮아 죽겠네.” 



1층으로 내려온 유인이 스테이지 위에서 달갑지 않은 손님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리며 중얼거린다. 

그는 싸울 마음이 없을 때의 싸움은 영 귀찮기만 했다. 오로지 푹신한 침대생각 뿐이다. 유인은 잠이나 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뒤에서 한 녀석이 스테이지 위로 올라오기 위해 한쪽 발을 테이블에 걸쳤다. 


퍼억! 그런 그의 이마를 발로 밀어버리는 유인이었다. 그 바람에 남자는 뒤로 꽈당 넘어져버리고 말았다. 



퍼버버벅!! 퍽퍽!! 


태기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왠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물론, 지금도 좋지 못한 상황이지만, 

그의 예감은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이었다. 태기는 강한 힘으로 여의봉을 휘두르며 놈들의 각목을 부러뜨렸다. 

그리고는 개소리가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였다. 



“제발. 제발 좀 꺼져라, 이 새끼들아!!” 



휘리리릭- 타악! 타악! 

적들은 하나같이 쓰러지면 다시 일어섰고 완전 뻗었다 싶으면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놈들이 나타났다. 

그만큼 쓰래빠는 강호파에게 수적으로 상당히 밀리고 있었다. 이 곳에 배치된 인원은 20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50명이 훨씬 넘는 강호파가 쳐들어온 것이다. 부상을 입어 일어나지 못하는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는 

개소리, 민규, 태기, 우혁, 유인. 이 5명뿐이다. 반면 강호파는 30명이 남아있다. 어쩌면 나이트 밖에 강호파가 더 있을 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이들을 이끌고 온 우두머리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쓰래빠는 오로지 메뚜기가 일초라도 빨리 부하들을 데리고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젠장. 사아칸 이 자식을‥!” 



뻐억!! 개소리는 사아칸에 대한 원망을 주먹에 모두 담아 상대에게 날렸다. 



“으윽!” 



이마를 정통으로 맞아 일직선에 가깝게 뒤로 쓰러져버리는 남자다. 그 모습을 태기가 아슬아슬하게 지켜보고 있다. 

파악! 그때 갑자기 등 뒤에 나타난 민규가 태기에게 소리쳤다. 그의 발아래에는 강호파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너 지금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어?” 



퍽! 그가 옆에서 공격을 해오던 사내의 복부에 킥을 날렸다. 저만치 떨어져나가는 적이다. 



“죽고 싶으면 아예 바닥에 누워있던가!” 



민규가 방향을 돌려 보이는 적을 있는 대로 공격했다. 태기는 친구의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숨을 짧게 내쉬었다. 



“이야아!!” 



뿌드득! 


나이트 내의 물품으로 보이는 칼을 들고서 태기의 가슴을 노려오는 상대를 막아내며 손목을 비틀어 꺾어버렸다. 

그에 고통스러워하며 칼을 떨어뜨리는 상대였고 태기가 마무리로 이마를 받아주었다. 빠아악! 쿵! 

상대는 결국 충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게 어디 전교 꼴찌한테 까불고 있어?” 



자신의 이마를 슥슥 비비며 태기가 중얼거렸다. 



“모두 동작 그만!!!” 



그때 한 남자의 우렁찬 고함소리가 나이트에 울려 퍼졌다. 태기는 소리가 난 곳으로 돌아보았다. 

개소리도 동작을 멈추고 소리가 들린 입구로 시선을 향했다. 태기의 눈 속으로 개소리가 들어오고, 곧이어 목소리의 주인공이 

따라 들어왔다. 나이트 내 아군과 적군의 눈에 비친 사람은 다름 아닌 진형우였다. 강호파의 진형우. 사아칸의 오른팔이다. 


우혁의 의문이 풀렸다. 이들을 이끌고 온 우두머리는 바로 진형우였던 것이다. 

잠시 싸움이 중단될 것 같자 유인이 가까운 의자에 앉는다. 



“진형우. 네놈이냐?” 



개소리가 이를 악물며 진형우에게 물었다. 그는 여전히 밝은 얼굴에 고운 피부였다. 하지만 3년 전과는 왠지 분위기가 달랐다. 



“아니, 구지 확실하게 대답을 하자면 제가 아니라, 저희 보스이죠. 전 명령을 받고 이곳으로 온 것 뿐이예요.” 


“찾아오지 않아도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갔을 텐데.” 


“그래서 저희가 미리 온 것이기도 하고요. 일부러 쓰래빠가 힘든 걸음하지 않도록 하기위한 저희 보스의 배려이기도 하죠.” 



개소리는 진형우의 말 하나하나가 얄밉게만 보였다. 그것은 3년 전 신이를 데려간 장본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오늘‥내가 직접 네 무덤을 만들어 주지.” 



그렇게 말하는 개소리를 태기가 보고 있었다. 과연 그녀가 지금 가장 하고 싶어 하는 말은 무엇일까? 

태기는 몰랐지만 개소리가 진형우에게 하고 싶은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신이의 안부. 그것이 가장 묻고 싶었다. 



“힘들게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전 지금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 


“뭐야?” 


“제 부하 녀석들을 데리러 온 것 뿐이예요. 실례가 참 많았네요. 아무쪼록 화 푸세요.” 



진형우가 눈빛을 보내자 강호파가 들고 있던 무기를 버리며 그에게로 걸어갔다. 쓰러져 몸을 가누지 못하는 동료들은 

그냥 둔 채 말이다. 곧바로 진형우가 눈빛을 한번 더 보내었다. 그 눈빛은 태기만이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두 번째 눈빛의 의미와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왠지 신경에 쓰였다. 



“그럼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너무 늦었지만 좋은 밤 되세요.” 



진형우가 돌아섰다. 개소리는 그의 행동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아칸보다 너부터 손봐주지!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후훗. 그러기 전에 뒤부터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건 경고가 아니라, 충고예요. 그러니까‥ 

잘 새겨들어.” 



개소리는 그의 뒷모습을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녀석의 자신감을 뭉개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한 곳에서 태기가 불안하게 보고 있었다. 진형우의 말도 신경에 쓰였다. 뒤를 조심하라. 


뒤‥. 아차하는 마음에 개소리의 뒤를 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바닥에는 방금 전 자신이 쓰러뜨렸던 조무래기가 엎드린 채 

개소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손에는 칼을 쥔 체 말이다. 



‘기절한 줄 알았는데?’ 



그리고 떠올랐다. 진형우의 두 번째 눈빛이. 

그 눈빛은 개소리의 뒤에 쓰러져 있던 자신의 부하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개소리는 그것도 모른 체 진형우 때문에 

아랫입술만 깨물고 있다. 사내가 칼을 높이 들며 개소리의 머리를 향해 힘껏 내던졌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아챈 태기가 앞으로 달려 나가며 크게 소리쳤다. 



“안돼!! 형님-!!” 



파앗!!! 


개소리는 누군가에게 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화를 내려는 그 순간, 

푸욱!‥보았다. 



태기의 가슴에 꽂힌 칼 한 자루를‥. 



“태‥태기‥야‥.” 



쿵!! 



태기의 가슴에서 서서히 흘러나오는 피가 그의 흰 셔츠를 빨갛게 물들어나간다. 




“형!!” 









※전국 고교 일진협회※ 






♡[2부] 8. 





약간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그렇지만 태기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슴 속이 용암처럼 들끓는다. 뜨겁다. 

그녀를 밀기는 했는데 무사한지 그것이 의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가슴팍에 칼이 꽂힌 걸 보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파악! 



“윽!” 



가슴에 깊이 꽂혀있던 칼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뽑혀져나갔다. 그때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칼을 뽑은 장본인은 다름 아닌 개소리였다. 



“‥태기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치?‥괜찮지‥?” 



몹시 당황한 그녀는 태기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혈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저 그녀가 하고 있는 것은 

피가 새어나오는 상처를 손으로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직도 상황정리가 되지 않은 개소리였다. 

칼을 던진 강호파의 조무래기는 민규의 명령을 받은 쓰래빠로부터 클럽 창고로 끌려갔다. 이제 그의 목숨도 보장할 수가 없게 되었다. 


우혁이 급히 가져온 수건으로 지혈부터 하였다. 하지만 피는 주워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왼쪽가슴에 꽂혔던 칼이 장기를 건드렸냐는 아직 미지수였다. 



“혀‥형님‥커헉!” 



호흡이 곤란해진 태기이다. 태기의 눈에 들어온 개소리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 자신 때문이었다. 



“병원‥병원으로 가야 돼‥, 어서‥어서 병원으로 옮겨!!” 



마치 도움을 요청하듯 개소리가 울부짖는다. 정신을 차린 민규가 황급히 태기를 등에 업었다. 

그러자 그의 등이 친구의 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개소리와 우혁이 그 뒤를 잇는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부하들도 그 충격에 

간신히 일어나 입구로 향했다. 태기가 칼에 맞던 순간, 유인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충격에 휩싸여 눈을 동그랗게 뜬 체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눈을 단 한번도 깜빡이지 않았다. 태기의 가슴에 꽂힌 칼과 바닥을 적신 피. 그것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태기‥형‥.” 



타다닥-. 유인이 뒤늦게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간다. 태기와 함께 봉고에 탄 인원은 모두 4명이었다. 

개소리, 민규, 우혁, 유인. 

모두가 차에 타자 민규가 급히 운전대를 잡았다. 룸미러에 비친 태기는 뒷좌석에 누운 체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태기에겐 1분 1초가 급했기에 민규는 빠른 속력으로 차를 몰았다. 좌석 두개가 마주보고 있는 운전석 뒤. 

한곳엔 태기가 누워있고 다른 한곳엔 개소리와 우혁, 유인이 앉아있다. 아니 개소리는 앉지 않았다. 



“태기야, 조금만 참아.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으니까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그녀의 두 눈에서 걱정과 죄책감이 섞인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을 태기는 보고 있었다. 

힘겹게 손을 들어 눈물을 훔쳐 주는 태기이다. 



“죄송합니다‥형님.” 


“뭐가? 네가 뭐가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다‥내 탓이야.”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던 태기의 손을 잡으며 개소리가 말했다. 태기의 손이 차갑다. 



“하아‥갑자기 떠올랐는데.” 


“흑, 뭐가?” 



무슨 중요한 말이라도 할 것만 같았다. 개소리는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바짝 세웠다. 



“개‥밥을 안주고 왔네요.” 



하지만‥그리 중요한 말은 아니었다. 



“괜찮아. 한 끼 굶는다고 설마 말라죽기야하겠어‥?” 


“두 낀데‥.” 


“이 자식아, 그럼 살아서 네가 주면 되잖아. 난 개밥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몰라‥엉엉.” 



우혁과 유인이 느끼기엔 전혀 진지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민규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운전을 하던 그의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자 이내 손등으로 스윽 닦아낸다. 



“형님‥근데 아까 저 멋졌지요‥? 씨바, 한 컷이라도 영상으로 담았어야했는데.” 


“흑‥몰라. 네가 미는 바람에 못 봤어. 흑, 개새끼야, 근데 왜 욕을 하고 지랄이야?” 


“하아‥형님한테 욕한 게 아니예요. 제가 칼을 맞지 않고서야‥어떻게‥.” 



조금 상황과는 맞지 않는 말이었다. 태기도 뒤늦게야 그를 깨달았다. 점점 더 호흡하기가 힘들어진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던 태기였다. 특히나 개소리에겐 할말이 산더미였다. 



“형님‥혹시 그 영화 보셨어요‥?” 


“무슨 영화‥?” 


“‥외로운 양아치 하나가 있었는데‥우연히 조직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그놈은 그곳에서 좋은 보스와 멋진 친구를 사겼죠. 

그러던 어느 날 보스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사진 한 장으로 보게 됐어요. 사진속의 여자는 보스의 딸이었어요. 참 예쁜 여자였죠. 

그 후 그놈은 사진속의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몇 년 후 보스가 죽자 그 자리에 보스의 딸이 앉게 되었어요. 

하지만 어린 여자애라는 이유로 조직원들이 하나, 둘 떠나버리고 말았어요. 여자는 무척이나 슬퍼했죠. 

놈은 그런 그녀를 보고 다짐했어요. ‥난‥절대 곁을 떠나지 않겠다. 꼭‥이 여자를 지키겠다‥라고요.” 



태기가 어렵사리 말을 마쳤다. 개소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에서 몇 가지 사실을 눈치 챌 수가 있었다. 

놈은 태기이고, 보스의 딸은 개소리라는 것을‥. 



“흐윽‥그런 영화는 못 봤는데‥.” 



당연했다. 처음부터 그런 줄거리의 영화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태기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흘렀다. 



“그래요‥? 나중에 꼭 보세요‥.” 


“결말이 뭔데? 결국엔 둘이 이루어지냐?” 


“‥아니요. 남자가 죽어요.” 



끼이익-!!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는 민규였다. 태기의 말이 그의 신경을 자극시켰기 때문이다. 



“이 새끼야, 네가 왜 죽어?!! 헛소리 하지 말고 무조건 살아!! 뒤지면‥뒤져도 네 무덤 같은 건 만들어 주지도 않을 거야. 

그러니까, 무조건 살아.” 



핸들만을 응시한 체 민규가 말했다. 태기는 가만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잠시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다시 차를 출발시키는 민규였다. 

밤은 이미 깊을 대로 깊었기 때문에 이제 날이 밝기를 기다릴 일만 남았다. 



“‥민규 말 들었지? 너.” 


“형님. 저 안 죽어요. 나이가 몇인데 벌써 죽겠어요‥? 저자식이 오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을 묶고 있던 생명의 끈이 서서히 풀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우혁은 입을 꾹 다문 체 태기의 얼굴만 응시하고 있었다. 유인은 창밖을 보았다.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정말‥걱정 안 해도 돼지?” 


“네‥형님.” 


“정말이지?” 


“‥네.” 



병원까지 300m를 앞두고 신호가 걸렸다. 하지만 민규는 신호를 무시한 채 계속 달려 나갔다. 



“형님, 요구르트가 먹고 싶네요.” 


“흑, 요구르트? 알았어. 병원가면 하나, 아니 한줄 사줄 테니까 이제 말하지 마. 너 힘들잖아.” 


“하아. 형님한테‥이 말 꼭 해야 하는데‥.” 


“해.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 근데, 지금 말고 내일 해.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좋아해요.” 



창밖을 보고 있던 유인이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개소리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해버렸다. 결국엔 해버리고 말았다. 영원히 가슴속에 담아두려 했는데‥ 죽음을 눈앞에 두자 용기가 생겼던 것일까? 

이제 주워 담을 수도 없게 되었다. 



“나도 좋아해. 나도 너 엄청 아끼니까, 그러니까.” 


“그게 아니예요.‥살아서 끝까지 형님을 모시고 싶었는데. 진짜 죽고 싶지 않아요.” 



끝내 그의 눈에서 눈물을 보고야 말았다. 태기는 울고 있었다. 겁이 났다. 처음으로 공포라는 것을 느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두 번 다시 싸울 수 없다는 안타까움. 이젠 친구들과도 헤어져야 한다는 서글픔. 또 다시 찾아온 외로움. 

그리고 개소리를 볼 수 없게 된다는‥슬픔. 모든 감정이 그의 머리와 가슴을 얽매었다. 



“이 등신아, 죽기 싫으면 살면 되잖아. 누가 너더러 죽으래? 살 수 있어.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는 줄 아냐? 

마음 굳게 먹어. 귀신이 오면 무조건 개기고 있어. 여의봉으로 물리쳐버려. 나도 도와줄 테니까‥.” 


“형님‥커헉!” 


“제발 살아라.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난‥너 없으면 안돼.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다 누구 때문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너랑 민규가 내 곁에 있어줬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던 거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난 너희들 모두와 끝을 함께 하고 싶어. 그러니까‥태기야, 제발‥제발 살아줘‥.” 


“‥크흑‥형님. 저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그 말 들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흑. 무슨 말?” 


“‥그게‥큭. 아니예요‥아무것도.” 



끼익-. 


병원이다. 병원에 도착한 그들이 차에서 내렸다. 우혁이 태기를 등에 업었다. 태기의 얼굴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타다닥!! 벌컥!! 

빠르게 달려가 병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의사!! 의사 어디 있어?!!” 



민규가 급한 마음에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간호사 3명이 뛰어와 그들을 가까이에 있던 환자 운반카로 안내했다. 

태기를 침대에 눕히자 의사 한명이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어떻게 된 겁니까?” 



태기의 상태를 보더니 의사가 물었다. 



“씨발, 보면 몰라?! 칼에 찔렸으니까 수술을 하던지 어떻게 하던지 간에 무조건 살려내!” 



개소리가 답답한 나머지 흥분을 해버렸다. 곧 운반카를 끌고서 수술실로 향하는 의료진이다. 

모두들 수술실까지 태기를 따라갔다. 



“이젠 괜찮을 거야. 이젠 살 수 있어. 그러니까 아까 내가 했던 말 명심하고 마음 단단히 먹어. 알았지??” 



개소리의 얼굴은 근심과 함께 눈물로 젖어버렸다. 태기는 수술실로 들어갈 때까지 눈을 감지 않고 개소리를 보았다. 

그리고 민규도 눈에 담았다. 유인이‥우혁이‥. 다른 녀석들도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하고 그는 생각했다. 

다시 개소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형님‥태기야하고 한번만 불러주시겠어요‥? 그럼 굉장히 용기가 날 것 같은데‥.” 


“흑‥으흐흑.” 



개소리는 계속 흐느낄 뿐이다. 수술실 문이 활짝 열리고 태기를 실은 운반카가 안으로 들어간다. 

개소리와 나머지 사람들은 여기까지 밖에 갈 수가 없었다.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는 태기를 보며 개소리가 소리친다. 



“태기야!!” 



쿵! 이윽고 수술실 문이 닫혔다. 개소리는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만 같았다. 




“‥불러줬으니까. 반드시 살아라.” 




[수술 중]이라 적힌 수술실 팻말에 불이 들어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술실에 불이 들어온 지 4시간가량이 지났다. 

민규는 한쪽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며 수술실 문만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유인과 우혁은 벤치에 앉아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개소리가 요구르트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앉았다. 2시간 전에 병원 밖 편의점에서 사온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체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제발 태기를 데려가지 말라고. 

그 녀석은 매일 말썽만 부리기 때문에 데려가면 골치만 아플 거라고. 계속 기도했다. 



“형님,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될 거야.” 



어깨에 닿은 우혁의 손길에 눈을 떴다. 다 잘될 거야. 정말 모든 것이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개소리의 마음은 너무 무겁기만 했다. 태기가 저렇게 된 것이 모두 자기 탓인 것 같았다. 아니 자기 탓이었다. 

그것 하나 눈치 채지 못해 부하에게 빚을 지다니. 다시 그 시각으로 되돌아갔으면 했다. 그럼 태기가 다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난 태기형이 개소리를 좋아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유인이 혼잣말을 했다. 개소리는 그의 말을 들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끼잉-.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리며 의사 한명이 나왔다. 그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을 떨었다. 개소리는 의사를 응시했다. 



“우리 태기는 어떻게 됐죠?” 



그녀의 물음에 의사는 무거운 표정만 지으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곧 고개를 흔드는 의사이다. 


철컹. 개소리의 간이 내려앉는 순간이다.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만 같았다. 눈을 깜빡일 여력도 없었다. 

서서히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그럴 리가 없어.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이라고‥.” 



믿기지가 않았다. 몇 시간 전만해도 웃고 있었는데‥ 다시는 볼 수가 없다니.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나쁜 자식‥감히 내 명령을 어겨? 지가 뭔데, 내 명령을 어기는 거야?‥네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이젠 어떡하라고 그렇게 가버린 거야. 흐흑, 안돼. 못 보내‥난 절대 못 보내‥.” 



민규는 고갤 돌려 눈물을 훔쳐내었다. 소중한 친구 하나를 잃어버린 그였다. 이젠 찾을 수도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유인과 우혁은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 어떤 말도 개소리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 또한 그 어떤 말로도 위로 받을 수가 없었다. 



“저기, 환자분께서 수술 전에 형님이라는 분께 이 말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의사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말을 꺼내었다. 개소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의사가 또 한번 입을 연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꼭 꿈을 이루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밉더라도 무덤은 만들어 달라고도 하셨구요. 

‥마지막으로‥.” 


“‥마지막‥?” 


“예. 요구르트가 먹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손에 쥐고 있던 봉지가 떨어지며 요구르트들이 굴러 나왔다. 

요구르트를 본 의사는 짧은 숨을 토해내며 죄송하다는 말을 두 번 되풀이했다. 



“병신. 지 먹으라고 요구르트까지 사놨는데. 그렇게 뒈져버리면 먹을 수가 없잖아. 흑, 이 많은 걸 누가 먹으라고. 나쁜 놈‥.” 



털썩! 끝내 정신적인 충격에 못 이겨 쓰러지고 말았다. 



“형님!!” 






************** 






개소리가 쓰러진지 반나절이 지났다. 우혁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동료들을 불렀다. 

모두들 태기가 죽었다는 믿기지 않는 소식에 당황해했다. 그리고 쓰래빠의 제한된 인원만을 병원으로 불렀다. 

그래도 병원 안은 혼잡했다. 개소리의 옆을 지키고 있던 유인이 병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어디 가노?” 


“형, 누님은 괜찮아요?” 



친구들이 찾아왔다. 호두와 희웅, 그리고 시백.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다. 모두들 기운이 없는 모습이다. 



“개소리는 괜찮아. 난 좀 나갔다올게.” 



그들은 더 이상 묻지 않으며 유인이 나올 수 있도록 비켜서주었다. 유인은 많은 부하들 사이를 지나 병원 밖으로 나왔고 

차에 타기 전 전화를 걸었다. 이틀 전 우혁에게서 알아낸 신이의 번호로. 


뚜르르르-. 



“여보세요.” 



신호가 짧게 이어지더니 얼마 안돼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이였다. 



“나야. 유인이.” 


“‥어.” 



신이가 조금 놀란 듯 했다. 유인에게 전화가 올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지금 좀 만나. 중요한 얘기니까 꼭 나와.” 


“안돼‥.” 


“S고 운동장이야. 기다릴게.” 



철컥. 


조금은 일방적인 통화를 끝낸 유인이 차에 올라 key를 꽂았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2부] 9. 






잠시 후. 모교에 도착한 유인은 차를 교문 앞에 세운 뒤 운동장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 S고는 수업에 한창이다. 

아직 추워서인지 하나같이 창문을 굳게 잠그고 있었다. 유인은 철봉 아래로 걸어갔다. 자신의 키보다 높은 철봉이 딱 한개 있다. 

학창시절 많이 매달리던 철봉이었다. 철봉 위에 올라앉아 넓은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유인은 옛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 속에서 헤어 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리운 추억들이다. 몇 분이 지나자 한 사내가 교문을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분명히 신이였다. 그는 태기의 죽음을 알기라도 하듯 검은색 정장을 깔끔하기 차려 입은 모습이었다. 

유인이 철봉 위에서 뛰어내린다. 신이가 다가왔다. 그의 표정이 굳어있나 싶더니 이내 미소로 번졌다. 

신이도 막상 친구를 보니 반가웠던 것이다.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냐?” 



신이가 물었다. 바지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유인이 그의 앞에 섰다. 



“그냥‥그럭저럭.” 


“이야~! 안본 새 많이 멋있어졌는데?” 



유인의 옷을 툭툭 털어주며 신이가 말했다. 그 손을 유인이 쳐내버린다. 



“넌 좋겠다.” 


“‥무슨 소리야?” 


“라이벌이 하나 줄어들어서. 아‥이젠 상관없는 일인가?” 



신이는 유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말투가 시비조이기는 한데, 그 이유가 3년 전 배신은 아닌 듯 했다. 

신이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자 유인이 풀어서 말해주었다. 일종의 배려였다. 



“태기형‥알고 보니 개소리 좋아하더라? 근데‥죽어버렸어.” 


“뭐‥?” 



전자보다는 후자에 놀란 그였다. 태기형이 죽었다니. 그 말은 마치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와도 같았다. 



“어젯밤에 진형우가 애들을 데리고 쳐들어왔어.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신이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진형우는 그에게 비밀로 한 체 일을 거행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형우가 태기형을 죽였다는 것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신이는 그저 답답하기만 했다. 



“그 자식이 개소리를 죽이려 했어. 그리고 태기형이 그걸 막다가 죽어버린 거야.” 



신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감히 개소리를 죽이려 했다니. 

분명 형우 그도 자신이 개소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인데 말이다. 



“그래서‥개소리는?” 


“태기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곧장 쓰러졌어. 반나절이 지났는데도 아직 깨어나지 않아.‥너, 계속 그곳에 있을 거야?” 


“‥‥.” 


“조금 있음 두 조직에 큰 싸움이 있을 거야. 그때도 네가 적이라면 난 서슴없이 너한테 주먹을 날릴 거야.” 


“‥미안하지만, 난 아직 나올 수 없어.” 


“그래? 그럼 너랑 이렇게 단 둘이 만날 날도 이젠 없겠네. 그럼 나중에 싸움터에서 보자.” 



유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신이의 곁을 지나 교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신이가 불렀다. 



“신유인.” 


“아‥이건 선물인데? 개소리는 바보같이 아직도 널 믿고 있어. 언젠간 네가 돌아올 거라나?” 



오른팔을 살짝 들어 보인 후 교문 밖으로 나가는 유인이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신이는 많은 생각을 하였다. 

형우, 태기, 그리고 개소리‥. 유인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원망할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3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을 믿고 있을 줄이야. 감동과 함께 다행이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리고 걱정이 되었다. 

그냥 쓰러진 거라면 곧 깨어나겠지만, 아끼고 소중히 여기던 태기형의 죽음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신이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쓰래빠를 건드리다니.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는 그길로 곧장 차를 몰아 진형우가 있을 빌딩으로 갔다. 이유를 물어볼 참이었다. 

그리고 이유에 따라 한방 먹일 작정이기도 했다. 



끼이익-! 


고급승용차가 급히 멈춘 곳은 황제빌딩 앞이었다. 진형우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였다. 

신이는 부하들의 인사를 받으며 진형우의 사무실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그리고는 노크 한번 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어버렸다. 

때마침 진형우는 통화를 끝내고 담배 한대를 피려던 참이었다. 신이의 방문에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다. 



“네가 웬일이야? 먼저 날 다 찾아오고? 오늘 저녁에 너한테 가려고 했는데.” 


“너 어젯밤에 개소리 건드렸냐?” 


“‥어?” 



신이의 말에 얼어버린 진형우다. 많이 놀랐다. 끝까지 비밀로 남겨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들켜버릴 줄은 생각지 못했다. 



“솔직히 다 불어. 쓰래빠한테 갔었지? 보스가 시킨 거냐?” 



신이가 또 한번 물어보자 진형우는 자포자기라도 하듯 의자에 앉았다. 꺼내놓았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니. 큰형님이 시킨 거 아니야.” 



담배에 성냥불을 붙였다. 신이는 진형우의 태연함에 더 화가 났다. 



“그럼‥네 멋대로 결정짓고 한 짓이라는 말이냐?” 


“맞아. 어차피 우리한테 뭉개질 거 미리 손봐준 거야. 뭐, 별 효과는 없었지만.” 


“별 효과가 없다고? 쓰래빠의 왼팔이 죽었는데?” 


“어라? 죽었어? 실패한 줄 알았는데.” 



쾅!!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진형우의 태도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신이가 오른발로 힘껏 책상 위를 밟았다. 

그 반동에 진형우가 물고 있던 담배 끝의 재가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넌 그냥 개 한 마리가 뒤진 걸로 보이냐? 내가 좋게 생각하던 형이었어. 그런데 뭐? 죽었어? 실패한 줄로 알았는데? 

씨발, 넌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네가 그렇게 화낼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난 강호파고 너도 지금은 강호파야. 난 우리 조직에 해가 되는 인간을 죽였을 뿐이야. 

물론, 처음 목적은 그 자식이 아닌, 대가리였지만. 어쨌든 만족해. 그리고 큰형님도 좋아하실 거야.” 


“‥진형우. 잘 들어. 만약, 네 목적이 달성되었다면 넌 내 손에 죽었어. 

잊은 것 같아서 다시 한번 말해주는데, 그 여자는 절대 건들지 마.” 



책상에서 발을 내려놓으며 신이가 말했다. 그는 친구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일찍이 돌아섰다. 

이 곳에 조금이라도 더 있다간 폭발해버릴지도 모른다. 문으로 걸어가는 신이를 보며 진형우가 벌떡 일어섰다. 



“너무 불안해서 그랬어!! 네가 그 계집한테 가버릴 까봐, 어쩔 수없이 너랑 또 적이 돼버릴 까봐 너무 불안했어. 

그 계집이 살아있는 한 그 불안은 계속 될 것만 같았어. 그래서 죽이려고 했던 거야. 난 널 잃고 싶지 않아.” 


“‥그럼 날 따라와.” 



진형우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큰형님께 은혜를 갚을 때까지 조직을 나갈 수는 없어.” 


“개자식을 선택한다는 말이군.” 



진형우는 어쩔 수없음에 고개를 숙였다. 물론, 신이도 그의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친구의 사정까지 생각해줄 만큼 여유가 충분치는 못했다. 신이는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그날 밤, 개소리가 입원해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개소리가 있는 특실. 


환자복을 입은 개소리가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다. 가습기가 하얀 수증기를 내뿜으며 쓸쓸함을 한층 높이고 있다. 

그녀도 무슨 꿈을 꾸는지 좀처럼 눈을 뜨려하지 않는다. 



“하아-.” 

“푸후.” 



그런 그녀를 보며 남자들이 한숨을 내쉬고 있다. 



“형님은 배도 안 고픈가봐.” 


“의사가 뭐래요?” 



희웅이 우혁에게 물었다. 



“곧 깨어날 거래. 설마 태기형이 형님까지 데리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야! 니는 그런 말이 튀나오나?” 


“그래! 튀어나오니깐 말했지!” 


“임마!” 


“아‥나도 알아! 그리고 나도 충분히 슬퍼! 그렇다고 나까지 축 쳐져 있을 수는 없잖아. 

저 문만 열어도 사람들 눈물도 공기가 축축하고 분위기부터가 다른데. 여기서만큼은 억지로라도 웃고 싶어.” 



호두는 우혁의 말에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자신이 그때 있었더라면 과연 태기형이 죽었을까? 

그때 자신은 현아와 놀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밀려왔다. 



“유인이형이랑 시백이형은요?” 



희웅이 물었다. 



“유인이는 모르겠고 시백이는 민규형 도와주고 있어.” 



이번 역시 우혁이가 대답을 해주었다. 호두가 시계를 보았다. 병실을 지키고 있는 지도 벌써 3시간째다. 

슬슬 배가 고파온다. 호두는 친구들에게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때마침 허기가 졌기에 모두들 흔쾌히 승낙을 하였다. 



“뭐 먹을까? 난 병원 밥은 싫던데.” 


“me too.” 


“그냥 매점에 가서 컵라면이나 사먹어요.” 



달칵. 


모두가 병실에서 나와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는 것을 확인한 신이는 주위를 살피며 병실로 걸어갔다.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싶었다. 분명 자신을 미워하고 있을 이들도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문에 부착된 환자이름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 병실은 컴컴했다. 하지만 달빛이 침대를 비쳐주었기에 개소리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근심어린 얼굴로 잠을 자고 있는 그녀이다. 사진속의 그 밝은 얼굴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살며시 그녀의 볼을 만져본다. 그에 금방이라도 깰 것만 같은 개소리는 어쩐 일인지 뒤척임 한번 없었다. 


미안했다. 너무나도 죄스러웠다. 기쁘게 해줄 수없음에, 웃게 해줄 수없음에 안타깝기만 했다. 



“미안하다.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막았을 텐데‥.”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갤 들어 창밖을 보았다. 창에 걸친 달은 3년 전과 다름없이 노랗고 환하기만 하다. 

다시 개소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젠‥태기형 대신 내가 지켜줄게. 너도‥쓰래빠도‥.” 



밤하늘의 달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또 한사람, 



“‥내가 친구를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너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주겠어.” 



병실 문 틈새로 진형우가 보고 있었다. 







************* 






다음날. PM.8:00. 


아무도 없는 병실에서 한 여자가 침대에 누워 뒤척이고 있다. 그녀는 깊은 꿈에 빠져 팔을 허공 속에 내저었다. 

개소리는 태기를 보고 있었다. 이틀 사이에 그리운 사람이 되어버린 그를. 



“태기야, 너 태기 맞지?” 



개소리는 그를 불러보았지만 그는 대답은커녕 눈길조차도 주지 않았다. 오로지 낯선 이들과 격렬히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태기와 싸우고 있는 이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양복은 아니다. 검은 천으로 만들어진 옛 한복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마치 저승에서 온 사자들 같았다. 그 가운데에서 태기는 열심히 여의봉을 휘둘렀다. 

무엇 때문에 저토록 싸우고 있는 것일까? 죽어서까지 싸움을 하다니. 개소리는 그가 또 다치기라도 할까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윽고 마침내 남자들을 물리친 태기가 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그것은 요구르트 병이었다. 



“태기야‥?” 



그녀의 부름에 드디어 시선을 보내오는 그였다. 태기는 그녀를 보며 웃어주었다. 어느새 가까워진 태기이다. 



“형님, 여긴 어쩐 일이예요?” 


“왜? 내가 오면 안돼?” 


“하하.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형님은 아직 오시면 안돼요.” 



이내 개소리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꿈이지만‥아니 꿈이어서 가슴이 아팠다. 



“아까 그 사람들은 뭐야? 왜 싸운 거야?” 


“아‥그냥 저승사자 똘마니들인데요. 요구르트를 들고 가려니까 자꾸만 막잖아요. 

이승에서 가져온 물건은 반입할 수없다나 뭐라나. 그래서 짜증나서 손 좀 봐줬어요. 대가리들한테 걸리면 끝장이지만요. 하하.” 


“이놈아, 하지 말라는 걸 왜해? 거기 가서도 말 안 듣냐?” 


“에이~ 형님도 참. 어쨌든 요구르트는 잘 마실게요. 진짜 먹고 싶었거든요. 늙어서 요구르트 회사나 차리려고 했는데. 

다음으로 미뤄야겠네요. 형님, 저 그만 가봐야 돼요. 그리고 울지 말고 웃으세요. 웃어야지, 복이 온다잖아요.” 


“넌 그렇게 웃어댔는데도 복은커녕 이런 꼴만 당했잖아. 그딴 말 다 거짓말이야.” 


“무슨 그런 말씀을. 전 형님을 모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복 받은 거예요. 그리고 형님을 대신해서 죽었으니 이만큼 큰 복이 

어디 있겠어요? 앗뿔싸! 저승사자가 눈치 꼽았나봐요. 형님! 그럼 전 갑니다!! 잘 지내세요!!” 


“태기야! 안돼! 잠깐만!! 태기야!!!” 



타악!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태기가 아니라 어둠이었다. 눈물이 그녀의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태기는 웃고 있었다. 자신을 전혀 원망하지 않고 있었다. 



“흐흑‥흑‥.”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그냥 흐르는 대로 쏟아지는 대로 놔두고 싶었다. 창밖에 내리는 눈발처럼 펑펑 울고 싶었다. 

겨울은 그녀의 눈물과 함께 마지막 눈을 뿌리고 있었다. 


1시간째 계속된 울음. 

눈물이 바닥이 날대로 나버리자 개소리는 팔에 꽂힌 링겔을 뽑아버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병실에 딸려있던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한 뒤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것은 분노에 가득 찬 한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뺨을 두 손바닥으로 탁 친후 화장실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은 그리움을 넘어선 광기였고 분노를 지나친 복수였다. 

그리고 단 한사람만이 눈앞에 나타났다. 

진형우. 

개소리는 이를 악물었다. 



“죽여 버리겠어.” 



쾅!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앞을 지키고 있던 부하들이 깜짝 놀라 입을 벌린다. 

개소리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복도를 걸어갔다. 



“형님!!” 



그 뒤를 부하들이 따랐다. 



“형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지금 당장 강호로 쳐들어간다. 애들 대기시켜.” 



그녀의 한마디에 한사람이 민규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또 유인에게도 이 소식을 알렸다. 

복도 안은 그들의 발소리로 가득 찼고 2005년 1월 31일. PM.10:00. 이제 그녀의 마지막 싸움이 곧 시작되려한다. 










※전국 고교 일진협회※ 






♡[2부] 10. 





부아아앙-. 쌔앵- 쌩! 


보기만 해도 거리감이 저절로 드는 검은색 승용차 세대가 도로를 무섭게 질주하고 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시민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들에게 집중되고 철없는 학생들은 저마다 감탄사를 연발한다. 

남자들은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값비싼 승용차가 줄줄이 지나가자 놀라워했고 어르신들은 혀를 끌끌 차대었다. 

개소리가 타고 있던 승용차가 사거리에서 직진을 하자 우측도로에서 또 다른 승용차 한대가 우회전을 하며 그 뒤를 따라붙었다. 

그 차안에는 우혁과 시백이 타고 있었다. 이제 4대의 승용차가 도로를 점령하고 있다. 

그들의 앞에 승용차 한대와 봉고차 2대가 좌측 깜빡이를 켠 체 정차하고 있었다. 


부앙-. 


4대가 지나가자 정차 중이던 차들이 출발을 했다. 민규와 유인, 그리고 20명쯤 되는 부하조직원들이었다. 

Rrrr. 민규의 핸드폰이 울어대었다. 발신자가 보스라는 것을 확인한 그는 얼른 폴더를 열었다. 



“네, 형님!” 


“다른 애들은?” 


“반대편에서 오고 있습니다.” 


“인원은?” 


“모두 61명입니다.” 


민규가 말한 것은 현재 파악된 인원수였다. 연락이 되는 대로 그 인원은 계속 추가될 터였다.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민규는 하루 빨리 친구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보스의 의식이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란 것이기도 했다. 전화를 끊고 개소리는 생각에 잠겼다. 병원에서 꾸었던 꿈이 떠오른다. 태기는 죽어서도 웃고 있었다. 

그것이 어쩌면 자신의 망상에서 비롯된 만들어진 꿈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그래도 다행이라 여겨졌다.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을 볼 수가 있어서‥. 그래서 더욱이 태기의 죽음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원한은 반드시 갚는다. 그것이 개소리의 세 번째 목표였다. 드디어 마지막 시간이 코앞에 다가왔다. 

사아칸이 있을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건물 옆 큰 골목에서 승용차와 봉고차들이 줄줄이 튀어나왔다. 

모두 호두와 희웅이 이끌고 온 쓰래빠의 조직원들이었다. 


끼이익-!! 차례대로 멈춰선 부하들은 누가 먼저랄 거 없이 빌딩 안으로 무질서하게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로 개소리와 각 지역의 보스들이 위엄 있게 빌딩 안으로 들어선다. 



“보이는 대로 다 밟아버려!!” 



우혁이 크게 소리쳤지만 빌딩 내에 보이는 사람이라곤 모두 같은 편뿐이었다. 너무 조용하다. 

개소리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쓰래빠는 흩어져 각 층을 다 둘러보았다. 

하지만 불이 꺼진 사무실이 대다수였고 결국 허무하게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다 어디로 간 거야? 이민규, 짐작 가는데 없어?” 



엘리베이터 안. 답답한 마음에 개소리가 민규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도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눈치 채고 도망간 게 아닐까요?” 



희웅이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말했지만 모두들 공감하지는 않았다. 계획 없이 갑자기 진행된 일을 

강호파가 알리 없다는 생각들이었다. 띵♬ 1층에서 멈춰야할 엘리베이터가 5층에서 멈추었다. 

모두들 긴장을 하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를 하였다. 


스르륵.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발을 들여놓았다. 

타악! 5층에서 탄 사람은 단 한명뿐이었고 그를 민규가 붙잡았다. 곧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뭐, 뭐야?!” 



민규에게 붙잡힌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자신들의 부하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는 건 곧 강호파라는 이야기가 된다. 

1층에 이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민규가 놈을 밀어내었다. 



“으악.” 



1층 로비에는 쓰래빠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웬 놈들이냐?!!” 



당황한 강호파의 사내는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거친 숨만 내쉬었다. 개소리가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뒷걸음질치는 사내였고 곧 쓰래빠의 조직원에게 등을 부딪히고 말았다. 털썩.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고 만다. 



“워, 원하는 게 뭐야?” 


“네 목숨.”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와도 같았다. 목숨이라는 말에 사내는 바짝 쫄아버렸다. 



“사, 살려줘. 부탁이야.” 


“좋아. 사아칸이 어디에 있는 지 가르쳐만 준다면 네놈쯤이야 얼마든지 살려주지.” 



개소리가 차갑게 웃었다. 사내는 살 수 있다는 작은 희망에 안심을 했다. 



“연회장‥. 퀸호텔에 있는 연회장에 있어‥정말이니까, 제발 살려줘.” 



개소리는 부하에게 사내를 묶어놓으라고 명령했다. 자신들이 호텔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아칸에게 알리기라도 한다면 

큰 낭패이기 때문이다. 쓰래빠는 빌딩에서 나와 곧장 차에 올랐다. 그리고 입에 테이프를 붙인 체 기둥에 묶인 사내가 

이를 사악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중요한 사실을 개소리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바보 같은 놈들. 지금 그곳에 120명이 넘는 우리 조직원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겁도 없이 쳐들어가려하다니‥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꼴이군. 흐흐, 어디 맛 좀 봐라.’ 



몇몇을 제외한 쓰래빠의 조직원들은 지금 긴장을 하고 있다. 호텔에 도착하면 이제 진짜 싸움이 시작된다. 

그곳에서 누가 다칠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이 될 수도 있다. 모두들 침을 꿀꺽 삼키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저승길이 조금이나마 늦춰졌으니 운이 좋은 놈들이군.” 



개소리는 빌딩에 도착하기 전보다 마음을 더 굳게 먹었다. 사아칸이 있는 곳에 그의 오른팔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사람‥. 



“아무렴 어때? 이젠 다 끝이야.” 



그녀는 설령 신이가 자신을 막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신이가 자신에게 주먹을 뻗는다면 

그녀 역시 주먹을 뻗을 거라고 다짐했다. 너무 오래 기다렸다. 그래서 이젠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작정이다. 

그녀는 사랑대신 동료를 선택하기로 했다. 


끼이익-!! 끼익-!! 

벌컥. 탁탁탁! 


짙은 어둠이 떼로 몰려들었다. 호텔 앞을 지키고 서있던 도어맨들이 깜짝 놀라 양옆으로 물러났다. 

무리의 우두머리는 여자였다. 가녀린 몸이지만 그녀는 남자들 속에서 단연 돋보였다. 

각목 및 파이프를 쥔 남자들이 유리문을 때려 부수며 요란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개소리는 부하들을 지켜보았다. 

민규가 그런 그녀를 보호하기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살핀다. 유인이 태기의 빈자리를 대신하며 개소리의 왼쪽에 섰다. 

퀸호텔은 작은 규모의 건물이었다. 어느새 호텔 로비는 쓰래빠로 가득 찼다. 



“저 새끼들은 뭐야?!!” 



쨍그랑!! 와장창창!! 


로비에 있던 강호파의 조무래기들이 주변에 있던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쓰래빠가 그런 그들에게 달려가 

각목을 마구 휘두른다. 로비에 있는 강호파의 수는 불과 8명밖에 되지 않았다. 



“형님, 사아칸은 3층에 있다는데?” 



부하에게 들은 말을 개소리에게 곧장 전하는 우혁이다. 개소리가 위층으로 이어져 있는 계단을 바라본다. 



“이민규, 소이켠한테 연락해.” 


“네, 형님.” 



개소리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구제파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짝짝짝짝! 


1월 31일. PM. 11:45. 

3층에 마련되어 있는 연회장. 조금 뒤면 강호파가 탄생한지 12년째 되는 날이다. 이곳에 모인 강호파의 조직원들은 

일제히 술잔을 손에 든 체 자신들의 보스인 사아칸을 바라보고 있다. 사아칸이 단상에 올라 연설을 한다. 



“15분 뒤면 우리 강호파의 날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뿐만이 아니라 1년 365일 매일이 강호파의 날이 될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자, 오늘을 위해 그리고 미래를 위해 축배를 들자!” 



사아칸이 술잔을 높이 치켜들자 모두가 그를 따라했다. 공중위로 자주 빛의 술이 출렁이고 있다.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 있는 진형우의 귀로 한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부하였다. 



“큰일 났습니다. 지금 로비에 쓰래빠가 쳐들어왔습니다.” 



진형우가 입술에 대고 있던 술잔을 멈추었다. 그 모습을 옆에 있던 신이가 보았다. 진형우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는 부하 녀석. 

그리고 굳어진 진형우의 얼굴. 분명 뭔가가 있었다. 



“규모는?” 



진형우가 나지막이 물었다. 



“대략 50명 가까이 돼 보입니다.” 



어느 정도 진압이 되는 숫자였다. 



“중심은 누구야?” 


“여자입니다.” 



여자라는 말에 개소리가 직접 나섰다는 걸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신이가 알아서 좋을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용히 해결하려고 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엔 절대 못 들어오게 막아. 2층에 애들 배치시키고.” 


“예, 알겠습니다. 형님!” 



부하가 동료 몇을 데리고 연회장에서 나갔다. 분명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신이가 형우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형우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정면을 응시한 체 대답을 해주었다. 



“아니. 그냥 피라미 몇 마리가 기어 들어와서.” 



하지만 형우의 연기는 완벽하지 못해 신이의 의심을 더하게 만들었다. 

우당탕탕!! 콰앙!!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오자 강호파가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숫자가 만만치 않았다. 

2층에 있던 그들은 일제히 무기를 부딪히며 공격과 방어를 꽤하였다. 푸욱! 어느새 칼에 찔려 쓰러지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것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두 조직이 한데 엉키어 과격한 싸움을 하였다. 


쿠당탕탕! 상대에게 밀려 계단을 구른 우혁이 손잡이를 잡고 간신히 일어섰다. 팔과 다리가 조금 쑤셨지만 상처가 나지는 않았다. 



“오, 제법인데?” 



시야에서 놓치지 않고 있던 우혁이 계단을 뛰어올라 놈에게 강력한 발차기를 선사했다. 

뻐억!! 그런 다음 놈의 뒤에 서서 등을 힘껏 차버린다. 



“으아악!” 



그에 상대는 앞에 있던 자신의 동료를 떠밀며 계단을 제대로 굴렀고 샌드위치가 된 그들을 바라보며 우혁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그를 뒤에서 또 다른 사내가 노리고 있었다. 사내는 들고 있던 각목을 우혁의 머리로 힘껏 내려치려 했다. 퍼억!! 



“윽!” 



하지만 각목이 우혁의 머리카락에 닿기도 전에 사내는 주저앉고 말았다. 등 뒤가 이상함에 우혁이 돌아본다. 



“빚은 꼭 갚아라!” 



못생긴 사내의 머리를 밟고 있는 개소리가 눈에 보였다. 



“빚?” 



영문을 모르는 그다. 



“그래. 꼭 갚으라고!” 



퍼억!! 

옆에서 달려드는 적을 힘껏 내려치며 그녀가 소리쳤다. 그를 보며 피식 웃는 우혁이다. 

콰앙!! 날아오는 도자기를 쇠파이프로 깨뜨려버리는 인물이 있었다. 호두는 도자기를 깨뜨린 후 던진 자에게도 파이프를 먹여주었다. 



“감히 나한테 도전을 해?” 



퍼억! 퍼억! 

넘어진 상대의 배를 파이프로 여러 번 찍어주었다. 고통스러워하던 남자는 호두의 공격이 끝나자 복부를 움켜쥐며 몸을 오므렸다. 

강호파가 쓰러진 만큼 쓰래빠도 쓰러졌다. 당연히 쓰래빠로써는 지장 있는 일이었지만 이 인원이 다 일거라 생각했던 개소리였기에 

걱정하지는 않았다. 현재인원. 쓰래빠 31명, 강호파 5명. 이것이 개소리의 머릿속에 계산된 두 조직의 총 인원이었다. 



2월 1일. 0시. 

한편, 연회장에서는 연설을 끝낸 사아칸이 단상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 그의 곁으로 다가가 소란이 벌어졌음을 알리는 형우였다. 

사아칸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가 싶더니 이내 환하게 변한다. 다시 단상으로 오르는 그다. 

그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사아칸에게로 집중되었다. 신이 또한 그를 응시했다. 사아칸이 마이크 가까이 입술을 가져다댄다. 



“모두들 기뻐해라. 반가운 손님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신이는 설마 했다. 지금 쓰래빠가 쳐들어오는 것은 너무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타다닥, 쾅!! 



“후후, 저기들 왔군.” 



하지만 설마가 아니었다. 연회장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분명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틈으로 개소리가 등장했다. 

신이가 본 쓰래빠는 너무 작았다. 그리고 개소리가 본 강호파는 너무 컸다. 그녀의 앞으로 펼쳐진 검정색은 그녀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하나같이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 분명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설마라는 마음으로 정면에 붙어있는 현수막을 보았다. 


-강호파 탄생 12주년 축하파티- 


쓰래빠는 일제히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이런-썅.’ 



현재인원. 쓰래빠 31명, 강호파 5명+93명=98명. 식은땀을 흘리지는 않았지만 쓰래빠의 얼굴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후우.” 



그 모습을 보며 신이가 한숨을 내쉰다. 



“자아, 그럼 지금부터 환영파티를 시작해볼까?” 


“와아아아!!” 



강호파는 사아칸의 말을 시작으로 주먹을 불끈 쥔 체 쓰래빠에게 달려갔다. 그중에는 가슴팍에서 칼을 꺼내든 이도 꽤 있었다. 

사전파악도 하지 않고 무작정 쳐들어간 게 실수였지만 이젠 돌이킬 수없게 되었다. 그래서 개소리는 부하들에게 크게 고함을 질렀다. 



“죽더라도 제 몫은 하고 죽어라!!” 



그녀가 말한 제 몫은 한 사람당 세 사람 이상을 쓰러뜨리는 것이었다. 



“예, 형님!!” 



그에 부하들이 씩씩하게 대답을 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퍽! 퍽퍽!! 챙그랑!! 연회장에 마련되어 있던 뷔페들이 아래로 떨어지거나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테이블 위로 올라가 싸우는 이들도 있었고 음식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사아칸은 단상 위에 올라 부하들의 보호 속에서 

싸움을 구경하였다. 푸슉! 쓰래빠의 조직원 한명이 칼에 맞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또 다른 곳에서는 한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도 쓰래빠에 몸담고 있었다. 신이가 초조하게 싸움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진형우가 불안하게 바라본다. 

신이의 시선이 머문 곳은 당연지사 개소리였다. 그가 바라본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칼과 무기를 피해내고 있었다. 



퍼억!! 유인의 발끝이 겁 없는 사내의 목을 강하게 올려쳤다. 사내는 숨 막히는 고통에 켁켁대며 목을 감쌌다. 

유인은 사내에게서 시선을 돌려 신이를 보았다. 그는 사아칸의 옆에 서 있었다. 



“‥배신자.” 



이를 꽉 깨물었다. 그리고는 보이는 대로 공격을 퍼부었다. 괜한 화 풀이었다. 

뻐억!! 콰당!! 그렇게 앞에 있던 놈들을 밟고 있을 때 뒤에서 쇠파이프를 쥔 사내가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유인은 주변의 소리에 미처 뒤에서 나는 기척을 느낄 수가 없었고 결국에는 까앙! 어깨를 맞고야 말았다. 



“으윽.” 



어깨를 쥐며 주저앉는 유인이다. 그에 강호파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마구 밟기 시작했다. 

파악! 시백은 복부를 찔러오려는 칼을 간신히 잡아내었다. 정말 간발의 차이였다. 칼날을 꽉 잡은 바람에 손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상대가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자, 하는 수없이 발로 급소를 차버렸다. 손바닥을 펼쳐 피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시백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퍼억!! 그때 뒤에서 한 녀석이 공격을 해왔다. 시백은 앞으로 넘어졌고 곧 사방에서 적들이 각목을 내려쳤다. 

시백은 통증이 덜하도록 몸을 움크렸다. 



“씨, 씨발‥.” 



끝내 피를 보는 것은 손바닥에서 끝나지 않게 되었다. 

신이는 예상대로 쓰래빠가 밀리는 것을 보자 가슴이 갑갑해져 왔다. 그의 시야 안에서 호두도 쓰러져나갔다. 


퍼억!! 민규는 개소리의 곁에서 놈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실력자 7명을 감당해내기에는 조금 역부족이었다. 

빠각! 쇠파이프로 허벅다리를 맞고 쓰러진 민규는 일어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곧장 날아오는 야구방망이에 머리를 맞고야 말았다. 

이를 뒤늦게 발견한 개소리가 의자를 밟고 뛰어올라 민규를 둘러싸고 있던 놈들을 차례차례 손을 봐주었다. 



“괜찮아?” 


“네, 형님‥.” 



적들을 경계하며 그녀가 묻자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한쪽 눈을 뜰 수없게 된 민규가 기침을 하며 작게 대답했다. 

한편, 희웅은 소화기를 들고 강호파를 상대하고 있었다. 들고 있던 각목이 부러진 바람에 근처에 있던 소화기를 무기로 삼은 것이다. 

단단한 소화기에 머리를 맞은 이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희웅은 놈들을 상대하기에 급급했던 나머지 등 뒤는 

무방비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를 진형우가 놓치지 않으며 노리고 있었다. 그가 가슴팍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정면에서 싸우고 있던 희웅의 왼쪽 다리를 노렸다. 


피슝! 푹! 그의 칼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희웅의 왼쪽 발목에 꽂히었다. 



“으악!” 



우혁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주저앉아버리는 희웅을 발견하였다. 그는 칼의 주인이 진형우라는 것을 대강 눈치 채고 있었다. 

칼이 날아온 위치에 정확히 진형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 자식이!” 



열이 받은 우혁이 진형우가 있는 단상위로 달려갔다. 진형우를 손봐주는 김에 사아칸까지 붙잡을 생각이었다. 

우혁이 가까이 다가오자, 철컥! 사아칸이 총을 꺼내들었다. 그에 우혁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이우혁, 오랜만이구나.” 



사아칸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개소리가 행동을 멈추고 사아칸을 바라보았다. 

총을 들고 있는 사아칸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그리고 총이 겨누어진 곳에 우혁이 있었다. 



“자, 이제 그만 포기하시지?” 



개소리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녀는 분한 얼굴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사아칸의 눈치를 받은 부하 한명이 

우혁의 허리를 파이프로 내려쳤다. 퍼억!! 결국 우혁까지 당하고 말았다. 



“제‥제기랄.” 



개소리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끝이라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찰캉. 무기를 손에서 놓아버렸다. 그러자 곧장 공격을 퍼붓는 사내들이다. 개소리는 사내들의 발에 질근질근 밟혔고 

그 모습을 신이는 애써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섣불리 나섰다간 도움은커녕 

자신까지 당하고 말 것이기에 선뜻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형우가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그를 주의 깊게 주시하고 있었다. 



2월 1일. AM. 1:10. 


쓰래빠는 사아칸의 명령에 따라 호텔 지하창고에 가두어졌다. 밧줄에 몸이 꽁꽁 묶인 체 개소리와 민규, 

그리고 유인, 호두, 우혁, 희웅, 시백이 숨을 거칠게 쉬며 앞에 서 있는 사아칸과 그의 부하들을 노려보고 있다. 

유인은 특히 신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네년이 나까지 발아래에 둘 줄 알았더냐?” 



타악. 발로 개소리의 뺨을 치며 사아칸이 말했다. 그녀는 사아칸을 노려보며 피비린내 나는 침을 뱉어내었다. 



“발아래는 무슨, 내 발까지 핥게 만들려고 했는데?” 



퍽! 


결국 그녀의 발언이 사아칸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주먹에 복부를 내준 개소리가 기침을 토해낸다. 



“우욱, 커헉!” 



그를 보는 신이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이년이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만? 썅년아, 네가 뭔데 기어오르고 지랄이야? 엉?” 



개소리의 이마를 툭툭 밀어내는 사아칸이다. 



“그, 그 손 치워.” 



옆에 있던 민규가 힘없이 얘기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사아칸의 부하에게 차이고 만다. 



“남자들은 어떻게 꼬셨냐? 한번씩 먹도록 해준 거냐? 그렇게 헤퍼서야 어디에 써먹겠어?” 


“퉤엣!” 



사아칸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개소리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에 사아칸이 일그러진 얼굴로 한숨을 쉰다. 

곧 개소리는 뺨까지 내줄 수밖에 없었다. 철썩! 



“이년이!!” 



철썩! 철썩!! 사정없이 여자의 뺨을 휘갈기는 모습에 쓰래빠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씨발, 그만해! 그만하라고!!” 


“개자식! 진짜 뒤지고 싶나?!” 



우혁과 호두가 악에 받쳐 소리친다. 결국 모두가 매타작을 받았다. 이제 울만도 하련만 개소리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에게 부하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사아칸이 일어나며 뒤로 물러섰다. 총을 꺼내들고는 마무리를 지으려했다. 



“너처럼 겁도 없이 설치고 다니는 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돼. 부하들에게 작별인사나 해라.” 



“안돼!!” 


“그만둬!! 씨바아!!” 



그녀의 동료들이 절규를 했다.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젠 진짜 끝이다. 개소리는 두 눈을 감았다. 

눈을 뜨고 당당히 사아칸을 노려보고 싶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 시선이 신이에게로 옮겨졌기 때문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아칸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려한다. 



“잘 가라.” 



사아칸이 아닌 신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쾅!! 








※전국 고교 일진협회※ 






♡[2부] 완결. 









총을 겨냥하고 날렸던 신이의 킥이 정확히 맞아 들어갔다. 






휘리릭~! 권총 한 자루는 공중을 날아 그들과 떨어진 창고 문 아래에 바로 떨어졌다. 가서 줍기엔 부담감이 있는 거리이다. 






부하의 갑작스런 행동에 사아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진형우는 결국에야 일이 터지고 말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사아칸이 성난 얼굴로 신이에게 물었다. 소란에 개소리가 눈을 떴다. 어느새 빈손이 된 사아칸이 신이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기분이 얼떨떨했다. 






"여기까지 해. 더는 못 봐주겠어." 







신이의 말에 코방귀를 끼는 사아칸이다. 






"헛, 지금 배반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못할 것도 없지. 한번 배신을 했던 놈이 또 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사아칸의 눈에 핏대가 서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를 받아들였을 때 의심을 안한 건 아니지만 




3년 동안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하는 그를 보자 의심을 버리고 믿음을 가졌었는데‥ 









결국 이렇게 배신을 할 줄이야. 











사아칸이 부하들에게 신이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창고 안에 있는 그의 부하는 모두 10명이다. 







다른 이들은 모두 창고 밖이나 로비를 지키고 있다. 



"저자식도 붙잡아버려!" 



보스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내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들은 신이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칼보다는 






길이가 긴 야구방망이를 사용하였다. 






칼은 신이에게 뻗기도 전에 손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으아아!" 



기합소리를 내며 한 사내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신이는 잽싸게 고개를 숙임으로써 자신의 머리로 날아오던 방망이를 

완벽하게 피해내었다. 





유인의 맑은 눈동자에 주먹을 뻗고 있는 신이가 가득 들어찼다. 

너무 늦게 돌아왔다. 



하지만 문은 언제나 열려 있었다. 개소리는 문을 꼭꼭 걸어 잠그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처음 그를 믿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마냥 기쁘기만 했다. 


퍼억!! 창고 안의 부하들이 모두 당했지만 사아칸은 전혀 당황해하지 않았다. 



다크호스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진형우는 보스가 말하기도 전에 자신의 차례가 다가왔음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가 앞으로 나왔다. 



"결국엔 떠나는 구나?" 



신이와 겨루기 전 형우가 한마디했다. 


그의 얼굴엔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신이는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도 이곳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대사였다. 



오로지 그는 주먹만을 굳게 쥐었다. 

이번 싸움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할 수는 없다. 





창고 밖에는 더 많은 적들이 우글거리기 때문이다. 

힘을 쓸데는 너무 많기만 하다. 



"3년 전처럼 봐주지는 않아." 



파이터 대전을 말하는 듯 했다. 신이가 피식 웃어 보인다. 


허무하게 우승을 차지했었던 3년 전의 파이터 대전. 




잠시 미뤄두었던 싸움을 오늘에서야 마무리짓게 되었다. 





이제 두 사람은 친구가 아닌 남자로써 붙게 되는 것이다. 


휘익! 형우가 먼저 선방을 날렸다. 








신이는 그의 주먹을 피했지만 빠른 속도로 이어지는 다음 동작을 간파하지는 못했다. 





퍼억! 강력한 킥에 뺨을 맞은 그는 한쪽 방향으로 밀려났고 그가 중심을 잡고 서려는 순간에도 형우의 공격은 빠르게 이어졌다. 

타악! 하지만 팔 등으로 아슬아슬하게 막아내었다. 



"훗." 



뻐억!! 하지만 이번에도 복부를 찍어버린 무릎까지는 막아내지 못했다. 



"우욱!" 



주저앉은 신이가 배를 움켜쥐며 일어섰다. 





사아칸은 형우의 일방적인 공격에 마냥 흐뭇해했다. 









자신이 오른팔 하나는 제대로 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형우의 일방적인 공격도 초반에만 허락되었다. 







퍽! 퍼벅! 신이가 제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점프를 하여 형우의 얼굴을 내려쳤다. 그들의 접전은 그렇게 계속되었고 

두 사람은 조금의 배려도 없이 최선을 다해 싸움에 임하였다. 때리고 맞고, 공격하고 방어하고. 

누가 더 맞고 누가 덜 맞았는지는 판가름할 수가 없다. 







신이는 사랑하는 여자를 구해내기 위해 목숨까지 걸고서 친구와 싸웠고, 




형우는 어릴 적 자신을 거두어준 보스에게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 아끼던 친구에게 주먹을 날렸다. 






형우가 자신의 특기인 급소 노리기를 시도하였지만 득 본 거 하나 없이 신이에게 기술을 먹히고 말았다. 

모두들 그들의 혈전을 숨죽인 체 지켜보았다. 



승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두 조직의 미래도 바뀌게 될 것이다. 





물론, 쓰래빠의 경우 이러나저러나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다. 







신이가 이긴다 한들 사아칸의 부하는 호텔 안에 얼마든지 깔려있기 때문이다. 








퍼억!!!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신이가 강력한 펀치를 형우에게 먹였다. 




휘익-쾅! 






끝내 형우가 완전히 주저앉고야 말았다. 





그는 더 이상 일어서지 않았다. 싸울 힘은 아직 남아있었지만 더 싸워봤자 

결과는 뻔하다고 생각한 형우였다. 오늘도 그는 신이에게 승자의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일어서." 



신이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어 신이에게 보여준다. 



"이것 봐. 난 힘들어서 더는 못 싸워." 


"지금 이게 장난인 줄 아냐?" 



신이의 표정은 진지하며 굳어있었다. 



"장난이 아닌 줄 아니까 더 안 싸우겠다는 거야. 난 벌써 죽긴 싫어." 


"뭐?" 


"더 싸웠다간 너한테 죽을 지도 모르잖아. 그건 싫어." 







마치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는 말이었지만 형우의 마음 속에는 전혀 상반된 뜻이 담겨있었다. 






그는 신이가 자기 손으로 친구를 죽인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분명 가슴에 상처를 새긴 체 긴 세월을 후회하며 보낼 테니까. 



"이젠 됐어. 내가 놓아줄게. 그러니까 너 가고 싶은 데로 가." 



바닥에서 일어서며 형우가 말했다. 


놓아준다는 말. 그 말은 즉 자신이 친구를 붙잡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형우 본인도 알고 있었다. 


신이를 향한 자신의 감정은 우정도, 무엇도 아닌 집착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놓아줄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를 너무나도 아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이니까. 

그래서 항상 함께 하고 싶었다. 유인이 동료들과 함께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이가 배신을 했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무척 기뻐하고 있는데 사아칸이 눈에 띠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혹시하며 돌아본 입구에 총을 주워든 사아칸이 있었다. 그는 기회를 틈타 신이를 제거할 작전이었다. 

이를 보곤 유인이 신이에게 외쳤다. 



"신아, 피해!" 









개소리도 좁쌀만해진 간으로 사아칸과 두 사람을 시야에 두었다. 유인의 고함소리에 조급해진 사아칸이 방아쇠를 힘껏 잡아당겼고, 






신이가 뒤를 돌아보자마자 한 사람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타앙!! 




역시 스피드는 신이보다 형우가 한 수 위였다. 






그리고 그 스피드는 총알조차도 이기지 못했다. 

사아칸이 쏜 총알은 형우의 가슴팍에 박혔다. 



"젠장!" 



사아칸이 방해물에 작전을 실패하자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 한다. 




하지만 형우는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항상 소지하고 다니던 칼을 꺼내어 힘껏 내던진다. 


푸슉-! 그리고 목표물을 제대로 맞추었다. 


타앙! 칼이 이마의 정 중앙에 꽂힌 사아칸은 충격에 그만 총을 쥔 손의 방향을 바꾸고 말았다. 









그에 두 번째 총알은 애꿎은 벽에 박혔다. 쿵! 사아칸이 앞으로 쓰러졌다. 두 눈을 뜬 체 숨을 거둔 그는 마지막까지 

심상 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형우가 나지막이 말한다. 정말 모든 일이 짧은 몇 초 사이에 벌어졌다. 



"크흑." 






형우가 구멍 뚫린 가슴을 움켜쥐었다. 신이의 심박수가 급격히 빨라졌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형우를 그가 아래에서 떠받쳐주었다. 



"진형우‥." 


"‥응. 말해." 


"이 새끼야, 말하기는 뭘 말해?! 너 미쳤냐? 정신 나갔어?" 


"왜‥? 크헉!" 








형우는 고통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친구의 일이라면 두 손 두 발 다 걷고 나서는 녀석이 바로 진형우였다. 







"할 일없이 네가 왜 대신 총을 맞아? 그러면 내가 고마워할 줄 알았냐? 눈물이라도 펑펑 흘릴 줄 알았냐고!" 


"‥응. 그럴 줄 알았어‥히히." 


"‥얼빠진 놈. 됐으니까, 그냥 닥치고 있어." 







우혁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형우를 보았다. 이대로 아는 사람을 또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람이 설령 적일지라도 말이다. 


콰앙!! 이윽고 창고 문이 열렸다. 곧 떼거지로 모인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하아-. 늦은 건가요‥?" 








소이켠이다. 순간 강호파의 조직원이라 생각하고 섬뜩했었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개소리가 그에게 말했다. 



"대강은. 하지만 지금이라도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어 반갑네요." 


"바깥에 있던 놈들은 저희가 다 해결했습니다. 뭐, 또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우선 이 밧줄 좀 풀어주시겠어요? 그리고‥." 



개소리가 시선을 옮겨 형우를 본다. 부하의 원수. 



"‥저 사람을 병원으로 옮겨주세요." 



정확히 2월 1일. AM. 2:00. 




모든 사건이 종결되었다. 




1년 후. 


누군가의 넋이 묻혀있는 무덤에 한 여인이 요구르트를 뿌리고 있다. 



바닥에 놓여진 빈 병은 모두 2개, 





지금 뿌리고 있는 것이 3개째이다. 요구르트에 젖은 흙에서 단내가 솔솔 풍기고 있다. 




냄새를 맡은 벌 한 마리가 무덤주위를 맴돈다. 



"많이 먹어라. 얼마나 이게 먹고 싶었음 꿈에 나타나서까지 달라고 그러냐?" 



개소리가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런 그녀를 건장한 남자들이 바라보고 서 있다. 






한 달에 한번 꼴로 오는 산소이기에 오늘은 민규와 신이, 그리고 우혁, 호두, 희웅만이 그녀를 따라왔다. 



"벌 꼬인다. 형님, 그만 뿌려." 



개소리가 4개째 요구르트 병을 열려고 하자 우혁이 말렸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요구르트를 또 뿌리는 개소리다. 



"진짜 산소에 술 대신 요구르트 뿌리는 집안은 여기 뿐일 거야." 


"왜? 특이하고 좋구만." 


"특이해서 좋다고? 그럼 산소 앞에 찌글이도 매달아놓지 그래? 찌글이 태기형꺼잖아." 


"그게 뭔 소리고?" 


"특이하잖아!" 


"그래. 니 참 특이하다." 


"뭐야?" 



희웅이 다투고 있는 두 사람을 재미있게 바라본다. 




그는 정말 특이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몇 분이 지나고 그들은 산에서 내려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민규야, 안 가고 뭐해?" 



산소에서 떠나는 사람들과는 달리 제자리에 꼼짝달싹하지 않는 그에게 개소리가 물었다. 



"형님, 먼저 내려가십시오. 전 뒤따라가겠습니다." 



또 태기에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개소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민규를 둔 체 산에서 내려갔다. 

시끌벅쩍하던 산소주위가 어느새 조용해졌다. 





민규가 무덤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이 무덤이 곧 태기였지만 

역시 죽은 사람은 말이 없기만 하다. 



"잘 지냈어? 요즘 우리 조직은 분주하게 지내는데, 넌 한가하지? 부럽다, 자식아. 






근래에 깡통파라는 새로운 조직이 크게 성장하고 있어. 



그 녀석들 때문에 형님이 골치 꽤나 썩고 있지. 

하긴, 네가 있을 때만큼 골치를 썩겠냐 만은‥. 


훗, 나도 이제 스무 다섯이다. 20대 중반에 들어섰지. 넌 어떠냐? 아직도 24살이냐?" 







태기의 산소를 찾는 날‥ 평소에 말이 없던 한 남자는 말이 많아진다. 

그가 말을 마치려면 아직 1시간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다음날, 개소리네 집. 





개소리와의 오붓한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도착한 신이는 우편함을 열어보았다. 

군대에 간 친구에게서 편지가 왔나해서이다. 





우편함에는 봉투 2개가 들어있었다. 하나는 전화요금 청구서였고 나머지 하나는 



"왔다!" 



자신에게 온 편지였다. 드디어 온 것이다. 







신이의 표정이 밝자 대문을 들어서던 개소리가 심통 맞은 얼굴을 한다. 



"왔나보네?" 


"어.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내가 뭘?" 



그냥 안으로 홱 들어가 버리는 그녀다. 






신이는 피식 웃으며 그녀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개소리가 정원테이블에 앉아있자 그도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편지봉투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잘 접어놓은 편지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개소리가 턱을 괴고서 신이를 본다. 

하지만 이미 그는 타인의 시선도 느끼지 못 할 정도로 편지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친구, 신이 보거라. 






이것으로 다섯 번째 편지지? 그러고 보니 내가 입대한지도 벌써 5개월이 지났네. 



처음에는 죽으라고 시간이 안 가더니만 

이제는 제법 하루 하루가 빨리 가는 것 같아. 넌 언제 입대할 거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나이 들어서 가면 어린것들한테 굽신거려야 한다니까? 하하. 근데, 재수씨랑은 잘돼가고 있어? 아직도 나 싫어하지? 





‥웬만해선 용서가 안되겠지. 사람의 목숨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보상받을 수 없으니까. 







그건 그렇고 재수씨가 그렇게 찾던 아버지의 원수가 진짜 개였다니‥솔직히 그 말듣고 많이 웃었어. 



재수씨가 이 사실을 알면 날 더 싫어하겠지? 아니야. 군대까지 쳐들어올지도 몰라. 그럼 네가 잘 붙잡아줘. 





내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잖아, 친구야. 아, 맞다! 나 곧 있음 휴가 나갈 거야. 서울가면 전화할게. 

편지에 못 담은 이야기는 그때 해줄게. 나 해줄 얘기 엄청 많거든. 그동안 잘 지내고 있어! 안녕! 친구, 형우가.' 






편지를 읽는 내내 신이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개소리는 또 무슨 내용이 있나싶어 편지를 빼앗아 읽었다. 

그녀의 인상이 일그러진다. 



"이것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하여튼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라니까?" 


"넌 형우가 그렇게 싫냐?" 


"그래! 바퀴벌레보다 더 싫어!" 


"그만 좀 미워해라. 그래도 남편 될 사람의 친구잖냐." 



개소리는 들고 있던 편지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고개를 홱 돌리며 그녀가 말한다. 



"안돼. 나까지 그 자식을 용서하면 억울하게 죽은 태기가 불쌍해지잖아." 


"‥‥." 







신이는 그저 개소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얼굴은 두 달 전 소이켠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된 사연을 들었을 때만큼 

슬퍼 보였다. 그때, 광견병으로 죽었다는 말을 듣자 모두들 웃음이 튀어나왔지만 개소리의 어두운 표정에 함부로 웃을 수가 없었다. 



침체된 분위기를 뚫고 유인과 시백이 정원으로 나왔다. 



"뭐꼬? 오자마자 또 데이트가?" 



시백이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다가왔다. 유인과 함께 빈자리에 앉는다. 



"그 카지 말고 나도 친구 좀 소개시켜도." 


"개소리 친구는 다 운동해." 



유인이 끼어 들었다. 



"진짜가? 무슨 운동하는데?" 


"권투랑 무에타이. 역도선수도 있어." 



시백이 입을 떡 벌린다. 힘센 여자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호기심정도는 있었다. 



"근데, 오늘은 뽀뽀했어?" 



유인이 묻자 신이가 편지지를 봉투에 넣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오늘은 이라니. 오늘도 라고 해야지." 


"아‥그런가?" 


"차안에서 뽀뽀했어." 



개소리의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이것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부끄러워하는 것 좀 봐." 


"냅둬. 저게 매력이야." 



개소리가 화를 냈지만 그에 기가 죽을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녀는 기가 막혀 웃음만 나왔다. 




다들 20살이 넘어도 하는 짓은 4년 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변한 것이라면 성숙한 겉모습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변하지 않는 서로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세월이 흘러 강산이 변한다하더라도 자신들의 마음가짐과 

우정만은 늘 변함 없기를 바랐다. 개소리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흰 구름이 두둥실 떠있는 것이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그녀는 분명 보이지는 않지만 구름 위 어딘가에 사람들이 모여서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남자가 보스와 왼팔이 되어 사람들을 모으러 다닐 것만 같았다. 



'우리들도 때가 되면 저곳으로 가겠지? 가는 열차 표는 달라도 언젠가는 모두 모일 거야.'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무슨 생각 하냐?" 



신이가 물었다. 



"그냥. 미래." 


"애는 둘만 낳으면 돼." 


"뭐어? 풋-!" 



행복한 오후. 





미래는 중요치가 않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현재일 뿐. 지금이 행복하다면 미래도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조직, 쓰래빠의 이름도 앞으로 수십 년 간은 지속될 것이다. 연개소리‥그녀의 이름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그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