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캄캄한 뉴욕의 뒷골목, 버려진 고아로 성장한 한재희. 극한의 위험과 스릴을 즐기는 그녀는 최고의 드라이버다.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신을 애타게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곁을 주지 않는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여자다. 그리고 우연히 게임처럼 시작된 관계, 그녀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다. 그의 육체 이외에는. 모든 것을 가졌으며 자신만의 제국을 소유한 남자 마커스 로웰. 그는 여자를 즐기지만 좋아하진 않는다. 한재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역시 처음에는 그녀의 육체만을 원하는 것이라 확신했었다. 하지만 이제 저 여자를 가두고 싶다. 그의 품속에 영원히. +++++++++++++++++++++++++++++++++++++++++++++++++++++++++++++++++++++++++++++++++++++++++++++++++++++++++++++++++++++++++++++++++++++++++++++++ 프롤로그 “아빠…” 들리지도 않는 작은 탄식이 하얀 입김과 함께 뿜어져 나왔다. 연한 갈색의 겨울 코트로 어깨를 감싼 어린 소년의 몸이 잎이 떨어져 내린 커다란 나무둥치 아래 숨듯 웅크리고 있었다. 소년은 나뭇가지로 얼어붙은 땅 위에 아무렇게나 동그라미를 그리며 반짝이는 머리를 작은 무릎에 파묻었다. 손등이 추위로 발갛게 변해 있었지만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장갑을 꺼낼 기분도 들지 않았다. 보스턴에서 가장 비싼 사립학교의 높은 담장이 흐린 겨울 하늘 아래 어슴푸레 서 있었다. 소년은 외톨이였다. 한창 잘난 체하고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또래들 가운데에서도 늘 말없이 조요했다. 친한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너무도 어린 나이에 깨달아 버렸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별다른 슬픔이나 감상을 느끼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아빠조차도 하나뿐인 아들인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아빠는 그를 싫어했다. 소년의 아빠는 그가 요람에 있을 때조차 한 번도 안아준 적이 없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었고 한 달에 고작 두세 번 얼굴을 마주칠까 말까 할 정도로 집안에 머무르는 일이 드물었다. 어쩌다 우연히 아들을 보는 그의 눈엔 웃음도 애정도, 심지어 실낱같은 관심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소년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의 보모나 가정교사, 심지어 집사와도 이야기를 했지만 소년을 불러 직접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소년은 그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게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조를 수조차 없었다. 소년은 태어나면서부터 저주의 씨앗을 품고 나왔다. 그로 인해 그의 쌍둥이형이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고 죽었으며 사진으로밖에 본적이 없는 아름답고 상냥해 보이는 엄마도 그를 낳자마다 과출혈로 눈을 감았다. 그 후로 그를 사랑해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바뀌던 보모나 주변을 서성대는 고용인들, 그를 깔보고 업신여기는 친척과 사촌들 모두 온기라곤 조금도 담고 있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부모가 버린 자식은 아무도 존중하거나 소중하게 대해 주지 않는다. 차라리 그때 쌍둥이형 대신 자신이 죽었다면 아빠는 그를 조금이라도 불쌍하게 여겨주었을까. 소년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지만 훔쳐내는 것도 잊어버렸다. 조금 있으면 수업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그를 찾아 나오겠지만 움직이기 싫었다. 이대로 잠들면 좋겠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아기 곰처럼 이 추운 겨울이 끝나고 따뜻해지는 봄날까지. 정말로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으며 몸이 나뭇등걸에 닿았다. 희미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불청객 노릇을 하지 않았다면 소년은 그대로 한참을 깨지 않았을 것이다. 눈을 뜨니 작고 구슬 같은 눈동자 두 개가 불과 몇 걸음 앞에서 그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어린 새끼 다람쥐 한 마리였다. 이런 계절에 뭘 찾겠다고 어미 다람쥐의 품을 벗어났는지 모르겠다. 바보 같으니. 소년은 다람쥐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뒤져 쉬는 시간에 먹다 남은 초콜릿 조각을 꺼냈다. 이것뿐이야. 무언으로 눈짓하며 초콜릿을 바닥에 살그머니 내려놓자 눈알을 도르르 굴리며 한참 경계하다 쪼르르 달려와 양발로 움켜쥐고 그대로 나무 위로 달아난다. 왠지 아쉬움을 느끼며 다람쥐의 자취를 쫓아가자니 가지 사이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녀석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소년의 입술이 벌어지고 하얀 이가 드러났다. 하지만 겨우 밝아진 얼굴이 되었다 싶은 순간도 잠시, 갑자기 뭔가에 놀란 듯 다람쥐가 후다닥 튀어 나무의 파인 홈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소년도 덩달아 움찔하며 뒷걸음치는데 등에 뭔가가 와서 부딪혔다. “안녕, 꼬마야?” 그보다 몇 배나 큰 어른의 덩치가 그를 완전히 가로막고 서 있었다. 선생님이 아니야. 소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의 거친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소리를 질러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 그와 같은 부잣집 아이들을 노리는 납치범들에 대해 귀가 따갑게 설교하던 학교 선생님들과 가정교사의 엄포가 생각났다. 절대 모르는 사람과는 이야기하지 마라! 씩 웃는 남자의 웃음이 징그러웠다. “네가 루이스 맞지?” 소년, 루이스는 재빨리 등을 돌려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려고 했지만 커다랗고 무서운 남자의 손이 먼저 그를 움켜쥐고 입을 틀어막았다. 시큼하고 더러운 냄새가 코에 확 끼쳤다. 토하고 싶었지만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다. “만나서 반갑다, 꼬마야.” 아빠… 소년은 드디어 벌을 받는 건지 모른다고 잠깐 생각했다. 1장 뉴욕,겨울 사위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포착됐습니다, 사장님.” 기복없는 정중한 사내의 음성이 넓고 어두운 차 안에 조용히 울렸다. “현재 엘리스 버크는 은신처 앞 공중전화 박스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덮칠까요?” “목표물은?” 또 다른 음성이 허공을 갈랐다. 이번엔 좀더 깊고 낮았으며 섬뜩할 만큼 무감각했다. “아파트안으로 사람을 풀었습니다. 곧…” 전자의 목소리, 즉 맥스 캐빈은 무전기를 들고 상황을 보고하다 갑자기 당황한 듯 말을 멈추었다. “뭔가?” 아파트 안에 목표물이 없다? 맥스는 뜻밖의 보고에 일순 낭패감을 느끼고 이마를 찌푸렸다. 심상치 않은 그의 반응에 제이슨 호크의 차갑고 감정없는 푸른 눈이 희미하게 번득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맥스가 보고를 할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맥스의 초조한 시선이 재빠르게 제이슨의 얼굴을 살폈다. “아이가… 없어졌습니다. 흔적이 남아 있는 걸로 봐선 제삼자가 끼어든 모양입니다.” 늘 그랬듯 제이슨은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라는 것을 보이는 남자가 아니었다. 정황을 들으면서도 그는 팔걸이에 놓인 손가락을 두어번 가볍게 두드렸을 뿐 그대로 정면을 응시했다. “삼자라 … 그 둔해 빠진 FBI 녀석들이 선수를 칠 정도로 새삼 똑똑해진 건 아닐 테고.” 낮은 중얼거림은 기묘한 전율을 불러일으키며 새삼 맥스를 긴장시켰다. 제이슨의 목소리가 낮아지는 건 결단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FBI는 아닌 듯합니다.” 빌어먹을. 엘리스 버크만 찾아내면 모든 일은 쉽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더니 일이 이상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흔치 않은 욕설을 삼킨 맥스는 어긋난 일 처리고 자칫 흥분하려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베어포드가 다른 세력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겠지만 그랬다면 우리한테도 지금쯤 연락이 왔을 테지.” 보스턴 상류층의 유력인사인 존 베어포드가 일주일 전 납치당한 자신의 상속자를 찾아주길 제이슨에게 요청해 왔을 때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을 용의가 있을 정도로 궁지에 처해 있었다. 납치범이 요구한 돈을 마련하는 것은 베어포드에겐 아무 문제도 아니었지만 정작 그가 불안해 한 것은 아들의 위태로운 목숨이었다. 그는 돈을 건네준 순간 아들과의 끈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납치범들이 돈을 받기 전까지만 범행 대상을 살려두는 것은 이런 일에선 흔하디흔한 경우였다. 애초에 신의나 약속과는 거리가 먼 인종들인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얼굴이 수사기관에 알려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아들이 사라진 이래 동분서주하며 힘닿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포장만 요란한 FBI나 뉴욕 경찰은 베어포드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그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제이슨 호크는 아무리 존 베어포드라 해도 부담없이 이용하기에는 너무나 값비싼 도구였다. 그러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패임에는 틀림없었다. 제이슨은 아랍 족장과의 대화 중간에 끼어든 존 베어포드의 필사적인 전화를 회상하며 희미하게 냉소를 머금었다. 부정이라. 확실히 물보다는 진한가? 그가 사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베어포드는 아들에게 유난히 관심없는 아버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아내가 출산으로 죽은 쉬 그는 사업에만 몰두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쌍둥이 중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상속자까지 무심하게 방치해 놓고는 미국의 보통 아버지들이라면 누구나 하는 휴일의 야구놀이조차 아들과 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 아들의 목숨을 구해 내기 위해 못할 짓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뭐, 죄책감이라면 그것도 좋겠지만. “사장님?” “일단 주변을 훑어봐. 한 팀은 엘리스 버크를 주시하고. 뭔가 밟히겠지.” “알겠습니다.” 최고급 가죽시트에 군살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는 단단한 근육질의 장신을 기대고 앉아 있는 제이슨의 겉모습은 일견 한가하고 여유로운 듯 보였지만 맥스는 눈앞의 이 남자가 어떤 사내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제 겨우 갓 스물 살을 넘긴, 남자로선 아직 어리다고까지 할 수 있는 나이, 심지어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연하인 그였다. 그러나 한 땀 한 땀이 디자이너의 심혈로 재단된 검은 양복에 자연스럽게 감싸인 제이슨 호크의 몸에서 성숙치 못한 연륜이 암시하는 빈틈은 찾아 볼 수조차 없었다. 연륜이라… 하긴 시간의 길이가 인간의 경험을 한정짓지는 못한다. 입으로는 다급하게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도 맥스는 머리 한쪽으로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자신의 상사이자 주인인 이 사내가 지나온 과거의 편린들을 그나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지금 그가 얼마나 위험하고 살벌한 길을 헤쳐나가고 있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자신이 어떻게 가히 그보다 나이를 조금 더 먹었다는 이유로 주제를 모르고 덤빌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럼 우리도 슬슬 움직여볼까?” 제이슨의 명령이 떨어졌다. 푸른 섬광처럼 일렁이는 눈빛은 싸늘하게 얼어붙어 평범한 심장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할 만큼 그를 비인간적으로 비추어내고 있었다. “아, 네.” 맥스는 정신을 차려 반사적으로 대답을 한 뒤 먹잇감을 발견한 날카로운 육시동물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제이슨의 눈길에서 서둘러 벗어났다. “조금만 …참아.” 끊어질 듯 이어지는 쉰 목소리는 아직 어린아이의 음성이었다. 이제 겨우 열둘이나 되었을까? 자그마한 아이는 악취가 진동하는 쓰레기 더미 뒤에 최대한 등을 낮춘 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낯선 그림자라도 비칠라치면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 경계심으로 신경이 잔뜩 곤두선 예민한 고양이처럼. 파랗게 굳은 아이의 얼굴에는 어린아이의 천진함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 또래 아이들이 으레 지니고 있어야 할 순수와 세상에 대한 믿음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의와 분노만이 번득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가늘고 마른 팔에 예닐곱 살 정도의 금발 사내아이를 안고 연신 소리를 죽여가며 그를 달래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제길! 내가 어쩌자고 이 성가신 일을 자청한 거지? 재희는 자신의 우발적이고 어리석은 행동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혀를 찼다. 평소대로 쓸데없이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철칙을 지켰다면 지금쯤 자신은 초라하지만 깨끗한 침대에서 편안한 잠을 청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잠은커녕, 손발은 물론이고 심장조차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 혹독하고 매서운 뉴욕의 겨울밤도 모자라 바람을 막아주는 것이라곤 기껏 지저분한 낙서와 더러운 오물들로 얼룩진 좁은 골목의 초라한 벽돌더미뿐인 신세라니. 하지만 당장은 지옥에서 금방 비어져 나온 듯한 황폐한 풍경의 이 한쪽 모서리만이 재희와 이름도 모르는 이 꼬마를 지켜주는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문득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재희의 얼굴을 건드렸다. 제 딴엔 걱정과 염려를 담은 간절한 몸짓이었지만 잔뜩 겁에 질린 떨리는 손끝엔 체온이라곤 남아 있지 않았다. 재희는 품안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마지못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 때문이 아니야!” 그래, 다 내가 저지른 일이지. 아이답지 않은 단호한 힘으로 이를 꽉 다물고 재희는 사내아이를 더 세게 껴안았다. 조금이라도 서로의 체온이 빠져나가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차고 세일에서 운 좋게 구입한 양가죽 점퍼도 맹렬한 추위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이제 가만있어. 여기서 그놈에게 들키면 정말 끝장이야.” 꼬마는 말귀를 알아들은 듯 바들거리는 조그만 입술을 아플 때까지 깨물었다. 마치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고 숨을 죽이는 것만이 그가 재희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어둡고 축축한 거리는 온갖 위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약과 알콜에 찌든 중독자들, 살인이나 강도짓을 밥먹듯이 해치우는 범죄자들, 그리고 떠돌이 부랑자들에 정신병자들까지… 세상의 모든 탈락자들은 마치 이정표라도 세워진 양 자연스럽게 이 거리고 들어와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았다. 재희는 걸음마를 떼어놓을 때부터 뉴욕 뒷골목의 밤거리가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한지를 알았고 동시에 살아남는 기슬을 배워야만했다. 꼬마가 잠잠해지자 재희는 차가운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살갗을 쿡쿡 찌르는 통증을 억누르느라 미간을 찡그렸다. 빌어먹을, 결국 동상에 걸린 모양이군. 재희는 시니컬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사실 동상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얼어죽지 않는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날이 밝기만 하면 이 지겨운 녀석을 경찰에 넘겨주고 이젠 자신의 주치의나 다름없는 늙은 사이비 의사 영감을 찾아 치료도 할 수 있었다. 술 마실 돈만 쥐여주면 뇌수술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그 노인네는 알콜중독 때문에 의사면허를 파기당했으면서도 결코 술을 끊지 못했고 이제 메스를 잡기에도 터무니없이 떨리는 양손을 다시 술로 달랬다. 하지만 유능한 외과의였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노인은 사실 솜씨가 꽤나 좋았다. 덕분에 의료보험도 없고 가진 돈은 더 없는 이 지역 사람들은 정식 병원 대신 늙은 주정뱅이 의사의 초라하고 볼품없는 진료실을 더 자주 찾곤 했다. 비록 그조차도 한때 재희로선 꿈도 못꿀 사치였지만. 조금만 있으면 새벽이었다. 재희는 추위와 긴장, 고통으로 감각조차 느낄 수 없는 굳은 몸을 더 더욱 웅크리며 골목의 입구 주의를 희미하게 물들이고 있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차가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보도 위엔 근처의 쓰레기와 나무 조각들을 모아 부랑자들이 모닥불을 지피고 있었다. 작은 양철통에서 타닥 소리를 내며 따뜻하게 타오르는 불꽃. 겨울밤의 쓰라린 얘기를 물리치기엔 턱없이 미약한 열기였지만 지금 그와 꼬마의 전신을 칼로 에는 듯한 이 오한과 한기를 우선이나마 달래줄 수는 있으리라. 만약 가까이 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 겨울 매춘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던 그의 엄마가 술에 만취한 채 길거리에서 얼어죽었다. 그녀는 소위 영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밤새 뜬눈으로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재희는 영문도 모른 채 다음날 오후, 엄마와 살던 낡고 더러운 아파트에서 쫓겨났다. 오직 돈만이 관심사였던 탐욕스런 집주인에게는 재희가 얼마나 어린지,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지 하는것에 대한 염려 따윈 눈곱만치도 없었다. 오히려 집세가 밀렸다는 이유로 재희가 그로부터 건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입고 있던 옷가지가 유일했다. 그것도 더 이상 쓸모가 없을 만큼 닳아 빠진 것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도 없이 알몸으로 눈덮인 골목으로 내몰렸을지도 모른다. 할렘에서 동사한 시체는 일상의 일들이었다. 사회복지당국은 어린 재희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고 또한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가여운 백인 아이들을 돌보고 입양하는라 너무 바빴다. 비록 형편없으나마 최소한의 보호막마저 사라진 의지할 데 없는 한국계의 한 작은 아이는 오직 살아남기 위해 낮에는 행인들에게 구걸을 하고 밤에는 얼어죽거나 폭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인적이 드문 하수도나 지하도 안에서 최대한 몸을 숨기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것은 본능이었다. 질기도록 강한 본능. 재희는 왜 자신이 죽지도 못하고 이런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벌이가 없는 날은 쓰레기통을 뒤지고 그러다 누군가 내다버린 썩은 빵이라도 건지는 날엔 너무 굶주려 쥐어 짜이듯 비틀리는 위장 안으로 그 빵을 감지덕지 밀어넣었다. 그러면서 저도 모르게 눈동자를 채우는 눈물을 스스로 혐오하며 거칠게 닦아버렸다. 사는 것이 우선이었다. 재희가 아는 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을 버린 엄마에게도 세상에게도 그리고 이 끔찍한 장소에 자신을 존재케 한, 기억조차 없는 아버지란 인간에게도 … 그들 없이도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만이 생의 유일한 가치였다. 굶주린 가난과 노출된 폭력은 인간을 빨리 성숙시킨다. 재희는 여덟 살이 채 못 되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주머니를 재빠르게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또 들키기 전에 그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는지를 눈치껏 습득하고 깨우쳤다. 도둑질에고 재능이란 것이 있다면 재희는 천재의 단계를 지나 거의 신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자신의 어린 나이 역시 이번에는 도움이 되었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의 허리춤에도 미치지 못하는 조그만 검은 머리의 꼬마가 귀신도 탄복할 만한 솜씨를 가졌다고는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엔 몇 번인간 경찰들이 좇아오기도 했지만 재희는 그때 이미 미로 같은 할렘가의 골목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리고 차츰 그의 솜씨가 진보하자 그나마 이런 숨바꼭질조차도 사라졌다. 그 후부터 쓰레기통을 뒤질 필요는 없어졌다. 하찮은 속임수 몇 가지를 동원해 목숨의 위협 없이 등을 대고 몸을 누일 수 있는 허름한 방도 하나 얻었다. 아이를 혼자 두고 매춘부 일을 나가는 여자들이 허다했기 때문에 주인은 별다른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이 동네 대부분이 그렇듯 계약서고 사인이고 필요없이 선불로 지급되는 집세만 꼬박꼬박 나오면 집주인은 방을 들어다볼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거리의 떠돌이들을 모아 조직적으로 행인의 주머니를 터는 소매치기 집단이나 갱단의 졸개들만은 조심해야 한다. 그들의 눈에 뜨여 자칫 끌려가기라도 하는 날엔 빠져나오기가 여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재희는 주위에서 그런 녀석들을 신물나게 보았고 사실 그것이 이 거리의 생존방식이기도 했다. 매일같이 일을 나가고 혹사를 당하지만 정작 굶주린 배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학대받는 아이들을 스쳐가며 재희는 그런 불운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던 자신의 재능과 약삭빠름에 감사했다. 그렇게 그럭저럭 살 만했다. 날마다 조금이라도 안전하고 따뜻한 잠자리를 찾아 더 이상 거리를 배회하지 않아도 되었고 밤이면 근처 교회의 도서관에서 빌려온 좋아하는 책도 실컷 읽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조만간 사업에 투자할 자금도 목표에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었다. 언제까지고 불법적인 일에 위험을 걸고 쫓겨다니는 생을 살고 싶지는 않았다. 재희는 노력과 그에 비례한 조금의 행운만 따라준다면 합법적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젠장! 따라서 애초부터 이런 성가신 일에 휩쓸리는 것은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며칠 전 엘리스 버크가 한밤중에 차 트렁크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내는 모습을 창문으로 엿보지만 않았더라도 찬찬히 미래의 계획을 점검하며 주식투자에 관한 법률서적을 오늘 안에 마저 독파했을 텐데. 그렇지만 뭐에 씌었는지 재희는 호기심과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엘리스의 행동에 그만 말려들었고 그가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즉시 일을 벌이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엘리스의 방안에 몰래 침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머리 속으로 그가 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대략 어림잡아 계산하며 재희는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거실로 소리없이 들어갔다. 한눈에 들어오는 접은 방 안은 난파선처럼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군데군데 먹다 남은 음식물과 음료수 병들이 굴러다니고 낡아서 구멍이 생긴 카펫은 먼지투성이였다. 물론 엘리스 같은 사내가 뭐 그리 탁월한 미적 감각을 소유했으리라고 믿어본 적은 없지만 이 꼴을 보아하니 최소한의 정리능력도 없는 게 분명했다. 하긴 이 바닥에서 정리정돈을 찾는 자신이 이상한 인간 축에 들 것이다. 상자는 아수라장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거기서 재희는 잠깐 망설였다.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는 벌써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원래의 자신이라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상자를 무시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잠이나 청해야 옳았다. 엘리스가 누구를 납치해 상자 안에 가둬놓았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자신의 현실만은 직시하며 살아가기에도 재희는 충분히 바쁜 인간이었으니까. 그러나 상자를 채운 커다란 열쇠에 결국 손을 대버렸다. 망할. 그때의 상황이 떠오르자 재희는 꼬마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며 욕설을 삼켰다. 유리 그릇처럼 섬세한 작고 약한 아이. 손발이 묶인 채 퀴퀴한 악취가 나는 좁고 어두운 상자 안에 처박혀 있는 꼬마를 본 순간 재희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골칫거리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온통 헝클어져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어려웠지만 잘 악은 밀 빛깔을 띠고 있음이 틀림없을 부드러운 금색 곱슬머리와 커다랗게 쌍꺼풀진 녹색 눈동자는 언젠가 도서관의 화보에서 본 라파엘로의 천사상의 그것과도 같았다. 아이답지 않게 길고 곧은 팔다리는 귀족적이고 우아했다. 더구나 먼지와 얼룩으로 엉망이긴 해도 그 사이비 의사 영감이 늘상 내뱉는 돈 많은 동부 상류층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차림새까지 어느 한곳 비싸 보이지 않는 데가 없는 아이였다. 이런 옷차림으로 애를 내보내니까 납치나 당하지. 세상엔 가진 것을 지나치게 자랑하는 인간들이 너무 넘쳐났다. 한심스러운 눈길로 애를 훑어보며 내린 결론이었지만 도저희 그냥 못 본 척 내버려두고 나올 수는 없었다. 만약 스스로에게 이유를 묻는다면 공포와 두려움에 마비된 아이의 녹색 눈동자에서 어처구니없게도 그가 누군가를 연상하고 말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아무런 예고 없이 세상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검은 머리칼의 초라하고 볼품없는 어떤 한 아이의 잔상을. 마침내 재희는 다소 거칠게 아이의 몸에 감긴 끈을 푸며 짜증스럽게 내뱉고 말았다. “조용히 해. 만약 조금이라도 시끄럽게 굴면 다시 상사 안에 처박아 버릴 테니까.”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는 말을 하지 못했다. 원래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필시 충격 때문일 테지만 아이는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듯 재희에게만 매달렸다. 경찰서에 신고하는 것은 별로 내키지가 않았다. 재희가 조직 갱단만큼이나 싫어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경찰 나부랭이들이었다. 만일 이런 애의 납치사건과 관련이 되기라도 하는 날엔 그의 신분 증명이 문제가 될 것이고, 출생 증명서조차 없는 재희 자신에게 자선을 베푼답시고 고아원에나 갖다 놓을 게 불을 보듯 훤했다. 그런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이 꼬마를 엘리스의 손에 다시 넘겨주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정말 그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재희는 경찰서 근처까지 함께 간 뒤 아이만 들여보낼 생각을 하고 일단 그곳을 빠져나오기로 했다. 꼬마를 껴안은 채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불안한 비상계단을 소리없이 내려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엘리스가 언제 모습을 나타낼지도 모르는데다가 이 구역의 밤거리엔 엘리스의 끄나풀 노릇을 하는 인간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심지어 순찰 경찰들 중에도 돈만주면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인간이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재희가 꼬마를 직접 경찰서 안에 들여보내려는 것도 기실 그 때문이기도 했다. 경찰서 안에서야 아이를 어쩌지 못할 테니. 다행히도 이 골목 안에 숨어들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지만 엘리스가 아파트에 돌아왔다면 금장 아이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테고 그렇다면 지금쯤 아이를 찾기 위해 근처를 수색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실패한 납치범답게 현명하게 꼬리를 감추든지. 재희는 엘리스버크가 후자의 길을 선택했길 절실히 소망했다. 어찌 됐든 아침만 되면 좀더 안전한 상태에서 일을 처리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찾으려고 어깨에서 힘을 빼며 피곤한 눈을 감았다. 아이는 조용했다. 추위는 여전했지만 이제 한두 시간만 더 있으면 해가 뜬다는 생각에 사방에서 엄습하는 냉기를 견디기가 조금 나아졌다. “잠들지 마, 얼어죽기 싫으면!” 무뚝뚝하게 경고를 하곤 아이의 얼굴을 자신의 점퍼 안으로 끌어들이던 재희의 손은 그러나 순식간에 경직됐다. 쓰레기 더미 위로 불쑥 솟아오른 험악한 그림자. 엘리스 버크였다! “드디어 찾았다! 이 망할 쥐새끼 같은 꼬마 놈!” 가장 최악의 상황이 그대로 벌어졌다. 전신으로 불길함을 내뿜으며 곰 같은 덩치의 사내가 단숨에 목덜미를 낚아챌 듯 울퉁불퉁한 손을 뻗어오자 재희의 눈은 초조감과 긴장으로 어둡게 물들었다. 혼자라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었다. 수없이 처했던 상황이니까. 그러나… “당장 그놈을 내놓지 못해!” 엘리스 버크의 씩씩대는 고함과 함께 재희는 아이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사정없이 그 거구의 사내를 향해 몸을 날렸다. 불시에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한 엘리스의 거구는 일순 균형을 잃고 쓰레기 더미 속으로 휘청했지만 곧바로 자세를 잡고 무시무시한 성질을 폭발시켰다. “감히 요 쥐새끼가!” “윽!” 순간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재희의 작은 몸이 힘없는 헝겊인형처럼 날아가 구석에 처박혔다. 핏물이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려 목덜미 안으로 사라졌다. “안 돼!” 동시에 찢어질 듯한 아이의 비명이 눅눅한 공기를 뒤흔들었다. 재희는 자신과 엘리스 중 누가 더 놀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들어본 아이의 음성은 형편없이 쉬어 있었고 귀에 거슬린 만큼 탁했지만 재희에겐 마치 기적의 소리처럼 들렸다. 뭐야, 꼬마 너 벙어리가 아니잖아. 제길! 쿡. 이 급박한 상황에서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힘을 주었다. 재희는 다시 필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일으켜 전력으로 엘리스 버크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근처 아이들보다 싸움 기술이 있다고 해도 신체적 열세와 힘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엘리스 버크는 군출신으로 격투에 일가견이 있는 사내였다. 엘리스 버크는 한 방에 나가떨어질 줄 알았던 비리비리한 꼬마 놈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자 머리끝까지 열이 뻗쳤다. 그의 부릅뜬 눈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 게 죽고 싶어 아예 환장을 했군!” 그의 주먹이 다시 쳐들렸다. “안 돼!” 오직 그 말만을 할 줄 아는 아이처럼 꼬마는 다시 결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극렬한 통증과 함께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재희의 귓가에 울렸다. 바닥으로 쓰러지기 전 재희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이의 공포에 찬 눈물이었다. “제…이!” 뭐야. 꼬마. 왜 울어? 아무리 기억을 되 짚어봐도 누군가 자신을 위해 울어주었던 기억은 재희에게 없었다. 걸핏하면 술에 취해 눈물을 쏟던 자신의 엄마도 그녀의 처지를 비관한 신세한탄이 이유였을 따름이다. 그러데 이름밖에는 아무것도 가르쳐준 게 없는 저 꼬마가 자신을 위해 울고 있었다. 그나마 제대로 된 이름도 아니었고 새겨들었을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었는데… 재희는 있는지도 몰랐던 심장의 한쪽 모서리가 심하게 아팠다. 한순간 육체적인 고통마자도 잊어버릴 만큼의 혼란이었다. 널 집에 데려다줘야 하는데… 길을 잃지 않게… 그리고 일단의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골목 안을 포위하고 접근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재희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사장님, 루이스 베어포드가 맞습니다.” 누군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이 재희의 감은 두 눈 위로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꼭 움켜쥐고 있는 조그만 손의 정체도. “이 아이는 어쩔까요? 루이스가 붙잡고 놓질 않는데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뒤이어 대답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재희가 처음 들어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감정이 배제된 음성이었다. 무서운 남자임에 틀림없었다.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인데도 본능적인 경계심이 들 만큼. “일단 데려가. 상황을 보아하니 우리 물건을 간수해 준 게 이 녀석인가 본데. 둘 다 차 안에 실어.” 데려간다고? 어딜? 재희는 납덩이처럼 느껴지는 몸을 움직이려고 애썼지만 미약한 신음을 흘리는 게 다였다. 또다시 그 차가운 목소리가 명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베어포드에게 연락해. 찾았다고.” “네, 사장님.” 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재희는 희미한 안개처럼 떠도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부질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어둠과 함께 끈질긴 고통이 사라졌다. 2장 섬뜩한 비명이 마른하늘을 찢는 번개처럼 넓은 저택 구석구석을 울렸다. 곧 여기저기서 불이 환하게 켜지는가 싶더니 소란스런 발걸음들이 한곳을 향해 분주히 몰려들었다. 벌써 며칠째 반복된 일과였다. “손대지 마!” “루이스!” “싫어! 싫다구!” 존 베어포드는 자다 말고 가운의 끈도 제대로 묶지 못한 채 허겁지겁 아들의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애들다운 물건과 장난감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는 넓은 실내에서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는 젊은 보모를 지나 그는 서둘러 사주식 침대로 다가갔다. 불안이 앞섰다. 잃어버린 줄 알았다가 겨우 찾아낸 아들이었다. “캐시, 무슨 일이야?” 캐시라 불린 이십대 후반의 여인은 제대로 된 도움은커녕 그보다 더 혼란스러워 보였다. “모, 모르겠습니다. 또 악몽을 꾼 모양인데 달래려고 하니까 손도 못 대게 몸부림을 쳐서…” “의사가 처방한 약이 있잖아!” “도무지 먹질 않으려고 하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역시 너무 젊은 여자를 뽑았던 것이 잘못이었다. 그래도 전문 교육을 받았다는 여자가! 존 베어포드는 내일 당장 나이 지긋하고 능력있는 새 보모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원래는 루이스가 납치당하고 홧김에 해고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집에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더구나 그녀의 잘못도 아닌데 너무 지나친 처사라고 생각해서 꾹 눌러참았었다. 또한 겨우 한고비의 시련을 넘긴 어린 아들에게 더 이상 낯선 사람을 만나지 않도록 배려해 주고 싶은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루이스에겐 이 여자보다 좀더 헌신적이고 자상한 보살핌을 쏟아줄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존 베어포드는 손을 저어 보모를 물러나게 했다. “얘야, 루이스?” 눈치를 살피며 놀라지 않도록 가만히 이름을 불렀다. “싫어! 오지마! 아무도 필요 없어!” 그러나 루이스는 막무가내로 고개를 흔들며 강하게 그를 거부했다. 아들이 돌아오고 나서 매일 이런 아들의 거절을 겪었지만 존 베어포드의 충격은 처음이나 오늘이나 다를 바 없었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언제나 자신의 포옹이나 손길을 기다리던 아이였다. 과거의 비극을 상기시키는 아들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 이리저리 핑계를 만들어 피했던 이는 외려 그가 아니었던가. 대체 납치당해 있던 그 끔찍한 시간 동안 무슨 일을 겪었기에… 존 베어포드는 자책과 공포에 짓눌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 루이스. 그건 그냥 못된 꿈이야. 다 끝났어. 넌 이제 안전해.” 부드럽게 아들을 을러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다가갈 수 없는 낭떠러지 저편에 서 있는 것만 같은 암담함이 그를 휩쓸었다. 어떻게 해야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제발 얘야, 더 이상 무서워할 것 없단다. 아빠가 전부…” “싫어! 만지지 마!” 엄청나게 격렬한 몸부림에 아들을 안으려던 존 베어포드의 팔이 움찔 떨어졌다. “루이스 …” 루이스는 아빠의 죄책감 어린 얼굴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을 건드리는 것은 더 더욱 참을 수가 없었다. 모두 그 무시무시한 남자의 손길처럼 느껴져 오한이 전신을 삼켰던 것이다. 아빠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예전에 공허하게 약속했던 수많은 다른 거짓말들처럼. 야구경기 관람도. 공놀이도, 독립 기념일 불꽃놀이도 아빠는 한 번도 그와 함께 보내지 않았다. 대신 비씨기만하고 싸늘하기 그지없는 커다란 선물 상자만이 그의 앞으로 배달되었을 뿐, 아빠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이 엄마와 형을 죽였기 때문에! “제이…” 그런데 검은 머리의 천사가 루이스를 구해 주었다. 캄캄한 어둠, 벌을 받아 죽는 거라고 생각했을 때 그가 나타나 손을 내밀고 안아주었다. 사람의 품안이 그렇게 따뜻한 줄은 몰랐었다. 얼굴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는데 하나도 춥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제이…” 어디로 간 거야? 방 안은 대낮처럼 밝고 따뜻했지만 악몽은 결코 가시질 않았다. 오직 한 사람만이 그를 이곳에서 끄집어내 줄 수 있었다. 제이를 봐야만 다시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없었다. 아빠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다 나으면 만날 수 있게 해줄겠다는 말뿐이었다. 거짓말! 또다시 거짓말이다. 대체 어른들은 그를 어디로 데려간 걸까. 루이스는 딱딱한 고동 속에 제 몸을 숨기는 게처럼 몸을 말고 외부와 자신을 차단했다. 하지만 울음소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많이 다쳤는데. 나 때문에… “루이스.” 피가 그렇게 많이, 자꾸만 자꾸만 흘렀는데… 죽은 걸까? 그래서 아빠도 보모도 아무도 그의 행방을 자신에게 가르쳐주지 않는 걸까? 그의 둥글게 말린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아냐! 안 죽었어. 아빠가 옆에서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것도 슬픈 눈동자에 염려가 가득한 것도 그의 의식 밖이었다. “제이, 제이는 어디 있어?” “루이스?” 존 베어포드는 주춤했다. “제이 데려와! 빨리! 갑자기 커다랗게 눈을 뜨며 아이답지 않은 무서운 기세로 노려보는 루이스 때문에 그는 당황했다. 떨리는 입술을 꽉 물고 사방이 적인 양 쏘아보는 전신에선 이젠 분노와 증오만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존 베어포드는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 아이가 정녕 그의 천사 같던 아들이란 말인가? 소심하고 숫기가 없어 언제나 수줍어하기만 하던? 출장에서 돌아오거나 퇴근을 하면 매번 숨어서 주위를 맴돌며 귀찮게 했던 그의 아들이란 말인가? 물론 전혀 이상이 없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곧 나아질 거라고만 믿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존 베어포드는 두꺼운 모포에 싸여 한마디 말도, 어떤 표정도 없이 자신에게 묵묵히 안기던 아들을 떠올렸다. 그저 쇼크 때문이려니 했는데… “제이한테 갈 거야! 다른 사람은 아무도 필요 없어!” 정신이 들고 나선 줄곧 저 이름만 부르고 있는 것이다. “얘야” 그도 호크에게서 그간의 정황을 짤막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만간 상황이 진정되면 그 고마운 아이에게 제대로 감사를 표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루이스와 있었던 시간은 고작 몇 시간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왠지 모르지만 존 베어포드는 지금은 무작정 아들과 그 아이를 만나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며칠째 둘러대 보았지만 루이스가 그 아이를 찾는 횟수는 점점 늘어가기만했다. “말하지 않았니. 루이스. 그 앤 지금 아파서 치료를 받고 있단다. 너처럼 말이야. 건강해지면 데려오도록 하마. 그러니 너도 어서 잘 자고 잘 먹고 해서 빨리 나아야지? 그래야 제이도 만나고…” “싫어! 만날 거야! 데려다 줘, 어서!” 부들부들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가는 몸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져 나갈 듯했다. “제이한테 갈 거야.” 쉴새없이 딸꾹질과 기침을 반복하며 울어대는 아들의 모습에 존 베어포드는 스물스물 두려움이 일었다. 아이의 이마는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고 입술은 죽은 사람의 것처럼 새파랬다. 그는 막힌 목소리로 겨우 지시했다. “어서 가서 당장 의사를 불러오게.” 그제야 멀거니 구경만 하고 서 있다 할 일을 찾은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나갔다. “자, 착하지. 루이스. 어서 눕자. 곧 선생님이 오실 거야. 그럼 금방 무섭지 않게…” 손수 이불보를 잡고 좁 베어포드는 아들을 눕히려고 애썼다. 하지만 루이스는 난폭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주인님!” 베어포드의 뺨에 길다란 생채기가 생기더니 곧 이어 빨간 핏물이 점점이 배어났다. 그는 아들이 놀라고 겁낼까 봐 얼른 상처를 가렸지만 잠시 후 아들의 눈을 보고는 외려 그가 경악하고 말았다. 어느새 눈물을 그친 루이스의 얼굴엔 자신의 행동에 대한 티끌만큼의 죄책감이나 미안함도 묻어나오고 있지 않았다. “자고 싶지 않아.” “루이스.” “제이 보고 싶어!” 루이스는 고장난 녹음기처럼 고집스럽게 한 사람만을 언급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필요 없어. 아빠도.” 아이의 생떼에 불과한 선언에 모골이 송연해졌다면 웃을 수 있겠는가. 그 말을 끝으로 루이스는 결코 그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뒤늦게서야 존 베어포드는 어린 아들에게 자신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나 그의 등을 쫓던 애처로운 눈동자는 이제 없었다. 불안에 떨며 깨어난 아들이 찾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정체도 뚜렷하지 않은 낯선 이방인이었다. 누구의 탓을 할 수도 없었다. 이건 모두 그가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불행을 제 때 덮지 못하고 미련을 부린 그의 잘못이었다. 마침내 존 베어포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침대에서 힘없이 일어났다. “모두 잠자리도 돌아가고 보모 한 사람만 남아주게.” “어떻게 하시려고…” “원하는 사람을 찾아다 줘야지.” 문을 나서는 그의 뒤에서 루이스가 슥 고개를 돌렸다. 겨우 밖으로 나온 존 베어포드는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복도의 벽에 전신을 기댔다. 하느님, 제가 무슨 짓을 한 것입니까!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존 베어포드는 괴로움에 탄식했다. 기억 속에서 늘 사랑스럽기만 하던 아내의 표정이 자신의 고통만 돌보느라 지금까지 그들의 어린 아들을 방치해 두었던 남편을 나무라는 듯 슬프게 변했다. 루이스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야 겨우 오랜 세월 눈감고 있던 진실을 보았지만 너무 오래 방황한 탓에 어린 아들은 더 이상 그를 기다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제발, 여보. 내가 잘못했어. 난, 당신을 닮은 얼굴을 보는 게 괴로웠을 따름이야.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알고 있었다. 그가 모두 망쳐버렸다는 것을. 하지만 존 베어포드에게 남은 것은 저 아이뿐이었다. 부탁해, 여보. 제발 도와줘! 그러나 수많은 그림과 화려한 골동품이 늘어선 회랑 안에선 그의 기도를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새벽에 잠긴 사방은 흐릿한 빛이 다였다. 그 사이로 어둠에 익숙한 듯한 조그만 그림자가 벽에 걸린 그림 위로 비쳤다. 동작이 불편한 듯 다소 둔한 움직임이었다. “이 집은 약간 절차가 어렵단다. 꼬마.” 파티오로 연결된 창가의 걸쇠를 만지던 손이 정지했다. 재희는 무심히 몸을 돌려 언제부턴가 같은 실내에 있는 남자의 날렵한 덩치를 바라보았다. 램프의 불빛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다 해도 재희는 그를 알아보았다. 본 적도 없는 남자지만 그 음성만은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당당한 분위기로 보아 이곳에서의 위치가 어찌 된다는 것쯤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들어올 때도 물론 힘들지만 나갈 때는 더 까다롭지. 내 허락 없이는 바람 한 점 새어나갈 수 없거든.더구나 밤 외출하기엔 좀 늦은 시각이 아닌가 싶은데.” 재희의 눈썹이 살짝 징그려졌다. “이만 갈 거야.” 이 남자를 상대로 길게 말씨름할 이유도 없거니와 그럴 기운도 없었다. 이 불편한 집과 이번 일에서 될 수 있는 한 빨리 발을 빼고 싶은 마음만 아니었다면 한 사흘간은 꼼짝없이 침대 신세만 지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으니까. “간다고?” “보내줘. 어차피 나하고는 더 이상 볼일도 없잖아.” 자신이 깨어나자 이미 아이는 없었다. 이름이 루이스라고 했던가. 재희와 잠시 운명을 함께했던 그는 작별인사도 없이 원래의 자기 자리고 다시 돌아갔다. 아마 앞으로는 절대 마주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편이 재희에게도 편했다. 싸구려 감상 따위는 인생을 피곤하게 만들 뿐이다. 맥스라고 했던 남자가 루이스의 소식을 전해 주었을 때 재희는 그와 연관되었던 페이지를 깨끗이 접었다. 어차피 다른 부류의 인생이었다. 나중에 자신이 돈을 얼마나 많이 벌든- 반드시 그렇게 되겠지만.- 얼마나 잘 살게 되든 그 녀석과 교차할 지점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야 어떻든 상관없지만…” 남자가 한 발짝 나서며 눈으로 재희를 가리켰다. “그 꼴을 해 가지곤 좀 무리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서야 어디 이집 현관이라도 제대로 걸아나갈 수 있겠어?” 그의 말에 재희는 새삼 부러진 어깨와 팔, 갈비뼈를 감싸고 있는 깁스와 보호대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에도 반창고가 여러 군데 붙어있었다. 성한 데가 별로 없군. 엘리스 버크. 그 개자식의 솜씨다웠다. 그렇다고 이 정도로 엄살 떨 생각은 없었다. 이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겪었다. 그나마 다리는 멀쩡하니 다행 아닌가. “그건 내 사정이니까 댁이 적정하지 않아도 좋아.” 그가 조용히 재희를 훑어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에 재희의 등줄기로 본능적이 긴장감이 어렸다. 이런 남자는 엘리스 버크 같은 인간보다 실제도 몇 십 배나 더 다루기 무서운 인간이었다. “고슴도치군. 그나마 의지 하나만큼은 인정해 주지.” “쓸데없이 말 길어지는 거 질색이야. 그만 보내주면 고맙겠어.” 차갑게 내뱉자 남자가 속으로 웃고 있다는 기색이 들었다. 동시에 저 남자와 웃음은 도무지 친할 것 같지 않다는 의심도 강하게 들었지만 재희는 무시해 버렸다. “굳이 그러겠다면. 맥스.” “네, 사장님.” 정시에 딱 떨어지는 시계추처럼 재희도 알고 있는 남자가 이름을 불리기 무섭게 문 앞에 나타났다. 마치 잘 훈련된 경비견을 보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몇 시인데, 잠도 안 자는 건가. 저런 인간 같지 않은 주인아래 있으려면 고용인도 비슷한 기준을 요구받는 것인가 보다. “데려다주게.” “네, 알겠습니다.” 왠지 모르지만 맥스란 남자가 약간 망설이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워낙 정중한 표정이라 제대로 잡아내긴 힘들었지만, 뭔가 재희가 모르는 질문과 대답이 그들 사이게 짧게 오갔다. 하지만 일방적인 의사전달은 순식간에 끝이 나고 주인임에 확실한 쪽이 재희를 돌아보았다. “차까지 사양은 안 하겠지?” “편하고 안전한 길이 있는데 돌아가는 건 멍청이나 할 짓이지. 더구나 난 필요 이상으로 현재의 능력을 과신하는 인간도 아니야.” 재희가 깁스를 흘끗 일별하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런 자신의 생존규칙을 어기도 평생에 선한 일 한 번 하고 얻은 꼴이 이 모양이라니. “지금 널 보자 하니 그렇게 철저한 원칙은 아니었나 보군.” 재희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나직한 비웃음이었다. 자신이라면 애초에 인간적이고 나약한 싹 따윈 키우지도 않는다는 의미처럼 들렸다. 뭐, 이 남자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맞아.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해.” 재희는 싸늘하게 얼굴을 굳히며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성을 따르지 않고 충동에 져서 남은 게 무언가. 결국 상처와 후회뿐이다. 그 녀석이 집에 돌아가서 다행이지만 자신이 아니었더라도 조만간 눈앞의 남자가 구해 냈을 것이 자명했다. 괜히 끼어들어 자신이 피를 흘리지 않았어도 되는 일이었다. 제길! “아, 그리고 보니 기억이 나는데.” 맥스를 따라 방안을 나서던 재희는 그의 목소리에 깔리는 미묘한 톤에 발길을 붙잡혔다. “네가 구해 준 꼬마 말이야.” 어깨가 저릿 울렸지만 무시했다. “그런데?” “제이라는 이름만 찾으면서 히스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군. 식사도 물도 다 거부하고 울기만 한다지.” 재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대로 두면 정시놔 치료를 받을 수밖에.” “돈 많은 인간들이 여가용으로 늘 하는 짓거리들 아닌가?” 더구나 납치까지 당한 아이라면 당연히 의사의 정신감정을 거칠것이다. 돈이 있다면 무슨 방법이든 쓰겠지. 재희 자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더 이상은 안 끌려가. 꼬마야. 어림없어! “꼬마의 부친이 널 찾고 있어.” 갑자기 침대에서 빠져나온 게 확실히 무리였나 보다. 컨디션이 형편없이 나빠지기 전에 그만 돌아가고 싶었다. “아들을 좀 봐줬으면 한다더군.” “그쪽 사정이야. 거기까지 내가 들어줘야 하나? 내 일은 끝났어. 깨끗이 손 털었다구.” “정 그렇다면.” “그럼 잘 있으슈.” 재희가 귀찮은 벌레를 떨궈내듯 나가버리자 맥스는 급히 제이슨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제이슨은 미미하게 손을 저었다. “알아서 하게 놔둬.” “하지만 베어포드는…” “저 꼬마 말대로 그건 그 남자 사정이야. 그리고, 보면 모르겠나? 저건 아무도 못 구부려.” 미련없다는 듯 존 베어포드의 요청을 가볍게 묵살해 버리는 제이슨에게는 놀랄 것도 없지만 재희의 태도는 맥스에게 뜻밖이었다. 자기의 목숨을 걸고 구해 낸 아이가 아닌가. 적어도 그동안의 안부나 건강 정도는 걱정되지 않을까. 그러나 치료를 마치고 마취에서 깨어난 재희는 딱 한마디, 아이가 돌아갔는지만을 묻고는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이름조차도. 참다못한 맥스가 단편적인 소식을 알려주었건만 조그마한 열의조차 태우지 않았다. 아직 고통과 약 기운으로 의식이 멍해서 그러려니했는데 다시 돌이켜보이니 아무래도 원래의 성격 탓인 모양이다. 사실 맥스는 어는 정도 어이가 없었다. 방금 전의 것이 어른과 아이의 대화란 것도 믿기 힘들었지만 제이슨 호크를 상대로 저토록 아무렇지 않게 대적해 내는 인간이 있었다니. 지금까지 제이슨이 뿜어내는 중압감 앞에서 납작하게 짜부러들지 않고 버텨낸 인물이 과연 얼마나 있었던가? 그것도 고작 열 살 안팎의 계집아이가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심장이 돌로 만들어졌다 해도 루이스의 상태를 들으면 동요 정도는 생겨야 하는 것 아닌가? 더구나 그렇게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때를 생각하면 말이다. 맥스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사람의 십 년 후가 무서워진 건 두 번째였다. 어쨌든 제이슨의 명령이 있었으니 내키지 않아도 재희를 바래다주어야 했다. 맥스는 걸음을 옮겼다. “빌어먹을!” 그는 절묘한 위치에서 하마터면 정면으로 충돌한 뻔한 작은 체구를 간신히 피했다. 재희가 검은 눈을 싸늘하게 번득이며 다시 돌아와있었다. 쉴새없이 욕설을 삼키며. “당신 말이야.” 재희는 우뚝 서서 제이슨을 노려보았다. “잊은 거라도?” 재희의 험한 눈초리에도 아랑곳없이 제이슨은 몸을 돌린 채 질문을 던졌다. “나쁜 놈이지?” “아니라고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질이 나빠. 최악으로.” “너한테 들으니 정말 칭찬 같군. 꼬마, 너도 이 방면으론 그 나이게 이미 한 경지를 쌓은 것 같은데 말이지.” 빙글거림인가? 맥스는 제이슨의 음성에 웃음기가 담겨 있다고는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내놔!” 어느새 무표정하게 얼굴을 굳힌 재희가 잇새로 말을 이었다. “뭘?” “그 녀석 주소 말이야.” 제이슨은 웃었다. “맥스.” “네, 사장님.” 그는 화들짝 급히 나섰다. “데려다주게.” “알겠습니다.” “제이!” 존 베어포드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가시를 세우고 있던 자신의 아들이 침대에서 구르듯 일어나 자신의 몸집보다 조금 더 큰 아이의 품을 무슨 성채인 양 안겨드는 광경을 착잡한 심정으로지켜보았다. “무사했어.” “꼬마…” 재희는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가 버리고 싶었다. 모든 것이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이 아이도, 자신이 서 있는 이곳도. 전부 비현실적인 세상에 갑자기 몸을 디민 꼴이었다. 여기 오기로 결정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재희는 가장 유죄라고 생각되어지는 남자에게 다시 욕설을 퍼부었다. “무사할 거라고 믿었어. 그래도 혹시 제이가 죽었을까 봐 나…” 루이스의 손이 재희의 등을 파고들었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알았어, 괜찮아.” 일부러 루이스의 머리카락-이제는 너무도 깨끗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을 되는 대로 흩트리며 재희는 열이 올라 뜨거운 몸을 망설이듯 성한 팔로 끌어안았다. “많이 다쳤어, 제이?” “별거 아니야.” 루이스가 훌쩍였다. “이젠 아무 데도 가지마. 제이…” 재희는 콱 잠기는 목을 애써 돋우며 차오르는 감정을 죽였다. 갑자기 팔 안의 조그만 무게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다. 3장 캐나다 위슬러, 15년 후 흰 담요 같은 새하얀 눈의 능선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를 봐도 눈과 바람. 그리고 하늘만이 맞닿아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 한 끝점 사방이 눈으로 덮인 까마득한 절벽의 경사면을 바람처럼 활강하고 있는 한 사람의 스키어. 날렵한 선회와 회전, 엄청난 속도 속에서 공기마저 숨을 죽인 이상의 자유를 한껏 즐기듯 푸른 스키 웨어를 걸친 스키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위를 뛰어오르고 수직에 가까운 낭떠러지를 날아올랐다. 보는 사람의 숨을 멎게 할 정도로 무모하다 싶은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 솜씨는 거의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정확했다. 티 하나 없는 설백의 긴 줄을 남기며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스키어의 모습은 생명을 담보로 위험한 모험을 즐기는 엑스트리머가 아니라 마치 무대 위를 누비는 무용수의 그것처럼 우아해 보였다.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었다. 햇살도, 눈도. 섬뜩할 만큼 시린 하늘과 눈부신 태양 속에서 눈은 마치 갓 세공한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며 이 자연의 고요를 침범한 인간의 뒤를 따라가 세차게 부서져갔다. 한순간 산은 이 매력적인 인간의 자태를 소유하기로 마음먹었다는 듯 가볍게 손을 휘저었고 작은 붕괴로 시작된 눈의 변덕은 곧 이어 흰 폭우처럼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좋아, 완벽해! 일촉즉발의 위기상황, 그러나 스키어는 새햐얀 이를 드러내 좀처럼 조이지 않는 만족의 미소를 떠올리고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날카로운 바위를 차고 나가 솟아오르는 한 마리 새처럼 허공을 향해 비상했다.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흰 눈꽃들이 이리저리 그 뒤를 쫓았다. 영국 런던 늦었군. 쯧, 또 한바탕 잔소리를 듣겠는데. 야생마처럼 으르렁거리는 페라리의 브레이크를 거칠게 밟으며 재희는 벌써 한참 그러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자세의 눈부신 미남을 흘낏 응시했다. 늘씬한 장신에 그린 듯한 외모, 저녁의 미풍에 살짝 흐트러진 긴 금발의 남자는 서 있는 그대로가 훌륭한 미술품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열심히 곁눈질하며 오페라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새삼스런 일은 아니었다. 오늘 저녁 왕립 오페라단의 공연을 보기 위해 코벤크 가든을 찾은 유명인사들의 화려함도 루이스 베어포드의 저 타락천사 같은 아름다움에 비하면 빛이 바래지니까. “재희!” 차에서 한 발짝 발을 내딛기도 전에 앞뒤 다 거두절미한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음성이 재희의 귓가를 자극했다. “루이스 … 됐어.” 그가 내민 손을 습관처럼 거절하며 재희는 청보라 빛이 도는 긴 실크 드레스를 거추장스럽다는 표정으로 밀쳐냈다. 그녀는 아직도 여자로서 치장을 하는 이 모든 방식들이 귀찮고 성가시게만 느껴졌다. 공들여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걸치고, 그도 모자라 발도 불편한 구두를 신은 채 장시간 서 있어야 하는 일은 중노동이나 다름없었다. 차라리 수십 킬로가 나가는 배낭을 지고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편이 낫지. 재희는 벌써부터 조여오기 시작하는 하이힐을 벗어 던져버리고 싶어 우울해졌다. 하지만 그랬다간 모처럼 허락한 루이스의 청을 완전히 망쳐버리는 꼴이 될 것이다. 비록 그녀가 이 고난의 시간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원인이었지만 이런 사소한 일로 그를 상심케 했다간 그 뒷감당이 더 어려우리란 것은 오랜 경험으로 체득한 사실이었다. “이런 차림으로 직접 운전을 한 거야? 그러게 내가 데리러 간다고…” 그녀를 바라보는 루이스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찌푸러졌다. “그건 네 데이트 상대에게나 해. 논문 마감이 얼마 안 남아서 바쁘다는 녀석이 난데없이 오페라를 보자고 생떼를 쓰면 어쩌자는 거야? 그것도 꼭 정장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를 골라서…” 재희의 명료하고 단순한 대답은 늘 그렇듯 루이스를 서글프게 했다. 그래야만 네가 그나마 여자의 모습으로 내 눈앞에 있어주니까. 루이스의 눈동자가 말없이 대꾸했다. 자신의 에스코트를 항상 거절하는 재희가 매번 서운하고 불만스럽지만 자신이 남자로서 그녀에게 인식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이 여자에겐 그랬다.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같은 남자의 눈에도 가장 완벽한 남성의 전형처럼 보이는 그 기분 나쁜 제이슨 호크조차 그녀에게는 이성의 대상이 아니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엔 타인보다는 훨씬 신한 감정의 교류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건 루이스가 십대 시절 애를 태우며 염려했던 사랑의 종류는 아니었다. 그것은 다행한 일인 동시에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만약 루이스가 객관적인 입장으로만 본다면 그들만큼 어울리는 한 쌍을 찾기란 불가능했으니까. 두 사람이 가진 거침없는 추진력, 지적인 탐구욕, 더불어 삶에 대한 치열한 도전 의식까지 그들은 꼭 한가지에서 동시에 자라난 사람들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들의 혈관에 흐르는 피의 일부분까지도 공통분모는 겹쳐 있었다. 루이스는 과거에 재희가 지나가듯 한 얘기에서 제이슨이 한국계 이탈리아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그들의 오모에서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었던 의문스런 일치감을 이해했다. 언뜻 봐서는 동양인의 섬세한 골격을 그대로 간직한 재희에 비해 라틴계 혈통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강한 제이슨의 외모에서는 기실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저 안에 내재된 어떤 닮음이랄까. 그들이 함께 서 있을 때면 루이스는 자신만 이방인 같다는 불유쾌한 상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제이슨 호크의 도움으로 그와 재희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대가가 있는 사업상의 결정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철이 들자마자 루이스는 그에게 생명을 빚졌다는 고마움 같은 건 지워버렸다. 자신의 부친인 존 베어포드는 아들을 찾는 대신 그의 회사가 가지고 있던 사우디의 이권을 제이슨의 다국적 기업인 J.H 인터내셔널에게 고스란히 넘겨주어야 했다. 결국 좀더 확실하게 표현하자면 제이슨 호크는 청부를 받은 해결사 노릇을 했던 것에 불과할 따름인 것이다. “아무튼 부탁이니까 루이스, 날 불러내고 싶으면 다음에는 편한 장소로 좀 해 줘. 특권의식에 가득 찬 사교계 사람들과 저녁 나절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이런 자리는 나하고 안 어울려.” 자신들에게 쏠리는 이목을 달가워하지 않는 재희의 낮은 불평이 그를 일깨우자 루이스는 무심코 이틀 내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일을 언급했다. “그렇게 편한 장소를 좋아하는 사람이 제대로 쉬지는 않고 캐나다에는 왜 또 가?” “루이스.” 왜 안 나오나 했지. 재희는 눈을 위로 굴리며 허공을 바라보았다. “경기 끝나자마자 위슬러까지 가서 그 엑스트림 활강인가 뭔가를 했다며? 그것도 혼자서!” 대체 이런 정보를 어디서 얻어내는지 모르겠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느라 옥스퍼드에 처박혀 있었던 녀석이. 재희는 남모르게 혀를 찼다. “안 했어. 그냥 짬이 나서 쉬러 간 참에 일반용 코스에서 가볍게 운동만 했을 뿐이야.”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부인하는 그녀를 루이스가 빈정거리듯 꼬집었다. “헬기까지 타고 올라가서 뛰어내리는 일반코스도 있어?” 젠장. 재희는 들리지 않는 한숨을 삼켰다. 루이스의 정보원들이 분명 위슬러의 별장 내에도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보고하는. 문제는 그것이 누구냐하는 것이었는데, 지난번 뉴욕의 아프트에선 가정부가 범인이었고 파리에선 운전기사, 로마에선 요리사, 이런 식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뇌물을 받고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루이스 베어포드의 백만 마력짜리 미소를 거절할 수 없었다 뿐이지. 재희는 어쩔 수 없이 실소를 머금었다. 이 녹색 눈의 덜 자라고 잘생긴 악동을 물리칠 수 없긴 자신도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번번이 루이스의 철없고 귀찮은 생떼를 감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다른 사람에게라면 어림도 없을 빈틈을 이 녀석에게만 허용하게 되는 것도 루이스가 그런 그녀를 너무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5년 전의 그날 밤. 그녀가 루이스의 집을 찾아간 이래 늘 그랬다. “하나도 안 위험하다니까. 차라리 네가 승마를 하다 네 애마한테 뒷발로 채일 확률이 훨씬 높지.” 재희는 담담하게 그를 달랬다. 루이스가 스키의 첫 글자만 들어도 알레르기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순전히 그녀 탓이었다. 그 역시 예전에는 스키를 즐겨 타곤 했었다. 어느날 재희가 스키를 신고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뛰어내리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그때부터 루이스는 그녀가 눈 근처에만 가도 신경질적으로 화를 냈다. “경주에 참가할 때도 비슷한 핑계를 대지.” 그의 눈에 짜증과 염려가 함께 묻어나자 재희는 따뜻하게 웃으며 그의 팔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걱정하지마, 알잖아. 난 부주의하게 굴다 아무 데서나 목을 부러뜨리는 얼간이 노릇은 안 해.” 아무리 루이스 그가 안달을 한다 해도 저 고집을 꺾을 수는 없으리라. 몇 년 전 그녀가 이름만으로도 악명 높은 파리-다카르랠리에 처음 참가했을 때에는 일주일 동안을 온갖 협박과 회유로 참가 취소를 종용했고 그 이후로도 목숨을 담보로 스릴을 즐기는 대부분의 경기때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라다녔지만 오히려 제풀에 나가떨어지고 만 것은 그였다. 루이스의 행동을 참다 못한 재희가 마지막 대응으로 결별을 입에 올렸던 것이다. 가끔 그 대단한 제이슨 호크마저 질려 하는 그녀의 냉담함을 잘 아는 그로선 재희의 선언을 단순한 협박으로 치부해 버릴 배짱이 없었다. 자신을 엘리스 버크의 그 비좁던 상자 안에서 끄집어낼 때부터 지금까지. 이 여잔 한번 내뱉은 말은 절대로 번복하는 법이 없었다. “제길.” 자신의 그 어떤 시도에도 그녀가 위험천만한 스포츠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결국 루이스는 욕설로 그의 패배를 마무리했다. 그게 직업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스페인에선 정말 아까웠어.” “그럴 때도 있는 법이지.” 재희는 카탈루니아에서의 불운을 가볍게 넘겼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래도 멋진 경기였어.” “고마워.” 재희가 별로 내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시하면서 루이스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갖다댔다. 이 정도 애정의 표시라도 그에게만은 대 놓고 거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그만 위안을 삼으면서. “조심하는 거 잊지 마. 나한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재희는 말없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고 루이스는 안타까운 열망이 어린 눈동자를 애써 잔자하게 가라앉혔다. 그러나 운명은 항상 예기치 않은 곳에서 갑자기 그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루이스 베어포드는 오래지 않아 억지로 재희를 설득해 오늘 이 장소에 오게 한 자신을 지독히 미워하게 되었다. 마커스 로웰은 영국 왕립 오페라단의 화려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는 무대를 무표정하고 따분한 시선으로 주시하며 자신의 손목에 감긴 시계의 바늘이 놓인 위치를 잠깐 확인했다. 그리고는 휴식을 알리는 막이 내려가자마자 오페라보다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데 더 관심이 있던 옆 좌석의 미녀를 미련없이 한 손으로 밀어냈다. “마커스?” 방 안에서 혼자 몇 번이고 철저한 연습을 통해 습득했을 허스키하고 자극적인 여자의 음성이 그를 불렀다. “전화를 써야겠소” “같이 갈까요?” 은근한 눈길로 열려다보는 이블린 칼턴의 눈빛에 노골적인 유혹의 빛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마커스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업상 통화요. 당신은 그동안 샴페인이나 드는 게 낮겠군.” “달링, 당신이 바쁜 사람이란 건 온 세상이 다 알지만 그래도 오늘 같은 날까지 꼭 그렇게 전화에 매달려 있어야 해요?” 이블린은 짐짓 교태로운 한숨을 가장해 그를 나무랐다. 정상적이 욕망이 있는 사내라면 은밀함이 담긴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커스는 나른함을 가장한 냉정한 눈길로 최대한 남자의 시선을 끌도록 고려해 만든 검은 드레스와 그에 걸맞는 여자의 요염한 곡선을 거리감 있게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바빴던 지난 한 달 동안 한계까지 쌓였던 정신적 욱체적 스트레스를 기꺼이 자진해서 해소시켜 줄 용의가 있는 이 여자는 미모뿐만 아니라 교양까지 갖춘, 도도하고 자부심 강한 영국 귀족 영양의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매일 헬스클럽을 드나들며 피나게 가꾼 모델 같은 늘씬한 몸매와 한 소대의 일류 미용사들이 가진 재주를 몽땅 동원해 열심히 다듬어놓은 흠잡을 데 없는 미모와 헤어스타일. 덧붙여 침대에서의 기교 역시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더 이상 이 여자에게서 아무런 매력도 발견할 수가 없다는 데 있었다. 마커스는 요즘 들어 부쩍 자신이 점점 나이들고 냉소적이 악당이 되어간다고 느꼈다. 하긴 로웰이란 이름이 업계에서 전지전능한 악마란 단어와 동일어가 된 것은 그리 짧은 기간도 아니었다. 언론들은 그를 식인 사자에 비유했고 주위에선 그가 인간의 감수성을 타고나지 못한 기형아나 다름없는 냉혈한이라는 이미지를 일부러 고수한다고 믿었다. 사실 일부는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기업들은 그의 이름만으로도 지레 겁을 먹고 지나친 경계를 하느라 오히려 약점을 노출하기 일쑤였고 주식시장이나 은행에서 로웰이란 철자는 바로 돈과 직결되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악명이 가져다주는 묵시적인 공격력을 적재적소에 알맞게 활용하는 것을 상당히 즐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겨우 서른넷의 나이에 보통 남자들이라면 눈을 번쩍 뜨고 군침을 흘릴 만큼 아름다운 여자를 지척에 두고도 침대로 데려가고 싶은 욕망은커녕 외려 지루함으로 미칠 지경인 자신의 신체 반응까지 흔쾌히 받아들인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인간이 되었지만 그래도 남자로서 최소한의 기본 욕구만은 남아 있다고 믿었다. 마커스는 아름답고 재능있는 여자들을 좋아했으며 그녀들과 짧은 정사를 공유하는 것에 대체적으로 거의 만족하고 있었다. 거의… 말이다. 하지만 이젠 그마저도 확실하지가 않았다. “잠시 후에 봅시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어쩌면 아주 신선한 유혹도. 저녁 내내 신경을 거스르던 이블린의 짙은 향수냄새를 멀리하며 마커스는 자리를 빠져나갔다. 설마 벌써 내가 싫증난 건 아니겠지? 이블린은 미심쩍은 초조감을 감추느라 목이 긴 샴페인 잔을 아무렇게나 들어올리며 성큼성큼 사라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속이 타고 있었다. 저 사내가 얼마나 대단한 대어인지는 지금 이 오페라 하우스 안에 모인 모든 여자들의 선망의 눈길만 봐도 해답이 나왔다. 부와 특권의 전시장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조차 마커스 로웰은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 단순히 그의 파트너로 참석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블린 칼턴이 우월감을 가질 정도로.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오만한 영국의 상류 귀족들은 미국인을 자신들보다 열등한 계급의 인간이라고 여기며 무슨 야만인처럼 함부로 취급했지만 오늘날은 돈과 명성이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내는 세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커스 로웰은 현대판 왕족, 그것도 만인 위에 군림하는 전제군주나 다름없는 권력자였다. 게다가 독신이 아니가 말이다. 이블린은 강하게 눈을 빛냈다. 팔 년 전, 짧고도 슬프게 끝난 결혼 뒤로 지금까지 마커스 로웰을 사로잡은 행운아는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언론지상을 장식한 화려하기 그지없는 여성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재혼에 뜻을 비치지 않았다. 아내를 그만큼 사랑했었다는 증거일까? 이블린은 내심 그 여자가 아주 불쌍했다. 저 마커스 로웰 부인의 직함을 그렇게 아깝게 놓쳐버리다니 끔찍하게 운이 나쁘다고 여길 수 밖에. 사업상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이래 이블린은 끈질기다 싶을 정도로 여러 번 의도적인 만남을 계획해 그의 곁을 맴돌았지만 그때마다 여지없이 다른 방해자들이 버티고 있었다. 미모도 배경도 빠지지 않는 쟁쟁한 라이벌들이 그와 함께 가십란을 장식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노력이 결실을 거두어 드디어 마커스 로웰를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이는 데까지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제대로 맛을 보기도 전에 빠져나갈 기미부터 보인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쓰게 중얼거렸다. 이블린은 비교적 자신의 위치를 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 자신이라 해도 저 견고하고 차가운 남자에게 다시 결혼의 굴레를 씌울 순 없으리라. 그건 제아무리 운 좋은 여자라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만큼 재혼에 대한 마커스 로웰의 확고한 신념은 잘 알려진 바였다. 그는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입에 발린 달콤한 사랑따윌 늘어놓지도 않았다.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 즉 받은 만큼 보상한다가 그의 원칙이었다. 단 원하는 만큼의 물질적 대가로. 마커스와 뜨거운 한때를 보낸 여자들 중 누구도 그가 선물한 복석이나 수표의 액수가 적다고 불평한 예는 없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떠돌 정도로 섹스 상대에 대한 그의 인심을 후했다. 그녀는 자신이 귀에 걸린 다이아몬드를 한 손으로 살짝 어루만졌다. 자신도 그에 대해선 이견이 없는 바였다. 그러나 이블린은 그가 주는 물질적 풍요를 떠나 - 돈이라면 그녀도 아쉬울 게 없었다.- 마커스 로웰이란 남자를 좀더 오래 자신의 품안에 잡아놓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가 다른 여자를 찾기 전에. 아쉬움과 탐욕, 그리고 만족할 수 없는 소유욕이 뒤섞인 두 누을 그에게서 끝까지 떼지 않으며 이불린 칼턴은 차가운 샴페인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한때 저 남자를 남편으로 가졌던 그 여자는 억울해서 어떻게 눈이나 제대로 감았을까. 홀 안은 막간을 틈타 사교를 즐기는 인파들로 붐비고 있었다. 소란스런 공간을 뒤로하고 인적이 뜸한 장소를 찾으려던 마커스의 시선이 운 좋게 한가해 보이는 통로를 발견했다. 사람의 키만큼 커다란 장식 화분이 양쪽으로 늘어서 뒤쪽을 가리고 있는 그곳은 충분히 은신처 역할을 해줄 듯싶었다. 마커스는 여기저기서 아는 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는 인사들을 급한 일이 있다는 말로 능란하게 무시하며 푸른 나무를 목표로 그렇지 않아도 긴 보폭을 빠르게 옮겼다. 겨우 나무 부근에 접근한 그는 상의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 전화에 손을 댔다. “벌써 날 찾아낸 거야. 루이스?” 여름날의 미풍 같은 한숨이 가볍게 스친 나직한 음성이 섬광처럼 그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좀 봐주면 어디가 덧나서 이렇게 꼭 찾아…” 자동적으로 그의 눈길은 자신이 하려던 을을 젖혀두고 키 큰 화분의 그림자 속에 자연스럽게 숨겨진 의자, 더 정확히 말해 그 위해 풍성하고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채 앉아 있는 여인에게 홱 날아갔다. 순간 은회색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동자와 밤의 가장자리를 연상시키는 검은 눈동자가 동시에 서로 맞부딪쳤다. 그리고 여인의 모습을 본 마커스 로웰이 맨 먼저 깨달은 것은 그녀가 이국의 동양인이라든가 또는 한번 음미하면 잊을 수 없는 깨끗하고 독특한 향취에 섬세하고 가는 몸매를 가졌다든가 하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어이없게도 크림색 벨벳 천 위에 다리를 올려놓은 그녀가 지금 맨발이라는 사실이었다! 4장 맨발의 여자라니. 이 거만한 왕립 오페라 하우스 안에서? 마커스는 잠시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스커트 자락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발은 분명히 하얀 맨발 그대로였다. 게다가 한 술 더 떠 드레스 속으로 감추어지기 직전 잠시 그의 눈에 오롯이 드러난 작은 발이 왠지 외로워 보이기까지… 긴 시간 내내 그를 괴롭히던 지루함과 따분함으로 인해 분명 마커스의 사고회로 중 한 군데가 약간 뒤엉켜 버린 게 틀림없었다. 생전 처음 만나는 여자의 발을 보고 외로워 보인다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실소로 스스로를 비웃었다. 불현듯 여자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실례했습니다. 사람을 잘못 알았군요." "뭐, 별로." 마커스는 내심과는 상관없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심지어 여자는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허둥지둥 구두를 찾느라 추태를 연출하지도 않았고 물정 모르는 여자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는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한 채 맨발을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태연자약한 여자의 모습이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를 즐겁게 만들기 시작했다. 적어도 상식적으로 볼 때, 이런 격식이 요구되는 공공연한 장소에서 신발을 벗은 것도 모자라 맨발 차림으로 앉아 있는 장면을 낯선 사람에게 들켰다면 설령 그녀가 남자였다 해도 당혹스럽고 민망한 표정을 쉽게 추스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그런데 심장이 대체 뭐로 만들어졌는지 이 낯선 여자는 티끌만큼의 동요조차 나타내질 않았다. 그는 어쩔 수 없는 흥미와 관심이 그의 안에 자리잡는 것을 인정했다. 마치 세상의 어떤 것도 자신을 흔들 수는 없다는 듯 여자는 절대 자신의 페이스를 흩뜨리지 않았다. 이곳의 공기와는 다른 서늘한 막이 그녀 주변에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고나 할까. 삽시간에 마커스의 무거웠던 공허감은 완전히 날아갔다. 무엇보다 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여자의 분위기였다. 겉으로는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보석으로 전신을 치장한 채 여기저기 서 있는 다른 여자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대담하고 강한 의지는 아무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잣대로 그 여자를 구분 짓고 있었다. 저렇게 차가운 표정의 여자가 어떻게 저런 분위기를 동시에 지닐 수 있는 것일까. 깊은 심연처럼 검은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스치자 무심코 마커스의 온몸에서 고통스런 흥분과도 같은 전율이 흘렀다. 다음 순간 무슨 염두에선지 그녀가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러자 눈의 여왕 같던 여자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백팔십 도로 바뀌어 버렸다. 마커스 로웰은 어떤 여자의 웃음이 한없이 무심함을 드러내며서도 한편으론 그의 남성이 즉각적인 충동을 일으킬 만큼 지독히 관능적인 표정을 담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미안해요. 내가 당신을 당황하게 만든 것 같군요. 미스터 로웰." 아마 그녀가 그의 얼굴을 보고도 누군지 모른다는 얼굴로 행동했다면 외려 의심이 갔을 것이다. 예전에 그가 누군지 사전에 조사까지 철저히 마친 여자가 그를 기만했던 불쾌한 기억을 상기하며 마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간의 여흥치곤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소." 그의 입가에 뚜렷한 미소가 번지자 여자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군요. 확실히 당신이란 사람은 그리 많이 놀란 경험은 없을테니까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명쾌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 보일 듯 말듯한 사소한 움직임으로 인해 가냘프고 작은 어깨가 천장의 조명을 받아 새하얗게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투명한 능선을 따라 매혹적으로 헝클어진 검은 머리채는 곧바로 마커스의 손가락을 근질거리게 할만큼 진한 윤기를 반짝이며 그녀의 섬세한 목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잠시 후 마커스는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마음을 결정했다. "하지만 당신이 앞으로 나를 자주 놀라게 할 것 같군." 명백한 저의가 담긴 그 말에 그녀는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탐색하듯 눈썹을 희미하게 치켜올렸다.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그렇게 나직하게 내뱉은 뒤 단호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마 구두를 찾아 신고 이쯤에서 그를 떠나려는 심산인 듯했다. 마커스는 새놀잇감을 발견한 악마처럼 회심에 찬 미소를 떠올리며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머리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맨발의 천사 아가씨. 당신은 내가 가라고 할 때까지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그는 점점 더 이 동양여인에게 끌리고 있었고 그 반사적이고 적나라한 욕구는 확실히 금방 만난, 이름도 모르는 여자에게서 받는 유혹치고는 지나친 감이 있었다. 하지만 마커스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그에겐 신선한 공기와 신선한 유혹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국적이고 특별한 자태를 가진 이 여자와의! 이 여자는 마커스 자신의 침대에 그녀를 눕히는 상상만으로도 그의 아드레날린을 위험수치까지 몰고 갔다. 그리고 더 이상 여자와의 관계나 정사에서 만족할 만한 흥분을 느낄 수 없다고 믿기 시작한 최악의 타이밍에서 그를 건져 올렸다. 마커스는 그녀가 구두를 집기 전에 재빨리 한 걸음 다가서며 드레스와 같은 색의 구두가 놓여 있는 의자 아래 위치를 점검했다. 그러자 욱신거리는 육체적충동과는 별도로 다시 한 번 웃음이 나왔다. 밋밋하던 하루의 끝에 이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군. 그래. 사실 즐거운 반전 이상의 무언가가 더 있는 듯도 했지만 당장은 굳이 해석해 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신발까지 벗어던질 정도로 공연이 형편없었던 거요? 그렇지 않으면 상대 남자가 그보다 더 지루했었나?" "어느 쪽이든 당신과 상관이 있나요?" "공연은 어쩔수 없다 해도 후자라면 내가 다른 대안을 제시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오." 돌연한 그의 말과 행동에 여자의 눈이 가늘어지며 살짝 표정이 변했지만 아쉽게도 그가 내민 미끼를 물지는 않았다. 이 여자와 동행한 남자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마커스는 조금 불쾌해졌다. 루이스라고 했던가? 그가 알고 있는 루이스란 이름의 사람만 해도 몇 명이 되지만 안면이 있는 사람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르는 인간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니면 루이스란 남자가 이 여자의 단순한 친구에 불과하거나 가족이라면 더 나을 것이다. 그럴 경우 이 여자를 차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성가신 장애물을 훨씬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자신이 그다지 오래 인내할 수는 없으리란 걸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일단 오늘은 이블린과 결별을 하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한 번에 오직 한 여자. 마커스는 서두르는 육체를 기분 좋게 음미하며 다시 한 번 자신의 규칙을 명심했다. 재희는 루이스가 친구에게 붙들려 있는 사이 잠시나마 평화를 찾고자 화장실을 핑계 대고 그의 곁을 떠났다. 그러나 화장실 역시 한꺼번에 화장을 고치고 옷차림을 다듬으려는 여자들로 분주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새로 펴바르고 립스틱을 고치며 대부분이 오늘 오페라를 보기 위해 나타난 어떤 특정인물에 대해 연신 확인되지도 않은 소문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타난 여인에 대해서도. 결국 한 남자의 애정 관계에 대한 시시콜콜한 소문들까지 귀에 주워담아야 하는 시끄러운 장소를 서둘러 벗어난 재희는 그냥 이 망할 하이힐을 잠깐 벗어던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때 마침 눈에 들어온 것이 이 나무 그늘이었다. 즐거운 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아 신발을 벗던 그녀는 여기 모여 있는 잘난 체하는 사람들이 만약 이 모습을 보거나 또는 그녀가 아예 이 드레스 밑에 스타킹을 신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방응들일지 궁금했다. 사실 스타킹은 서둘러 나오느라 잊어버렸던 것이지 하이힐만큼 그녀가 질색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하이힐에서 해방된 안락함도 얼마 가지는 못했다. 겨우 눈을 감고 미소를 지었다 싶은 순간 간신히 획득한 정적은 물거품처럼 자취를 감추었다. 대리석 바닥을 밟는 남자의 구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 하지만 재희에겐 어린 시절 누군가 등 뒤로 다가서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던 습성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어서 별다른 주의 없이도 그 소리를 집어낼 수가 있었다. 짧은 평화를 깨는 인기척에 재희는 내심 루이스가 빨리도 자신을 수색하는 임무에서 승리했다고 내심 신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등을 돌려 낯선 남자가 기묘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한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뜻밖의 목격에 최초의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듯했다. 물론 처음에야 눈앞의 모델 표본 같은 남자와 화장실에서 모든 여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남자를 그 즉시 연결시키지 못했지만 재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속 데이터에서 어렵지 않게 그의 정체를 찾아냈다. 마커스 로웰! 그녀 역시 사업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는 이상 그의 이름을 모를리가 없었고 제이슨도 저녁식사에서 몇 차례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그를 입에 올린 바 있었다. 사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제이슨 호크에게서 그런 평가를 받는 사람은 사업상이든 개인적인 친분 관계에서든 지극히 극소수로 한정도이 있었다. 어딘가에서 한두 장쯤 그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 재희였지만 인쇄된 종잇장과 실물은 하늘과 땅의 거리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날카로우면서도 거친 분위기는 어떻게든 비슷하게 잡아냈다. 짙은 눈썹과 강인한 윤곽, 그의 외모에서 가장 귀족적으로 보이는 깎은 듯한 콧날에다 거만한 입매까지. 그러나 지금 그녀가 절실히 느끼고 있는 마커스 로웰이 발산하는 압도적인 힘과 강렬한 지배감만은 생명없는 물체에 불과한 카메라가 담아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 그리고 웃을 때면 살짝 패는 보조개도 저만큼 섹시하게 묘사하진 못했군. 재희는 단순한 감상 차원에서 일부 소견을 덧붙였다. 남자에게 저런 보조개가 어울린다니. 그것도 치사량에 다다른 남성미에 어떤 치명타도 가하지 않으면서 … 재앙이 따로 없었다. 그가 전 세계에 걸쳐 보도 가치가 있는 유명인사가 아니었다 해도이래저래 군침을 삼킬 만한 피사체란 건 이해가 갔다. 특히 저 잡히지 않는 아우라 같은 에너지를 이차원적인 종이 위에 옮겨놓는 일이라면 비범함을 추구한답시고 설쳐대는 예술가들을 뿌리채 충동질하고도 남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천 마디 말이나 평판, 겉으로의 외형보다 저 남자를 진짜로 대변하는 것, 무엇보다 재희의 신경을 건드린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차가워.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남자야. 그리고 원한다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본성까지 가졌지. 미소를 짓고 있긴 해도 흡사 제이슨만큼이나 강하게 얼어붙은 눈동자에 그녀는 속지 않았다. 이 남자의 영혼도 그만큼 어둡고 고독할터였다. 그리고 그녀 자신만큼. 별안간 재희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익숙지 않은 감각에 알 듯 모를 듯 눈썹을 찌푸렸다. 달갑지 않은 그의 등장과 자신의 생소한 반응이 못마땅했다. 물론 그가 어딜 가고 오든 그녀가 상관할 바가 못 된다는 걸 재삼 주지하며 서둘러 그 기분을 몰아내고자 그녀는 평소의 습관이 만들어낸 갑옷과도 같은 미소를 로웰에게 던졌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그에게 이상한 효과로 작용해 위험한 맹수를 우리에서 풀려나게 한 결과가 돼버렸다는 것을 예감하기까지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덧붙여 이 남자는 육식성이었다! 그것도 아주 철저하고 지독한 사냥꾼의 기질을 겸비한. 이런 경우 꼬리를 사리고 달아나 봐야 사냥꾼은 끝까지 뒤쫓아와 급소를 물어뜯기 마련이다. 그리고 재희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급소를 물어뜯기는 일은 사절이었다. 그녀는 정색을 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미리 추격할 의욕을 꺾는것만이 가장 승산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녀보다 한 단계 앞서 행동을 개시한 그는 채 구두를 찾기도 전에 시야를 가려버렸다. 그가 일부러 그녀를 방해하느라 선수를 쳤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마커스 로웰은 기선을 낚아챈 악당처럼 웃고 있었다. 흠. 먼저 말을 움직이시겠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혈관을 따라 퍼져나가는 열기에 단호하게 저항했다. 천만에. 그렇게 녹록치는 않을걸. "그런데 이렇게 신발까지 벗어던질 정도로 공연이 형편없었던 거요? 그렇지 않으면 상대 남자가 그보다 더 지루했었나?" "어느 쪽이든 당신과 상관이 있나요?" "공연은 어쩔 수 없다 해도 후자라면 내가 다른 대안을 제시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오." 그가 낮게 중얼거리는 말들은 아예 바보거나, 남자를 전혀 알지 못하는 중세 시대쯤의 처녀가 아니라면 오직 한 가지 해석만을 가능하게 하는 대사였다. 이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남자는 다음 섹스 상대로 자신을 점찍은 것이다. 반사적인 불쾌함과 뒤섞인 것은 그녀 안에 내재된 원초적인 공격성일까? 적수를 만난 야생 호랑이처럼 전신이 파스스 긴장했다. 오한과도 같은 전율이 손끝에 이는 동안 재희는 익숙한 통제력을 끌어모아 자신을 제어했다. 남자, 아니 타인 앞에서 이렇게 스스로를 드러내본 적이 과연 있었던가. 생소해. 정말 생소한 종류의 경험이었다. 어느쪽이 더 나쁠까? 더 이상 감정이 메말라 버렸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몇 분 전의 자신과 그게 호전성이건 성적 끌림이건 새로운 감각을 욕심내는 낯선 지금의 자신과. 그녀는 꿰뚫어보듯 그를 쏘아보며 그를 상대하는 부담을 저울질해 보았다. 저 남자는 무슨 의미에선지 철벽 같았던 그녀의 오랜 평정을 흩어놓는 비정상적인 영향력까지 발휘하고 있었다. 아니면 여자로서의 본능을 자극한다는 편이 옳은 것일까. 마커스 로웰의 의미심장한 눈빛이 스칠 때마다 그다지 의식하지도 않았던 그녀의 성적인 욕망이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 마커스 로웰과 한재희? 단순해질 수가 없다. 그들 같은 사람들에겐 뒤따라 파생하는 문제들이 생기기 마련인 것이다.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복잡하게 꼬여들 소지가 보이는 사건은 원하지 않았다. 만일 정사의 상대를 찾겠다면 좀 덜 요란한 남자를 택하는 게 나았다. 그가 그녀에게 육체의 욕구만을 풀어놓고 싶어한다면 재희 또한 그에게 같은 것을 요구할 수는 있지만 그에게 붙어 있는 꼬리표는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정확히 필요한 시점에서 익숙한 경계심이 그녀를 신중하게 움직이도록 종용했다. 위험을 쫓아다니는 것을 밥 먹는 일보다 좋아하지만 그걸 인간관계에까지 적용하는 건 어리석음의 소치가 될 것이다. 랠리의 코스는 지도가 있지만 마커스 로웰에 관해서는 최소한의 정보조차 갖지 못한 채 스타트 라인을 끊어야 한다. 잘해야 페널티 없이 스테이지를 통과하는 정도? 게다가 중간에 폭우를 만날 수도 진창을 만날 수도 있는 최악의 난코스. 자칫 실수로 핸들을 잘못 꺾었다간 구명줄도 없이 절벽으로 굴러떨어지는 재난에 봉착할 수도 있었다. 재희는 마커스 로웰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는 찰나에 결정을 내리고. 아쉽지만 현명한 처신의 일환으로 그가 내민 도전장을 거절했다. 대신 손목에 걸린 체인 시게를 바라보며 깊게 심호흡을 하고 과장된 경멸이 감도는 냉랭한 눈으로 그에게 말했다. "이만 비켜주시겠어요? 곧 다음 막이 오를 텐데 그쪽이야말로 함께 오신 분에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서두르시는 게 좋겠군요." 그리고 루이스가 슬슬 나타날 때가 되어가고 있었다. 재희는 하루 밤새 더 이상의 소란을 감당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미스터 로웰?" 하지만 갑자기 그가 예고도 없이 자신의 정면에서 허리를 굽히자 단단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리고 말았다. 재희는 단번에 루이스에 대한 걱정을 놓쳐버린 채 다소 굳어진 눈길로 그의 검은 머리칼을 주시했다. "지… 금 대체 뭘 하는 건가요?" 점입가경이라더니, 점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젠장!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당신에게도 좋아, 마커스 로웰! 계속 무슨 장난을 하자는 거야? "날마다 눈앞에 구두를 벗은 맨발의 신데렐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서 말이오. 작은 실험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 중인데." 이젠 아예 만류할 새도 없이 무릎을 반쯤 접어 그녀 앞에 앉은 그의 행동에 아무리 침착을 가장하고 있는 재희라 해도 불신 어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커스의 속을 짐작하느라 우선 발을 빼야 한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저 마커스 로웰이 여자 앞에서 허리를 구부려 시중드는 하인처럼 구는 광경을 보다니. 그의 화려한 배경과 전력으로 볼때 이런 극적인 수단까지 동원할 정도로 여자가 궁하거나 다급할 리는 만무했다. 오히려 몰려드는 여자로 처치 곤란을 겪는 중이라고 좀전 화장실의 여자들도 입을 모았으니까. "안됐지만 난 동화 따위에 쏟을 관심도 없을 뿐더러 더구나 그 여자가 뽑았던 행운의 제비에는 일말의 흥미조차도 없어요." 마커스의 손길을 떨쳐내듯 그녀가 몸을 움직였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난 항상 신데렐라가 왕자에게 발견되리라는 사실을 미리 예견하고 일부러 신발을 가져가지 않았다고 생각했소." "흥미있는 학설이군요. 전형적인 남자의 오만이기도 하구요." 그가 만족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당신이란 여자는 내 의견에 동의할 것 같았지." "내가 동의한 건가요?" 팽팽한 줄다리기 같은 상황에서 문득 이 남자가 어디까지 할 셈인지 두고보고 싶어졌다. 빌어먹을 호기심 같으니! 그러나 재희는 곧바로 도전적인 시선으로 눈을 빛내며 천천히 발에 힘을 주었다. 이즘에서 그만두시죠. 천만에. 겨우 시작인걸. 두 사람의 눈빛이 강하게 부딪쳐 불꽃처럼 달아올랐고 어느쪽도 시선을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영원처럼 지나갔다. 길고 강인해 보이는 손가락이 그녀의 드러난 발목을 잡고 천천히 구두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것은 아주 은밀한 동시에 너무나 공개적인 몸짓이었다. 게임일 뿐이야! 점점 그의 의도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버티면서 재희는 이를 지그시 물었다. 마커스 로웰 식의 치밀한 덫 놓기에 해당되는 장난일 뿐이었다. 만일 그도 아니면 여자들에게 신발을 신겨주는 숨겨진 희한한 취미가 있었다거나, 재희는 추호의 갈등 없이 전자의 경우라고 결론지었다. 마커스 로웰과 같은 사내는 목표를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사업에서의 방식이 그대로 여자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만일 그가 무릎을 끓고 구두까지 신겨주며 유혹하려는 여자가 어떤 출신의, 어떤 태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과연 이 남자가 똑같은 전략을 시도했을지는 심히 의심스러웠다. 옷을 그럴듯하게 차려입고 대충 비슷한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계급마저 동등해지는 것은 아니다. 마커스가 만약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알콜중독자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할렘가 출신의 사생아 따위에게 비록 장난에서라도 허리를 굽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아마 이 시간 자체를 끔찍이 혐오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여성 취향을 봐도 그가 얼마나 고급스런 기호를 가진 남자인지는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마커스 로웰은 비싸고 예쁜 장난감을 선호했다. 자격지심 따위는 사는 데 방해만 될 뿐이다. 재희로선 그런 달갑지 않은 자기비하는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베를린 장벽만큼이나 허물기 어려운 신분과 사회의 벽 또한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녀는 몽상가가 아니었다. 철저한, 그것도 지나치게 직선적인 현실주의자였다. “고마워요. 조금도 반갑지 않은 선심이지만.” 이제 놓으라는 뜻이었다. “무슨 말을. 나도 즐거웠소.” 마커스는 느릿하고 친밀한 손길로 구두를 신긴 그녀의 발목을 부드럽게 쓸었다. 손에 닿는 서늘한 피부의 감촉이 그의 맥박을 불안정하게 두드렸다. “한 사람이라도 이런 엉뚱한 일로 즐거웠다니 다행이 아닐 수 없군요.” 스스로의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개운치 않은 것은 마커스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작정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간단히 달아나지 못하도록 잠시 신발만 치워둘 의도였을 뿐. 그런데 그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마커스는 난생 처음 본, 심지어 아직 자진해서 이름도 말해 줄 생각이 없는 여자 앞에 무릎을 꿇다시피 하고 앉아 그녀의 구두를 신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동화 따위에는 흥미가 없다는 이 여자처럼 그도 여자를 잠자리로 끌어들이기 위해 동화 속 장면이나 흉내내며 노닥거리는 남자가 전혀 아니었다. 기실 노닥거린다는 표현과 결코 타협하지 못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 자신이었다. 마커스는 문득 입가를 슬쩍 뒤틀었다. “옛날 중국에 이런 전통이 있었다더군. 자신의 소유인 여자가 함부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 발을 동여매어 자라지 못하도록 했다는. 그걸 전족이라고 한다지.” 왜 갑자기 그 야만적인 관습이 타당성있는 현실로 머리 속을 점령하는지는 그 자신도 납득할 수가 없었지만 여하튼 그는 그 사내들의 심정을 이해할 듯도 했다. “안됐지만 전족을 하기에 내 발은 늦은 감이 있군요.” 재희는 그의 강렬한 눈빛이 암시하는 바에 위장이 조여드는 거북함을 감추었다. 그의 손에 놓여져 있는 피부가 타는 것처럼 아렸다. “그렇군.” 마커스는 의미심장하게 마을 줄이면서 재희에게 미소를 떠올렸다. “하지만 어쩐다? 당신이란 여자에겐 이 하이힐이 전족이나 별반 다름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거칠고 유연한 그의 잘생긴 얼굴은 으스스할 만큼 당당한 표정과 차가운 위압감 때문에 그 매력을 한층 더 불가해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에게 못 박힌 재희의 눈동자가 가늘게 빛났다. “감당하기 벅찰 텐데요. 나란 여자…” “저절로 떨어지는 과일은 너무 익어버려서 씹는 맛이 없지.” “몸에 맞지 않는 걸 삼켰다간 배탈이 날 수도 있죠.” 그녀는 낮게 상기시켰다. “그건 맛을 본 후에 결정할 일이오. 전부를 먹을지, 아니면…” “재희!” 예리하게 날이 선 남자의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끼어듦과 동시에 격렬한 긴장감은 깨어졌다. 마치 뜨겁게 달구어져 있던 쇠 위에 차가운 얼음물이 떨어진 것 같은 상황이랄까. 바로 앞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재희에게 있어 그 순간만큼 루이스의 등장이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마커스가 몸을 일으키는 틈을 타 재희는 그로부터 당연한 듯 멀어졌다. “루이스.” 마커스는 눈썹을 찌푸려 그들 쪽으로 성급하게 다가오는 젊은 미청년을 바라보았다. 여리고 예쁘장했다. “아직까지 여기서 뭘 하고 있어? 곧 공연이 다시 시작될 텐데!” 성급한 불쾌감이 청년의 조각 같은 외모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오늘 상대인가?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성을 안다면 누군지 짐작이 갈 수도 있겠지만 당장은 이것으로 족했다. 저 둘은 연인 사이가 아니라는 본능적이 직감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저 루이스라는 청년은 이 여자에게는 너무 어렸다. 저 정도의 남자가 감당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미안, 좀 쉬고 있었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건가?” 그녀의 말에 마커스 역시 시니컬한 웃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길어야 이십 분 정도가 고작이었다는 게 새삼 그를 놀라게 했다. 그들은 동시에 시간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주위에 누가 있는지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적시에 구원병이 등장했군.” 마커스는 부드럽게 조롱했다. 어쨌든 적어도 이 여자의 이름을 따로 알아내야 하는 수고는 없어졌다. 재희 … 주인만큼이나 독특한 어감이었다. 분명 제이가 아니라 재희였지? 마커스는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재희라는 이 여자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 작정이었다. 지금 자신의 감정으로 보면 그리 짧은 기간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 같지만 뭐, 오히려 그 점이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그동안은 그녀가 오직 마커스 로웰만의 여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반드시 납득시킬 터였다. 문득 마커스는 그를 무시한 채 루이스에게 웃음을 떠올리는 그녀의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루이스를 향해 서둘러 자신을 지나쳐가는 재희의 팔을 확 끌어당겼다. 갑작스런 힘에 의해 그녀의 몸이 세차게 돌려졌고 어느새 그녀는 마커스의 품에 강제적으로 반쯤 안긴 자세가 되어버렸다. 재희의 동공이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미스터 로웰. 지나치군요!” 그녀가 딱딱하게 내뱉었다. 그는 들릴 듯 말 듯한 어조로 위협하듯 재희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잊지 마. 조만간 난 당신을 따라잡을 테니까! 그리고 그때가 되면 당신은 오직 나만 바라보게 될 거요.” 재희는 입을 굳게 다물며 그를 바라보았다. 강철 같은 의지가 담긴 곧고 집요한 시선이 곧장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이게 정상 같은가요?” “아니라면?” 그가 반문했다. “욕정에 미쳤다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겠죠.” 그녀는 냉정하게 응수했지만 별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럼 그렇다고 해두지. 상관없어. 어차피 평생에 이런 기분이 두 번 들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이오. 인생에서 한 번쯤 이성을 잃고 미친 척 행동하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소?” “그 다음에는요? 당연히 다른 사냥감을 발견하겠죠?” “아마.” “그럼 난 빼줘요. 난 당신의 그 ‘일시적이고 과격한 짝짓기’에 별로 끌리지 않으니까.” 그들은 미소 속에 살의를 감추고 진검 승부를 하는 검사들처럼 태연함을 가장한 채 서로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은회색의 눈동자는 예리한 만족감을. 그리고 검은 눈동자는 짙은 짜증을 담고서. “뭐, 일단은 달아난다 해도 상관없겠지.” “재희!” 루이스가 성마르게 그녀를 부르며 덤빌 듯이 다가오는 찰나 마커스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녀를 놓아주었다. "또 봅시다.“ 마커스의 경고 어린 선전포고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그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재희는 미련없이 등을 돌려 그를 뒤로했다. 당신하고 또 마주치느니 밤새도록 런던 시내를 헤집는 한이 있어도 남자를 찾아내고야 말겠어! 이런 엿 같은! 옆에 있던 루이스가 멈칫해 그녀를 보았다. “재희?” 재희의 눈은 어느새 딴청을 부리는 척, 그들을 호기심으로 곁눈질하느라 바쁜 홀 안의 사람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저들이 힐끔거리며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저 중에는 스캔들을 팔아 생활비를 벌어먹고 사는 기자들도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이 막간의 촌극에 웬 횡재수냐 싶어 눈에 불을 켜고 한 장면 한 장면을 염탐하고 있을 자세들이 선했다. 빌어먹을 사내 같으니! 기어이 성가시게 구는군. 그래, 어차피 한바탕 난리는 피하지 못하게됐다 이건가? 이제 이대로 곱게 저 사내를 놓아줄 선의 따윈 십리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재희는 치맛자락이 휘날리도록 휙 방향을 틀었다. 시끄러운 게임을 원한다 이거지? 좋아! “재희!” 루이스가 팔을 잡았지만 그녀는 아직까지 그 자리에 오연하게 서있는 사태의 주범에게 단호하게 걸어갔다. 재희가 다가가자 그녀의 돌발적인 움직임에 마커스의 한쪽 눈썹이 호기심으로 올라갔다. 그래도 궁금은 하시다? 그녀는 내심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숨겨진 그녀의 동기를 탐색하듯 지켜보던 마커스의 눈동자에 오히려 즐거운 기대감이 깃들이는 기색이 역력해지자 재희의 성질은 위험수위를 넘었다. 어디까지 웃을 수 있는지 한번 보자구! 마침내 두 사람의 몸이 거의 맞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생각이 변한 건가? 달아나지 않기 …” 하지만 그의 유유자적함도 그녀의 팔이 자신의 뒷머리를 세차게 끌어당겨 입술을 짓이기듯 내리누르자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고 말았다. “재희! 무슨 짓이야?” 루이스의 경악에 찬 고함과 사람들이 한꺼번에 숨을 들이키는 소리,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플래시까지 가세해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재희는 마커스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기 직전에 재빨리 그로부터 입술을 뗐다. “광기는 전염성이 강하다고 하죠. 로웰! 날 제멋대로 당신 영역에 끌어들인 일을 후회하게 될 것야. 원하면 얼마든지 따라와 봐!” 맙소사! 이 여자는 정말. 마커스는 받아칠 기회도 주지 않고 어느새 저만치 걸어가 버린 재희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턱을 꽉 다물었다. 웃음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정말이지 이런 여자는 만난 적이 없었다! 심장이 제 속도를 잃고 격하게 그의 가슴 밑에서 뛰고 있었다. 재희의 부드럽고 결연한 입술이 덮치듯 그의 입술을 눌렀을 때 느꼈던 전율과 격렬함이 고스란히 남아 그를 괴롭혔다. 만일 그녀가 마커스에게 한 방 먹일 의도로 저지른 짓이라면 그녀는 멋지게 성공했다. 그는 정말 크게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몸이 기우뚱하는감각에 즉시 그녀의 허리를 붙잡지도 못했을 만큼. 그녀를 쉽게 놓아줄 수 없는 이유가 다시 하나 추가되었다. 마커스 로웰은 그녀의 키스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생각 같아선 당장 저 인파를 헤치고 저 여자를 끌고 나가 자신의 차 안에서 마음껏 그녀의 입술을 탐할 수 있었으면 좋을 듯싶었다. 하지만 마커스는 묘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는 이블린의 모습을 발견하고 성급한 욕망을 일단 접어야 했다. 아직은 이블린 칼턴과의 정리가 남아 있었다. 물론 텅 빈 침대에서의 차가운 하룻밤도. 그는 재희가 그를 안았던 순간 풍겨왔던 매혹적이고 신선한 향기를 떠올리며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인생에 최초로 사업상의 용건을 깜박했다는 것을 기억한 것은 자리에 앉아 이블린을 통해 재희와 루이스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과 동시의 일이었다. 재희는 제한 속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차선을 바꾸었다. 그녀야말로 잠깐 핀트가 나간 동안 미친 짓을 해버렸다. 그것도 마커스 로웰. 바로 직전까지 얽혀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남자에게. 제이슨이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가히 상상도 하기 싫었다. 족히 사나흘은 예의 눈빛으로 빈정대지 않을까. 불현듯 재희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남자의 입술을 부드럽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다. 좀더 맛보고 싶다고 원한 곳도. 남자든 여자든 너무 오랫동안 자연스런 신체의 욕구를 멀리하는 건 무리가 있는 모양이다. 사실 주위에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레이더처럼 따라오는 관객들만 없었다면 허리를 감아오던 그 남자의 손길을 그렇게 단번에 떨쳐낼 수 있었을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웠다. 마커스 로웰 또한 비슷한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쯤은 뻔히 들여다보였다. 발목에 느껴지던 그의 손길을 다시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오싹했다. 아마 침대에서의 테크닉도 무시 못할 정도겠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경험을 골고루 쌓았을 테니까. 흔치 않게 성질까지 부렸다. 그렇게 부르르 했던 건 지난해 몬테카를로 랠리 때 차가 심각한 브레이크 이상으로 눈길에 뒤지어진 이후 처음이었다. 팔을 부러뜨렸지. 그것으로 두 달 동안의 경기 스케줄이 몽땅 날아가고 말았다. 이번에는 어디가 부러지는 정도까진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여기까지 생각한 재희는 머리를 내저었다. 뭐야, 정말 해볼 작정인가? 실소가 뒤를 이었다. 어차피 패를 던진 이상 겁쟁이처럼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보면 오페라 하우스에서 지레 내린 결론처럼 그렇게 감당하지 못할 정도도 아닌 것이다. 머리 한구석에서 내내 찜찜해 하며 그를 기억하느니 일단 가지고 본 다음 확실히 잊어버리는 것도 나쁠 건 없었다. 사실 질척거리는 감정만 배제된다면 예상보다 훨씬 순조롭게 끝이 날 수도 … 자신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따라오던 그의 눈길이 아직도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마 쫓아오겠지. 그 전에 이성을 차린다면 모르겠지만. 하지만 로웰 같은 남자는 일단 찍은 목표물을 손에 넣지도 않고 순순히 몸을 사릴 남자가 아니었다. 주변이 얼마나 들썩이든, 귀가 얼마나 따갑든지 간에 말이다. 무의식중에 재희의 입꼬리가 다소 차갑게 치켜 올라갔다. 마지막 장면에서 결투의 붉은 깃발을 흔든 건 그녀 자신이 아닌가. 어떻게 따라올지 두고보는 것도 지루하진 않겠지. 시작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스스로 도발한 싸움에 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차창 너머로 들어오는 한줌의 바람으론 양이 차지 않았다. 재희는 자동차의 지붕을 오픈시키고 머리에 꽂은 핀을 거칠게 빼냈다. 순간 갇혀 있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풀려나며 한껏 바람을 머금었다. 가슴 속까지 신선한 공기가 밀려들며 숨이 트였다. 바로 옆으로 지나가던 폭주족 청년들의 휘파람 소리와 음란한 찬사가 획하니 스쳐갔다. 루이스가 있었다면 또 뭐라고 투덜댔을지도. 그녀가 일으킨 소동으로 루이스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명백했다. 심지어 그는 평소대로라면 바래다주겠다고 끝까지 우겼을 배웅도 고집하지 않고 순순히 혼자서 자신의 차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루이스가 이번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든 재희는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애매한 위치로 시작해 너무나 오래 이어진 그와의 관계가 이제는 슬슬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음을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은 벌써 전에 반환점을 지나쳐 버렸다. 그러게 된 데에는 그녀 자신의 태도에도 책임이 있었지만 루이스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진짜로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원하고 바라는 것은 정말은 재희 그녀가 아니라는 것도. 그녀는 쓰게 한숨을 뱉으며 시야를 가리는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자동차가 속도를 올리며 야밤의 도로를 질주했다. 다음날, 마커스 로웰이 어떤 여성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은 왕립 오페라 하우스가 개관한 이래 최대의 스캔들이 되어 신문의 일면을 장식했다. 5장 엘리스 버트는 오래되고 너저분한 한 모텔 한에서 형편없이 낡아 빠진 중고 의자에 비대한 몸을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막 아침 겸 점심으로 먹으려던 시리얼에 우유를 들이붓는 참이었다. 아무렇게나 팩을 기울이는 바람에 사방으로 우유가 튀어나가 더러운 탁자 위에 되는 대로 펼쳐놓은 신문지 위에 지저분한 얼룩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버크는 신경도 쓰지 않고 대충 숟가락으로 그릇 안을 휘저은 뒤 우적우적 씹기 시작했다. 시리얼 그릇 옆에는 구운 지 사흘이나 된 베이글이 먹다 남은 채 나뒹굴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딱딱한 빵 부스러기 하나조차 아껴야 할 판이라 버크는 먹고 죽을 정도만 아니면 어떤 것도 버릴 처지가 아니었다. 색이 바래고 누렇게 뜬 벽지, 이름만 커튼이지 금방이라도 삭아내릴 듯한 조잡한 꽃무늬의 천 조각. 먼지가 떠도는 방 안에는 의미없이 틀어놓은 고물TV의 지직대는 소리와 그가 음식을 씹어대는 귀에 거슬리는 소음만이 전부였다. 이 망할 동네를 벗어나기 위해 별별 수단을 다 썼는데 15년 간의 비좁고 구역질나는 감옥 생활 끝에 돌아온 것이 여전히 이 악취 고약한 슬럼가에서의 새 출발이라니. 게다가 이제 더 이상 젊지도 않았다. 매일 아침 냉기가 기어올라오는. 제대로 볼일조차 보기 힘든 화장실에서 벽에 걸린 깨진 거울을 들여다볼 때면 그의 흐리멍덩한 눈에 비치는 것은 이미 오십 줄이 넘은 늙고 뚱뚱하며 추레한 전과자의 얼굴이었다. 15년 전 그가 알았던 인간들은 대부분 행방이 묘연했고 나머지 놈들은 모조리 그를 무시했다. 하다 못해 할인매장에서 짐을 나르는 일자리조차 그는 거절당해야 했다. 예전 같으면 그런 작자들을 죽지도 못할 만큼 밟아 만신창이를 만들어 버린 뒤 칼로 모가지를 그어버렸겠지만 엘리스 버크는 이제 이 동네에선 퇴물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채 열 살도 안 된 쥐방울만 한 소매치기 꼬마 놈들까지도 그를 대놓고 무시해 버릴 정도로 하마터면 이틀 전 그나마 수중에 있던 몇 십 달러를 이마에 피도 안마른 애송이 두 놈에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털릴 뻔한 것도 모자라 놈들을 잡지도 못하고 놓쳐버린 엘리스는 미칠 정도로 광분했다. 자존심이 상한 것도 문제지만 그 쥐새끼들이 그의 인생을 망쳐놓은 똑같은 쥐새끼 한 놈을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15년 전 그날,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코앞까지 와 있었다. 망할 꼬마 놈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단의 인간들만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지금쯤 그는 이 지옥 같은 방구석에 처박혀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는 대신 한가한 열대의 섬에서 황제처럼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쥐새끼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고작 해야 계단을 오르내리다 몇 번 마주친 게 다인 동양의 유색인 종 놈 하나가 난데없이 뛰쳐나와선 그의 계획을, 인생을 갉아먹으며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개 같은 새끼…” 입 안에 든 것을 삼키지도 않고 소리내 욕설을 퍼붓던 엘리스 버크는 갑자기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벌떡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먹다 남은 시리얼 그릇을 팔로 밀쳐 난폭하게 던져버렸다. 의자가 나자빠지고 축축한 콘플레이크 조각들이 우유와 함께 벌레가 기어다니는 마룻바닥 위로 후두두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지만 그의 핏발 선 눈은 조금 전 무심코 그냥 넘겨놓은 신문지면에 못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늘 아침 비쩍 말라비틀어진 염소처럼 생긴 재수없는 모텔 주인에게 억지를 써서 얻어놓은 신문의 한쪽 면에는 사진이 여러 장 늘어서 있었다. 마커스 로웰인가 뭔가 하는 팔자 좋은 상류층 부자 놈이 웬 여자랑 시시덕대는 꼴이 담긴 모습과 또 다른 앵글로 호스트 바나가면 딱 좋을 금발의 어린놈이 표정을 있는 대로 구기고 있는 모습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사실 워낙 자주 세간에 오르내리는 로웰를 빼면 그 사진에 아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뚫어질 듯한 두 눈은 읽는 사람들의 호기심과 말초신경을 잇는 대로 자극해 판매 부수를 올려보고자 하는 장삿속이 뻔한 선정적이 문구 아래 나열된 작은 글씨를 필사적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마커스 로웰을 강탈한 여인! 유서 깊은 보스턴 동부 명문가의 상소자인 루이스 베어포드의 파트너로 영국 왕립 오페라단의 시즌 개막 공연 관람을 위해 참석한 미스 제이(J)한은 위험을 가리지 않는 무모한 드라이버로 이미 높은 명성을 쌓은 여인이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최악의 난코스로 로웰 그룹의 최고 경영자이자 회장이기도 한 마크서 로웰을 다음 도전 대상으로 삼은 듯! 어제 런던 시각으로 저녁… 아무리 동명이인이 많아도 보스턴 베어포드가의 상속자인 루이스 베어포드가 둘일 리는 없다. 그러고 보니 놈의 금발도 어딘가 낯이 익었다. 제이. 루이스 베어포드. 젱,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었다. 그런데 그 조무래기 쥐새끼가 계집애였다는 말인가? 설마… 엘리스 버크는 한동안 멍청하게 웅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의혹을 증폭시키리가도 하듯 자세히 사진을 들여다보자 이 제이 한이라는 계집도 유색인종 같아 보이긴 했다. 조명 때문인지 잘은 확신할 수 없지만. 무엇보다 이 여자가 정말 동양인에다 루이스 베어포드와 함께 있다면 가능성은 무시 못할 게 된다. 우선 베어포드 같은 상류층 놈들이 대놓고 유색인종들을 달고 다니지는 않을 테니까. 게다가 그 버르장머리없는 꼬마였던 것이 영악하게도 일부러 이 바닥에서 자신의 성별을 속이고 있었다면… 입가를 실룩거리던 엘리스 버크는 문득 누런 이를 드러내며 키들거리기 시작했다. 탁하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방 안을 채워갔다. 먼저 술부터 한잔해야겠어!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길이 잘 든 마호가니 테이블 위의 값비싼 집기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티끌 하나 없는 청색의 대리석 바닥 위로 반짝이는 크리스털과 도자기들이 한때 찬란했던 골동품으로서의 잔해만을 간직한 채 산산조각으로 참담하게 흩어졌다. “빌어먹을” 루이스는 말 그대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자칫하면 심장이 잿더미로 변하고도 남을 울화가 그를 휩쓸고 있었다. 루이스는 움켜쥐고 있던 신문을 갈가리 찢어 쓰레기통에 쳐넣고 사방을 서성거렸다. 쓰고 있던 논문 따윈 그의 안중에 남아 잇지도 않았다.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어제의 장면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재희가, 그의 재희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는지. 그 누구 앞에서도 빈틈이라곤 내보이지 않고 화를 낼 때조차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경우라곤 없었던 그녀가,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일을 싫어해서 우승 인터뷰조차 기피하는 그 재희가! 수많은 인간들이 눈을 치켜뜨고 있는 가운데 외려 보란 듯이 일부러 구경거리를 만들었다. 어젯밤 루이스는 그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을 마주 대한듯했다. 15년을 옆에 있어 온 그 자신이 조금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재희의 일면이라니 … 목구멍에서 욕지기가 올라왔다. 루이스는 재희가 마커스 로웰의 입술에 자진해서 키스하던 장면을 깨지 못하는 악몽의 순간처럼 눈앞에 똑똑히 그려내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안 돼! 그의 손이 닿는 것도 내켜 하지 않는 여자,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는 여자, 그래서 언제나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밖에 없었고 자칫 실수라도 하여 겨우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서마저 추방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만난 지 반 시간도 안 됐을 남자한테 아무리 화가 낫다지만 그녀 스스로 키스까지 하다니! 마커스 로웰이 누군가. 온 세계를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드는 제트족에 거만하고 뻔뻔한 상류층 , 스쳐간 여자들만 해도 부지기수인 냉혹한 플레이보이, 평소의 재희라면 관심조차 두지 않는 가진 자의 대표적 상징처럼 여겨지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남자를 비록 잠깐이라 해도 재희가 선택했다. 그 오랜 혐오감, 거부감, 냉소를 모조리 젖혀두고서 말이다. 생소하리만치 빛나던 그녀의 눈빛, 남자에게 가 닿던 그 붉은 입술의 선…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루이스는 스스로가 비참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재희가 남자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또한 그녀를 그렇게 만드는 남자가 세상에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도. 안 돼! 그는 이성을 잃고 도리질을 쳤다. 아름다운 금색의 머리칼이 이리저리 엉키며 그의 섬뜩한 눈을 가렸다., 재희, 너는 내 전부야.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너의 차가운 검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지 않는 것까지는 좋아. 참을 수 있어! 하지만 그 시선이 만약 다른 곳을 향한다면 난 어떤 인간도 용서 안 해. 네가 나한테서 멀어지는 건 죽어도 용납 못하니까! 그러기 위해서라면 루이스는 무슨 수단이든지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옷의 매무새를 바로 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깜박이고 있는 응답기로 걸어갔다. 누구의 메시지인지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별로 듣고 싶은 내용도 아니었다. 망설이던 루이스는 잠시 후 재생 버튼을 눌렀다. "루이스, 나다. 모레쯤 영국에 출장을 갈까 한다만 함께 식사라도…" 자신없는 중년 신사의 음성은 여전히 거리감만 키우며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루이스는 표정없이 메시지를 삭제해 버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납니다. 알아냈습니까.?"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사방을 지배했다. "대단한 이력의 소유자더군요. 그리고 지명도에 비해 의외로 사적인 생활은 꽁꽁 싸매져 있는 인물이라 접근하기가 좀 힘들었습니다." 키가 크고 마른 감이 있는 루 핸더슨은 마커스가 혈기 넘치던 젊은 청년으로 살벌한 기업전쟁에 첫 발을 내디딘 이래 그의 곁을 한결같이 보좌해 온 오른팔 겸 친구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기민하면서도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이었고 마커스의 명령이라면 사막 한복판에다 호수를 만들라고 해도 일언반구의 항명 없이 그럴 많한 수단을 발휘할 사내였다 사실상 핸더슨이 이끌고 있는 일단의 두뇌집단은 초정예의 백악관 참모진을 방불케 했다. 실제로 그의 부친은 미 대통령으로 8년 간이나 재직한 마커스의 조부를 위해 백악관에서 정책 담당 자문의 직책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신 연방 의회의 상원의원이었던 마커스의 부친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선에 출마할 뜻이 없으며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뒤 워싱턴을 떠나자 로웰 부자를 따라 미련없이 은퇴를 결정해 버렸다. 그리고 그 무렵 막 대학을 졸업한 신출내기였던 루 핸더슨은 부친의 첫 출발이 그러했든 그 역시 로웰 그룹으로 들어가 마커스와 함께 일하는 길을 선택했다. 나이답지 않은 노련함과 지혜, 필요하면 어떤 계략이라도 눈 하나 까박하지 않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그는 자신의 마커스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만큼 똑같은 신뢰를 그에게서 받고 있었다. "제이 한, 본명 한재희. 한국계 2세. 신원미상의 고아라…" 마커스는 몇 페이지에 걸친 보고서 내용을 손가락으로 슬며시 쓸었다. 풀 네임을 알고 보니 몇 번 정도 이름이 스쳐간 적도 있었다. 흙먼지로 뒤덮인 차 안에서 헬멧을 쓰고 카메라를 향하고 있는 사진이나 검은 고글을 쓴 채 찍힌 옆모습도 한두 장 가량 본 기억도 뒤따라 붙어나왔다. 하나 그때는 젊은 여자가 꽤 특이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감상 외에는 무심하게 기사를 흘려버린 것이 다였을 뿐 장래 어딘가쯤에서 이 여자를 만나 그가 이만큼의 관심을 느끼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불과 얼마 전 당사자가 맨발의 드레스 차림으로 그의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리고 기습적으로 그의 입술을 빼앗은 뒤 자욱한 피냄새를 맡은 광분한 매스컴의 코앞에 그 혼자만 제물로 던져놓고 감쪽같이 빠져나가 버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광기는 전염성이 강하다고 하죠. 로웰! 날 제멋대로 당신 영역에 끌어들인 일을 후회하게 될 거야. 원하면 얼마든지 따라와 봐!' 그녀의 도발적인 속삭임. 감촉과 향기가 아직도 그대로 각인되어있었다. 그때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생생한 욕망이 괴롭히듯 되살아날 정도로. 그날 밤으로 이블린 칼턴에게 별로 매끄럽지 못한 작별을 선언하고- 언제나 유연하게 여자관계를 처리해온 그로선 사실 인내심이 부족한 처사였으나- 다음날 아침 식사 테이블에 놓여진 결코 점잖다고 할 수 없는 표현이 난무하는 '진지한'런던 타임즈를 읽으면서 그는 당장 재희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하지만 신문에 간단히 일부만 언급되었던 그녀의 전력이 루에 의해 낱낱이 기록되어 손에 놓여진 지금, 마커스는 재희의 지난 행적에 사실 감탄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사자, 혹은 독수리의 심장을 가진 여자였다. "인생을 무척 치열하게 아니, 꼭 죽으려고 사는 여성 분 같군요." 직원들에게 혹 심장 대신에 영구 베터리가 가슴에 들어 있는 것은 아니냐는 소리까지 듣는 루가 한 말이다. 하지만 말의 내용과는 달리 표정을 마치 진한 감명이라도 받은 듯했다. 어지간한 그도 그녀의 전적에는 혀가 내둘린 모양이었다. 그의 말대로 흔치 않은 프로필이었다. 아니 사실 믿을 수 없이 화려하고 다채로운 약력을 이 동양인 여자는 자잘한 액세서리처럼 소유하고 있었다. 우선 그녀는 출신에 비해 아주, 혹은 지나치게 부유한 여자였다. 젖비린내가 날 정도로 새파란 나이에 뛰어든 주식과 부동산 시장에서 한재희는 승승장구, 일찌감치 백만장자의 대열에 합류했으며 후에도 비밀리에 투자를 지속, 예리한 선견지명과 뛰어난 위기 관리감각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부를 축적했다. 단언컨대 주식 중개인이나 투자 자문 컨설턴트로 나섰다면 윌가의 거목이 되고도 남았을 재능이었다. 그러나 그녀와 같은 밑바닥 출신이었다면 우선적으로 지향했을 안전하고 편안한 상류층의 문으로 곧게 직직하는 대신 한재희는 느닷없이 방향을 선회했다. 난폭하고 거칠며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자동차 경주의 세계로 풍덩 뛰어든 것이다. 여자는 고사하고 남자에게도 볼모의 지대나 다름없는 그곳으로. 처음에 사람들은 그녀에게 적응하지 못했다. 단지 흔치 않은 여성 드라이버라는 이유로 업계의 이슈성은 있었지만 그것은 실력으로 말하지 않는 이상 얼마 가지 못할 일회성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를 곧 잊어버리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한재희는 달랐다. 모든 이들의 이목을 불신하게 했을 뿐 아니라 외려 그들의 경악을 즐기기라도 하듯 엄청난 기세로 최고에 가까운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목숨이 위태로울 만큼 위험하거나 극적인 스포츠라고 알려진 종목은 거의 남김없이 섭렵해 가면서 스스로를 하나의 전설이 되다시피 만들어놓았다. 경주, 활강스키, 암벽 타기, 래프닝, 스카이다이빙에 장애물 경주까지… 그 뒤로도 그녀가 도전하는 위험한 취미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정도. 어찌보면 정말 루의 말대로 죽으려고 사는 인간의 행동이 이럴지도 모르는 일이다. 왜 이렇게 위태롭고 거침없는 인생을 추구하는 것일까, 이 여자는! 마치 끝없이 자신을 몰아치며 무언가로부터 달아나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순간 마커스는 그녀에게서 맨 처음 느꼈던 모순된 인상을 기억했다. 강함 속에 내재한 고독과 외로움. 외로움이라… 고독이라면 몰라도 한재희와 외로움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마커스는 되뇌었다. 그가 마주쳤던 여자, 또한 이 보고서 위의 여자는 당당하고 강인했다. 그녀의 버려진 핏줄, 불행했던 과거 아무것도 그녀를 쓰러뜨리거나 부숴놓을 수는 없다는 듯 침착하고 견고했으며 마치 흐르는 물처럼 초연해 보였다. 그렇지만… 마커스는 서류를 쥔 채 호두나무로 조각한 가죽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리고 보고서 맨 마지막에 첨부된 예상치 못한 어떤 인물의 이름을 싸늘하게 주시했다. 제이슨 호크. 또 하나의 놀람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한재희와 함께 이자의 이름이 딸려 나오리라곤 짐작도 하지 못했다. 오래 전 잠깐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 그와 제이슨 호크는 첫눈에 서로를 재어본 다음 동시에, 똑같이 상대를 싫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서로의 관심 분야가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했고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백악관의 공식 일정으로 치러진 자선행사 내내 그들은 필요한 말 이외에는 어느쪽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일종의 동족 혐오와도 같은 반응이었다. 같은 유의 속성을 지녔기에 서로가 껄끄러운 것이다. 그런데 그 제이슨 호크가 비록 열두 살 때, 후견인의 명목뿐이라고는 해도 그가 손에 넣고 싶어하는 여자의 신상기록에 언급되었다는 것은 마커스에게 충분한 놀라움과 의심을 안겨주었다. 후견인이라고? "제이슨 호크가 키다리 아저씨 노릇을 한다…" 그야말로 웃다가 사레가 들릴 일이다. 호크는 거의 마커스 자신만큼이나 사업에 있어선 무자비하고 냉혹하기로 평판을 쌓은 사내였다. 오죽하면 윌스트리트나 업계에서 제이슨 호크를 지칭하는 말로 검은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별명까지 지어주었겠는가 말이다. 호크의 회사인 J.H인터내셔널은 처음엔 그저 아주 소소한 기업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불과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업계의 일인자로 올라선 호크는 실패를 모르는 기반 확장으로 현재까지 전 세계에 걸친 군수품 경쟁 시장에서 어마어마한 이권 시장을 장악하며 J.H인터내셔널의 영향력을 반석만큼이나 절대적이고 막강하게 굳혀놓았다. 그로 인해 제이슨 호크는 지난 수십년 동안 미국 내에서 가장 자수성가한 남자의 전형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경이적인 행보 뒤엔 늘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호크가 흔치 않게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상류층의 일각에선 그가 이태리 마피아의 사생아 출신이라는 루머가 끊임없이 나돌았고 거기에 뼈대가 생기고 살까지 붙어 그의 비밀스런 혈통에 관한 온갖 황당한 추측이 난무했다. 그러나 그 소문들 전체를 완전한 사실 무근으로 볼 수도 없었다. 마커스가 느낀 바로는 그 사내에겐 무시할 수 없는 본질적인 어둠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 사내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루?" "확실히 기묘한 구도의 그림입니다만…" 마커스의 생각에 잠긴 듯한 뇌까림에 루가 피력했다. 재희와 호크는 여전히 만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그 만남이 마커스가 그녀에게 원하는 종류의 그것과 같은 것이라면 호크는 아주 부담스러운 방해꾼이었다. 그 미끈하고 어린 루이스 베어포드와는 레벨부터가 틀린. 체급으로 빗대자면 가장 가벼운 플라이급과 무제한급의 차이 정도, 혹은 어린 아이와 성인의 차이일까. 그러나 베어포드는 물론 호크 둘 다 재희의 애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녀를 사이에 두고 다른 남자와 힘 겨루기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커스는 괜히 언짢아지는 성질을 참기가 어려웠다. 과거든 현재든 여자의 연애편력을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여자가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짐작이 들면 끝내버리면 그만이었다. 거기엔 분도도 실망도 없었다. 일단 헤어진 여자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는 시효 지난 음식에 불과했다. 얼마를 줬건 버리는 데 아쉬움이 남을 리 만무한 것이다. 그런데 시작도 하기 전에 다른 남자의 개입을 사전에 차단해 버리고 싶어진 것은 무슨 조화에서란 말인가. "이 여자 지금 어디 있지?" "경주 중입니다." "경주?" "사이프러스에서 열리는 세계랠리선수권에 참가했습니다. 첫날 경기에서 별 트러블 없이 상위권에 진입한 모양입니다만." "그래?" 마커스는 목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갈증이었다. 재희라는 존재와 그 존재 안에 내재되어 있을 열정과 뜨거움에 대한. 첫 만나에서부터 비롯된 그 성취에의 욕구가 그녀의 보고서를 읽은 후 점점 더 세차게 그를 갉아먹고 있었다. 철저히 만족감을 음미할 때까지 그녀의 모든 에너지를 자신만이 독점하고 싶었다. 호크든 베어포드든 그를 방해하는 것은 하나도 남겨두지 않을 심산이었다. 6장 재희는 사방을 매캐하게 물들이는 엔진의 기름 냄새와 타이어가 거칠게 마찰하며 일어나는 타는 냄새를 가득 들이켰다. 라이벌들의 승부욕이 감도는 적대감조차도 기꺼우리만치 반가왔다. 세계에서 몰려든 참가자들과 자동차들로 치열한 각축을 벌이는 세계릴리선수권도 벌써 5년째로 시즌 중반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통칭 WRC(World Rally Championship)로 불리는 이 대회는 1973년 개최된 몬테카를로 랠리를 그 시초로 첫해에는 총 13전을 개최했으나 이후 8~12전 등으로 바뀌다가 다시 매년 14전을 여러 나라를 돌면서 치르게 되었다. 물론 랠리의 역사는 1911년에 최초의 경기가 시작되어 그보다 훨씬 오래 되었지만 이후 영국의 RAC,핀란드의 1008호 랠리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열리던 경기가 하나로 통합되면서 WRC시리즈가 탄생한 것이다. "컨디션은 괜찮아?" "최고야." 오늘로서 드디어 마지막 3레그(leg. 하루 동안의 일정)를 맞이하는 이 사이프러스 랠리는 그 중에서도 코스의 험난함과 까다로움으로 마의 평판을 날리고 있었다. 거칠고 깊이 파인 노면, 급커브의 내리막, 비와 흙탕물, 바위투성이 낭떠러지까지. 그로 인해 사이프러스 랠리는 그래블 (gravel.비포장도로) 랠리의 묘미라고까지 불리며 사고없이 무사히 완주하는 것만이 포인트를 따내는 지름길이라는 인식을 드라이버들에게 심어주었을 정도였다. "좋아, 그럼 오늘도 잘해 보자구. 제이." 조수석에 앉아 코스의 특징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은 패스노트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던 코드라이버(cadriver) 준의 격려에 재희는 대답 대신 장갑 낀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준은 흠잡을 데 없이 숙련된 베테랑 파트너였다. 랠리에서 각 스테이지에 대한 코드라이버의 정보와 조언은 드라이버의 기량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기성적은 그저 드라이버의 실력에 달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코드라이버의 도움 없이 난이도 높은 코스를 고속으로 질주하면서 좋은 기록을 내기란 어려운일이다. 이동구간(Road Section)과 경기구간(Special Stage)을 합쳐 총 거리를 계산하는 랠리는 이 중 스페셜 스테이지 (Special Stage)로 불리는 경기구간의 주행시간에만 기록을 재 순위를 매긴다. 어제까지의 경기로 재희는 페널티 없이 무난히 득점권에 들었지만, 우승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할 순 없어도 절대적인 것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옆에 앉아 있는 준과 팀의 분위기로 보아 시즌에 또 한 번의 승수를 보탤 수 있기를 모두가 기대하고 있다는 것은 확연했다. 스페인에서 아깝게 놓쳤던 승리가 팀 내부에 여전히 큰 아쉬움으로 자리잡고 있는 눈치였다. 보통WRC에 출전하는 드라이버들은 자동차 메이커의 이름을 달고 참가하는 워크스 팀(works team)과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는 프라이빗 컴페티터(private competitor)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쟁쟁한 메이커들의 기술과 자원 지금을 받는 워크스 팀 드라이버에 밀려 개인 참가자들이 상위권 진출을 노리기란 힘든 실정이었다. 재희 자신의 경우는 일부러 메이커의 스카웃 제의를 거절한데다 다행히 자금이 장애가 되는 상황이 아니어서 제이슨이 중재한 메이커의 엔진만을 후원받아 일정 규모의 세미 워크스팀을 독자적으로 갖추었다. 그로 인해 워크스 팀 소속 드라이버들과는 달리 팀 포인트(manufactures point) 순위에 상관없이 훨씬 자유로운 경기를 즐길 수 있는 건 사실이었으나 그렇다고 팀원들의 수고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생각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재희의 승리가 그들에겐 자신의 성취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운이 따라준다면… 재희는 날카롭게 일어서는 신경을 의식하며 어쩌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기록을 오늘쯤은 갱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잠깐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승에 대한 집념보다는 자신이 가진 기량에 대한 도전의식이었다. "근데 저 남자, 아주 낯익지 않아?" 갑자기 경기의 내용과 상관없는 준의 짓궂은 음성이 귀를 울렸다. 어디서고 눈에 확 띄는 그 남자는 몰려 있는 군중 속에서도 따로 테를 두른 듯 한눈에 들어왔다. 재희는 이미 삼십 분도 전에 그를 보았다. 어디서나 최고 대접을 받는 것이 당연한 듯 사람들이 줄줄이 그의 뒤로 늘어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회사가 후원하고 있는 팀도 있었지. 아마, 하지만 한 번도 직접 시찰을 나온 적은 없었다고 들었는데." "어쩌다 시간이 남아도나 보지." "그런가?" 며칠 전의 신문 내용을 조사 하나 빠트리지 않고 모조리 섭렵한 준은 큭큭 웃음을 흘렸다. "노크나 잘 봐. 엉뚱한 지시를 했다간 자갈길에다 네 머리를 갈아버리고 말 테니까." "우리 사이에 그런 살벌한 소리를 " "내리막에서 차가 뒤집혀 굴러떨어지는 날엔 내 충고가 오히려 감사해질걸." 재희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그때까지 웃고 있던 준이 정색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어제 그 끔찍한 코스를 무사히 탈출하고 이제 와서 승리를 놓칠 생각은 없어." 그가 진저리를 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원래 사흘간의 경기중 가장 힘든 것이 이튿날이기도 했지만 멀쩡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져 중간에 비가 내리는 통에 노면이 진흙탕으로 변해서 애를 먹었던 것이다. 덕분에 군데군데 흙탕물이 흘러내리고 차 유리창에 습기가 가득 차서 최악의 구간을 달리느라 모두가 잔뜩 긴장하고 말았다. 길이 아니라 강을 건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그럼 어디 시작해 볼까!" "샴페인 잊지 마." "물론이지!" 출발 직전 스타트 라인에서 재희는 흘낏 멀리 서 있는 마커스 로웰의 위압적인 모습을 마지막으로 일별했다. 마커스는 재희의 차가 달려나가기 직전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를 여기까지 끌로 온 한재희란 여자의 실체가 무엇이든 그때 그녀 안에서 느껴지던 불꽃이 이 거친 경기 안에서 훨씬 활기 차게 타오르고 있다는 점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오페라 하우스 안에서 그에게 도전장을 던진 여자가 축제용 폭죽 같았다면 오늘의 저 여자는 거의 핵 수준에 맞먹는다고나 할까. 그에게 향하던, 경기에 대한 흥분과 도전으로 이글거리던 그녀의 눈빛을 생각하자 중추신경이 저릿했다. 자기 방어가 강한 그의 뇌리 어딘가에선 그녀에 대한 첫인상이 반쯤은 과장된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있었다. 마침 지겹던 차에 특이한 상황에서 만난 여자의 생경한 태도에 호기심이 잠깐인 것뿐이라고. 그리고 불현듯 침대에서 저 여자를 가지면 어떨까 싶은, 태곳적부터 주입된 수컷 본연의 욕구가 그를 충동질했다는 사실 외에는 달리 특별한 것도 없는 여자라고 자신을 합리화했었다. 그러나… "출발이 좋군요. 잘하면 선두를 탈환할 수도 있겠는데요." 어디선가 돌아온 루가 커피가 든 컵을 마커스에게 내밀었다. 누구를 지칭하는지 아는 마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이 오르는 잔을 받아들었다. 방금 재희가 첫 번째 스테이지에서 톱 타임을 기록했다. 차체에도 별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그렇군." "실제로 랠리는 처음 봅니다만 생각보다 더…" "격렬하지." 마커스는 날카롭게 미소를 떠올렸다. 저 여자가 택한 삶의 장이 이런 곳이란 말이지. 그는 진한 블랙 커피의 향조차 희석시키지 못하는 냄새를 맡았다. 살벌하고 위험한 동시에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한 자극적인 냄새였다. 마커스가 매시간 매초마다 대면하는, 계산되고 문명화된 정글의 위험과는 전혀 상반되어 있으면서도 닮은 구석을 연상시키는. 재희는 오르막에서 속도를 높였다. 어제까지 선두를 달리던 드라이버가 연거푸 일어난 실수로 밀려났다. 그래블 랠리는 타막(tarmac. 포장도로) 랠리에 비해 노면이 거칠고 굴곡이 심해 자동차의 속도가 아무래도 떨어지기 때문에 사고 발생시 오히려 선수들의 부상이 덜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사고 자체의 위험부담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위험은 어디에나 산재해 있었다. 갑자기 엔진의 유압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고 어제처럼 예기치 않았던 폭우에 와이퍼가 고장나 시야가 완전히 막힐 수도. 거친 노면에 타이어가 짖겨나가거나 심한 굴곡의 코너 각도를 잘못 계산해 정신없이 구를 수도 있다. 아무리 철저한 준비나 연습을 한다 해도 변덕스런 자연 상태와 코스의 상태를 백 퍼센트 자신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있는 경주인 것이다. 차가 거칠게 덜컹댔다. 재희는 핸들을 쥔 손을 강하게 움켜쥐고 상체를 함께 돌렸다. 순간 켜켜이 쌓여 있던 먼지가 뿌옇게 뒤덮였다. 전류에 감전된 듯한 짜릿한 감각이 전신을 통과하는 동시에 준의 고함소리가 윙하고 지나갔다. "제이! 제정신이야! 거기서 그렇게 드리프트(급커브를 한 버에 회전하는 레이싱 기술)를 하면…" "미안!" 그러나 악마의 꼬리 같은 먼지 구름을 뒤로한 채 가속 페달을 밟으며 다음 코너를 향하는 그녀의 귀에 그의 충고는 그리 강하게 파고들지 못했다. 자동차 엔지의 광음 속에서 그녀의 머리 속은 오로지 노면과 급경사, 진창과 자갈 같은 장애물들만이 숨가쁘게 펼쳐지고 있었다. 축축하게 흘러내리는 땀이 얼굴을 온통 적셨다. 준이 열심히 도로의 상태와 위험 요소를 설명했다. 마지막 스테이지였다. 혀끝으로 갈라진 입술을 축여보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허덕댈 만큼 뜨거운 공기가 차의 몸체를 한껏 달구어놓았다. 거친 자갈길의 연이은 커브를 돌면서 뒷바퀴가 살짝 벗어났다. "젠장!" 어떻게든 안전을 확보하면서 차의데미지 최소화가 관건이었다. 다행히 타이어의 마모상태가 걱정보다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준이 안도의 한숨을 내뿜었다. "20미터 앞에 개울이 있어, 재희. 깊이는 5에서 8(Cm)정도 돼. 오른쪽으로 통과해. 얕긴 해도 조절이 어려운데다 얼마든지 미끄러질 수 있다. 차가 달려가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달아났다. 그 다음부터는 땅이 다 마른 상태라 밀어붙이기만 하면 되었다. 재희는 공격적인 속도로 나머지 코스를 통과했다. "피니쉬 라인이야, 재희!" 준이 한껏 흥분된 목청으로 고함을 질렀다. "우승이라구!" 마커스는 저만치 보이는 흑먼지를 주시했다. 군데군데가 긁히고 우그러진 경주차, 차체는 형편없었지만 어쨌든 드라이버는 해냈다. "우승이군요," 루가 말했다. 차에서 내리는 재희와 한 남자에게 그녀의 팀원들과 프레스. 경기 위원회 관계자들까지 우르르 합세해 몰려갔다.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한재희가 또 다른 페이지의 승리를 기록한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의미없는 질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냥 밋밋하게 지나갈 수도 있었던 헤어짐을 대중 앞에 펼쳐 놓고 그를 자극하는 편을 택했던 건 그녀였다. 강탈하듯 그녀는 그에게 전쟁을 선포했던 것이다. 강탈과 전쟁, 적절한 단어였다. 매일 밤 커다란 킹 사이즈의 침대에 누워 육체적 접촉이라곤 고작 맨발의 피부, 그리고 벼락처럼 끝나버린 입맞춤이 전부인 여자에 대한 욕망으로 사춘기 소년처럼 뒤척이며 불면증에 시달릴 순 없는 오릇이다. 마커스이 눈길이 못 박힌 듯 헬멧을 벗는 그녀에게 고정되었다. 사람들의 숲이 그녀를 에워쌌다. 격려와 축하, 샴페인이 비처럼 쏟아지고 한바탕 사진촬영이 지나갔다. 겨우 동료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시상대에서 내려온 재희는 샴페인 병을 한 손에 들고 흠뻑 젖은채로 마커스를 향해 다가갔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갈라지며 길을 터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들이 이미 공인된 사이라도 되는 양, 아니면 여기까지 손수납신 그의 사전 의도에 이미 그런 계산이 내포되 있었던 건가? 그녀는 차갑게 곱씹었다. 오늘의 그는 국제적인 거물 사업가라기보다 오만하고 위험한 바람둥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안엔 무정하고 심장이 없는 남자가 들어있으리라. 그의 외모나 환경이 약속하는 달콤한 착각은 그 스스로가 원하는 동안만 여자에게 해당될 것이다. 일단 끝이라는 선고가 내려지면 그는 절대 여자에게 휘둘릴 남자가 아니었다. 재희가 그의 모습을 면밀히 검토하는 동안 그는 조용히 먹잇감을 덮칠 기회를 보고 있는 백수의 제왕처럼 오연하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른 우연인가요?" 실룩, 그의 뺨에 홈이 패었다. "피차간에 순진한 거짓말은 때가 지났지 않소?" 그러자 샴페인으로 축축한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재희는 시원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그를 재어보듯 조금의 빈틈이라곤 없는 단단함이 내비쳤다. 그가 자신을 일부러 찾아낸 것쯤은 별반 놀랍지 않았다. 마커스 로웰의 스타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십중팔구는 분명 사람을 풀어 이미 그녀의 뒷조사를 철저하게 끝냈을 것이다. "그렇군요. 하지만 당신 같은 남자가 내 뒤를 밟고 다닌다는게 기쁘지만은 않군요." "숨기고 싶은 비밀이라도? 내가 보기엔 아주 인상적인 기록이었소만." 마커스는 호크에 대한 사항을 염두에 두고 넌지시 떠보았지만 재희는 넘어오지 않았다. "당신만큼 극적인 삶이 아니라서 내세울 게 없답니다. 미스터 로웰." "겸손이 지나치군, 어쨌든 축하하오. 대단한 경주였어." 공치사가 아니었다. 한재희는 여자로서도 놀라운 존재였지만 드라이버로서도 경이적인 능력의 소유자임이 확실해졌다. 그러나 재희는 담담히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따름이다. "이것으로 2승인가? 어쩌면 시즌 타이틀도 꿈이 아니겠군." "아직 경기가 많이 남아 있어요. 하긴 올해가 아니라도 언젠가 챔피언 타이틀을 따낼 생각이지만." 1년동안 정해진 14전의 경기를 치러 매 경기1~6위의 드라이버들에게 부여되는 점수의 합계로 시리즈 드라이버즈 챔피언을 결정짓는데 이 점수를 드라이버즈 포인트(drivers point)라고 한다. 1위부터 10점. 그 뒤로는 각각 6,4,3,2,1,의 포인트가 주어지는 것으로, 오늘 경기의 결과로 그녀의 순위는 두 번째로 뛰어올랐다. 성급한 감이있긴 해도 타이틀 후보에 거론되기에 무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처럼 뜻밖의 부상만 당하지 않는다면 그녀로서는 얼마든지 해나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발등에 떨어진 불도 함께 꺼야 하는 법. 우선은 눈앞의 남자와 마무리지어야 할 일부터 해결을 봐야겠지. "당신 후원하고 있는 팀이 우승을 놓쳐서 아쉽겠군요." "상관없소. 난 당신을 응원했으니까." 마커스는 정말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머리를 저었다. 재희의 까만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번득이며 그를 따라왔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따라 흐르던 액체가 목덜미 사이로 방울지며 떨어지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을 텐데 샴페인은 들어야죠?"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병을 입가로 가져가 숨도 쉬지 않고 단번에 들이킨 다음 그에게 건네주었다. 마커스는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그녀의 동작을 지켜보다 도발하듯 내민 병을 받았다. 그리고는 마치 건배하듯 들어 보인뒤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또 다른 승리를 위해." 재희는 그가 꽤 많은 양의 샴페인을 마신 뒤 병을 내려놓자 쿡쿡 웃었다. 유쾌하다는 듯. 글라스 없이 저런 식으로 마셔본 적이 과연 있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저 남자에게선 어떤 때, 어는 장소에서도 서투르거나 어색한 점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첫날의 포장과는 많이 다를 텐데, 실망하지 않았나요?" 재희는 땀과 먼지투성이인 자신의 복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입었던 사치스러운 꽃잎 같은 드레스보다 훨씬 편하고 또 그녀와 어울리는 차림이기도 했다. 그날의 자신은 그가 늘 데리고 다녔던 정부들의 외향과 별 차이가 없었는지 모르지만 만일 그가 되도 않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면 이것으로 완전히 박살이 난 셈이리라. 하지만 마커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로 그녀의 예측을 간단히 비껴갔다. "내가 그날 당신의 '포장' 을 보고 가장 바랐던 것이라곤 그걸 벗겨내는 것뿐이었다면 반응이 어떨지 상당히 궁금하군?" "지금도 그렇다면 충고하건대. 먼지 맛이 많이 나서 그다지 맛은 없을 거예요." "그럼 그런 식으로 남자를 보진 말아야지." 그가 어둡게 눈을 빛내며 경고하자 재희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그를 노골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겨우 의식했다. 곤란하군. 재희는 내심 혀를 차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이 남자의 어디에 끌리는 걸까. 성적인 매력? 아니면 인간이자 남자로서의 저 거침없는 자신감? 강인함? 하지만 그런 것들이라면 넘칠 정도로 가진 또 다른 남자를 십 수년 간 알고 보아오지 않았던가? 그에게는 한순간도 전류가 흐른다거나 그의 나체를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걸 당신도 느끼고 있나?" 긴장감 어린 위협, 삽시간에 주위의 소음들이 윙윙거리는 진공상태로 변해 버렸다. 재희는 발을 내디딜 곳을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는 것을 자신에게 되뇌었다. "그래요" 그녀의 음성에서 머뭇거림은 사라져 있었지만 민감하게 조율된 분위기를 풍겼다. "재미있어요, 나란 여자도 남자한테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게." 마커스의 귀엔 도리어 기분 나쁘다는 것처럼 들렸다. 갑자기 그녀가 가까워졌다. "어쩌면 당신을 잡아먹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뺨이 스칠 정도로 바짝 얼굴을 갖다대고 그녀가 속삭였다. "겁나지 않나요?" 그의 근육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졌다. "얼마든지." 이를 가는 듯한 대답이 새어나왔다. 초조하고 갈라진 음성이었다. "나도 그만큼 당신이란 여자를 가질 테니까." 그는 조금만 더 있으면 자신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끌어당기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 다음엔 누가 뭐라 건 가장 가까운 개인 장소로 그녀를 데려가 방금 던진 위협대로 한 줌 힘이라곤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그녀를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는 깨끗이 머리 속에서 몰아내 버리리라. 불가사의해 보이는 이 여자의 정체를 완전히, 남김없이 벗겨내고 만족할 만큼 취한 다음 손을 털면 그뿐인 것이다. "아쉽게도 …" 재희의 입술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 샴페인 향기가 훅 끼쳐왔다. "여전히 눈들이 많군요." 재희는 사람들의 기대감 가득한 이목을 상기시킨 다음 그의 어깨를 슬쩍 밀었다. "자세한 협상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죠. 그럼." "도망인가?" "어쩌면." 그녀는 부드럽게 그로부터 물러났다. "이번까지만 봐주지." "승낙이 필요하다고 한 적은 없어요. 로웰." 그녀가 대꾸했다. "먼길 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좋은 여행이 되길 빌어드리죠." "너무 기다리게 하진 마시오. 한재희. 지루함이란 심술궂거든" 루이스는 차양 그늘 아래에 숨어서 선글라스 너머로 떨어지는 재희와 마커스 로웰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모두 자리에서 사라지자 사람들의 목소리는 좀더 높아졌다. 가슴이 막히고 호흡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루이스는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듯 그곳을 빠져나갔다. 7장 "사장님, 시간 다됐습니다."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검은 양복의 중년 신사가 문을 열었다. 마흔을 넘은 각이 진 얼굴에는 정중함이, 주위를 살피는 자세에는 빈틈없는 예의가 담겨 있었다. "알았네." 다크 블루를 주조로 고상함과 품격을 강조한 그러나 인간미라곤 느껴지지 않는 서재의 중앙, 거의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상에 앉아 오늘 안으로 필요한 서류를 살피고 있던 제이슨 호크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그는 지금 국방성과의 하반기 거래에 대한 계약서에 첨부할 새 조항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제이슨의 변호사들이 회사에 불리하거나 혹은 거치적거리는 요소가 될 것 같다 싶은 부분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문장 개개의 토씨 하나까지 점검하고 또 점검한 문서였다. "비행기는?" "조종사에게 정각에 대기하라고 일렀습니다." 맥스는 시계를 보며 대답했다. "워싱턴에 제때 도착하시려면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만." 제이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려있던 재킷을 집어들었다. 연방 의회의 실세들과 군비문제에 관한 조율이 필요한 자리였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에는 비공식적으로 대통령과의 회합이 결정되어있었다. 어느쪽이든 어려운 자리가 될 소지는 없었다. 다소 밀어붙이기가 필요할 뿐. 제이슨은 흐릿하게 만족한 냉소를 눈가에 머금었다.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위태롭게 외교 감각을 휘둘러야 했던 시절은 지나갔다. 이제 이 나라 안에서든 밖에서든 제이슨 호크의 입김은 확고했고 어디에서든 황금의 율법과도 같은 효과를 발휘했다. 무소불위! 바로 그의 회사와 제이슨 호크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리고 동시에 어둠과 결속된 이름이기도 한. "재희 양이 사이프러스 경기에서 우승을 했더군요." 그동안 서류 가방을 챙기던 맥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주변이 여간 소란스럽지 않습니다." "시끄러운 인물을 선택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제이슨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낮게 중얼거리고는 앞서 서재를 걸어나갔다. "이건 정말 재희 양답지 않다는 생각이…" "녀석답지 않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맥스?" "네?" 제이슨의 반문에 맥스는 무심코 그를 쳐다보았다. "그럼 사장님은…" "마커스 로웰, 물론 쉬운 적수는 아니겠지만…" 말끝을 흐리며 제이슨이 문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맥스는 그의 머리 속으로 정확히 어떤 생각이 오가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래도 세월 따라 어는 정도 익숙해졌지만 지금도 제이슨 호크의 감정적 변화를 알아내는 것은 거의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과제였다. 덧붙여 또 한 명의 불가해한 사람. 한쪽이 아예 표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면 다른 한쪽은 웃음을 가장한 포커 페이스로 속을 감춘다는 것이 그나마 차이점이랄까. 처음 루이스 베어포드의 사건 현장에서 다 죽어가는 재희를 데려와 그가 소년이 아니라 소녀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비록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놀랐지만 곧 이어 그녀의 눈부신 재능과 대담하고 거침없는 강인함이 드러날수록 맥스는 제이슨과 그녀가 어울리는 영혼의 짝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희망을 품은 적도 있었다. 즉 서로의 암흑 같은 인생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맥스는 자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결코 넘볼 수 없는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제이슨의 모든 것을 존경했으며 가슴 깊숙한 곳에 항상 그에 대한 애정이라 불러도 좋을 뭔가를 담아왔다. 그런 만큼 그는 언제나 제이슨이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었다. 부와 힘, 권력만이 전부가 아닌 세상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 평범하다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기쁨을 찾게 되길 말이다. 그리고 저렇게 어둠 속에서 앞만 바라보고 돌진해 가는 그를 지켜줄 만큼 강한 누군가가 있다면 재희보다 적당한 재목을 찾기도 힘들 거라 생각했었다. 그것은 솔직히 그리 헛된 망상도 아니었다. 치유하기 힘든 인간 불신과 오랜 상처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어느새 나름대로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저런 걸 우정이라 불러도 좋을지 망설여지긴 했지만 어쨌든 맥스의 견지에서 그들은 은연중에 상대를 다른 주변 인간보다는 우선시하고 존중해주었다. 그러나 불과 얼마 뒤 야심 찬 포부에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맥스는 그들이 서로의 고독하고 얼어붙은 영혼에 사랑을 심어줄 수 있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두 사람 사이엔 남녀간의 운명적인 끌림이란 게 조금도 보이질 않았다. 노골적으로 말해 불꽃의 파편조차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양쪽이 다 얼음이었다. 그리고 어느쪽도 불이 되길 거부하는 차가운 이성의 신봉자들이었다. 그러니 미지근한 온기는 전달할 수 있어도 타인으로 인해 그것을 완전히 녹여 끓게 만드는 일은 애초부터 그들의 사전에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맥스는 제이슨에게 인간적인 부분으로 나아 있는 재희에게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그녀의 일이라면 여지없이 각별한 호의를 먼저 앞세워왔다. 그런데 그런 재희가… "설마 재희 양이 진심이라고 여기시는 겁니까, 사장님?" 하, 그럴 리가. 맥스는 얼떨결에 고개를 저었다. 저 재희 양이? "두고 보면 알겠지. 결국 누가 쫓고 누가 좇기게 될는지 말이야." 의미심장한 단언과 함께 제이슨은 더 이상 논평할 마음이 없다는 듯 복도로 나가버렸다. 만약 제이슨의 예언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이만저만 골치 아픈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 아닐 텐데. 베어포드가 순순히 물러나리란 추측은 숫제 불가능에 가까웠다. 맥스는 제이슨과 재희가 나란히 있을 때면 거의 반사적으로 질투에 가까운 적의를 드러내던 루이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재희가 그런 의미로는 일말의 감정조차 가지고 있지 않는 제이슨을 상대로도 그랬는데 이번엔 그녀 스스로 자초한 스캔들이라는 경악할 만한 이변에다 상대가 마커스 로웰이라면… 아무리 그렇다 해도 서로 상대가 너무 나빠, 재희 양. 오죽하면 차라리 루이스 베어포드의 손을 들어주고 싶을까! 한바탕 무시무시한 태풍이 불겠군. 맥스는 긴 한숨을 소리없이 내쉬고는 검은색의 가죽가방을 들고 서둘러 제이슨의 뒤를 큰 걸음으로 쫓아갔다. 이블린 칼턴은 운전사가 차 문을 연 순간부터 자신을 따라오는 수많은 시선을 자랑스럽게 음미하며 허벅지를 간신히 덮는 엄청난 초미니의 드레스 표면을 연극적으로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금색 하이힐로 각선미를 움직이며 걸음을 옮길때마다 남자들의 신음소리가 일제히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러한 남자들의 시선을 자신의 미모에 대한 찬미와 경배로 우아하게 소화할 줄 아는 여자였다. 시종일관 단련된 미소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남자들의 눈에 쉽게 가질 수 있는 가벼운 여자처럼 보이지는 않게, 정확한 계산하에서 이블린은 그들의 안달을 만끽했다. 이처럼 맹세코 그녀의 인생에서 남자가 부족해 곤란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난 왜 여기까지 온 거지? 그녀는 붉은 립스틱을 완벽하게 바른 관능적인 입술을 오므리며 한숨을 불어냈다. 그야 이유는… 한 가지였다. 바로 그녀처럼 절대 섹스 상대가 부족할 리 없는 어떤 남자 때문. 그래서 이 시기에 뉴욕을 방문할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으면서 그 지긋지긋한 비행시간을 견디고 여기까지 날아온 것도 마자라 분명 실패로 돌아갈 게 뻔한 배팅을 시도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를 만난 후부터 아마 그녀는 약간 미쳐 있는지도 모르겠다. 전애인들 중 누구도 침대로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공을 들여 계획을 짜고, 집요하게 파티를 찾아다니고, 그도 모자라 이미 절교를 선언당한 마당에도 이런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게 한 남자는 전무했다. 차라리 쇼핑이라면 모를까. 이블린은 빈정대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곧바로 립스틱색상이 망쳐질까 봐 이를 뗐다. 전투를 앞두고 갑옷을 망치는 건 바보짓이었다.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반쯤, 아니 거의 확신하고 있지만, 그러나 아무 발버둥도, 노력도 하지 않고 얌전히 끝내기엔 그녀가 들인 공이, 또한 마커스 로웰의 가치가 너무 아까웠다. 그녀는 로비로 들어서기 전 잠시 멈취서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의 하나를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맨해튼의 고층 건물들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로엘 그룹의 뉴욕빌딩은 그 외관에 있어서 뛰어난 건축학적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 외에도 세계 최대의 다국적 기업이라는 거대한 힘의 상징성까지도 함께 겸비한 최고의 건물이었다. 뉴욕에 뿌리를 두고 사는 토박이 뉴욕커든 아니면 잠시 스쳐가는 이방인이든 사람들은 이 멋지고 경이로운 백 층짜리 건물을 볼 때마다 로웰 그룹이 가지는 절대적 영향력을 자동적으로 떠올렸다.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치밀하고 탄탄한 조직력을 가진 수많은 자회사들과 세계의 증시를 한 손에 쥐고 흔들 수 있을 만큼 막강한 거대 자본력, 입김만 불어도 움츠러드는 경쟁사들은 물론이고 말 한마디에 울고 웃는 정치가들까지… 그들 모두가 한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바로 현재 로웰을 이끌고 있는 마커스 로웰이라는 남자의 눈치를. 그러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잘 해보자구. 최소한 마지막으로 그 남자의 멋진 얼굴을 한 번은 더 볼 수 있는 거잖아? 이블린은 어깨를 들썩하며 자신도 모르게 새 주름이 잡혀버린 이마를 풀었다. 그리고 빌딩 안으로 침착하고 오만하게 걸어갔다. "그녀가 정말 뉴욕으로 돌아온 건 확실한가?" 마커스는 다소 그답지 않은 성마름을 희미하게 드러내며 질문을 던졌다. 호화로운 카펫이 깔린 대리석과 두꺼운 원목 바닥을 따라 전체 사면이 거대한 방탄 유리로 이루어진 넓은 층은 마커스의 전용 집무실이었다. 그가 서 있는 정면으로 활기 차고 장대한 맨해튼의 광경이 뉴욕 여기저기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파는 조그만 그림 엽서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 있는 마커스는 고작 경치 따위를 염두에 담을 기분이 아니었다. "네, 회장님. 확인한 탑승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었습니다." 한쪽에 가만히 서 있던 루가 대답했다. "그런데 왜 아파트에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지?" "일단 사람을 세워두었습니다만, 아마 다른 곳에 숙소를 정한 듯합니다." "다른 곳이라…" 마커스는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호텔이나 아니면…" 말끝을 자중하며 루는 무테의 얇은 안경렌즈 너머로 화강암으로 새긴 듯한 곡선을 그리는 마커스의 옆얼굴을 슬그머니 살폈다. "멀쩡한 자기 집을 놔두고 호텔을 빌렸다는 말인가?" 마커스는 더 이상 느긋하지 않았다. 아니, 실은 짜증이 날 정도였다. 쉽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얼마간의 수고로 잡을 수 있으리라 방심했던 여자가 마치 그런 그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허공 중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 여자의 행방을 알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었다. 기분이 나빴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평소의 페이스를 완벽하게 잃다니. 빌어먹을! 그녀를 자신의 침대로 끌어들이기로 작정한 것과는 별도로 이런 과도한 집착은 마커스로선 전혀 예상한 바도, 또한 의도한 바도 아니었다. "기자들을 피해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태도로 보면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것을 거의 회장님만큼 기피하는 성격 같더군요." 루가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도 기자들 몇 명이 아파트 근처에 진을 치고 있다는 보고가 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이프러스로 회장님께서 날아가신 것이 끓는 소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으니까요." 기자들이 잔치를 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재희 또한 그런 것에 관심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무서워서 도망칠 여자가 아닌 것이다. 그녀의 자동차가 낭떠러지가 심한 구간에서 오히려 가속도를 올리던 장면에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피니쉬 직전까지도 뒤집히는 차량들이 있었지만 재희는 기어이 자신의 페이스 그대로 완주를 마쳤다. 그녀를 사귀는 동안에는 놀라지 않는 법부터 익혀야 했다. 상자 안에 또 다른 상자가 숨어 있는 깜짝 상자처럼 마주칠 때마다 재희는 손쉽게 그를 뒤흔들었다. "한재희" 동시에 그녀는 미로 같은 여자였다. 어떻게 해도 조각이 맞지 않는 퍼즐처럼 모호하며 뭔가 전혀 다른 비밀이 숨겨진 것처럼 혼란스러운 이미지를 가진 여자. 그럼에도 그보다 더 자유로워 보이는 여자를 마커스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 모순과 대담함에 이렇게 끌리는 건가? 마커스는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시시때때로 재희를 떠올리며 끊임없이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문득 그의 안색이 희미하게 변하며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정직하게 인정하면 사실 지금의 불쾌한 초조감은 재희의 부재보다 다른 데 이유가 있었다. 제이슨 호크. 웬일인지 그가 자꾸만 걸렸다. 정작 사이프러스에선 언급하는 것을 그만두었지만, 루의 치밀하고 까다로운 조사망에도 걸려들지 않는 그녀의 베일에 싸인 열두 살 이전의 기록들만큼이나 마커스는 그들의 관계가 신경 쓰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녀가 그 남자와 함께 있는 거라면? 만약 그를 유혹하는 동시에 그녀가 호크의 침대도 데우고 있는 중이라면? 그 한 줌도 안 될 것 같은 부드러운 나신이 호크의 몸과 얽혀 있는 환영이 눈앞을 가로막자 마커스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는 소유욕과 분노의 물결에 잠깐 휩쓸렸다. 혐오감이 아니라 분노였다. 그것도 그녀에게가 아니라 호크를 대상으로 일어나는 불쾌한 적대감. "루" 루가 즉각 머리를 들었다. "네, 회장님." "제이슨 호크 쪽을 알아봐, 눈치채지 않게. 정말 둘이 그저 단순한 후견인과 피후견인의 관계뿐인지, 그리고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도." 마커스는 차갑게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마커스의 명령에 으레 수반되는 루의 대답이 뒤따랐다. 사실 제이 한에 대한 보고서를 올리면서 이런 일은 예상했다. 상대가 만만치 않게 까다롭겠지만 어쩌겠는가. 마커스가 원한다면 제이슨 호크가 아니라 악마의 뒷조사라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수행해내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비록 지금의 경우엔 전자와 후자의 차이점을 뚜렷이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아마도 극도의 신중함과 조심성이 배로 요구될 것이다. 제이슨 호크의 어두운 정글을 소리없이 건드리려면. 풀 섶 사이에서 독을 품은 뱀이나 만나지 않을지 모르겠군. 그때 마커스의 책상 위에 놓인 인터폰의 불이 파랗게 명멸하며 그답지 않은 사색에 잠긴 루의 주의를 되돌렸다. 그는 마커스의 끄덕임에 버튼을 눌러 내선을 연결했다. "뭔가?" "저, 핸더슨 실장님. 물론 방해하지 마시란 지시가 계셨지만 갑자기 손님이 찾아 오셔서…" 비서인 멜린다가 거북한 말투고 공손하게 고했다. 잠시 후 중역진들과 회계 실무진들 간에 길고 복잡한 회의가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 오늘 오후엔 어떤 방문 일정도 잡혀 있지 않았다. 제1비서인 그녀가 그걸 모를 리 없다. "손님?" "이…블린 칼턴 양입니다. 회장님께 잠시 시간을 내주셨으면 하고 전해 달라시는데요. 사전 약속이 없으셔서 안 된다고 극구 말씀을 드렸지만. 저 무슨 정보를 가지고 계신다며 거절하시기 전에 한 번 더 재고해 보시라고 워낙…" 멜린다는 어딘가 망설이듯 평소의 절도있는 음성을 흐렸다. "들여보내시오. 멜린다. 단, 십 분뿐이라는 걸 주지시키고." 루가 의견을 구하기 전에 한 박자 앞선 마커스의 대답이 스피커를 통해 전달됐다." "네, 회장님." 비서의 한시름 놓은 듯한 목소리가 밝게 흘러나왔다. 아마 이블린 칼턴의 등쌀에서 벗어난 것을 안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끝난 여자를 사적으로 그것도 회사 내에서 대면하는 것은 지금까지 마커스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블린 칼턴에게 한번쯤은 예의를 보여줄 빚이 있었다. 마커스는 여자에게 결코 질질 끌 여지를 주지 않는 자신의 상식선에서도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끊어내듯 이블린을 떨궈냈다. 우연히 발견한 한재희라는 새로운 상대를 최대한 빨리 손에 넣고 싶어졌다는 한 가지 사실만 빼면 그럴 만한 이유는 조금도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블린 칼턴은 꽤 괜찮은 여자였다. 날 때부터 몸에 밴 오만과 얼마간의 속물 근성은 그 정도 집안의 여자에겐 단점도 아니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덜 지루했거나 운 좋게 맨발의 걸어다니는 자극제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아마 마커스 역시 몇 주 정도는 더 그녀를 파트너로 삼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블린은 그날 밤 그가 준 은근한 모욕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삼십 분 뒤에 회의 시작하지." "알겠습니다." "그동안 그 여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좀더 알아보게." "네." 그만 나가보라는 표시에 루가 허리를 숙였고 다음 순간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게 제대로 달려 있는 사내들이 봤다면 눈이 한 자는 튀어나올 정도로 짧은 드레스를 걸친 이블린이 사무실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마커스. 꽤 오랜만이군요." "이블린" 이블린은 사무실 가운데 제왕처럼 버티고 서 있는 남자의 근사한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입 안에 고이는 침을 꼴깍 삼켰다. 어째서 저 사내는 빌딩 숲, 문명의 한가운데에 서 있으면서도 마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칼을 들고 적을 짓밟는 무시무시한 고대의 전사처럼 보이는 건지 모르겠어. "당신도 오랜만이에요. 미스터 핸더슨. 여전히 반듯하고… 재미없어 보이는군요." 겨우 있는 걸 알아챘다는 듯 드디어 눈길을 루에게 옮기며 이블린은 눈썹을 깜박였다. 속눈썹만으로 저런 인사를 할 수 있는 여자가 있다면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일수도… 루 역시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어서 오십시오. 미스 칼턴." 이블린은 다리를 옮겨 흐트러지는 법이 없는 자세의 그를 스치듯 무시하고 지나갔다.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겠죠? 반가운 손님은 아닐 테니까요." 마커스는 그녀에게 자리를 가리켰다. “앉지. 미안하지만 오래 마주하고 있을 시간은 없소.” 하지만 이블린은 오히려 미소를 떠올렸다. “알아요. 저 밖의 요령없는 여자가 딱 십 분뿐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더군요. 나도 그 정도면 충분해요. 당신의 시간은 우리 같은 사람들의 시간하고는 전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진 않으니까요. 게다가 이젠 잠자리 파트너로도 잘린 마당에 만나주신 것만도 황송하죠. 안 그래요?” 이블린은 황금색 그물로 자여진 숄을 벗어 검은 가죽소파에 아무렇게나 걸쳐좋고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 바람에 치마가 더 올라갔다. 그리고는 금으로 세공된 얄팍한 케이스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물며 마커스의 허락을 구했다. “피워도 되겠죠?” 마커스는 무표정하게 마음대로 하라는 제스처를 해보였다. 찰칵하는 라이터 소리와 함께 흰 연기가 빙글 피어올랐다. “그럼 저는 이만. 회장님.” 루가 나가자 이블린은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내뿜었다. “저 사람은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군요. 잘 돌아가고 유능한 기계.” “그게 내 밑에 있는 사람들의 기본 조건이지.” “하긴 당신 같은 사람 밑에 있으려면 저 정도는 돼야겠죠.” 다시 한 모금을 태운 다음 그녀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지은 마스카라를 바른 속눈썹 너머 그를 바라보았다. “이블린.” 유유자적 한들한들한 그녀의 모습에 마커스가 남은 시간을 암시하듯 경고하자 이블린은 그제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 다음 행동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알았으면 싶은 게 있어서 지엄하신 당신의 추방령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어요. 미련의 소지를 남기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렇게 길진 않아요. 질문은 하나뿐이니까.” 그러나 적당한 시작을 찾는 게 어려웠다. 그녀의 말이 길게 끌렸다. “그때… 당신이 점잖게 비서를 통해 내게 첫 데이트를 청하기전, 그 무렵 말이죠. 기억하나요?” 과거를 나열하는 듯 그녀는 머리를 갸웃했다. “사실 그 훨씬 몇 달 전에 이미 우린 만났었어요. 그리고 그동안 죽 내가 별별 정보를 다 동원해 당신 주위를 고의적으로 서성대고 있다는 것도 당신이라면 벌써 눈치채고 있었을 테고요, 아닌가요?” “그래서?” 마커스는 긍정도 부정도 없이 간단하게 반문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줄곧 나를 무시했던 거죠? 일부러 애를 태워 안달하는 걸 즐길 심산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군, 아니면 날 너무 모르고 있든지, 내가 그렇게 할 일 없어 보이오?” 마커스는 애초에 그녀를 사무실에 들여놓기로 한 것이 시간낭비였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이블린은 그의 말을 듣기도 전에 답을 들어버린 기분이었다. “알겠어요.” “난 여자들과 노닥거리지 않소. 그리고 여자들의 그 밀고 당기는 게임도 질색이야. 원하면 취하지. 그리고 그것으로 전부요.” 냉정하고 차가운 대꾸는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지만 그게 마커스 로웰다웠다. “아주… 고매하시군요.” 이블린은 입술에 가느다랗게 이는 신경질적인 경련을 꾹 참고 미소를 유지했다. “어쨌든 고마워요. 이렇게 깨끗하게 확인 사살을 해주니 내 수고가 훨씬 줄었네요.” 사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다만 자신이 이 남자에게 티끌만큼의 의미라도 있지는 않았는가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싶었을 뿐. 그녀는 잡을 수 없는 이 남자가 좋았다. 한동안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을 만큼. 그래서 끝났다는 현실을 조금이라도 미뤄보고 싶었던 것뿐이다. 어쩌면 사랑이었을까? 그래. 이블린 칼턴은 마커스 로웰의 이름이 나타내는 권위와 힘, 그가 대변하는 부와 명예. 그리고 대중으로부터 쏟아지는 존경과 경외까지 포함해 그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삼켰다. 어떻게 제 정신을 가진 여자라면 마커스 로웰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것이 짝사랑으로 그친다 해도. 주책없이 아려오는 코끝을 무시해 버리고 이블린은 손을 털었다. 그녀와 같은 레이디는 언제 어디서라도 고상함과 품위를 유지할 의무가 있었다. “그럼 약속대로 당신의 다음 목표에 대한 정보를 드리죠.” 비록 최후라고는 해도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게 퇴장할 수는 없지. 그건 이블린 칼턴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녀는 루이스 베어포드의 전화를 회상하며 씁쓸하고도 만족스런 웃음을 감추었다. “그 동양 여자. 꽤 거물이더군요. 좋아하진 못하겠지만 멋있는 여자예요.” 뜻밖의 언급에 마커스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지만 너무나 순식간이라 이블린이 그의 감정을 알아챌 충분한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당신과의 소문 덕분에 그 약혼자가 상당히 다급하게 된 모양이더군요.” “약혼자?” 냉정함이 묻어나는 담담한 질문에 이블린은 등 뒤의 숄을 도로 잡아당겨 입고 싶을 정도로 오한을 느꼈지만 꾹 참고 버텼다. 대신에 이블린은 안정을 찾듯 부자연스럽게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베어포드, 루이스 베어포드 말이에요. 잊지는 않았겠죠? 당신의 연적이 된 남자니까. 어쨌든 그는 자신을 그 여자의 약혼자로 여기고 있더군요. 사실 그는 내가 당신이 아니라 그 여자를 만나 설득해 주길 바랐어요.” “설득?” “당신과 나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를 해달라더군요. 난 이미 당신에게 그날로 차였다고 말했지만 상관없다고 하면서 나름대로 매력적인 보상액까지 제시했어요.” 마커스의 눈동자가 심상치 않게 가늘어졌다. 그녀의 속을 꿰뚫어 살피는 듯한 눈길이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그런 이야길 털어놓는 거요?” 이블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알다시피 이익도 없는데 맨땅에 머리를 박을 만큼 난 숭고한 여자가 못 돼요. 그 여자가 떨어져 나갈 경우에 당신이 내게 돌아온다는 가능성이 일 퍼센트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그녀가 마커스를 찾아온 이유는 그것이었다. 재시도에 대한 가능성의 확인. 아니, 그건 다 핑계일 뿐이다. 그냥 가지지 못할 저 남자를 한 번 더 사적으로 은밀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저절로 생겼고, 이블린은 그 유혹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 전부다. 저 남자를 몇 달간 주시하면서 그녀도 그냥 놀고 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입으로 뱉은 이상 변하는 것은 절대 없다. 더구나 한번 발을 담근 물에는 두 번 다시 근처에도 가지 않는 남자였다. 지나간 그림자에 대한 흥미나 여운 따윈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이블린은 재희라는 여자에 대한 말만으로 눈빛이 바뀌는 마커스의 태도에 절망이 아닌 체념을 맛보았다. 그는 이미 다른 사냥감을 쫓느라 몰두해 있었다. “한데 내가 왜 그런 노동을 자청해 하겠어요? 더구나 당신의 비위를 거스르려면 그만한 위험을 감수해야 할 텐데. 난 적당한 스릴은 좋지만 귀찮은 건 딱 싫은 체질이에요.” 애써 태연한 척 나른하게 말한 뒤 그녀는 드레스와 맞춤인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어쨌든 덕분에 본의 아닌 전화번호를 하나 알게 됐는데, 관심잇나요?” 누구 전화번호인지는 묻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도 이미 그 정도는 알고 있었고 한재희의 전화는 몇 번을 해도 어김없는 불통상태였다. 이블린이 웃었다. “그래도 이건 아마 당신의 리스트에 없을걸요.” “조건은?” 이블린은 왼손을 들어 손가락 두 개를 가볍게 내보였다. “베어포드가 내게 제시한 금액의 두 배.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여자들의 천구이라는 5번가에서 쇼핑이라도 즐겨야 하지 않겠어요?” “쇼핑할 돈이 모자라는 사람은 아닐 텐데?” 마커스의 어조에 어쩔 수 없는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재미있는 여자였다. 왜 예전에는 미처 이 여자의 이런 면을 보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공짜는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탐을 내는 법이에요.” “그렇군.” 마커스는 쪽지에 적힌 번호를 훑었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이블린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오만하게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숄을 걸치며 유혹적으로 그에게 다가와 단단한 뺨에 입술을 갖다댔다. “운이 좋다면 새 남자도 하나쯤 고를 수 있겠죠.” “세 배 주지.” 그는 짤막하게 말했다. “변함없이 관대하군요.” 이블린은 의미심장하게 대꾸하며 그가 사인한 수표를 반으로 접어 백에 넣었다. “아, 당신이 후하게 쳐줬으니 나도 보너스를 하나 드리죠. 루이스 베어포드. 그렇게 만만히 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 여자에 한해서라면.” 그녀는 눈을 치켜 떠올리며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당신이 멋지게 패배해 보기 좋게 나가떨어지는 걸 기대하겠어요. 당신도 한 번쯤은 그런 인생의 쓴맛을 봐야 서로가 공평해질 테니까. 물론 그 특이한 동양여자가 그런 일을 해줄 만큼 대단한 여자라면 가슴이 더 쓰라리겠지만! 어쨌든 이블린은 그렇게 마지막 미련을 작은 저주로 바꿔 아프게 날려버렸다. 8장 오늘따라 유난히 끈질기고 꼭 한여름 대낮에 아스팔트 위를 내리달리는 마라톤만큼이나 그의 인내와 지구력을 요하던 긴 회의가 겨우 끝이 났다. 마커스에게 있어 이번처럼 지겹고 참을 수 없이 미적거리는 회의는 처음이었다. 오죽하면 회의가 중반쯤에 접어들었을 즈음에는 발언을 하고 있던 판매 이사의 입을 탁자 위에 놓여 있던 물잔으로 막아버리고 싶은 어처구니없는 충동에까지 시달렸을까. 그동안에도 내내 야금거리며 파먹어 들어가는 그의 신경 맨 밑바닥엔 재희의 그림자가 있었다. 루가 회의 시작 전에 알아낸 전화번호의 주소지는 뉴욕의 외곽 근처였다. 아무리 늦어도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 안에 그 여자가 있다는 생각이 지시를 내리고 복잡한 토의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그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마커스는 불시에 적진을 덮쳐 재희를 찾아내려던 계획을 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수정했다. 그는 이미 자신이 그녀를 원한다는 것을 두 번이나 똑똑히 밝혔고 그녀 또한 인정했다. 그럼 이번엔 그녀 스스로 그를 찾아올 차례였다. 마커스는 이블린이 남기고 간 번호를 쳐다보았다. 비싼 값을 지불했지만 처음에 사용하고자 했던 의도는 실행에 옮기지 않을 작정이었다. 당장 나타나, 한재희! 날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말라구! 빌어먹을. 쫓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쫓기는 듯한 이 다급함과 비이성적인 흥분은 말이 안 된다. 더욱이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같이 있을 거라는 추측만으로 잠깐 정신이 나갈 정도로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다니. 이건 마치 지그재그로 내달리는 롤로코스트에 탄 기분이었다. 그녀를 만난, 아니 놓친 이래 하루에도 몇 번씩 극과 극을 오르내리는 불안정함이 맹목적으로 그를 귀찮게 괴롭히고 있었다. 어느새 적당히 여유롭던 사냥꾼의 자세는 필사적인 추격의 의지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여자라도 그의 잣대를 더 이상 흔들리게 놔둘 수는 없었다. 마커스는 자신을 그렇게 주지시켰다. 사이프러스까지 뒤쫓아가 그녀를 만난 것으로 이미 그는 자신의 금기를 충분히 무시한 상태였다. 다시는 어떤 여자도 그를 조정하게 할 수 없게 하겠다던 다짐을 잠깐 잊어버린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결연하고 비정한 그의 각오는 회의실을 나서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멜린다의 전갈로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맥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누구라고?” 그가 되물었다. 의식하지도 않는 사이 심장이 바짝 조여들었다. 미치겠군. 어떤 여자가 그 자신에게 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못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미스 한… 제이라고 하시던데요. 일층 데스크 라운지에서 기다리시겠다고 전갈을 부탁하셨습니다만…” “얼마나 됐나?” “네?" 착 가라앉은 상사의 불길한 음성이 심상치 않아 멜린다는 순간 비서다운 미소를 반쯤 흐리며 마커스의 뒤에 서 있는 루에게 도움을 구하는 곁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루는 뭔가 다른 생각에 골몰한 듯 머리를 희미하게 기울인 채 안경 안의 눈을 좁힐 따름이었다. 당연히 그녀의 구조신호는 무시되었다. “재, 아니 그 여자가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구!” 멜린다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마커스를 보았다. 왠지 그가 그녀의 대답을 굉장히 못마땅해 하리라는 예감에 소름이 끼쳤다. “저, 그게…” 자신의 상사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남자로 소문이 자자하든 간에 멜린다는 그를 남성으로 인식하는 일을 일찌감치 그만두었다.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조언 덕도 있지만 그녀가 본 상사로서의 마커스 로웰은 절대 부하직원들과 스캔들을 낼 인물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녀는 어렵게 따낸 자신의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업무에 뒤따르는 각종 수당과 혜택, 심지어 사내 의료보험까지. 일단 로웰 그룹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웬만해선 회사를 나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가망도 없는 일에 매달려 가슴설레며 상사에게 침이나 흘려대느니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편이 이익이라는 것을 멜린다는 재빨리 터득했던 것이다. “멜린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제정신을 차렸다. 루가 눈빛으로 마커스를 가리키며 그가 아직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게다가 그녀의 최고 상사는 척 보기에도 상당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녀는 다소 야멸차게 여자를 냉대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으로 보건대 만약 회장이 그 사실을 알았다간, 맙소사! 오늘 퇴근하면서 해고 통지서를 받지 않으려면 필시 신의 가호가 있어야 하리라. 대체 오늘 일진이 왜 이 모양인 거야. 사전 약속 없이 쳐들어온 건 두 여자가 다 마찬가지인데 이번엔 빨리 보고를 안 했다고 문책이라니. 멜린다로선 억울해서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한, 한시간 정도 지났습니다만…” “그런데 이제야 내게 전했다는 건가!” “당연히 중요한 회의 중이시라…” 마커스의 눈초리가 험악해지며 짜증이 역력한 기색에 움찔한 멜린다는 차마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젠장!”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혹 실수를 했다면…” 자진해서 매를 맞는 편이 차라리 편할 듯싶었다. 그러나 부당한 것은 부당한 것이다. 사실 천지가 개벽한다거나 혹은 그녀의 저 대단한 상사가 끔찍이 여기는 가족, 즉 로열 패밀리들 -언론들은 로웰가를 그렇게 부르길 좋아했고 어느새 사내에서도 그 말이 일상어로 통용되고 있었다- 중 누군가에게 변고가 생겼다는 비보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감히 로웰 회장이 직접 주재한 회의 중간에 끼어들 배짱을 가진 사람이 이 건물 안에 있겠는가! 그건 자살의 최단거리 코스나 다름아니었다. 멜린다 역시 신입 시절 첫 출근에서 간단한 임원들의 아침 브리핑 시간에 전화 연결 한 번 잘못했다가 몇 년간 단련해 온 비서 수업이 몽땅 물거품이 되어 그대로 목이 달아날 뻔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니 그 난리법석을 겪은 이래 어떻게 그녀가 또다시 함부로 회장의 비위를 거스를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말 그대로 마커스 로웰과 신문에 오르내리는 여자들이 한둘도 아니고. “루!” 다행히 그는 이제 멜린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네.” “네, 회장님.” 마커스가 등을 휙 하니 돌리자 멜린다는 엉겁결에 그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루의 손에서 양복 재킷을 빼앗듯 한 손에 움켜쥐고 성큼성큼 전용 엘리베이터로 서둘러 걸어가는 마커스의 뒷모습을 그녀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여자. 비록 그녀가 얼마 전부터 마커스와 타블로이드 지를 뜨겁게 달군 그 여자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긴 했지만 멜린다는 샹관의 이런 반응을 생전 처음 목격했고 그만큼 당황스러웠다. “전, 정말 몰랐어요. 실장님. 그냥 회의 중이시라 아무도 연결한 수 없다고만…” “괜찮아요, 멜린다. 당신 잘못이 아니오.” 루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하소연처럼 우물거리는 그녀를 위로했다. 정말이다 일개 중견비서가 감히 어떻게 지엄하신 회장님의 불문율을 제 마음대로 거역하겠는가. 더구나 다름 아닌 마커스 로웰을 위해 일을 하면서. “하지만…” “걱정 말아요. 그냥 이번 일에 하에서만 약간의 예외적인 변동 사항이 생긴 것뿐이라고 알면 돼요.” 루는 아직도 어쩔 줄 모르며 손가락을 꼬고 있는 멜린다의 등을 툭툭 쳐주었다. “자, 그럼 우리도 슬슬 퇴근할까. 오늘 수고했어요. 멜린다. 푹 쉬고 내일 봅시다.” 그러면서 항상 일자로 다물려 있는 루의 입술이 아무도 모르게 슬쩍 끌어당겨지고 있었다. 이 여자가 아직 있을까. 엘리베이터가 초고속으로 하강하는 동안 마커스는 좁은 공간에서 마치 우리 안에 갇힌 맹수처럼 초조하게 서성거렸다. 한 시간이라니… 드디어 문이 열리고 로비가 보이자 그는 퇴근하는 직원들로 술렁이는 내부를 단숨에 훑어 원하는 모습을 찾아냈다. 다행히 재희가 장중한 로비가 비스듬이 바라다보이는 위치에 있는, 예술적이고 기하학적인 설계의 철제 난간에 아무렇게나 대충 걸터앉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래 입이 길이 든 듯한 실용적인 가죽재킷을 허리에 대충 묶어 놓고 챙이 넓은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였다. 일견 폭주족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검정 일색의 복장이 실내의 분위기와는 유리되어 보이는 탓에 주위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그녀는 오페라 하우스에서 그의 눈길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긴 것처럼 오늘도 예사롭게 대중의 이목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커스는 호기심으로 향했던 시선들이 종국에는 그녀의 가늘고 우아한 몸에 유연하게 감기는 심플한 상의와 믿을 수 없을 만큼 길어 보이는 늘씬한 다리의 지극히도 도발적이 선에 노골적인 감탄을 드러내고 마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불쑥 내부에서 그만의 소유욕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마커스는 마침내 이 여자를 찾아냈을 때 자신이 어느 정도는 흔들릴 것이라 예감처럼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감이 주는 미묘한 스릴을 즐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거대한 물결이 한 순가에 거꾸로 솟구쳐 여지없이 자신을 후려치는 듯한 이런 충격은 미처 그가 대비할 수 없었던 종류의 것이었다. 마커스는 그때까지도 자신이 재희를 다시 만나기를 얼마만큼 열망하고 있었는지, 정말은 조금도 실감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사이프러스에서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넘쳐흐르는 갈망과 안도감, 그리고 다급함이 그를 가득 채웠다. 가지고 싶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작은 손가락 하나, 가는 솜털 한 가닥까지도 남김없이. 저 여자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싫증날 때까지 소유하고 싶어졌다. 이런! 그는 신음을 집어삼켰다. 불과 오 분 전까지 사무실에서 되씹었던 각오가 허탈할 정도로 삽시간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제길! 그는 위험한 기운을 온몸으로 내뿜으며 주위의 시선을 깡그리 무시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래. 이제 내게 뭘 줄 거지. 한재희? “미스터 로웰.” 시커먼 먹구름처럼 갑자기 솟아오른 남자의 커다란 그림자에 묻혀서도 재희는 예의를 차리듯 고개를 까닥했다. “아니 이젠 마커스라고 불러도 될까요?” “물론이요. 한재희 양.” 마커스 역시 인사를 받았지만 비꼬는 티가 역력히 느껴지는 제스처였다. 그들 사이에 질식할 것 같은 한 순간이 흘렀다. 어느쪽도 먼저 섣불리 말문을 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당신 정말 사람을 약올리는 여자로군.” 마침내 그가 으르렁대며 입을 열었고 재희는 반대로 분별있게 표정을 지웠다. “생각보다 만나기가 어렵지는 않군요.” 부드럽게 그러나 감정없이 그녀는 말했다. 그의 비서의 반응으로 봐선 자신의 전갈을 전해 줄지도 의심이 가던 참이라고는 덧붙이지 않았다. 그건 그 여자의 직업상 업무에 불과했고 사견이 배제된 공적인 대응에 유감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만나기가 어렵다?” 그녀가 선택한 화제가 그의 성미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 일에 대해서라면 할말이 많은 쪽은 따로 있는 것 아닌가?” 지난 며칠 간 재희의 행적을 꼬집는 것이리라. 그러나 마커스의 불쾌함은 아랑곳없이 그녀는 묵묵히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을 따름이었다. 잠시 재희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뭐라 딱 꼬집어 표현할 수 없이 차갑고 사나웠다. 문득 그는 단호하게 그녀의 팔목을 움켜쥐고 다짜고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되자마자 마커스는 당장에 그녀를 끌어당겼다. 즉시 그들의 몸은 한치의 틈도 없이 얽힌 나무덩굴처럼 밀착되었다. “마커스.” “입 다물어.” 그가 냉혹하게 속삭였다. “이건 복수요. 말 그대로의!” 동시에 딱딱하고 관능적인 남자의 입술이 뭐라고 희미하게 벌어지는 재희의 입술을 기습적으로 덮쳐 눌렀다. 그것은 거칠고 다급했으며, 지독히도 강렬했다. 입술을 강제로 차지한 것도 모자라 그의 혀가 안하무인으로 은밀한 입 안을 파고 들어오자 남자의 난폭한 대담함에 분노인지 격정인지 모를 감정으로 그녀의 온몸이 떨려왔다. 엄청난 양의 브랜디를 한꺼번에 들이부은 것처럼 남자의 흥분이 그녀의 가슴 안으로 세차게 밀려 들어왔다. 그들이 지금까지 나누었던 키스는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망할!” 잠시 떨어지는 것조차 싫다는 듯 마커스는 입술을 포갠 채 신음했다. 어느새 그녀의 모자는 바닥에 나뒹굴고 긴 목은 뒤로 껶여져 그의 굶주린 침입을 고스란히 허락하고 있는 자세였다. 재희는 마커스의 팔 안에서 한동안 꼼짝없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충격 때문이었다. 재흰 그의품에 안겨 거친 바람에 표류하듯 마구 흔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하던 뱃속은 이제 마치 한꺼번에 수많은 나비 떼가 날개를 퍼덕이는 것 같았고 엷은 피부는 한 겹 벗겨져 나간 것처럼 알 수 없는 열기로 따끔거리며 달아올랐다. “이건…” 그녀는 냉정한 목소리를 내려고 힘껏 목을 가다듬었다. 철저히 쉬어버린 음성은 그녀의 귀에도 거슬렸다. “너무 서두는 것 아닌가요? 아무리 목적뿐인 만남이라 해도.” 그의 커다란 손 안에 갇혀버린 자신의 손이 이상하리만치 연약해 보여 재희는 흠칫 놀라움에 휩쓸렸다. 전신의 감각이 없을 정도로 튕겨져 나가는 무한대의 질주에 생명을 걸었을 때조차 느껴본 적이 없는 생생한 두려움이었다. 그의 가슴에 놓인 자신의 손바닥이 타는 듯 뜨거웠다 그의 열기, 혹은 그녀 자신의 마치 다른 사람의 몸처럼 느껴지는 그녀의 육체가 생소하다 못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적나라한 실체를 드러낸 욕망에 떠밀려 급기야 재희는 속수무책으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조금도. 여자를 이렇게까지 오래 기다려본 건 전대미문의 일이오.” 마커스는 간단히 대꾸했다.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멜린다의 전갈을 들었을 때부터 뛰기 시작한 그의 심장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수많은 인물 들 중에서 정확히 그녀를 찾아낸 순간부터 미친 듯한 맥박으로 대체되었다. 그의 시선은 행여 그녀가 어딘가로 또다시 도망가 버리지나 않을까, 그의 이성과는 상관없이 줄곧 이 여자의 가는 등줄기에 꽂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러더니 어느새 정신 나간 소리를 중얼거리며 그녀의 입술을 짓누르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당신은 여기 왔고 지금은 그걸로 충분해.” 이제 무엇도 그를 방해할 수 없었다. 설령 이 여자 자신의 의지라해도. 그녀는 뭔가 의미 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가늠하듯 침묵하며 서 있었다 어쩌면 그녀 스스로를 저울질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초연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상한 일렁임이 들여다보이는 시선으로. 덕분에 욕망은 잠깐 그 힘을 늦추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 속에 오가는 상념을 낱낱이 끄집어내 일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뭘 생각하는 거지?” 그는 초조함에 쫓겨 그녀를 다그쳤다. “당신. 혹은 지금의 이 사태에 대해서.” 메마른 입술을 축이듯 재희는 입술을 적셨다. “재희.” 한데 섞인 그들의 숨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점점 그 울림이 커지고 커져서 죽음과도 같은 독성을 그들의 체내에 주입시키는 고대 의식처럼… “어차피…” 그녀는 말꼬리를 짧게 흐렸다. 어느새 엘리베이터는 그들이 내릴 층에 도착해 문이 열려 있었다. 그의 이글거리는 두 눈이 그녀를 꿰뚫듯이 바라보았다. “당신을 속이거나 돌려 말할 생각은 조금도 없어, 여길 나가면 당신이 갈 곳은 하나뿐이야.” 마치 딴 세상에서 들려오는 듯한, 남자의 욕망으로 흐려진 위협적인 목소리. 그 음성 하나만으로 몸이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추락해갔다. “동의 하나?”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놓아줄 관대함은 조금도 없으면서. 이 남자는 악당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뭐, 이제 와 상관없겠지. 그녀는 탄식 같은 실소를 트뜨렸다. “그래서?” 마커스의 눈이 예리하게 번득이며 은빛 광채가 더욱 짙게 변해 갔다. 재희는 대답에 앞서 그의 머리카락 속에 손가락을 파묻고 마커스의 입술에 으스러질 듯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가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멈칫하는 것으로 그 시도는 충분한 대가가 있었다. “그래요. 동의해요.” 그리고 덧붙였다. “이런 관계에서 늦건 빠르건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어쩌면 이 밤이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이 갖기로 결정한 이 남자를 철저히 음미할 것이다. 군데군데 조명이 낮게 비쳐진 드넓은 실내는 풍요롭고 차분한 남성적인 공간이었다. 여러 층계로 이루어진 연푸른 대리석 바닥과 최대한의 미학을 고려해 설계된 각기 다른 용도의 수많은 공간은 정교하게 수공 제작된 가구와 값비싼 골동품, 미술품들로 세련되게 배치해 그 주인과 디자이너의 안목을 한층 날카롭게 시사하고 있었다. 이곳이 마커스의 개인 장소라는 것은 사적이고 비밀스런 정적이 드리워진 엄숙한 분위기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문득 긴장으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굳어진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이었다. 핸들을 쥘 때도 유연함을 잃지 않던 손가락이 아닌가. 스스로 옷을 벗겠다며 그를 거절한 것이 일말은 후회되었다. 마커스는 이미 그를 그나마 문명인처럼 보이게 했던 셔츠를 벗어 던지고 장대한 근육과 탄탄한 가슴을 들러낸 채 사나운 정복자처럼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피어오른 욕망의 불길은 뜨겁다 못해 잔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의 나신은 이미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섹스를 원하는 남자 앞에서 알몸을 드러낸다는 것이 이렇게 불편하고 많은 의미를 함축하는 행동일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그냥 아침저녁으로 옷을 갈아 입기 위해 반복하는 습관적인 일상의 일과 뭐가 다를까 싶었지만 머리로 아는 남자와 실전으로 알게 되는 남자의 차이란 건 엄청난 갭이 있었다. 드디어 그녀의 상의가 떨어져 나가고 단순하고 깨끗한 디자인의 속옷이 나타나자 그 위로 드러난 크림 빛의 아름다운 능선에 그가 거친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길이 그녀의 팔과 가슴을 따라 유난히 가는 허리와 배로 굶주린 듯 옮겨가고 있었다. 그는 시선만으로 그녀를 더듬고 어루만져댔다. 그러나 마침내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마커스는 기어이 손을 내밀어 막 바지를 벗기 시작한 재희의 허리를 휘감아 자신의 억센 몸으로 바싹 끌어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그녀의 가는 근육이 움찔하고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순순히 그의 성급함을 허용했다. 그의 시선 아래 낱낱이 해부되느니 이 편이 나았다. “미리 말해 두죠. 난 피임 처방을 받았어요. 원한다면 당신도 예방 조치를 해요.” “안전한가?” “그래요.” 그렇지 않을 경우 그녀가 떠안을 위험부담을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마커스는 다른 때 같으면 그래도 콘돔을 썼겠지만 이번엔 그대로 진행했다. 그의 입술이 탐욕스럽게 그녀의 입술을 점령하며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거기엔 머뭇거림이나 피할 여지라곤 조금도 없었다. 자신들이 도달할 최종적인 장소가 어디인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남자의 원시적이고 선정적인 도발이었다. 그리고 세상은 어둠과 마커스 로웰이란 남자의 향기로 가득찼다. 재희의 등을 따라 독점하듯 미끄러지던 그의 끈질긴 손가락이 마침내 그녀의 가슴을 숨기고 있던 브래지어의 조그만 잠금쇠를 손쉽게 끌러버렸다. 장애물을 제거한 그는 이제 거칠 것이 없다는 듯 그녀의 부푼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고 곧 이어 혀가 가세해 그 달콤한 비밀을 맛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머리를 젖히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지만 신음을 흘리지는 않았다. 다만 자꾸만 벌어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가 그녀의 남아있는 옷가지를 모두 벗겨버리고 관능적인 공격의 수위를 높여가도록 방치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마커스는 침대 위에 누워 무섭게 그녀의 나체를 탐하고 있었다. 날렵하게 이루어진 곡선은 탄력적이다 못해 고된 훈련으로 빚어진 육체의 아름다움이 어디까지 완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사납게 날뛰는 요구는 이미 조절이나 통제가 불가능했다. 재희의 눈동자가 격렬한 열과 욕망에 들떠 흐려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견딜 수 없어진 그는 그녀의 입을 벌리고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투명한 치열을 가르고 들어가 어떤 남자도 시도해 본 적이 없을 깊이로 그녀를 더듬고 어루만져 자신의 것으로 가졌다. 그런데도 그녀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어떻게! 그는 이렇게 광기로 미쳐가고 있는데 이 여자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어떻게든 반응을 자제하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마커스는 조금씩 더 흉폭한 기분에 사로잡혀 그녀를 사정없이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이 여자가 그 아닌 다른 무엇의 지배를 받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모든 이성이 재가 되어 흩어진다면 재희 역시 그래야만 했다. “젠장!” 그는 재희가 그만을 인식하고 그의 품안에서 허물어지기를 절망적으로 바라고 있었다. “당신 뜻대로 될 것 같아? 그렇게는 안 돼. 재희…” 그는 그녀의 흰 가슴과 쇄골, 옆구리를 거쳐 민감한 아래쪽까지 아프도록 자신의 흔적을 새기고 남겨나갔다. 화인이 남을 것 같은 뜨거움이 그녀의 피부를 붉게 태웠다. 마침내 그녀가 토해 낸 작은 흐느낌은 승리감에 앞서 그를 위험하게 사로잡았다. 진하게 상기된 재희의 얼굴이 그의 가슴에 와닿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그녀의 뜨거운 혀의 감촉, 이제는 두 사람 중 어느쪽도 이 타오른 감각의 회오리를 진정시키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의 남성이 다시 없으리만큼 고통스럽게 딱딱해졌다. 마커스는 당장이라도 이 여자를 가지고 싶은 욕구로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날 탓하지 마. 이렇게 애송이처럼 날 밀어붙인 건 당신이니까.” 일그러진 표정으로 내뱉듯 속삭이며 그는 그녀의 다시 사이에 자리를 잡고 단숨에 그녀의 허벅지를 벌렸다. 그의 육중한 체중이 그대로 그녀에게 전해졌다. 어떤 여자와도 이렇게 격렬한 순간을 공유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사실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을 나눈다는 의미로 여겨본 적이 있었는지도 미지수였다. 침대 위에서 그는 오로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움직였고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이 여자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의 내부가 전혀 다른 외계의 존재로 변해 버린 것처럼. “재희!”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 안으로 거센 해일처럼 밀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채 움직이기도 전에 마커스는 그를 가로막고 있던 유일한 장벽을 뚫고 철저하게 그녀를 차지해 버렸다. 그녀는 마커스의 거칠고 사나운 욕망을 고스란히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억제하듯 내지를 재희의 힘겨운 비명이 그가 방금 시작한 일의 심각성을 그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그는 이 여자를 최초로 침입한 사내였다! 그녀의 눈가가 희미하게 흔들렸을 때 그의 의구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재희의 손톱이 그의 넓은 등에 자국을 남기며 따끔한 압력을 가해 왔다. 고통과 쾌감이 한데 뒤섞여 공존하고 있었다. 그대로 그녀의 좁고 숨막히는 뜨거움 속에 녹아들고 싶다는 열망이 압도적으로 그를 덮쳤다. 섣불리 움직이면 그녀를 더 다치게 하지 않을까 싶어 잠시 적응할 시간을 주고는 있지만 그의 가슴은 심하게 오르내리며 흥건하게 맺힌 땀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마커스는 자칫 고삐를 놓고 날뛰려는 욕구를 필사적으로 틀어쥐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타고 흘러내린 땀이 그녀의 가슴 골짜기로 떨어져 내렸다. 재희는 그의 몸이 조금씩 들어올 때마다 타는 듯하던 아픔이 약한 통증으로 변해 가자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전신이 예리한 긴장감으로 굳어 있는 그의 목을 끌어당겨 그의 입 안에 자신의 혀를 밀어넣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마치 맹수가 그르렁해는 듯한 소리를 내지르며 그의 강철 같은 근육이 가차없이 그녀를 내리눌렀다. 이번에는 그녀의 미약한 신음도 그를 결코 멈춰세우지 못했다. 그가 거의 완전히 몸을 뒤로 뺐다가 강하게 돌진하자 그녀의 몸이 시트 위로 미끄러졌다. 마커스는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고 침대에 고정시키듯 붙잡은 뒤 다시 움직였다. 그녀가 그를 질식할 정도로 촉촉하게 죄어들었다. 민감하고 부드러우며 완벽했다. 말 그대로 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강렬한 기쁨에 몸을 떨며 그는 점점 더 안으로 안으로 거듭해서 들어갔다. 어깨의 근육에서 등, 엉덩이와 허벅지로 이르는 그의 근육들이 물결치듯 꿈틀거리며 땀방울들을 흩어냈다. 이어 방 안은 그들이 내지르는 거친 숨소리고 가득 찼다. 9장 당신이 점점 더 달갑지 않아져, 마커스. 재희는 어둠에 가려진 침대 쪽을 바라보다 커다란 창문 너머 빛을 잃기 시작하는 파리한 달 조각으로 눈을 옮겼다. 전신의 근육이 욱신거리듯 조여왔다. 남자와 여자의 모든 관계는 이렇게 변덕스럽고 연약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무엇보다 자신은 마커스를 사랑하거나 하는 게 아니다. 단 하룻밤 침대를 공유했다고 싹트는 게 사랑이라면 요즘 같은 세상에는 사방이 온통 사랑 천지일 테니까. 가끔 남녀의 감정이 다르게 어긋나는 경우가 있긴 했다. 한쪽은 지나가는 오락거리에 불과한 일이 다른 한편에선 평생에 걸친 사랑이되기도 하는. 재희는 팔짱을 끼고 갑옷처럼 스스로를 껴안았다. 그 사람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저 남자가 침대에서 감명 깊은 첫 인상을 남겼다 할지라도. 그녀가 여자로서 자신의 욕심을 채웠듯 마커스 또한 본능에 여과없이 반응했을 뿐이다. 덕분에 두 사람이 즐거운 한때를 즐겼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 안에 숨은 의미나 그녀안에서 일어난 이상한 변화 따위를 세세히 분석해 나열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거리를 유지해. 그저 잠시의 휴가라고 여기라구. “여기서 뭘 하는 거요?” 남자의 손이 뒤에서 갑자기 끌어안자 그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뭐 해, 한재희! 왜 이렇게 멍하게 굴어? “긴장했군.” 그는 몸을 떼더니 그녀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감싸 어루만졌다. 얇은 천 아래 그의 열기가 그대로 전달되자 재희는 의식적으로 힘을 풀고 등을 그의 맨가슴에 기댔다. 감촉으로 보아 그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였다. 허리께에 와닿는 그의 남성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의 손이 미끄러지듯 그녀의 가운 사이로 들어와 아직도 예민함이 남아 있는 가슴의 중심을 문질렀다. “나보다 당신이 더 긴강한 것 같은데요?” 그녀는 자신의 가운 자락을 어깨 아래로 끌어내리며 그에게로 돌아섰다. 달빛이 얼룩지며 부드럽게 융기된 그녀의 가슴이 드러나자 그의 숨소리가 말없이 거칠어졌다. 재희는 그의 머리를 붙잡아 그가 원하는 대로 그녀의 가슴 골짜기 사이에 놓아주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지극히 만족한 신음을 토했다. 곧 이어 그는 짙은 분홍빛을 발하는 젖꼭지를 혀로 물고 삼키듯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상체가 뒤로 휘어지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가는 허리를 잡고 인디고 블루의 두꺼운 카펫 위에 그녀를 밀어 쓰러뜨렸다. “여기서요?” 그녀는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남자의 난폭한 실루엣을 보며 도전하듯 물었다. “침대까지 기다리기 싫어.” “인내할 줄 모르느군요. 정말.” “스스로를 꾸짖어, 그리고 이미 손안에 들어와 있는데 왜 그래야 하지?” 그녀의 가운은 그녀의 몸 아래에서 찢겨진 날개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배와 허리를 지나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었다. 불과 두서너 시간 전의 침입으로 아물지 않은 그곳에 그가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근육이 저항했다. “몰랐었어.” “아무 의미도 없어요. 가책이나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더 더욱.” 그녀는 자신의 내부 은밀한 지점을 부드럽게 자극하는 마커스의 손길에 더 신경이 쓰였다. “왜?” “남자와 섹스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당신처럼 정열적인 여자가 말이오? 한 번도 남자와 이걸 해보고 싶지 않았다고?” 재희의 손이 그의 팽팽한 가슴을 따라 검은 체모에 가려진 남성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그를 만지는 순간 그녀는 그대로 정지했고 그는 신음을 내뱉었다. “멈추기만 해봐.” 그가 초조하게 으르렁댔다. “젠장, 너무 빨리 배웠군.” “그런가요?” 그녀는 무섭게 성이 나 있는 그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었다. “한 가지 더 알아낸 게 있는데…” “젠장, 그래…” 떨리는 그의 등에 땀이 고였다. 마커스는 그녀가 그를 세게 죄어오자 눈을 감았다. “당신을 고른 건 꽤 괜찮은 판단이었어요.” 재희의 목소리엔 순수한 욕망 외엔 다른 어떤 것도 일체 배재되어있었다. 신체의 요구 외에는 아무것도 끼워넣고 싶지 안다는 듯. 그들은 가쁘게 허덕이며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열정과 흥분에 내쫓긴 남자와 여자가 있었다. 마커스의 손이 재희의 어깻죽지를 눌러 바닥에 고정시켰다.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군.” 그의 표정은 굶주려 있는 동시에 야릇한 빛을 담고 있었다. “계속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지.” 그리고 극에 달한 욕망의 날 위에서 그는 그녀의 엉덩이를 거칠게 붙잡아 무섭게 밀고 들어갔다. 재희는 순간 숨을 멈추고 고통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좀 전과 같은 배려는 없었다. 그는 억지로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도록 강요하며 끊임없이 그녀를 밀어붙였다. 남자의 힘에 사정없이 뒤흔들리며 재희는 그의 등을 움켜쥐고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모자라. 그의 어깨에 작은 잇자국을 남겼지만 마커스는 조금도 방해받지 않았다. 이대로는 중독되고 말 거야. 이 남자와의 정사에. 그의 안에서부터 지펴진 열기가 마침내 그녀를 터질 듯 채우기 시작했다. 마커스는 헝클어지고 젖은 재희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휘감으며 그녀를 보았다.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망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녀 역시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아니, 이곳에 그가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해 버린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침대로 다시 오게 됐는지는 뚜렷하지 않았다. 그대로 재희를 가지고 나서, 다시 침대에서 그녀를 무릎 꿇린 뒤 한 번을 더 가졌다. 그 자세 때문에 그녀가 처음엔 거부하던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하지만 후회할 겨를도 없었다. 그 마지막에선 육체적 만족을 원했다기보다는 그녀가 완전히 그의 손안에 있음을 확인하고 싶은 정신적인 욕구가 우선이었으니까. 재희도 그것을 눈치챈 듯했고 결국 그들은 서로에게지지 않으려는 전사들처럼 싸우듯 몸을 섞었다. 싸움에서 져버린 사람은 결국 그였다. 그가 절정에서 자신을 잃고 그녀 안에 자신을 풀어버렸을 때 그녀는 끝까지 선을 넘지 않았다. 그리고… “비켜주겠어요?” 그가 반쯤 깔아뭉개듯 아직도 그녀 위에 누워 있다는 걸 지적하며 재희는 비틀 듯 그로부터 몸을 떼어냈다. “잠깐.” “유익한 경험이었어요.” 제지하는 그의 손을 침착하게 뿌리치고 그녀는 바닥에 내려서 옷을 찾아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선 채 속옷을 갖춰 입고는 냉정해진 눈길을 그에게 던졌다. “다소 싱겁게 끝난 감은 있지만.” “이것으로 끝이라는 건가?” “화대라도 지불해야 하나요?” 웃옷을 걸치며 그녀는 쿡 웃었다. “실례, 실수였어요.” 그녀는 양손으로 간단히 부인했다. “지금 이러는 건 내가 당신의 의지에 반해 힘을 행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느릿하고 사나운 시선에 그녀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진실을 말하자면 화가 났었다. 그를 그저 쓰다버릴 일회용처럼 여기는 듯한 그녀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 때문에. 그의 지난날을 생각해보건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얼토당토않은 시비일뿐더러 그가 재희에게 제안한 관계 또한 다를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무슨 억지란말인가. 문제는 그것이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것. 여자 쪽에서 먼저 분명한 한계선을 그어버리는 것은 생소한 동시에 이상한 경험이었다. 서로간에 피곤한 절차를 덜어주었으니 마땅히 편안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비록 뭔가 선수를 빼앗긴 듯해 기분은 죽을 쑤었다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당신만을 매도하는 것이야말로 내 의지를 우습게 보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요. 만약 내가 내키지 않았다면 지금쯤 당신은 그 침대에 그렇게 말짱히 누워 날 비웃고 있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 “고맙군. 나도 한 가지 일러두는데 이 방 안에서 비웃음을 당하고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내 자신일 확률이 가장 높아.” 쓴 자조가 묻은 어조로 그가 조용히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신발을 찾아 신고 그녀는 침대로 걸어왔다. “나쁜 인상으로 헤어지고 싶진 않군요.” 그녀는 야만스런 빛을 발하고 있는 마커스의 얼굴 가까이 상체를 숙이고 그의 입술을 어루만졋다. 이 입술이 그녀를 어떤 식으로 애무하고 느끼게 했는지 꽤나 긴 시간을 반추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듯. “짐작보다 시시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즐거운 게임이 되었길 바라요.” 그리고 그녀는 키스했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처럼 기습적이고 짧은, 그리고는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만사가 종료됐다는 표정으로 핑글 방향을 바꾸었다. “모자 잊지 마시오.” 재희의 뒤통수에 대고 그가 불길한 여운을 담아 중얼거겼다. “그러죠.” 그녀는 대꾸와 함께 계단 아례로 사라졌다. 그리고 엉망으로 헝클어진 시트만이 어젯밤의 격렬했던 시간이 지나가는 백일몽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로 남아 있을 뿐. 불현듯 마커스는 베개에 등을 기댄 자세 그대로 양손을 머리에 파묻었다. 그리고 싸늘하게 욕설을 되뇌기 시작했다. 10장 “이게 사실이야?” 재희는 갑자기 서재로 밀어닥쳐 따지고 드는 루이스의 붉게 열이 오른 얼굴을 보고 피곤한 눈을 쓸었다. 밤새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의 옆에서도, 또 그를 떠나와서도 결과는 같았다. “루이스, 너 뉴욕엔 대체 언제 온 …” “이게 사실이냐고!” 정신도 육체도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모든 에너지를 남김없이 뽑아내고 난 듯. “그만 해. 루이스.” 씩씩거리며 그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신경질을 피우는 루이스를 도저히 감당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이렇게 아무 때나 대뜸 나타날 때면 그는 여지없이 싸움을 걸곤 했다. “그 자식하고 어디까지 갔어? 설마 진짜 이 기사대로…” “기사라니?” 루이스이 손에 그제야 종이뭉치가 한가득 들려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재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널 완전히 창녀처럼 묘사했어, 감히 그 망할 자식들이!” 대강 타이틀 라인만 읽는 것으로 그렇고 그런 폭로기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소문이 어떤 식으로 퍼져나가고 과장되는지 잘 알고 있는 재희는 그냥 무시해 버렸다. 사실 어제 그녀가 로웰 그룹의 타이쿤과 침대를 함께했다는 부분만은 뭐라 해도 진실이니까 억척이나 매도라고 우길 수도 없다. “이게 다 그 마커스 로웰인가 뭔가 하는 잘난 척하는 얼간이 때문이야! 사이프러스까지 쫓아가선 기어이 널 온통 구정물에 쑤셔넣었다구!” “그렇다 해도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루이스.” 그녀의 말에 담긴 뉘앙스에서 루이스는 뭔가를 잡아낸 듯 갑자기 우뚝 멈춰섰다. 그가 홱 머리를 돌렸다. “재희 너, 혹시…” 그래도 설마 설마 했는데.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입고 있는 셔츠의 색깔만큼이나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그… 와 잤어? 그래?” 꽉 다물린 잇새로 겨우 말이 나왔다. “루이스!” “말해!” “도를 넘지 마, 이건 내 생활이야.” 드디어 재희는 정색을 하고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를 냉랭하게 잘랐다. “정말 재희, 네가 그 녀석과…” 재희는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자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마커스 로웰이든 다른 남자든 내 사생활까지 간섭하지 마, 루이스. 그리고 이미 끝난 일이야.” “끝났다고?” 그가 소리쳤다. “어떻게! 바로 몇 시간 전에 그 작자와 밤을 보내놓고 나더러 그 말을 믿어 달라는 거야!” “믿으라고 하지 않았어. 그럴 이유도 못 느끼니까. 우리 옛날에도 이런 비슷한 대화를 한번 나눈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재희의 어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루이스가 그대로 얼어붙을만큼.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대답이야.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해. 누구도 그 원칙은 간섭할 수 없어. 그것이 아무리 너라 해도! 루이스.” 그 말이 루이스의 가슴을 칼로 후비듯 헤집었다. 전에 들었을 때에도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왜냐면 그때는 재희가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돌아온 다음날 아침이 아니었으니까. ‘인정할 수 없어.“ 그는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자식과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그만 해.” “그만 해? 내가 이런 식으로 널 추궁할 자격이 없다고? 아니면 너에 대한 내 사랑은 원래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고?” 그가 부르짓듯 다그쳤다. “그럼 대답해 봐. 너에 대한 내 모든 감정들. 이 안타까움, 절박함은 다 뭔지. 어떻게 하면 구질구질하게 너한테 매달리지 않고 깨끗하게 잘라버릴 수 있는지! 그거 재희 전문 아냐? 냉혹하게 사람 잘라내는 거.” 그 안에 담긴 울음에 재희는 약해지지 않으려고 전신을 굳혔다. 그래서 넌 날 모른다는 거야. 루이스. 만약 그 말대로 애초에 간단히 잘라낼 수 있었다면 상처를 입는 일도, 입히는 일도 없었을 거야. 그리고 이렇게 너를 보며 좀더 일찍 그 손을 놓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도 않았을 테지. 그녀의 눈동자가 검고 단단한 보석처럼 음울하게 빛났다. “돌아가, 네 자리로.” “……” “넌 남자가 아냐, 적어도 내겐” “뭐?” “말했었지. 널 남자로서 사랑해 줄 여자를 원한다면 다른 누군가를 찾으라고, 난 아니야.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앞으로도.” 정원에 면한 창문을 타고 햇살이 반들거리는 원목의 바닥 위로 눈부시게, 쉴 틈 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의 축제 속에서 두 사람은 질기고 오랜 유대관계가 마침내 끊어지는 슬픈 순간을 경험하고 있었다. 루이스의 눈동자엔 참혹할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재희는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한때 전부라 여겼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 그녀에겐 처음도 아니다. 어찌 됐건 이번엔 준비 할 시간도 있었으니 이럭저럭 행운인 셈인가… “하!” 루이스는 비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군, 그렇게 쉬운 거였어.”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보고 있을 수 없다는 듯 비척거리며, 그가 조금 전 뛰어 들어왔던 문으로 허탈하게 걸어갔다. 그때서야 재희는 반쯤 몸을 돌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루이스. 넌 지금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야. 난 좀더 일찍 그것을 알았을 뿐이고, 그러니 이제 너도 그 긴 악몽에서 깨어나야겠지. “내가 무슨 선택을 하건 넌 상관없다고 했지?” 루이스가 문간에서 불쑥 중얼거렸다. 머리를 숙인 그의 어깨와 등에 긴 그림자가 내려앉고 있었다. “분명히, 그래, 좋아, 재희. 이제 넌 자격이 없어.” 그 심상치 않은 말을 끝으로 그는 그녀로부터 곧바로 멀어져갔다. 재희는 무심코 그에게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이며 혀를 짓씹었다. 비릿한 향이 입 안을 채우며 재난이라 불릴 만한 하루를 멋지게 장식했다. 루이스… “잘한 거야, 재희. 꼬마 도련님도 슬슬 젖을 뗄 때가 됐어.” 조금 열려 있던 문으로 반백의 머리카락을 곱게 올린 애나 화이트 필드가 그녀의 일상 소지품인 먼지떨이를 든 채 씩씩한 목소리로 혀를 차며 안으로 들어왔다. 아마도 좀 전의 대화를 남김없이 들은 이후일 것이다. 하지만 재희로서는 이 숨막히는 정적을 깨뜨려 버린그녀가 고마웠다. “애나” “좀 애처롭긴 해도 저대로라면 영원히 너한테서 독립할 생각을 못할게 뻔하니까.” 재희는 억지로 웃었다. “네. 그럴 테죠.” 은빛으로 센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이가 심히 의심스러울 얼굴에는, 늘 미소를 짓는 탓에 눈가에 새겨진 몇 가닥의 주름이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의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을 거뜬히 다루고 건사하는 기력에다 집안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도 모자라 프랑스인 요리사가 울고 갈 환상적인 요리 솜씨까지. 한마디로 이 여인은 이곳의 보배이자 전제군주였다. 아무도 그녀에게 대항하거나 미워할 수 없었다. “케이트가 붙잡으려고 하긴 한 모양인데 오늘은 아무리 그 천사 같은 아이래도 도련님 비위를 맞추기는 역부족일 것 같구나.” 정리정돈의 대가답게 그녀는 가장 먼저 책상 위에 되는 대로 흩어진 신문들을 차곡차곡 접기 시작했다. “주인에게서 버림받은 고양이는 아무나 할퀴려 들거든.” 많이 몸을 놀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금세 책상은 거울처럼 윤기가 돌았다. 그리고 그동안에도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꽤나 잘생긴 고양이긴 하지. 그 털빛하며 조목조목 생긴 것이.” “애나.” 한데 그녀의 저 진지함이 농담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애나에겐 아이든 동물이든 눈에 띄는 대로 다 보살펴야 할 똑같은 생물에다 어느쪽도 차별이 없는 동격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사람에겐 누구나 성숙할 때가 닥쳐오기 마련이야.” 재희 너도 예외는 아니야. 애나는 자신이 무엇보다 애지중지하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며 현명하게 말을 멈추었다. “오후에 떠나겠어요.” 더 이상 이곳에 지체할 시간도 없었고 남아 있기도 힘이 들었다. “내일이라고 하지 않았었니?” 애나가 인상을 쓰며 불평을 표시했다. 워낙 철새처럼 잠깐잠깐 들르기는 해도 재희가 정해진 약속 날짜를 어긴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많이 실망할 텐데.” “제가 얘기하죠.” “알았어, 하지만 아침은 먹어야지.” 논쟁을 피하기 위해 재희는 말없이 승낙했다. “주방에 준비하마.” 서둘러 발을 옮기며 애나는 재희 몰래 옆구리에 낀 신문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빠르게 사라졌다. 그녀는 이 새로운 기사를 베리 영감에게 보여줄 때가 너무나 기대되었다. 케이트 마리는 올해로 열네 살의 막 성숙하기 시작한, 아름다운 갈색 눈빛과 부드러운 밤색 곱슬머리를 가진 사랑스런 소녀였다. 지금 그녀의 손은 종이 위에 뭔가를 열심히 스케치하느라 분주했다. 선을 긋고 둥글게 윤곽을 잡고… 아이들이 내지르는 시끄러운 고함이나 그녀를 부추기는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케이트는 오로지 뭔가를 화폭에 담는 작업에 깊숙이 몰두해 있었다. 어떤 것도 그런 그녀의 집중을 방해할 수는 없다는 듯했다. “재미있니?” 하지만 그녀가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음성이 들리자마자 케이트는 분주하던 손기을 멈추고 머리칼이 흩날릴 정도로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재희!” 청바지에 연푸른 줄무늬 스웨터를 입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그녀의 작은 얼굴에 환한 함박웃음이 커다랗게 번졌다. “안녕, 요정 아가씨. 여전히 바쁘구나.” 재희가 허리를 굽혀 그녀를 가볍게 품에 안고 머리칼에 입을 맞춘 뒤 놓아주었다. 케이트는 흥분으로 발그레해진 얼굴을 한껏 들어 재희의 허리를 두 팔로 부둥켜안았다. 그 바람에 무릎에 놓여 있던 스케치북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젯밤엔 늦게 도착했어?” “음. 조금.” 재희는 살며시 케이트의 팔을 풀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아무 경계심 없이 무조건적인 애정으로 다가들 때면 늘 어색하고 묘해지는 기분을 감추려고 허리를 구부려 발 밑의 스케치북을 주워들었다. “어디 보자, 뭘 그리고 있었나.” “그냥, 이것저것.” 스케치북을 들고 백지 위에 그려진 한 사람의 모습에 눈이 가자 재희의 입가가 무심결에 쓸쓸해졌다. “루이스구나.” 그는 실물과 아니, 그보다 더 생생한 빛으로 그림 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우리 아가씨, 갈수록 솜씨가 대단해지는데? 이대로 화랑에 걸어 놓아도 손색이 없겠어.” “대충 끄적거린 거야.” 케이트는 재희의 찬사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겸손할 거 없어, 케이트. 넌 그림에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으니까. 타고난 재능을 감출 필요는 없단다. 네 미술 선생님도 칭찬하느라 침이 마른다면서?” 꽤 날카로운 안목을 가진 그 초로의 학교 교사는 진작에 케이트의 화가로서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열성적인 노력을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 “애나가 얼마나 대견해 하고 자랑스러워하는지 알아? 오늘 보니까 정말 전시회를 해도 되겠구나.” 재희는 다시 케이트의 스케치를 보며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이 아이는 뼛속부터 예술가로 태어난 아이였다. 아직 어린데도 불구하고 그 날카로운 관찰력과 지각력은 평범함에서 비범함을 , 또한 일상의 무료함에서 특별한 생기가 번득이는 삶의 순간을 포착해 아름답고 따뜻한 시각으로 스스로 재창조한 화폭 위에 담아냈다. 그리고 그녀의 루이스에 대한 동경은 아주 소중한 애정을 다시 그 위에 덧입혀놓았음에 틀림없었다. “아직 멀었다니까, 재희는 참…” 머리를 마구 흔드는 케이트를 웃음 띤 얼굴로 바라보며 재희는 옆의 나무벤치 위에 앉았다. “저 그런데 … 재희” 조용히 자연이 빚어내는 마술적인 풍광을 감상하기 시작한 재희에게 케이트가 가마히 질문을 던졌다. “루이스와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니” “그가 뭘 잘못했어?” “아니, 그런 거 없어.” “그럼?” 걱정이 잔뜩 어린 케이트의 눈길이 그녀를 따라왔다. “그저, 서로 얼마나 자랐는지 인정하지 못하고 있던 두 바보가 이제 정신을 차린 거겠지.” 재희는 시선을 앞으로 고정한 채 마치 자신에게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럼 루이스는 이제 앞으로 여기 안 오는 거야?” 날카로운 아이의 질문에 재희의 눈썹이 흠칫했다. “글쎄. 잘 모르겠다, 케이트” 그녀는 정직하게 말했다. 적어도 케이트에게 그 정도는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왜?”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이었다. “내가 나빴던 거겠지. 내가 루이스에게 상처를 주었어.” 케이트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한적하고 아담한 풍경에 눈을 고정시켰다. 아늑하게 보이는 붉은 벽돌과 삼나무로 지어진 오랜 농가 풍의 장원. 그리고 신선한 나무의 향내와 자유롭고 활기 찬 아이들의 소리. 이 모든 것을 그녀에게 준 것은 재희였다. 케이트는 부드럽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아는 재희는 대단하다 못해 영웅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했으며 어떤 은혜를 베풀고 있는지 조금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이 행여 그런 말을 꺼내기라도 하면 무표정한 눈 속에 잔뜩 곤란함을 띄우고는 자시이 이 집에 들인 것은 단지 돈의 힘이 전부였다고 한사코 주장한다. 집안을 사랑으로 채우고 포근한 가정으로 만든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공이라며, 그들을 데려와 사랑으로 돌보아준 사람은 재희 그녀가 아니라 애나와 베리였으며 그들이 없었다면 이 집은 돌과 흙, 나무로 지어진 보통의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이다. 물론 애나 아줌마와 베리 아저씨가 그들의 부모나 마찬가지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재희만큼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 본인은 선행에 대한 찬사를 받을 자격이 눈곱만큼도 없다고 정말 진심으로 믿고 있다는 것이 늘 케이트를 슬프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당사자가 사양한다고 해서 버려진 아이였던 그녀에게 이런 현실을 가능하게 해준 기적이 다름 아닌 재희, 그녀라는 사실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집, 새로운 삶, 새로운 희망. 그것은 케이트나 이곳의 다른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한때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의 신기루나 마찬가지의 의미였다. 그들이 재희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가 그들의 삶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러니 이 집의 모든 구성원들이 재희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것에 다른 이견이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그래서 케이트 역시 자신이 아무리 루이스를 좋아한다고 해도 재희가 정말로 그를 나쁘게 대했다고는 편을 들 수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 재희 다 잘될 것야. 루이스도…” 재희는 자신을 위로하려고 사뭇 진지하게 애쓰는 케이트에게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그래.그랬으면 좋겠구나. 널 위해서도.” “응?” 끝말을 놓친 케이트가 되물으려 하자 갑자기 재희는 분위기를 떨치듯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힘들지 않지, 케이트?” “그야 오늘은 그림밖에 그런 게 없는 걸, 뭐.” 그러자 재희가 갑자기 케이트의 휠체어를 잡았다. “재희?” “그럼 가기 전에 그동안 케이트 운전 솜씨가 얼마나 늘었는지 좀볼까?” 그녀는 아까부터 떠들썩한 농구코트를 가리켰다. “벌써 또 경주하러 가?” 케이트가 주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금방은 아니야.” “하지만…” “케, 케이트. 어, 어서 와!” 그들을 발견한 검은 피부의 작은 소년이 말을 더듬으며 코트에서 열심히 손짓을 했다. 그러자 덩달아 다른 아이들도 동작을 멈추고 케이트를 불렀다. 처음에 케이트를 부른 소년, 조시는 비록 언어장애가 심한 학습장애까지 있는 소년이었지만 그의 성겨은 이곳의 아이들 중 가장 외향적이고 밝았다. 그리고 점점 더 나아지고 있었다. “이, 이번엔 내, 내가 이길 거야.” 지난번 경기에서 케이트에게 진 조시는 각오가 확실해 보였다. 재희가 장난스럽게 케이트의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웃었다. “어때, 요정 아가씨? 저 조그만 건달 녀석들이 도전을 하느데 받아들일 배짱은 키운 거겠지?” 케이트가 작은 머리를 끄덕이자 재희는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우리 둘이서 저기 잘난 체하는 사내 녀석들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오는 거야.” 또래보다 성숙한 어른의 표정을 하고 있던 케이트의 얼굴이 제 나이의 아이처럼 바뀌고 눈빛에 투지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응.” 곧 이어 그녀는 결연하고도 능숙한 솜씨로 자신이 앉아 있는 휠체어를 움직여 코트로 달려갔다. 11장 조용히 문이 닫히는 소리에 마커스는 소파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피로한 듯 미간 사이를 문질렀다. “다들 돌아갔나?” “네, 회장님.” 루는 반짝이는 자단목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문서와 계약서 초안들을 정리하며 대답했다. “오후 일정은 이걸로 끝난 건가?” “만찬 약속까지 세 시간 정도 비어 있습니다. 물을 좀 드릴까요? “내가 하지.” 마커스는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 양탄자 위를 가로질러 벽 한쪽으로 들어가 있는 바로 걸어갔다. 그는 얼음통에서 몇 조각의 얼음을 끄집어내 크리스털 술잔에 집어넣었다. “술을 하시려구요?” "조금만 들겠나?“ “전 사양하겠습니다.” 마커스는 스카치를 따른 술잔을 들고 홍콩의 마천루가 훤히 보이는 창가로 자리를 옮겼다. 창 밖으로 분주한 빅토리아 항이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홍콩의 명물이기도 한 스타 페이가 카우롱 반도와 센트럴 사이를 왕복하며 사람들과 관광객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홍콩 은행장의 청을 수락하실 겁니까?” “싱가폴 쪽을 좀더 조사해 본 뒤에. 언제쯤 결과가 나올 것 같은가/” “일주일 뒤면 완료될 예정입니다.” 한 손으로 넥타이를 푼 마커스는 독한 향기를 내는 액체를 꿀꺽 삼켰다. 루는 깔금하게 모은 서류들을 케이스에 순서대로 넣은 다음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슬쩍 마커스의 어깨를 주시했다. “조금 주무시는 편이… 며칠째 일만 하셨잖습니까.” “괜찮아.” 마커스는 건성으로 그의 제안을 물리쳤다. 겉으로는 수면부족의 내색도 없지만 루는 그의 찌푸린 얼굴에서 피곤함과 짜증을 읽었다. 물론 그 이유가 일에 치인 탓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로서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여하튼 홍콩에 도착한 날부터 마커스는 거의 눈을 붙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한재희란 여성이 찾아온 다음날부터. 그날 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충 짐작은 가지만 섣불리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로웰가의 가족이나 다름없이 성장해 사생활까지 커버하는 그일지라도 질문하기 곤란한 부분이란 늘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루는 마커스의 애정 생활을 포함해 여자 관계에 대해선 결코 토를 달아본 적이 없다. 그가 먼저 지시를 하기 전에는 말이다. 하지만 마커스가 어떤 여자와 헤어지고 이런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의외인 동시에 흥미로운 최초의 사태였다. 시작부터 꼬이긴 했지. 과연 마커스 로웰의 인생에 그런 식으로 정신이 번쩍 드는 일격을 당한 적이 있었던가. 과거 한 교활한 여자에게 잠시 속았을 무렵을 빼면 대답은 노였다. 아, 그 이름을 잊어선 안 되지. 셀리나 페어차일드. 각고의 연기력으로 로웰이란 왕관을 획득한 여자. 그때까지 조금 시니컬하긴 해도 지금처럼 못 말릴 정도로 냉소적이지는 않았던 젊은 청년 시절의 마커스를 결정적으로 망쳐놓은 여자. 루는 여전히 창가에 서 있는 마커스를 보며 조용히, 우울하게 한숨을 쉬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명예와 부, 모든 것을 가지고 절대적인 사랑으로 둘러싸인 근사한 가족 공동체 속에서 인생에 대한 단 한 번의 쓴 패배도 없이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에게 셀리나 로웰은 사악한 운명의 복병이 어떤 것임을 확실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사람을 다루는 데 능수 능란한 여자였다. 동부 상류가문 출신의 셀리나는 로웰 가문이 제공하는 특권에 일찍부터 매료되어 있었다. 상류계급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녀는 누구보다 힘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야심만만하고 똑똑했던 그녀는 신중한 목표를 세워 잘 짜여진 연극 아래 아직은 순수한 이상에 젖어 있던 마커스의 애정과 프로포즈를 낚아채는 데 기어이 성공했다. 마커스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한동안은 그녀와의 달콤한 연극에 최선을 다해 헌신했다. 하지만 가자 행복은 길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커스는 그녀가 창조한 이미지와 허상에 자신이 휘둘리고 있다는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거짓말과 엄청난 액수의 카드 청구서들이 현금과 함께 그 몰래 처리되었다. 그가 셀리나를 위해 개설해 준 구좌였다. 사실 돈 문제에 대해서 마커스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셀리나가 본격적으로 교양있고 순진한 안주인의 가면놀이를 집어치우고 그의 눈을 피해 결혼 전부터 비밀리에 사귀었던 남자와 다시 놀아나기 전까지는… 그 악녀는 그것도 모자라 어리석게도 점차 그 숫자를 늘려나가며 자기 무덤을 팠지. 사실 외도의 불씨는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그즈음, 속으로 어떻게든 그녀의 결백을 믿으려던 마커스는 최후의 수단으로 루에게 셀리나의 행동거지를 파악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루가 미처 일에 착수하기도 전에 그녀의 유혹을 뿌리친 젊고 잘생긴 상원의원 한명이 극도의 망설임 끝에 결국 마커스에게 직접 고백을 해왔던 것이다. 설사아상으로 그는 마커스의 오랜 지인이자 아직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유부남이었다. 그는 셀리나의 유혹에 넘어가기엔 자신의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고 또한 친구에 대한 우정으로 그 불편한 상황을 감수해 냈다. 그것은 결정타였다. 컵에 남은 마지막 물 한 방울이나 다름없는. 마커스는 셀리나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나자 그날로 집안 변호사를 통해 이혼 서류를 작성하게 한 뒤 그 사실을 통고했다. 당신 셀리나 로웰은 반쯤 제정신이 나갔다. 그녀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얼마나 정성을 들인 작업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게 생겼으니. 그 이기적인 머리로 누구의 잘잘못인지를 따지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남편의 친구가 거짓말을 했다고 했다가 다음엔 그가 먼저 자신을 유혹했지만 그녀가 넘어가지 않자 복수를 하는 거라고 주장하기까지 한 걸 보면 말이다. 그러나 마커스는 이미 셀리나에 대해 마음을 꽁꽁 걸어 잠근 상태였고 그를 아는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듯이 그는 용서를 몰랐다. 그는 마지막끼지, 셀리나의 표현대로라면 치가 떨릴 정도로 정나미 떨어지는 무심함으로 위압적인 침묵을 고수했고 그리하여 결국 그녀가 제풀에 이성을 내팽개칠 수밖에 없도록까지 내몰았다. 루는 이혼선언을 당하고 분에 못 이겨 서재 밖까지 울리던 그녀의 신경질적이 외침을 고스란히 기억할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바보처럼 굴어? 이 세계의 결혼이란 다 그렇고 그런 거 잖아! 밖으로 새어나가지만 않는다면 아내나 남편, 누구나 외도를 하고 또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 날 사랑한다면서! 그럼 아내의 실수쯤 어떻게든 눈감아줄 수 있는 거 아냐? 그게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잖아!’ ‘그게 사랑 아니냐고?’ 마커스가 셀리나에게 한 말은 그 불길하고 착 가라앉은 조소가 전부였다. 그는 그 후로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결혼 서약에도 있었잖아. 상대의 허물까지 덮어주는 게 진정한 사랑이라고. 그러는 당신! 지금 내 앞에서 잘난 척 고귀한 척 온갖 위선을 떨고 있지만 정말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다른 여자와 잔 적 없다고 맹세할 수 있어?’ 유감스럽게도 루가 아는 바로는 마커스 로웰은 일단 그가 내뱉은 약속은 철저하게 지키는 남자였다. 그에게 첫사랑은 신뢰였고 그들의 결혼은 굳건한 약속이었다. 셀리나는 코웃음을 치며 믿지 않았지만 그 여자의 믿음이나 도덕관념은 벌써 마커스에게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 울구불고 한동안 난리를 치던 셀리나는 그래도 포기를 몰랐다. 그 끈질긴 집념이라니. 루가 그녀를 서재에서 끌어낼 때까지 그녀는 사방의 물건을 내던지며 서재 안을 온통 폐허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실질적인 증거가 없는 한 이혼에는 죽어도 동의할 수 없다고 머리끝까지 흥분해 집을 박차고 달려나간 셀리나는 불운하게도 그 길로 교통사고를 당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것으로 셀리나 로웰이 일으킨 추잡한 소동은 세인의 눈길을 타지 않게 되었고, 당사자가 사라진 이상 가문을 둘러싼 불필요한 스캔들이 확대되는 것을 용납지 않았던 마커스는 모든 진실을 그녀와 함께 땅에 묻어버리는 것으로 그의 재난 어린 결혼을 종결했다. 하지만 그 불미스러웠던 사건은 마커스에게 깊은 상처와 불신을 아로새겨 놓았다. 그는 셀리나에 대한 실망보다 그녀에게 속아넘어간 자신의 어리석음에 더 분노했다. 결혼으로 잠시 접어두었던 그의 소위 여자에 대한 정의는 훨씬 더 나쁜 수준으로 재정립되었고 그 와중에 사춘기 시절부터 그를 둘러싸고 소동을 벌이던 여자들이나 장례식 이후부터 그를 쫓기에 여념이 없던 암 사마귀 같은 여자들은 그 견해에 하등 올바른 수정을 가하지 못했다. 이 특이하고 별난 재희란 여성이 또 다른 운명의 복병으로 마커스 앞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이건 좋은 쪽일까. 아니면… 이번에는 시작부터 진행과정까지 현저히 다른 궤도를 밟고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한낱 다음 침실 파트너와 잠깐 대화나 나누자고 사이프러스까지 날아간 것부터. 그녀의 뒷조사는 물론이요 주변까지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평소엔 찾아볼 수 없는 통과의례였다. 그리고 그녀가 회사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마커스가 내보인 행동은… 루는 한재희란 여성이 마커스의 심장을 쥐고 흔들 만한 담력과 기백을 지녔다고 믿었다. 마커스도 이제 셀리나가 펼쳐놓은 검은 마수에서 그만 빠져나올 때가 되었다. 자신이 만들어놓고 떠난 함정에 걸려 마커스가 진짜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딱딱하고 고집 센 늙은이로 살다 죽어버린다면 그 마녀 같은 여자가 무덤 속에서 얼마나 통쾌해할까. 루는 희미하게 인상을 썼다. 절대로 안 돼! 지금까지 마커스가 이다지도 강한 반응을 보인 상대도 없었거니와 상처를 아물게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지켜만 보고 있었지만 로웰 가문의 수장 이하 전체 가문의 일원들이 열망하듯 루도 마커스가 새로운 사랑을 찾을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이 흔치 않은 기회를 살려 그는 반드시 조력자의 입장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연애는 당자사끼리 풀어야 할 문제점과 타이밍이란 것이 있는 법. 연애라… 감으로 잡건데 루는 마커스와 재희의 관계가 한 번으로 완전히 끝장날 단계는 아니라고 보았다. 그날 하룻밤으로 그녀를 깨끗이 정리할 수 있었다면 마커스가 다음날로 잡혀 있던 출장을 일부러 당기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잠도 안 자고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미친 듯이 일에만 몰두하지도 않았겠지. “호크에 대한 사항은 좀더 시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회장님.” 그의 말을 못 들었을 리는 없는데 마커스는 여전히 술잔만 기울이며 발 아래 경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오! 루는 내심 승리의 미소를 감추었다. 결국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건 그것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이미 끝난 여자한테 정부가 있는지 없는지 신경 쓰는 남자가 만약 있다 해도 마커스 로웰은 절대 그 부류에 합류하지 않을 남자였으므로. “셩완의 장 노인이 방금 전에 물건을 보내왔습니다. 어르신이 원하시던 명조 때의 찻잔을 결국 구했답니다.” 루는 바깥에 놓여 있는 붉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상자를 떠올리며 화제를 전환했다. 장 노인은 희귀하고 오래된 골동품만을 취급하는 중국인 수집가이자 판매상으로 마커스의 조부와 우연히 거래를 튼 이래 그의 온갖 까다로운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는 물건들을 열과 성을 다해 찾아내 주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기뻐하시겠군.” “정말 좀 쉬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냥 두고 나가게.” 루는 서류가 든 케이스를 챙겨 가만히 물러났다. “그럼 두 시간 반 뒤에 출발하도록 맞춰놓겠습니다.” 중간보고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로웰 가문의 노호랑이에게 아직 실망할 단계는 아니라고 알려드릴 임무가 남아 있었다. 명나라 찻잔 따위가 문제가 아니지. 마커스는 다시 술 한잔을 따라 소파에 걸터앉았다. 손가락 사이로 위태롭게 술잔을 든 채 등을 젖히자 높다란 대리석 천장이 보였다. 정말 터무니없군. 어떤 존재를 마음에서 몰아내려고 애쓰는 일이 이렇게 성가실 줄은 몰랐다. 그의 전 아내조차 자존심은 상했을지 몰라도 그 존재를 지워내는 데 시간을 헛되이 소비하진 않았다. 일에 자신을 전부 쏟음으로써 셀리나는 과거가 되었고 인간에 대한 경각심을 돋울 때 외에는 그 존재를 상기시켜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종지부를 찍었다고 여기고 화를 삭이느라 홍콩까지 날아왔건만, 내내 밤잠까지 설쳐가며 일에 중독된 인간처럼 굴었건만, 녹녹치 않은 홍콩의 거물들과 정치 인사들을 쉴 틈이 없이 상대하면서도 귀찮은 모기처럼 그에게 달라 붙어 떨어지지 않는 여자라니. ‘화대라도 지불해야 하나요?’ 하! 다름 아닌 그가 여자한테 그런 말을 들었을리라고 누가 감히 믿기나 하겠는가. 머커스의 표정이 냉혹하게 일그러졌다. 차라리 시간당 받을 걸 그랬나? 그 여자한테 소모한 쓸데없는 시간까지 모두 합쳐서. 그게 처음이었지. 그런데도 그녀는 상대인 그에게 몸이 끌린 것 이외에는 아무런 비중도 두지 않았다. 그렇게 자칫 질식할 뻔한 사랑을 밤새 나누고도 그녀에게 덧입혀진 견고함은 한치도 누그러질 기미가 없었던 것이다. 잠깐, 뭘 나누었다고? 사랑이라니, 실수라도 그런 수어가 붙을 관계가 아니었다. 그는 일축하듯 정정했다. 그들은 각자의 목적대로 욕망에 부응했을 따름이다. 이제 와 차근차근 되짚어보면 미끼를 던진 쪽이 과연 누구였는지조차 애매모호하다. 그는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치부해 버렸지만 과연 그랬을까.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의도대로 움직였던 게 언제였던가를 기억해봐, 마커스 로웰. 제대로 하고자 덤벼든다면 한재희는 셀리나 따위가 사력을 다해 뛰어도 발뒤꿈치 쫓아가기도 벅찰 상대였다. 뭐, 이랬든 저랬든 그로선 그녀의 게임에 더 이상 동승할 생각이 없으니 복잡하게 분석할 것도 없지만. 그는 그대로 남아 있는 술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웬일인지 술맛이 싹 가셨다. 그리고 만찬이라곤 해도 비즈니스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과를 처리해야 하는 이상 더 이상 마시지 않는 편이 현명했다. 마커스는 두꺼운 유리 너머 하늘을 흘낏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 산책을 하는 편이 낫겠군. 걷고 나면 잡념도 개운하게 걷힐 것이다. 제이슨 호크에 대한 보고서 같은 건 올라오는 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으면 그만이다. “제이! 오늘 대체 왜 이래?” 준이 화를 내는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녀도 스스로를 채찍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니까. 컨디션이 나쁘다는 것은 핑계도 변명도 못 된다. “미안.” 그녀는 짤막하게 사과하며 마시고 있던 물병을 내려놓았다. 한 번도 사적인 부분을 경기에까지 끌어들여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무슨 일이 있었건 시합 도중에 딴생각을 한다거나 한눈을 파는 건 사고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으니까. 사이프러스 때와 달리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이번 경기는 엄청난 스피드의 고속 코스였다. 또한 점프코스가 포진해 있어 박력 넘치는 장면이 연출되는 탓에 관중들은 야영까지 하며 경기의 개막을 기다릴 정도였다. 당장 눈앞의 도로에 모든 주의를 집중해야 할 판에! 더구나 참가 드라이버들에겐 코스 상태만 해도 충분히 버거운 하루였다. 이곳은 초원지대이기 때문에 모래가 많고 땅이 무른 지형이었다. 물에 흠뻑 젖은 노면을 통과하고 나면 다시 자욱한 먼지 구름이 가로막고 그러고 나면 또 개울이나 웅덩이가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차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아 차체가 똑바로 설 겨를이 없을 정도로 스피드를 올린다. 그런데 오늘은 바람이 없어 더욱 불리한 조건이었다. 먼지가 일어나면 잘 흩어지질 않아 3분 간격으로 차들이 출발해도 앞서 달려나간 경주차가 일으킨 흙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써야 했기 때문이다. “연애도 좋지만 목숨이 먼저라구.” 준이 조금 누그러진 투로 푸념처럼 투덜댔다. 그러나 재희는 그의 오해를 바로잡지도 정정하지도 않고 입을 꽉 다물었다. 마커스 로웰이란 남자, 정말이지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해주는군, 한재희가 남자 때문에 제정신을 못 차린다는 인상을 심어주게 되는 날이 오다니. 그것도 자청해서 하룻밤 정사로 끝내자고 통고한 남자를 질질 끌며 여기까지… 그날 밤 마커스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곱씹어보며 그녀는 엄하게 스스로를 잡아챘다. 잘했어. 길어봐야 득될 거 하나 없는 남자야. 더구나 벌써 새로운 상대를 물색했는지도 모르지. 그녀는 자신을 비꼬며 걸음을 옮겼다. 이어진 여덟 번째 스테이지가 첫날의 마지막 구간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분처럼 안개가 잔뜩 끼어 있어 심상치가 않았다. 시계가 거의 제로 상태로 떨어졌고 희끄무레한 수풀의 형태만이 좌우로 빠르게 스쳐갔다. 게다가 차 안에 습기까지 차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행을 방해했다. 패스노트에 의지해 빠져나갈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준의 지시에 따라 악몽 같은 길을 헤쳐나오는 동안 재희는 신경과 근육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었다. 도로 바로 옆에까지 관중들이 나와 있어 더욱 위험했다. 결국 선두와는 30초 정도의 차이로 1레그를 마친 재희는 한숨을 불어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마지막 스테이지에선 마커스에 대한 상념 따위에 지배받을 틈도 없었다는 정도일까? 제2레그는 모두 열 개의 스테이지를 달려야 했다. 꽤 쌀쌀한 날씨와 낮게 깔린 구름 아래고 가벼운 빗방울이 뿌려지는 가운데 경기가 진행되었다. 감속하는 코스에서 갑자기 차가 서버리는 통에 타임 페널티를 아슬아슬하게 모면했지만 그럭저럭 열여덟 번째 스테이지가지 일정 순위를 마크해 냈다. 마지막 레그는 해발 2,000미터에서 치러지는 아주 유명한 코스였다. 공기도 희박하고 산소도 부족해서 연료와 공기의 매칭이 상당히 중요시되었다. 엔지의 파워손실을 최대한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3레그의 시작이자 열아홉 번째 스테이지는 바위산을 달려야 하는 데다 주변도 온통 바위산이었다. 덧붙여 지대가 높다 보니 안개는 늘 필수처럼 동반된다. “정말 조심해야 한다구, 제이.” “알아.” 재희는 간략하게 대답하고 스타트를 기다렸다. 마커슬 로웰 따윈 지옥으로나 보내면서. 동양의 진주라고도 불리며 얼마 전까지 영국의 지배령이었던 매력적인 도시 홍콩은 밤이 되면 낮과는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단정한 가면을 쓰고 있다 어둠이 내리면 휘황한 몸단장으로 사람을 홀리는 요부 같다고나 할까. 건물들의 불빛들과 간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하고 영롱한 색채들이 어우러져 또 다른 빛의 천국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왜 혼자 나와 계신가요? 한 손에 질 좋은 브랜디 잔을 들고 빅토리아 항의 야경을 주시하던 마커스는 교태가 묻어나는 젊은 여자의 질문에 마지못해 시선의 위치를 옮겼다. “미스 메이.” 부동산으로 재벌이 된 중국인 갑부의 막내딸이 중국 전통의상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청색의 비단 드레스를 입은 채 그의 옆으로 살랑살랑 걸어왔다. “사업상의 볼일은 이제 다 끝나셨나요?” 부친은 중국인이지만 모친이 영국인이라 파란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프리샤 메이는 중국제 도자기 인형 같았다. 매끈한 우윳빛 피부와 풍부한 표정을 담고 있는 얼굴, 풍만하고 아담한 몸매는 충분히 남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내일 돌아가신다구요?”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넓은 테라스의 판석 위에 놓여진 새하얀 고리버들 장식의자에 앉아 다리를 포개며 깍지를 끼고 마커스를 넘겨다보았다. “너무 아쉽네요. 홍콩을 안내해 드리고 싶었는데.” 예일을 나와 부친의 사업을 돕고 있다고 했던가? 지성으로 반짝이는 눈이 그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마커스는 그대로 서서 한손을 주머니에 넣고 난간에 몸을 슬쩍 기댔다. “안내를 받을 정도로 문외한은 아니라서.” “사업상 들르는 것과 즐기기 위해서 들르는 홍콩은 전혀 다르죠. 볼거리도, 사람도, 놀이도…” 그녀는 드레스의 가슴 부분에 장식된 용을 조각한 비취를 슬며시 쓸어내며 등받이에 유연하게 기댔다. 지루하군. 왜 이런 여자들은 독창성이 모자라는 걸까. 분명히 남들보다 훨씬 비싸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즐기기 위해서라면, 다른 곳을 찾고 싶군.” 자신의 유혹이 은유적으로 거절당했지만 프리샤 메이는 뽀로통해 지거나 토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치켜올리며 후후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히려 그의 맞은편 가까이로 다가왔다. “꽤 강한 적수가 버티고 있나 보군요.” 프리샤 메이는 마커스이 팔에 손을 얹고 매끈한 고급 천 위를 감각적으로 쓸어 내려갔다. 그리고 조용하게 그에게 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다음번 홍콩에 올 때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전화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불빛이 환한 실내의 파티장 안으로 돌아갔다. 불현듯 항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녀의 높이 올린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가자 마커스는 자신의 손가락에 감기던 재희의 검은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당장 그의 입가가 보일 듯 말 듯 긴장했다. 키가 크고 늘씬한 중국인 청년이 프리샤 메이를 반겼다. 그녀는 뭐라고 소곤거리며 그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남자의 가벼운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결국 두 번째 대안으로 낙찰을 본 모양이군. 마커스는 관심을 끊고 다시 야경을 향해 돌아섰다. 검은 머리카락을 보고 재희를 떠올리긴 했지만 그의 욕망은 저 여자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만약 한재희에게서 받았던 뜨거움의 부스러기라도 프리샤 메이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면 일말의 고려도 없이 그는 저 여자와 함께 침대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회장님.” 루가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마커스는 표류하고 있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는 희미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루를 잘 아는 마커스가 그 미묘한 차이를 놓칠 리 없었다. “긴급인가?” “상황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마커스의 의심스런 눈이 따라붙었다. 루가 머뭇했다. “한재희 양의 일입니다.” 이내 마커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네 눈치고 끝난 일이란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네.” “그런데?”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어투에 루는 순순히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됐어, 그리고 앞으로는 그 여자 소식을 일부러 수집할 필요 없네.” “알겠습니다.” 그러나 마커스의 냉정한 태도는 외향뿐이었다. 사실 그의 인내력은 한재희를 만나고 나서부터 종종 그랬듯이 이 순간에도 가느다란 실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였다. 그리고 그 연약한 줄이 뚝 끊어지면… 그는 어렴풋이 드러나는 바닥을 인식했다. 심각한 일이 아니라면 루가 일부러 언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커스는 내부에서 이는 갈등을 끝내 무시하려다 엘리베이터가 중간층에 이르렀을 무렵 말문을 열고 말았다. “그 여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실은…” “뭐?” 마커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루의 설명이 이어졌다. “차가 미끄러져 바위에 부딪힌 모양입니다. 코스가 험악해 위험이 더 컸지만 다행히 많이 다치지는 않았다고 … 경기는 그 사고 때문에 탈락했다는 소식입니다.” “젠장!” 역시 듣지 말았어야 했다. “망할 여자 같으니!” 그녀의 그 대단한 모험심과 무모함이 말썽이었다. 정말 목숨 하나는 질기게 타고난 여자군.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런 행운이 이어질 거라고 믿는단 말인가? 그는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근황을 알고 싶어하는 자신은 대체 무슨 이유란 말인가. 한재희는 이미 그를 깡그리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 버렸는데 왜 그가 이렇게 이성을 제어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해야 하는지 이 집요함에 스스로 정나미가 떨어질정도다. 일단 한재희란 여자를 가지고 차갑게 머리를 식히고 나면 다소 강했던 육체적 자극에 의지가 충실히 반응했던 탓으로 이 모든 혼란에 대한 해명은 끝날 줄 알았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도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세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이미 마커스의 계산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그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지? 몸을 가진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면 그 다음엔 뭘 더 가져야 그의 이 굶주린 광기가 채워질까. 정말 사람을 우습게 만드는군. 한재희. “회장님?” 마커스는 으득 이를 갈았다. 그래. 얼마나 가는지 두고보자구. 너나 나나 어디서 굴러 떨어지든 끝까지 해보는 거야! 12장 처음에 마커스는 자신이 주소를 잘못 찾았든지 아니면 루가 처음으로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시끄러운 학교처럼 보이는 커다랗고 소박한 집의 외양을 죽 둘러보았다. 온갖 종류의 나무들로 둘러싸인 그 건물은 뉴욕의 중심가로부터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가 서 있다는 것이 실감이 안 될 정도로 목가적인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마커스 역시 교외에 저택을 가지고 있지만 이렇게 편안하고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집은 아니었다. 나직한 울타리가 쳐진 정원과 그네가 달린 놀이터, 더구나 실물 크기의 농구코트까지 . 언뜻 보기엔 영락없이 시골의 캠프였다. 그리고 키가 낮고 조각이 아로새겨진 하얀 정문 가장 왼쪽으로는 채소를 키우는 넓은 텃밭도 있었는데 정원사인지 농부인지 모를 낡은 밀짚모자를 쓴 한 노인이 허리를 구부린 채 열심히 야채를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마커스는 자신이 정말 제대로 온 것인지 주소를 확인하려다 농구코트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가 미쳤다. 마침 작은 사내아이가 뒤뚱거리며 드리블을 하고 있었다. 순간 마커스는 어떤 놀라움 비슷한 것에 사로잡혀 농구를 하느라 분주한 각기 피부색도, 신체도. 외양도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중 한 여자아이는 휠체어를 탄 채로 신나게 가로채기를 시도하고 있었고 또 어떤 꼬마는 한쪽 팔만으로 블로킹을 하며 티 하나 없는 웃음소리를 하늘에 대고 목청 높여 터뜨리고 있었다. 정상적인 아이들도 또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도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부끄러워하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경계나 구분도 없이 누구보다 행복하고 풍요로운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커스는 그가 방문한 목적이자 다급하게 찾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의 시선은 코트 안을 소란스럽게 뛰어다니는 다수의 아이들보다 큰 키를 지닌 여린 몸매의 한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그녀는 코트 가장자리 벤치에 앉아 발 밑으로 굴러온 공을 휠체어를 탄 야무져 보이는 소녀에게 패스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중이었다. “케이트, 슛 해! 그래. 거기서!” “빨리 막아! 조시, 팔을 들라니까. 어서!: “어, 어림 어, 없어!” 검은 피부의 한 소년이 필사적으로 소녀의 공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마커스가 보기에도 소녀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잠시 후 기술적으로 상대편을 따돌린 소녀는 자신의 손을 떠나 골대 안으로 그림처럼 빨려 들어가는 주황색의 공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리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잘했어, 케이트!” 각기 터져나오는 탄성과 메아리치는 웃음. 적도 아군도 없이 그들은 함께 격려하고 함께 어깨를 두드리며 웃음을 나누었다. 그것은 마치 천국의 풍경을 잠시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안에 재희가 있었다. 마커스의 눈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녀의 얼굴을 따라갔다. 따뜻한 날씨에 공기는 맑고 건조했다. 물결처럼 흩어지는 검은 머리카락과 투명한 얼굴에 부서지는 햇살들. 재희는 마커스가 지금까지 본 어떤 순간보다 생생히 살아 있었으며 꿈, 또는 비현실적인 양 기이하게 아름다웠다. 저렇게 무방비해 보이는 그녀를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금방이라도 삼켜버릴 듯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강렬해진 눈길을 차마 그녀에게서 떼어내지 못했다. “누굴 찾아온 거요, 젊은 양반.” 걸걸하고 무뚝뚝한 목소리가 그를 방해했다. 밭을 손질하던 노인이었다. 마커스는 언제부턴지 그의 뒤에 서 있었을 노인에게로 마지못해 주의를 향했다. 그러나 그의 시야 안에는 여전히 그녀를 주의 깊게 담은 채였다. 투박한 손에 묻은 흙을 툴툴 털어내며 허술한 모자를 벗은 노인의 숱이 무성한 머리는 마치 금방 눈이라도 내린 양 새하앴다. 그러나 그의 허리는 아직도 곧게 펴졌고 어지간한 풍상을 딛고 이겨낸 자취가 역력한 주름진 얼굴과 움푹 파인 눈동자 너머에는 한창의 젊은이 못지않은 강단과 열정이 내재해 있었다. “저 여자를 찾아왔습니다.” 마커스는 망설이지 않고 재희를 가리켰다. 그녀와 이 노인이 가족일 리는 없었지만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가벼운 관계는 아닐 듯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노인의 다음 말로 확실해졌다. “이제 보니 겉멋만 잔뜩 들어서 여기저기 여자나 끌고 다니는 멍청한 사업가 아니신가? 거 이름이 … 맞아, 로웰인가 뭔가였지. 뭐 어쨌든 거창해서 좋긴 좋더군. 마커스는 이 노인이 자신의 이름을 스펠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쓸 수도 있다는 것에 전 재산이라도 걸 수 있었다.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입가를 살짝 들었다. “감사합니다.” “근데 이제 와서 여긴 무슨 일인가? 재희하고는 다 끝났다고 들었는데.” 빈정거림인지 질책인지 경계가 모호했다. “잘못 안 겁니다.” 마커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저 앤 뭘 잘못 알거나 실수를 할 얘가 아니야. 제 앞가림 하나는 확실히 하는 녀석이니까. 어줍잖은 사내 놈 하나 떼어내지 못해 질질 흘리고 다닐 것 같은가!” 저 여자는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그의 자존심을 뭉개기 위한 훈련이라도 받게 한 걸까. “아직 제대로 된 상대를 못 만났던 모양이군요.” 노인의 볼이 씰룩 움직였다. “그쪽이 임자다 이건가?” 마커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본능적이 감으로 노인의 기분이 보기만큼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실례지만 노…” “베리라고 부르게. 이 나이 먹도록 날 노인장으로 부르고 턱뼈가 무사한 놈은 아직 없었으니까.” 노인은 심술궂게 이죽거렸다. 초면에 마커스 로웰에게 이런 식으로 시비를 걸고도 무사했던 남자 역시 지금껏 없었다. 그러나 화가나기보다는 흥미로움이 더 우세했다. “그럼 베리, 이만 제 용건을 처리하고 싶습니다만.” 재희를 지켜보는 동안 어둡게 끓어올랐던 욕망이 노인과 실랑이 아닌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조금씩 안으로 갈무리되었다. 손해는 아니군. 그녀와 이야기를 마무리짓기 위해선 맑게 깨어 있을 필요가 있었다. 정신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만 보면 자동우로 발화되는 그의 육체까지도 마커스는 이제 모든 상황을 바로 이해하고 정리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뭔가 딴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온 모양인데,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을걸.” 자제력이라면 산더미처럼 쌓인 게 평소의 마커스였지만 정한 것을 쟁취하기 위해 달려나갈 땐 단도직입적인데다, 쓸데없는 인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재희란 여자가 만만했다면 여기까지 움직일 일도 없었습니다 . 그럼.” 적당선 선에서 마커스는 재희 쪽으로 몸의 방향을 바뀌었다. 그녀가 이미 그의 존재를 눈치챈 것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습게도 각자의 감각만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침착했다. 뜻밖의 재회일 텐데도 앉은 자세 그대로 움직임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마커스는 어처구니없게도 기분이 상하면서 짜증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감정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토록 기를 써도 그녀와 지낸 밤의 체취에서 그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그녀의 저런 깨어지지 않는 초연함이 매혹적이면서도 그를 자극하고 괴롭혔다. 그러나 마커스는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수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아직은 대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슛 자세를 취한 상태에서 케이트가 차분하게 공을 바스켓 안으로 던져 넣자 공은 우아하게 링을 통과해 바닥으로 안착했고 재희가 양손을 흔들어 격려를 보냈다. 마커스의 미간에 주금이 잡혔다. 분명히 갈비뼈 부근을 심하게 부딪쳤다고 했는데 저렇게 움직여도 되는 건가? 그동안 베리는 번득이는 시선으로 줄곧 두 사람을 연이어 오고가고 있었다. “자네.” 마침내 베리는 우뚝 솟은 아름드리 거목만큼이나 넓은 어깨를 지닌 남자에게 퉁명스럽지만 호의가 담긴 충고를 건넸다. “자네가 지금 훔쳐가려는 사람이 어떤 보석인지 제대로 알길 바라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야.” 그건 마커스의 입장에선 바라지도 그럴 필요도 없는 허가증이었지만 그는 생면부지의 이 노인이 재희에게 품고 있는 애정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아 이 괴팍한 노인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아마도, 확실히….” 모르는 것은 알아내면 된다. 지금부터라도 철저하게! 이 감정이 언제 시효가 만료될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때가 올 때까지 그는 한재희를 손에 넣기 위해 전력을 쏟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서류상이나 다른 사람이 전해 준 보고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저 여자의 진짜 본질에서 하나하나, 가령 이 집이 그녀에게 어떤 장소인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아끼는 색깔이나 향수, 하다 못해 자주 읽는 책의 제목과 기호품까지도 그는 낱낱이 파악할 예정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여자를 알아왔던 단순한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그녀의 영혼 저 안까지 철저하게 뒤져 이번에야말로 미련 따위는 남기기 않을 만큼 송두리째 빼앗아내고 말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듣지 못한다 해도 재희에게 다짐하는 선언이었다. 베리가 멀어져가는 기척이 나는가 싶었는데 그는 별안간 툭 하고 한마디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자네 조부가 미국을 이끌던 시절이 좋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참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어. 요즘은 정치가 온통 텔레비전 쇼 천지야. 지금도 그 시절이 가끔 그립다니까.” 그 말로 마커스는 노인의 낯설지 않은 인상을 이해했다. 이 노인은 어딘가 그의 할아버지 케인 로웰을 닮은 구석이 있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손꼽히는 치적을 이룩했다고 평가받는 위대한 인물. 그에 관련된 자서전이나 그의 재임시절 정책들을 소재로 다룬 책들만해도 족히 백여 편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가 집안에서 얼마나 독재자 행세를 하는지 제대로 아는 이는 없었다. 한없이 억세고 교활한 그의 조부와 이 노인이 만난다면 왠지 상당히 의기투합할 것 같다는 상상이 그를 재미있게 만들었다. “그대로 전해드리지요.” “정말인가? 흠…” 베리는 헛기침으로 자신의 경솔함을 만회하려고 했지만 스쳐간 흥분은 아미 탄로난 뒤였다. “ 그럼 또 보세.” 부루퉁한 음성으로 말을 마친 베리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사라져 버렸다. 마커스는 조부의 명성이 항상 꼬리표처럼 붙어다니는것을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달갑게 여겨본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그냥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이미 노인과의 대화는 그의 마음에서 멀리 떠나 있었다. 재희가 마침내 그에게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꽤나 유능한 수하를 두고 있는 모양이에요.” 어디를 봐도 환영의 인사라고는 볼 수 없는 차가운 비꼬임에 마커스는 자신이 얻은 정보의 경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기로했다. 가까이서 보니 아직 광대뼈 근처에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안쓰러움 혹은 연민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감정이 그에게 깃들였다. “유감이군” 그녀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는 말이다. 순식간에 복잡해지는 마음에 재희는 착잡해졌다. 완전히 끊었다고 생각했더니. 그날 새벽 이후 연락조차 없던 남자아닌가? 불쑥 무슨 게임을 다시 시작하자고 여기에 나타났는지 의심스러웠다. “괜찮아요. 경기에선 별의별 일들이 다 일어나는 법이니까. 게다가 이번에 난 운이 좋았어요. 작년처럼 뼈가 부러지지도 않았고. 다음 경기에 바로 참가할 수도 있을 만큼 상태도 양호하니까요.” “몬테카를로였던가?” “정말 대단하군요. 근데 어쩌죠? 슬슬 불쾌해지려고 하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단조롭고 거칠었다. 벌써 알고 있던 사실이라곤 해도 다 끝난 마당에 여기까지 헤집고 들어온 마커스의 존재가 못마땅했다. “정말 몸은 괜찮소?”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통증일 뿐이에요. 그보다 이곳엔 무슨 일이죠?” 그녀는 불필요한 대화가 길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이곳이 당신의 비밀스런 둥지인가?” 다른 사람, 더욱이 마커스에게는 이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는 자신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 집은 정말 그녀에게 너무나 사적인 의미였고 마커스는 그녀의 사생활에 가장 포함시키고 시지 않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빛나는 작은 눈망울들을 의식한 재희는 그 와중에도 불현듯 쓴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아이들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낯선 인물에게 주먹이라도 휘두를 기세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커스와 재희 사이에 흐르는 거북하고 뜨거운 공기의 변화를 눈치 빠르게 잡아낸 케이트가 커다란 소리로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자, 얘들아. 이제 점심시간이야. 애나 아줌마가 디저트로 애플 파이를 구워주겠다고 하셨으니까 모두 말끔하게 씻은 다음 식탁에서 보자. 늦으면 설탕 부스러기도 없을 줄 알아.” 그러자 뭐라고 투덜대며 일제히 항의하는 꼬마 녀석들을 케이트는 힘들이지 않고 제압한 뒤 집 쪽으로 우르르 끌고 가버렸다. 순식간에 그곳에 두 사람만이 남았다. “저 꼬마 숙녀를 유혹하게 될 것 같군.” “아무도 케이트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죠.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이미 저 요정 아가씨에겐 임자가 있어요.” 재희는 별다른 기색 없이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묻죠 .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요. 마커스.” 재희는 어딘지 지금까지와는 현저하게 달라 보이는 마커스에 대한 불안감을 안으로 삭였다. 결단력? 혹은 개운함? 원래 속을 보이지 않는 남자이긴 했지만 정장 차림이 아닌 브이넥 니트셔츠와 검은색의 진을 걸친 오늘 그의 모습은 사악한 분위기까지 감돌 정도로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재희 자신이 먼저 패를 던지기를. “정말 몰라서 묻는 거요?” 그가 언젠가는 찾아오리라는 것을 아마 그녀의 일부는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섹스에 초보인 그녀라도 그날과 같은 그런 절정의 환희가 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함께 나눈 쾌락은 특별했다. 너무 지나치게. 밤의 어둠 속에서 그녀의 귓가에 쏟아 부어지던 뜨겁고 거친 숨소리는 아직 잔 떨림을 간직하고 있던 그녀의 육체에 따뜻한 전율을 가져다주었고 그녀의 머리 속을 온통 착각과 혼란으로 물들여놓았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나눈 그 싸움 같은 관계에서조차 그를 거부하고 속여넘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졌다. 확실하게 자신을 놓쳐버린 것이다. 마커스의 손에 붙잡히기 저에 빠져나온 것은 천운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의 오만함에 대한 후회 정도가 아니라 뼈아픈 대가를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마 변변한 저항조차 없이. 잠들어 있던 그의 얼굴, 그녀를 안고 있던 무거운 팔의 무게, 가슴에 와 닿는 규칙적인 남자의 호흡… 그들을 한 몸처럼 감고 있는 실크시트조차 관능이 되었다. 그들이 나눈 숨막힐 듯한 정사보다 그렇게 영원히 정지해 버릴 듯한 한순간이 더 두려웠다. 그래서 멈추었다. 재희는 심호흡을 하고 신중하게 숨을 고른 뒤 공격했다. “서로의 의사를 분명히 하지 않았던가요?” “그런 기억은 없는데. 게임의 당사자들 중 한편이 일방적으로 중간에 돌을 던졌지.” “중간이 아니라 막판이에요.” 그녀는 실란하게 지적했다. 그러나 동공이 살짝 좁혀진 것만이 마커스가 보인 유일한 감정 표시였다. “당신과 나는 끝났어요.” “ 그 마지막 때문인가?” 재희는 그의 오해에 대해 그날처럼 구태여 반박하지 않았다. 구실을 제공해 준다면 고맙게 무기로 사용할 따름이었다. “우린 둘 다 한가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래서?” “앞으로의 수고를 절약하는 의미에서 밝혀두죠.” “계속해 보시오.” “우리 사이에는 일종의, 그래요, 인정해요. 불꽃이 있었어요. 한 번쯤은 태워 없앨 필요가 있었죠. 그건 불가피한 사고와도 같은 거였어요. 건너뛸 수 없는 함정이었고 난 그 외나무다리를 건너야만 한다는 데 있어서 당신에게 ‘합의’했어요.” “사고라. 그래서 내 침대로 기꺼이 뛰어 들어왔단 거요? 한 번의 실험을 위해?” 어느새 두 사람의 몸이 전하는 열기가 하나로 느껴질 만큼 바짝 접근한 그가 나직이 내뱉었다. “그리고 혼자서 끝났다?” “완전히 끝났어요.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당신도 동의하지 않았던가요?” “내가?” 그녀가 그대로 땅에 다리를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은 것은 물러선다는 인상을 줄까 봐서였다. 한치의 허점이라도 표시를 냈다간 그대로 공격당할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러나 고문과도 같은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린 둘 다 남녀 사이의 일회용 정사에 대한 룰을 아는 사람들이에요. 그 순간 나는 여자였고 당신은 남자였죠. 그래서 서로의 의사가 일치한 대로 동등하게 섹스를 즐겼어요. 깨끗한 종결. 그 안엔 해결해야 할 문제도 . 오해도 없어요.” “대단한 달변이군. 감동적이야.” 마커스는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말 미안하게도 지금부터 난 단지 시작일 뿐이오, 당신이 싫어도 어쩔 수 없어!”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어깨를 파고들었지만 아픔을 인식할 사이도 없었다. “거의 얼음장처럼 느껴지는 찬물을 한 시간이나 머리에 쏟아붓고 꽁꽁 언 시체가 된 뒤에 멍청이처럼 드디어, 완전히 정신을 차렸으니까. 그래, 난 그날 밤 당신을 가졌던게 아니야.” “당신은 나를 손에 넣었어요.” 그 순간만큼은 그건 그녀조차 부인하던 진실이었다. 그걸 고백함으로써 이쯤에서 전부 떨쳐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소리내어 알려주지. 당신에게도. 재희의 머리 속으로 고통이 밀려들었다. “거짓말!” 마커스는 재희의 몸짓 하나하나를 주의 깊게 응시한 채 시종일관 눈을 떼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의 감정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화난듯한 언동과는 달리 무기질의 광기가 감도는 그의 눈동자는 전혀 다른 의미의 불꽃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스스로 자초한 지옥이었다. 악수가 될 줄 뻔히 알면서도 마커스 로웰에게 끌려 들어간 대가. “당신은 스스로 말했어. 자신을 내준 게 아니라 그냥 ‘몸’을 내준 거라고. 그리고 날 가질 마음도 전혀 없었지. 안전한 중립 선상에서의 잠깐의 결투, 그뿐이었어. 아닌가?” 단숨에 정곡을 파고드는 질문도 질문이었지만 점점 피부에 화인처럼 느껴지는 그의 손이 신경을 달구었다.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흐트러지고 있었다. 마커스의 어두운 눈빛이 그녀의 집중을 방해하며 고의가 담긴 압력을 행사했다. 재희는 격한 욕설을 떠올리는 것으로 겨우 평정의 끈을 붙잡았다. “그 외에 뭐가 다 있어야 한단 말이죠? 그건 당신이 내건 선전문구이기도 해요. 섹스 외엔 어떤 집착도 요구도 없을 거라는!” 그러니 끝내자는 말이야! “그랬지. 하지만 가끔 난 아주 욕심이 많아져. 물론 지금까지는 여자에게 그런 감정을 해당시켜 본 적은 없었지만, 사업에 있어서의 내 평판은 훨씬 고약해.” “날 인수해야 할 물건쯤으로 여기겠다는 뜻인가요?” 청바지 위로 스치는 꽉 조여진 단단한 근육의 감촉을 애써 무시하며 그녀는 냉랭하게 물었다. “그래. 말 그대로 철저한 인수합병을 시작하겠다는 뜻이지. 난 당신이 내게 머물도록 만들 거요.” “당신이 좋다고 할 때까지 말인가요?” “이기적인 정신병자라고 욕하고 싶다면 기꺼이 들어주겠소. 사실 비슷하니까.” 그의 어조에 담긴 거침없는 냉소는 누구를 과녁으로 하고 있는 것일까. “불가능과 도전을 혼동하고 있군요. 마커스 로웰.” 그녀는 어디에도 오래 머무른 적이 없는 여자였다. 심지어 그녀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가정과 가장 가까운 형태의 장소라 부를 수 있는 이 집에서조차. 비밀스런 둥지냐고 물었었나? 둥지란 게 뭔지도 모르는 그녀였다. 재희는 되도록 빨리 본론을 해치우고 이 자리를 떠나야 하다고 되뇌었다. 특히 그녀의 표정이 언제까지 정상적으로 버티어줄지 장담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내게는 벌써 몇 채의 아파트와 집이 있어요. 제안은 고맙지만 더 이상 여분의 장소는 필요 없어요.” 그녀는 매몰차게 단어를 끊었다. “그리고 이미 싫증난 남자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나 막 그녀의 얼굴에 닿는 마커스의 손가락은 집요했으며 끈질겼다. 다른 의미로 이 심각한 분위기가 깊어지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차츰 그의 흥분에 감염되어 가고 있었다. 바로 그날 밤처럼. 뺨을 따라 시작된 열기는 이마를 지나 눈썹과 콧날 그리고 입술 윗선까지 번졌다. “내 품안에서 당신의 반응은 정반대의 의미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약점을 놓치지 않는 망할 남자! 결국 재희는 그의 손을 쳐내고야 말았다. 그녀가 보이는 것만큼 평정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시인하고 만 꼴이었다. 아울러 그가 그녀의 육체에 미치는 효과에 무심하지 않다는 사실도. 그가 떠올리는 흐릿한 만족감이 더욱 깊어지자 재희는 날카로운 비수가 심장을 찌르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안하무인처럼 이번엔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실수를 한 쪽은 당신이야, 알아?” 제길! 왜 이 남자를 그만두게 하지 못하는 거야, 한재희! 상대는 여자를 조종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요리하는 것이 이력이 난 남자야. 그런 남자와 넌 무엇을 시작하겠다는 거지? “만약 당신에 대한 내 흥미를 어떻게든 죽이고 싶었다면 나와 함께 침대로 가지는 말았어야지. 그리고 날 자극하고 도발하는 대신 겁쟁이처럼 숨어버렸어야 해.” 살아 숨쉬는 비단의 표면처럼 매끄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무의식중에 탐하며 마커스는 손끝의 모세혈관 하나하나가 거칠게 뛰는 자신의 맥박을 의식했다. 극도로 예민해진 그의 감각에 그녀의 유혹적인 향기는 독약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그랬다 해도 사실 변할 게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붉은 입술이 경직되어 파랗게 물들었다. 마커스는 그녀의 목을 마치 조르기라도 할 듯 양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쇄골 위 오목한 곳을 엄지로 어루만졌다. “진실을 듣고 싶어?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야. 우리가 나눈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당신의 눈을 똑바로 지켜보며 그 실체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해답을 찾아냈나요?” “아직. 그러나 마침내는 찾게 되겠지.” 욕망에 물든 신음처럼 그가 중얼거렸다. 논리적인 사고가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젖혀 갈수록 대담해지는 마커스의 손가락들을 떨구어내려 했다. 그러자 그는 더한 힘으로 그녀의 턱을 붙잡았고 미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드러움으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당신은 잡혔어. 스스로 그걸 인정하든, 하지 못하든 간에.” 깊게 가라앉은 그의 속삭임이 악마의 손길처럼 그녀를 움켜쥐었다. 자신과 그가 가진 것에 대해 한없이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사내. 그래서 그의 인생에 누군가를 포함시키는 일에도 일말의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돌아서기도 간단하리라. 싫증이 나고 흥미가 떨어지면 남는 사람의 감정은 그에겐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재희는 가끔 제이슨이 여자를 대하는 방식을 지켜보았다. 그는 아무리 많은 돈을 아낌없이 내줄지언정 절대로 자신의 일부를 내주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커스 로웰, 이 남자 역시도 사랑이나 감정 같은 것엔 아예 가치를 두지 않는 부류였다. 아마 지금까지는 재희 자신도 그렇게 지독히 무정했을 것이다. 그녀가 할 수 있을까? 다치지 않고 무사히 이 덫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좋아. 그럼 이쯤에서 일단 서로 공평해지기로 하지.” 약간의 조소와 희미한 긴장감이 그에게서 묻어나왔다. 새하얗고 튼튼한 치아가 그녀의 약한 살에 자국을 만들며 그 윤곽을 따라 탐색을 시작했다. 마커스의 길고 강인한 두 팔이 그녀를 꼼짝 못하게 붙들었다. 재희의 손이 그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고 커다란 손바닥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세게 잡아 그의 입술을 피하지 못하도록 고정시켰다. "그래. 이번엔 … 당신이 날 쫓아와도 좋아.“ 그리고 마커스는 가볍게 그녀를 들어 그토록 괴롭히던 여자의 입술에 거칠게 키스했다. “쫓아와. 안 그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마침내 입술이 떨어지자 그는 재희의 입술 바로 위에서 어둡고 위협적인 속삭임으로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당신이 목숨 거는 경기도 하지 못하게 가둬버리고 말겠어. 약속해.” “맙소사! 내 무릎이 다 후들거리네!” 애나는 부엌의 격자무늬 창으로 보이는 한 편의 영화 같은 장면에 낭만적인 탄식을 토해냈다. “저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은 본 적이 없어.” 그러나 두 남녀에 대한 그녀의 감개무량함은 일 초도 안 가 무참히 깨어졌다. 뒤쪽 스크린 도어를 통해 들어온 베리가 조리대 바로 옆에서 면박을 주듯 시큰둥하게 툴툴댄 것이다. “좌우간 여자들이란! 저런 허우대만 멀쩡한 늑대 같은 놈이 뭐가 좋다고. 그리고 애들도 다 봤을 텐데 대체 정신이 있는 놈이면…” 그러자 갑자기 애나의 눈이 세모꼴로 변하더니 그가 마침 잡고 있던 애플 파이를 홱 빼앗았다. "무슨 짓이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속수무책으로 빼앗긴 노인은 나이가 민망하게 아이처럼 울상을 지었다. 애나는 파이 조각을 그의 코앞에 마구 흔들었다. “세상에! 당신 같이 심술이 덕지덕지한 영감은 내가 만든 파이를 먹을 자격도 없어요. 우리 재희가 평생 처음으로 남자를 데려왔는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리고도 먹을 걸 바래요? “데려오긴 뭘 데려와? 혼자 몸이 달아 쳐들어온 게 뻔하더군만. 조만간 쫓겨나갈걸? 저 봐, 가잖소?” “뭐예요? 정말 이 노인네가…” 씩씩거리며 기세 좋게 덤비던 애니는 진짜로 마커스가 재희를 놓아주고 훌쩍 가버리자 오만상을 있는 대로 쓰고 말았다. “자그마치 15년을 매달려 따라다닌 루이스도 어찌 못해 본 아이요. 아무렴 호락호락 인정할 것 같소?” “상대가 틀려요. 상대가. 나이를 어디로 먹었기에 눈으로 보고도 몰라요?” 애나가 혀를 차며 구시렁거리자 그 틈을 노려 베리는 잽싸게 파이를 찾아왔다. “베리 올슨! 당신…” “몇 시간 동안 밭에서 허리가 부러져라 중노동을 했는데 기껏 파이 한 조각도 아깝다는 말이오?” 그는 달짝지근한 파이를 한 입 베어물고 밀려오는 감동에 입맛을 다셨다. “음… 애나, 당신은 하느님 앞에 가서도 이 파이 맛 하나로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 거요.” “엉뚱한 소리 말고…” “쉿.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요. 화이트필드 여사. 만사가 당신 뜻대로 굴러갈 테니까.” “무슨 말이에요?” 그녀가 코에 주름을 잡고 물었다. “방금 재희가 이쪽으로 오기 시작했소.” “그런데요?” 그게 뭘 어쨌단 건가. 가려면 저 남자가 간 곳으로 따라가야 일이되지. 하지만 베리는 파이 한쪽을 눈 깜짝할 새에 해치우고 어느새 다음조각을 우물거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베리!” 정말이지 이 남자는 가끔 ‘온화한’그녀의 천성을 너무 시험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 이상 묻지 말고 당신이 질색하는 그 시커먼 괴물의 열쇠나 찾아놓구려.” “시커먼…” 그제서야 상황을 알아챈 애나의 표정이 단박에 퍼졌다. 예의 시커먼 괴물이란 재희의 애마인 할리 데이비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걸 타는 재희가 안심이 안 돼 잔소리를 늘어놓기 일쑤지만 뭐 오늘은 예외로 해둬도 괜찮겠지. 베리가 입에 든 것을 꿀꺽 삼키고 공범처럼 씩 웃었다. “약삭 빠른 노인네 같으니. 그런데 재희가 정말 따라갈까요?” “내기할까? 십 년을 쌓아올린 오랜 우정으로 어떤 의미에선 부부보다 더 훤히 서로의 속을 아는 두 노인의 눈빛이 교활하게 부딪쳤다. “그런 의미에서 한 쪽만 더 주면 안 되겠소?”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요!” 애나는 쌀쌀맞게 코웃음을 쳤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지. “그나저나 저런 걸 타도 재희의 몸이 괜찮을까 모르겠네?” “그냥 멍든 정도라니까 그러네.” “당신 같은 돌팔이 말을 어떻게 믿어요!” 애나의 여지없는 타박에 베리의 투덜거림이 뒤를 이었다. 이곳 부엌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13장 “이 정신없는 여자가!” 마커스는 있는 힘껏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옆으로 돌렸다. 자동차가 진동을 일으키며 갓길에 멈춰서자마자 그는 차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옆을 딸라 긴 몸체를 자랑하는 매끈한 할리 최신형이 급정지했다. “죽고 싶어? 그 몸으로 대체!” 아무리 자신을 쫓아오라고 그녀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해도 이런 즉각적인 결단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대체 그의 허를 지르고 골탕을 먹이고 안달나게 하는 것을 취미로 삼으려고 작정한 여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번번이 이렇게 자신의 혈압을 뒤집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맙소사! 잠시 복잡한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는 검은 형체를 보지 못할 뻔했다. 행여 저 거대한 기계덩어리가 미끄러져 도로 위로 널브러지기라도 했다면 마커스는 그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짓이야? 보복 삼아 내 앞에서 목이라도 부러뜨릴 작정이었나? 아니면 자동차에 깔린 것 정도로는 성에 안 찬다는 건가!” 그녀는 일언반구도 없이 모터사이클에서 내려 , 쓰고 있던 헬멧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다. “한재희!” 재희는 흘러내린 앞머리를 되는 대로 쓸어넘기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눈은 화살처럼 곧게 그를 향해 검푸르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마치 잔잔한 심해의 저 안에서 세찬 격류처럼. “당신한테 전부를 걸라고?” 그녀는 주먹을 그러쥐고 극도로 억눌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커스가 갑작스레 숨을 삼켰다. “웃기지 마 로웰! 어림없어!” “젠장” 먹이를 노리고 바람을 타는 날렵한 호랑이처럼 마커스는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누구한테도. 어떤 인간한테도 두 번 다시 내 전부를 거는 일 따윈 안 해!” 그게 내 생존방식이야. 하지만 그녀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저에 먼저 마커스의 팔이 뻗어나왔다. 찰나 모든 것이 깨끗하게 머리에서 날아가 버렸다. 세상은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그저 하나의 진실만을 비추었다. 우선은 함께 있고 싶다는 너무나 직설적이고 단순한 욕망. 그것뿐이었다. “날 말려봐! 말려보라구, 한재희!” 그녀가 마주 그를 끌어안았다. 상체가 휘어지고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강렬한 포옹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들의 입술이 마치 한 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는 것처럼 숨막히게 서로에게 달라붙었다. 재희와 마커스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을 열어 서로를 맞아들였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살갗 위로 파고 들었다. 닥치는 대로 훔치고 빼앗고 그리고 되돌려주었다. 그의 손이 등을 타고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그녀의 엉덩이를 잡아 들어올렸다. 두 사람의 배와 허벅지가 아교처럼 녹아들어 하나로 용해되었다. 그녀는 그의 사납게 두근대는 욕망을 느끼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갈비뼈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녀를 일깨웠다. “제길” 마커스는 헐떡이며 그녀의 풍성한 머리칼에 입술을 파묻고 목 안에서 웅얼거렸다. 양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마 아무나 지나다닐 수 있는 대로변이 아니었다면 길바닥에서 일을 치르고 말았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아, 정말…” 재희는 두 눈을 감고 그의 단단한 뺨에 자신의 얼굴을 기대었다. “키스나 해” 그가 명령하고 고개를 숙여 또다시 밀어붙이듯 그녀의 입술을 열어뜨렸다. 잠시 후 낡은 구형의 시보레 한 대가 서로에게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사이드 미러로 그들을 지켜보면서 운전석의 사내는 쥐고 있던 싸구려 위스키를 병째로 들어켰다. 연신 키들대면서 말이다. “음…” 정신이 들자 어두운 밤의 그림자가 사방을 덮고 있었다. 재희는 맹세컨대 한 번도 이렇게 전신의 긴장을 이완한 채 잠든 적이 없었다. 눈을 가은 채로도 그녀는 옆에 누운 남자의 뜨거운 열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재희” 나직하고 남성적인 음성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재희는 혼자서 잠시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 재희는 그녀답지 않게 조금 멍한 눈빛으로 팔을 괴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마커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선택한 남자였다. 물론 혼자서 끌고 온 상황은 아니었지만 진실을 말하라면 그가 처음 자신의 발을 만지며 구두를 신겨주었던 그 순간부터 막연히 이런 날이 올 것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마커스 로웰이 오늘 그녀에게 미친 영향은 가히 파괴적이었다. 어떤 구속도 없이 거침없이 그녀를 소유하려는 그의 몸짓은 두려운 동시에 숨이 멎을 만큼 재희를 압도했다. 강인하고 아름다운 사내. 그러나 이 남자는 그녀를 더할 나위 없이 약하게 만들었다. 그녀 쪽으로 몸을 숙이고 있는 그는 그녀의 머리 속에 각인된 기억 그대로 크고 우아했다. 빈틈이라곤 없이 완벽하게 꽉 짜인 근육의 움직임은 동작 하나하나가 군더더기없이 깔끔하고 마치 매끈한 얼음 위를 흐르듯 날렵하고 유연했다.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 재희는 우울함과 경탄이 뒤섞인 눈으로 그 모습을 감상했다. 마커스가 팔꿈치로 베개를 짚고 상체를 세웠다. 그 또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잘못됐나요?” 그러자 놀랍게도 그가 긴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그러더니 알아들을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어쩌면 모든 게 잘못됐을지도.” 마커스가 한 대답은 재희로선 이해가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정확하게 그 뜻을 이해할 것 같아 불안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아. 지금은.” 그리고는 재희가 이미 익숙해지기 시작한 그 특유의 움직임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깨어난 것은 뭔가가 실내를 왔다갔다하는 미세한 소음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 나가떨어진 기분, 온몸에 자리잡은 남자의 표식은 조만간 멍이 되어 사고의 흔적과 함께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싫지 않다는 것, 화가 나지 않는 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였다. 생애 처음 가져보기로 마음먹은 남자에게 도리어 거꾸로 먹힐 지경인데도 달콤쌉싸름한 전율만이 그녀에게 남아 있는 전부라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를 넘어서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다. 치명적인 사내야. 제정신의 여자라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집어타고 당장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런데 스스로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 미친 짓이야.” 재희는 실소를 감추며 엎드린 채고 양팔에 얼굴을 묻었다. 어쩌면 마커스 로웰은 단 일주일이면 그녀에게 넌더리를 내며 싫증을 느낄지도 모르는데. 어젯밤. 그의 전적을 봐선 다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아직까지 그녀의 모든 감각이란 감각은 마치 바늘 끝처럼 예민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래층에서 나던 소음이 조금 더 수선스러워졌다. 재희는 독점하듯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마커스의 팔을 들어 옆으로 내려놓고 우선 바닥에 떨어진 시트로 대강 알몸을 둘렀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재희 양.“ 맨발로 계단을 내려가자 홀에 서 있던 빈틈없이 보이는 회색 양복차림의 삼십대 남자가 놀란 기색도 없이 일상처럼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전 로웰 회장님의 보좌관 루 핸더슨입니다.” 어쩌면 마커스의 침실에서 여자가 시트만 걸치고 나오는 모습을 보는 일이 다반사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낯선 여자의 이름까지 파악하고 다니는 건가? 더구나 제이가 아니라 재희라면… “핸더슨 씨.” 목소리가 형편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하긴 그녀의 현재 상태 자체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몰골이 아닐까 싶지만. 루 핸더슨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사양했다. “괜찮다면 루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렇게 엄격하게 예의를 차린 핸더슨 씨라는 호칭을 들으면 제가 꼭 저희 아버지같이 팍삭 늙은 기분이 들어서.” “그러죠. 루” 깐깐한 외모와는 달리 서글서글한 농담이 시원스러웠다. 그녀는 이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내 여자에게 수작부리지 말게, 루. 자넬 해고하고 거리로 내쫓긴 싫으니까.” 갑자기 끼어든 마커스의 음성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녀는 뒤로 다가서는 그의 기척에 신경을 쓰느라 그가 자신을 내 여자라고 지칭한 것을 놓쳐버렸다. “일어나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 아름다운 분께 제 대신 회장님을 깨워 달라고 부탁을 드려야 하나 망설이던 중이었습니다.” 아침부터 험악한 인상을 쓰고 있는 상관의 표정은 아랑곳없이 루는 침착하게 고개를 까닥했다. “아부가 능숙하군요.” 재희가 빙그레 웃고 말자 마커스가 그녀의 허리를 부둥켜안고 몸을 실었다. “아무 남자한테나 그렇게 웃지마. 기분 나빠.” “이봐요.” 지나친 간섭이라고 말하려다 그녀는 시트의 주름 사이로 능숙하게 비집고 들어온 그의 버릇없는 손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루의 눈치를 살폈다. “당신의 상대는 나야. 그런데 내가 깨기도 전에 내 침대에서 몰래 도망쳐 나와 내 보좌관과 눈을 맞추다니.” 손 안에 가득 차는 매끈한 감촉이 꼭 싱싱한 과일의 속살을 어루만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급속도로 단단해지는 유두를 남자다운 승리감으로 희롱하며 그는 슬며시 자신의 하체를 그녀의 뒤쪽 허벅지에 일부러 밀어붙였다. 그녀의 드러난 살갗에 소름이 돋는 것을 보자 마커스의 입가에 더욱 미소가 번졌다. 분명히 공기가 차가운 탓은 아니었다. 이 여자가 지닌 그렇게 대단한 의지로도 그를 거부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마커스의 우월감을 충동질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내놓고 여자에게 지분거리게 될 날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마는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멈추고 싶지 않았다. 침실로 이어지는 계단이 그 의미를 강렬히 주장하며 마커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움찔하며 신음을 죽였다. 그녀의 맨발이 그의 발등을 사뿐히 짓눌렀던 것이다. 그리고 기회는 이때다 싶게 재희는 잔뜩 흥분한 그의 몸을 유유히 비웃으며 저만치 피래버렸다. “오랜지쥬스 드시겠습니까? 방금 메이드가 짰습니다만.” 루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천연덕스런 얼굴로 재희에게 영롱한 크리스털 자에 담긴 신선한 액체를 권했다. 그녀는 잔을 받아들며 감사의 표시를 했다. “메이드가 여기 있나요?”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들 주위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팬트하우스에 고용인이 없을 리 없는 것이다. “상주하지는 않습니다. 직원과 마찬가지로 출퇴근을 하지요. 사실 이곳은 회장님이 이따금씩만 이용하는 장소라서 그게 더 효율적입니다." 친절하게 루가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이따금 정사 상대와. 하긴 그게 그녀로서도 나을 것이다. 마커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부담만 커질 뿐이다. 서로 손을 흔들고 헤어질 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야 한다. “일을 하다 보면 철야를 하실 때가 종종 있거든요. 그럴 때 쉬시는 장소입니다.” 주인의 인품을 방어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루의 설명은 아무 사시도 없이 단순 명료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내 집으로 옮겼으면 좋겠는데. 재희” 재희는 말없이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잔을 들어 길게 한 모금 마셨다. “좋네요. 고마워요.” “식탁에 아침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마커스의 심기는 영 좋지 않았다. 그는 루의 안내를 따라 테이블로 향하려는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막았다. “루가 말했다시피 이곳은 잠깐잠깐 머무는 곳일 뿐이야. 회사 건물이라 당신도 불편할 거고." 재희는 더 이상 시간 끌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내 아파트로 하죠.” 곧바로 마커스의 턱이 당겨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그러나 재희는 양보하지 않았다. “이미 당신도 주소를 알겠지만 센트럴 파크 근처니까 서로 편할 거예요.” 그녀의 제안에 숨은 진의를 떠보느라 마커스의 눈은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그녀를 놓아주고 의자를 빼주었다. “당신이 그러길 원한다면 우선은 그렇게 하지.” “난 경기 때문에 자리를 자주 비워야 해요. 자동차 세팅을 위한 정비팀과의 회합도 있고 무엇보다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니까요.”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따뜻한 토스트를 입으로 가져가며 그녀는 지나가는 말처럼 언급했다. “경기…라고?” 그러고자 한것도 아닌데 입가의 근육이 꿈틀하고 이마에 핏대가 섰다. 평소에는 딱 적당한 수준의 농도 짙은 커피가 오늘따라 유달리 마커스의 미각을 쓰디쓰게 가격했다. “아직 많은 경기가 남아 있죠.” 더 이상 그녀의 위험한 곡예를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 여자를 말리기엔 아직 그의 입지가 굳건하지가 못했다. 반대하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아도 타당한 명분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어느 때보다 민감하고 예민한 시점이었다. 외줄을 타는 데는 무엇보다도 재빠른 균형감각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법이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일단은! 마커스는 그것으로 대화를 마쳤다. “루, 오늘 일정을 불러주게.”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날부터 그들은 시간과 상황이 허락하는 하에서 늘 함께 있었다. 밤도 낮도 침실도 사무실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고 밀폐된 공간만 있다면 그는 어느 때고 거리낌없이 그녀를 요구했다. 그들은 방종하고 타락하기까지 한 순간순간을 유감없이 즐기며 보냈다. 재희가 주변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마커스는 그들의 사이를 음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국한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잔칫날이라도 만난 것처럼 연일 시끄럽게 구설을 만들어내는 언론에게 여봐란 듯이 그녀의 팔짱을 끼고 식당이나 극장 같은 공식석상에 태연히 나타났다. 또한 그녀의 아파트에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출근하다시피 했고 경기가 있는 곳까지 틈나는 대로 얼굴을 비쳤다. 극성스런 기자들은 로비의 경비원까지 매수해 가며 정보를 캐내려고 혈안이 되기 시작했다. 이제껏 그 오랜 시간 동안 마커스 로웰이. 교제하던 여자의 아파트를 정기적으로 드나든 경우는 결코 없었다. 대충 지나가고 말 소모성 스캔들 기사가 이렇게 과열되고 확대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기도 했다. 일종의 불문율과도 같았던 인간미 없고 철두철미한 과거 행적을 정면으로 무시하면서까지 마커스가 끊임없이 재희와 동행하는 모습을 보이자 성급한 타블로이드 지들은 일제히 포문을 열었다. 항간에는 마커슨 로웰이 새로운 취향을 개발하더니 한 여자에게 정신 못차리고 빠져 있다는 외설적인 루머와 함께 자칫 로웰 제국의 고귀한 혈통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순한 피가 더해질지도 모른다는 인신공격성 기사까지 가세했다. 재희로서는 조금이나마 주도권을 남겨두려는 계산에서 그의 장소보다는 자신의 집을 선택한 것이 외려 더 많은 추측과 소문이 난무하는 결과를 야기한 것이다. 거기에 랠리 경기에서 이어지고 있는 그녀의 상승세가 그들의 관심에 기름을 붓는 촉매제로 작용한 것은 뻔한 일이다. 하지만 그를 따라다니는 매스컴의 북새통 같은 집중포화에도 불구하고 마커스는 자신의 사생활을 엄격하게 지켜내는 남자였다. 불독만큼이나 끈질긴 취재 기자들을 능숙하게 따돌리고 마음대로 요리하는 그의 기술은 세상에 이미 정평이 나 있었고, 그 방면에선 어는 정도 노하우를 축적했다고 생각한 재희에게서조차 감탄을 얻어낼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재희는 마커스와 연관된 이런 소란스런 날들이 그저 한시적일 뿐이며 장기적으론 자신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을거라고 고집스럽게 자신을 기만하고 있었다. 원하면 언제든 자유롭게 그를 떠날 수 있다고 말이다. 사실 마커스는 얼마 안 가 재희에게 교외에 있는 그의 집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은연중에 다시 종용해 왔다. 그러나 처음 그들이 밤을 보낸 그곳이라면 차라리 모를까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그의 성체에 발을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 재희는 여전히 단호한 입장을 취하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커스는 이후로 더 이상 그 제안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수긍했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재희도 잘 알고 있었다. “알겠소. 물론 약속은 틀림없이 지킬 거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울리는 숨죽인 목소리는 신중하게 억제되어 있었으며 무섭게 냉랭했다. 잠시 후 전화는 끊어졌고 검은 실루엣으로만 비치던 남자는 천천히 창문을 열고 테라스 밖으로 나갔다. 그의 전신을 고통으로 가득했다. 미워해도 좋아. 별 한 점조차 없는 공허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는 웃었다. 잊혀지느니 그 편을 택하겠어. 하지만 그의 미소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루이스는 뭐가 되고 싶어요?’ 언젠가의 크리스마스 날 밤이었다. 아직 어린 숙녀가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거리며 그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겨우살이 가지 아래 서 있는 재희를 응시한 채 그는 대답했었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어.’ ‘누구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녀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꼭 쥐어 주었던 손의 감촉만이 아련히 남아 있을 뿐. 뭐라고 작게 속삭였지. 하지만 재희가 애니의 특제 사과술을 가져와 그에게 건네주는 바람에 주의가 다른 데로 쏠리고 말았다. 적어도 그때는 행복했다. 좀체 진심으로 웃지 않는 재희가 웃고 있었고 방 안은 훈훈한 공기로 기분 좋게 따뜻했다. 그녀의 어깨에 기대어서 잠이 들었지. 눈을 뜨니 아이들이 모두 잠들러 간 사이 벽난로가 타는 방 안에 그와 재희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한쪽 어깨를 내준 채 창틀에 수북수북 쌓이는 눈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옆얼굴이 장작불에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소중한 순간을 깨기 싫어 그는 깨어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만의 먼 세상에서 부유하듯 무릎을 감싼 채 정물화처럼 정지해 있었다. 겨울이나 눈은 재희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몸을 팔던 그녀의 어머니가 지독히도 눈이 많이 쌓였던 날 그녀를 두고 떠나버렸다는 것이 그가 아는 이유의 전부였지만.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너무나 마음이 쓰였던 기억이 난다. 어린 아이 혼자 그 차가운 골목에 버려져 어떤 식으로 살아남았는지 사실 그로서는 제대로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저 그때의 재희를 대신해 무심하기 짝이 없는 세상과 인간에 대해 화를 냈을 뿐. 물론 그에게도 늘 춥고 앙상한 계절과 아버지의 외면만을 떠오르게 하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대한 좋은 추억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 겨울에 재희를 만났고 그 이유만으로도 겨울은 그에게 특별하게 되었다. 사랑해. 재희. 하지만 넌 날 사랑하지 못하지. 루이스는 바스락거리며 번져나가는 수목들의 외로운 일렁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좋아. 이제부턴 날 미워해. 얼마든지. 14장 “보안 유지는 확실히 되고 있겠지?” 분주하고 힘든 하루를 마치고 재희는 늦게서야 귀가를 했다. 미뤄두었던 일들을 처리하고 회계 사무실에 들러 세무조항이다 면제조항이다 해서 오랜만에 숫자만 잔뜩 머리에 집어넣었더니 나중에는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아파트 안으로 들어서자 오늘도 마치 제 집처럼 그녀의 거실 전체를 점령하고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네, 공식적으론 협상 테이블에 오를 때까지 언론에 공개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소프 쪽에서도 비밀리에 마무리짓기를 원한다고 밝힌 터라.” 마커스와 루는 심각한 얼굴로 현재 인수를 추진하고 있는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신진 소프트웨어 회사에 관해 토의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루 핸더슨까지도 그녀의 아파트 경비원과 친숙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필요한 조항은 모두 첨부하고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지.” 중역회의에서 저런 목소리로 명령을 내린다면 아마 임원들은 하늘에 뜬 해가 달이라고 해도 철썩같이 신봉하리라. 그녀는 무심코 진단했다. “네, 회장님.” 파스텔 그린의 양탄자 위엔 노트북과 서류들이 어수선하게 널려있고 마커스는 셔츠의 단추를 끄르고 소매를 둘둘 말아 올린 채 펜으로 뭔가를 체크하느라 재희가 들어서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뭔가에 깊이 집중한 남자는 매혹적이다. 더구나 마커스 로웰의 경우라면 감히 저항할 여자가 드물겠지. 재희는 길게 드리워진 그의 짙은 속눈썹을 응시하며 자조했다. “오늘도 두 사람은 바쁜 것 같군요. 방해됐나요?” 그녀를 발견하자 냉철한 지성으로 가득하던 마커스의 눈빛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피곤해 보이는군. 선 채로 잠이라도 잘 것 같은 얼굴이야.” “맞아요. 난 이만 물러가죠. 계속하세요.” “마쳤어.” 마커스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루에게 건네주고 일을 중지했다. 루가 인사를 하고 그녀의 아파트를 나갈 때까지의 십여 분간도 기다리지 못한 마커스는 참을성없이 그녀에게 진한 키스를 했다. “저녁은 먹었나?” “샌드위치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든든한 몸에 기댔다. 마커스는 저녁을 함께 먹자고 요청한 자신의 전화를 바쁘게 끊던 그녀를 떠올렸다. “날 퇴짜놓고 겨우 샌드위치로 배를 채웠단 말이야? 근사한 요리나 하다 못해 스태이크 조각도 못 되고 고작해야 빵 부스러기 따위에게 밀리다니. 남자를 비참하게 만드는 법을 확실히 꿰뚫고 있군. 어떻게 책임질 거지?” 그가 불평을 늘어놓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우습게도 기분이 휠씬 가벼워졌다. “글쎄요. 우선 말끔하게 씻은 다음에 어디 한번 조용히 의논해 보죠.” 마커스는 고된 노동으로 뭉쳐 있는 그녀의 어깨를 마사지하듯 쓰다듬었다. 목 저 안쪽에서 반사적으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리 와봐.” 그가 이끄는 대로 저항없이 끌려갔다. 그는 그녀를 벽난로 옆에 앉힌 뒤 자신도 다리를 접고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뭐 하려구요?” “쉬.”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밀어 눕혀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관자놀이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잠시 이렇게 쉬자구. 우리 두 사람 다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나른한 바람의 장난처럼 그의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감겨들었다. 무의식중에 재희의 눈이 감겨들었다. 이 사람은 그녀에게 너무나 많은 위험 부담을 주고 있었다. 편안함과 안전함. 따뜻한 온기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 듯한 짧지만 탐나는 환상까지. 다른 여자들도 그러했을까. 그를 차지한 채 아무에게도 넘겨주고 싶지 않다는 맹목적인 욕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제 와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 못마땅했다. 그들은 모두 재희와는 완벽하게 반대되는 삶과 배경을 가진 여자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배경이 마커스를 붙들어두지는 못하겠지만 만약 그의 아내 자리에 누군가를 선택할 시기가 온다면 첫 번째 고려 대상이 될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마커스 로웰의 아내라… 재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왜 그러지?” “아뇨, 시답잖은 생각이 떠올라서요.” 이쯤에서 분별없은 행동을 그만 접어야 했다. 그는 너무나 깊이 들어와 버렸다. 더 이상 허용해서는 안 될 정도로 말이다. 마커스는 아주 서서히, 위험스럽게 그녀를 함락시켜 가고 있었다. 처음엔 만족을 모르는 잠자리 상대, 어떤 날은 사려 깊은 친구, 또 그 다음엔 다정한 연인. 그리고 이제는 그도 모자라 점점 독점욕 강하고 소유욕에 가득 찬 보호자의 역할까지 빠르게 근접해 갔다. 조만간 그는 자신의 자유를 구속할지도 모른다. 벌써 그녀가 경기에 나가는 것에 그가 싫은 내색을 하고 있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했죠, 마커스. 누구에게도 나 자신을 맡기지는 않겠다고. 재희는 그와 그녀 자신.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다짐했다. 난 그여자처럼 되지 않아. 사랑하고 버림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배신상한 남자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결국은 산 채로 자신의 목을 졸랐던 여자. 자신이 낳은 아이조차도 그녀가 버티고 살아남을 이유는 되지 못했지. 술만이 유일하게 그녀를 구원해 주었고 그녀의 마지막 숨마저 거두어주었다. 그래도 그 남자를 사랑할 때는 행복했다고 했었나, 당신은? 먹을 것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더러운 방 안에 배고파 쓰러져 있는 아이 옆에서 당신은 술병을 비우며 끊임없이 그런 주장만을 늘어놓았었지. “재희?” 긑내야 할 지점을 찾지 못하면 그 여자처럼 스스로 파멸을 자초할 뿐이다. 마커스는 재희가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풀어졌던 근육이 미세하게 다시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를 만지는 손길을 중단하지 않았다. 문득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따라 그의 손가락이 선을 그렸다. “오늘도 기자들이 귀찮게 굴었나?” “음…” 처음보다 수는 줄었지만 끈질긴 기자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녀는 잠에 취한 듯 대충 얼버무렸다. “모조리 잡아서 해치워 버리면 어떨까?” “재미는 … 있겠네요.” 그녀가 일부러 농담처럼 흐릿하게 웃었다.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야.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재희의 눈가에 긴 음영이 드리워졌다. 또다. 이 여자는 가끔 왠지 참을 수 없이 가냘프고 슬퍼 보인다. 상처로 자라고 상처로 강해졌기 때문일까. 비록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는 어린 시절 그녀가 겪어야 했던 가혹한 삶의 무게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왜 그녀가 타인에게 마음을 열어놓지 못하는지 어째서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인간 관계를 극도로 기피하고 경계하는지를 읽어내게 된 것이다. “확실히 저녁이 시원치 않았나 . 배가 고픈데. 어때요? 뭐 좀 먹겠어요?” 재희는 불편한 분위기를 차단하듯 그에게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마커스도 순순히 뒤를 따랐다. “냉장고에 루가 사다 놓은 중국요리가 남아 있을 거야. 데워줄까?” “내가 할게요.” 주방의 냉장고를 습격한 재희는 굴 소스를 곁들인 닭 요리를 오븐에 넣고 타이머를 맞춘 뒤 잔을 꺼내는 마커스를 보았다. “와인?” 그가 살짝 병을 들어 흔들어 보이자 프랑스 산 고급와인의 라벨이 보였다. “그것도 루가 사온 거예요? 집엔 없었는데.” “내가 가져오라고 했어.” 재희는 테이블 위에 놓인 붉은 망고의 껍질을 벗겨내고 노란 속살을 작게 잘라 입 안에 넣었다. 농익은 달콤한 과즙이 향기로웠다. 와인 잔을 내미는 마커스의 입가에 무심코 한 조각을 가져갔다. 멋대로 손이 움직인 재희 자신도 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마커스의 강하게 내리꽂히는 시선을 외면했다. 얼굴이 뜨거웠다. 젠장. 할 수만 있다면 나중에 위장에 탈이 나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도로 먹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마워, 맛있을 것 같군.” 그의 음성은 착 가라앉아 여운처럼 남았다. 그의 혀가 과즙이 묻은 그녀의 손가락을 느릿하게 깨물었다. 잠시 후, 오븐에 든 요리나 와인은 까마득한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희미한 전화벨 소리는 마치 방심하고 있는 그녀에 대한 무언의 경고처럼 들렸다. 정말 금방이라도 곧 죽은 듯이 잠들 것처럼 피곤한데도 쉽사리 숙면속으로 빠져들지 못하고 있던 재희는 그 예의 없는 전화가 마커스를 깨우기 전에 수화기를 들었다. “네.” 마치 전갈이 기어가는 것 가은 으스스한 침묵이 가로놓였다. 재희는 뭔가 불쾌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리자 가만히 시트를 걷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춰 재촉했다. “여보세요?” “쥐새끼.” 전화를 쥔 손이 그대로 우뚝 얼어붙었다. “누구야?” 15년이나 듣지 못한,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내의 음성을 단박에 달아듣는다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다. 그녀는 아니길 원했다. 착각에 불과하기를! 엘리스 버크의 음성은 망령의 부활을 의미한다. 지우지도 못하고 그저 덮어두었던 지나간 과거의 망령을! “이거 섭섭하군.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고 내 목소리를 기억 못하다니, 하긴 분에 넘치는 놈과 침대에서 뒹구느라 정신이 없으실 만도 하더구만.” 그가 음흉하게 낄낄댔다. 재희는 입가의 긴장을 억지로 풀면서 침대 위의 마커스에게서 신중하게 시선을 비꼈다. 힘들게 목소리가 나왔다. “버크” “그래. 그래야지. 네가 감히 내 이름을 모른 척할 수가 있나, 누구 때문에 오늘날 그렇게 팔자가 늘어졌는데. 안 그래? 목숨을 구해 줬다고 루이스란 놈이 한 재산 거하게 떼어준 모양이지? 아주 호화판으로 놀아나시더군. 뒷골목 출신의 소매치기 주제에 언감생심 그런 거물을 낚아채다니. 세상 참 많이 좋아졌어.” 버크가 키들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술에 취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네가 처박아넣은 그 지옥에서 영원히 허우적거릴 거라고 믿었겠지? 정말 안됐군. 쥐새끼. 이제 내가 돌아왔다. 널 위해서!” 재희는 얼음처럼 꼿꼿하고 냉정해졌다.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남았나?” 그러자 버크가 웃음을 뚝 멈추는가 싶더니 이를 갈아붙이는 듯한 소리가 선을 타고 그대로 전달되었다. “망할 년!” 그가 내뱉은 욕설에는 섬뜩한 증오와 원한이 담겨 있었다. 그는 한 동안 분을 사이는가 싶더니 의미심장하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참 베어포드 말이야. 그 꼬마 녀석, 많이 컸더군.” 재희는 멈칫해 수화기에 힘을 주었다. “널 방해했던 것은 나야, 버크!” “글쎄.” 버크는 이죽거리는 기색으로 재미있다는 듯 말을 받았다. 재희의 악다문 잇새로 극도로 낮은 경고가 새어나왔다. “루이스에게 손대지 마, 버크! 다시 지옥 구경을 하고 싶지 않다면!” “누구에게 시건방을 떠는 거냐, 쥐새끼! 그때나 지금이나 너 같은 건 벌레만큼도 신경 쓰이지 않아. 엉뚱하게 중간에 끼어든 놈들만 없었다면 너나 꼬마 놈은 이미 내 손에 죽은 목숨이었어!” 개자식! 재희의 눈에 새파란 살기가 내비쳤다. "버크‘ “그럼 재회의 반가움은 서로 이쯤에서 끝내자구. 모쪼록 즐길수 있을 때 즐겨둬. 너나 너의 그 돈 많은 파트너나. 아, 그리고 원한다면 꼬마 놈에게도 네 안부 전해 주지.” 딸깍 소리를 내며 전화는 끊어졌다. 한동안 매섭게 전화기를 노려보던 재희는 서둘러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주의 깊게 문을 닫고 거실의 전화를 집어들고는 호크의 직통 비밀 번호를 빠르게 눌렀다. “네.” 냉담하고 무심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는 크게 숨을 쉬었다. “제이슨?” “무슨 일이야, 재희” 이런 시간에 전화를 받는 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가 태연하게 되물었다. “엘리스 버크가 다시 기어나왔어, 방금 전!” 그에 맞춰 그녀도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했다. “루이스가 어디 있는지 알아봐 줘. 그 망할 놈은 일단 나를 노리겠다고 했지만 그 속셈을 어떻게 알겠어.” “기다려.” “고마워.” “루이스에게 갈 생각이군.” 재희는 그가 보지도 못하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이슨은 그녀의 의사를 알아들었다. 드물게 그는 난색을 드러내놓고 표했다. “마커스 로웰 옆에 있으면 좀더 안전할 텐데. 아니면 여기로 오든가. 루이스 주위엔 내가 따로 사람을 붙여놓지.” 재희는 마커스가 잠들어 있는 침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눈을 돌렸다.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리고 그가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아. 그럴 필요도 없고.” “끝났나?” “거의” 요즘 신문이 떠드는 꼴을 보아하니 그것은 아니다 싶었지만 제이슨은 자신의 어떤 면을 흡사하게 닮은 재희를 알고 있기에 더 이상 별다른 충고는 하지 않았다. “루이스는 더 이상 널 환영하지 않을지도 몰라.” 어떤 경로로든 제이슨은 루이스와 그녀의 결별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게 확실했다. “알아, 이것이 마지막이야.” 남아 있는 모든 과거의 청산. 그 안에는 루이스나 엘리스 버크만이 아니라 그녀 자신도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했다. 침실로 돌아가자 그가 깨어 있었다. 재희는 날카로운 신경을 의식적으로 조절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태연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며 등으로 문을 닫았다. “무슨 전화야?” “팀의 사람이에요.” 그녀는 차분하게 거짓말을 했다. 이건 그녀의 일이지 그의 일이 아니었다. 버크 같은 자가 연결된 과거를 그로 하여금 굳이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시간에? 무슨 문제라도?” “아뇨, 술을 조금 했나 봐요. 그냥 생각이 났다는군요.” 가운을 벗어 발치에 떨어뜨리고 그녀는 그가 기다리고 있는 침대로 걸어갔다. 그의 관심이 분산되기를 바랐다면 어느 정도는 성공이었다. 강렬하게 번득이는 그의 시선은 어둠 속에서도 석고상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나신에 전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당당하게 걷는 그녀의 모습은 남자를 유혹하고 충동질하는 불가사의한 마녀의 주문처럼 느껴졌다. “남자겠지.” “그렇다면요?” 그녀는 실크시트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 나른하고 거만한 제왕처럼 커다란 베개들과 쿠션 사이에 반쯤 몸을 기대로 있는 마커스 위로 느릿느릿 말을 타듯 올라갔다. 그리고는 그가 허리에 두르고 있는 시트를 시간을 들여 아래로 밀어냈다. 그의 숨소리가 흔들리고 단단한 가슴의 근육들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광경은 상당히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버크가 불러일으킨 불안들이 서서히 머리 속에서 멀어졌다. “젊어?” 그녀는 고개를 숙여 그의 살갗 위 엷게 맺히는 땀방울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가 가슴을 들썩였다. “젊은 남자인가?” “포기를 모르는구요.” 손으로 그의 아랫배를 쓸며 짐짓 나무라듯 한숨을 쉬었다. “젊죠, 그리고…” 그리고 그의 탄탄한 근육의 골이 파이는 부분을 살짝 이로 깨물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힘있게 붙잡았다. “부인도 아주 어리고 예뻐요.” 마커스의 목 안에서 낮게 으릉대는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어깨가 흔들렸다. “한재희” 그는 베일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가려진 그녀의 얼굴을 치켜들고 자신을 보게 했다. 재희는 가느다란 한쪽 팔로 부드럽고 완강하게 그의 목을 휘감았다. 마커스의 커다란 손바닥이 체벌이라도 가하듯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감싸쥐었다. 미미한 통증이 느껴지며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어깨 위로 미끄러졌다. “그럼…” 재희는 혀끝으로 입술을 축이며 의미심장하게 그를 응시했다. “새벽의 대화는 이것으로 충분한 것 같군요.” 그녀의 펼쳐진 손가락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잔소리 닥치고 키스나 해요.” 그리고 그의 입가에 가벼운 지분거림을 남기며 나직하게 키득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건 당신 대사였던가?” 자극적인 도발에 넘어간 마커스의 자제력이 일시에 날아갔다. 그는 이렇다 할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자신이 원하는 자세를 만든 뒤 단 한 번의 힘찬 동작으로 그녀의 몸안에 자신을 밀어넣었다. 재희의 허리가 움찔하며 본능적으로 뒤틀리자 마커스는 재빠르게 그녀를 붙잡아 오히려 더 깊이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재희의 입술에서 웃음인지 항의인지 모를 신음이 새어나왔다. “키스라고… 훗… 하지… 않았던가요?” 그가 숨을 몰아쉬며 사납게 눈빛을 빛냈다. “이걸 원해? 그럼 가져가! 전부 다!” 그의 침입을 따라잡지 못해 뒤로 꺽이는 그녀의 목을 잡아 탐욕스럽게 입술을 덮치며 마커스는 더욱 결렬하게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기꺼이 주지.” 욕망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고 긴박하게 자라났다. 그의 위에서 파도처럼 흔들리는 그녀의 등줄기가 연약한 버드나무처럼 휘어지며 아름다운 굴곡을 만들었다. 마커스의 억센 몸이 그녀의 아래에서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무너졌다. 그가 그녀의 안에서 여전히 떨고 있는 동안 재희는 힘없이 그에게로 쓰러져 눈을 감았다. 두 사람 중 누구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마커스는 구겨진 시트 사이로 재희를 끌어들여 완전히 지친 그녀의 벌거벗은 몸에 팔을 둘렀다. 열정과 가시지 않은 정사의 흔적, 그 자신의 체취를 두른 채 품에 있는 이 여자만큼 그의 소유욕을 충족시키는 것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의 목을 가린 검은 실크의 물결을 나른하게 헤집으며 마커스는 귓가에 입술을 가져가 깊이 들이마셨다. 허기졌던 굶주림을 완벽하게 채운 남성 특유의 만족감이 그를 덮쳤다. “말랐군.” 자잘한 키스와 함께 창백한 달빛에 어른거리는 재희의 어깨와 매혹적인 견갑골의 선, 허리와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딴생각에 잠긴 듯 무심히 자신의 등에 기댄 그를 내버려두고 있던 그녀의 전신이 미묘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런가요?” “지금보다 훨씬 많이 먹여야겠어.” 그가 나무라듯 중얼거렸다. “우리…” 마커스의 음성을 귓전으로 흘리며 재희는 문든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그만 할까요?” 더도 덜도 없이 간결한 제안. 늘 잔재처럼 떠돌던 말이었지만 지금 불쑥 흘러나온 것은 우연이었다. 과거의 유령이 다시 등장한 여파일까. 그저 지금이 적기라는 기분이 든 것이다. 순식간에 정적이 깃들인 방 안은 고요했다. 냉기가 그녀의 피부 위를 스르르 기어다녔다. “마커스!” 놀란 듯이 그녀의 부르짖음이 그토록 예민하던 침묵을 우습도록 산산히 부숴놓았다. “다시 말해.” 핏대가 선 그의 얼굴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싸늘했다. 그는 깔아뭉개듯 그녀를 내리눌렀다. “말하라구, 한재희!” 서릿발 같은 시선이 날아왔다. 그의 이런 모습을 본 기억이 없었다. 첫날 그녀가 고의적으로 그를 모욕했을 때에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러나 재희는 이마를 일그러뜨리며 수갑처럼 자신을 묶고 있는 그를 단호하게 쏘아보았다. “당장 놓아요, 마커스 로웰.” “당신 내 허락을 구할 때도 있나?” “경고했어요.” “얼마든지.” 재희는 마커스의 무력 행사를 충분히 봐주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녀는 힘을 빼고 심호흡을 했다. 다 당신의 자업자득이야, 로웰! 그녀는 무릎으로 그의 단전 부근을 호되게 후려쳤다. 가차없는 일격이었다. 동정심은 더 더욱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고통으로 침대 위를 굴러다니든 말든, 욕설을 있는대로 퍼붓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냉정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TEk. "좀더 아래로 내려가지 않은 걸 고맙게 생각해요. 거길 제대로 가격하면 당신을 죽여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고마워하라구? 마커스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신음을 삼켰다. “그날 밤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대가야. 내가 내키지 않으면 아무도 날 못 건드린다고 분명히 밝혔을 텐데. 처음엔 넘어갔지만 두 번은 안 돼요!” 그녀는 자기 말만 마치고 문가로 걸아가 가운을 낚아챘다. 어딜! 그는 빠드득 이를 갈며 고통을 억누르고 뛰어가 겨우 그녀를 붙잡았다. 식은땀이 축축하게 배어났다. 젠장! 대체 이 여자를 어떻게 해야 속이 시원할까. “아무래도 모자라는 모양이군요.” 재희의 격렬한 눈동자가 그의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뒤얽혔다. “모자라.” 그가 내뱉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타오르는 분노와 알 수 없는 감정의 역류로 탁해진 그의 눈에 재희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필사적으로 가운의 조각을 움켜쥐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결국 보이는 만큼 이 여자도 매정한 것은 아닌 모양이군. 그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천 조각을 뜯어내고 강제로 그의 어깨를 잡도록 만들었다. “다시 함부로 지껄였다간 알아서 해. 어디서 그만 하자는 말 따위를 하는 거야!” “그런 말은 당신 몫으로나 남겨두란 말이야?” 재희는 그를 비웃었다. “웃기지 마” 그녀는 저항하듯 손톱을 그의 등에 강하게 박았다. 하지만 마커스는 표정하난 변하지 않고 피가 배어나올 듯한 그녀의 공격을 외려 웃어넘겼다. “고작 그 정도야? 표범인 체해도 결국 넌 고양이가 될 수밖에 없어.” 그는 그녀의 허벅지를 멍이 들도록 틀어쥐었다. “내가 기어이 널 길들일 거니까.” 그리고 마커스는 한껏 그녀의 다리를 벌려 그녀의 여성이 자진해서 그를 꽉 조일 때까지 거칠게 돌진했다. 재희의 손톱이 다시 그를 할퀴었지만 이번엔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욕망 때문이었다. 충족을 바라는 쾌락의 소용돌이는 점점 험악하게 자라나 그들을 머리까지 삼켜버렸다. 이성도 분노도 부질없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더운 열기와 땀방울이 서로를 흠뻑 젹셨다. “이…래도… 그만두겠다고?” 그녀가 헐떡이며 입을 열었지만 마커스는 그녀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허리를 밀어붙인 채 그녀의 벌어진 입술을 거세게 짓눌렀다. 약한 피부의 살점이 그가 가하는 힘을 이기지 못해 상처가 났다. 조금은 비릿한 혈향이 그의 타액과 뒤섞였다. 그래도 드는 그녀의 입술을 놓아주지 않고 호흡이 막혀 질식할 정도까지 재희를 몰아붙였다. “넌 내거야, 한재희!” 한 달이 아니라 일 년이 지난대도 이 여자에 대한 그의 갈망을 쉽사리 고갈시키지는 못할 것 같았다. 지금 이 여자를 놓아줄 수는 없다. 그녀가 뭐라고 하던 간에 한재희는 그에게 속한 그의 것이었다. 그가 원할 때까지. 드디어 마커스는 뜨거운 동굴처럼 자신을 감싸며 숨막히게 죄어드는 재희의 안에서 완전히 길을 잃고 거의 폭력에 가까울 정도의 힘으로 그녀를 가지고 또 가졌다. 마지막 순간 그녀가 정신을 차려 그에게 던진 실날같은 속삭임을 그는 채 알아듣지 못했다. 머물러도 좋을까? 정말 당신 옆에 이대로… 15장 “이런, 제기랄!” 변함없이 상쾌했던 아침, 루 핸더슨은 막 마시려던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으며 기어이 그답지 못한 거친 욕설을 입에 담고 말았다. 그는 다소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신문의 일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대체 어디서. 어떻게 그도 얻지 못했던 정보를 신문사에서 밝혀냈단 말인가. 더군다나 이건! 루는 먹던 조반도 팽개치고 양복의 윗도리를 걸치며 정확한 사태 파악을 위해 재빨리 휴대폰을 집어 들고 아파트를 나섰다. 회장님이 과연 어떻게 나올지. 한 손으로 서둘러 차를 출발시키며 루는 전화를 거느라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희 양은? 마커스와의 관계에서 언제라도 발을 뺄 준비를 한 채 한 발을 뒤로하고 있는 그녀를 떠올리며 루는 골치가 지끈거려 왔다. “회장님.” 루가 마커스의 사무실 안으로 최대한 빨리 뛰어 들어가자 그는 여전히 신문들을 펼쳐놓은 채 딱딱한 표정으로 기사를 훑고 있었다. “재희 양 소식은 아직?” “없네.” 루 역시 노기를 억지로 누른 듯한 살벌한 목소리의 마커스와 통화를 끝낸 뒤, 차에서 내내 모든 가능한 번호로 재희에게 연락을 취해봤지만 그녀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아침에 재희 양을 못 만나셨습니까?” “자네 전화가 왔을 때 벌써 나가고 없었어.” 새벽의 일과 더불어 그녀가 나가버린 아파트에서 혼자 일어난 것도 기분이 좋지 않던 마당에 루의 다급한 전화는 마커스의 아침을 완벽하게 망쳐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재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자 그녀의 결별 선언이 생각나 초조함을 달래기가 점차 힘들어졌다. 결국 생각을 바꿔놓지 못한 거란 말인가? 루가 침울하게 한숨을 삼켰다. “그분도 당연히 보셨겠지요?” “아마도.” 마커스는 입술을 차갑게 다물고 맨 위에 놓인 눈앞의 기사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뒷골목의 부랑아에서 천재적인 드라이버, 그리고 로웰 제국의 안주인 후보까지! 신비와 비밀에 둘러싸여 있던 제이 한의 충격적인 과거 드디어 밝혀지다. 뉴욕의 할렘가에서 창녀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소매치기로 밤거리를 전전해야 했다. …… (중략) …… 우연히 런던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로웰 그룹의 회장인 마커스 로웰의 눈길을 사로잡는 행운을 거머쥔 그녀는 가장 극적인 효과로 그의 마음까지 빼앗는 데 성공, 초라한 밑바닥에서부터 마침내 미국 최 상류층 가문의 안주인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극적인 신분상승을 쟁취해 냈다. …… (중략) …… 그러나 과연 명 망높은 전직 대통령의 손자 며느리감으로 그녀의 형편없는 과거 자질이 쉽사리 받아들여질 것인가에 대해선 부정적인 관측이 대다수이다. 결국 이 신분을 초월한 세기적 연애의 말로 가 어떻게 결론지어질지 대중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가운데 상류사회의 꽃으로 불렸던 고 셀리나 로웰에 대한 이야기도 덩달아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어서 젊은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우아하고 귀족적이었던 첫 부인에 대한 반항으로 마커스 로웰 회장이 전혀 다른 계층, 다른 분위기의 여인을 고른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으며 …… 다른 기사들도 모두 엇비슷했다. 그들의 내용 어디에도 재희 스스로 이루어낸 노력과 성공에 대해 감명을 받은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의도적으로 쳐놓은 덫에 마커스가 잘못 걸려 들었다는 식의 암시와 모략만 가득할 뿐이었다. “빌어먹을!” 마커스는 결국 화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그는 신문을 모조리 바닥으로 던져버리고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참을 수가 없었다. “셀리나라고? 놀고들 있군!” 싸늘한 비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가 죽는 날까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여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전처였다. 겉으로는 우아한 장미처럼 아름다울지 몰라도 속은 교활하고 잔인한 술수로만 가득 찼던 여자. 앞서 말했다시피 셀리나의 실체를 알면서 그녀를 좋아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짜증나는 상황에서 전처의 이름을 다시 접하게 된 마커스의 심기가 어떠하리라는 것쯤은 루는 눈을 감고도 짐작할 수 있었다. 묘지에 누워서까지 물고 늘어지는군. “이 망할 기사를 제보한 자가 누군가!” 마커스가 잇새로 내뱉었다.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다섯 개 신문사로 동시에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보셨다시피 내용도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재희가 이 내용을 읽었다면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녀의 단단한 방어벽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는 복병이 튀어나올 줄 짐작도 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고의가 아니라면. 마커스는 격노했다. 그것도 재희의 과거를 잘 아는 어떤 사람이었다. 단번에 제이슨 호크의 이름이 떠올랐지만 다음 순간 마커스는 즉시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 사내는 이런 유치하고 속이 뻔한 술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성격이었다. 그는 태생부터가 비밀스런 아웃사이더였다. 그리고 마커스는 더 이상 재희와 호크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았다. 한재희를 가져본 남자라면 누구와도 그 여자를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결코 한 사내가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여자였고 더군다나 마커스나 제이슨 호크 둘 중 누구도 자신의 여자를 나눠 갖는 아량의 소유자들이 못되었다. 그럼 누구란 말인가! 이린 비열한 짓을 사주한 놈이! 어떤 인간이 이런 야비한 방식을 써가면서까지 재희와 그의 사이를 망쳐놓고 싶어할까. 문득 오페라 하우스에서 자신을 불쾌하게 노려보던 긴 금발의 미 남자가 떠올랐다. 루이스 베어포드. 키스하던 그들을 바라보던 그의 증오가 감돌던 눈동자, 그 안에 어린 필사적인 집착. 재희와 루이스가 만나게 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마커스는 제이슨만큼이나 루이스가 오래된 관계임을 알고 있었다. 재희가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망할 애송이! 만약 정말로 베어포드의 소행임이 밝혀진다면 그 자식은 세상에 태어난 것을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마커스는 이런 식으로 흙탕질을 치지 않아도 이미 위태로운 재희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무슨 수를 쓰건 책임있는 자들은 모조리 색출 내.” 어떤 인간도 내 여자를 아무렇게나 함부로 취급하고 무사히 넘어갈 수는 없어! 어느새 재희를 자신의 여자로 지칭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마커스는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법정까지 개들을 끌고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재희가 원한다면 그들을 지옥 끝까지 난도질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비컨힐에 위치한 베어포드 가문의 고풍스런 저택 앞에 도착한 재희는 한동안 멈춰서서 그 우아한 석조 건물을 바라보았다. 미국에서 가장 오만하고 점잖은 이 동네에는 보스턴의 유서 깊은 가문들이 한껏 위엄을 자랑하며 서로 이웃해 있었다. 그리고 모든 집들은 철통 같은 최신 경보 장치와 보안 시스템에 둘러싸여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버크는 이미 이 동네에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재희는 주위를 둘러보며 씁쓸하게 상기했다. 하긴 그때보다는 과학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하긴 했지. 아무리 솜씨가 좋은 침입자라 하더라도 최첨단 컴퓨터의 날카로운 감시망을 피하려면 꽤나 힘든 수고와 노력을 쏟아부어야 할 터였다. 어린 시절 그 첫 방문 이후로도 몇 번인가 베어포드 본가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있는 재희는 곧장 집사의 안내로 이층의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정면에 걸린 르느와르의 그림을 멍하지 바라보며 수많은 상념을 정리하는 동안 집사를 앞세운 루이스가 걸어 들어왔다. 자신을 피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루이스의 얼굴에서 그들의 지난번 만남 따위는 고스란히 사라지고 없었다. “재희!” 마치 어린아이처럼 무작정 자신을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 그 품안에서 재희는 어쩔 수 없는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뒤에 서 있던 초로의 남자는 전통있는 가문의 집사가 지켜야 하는 행동규범 그대로 근엄한 표정을 유지한 채 조용히 물러났다. “와줄 줄 알았어.” “루이스.” 그에게는 생기가 없었다. 잘생긴 얼굴 윤곽과 보기 좋았던 어깨선이 여위어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던 듯 아름다운 눈가도 퀭하니 비어 있었다. 죄책감이 밀려들었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차단했다. 이곳에 온 것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건 그들 모두에게 잔인한 짓이었다. “괜찮아? 신 …문 봤어.” “그래.” 루이스의 표정은 걱정스럽고 창백했다. 그는 재희에게서 조금 물러나 그녀의 모습을 세심하게 살폈다. 재희는 보스턴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읽은 기사를 상기했다. 부끄러운 것도 굳이 감추려고 애를 썼던 것도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과장되게 오해를 하기 마련이었고 더구나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해 타인에게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젠장! 이런 식으로 마커스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에게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변질된 거짓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의 과거, 살기 위해 버텨낸 그 모든 시간들. “로웰은 …. 저 … 괜찮겠어?” 루이스가 넌지시 눈치를 보았다.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건 그 남자의 자유야. 내가 왈가왈부 간섭할 게 아니지. 사람이란 누구나 각자의 판단 아래 행동할 권리가 있는 거니까” 끝내자고 한다면 그렇게 해주는 수밖에. 어차피 그녀가 먼저 염두에 두고 있던 일이었다. 새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재희는 눈가를 어둡게 물들이며 새벽, 그에게 속삭였던 그녀의 마지막 말을 가만히 덮어버렸다. “만약 그 자식이 재희 네 과거를 가지고 뭐라고 한다면…” “상관없어.” 애초에 없었던 남자였으니 다시 혼자가 된다고 해서 살아가지 못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 것도 아니잖아. 난 사랑을 모르니까. 원래의 한재희로 복귀하는 것뿐이야.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키자 뭔가에 쪼이는 듯하던 명치 끝의 통증이 약간 덜해지는듯했다. 한재희. 넌 영국에서 그 남자와 마주친 순간부터 이상해졌던 거야. 루이스가 와락 화를 냈다. “모조리 고소해 버리고 말겠어!” 덕분에 그녀는 적절한 때에 깨어났다. “무엇으로?” 재희는 아직도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루이스의 손을 떼어내며 담담하게 반문했다. “새빨간 억측이나 날조도 아니야. 그래 봤자 흥미만 더 끌게 돼.” “하지만....” “잊어, 내 문제야. 그리고 소문 따윈 금방 식기 마련이고, 이 바닥 생리를 네가 몰라?” 순간 루이스의 눈동자가 흠칫 빛났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뒤로 돌아서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억지로 흥분을 경감시키듯 마른침을 삼키며 더없이 완고해 보이는 재희의 등을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조경을 바라보며 그녀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실은 할말이 있어서 왔어.” 루이스가 무심코 발을 앞으로 내딛자 그녀가 저지했다. “잘 들어, 루이스. 당분간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여기 온 거야.” 그의 머리가 핵 들려졌다. 용케 평정을 가장한 루이스에게선 어떤 관용의 기대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재희, 물론 기사가 충격적이었을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우리 사이엔 아무것도....” 그건 충격이나 파문 정도가 아닌 일종의 인간사냥이라 불러도 무방했지만 재희는 쓴웃음으로 대신했다. “신문이나 기자들과는 상관없어. 내가 전에 너에게 했던 말은 모두 진심이야. 루이스. 우린 각자의 자리가 따로 있어. 내가 오늘 너를 찾은 건.... ” 그녀는 루이스의 팽팽하게 당겨진 얼굴에서 점차 핏기가 가시는 것을 보고 그 다음에 자신이 하는 말에 그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몰라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든 그의 놀람을 희석시켜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엘리스 버크 때문이야. 그 자식이 .... 돌아왔어.” 루이스는 이제 완전히 분필처럼 질려 있었다. 그도 그 이름을 잊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쩌면 재희 자신의 기억은 그의 악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말도 안 돼!” “죄수들도 출옥을 해.” 쓸모없는 지적이지만 적응할 시간을 끌어줄 수는 있었다. 그는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눈빛은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루이스가 가까스로 쉰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알아! 하지만 재희 네가 그걸 어떻게....” “협박 전화가 왔어.” “그런....” 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걱정하지 마 . 넌 여기 있으면 안전할 거야. 제이슨이 곧 그놈의 행방을 알아낼 테니까.” “좀 .... 앉을게.” 재희는 비틀거리며 의자에 앉는 루이스의 옆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루이스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눈을 감았다. “괜찮아. 이대로 조금만 있어 줘.” 얼마 후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기 있어줄 거지? ” “루이스” “오늘만, 마지막이라도 좋아. 하루만 있다가 가. 전에도 그랬잖아.” 간절하게 매달리는 음성. 전과는 이제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을 그도 알고 그녀도 알았다. 하지만 재희는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하루만.” 마커스에게 전화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잠지 떠올랐지만 그녀는 곧 이어 부인했다. 그는 그녀의 아무것도 아니다. 남편도. 가족도. 연인도. “이곳에는 없네.” 베리가 마커스를 보고 침울하게 머리를 흔들자 여기까지 달려오며 걸었던 다소의 기대감마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럼 따로 갈 만한 데라도....” 실망과 초조함을 억누르며 낮게 물었다. “글쎄, 여러 곳에 거처는 있지만 지금 같아선 짐작이 안 가는군. 그 아이가 진짜 숨고 싶을 때에는 아무도 그 앨 못 찾아.” 마커스도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재희의 성격으로 볼 때 그녀를 다시 찾아내려면 지난번처럼 적지 않은 노력이 소요되어야 할 것이다. “자네는 붙잡아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노인은 심각하게 긴 한숨을 들이쉬었다. “이런 일이 터지지 않을까 오랫동안 짐작은 하고 있었네만.” 마커스가 눈썹을 희미하게 치켜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베리는 그가 묻고 싶어하는 질문에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알고 있었느냐고? 물론이네. 거의 처음부터 그 아이의 고단한 싸움을 지켜봐온 장본인이 나니까.” 그는 입가를 씰룩였다. “물론 그때야 술병에 미쳐 있느라 그 애가 건네주던 단 돈 몇 달러에 더 목을 맸지만.” 과거를 회상하는 베리의 눈가엔 자조가 가득했다. 그는 주름지고 구부정한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그것을 가만히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고통스런 추억의 파편들을 긁어모으는 데는 시간과 용기가 필요했다. 마침내 베리가 느릿느릿 말문을 열었다. “술에 찌든 손으로 메스를 잡았지. 당국에 적발돼 의사면허를 박탈당하는 건 시간문제였어. 나중엔 내가 쥐고 있는 게 뭔지도 모를 지경이었으니까. 일하던 병원에서도 당연히 쫓겨났지. 아무렇게나 뒹굴다 흘러 들어간 게 뉴욕의 그 허름한 뒷골목이었어.” 그는 쓰디쓰게 회고했다. 우연히 재희를 만나던 날이 어스름한 안개등처럼 그의 뇌리에 스쳐갔다. “그 애가 열 살 무렵인가. 처음 상처를 치료해 주고 나서 그 후에도 간혹 아플 때면 들렸지만 우린 서로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네. 그 바닥이 원래 그렇기도 했거니와 피차 두 사람 다 남에게 관심을 둘 처지가 아니었거든. 베리에게도 삶은 온당치가 않았지만 재희에게는 싸워야 할 것들이 더 많았다. “그러다 통 기척이 없는 거야. 자네도 알다시피 웬만해선 잊어버릴 수 있는 애가 아니지 않는가. 갑자기 소식도 끊기고 모습도 보이질 않아 이상하다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어. 봤다는 사람도 없고. 결국 잘못됐나 싶었지. 워낙 허다하게 일어나는 일이라....” 그는 마커스의 거친 얼굴을 지나가는 무수한 감정의 편린을 지켜보며 그가 어린 재희에게 일어났을 법한 일을 상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난 그 후에도 계속 술을 마셔댔지. 그러다 어느 날인가 손님을 잘못 골라서 맞아죽을 뻔한 여자를 받았는데 손이 하도 떨려서 엉뚱한 곳을 건드리고 말았어. 피가 꼭 분수처럼 솟구치는데....“ 그때 베리는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양손에 피를 잔뜩 묻힌 채 덜덜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침침한 거울에 훤히 비쳐 들어왔다. 흐리멍텅한 눈, 시커먼 안색과 붉게 변한 코, 사시나무처럼 부들거리는 손가락, 메스가 떨어지며 챙그랑대는 소리가 꼭 벼락처럼 들렸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형상을 겨우 덮어쓴 괴물이었다. 베리는 뒤에서 애나가 조용히 그의 어깨를 쓸어내리는 것을 느끼고 킁킁 목을 가다듬었다. “그대로 엎어져 딱 죽고만 싶었지. 정신이 번쩍 들더군. 이쯤에서 끝내자 그랬어. 그날 밤 술병을 끌어안고 눈 바닥에 드러누웠는데.... 그 다음부터는 기억이 안 나. 눈을 떠보니 치료센터더군.” 그리고 베리는 그를 둘러싼 비참하고 어두운 과거의 물결을 비집고 서서히 헤어나왔다. “혹시, 재희였습니까?” 머커스의 질문에 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직도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치료를 끝내고 요양소 밖으로 나서던 날 긴 모직 코트를 들고 자신을 기다리던, 아직은 어린 그러나 누구보다 초연했던 재희의 얼굴. 그녀는 아무 말없이 다가와 오랜 싸움으로 지친 그의 앙상한 어깨에 따뜻한 보호막을 둘러주었다. 그리고 이곳으로 데려와 그를 다시 태어나게 해주었다. 베리는 뒤늦게서야 그가 알콜중독을 이겨내는 이 년 동안 요양원의 값비싼 치료비와 생활비를 모두 부담해 준 사람이 재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는 그 시절의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웠다. 재희가 선사한 수많은 아이들의 웃음과 사랑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또한 퉁명스럽고 괴팍하지만 지금은 옆에 없어선 안 될 세상 최고의 애플 파이를 만들 줄 아는 애나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일부였다.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재희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가 빚이라는 단어를 질색했기 때문에 비록 당사자 앞에선 입 밖에도 내어본 적이 없지만. “그 애는 이곳 사람들의 빛이라네.” 베리는 누구보다. 어떤 소망보다 재희가 행복해지길 바랐다. 그리고 마커스 로웰이 그 적임자가 될 거라고 믿었다. 안 그랬다면 그가 찾아왔던 날 몽둥이로 두들겨패서라도 재희 곁에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부자이고 잘났건 그건 베리의 기준밖이었다. “그녀를 찾아 데려올 겁니다.” 강철처럼 낮게 깔리는 목소리. 베리의 마음을 들여다본 듯 마커스가 무겁게 선언했다. “내 여자니까요.” 확고부동한 결단이 서린 그의 어조에는 누구의 반박도 용납지 않겠다는 소유욕과 보호의식이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마커스는 바로 이 순간까지도 자신이 어는 정도로 재희에게 빠져들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한재희란 여자의 모순, 언제부턴가 화강암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 외견 뒤에 숨은 애처롭고 부서질 듯한 영혼을 본 순간부터 마커스는 자신의 감정과 싸우는 부질없는 소모전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감했어야 옳았다. 전처였던 셀리나에 대한 해묵은 증오나 여자에 대한 불신도 어느새 뒷전으로 물러나 버렸다. 재희가 없는 미래를 더는 상상할 수 없었다.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원했던 일을 왜 진작 시인하지 못했을까. 그 여자를 자신의 안에 영원히 붙잡아두는 것이야말로 그가 그녀의 눈동자 속을 들여자보며 말을 걸었던 순간 원했던 유일한 것이었는데! 그녀가 다른 사람이 아닌 그의 앞에서만 항상 웃어주길 바랐다. 강하고 사랑스런 검은 두 눈이 오직 그를 향해서만 고정되길 갈망했다. 그만 인정해! 어리석지만 이것이 사랑이란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되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숨겨진 과거 따위는 그에게 단 한순간의 문제도 되지 못했다. 머커스는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손가락으로 쓸어올리며 뭉클한 감정의 덩어리를 삼키느라 숨을 멈췄다. 재희! 그 여자를 찾아야 해. “재희가 갈 만한 곳을 아십니까?” 한번 드러난 감정은 아무리 무정하기로 소문난 마커스 같은 남자라도 다시 숨기기가 어려운 법이다. 특히나 온갖 인간 군상을 상대하며 평생을 살아온 애니와 베리 같은 고수들은. 그들은 잽싼 눈빛으로 사인을 주고 받았다. 쯧, 제대로 완벽하게 들어갔어. 내가 뭐랬어요. 애나가 으스댔다. 재희는 사랑받고 있었다. 시작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영원을 지속할 만큼 끈질기고 완전한 사랑임에 분명했다. 암, 그 애가 누구인데. 베리는 뿌듯한 자부심으로 중얼거렸다. 흥, 눈앞의 대단하기만 한 사내도 결국은 재희에게 불쌍할 정도로 코가 꿰고 만 것이다. 베리는 재빨리 원래의 심술을 회복해 처음부터 뻔한 일이었다며 허세를 부렸다. “재희가 당신 여자라구?”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대뜸 끼어들었다. “내겐 자신감 과잉으로밖에는 안 들리는군. 대체 무슨 수로 말이오?” 제이슨 호크가 바로 뒤에서 빈정거리며 서 있었다. 마커스는 몸을 돌려 기대치 않았던 방문객과 시선을 교차했다. 옆에는 호크의 비서인 듯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기민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녀를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하고 또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우기기만 하면 되는 거요?” “제이슨, 어서 와요.” 애나가 반색을 하며 그를 반기는 것으로 보아 호크가 이 집에 처음 방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위협적으로 보이는 검은 정장에 검은 구도, 적갈색의 실크 넥타이를 매고 있어 젊고 무자비한 마피아 보스를 연상시켰다. 두 사내는 자기 영역 안에서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처럼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신중한 탐색전을 펼치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싫군. 그들은 동시에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비스듬히 얼굴을 돌렸다. “호크” 마커스가 고개를 까닥했다. 그나마 이 시점에선 실보다 득이 되는 인물이란 게 그가 호크를 무시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였다. “오랜만이오, 로웰. 인연이란 참 묘하군. 우리가 이런 일로 만나는 날이 오다니 말이오.” 호크는 비꼬듯 미소 지었다. “정말 싫은 일이야.” “나 역시 내 여자 근처에 당신 같은 상어가 돌아다니는 게 내키질 않는군.” 마커스가 무례하게 맞받자 호크가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남의 뒤를 열심히 캐고 다니시는 모양인데, 건진 건 있나 모르겠군?” “필요한 만큼은. 하지만 충분한 건 아니었지.” 호크의 음산한 여유가 담긴 질문에 마커스 역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게 한가한 입장은 아닐 텐데.” 애나와 베리는 흥미진진하게 그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화살의 향방을 관전했다. 마커스의 눈가에 미세한 긴장이 스미자 호크는 즐겁게 적을 바라보았다. “재희가 있는 곳을 알고 잇다는 소린가?” “물론, 내가 장소를 알려줬으니까.” “어디지?” 그는 이것저것 계산할 것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난 공짜나 손해나는 거래는 안 하오.” “정산은 나중에 하지.” 호크는 정말 오랜만에 재미를 느꼈다. “재희는 보스턴으로 갔소.” “베어포드” 마커스가 쓰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과민하게 굴지 않아도 괜찮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이유로 재희가 루이스를 방문한 건 아니니까.” 시간이 촉박하지만 않았다면 제이슨은 저 마커스 로웰을 슬쩍 골려줄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토록 쉽사리 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깝군, 뭐. 다음에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재희는 베어포드에 대해 다소 강박적인 보호본능을 가지고 있소. 물론 재희에 대한 루이스의 집착은 훨씬 지나치지만. 뭐, 그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오, 두 사람이 만나 상황을 고려하면.” 제이슨은 곧 15년 전의 사건에 관해 마커스에게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최근에 버크가 출소해 재희에게 연락을 취한 일까지. 물론 당시에 자신이 루이스의 부친과 한 거래에 관한 사항은 로웰이 알 바가 아니었다. 마커스의 표정이 점차 심상치 않게 굳어졌다. “그럼 재희가 그 버크란 작자의 협박을 받고 있단 말이오?” 그러다 문득 짚이는 게 있었다. “혹시 어젯밤 전화....” 호크가 끄덕였다. “맞아, 내게 연락을 한 건 그 직후였소.” “제길! 그런데 나한테는 말도 없이 베어포드에게 달려갔다고?” 무서운 목소리는 날이 서다 못해 베일 것 같았다. 그러나 호크는 사자의 꼬리를 지긋이 밟아주는 쾌감을 얻느라 기꺼이 그 위험부담을 감수했다. “재희는 당신과의 사이가 이미 끝났다고 하더군.” “누구 마음대로!” 마커스가 이를 갈았다. 이 안에 있는 성질 나쁜 인간들이 이런 그의 모습을 즐기든 말든 안중에도 없었다. 버크란 벌레 같은 놈이 재희의 뒤를 쫓고 잇다는 사실을 안 이상 그의 관심은 그녀를 최대한 빨리 되찾는 일뿐이었다. “재희는 자신이 결심한 일은 누가 뭐래도 실천에 옮기는 여자요.” “그럼 이번에야말로 좌절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될 거요.” 어떻게 그에게는 거짓말까지 하며 속여넘기고 호크에겐 도움을 청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여자가! 대체 이 남자가 무슨 존재이기에. 머리 속이 질투로 붉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래, 이건 질투야! 망할! 인정한다구. 애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그러니까 한재희 당장 내 앞에 나타나서 해명이라도 하란 말이야. 호크는 그런 마커스를 지켜보며 픽 웃었다. 쉽지 않겠구나. 재희 . 잘못하면 저 야수의 우리에 그대로 갇히겠어. 마커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냉랭하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당신이 이곳까지 발걸음을 한 이유가 뭐지? 내게 재희의 과거나 행방을 말해 주는 것 이외에 말이오. 호크?” “확인할 게 하나 있었다고 해둡시다.” 마커스는 눈빛만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그러자 호크의 입가가 짓궂게 씨익 비틀렸다. “됐소, 뻔한 결말에 대한 대수롭지 않은 기우였으니까.” 뭐, 그렇다고 이대로 곱게 넘어갈 생각도 없다. 그는 일부러 덧붙였다. “하지만 아까우면 언제든지 찾으러 갈 거요.” “당신도 약점이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기억해 뒀으면 좋겠군.” 냉소 어린 대꾸로 마커스는 그가 건 시비를 싸늘하게 받아쳤다. 호크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를 주시했다. 두 남자 사이에 어쩐지 그다지 달갑지 않은 기이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거 아시오? 난 정말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 로웰.” “피차일반이오.” 마커스는 귓등으로 그의 말을 넘기며 걱정스러워하는 베리와 애나에게 작별을 고한 뒤 차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루가 차 안에서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원하는 정보를 찾았다. 이용 가능한 가장 가까운 활주로에 비행기를 대기시키라는 지시와 함께 마커스는 차의 뒷좌석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숙였다. 바로 그 순간 루가 뭐라고 소리를 쳤고 그가 쥐고 있던 차 문에서 불꽃의 파편이 튀어올랐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또 다른 총알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첫 번째 총성이 울렸을 때 호크는 벌써 자신의 권총을 들고 맥스와 함께 달려나오고 있었다. 잇따라 두 번째 총성이 울리고 저만치서 마커스가 뭐라고 격한 욕설을 터뜨리며 어떤 남자를 붙잡고 차체 뒤로 몸을 낮추는 광경이 들어왔다. 라이트가 산산 조각나며 파편이 이리저리 비산했다. “아무도 밖으로 나오지 마!” 그는 냉혹하게 고함을 지르며 마크스에게 다가가기 위한 엄폐물을 찾았다. 이미 맥스는 탄환이 발사되고 있는 곳을 향해 보이지 않게 접근하고 있었다. 호크가 할 일은 저 뱀 같은 야비한 놈의 관심을 마커스에게서 자신에게로 분산시키는 일이었다. 제발이지 근처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없으면 좋으련만. “이런 제기랄!” 차갑고 무서운 분노가 그를 뒤흔들었다. 만약 마커스가 다치기라도 하는 날엔 재희가 그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놓으려 들 것이다. 가까스로 마커스 옆에 다가선 호크는 그의 옷을 지저분하게 물들이고 있는 익숙한 색깔의 액체를 보고 말았다. 마커스 로웰이 총에 맞은 것이다. 개 같은! 비껴났어! 그 자리에 그냥 꼬꾸라질 일이지! 엘리스 버크는 조준 렌즈를 들여다보며 등줄기를 축축하게 적시는 식은땀을 기분 나쁘게 인식했다. 저 보좌관이라는 놈이 훼방만 놓지 않았어도! 그는 서둘러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알은 또 빗나갔다. 버크는 다급해졌다. 시간을 끌수록 위험부담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었다. 방금 건물 안에서 뛰쳐나온 두 놈 중 좀더 덩치가 커다란 한 놈이 대응 사격을 하며 로웰에게 바싹 다가서고 있었다. 그럼 다른 한 놈은 틀림없이 그의 위치를 찾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면 두 번 다시 기회는 없었다. 다음번에 그가 로웰의 반경 일 킬로미터 안에 들어가려면 적어도 일개 부대나 되는 경호원들을 상대해야만 할 것이다. 이 순간을 잡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버크는 연달아 총을 발사했다. 로웰의 목에 그의 남은 인생이 달려 있었다. 백만 달러. 저런 거물을 해치우는 데 드는 비용 치고는 어린애 껌값에도 못 미치는 싼 값이었지만 그의 인생을 냄새나는 시궁창에서 다시 건져내는 데는 충분한 액수였다. 게다가 세금도 없는 백 퍼센트 현찰이었다. 그에게 충부한 자는 자신의 정체를 숨겼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그런 거래는 흔했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의 비밀 금고에 얌전히 들어있는 오십만 불에 해당하는 선금이었고 로웰을 없애고 나면 나머지 반도 수중에 넣은 것이나 진배없었다. 그럼 평생을 꿈꿔 왔던 대로 이 지긋지긋한 뉴욕을 벗어나 태양이 내리쬐는 남미의 어느 섬으로 날아갈 것이다. “그만 뒈지라구!” 버크는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을 찡그리며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미 실패는 기정사실이었다. 차를 방패삼아 로웰을 엄호하고 있는 보좌관이란 놈이 뭐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제 시간이 없어! 그는 더 이상 확인할 겨를도 없이 갓길 수풀 옆에 세워놓은 차로 전력을 다해 뛰어갔다. 열려진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총을 던져놓고 서둘러 시동을 걸어 기어를 잡아당겼다. 빨리, 빨리! 고무 타는 연기가 확 치솟는 가운데 차를 잡아 빼는 순간 총알이 트렁크에 와 박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웃기지 마! 내가 또 잡힐 것 같아? 버크는 조수석에 던져두었던 술병들을 시트 아래로 마구 밀쳐내고 간신히 권총을 찾아냈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나머지 손으로 되는 대로 방아쇠를 당기며 차를 도로 위로 올려 앞뒤 볼 것 없이 액셀를 힘껏 밟았다. 룸미러로 차를 향해 뛰어오던 사내가 조그맣게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버크는 그제서야 권총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셔츠가 땀으로 절어있었다. 그는 반쯤 남아 있는 술병의 뚜껑을 열어 그대로 입에 아예 처박았다. 벌컥거리며 한 방울까지 몽땅 들이마시고 나서야 난폭하게 병을 차 밖으로 던져버렸다. 오십만 불이 바로 목전까지 왔다가 꿈 속으로 멀어져 갔다. 버크는 당장 통곡이라도 하고 싶어 팔짝 뛰고 미칠 지경이었다. 그의 소중한 의뢰인은 결단코 이 소식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16장 “어떤가?” 베리가 붕대를 감으며 물었다. 마커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빙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내키지 않았지만 별수없이 이를 악문 채 참아내야 하는 수난의 와중에 있었다. 총알을 빼내고 금장 봉합한 어깨가 불에 찬 듯 화끈거리며 그를 이중으로 괴롭혔다. “별 것 아니야. 조심만 하면 금세 아물 걸세. 그러고 나면 모기에 물린 흉터 정도만 남을걸.” “어떤 모기가 저렇게 큰 자국이 남도록 문단 말이에요? 농담을 해도 상황에 맞게 좀 하라구요!” 애나는 호들갑을 떨며 마커스의 안색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당신이 웬 흥분이야? 이 녀석은 재희 남자라구! 닦달하고 헛물 켜봤자 아무 소용 없어.” “아니, 이 노인네가 노망이 들었나.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애나가 뺨을 붉히며 빽 소리를 지르자 마커스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켰다. 한시가 급한 마당에.... 호크는 거실의 벽면에 기대서서 무료한 방관자처럼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경찰들을 상대하고 뒤늦게 들어온 루의 조용한 한마디가 다행히 방 안을 환기시켰다. “이대로 병원에 가시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심하지 않네.” 대답과 달리 마커스이 인상이 찌푸려졌다. 상처의 통증보다 붕대를 싸매는 베리의 무지막지한 손놀림이 더 아팠기 때무이다. “세상에. 그러다 사람 잡겠어요! 좀 살살 할 수 없어요?” “날 뭘로 보는 거야. 이래 봬도 내가 왕년에....” 베리가 투덜투덜댔다. “날리던 돌팔이였다구요?” 애나가 콧웃음으로 그를 받아쳤다. “뭐야?” 베리가 발끈했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비꼬았다. “그렇지 않수. 당신 입으로 의사면허를 박탈당했다고 털어놓고선 다른 사람더러 당신의 실력을 무조건 믿으라면 그게 가당키나 해요? 나 같아도 조심초사. 총알은 제대로 빼냈는지 혹시 꿰맨 게 터지지는 않았는지 안달하는 게 정상이지, 안 그래요. 젊은 양반?” “뭐라구? 듣자듣자 하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능숙하게 마커스의 환부를 다루는 솜씨는 보았지만 밖에서 대기해있느라 그의 과거에 대해 듣지 못했던 루가 정중하게 사과했다. “아이구, 깍듯하기도 하지. 봐요, 누구랑은 아주 자세부터가 달라! 이런 게 신사의 기본이란 걸 좀 배우라구요!” “흥! 무슨 말라비틀어질 신사는 신사야. 독신자 바 같은 데서 헛바람든 여자나 꼬시면 딱 적격이겠네.” 이거야, 웃지도 못하겠군. 이제보니 저렇게 티격태격하는 게 생활인 듯 노련미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마커스는 루가 아무도 모르게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았다. 저 루가 여자들 앞에서 겉멋 잔뜩 든 바람둥이 흉내를 내며 그녀들을 유혹하는 장면이 떠오르자 자칫 웃음이 새어나올 뻔했다. 그런데 의외로 잘 어울릴지도.... 재희와 루가 처음 대면했던 아침을 생각하며 그는 베리의 눈썰미에 즉각 한 표를 던졌다. 하지만 치료가 끝나자 안도감이 든 건 숨길 수없었다. “근데 대체 어떤 놈이 이런 싸가지없는 짓을 저지른 게야!” 심사가 단다히 상했다는 것을 유세라도 하듯 베리는 애나에게서 고개를 팩 돌리며 화제를 바꾸었다.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맞아요. 정말 애들이라도 다쳤으면....” 이어 애나가 아까의 충격을 되새긴 듯 심장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마커스와 호크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러나 당장의 정보가 제로 인건 서로 마찬가지 상태였다. 그때 활짝 열려진 거실 문을 통과해 맥스가 뛰어 들어왔다, “어떻게 됐나?” “차로 쫓아갔지만 한 발 늦었습니다. 면목없습니다. 사장님.” 맥스는 다른 변명없이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이며 잘못을 시인했다. 사람을 잘 썼군. 루도 그렇지만 맥스도 절대 신뢰를 배신할 타입이 아니었다. 행동도 보통은 아니었지. 그가 정확하게 사격지점을 찾아 달려가던 모습이 기억났다. 그런데 이 두 사내는 늘 권총을 지갑처럼 품에 소지하고 다닌단 말인가? 어쩌면 여기저기 떠도는 소문들이 정말로 새빨간 날조는 아닌지도 모르겠군. 마커스는 어깨를 잡고 주의 깊게 몸을 일으켰다. 상황이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그자를 하수인으로 삼은 자가 누군지 명백하게 알아내야 했다. 경찰의 안이한 조사나 믿고 있을 순 없었다. 사업상의 적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원한인지, 지금으로선 하나도 짐작 가는 바가 없지만 루가 조만간 실마리를 잡을 것이다. 그런데 호크가 입을 열어 그의 의구심을 가운데부터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놈이었나?” “네, 엘리스 버크였습니다.” “뭐?” 마커스의 눈썹이 당장 험악하게 휘어졌다. 베리와 애나가 숨을 삼켰다. “버크라면....” 그는 상처도 잊고 긴 의자가 끼익 밀려날 정도로 급하게 일어났다. 애나가 뒤늦게 깜짝 놀라며 붙잡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재희를 협박하고 있다는 놈 말인가?:” “그렇소.” 호크는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근데 이해할 수 없는 건 왜 재희 대신 당신을 노렸는가 하는 점이란 말이야, 로웰.” “그렇군.”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건 그놈이 자신을 노렸다는 것에 마커스는 감사하고 있었다. 만약 그놈이 재희에게 총을 쏘기라도 했다면! “당장 재희에게 가야겠어!” 그는 서둘러 벗어놓은 옷가지를 움켜쥐었다. 피와 총알자국으로 옷의 형테를 구분하기가 어려웠지만 일단 급한 대로 필요는 했다. "잠깐, 아무리 그래도 보스턴까지 비행은 무리요.“ 마커스는 호크를 무시했다. “루!” “네, 회장님.” “차를 쓸 수 있을 거 같은가?” “아직 확실히는....” 루가 주저하는 것은 호크처럼 마커스의 상태가 염려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그러면 애초에 말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호크, 차 좀 빌리겠죠. 곧 다른 차를 보내도록 조처하지.” 부탁을 명령조로 툭 던져놓고는 정작 차주인의 허락은 기다리지도 않고 그는 소박한 거실을 힘있게 가로질렀다. 베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고 애나의 얼굴에도 근심이 그대로 서려 있었다. 마커스를 말리자니 그들도 재희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잠깐.” 호크가 마커스를 불러세웠다. “뭐요?”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운전을 아무래도 맥스가 빠를 거요. 재희한테 몇 가지 비결을 전수받았거든. 게다가 이 부근은 눈에 익으니까.” 그를 달고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호락호락 ‘그러십시오’손 들 사대가 아닌데다가 여유를 부릴 계제가 아니었다. 마커스는 마지못해 휙 돌아서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굳이 그러겠다면.” “우선 이걸 입으시죠, 회장님.” 루는 총격전으로 구겨기고 먼지 묻은 자신의 상의를 대충 털어내고 그에게 걸쳐주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눌러 멜린다를 호출했다. 전용기를 준비하라는 지시와 함께 마커스의 옷, 그리고 만약을 위해 의사까지 대기시키라는 그의 전달 사항은 반문없이 명확하게 하덜됐다. “개자식!” 재희가 손님용 침실로 가자 루이스는 극렬한 욕설을 내뱉으며 단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구입한 휴대전화의 버튼을후려갈기듯 눌렀다. “여보세요.” 그 혐오스런 음성을 듣기만 해도 구토가 치밀 것 같았다. 개자식, 이 일만 끝나면 다음 차례는 바로 너야! 감히 너 같은 인간 쓰레기가 재희를 다시 건드려? 루이스는 폭발하는 분노를 겨우 가라앉혔다. “납니다.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저.... 그게....” 뜸을 들이는 비굴한 음성에서 이미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루이스는 이를 꽉 다물고 스산하게 내뱉었다. “실패입니까?” “시, 실패라기보다.... 맞히긴 맞혔습니다, 근데....” “죽진 않았다 이거군요.” 놈이 우물댔다. “네,네....” “계약조건은 알고 있겠죠?” “그, 그렇지만 저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조금만 더 .... 얹어주시면....” “지금 일도 다 망쳐놓고 돈을 더 달라는 거요?” 루이스는 경멸조로 빈정댔다. “당신은 그자를 반드시 죽여주겠다고 공언했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두 놈의 훼방꾼만 아니었더라도....” 버크는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누가 당신을 봤다는 거야, 지금?” 전화를 쥔 루이스의 손에 부서질 듯 힘이 들어갔다. “그, 그게....확실히는....” 버크가 우물쭈물 말꼬리를 사렸다. “제대로 말해! 당신이 노린 사람이 누군 줄 알아? 잘못하면 당신이나 나나 끝장이라구!” 루이스는 연달아 비난을 퍼부었다. “숨도 제대로 못 끊어놓은 주제에 꼬리까지 밟히다니!” 버크가 자신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만약 그 두사람이란 게 호크와 그 정나미 떨어지는 심복이었다면 버크는 산채로 가죽이 벗겨질 것이고 로웰의 살해를 청부한 배경에 루이스가 있었다는 것 또한 드러나 버릴 것이다. “저....” 전화 너머 버크가 쩔쩔매며 머리를 처박고 땅바닥을 기어도 그에겐 어떤 의미도 되지 못했다. 뻔한 눈속임용 연극일 뿐이었다. 놈이 원하는 것은 결국 더 두둑한 액수의 돈이었으니까. “당장 미국을 떠나서 숨어요. 그러면 십만을 더 얹어주겠소. 다시는 돌아오지 마시오! 알겠소?” “어이구! 고, 고맙습니다! 정말 후하고 친절하신....” 약삭빠르게 웃으며 감사를 늘어놓은 버크의 얼굴을 짓이겨놓고 싶을 정도로 폭력저인 충동이 그를 휘감았지만 루이스는 일단 선결문제를 생각했다. 우선은 이자를 재희에게서 멀리 떼어놓아야 해! 그리고 제이슨의 감시망에서도. 아마 로웰 쪽의 사람들도 이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다. “그럼 이것으로 작별이군, 다시 전화하는 일은 없을 거요.”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관대한 처사, 감사드립니다.” 루이스는 죽은 뱀을 털어내는 기분으로 전화를 꺼버렸다. 어디 실컷 만끽하라구. 곧 네놈이 살았던 교도소가 지상낙원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어주마. 재희 근처에만 다시 가지 않았어도 네놈의 하찮은 목숨 따위 로웰을 없애주는 대가고 고이 놔주려고 했더니만, 그의 눈이 얼음 조각처럼 가늘게 빛났다. 15년 전 재희가 어떤 식으로 고통받았는지 이번에야말로 네놈 머리통에 똑똑히 각인시켜 주겠어! 멀리서 천둥이 우르르 울었다. 조만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축축한 공기의 냄새와 함께 번개가 흐린 하늘을 번쩍 갈랐다. 재희가 묵고 있는 방의 열려진 발코니 문으로 흰색 커튼이 종이처럼 이리저리 펄럭였다. 루이스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재희는 벨벳을 씌운 커다란 의자에 앉아 선잠이 든 듯 무릎 위에 책이 반쯤 펼쳐진 채 엎어져 있었다. 시끄러운 천둥과 바람이 그녀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그는 발코니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서서 한참을 주저하듯 망설였다. 방 안은 차분한 여운으로 가라앉아 이따금 번쩍이는 자연의 섬광만이 잠든 재희와 그의 모습을 비출 따름이었다. 루이스는 무언가에 이끌려가듯 한 발짝 한 발짝 그녀에게 걸어갔다. 눈을 감고 얼굴을 약간 기울인 그녀는 그가 의자의 팔걸이를 짚고 허리를 숙일 때에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단저하게 감은 두 분. 길다랗게 드리워진 새카만 속눈썹. 반투명한 뺨을 지나 작은 코와 붉은 입술이 너무나 가까이 있었다. 일 센티만 더 접근하면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것이 될 터였다. 셔츠의 단추가 불편했는지 풀어헤져진 목덜미가 눈이 부시도록 희었다. 이곳엔 그들만이 존재했다. 루이스의 손에 땀이 고여들었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켜 재희에게서 돌아선 뒤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이런 거야.” 그는 몸을 홱 틀어 의자에 앉아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재희를 바라보았다. “재....희, 안 잤어?” 당황함이 묻어나는 음성에 재희는 의자에 묻었던 몸을 천천히 세웠다. “그러지 마, 민망할 거 없어. 루이스.” “난....” 루이스가 말을 흐렸다. “할 수 없었지, 그게 전부야.” 그녀의 음성은 나직했다. “뭐?” “내게 네가 남자가 아니었듯이 너도 그런 의미로는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루이스의 눈동자가 커졌다. “무엇보다 내 옆에서 너는 여자를 원하는 남자가 아니었어.”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며 안색을 바꾸는 루이스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감이 안 잡혀?” “무슨 .... 뜻이야? 그게!” 당황한 그의 질문이 날아왔다. “이제 그만 자신에게 물어봐.” “모르겠어! 대체 뭘 물어보라는 거야?” 루이스의 반응은 신경질적이었다. 그는 재희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어 두 손을 세게 맞잡았다. “네 잠을 깨울까 봐 그랬어. 피곤한데 깨우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리고 내가 키스하면 넌 분명히 싫어했을 거잖아!” 그는 날카롭고 방어적으로 말했다. 재희가 공허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녀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내가 내 키스를 싫어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어?” "싫어했잖아! 내가 너한테 다가가는 것조차....“ 그가 외쳤다. 뭐야! 난 언제나 널 원했어. 밀어낸 건 너였잖아. 지금 와서 아니라고 하는 거야?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네 주위를 서성거렸는데.... 심장이 답답해졌다. 재희는 무릎에 놓여 있던 책을 덮고 일어나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움츠러드는 루이스의 어깨를 잡고 턱을 얹었다. 램프가 그들의 그림자를 하나로 묶어놓았다. 그녀가 자진해서 이만큼 가까이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거 알아?” 루이스는 꿀꺽 침을 삼켰다. 비스듬히 고개를 든 그녀가 곁눈으로 그를 보았다. “우린 진짜로 끔찍하게 서투른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끼리는 동료는 되지만.... 연인은 힘들어.” 그의 몸이 움찔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손가락으로 루이스의 아름다운 황금색 머리카락을 살며시 감아 끌어당겼다. 그것은 살아있는 양 물결치며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갔다. “진작 이런 방법을 썼어야 했는데. 그럼 어쩌면 너도 쉽게 납득했을지도.” 그의 몸이 경직됐다. “뭐?” “네 눈엔 욕망이 없어. 적어도 마커스 로웰이 나를 보는 것 같은. 남자가 여자를 갈망하는 것 같은 정욕이 없다구.” 그녀의 가슴과 루이스의 가슴이 맞닿아도 그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날 갖고 싶었지만. 이런 식은 아닌 거야.” 마커스라면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루이스처럼 바라보진 않았을 것이다. 맹목적인 열정, 떨리는 긴장감, 정신을 파멸시키는 사슬과도 같은 구속,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마저 그 불길 속에 타올라 남김없이 사그라졌겠지. “욕망.... 이라구?” "그래.“ 그녀는 속삭였다. “아직도 모르겠어? 우리에겐 그저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위로를 채워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거야. 너의 아버지 대신, 내 그 여자 대신.” 그러면서 늘 안전한 감정의 교류에만 편안함을 허락했다. 일정한 거리에서 초연함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타이의 접근을 허용한 것이다. 루이스는 특별할 수 있었지만 예외는 되지 못했다. 그 장막을 걷고 다가온 남자는 마커스뿐이었다. 두려운 마음에 지금까지 부인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그 남자는 필요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먼저 헤어지자고 말한 것도, 루이스에게 도망치듯 달려 온 것도, 신문기사를 읽고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상관없다고 한 것도 그런 스스로를 어떻게든 속이고 통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니야.... 그런 게....” “그리고 후회해.” 너를 잡고 놓아주지 못했던 것을. 이 지경으로 모든 것을 망쳐버린 것을. 재희는 열린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던 루이스의 음성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그를 어루만졌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멋대로 분석하지 마!” 비틀리는 내장을 무시하고 루이스는 거칠게 반박했다. 하지만 그녀를 잡고 흔드는 그의 얼굴은 충격을 받은 징후가 역력했다. “날 어떻게든 떨궈내고 싶어서 억지 논리를 펴는 거라면 실수하는 거야! 누가 널 여자로 보지 않았단 거야? 누가 널 남자로서 사랑한게 아니었다고! 그렇게 뭐든 다 안다는 듯 쳐다보지 마!” 그는 휙 돌아서서 벽난로 위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크리스털로 만든 촛대가 바닥으로 떨어져 두 동강이 났다. 재희는 그런 그를 내버려두었다. 사실 오래 전부터 자신의 내부를 휘젓고 있는 충격을 어떻게 흡수하면 좋을지 막막한 것은 바로 그녀였다. 되돌리기엔 너무나 멀리 와버린 길이었다. “로웰! 그래. 그자만 없어지면 달라질 거야!” 루이스가 빠르게 말했다. “그자가 나타나면서 모든 게 엉망으로 변해 버렸어! 너도.... 나도. 그자만 빠지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그는 되풀이해 필사적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재희를 이해시켜야만 했다. 그녀가 자신을 떠나지 않도록. 왜 그런데 항상 팔을 뻗어도 영원처럼 멀기만 한 거지? “두고 봐” “루이스” 재희는 심한 고통을 느끼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가 없어져도 나는 네게 돌아가지 않아.” 한치의 여지도 주지 않는 그녀의 자세는 어느듯 서늘함이 담겨 있었다. “설령 네가 사람을 고용해 그를 죽인다 해도.” 루이스는 우뚝 멈췄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비가 억수처럼 퍼붓기 시작했다. 바람은 맹위를 떨치며 사납게 굵은 빗방울을 흩어놓았다. 나뭇잎이 후드득 지는 소리가 빗소리에 묻혀서 들려왔다. 번개가 다시 한 번 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무, 무슨 소리야. 재희. 아무리 내가....” 신경질적인 웃음이 새어나왔다. 불안이 스멀거리며 뇌리를 엄습했다. 그녀가 아까 그 대화를 들었을 리가.... 재희의 꿰뚫는 듯한 시선이 그를 통과했다. “마커스였지? 네가 아까 전화한 남자에게 청부한 사람이....” 오싹하고 끔찍한 전율이 그를 휩쓸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루이스는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제이슨에게 확인해 볼까 하다 너에게 먼저 묻는 거야.“ 재희가 무겁게 내뱉었다. “대답해. 루이스. 마커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떻게든 무마해 보려던 그의 노력은 수포가 되었다. 재희가 알아버렸다. 눈앞에 새카만 암흑이 몰려들었다. “루이스!” 희미하게 들리던 말들이 틀리기를 바랐다. 아니 망상이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마커스.... 그는 어떻게 됐을까. 다시 볼 수 있게 되면 그에게 무슨 말을 하지? 아니, 무엇보다 루이스는? “왜, 그랬어?” 그녀는 지치고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좌절에 찬 갈라진 신음이 흘러나왔다. “넌, 상관없다고 했어.” 루이스의 안색이 납빛으로 변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건 참견하지 않겠다고! 아니야?” 루이스가 그답지 않은 잔인한 눈매로 무자비하게 말했다. 그 눈에는 참았던 증오와 반항, 그리고 절망적인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응집되어 떠돌고 있었다. “그래서 했어. 방해꾼은 거치적거리지 않도록 치워버리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재희는 감정의 기복을 나타내지 않고 기계적으로 물었다. “신문의 기사도 네가 한 짓이야?” “그랬어.” 루이스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심하게 대답했다. 자포자기라도 한 듯 오히려 후련하다는 빛까지 실려 있었다. “왜?” “그자를 시험해 보고 싶었으니까. 로웰이 과연 네 과거까지도 받아들일 아량이 있을까?” 재희는 눈을 감았다. “넌 내가 부끄러웠어?” “아니야!” “그럼 왜 다른 사람이 날 수치스런 존재로 취급해야 하지?” “네가 그로부터 벗어나길 바랐어! 예전처럼 나말고 아무도 네 옆에 없길 바랐다고!” 그가 가하게 외쳤다. “그런데.... 버크 그 개자식이 감히 너한테 협박을 해대다니.” 설마.... 재희는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얼어붙었다. 할 수만 있다면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놈이야?” 하고 많은 인간 중에 루이스 스스로 어린 시절 그 악몽의 장본인을 다시 찾다니. “네가 돈을 주고 고용한 인간이 버크라고?” 그녀는 예리하게 다그쳤다. 루이스는 엘리스 버크에 대한 소식을 그녀에게서 처음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처음에 놀랐던 것은 그 쓰레기가 재희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었던 것이다. 착각에 불과하길 원했던 현실이 그녀를 움켜쥐었다. “어떻게?” “그 인간을 움직이는 게 뭔지 아니까. 돈이면 충분해.” 그는 음울하게 허공을 더듬었다. “난 늘 불안했어, 언젠가 그자가 다시 나타나 우리 주위를 맴돌까봐. 네가 위험에 처하게 될까 봐. 그자가 출옥하는 정확한 날짜. 시간까지 알고 있었지.” 설명할 수 없는 한기가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고통, 비애와도 흡사한 느낌에 그녀는 잠시 말을 잃었다. “완벽한 해결책이었어. 세상에서 가장 증오스런 두 인간을 한꺼번에 해치워 버릴.” “버크를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데?” 재희는 괴롭게 물었다. 모든 게 그의 뜻대로 이루어질 거라 정말로 믿었던 걸까? “처음엔 감옥에서 다시 썩게 하거나 교수형을 당하게 할 생각이었지만 계획이 바뀌었어. 일이 잠잠해지면 그를 찾아내 뒤처리를 할 생각이야.” 루이스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그의 입에서 나오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잔인한 단어들에 재희의 좌절감은 더욱 크기를 더해 갔다. 살갗을 애는 듯한 깨달음 속에서 재희는 루이스가 아직도 상자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했다. 자신은 그를 구하지 못했다. 어둡고 좁은 사각의 공간에 그는 아직도 홀로 갇혀 있었다. 간절히 손을 내민 채. 네가 가장 증오해야 할 사람은 나야, 루이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놈이 선수를 치면?” “버크는 내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못했어 그 개자식은 자신을 사주한 자가 로웰의 사업상 적이라고만 알고 있으니까.” 루이스는 빈정댔다. 하지만 그들은 대화에 몰두해 있느라 방 안에 다른 그림자가 숨어들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인지했다. 불길한 바람이 실내로 밀어닥쳤다. 그녀는 서둘러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그래, 나도 네 연극에 속아 감쪽같이 그런 줄만 알았지. 꼬마야.” 재희와 루이스는 동시에 홱 몸을 돌려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분명히 루이스가 닫았던 문이 활짝 열려 있고 커튼이 휘날리는 가운데 한비대한 사내가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총을 겨눈 채 그들을 보고있었다. 버크! 재희는 혈관을 물들이는 차디찬 감각에 신음했다. 루이스의 표정도 무섭게 질려 있었다. “큭큭! 빌어먹을! 진작에 때려 맞췄어야 했는데 말이야.” 15년 만에 나타난 그는 형편없이 망가진 인간의 전형처럼 보였다.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늙고, 비참하고, 악에 받쳐 있었다. 정원의 수목 아래에라도 숨어 있었던 듯 그의 낡은 셔츠에는 진흙이 여기저기 이겨져 있었다. 그가 흘린 물이 바닥에 지저분한 얼룩을 만들어냈다. 영락없이 비 맞은 개 꼴이었다. ‘버크“ 재희는 사태를 파악하려고 최대한 태연함을 유지했다. “이게 반전의 묘미란 거겠지. 너희 두 놈 때문에 가진 걸 몽땅 잃고 감옥에서 썩었는데 날 다시 부자로 만들어준 놈이 다름 아닌 꼬마 네 놈이라니!” 그는 즐겁데 웃으며 총을 든 손을 놀려 그들이 가까이 붙어 서도록 지시했다. “많이 컸군, 꼬마야. 머리를 굴릴 줄도 알게 되고. 어쩐지 기회가 너무 좋다 했지. 제이란 년을 발견한 시점에 그 계집의 기둥서방을 해치워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다니. 뭐, 네놈이 날 갖고 놀았다는 사실이 더럽게 기분 나쁘긴 하지만 그쯤이야 네가 지불한 오십만으로 넘어가주마. ” 재희는 루이스를 암암리에 응시하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버크가 계속 지껄이도록 놔두었다. “그럼 이제 지나간 과거를 청산해야겠지?” 그는 좀더 안쪽으로 접근하며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경고하는데. 헛수작 부리지 마, 머리통이 박살나고 싶지 않으며, 그렇지 않아도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해 기분이 나쁘니까. 알았어?” 그의 총구가 번갈아 두 사람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네놈들은 모를 거야. 네년한테 루이스 이야기를 슬쩍 우겨넣으면 이리로 쪼르르 달려올 줄 알고 있었지.” 그는 만족감으로 비열한 웃음을 드러냈다. “감옥에서 눈을 뜨면 날마다 그날의 실수를 돌이켰지. 진즉에 그 자리에서 쳐죽여 버리지 못한 걸 얼마나 애석해 했는지 상상이 가? 이제 슬슬 마무리하자고. 서두르고 싶진 않지만 비행기 시간이 다돼서 말이지.” 버크는 루이스의 가슴에 총을 조준하고 재희의 머리를 확 잡아당겨 냄새나는 입을 갖다댔다. 루이스가 주먹을 쥐고 오른발을 내밀자 버크는 조롱하며 끌끌 혀를 찼다. “가만, 가만, 얌전히 있어야지. 꼬마 도련님?” 역겨움이 가득한 축축한 손이 재희의 목을 감았다. “쓸 만해서 그냥 죽여버리기엔 아깝군. 네가 계집앤 줄은 그 거리에서 아무도 몰랐는데....” 더러운 입김이 그녀의 목덜미에 뿜어졌다. 그녀는 뭉클거리며 피어오르는 루이스의 살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안 돼. “좀더 빨리 눈치를 챘다면 꽤 돈벌이가 됐을 텐데 말이야. 그럼 로웰 같은 거물을 낚은 솜씨나 좀 볼까?” 그가 낄낄댔다. 루이스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재희는 무언으로 경고했다. 가만히 있어, 루이스. 아직 때가 아니야. 하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재희에게 닿아 있는 버크의 손을 새파란 증오에 이글거리며 노려보았다. “멍청한 놈, 결국 네놈은 뒷골목 쓰레기밖에 안 돼, 버크.” “뭣이!” 양쪽 눈을 도끼처럼 부릅뜨는 버크를 비웃으며 루이스는 혐오스럽게 내뱉었다. "받은 돈이나 얌전히 챙겨서 사라질 것이지.“ “수작 떨지 말라고 했을 텐데. 쥐새끼.” 분개한 그는 총신으로 루이스의 가슴을 위협적으로 쿡 지르며 재희를 앞으로 밀쳤다. 그 때문에 버크의 몸이 밀착한 틈을 타 루이스에게 향한 총을 치우고 급소를 가격하려던 재희의 시도가 수포도 돌아갔다. 그녀는 소리없이 쇳소리를 삼켰다. “복수를 하려면 상대를 잘못 짚었어.” 버크의 성미를 일부러 건드리는 루이스의 말을 가로막고 싶어도 뾰족한 수단이 없었다. ‘뭐?“ “15년 전 널 감옥에 처박은 게 누구였는지 생각해 봐, 그럴 용기가 있다면.” 버크가 심하게 씨근덕거렸지만 루이스는 비아냥을 멈추지 않았다. "네 손에 붙잡혀 만신창이가 되도록 두들겨맞은 재희가 널 붙잡기라도 했나? 아니면 겁에 질려 멍청하게 울 줄밖에 몰랐던 내가? 너도 똑똑히 봤을 텐데. 그때 너를 때려눕힌 남자들이 누구인지. 그런 다른 인간들이었어!“ “빌어먹을! 입 닥치지 못해!” 버크가 살기 등드하게 한 발짝 나서자 루이스 역시 재희를 가리듯 옆으로 한 걸음 옮겼다. “그럴싸하게 발버둥쳐 봤자 넌 이제 다 늙은 전과자에 불과한 비참한 신세야.” 버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 마, 루이스. 그를 저지할 수단을 찾느라 재희의 마음이 급하게 움직였다. 바깥의 비는 더욱 요란하게 내렸다. 세상을 모두 뒤덮어 버릴 듯. “그러니 무서우면 무섭다고 인정해. 너 같은 조무래기가 호크 같은 거물을 상대했다간 당장 교수대에 매달릴 것 같아 좀더 손쉬운 먹잇감을 찾았다고!” “웃기지....” 루이스가 큰 소리고 버크의 말을 가로챘다. “넌 어린아이들이나 납치하고 때리는 일밖에 못해. 왜냐하면 소심한 겁쟁이에 비열한 개자식이니까.” 격분한 버크가 자신을 잊어버리고 고함을 지른 순간 총구가 잠깐 바닥을 향했다. 앞뒤 잴 것 없이 자동적으로 재희는 행동을 취했다. 하지만 루이스가 더 빨랐다. “안 돼, 재희!” “뭐야! 이것들이....” “루이스!” 와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발코니까지 튕겨나간 두 사람이 딱딱한 바닥을 뒹굴었다. 그들은 총을 뺏기 위해 엉켜서 치열한 몸싸움을 벌였다. 체구로 보면 루이스가 훨씬 불리했지만 그는 몸부림치는 버크를 필사적으로 잡아 누르며 그의 손목을 꺾고 있었다. 루이스! 재희가 달려나가고 불과 몇 초 차이로 두 발의 총성이 천둥소리를 뚫고 저택 안에 울려퍼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둘 다 더 이상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는 깨달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루이스가 왜.....? 재희는 아직도 버크와 얽혀 있는 루이스 옆에 간신히 떨리는 무릎을 꿇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야!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그녀의 이해력을 앗아가고 있었다. “재희....” 허겁지겁 즉사한 버크의 무거운 덩치를 아무렇게나 밀어버리고 재희는 루이스를 붙들었다. “다치지.... 않았어?” 그는 그녀의 가슴에 기댄 채 흐려진 눈으로 물었다. 그런 그의 배 아래쪽에서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이스....!” 금세 핏기가 사라진 입술은 바싹 마른 종이처럼 창백했다.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피가 그녀의 셔츠를 홍건히 적셨다. 맨손으로 상처를 누르며 그녀는 그의 고통만큼이나 심한 아픔에 난자당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누구라도 빨리 오란 말이야! “네 탓이 아.... 니야.” 루이스가 미소 지었다. 웃지마. 재희는 입술을 깨물며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내게 웃지 마. 이 바보야! "왜 그랬어?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쉰 듯한 음성이 나왔다. "알…잖아… 버크를 샀을 때부터 난…제 정신이 아니었어. 그래도 이번엔 내가… 널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기다려. 의사를…" 그러나 루이스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손으로 그녀의 팔목을 꽉 잡았다. "나… 미워할 거지? 복도로 면한 문이 부서져라 열리고 시끄러운 사람들의 소리가 밀려들었지만 그녀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 사이에 마커스와 제이슨의 걱정스런 얼굴이 섞여 있다는 것도 몰랐다. 루이스가 그녀를 보았다. "내가 로웰에게 그런 짓을 해서…" 목이 아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미움… 받아도 좋다고… 한 건… 거짓말이야. 나 네가 날… 싫어하거나 미워하면 살 수 없어." 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슬프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희는 그를 껴안았다. 15년 전 몸이 꽁꽁 얼어붙는 추위 속, 뉴욕의 어느 뒷골목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워하지 않아. 내가… 왜 널… 미워…" "고… 마워…" 그는 눈을 감으며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사랑해… 재희… 고집 부려서 미안해. 용서해 줄 거지?" 이제 루이스의 목소리는 먼 곳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처럼 들렸다. 몸속에 머무르고 있던 냉기가 그녀의 전신을 마비시켜 나갔다. "루이스… 안 돼…!" 그의 손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재희…" 마커스가 그녀를 붙드는 것도 알지 못했다. 재희는 무조건 상대방을 뿌리치며 자신을 잡아매는 속박을 거부했다. "놔!" "재희!" 사람들이 루이스를 옮기고 있었다. 구급요원들과 함께 온 의사가 그의 상태를 살피며 뭐라 연신 소리를 질렀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불빛에 눈이 아렸다. 하지만 눈물은 나와주지 않았다. "괜찮을 거요."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이 마커스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하게 두려움이 치밀었다. 그를 너무나 원했다. 그가 필요했다. 루이스의 피 냄새가 남아 있지 않은 어딘가로 자신을 데려가 숨이 막힐 정도로 안아주었으면 싶었다. 이런 때에… 누구 때문에 루이스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여긴 곧 경찰들이 북적일 거요. 당신은 잠시 앉아 있어야 해. 나가자구." 재희는 묵묵히 마커스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지만 그의 다른 포옹은 거절했다. 그의 어깨가 불편해 보인 것은 아마 버크가 입혔다는 총상 때문일 것이다. "많이 … 다쳤어요?" "별거 아니야." 재희는 재킷 안쪽을 들치고 붕대가 감긴 장소를 확인했다. 성한 쪽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녀는 얼마간 움직이지 않았다. 루이스의 통화를 들은 뒤부터 내내 이 남자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감정을 억지로 수습하고 일부러 고개를 반대로 향했다. "병원에 따라가 봐야겠어요." "같이 가지. 루가…" "아뇨, 혼자 가겠어요. 당신도 안정을 취해야 하잖아." "재희!" 그녀가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마커스는 그 이유가 루이스에 대한 충격과 죄책감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 서운했다. 내내 안절부절못하며 상처의 통증도 무시하고 여기까지 날아왔더니 벌써 늦은 뒤였다. 총소리에 미친 듯이 계단을 달려 올라가 바닥에 피가 고인 버크의 시체 옆에서 루이스를 껴안고 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을 때 마커스는 순간적으로 혹시 재희가 잘못되기라도 한 게 아닐까 싶어 심장이 멎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순간이 지옥처럼 느껴진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런데… 그가 평생의 사랑이라고 결심하고 죽을힘을 다해 찾아낸 여자는 그를 외면한 것도 모자라 혼자서 그를 놔두고 떠나버렸다. 대체 언제쯤이나 되어야 그는 한재희의 가장 우선 순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될까. 그는 꼭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고 중얼거리며 욱씬대는 상처를 쥐었다 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회장님!" 젠장! 한재희 내가 총에 맞은 건 아무 관심도 없다는 거야? 루가 뛰어왔다. 재희는 삭막한 병원의 복도에 앉아 집중 치료실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심각하게 왔다갔다하는 것이 두꺼운 유리문 사이로 비쳤다. "가관이군." "시끄러워." 김이 오르는 뜨거운 커피와 함께 언제나 먼지조차 비껴 달아날 것 같이 완벽하게 보이는 호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재희의 윤기없는 머리카락과 피곤한 눈빛을 주시하며 가볍게 툭 내던졌다.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안 변했어. 너나 저 안의 꼬마나." 호크는 재희가 일회용 컵을 받아들자 옆의 간이용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그가 루이스의 집 근처에 붙여놓은 감시인들은 버크를 보지 못했다. 문책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지만 그들의 실수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었잖아. 정말로 버크가 간 크게 집 안에까지 나타날 줄은 나도 짐작 못했으니까. "고용인들이 타고 다니는 차 트렁크에 숨어서 내부로 들어왔던 모양이야." 그랬다면 수월하게 보안 카메라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재희가 블랙커피를 한 모금 삼키더니 그 고약한 맛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정신이 번쩍 나는군." 호크도 자신의 커피를 마시며 소감을 말했다. "그런데 이제 로웰과는 정말로 끝난 건가?" "아니." 그녀는 간단하게 부정하며 병원용 알콜의 향기를 뱉어냈다. "많이 진보했군,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재희의 눈썹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 남자 어때? 여기까지 와도 괜찮았던 거야? 의사가 허락했어?"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 재희는 비협조적인 호크의 태도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들 사이의 대화는 늘 이랬다. "루이스 일을 알아서 처리해 줘서 고마워. "그것도 내가 받을 인사는 아닌 것 같군. 피해자인 로웰이 바라지 않는 이상 버크도 깨끗이 죽어 입을 다문 마당에 귀찮게 루이스를 재판대에 세울 이유가 내겐 없어." 호크는 유리문 너머를 흘끗 바라보았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야?" "모르겠어." "갑자기 가당치도 않은 죄의식에 붙잡히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왜, 녀석이 깨어나지 않으면 같이 따라죽기라도 하려고?" 재희는 피식 웃었다. 루이스가 병원에 실려온 이래 처음 웃는 것이었다. “그럼 그 남자가 가만있을 것 같아? 아마 날 두 번 죽이려고 덤벼들걸." "알면 됐어, 적당히 해." 호크가 일어나 빈 컵을 수거함에 던져넣었다. "잊을 뻔했군."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로웰도 지금 병원에 있어. 상처가 덧나서 열이 사십 도까지 올랐다는군. 그런데 절대로 루이스 베어포드와 한 병원은 싫다고 했다지. 생각보다 웃기는 데가 있는 사내야, 네 남자도." 재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호크는 유유히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미스 한…" 루이스의 부친. 존 베어포드가 초췌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출장지에서 달려온 모양인지 정장 차림이긴 한데 넥타이는 어딘가로 달아나고 없었다. 언제나 깔끔한 신사였던 그는 아들의 사고에 망연자실한 듯 자신의 외관 따위엔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루이스가… 그 아인…" 재희는 일어나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방금 호크가 앉았던 의자를 권했다. 재희는 제이슨이 처리한 대로 대강 사건의 전말을 각색해 그에게 설명했다. 굳이 이 노신사의 마음을 더 어지럽힐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미 존 베어포드는 충분히 고통받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루이스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이 남자인지도 모른다. 아내를 너무 사랑한 여파로 아들과 거리를 두었지만 그는 자신의 아들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존 베어포드가 겨우 애정을 드러낼 준비가 되었을 때 반대로 부친을 차갑게 밀쳐버렸다. 그는 15년 간이나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한번 파인 골은 결코 다시 메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반목 사이에 자신이 있었다. 재희는 하얀 벽을 바라보며 우울하게 되뇌었다. 그녀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루이스는 그의 부친과 어린 시절 화해하고 행복한 가정 속에 자랐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해본 적이 없군요." 존 베어포드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선이 뚜렷한 세련된 멋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아무렇게나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쓰디쓰게 중얼거렸다. "난 당신이 내 아들을 빼앗아갔다고 늘 생각했었소." 재희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당연히 침입자였음에 틀림없었을 테니까. 재혼도 하지 않고 오직 아들만을 보며 살아온 그에게 루이스의 모든 애정의 대상이 그녀였다는 것은 그의 절대적인 반감을 사고도 남았으리라. 존 베어포드는 아마 루이스가 그녀를 통해 대리 만족 하려던 애정의 대상이 자신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녀도 루이스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완전한 가족애… 루이스가 바랐던 것은 그런 헌신적이고 따뜻한 사랑이었다. "배은망덕하게도 말이오." 그가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 아이의 생명의 은인이었는데." 그의 눈에 물기가 젖어들었다. "자신의 잘못은 돌아보지 않았던 게요. 내가 좀더 일찍 그 아이를 사랑했더라면…"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재희는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실례합니다. 루이스 베어포드의 보호자 분. 닥터 킨케이드께서 찾으시는데요." 존 베어포드가 눈물을 수습하며 일어나자 재희도 역시 일어났다. 이러저러한 사정을 늘어놓은 것보다 부자가 직접 만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리라. 이제 그곳에 그녀가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각기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재희는 로비를 지나 병원 현관의 회전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언제 비가 왔나 싶게 하늘이 쩅쨍했다. 그녀는 손으로 해를 가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그 파아란 빛의 물결을 감상했다. "재희 양." 맥스가 서 있었다. 그는 정중하게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열려진 차 안, 호크가 다리를 포개고 앉아 경제지를 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해?" "태워다 주려고." 재희는 비꼬듯 웃었다. "결국 당신도 악당은 못 돼, 호크." 차는 한가한 오후의 도심거리를 막힘없이 달려나갔다. 차가 신호등에 걸렸을 무렵이었다. 아무 말 없이 윌가의 동향을 읽던 호크가 낮게 입을 열었다. "왠지 이러고 있으니 맥스에게 널 데려다주라고 했던 밤이 생각나는군." "그래." "그날 루이스에게 갔던 걸 후회해?" "아니 … 후회는 없어." 재희는 눈을 감고 수많은 감정이 스치는 동안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군." 호크도 따라서 지나가듯 대꾸했다. 17장 "괜찮을까요, 사장님?" 병원 입구로 사라지는 재희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호크에게 맥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호크의 눈빛이 짙푸르게 빛났다. "로웰에게 뭐 유감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맥스는 뒷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어차피 재희의 마음이 결정된 마당에 굳이 이렇게까지 대령해야 하나 싶어 그는 내내 입맛이 좋지 않았다. "15년 전에 주운 성가신 물건이 드디어 임자를 찾아가는 것이니 우린 당연히 환영해야지. 안 그런가, 맥스? 나머지는 로웰이 알아서 하게 놔두자고." 눈을 감고 몸을 시트 깊숙이 기대며 호크는 귀찮은 양 중얼거렸다. 도무지 그의 적성에는 안 맞는 일이었지만 어쨌건 끝까지 해치운 셈이었다. 문득 그의 변화없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이 매달렸다. 로웰에게 보낼 청구서 금액을 좀더 늘려야겠군. 하지만 기분은 별로였다. 이게 바로 팔자에 없는 누이를 시집보내는 오빠의 개운치 않은 감정이란 걸까. 그러나 호크는 그쯤에서 자신의 시시한 상념을 일축하고 맥스에게 본래의 차가운 음성으로 지시했다. "가지." 엉뚱한 일에 끼어드는 바람에 낭비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 "네." 잠깐 백미러를 곁눈질하는 맥스의 눈에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일에 빠져드는 호크의 무표정한 얼굴이 들어왔다. 맥스는 내심 긴 한숨을 쉬며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촉새들의 입방아가 여전하더구나." 케인 로웰. 미합중국의 전 대통령이자 지금도 변함없는 존경과 지지를 받고 있는 위대한 사내는 눈앞의 손자를 눈치껏 떠보았다. 그는 마커스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케이프코드의 장원에서 곧장 이곳으로 날아왔다. "그래도 꼭 그 여자를 고집하겠다고?" "네." "쯧…" 역전의 투사, 불굴의 노장. 그 이름 앞에 붙는 형용사들만으로도 이미 무수한 전설을 가지고 있는 백발의 노인이지만 병원 침대에 누운 손자와 체신머리없이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케인은 머리카락만큼이나 새하얗게 센 자신의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눈으로 침대에 앉아 있는 마커스를 바라보았다. 별 것도 아닌 부상에 호들갑 떨 것 없다는 단호한 마커스의 요구로 케인의 큰아들 내외와 나머지 가족들은 모두 이곳의 방문을 금지당했다. 물론 그 자신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흥, 그가 누구의 반대나 불만 때문에 어디 하고 싶은 일을 못한 적이 있었던가 말이다. "네가 병원에 누워 있는데 코빼기도 안 비치는 여자가 제대로 된 신붓감이라고 할 수 있냐?" 케인은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그만 하세요. 할아버지, 전 그 여자가 절 사랑하고 있는지도 아직 모릅니다." 마커스는 침울하게 대꾸했다. 열은 떨어졌지만 기분은 엉망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조부의 지적대로 그가 아직 재희의 머리카락 한 올 구경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그럼 그 여자가 눈이 삔 게야." 그가 흥 하고 콧방귀를 끼었다. "자신감을 북돋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감은 무슨 개뿔! 난 진실밖에 말할 줄 모른다." 케인은 언제나 당당하고 거칠 것 없이 보이는 손자를 내심 자랑스러워하면서 눈썹을 찌푸렸다. 젊은 날의 자신을 어떤 아들보다 더 많이 닮았으며 또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손자였다. 재난과도 같던 첫 번째 손자며느리가 온 집안을 흙탕물로 휘젓고 지나간 일은 마커스에게 뼈아픈 실책이자 호된 교훈 되었다. 하지만 한 번의 실패는 말 그대로 한 번의 실패일 뿐이다. 어떤 사람의 인생도 성공만으로 채워 질 수는 없다. 얻는 때가 있으면 잃는 때가 있고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가 있는 것이다. 하물며 어떤 일에서든지, 하다못해 가시덤불 위로 나자빠지는 경험에서조차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법이 아니던가. 뭐, 조금 피가 나고 따끔거리기야 하겠지만. 그리고 그의 손자에겐 제 일쯤은 스스로 알아서 거뜬히 처리할 능력이 있었다. 루가 병실 문을 토크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마커스의 연애놀음에 제일 동분서주하고 뛰어다녀야 하는 건 저 녀석이군. 어디 휴가라도 보내주든지 해야지… 쯧. "뭐냐?" 케인은 짐짓 커다랗게 물었다. 루는 그에게 또 다른 손자나 다름없는 녀석이었다. "재희 양이 밖에 와 있습니다." 마커스와 흡사한 눈썹이 둥글게 휘어졌다. "그 아가씨 이름이 제이라고 했더냐?" "재희입니다." 마커스는 입가를 슬쩍 비꼬았다. 그는 난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표정으로 능청스럽게 되묻는 케인이 재희의 본명은 물론이고 덧붙여 최근에 신문을 장식한 수많은 기사들까지 남김없이 파악하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마 스크랩한 자료들만 해도 트렁크 하나쯤은 거뜬히 채우고 남을지도. "그래, 결국 오긴 온 게로군. 흠…" 케인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불쑥 물었다. “만약 그 여자가 싫다면 셀리나 때처럼 쉽게 잊어버릴 수 있겠느냐?" "그런 일은 없습니다." 마커스는 잘라서 단언했다. "하지만 만약?" 그는 단단한 턱에 힘을 주고 잠시 침묵했다. 곧 이어 마커스는 씁쓸하게 반쯤은 체념한 미소를 떠올렸다. "아니오. 그땐 납치를 해서라도 내 옆에 묶어둘 수밖에요." 케인은 기이하고 불가해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손자를 주시했다. 셀리나 고 여우 같은 것 뒤로 결혼의 'ㄱ' 자도 못꺼내게 하던 녀석을 이렇게 바꾸어놓은 여자가 실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루가 짬짬이 보고를 게을리 하진 않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지 않았던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봐야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지. 여태까지 기다린 참을성만 해도 노벨 평화상을 다시 받아야 마땅했다. 뭐, 두 개씩이나 장식장 위에 둬봐야 폼도 나지 않겠지만서도. “글쎄. 지금까지의 네 말대로라면 그런다고 고이 항복할 여자 같지는 않구나." 그가 경고하자 마커스는 다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케인은 더 묻지 않았다. "알았다. 들여보내마." "케인 로웰이라고 하오." "한재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통성명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다짜고짜 아래위로 그녀를 죽 훑었다. 그의 전직을 몰랐다면 틀림없이 은퇴한 늙은 난봉꾼으로 여겨질 만큼 노골적인 눈길이었다.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는 거군. 그래. 오페라 하우스에서 그녀를 보던 마커스를 생각하며 재희는 속으로 찡그림을 감추었다. "그래, 아가씨가 내 손자를 물 먹인 바로 그 장본인인가?" “물을 먹인 기억은 없습니다만. 손자 분이 얌전히 당할 사람도 아니구요." 재희는 수십 년 뒤 나이 든 마커스의 모습이 될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미국의 전 대통령이 그녀 앞에서 열 살짜리 꼬마처럼 입술을 내밀고 기분 나쁘다는 듯 투덜댔다. "아가씨가 워낙 미꾸라지처럼 나대는 바람에 녀석의 몰골이 말이아니야." 나댄다고? 재희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남자가 총알에 '슬쩍' 스쳤다고 죽지는 않겠죠. 손자 분에 대한 과장된 소문이 완전히 허튼소리가 아니라면요." "슬쩍이라니! 총알이 완전히 빠져나갔다고. 더구나 내 손자에 대해선 허튼소리라곤 절대 없어, 이 아가씨야!" 그가 분노했다. 뒤로 넘겨 하나로 묶은 그의 하얀 머리가 주인의 성질머리를 닮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안 그럼 사방으로 뻗대어서 저렇게 얌전히 그의 등 뒤로 내려와 있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 녀석은 백 퍼센트 순종마라구.!" 그러시겠죠. 재희는 마커스가 저 안에서 조부가 자신을 말에 비유한 소리를 듣고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아주 궁금했다. 케인 로웰의 목청으로 보건대 족히 이 층의 절반이 넘는 사람이 그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오늘 내로 그 '대단하신' 손자분을 만나게 해주실 수 없다면 이만 돌아가서 쉬고 싶군요. 저 또한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하루라 많이 피곤해서요. 손자 분에 대한 강좌는 다음에 따로 듣겠습니다." 그러자 그가 척 팔짱을 끼더니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럼 딱 십 분을 주지. 물론 내 손자가 아가씨를 발로 차서 내쫓지 않는다면 말이오." 도대체 누가 이 노인에게 손님을 정중하게 대접하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을까. 그가 만약 미국 대통령에 재임해 있는 기간 동안 외국 사절단을 저런 식으로 골탕먹였다면 지금까지 세계가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는 물론 절 발로 차내지 못할 겁니다. 그 전에 제가 손자 분을 바닥으로 팽개쳐 버리고 말 테니까요." 재희는 담담하게 받았다. "오페라 하우스 때처럼 말인가? 그때 사진에 난 그놈 표정을 보는 것만큼 내 인생에 신났던 순간이 별로 없어. 케인은 부리부리한 눈을 교활하게 번득이며 냉큼 말을 받았다. 왜 갑자기 베리가 떠오르는 거지? 지끈거리는 머리와는 달리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마커스의 가족이 자신에게 뭐라고 하든 신경쓰지 않겠다고 작정했지만 재희는 케인 로웰이 좋아질 것 같아 두려웠다. "그럼 앞으로 종종 제가 신나게 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정말인가?" 잔뜩 흥분한 음성이었다. “기대하지." 갑자기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탐스런 은빛 턱수염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백구십에 가까운 키에 마커스만큼이나 커다란 체격, 적어도 여든은 넘었음직한 케인의 자세는 그러나 어린 나뭇가지처럼 유연하고 금방이라도 넘칠 듯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그가 어떤 행동을 한다 해도 스스로 지닌 위엄이나 권위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못할 것 같았다. "좋은 눈빛을 가졌군, 아가씨. 그런 눈빛의 가치는 고리타분한 혈통의 낡은 증명서보다 몇만 배의 가치가 있는 거라오. 당신 같은 숙녀를 우리 가문에 맞이하게 된 걸 진심으로 환영하오." 그녀는 문득 숨을 멈추고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결혼은 생각 없습니다만." “저 안의 녀석을 사랑하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건 본인에게 직접 대답할 문제군요." 하지만 이미 그녀의 태도 자체가 케인이 알고 싶어하는 전부를 말해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찔렀지만 그는 아주 만족했다. 납치는커녕 꽃다발이라도 트럭째 갖다바치며 구걸이나 해, 녀석아! 하루라도 빨리 증손자를 보자면 그가 열심히 코치하는 수밖에! 케인은 기분 좋게 박장대소했다. "그럼 저 멍청한 손자 놈을 한시바삐 제단 위에 세워줄 거라고 믿겠소." 그가 재희의 등을 떠다밀더니 그녀의 뒤에서 그대로 문이 닫혔다. "이제야 왔군." 마커스는 그녀를 반가워한다거나 호의적으로 대하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치도 없는 듯 보였다. 재희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누구를 닮았는지 확실히 알았어." 그녀는 다소 창백하게 그늘진 마커스의 안색을 살폈다. 벌거벗은 어깨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제이슨에게서 얘기 들었어요. 좀 어때요?" "또 호크인가? 슬슬 지겨워지는군." 그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편하게 넘어가지 않을 심산임에 분명했다. "이번엔 내가 나서서 그를 해치워야 하는 거요?" 재희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루이스가 한 짓은…" "그만해, 그가 한 짓에 대해 당신 사과를 듣고 싶지는 않으니까." 재희는 차가운 문에 등을 기대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어렵게 굴 건가요?" "어렵게 군다고? 내가?" "그럼 여기 당신말고 또 누가 있나요, 마커스?" “적반하장이군." 다름 아닌 자신 때문에 마커스가 피를 흘렸다는 것이 미안했지만 그의 신경질을 있는대로 감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그의 모습을 보자 버크가 죽지 않았다면 직접 그에게 방아쇠를 당겨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긴 했다. 감히 내 남자를 건드리다니. 빌어먹을 자식! 아, 그래. 이제 마커스 로웰은 그녀의 남자였다. 거북하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기 전에 풀어야 할 매듭이 있었다. "루이스는…" "알고 있어. 아직 의식불명이라지. 그런데 여긴 왜 온 거요. 그 소중한 꼬마 도련님 옆에서 노심초사 시중이나 들 것이지." 마커스는 그녀가 그를 밀어냈던 것을 여전히 용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달리 무슨 반응을 보여야 했단 말인가. 그녀로 인해 루이스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적어도 그는 그 순간 멀쩡하게 서 있었던 사람이다. 문제는 이 남자의 어떤 면이 철저하게 이기적이란 사실이었다. 특히 그녀와 연관된 부분에서 그의 원시적인 소유욕은 그녀에게 그 자신이 처음이자 전부를 차지하길 원하고 있었다. 재희 자신의 일부도 어쩌면 그와 비슷한 형태의 욕망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마커스에게 대놓고 인정하기엔 그녀의 성격이 별로 무르질 못했다. "알았어요. 이만 쉬어요. 내 생각이 모자랐어요. 나중에 다시 오죠." "젠장. 한재희! 거기서 일 센티만 더 움직여봐! 여태까지 당신이 날 골탕먹인 그대로 전부 보복해 주고 말 테니까, 약속해!" 그의 차가운 음성이 버럭 날아왔다. 재희는 문의 손잡이를 잡고 우뚝 신형을 멈춘 채 왼손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의 사나운 눈초리가 등골을 파고들 지경이었다. "뭐 하는 거야?" "당신 할아버지가 약속한 십 분이 지난 것 같아서요." "할아버지가 뭐라고 하셨건 상관없어." 그가 잇새로 뇌까렸다. "그래요?" 재희는 팔짱을 끼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분이 마음에 들 것 같은데." 그리고 나서 그녀는 짜증으로 혀를 차는 그의 곁으로 걸어가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상큼한 치약 향기가 났다. "그리고 나도 순종마가 좋아요." "젠장." 마커스는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 다음 순간 으스러질 듯 부둥켜안았다. "당신이 그렇게 피범벅을 하고 앉아 있는 걸 보고 내 심정이 어땠을지 몰랐단 말이야?" "미안해요." 그가 뛰어 들어오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긴장감은 그녀의 무사함을 알고 나서도 쉬이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녀를 안는 그의 팔에 그의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니까. "더구나 그렇게 사정없이 날 밀어내다니." 그가 비난했다. 재희는 그냥 듣고만 있었다. 이렇게 질책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왜 그랬는지는 그도 잘 알고 있으리라. "아침에 왜 말도 없이 루이스에게 간 거요? 정말 그것으로 우리 사이에 종지부를 찍을 생각이었나?" "어쩌면 그랬을지도 몰라요." 옷 위로 전해지는 그의 힘이 아플 정도로 강하게 그녀를 조여왔다. 뼈가 부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작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땐 나한테 마커스 로웰이란 남자가 얼마나 필요한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가 그녀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기이하게 타오르는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꼼짝할 수 도 없게 사로잡고 있었다. "내가… 필요해?" "그래요." "얼마나?" 마커스는 강렬하게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 보고 대답해. 한재희." 각인이라도 시키듯 그는 강요했다. "내가 얼마나 필요한 거야? 당신이란 여자한테." 그를 자신의 남자라고 생각했던 순간처럼 아주 불안정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예감처럼 고약하진 않았다. "전부." 재희의 손이 천천히 그에게 가 닿았다. "머커스 당신의 전부가 남김없이 필요해."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마커스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을 부서뜨릴 듯 세차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등 위에 강하게 입술을 눌렀다. "드디어 말했군." 쉬고 가라않은 마커스의 목소리는 탁하게 들렸다. 그들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열기가 고이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듯한 폐의 산소를 앗아갔다. "당신 할아버지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냐고 묻더군요." 그녀는 손가락에 닿는 마커스의 입술의 감촉을 부드럽게 쓸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당신에게 느끼는 이 모든 것이 사랑인지는 모르겠어." 마커스의 몸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지만 곧 이어 그는 근육에서 힘을 풀어냈다. "그래서 아직은 당신에게 그렇게 말해 줄 수 없어." "괜찮아." 그가 말했다. "하지만... 말이에요." 재희는 그의 억세고 우아한 턱을 양손으로 감싸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 날 배신하면 그땐 죽여버리고 싶어질 것 같긴 해." 그는 신음처럼 웃었다. "기꺼이." 마커스는 그제야 해답을 알 것 같았다. 한없이 강하고 약점이라곤 없을 것 같은 이 여자 안에 작은 소녀가 살고 있다는 것을. 또다시 혼자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며 사랑을 억누르고 자라온 여리고 작은 여자가 숨이 있다는 것을. "경고했죠. 당신 잘못 걸린 거라고." "얼마든지." 절대로 혼자 두지 않아. 그리고 네 옆에 나말고 다른 남자가 다가오도록 하지도 않겠어. 한재희, 날 가지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대신 너도 내게 전부를 줘야 해! 그는 이 여자가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웠다. “너야말로 이제 내 거야. 허락도 없이 다시 도망갔다간 단단히 겁을 집어먹는 게 좋을걸? 오늘처럼 이렇게 쉽게 봐주는 일도 앞으로는 없어!" 그는 격하게 말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 향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다치지 않은 팔이 재희를 넝쿨처럼 거칠게 휘감았다. 마커스의 숨결이 그녀의 가슴 부근을 어지럽혔다. 그는 이겼다는 것을 알았다. 이 여자는 드디어 그를 받아들였다! 그녀의 심장 바로 위 맥이 뛰는 곳을 찾아 마커스는 숨을 빨아들였다. 마치 그녀의 모든 정신, 존재, 의지를 흡수하듯. "사랑해." 그의 눈동자는 뜨겁고 짙게 물들어 있었다. “지금은 대답할 필요 없어." 재희는 그에게 끌려갔다. "나중에 결혼해서 살다가 이게 사랑이라고 생각되면 언제든 내게 말해. 기다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미 마커스는 확신하고 있었다. 한재희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리내여 말하지 않았다 해도, 설령 그녀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해도 말이다. 재희에게 있어 그녀 자신 말고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말은 그런 의미였다. 단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 여자로 인해 사랑에 대한 정의를 다시 배웠듯이 재희도 언젠가는 깨닫게 될 테니까. "그래… 그럴게요." 그녀는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마커스의 입술이 재희의 입술을 덮쳤다. 어떤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이 그녀는 자신을 내주었다. 그리고 아무 거리낌 없이 열정적으로 그를 소유했다. 이제 이 남자는 평생을 그녀 옆에 머무를 것이다. "마커스" 그녀를 이대로 삼켜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막 그녀의 가슴에 그의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 재희의 손이 그의 어깨를 쳤다. 그는 마지못해 끙 소리를 냈다. “재희 거긴 다친 데야." 마커스가 숨을 헐떡였다. "잘됐네요." 재희도 가파른 호흡을 추스르며 약간, 정말 아주 약간의 심술을 담아 그의 귓가에 가만히 중얼거렸다. "나도 지금 당장 당신이 탐나긴 하지만 바로 문 밖에 당신의 할아버지가 귀를 바짝 갖다대고 우릴 염탐하는 중이라는 데 백 달러를 걸어도 좋아. 그러니 할아버지 앞에서 실황으로 여자에게 강간당하고 싶지 않다면 그만 얌전히 침대에 눕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제길." 마커스는 투덜대며 마치 벽이 투과되기라도 하듯 저 너머를 쏘아보았다. 재희가 쿡쿡 웃었다. "재미있다니 다행이군. 나중에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못말리는 참견쟁이 늙은 독재자도 덤으로 따라온다는 걸 잊지 말라구!" "누가 당신하고 결혼한다고 했어요?" 재희는 매정하게 반문하며 옷을 바로잡고 문 쪽으로 소리없이 걸어갔다. 뭐? 마커스의 눈동자가 낭패감으로 빛났다. 그럼 지금까지 했던 말들은? "결혼도 안 하고 같이 살아줄 것 같아?" 그는 화가 나서 외쳤다. "누가 아쉬운지 두고 보면 되겠죠." 그녀는 그렇게 대꾸하며 예고 없이 병실문을 확 열었다. 그러자 기묘한 자세로 몸을 숙이고 있던 두 남자가 화들짝 일어났다. 케인 로웰이 뺨을 아주 극히 미미하게 붉히며 헛기침으로 사태를 무마하려 했다. 루는 지은 죄를 아는지 즉시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이번만은 마커스의 호출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사라지기 직전 그의 입가에 맴돌았던 것이 웃음기였던가? "아, 면회가 이제 다 끝난 모양이군." 케인 로웰이 뻔뻔하게 말했다. "네. 십 분이 좀 길었죠? 손자 분이 놓아주질 않아서요." 정말 이 집안 남자들은! 마커스의 부친을 대면하게 되는 날이 아주 희미하게 불안해지는 재희였다. 그러나 루이스의 의식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심각한 후유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육체적으론 상처가 거의 아물고 있었는데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도 루이스의 상태는 평행선을 그렸다. 영문을 몰라 하던 의사들은 사고 전 환자의 정신 상태가 불안했다는 말에서 그 원인을 찾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가 언제 깨어날지, 아니 깨어날 의지나 있는지조차 속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마커스는 재희의 기분을 달래느라 늘 애썼지만 그가 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면 그녀는 여지없이 걱정으로 굳어진 눈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목전의 경기를 취소하고 새로 옮긴 루이스의 병원과 집만을 왔다갔다했다. 하지만 그녀가 병실 안에까지 들어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유를 묻는 마커스에게 재희는 관계 찾기라고 짧게 말했을 뿐이다. "쉴 시간이야." 재희는 보고 있던 두꺼운 책에서 눈을 들었다. 오랜만에 어디에도 나가지 않고 그와 단둘만의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마커스가 홍차와 간식이 담긴 쟁반을 들고 그녀가 있는 일광욕실로 들어왔다. 마치 정중하게 시중을 드는 하인처럼. 그녀는 무심코 피식 웃으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멋지군요. "나야 뭘 해도 멋지지." "남자란, 조금만 치켜세워 줘도 금방 기어오른다니까." 밉지 않다는 듯 그를 구박하며 재희는 책을 밀어놓았다. 잠깐만 보려 했던 것이 눈이 침침할 정도로 오래 봐버렸다. "오늘은 이제 이걸로 끝이야." 그가 단호하게 명령하며 그녀의 책을 아예 덮어버렸다. 그리고 따뜻한 김이 오르는 찻잔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재희는 옆에 와 앉는 마커스의 팔 안에 어깨를 기대며 양쪽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를 대신해 지압을 해주자 길게 한숨을 흘러나왔다. "애나와 베리에게서 연락은 왔었소?" "그래요. 아직 그대로라고. 케이트가 루이스의 아버지를 도와 열심히 간병을 하고 있는 모양이에요." 그는 재희의 손을 잡아끌어 입을 맞추었다. "루이스 베어포드에게 그 아가씬 너무 아까운데." 이젠 마커스도 케이트의 연심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군." "뭐가요" "애초에 베리 같은 사람이 왜 알콜중독에 빠져들었던 거요?" 그는 과거를 털어놓던 베리를 떠올렸다. 나이가 든 지금도 의지만은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그 지경으로 몰아넣을 만큼 뭔가 치명적이 비극이 존재하지 않은 다음에야… 재희가 차를 한 모금 삼키며 그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잔의 표면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베리는 자신의 병든 아내를 수술대 위에서 잃었어요. 바로 자신이 집도한 수술에서. 그 뒤로는 맨 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는 그 분야의 최고였어요. 사랑하던 아내를 구하기 위해 두려움과 맞서 싸웠지만 결국 신이 정한 운명을 거스르지는 못했던 거죠. 그리고 나서 그는… 무너졌어요." 조용한 순간이 지나갔다.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상실감, 그보다 더한 지옥은 없을 것이다. 지금의 마커스는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도 절실하게. 너무도 잘… "그렇군" 그는 나직이 대답하고 재희의 귓볼에 키스했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그 아래 오목한 곳에 혀를 갖다댔다. 재희의 섬세한 살갗이 긴장하는 것을 음미하며 한참 후 그는 말했다. "당신이 베리를 구했소." 하지만 일찍이 마커스도 알게 되었듯이 그녀는 자신이 도움을 준 사람들에 대한 자각이 부족했다. 재희는 잔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아뇨, 베리 스스로 한 일이에요. 아무도 남을 구할 수는 없어요." 마커스는 그녀가 다시 루이스에 대한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루이스 베어포드였지만 정말이지 좀체 좋아할 수가 없다. 그는 하늘이 내비치는 천장을 향해 기어이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어린 놈, 만약 이대로 계속 내 몫의 웃음을 훔쳐간다면 의식이 있든 말든 한 대 걷어차 주고 말 테다. 그리고 아직 그녀의 과거를 멋대로 기자들에게 던져준 빚도 남아 있지 않는가. 빨리 일어나서 갚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어! 오후의 햇살이 푸른 블라인드를 타고 남자의 머리맡에 부드럽게 쏟아져 내렸다. 케이트는 스케치북을 꺼내들고 느린 손놀림으로 잠든 루이스의 모습을 종이 위에 옮겼다. 그는 아름다운 소년처럼 잠들어 있었다. 줄곳 병실을 지키던 존 베어포드는 담당 의사와 상담을 위해 자리를 비웠고 짬을 내어 병실을 방문한 베리와 애나도 집에서 만든 케이크와 과자들을 내려놓고 조금전 기운을 내라는 말과 함께 돌아갔다. "루이스" 문득 케이트는 반쯤 완성되어 가고 있는 그의 스케치를 슬픈 표정으로 주시했다. 벌써 몇 장째일까. 아무리 그림을 그려도 여전히 루이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연필을 내려놓고 케이트는 그에게로 가만히 상체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의 뺨을 간질이며 허공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녀는 나직하게 물었다. "잠들어 있으니 좋아? 그 세상에선 재희가 아직 루이스의 사람으로 남아 있어?" 가슴이 아팠다. 그가 깨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그의 사랑이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재희라는 사실은 아무렇지 않았다. "언젠가 나한테 그랬었지. 루이스에게 재희는 빛이자 모든 행복이라고." 그녀의 문에 어느덧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한테도 그런 사람이 있어." 케이트는 눈을 감고 조심스럽게 그의 뺨에 입술을 비볐다. 따뜻했다. "그 사람을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그가 웃을 때면 내 온 세상마저 덩달아 환해지게 하는 사람, 그 사람의 미소만 있으면 아무리 슬픈 날도 슬프지가 않았어." 진심이었다. 그녀는 루이스가 행복하다면 그 옆에 재희가 있어도 상관없었다. "처음엔 나 같은 애가 당신처럼 대단한 사람을 사랑해도 되는지 겁이 나고 무서웠어. 난 걷지도 못하고 심지어 부모가 누구인지도 몰라. 할 줄 아는 거라곤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야." 케이트의 속삭임이 빨라졌다. "하지만, 어느 날 재희가 말해 줬어. 육체가 조금 부자유스러운 것은 세상을 외면하고 살 이유가 못 된다고. 그것은 영혼의 차이일 뿐 스스로 자유롭다면 펼치지 못할 날개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루이스, 내말 듣고 있어?" 그녀는 자신이 뭘 찾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뭔가가 나타나길 바라며 루이스의 얼굴을 보았다.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사람은 주변의 일을 모두 알아들을 수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받아들이는 데 힘이 들었지만, 이제는 알아. 그리고 믿어." 뭔가에 쫓기듯 케이트는 계속해서 간절하게 덧붙였다. "루이스, 당신의 영혼도 이제 자유로워. 그러니까 돌아와 줘. 우리에게. 존 아저씨에게. 그리고 나에게." 처음에 그 미미한 의사 표현은 알아챌 수도 없는 진동에 불과했다. "사랑해." 간절하게 중얼거리며 루이스의 얼굴에서 몸을 일으키던 케이트는 하마터면 그 작은 표식을 그냥 놓칠 뻔했다. 그녀는 무심코 루이스의 팔을 붙들었다. 이미 병실에 두 사람만이 있지 않다는 것도 케이트는 의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존이 갑자기 숨을 죽였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루… 이스?" 그의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착각하거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하지만 케이트는 너무나 커다란 기쁨에 한동안 자신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분명히… "루이스" "깨어났어. 돌아왔구나!" 바로 등 뒤에서 케이트의 심정처럼 목이 막힌 듯한 존의 말이 들려왔다. 그는 케이트의 어깨를 꽉 움켜쥐고 서있었다. "의사! 의사를 불러야겠다. 금방 다녀오마!" 존은 품위있는 행동을 몽땅 내던지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달려나갔다. 어디서부터건 아마 존은 케이트의 고백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을 붉히거나 민망해지는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봤지? 저분은 루이스를 사랑해. 나도, 그리고 재희도." 고마워, 루이스. 다시 돌아와 줘서. 그리고 내가 계속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케이트의 기도는 그 보답을 받았다. 재희는 복도에 선 채 마커스의 가슴에 기대었다. 그가 웃으며 그녀를 어루만졌다. “괜찮아, 재희 . 이제 그는 괜찮을 거야. 그만의 진짜 사랑을 찾아낼테니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절반도 알고 있지 못했어요. 하지만 케이트는 정말로 신이 보내준 천사야." "그렇긴 해도 나보다 그녀를 더 좋아하진 말아 줘. 알았지?" 마커스가 속삭였다. "그리고 이제 그만 나와 결혼해 줄 때도 되지 않았어?" 재희는 웃으며 고개를 돌려 그의 입에 진한 키스를 했다. "이것도 좋긴 하지만. 대체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야?" 하지만 그의 투덜거림은 재희의 입술 안으로 곧바로 사라져 버렸다. 에필로그 스타트 라인에서 으르렁거리며 굉음을 내던 차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튕겨져 나갔다. "꿈도 꾸지 마."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으름장을 놓았다. 재희는 보고 있던 화면의 소리를 죽였다. 그러자 귀를 멍하게 하며 실내를 꽉 채웠던 자동차 소음이 사라졌다. "내가 지금 이 모양으로 어딜 가?" 웃음기를 매달고 재희가 그를 보며 슬쩍 비꼬았다. 그리고 하늘색 임부복에 가려진 배를 손으로 사랑스럽게 쓸어내렸다. "아마 운전대 사이에 배가 끼이고 말걸?" 만삭에 가까운 그녀의 몸은 동그랗게 부푼 배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날씬하고 가늘었다. 마커스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앉은 소파 앞에 다리를 펴고 앉아 그녀의 배에 뺨을 갖다댔다. "안녕, 아가야. 네 엄마가 아무래도 옛 생각이 나서 슬슬 지루해지는 모양이다." “모함하지마, 당신. 그러다 이 녀석이 당신 말을 진짜로 알아듣고 빨리 세상 밖으로 나오겠다고 결심하면 어떻게 할 거야?" "음…"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모든 것, 그 생각, 습관, 의지마저 모두 감싸안아야만 했다. 처음부터 마커스는 재희에게서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불안하고 초조해지더라도 그녀가 원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게 지원해 주는 것이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지켜내는 방법이란 것도. 때로는 궤도를 잃고 덜컹대는 차를 보며 공포로 죽을 만큼 겁에 질리거나 그녀가 결승점에 안전하게 들어오기 전까지 미칠 듯이 걱정을 하면서도 마커스는 묵묵히 그 시련을 이겨내는 도리밖에 없었다. 개조된 경주차량으로 낭떠러지를 달리고 바위산과 숲속을 가로지른다해도 그녀는 항상 그가 기다리고 있는 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재희는 임신을 알고 나서부터는 스스로 일정을 조절했다. “당신이 조금씩 뒤뚱거리며 걷는게 너무 귀여워, 앞으로 오십년 내내 그 모습이면 안 될까?” 재희가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나더라 여든 살이 될 때까지 아이만 낳으라는 건 아니지, 마커스?” “좋은 생각인데? 내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기꺼이 봉사하지.” “당신도 나이를 생각하라구.” “그래도 두 사람은 하나도 안 변할걸.” 케이트가 정원으로 나있는 커다란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며 놀렸다. 그녀는 파리에서 그림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방학을 맞아 그들의 신혼집을 방문한 참이었다. “루이스가 뭐래?” 케이트의 손에 들린 전화기를 가리키며 재희가 물었다. “내일 저녁에 집으로 초대했어.” 케이트는 어느덧 소녀시절의 절정을 향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더 자라서 성숙한 세월의 빛이 더해지면 그녀는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인이 될 것이다. 루이스는 치료를 마친 뒤 옥스퍼드 대학의 제안에 따라 그곳연구소에 당분간 적을 두기로 했다. 그리고 부친의 희망대로 집안의 가업을 잇기 위한 준비가 되면 그는 완전히 미국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가 서서히 케이트에게 마음을 열어가고 있는 것이 재희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언제 루이스에게 식사 한 번 같이하자고 전해 줘, 케이트” 마커스가 말했다. “그럴께요.”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더 흘러야 할 일이었다. 루이스는 여전히 마커스를 대하는 것에 어색함을 가지고 있었다. 마커스는 사랑스럽게 부풀어 있는 아내의 배를 양팔로 끌어안으며 그녀의 목과 어깨 사이에 코를 비볐다. “마커스 로웰!” 그녀가 가볍게 나무랐다. “당신이 바쁘다고 쫓아내는 바람에 아침인사도 제대로 못했어.” 그는 애처럼 투덜거렸다. “그야 당신이 샤워 부스까지 쫓아 들어와 애를 먹이니까 그랬지.” 재희가 케이트 몰래 그의 귀를 잡아 당겨 슬쩍 깨물었다. “아, 난 저녁 메뉴가 뭔지 알아봐야겠어.” 케이트는 숨죽여 낄낄거림을 감추고 휠체어를 움직였다. 아이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층마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턱을 모조리 없앤 마커스의 배려는 애나와 베리의 열렬한 지지와 보답을 얻어냈다. 휴일이나 방학이 되면 마커스의 저택 역시 애나와 베리의 집처럼 떠들썩한 혼란으로 가득 차곤했다. 로웰가의 사람들 역시 합류해 즐거운 시간을 나누었다. 내가 무슨 행운으로 이 좋은 사람들을 만났을까! 케이트는 달콤한 감동으로 신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내일은 루이스를 유혹해 첫키스를 받을 수 있을까? 지금 같아서 아마 가능할 듯도 싶었다. 그녀의 뒤로 쏟아지는 빛의 축복 아래서 케이트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서로를 사랑하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끝나지 않을 입맞춤을 길게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로웰…” “음?” “인수 합병의 결과가 마음에 드나요?”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의 합병이야.” 재희 또한 자신의 인생에서 영원히 달려갈 이 스페셜 스테이지(Special Stoge)의 행운에 깊이 만족했다. 사랑해… 이제 그에게 이 말을 해주어야 할까? 그렇지만 그도 벌써 알고 있으리라. 그녀가 밤마다 잠든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이 말을. 오늘도 어김없이 그들에겐 한참 늦은 저녁이 될 것이다. 오늘밤을 위한 디저트로 남겨두는 것도 좋겠지. 재희는 그의 품에서 은밀하게 미소지었다.